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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룬델의 유령(1) >

***

아룬델의 유령이 출몰하는 거대 저택은 이 도시의 금지(禁地) 중 하나였다.

함부로 접근했다가 아룬델의 유령과 마주하면 낭패를 겪기 때문이다.

아룬델의 유령은 심사가 꼬인 악의적인 존재였다. 마구 날뛰며 도시를 어지럽히진 않았지만, 자신의 눈에 띈 존재들에겐 갖은 패악질을 부려댔다. 그렇기에 경을 치고 싶지 않다면 특정한 날에는 저택 근처에 얼씬도 안 하는 게 좋았다.

그 덕에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기··· 괜찮은 겁니까?"

곁에 있던 고블린 스카브누그의 사도 칼센이 긴장해서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도씩이나 되는 존재라도 성격이 더러운 대신격의 유령은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아룬델의 유령이 좋아할 유물을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게임 속에서 협상해 본 적이 있기에 여유를 잃지 않았지만, 솔직히 주변의 광경이 을씨년스럽긴 했다. 왜냐하면 죽은 신의 감정이 저택 곳곳에 묻어났기 때문이다.

'슬픔과 분노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군.'

저택의 물건들은 그런 신의 의 지에 의해 이리저리 뒤틀려서 더욱 공포스럽게 보였다. 모든 물건이 울며 화내는 감정을 형상화한 것만 같았다.

이 침울하고 소름 돋는 광경 속에서 칼센이 겁을 집어 먹는 건 사실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꿀꺽.

앞서 걷는 나도 연신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으니까.

"어디까지 가야 합니까? 다켄발트 님."

"저택에 감춰진 중정(中庭)이 있는데 그곳에서 유령을 부를 수 있습니다."

감춰진 중정으로 가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게임 맵에 익숙해도 실제로 중정으로 통하는 비밀문을 찾는 건 별개였기 때문이다.

한참 난리를 핀 후에야 간신히 문을 부수고 오래간 누구도 출입하지 않은 중정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안은 가시덤불과 앙상한 나무, 다 쓰러져가는 펜스 등으로 어지러웠다.

"여기군요?"

"네, 여기서 아룬델의 유령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방법은 제가 아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켄발트 님만 믿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칼센은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는 바닥에 일정한 도형을 그려갔다. 여러 개의 원과 거기서 튀어나온 방사 무늬가 인상적인 것이었다. 일종의 마법진인데, 자세한 의미는 모른다. 그저 기억대로 그릴 뿐이다. 그리고는 주문을 외웠다.

"그림자여. 타락한 빛이여. 이 미천한 자의 부름에 응하십시오. 찬란한 베일 속에 군주여. 여기 당신께 공양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소서. 영광된 이여."

주문이 끝났지만 주변은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그 침묵에 불안감을 느낀 칼센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오긴··· 오는 것이오?"

"쉿!"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이미 무언가 느껴지고 있었다. 공기가 서서히 떨리기 시작하더니 멀리서 은은하고 창백한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숨이 막힐 것 같은 냉기와 압박감이 일대를 사로잡았다. 칼센은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이익! 크윽!"

대신격의 유령이 오는 것이다. 나 역시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이윽고, 중정의 가운데에 쓰라림과 고통, 비탄이 뭉쳐 만들어진 신의 유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만 해도 비명이 터질 만큼 섬뜩한 모습이었다.

백발의 초라한 늙은 인간이 눈두덩이가 검게 뻥 뚫린 채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가뭄이 진 땅처럼 균열이 가득했다.

[무엇인가···? 벌레들아···? 무엇을 원하느냐?]

탁하고 흐리멍덩한 목소리로 신의 유령이 입을 열었다. 생전의 총명함을 잃고, 이지가 흐려진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나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노인을 향해 예를 갖춰 보였다.

"위대한 분이시여. 당신께서 기껍게 여기실 것을 가져왔습니다."

[으음···? 하찮은 벌레들이 내 마음에 흡족할 걸···?]

나른하게 답하던 그는 곧 악의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좋다! 어디··· 보겠다. 보잘 것 없는 물건이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아무래도 물건을 보고 트집을 잡아 괴롭힐 생각에 신난 것 같았다. 자칫하다가는 아룬델의 유령에 관한 나쁜 소문을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있겠지만,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경매장에서 가져온 물건에 그만큼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받아주십시오. 마음에 드신다면 이 하찮은 자의 청을 하나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흥···! 무엇인데 그리 자신을···. 아니, 이건!]

