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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두의 출현(4) >

이미 블라르 백작에게 에너지 드레인 사용법은 배웠다. 숙련도가 낮긴 해도 발동 자체는 문제가 없을 터.

넘쳐나는 힘 덕에 어렵지 않게 에너지 드레인을 발동시켰다. 두 손에 짙은 보라색의 소용돌이 같은 게 만들어졌다.

우우우웅!

휘몰아치는 그 빛은 누가 봐도 불길하고 음험했다.

이걸로 오크 놈들의 기운을 쏙쏙 빨아 먹을 작정이었다. 한껏 들떠 있던 고르가쓰도 내가 만든 에너지 드레인의 구체를 보고는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그 무슨!"

문답무용이었다. 즉각, 고르가쓰와 오크를 향해 대규모 에너지 드레인을 발동했다.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일단 마법은 제대로였다. 스스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내겐 재능이 있었다. 블라르 백작에게 짧게 배우고도 발동에 성공했다.

"크으으···!"

문제는 내 몸이었다. 갑자기 찢어질 듯한 통증과 함께 이상이 발생했다.

'뭐야, 이게!'

이건 뭐랄까, 전신의 혈관으로 불길이 퍼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랄까? 동시에 얼음장 같은 한기에 몸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언데드라 멈춰 있던 심장이 갑자기 터질 것처럼 뛰어댔고, 나지도 않던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 와중에 대규모 에너지 드레인은 제대로 발동했다.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말이다.

"쿠어어어어어!"

"크아아아아아!"

고르가쓰의 뒤에 응원단처럼 있던 오크들이 통째로 휘말렸다. 놈들은 몸에서 생명력을 뽑히는 격통에 뒹굴어댔다. 심지어 그 강력한 고르가쓰조차 에너지 드레인의 영향으로 휘청이고 있었다.

"뱀파이어!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렇게 물어봐도 나도 알 수가 없다. 에너지 드레인을 일으키는 보라색의 소용돌이는 점점 더해갔으니까.

'블라르 백작의 것을 뛰어넘겠는데!'

원조인 블라르 백작이 쓴 대규모 에너지 드레인도 이렇게 강력하진 않았다.

아니, 그렇다고 이게 좋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에너지 드레인에 대한 통제력 자체를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건··· 폭주였다.

'카르멘! 이런 빌어먹을!'

분명히 에인션트 드래곤의 피가 문제를 일으킨 게 틀림없다. 설마 카르멘이 날 함정에 빠뜨리려 한 건가 의심하던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맞아! 카르멘은 내가 블러드 비스트 능력을 받은 걸 모르잖아!'

카르멘은 다각도로 검증했기에 에인션트 드래곤의 피가 안전하다고 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오래간 카르멘이 아껴온 비보(祕寶)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자로 삼고 싶은 날 위해 내어준 것이다.

문제는 블러드 비스트를 몰랐다는 점. 아마 원래 상태에서 에인션트 드래곤의 피를 마셨으면 일시적으로 대단한 능력 향상을 이뤘을 거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독이었다.

삽시간에 내 눈과 코, 입과 귀에서 시커먼 피가 쏟아져 나왔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몸 안에서 폭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대규모 에너지 드레인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쌔애애애애애!

상대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보라색 소용돌이가 가공할 소리를 내며 회전했고, 급기야 오크들은 마치 미라처럼 빼빼 말라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크억······."

"크······! 우워···."

오크들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살은 물기 한 점 없는 것처럼 푸석푸석하게 변했고, 몸은 극도로 굶은 것처럼 뼈만 남았다.

지켜보던 다른 종족과 대표들은 놀라서 황급히 물러날 정도였다. 그들은 에너지 드레인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넘어지고 구르는 걸 감수하고 시합장에서 떨어졌다.

이제 주변에는 죽어가는 수백의 오크와 고르가쓰 뿐이었다. 심지어 그의 동생이었던 오크 대표 타라카 역시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형님! 형님이라도 피하십시오! 크르륵!"

"타라카! 이놈, 정신 차려라!"

고르가쓰 역시 눈에 띄게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그래도 그는 생명력을 빼앗기는 와중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이 처죽일 뱀파이어 새끼!"

그는 조상의 힘을 다시 모아, 오거의 골통을 깼다는 도끼를 집어 던졌다.

하지만 블러드문도 박살 냈던 '오거 골통 분쇄기'는 이번에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도끼를 휘감고 있던 새하얀 조상의 힘마저 에너지 드레인에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결국 도끼는 힘을 잃었고, 궤적을 벗어나 빗나갔다.

쌔애애애애앵!

대규모 에너지 드레인은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주변의 힘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모은 에너지를 내게 주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건 다시없을 재앙이었다. 가뜩이나 블러드 비스트 상태에서 에인션트 드래곤의 피까지 마셔 과부하를 일으키고 있는 몸이다.

거기에 오크 고르가쓰와 타라카를 비롯해 그들이 끌고 온 정예 전사들의 생명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대로라면 터져 죽는다!'

이건 절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힘이 아니었다. 적당한 양이었다면 잘 갈무리해서 뱀파이어의 등급을 올렸을 것이다.

엘더 뱀파이어가 되거나, 어쩌면 뱀파이어 로드까지 올랐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임시적으로 로드급의 힘을 내는 게 아니라 진짜 뱀파이어 로드 말이다.

하지만 폭풍과 해일처럼 들이친 에너지는 날 갈기갈기 찢어발기기 직전이었다.

'넘치는 힘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할 방법이 필요해!'

이 물길을 돌리지 않으면 난 죽는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고르가쓰의 생명력조차 본격적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뭔가 방법이! 제발!'

내가 마법의 천재도 아니고 즉각적으로 에너지 드레인의 구조를 바꿀 순 없다. 즉, 무언가가 이 거대한 힘을 대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갖고 있는 무기나 아티펙트를 사용할 수 있는지 재빨리 검토했다.

'이것도···, 저것도···, 소용없어!'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싹 점검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생각지도 못한 게 떠올랐다.

'잠깐? 마른 오징어?'

갑자기 왜 그 말린 촉수 덩어리가 생각난 건지 모르겠다. 한데 생각해 보면 그건 말라비틀어진 거긴 하지만 본디 생명체였잖아?

갖고 있는 다른 어떤 물건보다도 이 넘쳐 오르는 생명 에너지를 받아낼 확률이 존재했다.

'성녀가 준 거니 일반적인 오징어는 아니겠지!'

이미 전신의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상태라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서둘러 품에서 성녀가 준 눌린 촉수를 꺼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것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꼴인데도 말이다. 그걸 보자마자 가능성을 느꼈다.

'어차피 뒤질 거 같은데 한 번 해보자.'

이놈에게 생명 에너지를 넘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나는 칼날 같이 튀어나온 뼈로 왼손을 사정없이 긁었다. 살점이 갈라지고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촉수가 그 상처 부위에 달라붙으려는 듯 발악을 해댔다.

끼잉! 뀡―!

나는 짧은 순간 각오를 다지고 상처로 촉수를 대었다. 그러자 그것은 빠르게 달라붙어서 내 피를 게걸스럽게 빨아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뱀파이어인지라 피가 많지 않았고, 곧 녀석은 훌륭한 대체재를 찾아냈다.

바로 에너지 드레인으로 흘러넘치는 에너지였다. 놈은 그걸 흡수하더니 삽시간에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잠깐 사이에 커다란 개만 해지더니, 금세 중형차 정도로 커졌다. 놀랄 정도로 변화가 빨랐다. 그리고 그때쯤 나도 이 괴생명체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룩스 움브라!"

아니, 성녀시여. 대체 뭘 주신 겁니까! 이게 여기서 왜 튀어나와?

놀라서 이걸 당장 없어버려야 하나 싶었지만, 성녀가 모르고 건넸을 것 같진 않았다.

'심지어 위험한 걸 제거했다고도 했지.'

하면 처음부터 이 작았던 촉수가 룩스 움브라였다는 걸 알았다는 소리.

'잠깐, 진정하자. 확실한 건 이 녀석은 내가 지난번에 죽인 것과 다른 조각이다.'

고대신이었던 본래 룩스 움브라는 조각조각 났고, 그 조각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갖고 있었다. 하니 이건 일곱 봉우리를 멸망시킬 뻔했던 그 룩스 움브라가 아니란 소리였다.

이 촉수가 내게 우호적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는 건 사실이었다.

내 몸을 터뜨릴 뻔했던 에너지가 필요한 수준만을 남기고는 모두 룩스 움브라에게 흘러 들어갔다.

'세상에! 살 것 같군···!'

격렬하단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고통이 온몸을 헤집고 있었다. 서서히 그것에서 해방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털썩.

어느새 팔에 붙어 있던 룩스 움브라의 거대한 촉수 가닥이 떨어져 나갔다.

이미 녀석은 버스만큼이나 커진 상태. 생김새는 스킨크의 본진인 바위 봉우리에서 봤던 놈과 똑같았다.

하지만 내는 소리는 훨씬 이상했다.

뀌잉―! 낑!

뭔가 덩치와 생김새에 어울리는지 않는 소리였다. 몸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눈알로 일제히 날 보는 중이었는데 적의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이 동네 똥개를 보는 것 같은 평안한 기분은?'

흔히 말하는 그 시골잡종이라 불리는 품종에게 보이는 때 묻지 않은 명랑함마저 보였다.

뀌이이잉! 뀡! 귕!

놈은 높은 소리를 내며 문어 같은 촉수 가닥을 흔들어댔다. 아니, 문어보다 훨씬 끔찍하다. 촉수를 따라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한 데다가 군데군데 눈알까지 붙어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다른 차원에서 온, 심연의 공포와도 같은 생김새. 하지만 놈은 아무리 봐도 날 주인처럼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저건 생김새를 초월해, 뭐랄까··· 댕댕이와 같은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세상에, 촉수 댕댕이라니!'

한데 좋은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날아온 도끼가 우리 문어를 닮은 시골잡종에게 박힌 것이다. 피가 튀며 룩스 움브라가 비명을 질렀다.

공격을 한 이는 고르가쓰. 놈은 이제 거의 노년의 오크처럼 보였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투지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 비열한 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감히 결투를 어기고 우리 형제들을 공격해! 천벌을 받을 것아!"

나는 여기서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이 시골잡종이 내 말을 듣는지 말이다.

"시골아."

끵?

대답이 우호적이라 계속 말해봤다.

"가서 저놈을 늘씬하게 두들겨 패줘. 죽이지는 말고. 나머지 오크는 어떻게 해도 좋아."

뀡―!

놀랍게도 놈은 명령에 즉각 반응했다. 꾸물텅거리며 움직이더니, 대들보 같이 두꺼운 촉수를 고르가쓰에게 내리쳤던 것.

쌔앵!

콰앙!

고르가쓰는 그걸 막아냈지만 소용없었다. 우리 시골이는 촉수가 많았고, 다른 촉수로 놈을 야구공을 치듯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크아악!"

입에서 피를 토하며 고르가쓰가 산지를 굴러갔다. 보면서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존나 강하잖아!'

생각해 보니 룩스 움브라는 고대신의 조각이다. 거기다 막대한 에너지를 먹었으니 약하면 이상하겠지.

반면 고르가쓰는 에너지 드레인의 폭주에 휘말려 쇠약해져 있었고.

룩스 움브라는 고르가쓰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며, 근처에 쓰러져 있는 오크들을 주워 먹기 시작했다.

오독! 오도독!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렸다. 말라비틀어져 절명한 오크가 반 이상이었지만, 아직 살아 있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룩스 움브라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사방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마치 오크 도살장 한가운데 들어온 것만 같았다. 룩스 움브라는 내가 맘대로 하라고 했다고 오크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있었다.

'배가 고팠나.'

그 사이 나는 자신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눈앞의 상황은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룩스 움브라에게 넘겨주고도 남은 에너지, 즉,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것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잘만 하면 뱀파이어의 급을 올릴 수 있겠어.'

더 이상 뱀파이어 어뎁트가 아니라 그 이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시적이었던 승급을 영구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 블러드 비스트 상태를 풀었다. 그러자 뒤틀렸던 뼈마디가 정상으로 돌아가며 키가 줄어들었다.

우두두득! 드득!

"으윽··· 젠장!"

온몸이 엉망이었다. 튀어나왔던 뼈가 사라지자 살점에 흉흉한 구멍이 보였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변신의 여파만으로 사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재생력이 그걸 감당해줬다. 원래대로 돌아오자 상의는 거의 넝마짝이었다. 그나마 바지만 비교적 괜찮았다. 물론 그 바지도 무릎 아래로는 다 터져나갔지만 말이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뱀파이어의 승급은 조건만 갖춰지면,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로 지금이 그 타이밍이었다.

"후···."

한 차례 더 숨을 내쉬며 집중하자 세상이 느릿하게 느껴졌다.

저 앞에서 고르가쓰가 룩스 움브라를 상대로 격전 중이었지만, 다른 세계의 일로만 느껴졌다. 심지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승급이 시작됐군.'

조건이 갖춰지자 의지만으로 금방 가능했다. 살점이 파문을 일으키며 뼈가 다시 삐걱거린다. 몸의 모든 게 상위의 것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감각이 더욱 고조되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격렬한 쾌감이 뒤따랐다.

'이게 바로 진화의 기쁨이군!'

좀 더 상위의 존재가 될 때 겪는 증상임이 틀림없다. 이 과정은 몸이 뒤틀리는 고통과 정신적 환희가 서로 동반되고 있었다. 그리고 혼돈과 무질서했던 것이 정렬되어 간다.

마치 이 느낌은 불협화음이 점차 그럴싸한 교향곡으로 변해가는 것만 같다고 할까?

이건 결코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누가 귓가에서 연주를 할 리 없건만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소리가 끝난 순간, 승급도 완료됐다.

"끝났군···."

나는 한 단계 더 나아간 육체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러던 중 갑자기 무언가가 날아왔고 손을 뻗어 가볍게 잡아났다.

턱!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붙들린 건 섬뜩하게 생긴 도끼였다. 그것의 날은 바로 내 얼굴 옆에 멈춰서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르가쓰의 오거 골통 분쇄기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마 룩스 움브라와 싸우다가 틈이 난 순간 도끼를 내던진 것 같았다.

원래의 나였다면 반드시 여기서 머리가 쪼개졌을 거다. 블러드 비스트 상태도 풀렸으니 고르가쓰의 도끼를 당해낼 리가 없잖나.

하지만 짧은 승급을 거친 후 모든 감각 자체가 달라졌다. 나를 향해 쏘아져 오는 살의가 일종의 선처럼 느껴졌고 간단히 잡아챌 수 있었다.

나는 하나 더 깨달았다. 그래서 시도했다.

끼기기긱! 끼이익!

양손으로 거대한 도끼인 오거 골통 분쇄기를 우그러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도끼는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고르가쓰가 소리를 쳤다.

"멍청한 놈! 그 도끼는 절대로···!"

하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오거 골통 분쇄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났기 때문이다.

카아아앙!

쇠가 깨지고 안에 담긴 마력이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도끼 머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그것은 바로 앞에 흩뿌리며 웃어댔다.

"크흐흐흐! 이젠 이런 것도 되는군."

뭐랄까, 블라르 백작이 평소 보던 세상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다 조무래기 같구만. 이러니까 사람이 그렇게 미치지. 키키키킥!"

< 대마두의 출현(5) >

나는 블라르 백작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려웠다. 뭐, 게임 속 캐릭터에 대해 알고야 있지만 그건 정해진 텍스트를 내뱉는 존재에 불과했다.

반면 실제로 만난 블라르 백작은 헤아리기 어려운 존재였다. 격분해서 날 죽이려 하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도와주기도 한다.

실로 종잡기 어려운 자였는데, 이제는 한 가지만은 알겠다. 힘을 갖고 내려다보게 된 자의 시선 말이다.

"이런 느낌이었어. 크흐흐."

블라르 백작은 더 높은 곳에 있을 테니 정신이 온전하길 바라는 게 이상하다.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니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는 거다.

요즘 블라르 백작의 호의도 그런 게 바탕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가지고 놀다가 재미가 없어지면 처분해 버리면 되니까.

내가 지금 왜 이런 생각을 하냐면, 저 앞에서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고르가쓰 때문이다. 나는 놈을 맘대로 할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괴롭혀도 됐고, 갑자기 돌변해서 잘해줘도 그만이었다.

그야말로 제멋대로.

미치광이가 되어가는 것이다.

'현재 나는 엘더급에 오른 건가?'

로드급까지 오르진 못했지만 아쉬워할 건 없었다. 원래 뱀파이어는 몇 단계씩 한 번에 올라가지 못하니까.

게다가 내가 엘더급이라고는 하나 실제적인 전투력은 완숙한 로드급이라 할 수 있었다. 사도직과 신체개조의 덕이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몸의 상태를 점검했다.

'만전이로군.'

치고받고 싸운 게 무색할 정도로 내 몸은 작은 이상조차 없었다. 게다가 블러드 비스트란 편법으로 로드에 잠깐 발을 걸쳤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심지어 그간 사용할 수 없었던 신체개조 7단계인 '음 에너지 숙달' 역시 깨닫게 됐다.

"아···. 이런 거였나."

손가락 사이로 회색의 음험한 에너지가 소용돌이쳤다. 이것은 생명력에 반대되는 개념이며 언데드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것이기도 했다.

케일런이 그림자로 이런저런 힘을 발휘했듯 나 역시 음 에너지로 여러 기술을 쓰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7단계 음 에너지 숙달은 신체 개조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요하다 할 만했다.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능력이지.'

신체 개조 중에 가장 많은 기술적 분화를 이룰 수 있는 게 바로 이 음 에너지 숙달이었으니까.

그렇게 잠시 나 자신에 대한 관조가 끝이 나자, 고르가쓰가 눈에 들어왔다. 흡사 나라라도 잃은 표정이네.

'아니, 더하겠지. 오크의 무기는 놈들의 인생과 같으니까.'

오거 골통 분쇄기는 그의 치열한 삶 그 자체로 온갖 영욕이 그 도끼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한데 그게 박살 났다. 이제 그가 걸어온 인생을 반영해줄 것이 사라진 것이다.

"네놈··· 으드드득! 감히···!"

도끼가 박살 날 때 그도 같이 망가진 것만 같았다. 한때 전설이라 불렸던 오크가 팍 늙은 얼굴로 손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한낮의 태양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대로 무너지는 건가?'

나는 흥미로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고르가쓰에게 물었다.

"지금이라도 항복하고 무릎을 꿇어라. 그렇게 한다면 남은 놈들에게 자비를 베풀겠다."

실시간으로 룩스 움브라가 쓰러진 오크들을 뜯어 먹고 있다. 녀석은 막대한 에너지 드레인 덕에 배가 불렀는지 먹는 속도가 느렸다. 원체 탐욕스러운 녀석이라, 포만감을 느끼면서도 주변에 널린 음식을 주워 먹고 있는 것이다.

하니 오크 족장 고르가쓰가 자기 체면만 꺾으면 충분히 남은 자들을 구할 기회가 있었다. 물론 고르가쓰의 전설은 오늘로 완벽히 끝나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할 건가? 고르가쓰. 고개를 숙이고 따르는 자들을 살리는 게?"

"닥쳐라! 나는 혼자가 아니다. 조상의 영혼을 빌려온 이상, 그들의 명예 역시 짊어지고 있단 말이다!"

"그래서···?"

"내 패배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 저들도 이해할 것이다!"

개소리가 아주 그럴 듯했는데, 결국 죽어도 무릎은 못 꿇겠다는 거잖아? 지들 부족민들이 죽든 말든.

'내가 싫어하는 타입이네.'

내 사고 방식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나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지만, 날 믿고 따라온 자들이 있다면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적의 구둣발이라도 핥아서라도 살릴 수 있다면 그럴 거다. 물론 나중에 철저히 앙갚음 할 테지만.

한데 그놈의 명예 때문에 부족민이 다 죽든 말든 싸우겠다는 태도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고르가쓰, 네가 틀렸다곤 하지 않겠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는군. 그렇게 명예가 소중하면 덤벼라."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다!"

고르가쓰는 날처럼 휘어진 시클소드로 갑자기 자해를 시작했다. 몸 여기저기를 긋자 피가 흥건하게 쏟아졌다.

"조상들의 분노를 느껴봐라! 이들이 본 천 번이 넘는 겨울의 혹독함을 알려주겠다!"

그와 함께 엄청난 에너지가 고르가쓰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한눈에 뭔지 알 수 있었다.

'조상 중 강력한 전사들을 자신의 몸에 강신시키려는 거군.'

고르가쓰가 가진 오의다. 지금껏 조상의 영혼에서 힘만 빌려왔다면, 이번에는 조상들에게 몸을 아예 내어주는 기술이다.

과거 수많은 부족을 자기 솥뚜껑에 삶아 먹었던 오거 대장을 이긴 게 바로 저 기술이었다.

"크워어어어!"

조상의 강신에 고르가쓰는 눈깔이 돌아가서 산지가 쩌렁쩌렁 하게 소리쳤다.

고르가쓰의 최종 오의가 제대로 먹히면 다시 상황이 역전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내겐 아단 삼촌의 힘이 있으니까.

'음 에너지를 다룰 기회가 딱 오는군.'

조상의 혼이란 게 뭐냐? 결국 귀신 아닌가. 귀신이면 음 에너지로 구성돼 있는 존재다. 음 에너지를 다룰 수 있다면 지금 강신하는 저 영혼에게 간섭할 수 있다는 것.

방법은 간단했다.

"음 에너지 드레인!"

음 에너지 다루기+에너지 드래인의(@드레인의) 결합 마법이다. 둘 다 학문으로서의 마법이라기보다 뱀파이어의 '주문 유사 능력'이라 어렵지 않게 결합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몸이 천재기에 가능한 거긴 하지만.'

음 에너지 드레인은 일반적인 에너지 드레인과 다르게 현란하고 소란스럽지 않았다.

마치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며 생명력을 빼내는 게 아니라 잔잔한 빛이 고르가쓰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고르가쓰에게 강신했던 영혼들이 힘을 점점 잃고는 희미해지기 시작했던 것.

마치 수명이 다 되어가는 형광등을 떠올렸다. 밝기가 약해지고 자꾸 깜빡깜빡 거리는 것이다. 그리고 강신했던 조상의 영혼들은 모든 힘을 잃고는 흩어져갔다.

그럼에도 고르가쓰는 포기하지 않았다. 점점 약해져 가면서도, 빠르게 흩어지는 조상의 힘을 느끼면서도 내가 달려와 기어코 시클소드를 휘두른 것이었다.

푸욱!

칼끝이 가볍게 살점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엄지와 검지로 시클소드를 잡고는 살짝 힘을 줬다.

캉!

그대로 시클소드가 부러져서는 땅바닥에 굴렀다.

"이럴 수가···."

망연자실해 하는 그에게 한 가지를 분명히 알려줬다.

"네놈의 전설은 끝났다."

대답도 듣지 않고 손을 뻗어 고르가쓰의 목덜미를 잡아 땅에 찍어버렸다.

콰앙!

땅바닥의 바위가 거미줄처럼 금이 갈 정도였다. 고르가쓰는 게거품을 물고 혼절했다.

