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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단 최강의 검(5) >

***

"쉽지 않겠는데···."

일단 오르고 투탄이 잡혀 있는 진중을 자세히 살펴봤는데, 답이 없었다.

군기가 바짝 든 성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겠군.'

어지간한 거로는 안 될 거 같다. 고민 끝에 전투가 벌어진 이후를 노리기로 했다.

한창 적과 싸울 때 진중에서 드래곤이 풀려나 날뛰면 큰 타격을 입을 터.

'문제는 성기사단장인데···.'

그 괴물을 내버려 두면 오르고 투탄을 조기에 진압해 버릴지도 모른다. 성기사단장을 어떻게든 다른 곳으로 유인할 필요가 있었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나는 이미 잘 먹힌 걸 또 써먹으면 되지 않겠나 싶었다. 이전에 성기사단장은 구출 작전에 직접 나섰다.

'포로를 이용해 또 한 번 가능할 것 같은데···.'

일단 아달릭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고민하더니 끄덕였다.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성기사단장은 블라르 백작의 군대를 상대로 연전연승. 여유가 넘치는 상황인 데다가 동료를 아끼는 그 성품을 미뤄 보건대··· 이번에도 직접 나설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좀 더 그럴싸한, 성기사단장의 관심을 끌 장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성기사단장은 높은 확률로 포로 구출에 나설 거다. 하지만 좀 더 확실하게 만들면 좋겠지.

"뭐가 좋을까?"

내 물음에 아달릭이 좋은 의견을 제시했다.

"주인께서 포로를 운반하고 있다고 하시죠."

"나?"

"네, 성기사단장은 이전에 해방된 포로들에게 미혹의 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소렌 다켄발트란 이름에 이를 갈고 있지요. 눈앞에 있는 블라르 백작만 정리되면 당장이라도 일곱 봉우리로 향할 기세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들려온다면 어떻겠습니까?"

"미끼를 덥석 물겠군."

아달릭 이 새끼 똑똑하구나. 하긴 교활한 놈이니 날 만나기 전까지 나름 승승장구해온 거겠지.

"좋다. 나는 일단 물러난 뒤, 성기사단장을 유인하는 데 성공하면 돌아오겠다."

"알겠습니다. 주인이시여."

* * *

진중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인질을 활용했다. 소렌 다켄발트가 직접 백여 명을 이끌고 오크 대족장에게 가고 있다는 첩보를 흘린 것이다.

"나 소렌이 이번 전쟁에서 오크 대족장의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선물로 건넬 인질을 데리고 이동 중이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이후 일단의 무리가 태양 교단의 포로 백여 명을 데리고 어둠의 숲 외곽으로 향했다. 숲을 벗어나 대족장이 있는 평야로 가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무리 중에는 나로 변장한 녀석까지 있었다.

'이제 미끼를 무냐는 건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자 아달릭이 연락을 해왔다.

-주인이시여!

-어떻게 됐나?

-성기사단장이 무리를 이끌고 출동했습니다.

-좋아! 됐군!

솔직히 먹힐 줄 알았다. 지난번 포로 구출로 큰 이득을 본 성기사단장이다. 이번에는 일곱 봉우리의 수괴인 나까지 잡을 수 있는 기회였으니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좋다! 성기사단장이 자리를 비웠다! 놈이 돌아오기 전에 공격한다!"

마음 같아선 가진 병력 전부로 들이받고 싶었지만, 그건 무리였다.

아군과 태양 교단의 본대는 아직 꽤 거리가 있는 편이다. 더 다가갔다간 들킬 게 뻔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부대 전체가 이동하기엔 시간이 많이 걸린다. 드워프 중갑보병이나 짐을 잔뜩 실은 보급대 같이 느린 병종도 많았기 때문이다.

모두를 데리고 적진에 당도하면 성기사단장이 볼일을 마치고 이미 돌아와 있는 상황일 터. 그러니 이 기회를 이용하려면 빠른 병종만 데리고 먼저 진격할 필요가 있었다.

"고블린, 코볼트, 스킨크가 날 따른다. 나머지는 뒤따라오도록."

먼저 날렵한 종족만 선발대로 데려가려는 거다. 이에 비해 둔한 드워프, 오크, 노움은 후발대로 편성했다.

고블린, 코볼트, 스킨크는 천이 넘었는데, 나는 그중에서 다시 정예를 추려 선발대를 총 오백으로 구성했다. 이에 우려를 표하는 자도 나왔다.

"신속한 기동을 위한 결정임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태양 교단을 상대하긴 빈약합니다."

고블린 대표인 카조그의 의견은 타당했다.

"틀린 얘기는 아니지."

"게다가 아군은 무장이 상대적으로 열세입니다. 그 철갑덩어리인 태양 교단 놈들을 무너뜨리기 쉽지 않습니다."

사실 고블린들을 데리고 태양 교단과 정면승부는 쉽지 않다. 지난 번에 고블린들이 대활약한 건 산지에서 벌인 게릴라전 때문이었고.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목표는 기습 이후 크게 소란을 피우는 거다. 적진을 무너뜨리는 건 다른 놈이 해줄 테니까."

카조그는 그게 드래곤을 말함을 알고 결국 작전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이후 나는 정예 오백을 데리고 어둠의 숲을 전속력으로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이제 적에게 들키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성기사단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를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서둘러라! 퍼지지 않고 도착하는 놈들에겐 금화 하나씩을 주겠다!"

격한 달리기가 계속되자 낙오해 퍼지는 놈들이 나왔다. 하지만 놈들을 추스를 시간은 없었다. 그렇기에 태양 교단의 본대가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선발대는 삼백여 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나머지는 이동경로를 따라 여기저기 퍼져서 길게 늘어져 있겠지.'

주변을 보니 선발대의 고블린, 코볼트, 스킨크들이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요란했다. 다들 강행군으로 헐떡이고 있었다.

"카조그, 내가 떠나면 약속한 때에 기습하도록."

"알겠습니다."

선발대의 지휘관은 유능한 카조그에게 맡겼다. 그 뒤, 아달릭을 불러들여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적진에 잠입했다.

"좋아. 이제 저놈만 풀어놓으면 되는군."

나는 여전히 처량한 모습인 오르고 투탄을 살펴봤다. 그사이 눈두덩이의 부기가 좀 가셔서 눈동자가 보였다. 하지만 멍하니 넋 나간 표정이었다.

역시 저런 건 드래곤답지 않은 모습이다. 웜루트를 써서 신속하게 치료해줄 필요가 있었다. 다소 화가 늘기는 하겠지만, 세상에 완벽한 치료제는 원래 없는 법이다.

'슬슬 공격이 개시되겠군.'

약속한 때가 점점 다가왔다. 아니나 다를까, 좀 기다리자 태양 교단의 진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고성이 터졌다.

"야습이다!"

"서둘러! 모두 일어나!"

태양 교단은 예상외의 공격에 허둥대고 있었다. 최근의 연승으로 마음이 느슨해진 상태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원리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성기사단장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느긋하게 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복합적인 이유겠지만, 태양 교단은 생각 이상으로 허를 찔린 모습을 보였다.

"놈들이 독을 쓴다!"

"사제님! 사제님을!"

진중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다 보니 오르고 투탄을 지키고 있던 자들의 배치에도 변화가 있었다. 서로 뭔가를 논의하더니 일부가 적습에 대응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좋아. 아달릭. 우리도 나서자."

"아직 성기사가 많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더 이상 못 기다려. 고블린 놈들이 힘내주곤 있지만, 태양 교단이 혼란을 극복하면 순식간에 밀려날 거다."

고블린이 태양 교단을 상대로 재미를 볼 수 있는 건, 기습이나 게릴라전 같은 경우다. 정면승부라면 덩치나 장비빨에서 상대가 안 된다.

"오르고 투탄만 풀어놓으면 블라르 백작의 군대도 호응하기로 했다.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알겠습니다. 주인이시여. 제가 목숨을 바쳐 돕겠습니다."

아달릭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우리는 오르고 투탄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자 초조한 표정으로 드래곤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막아섰다.

"멈추십시오. 무슨 용무입니까? 참회자 아달릭."

막아서는 성기사들의 눈빛이 흉흉하다. 그러자 아달릭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명령을 받고 왔소. 전투로 인해 드래곤이 흥분할 수 있으니 성력으로 진정시키라 하셨소."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습니까?"

"서부 추기경 각하시오. 감히 그분의 명에 토를 달겠다는 거요?"

전가의 보도인 서부 추기경을 꺼내자 막아선 자들이 주춤거렸다. 게다가 아달릭의 명분은 문제 삼을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참회자라 불리는 죄인의 신분 때문인지, 아니면 성기사단장에 무언가 들은 게 있는지 그들은 쉽게 입구를 열지 않았다.

"드래곤은 우리가 완벽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참회자께선 그냥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에 아달릭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내 비록 참회자가 됐으나 그대들을 통솔하던 교구장이다! 더 이상 주제넘는 소리는 듣지 않겠다! 서부 추기경 각하의 명을 받고 온 건데 진정 막아서겠다는 건가!"

"크음! 성기사단장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자네는 교단의 위계와 질서를 무시하려는 건가! 그리고 비록 참회자이긴 하자 내 성력은 아버지 태양신께서 이 비천한 자를 버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버럭 소리를 지른 아달릭이 신성력을 일으켰다. 역시 한 지역의 교구장 정도 갔던 자라 그 힘이 중후했다. 성기사들도 그걸 느끼고는 움찔하며 물러났다.

'사실 시스템을 다루는 법에 불과하지만···.'

태양신의 본질을 파악한 자는 저 힘이 신앙과는 상관없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런 자는 극소수. 교단의 대부분은 저 신성력을 보며 아달릭을 다시 보게 됐다.

"교구장님을 그만 막게나. 지금은 우리끼리 다툴 때가 아니야."

"맞아. 저 빛을 보니 아버지께서 교구장님을 아직 버리신 게 아니로군."

"비록 참회자이나 다시 쓰시려는 거겠지."

다른 성기사들이 만류하고 나서자, 제일 앞에서 막아섰던 자가 갈등하는 표정이 됐다. 그가 보기에도 아달릭이 뿜어내는 신성한 빛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례를 용서하시지요. 추기경 각하의 명을 수행하는데 협조하겠습니다."

성기사들이 물러나자 나와 아달릭은 오르고 투탄에게로 향할 수 있었다.

'아달릭 녀석 아주 제법이구나.'

흡족해하며 걷는데 누군가 나를 제지해왔다.

"잠시만요!"

맑은 음성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웬 수녀 하나가 날 보며 살짝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형제님께선 누구신가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수녀는 나를 지적하며 물어왔다. 그러자 주변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렸다. 다행히 상급 변신 덕에 내 정체를 간파하는 이는 아직 없었다.

"그는 지부에서 날 돕기 위해 온 데르암 수사요. 됐소?"

아달릭이 대신 답을 해줬다. 좋은 판단이다. 내가 어설프게 입을 놀리는 것보단 아달릭이 말하는 게 훨씬 나았다.

하지만 상대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이상하군요? 저는 본부의 행정을 총괄하는 칼렌 대주교님의 비서입니다. 이번에 지부에서 오신 분들은 여비 문제 때문에 한 분도 빠짐없이 대주교님을 만났습니다. 저 역시 모든 분을 옆에서 봤고요. 거기에 저 데르암이란 수사는 없었어요."

그 지적에 아달릭은 잠시 주춤하다가 입을 열었다.

"데르암 수사는 이번 원정 때문에 온 자가 아니오. 불초하게도 이 참회자 때문이지. 아까 날 돕기 위해 왔다고 했지만, 사실 감시하고 감독하기 위한 직분을 갖고 있소. 그는 비밀스러운 감찰관이니 자매께서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오."

꽤나 능숙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상대가 독종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무언가 제 마음에 걸리는군요. 신분을 증명할 패나 성력을 일으켜서 보여주실 수 있으실까요? 지금은 전시랍니다. 감찰관이라고 뭐든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태양 교단에서 신성력은 가장 직관적이고 확실한 증명이다. 아달릭이 그랬듯 나도 신성력을 보이면 의혹을 넘길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태양신의 힘을 다룰 수 있을 리가 있나. 새벽의 손길 같은 치유력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건 이들에게 이질적인 힘이다.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좀 쉽게 가나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군.'

주변에 있던 성기사들은 무기를 이쪽으로 겨눈 상태였다. 아달릭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지만, 이미 망했다.

"데르암 수사님, 신성력을 보여주시지요. 간단한 거라도 좋습니다."

아까 아달릭을 막아섰던 성기사가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의혹을 해소할 테니까."

그리고 신실한 자가 으레 취하는 것처럼 양손을 공손히 앞으로 내밀었다. 옆에 있던 아달릭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쓰려는 건 신성력이 아니었다.

정중하게 모은 두 손에서 붉은 달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블러드문이여!"

붉은 달이 하늘로 떠오르자 가공한 힘을 내게 부여하기 시작했다.

구우우우웅!

반면 주변에 있던 성기사들은 갑작스러운 과부하를 느끼고는 흔들렸다.

일부는 피를 토하고 한쪽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블러드문 아래서 생명체는 몹시도 괴로운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었다.

"선수필승이다! 이 새끼들아!"

나는 그런 그들이 제대로 추스르고 반격하기 전에 힘을 일으켰다.

"대규모 에너지 드레인!"

사방에 있던 성기사들의 생명력이 실처럼 뽑혀서 내게 흘러들어왔다. 산 채로 생명이 뜯겨나가는 고통에 성기사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사실 성기사들이란 이리 쉽게 제압할 수 없는 놈들이지만,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기술인 하나인 블러드문과 대규모 에너지 드레인을 연이어 발동한 덕을 봤다.

"크아아···!"

"크윽! 아아아아!"

삽시간에 주변에 있던 십여 명의 성기사들이 기력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일부는 견디지 못하고 죽은 듯 미동도 없었다.

근처에 있던 자들 중에는 내게 의혹을 제기했던 수녀만이 멀쩡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적시에 신성한 푸른 방어막을 전개해 버티는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얼굴로 몸을 파르르 떠는 게 애처로운 꼴이었다. 어떻게든 막아내긴 했지만 그걸로 기력을 다한 듯 얼굴도 창백해져 있었다.

나는 그런 수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뾰족한 뱀파이어의 손톱으로 그녀가 만든 방어막을 살짝 내리그었다. 그러자 얇게나마 버티고 있던 방어막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파편을 남기며 부서졌다.

"으읏!"

블러드문의 힘에 노출된 수녀가 비틀거리며 쓰러지려는 그때, 목을 잡아서 들었다. 그리고 가까이 가져와 눈을 마주했다.

"누구냐고 물었지?"

"끄으··· 끄으윽!"

공포에 질린 수녀가 발버둥치며 시선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허락하지 않고 눈동자를 마주친 채 말해줬다.

"나는 소렌 다켄발트다. 기억해 두라고. 너희 태양 교단의 멸망을 부를 이름이니까."

< 교단 최강의 검(6) >

내 말에 수녀의 얼굴에 혐오가 떠올랐다.

"소렌···! 그 악귀가···!"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저런 감정이 일어나려면, 대체 나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걸까?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우둑!

나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수녀의 목뼈가 부러져 버렸다.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억해 달라고 했는데 소용없게 됐잖아."

머리가 덜렁거리는 수녀의 시체를 옆으로 내던지고는, 막 에너지 드레인을 이겨내고 일어나려던 성기사의 머리를 박살 내줬다.

퍼억!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서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이름 모를 자지만 꽤나 훌륭한 남자였다.

"아달릭. 서두른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묶여 있는 오르고 투탄 앞에 섰다. 오르고 투탄은 호기심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아단의 조카여! 이 몸을 구출하러 온 것··· 크르릉!"

오르고 투탄은 말을 다 하지도 못했다. 벌린 입에 내가 웜루트를 던져넣었기 때문. 그리고는 재빨리 마법주머니에서 아단 삼촌의 유품인 검은 해골 지팡이를 꺼냈다.

최고의 흑마법사를 위해 만들어진 이 물건은, 나 같은 수준 낮은 주문사용자의 능력을 뻥튀기 시켜주는 힘을 가졌다. 나는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약초의 광기여, 드래곤의 혈관에 깃들어라. 숲의 짐승아, 지혜를 버리고 본능에 몸을 맡기라. 이제 광기의 씨앗이 심장에 뿌리내릴 테니!"

오르고 투탄은 뭔가 불길함을 느낀 듯 몸부림쳤다.

"이 빌어먹을!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 것이냐! 감히! 이 무도한! 크워어어어!"

오르고 투탄은 몸부림을 치려고 했다. 머리를 격하게 흔들던 놈은 어느 순간 의식이 끊어지듯 쓰러졌다. 묶인 사슬 때문에 얼마 들지도 못한 머리가 그대로 땅에 쳐박힌다.

콰아앙!

드래곤의 턱이 땅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곧, 그 먼지를 뚫고 광기 어린 안광이 반짝였다.

"우르르르! 크와아아아!"

섬뜩한 그 노란 눈동자의 주인은 오르고 투탄이었다. 광증과 함께 다시 깨어난 것이다.

'완전히 돌아버린 눈빛이군. 제대로 먹혔구나!'

곧 오르고 투탄은 포효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우두두둑! 콰앙!

놈을 고정하던 사슬 몇 개가 끊어지며 불꽃을 튀겼다. 광기로 인해 힘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탓이다.

하지만 여전히 오르고 투탄은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이래서는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구속을 푸는 데 힘을 다 쓸 것 같았다.

"아달릭! 놈의 구속을 풀어줘라! 나는 그동안 저것들을 막겠다!"

이미 주변에서 이상을 눈치채고 태양 교단 놈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사슬을 고정하고 있는 건 태양 교단의 봉인 마법. 나보단 아달릭이 훨씬 잘 풀 수 있을 터였다. 아달릭이 주문을 외우는 사이 몰려온 성기사, 전투수도승, 종복 등과 전투가 시작됐다.

"뱀파이어다! 놈을 처단하라!"

태양 교단은 기세 좋게 몰려왔지만, 블러드문의 범위에 들어서자마자 비명을 질러댔다.

"크아아악! 사악한 힘이!"

"불길한 달이다!"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땅바닥에 뒹구는 자도 여럿이었다. 그러자 태양 교단 놈들도 경각심을 갖고 대응하기 시작했다.

"힘을 결집해 저 삿된 달을 물리칩시다!"

"빛을 모으면 될 것 같습니다."

놈들이 신성력을 집중하자 블러드문에 타격이 들어왔다. 엄청난 위력 때문에 가뜩이나 지속 시간이 짧은 블러드문이다. 적의 방해까지 들어오자 결국 금세 소진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카앙!

허공에 떠 있던 핏빛 달이 깨어지며 빛나는 파편이 사방에 꽃잎처럼 흩날렸다. 그 빛무리 속에서 태양 교단 놈들이 무기를 꼬나들고 달려들어왔다.

"악을 정화하라!"

"태양신의 이름으로!"

"크워어어어!"

덩치 큰 성기사들이 내게 달려들던 그 순간, 나는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쌔애애앵!

동시에 날카로운 파공음이 일었고, 달려오던 성기사 셋의 머리가 일제히 터져나갔다.

피가 솟구치며 머리를 잃어버린 육체 세 구가 그대로 바닥으로 굴렀다.

놈들을 저렇게 만든 건 바로 쇠사슬. 드래곤의 몸에 묶여 있던 게 풀리며 엄청난 속도로 채찍처럼 휘둘러진 탓이다.

나는 등 뒤에서 날아오는 사슬을 느끼고 바로 숙였지만, 돌격해 오던 성기사들은 그 속도에 반응하지 못했다. 지켜보던 자들이 비명을 터뜨렸다.

"조심하시오!"

"피해라! 위험하다!"

연이어 끊기거나 풀리는 사슬은 놈들에게 큰 문제를 일으켰다. 굵직한 쇠사슬 줄에 맞았다가는 정말 뼈도 못 추린다. 이러니 기세 좋게 달려들던 놈들은 주춤거렸다. 나는 그런 놈들에게 케일런의 그림자로 일으킨 섀도우 블레이드란 기술을 사용했다.

이것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그림자 단검 수십 개를 뿌리는 기술이다. 시커먼 그림자 칼날이 날아들자 태양 교단 놈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크아아아악!"

"끄악! 끄아아아!"

여럿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지만, 새롭게 몰려드는 놈들이 더 많았다. 선전했음에도 어느새 주변은 태양 교단으로 가득해졌다.

"저놈부터! 처리하시오!"

"힘을 집중합시다! 형제님들!"

"빛의 힘이여!"

아무리 나라도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태양 교단 놈들에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는 위험하겠는 걸.'

나는 아달릭에게 서두르라 소리를 빽 지르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내 근처에 있던 사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굵직한 사슬 줄을 지면에 고정한 부분이 빠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 사슬을 잡았다.

수많은 태양 교단 놈들이 달려들려던 그 찰나, 사슬이 뽑히며 나도 그대로 딸려갔다.

부우우웅!