깔보듯 답하던 아룬델의 유령은 내가 고대신의 신력이 깃든 다섯 가닥의 나무지팡이를 꺼내자 표정이 급변했다.

[이것은! 이것은···!]

놀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정말 내게 주는 것이냐? 실로 대단한 걸 가져왔구나!]

어쩐지 흐리던 그의 의식이 또렷해진 것 같았다. 노이즈가 낀 듯한 목소리도 좀 더 선명해졌다.

역시 그는 이 유물을 보고는 대단히 기뻐했다. 대체 무슨 용도기에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벌레··· 아니, 필멸자! 원하는 바를 말해라. 그 유물의 힘을 쬐니 머릿속을 가득 채운 혼몽이 물러가는 걸 느낀다. 아, 지금 이 기운이 본디 나다운 것이거늘···. 유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겠다.]

놀랍게도 유령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었다. 탐욕스럽고 악랄한 늙은이의 음성이 지엄한 기세를 풍기기 시작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다행히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제가 원하는 바는······."

한데 그때 아룬델의 유령이 한손을 들어 날 제지했다.

[잠깐. 이건···? 네놈!]

갑자기 유령의 기세가 칼날처럼 매서워졌다. 그러더니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꺼냈다.

[필멸자 놈! 내 사악한 여동생과 인연이 닿아 있구나! 참으로 고약한!]

"!"

그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룬델의 유령이 지적하는 여동생은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를 말한다. 그의 입장에선 여동생에게 살해당했으니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어째서?'

게임을 할 때 카라즈라를 만나고도 아룬델의 유령을 찾아온 적이 있다. 몇 번이고 있었는데 저런 식으로 분노한 건 한 번도 없었다. 점점 섬뜩한 신력을 뿜어내는 걸 보니 보통 화가 난 게 아닌 듯했다.

"인연이리시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건방진! 감히 시치미를 뗄 참이더냐! 네놈에게 카라즈라와 연결된 인연이 느껴진다!]

그 순간 문제가 뭔지 알 수 있었다.

'본체다. 본체를 만난 것 때문에 그래!'

지금껏 게임에서 만난 카라즈라는 '의지의 일부'라 부르는 그녀의 파편 같은 존재였다. 한데 얼마 전 지성소로 가서 카라즈라의 본체를 만나게 됐다. 그 때문에 유물의 기운으로 이지를 어느 정도 찾은 유령이 분노한 것 같았다.

'본체와의 인연이니 바로 감지된 건가!'

나는 서둘러 변명해 보려고 했지만 상대는 그대로 폭발했다.

[이제 보니 네놈은 그 빌어먹을 년의 끄나풀이구나! 용서하지 않겠다!]

아룬델의 유령은 곧장 힘을 일으켰다.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고, 칼센과 나는 곧장 뒤로 튕겨나갔다.

우르르르! 콰앙!

중정의 벽을 부수고 건물 안까지 날아갔다.

"크아악!"

돌 부스러기를 잔뜩 뒤집어쓴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여유를 부리고 있을 틈은 없었다. 벽면에 난 구멍으로 격분한 아룬델의 유령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바른대로 고하라! 네놈이 끄나풀임을!]

"오해십니다! 위대하신 분이여!"

[아직도 이놈이 정신을 못 차렸구나!]

아룬델의 유령이 일갈하자 그 충격파만으로도 무슨 태풍이 분 것처럼 뒤로 날아갔다.

"크윽!"

아무리 구질구질하게 유령으로 몰락했다지만, 대신격이었던 가락이 어디 가는 건 아닌 듯했다. 급하게 그림자 방어막 같은 걸 만들어 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상대가 안 됐다.

옆을 보니 칼센은 이미 기절해서 축 늘어진 상태. 그래도 사도씩이나 되는 존재인데, 벌써 뻗어버릴 정도로 유령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진짜 놀랄 건 아직 시작도 안 한 상태였다. 곧 이어진 공격에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벌레 같은 것들! 태양의 분노를 보여주겠다!]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뭐, 태양?

하지만 더 생각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눈앞에서 눈부신 광채가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악!"

빛에 휩싸이자 온몸이 타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데이워커의 힘과 핏빛 새벽의 여신의 가호로 태양광을 간신히 견뎌낼 수 있었다.

"크으윽···."

태양광이 사라졌을 때 전신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심한 화상을 입었지만, 잿더미가 된 것만은 피한 것이다.

