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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째.

방바닥의 따스함을 느끼며 오랜만에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레아가 눈앞에 있어서 조금 놀랐지만 크게 신경을 쓸 일은 아니었다.

'무슨 꿈을 꾼 거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천둥소리랑 망치가 떠오르긴 했다.

"토르? 어벤져스 꿈이라도 꿨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보다는 이게 더 중요했다.

[나만의 상점]

-6일 21시간 35분 남음.

[딱딱한 빵x10] - 1금화

[푸른 성수x2] - 15금화

[포탈 스크롤] - 20금화

[미확인 스킬북] - 3333금화

나만의 상점이 갱신됐다.

"감안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뼈 아프네."

어젯밤.

기부도의 초가집을 베이스 캠프로 삼아버렸다.

성역을 구매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덕분에 내 주머니는 홀쭉해졌다.

[소지금 1710 금화]

천금이나 하는 성역을 구매해 이곳 100평을 안전지대로 만들었다.

분명 오랜만에 편하게 온돌방에서 안락하게 휴식을 취했지만, 그 대가는 꽤 컸다.

"랭킹 보상도 좀 받고..."

[레벨 랭킹 1위 보상 주머니]

[레벨 랭킹 2위 보상 주머니]

[주머니를 개봉합니다.]

[감정 스크롤 5개를 획득합니다.]

[100금화를 획득합니다.]

[감정스크롤 3개를 획득합니다.]

[50금화를 획득합니다.]

"주마다 보상이 조금씩 바뀌네."

이로서 내 소지금은 1860 금화가 됐지만, 상점에서 뭘 사기는 애매했다.

아니, 애초에 살 것도 없었다.

'이번엔 목록이 별로네.'

스킬북이라도 하나 있지만, 이전처럼 다양한 장비들이 있지는 않았다.

어째서일까, 모르겠다.

그래도 스킬북이 있으니 다행이다.

어느 상황에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항상 먼저 구매해야 할 물건이다.

왜 상점에서 자꾸 미확인 아이템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뭔지 보여주지 않으니 더 욕심난다.

"근데 삼천금을 어디서 모으나."

어제 성역을 사지 않았다면 조금 괜찮았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한번 느껴버린 따스함을 뒤로하고 불별도의 차가운 침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성역을 안 쓰고 자면 그건 그것대로 위험했으니 말이다.

"벌어야지 뭐."

방법은 하나.

어차피 시간은 일주일. 벌면 된다.

여기는 불별도가 아니다.

금화를 벌 방법은 많다.

기부도를 지배하고 있을 게 뻔한 검은 산양 놈들을 천천히 족치던가 그도 아니라면 서펜트를 사냥해도 좋다.

물론 서펜트 사냥보다는 검은 산양 놈들을 처리하는 게 더 쉽겠지만.

"으으음..."

일어나려고 하니 레아가 추운듯 새우처럼 몸을 움츠렸다.

그러고 보니 밤새 데워졌던 온돌이 식었다.

장작이 벌써 꺼진 모양이다.

조심스럽게 일어나려 했으나 이상하게 붙잡혔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날 붙잡고 사죄하는 레아는 연신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일을 꿈꾸는 건가.

아닌 척했어도 사실은 그때의 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모양이다.

어린아이다.

난 고작 결혼이 망한 일로 이 지경인데 이 아이가 품은 걸 생각하니 괜히 내가 지닌 아픔은 별거 아닌 거처럼 느껴졌다.

토닥, 토닥.

등을 두드려주니 슬그머니 눈을 떴다. 눈물에 맺힌 홍안은 반짝였고 몽롱한 듯 뜬 눈은 아름다웠다.

잠시 가만히 날 바라보던 붉은 눈은 이내 다시 눈을 감고 잠들었다.

새액, 새액.

아기 새 같은 숨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난 참았던 숨을 작게 뱉었다.

'깜짝이야.'

일어난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괜히 잘못한 것도 없는 심장까지 야단이다.

조용히 일어나 부엌으로 가 아궁이에 장작 몇 개를 주워 집어 던졌다.

"나이가 몇 갠데 이 난리냐."

괜히 창피했다.

장작을 잡아먹고 타오르는 아궁이를 멍하니 바라보다 적창을 잡았다.

"쟤도, 나도 혼자구나."

슬그머니 올려다본 하늘은 늦은 해가 머리를 보이고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

찬물로 가볍게 세수하고 악과 하나를 깨물어 먹었다.

[그렘린 열매를 섭취합니다.]

[용장이 소화를 돕습니다.]

[민첩이 0.2 상승합니다.]

아침은 악과로 떼우고 가볍게 산책하기로 했다.

"성역이라고 만능이 아니니까."

안전지대는 일종의 성역.

그러니까 결계다.

악마들은 이 결계를 통과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닿으면 불에 타 죽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보이지 않는 벽이 막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역시... 왔다갔네."

놈들이 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거다. 지능 있는 놈들이라 그런지 어제 호되게 당했음에도 끝끝내 위치를 확인했다.

"정말로 간이 성역 설치 안 했으면 큰일날 뻔했네."

위치를 확인했다는 건 언제든지 날 공격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함정, 매복 등등.

놈들이 날 공격할 준비와 시간을 건네준거나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성역에서 나오기만을 밤새 고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내 적은 악마니까."

근데 놈들은 알까.

성역은 온갖 삿된 것을 방어하지만, 안에서 날리는 건 통과된다는 걸.

쿠르르릉-!!

"레인스톰."

나는 성역 안에서.

몰려드는 먹구름과 쏟아지는 폭풍우 속에서 뇌전을 끌어올렸다.

파지지직-!!

투척과 동시에 투창.

먹구름으로 들어간 해골 기사의 창은 이내 여러 줄기의 적뢰로 화하여 낙뢰로 떨어졌다.

꽈광-!!

[검은 산양 추종자가 치명적인 일격을 입었습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가 치명적인 일격을 입었습니다.]

후두둑!!

나무 위에서 대낫과 검은 산양 놈들이 떨어져 내린다.

"뻔하지 개자식들."

다시 한번.

꽈광-!!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많이도 왔다.

난 신명나게 투창을 계속했고, 놈들은 달아나는 듯 낙뢰가 점점 성역에서 멀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엄마 모시고 와라. 형 돈 급하다."

한마리당 30금.

이만한 앵벌이 또 없다.

카탈린의 감전을 너무 많이 사용한 탓인지 마나가 떨어지려는 무렵.

블리자드까지 사용해서 깔끔하게 주변을 초토화했다.

적당히 따뜻한 4월.

초가집에는 소복이 눈이 쌓였다.

*

기부도에서의 하룻밤 후.

그러니까 사흘이 더 지났다.

아포칼립스 시작 19일 째.

오늘도 어김없이 레인스톰과 카탈린의 감전을 이용해서 주변에 있을 추종자들을 정리하고 플라이를 사용해 섬을 날아다니며 광역 마법들을 남발하고 다녔다.

한쪽 옆구리에는 레아를, 한 손에는 야칸의 숲 지팡이를 들고 다니며 광역기를 난사하다 마나가 떨어지면 푸른 성수를 마시거나 휴식하며 악과를 먹던 일상이 이어졌다.

그렇게 사흘.

기부도에서 5일을 지냈다.

그러다보니 뭐랄까.

"씨가 말랐나?"

슬슬 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심심찮게 보이던 놈들이 이제는 통 얼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점점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그때.

[최초로 검은 산양의 카타콤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들은 평화로운 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그들을 검은 산양을 신으로 받들게 했습니다.〉

〈육신은 짐승으로 변하였고, 그들은 원하는 힘을 얻었지만, 본래의 선량한 인간은 사라졌고 악을 추종하게 되었습니다. 카타콤은 그들이 받드는 신이라 알려진 악마의 무덤입니다.〉

[최초 업적으로 검은 산양의 투구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의 투구』 (magic)

-검은 산양의 눈을 모방한 투구.

야간 시야 +3

[뉘우치는 망치를 사하여 악으로부터 구하여 주십시오.]

『주의』

[네피림의 레벨보다 카타콤의 적정 레벨이 훨씬 높게 측정됩니다.]

[권장 인원을 6명으로 조정합니다.]

"6명을 어디서 구한다고..."

['한국' 차원의 상위 레벨 네피림에게 참전을 요청합니다.]

[요청이 완료되었습니다.]

"엥?"

촤악.

푸른 포탈이 허공에서 열리고 네 명의 남녀가 나타났다.

"뭐, 뭐야? 여긴 어디야!?"

"....."

"오... 포탈 열렸네?"

"뭐야 뭐야?"

그들은 아마도 상위 랭커.

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와 쌍도끼를 든 우락부락한 덩치의 사내.

그리고 자기 몸집만 한 방패를 든 군인과 술병 들고 있는 사내였다.

검은 산양의 카타콤 [2]

30화.

갑자기 나타난 4인.

난 검은 산양의 투구를 레아의 머리에 씌웠다.

"왁!"

"쓰고 있어."

레아의 적발은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꽤 튀는 편이니까.

그건 그렇고.

"여, 오랜만이네. 뇌창."

친한 듯 살갑게 인사하는 바바리안.

그리고 뚱하게 팔짱끼고 쳐다보고 있는 은색 갑옷을 걸친 놈은 카오스에서도 봤던 강철 군주다.

나머지 둘은 처음 보는 네피림 들이었는데 저들도 상위권에 속해 있는 랭커들인 모양이었다.

"뇌창? 어어, 진짜네!"

"흐음... 여긴 어디야? 섬인가."

