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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2]

55화.

4월이 접어들고 5월이 왔다.

꽃샘 추위는 가셨고 따스한 봄날의 계절이 찾아왔다.

"날씨 좋네."

"그러게 말이에요. 오늘은 빨래도 잘 마르겠어요."

거래소에서 산 세제와 발전기 돌려 사용한 세탁기로 빨래를 했다.

데몬트리 사이사이에 빨랫줄을 연결하고 이불을 널어놓았다.

두번째 카오스.

갈루란타의 오크전이 끝나고 난 충분한 휴식기에 들어갔다.

카오스가 끝나고 일주일.

일주일간의 휴식은 꿀맛이었다.

일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끔 찾아오는 와이번도 무시하고, 바다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서펜트도 무시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잤다.

그간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날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

다시 현실로 돌아갈 시기다.

"아마존 말이 맞았네."

네갤로 불리는 커뮤니티에서는 한창 이런저런 인기글이 상단을 도배했다.

[살아남은 국가, 72개국중 37]

[콜로세움 공략]

[헬뮤트가 ㅈ같은 점 251가지]

[지옥광산 이거 맞냐?]

제일 먼저 눈이 간 건 이번 카오스에서 살아남은 국가들의 숫자.

54에서 37로 변한 것이다.

국가에 대한 소식 중, 조금 놀랐던 건 북한이 사라졌다는 것.

이제 지구에서 북한이라는 국가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정부에서 알려준 정보에 의하면 위성으로 봤을 때, 그곳만 유독 잿빛의 장막으로 뿌옇다고 들었다.

시도때도 없는 번개폭풍.

우레소리만이 그곳에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다는 존재감을 일으킬 뿐.

이제 북한이 아닌 악마의 땅으로 변해버린 그곳에 대한 내용은 조금 놀라우면서도 씁쓸했다.

ㅇㅇ:빨갱이들이 드디어.....

ㅇㅇ:이제 우리 죽은 거 아님? 저기놈들이 남침하면 우리도 타격있잖아

용권:경기 북부는 힘들겠네요. 남쪽으로 이주하는 분들이 많겠어요.

ㅇㅇ:헉! 랭커다.

북한이 실패했다.

북한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지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래도 나름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였는데, 막상 없어졌다고하니 시원하면서도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다음 카오스는 기간이 넉넉해서 차라리 다행이지.'

세번째 카오스는 세달 뒤.

난이도가 높아질테니 준비하는 기간도 늘어난게 아닐까라고 추측했다.

어쨌거나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다.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칠 시간이 많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강해질 수 있는 기회는 많아. 점점 더 많아지고 있기도 하고."

[관찰자의 보고서 23#]

-51위 관찰자입니다. 콜로세움에 있는 아이템들을 모조리 관찰해봤습니다. 이번에 레벨이 올라서 아이템들도 일부 자세한 관찰이 가능해지게 바뀌었거든요. 급이 높은 건 어렵고, 해석이 안되는 것도 많았지만 확실하게 도움이 될만한 물건을 찾아냈습니다. 부디 여러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어서, 슬픔에 빠진 다른 국가처럼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콜로세움의 상점에 놓여져 있는 아이템들 중.

네피림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만한 아이템이 뭐가 있을까라고 내려다보던 난 감탄했다.

「알레이슈」

-지옥에서도 흔하게 보이지 않는 희귀한 광물

여기까지가 우리가 보는 시선.

그리고 여기는 관찰자만이 볼 수 있는 숨겨진 정보다.

-무기 강화율을 확률적으로 최대 30% 상승시켜줍니다.

무기 강화 확률을 올려주는 강화석.

알레이슈란 강화석이었다.

알레이슈란 게 강화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네갤이 들썩였다.

ㅇㅇ:강화율 30퍼? 미쳤네 ㄹㅇ

보석보석:30퍼센트면 높긴한데 지옥석 천개면 너무 빡센 거 아님? 하루종일 파도 하나 나올까 말까던데

마리오네트:지옥석은 광산에서도 구할 수 있잖아요? 노동, 해야겠지?

ㅇㅇ:광산 갔다가 뒤질뻔 했는데? 천개를 어떻게 구하냐고 씨파알~

Kirito:목숨을 걸어라. 게임은 아소비가 아니다.

[네피림 콜로세움]

[결투장] [수련장] [지옥광산]

새로 열린 컨텐츠.

컨텐츠라고 말하니 게임 같지만 실상은 전혀 게임 같지 않다.

결투장과 수련장이야 네피림들끼리 전투력을 갈고 닦는 장이지만 지옥광산이란 곳은 전혀 아니다.

난 아직 들어가보지 않았다.

하지만 들려온 말들이 썩 괜찮아 보이는 곳은 아니었다.

[지옥광산]

말 그대로 지옥석이 나오는 광산.

지옥석이 갖고 싶다면 이곳에 들어가 직접 곡괭이질을 해야한다.

일반적으로는 이게 정석.

하지만 지옥석이 나올때까지 곡괭이질을 한다고해도 하루를 모조리 투자해도 1개에서 2개 얻을까말까한 극악의 확률을 자랑한다고 한다.

운이 좋아야 3, 4개?

하지만 그걸 어느 세월에 모아서 천개를 만들까. 천개로 교환해서 지옥석을 구한다해도 알레이슈 하나는 고작 30%를 올려줄 뿐이다.

가성비가 나쁘다.

거기다 지옥광산 깊이 들어가면 이곳에 상주하는 악마들이 존재한다.

등에 지옥석을 키우는 짐승형 악마인데 이름은 헬뮤트.

등에 지옥석을 키우고 돌아다니는 도마뱀 형태의 악마다.

기본적으로 불속성이고 마그마를 토해내서 상대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관찰자의 말로는 지옥석을 먹어치우는 녀석이라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어디선가 나타나서 공격한다고한다.

지옥석을 던져 따돌리기는 쉬워도 잡기는 어렵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잡았다는 사람이 없는걸 보면 꽤 강한축에 속한 악마일거다.

목격한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헬뮤트 봤다.]

-234위 해골수집가다. 지옥석 캐다가 더워져서 뒤에 봤는데 헬뮤트 있어서 냅다 도망. 등에 지옥석 한 수십개 있던데 욕심났지만 도망침. 용암 뿌려대는데 진짜 뒤질뻔함.

┗ㅇㅇ:똑똑했네 ㅋ

┗ㅇㅇ:솔직히 도망치는 게 맞음. 헬뮤트 열댓명이서 잡아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다 죽었다더라...

여기서 헬뮤트 잡고 인증글 올리면 단숨에 인기글로 올라가지 않을까.

갑자기 의욕이 샘솟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알레이슈가 탐나기는 했지만 그렇게 급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천천히 하면 된다, 천천히.

"얘들은 아닌가 보네."

다소,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보니 사람들은 안전하게 지옥석을 캘 장소를 찾아다녔고, 그로인해 지옥광산은 몇몇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

1구역, 2구역, 3구역, 4구역, 5구역.

순차적으로 가장 안전한 곳은 1구역 순이고 5구역이 가장 위험도가 높은 구역이었다.

여기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이래서 랭킹이 중요한건가."

사람들은 더 안전한 곳에서 지속적인 지옥석을 얻기 위해서 앞다퉈 자리를 선점했다. 사람은 많고 공간은 협소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랭킹 1000위 밑으로는 1구역은 거들떠도 보지마라 ㄹㅇ]

[1구역 오고 싶으면 랭킹 올려~]

이 때문에 콜로세움 랭킹의 과도한 열기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ㅇㅇ:랭커들은 솔직히 5구역으로 가서 헬뮤트 잡는 게 낫지 않냐? 나 같은 사람은 ㅅ발 어쩌라고!

┗꼬우면 레벨 올리든가ㅋㅋ

┗랭커들도 사람이야... 랭커들도 헬뮤트 무서워!! 데몬시드나 뇌창쯤은 되어야 안 무섭겠지...

대충 이런 상황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1구역은 헬뮤트가 거의 없지만 2구역, 3구역부터는 종종 심심찮게 나타난다고 한다.

4구역은 말할 것도 없고.

5구역은 헬뮤트 밭이라고 할 정도니 어떤 구성인지도 쉽게 파악됐다.

"몇번 싸웠다고 했던가."

암묵적으로 랭킹 제도를 이용하기 했지만 심심찮게 다툼이 일어난다고 한다.

"별게 다 난리네."

고개를 젓고 악과 하나를 꺼내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건강이 0.032 상승합니다."

내가 먹은 건 오크 전사의 열매.

그것도 +5로 합성한 열매였다.

고블린 열매로도 순수 능력치가 오르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오크가 건강 스탯을 올려줬다.

+5 합성인데도 저따위로 오르지만 오른다는 게 어디겠는가.

다행히 과실이 맛도 있고 내가 꽤 좋아하는 키위랑 모양도, 맛도 비슷해서 요새 심심찮게 먹고 있다.

갈루란타의 씨앗은 굳이 제물성장으로 성장시키지 않았다.

포효하는이라는 수식언은 확실히 자신보다 낮은 녀석에게는 좋지만, 강한 녀석에는 별 의미가 없는 수식언.

굳이 애써서 먹을 필요도 없었고 아직도 불타는 기사왕 오그의 수식언을 능가하는 챔피언 데몬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수식어도 이제 곧인가."

느낌상, 천천히 먹어도 이번달까지는 충분히 수식어를 만들 거 같다.

곧 불을 다루게 된다.

그 사실 하나로도 가슴이 벅차다.

"과수원도 충분하고."

과수원의 수확은 순조롭다.

고블린의 열매가 내게는 필요없어졌지만 그렇다고 굳이 뽑지는 않았다.

레아에게 줘도 좋고, 파수꾼 그렘린들한테도 쓸모가 있으니까.

시간이 지나 그들도 필요없게 된다면 거래소에 내다 팔아도 큰 돈을 만지게 해줄테니 좋다.

그럼 다음은 결투장인데.

"굳이 신경쓸 필요는 없긴한데."

아예 안 해볼 수는 또 없다.

[콜로세움 랭킹]

1위-데몬시드 [7514]

2위-카탈린의감전 [4562]

3위-강철군주 [254]

4위-네크로맨서 [211]

5위-아마존 [195]

콜로세움은 주마다 3회 도전장이 주어진다.

누구에게나 도전할 수 있고, 승리하면 상대방의 점수를 뺏는다.

당연하게도 패배하면 점수를 빼앗기는데 나는 누군가에게 도전한 적은 없다. 도전장을 받고 자동적 수비가 이루어져서 가만히 내버려둬도 저렇게 점수가 올라 1위를 한거다.

"재산 랭킹때처럼 뇌창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란 말이지."

여기서 한가지 의문.

카탈린의 감전.

즉, 뇌창으로 데몬시드에게 도전장을 내밀면 어떻게 될까.

난 나와의 싸움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내 선택의 결과는 황당하게도 YES.

[데몬시드에게 도전합니다.]

도전이 가능했었다.

마치 영혼이 유체이탈하듯 빠져나가고 어느샌가 난 콜로세움의 결투장 안에 있었다. 내 앞에는 물소뼈 투구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데몬시드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동수비가 저건가."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

그걸 가능케 하는게 언제라도 도전장을 받고 전투를 치룰 수 있게 해주는 자동 수비 덕분이었다.

저건 나의 장비와 능력과 행동 데이터가 탑제된 ai.

"가볍게 한번 싸워볼까."

아무 생각없이 다가가던 그때.

"어?"

돌연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핑핑 돈다. 이내 헛구역질과 함께 피를 잔뜩 쏟아냈다.

"지독한 열병?"

하지만 열병은 피를 쏟게까지 하지 않는다. 그럼 이건 뭐지?

'설마 지독한 열병에 페스틱 사드를 덧입힌 건가?'

그것 외에는 없다.

열병은 저주, 그것이 퍼지는 과정에서 페스틱 사드를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방금 처음 알았다.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전법.

-블리자드

세상을 얼리는 대단위 마법이 캐스팅됐다. 위기를 느꼈지만 열병과 독의 콜라보로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것과 동시에 블리자드는 사방을 얼린다. 냉기는 열병으로 인해 안 그래도 난해한 내 몸을 얼리고, 투창해야 할 시야를 가린다.

투두둑!

땅속에서 튀어나온 브램블리가 단번에 사지를 구속한다.

-키에에에!

튀어나온 브램블리 속에서 씨앗으로 발화한 씨드라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 내 몸을 물어 뜯는다.

"브램블리로 씨드라를 옮겨?"

움직이려 했지만 열병과 독으로 인해 움직이지 않았고, 브램블리의 구속력과 리버슬로우의 효과로 난 아무것도 못했다.

결과는 당연히.

"패배하셨습니다."

"-1000점이 차감됩니다."

일련의 과정이 스무스하게도 30초 내외로 이루어졌다.

어이없게도 나는.

나 자신한테 단 한번의 공격도 해보지 못하고 간단하게 패배했다.

데몬시드vs뇌창 [1]

56화.

세상 만물 중, 가장 많은 생명을 죽이도록 꾸준하게 진화해 왔던 게 한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독이다.

독.

독은 치명적이다.

아니, 치명적이게 진화해왔다.

자신보다 강한 적을 죽이기 위해, 또는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동물이고 식물이고 가릴 것 없이 독을 생성해낸다.

그렇게 독을 지닌 이들은 생태계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난 망각했었다.

이렇게 치명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부분에 시선을 돌렸다. 왜일까.

독은 비겁해서? 멋있지 않아서?

은연중에 스며든 생각으로 독을 하찮게 대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래서는 안됐다.

생존을 위한 전투에서 독은 확실하고도 강력한 무기.

"설마 공격한번 못해볼 줄이야."

간담이 서늘했다.

방금의 전투가 가상이 아니라 실전이었다면 어땠을까.

난 이만큼 노력하고도 공격 한번 못해보고 죽었을거다.

'독에 대한 대처가 필요해.'

독은 확실히 위협적이다.

그 어떤 것보다 더.

이걸 설마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알게 될 줄은 몰랐지만...

