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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뉘우치는 대장간의 저녁 시간.

점심에 이어 저녁도 북적북적해진 대장간은 이전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사장님~ 저희 오마카세 한그릇씩 주세요!"

"네, 나갑니다!"

점심은 매웠다.

그건 레아도 인정한다.

그러니 저녁 메뉴는 담백! 달달하게라고 생각했다.

"자! 레아표 화돈 스튜입니다!"

"주인장 이름이 레아였어? 퀴여운데!?"

"어이! 주인장한테 작업걸지마라!"

"흐하하하!"

"누가 작업이랬나...."

화돈.

레벨4에 해당하는 불타는 멧돼지형 데몬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초목을 불태우고 다니는 놈들이고 힘도 좋고 멧집도 좋다. 잡기는 번거롭지만 놈들의 살이 꽤 맛있어서 거래소에서도 고가에 거래되는 녀석!

레아는 오늘 큰맘을 먹고 거래소에서 화돈의 사들여서 통째로 과일들과 굽고 삶았다.

"주인장! 여기 한그릇 더!!"

"네! 지금 갑니다!!"

덕분에 점심의 죽을 거 같았던 이들과 달리 화돈 스튜는 몇그릇이라도 먹을만큼 맛이 좋았다.

화돈은 애초에 잡내도 잘 안났고 특유의 과일들의 향이 물씬 베어들어서 정말 돈주고 먹어도 안 아까울만큼 맛이 좋았다.

"나도 한그릇 더!!"

"네!!"

한바탕 전쟁같은 저녁을 거치고 나서야 레아는 순식간에 매진된 스튜 냄비를 보고 뿌듯해했다.

게다가 한그릇에 백 금.

삼백 그릇은 넘게 팔았으니 벌써 점심이랑 저녁 장사를 합치면 오만 금을 넘게 벌었다.

'화성님은 다 가져도 된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지!'

주재료인 악마의 열매도 그의 것이고 이렇게 준비를 해준 것도 그다.

그러니 레아는 3할만 요리비로 가지고 나머지는 다 화성에게 줄 셈이었다. 3할도 많지 않을까 했지만 그렇게 안 하면 화성이 안 받는다고 할거 같았다. 그는 그런 남자니까.

"이야, 오늘은 진짜 맛있었어! 주인장 요리 실력이 엄청 올랐는 걸?!"

"정말요? 히히."

"내일도 오늘처럼만 맛있으면 정말 소원이 없겠다..."

돌연 하소연하는 랭커의 옆구리를 푹 찌르는 바바리안은 입 조심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리벨롬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있었으면 네 머리통이 찌그러진 냄비처럼 변했을테니."

"그, 그러게. 고마워."

"주인장, 근데 리벨롬은 왜 없어? 무슨 연락 받은 거 없나?"

"글쎄요. 저녁에는 오신다고 하셨는데 지금까지 안 보이시네요?"

레아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와이번 둥지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건 알았는데 저녁이 다 될때까지도 안 나타나다니. 원래라면 아무리 바빠도 약속 시간은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인데 말이다.

"오늘이야말로 5강 한번 띄워보려고 했는데 아쉽네....."

"어차피 깨졌을 걸? 깔깔!"

이쯤되니 슬슬 걱정되기도 했다.

어디에 있든 대장간에 오는 건 금화만 있으면 되는 일인데 말이다.

"무슨 일이 있으신건가."

하지만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아무 전쟁통에나 떨어뜨려도 그가 위기를 겪을 일은 크게 없었으니까.

"곧 돌아오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레아는 화돈 스튜를 날랐다.

*

빛 하나 없는 어두운 동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괴기스럽기 그지없다. 습한 공기, 퀘퀘한 냄새. 은연중 맡아지는 피비린내.

그곳에 놓여진 수많은 고치들.

그것만으로 이곳이 뭐하는 곳인지를 충분히 알려주었다.

꿈틀꿈틀. 그중 하나. 가장 커다란 고치가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찌지직.

손쉽게 찢겨져나가는 고치 안에서.

웬 사내가 나타났다.

"뭐야 여긴. 히든 던전인가?"

그는 다름아닌, 고치로 빨려 들어갔던 데몬시드였다.

"히든 던전 '거미여왕의 둥지'에 입장하셨습니다."

예상한대로였다.

히든 던전.

오랜만에 듣는 좋은 울림이다.

하지만 옛날, 그렘린 성채에 입장했을 때와는 한가지가 달랐다.

"최초 아니네."

최초로 찾아냈다는 알림이 없다.

게다가 보상도 없고.

아마 히든 던전. 거미 여왕의 둥지는 그보다 먼저 찾아낸 자가 있으리라.

"몰랐는데 히든던전에서는 커뮤니티랑 다른 포탈도 안 열리네."

"불가합니다."

"불가합니다."

몇개 열어봤는데 안 열린다.

히든 던전.

일반적인 던전과는 약간 다르다.

나오는 데몬들의 레벨도 다르고 강함도 현격하게 다르다.

그리고 가장 다른건 이 던전이 생긴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일단 가볼까."

빛하나 없는 동굴.

하지만 그의 야간시야 수치는 +4

고양이보다 살짝 밤눈이 밝았다.

어둡기는 하지만 소소한 불편함 정도랄까.

크게 문제될 것도 없었다.

'간간히 추종자 바나나를 먹은 보람이 있네.'

검은산양의 추종자 열매는 바나나의 형태로 간식처럼 먹기가 좋았다.

해서 간간히 먹었는데 어느새 야간시야가 +4나 올라가 있었다.

"불 피울 필요도 없고 좋네."

하지만 이곳은 히든 던전.

데몬시드는 워터볼에 리버슬로우를 사용해 자신의 몸 주변에 수십개를 생성해놓고 걸었다.

-키시시시!

퓩, 퓨퓩-!

"데몬 스파이더를 처치하셨습니다."

"데몬 스파이더를 처치하셨습니다."

"데몬 스파이더를 처치하셨습니다."

"공포 각인이 증가합니다."

걷자마자 거미들이 나타난다.

산책하듯 걸으며 한 두마리씩 죽이고 있지만 어째 점점 늘어난다.

돌연 천장의 틈을 비집고 나타나서 독침을 뿌리거나 끈끈한 실을 던져 몸을 묶으려고하니 별로 위협적인 스펙이 아니어도 여간 귀찮았다.

"꽤 위험하네."

그라서 큰 긴장감이 없는거지 다른 네피림들이었다면 여기서 꽤 많이 다치거나 살해 당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바글바글거리는 거 아닌가."

무슨 거미떼가 물밀듯 넘쳐난다.

손바닥만한 것부터 시작해서 웬만한 사람보다 큰것들이 말이다.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

손바닥에 가스 불을 일으켜 거스트를 사용했다.

돌풍으로 휘날리는 푸른 불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삽시에 불길은 모조리 번져나갔고 거미떼를 태웠다.

"길이 별로 안 좋네."

울퉁불퉁한 동굴.

통로는 꽤 넓었지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쉬운 그런류의 동굴이다.

게다가 습하고 악취까지 진동하니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후딱 보스 잡고 나갈까."

히든 던전은 각각의 사연이 있었다.

그렘린의 성채도 그랬고 카타콤도 나름 그런게 있었다.

'카타콤은 히든은 아니었지만.'

약간 비슷한 취급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들어온 이곳.

거미여왕의 둥지도 마찬가지.

"뭐가 있기는 할텐데."

사연이야 있겠지만 던전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보스를 죽이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

거미 둥지니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거미 여왕을 죽이면 될거다.

"던전 난이도가 나한테는 별로 어렵지도 않으니까."

수식언으로 불만 지르고 다녀도 될 거 같다. 의도치 않았지만 데몬 스파이더의 거미줄은 불에 약했다.

끈끈하고 질긴 거미줄은 가스불에 금방 타버려서 여기저기 설치된 함정들이 내게는 아무 소용 없었다.

산보하듯 뒷짐지고 설렁설렁 불지르며 걷다보니.

"보스 방인가? 역시 여왕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긴하지."

꽤 거다란 공동이 나왔다.

당연하게 발 디딜 곳 없이 수많은 알들이 지면에 자리잡아 있었고, 수십에서 수백개 정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고치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뒷짐진 상태로 권능을 일으킨다.

화르륵.

발밑에서부터 솟아오른 청염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며 고치처럼 생긴 알들로 모조리 옮겨 붙었다.

"잘~ 탄다."

거스트로 살랑바람을 불어주니 더 활활 잘 탔다.

-캬샤사사아아아!!

흡족하게 불장난을 치고 있었더니 어느새 천장에서 커다란 거미가 내려와 괴성을 질러댔다.

[마나번 스파이더 퀸 엘리제]

"어?"

거미 여왕.

여왕다운 품격의 외형이었다.

크고 흉측하고 무섭게 생겼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내 시선을 확 잡아 끈건 하나의 수식언.

'마나번?'

나는 바로 마나번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왕의 권능이 마나를 태웁니다."

"당신의 마나가 타들어갑니다."

"저주 내성이 마나번의 효과를 일부 저항합니다."

"-95의 마나가 불태워집니다."

"마나소실의 저주에 걸립니다."

"초당 10의 마나가 사라집니다."

자그마치 마나를 불태우는 권능!

단숨에 마나통의 마나가 불타듯 사라졌다. 그것도 이게 끝이 아니다.

한번에 100의 마나를 불태우고 마나 소모의 저주를 걸었다.

놈이 죽기 전까지 저주는 안 풀리는 것 같았다.

"확실히, 까다롭네."

단숨에 100의 마나를 불태우고 초당 도트딜로 마나를 완전 연소시키는 놈의 권능은 치명적이다.

네피림들은 기프트 스킬이든 마법 스킬이든 각자의 스킬을 지녔다.

그건 대부분 마나를 소모하는 스킬들인데 마나를 불태운다면 스킬없이 순수 육체만으로 싸워야 했다.

웬만큼 신체 스펙이 높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닌 네피림들은 모두 이놈의 밥이 되어버렸으리라.

툭, 툭!!

게다가 놈은 거미줄과 독액을 뱉어내며 싸운다.

이 공간 대부분에 펼쳐져 있는 거미줄에 조금이라도 걸린다면 사실상 벗어나가기란 불가능.

대한민국의 네피림들의 근력 평균치는 10 이하니까.

물론.

"에너지쉴드."

나는 관계 없었다.

놈의 독침을 가볍게 에너지쉴드로 막아주고 발을 굴러 푸른 불을 퍼뜨렸다. 거스트를 사용해 공간 자체를 푸르게 불태우자 난리가 났다.

순식간에 여왕의 둥지가 불바다로 변했고 놈이 자랑하던 거미줄과 고치들이 모조리 불타 떨어졌다.

쾅! 쾅!

지랄 발광을 하며 난동을 피우는 거미여왕과 바닥에 고치로 변해 있던 거미 알들에서 새끼들이 태어나자마자 불길에 휩싸여 죽어나갔다.

여왕은 거미줄에서 떨어져 바닥에서 뒹굴며 불이 붙었고 고통에 목놓아 괴성을 내질렀다.

-캬샤샤사사사아아!!

"여왕의 권능이 마나를 태웁니다!"

"당신의 마나가 타들어갑니다!"

굉장히 화가 많이 난 거 같다.

제 몸이 불타는 와중에도 날 죽이려고 달려드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의미없다.

일반적인 네피림들이야 마나가 100에서 200 사이일거다.

하지만 난 아니다.

「생명력」 – 890/900 (+200)

「마나」 - 610/920 (+80)

내 마력은 42.

마나통은 자그마치 920이 넘는다.

여왕이 권능을 아무리 써봤자 100씩 타들어가서는 의미가 없다.

물론 전투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도트딜 때문에 마나가 사라지겠지만 그래도 별로 상관은 없다.

저렙 던전에 들어온 고렙마냥 무엇 하나 위협적이지 않았으니까.

마나가 없다해도.

"창으로 싸우면 되니까 뭐."

인벤토리에서 적창을 꺼내 단번에 투창했다.

쇄애애애애액-!!

쾅!!

-키샤아아아아아아아!!

적창이 꽂힌 그대로 벽에 처박힌 거미 여왕의 다리가 축 늘어졌다.

"마나번 스파이더 퀸 엘리제를 처치하셨습니다."

"수 십년간 죄 없는 자들을 먹이로 삼은 거미 여왕을 처치했습니다."

"히든 던전 '거미 여왕의 둥지'를 성공적으로 완료하셨습니다!"

"관련 보상이 주어집니다."

"2205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510 금화를 획득합니다."

"일기장을 획득합니다."

"거미 여왕의 실뭉치를 획득합니다."

"스킬북'레그릿지'를 획득합니다."

"거미 여왕의 알을 획득합니다."

"오, 스킬북! 스킬북도 주는구나... 근데 일기장은 또 나오네."

게다가 거미알은 왜 주는거지?

일단 인벤토리에 넣고 주변을 살펴보니 죄다 불타고 있다.

그 와중에 돈이 될만한 게 없나 살펴보고 있으니.

"나! 날 살려주시오!"

돌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여기요!"

"?"

거미 여왕의 둥지.

그 벽의 조그마한 틈.

"날 여기서 꺼내주시오!!"

그 틈에 사람이 있었다.

무슨 말인지 해석은 됐다.

하지만 지구의 언어는 아니다.

"누굽니까?"

"난, 난..... 거미 여왕을 만들어낸 죄인이라네!"

만들어낸 죄인? 그럼 설마.

"당신이 던전을 만들었습니까?"

"그런거나 다름없지... 내 얘기를 좀 들어주겠나?"

"음... 사양하죠."

악마를 만들어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소리.

쿵! 쿵!

바위 틈을 다른 돌들로 다시 메우며 완곡히 거절했다.

"잠깐! 잠까아아안!! 나는 네피림이네! 영웅인 자네에게 분명 도움이 될 것이야!!"

네피림?

마지막으로 남은 작은 틈을 남기고 내 손이 멈췄다.

거미 여왕의 히든 던전 [2]

73화.

히든 던전.

히든이라는 말은 흔치 않은 것.

뭔가 특별한이라는 의미다.

때문일까. 그곳에는 항상 던전과 관련된 사람들이 있었다.

에서는 그들의 어머니인 레아가 있었고 그건 에서도 마찬가지.

이번에도 사람이 나왔다.

잡혀있는 고치들이 꽤 많으니 살아있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했다.

근데 고치가 아니라 웬 벽틈에 끼어서 생존해 있을 줄이야.

'네피림이라 해서 적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지.'

상황은 종료됐다.

카타콤에서 시스템이 필요로 하는 엔피시는 사전에 설명이 나왔다.

그를 구하라고까지 하면서.

