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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와이번을 대충 정리하고 난 저녁.

난 레아와 함께 저녁 준비를 했다.

저녁 메뉴는 당연히 삼겹살.

수량이 별로 없고 가격도 꽤 비쌌지만 그래봤자 내가 걱정할 정도의 금액은 아니었다.

[네피림 거래소] (삼겹살) 검색

[옛날 삼겹살 구이용 (냉동) 1Kg] - 12금

[벌집 삼겹살 600g (냉동)] - 15금

[대패 삼겹살 1kg (냉동)] - 13금

[무항생제 한돈, 목살 1kg] - 21금

목살이랑 냉삼 몇개를 샀다.

역시 삼겹살은 볏짚이지.

대패는 영 씹는 맛이 없으니 벌집 삼겹살이랑 목살을 사고 다음은 상추와 깻잎. 그리고 잘 익은 김치를 샀다. 삼겹살에 김치가 빠지면 쓰나.

적당히 3금에 올라간 소주도 한병 사주도록 한다.

이것들 전부가 꼴랑 50금도 안된다.

대장간 들어가서 한시간정도 망치만 두들겨도 천금정도 벌다보니, 이정도 지출은 별로 아깝지도 않았다.

"여기에 굽는거에요?"

"응, 원래 솥뚜껑은 삼겹살을 굽는 용도거든."

"정말요? 그냥 뚜껑아니었어요?"

후훗.

K-고기구이를 모르는 공주님에게 삼겹살의 진의를 맛 보여줄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난다.

가볍게 공사하다 남은 벽돌을 쌓고 그 위에 솥뚜껑을 올린다.

와이번 때문에 난리나서 남는 게 장작이다.

화력은 쌔면 쌜수록 좋겠지.

솥뚜껑이 달아오르려면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니까.

후우-! 후우-!

바람을 불어 넣으니 금세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이쯤이면 됐나."

고작 고기 굽는거지만 레아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쳐다보고 있다.

K-아저씨로서 이럴 때 멋진 모습을 보여줘서 K-문화를 주입해야 진정한 애국자라 할 수 있겠지.

달궈진 솥뚜껑.

집게로 집은 두툼한 삼겹살을 올려 놓는다.

치이이익!!

"사운드 미쳤네."

"소리만 들어도 맛있어요!"

"진짜로."

진짜 소리만 들었는데 군침이 질질 흐른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

삼겹살을 차례차례 올린다.

치익, 치이익!

"이건 뭐에요? 상추랑 깻잎은 싸먹는거라고 듣기는 했는데."

초록색의 빨대처럼 생긴 줄기.

저것의 이름은 다름아닌 미나리.

"미나리라고 구워먹으면 맛있어."

미나리의 향긋함은 구워먹으면 이루 말할 수 없다.

"자, 봐바."

고기를 한번 더 뒤집어주고 가위로 싹뚝싹뚝 자른다.

날개처럼 쫘악 펼쳐놓으니 노릇노릇해진 삼겹살이 장관이다.

그 안쪽에 미나리를 올려 놓는다.

삼겹살 기름이 솥뚜껑의 움푹 파여진 곳으로 이동해서 미나리들이 둥둥 떠다녔다.

하지만 이때를 위해 산 게 있지.

"삼겹살엔 김치가 빠져선 안돼."

"김치요? 이 피처럼 빨간풀이요?"

피처럼 빨간 풀이라니.

한국에선 신성시하는 k-푸드를 감히 무엄하게!

"김치는 생으로 먹어도 맛있지만 삼겹살을 먹을 땐 이렇게 해야 해."

삼겹살에서 나온 동물성 기름.

그것이 솥뚜껑 한가운데에 한강처럼 모였다. 이곳에 침투할 수 있는 건 전 세계의 음식을 통들어 오직 김치뿐이리라!

치이이이익!!

"지린다."

묵은지 한포기를 그대로 삼겹살 기름에 투하.

순식간에 코끝과 혀끝의 침샘을 자극하는 향이 올라온다.

더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

"먹자. 빨리!"

"네, 넵!"

레아를 재촉해 앉게 하고 장작을 조금 빼낸 뒤, 씻어놓은 상추쌈을 하나하나 올리도록 한다.

와이번의 용과는 이미 잘라서 따로 세팅해놓은지 오래.

우선 순정으로 고기만.

"음!"

가볍게 소금과 후추로만 간을 한 벌집 삼겹살 구이.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하면서도 돼지의 적당히 진한 고기맛이 풍미로 돌아오 코속을 때리고 넘어간다.

레아도 내가 그냥 먹는 걸 보고는 우선은 고기만 입에 넣는다.

어색한 젓가락질이지만 떨어뜨리지 않고 착실하게 입 속에 넣었다.

"으음!! 맛있허요!"

"다음은 이렇게야."

상추를 올리고 깻잎도 올린다.

솔직히 상추쌈은 개인취향이다.

깻잎 향이 너무 강해서 싫다면 상추만 먹고 돼지 누린내가 좀 난다 싶으면 깻잎을 먹어주면 좋다.

물론, 난 둘다 먹는다.

상추와 깻잎.

그 위에 삼겹살을 두점 올리고 김치와 함께 구웠던 미나리를 올린다.

잘 구워진 미나리의 향긋함이 벌써부터 코를 자극한다.

본래라면 여기에 양파절임이나 쌈장을 올렷겠지만 오늘은 제외한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와이번의 짭잘한 용과가 있기 때문이다.

"용과를 올린다. 실시!"

"실시!"

잘 자른 용과를 올리고 그 다음 화룡정점인 김치까지 올린다.

"와, 미쳤다 진짜."

이 훌륭한 자태를 보라.

아포칼립스가 터진지 한달이 되가는 와중에 먹는 삼겹살이라니.

폐허가 된 도심 속에서 먹는 삼겹살도 낭만있겠지만 찬바람 부는 달밤에 무인도에서 먹는 삼겹살 또한 운치로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먹자."

"넵!"

한쌈 크게 입안에 가득 넣는다.

씹히지 않을 정도로 쌈을 크게 싸서인지 겨우겨우 이빨에 안착시켜 씹자 깜짝 놀랐다.

삼겹살의 육즙이 입안에서 난리가 났다.

촤악 터지면서 삼겹살의 맛과 향이 미나리와 김치로 바톤이 이어진다.

"와아..."

"음! 우움!"

레아도 삼겹살 맛에 놀랐는지 다람쥐처럼 꼭꼭 씹으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러다가 조금 매운지 물을 찾았는데 아마 김치 때문인 듯 했다.

하지만 금세 매운맛에 익숙해졌는지 바로바로 쌈을 싸먹기 시작했다.

삼겹살을 네덩이나 구웠는데 벌써 싸그리 사라지는 걸 보자마자, 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기를 더 구웠다. 너무 당연하게 굽길래 조금 당황해서 쳐다봤더니 입을 가린다.

"왜, 왜요?"

"아니야."

"제가 맛있게 구워드릴게요!"

"기대할게."

고기는 레아에게 맡겨두고 난 소주잔에 소주를 따랐다.

꼴꼴꼴, 따라지는 소주를 보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오늘은 와이번 때문에 힘을 쓰기도 했으니 괜찮겠지.

가볍게 한입 털어넣자 알싸한 쓴맛이 입안의 기름기를 씻어준다.

"크으."

이거지, 이 맛이지.

배달 알바할 때는 일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게임하다 잠만자고 있는 와이프가 깨기라도 할까봐 고기는 커녕, 대충 밑반찬에 끼니 떼우고 새우깡에 소주나 먹던 때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이 행복했다.

"자, 자요."

"헉!"

기다렸다는 듯 레아가 쌈을 싸서 내게 건넸다. 이 불여우 스킬은 대체 어디서 체득한거지? 본능인가?

"잡지에서 이런 거 하던데..."

"잡지? 아..."

그러고보니.

커뮤니티나 거래소에서 책을 사서 보는 가 싶더니 저런 기술을 습득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언제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 생각해보니 중세시대 사람인데 말까지 통한다.

그건 그냥 알아서 통역이 되는건가? 번역이 되는거고?

'그런가보지 뭐.'

뭔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세상이니 그럴 수 있다. 신경쓰지말고 레아가 싸준 쌈이나 먹기로 했다.

"이것도 드신다고해서 넣었어요."

"고마어."

기름진 상추쌈 사이.

미나리와 김치의 조화가 맞물리는 그 자그마한 빈틈의 실을 파고든 생마늘의 알싸함이 혀를 정복한다.

마늘의 민족인 k-아저씨라면 응당 고기쌈엔 마늘이 들어가야지.

아암, 그렇고말고.

훌륭한 예술작품과도 같은 고기쌈 이후엔 또 소주가 빠질 수 없다.

크으.

그렇게 꼬리를 문 뱀처럼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식사가 끝나고.

"좋다."

뒷정리는 나중으로 미루고 쏟아질 뜻 수많은 별을 바라보며 용과를 안주 삼아 남은 소주를 홀짝였다.

알딸딸하게 올라온 취기가 좋다.

볼살이 내것 아닌 기분을 지닌 채 멍하니 올려다본 하늘은 적당히 서늘해서 좋았다.

모든 날이 오늘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이 흥겨운 분위기를 깨는 레아의 한마디가 참 미웠다.

불별도의 산장 앞.

푹신한 흔들 의자에 앉으며 타다 남은 장작의 열기를 쬐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레아의 말은 카오스를 뜻했다.

이런저런 일을 하고, 겪다보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

카오스 게이트.

또 힘겨운 싸움을 할 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무인도에서 생활한지 벌써 한달이 다 되었고 앞으로 일주일이면 그날 말했던 카오스가 열린다.

카오스 게이트가 열리고 네피림들은 차원석을 공격하는 악마들을 막기 위해 또 죽어나가겠지.

"괜찮을거에요."

내 표정이 무거워져서 그랬을까.

레아는 조금 취기가 오른 내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었다.

"화성님이 또 모두를 구하실거잖아요. 저번처럼."

"그거야 모를 일이지."

내가 남들보다 강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게 모두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건 아니다.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나는 결국 인간이다. 내가 죽지 않는다고, 남들의 죽음까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물론 지금이야 괜찮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까지 슬퍼할 여유는 내게 없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더 흘러서 친한 동료들이 생기고 그들에게 정을 주고 추억을 만들었을 때.

전장에서 그 동료가 죽게되는 일이 생기면 어떨까.

난 아마 굉장히 슬퍼할거다.

그게 싫다.

슬퍼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정 주고 싶지도 않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준 정으로 슬프고 싶지 않았다.

밤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는 레아의 머리는 붉었다.

그녀의 눈 또한 붉었다.

이 땅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붉음은 오늘따라 유달리 이뻐보였다.

취기 오른 볼에 닿는 밤바람은 시원했고, 숨이 남은 장작은 따스했다.

내 시선을 알아차려서일까.

밤하늘을 보던 그녀의 고개가 슬쩍 나를 향했다. 이내 싱긋 미소짓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질적이었던 그녀의 적발과 눈이 오늘따라 썩 밤하늘과 어울렸다.

"... 김치, 맛있었지."

"김치요? 네. 맛있었어요."

뜬금없이 김치가 튀어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의 머리가 김치처럼 붉어서는 아니겠지.

해 넘어간 밤처럼 깊어져만 가는 멸망기에 레아처럼 아리따운 여인과 함께하는 동거 생활이다.

남자가 고자가 아니고서야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게 이상하겠지.

내 나이가 조금만 어렸더라도 지금처럼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거다.

열가지중 하나만 맞아도 천생연분이라 생각하며 연애를 시작했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열가지중 하나만 안 맞아도 뒷걸음질 치는 게 내 나이다.

게다가 난 이혼까지 했다.

한번 갔다온 남자의 감정은 좀비 영화의 낡은 엔진과 같다.

쉽게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인간의 감정은 마모된다.

학창시절의 첫사랑.

스물 초반의 풋사랑.

그리고 결혼 적령기의 참사랑.

이 셋을 겪고나면 사람의 감정은 녹슬고 마모되서 좀처럼 쉽게 엔진이 뛰지 않는다.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다.

웬만한 일은 다 겪어서 뛸 심장이 없으니까.

이혼 후, 친구들 성화에 다른 여자를 한번 만나본 적이 있다.

좋은 사람이었고 친절했다.

별볼일 없는 내 이야기에 쉽게 웃어주고 날 배려해주는 따뜻한 여자였다. 그러나 내 심장은 뛰지 않았다.

그저 뜨뜻 미지근했다.

일종의 죄책감 때문인지 뭔지, 미안해서 사랑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처럼 안되더라.

그때 알았다.

내 인생에서 심장은 이제 멈췄다고.

B급 좀비영화의 자동차 엔진처럼.

차 키를 꽂아도, 돌려도 흔들어도 얄팍한 시동음이 희망만 안겨주다 결국 뛰지 않는 엔진으로 조롱하듯.

'취햇나.'

술 기운에 취했을까.

별 생각을 다 했다.

"배 부르다."

배가 불렀다. 오늘은 배가 불러서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를 하기엔 배가 너무 불러서 움직이기도 힘들고 귀찮음이 강해졌다.

그래, 배가 불렀다.

단지 그거 뿐이다.

농사꾼 불별

46화.

기부도의 해변가.

동쪽을 바라보는 내 눈은 마치 매처럼 날카롭게 수평선을 노려봤다.

카이삭스의 표식.

아마 기부도에서 시드로긴으로 능력치 도핑해서 창을 날리면 얼추 뭍까지 닿지 않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플라이를 써서 날아가다 던져도 된다.

그걸로도 모자라다면 던지는 와중에 표식을 써서 무한 이동을 하면 얼추 뭍으로 가는 건 이제 어렵지 않다.

게다가 내게는 자아잔티의 눈.

레아가 선물한 브로치에는 시야를 더 멀리 볼 수 있는 내장 스킬이 붙은 [내다보는 눈]까지 있다. 이 스킬을 사용하면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멀리까지 볼 수 있게 해준다.

마음만 먹으면 기부도에서 화성시까지도 투창이 가능하다는 소리.

물론 시드로긴으로 펌핑 좀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렇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있게 된거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한 단어가 꽃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굳이?"

굳이라는 꽃이.

왜냐면 굳이 갈 이유가 없다.

웬만한건 거래소에서 사면 되다보니 그럴 이유가 더더욱 없다.

치익!

거래소에서 산 차가운 콜라를 한입 마시고는 시원하게 트림했다.

"거래소가 좋긴 좋네. 배달비도 안 받고."

클릭 몇번이면 먹고 싶은 거, 필요한 물품을 인벤토리로 옮겨다주니 이 어찌 좋지 않으랴.

게다가 배달비도 받지 않는다.

그야말로 갓 딜리버리.

"거래소가 있어서 더욱 더 뭍으로 나갈 이유가 없다..."

벌써 한달 째다.

무인도에서 생활한 지.

웬만한 건 다 거래소에서 구하고 직접 만들고하다보니 이곳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만든 하나의 낙원이랄까.

레아는 그램과 돌아다니며 심심하면 검술을 연습하고 도끼들고 미개척지역의 나무를 벤다.

난 늘어지게 누워있다가 레아 도끼 소리에 눈 뜨고는 입가심 삼아 악과를 먹고 잠에서 깬다.

데몬시드에서 자라난 열매가 매일매일 자라는 것도 아니다보니 평소에는 그닥 할일도 없다. 수확해놓은 과일을 먹거나 거래소에서 산 음식들로 요리를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요 일주일을 그렇게 지내기만 한 건 아니다.

간간히 서펜트들이 헤엄치는 곳을 살피기도 했고 몇마리 잡기도 했다.

서펜트는 예상대로 이빨에서 굉장한 맹독이 흘러나왔는데, 놈들을 잡을 때마다 페스틱사드로 독을 저장했다.

아마 이제 웬만한 놈들은 페스틱 사드의 독으로도 금방 죽어버리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보다 서펜트의 독이 강해서 와이번도 쉽게 사냥할 수 있을 거다.

"근데 저 새끼들이 진짜 돌았나."

호시탐탐 과수원을 노리는 와이번.

놈들은 며칠전에 나한테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날의 복수를 하려는 것처럼 더 많은 와이번들이 간간히 날아왔다. 이렇다보니 내가 뭍으로 나가지 못하는거다.

정확하게는 나갈 겨를이 없다.

"대책이 필요하긴 해. 저 놈들 열 받은 거 같아."

"제가 봐도 그런 거 같아요."

요 며칠 안 보인다 했는데 어느날을 기점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내 예상대로 와이번의 둥지가 이 근처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뺀질나게 보일 수가 없으니까.

"흠..."

인벤토리에서 창 하나를 꺼냈다.

흉악하게도 생긴 하나의 거창.

[드레커니의 용살창] (unique)

-용살자 드레커니가 애용했던 창.

