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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 *

이틀 뒤에야 고블린의 왕국을 나서게 됐다. 여기저기서 만남을 청해오는 고블린 유력자들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지금 만든 인맥이 나중에 도움이 될 테니, 선별해서 마주했다. 하지만 그건 끝도 없었고 이틀 만에 박차고 나왔다.

"달빛이 좋구나. 나의 권속이여."

"네, 정말입니다. 주인님. 특히 냄새나고 시끄러운 고블린들이 없으니 더욱 좋습니다."

에레미나는 매번 평가가 신랄했다. 지금은 귀여운 맛이 더 강해서 괜찮은데, 나중에 크면 상당히 까칠한 처자가 될 것 같았다.

한데 주종이 함께한 오붓한 밤 산책은 얼마 가지 못했다. 한 무리의 땀내 나는 전사집단이 기다렸다는 듯 습격해왔기 때문이다.

"네가 다켄발트인가! 이놈!"

무리의 선두에는 어마어마한 덩치의 오크가 서있었다. 보자마자 누군지 딱 알아봤다.

'본크러셔군.'

네임드 오크가 하나 납셨다. 저 녀석은 혈통 중에 거인이 섞였다는 농담이 도는 자였다.

구라가 아닌 것 같은 게 오크 주제에 키가 3미터나 됐다.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오크와 코볼트, 노움 따위가 성난 기색으로 몰려왔다. 다들 한가락 하는 자들로 보였다.

"왜 이렇게 몰려왔어? 이런 좋은 밤에."

내가 양손을 펼치며 묻자 날선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절대 너를 일곱 봉우리의 대표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늘 네놈의 뼈를 분쇄하고 골수를 뽑아, 신들의 결정을 무효로 만들겠다!"

아, 결국 소문 듣고 왔구만. 모여든 자들은 스무 명이 넘고 다들 강자였다. 상대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작게 속삭였다.

"에레미나. 적당히 몇 명 죽이고 빠진다.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걸리적거리지 않겠습니다. 새로 받은 단검을 써보고 싶었는데 잘됐습니다."

그렇게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콰지지직! 우우우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적들 한 가운데서 밝은 빛을 뿜어내는 차원관문이 생성되기 시작했던 것.

차원이 뒤틀어지며 열리는 탓에 거기에 휘말린 자들이 육편으로 터져나갔다.

콰직! 퍼엉!

사방에 살점과 내장이 흩뿌려졌다. 이 갑작스러운 재난에 기세등등하게 몰려왔던 자들이 당황해했다. 놀라긴 나도 마찬가지.

"뭐, 뭐냐?"

모두의 시선이 꽂히는 가운데, 차원 관문 속에서 한 거물이 걸어 나왔다.

바로 블라르 백작이었다.

그는 날 보자마자 외쳤다.

"소렌 다켄발트. 고민을 끝내고 네놈에게 전수할 기술을 정해왔다!"

의기양양하게 외치던 그는 주변에 낭자한 살점을 보고 의아해했다.

"뭐지? 이 잡것들은? 바쁜 와중이었나?"

그 태연자약한 모습에 몰려온 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네놈! 감히!"

죽은 자들의 동료들이 격분했다. 또한 그들 중 최고의 전사가 틀림없는 본크러셔는 포효를 터뜨렸다.

"블라르 백작―!"

아무래도 구면인지 바로 알아보고 있었다. 블라르 백작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어딘가에서 봤는데. 이 덩치는···."

"모르겠는가! 됐다! 오늘 네놈과 오랜 원한을 정리하겠다! 모두 쳐라!"

그 말과 함께, 본크러셔를 필두로 허망하게 동료를 잃어 분노한 자들이 블라르 백작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저기!"

내가 말한다고 듣지도 않겠지만, 할 수 있다면 저 싸움··· 말리고 싶었다. 그리고 내 우려는 금방 현실이 됐다.

저 치사한 블라르 새끼가 시작부터 비열한 기술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대규모 에너지 드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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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봉우리의 왕(1)

과연 지상최강의 뱀파이어가 쓰는 에너지 드레인은 차원이 달랐다.

보통 뱀파이어가 쓰는 에너지 드레인은 단일 타켓이 대상이다. 게다가 상대가 실력자라면 에너지 드레인의 효율도 떨어진다.

강력한 기술인만큼 여러 가지 제약이나 한계점도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에겐 그딴 건 무용했다.

여기 얼마나 모여 있든, 얼마나 강하든 상관없이 적들의 몸에서 빛나는 하얀 실을 뽑아냈고, 다들 고통에 몸서리쳤다.

"끄아아아아!"

"흐그으윽!"

"블라르! 이 개새끼!"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트는 그 꼴이 언젠가 투망에 잔뜩 잡혀서 올라오는 물고기 떼를 본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벗어날 수 없는 그물 속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여기서 그걸 다시 보다니.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이 대규모 에너지 드레인에 몰려온 자들은 사기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무리야! 도망쳐야···!"

"어떻게! 방법은 있나! 크아아!"

하지만 딱 한 명. 에너지 드레인의 위력을 정면으로 깨부순 이가 있었다.

바로 거인의 피가 섞였다는 얘기가 떠도는 오크, 본크러셔였다.

"쿠아아아아압!"

괴성을 지르던 그는 에너지 드레인의 힘을 떨쳐내는 데 성공했다. 본크러셔의 핏줄이 잔뜩 붉어진 팔뚝을 보니, 그의 어마어마한 생명력은 에너지 드레인 따위에는 지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크어어어어엉!"

급기야 본크러셔는 성난 황소처럼 포효하더니 블라르 백작에게 돌진했다. 땅을 밀어내며 뛸 때마다 지면이 부서져나가는데, 그 광경이 실로 장쾌하다.

'본크러셔는 돌격 거리가 확보될 수록 강해지지.'

마치 마상창을 세우고 돌격하는 기사 같은 느낌이다. 가까이서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지만, 거리면 확보되면 인마일체의 무서운 충격을 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공격은 본크러셔에게 최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을 마음껏 끌어냈다.

"블라르으으―!"

크게 외치며 휘두르는 본크러셔의 드래곤 뼈몽둥이는 모든 걸 뭉개버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은 그걸 우아하게 피해냈다. 빗나간 뼈몽둥이가 지면을 타격하자,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무슨 TNT가 20킬로그램 정도 터진 것 같은 위력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블라르 백작을 해하지 못했다.

삽시간에 나타난 수많은 박쥐 떼가 폭발을 막은 것이다. 이후 박쥐 떼는 블라르 백작의 몸에서 떨어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진짜 박쥐는 아니군.'

정확히 말하자면, 방어 마력을 박쥐 같은 형태로 가공한 것이다. 딱 봐도 내가 쓰는 케일런의 그림자 수의 기술보다 훨씬 뛰어났다.

"쥐새끼처럼 도망을 다닐 건가! 겁쟁이 같으니라고!"

본크러셔는 격분했지만 블라르 백작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이후로도 그는 계속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본크러셔를 농락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성난 황소를 상대하는 투우사 같았다.

'대단하군.'

절대강자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우아함도 갖고 있었다. 블라르 백작이라 하면 패기와 힘으로 주로 대표되지만, 이렇게 보니 모든 분야에서 완성된 존재였다.

새삼 저 괴물을 사칭하고 다녔다는 사실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특히 블라르 백작이 가지고 있는 차갑고 계산된 눈빛이 지켜보는 날 섬뜩하게 했다. 오크 특유의 광기로 힘의 차이를 어떻게든 메꿔보려는 본크러셔를 보면서도 작은 동요도 없었다.

그러던 중 묵묵히 본크러셔를 상대하던 블라르 백작이 입을 열었다.

"오크. 네놈의 용맹에 경의를 표하고자 좋은 걸 보여주지."

그 말과 함께 블라르 백작은 자신의 절기 가운데 하나를 꺼내보였다. 그것은 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검이었다.

저것은 블라르 백작에게 패배한 자들의 피를 흡수해 만든 혈검. 그렇기에 블라르 백작이 승리를 쌓아갈수록 혈검의 힘은 더욱 강해지는 게 특징이다.

혈검을 꺼냈다는 건 블라르 백작이 본크러셔를 존중할 적으로 인정했다는 거고,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죽는다는 점이다.

'본크러셔의 피도 혈검에 흡수되겠군.'

오늘 저 악명높은 혈검은 더욱 강해지겠지. 저 검은 블라르 백작만이 다룰 수 있는 능력으로, 에인션트 뱀파이어들이 태양빛만큼이나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기술을 발동하니 결판은 빠르게 났다.

본크러셔는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돌격했고, 블라르 백작은 자로 잰 듯한 타이밍에 검을 휘둘렀다.

결과는 놀라웠다.

본크러셔의 거대한 몸이 드래곤의 뼈몽둥이와 함께 사선으로 깨끗하게 절단됐던 것.

그는 단말마도 남기지 못했고, 달리던 위력 때문에 쪼개진 몸으로 성대하게 굴러갔다. 사방에 피가 휘몰아치듯 쏟아졌다.

'세상에! 드래곤의 뼈를 무슨 두부 자르듯?'

블라르 백작의 혈검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주변은 깊은 침묵에 뼈져 있었다. 비참한 꼴로 조각난 본크러셔를 보고 말을 잃은 것이다.

블라르 백작은 혈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본크러셔의 피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일어나 그의 혈검에 흡수됐다.

촤아아아!

그 모습에 정신이 든 듯 날 잡으러 왔던 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마치 쥐떼 같았다. 블라르 백작은 놈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맞아, 이 친구. 본크러셔란 이름이었지···."

아무래도 이제야 본크러셔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오른 모양이다.

***

상황이 정리되자 블라르 백작에게 바로 물어봤다.

"백작님, 제게 가르쳐주겠다는 기술이 그 혈검입니까?"

"뭐? 혈검을?"

블라르 백작은 뭔 생뚱맞은 소리냐는 표정이다.

"네놈이 가진 일식의 검도 비할 데 없이 막강하다. 게다가 너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니 다른 걸 택할 이유가 없겠지. 원한다면 혈검을 전수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괜히 깨달음만 복잡해져 이도 저도 안 될 게 뻔해."

그렇게 말하던 블라르 백작은 에레미나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 권속인가? 이런 엄청난 녀석이 있다니!"

블라르 백작은 드물게 동요하며 에레미나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에레미나는 불쾌하다는 기색으로 내 뒤로 숨었다.

"이 녀석이라면 내 혈검을 전수받아도 완벽하게 쓸 수 있겠군. 대단한 재능이야! 어디서 이런 녀석이 튀어나온 거지?"

전설급이니 당연하다. 그런데 아이가 칭찬받는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으쓱해서 굳이 물어봤다.

"뭐···, 그 정도입니까?"

"그래! 이런 자질은 긴 세월에 간신히 하나 출현하는 정도지. 크윽···, 이런 아이가 왜 저런 개새끼에게···."

"네?"

"아닐세. 그냥 푸념이니까. 그것보다 꼬마야. 혹시 혈검을 배워보고 싶은 생각은 있느냐?"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하는 블라르 백작. 하지만 에레미나는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관심없습니다."

"뭐? 이것은 뱀파이어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것이다. 여기 네 주인이 가진 일식의 검이 아니라면 맞서지도 못할 터. 그런데 싫다고?"

"저는 주인님이 주신 것 외에는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혈검을 전수할 생각도 없으면서 떠보지 마십시오."

"허허, 이것 참! 꼬마가 재능뿐 아니라 영민하기까지 하군."

블라르 백작은 에레미나를 보며 탐난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같이 경험많은 자가 보면 에레미나가 얼마나 성장할지 감이 잡히기 때문이겠지.

아마 뱀파이어에게 권속이란 시스템이 없었다면 내게 에레미나를 넘겨달라고 징징거렸을 게 틀림없겠지.

"몇 번 물어보셔도 결과는 같습니다."

"쩝······. 본인이 거절하니 어쩔 수 없다."

결국 블라르 백작은 내게 가르쳐 주겠다는 기술 얘기나 하기로 했다.

"고민한 뒤에 대답을 가져왔다. 그 노인네를 이기려면 뭐가 좋을지 열심히 골랐지."

"그래서 어떤 겁니까?"

내 물음에 블라르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본래 전수하려 한 것은 이루기 난망하고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완성만 하면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깊이가 있는 기예라 할 수 있지. 하지만 지금 네놈 사정을 보니 좀 바꿔야겠구나."

블라르 백작은 방금 전 습격에 대해 지적했다.

"저건 시작에 불과할 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도 세작을 통해 이것저것 파악했다. 신들이 단체로 신탁을 내려 일곱 봉우리 전원이 모인 회합을 열라 했다지?"

"맞습니다."

"다들 따르기야 하겠지만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그런데 네놈이 갑자기 우두머리를 하겠다고 나선다? 그 뒤는 안 봐도 뻔하지."

문제는 일곱 봉우리의 종족들이 가진 여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 본크러셔처럼 나대지 않아서 그렇지, 그들에게도 대단한 강자가 도사리고 있었다.

원래 무협에서도 보면 장문인은 밖에서 싸돌아다니지 않고 묵직하게 본진을 지키고 있잖은가? 그거랑 비슷한 거다.

한데 일곱 봉우리 전체의 회합이 일어나면, 그 엉덩이 무거운 장문인들이 총출동할지도 몰랐다.

내가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당연히 방법이 있다. 크흐흐. 그걸 네게 베풀어주마. 이건 꽤 쓸만한 테니 점수 좀 딸 수 있겠군."

"오, 해결책이 있군요."

"그래, 일시적으로 네놈의 격을 올려버리는 비기가 있다."

뱀파이어에겐 다섯 단계의 계급이 있다.

1단계가 레서 뱀파이어.

2단계가 뱀파이어 어뎁트.

3단계가 엘더 뱀파이어.

4단계가 뱀파이어 로드.

5단계가 에인션트 뱀파이어.

블라르가 말한 격은 이 다섯 단계를 의미한다. 나는 생각난 김에 물었다.

"백작님, 저는 어느 단계에 와있는 뱀파이어입니까?"

"네놈? 당연히 어뎁트에 불과하다. 옆에 있는 붉은 머리 꼬맹이는 레서 뱀파이어고."

"제가 어뎁트 밖에 안 됩니까? 케일런도 이겼는데?"

참고로 게임 데이터에 의하면, 나와 크게 싸운 후 진정한 친구가 된 케일런은 엘더 뱀파이어다.

"등급이 절대적인 건 아니니까. 네놈은 사도지 않느냐? 그 외에 이런저런 게 합쳐져 어뎁트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거고."

듣고 보니 이상한 얘기는 아니다. 블라르 백작은 4단계인 뱀파이어 로드임에도 그 위인 에인션트들을 두들겨 패고 다니니까.

"각 종족마다 사정이 다르니 정확하진 않지만, 회합에 나올 놈들은 뱀파이어로 치면 4단계 로드급 정도는 된다. 하나 같이 거물들이지. 아무리 네놈이 뱀파이어 어뎁트 중에 발군이라고 해도 당해내긴 어렵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탈 후기지수지만 장문인은 무리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네가 널 일시적으로 로드급으로 만들어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말 그런 게 가능합니까?"

"크흐흐흐! 이 블라르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마침 잘 됐구나. 이참에 절대자의 시선을 느껴 보거라. 후일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널 어림짐작하고 모인 것들이 크게 당황할 게 틀림없다."

상황이 절로 그려졌다. 신탁이라 어쩔 수 없이 오긴 왔는데, 건방진 애송이 놈이 우두머리라 한다. 그래서 힘으로 눌러주려 했더니 그 애송이가 더 강하다? 이건 뭐, 벌써부터 하고 싶네.

원래 나는 다른 놈들이 허둥대고, 놀라고, 당황해서 자빠지는 걸 보기 즐겼다. 그런 점에서 이번 회합은 최고의 쇼가 될 것 같았다.

"좋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로드급의 경지를!"

"그래, 기왕 급을 올리는 거 에너지 드레인도 전수해주지. 대규모 에너지 드레인은 로드급이어야 쓸 수 있으니 말이다. 이것을 익히고 나면 그 카르멘이라는 골방지기 노인네는 더 생각나지도 않겠지. 크하하핫!"

***

카르멘은 섀도우타운 깊은 곳에 콕 박혀 있는 존재지만, 세상물정에 어둡진 않았다.

그녀의 충실한 동맹이자 친구인 로드급 뱀파이어 루신다가 바깥 소식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카르멘은 루신다가 가져온 소식 하나에 반응했다.

"뭐? 이번에 300여년 만에 열리는 일곱 봉우리 회합에서 결투로 의견을 정하기로 했다고?"

"네, 봉우리의 실무진들이 모여 얘기를 하면서 온갖 진통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세련된 토론은 무리라고 여겼고, 기왕 이렇게 된 거 강한 놈의 말을 듣기로 했다네요."