의도치 않게 불청객을 들이고 말아버렸다. 시스템이 제멋대로 판단해서 권장 인원 4명을 불러들인 것.

'짜증나네.'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나만의 공간에 다른 사람들이 침입하니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기부도에 도달하기까지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이놈들은 포탈 한번 열리니 와버린 거 아닌가.

조금 위축된 레아의 어깨를 보니 그녀도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어찌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으니 강철 군주가 제멋대로 주변을 둘러봤다.

"카타콤. 지하 묘지라는 뜻인가?"

"어어, 게임할 때 들어봤다. 나도."

강철 군주는 이곳저곳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나 싶더니 주변 풍경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여기 왜 눈이 내렸지?"

뜨끔했다.

"여기, 섬인가?"

"그러네. 섬이네. 뭐야! 뇌창. 너 섬에 갇혀 있었던 거냐!? 그럼 말을 했어야지! 내가 어떻게든 도와줬을걸!"

바바리안 놈이었다.

도와준다?

말은 고맙지만 불가능하다.

"서펜트가 있는데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지?"

"아, 맞네. 서펜트... 그럼 뇌창. 너 계속 여기 갇혀 있던 거냐?"

바바리안이 깜빡했다는 듯 다시 질문했으나 무시했다.

그러자 강철 군주가 따지듯 물었다.

"그래서, 어쩔 거지? 우린 힘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왔다. 아무래도 다시 돌아가려면 카타콤을 공략해야 할 거 같은데. 넌 내키지 않는 것 같군."

눈치가 꽤 빠르다.

"그러네, 다시 못 돌아가는 건가?"

"나도 그런 거 같은데."

"공략할 수밖에 없겠어."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는 뜻.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더더욱 싫다.

기부도가 내 소유의 섬은 아니지만, 이곳엔 내 돈 들여 만든 성역도 있고 악마 대부분을 거의 처리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카타콤이다.

저들이 나쁜 뜻을 가지고 이곳을 찾아온 건 아니지만 기부도에 오래 머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내키지 않지만 검은 산양의 카타콤을 공략해야만 했다.

친분 없는 그들과 함께.

"여긴 검은 산양의 카타콤이다."

"검은 산양?"

"이거 말인가?"

"그래."

그들은 검은 산양의 투구를 쓴 레아를 보며 말했다.

섬에 있는 추종자들의 시체는 대부분 데몬시드로 만들어버렸다.

이들에게 보일 샘플은 레아가 쓰고 있는 투구로 대신해야 했다.

"검은 산양의 추종자. 이제까지 내가 상대했던 악마다."

간단하게 놈들에 대해 설명했다.

인간 수준의 지능. 사용하는 무기와 지닌 전투력, 그리고 전술 등.

"그렘린과 비교하면 어떻지?"

"더 까다롭다. 다리는 산양의 발굽처럼 되어 있어서 빠르고 간단한 발차기에 중상을 입을 거다."

그렘린도 날아다녀서 까다롭지만, 이놈들은 전술을 쓴다.

게다가 기본적은 스펙도 높아서 한순간의 방심이

"흠..."

"아! 나 관찰자 공략 글에서 읽은 적 있다. 염소 인간 같은 놈들 조심하라고. 레벨이 5인가 6으로 측정됐다고 하던데?"

"뭐? 설마. 그렘린이 몇인데?"

"그렘린은 3렙이라고 했다."

그렘린이 3렙인데 추종자가 5렙?

어찌 보면 적절한 레벨이다.

어렴풋이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니까.

"넌 그걸 믿냐? 나도 그 공략 글은 봤다. 그렇지만 관찰자는 레벨만 보고 도망친 겁쟁이잖아."

"미련하게 싸울 필요가 없던 거였어. 상위 랭커들도 그렘린을 혼자서 사냥하기는 아직 버겁다. 그런데 5렙 악마가 나타났다니 당연히 물러나는 게 현명하지."

술병든 사내의 비난을 강철 군주가 일축했다.

그리고는 날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강적을 너 혼자 처리하고 있었다는 소린가?"

"역시 랭킹 2위... 카오스의 보스몹을 일격에 죽인 녀석답다니까!"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의심하는 강철 군주와는 반대로 바바리안은 역시 랭킹 2위라며 추켜세웠다.

"너는 왜..."

"어이, 운 좋게 기프트 좀 좋은 거 얻었다고 네가 진짜 기사라도 됐다고 착각하는 거냐? 엉?"

"뭐? 넌 뭔데 끼어들지?"

"네가 먼저 뇌창한테 시비 걸었잖아 임마! 뇌창이 만만해!? 녀석 덕분에 우리가 손쉽게 카오스를 끝낸 거라고! 해골들에 허덕이던 놈이 뭐 잘났다고 뇌창을 의심해!? 앙!?"

갑자기 주정뱅이가 강철 군주를 향해 시비를 걸었다. 날 두둔해주는 건 좋지만 술이 잔뜩 취한 모습은 썩 보기 좋지 않았다.

바바리안이 둘 사이를 갈라놨다.

"어이어이! 싸우지 말라고! 우리끼리 싸워서 좋을 게 없잖아?"

"그래. 바바리안 말이 맞다. 어쨌든 간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면 우린 힘을 합쳐야 해."

바바리안이 말리고 방패병이 그 말에 동의했다.

철컥. 방패병의 말림에 뒤로 물러난 강철군주가 날 향해 물었다.

"관찰자의 공략집은 어느 정도 신뢰할만해. 게다가 이 던전을 찾아낸 건 뇌창이다. 즉, 그는 레벨 5에 해당하는 추종자를 죽여왔단 거겠지."

"뭐? 정말이야? 뇌창?"

"옆에 동료가 쓰고 있는 투구가 그 증거이지 않을까."

"그러네."

레아가 쓴 투구를 가리켰다.

강철 군주의 추측은 대부분 옳았다.

영 끌리지 않는 파티지만.

이번엔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요 며칠 추종자들을 섬멸해왔다. 그러니까 카타콤을 찾은 거지. 시스템이 스스로 너희들을 초대한 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카타콤을 공략해야 한다. 이 지하에 뭐가 있고 얼마나 많은 추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싸워보면 알겠지. 대충 보니, 조합은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자기만큼 큰 방패를 든 군복 입은 방패병과 그와 비슷할 정도로 우락부락한 덩치의 대머리 바바리안.

그리고 배나온 40대 아저씨로 보이는 술병 든 사내와 은빛의 갑옷으로 무장한 강철 군주.

던전을 공략하기에 전위와 후위가 나뉘어 있는 조합들이니 썩 포지션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직접 싸워봐야 할 일이지만.'

시선을 내리자 작은 공간이 보인다.

여리게 흔들리는 작은 촛불.

촛농이 불길하게 녹아내려 있는 작은 촛불들이 카타콤으로 내려가는 지하 계단의 불길함을 밝혔다.

"그럼... 일단 자기 기프트에 관해 조금 얘기해볼까? 난 알다시피 바바리안이다! 기합으로 활력을 조금 불어넣고 고함으로 적들을 끌어모으지. 그리고 쌍도끼로 골통을 박살낸다!"

"난 방패병이다. 단단한 방패로 웬만한 공격은 다 막아내지. 내가 있으면 전위는 문제없어."

"무기를 강철 기사로 만든다. 쓸모 없는 강한 무기가 있다면, 내게 줘. 악마들은 모두 쓸어버릴 테니까."

바바리안과 방패병.

그리고 강철 기사는 전위를 맡으면 될 것 같았다.

"난 주정뱅이다. 내 술은 터져. 폭발하지. 위력은 꽤 강해. 거기 있는 깡통 여자보단 도움이 될걸?"

영 성격이 문제되는 놈이지만 화염병을 만들어낸다는 주정뱅이의 화력은 꽤 기대된다.

"저, 저는 상처를 치료할 수 있어요. 다치시면 저한테 오세요!"

"오우! 힐러였어? 든든한데? 염소 아가씨."

"여, 염소 아가씨라니..."

"저건 염소가 아니라 산양이다."

"뭐, 그게 그거 아냐? 하하하!"

그리고 마지막.

나다.

"창을 쓴다. 내가 전위로 갈 필요는 없을 테니 후방에서 투창하면 꽤 적절한 도움이 되겠지. 지금 포지션으로는 내가 후위를 지키면서 보조를 맞추는 게 좋을 테니까."

"음, 든든해!"

다행히도 역할은 딱딱 정해졌다.

"랭킹 2위의 보조라면 걱정할 건 없겠지. 아, 근데 다들 랭킹이? 난 조금 부끄럽지만 14위야."

방패병의 물음에 바바리안이 가슴을 활짝펴고 답했다.

"난 뭐 알겠지만. 6위다."

"난 11위다."

주정뱅이는 11위.

"3위."

"칫."

강철군주는 3위.

주정뱅이가 혀를 찼다.

"저, 전 3942위요..."

"어우... 힐러니까 괜찮아! 힘내!"

"네!"

그리고 내가.

"1위. 아니 2위다."

"하하하! 역시 뇌창도 1위를 노리는구만! 힘내보자고!"

바바리안이 호탕하게 웃어젖히며 카타콤 아래로 내려갔다.

"어이, 내가 앞장설게. 뭐가 있을지 모르잖아."

"놈들은 대낫을 쓴다며? 그럼 뭐 걱정할 거 없는 거 아냐?"

"그건 밖이지 안은 몰라.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뒤에 서라. 방패를 든 내가 앞장서는 게 맞아."

"크흠, 좋아."

방패 병의 앞장 아래.