아룬델의 유령도 그걸 보고는 멈칫한다.

[네놈! 뱀파이어일 텐데 내 태양광을 견뎌?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꽤나 놀란 듯 더 공격도 하지 않고 멈춰버린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머리가 핑핑 돌아가느라 거기 답할 여력도 없었다.

'태양의 힘이라고? 이게 무슨?'

태양의 힘을 쓰는 존재는 태양신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태양신이란 섭리이자 관념이며 법칙인 존재. 즉, 인격신이 아니다.

그런데 왜 저 아룬델의 유령이 태양의 힘을 쓰는 건가?

'혹시 여신님처럼 태양 교단과 관련이 있는 존재인가?'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게다가 아룬델의 유령은 다른 세계의 신도 아니었다. 그리스 신화의 헬리오스 같이 다른 세계의 신이면 그러려니 하는데, 카라즈라의 오라비인 것만 봐도 그는 이쪽 세계의 신이다.

'한데 태양이라고?'

아니, 애초에 아룬델이 유령이 생전에 무얼 담당하는 신이었지? 놀랍게도 그 부분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다.

나는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직감했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얽혀있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엉망으로 얻어터지더라도 상대와 얘기를 해볼 필요를 느꼈다. 다행히 아룬델의 유령은 뱀파이어가 태양을 견딘 것 때문에 멈춘 상황. 재빨리 그의 관심을 끌 말을 꺼냈다.

"카라즈라가 제게 명한 게 있습니다."

[뭐라! 무엇인지 말하라! 입을 다물겠다면 지옥이 뭔지 보여주겠다.]

아, 그러면 얼른 말해드려야지.

"제게 태양신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상대에 대해 판단해볼 수 있을 터. 한데 아룬델의 유령이 예상치 못한 답을 내놨다.

[뭐라! 이미 죽여놓고 날 또 죽이겠다는 건가! 이 빌어먹을 년! 오라비가 영원히 소멸했으면 하는 거로군!]

뭐라고? 대체? 본인을 태양신이라 하는 건가? 나는 그 점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 태양신이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태양신은 섭리이자 관념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당신께서 태양신일 리가 없습니다."

[이런 멍청한! 황당한 소리를 하는구나!]

어이없어 하던 아룬델의 유령은 곧 뭔가 알아챘다는 듯 소리쳤다.

[네놈이 왜 그리 지껄이는지 알겠구나!]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을까 했는데, 흥분한 상대가 알아서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파악했다! 그 빌어먹을 년이 자기 오라비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린 게 틀림없다.]

"지워버렸다고요?"

[그렇다. 그리고 내 빈 자리를 섭리로 대체한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태양신은 본디 인격신이었으나 살해당한 뒤, 시스템적인 존재로 바뀌었다는 거다. 카라즈라가 그걸 한 흑막이었고.

아룬델의 유령은 몇 가지 없는 단서로도 신적인 통찰력을 발휘해 그걸 간파한 듯했다.

[네놈은 내가 태양신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모양이군.]

진짜 몰랐다. 심지어 게임 속에서도 아룬델의 유령이 원래 어떤 존재였는지 정보가 없었다. 설마 태양신이었다니. 카라즈라가 철저히 정보를 통제한 모양이다.

'아니, 어떤 대마법으로 세계의 인식 자체를 손본 것 같군.'

대신격이라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는다.

극히 일부의 신화적인 존재만이 옛 태양신을 간신히 기억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그들도 카라즈라가 두려워 감히 입도 벙긋 못하겠지.

"불멸의 여신이 자기 오라비를 살해하고 우주에서 그 존재를 지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나는 심각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면, 태양신 죽이기란 퀘스트가 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인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카르자라는 내게 말하지 않고 무언가를 노리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 결과가 어쩌면 나와 핏빛 새벽의 여신의 파멸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외줄타기 같군. 자칫하면 통수 거하게 맞겠어.'

그때 아룬델의 유령이 내게 명령했다.

[공양하겠다던 나무지팡이가 가진 힘을 발동하라!]

"송구합니다만 이것의 용도도, 사용법도 모릅니다."

[그 물건은 내 잃어버린 지성과 이성을 일부나마 돌려주는 역할을 한다. 저주받은 망자로 혼몽에 쌓인 이 어지러운 정신을 조금이나마 맑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 기능이!"