하지만 히든 던전.

레아나 지금 나타난 노인은 아니다.

이들은 뭘까.

'리벨롬은 이해해.'

그만한 망치를 가지고 있었다.

인류의 전체적인 스펙업을 위한 망치를 들고 있었으니까.

네피림을 위한 시스템이 악마들에게 반하는 천상의 존재라면 인류를 위해 필요로 하는 자를 원하겠지.

리벨롬은 그런 자였다.

네피림을 인도하는 하늘의 신이 원하는 자.

'하지만 레아는 아니었지. 시스템이 그녀에 대해 말해주고 일기장을 건네기는 했으나 반드시 필요로 하지는 않았어.'

마치 어찌될지 두고 보고 싶다는 듯.

그러고보니.

"일기장."

거미 여왕을 죽인 보상으로 웬 일기장 하나를 얻기는 했다.

"날 꺼내주게! 자네에게 결코 위협이 되지는 않을게야. 나의 죄 많은 생을..... 자네, 내 말 듣고있나?"

일기장.

「브란스의 일기장」

제국력 421년.

-한낱 도적떼에 불과했던 내가 지금의 존재가 된 이유는 나의 주인.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어려운 은혜스러운 분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소망한다. 나의 연구가 인류를 위하는 첫걸음이 되기를...

제국력 424년.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그저 거미에 불과했던 그 아이가 날 부모로 알고 대화까지 시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 아이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오오, 나의 주인. 나의 신이시여,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인간을 위해 일할 당신의 종이 인간을 위하셨던 당신의 신하가 인간을 죽이다니!! 하루빨리 이 녀석을, 엘리제를 교정해야 한다.

제국력 427년.

-엘리제를 막을 수 없었다.

키워준 은혜를 갚으려는 걸까. 그녀는 날 잡아먹지 않았다. 대신 날 가두고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다.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그녀의 권능 앞에서 난, 숲의 현자가 아닌 한낱 늙은 노인네일 뿐이었다.

제국력 429년.

-제국군이 당도했다. 내 딸, 엘리제를 토벌하기 위해서! 아아, 나는 대체 무슨 짓을.... 당신처럼. 나 또한 이들에게 보탬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제국력 431년.

-몇차례 제국군이 찾아왔지만 그 누구도 엘리제를 막지 못했다. 도리어 그녀의 양분이 되었다. 더 이상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너무 많은 피를 보았고 엘리제는 그것으로 제 자식을 낳아 둥지를 굳건히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나의 마나는 이곳에 있는 한 채워질리 없는 밑빠진 독이었으니...

제국력 433년.

-그가 나타났다. 엘리제는 군주의 휘하로 들어서길 바라며 고갤 조아렸다. 앞으로 더 강력한 힘을 얻을 것을 약조 받았다. 이제, 엘리제를 막을 자는 없다... 나의 신이시여. 만약, 제 목소리가 닿는다면. 어리석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신다면 제발 답해주십시오. 저는 무엇을 해야...

일기장이라기보다는 뭐랄까.

"회고록인가."

"사람 앞에 두고 개무시하는 걸 보니 왕족이신가? 아니면 귀족? 날 꺼내라! 귀족이든 왕족이든 나 브란스를 무시할 수는 없다!"

"아까는 죄인이라더니."

"죄인은... 맞다. 내가 그녀를 괴물로 만들어버렸으니."

악마를 키웠다라.

"저런 괴물을 왜 키운겁니까."

"괴물이라... 어릴 때는 작고 조그맣고 귀여웠는데 말이지."

"취향 한번 독특하시네."

"저 아이는 특별했다. 엘리제의 거미줄은 마법을 저항하고 상대의 마나를 태운다. 그건 분명 들끓는 땅속의 존재들을 대항하기에 분명히 필요한 힘이라 생각했지!"

"악마들을 말하는겁니까?"

"그래.... 그들은 마법에 능하니."

하지만 일기장에 적힌대로.

거미 여왕 엘리제.

즉, 인육의 맛을 봐버렸고 그때부터 사람을 위한 게 아닌, 사람을 먹기 위해 살아가게 되었다.

"날 이런곳에 막아두기까지하고 말이네. 그래도 애가 착해서 아버지까지 죽이지는 않았지... 착한 아이였는데...! 모두 내 잘못이네!"

"아직도 정신 못차렸군."

"이놈! 아까부터 말뽄새가 고약하구나! 대체 누구냐! 내 입으로 이런말 하고 싶지는 않지만 본인으로 말하자면 제국의 황제도 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위명이 자자한 흰숲의 현자 브란스님이시다!"

흰숲의 현자 브란스.

역시나 이 세계 사람은 아니었다.

"저는 제국 사람이 아닙니다."

"흠..... 그래 보였다. 그 갑옷, 난생 처음보는 마법이 부여되어 있구나. 게다가 자네가 쓰는 불. 창, 모두 굉장히 이질적이야. 마치 악마들처럼."

현자는 현자라는건가.

꽤 날카롭다.

"현자라면서 왜 이런 벽 하나도 부수지 못하는겁니까."

"이 돌은 나의 딸, 엘리제가 날 가두기 위해 특별히 만든 돌이다. 제아무리 현자라도 마력이 없으면 그저 범부와 다를 바 없는 법이지."

대충 이 돌에도 마나번의 권능이 담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안되네.'

쓸모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곳의 좌표를 저장하려고 했지만 포탈의 서가 좌표 고정을 못했다.

창으로는 애매하니 이번에도 로자리의 메이스를 꺼냈다.

요새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물러나시죠."

"아, 알겠네!"

이 자의 일기장.

말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

흰숲의 현자가 아니라, 악마와 결탁한 마법사일 수도 있는 노릇.

"한가지 물어도 됩니까."

"뭔가."

"거미 여왕은 군주의 휘하로 들어가길 바랐다고 했었는데... 무슨 군주를 말하는겁니까."

"죄악의 군주들. 그중 음모와 모략의 재주를 부리는 거짓의 군주. 벨리알의 휘하를 뜻함이지."

거짓의 벨리알. 들어본 적 있다.

게임같은 곳에서 들어본 적 있다.

오만, 탐욕, 질투, 음욕, 식탐, 나태.

인간의 일곱가지 죄라던가.

이 노인네는 아마도 그중 하나를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고보니 공포는 어딘가에 봉인 되어 있다고 들었네만."

"공포..."

그러고보니 수식언을 얻고나서 생각해 본적이 있다.

공포.

그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였고 악마가 즐거워 할 하나의 먹이라는 걸 말이다.

"답변이 되었나?"

"예."

군주라는 직책.

역시 내가 지닌 수식언의 기원은 공포를 지녔고 공포의 기원이 되는 악마는 그 이름이겠지.

'디아블로.'

그러고보니 내가 지닌 장비 중에서도 군단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열병의 투구』 (unique)

-6군단 사령관 아스모디의 부관. 삭스의 유희로 만들어진 물소뼈 투구.

〈지독한 열병〉

"6군단의 주인은 누굽니까?"

"고뇌의 엘룬이지. "

악마에 대해 꽤 빠삭하다.

아무것도 모르던 공주였던 레아와는 달리 지식이 해박하다.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게든, 인류에게든.

'그래도 뭔가 수상하긴하지.'

일기장을 봤어도.

그가 이런 악마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엔 큰 변함이 없다.

"한 가지만 더."

"노인네 놀려?!"

성격이 괴팍해보이는 것도 한몫하고 있다.

의심에 확신이 더해진다.

"당신을 구하면, 저한테 뭘 해줄 수 있으십니까?"

"힘 없는 노인네를 그럼 그냥 이렇게 두겠다는게냐?"

"실리를 따지는 게 사람입니다. 이득이 없다면 오늘 처음 본 노인네가 죽든 말든 별 상관은 없죠."

더군다나.

"제게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숲의 현자를 말입니다."

"흠..... 내가 왜 네 목숨을 노릴거라고 생각하지?"

"저도 모르죠."

"똑똑한척 하는 칠푼이구나."

"가겠습니다."

"자, 잠깐만! 기다려봐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노부는 더 큰 사람이다! 벌써 수백년을 살아왔지!"

수백년?

"인간이 아닙니까?"

"인간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간은 아니다. 네가 말해도 알지 모르겠지만 이 몸은 신이 선택한 네피림! 악에 빠질 세계를 구원할 용사니라!"

네피림이 그런거였나.

우리나라만 해도 백만명 정도는 있는 거 같던데.

"저도 네피림입니다만."

"뭐시라! 허허..... 젊은 놈이 어디서 허풍은. 내 삼백 평생을 살아오며 나와 같은 네피림은 본적이 없다! 덕분에 대악마들한테 망해가는 중이지. 이곳에 갇힌지도 어언 십년. 세상이 어찌 변했는지도 모르는구나... 벌써 망했으려나?"

바위틈으로 슬쩍 날 보고 말하는 게 떠 보는 거 같다.

"망해가는 중이죠."

"별반 다를 거 없구만."

쿠웅!!

무너지는 돌무더기.

그 사이로 피어오르는 먼지 너머.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수염, 흰 눈썹.

그러나 머리는 민머리의 노인이었는데 그는 숲의 현자라는 자칭답게 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듯한 인상착의를 가지고 있었다.

혹시 몰라 메이스를 강하게 쥐었으나 노인. 아니, 브란스는 나는 안중에도 없는듯 곧장 밖을 두리번거렸다.

"아아."

그리고 시선이 꽂힌 것은 자신이 키웠다던 엘리제.

내 창에 꽂혀 죽은 엘리제였다.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그때 네게 눈을 돌리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가 흘리는 건 참회의 눈물이었다.

진심으로 슬퍼하는 브란스를 보자 괜히 나까지 울적해졌다.

'어렸을 때...'

보육원에서 백구 세마리를 키웠다.

밥 먹는 것도 눈치보면서 먹었던 때다. 백구는 나를 포함한 보육원 아이들이 정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유일하게 자신보다 만만해서 괴롭히는 애들도 있었지만, 난 백구와 남다른 정을 쌓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어느날 한마리씩 사라졌다.

한마리, 한마리씩 사라졌다.

원장님께 물어보니 호랑이가 물어간거 같다고 하셨다.

위험하니 밤에는 절대 나다니지 말라고 했고 우리는 그날 이후로 결코 밤에 밖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구라였지만.'

그로부터 십수년이 더 지난 뒤에야 초복과 중복, 말복이란 개념이 있다는 것과 호랑이는 이미 예전에 대한민국에서 자취를 감춘 아이라는 걸 깨닫고 허망해 했었다.

그때부터 내 인생에 애완동물을 키운다는 선택지도 없었고.

그래서일까.

슬피우는 브란스를 보니 괜히 그때가 떠올랐다.

"노인장, 저랑 가시겠습니까."

"브란스라고 불러라."

"예. 가시겠습니까."

"흠."

브란스는 내가 바라보는 포탈을 보고는 눈가를 좁혔다.

"넌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구나."

"예. 하지만 멸망중인건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내가 엘리제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이곳이 대악마들과 인류가 싸우고 있는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엘리제의 거미줄을 그들에게 보내 조금이라도 전쟁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났다.

"거짓의 휘하로부터 들었다. 이미 이 세상은 끝났다고 말이지."

"...."

"그들은 벌써 몇개의 세계를 정복하고 부수고 초토화시켰다. 우리가 끝났으니 아마 이번엔 네가 있는 세계의 차례인 듯 하구나."

"아마도 그렇겠죠."

브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내 아이가 먹어치운 인간들은 이곳이 아니라 그쪽일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응당 사죄를 해야겠지. 본래는 죽음으로 죗값을 치루려 했다. 용서받지 못할 죄이니, 지옥의 구렁텅이에 떨어져 내 영혼은 불결해지고 육신은 후회라는 기름탕에 담가져 아득한 세월을 고통받아야 할....."

브란스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엘리제를 씨앗으로 만들어 포탈을 탔다.

이 양반 생각보다.

"어른이 말하는데 어딜 마음대로 움직이느냐! 내 아무리 죄인이라고는 한들 이런 예의범절 하나 없는 놈은 또 처음 보았다!"

투머치다.

십수년을 갇혀 지내서 그런가.

'그래도...'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지식들을 알고 있는 느낌이 든다.

날 적대하지 않는다면 곁에 둬서 조언을 구하는 것도 좋겠지.

"오오! 이, 이런 회색의 건물들이 줄기차게 이어져 있다니! 이곳은 마치 신들의 궁전 같구나!? 훌륭한 골자야! 쇠를 어떻게 이 벽에..."

현자는 현자인가.

다 무너진 건물들인데 뭐가 그리 훌륭하다는건지 연신 감탄사를 뱉어내며 시끄러웠다.

방금까지 눈물 흘리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로울 정도.

더 보고 싶다며 다 늙은 몸을 이끌고 높이, 더 높이 올라갔는데.

"플라이!"

안되겠는지 마법까지 사용하며 하늘 높이로 올라갔다.

역시 현자는 현자. 플라이 정도의 마법은 손쉽게 사용하는 거 같았다.

"거 조심하십쇼, 여기에 와이번이 다닐수도 있....."

그때였다.

브란스의 모습이 돌연 사라졌다.

"뭐야 어디갔어."

어딜갔나 돌아보니.

후우웅-!!

"이, 이놈이! 놔라! 놔!!으와아아!!"

"염병."

하늘 높이 올라가던 브란스를 창공의 왕자.

와이번이 낚아채 날아가고 있었다.

"미치겠네 진짜."

저 양반, 현자라는 거 치고는 너무 조심성이 없었다.

"아니, 차라리 잘됐나."

한동안 안 보이던 와이번.

놈을 따라가면 놈들의 둥지를 찾을지도 모를 일이니.

와이번 둥지 [1]

74화.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

어둑어둑해진 하늘은 짧게나마 수평선에 자리잡은 석양이 어둠을 간신히 조명했다.

하지만 잔잔하게 드리우는 어둠이 늙은이의 밤눈을 가렸기 때문일까.

"와이번이라니! 이놈이 왜 이곳에 있는게야!"

와이번의 발에 잡혀 날아가는 브란스의 호통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거미 둥지에서 수십년을 갇혀 있다 나오자마자 어쩜 저렇게 바로 잡힐 수 있는지 보면서도 어이가 없다.

"이, 이놈아! 어서 날 구해라!! 아직 마나가 다 회복 안됐단 말이다!"

"뻔뻔하기까지, 목숨 맡겨놨나."

그래도 모른척할 생각은 없다.

지금 저렇게 죽으면 괜히 구한게 되기도하고 내 고민이 물거품이 되니까. 게다가 아직 궁금한 것도 많다.

악마라는 것.