방패병

바바리안

강철군주

주정뱅이

레아

그리고 내가 후방을 주시하게 됐다.

"냄새 한번 지독하군."

"그러게 말이야, 코가 썩겠어."

카타콤.

지하 묘지라 불리는 이곳은 계단을 밟고 내려가자마자 풍기는 악취에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퀴퀴한 썩은 내가 코를 마비시킨다.

하지만 계단 아래의 공간은 넓었다.

왜 권장 인원이 6명이었는지 알 것 같은 넓이였다.

지하라 좁고 작을 줄 알았지만, 천장은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높았고 돌로 만들어진 통로 또한 수십 명이 들어와도 될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둡군."

어두웠다. 지하 묘지, 이곳에 촛불은 듬성듬성 달려 있었는데 덕분에 앞이 훤히 보이지 않았다.

'왜 최초업적으로 야간 시야가 달린 투구를 준지 알겠군.'

지하 묘지는 어둡기 때문이었다.

들은 적 있다.

염소는 낮에는 동공이 가로로 좁혀지지만, 밤에는 활짝 펴진다고.

마치 고양이의 동공과 같은 원리이다.

낮보다 밤. 검은 산양은 낮보다 밤에 더 잘 보인다.

"답답한데? 누구 횃불 없어?"

그리고 그것은.

휘이익, 푹-!!

"어? 악! 아아아아아악!!"

어둠 속에서 무엇보다 강력한 이점으로 활약한다.

"바, 방패병이 당했어! 제기랄! 저리 안 꺼져 이새끼들아!!"

그것을 내가 깨닫기 시작했을 때.

이미 일은 벌어졌다.

쿵!

어둠을 틈탄 추종자의 대낫을 허용한 대가는 끔찍했다.

"끄아아아악!!"

어깨를 꿰뚫린 방패병의 방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바바리안의 도끼가 추종자의 목을 베려 했지만 늦었다.

휙, 폭!

낫을 뽑아낸 추종자는 벌써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검은 산양 추종자들은 어둠에 스며드는 것에 능숙했다.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인간의 눈으로는 눈치채지 못했다.

"젠장! 주정뱅이 뭐해!! 화염병 좀 던져보라고!!"

"젠장."

방패병을 부축한 바바리안이 고함치듯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주정뱅이가 아깝다는 듯 화염병을 던졌다.

휘릭, 쨍그랑. 화아아악-!!

던져진 화염병이 카타콤 벽에 부딪혀 불길이 화악 번졌다.

알코올에 의해 번진 불길에 잠시간 어둠이 물러나고 주위가 밝혀졌다.

바바리안이 잠시 안도했으나, 이내 그 표정에 다시금 절망이 깃드는 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벽이라 생각했던 것.

"뼈?"

그것은 전부 뼈였다.

죄가 없는 누군가의 두개골이었으며 이곳을 침입한 무언가의 척추뼈였다.

"무슨....."

"히익!"

거기에 더해.

뼈로 이루어진 벽 사이사이.

어둠을 벗삼아 숨어든 놈들이 있었다.

카타콤에서 가장 큰 무기.

그것은 그들이 든 대낫과 육체적인 스펙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묘지에 지대하게 내려앉아 뜬눈을 가리게 할.

지나칠 정도의 어둠이었다.

검은 산양의 카타콤 [3]

31화.

화르르륵.

깨진 술병에서 피어오른 화염은 삽시간이지만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하지만 작게 피어난 불꽃은 눈이 보인다는 안도감과 현실의 절망적임을 함께 보여줬다.

"대체 언제..."

들리지 않았다.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들은 착실하고 확실하게 어둠을 벗 삼아 접근해 왔다.

그 수는 어림잡아 여덟.

사방을 포위한 검은 산양의 추종자들이 대낫을 들고 서 있었다.

섬뜩함에 예기가 번쩍이는 대낫.

그것을 든 검은 산양 놈들은 사신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치익.

주정뱅이로 인해 밝혀진 불꽃은 이내 검은 산양의 발굽에 꺼졌다.

다시금 내려앉은 어둠은 불꽃에 수축된 시야를 완전하게 가렸다.

가려진 시야는 공포를 불러왔고 공포는 비명으로 변질하여 뱉어졌다.

서걱.

"끄아아아악!! 내, 내 파아아알!!"

뜨거운 무언가가 얼굴에 튀었다.

그것이 붉은 피라는 걸 느꼈을 때.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씨이발!! 뭉쳐! 뭐해! 주정뱅이!! 빨리 불 밝히라고 개자식아!!"

"방패병! 방패 병!! 이 개자식아 정신 안 차려!?"

"끄륵, 끄르르르륵!"

"큭! 무슨 힘이...!"

카타콤의 퀴퀴한 어둠 속에서 피 튀기는 난전이 벌어졌다.

전위를 든든하게 막아야 할 방패병의 방패는 그의 팔과 함께 떨어졌다.

피거품 물며 쓰러지는 방패병은 의식을 잃었다.

보일 리 없는 어둠 속에서 휘두르는 쌍도끼는 갈 곳을 잃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구잡이로 던져지는 주정뱅이의 술병은 초라한 불꽃으로 번져 오히려 자신들의 입지를 좁혔다.

강철 군주의 은색 갑옷은 추종자의 대낫에 찢겨 핏물이 흘렀으나 그녀의 검은 그들의 몸에 닿았음에도 상처 입히지 못했다.

절망과 절규가 퍼져가는 난전 속에서도 그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둘이었다.

하나는 산양의 탈을 쓴 힐러가 자신들의 생명력을 회복시키고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파지지지지직!!

콰앙-!!

검을 맞잡아 기도하는 여인 옆에서 붉은 뇌전을 흩뿌리며 투창하는 한 명의 사내 덕분이었다.

"뇌창!!"

뇌창이라 불리는 랭킹 2위.

카탈린의 감전이었다.

파지지지직!!

쾅-!

체인 라이트닝처럼 붉은 뇌전에 피로 인해 번졌다. 삽시에 번지는 뇌전에 순간 주변이 환히 밝혀졌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뿐.

쓰러지는 추종자보다 대낫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놈들이 더 많았다.

'수준 차이가 심해.'

여기 모인 랭커들의 수준보다 추종자의 스펙이 월등히 뛰어났다.

저들은 겨우겨우 추종자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으나 그건 찰나의 발버둥일 뿐이다.

바바리안은 팔 잘려 쓰러진 방패병처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고, 무분별하게 공포에 질려 화염병을 투척하는 주정뱅이 또한 이 전투에서 큰 쓸모가 있진 않았다.

도도하게 굴던 강철 군주 또한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검은 추종자의 가슴에 닿았으나 작은 생채기만을 낼 뿐, 뚫어내지도 못했다.

난 판단했다.

이 파티로 카타콤의 공략은 무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빠져나갈 수도 없는 노릇.

'퇴로는 진즉에 막혔다.'

놈들은 우리의 퇴로를 가장 먼저 단단하게 막아뒀다.

전위보다 후방에 더 많은 추종자가 배치되어있음을 확인했다.

이렇게 근접해서는 투창도 큰 의미가 없다. 투창에 힘이 실리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거리를 벌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근접전을 벌여야 하는데 지금 상황을 보면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난 근접전에 재능이 없다.

괜히 투창과 마법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매복에 당한 게 컸다. 제대로 싸울 환경이 갖춰지지가 않았어.'

방패병과 바바리안은 그렇다쳐도 강철 군주와 주정뱅이는 조건만 갖춰지면 큰 힘이 되어줄 기프트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놈들의 매복과 기습이 예상보다 빨랐을 뿐이다.

애초에 스펙 자체가 심하다.

저들이 말한 대로 추종자의 레벨이 5라면 이 파티의 레벨은 평균 2렙.

애초에 공략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허나 그런데도 내가 들어온 이유는.

"기프트 포인트를 사용합니다."

"씨드라를 선택하셨습니다."

『씨-드라』

데몬시드를 강제 성장시켜 무작위로 공격하는 씨드라를 만든다. (데몬시드의 수준에 따라 씨드라의 강함 수준이 달라진다.)

〈소모값: 20〉

나름대로 믿는 구석 하나쯤은 있었기 때문이었다.

"씨드라."

촤악.

뿌려진 데몬시드는 여섯.

전방위로 뿌려진 데몬시드는 허공에서부터 자그마한 빛을 머금는다.

한꺼번에 달려들던 추종자들의 앞에서 순식간에 씨앗을 뚫고 나온 촉수들은 나무의 것.

하지만 그것은 이내 삽시에 성장해 추종자를 넘어서는 크기로 성장한다.

"뭐, 뭐야 저게!"

"뛰어!!"

콰즉!! 쾅-! 쾅쾅!!

데몬시드 하나당 나타난 씨드라는 3개의 머리를 지닌 히드라.

흉포한 뱀의 머리를 지닌 여섯 마리의 씨드라의 머리는 총 18개.

총 18개의 머리가 각기 움직이며 추종자를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끼야아아아아!!]

고막이 찢겨질 것만 같은 굉음을 자아내며 나타난 씨드라 여섯 마리.

그것들은 태어나자마자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 치웠다.

콰직! 콰직! 콰즉!!

"우욱!"

강철군주가 씨드라에게 잡아먹히는 추종자들을 보며 헛구역질했다.

욕심 많은 놈들은 세개의 머리로 서로 먹고자 하며 추종자의 몸뚱이 하나를 물고 찢었다.

덕분에 주변은 피 웅덩이로 흥건해졌고 흩날리는 장기들이 빨랫줄처럼 여기저기 늘어졌다.

