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8

적과의 동침(4)

블라르 백작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공포로 얼어붙어 버렸다.

'튀자, 더 볼 것도 없어.'

역시 지상최강의 뱀파이어란 말은 허명이 아니었다. 바로 몸을 돌리려는데 블라르 백작이 갑자기 발을 굴렀다.

쿠웅!

동시에 지진이 난 것처럼 땅바닥이 출렁거렸다. 그리고 그 여파로 퇴로인 동굴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런 미친!"

어떻게 한 건지도 모르겠다. 충격파를 일으켜서 집중? 그 기묘한 수법에 말도 안 나왔다.

아무래도 블라르 백작은 나를 도망가게 둘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스릉.

허리춤에서 은제검을 뽑았다. 오른손에는 장검은, 왼손에는 단검을 쥔 소드 앤 대거 스타일이다.

검은 해골 지팡이와 스킨크의 창인 뱀의 송곳니는 꺼내지 않았다. 괴사의 광선이나 독은 상대가 뱀파이어인 이상 안 먹히기 때문이다.

검을 들자마자 블라르 백작이 반응했다. 들고 있던 엘프 방랑기사 윈드러너를 던져버리더니 포탄처럼 내게 쇄도해왔다.

콰아앙!

농담이 아니라 돌진하는 그의 뒤로 충격파가 일어났다.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블라르 백작의 경로에 있던 공격대는 비참한 꼴을 맞았다.

"크아악!"

"끄아!"

마치 트럭에 치이는 것처럼 팔다리가 괴상하게 꺾인 채 허공으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나는 즉각 방어기를 펼쳤다. 케일런의 능력을 흡수하면서 강력한 기술을 얻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림자 수의'란 방어기다. 그것을 사용하자마자 그림자가 온몸을 휘감아 보호에 들어갔다. 나는 이것이 블라르 백작의 공격을 한 번 정도는 막아낼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케일런이 자랑하던 기술도 블라르 백작 앞에선 소용이 없었다. 날아온 백작이 주먹을 후려치자, 그림자 수의가 단박에 박살 났다.

"크아아악!"

몸을 감고 있던 그림자가 찢어 발겨지며,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무너진 돌무더기에 요란하게 부딪혔다.

돌무더기가 비스듬하게 쌓여 있던 탓에 나는 위쪽으로 튕겼고, 천장에 부딪힌 후에 다시 지면으로 성대하게 떨어졌다.

"크윽···!"

블라르 백작은 여유롭게 날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고작 그 정도인가? 아니겠지?"

그 순간 블라르 백작의 양쪽에서 푸른색과 하얀색의 광채를 뿜어내는 검이 베어왔다.

하이엘프 왕자 문브라이트와 방랑기사 윈드러너였다. 블라르 백작이 날 보느라 등을 보인 틈을 노렸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은 양손을 들어 그걸 여유롭게 막아내고는 엘프의 두 영웅을 상대했다.

그 틈에 재빨리 품에서 수정병을 하나 꺼냈다. 안에는 녹진한 피가 담겨 있었다. 바로 레그너 3세와 함께 쓰러뜨린 거인 토르페아의 피였다.

엄지로 수정병의 뚜껑을 부수고는 피를 마셨다. 품질 좋은 피가 내게 강력한 힘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뱀파이어에게 고품질의 피는 버프 포션이나 마찬가지다. 거기에 더해 내겐 신체개조 6단계인 흡혈 효율 강화가 있다.

거인의 피는 본래보다 몇 배나 효과를 발휘했다.

"크으으윽!"

솟구치는 힘을 느끼며 몸을 일으킨 나는 막 엘프 영웅 둘을 날려버린 블라르 백작에게 돌격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은제검을 휘둘렀다.

블라르 백작은 팔뚝으로 그걸 막았지만, 워낙 막강한 힘을 담은 공격이라 그런지 몇 미터쯤 뒤로 주욱 밀려났다.

"호오! 대단하군!"

블라르 백작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게 좌절감만을 줄 뿐이었다. 방금 일격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검격 중 하나였다.

한데도 블라르 백작의 팔은 멀쩡했다. 은이 약간 효과를 발휘한 듯 칼을 받아낸 부위에서 검은 연기가 살짝 올라오는 게 다였다.

"대체 무슨 피를 마신 거지?"

블라르 백작은 궁금하다는 얼굴로 내가 버린 수정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수정병이 떠오르더니 그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블라르 백작은 피의 냄새를 맡아보더니 의아해했다.

"훌륭한 품질의 피로군. 하지만 그 정도 효율은 나오지 않을 텐데?"

블라르 백작은 거인의 피로 이런 괴력을 발휘하는 게 신기한 것 같았다. 나는 공격 후 떨어질 것 같이 뻐근한 팔을 애써 피며 씨익 웃었다.

"이 몸이 좀 특별해서 말이야."

그러자 블라르 백작도 기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더니, 주변에 안 들리게 작게 답했다.

"아, 그러셔야지. 소렌 다켄발트."

나는 일단 재빨리 뒤로 빠져 블라르 백작과 거리를 다시 벌렸다. 그 틈에 다시 남은 영웅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공기여! 휘몰아치는 칼날이여!"

바람 마법의 대가 에이실리온이 사나운 실프를 소환했는데, 블라르 백작은 양손으로 정령을 찢어버렸다.

끼에에에에!

소멸하는 정령의 찢어지는 비명이 동굴에 요란하게 울렸다. 그 반동으로 에이실리온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어서 남작 마가르가 육중한 해머를 휘둘러왔다.

"블라르으―!"

그는 한때 왕국 최강의 용병이라 불렸던 자로, 빛나는 무훈으로 일개 용병에서 남작까지 오른 이다. 무력이야 말해봐야 입도 아플 테지만 그의 공세조차 블라르 백작에겐 무용했다.

블라르 백작은 어린애를 상대하듯 마가르 남작의 손목을 잡아 꺾더니 질질 끌고 다녔다.

"끄아아악! 크악!"

굴욕적으로 끌려다니는 마가르 남작은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블러르 백작은 그에겐 무관심했다.

애초에 그는 공격대 따윈 제대로 보고 있지도 않았다. 관심의 대상은 오로지 나 하나였다.

"이게 다가 아니겠지?"

블라르 백작이 소리쳤다.

"어디 한번 네놈의 재능을 보여봐라!"

나는 아직도 근성의 공격을 날리는 영웅들과 보조를 맞춰 그림자 속박을 사용했다. 예전에 케일런에게 당했던 기술로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수많은 손이 목표를 붙잡는 기술이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은 태연하게 그림자를 찢어버리며 외쳤다.

"신기하게도 케일런의 것을 가져간 모양이군! 하지만 이딴 잡기로는 부족하다! 진정한 모습을 보여라! 만약 그게 다라면, 이제 끝을 내겠다."

더 이상 재롱을 봐주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진짜 괴물 같은 새끼!'

내가 가진 고급 기술을 아무렇지 않게 박살 내며, 뭔가 더 꺼내놓으라고 한다. 놈에게 타격을 가하려면 이제껏 하지 못했던 게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가만?'

그때 동굴의 천장에 떠 있는 블러드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본 순간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신체개조 9단계가 '블러드문 다루기'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지 감을 못 잡았는데 예시가 떡하니 있으니 될 것도 같은데?'

내 눈에는 저기 떠 있는 블러드문의 마력 구조가 보이고 있었다. 패턴을 파악한 나는 즉각 따라 하기에 나섰다.

'해보자.'

손바닥을 내밀고 마력을 집중했다. 최대한 블라르 백작이 했던 방식을 흉내 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가 소환한 블러드문에서 발견한 마력 구조로 마력을 짜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심장에 곧장 과부하가 오기 시작한다. 혈액이 아니라 마력을 전신으로 순환시키는 과정에서 부담을 받아서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설령 심장이 터져도 해내야만 해.'

급기야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노력 끝에 손바닥에 핏빛 구체가 뭉쳐갔다. 그것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작은 달이었다.

문제는 처음 해봐서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 하지만 내겐 사기적인 물건이 있었다. 바로 5대 아티펙트라 불리는 '달의 펜던트'.

이것은 소유자의 마법을 증폭시켜준다. 심지어 지금 펜던트에 보이는 문페이즈는 보름달을 가리키고 있다. 즉, 효과가 최대치를 찍는 날이다.

우우웅!

달의 펜던트의 도움으로 완성된 블러드문은 막대한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위로 던졌다.

"밀어내라!"

내 블러드문이 블라르 백작의 블러드문을 밀어내길 바라면서 말이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한창 주변에서 덤비던 영웅들을 족치던 블라르 백작이 대경했던 것이다.

"내 블러드문보다 더욱 강력하다고?"

달의 펜던트 탓인지 내 블러드문은 블라르 백작의 블러드문보다 강했다. 점점 그가 소환한 달의 크기가 줄어 들어갔다.

블라르 백작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그래, 그거지! 실망시키지 않는군! 좋다. 그렇다면 이런 것도 할 수 있겠나!"

놀랍게도 블라르 백작은 허공에 뜬 블러드문을 움직이더니, 내 쪽으로 운석처럼 떨어뜨렸다.

"이런!"

저걸 움직일 수도 있는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곧장 대폭발이 일어났다. 순간 시야를 잃을 정도였고, 청각도 완전히 먹통이 됐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폭발의 여파로 지면이 꺼졌다는 거다. 나는 빠르게 아래로 추락했다. 그리고는 얼마 뒤 딱딱한 바닥에 부딪쳤다.

"크으윽!"

주변이 온통 먼지였다. 하지만 금방 강풍이 불어와 시야가 확보됐다. 블라르 백작이 손짓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그는 감탄한 듯 주변을 보고 있었다.

"아름답군. 동굴 밑에 또 이런 동굴이 있었던가!"

우리가 도착한 곳은 깊은 곳에 있는 공동이었다. 추락한 곳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높았다.

'대체 얼마나 떨어진 거지···?'

주변에는 지하수가 잔뜩 흐르고 있었다. 광대한 지하호수도 보였다. 블라르 백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둘이 오붓이 대화하기 좋은 장소로군. 안 그런가?"

"거, 이쪽은 별로 달갑지 않은데."

"섭섭한 소리를 하는군."

블라르 백작은 뒷짐을 짊어진 채 다가왔다.

"블러드문을 만든 건 아주 훌륭했다. 나 말고도 그 인공적인 달을 만들 수 있는 자가 있을 줄이야."

사실 블러드문의 원조는 블라르 백작이다. 아단이 그의 기술을 훔쳐서 내게 이식한 거니까.

"심지어 이 몸보다 훌륭하게 펼쳤지. 다만, 어찌 응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배우고 싶지 않나? 블러드문을 다루는 진정한 기예를."

"···무슨 꿍꿍이지?"

블라르 백작은 내 주변을 느긋하게 걸었다. 마치 마당에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은 모습이다.

"내가 왜 자네에게 관심이 갔던 건지 이제야 이해했기 때문이다. 자네에겐 재능이 있다. 이 블라르가 갈고 닦았던 기술을 계승할 만한 재능 말이야."

"···뭐라고?"

"소렌, 내 후계자가 되지 않겠나? 제자의 예를 다하겠다고 맹세하면 내가 쌓았던 모든 걸 넘겨주마."

믿기지 않는 얘기였다. 이런 건 게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제안이었으니까. 블라르 백작의 후계자라니? 내가 말없이 있자 블라르 백작이 계속 제안했다.

"수락한다면 내가 가졌던 기술을 전승하고, 내 권력을 넘겨주겠다. 어떻게 생각하지?"

"흐음······."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받아들이면 그만이야. 자네는 충분한 재능을 가졌고,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제안은 달콤했다. 목숨을 부지함과 동시에 블라르 백작의 모든 걸 계승하게 된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기에 고인물인 나는 아는 게 많았다.

"거절한다."

예상 못 한 답변인 듯 블라르 백작은 멈춰 섰다.

"어째서···?"

블라르 백작에 대해선 잘 안다. 그는 힘만이 아니라 교묘한 언변과 지혜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도 즐긴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근성의 전투를 보여주고 있는 나를 몇 마디로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게 뻔했다.

주먹과 혀를 모두 쓰는 것. 그게 블라르 백작이 가진 전투의 미학이었다. 나랑 꽤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여기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블라르 백작가의 가언은 '꺾이지 않는 의지'라는 걸. 그가 에인션트 뱀파이어와 대립하고 있는 것도 그런 가언 때문이다.

한데 혹하는 제안에 태도를 바꾼다?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아마 함정이겠지.'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가 내게 갖고 있는 흥미는 완전히 사라질 테고 그 후에 남은 건 확정적인 죽음뿐이다.

결국 블라르 백작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초지일관의 자세였다.

"간단하다. 내가 갖고 싶은 건 스스로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누구에게 조아릴 생각은 없다."

"진심인가? 이 블라르의 제안을 걷어찬다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겠지. 블라르 백작.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마. 네놈이 얼마나 강대하건 간에 상관없다."

나는 이 세계에 와서 가장 진심 가득한 태도로 블라르 백작에게 외쳤다.

"이 세계의 모든 건 내 발판이다! 감히 누구도 이 소렌 다켄발트를 깔보거나 밑에 둘 수 없다! 제자의 예? 어림없는 소리! 원한다면 네놈이 가진 모든 걸 빼앗을 것이다! 고개를 조아리는 게 아니라!"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도 고인물인 이 몸에겐 공략 대상일 뿐이다. 애초에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런 특이함 때문인지 블라르 백작은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좋은 결의로군. 하지만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얼마나 갈지 궁금하구만."

말을 마치자마자 블라르 백작의 형상이 사라졌다. 그러자니 내 바로 옆에서 나타났다. 제대로 반응할 수도 없는 속도였다.

그는 내 왼팔을 잡고 제압하더니 묻는다.

"나는 줄곧 사람들에게 바른 대답을 찾기까지 네 번의 기회가 있다고 말했네. 왜인지 아나?"

"크윽! 알 것 같아서 짜증 나는군."

"인간의 팔다리가 총 네 개기 때문이야. 모두 다 뽑아 굼벵이로 만들어 버리기 전까진 기회가 있는 셈이지. 잘 생각하게나. 소렌."

그 말과 함께 블라르 백작은 내 왼팔을 통째로 뽑아버렸다.

뚜둑! 뻑!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끊어지는 소리가 끔찍했다. 뱀파이어라고 고통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지만, 새어나가는 비명은 어쩔 수 없었다.

"끄으으윽! 아아악!"

"자, 대답해 보게. 내 후계자가 될 생각이 들었는지?"

"좆까라! 내가 남 위에 서는 건 괜찮지만, 내가 남 아래 서야 하는 상황은 용납할 수 없다!"

"···아직 부족한가 보군."

블라르 백작이 이번엔 내 오른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신성한 광채가 빛나더니 뜯어졌던 내 왼팔이 말끔하게 복구된 것이다.

순간 어리둥절했으나 느껴지는 기운에 성녀의 안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블라르 백작 역시 감탄했다.

"신성한 힘이로군. 사도라서 그런 건가? 훌륭해. 자네는 남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가졌군."

블라르 백작은 팔다리를 더 뽑을 수 있다고 즐거워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는 이 미친놈을 상대할 생각이 없어졌다.

'어떻게든 자력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군.'

마지막 수단을 쓰는 수밖에.

나는 복구된 왼팔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바로 블랙코인. 차원 관문을 열어 섀도우타운으로 갈 수 있는 도구다.

섀도우타운을 관리하는 크림슨코트의 수장 루신다는 블라르 백작의 원수다. 게다가 그곳에는 에인션트 뱀파이어도 머물고 있으니 블라르 백작이라고 해도 함부로 쫓아오지 못할 거다.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어.'