"다행이야."

차라리 다행이었다.

콜로세움의 결투로 하여금 알게된 게 차라리 다행이다.

애초에 난 독에 대한 방비를 할수 있는 사람이다.

다른 이라면 알고도 속수무책이겠지만 난 다르다.

"서펜트, 잡아야겠지?"

서펜트.

놈들을 잡아 심으면 독 내성을 올려주는 열매가 열린다.

독 내성은 분명 중요하다고 인지했지만 그렇게까지 급하게 올려야할까 싶어 후순위로 미뤄놨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독의 무서움을 너무도 뼈저리게 느껴버렸으니까.

"다시 해봤자 의미는 없겠지."

지금으로서의 뇌창은 데몬시드가 뿜어내는 독을 이겨낼 수 없다.

시작과 동시에 투창한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겠지.

'데몬시드는 에너지쉴드도 있고, 오스칼의 인형도 있으니까.'

공격이 한번 막히는 순간.

온갖 종류의 디버프들이 뇌창의 움직임을 막아버릴거다.

굳이 이기려고 애쓸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둘다 나니까."

그럼 여기서 궁금한게 생기는데.

데몬시드로 뇌창에게 도전하면 이길 수 있나? 였다.

물론 지독한 열병에 페스틱사드를 뿌린다면 어렵지 않겠지만 독을 제외한다면 어떻게 될까.

데몬시드는 뇌창을 이길 수 있을까.

내가 독의 활용법을 잊었던 것처럼 뇌창한테도 간과하고 있던 전투법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

'ai한테 의지하는 게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다만.'

배울점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

강해지는 건 물론 당연하지만, 강함을 제대로 알고 활용하는 건 더더욱 중요한 일이니까.

앞으로의 생존을 생각해본다면 제한되어 있지만 나를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콜로세움이 만들어진 이유도 그렇게 강해지라는 의미이겠지.

[카탈린의 감전에게 도전합니다.]

생각은 깊었지만 고민은 짧았다.

바로 행동에 나가자 다시 한번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정신차려보니 열광하는 관중석과 함께 콜로세움의 결투장에 놓여져 있었다.

내 앞에 선 적창을 들고 있는 사내는 당연히 뇌창이었다.

'우선...'

[지독한 열병] 그리고 [레인스톰]과 [블리자드]로의 연계를 하려 했지만.

꽈광-!!

빛살보다 빠르게 뇌창의 적창이 벼락처럼 쇄도했다.

"에너지쉴드!"

황급하게 에너지 쉴드를 사용했지만 내가 막은건 뇌창이 아닌 단순한 벼락. 카탈린의 벼락이었다.

툭, 투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고 뇌창을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다.

설마하고 하늘을 바라본 순간.

폭푸우 몰아지는 하늘 위.

뇌창이 양 손에 붉은 벼락을 손에 쥐고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붉은 한줄기의 낙뢰.

그것이 빗방울과 연계된 상태에서 감전까지 터트렸다.

황급히 플라이로 날아올랐지만 감전의 여파에 무사할 순 없었다.

"블리자드!"

놈이 사용한 레인스톰을 블리자드로 바꾸어 빗방울을 우박으로 바꾼다.

한순간에 얼어붙은 세상.

우박과 눈송이가 떨어지며 모조리 얼어붙는 콜로세움에서 아직 땅에 있는 뇌창을 향해 브램블리와 리버슬로우로 속박하려는 순간이었다.

파직!

붉은 번갯불과 함께 놈의 신형이 사라졌다.

"뭣, 언제!"

저건 분명히 카이삭스의 표식.

텔레포트다.

놈은 아직 투창한 적이 없다.

그런데 대체 언제, 어디로 표식을 사용했단 말인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돌아봤지만 콜로세움 내에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

"설마 먹구름? 아까 하늘에서?"

레인스톰으로 먹구름을 불러일으키고 그곳에 미리 창 하나를 투창한 상태에서 나한테 벼락을 꽂았던 것.

놀라울 정도의 전투 센스에 소름이 돋을 지경.

지독한 열병에 페스틱사드를 쓰지 않은걸 후회하기까지 했다.

'괜찮아 아직 기회는 있다.'

레인스톰은 블리자드로 바꾸었다.

비구름은 눈구름으로 바뀌었으니 뇌창의 위력은 반감되었다.

그때였다.

푹-!!

"어?"

돌연 등 뒤에서 창이 날아왔다.

'어떻게?'

분명 표식을 사용한 걸보고 하늘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땅에서 투창했다?

'다시 표식을 쓴건가? 하지만 어떻게? 땅에 남아있는 창은...'

없었다.

분명 확인했을 터.

그런데 놈은 땅에 있었다.

'땅?'

카이삭스의 표식은 표식을 만든 곳에 전이한다.

"어느새에!"

그제야 깨달았다.

놈은 창이 아니라, 처음 공격했던 땅에 표식을 새겨놨다는 걸.

놈은 구름 속으로 던져놓은 창으로 전이하고 다시 땅으로 전이한거다.

이중 페이크.

한번 속은 대가는 강렬했다.

"강력한 출혈 효과가 터집니다."

푸확!!

터져나온 대량의 피.

하지만 아직이다.

"치명적인 피해를 오스칼의 인형이 대신 받습니다."

여벌의 목숨.

오스칼의 인형이 놈이 던진 적창의 피해를 대신 받았다.

찢어져 바스라지는 오스칼의 인형과 함께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빌어먹을."

곧장 뇌창을 향해 리버슬로우와 브램블리를 사용한다.

하지만 놈은 다시 표식을 사용해 전이했고 떨어지고 있던 적창을 공중에서 잡아챘다.

"그럼 그렇지! 리버 슬로우!"

"대상의 흐름을 느리게 합니다."

잡아챈 순간 리버 슬로우.

그리고 바로 브램블리.

후두두둑!! 땅밑에서 뻗어나오는 가시덩쿨이 무섭도록 뇌창의 등을 노리며 쫓아온다.

거대한 덤불 그 자체가 되어 촉수처럼 쇄도하는 브램블리.

하지만 뇌창은 당황하지 않았다.

놈 또한 브램블리를 사용했다.

나와 동시라고 할만큼 리버슬로우를 사용해 흐름을 늦췄다.

그렇다.

스킬북으로 익힌 스킬은 뇌창도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했다.

하지만 난 랭킹 1위의 남자.

조금 모자라지만 학습은 하는 사내란 말씀. 예상 못한 결과는 아니다.

"먹어치워버려."

놈이 막아놓은 브램블리.

가시덩쿨의 끝에서 내가 숨겨둔 비장의 한수. 데몬시드가 발아한다.

-키에에에에에!!

데몬시드가 지닌 스킬중 가장 흉포하고 무자비한 식충식물.

씨드라의 흉악한 아가리가 뇌창을 향해 벌어진다.

승리를 장담하던 그때였다.

돌연 뇌창에게서 수많은 창들이 뿌려지듯 퍼져나왔다.

투창이 아니다, 말 그대로 뿌렸다.

"염병!"

텅!!

허공을 물어 삼킨 씨드라의 황망한 이빨소리만 들려온다.

'어디로 전이했지?'

콰지지지지직!!

또 땅? 아니다.

이번에야 말로 하늘이었다.

먹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해골기사의 창을 잡고 벼락을 잡아 투창한다.

꽈광-!!

카탈린의 벼락과 적창의 조합.

맞으면 바로 즉사 콤보. 하지만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랭킹 1위 무시하냐!?"

와작!

"시드로긴을 사용합니다."

"오크전사의 데몬시드를 섭취합니다."

"오크전사의 잠재력을 발휘합니다."

이걸론 부족하다.

더.

"오크전사의 데몬시드를 섭취합니다."

"실패합니다!"

"오크전사의 잠재력을 절반만 발휘합니다."

"시드로긴의 부작용이 강화됩니다!"

「능력치」

근력 – 36 (+14) ▲

민첩 – 28 (+4) ▲

건강 – 35 (+14) ▲

마력 - 41 (+6) ▲

강골 - 13 ▲

힘이 넘친다.

몸의 회복도 한층 더 빠르다.

어차피 콜로세움이다.

부작용따위 알게 뭐냐.

에너지 쉴드와 오스칼의 인형도 없다. 이제 창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맨손으로 막는다.

또는.

"변색된 뼈방패를 착용합니다."

『변색된 뼈방패』 (unique)

-위대한 대전사들의 뼈를 이어 만들어진 방패. 오랜 세월, 전장의 피가 묻어 변색된 오크족의 뼈방패.

〈물리 경감-(65%)〉

〈마법 저항-(43%)〉

〈녹음진 혈맹〉

〈근력 +1〉

〈건강 +2〉

콰아아앙-!!

투창을 막은 뼈방패에 기이할 비명소리가 퍼져나간다.

"큭!"

이 정도의 근력을 가지고도 놈의 투창에 담긴 힘이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그것을 이루는 카탈린의 벼락이 살상력을 더한다.

하지만!

쿵!! 휘리릭, 힘없이 튕겨나가는 적창과 함께 변색된 뼈방패를 하늘 높이 치켜든 나의 승리였다.

"녹음진 혈맹!"

후우웅!!

하늘에서 나타난 녹음진 바람과 함께 형체를 갖추는 수백마리의 오크들이 뇌창을 향해 돌진한다.

놈은 지쳤다.

지독한 열병에 스택이 오랜 시간 쌓였다. 눈에 보일 만큼 힘들어 하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추하지만 내 승리다.

파직!!

"오냐 그럴 줄 알았다!"

놈은 마지막의 마지막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튕겨져 나간 적창으로 표식을 사용해 전이했고 난 예측했다.

시드로긴으로 명백하게 뻥튀기 된 내 스탯은 뇌창의 전이를 놓치지 않는다. 위치는 적창이 떨어진 곳.

지팡이를 쥔 채로 전이되는 뇌창에게 주먹을 날린다.

콰아아아앙-!!

"!!"

하지만 놈에게는 붉은 에너지쉴드가 주먹을 막고 있었다.

"우아아아아아아아!!"

콰직! 콰지직!!

하지만 뻥튀기 된 내 근력은 쉴드 그 자체를 부순다!

콰차앙!!

유리조각처럼 부서지는 쉴드를 꿰뚫는 주먹이 뇌창에게 꽂힌다.

하지만 놈 역시 나.

그 와중에 나와 똑같은 변색된 뼈방패를 꺼내들었다.

쿠우웅!!

물리경감 65%에 필적하는 방어율을 보이는 방패는 녹음진 바람을 만들어내 오크전사들의 혼을 불러냈다.

하지만 오크전사들의 혼이라고 해봤자 카오스에서 만났던 많고 많은 이들의 혼일 뿐.

갈루란타 수준의 혼은 드물다.

놈의 혼과 육은 내가 데몬시드로 만들어버렸으니까.

즉.

"어림없어!"

녹음진 혈맹은 내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나 또한 그들을 불러냈었으니까.

내가 놀란건 그들이 아닌.

"!!"

뇌창이 꺼낸 하나의 거창.

드레이커의 용살창이었다.

순간 전신에 소름이 가득찼지만 이내 안심했다.

-착용제한-

〔근력 제한 40〕x

〔용의 피를 뒤집어 쓴 자〕o

드레이커의 용살창은 충격에 의해 폭발하는 형식.

창을 찌르지 못하면 폭발하지 않고 시드로긴으로 도핑하여 근력 수치가 40 이상이 된 나와는 달리, 순수한 뇌창은 시드로긴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근력 수치를 올릴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너 그거 못쓰잖아."

뇌창은 용살창을 쓰지 못한다.

여기서 ai의 한계가 나타난걸까.

역시나 용살창은 나를 겨누지도 못하고 창끝이 아래를 향했다.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있다.

'저대로 두면 땅에 박혀서 폭발할텐데?'

설마 동귀어진을 노리는 건가? 싶었지만 말이 안된다.

찍어 누르는 나보다 자기가 더 피해를 입을테니 동귀어진이 성립되지도 않는다.

콰아앙-!!

방패째로 놈을 땅으로 날려버린 순간, 예상한대로 용살창이 땅에 박히고 그대로 터졌다.

순간 플라이를 사용해 날아오른 나야 폭발의 여파에서 조금 벗어났지만 뇌창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몸의 절반이 터지고 작살이 났는데... 그걸 녹음진 혈맹의 오크들을 소환해 폭발의 위력을 감소시킨 듯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했어도 몸이 박살나는 건 피하지 못했는데, 여기서 난 잠시 잊고 있던 세트 스킬 효과를 다시금 떠올렸다.

"아."

뇌창의 작살난 몸이 순식간에 모조리 회복되고 표식을 사용해 내 뒤로 전이했다.

그걸 가능케 한 건, 네피림 세트.

네피림 세트의 장비 스킬.

피조물의 영광이었다.

"와... 씨발."

이겼다고 손놓고 있는 순간.

놈은 순식간에 회복하고 전이해서 내 등을 찔러 전기 통구이로 만들었고 난 그대로 패배했다.

"결투에서 패배하셨습니다."

"-1000점이 차감됩니다."

잠깐의 방심.

그것이 패배를 부른 셈이었다.

데몬시드vs뇌창 [2]

57화.

콜로세움을 즐기고 있는 건 랭킹 1위 데몬시드만이 아니었다.

자동 수비는 ai의 영역.

하지만 자동 수비로 설정하지 않은 자들은 일일히 도전을 받았다.

"하핫, 여기서 끝이다!"

그의 랭킹은 16위, 그림자 검.

그림자속을 침투하고 그림자를 이용해 검을 만드는 그의 특이한 기프트는 암살에 특화된 검수.

레벨 랭킹뿐만 아니라 콜로세움 랭킹도 높았던 그는 자신의 기프트를 적극 활용해서 랭킹을 올리고 있었는데, 그가 이번에 도전장을 건넨 이는 자그마치 랭킹 5위의 아마존이었다.

활을 쓰는 그녀는 물론 강하지만 접근만하면 별 힘을 쓰지 못하는 게 사실이기도 하다.