모두가 이 상황을 숨도 쉬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선언했다.

"그래. 이제부턴, 내가 전설이다."

* * *

고르가쓰는 내 포로로 삼았다.

죽이자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결투의 승리자인 내가 원하자 다들 따라줬다.

오크를 뺸 여섯 부족은 전쟁을 앞두고 성역에서 오크 큰 턱 부족을 처리하기로 맹세했다. 300년 전에는 트롤이었고, 이번엔 오크가 된 것이다. 빠른 합의에 다들 기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최대한 빨리 다시 모이도록 하지요."

"맞습니다. 이런 일은 속도가 생명입니다."

다들 합법적으로 오크를 약탈할 생각이 몸을 들썩였다.

'에레미나가 이 광경을 봤어야 하는데···.'

오크라면 갈아 마실 정도로 싫어하는 에레미나는 오늘 결정에 몹시도 감격해 할 터.

하지만 데이워커가 아닌지라 어쩔 수 없이 피의 제단으로 갔을 때 두고 왔다.

"사도시여."

그때 스킨크 족장인 스위프트테일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찾아왔다.

"아까 대결에서 보이신 괴생명체는 분명 룩스 움브라가 아닙니까?"

"맞다. 하나 근심할 것 없다. 우리가 퇴치한 룩스 움브라와는 다른 존재니."

나는 룩스 움브라가 조각난 내력을 설명해줬다. 그리고 그것들마다 다른 성정을 가졌다는 것까지.

"핏빛 새벽의 여신께서 우리 일을 돕기 위해 직접 보내신 거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위험 요소를 제거했다더군. 만약 위기의 순간이 오면 큰 도움이 될 거다."

"과연···! 여신님께서!"

그제야 스킨크 족장 스위프트테일은 안도했다.

참고로 우리의 룩스 움브라의 천진난만한 조각인 '시골이'는 오크를 잔뜩 먹더니 땅을 파고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햇빛 아래보단 땅 아래가 편한 모양이다. 다만 시골이는 말귀를 잘 알아먹었는데, 부르면 언제든 나타나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일곱 개의 봉우리가 있는 지역을 떠나지 말라고 했다.

"자! 이제부터 서둘러 오크를 토벌합시다!"

"좋소! 빠르게 모병을 하고 바로 시체 봉우리로 향하는 것이오."

각 부족의 대표들은 이제 오크 공격 계획을 짜는데 바빴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1:6의 싸움이다. 심지어 하피까지 꼈다. 오크의 멸망은 기정 사실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내겐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포박된 고르가쓰였는데 자결하지 못하게 입에 재갈을 물려놓은 상태였다.

무릎을 꿇려놨지만 날 쏘아보는 눈빛이 아주 매섭다.

"으으읍! 으윽!"

"아, 너무 호들갑 떨지 마. 널 위한 역할은 만들어놨으니."

마침 엘더급에 오른 탓에 강력한 하인을 추가로 만들 수 있게 됐다.

나는 이 전설적인 오크를 뱀파이어의 능력으로 하인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전설이라고 해도 늙고 약해져 있다. 정신을 굴복시키기엔 충분해.'

이런 기회가 어디 또 있겠나?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항시 날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어주지."

얼마 뒤 매혹 능력으로 인한 세뇌는 완료됐다. 내 진영에 최고의 전사가 하나 생기게 된 것이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 * *

태양 교단의 최심부.

지하 깊은 모처는 현재 엄청나게 화끈거렸다.

그도 그럴 게, 막 열린 차원 관문으로 마계의 열기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르르륵!

실제로 흘러나오는 바람에는 불길까지 섞여 있었다. 메케한 연기가 일대를 가득 채워서 환기 시스템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원 관문 너머에서 마족들의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쿼어어어어어!

크아아아!

놀랍게도 그 포효는 평소와 달랐다. 고통과 공포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 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금빛 갑옷을 입은 덩치 큰 성기사가 차원 관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몸은 마족의 푸른 피로 흠뻑 젖은 상태.

기다리고 있던 태양 교단의 사제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무사귀환을 축하했다.

"성기사단장님, 무탈하셔서 다행입니다."

"이번에는 여정이 길어져 걱정했습니다!"

사제들의 말에 방금 전까지 강철처럼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던 성기사단장의 표정이 유하게 풀어졌다.

"관문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분의 노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의 갑옷과 축복받은 망토는 재와 마족의 피로 온통 더러워져 있었지만, 그 미소만큼은 깨끗했다. 하지만 깊은 피로감 역시 감출 수 없었기에 기다리던 사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본단 추기경 예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가보셔야 할 듯합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마족의 피를 닦을 틈도 없이 본단의 추기경을 찾아간 성기사단장은 새로운 명을 받게 됐다.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블라르 백작을 공격하라는 것. 여기까진 성기사단장도 납득했다. 한데 뜻밖의 요구가 있었다.

"전직 교구장인 죄인 아달릭을 길잡이로 데려가도록."

"예하, 어찌 그 불경한 자를···."

상관에게 무례한 기색을 보일 줄 모르는 성시가단장조차 지금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는 참담한 죄를 짓고 교단의 감옥에 갇힌 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단 추기경은 느긋하게 대꾸했다.

"최악의 죄를 저지른 자일지라도 태양신께선 요긴하게 쓰십니다. 그가 비록 천국에 들지는 못하겠지만, 자기 죄를 사함 받기 위해 노력할 기회는 줘야겠지요. 아달릭 형제는 어둠의 숲과 미혹의 산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데려가도록 하세요. 이제 그는 아무런 능력도, 지위도 없는 범인에 불과합니다."

"······알겠습니다."

결국 수락한 성기사단장은 교단의 감옥으로 가 아달릭을 만났다. 그리고 이번 원정에 종군할 것을 제안했는데,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눈이 광인처럼 충혈되고 머리가 여기저기 벗겨진 아달릭은 감옥의 철창을 잡고 말해왔다.

"소렌입니다! 블라르 백작보다 그 소렌이란 뱀파이어 놈이 더 문제입니다! 반드시 처리해야 합니다! 크으으으!"

침까지 질질 흘리며 말하는 그 모습에 성기사단장은 작게 혀를 찼다.

"유념해두지."

"소렌은 이단자이며 쫓겨난 성녀의 추종자입니다! 또한 거짓 기적을 일으킨 악적이니 내버려두면 블라르 백작보다 더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블라르 백작이다. 그리고 스스로 죄인임을 잊지 말고 종군하도록."

"···알겠습니다."

"어차피 너는 사면받지 못한다. 그저 마지막까지 참회해 그 무거운 죄를 조금이나마 덜어내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비루한 육신을 바쳐서 신의 영광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겠습니다."

짧은 면담을 끝으로 아달릭은 제한적으로 풀려났다. 그날 이후 헛간 같은 곳에서 머물렀는데, 밤이 되자 은밀히 그를 찾아온 자가 있었다.

"헛! 추기경 예하!"

"쉿, 말씀을 낮추세요. 형제님."

보좌관 하나를 데리고 찾아온 이는 분명 본부 추기경이었다. 그는 몰골이 말이 아닌 아달릭의 손을 직접 잡고는 위로했다.

"고난 끝에 영광이 있는 법입니다. 형제님의 지금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다 찢어지는군요."

"크흑··· 예하."

"우리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결국 시조의 피를 받아들이고 영원한 존재로 거듭날 터이니."

"그 말씀 믿고, 또 믿습니다."

본부 추기경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하며 개 같이 일하던 교구장 아달릭은 자신이 버려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오기까지 하자 감격해서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런 그에게 본부 추기경이 수정구 하나를 내밀었다.

"해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래 미혹의 산에 있는 큰 턱 부족을 관리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 야만적인 놈들과 접촉한 저였습니다. 이 수정구는 고르가쓰와 직통으로 연결된 물건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본부 추기경은 고르가쓰와 협력해 그가 일곱 봉우리의 병력을 이끌고 블라르 백작의 뒤를 치게 유도하라고 했다.

"고르가쓰 역시 우리처럼 피로 거듭나고자 하는 존재임을 아시지요?"

"네, 물론입니다."

"그는 적극 협력할 테니 꼭 성공해 주세요."

또 다시 오크와 내통하는 더러운 임무였다. 하지만 아달릭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교단 내에서 흠 없이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가는 성골이 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미 이마에 죄악의 낙인까지 찍힌 끝장난 몸이었다. 이 밀명을 잘 수행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추기경이 그렇게 떠난 후 몰래 수정구를 써 미혹에 산에 있는 오크 고르가쓰와 연결을 시도했다.

워낙 거리가 있어서 쉽지 않았지만 결국 연결이 됐고, 상대가 물어왔다.

-여보··· 세요···? 누구?

노이즈가 잔뜩 낀 소리라 목소리를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리고 여보세요란 말이 뭔지 알 수 없어 아달릭은 잠깐 고민했다.

-고르가쓰. 나다, 아달릭.

-······.

잠시 상대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다 곧 다시 답이 돌아왔다.

-크르릉··· 그래? 무슨 일이지···?

어쩐지 처음보다 목소리를 잔뜩 깔고 있었지만, 노이즈가 심해 아달릭은 눈치채지 못했다.

< 반역자(1) >

***

"크르르릉. 그런데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군."

내 물음에 상대의 답이 돌아왔다.

-거리가 멀어서··· 어쩔 수 없다. 이 정도 거리에서······ 통신이 가능한 것만 해도 대단하다···.

확실히 말이 늘어지고 끊기듯 들렸다.

"그런가."

내 입장에선 다행스러운 일이네. 고르가쓰 행세를 하는 게 들키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결투 때도 그랬지만 고르가쓰는 공용어로 말하는데 달변인지라, 목소리만 허스키하게 깔면 문제없을 듯했다.

'그나저나 아달릭이라고? 이 새끼, 아직 처형 안 됐나?'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태였다. 고르가쓰가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사주를 받은 건 알았다. 그런데 설마 아달릭이랑도 연결이 있었다니.

현재 고르가쓰는 독방에 두고, 그의 소집품 중 쓸만한 건 모두 압수해 살펴보고 있던 중이다. 그때 갑자기 수정구가 진동했던 것.

'그래도 여보세요, 라니···.'

엉겁결에 그리 묻고 말았는데, 아직 지구 물이 다 안 빠진 탓이다.

"그간 왜 소식이 없었지?"

일단은 상대를 떠봤다. 그러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사정이 있었다······. 이제··· 운신의 자유를··· 얻었다.

아, 이 새끼 풀려났구나. 뭔가 에인션트 뱀파이어랑 관련있는 파벌에서 힘을 쓴 모양이네.

아달릭을 토사구팽할 거라 여겼는데 살려놓은 걸 보니 아직 써먹을 구석이 있다고 여긴 거군. 아무래도 지금 통신을 건 용무와 관련이 있겠지.

-일곱 봉우리의 상황······. 알고 싶다. 장악했나······?

역시 이쪽 상황을 점검하려는 거였구나.

"식은 죽 먹기다. 녀석들은 우리 오크의 말에는 순종적이지."

-오오···! 훌륭하군······!

아달릭 놈은 일곱 봉우리의 군세를 이용해 블라르 백작을 같이 공격하자고 했다. 자세한 건 만나서 논의하자고.

"올 수 있는 건가?"

-이번에··· 원정군에··· 참가하게 됐다. 따로 시간을 내 빠져나가는 건······ 일도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정보네.

'이건 활용할 수가 있겠어.'

지난 회의에서 내가 승리한 이상 일곱 봉우리의 군대는 블라르 백작을 공격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회를 봐서 태양 교단의 군대를 기습할 수 있을 터.

만약 그게 어렵다면, 약속 장소로 나온 아달릭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기회는 다양했다.

"좋다. 다시 연락하도록. 만나서 자세한 건 정하도록 하지."

-알겠다······. 이만 대화를 끝내겠다.

그리 말한 아달릭인 인사를 해왔다.

-어둠에서··· 영원으로···.

일종의 암구호였다. 에인션트 뱀파이어 중에서 '영원의 발레스카'를 섬기는 이들이 담는 말이다. 여기서 제대로 된 답을 못하면 조진다. 바로 의심을 살 터.

하지만 나야 이런 부분에는 빠삭하지. 영원의 발레스카만 아니라 다른 에인션트급 뱀파이어의 비밀도 훤하니까.

"우리는 달 그림자 속에서 영원히 번창할 것이다."

내 답을 들은 아달릭은 자연스럽게 연결을 뚝 끊었다. 전혀 의심을 사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흐흐흐, 이거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는군."

아달릭 이 새끼도 은인이었네.

오늘도 이렇게 목록이 또 갱신되나?

***

일곱 봉우리의 회의가 끝난 뒤에 아단 삼촌의 골짜기로 돌아왔다.

현재 이곳은 전쟁 준비가 한창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일은 골짜기의 입구인 협곡 지역에 단단한 관문과 성벽을 짓는 것이다.

이 일은 드워프와 스킨크들이 주로 맡게 됐다.

"기중기를 이쪽으로!"

"모두 물러나!"

확실히 돈이 좋기 좋았다. 긴급한 사태라 평소 임금의 세 배를 부르자 그들의 태도는 가히 열정적이었다.

특히 드워프 작업반장 새끼의 주둥이가 예술이었는데, 단순한 성벽과 관문이 아니라, 불멸의 예술적 기념비를 세워보이겠다나?

반짝이는 금은 과묵한 드워프조차 그딴 미사여구를 남발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쿵쿵! 뚜닥뚜닥!

사방에서 석재와 나무를 다듬는 소리가 요란했다. 마력이 펑 하고 터지며 스킨크 주술사들이 재주좋게 거석을 허공에 띄우는 것도 보였다.

공사는 교대 근무로 24시간 이어졌다. 현재 목표는 완벽한 관문과 성벽을 만드는 게 아니다. 태양 교단의 침공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가장 훌륭한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게 목표였다.

나는 데이워커인지라 이제 당당하게 햇님과 인사하며 낮도깨비처럼 주변을 순시했다. 허여멀건한 뱀파이어가 낮에도 돌아다니자 다들 몹시 신기하게 여겼다.

"주인이시여."

그때 스킨크 하인인 스칼릭스가 찾아와 알렸다. 손님이 왔다고 한다. 누군가 해서 가보니 고블린 용병사업자겸 장군인 카조그였다.

"카조그. 용병들을 데려온 건가."

"네! 제일 쓸만한 놈들로 선별했습니다!"

"확실한 친구들이야?"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입니다. 수성전이 벌어지면 맹활약할 게 틀림없습니다."

카조그가 내 요청을 받아 데려온 고블린 용병은 석궁수 218명, 마법사 15명이었다. 다들 한가락 해보이는 게 목숨 내놓고 사는 놈들 다웠다.

"아단 삼촌의 골짜기에 온 걸 환영한다. 이 새끼들아. 사고만 치지 않으면 금화를 넉넉하게 줄 테니 알아서 잘 하도록. 사고치는 놈은 바로 피를 빨아먹어버리겠다."

내 말에 고블린 용병들이 일제히 답했다.

"알겠습니다! 케케겍!"

그 군기가 바짝든 모습에 나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블린 특유의 케케겍, 소리조차 통일돼 있으니 말이다.

"뭐, 뭐야? 얘들."

내 평생 이렇게 기강이 잡힌 고블린은 처음이었기에 카조그를 보며 묻자, 그가 설명해줬다.

"주인께선 스카브누그 님의 총애를 받지 않으십니까? 그날 동상으로 강신하신 스카브누그 님과 나란히 걷던 걸 본 이들이 많습니다. 다들 비범한 존경심을 가질 수밖에요. 케르르!"

그것 때문이구만. 아무튼, 말썽쟁이들이 기합이 들어가 있으니 잘 됐네. 얼마나 갈까 싶다만, 한동안은 괜찮겠지. 사고가 터질 때마다 한 놈씩 목을 뽑아둬도 좋고.

"카조그, 오크들은 어떻게 됐나?"

"벌써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저희쪽도 이렇게 쉽게 오크가 무너질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케르르륵."

아무래도 그들의 족장이자 전설인 고르가쓰가 이탈해 버린 게 컸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현재 오크가 있는 시체 봉우리는 다른 종족들에게 난도질당하고 있다고. 아무리 오크가 굳건하고 강한 종족이라고 해도 다구리 앞에선 장사 없는 법이다.

한 부족의 소멸이 다른 이들의 전비와 물자 확충을 위한 희생이 되는 일곱 봉우리의 유구한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크들이 가졌던 부는 재분배될 것이고, 항복한 이들은 모두 코뚜레가 걸려 노예로 끌려가겠지. 그들은 일곱 봉우리 각지의 광산에서 평생 다시는 태양을 보지 못한 채 곡괭이질만 하다 죽게 될 것이다.

'그게 패한 종족의 결말이지.'

끔찍하지만 어느 세계에서나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일에 불과했다.

"곧 오크 요새가 무너지고 본격적인 약탈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턱을 쓰다듬으며 슬쩍 보자 카조그는 눈치 빠르게 고개를 숙이며 속삭여왔다.

"주인님 몫은 제가 따로 챙겨놓겠습니다. 다른 종족에게도 말해서 일정량을 채우라고···."

"아이 사람이 참! 왜 일을 그렇게 처리해?"

내가 다소 탓하는 기색을 보이자 카조그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

"그렇게 공출하지 말고. 서로 같이 먹고 살아야 하잖아."

"그러면 어떻게? 케르르···."

"내가 말이야. 경조사가 좀 있어. 다행히 좋은 쪽으로 일이 있는 거지. 그러면 기쁨을 함께 축하해야겠네?"

"맞습니다."

"넌지시 말하면 다들 진심으로 축하해 주겠지. 설마 말로만 하려고?"

내 조언에 카조그는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눈을 부릅 떴다.

"이럴 수가! 뜯어내는 것도 합당한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 오늘 크게 한 수 배우게 됩니다. 주인이시여."

"아니, 뭐 뜯어낸다기보다 오고 가는 성의지. 아무튼, 결과는 같을지라도 그 과정은 매끄러워야지. 안 그래?"

"한데··· 그럼 무슨 경조사로?"

적당한 핑계를 대려고 하다가, 오크 큰 턱 부족이 가진 부가 막대하다는 게 떠올랐다. 그 때문에 욕심이 일었고 나는 좀 돈을 많이 받아낼 방법이 없나 고민했다.

'큰 건, 큰 건이 없나?'

그러다가 한 가지가 떠올라 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쳤다.

"약혼, 약혼식이다!"

"설마 진짜 약혼하시는 겁니까? 케륵!"

그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왼손의 낙인을 만져봤다. 갑자기 달아오른 듯 뜨거워져 있었다.

"뭐, 거짓말은 아니지. 좀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느낌이 있지만. 카하하핫!"

불멸의 여왕 앞에서 한 소리도 있겠다, 성녀랑 결혼 못 하면 나는 파멸이다. 솔직히 그 특이한 존재의 마음을 어찌 얻어야 할진 모르겠지만, 나답게 할 생각이다.

일단 물질계에선 기정사실로 만들어놔야지. 성녀가 뭐라 반응하든 간에 말이야.

'저랑 엮인 걸 후회하셔도 늦었습니다. 어떻게든 성녀님이랑 맺어져야겠으니.'

나는 소렌이다. 소렌 다켄발트.

원하는 건 뭐든지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였다.

***

시간이 좀 지나 협곡에 성벽과 관문이 그럴 듯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무렵의 밤.

나는 한가롭게 에레미나의 약초밭을 산책하고 있었다. 녀석이 이곳을 정성스럽게 가꾼 탓에 온갖 기화요초가 보기 좋았다.

특히 밤에는 기묘한 빛을 내며 발광하는 특이한 식물이 많아 독특한 맛이 있었다.

저 멀리 골짜기의 입구 쪽에서 희미한 공사의 소음이 들려왔지만, 주변은 한적하고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던 그 순간.

풀벌레 소리가 뚝 끊겼다.

나는 본능적으로 은제검에 손을 가져갔고, 그때 눈앞에서 차원 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쪽 세계관에선 차원 관문이나 순간이동 같은 게 상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게 활성화돼 있으면 협곡을 막는 것도 별 소용없는 짓거리일 거다. 하지만 다행히 극히 일부의 강자만이 제한적 거리에서 차원 관문을 열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론 이 일대에선 블라르 백작 정도였다.

'갑자기 블라르 백작이?'

차원 관문의 형태를 살펴보니 블라르 백작의 것과 같았다. 그래서 그 변덕스러운 위인을 만날 준비를 하는데 전혀 뜻밖의 인물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아름다운 미부인이었다. 보라색 리본이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었고, 새하얗고 풍만한 가슴골의 노출은 과감했다. 나는 그녀와 초면이지만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새블릿 남작부인이잖아!'

그녀는 블라르 백작의 충복으로, 고아한 미색을 자랑하는 여성 뱀파이어다. 게임 내에서도 무척 예쁘게 등장해 플레이어들에게 인기가 참 많았지.

한데 갑자기 여기 왜?

나와는 아무런 접점도 없는데.

"이렇게 무례하게 찾아와 죄송해요. 저는 새블릿이라 해요."

남작부인은 서둘러 사과를 했지만 상당히 다급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기품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의아할 수밖에.

"아, 백작님의 총애를 받는 분이시군요. 그 이름 들어 알고 있습니다. 부인."

나는 최대한 신사답게 응대했다. 블라르 백작도 백작이지만, 그녀 자체로도 대단한 강자니 심기를 거슬려봐야 좋은 건 없었다.

'그래도 이젠 크게 꿀릴 것 없군.'

예전이라면 그녀가 한참 위였겠지만, 승급 후 급격하게 강해진 터라 얼추 눈높이가 맞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네임드 뱀파이어를 앞에 두고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와주세요! 백작님께서 큰일이 났어요!"

"백작님께서요? 그런 일이 있을 리가···."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에 말끝을 흐렸다. 그 지상최강의 뱀파이어가 위기에 처한다는 건 쉽게 상상이 안 됐기 때문이다. 설마 성기사단장이 몰래 블라르 백작의 침소에 잠입하기라도 한 건가?

"지금 농을 하는 게 아니에요. 가신단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고, 백작님께선 암습에 당해 쓰러지셨어요!"

"뭐라고요! 그게 진짜입니까! 설마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무슨 짓을?"

"맞아요! 자세한 사정은 가면서 설명할게요."

무슨 흉계를 부린 건지 블라르 백작은 부상을 입고 현재 성의 밀실에 들어가 버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반란군 놈들이 밀실을 포위하고 백작을 끌어내려는 중이고.

"제발 도와주세요. 당신은 백작님의 후계자잖아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든든한 성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꼴이 떠올랐다.

후계자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도 블라르 백작은 무조건 도와야 한다.

'그가 지금 쓰러져선 절대로 안 돼.'

얼마 뒤면 태양 교단이 쳐들어올 텐데 블라르가 벌써 칼침 맞고 뒤지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해일처럼 밀려온 태양 교단은 기어코 일곱 봉우리까지 쓸어버릴 터.

뭐랄까, 국사책에서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는 고구려의 멸망 부분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들었다.

"가시지요. 부인.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 반역자(2) >

일단은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내 머릿속은 부산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구원 요청이 함정일 가능성은?'