사슬의 힘으로 하늘 위로 높게 던져진 나는 공중에서 회전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주변이 온통 전투로 난장판이었다. 나는 그대로 추락해 드래곤의 등 위에 올라탔다.

"아달릭! 이 정도면 됐다! 너도 올라와라!"

이미 드래곤은 해방되기 직전이었고, 아달릭은 직장 동료들에게 쫓기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저 배신자를 처단하라!"

"참회자 아달릭! 죽음으로 속죄하라!"

도망 다니던 아달릭은 아직 남아있는 사슬을 타고 드래곤의 몸통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뒤쫓는 자들이 있었지만 내가 검은 해골 지팡이로 도움을 줬다.

"괴사의 광선!"

섬뜩한 광선이 쏘아지자 아달릭을 쫓던 자들은 살이 썩어들어가며 쓰러졌다. 지켜보던 자들은 사악한 힘이라며 격분했다.

하지만 이미 사태를 어쩌기엔 늦었다. 아달릭이 내 근처까지 왔을 때, 상당한 자유를 얻은 오르고 투탄이 상체를 들어 올렸다.

"큭!"

놀이기구라도 탄 것처럼 급격하게 몸이 뒤로 쏠렸다. 나는 오르고 투탄의 등에 난 가시를 붙잡고 버텼다.

후우우우웁!

공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거대한 소음이 일어났다. 듣자마자 드래곤 브레스임을 직감했다. 그와 함께 엄청난 불길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화르르르르!

분노한 드래곤이 고개를 돌리며 사방에 불길을 쏟아냈다.

일대가 삽시간에 환해졌다. 또한 엄청난 열기가 느껴져 망토로 서둘러 몸을 가려야 했다.

개미 떼처럼 몰려왔던 태양 교단 놈들이 불길을 뒤집어쓰고는 비명을 질러댔다.

"끄아아아아!"

"카아아아! 아아악!"

수십 명의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 가는 모습은 가히 지옥도였다. 온몸에 불이 붙은 자들 사방으로 뛰어댔다. 하지만 그들은 몇 미터도 가지 못하고 땅바닥에 뒹굴며 괴로워하다가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크게 몸을 일으킨 탓에 남은 사슬이 다 풀렸고, 분노로 돌아버린 드래곤이 마구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쿼어어어어어!"

지금 오르고 투탄의 머리는 광기와 분노뿐이었다. 굴욕을 되갚겠다는 듯 보이는 건 모두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세상에 미친 드래곤을 막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황소 한 마리가 날뛸 때도 무서운데, 드래곤이라? 이건 재앙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몰려왔던 태양 교단이 오르고 투탄에게 완전히 개박살나고 있었다.

콰아아앙!

드래곤의 꼬리치기 한 방에 막사가 우르르 무너지며 사람들이 허공으로 장난감처럼 날아갔다.

드래곤의 앞발이 주변을 내리찍자 성기사들조차 피떡이 되어 터져나갔다.

성기사단장이 오지 않는 한 이 재앙은 결코 멈추지 않을 터였다.

'전황이 유리하다!'

태양 교단은 난장판이 되고 있었다. 가뜩이나 야간 기습을 허용해 흔들리고 있었던 놈들이다. 한데 내부에서 드래곤이 날뛰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변하는 중이다.

이 틈을 노리고 내가 데려온 고블린, 코볼트, 스킨크들도 활약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놈들이 싸움보다는 약탈에 정신이 나갔다는 것.

'역시 도적놈들 근본은 어쩔 수 없구만.'

특히 고블린들은 물자를 노획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화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근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블라르 백작의 군대가 호응해 왔기 때문이다.

부우우우웅!

묵직한 뿔나팔 소리와 함께 요새의 성문이 열리더니, 블라르 백작의 군대가 성난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복수의 시간이다!"

"놈들의 피를 맛보자!"

블라르 백작 밑에서 일하는 뱀파이어 장교들이 각종 언데드로 이뤄진 군대를 이끌고 쇄도해 왔다.

태양 교단은 그 기세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 *

전투는 완승이었다.

태양 교단이 패주한 것이다.

오르고 투탄은 한창 날뛰다가 도중에 정신을 차리고 숲으로 도망가 버렸다.

웜루트는 편리하지만 드래곤을 상대로 약효가 오래가지 못했다. 놈들은 거대한 덩치와 타고난 저항력 때문에 뭐든 빨리 떨쳐낼 수 있었으니까.

'차라리 잘됐지.'

오르고 투탄이 끝까지 발광했으면 응원을 온 블라르 백작의 군대마저 깔렸을 테니까.

"소렌 다켄발트!"

군을 이끌고 튀어나온 블라르 백작이 날 찾아왔다. 그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고, 날 보자마자 팔을 꽉 잡아왔다.

"고맙다! 그대의 공이다!"

블라르 백작은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하나 남은 눈동자는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추격을 제안했다.

"태양 교단을 밀어내긴 했지만 도주한 자들이 많습니다. 추격해서 섬멸해야 합니다."

내 제안에 블라르 백작은 신중한 얼굴이 됐다.

"음··· 무리하게 추격전을 벌이는 것보다 협상하는 게 낫지 않겠나? 적이 큰 타격을 입은 건 사실이네. 이전과 다르게 협상의 여지가 생겼지."

블라르 백작은 전투를 피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유를 눈치채고는 물었다.

"성기사단장 때문입니까?"

블라르 백작은 순순히 끄덕였다.

"맞아. 추격전을 하면 필시 마주칠 수밖에 없겠지. 자네의 계책에 잠시 자리를 비웠지만,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올 테니."

"두려우십니까?"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피하는 게 좋은 법이야. 차라리 두려우면 낫겠군."

무슨 소리인가 하니, 블라르 백작은 그냥 맘 같아서는 성기사단장과 싸우다 죽고 싶다고 했다.

"···나는 피곤하고 지쳤네. 그냥 꼬라박고 뒤졌으면 좋겠군. 적어도 비겁자라고 손가락질당하진 않을 테니."

그의 말을 듣고 하코의 눈물이 남긴 후유증이 생각보다 깊은 걸 알 수 있었다. 그냥 포기하고 죽겠다는 게 전형적인 우울증 증세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백작님. 그래선 안 됩니다."

"···알고 있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날 믿고 따르는 이가 아직 많으니 함부로 처신할 수는 없지."

왜 블라르 백작이 성기사단장과 싸우는 걸 꺼리나 했더니, 자살과도 같은 선택을 할 걸 우려한 탓이었군.

하지만 성기사단장을 상대할 방법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백작님, 성기사단장을 이길 수 있습니다."

"뭔가 대책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품에서 작은 석판을 꺼내서 보여줬다. 그리고 카라즈라의 성소에 다녀왔다는 말을 했다.

"정말인가? 거길?"

"네, 이 석판도 거기서 얻은 겁니다."

물론 본체를 만났다거나 태양신을 죽인다거나 하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성소에서 석판을 얻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성기사단장을 쓰러뜨리길 원했고, 이걸 받게 된 겁니다."

"그 석판이 가진 효용이 무엇인가?"

"따로 듣진 못했습니다. 석판을 부러뜨리면 발동한다는군요."

"내가 한번 살펴봐도 되겠나?"

"여깄습니다."

블라르 백작은 석판을 이리저리 보더니 금방 알아냈다. 과연 안목과 쌓아온 지식이 남달랐다.

"귀중한 물건이로군. 빛 속성 무효의 석판이야."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석판을 발동하면 빛과 관련된 힘이 완벽히 무력화된다고 했다. 성기사가 뱀파이어를 상대로 가지는 상성의 우위가 상쇄되는 것이다.

"그러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 아닙니까?"

상성 문제만 해결되면 블라르 백작이 성기사단장보다 더 강하다. 괜히 지상최강의 뱀파이어라 불리는 게 아니니까. 한데 블라르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본래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지난 사건의 후유증이 심해서 장담할 수 없네. 게다가 성기사단장의 힘은 예상을 상회하고 있어. 그래도···."

잠시 입을 닫고 있던 블라르 백작은 날 쳐다보며 물어왔다.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 그러니 묻고 싶군."

"말씀하십시오."

"소렌 다켄발트, 성기사단장을 사냥하기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됐나?"

이번에 성기사단장을 놓치면 언제 잡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최악의 경우 그 미친 괴물이 일곱 봉우리로 날 암살하겠다고 잠입할지도 모르고.

당연히 답은 하나였다.

"기꺼이 걸겠습니다. 그놈 머리통을 뽑아야 제가 편히 잘 수 있거든요."

< 교단 최강의 검(7) >

***

"속았군···."

성기사단장은 쓰러뜨린 소렌 다켄발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소렌이라 생각했던 존재는 변신한 고블린이었고, 칼을 맞고 죽자 본모습이 드러났다.

"보고 드립니다! 포로로 잡혔던 형제들을 모두 구출했습니다! 격살한 적의 수는 총 서른셋입니다."

부관이 구출 작전의 결과를 보고해 왔지만, 성기사단장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유인인가? 이유가 뭐지?'

자꾸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수고했다. 서둘러 본대로 귀환하는 게 좋겠군."

안색이 어두워진 성기사단장의 모습에 부관이 위로를 해왔다.

"본대의 방비는 훌륭합니다. 너무 심려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겁니다. 단장님."

"흐음······."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연승으로 경계심이 다소 풀어진 게 걸리긴 했지만, 각종 방비는 착실했다.

뾰족한 말뚝이나 목책, 경계 초소 등 다양한 대비를 해놓았다.

밖에서 때리는 공격에는 굳건히 버틸 수 있을 터. 성기사단장이 포로를 구출하러 나온 것도 나름대로 대비가 충실했기 때문이다.

'블라르 백작이 출전한다고 해도 문제없을 테고···.'

각종 성유물과 사제들이 잔뜩 준비돼 있다. 성기사단장이 없다고 해도 블라르 백작을 막아내긴 충분했다.

'아니, 약해진 블라르 백작이라면 토벌해 버릴 수도 있겠지.'

블라르 백작도 그걸 알고 요새에 틀어박혀 버린 게 아니겠는가? 그 악명 높은 뱀파이어도 지금은 두려운 적이 아니었다.

성기사단장은 주변을 정리 중인 부하들을 보며 본대가 무너질 수 있는 최악의 경우가 뭔지 생각해봤다.

'신성력으로 우위를 점할 수 없는 적이 내부에서부터 날뛰는 경우 정도겠군···.'

그런 일이 벌어질 확률은 극히 낮았다. 블라르 백작의 지원군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오크 대족장은 출병을 지지부진하게 끌었고, 포레스트 드래곤 오르고 투탄은 붙잡혀 포로가 됐다. 일곱 봉우리의 군대와는 아직 거리가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뭘 노리고 이런 짓을 한 거지···?'

그때 성기사단장이 가지고 있는 통신용 수정구가 진동했다. 담대한 성기사단장도 그 순간은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이윽고 수정구를 연결하자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고 드립니다! 본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적습입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이어진 설명에 성기사단장은 입이 쩍 벌어졌다.

-드래곤이 풀려나서 날뛰었다? 그리고 그때를 맞춰 적이 몰려왔고? 뭐, 고블린이라!

성기사단장은 어질어질한 기분이 됐다. 그제야 모든 게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안일했다! 연승으로 나 역시 적을 얕보고 있었구나!'

이렇게 밖으로 유인당한 뒤, 본대가 털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적의 수괴가 누구라 하는가?

-들리는 얘기로는 소렌 다켄발트라고 합니다.

-크으윽! 이 빌어먹을!

구원을 가고 싶어도 거리가 문제였다. 본대가 있는 곳까진 하루반이 꼬박 걸린다. 서둘러 돌아가도 이미 승패가 결정 나 있을 상황. 성기사단장은 암담함에 젖어들어갔다.

-최대한 신속하게 복귀하겠다. 계속 상황을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통신을 끊은 뒤 성기사단장은 고민에 빠졌다.

'구출한 포로를 돌볼 인원만 남겨둔 채, 말을 타고 빠르게 복귀하면 돌아가는 시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을 터···.'

어둠의 숲은 나무가 빽빽하고 말을 타는데 제약이 많아 생각보다 속도를 낼 수 없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평지랑 다르게 말을 타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큰일이군. 그래도 늦어.'

이미 본대가 무너지고 있는 중이라 했다. 지금 당장 전장에 합류하지 못하면 흐름을 바꿀 수 없을 터. 아까 보고에서 듣자니, 블라르 백작의 군대까지 요새에서 쏟아져 나오는 중이라 했다.

"크윽···!"

한순간의 실수로 공들인 일이 엉망이 됐다.

'여기까지 잘해왔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이야.'

아무리 성기사단장이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 성품이라고 해도 지금만큼은 수염이 파르르 떨릴 수밖에 없었다.

"소렌···, 소렌 다켄발트!"

성기사단장은 적의 이름을 읊조리며 이마를 짚었다. 미혹의 산에서 태양 교단의 군세를 전멸시켰다고 했을 때부터 최고 수준으로 대비했어야했다.

'안일하게 여기서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니.'

성기사단장은 자신이 승리와 공명심에 잠시 눈이 멀었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법. 속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런 그에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괴로우신가 보군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성기사단장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는 주변에 들리지 않게 작게 답했다.

"감히···! 감히 내 앞에 나타나!"

성기사단장은 서둘러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목소리의 주인공이 근처의 숲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금방 돌아오지."

부관에게 그리 말한 성기사단장은 성큼성큼 숲 안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작은 공터가 나왔고, 그 가운데 인자한 얼굴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벨벳으로 만든 화려한 의복을 입고 섬세한 장신구를 여기저기 꽂았다. 그리고 긴 회색 수염은 이야기 속의 마법사처럼 보였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

노인은 입을 열었으나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빛이 번쩍이며 몸이 반절로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어느새 성기사단장은 성검을 뽑아 든 채 검 끝이 하늘로 향하게 들고 있었다.

둘 사이에 거리는 10미터가 넘었지만 성기사단장에게 무의미했다. 그는 인지하기도 어려운 짧은 순간 이미 적을 베어 버렸던 것이다.

파스스.

노인의 몸이 잿더미로 변하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곧 근처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훌륭한 솜씨입니다. 아무리 인형이라지만 어찌 일격에! 역시 교단이 자랑하는 검이라 하겠군요. 허허허!]

근처의 나무에서 똑같이 생긴 노인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성기사단장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다시 검광이 번쩍였다.

툭.

노인의 머리가 떨어져 땅바닥을 굴렀다. 이번에도 그는 잿더미로 흩어졌다. 하지만 곧 세 번째가 나타났다.

[비싼 인형인데 그렇게 베어대시면 좀 곤란하군요. 껄껄.]

"닥쳐라! 이 사악한 것!"

세 번째 노인 역시 일격이었지만 금세 네 번째가 나타났다. 성기사단장은 더 이상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노인은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이 인형들 하나, 하나가 엘더급에 이르는데 일격이라니. 그 힘에, 이 움베르트 경의를 표합니다.]

노인의 정체는 에인션트 뱀파이어인 '공포의 움베르트'였다. 그 역시 이번 원정을 배후에서 움직인 자다.

"감히! 내 앞에서 뻔뻔하게 모습을 드러내!"

성기사단장은 격분하고 있었다. 그 역시 태양 교단의 내부에서 에인션트 뱀파이어들이 벌이는 협잡질을 알았다.

다만 증거가 부족하고, 누가 연루됐는지 파악하는 건 어려웠다. 섣불리 문제를 터뜨렸다가는 역공을 당할 수도 있는 문제기도 했고. 그렇기에 그는 교단을 좀먹고 있는 에인션트 뱀파이어를 깊이 증오하면서도 어쩌질 못하고 있었다.

[분노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 인형 같은 것 말고 중요한데 쓸 힘이지 않습니까? 아끼시는 게 좋습니다.]

"네놈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기사단장은 더 이상 인형을 벨 생각은 없었다. 분풀이를 위해 성력을 낭비하기 싫었던 것이다. 에인션트 뱀파이어 움베르트는 그런 태도를 읽고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이제야 좀 대화가 가능할 것 같군요. 이 미욱한 늙은이가 한 가지 제안을 갖고 왔습니다.]

"닥쳐라."

성기사단장은 더는 얘기를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몸을 돌리려 했다. 그가 여기까지 온 건 혹시나 본체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한데 이어진 말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이동이 가능한 차원관문을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본대가 위기이니 즉시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라···?"

[어려운 기술이긴 합니다만, 오래 산 덕에 그 정도 재주는 부릴 수 있습니다. 부디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허허허.]

이 세계에서 마법으로 장거리를 단숨에 이동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기술이었다. 극히 일부의 존재만이 할 수 있었는데, 에인션트 뱀파이어 움베르트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건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위기에 빠진 본대를 구하러 갈 수 있다니. 성기사단장도 순간 시험에 드는 걸 느꼈다.

'이 모든 원정이 실패하는 걸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는 상대의 제안을 거절했다.

"너 같은 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일은 없다."

[호오··· 하지만, 거절하신다면 오늘 수많은 교도들이 죽게 될 겁니다.]

그 물음에 성기사단장의 표정이 고통으로 얼룩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되새겼다.

"설령 형제들의 목숨이라고 해도 신앙 앞에 맹세한······ 원칙을 어길 순 없다. 절대로··· 악과 타협하지 않는다."

[무수히 흐를 피를 외면하시겠다는 거군요?]

"나의 믿음은··· 나의 신앙이다. 악과 타협해 그곳에 간다고 한들··· 적을 무찌를 힘이 온전할까?"

성기사단장의 태도에 움베르트는 감탄했다. 그가 아는 태양 교단의 내통자들은 태양 교단의 시스템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정말로 신앙으로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었다.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서 저렇게 강한 건지도 몰랐다.

[놀랍군요. 알겠습니다.]

여태 성기사단장을 구슬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온 움베르트다. 쉽게 될 거라 여기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곧 제 힘이 필요할 때가 올 겁니다. 당신께 경의를 담아 선물을 하나 남겨놓고 가지요.]

"썩 꺼져라!"

성기사단장은 더 대화하기 싫다는 듯 돌아섰지만,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단호한 태도와 다르게 지금도 위기를 겪고 있을 본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패주하고 있는 태양 교단을 향한 추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선발은 기병들이었다.

블라르 백작에겐 열다섯의 데스나이트가 있었고, 그들이 언데드 기병과 좀비 사냥개를 이끌고 맹렬한 기세로 출발했다.

두두두두두!

해골마들의 발굽 소리가 숲에 진동했다. 컹컹거리는 좀비 사냥개들의 소리도 사방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뒤이어 고블린과 코볼트들도 동참했다. 이건 즐거운 사냥이었다. 태양 교단은 어떻게든 어둠의 숲을 빠져나가려 할 테고, 우리는 쫓아가며 뒤통수를 때려대면 됐으니까.

"놈들이 심한 혼란에 빠져 좀처럼 뭉치지 못하고 있다는군. 사냥하기 더욱 쉬워졌어."

나와 나란히 말을 타고 가는 중인 블라르 백작이 까마귀가 가져온 소식을 듣더니 알려줬다.

우리는 함께 태양 교단을 쫓고 있었다. 주위에는 뱀파이어 기병 삼십여 명이 호위로 붙었다. 그들은 좀비 사냥개보다 더 크고 강한 좀비 늑대를 여럿 데리고 있었다.

"다행이군요.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성기사단장이지요. 단장의 성격상 최후미에서 아군을 지키려 할 겁니다."

"맞는 말이야. 하루나 이틀 뒤면 마주하게 될 걸세."

블라르 백작은 패주하는 태양 교단을 사냥하는 일은 부하들에게 맡겼다. 그는 나와 함께 성기사단장을 쓰러뜨리는데 전력을 다할 예정이었다.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는 성기사단장의 목이 꼭 필요했다.

"카라즈라가 준 석판은 결정적인 순간까지 아끼게."

"알겠습니다."

우리는 작전을 논의하며 말을 타고 나아갔다. 숲 곳곳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불길이 보였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과 나는 그런 싸움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목표를 발견했다.

"보고드립니다! 성기사단장입니다!"

호위인 뱀파이어 기병 하나가 정찰을 나갔다가 돌아와 알려왔다. 잠깐 사이에 녀석은 한쪽 팔이 없어져 있었다. 블라르 백작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상황은?"

"성기사단장이 나타나 아군의 추격대를 습격했습니다. 데스나이트 아르운 경을 비롯해, 삽시간에 아군 수십이 죽었습니다."

"알겠다. 그곳으로 가겠다."

서둘러 말을 달려 가보자 과연 성기사단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오연하게 버티고 있었다. 적의 무리는 이십여 명쯤 됐다. 전원 성기사들이라 막강한 전력이다. 그들 앞에 데스나이트와 언데드 기병들이 죽어서 뒹굴고 있었다.

"블라르 백작!"

성기사단장이 이쪽을 보더니 성난 사자처럼 포효해왔다. 피로 얼룩진 황금빛 머리털을 가진 그는 실제로 사자처럼 보였다.

"내 부하들이 신세를 졌나보군. 이제부터는 이 몸과 얘기하지."