군주란 것들에 대해 말이다.

"구하라니까! 뭐하냐 이놈아아!!"

"기다려보십쇼."

와이번의 비행속도는 빠르다.

하지만 내 플라이와 거스트를 조합한 속도도 언듯 와이번의 비행 속도를 가까스로 따라잡고 있다.

놓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굳이 요격할 필요 있을까.

'어차피 와이번 둥지를 찾고 있었어. 차라리 잘된걸지도 몰라.'

요즘 한동안 나오지 않았던 와이번을 드디어 만났다.

저놈을 미행만한다면 꽁꽁 숨겨둔 와이번 둥지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거미 둥지처럼 히든 던전을 찾게 될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더라도 와이번 둥지는 찾아 놓는 게 좋다.

화염 내성을 키워야 하니까.

내 가스불은 쓰면 쓸수록 레벨이 올라간다. 지금도 뜨거운데 앞으로 더 뜨거워질 가스불에 대한 내성을 지금부터 차근차근 쌓아둬야 한다.

모처럼 힘들게 얻은 수식언이다.

썩힐 수는 없지.

그리고.

'현자라고는 자칭했지만 난 아직 저 노인네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몰라.'

마나가 회복되지 않았다지만 그건 잠시 기다려보면 되겠지.

그게 진짜인지.

아니면 힘을 숨기고 있는건지.

-뭐, 네놈이 날 구하는 것보단 이놈들의 뒤를 밟고 싶은 건 알겠다. 참 노인공경이라고는 없는 놈이군.

거리가 꽤 멀어졌고, 상공이 높아져서인지 들리지 않겠다 생각하던 찰나 머릿속으로 말이 들려왔다.

-놀랄 것 없다. 흰숲의 현자라 불린 이 브란스님의 서른 다섯 일곱가지의 신기중 하나이니.

서른다섯 일곱가지는 뭐야.

-물론 너는 못할거다. 이게 생각보다 꽤 고등 마법이거든. 후후훗, 어떠냐? 이제 이 현자님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샘솟느냐?

뚱한 얼굴로 따라가고있자 혀차는 소리가 들린다.

저 양반 와이번한테 잡힌 거 치고는 꽤 침착하네.

-와이번한테 잡힌 거 치고는 침착하다고 생각했느냐? 그럴게다. 왜냐면 이 몸은 현자님이시다. 이런 일은 숱한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알 수 있지. 놈은 아직 날 잡아먹을 생각이 없다. 아마 둥지로 날 데려가려는거겠지. 와이번은 구름 위에 사니까.

구름 위에 산다?

이건 또 처음 듣는 소리다.

그러거나 말거나 흰숲의 현자 브란스의 투머치토커가 발동걸렸다.

-이 와이번이란 놈들은 말이다. 항상 짝을 지어 다니지. 하지만 이놈은 그렇지 않아. 혼자다. 그걸로 미루어 봤을 때 이 놈은 아직 솔로인게지! 날 아마 제 반려로 점찍어 놓은 암컷에게 주려 할게다! 그렇게되면...

그러고보니 그렇다.

내가 본 와이번들은 항상 둘, 아니면 셋이서 다녔는데 이녀석은 혼자.

그런 생리가 있었다니!

'별로 관심 없는 내용이었지만 가는 길 심심하진 않네.'

어느새 해는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고 노을에 물든 하늘은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와이번은 구름 위에 산다.

그 말 뜻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라는 걸 난 곧 알수 있었다.

"이래서 안 보였던 거였어?"

와이번은 구름 위에 산다.

말 그대로였다.

놈들은 구름 위를 둥지처럼 만들어서 살고 있었다.

고공의 구름 위에는 구름들을 뭉쳐 놓은 와이번들이 각자의 둥지 안에서 잠을 청하거나 먹이를 먹거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여기. 날이 아무리 화창해도 이상하게 구름이 많다 했어."

불별도에서도 보이는 곳이다.

날이 아무리 화창해도 이곳만큼은 구름이 항상 껴있어서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근데 이 구름들이 바로 와이번이 둥지로 한 곳이었다니!

-와이번들은 하늘에서 태어나 땅에 떨어져 죽는 이상한 놈들이지. 구름을 붙잡아 놓는 희귀한 능력은 현자인 나라도 생리를 모른다. 하지만 와이번들은 집단을 이루고 살며 한 집단이 만들어낸 구름의 크기는 한 나라와도 비견될 정도로 넓지!

그 말대로다.

놈들이 만들어낸 구름은 푹신하지만 단단한 솜사탕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못 뜯어낼 정도는 아니었는데 마치 솜사탕 같은 밀랍의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도통 무슨 원리인지 몰랐다.

하지만 뭐 알 필요 있을까.

쿵.

웬 와이번의 둥지 앞에 내려앉은 놈은 자신의 발에 잡혀 있는 브란스를 툭 던졌다.

마치 자신이 점찍은 암컷에게 오다 주웠다며 선물하는 느낌이랄까.

근데 진짜 오다 주운 게 맞긴했다.

"아고고, 이 빌어먹을 도마뱀 놈이!"

아무튼 허리를 겨우 붙잡은 브란스가 현자의 위엄따윈 개나 줬다는 듯 꼴사납게 일어나는 사이.

난 구름 위에 살고 있는 마냥 동화 같은 이야기의 현실을 보고 있었다.

'대부분 인간인가.'

구름 위의 둥지.

그곳의 대부분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당연하다. 저들이 주 먹이로 삼는 것은 커다란 짐승이나 인간이니까.

쌓여진 뼈.

굴러다니는 갑주나 무기 등등이 이곳의 잔혹성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수는 헤아릴 수가 없네.'

와이번의 숫자는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았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놈들만 수십마리다. 해가 사라지고 자신의 둥지에 눈을 붙인 놈들이 많아서 그렇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날개를 피고 날 죽이려 달려 들었을 것이다.

"히든 던전이고 나발이고."

"열병의 투구를 장착합니다."

"페스틱 사드를 사용합니다."

저 노인네 살리고, 내가 살아나가려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했다.

"시드로긴을 사용합니다."

"오크 전사의 잠재력을 발휘합니다."

"시드로긴을 사용합니다."

"오크 전사의 잠재력을 절반밖에 발휘하지 못합니다!"

"경고! 부작용이 과중됩니다!"

"아토믹 시드의 숙성도가 0.7% 상승합니다."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을 착용합니다."

"야칸의 숲 지팡이를 착용합니다."

"메모라이즈가 발동됩니다."

"레인스톰을 시전합니다."

"블리자드를 시전합니다!"

레인스톰만 사용해서 벼락을 몰아치는 것도 좋지만 수가 너무 많다.

일단 저들의 움직임을 늦추게 만들고 비행을 막는 게 관건이다.

그리고 한마리 씩.

꾸드드득.

"사냥한다."

콰지지지지직!!

손안에 잡힌 벼락이 날뛴다.

어둡게 변한 하늘이 순간적으로 붉게 번쩍인다.

꽈광-!!

'일단 한발.'

브란스를 먹으려는 와이번.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된다.

"우, 우와아아악! 저리가! 저리가 이놈아! 난 말라서 먹을 게 없단 말이다! 이, 이럴줄 알았으면 엘리제에게 먹혔을 것을!!"

파쟈쟈쟈쟈쟈쟉!!

콰아앙-!!

-퀘에에에엑!!

쿠웅!!

"와이번을 처치하셨습니다."

"2500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180 금화를 획득합니다."

아가리를 벌리고 있어서 놈의 머리를 맞춰 단번에 절명시켰다.

-크아아아아아아!!

암컷이 죽어서인가.

수컷 놈이 분노하며 굉음을 터뜨렸다.

"오오!! 역시 믿고 있었다!!"

"드레이커의 용살창을 착용합니다."

[드레커니의 용살창] (unique) +3

-용살자 드레커니가 애용했던 창.

〈매우 강력한 관통력〉

〈매우 강력한 폭발력〉

--착용제한--

〔근력 제한 40〕 O

〔용의 피를 뒤집어 쓴 자〕 O

+3강까지 해둔 드레커니의 용살창이 진정한 빛을 볼 때다.

철컥.

"한번 화려하게 가보자고."

끼기기긱!

콰아아아아아앙-!!

*

흰숲의 현자 브란스.

그는 사백년을 넘게 살아오며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했다고 자부하는 자였다.

하지만 바로 오늘.

그는 자신은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게.

"미친놈처럼 싸우는 군."

밤하늘을 모조리 터트리며 싸우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콰아아아앙-!!

그가 창을 던지면 와이번이 골통이 터져나갔다. 붉은 벼락을 제 뜻대로 펼치며 동해번쩍 서해번쩍 하는 걸 보면 마치 뇌신 같았다.

하지만 창 한자루로 와이번을 터트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불세출의 기사, 눈을 부리고 독을 흩뿌리는 걸 보면 세상에 다시 없을 마도사였다.

가시덤불과 식물로 이루어진 히드라를 만들어낼 때면 자연을 지키며 싸운다는 드라이어라는 정령 같았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적의 한계치가 이미 넘었다."

거기에 더해.

화르르륵!!

불길하기 짝이 없는 시퍼런 불까지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저건 공포의..."

제아무리 숫자가 많다 한들, 와이번은 저 사내를 당해낼 수 없었다.

하늘에선 폐를 얼리는 눈이 내리며 날개를 얼리고, 덕분에 구름을 밟으면 가시덤불이 나타나 옭아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열병과 독이 서서히 몸을 좀 먹었다.

놈들에겐 방도가 없었다.

죽기 살기로 뛰어들며 입안에 불길을 그러모아 쏘아대는 것밖엔.

푹-! 콰앙-!!

하지만 그건 도리어 그가 바라던 바였다. 달려드는 놈들의 목에 창을 찔러놓고 폭발시키니 와이번의 머리가 뚝뚝 떨어져나갔다.

수가 많아도 소용없다.

표식을 사용해 전이하는 그에게 사각이란 존재치 않았다.

"이런류의 싸움이 익숙하군."

브란스는 냉정히 그를 평가했다.

의심많고 남을 쉽게 믿지 않는 성격답게 전투에서도 무엇 하나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실리를 따지는 공격.

중간 중간에 숨을 몰아쉴때면 어김없이 품에서 물약을 꺼내 마셨다.

저정도의 지속적인 마법을 유지하려면 마나가 얼마나 많아도 부족할텐데 말이다.

"보면 볼수록 보석이군."

멸망으로 가득찬 이곳의 하늘에도 그는 유난히 반짝거리는 보석이었다.

쿵-!!

마지막 와이번까지 쓰러뜨린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죽인 와이번의 사체에 걸터 앉았다.

"아직 쉴 때는 아닌 거 같군."

그의 뒤로.

또 다른 와이번 무리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 수는 어림잡아 스물.

여기서 서른마리가 넘는 와이번을 홀로 잡은 그다.

지금은 달아나는 게 적기다.

"가자, 내가 도와주마!"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푸른 물약 하나를 먹더니 등을 돌려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지팡이를 놈들에게 뻗었다.

일순 끌어 올려지는 방대한 마력.

브란스는 고갈되어 있었던 그에게서 순식간에 뿜어져 나오는 마력에 화들짝 놀랐다.

방금 마신 물약이 무슨 엘릭서라도 된단 말인가.

하지만 놀라기는 아직 일렀다.

"카탈린의 뇌격."

꽈과광!!

하늘에서 돌연 한줄기의 붉은 벼락이 내려쳤다.

"그것만으로는 끝이 없어!"

다그쳤으나 브란스는 자신의 생각이 성급했다는 걸 곧 깨달았다.

"이럴, 수가....."

쾅! 꽈광!! 꽈과과과광!!

뇌격.

그것은 끝없이 메우치는 벼락의 향연이었다.

십수마리의 와이번 떼가 붉은 벼락의 홍수 속에서 사라져갔다.

"자네, 자넨 대체 뭔가....?"

와이번.

그 대적하기 힘든 악의 피조물을 저리도 쉽게 찢어 발기는 자.

"데몬시드."

악마를 먹고 피어날 씨앗.

데몬시드였다.

와이번 둥지 [2]

75화.

"레벨이 상승합니다."

"카탈린의 감전이 레벨업 합니다."

[카탈린의 감전 Lv.4]

"모든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능력치 포인트 +3이 주어집니다."

"카탈린의 뇌격을 익히셨습니다."

"적들의 영혼에 공포가 각인됩니다."

"푸르게 불타는 영혼의 불 Lv.3으로 상승합니다."

『카탈린의 뇌격』

-자신의 생명과 마나를 이용해 아주 강력한 벼락을 연이어 떨어뜨립니다.

*한번의 소모마다 12번의 뇌격을 떨어뜨리고 〈강력한 관통〉 〈매우 강력한 번개 피해〉 〈강한 출혈〉 피해를 입힌다.

(소모h,m:300)

드디어 기다렸던 레벨업 시간이다.

『이화성』

「데몬시드 Lv.4」

「카탈린의 감전 Lv.4」

「생명력」 – 750/920 (+200)▲

「마나」 - 820/1000 (+80)▲

「능력치」

근력 – 38 (+14) ▲

민첩 – 30 (+4) ▲

건강 – 37 (+14) ▲

마력 - 46 (+6) ▲

강골 - 15 ▲

〔시드로긴 활성화 00:15 남음〕

"능력치 포인트 3을 사용합니다."

"마력이 46으로 증가합니다."

하지만 와이번은 아직도 있다.

저 멀리 날아오는 와이번 떼.

"내다보는 눈을 사용합니다."

"시야 범위가 확장된다."

수는 24마리.

단번에 숫자를 확인하고 곧 끝나가는 시드로긴을 억지로 붙잡는다.

"시드로긴을 사용합니다."

"오크전사의 씨앗을 섭취합니다."

"오크전사의 잠재력을 발휘합니다."

"실패합니다!"

"잠재력을 30% 이끌어냅니다!"

"경고! 경고!"

"더 이상의 섭취는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생명력 수치가 30% 하락합니다!"

"아토믹시드의 숙성도가 2.5% 상승합니다."

"아토믹시드 숙성도 5%"

"숙성도의 상승으로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씨앗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시드로긴의 부작용이 5% 감소합니다."

울컥!

신물처럼 올라오는 핏물.

기분 나쁘게 토한 핏물과 함께 전신의 힘이 통증과 함께 차오른다.

「능력치」

근력 – 43 (+14) ▲

민첩 – 35 (+4) ▲

건강 – 42 (+14) ▲

마력 - 51 (+6) ▲

강골 - 20 ▲

배우자마자 머릿속에 입력된 지식.

"카탈린의 뇌격."