〈더 강한 관통력〉〈더 강한 폭발력〉

--착용제한--

〔근력 제한 40〕x

〔용의 피를 뒤집어 쓴 자〕o

착용제한이 있는 무기는 처음이다.

근력이 40이 되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내 근력은 33이라 용살창을 쓰기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7이면 금방 올릴 수 있기도 한데."

애초에 투창을 주로하는 편이다보니 창이 하나 더 생긴 건 오히려 좋다.

강화시키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테니까.

게다가.

"폭발력이라는 거, 폭탄 터지듯 터진다는 거겠지?"

"그렇지 않을까요. 제가 있던 세계에서도 이런 종류의 무기가 있다고 들어본 적 있어요. 저희쪽에서는 아티팩트라고 했는데..."

폭발력.

이 문구가 내 호기심을 잡아 당겼다.

지금은 한창 불타는 수식어를 갖기 위해서 기사왕 오그의 열매만 먹다시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되면 대전사 그렘린의 열매를 다시 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억지로 쓰려고 해도 안되니까.'

억지로 쓰면 쓰는데 너무 무거워서 제대로 들 수가 없다.

지금 내 수준의 근력이면 수백년 된 나무 한그루도 맨손으로 뽑을 정도로 힘이 강한편인데, 이 어마어마하게 큰 거창은 들수조차 없다.

참고로 현재 랭킹 3위를 유지하고 있는 강철군주의 근력은 10이다.

며칠 전에 궁금해서 물어봤었다.

하도 지난번에 빚을 갚고 싶다고 뭐라뭐라하길래 능력치를 좀 물어봤었는데 생각했던 거 이상으로 약했다.

능력치의 평균이 이제 겨우 10을 넘기거나 넘기지 못한 것도 많았다.

너무 약해서 어이가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강철은 랭킹 3위였다.

당연히 그 밑의 사람들은 강철보다 더 능력치가 낮다는 말이다.

"내 능력이 사기긴 해."

가지고 있는 장비의 옵션이나 데몬시드로 만든 악마의 열매.

그것으로 무한정 상승한 능력치가 사기는 사기였다.

솔직히 지금 내 스펙이면 웬만한 스킬은 쓰지 않고도 동 레벨대의 악마들은 쉽게 때려 잡는다.

악마들의 레벨표는 커뮤니티의 관찰자 글을 보면 나와있다.

[데몬 티어표]

좀비 lv.1 고블린 lv.1

해골병사 lv.2 데몬이글 lv.2

늑대 lv.2 구울 lv.2

그렘린 lv.3 대주술사 lv.3

화돈 lv.4 가고일 lv.4

타락한 숲 lv.4

검은산양 lv.5

웨어울프 lv.6

미노타우르스 lv.7

서펜트 lv. 7

와이번 lv. 7

.

.

.

"이 사람은 대체 뭘 하고 다니는데 이렇게 많이 알지?"

신기한 노릇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본적도 없는 악마들을 모조리 만나본 모양이다.

그들의 레벨이나 간단한 습성과 외양에 대한 묘사들도 적혀 있었다.

그중에서는 레벨이 10에 해당하는 것도 있었는데, 관찰자는 유독 그 놈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원래라면 지금 시기에는 절대로 쓰지 못하는 창이다 이거지..."

하지만.

시드로긴으로 근력 능력치를 펌핑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용할 수 있어.'

용살창의 위력을 시험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

농사 망치는 까마귀떼 같은 와이번들을 시원하게 폭죽 터트리듯 터트려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와이번의 최초업적으로 나온 아이템이 놈들을 잡는 데 수월한 장비템이 확실할 테니까.

"하지만 이게 근본적인 해결은 안되니까 문제라는건데..."

"결국 와이번의 둥지를 찾아야 해결이 되겠죠...?"

"그치. 근데 그걸 모른다는 게 첫째고 알아낼 방법도 없다는게 둘째. 그리고 셋째는 이제 며칠 뒤면 카오스 게이트가 열린다는 거지."

"헉! 그렇네요...!"

와이번들이 깔짝거리는 건 스트레스받지만 지금으로서는 대안이 없다.

그러니 우선은 더 급한 일.

내 과수원을 망치는 와이번들이 열받기는 하다만 놈들도 나한테 호되게 당해서 섣불리 다가오진 않는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릴 뿐이지.

"몸이 두개라도 바쁜데 말이지."

카오스는 카오스대로 준비를 해야했고, 과수원은 과수원대로 이래저래 바쁜 일의 연속이었다.

'그래프트.'

데몬시드의 스킬 선택지에 있던 그래프트는 이른바 작물의 접목에 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접목이 뭔가.

나무와 나무를 접하여 하나로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 생각해봤다.

'꼭 스킬로 배워야만 쓸수 있나?'

의문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뭐 뺄 거 있나.

당장 해봤다.

솔직히 접목에 관한 지식은 몇가지 없어서 우선 고블린 나무와 그렘린 나무의 가지를 잘라서 접붙였다.

말 그대로 그냥 잘라서 서로 다른 가지를 접붙인 것이다.

물론 이건 실패했다.

"나무가지 하나 다른걸 붙인다고 뭐가 다른게 나오진 않겠지."

가지가 안된다면 중심을 이루고 있는 몸통 부분은 어떨까.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묘목 수준의 나무들도 있다. 씨를 뿌리고 성장하고 있는 도중의 고블렌 나무와 그렘린 나무의 몸통을 베어 서로를 바꾸어 놓았다.

붕대를 감아주고 물을 듬뿍 줬다.

여기서 찬양자의 항아리로 물을 준다면 급성장을 이루겠지.

"서로 붙을 시간 정도는 줘야겠지."

이번만큼은 신중을 기해야 할 일.

솔직히 급한 일도 아니라서 일단은 그냥 두기로 했다.

"데몬시드는 결국 악마의 혼을 작물로 만들고 놈들의 힘을 열매로 맺게하는 능력이야."

말 그대로 악마의 힘을 뽑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데몬시드다.

서로 다른 두 힘을 하나로 접붙이는 일이 쉽게 되지는 않을거다.

된다하더라도 고블린과 그렘린을 합쳐놔서 더 열화된 열매가 나올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성급하게 될 일은 아니다.

"뭐 이건 이정도로 하고."

중요한건 이게 아니다.

내게 중요한 건 카오스다.

『소지금 4713 금화』

일주일.

돈을 모아야 했다.

[나만의 상점]

-5일 1시간 55분 남음.

[브릴뤠의 빵x10] - 100금화

[푸른 성수x10] - 150금화

[포탈의 서] - 999금화

[오스칼의 인형] - 3579금화

[열병의 투구] - 6842금화

[미확인 스킬북] - 11111금화-품절

"열병의 투구까지는 이천금만 모으면 되고... 혹시 모르니까 오스칼의 인형도 사서 나쁠 건 없어."

오스칼의 인형이 후순위로 뒤쳐졌다고는 하지만 여벌의 목숨을 하나 더 갖게 해주는 아이템이다.

혹시 모르니 구비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오스 게이트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나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잘 자랐네."

해골기사의 씨앗의 성장기간은 23일. 꽤 짧은 기간인데 어느덧 벌써 수확의 때가 다가왔다.

내가 불별도랑 기부도에 심어둔 해골 씨앗이 꽤 많다.

쌍성의 거울로 합성까지 해놓은 해골기사의 씨앗은 +6으로 된 열매들이 잔뜩 열려 있었으니까.

[해골기사의 열매+6]x6302

[해골기사의 열매]x163542

자그마치 해골기사 천그루.

해골기사의 열매는 오디나 다름 없는 모습이기에 나무 한그루에 적게는 백개에서 많게는 삼백개도 열린다.

크기가 손톱만한 녀석이라 그렇다.

+6으로 만들어 놓은 녀석은 내가 먹고 나머지는 다 팔 생각이다.

자그마치 16만개.

10개당 1금에 올려도 얼마야 이게.

자그마치 1만 6천금이다.

솔직히 0.001 오르는걸 개당 1금에 파는 건 양심없는 짓이다.

나, 이래뵈도 양심있는 농사꾼이다.

게다가 오디는 지하 냉동고에 넣어도 금방 상한다. 빨리 안 먹으면 썩으니까 그냥 싼값에 파는 게 낫다.

어차피 한달도 안되서 다시 열릴텐데 뭐.

"지렸다..."

이게 바로 창조 경제?

[네피림 거래소]

[악마의 오디] - 10개당 1금

판매자: 불별

"지리긴하네."

거래소에 올리자마자 너도나도 할거 없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악마의 오디 100개가 판매되었습니다. 10 금화를 획득합니다."

"악마의 오디 10개가 판매되었습니다. 1 금화를 획득합니다."

"악마의 오디 1000개가 판매되었습니다. 100 금화를 획득합니다."

요동치게 울려퍼지는 판매 알람.

마치 영혼을 두드리는 울림이었다.

"이게 바로 농사꾼의 보람인가."

불티나게 팔리는 걸 보니 내가 뿌듯하다. 그동안 얼마나 고단했던가.

무인도에 갇혀서 그렘린한테 죽을 뻔하고, 그 뒤로도 여기저기 방해하는 개자식들 때문에...

"가만 생각해보니 와이번 말고는 딱히 날 괴롭힌 놈들이 없긴하네."

뭐 어떠랴.

씨앗을 심고 개고생해서 키운 건 매한가지 아니던가.

말로는 쉽지 매일매일 나무들 상태를 확인하고 물을 주고 해충들을 제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귀찮은 일들이야 그렘린들이 해준다고해도 나무가 병에 들거나 할 때면 내가 직접 농약도 치고 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렘린의 열매도 곧인가."

해골기사의 열매 뿐만이 아니다.

수확의 때가 다가온 건 간간히 잡아서 심었던 고블린 열매도 마찬가지였고 그렘린 나무도 슬슬 수확하기 좋을 정도로 열매가 농익고 있다.

이셋은 모드 23일에서 30일마다 열매가 자라나기 때문이었다.

합성된 건 내가 먹고 나머지는 그램이나 레아를 주고 그마저도 남는 건 팔려고 한다.

"카오스니까..."

전체적으로 랭커들의 능력치가 조금은 더 높아야 한다.

그래야 혹시라도 모를 불상사를 대비할 수 있을테니까.

물론 내 주머니도 두둑하게 채우고.

슬쩍 소지금을 보자.

『소지금 15024 금화』

"벌써 이만큼 팔렸다고...?"

한동안 망치질은 안 해도 될거 같다.

돈은 넘치듯 많았으니까.

남은 건 카오스를 준비하는 것 뿐.

녹색의 카오스 [1]

47화.

한적한 오후.

악마들의 침공과 카오스 이후.

대한민국은 나름대로의 힘과 집단을 이루며 악마들에게 대항했다.

아직도 악마에게 붙잡혀 좀비가 되거나 잡아 먹히는 이들은 많았으나 이전처럼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다.

커뮤니티에서는 활발하게 랭커들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뽐내고 공략집을 만들어 인기글을 달성했다.

하위 순위의 네피림들은 그걸 보며 악마들을 잡고 힘을 키웠다.

처음에는 작은 파티로, 이후에는 수십명으로 이루어진 공대가 되었고 후에는 지역구의 집단을 이뤘다.

약간의 안정을 찾게되니 랭커들은 몸이 달았다.

한국인이 어떤 족속인가.

배달의 민족이며 E스포츠 강자로 떠올랐던 성격 급한 놈들이 아니던가.

작금의 시대가 되었어도 랭커들이란 자들은 더 효율적인 사냥.

효율적으로 강해지는 법을 찾았다.

그래야만 생존율을 올리면서도 지금 시대에서 도태되지 않는 강자로 사람들의 위에 군림할 수 있을테니까.

각자의 이유로 인하여 랭커들은 강해지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하, 이 새끼 존나 까부네."

"뭔데."

"아니 나 620위인데 621위새끼 존나 이악물고 나 재낄려고 한다니까? 잠도 줄이면서 사냥하나 진짜."

"크크큭, 미친놈. 순위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데."

"620위라고 하면 이쁜이들이 껌뻑 죽어 인마."

옆구리를 툭툭 치는 동료의 말을 들으며 큭큭 웃는다.

사내의 말대로 누구나 악마와의 싸움을 달가워하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친구와 가족과 연인을 잃은 사람은 존재했고 그들에게 악마란 곧 자신에게 올 죽음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듯 그들에겐 악마가 두려웠고 악마를 때려잡는 랭커들은 당연히 그들의 호감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

힘 없는 자, 싸우는 걸 택하지 않은 자들은 강한 힘에게 의탁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개중에는 더 강해지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해 같은 인간을도 해치는 자가 있었고, 사명감을 갖고 악마만을 퇴치하려 제 몸을 불태우는 촛불도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성장 한계에 부딪쳐 오기 시작할 때.

아는 사람만 아는 물건이 있다.

[야 너네 오디 먹어본 사람?]

-나 랭킹 100위 오거킥인데 그거 또 안파냐? 진짜 개 혜자던데

네피림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감자로 달궈졌던 그것.

악마의 오디.

[원피스는 실존했다.]

[오디 또 안 뿌리나?]

-진짜 개혜자였는데 아니 불별 새끼 이런거 어떻게 만든건지 모르겠네. 나한테 제발 와! 내가 책임지고 키워줄게!!

┗랭킹도 안까는 ㅈ밥 ㅅㄱ

┗그래 랭킹은 까고 씨부려라 ㅋㅋ

┗랭킹 못까는 이유 뻔하쥬?

머리말에 랭킹을 말하고 글을 쓰는게 하나의 불문율처럼 붙여진 지금.

랭킹을 말하지 않는 건 소시민적인 겁쟁이나 할법한 짓이었다.

아무튼 대다수가 한때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던 오디를 찾았는데 바로 지금.

그게 다시금 나타났다.

[네피림 거래소]

[악마의 오디] - 10개당 1금

판매자: 불별

"떠! 떴다아아아아아!!"

악마 토벌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바바리안도.

"이건...!"

자신의 강철마를 타고 성남시를 돌아보던 강철군주도.

"사야겠어요."

여의도 건물에서 자신과 함께하는 무리들과 함께 악마를 토벌하던 아마존도 마찬가지.

대한민국의 네피림들 모두가 이 순간만큼은 거래소를 클릭했다.

[오디 떴다!!!!!!!!!!!!!!!!!!!!!!!!!!!!]

[감사합니다. 불별님 감사합니다!!]

[차냥해! 불별!]

[불별! 그는 신인가?]

[강골이 근데 뭐냐? 좋냐?]

┗뼈를 단단하게 해주는거니까 당연히 좋지. 싸우다가 뼈 부러지면 몇달은 전투불가인데.

[이거 안사는 새끼가 ㅂㅅ임 ㅋㅋ]

[오디 안 산 호구 없줴?]

[응~ 나 강골 1이다. 뼈 존나 튼튼해짐. 뼈 튼튼은 역시 젖소보단 불별느님의 오디지~]

불별에 대한 찬양이 이어졌다.

[아 씨발 나 못샀어!!!!!!!! 개새끼들아 나 조금만 나눠줘!!!!!]

┗제가 거래소에 다시 올려드림

┗아 정말요? 감사감사!

순식간에 품절된 오디.

그중에서는 사재기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악마의 오디] - 1개당 2금

판매자: 사재기꾼

[야이 양심없는 십새끼들아!]

[사재기 저새끼 죽이고싶네 ㄹㅇ]

[어디사냐 사재기련?]

10개당 1금이었던 걸 1개당 그것도 2금에 되팔고 있었다.

이 모든걸 보고 있는 판매자.

불별은 사재기꾼을 보며 피식 웃어넘겼다.

"사재기꾼 새끼, 나중에 걸리면 넌 뒤졌다."

하지만 그가 사재기꾼을 찾아낼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거래소나 커뮤니티가 실명제도 아니고 닉네임을 바꾸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화성은 그런거보다 두둑한 주머니를 비우기로 했다.

[나만의 상점]

-1일 12시간 23분 남음.

[브릴뤠의 빵x10] - 100금화

[푸른 성수x10] - 150금화

[포탈의 서] - 999금화

[오스칼의 인형] - 3579금화

[열병의 투구] - 6842금화

[미확인 스킬북] - 11111금화

『소지금 4635 금화』

열병의 투구.

오스칼의 인형도 모조리 구매했다.

포탈의 서는 스크롤을 더욱 간편하게 정리할 수 있는 책이었다.

장기적으로는 이게 편하고 좋았기에 구매하는 게 좋았다.

이제는 생각하는 곳을 떠올리고 책만 펼치면 포탈이 열렸으니까.

푸른 성수는 아직도 마나 소비가 큰 내게는 반드시 사야할 품목이었고 브릴뤠의 빵은 그냥 한번 사봤다.