블라르 백작은 여유롭게 그를 향해 해골마를 몰고 갔다. 성기사단장과 부하들은 일순간 긴장한 기색이다. 그 모습에 나는 감탄이 나왔다.

'약해졌다고 해도 블라르 백작은 과연 블라르 백작이군.'

저 정도 무리를 상대로도 전혀 기세가 밀리지 않고 있었다. 수많은 칼끝이 자신을 향하는데도 태도에 여유가 넘쳐났다. 역시 강자의 품격이라 할 만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해골마를 멈춰 세운 블라르 백작이 상대에게 물었다.

"에인션트들에게 휘둘려 출발한 이번 원정은 어땠나? 충분한 보람이 있었냐는 말일세."

성기사단장은 노호성을 터뜨렸다.

"백작! 아무리 네가 어둠의 거물이라고 해도 말을 조심하라!"

하지만 블라르 백작은 유들유들한 태도를 보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참 얄궂은 일이구먼. 태양 교단의 피로 이득을 보는 게 에인션트 뱀파이어들이란 사실이 말이야. 자네들은 대체 누굴 위해 봉사하는 건가?"

"닥쳐라! 더 이상 간악한 혓바닥에 놀아나지 않겠다! 이제 검의 대화만이 있을 뿐이다."

"아쉽군. 좀 더 해줄 얘기가 많았는데. 하면 어쩔 수 없지. 크흐흐."

블라르 백작은 나직하게 웃더니 손바닥을 펴며 외쳤다.

"블러드문이여!"

그와 함께 핏빛 달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성기사단장은 그걸 보자마자 외쳤다.

"힘을 결집해 대항한다! 준비한 파훼법을 수행하라!"

놀랍게도 성기사단장과 부하들은 블러드문에 대한 대책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신성력을 일으키자 강력한 블러드문이 무력화됐다.

"대단하군!"

블라르 백작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했다.

"하지만 자네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네. 블러드문이 꼭 한 개만 뜨란 법은 없다는 걸 말일세."

블라르 백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손바닥을 폈다.

"블러드문이여!"

허공에 두 개의 핏빛 달이 떠올랐다. 단언컨대, 블러드문이란 기술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의 상대에겐 꽤나 운이 안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성기사들의 신성력이 밀려나며, 주변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며 뱀파이어의 영역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니까.

"블러드문이 두 개!"

"저자는 대체 누구냐!"

< 교단 최강의 검(8) >

확실히 블러드문 두 개는 사기였다. 성기사들의 결속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의 대비가 부족하진 않았다. 실제로 블라르 백작의 절기라 할 수 있는 블러드문을 효과적으로 파훼했으니까. 그저, 그게 두 개일 줄은 상상도 못 했을 뿐이다.

"크으으윽!"

"이런! 카아악!"

성기사들이 블러드문의 힘에 짓눌려 휘청이기 시작했다. 원조에 비해 다소 부족해도 내 블러드문도 제법 매서웠다. 그리고 백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쳐라!"

그의 명령에 해골마를 탄 뱀파이어 기병들이 일제히 돌격했다. 성기사들은 말을 타지 않은 상태라 이 돌격에 속수무책이었다.

가뜩이나 블러드문의 여파로 비실거리고 있는데, 마갑까지 갖춘 육중한 기병대가 부딪쳐 오는 상황이다. 성기사들은 차에 치이는 것처럼 우르르 넘어졌다.

"크악!"

"끄으으윽!"

이런 와중에도 뱀파이어 기병을 해골마에서 끌어내리고 반격까지 하는 대단한 자들도 있었지만, 소수였다. 전투는 이쪽이 기선을 제압하고 들어갔다.

'이대로 성기사단장만 처리한다면···!'

한데 그때 성기사단장과 눈이 마주쳤다. 소름 돋게도 그는 날 노려보고 있었던 것.

'위험하다!'

성기사단장이 무슨 동작을 취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직감이 경고를 해왔다. 나는 뭔가 더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케일런의 그림자로 보호막을 만들었다.

그와 함께 가공할 충격이 덮쳐왔다.

카아앙!

빼어난 방어력을 자랑하는 그림자 보호막이 단번에 깨지더니 나는 그대로 튕겨 나갔다. 마치 거인이 발로 걷어찬 것처럼 날아갔다.

"크아악!"

쾅! 우지끈!

굵직한 나무 몇 개를 부러뜨리고야 멈췄는데, 무슨 공격이 날아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죽을 뻔했다···.'

땅바닥에 구르고 나서야 방금 얼마나 위험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만약 신체개조 4단계 '강화된 감각'이 없었다면 삽시간에 목숨을 잃었을 터. 소름이 쫙 돋았다.

'성기사단장이 무슨 공격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이미 격전으로 난장판이었다. 내가 타고 있던 해골마는 어느새 반으로 갈라진 상태.

"크윽···."

애써 몸을 일으키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블라르 백작이 아니라 나부터 벤다고? 아무래도 유인 작전으로 물 먹인 것 때문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모양이네.

심지어 혼란의 와중에도, 저 멀리 있는 성기사단장이 내게 소리쳐왔다.

"소렌! 네놈이 소렌 다켄발트구나!"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그 기세가 대단히 살벌했다. 완전히 잘못걸렸다. 성기사단장은 이쪽까지 돌격해 오려 했으나 블라르 백작이 적시에 막아섰다.

콰아앙! 번쩍!

블라르 백작의 어둠과 성기사단장의 빛이 서로 어지럽게 격돌했다. 한 번 충돌할 때마다 발생한 충격파에 주변의 나무들이 수십 그루씩 쓰러지고 있었다.

'싸움의 규격 자체가 다르군!'

오죽하면, 주변에서 부모의 원수를 눈앞에 둔 것처럼 싸우던 성기사와 뱀파이어들도 식겁해서는 물러나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두 거물이 싸우는 여파에 휘말려 비명횡사하기 십상이었다.

"비켜라! 백작!"

성기사단장이 성난 사자와 같은 기세로 외쳤다. 저게 말하는 바는 명확했기에 듣는 입장에선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떻게든 내 목을 따겠다는 의지가 충만해 보였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을 떨쳐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결국 성기사단장은 귀중한 성검의 힘을 사용했다.

번쩍!

성검이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블라르 백작은 망토로 얼굴을 가리고 물러났고, 근처에 있던 뱀파이어 십여 명이 말려들어 소멸해버렸다.

'성광 폭파군!'

성기사단장이 쓰는 성검에 대해 잘 알았기에 무슨 기술인지는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대단히 강력한 능력인데, 다행히 하루에 한 번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블라르 백작을 물러나게 한 것만으로 충분한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잠시간의 틈을 번 성기사단장을 곧장 거인으로 변신했다. 이전에 오르고 투탄을 두들겨 팰 때 보여줬던 그 기술이다.

"크워어어어!"

거대해진 성기사단장을 보자 눈앞에서 갑자기 건물이 솟아오른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 건물 같은 놈이 내게 상당히 불만이 많다는 거다.

"소렌 다켄발트!"

거인화의 탓인지 굉장히 허스키해진 목소리로 성기사단장이 날 부르더니 돌격해왔다.

"이, 이런 시팔!"

당연히 몸을 돌려 달아났다. 저런 괴물과 싸우는 건 자살행위다. 덤프트럭에 정면으로 돌격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다행히 내 다리는 무지하게 빨랐다. 숲을 빠르게 가로지르자 뒤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따라왔다.

쿵! 쿠웅! 쿠웅!

괴물이 날 다진 마늘처럼 만들기 위해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줄행랑을 치면서도 가슴팍을 손으로 더듬었다. 혹여나 준비해온 석판을 어디 흘렸을까 싶어서다.

만약 그랬다면 내 인생은 파멸이었겠지만, 다행히 석판은 제자리에 있었다. 덕분에 자신감이 생겨서 뒤를 보고는 소리쳤다.

"선물로 보낸 인질은 마음에 들었나!"

유인작전에 말려들었던 성기사단장을 향한 조롱이었다. 당연히 화끈한 대답이 돌아왔다.

쑤우웅!

무언가 기둥 같은 게 내 근처를 스치고 지나가 대지에 요란하게 꽂혔다.

콰아아앙!

무슨 미사일이 떨어진 줄 알았다. 놀라서 보니 성기사단장 놈이 거대한 고목을 집어던졌던 것. 주변이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난장판으로 변했다.

"저, 저! 무식한 놈!"

종교에 심취하면 무식해진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소렌 다켄발트! 쥐새끼 같구나! 계속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나!"

성기사단장은 주변의 숲을 박살내며 쇄도해왔다. 그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내 다리가 빠르다지만 더 도망치는 건 무리였다.

'그래도 괜찮다.'

내겐 비장의 수단이 있었으니까. 마침 도망가기도 어려운 지형에 도착한 나는 멈춰서 몸을 돌렸다. 그러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날 붙잡기 위해 뻗어오는 성기사단장의 거대한 손이었다.

그림자처럼 꺼지며 간발의 차로 그걸 피한 나는 품에서 카라즈라에게 받은 석판을 꺼냈다. 그리고 단번에 부러뜨렸다.

"언데드의 어머니시여!"

섬기지도 않는 존재지만 지금만큼은 그리 간절할 수가 없었다.

우우웅!

빛 속성 무효의 석판은 제대로 작동했다. 거대한 반구형의 검은 장막이 일대에 생겨났던 것.

"됐군."

이제 이 안에서 빛 속성은 무효화되며, 성기사 같은 존재는 탈출할 수 없다. 석판을 발동한 날 죽이거나, 일정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또 무슨 간악한 짓을 한 것이냐!"

성기사단장이 거대한 주먹을 내질러왔다. 나 같은 건 단숨에 터뜨려 버리겠다는 기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막을 만해서라기 보단, 중간에 끼어든 존재를 봤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폭음이 터졌다. 적시에 나타난 블라르 백작이 성기사단장의 주먹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공중에 떠 있는 블라르 백작은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다른 한 손을 뻗어 성기사단장의 거대한 주먹을 막아냈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백작!"

성기사단장은 힘을 더해 블라르 백작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꼼짝도 안 했다. 이에 성기사단장은 주먹을 살짝 거둔 뒤,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빛이 뭉치기 시작했다.

뱀파이어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신성 마법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신성한 빛은 뭔가 고장난 것처럼 몇 차례 점멸하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이 무슨!"

성기사단장이 당황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빛 속성 무효화의 비석에 대해 알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그가 가진 강력한 수단들이 봉쇄된 것이다.

우리는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됐다. 블라르 백작이 내게 소리쳤다.

"시간을 벌어주게.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기술을 준비할 테니!"

"알겠습니다!"

잠깐 사이 어떤 식으로 성기사단장을 견제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저 거대한 놈과 직접 드잡이질을 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결국 블러드문 같이 능력을 발동해 상대를 약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블러드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블러드문은 대단한 기술이긴 하지만 광역기였고, 그 때문에 단일 타켓에 대한 집중도가 약했다. 성기사단장 같이 규격 외의 강자라면 애매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대책은 있었다. 바로 신체 개조 7단계인 '음 에너지 숙달'이다.

엘더급으로 승급한 뒤 음 에너지를 다룰 수 있게 됐다. 음 에너지란 것은 다방면으로 활용할 수 있는데, 생명체에게 주입하면 쇠약해지거나 죽음에 이른다.

'음 에너지를 집중하면 단일 타켓에 대해선 블러드문보다 낫다.'

나는 즉각 음 에너지를 끌어냈다. 그리고 그걸로 부족하다고 생각해 핏빛 새벽의 여신에게 기원했다. 한 달에 한 번 사용하는 소원권을 쓴 것이다.

'음 에너지의 힘을 증폭시켜 주십시오.'

충분히 가능한 소원이었기에 낙인이 붉게 빛났다. 나는 음 에너지를 일으켜 성기사단장에서 퍼부었다. 음 에너지란 생명력의 상극. 갑자기 그걸 뒤집어쓴 성기사단장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터뜨렸다.

"크으으윽!"

성기사단장이 휘청이며 급기야 한쪽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쿠우웅!

그는 즉각 몸을 회복하려 했지만, 비석의 힘 때문에 신성력이 또다시 방해를 받았다. 평소라면 음 에너지 세례를 어렵지 않게 밀어냈겠지만, 지금은 무방비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크으으윽! 이 간악한 놈들!"

성기사단장은 주먹으로 날 연달아 내리찍어왔다. 여전히 그 공격은 무시무시했으나 음 에너지 때문에 둔해져 있었다. 그래서 간발의 차이로 계속 피해내는 게 가능했다.

'어쨌든 시간 벌기는 확실하군.'

블라르 백작이 큰 걸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성기사단장은 내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음 에너지를 쏟아내는 날 막아야 기운을 되찾고 블라르 백작을 저지할 수 있을 테니까.

날 무시한 채 블라르 백작에게 대적해 봐야 필패다. 성기사단장도 그걸 알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터질 폭탄을 앞에 두고 발버둥 치는 자 같았다.

쿠웅! 콰아아앙! 쾅! 쾅!

성기사단장의 주먹이 지면을 내리칠 때마다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진동이 일어났다. 땅이 흔들리며 먼지가 자욱하다. 그 덕분에 몸을 숨기기 유리해졌다. 성기사단장도 분진 속에서 내 모습이 사라지자 아차 싶었던 모양이지만, 이미 늦었다.

사실 성기사단장쯤 되면 시야가 가린다고 해서 목표를 찾지 못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문제는 내가 언데드라는 것. 언데드는 기본적으로 시체기 때문에 특유의 기척만 죽이고 가만 있으면 그냥 무생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잠깐 더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그 사이 블라르 백작이 준비하던 회심의 기술을 완성했다.

"오라! 공허여!"

백작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하지만 민감한 내게는 그 외침이 살짝 갈라지고 떨리는 게 느껴졌다. 후유증에 시달리는 중 최강이라 할 만한 기술을 끌어낸 탓에 블라르 백작도 큰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본래라면 어렵지 않게 쓸 기술을 지금은 이를 악물고 시전한 느낌이다.

'공허 폭발이군. 이거면 성기사단장 놈도 쓰러뜨릴 수 있어.'

공허 폭발이라는 기술은 발동이 어렵지만, 그 위력은 무엇도 비교할 수 없었다.

블라르 백작의 의지에 따라 허공에 검은 점 같은 게 십여 개 정도 생겨났다. 그건 매우 기묘했다. 빛을 완전히 빨아들이는 부자연스러운 검정색이라고 할까?

블라르 백작이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점들이 반응했다. 그것들은 마치 폭발을 일으키는 것처럼 수십 배 크기로 팽창해서는 닿는 모든 걸 삭제해 버렸던 것이다.

분명 폭발이지만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성기사단장의 거체에 십여 개의 공허 폭발이 일어났고, 그것은 상대를 파먹듯 접촉면을 없애버렸다.

"크아아아악!"

몸 여기저기가 원형으로 파인 성기사단장의 거대한 몸이 뒤로 넘어갔다. 10미터나 되는 거인이 쓰러지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아름드리나무가 넘어가는 듯하더니 충돌의 순간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콰아아아아앙!

***

성기사단장은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두 가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패했다는 것과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교단의 원수인 뱀파이어에게··· 이렇게 쓰러질 순 없다···.'

성기사단장의 패배는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교단을 상징하는 검이다. 그리고 패주하는 아군을 지켜야 하는 방패기도 했다. 이 패배로 엄청난 희생이 이어질 터였다.

'절대 안 될 일···.'

성기사단장은 원통함에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공허폭발에 당한 육체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한데 그때 그의 머릿속에 듣기 싫은 목소리가 울렸다.

[생각보다 제 도움이 금방 필요하시겠군요. 어떻습니까? 이 움베르트의 선의를 받아들이는 게?]

성기사단장은 이를 악물었다.

'꺼져라···. 악과 거래하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신념에 움베르트는 찬사를 보냈다.

[대단하시군요. 하지만 인생이란 때때로 타협이 필요한 법입니다. 오늘 당신이 쓰러지면 패주하는 태양 교단의 형제들이 수도 없이 살해당하겠지요. 많은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이었기에 성기사단장은 몹시도 괴로운 마음이 됐다. 그런 그를 향해 공포의 움베르트가 속삭였다.

[이번에도 그 많은 죽음을 외면하실 겁니까? 신념이란 게 그 많은 희생보다 중요한 건지 이 늙은이가 진정 묻고 싶습니다.]

'······닥쳐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 잠깐일 뿐입니다. 이번 한 번만 제 손을 잡으시지요. 아무도 당신을 책하지 않을 겁니다.]

< 교단 최강의 검(9) >

움베르트의 설득은 집요했다.

[힘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그것으로 동료들을 구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십시오.]

'기가 막히군. 사악한 힘으로 정의를 논하다니!'

[힘이란 것 자체에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불길하나, 성스러우나, 결국 한 자루 칼에 불과한 겁니다. 중요한 건, 그걸 휘두르는 자의 의지겠지요. 저는 힘을 드릴 뿐입니다. 단장님께서 그걸 잘 써주신다면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듯한 소리였지만 성기사단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요설이로군. 내게 주겠다는 그 힘을 쌓아 올리는데 얼마나 많은 악행을 벌였는지 알 만하다. 그 악으로 만들어진 힘을 쓰는 건 지금까지 나와 신실한 자들이 해왔던 모든 일에 대한 모독이지 않은가?'

[고집이 지나치시군요.]

'신념이란 그런 것이다. 때때로 불합리하게 보여도 꺾이지 않아야 한다.'

[······.]

움베르트는 더는 상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의 마음은 노여움으로 차갑게 식어갔다.

눈앞의 성기사단장이 건방지고 불쾌하단 생각만 들었다. 마지막 순간이 오면 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무리 신념이 강한 인간이라도 최후의 순간에는 추해지는 법이니까. 인간을 인형처럼 조종하며 온갖 악을 뿌리고 다닌 에인션트 뱀파이어답게, 솔직히 성기사단장을 얕보고 있었다.

긴 세월 동안 성기사단장 같은 인물은 얼마든지 봐왔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거절은 뼈아팠다.

[잘도 말씀하시는군요. 하지만 당신은 제가 준 선물을 버리지 않았지요.]

이전에 대규모 차원관문을 제안했을 때 움베르트는 사악한 징표 하나를 선물이랍시고 건넸다. 올곧은 자라면 바로 내던졌어야 맞았지만 성기사단장은 그러지 않았다. 그의 내면에도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정하겠다. 그것이 내 나약함이었음을.'

하지만 성기사단장은 끝끝내 타협하지 않았고, 신념 속에서 죽음을 선택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게 움베르트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고결하고자 했다면 작은 흠도 없었어야지! 그 나약함이 널 실패하게 만들 것이다! 하찮은 인간!]

움베르트는 성기사단장을 설득할 수 없는 걸 알고 억지로 굴복시키기로 했다.

지금 성기사단장은 약해진 상태. 게다가 이전에 건네준 사악한 징표를 갖고 있으니, 인형으로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성기사단장은 움베르트가 부리는 수많은 인형 중에 가장 우수한 개체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타락하게 만들어 부하로 삼고자 했다. 너 정도 되는 존재를 꼭두각시 인형으로 만들긴 아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까지 거절하다니, 더 망설이지 않겠다!]

꼭두각시 인형이 된 성기사단장은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터였다. 인형에 불과하니 본래의 능력에는 못 미치겠지만, 성기사단장이란 지위에서 나오는 힘은 건재했다.

명령만으로 태양 교단의 강력한 성기사들을 움직일 수 있으니 움베르트에겐 아주 요긴할 터.

'나의 껍질을 갖고자 추하게 구는군. 늙은 뱀파이어. 아무리 노력해도 내 영혼은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래, 인정한다. 하지만 그 껍질이 일으킬 온갖 정치적 문제를 지켜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넌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그렇게 홀가분하게 떠나려 하면 안 되었다.]

그 부분은 성기사단장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영혼은 타락하지 않은 채 저승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남은 껍질은 움베르트의 꼭두각시가 되어 온갖 악랄한 결정을 내릴 테니 말이다. 사람들은 아직 성기사단장이 살아 있다고 속을 게 틀림없었다.

'이 간악한 놈!'

[이제 와서 후회가 되는 것이냐? 하지만 늦었다! 마음대로 저승으로 떠나라. 크하하핫!]

성기사단장은 끝까지 신념을 지켰지만, 직책과 의무가 그를 영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움베르트를 불러봤지만 이미 연결을 끊은 듯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성기사단장은 초조해졌다.

'무언가 해야···!'

이대로라면 성기사단 전체가 저 악랄한 뱀파이어에게 조종당하게 될 터.

하지만 이미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성기사단장은 절망했다.

'태양신이시여! 도우소서! 저 악귀의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십시오!'

간절히 평생 섬기던 신을 불러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태양신은 늘 그랬다. 신성력을 내려줄 뿐이지, 그 이상은 없었다. 모든 걸 인간에게 맡긴다는 듯 침묵하는 존재였다.

성기사단장은 그것에 깊은 뜻이 있을 거라 여겨왔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원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생 당신을 섬겨왔습니다! 이 순간이라도 응답해 주십시오! 저 악귀를 막을 힘을 제발!'