아마존이 무서운 이유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연사와 정확도.

그리고 화살이 꽂히면 죽었다고 복명복창해도 좋을 폭발력.

하지만 활이라는 무기가 그렇듯 그림자 검은 접근전을 유도했고 결투는 지지부진하게 그림자 검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길 수 있어. 가능하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아마존은 가능해.'

강철군주나 네크로맨서, 바바리안이라면 힘들겠지만 아마존은 할만했다.

그때였다.

아마존의 화살이 쏘아졌다.

한번에 세개씩 뿌려대는 화살에는 예측샷까지 가미되어 있어서 피하기가 까다롭지만 그림자 검은 특유의 기프트가 그걸 가능케 했다.

"그림자 숨기!"

그림자로 숨어 화살을 피한 뒤, 비교적 가까운 그림자로 이동후 공격한다.

촤악-!

하지만 아마존 또한 잘 알고 있다는 듯 점프로 피했다.

"끝이다!"

한번의 도약으로 피한 공격.

제아무리 아마존이라도 공중에서는 무방비하다.

그림자 검의 칼날이 아마존을 향해 뻗어나간다.

그림자 자체가 검이 되어 칼날처럼 아마존에게 쇄도한 그때.

퉁-

"이중 점프? 이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기고 있었던 아마존의 스킬.

이중점프가 한번의 점프를 만들고 그림자 칼날을 피해 화살을 쏠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푹, 푸푹!

몸에 꽂히는 화살.

"젠장."

점멸하던 화살이 터지고 헐떡이는 아마존에게 시스템 메시지가 떨어진다.

"결투에서 승리하셨습니다."

"+80점을 획득합니다."

자신보다 순위가 낮았기 때문에 80점밖에 주지 않았지만 결투 그 자체의 영양가는 높았다.

카오스가 끝나고 상점에서 구매한 스킬북으로 얻은 이중점프가 아니었다면 꽤 위험했었다.

"콜로세움으로 친해지는 사람도, 원한이 생기는 사람도 많겠지만 확실히 훌륭한 컨텐츠야."

서로 결투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게 되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점에서 콜로세움은 분명 네피림 전체의 평균 수준을 확실하게 올려줄 게 분명했다.

"악용될 여지도 있기는 하지만..."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는 노릇.

그걸 배제하더라도 결투 자체는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악마들이 판을 치는 와중에 시설은 망가지고, 식량은 점점 동이 난다.

와중에 재미를 즐길만한 일은 사라지던 중에 우울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콜로세움 하나로 네피림 전체에 숨결이 불어넣어졌다.

그건 물론 아마존도 마찬가지.

전적을 살펴보던 아마존은 또다시 밀려오는 도전장을 보며 잠시 자동수비로 바꿨다.

활잡이라 그런지 만만하게 보고 도전장을 내미는 랭커들이 많았다.

하루에 몇번 정도야 싸워주지만 수십장이 밀려오면 정신적으로 힘들다.

'결투할 때 몸이 외부로부터 보호되는 것도 아닌 거 같으니까.'

그런 사전 설명이 없는 걸 보면 콜로세움으로 혼이 날아가 싸우다가 본체가 공격받으면 그대로 사망이니 아무리 재밌어도 각별히 주의해야했다.

주르륵.

자신의 전적을 확인하던 아마존은 문득 데몬시드가 궁금해졌다.

어김없이 여기서도 랭킹 1위를 유지하고 있는 데몬시드.

뇌창은 역시나 2등이었지만 점수차이는 꽤 많이 났다.

"1위의 숙명이시네."

사람들은 질 걸 알면서도 데몬시드와 한번 대면해보고 싶어서 도전장을 내민다.

결과는 대부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독에 중독되어 피토하고 끝나는 편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데몬시드의 강함에 대해 입에 침 튀기며 오르내린다.

커뮤니티에서도 데몬시드와 결투했다가 5초만에 패배했다는 글은 심심찮게 볼 수 있었으니까.

뇌창도 물론 데몬시드보다는 나았지만 투창 한번에 즉사하는 파괴력은 그 못지 않았다.

"이게 동일인물이란 말이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히든 던전 같은거라도 깨서 받았으려나."

모르겠지만 한가지 확실한건 그의 힘이 굉장히 사기적이라는 사실.

데몬시드를 눌러 전적을 살피던 아마존은 잠시 깜짝 놀랐다.

"뭐야? 졌네?"

뇌창에게 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한번은 이기고 한번은 졌다.

[데몬시드의 전적]

데몬시드 VS 거대한 뿔-승

데몬시드 VS 파이어펀치-승

데몬시드 VS 푸른백합-승

데몬시드 VS 카탈린의 감전-승

데몬시드 VS 카탈린의 감전-패

"이거 올리면 인기글은 먹겠다."

뇌창의 전적도 확인해보니 똑같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몰라도 흥미로워 보이는 건 사실.

얼마나 강해지고 싶었으면 자기 자신이랑 저렇게 싸우고 있을까.

역시 최강은 지금도 저렇게 꾸준하게 강해지려는 자가 갖게되는 타이틀이겠지.

"좋아. 나도 질수 없지."

싸울 상대가 없어서 자기 자신이랑 싸우기까지하는 데몬시드를 본받기 위해선 우는 소리는 금물.

아마존은 자동수비로 해놓았던 설정을 풀고 밀려드는 도전장들을 모조리 수동으로 해치우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그를 따라잡기 위해서.

그리고 한편.

"결투에서 승리하셨습니다."

"+210점을 획득합니다."

"랭킹이 +2 상승합니다."

"현재 랭킹은 9위입니다."

"좋았어!"

한창 콜로세움에 열 내며 랭킹을 올리고 있는 자는 글로리안.

네피림 랭킹 11위에 달하는 등에 날개를 가진 사내였다.

겨우겨우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사용해 9위였던 팔라딘을 이겨내고 자신이 9위에 등극했다.

10위 권 내의 랭커가 되면 보상도 보상이지만 그만한 입지를 다질 수 있다.

글로리안은 바로 네피림 커뮤니티에 들어가 에고 서치를 시작했다.

[실시간 랭킹 순위]

방금 바뀐 터라 커뮤니티의 랭킹 순위가 적용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 적용되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리라.

"랭커는 못 참지!"

희희 웃으며 기뻐하던 찰나.

"당신에게 도전장을 건넨 전사가 나타났습니다."

도전자가 나타났다.

글로리안은 짜증내며 혀를 찼지만 도전을 받아 들였다.

어차피 대부분의 네피림들은 공중전에 유리하지 못하다.

"모양은 빠지지만... 날아다니면서 날개깃 쏘면 니들이 어쩔건데."

앞서 승리한 추잡함의 진의를 엿볼 수 있는 혼잣말이었다.

피식 웃으며 도전을 받아들인 찰나.

도전자의 닉네임을 보며 글로리안의 안색에 핏기가 가셨다.

"카탈린의 감전과 결투를 시작합니다."

"뇌창, 이 개자식아!!"

승패는 3초 안에 끝났다.

뇌창의 투창을 피하지 못하고 시작과 동시에 패배.

"결투에서 패배하셨습니다."

"-100점이 차감됩니다."

"랭킹이 -20 하락합니다."

"현재 랭킹은 29위입니다."

글로리안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데몬시드와 결투를 시작합니다."

"결투에서 패배하셨습니다."

"-100점이 차감됩니다."

"랭킹이 -30 하락합니다."

"현재 랭킹은 59위입니다."

"안돼에에에에에!!"

인기글 가보려던 글로리안의 소소한 행복은 단박에 박살났다.

*

"열받네 진짜."

벅벅 두피를 긁은 데몬시드.

아니, 이화성은 팔짱 낀 채로 소파에 앉아 고심을 거듭했다.

고민하는 당연히 콜로세움.

자신과의 결투였다.

거의 다 이긴 승부였지만 마지막에 방심한 탓에 졌다.

아깝다고도 말할 수 있었지만 화성은 전체적인 결투의 흐름이 모두 뇌창에게 있었다는걸 다시금 깨달았다.

깨달은 후에 하게된 건 반성.

자신의 능력치와 스킬들은 파악하고 있었지만 아이템의 능력과 스킬들까지 모조리 감안하지 않았다.

"솔직히 아이템이 너무 많아."

스킬, 아이템, 장비, 장비 스킬.

가지고 있는 장비와 스킬들이 너무 많다보니 잊어버리고 있던 것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애시당초 피조물의 영광은 한번 사용하면 한달은 사용하지 못하는 쿨타임이 있기 때문에 사기적인 능력에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적이 비교적 없었던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보니 뇌창이 지니고 있는 네피림 세트의 스킬을 염두에 두지 않아버리는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

"데몬시드는 열병의 투구 때문에 네피림 세트의 효과를 받지 못했지."

아이템 스왑을 했다면 어땠을까.

재빠르게 투구를 바꿔 꼈다면 데몬시드 또한 피조물의 영광 효과로 모든 상처를 회복했을 것이다.

그게 최초 업적으로 얻은 네피림 세트. 피조물의 영광이라는 사기적인 스킬의 효과니까.

"후, 어쩔 수 없지. 진건 진거다."

분노가 치미는 방향은 뇌창이 아니라 자신의 모자람이다.

하지만 모자람은 채우면 된다.

갈곳 잃은 분노는 자신을 향해서도 아니되고 분출할 방향을 잘 정해서 터트리면 된다.

그의 분노가 향한 방향은 랭킹 순위권에 이제 막 올라온 놈이었다.

안 들릴 줄 알았는지 남은 힘들게 싸우고 있는데 호박씨 열심히 처 까시던 새새끼였다.

글로리안.

가볍게 놈부터 족쳤다.

어려울 건 없다.

투창 한번에 원큐.

시시할 정도로 쉬운 놈의 수준을 보며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던 자존감을 순식간에 되찾았다.

하지만 그 또한 잠시 뿐.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

이런 아무래도 좋을 녀석을 이겨봤자 저열한 만족감이 드리웠다 사라질 뿐 진정한 충족감을 선사하진 않는다. 그렇기에 화성은 바다를 보며 분노를 분출하기로 했다.

"일단, 써펜트 잡자."

뇌창으로 데몬시드를 이기려면 독 내성을 키워야 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독에 취약한건 데몬시드도 뇌창도 매한가지.

독을 사용한다고해서 독에 대한 내성이 있는 건 아니니 제일 급선무로 해야 할 건 독 내성을 키우는 것.

독을 쓰는 놈이 독의 내성이 없다니 이거야말로 언어도단이다.

다행스럽게도 화성은 서펜트를 잡아 용과를 먹는 것으로 독 내성을 키울 방도가 있으니 남는 건 약간의 노력과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다.

독에 대한 내성이 차오른다면 뇌창으로도 데몬시드를 이길 수 있다.

인생은 진취적이어야 한다.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 맞는 일이 허다한 게 인생인 것처럼.

내 뒤통수를 누가 보호해 줄 일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 어째야 하는가.

대비를 해야 한다.

"그럼 데몬시드가 다시 뇌창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도 또한 독이다.

독 내성을 키운다 해도 내성을 웃돌 정도로 독의 강력함을 키우면 된다.

페스틱사드는 모든 것을 독으로 만들 수 있는 스킬이다.

정확하게는 농약이지만 그 농약의 독성을 높일 수 있다는 부분이 아주 매력적인 스킬이다.

한동안은 손 놓고 있었지만 이 또한 서펜트를 잡으며 높이면 된다.

서펜트의 이빨은 아주 강력한 독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서펜트가 아니더라도 악마들 대부분은 치명적인 독을 쓰는 경우가 많으니, 독을 키울 수단은 얼마든지 있다.

"이건 기본적인거고."

외에도 강해질 수단은 많다.

이를테면 쿨타임이 찬 나만의 상점이라든지 카오스 상점.

그리고 콜로세움 상점도.

"서펜트 전부 잡아서 쌍성의 거울로 합성시키고 심어서 먹자. 그리고 알레이슈를 모아서 강화시켜야겠어."

자기 자신에게 패배했기 때문일까.

세상이 이 지경이 된 이후, 처음 겪는 패배라서 그런지 화성은 이전보다 더 강렬하게 타올랐다.

"카오스 보상이 영 맛이 없어서 아쉽네."

카오스 1위, 2위 보상 상자.

집으로 돌아온 뒤에 바로 열었지만 나온건 금화와 지옥석, 그리고 성역이 전부였다.

있으면 좋지만 그에겐 없어도 그다지 문제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오크왕의 도끼.'

오크왕의 도끼를 얻었다는 것 정도.

절단 특성이 붙어있는 무기.

[오크왕의 도끼] (uniqe)

-역대 오크 왕이 다루었던 도끼. 그들이 말하는 조상의 혼이 담겨있다.

〈강력한 절단〉

〈근력+5〉

〈건강+5〉

나쁘진 않지만 창과 스태프를 사용하는 내게는 그렇게까지 매력적인 무기는 아니었다.

대충 생각을 정리한 화성은 해변가로 다가갔다.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오른손엔 적창, 왼손엔 숲 지팡이를 들고 하늘을 날았다.

미네트의 로브로 하늘을 날아오른 화성은 곧장 지팡이를 지켜들었다.

"레인스톰."

후우우우웅-!!

곧장 먹구름이 새파란 하늘을 깜깜하게 물들었다.

화들짝 놀란 레아가 빨랫줄에 걸어놨던 빨래들을 거두려고해서 사정을 설명하기는 했지만 행해질 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블리자드를 먼저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

벼락과 함께 쓰기 위함이었다.

'놈도 그랬어. 굳이 블리자드를 쓰지 않았다.'

뇌창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비가 내림으로서 상대가 받을 뇌격의 피해가 더 커지는 게 좋았으니까.

서펜트들에게 굳이 그렇게 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명백하게 바다속에서 사는 수 속성 악마니까.

하지만 굳이 레인스톰을 쓴 이유는 지금 놈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바다 어딘가에 사는 서펜트.

그들을 불러낼 방법?

"닥치는대로 날려대면 나오겠지."