격퇴도 불가고, 도망도 여의치 않으니 루신다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이번 위기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해낼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블라르 백작이 에인션트 뱀파이어들과 반목하고 있는 점, 거기에 해결책이 있을 것 같았다.

우웅!

블랙코인의 힘이 발동하자 차원관문이 열렸고, 내 몸이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이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섀도우타운으로 도망치려고? 그게 가능할 거라 보는 건가!"

블라르 백작은 왼손으로 날 잡고 오른손으로 차원의 틈새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의 아귀힘만으로 갈라진 차원을 억지로 닫기 시작했다.

콰지지지직!

열려 있던 차원이 비정상적인 힘에 균열을 일으키며 요란하게 스파크를 튀기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그대로 두면 정말 차원의 균열을 닫아버릴 것 같았다. 블라르 백작을 껄껄 웃어댔다.

"절망을 보여주마. 이런 약은 짓을 했으니 다음에는 두 개를 뽑아주겠네. 미리 어떤 대답을 할지 잘 생각하게나!"

블라르 백작은 절대로 내가 도망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겐 비밀스러운 성명절기가 있었다.

'새벽의 손길을 끝까지 아껴두길 잘했군.'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뻗고 힘을 일으켰다.

"치유의 새벽이시여, 지친 자들에게 은혜를!"

그 말과 함께 막강한 치유마법이 블라르 백작의 얼굴에 작렬했다. 기세등등하던 블라르 백작은 경악했고,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악―!"

처음으로 듣는, 정말로 고통에 찬 음성이었다. 순식간에 얼굴 한쪽이 타버린 블라르 백작은 하나 남은 눈으로 날 악귀처럼 쏘아봤다.

"이건 대체! 치유력이라고?"

하지만 대답 같은 걸 할 여유 따윈 없었다. 나는 블라르 백작을 즉각 떨쳐내고 차원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

***

팟!

차원 관문이 닫히며 어둠 속에 마력의 잔재가 불티처럼 흩날렸다. 그 작은 빛무리 속에서 블라르 백작은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다가 찡그렸다.

"크으으···! 정말 더럽게 아프군."

이런 고통은 가히 수백 년 만에 겪는 것이었다. 막강한 치유력이 강타했을 때는 정말 얼굴 뼈가 바스러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타고난 경지 탓에 고통에 무감각해져 버린 그에겐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충격이었다. 심지어 잠깐이지만, 그때 공포마저 느꼈다는 사실에 블라르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크크큭··· 크크크···!"

하지만 어째서인지 험한 꼴을 겪고도 블라르 백작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신경이 타오르는 것 같은 고통과 잠시나마 느꼈던 스릴이 그의 공허한 가슴을 새롭게 깨워주고 있던 탓이다.

"놀라워. 아주 놀라워···!"

블라르 백작은 화상으로 타버린 왼쪽 얼굴을 쓰다듬었다. 재생력을 발휘해봤지만 조금도 치유가 되질 않았다. 블라르 백작은 몸이 수십 조각이 나도 끄떡없는 재생력을 가졌다. 그럼에도 회복이 되질 않았다.

소렌은 오래전에 완성된 절대자의 육체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겨버린 것이다. 심지어 블라르 백작의 왼쪽 눈도 녹아 없어졌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의 웃음은 점점 커졌고, 급기야 광기로 가득 차 지하 공동을 쩌렁쩌렁 울려댔다.

"크하하하하! 하하핫! 아! 근사하군! 이러면 진짜 갖고 싶어지잖나! 소렌!"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계속 웃어댔다. 하지만 손가락 틈으로 보이는 하나 남은 붉은 눈동자는 비교할 데 없는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

────────────────────────────────────

더 좋은 거(1)

"허억! 허어억!"

섀도우타운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안개 자욱한 마을의 골목길에 널브러졌다.

'진짜 뒤질 뻔했다!'

용케 살아남았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안도감이 드는 것도 잠시였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장이라도 블라르 백작이 마지막에 보여줬던 악귀 같은 얼굴로 쫓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살았다는 감정도 잠시였고 공포가 밀려왔다. 설마, 설마 싶지만 블라르 백작이 돌아버리면 여기까지 쳐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안전한 곳으로 빨리···!'

몸을 일으키는데 무릎이 후덜덜 떨려서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일어난 나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목적지는 크림슨코트가 직접 관리하는 안전지대인 '붉은 성지'였다. 재빨리 체크인한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시발."

이제 괜찮다는 생각에 굳어 있던 머리가 기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깐···?"

제일 먼저 든 생각이 권속인 에레미나부터 챙겨야 한다는 거다.

'블라르 백작의 성품이면 아이를 해치거나 인질로 잡지 않을 테지만, 세상에 절대란 없지.'

문제는 블랙코인에겐 하루 간의 쿨타임이 있어서 당장 골짜기로 갈 수 없다는 거다. 그렇지만 지금은 시간이 생명이었으므로 크림슨코트에서 제공하는 전보(轉報)를 쓰기로 했다.

거리에 따라 비용이 달라지는데 어지간한 곳으로는 신속하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일단 에레미나에게 편지를 써 스킨크 둥지로 대피하라고 했다. 또한 스킨크 족장에겐 에레미나를 반드시 보호하란 편지를 보냈다.

일단은 그렇게 처리해두자 마음이 좀 놓였다.

"후우······."

그 뒤,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려 했지만, 전투의 여파로 인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기절하듯 쓰러져버렸다.

* * *

정신을 차리고 숙소 관리인에게 가서 물었다.

"입실한 지 얼마나 지났나?"

"사흘입니다. 손님."

세상에! 사흘이나 정신을 잃고 기절해 있었다니. 극한의 상황까지 몰렸던 게 몸에 과부하를 줬던 모양이다. 특히 블러드문을 만들 때 피눈물까지 줄줄 흘렸으니 크게 무리했다.

'일단 퇴실부터 해야겠군.'

아직까지 별일 없는 거 보면 블라르 백작은 섀도우타운까지 쫓아올 생각은 없는 듯했다. 재빨리 상황을 알아봐야 했다.

전보를 써서 스톤헤븐에 있는 드워프 뱀파이어인 딥델버에게 연락을 넣었다. 당장 케일런의 집으로 오라고 말이다.

이후 친우인 케일런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여전히 후락한 갑옷을 입은 해골 케일런이 날 맞아줬다.

"케일런, 어떻게 지냈나?"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런, 지능이 떨어진 탓에 여가생활도 할 줄 모르는 처지가 된 듯했다.

얼마 뒤, 딥델버가 황급히 달려서 날 찾아왔다.

"주인이시여! 부르셨습니까?"

"잘 왔다. 딥델버. 두 가지를 좀 알아봐."

첫 번째는 그 사건 이후 에버송이 어떻게 됐는지, 그리고 블라르 백작은 뭐하고 있는지다.

섀도우타운으로 온 이상 딥델버도 하루 동안 못 나가는 건 같지만, 그에게는 이 마을의 정보길드와 인맥이 있다. 길드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라고 했다.

두 번째는 사람을 보내서 에레미나가 잘 피했는지 확인이다. 블라르 백작이 갑자기 아단의 골짜기로 가 깽판을 쳤을 거 같진 않지만 꼭 확인해야 했다.

아직은 장거리 텔레파시가 안 되니 어쩔 수 없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서둘러라. 네놈이 가진 걸 팍팍 쓰라고."

돈을 발라서 빨리 처리하란 말에 딥델버는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그리하겠다고 했다.

다행히 녀석은 매를 버는 타입은 아니었다.

대충 일곱 시간 정도 지나자 딥델버는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왔다.

"주인이시여. 블라르 백작은···."

"아니, 에레미나 먼저."

"네, 아가씨께선 잘 피신하셨다고 합니다. 저희 인부들에게 확인한 바 스킨크들이 아가씨를 차기 사도로 여겨서 목숨 걸고 보호 중이라는군요. 현재 스킨크 둥지 가장 깊은 곳에 있다고 합니다."

"다행이군."

아마 에레미나가 성녀의 사도가 되는 일은 없을 거다. 녀석은 성녀가 아니라 날 믿으니까. 하지만 스킨크가 보기에 내 권속이니 그리 보일 법도 했다.

"골짜기 쪽에도 별다른 이상이 없습니다. 저희 인부들이 공사에 열심입니다. 어제 왕이 보낸 건축가도 도착했다더군요. 거대한 신전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답니다."

"그래, 그럼 이제 블라르에 대해서도 말해봐."

딥델버는 정보 길드에서 받아온 서류를 건네며 설명에 들어갔다.

"블라르 백작은 그날 전투 이후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에버송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인가?"

"네, 정보길드의 의견으로는 그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그냥 홀연히 떠난 것 같다고 합니다. 다만 특이한 게···."

"음?"

"떠나기 전, 엘프 서점에 들러서 한동안 기웃거렸다더군요. 서점 주인 말로는 뭔가를 찾는 기색이었는데, 원하는 게 없자 실망한 얼굴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주인은 나중에야 그 손님이 블라르 백작인 걸 알고 대경실색해서 쓰러졌다는군요. 설마 한낮에 전설적인 뱀파이어가 자기 서점에 올 줄은 몰랐다나···."

이상한 얘기는 아니다. 블라르 백작은 햇빛에 탁월한 저항력을 갖고 있으니까. 데이워커처럼 면역은 아닌데, 존나 강해지다 보니 태양도 견디는 수준이 됐다. 두꺼운 옷을 입고 그늘로 다니면 낮에도 평범하게 행동할 수 있으니 가히 뱀파이어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참고로 그건 에인션트 뱀파이어들도 못하는 짓거리였다.

"이후 에버송에서 블라르 백작에 관한 정보는 없습니다."

"그런가···."

아무래도 내가 탈출하자 흥미를 잃고 떠난 듯했다. 느긋하게 서점에 들렀다가 사라진 걸 보아 섀도우타운까지 무리해서 쳐들어올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이군.

"동굴로 들어갔던 공격대는 어떻게 됐지?"

"아, 그게 상당히 참혹합니다. 시신의 조각이라도 찾아서 사망 처리된 게 14명, 실종 23명입니다."

"뭐? 설마 생존자가 없어···?"

"네, 아무도 살아서 돌아온 이가 없습니다."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블라르 백작이 내가 떠난 뒤 기어코 남은 자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죽여버린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날 전투에 관한 작은 소문이라도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겠지.

'레그너 3세가 공격대에 들어갔으면 엘프 여왕이 구혼자 파티를 또 열 뻔했네.'

다행히 레그너 3세를 비롯해 동굴 밖에서 대기하던 인원들은 무사하다고 한다.

"···전율이 이는군."

입에서 솔직한 감상이 흘러나왔다. 공격대는 다들 이름난 영웅들이었다. 그런데 전멸이라니···. 블라르 백작이 얼마나 강한 건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어떻게 위기를 넘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

블라르 백작을 이기겠다는 생각은 아직은 무리수 같았다. 아니,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무력인데?

언젠가는 그를 넘어서겠지만 아직은 격차가 너무 컸다. 그러니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

블라르 백작이 굳이 날 죽일 필요가 없게 되거나, 혹은 날 필요로 하게 되는 식으로 말이다.

"알겠어. 또 부를 테니 돌아가 봐."

"네, 주인이시여."

딥델버를 보낸 뒤에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한참 고민했다. 그런데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크림슨코트의 간부 중 하나인 '카시아'란 자가 찾아온 것이다.

"다켄발트. 당신을 찾으시는 분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지요."

카시아를 보자마자 누가 날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섀도우타운에 자리 잡은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부름이었다.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아니라면 클랜의 간부가 전령으로 올 리가 없지.'

문제는 게임에서 발휘되던 무작위성 때문에 이곳의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누굴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상대에 따라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고,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케일런과의 결투 때문에 주목받을 건 알았지만 하필 이 타이밍에···.'

이게 호재일지, 악재일지는 가봐야 알 듯했다.

안 그래도 블라르 백작 때문에 루신다를 찾아가 보려 했는데, 그 윗선과 만나게 됐다.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죠."

악재라면 호재로 만들면 그만이니까.

* * *

카시아를 따라 크림슨코트의 본부인 대저택으로 향했다.

크림슨코트의 본부는 뱀파이어의 미학이 잘 드러나는 건물로 솔직히 내 감각으로 보면 악취미에 가깝다.

가령 성당의 외벽에 성인상을 늘어놓은 것처럼 여기도 비슷한 짓을 했는데, 그게 고통에 찬 희생자의 조각상이란 게 달랐다.

온갖 종족을 다 흡혈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고 할까? 아니면, 여기까지 흡혈해 봤다는 기념인 건가?

'하여간 이 망토 두른 모기 새끼들은 이해가 안 된다.'

역시 뱀파이어란 종족 중에 정신이 멀쩡한 건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나마 제정신이자, 마지막 양심이라 할 만한 게 이 소렌 다켄발트였다. 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종족의 평균 인성에 이바지해야겠단 생각만 들었다.

'가고일 좀 보게···.'

건물 곳곳에 가고일상이 있었는데 현실 세계와 다른 점은 저게 진짜로 움직인다는 거다. 침입자가 오면 벌떼처럼 호롤롤로 날아오르는 데 아주 장관이었다.

"이쪽으로."

카시아는 본관에서 가장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 날 이끌었다. 검은 복도에는 특별히 정예로 보이는 클랜원들이 완전무장한 채로 경비 중이었다.

좌우로는 역대 클랜장들의 초상화가 보였는데, 내가 지나가자 그림 속 눈동자들이 일제히 날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하여간 뱀파이어의 집은 뭐든 섬뜩하네.

"다 왔습니다."

얼마간 걸어가자 복도 끝에서 장미 장식이 붙은 육중한 나무문을 만났다. 카시아는 문을 열어주고 비켜섰다. 혼자 가라는 모양이다.

'한 번 해보자.'

어떤 에인션트가 나타나든 블라르 백작으로부터 보호를 이끌어내는 게 일단 목표였다.

"소렌 다켄발트가 도착했습니다!"

뒤에서 외치는 카시아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몹시 화려한 방이었다.

곳곳을 진홍색 벨벳과 검은 대리석으로 장식했는데,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정체 모를 해골 여러 구가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각양각색의 무기를 들고 마치 장식용 석상처럼 일렬로 늘어선 모습이다. 그리고 그 끝에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앉아 있었다.

"어서 오게."

여성치고는 차분한 저음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내심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르멘이다! 카르멘!'

저 칠흑 같은 머리칼과 연보라색 눈동자, 크고 늘씬한 체구. 틀림없이 에인션트 뱀파이어 카르멘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하면 카르멘은 이쪽 하기에 따라, 플레이어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유일한 에인션트 뱀파이어기에 그렇다.

'여기서 운이 좀 풀리는구나.'

만약 '영원의 발레스카' 같은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출몰했다면 일이 거지 같이 꼬일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카르멘에게서 어떻게 하면 블라르 백작으로부터 보호해 주겠다는 말을 끌어낼지 궁리에 들어갔다.

위기에 최적화된 뇌구조 덕에 벌써부터 각이 나오기 시작했다.

'크흐흐, 좋군.'

만족스러운 얼굴을 가리느라 고개를 푹 숙인 채 인사했다.

"고귀한 시조를 뵙습니다. 소렌 다켄발트라고 합니다."

뱀파이어의 예법에 맞게 인사하자 카르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이가 옛 방식을 잘 알고 있구만. 반갑네. 나는 카르멘일세."

"대단치 않습니다. 모르는 것이 많으니 너그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 예의 바른 대답에 카르멘은 재밌는 듯 낮게 웃었다.

"크크큭. 결투 때는 동네 건달처럼 싸우더니, 여기선 딴판이군."