하지만 아무리 간절해도 답은 없었다. 결국 성기사단장은 태양신을 부르는 걸 멈추고 절규했다.

'아무나! 아무나 날 도와다오! 저자를 막을 수 있게!'

애타는 외침과는 다르게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그의 정신 속에서 누군가 대답해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죽어가는 성기사단장의 희미한 의식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원하시면 도와드리지요.

성기사단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그대는 누구인가!'

그러자 매력적이지만, 어쩐지 약간은 야비하게 느껴지는 남성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소렌 다켄발트입니다.

* * *

성기사단장이 쓰러졌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대였는데, 카라즈라가 준 비석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평소라면 성기사단장이 다 막아낼 공격이 속수무책으로 들어갔고, 그는 패배해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10미터나 됐던 거대한 몸도 원래의 크기로 되돌아간 상태.

한데 그때 갑자기 문제가 터졌다. 성기사단장의 몸에서 시커먼 화염이 극렬하게 일어났던 것.

"큭!"

그 사악한 열기에 서둘러 물러나야 했다. 당황했지만 금세 그 불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백작님! 저 힘은 에인션트인 움베르트의 기운이 틀림없습니다!"

움베르트의 검은 화염은 유명한 것이었다. 게임 속에서 보던 것과 똑같았다.

"움베르트···? 그 고약한 늙은이가 끼어들었다는 건가! 성기사단장을 가지고 무얼 하려는 거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막아야 된다는 거다.

'내 사냥감을 이렇게 가로챈다고? 어이가 없네. 진짜!'

블라르 백작은 무언가 당하기 전에 성기사단장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자고 했다.

"아예 없애버리면 그 고약한 늙은이가 수작질도 못하겠지."

"무리입니다."

움베르트에 대해 잘 아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검은 화염에 둘러싸인 존재는 무적에 가까운 방어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움베르트의 화염을 처리하려면 특수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물론 백작님 정도 되면 힘으로 깰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그 정도 시간이면 움베르트가 원하는 수작질을 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움베르트에 대해 잘 아는가 보군? 나는 별로 엮인 적이 없어서 모른다네."

"어쩌다 보니 좀 들었습니다. 지금 보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겠군요."

아마 성기사단장을 인형으로 만들려는 것 같았다. 움베르트는 여러 강자를 인형으로 수집하는 악취미가 있었다. 그 인형들은 다방면으로 쓰이는데 희생자가 살아 있는 것처럼 연기하거나, 아니면 분해되어 움베르트와 똑같은 분신을 만드는데 쓰인다.

'아마 성기사단장을 꼭두각시로 써먹을 생각이겠지.'

인형이 완성된 순간, 움베르트는 태양 교단의 병력을 보내서 회수하려 할 거다. 그러면 인형이 된 성기사단장은 그들에게 합류해 감쪽같이 녹아 들겠지.

아닌 게 아니라, 블라르 백작의 감각에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태양 교단의 무리가 느껴진다고 했다.

"최정예로군. 고위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네. 이 정도면 추기경의 호위병들이 아닐까 싶은데···."

반면 여긴 우리 둘밖에 없다. 아무리 이쪽이 강해도 그 정도의 고위 사제와 성기사가 바글바글 몰려오면 위험하다. 보자마자 뱀파이어에게 치명적인 공격들을 터뜨려댈 테니 말이다.

블라르 백작이 있으니 싸우려면 못 싸울 건 없지만,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럴 바에는 물러나는 게 나았다. 백작 역시 그런 의견이었다.

"일단 후퇴한 뒤에 부하를 불러 다시 싸우는 게 어떻겠나?"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성기사단장이 태양 교단의 수중으로 들어가면 일이 어려워질 겁니다."

"하지만 저 화염을 빠르게 처리할 수단이 없잖나?"

"백작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뭐라? 그게 뭔가?"

"직접 성기사단장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아직 성기사단장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법을 써서 그와 대화할 수가 있다.

특히 흑마법 계통은 영혼을 다루는데 특화돼 있기에, 블라르 백작이 도와준다면 성기사단장과 감응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런 점을 설명하자 블라르 백작은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성기사단장을?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네만···."

"성기사단장은 움베르트에게 성기사단이 농락당하는 걸 원치 않을 겁니다. 저 또한 갑자기 끼어든 그 고약한 놈이 이득을 보는 걸 내버려 둘 생각이 없고요."

방금 전까지 서로 싸웠던 사이긴 하지만 공동의 적이 나타났으니 협력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물론 설득이 성공할지는 미지수였으나 시도는 해볼 만했다. 이런 점을 설명하자 블라르 백작은 끄덕였다.

"알겠네. 강령술 계통의 주문으로 자네가 성기사단장과 대화할 수 있게 해주지."

* * *

블라르 백작의 마법으로 성기사단장의 영혼과 접촉하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게 됐다.

움베르트가 성기사단장을 유혹했지만 거절 당했고, 결국 죽어가는 그를 강제로 인형화 하려고 중이라는 것.

성기사단장이 간절함을 담아 외치고 있었다.

'아무나! 아무나 날 도와다오! 저자를 막을 수 있게!'

-원하시면 도와드리지요.

갑작스러운 내 목소리에 성기사단장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그대는 누구인가!'

-소렌 다켄발트입니다.

대답과 함께 맹렬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돌아왔다. 성기사단장 입장에선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이름일 테니까.

-제가 증오스러운 건 알겠습니다만, 좋은 제안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성기사단장은 한탄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간악한 뱀파이어가 기회를 엿보며 악마처럼 혀를 놀리는군.'

-제 제안은 나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요구는 하지 않을 테니.

'이해하지 못하나 보군? 뱀파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신념을 배신하는 일이다.

-아, 그러면 정정하지요. 이건 신념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저 양자택일의 문제일 뿐입니다.

이제 남은 건 둘 중의 하나다. 움베르트의 인형이 되어 그의 사악한 도구로 전락하거나, 나와 거래해서 움베르트에게 한 방 먹여주는 것이다.

-이제 그 고결한 신념이 끼어들 공간은 없습니다. 당신은 그냥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크윽···!'

상황을 이해한 성기사단장은 침음을 흘렸다. 나는 그런 그에게 강조했다.

-방금 전, 아무나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제가 응답한 겁니다.

'대체 내게 무얼 바라는 거지? 인형이 되는 걸 막아주는 대가로?'

-한 가지만 해준다면 당신은 모든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간단합니다. 움베르트와 그의 일파에 관한 정보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교단의 적을 제거해 주십시오. 그뿐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건 성기사단장을 이용해 움베르트를 손도 안 쓰고 처리하는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지? 네놈도 뱀파이어가 아닌가.'

-뱀파이어의 관계도 서로 복잡합니다. 인간끼리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않습니까? 이쪽은 더하지요. 당신과 죽자고 싸웠지만, 움베르트의 등장으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인형이 되는 걸 막은 뒤, 살려서 보내주겠다고 했다.

-대신 움베르트와 싸워주십시오. 제가 바라는 건 그뿐입니다.

'태양 교단의 내분을 바라는 건가!'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입니다. 당신은 교단의 정화를 위해 노력하면 될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뱀파이어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느니, 뭐니 하는 소리는 집어치우십시오. 당신에겐 두 가지 길 밖에 없으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니까요.

움베르트에게 이용 당하느냐?

움베르트를 토벌하느냐?

오직 둘 중의 하나였다.

-만약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당신의 그 잘난 태양신에게 계속 간청해 보십시오. 응답이나 할지 의문입니다만.

내 지적에 성기사단장은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그는 태양신에게 간청했음에도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으니까.

-어차피 태양 교단은 이번 전역에서 실패했습니다. 이제 교단이 더더욱 에인션트 뱀파이어에게 넘어가게 될 텐데, 맘 편히 저승으로 떠나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

-하지만 아직 무언가 할 의지가 있다면 당신을 일으켜 드리죠. 새벽의 빛이 치유할 겁니다.

성기사단장이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움베르트는 아주 난처한 처지가 될 것이다. 분노한 성기사단장이 안방으로 쳐들어갈 테니까.

-움베르트의 본거지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려드리지요. 어떻습니까?

< 교단 최강의 검(10) >

움베르트의 본거지를 안다는 말에 성기사단장이 격동했다.

'정말 알고 있는 건가!'

-네, 거짓이 아닙니다.

사실 성기사단장이 힘이 부족해서 에인션트 뱀파이어를 격퇴하지 못한 게 아니다. 놈들에 관한 정보가 워낙 없는 데다가, 교단 내부에도 숨어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밀에 쌓인 본거지를 알 수 있다? 성기사단장의 입장에선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의 울분을 모조리 갚아 줄 수 있을 테니까.

-단순히 본거지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정화의 기사단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정화의 기사단이라고?'

-어떤 조직인지 알고 계시잖습니까? 일반 성기사를 데리고 가면 사전에 정보가 셀 테니, 본거지를 습격하려면 정화의 기사단으로 선별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정화의 기사단에 대해 알고는 있다. 접촉하진 못했지만···. 그들이 날 꺼리고 있지.'

세상에, 뱀파이어보다 꺼려지는 성기사단장이라니! 너무 올곧아서 상대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확실히 정화의 기사단이란 존재는 파격적이긴 하다. 교단의 정화를 위해 뭐든 하겠다는 입장이니 말이야. 솔직히 그 정도는 해야 썩은 교단을 정화할 수 있겠지.

눈앞에 있는 성기사단장을 봐라. 이렇게 강한데도 결국 실패했다. 반면 정화의 기사단은 차곡차곡 해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런 점을 성기사단장에게 설명했다. 그는 침묵하고 있었지만 뭔가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우리는 의식 세계의 가속된 사고 속에 있었기에 바깥의 시간은 느리게 가는 중이다. 자세한 얘기를 나누긴 충분했다.

-정화의 기사단의 도움을 받으면 움베르트 토벌도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에인션트 뱀파이어를 토벌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안 될 게 있습니까? 이쪽은 벌써 은빛 엘리시아를 처리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아직 모를 수도 있겠군요. 은의 성녀의 정체는 사실 에인션트 뱀파이어, 은빛 엘리시아였습니다.

나는 일곱 봉우리에서 있었던 일과 은의 성녀에 관해 말해줬다. 그러자 성기사단장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성녀가 에인션트 뱀파이어였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믿지 못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제야 교단이 얼마나 썩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일이 이 지경인데도 신념을 논하며 편히 저승으로 가고 싶습니까?

'······.'

그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는 듯 성기사단장은 침묵했다.

-어째 뱀파이어인 제가 당신보다 교단에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대체 목적이 뭐지? 뱀파이어답지 않은 짓거리를 하는 이유가 뭐냔 말이다.'

-그건 간단합니다. 제가 살기 위해섭니다.

나는 성기사단장에게 같은 편이 될 수 있다느니 하는 소리는 안 하기로 했다. 그저 현실적인 걸 말해줬다.

-에인션트 뱀파이어는 모두의 위협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리지 않죠. 놈들의 목적을 알고 있습니까? 놈들은 피에 굶주린 데미 뱀파이어로 가득 찬 세계를 원합니다. 그 파멸한 세계에서 신좌에 오르고 싶어 합니다.

나는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목적을 설명해줬다. 그리고 덧붙였다.

-저도 그렇고, 블라르 백작도 그걸 반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균형을 중시합니다.

'균형이라고? 지금 뱀파이어가 균형을 논하는 건가?'

-네, 균형입니다. 그건 평화로운 세계를 말하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산 자와 죽은 자는 서로를 증오하고 죽일 겁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반복할 테니까요. 하지만 세계는 계속 굴러갈 겁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로군.'

-확실히 언데드가 이런 말을 하니 이상하긴 하군요. 하지만 우리가 부정한 존재일지언정,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 중 하나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풍요롭고 번창하길 바라죠.

'······.'

성기사단장에겐 상당히 파격적인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가 충격을 받은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물론 저에 대해서는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건 선과 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해서 얼마든지 이기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위해 세계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진 않습니다.

'너는 정말로 특이한 뱀파이어군···.'

-별나다면 별나겠지요. 그래서 정화의 기사단과 손잡은 건지도 모릅니다.

'내게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군.'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할 겁니다. 의식 세계 속이라고 무한정 고민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살짝 재촉하면서도 성기사단장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감이 왔다. 어파치 그는 양자택일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에인션트 뱀파이어에게 한방 먹여주는 길을 택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좋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그런데 어떻게 움베르트의 힘을 물리칠 수 있다는 건가?'

-인형화 말입니까? 간단합니다. 치료하면 됩니다.

움베르트가 성기사단장을 강제적으로 인형으로 삼을 수 있는 건, 죽음을 앞두고 약해져서다. 내 매혹 능력도 그렇지만 뱀파이어가 상대를 굴복시킬 때는 정신이나 육체가 약해진 틈을 노리는 게 보통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성기사단장의 경우는 부상을 치료해주면 그만이다.

'치료라고? 어지간한 포션으로는 이 상처를 어쩌지 못한다.'

확실히 블라르 백작이 맘먹고 날린 공허 폭발의 위력은 대단했다. 포션 같은 거로는 턱도 없었을 테니 성기사단장이 저리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언제 포션을 쓴다고 했나?

-포션은 필요 없습니다. 치료 주문을 쓸 수 있습니다.

'뭐라고! 뱀파이어가 치료 주문을?'

성기사단장은 참으로 기괴한 걸 들었다는 목소리다. 저런 반응이 상식적이긴 하다. 치료의 힘은 뱀파이어 같은 언데드를 파괴하니까.

-저는 핏빛 새벽의 여신을 섬기는 사도입니다.

나는 강력한 치유 마법인 새벽의 손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성기사단장의 의식 세계에서 튕겨 나기 시작했다. 나는 떠나면서 그에게 말했다.

-사태가 수습되면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움베르트를 처단하러 갈 때 동행할 테니 같이 가시죠.

움베르트 토벌을 성기사단장에게만 맡길 생각은 없었다. 확실히 끝내도록 옆에서 끼어들 생각이었다.

뭣보다 이번에 꽤나 귀찮게 해줬으니, 놈의 본진에 있는 보물로 보상을 좀 받아야겠단 생각도 있었고.

딱 적당한 게, 움베르트의 본진에 5대 아티펙트 중에 하나가 있었다. 5대 아티펙트 중 하나인 달의 펜던트를 알차게 써먹고 있는 입장에서 아주 탐나는 물건이라 하겠다.

'아예 5대 아티펙트를 모두 구해서 전신에 바르고 다닐까?'

가능성이 없는 얘기도 아니었다.

* * *

에인션트 뱀파이어 움베르트는 크게 당황했다.

자신만만하게 펼친 인형술이 실패한 데다가, 성기사단장이 구조대와 함께 돌아왔기 때문이다.

성기사단장은 실려 올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지만, 죽어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인형으로 만드는 게 먹히지 않는 상태까진 회복한 것이다.

'대체 어떻게?'

성기사단장은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 상처를 회복시킬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이는 근처에 있지도 않았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뭔가 계속 잘못돼 가는군.'

움베르트는 인상을 구겼다. 은빛 엘리시아는 연락이 끊겨서 어떻게 된 건지도 파악이 안 된다. 영원의 발레스카는 지난 죽음 때문에 한동안은 활동하지 못한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움베르트 본인 역시 회심의 한 수가 실패했다.

이번 원정과 관련해 에인션트 뱀파이어들에게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이다. 막후에서 태양 교단조차 농락하던 실력자 셋이 삽시간에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움베르트는 이제 자기 처지가 위태로워졌음을 깨달았다. 뭔가 보이지 않는 칼날이 목을 겨누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긴 세월 동안 암약하면서 이 정도 위기감을 느낀 건 몇 번 있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뭔가 대책이 필요해.'

지금까지보다 더 강한 수단이 필요했다. 결국 움베르트는 신에게 힘을 빌리는 걸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어떤 신이 좋을까?'

뱀파이어들에게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신은 드라큘라다. 하지만 움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드라큘라가 에인션트 뱀파이어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품은 야망을 알기에 그런 듯했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같은 에인션트 뱀파이어지만, 은거해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는 카르멘 같은 경우는 총애했으니까. 반면 움베르트, 발레스카, 엘리시아 같은 경우에는 미운털이 제대로 박혀 있었다.

'그렇다면 언데드의 어머니인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

하지만 그 역시 적당하지 않았다. 카라즈라는 워낙 거물인지라 에인션트 뱀파이어인 움베르트로서도 그녀의 관심을 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여러 신을 떠올려봤지만, 저마다의 이유가 걸려서 도움을 청하기 애매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있을 수도 없는 법. 성기사단장이 이번 일로 독기가 바짝 올랐을 텐데···.'

고민만 거듭하던 그는 얼마 뒤 특이한 손님을 맞이하게 됐다.

"찾아오신 분께선 누구십니까?"

대담하게 그의 본거지로 불쑥 들어온 이는 묘령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움베르트는 그런 겉모습은 상관하지 않고 경계심을 담아 물었다. 그러자 여인이 차분히 답했다.

"저는 미의 여신님을 섬기는 사도입니다."

미의 여신. 물질계에서 자애롭다 칭송받지만 실상은 상당히 음험한 존재였다.

가장 최근에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단이 행했던 공양 의식에서 녹색 연기의 형태로 나타난 적이 있었다.

"미의 여신이라고요? 위대한 분의 사도께서 이 늙은이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 겁니까?"

움베르트는 의아했다. 미의 여신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의 여신이라 하면 엘프들이 좋아하는 신으로만 알고 있을 뿐, 뱀파이어인 그에겐 생경했다. 그런데 사도가 직접 오다니?

여신의 사도는 그런 움베르트의 심경을 이해한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제안해왔다.

"위대하신 분께서 분수를 모르는 자들에게 교훈을 내리고자 당신을 돕고 싶어 하십니다."

* * *

어둠의 숲에서 벌어진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추격전에서 쏠쏠한 이득까지 본 건 덤이다. 많은 포로를 잡아서 태양 교단과의 몸값 협상에서 노다지를 캐게 생겼다. 다들 굴러들어올 금덩이에 싱글벙글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고맙네. 소렌. 자네의 조력에 어찌 보답해야할지 모르겠군."

블라르 백작은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는 은근한 어조로 제안해왔다.

"이참에 어둠의 숲 전체를 넘겨주겠네. 이 광대한 숲의 주인이 되는 건 어떤가? 요새와 남은 재산도 주지."

그 말에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보상을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고마우면 남에게 짐을 떠맡기지 말고 끝까지 잘 지키십시오."

"이런··· 끄응."

블라르 백작의 요새 지하에는 고대신의 유적이 있다. 그곳에 에인션트 뱀파이어들이 원하는, 세계를 데미 뱀파이어로 가득 채우기 위한 방법이 존재했다.

이 세계가 굶주리고 정신 나간 데미 뱀파이어로 가득 찬 멸망을 보고 싶지 않다면 그 유적을 잘 지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어둠의 숲의 소유권이니, 남은 재산 전부니 해도 귀찮은 일을 떠넘기려는 수작질에 불과했다.

"일곱 봉우리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백작님께선 영세 무궁토록 요새를 지켜주십시오."

"영세 무궁하도록이라··· 세상에, 그런 끔찍한 저주는 처음이군. 요즘에야 진실로 알게 됐다네. 사실 죽음이 축복이라는 걸."

"그 관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백작님께서 다 내려놓고 싶어 하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수백 년은 이릅니다."

"수백 년은 이르다니··· 암담한 소리를 하는군."

"그래도 앞으로는 평안할 겁니다. 태양 교단이 대패했으니 수십 년간은 근처에서 어슬렁거릴 생각도 못 할 테니까요."

"그래,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지."

블라르 백작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표정이다. 이 양반, 정말로 나한테 영지고 요새고 재산이고 다 넘기고 은퇴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절대 혼자 편히 쉬는 건 두고 볼 생각이 없다.

"자네에게 줄 보상은 다른 걸로 생각해 보지. 그 공에 비할 바가 없으니 섭섭하지 않게 보상하겠네."

"주신다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후 블라르 백작과 몇 마디 더 나누고 헤어졌다.

이번 전쟁 후에 수습할 일이 산더미 같아서 서로 바빴기 때문이다. 나도 당장 일곱 봉우리의 연합군을 치하하며 논공행상에 들어가야 했다. 약탈품을 나누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한데 그때 불청객이 찾아왔다. 숲이 강풍으로 난리가 났다. 마치 거대한 헬기가 착륙하는 것처럼 풀들이 넘어지며 근처에 있던 자들이 바람에 밀려 뒤뚱거렸다.

"뭐냐!"

놀라서 위를 보니 익히 본 존재가 나타났다.

하피 여왕이었다.

"케찰코아틀루스! 무슨 일이지?"

"우리 신께서 부르신다. 약속을 이행할 때다. 다켄발트."

"벌써?"

"거부권은 없다. 이미 신께선 그대를 태우고 아룬델로 날아갈 준비를 마치셨으니까."

< 신들의 도시(1) >

***

"좀 태워주지?"

