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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서 [1]

198화.

대한민국의 국무회의실.

아이러니하게도 청와대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은 국무회의실에서 자신의 위치를 실감했다.

분명 대한민국의 주인이자 현 통지권의 주체는 대통령에게 있었으나, 이곳의 네피림들은 자신을 안중에도 없다는 듯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데몬시드.'

그에게 있을 뿐이었다.

그가 미국 1위라는 메타르와 함께 등장하자마자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단번에 일축됐다.

당연하게 본래 자신의 자리에 앉은 데몬시드는 능숙하게 회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프랑스가 걸어온 도발에도 남자답게 피하지 않고 응했다.

그 결과.

"데몬시드!! 이거 당장 풀어!!"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프랑스의 레온은 안간힘을 주며 붉어진 얼굴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있었다.

데몬시드는 관찰자가 가져온 아다만티움이 담긴 주머니를 품에 넣었고 다른 랭커들은 실시간으로 망신당하는 프랑스의 1위, 레온을 향해 비웃음을 연발했다.

"프랑스 1위는 춤을 잘 추는군!"

"어디, 나도 한번 어울려야 하나? 근데 춤이 너무 구닥다리인데?"

"푸하하핰!"

물론 웃고만 있는 자들과 달리, 충격받은 듯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자들 또한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미국의 메타르, 영국의 마스크, 독일의 레이지 등이 그러했다.

"지속시간이 길군. 저항은 무엇으로 할 수 있지? 역시 마력인가."

"저런 종류의 마법은 처음 봐. 당장 조사해봐."

"건들면 풀리는 거 아냐? 그래봤자 춤만 추는 건데..."

독일의 레이지가 프랑스의 랭커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건들어보려는 프랑스 랭커들의 움직임이 순간 멎었다.

"너희도 춰라."

이내 프랑스의 랭커들조차도 해괴망측한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각 나라를 대표하는 랭커를 저리 대했으니, 후환이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데몬시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왜 그럴까 고민해본 대통령 윤태호는 그 이유가 힘 때문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옆에 있는 한국의 네피림.

거대한 손. 일명 거손이라 불리는 네피림 덕분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종류의 마법인가. 그럼, 여기 놈들 전부가 달려들어도 데몬시드의 털끝도 못 건들겠군."

묘하게 자부심이 서려 있는 음성.

대통령은 자못 믿지 못했다.

"그 정도입니까."

"상대를 춤추게 하는 마법이라면 매혹이나 저주 계열이겠죠. 하지만 그런 종류의 내성을 갖추기란 쉽지 않습니다. 미국 1위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한번 걸리면 풀어내기도 어려워 보이니... 춤추는 중에 공격이라도 당한다면 즉사겠죠."

인간의 취약 부위인 목이나, 심장을 관통당하기라도 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프랑스 랭커들이 레온을 건들지 못하게 하는 걸 봐서는, 물리적 접촉으로 쉽게 풀리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군요..."

사실, 대통령은 네피림들의 힘의 간극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지 못한다.

일평생 정치판에서만 활동하던 사람이기도 했고, 멸망기가 펼쳐졌어도 비교적 안전한 방공호에서 보냈기에 악마를 죽여본 적은 있어도 네피림의 힘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를 경험할 기회는 적었다.

군단장을 보는 것은 차치하고, 그 근처도 가보지 못했으니 데몬시드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솔직한 말로 실감하기 어려웠다. 탱크나 비행기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그 크기를 실감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데몬시드의 힘.

대한민국의 힘.

예전 같았다면 그것이 가져다주는 국가적 이득을 계산하고 이해득실을 따져 명백한 논리로 타국을 쥐어짜 낼 대안을 마련했을 것이다.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 모든 것을 정치생명의 연장할 도구로밖에 보지 못하는 것. 그게 정치인의 인생인 것을 어쩌겠나.

하지만 사람이란 게 꼭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각국의 내로라하는 세계 랭커들 앞에서 대통령은 무엇조차 못했다.

그들이 숨만 쉬고 있음에도 불안했고 호흡이 힘들었으며 괜스레 식은땀이 자꾸만 났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쥐락펴락하는 자신을 생각하며 대한민국의 진정한 통치자로서의 면을 세워보려 했으나 할 수 없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장관들처럼, 대통령도 다르지 않았다.

진정한 강자들 사이에서.

정치인들은 개미만도 못한 존재임을 새삼스럽게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정치질을 해도.

'시대가 변했어. 권력으로 모든 걸 좌지우지하던 시대는 변하고 만 것이야. 너무 오래 걸렸구나.'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외면했는지 모르겠다. 어린애처럼 현실을 부정하며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가 없다. 눈앞에서 보여주는 모든 것이, 이 세상을 유지 시킬 테니.