뭐 얼마나 맛이 좋은 빵이길래 100금화나 하는건지 궁금했다.

"음, 고소하네."

퍽 고소하고 맛있었다.

일반적으로 파는 빵보다 풍미가 깊게 느껴지는 빵.

확실히 비싼게 맛있긴했지만 값을 생각한다면 굳이 사먹고 싶을 정도는 아니라고 해야할까.

미묘하게 맛이 뛰어났지만 100금화나 주고 또 먹고 싶은 맛은 아니다.

"커피나 잼이 있었으면 더 맛있긴 했겠네."

잼은 레아가 오디를 가지고 만들어 둔 게 있긴하다.

그리고 커피는...

"믹스커피가 최고지."

역시 커피는 맥심.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고 싶었지만 구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 갓 만든 커피 맛은 기성품으로 대체되는 게 아니니까.

"오늘은 따뜻한 거 먹고싶네."

따뜻한 믹스 커피에 오디 잼 바른 브륄레의 빵.

호밀빵처럼 생긴 녀석에게 듬뿍 잼을 바르고 한입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씹다가 커피 한모금으로 뜨근하게 넘겨주니 오장육부가 다 따뜻해지는 기분.

용장이 발휘됐다며 강골이 몇 올랐다는 알람을 무시하고 순식간에 빵 하나를 다 먹고 남은 건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다.

"평화롭네."

불별도의 해변가.

그 앞에 차려진 부드러운 소파에 몸을 뉘이면서 쏴아아- 밀려드는 파도와 쓸려가는 바다를 보았다.

평화롭다.

저 바다속에는 지금도 아무거나 다 처먹는 흉흉한 서펜트가 있고.

하늘 위에는 불별도의 악과를 노리는 와이번 새끼들이 있지만 뭐 놈들도 섣불리 건들지 못하니 어쩌랴.

"성역의 구매한도가 한사람당 한개라는 게 흠이라니까."

덕분에 여러개를 살 수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불별도 전체를 성역으로 깔아버렸으면 와이번이 별 문제도 아닐텐데 말이다.

기부도에 성역을 설치하느라 레아의 구매횟수도 사용했었다.

이번 카오스가 시작되면 성역의 횟수제한이 다시 갱신될테니 모조리 사서 불별도에 좀 깔아둬야겠다.

"이제 슬슬인가."

내가 이렇게 여유부리고 있는 이유.

그건 이제 몇시간 뒤면 카오스가 열리기 때문이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최대한 리벨롬을 연기하며 네피림들을 강화시켰고 나름대로 오디도 싸게 풀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러니 이 정도 여유는 부려야지.

"레아는 아직도 먹고 있나."

내가 +6 오디를 조금 나눠줬다.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뼈가 튼튼해져서 더 강한 힘을 낼 수도 있고, 혹여나 다쳤을 때 큰 피해가 없을테니 오디를 먹는 건 이제 필수다.

사람 몸에서 뼈는 기둥이니까.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냉동고에 있는 과일은 먹을만큼 먹으라고 했다.

레아한테라면 굳이 아깝지도 않다.

"열매야 제물을 바치던지, 아니면 시간 지나면 다시 맺히는거니까."

그리고 슬슬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민첩 수치가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그렘린의 열매로는 20 이상의 수치가 오르지 않습니다."

"건강 수치가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고블린의 열매로는 15 이상의 수치가 오르지 않습니다."

카오스가 열리기 일주일 전.

난 조금 낮은 민첩과 남아도는 고블린 열매로 건강 수치를 조금 올리고 있었다. 밥 먹는 식단 대부분에 열매를 넣어서 먹고 있었으니까 간간히 오르고는 있었다는 말이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민첩과 건강의 능력치가 한계에 달했다.

솔직히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한계라는 말은 더이상 건강과 민첩의 순수 능력치를 올리지 못한다는 소리나 다름 없었으니까.

"물론 악마의 열매로지만..."

그렇기에 이제 고블린 나무와 그렘린 나무는 슬슬 큰 쓸모가 없지고 있다. 성장 한계가 있는 이상, 근력을 올려주는 대전사나 사냥꾼 그렘린 나무도 큰 차이는 없을테니까.

그래서 그렘린과 고블린의 접목을 시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둘을 섞어서 나오는 열매는 이 성장 한계를 뚫을 수 있을지, 아니면 못 뚫을지 알아보기 위해서.

하지만 접목으로 되지 않는다면...

'아마도 더 상위 개체의 악마를 잡아야 겠지.'

내가 생각해봐도 고블린과 그렘린은 내 수준에 비하면 한참 낮은 녀석들이다. 고작 한달 전이기는 하지만 그 한달만에 내 성장력은 레벨 7이라는 서펜트와 와이번과 싸울 정도로 성장해버린 게 현실이니까.

그러니 당연히 고블린과 그렘린이 아닌 그보다 상위종의 데몬시드를 만들어 능력치를 성장시키는 게 맞다.

"레벨은 더럽게 안 오르네. 난 기프트가 두개라서 그런가?"

아마 그렇겠지만 그렇다고해도 슬슬 오를 때가 됐다.

카오스 게이트가 열리고 쏟아져 나오는 악마들을 잡다보면 레벨이 오를거라 예상해본다.

거기만큼 경험치를 대량으로 얻을 수 있는 곳도 없으니까.

"슬슬인가."

[카오스 게이트]

-0시 01분 22초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는 깨지든 박살나든 직접 부딪쳐보는 수밖에.

솔직히 나는 큰 걱정이 없다.

-0시 01분 00초

한달간 강해질 만큼 강해졌다.

제 아무리 강력한 악마가 나타난다해도 자신 있다.

-0시 00분 22초

네피림 세트.

열병의 투구까지 쓰고 오른손에는 창이 아닌 지팡이를 들었다.

뇌창도 활약하겠지만.

시작은 데몬시드가 먼저다.

그렇게 정했다.

광역 마법으로 놈들의 전투력을 크게 깎고 시작할 것이다.

아무리 내 기프트가 제물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죽는 걸 바랄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다.

"카오스 게이트가 열립니다."

검붉은 포탈이 열렸다.

그 속은 울창한 수풀과 굳건히 솟아 있는 성벽이었다.

이전의 잿가루만 휘날리던 황량한 곳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눈에 익다.

한달 전 우리가 싸웠던 그곳이다.

그곳에 나무가 자라고 숲이 형성된 것이 분명했다. 드넓은 들판과 숲이 형성된 곳 너머.

그곳에는.

[오크전사]

녹색 물결이 일렁였다.

녹색의 카오스 [2]

48화.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크왕 갈루란타의 전사들입니다."

"녹색의 전사들을 처치하여 카오스 게이트를 닫아주십시오."

콰직, 콰지직! 콰창-!!

능선 너머.

그저 풍경으로 이루어진 벽이 부서졌다. 그 너머를 녹색의 군대가 물결처럼 일렁이며 쇄도했다.

신장은 이미터가 조금 넘었으며 다부진 근육과 튀어나온 혈관과 검은 털, 그리고 녹색의 피부는 그들이 인간이 아님을 증명했다.

입가엔 도드라진 송곳니가 짐승의 것처럼 흉하게 나 있었으나 그들의 저들의 덩치에 걸맞은 도끼들을 하나씩 쥐고 있었다.

"갈루란타!"

"갈루란타!!"

맹수와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늑대를 타고 달려드는 악마의 모습에 차곡차곡 소환되어 오는 네피림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당황하지마라!!"

탕탕탕!

이질적인 전쟁터에는 어울리지 않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피림들의 이목이 한꺼번에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총구를 향했다.

총을 들고 있는 사내는 현대식 군복을 입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반갑다. 난 임장철 대령이다."

그의 군복에는 무궁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네피림들의 눈은 약간의 의문과 불쾌함이 뒤섞여 있었다.

"대한민국의 일원이라면 현 상황에서도 당연히 조국을 위하는 게 맞다. 그러니 현 시간부로 예비역 장병들은 우리의 명령체계에 따르길 바란다."

"뭔 개소리야?"

네피림 중 한 명이 불만을 표하자 임장철 대령은 자신의 권총을 사내에게 향하며 말했다.

"전시상황에서 명령 불복종은 즉각 사형이다. 처음은 봐줄 테니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그는 꽤 흥분으로 얼굴이 붉어져 있었는데 묘한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

그때였다.

쇄액, 퍽!

"헉!"

화살 한대가 날아와 임장철 대령의 이마를 관통했다.

"강철군대!!"

즉각 전투에 돌입한 것은 다름 아닌 강철군주였다.

그녀는 자신의 검들을 꺼내 그들을 기마대로 만들었다.

강철로 이루어진 말을 탄 기사 서른명이 즉각 나타나 그녀의 양 옆으로 날개를 펴듯 나란히 섰다.

"자, 잠시만! 우리 정부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코앞에 적들이 당도했는데 무슨 명령을 따르란거냐. 일단 전선을 유지하고 상황을 보는 게 먼저다."

강철군주가 탄 강철마가 뒷발을 들썩이며 위협하니 군복 입은 정부의 사내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흥."

그 모습에 꼴 좋다는 듯 몇몇이 강철군주의 뒤를 따랐다.

"이제와서 뭐 해보려고 해봤자 말을 따르겠냐고... 참나. 어이! 강철! 나도 같이가자! 신나게 놀아봐야지!!"

대머리 바바리안이 그 뒤를 따랐고, 또 많은 무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선으로 뛰어나갔다.

"랭킹 10위 팔라딘입니다! 상황이 급작스럽지만 뭐, 언제는 안 그랬습니까? 저와 함께 싸우실 분은 부디 그 목숨,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망치를 든 팔라딘이라 불리는 자가 발을 구르자 주변으로 따스한 오오라가 펼쳐졌다.

"저와 함께하면 더 오래, 그리고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또 대규모 인원이 팔라딘으로 쏠렸다.

"난 여의도의 아마존. 활을 쓰는 사람은 나와 함께 하도록 해."

랭킹을 말할 것도 없었다.

아마존은 그 자체로 아마존.

지금은 랭킹이 4위로 밀려났지만, 초반부터 그녀의 랭킹은 상위권이었던만큼 인지도 또한 높았다.

활을 쓰거나 석궁. 또는 원거리 공격에 능한 자들이 아마존을 따라나섰다.

"난 랭킹 7위 어쌔신이다. 트랩과 발치기에 능하다. 트랩퍼나 은신에 능한 자들은 나와 함께해주길 바래."

"랭킹 17위 파이어펀치다. 화끈하게 싸워볼 놈들은 나랑 가자!"

"39위 소서리스에요. 마법사들은 저와 함께 해요. 아직 부족한 마나를 서로 보완해줄 수 있어요."

"29위 울프검이다.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나랑 돌격하자!"

각각의 인물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이끌고 전선으로 향했다.

그중에는 꽤 다양한 기프트를 가진 자들이 있었는데, 랭커들 답게 재빨리 전선으로 향하면서 간략하게 서로의 능력에 대해 정보를 주고받았다.

"어, 야야."

물론 혼자 행동하는 사람도 많았다.

쿵, 쿵.

"와씨, 뭐야. 곰이야?"

곰을 타고 다니는 어린아이도 있었고, 커다란 호랑이를 이끌고 다니는 여인도 있었다.

"힘내봐요."

푸른 나비들과 함께 사라지고, 돌연 하얀 백합을 심기 시작한 정신이 나간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인 것은 한 사내였다.

"뭐야!"

"나, 날아가는 데?!"

"누구야 저건?"

물소 뼈를 얼굴에 뒤집어 쓴 사내가 검은 로브를 휘날리며 사람들 머리 위를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힘내세요!!"

그 밑에는 산양의 머리를 뒤집어쓴 여기사도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화성과 레아였다.

그가 랭킹 1위 데몬시드라는 것을 아는 자는 없었으나, 멋드러진 장비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위용을 보자 못해도 손가락에 꼽히는 랭커임을 누구나가 알 수 있었다.

"꽤 많네."

그러거나 말거나.

하늘을 날며 전장으로 다가가고 있는 화성은 높은 곳에서 새로워진 풍경을 다시금 둘러봤다.

뒤쪽엔 [바사르 성채] 차원석을 담고 있는 성채들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그 앞에는 잿가루만 휘날렸던 이전과는 달랐다.

잔디는 푸르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들과 풀들이 자라나 자그마한 숲을 형성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화성이 심었던 데몬시드도 있었는데, 그때가 되서야 그는 왜 이런 풍경이 되었는지 알았다.

"내가 성수먹고 비 내려서 그런가."

이전의 카오스에서 화성은 성수를 마시고 레인스톰을 남발했다.

그 때문일까.

차원석이 있는 전장에는 들판의 잔디가 자라나다못해 숲이 만들어진 것이다. 고작해야 그때로부터 한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큰 나무들과 우거진 수풀은 세월의 흔적이 꽤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성수 때문에 급성장한거라 보기엔 조금 달랐다.

'시간의 흐름이 다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넓은 숲으로 확장된 건 단순히 성장의 문제만은 아닌 듯 했다. 왜냐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데몬 트리들에겐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다.

'악마의 열매가 땅으로 떨어지면 이런 효과를 낳는 거일수도 있겠어.'

거대한 생명력을 가진 열매.

그게 바로 악마의 열매다.

그만한 능력을 지녔으니 땅으로 스며들었을 때 또한 이로운 효과를 가져다주기에 충분했을 터.

시험용으로 심어둔 데몬시드가 시간이 흘러 열매가 떨어지고 또 떨어져 땅을 이롭게 했다. 비옥한 땅은 당연히 숲을 이뤘을테니 이런 풍경이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만약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번 싸움이 끝나면...'

해야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카오스는 아마 또 열릴테니까."

그렇다면 미리 준비해둬서 나쁠 게 하등 없지 않은가.

물론 지금 당장은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죽으면 미리 세워둔 계획도 다 무용지물이 되는 법.

"오크는 처음 보는데. 얼마나 강할지 예상이 안가네."

그때였다.

확성기를 튼 듯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사내의 목소리가 화성의 미간을 좁히게 했다.

[오크전사! 레벨 4 데몬입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오크 전사!! 레벨 4 데몬입니다! 감사합니다!]

전장에 널리 퍼지는 음성.

그도 익히 들어본 음성이었다.

"관찰자..."

확성기를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방송하고 있는 자는 관찰자였다.

전투능력은 낮지만 확실히 전장에서는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려 애쓰는 그는 누구에게나 호감이었다.

그러나 관찰자가 전하는 정보는 전쟁을 시작도 하지 않은 네피림들에게는 꽤 겁먹기 충분한 것이었다.

"레벨 4라니! 그렘린도 그렇게 힘든데 그럼, 그렘린보다 쎄다고!?"

"나, 나는 이렇게 강할거라는 얘기는 못 들었단 말이야!"

"야 관찰자!! 그런 거 말고 약점이나 알려달라고!"

확성기를 든 관찰자가 투덜거리는 네피림들을 향해 소리쳤다.

[적들의 수는 백만입니다!!]

관찰자가 분명 의로운 일을 하기는 했으나 겁먹은 버러지들의 혼란을 가중시킬 불필요한 정보였다.

쯧.

혀를 찬 화성은 지팡을 들었다.

더 혼란을 가중하는 관찰자를 대신하여 사기를 올려야 했으니까.

야칸의 숲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메모라이즈 마법을 사용합니다."

"내장된 마법 '레인스톰'과 '블리자드'를 사용합니다."

쿠구구궁!!

천둥벼락과 함께 먹구름이 카오스의 하늘을 가득 메웠다.

톡, 토옥.

비바람이 몰아치는 폭풍우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나기처럼 세차게 전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우박?"

강철마의 고삐를 쥐어 멈춘 강철 군주는 우후죽순 떨어지는 크고 작은 우박을 보며 뒷걸음질 쳤다.

그 판단은 비교적 현명했다.

콰앙!!

쾅! 콰아앙!

떨어지던 빗방울은 이내 뼈까지 시릴 듯한 추위로 인해 우박으로 바꼈다. 자그마한 얼음조각들은 떨어지며 하나로 뭉쳤다.

뼈에 살이 붙듯 빗방울에 달라붙은 냉기는 우박의 크기를 스노우볼처럼 불려 나갔고 이내 바위만 한 우박들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거침없이 전장으로 뛰어들던 오크들이 비명횡사하기 시작했다.

보잘것 없는 단말마를 내뱉으며 우박에 깔려 죽는 오크들의 숫자가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푸른 초록이 돋아났던 들판은 어느새 새하얗게 얼어붙었고, 떨어진 우박과 눈으로 매몰됐다.

선채로 얼어죽은 오크들도 여럿 보였으나 그게 끝이 아니다.

"브램블리."

투두두두둑!

하늘에서 우박과 눈이 떨어져 전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면, 그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에서는 돌연 가시덤불이 튀어나와 눈보라를 가로지는 용맹한 적군을 옭아맸다.