"단순 무식하지만··· 합리적이군. 태양 교단이 온다는 사실이 크긴 크구나. 그렇게까지 해서 모이려는 걸 보니."

요컨대, '칠봉제일무술대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카르멘은 자신이 제자로 삼으려고 하는 소렌 역시 스킨크족의 대표로 결투에 참가함을 알게 됐다.

"쉽지 않을 텐데?"

벌써 걱정이 됐다. 각 봉우리에는 평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절대강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일곱 봉우리라는 역사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거물들 덕이었다.

한데 이렇게 각 종족의 이권이 첨예하게 대립한다면 모습을 드러낼 텐데, 카르멘이 보기에 아직 귀엽기만 한 소렌이 당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금세 할머니의 본능이 발휘됐고, 루신다를 내버려두고 자신의 금고로 달려갔다.

"그래, 이걸 주자."

카르멘은 금고 안, 영구적인 냉장 마법이 걸린 곳에서 한 수정병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안에 든 것은 지금은 사라진 에인션트 드래곤 자이쏘르라는 존재의 은색 피였다.

이 피는 대단한 품질을 가지고 있고, 뱀파이어가 마신다면 그 격이 일시적으로 올릴 수 있었다.

'소렌이 마신다면 로드급으로 올라갈 터. 충분히 결투에서 잘할 수 있을 거다.'

카르멘은 긴 세월간 아껴왔던 에인션트 드래곤 자이쏘르의 피를 보며 흡족한 기분이 됐다. 아주 가치 있는 곳에 쓸 수 있겠단 생각에서였다.

'블라르 그놈은 이런 피가 있는 줄도 모를 거다.'

아무리 블라르가 오래 살아왔어도 카르멘에 비해선 애송이였으니까. 카르멘은 블라르와의 내기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블라르도, 카르멘도 모르는 게 있었다.

뱀파이어 어뎁트에 불과한 소렌에게 로드급으로 뛰어오를 수 있는 수단 두 개가 한꺼번에 투여되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말이다.

대재난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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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봉우리의 왕(2)

***

'일곱 봉우리의 회의'가 열리는 게 확정됐다. 거의 300여 년 만이라고 하니 태양 교단의 대규모 원정이 얼마나 큰일인지 알 만했다.

거기에는 블라르 백작이 본의 아니게 힘을 써준 것도 컸다. 네임드 오크인 본크러셔를 필두로 하는 회의 반대자들이 쓸려 나갔기 때문이다.

이제 미혹의 산에 사는 자들의 시선이 일곱 봉우리의 회의에 쏠리게 됐다. 나 역시 이번 일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훌륭한 전략가의 자세란 무엇이냐? 간단하다. 이미 이겨놓고 싸우는 것이다."

나는 턱을 치켜세우고, 검지를 든 채 어디선가 들은 말로 아는 체를 했다. 그러자 전용 박수 기계인 에레미나가 열렬히 호응해왔다.

짝짝짝!

"과연, 훌륭하십니다. 주인님."

"하면 이번 회의에서 어떻게 해야 이겨놓고 싸울 수 있을까?"

나는 바로 설명하는 대신에 에레미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녀석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권속인 에레미나가 바르게 성장해, 훌륭한 뱀파이어가 되게 만드는 건 내 의무였다.

"음···."

에레미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회의에 참석하는 주요인물들을 사전에 포섭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회의 결과를 원하는 대로 이끌 수 있을 테니까요."

"훌륭하다!"

나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흐뭇한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에레미나에게 다시 물었다.

"하면 어떤 방법으로 회의에 참석할 자들을 사전에 설득할 수 있겠나?"

"그 점은··· 주인님께서 추구하시는 방향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하면 내 먼저 설명해주마.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일단 상대에 대해 조사한다. 그렇게만 하면 어떤 식으로 다가가야 할지 알 수 있지."

"호오···."

"가령 무언가 간절히 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돈이 궁할 수도 있고, 귀중한 물건일지도 모른다. 그걸 선의로 건네준 뒤에 호의를 사는 것이지. 꽤 다정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내 구구절절한 설명은 에레미나는 간단하게 정리해 버렸다.

"즉, 뇌물이군요?"

이 녀석, 듣기 불편한 지적을 하는군.

"크흠! 뇌물이라니. 그건 인간관계의 기름칠 정도에 불과하다. 아니면, 다른 방법을 동원할 수도 있다. 참석자를 미리 사전에 초청해서 한곳에 머물게 한 뒤에, 집중적으로 설득하는 것이지."

에레미나는 대번에 알겠다는 듯 조막만 한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을 쳤다.

"아! 알겠습니다. 납치한 뒤에 감금하는 거군요?"

"커흠! 아니, 그저 가벼운 초대다···."

"적어도 초대받는 사람이 머물 곳에 와인과 소파가 있지는 않을 듯합니다만? 분명 사슬과 고문 도구가···."

아, 쉽지 않다. 이 순수하고 파릇파릇한 아기 뱀파이어에게 세상사를 좀 순화해서 알려주기란.

"어허! 그것은 다소 완고한 자세가 동반될 뿐인 협상이다. 상대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점에선 엄연한 교섭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폭행과 협박은······."

"때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다들 자기 고집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그건 '조금 빠른 일 처리'에 불과하다."

"이해했습니다!"

에레미나는 꼭 기억하겠다는 듯 작게 웃으며 끄덕였다.

'아, 이게.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 거 맞나?'

이 소중한 권속에게 좋은 것만 알려줘야 하는데.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에레미나가 이미 결론을 내렸다.

"먼저 돈을 먹이고, 안 되면 납치하라 그거군요?"

"······."

"주인님?"

"아니, 절대 그런 험악한 게 아니다. 그리고 아마 얘기가 잘 통할 테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이 소렌, 일곱 봉우리 제일의 신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일을 벌일 리가 없잖아?

***

사흘 뒤.

"잡아! 잡으라고! 에레미나! 이 씹새끼들 일단 기절시켜라!"

나는 노움 마법사 하나를 포대기로 보쌈하면서 외쳤다. 그러자 신난 에레미나가 근처에 있던 경호원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네! 드디어 일을 제대로 하기로 하셨군요! 주인님!"

에레미나는 어리지만 뱀파이어였고, 괴력을 지녔다. 특히 이 소렌님의 인자를 바탕으로 뱀파이어가 됐으니 그 자질이 엄청났다.

"으하합!"

녀석은 뭔가 꼬맹이 같지 않은 기합 소리를 내더니 떡장갑을 두른 경호원들을 잡아다 던져댔다.

"끄악―!"

노움 마법사를 위해 일하는 드워프 용병 하나가 근처의 나무창에 비명을 지르며 처박혔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에레미나는 남아 있는 다른 놈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뒤, 위에 올라타 투구를 잡고 마구 땅에 찍어댔다.

캉! 캉! 카앙! 캉!

철 투구가 포장된 도로를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에레미나야! 그만해도 되겠다. 저놈 뇌가 이미 오믈렛처럼 변했을 거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손님은 어찌?"

"여기 있다."

기습을 당한 노움족 마법사가 마법 지팡이도 놓친 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나는 포대 자루째 어깨에 짊어지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가자! 권속이여!"

"네! 주인님, 귀한 분을 이렇게 초대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우리 둘은 바람과도 같이 노움의 도박과 향락의 도시 '트란발'의 거리를 질주했다. 일곱 봉우리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이곳은 불야성이었고, 온갖 부류가 몰려 있었다.

그들은 복면을 한 채 내달리는 우리를 보고는 기겁해서는 비명을 질러댔다.

"뭐야! 끄아아아!"

"납치다! 사람이 납치됐어!"

그러거나 말거나 에레미나와 난 근처의 하수구로 향했다. 뒤에서는 도시 경비대가 따라붙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었다. 우리 하수도를 통해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탈출로나 도시에 대해 빠삭하니 쉽구만. 키키킥.'

지금 정중히 초대하는 인물은 노움족의 대표로 오는 빼어난 마법사이자 과학자인 '엉겅퀴 스란레'이다.

현명한 학자라, 이번 회의에서 노움을 위해 올바른 결정을 내려줄 거라 여겨져 뽑혔다.

뛰어난 전투원은 아니지만, 만약 무력으로 뭔가를 결정하게 되면 대신 내세울 챔피언이 있으니 별 상관없었다.

결국 의사결정을 하는 건 엉겅퀴 스란레이니 그녀를 공략하는 게 맞지.

우리는 그녀를 미혹의 산에 미리 마련한 모처로 데려가서는 정중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소렌이라 합니다."

"전 권속 에레미나입니다. 주인님의 껌딱지 같은 거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상적인 인사를 건네는 듯한 우리 모습에 엉겅퀴 스란레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당신이 이번 신탁의 주인공이군요! 한데 이게 대체 무슨 무례지요! 감히 날―!"

분노한 스란레가 새하얀 안광을 뿌리며 마법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곧 그녀의 마력은 파스스, 하는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바로 그녀가 목에 착용한 구속구 때문이다. 그것은 마법의 흐름을 방해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아단 삼촌이 남긴 것이다.

늘 남을 구속하고 자기 맘대로 하기 좋아했던 분이라 그런지 그의 유산에는 이런 물건이 제법 있었다.

물론 엉겅퀴 스란레 같은 마법사면 풀어낼 수 있겠지만,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고 그 사이 그녀를 설득하긴 충분했다. 에레미나는 다소 상기된, 은근히 들뜬 기색을 애써 억누르며 물어왔다.

"이제 협박과 폭행, 고문의 차례입니까? 하악···!"

그 말에 스란레가 깜짝 놀라서는 눈이 커졌다. 마법도 안 먹히지 고문도 하겠다지, 금방 공포가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

아니, 신사적으로 나가려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니, 에레미나야.

"―너는 일단 입 좀 다물고 있어라."

"네, 주인님."

그리고 고문이라니? 나는 심약한 사람이라 고문 같은 건 할 엄두도 못 낸다.

"마담, 진정하십시오. 이 꼬맹이가 뭔가 착각한 것입니다. 농담이거나."

"···뱀파이어의 농담은 고약하군요."

"제가 원하는 건 거래입니다. 한쪽만이 손해 보는 게 아닌, 서로가 만족할 만한 것이죠."

"그런 자가 숙녀를 이렇게 묶어두고 말해!"

"죄송합니다. 일단 얘기를 들어보시지요."

"당장 풀어요! 얘기를 듣는 건 그다음이니까."

"제게 기회나 주실지 모르겠군요."

사실 이렇게 초대하게 된 건 이미 그녀가 내 대화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의 직접적인 당사자를 사전에 만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이유였지.'

결국 이렇게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일단 얘기를 들어주시면 그 후에는 받아들이든 말든 풀어드리겠습니다."

결국 스란레에겐 선택권이 없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으윽! 이렇게까지 하디니. 알겠어요. 짧게 해주세요."

좋아, 짧게 해달라니 핵심부터 말해주지.

"저는 이 미혹의 산에 세계수 아만비다의 묘목을 심을 예정입니다."

"······?"

엉겅퀴 스란레는 순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래서 다시 말해줬다.

"세계수의 묘목을 이 일곱 봉우리로 둘러싸인 미혹의 산 한가운데 심을 예정입니다. 이 산지 가운에서 거대하게 솟아오른 세계수를 볼 수 있을 거란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스란레는 경악한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이런 황당무계한 소리가 또 없다는 듯이 말이다.

스란레의 엉겅퀴란 이명에서도 알 수 있듯, 그녀는 과학자겸 일곱 봉우리 최강의 자연계 마법사다. 당연히 그 관심의 최종적인 부분은 이 세계 최대의 신비라 할 수 있는 세계수에 닿아 있었다.

세계수란 엉겅퀴 스란레에게 가장 달콤한 유혹이자 관심사다. 그런데 그걸 미혹의 산에 심겠다? 이미 이 협상은 끝난 거다.

스란레는 어이없어하면서도 귀를 쫑긋거리는 게 관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지 않습니다. 제가 세계수의 묘목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뱀파이어 따위가 엘프의 비밀을 어떻게?"

이럴 때는 대답하기 별로 어렵지 않다.

"블라르 백작님께 들었습니다."

"······."

정보에 관해서라면 그냥 블라르 백작 핑계를 대면 된다. 거미줄처럼 정보망을 뻗어둔 자로 유명하니 말이다.

"정작 블라르 백작님은 세계수에 관심이 없습니다만, 전 다릅니다. 이 정보는 진짜입니다. 들어보시면 알 겁니다."

나는 현재 아만비다의 묘목이 대충 어디에 있고, 엘프들이 그걸 어디에 심을지 결정하지 못한 정치적 이유, 묘목에 접근하는 법 따위를 설명했다.

그것은 고인물인 내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처음에 미심쩍게 듣던 스란레도 점점 입이 벌어져갔다. 그녀도 많은 지식을 쌓았다. 그렇기에 지금 내 얘기가 허튼 말이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한 이야기군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제가 그 묘목을 이곳으로 가져올 생각이란 점입니다."

"그래서 제안할 게 뭔가요···?"

스란레는 침착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팔다리가 살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세계수는 그녀의 욕망 그 자체기 때문이다.

"두 가지만 도와주시면 미혹에 산에 심어질 세계수에 대한 독점적인 연구권을 드리죠. 30년간."

"세상에!"

"다른 학자들은 접근이 불가할 겁니다. 즉, 스란레 님 혼자 그 아름다운 세계수를 30년간 요리조리 살펴볼 수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 당신은 단순한 뱀파이어가 아니군요. 두 가지 도울 게 뭔가요? 듣고 결정하겠어요."

엉겅퀴 스란레는 아직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듯 허세를 부리고 있었지만 무의미했다. 저 열망에 싸인 눈빛은 그녀의 머릿속에 세계수가 가득 찼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첫 번째는 제가 세계수를 가지러 갈 때 도와주십시오. 숙련된 자연계 마법사의 도움이 필수입니다."

"직접··· 저도 갈 수 있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위험이 가득합니다. 그 귀쟁이 놈들이 순순히 세계수의 묘목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가겠어요! 그 건방진 귀쟁이 놈들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다면 바라마지 않는 바예요."

"아주 좋습니다."

나는 정말로 세계수의 묘목을 탈취해 이곳 미혹에 산에 심을 생각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이곳은 불멸의 영지가 될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땅 주인은 나였고.

그 탈취 과정에서 빼어난 자연계 마법사인 스란레의 도움은 절대적이다.

즉, 이번 일은 일곱봉의 회의를 위한 사전 포석이면서, 엘프에게서 세계수의 묘목을 훔쳐 올 다음 단계를 위한 안배다.

역시 고인물은 효율인 법이다.

"두 번째 요구는 이번 회의에서 제 의견에 동조해 주시면 됩니다."

"흐음······."

"노움 의회에서 일족의 도움이 되는 방향을 지지하란 명을 들은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노움에게 해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일곱 봉우리가 단합해서 몰려온 태양 교단을 막자는 것뿐입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좋아요."

스란레는 잠시 생각하더니 물어왔다.

"당신의 제안은 받아들일 만하다고 느껴져요. 하지만 여전히 의심이 가는 게 사실이랍니다. 무엇으로 보장할 거지요?"

거기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스란레 님, 제 말에 거짓이 아니라는데 스승이신 블라르 백작을 걸겠습니다!"

"······네?"

"만약 제 혀가 거짓을 말한다면 블라르 백작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을 것입니다."

"······네? 어째서 블라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그 물음에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한 표정을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블라르 백작의 후계자란 소문을 들으셨을 겁니다. 본디 스승이란 부모와 같습니다. 부모가 벼락을 맞는다면 자식된 입장에서 가슴이 찢어질 일 아니겠습니까? 제 자신이 맞는 것보다 훨씬 두려운 일이지요."

"아···? 그렇긴 하겠지만······?"

스란레는 그럴싸한데 뭔가 개소리 같기도 하고 헷갈리는 표정이 됐다. 그런 그녀 앞에서 드워프의 마법주머니를 열어서 다량의 금화를 쏟아냈다.

촤르르르르!

삽시간에 금화가 무려 6,000여 개가 바닥을 가득 채웠다. 이것은 금 200킬로그램가량의 값어치를 가진 재화였다. 엄청난 양이지만 갑부인 내겐 별거 아니었다.

엉겅퀴 스란레는 멍한 얼굴이 됐다. 아무리 무욕하다고 해도 이런 금을 보면 홀리는 게 당연했다. 그게 금의 마력이고, 태어날 때부터 금의 노예인 우리의 숙명이다.

"이 금화를 보증금으로 맡기겠습니다. 스란레 님. 이 정도면 평생 연구비 걱정 따윈 없을 겁니다. 설령 제가 세계수를 가져오는 일이 실패하더라도 손해는 없겠지요. 어떻습니까?"

결국 엉겅퀴 스란레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제가 회의에서 뭘 하면 될까요?"