회의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프랑스의 랭커는 이를 갈며 어디론가 사라졌고 다른 랭커들은 정부가 마련한 숙소로 향했다.

"대통령님."

"예?"

"현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아..."

관찰자의 물음에 대통령은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모든 상황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현자와 같은 답을 내놓는 관찰자 앞에서 일개 정치인에 불과한 자신의 견해가 대체 무슨 도움이 될까.

젊고, 힘이 있는 저들의 눈에 자신은 그저 힘도, 권력도 잃어버린 옛 추억에 젖은 노인일 뿐인 것을.

"프랑스와 브라질 네피림들의 동태를 잘 살피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들을 왜..."

"프랑스와 브라질의 랭커들이 막역한 사이라고 그러더군요. 어울리지는 않습니다만."

"여기는 대한민국입니다."

"아시잖습니까. 랭커들은 대개 자존심이 굉장히 강합니다. 프랑스의 레온이란 자는 특히 호승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호언장담한 내기에서 패배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가 아니더라도 협회장님을 노리는 랭커들은 많아요. 적이 많으신 분이라서요."

"예. 아무래도 그렇지요."

대통령은 관찰자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대번에 파악했다.

"트라움에서 관리를 해야겠군요."

"예, 적어도 한국에 있을 때까지는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할 겁니다. 프랑스 랭커들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정부의 인력을 동원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 몰라 그러니 화성 부근에도 사람을 배치시켜 주십시오."

"예? 거기엔 왜..."

"노파심일 뿐입니다만, 혹시나 타국의 랭커들이 그곳에 모습을 보인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주셔야 할 겁니다. 조국을 위한 일입니다."

조국.

그 큰 울림에 대통령은 대강의 사정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곳만큼은 내 윤태호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장관들과 함께 사라지는 대통령을 본 관찰자는 한숨을 후 뱉었다.

"가능성이 있을까요?"

관찰자의 곁으로는 언제 다가왔는지 소서리스가 자리했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죠. 제가 알아본 바로 레온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꽤 집요하다고 하니까요."

"그래도 대통령에게 알리실 필요까지는 없다고 보는데요. 바보도 아니고 눈치챘을 거예요."

대통령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관찰자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협회장님 지시였습니다."

"네? 대체 왜요? 굳이 그런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데요."

"글쎄요."

관찰자는 자신의 안경을 치켜올리고는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 그렇게만 말씀하셨습니다."

"갑자기 무슨 시험을? 이해가 안 돼요."

"의정부의 네크로맨서를 기억하십니까."

"의정부요? 아! 알아요. 하지만 머리가 돌아버렸다고 하던데..."

"얼마 전에 협회장님 지시로 의정부에 있는 그를 화성으로 이주시켰습니다. 협회장님이 직접 그와 만나고 이주시켰죠. 아마도 그분을 시험하고 싶어 하는 거 같았습니다."

"그럼 대통령은..."

관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끼겠죠."

*

화성시 인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가득 흐르는 화성시의 밤하늘은 달이 구름에 숨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서울과 달리, 지방 지역은 사람의 인기척이 매우 적었는데 화성 또한 그와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더했다.

이곳엔 살아 있는 시체들이 줄기차게 움직이는 동네로 유명했으니까.

"여기가 확실해?"

이 난리 통에도 아직 건물의 외관을 유지한 빌딩 옥상의 난간을 밟고 있는 프랑스의 랭킹 1위.

레온이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이를 갈며 말했다.

"확실해. 이쪽으로 이동했어. 사람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거든. 비행으로 날아갔다고 해도 흔적은 남지. 내 눈은 마력의 흔적까지 쫓으니까."

레온의 의문에 답한 것은 프랑스의 오쿨루스였다.

그는 상대를 추적하는 스킬을 하나 지니고 있었는데, 자신의 기프트와 결합하여 기막힌 시너지를 발휘하는 프랑스의 랭커였다.

그의 눈에는 청와대에서부터 기가 막힌 속도로 날아간, 아니. 정확하게는 바람을 박차고 간 흔적을 보았다.

'엄청난 속도다. 비행과 거의 다를 바가 없지만 폭발력이 대단해. 전투에 있어서는 비행 따위보다 좋다. 폭발적인 스피드, 바람을 기본 베이스로 한 스킬이야. 이동과 공격이 동시에 가능한 녀석이군... 확실히 범상치 않은 스킬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흔적이 많이도 남았다.

그의 눈에는 밤하늘을 푸르게 수놓은 그의 마력이 오로라를 보는 것보다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오쿨루스 말이 맞나 본데?"

프랑스 랭커. 볼디시안이 턱짓하는 곳을 보자 도시를 빼곡하게 수놓은 좀비들 외에도 굉장히 수상한 사람들 몇이 보였다.

"정부 쪽인가?"

"아마도."