하피의 본거지인 구름 봉우리까지 가야 했기에 하피 여왕에게 부탁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어림없는 소리. 태양 교단의 문제는 이미 끝났다. 그런 굴욕을 다시 겪을 거 같나? 직접 날아라."

어쩔 수 없이 박쥐로 변해 구름 봉우리까지 날았다.

파닥파닥! 파닥파닥!

열심히 날갯짓을 하는데 날 지켜보는 하피 여왕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그리곤 성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종일 날아야겠군. 그냥 매달려라. 데려다줄 테니."

흡혈박쥐가 날아봐야 얼마나 빠르겠나? 반면 하피 여왕은 판타지 세계의 제트기라 할 수 있으니 혼자 속이 터졌던 모양이다. 나는 흡혈박쥐 형태로 하피 여왕에게 매달렸고, 그녀는 순식간에 날 구름 봉우리에 있는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에게 데리고 갔다.

[잘 있었나? 떡두꺼비.]

하피의 신인, '사나운 폭풍 아우레케아'는 쾌활한 태도로 날 맞아줬다.

아우레케아는 크기는 인간 정도로 평범했지만, 날개를 뒤덮은 은색과 연두색, 하늘색의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깃털은 그녀가 신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위대한 하늘의 대모시여."

나는 뱀파이어 형태로 돌아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래, 그래. 키키킥. 널 다시 만나길 기다리고 있었지! 이제 약속을 지킬 시간이야. 안 그래?]

"맞습니다. 기꺼이 제 자신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아우레케아는 빚을 받으려 했고, 나는 거기 응할 생각이다. 사람이 받은 게 있으면 돌려줘야 하는 법. 게다가 이번 일로 얻을 게 있기 때문이다.

아우레케아는 이전에 약속했다. 자신의 복권(復權)이 성공하면 구름 봉우리의 하피 무리를 내게 주겠다고. 즉, 여기 사는 하피가 모두 내게 귀속된다는 거다.

'가장 점령하기 어려운, 기질이 사나운 하피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좋은 기회야.'

거기에 더해, 신들의 도시를 여행하며 물질계에서 보기 힘든 진귀한 물건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핏빛 새벽의 여신과 직접 대면할 기회도 있을 터.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하지.'

드디어 여신님과 만난다. 처음 만나면 뭐라고 인사해야 할까? 머리를 굴려 봐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좋아. 우리 떡두꺼비가 약속을 잘 지킬 거라고 생각했어.]

"아, 그런데 돌아오는 시간을 좀 조정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물질계에서 할 일이 많아서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거든요."

[걱정 마. 거기서 얼마나 있든 현실의 시간은 하루 정도 흘러가 있을 테니까. 그 정도 시간대로 되돌아오면 돼.]

다른 차원으로 가는 만큼 시간의 흐름도 다르다.

'좋군. 거기서 난리를 치고 와도 하루 정도 지난다고 하면 부담이 없지.'

에인션트 뱀파이어인 발레스카나 움베르트에게 많은 시간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기사단장 문제도 해결됐으니 공격대를 조직해 놈들의 본거지를 쳐들어갈 생각이니까.

"알겠습니다. 기꺼이 동행하겠습니다."

[좋아! 더 미적거릴 거 없이 바로 가자고.]

성격 급한 하피 신답게 즉각 출발하자고 한다. 예상하던 바라 순순히 응했다.

'에레미나도 보고, 전후 일 처리도 좀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하피 신인 아우레케아가 내게 호의를 보일 때 잘하는 게 좋다. 아무리 지금 눈앞에서 사근사근 웃고 있어도 하피란 것들은 하나 같이 인성이 파탄 난 존재들이니까. 뭔가 거슬리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날아서 차원을 이동할 거야. 박쥐로 변해서 내게 매달려. 뱀파이어의 형태는 너무 커서 비행하는데 방해돼.]

그럴 거 같긴 하다. 하피 여왕이야 워낙 거대하니까 타는데 문제 없이지만, 하피 신은 나보다도 키가 작았다.

"알겠습니다."

퍼엉!

뱀파이어로 변해서 하피 신의 등으로 기어올라가려고 하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날 붙잡더니 가슴 쪽에 붙여줬다.

[뒤에 매달리면 위험할 때 지켜주기가 힘들어. 그리고 딱 가슴에 달라붙어 있어야 차원을 비행할 때 부는 강풍에 휘말리지 않을 거야. 조심하라고. 차원 이동 중에 떨어지면 넌 영영 우주의 미아가 될 거야!]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의 상반신은 아름다운 인간 여성의 형태다. 따로 의복을 입지 않았지만, 깃털이 옷처럼 상반신을 덮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골 사이에 자리 잡고 단단히 매달렸다. 그러자 아우레케아가 웃어댔다.

[귀엽네. 키키킥! 오랜만에 새끼라도 낳은 기분인 걸?]

"···황송한 말씀이십니다."

아우레케아의 자식이라니. 이쪽에서 절대로 사절하고 싶다.

[자, 간다!]

차원을 이동한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뭔가 근사한 마법이 발동되나 했는데, 그딴 거 없이 모든 일이 삽시간에 이뤄졌다.

아우레케아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공간을 잡아서 부욱 소리가 나게 찢더니 그 틈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휘이이이이잉!

엄청난 바람 소리가 나며 아찔한 추락이 이뤄졌다.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할 정도였다. 우리는 끝도 알 수 없는 흑암의 세계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까지 떨어지는 거지!'

이러다간 기절하겠다 싶던 그때 거대한 파공음이 있어났다. 마치 폭탄이라도 터지는 듯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게 곧 하피 여왕의 날갯짓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추락을 끝내고 힘차게 날개를 움직였고, 그 순간 무언가 유리창 같은 게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났다.

와장창!

차원의 경계가 깨지며 내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더 이상 흑암의 세계가 아니라, 총천연색 빛의 소용돌이가 가득한 장소였다. 사방에 소용돌이가 수도 없었는데, 보자마자 그게 여러 차원으로 이어지는 구멍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수많은 차원의 구멍이 이어져 있는 일종의 허브였다.

하피 신 아우레케아는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구멍 한 개를 찾아갔다. 유난히 밝은 소용돌이였다. 그녀가 날개를 움직일 때마다 주변에선 천둥과도 같은 소음이 터져 나왔다.

[속도를 올릴 테니 잘 매달려! 느리게 날다가는 아룬델의 파수꾼들에게 들킨다고!]

그 말과 아우레케아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속도로 날아서 소용돌이를 통과했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은 갑작스럽게 끝났다. 폭풍이 끝난 평온 속에서 우리는 잔잔하게 창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새로운 대지가 펼쳐졌다.

"아···!"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하피의 신은 낄낄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신들의 도시에 온 걸 환영해! 뭐, 우리는 당장 도시에 들어가진 못할 테지만.]

* * *

신들의 도시 아룬델.

여러 차원의 신들이 모이는 장소로 하늘 높이 나선형으로 솟은 황금 탑, 공중 산책로, 별빛이 쏟아지는 수정 건물 등, 물질계에선 볼 수 없는 신비로운 광경으로 가득한 장소다.

하지만 도시 밖은 황무지만 끝없이 펼쳐진 모습이다. 우리는 영광된 도시를 멀리서 힐끔 본 뒤 황무지 위를 줄곧 비행하고 있었다.

'마치 라스베이거스 같군.'

라스베이거스는 네온사인으로 화려하지만 밖은 사막이지 않나. 아룬델의 모습은 그걸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먼지뿐인 황무지를 얼마나 날았을까?

하피 신 아우레케아는 어떤 거대한 바위 앞에 착륙했다.

[자, 원래대로 돌아가도 좋아.]

그녀의 말에 뱀파이어 형태도 돌아왔다. 그리고 아우레케아가 이끄는 대로 바위 근처로 갔다. 그곳에는 굳건하게 닫힌 돌문이 있었다.

"여기가 뭐하는 곳입니까?"

[추방자들의 지하도시지.]

아우레케아가 마법을 쓰자 문이 열렸고, 아래로 깊게 이어진 계단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곳을 통해 한참을 내려갔다. 내부는 아주 서늘했다.

[나처럼 도시에서 쫓겨난 자들이 꽤 많거든. 황무지에서 할 것도 없어서 모이다 보니 이렇게 지하에 도시가 생겨났지. 아룬델 정도는 아니지만, 이쪽도 꽤나 재밌는 곳이야.]

"전에 말씀하신 계획은 여기서부터 시작되겠군요?"

[그래. 기대해도 좋다고.]

기대라고 하기엔, 목숨이 몇 개라도 부족할 짓거리였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우리는 얼마 뒤, 번잡스러운 지하도시에 도착했다.

이곳에도 다양한 신과 그들의 추종자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아우레케아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날 한 술집으로 데려갔다.

[우릴 기다리는 놈이 있어. 가서 합류하자고.]

"누굽니까?"

[가보면 알아. 너도 아는 얼굴이야.]

술집에 들어가니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 손을 들며 씩 웃고 있었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높이 솟은 모자를 쓰고 있는 그는 고블린의 신 스카브누그였다.

[여, 떡두꺼비! 오랜만이구만. 케케켁. 이쪽으로 오라고.]

이번 일에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가 엮여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만날 줄은 몰랐다. 언젠가 고블린의 용병굴에서 만난 모습 그대로였다.

"수수께기의 대가이자 책략의 실타래를 짜는 분이시여. 그 존의(尊意) 높게 빛나길 바랍니다."

나는 용병굴에서 그의 동상에 하던 인사를 그대로 했다. 스카브누그는 날카로운 이빨을 잔뜩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우리 떡두꺼비는 여전히 예의가 바르구만. 이쪽 세계에서 봐서 아주 기뻐. 케케켁! 이리 와서 신들의 음료를 들게. 내가 특별히 사는 거야. 케르륵!]

그렇게 나는 신들이 거니는 지하도시의 한 술집에서, 고블린의 신 스카브누그와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를 양쪽에 끼고 술자리를 갖게 됐다.

'묘하게 현실감이 없구만···.'

둘 다 일곱 봉우리의 종족들이 경건하게 떠받드는 신들인데, 술친구처럼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일 얘기를 해보자고! 내 계획은 꽤 괜찮아. 고블린, 너도 만족할 거고!]

아우레케아는 으스대듯 턱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세운 계획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웠다.

[전에 말한 대로 할 거야. 위조 전문가를 데리고 아룬델에 잠입해서 내 추방과 관련된 문서를 고치는 거지. 그렇게만 하면 다시 복권될 수 있어.]

그녀의 말에 스카브누그는 끄덕였다.

[위험하지만 해볼 만한 짓거리지. 문제는 그 위조 전문가가 잡혀간 내 사도라는 데 있지만. 케케켁!]

아우레케아는 아룬델로 돌아가는 방법으로 관련된 서류를 위조하는 걸 택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만한 전문가도 찾았고. 문제는 그 전문가가 한 범죄조직에 잡혀가 있다는 것.

[망할 황무지 평의회 놈들!]

아우레케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말한 황무지 평의회는 추방자 신격들로 이뤄진 범죄 단체다. 쉽게 말해 이 지하도시에 자리 잡은 갱단이었다.

황무지 평의회의 목적은 아룬델을 망치고 그 도시를 약탈하는 게 목적이다. 규칙을 어기고 신들의 도시에서 추방된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그놈들이 최고의 위조 전문가이자 이번에 우리 일을 도울 수 있는 '칼센'이란 고블린을 잡아갔다는 것. 그리고 그 칼센은 고블린 신격인 스카브누그의 사도기도 했다.

[내 사도를 구출해야겠어. 케륵케륵. 그 와중에 멍청한 평의회 놈들의 금고도 털고 말이야. 이런 신나는 일에 불러줘서 고맙구만. 케케켁!]

이런 이유로, 하피의 신과 고블린의 신이 작당모의를 시작한 것이다. 그 사이에 불쌍한 필멸자인 내가 낀 거고.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신들로 이뤄진 갱단이라니.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 일에 내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거였다.

[자네가 잘해줄 거라 믿네. 떡두꺼비!]

[나도 같은 생각이야! 떡두꺼비!]

둘 다 신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이구··· 맙소사."

* * *

황무지 평의회는 지하도시의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침 오늘은 주요 간부가 참여한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모르투카나 님이 입장하십니다."

사도 하나가 외치자 자리에 탁자에 앉아 있던 신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리고 곧 위엄 넘치는 대신격이 등장했다.

그는 바로 파멸의 신 모르투카나.

황무지 평의회의 리더로, 개성 강한 빌런들을 자신의 카리스마로 이끌고 있었다.

실제로 회의에는 온갖 악신이 가득했지만, 모르투카나에겐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그 정도로 강력한 신이었다. 실제로 자신의 분노 때문에 몇 개의 세계를 멸망시켰다고 하기도 하고.

"모두, 앉지."

그의 말에 신들이 착석했다. 주변의 면면은 화려했다. 모두 아룬델에 의해 공적이자 추방자로 지목된 자들이었다.

-투쟁과 질투의 여신 에리아스.

-그림자와 죽음의 신 나르굼.

-저주와 노화의 여신 헤르카테.

-야수와 폭력의 신 스테노반.

등등.

하나 같이 악명 높은 신들이었다.

모두 다른 세계의, 다른 만신전에서 아룬델은 찾은 이들이었지만, 추방된 이후 출신을 불문하고 똘똘 뭉쳐 아룬델 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모르투카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선언했다.

"드디어, 오래간 준비한 계획을 실행한다. 아룬델은 화염과 비명에 휩싸일 것이다."

< 신들의 도시(2) >

***

나는 좌우의 신들에게 질문했다.

"일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부분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번 일에 필멸자인 제가 왜 필요한 겁니까?"

거기에 대해 고블린의 신 스카브누그가 명쾌한 답을 내놨다.

[애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지.]

"어디까지나 필멸자끼리의 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까? 이번 탈취 작전이."

[맞아. 잘 이해했구만. 케륵!]

아룬델과 이 추방자들의 지하도시는 온갖 차원에서 다양한 신들이 모이는 곳이지만, 필멸자 주민이 훨씬 많다. 위대한 신들을 위해 시중을 들 인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인 '황무지 평의회' 역시 구성원의 대부분은 필멸자였다.

특히 칼센이 갇혀 있는 감옥소 같은 곳은 필멸자들이 관리한다. 특별히 감옥이나 형벌을 담당하는 신이 아닌 이상 그런 곳을 맡으려는 신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황무지 평의회의 감옥소를 공격해 위조 전문가인 칼센을 탈출시키는 일은 필멸자끼리의 다툼으로 국한시킬 수 있었다.

[나나 여기 하피가 끼면 신들의 전쟁으로 번지거든. 다툼이 커지는 건 막는 게 좋다네. 케르르!]

"···일이 틀어지면 꼬리자르기 하기도 좋겠군요."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가 높이 솟은 모자가 흔들흔들 거릴 정도로 웃어댔다.

[그런 부분도 있지! 케케켁! 그래도 충분한 지원은 할 걸세. 일단 이걸 받게나.]

스카브누그는 두툼한 서류뭉치를 건네줬다. 그건 황무지 평의회의 조직도와 구성원, 위치 등을 담은 정보였다.

나는 서류뭉치를 받아들고는 빠르게 살폈다. 개중에는 아는 내용도 많았다.

'이쪽 세계의 지식이 있어서 다행이군.'

처음에는 차원을 건너와 정신이 없는 데다가, 바위의 낯선 입구 때문에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술 한잔 하고 차분해지자 여러 가지 지식이 떠올랐다.

'다만 완벽하진 못해···.'

아룬델과 이 지하도시는 게임내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뭐든 빠삭한 물질계와 다르게, 이곳에 관한 지식은 군데군데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느낌이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겠군.'

안 그러면 경을 칠지도 모른다. 눈앞에 있는 두 신은 고인물의 지식 때문에 날 과대평가하고 있다. 여기서도 물질계에서 한 것처럼 해주길 기대할 터.

하지만 지식의 공백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바에 못 미칠 수도 있었다.

만약 일이 실패한다면 어떤 태도가 될지 벌써부터 보이는 듯하다. 잔머리의 대가인 스카브누가가 실망한 기색으로 자네 왜 갑자기 멍청해졌나, 라고 할 것만 같았다.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하지만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한 채 물었다.

"어떤 식으로 하는 게 좋겠습니까? 두 분의 의견부터 듣고 싶습니다."

내 말에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가 활기차게 답했다.

[몰래 잠입해서 빼내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까 대놓고 가는 수밖에 없어. 감옥을 공격하라고.]

"공격하라고요? 저 혼자?"

[아니지. 이 지하도시에서 용병을 고용해서 공격하라고.]

"빼돌린 후에는요? 여러 가지로 위태로울 것 같습니다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칼센과 돌아오면 그 뒤론 우리가 나설 테니까.]

"칼센만 받으신 뒤에··· 저는 쓸모를 다한 사냥개처럼 버리시면 곤란합니다만."

내 말에 아우레케아가 킥킥거리며 웃어댔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으니까 걱정 마! 신의 이름을 걸고 네 안전도 보장할게.]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시군요."

눈앞에 두 신은 내게 호의적이었지만, 선한 존재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하피는 성격 파탄으로 유명하고, 고블린은 음흉하기로 유명하다. 그들의 신이니 오죽하겠나?

토사구팽은 항상 염두에 두고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어떤 용병을 고용할지 고민이면 추천할 만한 녀석들이 있어. 현상 수배 때문에 이쪽으로 도망 온 다크엘프 도적단이 있는데 이런 일에 써먹기는 제격이지. 고향 차원에서 대단한 명성을 쌓은 놈들이거든? 그쪽 세계에서 신들의 물건을 훔쳤다고 하더라고.]

그 다크엘프 도적단은 분명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자료를 검토한 나는 다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용병을 고용하는 것보다 내부의 배신을 이용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 이걸 보십시오."

나는 조직도가 그려진 종이를 내밀며 설명했다.

"황무지 평의회 산하에 하부 조직인 '시궁창 건설'을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이놈들은 조직의 궂은일을 맡아서 처리하는데 취급이 안 좋아서 불만이 매우 크거든요."

[호오···? 그런가?]

"이놈들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겁니다. 내부의 배신자를 이용하면 용병보다 이점이 많습니다. 일단은 배신자가 나왔으니 적의 내부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고, 끌어들인 만큼 적의 전력을 깎아 먹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용병보다 내부 사정을 잘 알 테니 감옥을 습격할 때 유리합니다."

내 주장에 스카브누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의견이야. 하지만 단점도 있다네. 정보가 사전에 샐 위험이 있고, 하부 조직을 선동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을 일이란 걸세. 그들도 자신들의 이권으로 황무지 평의회에 엮여 있을 텐데 배신이란 어려운 결정을 하겠나?]

합당한 지적이었지만 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고인물의 지식 덕에 놈들을 부추길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보가 샐 위험이 있다는 건 용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의가 없기론 용병 놈들이 더하지요. 그리고 시궁창 건설의 두목을 설득할 자신이 있습니다. 두 분께서 적절한 지원을 해주신다면 말이죠."

[어떤 지원인가?]

"신력이 필요합니다. 되도록 많이."

물질계에서 신력이라 하면 위험한 방사능 물질 같은 거지만, 여기선 다르다. 그것은 매우 값진 화폐였다.

이곳은 신들이 실제로 돌아다니는 세계다. 즉, 신력을 사고 싶어 하는 고객이 넘친다는 소리. 얻기만 하면 팔긴 쉬웠다.

신들은 대부분 부자고, 신력 앞에선 게걸스러운 탐욕을 감추지 않는다. 비싸게 사들이니 물질계에선 상상하기도 힘든 부와 힘을 얻을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이곳에 오는 필멸자들은 대부분은 그런 한탕을 꿈꿨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놈들은 등쳐먹기가 쉬웠다.

[호? 신력이라. 신력으로 배신을 유도하겠다는 거군.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걸세.]

"그런 일에서 수완을 발휘하는 게 제게 주어진 일이 아니겠습니까?"

[케륵! 케륵! 맞네! 맞아.]

결국 스카브누그는 신력을 내놓겠다고 했다. 옆에 있던 하피 신 아우레케아는 그냥 동의했고. 지켜보면서 느낀 건데 아우레케아는 새대가리였다. 매사 별생각이 없었다.

[케륵! 자신하곤 있지만 자네가 맡은 임무는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일세.]

"알고 있습니다."

[한데도 그런 결연한 태도라니. 이 스카브누그가 감탄했네. 자네는 정말 풍운아이자 승부사구만!]

확실한 일 처리를 위해 더 어려운 방법을 택하자, 스카브누그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사실 오해다. 풍운아이며 승부사인 게 아니라, 그냥 쫄보다. 이번 건은 잘 아니까 달려들겠다는 거지.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면 진작 쭈구리가 됐을 거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스카브누그는 감탄과 오해 속에서 나에 대한 고평가를 이어갔다.

[역시 떡두꺼비에 대한 명성 중에 허명이 없었음이야. 케케켁!]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이번에 내 사도를 구해주면 크게 상찬(賞讚)할 테니 기대하게나.]