[원래 네놈을 처죽이려 했으나, 얘기를 들어보니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고대신의 힘이 깃든 그 유물이 카라즈라의 저주를 일시적으로 몰아낼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이어서 나는 그가 알려준 대로 나무지팡이의 힘을 발동했다. 그러자 오색찬란한 빛이 퍼져나갔고, 아룬델의 유령이 변하기 시작했다.

쭈글쭈글한 늙은이가 건장한 체격의 호걸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찢어진 그의 의복은 반짝이는 태양빛 갑옷으로 변했다. 그는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로 내게 입을 열었다.

[혼몽이 물러갔다! 필멸자. 그대에게 날 소개하겠다. 나는 태양의 신격이며 과거 만신전의 주인이었던 솔라루스다!]

뭐? 대신격인 것만이 아니라 이쪽 세계 만신전의 수장이었다고?

"위대한 분이시여."

일단 예를 표하자 그는 내게 끄덕이며 제안해왔다.

[필멸자여, 카라즈라가 아닌 나의 손을 잡아라. 그대는 영광의 길을 걸을 것이다! 태양처럼 찬란한!]

< 아룬델의 유령(2) >

뭐냐, 이 급전개는!

갑자기 대신격이 튀어나와서 손을 잡자고 하는 현실에 사고가 따라가질 못했다.

'크아아···, 뇌의 연산력이 부족하다!'

만약 내가 초인공지능 같은 거였으면, 예측 가능한 상대의 태도와 이어질 전개, 그리고 가능한 대응책 등이 실시간으로 줄줄이 떠오를 거다.

하지만 나는 인간에 불과했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과부하가 걸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고하게 유지했다.

겉으로 아무런 티도 내지 않는 것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지난 위기 속에서 배운 삶의 지혜다. 속으로 얼마나 동요하고 있건 간에 표정과 태도만은 고요해야 했다.

"위대한 솔라루스시여. 그전에 묻고 싶습니다. 당신께선 무엇을 하고자 하십니까?"

내 물음에 솔라루스는 어깨를 펴고 당당히 선언했다.

[나의 누이인 카라즈라를 죽이고자 한다!]

와우···, 일이 점점 커지네. 여동생에게 살해당했으니 감정이 곱지 않겠지만, 우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신 가운데 하나를 죽이겠다니.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 사료됩니다."

[얼토당토않은 목표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능히 이룰 수 있다!]

이어진 솔라루스의 설명을 들어보니 생전에 여러 가지 안배를 해놨다고 한다.

[날 사로잡고 있는 이 혼몽에서 영구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고약한 것에게 복수할 수 있을 터!]

들어보니 꽤 그럴 듯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가능성도 충분했고. 복수에 성공하면 그야말로 왕의 귀환이긴 하겠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야.'

내가 굳이 솔라루스에게 호응해줄 이유는 없어 보였다. 뭣보다 솔라루스란 저 대신격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른다.

'그래도 이용할 수 있겠는데?'

먼저 손을 내밀었던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만약 카라즈라에게 통수맞을 거 같거나, 압박을 받을 때 솔라루스의 손을 빌리는 건 어떨까?

'아니면 카라즈라에게 얻은 정보를 넘겨주고 대가를 달라고 해도 되고.'

좋은 카드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 과정이 위험천만하긴 하겠지만, 이곳에 와서 벌어진 내 모험은 언제나 그랬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

'날 조각 피자처럼 썰어버릴 수 있는 건 얼마 전에 만났던 성기사단장이나, 예전에 어둠의 숲에서 쫓아오던 발레나 공녀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난 해냈다. 대신격이라고 겁먹을 필요는 없어.'

일단은 이런 의도를 감추고 상대의 제안에 관심 있는 척했다.

"이 미천한 자가 위대하신 분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면 큰 영광일 것입니다만, 제가 작은 것이라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솔라루그가 호탕하게 제안해왔다.

[신좌에 앉게 해주지! 반신 따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신위를 말이다!]

간단명료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보상안이었다.

'반신도 아니고, 진짜 신이라니!'

솔직히 반신에 오르는 것도 대단히 어렵다. 최근에 내가 엄청난 투자를 받아서 좀 현실감이 없어지긴 했는데, 실제로 물질계에 있으면 별 지랄을 다 해도 반신에 오르질 못하더라.

하지만 반신은 결국 반푼이에 불과하다. 소신격부터 제대로 된 신이다.

그 둘의 차이는 가히 넘사벽.

