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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바다를 얼린다.

어찌보면 바보 같은 생각이다.

달의 존재로 인해 바다는 한시도 고요하지 않고 움직인다.

염분을 가진건 얼지 않는다는 상식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 바다.

그러니 바다를 얼리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것도. 배타고 5분은 달려야 할 섬까지의 바다를 얼리는 걸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마법이면 모르지."

바다를 얼릴 수 없다.

그건 이제까지 인류가 가지고 있던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다.

그럼 마법이라면?

초현실적인 무언가의 영향이라면 바다를 얼릴 수 있지 않을까?

시도해볼만 하다.

[나만의 상점]

-4일 21시간 52분 남음

[부드러운 빵x10] - 1금화

[포탈 스크롤] - 20금화

[미네트의 로브] - 731금화 (품절)

[블리자드 스킬북] - 2222금화 (품절)

"구매."

[미네트의 로브를 구매하셨습니다. 731금화가 소모됩니다.]

[블리자드 스킬북을 구매하셨습니다. 2222금화가 소모됩니다.]

[합계 2953 금화를 소모합니다.]

[소지금 3997 금화]

「미네트의 로브」

-메아리치는 마녀, 자신의 어린 제자를 위해 부유마법 플라이의 마법각인을 새겨 놓은 로브다.

『플라이』 (1일 3회 회당 5분)

하늘을 날 수 있는 플라이 마법이 각인되어 있는 미네트의 로브.

731 금화라 굉장히 비싼편에 속하는 매직 아이템이다.

하지만 살 수밖에 없다.

하늘을 날 수 있게 해주는 마법.

'플라이를 쓰게 해준다는 데 이걸 안 사고 베겨?'

인간은 언제나 하늘을 지배하기를 욕망했다.

덕분에 쇳덩어리가 하늘을 활공하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하늘을 욕망한다. 허구헌날 자유로운 새가 되어 훨훨 날고싶다하는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많다.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플라이.

부유 마법, 플라이였다.

'플라이랑 블리자드.'

이거라면 모른다.

바다만 얼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

블리자드로 바다를 얼릴 수 있다해도 과연 바다 속까지 얼릴까?

난 아니라고 본다.

"서펜트라고 했던가."

우연히 놈의 이름을 봤다.

바다 속에 잠들어 있는 용과 흡사하게 생긴 악마.

서펜트.

우연히 무인도까지 도망쳐 오던 범고래를 한입에 삼킨 괴물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 거대한 범고래가 수면 위로 튀어오르길래 진짜 크구나 했는데, 그거보다 더 큰놈이 범고래를 한입에 삼켜버리는 광경이란 직접 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충격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함선크기였지."

그런 놈들이 언제 어디서 튀어 나올지 모르는 게 지금의 서해다.

서펜트만 있는 게 아니다.

무슨 이상한 해파리랑 거대 문어도 본적 있다.

"차지볼트로 물고기 잡다가 문어 다리가 날아와서 죽을 뻔 했지..."

고작 일주일 전 쯤이다.

"바다엔 뱀장어. 하늘에는 갈매기."

하늘을 날아다니는 검은 그림자.

거대 독수리였다.

진짜 이름은 [데몬이글] 하지만 내가 무서워하는 건 이놈이 아니다.

데몬이글은 그램한테도 처맞고 쫓겨나는 놈들이다.

진짜 무서운건.

[와이번]

콰직!

데몬이글을 주식으로 씹어먹는 창공의 왕자. 와이번이었다.

거대한 몸체.

팔 대신 돋아난 박쥐의 날개.

날카로운 발톱과 억쎈 꼬리.

무엇이든 찢는 이빨.

"와이번은 아직 힘들어."

플라이 마법이 있으니 와이번이랑 싸워서 이기면 될지 않을까싶기도 하다. 한마리 쯤이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니까.

다만 문제는.

"와이번이 한마리가 아니라 떼 지어 다니는 게 문제지만."

한마리가 있으면 반드시 두마리. 세마리가 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와이번은 결코 혼자 다니지 않았다.

덕분에 난 물리적으로 무인도를 탈출하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하늘엔 와이번 떼, 바다엔 서펜트 떼가 도사리는데 탈출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웬만하면 가만히 무인도에서 과수원 농사나 지으면서 사는 게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지."

첫째로 무인도엔 더이상 날 위협할 악마가 없다.

이는 성장의 정체를 뜻한다.

성장의 정체는 곧 도태이다.

악마들이 드글거리는 세상에서 도태는 곧 죽음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한달 뒤..."

카오스 게이트는 다시 열린다.

시스템은 말했다.

한달 뒤, 더 강력한 적들이 나타나 차원석을 노릴 거라고.

난 이를 대비해야만 했다.

앞서 보았던 한국 네피림들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약하다.

내가 강해지지 않으면 다음번 카오스가 위험하다.

'정부에서도 그랬지.'

거래소에 1금으로 올라온 구호품.

[정부가 주는 구호품] - 1금

판매자: 청와대

거기엔 식량 조금과 간단한 옷가지와 물품들이 들어 있었는데, 악마들의 약점과 습성을 간략히 적어둔 공략집과 해외 소식들이 적혀 있었다.

[72개국 중 카오스 공략에 성공한 나라는 54개국. 나머지 18개국은 대악마의 침공으로 소멸.]

이 소식은 커뮤니티를 들썩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렴풋이 그렇지 않을까 했다.

다만 생각만 했던 것과 직접 벌어진 일을 보는 건 실감하기가 달랐을 뿐.

"기프트와 시스템은 인류에게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는거야. 작은 힘을 보탤테니까 악마들을 물리치라고."

신의 선물이라는 기프트.

그리고 짬뽕 게임 시스템.

이 모든 것들이 악마들을 처치하라는 신의 뜻인 것이다.

"악마들 짬처리 맡은 게 아닌가 싶긴한데... 뭐 해야지."

짬 당한 거 같긴하지만 어쩌랴.

죽기 싫으면 해야지.

그러니 내가 무인도를 탈출하려는 건 하나의 일환인거다.

그럼 다시 무인도 탈출로 돌아와서.

"바다가 얼어도 서펜트들도 얼지는 않겠지만 얼추 놈들 눈이나 감각을 가리는 정도는 되지 않을까."

와이번들이 창공의 왕자라지만 바다 상공 3미터쯤을 날면 눈치 못챈다.

하여 내 작전은 이렇다.

'우선 바다를 얼린다.'

얼린 바다 위를 뛰면 놈들이 눈치 챌테니 플라이를 써서 그 위를 전속력으로 날아간다.

"이러면 소리 안나고 시야도 가려져서 서펜트들도 모를거고, 와이번 놈들도 굳이 바다 근처까지 내려오지는 않을테니까 만사 해결이야."

와이번도 서펜트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지 바다 근처로 까지 내려오지는 않는다.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느낌.

"이게 성립되려면 일단 블리자드로 바다를 얼릴 정도는 되야하겠지."

난 곧장 블리자드 스킬북을 펼쳤다.

『블리자드』 (uniqe)

-일대를 모조리 얼려버릴 강렬한 눈보라를 내린다. (소모값: 80)

선행스킬 - [레인스톰]

레인스톰과 함께 사용시 블리자드의 효과 50% 증가.

냉기 속성 마법 보유시 블리자드의 범위와 냉기 피해 10%씩 증가.

다행스럽게도 레인스톰을 배워서 블리자드도 익힐 수 있었다.

소모량이 크지만 그렇다해도 블리자드는 내게 큰 도움이 될 마법.

배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블리자드를 배우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스.

촤라라락!

수락하자마자 스킬북이 제멋대로 펼쳐지며 미증유의 마력이 피어 올랐다. 펄쳐지는 스킬북에서 알 수 없는 룬 문자들이 떠오른다.

두둥실 떠오른 룬문자.

그것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주위를 떠돌며 검사하듯 이곳저곳을 만져보고 건들더니 순식간에 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크윽!!"

알고는 있었다.

레인스톰을 배울 때도 이정도의 통증을 겪었으니까.

하지만 블리자드는 훨씬 고등 마법이라 예상했던 것보다 배는 더 고통스러웠다.

블리자드의 술식.

그것에 따른 수학적 지식과 마법적 지식들이 동시에 머릿속의 뇌를 태우며 각인되는 것 같았다.

꽈드득!

"크흡! 크으아아악!"

참지 못했다.

너무도 고통스럽다.

고통을 참지 못했다. 나이 서른넷 먹고 비명을 지를 정도로 말이다.

송곳 수십개로 뇌를 찌르고 제멋대로 휘젓는 느낌은 무엇이라 할까.

제대로 표현하기 조차 힘든 종류의 통증에 할 수만 있다면 도끼로 내 머리를 내려쳐 고통을 끝내고 싶을 정도였다. 근처에 있는 돌을 들어 올렸다 겨우겨우 놓았다.

그때였다.

후우웅-!

사뭇 다른 풍경이 보였다.

"아."

그건 눈보라였다.

작은 마을을 뒤덮은 눈보라.

그 눈보라 속을 거니는 자가 있다.

지붕까지 쌓인 눈 위를 맨말로 거니며 그 위에서 홀로 춤춘다.

아무도 없는 허공에 손을 올리고, 마치 합이 잘 맞는 왈츠를 추듯 흡족한 미소를 그리며 말이다.

"미친... 년인가?"

순간 홱! 꺾인 목으로 날 꿰뚫듯 바라보는 푸른 머리의 여자.

그 여자는 날 똑똑히 바라보고 무어라 말했다.

[...음은..... 뜨겁.... 곧..... 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눈보라 때문에 말이 끊긴다.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하려는 찰나.

화아아아악-!

눈보라 풍경 속에서 튕겨나갔다.

"크헉! 하아, 하아... 후우..."

[블리자드를 배우셨습니다.]

[지식의 증가로 마력이 +1 상승합니다.]

[냉기 속성 마법을 배워 냉기 저항력이 영구적으로 5% 상승합니다.]

방금.

"방금... 뭐지?"

푸른 머리의 여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위화감만이 가득한 여자였다.

"인간이... 아니었나?"

생김새는 인간과 비슷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저히 '그것'을 인간이라고 느낄 수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스킬을 배우면서 누군가의 환상을 본 건 처음이었다.

뭐랄까 섬뜩하고 소름끼치면서도 자꾸 그 여자한테 손을 뻗는 느낌.

손을 뻗어야만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소름끼쳐. 어우."

머리가 아픈건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아프다고 바닥을 기었던 게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슨 일이에요!!"

"아이 깜짝이야!"

"괘, 괜찮아요? 놀랐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큰 소리가 들렸어요! 헉! 식은땀 좀 봐! 악몽이라도 꿨어요?"

"아, 아니 괜찮아. 별 거 아니야."

레아는 자기 윗옷을 잡아 당겨서 내 땀을 닦아줬다.

덕분에 새하얀 배가 훤히 보였다.

"그, 그만해."

"어디 아픈건 아니죠?"

"아니야. 스킬 배우느라 잠깐 아파서 그랬던거니까."

"스킬?"

"블리자드를 배웠거든."

"아... 그렇죠. 네피림은 그런 분들이라고 알고 있어요. 아! 저도 네피림이니까 저도 배울 수 있겠네요!"

그러고보니 레아도 카오스에서 레벨이 올랐으니 나마의 상점을 한번 확인해볼 때가 됐다.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상점 나도 볼 수 있을까."

"넵!"

[나만의 상점]

-4일 21시간 22분 남음

[부드러운 빵x10] - 1금화

[붉은 성수x10] - 20금화

[미확인 지팡이] - 125금화

[미확인 검] - 432금화

[미확인 스킬북] - 1156금화

"헉! 미확인 장비 밖에 없어요! 어떡하죠? 이러면 어떤 장비인지 알수가 없는데... 어차피 돈도 없지만요."

미확인 장비들.

왜인지 모르겠지만 레아의 상점은 미확인들로 가득찼다.

'대개 이런건 뽑기 수준인데.'

감정했는데 대박이 나올 수도 있고, 쓰레기가 나올수도 있다.

모든 건 정말 운.

'옛날에 이런거 몇번 샀다가 돈 다 날리고 똥템들만 얻었지.'

하지만 만약, 이것들이 적혀진 금화 이상의 가치를 지닌 장비들이라면?

이 장비들 가운데, 무인도 탈출을 도울 수 있는 거라도 나온다면?

일말의 가능성.

놓칠 수 없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서 뽑기 이벤트를 놓칠 순 없지."

내게는 돈도 감정 스크롤도 있다.

레벨 순위 1위. 2위를 해버린 탓에 5개를 쓰고도 3개가 남았다.

'운명인가.'

세상의 흐름이 내게 뽑기를 권하고 있다. 사내로 태어나 뽑기 앞에서 거리낄 것 있는가? 일단 지른다.

생각은 그 다음이었다.

"레아, 돈 줄테니까 몽땅 사!"

"네? 모, 몽땅이요!?"

"얼른!!"

"네, 네!!"

[미확인 지팡이를 구매하셨습니다.]

[미확인 검을 구매하셨습니다.]

[미확인 스킬북을 구매하셨습니다.]

[-1713 금화를 지불합니다.]

[소지금 2284 금화]

거지가 됐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뽑기 간다! 레아도 따라해!"

"가, 간다아!!"

[감정 스크롤x3 을 사용합니다.]

[미확인 지팡이의 숨겨진 이름이 드러납니다.]

[미확인 검의 숨겨진 이름이 드러납니다.]

[미확인 스킬북의 숨겨진 이름이 드러납니다.]

작은 빛무리와 함께.

뽑기의 실체가 드러났다.

미확인 아이템 [2]

22화.

[야칸의 숲 지팡이] (매직)

-야칸의 숲 바위에 끼어져 있던 지팡이. 어디서 누구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은유한 마력과 메모라이즈 마법이 각인되어 있다.

