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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빛 엘리시아(3) >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너는 날 위대하다 부르지만, 그 정체도 모르지 않나? 한데 어찌 섬기겠다고 결정한 것인가?"

한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충분히 짐작하고 있습니다. 소렌 다켄발트 님이 아니신지요?"

"근거는?"

"이전부터 일곱 봉우리에 빼어난 뱀파이어가 출현했다는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간파할 수 없는 변신 능력에 지배도 먹히지 않으니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사도의 능력을 가진 뱀파이어라면 가능한 부분이겠지요."

사실 뱀파이어의 세계는 좁은 편이다. 몇 가지 단서만 가져도 금방 특정됐다.

"설령 내가 소렌이라고 해도 네가 주인으로 섬길 만한 자는 아니다. 겨우 엘더급에 불과한데 에인션트가 어찌 고개를 조아린단 말인가?"

"그런 등급은 하잘것없는 것입니다. 부족한 자입니다만,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엘리시아의 말로는 자기도 신들의 세계에 관해 소문을 들을 방법이 있단다. 그래서 아룬델에서 화제인 '은혜 갚는 떡두꺼비' 이야기를 안다고.

"오, 그것도 들은 건가?"

"네, 그래서 사실 이번 원정에서 다켄발트 님을 어찌 대해야 할지 고심이 많았습니다."

협상을 해 구슬릴지, 강압적으로 제압할지 여러 방법을 생각해 왔다고. 한데 막상 마주하니 그 기량이 생각이상이자 복종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라 했다.

"으음···."

내가 여전히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엘리시아가 간곡히 다시 청해왔다.

"다켄발트 님께서 섬기는 핏빛 새벽의 여신께서 에인션트 뱀파이어를 원수로 여김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변명을 하자면··· 당시 성녀로 계시던 그분께서 쫓겨난 일에 저는 관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태양 교단의 일에 끼게 된 건 성녀의 자리가 공석이 된 후 발레스카와 움베르트의 요청에 의해서입니다. 제 비록 큰 무례를 저질렀으나 이전에 벌어졌던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적습니다. 그러니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다시 없는 은혜로 여기겠습니다."

"음···."

"받아주신다면 다켄발트 님뿐만이 아니라 핏빛 새벽의 여신을 위해서도 낮은 자세로 복종하겠습니다. 미천한 저를 써서 발레스카와 움베르트를 처단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여신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이용 가치와 엘리시아를 써서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고삐를 쥐는 방법까지. 이후 결론을 내렸다.

"좋아. 받아들이지."

이에 엘리시아는 크게 감사했다.

"위대한 분이시여. 제 청을 들어주셨으니 이 천한 재주나마 요긴하게 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엘리시아는 연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해왔다. 그리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줬다. 그건 작은 청동 십자가였다.

"이것은 제 목숨이 담긴 유물입니다. 꿈이라 직접 전달해 드리지 못하지만, 다음에 뵐 때 주인께 이 목숨을 맡기겠습니다."

"좋다. 다만 아직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건 아니다. 구두 합의에 불과하다는 거다. 이번 전쟁에서 성의를 보여 스스로 입증하라. 그 후에 최종적으로 결정하겠다. 네가 원하는 소망도 들어봐야 하고."

"알겠습니다. 전투가 벌어질 때 제 진심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얘기를 끝내자 꿈의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 만남은 끝이 났다.

***

나는 막 도착한 하피 전령에게 물었다.

"오고 있나?"

"그렇다. 의장. 인간의 군대가 코앞이다. 케악!"

반말로 지껄인 하피가 곧장 깃털을 흩날리며 날아갔다. 주변에서 저 무례한 생물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나왔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피는 원래 저런 놈들이지.'

도무지 써먹을 수 없는 놈들인데, 그들의 신이 명해서 정찰 드론 역할을 해주는 것만 해도 대견한 일이다.

얼마 뒤, 하피가 보고 대로 태양 교단의 군세가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산길을 통과해 진군하는 게 보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룩스 움브라의 조각인 시골이가 자리 잡은 산지의 공터. 놈들은 먼저 룩스 움브라를 처단한 뒤, 오크와 연합해 일곱 봉우리의 주도권을 잡는다는 전술적 목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진군하는 태양 교단은 어수선했고,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연신 주변을 둘러보는 이가 많은 게 자기들이 함정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듯했다. 아마 저들 중 일부는 이번 일을 반대했을 것이다.

현명하게 퇴각하길 주장하는 이도 여럿이었을 터. 하지만 기어코 성녀가 끝까지 룩스 움브라를 토벌할 의지를 관철해 진군이 이뤄졌다고 한다.

-사악한 고대신의 조각을 내버려 두는 건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것이에요.

고대신을 멸해야 한다는 논리는 무적이었고, 성녀가 반대하는 이는 교단의 율법대로 처리하겠다고 윽박지르자 반대할 이도 없었다.

심지어 원정군의 실세 중 하나인 대주교 막시밀리언(아딜릭의 직속상관)도 성녀의 끄나풀이었으니 군대의 운명은 뻔했다.

노련한 군사지휘관이자, 실질적으로 군대를 움직이고 있는 발드릭 경이란 자는 크게 낙담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명을 따르고 있다고 세작이 보고해 왔다.

"발드릭이 전권을 갖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군."

그는 나도 잘 아는 캐릭터다. 훌륭한 지휘관이 때문에 자기 능력을 다 발휘하면 매우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푸하하핫! 군사에 무지한 주제에 훈수만 두는 상관들이 있으니 그의 운명은 참으로 가련합니다."

벌써 맥주에 얼큰하게 취한 레그너 3세의 조카 그루린 레그너가 웃어댔다. 이미 그는 전투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아까 떠들기를, 자기가 만취해 잠들어도 오늘의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라나?

실제로 드워프 중갑보병을 지휘하는 건 노련한 전문장교였기에 명목상 대표인 그루린 레그너는 술에 취하든 말든 내버려 뒀다. 뭣보다 드워프가 만취로 쓰러진다는 건 상상도 안 됐고.

"아군의 포위망도 점점 조여오고 있습니다. 케켁! 적이 목적지에 도착해 룩스 움브라를 공략할 때 충분히 완성될 것입니다."

유능한 용병대장인 고블린 대표 카조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시간 현황을 반영한 작전지도에는 목적지를 향해 점점 조여오고 있는 일곱 종족의 군대들이 표시돼 있었다.

앞으로 몇 시간 안에 태양 교단은 우리가 준비한 그물 안에 갇힌 신세가 될 터였다.

"좋다. 이대로 진행한다."

***

태양 교단의 일곱 봉우리 원정대를 이끄는 발드릭 경은 속에 체한 것마냥 좋지 않았다.

"죽으러 가는 것 같군···."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가 있다면 오늘 자신의 심경일 것 같았다. 그는 연신 불안을 억누르며 주변의 산지를 살폈다.

'너무나 불리한 지형이다. 매복이 있으면 꼼짝없이 당해!'

일대를 병풍처럼 둘러싼 산자락을 보며 발드릭 경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아까부터 하피들이 자주 보이며, 간간히 뛰어다니는 고블린들도 눈에 띄었다. 고블린이야 미혹의 산에 들어온 뒤에 끊임없이 보던 놈들이지만, 오늘은 유독 움직임이 불순했다.

"발드릭 님, 이제라도 퇴각해야 합니다. 이미 군대는 싸우기도 전에 패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옆에선 부관이 진심어린 간언을 해왔다. 발드릭도 그 의견에 동감했다. 하지만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대.

"성녀님과 대주교께서 엄숙한 신앙과 함께 전진을 명하셨네. 우리에게 달리 무슨 선택이 있겠나?"

"하지만 이건 너무나 위험한···."

"저 앞에 고대신의 조각이 있는 건 사실이지. 우리는 태양의 자식들로 그것을 정화해야 하는 사명이 있고. 이것에 어떤한 반론도 있어서는 안 되네."

"···알겠습니다."

부관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발드릭의 말이 구구절절 맞았기 때문이다.

한편 단호히 말한 발드릭 경은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누구보다 진격하고 싶지 않은 게 그였다. 하지만 여기서 지시를 어겼다가는 이단으로 몰려 처형될 게 뻔했다.

'나만 끝나는 거면 상관없는데, 내 식구들까지 다······.'

발드릭 경은 결혼하지 않은 성기사기에 가족은 없다. 식구라 하면 그의 라인이라 할 수 있는 파벌을 말했다. 분명 이단 혐의로 싸그리 숙청하려 할 테니 엄청난 피가 흐를 터.

'오늘 운이 좋길 바라는 수밖에.'

근심걱정이 가득한 발드릭 경의 표정은 몇 시간 뒤에 룩스 움브라를 만나자 의외로 좀 펴졌다.

직접 본 룩스 움브라는 정말 사악하고 거대한 존재였다. 거의 작은 언덕만큼이나 컸지만, 태양 교단의 힘 앞에 맥을 추지 못했다.

군대 단위로 몰려온 탓에 사제와 성기사의 숫자가 엄청났다. 그들이 일제히 발휘하는 신성력에 룩스 움브라의 조각은 비명을 지르며 타들어갔다.

퀘에에에에!

누가 봐도 장엄한 광경이었다. 빛이 압도적으로 어둠의 존재를 압박하고 있었으니까.

"놀랍군! 정말 토벌할 수 있겠어!"

발드릭 경은 다시 희망을 느꼈다. 이대로 룩스 움브라를 정리하고 몇 가지 일만 잘 풀린다면···.

하지만 그때.

육중한 뿔나팔 소리가 산지에 울려퍼졌다.

부우우우우웅!

듣자마자 발드릭 경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산에 들어온 뒤 지겹게 듣던 고블린의 뿔나팔 소리였기 때문이다.

"전투 준비! 습격이다!"

발드릭 경의 외침에 룩스 움브라를 공략하는 자들을 내버려 두고 모두가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곧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고블린만 온 게 아니었어?"

"오크다! 오크가 왜 저쪽에? 아군에게 합류한다고 했는데!"

"코볼트도 있어!"

일곱 봉우리의 온갖 종족들이 저마다의 군기를 휘날리며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봐도 그들은 같은 편으로 보였다. 특히 도움을 주기로 한 오크들은 어째서인지 제일 선두에서 서서 흉흉한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크워어어어어!"

일대에 성난 오크들의 함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발드릭 경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최악이군.'

그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상황이 벌어졌다.

하필 룩스 움브라를 공략하는 중에 적습이 벌어진 것이다. 한데 그것도 기존에 상대하던 고블린들만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종족이 나타난 것이다. 그제야 발드릭 경은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노렸구나. 결국 여기가 우리의 무덤이란 말인가!'

절망 속에서도 발드릭 경은 군대를 지휘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오크, 고블린, 코볼트들이 야만적으로 밀려들어오는 걸 본 순간 안색이 헬쭉해졌다.

"크워어어어!"

성난 오크의 힘은 굉장했다. 경사를 내려와 그대로 갑옷과 함께 부딪치자, 병사들이 장난감 병정처럼 우르르 쓰러졌다.

'전혀 저지를 못 하잖아!'

돌격하는 오크 전사들을 향해 내밀었던 창이 효과를 좀 보기도 했지만, 수수깡처럼 부러지는 게 더 많았다.

그런 창틈 사이로 고블린 용병들이 교활하게 뛰어들었고, 뒤따라온 코볼트들이 투창을 던지거나 주술을 부려댔다.

격전이 계속 이어졌고 태양 교단은 점점 밀려났다.

"젠장!"

발드릭 경은 초반에 손해 본 걸 메꾸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적의 돌격이 매섭다 해도 반격을 가할 허점을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곧 그의 군사적 지혜가 빛을 발휘했다.

"저기다! 성기사단을 저곳으로 돌격시킨다!"

적이 지나치게 신을 내는 탓에 대열에 눈에 띄게 벌어진 구멍이 있었다. 그걸 돌파하면 뒤쪽에 있는 코볼트 주술사 집단이 바로였다. 공략할 수만 있다면 상황을 반전할 수 있을 터.

"출격하라!"

발드릭 경의 명령에 인간병기인 성기사들이 황소처럼 돌진했다. 그 용맹한 모습에 발드릭 경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용맹한 성기사들이 돌격했던 게 무색하게 뒤로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냐!"

놀랍게도 움직이는 철벽이라 할 수 있는 드워프 중갑보병들이 그들을 막아선 것.

거대한 방패와 단단한 창을 든 그들은 성기사들의 돌격을 저지했다. 성기사들은 애를 썼지만, 상대는 드워프. 언데드나 부정한 것처럼 대번에 녹여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새끼들! 힘이 너무 강해!"

"성력으로 강화해라!"

"태양이여! 내게 축복을!"

성기사들도 그 명성에 걸맞게 저력이 있었다. 그들의 필사적인 공격은 명성 높은 드워프의 철벽을 정말로 무너뜨릴 뻔하기도 했다.

상성상 유리한 것이 없음에도 방어에 특화된 드워프들을 밀어내려 했으니, 교단의 검이라 불리는 그들의 명성은 명불허전이었다.