그저 짐승.

잔혹한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가, 갑자기 저게 어디서 나타난 거야 씨발!"

"닥치고 뛰기나 해!"

[검은 산양의 추종자를 섬멸해 500의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검은 산양의 추종자를 섬멸해 500의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검은 산양의 추종자를 섬멸해 500의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

.

.

순식간에 차오르는 경험치와 금화에 일순 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씨드라의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추종자의 데몬시드를 써서 그런가.'

강함의 정도가 달랐다.

삽시에 추종자들을 찢어 먹는 씨드라의 모습은 그야말로 폭군 그 자체.

표면이 나무의 그것만이 아니라면 진정 악마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한 괴물이었다.

추종자의 데몬시드는 분명 뼈아픈 지출이었지만 이만한 파괴력과 힘이라면 분명 훌륭한 스킬이지 않은가.

물론.

'벌써 죽어간다.'

억지로 급성장 시켰다는 스킬 설명처럼 금세 시들어 죽어가는 모습은 묘한 안도와 실망을 함께 했다.

'3분정도.'

씨드라의 활동 시간은 3분.

하지만 그만큼 임펙트는 대단하다.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강력한 한 수가 되어줄 게 분명한 스킬이었다.

'역시 데몬시드의 관련 스킬은...'

강력하다.

카탈린의 감전도 그에 못지 않게 강하지만 데몬시드는 역시 강하다.

"젠장."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씨드라의 난동을 듣고 추종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련한 불빛은 춤사위를 추듯 흔들리다 사라졌다. 다시금 우리 앞을 가로막은 건 빛의 부재였다.

"빌어먹을."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달리며 뒤쫓아오는 추종자들에게 투창을 날린다.

간간히 뿌려둔 씨앗은 다시금 일어나 씨드라가 되어 추종자들을 집어삼키지만 이마저도 희망적이진 않다.

'마나가 바닥나고 있다.'

「마나」 - 130/380

카탈린의 감전.

그리고 투창과 함께 가끔 창날에 페스틱사드도 사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치명상을 입힘과 동시에 독 데미지로 놈들을 죽이는데는 성공하고 있다. 달아나며 씨드라를 활용해 쫓아오는 놈들을 죽이는 데 성공하며 효과적으로 추종자를 죽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마나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우리의 목적 없는 질주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면 위험하다.'

그때였다.

타앙-! 타앙-! 규칙적인 망치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무슨 소리 안 들리나?"

"갑자기 무슨 소리! 뛰기나 해!!"

"드, 들려요!! 망치 소리가 나요!"

"나도 들린다!"

주정뱅이는 못 들었지만, 레아와 바바리안은 들었다.

갑자기 들려온 망치 소리.

불현듯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사로잡힌 뉘우치는 망치를 사하여 악으로부터 구하여 주십시오.]

망치.

망치를 사하여 구해달라고.

"망치 소리! 망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가!! 찾을 수 있겠어!?"

"음!! 저쪽이다!"

바바리안이 손가락질한 곳.

그곳은 뼈로 이루어진 단단한 벽.

난 곧장 적창을 꺼내 잡았다.

"비켜."

꽈드득-!

카탈린의 감전을 일으켜 투창하자.

콰앙!!

탱-!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튕겼다.'

벽을 뚫고 간 적창이 무언가에 튕겨지는 철성이 똑똑히 들려왔다.

쿵.

무너져 내린 벽 사이로 검은 산양의 머리를 한 사내가 나타났다.

추종자들보다 몸집이 1.5배는 더 큰 듯한 놈.

[돌가죽 검은 산양의 문지기]

"헉! 엘리트 데몬이잖아!"

돌가죽이란 수식어를 가진 악마.

엘리트 데몬이었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추종자와 비슷한 외견이었으나 놈은 낫이 아닌 망치를 들고 있었다.

놈의 옆, 벽에 적창이 꽂혀 있는 걸 보니 방금 들린 철성은 놈이 망치로 튕겨낸 소리였던 모양이다.

'감옥?'

놈은 철창으로 이루어진 감옥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였다.

안에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대장간에서 누군가가 망치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 또한 검은 산양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감옥에 갇힌 검은 산양.

아마도 저자를 구해야 하는 게 아니냔 생각과 동시에.

콰앙-!!

문지기의 공격이 들어왔다.

거대한 망치로 두들기자 지면이 들썩거릴 정도의 강력함.

"크억!!"

바바리안은 단 일격에 피떡이 되어 날아가 처박혔고 주정뱅이는 달아나 화염병을 던졌으며 강철군주 챙겨온 대낫을 강철 기사로 만들어 반격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레벨이....."

레벨이 다르다.

추종자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한 놈들이 엘리트 데몬을 상대로 유효타를 먹일 수 있을 리 없었다.

"화, 화성님..."

이번에는 레아마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놈은 내 적창마저 튕겨낸 놈.

게다가 돌 가죽이란 수식어는 모든 물리 공격을 무효화 할 정도로 단단한 몸을 지닌 데몬을 뜻한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

"씨드라."

더 압도적인 물리공격이었다.

쾅-! 쾅-! 쾅-! 쾅-!!

씨드라 네 마리가 나타나 문지기를 향해 12개의 머리가 스륵 돌아갔다.

무작위로 공격하는 씨드라.

놈들이 나타난 자리엔 문지기 한 마리 뿐.

먹잇감이 하나뿐인 씨드라가 할 행동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먹어치워."

씨드라의 머리들이 앞다퉈 문지기를 씹어먹기 위해 짓쳐들었다.

"돌가죽의 검은 산양 문지기를 쓰러뜨리셨습니다."

"검은 산양 카타콤에서 문지기는 수많은 적들 앞에서도 무릎 꿇은 적이 없는 강인하고 잔혹한 자였습니다."

"단신으로 그의 혼을 정화한 당신에게 추가적으로 경험치 5000, 200금화를 획득합니다."

"'카탈린의 감전'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타앙.

"사로잡혔던 뉘우치는 망치. 리벨롬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망치질을 멈춥니다."

"그는 검은 산양의 꾀에 빠져 자신의 일족들을 모조리 악마의 추종자로 만들게 한 원흉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에 고통스러워했고 제 아내까지 빼앗겨버린 비운의 인물이자 카타콤의 유일한 대장장이입니다."

"그를 도와 카타콤을 정화하십시오. 그의 무기는 네피림의 힘을 더욱 강화해줄 것입니다."

"한 네피림으로 인하여 새로운 축복이 내려집니다. 한국 차원의 네피림들은 [네피림의 대장간]에서 무기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뉘우치는 망치가 그것을 가능케 도울 것입니다."

[뉘우치는 망치 리벨롬]

끼익. 철창의 문을 열고 나오는 리벨롬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아아... 드디어, 신이시여! 리벨롬의 혼과 육신의 모든 것을 악을 멸하기 위해 쓰겠나이다!"

그때였다.

덥썩.

"어억!!"

콰직! 콰즉! 꿀꺽.

"아..."

"뉘우치는 망치 리벨롬이 사망했습니다."

중요한 인물이었던 리벨롬이 씨드라에게 잡아 먹혔다. 남은 것은 그가 손에 쥐었던 망치뿐.

숨막히는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좆됐음을 단박에 느꼈다.

뉘우치는 망치 [1]

32화.

삼등분되어 찢겨 먹히는 리벨롬을 보며 난 참담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뭐, 뭐야. 이거 좆된 거 아냐?"

내 심정을 대변하는 바바리안만이 현 상황의 핵심을 꿰뚫었다.

"아마도 리벨롬이란 자는 우리가 구해서 나갔어야 했을... 네임드 같다."

"네임드?"

"중요 인물이란 소리다. 이것 봐. 시스템이 말하는 뉘앙스를 보면 리벨롬은 네피림의 무기를 강화시켜줄 우호적인 네임드 같은 존재다."

그런데 그 네임드가 죽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카타콤 자체가 리벨롬을 구출하고 그에게서 강화된 무구들을 가지고 공략하는 게 정석이 아니었을까."

강철군주의 추리는 그럴듯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이제는 별 쓸모도 없어졌지만.

[뉘우치는 망치]

-죄를 뉘우치며 쉼 없이 망치질했던 리벨롬의 혼과 대악마 바포메트의 숨이 불어 넣어져 있는 망치.

(소모 10)

〈1회-100% 2회-80% 3회-60% 4회 -40% 5회-20% 6회-8% 7회-4% 8회-1.5% 9회-0.5%〉

〈강화 실패시 파괴〉

망치를 쥔 난 그 속에 담겨 있는 능력치를 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강화 망치.'

아마도 리벨롬은 악마에 대항하는 네피림들을 위한 존재로서 신이 안배한 자일지도 모르겠다.

대놓고 강화 망치를 들고 있는 놈이었으니 말이다.

'근데 죽었군.'

꽤 큰일이었다.

나 때문에 대한민국의 네피림들이 전력을 올릴 기회를 놓쳤다.

솔직히 억울하다면 억울하다.

나라고 놈이 갑자기 감옥 안에서 뛰쳐나올 줄 알았나.

적어도 씨드라가 시들 때까지만 기다리다가 나왔어도 이런 사달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호적인 네임드였으니 당연히 카타콤의 공략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말이다.

"이제 어쩌지?"

강철군주였다.

시종일관 담담했던 그녀 또한 이번에는 꽤 초조한 기색이다.

당연하다.

문지기는 씨드라로 손쉽게 잡았지만, 아직도 카타콤의 추종자는 많다.