〈마력 +3〉

〈메모라이즈 (2)〉

[리켈란의 검] (매직)

-고위 성기사 리켈란이 애용한 양날검. 약간의 신성력을 지니고 있다.

〈최하급 신성력 +1〉

[리버슬로우 - 스킬북] (유니크)

-대상의 흐름을 늦춰 느리게 한다.

(소모값: 5)

"오! 오오? 오오오..."

내 음성이 점차 낮아졌다. 두근두근 기대했던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

"... 어... 화성님?"

남자는 때론 속으로 운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남자는 가슴으로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

지금의 내가 그랬다.

'하... 이래서 도박은 안되는건데.'

사람은 하면 안된다는 걸 알아도 도전하고는 한다.

혹자는 그것을 용기라 부르며 패기라 치장하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지능의 모자람이었다.

"내 돈....."

무려 천칠백십삼 금화를 날렸다.

1713 금!

그 돈이면 반년 내내 거래소를 뒤지며 쇼핑해도 한참 남을 돈이었는데.

"... 어쩔 수 없지."

손해를 본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지만 이득이 없는 건 아니다.

[야칸의 숲 지팡이] (매직)

매직 아이템으로서 내게 필요한 지팡이 장비다.

마력이 무려 +3이 붙어 있고 메모라이즈 마법이 각인되어 있었다.

[메모라이즈]

-마법을 저장할 수 있다 (2)

최대 2개까지 마법을 미리 넣어 저장할 수 있는 마법.

가지고 있는 마법에 비해 마나통이 언제나 부족한 내게는 꼭 필요한 마법이라고 할 수 있다.

"메모라이즈는 좋아."

마나소모가 큰 블리자드나 레인스톰을 미리 저장해놓고 전투시에는 마나소모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내겐 꼭 필요한 지팡이다.

내 전투 능력은 잡캐라고 부를 정도로 이상하지만 그래도 자주 쓰는 건 역시 마법이다.

근접 전투를 선호하는 편도 아니다.

하여 마법용 장비 하나쯤은 갖고 싶었고, 125금으로 이만한 장비를 얻은거라면 손해보단 이득이다.

다음은 [리켈란의 검]

400금이나 할 정도인가? 라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지만 흔치 않은 최하급 신성력이 부여되어 있다.

신성력의 희소성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측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최하급이라도 신성력의 유무는 확실히 크다고 본다.

'빛무리 성수가 하급 신성력이었지.'

10분 효과에 100금이나 하는 거금의 버프. 그 정도의 위력을 자체적으로 지닌 검이라면 생각보다 훌륭한 무기일지 모르겠다.

신성력이란 건 결국, 악마 종류의 적들에게 모두 치명적인 기운.

물론, 내게는 썩 필요치 않았지만.

"이건 레아가 갖자."

"네? 이, 이걸요? 하지만 무려 400 금화나 하는 거금인데..."

"괜찮아. 난 창이 있으니까."

검을 쓰는 레아이기에 나만의 상점에 나올 수 있었던 검이다.

애초에 난 검을 쓰지도 않는다.

쓰지 않는다면 내가 갖기 보다는 레아에게 주는 게 낫다.

그녀 또한 내 전력이고, 그녀가 없었다면 사지도 못했을 것들이니.

"소, 소중하게 쓸게요!!"

"그래."

그리고 마지막.

무려 거금 천금이 넘는 스킬북.

[리버슬로우 - 스킬북] (유니크)

"하아..."

보자마자 한숨만 나왔다.

무려 천금이나 천금.

레인스톰을 샀을 때와 비슷한 가격.

근데 나온건 고작 슬로우라니.

'물론 직접 전투시에 슬로우 디버프는 훌륭한 마법이지만...'

그동안 얻었던 게 너무 넘사급으로 좋은 게 나와서일까. 아니면 기대가 커서였을까.

영 마뜩찮았다.

"근데 이거 왜 등급이 유니크지."

고개를 갸웃하게 될 등급이다.

내가 지니고 있는 유니크 장비는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 하나 뿐.

적창의 효과를 보면 유니크라는 등급이 절로 이해가는 효과를 지녔다.

근데 고작 슬로우가 유니크라...

"이건 내가 가질게."

"물론이죠! 화성님이 없었으면 뭔지 알지도 못했을텐데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걸 보아하니, 내가 실망한 낯이라 괜히 눈치보고 있는 듯 했다.

"근데 어떤 스킬인지 물어도 될까요?"

"리버 슬로우라는건데... 알아?"

"아뇨, 처음 들어봐요. 리버 슬로우... 흐름을 늦추는 건가요?"

"그렇지. 적들을 느리게 만들어줄 뿐인 마법인데 왜 유니크인지..."

이해가 안된다.

"적들이요?"

"응."

"아아! 그렇구나. 적을 느리게 할 수도 있구나. 몰랐어요."

"... 그럼 뭘 느리게 하는데?"

"저는 흐름이라고 해서 강이나 바다를 떠올렸어요. 아니면 피?"

".....!"

흐름.

흐름이란 시간을 뜻하기도 하고, 물이나 생물의 체액을 말하기도 한다.

뒤통수를 쎄게 때려맞은 느낌이다.

레아는 피와 관련된 기프트를 가져서인지 혈액순환하는 피의 흐름을 떠올린 듯 하지만 난 달랐다.

"시간, 바다, 흐름..."

많은 게 떠올랐다.

게임에서 슬로우가 가진 가치가 대부분 낮게 평가되서일까.

나도 모르게 슬로우 자체의 가치 평가를 낮게만 잡았다.

하지만 이거 생각해보니.

"쓰기에 따라서는..."

유니크급 스킬답게 설명 자체도 단조롭기 그지 없다.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어찌 쓰기는 사용자에 따라 다르다는 것.

응용법 또한 무궁무진하다는 뜻.

"고마워. 뭔가 깨달은 거 같다."

"헉! 아, 넵! 화이팅이에요!"

[리버슬로우를 배우시겠습니까?]

곧장 배우려 했으나 머뭇거렸다.

방금 전 블리자드를 배워놓고 죽을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었다.

유니크급의 스킬북.

이 또한 배우기 위해선 머릿속에 억지로 쑤셔넣는 지식의 통증을 견뎌야할지 몰랐다.

"레아, 혹시 내가 아프다고 내 머릴 돌로 찍으려고하면 막아줘."

"헉!! 아, 알겠어요!! 화성님 머리는 제가 꼭 지킬게요!"

"고마워."

배운다.

촤라락!

스킬북이 열리고 블리자드 때와 같은 룬문자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굼뜨지 않았다.

곧장 내 이마로 쑤셔지는 지식의 해일이 날 덮쳤다.

[리버슬로우를 배우셨습니다.]

[흐름의 미학을 깨우쳤습니다.]

[마력이 +1 상승합니다.]

"어, 안 아프네."

블리자드의 영향인가?

전혀 아프지 않았다.

"머리 깨면 안돼!!"

와락!

레아가 안겨들었다.

[피의 축복이 내려집니다.]

[생명력 회복과 건강이 증가합니다.]

내가 머리 긁적이는 걸, 부수려는 줄 알았던걸까. 와락 안겨서는 날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윽, 레아. 나 괜찮아."

"정말요? 놓아도 골통을 부수진 않으실거죠?"

"응..."

골통이라니... 꼴통이라고 하는 줄 알고 흠칫했다.

학창시절에 자주 듣던 말이라 그만.

"다행이에요."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놓으라니까?"

근데 왜 안 놓지?

"화성님의 피는 맑고 깨끗하네요."

"갑자기?"

"예전부터 그렇게 느꼈어요. 이런 피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 자신한테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 그, 그래?"

그랬던가? 애초에 자기 자신한테 거짓말하는 사람이 있나?

"네. 좋은 피에요..."

"알았으니까 놔줄래."

피, 피거리니까 뭔가 섬뜩하다.

억지로 떼어놓자 그제서야 머쓱하게 웃는다.

"근데... 스킬 새로 익혔어?"

"아, 넵. 기프트 레벨이 올라서 피의 축복이 강화됐어요."

"응, 그런 거 같았어."

본래는 치유 효과만 있었는데 이제는 버프 효과도 추가됐다.

5분동안 건강이 +5나 올라갔으니 제법 높은 수치이지 않은가.

『이화성』

「데몬시드 3레벨」

「카탈린의 감전 2레벨」

「생명력」 – 320/320 ▶320/420

「마나」 - 260/380

「능력치」

근력 – 17 (+7)

민첩 – 14 (+2)

건강 – 21 (+7) "+5"-(4:58)

마력 - 19 (+3)

강골 - 1

「세부 능력치」

명중률 +2 시야 +2 방어력 +40 마나재생 +5 번개내성 10%

「스킬」

[워터볼] [투척] [돌진] [레인스톰] [블리자드] [리버슬로우]

「장비 스킬」

[차지볼트(2)] [에너지쉴드(1)] [피조물의 영광(1)] [플라이(3)]

블리자드랑 리버슬로우 덕분에 마력이 +2나 영구적으로 상승했다.

게다가 야칸의 숲 지팡이 덕에 +3을 채우니 마력이 자그마치 19.

19나 되는 마력을 갖게 됐다.

그리고 [리버슬로우]를 배우니 알겠다. 이게 왜 유니크 급의 스킬인지.

스킬북을 배우면 직접적으로 지식이 머릿속에 새겨진다.

덕분에 이 마법의 해박한 지식이 생기는데 [블리자드]도 [리버슬로우]도 어떻게 써야 할지 제법 감이 잡혔다.

"워터볼."

내가 제일 처음 배운 마법.

워터볼.

기본적으로 대기중의 수분을 모아 응집 시키고 발사하는 초급 마법.

내 마력이 증가함에 따라 위력 또한 많이 강해졌지만 그래봤자 초보적인 마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생성하고 모으고 발사하는건 자유자재지만 중복적으로 한번에 두개 세개를 만들어내진 못한다.

그러나.

"어, 물이 많아졌어요!"

"응."

리버슬로우.

흐름을 느리게 한다.

그것은 살아있는 대상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

그렇다.

난 리버슬로우로 워터볼의 흐름을 느리게 만들었다.

'워터볼과 리버슬로우.'

워터볼의 마나소모가 5.

리버슬로우도 5. 도합 10.

380이나 되는 내 마나가 감당하기엔 충분한 소모값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도 가능하다.

"와..."

내 주변엔 워터볼이 가득했다.

떠오른 주먹 크기의 물방울.

본래 응집되고 발사되어야 하는 스킬을 정지 수준으로 느리게 만들었다. 살아있는 걸 억제 한 게 아니라 내 의지로 만든 마법을 느리게 하는 수준이라 어렵지 않았다.

마나를 더 잡아먹히지도 않았고 주변에 떠오른 스무개의 물방울.

이걸 일제히 발사한다면 어찌될까.

보스급 악마라도 꽤 유효한 타격을 입게 될거다.

거기에 더해.

"페스틱사드."

투명한 워터볼이 녹빛으로 물든다.

보기만해도 가까이하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워터볼에 독의 중첩.

이런식의 연계 또한 가능하다.

워터볼의 물리적인 연쇄 타격과 독의 중첩 또한 가능한 공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좋아."

페스틱사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성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틈날 때마다 이것저것을 녹여 넣고 있기 때문에 웬만한 적들은 이 독에 노출되면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게 될 것이다.

'독이라기보단 농약이지만.'

적들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긴하다.

어쨌든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마법, 리버 슬로우.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다양한 활용법이 나올 수 있는 좋은 마법이다.

"지팡이에 레인스톰 하나 쓰고."

[메모라이즈에 레인스톰을 저장하셨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마나가 없으니 내일이나 블리자드를 저장하고 충분히 휴식한 뒤에 바다를 건너면 될 것이다.

"좋아."

훌륭하다.

이거라면 된다.

리버슬로우는 생각보다 고등 마법.

이거라면 서펜트나 와이번이 와도 어찌저찌 해낼 수 있다.

만반의 준비를 거친다면 3일 뒤.

3일 뒤, 기부도로 출발이다.

기부도 [1]

23화.

무인도에서 13일째.

"화성님, 이거 봐요."

레아는 내가 사둔 냄비들로 요리를 해주겠다고 하더니 오디를 끓여 잼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상점에서 빵을 사서 잼을 발라 나에게 건넸다.

고농도로 압축된 오디 잼.

빵까지 잘라 구워서 먹으니.

바삭.

소리와 함께 오디의 단맛이 증폭된 잼 맛이 빵과 어우러져 입속에 퍼졌다. 가벼운 한 끼 식사로도 잘 어울리는 오디 잼과 상점 빵의 조화.

"오..."

과일로만 배 채우고 있었던 내게 빵과 잼의 조화는 아주 훌륭한 미각의 자극이었다.

[해골 기사의 열매를 섭취하셨습니다.]

[강골 0.015가 상승했습니다.]

압축된 오디는 잼으로 발라 먹으니 더욱 쉽고 편하게 상승치로 돌아오기도 했다.

레아가 만든 잼으로 빵을 몇 개 먹으니 강골 수치가 올랐다.

[강골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강골 - 1 ▶ 2

꽈악.

말아쥔 주먹으로 확인해봤지만, 솔직히 뼈가 강인해진 건 어떤 느낌인지 확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상태창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분명 뼈의 밀도가 강화됐겠지.

말인즉슨 뼈가 부러질 위험이 적어졌다는 거고 이는 악마들이 득실거리는 아포칼립스에서 생존으로 직결되는 중요한 사항이다.

"이제 물리네 어우."

10일에서 3일이 더 지난 13일.

그간 나는 악과를 꾸준히 먹으며 스펙업을 해왔다. 그 스펙업의 변화는 보이는 바와 같다.

「능력치」

근력 – 17 (+7) ▶ 19

민첩 – 14 (+2) ▶ 15

건강 – 16 (+7) ▶ 18

마력 - 19 (+3)

강골 - 1 ▶ 2

골고루 먹는다고 했지만, 역시 생존과 직결된 건강과 근력을 더 집중적으로 올렸다.