레인스톰은 강력한 카탈린의 벼락을 광범위하게 쓰기 위함일 뿐이었다.

우르르콰광-!!

천둥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에서 빗방울이 쏟아지고 화성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바다속에 잠자고 있을 놈들을 불러일으켰다.

"나와라, 형 바쁘다. 할 일 많아!"

허공을 움켜잡는다.

먹구름에서부터 벼락이 떨어져 화성의 손에 쥐어졌다.

벼락은 번쩍하며 사방을 붉게 물들였다. 카탈린의 벼락이었다.

벼락을 그대로 잡아 바다에 냅다 집어 던지자. 꽈광-!! 거대한 폭음과 함께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몇번을 더 벼락을 먹구름 속으로 던져 벼락을 떨어뜨린 후.

"일초, 이초, 삼..."

삼초를 세기도 전에.

-크아아아아아!!

바다의 왕자. 서펜트 무리가 머리를 치켜 들고 나타났다.

"미안하다. 근데 너네가 필요해. 너네도 심심하면 사람 잡아 먹었잖아!"

화성은 서펜트들을 내려다봤다.

흉악한 이빨과 단단한 비늘을 보니 미안한 감정도 금세 사라졌다.

저 몸뚱이로, 저 날카로운 이빨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애초에 본능적인거다.

놈들이 인간을 비롯한 생물들을 잡아먹는것도, 그가 필요에 의해 서펜트를 잡는 것도 정상적인 본능.

자연의 세계에서.

필요에 의한 행위는 본능이다.

그리고 본능과 본능이 부딪쳐서 낙오되고 도태되는 것은 언제나.

"약하면 죽어야겠지?"

약한 생명체다.

벼락을 붙잡은 화성의 곁에 수많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빗방울이 떨어지며 동시에 붉게 반짝거렸다.

불별도의 서해.

그곳에서는 수 일간 붉은 벼락이 끊이질 않고 몰아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시로 몰아치던 폭풍우와 벼락은 사라지고 불별도에는 새로운 구역에서 데몬시드가 열매를 맺었다.

콰즉.

"+5 서펜트의 열매를 섭취합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독 내성이 0.32% 상승합니다."

서펜트 나무 근처에서 열매를 씹어먹는 화성이 차오르는 독 내성 메시지를 보며 만족스럽게 끄덕거렸다.

지옥광산 [1]

58화.

나만의 상점은 아포칼립스 초기부터 네피림들을 살려준 고마운 상점이다.

7일에 한번 갱신되고 일주일마다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며, 획기적인 아이템들을 내놓는 고마운 시스템.

하지만 여러번의 갱신과 매진으로 인해서였을까.

내 상점은 이제 썩 기대할만한 녀석이 아니게 되었다.

[나만의 상점]

-28일 13시간 52분 남음.

[브륄레의 쿠키x10] - 100금

[붉은 성수x100] - 500금

[푸른 성수x100] - 2,000금

[미확인 아뮬렛] - 6,475금

[미확인 팔찌] - 15,367금

[미확인 스킬북] - 1,000,000금

"지랄났네."

15일의 쿨타임이 있었던 상점이 이번엔 아예 30일로 바뀌었다.

거기에 더해 상점 물건들의 가격이 전보다 더 껑충 뛰었다.

아뮬렛이나 팔찌는 뭐 그렇다 쳐도 스킬북의 가격이 미쳤다.

"100만금? 개 돌았네 진짜."

십만금이었어도 비싸다는 생각이 가득한데 백만금이라니.

사지 말라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

갑작스레 상점의 난이도가 점점 껑충껑충 뛰어오른다.

모르긴 몰라도 가지고 있는 돈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가격이 누수된 수도세가 마냥 껑충 뛰어오를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탐이 난다."

미친 듯한 가격에 욕이 절로 나오긴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또 탐이 나는 게 당연했다.

상점은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몇번 실망시키긴 했지만 아직도 여기서 구매한 스킬북은 무엇 하나 버릴 것 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1,000,000 금화라고 적혀 있는 스킬북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물욕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든다.

남은 시간은 한달. 내가 한달동안 백만금을 구하지 못할까? 아니다.

"풀 노동하면 될지도..."

하루 반나절은 대장간에서 지내면서 강화해주고 남아도는 악과들을 거래소에 모조리 팔면 가능하다.

카오스 이후.

나한테는 찬양자의 항아리에 담긴 정의 수량도 충분하다.

그걸 사용해서 제물 성장을 이루어 열매들을 모두 수확해 판다면 못할 것도 없다.

조금 빠듯하겠지만 가능하다.

"브램블리 같은 거 나오면 조금 마음이 꺾일 거 같지만..."

솔직히 브램블리가 다른 스킬에 비해서 약한거지, 나쁜 스킬은 아니다.

적을 옭아메고 마음만 먹으면 가시덤불의 벽을 만들 수도 있다.

한번 만들어낸 벽은 마나를 끊는다고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 가시덤불의 요새나 미로를 만들 수도 있다.

덩굴로 엮어내면 웬만한 이들은 손도 못 쓰고 당할 억제기 노릇을 톡톡하게 할 테니 절대 쓸모없지 않다.

매직 등급치고는 꽤 쓸모가 많은 편이긴 하다.

'양학하기엔 좋지.'

비교적 강한 상대한테는 큰 쓸모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뭐, 브램블리는 제 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게다가 저번에 샀던 스킬북.

자그마치 11,111 금을 들여 구매했던 [카이삭스의 표식]을 생각해보면 절대로 구매하고 싶어지긴 한다.

[카이삭스의 표식]은 부족했던 기동력을 폭발적으로 올려준 스킬이고 엉성했던 창술도 보완해준 고마운 녀석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백만금의 스킬북은 제값을 톡톡히 할 거라고 생각한다.

"좋아. 목표가 높으면 좋은거니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돈은 날 배신하지 않는 법!

결정했으니 돈을 모으기로 해본다.

"얼마 있더라."

「소지금 419,240 금화」

카오스 랭킹 보상, 레벨 랭킹 보상등을 받고 악마들을 사냥하다보니 벌써 이렇게 모였다.

리벨롬으로 변신해서 망치질하는 건 한동안 그만뒀음에도 이 정도다.

뉘우치는 대장간으로 복귀해서 금화를 긁어모으고 악마의 열매를 내다팔면 백만금이야 금방이겠지.

한 달이나 남은 기간이다.

기간은 넉넉하다.

물론 이번에 판매할 악과의 가격은 저번보다 뻥튀기 시켜야겠다.

"레아, 넌 어때?"

"저는 적당해요."

"보여줄 수 있어?"

"물론이죠."

[레아의 상점]

-5일 1시간 22분 남음

[부드러운 빵x10] - 1금

[붉은 성수x10] - 20금

[미확인 방패] - 222금

[미확인 귀걸이] - 536금

[미확인 스킬북] - 3122금

"응, 적당하네."

"그렇죠?"

"뭐 살거야?"

"귀걸이랑 스킬북을 우선으로 사보려고 해요."

"저번에 산 스킬북이 감지 스킬이었던가?"

"넵! 이번에도 화성님을 보조할 스킬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좋겠네."

레아는 착실하게 돈을 모으면서 스킬북을 몇번 샀다.

대개 보조적인 스킬들이 나왔는데, 저번에 얻은 게 감지 스킬이었다.

반경 몇백미터의 생명을 감지하는 스킬이었는데, 본래 가지고 있는 기프트와 연계해서 사용하니가 더 정확한 생명반응을 감지하게 됐다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과수원에서 레아가 해주는 일이 많다보니 가끔씩 용돈 형식으로 돈을 주고는 한다.

날 따라다니기만 하는 편이라 금화를 모을 일이 적으니 말이다.

레아는 악마의 열매를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서 한사코 거절하지만, 나만의 상점을 날리는 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니라 챙겨주는 편이다.

섬에 갇혀서 아저씨랑 지내는 것도 힘들텐데 용돈이라도 많이 줘야 삶의 질이 올라가겠지.

게다가 내 그늘에 가려서 랭킹이 낮은 것도 조금 마음 아프니까.

"감정 스크롤은 있어?"

"사야죠! 나만의 상점에는 없지만 카오스 상점에는 감정 스크롤을 판매하니까..."

"됐으니까 이거 써."

"네? 하지만 이건 화성님껀데...."

"난 남아돌아."

랭킹 1, 2위를 고정적으로 차지하고 있다보니 남는 게 감정서다.

주마다 1위는 5개, 2위는 3개를 주는데 내가 독식하다 보니 일주일에 8개가 꽁으로 들어온다.

게다가 감정서는 쓸 일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 줘도 상관없다.

"나 지금 14개 넘어. 써도 돼."

"하지만!"

"이럴 땐 그냥 감사합니다. 하는거야. 우리가 남도 아니고."

"헉!"

또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 같지만 내버려두자.

"됐으니까 빨리 써봐. 나도 궁금하다. 뭐가 나올지."

구경값으로 줬다고치면 아깝지도 않다.

"네!"

찌익.

감정서를 찢자 작은 빛무리가 흘러나와 빛바랜 스킬북으로 스며들었다.

이내 스킬북의 글자가 나타나 촤르륵 펼쳐졌다.

"뭐야?"

"타이탄이래요!"

[타이탄] (unique)

-나약한 전사가 강해지기 위해 제 목숨을 걸며 만들어낸 힘.

〈70% 이하의 생명력으로 전투시 모든 능력치 2배〉

〈30% 이하의 생명력으로 전투시 모든 능력치 4배〉

〈전투 종료시 24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 30% 감소〉

"오... 좋은데?"

자체적인 힐이 가능한 레아에게 썩 어울리는 스킬이다.

생각해보면 레아의 포지션이 애매하기는 하다. 원거리 힐러라기엔 검을 잘 쓰고 악과로 인한 전체적인 스펙이 높기도 하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스펙만으로는 레아가 나 다음으로 강할거다.

일반적인 네피림들이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조건은 레벨업과 카오스 상점의 엘릭서 말고는 전무하니까.

'그러니까 내 열매들이 불티나게 팔리렸지.'

디버프가 있기는 하지만 전투시엔 썩 나쁘지 않다.

안 그래도 악마의 열매로 스펙이 높아진 레아이니, 능력치가 두배가 되는 스킬은 확실히 좋다.

광전사 느낌의 스킬이기는 하지만 애매한 레아의 포지션을 확실하게 정해주는 녀석이다.

"레아, 이번에 레벨업 했지?"

"넵! 저도 이제 3레벨이에요!"

레아의 기프트.

피의 축복도 3레벨.

"기프트 스킬은 뭐 찍었어?"

"아, 그게..."

영 말하기를 껄끄러워하는 모습.

왜 그러나싶어 괜찮다고 말해보라고 하니.

"흐, 흡혈이에요."

"흡혈?"

"네..."

"그... 이빨로 흡혈하는 그거? 모기처럼..."

"아! 아니에요! 물론 그것도 가능은 하겠지만 달라요!"

"뭔데, 그럼. 설명을 해줘야 알지."

"피 흘린 상대 혈액의 기운을 흡수해서 제 몸을 회복시키는거에요! 모, 모기랑은 조금 달라요!"

"어, 어. 그러네. 다르네."

적에게 상처를 입히면 입힐수록 자신의 몸을 회복시키는 블러드 드레인이었다.

레아가 본래 지닌 피의 축복이 생명력을 회복시켜주기는 하지만 그 수치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보니 회복 능력을 조금 더 강화시킬 수 있는 [피의 흡혈]이라는 스킬을 찍었다고 한다.

"원래는 복수의 대상에게 피의 축복을 내릴 수 있도록 강화하는 스킬을 찍을까 했지만... 전 그것보다는 화성님과 함께 싸우고 싶었어요."

"음..."

카오스 게이트같은 대단위 전장에서는 분명 전자의 스킬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아깝다고도 생각했지만 레아는 카오스보다 나와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우고 싶은 모양이다.

'하긴.'

레아와 함께 악마를 사냥할 때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피의축복만 쓰게 하고 내가 전위에서 모조리 죽여버렸으니 할 일이 없긴 했다.

'레아의 의지가 중요한거지.'

싸우고 싶다는 그녀의 의지.

그게 제일 중요한 법이니까.

생각해보니 이번에 얻은 스킬북.

타이탄과도 썩 잘 어울리는 스킬이지 않은가.

순수하게 축하해주자.

"축하해. 이번에 얻은 스킬하고도 잘 어울리네."

"고마워요. 저도 이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아요."

스킬의 관계만 보면 광전사.

항상 다치면서 싸워야할 수밖에 없는 스킬들이다.

필연적으로 고통을 동반해야만 하는 전투 스타일이 될 터.

레아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선택한 길이 고통으로 얼룩진 가시밭 길이라는 걸.

'알겠지. 똑똑한 아이니까.'

그래도 걷고 싶은거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공주의 신분으로도 지냈던 아이니까.

무력함이 주는 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녀의 선택이 가볍지 않다는 걸 나는 안다.

겉으로는 순수하고 상냥하지만.

속에는 누구보다 악마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살았던 삶의 터전.

가족과 친구들을 모두 악마에게 빼앗긴 것도 바로 그녀였으니까.

'변색된 뼈방패를 줄까 했는데... 저 스킬을 주력으로 쓴다면 굳이 필요하지는 않겠네.'

방패를 구해다주려 했는데, 이제는 필요가 없어졌다.

싸우고 싶어하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함께 싸워주는 것 뿐.

"조금 이르지만... 가볼까."

"네? 어딜요?"

"지옥광산."

목표도 정했고, 할 일도 얼추 해뒀으니 광산에 한번 가볼 참이다.

강해지기 위한 세번째는 강화석.

지옥석을 모으는 것이다.

+3강으로도 놀라울 정도의 성능을 내는 게 무기 강화다.

여기서 더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무기의 성능은 전투력의 강함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아! 그럼 곡괭이 살까요!? 요새 거래소에서 곡괭이가 점점 비싸지고 있더라고요!"

"아니, 필요없어."

광산에 들어가서 곡괭이질만 할거였으면 굳이 가지도 않는다.