하지만 곧 드워프에게 합류한 노움들이 폭탄을 던지기 시작하자 성기사들은 와르르 무너졌다.

콰아아앙!

콰앙!

노움이 던지는 폭탄 앞에서 성기사고 뭐고 없었다.

한 방 터질 때마다 십년을 수행한 성기사들도 줄줄이 쓰러지니 공격이고 뭐고 결국 혼쭐이 나서 물러날 수밖에.

"노움이 왜! 태양 교단과 척을 지려고!"

"저 비싼 폭탄을 마구 던지다니!"

"이놈들! 이런 천벌 받을 짓을!"

피떡이 된 동료들을 들쳐엎고 물러나는 성기사들은 악을 써댔다. 땅바닥에는 어느새 피로 잔뜩 젖어서 진창이 될 정도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발드릭 경은 지금이 이 전투의 중요한 분수령임을 직감했다.

'어떻게든 밀려선 안 된다!'

점점 태양 교단을 향한 포위가 늘어났다. 산지 곳곳에서 새로운 군대가 도착해 합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폭탄마인 노움들만 해도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신출귀몰하게 땅바닥의 굴에서 튀어나오더니 합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뭐가 더 나올지 모른다!'

여기서 발드릭은 성녀에게 부관을 보냈다.

"가라! 성녀님께 가서 기적의 노래를 부탁해!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

"알겠습니다!"

은의 성녀에겐 기적의 노래라는 능력이 있었다. 기적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능력으로, 그 노래는 수백 명의 전사에게 무한한 원기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지쳐서 쓰러진 자들이 대번에 모든 힘을 충전해 다시 일어나게 해주니, 실로 엄청난 능력이었다.

발드릭 경은 기적의 노래가 울려퍼지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셈이었다.

그는 군사의 영재다.

일부러 군을 수세적으로 운영하며 반격을 위한 준비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아직 예비대가 건재하다.'

그는 적시에 투입할 예비대의 중요성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기적의 노래가 울려 퍼지면 예비대를 포함해 다시 한번 강력한 돌격으로 적을 분쇄하고 전투를 승리를 이끌 셈이었다.

슬쩍 뒤를 보자 고대신의 조각을 공략하는 일도 마무리 단계로 보였다. 언덕만 하던 룩스 움브라의 거체가 어느새 눈에 띄게 작아져 있었다.

'저기 투입된 사제들까지 전장으로 돌린다면···.'

발드릭 경은 다시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보냈던 부관이 괴로운 표정으로 되돌아오기 전까진 말이다.

"성녀께서 기적의 노래를 거절하셨습니다!"

"뭐라고? 뭐라고! 왜!"

발드릭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부관의 멱살을 잡고 소리 질렀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 은빛 엘리시아(4) >

***

"태양 교단 놈들이 지리멸렬하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케케켁!"

내 근처에 있던 고블린 대표인 카조그가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아군이 적을 압도하고 있다. 중간까지 태양 교단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걸 제압하자 승기가 넘어온 상황.

'엘리시아가 자기 말을 지켰군.'

은의 성녀가 힘을 발휘했으면 일이 곤란해졌을 거다. 그녀의 특수기인 '기적의 노래'라면 익히 알고 있다. 분명 전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정도의 능력임에도 끝까지 발동하지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니 전령으로 보이는 이가 성녀가 있는 본진으로 여러 차례 달려가는 걸 봤었다.

한데도 감감 무소식이었으니 엘리시아가 뭔가 핑계를 대고 거절한 게 틀림없었다.

'이제는 전세가 너무 기울어서 설령 발동해도 늦었고···.'

한데 그때 아군의 포위망 한쪽이 터져나갔다.

콰아아아앙!

빛의 폭발과 함께 철벽을 자랑하는 드워프 중갑보병들이 와르르르 무너진 것.

"뭐냐!"

맥주를 마시며 상황을 즐기고 있던 그루린 레그너가 벌떡 일어났다. 드워프들이 당한 모습에 취기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드워프를 무너뜨린 이들은 온몸이 빛에 둘러싸인 성기사들이었다. 나는 보자마자 뭔지 알 수 있었다.

'희생 능력이군···.'

극히 일부의 성기사만이 자기 생명력을 대가로 엄청난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 지금 저 앞에서 날뛰는 이는 교단의 최정예겠군.

성기사들은 철갑을 두른 드워프들조차 한손으로 집어 허공으로 던져버리고 있었다. 그러니 근성의 드워프라도 막을 방법이 없다.

그들의 돌파를 시작으로 수백의 무리가 포위망을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격분한 그루린 레그너가 장비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책임지고 저놈들을 다시 붙잡겠습니다."

나는 빠져나가는 무리 중에 은의 성녀와 호위, 그리고 부패한 태양 교단의 수뇌부가 있는 걸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패주하는 놈들은 일단 내버려두게."

"네? 어찌?"

나는 대답대신 포위망 안에 든 병력들을 가리켰다. 여전히 많았다.

"물고기를 그물로 잡다보면 일부 빠져나가기도 하는 법이지. 일단 그물 안에 있는 녀석들을 잘 수습하는 게 먼저야. 게다가 추격대를 붙일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고블린 대표인 카조그에게 도망친 녀석들을 쫓을 추격대를 준비하라 했다.

"카조그, 날래고 석궁을 잘 쏘는 녀석들로 붙여."

"알겠습니다!"

게다가 이미 산지 곳곳의 퇴로에 매복이 들어가 있는 상황. 수백이 빠져나갔다고 해도 살아서 미혹의 산을 벗어나는 이는 극히 적을 터였다.

이런 점을 알려주자, 그루린 레그너도 만족했다. 그래도 그는 자기 부대의 실수를 만회하겠다며 뛰쳐나갔다.

"레그너 왕의 이름으로! 포위한 놈들을 모조리 격멸하라!"

그가 도끼를 들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자 드워프 부대가 곧장 함성으로 호응했다.

"레그너 3세! 왕 중의 왕! 만세!"

일부가 불안한 도주에 성공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머지는 꼼짝도 못 하는 상황. 이걸 지켜보고 있는 각 종족의 대표들인 이미 전리품을 나누는 문제에 관해 논의하고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인력이 필요하오. 포로를 노예로 갖고 싶소."

"다행이군. 겹치지 않으니. 우리는 인간의 질 좋은 장비를 원한다."

"이쪽은 사제들을 받고 싶어요. 태양 교단과 협의해서 몸값을 받는 식으로 진행하려고요."

나는 전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은의 성녀와의 문제를 마무리하는 것이었으니까.

* * *

포위망을 빠져나간 수백이 겪은 운명은 잔혹했다. 빠져나왔다는 기쁨도 잠시, 산지 곳곳에서 공격을 해오는 적습에 밤낮으로 시달렸기 때문이다.

온갖 종류의 독을 발라서 쏴대는 고블린의 석궁이나, 기력을 쇠하게 하는 코볼트 주술사의 저주,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폭발하는 노움의 폭탄까지··· 지옥과도 같은 탈출이 이어졌다.

전사자가 줄을 이었고, 무리는 수십여 명 단위로 쪼개져 미혹의 산 곳곳으로 흩어지게 됐다. 이제는 여러 소그룹들이 어떻게든 인간 왕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야밤에 산지의 은밀한 곳에서 엘리시아와 따로 만남을 갖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내 부름에 엘리시아는 기진맥진해 쓰러진 한 줌밖에 안 되는 수행원들의 눈을 피해 찾아왔다.

"주인이시여."

은의 성녀로 가장하고 있는 엘리시아가 내 앞에서 기꺼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하얀 성의는 먼지와 얼룩으로 더러웠다.

"이렇게 실제로 대면하는 건 처음이지?"

"깊은 영광입니다. 감격한 이 마음을 말로 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첨은 됐다. 이번에 일을 아주 잘해줬군. 너는 스스로를 입증했다."

내 선언에 엘리시아는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이번 일로 인해 은의 성녀의 평판이 크게 떨어지겠지만, 내부에서 돕는 데는 문제없을 것입니다. 인간이란 뭐든 금방 잊어버리니까요."

그 말에 나는 흡족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아주 잘했다. 엘리시아."

"감사합니다. 이제 제 진명을 바치고 종속하고자 하니 받아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하지만 그전에 할 일이 있다. 이리 오도록. 여신의 축복을 받으라."

나는 제자리에서 손을 앞으로 내밀며 명령했다. 그러자 엘리시아가 일순간 꺼림칙한 표정이 됐다.

"왜? 이제부터 너도 그분을 섬길 테니 이 축복을 거절할 이유는 없는 터."

내 말에 엘리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차분한 태도로 다가왔다.

"주인께서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좋다. 무릎 꿇고, 새벽빛의 주인인 그분을 향해 존경의 마음을 품어라."

얌전히 무릎 꿇은 그녀의 정수리를 향해 나는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은발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겉모습만 보면 정말 영락없이 정결하고 아름다운 성녀로만 보였다.

"새벽의 축복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주인이시여."

"그래, 이것은 네게 좋을 것이다."

그 말과 함께 전력으로 힘을 일으켰다.

"치유의 새벽이시여! 지친 자들에게 은혜를!"

바로 내 성명절기, 새벽의 손길이었다. 추기경급의 막강한 치유력이 엘리시아의 정수리로 향했다.

허를 찔러 약점을 제대로 노렸다. 잘만하면 에인션트의 머리를 터뜨려 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번쩍!

빛이 작렬하나 싶더니 뜻밖에 폭발음이 일어났다.

콰아아앙!

폭발력에 나는 뒤로 길게 밀려났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더 심했다. 그녀는 포탄처럼 날아가 근처의 바위를 쪼개며 쓰러졌던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다.

"견뎠어···?"

놀랍게도 은빛 엘리시아는 내 성명절기를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머리가 온전했다.

물론 타격을 크게 입은 듯 비틀거리긴 했지만, 이 능력을 뒤집어쓴 뱀파이어 중에 제일 멀쩡한 모습이었다.

"주인이시여···! 이게 무슨?"

그 말에 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 가식은 그만 좀 떨지? 그것보다 대체 어떻게 막았담? 하, 이 양반, 진짜 대단하네. 아무래도 발레스카에게 이 기술에 대해 들은 것 같은데 말이야."

어쩐지 축복을 준다고 할 때 순순히 오더라니. 새벽의 손길은 분명 어떤 힘에 막혔고, 그 충돌로 인해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엘리시아는 그 탓에 바위를 부술 정도로 튕겨나갔지만 에인션트 뱀파이어에겐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저는 오로지 충순하고자 할 뿐입니다! 제 뜻은 이미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부디 노여움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주인이시여!"

엘리시아는 그런 꼴을 겪고도 간청해왔다. 마치 이게 시험이면 기꺼이 응하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한다. 만약 제대로 된 대비가 없었다면 머리가 터질 뻔했음에도 분노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자신을 거절한 사실에 깊은 슬품을 느끼는 듯한 얼굴이었다.

겉모습만큼은 몹시 가련했기에 그녀가 괴로워하는 표정은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워어. 가까이 오진 말고. 아직 더 남았으니까."

아직 내 오른손에는 새벽의 손길이 발휘하는 힘이 머물고 있었다. 완벽히 쏟아내기 전, 반발력에 상대가 튕겨 나간 탓이다. 나는 그걸 앞으로 내밀며 엘리시아를 경계했다.

"주인이시여. 저는 교단마저 버리고 주인을 선택했습니다. 부디 마음을 진정하시고, 제 진심을 헤아려 주십시오. 주인께서 믿을 수 있게 뭐든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엘리시아는 뭔가 결심한 표정이 되더니 자신의 옷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하얀 어깨를 노출한 채 얼굴을 붉히며 말해왔다.

"믿음을 위해서라면 저를 품으셔도 좋습니다. 제 마음도 몸도 주인께 드리겠습니다."

애써 수치를 이겨내는 듯 입술을 깨문 모습과 용기를 가득 낸 듯한 태도. 그 모든 게 꿈결처럼 달콤했다.

'서큐버스의 피인가. 다들 넋 놓겠군.'

대단하다 싶었다. 심지어 노출도 아주 계산적이었다. 최소한의 절제로 천박한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심장이 뛰게 만든다는 건가. 성녀의 복장은 약간만 벗는 것만으로도 파괴력이 막강했다.

이런 여자에게 홀리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여전히 오른손에 새벽의 손길을 유지하며 말했다.

"지랄은 거기까지 해라. 네 계책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끝날 테니까."

어쩌면 이 녀석, 여신님까지 노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섬기는 신을 배신해 신력을 차지하려는 야망도 예상할 만했다.

"주인이시여··· 어찌.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소녀라니. 긴 세월을 머금은 괴물이 참으로 별스러운 소리를 다하는군. 이 움직이는 썩은 시체야! 네가 지상의 여자 중 가장 늙고 추한 걸 모르지 않는다."

"······."

"이미 네가 꿈속에서 고대의 유물을 내밀었을 때부터 눈치챘다."

엘리시아의 목숨이 담긴 고대의 유물은 청동 십자가가 맞다. 하지만 진품은 십자가의 한쪽이 부러진 모습이다.