덕분에 100개가 넘었던 대전사와 사냥꾼 그렘린 열매는 거의 바닥을 드러냈고, 건강을 올려주는 고블린 열매도 마찬가지.

남은 건 일반 그렘린과 해골 기사 열매들 뿐이었다. 슬슬 만들어둔 악과들의 재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해골 기사의 열매.

악마의 오디라 명명한 오디야 그 수량이 아직도 천 개가량 남아 있었지만 남은 것도 대부분 레아가 잼으로 만들려고 했기에 큰 의미는 없었다.

'마력을 올릴 수 있었다면 그랬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어. 카오스 상점에서 엘릭서를 구매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만...'

마력의 엘릭서 하나에 금화 3000개.

거기에 소모하기엔 효율이 너무 아쉽다.

[마력의 엘릭서]

-마력 +3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엘릭서일지도 모른다. 3천개로 마력을 깨닫고 레벨업 할 때마다 능력치 투자로 마력을 키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데몬시드가 있는 내겐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내게 남은 금화도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소지금 2284 금화]

이제는 2천 금화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에 아껴 쓸 필요가 있다.

[나만의 상점]

-0일 23시간 12분 남음

[부드러운 빵x10] - 1금화 (품절)

[포탈 스크롤] - 20금화 (품절)

[미네트의 로브] - 731금화 (품절)

[블리자드 스킬북] - 2222금화 (품절)

다음 상점에서 뭐가 나올지도 모르니 돈은 이제 아낄 차례다.

물론, 내가 무인도를 나가 기부도로 가려는 이유의 하나도 금화이다.

하루 뒤면 상점이 갱신된다.

그때 만약, 사고 싶은 아이템이나 스킬북이 있는대도 돈이 없어 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기부도로 가 악마들을 때려잡아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3일.

스펙업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야칸의 숲 지팡이에 저장할 수 있는 마법도 전부 저장한 상태.

미네트의 로브에 걸려 있는 부유 마법. 플라이의 시험도 대충 적용해 봤다. 그램과 함께 무인도 주변을 날며 [데몬이글] 한마리를 잡아보기도 했다. 놈의 씨앗을 얻기는 했지만.

[데몬이글의 씨앗]

성장기간: 19일.

성장기간이 19일이었고 제물이 없는 지금은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작물이었다.

게다가 데몬이글 자체도 그렇게 강한 악마는 아니었으니 뭐가 나올지 기대가 되지도 않았다.

"성장기간이 짧으니까."

현재 성장 기간이 제일 길게 나와 있는 건 단연 그렘린이다.

그러니 그보다 낮은 작물들은 그렘린보다 효과가 낮다고 봐야 한다.

'마력이나 다른 추가 능력치를 개화할 수 있는 게 아니고서는...'

키울 필요가 없다.

내가 무인도에서만 안주할 생각이었다면 키웠겠지만 난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유가 있다.

하지만 하루 전, 내 마음을 더욱 견고히 할 사건이 발생했다.

[레벨 랭킹]

- 1일 15시간 54분 남음.

- 11일 23시간 12분 남음.

[1위 데몬시드 - 레벨 3]

[2위 카탈린의 감전 - 레벨 2] (강등 임박) ▼

[3위 강철군주 - 레벨 2] (승격 임박) ▲

[4위 아마존 - 레벨 2]

[5위 네크로맨서 - 레벨 2]

강철 군주.

은색 갑옷을 입고, 검을 기사들로 만들어 싸우던 놈이 내 랭킹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동안 경험치가 거의 동결이었지.'

카오스 이후.

데몬시드와 카탈린의 감전의 경험치는 거의 오르지 못했다.

무인도엔 더 이상 악마가 없다.

근절했다시피 씨를 말려버렸기 때문이었다.

혹시 고블린이나 좀비들의 숨겨진 던전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했지만, 무인도에는 없었다.

'내가 못 찾는 거일 수도 있고.'

그러니 가야만 한다.

레벨 랭킹의 보상이야 감정 스크롤과 금화 100개 정도가 다라지만 그걸 굳이 뺏기고 싶지 않았다.

욕심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누렸던 걸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기분은 썩 불편했다.

이 불편함은 커뮤니티도 한몫했다.

[카탈린의 감전 곧 따잇?!]

[강철군주! 강철군주! 강철군주!]

[군주님! 뇌창은 됐으니까 데몬시드 저 새끼도 따주세요!!]

[강철군주 렙업하고 말 타고 다니더니 폭업하네 ㄹㅇ]

이런 식이었다.

대충 커뮤니티를 훑어보니.

"스킬 하나 배웠나 보네."

강철군주가 렙업 이후, 강철마라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일대를 휩쓸며 악마 토벌에 나선다는 이야기였다.

[성남의 자랑! 강철군주를 의회로!]

[강철군주 투구 벗은 거 본사람? 보고 놀라지마라 심장 멎을 수도 있다.]

[강철군주 실물짤 올림.jpg]

-형님들 사과 박겠습니다. 사실 여기 던전 찾았는데 쫄려서 갈 수가 없습니다. 좀 도와주십쇼! 남한산성 쪽임돠!

┗강철군주 짤 주면 도와줌

[이러다 강철군주가 지역 다 먹는 거 아님?]

[응 어림없어~ 여의도는 아마존이 꽉 잡고 있음 ㅅㄱ]

[아마존도 쎄더라. 무슨 화살이 폭발하던데? 그거 뭐임?]

┗화살에 수류탄 단거임

┗ㄹㅇ? 그걸 어케함?

┗그걸 속네 ㅂㅅ

강철군주와 아마존 뿐만이 아니다.

커뮤니티를 살펴보면 랭커들의 활약상이 한번씩 떠오른다.

그런 와중에도 데몬시드와 카탈린의 감전은 대체 어디에 있느냐로 한번씩 떠들어대니 가만있을 수 없다.

"따잇 당할 수는 없지."

이는 자존심 문제다. 한번 내려놓으면 죽기 직전까지 내려놓게 된다.

결혼 생활도, 직장 생활도 그랬다.

이전에는 몰라도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지금의 난.

힘없는 빚쟁이가 아니니까.

"그램, 과수원 잘 지키고 있어라."

[캬캭!]

"그램! 다녀올게요!"

[캭!]

[야칸의 숲 지팡이에 내장된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레인스톰(1)] [블리자드(1)]

"예스."

[레인스톰을 사용합니다.]

쿠구구궁-!

먹구름이 몰려온다.

하늘을 까맣게 뒤덮은 먹구름은 이내 물줄기를 뱉는다.

툭, 투둑.

떨어지는 빗방울은 점차 강해지고 세기는 더욱 따갑게 변한다.

이슬비에 한했던 것이 소나기로 변하고 소나기는 폭풍우로 변한다.

그 상태에서.

[블리자드를 사용합니다.]

지팡이에 내장된 블리자드를 시전.

쾅-! 콰앙-!

내리던 빗줄기는 우박으로 변하고, 한없이 차가운 냉기는 바닷물을 점차 새하얗게 얼리기 시작한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곳.

한없이 출렁이기만 했던 바다.

서해 한복판이 모조리 얼어붙었다.

"레아."

"넵!"

레아를 안아 들고.

[플라이]

두둥실 떠오르는 몸으로 단숨에 바다로 비행했다.

후우웅-!

지금의 내 신체 능력으로는 플라이로 날아가는 거보다 뛰는 게 빠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쿠궁-!

얼음이 쪼개진다.

바다 안에 있는 서펜트들이 움직여대기 시작했다.

뱀장어처럼 꼼지락거리는 중일 터.

하지만 놈들의 몇 번의 움직임으로 얼어붙었던 바다가 쪼개진다.

'다시.'

레인스톰, 블리자드.

「마나」 - 380/380 ▶ 280/380

이걸론 아직 부족하다.

기부도까지는 아직도 아득하다.

적어도 3km 더 가야 했다.

'한 번 더!'

「마나」 - 280/380 ▶ 180/380

총 세 번의 블리자드.

바다는 내 예상대로 기부도까지 꽁꽁 얼어붙었다.

블리자드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위력을 가진 대마법.

허나 한가지.

나는 위험을 배제하지 못했다.

"화성님...!"

그건 바로.

"큭!"

거센 눈발과 우박을 뿌려대는 거대한 자연재해 그 자체인 마법.

블리자드. 놈이 뿌려대는 강렬한 추위와 우박에 나 또한 데미지를 입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블리자드의 우박에 피해 입습니다.]

[블리자드의 추위에 둔해집니다.]

「생명력」 – 360/360 ▶ 280/360

안일했다.

내가 사용한 스킬이기에 자동으로 피해입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대단위 마법.

자연재해에 가까운 대마법의 영향권은 시전자라 해도 저항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난 냉기 저항력을 가진 아이템은 하나도 없다. 있는 거라고는 블리자드를 배웠을 때 자연적으로 상승한 냉기 저항 5% 정도.

기부도까지의 거리는 이제 겨우 중간.

'이대로는 안돼.'

나는 괜찮다.

하지만 레아가 괜찮지 않다.

내 품에 안긴 채로 덜덜 떨고 있는 레아의 얼굴은 창백하고 입술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두 손을 가득 모아 피의 축복을 자신에게 사용하고 있는 듯하지만 처음 겪어본 추위에 힘이 없어 보였다.

'더 빨리 가야 해.'

그러기 위해선.

[시드로긴을 사용합니다.]

[그렘린의 데몬시드를 섭취합니다.]

[그렘린의 잠재력을 일시적으로 100% 발휘합니다.]

「생명력」 – 280/360 ▶ 270/740 "피의축복" ▲

「마나」 - 180/380 ▶ 280/460

「능력치」

근력 – 19 (+7) ▶ 34

민첩 – 15 (+2) ▶ 35

건강 – 18 (+7) ▶ 37 "+5" (4:59)

마력 - 19 (+3) ▶ 23

강골 - 2

지금 필요한 건 민첩의 상승.

탓!

"그렇게 하면 서펜트들이!"

"어쩔 수 없어. 이게 빨라!!"

시드로긴으로 신체 강화.

그리고 플라이를 풀었다.

어중간한 속도의 플라이보다는 확실하게 발로 뛰는 게 빠르다.

쿵! 얼음을 밟고 달려가자 우박 무더기가 몸을 덮친다.

하지만 속도는 3배 이상 빨라졌다.

물론.

콰아앙-!!

소리를 듣고 날아드는 서펜트들은 덤이었지만 말이다.

"한번 해보자고."

나한테는 아직 스킬이 남아 있다.

[돌진]

파앙-!!

덮쳐오는 서펜트들 사이로 부서지는 바다 위의 얼음 조각들을 밟아가며 달려간다. 돌진과 시드로긴으로 강화된 신체능력은 그걸 가능케 했다.

'강골 효과가 이제 좀 빛을 발하네.'

급박하게 달려 나가는 얼음 위.

더 강인해진 뼈로 인해 서펜트들이 찍어대는 아가리에도 발 빠른 방향 전환이 가능하다.

원래라면 무릎이 한번 빠졌을 정도의 격한 변환에도 이를 가능케 한다.

'후우.'

기부도까지는 이제 800m.

할만하다.

"화성님, 앞에!!"

그때였다. 쿠우우웅-!!

기부도 바로 앞에 솟아나는 서펜트.

얼음길을 입으로 씹어 먹으며 길을 가로막았다. 흉흉한 이빨. 거대한 몸뚱이와 살기 가득한 눈은 날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발빠른 서펜트 ???]

하필 여기서 엘리트 데몬이 나오다니. 챔피언이 아닌 게 다행이지만 그냥 서펜트도 힘겨운데 이 무리의 리더 놈이 튀어나왔다.

"진짜 끈질기네."

놈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블리자드.

그리고, 퐁퐁퐁.

내 주위엔 녹색으로 물든 워터볼 8개가 떠올라 놈에게 쇄도했다.

[돌진]

총알처럼 빗발치는 워터볼.

놈은 발빠른이란 수식어답게 피하려고 했지만.

척.

"어림없지."

[리버 슬로우]

[적의 흐름이 느려집니다.]

[강력한 적입니다. 리버 슬로우의 효과가 경감됩니다.]

효과가 경감됐지만 상관없다.

잠시 느려졌던 놈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온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건 잠깐, 아주 잠깐의 틈이면 충분했다.

순간 멈칫한 놈의 대가리에 워터볼을 먹여준다.

팡, 팡팡팡팡팡-!

얼굴에 박아준 워터볼은 터짐과 동시에 놈의 얼굴에서 산화시켰다.

온갖 더러운 병균들은 다 있는 독.

패스틱사드가 들어간 독이다.

-퀘에에에에에에!!

녹아내리는 놈의 눈과 피부.

하지만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리더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다른 서펜트들도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빨리 끝내야 한다.

[돌진]

"죽어 새끼야."

레아를 안아 든 반대 손.

난 적창을 꺼내 들었다.

[리버 슬로우를 사용합니다.]

[리벌 슬로우의 효과가 파훼됩니다.]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이 적중합니다!]

[강력한 출혈이 발생합니다!!]

콰아아아아-!

서펜트의 푸른 피가 사방으로 터져나왔다.

하지만 아직이다.

파지지지직-!!

블리자드가 뿌려대는 눈보라 속.

피 흘리는 서펜트의 대가리에 적창을 꽂은 채로.

[카탈린의 감전을 사용합니다!]

콰가가가가가각-!!

거대한 붉은 뇌전이 터져나왔다.

기부도 [2]

24화.

같은 시각.

[네피림 커뮤니티]

[본인 방금 적뇌치는 거 봄]

-나 루팅한다고 인천 근처에 있었는데 거기서 붉은 번개 침. 자세히 안 보면 모를 정도라서 애매하긴 한데 제대로 봤음.