지옥석을 구한 이들이 거래소에 올리는 매물을 사도 충분하니까.

"헬뮤트를 사냥하러 갈꺼야."

헬뮤트를 사냥해서 얻어지는 지옥석이 몇개인지 아무도 모른다.

사냥한 사람이 있다해도 그걸 굳이 공유하려 하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직접 알아볼 수밖에.

"모르긴 몰라도, 힘들게 곡괭이질 하는 것보단 이게 더 나을걸?"

"헉! 넵!!"

"지옥광산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요구 조건은 단돈 10금.

입장하겠다고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클릭하자마자 포탈이 생성된다.

넓지만 어둡고 퀘퀘한 광산.

총 다섯개로 나뉘어진 갈랫길.

안전한 1구역부터 위험한 5구역까지 전부 있었다.

모여있는 사람들은 1구역을 선망하면서도 3, 4구역으로 향했는데 5구역만큼은 아무도 향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쪽이시죠?"

레아의 가리킴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갈 곳은 5구역.

근데.

"저 사람들은 뭐지?"

아무도 없어야 할 5구역.

그곳에는 웬 깡패 같은 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옥광산 [2]

59화.

"레아."

"넵!"

레아는 금속으로 된 중세시대 투구를 뒤집어 썼다.

특유의 붉은 머리와 눈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괜히 튀지 않도록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와 머리색은 동양에서 꽤 이질적인거니까.

특별하다면 특별하지만, 괜히 눈에 띄는 것만큼 피곤한 건 없다.

네피림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특징이 알려지기 시작한다면 여러모로 귀찮은 일들이 많아질테니까.

레아가 투구를 쓰고, 나 또한 네피림 세트를 착용하고 나서야 5구역에 모여 있는 사람들 근처로 향했다.

"정말 괜찮은거야?"

"모르지 뭐."

"랭커들이니까 알아서 하겠지..."

그들은 5구역의 입구에 모여서 그곳으로 들어가는 한 파티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말고도 헬뮤트를 사냥하려는 사람들이 있긴 있나보네."

"그러게요."

우리와 다른점이 있다면 저쪽은 한파티가 수십명이라는 점.

5구역은 확실히 다른 광산에 비해서 통로가 넓은 편이기는 하지만 저렇게 숫자가 많아서야 제대로 싸울수나 있을까 싶다.

"다른 곳으로 갈까요?"

"아니, 한번 따라가보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싸우는지도 궁금하고."

"넵!"

그때였다.

"어이! 너희 뭐야?"

구경하는 사람들 중.

우리가 5구역으로 들어가려하자 황급하게 길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죠?"

레아가 묻자 당연하다는 듯 막아서며 말했다.

"우린 오거 길드다."

"오거?"

"우리 길드장님은 자그마치 랭킹이 100위지. 오거킥이라고 들어봤나?"

못 들어봤다.

내가 기억하는 정도는 10위권 정도.

하물며 20위권쯤은 되어야 머리에 남는데 100위를 기억할 리가.

"그래, 한번은 들어봤겠지. 아무튼 우리 길드장님이 파티원들 데리고 5구역을 공략하러 가셨다. 그러니까 여긴 아무도 출입할 수 없어."

"그분들이 출입한거랑 저희가 못 가는 게 무슨 상관인데요?"

레아는 정당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놈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답하기를.

"뭐? 아가씨. 그거야 당연하잖아. 혹시라도 뒤치기 당하는 일 없도록 길을 막는거지. 열심히 싸우는 와중에 다른 사람이 돌아오는 길에 함정을 파고 기다리면 낭패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길을 막아두는거지."

"아....."

얼추 이해가 가는 행동이다.

법이 없어진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것 자체가 큰 부담으로 이어지는 일.

경계하는 일이 당연하다.

'근데 벌써 길드 같은 게 있나.'

나름대로의 세력이 있다고는 듣긴 했는데 이렇게 활동할 줄은 몰랐다.

그러고보니 강철군주나 아마존도 나름의 세력을 이끌고 있다고 듣기는 했던 거 같다.

네피림 협회를 만든다는 얘기가 그 이후로 진척이 없다보니 각각의 지역에서 세력을 만든 모양. 어쨌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뒤통수 치는 일 없으니까 비켜. 우리도 이쪽에 볼일이 많으니까."

비키라고 하자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며 슬그머니 입구를 머릿수로 벽을 세운다.

"안된다고 했잖아. 돌아가라.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무슨 던전 통제하는 것도 아니고 웃겨 죽겠네."

혈맹을 중요시한 어떤 게임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현실자각 못하고 게임인 줄 알지.

"뭐야? 이새끼가 함 처맞아봐야 정신을 차리려고 그러나....."

"야, 투구 쓴 여자는 비켜. 오빠가 네 남친 좀 혼내줘야겠으니까."

"나, 남친이요...? 그렇게 보이면 그냥 그런걸로..."

몽둥이 든 사내가 레아의 어깨를 밀치려는 순간이었다.

꽈악-!

"읏! 뭐, 뭐야! 이게...! 아아악!"

"화성님. 때려도 되나요?"

레아가 사내의 손목을 비틀어 잡았다.

네피림들의 평균 근력은 6에서 10.

어중이떠중이들의 근력은 아무리 높아봤자 10 정도다.

그와 달리 한 달이 넘도록 악과를 먹어 능력치를 키워온 레아의 기본 스펙은 그들의 세배를 웃돈다.

한마디로 레아가 마음만 먹으면 지푸라기 뽑아 꺾듯 이놈들을 맨손으로도 찢어발길 수 있다는 뜻이다.

"야, 뭐하냐? 얼른 쫓아내."

"아니! 이거 아, 안 빠져! 안 빠진다고 시발!! 악! 아아아악! 아파!!"

레아가 붙잡은 사내의 손은 붉다못해 보라색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강력한 근력 수치로 팔이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굳이 싸울 필요는 없지."

레아보고 다 때려눕히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전투 민족도 아니고 그럴 이유가 없다.

싸울 이유도 없고, 별다른 메리트도 없는데 싸워 뭐하겠는가.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악마지 같은 인간이 아니니까.

게다가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이들을 물릴 방법은 난 알고 있다.

인벤토리에서 적창을 꺼냈다.

"헉! 뇌창!"

"야, 저거 뇌창이잖아!"

"그러고보니 뇌창은 항상 힐러 여자랑 다닌다던데..."

적창만 꺼내면 단번에 알아보니까.

괜히 주목받기 싫어서 안 꺼냈지만 그냥 꺼내놓을 걸 그랬다. 그랬으면 괜한 시비는 안 걸렸을테니 말이다.

"됐나?"

"예, 예..... 가, 가시죠!"

뇌창임을 밝히자마자 태도가 단번에 바뀌었다.

놀라움과 경악. 그리고 동경과 경외로 바뀌는 시선들은 괜히 사람을 쑥스럽게 만들었다.

"제가 길 안내를 하겠습니다! 앞서 간 길드장이랑도 괜한 트러블이 생기면 안되니까요!"

굳이 길 안내를 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다.

앞서 먼저 간 파티와도 괜히 분란이 일어나면 귀찮은 건 매한가지니까.

"그래주면 고맙고."

"물론이죠, 하하! 야, 얘들아! 혹시라도 길 엇갈리면 말 잘해라!"

"예! 형님!"

형님이라고 불리는 거 보니 나름대로 직책이 있는 사람일까.

"전 3512위 권투사라고 합니다! 필요하신 일 있으시면 어디든 불러 주십쇼! 뇌창님을 만나뵙게 되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랭킹이나 하는 짓이나 얼굴을 보니 딱히 그런건 아닌 거 같다.

뭐랄까.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 건달 비슷한거 했을 법한 얼굴이랄까.

말투나 행동이나 얼굴에 있는 흉터들이 과거사를 자기 주장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이전의 직업 따위.

이렇게까지 변해버린 세상이다.

이전에 뭘 했는지 따위, 과거 따위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럴 자격도 없고.

"아, 이쪽입니다! 여기로 가면 막다른 길입니다. 이쪽으로 가야 쭈욱 깊어지거든요."

"길을 잘 아시네요?"

"예, 이번 레이드를 위해서 저희 길드가 며칠 전부터 구석구석 5구역을 살폈습니다. 커뮤니티에 있는 공략 혹시 보셨습니까? 5구역을 살펴보는 건 저희 길드가 전담했거든요."

"아, 그랬구나."

그건 몰랐다.

"왜 5구역을?"

"저희도 몰랐죠. 혹시나 하고 살펴봤는데 역시나 가장 위험한 곳이었을 뿐입니다. 흐흐, 하지만 저희 형님은 남자가 곡괭이질을 어떻게 하냐면서 이번 레이드를 준비하신 겁니다. 아, 여기 발 조심하십쇼. 돌부리들이 많아서 위험합니다."

"아, 고마워요."

깍듯하게 안내하는 사내의 태도에 레아도 기분이 풀렸는지 미소를 곁드린 감사를 표한다.

투구 때문에 보이진 않지만 밝아진 음성에서 알 수 있었다.

"5구역은 대충 삼백미터 정도를 기준으로 계단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형태죠."

"덥네요?"

"네, 괭이질을 할만한 곳이 나오려면 아래로 내려가야하는데, 아시다시피 내려가다보면..."

"헬뮤트가 있다는거군."

"그렇죠. 점점 더워지는 것도 헬뮤트 때문일 겁니다. 놈들은 입에서 용암을 뿌려대는 미친놈들이니까요."

이미 한번 마주친 적 있는지 랭킹 3512위 권투사라는 사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주친 적 있나?"

"예, 1층으로 들어가서 마주쳤습니다. 5구역 지하 1층에는 지옥석을 캐기 좋은 자리들이 많거든요. 탐사중에 지옥석 몇개를 캤더니 귀신같이 나타난겁니다!"

"싸워봤어요?"

"예. 덕분에 절 제외한 탐사팀이 모두 죽었습니다. 놈의 용암에 조금이라도 닿으면 몸이 녹아내렸거든요."

"저런...."

안타까운 일이지만 궁금한 게 있다.

"그렇게 강한데 레이드 하는건가?"

"예. 놈의 피부는 단단하고, 강력한 용암을 뿌리긴 하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뭐지?"

"네? 아 그게..."

"기밀이라면 대가를 주지."

정보는 공짜가 아니다.

금화나 인벤토리에 굴러다니는 장비를 몇개 줄까 했지만 권투사는 한사코 사양했다.

"아! 아닙니다! 대가는 무슨요. 별거 없습니다. 몸이 단단하다고해도 눈까지 단단하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생각보다 둔합니다. 도마뱀이라기 보다는 악어 같다고 해야할까요. 길드장도 놈의 둔함과 눈을 공략하면 승산이 있을거라면서 향한겁니다."

말을 끝내면서 계단을 전부 내려온 권투사가 활기차게 말했다.

"여기가 지하 1층입니다!"

"와, 덥다."

"덥네. 지하로 갈수록 점점 더워지는 건가?"

"하하, 그럴지도 모르죠. 아직 저희가 탐사한건 1층이 전부니까요."

지하 1층.

지상과 구조 자체는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주변 온도 자체가 굉장히 높아서 꽤 더웠다.

입고 있는 갑옷이 철갑옷이었다면 금세 달아올랐을만큼 말이다.

"아! 저기 앞에 저희 길드장이 있네요! 길드장님!! 저 형석입니다!!"

권투사의 이름이 형석인 모양.

앞서 있던 파티의 이름을 부르던 그때였다.

"헬뮤트다!!"

"모두 자리잡아!! 움직여!!"

헬뮤트의 등장도 함께 나타났다.

"어, 어어..... 어떡하지?"

당황하는 권투사는 내버려두고, 나와 레아는 헬뮤트를 관찰했다.

암석과도 같은 피부는 확실히 도마뱀보다는 악어에 가까웠다.

등과 몸 곳곳에 있는 암석과 검은 베이스에 속이 붉은 광석.

지옥석을 여러개 매달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헬뮤트가 맞다.

저런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악어가 아니라 도마뱀이라 불리는 이유는, 입이 길쭉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퀘에에엑!

그 이유는 아마도 몸속에 품은 붉은 용암을 토해내기 위해서겠지.

"피해! 용암 토한다!"

"근접들은 피하고! 원거리들은 지금 공격해!! 눈을 집중 공격해라!!"

"텅스텐 방패가 녹았어!"

텅스텐.

삼천도의 온도에서도 녹지 않고 버틴다는 금속. 일명 중석이라고도 불리는 용해점이 가장 높은 금속이다.

방패가 조금 현대적이라고 생각했더니 어디서 텅스텐을 구해서 자체적으로 만든 방패인 모양이었다.

3천도에서도 어느 정도 견딘다고 알려져 있는 텅스텐이었지만 그건 일반적인 현대 과학에서나 통용됐던 일.

'악마의 용암은 다른거겠지.'

이능에 가까운 불꽃.

용암은 현대 과학 이상의 효과를 자아낸다. 텅스텐 방패로 막아낼 수 있을거라 믿은 게 패착이었다.

"주변 돌면서 어그로라도 끌어!"

"꺄아악!"

오거킥이라는 길드장이 분전하고는 있지만 상황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궁리를 하고 온 모양이지만 헬뮤트의 크기가 생각보다 컸고 입에서 뿌려대는 용암의 수준이 전위들이 가지고 있는 방패의 성능을 월등히 뛰어넘었다.

사실상, 저 용암을 막아낼 방법은 딱히 없어 보였다.

"덥네."

"네, 헬뮤트가 나타나고 더 더워졌어요. 아마 이 열기는 저녀석 때문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놈이 뿌려댄 용암 탓인지, 아니면 헬뮤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열기인지 이전보다 확실하게 더워졌다.

본래는 여름 비슷한 날씨였던게 지금은 사우나실에 온 기분이다.

"안되겠습니다. 저도 도와야겠어요!"

3512위라는 랭킹 치고는 보는 눈은 있는 모양이다.

권투사는 파티가 위급해지자 위험한 줄 알면서도 뛰쳐나갔다.