당연히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해 보는 편이다. 특히 속임수에 대해 민감하다. 그것은 내가 잘 쓰는 것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냐. 함정일 가능성은 낮다.'

블라르 백작은 원하기만 하면 날 죽일 수 있다. 딱히 쫓아오지도 않고 스승 흉내를 내는데 재미를 붙인 것 같지만, 그는 언제든 마음대로 할 능력이 있는 것이다.

'굳이 번거롭게 새블릿 남작부인을 써서 끌어들일 이유는 없지.'

하면 새블릿 남작부인의 독단적인 짓일 가능성은?

'그것 역시 낮아···.'

새블릿 남작부인은 블라르 백작의 뜻만을 따른다. 그 순애보적인 사랑으로 플레이어들에게 큰 인기를 끈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독단적으로 블라르 백작의 후계와 관련된 날 처리하려 하진 않을 터.

'게다가 내가 고르가쓰를 처리한 것도 알 테니까.'

이미 나는 그녀보다 아래가 아니다.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솔직히 사도의 힘까지 발휘하면 질 것 같지가 않았다.

"한데 어떻게 차원 관문을 여신 겁니까?"

새블릿 남작부인을 따라 차원 관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 부분은 체크하고자 했다. 그녀가 강자긴 하지만 이런 차원 관문을 자유자재로 만들진 못할 테니.

"백작님께서 제게 주신 물건이 있어요. 그걸 썼답니다."

아, 뭔지 알겠다. 자기 여자가 위급시에 도망갈 수 있게 뭔가 줬던 모양이네.

"알겠습니다. 가시죠."

우리는 곧장 차원 관문을 통과했다. 전신을 마력의 번개가 튀기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다.

"여긴?"

"백작님의 내성 안입니다. 이제부터 기척을 죽이세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미로처럼 복잡한 내성을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나는 따라가며 사정을 설명해 달라 했다.

"가신단 중 간부 셋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어요."

첫 번째 간부는 늑대인간인 나이트모 장군이라고. 늑대인간과 뱀파이어가 서로 원수인 걸 고려해 볼 때 그가 블라르 밑에서 일하는 건 특이한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충성스럽게 군을 이끌던 훌륭한 지휘관이라 했다.

두 번째 간부는 펠킨이라는 워록. 강력한 암흑 마법의 달인인 그는 블라르 백작의 조언자라고.

세 번째 간부는 사일러스 블랙쏜이라는 뱀파이어인데, 이 자가 매우 특이했다. 전직 뱀파이어 헌터 출신의 뱀파이어인 것이다. 수척하고 창백한 꺽다리인 그는 전투기술의 달인이며 블라르 백작을 위해 각종 처형을 맡아왔다고 한다.

"부인같은 충성파도 있었을 텐데요? 어찌 그들이 쉽게 들고일어난 겁니까?"

"하필 제 우군이라 할 만한 자들이 대거 자리를 비웠어요. 태양 교단과의 전쟁을 앞두고 동맹자를 확보하기 위해 외교관으로 떠났거든요."

간부들은 오크 대족장이나 어둠의 숲에 있는 켄타우루스, 포레스트 드래곤 따위를 끌어들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것.

그 틈에 다른 셋이 들고 일어났다는 거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고 했다.

"셋 다 충순한 자들이었어요. 설마 반역을 할 줄이야···."

"그게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무서운 점입니다. 누구든 마음을 흔들어 무너뜨립니다. 충신들조차 예외는 아니에요."

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간부진이 덤빈다고 블라르 백작을 어쩔 수 있단 말인가? 엘프 공주 알테아의 동굴에서 원정대를 몰살시켰던 그 공전절후의 무용이 기억 속에 선명했다.

이런 점을 묻자, 새블릿 남작부인은 내성의 상황을 탐지하기 위한 마법을 시전하면서 빠르게 답했다.

"이 세상에 무적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백작님께서 당신에게 한쪽 눈을 잃기도 하셨잖아요."

맞는 얘기였다. 특히 온갖 신비로운 마법과 성유물, 아티펙트가 난무하는 이런 세계라면 더더욱.

"에인션트 뱀파이어들이 백작님을 궁지에 몰아놓을 방법을 찾은 거예요. 현재 그 때문에 밀실까지 몰려 있어요."

"그게 뭡니까?"

"특별한 성유물입니다. 우울과 비탄의 신인 하코가 흘린 눈물이에요."

아, 뭔지 알겠다.

'하코의 눈물'이란 성유물이구나. 그것은 우울과 비탄의 신인 하코가 흘린 눈물이 결정화된 보석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성유물 가운데 하나로, 상대에게 신의 힘이 농축된 비탄과 절망, 고통과 후회, 상실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하코의 눈물에 당한 자는 십중팔구 그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로 이어지는 결말을 맞이했다.

"외부에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블라르 백작님의 정신은 문제 투성이에요. 마치 누더기 같다고 할까? 아니면 얼기설기 쌓아 올린 판잣집일지도 모르지요. 그분의 정신은 언제 와르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아요. 겉으로 보이는 고고한 모습은 필사적인 노력의 산물일 뿐이랍니다."

요컨대, 그를 물리적으로 굴복시키는 건 어렵지만, 정신적으로 무너뜨리는 건 가능하단 소리였다.

이어진 설명을 더 들어보니 블라르 백작의 상태는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심각한 우울증 말기와 비슷해 보였다.

"실제로 백작님께선 정신을 돌봐줄 약물을 정기적으로 복용하고 계셨어요. 원래부터 정신이 강인한 분이었다면 이리 당하진 않았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하코의 눈물'로 신적인 비탄과 마주하니 완전히 맛이 가버린 모양.

"거의 다 왔어요."

우리는 작은 방에 있는 테라스에서 몸을 살짝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단단한 석재문을 포위하고 있는 한 무리가 보였다.

딱 봐도 반역한 세 명의 간부와 그들의 부하들이었다. 나는 바로 간부들의 생김새를 알아봤다. 간부 중 하나인 워록 펠킨이 검은색 오브를 들고 있었는데 저게 바로 '하코의 눈물'이 틀림없었다.

워록 펠킨은 주문을 계속 외웠는데, 오브에서 일어난 시커먼 영기가 석재문 안으로 파고들어가고 있었다. 그때마다 안에서 비명과 무언가를 와장창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아아악! 꺼져! 꺼지라고!"

분명 그건 블라르 백작의 목소리였다. 새블릿 남작부인은 비통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백작님께선 궁지에 몰려 있으세요. 이대로 더 압박하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봉인해 버릴 수도 있어요."

"반격할 순 없었습니까? 거대한 파괴력으로 저딴 짓거리를 못하게···."

그 말에 새블릿 남작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젊은 뱀파이어. 당신은 공황과 정신적 고통이 뭔지 몰라요. 하코의 신적인 힘이 백작님을 사로잡은 순간 마력을 운용하시지도 못했을 거예요. 당신은 극도로 공포에 질려 오줌을 질질 쌀 상황에서 고풍스러운 소설을 쓸 수 있겠어요?"

"······."

"마법이나 주문 유사 능력은 그것보다 더 어려운 부분이에요."

우리가 상황을 살펴보는 사이에도 적들은 블라르 백작을 계속 압박하고 있었다. 특히 뱀파이어 헌터 사일러스 블랙쏜이 잔혹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블라르! 이제 그만 모든 걸 끝내라! 더 이상 네놈에게 미래는 없지 않나!"

"닥치라고!"

"돌이켜 봐라. 너의 뜻을 이어갈 권속들이 모두 어떻게 됐는지! 다 떠나고, 다 죽었다! 너는 권속을 남기지 못한 실패한 존재야! 후계자 따윈 찾지 못할 것이다!"

그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블라르 백작의 거대한 아픔이자 트라우마였다. 내게 소중한 에레미나가 있듯 블라르 백작에게도 권속들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죽고, 떠나고, 블라르 백작을 배신했다. 그는 버려진 남자였고, 권속과의 기억과 추억을 모두 가슴에 묻어야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백작의 정신도 썩어 문드러져 갔다.

그 지적이 통렬했던지 블라르 백작이 밀실 안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만하라! 그만해! 끄아아아아악―! 제바알!"

그걸 듣자 마음이 이상했다. 저 위대한 사내가 저런 비명을 지르는 걸 처음 들어봤기 때문이다.

지상최강이라 불리던 그가 정신적 고통에 몸부림치며 어쩔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뭐랄까, 연민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내게 블라르 백작은 분명 멋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동경했다. 이 세계의 흑막인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모습도 대단하게 여겼다.

그런 그가 지금 처절한 고통에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자신의 삶과 인생 모든 게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마음에 들지 않아.'

블라르 백작이 무조건 내 편이라곤 할 수 없다. 앞으로 백작과 무슨 관계가 될지도 미지수고.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저런 비참한 꼴을 겪는 걸 더 두고 보긴 싫다는 사실이었다.

"이제부터 작전이 어떻게 됩니까?"

"···소렌 님. 힘드시겠지만, 간부 셋을 동시에 상대해 주셔야 합니다. 그 사이 제가 여기서 마법을 부려 아티펙트의 발동을 멈출 수 있어요."

늑대인간, 워록, 뱀파이어 헌터.

다들 쟁쟁한 상대다. 그 대단한 블라르 백작의 간부니 만만한 놈이 없었다.

"꽤나 빡세겠군요."

"미안해요. 이런 부탁을 해서. 다만 워록 펠킨의 경우는 하코의 눈물을 컨트롤하느라 제대로 끼어들지 못할 거예요."

"그건 다행이군요."

"무리하게 승리를 위해 싸우지 않아도 괜찮아요. 일단 버티기만 하세요. 제가 하코의 눈물을 멈추고 나면 반드시 가세해 도울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죠."

나는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블라르 백작이 숨은 방을 포위한 자들 앞으로 나아갔다.

***

현재 블라르 백작이 숨은 밀실을 포위한 인원은 오십여 명 가량이다. 나머지 인원은 외성 쪽에서 블라르 백작의 충성파들과 치열한 전투 중이었다.

내성으로 통하는 길은 확실히 막아버렸기에 이제 블라르 백작을 도울 이는 없었다. 유일한 문제가 새블릿 남작부인이었는데 아까부터 보이질 않았다.

"남작부인, 이년. 어디로 간 거야?"

늑대인간 나이트모의 말에 뱀파이어 헌터 사일러스가 심드렁하게 받았다.

"백작의 저 병신 같은 꼴을 보라고. 정이 뚝 떨어져서 도망갔나 보지. 크크큭!"

그들의 가운데 있던 워록 펠킨은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신의 힘이 담긴 물건의 위력인가! 그 강력한 백작이 꼼짝도 못하고 아이처럼 울부짖기만 하다니! 마음을 찢고 정신을 무너뜨리는 힘이여. 내가 평생 익힌 그 어떤 파괴마법보다도 강력하구나!"

워록 펠킨은 파괴마법의 대가였다. 하지만 그의 가장 강력한 기술도 블라르 백작을 해하긴 부족했다. 그런데 정신을 무너뜨리는 방법이 이렇게 효용을 보자 격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이, 영감탱이. 손이 떨리는데 그 물건 떨구지 않게 조심하라고. 망가뜨렸다가는 우린 다 죽은 목숨이니까. 그걸 건네준 분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걸?"

늑대인간 나이트모의 말에 워록 펠킨은 인상을 팍 구겼다.

"알고 있다. 멍청한 놈! 시끄러우니 닥치고 있어."

"쳇, 서두르라고. 얼른 그놈의 가슴팍에 말뚝을 박고 싶으니까. 이것만 끝내면 우리는 위대한 존재가 될 테지."

한데 그때 뒤쪽에서 무언가 가볍게 착지하며 망토가 바람에 부드럽게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젊은 뱀파이어가 서 있었다. 그는 턱을 살짝 치켜든 거만한 표정의 미남자였다. 그들을 샅샅이 훑는 눈길에서 모두 이유를 모를 오한을 느꼈다.

"웬 놈이냐!"

늑대인간 나이트모의 외침에 젊은 뱀파이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허리춤의 은제검을 뽑으며 중얼거렸다.

"막상 보니까 이거 할 만할지도 모르겠어."

나이트모는 지휘관답게 빠르게 판단했다. 헛된 대화 대신 공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놈을 찢어발겨라!"

그의 외침과 함께 휘하의 늑대인간 전사들이 쇄도했다. 그들은 모두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러자 그들의 목표인 젊은 뱀파이어 왼손으로 목에 걸고 있는 펜던트를 잡더니 생각지도 못한 기술을 발동했다.

"대규모 에너지 드레인!"

그 말과 함께 젊은 뱀파이어의 앞에 보라색 구체가 형성됐다. 그리고는 일대에 있는 늑대인간 전사들의 생명력을 무자비하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커엉! 컹! 컹!"

"깨개갱!"

산 채로 생명력을 잡아 뽑히는 격통에 늑대인간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바닥에 뒹굴며 쓰러지기까지 했다.

"크르르르릉! 크앙!"

몇몇 늑대인간들이 근성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과연 정예다웠지만 젊은 뱀파이어의 에너지 드레인은 놀랄 정도의 위력이었다.

금방 늑대인간들은 미라처럼 말라 비틀어져갔고,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 모습에 그는 스스로 크게 만족한 모습이었다.

"이 정도란 말이지. 흐흐흐."

지켜보던 뱀파이어 헌터 사일러스는 무기를 챙겨서 심각한 얼굴로 경고했다.

"엄청난 강자다! 셋이서 같이 덤벼야 한다."

"우리 힘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셋 다 비장한 얼굴이 됐다. 다들 이름이 알려진 강자였지만 지금만큼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저 뱀파이어는 압박감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로드급이야. 틀림없어."

"갑자기 로드급이 왜!"

"이런 빌어먹을···!"

하지만 그들은 곧이어 젊은 뱀파이어가 한 행동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손바닥에서 붉은 달을 만들어 띄웠던 것이다. 워록 펠킨은 경악성을 터뜨렸다.

"블러드문! 어찌 백작의 기술을!"

하지만 대답대신 음침한 웃음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크흐흐흐, 반역자들의 피는 무슨 맛일까 궁금하군.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저 안에 있는 늙은 양반이 조금은 마음에 드는 편이거든."

< 반역자(3) >

***

"블러드문이여!"

곧장 손바닥에 떠오른 붉은 구체를 위로 던졌다. 그러자 주변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섬뜩한 진홍색 빛에서 발산되는 에너지의 파동은 내게 고스란히 흡수됐다.

"아주 좋군···!"

전신에 활력이 넘치는 게 느껴졌다.

반면 상대는 괴로움과 고통에 빠졌다.

"끄아아아악!"

워록 펠킨이 비명을 질러댔다. 늑대인간 나이트모도 송곳니를 잔뜩 드러내며 통증에 울부짖었다.

"크르릉! 크아앙!"

지금 그들은 마치 전신을 바늘이 쑤시는 듯한 격통을 느낄 터. 블러드문의 빛은 적에겐 재앙과도 같았다.

단순히 고통만 느끼는 게 아니다. 그들은 약화되고 무기력해지까지 한다.

유일하게 멀쩡한 건 뱀파이어인 사이러스 뿐이었다.

물론 블러드문을 조절해 그에겐 버프가 가지 못하게 했다. 처음 써보는 것도 아니고 몇 번 해봐서 이제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다만, 사이러스는 나처럼 버프는 못 누려도 이 진홍색 빛 속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 듯했다.

"이거 아주 재밌군!"

입꼬리를 올리는 그의 눈이 언데드답지 않게 초롱초롱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동료들은 죽을 맛. 워록 펠킨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내가 블러드문을 막겠다! 아직 완벽하지 못한 기술이야. 대신 하코의 눈물과 블러드문을 동시에 통제해야 하니 그 이상의 도움을 주진 못한다! 알아서들 하라고!"

그 말에 아파 죽으려고 하는 늑대인간 나이트모가 소리를 질러댔다.

"어서 해! 어서 하라고! 늙은이!"

워록 펠킨은 즉각 음산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딱히 막지는 않았다. 블러드문 때문에 저 파괴마법의 대가가 싸움에서 빠지면 그걸로 좋으니까. 게다가 블러드문까지 신경 쓰다 보면 곧 이어 들어올 새블릿 남작부인의 방해에 취약해지겠지.

우우우웅!

마력이 진동하며 파란 막이 블러드문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것은 블러드문을 완벽히 코팅했고, 주변을 채우던 진홍색 빛을 막았다.

"이제야 괜찮군! 크르르르릉! 빌어먹을 새끼!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으르렁거리는 늑대인간 나이트모는 격분한 듯 털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은 단 한 순간도 내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완전히 사냥감에 집중하는 포식자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나이트모의 호흡이 딱 멈추는 게 내 민감한 감각에 걸렸고, 방어기인 그림자 수의를 펼쳤다.

카아앙!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늑대인간 나이트모의 모습이 흐릿하게 사라진다 싶더니, 그림자 수의를 앞발로 강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자 수의의 능력으론 분노한 늑대인간의 공격을 감당하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이 미친놈이 발톱을 마구 휘둘러 대더니 기어코 그림자 수의를 찢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기다란 주둥이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커엉! 크르릉!"

날카로운 늑대의 이빨이 어떻게든 날 물어뜯으려 난리였다. 은제검을 휘둘렀지만 입으로 그걸 받아냈다.

적이지만 놀라운 솜씨였다. 떨어지는 칼날을 이빨로 물어 잡아채다니.

"크르르릉!"

하지만 내겐 은제검이 하나 더 있다. 허리춤의 은제 단검을 꺼내서 놈의 콧잔등을 찔러버렸다.

"크르으르르르!"

격통을 느낀 듯 나이트모가 얼굴을 흔들려 물러났다. 은제검에 찔린 부분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검은 연기가 솟아났다.

그때 내 관자놀이를 정확히 노리고 석궁의 볼트가 날아왔다.

캉!

단검으로 즉각 쳐냈는데, 문제는 그거 한 발이 아니었다는 거다.

퉁! 퉁! 퉁! 투웅!

뱀파이어에게 치명적인 은제 볼트들이 연발로 날아왔다. 뱀파이어 헌터 사이러스 놈이 카트리지가 붙어 있는 연발식 석궁을 썼기 때문이다.

내 민첩성이면 저 볼트들을 모두 쳐낼 순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다가는 빈틈을 노려오는 나이트모에게 당하게 될 터. 나는 날아오는 볼트를 무시하고는 하단으로 묵직한 태클을 걸어오는 나이트모를 상대로 다리를 뒤로 빼며 버텼다.

캉! 카앙! 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은제 볼트가 내 몸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건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볼트의 촉은 날붙이였고, 신체개조의 3단계가 발동하기 때문이다.

옷이 일부 찢어졌지만 드래곤의 비늘이 볼트를 모조리 튕겨냈다. 급해서 갑옷을 챙겨 입지 못했는데 아주 든든했다.

"이 괴물 같은 놈!"

설마 자신의 볼트가 모두 튕겨 나갈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지 사이러스가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터뜨렸다.

그 사이 나와 늑대인간 나이트모의 몸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크르릉! 크르릉! 크어어!"

나이트모는 나를 밀어붙이면서도 어떻게든 주둥이로 물어뜯으려고 난리였다. 한 번만 물려도 살점이 뭉텅이로 뜯겨나갈 것만 같이 살벌했다. 나는 왼손으로 놈의 턱주가리를 밀어내며 버텼다. 그 와중에 한 가지 알게 됐는데, 이 근육덩어리 늑대인간보다 내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이었다.

'승급하고 대체 얼마나 완력이 강해진 거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일부러 덤벼오는 나이트모를 내던져버리지 않았다. 슬쩍 보니까 뱀파이어 헌터 사이러스가 연발식 석궁 대신 등에 매고 있던 중석궁을 꺼내 장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볼트의 촉을 보니 두툼하게 뭉친 게 화약과 마법을 이용한 폭발성 발사체가 틀림없었다.

'한 방만 맞아도 치명타겠군.'

게다가 사이러스의 특성상 뱀파이어에게 특히나 치명적인 물건을 만들었겠지.

사이러스는 희열에 들뜬 얼굴이었다. 자신의 중석궁으로 얼른 날 쏴 맞추고 싶은 것 같았다. 완벽한 사냥감을 앞에 두고 한껏 고양된 사냥꾼 같다고 할까?

"꽉 잡고 있어라! 나이트모!"

아마 사이러스는 우리의 힘 싸움이 백중지세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섣부른 오해였다.

사이러스가 석궁을 쏘려던 그 순간 늑대인간 녀석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내 앞으로 끌어들였다. 고기 방패로 삼기 위해서다.

"!"

갑자기 끌어 당겨진 나이트모가 움찔하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완벽하지 못했다.

엘더급에 오른 이후부터 투사체의 진로가 가상으로 선으로 느껴지곤 했다. 이전에 고르가쓰와 싸울 때도 그랬다.

지금 상황은 날아온 볼트가 늑대인간의 갈비뼈를 스치고 지나 내 오른쪽 가슴에 박히는 진로였다.

분명히 좋은 타이밍에 고기 방패를 내세웠다. 하지만 뱀파이어 헌터 사이러스의 빼어난 사격술이 그걸 커버한 것이다.

그야말로 극속의 순간이었다. 놈이 방아쇠를 반쯤 당기는 소리까지 내 귀에 생생히 들릴 정도였다. 그리고 충혈된 눈으로 날 쏘아보는 사이러스가 마치 정지 화면처럼 느껴졌다.

놈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이겼다, 라고.

하지만 사이러스는 한 가지 모르고 있었다. 그 순간 자신의 그림자에서 검은 손길들이 뻗어 나가는 중이라는 걸.

케일런의 능력으로 만든 그림자 손길이 마지막 순간 사이러스의 팔을 붙잡고 석궁의 발사경로를 틀어버렸다.

놀란 사이러스가 자신의 손을 쳐다봤지만, 이미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긴 후였다.

쌔앵!

중석궁의 위력으로 매섭게 날아온 볼트는 늑대인간 나이트모의 가슴팍에 정확히 박혔다. 그리고 폭발했다.

콰아아앙!

놈을 붙들고 있던 나 역시 뒤로 날아갔다.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균형을 잡고 일어서서는 길게 미끄러졌다.

"크르르르르릉! 커커컹!"

가슴에서 폭발이 일어난 나이트모가 비명을 질러댔다. 그의 흉부가 일부 터져서는 부러진 갈비뼈들이 여기저기 튀어나오고 난리였다. 가슴은 연기와 쏟아지는 피로 엉망진창이었다.

'기회로군.'

나는 마법주머니에서 스킨크의 보물인 마법창 '뱀의 송곳니'를 꺼내들고 달렸다.

내가 중상을 입은 나이트모를 노리자 즉각 사이러스가 단검을 한 번에 십여 개나 투척하며 견제해 왔지만, 소용없었다.

달리던 기세 그대로 몸을 낮춰 회전하며 피한 뒤, 그대로 바닥을 쓸 듯 창대로 나이트모의 발을 강타했던 것이다.

빠각!

요란한 소리와 함께 늑대인간의 다리가 기괴하게 꺾이며 벌러덩 뒤로 넘어졌다.