┗허겅스! 인천 어디서? 거기 뇌창 있는 거 아님?

┗이게 사실이면 뇌창은 인천에 있다는거네! 역시 인천... 보통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는 마경이었군.

┗작성자:ㄴㄴ 인천인데 인천 아님

┗? 그럼 어딘데?

┗인천 앞바다였음

┗??

┗???? 어그로네 10련

┗작성자:ㄴㄴ 진짜임. 바다 쪽에서 났음. 존나 크게 쳤다니까? 거기 섬들 있는 쪽인데 뇌창 거기있는듯 섬에서 나오려고 서펜트들이랑 싸우는 느낌이었음.

┗ㅈㄹㄴ 조그만 섬에 있는데 랭킹 2위라고? 말이되냐?

┗ㅇㅈ 랭커들은 하루에 악마들 잡는 것만 수백 마리를 잡는데 무인도에 있으면 랭킹 유지? 말도 안 됨 ㅂㅅ아

어느 한 네피림의 게시글은 순식간에 욕먹고 사라졌다.

바다에 서펜트와 각종 거대 악마들이 있는 걸 모르는 자는 없다.

그런데 섬?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게다가 서펜트가 뭐 보통 악마인가.

최초에 서펜트들 때문에 함선에서 각종 포탄과 전술 무기를 사용했었지만, 흠집도 내지 못했던 게 서펜트다.

제아무리 카오스에서 보스몹을 원킬원샷 낸 뇌창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서펜트는 무리다.

땅 위라면 몰라도 바다 위의 괴물을 어찌 잡는다는 말이던가.

[뇌창이 하늘이라도 날지 않는 이상은 절대 불가능함 ㅋ]

[ㅇㅈ 하늘 위에서 투창 존나하면 잡기는 할듯?]

[하늘 날면 데몬이글이랑 와이번 날라오는데 잘도 가능하겟다 ㅋㅋ]

지금의 네피림들의 힘이 일취월장하고는 있으나, 아직 현 인류에게 서펜트란 미지의 존재였다.

*

[발빠른 서펜트 ???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7500을 획득합니다.]

[금화 100개를 획득합니다.]

쿠우우우웅-!!

쓰러지는 엘리트 서펜트와 함께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다.

그 즉시 [데몬시드]

[발빠른 서펜트 ???의 데몬시드를 획득하셨습니다.]

[경험치 +10을 획득합니다.]

-퀘에에에에에엑!!

자신들의 대장이 쓰러졌음을 깨달았는지 마구잡이로 달려든다.

동시에 덮쳐오는 서펜트는 다섯.

집채만 한 놈들이 제 몸 안 가리고 뻗어오니 피하기가 쉽지 않다.

'저놈들도 똑같아.'

블리자드로 약해져 있는 건 저들도 똑같다. 오히려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방금 엘리트 놈을 잡고 나니 확신이 든다.

마음 같아서야 전부 사냥하고 싶지만, 숫자도, 딛고 서 있는 위치도 좋지 않을뿐더러.

「생명력」 – 94/740 "피의축복" ▲

「마나」 - 5/460

내 상태도 좋지 않다.

레아가 버프 스킬을 계속 걸어주고는 있지만 체력은 차오를지언정 마나는 그대로다.

시드로긴으로 능력치가 올라가 있기는 하지만 그걸로는 아마 역부족.

이 상황에서는 마음 편히 마나를 채우는 푸른 성수도 먹을 겨를이 없다.

"도망쳐!!"

"꺅!!"

콰아앙-!!

서펜트의 꼬리가 내가 있던 얼음을 깨부쉈다.

그와 동시에 한 놈은 아가리를 들이밀었고, 다른 놈은 웬 물을 뿜었다.

쾅! 콰앙-!!

스치기만 해도 즉사가 될 법한 것들을 돌진으로 겨우 피한다.

그와 동시에.

"레아! 다 됐어!?"

"넵!!"

나는 이곳으로 오기 전.

레아에게 당부한 게 있다.

'만약 우리가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죽을 위기에 처하면 이걸 써야 해.'

[귀환 스크롤]

나는 상점에서 귀환 스크롤이 나올 때마다 구매했다.

그건 카오스 상점에서도 마찬가지.

하여 난 귀환 스크롤이 열댓 개 정도 있는데 이것의 사용법은 간단하다.

[귀환 스크롤]

-좌표 고정 (불별도)

스크롤을 쓰기 전 좌표를 미리 고정하고 찢기만 하면 된다.

체력도 없고 마나도 없다.

그렇다면 달아날 수밖에!

"레아!"

"좌표 고정했어요!! 찢어요!"

이미 여유분의 귀환 스크롤로 기부도의 좌표를 고정했다.

그럼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

찌이익-!!

[포탈이 열립니다.]

기부도 인근, 바다 위.

서펀트들이 아가리를 치미는 상공.

푸른 포탈이 열렸고, 나와 레아는 곧장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앙-!!

서로 부딪치는 서펜트들.

울분에 차 괴성을 내지르는 서펜트들에게 포탈 사이로 난 놈들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줬다.

사악.

닫힌 포탈.

돌아온 무인도.

아니, 이제는 불별도라 이름 붙인 내 집이자 과수원에 돌아왔다.

"와..... 죽을 뻔 했다. 진짜."

"괜찮으세요!? 저, 정말...."

"너야말로 괜찮아? 몸이 얼음장인데... 미안하다. 블리자드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레인스톰은 같은 편에게는 아무 영향도 없었는데 블리자드는 아니었다.

피아식별도 못 하는 자연재해 그 자체의 악랄한 마법이었다.

[...음..... 뜨겁.... 곧..... 하...]

'설마 그때 말하던게...'

몸을 뜨겁게 하라는 소리였나.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스킬들과는 달리 블리자드는 뭔가 달랐으니까.

"후우.... 어쨌든 힘들었다. 레아, 제대로 했지?"

"물론이죠. 여기요."

[귀환 스크롤]

-좌표 고정 (기부도 인근)

됐다.

이거면 충분하다. 이제 이 포탈을 열면 기부도 앞으로 떨어진다.

물론 아직도 바다 위겠지만 그 정도는 플라이를 써서 날아가면 될 일.

"푹 쉬고 내일이나 가보자."

"넵!"

이제는 블리자드로 위험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포탈을 얻었으니까.

'웨이 포인트 찍은 거지.'

이렇게 점차 성장하다보면 이런 식으로 뭍으로 나갈 수 있을 거다.

[발빠른 서펜트의 씨앗]

성장기간: 117일.

엘리트 서펜트의 씨앗도 얻었다.

심어보고는 싶지만, 혹시 모르니 일단은 가지고 있는 게 낫다.

시드로긴으로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시드로긴은 참 좋단 말이지.'

위급 상황 시의 생존율을 올려준다.

이놈 덕분에 헤쳐 나간 난관도 여럿 되니 말이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고민이 깊어진다.

난 3렙에 해당하는 기프트 스킬을 찍지 않았다.

〔그래프트〕

-형질이 다른 나무를 서로 접목시켜 새로운 종을 탄생시킬 수 있다.

〔트리가드〕

-스스로 열매를 지키는 가드를 만들어낸다.

〔씨드라〕

-데몬시드를 강제 성장시켜 무작위로 공격하는 나무뱀을 만든다.

원래라면 그래프트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내가 지금까지 강해질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데몬시드 덕분이니까.

그런 작물들을 접목시켜 완전 새로운 종을 탄생할 수 있다는 능력은 즉 날 강하게 만들어줄 힘이다.

'하지만...'

방금 겪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꼼짝없이 죽었다.

포탈을 열 시간도 거의 없었다.

블리자드의 영향으로 놈들이 약화하지 않았다면? 놈들이 마법 저항이라는 수식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내가 발을 조금 삐끗했다면 어땠을까.

바로 죽었을 거다.

레아 덕분에 위험을 자초한 거긴 했지만 그렇게 안 했다면 레아가 죽었을 게 분명했다.

나한테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내 품에 안겨 있던 레아의 모습은 동사하기 직전의 사람과도 같았으니까.

'참았던 거겠지.'

자기 기프트를 믿고.

하지만 그런데도 위험했다.

애초에 레아의 기프트는 자신의 생명력과 마나를 동시에 사용한다.

5/5라고 했던가.

더 강해진 이후라면 몰라도 나와 달리 그녀는 아직 약하다.

장기적인 강함이냐.

작금의 생존력이라는 갈림길에 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펜트가 그 정도다. 기부도에 뭐가 있을지 난 아직 확인도 못 했어.'

기부도에 서펜트보다 강한 악마가 살아 숨쉴지 어찌 알까.

게다가 다음 달 카오스까지.

지금의 세상은 너무 위험했다.

그러니까.

"아직은 생존에 치중하자."

애초에 제물 성장을 쓰지 않는 이상, 데몬시드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그동안 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생존에 더 중점을 두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내가 살아야, 농장도 키우고 지키고 하는 거지. 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마지막의 마지막에 찍는 걸로 남겨두고 오늘은 쉬도록 하자.

어차피 시드로긴의 후폭풍이 몰려와서 24시간은 꼼짝없이 디버프 때문에 사냥할 생각은 제쳐둬야 하니까.

*

그리고 다음날 14일 째.

찌이익.

[귀환 스크롤을 사용합니다.]

-고정좌표 (기부도 인근)

푸른 포탈.

머리를 조금 내밀어 주변을 살피자 아무것도 없다.

"확실히... 아무것도 없군."

"없어요!"

"좋아 가자."

레아를 안아 들고 플라이를 사용하자 스무스하게 기부도의 땅을 밟았다.

"좌표 다시 고정하자."

"넵!"

레아에게 건넨 귀환 스크롤 다섯 개를 기부도에 고정시켰다.

이제 불별도와 기부도간에 통로가 생긴거나 다름없는 셈.

귀환 스크롤이 하나에 20금 정도라 빡세긴하지만 나한텐 그렇게까지 부담스러운 금액은 아니었다.

'서펜트랑 싸우는 것보다는 20금이 훨씬 싸지.'

드디어 밟게 된 기부도.

감개무량하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그간의 고생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쳤다.

그렘린을 처음 보고, 데몬시드를 얻고 열매로 연명하고 시체를 찾고 히든던전을 깨고 카오스를 갔던 일들이 한순간 머리를 스쳤다.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그런 충족감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럼, 가볼까."

"네!"

이곳에 뭐가 있을지. 혹은 사람이 살고 있을지. 그 모든 게 궁금했다.

'악마가 있다면 사냥하면 되고.'

사람들이 있다면 교류하면 된다.

정보를 교류하든 음식을 교류하든 할 수 있는 건 많다.

레아처럼 나만의 상점을 교류해서 내게 필요한 걸 구매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기부도는 큰 섬이야. 내가 알기로는 어촌 마을이 있었다고 언뜻 들었으니까 사람들이 있을 거야."

"그럼 이곳에 악마들이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저희처럼."

"그러게, 다 토벌했으면 아쉽지만, 이 사람들도 섬 밖으로 나가고 싶을 테니까 함께 머릴 굴려봐야겠지."

혹시 몰라 워터볼에 리버 슬로우를 걸어 놓고 길을 걸었다.

가볍게 여섯 개 정도.

이 정도면 갑자기 나타난 악마라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정찰 보법으로 느릿느릿 한 시간.

우리는 기부도의 마을을 찾았다.

"마을이 있긴 있네."

"네..."

마을이 있었다.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기부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악마 숭배자들인 건가."

그들의 머리엔 하나씩 뿔이 돋아 있었다. 마치 염소 뿔이 연상되는 뿔과 눈동자가 가로로 찢어져 있었다.

마치 뭐랄까.

염소를 숭배하다 못해 염소 그 자체가 되어버린 사람들 같았다.

어릴 적 했던 게임에서도 이런 악마가 있었던 것 같다.

"고트맨이던가."

염소 인간들처럼 보였다.

"사, 사람이다! 죽여! 죽여야 해!!"

"죽여라! 사람이다!!"

"고기! 고기!"

"그분이! 그분이 알면 진노한다! 어서 죽여 분노를 잠재워야해!!"

우릴 보자마자 발작하는 염소 인간들을 보며 난 천천히 숫자를 셌다.

머리 위에 이름이 뜨지 않는 걸 보니 저들은 완전한 악마가 아니다.

악마로 분류되지도 않는 모양.

그럼 인간이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할 건 하나.

"하나, 둘, 셋... 넷, 다, 여섯."

"뭐하시는거에요?"

"제물 숫자 세는 중."

악마한테 영혼이라도 판 것 같은 사람들이라면 악마나 다름없는 자들이니 죽이는 게 십상이다.

"시작이 좋네."

기부도는 예상대로.

시작부터 이것저것을 기부해줬다.

기부도 [3]

25화.

파파팡-!

"시, 신이 노하신다! 신이...끄륵!"

워터볼을 사용해 악마 숭배자들을 모조리 처리하고 나자 제물이 여섯 개나 생겼다.

"챔피언들 주면 좋아하겠네."

내 성역에 있는 그렘린 킹 엘데라던지 기사왕 오그 녀석에게 주면 꽤 좋아할 것 같다.

'아니지.'

제물 하나당 거의 20~30일 정도를 줄여주는 편이니 한쪽에 몰빵하는 게 어쩌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기사왕 오그냐, 그렘린 킹 엘데냐.

그것이 문제였다.

"역시 엘데가 좋겠지."

해골 기사들의 왕인 오그보다는 그렘린 쪽이 더 강하다.

기간도 오그는 70일인데 반해 엘데는 100일 남짓이었으니까.

"아니지, 아니지."

생각해보니 나한테는 이번에 새로 얻은 데몬시드가 하나 더 있다.

[발빠른 서펜트 ???의 씨앗]

성장기간: 117일.

챔피언이 아닌 엘리트지만 자그마치 서펜트의 씨앗이다.