"화성님."

"응."

저대로가면 파티는 괴멸한다.

눈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지만 저들의 원거리 공격 수단이 너무도 형편없다.

돌덩어리나 다름 없는 헬뮤트의 눈꺼풀은 꽤 빠른 속도로 깜빡여서 저들이 퍼붓는 화살은 다 튕겨낸다.

기대할만한 건...

"저기 소서리스뿐인데."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소서리스 뿐인데 썩 강해보이진 않는다.

책을 펼쳐내고 주문을 외우듯 마력을 집중시키고 있는데 캐스팅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스킬북으로 배운 마법과는 달리, 소서리스는 대부분의 마법을 기프트로 배우는 것 대신 주문을 외우는 캐스팅 시간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다.

주문의 정확성과 음절에 따라 마법의 강도가 달라진다던가.

그랬던 것 같다.

"됐어!"

"마법이다!"

"한방 먹여줘!!"

오거 파티의 비장의 무기인 느낌.

뭔가하고 기다려보니.

"아이스 블래스트!!"

소서리스의 손에서 모여든 아이스 블래스트가 밀집되어 쏘아졌다.

아이스 볼트의 상위 단계 마법.

아이스 블래스트였다. 사람 머리보다 더 큰 냉기가 밀집된 구 형태의 마법이 헬뮤트를 향해 쏘아졌다.

'헬뮤트는 확실히 화속성이지.'

냉기 속성의 마법이라면 확실하게 피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쾅!

-퀘에에에에엑!!

"이럴수가!"

"말도 안돼!"

헬뮤트는 이렇다할 피해가 없었다.

단지 머리 끝까지 화났다는 듯 소서리스를 향해 달려들 뿐이었다.

"꺄, 꺄아악!"

"막아!!"

"둔해빠진 놈이 어떻게 저렇게!!"

평소의 둔한 모습은 어디로갔는지 화가 나니 굉장히 빠르다.

막아세우려는 전위들을 모조리 짓밟고 후위의 소서리스가 있는 곳까지 단번에 달려들었다.

활을 쏘지만 어림없다.

소서리스는 달아나려했지만 마력에 몰빵하고 살았는지 신체 능력이 형편없이 낮았다.

"꺄악!, 누가! 누가 좀 살려줘요!!"

"레아?"

막 투창해볼까 하려는 찰나.

레아가 쏜살처럼 달려나갔다.

"피하세요!"

쿵-!! 우드드득!

레아의 검이 헬뮤트의 대가리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과거의 인연 [1]

60화.

-키에에에엑!!

파작!

헬뮤트의 단단한 외피가 부서지고 붉은 속살이 튀어나왔다.

레아의 양손검 내려찍기 한방이 레이드 파티가 그동안 쏟아부은 모든 공격을 웃돌았다.

"누, 누구야?"

"지금 그게 문제냐! 공격해!!"

"지금이야! 눈 찔러!!"

"비켜!!"

제일 덩치큰 사내가 높이 도약하더니 내려찍기 킥을 선보였다.

쿠웅-!

목 부근을 비스듬하게 맞춘 킥.

"오거 형님!!"

오거 길드의 길드장. 오거킥이었다.

그의 이름에 걸맞는 단단한 킥.

오거킥이 헬뮤트의 둔중한 몸을 잠시나마 뜨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쿠웨에에에에!

헬뮤트의 목부근이 붉게 변하며 뜨거운 열기가 시야를 왜곡시켰다.

"마그마다! 피해!"

"피해! 안 피하면 그냥 녹는다!"

"아니야 페이크야!!"

푸후우우우우우!!

"으악!"

"콜록콜록! 뭐야 이거!"

용암을 뱉어내는줄 알았으나 페이크. 목 옆이 갈라지더니 돌연 새까만 스모그를 뿌려댔다.

안 그래도 광산 특성상 어두운 곳인데 스모그로 인해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레아!"

"괜찮아요! 아직 여기 있어요!"

앞이 안 보일텐데도 놈을 붙잡아 두고 있는 듯 했다.

저번에 배운 감지 스킬로 눈이 안 보여도 전투를 지속하는건가?

'그건 꽤 놀랍네.'

카오스에서는 후방에서 힐러 역할을 자처해서 그렇지, 레아의 전투 센스도 꽤 놀랄만한 수준이다.

'투창은 어렵나.'

투창하려 했으나 전장이 어지럽다.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뭉쳐있고 대피하고 공격하기를 반복한다.

게다가 놈이 뿌려댄 스모그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이 상황이면 내 투창은 어렵다.

아무리 스펙이 높고 투창이 익숙해졌다고해도 저렇게 난전으로 싸우는데 투창하기엔 위험했다.

실수로 사람 죽인 병크를 터트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사람들이 방해다.

'레아가 계속 어그로 끌고 있나.'

대피하는 사람들의 발소리는 많이 들리지만 비명 소리는 없다.

그저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목소리 뿐. 쿵쿵 거리는 헬뮤트의 소음만이 놈이 아직도 뭔가와 싸우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

'워터볼은 애매하지.'

마법을 쓰기도 조금 애매하고 워터볼 정도로는 큰 피해를 입히기는 어려울거다. 그렇다고 여기서 레인스톰을 쓸 수도 없는 노릇.

단단한 외피는 날이 서 있는 무기 보다는 외피를 벗겨낼 몽둥이나 망치류의 무기가 더 효과적일 터.

그렇다면.

[로자리의 메이스] (magic)

-검은산양 카타콤의 안주인. 찬양자 로자리의 둔탁한 메이스.

〈경감 파괴〉

이전에는 쓸 필요도 없어서 인벤토리에 넣어두고만 있던 아이템.

딱히 좋은 게 없는 무기지만 딱 하나. 마음에 드는 옵션이 있다.

'경감 파괴'

경감률을 가지고 있는 방패, 벽, 쉴드 등등을 부수기에 최적의 옵션.

경감 파괴가 붙어 있는 무기다.

헬뮤트의 외피는 단단하다.

용암을 쏴대는 녀석 특성상, 외피 자체가 화강암 비슷한 돌덩어리일테니 놈에겐 단단한 갑옷과 같다.

말인 즉슨.

외피 또한 경감률이란 속성이 부여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뜻.

"레아!"

"넵!"

앞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레아는 아직도 싸우고 있다.

소리로 알 수 있다.

게다가 달려갈수록 뜨거워진다.

그렇다면 거기로 향한다.

콰아앙-!!

"명중."

-케에에에!!

부스슥.

게다가 외피도 예상대로다.

헬뮤트의 돌처럼 단단한 화산암 외피도 쉽게 부숴진다.

부서진 외피 속은 부드러워보이는 새빨간 속살이 보인다.

-케엑!!

"어딜!"

쿵!!

양손에 거대 메이스를 들고 용암을 뿌리려고 번쩍거리는 헬뮤트의 대가리를 찍어버렸다.

매직 아이템이지만 쓸모는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강화 좀 해 놓는건데 그랬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하니까.

"화성님!"

"알아!"

대가리를 찍혔지만 놈은 아직도 움직인다. 짓이겨진 머리를 비틀어서 꼬리를 채찍처럼 쓰려했지만 어림없는 짓. 힘찬 도약으로 피해 천장에 뒤집어져서 다시 밟고 뛴다.

"등!"

"넵!"

쿵-!

파사삭!

껍질 벗겨지듯 비산하는 헬뮤트의 외피가 날아가고 등의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체중을 실은 메이스 질에 등 부분의 외피가 박살난 것.

레아는 박살난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합!"

속살이 드러난 순간.

레아가 다가와 검으로 말랑한 헬뮤트의 속살을 찔러넣었다.

-키이이이이에에에에엑!!

"윽! 안 빠져요!"

"여기!"

빠지지 않는 검을 대신해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을 던져주고 난 다시 메이스를 휘둘러 놈의 외피를 모조리 박살낸다.

쾅! 쾅! 콰앙! 콰앙! 쿵!!

그야말로 무쌍.

마구잡이로 휘둘러대지만 내 근력수치와 만난 메이스는 물만난 고기처럼 헬뮤트의 등을 모조리 헤집는다.

-캬아아아아!!

박살난 부위마다 레아는 놓치지 않고 적창을 찔러 강력한 출혈 효과를 이뤄냈고 그리고 이내.

쿠웅-!!

헬뮤트가 쓰러졌다.

"지옥광산의 파수꾼, '헬뮤트'를 처치하셨습니다."

"2900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400 금화를 획득합니다."

"지옥석 24개를 획득합니다."

꽤 강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못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그마와 스모그 공격이 매섭고 단단한 외피가 문제였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그리 까다롭지는 않았다.

까다롭기로 따지만 서펜트나 와이번이 더 까다로우니 말이다.

바다속을 제 집처럼 유영하는 서펜트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공간적 이점을 지닌 악마들에 비하면 헬뮤트는 그리 어려운 놈도 아니었다.

그냥 다 피하고 두들겨 패면 되는 놈이었으니까.

"화성님!"

"응, 잘했어!"

짝!

하이파이브를 하니 장갑에서 메케한 먼지가 터져나왔다. 한차례 콜록거리던 레아는 활기차게 웃었다.

"재밌었어요!"

"합이 꽤 잘 맞았네."

"화성님이 맞춰주셨으니까요!"

제대로 합이 맞게 싸워본 건 오늘이 처음 아니었을까.

레아가 놈의 머리 앞에서 확실하게 어그로를 잡아주니 내가 메이스로 공격하기가 편했다.

그래도 함께 생활한지가 한, 두달이 넘어가서 그런가. 얼떨결에 맞춰본 합이었지만 꽤 잘 맞았다.

전투시의 다급함에도 서로가 원하는 바를 잘 캐치할 수 있었으니까.

"자 그럼..."

바로 데몬시드로 만들거나, 싸우면서 튕겨져 나간 지옥석이나 뱃속에도 있을지 모를 지옥석등을 확보하고 싶은게 마음이다.

언뜻 봤던 등의 지옥석은 못해도 수십개였다. 대충 스무개 정도.

놈들은 지옥석 자체를 먹기까지 한다고하니 배를 갈라 내장을 살펴봐도 몇개 찾아볼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난 오거 길드의 길드장이요. 오거킥이요. 도와준 건 감사하지. 하지만 우리... 해야할 일이 있지 않을까?"

도움에 감사를 표하지만 완전히 고개숙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처치한 헬뮤트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겠지.

'우리가 거의 다 잡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저쪽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친 사람도 있고, 애초에 먼저 발견하고 싸우고 있었다.

'중간에 개입한 건 우리니까.'

우리가 한 일은 명백하게 스틸 행위로 보여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누는 게 맞다.

도우려고 한 일이지만 저들도 목숨 걸고 싸운 거니 말이다.

솔직히 우리가 다 때려잡은거지만 목숨을 건 일에 아무런 보상도 없으면 눈깔 뒤집어지는 게 사람이다.

그냥 넘어가지는 못하겠지.

그렇다면 문제는 비율인데...

'우린 둘인데 반해, 저쪽은 스무명 정도. 다친 사람도 꽤 있네.'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누가 좀 나서서 말좀 해줬으면 좋겠다만, 우릴 여기까지 안내한 권투사 사내는 안타깝게도 큰 부상을 입어 정신을 잃었다.

어떻게 나올지 한번 기다려볼까.

레아는 날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뜻에 맡기겠다는 뜻.

잠시 기다리자 길드장인 오거킥이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다시 한번 도움에는 감사하지. 하지만 놈을 발견하고 전투에 돌입한 건 우리가 먼저였어."

기선제압을 위함인가.

아니면 자신의 위치 때문인가.

오거 길드의 오거킥은 우리에게 감사의 인사는 전해도 존댓말을 쓰지는 않았다.

그럼 나도 존대할 필욘 없겠지.

"인정해. 우리가 나선건 순수하게 도우려는 의도였지, 당신들 사냥감을 가로채려고 한건 아니었으니까."

그리 말하니 오거킥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럼 비율은 이렇게 하는 게 어때.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건 지옥석이잖아? 8대 2로 나누지."

"8대2?"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심하다.

뭐라 더 말하려는 찰나.

"오해하지마. 우리가 2다. 너희가 8이야."

"형님!"

"길드장!"

꽤 파격적인 제안이다.

우리로서는 썩 나쁠 게 없다.

솔직히 자기들이 8을 가지겠다고 배짱부리면 다 두들겨패야 하려나 했는데 기분좋은 예상의 빗나감이었다.

"혹시 조건이 있나?"

"이야기가 잘 통하네. 어차피 당신들도 헬뮤트를 사냥할 거 아냐?"

"그렇지."

"하지만 둘로는 힘들지 않을까?"

설마.

"하고싶은 말이 뭐지?"

"우리랑 함께 파티를 맺자. 당신들이 더 편하게 싸울수 있도록 지원하겠어. 대신, 우리는 사냥감의 2할만 먹도록 할게! 어때?! 나쁘지 않지?"

생긴 건 산적처럼 생겨서 머리가 꽤 잘 돌아갔다.

'판단도 빠르고, 거래에도 능해.'

뭐가 자신한테 이득이 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는 타입이다.

다른 길드원들은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지만 길드장의 제안이라 별다른 말을 못하는 느낌.

'썩 나쁘지는 않다.'

이런 지하 광산에서 사냥하다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함정이 있을 수도 있고, 갑자기 많은 헬뮤트들의 무리를 이루고 돌격해올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부분에서 위험에 빠지지 않을 보장도 없으니까.

그때 사람이 많다면 어떻게든 도움을 청할 수도 있고, 머리가 여러명이니 위기를 타파할 지혜 또한 다양하다고 본다.

하지만.

'굳이?'

앞선 전투에서 봤다시피 레아와 나는 둘만으로도 헬뮤트를 박살낸다.

전투 시간은 길어야 오분에서 십분.

가진 힘이 비슷했다면 모를까, 차이가 많이 나는 병력들은 단순한 짐.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게다가 저들과 있으면 나는 다양하게 싸우지 못한다.