나는 그걸로 그치지 않고 창을 살짝 위로 던진 뒤, 뛰어올라 양손으로 창대를 잡고는 그대로 나이트모의 흉부를 내리찍었다.

퍼억!

뱀의 송곳니의 긴 창대가 나이트모의 두꺼운 흉곽을 관통하더니 바닥의 돌에 박혔다.

"크르르르릉! 이 빌어먹을 놈!"

이 와중에도 나이트모는 전의를 잃지 않고 충혈된 눈으로 사납게 입을 벌려댔다. 어떻게든 가슴을 관통한 창을 뽑아내고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창날에서 맹독이 그의 몸으로 퍼져들어갔기 때문이다. 스킨크의 보물인 뱀의 송곳니가 무서운 건 창날이 뿜어내는 독이다.

그간 언데드나 고대신의 조각 같이 별 이상한 것들만 상대하느라 크게 효험을 못 봤지만, 써먹을 때가 오자 아주 막강했다.

부글부글.

표독스럽게 짖어대던 나이트모가 보라색 거품을 잔뜩 입가로 흘리며 마비돼 버린 것이다.

'한 놈 제압했고.'

그 순간 사이러스가 검을 들고 사납게 덤벼들어 왔다. 놀랍게도 놈은 은제검을 들고 있었다.

'나 말고도 은검을 쓰는 미친 뱀파이어가 또 있다니!'

역시 뱀파이어 헌터 출신이라 은에 대해 저항하는 능력이 있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곧 피를 뿌리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사이러스는 내게 무기가 없다는 걸 노린 건데, 어림없는 소리다. 케일런의 능력 덕에 그림자 검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

놈은 검에 중후한 마력을 담은 듯 내 드래곤 비늘을 몇 개 떼어내기까지 했으나 상처는 얕았다. 반면 내 그림자 검은 놈의 흉부를 깊게 갈랐다. 예상도 못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크억!"

한쪽 무릎을 꿇은 사이러스의 가슴팍에서 언데드 특유의 시커멓고 눅진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 그림자 검은 케일런의 것인데··· 네놈이 어찌!"

"아, 친구랑 좋은 건 나눠 쓰는 주의라서 말이지."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놈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한손에 은제 말뚝을 들었다. 뭔가 필살의 일격을 준비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급히 단검을 주워서 던졌지만 방어막이 나타나 그를 지켜줬다.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 한 방 먹이라고!"

누군가 했더니 워록인 펠킨이었다. 블러드문도 막고, 하코의 눈물의 통제권 싸움도 하는 와중에 발휘한 눈물겨운 도움이었다.

펠킨은 과부하로 땀을 샤워하는 것처럼 흘리며, 이마에 핏줄이 터질 듯 불거진 상태. 하지만 그건 분명 제대로 일을 했다.

사이러스가 자신의 필살기를 완성한 것이다.

"고맙군. 이 빚은 잊지 않지."

저놈들, 마치 소년 만화의 주인공들 같구만.

동시에 사이러스의 은제 말뚝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놈의 손이 연기를 내며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광은(鑛銀)의 말뚝을 쓰려는 거군.'

놈의 최종오의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대 뱀파이어 궁극기라고 할까?

은의 힘을 극대화한 기술이기에 맞으면 버티는 뱀파이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다.

문제는 사용자 본인도 뱀파이어라 못 버틴다는 것. 그야말로 너죽고, 나죽자는 공격이었다.

뱀파이어 헌터 출신이라 그런지 공격 수준이 아주 이쪽 업계의 상식을 초월해 버렸다.

"은의 순수함 속에서 타들어가라! 이 괴물!"

아니, 지는 뭐 뱀파이어가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어.

"네놈의 영원한 밤은 이 은빛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저건 단순히 멋지라고 외치는 대사만은 아니었다. 마법사의 주문과 비슷한 거다. 그러자 과연 내 머리 위쪽에서 길고 거대한 은제 말뚝이 생겨났다.

지금 놈이 손에 들고 있는 걸 그대로 확대해 놓은 생김새였다. 말뚝은 깨끗한 은빛으로 찬란한 게 보통의 뱀파이어라면 식겁할 것 같았다.

'저런 걸로 내리찍으니 다들 족족 죽어나가지.'

하여간 흉악한 놈 같으니라고.

"어둠을 끊는 순결한 은이여!"

사이러스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은제 말뚝이 무서운 기세로 내 정수리로 내리꽂혔다. 하지만 나는 양손으로 그 말뚝을 잡아버렸다.

"크윽!"

솔직히 쉽지 않아 전신이 흔들렸지만 이를 악물자 곧 자세를 회복했다. 은과 닿은 손바닥 등의 부분이 타는 듯 뜨거웠지만 그게 전부였다.

내가 가진 은에 대한 강력한 내성 덕에 더 큰 피해는 없었다. 반면 정작 능력을 발휘한 사이러스는 은에 쩔어서 온몸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상황.

"네놈! 어떻게 끄떡도 없는 거냐!"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외치는 사이러스를 보며 대답대신 양손에 힘을 줬다.

우직. 우지지직!

그와 함께 대들보 같이 거대한 은제 말뚝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결국 박살이나 공중에서 흩어졌다.

카아앙!

동시에 사이러스가 들고 있던 그의 능력의 매개가 됐던 은제 말뚝이 폭발했고, 그는 뒤로 날아가 쳐박혔다.

"크헉······."

온몸이 은에 의해 타들어 가고 잔뜩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회생불능이겠군.'

사이러스는 근성으로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의 얼굴을 땅바닥에 눌러버렸다.

"패했으면 머리를 숙여야지. 안 그런가?"

"크으으윽···!"

침음성을 내는 것 외에는 꼼짝도 못하는 사이러스를 보며 나는 승리감에 젖었다.

'강해졌군. 이렇게 강해졌을 줄이야.'

솔직히 전투 기술의 구성이야 이전과 별 차이가 없지만, 격 자체가 달라졌다고 할까?

이 정도의 강자 둘을 한꺼번에 상대해서 완승을 거두다니. 이전이었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남은 건 이제 워록 펠킨 뿐이었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이런 젠장! 빌어먹을!"

펠킨은 어쩔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현재 하코의 눈물을 통제하느라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코의 눈물을 포기한 순간 블라르 백작이 정신을 차리고 튀어나올 터.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주 재밌게 됐군. 안 그런가? 마법사."

놈은 파들파들 떨며 어쩔 바를 몰라 했다. 한데 갑자기 워록 펠킨의 표정이 바뀐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내 앞쪽으로 피투성이가 된 새블릿 남작부인이 떨어졌기 때문.

무슨 운석처럼 사선으로 내리꽂힌 남작부인은 주욱 미끄러졌다. 한눈에도 상태가 위중해 보였다. 나는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살펴보면서도 의아해졌다.

'대체 누가?'

새블릿 남작부인은 블라르 백작의 쟁쟁한 가신단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강자다. 한데 삽시간에 이런 꼴이 되다니?

"무슨 일입니까!"

"조심하세요··· 아니, 도망을··· 어서···."

숨이 끊어질 듯 작은 그녀의 목소리에 나긋나긋한 답이 돌아왔다.

"글쎄, 그게 가능할까?"

목소리만 들어도 전신에 소름이 돋고 머리칼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쩐지 뻣뻣하게 굳어 잘 움직이지 않는 목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이런 젠장······!"

나직이 욕설을 내뱉자 갑자기 나타난 자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왜 모르겠나? 저 외팔이 뱀파이어는 게임 내내 플레이어를 괴롭히는 빌런인데.

그녀는 에인션트 뱀파이어고, '영원의 발레스카'라고 불린다. 내가 줄곧 경계하던 '어둠에서 영원이란' 모토를 사용하는 게 저 여자였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영원의 발레스카가 꾸민 것 같았다.

"···발레스카 님 아닙니까?"

"아, 그래. 맞아. 블라르 그 자식이 뽑아버린 이 팔을 보면 알 만하겠지."

발레스카는 다소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헐렁거리는 소매를 들어보였다. 저건 블라르 백작에게 당한 건데 어째서인지 이후 재생하지 못했다고 한다.

겉으로 보이는 저런 태도와 다르게 발레스카가 블라르 백작에게 품고 있는 원한은 상상을 초월했다.

"너는 소렌이지? 최근 네 이름을 몇 번이고 들었단다."

"···영광이군요."

"꽤나 건방을 떨고 다닌 것 같지만 네놈은 아직 갱생의 여지가 있지. 저 안에 있는 블라르 놈과 다르게. 그러니까 잠깐 꺼져 있으렴."

그 말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내 몸이 튕겨나갔다. 그리고 석재 벽에 요란하게 부딪쳤다.

콰아아앙!

순간 눈이 찢어질 듯 커지며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삽시간에 속이 엉망이 된 것 같았다. 빠르게 재생하곤 있었지만 대체 어떻게 당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거지 같은!'

저 미친년은 내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그 사이 이미 발레스카는 쓰러진 새블릿 남작부인를 밟고 서 있었다. 그리고 밀실을 향해 소리쳤다.

"블라르! 이 비열한 새끼야! 여기 네놈이 아끼는 계집의 팔을 하나씩 뽑을 테니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하하하핫!"

< 반역자(4) >

발레스카의 째지는 목소리에는 악의가 가득했다. 그녀의 치렁치렁한 긴 머리칼은 격동하는 감정을 반영하는 듯 허공에 떠서 일렁이고 있었다.

"블라르! 이 개종자야. 역시 답이 없구나! 네놈만 살면 이 여자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그거지! 크하하하하!"

발레스카는 허리를 굽히며 웃어댔다. 처음부터 블라르 백작이 나오질 못할 거라고 여긴 것 같았다. 솔직히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하코의 눈물은 치명적이야···.'

저것은 극도의 우울증과 공황 등으로 정신을 붕괴시켜 버린다.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한번이라도 노출된다면 정신이 영구적으로 망가지고 결국 자살만 남는다는 극악한 성유물이다.

'아무리 블라르 백작이라도···.'

아니, 블라르 백작이기에 더 힘들지도 모르겠군. 그의 과거는 트라우마와 후회로 가득하니까.

"크하하하핫! 자, 그럼 거기서 네 여자의 비명이나 들어라!"

영원의 발레스카가 새블릿 남작부인의 팔을 붙잡던 그 순간, 단단한 석재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릉.

석재문에 새겨져 있던 강력한 보호 마법들이 하나씩 풀리며 마침내 열린 것이다.

벌어진 문 사이로 강건한 체구에 한점의 흔들림 없는 표정, 완벽에 가까운 위용을 자랑하는 지상최강의 뱀파이어가 서 있었다.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 비명을 질러대는 게 무색하게도 옷은 구겨진 곳조차 없었다.

그 모습에 워록 펠킨이 놀라서 손을 덜덜 떨었다.

"세, 세상에. 주, 주인이시여!"

그런 그에게 발레스카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정신 차리고 눈물을 계속 가동해!"

하지만 발레스카 역시 놀란 표정이다.

"블라르 네놈···!"

"흥, 같잖은 수작질을 하는군. 늙은이."

차분하고 위엄이 넘치는 패자의 음성이었다. 나 역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모든 게 블라르 백작의 속임수이자 함정이었나? 발레스카를 끌어들이기 위한?'

발레스카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에인션트 뱀파이어답지 않게 약간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추가적인 매복이 없나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다. 그러다 곧 멈칫하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핫! 블라르. 이 귀여운 녀석! 안 본 사이에 연기력이 늘었구나. 연극이라도 배우고 있는 건가? 다리가 살짝 떨리고 있는데? 크히히힛!"

발레스카의 지적은 정확했다. 굳건하게 서 있는 줄 알았던 다리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블라르 백작이 반응했다.

자신의 주먹에 시커먼 마력을 만들어 있는 힘껏 후려친 것이다. 발레스카는 놀라서 그걸 피했다.

콰아앙―!

흡사 소닉붐이 터지는 것 같은 파공음이 일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목표는 발레스카가 아니었다. 블라르 백작의 일격은 하코의 눈물을 컨트롤하고 있는 워록 펠킨을 정확히 때렸다.

쿠아아아앙!

폭발이 일어나며 일대에 검은 화염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졌을 때 워록 펠킨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피눈물과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희열에 사로잡힌 얼굴이었다.

"주군! 확실히 약해지셨군요! 쥐어짜낸 일격이 겨우 이 정도라니! 크흐흐흐! 카하핫!"

펠킨은 자신의 방어 마법으로 블라르 백작의 일격을 막아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덕에 엉망이 된 듯했지만 더 없이 기쁜 얼굴이었다. 본래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기에.

"크흑!"

블라르 백작은 일격이 실패하자 더없이 창백한 얼굴이 되어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온몸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방금 그 일격은 마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발휘한, 기적의 한 방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블라르 백작에겐 더 이상 부릴 허세도 남아 있지 않았다.

"끄으으으윽! 아악···!"

그는 두 손을 벌벌 떨고,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억눌린 비명을 흘러댔다.

그 모습에 뒤로 물러났던 발레스카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좋아했다.

"이 얼마나 꼴사나운 모습이란 말인가! 블라르! 꺄하하하핫!"

발레스카는 곧장 블라르 백작을 걷어찼다. 피가 튀며 블라르 백작이 볼품없이 날아가 석재문에 부딪쳤다가 다시 앞으로 튕겨 나왔다.

"커헉!"

발레스카는 그걸로 멈추지 않았다. 블라르 백작의 발목을 잡아 땅에 내리찍고, 또 반대편으로 내리찍고, 마치 장난감을 망가뜨리는 것처럼 괴롭혀댔다.

"이제야 우리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 않아? 블라르."

발레스카는 뱀처럼 기다란 혀를 뽑아 블라르의 뺨을 핥으며 조롱을 이어갔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은 너무나 심한 공황 때문에 대꾸할 여력도 없는 듯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어떻게 될 정도로 창백했다.

숨을 쉬지 않는 뱀파이어인데도 숨이 막힌 사람처럼 괴로워하고 있었다. 또 심장 역시 뛰지 않음에도 너무나 과도한 심장의 발작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것처럼도 보였다.

"블라르!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네놈은 죗값을 치러야 해. 그건 아주 무겁지. 감히 에인션트에게! 네놈의 시조에게 반항해! 이 반역자!"

그건 나도 모르는 이야기였기에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반역자라고···?"

한데 놀랍게도 영원의 발레스카가 내 혼잣말에 반응해줬다.

"아, 소렌이여. 아직 어린 뱀파이어라 모르는 건가? 좋아. 그러면 교훈을 줄 겸 알려주지. 너는 아직 방황하는 청소년 같은 거라 충분히 계도할 수 있을 테니까.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이 발레스카가 널 괜찮게 보고 있다고? 카하하하! 카하하하하!"

발레스카는 미친년처럼 웃으며 블라르 백작을 마구잡이로 구타해댔다. 절대 흠집조차 나지 않을 것 같은 백작의 강건한 육체가 터지고, 깨지고, 부러지고, 찢어지기 시작했다. 보고도 믿기가 어려웠다.

"이놈은 스스로 백작을 자처하지만 백작 같은 게 아니다! 본디 천하디 천한 놈이지! 블라르 백작가의 사생아 새끼! 내가 줍지 않았으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 새끼가! 감히!"

발레스카가 블라르를 주웠다고?

"애초에 이놈은 병기로 만들어진 존재다. 우리 에인션트끼리 여러 가지 강점을 심어줬지. 병기니 당연히 통제가 가능했다. 하지만 어느 날 주제도 모르고 속박을 끊고 독립하더군. 이 반역자 새끼가! 감히! 제놈이 만들어진 목적을 져버려!"

요컨대, 블라르 백작의 강함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그건가?

"반역자! 반역자! 반역자!"

발레스카의 광기 어린 외침에 마침내 블라르 백작이 간신히 답했다.

"크윽··· 세상에는··· 균형이 필요하다."

그 말은 발레스카를 더욱 격분하게 했다.

"미친 소리! 뱀파이어 주제에!"

발레스카의 발길질에 블라르 백작은 단번에 수십 미터를 날아가 고성 바닥을 미끄러졌다.

영원의 발레스카의 목적이라면 이미 알고 있다. 저 미친 존재는 세상을 뱀파이어로 가득 채우고 싶어 한다.

권속 같이 제대로 된 존재가 아닌, 좀 더 편리한 형태로 심각한 전염병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

마치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처럼, '데미 뱀파이어'라 불리는 피를 갈구하는 미친 생물이 드글드글한 세계를 원했다.

세상을 피와 혼돈과 공포로 몰아넣고 자신이 그 위에 군림해, 종국에는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 전체가 뱀파이어들로 가득 차면 새로운 희생양을 찾아 다른 차원까지 침공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야말로 미친 계획이지.'

어둠에서 영원으로, 라는 그녀의 모토는 결국 신좌의 오르고자 하는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은 그것에 반대하는 뱀파이어다. 자신이 포식자이며 세상의 어둠이란 건 인정하지만, 균형을 유지하고 용인된 선을 넘지 않으려는 자였다.

바닥에 뒹굴던 블라르 백작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미치광이야. 허억··· 허억···."

블라르 백작은 무언가 할 말이 있었지만 공황 증세가 심해 말을 이어가질 못했다. 그러자 발레스카가 워록 펠킨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출력을 약간만 줄여봐. 저놈이 뭐라 하는지 들어보게."

"하지만 그건···."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녀석이야."

"알겠습니다."

펠킨의 조작으로 하코의 눈물이 쏟아 내는 힘이 조금 약해지자 블라르 백작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등을 벽에 기댔다. 고아한 백작은 얼굴이 엉망진창이었고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발레스카··· 크흐흐. 힘은 우리만 갖고 있는 게 아니야. 멍청한 늙은이야.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 너의 그 어리석은 야망은 절대로 실현될 수 없으니까···."

블라르 백작은 그 와중에도 힘든 듯 한손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너뿐만이 아니다··· 다른 에인션트들이 가진 터무니없는 야망을··· 나는 저지할 것이다. 그게 나를 만든 너희에 대한 반역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 말에 발레스카는 격분했다.

"더러운! 가증스러운 소리! 누구보다 악행을 저지른 네놈이 그런 말을 입에 담는다고! 누구보다 악랄했던 뱀파이어가? 세상의 균형을 원하나? 속죄라도 하겠다는 거냐! 이 빌어먹을 실패작아!"

발레스카의 물음에 블라르 백작은 낮게 웃어댔다.

"크흐흐··· 그딴 거창한 게 아니다. 이건 그저··· 후회일 뿐이다."

"후회라고?"

"내 아이들이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죽거나, 떠나고, 견디지 못해 날 배신했던 권속들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다."

블라르 백작은 박살이 나 피에 끈적하게 붙어 있던 가면의 조각을 손으로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착하게 살겠다는 개소리가 아니다···. 나는 뱀파이어고 밤마다 희생자를 찾아 산 자들을··· 공포에 빠뜨릴 것이다. 그렇게 살다 뱀파이어 헌터들에게 말뚝이 박혀··· 뒤지겠지."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내가 악임을 인정한다. 나는 어둠이며··· 걸어 다니는 시체다. 불길한 것이며 저주받은 존재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해주지. 너처럼 세계 자체를 멸망으로··· 몰고 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내가 원하는 건 균형이다···."

블라르 백작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소렌이여···, 나를 도와다오."

그 말에 발레스카가 조롱을 참지 못했다.

"멍청한! 저 녀석도 머리가 있다면 널 돕겠느냐? 어디 헛된 구걸이나 해보도록. 더욱 비참한 꼴이 될 테니."

블라르 백작은 그녀의 비웃음을 무시하고는 내게 설명해왔다.

"내가··· 이 어둠의 숲에 자리 잡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전에 이곳은 한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땅이었지···. 하지만 그자를 처리하고 본거지로 삼았다."

거기까지는 나도 아는 얘기였다. 게임 중에 배경 설명으로 등장하니까. 하지만 이어진 이야기는 새로웠다.

"저··· 발레스카가 말하는 데미 뱀파이어의 전염병을 만들기 위한 고대신의 유적이··· 이 성의 지하에 있다···."

"정말입니까?"

"그래, 나는 이곳에··· 자리 잡고 그들의 접근을 막아온 것. 하지만 이제 놈들은··· 태양 교단이란 치명적인 적까지 움직이고 있다··· 게다가 저 성유물이라니···. 부디 나를 도와다오."

그 말에 발레스카는 박수를 치며 웃어댔다.

"저딴 것도 거래라고 제안하는 건가? 카하하하핫! 좋다. 소렌. 그렇다면 유흥을 위해 나도 제안하지."

발레스카는 내 쪽으로 향해 다가오며 검지를 까딱거렸다.

"잘 생각해 보렴. 어린 뱀파이어야. 저 비루한 실패작의 손을 잡을지, 아니면 내 손을 잡을지 말이야. 만약 내 손을 잡는다면 우리 에인션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마."

"어떤 지지입니까?"

"너는 사도지? 거기 알맞은 이점을 제공하마. 데미 뱀파이어의 전염병이 퍼지면 무수한 종복이 생겨난다. 그들은 우리에게 거역할 수 없으니까. 그중 일정량을 네가 모시는 신을 섬기게 해주마."

발레스카는 이게 엄청난 혁신이 될 거라고 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천년, 만년 종교를 전파해도 커질 수 없는 교세를 단번에 얻게 될 것이다. 네가 섬기는 신의 격은 올라갈 테고 너 역시 위대해질 거다.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다. 꼬마야."

상냥하게 웃던 발레스카는 뒤이어 얼굴을 굳히며 블라르 백작을 가리켰다.

"만약 거절하겠다면. 스스로 백작을 자처하는 저 비천한 놈의 손을 기어코 잡겠다면, 관용 대신 지옥을 보여주마. 소렌 다켄발트."

"······."

"네놈이 가진 모든 걸 빼앗고, 네놈이 소중히 여기는 걸 모두 찢어발기겠다. 너는 그걸 막을 수 있겠나? 응? 자, 이제 선택해!"

양쪽에게 제안을 받게 됐다. 피투성이인 블라르 백작이 처연하게 날 바라보고 있다. 반면 발레스카는 내가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나는 잠깐 고민한 뒤에 답했다.

"발레스카 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나는 뱀파이어의 약속을 해줄 걸 요구했다. 뱀파이어의 약속은 손바닥에 피를 내고 악수를 해 서로의 피를 섞는 의식.

구속력은 없지만, 어긴 횟수를 누구든 알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에인션트급 정도면 쉽게 저버리긴 어렵다. 그만큼 체면이 중요한 자리니까. 영원의 발레스카는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에인션트에게 그딴 걸 요구하는 건가!"

"약속만 해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제가 블라르 백작을 직접 처단하겠습니다."

"뭐? 그거 재밌겠네! 하하하핫! 간절히 제안했던 상대에게 목이 잘린다면 말이야. 좋아. 하자고. 약속."

나는 발레스카를 향해 가며 속으로 되뇌었다.

'성녀시여. 구하소서.'

다행히 발레스카는 내 성명절기에 대해 모른다. 악수라는 건 그걸 쓰기 위한 완벽한 조건이었다. 나는 발레스카와 마주보고 서서는 단검으로 손바닥을 뚫었다.

발레스카 외팔이라 단검 대신 자신의 기다란 송곳니로 손바닥에 피를 냈다.