"흐흐흐, 좋은 결정을 하셨습니다."

나는 웃으며 그녀의 구속을 풀어준 뒤에 말했다.

"일단은 제 의견에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거기에 더해 부수적으로, 오크 족장과의 결투를 하고자 하니 호응해 주시면 됩니다."

"뭐라고요! 오크 족장이라면 고르가쓰잖아요? 지금 일곱 봉우리 최강의 전사와 결투를 하겠다고요?"

스란레는 우려가 가득한 얼굴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곱 봉우리에서 고르가쓰는 살아 있는 전설이기 때문이다.

일곱 봉우리에서 대장 노릇 좀 하려면 고르가쓰만큼 발판으로 삼기 좋은 게 없다는 소리다.

"네, 그렇습니다."

물론 정정당당히 싸우겠다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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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봉우리의 왕(3)

* * *

뱀파이어 성녀는 신들의 도시인 아룬델을 찾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데이워커의 인자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그걸 부탁한 소렌이야 단순히 시일이 걸린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달랐다.

뱀파이어 성녀가 신좌에 올랐다고 해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었고, 일을 해결하려면 공부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아룬델의 대도서관으로 가고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해요.'

소렌은 지가 제일 싫어하는 게 공부면서 섬기는 신을 공부의 늪에 빠져들게 한 셈이다.

'하지만 그전에··· 조금의 사치는 괜찮겠죠.'

뱀파이어 성녀는 이전에 침만 꼴깍꼴깍 삼키다가 도망쳐야 했던 넥타르 노점상 앞에 섰다. 지난번에 봤던 요정이 여전히 장사 중이었다.

"어서 오세요! 여신님!"

요정은 친절한 미소로 뱀파이어 성녀를 맞아줬다. 그러자 뱀파이어 성녀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예전의 일을 변명했다.

"에흠! 그때는··· 다이어트 중이었어요."

넥타르 한 잔 못 사고 도망갔던 일을 굳이 변명하는 걸 보면, 성녀도 아직 궁박했던 시절의 물이 다 안 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요정은 무슨 소린가 싶어 영업용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애초에 뱀파이어 성녀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누구지? 어느 세계의 미의 여신 같은데···.'

요정은 일전에 도망갔던 빈곤한 여신과 지금 눈앞에 잘 차려입은 여신이 동일인물일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당연히 대화가 맞물리지 않을 수밖에. 그래도 여신의 말을 씹어버릴 수는 없는 일. 요정은 적당히 답했다.

"다이어트 좋지요. 하지만 여신님처럼 하늘하늘한 분께는 넥타르 한 잔은 괜찮지 않을까요?"

그 말에 뱀파이어 성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끄덕였다.

"한 잔 주세요."

"네! 여깄습니다!"

그렇게 넥타르를 받은 뱀파이어 성녀는 기쁜 얼굴로 빨대를 쪽쪽 빨며 대도서관으로 향했다. 은근히 신난 기색이 놀이공원에서 츄러스 하나 사든 아이를 비슷한 표정이었다.

대도서관에 도착한 그녀는 거대한 책무더기에 파묻혔다. 신비로운 고대 지식 속에는 소렌을 위한 해결책이 있을 터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무아지경에 가깝게 책을 뒤적이는 그녀는 도서관의 구석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끠잉. 끵!

이상한 소리를 내는 그건 마치 낙지처럼 생긴 작은 생물이었다. 해산물 같은 촉수가 어째서 도서관에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곳은 신들의 도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건 없었다.

끠이잉···.

작은 낙지 같은 생명체는 조심스럽게 성녀에게 다가왔다. 몹시 꺼려하면서도 분명 성녀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세상에? 이건 뭐지요?'

뱀파이어 성녀는 당황해하면서도 도서관 책장 구석에 있는 그 정체불명의 촉수덩이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징그럽게 생기긴 했지만, 뭐랄까···? 어떻게 보면 귀여운 구석도 있군요.'

촉수 생명체는 청자색 피부에 검고 노란 반점이 있었다. 딱 봐도 맹독을 가졌을 듯한 형태. 하지만 이상하게 성녀는 그 생명체에게 호감이 갔다. 녀석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다만 바로 다가오지는 않고 조심스럽게 성녀를 관찰하고 있다. 뱀파이어 성녀 역시 촉수덩어리를 유심히 살펴봤다. 그러던 중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아······!"

저 생명체의 정체가 뭔지 간파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저건 일곱 봉우리에서 난동을 부렸던 고대신인 룩스 움브라의 파편 중 하나였다.

당시 소렌이 새벽빛으로 불태웠던 조각에 비하면 쌀알같이 작은 것에 불과했지만, 분명 룩스 움브라의 파편이 맞았다.

'왜 제게 관심을 갖는지 알겠군요.'

뱀파이어 성녀가 반신에서 소신으로 승격한 건 룩스 움브라가 남긴 신력 덕분이다. 그 신력은 뱀파이어 성녀에게 맞게 변환됐지만, 그 성질 일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저기 있는 룩스 움브라의 조각이 호의와 관심을 보이는 건 그 때문이었다. 뱀파이어 성녀가 저 작은 촉수에게 끌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였고.

"이건 동질감이군요···."

뱀파이어 성녀는 촉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녀석은 망설였다.

끠잉···.

"괜찮아. 이리 오렴."

처음에는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뱀파이어 성녀가 차분하게 기다리자 녀석은 조금씩 다가오더니 결국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

크기도 딱 낙지만 했다.

"아!"

뱀파이어 성녀는 녀석과 접촉한 순간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이 촉수는 너무 작은 파편이었기에 본래 신이었던 존재와 달라진 그저 동물임을.

하지만 이 녀석에겐 거대한 잠재력이 있었다. 잘 연구해 보면 룩스 움브라의 권능을 복원할 수 있을 터였다.

아무리 작아도 인간이 DNA를 품은 것처럼 신이었던 시절의 '디바인 코드'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디바인 코드는 신의 본질과 권능의 구조, 담당했던 영역이 암호화된 정보 체계다.

'그 힘을 연구하면 사도에게 도움일이 될 거 같군요.'

룩스 움브라는 강한 신이었다. 지금의 뱀파이어 성녀보다 훨씬 더. 그렇다는 건, 연구에 성공하면 더 강한 권능을 사도에게 내릴 수 있다는 소리였다.

더불어 자신도 중신격으로 오르는데 도움을 받을지도 몰랐다.

이름난 고대신의 디바인 코드라니, 뱀파이어 성녀는 뜻하지 않은 기연을 만났다.

한데 그때 도서관이 수선스러워졌다.

"이쪽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포위망을 갖춰야 해."

"이번에도 놓치면 가망이 없다."

놀라서 쳐다보니 그것은 아룬델에만 있는 특이한 조직인 '연합성기사단'이었다.

원체 신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치안 유지를 위해 여러 신들의 성기사들을 모아서 발족한 단체다. 서로 다른 신을 섬기는 성기사들이지만 아룬델에서만 함께 움직였다.

그들 모두 지상에 있을 때 대단한 위업을 쌓은 전사들로, 한 시대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뱀파이어 성녀는 직감했다. 저자들이 자신을 찾아온 낙지 같은 녀석을 쫓아온 것임을. 실제로 손바닥 위의 촉수는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끠잉! 낑! 낑!

짧게 고민한 뱀파이어 성녀는 결국 촉수를 자신의 소매 안에 숨겼다. 그리고 신성한 힘으로 촉수의 정체감을 가렸다.

이대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성기사들이 걷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위대하신 분이여. 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지요?"

"대도서관으로 흉험한 존재가 숨어들어온 정황이 있습니다. 혹시 수상한 걸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다행히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성기사들은 뱀파이어 성녀의 아름다움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다들 높은 수양을 쌓은 종교인임에도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흔들리는 것이다. 뱀파이어 성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알지 못한답니다. 지나가도 괜찮을까요?"

"네, 그러시죠."

연합성기사단은 마음만 막으면 소신격 정도는 막아설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이지만, 성녀의 기품에 놀라 서둘러 물러났다.

다들 저런 고상하고 지체 높은 존재가 불경한 고대신의 파편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렇게 무사히 빠져나가나 했는데, 갑자기 성기사 하나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놀란 성녀는 흠칫했다. 설마 들킨 것일까?

소문에 따르면 연합성기사단의 부대장 중에는 반신격과 맞먹는 괴물들도 있다고 했다.

물질계에서 사악한 드래곤과 지옥의 악마도 썰던 자들이니 그럴 법한 일이었다.

'역시 경솔했나요···.'

경험 많은 이의 통찰력이나 특별한 아티펙트라면 성녀의 소매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뱀파이어 성녀는 살짝 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돌아봤다. 변명을 떠올려봤지만, 좋은 게 없었다.

"···무슨 일이시지요?"

긴장감을 애써 억누르며 묻자 뜻밖에 대답이 돌아왔다.

"저, 여신님의 신명이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입교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하하하!"

한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성기사 하나가 그리 물어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료들이 화들짝 놀라서 그놈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아니, 이런 미친놈이!"

"아무리 아름다우셔도 그렇지. 너 섬기는 신도 있잖아!"

"여신님! 정말 죄송합니다. 이 멍청이 말은 신경 쓰지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놈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아! 모른다! 개종이 나를 부르고 있다!"

긴장된 분위기가 탁 풀려버렸다. 저 정도 성기사들도 투닥투닥거리는 게 아이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뱀파이어 성녀는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고는 답했다.

"핏빛 새벽의 여신이라 합니다. 마음은 감사하나 그대를 신앙으로 이끌어준 분께 늘 감사하도록 하세요. 그럼, 이만."

그렇게 대도서관을 떠나는 데 성공했다.

아룬델의 거리를 걷는 동안 내내 긴장했지만 별 일이 없었다. 그때, 소매로 청자색의 가는 촉수가 슬그머니 튀어나왔다. 뱀파이어 성녀는 손가락으로 그걸 도로 밀어 넣은 뒤에 말했다.

"아직 숨어 있으세요."

룩스 움브라는 혼돈과 광기, 어둠과 악령, 심연, 괴물의 지배자였다. 뱀파이어 성녀는 그걸 어떻게 활용하지 고민을 이어갔다.

'사도가 가진 뱀파이어의 성질에 도움이 될 거 같긴 한데 말이죠···.'

* * *

노움족 대표인 엉겅퀴 스란레와 좋은 협상을 한 나는 다음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그것은 바로 스킨크, 드워프, 노움, 고블린, 오크, 코볼트를 잇는, 미혹의 산의 일곱 번째 종족이다.

"주인님, 일곱 번째 종족은 무엇입니까? 저도 미혹의 산의 주민인데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에레미나의 물음에 나는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 놈들은 보통은 볼 일이 없으니까.

"일곱 번째는 바로 구름 봉우리에 살고 있는 하피들이다."

"하피라 하면··· 인간과 새가 뒤섞인 괴종족이 아닙니까?"

"맞다. 보통 인간 여성의 상체에 새의 날개와 새의 하반신을 갖고 있지."

미혹의 산에 사는 하피들은 구름 봉우리라 불리는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존재들이다. 그곳은 날개가 없으면 닿을 수 없는 장소라 알려져 있다.

하피들은 가끔 산지로 내려와 다른 종족을 잡아먹곤 하는데, 그 때문에 미혹의 산에선 기피되는 해충 같은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들도 나름의 문화가 있고, 지성도 가진 이들이다. 문제는 원체 성정이 잔인하고 괴팍한 데다가 다른 종족과 교류라곤 안 한다는 것.

그래서 일곱 봉우리에서 하피라 하면 경멸의 대상이었다. 내 설명을 들은 에레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막돼먹은 종족이라면 설득할 수 있는 건가요? 애초에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하피도 엄연히 일곱 봉우리의 주민 가운데 하나다."

"주민이라는 걸 누가 인정하는 건가요?"

"과거 있었던 평화협정에 하피들 역시 참가했기 때문이지."

어떻게든 하피를 끌어들여야 한다. 놈들의 비행 능력은 태양 교단과의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좋아, 에레미나. 하피가 사는 구름 봉우리로 가기 위해선 너도 비행을 배워야 한다. 박쥐 변신을 가르쳐 주지."

동물로 변하는 건 뱀파이어의 주된 능력 가운데 하나다. 나야 권능으로 받았지만 처음부터 익히려면 쉽지는 않을 터. 일주일 정도 걸릴 거려 여겼는데 에레미나는 반나절 만에 성공했다.

퍼엉!

삽시간에 작은 박쥐로 변한 에레미나가 기뻐하며 날개를 파닥파닥거렸다.

-주인님, 성공입니다.

텔레파시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들뜸이 가득했다. 그 빠른 성취 덕에 다음날 밤에 바로 구름 봉우리를 올랐다.

-에레미나야. 낮게 날아야 한다. 높게 날면 근처에서 비행하는 하피에게 순식간에 낚아채일 거다. 공중에서 싸움이라면 이길 가망은 없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지면에 붙듯 낮게 날며 구름 봉우리를 올랐다. 나중에는 거의 수직의 절벽을 오르는 지경이 되어서, 날개가 없으면 여길 왜 오를 수 없는지 절감하게 됐다.

-에레미나, 하피다! 절벽에 달라붙어 숨자.

주변에 자욱한 구름 사이로 하피 떼의 실루엣이 보였다. 놈들은 박쥐를 간식처럼 먹기도 하니 조심해야 했다.

일단은 절벽의 틈새에서 기다리다가 하피들이 사라지면 움직일 생각이었다. 한데 일대에서 날아다니는 하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오늘은 무슨 날인가? 이미 밤이 왔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하피들은 야간 사냥에도 익숙하기 때문에 섣불리 다시 나는 건 위험하다.

'이거 어쩌지?'

고민하고 있을 때 에레미나가 뭔가를 발견했다.

-주인님, 이 절벽의 틈새로 기어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람이 흘러나옵니다.

아마 하피굴의 공기 구멍 같았다. 하피 놈들은 구름 봉우리 안을 개미집처럼 파고 들어가 생활한다.

-좋아. 그리로 들어가자. 하피굴 안이라면 해볼 만하지.

굴 안에서는 뱀파이어 형태로 걸어 다닐 수 있으니 싸움이 벌어져도 대항이 가능했다. 우리는 날개를 접은 채 절벽의 틈새로 기어들어 갔다.

다행히 하피굴이 맞았다. 넓은 터널에 도착하자 우리는 변신을 풀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주인님, 새똥 냄새가 납니다."

"음, 확실히···. 코를 막아버리고 싶구나."

"한데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들 입장에서 보기엔 우리는 숨어든 도둑일 텐데 말입니다. 이번에도 납치입니까?"

그 말에 나는 검지를 까딱거렸다.

"아니지, 아니야. 이참에 네게 보여주마. 일곱 봉우리의 아무도 모르는 하피들의 비밀을."

"비밀입니까?"

"그래, 하피 여왕의 챔버로 간다. 날 따르거라."

우리는 하피굴 안을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하늘이 아니라면 우리가 더 유리했다. 뱀파이어의 민감한 감각은 하피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곳이 놈들의 동굴임에도 우리는 먼저 발견하고 피하거나 우회할 수 있었다.

그렇게 문제없이 나아가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났다. 나아가고 있는 터널 뒤쪽에서 수많은 하피 떼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주인님!"

놀란 에레미나가 날 불러왔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우리의 침입을 눈치채고 잡으러 온 건가?

아니, 느껴지는 기운을 봐서는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대체 아까 하피들이 공중에서도 그렇고 왜 이리 몰려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일단 이쪽으로 간다."

몰려오는 하피 떼를 피해서 우리는 서둘러 터널을 달렸다. 하지만 금방 다른 쪽에서 더 많은 하피 떼가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다시 방향을 바꿨지만 계속 하피 무리를 만났고, 우리는 마치 몰리는 물고기처럼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이게 대체!"

황당한 건 저들이 우리를 잡으려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란 점이었다. 그저 사방에서 밀려오는 탓에 이쪽이 알아서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것.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보통 하피들은 이렇게 몰려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침내 독 안에 든 쥐 신세처럼 어떤 챔버로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만났다.

"이런 맙소사···!"

챔버 안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젊은 하피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시종인 듯한 하피가 여럿이다.

"공주님! 힘주세요!"

"거의 다 됐어요!"

특이한 건 그 화려한 하피가 새의 하반신을 내민 채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는 것.

"아윽···! 으읏!"

보자마자 뭐 하는 짓거리인지 알 수 있었다.

'초란 의식이잖아?'

하피에게 처음 무정란을 낳는 일은 신성한 일로 통한다. 그렇기에 축하해주는데, 신분이 높을수록 큰 잔치가 열린다.

한데 저 젊은 하피는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오색 깃털의 모르페', 하피의 고귀한 공주였다.