나는 그걸 지적했다.

"날 어리숙하고 속여먹을 만한 젊은 뱀파이어라고만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네가 생전에 어떤 존재였는지 알고 있다."

"그게 무슨···?"

"너는 고대의 사제였다. 엘리시아. 그 십자가 역시 생전에 가지고 있던 신앙의 증표이고. 하지만 타락했고, 그 증표의 일부를 부러뜨림으로써 믿음을 저버렸다."

즉, 온전한 십자가는 엘리시아가 신실했던 사제일 때를 나타내니 뱀파이어의 생명을 담은 유물로 적당하지 않다는 것.

"이래도 부정할 건가?"

"······."

엘리시아는 별다른 대답 없이 차갑게 변한 얼굴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 자신의 비밀이 갑자기 튀어나왔으니까.

나는 엘리시아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 결론은 엘리시아를 받아들인다는 게 아니었다.

나답게 처리했다.

'써먹고 버린다.'

전에도 누누이 말했지만 에인션트 뱀파이어는 똥덩어리들이다. 어찌 똥을 옆에 두겠는가?

교양 있는 시민이라면 그런 더러운 건 화장실로 분리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주인이시여. 그건 착오입니다."

엘리시아는 다시 처연한 얼굴로 연기를 해왔다.

"착오라고?"

"꿈의 세계였지 않습니까? 그곳은 뒤틀린 세계. 실제 유물과 다소간의 모양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거지요. 오해하게 해드린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오? 그런 건가?"

"송구합니다. 제대로 된 유물을 바치겠습니다. 제 생명을 온전히 맡길 테니···."

"아니, 단서는 그것만이 아니지."

고인물을 얕보지 마라. 뭔가 판단할 때 한 가지 근거만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으니까.

"너는 전직 성녀님과 직접적인 원한 관계가 없다고 했지."

"물론입니다. 말씀드렸듯 제가 교단에 온 건 다른 에인션트의 요청으로······."

"아니지. 아니야. 나는 알고 있다. 네가 다른 에인션트마저 속이고 있었던 걸."

이게 어디서 스토리를 빠삭하게 알고 있는 내 앞에서 구라를 쳐?

은빛 엘리시아는 에인션트 중에서도 정말로 교활한 존재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먼저 태양 교단에 자기 세력을 심고 암약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조차 같은 에인션트들에게 철저히 감췄다.

동업자겸 라이벌인 영원의 발레스카와 공포의 움베르트는 그녀가 이미 교단에 뿌리를 내린 걸 몰랐고, 이후 일손이 부족하자 불러들인 것.

그때 엘리시아는 태양 교단은 처음이라는 듯 뻔뻔하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지. 네가 전직 성녀님의 실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걸."

"대체 무슨 근거로···?"

"추잡하게 그것도 설명해야 하나? 교황의 숨겨진 애인 중에 하나가 너였다는 거 말이야?"

"!"

교황과 엘리시아만의 비밀이라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둘은 이전부터 연인 관계였다. 나중에 발레스카와 움베르트가 엘리시아를 성녀로 가장시킬 때 교황이 은근히 도움을 준 것도 그것 때문이다.

"아주 비밀스러운 관계라 아는 이가 없지. 하지만 완벽한 비밀은 없는 법이야."

엘리시아는 대담하게도 핏빛 새벽의 여신마저 속일 생각이었다. 아마 그녀가 관여했던 건 우리 순둥이 여신님도 사실 몰랐을 거다.

'여신님은 안 봐도 뻔하지.'

아마 우리 여신님 성격상 엘리시아가 보자마자 맘에 안 들었었을 것이다. 자기 자리를 차지한 가짜 성녀니까. 하지만 내가 수하로 받겠다고 결정하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겠지. 사도인 나를 존중해 주려는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 없는 놈이 아니다. 누구든 핏빛 새벽의 여신과 작은 원한이라도 있다면 절대 타협할 생각 따윈 없었다. 심지어 저년은 직접적인 원수 가운데 하나다.

여신이 과거 직장에서 쫓겨나는데 알게 모르게 많이 관여했었던 것이다.

'여신님 걱정 마십시오. 저는 여신님 밖에 없으니.'

속으로 기도를 올리자 갑자기 극렬한 반응이 돌아왔다.

왼손에 낙인이 뭔가 불에 댄 것처럼 뜨거워졌던 것.

"네놈······. 대체?"

"아, 이제는 부정할 생각이 없는가 보지?"

"······."

"나는 진작 결론을 내렸다. 네년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당장이야 유능하고 잘 써먹을 수 있겠지. 하지만 정신 차리면 모든 게 홀랑 네년에게 넘어가 있는 꼴을 볼 것 같거든?"

엘리시아의 수작질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진명을 바치고 꼼꼼한 계약을 한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다.

뭐든 파훼법이 있기 마련이다. 엘리시아는 필요하다면 수십 년, 수백 년간 굴종을 택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허점을 찔러올 타입이었다.

가령 내 모든 목표가 최종적인 승리를 향해 가고 있을 때,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 무섭게도 그때까지 아주 충실한 수하 노릇을 할 테고.

처음에는 진명을 받아 유리한 상황에서 처분할까 했다. 하지만 제대로 진명을 바칠지도 미지수인 데다가, 계약을 하면 나도 주인의 의무가 생겨 저쪽을 처리하기 어려워진다.

"나는 네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안단 말이야. 그러니 속지 않는 거다."

내 말에 엘리시아는 처음과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입을 열었다.

"제법이구나. 젊은 뱀파이어."

동시에 엘리시아가 성녀의 모습을 버리고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본질을 드러냈다.

성녀의 신성한 의복이 불에 탄 것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붉은 비늘로 덮인 육감적인 여성의 육체가 드러났다.

등 뒤로 펼쳐진 날개와 머리의 뿔. 악마적인 외형이었다. 그녀는 나른하게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의문이구나. 무슨 깡으로 내 앞에 홀로 나온 것이지? 네 모든 영민한 추리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내가 널 잡아 찢어버리면 다 소용없는 것 아닐까?"

"아, 그건 맞는 얘기지.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을 테니 몸이 들썩이겠군?"

"잘 아는구나. 네게 궁금한 게 많단다. 붙잡은 뒤에 피부를 천천히 벗기면서 친절하게 물어주마. 발레스카랑 싸울 때는 꽤 운이 좋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밤이 깊구나. 더 이상의 행운은 없을 거란다."

그 말에 나는 씨익 웃었다.

"미안하지만 정정당당한 싸움은 나랑은 거리가 멀어서."

"뭐라?"

대답은 내가 하지 않았다. 창공에서 빛이 반짝였기 때문이다.

콰아아아아앙!

작렬하는 번개가 은빛 엘리시아를 강타했다. 하지만 진짜 공격은 그 다음이었다.

하피의 여왕이 날개를 접고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물은 거물들끼리 싸우라고."

< 은빛 엘리시아(5) >

***

뱀파이어들의 시조인 에인션트와 신의 힘으로 떡칠한 사도인 하피 여왕의 싸움.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절로 웅장해진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울어라! 내 하늘에는 자비란 없을지니!"

하피 여왕의 외침이 일대를 쩌렁쩌렁 울렸다. 신의 힘을 발휘하는 그녀는 가히 초월적인 모습이었다.

하피 여왕의 날갯짓만으로 주변에 먹구름이 끼고 비바람이 불어댔다. 강풍에 사방의 나무가 넘어갈 듯했고, 나뭇잎이 무수히 흩날렸다.

번쩍!

다시 한번 낙뢰가 에인션트 뱀파이어 엘리시아를 강타했다.

"끄아아아아!"

번개를 맞은 엘리시아의 한쪽 날개가 터져나갔다. 그녀는 온몸이 그을린 채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빠르게 재생 중이다.

"감히! 이 날파리 같은 것이!"

격분한 엘리시아가 양손으로 땅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지면에서 뾰족한 돌기둥이 줄줄이 치솟으며, 하피 여왕을 노렸다.

하피 여왕은 엘리시아를 노리며 날아오고 있었기에 위험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피 여왕의 비행술은 놀라웠다. 빠르게 비행하면서도 몸을 좌우로 틀어 밑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돌기둥들을 모조리 피해낸 것이다.

"허!"

지켜보면서도 그 신들린 비행술에 감탄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하늘의 종족인 하피답다고 할까?

하지만 그때 엘리시아도 자신의 날개를 이용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하피 여왕과 교차하는 순간 마법을 퍼부었다.

번쩍!

마치 투척한 단검처럼 보이는 마법의 투사체가 폭우처럼 하피 여왕을 향해 쏟아졌다.

보자마자 엘리시아가 공중전에 경험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중에서 상대를 맞추는 게 쉽지 않음을 알고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하피 여왕이 위기에 처하는 듯했지만 그녀는 공중에서 기가 막힌 솜씨로 그걸 피해냈다. 그리고 교묘한 비행으로 엘리시아의 후미에 붙더니 마구 번개를 쏘아댔다.

콰앙! 쾅!

엘리시아도 이번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미리 마법 방어막을 펼쳐 번개를 견뎌낸 것이다. 하지만 공중에선 하피 여왕이 한 수 위였다. 그것조차 계산했다는 듯, 번개를 막느라 주춤한 엘리시아를 빠르게 날아 독수리 같은 발로 낚아챘다.

"끄아아아아!"

비명이 터지더니 둘은 공중에서 서로 엉켜 싸우는 매처럼 빙글빙글 돌아댔다. 그리고는 근처에 일렬로 솟아 있던 돌기둥을 요란하게 부수며 추락했다.

와르르르! 콰아아앙!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 어떻게 된 건지 상황 파악이 안 됐다. 그런데 그때 엘리시아가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로 튀어 올랐다.

무언가에 맞고 날아가는 모양새였다. 그녀의 곁에는 부서진 돌기둥의 파편이 무수히 많았다.

"끄아아아아!"

엘리시아는 곧 바닥에 추락했고, 주변에 돌기둥의 파편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땅바닥을 구르는 엘리시아는 나무 몇 개를 박살낸 뒤에야 겨우 멈췄다. 그녀는 머리를 털며 몸을 일으켰고, 곧 구경하던 나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누가 봐도 날 인질로 잡고자 하는 기색이었기에 물었다.

"왜. 하피 여왕과 잘 안 풀리나?"

그러자 엘리시아는 대답대신 내 쪽으로 손을 뻗으며 화살처럼 쏘아져 왔다.

"어이쿠, 이런!"

놀란 나는 재빠르게 도주했다. 물론 에인션트 뱀파이어에게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곧 지면이 지진이 난 것처럼 출렁거리더니 거대한 촉수 덩어리가 튀어나와 내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뀌이이잉! 뀡!

바로 룩스 움브라의 조각 중 하나인 시골이였다.

이 녀석은 미혹의 산이라면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태양 교단에게 당해 많이 약해져 있긴 했지만 방패 역할 정도는 충분했다.

거대한 기둥 같은 촉수들이 채찍처럼 엘리시아를 연이어 때려댔다.

콰아앙! 쾅! 쾅!

촉수 하나하나가 땅을 강타할 때마다 지면이 박살 나며 흔들렸지만, 엘리시아는 어렵지 않게 막거나 피했다.

"겨우 이딴 괴물로 날 어찌할 수 있을 것 같나!"

분노에 젖어 소리치는 엘리시아를 보며 시골이 뒤에 숨은 나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하지만 엘리시아는 그쪽을 볼 틈도 없었다. 순식간에 날아온 하피 여왕이 발톱으로 엘리시아를 붙잡고 지면에 그녀를 갈아버렸기 때문이다.

콰지지지지직!

엄청난 무게의 하피 여왕에게 짓눌리며 엘리시아가 길게 지면에 갈려나갔다.

"무지 아프겠네."

지켜보던 나는 인상을 쓰며 몸을 움츠렸다.

"이 빌어먹을 놈들! 크아아아!"

엘리시아는 몸을 일으키려 바둥바둥거렸지만, 하피 여왕은 강력했다. 사납게 울부짖으며 발로 엘리시아를 찍어 눌렀다.

콰직!

어찌나 그 힘이 강하던지 지반에 금이 가더니 함몰되는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소렌, 서둘러라!"

하피 여왕의 외침에 미리 준비한 은접시를 꺼냈다. 이전에 여신이 소신격에 오른 걸 기념해서 내린 하사품이다.

은접시는 지상으로 내려온 달처럼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이걸 보자마자 위협을 느낀 듯 비명을 질러댔다.

"키에에에엑!"

그리고 괴력을 발휘해 하피 여왕을 밀어내기까지 했다. 하피 여왕은 당황한 듯 비명을 질렀다.

"이년이 갈수록 강해진다! 소렌! 어서!"

나는 얼른 시골이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촉수가 뻗어가 몸을 일으키던 엘리시아를 휘감는다.

그렇게 하피 여왕과 시골이가 엘리시아를 붙잡는 동안 은접시에 힘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핏빛 새벽의 여신이시여. 여기 신성한 하사품의 힘을 발동하여 저 오래된 어둠을 영원히 결박하길 원합니다."