그렘린 킹 엘데와 기사왕 오그는 결국 그렘린과 해골기사 종이다.

그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악과는 결국 근력이나 민첩 등의 능력치.

종으로서의 힘을 놓고 본다면 당연히 서펜트가 위이다.

"그래도 체감상은 서펜트보다 그렘린 킹이 더 강한 거 같았지."

더 치열하게 싸웠던 건 서펜트보다는 역시 그렘린 킹이다.

조금 고민해봤지만 애매했다.

서펜트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고 블리자드를 사용했던 터라 꽤 많이 약화되어 있기도 했었으니까.

"그래도 기간은 서펜트가 더 길어. 역시 서펜트를 키워봐야하나?"

종의 우월함이냐, 아니면 진명을 찾은 깨달음의 강함이냐였다.

마음 한편으로는 후자 쪽으로 마음이 쏠렸지만 새로운 종이 가져다줄 열매의 효과가 기대되기도 했다.

"엘리트 정도는 그냥 여기서 하나 키워봐도 상관없을 거 같기도 해."

불별도에 있는 오그와 엘데는 챔피언 급 데몬시드다. 아무리 서펜트라도 엘리트밖에 되지 않으니 시험삼아 키워봐도 썩 나쁘지 않을지 모른다.

"어차피 여기도 싹 정리하면 내 과수원이 될 섬이니까."

엘리트급 악마 하나 정도는 그냥 심어서 키워도 상관없겠지.

마음을 굳혔다.

"흣쨔!"

푹! 악마 숭배자들을 확인 사살하는 레아를 보며 멋쩍음에 목을 긁었다.

"레아, 그래도 사람인데 확인 사살까지 하는 건 좀..."

"네? 사람이 아니잖아요...?"

"음... 그건 그렇지."

그래도 인간이었던 사람들이라 확인사살까지하는 레아를 말리려 했지만 그만뒀다. 레아 말대로 이들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아니다.

마을에 있던 숭배자들을 처치했다.

그거면 충분하다.

깊은 생각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뿐이고 지금 세상은 깊게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질 미지뿐이니까.

"자 그럼..."

간단하게 생각하자.

내 앞에는 제물을 여섯 구가 생겼다.

그러니까 일단 하나씩 사용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제물성장]

작은 빛무리와 함께 시체가 가루로 변해 데몬시드로 스며들었다.

그 즉시 데몬시드에서 새싹이 돋아나 성장을 시작했다.

[성공적으로 제물을 사용하셨습니다.]

[경험치 +1을 획득합니다.]

「발빠른 서펜트???의 새싹」

-남은 성장기간:89일.

117이 89가 됐다.

그렇다면 총 28일이 줄어든 셈.

난 다시 한번 제물성장을 사용했다.

-남은 성장기간:59일.

이번에는 정확하게 30일.

30일이 감소했다. 28일과 30일의 차이는 뭘까. 각 제물마다의 차이.

그 차이는 무슨 기준일까.

이 또한 천천히 생각해볼 부분이다.

떡잎에 불과했던 작물은 몰라보게 성장해 작은 묘목처럼 변해 있었다.

남은 제물은 네 구.

[제물을 사용하셨습니다.]

[제물을 사용하셨습니다.]

[작물이 성장을 마쳤습니다!]

[수확 가능한 열매가 열렸습니다.]

[발빠른 서펜트의 나무]

-다음 수확까지 120일.

"수확 가능 열매: 6"

열매가 여섯개가 열렸다.

꼴랑 여섯 개.

'서펜트의 악과가 마력을 올려주지는 않을거야.'

서펜트가 마법을 사용하는 그런 느낌은 잘 없었다.

몸 쓰는 무투파랄까.

그렇다면 서펜트의 악과도 신체 능력을 올려주는 효과를 지녔을 거다.

그 효과 폭이 조금 클 뿐이겠지만.

그럼,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기본적인 서펜트의 악과 효과는 그럴거라 생각된다. 그럼 빛나는 열매는 어떨까? 난 이 부분에 의문과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제물은 두구.

이는 여기서 빛나는 열매를 띄울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만족하고 남길 것이냐의 문제였다.

잠시 고민했다.

아직 열매의 효과가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애가 탔다.

서펜트가 주는 빛나는 열매의 효과는 얼마나 굉장할까?

그런 기대가 머릿속에 처박혀서 도통 빠져나오질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못 먹어도 고!"

[제물을 사용하셨습니다.]

[제물을 사용하셨습니다.]

틀렸나 싶었던 그때.

[신의 행운이 깃듭니다.]

[열매 중 하나가 완숙에 이릅니다.]

[빛나는 발빠른 서펜트 열매를 획득하셨습니다.]

[경험치 +10을 획득합니다.]

"오...!"

꽈악.

주먹을 말아쥐었다.

빛나는 열매를 띄웠다.

솔직히 될까 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효과를 봐야 할 타이밍.

"일단 기본 열매부터."

[발빠른 서펜트의 열매]

생긴 건 용과처럼 생겼다.

드래곤의 열매라고 불리는 그 과실 말이다.

꽤 멋있게 생긴 녀석이었는데 표면은 딱딱했다.

단검을 꺼내 반으로 갈라보니 딱딱했던 검은 껍질과는 달리, 안에는 뽀얀 속살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칼로 잘라 한입 먹어보니.

"!!"

과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풍미가 화악 터져 나왔다.

마치 살코기에서나 나올법한 풍미와 함께 과실의 단맛이 함께 느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스테이크와 함께 먹는 상큼한 과일의 맛이 이거 하나에 전부 들어가 있다고 해야 할까.

말로 표현하자니 이상하지만 어쨌든 상상 이상으로 맛있다.

고기를 먹는 것 같기도 하고, 과일을 먹는 것 같기도 오묘한 맛.

묘하지만 이상하게 맛있는 맛에 나도 모르게 하나를 전부 먹어 치웠다.

이거만 있으면 고기를 먹지 않아도 될 것만 같은 맛이다.

[서펜트의 열매를 섭취하셨습니다.]

[독 내성이 0.01% 상승합니다.]

"엥?"

기대했던 스킬이나 그런 것도 아니고 독 내성이 올라버렸다.

서펜트가 독이 있던 놈이었나?

모르겠다.

서펜트와 싸울 때는 놈들한테 당했다기보다는 내가 쓴 블리자드에 얻어맞아서 다친 게 더 많았다.

엘리트 서펜트는 잡자마자 데몬시드로 만들어버리기도 했고.

'독이 있다면 잡아서 페스틱사드의 재료로 쓰는 것도 괜찮겠네.'

어쨌든 서펜트 열매. 용과는 독 내성을 영구적으로 올려줬다.

그렇다면 빛나는 열매는 어떨까.

먹어보지 않을 수 없다.

[빛나는 발빠른 서펜트의 열매를 섭취하셨습니다.]

[신의 행운이 깃듭니다!]

[패시브 스킬 용장을 획득합니다.]

『용장』 (unique)

-용과 같은 위장을 갖게 한다.

"입으로 섭취하는 영양분을 극대화 시키고 부정적 효과를 감소시킨다."

독 내성을 1%쯤 얻지 않을까 했는데 스킬을 배워버렸다.

그것도 패시브 스킬! 용장!!

"용의 위장이라..."

어찌 보면 생존에 있어서 이것보다 나은 스킬이 또 있을까?

생존에 있어 섭취.

즉 먹는 건 중요하다.

아포칼립스가 가속될수록 먹을 건 부족하고 때론 상하거나 탈이 날 음식을 먹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용과 같은 단단한 위장을 가지고 있다면 탈이 날 일이 적으니 병에 걸릴 일도 적겠지.

훌륭하다.

사람은 과식해도 속이 아프다.

그 상태로 전투를 시작한다면 어지럼증과 울렁거림을 동반하게 되고 구토까지 하게 된다면 전투를 이어갈 수 없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죽게 될 거다.

그런 상황에 용장이 있다면 갑작스럽게 펼쳐진 전투 중에도 탈이 없다.

'물론, 이런 상황에 과식할 머저리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용장은 아포칼립스에 최적화된 효과적인 스킬이란 뜻이다.

"공격 스킬이 아닌 게 아쉽지만 하루 이틀 싸울 것도 아니니까."

훌륭한 스킬이다.

엘리트 악마의 빛과라서 그런 걸까.

패시브 스킬을 얻다니 도박하기를 잘했다.

"레아, 너도 하나 먹어볼래?"

"그래도 돼요? 그래도 이제 네 개밖에 안 남았는데....."

"괜찮아."

하나쯤이야 뭐.

독 내성을 올려주는 녀석들이란 걸 알았으니 더는 두려워해야만 할 존재가 아니다.

독 내성.

생존에 있어서 필수로 올려야 할 내성임을 게임 좀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잘라준 용과를 내미니 기대 반 두려움 반 가득한 얼굴을 한다.

이내 하나 집어 먹고는.

"으으음!!"

부풀린 볼 상태로 눈을 빛냈다.

"마, 맛있어요! 스테이크 같아!"

"그치?"

식감은 과일이지만 풍미가 스테이크의 것과 닮았다. 이게 참 별미인 게, 자꾸만 먹게 되는 맛이랄까.

'그래도 고기만 못하지.'

식감이 아삭해서 그럴까.

맛은 스테이크랑 비슷한데 식감은 과일이라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기가 먹고 싶어지는 맛이다.

스테이크랑 같이 해 먹으면 맛있을 것 같은 과일이 바로 용과다.

[네피림 거래소]

의식의 흐름대로 거래소를 열어서 검색해보니 스테이크가 있었다.

[토마호크 스테이크1100g x2]-5금

판매자- 좀비고기

판매자 이름이 좀 거시기 했지만 캡처된 사진은 퍽 나쁘지 않았다.

마트에서 판매되던 냉동 상태.

난 바로 구매 버튼을 눌렀다.

[미국산 토마호크 1100g x2를 구매하셨습니다.]

용장이 있으니 조금 과식해도 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생각난 김에 맛있는 거 먹으면 좋지 않은가.

용장도 생겼겠다. 오랜만에 고기 먹으면서 제대로 포식이나 해야겠다.

영양분을 극대화해준다니 고기 좀 먹으면 그동안 못 먹은 단백질 좀 채워주겠지.

"대충 정리하고 이따가 고기 먹자."

"좋아요! 저도 용과 먹으니까 고기가 땡겼거든요! 제가 거래소에서 사드릴게요!"

용과를 먹어서 그런가.

설마하니 사주겠다고 할 줄이야.

"아냐 됐어."

"아니에요! 저도 돈 있어요! 맨날 얻어먹을 수는 없는걸요!"

"아니. 이미 샀어."

"아...! 화성님 영양분을 채워드릴 수 있는 기회였는데..."

뭔가 시무룩 해하는 레아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빚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영양분을 채워드릴 기회라니. 신선한 표현법이었다.

영양분.

"왜 그러세요?"

"아냐 잠시만."

'섭취하는 영양을 극대화?'

용장의 효과는 분명 그랬다.

"입으로 섭취하는 영양분을 극대화하고 부정적 효과를 감소시킨다."

영양분.

당연히 악마의 열매를 떠올랐다.

악과의 효과는 당연히 과실의 영양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것도 되지 않을까?

난 곧장 인벤토리에서 하나 남아있는 악과를 꺼내 먹었다.

[그렘린 열매를 섭취합니다.]

[용장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민첩이 +0.2 상승합니다.]

"!!"

본래 민첩 0.1이 올라야 하는게 맞는 그렘린 열매가 0.2가 올랐다.

영양분을 극대화.

용장은 영양분을 두배 올린다.

즉슨 악과의 효과를 두배 상승시킨다는 말.

"미친."

용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대박 스킬이었다.

기부도 [4]

26화.

경기도 안양시.

악마들이 만들어 놓은 어느 던전.

그 안에서 바바리안이 신음했다.

"아오..."

"왜그래?"

"배가 슬슬 아파서. 누구 휴지 있는 사람 있냐?"

"난 없음. 거래소에서 사."

"돈 아깝게 거래소에서 왜 사! 거기서 사려면 최소 1금화잖아. 나 있으니까 이거 써."

건네는 휴지를 받은 바바리안은 그걸 빤히 바라보더니 되물었다.

"물티슈는 없어?"

"대충 닦아 시발."

"난 비데나 물티슈 없으면 못 싸."

"밥 처먹는데 더럽게 똥 얘기나 하고 있네! 미친놈이."

이들은 랭커인 바바리안을 중심으로 모인 안양 파티였다.

이틀째 지하수로에 만들어진 던전을 탐사하다가 안전 구역을 확보하고 식사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먹은 게 잘못되어서였을까.

바바리안 장돌철은 계속해서 아랫배가 슬슬 아팠다.

"아, 이거 느낌 안 좋은데..."

"그러게 누가 다 익지도 않은 걸 그렇게 먹으래? 안 뺏어 간다니까 그렇게 급하게 먹어."

"바바리안은 원래 그래. 남자답게! 사내답게 먹어야 바바리안이다!"

"... 그렇게 처먹었으면 탈이나 나지 말던가."

당당하게 답하던 바바리안은 시무룩해졌다. 이내 식사 자리에서 멀찍히 떨어져서 큰일을 치르던 중.

-끼기긱!

"야! 전투 준비!!"

"바바리안! 야 장돌철 이새꺄! 빨리 끊고 나와! 악마 떴어!!"

"자, 잠깐만!! 잠깐! 끄윽...!"

전투가 시작됐지만 한번 배탈 난 장은 자신을 한껏 과시했다.

멈출 길 없는 폭주 기관차.

바바리안의 거대한 장 속에는 폭주 기관차가 연신 출구를 향해 달렸다.

"꺄악!"

"소미야! 괜찮아!?"

"윽!! 야이 똥쟁이 새끼 뭐하냐고!"