들어올린 손에서 나의 생명과 마나가 동시에 소실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와이번들의 머리 위로 만들어진 검붉은 먹구름.

그곳의 중심이 원형으로 허리케인처럼 휘몰아치며 벼락이 쇄도했다.

콰광-!!

-퀘에에엑!!

이제까지와의 벼락과는 다르다.

벼락 한줄기에 담겨 있는 힘과 밀도가 차원이 다르다.

벼락에 적중한 와이번은 삽시간에 몸이 꿰뚫려 피를 흩뿌리며 타들어갔다. 아니, 벼락이 놈들의 피를 게걸스레 탐하며 사라졌다.

일순간에 와이번 한마리가 죽어나가자 날 향해 쇄도하던 놈들이 주춤했다. 하지만 그건 몰살의 징조였다.

꽈광-!!

꽈과과과과과광-!!

매우쳤다.

벼락은 한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뇌격은 십수발의 벼락이 몰아치는 것. 소모 h,m이라는 건 생명과 마나를 절반씩 소모한다는 뜻.

150씩 빠져나가는 생명력과 마나에도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드로긴의 중복 복용으로 내 생명력과 마나는 평소와 달리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생명력」 – 750/1040 (+200)

「마나」 - 820/1100 (+80)

덕분에 뒤를 생각하지 않았다.

붉은 뇌격은 수십발을 치고도 또 떨어져 놈들을 확실하게 죽인다.

확실하게.

쏟아지는 뇌격의 향연에 놈들이 도망칠 곳 따위는 없었다.

"와이번을 처치하셨습니다."

"와이번을 처치하셨습니다."

"와이번을 처치하셨습니다."

"와이번을 처치하셨습니다."

"와이번을 처치하셨습니다."

"와이번을 처치하셨습니다."

"와이번을 처치하셨습니다."

"와이번을 처치하셨습니다."

"와이번을 처치하셨습니다."

"와이번을 처치하셨습니다."

.

.

.

쿠웅-!!

털썩.

마지막 와이번까지 쓰러뜨리고 나서야 겨우 자리에 앉았다.

"자넨, 자넨 대체 뭔가....?!"

많은 것이 함축된 물음이었다.

누구냐가 아닌, 뭐냐는 물음.

"데몬시드."

데몬시드라 했다.

"데몬시드... 악마의 씨앗이라는 뜻이로군."

처음 들어보는 단어임에도 자동으로 해석이 됐는지 브란스는 데몬시드란 이름을 음미하듯 곱씹었다.

그러더니 불현듯 말했다.

"다시 소개하지. 귀공. 본인은 흰숲의 현자, 브란스라고 하네."

"왜 그러는겁니까?"

"귀공의 지닌 힘에 대한 존중. 그리고 목숨을 살려준 것에 관한 은혜를 입었으니 말뿐이라도 뜻을 보여야 함이 옳지 않겠는가."

울컥, 울컥.

올라오는 핏물을 가까스로 삼켜 넘기며 헛웃음을 흘렸다.

"귀공이라니 됐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걸 보인 것도 아니고요."

"이게 어떻게 대단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나 브란스! 살아 생전 이토록 치명적이게 웅장한 전투는 처음이었네! 자네는 존중받을만 해!"

"나참."

괜히 쑥스럽다.

"괜찮나? 몸이 많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조금 무리한거 뿐입니다."

시드로긴의 효과가 아직 남아 있을 때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한다.

와이번을 데몬시드로 만들어서 가져가야하니까.

"와이번 고기, 먹을 수 있습니까?"

"고기? 먹으려면 먹을 수야 있지! 어느 왕국에서는 별미로 통한다 들었네."

"그렇습니까."

많으니까 한마리 쯤은 레아한테 요리해보라고 해도 좋을 거 같다.

요즘들어 식재료 조달로 골머리를 싸메는 듯 했으니까.

슬슬 요리 실력도 늘어나는 거 같아서 한결 마음이 놓인다.

"꼬리 부분이랑, 옆구리 살. 그리고 역시 목살과 등심이 제격이네. 내가 좀 도와주지!"

브란스는 각종 마법으로 와이번의 고기를 잘라 종류별로 나눴다.

역시 아는 게 많아서 그런지 어디가 맛있고 어디가 맛없는 부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거 한마리는 내가 써도 되나?"

"뼈만 남은 걸 뭘로 쓰려고요."

적당히 고기를 인벤토리에 넣자 브란스가 와이번의 뼈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흰숲의 현자, 브란스님은 무엇 하나도 허투루 쓰는 일이 없네."

그때였다.

브란스가 뼈를 만지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뼈만 남았던 와이번이 돌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살가죽이 씌워졌던 머리마저 시계태엽이 되돌아가듯 뼈에 맞춰지고 가죽이 녹아내리더니 완전한 뼈 와이번이 만들어졌다.

-게게게게게!

뼈만 남은 데스 와이번이었다.

"브란스, 네크로맨서였습니까?"

"허허, 네크로맨서? 그 또한 마법의 한 종류일 뿐이라네. 기적을 발하는 것. 그게 바로 마법이니까."

말인즉슨.

그는 모든 종류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괜히 현자라고 자칭하는 게 아니었군요..."

"당연하지! 나도 양심이 있는 놈이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흰숲의 현자! 브란스 님이니 이 정도를 하는게지!"

엣헴!

콧대가 높아진 브란스는 와이번 타라는 듯 두들겼다.

"타게."

"이거, 날 수 있습니까? 날개의 피막은 사라졌는데요."

"이놈들은 피막으로 인해서 나는 게 아니라 날개에 자체적인 마법적 현상이 유전적으로 이어진 것 뿐이네."

마법의 유전성?

"피막이 없어도 날 수 있다는거네. 어서 타게. 밤이 어둡네, 또 뭐가 나올지 무서워서 오래있고 싶지 않아."

"예. 그러죠."

묻고 싶은 게 많기는 했지만 우선은 섬으로 돌아가는 게 먼저였다.

곧 시드로긴의 효과도 끝난다.

여기서 혹시 다른 무리의 와이번과 마주한다면 큰 낭패다.

시드로긴은 중복 복용은 가능하지만 디버프가 활성화 됐을 때는 사용하지 못한다.

아토믹시드의 숙성도 상승으로 시드로긴의 부작용이 다소 감소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 수치는 족쇄를 차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다.

게다가 중복 복용으로 몸 상태도 좋지 않으니 전투는 이제 피하는 게 반드시 옳다.

'불별도로 갈수는 없지.'

어느 정도는 알겠지만 그래도 아직 완전히 신용할 수는 없다.

'기부도로 가자.'

그렇다고 버려두고 올 수도 없으니 기부도로 가서 앞으로의 일정과 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면 되겠지.

나 자체도 정리해야 될 일들이 많으니까.

거미둥지에서 얻었던 아이템이나 스킬북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할 일이 태산이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리벨롬으로 활동하지도 못했네.'

꾸벅, 꾸벅.

감기는 눈을 애써 떠보려 했으나 무리한 탓일까.

뼈만 남은 데스와이번의 등에서 떨어지려는 찰나.

후웅-!

"편히 주무시게. 내 죄 많은 삶에 그대를 만난 신의 뜻이 있겠지."

마법으로 화성을 받아낸 브란스는 뒷짐진 채로 그가 일러준 섬을 향해 날아갔다.

늙은 몸으로나마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많기를 바라며.

숲의 현자, 브란스.

그는 자신의 죄를 다시금 통탄하며 그가 말한 섬으로 향했다.

*

같은시각 불별도.

"왜 안오시지....."

저녁식사가 한참 지났음에도 그는 오지 않았다.

한그릇 남겨둔 화돈 스튜를 테이블에 두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직도 오지 않는다.

남편 기다리는 새색시마냥 턱을 괸 여인은 붉은머리 레아였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단순하게 생각했던 일들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그조차도 해결하지 못할 악마가 나타난 건 아닐까.

돌연 누군가에 기습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연락하지 못하는 어딘가로 갇히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등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레아는 저도 모르게 두 팔을 감쌌다. 그가 위험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언제나 안정감을 줬던 집이 돌연 갇혀 있던 성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님을 알아도 자꾸만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렘린에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 노리개처럼 갖고 놀며 사람을 떨어뜨리는 그들의 놀이.

터지는 소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문만 두드리는 자신의 모습.

"안..... 안돼!"

발작적으로 뛰쳐나간 레아는 문을 열어 젖혔다.

그때였다.

어두운 밤하늘.

달빛을 등진 채로 저 멀리 거대한 무언가가 섬으로 내려 앉았다.

"기부도? 아니 저건..."

거대한 새.

아니, 와이번인가? 하지만 기묘하다. 너무 얇다.

"생명 감지를 시전합니다."

파문처럼 퍼져나간 레아의 감지 스킬이 기부도까지 향한다.

하지만 그때였다.

"누군가에 의해 감지에 실패합니다."

김지가 실패했다.

누군가에 의해서!

"화성님이 아니야."

화성님이 아닌데 저곳에 내려 앉는 무언가가 있다?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사람이 화성님을....."

그랬을지도 모른다.

확신은 할 수 없다.

하지만 눈물은 차오르고 그녀의 손은 자동적으로 무장을 위한다.

갑옷과 무기를 손에 쥔 레아는 곧장 기부도로 향하는 포탈을 찢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

쓰러진 화성을 허공에 둥둥 띄우고 있는 뼈만 남은 와이번을 부리는 사악한 마법사가 달을 등지고 있었다.

악마의 알 [1]

76화.

"이제는! 이제는 제가 당신을 지킬거에요!!"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대사를 읊은 붉은머리 여자.

브란스는 당연히 당황스러웠다.

"귀공과 아는 자인가?"

"흐랴아아아아!!"

푸른 포탈을 열고 달려드는 레아의 모습에 브란스는 당황스러웠다.

카앙-!

데스 와이번을 움직여 레아의 검을 막는다. 하지만 얼마나 속도가 잽싼지 금세 사라져 브란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무슨 사이인줄은 모르겠지만.

'이러다 내가 죽겠군.'

그의 화력에는 못 미치지만.

"루샨테."

그 또한 현자라 불린 마법사.

슬그머니 차오르기 시작한 그의 마나는 온갖 종류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에 충분했다.

뼈를 이용한 마법.

데스 와이번의 뼈 한부분에서 뼈가 급속도로 자라나 레아에게 쏘아졌다.

탓, 탁! 끼기기긱! 쾅!

"윽!"

수개의 뼈 촉수를 삐하고 검으로 빗겨가며 밟아 뛰었지만 한 걸음이 모자라 결국 튕겨져 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그녀를 보는 브란스의 눈이 이채에 번득인다.

'강하군.'

신체능력은 웬만한 기사들보다 강하고 지금, 실시간으로 더 강해지고 있다.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타입.

광전사와 같은 전투방식을 고수하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근데 치유까지.'

상처 입은 부분이 치료된다.

자가치유가 가능한 광전사라... 이건 또 희귀한 네피림을 보았다.

"화성님을 놔주세요!!"

황소마냥 달려들 기세의 그녀를 보고 브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보챌 것 없다. 내 은인을 해할정도로 염치없는 놈도 아니니."

"네? 정말인가요? 그렇게 방심시키고 해치려는 거 아닌가요!"

"아니라니까! 이놈이고 저놈이고 뭔 놈의 의심이 이렇게 많아? 흰숲의 현자라는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데몬시드와 네게 해를 끼칠 의도는 없으니 좀 가만히 좀 있거라!"

그제야 레아도 그가 화성을 해치려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의심의 눈초리로만 바라보았다.

"나참. 꽤 힘든 전투를 치뤄서 잠시 곯아떨어진 것 뿐이야."

둥둥 떠있는 화성을 넘겨주자 그제야 레아는 그를 꼬옥 껴안으며 안심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후웅, 후웅, 후웅.

"음? 뭔 소리야. 우, 우왁!! 쉴드!"

쿵-!! 하늘을 훙, 훙 날던 거대한 도끼 하나가 브란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등골이 오싹한 브란스가 겨우 실드를 펼쳐 거대 도끼를 막아냈다.

'내 주의를 끌고 도끼를 던져서 맞추려고 한건가? 무슨...'

전투 센스가 꽤 상당하다.

게다가 이 도끼.

엄청나게 큰 도끼다.

여자가 다루기엔 심상치 않은 크기의 물건인데 이걸 안 보이는 사이에 하늘 높이로 던질 줄이야.

"갈루란타의 도끼? 흠.... 갈루란타라,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잠깐.

갈루란타?

"설마 오크들의 왕, 갈루란타?"

그린스킨의 대두.

그들의 왕이라 불리는 갈루란타의 도끼라니!! 수백년의 정복 전쟁을 마치가 끝내 모든 오크를 하나로 묶어 왕국까지 건국한 건국왕 아니던가!

"악마의 휘하로 들어간 어리석은 왕이다만 그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지. 오히려 어중간한 고위 악마들보다 강한 편일텐데..."

그 갈루란타의 도끼라니.

브란스의 눈이 붉은머리와 데몬시드로 향했다.

"그런가."

그녀로서는 아직 부족하다.

그러니 아마도 갈루란타를 쓰러뜨린 자는 데몬시드.

'하루에 몇번을 놀라게 하는가.'

진실로 영웅이 아니던가.

말년에 이 자를 만나게 된 것에 브란스는 큰 운명을 느꼈다.

놀라움을 곱씹고 있던 그때.

-캬악!

-캭!!

"음? 이놈들은.... 뭐지?"

생전 처음보는 종류의 놈들.

생긴건 고블린과 흡사하다만 좀더 동글동글하고 날개가 달렸다.

"실드."

쿵! 쾅!!

브란스의 실드는 꽤 강력한 축인데도 불구하고 놈들의 주먹과 손톱이 꽤나 매섭다.

실드가 격하게 흔들렸다.

'놀랍군. 저열하게 태어난 악마 따위가 이정도의 힘을 보유하다니.'

"애들아 아니야! 공격하지마!"

-캭?

-캬캭...?

게다가 악마인데 명령을 듣는다라.

'그렇군. 저들의 탄생에 이 아가씨가 일조한건가.'

묘하게 비슷한 흐름이 느껴졌다.

"일단 환자부터 눕히세. 나머지는 그 이후에 해도 좋지 않겠나?"

"으음, 네."

애지중지 안고 가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난다.

"좋을 때로구나."

흐뭇하게 젊은 남녀를 지켜보던 브란스는 이내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참 기묘한 섬이로군. 이 나무들은... 모두 악마의 분노를 품고 있지 않은가."

분노.

그것은 악마들이 악마로서 존재하는 근본적인 감정이자 힘이다.

그것들이 이섬 전체에 퍼져있었다.

정확하게는 나무.