즉, 에레미나와 나는 하피의 공주가 신성한 초란 의식을 준비하는 챔버로 난입하게 된 것이다.

우리 뒤로는 축하를 위해 수백의 하피가 몰려오는 중이고.

'아, 오늘따라 사방에 하피가 많더니 이런 이유에서였구나.'

모르는 걸 알게 된 건 좋았다. 공주와 시종들이 우리를 발견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저자들은!"

"침입자!"

그들의 얼굴에서 당혹과 분노가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곧,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이 악귀처럼 변했다. 그리고 입이 길게 찢어져 칼날 같은 이빨을 드러내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감히! 공주님의 의식을!"

"네놈들!"

"서둘러 죽여서 치워야 합니다! 이 일이 알려지기 전에 수습할 수 있어요!"

격노하는 게 당연했다. 이 신성한 의식에 외인은 절대로 참가할 수 없었으니까. 즉, 나와 에레미나는 하피의 미래라 할 수 있는 공주의 초란 의식을 망친 셈이었다.

이래저래 복잡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런 걸 간단하게 정리하는데 소질이 있는 에레미나가 슬쩍 입을 열었다.

"주인님, 좆된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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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봉우리의 왕(4)

상황이 심각했기에 에레미나에게 농담으로 대응해줄 여력이 없었다. 나는 빠르게 설명했다.

"놈들은 날아서 덮쳐온다! 칼날 같은 발톱으로 우악스럽게 움켜쥐려 할 테니 조심해야 한다."

하피의 발톱은 맹금류의 것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기에 놈들에게 붙들리는 순간 발톱이 일제히 몸을 파고들어 온다. 마치 그건, 단검 여러 개에 찔리는 것 같은 효과를 냈다.

"놈들을 찢어죽여!"

"절대 살려둬선 안 된다!"

눈이 뒤집힌 하피들이 이쪽으로 쏘아지듯 날아왔다. 날카로운 발톱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평범하던 여성의 얼굴이 변해, 입이 귀까지 길게 찢어져서는 상어처럼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완전 판타지판 빨간 마스크였다. 놈들은 발톱으로 상대를 고정시키고 크게 벌어진 입으로 물어뜯는 잔혹한 사냥을 즐겼다.

"끼에에에에―!"

날카로운 새 울음소리와 함께 공주를 지키는 하피들이 쇄도해왔다.

나야 그림자로 꺼지거나 연기로 변하는 등의 회피기가 있기에 괜찮았지만, 문제는 에레미나였다. 그런 기술이 없어서 타고난 감각에 의지해야 했다. 두 번의 공격은 간신히 피했지만, 세 번째에서 위기를 맞았다.

"!"

놀란 에레미나가 피하는 걸 포기하고 손으로 얼굴이려도 가리려던 그때 재빨리 끼어들어 녀석을 내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막 에레미나를 낚아채려던 하피의 발목을 붙잡아서는 힘껏 땅에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충격에 땅바닥이 들썩이며 하피는 피떡이 됐다. 몸이 터져서 피가 무슨 터진 케첩처럼 촤악 뿌려졌다.

보니까 내 손바닥도 엉망이 돼 있었다. 고속으로 움직이는 하피를 붙잡은 탓에 찢겨나간 것이다. 나는 부러져서 덜렁덜렁거리는 하피의 발을 놔주고, 다른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놈들이 빠르다고 이쪽에서 공격하지 못할 것도 없지.'

케일런의 그림자는 매우 변칙적인 기술이다. 특히 놈들도 생명체인 이상 그림자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나는 공격 준비를 하는 다른 하피를 겨냥해 그림자의 힘을 끌어냈다. 그러자 그림자에서 여러 개의 팔이 튀어나오더니 녀석을 붙잡았다.

"끼에에엑! 끼에에에!"

당황한 하피가 몸부림을 쳤고, 사방에 빠진 깃털이 흩날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근처의 돌덩이를 하나 주워서는 놈의 바로 앞에 연기처럼 나타났기 때문.

"케엑!"

하피는 날 발견하자마자 물어뜯으려 했지만, 단번에 턱을 잡아버렸다. 뱀파이어의 괴력에 버둥대는 놈의 주둥이 안으로 미리 주운 짱돌을 쑤셔 넣었다.

퍼억!

놀란 하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하지만 놈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림자 손들로 바닥에 내리눌렀다. 그리고는 하피의 뒤통수를 힘껏 밟았다.

콰직!

불쾌한 소리와 함께 하피의 주둥이로 피와 박살 난 이빨이 쏟아져 나왔다. 놈은 몸을 파닥파닥 뛰더니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그 사이 에레미나가 어쩌고 있다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녀석은 용감하게도 자신보다 훨씬 큰 하피를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하피는 뒤로 넘어질 듯 비행하며 발톱을 내밀어 에레미나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에레미나는 놀라운 솜씨로 발톱을 피하며 그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에게 받은 단검을 들고 하피의 품에 안기듯 찔러 넣었다.

카아앙!

하피는 흉갑을 입고 있었는데 마법이 걸린 물건이 틀림없었다. 단검이 그것을 관통할 때 요란하게 마법의 스파크가 튀었으니까. 딱 봐도 훌륭한 방어구였지만, 고블린 신이 직접 준 단검을 막긴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이후 곧장 에레미나와 하피가 서로 뒤엉켜서 요란하게 바닥을 굴렀다.

"에레미나!"

잠시 뒤 흙먼지를 뚫고 에레미나가 나타났다.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다.

"해냈습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하피 공주가 격노했다.

"이 무례한 것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패악을···!"

하지만 하피 공주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찢어진 입을 크게 벌리며 어떻게든 이쪽을 위협하려고 했다.

"주인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미 사방에서 하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본래 그들은 초란 의식을 축하하러 온 것이지만, 전투의 소음에 놀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피할 곳도, 빠져나갈 곳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인질극이다! 에레미나!"

나는 즉각 하피 공주를 붙잡았다. 놈은 반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자신의 경호원보다도 한참 떨어지는 실력이었기에 대번에 제압해서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그때쯤 챔버 안으로 들어온 하피들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그리고는 쉬지 않고 비명을 질러댔다.

"키에에엑! 키엑!"

"꾸에에에! 까아악!"

"끄키이이익! 키킥!"

하피도 몇 가지 종이 있어서 서로 내는 울음이 상이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어우러지지 못했고, 불협화음 그 자체였다. 실제로 하피의 비명은 듣는 이로 하여금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하고 공황을 일으키는 효능이 있었다.

뱀파이어인 우리 둘에겐 효과가 없었지만 엄청나기 듣기 싫은 소리라는 점은 확실했다.

"주, 주인님! 저놈들이 소리로 우리를 죽이려···."

"크으윽!"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이! 시팔 깃털 새끼들아! 주둥이 안 닫아! 닥치지 않으면 이년 목에 피 철철 흐를 줄 알아!"

그와 함께 사방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대신 원독에 가득 찬 눈길로 쏘아보는 눈동자만이 가득했다.

점점 많은 하피들이 주변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더 안 좋은 건 이 챔버의 천장이 드럽게 높았는데, 그 위쪽에서도 날아다니는 하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그야말로 사방이 하피 천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에레미나가 담담히 말해왔다.

"주인님, 제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겠습니다. 주인님께서는 몸을 빼서 후일을 기약하십시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도망쳐도 에레미나가 도망치게 해야지, 이런 꼬맹이를 희생양으로 삼아 목숨을 부지하라고? 절대 그럴 순 없다.

"물러나! 물러나라고! 이 새대가리 같은 새끼들아! 에레미나, 바짝 붙어라! 공주를 방패 삼아 어떻게든 빠져나간다."

하지만 내 희망은 금방 박살났다. 저 높은 천장에서부터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 빌어먹을."

이 장대한 존재감으로 미뤄보건대 틀림없었다. 일곱 봉우리를 너머, 세계 전체에서도 내노라하는 강자의 반열에 들어가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었다.

바로 하피의 여왕 자이리스였다.

'젠장! 보통 여왕은 이런 소동에 관심을 갖지 않는데··· 공주의 초란 의식이라 그런 건가.'

굼뜬 하피 여왕의 성정을 생각해 볼 때 엄청나게 신속한 반응이었다.

어두컴컴하던 챔버의 드높은 천장에서 환한 빛이 터지더니 거대한 하피 여왕의 모습을 드러냈다.

날개의 익장만 무려 10미터가량. 어마어마한 존재감이다. 그녀는 이쪽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하강했는데, 한 번 날갯짓을 할 때마다 무슨 북을 두들기는 것 같은 파공음이 일어났다.

모든 하피가 대체로 그렇듯 여왕도 입이 길게 찢어지기 전까진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대한 익장에 어울리게 상반신만 해도 내 키보다 더 컸다.

그녀의 눈은 연초록색이었는데 멀리서부터 섬뜩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안광이 강했다.

하피 여왕이 근처까지 하강하자 나는 그 크기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랄까··· 새는 아니고 익룡이지만, 케찰코아틀루스를 실제로 보면 이 느낌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압도적인 포식자를 마주한 느낌이랄까?

실제로 하피 여왕이 가진 힘도 그러했다.

"뱀파이어, 같잖은 소동을 부리는군."

그 말과 함께 하피 공주를 구속하고 있던 내 그림자가 산산이 조각나며 흩어졌다. 그리고 하피 여왕이 살짝 날개를 움직여, 수많은 깃털을 단검처럼 던져왔다.

나는 공주를 붙잡고 있어 피할 방법도 없었다. 놓고 물러나는 순간 근처에 있는 하피들이 쏜살같이 구출해 갈 것이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내가 가진 최고의 방어기인 '그림자 수의'를 펼쳤다. 검은 그림자가 망토처럼 자라나 내 몸을 가렸다.

하지만 여왕이 쏘아낸 깃털들은 그림자 수의를 너무나 간단하게 박살내더니 내 몸 이곳저곳에 박혔다.

"크윽!"

격통은 둘째치더라도 깃털이 박힌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나는 그게 바로 독인 걸 알아챘다.

'언데드에게 독을?'

보통 언데드에게 독은 안 먹힌다. 하지만 나는 금방 그 예외를 떠올렸다.

바로 에테르 차원에서 가져온 '에테리알 베놈'이다. 아무리 언데드라도 물질계의 것이 아닌 그 독에는 저항할 수 없었다.

"크윽···!"

옆을 보니 에레미나는 이미 앞으로 엎어져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의식을 다잡으려 했지만, 금방 모든 게 암전됐다.

* * *

다시 의식이 돌아오자 나는 감사의 말부터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이런 개 같은 인생!"

다행히 시야가 어두워지며 모든 게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좋아진 것도 아니었다.

앞을 보니 수많은 해골 무더기가 보였다. 오크, 노움, 코볼트, 고블린, 스킨크, 드워프 같은 일곱 봉우리의 종족부터 트롤이나 오거, 거인 같은 이들의 뼈까지 있었다.

모두 하피 여왕이 잡아먹은 것이다. 거대한 하피 여왕은 자신이 쌓아 올린 뼈 무더기의 언덕에 앉아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에레미나는 마치 건물의 기둥 같은, 정체불명의 거대한 뼈에 묶인 상태였다.

"정신이 드나보군? 뱀파이어."

하피 여왕은 몸을 옆으로 기댄 체 느긋한 태도였다.

"···왜 아직 살려둔 거지?"

"살려둬도 불만인가? 땅을 기는 하찮은 벌레여. 어찌 처리할지 잠시 고심했기 때문이다."

"공주의 일은 사과하겠다. 어쩔 수 없었다. 초란 의식을 망친 건 백배 사죄하지. 하지만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구름 봉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여왕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고 나는 설명에 들어갔다. 태양 교단의 침공과 일곱 봉우리에서 벌어진 회의에 대해서 말이다.

"이번 일에 협조를 청하러 왔다. 일곱 봉우리 내에서 하피가 가진 권리를 회복하게 도와주지. 앞으로 그 외에도······."

"아니, 필요 없다. 뱀파이어."

하피 여왕은 냉정하게 내 말을 잘랐다. 그 태도에 나는 일이 심각하게 꼬였음을 알았다. 원래 하피 여왕은 복권을 약속하는 걸로 설득할 수 있다.

지금껏 구름 봉우리 위에서 신선놀음을 하던 하피족이지만, 현재 남들에게 말 못할 문제가 생긴 상태. 그 때문에 이전과 다르게 바깥 세계와 교류할 필요가 생겼다.

고인물의 지식으로 그걸 파고들려고 한 건데, 초란 의식을 망친 게 생각보다 큰 문제였던 것 같다.

"그건 사고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단다."

이쪽을 바라보는 하피 여왕은 눈이 희번득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요한 건 네놈이 사도라는 것이지."

어찌 알아본 모양이군. 내가 알기로 하피 여왕 역시 사도이다. 그녀는 하피의 신인 '하늘의 대모'를 섬기는 제사장이기도 했다.

"그래, 사도다. 같은 사도끼리의 관계도 있는데 풀어주는 게 어떻겠나?"

원래 신의 사도는 함부로 해하지 않는다. 다른 신과의 관계를 생각해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피의 신인 하늘의 대모는 여기서 예외라고 할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하늘의 대모는 막 나가는 경향이 있는 신이고, 신들의 도시 아룬델에서도 쫓겨난 추방자 신격이기 때문이다.

즉, 질서 너머에 있는 신이란 소리.

질서에는 선도 악도 상관없다. 악해도 질서를 지키는 자는 아룬델에 거주할 수 있었다.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 역시 아룬델에 머물 때도 있으니까.

반면 선악을 떠나 무질서하고 법규를 위반하는 존재는 아룬델에 들어가지 못한다.

내겐 매우 불행하게도, 다른 신과의 관계를 고려할 생각이 없는 신에겐 사도만큼 맛있는 제물도 없었다.

"뭘 하려고?"

내 물음에 하피의 여왕은 칼날처럼 긴 발톱을 이리저리 손질하며 답했다.

"네놈,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인신공양 해주마. 분풀이도 하고, 섬기는 분께 기쁨도 드리고, 일거양득이로군."

"···후회할 텐데?"

"아, 그럴 리가. 크크큭!"

여왕이 손짓을 하자 하피들이 나타나 날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곳은 거대한 공동이었고, 바닥에는 그리는 데만 몇 년이 걸릴 것 같은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그 마법진의 회로는 온갖 보석을 가루로 만들어 그린 값비싼 것이었다.

'신을 부르기 위한 장소군.'

마법진 한가운데 날 묶은 하피들은 어디서 구해온 건지 은제 검을 내 몸 여기저기 박기 시작했다.

"아악! 시발, 좀 살살··· 으으윽!"

은제 검을 박아서 뱀파이어인 날 꼼짝 못 하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은 저항력이 있는 탓에 아프기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에레미나는 내 옆에 밧줄로만 묶어둔 상태. 레서 뱀파이어에 불과하니 은검까지 박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뭐랄까, 내 쪽에 하나라도 더 박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아아악!"

그렇게 몸에 은제 검을 스무 개 가량 박았다. 아주 지독한 놈들이었다.

그 후 일족의 제사장도 겸하는 여왕의 주관 아래 하피의 신인 '하늘의 대모'를 부르는 의식이 시작됐다.

의식은 오래 걸렸고 장엄했다. 마법진으로부터 화려한 빛이 피어올랐고, 공동 전체에 생경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곧 그 바람이 이 물질계의 것이 아닌, 다른 차원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았다. 그와 함께 사방에 신력이 쏟아내는 빛으로 번쩍이는 깃털이 무수히 흩날렸다. 그리고 그 깃털 속에서 한 위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하피의 신 '하늘의 대모'의 화신이었다. 화신은 하피 여왕처럼 거대하진 않고, 평범한 크기였다. 하지만 날개를 덮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은색과 연두색, 하늘색의 깃털을 보자 상대가 신이라는 걸 납득할 수 있었다.

하늘의 대모는 당당하게 걸어 나왔고, 여왕을 포함한 모든 하피들이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조아렸다. 그야말로 자신들의 신을 향한 극도의 존경이 느껴졌다.

하늘의 대모는 날개를 크게 펼치며 물었다.

[오늘은 특별한 제물이 있다고?]

그 말에 하피 여왕이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채 날 가리켰다.

"저자입니다. 대모님!"

[네 들뜬 태도를 보아하니 저놈이 굉장한······ 응? 어···?]

한껏 입맛을 다시고 날 보던 하늘의 대모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껌뻑이다가 다시 날 보며 물었다.

[아니, 너는 은혜 잘 갚은 떡두꺼비가 아니더냐?]

"···절 아십니까?"

[물론이다. 아룬델 밖의 추방자들에게까지 소문이 다 났거든.]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제물로 준 뱀파이어 놈이 존경하는 자신들의 신과 친근하게 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하늘의 대모가 파격적인 제안을 해왔다.

[너, 내 사도하지 않을래?]

"아니, 그건 좀···."