놈들은 아직도 우릴 쫓고 있을 터.

이쪽에서 소란이 일었으니 곧 찾아온다 봐도 무방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

'도망치거나.'

맞서 싸우거나.

난 당연히 후자에 초점이 맞춰졌다.

내 손에 들린 뉘우치는 망치.

이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철. 대장간 안에 무기들이 많다. 넌 무기들로 강철기사를 만들어. 최대한 많이 만들어라."

"뭘 할 셈이지? 내가 기사들을 만든다 해도 이곳에서 내 능력은 반감된다. 기사들에게 말을 태울 수 없어."

카타콤이 아무리 넓다 해도 말을 타고 다닐 정도로 넓고 크진 않다.

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하다.

퍼걱.

벽에 꽂힌 적창을 뽑아냈다.

이내 적창에 대고 망치질하자.

타앙!

"10금화가 소모됩니다."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의 한계가 돌파됩니다!"

소모값이 10이라고 해서 마나인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금화였다.

설마하니 금화일 줄은 몰랐는데 빠져나간 금화를 보니 당황스럽지만 얼추 이해는 된다. 강화 시스템이란 재화가 필요한 법이니까.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 +1]

-그렘린 킹의 피와 뼈를 갈아 만든 적창. (더 강한 출혈)

평소와 같다.

강한 출혈에서 '더' 가 붙었을 뿐.

난 한번 더 적창을 두드렸다.

타앙!

"20금화가 소모됩니다."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의 한계가 돌파됩니다!"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 +2]

-그렘린 킹의 피와 뼈를 갈아 만든 적창. (매우 강한 출혈)

한번 더.

캉!

"40금화가 소모됩니다."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의 한계가 돌파됩니다!"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 +3]

-그렘린 킹의 피와 뼈를 갈아 만든 적창. (강력한 출혈)

더욱 강한에서 강력한으로 바뀌었다. 솔직히 60% 확률에서 무기가 파괴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렇게 크게 바뀐 건 아닌 거 같지만 안 그래도 이상할 정도로 출혈 능력이 강했던 무기다.

원래의 상태에서 강렬한 출혈로 바뀌었으니 기대하기는 충분할 터.

시간이 없다.

"강철!"

"여기있다!"

와르르.

쏟아지는 강철의 무기.

이곳에서 그녀가 선별한 무구들.

그 수는 수십.

대부분이 검과 창이었다.

한눈에 봐도 리벨롬이 만든 명품 중에서도 명품들이었다.

"그 망치로 강화하는건가?"

"강화한 무기를 기사로 만들면 더 강력해지겠지?"

"당연하다."

기대하는 모습이 다분한 강철군주.

그녀의 기프트는 무기를 기사로 만드는 것.

그 무기가 어느 것이냐에 따라 기사의 성향과 전투력이 차이 난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강화시킨 무기를 기사화하는 것이 좋다.

어느 정도 강화한 무기를 기사화 한다면 이곳에서도 강철군주는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난 곧장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기대하지."

그녀는 내 손을 맞잡고 악수했지만 난 곧장 손을 뿌리쳤다.

"돈 내놔. 강화 한번에 20금이다."

"그런...!"

"망치 속성이 그래."

"믿을 수 없다!"

강화 한번에 20금.

열개의 검과 창이다.

200금이 넘게 드는 돈.

강철 군주의 재산 랭킹을 보면 그녀의 전재산은 300금 정도.

전재산에 절반이 넘는 돈이니 강한 반발은 당연했다.

"망치로 강화하는 힘을 아무런 조건없이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물론 상황이 상황이니 15금만 받겠다."

"크윽..."

"추종자 한마리 잡으면 30금씩 떨어지는데 뭘 망설이지?"

그렇다. 추종자 한 마리에 30금 정도 떨어지는 건 기정사실. 이곳에서의 200금은 높이 도약하기 위한 투자다.

"!"

"저, 정말이야?"

"정말이다."

"그럼 내거부터 해줘!"

바바리안은 쌍도끼를 내밀었다.

가만히 쌍도끼를 내려다본 내가 강철을 향하며 턱짓했다.

"내겠...다!"

"바바리안. 상황이 너보단 강철이 먼저다."

"어쩔 수 없지. 빨리 시작하자고!"

"좋다."

캉! 캉! 캉!

들리지 않을 거라 예언했던 시스템 메시지와는 달리.

카타콤에서는 멈추었던 망치질 소리가 다시금 들리기 시작했다.

*

카타콤의 추종자들이 모여 코를 킁킁거렸다.

이 어둠 속에서 피비린내가 난다.

그들은 확장된 동공 속에서 대화했고 이내 침입자들을 찾아냈다.

불이 꺼지지 않은 대장간.

그곳에서는 망치질 소리가 들려왔지만, 망치를 쥔 자는 다른이였다.

게다가 그 앞을 막고 선 자들 역시.

문지기가 아니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강철 기사단.

하지만 추종자들은 코웃음을 쳤다.

저 기사가 만들어낸 기사들은 나약해빠졌다.

종잇장처럼 찢기는 갑옷은 불편하게 왜 입었나싶어 어리석어 보였고, 자신들의 피부를 찢지 못하는 그들의 검 또한 두렵지 않았다.

추종자들은 기사들을 겁내지 않았고 이전과 같이 대낫을 휘둘렀다.

카앙-!!

[!]

하지만 달랐다.

강철 기사들이 자신의 대낫을 검으로, 갑옷으로 완전하게 막아냈다.

[강철기사+2] x10

"죽여버려어!!"

쿵-!! 카앙-! 촤악!!

동시에 발돋움한 강철 기사들이 추종자들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강철군주 또한 그들 사이에서 추종자들의 팔을 잘라내기까지 했다.

작은 생채기 정도만을 겨우 냈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행보.

이 모든 것은 뒤에서 연신 무기들을 두들기고 있는 뇌창 덕분이었다.

[리벨롬의 뉘우치는 검 +3] (magic)

-리벨롬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정성들여 만든 검.

"강한 절삭력" "명중률"

절삭력과 명중이 붙은 검이다.

예기가 남달라 질겨 잘 베어지지 않았던 추종자들의 몸도 쉽게 베였다.

이 검을 만들기 위해 강철군주는 전재산을 전부 털었지만 후회는 없다.

[검은 산양의 추종자를 섬멸하셨습니다.]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29금화를 획득합니다.]

추종자들을 잡으면 잡을수록 소비했던 금화와 더불어 엄청난 경험치가 들어오고있기 때문이었다.

"으랏챠!! 내 쌍도끼 맛좀 봐라!"

"흐아아압!!"

새로운 쌍도끼를 든 바바리안과 검은산양의 투구를 쓴 힐러 또한 마찬가지. 강화된 무기로 추종자들과 대등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물론 기본적인 스펙은 딸렸지만 이제야 겨우 그런대로 전투가 된다.

'대단한 힐러야. 놈들의 무기에 묻어 있는 독도 해독해 버리고 있어.'

피의 축복이라는 기프트는 피에 담긴 부정함도 씻겨버릴 정도로 강력한 회복력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그들이 멀쩡하게 싸우고 있는 거나 다름 없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대낫에 발라져 있는 독에 의해 몸이 마비되어 제대로 싸울 수조차 없었을 터.

물론 제대로 된 치유가 아닌, 버프 형식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 힐러와 함께하는 뇌창이니 저정도의 강력함을 손에쥔 것일 터.

강철군주는 조금 뇌창이 부러웠다.

쾅-!!

"휘유~ 살벌하구만!"

망치질하다가 한번씩 투창하는 뇌창의 위력은 어마무시할 정도.

한번의 투창마다 추종자가 절명하고, 붉은 뇌전은 피를 따라가며 싸우던 추종자들에게도 데미지를 입히니 투창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다.

'위험하다 싶으면 한번씩 날린다.'

망치질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전장에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대장간.

연신 불타오르는 불꽃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곳.

적어도 어둠을 틈타 기습하는 추종자들의 전술은 통하지 않는 곳.

암담했던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희망이 보였다. 방패병은 죽었고, 주정뱅이는 도망갔지만 썩 나쁘지 않다.

전위를 스펙업한 바바리안과 강철군주의 기사들이 맡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들의 뒤를 레아가 피의 축복으로 강화시켜주면서 자신 또한 검을 휘두르고 있다.

조금 위험하다 싶으면 회복되는 체력으로 버티기가 가능했다.

콰앙!!

하지만 자그마한 희망에 조금은 기대해버려서일까.

"젠장할... 챔피언이다! 끄륵."

전위에 섰던 바바리안이 튕겨나갔다. 단 일격에 혼절. 대낫이 가슴에 박혀도 멀쩡하게 싸울 정도로 터프한 바바리안이 말이다.

벽 한구석에 처박혀서 일어나질 않는다. 반짝거리던 대머리에서 흐르는 검붉은 피가 이를 증명했다.

"젠장!"

희망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갑자기 챔피언이라니!

[검은 산양의 찬양자 로자리]

검은 산양의 얼굴.

그러나 몸은 여인의 것이고 머리에 난 구부러진 뿔은 총 4개에 달했다.

크기는 거인이라 할 정도로 크고 양손에는 죽은 망자들의 머리가 매달려 있는 흉흉한 메이스를 들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 리벨롬! 리벨로오오오오옴!!]

오자마자 바바리안을 벽에 처박고 강철의 기사들을 모조리 짓밟아 박살낸다.

쾅! 쾅쾅쾅!!

양손에 든 메이스는 특별한 힘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들고 있는 그 자체로 강력함을 보여줬다.