기도문을 외기 시작하자 점점 은접시의 색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엘리시아는 심각한 위협을 느끼는 듯 발작해댔다.

"닥쳐! 닥쳐라! 그 주둥이 닫으라고!"

하지만 나는 하피 여왕과 시골이를 믿고 계속 주문을 외워나갔고 마침내 완성했다.

"어둠을 가두고자 하니, 고대의 공포가 영원한 은의 감옥에 머물게 하십시오."

기도문이 완성되자 그렇게 날뛰어대던 엘리시아가 역동적인 형태 그대로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재처럼 바스러지며 은접시로 그 가루가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공에선 봉인 중인 엘리시아의 목소리가 귀신처럼 들려왔다.

[이 무슨···! 히이익! 이럴 순 없다!]

"없긴 뭐가 없어. 너 같이 은퇴할 시기를 놓친 늙다리에게 노후 설계를 다해줬는데."

[자, 자비를.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위대하신 사도시여!]

엘리시아는 이제야 내 힘을 실감한 듯 애걸복걸해왔다.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아주 깊은 곳에 봉인해 주마. 이 세상이 열 번은 망할 때까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혼자 느긋한 시간이 될 거야."

에인션트 뱀파이어에게 봉인은 가장 무서운 최후 가운데 하나였다.

산 채로 멀뚱멀뚱 눈을 뜨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영겁의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어둠의 유물 때문에 자살도 못하고, 봉인 속에서 정신이 붕괴돼 간다.

당연히 식겁할 수밖에.

엘리시아는 온갖 조건을 걸며 협상하려 했다.

[영원한 노예로 작은 소망조차 갖지 않고! 세상이 망할 때까지 봉사하겠습니다!]

"그래?"

[저뿐만이 아니라 발레스카! 발레스카와 움베르트 또한 노예로 만들 방법이 있습니다! 제발 자비를!]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만 주절거리고 은접시 안으로 들어가."

[제가 할 수 있는 제안은 더 남았습니다! 주인이시여!]

"뭘 제시하던 소용없다. 네가 여신님께 반기를 든 순간부터 그분의 사도인 나와는 작은 타협조차 불가능해진 거니까."

[네놈! 이 빌어먹을 새끼! 이 봉인에서 나가기만 하면······ 끄아아아아······.]

나는 더 들어줄 것도 없다는 듯 봉인 의식을 마무리했다.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찢어지는 비명이 사방에 울렸지만 금방 뚝 그쳤고,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됐다.

봉인에 성공한 것이다.

빛을 뿜어내던 은접시는 에인션트 뱀파이어가 사라지자 평범한 물건으로 돌아갔다.

접시 위에 고통스러운 표정의 엘리시아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 외에는 흔한 은접시처럼 보였다.

"끝났군. 후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강적이라 할 수 있는 에인션트 뱀파이어 하나를 치운 것이다. 동시에 이 뿌듯한 기분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이제 이 은접시만 잘 보관하면 엘리시아는 영원히 안 봐도 된다. 거기에 더해 보너스도 있었다.

'조만간 엘리시아의 본진을 털어야겠군.'

주인 잃은 본거지의 보물은 모조리 내 차지였다.

그때 거대한 하피 여왕이 이쪽으로 걸어와 선언했다.

"약속을 지켰다. 너도 우리의 존엄하신 분과 한 약속을 지켜야 할 거다."

무슨 소린가 하면 신들의 도시 아룬델에서 추방된 하피신에 관한 문제다. 그걸 내가 해결해주기로 했다.

"알고 있다. 감히 어길 생각도 없고."

하피신이 직접 신들의 도시로 데려다 준다고 했다. 그곳에 가면 드디어 핏빛 새벽의 여신님과 만날 수 있을까?

어쩐지 해결해야 할 문제보다 여신님이 제일 신경 쓰였다.

* * *

뱀파이어 성녀.

핏빛 새벽의 여신은 에인션트 뱀파이어 엘리시아가 봉인되는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원수의 몰락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머릿속에 계속 자신의 사도가 남긴 말이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신님 걱정 마십시오. 저는 여신님 밖에 없으니.

그 기도를 듣는 순간 무언가 가슴 속을 푹 찔러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신은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감정이 소용돌이쳤고, 여신은 혼란스러워졌다. 그 모습에 새벽의 시종 세티스가 간해왔다.

"위대한 분이시여. 이럴 때가 아닙니다."

"···네? 어째서요?"

"현명한 이라면 늘 앞일을 대비해야 합니다. 사도가 이번 일을 마무리하면 아룬델로 오는 건 명확한 사실입니다."

"아룬델!"

뱀파이어 성녀의 붉은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아룬델이라면 여신님과 만날 기회가 있겠지요."

"세상에.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핏빛 새벽의 여신은 당황해서 허둥댔다. 사도와의 대면을 줄곧 기대해 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진짜로 코앞에 닥치자 어질어질해졌다.

게다가 둘의 만남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대신격인 불멸의 카라즈라에게 공언한 게 있는 바, 둘은 반드시 연인이 되어야만 했다.

그건 성녀로 금욕적인 삶을 살아온 여신에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연인이나 연애란 게 대체 뭘까요?"

혼란을 겪는 주인을 위해 새벽의 시종 세티스가 자신의 지식을 검색하고는 답해줬다.

"음··· 고서의 표현에 의하면 연애란 사랑의 화살로 상대를 쏘아 맞히는 것이라 합니다."

"화살인가요!"

"아마도 비유인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결국 그 연애란 게 사냥과 같다는 뜻 아닐까 싶습니다."

새벽의 시종 세티스의 말에 여신은 집중했다. 그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어서 세티스는 나름의 결론을 내줬다.

"연애의 상대는 사냥감 같은 거겠지요. 결국 다양한 기술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게 연애인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가. 정말 만만치가 않군요!"

안타깝게도 세티스는 연애에 무지한 여신에게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주고 있었다. 핏빛 새벽의 여신은 결의를 다졌다.

"대비할 필요가 있겠어요. 일단 아룬델로 먼저 가 있는 게 좋겠네요. 연애가 사냥이라면 아룬델은 사냥터니까요. 훌륭한 사냥꾼이라면 사냥터를 미리 관찰하는 게 중요하죠."

세티스는 여신의 말에 찬동했다.

"대견하십니다. 정말. 그런 자세라면 노리는 먹이를 단번에 쳐서 쓰러뜨릴 수 있을 겁니다."

"후훗. 칭찬 감사해요."

"이곳의 관리는 걱정하지 마시고 천천히 일을 보고 오십시오. 제가 잘 돌보고 있겠습니다."

"정말 든든한 말씀이네요."

핏빛 새벽의 여신은 아룬델로 향하는 차원 관문을 열었다. 그런 그녀에게 세티스가 조언했다.

"위대하신 분이여."

"네?"

"연애가 뭔지 저희끼리 대강 결론을 내긴 했습니다만··· 잘 모르는 부분은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게 제일 좋습니다. 아룬델에 분명 사랑이나 연인에 관련된 신들이 있을 겁니다. 찾아가서 조언을 구해보심이 어떠신지요?"

"정말 좋은 의견이네요."

여신은 조언을 받아들이고 아룬델로 향했다. 그리고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한 가지 문제를 깨닫게 됐다.

"아······!"

생각해 보니 핏빛 새벽의 여신은 친구도 지인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르는 여신에게 말을 걸어볼 정도로 담이 세지도 않았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신들 주위를 기웃거렸지만, 저마다 무리를 이룬 그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소심한 핏빛 새벽의 여신에게 그건 너무나 큰 장벽이었고 그녀는 이내 포기하고는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네요. 도서관이라도 갈까요? 책 속에 모든 지식이 있으니···.'

도서관으로 가기 전에 평소처럼 음료수인 넥타르를 사러 노점에 들렸다. 그곳에는 어느 때처럼 귀여운 요정이 웃는 얼굴로 여신을 맞아줬다.

"앗! 또 오셨네요!"

한데 오늘은 손님이 하나 더 있었다. 부드러운 크림색 머리칼을 땋아 올린 몹시도 아름다운 여신이었다.

핏빛 새벽의 여신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 여신을 쳐다봤다. 상대는 노출이 심한 색정적인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같은 여자가 봐도 어쩐지 볼이 붉어질 정도로 야하게 느껴졌다.

성의로 몸을 꽁꽁 싸매고 다니는 핏빛 새벽의 여신과는 상당히 다른 차림새였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주문한 넥타를 건네받다가 핏빛 새벽의 여신의 눈길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돌렸다.

"와, 귀여운 분이시군요! 그런데 제게 무슨 용무가 있으신가요?"

상대의 태도는 몹시 살가웠다. 그래서 핏빛 새벽의 여신은 자기도 모르게 용기가 나 불쑥 물었다. 뜬금없긴 하지만 지금 얘기를 꺼내야 한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저···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걸까요?"

그 말에 상대는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곧 환하게 웃었다.

"아, 제가 누군지 알아본 거군요? 걱정 마세요. 당신은 아주 좋은 조언자를 찾은 거니까. 이 아프로디테가 그쪽에는 전문가거든요. 호호호호."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다른 세계의 신이지만, 수많은 차원이 교차하는 이 아룬델에서는 한 번쯤 만날 수 있는 존재였다.

< 교단 최강의 검(1) >

***

미혹의 산 방면으로 진군했던 태양 교단의 군세는 전멸했다.

전멸이란 판정에 대해 군사학적으로 서로 입장이 다르겠지만, 이번에는 이견이 없을 정도였다.

산에 진입했던 인원 9할이 죽거나 포로로 사로잡혔으니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참패라 하겠다.

나머지 1할도 산지 여기저기서 노루처럼 쫓기며 사냥 당하는 중이라 과연 몇이나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살아남을 놈은 사는 법이다.

"네가 멀쩡할 줄 알았다. 너 같은 악당은 목숨이 쇠심줄처럼 질기거든. 크하하핫!"

나는 잡혀와 무릎을 꿇고 있는 아달릭을 보며 파안대소했다.

교구장 아달릭.

에인션트 뱀파이어의 끄나풀로 나와도 꽤나 인연이 있는 자라 하겠다. 지금 그는 넋 나간 표정으로 주저 앉아 있었다.

"···주인께서, ···주인께서 느껴지지 않는다. 나의 주께서!"

아달릭은 섬기던 에인션트 뱀파이어인 은빛 엘리시아의 소멸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녀석은 도망갈 생각도 안 한 채 주변을 떠돌다가 잡혀 왔다. 주인을 부르며 정신병자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나는 그런 그를 보며 혀를 찼다.

"태양 교단이란 놈이 뱀파이어 따위를 주인으로 부르면서 정신이 나가서는··· 쯧쯧!"

"주인이시여··· 아아! 나의 주인이시여!"

"정신 차려라. 아달릭. 네 주인은 이제 없으니까."

내 지적에 아달릭이 눈을 부릅떴다.

"닥쳐라! 미천한 자가 아무것도 모르고 내뱉어! 이 무도하고 무례한!"

나는 충혈된 눈으로 원한을 쏟아내는 아달릭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기운이 넘치나 보군? 뭐, 좋아. 너는 꽤 쓸모가 있으니까."

대답대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손을 그에게 뻗었다. 그리고 뱀파이어의 매혹 능력을 사용해 아달릭의 정신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놈! 이 무슨 수작질을! 끄아아아!"

아달릭은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포박 때문에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는 발작을 해댔는데, 마치 그 꼴이 그물에 갇혀 발버둥 치는 물고기 같았다.

"으아아아! 크악!"

아달릭은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엘더급에 오른 뒤, 내 능력은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다.

놈이 얌전해지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 나의 주인이시여!"

절망에 빠져 있던 그의 얼굴에 새로운 희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음울하게 젖어 있던 눈동자가 기쁨으로 다시 물든다.

새롭게 마음을 바쳐 섬길 이를 찾은 환희라고 할까?

나는 조소를 감출 수 없었다.

"누군가의 하수인을 벗어날 수 없는 전형적인 소악당이구만."

하지만 이런 모욕에도 아달릭은 기어와 내 신발에 입술을 맞춰댔다.

"주인이시여. 이 비천한 자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존의를 일생 좇겠습니다."

"됐다. 달라붙지 마라!"

나는 놈이 역겨워 걷어찼다. 그럼에도 아달릭은 서둘러 다시 기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주인이시여!"

놈은 충성을 증명하겠다는 듯 진흙 바닥에 이마를 계속 찍어댔다.

"그래, 앞으로 쓸모가 있기 바란다."

악당이란 교활하기에 수족으로 부릴 수 있다면 쓸모가 많은 법이다. 나는 아달릭을 어떻게 써먹을지 구상에 들어갔다.

***

승전의 여세를 몰아 어둠의 숲으로 진군하고 싶었지만 무리였다.

다들 전리품 분배에 눈이 돌아갔기 때문이다. 태양 교단은 부유한 집단이었고, 놈들은 엄청난 재산을 남겼다.