"갈루란타!!"

"갈루..... 라타.....!"

차가워진 가시덤불은 오크의 힘으로도 찢기 어려운 것이었고, 힘을 주면 줄수록 더욱 빠져들었다.

게다가 녹색의 피부를 찢고 파고드는 가시덤불의 가시에는 독까지 발라져 있어 힘이 빠져 얼어 죽었다.

오크의 숫자는 총 백만.

이것만으로 오크 모두를 죽이기는 분명 부족했다.

하지만 기선제압으로는 충분했다.

"썩 잘 어울린단 말이지."

눈보라를 일으키는 블리자드.

그리고 새로 얻은 투구.

『열병의 투구』 (unique)

-6군단 사령관 아스모디의 부관. 삭스의 유희로 만들어진 물소뼈 투구.

〈지독한 열병〉

반경 300m 내에 시전자와 아군을 제외한 존재에게 최대, 능력치의 20%를 하락시키는 저주의 오오라를 퍼뜨린다. (소모값: 분당 5)

〈저주 내성 +5%〉

〈마력 +1〉

블리자드로 눈길을 돌파하는 오크들은 뼈속까지 얼어붙는 추위와 옭아메는 가시덤불의 독, 그리고 은밀하게 찾아오는 지독한 열병까지 견뎌야만 겨우 전장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도달하지도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다.

[카오스 랭킹]

1위 데몬시드 118,600점.

2위 ...

3위 ...

급속도로 올라가는 데몬시드의 랭킹에 화성의 입꼬리를 호선을 그렸다.

올라가는 입꼬리와는 반대로 그의 마나는 빠르게 수직낙하 하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 때를 대비하여 사둔 푸른 성수의 숫자가 자그마치 서른개가 넘어간다.

"오랜만에 배좀 터져볼까."

랭킹을 확인한 네피림들의 눈은 당연하게도 하늘로 향했다.

전장의 하늘에는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채로 지팡이를 든 물소뼈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체불명의 사내.

하지만 모두가 마음속으로 알았다.

비를 부르고 눈을 불러들인 사내.

그가 바로.

"데몬시드."

부동의 랭킹 1위.

데몬시드라는 것을 말이다.

녹색의 카오스 [3]

49화.

"저게 데몬시드라고?"

데몬시드.

9초의 사나이.

부동의 No.1.

누구나가 존재를 알지만, 누구도 그의 존재를 확인한 적 없는 사나이.

그런 절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꼭꼭 정체를 감추더니."

의문을 표하는 자.

비난 어린 말을 하는 자와 이제 와서라며 콧방귀를 끼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가슴엔 하나의 감상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그건 바로 경외.

고고하게 하늘 위에 떠 있는 자태.

홀로 대군을 상대하는 사내의 등은 유난히도 듬직해 보였다.

입 밖으로는 다른 소릴 내뱉어도 마음속으로는 경외심을 금치 못했다.

그를 보라.

비를 부르고 끝내 눈보라를 불러들여 전장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눈보라는 적의 숨결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우박은 적군의 단단한 대열과 치열한 녹색의 근육을 짓눌렀다.

그걸로도 모자라 눈보라를 뚫으려 는 오크들을 가시덤불의 장벽으로 막아내고 있지 않은가!

데몬시드가 만들어낸 가시덤불은 두껍고 질겨 오크의 막강한 근육으로도 쉬이 찢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가시덤불의 장벽을 전장 일대에 모조리 펼쳐내고 있으니 어찌 장관이 아니랴!

"이건 완전 일인 군단이잖아."

그야말로 일인 군단.

홀로 대군을 상대하고 있으니 능히 부족함이 없는 찬사였다.

물론 그것으로 전쟁이 끝난다면 다행일 터였으나 세상일이란 게 그렇듯 이번 카오스 또한 녹록지 않았다.

녹색의 물결이 새하얗게 변했지만,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전에 보았던 불사의 군대와는 또 다른 의미로 죽음을 두려워 않는 전사들.

"갈루란타!!"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갈루란타의 전사들.

죽음을 불사르며 눈보라와 가시덤불을 넘어서는 오크들이 하나둘 화성의 발밑을 지난다.

마치 덫을 빠져나가는 늑대처럼 초목의 숲을 지나는 오크를 보며 화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갈루란타!!"

화아아-!

뭔가가 있다.

수많은 오크가 눈보라 앞에서, 가시덤불 앞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이끄는 힘은 무엇일까.

화성은 녹음진 물결의 후미를 바라보았다.

"내다보는 눈을 사용합니다."

눈보라 저 멀리.

녹색 군대의 후미.

그곳에는 오크전사들을 독려하고 다그치는 한 존재가 있었다.

일반적인 오크들보다 덩치는 1.5배 컸으나 땋아진 머리칼과 눈썹은 색이 바래버린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전장의 노장처럼 보였다.

[포효하는 오크 왕 갈루란타]

탄탄한 근육질 몸에는 훈장처럼 새겨져 있는 전장의 흔적이 곳곳에 자리잡아 있었다.

목에서부터 가슴. 팔과 다리. 할것 없이 모두가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고 화살을 맞거나 불에 지져진 흉터.

하지만 오크왕 갈루란타는 그것을 마치 자랑스레 보이며 커다란 늑대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야말로 왕의 위엄에 어울리는 모습. 산전수전을 다겪어 왕의 자리에 오른 노장의 모습이랄까.

오크란 종족을 처음 봤지만 어떻게 왕의 자리까지 올라왔는지 다분히 알 수 있는 존재였다.

"갈루란타!!"

오크들이 외치는 갈루란타.

그것은 그들의 언어이자 구호 같은 게 아니라 왕의 이름이었다.

"왕이라..."

그때였다.

오크왕 갈루란타가 돌연 숨을 가득 머금더니 땅이 울릴 정도로 거대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갈루란타!!"

"오크왕의 포효가 군대의 사기를 끌어 올립니다."

"와아아아아아!!"

"갈루! 갈루! 갈루!!"

"갈루란타!!"

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오크왕의 목소리가 내 전신을 저릿저릿하게 울렸다.

그 때문일까.

오크들의 사기가 올랐다.

이전까지는 간신히 뚫어내던 눈보라와 가시덤불을 이제는 여럿이서 한꺼번에 돌파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사기는 아닌가."

갈루란타의 포효를 듣자마자 오크들의 사기가 증가했다.

단순히 사기만 증가했다면 모를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전체적인 신체 능력의 상승."

전쟁에서는 꽤 사기적인 수식어.

권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간신히 눈보라를 뚫던 놈들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고 추위를 이겨내고 가시덤불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전장인데 하물며 이곳은 악마들과 싸우는 카오스 게이트다.

이 정도도 견뎌내지 못하고 나한테 몰살당한다면 오히려 내가 실망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마나도 전부 소진됐다.

들고 있던 [푸른 성수]도 모조리 사용했으니 한동안은 물러나야 할 때다.

플라이의 스킬 하루 횟수도 모조리 사용했으니 상황을 지켜볼 시간.

성수 때문에 배부르기도 하니.

"데몬시드는 잠시 휴식."

탁.

지면으로 내려선 난 열병의 투구와 미네트의 로브를 인벤토리에 집어 넣고 네피림 투구를 썼다.

"네피림 세트가 활성화됩니다."

거기에 오른손엔 적창을 쥔다.

"뇌창 출격이다."

랭킹 2위. 카탈린의 감전.

일명 뇌창이라 불리는 자가 말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죽어! 죽어! 죽어라!!"

"숲을 이용해라!! 함정을 파!!"

"쏴라!!"

무작정 돌격하는 바바리안.

함정을 설치하는 트래퍼들.

숲을 방벽 삼아 화살을 날려대는 아마존을 주축으로 한 부대들이 오크들을 향해 맹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그 뒤를 소서리스들이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고, 곁에는 이도저도 도끼와 망치를 든 자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전보다는 제법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콰직.

"불타는 기사왕 오그의 열매를 섭취하셨습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생명력과 마나 회복력이 상승합니다."

"불타는이 0.02 상승합니다."

오그의 열매를 먹어주며 차오르는 마나 회복력으로 가볍게 투창한다.

쇄애애애액-!!

"오크 레벨이 4라고 했지."

명백하게 추종자보다 낮다.

반면 난 추종자와 싸울때보다 배는 높은 스탯치를 가졌다.

뻐엉-!

적창이 늑대를 타고 날아오른 오크 전사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오크 전사를 처치하셨습니다."

"300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17 금화를 획득합니다."

내 투창은 감히 오크 전사 따위가 막아낼 것이 아니다.

게다가 적창의 강화는 +3강.

놈들이 막아낼 재간이 없다.

그리고 이 정도 수준이라면 굳이 투창이 아니라도 해볼만하다.

'창술도 익혔으니까.'

그것도 그냥 창술이 아니다.

자그마치 절대자나 다름 없어 보였던 [카이삭스의 초급 창술]이다.

"표식으로 전이합니다."

파짓.

번갯불로 화하는 몸과 함께 내 시야가 일순 오크를 꿰뚫은 적창에게로 향한다.

적창의 표식으로 전이된 순간, 바닥에 꽂힌 창을 잡아 찌른다.

콱!!

"갈루....."

정확하게 심장을 관통당한 오크 전사가 도끼를 떨어뜨린다.

허나 그때, 두 손으로 내 적창을 꽉 잡아 붙든다.

"란타....!!"

놈이 내 적창을 잡아 날 붙들어 놓자 다른 오크들이 삽시에 나타났다.

늑대에 탄 채로 내 머리를 노리는 놈이 하나, 몸을 날린 채로 거대 도끼를 두 손으로 잡아 내 허리를 노리려는 놈이 하나였다.

죽어도 놓지 않겠다는 듯 적창을 붙잡고 있는 놈을 그대로 들어 올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미련한 짓을."

인벤토리에서 창 하나를 꺼내 하늘로 집어 던졌다.

"그렇게 가지고 싶으면 가져라."

"표식으로 전이합니다."

파짓.

단숨에 하늘 높이 전이한다.

날 노리려던 놈들은 순간 사라진 내 모습에 멈칫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내 손에서 창이 날려진 직후였다.

콰직! 푹!!

"크아아악!!"

"갈루....!!"

"오크 전사를 처치하셨습니다."

"오크 전사를 처치하셨습니다."

꼬챙이처럼 꿰인 오크들을 밟아 죽이며 떨어지는 내 모습에 아직도 적창을 꽉 쥐고 있는 오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다.

"내놔 이제."

쿵!

놈에게 맡겨둔 적창을 뽑아낸다.

"오크 전사를 처치하셨습니다."

휘리릭, 촤악.

창에 묻은 피를 털어내자 휘파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뇌창! 이제 왔나!!"

누군가 했더니 바바리안이다.

전장의 선두에서 쌍도끼를 든 스킨헤드. 놈은 오크들을 보고 감명이라도 받았는지 제 얼굴에도 물감으로 뭔가를 그려놓은 상태였다.

컨셉에 확실한 건지 뭔지.

바바리안이라기 보다는 몽골군처럼 생겨서 웃기기만 하다. 그래도 보다보니 정이 든다는 게 이런 거려나.

죽을 고비에서 몇 번 함께 싸웠다는 것만으로 친숙함이 느껴진다.

"아직 살아 있었군."

"당연하지! 바바리안은 죽지 않아!"

으라쌰!

특유의 기합과 함께 오크의 골통을 박살내는 바바리안은 주변에 뇌수를 튀겨대며 화려하게 싸웠다.

"안 그러냐! 강철!! 흐하하!"

"시끄럽다. 야만인."

거친 강철마의 푸레질과 함께 강철의 강철군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강철로 무장한 기마군.

말을 타고 오크들을 짓밟고 강철검을 휘둘러 그들의 수급을 취하는 강철기사는 그야말로 전장의 저승사자.

"데몬시드의 눈보라가 사라지고 있다. 슬슬 놈들이 대거 몰려올거야. 뇌창 좋은 생각있나?"

"딱히."

놈들의 수는 이전, 불사의 군대와 비슷한 정도의 대군.

백만대군이다.

우리쪽의 숫자는 그보다 적다.

뭔가를 준비할 시간도 없다.

트랩퍼들과 소서리스들이 마법을 준비하고는 있지만 그 또한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다.'

이렇다할 작전을 짜는 것도 좋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린 강하다."

난 확신한다.

그간 허투루 망치질 하지 않았다.

강화 실패로 아이템을 부서먹은 적도 많았지만 현 네피림들의 전력은 무기 강화로 크게 상승했다.

"전위들은 숲을 등진채로 오크를 막는 게 좋겠지. 숲에는 아마존들이 있으니까."

그 정도로 충분할거다.

물론 아직 나타나지 않은 오크들과 저 멀리서 담담하게 전장을 살피는 갈루란타가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희생을 최소화하고 싶어."

강철의 간절함 가득한 음성.

그녀답지 않은 말투다.

마치 뭔가를 애원하는 듯한 태도에 난 이내 그녀의 바람을 깨달았다.

"우두머리를 죽여달라는거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자 강철의 몸이 흠칫한다.

"관찰자에게 들었다. 놈들의 우두머리의 이름이 갈루란타라는 걸."

[포효하는 오크 왕 갈루란타]

자신들의 왕인 갈루란타를 외치며 죽음을 불사하는 저들의 성격상.

그 존재가 죽으면 사기와 버프 또한 크게 하락하게 될 터.

그렇게 된다면 이 싸움은 네피림 군의 큰 희생 없이 종결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그때, 보여줬던 뇌창. 다시 한번 보여줄 수 있겠나?"

불타는 기사왕 오그를 죽였던 그때의 투창. 시드로긴을 중복 사용했던 풀도핑 투창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처럼 일격으로 저들의 왕을 죽여줄 수는 없느냐고.

그렇게만 한다면 카오스는 쉽게 종식되고 죽는 이도 거의 나오지 않는 승리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절하지."

시드로긴의 중복 도핑은 내게도 꽤 리스크가 큰 힘. 굳이 내가 무리해서 희생할 필요가 있을까?

난 없다고 본다.

데몬시드로 오크군의 3분의 1을 나 혼자 정리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데 우두머리가까지 굳이 무리해서 죽이라고?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목숨이 두번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마나 없어서 못해.'

소모된 마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하지도 못하는 일이다.

괜히 내가 지금 창들고 직접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다.

마나가 회복될 동안은 몸을 움직이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점수를 모아야 했으니까. 그래야 부동의 1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원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

마나를 회복할 수단이 생긴다면, 굳이 이러고 있을 필요가 없기도 했다.

"정말 다 해줄건가?"

"그, 그래! 뭐가 필요하지?"

"푸른 성수."

유일한 마나 회복 물약.

푸른 성수를 원한다.

그것도.

"카오스에 참가한 네피림 1인당 한병이면 충분하겠군."

카오스에 참가한 네피림들의 숫자가 백만이 되지 않음을 안다.

80만명도 채 되지 않을 터.

하지만 이는 곧 푸른 성수의 80만병을 뜻하기도 했다.

"가능하나?"

푸른 성수의 가격은 카오스 상점을 기준으로 한병에 20금. 운이 좋아 나만의 상점에서 할인을 받는다면 10금이나 5금에도 살수 있는 물건.

푸른 성수 80만병을 얻는다면 난 천육백만 금의 이득을 얻게 된다.

가만히 앉아서 1600만 금.

그 정도라면 시드로긴 풀도핑이야 두번 세번이고 할 수 있다.

가능하냐는 내 말에 강철은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게 만들겠다...!"

"좋아."

그 대답이면 충분하다.

강철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을 위인이 아니니까.

그럼 이제 내가 할 일은 하나.

[쌍성의 거울]을 손에 쥐고 강철이 가져다 줄 푸른 성수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녹색의 카오스 [4]

50화.

단순히 마나가 부족해서.

내가 마나를 많이 쓰는 스킬들을 가졌기 때문에 강철에게 저런 조건을 요구한 것은 아니다.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다.

내 손에 있는 것.

바로 쌍성의 거울 때문이다.

[쌍성의 거울] (???)

-한 쌍이 되는 별의 거울.

이 쌍성의 거울은 완전히 같은 물건을 하나로 합쳐주는 힘을 가졌다.

내 나름대로 유일 등급을 붙인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템.

이걸로 푸른 성수를 합성시킨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과 함께 강철에게 그런 요구를 하게 됐다.

"내 예상대로라면."

쌍성의 거울로 만든 +6 데몬시드는 내가 봐도 놀라울 정도의 효과를 가져다줬다. 0.001의 상승 폭을 +6을 만들자 0.028의 상승으로 만들었다.

자그마치 28배.

그렇다면 마나를 단기간에 순식간에 회복시키는 푸른 성수라면?