리벨롬을 부르짖으며 슬퍼하는 모습은 마치 연인을 잃은 여인의 절규와도 같았다.

하지만 싸우는 자들에게는 웬 미친년이 등장한거나 다름없는 바.

그녀의 메이스질을 피하느라 급급한 레아와 강출군주는 반격 한번 해보지 못하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다.

"리벨롬... 그러고보니 리벨롬은 자기 아내를 빼앗겼다고 그랬어!"

그때였다.

로자리의 등장과 함게 시스템 메시지가 다시금 등장했다.

"리벨롬의 아내, 로자리는 자신의 영혼을 검은 산양 바포메트에게 바치고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지만 색욕의 저주에 걸려 향락에 도취되어 제 남편인 리벨롬을 저버렸습니다."

"하지만 리벨롬이 죽은 지금 그녀의 분노는 정당합니다. 허나 그렇다 한들 로자리의 혼은 '검은 산양 바포메트'의 것이고 그로 인해 저지른 악행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부디 카타콤을 지키는 그녀의 혼을 정화시키고 '부정한 검은 산양 바포메트'의 흔적을 멸하여 주십시오."

쾅! 쾅! 쾅! 쾅!

[리벨로오오오오오옴!!]

거대한 메이스를 휘두르는 로자리의 공격은 변화무쌍하다.

슬픔과 분노에 의해 제멋대로 휘두르고 있다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걸 휘두르는 게 그녀.

로자리였기에 일대는 당연하다시피 모조리 파괴되고 있었다.

강철군주는 생각했다.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자.

이곳에서는 그밖에 없다고.

"뇌창!!"

다급하게 그를 부름과 동시에.

꽈광-!!

그의 적창이 불을 뿜으며 로자리의 어깨에 박혀 들었다.

[꺄아아아아악!!]

"강력한 출혈이 발생합니다."

보랏빛 피가 사방으로 분수를 뿜었다. 고작 단 한방의 투창.

쿵!! +3 강화된 적창의 일격에 카타콤의 주인이 무릎을 꿇었다.

창 하나가 몸에 박힌 거 치고는 쉴세없이 많은 피가 흘러나왔다.

마치 창 자체가 피를 뽑아내고 있는 듯 순식간에 주변은 로자리의 보랏빛 피로 웅덩이졌다.

로자리는 삽시에 피를 빼앗겨 피부가 메마르고 양손에 쥐었던 메이스마저 놓쳤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콰지지지직!!

뇌창은 강렬한 적뇌를 방출하며 단단한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쿵!

그러자 붉은 뇌전들이 그의 손에 모여 하나의 검붉은 벼락으로 변했다.

보기만 해도 불길한 검붉은 벼락.

그가 레벨업하고 새로 얻은 스킬.

[카탈린의 벼락]이었다.

[아아아... 리벨롬... 날 용서...]

쇄애애애액-!!

불길하게 투창되는 '카탈린의 벼락'이 로자리의 가슴에 꽂혔다.

콰앙-! 콰자자자자자작-!!

일대를 검붉게 물드며 모든 피를 게걸스레 잡아먹었다. 근처에 있던 추종자들은 물론이요 카타콤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 뿐이랴, 카타콤 한쪽을 모조리 박살내는 파괴력은 커다란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위력.

"검은 산양의 찬양자 로자리가 영원한 잠에 빠집니다."

"뇌창..."

그가 바로 뇌창이었다.

뉘우치는 망치 [2]

33화.

"검은 산양의 찬양자 로자리가 영원한 잠에 빠집니다."

"위대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검은 산양의 찬양자 로자리'를 처치하셨습니다."

"12450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1530 금화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의 카타콤을 정화하여 경험치 5100, 130금화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최초로 카타콤을 정화한 1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최초 공략 보상이 주어집니다."

"[찬란한 카타콤의 보상 상자]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의 카타콤을 정화한 것은 분명 대단한 업적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도 수많은 악마들의 카타콤이 존재합니다. 리벨롬은 자신의 죄를 뉘우친 몇 되지 않는 네피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의 앞길에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뭐야..."

마지막 메시지는 왠지 영 탐탁치 않은 듯한 말투였다.

'리벨롬이 죽어서 그런가...'

왠지 맞는 거 같다.

리벨롬이 죽은 걸 탓하는 거 같은 기분. 조금 씁쓸했지만 어쩌겠나.

이미 죽어버린 걸.

난 문지기를 죽이고 레벨업한 뒤.

뉘우치는 망치로 내가 지닌 대부분의 장비들을 모조리 강화했다.

강화.

그건 장비의 한계를 돌파해주는 아주 대단한 시스템이었다.

내가 지닌 적창.

푸르푸르의 반장갑. 네피림 세트.

모조리 +2 강화를 하자 그 효율은 어마무시하게 변했다.

「네피림의 심장+2」

-시작의 네피림이 지녔던 심장의 힘을 뜯어내 만든 갑옷.

-방어력 +15▶+30(건강 +5▶+10)

「네피림의 힘줄+2」

-시작의 네피림이 지닌 힘줄을 이용해 견고하게 만들어진 하의

-방어력 +10▶+20(건강 +2▶+4)

「네피림의 손톱+2」

-시작의 네피림이 지닌 손톱에 깃든 힘을 엮어 만든 건틀릿.

방어력 +5▶+10 (근력 +2▶+4)

「네피림의 발톱+3」

-시작의 네피림이 지닌 발톱에 깃든 힘을 엮어 만든 부츠.

-방어력 +5▶+10 (민첩 +2▶+4)

「네피림 세트+2」

-세트 효과

2중: 근력 +5▶+10

4중: 생명력 +100▶+200

5중: 마나 +40▶+80

「피조물의 영광」

-한달에 1회.

신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생명력과 마나를 100% 회복합니다.

네피림 세트 효과가 2배로 뛰었다.

개별적인 장비 효과도 2배.

이게 모두 강화의 효과다.

그렘린의 목걸이 명중률도 2배.

푸르푸르의 반장갑과 은반지의 번개 내성도 2배가 되어 총 20% 올랐다.

[야칸의 숲 지팡이+2] (매직)

-야칸의 숲 바위에 끼워져 있던 지팡이. 어디서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은유한 마력과 메모라이즈 마법이 각인되어 있다.

〈마력 +3▶+6〉

〈메모라이즈 (2)〉

하지만 아이템에 각인된 스킬까지 올려주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미네트의 로브]까지 강화를 하지는 않았다.

로브는 플라이 마법의 스킬만 각인되었을 뿐 다른 보조적인 능력치가 붙은 장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내 스펙은 예상보다 더 높아졌다.

『이화성』

「데몬시드 Lv.3」

「카탈린의 감전 Lv.3」

「생명력」 – 524/720 (+200)▲

「마나」 - 7/660 (+80)▲

「능력치」

근력 – 28 (+14) ▲

민첩 – 16 (+4) ▲

건강 – 26 (+14) ▲

마력 - 29 (+6) ▲

강골 - 3 ▲

「세부 능력치」

명중률+4 시야+4 방어력+80 마나재생+10 번개내성+20% 냉기내성+5%

「스킬」

[워터볼] [투척] [돌진] [레인스톰] [블리자드]

「장비 스킬」

[차지볼트(2)] [에너지쉴드(1)] [피조물의 영광(1)] [플라이(3)]

카탈린의 감전이 레벨업하며 생긴 올스탯 +1과 여분의 포인트는 전부 마력을 찍었다.

덕분에 내 마력은 이제 30을 넘보고 있었고 마나는 660이나 됐다.

물론, 전부 강화한 덕에 내 주머니는 조금 가벼워졌지만 말이다.

『소지금 1680 금화』

본래라면 카타콤에서 사냥한 금화와 공략 완료 보상으로 받은 돈이 4천금이 넘어야 했지만 강화 비용으로 2천금 정도를 썼더니 이거뿐이다.

당연히 후회는 없지만 3천금을 모아야 나만의 상점에서 스킬북이라도 사는데 아쉬웠다.

"아직 추종자들이 좀 남았을테고... 뒤져보면 뭐든 나오겠지. 돈 나올 구석이 없어 보이지도 않고."

[뉘우치는 망치]

강화 망치.

왠지 이것만 있으면 앞으로 돈 문제는 전혀 걱정이 없을 거 같다.

그러니 그것보다는.

『카탈린의 벼락』

-피를 쫓는 벼락을 만든다.

(소모값:40H+M)

우선 스킬이다.

생명과 마나를 각각 20씩 소모하는 괴랄한 스킬. 하지만 그 위력은 앞서 보았던 것처럼 어마무시할 정도.

이쯤이 되니 대체 카탈린이 뭔데 이런 기프트가 탄생했는지 모르겠다.

우연과 행운이 겹쳐 얻어 사용하고는 있지만, 불길하면서도 강력한 위력이 카탈린의 핏줄에서 나온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화! 아니 뇌창님!"

무너진 카타콤에서 빛이 스며든다.

어두워 불길했던 곳에 빛이 스며드니 어둠은 달아나고 빛이 찬란하다.

"대단하세요!!"

대단하다며 내가 만든 뇌창을 자기도 흉내내며 따라 해보는 레아를 보노라면 영 웃음이 난다.

"그 투구 쓰고 그러니까 웃기다."

"아! 맞네요. 헤헤."

아직도 검은 산양의 투구를 쓰고 있는 레아였기에 영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바바리안 좀 치료해줘. 저러다 죽겠어."

"아! 어떡해!! 잊고 있었어요!"