"데몬시드.....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흰숲의 현자 브란스.

그의 지혜욕은 그를 인류가 삿된 것이라 부르며 말하는 죽음의 마법까지 다다랐던 것.

그것이 데몬트리라 한들, 그의 탐구심은 식지 않았다.

"악마를 씨앗으로 만들어 심었구나. 그래, 그것으로 열매를 맺는다? 옳거니! 그래서 데몬시드인게야!"

열매를 살펴본 브란스의 눈에 놀라운 빛이 깃들었다.

"오오, 알겠다. 건드리지 않으마. 네 주인의 것이라 이거지?"

-캬!

-캬캭!

그렘린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브란스를 경계했다.

"주종의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말을 들을 줄이야. 신기하군."

그도, 이곳도, 이녀석들도.

전부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그를 따라오는 선택이 역시 맞았던 모양이야."

브란스는 수많은 미지를 보며 기분좋게 허허 웃었다.

*

다음날.

뜨끈뜨끈한 바닥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 뜨거운 바닥.

기부도의 초가집 안, 온돌방이다.

'언제부터 잠들었지.'

브란스의 데스 와이번을 타고 날아오던 것, 레아가 날 위해 브란스와 싸우기 시작한 것까지 기억난다.

사실 잠든 척하고 브란스의 의중을 살피려 했는데 레아가 나타나서 솔직히 망했구나 생각한 이후부터 기억이 없는거 보니 잠든 모양이다.

'몸은 별 이상이 없어.'

디버프로 인해 조금 몸이 무겁다는 것 말고는 괜찮다.

왼쪽 팔이 조금 무겁긴한데.

"얘가 왜..."

옆구리로 파고들어 팔을 베고 있는 붉은 머리가 있었다.

잠시 꿈뻑꿈뻑 바라보다 다시 누웠다. 뭔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온돌방에 누우니 기분은 좋았다.

피로가 확 가시는 느낌.

'와이번도 잡았고, 남은건 합성해서 심기만 하면 되겠지.'

독 내성도 모아놧고, 화염 내성도 이제 금방 만들어질테니 남은 건 꾸준하게 먹기만하면 된다.

'빛나는 열매 안 나오겠지.'

그간 나는 종종 보았던 빛나는 열매를 보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봤는데 이제는 슬슬 알거 같다.

'빛나는이 나오지 않게 된 기점이 바로 기부도에서부터지.'

정확하게는 찬양자의 항아리를 얻은 이후부터였다.

찬양자의 항아리.

분명 제물성장을 위한 제물을 담는 항아리로 이제는 없어서는 안될 편리한 물건이지만...

'역시 정이라는 게 그렇게 생각 편한 물건이 아니었다는 거겠지.'

제물이라는 것에 있어서 정이라는 건 결함이 있다는 뜻일 터.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많은 제물을 바쳤는데도 빛나는이 한번도 뜨지 않을 수가 없다.

"역시 싱싱한 제물을 바쳐야..."

"일어나자마자 귀공은 섬뜩한 소리부터 하는 군."

"아, 계셨습니까?"

"늙은이는 아침잠이 없는 편이라 말이지."

"그렇습니까?"

"사실은 어서 이 섬에 대해 귀공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 말이지."

"귀공이라니 낯간지럽습니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자라면 능히 불러줘야하는게지. 난 이게 좋군. 이미 입에도 붙었고."

"그렇다면 뭐."

그건 그렇고.

"섬에 대한거라면 뭘 말입니까?"

"이 섬에 있는 열매들. 나도 한번 먹어보고 싶어서 말일세."

"음....."

"물론 공짜로 달라는 소린 아닐세. 이 섬은, 아니. 귀공의 나무들은 신기한 힘을 내포하고 있네. 분명 원천은 악마의 것을 하지만 열매로 맺힌 이것은 정순함을 품고 있어. 이거야 말로 진정으로 삿된 것을 사라지게 할 이로움이 아니던가!"

또 시작됐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또 혼자 흥분한 거 같았다.

"자네야 말로 진정한 정화를 이루고 있으니 성자라 말할 수 있지 않겠나!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일세! 자네의 힘이라면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군주들을 진정으로 봉인할 수 있네!"

성자라니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디아블로 같은 거 말입니까?"

그러자 신나서 떠들던 브란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그!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말게!! 절대로 담으면 안되네!"

"예? 이름 가지고 말입니까?"

"이름은 그저 부르기 위한 명칭이 아니네. 그들에게 이름이란 존재의 증명이지. 어디서든 자신의 이름이 불러진다면 그들을 나타나네. 앞으로는 절대, 입밖으로 꺼내지말게. 놈들은 제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니."

"... 예."

다소 분위기가 심각해져서 그런지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

그것을 알았는지 브란스도 헛기침하며 턱짓했다.

"밤새 자네를 간호하더군. 옷도 갈아입히고 물수건으로 씻기기까지 하던데... 부인인가?"

"예? 아닙니다."

"연인인가보군, 아이를 낳는다면 흰숲의 현자인 내가 이름을 지어주어주겠네. 옛부터 내게 이름 한번 받으려고 아이를 안고 오는 아낙네들이 얼마나 줄을 섰었는지 자네는 모를거네. 아이의 행복와 밝은 미래를 위해서 얼마나...."

또 자기 혼자 시끄럽게 떠드는 브란스를 보며 아직도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레아를 보았다.

밤새 간호하느라 잠을 못 자서 이렇게 잠들어 있는 거 같았다.

근데 옷도 갈아입히고 씻겼다니.

이불을 들춰 입고 있는 옷을 보니 어느새 새로운 팬티를 입고 있었다.

'봤겠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무튼, 일어났으면 나와보게. 대가는 동등해야 하는 법. 정당한 대가를 건네고 교환하고 싶네."

"악과를 말이지요."

"악과? 악의 과실이란건가? 그렇군. 썩 좋은 이름이야."

벌써부터 진이 빠진다.

이 말 많은 영감탱이를 상대하기가 말이다.

"대가라, 그럼 몇가지 알려주십쇼."

"음, 현자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 보다 현명한 길은 없지. 기탄없이 한번 말해보시게!"

인벤토리를 열어 하나의 물건을 꺼내 보였다.

"이, 이건....."

"거미여왕의 알입니다."

[거미 여왕의 알] (unique)

-거미 여왕 엘리제가 품은 알고치.

"어떻게 쓰는건지는 모르겠어서요."

"..... 이게 남아 있었군."

말많던 브란스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자식처럼 키웠던 엘리제가 남긴 알이라 그런걸까.

"쓰임에는 몇가지가 있네."

"경청하겠습니다."

"첫째는 부화시키는 것일세. 물론 주종의 계약을 맺고 길들여야겠지. 그리한다면 아마 자네에게 훌륭한 거미줄을 보급하지 않을까. 이 섬의 파수꾼으로 써도 훌륭할게야."

섬의 파수꾼은 이미 있다.

"파수꾼은 괜찮습니다."

"그럼 약으로 만들어 먹는다는 선택지도 있겠지. 엘리제는 본래 악마라 규정하기엔 애매한 감이 있었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엘리제는 본래... 혼혈이었거든."

"혼혈이요?"

"그래, 악마와 인간의... 뭐 그런거지."

어느날.

거미를 낳은 산모가 찾아왔다.

그녀는 현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겼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그게 엘리제와 현자의 만남이었다.

악마의 알 [2]

77화.

"그럼 아기였단말입니까?"

"사람도, 거미도 아닌 모습이기는 했지. 하지만 우연찮게 죽은 사람을 주워 먹더니 그리 변했던거네."

본래는 인간의 모습도 일부 남아 있었다는 소리였다. 꽤 소름 돋으면서도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그럼 이것도..."

"그럴 확률이 있겠지. 보고 알겠으나 엘리제가 낳은 거미들은 많았네. 하지만 이것과는 조금 달랐지. 알에 담긴 힘도 그렇고... 아마 군주의 휘하로 들어가 거짓의 힘을 얻은 이후에 품은 알이 아닐까 싶군."

거짓의 군주 벨리알.

그의 휘하로 들어가 얻은 힘으로 낳은 알이라.

"선택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난 이 알을 어찌할 자격도 없으니."

"약으로 만들면 어떤 효과가 있겠습니까?"

"글쎄, 그거야 만들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지."

"위험하지는 않겠습니까?"

"자네의 힘이라면 위험하지는 않겠지. 되도록 빨리 결정하는 게 낫겠군. 조짐이 좋지 않네."

"곧 태어날거란 말입니까."

"아마도 그래 보이는군."

태어나게 두면 섬의 파수꾼으로 쓰며 녀석의 실을 사용할 수 있다.

거미줄은 마법 저항의 능력이 탁월할거라 예상한다며 브란스는 어떤 선택에도 참견하지 않음을 보였다.

다음은 약으로 고아 먹는다는 선택지가 있지만 이건 확실한 게 없었다.

브란스가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거미의 알을 약으로 만들어서 뭐가 좋을지는 예상이 안되기도 했다.

'지금 죽여서 이득이 없다면, 일단 내버려두고 이득이 되는 쪽으로 키우는 게 좋겠지.'

별 쓸모가 없다면 그냥 처리해버려도 충분하다.

어차피 관리하는 섬을 더 늘리려고 하기도 했고, 세번째 섬에 내버려두면 알아서 크지 않을까.

"키우는 게 쓸모가 있어 보이네요."

"그럼 주종의 계약을 치루는 게 나을걸세, 그래야 공격 당하지 않고 귀공을 부모처럼 여길테니."

"어찌하면 됩니까?"

"피 한방울이면 되네, 나머지는 내가 해줄테니."

피 한방울을 알고치에 떨어뜨리자.

"오실라(otgila)운:조(Wynn)이:사(is)에:이화즈(Eoh)."

브란스의 손끝에서 문자들이 그려지고 떨어져 고치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각각의 문자는 강대한 힘이 함축된 마법 같았는데, 신기한건 문자가 고치로 스며들 때마다 내가 떨어뜨린 피가 파문처럼 퍼져 형태를 바꾸어 나갔다는 점이었다.

"다가즈(Daeh)."

그것을 끝으로 브란스의 마법은 끝을 맺었고, 마지막으로 떨어진 문자는 호숫가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파문을 만들고 사라졌다.

"뭘 한겁니까?"

"자네의 피를 매개로 하여 끈끈한 운명의 실을 엮었네. 이 아이는 이제 자네를 부모로 여길게야. 그리고 자네의 피에 강한 이끌림과 영혼의 영향을 받게 되겠지. 내가 키운 아이와는 아예 다를거네. 어떤 힘을 지니고 태어날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게 될지는 무조건적으로 자네의 뜻에 달려 있다 봐도 무방하네."

가만히 얘기를 듣다 떠올렸다.

'일종의 펫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썩 이해하기가 조금 편했다.

"기본적으로 항상 자네를 기다릴 거라네. 파수꾼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심어 두었어. 그리고 강한 생명력을 키울 것이고 혹시 모를 전투에도 일가견이 있게끔 기원했지. 마지막으로 그들 전부를 융화할 수 있도록..."

자신이 걸어둔 마법에 대한 이야기인데 또 말이 길어진다.

"언제 깨어나죠?"

"빠르면 하루, 늦으면 일주일이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이군."

"네?"

찌직. 스르륵.

알이 찢어졌다.

안에는 새하얀 거미가 호기심 많은 붉은 눈으로 힐끔거렸다.

새하얀 몸과 다리.

여러개의 눈.

영락없는 거미였다.

'타란튤라같네.'

"손바닥보다는 조금 큰 거미네요."

"음, 그렇군."

"혼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부모가 그렇다고 자식까지 그럴거라는 보장이 있나. 완전한 거미로 각성했던 아이니, 녀석은 거미로 태어난건지도 모르지."

"하긴, 저도 차라리 이게 낫네요."

반은 인간이고 반은 거미인 모습은 차라리 징그럽다.

그냥 거미인게 낫지.

"이름은 뭔가?"

"이름이요? 지어야하나?"

"지어야지! 이제 자네 자식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겁니까? 브란스가 지어주는 건 어때요."

"난 싫네. 엘리제를 그렇게 만들고 내가 무슨 염치로 이름을 짓겠나."

숫제 죽은 딸의 아이를 보는 듯한 죄책감 많은 눈이다.

어이없게 바라보다 흰 거미의 이름을 짓기로 했다.

"앨리스로 짓죠."

"너무 대충 짓는 거 아닌가?"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는걸요."

거미하면 엘리스지.

엘리제의 자식이니 엘리스.

딱 어울린다.

"네 이름은 이제 엘리스다."

딱히 반응은 없다.

하긴, 거미가 이름 알아듣고 반응할 리는 없을테니까.

"물지는 않겠죠?"

"안 물거네. 엘리제는 지능이 꽤 높았거든. 똑똑한 아이였지. 그만큼 본능에 충실하기도 했지만..."

엘리스는 자신이 찢고 나온 알고치를 뜯어먹고 있었다.

거미도 자기 알집을 먹던가.

"그보다 이제 됐으니 나도 한번 맛보게 해주게!"

"그러죠."

거래는 거래다.

아는 것도 많고, 마법이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은 거 같지만 다양하게 쓸모는 많아 보인다.

뒤통수 칠 성격처럼 보이지도 않고.

물론 하루만에 사람을 판단하는 건 위험한 일이지만 감이 그렇다.

"자요."

"오오, 이것이..."

수중에 들고 있떤 악과.

오크 전사의 키위를 줬다.

"숟가락으로 파먹으면 편한..... 아니, 그새 씹어드셨네."

"맛이 아주 좋군! 아주 달아! 그리고 이 몸을 채우는 힘이라니! 오오! 이건 영구적인 증가로군! 어찌 이런 신비가 이깟 열매 하나에!"

벌써 자기 혼자 맛보고 분석하면서 난리가 났다. 난 키위보단 서펜트의 용과를 먹었다.

"+5 서펜트의 열매를 섭취합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독 내성이 0.32% 상승합니다."

[독 내성 5%]

틈틈히 먹었더니 벌써 독 내성이 5%가 됐다. 이대로 천천히 올리면 금세 100%까지 달성하지 않을까.

그럼 만독불침이 될지도.

물론 이번에 얻은 와이번으로 화염 내성의 열매도 잔뜩 만들어야겠지.

"합성하고..... 제물성장 시킬 때 항구로 가서 시체좀 공수해올까."

다소 수고스럽더라도 그렇게 하는게 빛나는 열매가 나온다면 낫지 않나 싶기도 하다.

'찬양자 항아리가 좋긴 좋은데.'

강화라도 한번 시켜봐야 하나 싶던 그때 엘리스가 제 알집을 다 먹었는지 다리 하나를 들어 내가 먹고 있던 용과를 건들였다.