다소 곤란하다는 태도를 보이자 하늘의 대모가 다급히 제안해왔다. 대모는 날개로 하피 여왕을 가리켰다.

[원한다면 쟤를 네 노예로 줄게!]

그 말에 여왕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그런 여왕을 보며 나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타고 다녀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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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봉우리의 왕(5)

그 순간 옆에 있던 하피 여왕 자이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마 내가 한 말은 그녀의 입장에선 참을 수 없는 모욕일 테지.

하피의 여왕은 하늘의 지배자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다. 폭풍우를 부르고 낙뢰를 떨어뜨리는 데다가, 신의 사도기도 하니 그 위세가 말도 못 했다.

한데 타도 되겠냐고 물었으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곧장 노호성이 터졌다.

"네 이놈! 감히 망발도 정도가 있지! 위대한 아우레케아시여. 이 삿된 자의 허언은 더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우레케아는 하피 신의 이름이다. 보통 '사나운 폭풍 아우레케아'라 불린다.

하지만 그 아우레케아는 자신의 사도가 한 말을 무시해 버리더니 내게 답했다.

[너 하기에 따라 가능하지!]

하피 여왕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이 커졌다. 그녀는 아마 직감했으리라. 지금부터 이어질 논의에 자기 의견은 조금도 반영되지 못할 것임을.

"기쁜 대답을 해주시는군요. 한데 그보다 이것 좀 어찌해주시겠습니까?"

나는 몸짓으로 전신을 관통하고 있는 은제 검들을 가리켰다.

"위대하신 분의 자식들은 아무래도 손님 대접이 영 아니더군요."

[아! 이런. 꽤 짜릿짜릿하겠네. 미안해.]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가 턱짓을 하자 사제들이 황급히 나서 은제 검을 뽑아냈다.

"앗! 아윽. 살살! 거, 살살 좀 하지. 좀!"

검은 뽑을 때마다 검은 피가 조금씩 튀었다. 관통으로 인한 상처는 재생력으로 순식간에 회복했다.

이후 하피 사제들은 나와 에레미나를 묶고 있던 밧줄 역시 풀고 물러났다. 그러자 하피 신 아우레케아가 아까 얘기를 계속해왔다.

[내 사도가 된다면 충분히 가능해. 저 아이를 네 전용 탈것으로 줄게. 어때?]

하피 신 아우레케아의 결정에 하피 여왕 자이리스는 격분으로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내 앞에서 데면데면한 태도를 보여주는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가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신인지 알기 때문이겠지.

"사도라··· 그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라서 말입니다."

나는 죽으나 사나 뱀파이어 성녀랑 함께 갈 생각이다. 어떤 조건이 와도 이직에 뜻은 없었다. 그렇다고 저 하피 여왕을 포기하기도 싫었다.

과연 저 장엄한 존재를 탈것으로 분류해도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이쪽 세계 최강의 날틀 중 하나긴 했다.

[결정할 수 없는 거야? 그럼 나도 저 녀석을 너한테 줄 수 없는데?]

선을 긋는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에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대신 시승 같은 걸 좀 해보면 안 될까요?"

[뭐, 시승···?]

"네, 좀 타보다 괜찮으면 제가 아우레케아 님의 사도가 하고 싶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니다 싶으면 반납하면 되고요. 일단 좀 경험해 봐야 판단이 서는 법이잖습니까?"

내 말을 들은 하피 여왕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머리에 난 깃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이 쓰레기 같은 놈이!"

또한 거대한 날개를 펼친 탓에 주변이 온통 어두워질 정도였다. 또 장검을 떠올리게 할 긴 발톱으로 땅을 긁어대자 그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러자 하피의 신이 한 마디 쏘아붙였다.

[가만히 있지?]

슬슬 짜증이 난다는 듯한 목소리에 하피의 여왕 자이리스는 그대로 날개를 접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얼굴에 실망과 고통이 가득했지만, 아우레케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날 보고 웃으며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물건을 파는 방식 중에 그런 게 있다고 들었어.]

역시 하피 새끼들은 하나 같이 성격 파탄자들이 틀림없었다. 자기 사도이자 제사장이라고 해도 결국 노예나 물건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처분도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아우레케아 밑으로 갔다가는 무슨 꼴을 겪을지 훤하구만.'

지금이야 내가 잘 나가니 호의적으로 대해주고 있지만, 더 괜찮은 사도 후보가 나타난다면 나 역시 하피의 여왕 같은 처지가 되고 말 터.

[좋아. 이 녀석을 석 달간 빌려줄게. 맘대로 부려도 좋아. 그리고 마음에 들면 내 사도가 되는 것도 생각해 보라고!]

아우레케아의 말 한마디에 위대한 창공의 절대자가 종살이를 하게 됐다. 하피의 여왕은 부디 다시 생각해 달라 간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우레케아는 싸늘하게 답할 뿐이었다.

[네 근본이 어디서 왔는지 잊지 마. 평범한 날벌레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

그 물음에 하피의 여왕은 입을 열지 못했다. 모멸감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고개를 숙일 뿐이다.

'신에게 너무 많은 힘을 의지하면 저런 모욕을 겪는 법이지.'

스스로 힘을 추구해 강해진 경우라면 저러진 않았을 거다. 그 전형적인 예가 블라르 백작인데, 그는 무교다.

설령 블라르 백작이 섬기는 신이 있다고 해도 저런 명령을 들으면 즉각 교단을 떠나버릴 터.

'아니, 그걸로 부족해 근처에 있는 해당 신의 신전이나 세력을 박살내 버리겠지.'

본인에게 힘이 있으니 그런 짓이 가능한 거다.

하지만 하피의 여왕 자이리스는 사정이 달랐다. 그녀가 대단한 존재인 건 맞지만, 가진 힘의 대부분이 사도라는 위치에서 온 것이었다.

즉, 그 힘을 내려준 아우레케아가 목줄을 쥐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 그냥 까라면 까는 신세였다.

결국 하피의 여왕은 석 달간 내 탈것으로 전락했다. 커다란 날개로 가장 높이 나는 이의, 기가 막힌 추락이다.

'역시 사도는 모시는 신을 잘 만나야 해.'

그것이야말로, 아무리 좋은 조건이 와도 내가 뱀파이어 성녀를 버릴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자이리스의 사정과는 별개로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에게 뭔가 뜯어내는 것에는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거래긴 하겠지만 원래 내가 했던 모든 일은 그랬다.

'대신격에게도 구라를 친 이 몸이다. 이깟 하피의 신 정도야···.'

일단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는 여왕을 선뜻 내어줄 정도로 호의적이다. 하면 잘 꼬드겨 볼 수 있을 터.

나는 즉각 머리를 굴려서 괜찮은 사업 모델을 하나 만들어냈다.

"사나운 폭풍이시여. 여왕만이 아니라 이곳 구름 봉우리의 하피 전부를 제게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응···? 다 달라고?]

"달라기보다, 이들을 제가 빌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피들은 언제나 아우레케아 님을 섬깁니다. 신앙이 바뀔 리가 없으니 아우레케아 님의 소유를 벗어날 수 없지요."

[응? 고건 고렇지? 근데 내가 빌려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 여왕을 내어준 것만 해도 충분한 호의를 베푼 것 같은데?]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는 입만 웃고 있었다. 슬슬 내가 기어오르는 것 같다고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오해를 서둘러 바로 잡았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다만, 제게 하피족을 빌려주신다면 그것은 아주 만족하실 만한 투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짜로 빌리겠다는 게 아닙니다."

[으음···? 무슨 소리야? 설명해봐.]

"간단합니다. 이건 투자. 빌려주신 하피의 숫자만큼 신도를 늘려드리겠습니다. 배당일이 오면 신도의 10% 증가를 약속드립니다."

간단한 얘기다.

하피 500명을 빌려주면, 정해진 날짜까지 10%에 해당하는 50명의 신도를 책임지고 추가로 모집하겠다는 것.

신도의 수는 신의 힘과 재산이다. 신도가 늘어날수록 신은 강해진다. 즉, 정해진 기일마다 투자 수익의 10%을 약속한 거다.

상대가 신이다 보니 금화가 아니라 신도의 수로 했을 뿐이다.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는 내 제안을 파악하고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아하하하! 세상에, 내게 이런 제안을 한 놈은 처음이야. 빌려간 만큼 신도를 늘려준다니!]

아우레케아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크게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나는 구름 봉우리의 하피들을 확보하기 위해 계속 설득에 나섰다.

"저라면 가능합니다. 지금까지의 실적이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제 행보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하피들을 과감히 붙여주신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과연···! 틀린 얘기는 아니야. 그 말대로 네 성과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지.]

"말씀 감사합니다. 세상에 사도는 많지만, 쓸 만한 사도는 적은 법입니다."

[아하하하핫! 재밌어. 아주 재밌구나. 역시 은혜 잘 갚는 떡두꺼비야. 실패하지 않는 투자라는 건가?]

아니, 그런데 왜 두꺼비야?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어디에 있다고.

아무튼, 아우레케아는 내 제안을 꽤나 그럴싸하다고 평했다. 실제로 투자란 걸 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라고. 하지만 받아들이진 않았다.

[네가 말하는 걸 보니 사도직은 은근슬쩍 거절하고 그 투자 건으로 무마하려는 것 같군.]

역시 신이라 그건가.

덤덤한 태도를 보여주면서도 이런 면에선 꽤나 날카롭다.

[하면 나도 원하는 바를 제시해야겠네. 신도를 추가로 모집해 주겠다는 건 확실히 마음에 들지만, 그걸론 내 뜻을 이루지 못해.]

"하면 무엇을 원하십니까? 사나운 폭풍의 아우레케아시여."

한데 아우레케아가 뜻밖의 요구를 해왔다.

[내게 필요한 건 복귀라고.]

"복귀요?"

[나는 추방자 신격이라 아룬델에 들어갈 수 없어. 그곳으로 돌아가게 해줘. 아마 너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그 요구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방된 신격의 복권(復權)은 나도 전혀 모르는 분야기 때문이다.

"네? 저라고 되겠습니까? 어떻게 할지 감도 안 잡힙니다만···."

[내가 알고 있어. 오로지 너 같이 뛰어난 필멸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어떤 방법입니까?"

[바로 말해줄 수 없어. 이건 대단한 비밀이거든?]

"음······."

딱 봐도 위험해 보였지만 흥미가 돋았다. 모르는 분야를 향한 고인물의 호기심이었다. 내가 망설이고 답을 하지 않자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가 거래를 제안해왔다.

[만약 나를 아룬델로 복권시켜주면 이 구름 봉우리의 하피를 모두 네게 줄게.]

"뭐라···? 정말이십니까?"

[그래, 신앙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네 절대적인 지배권을 인정해주지. 하피들은 모두 널 따를 거야.]

성공만 한다면 참으로 달콤한 보수로군. 구름 봉우리는 일곱 봉우리에서 가장 점령하기 어려운 곳이니까.

아니, 어려운 게 아니라 막막하기만 했다. 수직 절벽으로 둘러싸여 구름 위쪽까지 뻗어있는데, 군대를 이끌고 올라갈 방법조차 없었다.

게임을 할 때는 하도 빡세서 후반부에 드래곤 떼를 이끌고 와서 다 태워버린 적도 있다. 절멸시켰지만, 하피를 굴복하게는 못했다.

'그런 구름 봉우리를 통째로 먹게 해준다?'

앞으로 모든 게 엄청나게 유리해질 터. 그래도 추방자 신의 복권이라니···. 어마어마하게 위험천만한 일일 거 같은데.

내가 그렇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자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가 살살 달래왔다.

[당장 해달라는 건 아냐. 네가 태양 교단 때문에 바쁜 건 알아. 게다가 널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너무 약해서 내 부탁을 들어주기도 힘들고. 충분히 때가 무르익은 순간까지 기다려 줄 수 있어. 난 신이야. 어차피 시간은 넘쳐!]

"음··· 일단 어떤 식으로 복권이 가능한 건지 들어야겠습니다. 그래야 받아들일지 말지 정할 수 있습니다."

아우레케아는 일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이 자리에서 정해야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 말에 궁금한 게 하나 생겼다.

"다 듣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시려고요?"

[바로 네 기억을 지우지 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에 동의하겠다고 약속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안전장치를 마련한 뒤에야 아우레케아는 복권을 위한 방법을 말해줬다. 들으면서 나는 엄지와 검지로 콧등 부분을 집었다.

"아··· 그거 참···."

막상 들어보니 그 방법이 만만치 않았던 것. 목숨이 몇 개나 있어도 모자랄 위험한 짓거리였다.

심지어 이번 일에는 고블린 신격인 스카브누그까지 얽혀 있었다.

'그래도 가망이 없는 구름 봉우리 점령보단 훨씬 나은 것 같은데······.'

손해와 이득을 저울질하던 나는 결국 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위험하긴 해도 그러는 게 훨씬 나았으니까.

"좋습니다. 이 일을 받아들이죠."

[카하핫! 잘 생각했어! 역시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네!]

"하지만 제가 아룬델로 갈 방법이 없습니다만."

[걱정 마. 내 날갯짓은 차원을 가로지르니까. 데려다 줄게.]

졸지에 신들의 도시 아룬델로 가게 생겼다. 다만 시기는 논의가 있었다. 일단 일곱 봉우리의 회의와 태양 교단의 침공이라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한 후에 진행하기로 했다. 아우레케아는 자신에게 예지력이 있다면서 덧붙였다.

[이번 사태에서 살아남는다면 너는 훨씬 강해질 거야. 아룬델에서 내 복권을 돕기에 적당해지겠지. 부디 꽥하고 죽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아룬델이라.

그 신들의 도시에서 벌어질 일을 처리하면 구름 봉우리가 온전히 내 손에 들어온다.

한데 사실 굳이 아룬델에 가려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곳으로 가면···.

'뱀파이어 성녀랑 실제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상으로만 봤던 그녀를 직접 마주하게 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어째서인지 성녀에 대해 생각하자 차갑게 식은 언데드의 심장이 다시 뛰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왼손의 낙인에 달아오른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 * *

하피의 신, 사나운 폭풍 아우레케아가 떠났다.

태양 교단의 일이 끝나면, 적당한 시점에 아룬델로 함께 가기로 약속한 채로 말이다.

떠나며 아우레케아는 관대하게도 하피 여왕뿐 아니라, 백여 마리의 하피 전사들이 내게 복종하라 명했다.

[아무래도 태양 교단과 싸우다 떡두꺼비 네가 뒤지면 곤란하니까!]

···뭐, 그런 이유에서였다.

덕분에 백여 명의 하피 전사와 그들의 여왕이 내게 한시적으로 귀속됐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분한 표정을 감출 생각이 없는 여왕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케찰코아틀루스다."

"뭐, 뭐라? 이 몸에겐 존귀한 이름이 따로 존재한다. 그 이상한 건 뭔가!"

"감사한 줄 알도록. 지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익룡의 이름이니까."

"지, 지구? 지구가 뭔가?"

"쯧쯧. 무식하기는. 그런 게 있다. 새대가리야."

하피는 엄밀히 따지면 새대가리가 아니다. 상반신은 아름다운 인간 여성체였으니.

하지만 그런 부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새대가리라고 부르고 싶었으니까.

"감히 이 몸을 어디까지 모욕할 셈인가!"

"시끄럽다. 아우레케아 님의 말씀도 있으니 얌전히 협조하도록."

"크으······."

케찰코아틀루스는 애써 화를 참으며 물어왔다.

"그래서 무얼 하고 싶은 건가?"

일단은 여왕과 하피 떼를 데리고 일곱 봉우리의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참가할 리가 없다고 여겨지던 하피를 데리고 나타나면 다들 기절초풍하겠지.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됐다.

하지만 그건 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일곱 봉우리의 회의나 태양 교단의 공격이나, 그 모든 건 결국 지나가야 할 길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나는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답했다.

"일곱 봉우리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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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두의 출현(1)

마침내 일곱 봉우리의 거주민 모두가 모인 회의가 열렸다.

장소는 '일곱 기둥의 성역'이란 곳이다.

오래간 버려졌던 곳이지만, 300년 전 여러 종족이 모여 피비린내 나는 '일곱 봉우리 전쟁'을 끝내기로 협의했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그곳은 중립지대의 바위산을 깎아 만든 회의장으로, 봉우리의 각 종족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기둥이 거대한 석재 원탁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적막한 장소였지만 회의로 인해 아주 시끌벅적해졌다.

각 종족의 대표들이 조언자, 경호원, 일꾼 등을 잔뜩 끌고 왔기 때문이다. 일대에 모인 인원은 천을 가볍게 넘어갔다.

아직 소렌이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회의는 시작됐다. 원탁을 둘러싸고 석재 의자에 앉은 이들은 총 여섯.

그중 오크 대표인 타라카의 목소리가 제일 높았다.