'푸른 성수의 회복량은 적어.'

20금이라는 터무니없는 가격의 소모 아이템 주제에 마나 회복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내 마나량이 지금 760이다.

하지만 푸른 성수 하나로는 고작 100의 마나밖에 회복되지 않는다.

아마 본래라면 100이면 충분히 많은 양을 회복시켜주는 걸 거다.

지금 시기에 나만큼 마력에 모든 것을 몰빵한 네피림은 또 없을 테니까.

게다가 내 스탯치는 기프트를 두개 가지고 있는 만큼, 레벨업 할 때마다 올스탯 +1이 두 배이고 챔피언 데몬시드를 완전 성장 시킬 때마다 또 올스탯 +1을 얻는다.

'기프트가 두개라서 그런지 이상하게 렙업이 안되고 있지만.'

아무튼 시작의 네피림 세트로 +80 마나를 얻어 뻥튀기 된거지 본래라면 100을 채워주는 회복량이 지금 네피림들 수준에서는 적정수준.

하지만 내가 누군가.

랭킹 1위라는 왕좌에 앉은 사나이.

그런 만큼 내 마나통은 거대했고, 그것을 채우기에 작금의 회복 물약은 턱없이 빈약하다.

그러니 강화할 수밖에.

카오스 상점에서는 어떤 물건이라도 횟수 제한이 붙어 있고 [푸른 성수]는 당연히 한 사람당 10개밖에 못산다.

나만의 상점에서 산 푸른 성수도 꽤 있기는 하지만 내 전투 스타일이 마나 소모를 대량으로 사용하다 보니 당연히 금방금방 동이 난다.

그렇다 보니 사용해볼 기회가 없었지만 저렇게 가져다 바친다니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고작해야 100을 채워주는 푸른 성수를 합성시키면 그 상승폭이 얼마가 될지 벌써부터 궁금했으니까.

"데몬시드로 생각해보면 +6까지 올린다면 28배가 되려나."

100의 28배.

2800이나 되는 마나 회복력이겠지.

"근데 이 정도까지는 필요 없어."

내 마나통은 760.

세트 효과 없이 순수 마나는 660.

그러니 대충 +3까지만 하면 얼추 맞지 않을까 싶다.

그건 그렇고.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지."

대충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인원을 제외하고서라도 후방에 밀집된 자들의 숫자가 꽤 된다.

백만에 가까운 숫자가 모인 걸로 아는데 반의반을 잡아도 20만개 정도는 빠르게 모이는 게 분명한데 어째 물약 배달이 지지부진하다.

"화성님!"

"어, 어떻게 되가고 있어?"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혼자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레아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다.

싸우다가 온 건지 내가 선물한 갑옷이랑 검에 오크의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호의적인 반응은 아닌..... 거 같아요!"

"그래?"

생각보다 반발이 심한 듯하다.

나한테야 20금이 껌값이지 지금 사람들한테 20금은 며칠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금액이니까.

반발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을 텐데..."

"그러게요! 화성님도 목숨 걸고 싸우는 건데!"

"맞지, 맞지."

아암, 그렇고말고.

팔짱끼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증가한다.

건강스탯이 올라서 그런지, 청력도 꽤 좋아졌나보다.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얼추 들린다.

-우리가 왜 그래야하죠?

-그래그래! 그 사람이 챔피언 데몬을 못 죽이고 죽어버리면 어떡할 겁니까!

-아니 무엇보다! 우리가 왜 돈을 바쳐야 하냐고! 다 같이 싸우는 거 아니요? 난 한푼도 줄수 없어!

-하지만 그분이 이전에도 챔피언 데몬을 처치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죽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돈을 요구하는 건 옳지 못하지.....

-돈이 아니라 성수잖아. 마나가 부족해서 그런 거 아닌가?

-그게 곧 돈이지! 마나가 부족하면 뭐 얼마나 부족하다고! 우리가 하나씩만 모아도 100만 개 아냐? 이거 거래소에서 되팔기만 해도 100만금이라고 백만금!!

웅성웅성.

백만금이란 소리에 군중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하! 백만금이라니... 나한테 10만금만 주쇼! 그럼 내가 챔피언 데몬 정도는 잡아줄 테니까!

-참나 어차피 잡아야 할 데몬인데 돈까지 받아? 그 사람 참 양심 없구먼! 뇌창보다는 차라리 데몬시드가 낫겠어!

-맞네, 데몬시드는 돈 달라고는 안하니까.

-하지만 저번에 보니까 뇌창도 목숨 걸고 던지는 것 같던데... 저번에 기사왕 잡고 피 토했잖아.

-그래, 그냥 하나씩 주고 맡기면 되는 거 아냐? 20금화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싼편이라고.

-흥, 피는 나도 토할 수 있다. 그 정도 리스크는 자기가 짊어지는 거지. 솔직히 나한테 20금 정도는 별일도 아니지만, 심보가 싫잖아, 심보가!

-그래! 우리가 무슨 자기 없으면 다 몰살 당하는 줄 아나? 데몬시드도 있는데 꼴랑 2등따리가 무슨...

"근데 저새끼가 확."

1등도 나고! 2등도 나다 개새꺄!

'면상을 확 뭉개버리고 싶네.'

열불나서 당장에라도 투창하고 싶지만 참았다. 손해보고 싶지 않은 마음 정도는 나도 가슴 깊이 익숙하니까.

아무래도 저놈들한테 성수를 받아내는 건 제아무리 강철군주라도 힘들겠다 싶을 때 즈음.

쿵!

강철군주가 자신이 타고 있는 말을 차 발을 구르게 했다.

일순 어수선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강철에게로 몰렸다.

-그가 단순한 금화가 아니라, 푸른 성수를 요구 조건을 내건 이유를 당신들은 아직도 모르겠나.

-그게 무슨 소리요 강철.

-이유는 무슨 놈의 이유! 돈독이 올라도 더럽게 오른거지!

-그래 맞소!

-맞지 맞지!

사람들은 괜히 열내며 목청을 드높였는데 그럼에도 강철은 담담한 낯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뇌창과 데몬시드는 한 파티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푸른 성수를 요구하는거지.

"강철이 똑똑하긴하네..."

지금 강철의 말은 이러했다.

데몬시드와 뇌창은 하나다.

그러니 푸른 성수는 대마법을 선보였던 데몬시드가 필요한 것.

랭킹 1위와 2위.

둘이 한팀이라는 걸 군중들에게 밝힘으로서 20금화의 손해를 타당하게 만들었다.

-목숨값으로 20금. 싼 편이지. 그리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지금 오크들이 강화된 이유는 챔피언 데몬. 갈루란타라는 오크왕에 의한 일이다. 놈만 없다면 오크들은 약화되고 카오스는 성공적으로 방어하겠지. 오크 한마리당 금화 드랍이 17금 정도 되니 그렇게 문제될 금액도 아님을 모르나? 그런데도 손해? 그 정도 돈이면 챔피언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담담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팩트로 후드려패는 강철의 반문에 이악물고 싫다던 사람들의 주둥아리도 쏙 들어갔다.

"그래그래, 이게 옳지."

역시 랭커.

똑똑해서 그런지 말 한번 잘했다.

강철의 사이다를 한껏 마시며 음미하던 그때.

까앙-!!

돌연 풀숲에서 나온 오크의 도끼를 맞받아친 레아는 그대로 달려가 놈의 어깨를 베어냈다.

뒤로 굴러 단칼에 베이는 걸 거부한 놈이 다시금 도끼를 잡았다.

몇번의 무구를 부딪친 후, 겨우겨우 오크를 베어넘긴 레아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놈이 떨어뜨린 장비를 파밍하고 다시 되돌아왔다.

"오크들의 진입이 거세지고 있어요. 화살에 맞고, 트랩을 밟아 다쳤어도 꾸역꾸역 밀고 들어와요."

"응. 터프한 놈들이야."

레아가 싸우는 걸 구경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걱정했는데 이 정도면 따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레아의 검술은 여기 있는 네피림들 보다는 매끄럽고 정교하다.

정확하게는 정돈되어 있다는 편이 맞겠지. 공주였던만큼 기초적인 검술은 배워서인지 오크와의 전투에도 한사람몫은 충분히 해내보인다.

거기에 더해 최하급 신성력이 깃든 [리켈란의 검+3]의 검에 맞은 악마는 기본적으로 취약하다.

오크라해도 악마는 악마.

신성력 깃든 검에는 필요 이상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레아, 그 검. 이전보다 괜찮아?"

"네! +3강되서 신성력도 최하급에서 하급으로 바뀌어서 더 좋아요!"

"그래, 다행이네."

최하급에서 하급으로 바뀐 검.

리켈란의 검이니 데몬을 상대함에 있어 남들보다 쉬운 건 물론, 레아의 스탯은 나보다는 낮지만 네피림 평균보다는 월등히 높다.

아마 오크를 상대로 2대1의 상황이 펼쳐져도 살아남겠지.

레아를 걱정할 필욘 없어 보인다.

그보다는 슬슬 전선을 걱정해야 할 때다.

"조금씩 뚫리네."

"오크들의 체력이 어마어마해요."

"그러게."

한마리, 한마리가 끈질기다.

절대 쉽게 죽지 않는다.

갈루란타를 외치며 끝끝내 상처를 입히고 죽어가는 놈들의 눈을 보노라면 지독한 광신도의 눈빛과도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런 놈들이 천천히 소모전을 원하는 듯 숨쉴틈 없이 몰려드니 제아무리 호기로웠던 랭커들이라고 해도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육체적인 피로뿐만이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존."

숲의 나무 위에서 쉴틈 없이 화살을 쏘고 있는 아마존이 보인다. 얼마나 화살을 쏴댄건지, 손끝에 붕대를 감았음에도 핏물이 베어나오고 있었다.

한번에 여러대의 화살을 끼워 쏘아대는데 백발백중이다.

하지만 오크들은 그걸로 죽지 않는다. 목에 화살을 맞았어도 꾸역꾸역 달려든다. 이런 놈들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건 그것대로 대단하다고 말해도 되겠지.

쾅! 쾅! 쾅! 쾅!!

그때 화살깃이 붉게 달아오르며 폭발했다.

아마존의 새로운 스킬.

익스플로젼 애로우였다.

"꽤 무섭네 저건."

화살을 맞추기만하면 폭발시킨다.

그 위력은 소형 폭탄이지만 몸 내부에서부터 터지는거니 꽂히기만 한다면 누구도 무서워할 무기였다.

"..."

하지만 폭발화살을 쓰자마자 아마존의 얼굴에 피로가 쌓였다.

적잖이 기력을 많이 소모시키는 스킬인 듯 했다.

지친 건 아마존뿐만이 아니다.

쌍도끼를 휘두르며 몸을 회전시켜 싸우는 랭킹 6위 바바리안.

"이게 바로 휠윈드다 이놈들아!!"

군복 입은 해골들을 상대로 대화하며 싸우는 5위 네크로맨서.

"박병장님 대단하시지말입니다?"

망치를 들고 날리며 옅은 오오라를 펼치는 10위 팔라딘. 길들인 짐승들을 거대화시켜 싸우는 18위 드루이드 등등 꽤 다양한 자들이 전선을 지키고는 있었지만 내 눈엔 보인다.

'서서히 밀리고 있어.'

인해전술을 사용하는 오크들의 끈질힌 집념과 질긴 생명력은 방심하는 랭커들을 하나둘 상처입혔다.

"악! 이 개새끼가!!"

"죽은 척하고 있었어! 제기랄!"

그 상처는 하나둘 쌓여가며 서서히 후퇴로 이어진다.

한명, 두명, 열명의 이탈이 전선을 숲속으로 밀리게 만들고 뒤로 물러날 곳이 조금씩 사라진다.

"마법부대! 마법 발사!!"

39위 소서리스가 마법사들을 긁어모아 대단위 마법을 발사한다.

불구덩이와 전격 마법들이 장관을 이루며 쏘아진다.

꽤 효과적으로 오크들을 섬멸하지만 그 뒤를 이어 새로운 녹색의 물결이 또다시 출렁거린다.

"위험하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오크라는 종족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의 얼굴에 그늘처럼 드리운다.

우선 급한 불부터 꺼야겠다.

난 숲으로 가 열병의 물소뼈 투구를 썼다.

적창을 인벤토리에 집어 넣고 로브와 지팡이를 꺼냈다.

숲에서 다시 나타났을 때, 나는 명백한 랭킹 1위.

데몬시드의 모습이었다.

아직도 웅성거리며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앞으로 가 말했다.

"성수가 필요하다."

머뭇거리던 사람들은 이내 내 발치에 성수를 두기 시작했다.

오크 왕 갈루란타 [1]

51화.

"데몬시드! 데몬시드!!"

"믿고 있었습니다!"

"랭킹 1위!! 오크들을 물리쳐줘요!"

"사랑해요 오빠! 꺄악!"

"존나 멋있어!!"

열병의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에 내 표정을 못보여주는 게 한이다.

뒤에서는 이렇다저렇다 뒷담화 비슷한 소릴 다 떠들어대놓고 눈앞에 닥치자 찬양 한사발이다.

그거 뿐일까.

앞다퉈 성수를 바치려고 새치기까지 하기 시작했다.

"저 랭킹 1953위 알커미스트입니다! 충성! 충성! 데몬시드님을 옛날부터 흠모했습죠!!"

"데몬시드님 전 2549위 링구아입니다! 강력한 힐러이니, 제가 필요하실때는 저 링구아를 찾아주십쇼!"

"저, 저는 521위 보아드입니다!"

"저는...!!"

성수 하나씩을 내려놓으면서 자기 PR에 여념없다.

어떻게든 나한테 얼굴 도장이라도 찍어 놓으려고 안간힘들이다.

보이지 않을때는 그렇게 까내리고 자기 돈 아까워하던 양반들이 말이다. 어렴풋이 들은 목소리였지만 같은 음성을 내뱉는 자들을 대충 추릴 수 있었다.

이 또한 능력치가 올라가서일까.

신체능력이 월등히 뛰어나지니 별게 다 된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것들까지 모조리 말이다.

물론, 딱히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저 한명, 한명. 내 욕했던 놈들 얼굴을 마음 속에 품었을 뿐!

나 이화성.

내 사람에겐 관대하나, 내 욕하는 놈들에게는 누구보다 속좁은 인간이 될 자신이 있었다.

그걸 위한 귀찮음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노력까지 품은 사내.

그게 바로 현 랭킹 1위.

데몬시드다.

"데몬시드님, 도와드리겠습니다."

자처하며 내 앞에 늘어져 있는 성수들을 레아와 함께 정리하기 시작한 사내는 랭킹 51위 관찰자.

글을 썻다하면 인기글로 도배되는 네갤의 인기 스타였다.

하지만 네갤의 네임드조차 내 앞에서는 자세를 낮춘다.

그 모습이 적당히 불편하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80만개라 말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 정도의 숫자까지 필요하지는 않았다.

"관찰자. 당신 2레벨 스킬은 뭐지?"

"네? 아...! 관찰 레벨이 한층 더 높아졌을 뿐입니다. 이전에는 색으로 위험 수준을 구별하고 숫자로 강함을 나타냈다면, 이제는 더 추가적인 관찰력이 높아졌죠."

"예를 들면?"

"오크 전사를 예로 들면, 제 기준으로는 주황색이고 레벨이 표시되며, 숱한 전장을 거친 갈루란타의 전사라고 적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찰자의 시점에는 이렇게 보인다고 한다.

[오크 전사] (yellow) 4레벨 - 225.

-거친 땅. 거친 숲에서 태어난 큰 바위 도끼 부족. 숱한 전장을 겪은 위대한 오크왕 갈루란타의 전사.

"그럼 난 무슨 색이지?"

"붉은 색입니다."

적색.

관찰자의 시점에서는 싸워서는 안될 상대라는 것이었다.

"갈루란타는?"

"흑색..... 7레벨입니다."

"역시 그런가."

7레벨.

오크 전사가 4레벨이니 오크왕이 7레벨인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이름이 있는 챔피언 데몬.

일반 전사보다야 당연히 상위 레벨을 지니고 있는 게 맞다.

"여기요."

"응."

정리해주는 성수들을 인벤토리에 넣는 척 하며 쌍썽의 거울 속으로 모조리 집어 넣었다.

차근차근 모여드는 성수의 숫자는 벌써 일만이 넘어가고 있었고, 서서히 몰려드는 사람들의 납품으로 3만에서 5만, 10만으로 불어났다.

싱글벙글 성수를 거울 속으로 넣다 십만이 됐을 때 합성을 시도했다.

[푸른 성수+1]x50000

"쌍성을 이룹니다."

[푸른 성수+2]x23570

"쌍성을 이룹니다."

[푸른 성수+3]x7060

+3에서 꽤 합성에 실패했지만 그 정도야 충분히 감안할 수 있다.