"먹고 싶은건가."

거미한테 독 내성을 먹으라고 하는건 좀 그런거 같아서 인벤토리에서 키위를 꺼내줬다.

그러자 키위에 이빨을 박고 쪽쪽 빨아먹는데 보고 있으니 꽤 신기했다.

역시 이래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조그만게 지도 살겠다고 뭘 빨아먹는데 그게 참 신기하다.

'상태창 같은 거 없나.'

딱히 뭐가 뜨지는 않는다.

혹시나 싶어 내 상태창을 열어서 살펴보니 새로운게 생겨났다.

[주인 - 데몬시드]

『거짓된 여왕의 딸』

「모략의 거미줄 Lv.1」

「생명력」 – 20/20

「마나」 - 100/100

「능력치」

근력 – 1

민첩 – 1

건강 – 1

마력 - 5

'능력치는 아직 아기니까 그렇다치고, 모략의 거미줄은 또 뭐지. 거짓된 여왕의 딸은 또 뭐고.'

영 껄끄러운 것들만 있다.

거짓의 벨리알의 휘하로 들어가서 낳은 알이라 그런가. 그렇다해도 영 꺼림칙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주인이라고 적혀 있으니 나름 안심은 된다만 아직은 뭐라 판단하기엔 일렀다.

"그래도 몸이 많이 말랑거리네."

능력치도 마력 빼고는 밟으면 터질 정도로 나약하다.

불별도로 데려가서 아무거나 주워먹고 크라고 좀 던져둬야겠다.

"강골을 올려주면 좀 튼튼해지겠지. 얘들은 뼈가 바깥에 있으니까."

이런 절지동물은 외골격이라고 몸 속에 뼈가 없고 바깥에 있는 게 뼈다. 강골을 키워주면 외골격이 튼튼해질테니 밟혀 죽진 않겠지.

"이 악과라는 거 말일세. 아주 신비롭군. 전설의 엘릭서와 비견해도 좋을 정도야. 아주 활기가 넘쳐졌어!"

"그렇습니까?"

악과의 효능에 대해 칭찬하기 시작했는데 또 슬슬 투머치토커가 발동 걸린 모양이다. 한동안 듣다가 결론이 뭔가 하니.

"그래서 말인데, 더 먹어도 되나?"

더 먹고 싶다였다.

"대가가 충분하다면요."

"으음..... 저 적귀놈들도 마음대로 먹는데 에잉, 그래! 뭘 원하나!"

"필요한 사람이 알아서 구해와야죠. 제 나라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는 놈이 알지 파는 놈이 아느냐란 말이다.

"합당한 대가를 치루시면 얼마든지 가져가셔도 됩니다."

솔직히 나한테 열매는 무한이다.

찬양자의 항아리에 담긴 정의 숫자만 해도 여섯자리가 넘어가고 데몬 트리의 수는 이제 셀수 없다.

게다가 이제는 내 능력치를 올려주지 못하는 악과도 있다.

흰숲의 현자 브란스.

그가 뭘 줘도 결국엔 내겐 이득.

하지만 될수 있다면 많은 것들을 얻어내는 게 좋겠지.

"일단 전 할 일이 많아서 자리를 비울테니 천천히 생각해 보십쇼."

브란스의 성격상 몰래 훔쳐먹거나 하지는 않을거다.

현자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

게다가 내 힘을 굉장히 존중했으니 차마 그러지도 못한다.

'항구로가서 시체들이라도 좀 수거해올까.'

불별도로 가서 거미 여왕의 씨앗도 좀 심어보고 데몬 스파이더의 씨들도 심어서 뭐가 나오는지 궁금했다.

히든 던전 보상으로 얻은 스킬북도 익혀봐야하고 와이번 씨들 합성하고 다시 심어야한다.

'거기에 지옥석으로 강화석 사서 강화도 해봐야하고.....'

할일이 태산이다.

"이 사람아! 암만 그래도 필요한 게 뭔지 힌트 정도는 줘야..."

"음... 그럼 이거 봐주시겠습니까."

밑져야 본전.

찬양자의 항아리를 보여줬다.

"윽! 이런 흉물스러운 걸 왜 가지고 있는겐가!?"

"흉물이요? 그냥 제 물뿌리개인데요."

"물 뿌리개? 무슨 미친 소릴... 음욕의 창녀를 추종하는 얼간이들이나 쓰는 항아리가 아닌가! 이런걸 왜 가지고 있는건가? 게다가 안에 정기도 꽤 들어있는 거 같고... 구역질이 다 나올 정도군."

반응이 예상보다 강렬하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정욕이란 거지. 당장 내다버리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악마 숭배자였나?"

"아니요. 꽤 쓸모가 있어서요."

사정을 설명했다.

데몬시드에 성장 시간.

그걸 대폭 줄여줄 제물들.

우연찮게 구한 찬양자의 항아리.

그것을 설명하자 혐오 가득한 시선이 일순 사라졌다.

"그건 꽤 흥미로운 내용이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서 항아리를 빼앗아 갔다.

"내가 고쳐줌세!"

"고치는 걸로 되는 겁니까?"

"고친다는 뜻은 정정할 필요가 있구만. 내게 맡기게, 그 추잡한 걸 새로 탈바꿈 해줄터이니."

흰숲의 현자 브란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마구(魔具) 개조. 그게 내 특기네."

더 대단한 현자였다.

마나번

78화.

마구 개조.

마도구라 불리는 것들로 마법적인 개념이 깃들어 있는 물건들을 뜻한다. 그리고 흰숲의 현자 브란스는 이런 것들을 원리를 분석하고 이해하며 개량까지 가능한 존재였다.

"누구도 할 수 없지. 그 위대한 소서리스의 어머니조차 어려울걸세."

"소서리스의 어머니?"

"모르나? 마법을 창시한 소서리스의 어머니라 불리는 존재는 유명한데. 하긴 귀공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지. 궁금하나?"

"궁금합니다."

스킬북을 살 때 본적이 있다.

[브램블리-스킬북] (magic)

-골드캐넌의 골짜기 아래 무덤에 유폐된 모든 소서리스들의 어머니. 그녀가 생전에 적은 책.

"골드캐넌의 골짜기 아래 무덤에 유폐된 모든 소서리스의 어머니라고."

"뭐야, 알고 있구만. 골드캐넌, 풍요로운 골짜기에 유폐된 참혹한 이야기이지. 근데 공짜로 들을 셈인가?"

"..."

난 인벤토리에서 해골기사의 열매.

일명 악마의 오디라 불리는 악과를 브란스에게 건넸다.

"오오, 이건 또.... 세상에나! 근골을 단단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원기까지 끌어 올려 주는군! 이런 비약이나 다를 바 없는 걸 만들어내는건가!? 자넨 정말이지 신이나 다름 없군!!"

"됐고, 말이나 해주십쇼. 항아리를 어떻게 개량하겠다는건지, 그리고 소서리스의 어머니에 대한 일화들도."

"수지가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난 오디 하나는 더 던졌다.

물른 합성하지 않은 녀석이었다.

일반적인 오디는 나한테 그렇게 값진 물건도 아니었으니까.

"하나 더 없나? 이번엔 다른걸로."

"까다로우시네요.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소서리스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다쳐도 항아리를 개선하는 점은 쉽지 않네. 나야 현자이니 어렵지 않게 하겠으나 본래라면 천만금을 가져다줘도 어렵지!"

"흠....."

확실히. 내가 아는 선에서도 무기를 강화할 수는 있어도 개량을 할 수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다.

아직 컨텐츠가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선 없는 일.

게다가 항아리의 개량은 내게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걸 드리죠 그럼."

"이건... 요상하게 생겼군. 이것도 열매인가?"

"예. 바나나라는 건데 드셔보시죠."

추종자를 심어 얻은 바나나.

겉보기엔 썩 좋지 않지만 맛은 탁월하다. 게다가 밤눈을 밝혀주는 야간시야의 상승을 이뤄주는 녀석이니 브란스의 탐구심을 충족시켜주겠지.

"오! 세상에! 이건 또 놀랍군!!"

허겁지겁 바나나를 먹어본 브란스는 세상에 이런 열매가 있었느냐며 놀라워했다. 게다가 약간이나마 상승한 눈의 변화를 명확하게 알아차렸다.

"그럼 얘기해주시죠."

"일단, 항아리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하지. 이건 바포메트의 힘이 깃든 이를테면 음욕의 항아리네."

"음욕?"

"그래, 바포메트는 악마들 중에서도 꽤 급이 높은 고악마다."

"고마다."

"고마? 고위 악마라는 겁니까?"

"그렇지."

고마, 바포메트.

그러고보니 옛부터 흑 염소나 산양은 정력이 남달라 음욕을 상징하는 동물이라 했던 걸 들은 기억이 있다.

"근데 그래서 할 수 있는겁니까?"

"결과만 말하면 할 수 있지. 하지만 재료가 필요하네."

"재료요....."

"자네는 사람에게 정욕만을 빼내 이 안에 담아서 사용하고 있었겠지."

"정확하게는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게 그거지. 아무튼 자네가 원하는 바는 이거잖나."

브란스는 막대기로 바닥에 글자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었는데 이상하게 얼추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정욕만 빼내던 부분을, 사람 전체로 만들기 위한거군요."

"그렇지! 허나 그러기 위해서는 마법 각인이 필요하지. 마법 각인이야 내가 해줄 수 있네. 시체를 그 상태 그대로 보존하며 봉인하는 마법은 꽤 다양하게 있으니까. 하지만 그걸 각인 시키고 변환하는 술식에서 필요한 게 몇개 있다네."

"뭡니까."

"고르그의 눈물, 그리고 타락한 심장이 필요하다네."

고르그의 눈물과 타락한 심장.

"다른건 내가 지닌 게 있으니 상관없지만 그 두개는 자네가 구해와야만 하네."

"... 어디서 구하는데요."

"고르그의 눈물이야 고르그를 잡다보면 얻을 것이고, 타락한 심장도 타락한 악마의 심장을 파다보면 우연찮게 나오는 것이니 열심히 구해봐야지. 아니면 이 거래소 같은 것에서 한번 찾아보는 건 어떤가?"

"네피림 거래소를 말하는겁니까?"

"맞네. 내가 있던 세상에는 이런 게 없었는데 신기하군. 별게 다 있어!"

혹시 몰라 거래소에 검색해봤지만 브란스가 말하는 건 없었다.

역시 잘 풀리나 했더니 세상사 쉽게 되는 일은 없다. 고르그의 눈물과 타락한 심장이라니, 그런 걸 대관절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저 있어요!"

그때였다.

돌연 초가집에서 나온 레아가 외쳤다.

"있다고?"

"아니, 지금 있는 건 아니지만 어디에서 파는 지 알아요!"

"어디?"

"콜로세움이랑 카오스 상점이요!"

"어?"

[콜로세움 상점]

-미확인 스킬북 (5550) 품절

-알레이슈 (1000)

-고르그의 눈물 (2500)

-그레미나티 (10000)

[카오스 상점]

[마력의 엘릭서 (3000)]

[근력의 엘릭서 (1000)]

[민첩의 엘릭서 (1000)]

[건강의 엘릭서 (1000)]

[성역 - (1000)] 품절

[타락한 심장 (1000)]

그러고보니 잊고 있었다.

콜로세움에는 수많은 물건들을 판매했고 카오스 상점 또한 만만치 않게 잡다한 걸 많이 팔았다.

'설마하니 그래도 팔고 있을줄이야.'

가격도 적당하다.

고르그의 눈물은 지옥석 2500개라 좀 비쌌지만 타락한 심장은 썩 문제 없이 구매할 수 있었다.

데몬시드를 위해서다.

이 정도는 플렉스해야지.

이번에 와이번 오십마리 정도 잡아서 돈도 꽤 모였다.

「소지금 26870 금화」

나만의 상점에서 구매해야할 스킬북 때문에 빠듯하기는 하다만 타락한 심장 하나 살 돈은 있다.

"아, 화성님! 여기 판매금이요!"

"응? 판매금?"

"네! 점심이랑 저녁 장사한거요! 물론! 제 노동값은 뺀 금액이에요!"

"안 그래도 되는데..."

"헉! 하지만 음식에 쓴 악과는 모두 화성님이 소유인걸요! 이게 맞아요."

얼마가 됐든 고맙다.

한접시에 100금에 판매 했었으니 뭐 많아봤자 일만금 정도 아닐까.

했으나 그건 내가 레아를 얕잡아 본 결과였다.

"75,000금에서 3할 정도 빼고 나머지 52,500금이에요!"

「소지금 79370 금화」

'아니...'

고작 이틀만에 아무것도 안 했는데 5만금이 손에 들어왔다.

이건 꿈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이게 바로 자동사냥..."

"네?"

"아니야. 어....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는거야?"

"그럼요! 제 요리는 화성님이 없으면 만들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사주지도 않았을테니까요."

그건 그렇다.

사람들은 스펙업을 위해 레아의 요리를 울며 겨자먹기로 먹었으니까.

"일단, 고맙게 받을게. 그래도 30퍼센트만 가져도 되는거야?"

"넵! 저도 재밌고, 이정도만 받아도 저는 충분해요! 3할 정도라고 해도 2만금이 넘는다고요?"

하긴, 고작 이틀동안 2만금.

꽤 놀라운 액수다.

'이틀에 거의 8만금을 번건가. 이게 한달을 채우면...'

하루에 사만금이라고 치고 열흘이면 사십만금. 30일이면 백이십만금이다.

120만 금화.

계산해보고 제일 먼저 생각한 건 아마추어 자영업자 사장 같은 생각이었다.

'식당 평수를 좀 늘릴까.'

이만큼이나 잘 팔린다면 좁아터진 대장간 옆에서 장사할게 아니라 좀더 넓은 곳에서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었다.

뉘우치는 대장간의 배경은 카타콤.

벽이라도 무너뜨려서 장사를 해야하나 심히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장사하는거야?"

"그럼요! 손님들이 제 음식을 기다리고 계실거에요!"

어느새 식당 주인의 자부심을 가득 품은 레아는 점심 장사를 준비해야겠다며 불별도로 넘어가려 했다.

"아, 레아. 도움될까 싶어서 고기 가져왔어."

"헉! 정말요? 와이번 사냥하시는 것만해도 힘드셨을텐데 절 위해서..."

"식재료 구하는걸로 고민이었잖아."

"너무 선물이에요!"

"응? 선물이긴하지."

"화성님이 절 생각해주신 마음이 제겐 선물이라는 뜻이었어요. 헤헤."

"어, 어... 좋다니 다행이네."

그렇게 레아는 불별도로 가버렸고.