일이 완료되면 스카브누그에게 한밑천 뜯어낼 수 있겠지. 물론 상대가 교활한 고블린 신이니 뒤통수 안 맞게 조심해야 할 터였다.

* * *

내 작전은 실로 대담하다.

황무지 평의회를 엿먹이기 위해서 하부 조직을 이용하는 것이니까. 성공만 하면 효과는 아주 확실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니만큼 여러 준비가 필요했다.

'차분히 하면 못할 것도 없지.'

정보를 미리 알고 있다는 건 정말 유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먼저 검증이 필요했다.

사전에 내가 게임으로 얻은 정보는 대부분 유용했으나 일부는 이쪽 세계에서 달라져 있기도 했으니까.

'일단 시궁창 건설의 대장이 게임이랑 똑같은지 확인해야겠군.'

시궁창 건설을 움직이기 위해선 놈들의 대장을 설득하는 게 우선이다.

그의 이름은 '오록스'로, 황무지 평의회의 간부인 저주와 노화의 여신 헤르카테의 전직(前職) 사도다.

한때는 여신 헤르카테를 섬기며 잘 나갔는데, 주인에게 미움을 받아 사도직을 잃고 한직인 시궁창 건설로 쫓겨난 인물이다.

'좌천된 이후 섬기던 여신을 향해 이를 갈고 있는 자다.'

지금이야 영락해서 온갖 잡일을 처리하는 오록스지만, 한때는 신좌에 오를 꿈까지 꾸던 양반이다. 나름대로 사도로서 잘 나갔다.

오록스는 그때를 잊지 못하고 아직 신이 되겠다는 야망을 포기 못했다.

'한데 내가 그 야망의 불꽃을 다시 피워준다면?'

분명 오록스는 자기를 버린 저주와 노화의 여신에게 한 방 먹여주기 위해 들고 일어날 게 틀림없었다.

'일단 그 오록스가 잘 있나 확인해야 한다.'

만약 시궁창 건설 대표가 다른 놈이라면 작전도 변할 테니까. 나는 게임에서 오록스가 자주 들르는 술집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버섯 곰팡이 맥주랑 와이번 창자로 만든 소시지 좀 내오게."

"알겠습니다요."

점원에게 주문을 한 뒤, 한참을 기다리자 목표인 인물이 나타났다. 껑충하게 키가 크고, 창백한 낯빛을 가진 자였다. 마치 저승사자 같은 생김새였다. 그는 부하를 몇 데리고 와서 테이블 하나에 자리잡았다.

"좆 같은 인생···."

"대장, 술로 시름을 날려버립시다.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맞습니다. 여기 술 좀 가져와!"

나는 오록스와 부하들이 떠드는 이야기에 몰래 귀를 기울였다. 뱀파이어의 탁월한 청각 덕에 수상쩍한 모습 없이 모두 엿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항을 알아냈다.

'다행이군. 오록스가 여전히 시궁창 건설의 대장이야. 작전에 문제가 없겠어.'

흡족해하면서 계속 대화를 엿들었다. 뭔가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러다가 시궁창 건설 놈들에게 큰 불만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검은 감옥소 놈들 진짜 너무하지 않습니까? 대장. 제 놈들 시설 문제를 왜 우리가 해결해 줍니까? 유지보수는 각자 하는 건데, 간부님들에게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저희 쪽 인원들을 데려다 투입 중입니다."

"맞습니다. 더러운 놈들! 애초에 감옥소가 부서진 게 자기들이 관리 소홀로 벌어진 거잖습니까? 예산도 그쪽에서 써야 맞는데 이쪽으로 모두 짬처리했습니다."

부하들이 열변을 토했고, 듣던 오록스는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저놈들이 말하는 '검은 감옥소'란 곳은 구출할 위조 전문가인 고블린 칼센이 갇혀 있는 곳이다.

최근에 유지보수 문제 때문에 시궁창 건설이랑 검은 감옥소 사이에 다툼이 좀 있는 모양이었다.

'이거 호재인데?'

애초에 내 계획은 신력을 대가로 오록스를 설득해 같이 검은 감옥소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검은 감옥소랑 감정 다툼이 있다? 이거는 공격하게 만들기 더욱 쉬웠다.

나는 좀 더 얘기를 들어봤다. 오록스는 애써 인내하는 어투로 부하들을 달래고 있었다.

"애초에 우리 조직이 건설업자에서 출발한 걸 잊었나? 윗선에서 명령이 내려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름만 건설일 뿐, 이제는 상관도 없는 조직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다른 놈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것도 지겹습니다."

"끄응···."

부하들은 열이 받을 대로 받은 모양이지만, 대장이란 작자는 현실에 어느 정도 수긍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그의 등을 떠밀어줄 필요를 느꼈다.

'검은 감옥소와의 관계를 좀 더 험악하게 해줘야겠군. 그러면 이후에 설득할 때 잘 먹히겠지.'

사정은 알았다. 나는 자리에 일어나서, 검은 감옥소로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놈들의 얼굴을 익힌 뒤에 다시 돌아왔다.

'이제부터 할 일은 간단하지.'

곧장 상급 변신을 써서 검은 감옥소의 간수 중 하나로 변했다.

"음, 완벽하군."

덩치 큰 오거 간수로 변신한 나는 어깨를 펴고 주변을 돌아다녔다. 일부러 시궁창 건설의 졸개들이 자주 다니는 지역으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궁창 건설 놈들을 금방 마주쳤다.

"이 새끼들아! 어르신께서 지나가는데 길을 막아!"

나는 오거로 변신한 채 시궁창 건설 놈들을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퍼억! 퍽! 퍽!

지하 골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악! 크아악!"

"살려줘!"

이곳에는 말도 안 되게 강한 필멸자도 많지만, 별 볼 일 없는 놈은 더 많았다. 필멸자들의 수준이 물질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높다 해도 이런 잡어는 어딜 가나 비슷했다.

놈들은 팔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얻어맞았고, 나는 오거를 흉내 내며 콧김을 성대하게 뿜어냈다.

"다음부터 내 앞에선 이마가 땅에 닿게 기어 다녀라! 쿠하하하하! 시궁창 건설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비켜라!"

바닥에 구르는 놈들을 성대하게 걷어 차준 뒤에 당당하게 걸어갔다. 이미 주변에 싸움 구경을 하는 목격자가 잔뜩이었다. 나는 그대로 걷다가 한적한 골목에서 변신을 풀고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좋아. 아주 난리가 나겠군.'

가뜩이나 시궁창 건설에서 검은 감옥소 때문에 불만이 많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직원이 감옥소 놈에게 얻어터졌다. 당연히 발끈할 수밖에.

부하들은 더욱 큰 불만을 터뜨릴 거고, 오록스는 점점 곤란한 지경이 되겠지.

'그렇게만 되면 내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울 거다. 더러워서 다 때려치우고 싶을 테니까.'

퇴사의 유혹이란, 누구에게나 참을 수 없는 달콤한 것이기 때문이다.

< 신들의 도시(3) >

***

최근 벌어진 폭력 사태 때문에 시궁창 건설이 발칵 뒤집혔다.

"정말이냐! 그게 사실이냔 말이다!"

"맞습니다! 저희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감옥소의 오거 놈이 와서 우리 애들을 멋대로 두들기고 갔다니까요?"

"와아!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 아주 막나가겠다는 거지? 이 정도면!"

부하들의 하소연을 들은 시궁창 건설의 간부들은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그들은 곧장 대장인 오록스를 찾아갔다.

"대장! 우리 애들이 맞았답니다!"

"뭐라!"

사정을 들은 오록스는 격분했다. 부하들 때문은 아니었다.

'이미 밑바닥까지 내려온 나다. 그런데 이런 자리조차 유지 못할 상황이라니!'

이럴 때 가만히 있으면 대장 자리도 위태로울 터. 이런 비루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하는 자기 처지가 너무 비참해서 오룩스는 화가 났다.

"당장 가서 따지고 와라! 녀석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결정하겠다."

"알겠습니다!"

간부진이 검은 감옥소로 가서 이번 일을 항의했지만, 상대방은 어이없다는 반응만 보였다. 오히려 최근 보수 공사 때문에 불만을 품고 트집을 잡는 거 아니냐고 할 뿐이었다.

당연히 두 집단의 관계는 더욱 험악해졌다. 서로 날 선 비방이 이어졌고, 급기야 거리에서 물리적 충돌이 연달아 발생했다.

"감옥소 놈들이다! 따끔한 맛을 보여줘라!"

"두들겨 패버려! 시궁창 같은 새끼들에게 주제 파악하게 해주라고!"

둘의 충돌로 일대가 시끄러웠다. 하지만 신들은 관심이 없었다. 하부 조직 간의 추잡한 일일 뿐더러, 두 조직도 관련된 문제를 위로 보고하지도 않았다. 결국 양자 간의 갈등은 화해의 기미도 없이 증폭돼 갔다.

"역시 제대로 손을 봐줘야 합니다."

"거리에서 몇 놈 두들겨주는 걸로는 안 됩니다."

"맞습니다. 이참에 조직 간의 위치를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열변을 토하는 부하들의 태도에 오록스는 일단 동조했다. 하지만 그는 분이 가시고 머리가 냉정해지자 이리저리 손익을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애매한데··· 이번 일로 얻을 이득이 그리 크지 않아. 위험은 크고.'

문제는 안 할 수도 없는 노릇. 하긴 해야 하는데 얻을 이득은 애매했기 때문에 오록스는 빠른 결정을 할 수 없었다.

"애들 잘 모아놓고, 연장도 점검해."

일단 그렇게 말해두고는 오록스는 고민에 빠졌다. 평소 자주 가는 술집에서 술을 기울이고 있는데, 한 남자가 그에게 접근해왔다.

"누구시오?"

오록스의 물음에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소렌이라 합니다. 괜찮으시면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키가 훤칠하고 매우 잘생긴 뱀파이어였다. 설명하기 힘든 매력과 비범함을 갖춘 자였기에 홀대할 수도 없었다. 결국 오록스는 끄덕였다.

"뭐, 좋소."

이후 소렌이란 남자가 꺼내놓은 얘기는 놀라웠다.

"뭐? 감옥소에 갇힌 자를 하나 구출하고 싶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사례는 후하게 하겠습니다."

"아니, 어찌 내게 그런 요구를 하는 거요?"

"이미 물정 밝은 이들에겐 소문이 났지요. 시궁창 건설이 검은 감옥소를 칠 거라고요. 가는 김에 제 부탁도 들어주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허허, 이거 참···."

오록스는 난처한 기분이 됐다. 소문이 돌고 별놈이 다 끼어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라면 소리를 질러 쫓아내겠지만, 상대는 귀한 신분으로 보여서 완곡히 거절하기로 했다.

'품위와 기품이 느껴지는 게 시정잡배는 아니군. 잘 얘기해서 보내야···.'

그리 생각하던 오록스는 상대가 사례로 제시한 것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지금 뭐라고 했소?"

"신력을 드리겠습니다. 괜찮은 대가라 생각합니다만."

"신력이라 했소? 얼마나!"

그 물음에 소렌은 예상을 뛰어넘는 양을 제시했고, 오록스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러다 덜컥 걱정이 일었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정도의 신력을 갖고 필멸자인 내가 안전할 방법이 없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룬델에 들어갈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아룬델로!"

추방자들의 지하도시가 아니라, 질서와 규율이 잡힌 아룬델이라면 안전했다. 원한다면 좋은 조건으로 신력을 판매할 수도 있을 테고.

'아니···, 아니지.'

오록스는 신력을 팔 게 아니라 자신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주와 노화의 여신 헤르카테에게 계속 충성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나는 버려진 존재야. 그렇다면···!'

사도직에서 쫓겨난 오록스가 끈질기게 이쪽 세계에서 버티고 있는 건 신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는 강자다. 물질계로 가면 영웅으로 행세하며 호의호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굳이 이 똥통을 자처하는 건 신좌로 가는 길 때문.

이 세계에선 신이 될 방법을 찾는 게 물질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기 때문이다. 이곳은 신들뿐만이 아니라, 신에 가까워진 필멸자들도 몰려드는 세상이니 온갖 방법이 공유됐다.

즉, 아룬델이 자리잡은 차원은 신계의 등용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태어난 토박이가 아니라면 필멸자는 여기 오는 것조차 극히 어려웠다.

오록스는 그게 가능했던 강자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신좌에 욕심을 갖는 게 당연했다. 소렌이 제시한 신력으로 바로 신이 되긴 부족했으나, 희망을 갖기엔 충분했다.

'그 신력을 기반으로 사업을 전개하면 새 인생을 살 수 있을 거야.'

그는 짧은 시간 동안 깊게 고민했고 결정을 내렸다.

"좋소. 하겠소이다."

그는 이제 오랜 설움을 이겨내고 신의 길을 걸을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 * *

신력은 게임 속에서 CP란 단위로 등장한다. 'Celestial Points'의 약자로, 아룬델 같은 장소에선 모으면 모을수록 필멸자는 신에 가까워진다.

필멸자가 반신의 지위를 얻어 승천하려면 최소한 15만 CP는 필요했다. 내가 작전 명목으로 스카브누그와 아우레케아에게 받아낸 건 5만 CP.

신좌에 오를 분량의 1/3이나 됐으니 두 신이 아주 넉넉하게 인심을 쓴 셈이다.

물론 반신과 소신 사이에 어머어마한 격차가 있는 만큼, 소신인 그들에게 5만 CP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는 금액이긴 했다.

나는 그렇게 받은 5만 CP를 전부 오록스에게 제시하지 않았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지.'

오록스에게 제시한 건 3만 CP. 나머지 2만 CP는 내 주머니로 들어왔다. 중간에 해먹은 건데, 솔직히 이 정도는 고생하는 거에 비하면 소소한 수고비라 할 수 있다.

'나 같은 고급 인력은 돈이 많이 든다고.'

본디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찾아가는 법. 이 몸이 한 번 나서는 일당은 얼마 전에 2만 CP라 정했다. 그러니까 이건 아무 문제도 없는 정당한 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흠··· 그나저나 넘겨주기로 한 3만 CP도 아깝군.'

그런 생각이 들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과만 좋으면 되잖아? 굳이 3만 CP를 지급해야 할까?'

때때로 약속이란 제 기능을 잘 못하는 법이다. 어른의 세계에서는 특히나 더더욱. 나는 상황을 봐서 일의 대가로 제시한 3만 CP를 챙기기로 했다.

"총 5만 CP라···."

큰 재산이다. 아룬델로 가면 뭐든 살 수 있겠지.

'좋아, 기왕이면 내가 다 먹자.'

그래도 일단은 검은 감옥소 습격이 우선이다. 칼센을 빼와야 뭐가 되니까. 이번 일에 실패하면 투자자인 스카브누그와 아우레케아 앞에서 면이 안 설 터.

[은혜 갚는 떡두꺼비 성능이 왜 이런가?]

벌써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할 스카브누그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성공해서 능력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오록스 님. 미욱한 솜씨를 가졌습니다만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겁니다."

내가 직접 끼겠다고 하자 어떻게든 전력 증강에 골몰하고 있는 오록스는 좋아했다. 엘더급 뱀파이어란 게 이곳에선 많이 튀는 힘은 아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고맙소이다. 내 근처에서 힘 좀 쓴다는 놈들을 몰래 데려오고 있소. 며칠 안에 준비가 끝날 터이니 그때 들이칩시다."

"알겠습니다."

준비는 순조로웠다. 그간 당한 게 많았던 시궁창 건설의 조직원들이 열성적으로 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록스 역시 이번만 하고 튈 생각이라 착복한 재산을 대부분 투입한 것 같았다. 굉장히 몸값이 비싼 용병들도 여기저기서 도착했다. 지켜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와, 이거··· 감옥 쪽 애들이 박살 나겠군."

* * *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디데이가 되자, 시궁창 건설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들이쳤고, 검은 감옥소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미쳤나! 미쳤어! 이건 선을 넘는 행동이다!"

검은 감옥소의 간부가 비명을 질러댔다. 그의 외침이 놈들의 심경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아무리 앙숙이라곤 해도 설마 같은 하부 조직끼리 사생결단으로 쳐들어올 줄이야. 상식을 가진 이라면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이었다.

이딴 짓을 벌였다가는 황무지 평의회의 신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찮은 일이라 필멸자들에게 맡겨뒀다고는 하나, 조직이 엉망이 된다면 신들도 나설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검은 감옥소 입장에선 감옥이 직접 공격 받는 일까진 생각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쪽의 대장 오록스는 이미 다 때려치우기로 했다. 퇴사를 결정한 사람이 다 그렇듯 그도 빠꾸가 없었다.

"다 갈아버려라! 이 새끼들 봐줄 필요 없어! 뭐든 내가 책임지겠다!"

대장의 호쾌한 태도에 시궁창 건설 놈들은 그간의 울분을 쏟아냈다. 붙잡혀 자비를 구하는 자들조차 대가리를 모조리 깨버리고 있었다. 그리곤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껄껄 웃어댔다.

'살벌하구만.'

시궁창 건설에 낀 나는 적당히 싸우며 눈치를 봤다.

뭐랄까, 이쪽 세계에는 강자가 너무 많았다. 물질계에선 한가락 하던 나도 여기선 평범했다.

'괴물들 천지네.'

토박이가 아닌 필멸자는 하나 같이 괴수들이었다. 하부 조직이나 전전하는 걸 보면 이쪽에 와서 일이 잘 안 풀렸던 모양이지만, 다들 고향에선 영웅호걸이라 불렸던 몸들이다. 나보다 강한 이가 우글우글했다.

'게임에서도 최고의 고렙 지역이었는데 실제론 더하네.'

다행히 내가 열심히 싸울 필요는 없었다. 케일런에게 받은 그림자 기술로 적당히 원거리 딜이나 하고 추잡스런 근접전은 피했다.

역시 멀리서 공격하는 게 선비다운 기품이 있어서 좋았다. 앞에서 칼질을 하는 건 백정이나 하는 짓거리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무리와 함께 다니다 마침내 목표인 칼센을 찾았다.

"칼센인가? 스카브누그께서 날 보내셨네."

"오오! 위대한 분께서 저를 잊지 않고! 케케켁!"

늙은 고블린 마법사이자 위조범이 감격해서는 눈물을 쏟아냈다. 이윽고 한바탕 휘저은 무리는 재빨리 빠졌고, 나도 따랐다.

"성공이다! 아주 제대로 먹여줬어!"

"크하하하하! 그 새끼들 얼굴 봤지!"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다들 약탈로 한밑천 벌어서 기분이 좋은 듯했다. 이제 모두 기존의 터전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예정이다.

그런 깽판을 쳤으니 지하도시에서 머물긴 틀렸다. 다행히 아룬델 외곽에는 여기가 아니라도 추방자들의 정착촌이 몇 개 더 있었다.

오록스처럼 아룬델행을 약속받은 이가 아니라면 그리로 떠나야 할 터였다.

"소렌. 이제 결산을 좀 했으면 하오."

탈출은 성공적이었고, 지하 도시의 외곽 부분에 도착했을 때 오록스가 다가와 말했다. 이미 주변은 거주지가 없는 비밀스러운 터널 지대. 이대로 움직이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약속한 신력을 드리지요."

계약금으로 먼저 1만 CP만 줬었다. 나머지 2만 CP를 주겠다고 하자, 오록스 놈이 다른 소리를 했다.

"추가금을 내놓으시오. 약속한 걸로는 부족하오."

"뭐라?"

내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건 작은 신상처럼 생긴 아티펙트였다. 보자마자 뭔지 알 수 있었다.

'신력을 감지하는 물건이군. 귀찮은 걸 갖고 있었네.'

오록스는 저 아티펙트 덕에 내가 약속한 3만 CP 외에도 신력을 더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정확한 양은 몰라도 욕심이 났겠지.

"사정이 변했소. 이제 나는 기반을 잃었소. 더 내놓으시오. 안 그러면 약속한 이 고블린을 넘겨줄 수는 없소이다."

이런 날강도를 봤나. 어떻게든 더 뜯어내겠다는 심보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역시 이쪽 놈들은 심성부터 썩었구나.'

일단 거부했다.

"아룬델에 데려가겠다고 한 약속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제 도움이 필요할 텐데 이러시면 서로 곤란합니다. 제가 제시한 금액은 귀하의 아룬델행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그러자 오록스가 무기를 뽑아들더니 음흉하게 웃어댔다.

"아, 이쪽은 새로운 방법이 생겨서 말이오. 굳이 아룬델로 갈 필요가 없어졌지."

아마 피신할 만한 다른 차원이나 장소가 생긴 모양이다. 굳이 내게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기존의 약속을 깨고 다 털어먹기로 한 거로군.

"얼마나 원하십니까?"

"다. 가진 걸 전부 주시오."

"와우······."

이거 일이 참 재밌게 됐네. 사실 나도 계약을 이행하는 척하고 나중에 3만 CP를 도로 빼앗으려 했다. 다만 어떤 명분을 내세울까 고민 중이었는데 알아서 저리 나올 줄이야.