"소렌 다켄발트. 앞으로 기대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발레스카 님."

그렇게 서로의 손을 마주잡으려던 그 순간 발레스카가 과장된 제스쳐를 하며 손을 뺐다.

"아이쿠! 이런. 잠깐만!"

"뭐···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내 말에 발레스카는 위험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혹시 이거 무슨 수작질 아닌가?"

"제가 어찌 감히···."

"아니지. 아니야! 긴 세월 살다 보니 알겠더라고? 보통 이딴 식으로 남의 뒤통수를 치더라. 크흐흐."

"······."

"네놈 눈빛을 보니 알겠다. 너도 뱀파이어지만, 뱀파이어답지 못한 놈이라는 걸. 역시 뭔가 있구나?"

발레스카는 쾌활한 태도로 물러나더니 손을 털었다. 그러자 피가 좀 튀기면서 손바닥의 상처는 삽시간에 아물었다. 그녀는 검지를 튕겨 딱, 하는 소리를 내며 혼자 끄덕였다.

"결정했다! 역시 그게 좋겠어. 소렌, 너는 오늘 블라르랑 같이 처분해 줄게. 캬핫! 이래야 후환이 없는 법이지!"

그 말에 여태 내가 쓰고 있던 가면이 벗겨지며 본심이 튀어나왔다.

"아니, 이런 씨발년이 진짜. 크크크큭!"

그다음 순간, 우리는 동시에 움직였다.

< 반역자(5) >

하지만 똑같이 움직였다고 해도 서로 인지하는 시간의 차이는 현격하다.

엘더급에 오르고 이전보다 훨씬 감각이 확장됐음에도 발레스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우당탕!

그녀의 일격에 나는 주변의 집기를 부수며 요란하게 날아갔다.

"아우으······."

뭐에 얻어맞은 건지 모르겠는데 아래턱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입을 벌려보니 진득한 피와 함께 부러진 이빨이 우르르 떨어졌다.

손바닥으로 이빨 조각을 받아낸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엄청 털렸네.'

격전 끝에 이빨이 부러진 경험은 이전에도 있다. 다시 자랄 때 기분이 영 좆같았지. 관속에 있는 한낮 동안 잇몸이 간질간질하는 게 뭐든 물어뜯고 싶어 죽겠더라.

동물 중에는 상어가 빠진 이빨이 계속 자란다고 한다. 걔들도 분명 나처럼 잇몸이 근질거렸던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궁금한 건 뭐든 물어대지.

"아주 여유가 넘치는구나? 소렌. 딴 생각을 다하고."

눈치가 아주 귀신이네.

"주둥이가 영 아파서··· 말이지."

말하자마자 또 얻어맞고 뒤로 포탄처럼 날아갔다.

쾅!

벽에 부딪힌 후 튕겨 나오자마자 수직으로 치솟았는데, 정신없는 와중에도 발레스카가 날 위로 걷어찬 걸 알 수 있었다.

"커···!"

천장에 밟혀 죽은 개구리처럼 착하고 달라붙으니 위아래가 완전히 반전된 기분이 들었다.

'어디고 천장이고, 어디가 바닥인지.'

하지만 곧 중력이 날 잡아당기자 위아래를 구분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때, 발레스카가 날 공중에서 낚아채더니 집어던졌다.

"크으!"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다 볼품없이 추락했다.

퍼억!

바닥에 떨어져 꿈틀대자 발레스카가 웃으며 다가왔다.

"언행에 조심하고, 예의를 지켜라. 젊은 뱀파이어에게 선배들이 건네는 조언이지. 너는 못 들어본 것 같군. 소렌. 이 조상님께 반말로 지껄이는 걸 보니?"

대범한 척해도 역시 내가 지껄인 말에 화가 났던 모양이다. 발레스카 같은 다혈질이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내가 바라는 바기도 하고.'

분노한 발레스카는 상대를 깔끔하게 끝내는 대신 괴롭히려 한다. 가학적으로 가지고 노는데 이때 내게 딱 한 번의 기회가 있을 터.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뼈마디가 온통 부러졌기에 쉽지 않았지만, 빠른 속도로 재생하고 있었다.

"조상이라? 이제 보니 뱀파이어들이 영 개판인 게, 그 조상 질이 안 좋아서인가 보네? 이 외팔이 년아."

그 말을 하자마자 발레스카의 안색이 일변했다.

블라르 백작에게 당해 한쪽 팔이 없는 건 긍지 넘치는 그녀의 역린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 깜박하기도 전에 내 앞에 나타나 날 넘어뜨렸다. 간신히 재생되는 뼈마디로 몸을 일으키는 나를 쓰러뜨린 뒤 앞발로 가슴팍을 세게 짓밟았다.

"커억!"

빠각. 뚜둑!

끔찍한 소리와 함께 흉곽을 감싸고 있는 흉골과 늑골이 한 번에 부러지며 박살 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건 그게 아니었다. 심장이 그대로 터져버린 것이다.

순간 시야 자체가 하얗게 변할 정도의 격통이었다. 하지만 뱀파이어라 그런지 기절도 하지 못했다. 발레스카는 함몰된 내 가슴팍을 짓밟은 채 으르렁대고 있었다.

"네가 아직 세상 무서운 걸 모르나 보군. 그래, 가끔 너 같이 젊고 승승장구하는 녀석 중에 그런 놈이 있지. 하지만 예외 없이 쓰디쓴 교훈을 얻곤 한다."

나는 입에서 핏물을 토해내며 필사적으로 답했다.

"어쩌라고··· 외팔아···."

"······."

발레스카는 더 말하지 않겠다는 듯 내 한쪽 팔을 붙잡았다.

잡아 뽑을 심산인 게 틀림없다.

그녀는 과거 블라르 백작에게 한쪽 팔이 뽑혀 외팔이 된 후, 남에게 같은 짓을 하는 데 집착하게 됐다. 무슨 수를 쓰는지는 몰라도 당한 뱀파이어는 뽑힌 팔을 재생할 수 없다.

발레스카 역시 블라르 백작에게 자신이 당한 수법을 따라하는 걸로 보였다.

'그러니까 방심하겠지.'

자신의 방법에 확신을 갖고 있는 강자라면 더더욱.

"일단 젊은 네게 알려줘야겠군. 신체의 결손이 어떤 것인지···."

서 있던 발레스카가 몸을 숙여 내 왼팔을 붙잡았다. 놀랍도록 따끔거렸다. 보니까 그녀의 손바닥에는 갈퀴 같은 작은 가시가 가득해 한번 붙잡은 걸 절대 놓치지 않게 돼있었다.

'괴물 같은 년.'

에인션트 뱀파이어라는 건 현대의 뱀파이어보다 훨씬 괴물에 가까운 부류다. 놈들의 피가 옅어지고 나서야 흔히 알려진 인간형 뱀파이어들이 태어난 거고. 그렇기에 놈들은 겉으론 사람인 척해도 태초의 괴물을 닮아 있었다.

"느껴보라고."

발레스카는 내 팔을 잡더니 인정사정없이 뽑았다.

뚜둑! 부욱!

근육이 찢어지며 삽시간에 팔이 뽑혔다.

"크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면서도 상대의 손에 덜렁덜렁 들려 있는 저게 내 팔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팔이란 게 이렇게 쉽게 뽑히는 거였나?

하지만 아파서 뭐라 말도 할 수 없었다. 발레스카는 그걸로 그치지 않고 내 다른 팔도 뽑아버렸다.

부욱! 뚝!

그리고는 코를 치켜세우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자, 이제 자기 꼴을 보렴. 너는 두 개가 다 없구나."

양쪽 팔이 뜯긴 고통에 몸서리치면서도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뭔가 고등한 수법이 있다.'

무언가 미지의 힘이 쐐기처럼 박혀서 뱀파이어의 재생을 가로막고 있었다.

일반적인 뱀파이어보다 훨씬 뛰어난 내 재생력이 전혀 발동을 못 했다.

"크아악! 크으으!"

"신기한 기분이지? 본래 인간으로 돌아간 거 같지 않아? 언제든 재생되는 편리한 육체를 잃어버렸다는 거 말이야."

날 내려다보는 발레스카의 탁한 푸른색 눈동자는 공허한 심연 같이 두려웠다.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렴. 다리 두 개가 더 남았으니 좀 더 인간적인 기분을 느끼게 해줄 테니."

발레스카는 내 다리를 잡아뽑기 위해 몸을 반쯤 돌렸다. 나에 대해선 작은 걱정조차 없는 듯했다. 무슨 짓을 해도 팔을 재생할 리가 없다고 여길 테니까.

'하지만 사도를 너무 얕보네.'

뱀파이어 성녀는 내 신체를 복구할 방법을 마련해 뒀다. 자신의 차원에 내 피해를 대신할 거대한 동상을 세우는 방식이다.

블라르 백작에게 당해 팔 부분이 부서졌을 테지만, 그 뒤로 시간이 지났으니 충분히 수복했을 터.

'무슨 힘인지 알고 있으니, 이전과 다르게 회복하는 타이밍은 조절할 수 있어.'

내가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리자 바로 효과가 발동했다. 양쪽 팔의 절단면에서 신성한 힘이 느껴지며, 쐐기처럼 박혀 있던 무언가를 삽시간에 박살 낸 것이다. 그리고 황금빛이 찬란하게 일어나며 내 양쪽 팔을 수복시켰다.

"뭐?"

설마 내 팔이 다시 생길 줄 몰랐던 발레스카는 처음으로 당황하는 표정이 됐다. 내가 상반신을 일으켜 그녀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았을 때조차 제대로 반응을 못했다.

"이게··· 어떻게···?"

발레스카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한 것만 같았다. 확실히 아까 쐐기처럼 파고든 힘은 참으로 고등했다. 발레스카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소신격의 능력에 비할 바는 아니다.

"치유의 새벽이여!"

내 외침에 응해, 감춰둔 최고의 능력인 '새벽의 손길'이 발동했다. 여명의 빛이 터지며 발레스카를 덮쳤다.

"끼아아아아악!"

발레스카가 전신을 쑤셔오는 격통에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는 어떻게든 날 떼어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 팔과 그녀의 몸이 빛에 녹아서 서로 눌러 붙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새끼가! 끄아아아아! 무슨 짓을!"

발레스카는 날 매달고 달리기 시작했다. 딸려가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보다 훨씬 강해!'

새벽이 손길이 블라르 백작에게 쓸 때보다 그 위력이 급격히 올라갔다. 심지어 시동어를 다 외치지 않았음에도 발동했다. 왜 그런지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딸려가지 않고 괴력을 발휘해 발레스카를 성의 벽면으로 밀어붙였다. 빛에 타들어가며 연기를 자욱이 내고 있던 발레스카는 속절없이 밀려갔다.

콰아앙!

발레스카를 힘껏 밀치자 석재벽에 금이 갔다.

새벽의 손길을 쓰자마자 알았다. 이놈을 어떻게든 성 밖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걸.

하지만 현재 새벽의 손길을 계속 발동 중이라 유난히 두꺼운 블라르 백작의 성벽을 박살내기 어려웠다. 나는 블라르 백작을 불렀다.

"블라르 백작! 성벽을!"

블라르 백작이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아직 성벽을 부술 힘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믿어볼 수밖에.

나는 성벽을 박살낼 여력이 없었다. 발레스카가 악귀 같은 눈빛을 한 채 새벽의 손길을 이겨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개같은! 네놈! 이 신성마법이··· 끄아아아아아!"

하지만 내겐 아직 힘이 남아 있었다. 시동어를 다 외치지 않았는데도 새벽의 손길이 발동했다면 이게 끝이 아닐 거다. 나는 나머지 기도문도 외웠다.

"지친 자들에게 은혜를!"

새벽의 손길이 다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추스르려던 발레스카가 다시 비명을 질러댔다. 그녀의 전신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뒤를 보니 블라르 백작이 힘겹게 일어나 오른손에 힘을 모으는 게 보였다. 그야말로 남은 걸 다 쥐어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쪽으로 주먹을 뻗었다.

콰아아아앙!

갑자기 공성추가 덮치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발레스카와 함께 성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보통 성이란 건 방어를 위해 주변 지형을 이용해 지어진다. 그렇기에 튕겨 나간 곳은 가파른 절벽이었다. 발레스카와 나는 서로 번갈아가며 절벽의 면에 부딪치며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성 밖의 세계는 찬란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라르 백작의 성 안에선 완전히 빛을 막기 때문에 밖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새벽의 손길 덕에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새벽의 손길은 여명이 올 때, 가장 강력해지기 때문이다. 이전과 다르게 훨씬 막강한 위력을 보자마자 아침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성 밖으로 나가고자 했던 거다.

콰아아아앙!

요란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발레스카와 나란히 추락했다. 이번에는 내가 위에 서서 쓰러진 그녀를 밟고 서 있었다.

눌러 붙었던 부위도 새벽의 손길 덕에 재처럼 변하자 충격에 박살나며 떨어졌다.

나는 새벽의 손길의 여파로 반절은 타서 없어진 양쪽 손을 바라봤다. 하지만 빠르게 재생하고 있었다. 발레스카의 쐐기가 깨진 이상 이 막강한 재생력을 막을 건 없었다.

"아침 햇살이 상쾌하지? 안 그러냐?"

데이워커가 된 뒤,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내 친구가 되어주는 햇살이 아주 눈 부셨다.

반면 발레스카는 죽을 맛인 듯했다. 고고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대답도 못한 채 비명을 지르느라 바빴다.

"퀘에에에에! 꾸에에에에!"

피부 표면이 이제는 검은색을 넘어 다 타버린 연탄처럼 하얗게 변해 흩날리고 있는 그녀는 사람 같지도 않은 비명을 질러댔다. 고대에 태어난 괴물에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전신 여기저기에 불이 붙은 채로, 발레스카는 가슴팍을 짓밟고 있는 날 밀치고 일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태양 아래선 그녀의 힘은 별 볼 일 없었다.

"이 개새끼! 크에에에에! 소렌!"

그 와중에 조금 정신을 차린 듯 다 타버린 눈으로 날 쏘아보며 입을 벌려댔다. 지옥에나 어울릴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별로 무섭지 않았다. 나는 승자의 여유 속에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 병신 같은 년아. 그렇게 존나게 떠드니까 결국 새벽이 오는 거 아니냐."

"이노오오옴!"

"아, 나중에 또 보자고. 그래도 인사는 블라르 보다는 화끈하게 해주지."

나는 어느새 재생이 끝난 양손을 뻗어서 발레스카의 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잡아뜯어 버렸다.

"아주 이거 볼 만하구만."

내 손에 들린 머리가 기다란 머리칼을 연료 삼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살점은 타서 부서지고 해골만 남았다가, 그것도 곧 햇살에 바스러졌다.

* * *

성으로 돌아오니 상황이 정리돼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나와 발레스카가 성 밖으로 튕겨 나간 순간 새블릿 남작부인이 나섰다고 한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해요."

그녀는 죽은 척하고 상황을 보고 있었던 것. 그리고는 재빨리 워록 펠킨을 제압하고 성유물의 발동을 멈춰 블라르 백작을 구했다고 한다.

배신자인 워록 펠킨은 사지가 분리돼 주변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숨이 붙어서 굴러다니던 뱀파이어 헌터 사이러스 역시 같은 꼴이었다.

"됐습니다. 어차피 나서셨어도 일만 꼬였을 테니."

나는 한쪽 구석에 기대에 앉아 있는 블라르 백작에게 다가갔다. 안색이 어지간한 시체보다 창백했다. 뭐랄까, 밀가루 포대에 얼굴을 묻었다 뺀 것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다고 할까.

성유물인 하코의 눈물이 꺼지자 간신히 회복한 모양이지만, 후유증이 큰 것 같았다. 블라르 백작은 날 힘겹게 올려다보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군. 추한 꼴을 보였어."

"알긴 아시는군요."

"···할 말이 없네. 발레스카는?"

"육체 하나는 확실하게 박살냈죠. 그뿐인 게 문제지만···."

에인션트 뱀파이어는 죽이기 까다롭다.

리치를 죽이는 것과 비슷한데, 리치가 성구함에 생명력을 보존해 부활하는 것처럼 에인션트 뱀파이어에게도 비슷한 수단이 있다.

처음 그들을 에인션트 뱀파이어로 만들어준 어둠의 유물을 박살내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게 가능한 것이다.

만약 그런 방법이 없었다면 에인션트 뱀파이어들은 긴 세월 동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강자라도 위기가 찾아오는 법이니까.

"부활하는데 한세월 걸릴 겁니다."

"···두렵지 않나 보군? 발레스카의 원한을 샀는데."

"별로."

간단히 답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발레스카가 부활하는 사이에 걸리는 긴 시간 동안 그 괴물을 능가할 만큼 강해질 자신이 있으니까.

'결정적으로 발레스카의 유물도 어디 있는지 알고 있고.'

지금쯤 발레스카의 영혼이 어둠의 유물로 돌아가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겠지만, 잘못 걸린 건 그쪽이라 하겠다.

'원한을 잊지 않고 앙갚음 하는 건 이쪽 주특기라서 말이야.'

나중에 갖은 선동으로 탐사대를 꾸려서 발레스카의 기지를 공격해야겠군. 그녀가 오랜 세월 쌓은 부도 다 털어먹고 말이다. 부활하다가 날벼락 좀 맞으라지.

"소렌, 내가 자네에게 큰 은혜를 입었네. 어쩌면 오늘이 이 블라르의 마지막 날이었을지도 몰라."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태양 교단의 공격부터 기존의 시나리오와 틀어진 이야기니 예측 불가였다.

'그래도 아직은 이 양반이 살아줘야지.'

블라르 백작의 생존이 내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오늘 이 자를 구해낸 덕에 앞으로의 전개가 굉장히 유리해졌다. 뭣보다 위험천만한 발레스카도 한동안 리타이어시켰고.

"자네에게 무언가 보상을 해야겠군···. 이건 진심일세."

"주신다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블라르 백작은 잠시 숨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카르멘 늙은이와의 이야기와 상관없이··· 자네에게 내 능력을 전수해 주지."

그가 단순히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실험체였기에 최강의 자리에 오른 건 아니다. 분명 엄청난 재능을 받긴 했지만 스스로 그 경지를 개척했다.

그렇기에 에인션트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속박을 풀고, 그들을 압박할 정도가 된 것이다.

블라르 백작에겐 무언가가 더 있었다. 게임 속에서도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 말이다.

"뭔가 가문의 의지나 뭔가 의무를 떠안는 건 사절입니다만."

"크흐흐··· 그건 오래된 집착에 불과하지. 자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겠네. 이걸 받게."

놀랍게도 블라르 백작은 품에서 낡은 단검을 내밀었다.

"이건?"

"사생아였던 내게··· 아버지 블라르 백작이 유일하게 남긴 물건이지. 사실 이건 열쇠라네."

< 태양 교단 출진(1) >

열쇠라?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흥미가 돋았다.

나는 이 가문의 단검이 블라르 백작의 진심을 상징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이걸 내밀고 하는 소리여야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라는 거다.

한데 열쇠였다고?

"어디로 통하는 열쇠입니까?"

"카라즈라의 성소로 통한다."

놀라운 정보가 계속 튀어나오고 있었다.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 말입니까?"

"그래. 불멸의 여왕, 언데드의 어머니, 그 대신격 카라즈라 말이다."

그 신격이라면 악연이 있다. 자칫하다가는 언제고 날 파멸시킬 위험을 가진 존재니까.

'설마 카라즈라의 성소라니.'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카라즈라의 사도나 신도십니까?"

"아니, 나는 무교다. 나 자신 외에는 믿지 않아. 그리고 카라즈라의 성소에선 그녀를 믿지 않아도 언데드라면 누구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왜냐하면, 그녀가 언데드의 어머니를 자처하는 존재기 때문이지."

블라르 백작은 설령 믿지 않는 신이라고 해도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하는 게 좋다는 태도였다.

"그 성소에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선택의 기로에 설 걸세. 자신의 중요한 걸 바치고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게 돼. 당시 나는 힘을 원했네."

거기서 백작은 새로운 기술과 능력을 받았다고 한다.

블라르 백작의 전투 체계를 '이클립스 녹턴'이라 부르는데, 에인션트들에게 받은 재능과 성소에서 얻은 기술을 통합한 것이라 했다.

"백작님께선 그 대가로 무엇을 바치셨습니까?"

블라르 백작은 잠시 어두운 얼굴이 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대가를 치렀네. 그뿐이야."

나는 블라르 백작의 스토리를 알고 있었기에 그가 치른 대가가 뭔지 짐작됐다. 하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얘기였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요."

"···자네가 거기서 뭘 얻을지는 자유라네. 힘을 얻기로 한다면 나 같은 존재가 되겠지. 날 따르던 수식어들을 모두 물려받게 될 걸세. 하지만 분명 잃는 것도 생긴다는 걸 명심하도록."

"알겠습니다."

"만약 자네가 나와 같은 선택을 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해 주겠네. 성소에서 받은 기술을 어떤 식으로 성장시킬지. 그리고 모든 걸 통합한 내 기술 체계인 이클립스 녹턴도 완전히 전수하지."

블라르 백작은 가문의 원념이 담긴 단검을 건네며 사용법을 알려줬다. 나는 단검을 뽑아봤다. 낡은 날에 피 얼룩이 보였다.

'이게 그···.'

누구의 피인지 알고 있었기에 블라르 백작에게 다소 동정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걸 입에 담는 건 오지랖이었기에 살짝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할까?'

블라르 백작처럼 꼭 힘을 고집하지 않아도 좋다. 어쩌면 이 단검은 불멸의 여왕과 관련된 내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직 모르는 다른 활용책이 있을지도 모르고.

어떤 식으로 쓸지는 내 선택의 문제였다.

* * *

블라르 백작의 성에 손님으로 머물게 됐다. 이것저것 논의할 게 있었기에 바로 떠날 수 없었던 탓이다.

한 손님방에 머물게 됐는데, 그 호화로움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비싸디비싼 붉은 대리석인 로쏘 밤피로로 만든 관에서 잠을 자보는 호사를 누렸다. 이 대리석은 과거 아단 삼촌이 대신격에 기원하기 위한 제단을 만들기 위해 썼던 것이다.

한데 여기선 손님용 방에 있는 관에 사용되고 있었다.

아단이 돈지랄을 했다고 여겼지만, 진짜 갑부인 블라르 백작과는 비교할 게 아니었던 거다.

'삼촌···. 소박한 분이셨군요. 제가 오해했습니다.'

드르르릉.

관에서 몸을 일으키자 관뚜껑이 자동으로 열렸다. 주변은 아주 사치스러웠다. 촛대는 백금이고, 관의 테두리는 금과 호박, 루비로 장식했다.

거기에 더해 필요도 없는 인간이던 시절의 흔적이 남은 게 흥미로웠다.

가령 완전히 막혀서 형태만 보이는 창문이다. 그냥 벽으로 해놔도 될 텐데, 굳이 창문의 흔적을 만들고 비단 커튼을 달아뒀다.

'인간이던 시절을 흉내내는 게··· 전형적인 뱀파이어의 특징이지.'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다소 울적한 얼굴의 귀부인이 나타났다.

"편안히 쉬셨는지요."