"그 신들께서 선택했다는 위대한 자는 어찌 얼굴을 보이지 않지? 이제 와서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내뺀 게 아닌가!"

타라카는 오크의 족장은 아니다. 일곱 봉우리에 자리 잡은 '큰 턱 부족'을 이끄는 전설적인 족장인 고르가쓰의 동생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 고르가쓰는 근처의 천막에서 머물 뿐 회의에는 동생을 대신 내보낸 상태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오겠지. 회의의 공식적인 시작은 태양이 가장 높을 때다. 좀 더 기다리도록. 오크."

오크에게 답한 이는 드워프 대표인 그루린 레그너. 현 국왕인 레그너 3세의 조카였다. 그는 왕의 명을 받고 이번 회의에서 확실히 소렌의 편을 들어줄 작정이었다.

드워프의 그런 입장을 알고 있는 오크 타라카는 조소를 터뜨렸다.

"놈은 뱀파이어가 아닌가! 뭐? 태양이 가장 높을 때? 공개적으로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카하하핫! 이거 진귀한 꼴을 보겠군!"

오크 타라카의 지적에 소렌의 지지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단 기다리고 있지만 이런 한낮에 뱀파이어가 나타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걸 눈치챈 큰 턱 부족의 대표 오크 타라카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크르르르! 이보게. 드워프. 그 뱀파이어보다 자기 처지나 살피는 게 좋겠군. 의자가 높아 보이는데 발받침은 안 필요한가?"

그 조롱에 대해 뜻밖에 고블린 대표가 반박했다.

"점잖지 못하군. 입을 다물고 있도록. 덩치만 큰 머저리 같은 것아. 케케켁."

갑작스러운 고블린 대표의 행동에 오크는 물론 드워프까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드워프와 고블린은 앙숙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블린이 편들어 준 게 의아할 수밖에.

하지만 여기에는 사정이 있었다.

고블린 대표로 참가한 이는 바로 카조그. 고블린의 유명한 용병사업자겸 장군으로, 이전에 소렌의 하인이 된 자였기 때문이다.

소렌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를 얻었지만, 카조그는 생각 이상의 거물이었다. 이번 회의도 고블린 왕을 대신에 참가할 정도로 말이다.

당연히 그는 자신의 주인인 소렌을 지지하고 있었고 드워프의 편을 든 것이다.

'주인의 일이 우선이지. 드워프에 대한 악감정 보다는···. 케켁!'

카조그와 소렌의 첫 만남은 고약했던 걸 비춰볼 때 그는 꽤나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재 소렌의 지지자는 총 넷이다.

-드워프 대표인 그루린 레그너.

-고블린 대표인 카조그.

-스킨크 대표인 족장 히스카 스위프트테일.

-노움의 대표인 엉겅퀴 스란레.

이에 대항하는 명백한 반대자는 오크 대표인 타라카다.

그리고 나머지인 코볼트 대표는 아직 중립이었고, 하피 대표는 공석이었다.

전체적으로 무게추가 소렌에게로 기운 상태.

하지만 오크 대표인 타라카는 여유만만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쥐새끼들처럼 꽤나 작당모의를 한 모양이군! 크르르르!"

바로 이번 회의의 규칙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규칙은 간단하다.

무언가 합의하기 위해선 일곱 중 여섯 부족 이상의 결정이 필요했다. 만약 끝까지 반대하는 한 부족이 있다면, 찬성한 여섯 부족이 그들을 찢어발기고 약탈해 전비를 마련하게 된다.

실제로 300년 전에 일곱 봉우리의 주민 가운데 하나였던 트롤족이 그렇게 사라졌다.

어째서 이런 규칙이 생겼는지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내부의 불만 종자를 처리하고 그들의 물자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마도 한 부족을 전쟁 전에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탄생한 규칙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 현대 대표들이 있는 '일곱 기둥의 성역'이 가진 힘 덕분이었다.

이곳에 세워진 기둥과 원탁, 심지어 대표들이 앉은 석재 의자까지 강력한 아티펙트였다. 아마 과거에 각 종족신들이 선물한 물건인 듯했다.

여기서 합의하면 신성한 동맹으로 거듭날 수 있고,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배반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강제적인 장치가 없었으면 개성 강한 일곱 종족의 동맹 따위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터다.

하지만 이런 걸 알고 있음에도 오크 대표 타라카는 똥배짱이었다.

'어차피 하피는 참가하지 않으니 반대가 많아 봐야 다섯이 한계지.'

300년 전처럼 여섯 부족이 합의하고 한 부족이 전쟁의 거름이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오크 타라카는 계속 강짜를 부려댔다.

"이번 싸움은 우리 오크족이 주도할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총대장은 살아 있는 전설이자, 내 형님이신 고르가쓰가 맡는 게 옳을 것이고! 크르르르!"

이에 노움의 대표인 엉겅퀴 스란레가 지적했다.

"하지만 신들의 의지가 소렌을 내정하지 않았나요?"

"크르릉! 우리는 마땅히 신들을 공경해야 하지만 실무에선 다소간의 조정이 있을 수 있는 법이지. 지상의 일은 지상의 자들끼리 해결해야 한다."

오크 타라카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이유가 명백해졌다. 신들이 선택한 소렌 대신 자기들이 주도권을 잡길 원하고 있었다.

이에 다른 이들은 골치 아픈 표정이 됐다. 다들 신들의 권고까지 내려온 마당에 신속하게 합의를 이루고 태양 교단에게 대비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집 센 오크들이 그걸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뭣보다 오크의 전사신 팔루크가 모호하게 신탁을 내린 게 주요했다.

그는 상황을 봐서 꼭 소렌을 인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덧붙였기 때문. 사제를 통해 이를 들은 큰 턱 부족의 지도부는 맘 놓고 깽판을 치기로 했던 것이다.

"해가 점점 올라가는군! 우리 주인공께서는 뭘 하고 있나 모르겠네! 쿠흐흐흐흣! 관속에서 꿀잠이라도 자고 있는 건가!"

오크 타라카는 하늘을 보며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한데 그러던 중 박수를 치던 그의 손길이 멈췄다. 그리고 호선을 그리던 눈매가 삽시간에 경악으로 커졌다.

"크르르······? 크러렁!"

명백히 당황한 음성이었다. 그제야 모두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그곳에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삐에에에엑―!

끼에에에―!

날카로운 새소리와 함께 거대한 새들의 실루엣이 나타났기 때문. 자세히 보니 그들은 인간 여성의 상반신을 가지고 있는 하피였다. 심지어 그 수도 일백이 넘었다.

"하, 하피라고? 싸우러 온 건가!"

오크 타라카가 자신의 도끼를 들고 석재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이들의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피가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냥을 위해 몰려온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일곱 봉우리에서 하피의 이미지는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때 압도적인 힘을 가진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우리는 고대의 예법에 따라 회의에 참가한 것이니!]

그 목소리는 하피 여왕의 것이었다. 한데 어찌나 강대한 힘을 담고 있던지 마치 신의 말씀과도 같았다. 일반적인 육성이 아니라 신성을 담아 모두의 귀에 내리꽂힌 것이다.

원탁과 거리를 둔 곳에는 각자의 대표를 수행하기 위해 몰려온 자들이 많았는데, 놀라서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댔다.

"하피! 하피의 여왕이다!"

"창공의 여제가 나타났다!"

"하늘이! 하늘이 힘으로 가득!"

경악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하피의 여왕은 자신이 섬기는 신에겐 꼼짝 못 하지만, 지상에선 절대자로 불릴 존재 가운데 하나였다.

왜냐하면, 신의 힘을 떡칠한 사도인지라 어지간한 필멸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으니까. 괜히 창공의 여제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몰려온 하피 중에 특출나게 거대한 여왕의 모습은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면 도전으로 받아들이겠다. 하늘의 분노를 느껴보고 싶다면 계속해 보라!]

그제야 무기를 꼬나 들었던 일부가 황급히 내려놓았다. 다들 저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부산해졌다.

"설마 하피의 여왕이 출현할 줄은···!"

"하면 오늘 회의에서 합의가 이뤄지는 것이오?"

"오크가 찢겨지는 건가?"

"설마, 그렇게 되려고. 코볼트들의 의중은 오리무중이오. 하피라고 소렌이란 작자의 편을 들 리도 없고."

저마다 논의하는 그들은 대표의 조언자이자 가신들이었다. 비록 원탁에 앉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파악하고 대표에게 의견을 전달해야 했다.

하지만 한창 논의를 하던 그들은 금세 더 큰 혼란과 충격에 빠져들었다. 뭐라 얘기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하늘에서 원을 그리며 내려오던 하피 여왕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을 때, 기절초풍할 만한 광경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 여왕의 위에 누가 타고 있다!"

"뭐? 무슨 거짓부렁을! 여왕을 탄다고?"

"헛소리! 하늘의 여제 위에 올라타는 건 드래곤에 오르는 것보다 어렵소."

"맞소. 차라리 드래곤이라면 믿겠네. 크크큭."

괜히 눈 좋은 자들만 바보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비웃음을 터뜨렸던 이들도 하피 여왕이 더 가까워지자 들고 있던 걸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진짜다! 여왕을 올라탔어!"

"누구지?"

"뱀파이어 같은데! 저건 뱀파이어다!"

여왕을 탈것으로 삼은 자는 분명 뱀파이어의 복식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뾰족뾰족한 고딕풍의 검은 갑옷, 안감으로 붉은 벨벳을 사용한 검은 망토까지. 전형적인 뱀파이어의 기풍이었다.

하지만 곧장 반론에 부딪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뱀파이어가 어찌 한낮에!"

"맞소! 저건 뱀파이어처럼 차려입은 누군가일 겁니다! 지금 태양이 가장 높이 솟은 정오가 아닙니까!"

지켜보는 자들은 저게 도저히 뱀파이어라고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잘 차려입은 미남자였는데 햇살 아래서 한껏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워커 같은 거 아니오?"

"그 부분은 내가 좀 아는데 데이워커는 보통 엘프들이오. 저 자는 엘프족이 아닌 것 같소만?"

그래도 만약 뱀파이어가 맞다면 데이워커인 것 같다는 의견으로 정리돼 갈 때 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누군가 저자의 얼굴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소렌이다! 소렌이 맞아!"

"뭐라고? 그 소렌 다켄발트?"

"맞다! 아단의 조카이자 드워프 왕의 친구인 소렌이야."

정말로 뱀파이어가 낮도깨비처럼 나타난 것이었다. 그때 마침 그 뱀파이어가 하피 여왕의 등 뒤에서 뛰어내려 원탁 근처에 착지했다.

원탁에 앉아 있던 대표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뱀파이어는 두 팔을 펼친 채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웃어댔다.

"아, 좋구만! 콜라처럼 물약을 퍼마시며 견디지 않아도 되는 태양은! 크흐흐흐!"

그 여유 가득한 모습에 오크 대표인 타라카는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이다지도 대단한 자일 줄이야······!"

* * *

나는 정오의 태양빛을 한껏 즐겼다. 미국 드라마로만 보던 마이애미에 가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도 싶었다.

"그래, 이거지."

데이워커의 힘은 태양 저항 물약과는 차원이 달랐다. 더 이상 태양이 내 적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빛은 이제 사형 선고 같은 게 아니다. 물론 무제한적이진 않지만 말이다. 내 데이워커의 힘에는 아직 한계가 있어서 하루 세 시간 정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늘어날 테고, 나중에는 궁극적인 면역을 얻게 되겠지.

'성녀님, 감사합니다.'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골짜기 본진에 들려서 데이워커 인자의 진행 상황을 체크했었다.

다행히 부탁한 게 완료된 상태라 바로 데이워커의 인자를 받아들였다.

'역시 뱀파이어 성녀를 택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데이워커가 되고도 힘의 손실이 없었다. 역시 빛 속성 뱀파이어라는, 둘도 없을 그 특이체질의 성녀께서 해내신 거다.

한데 피의 제단에서 데이워커의 인자를 회수할 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었다.

바로 신의 사자인 '새벽의 시종 세티스'가 차원을 건너 나타났던 것.

뱀파이어 성녀의 부관겸 비서인 세티스는 대단한 거물이었고, 신 정도는 아니지만 물질계에 쉽게 나올 수 없는 존재였다.

실제로 본 건 이전에 내게 아직도 용도를 모르겠는 은접시를 건네줬던 게 마지막이었다.

한데 모습을 드러낸 세티스는 뱀파이어 성녀가 하사하라 했다며 묘한 걸 건네줬다.

'대체······?'

그건 다시 생각해도 아리송한 물건이었다.

작은 촉수 덩어리였는데 건조한 뒤에 눌러놓은 형태였다. 뭔가 마른 오징어 같다고 할까? 그래서 혹시 먹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세티스가 기겁을 했었지. 나는 잠시 그때의 대화를 떠올렸다.

[용도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여신님께서 사도에게 필요할 거라고 했습니다.]

"이 오징어가 말이죠?"

[오징어가 아닙니다! 절대 드시진 마십시오. 여신님께서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없어도 잘 해내실 걸 알지만, 이게 있으면 더 잘 될 거예요, 라고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것의 위험은 모두 제거했다고도 덧붙이시더군요.]

"···위험이요?"

손에 든 마른 오징어를 떨떠름하게 바라봤지만 추가적인 설명은 들을 수 없었다.

물질계에서 신의 사자가 가진 존재감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다며 금방 돌아갔기 때문.

아무래도 새벽의 시종이란 존재는 용도불명의 물건만 건네는데 특화된 녀석인지도 모르겠다. 성녀께서 준 거니 일단 챙겨서 품에 넣어뒀긴 했지만.

아무튼, 피의 제단에서 그런 일을 겪은 뒤 하피 여왕과 함께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자, 이제 눈앞의 회의에 집중해 볼까?'

원탁에는 모두가 모여 있었다. 거대한 하피의 여왕도 한자리를 차지하니 일대에 거목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아졌다.

나는 그들을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한껏 지으며 손바닥을 싹싹 부볐다.

"아이고, 선생님들! 잘 오셨습니다! 아주 잘!"

그래, 반갑다.

내 인생의 발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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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두의 출현(2)-여기부터 유료 >

결국 일곱 종족이 30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거기에 더해 여러 신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 소렌까지, 7+1의 회합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곳엔 내 편이 많았기에 자연히 분위기를 주도하게 됐다.

"그루린 레그너 공, 만나서 반갑습니다. 초면이지만, 이 웅혼한 기운이 어디서 왔는지 알겠습니다. 과연 레그너 가문의 사내십니다."

내 인사에 드워프의 대표로 온 레그너 3세의 조카가 활짝 웃었다. 드워프 중에서 이름난 전사인 레그너 3세를 빗댄 건 큰 칭찬이었기 때문이다.

"하하하핫! 과찬이십니다. 숙부께서 소렌 공을 친우로 여기십니다. 저는 손아랫사람에 불과하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말투부터 이미 이쪽에 호의가 가득했다.

"공적인 자리니 어찌 그러겠습니까?"

"하하핫, 그러면 사적인 자리에선 꼭 좀 부탁드리지요."

레그너 3세의 조카인 그는 드워프치고는 꽤 친화적인 성격을 가졌네. 성격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그 외에도 나는 차례로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스킨크 대표, 노움 대표, 고블린 대표까지 말이다. 이들은 모두 내 편이라, 친목질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이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는 자가 나왔다.

콰앙!

바로 오크 대표인 타라카였다.

"모두 어린 애새끼들이 따로 없군. 잘난 뱀파이어 선생이 시키면 뭐든 따라 하겠어! 뭐든 네네, 거리는 게 아주 웃기구만."

좋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저런 교양 없는 오크 같으니라고.'

속으로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소렌, 사회적 위치와 체면이란 게 있다.

일곱 봉우리의 다른 대표들이 보는 와중이니 고상함을 어찌 내려놓을까?

대신 얌전하게 타일렀다.

"이 씹새끼야. 주둥이 닫아. 오늘의 나는 거칠 게 없으니까. 이 좆같은 회색 대가리 새끼가 쳐돌아서는. 쯧!"

사람이 자기 위치를 잊지 않는다는 건 중요한 법이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것의 반의 반만 뱉어냈다.

한데 어째서인지 주변이 더욱 얼어붙었다. 오크 놈은 어찌나 당황했는지 안색이 변해서는 손을 파르르 떨어댔다.

"뭐, 뭐, 뭐라? 지금 뭐라고?"

당황해서는 말을 더듬는 게 애잔하기까지 했다. 역시 일곱 봉우리에서 오크는 필요 없는 종족이란 강한 확신이 들었다.

"말한 그대로다. 이 멍청한 놈아! 자, 여러분. 여기서 제가 요청하겠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한 종족을 재끼는 건 일곱 봉우리의 유구하고 아름다운 전통. 이참에 그 대상을 오크로 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300년 전에 트롤이 일곱 봉우리에서 쫓겨났듯, 이번에는 오크 차례가 된 것이다. 당연히 오크 대표 타라카는 극렬하게 반대했다.