"이거 참 욕심이 많은 양반이셨군. 크흐흐흐."

나직하게 웃은 나는 허공을 향해 물었다.

"저쪽에서 먼저 계약을 깼습니다. 이러면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오록스는 갑자기 내가 누구에게 묻는지 의아한 표정이 됐다. 그때 허공에서 답이 돌아왔다.

[그건 그렇지. 케켁.]

뭔가 간사한 고블린의 목소리였다.

"그럼 비용은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칼센을 이렇게 데려왔으니 말입니다."

[뭐, 자네 뜻대로 하게. 우리야 목적만 이루면 되니까. 성공 보수라고 해두지. 케케케켁!]

그 말과 함께 어둠 속에서 두 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블린의 신 스카브누그와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였다.

신들은 한껏 찢어진 입으로 험악한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이거 다 죽여서 입을 막아야겠는데? 안 그런가? 아우레케아?]

[마침 배고팠는데 잘 됐네!]

아, 맞다. 저 미친 하피는 식인이 특기였지.

"이 무슨!"

내 앞에 있는 오록스는 갑자기 나타난 신들을 보고 안색이 핼쑥해졌다.

나는 별 말없이 손을 흔들어줬다.

"잘 가라."

공짜로 쓰긴 괜찮은 녀석이었어, 넌.

< 신들의 도시(4) >

***

오록스는 분명 나보다도 강한 존재였다. 비록 그가 이쪽 세계로 와서 허드렛일을 하는 처지가 됐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불멸자인 신의 앞에선 소용이 없었다. 그와 부하들은 스카브누그와 아우레케아의 공격에 삽시간에 찢어발겨 졌다.

부우욱!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가 독수리를 닮은 새의 다리로 사람을 오징어포처럼 찢어버렸다.

"끄아아아아악!"

공포에 질린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래도 바로 절명한 자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괜히 생명력이 강한 놈들은 몸이 찢어지고도 살아있었는데, 아우레케아는 크게 입을 벌리고 그들을 잡아먹었다.

쩌어억!

그녀의 머리는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었지만, 포식자의 본모습을 드러내자 입이 귀밑까지 길게 찢어졌다.

크게 벌린 입으로 사람을 집어넣고는 뼈째로 오도독, 오도독 씹어먹기 시작했다. 피가 터져 아우레케아의 턱을 타고 끈적하게 흘러내렸으나 그녀는 즐거운 얼굴이었다.

'뭐랄까, 판타지 세계에선 치킨이 사람을 찢는군.'

식인을 시작하자 아우레케아가 내게 보여줬던 다소 맹하고 무해한 느낌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굶주린 야수에 불과했다. 한동안은 주변에 갑옷과 의복, 사람의 근육이 찢어지는 소리만 가득찼다.

그렇게 하피 신의 만찬이 끝났을 때 주변은 피와 살점, 어지럽게 흩어진 내장과 박살난 장비만이 가득했다.

그 잔혹함 속에서 아우레케아는 기괴하게 웃어대고 있었고, 지켜보던 고블린 신 스카브누그는 혀를 찼다.

[아주 추잡스럽구만. 소렌, 우리 같은 문명인은 저런 친구랑은 멀리 지내는 게 좋네.]

별로 설득력이 없는 소리였다.

스카브누그 저 양반도 상대를 농락하며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 죽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피 신의 사냥해 먹는다는 행위가 훨씬 건전할지도 모르겠다. 스카브누그에게 당한 자들은 어린애가 망가뜨린 장난감처럼 여기저기 엉망이 돼 죽었으니까.

"···문명이란 어렵군요."

그래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스카브누그가 오록스에게 회수한 1만 CP를 내줬기 때문이다. 스카브누그는 보상만큼은 아주 후했다.

아무튼, 그렇게 상황이 잘 정리되나 싶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우우윽! 우웨에에엑!]

갑자기 아우레케아가 먹었던 필멸자들을 성대하게 토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벌어진 주둥이로 반쯤 소화된 살점과 뼈가 어지럽게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여태 맡아본 적 없는 좆같은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우욱··· 씹!"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쏟아낸 토사물이 출렁이며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걸 본 순간 뭔가 이상을 감지했다.

'하피 신이나 되는 존재가 먹이를 소화 못 해서 토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나는 서둘러 스카브누그를 불렀다. 그는 이미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좋지 않구만.]

곧 출렁이던 토사물 덩어리가 뭉치더니 위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일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뭔가 크게 잘못됐다.'

인생이란 얄궂어서 안 좋은 직감이란 빗나가는 법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 덩어리에서 신력이 흘러나오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곧 그 덩어리가 입을 열었다.

[끌끌! 이거 참, 생각지도 못한 일이로구나. 자네들이 내 전직 사도에게 재밌는 짓거리를 해줬어.]

늙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스카브누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주와 노화의 여신 하르카테인가?]

[그렇다. 이 조악한 고블린아.]

[이런, 다른 신에게 들키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 말이야. 케케켁!]

스카브누그와 아우레케아는 이게 어디까지나 필멸자 간의 다툼으로 국한되길 원했다. 하지만 이제 다 틀렸다.

[아, 그런가? 자네들은 성공할 뻔했지. 이 늙은이가 괘씸한 전직 사도놈의 육체에 장난질을 해놓지 않았다면 말이야.]

그 말에 아우레케아는 깜짝 놀랐고, 스카브누그는 당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오록스가 죽거나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녀에게 연락이 가도록 해둔 모양이다.

'흠···. 이거···.'

나는 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야 빡대가리가 맞으니까 그렇다 쳐도, 잔머리와 책략의 달인 스카브누그가 이런 수작에 당한다고?

마음속에서 의심암귀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걸 겉으론 드러내지 않았다.

스카브누그는 앞으로 나서 너스레를 떨며 헤르카테에게 답했다.

[이런 식으로 만나서 유감이군. 케켁. 필멸자들이 좀 뒤진 하찮은 일이니 좋게 넘어가지 않겠나? 적절한 배상을 하겠네. 케르르.]

[하찮은 일이니 넘어가자고? 어림없는 소리를 하는군. 끌끌끌. 너희는 황무지 평의회 하부 조직을 분탕질해 파괴했다. 여기에는 뭔가 의도가 있는 거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어.]

[이거 영 말이 안 통하는 할망구로군. 케르르. 그래서 원하는 게 무엇이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너희는 이대로 황무지 평의회에 출석해 죗값을 치러야 한다. 얌전히 구는 게 좋을 게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평의회로 가면 스카브누그, 아우레케아보다 강한 신들도 여럿 있을 터. 그야말로 목숨줄을 남의 손에 맡기는 꼴이 아닌가.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마라! 이 추물아!]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가 빼액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상대가 서늘한 말투로 경고해왔다.

[황무지 평의회와 갈 데까지 가 보겠다고? 이번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겐가? 너희는 이제 평의회의 살생부에 오를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스카브누그가 여유로운 태도로 답했다.

[우리가 아룬델로 들어가기 전에 잡기는 어려울 것이네. 내키는 대로 해보게나.]

[끌끌끌, 아룬델이라고 안전할 것 같나?]

[걱정은 고맙지만, 면상이 너무 역겹구만. 이제 그만 사라져 주게.]

스카브누그는 마법을 일으켰고, 토사물로 만들어진 형체가 퍼엉, 하고 터져나갔다. 사방에 끈적한 살점이 어지럽게 튀었다.

"아룬델까지 문제없이 갈 수 있는 겁니까?"

스카브누그는 끄덕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저쪽도 체면이 있으니 우리를 잡겠다고 중신격이나 대신격이 나서진 않을 걸세. 기껏해야 소신격 몇 달라붙겠지. 그 정도면 우리 솜씨로 충분히 따돌리고 아룬델에 들어갈 수 있다네. 케륵! 케륵!]

문제는 그 후라고 했다.

[그 못된 할망구가 아룬델이라고 안전할 거 같냐고 했지? 분명 뭔가 대비가 있을 걸세. 추방자라고 해도 도시에 끄나풀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렇군요. 한데 아우레케아 님이 아룬델로 들어갈 수 있는 겁니까? 추방자인데."

내 물음에 스카브누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정식으로는 못 들어가지. 하지만 다소 융통성 있는 방법이라면 안 될 게 뭐가 있겠나?]

원래 계획도 아룬델로 숨어 들어간 뒤에 서류를 조작할 것이었다고 했다.

[아룬델에 이쪽의 편의를 봐줄 만한 녀석들이 있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저 할망구 놈이 뭔가 수작질을 부릴 게 뻔하니, 믿기가 어렵거든.]

스카브누그의 설명으론, 아룬델에 추방자를 위해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조직이 있다고 했다. 추방된 신격을 도시 안으로 들여보내 주거나, 안전가옥 같은 걸 제공한다고. 하지만 이제 황무지 평의회의 입김이 닿을 테니 전적으로 믿기가 어렵게 됐단다.

[그 조직의 놈들은 이득에 움직이지. 평의회 놈들이 그럴 듯한 걸 제안하면 이쪽을 팔아먹을 확률이 높아.]

"문제로군요."

그때 입을 다물고 있던 아우레케아가 소리를 질렀다.

[그만 떠들고 움직이자! 도시로 갈 때까지 안 잡힐 자신이 있다지만, 여유를 부려도 되는 게 아니야. 재수 없으면 가는 길에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어.]

틀린 소리는 아니었던지라 우리는 곧장 움직였다. 일행은 총 넷이었다.

고블린의 신 스카브누그.

스카브누그의 사도이자 위조범 칼센.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

그리고 이 소렌 다켄발트까지 말이다.

우리는 깊고 어두운 토굴을 가로질렀다. 스카브누그의 설명에 의하면 이쪽은 밀수를 위한 통로로 도시까지 이어져 있다고 했다.

[이 굴들은 미로와 같지. 물질계의 어떤 미로보다도 복잡해서 필멸자가 갇히면 탈출하는 데는 수백 년이 걸릴 거야.]

"그 정도입니까?"

[실제로 한 놈을 가둬본 적이 있거든. 꽤 괜찮은 유희거리였지. 생명을 유지할 만한 장치를 주고 아둔한 머리로 이 미로를 탈출하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구경하는 거 말이야. 정확히 314년이 걸렸나? 케케케켁!]

"······."

[그 고생을 하고 나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집에 가고 싶다였나? 듣고는 폭소했지. 케르르륵!]

실로 악랄한 짓이었는데 스카브누그의 태도에는 아무런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개미 한 마리로 실험을 해봤다는 듯한 모습이다. 저 모습이 신에게 필멸자가 어떻게 비추는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자네는 걱정하지 말게. 이 스카브누그가 인도할 테니까. 우리는 헤매지 않고 아룬델까지 닿을 거야. 문제는 도착 후지.]

문제는 아룬델에서 우리를 도울 조력자였다.

황무지 평의회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우리를 숨겨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존재여야 했다.

우리는 미로를 지나며 계속 고민을 이어갔다.

* * *

[없어! 없다고!]

하피의 신 아우레케아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안타깝게도 두 신은 심하게 인망이 없었고, 내부에서 도움을 줄 이를 찾질 못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아룬델에 근접했음에도 도시로 향하지 못하고 근처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냥 말씀하신 그 조직이란 곳과 접촉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내 제안에 스카브누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그 조직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래. 놈들이 우리를 팔아먹는 건 시간 문제야.]

"흐음···."

[안으로 들어가는 건 언제든 가능해. 하지만 신적인 조력자가 꼭 필요하지.]

그 말에 나는 문뜩 떠오르는 게 있어서 물었다.

"스카브누그 님이 마련해 주시면 안 됩니까? 아우레케아 님과 다르게 추방자도 아니신데···."

[아, 그게 말일세.]

스카브누그는 면목 없다는 듯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아룬델에서 모든 거래가 정지돼서 말일세. 케케케······. 저 새대가리처럼 쫓겨난 건 아니지만 처지가 별로 안 좋긴 하지.]

아니, 신용불량에 파산자라니!

갑자기 골치가 아파졌다. 같이 일하는 두 신이 하나 같이 정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대체 어쩌시다···?"

[사연을 말하자면 기네. 일단은 도시 안에서 별로 도움이 안 될 거란 것만 알아두게.]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한 두 신은 내게 매달려왔다.

[떡두꺼비! 도와주게!]

[도와줘! 떡두꺼비!]

아니, 내가 뭐든 해주는 그 귀 없는 파란 고양이도 아니고···. 신이란 작자들이 애걸복걸 하고 양쪽에서 매달려 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가 뭘 하겠습니까? 필멸자 주제에."

신들이 못하는 일을 어떻게 하라고? 그럼에도 아우레케아가 더욱 매달려왔다.

[여기서 계속 시간 보내면 안 돼! 결국 잡힐 거라고!]

아우레케아는 약간 패닉이 오는지 자신의 화려한 깃털을 뽑아대고 있었다. 닭털 같은 게 여기저기 흩날렸다.

"그건 아는데··· 저도 방법이···."

그러자 스카브누그가 나라면 가능할 거라고 했다.

[자네는 은혜 갚는 떡두꺼비로 유명하네. 우리랑 다르게 아룬델에 있는 신들에게 호의를 살 수 있다는 거지.]

"그래서요?"

[신들을 잘 구워삶아서 조력자를 만들어 보란 말일세. 우리가 넉넉하게 신력을 내어줄 테니 말이야.]

듣기만 해도 난도(難度)가 너무 높았다. 결국 돈 줄 테니까 너 혼자 가서 해결 좀 하라는 거 아닌가?

딱 잘라 거절하려 했는데 스카브누그와 아우레케아가 내놓겠다는 신력에 멈칫하고 말았다.

"그 정도나?"

둘은 무려 20만 CP를 내놓겠다는 것. 그러자 내 머리가 부산하게 굴러갔다.

'그걸 다 해먹을 수야 없겠지만··· 예산을 반만 쓰고 성공하면 대박이겠는 걸?'

왜냐하면 현재 내가 5만 CP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추가로 받은 것 중에 반을 해 먹으면 10만 CP.

합치면 총 15만 CP다.

이것은 의미 있는 숫자였다. 필멸자가 반신으로 승천하는데 드는 최소의 신력이 바로 15만 CP였기 때문이다.

'잠깐, 이 몸 반푼이지만 불멸자가 되는 거 아닌가?'

물론 신이 되는 게 꼭 좋은 건 아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이 여기도 적용되니까.

신좌에 오르면 물질계의 일에서 물러나야만 한다. 게다가 맘에 안 드는 놈이 생겨도 벼락을 날릴 수도 없고, 손발이 묶이는 것이다.

하지만, 꼭 반신에 오르려는 게 아니라도 아룬델에서 신력은 아주 매력적인 자산이었다. 그걸로 할 수 있는 게 도시에 널려 있었으니까.

결국 수락했다. 거절하기엔 너무나 많은 신력이었다.

"맡겨주십시오."

그렇게 나는 20만 CP를 들고 아룬델로 향했다.

이 투자금을 챙길 생각에 발걸음이 설레기 그지없었다.

< 신들의 도시(5) >

***

나는 이상한 신 이인조의 의뢰를 받고 움직이는 중이다.

하나는 새대가리 멍청이고, 다른 하나는 수상쩍은 놈이다. 원래라면 이런 거래는 잘 안 하는 편이지만, 워낙 대가가 달콤해서 어쩔 수 없었다.

필멸자가 만 단위의 CP를 수집하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다. 물질계에 날고 기는 놈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반신으로 승천하는데는 줄줄이 실패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단 삼촌도 그런 경우지.'

초 엘리트 코스로 성장해온 전설적인 네크로맨서도 신이 되는데 실패했던 걸 보면, 15만 CP를 모아서 반신격으로 승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한데 지금 이번 건으로 받은 공작금은 무려 20만 CP.

'도저히 안 할 수가 없네.'

현재 혼자는 아니다. 스카브누그가 시종으로 쓰라고 고블린 위조 전문가 칼센을 붙여줬기 때문.

마법에도 깊은 소양이 있는 만큼 도움이 될 거라나? 아무래도 20만 CP나 맡긴 것 때문에 붙인 감시역 같은데···.

"다켄발트 님, 같은 사도끼리 열심히 해봅시다. 케켁!"

칼센은 인상 좋게 웃어 보였다. 문제는 고블린의 얼굴이란 점.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헤벌쭉 웃는 게 배가 고프니 네놈을 잡아먹겠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뭐, 그래도 이 양반도 만만치 않은 작자니 친하게 지내는 게 좋겠지.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칼센 님."

우리는 함께 아룬델로 향하는 지하 터널을 나아갔다. 그때 갑자기 왼손의 낙인에서 신호가 왔다. 핏빛 새벽의 여신이었다. 나는 칼센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거리를 벌렸다.

"여신님?"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는 힘이 굉장히 생생했다.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근처에 있는 듯한 이 느낌. 그래서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룬델에 계시군요!"

긍정을 뜻하는 붉은 빛이 반짝였다. 마음속에 반가움이 확 피어올랐다. 그녀는 이쪽 세계로 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만한 존재기 때문이다. 우리는 운명 공동체였다.

한데 여신님이 근심하는 듯한 감정을 보내왔다. 그리고 빛이 깜빡이는 게 도와줄지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내가 맡은 일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사실 아룬델로 잠입하는 데 여신님의 도움을 받으면 간단하긴 하지.'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번 일은 불법적이며 내 개인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한창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여신님을 끌어들일 수 없다.

'단순히 도의적인 문제가 아니야.'

여신님은 사도인 내 힘의 원천이다. 만약 여신이 몰락한다면 나도 약해진다. 뭣보다, 그녀는 내가 공을 들여 육성한 존재다. 당연히 문제될 일에는 끼어들게 둘 수 없었다.

"고귀한 여신이시여, 그 자애로운 마음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게 어려운 상황은 아니니 괜찮습니다."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자 뭔가 섭섭해하는 듯한 감정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일단 알겠다고 답하는 것 같았다.

'아룬델에 온 이상 일이 틀어지고 내가 위험해지면 여신님이 어떻게든 끼어들겠지.'

그걸 생각하면 여신님이 나서지 않게 알아서 잘 하는 게 중요했다.

"제게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조만간 있을 만남을 기대하겠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설레는 감정이 돌아왔다. 나는 여신님이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지?'

알 수가 없다. 물어봐도 알려주질 않고 여신님의 기척이 빠르게 사라졌다. 마치 도망가는 것만 같았다.

아무튼, 납득해줘서 다행이다. 내 일에 휘말렸다가 핏빛 새벽의 여신이 아룬델에서 추방자 신세가 된다면 대단히 난처할 테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케르르."

돌아와보니 칼센이 궁금한 표정이었다. 나는 별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는 계속 걸었다.

"서두르시지요."

그렇게 지하 터널에서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고인물인 내 지식에는 다양한 방법이 떠올랐다.

아룬델은 거대한 도시고, 완벽해 보여도 곳곳에 빈틈이 있으니까.

'단순히 도시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아. 솔직히 식은 죽 먹기지.'

문제는 내 의뢰인인 두 신이 안전하게 머물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 고민이 됐다.

"칼센 님께선 특별히 생각해 두신 방법이 있습니까?"

"저는 없습니다. 스카브누그께서 말씀하시길 다켄발트 님께 맡겼으니 열심히 보조하라고 하더군요. 필요하신 걸 말씀하시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케륵!"

"알겠습니다."

이후 교묘한 길을 통해서 아룬델의 내부로 잠입했다. 지금은 버려진 밀수꾼의 루트였다.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이제부터지.'

통로 밖으로 나가자 신들의 사는 거대한 도심이 눈앞에 펼쳐졌다. 엄청난 위용에 입이 절로 벌어진다. 모니터 속 그래픽과는 차원이 다른 광경이었다.

신들과 비범한 필멸자들이 평범하게 주변을 걷고 있었다. 신이란 특별한 존재가 제법 흔하게 보이는 게 이 도시의 놀라운 점이다.

'맙소사··· 저거 헤라클레스 아닌가?'

뭔가 그리스로마 신화의 세계관에서 온 듯한 거한을 보니 입이 쩍 벌어졌다. 사자 가죽을 머리에 쓰고 활을 든 모습이 아주 멋드러졌다. 달려가서 사인이라도 받고 싶을 정도로 근사한 신이었다. 그렇게 친숙한 신도 있는 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도 많았다.

'저 눈알 달린 촉수 덩어리는 대체 뭐야···? 이름표가 있는데, 오투예··· 뭐시기?'

촉수 덩어리 신의 뒤로 외계인 같이 생긴 괴종족이 북을 치며 따르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주변의 풍경에 온 정신을 빼앗길 것만 같다. 하지만 지금은 말로 표현하기도 힘든 이 도시의 장엄함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우선 근처에 있는 광장으로 향했다.

'요일이랑 시간을 확인해야 해.'

광장에는 데이데이트 기능이 붙어 있는 거대한 시계가 있었다. 가서 확인해 보자 오늘은 15월 77일이었다.

"헛! 77일!"

역시 날짜를 보러 오길 잘했다. 77일이란 걸 보자마자 퍼뜩 떠오른 게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십니까? 다켄발트 님."