"다, 다쌋어! 기다려!!"

하지만 탈이 난 장은 의지로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바바리안은 그 뒤로 5분이나 늦게 전투에 참가했다.

바바리안 장동철은 그 뒤로 똥철이라 불리며 한동안 놀림 받았다.

*

[용장이 소화를 돕습니다.]

[민첩이 +0.2 상승합니다.]

용장의 위대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안 그래도 사기급으로 대단한 효과를 지닌 악과를 두 배 더 사기로 만들어줄 스킬이 바로 용장이었다.

방금 4개째의 악과를 먹었다.

불과 5분 만에 용과 한개와 빛나는 용과 한개. 그리고 그렘린의 열매 두개를 먹었다.

이 정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기 마련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화를 돕는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지 헛배차는 느낌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포만감이 금세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진작 배웠으면 더 강해졌을 텐데.'

하다못해 마력을 증가시켜주는 빛나는 그렘린 열매를 먹었을 때 이걸 얻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서펜트를 잡아 희귀한 확률로 나온 패시브 스킬이다.

같은 엘리트 서펜트를 잡아 빛나는 열매를 띄워도 다시 나올지 말지 모르는 스킬이란 말이다.

'얻었음에 감사하자.'

지금은 충분히 감사하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기뻐서 지금 당장이라도 고기 파티를 벌이고 싶지만 그럴 순 없었다.

여기서 바로 스테이크를 구워 먹기엔 주변이 난장판이었기 때문이다.

용과들을 모조리 수확한 이후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나저나 개판이네."

슬쩍 둘러본 마을은 가관이었다.

지저분했다.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군데군데 핏자국과 뭔지 모를 살점들이 있었고 그마저도 썩어가 악취를 풍겨댔다.

"식인종이었던 건가?"

현대 마을이 아니라 원시인들의 촌락을 보는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집 여기저기엔 파리가 들끓고 씹다 만 고깃덩어리들이 있었다. 마치 사람의 팔다리와 같은 것들이 말이다.

게다가 집 한구석에는 염소 그림이나 조각상들이 자리해 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이렇게 된 게 아닌 거 같네."

악마들이 나타난지 이제 14일.

2주 동안 고립된 섬.

그곳에 나타난 악마들이 마을 주민들을 죽이는 와중에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숭배하게 만들었다는 걸까.

'지능이 있는 악마들인가.'

사람들이 원해서 이런 짓을 벌이게 된 건 아닐 테니 가능성은 다분하다.

"화성 님! 여기요!"

"응."

레아가 불러서 가보자 창고에는 웬 아이들이 포박되어 있었다.

피골이 상접했는데 꽤 오랫동안 먹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음. 죽었네."

아이들은 죽어 있었다.

창고에 포박된 채로. 마치 뭐랄까.

'일부러 굶겨 죽은 거 같아.'

아이들을 키워 먹기 위해서라면 배부르게 먹여놓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들은 일부러 굶겨 아이들을 죽였다.

먹기 위해서 포박한 게 아니다.

"여기도 염소 조각상이 있어요."

바닥에는 돌 같은 걸로 긁어대서 그린 듯한 염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죽은 아이들은 그 위에 있었다.

"제물인가."

제물로 바치기 위해 굶겨 죽였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요."

"어떤 거?"

"아이들을 굶겨서 제물로 바치는 종류의 이야기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이 배곯아 죽으면 그냥 죽는 것보다 악에 가득찬다고 들었어요."

"음..."

"맞는 거 같아요. 완전 영유아라면 큰 의미가 없지만, 얘들은 10살에서 13살 정도는 되어 보이니까요."

하긴, 자의도 아니고 타의로 배를 굶겨 죽는다니.

요즘 세상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도 잘 있지도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이들은 억지로 잡혀 창고에 갇혀 굶어 죽었으니...

"악마에게 가져다 바치기엔 딱 좋게 독기를 품었다는 건가?"

"예. 아마도..."

썩 기분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도 모자라 일부러 굶기고 악에 받쳐서 죽게 만든다? 대체 이곳에 뭐가 있길래 미쳐서 이런 제물이나 만들게 됐을까.

"제물..."

굶어 죽은 아이들과 내 [제물성장] 스킬을 번갈아 떠올리자 묘하게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난 조용히 창고 문을 닫았다.

아마 이 아이들을 내가 쓰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묻어주자."

"네!"

그 이후로도 우린 마을 곳곳을 뒤지며 쓸만한 물건이나 악마에 대한 단서가 될 것을 찾았다.

썩 불길한 곳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세상 어디라고 기분 좋은 곳이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랭커들이 없는 세상 대부분은 이렇게 변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악마를 죽여야만 네피림이 된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악마들에게 잡아먹히거나 죽임당하거나.

또는 이렇게 길 들 여지는 거겠지.

길들여져 인간성을 상실하고 같은 약한 인간을 제물로 바친다.

그러므로 목숨을 연명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참 말세였다.

참담한 심정으로 혹시 몰라 마을 이곳저곳을 뒤졌다.

내가 이곳에 목숨 걸고 온 건 악들을 사냥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마을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도시도 아니고 섬마을이다.

어촌이었으니 당연히 도시보다는 촌락이고 때문에 제대로 된 시설이 부족한 곳. 즉 비상시를 대비한 기계들이 많을 거란 판단이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오, 찾았다!"

역시 섬마을이라 그런지 발전기가 갖춰져 있었다.

찾은 곳은 마을 회관 같은 곳.

그곳 창고에 발전기가 있었다.

발전기.

이제는 거래소에서도 비싼 값에 올려져 있는 물건이다.

"기름도 있고, 횡재했네."

어제까지 거래소를 봤을 때 40금까지 올라갔는데도 게 눈 감추듯 사라졌던 게 바로 발전기다.

그런 발전기를 공짜로 얻었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

솔직히 악마들에 의해 사람들이 길들여지고 죽어간 건 슬픈 일이다.

하지만 어디 여기만 그럴까.

'이런 거 하나하나에 슬퍼하고 감정 소비하면 결국 손해를 보는 건 나다.'

그런 세상이다.

익숙해져야 한다.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 더 생존에 힘쓰고 강해져야만 하는 삶이다.

이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난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만 하는 사람이다.

"전부 다 챙기자. 냄비랑 뭐 쓸만해 보이는 건 전부 가져가자고. 아! 여기서 좀 깨끗하고 큰 집은 그냥 두고."

"네? 왜요?"

"자주 왔다 갔다 할 거니까. 별장 개념으로 집 하나 정도는 써야지."

만들어져 있는 집이다.

영 꺼림칙하지만 굳이 고생해서 새 집을 하나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촌이라지만 적당한 집 하나 정도는 쓸 수도 있을 테니까.

'기부도에 있는 악마들을 모조리 처리하면 여기에도 과수원을 만들어야 하니까.'

결국 내 힘의 근간은 데몬시드다.

만들 수 있는 데까지.

힘 닿는 데까지는 과수원을 늘리고 또 늘려야 강해질 수 있다.

'악과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수량이 많아진다면 많은 대로 팔아도 된다. 팔면 팔수록 내 주머니는 무거워지고 사람들은 강해질 테니까.

과수원을 늘리는 것.

이건 현재 빼놓을 수 없는 목표다.

'불별도는 땅이 부족해.'

불별도는 작다.

하지만 기부도는 크다.

일주일을 돌아도 다 못 돌아볼 정도로 크고 넓으니 여기 전체를 과수원으로 만들면 필히 내겐 이득이다.

"가자."

"어, 어디로요?"

챙길 건 대충 챙겼다.

중요한 건 인벤토리에 넣었고, 아닌 건 한 곳에 모아뒀다.

어촌 한쪽에 따로 떨어져 있는 초가집이 있었는데 거기 두기로 했다.

마당도 큼직하고 집도 꽤 튼튼해 보였다. 무엇보다 아궁이가 있어서 장작만 있으면 방바닥이 뜨끈해지는 자체 보일러 시설이 완비된 곳이다.

'지금은 차라리 이런 게 낫지.'

가스나 기름이 필요한 시설보다는 아궁이 떼는 게 차라리 편하다.

가스나 기름 구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질 시대니까.

지금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어도 이런 생활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구하기 어려울 테니 땔감만 있으면 되는 아궁이 난로가 더 나을 거다.

"오랜만에 따뜻하게 자겠네."

뜨끈하게 등지질 생각하니 벌써 괜히 몸이 노곤해졌다.

왠지 시골에 놀러 온 거 같기도 하니 드럼통에 물 받아 목욕하면서 시원하게 땀 한번 빼주고 싶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거래소에 1인용 사우나도 팔았던 거 같았는데."

전기만 있으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니 거래소에 나와 있다면 여유 있을 때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나중에 다시 찾아보면 되겠지.

"그럼 이제 어디로 갈까요?"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길들인 놈도 있을 게 뻔해."

놈들이 마을 하나를 습격해 길들였다면 있을 곳은 뻔하다.

"염소 새끼들이니까, 산 어디에 있겠지."

아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터.

사람들이 염소가 된 이유는 아마 여기 있는 악마들이 염소라서일 거다.

고트맨.

염소 인간들은 본래 인간이었으나 악마를 숭배하며 고트맨이 된 자들이라고 게임에서 들은 적 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지능도 있을 것이고 태생이 악마 숭배자들이니 자신들의 구역을 따로 만들어두고 행동하고 있을 게 뻔하다.

"놈들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니까. 일단 조심스럽게 접근을..."

레아에게 기부도에서의 행동 사항을 말해주던 찰나.

흠칫.

갑자기 들려온 수풀 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명백하게 산 쪽에서 난 소리.

난 인벤토리에서 적창을 꺼냈다.

[투척을 사용합니다.]

쐐애애애액-!! 쾅! 소리가 난 쪽으로 곧장 적창을 투창했다.

하지만 경험치가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소리는 들렸다.

하지만 맞지는 않았다.

살아있다는 소리다. 내 투창을 피했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그렇게까지 먼 거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내 투창을 피했다면 반드시 그 정도의 실력을 지닌 강자란 소리.

보통 악마는 아닐 것이다.

"대기."

레아에게 대기하라 말하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워터볼을 리버 슬로우로 늦춰놓고 3개 정도 내 몸 주변에 띄웠다.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해골기사의 창을 꺼내 장비하고 투창한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바로 투척을 사용할 수 있는 거리에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바위에 꽂혀있는 적창과 그 아래.

"대낫...?"

흔치 않은 대낫이 떨어져 있었다.

대낫을 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때였다.

쿵.

돌연 내 뒤에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화성님!! 뒤에!!"

레아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을 땐.

퍼억-! 꾸드득!

뭔가에 얻어 맞은 직후였다.

'발굽?'

쿵! 우지끈!! 쿠구궁!

"커억!"

뭔가에 얻어 맞아 나무 한그루를 부수고 땅바닥을 굴렀다.

숨쉬기가 버겁다.

'발굽? 발굽이었어.'

배에 발굽을 맞아서 그런가 갈비뼈 부근이 금 간 것 같았다. 강골 스탯이 2나 올라서 나름 튼튼하다고 자부했는데도 갈비뼈가 나갔다.

원래는 대체 얼마나 강했던 거지?

정신이 없다.

그래도 차려야 한다.

발굽.

겨우 발차기 한방에 이런 위력을 보일 정도의 강력함이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죽는다...!'

겨우 정신차리고 앞을 보니 그제야 겨우 날 때린 놈의 얼굴이 보였다.

[검은산양 추종자]

놈의 얼굴은 검은 산양.

상체는 인간의 것이지만 머리와 하체는 산양의 것을 한 악마.

"검은산양..."

고트맨, 또는 카즈라라 불리는 반인반수의 악마였다.

검은 산양 [1]

27화.

[피의축복이 활성화됩니다.]

[생명력이 소폭 회복됩니다.]

[생명력이 강화됩니다.]

"후우...."

멀리서 지원해주는 레아의 기프트로 겨우 숨을 돌렸다.

아직도 갈비뼈가 아프지만 적어도 움직일 정도는 됐다.

피가 들끓는 것처럼 활성화 되는 게 느껴진다.

고통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라앉는 고통과 함께 놈을 노려보며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떨어뜨린 해골기사의 창이 바닥에 있었고, 적창은 아직도 바위에 박혀 있는 상태였다.

[크륵]

놈은 내게 발길질 함과 동시에 날려졌던 워터볼을 맞고 신음했다.

순간적이지만 놈은 그 상황에 워터볼 하나를 피해내는 기적같은 반사신경을 보였다.

'절대 만만한 놈이 아냐.'

투창한 적창을 피하고 나무 위로 올라가 기척을 숨기고 기습했다.

여기까지만 봐도 놈은 전투에 숙달됐고 지능까지 있다 봐도 무방하다.

본능적인 전투 센스.

놈에겐 그것이 있었다.

'방심했어.'

경계를 단단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몸을 숨기고 기습을 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단 한번의 발길질에 들어온 데미지가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내게 만약 강골 스탯이 없었다면 분명하게 갈비뼈가 부러져 내 폐를 찌르거나 장기를 찔렀을 것이다.

그리 됐다면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었을거다.

물론 놈도 성치는 않다.

워터볼 두개를 맞았다.

순간적으로 팔로 막아냈지만 그 팔에 닿은 워터볼에 스며든 페스틱사드는 놈을 천천히 중독시키고 있었다.

[크르르.]

고통이 뒤섞인 으르렁거림만이 놈의 상태를 증명했다.

그때였다.

놈이 움직였다.

날카로운 검은 손톱이 자리한 두 손을 할퀼 기세로 쇄도했다.

난 곧장 바닥에 떨어져 있던 창을 잡고 놈에게 찔러 넣었다.

훅-!

하지만 놈은 당연하다는 듯 피해내고 자신 또한 자기가 떨어뜨린 대낫을 손에 쥐고 포효했다.

[메아아아아아아악!!]