안 그래도 콜로세움을 감안하면서 데몬시드와 카탈린의 감전이 지닌 스킬들을 잘 조합해서 싸워보려고 했는데, 저들이 있으면 껄끄럽다.

누군가에게 까발려진다면야 상관없지만 애써 밝히고 싶지 않은 게 지금의 내 마음이니까.

저들보다 내 궁금증을 자극하는 건 헬뮤트의 사체.

오크 전사의 열매는 키위였다.

헬뮤트는 어떤 열매가 맺힐지가 내 주요 관심사였다.

어서 빨리 심어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이 녀석은 어떤 능력치를 올려줄지,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그러니 거절이 맞다.

"거절..."

하려는 찰나.

"형부?"

".....?"

돌연 오거 길드의 소서리스가 날 보며 눈이 동그랗게 변해 소리쳤다.

"아."

왠지 익숙한 얼굴이다 했더니.

날 쳐다보는 소서리스의 얼굴이 죽은 전 와이프와 겹쳐보였다.

"처제?"

전 와이프의 여동생.

그러니까 정확히는 전 처제였다.

과거의 인연 [2]

61화.

"처제가 왜 여기에."

정확하게 말하면 처제가 아니다.

전 처제다.

나와 전 와이프는 이혼했었으니까.

"형부야 말로!"

전 와이프와는 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이다.

내가 알기로 한 8살 차이였던가.

내가 서른넷이고 전 와이프가 서른셋이었으니까 지금 스물 다섯인가.

처음 봤을때보다 몰라보게 어른스러워져서 못 알아봤다.

'다 컸네.

'

처음 봤을 때가 22살 때였나.

한창 대학생이었을 때 봤으니 그때보다는 확실히 숙녀가 다 됐다.

"정말 반갑다! 여기서 형부를 다 만날줄은 몰랐어! 우리가 언제보고 또 보는거지? 언니 결혼기념일 때 보고 처음 보는 거였던가?"

"아, 응..... 그럴거야."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전 와이프 빚 갚느라 그날도 배달 알바하느라 결혼기념일도 잊어버릴 뻔 했는데 우연히 처제를 만나서 알게 됐었다.

하필 배달 간 곳이 처제가 친구들이랑 파티룸 잡고 놀던 곳이라.

"진짜 세상 좁다! 여기서 형부를 다 보게 될줄이야. 아, 길드장 오빠! 나 아는 사람이니까 괜찮아!"

"어? 아 그래? 우리 마법사님 지인이면 믿을 수 있지."

"형부, 형부! 아까 보니까 정말 쎄던데! 형부도 우리 길드 올래? 여기 진짜 가족같고 좋아요!"

상황이 꽤 난감해졌다.

"현경아. 그렇게 하시면 그분이 난감해하시잖아.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아 그러네요. 형부! 그럼 오늘만이라도 우리 파티랑 동행하자. 이미 여기까지 들어왔으면 뽕 뽑아야지! 오빠 실력이면 열댓마리는 더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가자가자! 하루 정도는 같이 사냥해도 좋잖아!"

본래라면 거절이 맞다.

그런데 왜일까.

"그럴까."

"정말?! 길드장 오빠! 같이 하신대!"

"역시 우리 마법사님이 최고네!"

"오오! 이 파티면 무서울 게 없지!"

"그럼 아까 얘기한대로 비율은..."

"예, 대신 사체는 제가 쓰겠습니다."

"그럼 7대 3 어떠십니까."

"그러죠."

신난다며 내 팔을 붙잡고 흔드는 처제를 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언니를 꽤 잘 따르던 귀여운 동생.

마냥 어리기만하던 그때와 지금이랑 크게 다른 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왠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그게 뭔지 지금은 모르겠다. 알아보고 싶었다.

"....."

"레아, 미안. 오늘만이니까."

"네. 저는 괜찮아요."

레아의 눈이 조금 날카로운 거 같은데... 착각이겠지.

그렇게 우린 오거킥 파티와 동행하게 됐다.

한바탕 난리를 쳐서일까.

5구역 지하 1층은 나름 한적했다.

"헬뮤트 안 나오네~ 이거 괭이질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큭큭, 그러게. 이 정도로 안 나오면 그냥 곡괭이 들고 올걸 그랬다."

정처없이 길을 걸으니, 처제가 내가 있는 쪽으로 오더니 말을 걸었다.

"형부."

"그래. 왜?"

"역시 언니는 모르는거죠?"

"... 그렇지."

"괜찮아요. 나도 큰 기대는 안 해요. 어차피 세상이 이지경인걸. 우리 엄마, 아빠도 어딨는지 모르는데... 그래도 상관안해. 언니야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커뮤니티엔 올려봤어?"

"응! 근데 워낙 사람은 많으니까요. 발견 못 했거나..... 아니면 아직 기프트 각성하지 못했거나? 겠죠."

난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짓인데, 열심히 하고 있구나.

하긴, 그게 맞겠지.

악마 때문에 세상이 이지경이 됐어도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사람을 찾는 게 가족이니까.

가족이라.

'나도 한때는 갖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안다.

부질 없는 꿈이다.

세상이 이 모양인데 가족은 무슨 가족인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데.

"근데 형부....."

"응?"

"저기, 저분은... 그냥 동료죠?"

조금 멀리 떨어져서 걷고 있는 레아를 턱짓하며 말했다.

"어, 왜?"

"그냥. 딱, 그래 보여서요. 투구랑 갑옷으로 완전히 가리고 있긴 하지만... 목소리는 어리고, 전체적인 실루엣이 여성분이라서."

"믿을만한 동료야."

"아.... 그렇구나~ 동료구나."

꾸욱. 처제가 내 팔뚝을 두 손으로 꽉 끌어안았다. 순간 레아의 몸이 흠칫했다.

"형부, 근데 형부 엄청 쎄더라. 레벨이 몇이에요?"

"아.... 3레벨이지."

거짓말은 아니다.

카탈린의 감전은 아직 3레벨이니까.

"정말요!? 우와 대단해! 그럼그럼, 혹시 형부가 뇌창이에요?"

어떡할까.

어차피 바깥의 길드원과 합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

하지만 우릴 안내해줬던 권투사 친구는 아까 크게 다쳐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그렇다보니 아마 내 인상착의를 보고 길드원들이 추측한거겠지.

처제도 제대로 감을 못 잡은 거 같으니까.

"왜? 어때 보이는데?"

"우리 길드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긴한데..... 에이, 설마 형부가 그럴려고! 게다가 뇌창은 번개랑 창을 쓰는데 형부는 아니었잖아요. 그러니까 아니겠지!"

하지만 그리 말하면서도 혹시나 뇌창이기를 바라는 어투긴하다.

"네가 아니라면 아닌거겠지."

하지만 난 굳이 부인했다.

"뭐에요! 말을 그렇게 두루뭉실해! 제대로 말 안 해요!?"

"처제가 그랬잖아. 뇌창은 번개랑 창을 쓴다고. 근데 난 아니잖아. 그럼 아닌거겠지."

아무리 전 처제라도 뇌창인게 알려지면 이래저래 귀찮아진다. 어쩌다보니 감정에 휩쓸려서 동행하고는 있지만 오래보고 싶은 얼굴도 아니고.

처제를 보면, 자꾸 전 와이프가 떠올라서 기분이 썩 유쾌하지도 않다.

'딱히 내가 잘못한 건 없지만.'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자꾸만 내가 죽인 거 같아서 언니의 생사도 숨겨버렸다.

하지만 굳이 밝힐 필요 있을까.

어차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에서 떄론 가슴 아픈 진실보단 두루뭉실한 어정쩡함이 나을 때도 있으니.

"으응~ 그렇구나. 근데 어떻게 그렇게 강해진거에요? 나 진짜 깜짝 놀랐잖아! 이제 끝났구나 싶었는데 저분이랑 형부가 똭! 나타나서 헬뮤트 두들겨 패는데 진짜 심쿵 당했다니까?"

쫑알쫑알 잘도 떠드는건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아! 오빠 근데 그럼 돈도 많겠네요? 금화 많아요?"

"조금 있지."

"우와! 얼마나요?"

"음, 한 오천금정도?"

"헤엑! 그렇게나 많이요!? 우와..... 난 100금 밖에 없는데!"

설마하니 조금 달라하지 않을까 했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사실 40만금 정도 있지만 대충 절반정도 불렀는데도 많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하긴, 그렇겠지.

몇몇 랭커를 제외하고는 수중에 천금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니까.

"레벨도 높고, 돈도 많고..... 우리 형부 출세했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지."

정말 출세하긴 했다.

빚 갚는다고 투잡 쓰리잡 뛰던 게 바로 나였으니까.

그런 내가 지금은 랭킹 1위에 대한민국을 책임지는 랭커로까지 불리고 있다니 말이다.

세상 참 모를 일이다.

"와.... 그럼 나 형부랑 같이 지내고 싶을지도~"

"길드는 어쩌고."

"길드는, 탈퇴하면 되죠. 아무리 잘 대해줬어도 남남이잖아요? 가족보다는 덜하지... 게다가 자꾸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남자도 많고."

이상한 눈빛이라.

하기사, 이 지경이 된 세상에서 살아남는 여자는 흔치 않았으니까.

게다가 처제는 고양이상에 꽤 흔치 않은 미인이다.

끌리는 게 당연하겠지.

"형부~"

그러면서 은근히 내 쪽으로 마냥 기대온다.

"나 그냥 형부 따라가면 안될까? 저 랭킹도 높아요! 5569위야. 웅? 생각해보니까 형부도 아니네. 이혼했으니까 그냥 오빠잖아요. 응? 오빵. 저랑 같이 지내요~"

내 팔뚝을 끌어안고 올려다본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온 고양이를 닮았다.

"응? 안돼요?"

"그건 좀."

"왜요, 왜요..... 오빠는 저 싫어요?"

난감하다.

그렇다고 네 언니가 내연남이랑 짜고 나 죽이려고해서 내가 역으로 담궈버리려다가 그렘린한테 당해서 죽었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역시 괜히 엮였나.

그냥 금화나 조금 주고 헤어질까.

이런저런 고민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현경이 스스로 떨어졌다.

"혹시 언니 때문이에요?"

"..."

"언니는 예전부터 이랬다니까. 내가 좋아하는 건 다 먼저 갖고. 솔직히 이혼했으니까 언니 생각은 안 해도 될텐데... 이혼이 흠도 아니고."

"처제?"

"나도... 좋아했는데."

"..."

"됐어요. 이제와서 무슨 소리래. 나도 참... 먼저 갈게요!"

앞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무, 무슨 일이에요...?"

"다 들었으면서 뭘 물어봐."

"아, 아하하..."

손가락을 연신 꼼지락 거리는 걸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다.

"뭔데?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화성님. 여기 사람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으면 오빠, 동생이라고 스스럼 없이 부르더라고요."

"어? 아, 응. 그렇지."

뜬금없는 주제였다.

그러고보니 레아가 살던 곳은 중세 비슷한거라서 오빠가 아니라 오라버니라고 했으려나.

"그럼 저도 그렇게 불러도 될까요?"

"응?"

오빠라고?

"날?"

"네!"

"그치만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데... 오빠 보다는 아저씨 아닌가."

아니, 아저씨는 조금 상처받으니까 삼촌 정도? 아니지.

삼촌이 될 나이 차이는 또 아니다.

그렇다고 오빠라고 불리기엔 뭔가 낯간지럽다고 해야하나.

레아가 너무 어린 탓이다.

"아저씨라뇨, 전혀 아니에요!"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 않으려나."

"왜... 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잖아."

그리고 이제와서 호칭을 바꾸는 것도 뭔가 좀 그렇고.

하지만 생각해보니 언제까지 님자 붙여서 부르게 하는 것도 조금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한다.

뭐가 좋을까. 고민하고 있으니 조금 시무룩한 모습으로 땅만 보고 걷는 레아가 눈에 밟혔다.

'역시 님자 붙이던 게 그렇게 싫었던 거였나?'

아저씨를 오빠라고 부르고 싶어질 만큼? 그건 몰랐다.

역시 제대로 된 호칭을...

그때였다.

쿵-!

"헬뮤트다!!"

헬뮤트가 나타났다.

"메이스님!"

"아, 예."

저 사람들은 날 메이스라고 부르기로 했나보다.

"레아, 일단 가자."

"아, 넵!"

사냥은 순조로웠다.

한번 해본 헬뮤트를 두번 사냥하는 건 전보다 더 쉬웠다.

싸우면 싸울수록 합이 잘 맞는 레아와 나는 오거 길드의 사람들과 함께 헬뮤트는 금세 쓰러뜨렸다.

내가 외피를 부수면 레아가 찌른다.

마그마와 스모그가 꽤 위험하지만 몇번 싸우다보니 패턴도 외웠다.

마그마를 뿌리려고 할땐 목부근을 때리면 제대로 쏘지 못했고, 스모그를 만들땐 복부를 힘차게 때리면 콜록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싸우는 과정 속에서 그걸 눈치채자 사냥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이후로도 비슷했다.

헬뮤트가 나타나면 쓰러뜨리고, 지옥석을 나눴다. 어느새 사냥한 숫자가 다섯, 여섯을 넘어갈 때 즈음.

"잠시 쉬었다가 가죠! 저희는 식사할건데 함께 하시겠습니까?"

"그러죠."

지옥광산에서의 식사 시간이 찾아왔고, 난 처제에게 따로 불려갔다.

"왜? 나도 배고픈데."

"오빠, 생각해 봤어요?"

"뭘?"

"제가 누구 좋아했는지.... 알잖아요.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매달리게 할거야? 오빠 정말 나쁜 남자다..."

아련한 눈빛을 뿌려대는 처제를 보면서, 아니 전 처제를 보면서 난 한숨을 내쉬었다.

"날 좋아했었다고? 옛날부터?"

"응!"

"우리가 언제 처음으로 봤지?"

"그야 상견례 때죠."

"그때부터 날 좋아했었다는거야?"

"네, 부끄럽지만..."

참 이상하다.