"네, 괜찮은 방법을 찾은 것 같습니다."

매월 77일은 석 달에 한 번씩 오는데, 그날은 별이 없는 밤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별이 없는 밤에는 유명한 '아룬델의 유령'이 돌아다녔다. 나는 이런 점을 칼센에게 설명했다.

"아룬델의 유령이라 하면!"

"네, 알고 계신 게 맞습니다."

아룬델의 유령은 한때 도시의 의회에도 나아갔던 고명한 신인데, 죽어서 유령이 된 상태다.

신이란 불멸자니 언젠가 부활하긴 하겠지만, 일단은 망령의 상태로 생전의 영민함을 잃은 채 도시를 떠돌고 있었다.

그 망령은 대신격이었던 존재라 누가 어떻게 하질 못하고 있었다. 내버려 둬도 자질구레한 문제만 일으키는 정도니 그냥 방치하는 중이랄까.

'신출귀몰해서 애초에 잡기도 힘들고 말이야.'

오히려 잘못 건드려 그자가 원령이라도 되어 버리면 도시의 재앙으로 강림할 거다. 대신격의 원령이라니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우리가 아룬델의 유령에게 호의를 얻으면 도시에 안전지대를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대신격 유령의 힘이니까요."

칼센은 동의했다.

"확실하긴 하겠군요. 아룬델의 유령의 힘이면 황무지 평의회 놈들이 무슨 지랄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케켁! 하지만 무슨 수로 그 해량하기 힘든 존재의 호의를 얻겠습니까?"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확언하자 칼센의 눈이 커졌다.

"정말이십니까? 허언을 하실 리는 없고, 대단하시군요···. 과연 스카브누그께서 인정하신 자답습니다. 케케케···."

칼센은 자기 신의 과대평가 때문에 내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아룬델의 유령에 관한 내력을 알면 방법이 보입니다. 사실 아룬델의 유령이 계속 떠도는 건 어떤 물건을 찾아 헤매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룬델에 있는 어떤 유물을 계속 찾고 있다. 그걸 건네주면 거래가 가능했다.

그 유물이 재밌는 게, 게임상 아룬델에 빨리 오면 올수록 구하기 쉬운 곳에 있다는 거다.

'약해도 무리해서라도 아룬델에 빨리 오면 이득을 볼 수 있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물의 소유주가 계속 변해서, 늦게 올수록 강한 신에게 넘어가 얻기 힘들어진다.

지금은 나쁘지 않다. 최속은 아니지만, 분명 빠르게 온 편이니까. 일곱 봉우리도 정리되기 전의 타이밍이니 쉽게 얻을 수 있을 듯했다.

나는 고인물답게 해당 아티펙트의 이동경로를 다 외우고 있었다. 일단 순서대로 찾아가 보면 될 듯했다.

"제가 그 물건이 있을 걸로 추측되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함께 가보시죠."

"놀랍군요! 다켄발트 님. 알겠습니다."

이후 유물을 찾아갔는데, 처음 두 곳에서 허탕을 쳤다.

'역시 날로 막긴 어려웠나. 예상하던 바긴 하지만···.'

첫 장소는 벼룩시장인데 거의 공짜로 구할 수 있고, 두 번째 장소는 골동품 수집가의 가게다. 거기서도 간단한 심부름 후 받을 수 있다. 아쉽지만 좀 더 빨리 아룬델에 도착했어야 가능했던 곳이다.

세 번째부터는 약간 구하기 어려워진다. 유물이 경매장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골동품 가게에서 유물의 가치를 알아챈 수집가가 구매해 경매장에 출품한 것이다.

"경매장으로 가시죠. 아마 거기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경매장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에서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됐다.

"있습니다! 다켄발트 님께서 말하신 유물이 있네요."

경매장의 기록을 확인한 칼센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찾는 물건이 몇 번이고 유찰됐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좀처럼 주인을 찾지 못한 그 유물은 오늘밤 경매에 다시 나온다고 했다.

"다켄발트 님, 말씀하신 유물이 영 인기가 없군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케르륵!"

"일이 잘 풀렸습니다. 그런데 경매에 참가하는 문제 말입니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룬델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니 적법하게 경매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잘 됐군요."

내 지식 덕에 일이 술술 풀리고 있었다. 우리는 희희낙락해하며 그날 밤 경매에 참가했다. 나는 일부러 상급 변신을 사용해 정체를 감췄다.

"오, 신들도 많이 왔군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온갖 신들뿐 아니라 유력한 지위를 가진 필멸자들도 참가했다. 다들 여러 차원에서 모인 진귀한 물건에 기대가 큰 듯했다.

"경매야 말로 신들의 유희 중 하나지요. 그들은 별 쓸모도 없는 희귀한 물건에 막대한 돈을 퍼붓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노리는 유물은 몇 번이나 유찰된 만큼 크게 걱정할 것 없을 겁니다! 케르르!"

실제로 경매는 상당히 재밌었다. 구경만 해도 눈이 돌아갈 온갖 물건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우주 나무의 씨앗.

-시간의 신이 남긴 모래 시계.

-정령왕의 왕관.

-붕괴된 별의 에너지.

등등.

보기만 해도 놀라운 물건들 투성이었다.

'역시 아룬델이다! 물질계라면 구경도 못해볼 사기템들이 가득하잖아?'

갖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어떻게든 이번에 투자 받은 20만 CP의 신력을 해먹을 필요를 느꼈다. 감시역으로 붙은 칼센을 따돌리고 말이다.

그러던 중 마침내 노리고 있는 물건이 등장했다.

"이번 물건은 고대신의 신력이 깃든 다섯 줄기의 나무 지팡이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사회자의 열띤 목소리에도 반응은 미지근했다. 역시 몇 번이나 유찰된 물건다웠다.

나는 기분 좋게 입찰했다.

"2천 CP."

입찰 최소 가격이었다. 원래 5천 CP였는데 유찰 탓에 가격이 내려간 것이다. 그 저렴한 가격에 기분이 흐뭇해졌다. 투자금을 조금 쓰면 쓸수록 많이 해먹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한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3천 CP!"

갑자기 누군가 끼어든 것이다.

"뭐, 뭐야?"

놀라서 목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니 어떤 신이 날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마르둑이잖아!'

상대는 마르둑이라 불리는 다른 차원의 신이었다.

특별히 스토리에 존재감이 있는 신은 아니었지만. 유물의 네 번째 주인이 되는 인물이라 잘 알았다.

'이런 젠장. 유찰만 되던 유물이 낙찰되던 게 하필 오늘이었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나는 일단 계속 질렀다.

"4천 CP!"

문제는 마르둑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급기야 가격은 2만 CP까지 올라갔다.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저게 대체 무엇인데? 뭔가 아시오?"

"글쎄요. 별 볼 일 없는 물건이라 여겼거늘···."

"뭐가 있는 거 아니요? 저 둘이 경쟁이 붙은 거 보면?"

"이런 나도 끼어들어야 하나. 허허 참!"

안 좋게도 다른 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문제는 마르둑 놈이 유물의 용도도 모르고 집착하고 있다는 것. 저놈은 그냥 엄한데 돈을 쓰는 수집가다. 이유도 없이 유물에 꽂혔고, 경쟁이 붙자 포기할 생각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이쪽을 보는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어디 맘대로 해봐라, 필멸자.

나는 포기하지 않으니까,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젠장. 너무 출혈이 커지면 곤란한데.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

하지만 가장 저렴하고 확실한 방법은 역시 아룬델의 유령을 이용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도 있지만 투자금을 대부분 써야 해서 내키지 않았다.

'저 빌어먹을, 마르둑 놈!'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자네. 여긴 웬일인가?"

누군가 내 상급 변신을 꿰뚫어 본 것이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초면임에도 익숙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허? 드라큘라 님?"

뱀파이어의 신 드라큘라가 와인잔을 들고 근처에 서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었다.

< 신들의 도시(6) >

이 갑작스러운 만남에 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드라큘라가 여기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역시 신이고, 다양한 교류를 위해 신들의 도시를 찾을 테니까.

"처음 볼 텐데 바로 알아보는군?"

드라큘라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살짝 드러난 송곳니가 멋졌다.

"제가 은혜를 베푸셨으니 그 기운을 어찌 잊겠습니까? 그날 공양의식에서 제게 베푸신 은혜, 마음 깊이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허허허, 말이라도 고맙군. 너무 신경 쓸 것 없네. 자네는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었어. 그뿐일세. 한데 곤란해 보이는군? 무슨 일인가?"

"아, 그게 사실···."

나는 원하는 물건이 있어서 경매장을 찾았는데, 낙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음, 저 물건인가? 마르둑이 경쟁자로 붙었군. 그나저나 저걸 어디에 쓰려고? 용도를 잘 알 수 없네만."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드라큘라는 내게 호감을 보이곤 있었지만 이번 일에 관해 홀라당 말할 정도의 상대는 아니었다. 다행히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기색이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는 법이지. 더 묻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그것보다 마르둑이라···. 허허허. 자네, 운이 좋구먼?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아. 저 친구랑 아는 사이거든."

"헛, 그게 정말이십니까?"

생각지도 못하게 꼬인 일이 인맥빨로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이야."

드라큘라는 허언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큘라 님, 제가 대신 무엇을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한데 의외로 드라큘라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냥 호의로 받아두게. 이번에 태양 교단을 밀어낸 일에는 찬사를 보내고 싶군. 그리고 건방진 에인션트들을 물 먹였으니 그 상찬이라 여겨주게나."

에인션트 뱀파이어는 드라큘라의 문젯거리다. 놈들은 뱀파이어의 신인 그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도 신이 되겠다고 날뛰는 놈들이니까.

이번에 발레스카, 엘리시아, 움베르트 셋이 큰 낭패를 봤다. 드라큘라 입장에선 지켜보면서 꿀잼이었을 터.

하지만 난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이미 여러 가지 호의를 받았다.'

저렇게 날 상대로 호감도 작업을 하는 건 결국 빌드업이 아니겠는가. 무언가 원하는 게 있으니 자꾸 빚을 지우려는 거다.

단지 성격이 좋은 신이라 도와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뱀파이어다.

뱀파이어가 모두 악이라는 건 아니지만, 한없이 악에 가까운 건 사실이다.

하물며 신좌에 오른 뱀파이어.

악이란 분야에서 갈 데까지 간 자라는 거다. 쉽게 말해 세상에 다시 없을 독보적인 개새끼란 소리지.

그런 존재가 공짜로 계속 도와준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경매의 입찰을 계속하면서 그에게 입장을 밝혔다.

"드라큘라 님, 분에 넘치는 호의는 이미 받았습니다. 어찌 감히 또 염치를 모르고 손을 벌리겠습니까?"

"오, 그런가···?"

드라큘라는 씩 웃더니 경매의 사회자를 향해 노란 카드를 들어 보였다. 그러자 사회자가 놀라며 선언했다.

"특별회원께서 잠시 해당 물품에 대해 경매 중단을 요구하셨습니다. 입찰자들과 협상을 위해 해당 물품의 경매 순번은 밀립니다! 다음 물품부터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회원이셨습니까?"

"후훗, 그렇게 됐네."

소신격 주제에 대단하네. 경매장의 특별회원을 하려면 중신격 중에서도 위세 높은 자들만 가능한데. 아무래도 드라큘라의 수완은 내 상상 이상인 것 같았다.

'역시 서로 이득만 맞으면 좋은 비지니스 파트너가 되겠군.'

능력있는 사람은 환영이니 말이다.

아무튼, 특별회원인 그가 꺼낸 카드 때문에 나와 마르둑이 경쟁 중이었던 나무지팡이의 입찰이 뒤로 밀렸다. 무언가 협상할 시간이 마련된 것이다.

슬쩍 옆을 보니 마르둑이 다소 놀라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드라큘라 역시 그를 슬쩍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시간이 생겼으니 구체적인 얘기를 하세나. 마르둑은 기다려 줄 걸세."

아마 신의 힘을 사용해 잠깐 사이 그와 협상한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래, 자네처럼 현명한 자라면 계속되는 호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지. 어리석은 자라면 무한정 받아먹겠지만, 그건 사실 빚더미를 짊어지는 것과 같다네. 나 역시 자네에게 바라는 게 있어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고. 물론, 좀 더 나중에 용건을 꺼내려 했네만, 자네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꿨네."

이미 나는 일식의 검과 관련해서 그에게 빚을 졌다. 더 빚이 쌓이기 전에 협상하는 게 현명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피의 아버지시자, 영원의 송곳니시여."

"흐음······. 잠시 자리를 옮기지."

드라큘라는 개인실로 날 데려간 뒤에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 돌이킬 수 없게 되네.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이미 예전부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후환이 두려웠다면 일곱 봉우리에서 영향력을 끼쳐선 안 됐다. 아단을 만나 공양의식에 휘말려서도 안 됐고, 더 나아가 이쪽 세계로 와 뱀파이어가 되어서도 안 됐다.

나는 오래전부터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과 같은 처지였으니, 살고자 한다면 계속 나아갈 뿐이다.

"좋네. 자네 눈빛을 보니 금강석처럼 굳건한 각오가 느껴지는군. 사실 중요한 예언이 하나 있네. 나는 그걸 늘 걱정하고, 그때가 오면 함께할 투사를 찾고 있지."

"어떤 예언입니까?"

"불의 거인이 모든 악을 정화할 거란 예언이야. 이것은 예언의 대신격에 들은 것이니 절대 빗나가지 않네. 그때가 되면 모든 뱀파이어가 소멸하게 될 수도 있네."

"모든 뱀파이어가 소멸하면 드라큘라 님의 신성도 엄청난 타격을 받겠군요?"

"그렇지. 나는 뱀파이어의 신이니까."

나는 그가 말하는 불의 거인이 뭔지 즉각 알아챘다.

'태양신의 화신 얘기로군.'

태양신은 관념뿐인 존재라 엄밀히 말하면 화신은 아니다. 하지만 극도로 태양의 힘을 끌어올려 탄생한 그 존재는 태양신의 화신이라 불리게 된다.

반신격 정도의 강함을 가졌음에도 신이 아닌지라 제약 없이 지상을 휘저을 수 있다.

'솔직히 개사기지.'

놈이 출현하면 가히 핵폭탄 같은 위력을 발휘하게 될 터. 뱀파이어만이 아니라 무수한 어둠의 존재가 쓸려나갈 거다.

'후반부에 태양 교단이 미쳐 날뛴다고 한 게 바로 그 화신 이벤트 때문이지.'

사실 뱀파이어가 몰살하든, 어둠의 존재가 통째로 쓸려나가든 알 바 아니었다. 문제는 나도 어둠이고, 그때 같이 작살 날 예정이라는 거지.

'그걸 대비해서 핏빛 새벽의 여신을 택했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빛 속성을 가진 그녀의 힘이면 태양신의 화신에게 대항할 수 있을 터.

참고로 다른 신을 선택하면 절대로 못 이긴다.

태양신의 화신이 출현할 때 다른 차원으로 도망가거나, 기타 우회 가능한 방법을 써야 한다. 정면 대결로 무찌르는 시나리오는 없었다.

하지만 핏빛 새벽의 여신이라면 격파가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루트에서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엄청난 성공과 보상을 가져다줄 터. 그래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벤트였다.

'게다가 불멸의 여왕에게 태양신을 죽이라는 요청을 받았다. 태양신을 죽이려면 화신을 처리하는 건 필수야.'

결국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문제인데 드라큘라가 그 얘기를 꺼낼 줄이야. 이거 잘하면 도움을 받아서 그 고난의 퀘스트를 좀 더 쉽게 클리어할 수 있지 않을까?

"불의 거인은 막강한 존재야. 문제는 그걸 필멸자들의 힘만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거지. 우리 같은 불멸자는 지원할 수만 있을 뿐, 직접 물질계로 강신해서 끼어들 수 없거든. 그러니 강력한 물질계의 투사를 찾는 건 중요한 일이야."

"제가 적당하다고 보신 거군요?"

"그렇네. 세계에 온갖 강자는 많지만 나는 그들보다 자네에게서 가능성을 보고 있어. 그게 내가 호의를 보이는 이유일세."

"제게 특별한 점이 있겠습니까? 오래 묵은 대마두들이 더 강할 텐데요."

"그래, 하지만 자네는 핏빛 새벽의 여신의 첫 번째 사도지. 그리고 그녀는 태양 교단의 성녀였고."

역시 드라큘라는 핏빛 새벽의 여신이 가진 잠재력을 어느 정도 간파한 듯했다. 이 양반, 안목이 굉장하네.

"소렌 다켄발트, 정식으로 요청하네. 다가올 시련에서 동맹을 맺고 싶군. 내 신도들을 도와 불의 거인과 싸워주게. 그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우리가 속한 어둠은 흔적도 없이 지워질 걸세."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불의 거인을 토벌하는데 협력하지요. 어둠이 지워진다는 건 저 역시 설 곳이 없어진다는 소리니까요."

드라큘라는 만족해하면서도 주의를 줬다.

"자네는 지금 신 앞에서 약속을 하는 걸세. 이건 지상에서 자네가 했던 어떤 엄정한 계약보다도 구속력이 강하다는 거지. 훗날 그 정체불명의 불의 거인이 나타났을 때 자네는 약속 때문에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못한다는 걸세."

사실 살고자만 한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사도의 직을 이용해 위기의 순간 핏빛 새벽의 여신이 계신 차원으로 도망가면 될 터.

지금이야 그런 능력이 없지만, 그때쯤은 생기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도망치는 걸 원했다면 굳이 핏빛 새벽의 여신을 택해서 고생했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럴 거였으면 대신격 카라즈라의 신상을 선택했을 거다.

내가 원하는 건 화신의 토벌이다.

"말씀하신 바를 알겠습니다. 존엄한 불멸자의 앞에서 약속하겠습니다. 이 소렌 다켄발트, 예언 속의 파멸이 다가올 때 절대 피하지도 숨지도 않겠습니다."

내 말에 드라큘라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대단하군! 자네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겠네. 좋아, 이것으로 거래는 이뤄졌어. 자세한 협의는 차후 하세나. 지금은 그 용기에 대한 대가로 경매를 도와주지. 자, 나가세."

우리는 경매장으로 복귀했고, 드라큘라가 다시 노란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마르둑과 경쟁하던 경매가 재개됐다.

"8천 CP!"

"9천 CP!"

마르둑은 입찰을 하고 있었지만 태도가 좀 바뀐 모습이다. 드라큘라를 보는 게 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곧 마르둑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경매를 포기했다.

"1만 2천 CP! 더 없으십니까?"

사회자의 질문에 마르둑은 입을 다물었고, 결국 나무지팡이는 내게 떨어졌다.

'됐다. 이걸로 아룬델의 유령을 설득할 수 있겠어.'

예상보다 비싸게 사긴 했지만 잘 해결된 거다. 마르둑과 경쟁했으면 몇만 CP까지 갔을지 알 수도 없다.

뭣보다 이겨도 문제다. 경매에 패한 마르둑이 원한을 품을 테니까.

'신들은 졸렬한 존재지.'

특히 필멸자에게 지는 걸 분해서 못 참는 놈들이다.

그 인성이 괜찮다는 아테나 여신도 아라크네와의 베 짜기 시합에서 지자 상대를 거미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나? 심지어 아라크네의 직물을 갈기갈기 찢고, 베틀로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고 한다.

인격신이란 놈들은 그처럼 성정이 썩었다. 그걸 생각해 보면 드라큘라의 개입으로 다가올 불행을 하나 막은 셈이니 큰 이득이다.

그때 나와 경쟁하던 마르둑 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왔다. 마르둑은 길게 땋은 수염을 늘어뜨리고 호화로운 금관을 쓴 신이었다.

"드라큘라. 자네는 귀한 걸 내게 쓰게 됐네. 여기 이 보잘것없는 필멸자에게 그 정도 가치가 있단 말인가?"

마르둑의 물음에 드라큘라는 날 한 번 보더니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물론!"

***

경매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것보다 드라큘라 님과 아는 사이셨습니까?"

옆에서 입 닫고 상황을 지켜보던 고블린 위조 전문가 칼센이 흥분해서 외쳐댔다. 하지만 그에게 해줄 말은 많지 않았다.

"어쩌다 연이 닿았을 뿐입니다. 그것보다 서두르지요. 이제 77일이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더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걸 눈치채고는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는 게 좋겠습니까?"

"D지구의 폐건물이 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순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도록 하지요."

신들의 도시답게 지상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순간이동 마법진도 도처에 깔려 있었다. 신들을 위한 건 아니고, 도시의 필멸자 주민을 위한 시설이었다.

지이잉!

마력의 빛이 번쩍이며 우리는 D지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 엄청난 크기의 폐허를 볼 수 있었다.

"여긴?"

그의 물음에는 나는 서둘러 걸으며 답했다.

"아룬델의 유령이 생전에 머물던 저택이지요."

"아룬델의 유령은 대체 어떤 신이었습니까? 위세 높은 대신격이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칼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거기까진."

물론 거짓말이다.

고인물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룬델의 유령은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에게 살해당한, 그녀의 오라비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