후다닥 달려가서 피를 너무 흘려 얼굴이 보라색이 되어가는 바바리안에게 피의 축복을 내려주는 레아와 반대로 보랏빛으로 더럽혀진 갑옷을 입고 강철군주가 다가왔다.

"감사한다."

"... 갑자기?"

"네가 아니었으면 우린 죽었어. 우리들한테 카타콤은 수준이 맞지 않은 곳이었다."

"그랬나."

"우리가 없었어도 넌 혼자서 카타콤을 공략 했겠지."

강철군주는 자신의 투구를 벗었다.

이내 은발이 흘러내리며 안에서는 꽤 앳된 얼굴이 나타났다.

딱딱한 말투와는 반대로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은발은 신기하네."

"기프트를 얻고 이렇게 됐어.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군."

강철군주는 내게 악수를 권했다.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분에 넘치는 보상도 받았어."

"최초 공략 보상이 주어집니다."

"[찬란한 카타콤의 상자]를 획득합니다."

강철군주도 이 카타콤의 상자를 얻은 모양이다.

"찬란한 상자인가?"

"아니, 난 빛나는 상자다. 당신과는 다른 모양이군."

찬란한 보다는 한 단계 낮은 보상.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내가 다 했는데 같은 보상을 받았다면 조금 서운할 뻔했다.

건넨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 함께 등을 맞댔다. 보니 왠지 모를 전우애가 샘솟았다.

'나름 라이벌이니까.'

잠깐이지만 내 순위를 위협했던 건 강철 군주뿐이었다.

카타콤이라는 지형적 특성이 아니었다면 강철 군주는 강철마까지 꺼내 훌륭한 기마술을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기마술을 보여주는 건 카오스 게이트에서겠지만.

촤악.

때마침 그들의 곁에 푸른 포탈이 열렸다.

카타콤의 공략은 끝났다.

이제 돌아갈 차례였다.

"이 섬의 이름은 뭐지? 알려준다면 탈출할 수 있게 돕겠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하지."

굳이 이들에게 섬의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이 섬은 내 과수원으로 탈바꿈하게 될 테니까.

괜한 짓으로 위험에 빠지는 일이 생기는 건 지양하는 편이 좋다.

"그런가. 하긴, 당신이라면 돕지 않아도 알아서 할 테지. 그럼, 감사했다. 카오스에서 또 보자."

"그래."

강철군주가 포탈로 사라지고 나서야 바바리안도 겨우 일어났다.

"으으 머리야... 자, 잘은 모르겠지만... 돌아갈게! 다음에 또 보자고 친구! 염소 아가씨도!"

그도 원래의 곳으로 돌아갔다.

다시 찾아온 정적은 꽤 시원섭섭했지만 난 혼자는 아니었다.

"가요, 화성님."

"그래."

카타콤은 공략을 완료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직 남아 있는 놈들이 있겠지?"

"네, 그렇겠죠. 아마도 로자리의 방이 따로 있지 않았을까요? 전 거기도 수색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 맞아."

로자리는 카타콤의 주인.

일종의 보스 격 챔피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이었던 리벨롬이 죽으니 자기 위치를 벗어나고 냉큼 달려온 것이다.

그러니 본래의 방에는 이런저런 것들이 있을지 몰랐다.

'보물이면 좋고, 스킬북 같은 것도 좋고 아니면.'

시체여도 좋았다.

[검은산양의 찬양자 로자리의 씨앗]

-성장기간;153일.

이미 씨앗은 확보했다.

씨드라가 삼킨 문지기는 씨앗으로 만들지 못했다. 씨드라가 삼킨 건 금세 소화되어버려서 데몬시드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씨드라를 쓰는 건 정말 위급할 때 아니면 삼가야겠어.'

엄청난 위력으로 적들을 삼켜버리는 건 좋지만 데몬시드로 만들 수가 없으니 약간 손해였다.

그것만 아니라면 씨드라는 확실히 강력한 스킬이긴 했다.

'씨앗을 강화할 순 없나?'

그럼 분명 씨드라 또한 강해질 텐데 말이다. 혹시 몰라 망치를 들고 데몬시드를 두들겼다.

파삭!

아니나 다를까 씨앗이 부서졌다.

무구가 아니기에 뉘우치는 망치로는 강화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하긴 씨앗은 무기가 아니지.'

그렇게 여러가지를 고민하며 카타콤을 걸었다. 왠지 음산함은 없어지고 천장에서 뚫린 빛이 스며들어 이전과는 달리 길이 잘 보였다.

정말 카타콤이 정화된 기분이다.

로자리가 죽어서겠지.

"레아, 아직 추종자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 근처에는 없을거에요."

"어떻게 확신해?"

"음... 피가 느껴지지 않아요."

"피?"

"네. 전에는 몰랐는데 몇 번 보니까 알 거 같더라고요. 추종자들의 피는 뭐랄까. 지렁이처럼 꾸물거려요."

"무슨 소리야 그게."

어쨌든 추종자의 피를 느낄 수 있다는 소리 같았다.

그러니 근처에 추종자가 없다.

확신하며 말했다.

"들어올 때도 알았으면 좋았을텐데."

"그러게요..."

괜한 말을 해서일까.

시무룩해진다.

"괜찮아. 그들이 죽은 건 네 잘못이 아니니까."

"네..."

공략엔 성공했지만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비록 오늘 처음 만났었지만 방패병과 주정뱅이가 죽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조금 걷다 보니 죽은지 얼마 안 된 찌그러진 시체가 하나 보였다. 아마도 로자리의 메이스에 당한 주정뱅이처럼 보였다.

"도망치다가 로자리한테 찍혔나."

아마 그런 듯싶었다.

참 끔찍하게도 죽었다.

잠시 그의 명복을 빌어주고 있자.

"화성님! 이, 이쪽이요!"

그녀가 사색이 되어 박살이 난 벽 한곳을 가리켰다.

"... 엄청나네."

그곳은 로자리가 있던 방으로 짐작되는 곳이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피와 짐승.

그리고 사람의 시체로 보이는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널부러진 시체들은 꽤 어린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마을에서 있었던 아이들의 시체가 떠오름과 동시에, 제단으로 보이는 곳에 짐승의 뼈로 만들어진 무언가가 놓여져 있었다.

"산양의 뼈인가."

그건 검은 산양의 두개골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였다.

[찬양의 항아리] (unique)

-검은 산양을 모시는 추종자들이 그들이 받드는 신에게 바치기 위해 인간의 정을 모아둔 항아리.

(남은 정:333)

유니크 아이템.

여기 있는 망자들의 혼이 모여진 항아리인 모양이다.

항아리 같기도 하고 물 주전자 같기도 한 기묘한 모양새.

"이거..."

혹시 모를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료로 쓸 수 있으려나."

찬란한 보상 [1]

34화.

피가 끓었다.

무슨 피가 끓였노냐 묻노라면 나는 당당하게 답할 것이다.

"농사꾼의 피가 끓는다..."

라고.

찬양의 항아리를 보는 순간 나는 확신 비슷한 걸 했다.

그동안 적잖은 비료들을 바치며 나무들을 정성껏 키워왔던 나다.

그러니 항아리를 보는 순간 알았다.

이것들은 나를 위해 탄생한 아이템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라고.

인간의 정을 모아둔 항아리가 왜 찬양의 항아리라고 적혀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느낌이 온다.

"이건 된다."

인간의 정력이란 성욕적인 힘을 뜻하기도 하지만 포괄적인 의미에서는 심신의 활동력을 뜻하기도 한다.

인간의 활동력이란 곧 에너지를 뜻하고 데몬시드에게 그것은 좋은 양분이 될 밑거름이 될 것이다.

아직 확실하게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근데 이 섬에 사람이 그렇게 많았나."

항아리엔 333개의 정이 모여있었다.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을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숫자였다.

해봤자 백 명 남짓이나 살았을까 싶은 어촌인데 생각보다 모인 숫자는 많았다.

'아니, 여기에서 모은것만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지.'

레아가 있던 곳을 생각해보면 그 가능성은 다분하게도 크다.

애초에 섬 지하에 급하게 만들어 놓았다기에 카타콤은 깊고, 오래되어 보였다.

아마도 이들이 원래 있던 지하 묘지 그 자체가 이쪽으로 옮겨진 거겠지.

이게 신의 기적인지, 악마의 농간인지는 몰라도.

"깊이 생각할 필욘 없겠지."

숨겨진 진실 따위야 내겐 아무런 의미도 이득도 없다.

그걸 안다고 하여 내가 살아남는 게 더 수월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멸망기에 젖어든 세상에서 신의 의도를 찾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악마가 나타나고 신의 선물이 우릴 지켜준다 해도 없던 종교가 샘솟고 신에 대한 믿음이 맺히진 않는다.

그저 살아가야 하기에, 죽고 싶지 않기에 살아갈 뿐이다.

애초에 난 무교다.

신이 있든 없든,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난 관심이 없다.

난 그저 맛있는 걸 먹고, 몸 편히 누우며, 내가 주어진 삶을 충족스럽게 살아가고 싶다.

이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 또한 악마들로 인해 잔인한 죽음을 맞고 싶지 않기에 힘을 키우고 그것을 위한 선택을 축적할 뿐.

사람이 살고자 하는 본능에 그럴듯한 대의를 부여하여 내 어깨를 내가 몸소 짓누르고 싶지는 않다.

난 그저, 평온하게 살 것이다.

그것을 위한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손가락질받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난 그리 할 것이다.

멸망기의 선악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할 순 없어도 이거 하나는 안다.