새블릿 남작부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백작님께서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의복을 입는 걸 도와드리려 왔습니다."

몸을 보니 꼴이 말이 아니긴 했다. 발레스카 때문에 엉망진창이다. 어찌나 힘들었던지 불면불휴 능력이 있음에도 관에서 죽은 듯 쉬어야 했으니까. 지난 전투에서 왕창 빠진 이가 간질간질 다시 자라는 것도 느낄 새가 없었다.

"의복을 두고 가시면 차려입고 나가겠습니다."

한데 새블릿 남작부인은 기어코 내가 옷 입는 걸 돕기 시작했다. 공손하고 정중한 손길이 마치 시녀 같았다.

"지체 높으신 분이 어찌 직접 하십니까? 제가 못 미더우면 하인을 부르시지요."

"그게 아니랍니다."

듣자니 하인을 대부분 외성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남작부인은 배신당한 이후로 극도로 민감해진 모습이었다. 내성에는 아주 제한적인 인원만 두고 있다고. 손님을 도와줄 하인 한 명 없을 정도란다.

"은공. 부디 이런 거라도 하게 해주세요. 큰 은혜를 입었지만 당장 보답할 길이 없군요."

"음···, 알겠습니다."

"이후에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이번 사태가 수습되고 백작님께서 안정을 찾으신 뒤라면 언제든, 무엇이든 돕겠어요."

그 말과 함께 그녀에게서 사과만한 크기의 분홍색 수정구를 받게 됐다.

'이거, 여기저기 연락처가 늘어나는군.'

핸드폰 번호 받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수정구를 흔쾌히 받았다. 새블릿 남작부인은 능력이 있는 데다가, 뱀파이어 중에는 드물게도 신의도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부인."

이후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향했다. 블라르 백작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에는 뱀파이어에 하등 쓸모없는 스테이크나 빵, 치즈, 포도주 같은 요리가 놓여 있다.

이 역시 저주받은 존재들의, 부질없는 인간 흉내 내기에 불과했다.

"왔군. 앉게."

블라르 백작의 눈가는 퀭했다. 나는 보자마자 그가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특유의 광기는 우울함으로 바뀐 모습이다.

'아무래도 하코의 눈물이 남긴 후유증이 큰 것 같군.'

보통의 경우는 거의 자살로 끝날 정도니 실로 극악의 성유물이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은 울적한 분위기를 애써 누르며 어떻게든 버티기로 한 것 같았다.

내가 자리하자 블라르 백작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보자마자 뭔지 알 수 있었다. 각각의 에인션트 뱀파이어를 상징하는 철제 심볼들로, 그들의 추종자들이 갖고 다니는 물건이다.

"태양 교단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에인션트 뱀파이어는 셋이야. '공포의 지배자 움베르트', '은빛 엘리시아', 그리고 자네가 혼내준 '영원의 발레스카'지. 이 심볼들은 모두 태양 교단의 내통자들에게서 획득한 걸세."

광범위한 정보망을 자랑하는 블라르 백작답게 태양 교단 내부에서 협력자나 요원이 있다고 했다.

나는 문뜩 생각나는 점이 있어 물었다.

"에인션트끼리도 꽤 긴장 관계 아닙니까?"

"잘 알고 있구만. 맞아. 셋이 합심하는 일이 사실 드물긴 해. 하지만 이번에는 드물게 합이 맞았고, 태양 교단을 출진으로 이끌었지. 결국 발레스카가 사고를 쳤지만."

모종의 합의를 해놓고도, 블라르 백작을 도모하는 게 가능하겠다 싶으니 발레스카가 나선 거다. 이건 에인션트간의 합의를 무시한 독단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번 일로 발레스카가 다른 둘에게 꽤나 미움 받을 테니··· 자네에겐 좋은 소식이구만. 소렌."

맞다. 발레스카 둥지를 터는 일에 그린라이트였다. 지금 상황을 보니 내가 무리를 이끌고 발레스카의 기지를 공격해도 다른 에인션트들이 끼어들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아무튼, 그렇다고 해도 이 원정이 중지되거나 그럴 일은 없네. 세작의 보고로는 지나칠 정도로 착실히 진행 중인 모양이더군. 가까운 시일 안에 어둠의 숲에 나부끼는 놈들의 군기를 보게 될 거야. 자네는 어찌할 건가?"

이미 어떻게 할지는 정했다. 그렇기에 대답은 간단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지요."

그 말에 블라르 백작이 처음으로 웃음을 흘렸다.

"크크큭! 멋진 말이로군. 자네가 지어낸 건가? 상당히 위트가 있다고 하겠어. 그래, 일곱 봉우리의 입장에선 그렇겠지. 분열된 종족도 단합을 이뤘다고 들었네만?"

"일곱 봉우리까지 눈과 귀가 닿는 겁니까?"

"이 블라르의 눈과 귀는 제법 성능이 좋아."

눈치를 보니 종족의 대표들이 모여서 한 합의까지 다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뭐 이야기는 빠르지.

"일곱 봉우리는 연합군으로 이번 전쟁에서 백작님을 도울 겁니다. 정식으로 동맹을 제의합니다."

"고맙군."

블라르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뇌가 제거된 듯한 오거 좀비들이 커다란 궤짝 몇 개를 가지고 들어와 내려놨다.

보니까 안에 전부 금화가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지원하는 전비일세. 일곱 봉우리의 친구들과 이 우정을 나누고 싶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급료로 지불하면 봉우리에서 모여든 병사들을 훨씬 쉽게 통솔할 수 있을 테니까.

"모두 백작님의 충실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 * *

두 달 뒤.

마침내 태양 교단의 원정대가 출발했다.

원정대의 규모는 오천여 명.

예상보다 훨씬 규모가 커졌다. 원래는 삼천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 발레스카가 당한 것 때문인가?'

그 일로 인해 다른 에인션트들이 경각심을 갖게 됐고, 계획보다 원정군의 규모를 늘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는 지도 위, 태양 교단의 군세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교단의 규모와 이동 루트 등을 이쪽에선 상세히 파악하는 중이다.

블라르 백작의 정보망과 하피의 도움 덕이었다.

하피를 마치 장거리 정찰용 드론처럼 운용하고 있었기에, 부대 이동을 계속 감시할 수 있었다.

"확실히 놈들이 어둠의 숲을 박살낼 기세로군요."

위대한 코볼트 주술사이자, 그들의 지도자인 터널로드의 조언자 잼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재 큰 군막 안에 이전에 회의에 참석했던 각 종족의 대표들이 모두 참석해 있었다. 모집한 일곱 봉우리 연합군을 어떻게 운용할지 논의하기 위해서다.

"놈들의 이동 루트에 매복해 있다가 습격합시다!"

적극적으로 공격하자는 쪽과.

"아니에요. 먼저 태양 교단이 어둠의 숲과 부딪친 후의 상황을 보고 나서 움직여도 늦지 않아요."

일단 보자는 신중론자들이었다.

양쪽의 논리에는 다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고, 대립은 계속됐다. 이 부분에 있어선 일곱 봉우리의 회의에서 내 편을 들었던 것과 관계없이 의견이 갈렸다.

무조건적인 내 편은 스킨크와 오크뿐이었다.

스킨크야 내가 여신의 사도니 그랬고, 오크는 족장 고르가쓰가 내 하인이 되고 모두 노예로 붙잡혀간 껍질만 남은 종족이었다.

그들 외에는 모두 저마다의 생각이 있었다.

과격한 드워프와 용병 부족인 고블린은 적극적인 싸움을 주장했으나 노움과 코볼트는 신중했다.

하피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하피의 신이 시켜서 날 돕고 있을 뿐이었다.

"의장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노움의 대표 엉겅퀴 스란레가 물어왔다. 나는 일곱 봉우리 연합군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의장이란 자리를 맡게 됐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는 가운데 의견을 냈다.

"태양 교단이란 바퀴벌레 같으니 적극적인 방역만이 살길이다."

주전파를 옹호하는 의견에 신중론자들의 얼굴에 실망이 어렸다. 나는 그들을 달래듯 말했다.

"이번 싸움에서 대승한다면 적어도 20년은 평안할 테니 모두 각오를 다지도록."

그 말에 스란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왜 20년입니까?"

"인간이 성기사 한 세대를 교육하는 데 드는 시간이 20년이다."

"아···."

"다만 무턱대고 싸우자는 게 아니다. 계책이 있다."

상대를 설득하려면 당연히 대책이 있어야 한다. 신중론자들도 혹할 만큼의.

"계책입니까?"

코볼트 잼아이가 흥미를 보였다. 그는 벌써 아는 것이다. 내가 공연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걸.

"그래, 태양 교단의 일부를 일곱 봉우리로 끌어들여 격멸하겠다."

요컨대, 두 개의 전장을 만들겠다는 거다. 이에 대해 좌중이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걱정할 것 없다. 우리는 이걸 위한 모든 방법을 갖고 있다."

내가 시골이라 이름 붙인 룩스 움브라의 조각과 이쪽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패한 성직자인 아달릭까지 더해지면, 이 계책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다.

"적의 핵심인물이 이쪽에 대해 착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로잡아 줄 게 아니라, 마땅히 이용해야겠지."

"하지만···!"

일곱 봉우리가 싸움터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반대 의견이 나왔지만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얘기를 끝까지 들어본 뒤에 판단하도록. 그리고···."

나는 블라르 백작이 했던 것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튼튼한 오크 노예들이 무거운 궤짝을 가져와 열었다. 그 안에는 번쩍이는 금화가 가득했다.

"와우우우!"

"엄청난 양!"

"이게 다 얼마야!"

다들 눈이 돌아가는 게 보였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약속했다.

"이번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준다면 예정에 없던 급료를 지급하지."

그 말에 고블린과 드워프가 바로 넘어왔다.

"금과 망치!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오!"

"본래 전쟁은 피 묻은 금덩이다! 케케켁!"

코볼트는 잠깐 생각 후에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요. 금을 받을 수 있다면 괜찮은 장사입니다."

하피는 여전히 생각이 없었다.

"밥은 언제 먹냐?"

스킨크는 어차피 해야 하는데 돈까지 받는다고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이 모든 게 우리 어머니 여신님의 은덕입니다."

결국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가장 신중했던 노움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대표인 엉겅퀴 스란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의장님께선 참으로 매사 설득력이 있으시군요."

그 말에 나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을 뿐이지."

< 태양 교단 출진(2) >

닷새 뒤.

나는 오크 족장인 고르가쓰만을 대동한 채 비밀스러운 만남의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고르가쓰, 이번 일에는 작은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 행동 하나, 하나 조심하도록."

내 주의에 고르가쓰는 얌전히 답했다.

"알겠습니다. 크르르···."

한때 일곱 봉우리에서 전설로 불리던 오크가 이리 영락하다니.

겉으론 하인이 된 처지를 잘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만 방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인이란 건 권속만큼 안전한 게 아니지.'

뱀파이어의 하인은 강력한 속박에 묶여 있지만, 드물게도 그게 풀리기도 한다. 하물며 상대는 '불굴의 고르가쓰'라고 불리던 존재. 마냥 믿고 있다가는 뒤통수가 언제 깨질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 유용한 칼을 안 쓸 수도 없으니 항상 잘 지켜보는 수밖에.

"만약 모반이나 헛된 생각을 한다면 사지를 잘라 지하실에 가두고 피 공장의 가축으로 쓰겠다.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주인이시여."

우리가 향하는 곳은 이전에 정화의 기사단 단장과 만났던 켄트란 도시와 멀지 않은 장소다. 오래전에 폐허가 된 고성인데 언데드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아 인적이 없는 곳이다.

"주인이시여, 슬슬 약속 장소입니다. 모습을 변경하시는 게···."

"알겠다."

내겐 성녀님께 받은 상급 변신 능력이 있어서, 인간형 생명체라면 어지간한 건 다 소화 가능했다. 능력을 사용하자, 날카로운 인상의 젊은 오크로 변하게 됐다.

"족장님."

내가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이자 고르가쓰는 잠깐 주저하더니 위엄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음···. 흠잡을 곳 없어 보이는군. 여기서부터는 내가 앞장서지."

이제부터 연기해야 한다. 이번 협상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오크 족장인 고르가쓰고, 나는 달고 온 수하1에 불과했기 때문.

물론 고르가쓰에겐 어떤 식으로 할지 지겹게 가르쳐 둔 상태다. 오크 중에서도 똑똑한 놈이라 그런가 금방 습득하더라. 원래 족장이라 협상 같은데 능했던 거 같기도 하고.

사방에 어둠이 짙게 깔린 가운데 다 무너져 가는 고성이 아주 목가적이고 정겨워 보였다.

역시 뱀파이어가 되더니 감각이 달라지긴 했네. 예전이면 을씨년스럽다고 생각했을 텐데.

우리는 고성 안으로 진입했고, 먼저 도착해 있던 상대를 만날 수 있었다.

"늦었다."

늙고 불만 어린 목소리가 어둠 속을 울려왔다. 그러자 앞서 걷던 고르가쓰가 코웃음을 쳤다.

"크릉! 시작부터 쓸데없는 트집을 잡는군. 성직자."

성큼성큼 다가가는 고르가쓰의 태도에 상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너희 같은 야만 종족이 시간의 정확함을 알 리가 없지."

상대는 투덜대며 자신의 두건을 뒤로 넘겼다. 그의 정체는 바로 부패한 교구장이자, 현재는 죄수의 신분인 아달릭이었다.

하지만 죄수에 어울리지 않게 팔자가 꽤 좋은 것 같다. 심지어 뒤쪽에는 과묵한 성기사 둘까지 호위로 끼고 있었다.

'아마 저 성기사들도 평범한 존재는 아니겠지.'

인간 주제에 그 덩치가 고르가쓰 못지않게 컸고, 슬쩍 느껴지는 기세에 삿된 기운이 섞여 있었다. 아마 저들도 어떤 유혹에 굴복해 타락의 길을 가는 자들이 틀림없었다.

"잔소리는 됐다. 이전의 논의를 계속하지. 이쪽은 중요한 건이 많다. 성직자. 크르르!"

"좋다. 날 여기까지 오게 했으니 괜찮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군. 실망시키지 말도록."

아달릭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묻어났다. 이번 음모를 성공시켜 죄수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반전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묻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금세 실망으로 얼룩졌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왜냐하면 고르가쓰가 내가 시키는 대로 일곱 봉우리의 통합이 뜻대로 안 되고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아달릭은 점점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크들이 힘을 쓰면 별거 아니라 하지 않았나! 일곱 봉우리의 잡것들을 모아서 블라르의 후방을 치는 그딴 간단한 일조차 못 해!"

실망은 분노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달릭은 점점 큰 목소리로 이쪽을 비난해댔다.

무너진 돌 위에 앉아 있던 고르가쓰가 서늘한 목소리를 냈다.

"말조심해라. 성직자. 일곱 봉우리의 통합은 네놈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니다."

"그딴 변명으로 자신의 무능을 가리려는 건가! 오크!"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 일에 네놈도 흥미가 동할 거라고 장담하지."

"뭐라! 또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으려고···!"

다시 버럭 소리를 내지르려던 아달릭은 이어진 고르가쓰의 말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룩스 움브라, 그 고대신의 조각이 아직 살아 있다. 지난번 일로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되살아났단 말이다."

"뭐···? 뭐라?"

"농담하는 게 아니다. 지난번보다 약해진 상태긴 하지만 일곱 봉우리에서 활동 중이다. 내가 하려던 통합이 늦어진 게 룩스 움브라 때문이다. 너희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직자."

그 말에 아달릭의 눈에선 탐욕의 광채가 솟아났다. 룩스 움브라의 신력, 그것은 그에게 간절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달릭의 윗선에 있는 존재가 갖고자 하는 것이지만. 아무튼, 신력이라 하면 아달릭에게 성공의 보증수표 같은 거였다.

"정말 룩스 움브라가··· 그 더러운 조각이··· 아직 존재한다고? 그날 사교도의 힘에 의해 타올랐는데?"

"고대신의 끈질김을 모르는가? 크르르!"

"하긴··· 그런 존재가 쉽게 죽을 리 없지."

"맞다.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우리 힘으론 처리하기 어렵지만 태양 교단이라면 수월할 터. 군대를 이끌고 와서 처리해다오."

아달릭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아니, 지난번보다 약해졌다면 일부 원정대만 보내서···."

그 말에 고르가쓰 뒤에 서 있던 나는 그를 슬쩍 찔렀다. 단호하게 이쪽 뜻을 관철하라는 신호였다. 사실 여기가 중요한 지점이었다.

"성직자, 소규모 부대로 왔다가는 지난번처럼 방해가 들어오면 실패한다. 게다가 일곱 봉우리의 종족들도 저마다 군대를 모으고 있어. 자칫하다가는 원정대 전체가 포로가 될지도 모른다. 소규모로 움직일 때가 아니다."

"으음··· 그건 그렇군."

"게다가 우리는 태양 교단의 힘이 필요하다. 너희가 돕는다면 오크가 일곱 봉우리를 완전히 장악하는 건 일도 아니지."

고르가쓰는 아달릭에게 전략의 방향을 제시했다. 물론 다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우선 군대를 이끌고 와서 룩스 움브라를 제압, 이후 오크와 연합해 일곱 봉우리를 평정, 마지막으로 뭉친 군세를 이끌고 블라르의 후면을 공격.

성공만 한다면 백년 이상 노래될 위업이었다.

룩스 움브라에게서 신력도 얻고, 일곱 봉우리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고, 블라르 토벌에도 공을 세운다.

한 번의 출정으로 중대한 세 가지를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고르가쓰는 교활한 말투로 아달릭의 욕심을 자극했다.

"너는 교단의 영웅이 될 것이다."

"크으······."

아달릭은 어느새 꿈에 젖은 표정이었다. 그래, 거절할 수 없겠지. 추락한 자에게 인생역전만큼 달콤한 건 없으니까.

그러나 그도 바보는 아니다.

간교함으로 그 정도 자리를 꿰차고 있던 자. 대번에 증거를 요구해왔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증거로도 부족해. 직접 봐야겠다. 룩스 움브라를 이 눈으로 똑똑히 봐야 결정할 수 있는 문제야."

하지만 이건 어렵지 않았다. 고르가쓰는 끄덕였다.

"직접 보게 해주지.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크하하핫! 일이 이렇게 되다니! 아주, 재밌군!"

"일곱 봉우리로 다녀오는데 며칠이 걸릴 텐데 괜찮은 건가?"

"걱정할 거 없다. 군대란 덩치가 커질수록 느려지는 법이지. 시간은 충분하다."

일이 잘 풀렸다. 이제 아달릭을 일곱 봉우리 적당한 곳으로 데려가 시골이를 불러서 보여주면 된다.

그 뒤에는 에인션트들과 붙어먹은 자기 상관에게 가서 떠들어대겠지.

'잘 풀리는군. 흐흐흐.'

혼자 속으로 웃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낭랑한 목소리가 이 작당모의에 끼어들었다.

"아주 재밌는 소리를 하고들 계시네요."

이곳에 있던 우리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초대받지 않은 자가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있는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가 갑자기 훤해졌다. 갑자기 조명이라도 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한 고귀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달릭은 그녀를 보자마자 감격한 표정으로 부복했다.

"오! 성녀시여! 어찌 여기까지!"

내게 성녀라고 하면 핏빛 새벽의 여신만 떠오르지만, 태양 교단은 진작 쫓겨난 성녀 대신 새로운 성녀를 세웠다.

바로 '은의 성녀'라고 불리는 존재로 그 고아한 태도와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한 이였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이가 바로 그 은의 성녀였다.

짤랑짤랑.

성녀의 몸 곳곳에 붙어 있는 은제 장식이 잔잔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녀의 힘과 기운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게는 극히 불쾌한 빛이었다. 상대가 태양 교단의 성녀라서가 아니다. 그 진정한 정체를 알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저 앞에서 성녀로 가장하고 있는 저 가증스러운 존재는 사실 '은빛 엘리시아'라 불리는 에인션트 뱀파이어다.

그녀는 자신만의 특이한 체질을 이용해 인간 세계에서 완벽하게 성녀를 연기하고 있는 위험천만한 존재였다.

놀랍게도 저 여자는 태양뿐 아니라 모든 빛에 면역이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데이워커의 변이 인자가 저 여자에게서 나왔다는 설도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고 살아가고 있기에 제일 까다로운 에인션트급 가운데 하나였다.

'태양신과 태양 교단의 허점을 제대로 노린 거지···.'

모르는 이가 생각한다면 뱀파이어가 성녀 연기를 하는 게 터무니없다고 여길 거다. 하지만 태양신에 대한 진실은 그게 불가능하지 않음을 알려 준다.

만약 그런 게 안 됐다면, 애초에 내가 섬기는 진짜 성녀도 뱀파이어 인자에 감염된 순간 모든 빛의 힘을 잃어버렸을 테니까.

"아달릭."

나긋하고 부드러운 봄바람 같은 목소리가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이를 불렀다.

"네, 은의 성녀시여."

"당신이 꽤 재밌는 얘기를 하러 간다고 해서 따라왔답니다. 실례가 됐을지 모르겠네요."

"어찌 그럴 리가···. 필요하신 건 뭐든 하십시오."

당연하지만 아달릭은 성녀의 정체를 알고 있다. 신보다 더 섬기는 이니 저렇게 자세가 극진할 수밖에.

"교단의 성녀가 어쩐 일이지?"

일단 상황을 관망하던 고르가쓰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짜증이 난다는 기색을 담아서 말이다. 대처가 역시 노련했다.

이에 대해 성녀는 나긋나긋하게 답했다.

"당신이 생각보다 큰 건을 꺼내서 말이에요. 우리 아달릭만으로는 얘기가 안 될 거 같아서 직접 나섰답니다. 후훗. 저랑 얘기하지죠."

"성녀란 존재가 이런 음모에 끼겠다는 거냐?"

"후후후. 어느 곳이나 정치는 복잡한 법이랍니다."

아, 알았다.

그제야 퍼뜩 한 가지를 깨닫게 됐다. 교단에서 룩스 움브라의 신력을 원하는 존재가 누군지. 그리고 저 은의 성녀가 룩스 움브라의 얘기에 몸이 달아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신력을 원하는 건 에인션트 뱀파이어인 은빛 엘리시아였군!'

대체 아달릭의 상관인 대주교나 서부 추기경이 왜 신력을 탐내는지 의아했다.

인간에게 신력이란 방사선 같이 위험천만하고 쓸모없기 때문이다. 나도 신력만 보면 괜히 열심히 공양하는 게 아니다. 뭔가 쓸 구석이 있다면 여신님껜 미안하지만 나도 적잖이 챙겼을 터.

하지만 에인션트들이라면 다르지. 저들은 신이 되고 싶어 하니까. 그리고 그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신력을 확보하면 다른 에인션트들보다도 앞서 나갈 수 있고 말이야.'

에인션트들도 경쟁 관계다. 신에 가까워질 기회가 온다면 놓치지 않으려 할 게 뻔했다.

즉, 탐욕이 은의 성녀로 가장하고 있는 에이션트 뱀파이어 엘리시아를 움직인 것이다.