노예로 쓸 인력, 값비싼 무구, 보급품, 사제들의 화려한 장신구까지, 탐나는 건 얼마든지 있었다.

당연히 일곱 봉우리의 종족들은 자신들의 전공을 강조하며 하나라도 더 가져가려고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번 일에 우리 고블린이 최고의 공적을 세운 건 확실하다! 케케케!"

"알고 있소. 하지만 우리는 더 받아야 하오. 전투 중 스킨크 주술사들이 거대한 바위를 상대 진영에 굴려 방어진을 으깬 걸 잊었소? 스에에에!"

심지어 얌전하던 스킨크 족장 스위프트테일까지 목에 핏대를 세울 정도니 말다했다.

'무리해서 나아갈 순 없겠군.'

나는 다투는 각 종족 대표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고 분배 때문에 한정 없이 시간만 보낼 수도 없고···.'

미혹의 산에서 대승을 거뒀다지만, 태양 교단의 본대가 마주한 블라르 백작은 풍전등화다.

서둘러 구원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대론 어려우니 정예를 선발대로 추려서 먼저 진격하는 게 좋을 것 같군.'

한데 그때 품에 있던 수정구 중에 하나가 진동했다. 슬쩍 보니 새블릿 남작부인이었다. 나는 자리를 벗어나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남작부인.

-다켄발트 님!

새블릿 남작부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기돼 있었다. 어제 승전 소식을 듣고 어찌나 놀라고 기뻐하던지, 차분하고 기품있는 그녀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아마 여러 가지로 굉장히 구석에 몰렸던 모양이다. 그녀는 우리의 대승을 축하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연락을 하면서도 그 기분이 채 가시지 않은 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켄발트 님의 무훈에 대해 얼마나 더 찬사를 보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뭘 해야 보답을 할 수 있을까요···? 원하시는 건 뭐든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찬사는 최종적인 승리 후로 미루겠습니다. 상황이 어떻습니까?

새블릿 남작부인은 내 물음에 감정을 털어버리고는 다시 냉철한 목소리로 알려왔다.

많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블라르 백작은 짧은 기간 충분한 군세를 모았지만 태양 교단을 상대하기 무리였다.

'상성이 너무 안 좋군.'

구울이나 좀비로 이뤄진 부대가 성기사들에게 싸그리 녹아버리고는 연일 밀리기만 했다고. 결국 본진인 요새가 포위돼 완전히 갇힌 상태였다.

-블라르 백작님은 여전히 하코의 눈물이 만든 후유증에 시달리고 계세요.

-큰일이군요. 전력을 다해도 성기사단장을 상대하기 어려운데.

문제는 상황이 이러니 블라르 백작의 동맹자들이 갑자기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

전쟁 전까지만 해도 도와줄 것 같이 굴다가 갑자기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단다.

-특히 오르고 투탄이 가장 문제예요. 그 가증스러운 도마뱀!

새블린 남작부인이 성토하는 오르고 투탄은 어둠의 숲에 자리잡은 포레스트 드래곤이다.

몹시 탐욕스럽고, 멍청하고, 간악한 존재인데 그 힘만은 발군이었다. 블라르 백작의 허락 하에 광대한 어둠의 숲 일부에 세들어 사는 자인데, 그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도움을 줄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오르고 투탄은 굼뜬 엉덩이를 움직이긴 했는데, 오다가 멈춰버렸다고.

-그 도마뱀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합류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답니다. 멍청하긴 해도 워낙 강하니 분명 큰 도움이 될 텐데, 너무 괘씸해요.

-으음······.

어느 세계관이나 그렇지만 드래곤은 강하다. 어떻게든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오르고 투탄에 대해 정리한 뒤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녹색 도마뱀이 자기 의무를 다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정말인가요? 그는 오만하고 포악해요. 설득이 쉽지 않을 것인데!

-걱정 마십시오.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다켄발트 님···!

-일단 놈이 있는 위치만 알려주십시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

포레스트 드래곤 오르고 투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동원한 건 바로 태양 교단의 포로들이었다.

즉각 200명을 드래곤에게 바치는 공물로 위장해 포박했다. 그리고 고블린 용병들을 동원해 오르고 투탄에게 나아갔다.

고블린들은 위협적인 포레스트 드래곤을 만난다는 사실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내가 평소의 세 배나 되는 고용비를 약속하자 이 위험한 임무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꼬박 사흘을 행군했고, 마침내 오르고 투탄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거대한 숲의 공터였다. 포레스트 드래곤은 그 가운데 언덕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너희 조무래기들은 대체 뭐냐?"

언덕 위에서 길쭉한 게 위로 솟구치며 물어왔다. 늘어져 있던 드래곤의 긴 목이 꽂꽂하게 서며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드래곤이었고, 숲에 어울리는 녹색과 갈색의 비늘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샛노란 눈알은 탐욕으로 번뜩였다.

'장엄하긴 하군···.'

실제로 보게 된 드래곤의 위용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날개는 오랜 세월로 너덜너덜했지만 여전히 한 번 돌풍을 일으키면 이쪽 모두를 날려버릴 정도였다.

근육질의 꼬리 역시 주변을 내리치면 수십 명의 목숨을 대번에 빼앗아갈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늘 기세등등한 고블린들이 대번에 겁먹고 주눅든 게 느껴질 정도다.

"케케···."

"저건 죽음이다···. 케···."

"숲의 재앙··· 두렵다."

특별히 가려 뽑아, 오크처럼 덩치가 큰 고블린 호위병들조차 귀를 늘어뜨리며 어두운 얼굴이 됐다.

"모두 정신 차려라."

나는 사납게 일갈한 뒤에 앞으로 나아갔다.

"숲의 지배자 오르고 투탄이시여. 저는 소렌 다켄발트라 합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위대하신 분께 공물을 바치고자 함입니다."

"뭐라? 정말인가! 크르르르!"

공물이란 말에 오르고 투탄의 태도는 급격히 부드러워졌다. 휴식을 방해받아 짜증났던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험악한 얼굴로 그르렁거리며 날 환대했다.

"참으로 싸가지가 있는 녀석이군. 바지런히도 모아왔구나. 이게 대체 어쩐 일이냐? 설명해 보라."

"저는 소렌 다켄발트라 하며 일곱 봉우리에서 세력을 이루고 있습니다."

"소렌 다켄발트라? 들어본 적 없군. 다만 너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내가 소문에 어둡기 때문이야."

"위대한 드래곤께서 미욱한 자들의 이야기에 신경을 끄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게 어찌 흠이겠습니까?"

"푸하하핫! 네놈 말하는 게 점점 마음에 드는구나!"

입발린 소리를 하자 오르고 투탄은 즐거워하며 그르렁거렸다. 이 녀석은 칭찬이나 아부에 약했다.

"저는 무명이지만, 제 삼촌께서는 꽤나 이름을 떨쳤습니다."

"그래? 누군데?"

"아단이라 합니다. 저는 아단 삼촌의 조카입니다."

"뭐라!"

전설의 대마두 아단의 명성은 먹혔다. 포레스트 드래곤 오르고 투탄은 거체를 움찔하더니 날 다시본다. 그리고는 훨씬 살가운 태도가 됐다.

"훌륭한 삼촌을 둔 자였군. 그의 핏줄이라 하니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크르르르."

아단의 조카라는 건 잘 먹혔다. 갑자기 이쪽을 어느 정도 대우해 준다고 할까? 나는 죽어서도 끗발 날리는 삼촌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한데 저놈들은 다 뭐냐? 갑자기 왠 공물이고?"

나는 사정을 설명했다. 태양 교단이 미혹의 산까지 와서 큰 전투가 있었고, 이들은 그때 잡은 포로들이라고. 또 전부터 내가 오르고 투탄을 존경하고 있어, 이 기회에 친분을 쌓기 위해 공물을 가지고 찾아왔다는 얘기였다.

내 말은 들은 거대한 도마뱀이 크게 기뻐했다.

"크하하하핫! 너는 네 삼촌과 달리 싸가지가 있구나. 아주 좋다. 안 그래도 부리던 하인들이 모두 죽거나 도망가 곤란하던 차였다."

이 탐욕스러운 드래곤은 수하를 험하게 다룬다. 어둠에 숲에 사는 종족들을 하인으로 붙잡곤 하는데 금방 죽어나자빠진다. 그런 상황이니 포로들이 반가울 수밖에.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아주 적절하다. 너는 이 몸의 호의를 충분히 살 것이다."

"한데 제가 듣기로 블라르 백작의 구원 요청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으로 가보시지 않아도 괜찮으신 겁니까?"

슬쩍 떠보듯 묻자 오르고 투탄은 성대하게 콧김을 내뿜었다.

"크르르릉! 그 뱀파이어 놈이야 어찌되든 내 알 바 아니지. 이 몸이 여기까지 움직인 것만 해도 할 일을 다한 거다."

뻔뻔스럽게 말하고 자기도 좀 켕기는지 덧붙인다.

"드래곤은 충분히 잠을 자야 한다! 크릉! 안 그러면 이 거대한 몸뚱이를 움직일 수 없거든. 여기서 쉬는 것도 사실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실로 철면피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이 녀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건 무리다. 꼴에 드래곤이라고 육탄전 능력만 보면 에인션트 뱀파이어들도 아득히 상회할 정도니까.

곁에 하피 여왕이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녀석은 한 건 크게 해주고 돌아가버렸다.

'뭐, 힘으로 제압할 수 없다면 머리를 쓰면 되지.'

일단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로 했다. 나는 일부러 수레로 싣고 온 술독을 잔뜩 내려 오르고 투탄에게 주었다.

드래곤에겐 적은 양이었지만 기분을 내게 하긴 충분했다.

"술이라고? 크하하핫! 어서 가져와 봐라. 아주 마음에 드는군."

오르고 투탄은 술독에 혀를 담그며 즐겁게 핥아먹기 시작했다. 술이 들어가고, 내 아부까지 이어지자 분위기가 아주 좋아졌다.

결국 오르고 투탄은 한참을 떠들어대다가 잠들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바로 태양 교단의 포로 중 하나를 만나기 위해서다.

"아달릭."

"주인이시여."

완전히 하인인 된 그는 포로로 위장하고 있었다.

"예정대로 널 풀어주겠다. 주변에 있는 자들을 몇 데리고 탈출해서 태양 교단의 본대로 돌아가라."

"알겠습니다."

아달릭은 드래곤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도망친 연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뒤 태양 교단의 본대는 형제들이 드래곤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는 걸 듣고 움직이지 않을 리 없다.

'지금처럼 여유가 있는 상황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되겠지. 성기사단장의 성품이면 무조건 구출하려 할 거다.'

당연히 태양 교단의 정예들이 몰려올 거고, 태업하고 있던 오르고 투탄은 날벼락을 맞을 터.

"주인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아달릭의 물음에 나는 씩 웃었다.

"어부지리를 취해야지. 어느 쪽이 이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야."

태양 교단이 이겨도 드래곤과의 싸움이니 분명 너덜너덜해지겠지. 그때 튀어나와서 모조리 붙잡아도 된다.

아니면 드래곤이 이겨도 괜찮다. 녀석도 격전으로 온전하지 못할 테니 늘씬하게 줘패서 드래곤에게 목줄을 채우고 노예로 삼을 생각이다.

그야말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상황인 것이다.

"아달릭. 드래곤이 잠들어 있는 동안 서둘러 탈출해라.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

"맡겨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데 아달릭 녀석, 필요 이상으로 노력한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보게 됐기 때문이다.

며칠 뒤, 태양 교단의 최정예가 오르고 투탄이 머물고 있는 공터로 몰려왔다.

문제는 그들 중 성기사단장까지 끼어 있었던 것. 예상하지도 못한 출현이었다.

"이 악룡! 감히 형제들을 포로로 잡아? 단번에 목을 쳐 날려주마!"

분기탱천한 교단 최강의 목소리에 늘어져 있던 오르고 투탄이 기겁하며 일어났다.

"뭐, 뭐냐? 저건 인간인가! 괴물인가!"

"태양의 힘을 느껴보거라!"

격분한 성기사단장이 기적을 일으켰다. 그는 갑자기 키 10미터가 넘는 거인으로 변신했고, 놀란 드래곤을 복날 개처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퍽! 퍼억! 투각!

성기사단장의 주먹질에 드래곤의 뿔이 부러져서는 허공으로 화려하게 날아올랐다.

< 교단 최강의 검(2) >

***

드래곤의 뿔이 얼마나 단단한지 아는가?

경험 많은 모험가라면 드래곤을 공격할 때 결코 뿔을 노리지 않는다.

엄청난 가치가 있는 부위지만, 드워프가 만든 최고의 무기로도 제대로 타격하기 힘드니까.

드래곤의 뿔은 놈들이 가진 힘의 상징이며, 긴 세월 동안 더더욱 단단해진다고 한다. 그렇기에 오르고 투탄 같이 장년에 이른 완숙한 드래곤의 뿔은 어떨지 말해봐야 입만 아픈 법이다.

한데 그 뿔이 지금 거인화한 성기사단장의 주먹질에 박살이 났다.