한병을 따서 급히 마셔봤다.

"푸른 성수+3을 복용합니다."

"마나 500이 빠르게 회복됩니다."

"좋아."

마나를 회복시키는 푸른 성수는 꽤 작은 물약이지만 먹다보면 헛배가 부른다.

그런데 +3으로 합성시키자 물약 자체가 농축된 것처럼 걸쭉하기는 했지만 양은 확실히 더 줄어들었다.

게다가 5개를 먹었어야 회복됐을 양이 한병으로 이루어졌다.

썩 만족스럽다.

10만개가 7천개로 변해 피눈물 날 정도로 아쉽지만 어쩌랴.

이것만해도 충분하니 괜찮다.

'한번만 더 할까.'

500이 회복되지만 내 마나는 760.

어차피 더 많은 성수들이 들어올테니 +4까지 만들어도 좋지 않을까.

물론 실패확률이 그만큼 높아져서 손해보는 성수도 많겠지만 이 때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합성할까.

생각은 깊었지만 결단을 내리자 행동은 재빨랐다.

'간다!'

"쌍성을 이룹니다."

[푸른 성수+4]x1862

"큭!!"

"왜, 왜 그러세요?"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왜....."

"아, 아니야. 아무것도."

7천개가 1800개가 됐다.

실패 확률이 얼마나 높은건지 2천개도 채우지 못하고 다 날아갔다.

아까워 죽겠지만 나는야 랭킹 1위 데몬시드. 그런 꼴불견인 모습을 보일 순 없다.

열병의 투구 아래 눈물을 감추고, +4로 만든 성수를 마셔본다.

"푸른 성수+4를 복용합니다."

"마나 800이 빠르게 회복됩니다."

'천 정도는 찰 줄 알았더니...'

손실이 아깝지만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 마나 물약을 여러번 마셔야하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

잠깐의 틈으로 승패가 결정나는 전투 속에서 물약 여러개를 나눠마시는 것만큼 수고스러운 짓은 또 없다.

고작 800 이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차오르는 회복속도를 보니 충분히 만족스럽긴하다.

아무리 푸른 성수를 마셔도 마나가 회복되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는 않았는데 +4 정도 되니까 확연히 보일 정도로 회복 속도가 빠르다. 이 정도면 전투시에 먹어도 텀을 두지 않고 빠르게 스킬을 퍼부을 수 있겠다.

"정리, 부탁해."

"넵! 맡겨두세요!"

"다녀오십시오!"

나머지는 레아에게 맡기면 되겠지. 인벤토리가 가득 찰 정도겠지만 어쩔 수 없다.

가만히 앉아 성수만 합성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애초에 이렇게 성수를 받은 것도 놈들을 처리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이니.

"밥값은 해야지."

내가 할일은 다르지 않다.

[레인스톰] [블리자드]를 통해서 놈들의 발을 묶고 [브램블리]로 가시덩쿨을 만들고 [패스틱사드]로 독을 뿌려 약화시키고 [지독한 열병]으로 놈들을 병들게 만든다.

대단위 마법으로 빠져나가는 마나의 소모량이 꽤 대단했다.

하지만 한병을 마시니.

"푸른성수+4를 복용합니다."

"마나가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바로 회복.

"이거지, 이게 바로 치트지."

꽈과광!!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천둥번개가 번쩍이고 그 아래를 눈보라가 세상을 휩쓴다.

하지만 버프 받은 오크 대군은 이처럼 맹렬한 눈보라 속을 뚫어내려 하고 있다.

그 꼴을 가만두고 볼 수 없는 법.

"워터볼."

순식간에 수십개의 워터볼이 내 주변에 띄워진다.

내 손에는 잡다한 데몬시드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워터볼 안에 씨앗을 넣고는 단번에 날린다.

꽤 강렬하게 날아가지만 거리가 거리이다보니 포물선을 이루기 시작하는 그때.

"깨어나라, 씨드라."

유치한 주문을 외워주며 워터볼과 함께 날아간 데몬시드를 깨운다.

[끼에에에에엑!!]

순식간에 급성장한 씨앗에서 세개의 머리를 지닌 뱀이 나타나 녹색물결로 떨어져 사방을 닥치는대로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데몬시드로 만든 씨드라.

이놈은 레벨 5 검은산양의 추종자들도 어쩌지 못하고 단번에 잡아 먹혔던 놈들이다.

레벨 4에 불과한 오크들이 당해낼 수 있을 리 없다.

제아무리 버프를 받았다해도 블리자드로 몸이 굳고, 브램블리가 몸을 옭아메며 독과 열병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씨드라와 싸울 여력이 있을까?

단언컨데 없다고 본다.

그리고 전황은 내 예상대로.

"가, 갈루...!!"

"크억!"

"갈루란타아아!!"

갈루란타를 외치며 꾸역꾸역 아군의 시체를 밟고 전진하던 오크군의 진군이 멈췄다.

콰즉! 콰직!

거대한 씨드라들의 융단폭격에 오크군은 단번에 궤멸하기 시작했고 대응하는 놈들은 사지가 찢겼다.

이 정도가 되니 줄곧 흔들림 없는 눈빛을 뿌리던 오크왕 갈루란타 조차도 자신의 왕좌에서 일어났다.

최전선.

초목과 눈보라의 경계선.

그 앞에 지팡이를 들고 서있는 내게로 갈루란타의 시선이 꽂힌다.

짙은 눈보라 속.

오크들의 주검이 새하얗게 파묻히는 전장의 허공에서 갈루란타와 나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왕좌에서 일어선 갈루란타가 자신의 거대 도끼와 방패를 들고 전장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시선의 끝은 오직 나.

데몬시드를 향하며 말이다.

"열받았나보네."

백전노장.

숱한 전장을 겪으며 감정의 동요라고는 1도 없을 것 같은 오크왕이 분노에 휩싸여 달려들었다.

본래라면 당장 달아나 군대를 꾸려야할 상황이지만.

"나쁘지 않아."

썩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방패를 앞세워 달려드는 놈은 떨어지는 우박을 막고, 거칠게 포효하여 자체적인 버프를 유발했다.

거기에 더해.

"포효하는 갈루란타의 분노한 포효가 당신의 사기를 떨어뜨립니다."

"모든 능력치가 40% 하락합니다."

"당신의 강함이 포효를 저항합니다."

"능력치 하락이 절감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20% 하락합니다."

모든 능력치의 하락.

꽤 대단한 권능이다.

놈은 아마도 저 능력으로 숱한 전장을 승리로 이끌어온 주역이겠지.

"갈루란타아아!!"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갈루란타의 외침에 내 전신마저도 찌릿찌릿하다.

하지만 이건 두려움이 아니라, 모종의 희열이었다.

"얼마나 버티나 볼까."

지팡이를 들었다.

블리자드는 대단위 마법이지만 일시적으로 조절이 가능하다.

집중적인 공세가 가능하다는 말.

쾅! 쿵! 콰앙!!

사정없이 전장으로 뛰어드는 갈루란타를 향해 눈보라와 우박을 집중시킨다. 쾅쾅 터져나가는 전장.

떨어지는 우박의 손톱만한 것부터 사람만한 것까지 무수히 많다.

그것들이 전장에 떨어지자 새하얀 연기를 피워내며 크게 진동한다.

"크아아아아아아!!"

하지만 갈루란타에게는 큰 피해가 없다. 떨어지는 우박은 방패로 막고, 큰 것은 도끼로 부수며 전진한다.

"브램블리."

콰드드득!!

땅 밑에서부터 뚫고 올라오는 굵은 가시덤불이 갈루란타의 다리와 두 팔을 옭아멘다.

"크아아아!!"

하지만 놈의 포효 한번에 가시덤불은 생기를 잃고, 힘이 약해지며 썩은 동아줄처럼 찢겨진다.

그 뒤를 눈먼 씨드라가 앞다투어 갈루란타를 향해 아가리를 벌린다.

"갈루! 란타!!"

쩌저적!! 콰드득!!

씨드라의 공격을 회피해 단숨에 뿌리 부분을 도끼로 찍어버린 갈루란타는 능숙하게 씨드라를 베어냈다.

몸통이 베어진 씨드라는 힘을 잃고 시들었다. 또 한마리의 씨드라가 공격했으나 방패로 막아내고 아가리를 그대로 찢어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터프한 방법으로 씨드라를 돌파하는 갈루란타를 보자 헛웃음마저 나왔다.

"왕은 왕이네."

갈루란타의 등장으로 전황은 또 다시 돌변했다.

힘없이 죽어가던 오크 전사들이 갈루란타의 뒤를 따라 힘차게 진군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일순 갈루란타가 부러웠다.

자신을 위해 한치의 망설임 없이 목숨을 걸며 진군하는 전사들이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거래는 거래니까."

푸른 성수 하나를 마저 들이키고 나 또한 눈보라 속으로 뛰어들었다.

블리자드의 전선에 존재하는 아군은 없다. 놈은 아마도 데몬시드로는 꺾을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내 모든 걸 사용하며 꺾어야 할 오크들의 왕이다.

'마냥 멀쩡한 상태는 아니다.'

블리자드와 브램블리.

씨드라를 돌파하며 작은 생채기와 더불어 놈의 체력을 꺾었다.

지금도 블리자드로 인해 좀먹고 있는 놈의 생명력은 고갈되고 있을 터.

쿵! 쿵! 쿵! 쿵!!

기세 등등하게 날 향해 뛰어든다.

하늘 높이 도약한 갈루란타가 눈발의 긴 꼬리를 그리며 떨어진다.

거침없는 동작.

자신의 체중과 두꺼운 녹색 근육을 이용해 도끼를 내려찍는다.

놈은 생각했을 거다.

대단한 마법을 지닌 마법사라고.

하지만 마법사가 으레 그렇듯 근접하게 되면 자신이 이길 것이고, 전장 또한 승리하게 될거라고.

그 생각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려."

카앙-!!

끼긱! 끼기긱!!

"서펜트의 데몬시드를 섭취합니다."

"시드로긴이 활성화됩니다."

"!!"

"마법사가 근접전에 약할거라는 편견은 오늘부터 버려라."

아껴놨던 서펜트의 데몬시드를 도핑한 나한테. 오크왕의 육체 스펙은 그리 대단할 것도 아니다.

태앵-!

적창으로 오크왕의 도끼를 튕겨낸다. 이내 붉은 벼락이 퍼덕인다.

"카탈린의 벼락."

콰지지직!!

시뻘건 번갯불이 새하얀 눈보라를 붉게 물들였다.

오크 왕 갈루란타 [2]

52화.

눈보라 휘몰아치는 전장.

전장속으로 사라진 랭킹 1위.

데몬시드의 뒷모습을 숨죽이며 바라보던 아마존의 무릎이 펴졌다.

"대장! 안됩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데몬시드는 마법사야. 갈루란타가 근접전을 시작하면 불리한 게 당연해. 나라도 가서..."

아마존은 현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아무리 랭킹 1위라고 하더라도 고작 한사람한테 저 대군을 맡기고 있는 상황이 싫었다. 그에게 많은 책임을 떠맡기는 거 같아서, 또 무책임하게 바라만보는 건 이제 더 싫었으니까.

"그가 아무리 강하다해도 엄호라도 해주는 편이..."

"어이, 아마존. 굳이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스킨헤드.

바바리안이 쌍도끼를 털어내며 나타났다.

"바바리안. 뭘 알고 있는겁니까."

"당연히 너보다는 가깝지. 전우라는거다. 전우."

"... 설명이나 해주시죠."

설명을 원하는 경쟁자의 물음에 바바리안은 픽 웃이며 턱짓했다.

"곧 보일걸."

꽈광-!!

전장 전체를 감싸는 눈보라 속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뇌창...?"

"데몬시드와 뇌창이 함께한다. 솔직히 우리가 가봤자 오히려 방해야, 방해. 아직도 모르겠냐?"

"당신, 근데 왜 절 볼때마다 반말하는 겁니까."

"나보다 어리잖아?"

당연하게도 말하는 바바리안의 시야에 아마존이 잡혔다.

아마존은 좋게 봐줘도 스물 초반.

30줄이 넘어가는 자신과의 액면가는 스무해 이상 차이나기도 했다.

"당신보다 어리다고해서 무례해도 된다는 겁니까? 전 당신보다 랭킹도 높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응, 반말할거야~ 내가 반말하는 건 네가 어려서가 아니라 전우라서다!"

"방금은 어리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조크지, 조크!"

머쓱함에 뒷목을 긁적인 바바리안이 검지를 펴며 변명했다.

아마존의 낯에 혐오의 그늘이 드리웠다.

"전 당신이 싫습니다. 스스럼없이 대하지 말아주세요."

"시답잖은걸 신경쓰면 크게 될 수 없는 법이다. 아마존."

"디테일을 신경써야 하는 게 활잡이라는 겁니다. 알고나 떠드시죠."

"까탈스럽긴."

철컥.

"그가 만들어준 시간이다. 지금은 말싸움을 할 때가 아니라 무구를 재정비하고 온전히 휴식을 취할 때지."

"강철! 왔나?"

반가워하는 바바리안과 달리 강철은 그를 썩 내켜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바리안은 친한척 굴며 강철에게 아마존의 불안감을 고자질했다.

"데몬시드는 몰라도, 뇌창을 의심하는 건 전우로서 기분이 나쁘지! 안 그러냐 강철?"

"... 그럴 수도 있지."

"강철!!"

"뇌창을 믿는다. 그라면 분명 갈루란타를 쓰러뜨려줄거다."

"뭐야,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거냐고~ 배신하는 줄 알았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일은 있는 법이야. 뇌창과, 데몬시드가 합공해도 쓰러뜨리지 못하는 강적이라면 아마존의 말대로 우리도 가세할 준비 정도는 하고 있는 게 맞겠지."

어떠한 정보도 없는 적이다.

관찰자의 말에 의하면 숱한 전장을 겪은 7레벨의 백전노장.

그렇다면 단순한 레벨의 강함 뿐만 아니라 전략이나 전투 기술에 대해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상대라는 뜻.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지만 강철!!"

"혹시라도. 그가 퇴패했을 때를 대비해야 하는 게 옳아."

아무리 대비해도 부족한게 전쟁이다. 랭킹 1위와 2위라고는 하지만 겨우 두사람에게 맡겨놓기엔 전장의 승패에 사라질 목숨이 너무 많았다.

'두사람에게 맡겨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여기 있는 그들도 랭커. 둘이 패했을 때에 대비하여 목숨 정도는 내놓는게 정당해.'

그래야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을테니까.

"아니아니, 그게 되겠냐고. 자그마치 레벨 7이다 레벨 7!! 단순하게 레벨이 높은것도 아니고 수식언과 종족값까지 최상인 챔피언 데몬이야. 그런데 그걸 단 둘이서 가능하다고? 너네 진짜 미친 거 아니냐?"

바바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철과 아마존이 바바리안을 한차례 바라보고 조금 높은 곳에서 들려온 음성임을 알아차린건 찰나였다.

"누구."

고개를 들자, 깃털 날개를 펄럭이는 금발머리 사내가 그들 사이로 내려 앉았다.

"랭킹 11위 글로리안. 내 식대로는 찬양의 날개지."

글로리안이라고 자길 소개한 조금 껄렁거리는 사내는 자신의 깃털 날개를 접고 눈보라와 번개가 치고 있는 전장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되겠냐? 말도 안되지."

명백하게 데몬시드와 뇌창의 실패를 논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놈인데 나타나자마자 비난조로 말해대니 아마존과 강철은 눈살부터 찌푸렸다.

"7레벨이다. 그에 반해 데몬시드와 뇌창이 레벨은 몇이지?"

오크 전사보다 낮은 3레벨.

"4레벨이 높은, 그것도 최상의 종족값과 어떤 능력을 지녔을지도 모르는 수식언을 가진 챔피언 데몬을 단둘이서 상대해? 그냥 미친거지."

글로리안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데몬시드와 뇌창은 항상 상식 밖의 결과를 보여줬다."

강철이었다.

"맞아. 뇌창의 힘은 조금 분하지만 규격외였어."

방금 전까지 실패를 논했던 아마존이었지만 글로리안의 등장으로 돌연 성공을 희망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글로리안은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랭커라는 놈들이 겨우 이정도 통찰력으로 뭘 한다는건지... 그냥 운 좋게 기프트를 얻은거겠지."

"뭐?"

간과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아마존이 분개했다.

하지만 강철은 익숙한 듯 가만히 있었는데, 저놈과 비슷한 말을 했던 놈이 어떻게 됐는지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너랑 똑같은 말을 했던 불장난 좋아하는 놈이 있었지."

랭킹 11위 주정뱅이.

화염병을 만들어 던지는 놈이었다.