"알맞은 자리에 알맞은 행동이 필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 말이 옳군. 그것보다 제자리에서 서서 움직이지 말도록."

카르멘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한 번 휘둘렀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속옷만 남기고 내 의복이 모두 벗겨져 버린 것.

"!"

아니, 어느 틈에?

뭔가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한 채 의복이며 무기까지 단번에 무장해제 됐다.

블라르 백작을 공격하던 엘프 방랑기사 윈드러너의 경우도 공격이 시작되는 것까진 볼 수 있었는데, 카르멘은 아예 인지 불가였다.

'강한 줄은 알았지만, 겪어보니 장난 아니군.'

나는 어이없어하며 반라의 상태로 서 있었다. 그러자 카르멘이 다가오더니 매우 꼼꼼하게 내 육체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호···? 호? 어떻게?"

날 보는 눈에는 음욕이란 한 점도 없고, 호기심과 흥미만이 가득했다.

아마 카르멘과 처음 대면하는 자라면 이런 상황에 당혹하겠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 잘 알았기에 침착할 수 있었다.

'내 육체의 자질을 살펴보고 있는 거겠지.'

카르멘은 남자고 여자고 재능있는 젊은이가 있으면 다짜고짜 반라로 만들어 꼼꼼하게 살펴보는 걸 좋아했다.

'이 몸에 대해 어떻게 여길지 궁금하군.'

얼마 뒤, 카르멘이 평가를 내렸다.

"완벽하군···!"

실로 대호평이었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근골을 봐온 그녀인지라, 보는 눈이 더럽게 까다로웠다. 그런 카르멘이 완벽을 입에 담았으니 내 육체의 자질은 가히 역대급이라 할 수 있다.

'솔직히 안 그러는 게 이상하지.'

아단 삼촌은 수많은 신체개조에서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 왔다. 그리고 나온 최종판이 바로 내 몸이다.

중간쯤 나온 케일런도 그리 강한 전사가 됐다. 유작이라 할 수 있는 나야 말해봐야 입 아프다. 그 결과 카르멘의 관심을 온통 잡아끌 수준이었다.

"대체 이런 근골이 어떻게 튀어나온 건가? 놀랍구나. 소렌 다켄발트."

카르멘이 젊은 유망주의 육체를 유심히 살피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무기술의 대가인 자신의 제자를 찾기 위해서다.

실제로 카르멘은 '웨폰 마스터'라고 불린다. 세상에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는 달인인 것이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기예를 전수할 자를 오래간 찾아왔지만, 마음에 차는 이가 없었다고.

내가 알기로 카르멘은 현실과 타협해 몇몇을 제자로 들였으나 결국 실망만 하고 내쳤다고 한다.

이후 더 까다롭게 제자를 물색해 왔는데 오늘 완벽하다고 평할 자질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제 됐네. 갑자기 미안하군."

카르멘은 손을 살짝 휘저었다. 또 어느 틈에서인가 옷이 입혀져 있었다. 칼도 제대로 허리에 차고 있다.

'신묘할 정도의 속도군. 카르멘에게 배우면 나도 할 수 있겠지만.'

카르멘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자꾸 날 힐끔거리고 있었다.

'확실하군. 내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그렇다면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지. 흐흐흐.'

카르멘은 무인이라 그런지 간계가 깊은 성격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관계에 있어선 꽤 서툰 편이라고 할까? 심지어 언변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딱 보니 내게 욕심이 생겼는데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 감을 못 잡겠다는 얼굴이다.

그러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전에 보니까···, 자질은 뛰어난데 무기를 휘두르는 게 기초도 없더군."

"부끄러운 솜씨를 보여드렸습니다."

"그··· 힐난하고자 함이 아닐세. 자네 정도 되는 이가 왜 스승이 없나 싶었던 거지. 아니, 혹시··· 스승이 있나······?"

스승 있냐고 물어보는 카르멘의 표정에서 애타는 심경이 훤히 드러났다.

세상에, 이렇게 표정 관리 못 하는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또 있을까? 그녀는 놀랍도록 겉과 속이 같은 타입이었다.

만약 없다고 하면 기뻐하면서 자네만 괜찮다면 자신이 좀 기술을 봐줄 수도 있다, 뭐 그런 식으로 나오겠지. 그러면서 은근슬쩍 스승 노릇을 시작하려 할 터.

어차피 카르멘의 패턴이야 뻔했다. 벌써부터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뾰족한 귀가 살짝씩 쫑긋거렸다.

하지만 내 순순히 응해줄 수는 없지. 애초에 여기 온 건 뭔가 얻어내기 위해서다. 상대가 원하는 걸 알았으니 한발 뒤로 물러나는 게 맞다.

'애 좀 태워줄까?'

이 소렌 타켄발트. 갖고 싶다고 쉽게 가질 수 있는 남자가 아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적당한 답을 찾아냈다. 그리고 카르멘에게 곤란하다는 듯 답했다.

"그게 말입니다."

"응···?"

"최근에 블라르 백작께서 자기 후계자가 될 생각이 없냐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블라르 백작이 후계자 운운한 건 진심은 아니었다. 그저 말로 날 농락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가 그런 말을 했던 건 엄연한 사실. 즉, 지금 나는 한 점의 거짓도 없다는 거다.

그리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뭔가 두근두근한 기색으로 내 말을 기다리던 카르멘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던 것이다.

"뭐! 블라르 그 망나니가!"

카르멘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양손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 그러니까 제자 삼고 싶으면 보호해 달라고.

────────────────────────────────────

────────────────────────────────────

────────────────────────────────────

────────────────────────────────────

더 좋은 거(2)

***

카르멘은 대체 전후사정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말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설명해줬다. 그리고 제안을 거절하자 블라르 백작이 날 죽이려 했다고 덧붙였다.

"저는 스승이 없으니 카르멘 님 같은 분에게 조금이나마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일생의 영광이겠습니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이 절 처죽이려 하고 있으니 이루기 어려운 꿈이겠지요."

은근슬쩍 블라르와의 일을 중재해 주거나, 보호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거, 카르멘이 내 육체를 탐내는 탓에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는군.'

하지만 인생에서 조심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모든 게 순조롭다고 느끼는 그때 말이다. 이번에도 예외가 없었다.

"확실히 곤란하겠군. 그렇다면 같이 블라르에게 가서 이 문제를 처리해 보세."

아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야?

"네? 뭐, 뭐? 뭐라고요?"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걱정 말게. 공간을 검으로 갈라 차원 관문을 만들 수 있으니까."

"아니, 아니? 아니!"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니다. 블라르 백작에게 겨우 도망쳐 나와, 숙소에서 사시나무처럼 떨던 게 얼마 전이다. 그런데 다시 만나러 간다고?

'설마 블라르 백작이랑 삼자대면을 하자고 할 줄이야!'

카르멘은 에인션트 뱀파이어 중에서도 특이한 위치에 있다. 덕분에 블라르 백작과도 원수지간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이가 좋은 건 더더욱 아니니,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저, 카르멘 님? 제가 알기로 블라르 백작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찾으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다음으로 미루는 게···."

"자네는 걱정할 것 없어. 블라르 그놈과는 과거에 악연이 좀 있어서 연락할 방법 정도는 있으니. 잠시만 거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시게."

카르멘은 펑, 하고 사라지더니 근처에 있던 고풍스러운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는 대리석판 위에 드래곤의 손가락뼈로 된 펜을 들고 뭔가 끄적끄적 적기 시작했다.

'아니, 설마? 블라르랑 실시간으로 연락하는 건가?'

설마, 설마했지만 진짜인가 보다.

한데 특이한 게 하나 있었다. 그녀의 책상에 드라큘라의 신상이 보였던 것이다.

'드라큘라를 섬기나 보군. 체크해 두자.'

이 세계에서 상대의 종교는 중요한 정보였으니 말이다.

잠시 뒤에 카르멘이 들고 있던 펜을 집어 던지고는 벌떡 일어났다.

"이 핏덩이 놈! 성질머리가 여전하구나! 소렌, 어서 가세. 놈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아, 네?"

카르멘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더니 그대로 내리그었다.

촤아아!

그러자 공간이 갈라지며 차원 관문이 만들어졌다. 지켜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게 이리 쉽게 되는 거였나?'

감탄하고 있을 틈도 없었다. 카르멘이 내 손을 잡더니 차원의 균열로 뛰어든 탓이다.

***

도착한 곳은 물질계가 아니었다. 검푸른 색의 뾰족한 바위산이 가득했고, 하늘에는 핏빛 태양이 떠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블라르 백작이 혼자 고고하게 서있었다.

"노인네, 진짜 올 줄은 몰랐소."

블라르 백작이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카르멘을 맞아줬다. 그리고 내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렌 다켄발트. 자네 덕에 근사한 가면을 쓰게 됐으니 감사를 표하지.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만."

블라르 백작은 얼굴을 반을 가리고 있는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는 아부도 할 겸 칭찬을 했다.

"백작님, 가면이 잘 어울리십니다. 괜찮으시면 제가 다음에 멋진 가면을 선물하겠습니다."

"······."

블라르 백작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카르멘에게 물었다.

"대체 뭘 받아먹고 그 나이에 이 일에 끼어든 것이오? 마치 우는 손자 손을 잡고 나타난 할머니 같구려."

"시끄럽다. 이놈. 어린 놈의 새끼가 말본새가 엉망인 건 여전하구나."

옆에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자니 꽤 기묘한 광경이었다. 겉만 보면 블라르 백작이 노년에 이르고 있었고, 카르멘은 젊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세계에서 실제 연령과 외형이 일치하지 않는 건 흔한 일이다. 실제로 카르멘은 블라르 백작보다 나이가 열 배는 더 많을 터였다.

블라르 백작은 즉석해서 석재 의자를 창조하더니 카르멘에게 권하고는 자신도 털썩 앉았다. 그는 등받이에 거만하게 몸을 기대며 물었다.

"용건을 말해보시오. 내 에인션트 중에서 노인네만은 존중하는 편이긴 하나, 원하는 바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나. 블라르. 나는 네게 뭔가 부탁하러 온 게 아니다. 그저 통보하려는 거지."

"무슨 말이오?"

"간단하다. 여기 있는 소렌 다켄발트를 내 제자로 삼아 기예를 전수하겠다. 그러니 앞으로 소렌을 건드리면 나와도 겨뤄야 할 것이다. 그걸 알려주러 왔다."

카르멘의 선언에 블라르 백작은 놀랐는지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제자라 하셨소? 그 카르멘이 제자를 받는다고?"

"놀라는 것 보니 네놈 안목이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엉망인 게 여전하군. 이 젊은이의 자질을 보지 못한 것이냐?"

그 말에 블라르 백작은 날 쓱 보더니 끄덕였다.

"물론 대단하긴 했소. 그래서 나 역시 후계자 제안을···."

"웃기는구나! 그것은 진심이 아니라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간계이지 않느냐?"

"아니오. 이 몸 역시 나름대로 진지하게···."

그 말에 카르멘이 날 휙 돌아보더니 묻는다.

"소렌이여."

"네, 카르멘 님."

"블라르 저놈이 후계자 얘기를 할 때 가문의 단검을 꺼내 보이며 말했던가?"

"아뇨? 그런 거 없었는데요?"

"하! 그러면 거짓부렁이가 틀림 없구만. 잘 듣게. 블라르 가문에서 후계자를 논할 때는 반드시 선대로부터 받은 단검을 보이며 제안하네. 그게 가문의 규범이야. 한데 말만 했다는 건 그냥 자네를 농락하기 위함이 맞네."

그 말에 달변가인 블라르 백작이 일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아니, 그런 거였나?'

게임에서야 블라르 백작의 후계자가 되는 이벤트가 없으니 몰랐다.

카르멘은 혼자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아무튼 잘 됐구나. 난 또 블라르, 네놈이 소렌에게 진짜 관심이 있는 줄 알고 걱정했다. 하지만 이걸로 아닌 게 확실해졌으니 내 제자가 되어도 문제는 없으렸다?"

돌아가는 상황에 블라르 백작은 발끈했다.

"이보시오! 노인네!"

"뭐?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

"아니, 누가 진심이 아니라고 했소이까. 그때 단검을 깜빡할 수도 있던 거지."

"하면 너는 진짜로 소렌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 있다는 건가?"

카르멘의 물음에 블라르 백작은 복잡한 표정이 됐다. 갈등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러다 결심을 한 듯 답했다.

"물론이오. 상황을 봐서 후계자로 삼을 수도 있소. 아무래도 이놈은 우리 가문의 숙원을 해결할 만한 존재로 보이니까."

하지만 카르멘은 단호했다.

"혼자 관 속에서 고민을 많이 해보아라. 나는 바로 소렌을 제자로 삼을 테니. 소렌이 내 제자가 되면 네놈의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걸 알겠지?"

"아니, 노인네! 이 무슨 폭거시오! 내 언제 후계자로 안 삼겠다고 했소?"

블라르 백작이 발끈했다. 상황을 지켜보니 웃겼다. 블라르 백작은 처음에 카르멘에게 반대하기 위해 후계자를 운운했지만, 이젠 뭔가 점점 진심이 되어간다고 할까?

"뭐라? 참인가?"

"이 블라르의 말을 무엇으로 여기는 것이오!"

그러자 카르멘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하면 소렌을 죽이지 않겠구나? 후계자로 삼아야 하니."

그 예리한 지적에 블라르 백작이 움찔했다.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것이다. 나는 카르멘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잘 못 한다고 생각했는데 감언이설이나 미사여구에 약한 것일 뿐 논리가 없는 게 아니었다.

허점을 찔린 블라르 백작은 그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아, 그게··· 쓸만하고 잘 따라오면 안 죽일 수도 있고···."

그러자 카르멘이 코웃음을 쳤다.

"하! 됐다. 계속 헛소리나 하겠다면 이만 일어서겠다. 제 생각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모지리랑 더 대화할 것도 없다."

나는 그 대단한 블라르 백작을 아직 모자란 놈으로 만들어 버리는 에인션트 할머니 카르멘의 관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나이는 무시 못 하겠구나!'

카르멘이 승자의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블라르 백작이 황급히 그녀를 잡았다.

"시끄럽소! 내 확고부동하게 말하리라. 이 블라르, 소렌 다켄발트를 후계자로 삼겠소이다! 그러니 선배야말로 허튼 소리하지 마시고 물러나시오!"

"뭐라?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본디 강물이 흐르면 앞물은 뒷물에 밀려나는 법. 선배의 처지가 그와 같소. 그러니 그만 골방의 관속에나 들어가시고 세상사에 관심을 끄시오!"

"뭐라! 이놈! 핏덩이를 가르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다 컸다고 망발이 지나치구나!"

블라르 백작과 카르멘은 성난 개처럼 서로의 이마를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말은 험하지만 놀랍게도 사이가 나빠 보이지 않았다.

'둘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뭐지?'

아무튼, 웃긴 게 블라르 백작은 이제는 진짜 날 후계자로 받아들일 기세였다.

뭔가 간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낚아채 가려고 하는 걸 보고 생각이 바뀐 느낌이랄까?

게다가 가문의 숙원을 들먹이는 걸 보니 블라르에겐 나를 죽이는 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닌 듯했다.

급기야 둘은 말다툼이 격해지더니 한 가지 합의에 이르렀다.

"이렇게 된 이상 소렌에게 선택하게 하는 건 어떻겠느냐? 핏덩아."

"좋소이다. 노인네. 우리가 한 가지씩 기술을 가르쳐 본 뒤에 그가 최종 선택을 하게 하면 이치에 맞겠소."