한 드래곤의 삶과 세월이 묻어나는 뿔이 박살 나 허공으로 날아가는 광경은 가히 장엄하기까지 했다.

나는 경악성을 터뜨렸다.

'저 비싼 게 떨어졌다!'

피에 절은 뱀파이어가 되어서도 게이머의 마음가짐이 아직 남았던가?

하늘로 날아가는 '드래곤의 뿔'이라는 초레어템을 너무 갖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혼자선 저런 식으로 떼낼 수도 없는데 성기사단장이 알아서 해줬다.

'군침이 싹 도네.'

하지만 현실은 저 둘의 싸움에 끼어들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

"감히! 이 빌어먹을 인간이!"

오만한 포레스트 드래곤 오르고 투탄은 격분했다. 놀라서 얻어맞긴 했지만 그도 이름을 날린 드래곤. 비록 세 들어 사는 처지긴 해도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는 자였다.

머리를 흔들며 뒤로 물러난 오르고 투탄은 뒷발로 일어나더니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그리고는 전력으로 드래곤의 전매특허인 화염 브레스틑 토해냈다.

화르르르르륵!

오르고 투탄의 주둥이에서 엄청난 불길이 쏟아져 나왔다. 그 광경에 솔직히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서 드래곤, 드래곤 하는 건가!'

주변의 산소를 삽시간에 태우며 엄청난 불바다가 만들어졌다. 초목과 숲이 온통 지옥불 같은 광경에 삼켜지고 있었다.

'이 정도 불길이면 성기사단장도 무사하지 못할···. 응?'

내 기대와는 달리 성기사단장은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 버티고 있었다. 내민 손을 중심으로 신성한 빛의 방패가 생겨나 화염을 정면으로 막아냈던 것이다.

신성력으로 만든 방패는 고열에 새빨갛게 달궈졌지만, 자기 역할을 충분히 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방패가 터져나가며 사방에 빛을 뿌렸으나 그때쯤 이미 드래곤 브레스도 약해진 상태였다.

"후끈하게 해주는군."

성기사단장은 앞으로 달려 나가 오른손에 든 거대한 검을 찔렀다. 반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오르고 투탄은 아슬아슬하게 그걸 피했다.

카아앙!

요란한 소리가 나며 드래곤의 비늘이 스쳐지나가는 검에 여러 개 떨어져 나갔다.

간신히 치명상은 피했지만 드래곤의 몸뚱이에는 선명한 상처가 남았다. 하지만 위기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크아아압!"

천둥이 우는 것 같은 기합성과 함께 성기사단장이 거대한 검을 왼쪽 어깨 위로 들어 올렸던 것. 그대로 드래곤의 목을 쳐서 날리려는 게 틀림없었다.

부우우우웅!

가공할 공격이었다. 분명 삼나무보다도 두꺼운 드래곤의 목도 베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대로 오르고 투탄의 머리가 떨어지나 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득! 카앙!

오르고 투탄이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검을 물어서 붙잡아 버린 것이다.

끼이이익!

드래곤의 이빨에 붙들린 칼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오르고 투탄은 그대로 고개를 흔들어 칼을 빼앗아 내던졌다.

쾅!

거대한 검이 허공을 날아가 지면에 오벨리스크처럼 꽂혀서 출렁였다.

오르고 투탄은 그걸로 그치지 않고 검을 빼앗긴 뒤 비틀거리는 성기사단장에게 기가 막힌 꼬리치기를 먹였다.

퍼어어억!

꼬리치기를 맞은 성기사단장을 포탄처럼 뒤로 날아갔다. 어둠의 숲의 나무와 박살나며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오르고 투탄은 크게 웃어댔다.

"크하하하핫! 감히 드래곤에게 덤빈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확실히 드래곤은 강하긴 했다. 하지만 성기사단장은 겨우 그 정도로 쓰러질 존재가 아니었다. 그 불굴의 괴물은 먼지를 뚫고 튀어나와 드래곤의 꼬리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비명을 지르는 드래곤을 잡아당겨서 먼지 구름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크르릉! 놔라! 이 빌어먹을 인간!"

오르고 투탄은 노호성을 터뜨렸지만, 그게 곧 비명으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먼지 구름 속에서 경쾌한 타격음과 돼지 멱따는 것 같은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분명 성기사단장에게 붙들려서 야무지게 얻어터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성기사단장은 괴물이다. 내가 상대할 적이 아니야!'

엘더급에 오르고 세상 무서운 게 없어졌는데, 그야말로 천외천을 느끼게 해주는 놈이 아닌가. 말도 안 되게 강한데 그 속성조차 뱀파이어에겐 치명적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간단했다.

"튀자."

내 귀한 목숨을 헛되게 쓸 수는 없는 법.

'이건 도주가 아니야. 자고로 큰일을 할 사람은 자신을 아껴야 하는 법이다.'

그렇게 몸을 돌리자 오르고 투탄이 날 불렀다.

"아단의 조카여! 어서 날 돕거라!"

하지만 합류해서 싸울 생각 따윈 없었다. 오히려 성기사단장 앞에서 날 언급한 것 때문에 욕이 절로 나왔다.

"야이, 저 병신 도마뱀이!"

사실 저 멍청이가 아니라고 해도 200명의 포로 때문에 성기사단장이 나에 대해 알게 되는 건 기정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모두 후퇴한다! 포로고 뭐고 버리고 달려!"

고블린에게 명령을 하자 놈들은 충실히 따랐다.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줄행랑을 놓았던 것이다.

나 역시 곧장 따라가려다가 탐욕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기어코 주변을 돌아다니며 아까 떨어졌던 거대한 드래곤의 뿔을 찾아냈다.

'그래! 갈 때 가더라도 이건 가지고 가야지.'

부러진 뿔 조각이 사람 키보다 컸다. 나는 그걸 어깨에 짊어지고는 전력으로 튀었다.

드래곤의 뿔이 너무 길어서 질질 끌리자 근처에 있던 고블린 호위병들이 얼른 달려왔다.

"돕겠습니다! 케켁!"

우리는 일렬로 서서 드래곤의 뿔을 머리 위로 들고 열심히 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뒤쪽에선 무시무시한 타격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나중에 오르고 투탄이 어떻게 됐는지 소식을 들었다.

"뭐? 성기사단장에게 잡혀갔다고?"

"네, 태양 교단의 본진에 짐승처럼 묶여 있다고 합니다."

"맙소사···."

좀 어이없기도 했다. 보통 사악한 드래곤이라 하면 공주 같은 걸 납치하는 이미지잖나? 한데 왜 본인이 납치되고 지랄이야.

"와······."

성기사단장 때문에 그 정도 드래곤도 훅 가는 거 보니까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어느 정도냐면 아룬델에 가서 여신님 만날 생각에 들떴던 게 싹 식을 정도였다.

'여신님한테 가기 전에 저승에 먼저 가겠네.'

지금 세계관 제일의 미녀 같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세계관 최강의 뱀파이어 학살자가 지금쯤 내 존재를 알아챘을 테니까.

'이제 밤에 관에서 다리 뻗고 편하게 자는 날은 다 끝났다···.'

솔직히 에인션트 뱀파이어보다 훨씬 무서웠다.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마치 자연재해 같은 거랄까? 본디 태풍의 방향은 예상하기 어렵다지 않은가. 설마 이번에는 이쪽으로 올 줄 누가 알았겠나?

"후우···."

그렇다고 계속 겁먹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이 소렌 다켄발트.

이번에도 외치리라.

"위기를 기회로!"

성기사단장 공략법을 발동해야겠군.

* * *

뱀파이어의 재앙인 성기사단장을 공략하기 위한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가장 좋은 건 역시 정치적인 공략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럴 듯한 명분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뭣보다 아달릭의 보고에 의하면, 은빛 엘리시아가 소멸한 사건 때문에 서부 추기경을 비롯한 그쪽 파벌이 대혼란 상태라는 것.

그렇기에 정치적 방법을 동원하기는 적당하지 않았다.

하면 남은 방법들은 하나 같이 힘이 필요한 것들이었다.

'힘···. 적어도 성기사단장과 어느 정도는 비빌 정도는 되어야···.'

하지만 그 정도 힘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급한 상황이면 더더욱 말이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아예 방법이 없진 않았다.

나는 품에서 낡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검신에는 검붉은 얼룩이 묻어 있는 것으로 얼마 전 블라르 백작에게 받았다.

'이것만 있으면 대신격 카라즈라의 성소로 갈 수 있다.'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는 언데드의 어머니.

그녀는 성소에 도달한 자식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나 같은 불신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연 모든 언데드의 어머니를 자처하는 존재답다고 할까?

'성소에서 새로운 힘을 얻으면 성기사단장과도 해볼 만할지도 모르지.'

문제는 그 대가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불멸의 여왕에게 힘의 대가를 제공해야만 했다.

'자신의 소중한 걸 말이지···.'

거기에 예외는 없다. 블라르 백작조차 무언가를 바쳐야 했으니까. 나는 숙고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만 하면 힘도 얻고, 날 괴롭히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겠어.'

마침 떠오른 방법이 있었다. 그 결과 지금 카라즈라의 성소로 가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좋아. 해보자."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군대의 이동을 준비하는 사이 갔다 오면 될 것 같았다.

단검의 사용법은 이미 알고 있다. 이것을 이용해 차원의 틈새를 갈라, 카라즈라의 성소가 있는 특별한 공간에 도달하는 것이다.

"카라즈라여! 심장이 뛰지 않는 자의 어머니시여. 여기 청하오니, 당신의 성소로 가는 길을 열어주시길 간청합니다."

주문을 외자 단검이 서늘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힘을 이용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공간이 베어지며, 그 너머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캬아아아아아악!

그 공간 너머에서 소름이 돋는 귀곡성이 흘러나왔다. 슬쩍 보니 그곳은 보랏빛 밤이 펼쳐지고 있는 죽은 자의 세계였다. 저곳에 카라즈라의 성소들 중 하나가 위치해 있다.

'거지 같군···.'

그곳은 나 같은 존재조차 절로 거부감이 드는 장소였다. 하지만 성기사단장은 이와 비교할 수 없는 문제다.

나는 심각한 충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과에 발을 들이미는 심정으로 차원을 건넜다.

부르르르.

차원을 이동하는 동안 전신을 섬뜩한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 마치 내가 살아있는 존재면 삽시간에 생명을 빼앗아 가려는 듯한 악의가 느껴졌다. 하지만 언데드라 그런지, 미지의 존재가 간만 보고 사라졌다.

우르르릉! 콰앙!

죽은 자의 세계에 도착하자마자 날벼락이 쳤다. 그와 함께 어둠에 묻혀 있던 세계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무수한 뼈와 시체가 쌓여 있는 공간, 그 가운데 거대한 신전이 하나 있었다.

'저기가 분명 카라즈라의 성소겠군.'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의 성소를 방문하는 건 게임에서도 해본 적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긴장을 놓지 않은 채 신전으로 향했다.

뚜벅뚜벅 걷는 도중 수많은 괴물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은 딱히 날 공격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그르렁거리며 지켜보기만 했다.

'단검을 가졌으니 안 공격하는군.'

이 단검은 성소를 방문할 자격을 의미하니 말이다.

아마 이게 없었으면 여기 오자마자 갈기갈기 찢겼을지도 모르겠다. 느껴지는 기운을 보니, 나보다 강한 존재가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후우···."

얼마 뒤 거대한 신전 앞에 도착했다. 그것은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황량한 모습이었다.

입구에는 거인의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데스나이트 둘이 서 있었다.

'말도 안 되게 강한 놈들이군···.'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리는 느낌이었다. 한데 그들은 내게 짧게 외칠 뿐이었다.

"들어가도 좋다!"

"이곳은 어머니의 지성소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 힘의 파동에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다.

한데 그들이 한 말 중에 이상한 게 있었다.

'지성소(至聖所)라고?'

지성소가 뭐냐 하면 카라즈라가 갖고 있는 여러 개의 성소 중 가장 중요한 장소를 의미한다.

성소 중의 성소로 결코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나는 황급히 그들에게 물었다.

"일반 성소가 아니라 지성소입니까?"

이에 대해 데스나이트들은 싸늘한 어투로 답을 해왔다.

"어리석은 질문을 할 거라면 돌아가라!"

"무지의 소치! 입장의 자격을 스스로 의심하라!"

뭔가 더 물으면 저 거인 데스나이트들이 날 붙잡고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낼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묻지 않고 지성소로 입장했다.

'이거 대체 무슨 일이지···?'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의 지성소는 물질계에서 그녀의 교단을 대표하는 최고사제조차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한데 내가 여기 왜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둠의 기품과 품위가 느껴지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딴 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라즈라의 지성소에 왔다는 사실 때문에 부산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공허한 장소에 와 있었다.

건물 안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끝없는 어둠이 펼쳐진 장소였다.

아마 건물 안에 펼쳐진 또 다른 작은 차원 같았다. 그리고 그 어둠의 한 가운데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라. 소렌 다켄발트.]