그 순간 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건 기회군. 어쩌면 저년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물론 지금의 위험천만한 순간만을 잘 넘긴다면 말이다. 에인션트 뱀파이어와 마주한 지금, 사실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

은빛 엘리시아라면 내게서 뭔가 수상쩍은 기색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기에.

'적어도 변신은 간파하지 못할 거다. 그래, 침착하자.'

내가 쓰는 상급 변신의 주문은 여신께서 내린 거다. 에인션트 뱀파이어라고 해도 쉽게는······.

하지만 이런 다짐이 무색하게 언젠가부터 은의 성녀가 물끄러미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

이 이상한 상황에 아달릭도 고르가쓰도 입을 다물고 이쪽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은의 성녀의 시선을 떨어지지 않는다.

아달릭은 굽실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성녀시여. 저자는 하찮은 수행원에 불과···."

하지만 성녀가 손가락을 들자 아달릭은 황급히 입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곧 은의 성녀가 내게 물어왔다.

"당신··· 뱀파이어인가요?"

은의 성녀가 조용히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써늘한 은처럼 차갑게 덧붙였다.

"정직하게 답하세요. 거짓말은 용서하지 않으니까."

< 태양 교단 출진(3) >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뭐랄까, 이 기분은? 언젠가 영화에서 봤던 대사가 떠올랐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농담이 아니라 은의 성녀의 눈빛이 마치 사형집행인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목이 타고, 식도가 바짝 마른다. 당장 달콤한 피를 마셔야 정신이 돌아올 것만 같다.

평소 잘 굴러가던 혀도 의표를 찔려서 그런가 둔하고, 무거워서 움직이질 않았다.

그때 고르가쓰가 나서려 했다. 뭔가 커버 치려는 것 같았는데, 그의 어깨를 살짝 잡고는 말렸다.

'변명을 해도 내가 해야 해.'

고르가쓰는 노련하지만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진 못할 터. 나는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은의 성녀가 작게 미소지으며 물어왔다.

"땀이 나는군요? 마치 묘비에 맺힌 이슬 같네요."

세상에, 이렇게 무서운 비유라니! 대놓고 너 언데드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은빛 엘리시아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끄집어내 검토했다.

'날 소멸시키려고 추궁하는 건 아닐 확률이 높다···.'

게다가 어차피 뱀파이어인 게 들켰는데 잡아떼봐야 역효과만 날 뿐이다.

"대답하지 않을 건가요?"

재차 묻는 말에 일단 입을 열었다.

"맞다. 인간의 성녀. 나는 최근에 그 저주받은··· 질병에 감염됐고, 몸의 변화를 겪고 있다. 일부러 감춘 것은 아니다···."

나는 한 가지 가능성에 걸고, 젊은 오크 전사를 연기했다. 그러자 성녀가 여전히 은빛 눈동자로 날 지긋이 보며 답했다.

"특이한 경우군요. 오크 중에 뱀파이어는 드문데 말이에요."

그녀의 대답을 듣는 순간, 살아날 가능성이 보였다.

'내가 소렌인 걸 아는 건 아니다! 상급 변신을 간파하지 못했어.'

역시 여신이 직접 준 능력이군. 아무래도 나는 섬기는 분을 좀 더 믿을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은의 성녀는 모종의 감각으로 내가 뱀파이어란 것만 알아챈 듯했다. 어쩌면 뱀파이어 인자 자체에 민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보이는 대로 오크족 뱀파이어라고 여기고 있지.'

나는 이 상황을 이용할 방법이 떠올랐다. 상대는 뱀파이어의 정체를 감춘 채 인간 흉내를 내는 존재.

즉, 본질은 뱀파이어란 거다. 같은 뱀파이어니 이걸 이용해 호의를 사거나 뭔가 만들어 가는 게 가능할 듯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나는 은빛 엘리시아에 대한 고인물의 지식을 검토하고는 바로 결론을 냈다.

'할 수 있다. 상대가 무슨 수작질을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더불어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으니 말이다. 저 여자가 뱀파이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써먹을 수 있으니까···.'

저 간악한 에인션트 뱀파이어는 동족에게 금제를 걸어 하수인으로 만드는 특기를 가졌다.

그렇다는 건, 지금 은의 성녀는 나를 하수인으로 만들고 싶은 거다. 고르가쓰의 측근으로 보이니 하수인으로 만들면 유용할 거라 판단한 거겠지.

게다가 은의 성녀는 상대 뱀파이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하수인으로 만드는 방법을 갖고 있었다.

바로 뱀파이어화의 치유.

은의 성녀란 위명답게 그녀는 뱀파이어 인자를 정화해 치유하는 걸로 그 이름을 크게 떨쳤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외부적으로 뱀파이어화가 낫는 거로 보여도, 실상은 저 간악한 성녀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고대 마법에 불과하다.

'실제로 뱀파이어의 저주를 벗어나고 싶어 하던 왕국의 귀족 여럿이 은의 성녀의 하수인이 됐지.'

나 역시 뱀파이어화를 벗어나려 하는, 젊고 긍지 높은 오크 전사를 연기한다면 그녀가 마수를 뻗어올 터였다.

"이것은 저주다! 나는 결코 원하지 않았다. 강해지기 위해선 조상의 인도만 필요할 뿐, 이 흡혈의 본능 따윈 방해일 뿐이다. 크르르!"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성녀에게 답했다. 누가 봐도 부족에 대한 긍지 넘치는 젊고 오만한 오크 전사로 보일 터였다.

그러자 은의 성녀가 바로 낚였다.

"당신의 처지를 이해해요. 젊은 전사여. 뱀파이어인 걸 추궁한 건 미안해요. 탓하고자 한 게 아니랍니다. 후후후, 그저 제 힘으로 그 삿된 걸 치유할 수 있을 것 같기에 말씀드린 거랍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크게 되물었다.

"정말인가! 인간!"

"물론이랍니다. 저는 정화와 치유를 담당하고 있지요. 뱀파이어의 인자는 몇 번이고 다뤄봤으니까요. 진정으로 뱀파이어의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걸 받으세요."

은의 성녀가 품에서 팔찌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것은 상대를 옭매기 위한 사악한 저주템이다. 한 번 팔에 끼게 되면 점점 속박이 강해지고 결국 은빛 엘리시아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걸 모른다는 듯 물었다.

"이게 무엇인가! 크르르!"

"차고 있는 동안은 뱀파이어화가 진행되지 않을 거예요. 햇빛도 제한적이나마 볼 수 있을 거고요."

"아니, 정말인가!"

"네, 절 믿으세요."

세상 누구보다도 신뢰감을 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솔직히 그 순간에는 나도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에 나도 일순간이나마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정체를 알면서도 이러니, 모른다면 다 속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백이면 백 다 당하겠네.'

은의 성녀는 거기에 더해 자비로운 말투로 덧붙였다.

"이번 일은 중요하니, 공훈을 세워주신다면 저도 당신의 뱀파이어화를 책임지고 치유해 드리죠."

그 말에 옆에 있던 아달릭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두 손을 모으더니 마치 신을 대하는 것처럼 감격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는 것이다.

"성녀시여! 이 어찌 자비로운!"

이어서 아달릭은 내 쪽을 보더니 눈에 핏발을 세우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오크! 당장 엎으려 절이라도 해라! 아무리 야만종족이라지만 이게 얼마나 큰 자비인지 모른단 말인가!"

그 말에 나는 앞으로 나섰다.

"오크니 인간에게 절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이상을 보여주지."

성큼성큼 성녀에게 다가가자 아달릭이 막아서려 했지만, 은의 성녀가 인자한 표정으로 제지했다.

나는 은의 성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이것은 오크가 성년이 되면 받는 단검인 즈라크라는 물건이다. 이것으로 피를 내고 종족신에게 맹세하는 걸로 성녀 그대에게 충실할 것을 약속하겠다."

이건 오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맹세 의식이다. 나는 오크에 대해서도 잘 알았기에 조금도 막힘없이 흉내낼 수 있었다.

팔을 단검으로 긋자 피가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그 순간, 성녀가 살짝 혀로 입술을 핥는 게 보였다. 잠깐이지만 뱀파이어의 충동이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나도 모른 척했다.

"오크를 돌보는 위대한 신께 맹세하겠다. 오늘부터 이 동맹이 지속되는 동안 나는 성녀를 위한 도끼가 될 것이다."

곁에서 보던 아달릭은 감탄을 터뜨렸다. 오크가 이 맹세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도 알기 때문이다. 자기 종족신에게 걸고 한 맹세니 어겼다가는 지옥행 확정이니까.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지.'

나는 오크도 아니고, 오크신을 섬기지도 않으니까. 뭐랄까? 처음부터 무효인 법률행위 같은 거다. 즉, 이건 그냥 연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두를 속이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이 맹세가 성립할 때 무슨 마법이 발동하고 그러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오크의 똥고집과 종족신에 대한 맹신이 이 맹세를 아주 그럴 듯한 것으로 만들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뱀파이어 성녀는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대의 호의에 감사해요. 나의 친구."

맘에 들겠지. 오크 족장의 수하를 하수인으로 삼았으니 다양한 짓이 가능하다 믿을 테니까.

나는 은의 성녀에게서 팔찌를 받아서 찼다. 그걸 본 성녀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게임 끝이다 싶겠지.'

하지만 이건 낙인이 있는 사도에겐 안 먹히는 종류의 주문이었다.

핏빛 새벽의 여신과의 연결이 제일 중시되기에 은의 성녀의 명령은 무시되는 것이다.

'물론 잘 먹히는 척 연기하면 그만이지만.'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이걸로 은의 성녀를 함정 깊숙이 끌어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은빛 엘리시아를 꼭 잡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침 에인션트 뱀파이어를 상대하는데 좋은 방법이 있기도 하고 말이다.

발레스카의 경우에는 워낙 갑작스러워 쓰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가능할 터였다.

'좋아. 적의 군대를 몰살시키는 것만 아니라 성녀까지 얻겠군.'

이거 태양 교단의 체면이 땅바닥으로 떨어지겠네.

* * *

보름 뒤.

하피 정찰병이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 태양 교단의 군세가 둘로 갈라졌다는 걸.

"좋아."

이쪽 뜻대로 된 것이다. 자세한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정보망을 가진 새블릿 남작부인에게 연락을 넣었다.

-부인. 태양 교단 군대가 갈라졌다고 합니다.

-네, 맞아요. 2천가량이 우회해서 일곱 봉우리로 향할 예정입니다.

늘 침착한 편인 새블릿 남작부인에게서 드물게 들뜬 기색이 느껴졌다. 전황이 유리해졌으니 그럴 수밖에. 그녀는 내게 추가적인 설명을 해줬다.

-소렌 님께서 아달릭을 움직인 게 아주 유효했던 것 같아요. 성기사단장이 극렬히 반대했지만 소용없었답니다. 그가 실질적인 지휘관이긴 하지만,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서부 추기경이거든요.

게다가 종군 중인 은의 성녀 역시 서부 추기경의 편을 들자 성기사단장도 더 반대할 수 없었다고.

'계획대로군.'

성기사단장은 헌신적이고 유능한 인물이지만 정치 싸움에선 밀린다. 그러니 저들은 전술적 선택보다, 지도자의 탐욕을 따라 움직일 확률이 높았다. 이쪽에겐 유리한 점이라 하겠다.

나는 새블릿 남작부인과 이런저런 정보교환을 한 후 통신을 끊었다. 그리고 향한 곳은 본거지의 피의 제단이었다.

'이곳에서 기도해야 가장 효과가 좋지.'

뱀파이어 성녀에게 은빛 엘리시아와 싸울 때 필요한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이 한 달에 한 번 소원을 비는 의식은 첫 번째 사도만 가능한 것인데, 대단히 유용했다. 상대 입장에선 뒷목 잡을 만한 일이다. 뭐, 억울하면 사도 하던가.

"자애로운 핏빛 새벽의 여신이시여. 무도한 뱀파이어가 성녀를 참칭해 당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상대하고자 하오니 봉인의 수법을 내려주십시오."

내가 요구한 수단은 바로 봉인이다.

이것은 쉽게 죽일 수 없는 에인션트 뱀파이어를 상대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유물을 처리 못 하면 어차피 죽여 봐야 부활하니 아예 가두겠다는 것.

'잘만 하면 엔딩 볼 때까지 안 만날 수도 있고 말이야.'

요컨대, 에인션트 뱀파이어는 똥 같은 새끼들이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법. 그 똥덩어리들은 사회와 격리할 필요가 있었다.

'여신님께서 뭔가 근사한 수법을 주시겠지.'

한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낙인에서 푸른빛이 뜨며 거부 의사가 표출된 것이다.

"아, 아니?"

음봉이라고? 핏빛 새벽의 여신님께서 이 소렌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뭐랄까, 잠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엄마가 저녁을 차려줄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밥은 없다는 소리를 들은 꼬맹이의 기분이라고 할까?

"잠깐···."

혼란을 추스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여신님이 내가 싫어서 거절한 건 아닐 터.'

이건 진짜 확실하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우리 사이는 원만하다고 더없이 확신하니까.

나는 소원권이 거절 당하는 경우를 떠올려봤다.

'불가능한 건가?'

아니다. 핏빛 새벽의 여신에게 그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어렵다고 하면 비슷하게, 마이너한 버전으로 능력을 줄 터였다. 이렇게 바로 거절을 할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면 다른 경우는?'

나는 재빨리 소원이 거절당했던 사례를 떠올렸다. 초심자라면 헤매겠지만 나는 게임 속에서 경험이 많다.

그중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미 들어준 것? 이미 갖고 있어서?'

왜냐하면 신과 소통이 부족한 자가 가장 헤매는 부분이 이런 경우기 때문이다. 이미 줘서 거절당하는 건데 이걸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걸 떠올리고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다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피의 제단에 귀히 안치된 은접시였다.

과거 물질계로 나온 새벽의 사자인 세티스가 여신의 선물이라고 건네준 것이다.

"설마 이게···?"

그때 낙인에서 정답이라는 듯 붉은 긍정의 빛이 일어났다. 동시에 흐믓해하며 칭찬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 은빛 엘리시아(1) >

태양 교단 중 일부가 일곱 봉우리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군대를 소집했다.

의장인 내 요구에 응해 각 봉우리의 종족들이 군대를 이끌고 왔다.

아군의 총 병력은 4,000여 명가량. 일곱 봉우리로 향하는 적이 2천 정도니 배는 많았다.

"이 녀석들! 서둘러 움직여! 공을 세우면 노예에서 풀어주겠다! 케케케케!"

고블린 감독관들이 노예병으로 전락한 오크들에게 마구 채찍질을 해대고 있었다.

저 오크들은 돌격에서 일선에 설 예정이었다. 엄청난 희생이 있겠지만, 오크 노예들은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 기회기 때문이다. 공을 세워 자유민으로 올라서지 못하면 정말로 일생을 광산에서 노예로 썩어야 한다.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기에 오크들의 표정은 결연했다.

"의장님, 군의 사기가 높습니다. 승리는 확실하겠군요. 크하하핫!"

근처에 앉아 있던 드워프의 대표인 그루린 레그너가 맥주를 들이키며 웃어댔다.

레그너3세의 조카인 그는 내 요청에 드워프 중갑보병을 300명이나 이끌고 왔다.

300명이라 적다 생각할 수 있는데, 철갑으로 몸을 두른 드워프 중갑보병의 고용비는 고블린의 몇 배나 된다.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해 보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루린 레그너는 아까부터 어깨를 벌리고 당당한 태도였다.

반면, 이번 전쟁에 21명의 주술사와 82명의 전사를 겨우 지원한 스킨크 족장 스위프트테일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과연, 레그너 공의 말이 맞습니다. 스에에···. 스에···."

과거 룩스 움브라 사태 때 둥지가 무너져 스킨크족이 떼죽음 당한 여파 때문이다. 가뜩이나 수가 적었던 스킨크인데 그때 이후 외부로 원정을 보낼 여력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똑같이 한 종족을 대표해 왔다고 해도 둘의 발언권은 차원이 달랐다.

이는 다른 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일곱 부족 중 가장 입김이 강한 이들은 바로 고블린들이었다.

무려 2,000여 명이나 용병을 데려왔기 때문이다. 급료를 주겠다니까 지원자가 폭주했단다. 게다가 전쟁은 용병에겐 기회.

고블린들은 이번에 부유한 태양 교단의 재화로 한밑천 챙기려고 벼르는 중이었다.

다행인 건, 이 고블린 놈들의 대표가 내 하인인 카조그라는 거다.

덕분에 고블린을 통솔하긴 쉬울 듯했다. 안 그러면 매사 불평불만이 넘쳐나는 놈들을 관리하기 어려웠겠지.

"의장님의 작전을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멋대로 구는 놈들이 있으면 목을 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카조그의 도무지 고블린 같지 않은 듬직한 말에 나는 큰 위안을 얻었다.

"고맙군. 그대만 믿겠다."

군대의 사기도 왕성하고 보급품도 충분했다. 일곱 개의 종족이 모였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로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내 얼굴은 좀처럼 펴질지 몰랐다.

"의장께선 걱정이 많으신가 보군요?"

코볼트 대표 잼아이가 물을 타지 않아 진한 포도주를 훌쩍이며 물어왔다. 파충류인 그의 긴 혀가 잔을 훑더니 곧 빨려 들어가듯 입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에게 솔직히 털어놨다.

"유인과 매복이란 게 계획대로만 되면 좋은데, 실제론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말이지."

작전 자체는 간단하다. 룩스 움브라의 조각인 시골이가 세팅된 곳까지 적을 유도하고, 이후 방심한 놈들을 습격해서 몰살시킨다는 거다.

'문제는 저쪽도 이리저리 간을 볼 테고, 정찰병을 파견하는 등 상황 파악을 하려 들겠지.'

상대는 간교한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아닌가? 쉽게 함정 속으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뭔가 더 필요해. 무언가 더.'

"음······."

술잔을 기울이며 고민하던 나는 곧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자 코볼트 잼아이가 눈치채고는 물어왔다.

"뭔가 해법을 찾으신 모양입니다?"

나는 작게 끄덕였다.

"이럴 때는 상대가 애타게 만드는 게 최고지."

* * *

다음날 새벽.

군대가 행군을 시작하기 전이자, 뱀파이어가 슬슬 관으로 들어가기 좋은 시간대.

나는 야전용 나무관 안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불면불휴 능력 덕에 쉴 필요는 없지만, 꿈을 꾸기 위해서다. 이번 전쟁에서 꿈은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왜냐?

성녀로 가장한 은빛 엘리시아가 하수인에게 명령을 내릴 때 꿈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 간악한 에인션트 뱀파이어는 서큐버스의 피도 조금 섞여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꿈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다.

미혹의 산으로 향하고 있으니 십중팔구 내게 연락해서 이런저런 상황을 파악하려 할 터. 그렇기에 자발적으로 잠에 들려는 거다.

엘더급에 오른 뒤로 신체를 거의 완벽하게 통제 가능하게 됐다. 원할 때 잠들고 깨어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알람도 없는데 정확히 깨어나는 걸 보면 스스로로 신기할 때가 많았다.

'가보자.'

나는 신체를 조정해 세 시간 정도 수면하게 만들었다. 금방 모든 게 흐릿해졌고, 몸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음···?'

나는 이 무겁게 내려앉는 느낌이 수면으로 인한 건 줄 알았다. 한데 마치 진흙 속에 빠진 듯 불쾌한 기분이 계속되는 것이다.

점점 깊은 바닥으로 침전한다. 숨을 쉬지 않는 뱀파이어임에도 갑자기 무언가 턱 막혀오는 기분에 몸을 벌떡 일어났다.

"커헉···!"

몸을 일으키자 어느새 정원에 도착해 있었다.

'꿈의 세계로군.'

정원은 기묘했다.

아름다운 화초와 불길한 악마적 상징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푸른 잔디 위로 목매달린 시체들이 주렁주렁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정원의 가운데 은빛 엘리시아가 하얀 의자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나의 친구."

아름답지만 탁하고 음험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녀는 온전한 성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일부는 은의 성녀다웠지만, 일부는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본질이 한껏 드러나 있었다.

은빛 엘리시아는 에인션트 중에 누구보다도 많은 악마의 피를 가지고 있는 존재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뿔과 붉은 비늘 등, 악마적인 특색이 강했다.

'왜 저렇게 보이는지 알 만하군.'

꿈이란 내 인식대로 상대가 비추기 때문이다. 나는 완벽하게 위장된 은의 성녀를 직접 만났다. 하지만 그 본질 역시 알고 있기에 저렇게 중첩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반면 나는···.'

슬쩍 손을 보니 완벽한 오크였다.

씨익.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은빛 엘리시아는 내 본질을 간파하지 못했다. 여전히 젊은 오크 전사로 인식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러니 자신감이 생길 수밖에.

"성녀. 그대가 날 불렀나? 여긴 꿈인가! 이렇게 생생할 수가!"

"맞아요. 진정하세요. 나의 친구.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공간이니까요."

성녀의 말과 다르게 정원의 바깥에서 거대한 뱀들이 붉은 눈을 빛내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것은 나를 향한 눈앞의 존재의 속을 훤히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뱀처럼 교활하게 이쪽을 노리고 있군.'

하지만 나는 그게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며 성녀의 근처로 갔다.

"몹시 잘 가꾼 정원이군. 오크에겐 익숙하지 않은 장소다. 인간의 취미인가?"

"후훗. 취향에 맞지 않나요?"

"나쁘지 않다. 정말 여기가 꿈이란 게 놀랍군. 아무래도 네가 날 부른 것 같군. 무슨 이유지?"

용건을 묻자 은빛 엘리시아가 눈을 빛내며 말해왔다.

"물어볼 게 있어요. 뭐든 답해줘야겠어요. 나의 친구."

그녀의 말과 함께 전에 받은 팔찌가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다. 구속의 힘이 발휘된 것이다. 사도인 내겐 효과가 없었지만 충직한 태도를 연기했다.

"뭐든 물어라. 아는 건 다 답하겠다."

"좋아요."

성녀는 미혹의 산에 대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나는 작전에 방해가 되지 않을 수준에서 최대한 성실히 답해줬다. 이후 뿌릴 간계를 위해서다.

"음··· 대충 상황은 알겠군요. 특별히 중요한 게 있을까요?"

"일곱 봉우리에선 고블린을 조심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그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게 에인션트 뱀파이어 카르멘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 소리가 뜻밖이었는지 엘리시아의 표정이 흔들렸다.

"뭐, 뭐라고요!"

"고블린의 뒤에 카르멘이 있는 건 이미 알려진 이야기다. 최근 그녀가 고블린을 이용해 룩스 움브라의 조각을 사냥하려 한다는 소리가 있다. 실제로 고블린들이 나서고 있기도 하고··· 무얼 노리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은빛 엘리시아를 조급하게 만들 계책은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것이다.

바로 카르멘의 이름을 파는 것. 카르멘 역시 에인션트 뱀파이어고 그녀가 룩스 움브라의 신력을 얻는데 방해가 될 존재였으니.

'실제론 관심도 없겠지만···.'

카르멘은 에인션트 뱀파이어치고 뭔가 초탈해 버린 존재다. 다른 에인션트들과 연관되지 않은 채 반쯤 은둔한 모양새로 살아가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엘리시아는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할 터.