"그럼 맞겠군. 이 근처겠어."

"이 좀비들은 대체 뭐야? 대한민국은 이것들도 처리 못 하나?"

이에 레온은 씨익 미소 지었다.

"더미겠지."

"아하, 더미! 그렇군. 데몬시드 녀석 머리 좀 쓰는데?"

"근데 레온, 괜찮은 거냐? 아까 그거 또 당하면 이번엔 죽을 텐데."

회의실에서 프랑스 랭커들이 단체로 춤추는 모습은 굴욕 중의 굴욕이었다.

나라 망신이라 할 정도로 대굴욕.

이런 치욕은 어디에서도 느껴본 적 없었다.

"마스크, 그 망할 년은 우리 춤을 핸드폰으로 영상 촬영까지 했다. 그 수모를 겪고도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만 레온. 우린 아직 놈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어. 내 눈으로도 그 거지 같은 마법은 파훼하지 못했다. 대단히 높은 마력이 아니라면 놈의 '구애의 춤'을 파훼할 수는 없을 거다."

"물론 나도 생각이 없는 건 아냐."

레온도 막연히 복수하기 위해 무턱대고 데몬시드를 찾는 건 결코 아니었다.

"데몬시드가 운영하는 협회에서는 브릭서라는 걸 랭커들에게 유통한다고 한다."

"브릭서? 그게 뭐지?"

"일종의 엘릭서라더군. 하지만 그 효과는 상점에서 판매되는 엘릭서보다 월등히 높은 효과라고 한다."

"그럴 수 있나?"

"프랑스에도 비슷한 놈이 있지 않나. 게다가 데몬시드. 기프트 명을 봐도 느낌이 오지 않나?"

"그렇군. 놈도 '그런' 쪽인가 보군."

씨앗을 이루고 그것의 작물을 키워 성장하는 방식.

"그럼 놈의 작물을 훔칠 건가."

"그래. 물론 오늘은 아니다. 내일, 다시 회의가 벌어지는 정오. 그때 우린 회의에 불참한다."

놈이 청와대에서 열심히 앞으로의 일을 토론할 때.

"우리들은 놈의 근거지를 턴다."

놈의 작물을 모조리 털어버린다.

만약 예상이 빗나가 아무것도 없다면 살림살이나 놈의 여자라도 빼앗아 복수를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제아무리 놈이라도 인질을 잡으면 소극적일 수밖에 없지."

"인질이 없다면?"

"그럼 그냥 집이나 털지 뭐. 모르긴 몰라도 대량으로 한국 놈들한테 뿌릴 정도면 규모가 꽤 거대할걸?"

"그럼 우리 이제 한국이랑은 완전히 척지는 건가?"

"어차피 한국 같은 소국이랑은 척져도 돼. 세상이 이렇게 됐다지만 꼴랑 이만한 땅에 뭘... 가만히 내버려 둬도 곧 망하게 생겼던데 뭐."

그러니 자신들의 목적을 완수하는 데에 걸림돌은 더 없다.

나머지는 시간이 알아서 해줄 것.

"내일 보자, 개새끼야."

*

다음날.

"갔나?"

"갔을걸? 시간이 다 됐어."

중천에 떠오른 해.

데몬시드는 청와대의 국무회의실로 향했을 때는 놈의 거처는 비어있을 터.

"숨겨져 있을 거다. 셋으로 나뉘어서 거처를 찾아보자. 신호는 쪽지로 해."

탓!!

레온과 오쿨루스가 사라지고 볼디시안은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오쿨루스가 바다 쪽으로 갔으니, 난 이쪽을 뒤져볼까."

폐허 도시 안에는 좀비들이 득시글거리지만 랭커들에게 좀비는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귀찮은 파리 정도의 존재감에 불과했다.

프랑스 랭킹 2위인 볼디시안도 좀비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찮고 냄새나는 더러운 것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분명 아니었다.

"근데... 원래 이렇게 많았나."

어제도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째 어제보다 더욱 많아졌다.

볼디시안이 있는 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본 거리엔 좀비들의 수가 가득 차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

거리를 빼곡하게 가득 채운 좀비들의 숫자는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그사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 병장님, 제가 그런 게 아니지 말입니다. 저는 그러려고 그랬던 게..."

좀비들 사이에 사람이 있었다.

무언가를 연신 중얼거렸는데 한국의 군복을 입은 군인처럼 보였다.

"박 병장님? 제가 말입니까? 하지만 저도 무섭지 말입니다...예!? 아, 알겠습니다. 영창은 가기 싫습니다! 영창! 영창! 영창 가면 전역이 늦어지지 말입니다! 아아! 아아아아아아아!!"

그득! 콰득!

"뭐야 저 새끼. 머리가 돌았나?"

간혹 저런 자들이 있다.