카타콤에서 함께 싸웠던 놈이었는데 글로리안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

운 좋게 상급의 기프트를 얻었다며 강철을 무시했던 놈.

그 놈이 어떻게 됐더라. 곰곰히 생각하던 강철은 이내 씨익 미소 지으며 글로리안을 바라봤다.

"불장난을 너무해서 도망가다 오줌을 지렸던가."

"하하하! 글로리안은 날개가 있으니 잘못하면 우산이라도 펼쳐야겠구만!"

껄껄 웃는 바바리안의 웃음과 함께 글로리안의 낯이 불그락푸르락 변했다. 자신을 모욕주는 말임을 모르지 않았기에 날개를 펼쳐 펄럭였다.

"너희들이 언제까지 랭커일거라고 생각하지마라. 우리가 곧 따라잡으면 너희들이 카오스를 주도하는 것도 이제 끝이니까!"

삼류악당이나 할법한 대사를 치며 날아가려는 그때.

쇄애액-!!

퍽!!

"끄아아악!!"

돌연 눈보라 속에서 날아온 적창이 글로리안의 깃털 날개를 찔렀다.

"헉! 이건 뇌창꺼잖아!"

"으아아악! 이, 이거!! 이거부터 빨리 뽑아줘!! 끄악!! 아파! 아파아파!!"

얼마나 강하게 박혀들었는지, 화살에 맞인 새처럼 나무에 매달려 퍼덕거리는 꼴이 제법 꼴불견이었다.

강철과 아마존은 꼴 좋다는 듯 가만히 바라봤고 보다못한 바바리안이 적창을 뽑아주려 했으나.

"으으윽!! 강철! 나좀 당겨봐! 이거 안 뽑힌다!"

"빨리 뽑으라고! 문어대가리 자식아!! 죽는다고! 으아아악!!"

"거 더럽게 시끄럽네."

마지못해 바바리안과 함께 적창을 뽑으려는 강철이었지만 힘을 더했음에도 창은 꿈쩍도 안했다.

"이 개새끼들! 나 죽이려고 일부러 그러는거지! 살인자 놈들! 내가 다 신고할거야! 너네 콩밥 먹일거라고! 으아아악! 피가! 피가 안 멈춰!!"

어느 정도 근력 스탯이 높은 편인 바바리안과 강철이 당겨도 멀쩡하니 어이없는 건 오히려 그 둘이었다.

대체 얼마나 강한 힘으로 박혀야 랭커 둘이 잡아당겨도 안 뽑힐까.

이걸 던진게 뇌창인지, 싸우다가 튕겨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잖이 치열한 싸움임은 알 수 있었다.

근데 그건 그렇고.

"이새끼 이러다 진짜 죽겠는데."

"흥, 죽으라고 둬. 지 운이지."

꼴 좋다는 듯 콧방귀끼는 강철과 찝찝하다는 듯 인상쓰는 바바리안과 아무래도 좋다는 듯 관심없는 아마존이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파직!

스파크가 튀더니 적창을 잡아 뽑는 뇌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끄으아아아아악!!"

"뇌창!!"

"다쳤나? 이거 미안하네. 갈루란타의 저항이 꽤 거세서."

찢겨진 날개를 미안함 가득한 손길로 툭툭 두들긴 뇌창은 인벤토리에서 해골기사의 창 여러개를 꺼내 바닥에 꽂았다.

"뇌창, 상황은 어떻지? 데몬시드는?"

"아아, 아마 시간문제일거야."

그때였다.

"갈루란타-!!"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오크왕 갈루란타가 눈보라를 뚫고 크게 도약해 뇌창에게로 쇄도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다시피하는 갈루란타의 모습에 뇌창은 곧장 꺼내놓은 해골기사의 창을 투창했다.

순식간에 수십개를 투창한 뇌창의 실력은 노련했고, 하늘에서 피할길 없는 갈루란타의 몸에 창들이 고슴도치처럼 박혀들었다.

"크아아아아아!!"

하지만 그는 오크들의 왕.

갈루란타.

투창이 가슴에 박히고, 팔과 다리를 찔렀음에도 아랑곳 않고 도끼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꺄악!"

"끄아아악!"

"무, 무슨 위력이 크윽!!"

낙하는 속도에 더불에 거대 도끼를 휘두르자 갈루란타의 주위로 자리했떤 나무가 모조리 터져나갔다.

"쿠와아아아아악!!"

"오크들의 왕, 갈루란타의 사자후가 당신의 몸을 경직시킵니다."

"능력치가 40% 하락합니다."

"큭!"

강력한 맷집과 힘에 더불어 놈의 포효는 랭커들조차 경직시켜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고작해서 2, 3초 경직이었지만 전장에서는 그거면 목을 베기에는 충분한 시간. 게다가 능력치 40% 하락하게 만드는 디버프는 순간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곳에 있던 랭커들은 자신의 맞서 싸워야 할 존재라는 것도 잊고 뒷걸음질 치기 바빴다.

아마존도, 바바리안도, 강철도 오크왕의 강력함에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이게... 갈루란타...!"

보이는 기세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오크왕 갈루란타.

그런 자와 일대일로 싸우며 전혀 밀리지 않는 뇌창의 모습은 랭커들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카앙-! 채앵!!

창과 도끼가 부딪치며 피어나는 불티가 화려하게 둘 사이를 휘날린다.

콰지지직!!

붉은 벼락을 자아내며 전광석화처럼 이동하며 싸우는 뇌창의 모습은 그야말로 뇌신 그 자체.

그의 공격 한방, 한방은 제아무리 갈루란타라도 고통을 참아낼 수 없는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포효했다.

하지만 갈루란타의 도끼 또한 한방, 한방이 땅을 울리고 쪼갰다.

강력한 힘이 담긴 도끼는 바바리안이라도 막아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셌다.

쿵쿵!!

주변 숲을 모조리 박살내가며 적창에 찔린 갈루란타가 괴성을 내며 가슴에 박힌 창을 붙잡는다.

"이 새끼가...!"

"크륵!"

녹색의 피가 잔뜩 흩뿌려졌으나 아랑곳 않했다.

이 창만 막으면 싸움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믿는 듯 했다.

여러개의 투창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적창만큼 위협적인 것 없다고 몸으로 깨달아서일까. 갈루란타는 적창을 잡아 뺴내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의 가슴에 더욱 밀어 넣었다.

절대 뺏기지 않겠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이고는 짐승의 괴성이 한차례 터져나왔다.

그때였다. 자신의 도끼를 잡아 뇌창의 목을 베려했다.

간발의 차이로 창을 놓고 피한 그는 인벤토리에서 하나의 창을 꺼냈다.

본래라면 근력 제한 때문에 드는 것도 힘들었을 거창.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자기 몸 써서 무기 뻇는건 오크들 종특이냐?"

[드레커니의 용살창+3] (unique)

-용살자 드레커니가 애용했던 창.

〈강력한 관통력〉〈강력한 폭발력〉

--착용제한--

〔근력 제한 40〕 X▶O

〔용의 피를 뒤집어 쓴 자〕O

철컥.

"냉기랑 번개는 꽤 내성 있던데. 그럼 폭발도 내성이 있나?"

아마 있어야 할꺼야.

"이건 꽤 아플테니까."

"갈루란...타-!!"

콰아아아앙-!!

오크 왕 갈루란타 [3]

53화.

드레커니의 용살창.

용살자 드레커니가 애용했다던 용살창은 거대한 거창으로 날카로운 랜스 형태의 창이다.

창끝에는 기폭제가 자리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건랜스랄까.

충격에 의해서 창 속에 있는 폭탄이 작은 구멍들에 의해 터지는 형태다.

살속을 비집고 들어간 창날과 함께 그 속에서 터지는 폭탄.

마법으로 이루어진 폭탄인지 충전제를 갈아줄 필요가 없는 마법창이다.

완벽하게 드래곤을 위해 개조된 드레커니의 용살창이 오크들의 왕.

포효하는 오크왕 갈루란타의 어깨에 박혀들어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앙-!!

"갈루..."

왼쪽 어깨부터 시작해 상반신 절반이 날아가 버린 갈루란타는 대충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가슴뼈는 물론이요, 갈비뼈가 훤히 드러났고 날아가 버린 상반신 일부와 함께 시체 타는 냄새가 고약하게 화약과 함께 풍겼다.

"..... 끈질기다. 갈루란타."

하지만 그런데도 시스템은 갈루란타가 죽지 않았다는 듯 묵묵부답.

아직도 정신을 잃지 않고 도끼를 들고 있는 갈루란타는 적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쿵, 쿵.

상체가 절반 가까이 날아갔는데도 한걸음, 한걸음. 내게로 오며 힘겹게 도끼를 들어 올린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 전사로서 살아온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훌륭하다."

그러나 승패는 이미 났다.

가까스로 도끼를 들고 있는 건, 이성이 아닌 본능.

숱하게 들어 올린 그간의 습관이 만들어낸 본능적인 움직임.

훌륭하다는 내 말을 들은 걸까.

갈루란타의 도끼는 그제야 스르륵 땅으로 떨어졌다.

"위대한 업적을 세우셨습니다."

"단신으로 모든 오크들의 왕. 그들에게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포효하는 오크왕 갈루란타'를 처치하셨습니다."

"25430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3240 금화를 획득합니다."

"업적-단신으로 녹색 물결을 가른자를 획득합니다."

"보상으로 미확인 뼈방패를 획득합니다."

"데몬시드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스탯 포인트를 +3 획득합니다."

"아."

드디어!

드디어! 데몬시드의 레벨업이었다.

어지럽게 펼쳐진 상태창에서도 확인할 건 두가지.

나의 레벨업과 업적으로 받은 방패.

『이화성』

「데몬시드 4레벨」

「카탈린의 감전 3레벨」

「생명력」 – 320/820 (+200) ▲

「마나」 - 320/840 (+80) ▲

「능력치」

근력 – 33 (+14) ▲

민첩 – 25 (+4) ▲

건강 – 32 (+14) ▲

마력 - 38 (+6) ▲

강골 - 10 ▲

「세부 능력치」

명중률+4 시야+4 야간시야+3▲ 방어력+80 마나재생+10 번개내성+25% 냉기내성+5% 독내성+1% 저주내성 +5%

예상대로 막혀 있던 민첩과 건강 스탯도 악과가 아닌, 레벨업 올스탯으로는 성장하고 있었다.

시드로긴 때문에 능력치가 뻥튀기되서 확인하기 복잡하기는 하지만 얼추보니 올라가 있기는 하다.

+6 오디로 인해 강골의 수치가 꽤 많이 늘어나 있었지만 역시 포인트를 때려박는 마력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내가 쓰는 스킬들을 생각하면 마력은 더 높아야했지만 푸른성수를 +4까지 합성하면 되는 부분이다보니 이제 마력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 듯 보였다.

그보다는 이게 더 중요하다.

「데몬시드 4레벨」

〔아토믹시드〕

-분해되지 않는 씨앗을 몸속에 만들어 이로운 효과를 자아낸다.

〔시드윙〕

-씨앗에 날개를 달아 날게 한다.

〔시드폭발〕

-씨앗을 폭발시킨다. (위력은 씨앗이 지닌 잠재력에 비례한다.)

"아니 근데, 이렇게 몰살했는데 레벨이 하나밖에 안 올라? 아무리 기프트가 두개라도 그렇지 이건 좀..."

심해도 너무 심하지 않나 싶다.

경험치 요구량이 일반적인 네피림에 비해, 적어도 세배. 최대 다섯배까지 필요한 정도가 아닌가 싶다.

나 혼자 카오스 게이트에 있는 오크를 학살하다시피 했는데도 징그럽게 안 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아니면.

'경험치로만 렙업하는 게 아닌가?'

경험치는 부차적인 문제고, 깨달음이 필요하거나 엘리트나 챔피언의 섬멸 횟수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제까지 레벨업을 한 상황을 보면 챔피언이나 엘리트를 잡았을 때가 많았으니까.

'경험치랑 엘리트 처치 횟수 둘 다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오크들을 잡았는데도 렙업이 느린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지금으로선, 알수 없어.'

데이터가 필요하다.

"에효, 스킬부터 보자."

기프트가 두개인 점이 워낙 사기이니 이 정도는 감안해야 하는거겠지.

'씨앗을 몸속에 만들어서 신체능력을 높이는 아토믹 시드.'

이건 명백하게 패시브 스킬처럼 보였는데 그 다음의 선택지에 시드 폭발이 있다. 둘다 배우면 몸속에 있는 씨앗도 폭발시킬 수 있는건가?

모르겠다.

물론 시도해볼 생각도 없다.

"시드윙도 폭발도 나쁘진 않지."

씨드라와 연계를 생각하면 씨앗에 날개를 달아 날려보내는 것도 썩 나쁘지 않다.

다만 씨앗을 옮기는 일에는 워터볼이 있으니 굳이 스킬 포인트를 소모할 이유까지는 되지 않다는거지만.

그리고 시드 폭발.

화력이 어느정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꽤 강력한 무기가 될거 같다.

데몬시드는 악마의 근골과 혼을 씨앗으로 만드는 힘. 일종의 봉인과도 같은 씨앗을 폭발시키면 모르긴 몰라도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보여줄거다.

하지만.

'아토믹시드는...'

한시적으로는 큰 도움이 안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점진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아토믹이란 원자 단위의 분해되지 않는 물질을 뜻한다.

몸속에 만들어진 씨앗은 분해되지 않고 이로운 효과를 낸다고 하는데, 단순한 씨앗의 모양을 만든다는건지 그것을 이루는 게 무엇일지 모른다.

'악마의 열매와 관련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열매를 먹으면 먹을수록 축적되는 힘이라든가.

"무협지에서 나오는 단전이나 판타지 마법사들이 몸속에 만드는 써클같은 개념이려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성장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할지도 모른다.

시드윙은 논외.

시드폭발은 분명 매력적인 스킬이지만 현시점에서 내게 필요한가?

내 화력이 부족한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블리자드와 브램블리.

씨드라와 적창, 카탈린의 벼락과 감전으로도 레벨 7 챔피언 데몬인 갈루란타도 단신으로 잡아낼 정도다.

시드폭발이 더해진다면 분명 나쁘진 않겠지만 좀더 장기적인 플랜을 그린다면 아토믹시드가 더 낫다.

'내 마법에는 확실한 한방이 없어.'

하지만 그 한방을 뇌창이 대신해주고 있으니 굳이 필요치 않다.

본래의 나였다면 육체적인 스펙에 고집하지 않았을거다.

예전이었다면 시드폭발을 골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봐버렸지 않은가.

창 하나로 대악마와 단신으로 싸우고도 호흡 한번 흐트러지지 않았던 카이삭스의 창술을 말이다.

매료되었다고 표현해도 좋겠지.

난 카이삭스의 등에 매료됐다.

"화력은 상점에서 사는 스킬북으로도 충분해."

챔피언 열매를 먹으면 얻어질 수식언도 있으니까.

"아토믹 시드를 배우시겠습니까?"

"예스."

"스킬 포인트를 사용합니다."

"아토믹 시드를 배웠습니다."

"체내에 시드를 생성합니다!"

"읏."

심장에서 강렬한 통증이 일어났다.

원자 단위로 자그마한 씨앗들이 심장 부근에 만들어졌음이 느껴졌다.

통증으로 인해 핏줄이 도드라지고 내 마력이 빨려들어가듯 소모된다.

"끄윽, 끄으윽!!"

갈루란타와 싸울 때보다 더한 통증이 심장에서부터 동맥을 타고 나무 뿌리처럼 번져나간다.

심장에서 몸통으로, 몸통에서 팔다리로 뿌리뻗듯 생겨나는 아토믹시드는 이내 척추를 타고 머리끝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성장을 멈췄다.

"흐억! 우에웩!"

시꺼먼 검은피를 열댓번을 쏟고 나서야 맑은 피가 나왔다.

"아토믹 시드가 성공적으로 체내에 자리잡았습니다."

"시드와 관련된 신체의 모든 부분에서 이로운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3 상승합니다!"

"시드로긴의 부작용이 10% 감소합니다."

"우웩, 오!!"

시드로긴 부작용의 감소!

생각지 못했던 부분에서 이로운 효과를 받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아토믹시드』

-분해되지 않는 씨앗을 몸속에 만들어 이로운 효과를 자아낸다.

다양한 악마의 열매, 또는 신체에 이로운 효과를 가져다 주는 섭취와 행동을 함으로서 아토믹시드의 숙성도는 시간과 비례하여 증가한다.

(숙성도-1%)

"나이스으!"

당첨이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역시 데몬시드는 날 실망시키지 않아! 레아가 옆에 있었다면 껴안고 비행기라도 태워줬을텐데 아쉽다.

"대박."

아토믹시드를 배운 것 만으로 올스탯 +3이 상승했다.

그 뿐일까. 시드로긴의 부작용이 십퍼센트 감소했다.