"네놈 말 잘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내기까지 하자꾸나. 소렌이 선택한 쪽이 이긴 것이다. 진 쪽은 얌전히 포기하고 상대의 부탁까지 들어줘야 한다."

"크흠······."

"블라르, 쫄았느냐?"

"이런! 빌어먹을! 허튼소리 마시오!"

그렇게 의견을 조율하자 둘은 동시에 날 휙 돌아보며 한목소리로 외쳤다.

"누굴 선택할 것인가!"

"누굴 선택할 것인가!"

둘의 기세에 나는 양손을 들고는 일단 달랬다.

"두 분이 말씀하시길, 제가 선택하기 전에 각자 기술을 하나씩 가르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먼저 블라르 백작이 나섰다.

"흥! 네놈은 운이 좋은 줄 알아라. 그러니 닥치고 내게 배우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다."

그러자 듣고 있던 카르멘이 비아냥거렸다.

"우리 핏덩이 말이 길구나. 자신이 없는 모양이군."

"시끄럽소! 정말!"

다시 발끈하는 블라르 백작. 그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소렌 다켄발트. 나는 네가 블러드문을 다루는 기술을 가르쳐주겠다. 네놈은 재능이 있어 달을 띄우긴 했지만 그것으로 무얼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른다. 이 몸에게 배운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강해질 터. 어떤가?"

"호오···!"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질 혹한 제안이었다. 블러드문은 신체개조 9단계의 막강한 기술. 숙련만 할 수 있다면 그때 동굴에서 블라르 백작이 보였던 압도적인 위용을 흉내 내는 것도 가능해지리라.

너무나 먹음직스러운 미끼라 나도 모르고 군침을 삼켜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블라르 백작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크흐흐, 마음에 드나 보군. 노인네! 아무래도 이번 건은 내 승리 같소!"

"시끄럽다. 비켜보거라."

카르멘은 손등으로 블라르를 밀더니 나섰다.

"내가 자네에게 제안할 게 더 유용하다고 확신하네."

"무엇입니까?"

카르멘의 대답은 기대 이상이었다.

"일식의 검을 발동할 단초를 제공해주지."

"!"

일식의 검이라면 딱 한 번 사용해 본 적이 있는 궁극기다. 과거 친애하는 아단 삼촌을 성불시키는 데 사용했었지.

'카르멘이 그걸 어떻게 알지?'

잠시 헤아려 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그녀의 책상에 올려져 있던 드라큘라 신상.

'드라큘라에게 들었구만.'

에인션트 뱀파이어 정도의 절대자면 섬기는 신과 가까운 관계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갔을 터.

'더 고민할 것도 없군.'

내 마음은 급격히 카르멘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러자 블라르 백작이 다급히 말려왔다.

"네놈! 아, 아니. 소렌. 자네, 설마 그 노인네를 택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하하, 백작님. 최종 결정은 양쪽 기술을 다 배워본 후이지 않습니까? 벌써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다만, 제시한 걸 들으니 카르멘 님 쪽이 더 마음에 듭니다."

"이, 이런!"

나는 블라르 백작에게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직 바꾸실 기회가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블러드문보다 더 좋은 거 없냐는 소리였다.

마침 블라르가 만들어 놓은 석재 의자가 있기에 그쪽에 앉아 팔걸이에 두 팔을 떡하니 올려놓았다. 어째서인지 턱의 각도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

────────────────────────────────────

고블린의 왕자(1)

위기에 빠진 뱀파이어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은 대체로 비슷했다. 설령 지상최강의 뱀파이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 블라르 백작님 도망가나요?"

막 내빼려고 했던 블라르 백작이 내 한 마디에 발끈했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네놈 욕심이 도무지 만족을 모르기에 다른 걸 생각해 오겠다는 것 아닌가?"

"···그러시군요."

"이 몸처럼 바쁜 이는 한곳에서 오래 머물 수 없다. 잠시나마 귀한 시간을 내어준 것에 감사하라."

그 말만 남기고 블라르 백작은 사라졌다. 좀 더 그럴싸한 걸 고민해 보겠다는 말과 함께.

싸울 때는 세기말 패왕 같이 압도적인데, 도망칠 때는 사람이 뭔가 없어 보였다. 카르멘은 그 꼴을 보며 웃어댔다.

"흐흐하핫! 저놈이 저렇게 곤란해 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군."

나는 바로 카르멘에게 감사를 표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동안은 밤에 발 뻗고 잘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블라르 백작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카르멘이 끼어드는 바람에 당장은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

발끈해서 후계자 운운했으니 이제 날 공격할 명분도 없어진 상태. 뭔가 새로운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목숨을 위협받지 않게 됐다.

"고마워 할 것 없네. 자네에게 그런 천고의 자질이 없었다면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니."

카르멘은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으니 이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누가 천하의 블라르 백작과 말싸움을 벌이며 문제를 해결해주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군요."

"나 역시 그렇지만, 내기는 내기. 기다려 보세나. 블라르 놈도 자존심이 있으니 괜찮은 걸 준비해 올 테지. 아마 지금 고민 중이일 걸세. 어디까지 가르쳐줘도 되는지 말이야."

"알겠습니다. 한데 카르멘 님께선 일식의 검을 쓸 수 있으신 겁니까?"

그 말에 카르멘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네. 그건 자네처럼 빛 속성의 신을 섬기는 뱀파이어만 가능할 텐데, 그런 이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나?"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다만, 그 원리를 가르치는 건 가능하네. 그래서 단초를 제공하겠다고 한 거고."

"감사합니다.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난 돌파구입니다."

"좋아. 다만 쉬운 이론은 아닐세. 급하게 마음 먹지 말고, 섀도우타운에 올 때마다 날 찾아와서 배우게."

이후 섀도우타운으로 돌아가서 카르멘에게 일식의 검에 관한 기초적인 강의를 들었다.

배우면 배울수록 어째서인지 아단 삼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둘만의 추억이 어린 기술이기 때문이겠지.

'···그곳에선 잘 지내고 계십니까?'

나이가 들수록 가족이 소중한 걸 알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늘 넉넉하던 삼촌이 보고 싶었다.

***

블라르 백작의 문제도 해결됐겠다, 드디어 물질계로 나왔다.

"사회의 공기는 달콤하군."

곧장 향한 곳은 스킨크 둥지. 에레미나를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한데 둥지 내부의 터널에서 뜻하지 않은 인물을 만나게 됐다.

발레나 공녀였다.

공녀의 하얀 얼굴은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갑옷 대신 작업복 차림이었다. 스킨크 둥지 건설에 심취했던 건지 성기사는 어디 가고 무슨 건설 노동자가 돼 있었다

"공녀."

"아, 오셨습니까."

"정화의 기사단과 연락은? 어떻게 됐지?"

정화의 기사단 건에 대해서 처음에는 직접 관여했는데, 나중에 얘기가 잘 되자 바쁘기도 하고 그냥 발레나 공녀에게 맡겨버렸다.

"얘기가 잘 됐습니다. 단장님께서 다켄발트 님과 협력하는 것에 적극적이시거든요. 최대한 빨리 회동을 원하십니다."

"단장이 나서겠다는 건가?"

"네, 맞습니다."

정화의 기사단은 그 목적이 어떻든 간에 교단 내부의 반동 세력이다. 그래서 종적을 감추고 은밀히 활동하기 때문에 단장은 최대한 몸을 사린다. 한데 직접 만나고자 한단다.

"듣자 하니, 여러 가지 풍파가 밀려오는 것 같습니다. 단장님께서 오셔야 할 정도로요."

"흐음··· 알겠다."

"닷새 뒤에 켄트에서 만나길 원하시는데 괜찮겠습니까?"

"꽤나 구체적이군."

켄크면 미혹의 산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소도시다. 태양 교단의 본단이 있는 왕국의 수도에서는 꽤 거리가 있으니, 이쪽의 편의를 봐준 장소라고 하겠다.

'점점 증가할 태양 교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선 정화의 기사단과 손을 잡는 게 필수지.'

나는 발레나 공녀에게 일을 진행하라고 했다.

"닷새 뒤에 보는 걸로 하지. 공녀, 너도 같이 간다."

"알겠습니다."

***

닷새 뒤, 자정.

나는 왕국의 소도시 켄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 있었다. 도시는 대부분 어둠에 잠겼고,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몇 곳 정도에서만 희미한 불빛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철컥. 철컥.

내 뒤쪽으로는 갑옷 소리가 들렸다. 드워프 용병 21명으로, 이번 여정을 위해 경호원으로 고용한 자들이다. 비용은 내 충실한 하인인 딥델버가 냈다.

'협력을 위해 왔다지만 태양 교단의 인물을 만나는데 맨몸으로 갈 수는 없지.'

나는 드워프 용병들에게 명했다.

"나쁜 분위기는 아닐 거다. 그래도 놈들이 갑자기 돌아서 손에서 태양광 같은 걸 뿜기 시작하면, 도끼로 대가리를 쪼개버려라. 그러라고 고용한 거니까."

"알겠습니다. 어르신!"

드워프 용병들은 날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스톤헤븐의 귀족인 딥델버가 내게 연신 허리를 굽히는 걸 본 까닭이다. 게다가 뱀파이어는 겉모습만 보고 나이를 알 수 없으니 일단 어르신이라고 하는 거다.

"좋아, 가자고."

발레나 공녀가 약속 장소로 안내했다. 만나기로 한 곳은 켄트 외곽에 있는 농장의 창고다.

가보니, 이미 농장 앞에 갑옷을 있고 두건을 쓴 자들 몇이 서성이고 있었다. 발레나 공녀가 얼른 가서 인사를 했다.

역시 종교인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듯 서로 반가워하며 성호를 그어댔다.

"공녀님, 무사하셨습니까?"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대충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곧 책임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한 무리의 남녀가 보였다.

딱 봐도 태양 교단의 성기사와 사제들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여우 같은 인상의 사내가 보였다. 나이는 30대 후반 가량. 눈매가 가늘어 마치 만화 속 실눈 캐릭터를 떠올리게 했다.

'정화의 기사단 단장이군. 게임 속에서 보던 것과 똑같이 생겼네.'

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해왔다.

"어서 오십시오. 다켄발트 님."

나는 장갑을 낀 손을 들어 보이며 거절했다.

"예절을 모르지 않지만, 너희 태양 교단은 나한테 좀 해로워서 말이야. 특히 너 같이 신성력이 높은 존재는 괴롭지. 이해해 달라고."

"아, 이런 실례했습니다."

남자는 머쓱하게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일부러 악수를 하려 했음을 알았다.

'음흉한 놈 같으니라고.'

저놈은 악수만 해도 상대의 마력이나 신성력의 깊이를 파악할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날 한 번 재보려는 거였기에 핑계를 대고 딱 잘라 거절했다. 장갑도 괜히 끼고 온 게 아니다.

"주변을 좀 물려도 되겠습니까?"

단장이 자신의 단원들과 내가 데려온 드워프들을 보며 물었다. 나는 끄덕였다.

"좋아. 그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시원시원해서 좋으시군요. 자리 좀 비켜주시죠. 모두."

성직자와 사제들이 모두 이동했다. 드워프 용병들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뒤따랐다.

"자, 이제 일 얘기를 해보자고. 단장."

"알겠습니다. 중요한 소식이 있어서 직접 왔습니다. 안 그러면 믿지를 않으실 듯해서요."

"뭔데? 비밀결사의 단장이 직접 올 정도인 게?"

태연하게 되물으면서 내심 불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대체로 적중하는 법이다.

"지금 교단 본부에서 대규모 원정을 준비 중입니다. 유례가 없는 규모입니다. 지금 곳곳에서 성기사들과 종복, 전투 사제들이 집결 중입니다. 심지어 성기사단장까지 출격할 거란 얘기가 파다합니다."

"아니, 성기사단장까지? 대체 무얼 하려고?"

"서진해서 어둠의 숲에 있는 블라르 백작을 공격할 것 같습니다."

"뭐라? 블라르 백작을?"

생각 이상으로 놀라운 얘기였다. 드디어 태양 교단이 칼을 뽑고 지상최강의 뱀파이어를 갈아버리겠다고 나선 거니까.

교단 최고의 검인 성기사단장이 나서면 블라르 백작도 위험해진다. 상성의 문제라고 할까?

객관적인 힘이야 블라르 백작이 더 강하지만, 성기사단장의 능력은 뱀파이어에겐 쥐약 그 자체였다.

아무튼, [블라르 백작 VS 성기사단장]의 드림매치가 이뤄지는 건가?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졌다.

"네, 아무래도 백작은 오래전부터 눈엣가시였으니까요."

"쉬운 싸움이 아닐 텐데. 아니, 그것보다··· 아무리 협력하기로 했지만, 교단의 작전을 이렇게 뱀파이어에게 누설해도 되나?"

"아, 그게 사정이 있습니다. 정화의 기사단 쪽에선 이번 원정을 최대한 막고자 합니다."

"왜지?"

"이 일에 에인션트 뱀파이어들이 강한 입김을 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원정을 주관하는 자들이 에인션트 뱀파이어와 연관이 있는 교단의 부패 세력이라고.

"저희는 이번 일에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확실히··· 하지만 명분 자체는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블라르 백작은 뱀파이어고, 실제로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건 맞으니까."

"그래서 더욱 문제입니다. 명분이야 확실하니 반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중요한 건 원정의 본질이지요."

정화의 기사단이 우려하는 부분 이랬다. 이번 일 자체가 블라르 백작을 증오하는 에인션트 뱀파이어들의 부추김으로 일어난 것이라 했다.

그 결과 블라르 백작이 실각하면 에인션트 뱀파이어들이 득세할 테고, 그게 인간에게 더 큰 위협이 될 거란 얘기였다.

"교단 소속인 제가 블라르 백작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는 자기만의 선을 명확히 지키고 있습니다. 반면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든 생물종을 파멸시킬 겁니다."

"문제로군."

"맞습니다. 반대할 명분이 없는 원정인데, 손 빨고 보고만 있으면 모든 게 더 나빠질 테니까요. 원정대가 승리하면 이번 일을 찬성했던 교단 내의 권력자들도 더욱 득세할 겁니다."

에인션트 뱀파이어와 부패한 사제들의 힘이 동시에 커진다는 거다. 정화의 기사단에겐 끔찍한 상황이겠지.

"그래서? 나한테 이런 중요한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겠지?"

"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저희와 협력해서 이번 원정이 유야무야 끝나게 도와주십시오. 정화의 기사단은 블라르 백작의 존속을 바랍니다. 어쨌든 그의 존재 자체가 에인션트 뱀파이어를 위한 견제니까요."

"음···."

"다켄발트 님께서도 에인션트 뱀파이어에게 반대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상황이 참으로 괴이했다. 태양 교단의 인물들과 뱀파이어들이 저마다 합종연횡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패 사제들은 에인션트 뱀파이어와 편을 먹고, 정화의 기사단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모든 이의 시선이 어둠의 숲에 있는 블라르 백작에게로 향할 터였다.

"이거 참 복잡한 문제군."

카르멘이 일을 해결해 주기 전이라면 블라르 백작이 뒤지게 뒀을 것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내 생존에 위협이었으니까.

하지만 상황 자체가 달라졌다. 게다가 내 입장에서도 블라르 백작이 몰락하면 큰 문제였다.

미혹의 산과 인간 왕국 사이에 있는 게 블라르 백작이 다스리는 어둠의 숲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

블라르 백작이 무너지면 태양 교단 놈들은 반드시 일곱 봉우리까지 세력을 넓히려 할 거다.

지금도 은근슬쩍 공작을 해오는데 블라르 백작이 없어지면 이 산지에 성기사와 사제들이 보무도 당당히 활보할 터. 그 모습에 나는 집안에서 바퀴 떼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놀랄 게 뻔하다.