들어본 적 있는 신언이었다. 분명 공양의식때와 같은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완벽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신 카라즈라가 '의지의 일부'라 불리는 대신격의 파편 같은 존재라면···, 지금 저 목소리의 주인공은 온전한 대신격이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 언데드의 어머니가 나직하게 웃어댔다.

[네 우둔한 머리로 무슨 계략을 짜온 건지 이미 짐작이 가는구나.]

< 교단 최강의 검(3) >

순간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암담함이 느껴졌다.

'왜 본체가···?'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상대가 킥킥거렸다.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구나. 어린 뱀파이어야.]

지금처럼 이 모든 게 진짜 게임이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단검을 쓰기 전으로 로드해 버리고 싶었으니까.

[입조차 열지 못하는 것이냐?]

대신격,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가 물어왔다. 나는 무슨 말이든 답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카라즈라는 어수룩하고 겁이 많은 존재를 싫어한다. 주눅 든 태도를 보여 봐야 좋지 않은 일만 벌어질 터.

상황이 개같이 꼬였지만 담대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위대한 어머니시여, 제가 우둔한 건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성소에 발을 디뎠으니 어찌 계략을 마음에 품겠습니까?"

천연덕스럽게 잡아떼자 카라즈라가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

[네 방식을 잘 알고 있다. 소렌 다켄발트. 네놈의 혓바닥은 거미줄과 같지. 거미가 거미줄로 먹잇감을 사로잡듯, 너는 아첨과 속임수로 상대를 휘감더군.]

생각지도 못한 정확한 지적에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역시 대신격이라 그런가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존재들과 뭔가 달랐다.

심지어 카라즈라는 농담 섞인 말투로 폐부를 찌르는 듯한 경고를 해왔다.

[여의 궁전에는 딱딱하고 재미없는 시체들만 있지. 그러니 그대 같은 언변가는 귀하다. 어디 마음껏 떠들어 보라. 여의 궁전에서 언제까지 일할 수 있게 해줄 테니.]

"···어머니시여. 그건."

[그대의 매력이 산 자들의 세계에서 낭비되는 건 아까운 일이 아닌가?]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주둥이 믿고 까불면 그녀가 머무는 죽은 자들의 궁전에 영원히 가둬놓겠다는 거다.

'이 대화에서 속임수나 거짓을 쓰다 걸리면 각오하란 소리로군.'

그 재미없는 궁전은 진지하고 엄숙한 언데드의 세계다. 모처럼 멋진 농담을 떠올려 던져 봐도 대꾸해주는 이도 하나 없을 터.

그런 장소에서 천년만년 지내는 건 내게 죽음보다 더한 고문이었다.

'꼭 저런 경고가 아니라도 카라즈라의 본체는 내 지혜로 속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대체 저런 존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져 갔다.

"저는 하찮은 자입니다. 위대한 어머니께서 어찌 저 같은 이에게 관심을 가지십니까?"

[다듬지 않고, 가공하지 않아도 금덩이는 금덩이다. 안목이 있는 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일이지.]

"실로 과분한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되었다. 겸손은 네놈의 미덕이 아님을 알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겸손과 거리가 먼 놈이 가식이 지나치군. 쯧!]

살짝 혀를 차는 태도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카라즈라의 삭막한 궁전으로 한 발자국 더 나간 셈이었기 때문이다.

'정신 차리자. 말실수가 몇 번 더 반복되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

어차피 궁지에 몰렸다. 차라리 이럴 때는 그냥 뻔뻔하게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성소에 오기 전에 대비를 하고 온 게 사실입니다."

[흥! 이제야 좀 솔직하게 구는군.]

"짐작하고 계신 게 무엇인지, 미천한 자가 감히 물어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궁금했다. 성소로 오기 전에 이것저것 궁리해 오긴 했는데 대신격이면 그런 것도 짐작할 수 있다는 건가?

[간단한 문제니 답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네놈은 뱀파이어 성녀와의 관계를 파기하려 했던 게 아니더냐?]

"!"

상대의 지적에 진심으로 놀랐다.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성소에서 힘을 받는 대가로 불멸의 여왕은 상대에게 소중한 걸 요구한다.

그때 내가 바칠 게 바로 뱀파이어 성녀. 즉, 핏빛 새벽의 여신과의 관계를 파기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큰 이점이 있다.

뱀파이어 성녀와의 관계를 파기하면 이전에 공양 의식에서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에게 약속했던 의무도 벗어던지게 된다.

대신격을 의식해서 무리하게 연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그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관계라 설령 포기한다고 해도 뱀파이어 성녀와 나 사이에 변하는 건 없기도 하고.

즉,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걸 힘의 대가로 바쳐 날로 먹겠다는 계획이었다.

겉으로는 대단히 소중한 걸 잃는다는 듯 질질 짜면서도 나중에 그냥 아룬델로 여신님을 만나러 가면 되는 것이다.

핏빛 새벽의 여신과 내 유대관계는 그딴 핑곗거리 하나 없어졌다고 변할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만난 적도 없는 존재지만 누구보다도 그녀와의 유대감을 느끼고 있다. 이건 상대도 마찬가지라는 걸 잘 안다.

[아주 얄팍하지만 간악하고 효과적이구나.]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는 내 계획에 대해 그리 평했다.

[상대가 의지의 조각이라면, 아둔하고 포악하여 그럭저럭 속일 수 있었을 터. 하지만 본체인 여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상대가 대신격의 본체라는 것.

"어찌 그걸 짐작하셨습니까? 혹여나 제 생각이나 마음을 읽으신 겁니까?"

[귀찮게 그럴 필요도 없다. 우둔한 네놈이 꺼낼 수 있는 수단이야 뻔하니 말이다.]

"······."

지금껏 세 치 혀만 믿고 날뛰다가 걸려도 아주 제대로 걸렸다.

하지만 내가 일반 성소가 아닌 지성소로 오게 된 건 상대가 날 보고자 했다는 것.

무언가 용건이 있다는 거고, 거기 매달려 볼 필요가 있었다.

"위대한 어머니시여. 저를 조롱하기 위해 부르신 건 아닐 것 같고, 무얼 원하십니까?"

[네놈을 지켜봐왔다. 수완이 제법이더구나.]

"···솔직히 저 정도 인재가 흔하지는 않지요. 하지만 대신격께서 관심을 가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카라즈라는 고개를 저었다.

[신들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너도 알다시피 물질계에선 제한적인 영향만을 끼칠 수 있다. 대신격조차 그건 예외가 아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무언가 이루려면 필멸자를 통해서 해야 하지. 하지만 필멸자란 놈들은 하나 같이 일 처리를 제대로 하는 놈이 없다.]

"그렇습니까?"

뭔가 직원들에게 시달린 사장님 같은 말투가 아닌가? 동조하듯 묻자 카라즈라는 울분을 토해내듯 답해왔다.

[가끔 쓸 만한 게 나오면 금세 교만해져서 제멋대로 굴지. 자기도 신이 되겠다나? 말 잘 듣는 놈들은 하나 같이 무능력하고!]

"아···."

[이렇듯 신의 사업은 늘 어려움에 처해 있는 거다. 그렇기에 네놈처럼 능력이 있으면서 충성심까지 겸비한 이는 드물다. 더 길게 말할 필요 없겠지. 성녀를 버리고 여에게 오라. 소렌 다켄발트.]

이럴 수가. 소신격도 아니고, 대신격의 스카웃 제안이라니.

[네놈에게 가공할 힘을 약속하마. 그 블라르조차 우습게 볼 정도가 될 것이다.]

"아니, 그 정도를···."

[지상 최고의 권세도 약속하마. 거대한 여의 교단이 너를 교황처럼 떠받들게 해주지.]

"허···."

[여자도 원하는 만큼 가져도 좋다. 수많은 신도들 중에는 미희가 셀 수 없이 많다. 모두 다 갖거라. 재산도 차고 넘칠 만큼 축적하라. 네 권력과 명예가 끝도 없으리라.]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양팔을 펼쳐 보였다.

[대신 여를 섬겨라.]

이건 뭐랄까. 이제 막 매출이 좀 나오고 굴러가기 시작한 중소기업의 영업부장에게 대기업 총수가 직접 이직 제의를 해온 느낌이었다.

'심지어 업계 최고 대우잖아!'

혹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거기에 더해 네놈이 경솔하게 여의 파편에게 했던 거짓말도 무마해주마. 어떤가?]

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 내가 고인물이 아니었다면··· 넘어갔을지도 모르겠군···.'

이 모든 제안이 황홀하게만 느껴졌다.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실감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에 대해서 잘 안다. 그리고 그녀가 제공하는 게 탐났으면 처음부터 뱀파이어 성녀를 택하지 않았겠지.

"관대하고 은혜로우신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하오나, 송구하게도 거절하겠습니다."

딱 잘라서 말하자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는 약간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됐다. 그러다 곧 격분했다.

[하찮은 자여! 감히 여의 제안을 거절하는 무례를 범할 생각인가? 신중히 판단하라. 이곳은 물질계가 아니다! 손짓 하나로 네놈을 소멸시키거나 영원의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음을 모르는 것이냐!]

솔직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한 대신격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을 자가 어디에 있겠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거절하겠다. 네놈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애초에 여의 흥미를 끌고도 자중하지 않고 성소까지 오다니! 물고기가 알아서 그물로 들어오는 꼴인데 두고 볼 거라 여겼던가?]

"위대한 어머니시여."

[네놈의 자질을 아깝게 여겨 한 번만 더 제안하겠다. 성녀를 사도를 그만두고 여를 섬기도록 하라.]

하지만 이번에도 내 답은 같았다.

"거절하겠습니다."

[어째서 거절하는 거지?]

"조금 생각해 보면 위대한 어머니께서 사실 저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걸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설명해 보라.]

"저 자신을 비하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만들 수 있는 성공은 당신께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대신격이잖습니까? 이미 다 갖고 계신 것들이지요."

교세의 확장이나 신격의 상승 같은 부분은 이미 카라즈라에게 의미가 없는 얘기였다. 즉, 날 스카웃하고 싶어 혈안이 됐었던 소신격들과 관심사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왜 굳이 절 데려가려 하시는 건지. 그러니 답이 나오더군요. 저란 존재 자체가, 제가 섬기는 이의 가능성이기에 제거하는 것이라고."

간단한 얘기다. 대신격인 그녀에게 난 필요 없다. 하지만 이제 막 소신격이 된 뱀파이어 성녀에게 나는 엄청나게 중요한 존재다.

"제가 사라지면 뱀파이어 성녀, 핏빛 새벽의 여신의 성장은 느려지겠지요."

[필멸자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만한 발언이구나.]

"확실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어쨌든 저는 다른 신의 첫 번째 사도.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멋대로 납치해 살해한다면 치부가 되겠지요. 구슬려 배반하게 만드는 게 훨씬 원만한 방법일 겁니다."

대신격이라고 해도 신들의 세계에서 평판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뭐든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위대한 어머니께서 그래도 굳이 절 소멸시키겠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겠습니다만···, 제가 자발적으로 성녀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기에 거절하는 것입니다."

[대담한 발언이군. 충성스럽기도 하고.]

"그저 덧없는 작은 자의 반항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잠시 상대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나긋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우둔한 줄 알았더니 영민하구나.]

그 말과 함께 불멸의 여왕이 보여주는 기운이 변했다. 지금까지 표출하던 인간적인 감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제야 격노하고 언성을 높이던 게 다 연기란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의 그녀는 무미건조했고, 시체를 마주하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더 이상 웃지도 않았다. 불멸의 여왕은 덤덤하게 한 가지를 통보할 뿐이었다.

[역시 조금은 써먹을 수 있겠어. 네놈에게 진짜 용건을 꺼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불멸의 여왕이 날 시험했다는 걸 알게 됐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긴 했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카라즈라는 충성심이나 신의 있는 자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좋은 조건에 금세 섬기는 이를 갈아치운다면 좋게 볼 리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는 것과 별개로 엄청나게 쫄았다. 상대가 상대니까 말이다. 그래도 끝까지 버티고 태도를 바꾸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사실 네놈에게 일을 하나 맡기고 싶다.]

이제는 말하는 것도 감정 없는 차가운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연기를 위해 동원했던 인간적인 감정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더는 불필요하다는 듯이 말이다.

"무엇입니까?"

[너는 태양 교단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원하고 있다.]

"맞습니다."

다만 구체적인 선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저 미혹의 산에 찝쩍대지 못하게 하고, 뱀파이어 성녀의 실각과 관련된 인물을 숙청하는 것 정도로 정했다.

'교황까지 쓰러뜨려야 하니 결코 간단한 목표는 아니지만.'

한데 불멸의 여왕은 이런 내 목표에 대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해왔다.

[단순히 태양 교단에게 승리하는 걸로는 부족하다. 네놈과 핏빛 새벽의 여신이 살아남기 위해선 태양신 자체를 없애야 한다.]

"태양신을 말입니까?"

[그래, 그게 또 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지.]

태양신을 죽일 수 있다고?

그건 고인물인 나조차 생각도 못 해본 영역이었다.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 대답할 줄 알았다. 네놈은 태양신의 본질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하니. 아닌가?]