고막을 찢을 것만 같은 포효.

덕분에 내 몸은 위축됐다.

그 틈을 노리고 짖쳐 들어오는 카즈라를 향해 난 워터볼을 사용했다.

워터볼의 숙련도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중.

순식간에 다섯개를 만들어내 발사했지만 놈은 발굽 달린 다리로 땅을 박차더니 피해내고 우거진 나무 몸통을 밟아 내게 쇄도했다.

[돌진] 스킬을 사용해 몸을 피하고 곧장 [투척]을 사용했다.

물론 투척하기 전. [리버 슬로우]를 거는 건 잊지 않았다.

[대상의 흐름이 느려집니다.]

[대상이 저항합니다.]

[리버슬로우의 효과가 경감됩니다.]

서펜트와 비슷하다.

하지만 서펜트와는 달리 놈은 겨우 경감시키는 데 그쳤다.

놈은 서펜트보다 약하다.

"흐읍-!"

쿵-!

온 힘을 다해 던진 투창.

하지만 놈은 리버 슬로우가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꺾어 내 창을 피했다.

'미친.'

전투 센스가 짐승 수준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짐승이라 그런건가? 본능적인 움직임이 대단히 명쾌하다.

기괴하게 꺾여진 허리.

하지만 덕분에 난 여유가 생겼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푸르푸르의 반장갑]에 저장된 스킬.

[차지볼트]였다.

[차지볼트가 카탈린의 감전의 영향을 받습니다.]

[카탈린의 감전 볼트로 변환됩니다.]

[속성 데미지가 증가합니다.]

시뻘건 차지볼트.

그것이 고막을 뒤흔드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놈에게 날아갔다.

꺾여진 상태 그대로 대낫을 휘둘러 차지 볼트를 베어내려 했으나.

'카탈린의 감전은 피를 쫓는다.'

놈의 왼팔은 내 워터볼에 당해 피가 조금 흐르는 상태.

놈은 막을 수 없다.

촤악-!!

"좀 아플꺼다 염소 새끼야."

파지지지지직-!!

흐르는 피를 따라 흘러들어간 차지볼트가 카즈라의 몸속을 침투한다.

발작적으로 떨어대는 몸과 함께 놈이 대낫을 내던졌다.

휘리릭, 퍽-!

"깜짝이야!"

그 와중에 날 죽이려고 했다.

대단한 생명력, 그리고 의지였다.

땅바닥을 굴러서 피한 다음 바위에 꽂혀 있는 적창을 뽑았다.

[카탈린의 감전을 사용합니다.]

파지지지직!

솟아오른 붉은 뇌전을 적창에 담았다. 놈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이번에는 못 피한다!"

온 힘을 다한 투창.

쇄애애애애액-!!

놈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강력한 출혈이 발생합니다!]

콰직! 촤아아악! 파지지직-!

[검은 산양의 추종자를 섬멸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30금화를 획득합니다.]

"후아!!"

놈이 죽었다는 시스템을 보자마자 다리가 풀려 주저 앉았다.

"화성님! 괜찮으세요?"

"어, 어... 놀랐네 진짜. 후우..."

매초가 십분처럼 느껴진 전투였다.

검은 산양의 추종자.

엘리트나 챔피언도 아니다.

그냥 일반적인 악마였는데도 이 정도의 힘과 실력을 지닌 것이다.

기본적인 스펙으로 따지자면 서펜트보다 한참 아래였지만 까다롭기로 따지면 서펜트보다 더 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여기는... 이런 놈들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라는 건가."

생각했던 것보다 기부도의 위험수치는 더욱 높은 것만 같았다.

어째서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변했는지 빠르게 이해됐다.

"죄송해요. 제가 끼어들 틈이 도저히 안 보여서..."

"아니야. 잘했어."

오히려 레아가 애매하게 끼어 들었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거다.

내 스탯으로도 놈과는 호각이었다.

그런데 레아의 스탯으로 전투에 끼어 들었다면 최소 중상, 아니면 사망에 이르렀을지도 몰랐다.

"기부도에서는 후방에 서자."

"... 네."

시무룩한 모습이 조금 안타깝지만 그게 최선이다.

레아의 검술과 스탯으로는 후방에서 내게 피의 축복을 내리는 게 최선.

안타까운 말이지만 솔직하게 그거 외엔 방해다.

'아직도 몸이 떨리네.'

검은 산양 놈들은 강하다.

경험치만 봐도 알수 있다.

그렘린을 양학하고 내 능력치는 꽤 많은 성장을 이룬 상태지만 그럼에도 놈에게 당할 뻔 했다.

그렘린은 100의 경험치를 줬었고 검은산양은 다섯배인 500의 경험치를 줬다. 하지만 단순하게 다섯배 강한 정도의 실력이 아니었다.

짐승 같은 놈들이 아니라 진짜 전투가 뭔지 아는 놈들이라 더 까다롭게 다가왔다. 마치, 지능을 지닌 사람과 싸우는 느낌이었다.

수 싸움을 할줄 안다는 말이었다.

"아이고."

3분은 더 앉아서 숨을 고르고 나서야 겨우 심장이 진정됐다.

레아가 보는 앞에서 후들후들한 다리를 떨면서 일어날 순 없으니까.

"괜... 찮으세요?"

"괜찮아."

조금 놀랐고, 긴장이 풀려서 그럴 뿐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나 놈에게 꽂혀 있는 적창을 뽑아냈다.

창에 묻은 불길한 보라색 피를 털어내고나서야 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데몬시드."

콰직, 까드득!

찌그러져 씨앗으로 변하는 놈을 보며 난 그제야 안심했다.

[검은 산양의 추종자를 데몬시드로 만들었습니다.]

[경험치 5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의 추종자 씨앗」

-성장기간: 68일.

68일의 성장기간.

그렘린보다 두배에 가까운 기간이었다. 당장 심어서 어느 효과를 지닌 열매가 열릴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제물도 없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일단 인벤토리에 수납하고 놈이 떨어뜨린 대낫을 보았다.

[추종자의 대낫+1]

-검은 산양을 추종하는 것이 허락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대낫.

〈강한 베기〉

새까만 금속으로 이루어진 대낫은 투박하지만 실용적이고 실전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오로지 침입자를 죽이고 섬멸하기 위해 고안된 크기와 날이었다.

베기보다는 폭이 좁아서 날 끝으로 상대를 찍기 위한 무기로 보였다.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효과적인 전투 무기였지만 내가 쓸만한 건 아니다.

특이한거라면 하나.

+1 강화가 되어있다는 점.

"강화된 무기는 처음 보네. 그건 그렇고 이거 독인가."

"아, 그러네요."

역시 불길한 놈들 답게 대낫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기본적으로 악마란 놈들은 독을 자주 사용하는 편인 모양이니까.

'서펜트를 더 사냥해야겠어.'

서펜트 사냥은 곧, 독 내성을 키우는 걸로 이어진다.

앞으로의 모든 전투에서 독의 내성은 필수적으로 챙겨야 할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돌아갈까요?"

내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꼈는지 레아가 귀환의 뜻을 밝혔다.

불별도로 돌아가 잠시 쉬고 다시 오자는 뜻이였다.

하지만 난 고갤 저었다.

"놈들한테도 내 창은 통해."

갑작스러운 등장이었고 의도하지 않은 근접전이 벌어져서 벌어진 일.

내 전투 스타일은 근접전보다는 원거리전을 지향하는 편이다.

그리고 난 아직, 제대로 된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희는 아직 검은 산양의 거점도 모르고..."

맞는 말이다.

놈들의 위치를 모르니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고 그건 기습을 허락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방금 전의 전투로 지능이 뛰어나고 전투적인 면모가 높은 놈들이라는 걸 알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무턱대고 산으로 들어가 놈들을 찾기 시작한다면 최악은 기습.

또 다시 기습당하거나 아니면 무리를 이끌고 포위하여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포위 당한 상태에서 기습. 그건 죽음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난 그럼에도 고개를 저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숲에 숨은 짐승을 사냥 하려거든.

그 숲을 전부 불태울 각오를 하지 않으면 도리어 당하게 될거라고.

쿠구구궁-!

난 지팡이를 들어 올렸고 하늘에는 당연하게도 먹구름이 몰아쳤다.

"창, 가지고 있지?"

"아, 넵! 그때 카오스에서 모아놓은 창들 전부 저한테 있어요!"

해골기사의 창.

일부는 나한테 있지만 수백개가 넘는 수량의 창은 레아의 인벤토리에도 가득 차 있다.

"전부 꺼내."

투둑, 투두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내가 만든 레인스톰이 기부도에 자리한 숲을 적시기 시작했다.

놈들이 제아무리 강하다 한들.

숲과 산을 제것처럼 다니게 해줄 발굽을 지니고 있다 한들.

비와 눈.

그리고 번개를 다루는 내 마법 앞에서는 그저 대자연 앞에 놓여진 작디 작은 힘없는 짐승일 뿐이다.

쿠구궁-!!

쏴아아아아아-!!

쏟아지는 빗줄기.

난 레아가 건네주는 해골기사의 창을 잡고 [카탈린의 감전]을 사용했다.

비 묻은 짐승은 번개에 취약하다.

내 적뢰는 피를 따라간다.

난 비를 부린다. 내 비는 악마들에게 데미지를 부여한다.

맞다보면 피를 흘린다.

레인스톰의 빗방울은 바위마저 부수는 폭풍우로 돌변하는 마법이다.

그럼 여기서 문제.

이것들이 합쳐지면 어떻게 될까.

"자동 타겟이 된다는거지."

투창 자세.

그대로 내 창끝이 향한 건 내가 만들어낸 레인스톰.

바로 하늘 위의 먹구름이었다.

내가 레인스톰을 향해 힘껏 투창한 순간.

꽈광-!!

붉은 번개가 하늘을 뒤덮었다.

창에 깃든 카탈린의 감전은 먹구름을 감전시키고 빗방울 전체로 분산된다. 하지만 결국엔 모여 떨어진다.

카탈린의 감전은 피를 쫓는다.

시뻘건 낙뢰가 땅으로 분산되어 떨어져 내렸다.

꽈과광-!!

[검은 산양 추종자가 치명적인 일격을 입었습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가 치명적인 일격을 입었습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가 치명적인 일격을 입었습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셨습니다.]

마치 붉은 비가 내리는 것만 같은 장관.

그 효과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마어마했다.

검은 산양 [2]

28화.

부천시.

부호의 집 지하에 있는 방공호실을 거점으로 삼은 32위 랭커.

관찰자, 고준명은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이 알아낸 정보들을 가지고 커뮤니티의 공략 글을 써 내려갔다.

2주가 넘어가는 멸망의 날.

관찰자는 커뮤니티 사이에서도 꽤 유명세를 이끈 네임드가 됐다.

"오늘은 위험구역 재업로드해야지."

[관찰자 리포트 - 위험구역(3)]

랭킹 32위 관찰자입니다.

평안하지 못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네피림 분들께 심심한 안녕을 기원하며 이번에 발견한 세 번째 위험구역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김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 제보가 들어오는 와중 저는 김포에 있다는 염소 인간에 대한 제보를 받았습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숨어있는 악마들은 많지만 염소 인간에 관한 제보는 꽤 흥미로웠습니다.

그들에 대한 강함은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관찰자란 기프트를 얻고 레벨이 오른 지금 저는 악마들의 급을 숫자로 확인할 수 있게 됐습니다.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좀비들은 1~2레벨이고 고블린은 1~2레벨이죠.

많은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불사의 군대 또한 1~2레벨이었습니다. 그렘린은 기본 3레벨부터 시작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염소 인간.

정확하게 검은 산양이라는 놈들의 레벨은 자그마치 5레벨에 달했습니다. 저는 멀리서 그들 중 한 개체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도망쳤습니다.

관찰자란 기프트를 가지고도 그들의 습성이나 전투 능력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는 저를 겁쟁이라 치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시기에 한가지는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김포시의 네피림과 생존자 여러분.

절대로.

염소 인간을 보면 달아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하고 현재의 인류는 맞서 싸우는 게 불가능한 종족입니다.

*

꽈광-!!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가 치명적인 일격을 입었습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가 치명적인 일격을 입었습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꽈광-!!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꽈광-!!

[검은 산양 추종자가 치명적인 일격을 입었습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검은 산양 추종자가 치명적인 일격을 입었습니다.]

꽈광-!!

[검은 산양 추종자를 처치하여 500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거의 다 죽었나."

몇 번이나 투창했을까.

다섯 이후로는 세지 않았다.

「마나」 - 135/380

남아 있는 마나를 보니 제법 많이 벼락을 쳤다.

"여기요."

레아가 건네는 창을 손에 잡아 역수로 쥐었다. 내 근력과 더불어 [투척]스킬을 사용해 단번에 투창한다.

꽈광-!!

우렛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지고 레인스톰에서 붉은 낙뢰가 내려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추종자를 죽였다는 메시지가 뜨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하자."

이제 그만할 때였다.

벼락을 내려쳤는데도 죽는 놈이 없는 걸 보면 죽을 놈은 대부분 죽었거나, 아니면 몸을 피한 것일 터.

높은 확률로 놈들이 거점으로 삼은 굴이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터다.

'추종자만 있을 리 없을 테니까.'

검은 산양의 추종자만 있을 리 없다. 다른 계급을 지녔거나 종족 값을 지닌 상위 개체가 있을 거다.

그런 놈은 메시지에 뜨지 않으니 꼭꼭 숨었을 확률이 높다.

'오늘은 이 정도로 충분해.'

기부도는 넓다.

불별도의 동쪽에서 곧장 넘어왔으니 이쪽은 기부도의 서쪽에 해당한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을 잡고 천천히 이동하며 투창만 날리면 기부도에 있는 대다수 악마는 살벌하게 싸우지 않아도 토벌이 가능하다는 소리.