'블라르 백작은 태양 교단이란 파도를 막는 방파제 같은 거지.'

하면 적어도, 내가 일곱 봉우리를 통일하고 강력한 군주로 거듭날 때까지 버텨줘야 한다. 일곱 봉우리의 힘을 하나로 결집하면 태양 교단에게 더 이상 벌벌 떨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아직 스킨크의 바위 봉우리 밖에 점령 못 했는데···.'

이 문제를 어찌할 건가 고민하던 중 단장이 한 가지를 더 알려왔다.

"참, 이번 공격 목표에 다켄발트님도 포함돼 있습니다."

"뭐라고?"

"최우선목표는 아닌데, 교단에서 원정에 나선 김에 같이 처리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아니, 나 같이 선량한 뱀파이어가 어디에 있다고? 날 왜?"

"······단순히 뱀파이어라서가 아닙니다."

"그럼 왜?"

"핏빛 새벽 교단 때문입니다."

태양 교단의 목표는 일곱 봉우리까지 세력을 떨치는 거다. 그런데 웬 듣도 보도 못한 종교가 출현해 스킨크를 집어삼켰다.

당연히 태양 교단이 보기에 거스릴 수밖에. 한데 마침 그 교단의 사도란 놈이 뱀파이어고 하니, 잘됐다고 토벌해 버리려는 것.

"이거 영역 다툼 같은 건가?"

"네, 맞습니다. 마침 뱀파이어기도 하니 태양 교단 입장에선 맘 놓고 때려도 되겠다 싶은 거죠. 잘못하면 신생 종교를 탄압한다는 소리를 들을 텐데, 간악한 뱀파이어가 우둔하고 가여운 스킨크를 홀렸다는 식으로 명분을 확보할 생각 같습니다."

"······와."

역시 대형 교단의 노하우는 확실하구나. 차후 경쟁자가 될 새싹을 확실히 밟아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 전쟁, 나도 피해갈 수 없을 것 같군."

***

단장의 말에 의하면 태양 교단에서 대규모 원정대가 출발하는 건 대충 넉 달 뒤라고 했다.

지금 왕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성기사들과 전투 사제를 소집하고, 필요한 물자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예상되는 규모만 해도 대략 삼천가량이니 내겐 심각한 위험이었다. 골짜기를 지키는 인원이 스킨크 경비대 수십 정도니 삽시간에 쓸려나갈 터.

당장 골짜기 입구에 성벽과 관문을 설치하고, 병력을 추가로 확보해야겠군. 그렇게만 하면 막을 수는 있을 거다.

'문제는 그래선 수비 말고는 할 게 없다는 거지.'

골짜기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손 빨면서 보는 수밖에 없을 터. 그저 태양 교단이란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입장이 되는 거다.

하지만 그건 하책이다. 기왕 오는 전쟁이라면 여기서 최대의 이득을 얻어내야 하는 게 고인물의 본분이니까.

'즉, 나도 천 단위의 병력을 모아서 이번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다행히 전비라면 충분히 있다. 문제는 어떤 종족을 모병하냐는 거다.

'드워프가 제일이긴 한데, 이번 일에 끼지 않으려고 하겠지.'

드워프들이 태양 교단을 싫어하긴 하지만, 에버송과 연합 왕국을 만드느라 여력이 없다. 게다가 뱀파이어 토벌의 기치를 들고 일어나니, 드워프가 그걸 방해하기도 그랬고.

당연히 드워프는 탈락. 일곱 봉우리의 다른 종족을 용병으로 고려해야 했다.

'역시 고블린이 최고인가?'

고블린은 일곱 봉우리 중 '황량한 봉우리'란 곳에 거주한다. 그곳은 일곱 봉우리답지 않게 자원이 풍부하지 못하다. 게다가 고블린들이 광산업에 서툴기도 했고.

그래서 고블린들이 먹고 살기 위해 가장 열심히 뛰어드는 게 바로 용병 사업이다.

번식력이 뛰어난 고블린은 용병을 파견해 번 돈으로 그들의 작은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곱 봉우리와 주변의 분쟁에 고블린 용병이 안 끼는 곳이 없었다.

'오죽하면 고블린 꼬맹이들의 장래 희망 1순위가 용병일 정도니···.'

물론 고블린 군대가 탐욕스럽고, 규율이 난잡한 게 문제긴 하다.

하지만 그들이 숙련된 전쟁 기술자들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전쟁 용병으로서의 신뢰라는,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전투에서 좀처럼 후퇴하지 않는 호전성도 높은 점수를 줄 만했다.

'고블린으로 정해야겠군.'

다만, 이번에 내 모병은 단순히 용병을 모집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이참에 고블린 왕국을 통째로 접수해 버릴 생각이니까.

'슬슬 두 번째 봉우리를 먹을 때가 됐지.'

전쟁은 그것을 위한 훌륭한 기회를 제공할 터였다.

'생각해 보니 오히려 좋군.'

처음에는 고객으로 다가가야지. 그러다 태양 교단과의 싸움에서 고블린 지도부가 몰살되게 만들면 놈들을 먹어치우는 게 더욱 수월해질 터.

"태양 교단 문제도 해결하고 고블린 지도부도 죽여버리고, 아주 개꿀이로군. 크흐흐흐!"

지도부가 죽어버리면 고용비도 안 줘도 되는 건가? 용병들이 난리를 치긴 하겠지만, 지도부가 먹튀했다고 하면 되겠지. 어차피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역시 전쟁은 기회야.'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나 같은 사람들은 복을 받으니 말이다.

────────────────────────────────────

────────────────────────────────────

고블린의 왕자(2)

***

성녀께 소원권을 하나 사용했다.

"박해받았던 고귀한 존재시여, 고난을 이기고 어둠의 존재를 돌보는 어머니시여······."

이번 건 무척 중요했다. 바로 엘프 공주 알테아에게 받은 데이워커의 인자를 가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이워커 인자를 개조해 태양에 면역을 가지면서도, 뱀파이어로서의 힘은 떨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다. 이것은 태양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성녀만이 해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른 신들은 못하니까 말이지.'

곧 왼손의 낙인에서 붉은빛이 일렁였다. 이것은 양봉으로 긍정의 신호다. 동시에 먼 차원에서 성녀의 의지가 느껴졌다. 시간이 걸린다는 얘기였다.

게임에서도 인자의 가공에 시간이 필요했기에 예상하던 바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데 성녀의 의지에서 뭔가 작은 당혹감, 부끄러움 같은 것도 흘러나왔다.

'뭐지?'

뜬금없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워낙 작아서 금방 사라졌기에 더 신경 쓰지 못했다.

이후 데이워커의 인자를 피의 제단에 안치했다. 제단에서 흘러나온 신성한 빛이 병에 든 데이워커의 인자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신비로운 광경입니다. 주인님."

옆에 있던 에레미나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제단을 보고 있었다. 여전히 작긴 하지만, 처음 봤을 때보다 부쩍 컸다.

"에레미나. 이번에는 고블린을 보러 갈 생각이다."

"훌륭하십니다. 드디어 그 잡스러운 녹색 피부 놈들이 주인님의 수중에 떨어지겠군요."

"이번에는 너도 같이 간다."

에레미나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짓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정말 자기 맞냐고 묻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녀석은 골짜기에 온 뒤로 집만 지켰기 때문이다.

"맞다."

고개를 끄덕여주자 에레미나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이 디폴트값인 녀석인지라 저 정도면 꽤나 기쁜 거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을 이 꼬맹이를 더 기쁘게 해주는 법을 나는 알고 있지.

"너는 나의 권속이지 않느냐. 당연히 같이 가야지."

권속을 강조하는 그 말과 함께 에레미나의 광대가 승천했다.

"헤헷―!"

처음 보는 광경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렇게 귀엽게 웃는 아이였다니.

나는 흐뭇한 기분이 들어 에레미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하나 그렇다고 이 녀석을 무르게만 대할 생각은 없다.

'슬슬 실전 경험 같은 게 필요해. 어리다고 싸고돌면 험난한 뱀파이어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에레미나가 출타 중에 골짜기의 내정은 믿을 만한 노예인 딥델버에게 맡길 예정이었다.

딥델버는 재정 운용과 공사 감독에 탁월한 실력이 있다. 애초에 그런 일을 주로 하는 가문의 가주기 때문이다. 골짜기에서 진행 중인 공사와 관리를 착실히 해줄 수 있을 터.

"에레미나, 여정을 준비하도록. 특히 태양 저항 물약은 든든하게 챙겨라."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나와 함께 간다는 게 기쁜 건지 에레미나는 열심히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

피의 제단이 있는 지하실을 거의 봉인하듯 잠그고는 에레미나와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고블린들의 거주지인 황량한 봉우리다. 그곳의 외형은 일곱 봉우리에서도 특이했다.

땅 파는데 재주에 있는 드워프, 놈, 스킨크, 코볼트 등과 달리 고블린은 서툴렀기 때문이다. 그들의 갱도는 자주 무너졌고, 기술은 도무지 발전할 줄을 몰랐다.

결국 지하 도시를 만든 다른 종족과 달리 외부에 조잡한 도시를 세웠다. 그 도시들은 대체로 온갖 쓰레기와 거친 자재를 이용해 얼기설기 쌓아 올린 것이었다.

그래서 봉우리에서 강풍이 부는 계절이면 여러 건물이 무너지곤 했다. 하지만 고블린들은 그걸로 불평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남의 집 자재를 약탈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집 한 채가 무너지면 근처의 몇 채가 좀 더 튼튼해지곤 했다.

고블린은 그것을 공공의 발전이라 불렀다. 나는 이런 점을 고블린의 도시로 향하며 에레미나에게 들려줬다.

"놈들에겐 도둑질이란 개념이 없다."

"하면 그건 무엇인가요?"

"그냥 물건의 위치를 이동시킨 것에 불과하다."

"헤···."

녀석은 흥미 가득한 눈으로 이야기를 경청했다.

여정은 별다른 일 없었고, 우리는 고블린 도시 가운데 하나인 '용병굴'에 도착했다. 에레미나는 흥미롭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모두 활기차 보입니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제법 많은 돈이 오가는 곳이니까."

용병굴에는 고블린 용병을 고용하기 위해 사방에서 여러 종족이 모여든다. 또한 고용을 기다리며 휴식 중인 고블린 용병도 잔뜩 머물렀다.

용병들은 대체로 조잡한 굴집에서 살았기에 이곳을 용병굴이라 부르게 됐다.

주변은 불야성으로, 고블린들이 어둠 속에서도 잘 보긴 하지만 몰려온 다른 종족을 배려한 조치였다. 용병을 중개해주는 사업자들의 수완이 좋다고 하겠다.

"자자, 참전만 했다면 승리하는 무적의 용병대대인, '구더기 잔치 약탈자' 부대를 고용하시라! 이것은 적들의 시체로 사방에 구더기가 들끓게 하는 우리의 무용 때문이라오! 켁! 케켁!"

한 용병사업자가 외치자 주변에서 누군가 야유했다.

"지랄! 지난 싸움에서 구더기 잔치는 지들 몸으로 했으면서! 저딴 개허접 부대는 신경 쓰지들 마쇼!"

"뭐라!"

"케케켁! 우리 '곰팡이 미트볼' 부대야말로 손님들에게 승리를 안겨줄 수 있소! 이름이 말해주듯 우리 부대는 아무거나, 그 무슨 안 좋은 걸 처먹어도 버틸 수 있단 소리요! 군대의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현명한 이라면 우리 부대의 명성을 흠모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케륵! 케륵!"

누군가 했더니 경쟁 중인 다른 용병사업자였다. 당연히 곧 말다툼이 일어났고, 양쪽에 소속된 용병들까지 가세해 패싸움이 벌어졌다.

"덤벼라! 평생 그 미트볼만 먹게 해주마!"

"야! 저 새끼들 다 굴에 파묻어! 케케케!"

에레미나는 그 광경을 쳐다보며 즐거워했다.

"역시 고블린들은 책에서 본 것과 똑같이 미개합니다! 정말 멍청한 것들입니다."

"여기선 일상이지."

"그래도 재밌어 보여서 나쁘지 않군요."

의외로 에레미나는 고블린을 좋게 본 모양이다.

"그나저나 주인님. 이 번잡한 도시에서 무얼 찾으려고 하십니까? 주변에는 온통 냄새나는 고블린들 뿐이군요."

"앞으로 벌일 일을 위해서, 몇몇 유력한 고블린 용병사업자들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지. 음···? 아니, 잠깐!"

나는 에레미나를 멈춰 세우고 앞을 봤다. 저 앞쪽 도시의 광장 쪽에 버건디 색의 커다란 깃발이 펄럭이고 있어서다.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

"저기 깃발을 봐라. 저것은 고블린 왕 쿠룬닥의 깃발이다."

"하면 고블린 왕이 용병굴을 방문한 상태란 말입니까?"

"그래, 이거 잘됐구나. 왕을 만날 수 있다면 일이 수월해진다. 굳이 용병사업자들에게 뇌물을 찔러줄 것도 없어."

애초에 한가락 하는 용병사업자들을 찾아가려 했던 건 궁극적으로 왕을 만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저렇게 나타났으니 귀찮은 과정을 건너뛸 수 있을지 모른다.

"왕을 만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아마도? 고블린이란 놈들은 인간보다 더 뇌물을 좋아하거든."

오죽하면 고블린의 역사에 뇌물로 길을 열어 왕을 암살한 얘기까지 있을 정도다. '왕의 배때기까지 금화 31개'라 하면 가히 전설적인 일화다.

"가자."

왕의 깃발을 향해 가는 동안 여러 경비병을 만나게 됐다. 하지만 금화를 찔러주며 왕께 탄원할 게 있어서 왔다고 하자 모두 길을 비켜줬다.

게다가 이쪽은 딱 봐도 냉기 풀풀 흘리고 있는 뱀파이어라 고블린들도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이대로 무난하게 왕과 만날 수 있나 싶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한 인물이 떡하니 내 앞을 가로막았던 것.

"돌아가라! 뱀파이어! 지금 왕께선 네놈을 만날 수 없다! 케륵케륵!"

그는 고블린 중에서도 유난히 키가 큰 용병사업자겸 장군이었다. 키가 거의 인간만 하고 온몸이 근육질이었다. 언뜻 보면 고블린이 아니라 오크로 착각할 정도다.

"왜? 내 성의가 부족한가?"

"알 것 없다. 꺼져라!"

놈은 태도가 아주 거칠었다. 보통 고블린이란 종자들은 반짝이는 것 앞에서 유들유들 태도가 풀리기 마련인데 왜 이러지?

의아해서 주변을 힐끔힐끔 살펴보니, 앞쪽에서 풍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왕이 저기 있을 거다.

'이놈 왕을 불러다 뭔가 접대를 하고 있나 보군.'

용병사업자들은 정기적으로 왕에게 재물을 상납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부탁을 하곤 하는데, 아마 지금 그 타이밍인 것 같았다.

나는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돈을 더 내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잠깐만 왕과 얘기를 하게 해주면 된다. 어차피 이 밤은 길지 않나."

짧은 시간만으로 이 소렌, 왕을 혹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새끼가 되게 빡빡하게 굴었다.

"꺼져라! 더 말하지 않는다."

놈은 허리춤에서 검을 살짝 뽑아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덩치 큰 고블린 어깨들이 몰려와 날 위협했다.

"뱀파이어. 말뚝 맛 좀 보고 싶나? 케케케!"

"물러나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러면 광장에 묶어두겠다! 태양을 만나도록!"

"마늘을 으깨서 눈에 비벼주마."