한데도 그걸 약속한다는 건, 야심만만한 필멸자라면 모두 바라마지 않는 일일 것이다.

[못 믿겠다면, 되찾을 모든 내 지위에 걸고 맹세하겠다. 약속한 대가를 온전히 받을 것이다.]

"어찌 그 은혜를 의심하겠습니까?"

본인 주장이긴 하지만, 만신전의 주인이었다고 하니 자리 하나 내주는 건 일도 아니겠지.

'뭐랄까? 동생에게 통수 맞고 대기업에서 쫓겨난 회장님 같구만. 복귀해서 회사를 되찾겠다 그건가.'

갑자기 기업물 한 편이 머릿속에서 뚝딱 그려졌다.

문제는 그 여동생이 너무나 강하다는 것.

'신좌를 약속 받아도 내키지가 않는데···.'

내 목표가 뭔지 잘 떠올릴 필요가 있었다. 바로 생존과 성공의 균형이다. 성공 쪽으로만 너무 도취돼 폭주하면 곤란하다.

솔라루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저울의 균형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의미했다. 만신전의 정회원으로 가입이 가능하겠지만, 생존이란 목표는 달성이 어렵다. 신좌에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매번 백척간두와 같을 터.

이용하는 건 좋지만, 적극적으로 저놈 사업에 뛰어드는 건 지양해야 되겠군.

"관대하신 제안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게 제 아둔함 탓이니 고민해볼 시간을 주시면······."

한데 솔라루스는 내 생각보다 훨씬 성정이 포악하고 급했다.

[감히 이 솔라루스의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건가!]

강력한 힘을 담은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눈앞에서 비행기 엔진음이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유령이긴 해도 대신격의 분노라니.'

일반적인 경우라면 여기서 다 납작 엎드리겠지. 움찔한 나도 무릎이 땅바닥에 닿을 것만 같은 기분이라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아니야. 정신 차리자.'

두려워하면 무조건 상대에게 끌려가기 마련이다. 내가 예상보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솔라루스는 더욱 성을 냈다.

[네놈 따위는 간단히 죽여버릴 수 있음을 모르느냐! 힘을 잃고 유령이 됐다고 해도 너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위대한 솔라루스시여. 협박으론 진지한 협력을 이룰 순 없습니다."

눈을 부라리는 태양신 앞에서도 차분한 모습을 보이자, 곧 그의 곧 태도를 바꿨다.

[호기롭게 담대한 게 제법이구나.]

솔라루스는 언제 노호성을 터뜨렸냐는 듯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소름이 돋았다. 일부러 겁박해서 굴복시키려 했던 것 같다. 그게 먹히지 않자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아니, 저것조차 가면 중의 하나인가?'

대신격 정도 되는 존재면 인간의 지혜로 가늠하기 어려운 법이다. 나는 그의 진짜 성격이 어떤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 인정하지.]

솔라루스는 냉정하면서도 음험한 모습이었다. 작렬하던 그의 빛은 차분해졌지만, 더욱 위험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필멸자여. 한 가지를 간과한 듯하군. 어쨌거나 지금 네놈은 내 손아귀 안에 있다.]

"······."

[나무지팡이의 효과가 아직은 꽤 남았지. 그 정도 여유면 네놈을 제압해 충실한 주구로 정신을 개조하긴 충분하다.]

"참혹한 말씀 받잡기 어렵습니다."

[네 뜻은 알 바 아니다.]

차갑게 대꾸한 솔라루스는 잔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와 강력한 계약을 하나 해줘야겠구나.]

말인즉슨, 억지로 계약을 해 날 노예로 부려먹겠다는 거다.

'역시 인격신이야. 쓰레기구만!'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의 뜻은 모르겠지만, 저 인격신을 시스템으로 바꿔버린 건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라. 자발적으로 나서줬다면 네놈의 미래도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을!]

본색을 드러낸 이상 먼저 얘기했던 보상도 지급할 생각이 없어진 모양이다. 강제적인 계약을 이용해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이 가득한 것 같다.

'왜 쫓겨났는지 알 것 같구만.'

나는 냉정하게 솔라루스와의 전투에서 승산을 가늠했다. 그러자 금방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크흠······."

승산 따윈 없었다. 승리는커녕 도망치기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영락했다고 해도 대신격이었던 존재. 엘더급 뱀파이어인 내가 대적하긴 불가능했다.

'이대로면 꼼짝없이 죽는데···.'