상황을 대충 가늠하던 브란스는 피식 코웃음을 흘렸다.

"장사에 보탬이 되서 돈을 벌어오라는 뜻을 저리 받아들일 줄이야. 머리가 꽃밭이구먼."

"거, 말씀을 해도 그렇게...."

"크흠. 어쨌거나 잘 됐군. 자네 항아리는 내 금세 고쳐줌세. 하루 이틀은 걸릴테니 할거 하며 기다리세."

"소서리스 이야기는요?"

"일이 끝나면 하지. 뭐 그리 급한 이야기라고."

"그렇긴하죠."

나도 할일이 없는건 아니다.

"일기장을 획득합니다."

"거미 여왕의 실뭉치를 획득합니다."

"스킬북'레그릿지'를 획득합니다."

"거미 여왕의 알을 획득합니다."

히든 던전.

거미여왕의 둥지에서 얻은 물건들은 총 네가지.

일기장이야 브란스의 것이었고 읽어봤으니 패스.

거미 여왕의 알도 부화시켜서 엘리스가 태어났다.

지금은 툭치면 죽을 정도로 약하니까 기부도 냉동고에 있는 열매들을 꺼내서 먹이다보면 강해지겠지.

자꾸 내 어깨에 올라가서 과즙을 빨아먹는게 썩 귀엽긴 하다.

'그리고.....'

「거미 여왕의 실뭉치」 (magic)

-거미 여왕 엘리제의 실뭉치.

〈강한 마법 저항력〉

〈강한 튼튼함〉

거미여왕의 실뭉치다.

거미줄이 꼬아져서 만들어진 실뭉치인데 딱히 어디에 쓰일진 모르겠다.

꼬아서 밧줄로 만드는 것 정도 말고는 딱히 쓰임이 생각나지 않는다.

특성에는 튼튼함과 마법 저항력이 있으니 의복이나 보호구로 만들어서 쓰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관련 기프트를 가진 사람을 한번 찾아봐야하려나."

기프트의 형태는 다양하다.

만트라 놈은 자신이 만능형이라고 말했었지만 난 기프트가 그렇게 딱딱 형태에 맞춰져 있다고 보지 않는다.

'내가 만능형이라기엔...'

다소 손색이 있다.

데몬시드는 기프트적인 능력만 본다면 아무래도 생산직이다. 그러니 생산형이 붙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찾아보면 실을 옷으로 만들 수 있는 기프트도 있기야 하겠지."

아마존한테 찾아봐달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다음은.

스킬북 레그릿지.

『레그릿지-스킬북』 (magic)

-벽에 쉽게 붙을 수 있다.

(소모:10)

거미여왕한테 나온 스킬북이다보니 관련 능력이 나왔다.

"스킬북'레그릿지'를 익히겠습니까."

예스.

익혀서 나쁠 게 없다.

카이삭스의 표식과 플라이를 사용해서 자주 쓰이진 않겠지만 '히든던전'은 대부분 동굴이다.

그렇다면 긴박한 전투중에 쓰이는 일이 있겠지.

"스킬북'레그릿지'를 배웠습니다."

바로 사용해보도록 하자.

내 키보다 더 높은 데몬트리.

엘리트 데몬.

발빠른 서펜트 나무는 다른 데몬트리들보다 꽤 크다.

오랜만에 찾아온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발부터 붙여보자.

"레그릿지."

척.

"오."

바로 붙는다.

이게 뭐라고 해야할까.

신발 부근에 보이지 않는 아주 미세한 수만개의 마력이 돋아나 있다고 해야하나. 거미가 벽에 붙는 방식 그대로를 스킬로 쓸 수 있게 해줬다.

하늘로 뻗어있는 나무를 저벅저벅 걸어가 금세 꼭대기까지 닿았다.

내 어깨에 달라붙어 있던 엘리스가 이 나무가 마음에 들었는지 뛰어내려 나뭇잎에 안착했다.

거미줄을 만드려는 모양인지 꼼지락 거리는 게 꽤 귀엽다.

"남은 게..."

와이번의 씨앗 합성.

그것으로 화염내성을 기를 일이다.

거기에 거미여왕 엘리제의 씨앗.

'마나번이라...'

놈은 마나를 태웠다.

만일 이걸 나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수식언의 레벨을 올려서 겨우 100을 태우는 게 아니라 1000을 태울 수 있게 된다면?

'개사기지.'

북에서 내려온 똥 [1]

79화.

마나번.

상대방의 마나를 태울 수 있는 권능이란 놀랍도록 대단하다.

네피림들에게 마나란 강력한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자원.

그 자원의 고갈은 네피림을 무능력자로 만드는 일이다.

총을 든 군병이 무서운 이유는 탄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에 탄환이 없다면 과연 무서울까?

총알 없는 총은 그저 금속 덩어리일 뿐, 하등 무서울 게 없다.

마나번은 악마들의 총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점에 있다.

이는 대단한 이점이다.

"물론 항아리를 브란스가 고치고 있는 중이라 지금은 못하겠지만."

하지만 찬양자의 항아리는 이틀 내로 개선될거다. 그럼 금세라도 마나번의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되겠지.

안 그래도 다음으로 익힐 마땅한 수식언이 없었던 참에 잘 됐다.

이번 기회에 가능하냐 아니냐로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겠지.

"하루 이틀이라..."

그럼 그 기간동안 뭘 해야할까.

그간 마음의 짐덩이 였던 와이번 둥지를 소탕하는 것도 했다.

히든 던전도 다녀와서 굉장한 이득을 봤다. 금전적인 부분이야 가만히 있어도 레아가 벌어다 준다.

100만금이나 필요한 나만의 상점 스킬북을 구매하는 것도 시간문제.

"와이번 씨앗은 합성만 해놓고... 항아리 고쳐지면 심으면 되겠고. 딱히 뭐 해야할 거 있던가."

딱히 없다.

리벨롬이 되어 대장간에 잠깐 출근하는 거 말고는 말이다.

'그때까지 딱히 할것도 없고 어제 와이번 둥지를 청소하느라 디버프도 아직 안 풀렸으니 쉴까.'

기부도는 항상 레아한테 맡겨두고 있었으니 냉동고를 한번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기부도는 불별도와 달리 아직도 넓은 평수의 땅을 가지고 있다.

할일 없는 그렘린들이 이쪽 나무들을 전부 벌목하고 있었는데 이참에 자리도 확인하고 구역들을 나눠놓고 농사 계획을 세워둬야겠다.

"엘리스는 저기가 마음에 들었나."

서펜트 나무 위에 올라가서는 아직까지도 내려오지 않는다.

딴에는 거미집을 짓는 거 같긴한데 뭐 상관은 없겠지.

기부도 관련해서 농사 계획을 짜고 있으니 시간은 훅훅 지나간다.

오랜만에 냉동고를 확인하니 쌓여 있는 악과들도 몇 상자가 차곡차곡 들어 있어서 그 수가 꽤 된다.

"냉동고를 좀 넓혀야겠는데."

만들 때 적당히 만들었더니 이제는 평수가 조금 좁아 보였다.

애초에 섬이기도해서 깊게 파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된 김에 깊이는 아니더라도 좀 넓게 더 만들어야겠다.

"브란스한테 도와달라고하면 되겠지. 여러 마법들도 많이 알고 있으니까 냉동고 쯤이야 껌이겠지."

대충 확인할 것들만 확인하고 기부도를 둘러보던 중.

돌연 알람이 울렸다.

"무슨 일 있나."

아마존에게서 쪽지가 왔다.

[엘프님에게로부터 메시지]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뜬금없다면 뜬금없다.

무슨 일인가 싶어 왜 그러냐 하자.

[엘프님에게로부터 메시지]

-북한 관련해서 정부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정부?

"아직도 정부가 돌아가고 있던가."

저번에 카오스 게이트에서 어쩌고 저쩌고 하던 게 기억나긴 한다.

생각해보니 아마존은 정부와 연락하고 있었지.

"근데 애초에 북한은 카오스 게이트 막는 거 실패해서 망하지 않았나."

의문을 품고 묻자 당연하다는 듯 답변이 돌아왔다.

[엘프님에게로부터 메시지]

-아시다시피 북한은 망했죠. 그런데 그쪽을 점령한 악마들이 점점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고 해요. 안타깝게도 저희에겐 나쁜 소식이죠.

그러니까 한마디로.

"북한을 점령한 악마 군대가 점점 남하하고 있다는 말이네."

썩 기분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엘프님에게로부터 메시지]

-그나마 희소식은 북한을 점령한 악마. 정부에서는 챔피언의 상위종인 엘더라고 칭하는 악마는 자신의 지역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쫄따구들만 움직인다는거네."

문제는 그 쫄따구가 챔피언 데몬이 이끄는 군대라는 게 문제지만.

[엘프님에게로부터 메시지]

-벌써 중국과 러시아로 뻗어나갔음을 확인했어요. 그들이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북한의 엘더 데몬 이름은 푸르푸르. 그녀의 휘하에는 날개를 지닌 푸른 사슴들이라고 해요. 비행 속도가 빠르지는 않지만 푸르푸르의 군단들은 전부 전격을 사용하는 터라 상대하기가 까다롭다고....

푸르푸르.

나도 모르게 반장갑을 봤다.

[푸르푸르의 반장갑] (magic)

방어력 +5

-번개와 태풍의 악마, 푸르푸르가 어린 시절 애용했던 반장갑. 그녀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볼트 1일 2회)

내구력 +10% 증가.

번개 내성 +5% 증가.

내가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는 극초반에 얻었던 반장갑이다.

초반의 데몬시드는 지금처럼 강력하지도 않았고 공격 기술도 없어서 반장갑에 있던 볼트 마법이 굉장히 도움이 됐던 걸로 기억한다.

게다가 푸르푸르의 은반지.

[푸르푸르의 은반지]

-푸르푸르가 애용하던 은반지. 그녀의 기운이 은밀하게 깃들어 있다.

번개 내성 +5%

(에너지 쉴드 1일 1회)

이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반장갑과는 달리 은반지는 아직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반지에 각인된 에너지 쉴드는 내 하나밖에 없는 보호 마법이니까.

[엘프님에게로부터 메시지]

-날개 달린 사슴들은 전격을 뿌리면서 싸우는데 상대하기가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아마 그럴거다.

날개가 있다는 건 비교적 민첩하다 뜻이고 공격 기술로 번개를 떨어뜨린다는 건 주로 원거리 공격을 한다는 거나 다름 없으니까.

일반적인 네피림들이라면 상당히 애를 먹을만한 상대다.

'원거리 기술이 있어도 날개 때문에 잘 맞지도 않을테고, 그렇다고 근거리 기술을 맞아줄 놈들도 아닐테지.'

북한이 왜 그렇게 무너졌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현 시점에서 날아다니면서 번개 뿅뿅 쏘는 놈들을 이기기란 네피림들의 전력이 역부족이다.

[엘프님에게로부터 메시지]

-저희 쪽에서는 와이번들이 철원에 간간히 보이면서 푸리린들을 견제했다고 하는데.... 어제 이후로 와이번들이 사라져서 놈들이 철원을 지나 남하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어?"

와이번?

와이번들이 푸리린을 견제?

그러고보니 근래 와이번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더니 그런 사연이 있던거였다.

"어제도 마지막에 와이번 수십마리가 헐레벌떡 달려오기는 했었지."

뇌격으로 전부 죽여버렸는데 그놈들이 북에서 남침하는 사슴들을 견제하고 있던 거였다.

"그건 또 몰랐는데..."

그러니까 푸리린들을 견제하던 와이번 세력이 없어져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는 얘기.

결과적으로 푸리린들 숨통을 트여주게 된 일을 내가 했다는 뜻이었다.

[엘프님에게로부터 메시지]

-푸리린들은 Lv.6 라고 하네요. 혹시 괜찮으시면 철원으로 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만약 시간 되신다면 광산이나 대장간에서 좌표가 적인 포탈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데몬시드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음..... 일단 가볼까."

새로운 악마이기도하고, 내가 만들어낸 일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저놈들을 가만히 내버려뒀다가는 죽어나갈 사람들도 많을테고 일단 한번 보는 것 정도는 해야겠지.

"푸리린 심으면 뭐 나오는지도 궁금하기는 하고... 가볼까."

나로서는 썩 나쁘지 않은 상대다.

공중전이 까다롭지도 않고 번개 내성도 꽤 있는 편이라 놈들의 공격이 그렇게 위협적이지도 않다.

내 번개 내성만 보더라도 자그마치 25퍼센트에 육박한다.

놈들의 전격은 맞을 생각도 없지만 맞아도 참을만 할 정도겠지.

"번개 쓰는 사슴이라니까 꽤 귀엽지 않으려나."

*

콰앙!!

쿠웅! 우르르르르!

꽈광-!!

"난리도 아니군요."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는 아마존이 무너진 건물 뒤편에 엄폐한 채, 활시위를 당겼다.

"사슴이 저렇게 강해도 되는거야?"

"사슴이 아니라 고라니 아냐? 왜 저렇게 미친놈처럼 울어?"

"송곳니도 있는 걸 보니 고라니일지도 모르겠군."

그녀의 곁에서 거대한 땅울림을 견뎌내고 있는 자들은 11위 글로리안.

새의 날개를 등에 지니고 있는 사내와 18위 드루이드. 9위 혼나비였다.

"그나마 집단행동은 안 해서 좋긴합니다만, 강력하네요."

이질적인 푸른 털.

머리에 돋아난 뿔로 건물들을 모조리 들이박으며 박살내는 푸리린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그들의 등에 달린 날개와 함께 자리한 번개들이 근접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다.

"완전 사기 아냐? 원거리 기술도 강하고, 날개 달려서 비행도 가능해~ 신체능력도 엄청 쎄잖아."

손가락으로 나비를 만들어내고 있는 그녀는 9위 혼나비. 혼으로 나비를 만들어 시각과 청각을 공유하는 네피림이다. 정찰 능력이 탁월하고 나비를 이용한 공격 기술도 강력하기 때문에 아마존과 파티를 맺고 있었다.

"이래서 경기 북부에 살면 안됐는데 이게 뭔 개고생이람. 하여튼 북한 새끼들은 도움이 안되요. 도움이!"

"북에서 똥이 내려왔네."

"조용히 해라. 나비."

"당신도 도움 안돼. 날개만 있으면 뭐 어쩔건데. 푸리린 하나를 상대로 유효타 하나 못 날리잖아."

"닥쳐...!"

으르렁거리는 글로리안과 혼나비.

그 둘을 중재하는 건 아마존이 아닌 드루이드였다.

"진정합시다."