으르렁 대는 덩치 놈들을 보니 대가리를 다 깨 놓고 싶었다. 하지만 여긴 고블린들 소굴의 한복판. 결코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앞으로 이 동네에서 할 일이 많으니 어쩔 수 없군.'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대신 내 앞에서 싸가지 없게 군 놈들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모조리 얼굴을 기억했다.

나중에 보복하기 위해서였다.

"알겠다."

일단은 그렇게 빠졌는데, 에레미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런 격한 표정은 처음이었다.

"터무니없이 무례한 놈들입니다! 감히 주인님께! 잠시나마 놈들을 좋게 본 것이 수치스럽습니다. 앞으로 평생 복수해주겠습니다."

"평생···?"

"네, 오늘 제 복수 목록에 하나가 늘었습니다. 고블린 놈들을 부모의 원수인 오크와 똑같이 취급하겠습니다."

아니, 에레미나야.

그게 무슨 말이니.

아무튼, 전설급 인재인 에레미나가 원한을 품었으니 앞으로 고블린 놈들 미래에 먹구름이 꼈다고 봐도 좋았다.

"너무 흥분할 것 없다. 이번 문전박대는 반드시 갚아줄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대화를 하며 걷다 보니 마을의 중앙 광장에 도착했다. 번잡한 이곳 가운데 신상이 하나 서 있었다.

바로 고블린 종족신인 '스카브누그'의 신상이었다. 덩치는 크지 않았지만 쓰고 있는 모자는 길쭉하고 컸다. 저게 스카브누그의 꾀와 지혜를 상징한다고 한다.

나는 잠시 멈춰서 스카브누그의 신상에 목례를 했다. 섬기는 신은 아니지만 꾀와 지혜로 유명한 신이니만큼 호감이 갔다.

"수수께끼의 대가이자 책략의 실타래를 짜는 분이시여. 그 존의(尊意) 높게 빛나길 바랍니다."

사도는 신의 얼굴이나 마찬가지다. 뱀파이어 성녀가 소신격에 오른 이상 나도 다른 신에게 존중을 보이는 게 좋았다.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이상이 일어났다.

우르르릉.

지진이 난 것처럼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광장에 모여 있던 자들이 놀라서 비명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광휘가 신상에 내려꽂힌 것이다.

야밤에 이런 빛이라니! 지켜보는 자들이 혼비백산하는 게 당연하다.

"신상이! 케케켁! 스카브누그시여!"

"신성한 빛이다! 신께서!"

"엎드려라!"

신상의 질감이 점점 변하더니 급기야 돌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처럼 바뀌었다. 그리고 신상의 눈에서 안광이 뿜어졌다.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고블린 종족신인 스카브누그의 의지가 신상을 빌려 현현한 것이다.

[케륵. 크르르르!]

낮게 우는 신의 목소리가 울리자 소란을 피우던 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머리를 조아리며 찬양의 말을 내뱉었다. 그런 모습에도 스카브누그는 덤덤했다.

오히려 크게 치솟은 모자가 불편하다는 듯 손을 뻗어 이리저리 다듬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신이 이렇게 자신의 의지를 지상에 직접 드러내는 건 몹시도 드문 일이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대체 왜?'

한데 뜻밖에도 스카브누그는 나를 똑바로 보더니 반색했다.

[자네가 성공의 상징인 소렌인가! 케케켁!]

놀랍게도 스카브누그의 용건은 자기가 돌보는 고블린이 아닌 나인 것 같았다. 얼른 공손한 자세를 보였다.

"꾀와 지혜의 주인이시여. 제가 소렌이라 불리는 자입니다."

한데 스카브누그는 태도가 몹시 우호적이었다. 그의 교만한 성품에 비춰봤을 때 상당히 의외였다.

[맞군. 역시 잘 찾아왔어! 소렌이여. 본인은 그대에게 큰 관심이 있어 이리 현현했노라. 케륵! 케륵!]

아니, 대체 신이 나를 왜?

의아함만 가득하던 그때 스카브누그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해왔다.

[소렌, 혹시 자네. 나의 첫 번째 사도가 되어주지 않겠나?]

"네? 뭐라고요?"

[그대가 핏빛 새벽의 여신의 첫 번째 사도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사도의 직은 옮길 수도 있는 것. 최고의 조건을 약속하겠다! 케르르! 내게 오라.]

아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야? 갑자기 스카브누그가 강신한 것만 해도 대경할 만한데, 사도직을 제안하다니.

"귀한 분께 몹시 영광스럽습니다만, 받잡기 힘듭니다. 저는 별다른 위명이라곤 없는 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건 스카브누그에게 부정 당했다.

[아니다, 그대는 유명하다. 이미 아룬델에 소문이 크게 돌았다. 소렌이라고 하면 '성공의 떡두꺼비'로 불리고 있지. 직접 보니, 과연 은혜 잘 갚게 생겼구나, 이놈! 케케켁!]

아룬델은 여러 차원의 신들이 모인 도시다. 아니,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나는 당혹감 속에서도 한 가지를 확신하게 됐다. 성녀가 뭔가 제대로 사고를 친 것 같았다.

────────────────────────────────────

────────────────────────────────────

고블린의 왕자(3)

성녀께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눈앞의 상황에 대응해야 했다.

"과찬이십니다."

[자, 이럴 게 아니라 나랑 얘기 좀 하자구.]

고블린 신인 스카브누그가 강신한 신상은 정말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신상이 올려져 있던 단상에서 풀쩍 뛰어내리더니 근처에 엎드려 있던 고블린 왕을 불렀다.

[야! 뚱땡이! 너 이리 와봐라.]

스카브누그가 고블린 왕을 부를 때 손가락만 살짝 까딱까딱하는 게 마치 하인 취급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고블린 왕 쿠룬닥은 화들짝 놀라서는 재빠르게 달려와 부복했다. 그 덩치가 믿기지 않는 몸놀림이었다.

스카브누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통보했다.

[뚱땡아. 이 친구랑 길바닥에서 얘기할 수도 없으니 네놈의 그 악취미 가득한 궁전 좀 빌리자. 케케케!]

"무, 물론입니다! 케켁! 얼마든! 자, 앞장서겠습니다!"

고블린 왕은 비대한 뱃살 때문에 잘 굽혀지지도 않는 허리를 굽실거렸다.

곧 왕의 무리만이 아니라 용병굴의 방문자와 주민까지 우르르 뒤따랐다.

확실히 신의 의지가 물질계에 나타나는 건 진귀한 일이다. 사제가 아니라면 경험해 보는 자는 거의 없을 터. 다들 어떻게든 한 번 스카브누그를 보려고 기웃거리고 있었다.

마치 슈퍼스타가 나타난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스카브누그 님! 이쪽을!"

"저 좀 봐주세요! 케케케!"

스카브누그는 좀 특이한 신이었다. 지엄한 신격이면서도 자기를 부르는 고블린을 무시하지 않았다. 직접 눈을 마주쳐 주며 손까지 흔들어주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주변에 구름 같이 몰린 인파에서 환성이 터졌다.

"케에에엑! 나를 보셨다!"

"아니다. 내게 손을 흔드셨다!"

"올해는 운수대통이다! 케켁!"

다들 들뜬 얼굴이지만 고블린 왕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보다 더 심한 무리가 보였으니 바로 아까 날 무례하게 막아섰던 덩치 큰 용병사업자 고블린이었다. 유난히 어깨가 넓었던 그의 부하 셋도 다 죽어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다 그 용병사업자 놈과 눈이 마주쳤는데, 엄지로 목을 슥 긋는 시늉을 하며 웃어주자 그야말로 사색이 됐다.

당장이라도 달려와서 빌고 싶은 표정인데, 그럴 상황도 아니니 어쩔 바를 모르겠는 모양이다.

'나중에 처리해야지.'

나 소렌, 밥 먹는 건 까먹어도 앙갚음을 하는 건 절대 잊지 않는다. 어쩌면 에레미나의 첫 암살 목표로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일단 고블린 신 문제나 해결하고 말이지.'

한 시간 정도 뒤, 우리는 왕궁에 도착했다. 그곳은 화려하지만 최악의 미적 감각을 가진 장소였다.

스카브누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우리 종족은 생존에는 뛰어난데 어째서 집 꾸미기는 이렇게 덜떨어진 거지! 소렌, 여길 둘러보라고. 금으로 만든 쓰레기장 같잖나!]

확실히 그건 정확한 표현이었다. 고블린 왕이 용병 사업을 번 돈이 많긴 한 듯 사방에 금칠을 해놨지만, 그것에 절제와 균형,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모든 게 난잡하고 과했다. 사방이 지나치게 번쩍였다. 금을 입힌 우스꽝스러운 우상에는 커다란 보석이 천박하게 장식돼 있었다.

왕의 권좌에도 그저 보석만 많이 붙이면 된다는 듯 여기저기 더덕더덕 붙여놓은 꼴이 최악의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분명 보석인데 마치 따개비가 잔뜩 달라붙은 것처럼 보기 안 좋았다.

"아름다운 걸 가지고 이 정도로 연출하다니,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겠지요."

내 신랄한 평가에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는 껄껄 웃어댔다.

[아! 소렌! 이 친구, 유머에도 발군이구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 게게켁!]

스카브누그는 신랄한 유머를 좋아했기에 시도해 봤는데 효과가 좋았다.

우리는 곧 왕의 권좌가 있는 알현실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바닥에 철푸덕 앉았다. 원래 고블린들은 좌식이 기본이었고, 그나마 비싼 카펫을 가져다 놔서 앉을 만했다.

[마실 것 좀 가져와라. 이 빌어먹을 녹색 얼간이들아!]

스카브누그의 명령에 고블린들이 잽싸게 음식과 술을 가져왔다. 술은 악명 높은 고블린제가 아니라, 실버쿼츠 스타우트, 루비루트 와인 같은 값비싼 드워프술이었다.

'역시 돈만 충분하다면 고블린 술은 고블린도 안 먹는 모양이군.'

이 세계에 와서 좋은 게 게임에서만 보던 걸 실제로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의 설사와 양의 오줌을 섞은 맛이라고 하는 고블린 술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자, 한잔하라고. 켁켁! 좆같은 새끼들아 술만큼은 괜찮은 걸 구비하고 있구만. 암! 다음날 숙취에 해골이 깨지는 기분을 맛보기 싫으면 그래야지.]

스카브누그는 몸소 필멸자에 불과한 내게 술을 따라줬다. 주변에서 보더니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고블린 누구도 이 술자리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들의 왕조차 거리를 둔 채 떨어져 눈치만 보고 있었으니까.

즉, 이건 고블린 신과 나만의 회담이었다. 그는 바로 회유에 들어왔다.

[핏빛 새벽의 여신이 자네에게 무엇을 줬나?]

"이것저것 많이 해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케에!]

"박쥐로 변하거나, 마력이 늘어나는 등 다양합니다."

내 말을 듣더니 스카브누그는 가레가 끓는 것 같은 목소리로 웃어댔다.

[확실히 도움이 되는 능력이겠지. 그런 힘이 있으면 싸움에서도 유리하니까. 하지만 말일세. 이 몸은 그 이상을 제공해 줄 수 있다고.]

"그게 무엇입니까?"

내 물음에 스카브누그는 검지로 자기 관자놀이를 툭툭 두들겼다.

[바로 지혜다. 그것은 차원이 다른 힘이지. 케게켁! 여신이 자네에게 준 능력은 훌륭한 도구란 점에서 전투에서 쓰는 검과 같아. 그래, 검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 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게 뭔지 아나?]

답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지혜겠지요."

[영명하구만. 크크크게! 자네가 섬기는 여신은 분명 훌륭하겠지. 그녀를 평가절하할 수 없어. 필멸자에서 반신격까지 오른 것만 해도 얼마나 가시밭길을 걸어왔는지 알겠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

스카브누그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던지더니 내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 해왔다.

[나는 그녀가 줄 수 없는 지혜를 자네에게 선물해 줄 수 있어. 지혜란 모든 걸 이긴다고.]

"······."

[자네의 눈동자만 봐도 알겠어. 지금 공감하고 있지 않나? 우리가 비슷하다는 걸.]

확실히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는 어쩐지 나와 맞는 구석이 많은 듯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 농담으로 대신했다.

"확실히 스카브누그 님과 저는 닮긴 했습니다. 둘 다 아주 잘생겼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뭐라? 케케케켁! 케케케!]

스카브누그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뱀파이어들은 늘 딱딱하고 유머란 모르는데, 자네는 정말 다르군! 케케케케!]

그렇게 분위기는 좋았지만 내 머릿속은 풀가동 중이었다. 스카브누그는 쉽게 날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웃는 얼굴 아래 칼을 숨긴 상황이었다.

[역시 소렌, 자네가 내 사도직을 맡아줘야겠어.]

"죄송합니다. 제겐 성녀님이···."

[아, 결혼은 그쪽이랑 하시고 직장만 이쪽으로 다니면 될 거 아닌가? 케켁!]

"······."

대꾸할 말이 난처한 소리를 계속해댔다. 뭐라 답해야 할지 고심하던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공기가 윙윙거리며 떨리더니 엄청난 존재감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쿠웅! 쿵! 쿵!

발소리조차 묵직했다.

그와 함께 주변에 있던 고블린들이 비명을 터뜨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벌어진 그들 사이로 네 명의 비범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각기 다른 종족인 그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물질계로 출현한 신의 화신들이었다.

당연히 알현실 안에 있는 필멸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늘 스카브누그 하나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신격 넷이 더 출현한 것이다.

졸도한 이도 있었고, 달아난 이도 많았다. 어쩔 바를 모르고 그냥 바닥에 엎으려 바들바들 떠는 이도 보였다.

놀라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난리야?'

일단 재빨리 나타난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다행히 내 지식이 그들이 누군지 판별할 수 있게 해줬다.

가장 왼쪽에 있는 장대한 덩치의 오크가 바로 팔루크. 오크족 전사의 신이다.

오크의 주신은 대신격이지만, 전사신인 그는 소신격이다. 오크는 워낙 수가 많았기에 신들도 다양했고 그들만의 만신전을 지니고 있었다.

그 옆에는 토리아. 드워프 세공의 여신이었다. 그녀는 모든 드워프 세공사의 존경을 받는 소신격이다.

그 다음은 칼릭키. 코볼트 광부신이다. 날렵하고 재주 좋은 자로, 타고난 광부들인 코볼트의 지지를 받는 소신격이다.

마지막으로 제일 오른쪽에 있는 이는 노움이 섬기는 발명의 여신 살피라였다. 온갖 기괴한 장치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엔지니어로 역시 소신격이다.

이들의 라인업을 보니 바로 상황이 짐작 갔다.

'일곱 봉우리에 관심이 지대한 소신격들이 모두 모였군.'

다 그 위치가 현장에서 한창 뛸 신격이라고 할까? 중신격만 되어도 신도가 어마어마하기에 이런 지역 나와바리 싸움에 끼지 않는다.

반면 여기 모인 이들은 일곱 봉우리와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이 꽤 살벌했다.

[혼자 해먹으려 튀어나간 게 야비한 고블린 새끼답군! 크르릉!]

오크 전사의 신인 팔루크가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를 힐난했다.

[스카브누그, 혼자 이렇게 낼름 드시겠다?]

코볼트 광부신인 칼릭키도 혀를 낼름거리며 비난을 내뱉었다. 나머지 두 소신격도 다르지 않았다.

스카브누그가 선수를 쳐서 날 만난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스카브누그는 특유의 태도로 켁켁거리며 웃을 뿐 다른 신들이 눈을 부라리는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너스레를 떨 뿐이다.