대책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현재 갖고 있는 신력을 이용해 승천을 택하면 죽음을 벗어나는 게 가능하니까.

문제는 반신의 자리에 오르면 물질계의 일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없게 된다. 단순히 물질계 나들이를 하는 것조차 심한 제약을 받게 된다.

'벌려놓은 일이 많으니 신이 된다고 꼭 좋은 건 아니지.'

반신이 되면 내 모든 건 에레미나가 상속하게 될 텐데, 아무리 똑부러진 녀석이라지만 약하고 어린 애가 얼마나 고생할지 안 봐도 훤하다.

아니, 고생 정도로만 끝나면 다행이지. 야만의 세계에서 부유하고 힘없는 상속자가 겪게 될 운명은 끔찍할 뿐이다.

'에레미나를 두고 물질계를 떠날 수는 없는데···.'

긴장 속에서 기세를 끌어내 상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이런 내 모습이 솔라루스에겐 우습게만 보이는 모양이다.

[아주 재밌구나. 하찮은 벌레여. 피를 빨고 다니는 놈이니 모기라 할 수 있겠군.]

전투에 대비하는 내 모습이 재밌다는 태도였다.

[사소한 즐길 거리가 되겠어. 그간 정신이 나가 있었던 탓에 남을 찍어누르는 이 재미를 느껴본 지가 오래되었다!]

진짜 좆됐다.

상대는 나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고, 강제적으로 자기 뜻을 관철하려 했기에 대화도 안 통했으니까.

[발버둥쳐 봐라. 모기.]

솔라루스가 조소와 함께 손을 뻗어왔다. 그걸 보자마자 상대의 공격에 대항하려 한 게 얼마나 터무니없던 결정인지 절감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상대는 빛이었다. 눈앞에서 빛이 작렬하면 아무리 빨리 반응하려 해도 눈이 부신 걸 피할 수 없는 것처럼, 그의 공격은 저항하지 못할 종류였다.

'이렇게 당한다고?'

암담함을 느끼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공중에서 솔라루스의 손에서 뻗어 나오던 빛나는 에너지가 멈춰버린 것이다.

"헛!"

주변의 광경은 아주 놀라웠다. 솔라루스가 날 붙잡기 위해 쏘아낸 에너지가 멈춰서, 주변이 온갖 색으로 번쩍이는 빛무리로 가득했다.

'시간 정지 같은 건 아니다. 이게 뭐지?'

쏘아져 나오던 에너지는 공중에 멈춰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치 수많은 별들이 허공에 뿌려진 것 같은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저 빛에 담긴 힘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붙잡힌 순간 굴복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이게 무슨! 대체 어떤 놈이냐!]

솔라루스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 순간, 선명한 주황빛이 작렬하며 폭음이 터졌다.

콰아아아앙! 쿠아아앙!

위풍당당하던 솔라루스가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튕겨 나갔다. 주변에는 폭발로 자욱한 먼지와 에너지 폭풍이 일어났다.

누군가 솔라루스를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난장판 속에서 날카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사도에게서 물러나!]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여태 침착을 가장하던 나도 참지 못하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지금 누가 나타난 건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곧 에너지의 폭풍을 뚫고 내가 섬기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핏빛 새벽의 여신이었다.

그녀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은 마치 태양빛을 늘어뜨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얼굴은 신상으로 보던 것과 닮아 있었다.

설화 석고를 조각한 것 같은 하얗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눈매만은 어쩐지 퇴폐적이며 농염한 기색을 머금고 있었다. 특히 눈 밑에 있는 점이 그런 느낌을 더했다.

하지만 우주라도 담은 것 같이 반짝이고 깊은 눈동자는, 그녀가 단순히 아름다움 따위로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불멸자였으며, 본체로 나타났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상대가 전직 대신격이든, 만신전의 주인이든 상관하지 않고 일격을 먹여버린 것이다.

"여신이시여!"

놀란 마음을 다잡으며 외치자, 먼지 구름 속을 노려보고 있던 핏빛 새벽의 여신이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언제 매서운 표정을 지었냐는 듯 상냥한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드디어 만났네요. 나의 사도!]

밝고 아름다운 목소리에는 한없이 깊은 호의가 담겨 있었다. 나도 반가움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굳은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만만치 않습니다. 힘을 잃은 유령이라곤 하나 대신격입니다."

내 말에 여신님은 신력을 끌어올리며 담담히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부턴 제가 지켜드릴 테니까.]

< 아룬델의 유령(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