'누군가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건 아닐 테니까.'

이 항아리에 담긴 것이, 내가 바쳤던 것들이 인간의 선악에 위배되는 것이라도 난 또다시 같은 선택을 이룰 것이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최소한의 도리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들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뿐이다.

"찬양의 항아리를 획득합니다."

"신이시여...!"

갓블레스유.

[찬양의 항아리] (unique)

-검은 산양을 모시는 추종자들이 그들이 받드는 신에게 바치기 위해 인간의 정을 모아둔 항아리.

(모여진 정:333)

이것이야말로 내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물건이 아닐까.

다른 게 아니다.

이게 진정 신이 날 굽어살피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물건임이 틀림없다.

"믿나이다. 믿겠나이다!"

하지만 신에 대한 찬양은 그만.

할 일이 많다.

우선 많은 것들을 기부해준 기부도를 싹 청소해야 한다.

아직 이곳에 도망치거나 어슬렁거리고 있을 추종자들이 있을 터.

그리고 추종자뿐만 아니라 다른 악마들도 숨어 있을지 모르는 거니 말끔하게 청소하고 뿌리 뽑은 후에 이곳을 전부 오디 밭으로 만들 거다.

아직도 오디 씨앗이 일만 개가 넘게 있으니 이것을 그냥 놀고먹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어두면 어쨌든 내가 먹든지 팔든지 쓸모가 있으니까.

그리고 난 아직 추종자들의 열매를 만들어보지도 못했다.

검은 산양의 열매는 대체 무엇을 올려줄지도 기대됐고 챔피언들의 열매는 어떤 효과를 가져다줄지도 매우 기대가 되는 부분 중 하나.

'이 맛에 산다.'

요새는 뭐가 나올지 모를 악마의 열매에 대한 기대감이 썩 나쁘지 않다.

마치 보물상자를 열어보기 전처럼 가슴이 뛴달까. 물론 진짜 열어봐야 할 보물상자는 여기 있지만 말이다.

[찬란한 카타콤의 보상 상자]

-찬란한 축복이 깃든 카타콤을 정화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 상자.

참 때깔도 곱지.

삼색의 오묘한 빛으로 번득이고 있는 찬란한 보상 상자다.

찬란함.

그 이름처럼 이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운가. 카타콤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좆됐다고 생각했는데 이 상자를 보니 잠시간의 절망감이 회복됐다.

역시 치료 중에 가장 좋은 건 역시 금융치료 아닐까 싶다.

"레아, 열어봤어?"

"넵! 전 이거 나왔어요!"

그녀가 받았던 건 '빛나는 카타콤 보상 상자'.

벌써 상자를 열어본 모양이다.

[지아잔틴의 눈] (magic)

-오래전, 죽은 고위 악마 지아잔틴의 눈으로 만든 브로치.

"내다보는 눈(1)"

-시야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더욱 정확하게 볼 수 있다.

꽤 쓸모있는 스킬이다.

멀리 있는 지형에 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줄 망원경 같은 스킬이다. 관련 도구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즉 저격을 가능케 도울 스킬.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아에게는 별로 필요가 없는 스킬이기도 했다.

"여기요."

"이걸 왜...?"

"저한테는 큰 쓸모가 없어요. 저보다는 화성님이 가지고 있어야 빛을 볼 수 있는 스킬이니까요."

"하지만..."

분명 그렇다.

레아가 쓰는 것보다는 내가 사용하는 편이 효율적이긴 하다.

내다보는 눈으로 멀리 있는 적을 확인하고 투창이나 벼락을 날릴 수 있게 해줄 테니까.

"됐으니깐요. 화성님 하세요! 제가 멀리 본다고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는걸요!"

"아, 안되는 데에..."

레아는 괜찮다는 내 손을 뿌리치고 마음대로 옷깃에 브로치를 걸었다.

근력 29에 달해서 맨주먹으로 바위도 부술 정도인 내 힘을 능가하다니!

어쩔 수 없지. 받을 수밖에.

"응! 역시 잘 어울려요!"

붉은 보석 한 가운데가 파충류의 그것처럼 갈라진 문양의 브로치.

내가 걸치고 있는 미네트의 로브에 채우게 되니 썩 어울렸다.

"... 고마워."

시커먼 아저씨 주제에 쑥스러워하자 레아는 싱긋 화사한 미소로 답했다.

이거 참. 민망하달까.

"넵. 화성님도 어서 열어봐요!"

상자를 열며 다짐했다.

레아에게 악과를 많이 먹여서 반드시 강해지게 만들어주겠다고.

"찬란한 카타콤의 보상 상자를 개봉합니다."

"신의 축복이 깃든 물건입니다."

"당신에게까지 축복이 번집니다."

놀라울 정도로 화려한 빛이 번쩍였다. 어둑어둑해진 기부도를 환하게 비출 강렬한 빛이었다.

그리고 나온 물건은 바로.

[쌍성의 거울] (???)

-한 쌍이 되는 별의 거울.

"?"

손에 잡힌 것은 작은 손거울.

매우 고급스럽고 오묘한 흑진주와 같은 빛이 나는 거울이었다.

동그란 원형의 거울은 반쯤 균열이 생겨 있었는데 그걸 감안하서라도 심상치 않은 힘이 담겨 있어 보였다.

"헉! 추, 축하해요!!"

"응, 고마운데..."

축하받을 물건은 맞겠지?

아이템의 등급이 물음표인 건 또 처음이다.

애초에 이거, 어떻게 쓰는 거지?

딱히 설명이 나와 있지 않다.

잠시 살펴보고 사용해보려 했으나 딱히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아니, 뭐야. 이거 어떻게 쓰는 거야. 아니 설명을 똑바로 적어야 할 거 아냐! 일 안 하냐?"

왠지 모르게 하늘을 보고 화냈지만, 딱히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쌍성, 쌍성은. 아마 쌍둥이의 성운을 말하는 걸까요?"

"성운? 쌍둥이자리인지 게 자리인지 하는 그런 거 말이야?"

"네. 쌍성은... 서로 대칭되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 대칭되는 물건을 어떻게 해주는 거 아닐까요?"

"대칭?"

대칭.

대칭이란 간단하게는 같은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똑같이 대칭이 되는 것.

그건 당연히 씨앗이다.

데몬시드.

일만 개가 넘고 있는 해골기사의 씨앗은 물론이요, 카타콤을 빠져나오면서 추종자들을 씨앗으로 만든지 이미 오래다.

[검은 산양의 추종자 씨앗]

추종자 씨앗 두개를 아무 생각 없이 꺼내서 손바닥에 놓자.

돌연 거울이 빛났다.

"오오! 거, 거울이 빛나요!"

"워! 워워! 뭐야!"

불을 처음 발견한 원시인들처럼 놀라며 씨앗 두개를 거울 앞에 놓자.

거울은 씨앗을 비추며 은은한 흑빛을 뿌렸고 이내 두개의 씨앗이 서로 하나가 되어 합쳐졌다.

"어?"

[검은 산양의 추종자 씨앗+2]

씨앗이 합체해 버렸다.

"뭐야 이거... 대박!!"

씨앗 두개가 하나로 합체.

마치 강화시킨 것처럼+2 표시까지 붙어버렸다. 뉘우치는 망치로 씨앗까지 강화시킬 수는 없었다.

씨앗은 무구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여기까지라면 대박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거다.

씨앗을 강화해봤자 뭐가 되는데? 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짜 대박인 이유는 여기.

[성장기간: 68일]

본래 추종자의 성장기간은 68일.

그런데 합성되어 +2 됐음에도 성장기간은 그대로였다.

예상대로라면 과실을 먹었을 때 그 효과는 두배가 되겠지만 성장기간은 그대로가 된 엄청난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미친..."

물론 챔피언 등급의 데몬시드로는 사용할 수 없다. 그들은 대칭이 되는 존재가 아니니까.

하지만 일반적으로 수가 많은 악마라면 무한적으로 씨앗 자체를 강화시킬 수 있는 거다.

첫째로는 수확.

수확한 악마의 열매가 지닌 효과를 강화하는 게 가능하다.

둘째로는 씨앗 그 자체의 강화.

그러니까.

"씨드라도 강해지는 건가?"

추측일 뿐이지만 가능성은 다분하다. 씨드라는 애초에 씨앗이 지닌 잠재력에 따라 힘이 나뉘는 놈이니까.

이것만으로도 이 거울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 고유 능력은 데몬시드.

앞으로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얻게 될 스킬들은 씨앗과 관련된 것들이 많을 터.

그런 걸 생각해봤을 때 쌍성의 거울은 날 무한하게 강화시켜줄 지고의 아이템인 것이다.

"게임으로 따지면 거의 유일 등급의 아이템이 아닐까? 이런 게 하나 더 있으면 밸런스 좆망인데 진짜."

"그, 그런가요?"

"아니, 모르겠어?"

"글쎄요... 대칭이 되는 물건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아서 저는 잘 모르겠어요."

"... 아, 그런가."

생각해보니 대칭이 되는 물건이 그렇게 많지 않다.

찍어내는 장비나 물건들이라면 몰라도 희귀하고 강한 힘을 지닌 것들은 대개 두개, 세개나 존재하진 않는 법이니 말이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지도 않는다.

꽤 많이 지닌 해골기사의 창도 조금이라도 흠이 있거나 하는 것들은 거울이 반응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같은 상태에 해당하는 창만 합성 되고는 했다.

생각해보니 이건.

"나 한정으로 개사기 아이템인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뉘우치는 대장간 [1]

3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