[뭐? 그래서 사이좋게 손잡고 왔어야 한다는 건가? 멍청한 것들! 케케케! 그리고 나보다 조금 늦게 왔다는 것 때문에 소렌을 설득할 자신이 없는 건가? 내보일 밑천이 그렇게 허접하다면 여기 오지 않았던 게 나았을 걸?]

그의 조소에 오크 전사신인 팔루크가 발끈했다.

[이 미개하고 하찮은 고블린 놈이!]

하지만 그런 모욕에도 스카브누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비아냥댈 거리가 생겼다는 듯 좋아했다.

[케케케! 그 미개하고 하찮은 고블린의 매복과 전술에 매번 속는 멍청한 종족이 누구였더라?]

[이 빌어먹을 초록 피부 새끼! 말 다했나!]

오크는 힘과 덩치가 고블린을 압도하지만 일곱 봉우리에선 실제로 밀리고 있다. 고블린들의 유격전과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전술이 오크 전사들을 무척 곤란하게 만들었으니까. 팔루크가 저리 발끈하는 것도 당연했다.

반면 스카브누그는 여유만만한 자세였다.

[저 멍청한 오크 놈은 오자마자 떽떽거리지만, 나머지 셋은 다르겠지? 나는 이미 먼저 와 제안을 했었으니 물러나 있지.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어떤가?]

스카브누그의 제안에 나머지 세 신들이 받아들였다.

[좋아.]

[괜찮군. 알겠다.]

[중간에 끼어들지 말도록.]

오크 전사신인 팔루크만 불만이 큰 듯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가 제일 먼저 내게 제안을 해왔다.

[이 애송이 놈아. 다섯 번 목이 잘려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능력을 주마. 또한 일곱 봉우리에서 오크 전사들을 동원할 수 있게 해주지. 크르릉!]

혹하는 조건이었다. 목숨 다섯 개라니! 역시 바퀴벌레 같은 오크기에 제안할 수 있는 권능이었다. 게다가 오크 전사들을 쓸 수 있다면 매우 유용할 터였다.

그 뒤로 듣고 있던 드워프 세공의 여신 토리아, 코볼트 광부신 칼릭키, 노움의 발명신 살피라까지, 하나 같이 혹하는 제안을 해왔다.

하지만 무언가 하나를 고르기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고.

그런데 그때, 듣고만 있던 스카브누그가 슬쩍 끼어들어 훈수를 뒀다.

[좀 더 파격적인 걸 내놓으라고. 이 장님 같은 것들아. 저 소렌이란 자가 앞으로 일곱 봉우리와 그 너머에 퍼진 너희 종족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모르겠나?]

그 말에 드워프 여신 토리아가 물었다.

[예언이오?]

[아니! 케케! 하지만 나는 이게 예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해. 아니, 예언보다 더 정확하지! 누가 봐도 그렇게 될 거니까.]

스카브누그의 말에 신들의 대화가 점점 격해졌다.

[모두 꺼져라! 놈은 오크의 품에서만 진정한 전사로 거듭날 거다!]

[웃기네요. 전투가 전부가 아니에요. 무식한 자! 그리고 저자의 현명함이 오크랑 맞기나 하겠습니까?]

[끼긱! 우리는 광산의 모든 부를 약속하겠다!]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물러나지 않으니 다툼이 일었다. 나는 그걸 지켜보다가 이 모든 게 성녀의 뜻인가 싶었다.

처음에는 뱀파이어 성녀가 뭔가 사고를 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혜롭다. 게다가 특별한 통찰력이 있다.

내게 능력을 줄 때도 미래를 내다보고 내렸었다. 아단의 공양 이벤트 때 받았던 권속을 만드는 능력도 당시에는 왜 준 건지 몰랐지만, 위기의 순간 가장 유효한 해결책이었으니까.

한데 그런 성녀가 대책 없이 날 위기에 빠뜨린다?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지금 저마다 다투며 날 스카웃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조건을 추가하는 신들을 보며, 이게 충분히 이용할 기회라는 걸 알게 됐다.

'주목받는 이 상황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챙기라는 것 같군.'

내가 또 그런 건 잘하지.

신들 사이에 끼어들어 주둥이 좀 털어야겠군. 그런 생각과 함께 입을 열려고 하는데 한발 빠른, 나보다 간악한 이가 있었다.

바로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였다. 여태 낄낄거리며 지켜보기만 하던 그는 음흉하기 짝이 없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제안해왔다.

[이봐, 친구들. 누구도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저놈을 제거하는 게 어떨까?]

그 말에 다투던 신들은 놀란 표정이 됐다. 하지만 금세 끄덕이는 자가 나왔다.

[확실히··· 누구도 이득을 얻진 못하겠지만 우환은 사라지겠지.]

[크흠···. 누군가 독주하는 걸 볼 바에는.]

[분란은 제거하는 게 맞다!]

그리 말하던 신격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그들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늘했다.

'맙소사.'

나는 방금 했던 생각을 금방 고칠 수밖에 없었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기회 같은 게 아니었다.

'성녀님, 이거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요?'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는 재밌어 죽겠단 표정이었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는 잔혹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결정적일 때 남을 절벽에서 밀어버리는 그 모습이 역시 고블린 신다웠다.

스카브누그는 단검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광대처럼 웃으며 내게 눈으로 묻고 있었다.

이제 어쩔래?

너 좆될 거 같은데.

────────────────────────────────────

────────────────────────────────────

고블린의 왕자(4)

사방에 묵직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신이란 존재는 감정만으로 힘을 일으키는 게 가능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내게 살의를 품기 시작하자 무형의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여기에 휘말린 고블린들이 단체로 기절했다.

우르르르.

고블린 왕의 화려하고 천박한 궁전 역시 무너져 내릴 듯 기둥이 흔들리고 있었다. 날 일제히 쏘아보는 신들의 눈빛 역시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당혹감도 잠시였다.

신들이 날 압박하든 말든 느긋하게 근처에 있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넘겼다.

"그렇게 눈에 힘주면 안 피곤하십니까? 고블린들 숨넘어가는 데 적당히들 하시죠."

신들의 살의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넘기자 다들 좀 벙찐 표정이 된다. 보통 필멸자라 하면 신을 두려워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 신이 죽음을 운운했으니 납작 엎드리는 게 당연지사일 테니 의아할 수밖에.

하지만 나는 달랐다.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 두려움을 갖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신들은 세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어렵다.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불경하다고 화살 쏘거나 번개를 날릴 수 있는 세계관이 아니란 거다.

특히 여기 있는 소신격들은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하는 게 어렵다고 봐도 좋았다.

[저 녀석, 여유만만이로군.]

노움의 여신 살피라는 재밌다는 태도였다. 그녀는 품에서 괴상하게 생긴 돋보기 같은 걸 꺼내더니 날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판정했다.

[허세가 아니야. 정말로 두려워하지 않는걸? 이거 재밌네. 흐흐핫!]

당연하다. 당장 신들한테 맞아 죽을 일이 없는데 두려워할 리가. 이런 내 심리를 알아챈 듯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가 한 마디 해왔다.

[소렌, 자네. 너무 안심하긴 이르다. 사도인 탓에 신과 세상의 이치에 대해 잘 알고 겁내지 않는 모양인데, 저들이 일곱 봉우리에 있는 자기 종족을 움직이면 어찌 될 거 같나? 그래도 그리 느긋하게 술을 들이킬 수 있을까? 케겍케겍!]

당연히 알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 있는 소신격들이 영향력을 발휘해 오크, 코볼트, 드워프, 노움을 움직여 내 골짜기와 스킨크 둥지로 들이친다면 큰 문제가 발생할 터였다.

신들이 직접 개입하지 못한다고 해도 간접적으로 할 수 있는 수단은 많았다. 그렇기에 저 위협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만, 내겐 어림없는 소리였다.

"글쎄요. 제가 죽으면 일곱 봉우리가 엉망이 될 텐데요?"

내가 음식까지 집어 먹으며 여유를 부리자 스카브누그가 흥미를 드러냈다.

[어째서 그리되는 건가?]

"한 가지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라면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뭔가 말해보게. 케케켁.]

입을 열기 전에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고블린들은 다 도망간 상태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던 왕은 입에서 게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신들의 압력에 견디지 못한 것이다. 아마 저놈 깨어나면 한동안 신열 때문에 앓아누울 거다. 나도 전에 그랬었지.

아무튼 신들 외에는 들을 자가 없으니 말해도 괜찮겠군.

"태양 교단이 어둠의 숲으로 대규모 원정을 준비 중입니다. 블라르 백작도 이번엔 막지 못할 겁니다."

그 말에 어떤 신은 놀라워했고, 또 어떤 신은 이미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블린 신인 스카브누그는 진작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일부러 과장되게 놀란 척을 하며 물어왔다.

[블라르가? 그 지상최강의 뱀파이어가 패배한다는 꼴이 잘 상상이 안 되는데? 아무리 태양 교단이 뱀파이어를 도륙하는데 탁월하다고 해도 말이야. 케륵케륵.]

"이번에 성기사단장이 출격합니다. 그가 나서면 블라르 백작이라고 해도 못 막습니다."

나는 블라르 백작이 패배하면 태양 교단이 이 일대까지 몰려드는 건 기정사실이라 강조했다.

"이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여러분의 신도들이 태양신을 숭배하는 꼴을 보게 될 겁니다."

이에 모인 신들은 노호성을 터뜨리며 결코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오크는 전사가 아닌 이를 따르지 않는다!]

[맞아요. 모두 당신의 억측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태양 교단은 절대 이교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과격한 전도 방식을 모르십니까? 태양 교단은 개종을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겁니다."

내 말에 신들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피로 얼룩진 태양 교단의 역사를 알기 때문이다.

[드워프들은 결코 고집을 꺾지 않는다. 모르는 건가?]

드워프 여신 토리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더 문제입니다. 태양 교단은 개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면 그냥 박멸해 버릴 테니까요."

[······.]

"일곱 봉우리의 종족 중 반항하는 이는 모두 사라질 겁니다. 그리고 순응하는 이는 각자의 전통과 신앙을 거세당한 채 태양을 찬양하는 처지가 되겠죠."

설명하기 힘든 분노와 숙연함이 주변을 짓눌렀다.

"미안하지만 고귀한 분들께서는 그 과정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많지 않을 겁니다. 세상사를 결정하는 건 결국 필멸자의 몫이니까요. 일곱 봉우리 모두가 차례, 차례 태양 교단의 진격 앞에 무력화될 게 뻔합니다."

내 불길한 예언에 노움의 여신 살피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아이들이 블라르 백작을 지원하면 그렇게 될 일이 없을 거예요.]

"각 종족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눈치만 봅니다. 지원에 있어서도 어떻게든 조금만 내놓으려 할 텐데 그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요?]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일곱 봉우리를 통합해 그 역량을 제대로 이끌어 낼 영웅이 등장한다면 얘기가 다릅니다."

내 말에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가 흥미로워했다.

[그게 자네라는 건가?]

"저는 태양 교단과 다릅니다. 각 종족의 종교를 보장할 것입니다. 다만 그걸 뛰어넘어 우리 스스로를 지킬 통합체를 만들고자 합니다."

[소렌, 네가 유능한 건 알지만 꼭 너일 필요는 없다.]

"아니, 저만이 가능합니다. 이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블라르 백작과의 연계가 중요한데, 제가 백작의 후계자이기 때문입니다. 일곱 봉우리의 누가 저처럼 블라르 백작과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듣던 신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긴 상태.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이래도, 아직 절 죽이시겠습니까?"

사실 여유를 부리고 있지만 여기 있는 소신격들이 작정하고 나서면 크게 위험하다. 각 봉우리의 영웅들이 나 하나 잡겠다고 우르르 나서면, 맘 편히 어디 다니지도 못하게 될 테니까.

이들이 진짜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게 아닌 이상, 쓸모를 상기시키는 게 좋았다.

'그래, 이것도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이건 인생의 진리다. 백척간두에 섰을 때야 다음으로 올라설 수 있는 것. 이걸 깨닫게 되자 파멸의 위협이란 게 사랑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크르르! 만약 네놈에게 협력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기어코 네놈을 죽이겠다고 한다면.]

오크 전사신 팔루크의 물음에 나는 솔직히 답했다.

"간단합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태양 교단과 내통해 일곱 봉우리가 모조리 놈들의 수중에 떨어지게 만들겠습니다. 망할 게 뻔한 일곱 봉우리보다 돈 많은 태양 교단이 훨씬 낫겠죠."

듣던 신들이 격노했다

[감히! 그런 망발을!]

[건방이구나! 필멸자가 신에게 협박이라도 할 셈인가!]

[이놈! 듣자듣자 하니!]

신들의 분노로 인해 주변의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피부를 누르는 압력이 느껴졌다. 마치 점점 심해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파직. 파지직.

심지어 바닥의 타일 역시 금이 가며 깨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쫄 내가 아니지.

'이럴 때 밀릴 수 없지.'

어차피 이들은 당장 날 물리적으로 어찌하지 못하니까. 다만 바로 위협이 되는 게 고블린 신격 스카브누그다. 이 왕궁의 고블린 모두에게 날 죽이라고 명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마치 더, 더하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저놈은 그냥 이 혼란이 재밌는 모양이군.'

한데 그때, 신들에게서 내가 섬기는 뱀파이어 성녀에 대한 모욕이 튀어나왔다.

[대체 자기 사도를 어떻게 가르쳤기에 저리 안하무인인 건가요?]

[근본 없는 여자가 신격이 된 까닭인 것이오.]

[크르릉! 참으로 그 신격에 그 사도로다!]

코블트 신인 칼릭키를 빼고 뱀파이어 성녀에게 한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그 순간 참을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녀의 첫 번째 사도다. 첫 번째 사도라는 건 신의 얼굴. 그런데 어찌 참겠는가?

"지금 감히 핏빛 새벽의 여신님을 모독하는 건가!"

갑자기 반말로 분노의 사자후를 터뜨리자 신들이 화들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 필멸자가 미쳤나, 하는 생각이겠지.

하지만 난 이제 시작이었다.

"지금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당연히 신들은 분노했다.

[미쳤나! 필멸자!]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돌아버렸군. 정신줄을 놔버렸어!]

하지만 나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만 가득했다.

"지금부터 들어라. 그렇게 나와 대치하길 바란다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겠다. 내 모든 걸 걸고 너희가 아끼는 자식들의 씨를 말려버리겠다!"

이제 막 나가기로 했다. 신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지들이 열 받으면 뭐 어쩔 건데? 나는 계속 생각하던 바를 쏟아냈다.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다. 이 소신격 놈들아! 내 행보가 일곱 봉우리로만 멈출 것 같나? 아니지, 아니야. 이 대륙 전체로 뻗어나가 너희를 찬양하는 그 빌어먹을 새끼들의 주둥이를 다 찢어버리겠다! 알겠나!"

듣던 신들은 단체로 경악한 표정이었다.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필멸자 따위에게 이 정도의 폭언을 들어본 적은 없었을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는 아주 신이 나서 뒤로 쓰러지기까지했다.

[소렌! 소렌 다켄발트! 소문보다 더 대단하군. 도리어 신들을 협박하고 있다니! 케케케켁!]

스카브누그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쿠션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양손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케에에엑! 케케켁! 그래, 이거야!]

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신격들이 서둘러 요청했다.

[스카브누그, 체통을 지키시오.]

[당신도 신 아니오? 그에게 뭐라 한마디 좀 하시오.]

하지만 스카브누그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내가 왜? 갈수록 재밌는데.]

어이없어 하는 신들을 보고 스카누브는 특유의 칼날 같은 이를 잔뜩 드러내며 말했다.