섬에 얼마나 많은 추종자가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최대한 숫자를 줄여 놓는 게 좋다.

적은 다수고, 난 혼자다.

검은 산양 놈들은 지능이 뛰어나니 집단으로 날 잡으려 들기 시작하면 내가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건 일종의 사냥이다.

꽤 오랜 싸움이 될 것이다.

내가 사냥당할지, 놈들이 사냥당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정보의 우위는 내가 가지고 있다.

'놈들은 날 몰라.'

하지만 난 놈들을 안다.

그것으로 오는 이점을 오늘 썼다.

아마 내일도, 모레도 통한다.

하지만 놈들도 바보는 아니다.

비가 오면 천둥이 치는 걸 깨달을 테고 굴이나 바위 아래로 숨으면 괜찮다는 걸 학습할 거다.

물론 놈들이 학습하는 것처럼.

나 또한 학습한다.

통하지 않으면 통할 수밖에 없는 다른 수를 쓰면 된다.

간단한 이야기다.

'숲으로 갈 수 없으니 데몬시드를 얻지는 못했지만...'

경험치와 금화는 얻었다.

마리당 거의 30금화.

모든 추종자가 금화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난 잠깐의 전투로 300금화를 넘게 벌었다.

경험치는 대략 5천이 넘겠지.

그럼 당연히.

[레벨 랭킹]

- 0일 5시간 54분 남음.

- 11일 5시간 54분 남음.

[1위 데몬시드 - 레벨 3]

[2위 카탈린의 감전 - 레벨 2]

[3위 강철군주 - 레벨 2]

역시나.

"어딜 감히!"

팍씨!

원래는 있었단 강등 임박과 승격임박이 사라졌다.

2위를 순방 중인 카탈린의 감전이 지닌 경험치가 순식간에 증가한 탓.

순위를 지켰다.

기부도에 도달했으니 강철군주가 내 뒤를 따라잡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럼 돌아갈까요?"

"응, 아. 가기 전에 잠시만."

난 기부도에서 임시 베이스캠프로 정한 초가집 부엌으로 들어갔다.

"차지 볼트."

오늘치 한 번의 횟수가 남은 차지 볼트로 장작에 불을 붙였다.

적당히 장작을 밀어놓고 불씨를 옮겨 옆 아궁이에 땠다.

그리고 아까 거래소에서 산 토마호크 고기를 뒤집은 솥뚜껑 위에 식용유를 뿌리고 올렸다.

치이익-! 화력이 강해서 그런지 고기는 올라가자마자 지글지글 맛있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와! 고기가 엄청나게 커요!"

"용과 먹으니까 이게 생각나서. 금방 구워줄게."

"그럼 제가 다른 준비를 할게요!"

"응, 아 밥 먹고 가볍게 씻고 방에 들어가자. 따뜻할 거야."

"... 네? 아... 네, 넵!!"

왜 저러지.

묘하게 얼굴이 붉다.

추적추적 내리던 먹구름은 사라지고 뉘엿뉘엿 해가 진다.

지고 있는 해 때문이었나.

아마 내 착각이겠지.

그것보단 고기다.

자그마치 토마호크.

아포칼립스가 시작된 지 2주밖에 되지 않아 싼값에 살 수 있는 고기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런 류의 고깃값은 폭등하겠지.

식량은 점점 고갈될 테니까.

"고기는 불 조절이 생명인데. 조절은 딱히 안되네! 이거."

치이익!

한번 뒤집어서 강불로 세게 익혔다.

그리고 발로 설렁설렁 장작을 빼서 약불로 차근하게 익혀준다.

거기에 더해.

[발빠른 서펜트의 열매]

용과 하나를 깍뚝썰기로 잘라 넣어 같이 구웠다.

[고블린의 열매]

토마토 비슷한 고블린 열매도 넣는다. 꽤 고급진 고기인지 마블링이나 크기 면에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하나를 완전히 굽고 레스팅시킬 동안 나머지 하나를 마저 구웠다.

"다 됐어?"

"넵! 적당한 게 없어서 거래소에서 조금 샀어요. 헷."

"그래, 뭐. 한번 먹을 때 제대로 해서 먹어야지."

시골 마당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촛대와 와인잔까지 있었다.

이건 너무 본격적인 게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렴 어때.

다시 떠올려보지만, 레아는 본래 성의 공주였으니까 이 정도는 내가 이해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먹자."

"네! 감사히 먹을게요."

포크와 나이프를 유려하게 쓰며 교양있게 고기를 잘라 먹는 레아의 모습을 나도 모르게 쳐다봤다.

레아는 고기를 한 점 먹더니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깜빡였다.

"맛있어요!"

"토마토랑 용과랑 같이 먹어봐."

"넵!"

이내 용과랑 같이 고기를 잘라 먹더니 눈이 더 커져서 어깰 흔들었다.

보고 있으면 퍽 귀여웠다.

"나도 먹어볼까."

고기 한점을 잘라 토마토와 함께 입에 넣었다.

스테이크는 역시 생각했던 대로 맛있었고 고블린 열매인 토마토랑 같이 먹으니 감칠맛이 더했다.

느끼함은 싹 잡아주면서도 고기 본연의 맛은 해치지 않는다.

"과연..."

이번엔 용과와 함께.

"음."

이 또한 예상했던 대로 환상의 짝꿍이다.

스테이크의 풍미를 더욱 고풍스럽게 올려주고 아삭한 식감을 더해 미식의 질을 함께 드높였다.

"중독될 거 같네."

"정말로요!"

레아는 꽤 입에 맞았는지 공주였던 신분도 잊은 채 마구마구 먹었다.

하기야, 무인도에 있는 동안은 대부분의 식사를 빵이나 악과로 때웠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차려 먹는다는 호사를 부릴 생각조차 못 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맛있는 걸 먹고 살아야 한다.

레아가 거래소에서 산 와인까지 따라 먹으니 정말 이곳이 악마가 들끓는 마경이 아니라 그냥 평화로운 삶 속인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고마워요."

"... 뭐가?"

"저한테 잘 대해주셔서요."

와인잔을 바라보는 레아의 홍안이 그윽하게 황혼의 빛과 맞물렸다.

서해의 능선 너머로 사라지는 노을과 함께 완연한 밤이 숨어들었던 달과 별과 함께 찾아왔다.

흔들리는 와인잔 안에 밤하늘의 별들이 스며들었다.

"이유가 없는 선의는 없어."

"제가 도움이 되나요?"

"당연하지."

레아의 기프트.

피의 축복은 생명력의 회복과 더불어 강력한 버프 효과를 기대한다.

급박한 전투 때에 그녀의 기프트는 훌륭한 보조다.

카오스 게이트 때도 힐러를 자처하는 자들을 여럿 봤다.

하지만 그들의 회복률은 의약품을 구하기 힘들어진 지금, 빛을 보는 것일 뿐 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 정도의 수준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에 반해 레아의 기프트는 독보적일 정도로 강력한 회복력을 보여준다.

그걸 알기에 돕는 거다.

동료로 삼은 거고 그게 아니었다면 위험한 기부도까지 함께 오지 않았다.

"도움이 돼서 다행이에요."

"..."

뭘까.

레아의 눈에 깃든 빛은.

쓸쓸함과 안도감이 함께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밤은 어둡고, 악마들 덕에 전 세계의 굴뚝 공장들이 기능을 정지해서 그런지 밤하늘은 유독 별이 빛났다.

그래서일까.

난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했다.

"난 이미 결혼했어."

"...! 그럼 부인분은..."

"죽었다."

"아..."

"내 손으로 죽였어."

"..."

그렘린에게 죽었다는 소릴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자신에게로 태어난 놈들로 괜히 자책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부연 설명이 없어서일까.

레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날 죽이려 했어. 바람난 내연남이랑 같이. 그래서 내가 먼저 죽였지."

"아..."

이 정도면 되겠지.

"너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

"!!"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먹었겠지.

근데 이상하게 레아의 볼이 붉다.

머리가 붉고 눈도 붉은 애가 볼까지 벌겋게 익으니 영 이상했다.

왜 그러는 걸까.

배신하지 말라고 돌려 말해서 화가 났나? 자기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냐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다.

사과를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냥 고기나 먹기로 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난 물수건을 적셔 가볍게 땀과 장비의 먼지를 털어냈다.

시골이라 그런지 펌프질을 해야 물이 나왔는데 이쪽 수도 시설은 꽤 멀쩡해 보였다. 덕분에 워터볼을 이용해서 물을 구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게 몸을 씻었다.

"거, 거기 있으시죠? 어디 가시면 안 돼요?"

"응. 여기 있으니까 편히 씻어."

물론 레아까지 씻었다.

여자인데도 평소에 날 배려한다고 씻는 것도 많이 하지 않았다. 이제는 불별도라 이름 지은 무인도의 샘과 계곡은 내가 독을 퍼뜨려서 아직도 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볍게 몸을 씻은 이유는 하나.

아궁이를 땐 온돌방에 들어가서 뜨겁게 몸을 지지기 위해서다.

2주가 넘는 시간.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무인도 생활에서도 땅굴을 파서 지냈던 게 나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마음 편히 눕지도 못했다.

그런데 온돌방이라니!

드디어 뜨겁게 허리를 지질 생각을 하니 감개무량했다.

"역시 한국 사람은 온돌이지."

대한민국의 최첨단 온돌 시스템을 중세시대를 살았던 레아한테도 보여줄 기회가 왔다.

아마 깜짝 놀라겠지.

그러나 잠시 누워보면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저 거의 다 끝났어요."

"응, 먼저 들어가 있을게."

"네, 네!"

먼저 들어가자 방바닥을 확인해볼 것도 없었다.

벌써 후끈후끈한 열기와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캬, 사우나다 사우나."

방바닥을 확인해보자 뜨끈뜨끈, 딱 좋았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딱 알맞게 달궈진 온돌이었다.

처음엔 이불 밑으로 몸을 넣어 등을 달구다가 더워지기 시작하자 옷을 조금 벗고 이불 위로 올라갔다.

"와... 진짜 좋다."

여기서 나오기 싫을 정도로.

너무 안락했다.

"드, 들어갈게요...!"

"응~ 들어와. 지금 엄청 따뜻해."

가볍게 몸 좀 지지다가 불별도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다.

과소비이긴 해도 카오스 상점에서 성역 하나를 사서 안전지대로 만들어서 하룻밤 자야겠다.

그만큼 너무 편했다.

끼익.

푸른 달빛이 문틈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새하얀 다리가 뜨끈한 온돌방을 침투했다.

풀어헤친 적발. 그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속살. 가벼운 실크 소재의 슬립 하나만을 걸친 레아가 얼굴을 붉힌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다리... 셨죠?"

"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인벤토리에서 귀환 스크롤을 꺼냈다.

검은 산양의 카타콤 [1]

29화.

"아, 좋다..."

"저도 좋아요... 하아."

다행스럽게도 약간의 오해를 해결했다. 귀환서를 찢으려던 날 막아선 레아가 이유를 물었고 의도치 않게 살이 부딪쳐 대화를 시도했다.

지금은 서로가 평온해져 온돌방에서 몸을 지지는 중이었다.

살을 넘어 뼛속까지 온기가 닿는 이 느낌은 말로 할 수 없다.

목욕과는 또 다른 힐링이랄까.

"앞뒤 설명 없이 씻고 방으로 들어가자고 했으니 오해할 만했어."

"아, 아니요. 제가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차서... 죄송해요."

솔직히 나도 남자다.

전 와이프 때문에 이런저런 일을 겪었지만, 신체 건장한 대한민국 남아이다 보니 레아의 슬립 차림은 꽤 강렬한 임팩트로 다가왔다.

솔직히 레아는 어리고 이쁘고 착하고 말 잘 듣고 수동적이기 보다는 능동적인 여성이었다.

공주의 신분이었던 것에 비해 가진 능력이나 자기 의지로 뭐든 배우려는 욕구 또한 강하다. 지금 시대에 이 정도면 일등 신붓감이 아닐까 싶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이다.

'결혼 생각 없어.'

결혼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누구를 위하고, 배려하고, 참고하는 게 이제는 싫다.

화목한 가정.

겨우 그런걸 위해서 내 삶의 대부분을 감수하고 불행해져야 한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전의 나는 원했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한번 갔다 왔으니까 안다.

화목한 가정 따위는 없다.

인생에서 필요한건 온전한 나의 행복. 그거면 충분하다.

내가 제일 중요했다.

내 인생은 누구도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니까.

그 간단하고도 자명한 사실을 나는 개고생을 다 하고 깨달았다.

'무엇보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지. 도둑놈이야.'

최소 띠동갑인데 한참 어린 여자애랑 그렇고 그런 관계는 좀 그렇다.

애초에 지금 약간 혹했던 거지 평소에는 지극히 여동생 이상으로는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바닥을 뜨겁게 데우는 게 이렇게 좋을지는 몰랐어요오..."

"그치? 그동안의 피곤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야."

꾸벅, 꾸벅 잠드려고 하는 레아를 보며 나도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거금을 들여서 성역까지 구축했으니 이대로 솔솔 오는 잠을 뿌리칠 필요도 없다.

아주 오랜만에 편히 잠들었다.

그리고 그날.

꿈을 꾸었다.

타앙-! 타앙-!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는 굴.

철창으로 가려진 그곳에서 부러진 검은 산양의 얼굴을 한 누군가가 망치를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는 슬퍼 보였다.

치익, 치익.

턱끝으로 흘러내린 눈물이 달궈진 무쇠에 떨어져 증발했다.

잠시 멈춰진 망치질.

쿵, 쿵.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뿐.

누군가가 재촉하듯 철창을 두드리자 그는 다시금 망치질을 시작했다.

타앙-! 타앙-!

그러자 흠칫. 머리 위로 들어올린 망치를 잠시 멈추었다.

꽈광-!!

어디선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들려왔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러다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망치질을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