"감히! 그 능구렁이가!"

순간 은의 성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정원의 해가 사라졌다. 먹구름이 끼며 천둥까지 쳐대기 시작한 것이다.

우르르르! 콰앙!

이제 엘리시아는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신력을 노리는 경쟁자가 출현한 것이니까. 심지어 고블린 무리까지 움직이고 있다고 하니 다급할 수밖에.

"···이런, 제가 잠시 이성을 잃었네요. 그런 삿된 무리가 또 흉계를 꾸민다는 생각에···."

내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자 엘리시아가 다시 연기를 했다. 그리고는 물어왔다.

"좀 더 아는 게 있으면 말해주세요. 산지의 위기를 막기 위해선 그 간악한 뱀파이어보다 태양 교단이 먼저 고대신을 처리해야 해요."

나는 바로 준비한 걸 꺼내놓지 않고, 시간이 필요하다고 뜸을 들였다. 그리고 다음날 같은 시간에 꿈에서 보자고 약속했다.

"새로운 정보를 가져오겠다."

"당신만 믿겠어요. 나의 친구."

* * *

다음날 나는 엘리시아에게 새로운 정보를 풀었다.

"일곱 봉우리로 들어오는 입구는 몇 개가 있다. 지금 고블린이 그곳에 진을 친 상태다."

현재 성녀의 군대가 진행하는 방향을 보면 크게 두 곳 가운데 하나였다.

'오스의 구릉'과 '발의 협곡'.

둘 다 일곱 봉우리로 향하는 대표적인 통로였다. 보통 안전한 구릉지대로 이동하곤 하지만 나는 그곳에 고블린이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고 알렸다.

"구릉지대 위에 자리한 고블린을 공격하는 건 몹시 어렵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발의 협곡으로 우회해서 고블린의 후방을 치는 게 맞다."

"협곡으로 군사를 움직이긴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 때문에 고블린도 협곡을 소홀히 하고 있지. 상식적으로 구릉으로 밀고 올 게 맞으니."

나는 이런저런 정보를 풀며 설득했다. 선택은 엘리시아의 몫이었다.

"허를 찌르는 게 좋다. 이건 고블린과 많이 싸워본 오크로서 하는 조언이다."

"···알겠어요."

그리고 이틀 뒤.

엘리시아가 이끄는 태양 교단의 군세는 발의 협곡으로 들어갔다가 매복한 고블린들의 공격에 당해 여럿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나는 산지의 초입에서 일어난 작은 승리에 기뻐하며 세작에게 물었다. 이 세작은 블라르 백작이 태양 교단에 침투시킨 자로 이번에 날 돕고 있었다.

"사상자가 얼마라고?"

"듣자니 150여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죽은 성기사만 17명입니다."

반면 매복 공격을 한 고블린 용병들의 사상자는 겨우 2명. 태양 교단과 고블린의 힘 차이를 생각해 볼 때 완승이었다.

'성기사도 많이 죽었고 말이야.'

협곡 아래로 돌을 굴리고 투사체로 일방적으로 두들겼다고 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저희가 내부에서 파악한 바에 의하면 최고 지휘관 발드릭 경은 원래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고블린을 정면돌파 하려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구릉에 고블린을 위장으로 배치해 두긴 했다.

"그런데?"

"한데 성녀가 신탁이 내려왔다며 협곡으로 갈 걸 주장했고, 발드릭 경은 따랐다고 합니다. 성녀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요."

결국 고블린에게 신나게 얻어맞고 귀중한 성기사가 17명이나 죽었다는 거다. 신성 바퀴벌레가 그 정도나 없어졌다는 사실에 나는 속이 절로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17명이 서로 힐을 하며 날뛰면 얼마나 안 죽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심지어 껍질도 단단하고.'

하지만 아직 남은 성시가는 많았고, 적은 정예였다. 방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후 어떻게 됐어?"

"발드릭 경이 구릉지대를 정면돌파할 거라고 합니다."

뭐, 그때는 고블린들은 대충 싸우는 척하며 도주하도록 해놨다. 이후의 상황도 비슷하다. 고블린 용병들은 산지에서 유격대처럼 활약하며 이동하는 태양 교단의 군세를 계속 물고 늘어지며 지치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일곱 봉우리를 앞마당 삼아 날뛰는 용병들이니 누구보다 잘 해낼 거다.

"성녀의 권위가 크게 떨어졌겠어. 크흐흐."

"네, 신탁이란 소리까지 나와서 패했으니, 술렁임이 생각보다 큽니다."

아무래도 이 양반. 꿈속으로 날 또 부르겠군.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은빛 엘리시아가 날 꿈으로 소환했다.

"나의 친구···!"

말투는 같았지만 목소리는 칼날처럼 서늘했다.

나는 몹시도 미안한 표정을 한 채 그녀의 앞에 가 무릎을 꿇었다.

"일이 잘못됐다고 들었다! 미안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엘리시아는 참지 못하고 내게 힐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성녀를 연기해야 했기에 한계가 있었고, 품위도 지켜야 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납작 엎드려 알렸다.

"새로운 정보가 있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네놈은··· 아니, 당신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걸 알고나···."

엘리시아는 손가락질을 하며 언성을 높였지만 이어진 내 말에 입을 다물었다.

"카르멘이 룩스 움브라와 싸우다 상처를 입었다. 지금이야말로 더욱 진군 속도를 올릴 기회다!"

또 속을까?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어떤 멍청이가 두 번이나 넘어가겠냐 싶겠지.

하물며 교활한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아닌가? 속는 게 말이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욕심과 조급함 앞에서는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다.

"카르멘이 다쳤다고요? 진짜인가요?"

"확실한 정보다. 어젯밤, 장엄할 정도로 강한 뱀파이어가 룩스 움브라와 사투를 벌인 걸 본 이가 많다. 무언가 조급해 하는 기색이라 했다."

"흥! 우리에게 룩스 움브라를 빼앗길까 싶어서겠죠."

나는 고블린들이 주인이 다친 것 때문에 사기가 떨어져 물러났다고 전했다.

목적지까지 거의 무주공산이라며 진격 속도를 올릴 때라 덧붙였다.

"카르멘의 부상으로 모두 크게 동요하고 있다."

"허튼 소리는 아니겠죠?"

"당연하다. 카르멘은 고블린에게 급료를 주는 자다. 돈줄에 문제가 생겼으니 싸움에 소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상대는 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열심히 설득했고, 엘리시아는 미간을 좁히며 경고해왔다.

"이번에도 문제가 있다면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물론이다. 내가 종족신에게 맹세했던 걸 잊었나? 나는 성녀 그대를 위해 목숨까지 걸고 있다. 이 모든 정보는 결코 쉽게 얻은 것이 아니다."

"···알겠어요."

꿈은 그걸로 끝났고, 나는 다음날부터 세작의 보고를 다시 받았다.

구릉지로 진격한 태양 교단의 군대는 허술했던 고블린 방어군을 단번에 격파했단다.

애초에 싸울 생각이 없던 고블린들은 지리멸렬하며 모두 산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후 지휘관인 발드릭 경이 매복을 대비해 정찰병을 운용하며 천천히 진군하려 했지만 성녀가 다시 신탁을 들먹이며 끼어들었던 것.

세작의 보고는 내 귀를 기쁘게 했다.

"놈들은 빠르게 진군했고, 무수한 습격이 이어졌습니다. 결과는 이와 같습니다."

나는 세작이 건네 온 보고서를 보며 흡족해졌다. 피를 안 마셔도 배가 다 부른 기분이다.

양피지에 세작들이 열심히 기록한 태양 교단의 인명 피해 현황이 빼곡히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습격이 없을 거라는 내 말과 다르게 고블린은 포인트마다 매복해 있었고, 태양 교단이 지나가기만 하면 공격을 해댔다.

당연히 빠르게 나아가고 있던 태양 교단은 허를 찔리고 많은 이가 죽게 됐다.

사상자 350여 명.

성기사 사망 23명.

그 외에 잃어버린 보급품과 물자는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현재 성녀는?"

"일선에서 완전히 밀려났습니다. 사제와 성기사들이 성녀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시선도 늘었고요."

"동료들을 죽음으로 이끌었으니 말이야. 크흐흐흐!"

"감축드립니다."

"좋아. 돌아가서 임무에 힘써주게."

세작을 보낸 뒤 곧장 지휘관 회의를 열어 한 가지를 명했다.

"일곱 봉우리를 빠져나가는 길을 아예 막을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놈들이 이 산에서 뼈를 묻도록 하겠다!"

회의장 가운데는 현재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거대한 지도가 있었는데, 태양 교단의 군세는 룩스 움브라가 있는 곳으로 여전히 진군 중이었다.

마치 덫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사냥감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갈 길을 포함해 모든 진로를 일곱 봉우리의 종족들이 점점 포위하고 있는 형세였다.

모두가 즐길 잔치가 눈앞이었다.

* * *

은빛 엘리시아가 꿈으로 부단하게 날 호출했다.

하지만 두 번째 만남 이후론 응하지 않았다.

나도 꿈속에 몇 번 가다보니 상대를 거절하는 요령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엘리시아는 초초하게 날 불러댔다.

"나의 친구여···, 나의 친구여···!"

하지만 거절은 간단했다.

뭣보다 잠을 안 자면 부를 방법도 없었고.

태양 교단의 군세가 며칠이나 매복에 시달려 초주검이 됐을 때 나는 다시 꿈의 부름에 응했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핏빛에 지옥으로 변한 정원 한가운데서 엘리시아가 악귀 같은 얼굴로 내게 물어왔다.

"네놈··· 누구야?"

< 은빛 엘리시아(2) >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다.

내 대답에 따라 당장이라도 찢어발기겠다는 듯 기다란 손톱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상대는 더 이상 거짓된 성녀의 모습과 중첩돼 보이지 않았다. 완벽히 에인션트 뱀파이어 그 자체였다.

피부는 붉은 비늘로 덮여 있고, 머리에는 권위를 상징하는 뿔이 난 게 뱀파이어와 악마가 뒤섞인 잡종의 모습이었다.

"다시 묻는다. 네놈··· 대체 누구지?"

다만 눈동자만은 악마를 꼭 닮아 있어 나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태도는 여유로웠다.

"뭘 새삼스럽게 묻고 있나? 오크 전사잖아?"

당연히 상대는 발끈했다.

"닥쳐라!"

그 외침과 함께 붉은색으로 물든 정원에 천둥, 번개가 쳤다.

우르르!

콰앙!

나는 대답 대신 자신을 살펴봤다. 꿈속에서 내 모습은 상대의 인식에 달려 있었다.

'이제 더는 오크가 아니군.'

현재 내 모습은 검은 실루엣으로 둘러싸인 미지의 존재였다. 마치 어떤 추리 만화에 나오는 시커먼 범인 캐릭터 같은 형태다.

은빛 엘리시아는 이를 갈며 경고해왔다.

"스스로를 위해 대답을 잘 고르는 게 좋을 거다."

"어째서?"

"이곳은 꿈이다. 그리고 나는 꿈을 다뤄 네게 생지옥을 보여줄 수 있다."

은빛 엘리시아는 서큐버스의 피도 갖고 있기에, 몽상 세계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상대를 무한한 시간에 가둬두거나 기억을 조작하는 식이다. 아니면, 마비를 일으키고 죽음보다 무서운 악몽에 가둘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자신만만한 것이다.

비록 그 능력은 서큐버스에 비해 못하겠지만, 아무런 대비도 없는 자를 상대로는 실로 막강할 터. 하지만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네년의 잔재주로 나 같은 격조 높은 존재를 어쩔 수 없다."

이건 잘난 채가 아니다. 그저 사실이었다. 나는 신의 첫 번째 사도다. 꿈속 장난에 놀아날 일은 없었다.

"네놈이 누구건 간에 자신감이 과하군. 좋다. 점잖게 이야기하는 건 여기까지다."

그와 함께 은빛 엘리시아가 꿈을 다루는 힘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주변의 풍경이 불에 녹은 밀납처럼 녹아내리며 불길한 어둠이 사방을 덮어왔다.

동시에 숨 막히는 것 같은 공포가 잠식해 오며 사방에서 죽은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해골 같은 앙상한 팔을 가지고 날 더듬으며 저주를 퍼부어댔다.

"네놈이 날 죽였다고!"

"이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해주지!"

"이 악마 같은 자!"

모든 게 너무나 생생했다. 도저히 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보통 여기서부터 숨 막히는 공포를 느껴야 맞겠지만, 나는 달랐다.

사방에 가득 찬 시체 썩은 내, 몸에 닿는 흐물흐물 진물이 흐르는 살점, 망자들의 귀곡성도 다 재밌게만 느껴졌다.

마치 놀이공원에 있는 귀신의 집에 들어온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까?

이게 마음 먹기에 따라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이 현실감에 감탄할 뿐이다.

악몽이란 그게 힘을 발휘할 때는 한 사람을 백치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릴 재주는 다 부렸나?"

내 물음에 이 꿈속 세계 어딘가에 숨어서 열심히 악몽을 조종하고 있던 엘리시아가 놀라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

이어서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다양한 꿈속의 공격이 들어왔지만 내겐 무용했다. 잠시 그녀의 재주를 구경하다가 왼손을 들어보였다.

어느새 손목에는 날 하수인으로 만들기 위해 선물했던 팔찌가 있었다. 나는 그 팔찌를 손가락으로 때렸다.

까앙!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팔찌가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팔찌는 꿈속이라 실물은 아니지만, 엘리시아가 내게 악몽을 보여주는 매개체라 중요한 것이었다.

팔찌로 지배하고 있는 존재니 꿈마저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는 논리였다.

'서큐버스의 힘을 반푼이로 갖고 있는 그녀에겐 이런 장치가 필수지.'

그걸 꺼내 박살 냈으니 모든 게 엉망이 될 수밖에. 커다란 반동이 일어났고, 악몽을 조종하던 엘리시아는 큰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

"끄으아아악!"

엘리시아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변에서 요동쳤던 악몽 역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체··· 이게 무슨?"

엘리시아는 현재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가슴팍을 부여잡고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조소를 감추지 못했다.

"지배 같은 건 처음부터 먹히지 않았다. 서큐버스를 흉내 낸 이깟 잔재주야 말할 것도 없지."

내 지적에 엘리시아는 표정이 변했다. 악마를 닮아 강인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어느새 두려움과 공포가 묻어나고 있었다.

"···대체 넌 누구냐?"

거기에 대한 내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가 만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

상대의 얼굴에 미심쩍어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함정을 강하게 의심하는 것 같다.

'이러면 안 되지.'

은빛 엘리시아가 겁먹고 내빼면 일이 틀어진다. 아무리 놈들을 끌어들이고 포위했다고 해도 군대 단위의 이야기다.

에인션트 하나가 몸을 빼기로 결정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 무조건 오게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 때문에 꿈을 다시 찾아온 거지만.'

고인물의 지식 덕에 상대가 파멸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찾아오게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바로 꺼냈다.

"엘리시아. 이 만남은 거절하지 못할 거다. 나는 네 악마 혈통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뭐라···!"

엘리시아의 표정에 파문이 일어났다.

그녀는 에인션트 중에서 악마의 형질을 갖고 있는 특이한 부류. 당연히 그 기원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그걸 밝혀내는 게 게임의 재밌는 스토리 가운데 하나였고.

당연히 내가 잘 알고 있는 부분이다.

"네가 그 혈통의 비밀을 간절히 풀고 싶어 하는 걸 안다."

물론 피가 이어진 가족이나 친척을 만나고 싶다는 그런 이유는 아니다.

자신의 근본에 대해 파악하는 건 그녀가 가진 악마적 특성을 개화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지옥에서 있을지도 모르는 상속에 관련된 문제기도 했다.

상속이라 하면 꼭 물리적인 재산이나 지옥의 영지 같은 게 아니라, 정당한 후계자가 받는 권능 같은 것도 있다.

당연히 엘리시아가 탐을 낼 수밖에.

'사실 저 녀석은 다른 에인션트보다 훨씬 포텐셜이 높지.'

그 때문에 엘리시아는 다른 에인션트 뱀파이어를 내심 깔보고 있었다. 자신은 더 대단한 존재라고 말이다.

선민의식이 대단하다고 할까.

하지만 문제는 자기 피를 어떻게 써야 할지 정확히 모른다는 것. 서큐버스의 힘을 어쭙잖게 따라하는 것 같은 특성 몇 가지만 나올 뿐, 그건 경쟁자들을 압도할 만한 게 아니었다.

그런 엘리시아가 지옥에서부터 이어진 자신의 본류에 대해 알기만 한다면, 다른 에인션트급보다 앞서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떡밥은 절대 무시하지 못하지.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도 슬슬 힘이 딸리고 있을 테니까.'

겉으로는 고고한 은의 성녀를 연기하고, 뭐든 할 수 있는 척 행동하지만 실상 에인션트 뱀파이어 엘리시아의 처지는 쉽지 않았다.

강자의 세계로 가면, 또 그쪽만의 어려움이 가득이기 때문이다.

"나와 만난다면 그 비밀 역시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수를 던졌다. 대신 이건 단점도 있다. 엘리시아의 엄청난 집착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꺼냈다는 건 그야말로 사생결단을 내야 한다는 소리였다.

'후일이라도 엘리시아의 관계를 원만하게 수습할 방법이 없어지는 거지···.'

하지만 그만큼 확신이 있다. 이번에 봉인해서 앞으로 안 볼 수 있다고 말이다.

"거짓을 말하는군···. 어디서 내 비밀을 듣고 얄팍한 수작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엘리시아는 일단 부정했다. 어처구니없다는 태도로 여유를 가장하고 있었다. 황당한 소리라 자신이 흔들릴 것도 없다는 듯 말이다.

하나 이어진 내 주문에 그녀는 격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볼라스··· 헤자스 카나··· 두르.]

내가 악마의 언어로 주문을 외웠기 때문이다. 반응은 곧장 일어났다. 그것은 엘리시아의 혈통을 자극하는 것이었고,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 불길한 문양이 떠오르며 빛나기 시작했다.

"이건···! 대체 이건!"

엘리시아는 경악한 듯 눈을 찢어져라 뜨고는 자신의 몸을 살펴봤다. 그녀의 얼굴은 희열로 달아올랐다.

지금껏 감춰져 있던 가능성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쁨은 금세 사라졌다.

내가 잠시 읊던 주문을 멈췄기 때문이다. 그러자 전원을 끈 기계처럼, 웅혼하게 일어나던 힘도 그 흔적조차 없어졌다.

엘리시아는 그 상실감에 비명을 질러댔다.

"끄아아아아! 계속! 계속 주문을 외워라!"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경질적인 비명을 지르는 게 약물 중독자를 보는 것 같았다.

확실히 방금 전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희열에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순식간에 사라지자 엄청난 공허함에 허우적거렸다.

"외우라고! 내놔! 그 힘을! 내놔! 끼아아아아아!"

삽시간에 내게 달려든 엘리시아는 멱살을 잡고 흔들어댔다. 하지만 나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런 요구를 하려면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해야지 않겠나?"

"······."

은빛 엘리시아는 손을 놓더니 날 조용히 쳐다본다.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부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갔다. 자기 본류에 대해 무한한 집착을 보이는 그녀는 분노를 터뜨리겠지.

-이 모든 모욕을 되갚고, 네가 가진 걸 빼앗아주마. 에인션트가 널 잡으러 갈 것이다!

이렇게 표독스럽게 말할 게 뻔하니 받아칠 대사도 준비해뒀다.

-맘대로 해봐. 나는 너에 대해선 뭐든지 알고 있으니까. 아무 것도 통하지 않을 거다. 절망이 뭔지 보여주지.

무시무시한 미지의 거물 연기를 제대로 할 셈이었다.

은빛 엘리시아는 두려움을 다소 느껴도 고대의 악답게 맹렬히 몰아치려 할 게 뻔했다.

체면이 많이 상했지만, 성녀란 지위를 이용해 다시 군대에 영향력을 끼치려 할 수도 있었고.

이래저래 룩스 움브라가 있는 곳에서 벌어질 최종적인 결전에서 큰 승리가 기대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대번에 빚나갔다.

은빛 엘리시아가 생각지도 못한 짓거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경배하는 자세로 납작 엎드려 청해온 것이다.

"위대한 분이시여. 이 미천한 존재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만약 그리한다면 제 모든 걸 바쳐 보필하겠습니다."

"······뭐?"

상대의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아무리 나라도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자, 엘리시아는 초조한지 말을 계속해왔다.

"제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진짜 이름도 주인께 드리겠습니다. 그 외에도 필요한 속박과 구속이 있다면 받아들이며, 영원한 봉사를 약속드립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아니······."

"다만, 제 봉사에 대한 대가로 혈통의 비밀을 허락해 주시길 청합니다. 또한 지상에서 몇 가지 소망을 이루고 싶습니다."

이게 뭐야. 고고한 에인션트 뱀파이어 맞아?

미친년 같은 발레스카의 육체를 간신히 파괴했던 경험 때문에 더더욱 그리 느껴졌다.

영원의 발레스카는 진짜 눈앞에 걸리는 건 뭐든 박살내 버리겠다고 날뛰어대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반면 엘리시아는 굴종을 택했다.

'이런 경우는 겪어본 적이 없다. 은빛 엘리시아도 그 자존심이 드높은 존재인데···.'

아무래도 나를 터무니없을 정도로 위대한 대마두로 여기는 것 같았다.

지배도 안 먹히고 완전히 농락 당했다. 게다가 자신의 비밀조차 꿰뚫어 본다. 이미 그녀는 두려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라 굴복해서 이득을 얻으려는 건가? 집착에 공포가 더해지니 예상 못 한 방향으로 전개되는군.'

생각해 보면 내가 대단한 존재인 건 맞다. 이곳에 나보다 더한 강자는 많지만, 나만큼 세계의 비밀을 많이 아는 자는 없으니까.

지식이란 때때로 힘과 같고, 그런 점에선 나는 어지간한 신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은빛 엘리시아의 숙이는 걸 택하는 것도 이상한 판단은 아니다.

하지만 이 교활한 악의 거물을 수하로 안전하게 부릴 수 있을 것인가?

'고민되네.'

거기에는 커다란 장점과 커다란 단점이 공존할 터였다.

"흐음······."

내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엘리시아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해 왔다.

"주인이시여. 성녀로 가장하고 있는 제가 주인을 돕는다면 그 효용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태양 교단과 상대하고자 하심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성녀인 제가 내부에서 돕는다면 놈들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부인할 수 없는 얘기였다. 솔깃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엘리시아가 얼른 말을 이어갔다.

"주인께서는 이번 한 번의 승리만을 원하는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패배 후에는 제 권위도 땅에 떨어지겠지만, 높은 권세가 있으니 다시 일어날 수 있겠지요. 그때 주인의 손발이 되어 가축처럼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게임이면 이거 완전 돌발 이벤트 발생이다.

내 내면에는 갈등이 일어났다

원래는 엘리시아를 봉인해 앞으로 안 보려고 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은 생각도 못했는데···.

'설마 자기 소망 앞에서 이렇게 태도가 유연할 줄이야.'

다 죽여버리겠다는 발레스카랑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