"······."

[대답이 궁한가 보군. 어떻게 아는 건지는 추궁하지 않겠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중요한 건, 여에게 태양신을 죽일 방법이 있다는 거다.]

< 교단 최강의 검(4) >

"태양신을 죽일 수 있다니···."

나는 카라즈라의 말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상대가 대신격이고, 언행에 그만큼 무게가 따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납득할 수 없나 보군?]

"왜냐하면 태양신의 본질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닫자 카라즈라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대꾸해왔다.

[계속 말해도 좋다. 그게 대단한 비밀이긴 하지만 설마 여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하긴···.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 정도면 이 세계의 여러 비밀에 접근해 있을 터.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물었다.

"태양신은 인격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까?"

태양신에 대한 가장 큰 비밀은 그 존재가 어떤 섭리나 시스템이며, 인격이 없다는 것이다.

태양 교단에선 태양신을 빛의 아버지, 자애로운 태양 등으로 인격화해서 섬기지만 실상 그 존재는 그런 게 아니다.

그저 시스템에 불과했다.

태양 교단 내에서도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핵심관계자라 할 고위층조차 어렴풋이 이 사실을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밑으로는 말할 것도 없다.

보통의 사제, 성기사는 장엄하고 자애로운 표정의 중년인으로 묘사되곤 하는 태양신의 모습을 당연하듯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태양신은 인격이 없다. 그렇기에 타락한 자들조차 태양의 힘을 쓰며 교단에 섞여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시스템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셈이었다.

"신이란 불멸자라 불립니다. 그만큼 영구적으로 소멸시키는 게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인격이 없는 섭리에 가까운 존재라면 방법이라곤 없을 텐데···."

[정말로 없다고 생각하나?]

카라즈라의 물음에 나는 다시 생각해봤다.

상식적으론 절대 불가라는 답밖에 안 나왔다. 만약 가능하다고 한다면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파격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게임 속에 공략 불가의 엄청난 보스가 있다고 치자. 수없이 방법을 찾아도 쓰러뜨릴 수 없는 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게임 속을 탐색해야 할까?

아니다. 답은 게임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게 무슨 정답이냐는 소리가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그 정도의 파격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런 점을 설명했다.

"가능하다고 해도 혁신적인 발상이 필요할 겁니다. 이 세계의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한데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그렇기에 네가 할 수 있다는 거다. 소렌 다켄발트.]

"제게 무슨 특별한 점이 있다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근자에 성과를 좀 거두기는 했지만··· 이 정도 가지고는···."

[그게 아니다. 네가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다른 세계에서 왔기 때문이다.]

"!"

설마 이런 얘기를 들을 줄 몰랐기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상대의 담담한 태도를 보니 이미 많은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부인해도 소용없다. 상대는 대신격이야.'

어째서인지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혹시 날 이곳으로 데려온 게 불멸의 여왕 카라즈라일까? 그 점을 묻자 카라즈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누가 그랬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모든 게 계획적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우연한 사고일 확률도 높으니. 차원이란 복잡해서 그대와 같은 미아가 종종 발생하는 법이다.]

카라즈라는 나뿐만 아니라 내가 섬기는 여신도 특별하다고 했다.

[핏빛 새벽의 여신은 태양신을 대체할 자질이 있지.]

이어진 설명에 의하면 그녀는 태양 교단의 성녀 중 역대급 재능의 소유자라고 했다.

[미욱한 인간 주제에 스스로 반신에 오를 정도니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말할 것도 없다.]

생각해 보면, 대마두로 불렸던 아단 삼촌조차 신좌에 오르지 못해 공양의식으로 한자리 달라고 애걸복걸했었지. 반면 뱀파이어 성녀는 혼자 반신에 올랐으니 그 자질이 남다르긴 하다.

[너와 쫓겨난 성녀. 희귀한 존재가 한번에 둘이나 출현했기 때문에 여의 계획이 가능한 것이다.]

즉, 나 같은 이레귤러와 역대급 인재의 콜라보로 태양신을 죽일 수 있다는 거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입니까? 그게?"

대강 짐작은 됐다. 인격이 없는 존재를 인격신으로 대체하는 수순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하면 기존의 시스템이었던 태양신이 소멸하고 핏빛 새벽의 여신이 새로운 태양신이 되겠지.

[그것은 귀중한 비밀이다. 여의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알려줄 수 있다.]

"흐음······."

고민하던 나는 한 가지 더 물었다.

"아까 태양신을 처리하는 게 위대한 어머니께도 도움이 된다고 하셨죠? 어째서입니까?"

[그 또한 마찬가지다. 네 결정에 따라갈 것이다.]

"으음···. 이건 작은 일이 아닙니다.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알고 있다.]

다행히 카라즈라는 답을 재촉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당장 정하라고 압박해 왔으면 여간 난처하지 않았으리라.

[시간을 줄 테니 이후 답을 내놓도록.]

"알겠습니다."

[성소를 찾아온 문제는 도움을 주지. 너는 스스로 쓸모를 증명했으니 이것은 포상이다. 성기사단장에게 대적할 방법을 내리겠다.]

그 말과 함께 내 손바닥 위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작은 석판이 생겨났다. 석판에는 해독이 불가능한 죽음의 문자가 잔뜩 쓰여 있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요?"

[써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전투에 어려움을 겪을 때 석판을 쪼개라. 자, 그럼 이만 가보도록.]

더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듯 카라즈라는 손을 휘저었고, 나는 그 공간에서 튕겨져 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시 물질계로 돌아와 있었다.

"허······."

대신격 카라즈라의 본체와 만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나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더군다나 태양신을 죽여라?

솔직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니만큼, 아룬델에서 여신님을 만나보고 상의하기로 했다.

* * *

태양신에 관한 일보다는 눈앞의 문제가 더 큰 고민이었다. 당장 그 괴물과도 같은 전투력을 보여준 성기사단장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이게 효과가 있길 바라야지.'

나는 카라즈라에게 받은 작은 석판을 살펴봤다. 그렇다고 이것만 믿으면 또 곤란한 일. 최선의 계획을 세워 실행하는 게 우선이었다.

"어둠의 숲으로 출병하겠다."

의장인 내 선언과 함께 원정군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규모는 전보다 줄어든 2천여 명가량.

이전과 다르게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게 아니다. 가까운 편이긴 하지만 물자를 가지고 원정을 떠나는 거라, 양보다는 질을 추구한 탓이다. 정예병 위주로 군을 편성했다.

"작전이 무엇인지 듣고 싶군요. 아군의 사기가 왕성하다고는 하나, 무작정 가서 들이박는다고 승리가 찾아오진 않습니다."

코볼트 대표 잼아이의 의견에 나는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아군의 난입이 저울을 한쪽으로 기울게 하려는 무게추 역할을 하려면, 블라르 백작과 태양 교단이 백중지세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블라르 백작쪽이 일방적으로 발리고 있는 모습. 어설프게 끼어봐야 우리도 같이 갈려 나갈 뿐이었다. 그러니 잼아이의 말처럼, 기왕 출병하기로 한 거 대책이 있어야 했다.

"물론이다. 나는 일곱 봉우리의 군대가 의미 없이 낭비되지 않기를 바란다."

다행히 내게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바로 아달릭이다. 탈출을 가장해 태양 교단의 본대로 들어간 그는 귀중한 첩자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아달릭을 이용해 한 건 크게 할 생각이었다.

"어떤 방법을 준비 중입니까?"

잼아이의 물음과 함께 회의를 위해 모인 종족 대표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드래곤을 이용할 생각이다."

"드래곤이요? 제압돼 짐승처럼 묶여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기에 이용할 수 있다는 거다. 드래곤이 지금 어디에 있나?"

"적진에 있지요."

"생각하기에 따라선 드래곤이 적진 한가운데 침투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으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코볼트 잼아이를 비롯해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일주일 뒤.

나는 저 멀리 태양 교단의 본대가 보이는 장소에 와 있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수많은 횃불이 별처럼 반짝인다.

'끔찍하군.'

저 불빛 아래 모여 있을 성기사와 사제들을 생각하니 현기증이 절로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하느라 녹아내린 좀비와 구울 등의 각종 언데드 형제들을 애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태양 교단은 보이지 않을 때 가장 아름답다.'

어떻게든 저놈들을 숲에서 치워야겠다는 다짐이 더욱 강해진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는 준비한 물건을 품에서 꺼내 점검했다.

그건 바로 시커먼 풀뿌리였다.

이것의 이름은 '웜루트'로 아단 삼촌의 약초밭에서 가져온 것이다. 드래곤이 복용하면 광증을 일으키는 효과를 가졌다.

심한 정신착란과 행동이상을 일으키는데, 대부분 파괴에 집중된다. 심지어 평소보다도 힘도 강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대체 이 풀뿌리의 성분이 드래곤의 신경계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모르겠다만, 성능은 확실했다.

'미친 드래곤이 안방에서 날뛰면 아무리 태양 교단의 군대라도 엉망이 되겠지.'

오르고 투탄이 붙잡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 풀뿌리가 가장 먼저 떠올랐었다.

'성기사단장 놈, 왜 오르고 투탄을 죽이지 않고 잡은 건지 알 만하군.'

드래곤 같이 사악한 존재를 굴복시킨다면 교단의 위엄을 만천하에 떨칠 수 있을 테니 그랬을 거다.

실제로 오르고 투탄에게 목줄을 걸고 수도로 끌고 간다면 난리가 날 거긴 했다.

'하지만 그 욕심 때문에 망하게 되겠지.'

결국 욕심이 문제였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어쩌면 성기사단장은 오르고 투탄을 이용해 자신의 부족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한 게 아닐까도 싶었다.

드래곤을 제압한 성기사라 하면 엄청난 인기와 함께, 시민들의 지지를 받게 될 터. 성기사단장의 위상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게 올라갈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그 양반 본심이야 모르겠지만, 드래곤을 바로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은 탓에 아주 좋은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부스럭. 부스럭.

그때 저 앞에서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두꺼운 나무 사이로 마른 인간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바로 아달릭이었다. 충실한 주구가 된 놈은 내 부름에 응해서 직접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그는 날 다시 봐서 감격스럽다는 듯 무릎을 꿇고 흙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주인이시여!"

"아달릭. 별일 없었나?"

"제 늙은 몸이야 아무래도 좋을 일입니다. 어찌 귀하신 분께서 이리도 위험한 곳에 오셨습니까?"

"직접 해야 할 일이 있다. 오르고 투탄이 묶여 있는 곳까지 안내하도록."

"위험합니다! 그곳은 경계가 가장 삼엄합니다. 무엇을 하시려는지 모르겠으나 소인에게 맡겨주시면 목숨을 걸고 수행하겠습니다!"

솔직히 나도 태양 교단의 본대에 잠입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웜루트를 쓰려면 풀뿌리만 먹이는 걸는 부족하다. 강력한 흑마법이 동반되어야 하니 결국 내가 가야했다.

나도 솜씨가 부족해서 발동하기 어려운 주문이지만, 삼촌의 유품인 검은 해골 지팡이의 힘을 빌리면 가능했다.

"직접 가야한다. 안내해라."

단호하게 명하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달릭은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작은 문제도 일어나지 않도록 소인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다."

이후 상급 변신을 써서 인간 수도사로 위장하고는 아달릭을 따라갔다.

우리는 전혀 튀지 않았다. 그저 진중을 걷는 두 명의 늙은 수도승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래서 내부의 첩자가 중요했다. 나 혼자 변신해서 걸어갔으면 참으로 살 떨렸겠지. 하지만 진중의 사정을 잘 아는 아달릭의 인솔 덕에 무탈하게 내부로 잠입할 수 있었다.

관문을 지키는 성기사들도 아달릭을 보고는 별말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 경멸이 묻어났지만, 서부 추기경이나 대주교가 아달릭을 감쌌기에 감히 뭐라 하는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아달릭은 죄인의 신분임에도 거칠 게 없어 보였다.

"이쪽입니다."

얼마 뒤 우리는 오르고 투탄이 잡혀 있는 곳 근처까지 이동했다.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도 관찰하기 적당한 장소였다.

"워······."

붙잡힌 오르고 투탄은 실로 비참한 몰골이었다. 한 지역의 패자가 수많은 사슬에 묶여 꼼짝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걸리버 여행기가 떠오르네.'

소인국에 갔다가 제압돼 꽁꽁 묶인 걸리버를 보는 것만 같다. 오르고 투탄은 뿔이 부러지고 여기저기 비늘이 깨져나간 모습이다.

피부 곳곳에 피딱지가 가득했고, 이빨도 여러 개 나간 것 같았다. 눈두덩이는 크게 부어올라 눈동자가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녀석은 지친 듯 꼬리를 늘어뜨리고는 무력하게 축 처져 있었다. 도저히 드래곤이라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역시 오길 잘했어. 이웃끼리 이럴 때는 서로 도와야지.'

오늘 좋은 일 한 번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차가운 내 심장이 따뜻해졌다.

< 교단 최강의 검(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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