그게 정상적인 일인가? 정상적인 일은 아닌 거 같은데 별거 아닌 듯 말해서 내가 다 혼란스럽다.

아니, 이상하다고 해야할까.

"그래? 이상하네."

"뭐가요?"

"그도 그럴게 그때 처제, 파티룸에서 다른 남자랑 헐벗고 있었잖아."

"네.....?"

우연히 배달갔던 파티룸.

문을 열어줬던 처제는 야한 속옷 한장만 입고 치킨을 받았다.

꽤 많은 남자와 여자 친구들이랑 있었는데 딱 봐도 썩 좋아보이는 그림은 아니었지 아마. 그 뒤에 여기서 뭘 하냐고 뭐라고 하면서 언니랑 결혼기념일 아니냐며 문전박대 당했다.

누굴 좋아한다는 여자가 할만한 일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 그건... 어렸잖아요...!"

그래, 어려서. 어려서 그럴 수 있다.

근데 난 어릴 때부터 그럴 수 있는 방탕한 사람이랑 엮이고 싶지 않다.

어려서 그럴 수 있으면, 늙어서도 그럴 수 있는 게 사람이니까.

처제 또한 전 와이프랑 똑같다.

하지만 상황은 똑같지 않을 것이다.

그때와 달리, 지금의 난 멍청한 호구가 아니니까.

과거의 인연 [3]

62화.

"어려서, 좋아하면 안될 사람을 좋아했으니까! 그게 마음 아파서 조금 기분 전환으로....."

"그렇구나."

뭐 그럴 수 있지, 이해는 안되지만.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고.'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려 해봤자 골치만 아프고 귀찮기만 한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마음 편하다.

배달 알바를 하다보면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누구도 같은 사람은 없다.

사람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들의 행동, 불편함 등을 모두 이해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그럴 수 있지.

또는 그런 사람인가보다하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게 좋다.

나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사람인데, 타인을 이해하려고 하는 거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지금에야 깨달았다는거에요! 언니랑 이혼한지도 꽤 됐고.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운명일 수 있잖아요!"

"그래, 그럴 수 있지."

"그, 그럼요! 그럼..."

"근데 난 처제를 한번도 마음에 품어본 적이 없어. 지금도 처제 고백이 난감하기만 하고."

"왜, 왜요...? 저 이쁘잖아요."

"그래, 이쁘지. 근데 이쁘다고 마음이 가는 건 아니잖아."

이쁘다고 과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솔직히 레아보다 안 이쁘다.

나이도 많고, 신분도 차이나고.

동행한다고 해도 도움도 안된다.

레아는 대체불가능한 힐러겸 전사이고, 과수원의 파수꾼들을 통솔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처제의 능력은 간단한 마법류 뿐이다.

소서리스의 마법서에 적혀있는 다양한 마법들이야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내게는 있으나 마나한 것들이다.

먼 미래엔 몰라도, 지금의 내 과수원은 마법사를 양성할 수 있는 열매를 맺게하지도 못하니까.

게다가 난 처제의 성격을 약간이나마 안다.

집안 막내로서 이쁨만 받고 자랐고, 제 얼굴이 이쁜걸 알아 어릴적부터 그걸 무기로 사용했던 철부지.

지금도 오거 길드에서 지내는 것보다 내게 붙는 게 더 수지타산이 맞겠다 싶어 이러는거겠지.

내가 10년만 어렸다면 여자에 눈이 돌아서 함께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자 하나 때문에 내 인생이 풍비박산 났었는데, 이제와서 그런 멍청한 짓을 또 할까.

이젠 하고 싶어도 못한다.

여자.

아니, 사람 자체를 제대로 신용하지 못하고 그럴 마음이 생기지도 않게 되어버렸으니까.

"이야기는 끝이지? 혹시 도움이 필요한거면 어느 정도는 도와줄게. 하지만 나도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함께하지는 못할 거 같아."

"하, 시발."

"..."

어이가 없다는 듯 제 머리를 쓸어내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존나 웃긴다 진짜... 형부 진짜 잘 나가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날 깐거야 지금?"

"처제."

"그러니까 시발, 언니한테 이혼당하고 돈이며 재산이며 다 뜯겼지. 후회하지마요. 난 분명 기회 줬어."

그때였다.

"꺄아아아악!!"

돌연 처제가 비명 지르며 자기 옷을 찢고 주저 앉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웅성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달려왔고 처제는 찢겨진 옷을 양팔로 가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뭐야?"

길드장 오거킥까지 오자 처제는 울먹이며 그에게로 달려가 안겼다.

"오빠, 형부가 내가 좋다면서 나를, 나를 막..... 아무리 언니랑 이혼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처제였던 사람한테 그럴 수가 있어요 형부!!"

아포칼립스 연기 대상이 있다면 처제한테 돌아가지 않았을까.

어쩜 사람이 저렇게 입에 침 하나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자 바로 다른 남자한테 매달려 엿 먹이는 모습까지.

'지 언니랑 똑같네.'

바람피고 내연남한테 들붙어서 나까지 죽이려 했던 전 와이프랑 크게 다른 게 없다.

역시 콩심은 데 콩나지 팥이 나지는 않는 것처럼 자매가 쌍으로 똑같다.

"힘좀 쎄다고 마음대로 여자를 핍박하면 쓰나? 사람이 덜 됐네 이거."

"그렇게 안 봤는데 쓰레기였네."

"어떻게 자기 처제한테....."

스무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단번에 둘러싸고 무기를 들었다.

대부분은 인상을 구겼지만 중간에 피식피식 웃는 사람도 있는 걸 보니 갑자기가 아니다. 이미 사전에 얘기가 된 내용인 듯 싶었다.

'난 분명 기회 줬어.'

그렇게 말했던 처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오거 길드.

애초에 그들은 날 그냥 내버려둘 이유가 없었다.

"이유가 뭡니까."

"이유? 무슨 이유?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 애인을 건드려놓고 이유는 무슨 놈의 이유."

오거킥의 애인? 찰싹 안겨 있는 꼬라지를 보니 그랬던 모양이다.

하기사.

처제 성격상 어중이떠중이한테 붙어 먹지는 않았겠지.

"게다가 당신, 우릴 무슨 병신인줄 아나본데, 자기 랭킹도 말하지 않는 놈이랑 뭘 믿고 끝까지 가? 그래도 돈은 꽤 있는 거 같던데. 얌전히 내놓으면 그래도 목숨은 살려주지. 당신도 여기서 죽고 싶진 않을 거 아냐. 서로 편하게 가자고. 아, 물론."

메이스만 사용했고 길안내하던 권투사는 혼수상태.

내가 누구인지 그들은 알수 없었다.

오거킥은 등 뒤를 손짓하며 쓰러져 있는 레아도 잊지 않았다.

"꽤 이쁘던데. 네 동료는 우리가 잘 써줄테니까 걱정하지말고."

그들이 건넨 스프를 먹고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독인가?"

"간단한 마비약이야.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고. 얼마 안 넣었으니까. 잘 써먹어야 되는데 흠집 나면 안되잖아?"

꽤 익숙한 듯 말하는 모습을 보니 한층 안심이 된다.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광산.

있는 건 더위와 광물. 그리고 헬뮤트만이 자리한 곳.

누구 하나 죽어나가도 아무도 모르는 곳이다.

확실히 이런 곳에서는 방심하는 사람 잘못이고, 당하는 놈이 머저리다.

그리고 난 이곳에서 명백히 머저리였다.

"처제."

"왜요? 형부?"

"내가 한가지 후회하고 있는 일이 있어. 하지만 나도 정확하게 뭘 후회하는지 몰랐거든."

"뭔 소리래 갑자기."

근데 이제는 알거 같다.

날 죽이려 했던 전 와이프와 내연남은 몰래 우리집에 들어왔다.

내 사망 보험금을 노릴 겸, 날 죽이려고 했던 거 같다.

하지만 내연남은 얼굴만 뺀질거리는 양아치 놈이었고 힘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난 그들을 제압하고 고삐 뿔린 망아지처럼 년놈들을 캐리어에 넣어 무인도로 향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그렘린이 나타나 그들을 죽였을 때.

내 안에 뭔가가 남아있었다.

그게 뭘까.

왜 자꾸 거슬리는걸까 했는데.

이제 알겠다. 아쉬움이었다.

"그 연놈들을 내 손으로 직접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두고두고 내 한이었어."

일명 막타 뺏긴 찝찝함.

"뭐?"

"네 언니. 죽었다는 뜻이야."

두 눈이 동그랗게 변해 놀라는 때.

난 인벤토리에서 투구를 하나 썼다.

열병의 물소뼈 투구.

"지독한 열병이 발동됩니다."

"페스틱 사드가 열병을 타고 흐릅니다."

그들과 내 거리는 일미터.

최대 삼백미터까지 흐르는 열병의 저주는 내 임의로 조정이 가능하다.

저기 쓰러져 있는 레아에게까지는 닿지 않도록.

고맙게도 오거킥의 길드원들 대부분이 내 쪽으로 몰려있는 상태.

갈루란타의 버프를 받은 오크들도 내 근처까지 오면 두통이 심해 머리를 부여잡았다.

나를 중심으로 퍼져가는 지독한 열병은 근원지에 다가가면 갈수록 저주의 강도는 더욱 강해진다. 거기에 더해 페스틱 사드까지 덧 씌웠다.

내가 굳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열병과 독은 강력한 시너지를 이뤄 그들의 몸속을 침투한다.

"커헉!"

"으윽! 머리가!"

"코피가.... 왜 갑자기 코피가!!"

"그, 투구....!"

"데, 데몬시드....!!"

지독한 열병과 페스틱사드의 시너지는 뇌창도 어쩌지 못했다.

그런데 하물며 평균 레벨 2밖에 안되는 파티가 당해낼 수 있을까?

구멍이란 구멍에서 전부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파티원들을 보며 오거킥과 처제는 사색이 되었다.

내 물소뼈 투구를 보고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형부! 잘못했어! 잘못했다구! 내가, 내가 잘할게! 이딴 새끼 버리고 형부가 하라는 건 다 할... 우웩!"

"데몬시드! 잠시만! 협상! 그래 협상을 하자!! 우웩!!"

컥컥거리며 검은 피를 토한다.

털썩 쓰러지는 처제를 보며 난 작게 미소지었다.

쿵쿵.

소란 때문인지 헬뮤트가 나타났다.

점점 다가오는 헬뮤트.

독에 중독된 길드원들은 도망칠 수 없다. 난 쓰러져 있는 레아를 안아 들며 처제에게 말했다.

"언니 만나면 안부 전해줘."

"오빠...! 오빠!! 시, 싫어.... 싫어. 싫어어어어!!"

콰직.

*

스르륵.

눈꺼풀을 뜬 레아는 한참이나 커다란 눈망울을 꿈뻑거렸다.

"이제 괜찮아?"

"네? 아.... 제가 왜.... 누워있죠?"

"놈들이 독을 썼어. 큰일날 뻔 했다. 용과 많이 안 먹었지?"

"아..... 네. 먹는다고 먹었는데 독 내성이 잘 오르지 않아서요. 근력이랑 건강 위주로 올렸어요. 제 기프트는 건강이 높아야 좋은거라."

"하지만 이제는 용과도 먹자. 독 내성을 길러야 이런 일도 안 당할테고 무력하게 당하는 일도 없을테니까."

점점 가면 갈수록 독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질 일들만 생긴다.

인간은 독 앞에 이렇게도 무력하다.

그렇게 강해진 레아도 음식에 탄 마비독 하나로 이렇게 되니까.

"네, 죄송해요."

"아니야. 나야말로 미안해. 험한 꼴을 당하게 할 뻔 했으니까."

"그 사람들은..."

"죽었어."

"네..."

"찬양의 항아리에 정이 쌓입니다."

"찬양의 항아리에 정이 쌓입니다."

항아리에 정도 쌓아주고.

이들이 가지고 있던 전리품도 전부 털어서 경매장에 올리면 얼추 400금 정도는 나올 듯 싶다.

"금화는 얼마 안 가지고 있네. 890금인가. 무기나 갑옷은 거의 싸구려고 딱히 뭐 건질 건 없네."

하지만 덕분에 내 수중에 있는 지옥석은 1012개 정도가 됐다.

보상 상자에 있던 것과 사냥한 것을 합치니 겨우 천개를 넘겼다.

알레이슈 하나를 살수 있는 수량.

"어떡할래?"

첫날이다.

많은 일도 있었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낫겠지.

레아는 잠시 일어나 스트레칭하며 자기 몸을 점검하더니 답했다.

"조금 더 갈까요?"

"어디서든 포탈은 쓸 수 있으니까. 상관은 없어. 괜찮겠어?"

"네! 조금 더 가고 싶어요."

"컨디션만 괜찮다면 상관은 없지."

썩 괜찮아 보이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일까.

레아는 더 의욕이 붙은 거 같았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타이탄을 쓰기엔 지금이 적기 같아서요."

"그렇군."

타이탄.

생명력이 70% 이하일때 신체 능력이 두배로 상승하는 스킬.

그 광전사 스킬을 써볼 타이밍이 좀처럼 나지 않았는데, 마비독 때문에 생명력이 좀 내려간 모양이다.

"무리하지는 말고."

"네, 괜찮아요!"

쓰러진 시체들을 대충 정리하고 광산을 걷자 어김없이 헬뮤트 한마리가 어슬렁거리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저 혼자 해봐도 될까요?"

"괜찮겠어?"

"메이스만 빌려주시면 될거 같아요. 한번 해보고 싶어요!"

"나야 상관없지만. 위험하면 끼어들테니까."

"넵!"

메이스를 건네받은 레아는 잠깐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제가 혼자 잡으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될까요?"

"부탁?"

뜬금없다면 뜬금없다.

무슨 부탁을 하려고 저럴까.

궁금해서 물어보자, 레아는 아주 해맑게 말했다.

"뭔데?"

"오빠라고 부르고 싶어요!"

그리고 난.

"그건 좀."

확실하게 거절했다.

오빠 소리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이국의 씨앗

6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