"역겨운 놈! 이 애송이 새끼가 감히 되는 대로 지껄여! 시체 봉우리는 우리 부족의 피로 쌓아 올린 터전이다!"

오크의 터전인 시체 봉우리에 관한 이야기는 가히 전설적이다.

큰 턱 부족은 오크 중에서도 특별히 사납고 호전적이라 쫓겨난 무리였다고 한다.

떠돌던 그들이 일곱 봉우리에 자리 잡은 건 불과 몇 십 년이 안 됐다. 그건 오로지 족장 고르가쓰의 무용으로 이룬 일이다.

원래 그 봉우리의 주민은 덩치 좋은 오거들이었다. 저 먼 동쪽에서 원정을 왔다가 낙오된 부류로, 타고난 괴력 탓에 금세 일곱 봉우리의 폭군으로 악명을 떨쳤다.

오거가 강한 건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큰 턱 부족은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들이 사는 봉우리가 시체 봉우리라 불리게 된 것도 지천에 널브러졌던 오거의 시체들 때문이었다. 그런 전설적인 일화에 대해 오크들이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한데 웬 놈의 뱀파이어가 피로 이룬 역사를 박살내자고 한다. 오크 대표의 타라카의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급기야 자신의 무기를 들고 탁자 위로 올라섰다.

"이 빌어먹을 놈! 대가리를 쪼개주마! 크워어어어어!"

오크 타라카는 회의고 뭐고 내게 달려들 기세였다. 하지만 결코 그러지 못했다. 거대한 하피 여왕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경고했기 때문이다.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이 빌어먹을 날개달린 도적놈아! 맘대로 해봐라! 전혀 두렵지 않다!"

형에 비해 부족하긴 했지만 오크의 대표로 나온 타라카도 굉장한 전사였다. 자신보다 강한 하피 여왕을 보고도 기죽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하피 여왕의 협박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하핫! 맘대로 해보라고? 좋지. 그럼 이 몸이 이대로 너희 비루한 놈들이 드글거리는 시체 봉우리로 날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크! 그건···!"

"아마 시체 봉우리에 있는 오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피로 물들여 주마. 네가 그걸 막을 수 있을까?"

하피 여왕이 산지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면 시체 봉우리까지 가는데 30분도 안 걸린다.

내가 박쥐로 변해 파닥파닥 날아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거의 뭐, 비행기라고 보면 된다.

반면 오크가 도보로 본거지까지 가는 데는 하루반 이상 걸린다. 그때쯤이면 여왕이 시체 봉우리를 모조리 갈아버리고도 남을 터.

유일하게 하피 여왕과 상대할 수 있는 건 전설적인 고르가쓰 뿐인데, 그도 이 일곱 기둥의 성역에 와 있다.

즉, 하피 여왕이 마음만 먹으면 오크는 몰살이라는 거다.

얘기를 듣던 나는 이러니 공군이 사기란 생각이 들었다.

"이 빌어먹을······."

하피 여왕의 실감 나는 협박에 오크 타라카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 뿐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는 하피 여왕에게 눈빛으로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하피 여왕은 가볍게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딱히 네가 좋아서 도와주는 게 아니라, 신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자자, 앉으시라고. 호들갑 떨지 말고. 문명인답게 대화하려고 모인 거 아닌가?"

나는 뒤로 몸을 기댄 채 검지로 의자를 가리켰다. 오크 타라카는 어쩔 수 없이 원탁에서 내려갔다.

"우리는 결코 그런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설령 그런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순순히 당하지 않는다!"

역시 기세 하나는 좋은 놈이구만. 그런데 그때 여태 말이 없던 코볼트 대표가 끼어들었다.

"코볼트 역시 그 의견에는 반대한다."

모두의 시선이 코볼트 대표에게로 향했다. 그의 이름은 잼아이란 이명으로 불리는 글린지크로, 코볼트의 수장인 터널로드의 조언자이다.

잼아이는 일곱 봉우리에서 알아주는 원소계 주술사였다. 그의 외형은 붉은 비늘이 돋은 작은 파충류형 인간이다.

파충류형 인간이란 점에서 스킨크족과 같았지만, 둘은 꽤 차이가 있었다.

스킨크족이 날렵하고 매끈한 체형에 반짝이고 화려한 비늘을 가졌다면, 코볼트는 뾰족뾰족한 비늘에 투박한 색채가 많았다.

얼굴상도 다른데 스킨크족이 주둥이가 짧고 귀여운 인상이라 하면, 코볼트는 주둥이가 길고 이빨이 악어처럼 입 밖으로 튀어나와 험악해 보였다.

"반대하시는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나는 상대가 오크가 아니기에 예를 차려 물었다.

"오크의 힘은 강하다. 아니꼬운 놈들이긴 해도 태양 교단이 군대 단위로 쳐들어온다면 반드시 도움이 된다."

저 잼아이는 음흉한 신중론자로 유명하다. 그다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고래(古來)로부터의 규칙에 따르면 한 종족을 처리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꼭 옛 규칙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 코볼트가 반대한다면 오크를 처리할 수는 없을 터."

그건 맞는 얘기였다.

현재 내 편은 다섯이다.

-스킨크.

-드워프.

-고블린.

-노움.

-하피.

이렇게 말이다. 코볼트는 중립이었으니 여섯이 찬성해 남은 하나를 나눠먹는 일은 불가능했다.

'사실 코볼트 대표가 잼아이인 걸 듣고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지만 말이지.'

처음부터 이 안건이 통과되지 않을 걸 알았기에 대신할 요구를 준비해왔다.

'애초에 무리한 걸 요구하고 그 다음에 수용할 만한 걸 제시하는 건 협상의 기본.'

내가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 일곱 봉우리 전체에 군림하기 위한 실적이다.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오크의 전설 고르가쓰를 쓰러뜨리는 거다.

마침 훌륭한 무대가 만들어진 상태다. 각 부족의 대표뿐 아니라, 그들의 수행원까지 천 단위로 몰려온 상황.

모두가 결투의 승패를 지켜보게 될 터.

'이러다 지면 개쪽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상대가 전설이든 말든 간에 질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잼아이 님, 입장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오크들이 끝까지 반대만 외치니 대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은근히 묻자 잼아이가 눈에 살짝 이채를 띄며 물어왔다.

"대안이 있는가?"

"네, 이럴 때는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이 최고겠지요. 이 소렌 다켄발트가 오크족 대표와 결투를 해 의견을 가리겠습니다. 제가 진다면 오크족의 의견을 수용하죠. 하지만 제가 이긴다면 오크들은 전면적으로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에 오크 타라카가 흥분해서는 벌떡 일어났다.

"네놈! 말 잘했다! 아주 시원하군! 그래, 이딴 협상은 필요 없다! 그저 상대의 머리를 망치로 으깨면 끝인 것을! 당장 싸우자!"

오크 타라카는 무기를 들고 으르렁댔다. 그는 오크치고는 놀랄 정도로 달변이었지만, 역시 종족 특유의 성미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한 채로 답했다.

"아니, 네놈은 필요 없다. 족장이 직접 나서라."

오크 타라카도 일곱 봉우리에 이름이 알려진 전사다. 하지만 형에 비하면 이 소렌의 발판으로 쓰기엔 약했다. 기왕 일을 벌인 것 최고 난이도로 도전하고 싶었다.

'아, 그래야 보상이 많다고.'

아마, 이게 게임 속이었으면 난이도 설명과 함께 누구와 싸울지 선택지가 있었을 거 같다. 그런 상황이 오면 주저 없이 최고 난이도를 택하는 게 나 같은 고인물의 숙명이었다.

"이 애송이 새끼가 감히! 요즘 이름 좀 날린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건가! 크르르르!"

이때 가만히 있던 노움족 대표 엉겅퀴 스란레가 나섰다.

"소렌의 의견을 수용하는 게 어떠실까요? 대신 고르가쓰가 승리한다면 우리 노움은 오크를 지지하도록 하지요."

거부하는 타라카에게 스란레가 미끼를 던졌다. 가뜩이나 편이 없는 오크 입장에선 달가운 제안이었다.

엉겅퀴 스란레는 내가 일찍이 부탁한 대로 오크 족장과 결투를 벌이게 도움을 준 것이다.

"크릉······ 그것은."

달콤한 제안에 타라카가 고민하던 그때, 저 아래쪽 오크들의 천막이 있는 곳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받아들여라―!"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에 잔털이 쭈뼛 서며 소름이 돋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닌 듯 몇몇은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리기까지 했다.

살아있는 전설, 오크 큰 턱 부족의 족장 고르가쓰가 답을 한 것이다.

'미친놈, 저 먼 곳에서 회의 중에 한 소리를 다 듣고 있었던 건가?'

별다른 마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극도로 발달한 감각을 이용한 게 틀림없었다.

그때 오크식 천막 중 가장 거대한 게 폭발하며 모래 먼지에 휩싸였다. 그리고는 하늘 위로 무언가 시커먼 게 솟아올랐다.

처음엔 포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곧 그게 엄청난 높이로 뛰어오른 오크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덩치 큰 오크는 정확히 원탁 근처에 착지했다.

콰아아아앙!

마치 포탄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이 일어났다. 우리 모두는 들썩였고, 그 무게를 짐작하기도 힘든 거대한 석재 원탁이 흔들릴 정도였다.

"흐음···."

나타난 오크는 주변을 둘러보며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키는 2.5미터에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아랫턱이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두 개의 송곳니 중에 하나는 부러져서 철로 덧붙여놨다. 그의 눈동자는 호랑이를 떠올리게 했다.

또한 몸에 걸친 육중한 갑옷은 인간이라면 입고 움직이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나는 쿠론드의 아들, 큰 턱 부족의 족장 고르가쓰다. 대체 무슨 희망을 갖고 내게 결투를 신청한 건가?"

살아있는 전설이 날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 눈빛이 갖고 놀 새로운 장난감을 보는 듯했다.

두려움이나 긴장감은 없다. 흥미와 타고난 가학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대단한데···.'

실물로 보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는 하피 여왕만큼이나 무서운 존재였다. 물론 그렇다고 겁먹을 내가 아니었지만.

"내가 옛날부터 뭔가 밟고 위로 올라가는 걸 좋아해서 말이지. 너 정도면 괜찮은 디딤돌이라고 생각했다."

내 말에 고르가쓰는 나직이 웃어댔다.

"크크크큭. 이거 재밌는 친구로군. 하지만 쉽지 않을 거다. 이 몸은 암벽이고, 네놈은 추락할 테니까."

"오크치고는 근사한 표현이구만.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내가 좀 써먹어야겠어."

나는 망토를 풀고는 앞으로 나섰다.

"고르가쓰. 오크에겐 전투가 일상과도 같은 거라며?"

"그래, 그렇다."

"그러면 이 결투는 같이 밥 한 끼 하는 것처럼 평범한 일이겠군. 그 과정에서 한 놈이 뒤지긴 하겠지만 그것도 일상일 테니."

"크르르르, 우리 종족에 대해 잘 알고 있군. 한데 그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뭐지?"

"네놈이 죽으면 오크는 약속을 지키고 순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상적인 일이 하나 지나갔을 뿐이니, 옹졸하게 보복하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고."

모든 오크가 결투를 신성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또한 오크 중에도 음흉하고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이가 많았다.

고르가쓰의 동생 타라카가 그런 인물이었기에 미리 얘기를 꺼낸 것이다. 오크 족장 고르가쓰는 크게 웃음을 터뜨려댔다.

"놀랍군. 크흐하하핫! 역시 신들이 주목하는 자라 그건가. 이 고르가쓰를 앞에 두고도 뒷일을 생각하고 있다니."

"이쪽은 진지하거든?"

나는 코볼트 대표인 잼아이에게 요구했다.

"결투의 결과는 지켜져야 합니다. 만약 오크가 그걸 저버린다면 코볼트족은 저를 지지해 주십시오."

코볼트마저 지지하면 여섯이 하나를 희생양으로 삼는 일이 가능해진다. 오크가 얼마나 강하든 그날로 일곱 봉우리에서 지워질 터다. 코볼트 잼아이는 그걸 약속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이 결투는 신성한 것이 될 걸세."

* * *

한 시간 뒤.

바위 산지의 적당한 장소에 결투장이 마련됐다. 이미 사방에 여러 종족이 구경을 위해 진을 치고 있는 상태.

그 가운데 나와 오크의 전설 고르가쓰가 마주하고 있었다. 고르가쓰는 낫처럼 휘어진 칼 한 자루와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교차하며 불꽃을 튀기며 물었다.

"할 수 있을 때 전력을 끌어내라. 안 그러면 내 한 수를 받아내지도 못할 테니까."

"아, 물론이지. 너 같은 놈은 간보면서 상대할 적이 아니니까."

나는 곧장 블라르 백작이 마련해준 능력을 발동시켰다. 일시적으로 뱀파이어 로드급에 해당하는 힘을 갖게 해주는 능력인 '블러드 비스트'였다.

콰직!

갑자기 끔찍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뒤틀리며 변형되기 시작했다. 블러드 비스트는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괴물이 되는 능력이다.

콰지지직! 찍!

몸의 관절이 틀어지고 뼈마디가 칼날처럼 살점을 뚫고 튀어나왔다. 당연히 갑옷은 다 벗고 왔다. 몸 곳곳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뼈가 가득했다.

키는 삽시간에 자라 오크 족장 고르가쓰보다 더욱 커졌다. 온몸은 터져 나온 시커먼 피에 젖고 피부는 진홍색의 괴물로 변해갔다.

하지만 가장 무시무시한 건 내 얼굴일 터.

마치 악몽에 나온 늑대와 같이 변해서는, 두 눈은 흑요석처럼 빛나고 있겠지. 입에는 칼날 같은 이빨이 가득해서 물고 흔들면 뭐든 뜯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등 뒤로 피막이 없이 뼈마디만 남은 날개가 튀어나왔으며, 몸 주변으로는 불경한 검은 안개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지옥에서 올라온 괴물 같은 형체가 된 것이다.

당연히 지켜보고 있던 자들은 비명을 터뜨렸다.

"저, 저게 뭐요!"

"뱀파이어의 능력인가!"

"들어본 적이 있소! 뱀파이어가 큰 힘을 얻어 변하는 괴물에 대해!"

"설마 저자가 저 정도 경지일 줄이야!"

격변한 내 모습에 고르가쓰도 놀랐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금세 호전성을 드러냈다.

"아주 괴물이 되버리셨군. 크흐흐핫! 그래, 재밌구나. 그 정도 괴물은 되어야 사냥할 맛이 나지! 오크는 불굴이다! 뱀파이어!"

뭔가 구도를 보니 내가 악역 같네. 하지만 상관없다. 나는 괴물과 싸우는 정의로운 주인공 같은 게 아니다. 필요하면 내가 괴물이 되어도 상관없다.

블러드 비스트가 된 여파일까?

나는 참을 수 없는 흡혈의 욕구에 사로잡혔다.

처음으로 이 세계에 진입했을 때처럼 이미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그렇기에 고르가쓰에게 별로 멋진 답을 들려줄 순 없었다.

"아··· 너 맛있겠네. 이리 와봐."

벌어진 턱으로 따라 시커먼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 대마두의 출현(3) >

고르가쓰는 날 보더니 코를 킁킁 거렸다.

"피 냄새가 가득하구나! 하지만 이것은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의 피 냄새가 아니야. 영예와는 거리가 멀군."

"하면 무엇인가···?"

"삶, 그 자체를 모욕하는 뱀파이어의 썩은 피 냄새에 불과하다."

그 지적에 나는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지옥의 악마처럼 변한 붉은 피부를 따라 검은 피가 끈적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불경하기 짝이 없는 종류였다.

웬일로 오크가 맞는 말을 다 하는군.

"그래···, 나는 삶에 대한 모욕이다. 그러니 너 같이 산 자의 피를 원한다···."

내 대답에 고르가쓰가 반색하고는 지켜보는 자들을 향해 외쳤다.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는 건가! 모두 들으라! 어찌 이런 자에게 일곱 봉우리의 운명을 맡기고자 하는가!"

고르가쓰의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는 여세를 몰아 계속 말했다.

"만약 위기의 순간 함께할 자를 찾아야 한다면, 너희와 같이 숨 쉬고, 음식을 먹는 내가 더 믿음직하지 않겠나? 여기 이 언데드가 아닌, 같은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당연히 주변이 술렁거렸다. 설득력이 있다고 느낀 거겠지. 그 정도로 뱀파이어의 이미지는 안 좋았다.

참고로 지켜보는 자들 중 오크는 따로 모여 있었다. 원체 지금 놈들의 이미지가 안 좋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응원단처럼 자신들의 족장에게 호응하고 있었다. 그 기세에 다른 종족들이 흔들렸다.