하지만 이 모든게 숙성도1%에서 발휘된 효과라는거다.

몸속에 자리잡은 아토믹 시드의 숙성도가 10%, 또는 100%가 되었을 땐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섭취라는걸 보니까 역시 악마의 열매 먹는 것도 축적되나보네."

예상대로다.

시드폭발도 조금 아쉽긴하지만 장기적으로 보자면 역시 아토믹시드가 훨씬 좋았다.

몸속에 자리잡은 아토믹시드가 혈관 하나하나에 퍼져나간 게 느껴진다.

이전보다 더 강한 힘을 얻게 할 초석이 쌓아진거나 다름없었다.

무협지로 비유한다면 이제야 겨우 단전에 내공이 깃들기 시작한 것.

앞으로가 기대된다.

난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때 봤던 카이삭스처럼!

"일단... 데몬시드."

"포효하는 오크왕 갈루란타의 데몬시드를 획득합니다."

데몬시드는 확보하고.

『미확인 뼈방패』 (???)

-??? 전사들의 뼈를 이어 만들어진 방패. 오랜 세월, ???

〈???〉

〈???〉

업적 보상으로 얻은 뼈방패를 감정한다.

"감정 스크롤을 사용합니다."

"숨겨진 이름이 드러납니다."

『변색된 뼈방패』 (unique)

-위대한 대전사들의 뼈를 이어 만들어진 방패. 오랜 세월, 전장의 피가 묻어 변색된 오크족의 뼈방패.

〈물리 경감-(65%)〉

〈마법 저항-(43%)〉

〈녹음진 혈맹〉

〈근력 +1〉

〈건강 +2〉

「녹음진 혈맹」

-녹색의 피로 이루어진 혈맹의 혼이 나타나 함께 싸운다.

(축적된 오크의 피를 소모한다.)

〈축적된 오크의 혈: 2568〉

"오우."

유니크 방패인걸로도 모자라 고유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녀석이다.

방패에 스며든 피를 소모하여 혈맹의 혼을 소환하는 방식.

오크의 피만이라는 게 조금 아쉽지만 썩 나쁘지 않다.

왜냐면 지금 전장은.

"아직도 오크밭이지."

갈루란타가 죽었으니 포효의 효과도 받지 못하는 오크들이다.

지휘관. 아니, 왕을 잃은 전사만큼 사냥하기 쉬운 적이 또 있을까.

"쉬고있을 때가 아니지."

아직 오크의 씨앗이 어떤 능력을 올려주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전장에 남아있는 오크들의 숫자는 못해도 4, 50만은 될 터.

놈들 모두의 피를 이 방패에 묻히기에는 시간도, 숫자도 충분했다.

파직!

전장으로 투창해 사라진 뇌창과 함께 적막만이 흘렀던 숲은 그제서야 멈췄던 숨을 터트렸다.

"우, 우아아아아!! 이겼다!!"

"와아아아아아!!"

"뇌창! 뇌창! 뇌창!!"

"데몬시드! 데몬시드!!"

"근데 방금 뇌창이 갈루란타를 씨앗으로 만들지 않았어?"

"그게 씨앗이야? 보석같던데?"

"아 몰랑! 뇌창 개멋있어!!"

모두가 환희에 쌓여있는 이때.

강철은 강철마를 타고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높아진 사기를 가만히 소모되게 둘 수는 없었다.

"지금이다 지금!! 모두 진격하라!!"

"오크왕 갈루란타가 죽었다!!"

"보스가 뒤졌으니 남은 건 쫄따구밖에 없잖아!! 빨리 달려! 이대로 있다간 데몬시드랑 뇌창이 다 잡는다!!"

"나도 카오스 점수 벌어야 해!"

툭 투둑.

눈보라는 사라지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폭우가 쏟아짐과 동시에 하늘에서는 붉은 벼락이 동시다발적으로 떨어져 내렸다.

꽈광-!!

몇번의 벼락이 더 울려퍼지고 나서야 카오스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카오스 게이트가 종료됩니다."

"카오스 랭킹이 갱신됩니다."

[카오스 랭킹]

1위 데몬시드 - 32,702,921점

2위 카탈린의감전 - 9,353,255점

3위 철의군주 - 2,158,589점

"카오스 게이트 완료 보상 상자를 획득합니다."

"카오스 랭킹 1위 상자를 획득합니다."

"카오스 랭킹 2위 상자를 획득합니다."

"두번째 카오스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셨습니다. 모든 네피림들에게 20000 경험치와 2000 금화를 추가적으로 획득합니다."

"두번의 침공을 무사히 방어하셨습니다. 차원의 힘이 강화됩니다."

"네피림 콜로세움이 해금됩니다!!"

"?"

콜로세움 [1]

54화.

마지막 오크를 창으로 찌른 순간.

수많은 알림창 중에서도 단번에 이목을 사로잡는 녀석이 있었다.

"엥?"

"네피림 콜로세움이 해금됩니다!!"

콜로세움이었다.

"뭐야 이건."

콜로세움.

그것의 시작은 먼 옛날.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몇백년 전.

콜로세움은 발달되지 않은 인간의 문명 수준에서 그나마 유희를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였다.

그런 콜로세움이 심심하면 악마한테 쌈싸먹히고 한달에 한번이면 전쟁 터지는 이 상황에?

"미친놈들인가?"

하늘을 보며 욕지거릴 날릴 수밖에 없는 컨텐츠였다.

현질유도 심한 게임을 하면 자연스레 나오는 욕설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이 미친놈들은 우릴 상대로 놀이라고 하는건지 뜬금없이 카오스도 잘 막아냈더니 콜로세움을 해금한다고 지랄을 한다.

화가 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물론 이곳이 단순한 게임이라면 내 과금력을 확인하기위해 콜로세움을 반겼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게임이 아니다.

현실이다.

지금도 죽고싶어하지 않는 오크의 목을 창으로 찔러 넣고 있는 중이다.

악마를 죽임으로서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있음을 느끼는 전장.

그곳에서 돌연 콜로세움이라고?

"누구랑 싸우는건데."

마음속으로는 온갖 육두문자가 남발하지만 랭커이다보니 자연스레 의문이 향한 곳으로 손이 간다.

상대는? 룰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보상은?'

의식의 흐름대로 콜로세움에 대한 정보를 찾고 나서야 난 떨떠름한 얼굴로 오크의 목에 꽂힌 창을 빼냈다.

"그냥 연습 대련이네."

일종의 전투력 측정기.

모바일 게임의 결투장과 같은 시스템이었다.

몇몇 곁다리로 붙어 있는 [수련장]이 있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일대일의 결투를 부추기는 시스템이다.

보상으로는 한달에 한번씩 순위에 따른 금화와 콜로세움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화폐를 얻을 수 있었다.

"지옥석?"

1등 보상 - 지옥석x1000.

2등 보상 - 지옥석x500.

3등 보상 - 지옥석x300.

.

.

.

지옥석은 각각의 콜로세움 전용 아이템과 교환이 가능하다는 식이다.

설명을 읽어보니.

"콜로세움은 도전자와 수비자로 나뉜다. 도전에 승리하면 점수를 쟁취하지만 패배하면 점수를 빼앗긴다."

도전은 콜로세움에 들어가 실제로 싸우게 되지만, 수비자는 직접 싸우지 않는다.

물론 상대는 한국 네피림 전원.

"자동 수비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자동 사냥 같은건가."

전반적인 시스템은 모바일 게임의 대전 방식인 듯 하다.

입력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상의 수비자와 싸우게 된다는 것 같았다.

그러니 콜로세움에서는 도전자도 수비자도 실제로 다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싸우며 기술적인 부분을 갈고 닦을 수 있다는 소리.

그리고 [대련장]과 달리 [수련장]에서는 원하는대로 허수아비를 때리며 수련할 수 있었고 자기 기술의 시험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자동수비]로 바꿔놓고 다른 걸 살펴봤다.

"금화 받네."

수련장 입장은 금화 10금.

콜로세움 도전은 하루 3회.

함께 전장에 있는 자들은 꽤 관심있는 듯 보였지만 애석하게도 난 별로 관심없었다.

네피림들끼리 치고박고하며 성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인거 같은데 솔직히 나한텐 의미가 없다.

'네피림들 중에서 나랑 견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 같진 않으니까.'

일대일에 강할 거 같은 사람은 생각해보면 바바리안, 아마존, 강철군주 말고는 딱히 없다.

특출나게 보이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저 셋과 동시에 싸워도 내가 질거 같다는 생각은 안 드니까.

솔직히 블리자드 한번만 써도 여기 있는 네피림들 대부분은 손도 까딱 못하고 얼어 죽을거다.

오크들이 모자라고 멍청해서 내 블리자드에 몰살 당한 게 아니니까.

"이야, 지옥석으로 살수 있는 아이템들이 죄다 미확인 템들이네."

전부 미확인 아이템.

미확인 아이템이 아닌 건 영문 모를 이름과 설명이 있는 것들이었다.

-미확인 망토 (50)

-미확인 검 (54)

-미확인 대검 (63)

-미확인 지팡이 (75)

-미확인 반지 (53)

-미확인 스킬북 (5550)

-알레이슈 (1000)

-고르그의 눈물 (2500)

-그레미나티 (10000)

.

.

.

셀수도 없이 많다.

스크롤을 내리고 내려도 끝이 없을 정도의 아이템들이 있었는데, 그나마 조금 끌리는 건 스킬북 정도였다.

"지옥석 5550개라..."

근데 필요 지옥석의 갯수가 퍽 만만치 않다.

한달에 1위를 해야 지옥석 1000개를 겨우 얻는건데 오천개라니.

다섯달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스킬북이라는 뜻이었다.

그것도 1등만해서!

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던 때 즈음, 아직 열리지 않은 컨텐츠가 있는 걸 확인했다.

[네피림 콜로세움]

[결투장] [수련장]

[지옥광산] (23:42)

아직 열리지 않은 슬롯.

지옥광산이었다.

저기가서 추가적으로 지옥석을 획득하는 거 같았는데, 이렇다할 설명은 아직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정말 광질하는 건 아닐테고....."

높은 확률로 악마와 싸우게 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잠시 고민해봤지만 딱히 이렇다할 답이 나오지 않자 포기했다.

"때 되면 알게 되겠지."

우선은 눈앞에 산재한 일부터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수많은 오크 전사들의 시체.

놈들을 우선적으로 데몬시드로 만들어야 했고... 승리를 순수하게 기뻐해야 할 때였다.

"뇌창 만세!!"

"데몬시드 만세!!"

"네피림 만세!!"

"대한민국 만세에에!!"

저마다 기뻐하면서 얼싸 안으며 순수하게 승리를 자축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근처로는 아무도 안 왔는데, 그 모습을 봤는지 아마존이 곁으로와서 악수를 청했다.

"축하해요."

"아, 축하합니다."

"뇌창, 당신이 아니었으면 힘들었겠죠. 레벨 7의 갈루란타는 아마 우리같은 랭커 수십이 붙었어도 쓰러뜨리기 힘든 존재였을거에요."

"아니 뭐, 그 정도는..."

랭커라서 그런가? 역시 통찰력이 제법이다.

그녀의 말대로 이번 카오스는 저번보다 난이도가 제법 높았다.

네피림들 평균 레벨이 2레벨이라는 점만 봐도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건지는 감이 온다.

무기 강화로 전체적인 전투력이 올랐다고해도 이번 카오스 난이도는 높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마 다음번 카오스는 더 높아지겠지.

아마존은 그걸 염려하고 있었다.

"이번 난이도로 보건데, 지구의 많은 나라들이 무너지겠죠."

"네?"

"악마들은 우리의 평균 전투력을 상정해서 오지 않아요. 게임이 아니니까요. 우릴 죽이러 침공하는 녀석들이 우리 사정을 봐주진 않겠죠."

"....."

특출난 영웅이 없다면 어느 나라든 쉽게 꺾일 거라는 소리였다.

"첫번째 카오스에서 72개국의 나라는 54개국이 됐어요. 이번엔 아마도 그 절반으로 줄게 되겠죠."

첫번째 카오스에서 멸망한 나라의 숫자는 18개의 소국.

솔직히 이번 카오스의 난이도가 내게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랭커들 기준으로는 매우 악랄했다.

약한자에게 더 강한 디버프를 부여하는 갈루란타의 포효는 랭커들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공포를 심어주는 녀석이었다.

완전한 공략법이 없었다면 나를 제외한 랭커들은 모조리 몰살 당할 수도 있었을 보스몹이었단거다.

아마도 아마존은 그걸 눈치채고 말하는 거겠지.

"절반 이상이라고 봅니다."

이번 카오스로 사라지는 국가.

54개국중 절반.

20개국 남짓만이 살아남을거라는 소리는 제법 충격적으로 들려왔다.

"그 말을 내게 하는 이유는 뭡니까."

"당신이, 우리의 희망이니까요."

"뜬금 없는데..."

부담스럽기도하고.

"우호 관계를 맺고 싶다는겁니다. 뇌창, 아니면."

아마존은 내 손을 잡은채로 날 잡아당겨 은밀하게 말했다.

"데몬시드라고 해드릴까요."

"..."

내가 아무말도 안하고 있자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잇는다.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시던데, 갈루란타를 씨앗으로 바꾸는 걸 봤어요.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프트를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겠죠. 상태창도 있는 마당에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거죠. 안 그런가요?"

"협박?"

"아니요. 말했잖아요?"

친해지고 싶다고.

"그거 뿐이에요. 원래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일 수록 가까워지잖아요."

"누군가가 알게 된 그때부터. 비밀은 비밀이 아니게 된다는 건 모르나보군."

굳이 말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 뿐.

비밀로 하려고 애쓰고 있던 적은 딱히 없었다.

옛날이야 내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과수원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 비밀로 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랭커들이 과수원을 침략해도 불별도의 파수꾼 혼자서도 격퇴 가능할 정도가 됐으니까.

"마음대로 해."

그 정도 협박에 쫄기엔, 지금의 난 너무 강하다.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있는 네피림 전원과 싸워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만.'

굳이 밝힐 생각도 없지만, 이전처럼 한사코 감출 이유도 없다. 등돌리고 있으니 아마존이 굳이 따라붙는다.

"친추해요!"

"..."

"마, 말했잖아요! 친해지고 싶다고."

말없이 가만히 있어서일까.

"전, 정부와 연이 닿아 있어요. 남들은 모르는 중요한 소식들... 궁금하지 않아요?"

"친추만하면 정보를 주겠다? 무료로?"

"네. 무료로!"

"좋아."

친추 정도로 정부의 정보를 공짜로 얻을 수 있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엘프님으로부터 친구 신청이 도착했습니다."

"엘프?"

"니, 닉네임은 그럴 수 있잖아요."

부끄러워하면서도 애써 당당하려는 모습이 신선하다. 완전 부정했던 강철하고는 꽤 다른 모습.

하기사, 다른사람 닉네임이 어쨌든 내 알 바는 아니지.

대충 친구 신청을 수락하고 나서야 난 아마존한테 벗어나서 전사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가갈 수 있었다.

"뇌창이다."

"뇌, 뇌창님?"

전쟁은 승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사자는 있었다.

오크의 생명력을 얕보다 눈먼 도끼에 맞아 죽은 자.

오크와 결투하다 죽은 자.

자기가 죽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순식간에 전사한 자들이 부지기수기도 했다.

오크 한마리도 잡지 못하고 죽은 자들도 꽤 많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죽음이 헛된 것일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에 헛된 건 없다.

카오스 게이트는 위험한 곳이다.

네피림들은 많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각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테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싸우고자 열중하지는 않는다.

카오스에 올 수 있음에도 거부하는 자들은 많다.

오늘만 해도 카오스에 참가한 네피림들의 수는 사실 60만명도 되지 않는다고 강철이 말했다.

죽고싶은 사람은 없다.

여기 있는 전사자들도 그렇다.

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싸우기 위해 왔고, 결국은 싸우다가 죽었다.

비록, 적을 죽이지는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전사가 아니었을까.

"뇌창님..."

이름도 모르는 사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날 불렀다.

전사자들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나 때문이다.

아마도 이 전사자의 친구였을까.

가족이었을까? 모르겠다.

"신이 함께하기를."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말뿐.

하지만 곁의 사내는 고작 이 한마디 말로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죽은 사내를 끌어 안고 말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난 그들 한명, 한명에게 무릎 꿇어 그들의 명복을 빌어줬다.

이제는 죽음으로 나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으나, 그 길에 언제나 신의 가호가,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진심이다.

"찬양의 항아리에 정이 쌓입니다."

난 신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신을 불러본다.

부디 이 가엾은 영혼들을 품에 안아 그들을 위로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라봐 본다.

"찬양의 항아리에 정이 쌓입니다."

콜로세움 [2]

5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