[한마디 해달라고 하니 소렌 말고 너희에게 해주지. 저 녀석은 자기 말을 이룰 능력이 있다. 저놈이 미쳐 날뛰면 너희가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저 미친 뱀파이어를? 케케케!]

듣던 신들이 대답을 못하자 스카브누그는 더욱 신을 냈다.

[심지어 블라르 백작의 후계자라고 하지 않았나? 만약 저놈이 블라르랑 그의 군세를 움직일 수 있다면 태양 교단이 오기도 전에 일곱 봉우리가 풍비박산 날지도 모르지. 케케케켁! 뭐, 그것도 좋아! 아주 재밌을 테니까!]

스카브누그는 거기서 한술 더 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와서는 낄낄거리며 선언했다.

[너희가 말한 대로 소렌을 공격한다면 고블린은 그의 편에 서겠다. 일곱 봉우리 최고의 용병들과 싸울 자신이 있는 건가?]

나는 설마 스카브누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기에 놀랐다. 그런데 다른 신들은 더 놀란 듯했다.

[대체 왜 그딴 짓을 하려는 건가! 크르르! 단순히 방해인가!]

오크 전사신 팔루크가 그리 묻자 스카브누그의 대답은 단순명확했다.

[진정한 고블린이란 이 병신 같은 궁전의 꼬라지처럼 돈과 금을 쌓아 올리는 것에 있지 않아. 그저 함께 재밌는 걸 하고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의 해골을 깨는 것에 있지. 그런 점에서 소렌이 하려는 일은 아주 괜찮아 보이거든. 케케케케케켁!]

한 가지는 확실했다. 스카브누그는 역시 보통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내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사실 말이야. 아까 내가 왜 자네를 위기에 빠뜨렸는지 아나? 당황해선 내게 손을 내밀기 바랐기 때문이야. 그러면 못이기는 척 들어주며 자네를 벗겨먹으려 했지.]

"세상에···."

[하지만 자네는 신들과 정면충돌을 택하더군. 재밌어! 케케켁! 아주 재밌다고. 내가 미리 했던 계획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말이야. 자, 싸우자. 저 멍청한 새끼들을 우리 둘이 다 뭉개버리는 거야.]

작게 말한다고 했지만 흥분한 그의 말이 다른 신들에게 안 들릴 리가 없다. 다들 노기로 얼굴이 잔뜩 달아오른 상태였다.

'역시 이 새끼는 정상이 아니군.'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놈은 나보다 더한 새끼였다. 그렇기에 약간 분함이 느껴졌다.

'내 비록 부족하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네놈을 능가해주마. 스카브누그.'

하지만 일단은 이 상황을 한껏 이용해야겠지.

나는 술병을 일부러 큰 소리가 나게 쾅 내리쳤다. 그러자 아까부터 입을 다물고 있던 신들이 단체로 움찔거린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단호하게 통보했다.

"자, 이제 대답 좀 해보지? 날 일곱 봉우리 대표로 추대하던가, 아니면 그냥 다 같이 개판 치고 죽던가. 어쩌겠나?"

이제는 신이고 뭐고 예절 따위 갖다 버린 내 모습에, 슬슬 그들의 얼굴에도 뭔가 잘못 걸린 것 같다는 낭패감이 가득해지고 있었다.

────────────────────────────────────

────────────────────────────────────

고블린의 왕자(5)

* * *

이후 격렬한 토론과 날 선 비방, 다양한 욕설이 오갔다. 이 다툼의 구도는 명확했다.

-소렌(블라르 백작도 모르는 사이에 공식 후계자를 자처).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

VS

-오크의 전사신 팔루크.

-드워프의 세공의 여신 토리아.

-코볼트 광부신 칼릭키.

-노움의 발명의 여신 살피라.

한데 우리는 놀랍게도 두 배의 적을 상대로 혓바닥으로 승리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고블린 신인 스카브누그는 만족감을 표했다.

[역시 잘생긴 사람 둘이 모이니 화력이 세구만. 케케케!]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잘생긴 사람은 우리 중에 단연코 한 명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스카브누그의 명예를 위해서 굳이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오크의 전사신 팔루크가 거기에 대해 격한 반론을 해왔다.

[앞에서 개새끼 두 마리가 시끄럽게 짖으니 그런 것이다! 아주 학을 떼겠군! 크르릉!]

그 말에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가 날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랑 내가 개라는데?]

"술에 취하기 전에도 이미 개새끼라니··· 아무리 봐도 저희가 비범한 이인조란 건 사실인 듯합니다."

[뭐라? 케케케켁!]

고블린 신이 난 듯 크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들고 있던 술잔이 흔들려서 와인이 다 쏟아질 지경이었다.

우리가 서로 잘 통한다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언제든 상대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위험한 동맹이군.'

하지만 그래서 더 의미 있었다. 그만큼 큰 걸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이런 합리적인 토론 끝에 우리는 간신히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태양 교단은 위험한 존재고 그들이 일곱 봉우리로 진출했을 때 벌어질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

이건 마치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하던 스페인 침략자만큼이나 큰 사달을 일으킬 문제였다.

감정과는 별개로 신들은 이 문제를 대처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소렌을 일곱 봉우리의 대표로 삼는다는 것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정말 탁월한 판단이십니다."

상황이 정리되자 재빠르게 존대로 전환했다. 그러자 눈앞에 있던 코볼트 광부신 칼릭키가 어이없는 표정이다.

[···반말이나 계속하지? 잘 어울리던데?]

"저는 언제나 불멸자들을 존경으로 대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여태 같이 죽자고 하던 녀석이···. 끼륵끼륵.]

코볼트 신은 어이없는 걸 넘어 아연실색한 듯했다.

아무튼, 신들은 일단은 내가 일곱 봉우리로 대표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 보겠다고 했다.

신들은 저마다 신탁을 내려 일곱 봉우리의 각 대표가 모이는 회의체를 만들기로 합의한 것.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 소렌 다켄발트를 연합의 대표로 뽑도록 밀어보겠다고.

하지만 일부에서 반발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했다. 특히 오크족이 그럴 거라고.

[크르르! 우리 쪽 애들은 성미가 사납지. 특히 대전사들은 네놈의 무력에 납득하기 전에는 말을 안 들을 확률이 높다. 그건 알아서 해라. 우리가 해줄 건 신탁 정도니까.]

맞는 얘기였다. 각 종족마다 성향은 다르니까. 예상하던 부분이었다.

신들은 왕이 아니다. 신탁으로 방향을 제시해도 결국 일을 진행하는 건 지상의 필멸자들이다. 각 종족의 신앙도에 따라 말을 안 듣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오크의 대전사(大戰士)들은 강하긴 하다. 정면승부를 하면 지금껏 빠르게 성장한 나도 승리를 장담 못 할 정도다. 당장 눈앞에 있는 오크 전사신인 팔루크 역시 오크 대전사 출신이었으니까. 하지만 늘 그렇듯 이 몸에겐 공략법이 있었다.

[좋아. 여기까지 하지. 더 있다가는 저놈들 때문에 열 받아 쓰러지겠군. 크르르!]

오크 전사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가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하고 가지? 뇌가 반쯤 익어가는 것 같은데 술로 식히라고.]

[꺼져라.]

뒤이어 드워프 여신과 노움의 여신, 코볼트 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회합이 끝났다.

[나도 가볼 테니, 또 보자고. 그리고 이건 내 예감인데, 우리 둘이 아주 근사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케케!]

"저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는 떠나기 전에 여태 그림자처럼 내 곁에 있던 에레미나에 대해 언급했다.

[네 꼬마 시종. 별의 기운을 타고났군. 잘 키워봐라. 별 문제 없이 성장한다면 일곱 봉우리의 누구보다도 강해질 테니.]

그리 말한 스카브누그는 에레미나에게 무언가를 하나 던져줬다.

[이걸 받도록. 케켁. 쓸 만한 거다. 내 유머만큼이나 날카로운 물건이니까.]

스카브누그가 에레미나에게 준 건 고블린식 단검이었다. 딱 봐도 비범한 아티펙트였다.

"귀한 것 같은데 아이에게 주셔도 되겠습니까?"

[일종의 투자라고 하지.]

에레미나를 보니 단검을 들고 날 쳐다보고 있다. 받아도 되는지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살짝 끄덕여주자 녀석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단검을 품에 넣었다. 일견으로도 대단한 물건인 걸 꼬맹이도 아는 것이다.

"주인님, 정말 감사합니다."

에레미나의 말에 스카브누그가 불만을 표시했다.

[이 얼라 새끼야, 단검을 준 게 난데 왜 네 주인에게 감사하냐? 이거, 웃긴 놈이네. 진짜. 케륵!]

"음··· 나중에 지나다 신상이라도 보이면 목례 정도는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에레미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스카브누그는 재밌다는 듯 낄낄댔다.

[하! 주인이나 꼬마 시종이나 꼬시기 힘든 건 똑같구만. 그래, 비범한 놈들은 이런 재미가 있는 법이지. 아무튼, 간다! 또 보자고. 케케케!]

고블린의 신 스카브누그까지 떠나자 주변은 다시 사치스럽고 천박한 고블린 왕궁으로 변했다. 마치 천상의 한가운데 있던 것 같은 분위기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이다.

* * *

그 후 며칠간 고블린 왕궁에서 머물렀다. 고블린 왕이 대접하겠다고 나선 것도 이유지만, 에레미나와 함께 신열로 앓아누웠기 때문이다. 왕궁에는 우리 말고도 신열을 앓는 환자가 넘쳐났다.

"음··· 그래도 대신격을 만난 거에 비하면 별거 아니군."

게다가 신열이란 건 점점 익숙해지는 특성이 있다. 에레미나도 곧 떨쳐 일어났다. 녀석은 스카브누그가 준 단검이 맘에 드는 듯 항상 만지작거렸다.

"한 번 줘봐."

"네, 여기 있습니다. 주인님."

단검을 받아서 살펴보니 저주나 고약한 기능은 없었다. 신이 준 물건답게 대단히 훌륭한 단검이었다. 하지만 나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스카브누그는 중요한 순간에 뒤통수를 친다. 그가 준 물건도 다르지 않을 거야. 네가 이 단검을 믿고 의지할수록 마지막 순간에 배신할 거다."

"꼭 명심하겠습니다. 주인님."

"그 점만 주의한다면 이 정도 되는 단검도 없겠군. 맙소사. 드워프 대장장이들이 보면 질투심에 단체로 앓아눕겠어."

"그건 한 번 꼭 보고 싶군요."

그 뒤 카조그란 고블린 장군이 만남을 청해왔다.

"카조그가 누구지?"

하지만 금방 알 수 있었다. 바로 용병굴에서 내가 왕에게 가는 걸 막았던 무례한 녀석이다.

'음, 그놈을 어떻게 할까?'

잠시 머리를 굴려보니 단순히 보복으로 죽이는 것보다 쓸모가 있을 듯해 만남을 허락했다. 그러자 카조그와 내게 폭언을 했던 고블린 어깨 셋이 머리를 조아리며 찾아왔다.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분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여기 비통한 심경으로 고개를 숙이며 가져온 선물을 바칩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부디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케으윽···!"

고블린 장군 카조그는 언변이 몹시 유려했다. 고블린답지 않을 정도였다.

'음, 역시 쓸모가 있겠는데? 뭣보다 성의를 무시하기 어렵군.'

생각보다 금을 많이 가져왔다. 그래서 나는 생각보다 그를 고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옆에서 살려달라고 고개를 땅에 찧어대는 고블린 어깨 셋은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시끄럽게 잘못했다고 비는 게 힘 센 거 빼고는 그냥 평범한 고블린에 불과했다.

어찌할지 처분을 정하고는 즉각 그림자의 힘을 일으켰다. 친우 케일런이 준 능력이다.

스으으으.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손이 고블린 어깨 셋을 덮쳤다. 그리고 코와 입을 막아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

"케에에에···! 케엑!"

"켁! 켁! 케엑!"

"케케케케! 켁!"

놈들은 놀라서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케일런의 힘은 이딴 고블린들이 어쩔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최근 블라르 백작이 그림자를 찢어버리며 잡기라고 평가절하했지만, 그건 블라르니까 그런 거다. 상대가 규격 외의 존재가 아니라면 그림자는 여전히 무시무시했다.

고블린 셋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쳤지만 내가 그림자 손을 더 늘리자 소용없었다. 그들은 축 늘어졌고 더 움직이지 않게 됐다.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카조그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그를 칭찬했다.

"참견하지 않은 건 잘한 거야. 지난번 일을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그게 너 자신일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이렇게 금도 많이 가져왔는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절 살려두신 걸 보니 쓰실 곳이 있으신 듯합니다만···?"

이놈 보게. 눈치도 빠르군. 나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수많은 그림자 손이 뻗어가 카조그를 붙잡았다. 놈은 삽시간에 내게 끌려왔다.

"사, 살려주시는 거! 아닙니까!"

"아, 살려는 줄게. 지금까지랑 조금 다른 삶이 되겠지만."

마침 출출하겠다 놈을 흡혈했다. 그리고 매혹 능력을 사용해 카조그를 내 하인으로 만들었다. 이래서 뱀파이어는 굳이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충성심을 바랄 필요가 없었다.

"주인이시여···."

카조그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는 곧장 머리를 조아려왔다.

'잘됐군. 안 그래도 고블린 쪽에 믿을 만한 끄나풀이 필요했으니.'

지금이야 고블린 왕 쿠룬닥이 신들에게 놀라 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지만, 놈은 이 일곱 봉우리에서 가장 음흉하고 위험한 놈 가운데 하나다.

각만 나오면 언제든 내 뒤통수를 치려고 할 터. 만약 그게 성공적이고 꽤 근사하다면 스카브누그는 자기 일을 망쳤어도 용서해줄 테고.

그게 고블린의 생리였다. 삶 전체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란 점에선 뱀파이어보다 훨씬 위험했다.

"카조그.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다."

"네, 주인이시여."

"쫓겨난 고블린 왕자를 찾아서 확보해라."

샤고쓰란 이름의 왕자가 있다. 대단히 영준한 인물로 한때 고블린의 미래라고 평가받을 정도였다. 그의 실력이면 일곱 봉우리를 통일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 돌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샤고쓰는 질투심에 사로잡힌 고블린 왕 쿠룬닥에 의해 쫓겨났다.

이후 고블린 왕자 샤고쓰는 일곱 봉우리와 주변의 소국을 돌며 방랑자의 삶을 살고 있다. 검의 명인이기도 한지라 되는 대로 지내며 칼밥을 먹는다.

그래서 왕자는 무법자, 고블린 칼잡이, 녹색 도망자, 떠돌이 등으로 불리고 있다.

"샤고쓰 님을 말입니까···? 그 뜻은?"

카조그는 내 의도를 파악하고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도망간 왕자를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고블린 왕인 쿠룬닥을 축출한 뒤 왕자를 허수아비 왕으로 삼기 위해서다. 내가 고블린이 아닌 이상 그렇게 주구를 내세우는 게 통치하기 편했다.

"네가 생각하는 게 맞다."

나는 카조그에게 당근도 슬쩍 제시해줬다.

"왕자를 권좌에 앉히고 나면 내 뜻대로 이 작은 왕국을 주무를 수 있겠지. 그때 널 중히 쓸 것이다. 어떤가?"

딱 봐도 카조그는 권력욕이 넘치는 자였다. 그날 용병굴에서 왕에게 접대를 하느라 애를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열의로 불타올랐다.

"반드시 확보하겠습니다."

"좋다."

그 왕자는 너무나 방랑벽이 심하기에 쫓기 어렵다. 게다가 고블린은 고블린이 잘 찾는 법. 일도 많은데 직접 하겠다고 나서는 것보다 믿을 만한 자에게 맡기는 게 나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