'이 녀석, 정치력이 제법이군.'

배고파 죽겠는데 아가리 파이팅을 걸 줄이야. 그냥 오크답게 무식하게 싸움질이나 하지. 짜증이 나는군.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돌격해서는 안 된다. 지켜보는 이들이 많다. 발끈하는 모습을 보여봐야 고르가쓰의 말에 설득력을 더할 뿐.

'좋아. 참자. 대신 이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끓어오르는 흡혈의 욕구를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저놈의 수작질에 대응해주기로 했다.

고르가쓰는 자신만만한 모양이지만 전혀 모른다. 내가 이 세계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고인물이라는 걸.

심지어 태양신의 본질까지 아는데, 이깟 산봉우리 하나 차지한 오크 일족의 치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멍청한 놈. 차라리 싸움이 더 낫겠다. 여론전으로 날 상대하려 하다니 패배를 자초하는군.'

나는 잠시 짐승처럼 길어진 주둥이를 쓰다듬으며 길쭉한 혀를 움직였다. 블러드 비스트가 된 탓에 말하는 게 자연스럽지 못한 탓이다. 턱을 좀 움직이고 조정(?)을 한 뒤에야 답했다.

"죄악이라! 말 한번 잘했군!"

나는 고르가쓰에게 썩은 미소를 날려준 뒤에 지켜보는 자들에게 외쳤다.

"모두 머리가 있으면 생각해 보라! 오크 새끼들이 우리의 단결을 왜 끝까지 반대하는지! 지금 오크를 빼고 모든 종족이 위난에 대비하고자 타협을 원하고 있다. 한데도 혼자 저 난리인 것의 이유가 무엇이겠나?"

내 질문에 몇몇이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됐다. 여유만만하던 고르가쓰는 뭔가 찔끔한 기색이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궁지에 몰리니 간악한 혀를 써 모함하려는 건가!"

그 말에 나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간악은 지랄! 간악한 건 네놈과 오크들이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너희 큰 턱 부족이 이번 전쟁에서 태양 교단과 협조하기로 한 것을!"

내 폭로에 주변이 난리가 났다. 다들 태양 교단이라면 학을 떼는 와중인데 오크들이 손을 잡았다는 말은 파급력이 셌다.

"또 태양 교단이냐! 이놈들 대체 얼마나 침투한 거지!"

"그래서 끝까지 반대한 건가!"

"역시 이유가 있었어! 저 빌어먹을 새끼들!"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전쟁에 큰 턱 부족이 태양 교단과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미지수다. 이번 일은 게임에 없던 시나리오니까.

하지만 큰 턱 부족이 오래 전부터 태양 교단과 관계가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번에도 뭔 짓거리를 하겠거니 추측한 거다.

실제로 끝까지 회의에서 반대를 하는 모습에 확신을 얻었을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고르가쓰의 표정이 잠깐이나마 흔들렸다.

'역시. 맞네.'

고르가쓰의 큰 턱 부족이 태양 교단과 손을 잡은 이유는 간단하다.

'일곱 봉우리 자체보단 블라르 백작이 목표겠지.'

고르가쓰는 전설이었지만 삶의 여정이 끝에 이르고 있다. 결국 그도 유혹에 굴복했고, 뱀파이어의 인자를 받아 새롭게 태어나길 원하고 있다.

당연히 그런 거래를 먼저 제안한 건 에인션트 뱀파이어들이고. 태양 교단의 고위 성직자들과 같은 경우였다.

'정말 놈들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네.'

에인션트 뱀파이어들은 그런 식으로 블라르 백작을 향한 포위망을 완성하고 있었다.

이번에 전쟁이 난 김에 태양 교단과 일곱 봉우리의 오크를 이용해 블라르 백작을 양면으로 칠 생각이겠지.

'물론 상당 부분 추측이지만, 사리에 맞아.'

오크 족장 고르가쓰가 일곱 봉우리 연합군의 지휘권을 잡게 되면 블라르 백작은 재앙에 빠질 거다. 태양 교단도 문제인데 뒤에서 대군이 밀려오니, 그 지상최강의 뱀파이어의 운명도 끝이라고 할 수 있지.

"놈들은 태양 교단과 붙어먹은 놈들이다! 저런 오크 새끼들에게 주도권을 주면 어떻게 되겠나!"

"터무니없는 모함이다!"

"왜? 발끈하는 거지? 원한다면 해명하는 대신 도끼를 휘둘러도 된다! 크흐흐흐!"

아까와 상황이 반대가 됐다. 고르가쓰가 해명 대신에 공격을 택한다면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것으로 비출 터.

'정곡을 찌른 게 틀림없는 데 해명할 말이나 있을까?'

놈이 주둥이를 잘 놀려봐야 결국 오크고.

정치력이 있어 봐야 결국 오크인 거다.

대신격을 상대로도 이빨을 터는 이 소렌 님을 따라오려면 백 년은 일렀다.

경험과 격이 다르다.

이 애송이 놈아.

나는 지켜보는 각 종족들에게 오크를 제거할 때 누릴 이점을 설파했다.

"이들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일곱 봉우리는 상당한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왜 그런가! 내부에서 호응해줄 존재가 사라졌으니 태양 교단이 여기까지 공격하기를 꺼릴 수밖에 없다! 크르르릉! 크르르!"

블러드 비스트로 변한지라 흥분하자 성대 깊은 곳에서 짐승의 울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설령 블라르 백작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거기서 만족하지 않겠는가? 뭐, 그깟 늙은 뱀파이어 새끼 하나 죽든 말든 무슨 알 바인가! 우리끼리 잘 먹고 잘살면 되지!"

청중들은 내 말에 설득력을 느끼고는 환호로 답해왔다.

"옳다! 맞아!"

"맞는 얘기다! 오크를 제거하자!"

"저 빌어먹을 놈들이 없으면 일곱 봉우리는 안전해진다!"

이건 평소의 인덕과도 관련이 있었다. 오크는 강한 부족이었고, 일곱 봉우리에서 벌인 패악질이 말도 못 했다.

자기들이 몰아낸 오거의 위치를 그대로 물려받은 놈들이다. 당연히 다들 쌓인 불만이 많을 수밖에.

"오크를 향한 우리의 분노는 대장간의 화염 같소! 놈들을 쳐냅시다!"

드워프들이 먼저 외치자, 앙숙인 고블린이 말을 받았다.

"맞다! 놈들은 우리가 작다고 괄시하고 괴롭혔다! 케케케! 이제 뾰족한 걸로 오크의 목덜미를 찌를 거야!"

내내 중립을 지키던 코볼트들 역시 관심을 보였다.

"좋군요. 시체 봉우리에 금광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놈들을 처분하고 나누지 않겠습니까?"

일곱 봉우리의 부족은 오크를 향해 적의를 쏟아내고 있었다. 모두 치열하게 살아온 자들이었고,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걸 최고로 쳤다.

도움이 된다면 그게 설령 뱀파이어라고 해도 별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나는 모두에게 쐐기를 박았다.

"보다시피 나는 뱀파이어다! 심지어 이런 괴물로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맹세하겠다. 이번 전쟁에서 그대들의 수호자가 되겠다고!"

환호성이 터졌다.

"와아아아아!"

"크아아아와!"

그때 누군가 외쳤다.

"복을 주는 떡두꺼비!"

그러자 모두 환호하며 답했다.

"와아아아! 떡두꺼비 소렌!"

"떡두꺼비! 떡두꺼비!"

아니? 어떤 새끼야!

그거 신들만 하는 얘기 아니었나?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웬 고블린 같은 놈이 재빨리 사라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가자! 시체 봉우리로!"

"놈들을 처리하자!"

모두의 눈빛을 보니 이미 오크족이 일군 터전을 약탈할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기왕 기세를 탄 거 얼른 쳐들어가서 오크의 금고를 털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보였다.

탐욕이 미덕이라면, 일곱 봉우리의 주민들은 그 미덕의 표본과도 같은 자들이었다. 모두 금은보화의 성자요, 약탈의 기사들이었다.

오크 족장 고르가쓰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증거가 있는가! 터무니없는 소리다!"

거기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모두가 원하는 걸로 들려주면 되니까.

"증거야 네놈들 소굴에 있겠지! 모두 가서 확인해 봐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가!"

당연히 열광적인 호응이 터졌다. 왜냐면 금고를 열 핑계가 필요했으니까. 남의 집을 공짜로 털 기회다. 다들 좋아서 죽으려고 했다.

"그렇다! 직접 보고 오크의 결백을 확인하겠다!"

"맞다! 우리도 오크를 믿는다! 다만 직접 가서 보고자 한다!"

"오크여! 이웃의 선의를 알아다오. 무기를 내려놓고 손님을 맞이하라!"

듣다 보니 개새끼도 이런 개새끼들이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증거를 핑계로 다 털어먹겠다는 고약한 심보가 아닌가.'

당연히 오크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말이었다.

"만약 우리의 소굴을 다 뒤지고도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고르가쓰의 물음에 내가 나섰다.

"증거가 없다면 이 소렌, 모든 책임을 지겠다!"

아주 비장한 대답에 관객들이 열렬한 호응을 해줬다.

"역시 책임감 넘치는 사나이!"

"그래, 그라면 믿을 수 있다!"

믿긴 뭘 믿어? 진짜 웃긴 새끼들이네. 사실 내 책임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때쯤 오크 부족은 이미 없어졌을 텐데.

"개소리를 하는군!"

결국 고르가쓰가 못 참고 움직였다. 그는 관중을 선동하려다 실패하고 먼저 무기를 휘두르게 된 것이다. 지켜보는 이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지 뻔했다.

나 역시 참는 데 한계였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진 게 아주 기꺼웠다.

카아앙!

요란한 소리가 나며 고르가쓰의 도끼가 내 목을 노려왔다. 간신히 반응해 팔을 들어 올려 검처럼 튀어나온 뼈로 막아냈다. 그럼에도 뼈 일부가 잘려나간 뒤에야 도끼가 멈췄다.

간단한 기습적 공격임에도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겁먹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팔로 도끼날을 밀어내며 그에게 속삭였다.

"더러운 새끼야! 나는 너 같은 놈을 잘 알지. 본인이 더럽기 때문에 남을 더욱 강하게 비난하는 거, 정말 질릴 정도로 봐왔다. 그걸로 자신의 추함이 가려질 거라 생각하나? 흡혈의 삶을 간절히 바라는 그 모순 말이야."

"네놈······!"

설마 내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을지 몰랐다는 듯 고르가쓰가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절대 살려놔서는 안 되겠어."

고르가쓰가 왼손에 든 낫을 닮은 칼로 기습적으로 올려 베기를 해왔다. 그대로 턱을 쪼갤 위력이었지만, 재빨리 다리를 박차며 옆으로 몸을 던졌다.

블러드 비스트가 된 내 속도는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단순히 옆으로 튀어 나간 것만으로 몸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제동을 위해 땅바닥에 발톱을 박고, 길게 고랑을 만든 뒤에야 멈춰 설 수 있었다.

"경이로군 속도로군!"

감탄하는 고르가쓰에게 대답 대신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속도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블러드 비스트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나는 고르가쓰에게 달려들어 양팔에 칼날처럼 튀어나온 뼈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블러드 비스트의 속도는 대단했다. 완벽해 보이는 전사인 고르가쓰조차 방어가 뚫려서 여기저기 상처를 입기 시작한 것이다.

피를 보자 나도 돌아버렸다. 얼굴에 튀는 뜨거운 액체와 벌겋게 물들어가는 시야 속에서 환희마저 느꼈다.

'그래! 이거야! 이거!'

그 감각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 갑자기 엄청난 충격과 함께 뒤로 튕겨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지면을 보고 있었다.

"크으···. 크르릉!"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보자 고르가쓰가 껄껄 웃고 있었다.

"제법이군! 제법이야!"

그의 몸 주위로 하얀 빛무리 같은 게 맴돈다. 저건 오크족 전사의 특기인 조상의 혼을 불러내 자신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겠군.'

조상의 혼을 불러낸 오크는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강해진다. 그래서 일부러 내 공격을 허용했었던 거다. 자신의 살점을 가르는 공격에 오히려 강화되어 반격까지 날렸던 것.

'아는 거였는데··· 이런 빌어먹을.'

당연히 고르가쓰의 기술이나 능력은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피를 보고 폭주해 생각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공격을 날렸던 게 문제였다. 너무 참았던 욕구라 고삐가 풀리니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던 거다.

"확실히 그 형태로 변하니 대단하긴 하군. 하지만 경험과 숙련도의 차이는 여실한 법이지. 이제부터 이쪽이 들어갈 테니 받아보아라!"

고르가쓰는 제자리에서 발을 쿵, 하고 굴렀다. 그러자 그를 둘러싼 하얀 혼령의 빛이 더욱 강해진다. 최대치로 버프를 넣은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위험하다!'

원래부터 차이가 있었는데 이대로 싸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즉각 필살기라 할 능력을 꺼냈다.

"블러드문이여!"

손안에서 배구공만 한 작은 달이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간신히 완성한 후 하늘로 던졌다. 그러자 일대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자들은 두려워서 탄성을 터뜨렸다.

"이건 블라르 백작의 것이다!"

"역시 후계자란 말이 확실하군! 저걸 쓸 줄 알다니!"

고르가쓰도 블러드문을 보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젊은 뱀파이어인 것 같은데 어찌 이런 능력을! 보면 볼수록 놀랍군."

블러드문의 효과는 확실했다. 그를 둘러싼 조상의 혼이 약화되더니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던 것. 그와 함께 내게 힘이 쏟아져 들어왔다.

처지가 뒤바뀐 것이다. 하지만 고르가쓰는 여유만만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든 도끼를 보이며 물었다.

"이 도끼가 뭐라 불리는지 아나?"

"······."

별다른 답을 하지 않자 그는 혼자 계속 말했다.

"오거 골통 분쇄기다. 직관적이고 아주 멋진 이름이지."

"···그래서?"

"정말 근사한 건 꼭 오거 골통에만 효과가 있다는 게 아니야. 단단한 건 뭐든 잘 부순단 말이다!"

그 말과 함께 고르가쓰는 도끼에 조상의 힘을 불어넣더니 블러드문을 향해 집어 던졌다.

마치 미사일처럼 날아간 그것은 블러드문과 그대로 충돌했고,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앙!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며 관중들이 와르르 쓰러졌다. 충격파가 마치 지진처럼 산지를 휩쓸고 지나갔고, 경사면으로 따라 바위며 토사가 쏟아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비하면 말이다.

"맙소사··· 부쉈다고?"

놀랍게도 고르가쓰는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기술 가운데 하나인 블러드문을 도끼로 파괴해 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떠났던 도끼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날아와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턱!

"꽤나 감탄한 모양이군? 뱀파이어."

"···어떻게 블러드문이?"

"하하하, 그게 바로 숙련이다. 블라르 백작의 블러드문이었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부술 수 없었겠지. 하지만 네놈의 것은 아직 어설프고 파훼할 구석이 있더군."

고르가쓰는 두 개의 무기를 다시 마찰시켜 불꽃을 튀기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자신만만해졌다. 사냥감이 날뛰다 지친 걸 알아챈 사냥꾼처럼 말이다.

"자, 이제 끝을 내야겠군. 네놈 목을 잘라 장대에 세워놓고 이 고르가쓰에게 반항한 자의 최후를 사방에 알리겠다."

"아, 그건 별로 효과가 없을 텐데."

데이워커의 힘이 얼마 남지 않아서 머리를 효수해도 금방 재가 되어 사라질 텐데 말이야.

하지만 그걸 알 리가 없는 고르가쓰는 다른 부분에 대해 물어왔다.

"아직도 승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했나? 크흐흐흐흐! 그렇다면 결과를 미리 알려주지."

"떠들어 봐라."

나는 그리 답하며 조심스럽게 아직 찢어지지 않은 바지의 호주머니를 쓰다듬었다.

수정병이 있었다. 카르멘이 준 것으로 에인션트 드래곤의 피가 담긴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르가쓰는 이미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네놈이 했던 말이 모두 거짓임이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일곱 봉우리는 다시 일어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 고르가쓰의 영도 아래!"

고르가쓰는 내 목을 치기 전에 지켜보는 이들에게 한마디 하려는 것 같았다. 아마 태양 교단 문제에 대한 변명과 자신이 정당하단 소리겠지.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수정병을 꺼내 에인션트 드래곤의 진득한 피를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그러자 불덩어리 같은 힘이 몸 안에 자리 잡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당장이라도 터지려는 폭탄 같았기에 어서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새로운 기술을 준비했다.

그건 바로 대규모 에너지 드레인.

고르가쓰뿐 아니라, 놈의 졸개인 오크들까지 모조리 흡수해 버릴 생각이었다.

< 대마두의 출현(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