-냐앙~

드루이드와 함께 그의 등에 매달려 있는 고양이가 말했다.

"당신도 똑같애. 고양이가 정전기를 싫어해서 안될 거 같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저희 미미가 싫다는데 어떡해요. 드루이드이긴 하지만 전 미미 원툴인 걸요."

"진짜 도움 안돼. 아마존!"

활시위를 당기던 아마존이 혼나비를 바라보았다.

연갈색 장발과 몸에 짝 달라붙는 탱크탑과 펑퍼짐한 점퍼의 인상착의.

누가봐도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게 한껏 치장한 모습이다.

게다가 화룡점정으로 조금 연하다지만 색이 들어가 있는 선글라스.

저 사람을 보고 누가 랭킹 9위의 랭커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랭킹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게 지금의 멸망기가 말해주는 하나의 진실이기도 하다.

"일단 저새끼 잡는다."

"기대하겠습니다."

"야! 참새! 당장 튀어나가!"

"제기랄!"

"저도 보조하겠습니다!"

글로리안이 날개를 펼쳤다.

촤악! 펄럭이는 거대한 날개가 아파트 경비실을 부수고 있는 푸리린의 고개를 돌린다.

"글로메치!"

글로리안의 날개가 옅게 빛나더니 깃털들을 쏘아낸다.

하나하나가 마력이 담긴 깃털의 파괴력은 현대의 화력병기를 뛰어 넘는다.

-크르르!

하지만 푸리린에 한해서는 그마저도 애들 장난일 뿐.

쿵-!

발 한번 구르자 푸른 번개가 놈의 주변에 빗발쳐 깃털이 싸그리 씻겨 나갔다.

"미미합체!"

-냥!

드루이드는 자신의 애묘와 하나되어 고양이와 비슷한 모습을 취했다.

행동과 성격도 고양이처럼 변하고 눈 또한 그리 변했지만 사슴뿔을 내세운 채 돌진하는 푸리린을 상대로는 무엇 하나 하지 못했다.

"야! 할 만큼 했다고!!"

글로리안과 드루이드가 푸리린의 주의를 끌고 있을 때.

양팔을 교차시키고 있던 혼나비가 스르륵 눈을 떴다.

"만천접봉."

화아아악-!!

그녀의 등뒤로 수만마리의 나비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날아오른 나비떼들은 일제히 푸리린에게 쇄도했다.

"죽여버려!"

흉악한 말을 해대는 입과는 달리 혼나비의 손은 꽉 쥐어져 있었다.

그러자 돌연 나비들이 소용돌이치듯 회전하며 푸리린을 가뒀다.

"오!!"

"아직이야."

쿵-!

콰지지지지!!

푸리린의 번개가 치솟아 올랐다.

"한번 당하지 두번 당할 거 같아!?"

푸리린의 몸에서 푸른 번개가 치솟자 압박하던 나비들을 산개시킨다.

그리고는 곧장 달려나가 아마존을 향해 소리쳤다.

"준비해!"

-삐이이이!!

화가난듯 소리친 푸리린이 혼나비를 향해 뛰어들었다.

번개 뿌리며 달려나가는 푸리린의 속도는 그야말로 섬광.

일직선상으로 돌진하는 푸리린의 돌격은 기차와 정면충돌하는 것과 마찬가지. 터프하기로는 유명한 바바리안조차 저거 한방에 리타이어 됐다하니 말 다한셈.

'멍청한 여자는 아니니까요.'

생각이 있으니까 나갔을 것이다.

그때였다.

번개가 치닿고 푸리린의 섬광이 혼나비를 박으려고하는 순간.

일순, 나비들이 그녀의 앞에 모여들었다.

"일신호접."

콰아아아앙-!!

후두두둑! 떨어져 내리는 나비들과 함께 혼나비가 소리쳤다.

"혼호접창."

그녀의 손에서 나비들이 모여 하나의 창으로 변했다.

한손으론 나비를 방패로, 한손으로는 창을 만들어 찌르려는 것이었다.

어지간한 배짱이 없으면 감히 할 수 없는 짓.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푸리린의 움직임을 막은 천재일우의 기회.

하지만 혼나비의 창이 푸리린에게 꽂히는 일은 없었다.

자그마치 Lv.6의 악마.

그 정도의 두뇌는 푸리린에게도 있었다. 낌새를 눈치채고 섬광을 풀고 날개를 펄럭이려는 찰나.

"아마존!!"

혼나비가 소리치고.

아마존이 활시위를 놓았다.

"익스플로젼 애로우."

어느새 건물 옥상에 올라가 활시위를 놓은 아마존의 손끝. 화살 세대가 푸리린을 향해 날아갔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광속.

바람을 탄 화살의 속도는 푸리린이 눈치채도 한참 늦었다.

생명의 위기를 느낀 탓일까.

나비들이 붙잡고 있음에도 푸리린은 몸을 비틀었고 화살 두대를 피해낼 수 있었지만 한대는 맞았다.

푹!

다리에 맞은 화살은 그대로 점멸하며 강력한 폭발을 일어내며 터졌다.

콰아아앙-!!

"푸리린을 처치하셨습니다!"

"1200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1200 금화를 획득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나오자마자 혼나비를 비롯한 랭커들이 털썩 주저 앉아 거친 숨을 내쉬었다.

"경험치 ㅈ도 안 주면서 더럽게 쌔네. 북한이 망한 이유가 있었어."

"그래도, 좋았습니다. 혼나비."

어느새 내려온 아마존이 혼나비를 향해 손을 건넸다.

"엉, 너도 좋았어. 아마존. 다른 사내 놈들은 무쓸모지만."

"그래도 돈은 많이 주네."

탓. 아마존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그때.

"어, 저기!!"

"씨발."

소란을 듣고 몰려왔는지 미친 번개 고라니 떼들이 아마존들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고작 하나 잡는데 꽤 많은 심력을 소모했는데 족히 스무마리 정도라니.

"일단 도망치자! 어떻게 상대해 저걸! 개죽음이야!"

혼나비가 아연실색해 뛰쳐나가려고 한 순간.

턱.

아마존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미쳤어? 저걸 싸우자고?"

아마존은 고개를 저었다.

"싸울 필요는 없을 거 같네요."

이상하게 침착한 태도.

혼나비는 아마존이 향하는 시선을 그대로 따라갔다.

그러자.

"어?"

어느새 하늘에는.

적창을 손에 쥔 채 붉은 스파크를 튀기고 있는 사내. 일명 뇌창이라 불리는 자가 온 하늘을 붉은 벼락으로 물들이려 하고 있었다.

북에서 내려온 똥 [2]

80화.

저 멀리서 날아드는 푸른 사슴들.

몸 주변엔 푸른 뇌기와 구슬들을 가득 단채 기세등등한 모습은 내가 아닌 자들이라면 겁에 질려 도망갔을 정도로 위협적인 모습.

하지만.

"카탈린의 뇌격을 사용합니다."

꽈과과광-!!

그 위협이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푸리린을 처치하셨습니다!"

"1200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1200 금화를 획득합니다."

"푸리린을 처치하셨습니다!"

"푸리린을 처치하셨습니다!"

"푸리린을 처치하셨습니다!"

"푸리린을 처치하셨습니다!"

.

.

.

시드로긴으로 마력이 높아지지 않아서인지 한번으로는 처리하지 못했다.

그렇다해도 고민할 게 있을까.

한번으로 안되면 두번, 세번으로 모조리 처리하면 될 일이다.

"카탈린의 뇌격을 사용합니다."

"카탈린의 뇌격을 사용합니다."

두번 더 사용하자 그제서야 하늘을 덮었던 푸리린들이 말살됐다.

확실히 Lv.6이라 그런지 강하다.

하지만 와이번보다는 아니다.

와이번과 자주 싸워봤기에 안다.

와이번인 푸리린보다 강력한 육체능력과 비행 능력을 바탕으로 한다.

시드로긴을 쓰지 않으면 한 두마리 상대하는 것도 애먹을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푸리린은?

'레벨 차이가 좀 있긴하네.'

그게 아마 푸리린들의 레벨이 7이 아닌 6인 이유일거다.

게다가 무엇보다 금화.

돈을 엄청나게 많이 준다.

경험치와 금화의 비율이 같다니.

꽤 흥미롭다.

"사슴이라길래 귀여울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네. 무슨 사슴들이 근육이 이렇게 우락부락해. 더럽게 무섭네."

뇌격에 몰살당한 푸리린들을 데몬시드로 만들며 주변을 살펴보자 이놈들에 휩쓸린 인명피해가 있었다.

아직도 민간인과 다름 없는 네피림들은 있었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상자들이 꽤 있었다.

"부디 좋은 곳 가시길."

명복을 빌고 품에서 이번에 브란스가 새롭게 개량한 항아리를 꺼냈다.

『은정의 물뿌리개』 (unique)

-검은 산양의 정욕을 바치는 항아리였으나 흰숲의 현자가 은인을 위해 개량한 은정의 물뿌리개가 되었다.

〈은정:0〉

브란스가 개량한 은정의 항아리.

은정이란, 말 그대로 은혜로운 마음을 뜻하지만 브란스는 아마도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거라고 했다.

명복을 빈 시체에 물뿌리개를 가져가자 시체의 몸이 하나의 빛으로 변해 물뿌리개로 스며들었다.

"오."

찬양자의 항아리일 때는 시체는 그대로두고 빛만 스며들었는데 이제는 원했던대로 되었다.

"그래도 정욕이 완전히 다 사라져버린건 좀 뼈 아프네."

들어있던 것만 수십만이었는데 그걸로 악과들이나 전부 수확하고 고쳐달라 했으면 그게 다 얼마야.

'어쩔 수 없지.'

담아있던 정이 사라질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내 탓이다.

아쉽지만 다시 모으면 된다.

이제는 단순히 제물성장만이 아니라 빛나는 이나 찬란한 열매도 맺힐 가능성이 다시 생긴거나 다름 없으니.

"좋아. 시원시원하게 해볼까."

하지만 당연하게도 방해가 들어왔다.

"뇌창! 오셨군요."

"아, 오랜만이네."

아마존이다.

곁에는 여자 하나와 사내 둘이 있었는데 안면이 있는 자들이었다.

랭커들은 카오스에서 지나가다 몇번 보기도 했었으니까.

"카오스 때 보고 처음 뵙네요."

덩치 큰 사내.

서글서글한 눈매에 인자한 풍채를 지니며 고양이 키우는 드루이드.

키우는 고양이를 괴수처럼 크기를 부풀리거나 합체해서 싸우는 드루이드인데 꽤 강했던 걸로 기억한다.

"칫."

그리고 날개 달린 쪽은 글로리안.

저번에 나한테 날개 한번 찔려서 아직도 콜로세움 도전장을 나한테 전부 소비하고 있는 머저리다.

질꺼 뻔히 알면서 계속 도전하는 걸 보면 학습 능력이 없는건지 그때 맞았던게 굴욕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갈루란타랑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뒷담화 비슷하게 까불면 당연히 처맞아야지.'

그리고 마지막은.

"혼나비야."

"그래."

랭킹 9위 혼나비.

여기까지 오면서 봤다.

푸리린 하나 잡으면서 온갖 화려한 기술들을 다 쓰던 녀석이다.

나비를 이용한 기술들을 사용해서 눈은 화려하지만 별로 실속은 없던 걸로 기억한다.

신체능력이 탁월한 것도 아니고 나비들이 강한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푸리린을 잡기 위한 파티라고는 좀 손색이 있는 조합들이다.

그나마 쓸만해 보이는게 혼나비랑 아마존이라는 게 우스울 따름.

'내가 스무마리정도 잡기는 했어도 아직 꽤 많을텐데.'

북한이 괴멸했다면 푸리린들의 군대도 족히 백만마리 이상일 거다.

그중 스무마리 잡았다고 남하한 놈들 숫자가 많이 줄지는 않았겠지.

놈들의 숫자를 줄이려면 대대적인 토벌이 필요한데, 랭커라는 놈들이 고작 한마리한테 쩔쩔 매는데 더 뭐가 필요할까.

'확실히... 약하긴하네.'

고위 랭커들이 이 정도인데 다른 네피림들은 볼 것도 없겠지. 괜히 싸움걸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인 정도다.

'이 사람들은 레아가 만드는 스튜를 안 먹는건가. 하긴, 아직 며칠 되지도 않았으니까 효과를 보려면 아직 멀긴 했지.'

이제 한 사나흘 됐을까.

티가 날 정도의 시간이 지나지는 않긴 했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질텐데 네피림들의 성장은 너무도 더디다.

근 시일내에는 그냥 +5 합성된 열매들을 섞어 레아 스튜에 섞어 파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다.

"뇌창은 거미도 키워? 귀엽네."

내 어깨에 있는 엘리스를 보고 한 말이었다. 손바닥만한 새하얀 거미, 엘리스는 웬만하면 나랑 떨어져 있기 싫은 듯 했다.

여기도 혼자 오려고 했는데 엘리스가 거미줄로 붙어서 따라왔다.

"만져봐도 돼? 앗!"

-큐!

큐큐거리며 쌔액쌔액거린다.

"내 손톱!! 뭐야 이거?"

"..... 사나운 놈이다. 건들지마라."

약해빠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엘리제의 새끼라 그런가.

거미줄이 제법이다.

'거미줄로 혼나비 손가락을 자르려고 할 줄은 몰랐네.'

혼나비가 조금만 늦었어도 손가락이 거미줄에 감겨 잘려나갔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손가락이 잘리는 상황은 보고 싶지 않으니 나중에 따로 교육을 해야 할듯 싶다.

"뇌창,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아요. 저희도 힘내고 있지만 고전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상황은 봐서 알고 있다.

"여기까지 놈들을 이끌고 온 챔피언이 있겠지?"

"네, 리더격 존재가 있긴해요. 위치는 확보했지만 아직 어느 정도의 힘을 지녔는지, 레벨은 몇인지, 거느리는 푸리린들의 숫자는 몇인지가 정확하게 파악이 안된 상태죠."

"위치만 말해줘."

"설마 혼자 가시려고요? 아무리 뇌창이라도 그건 위험해요!!"

"아니."

굳이 적진에 뛰어들 필욘 없다.

애초에 내가 창을 선호하게 된 이유는 인간이 활을 잡게 된 이유랑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그럼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거?"

혼나비였다.

아마존과 드루이드. 그리고 글로리안도 꽤 궁금한 듯 보였다.

"너희들 시력은 좋은 편인가?"

"시력?"

"시력은 자신있긴한데....."

"저도 꽤 좋습니다!"

"흥, 난 쌍안경 있다."

그럼 됐다.

비행하며 전격이 주특기?

그런건 다 의미없다.

요격하면 그만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