동료의 죽음, 가족의 죽음. 현실의 잔혹함 때문에 정신을 놓고 미치광이가 되어버리는 네피림들이.

"네크로맨서인가. 나약한 버러지군."

볼디시안은 그 또한 그런 놈이라 생각하며 무시하려는 찰나.

점점 무시할 수가 없었다.

"..."

네크로맨서가 돌연 곁의 좀비를 물어뜯고, 목을 잡으면 그들의 살과 뼈가 그에게 달라붙어 크기가 점점 거대해지는 것이었다.

시체로 만들어진 거인.

점점 커지는 덩치와 위압감에 볼디시안도 마냥 놈을 무시하지 못했다.

"거지 같은 동네에도 숨겨놨군."

저놈이 있다면 마냥 쉽게 찾아내지는 못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든 탐색을 하려면 좀비들을 처리하기는 해야 했으니 볼디시안은 네크로맨서를 처리하기로 했다.

"헤일로도 없는 버러지를 상대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지."

하물며 그는 정신 나간 네크로맨서.

"좀비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나사 빠진 마법사는 내 상대가 아니야."

좀비에게 가장 취약한 것.

그것은 인류를 번창시킨 불.

볼디시안은 불을 다루는 기프트가 성장한 랭커. 전신이 불로 뒤덮여, 불 그 자체가 되는 네피림이었다.

그런 그에게 좀비? 시체? 그것으로 엮어 강화한 신체 강화술 따위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하물며 저런 미치광이에게 헤일로가 있을 가능성도 전무 했으니 말이다.

쾅! 콰직! 콰아아!

시체로 엮어 만든 괴물의 모습으로 빌딩을 타고 올라오는 네크로맨서를 보며 볼디시안은 온몸의 불길을 자아내며, 빌딩을 모조리 태워버릴 화력을 끌어올렸다.

"애초에 나한테 왜 달려드는 거야? 이해를 못 하겠군. 헤일로를 쓰면 모조리 태워버릴 순 있긴 한데... 그럼 괜히 눈치챌 수도 있으니."

쾅-!!

마침내 옥상까지 올라온 네크로맨서는 시체로 엮어 만든 온몸이 타들어 가면서도 뭐라 중얼거렸다.

"박 병장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대신 죽일게요.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뭐라는 거야 미친놈."

화마 그 자체가 된 볼디시안이 거대한 불길로 주먹을 만들어 휘둘렀다.

단순한 행위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네크로맨서의 시체로 엮은 신체는 모조리 불타 뼈가 드러나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정도의 화력.

그때였다.

"네가, 죽였지?"

서늘한 음성과 함께, 시체 덩어리 속에서 서릿발과 같은 한기가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뭣!"

볼디시안은 당황으로 물들었다.

시체 덩어리였던 것이 주변 모든 것을 얼리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뼈가...'

놈의 등 뒤로, 아니 몸으로 온갖 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방천지에서, 좀비와 스켈레톤들에게서 뼈와 살점이 뜯겨져 나와 오직 그를 향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온 세상이 뼈와 썩은 살점으로 뭉쳐져 뼈로 이뤄진 거인을 만들어냈다.

거대한 스켈레톤의 머리와 날개.

그 머리 위에는 충격적이게도.

"헤일로?"

심연처럼 시꺼먼 헤일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뼈를 찌르는 한기와 함께.

거대한 스켈레톤. 아니, 사신의 낫이 볼디시안을 향해 짓쳐 들었다.

네크로맨서 [2]

199화.

"괜찮을까요. 전 걱정됩니다."

청와대의 국무회의실 안.

회의가 시작되기 전, 관찰자는 데몬시드에게 그런 말을 해왔다.

"뭐가 말이지."

"아무래도, 정신이 조금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까. 게다가 상대는 세계 랭킹 6위의 프랑스입니다. 아무리 시험해보고 싶으셨다고 해도 괜한 짓을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괜한 짓을 한 게 아니냐. 왜 굳이 그런 위험부담을 짊어지는 것이냐고.

불별도는 데몬시드의 근간이라 볼 수 있는 농작물이 있는 땅.

그곳에서 생산되는 악과의 양은 점점 늘어나고 있고, 다양성 또한 많다.

게다가 그뿐인가, 근처의 섬에서는 브란스가 그것들을 조합해 브릭서를 만드는 데 큰 힘을 들이고 있다.

한국의 네피림들이 서서히 강해지는 뿌리가 그곳에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제일 중요한 곳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그곳을.

시험이라는 긴장감 없는 이유로 적들에게 내던져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관찰자의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데몬시드는 완강했다.

"내가 언제나 그곳에 붙어 있을 수는 없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다. 이 세상에 내 목숨을 노리는 적들은 어디든지 있을 것이고, 그것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을 테니까."

군단장을 잡으러 갈 때나, 카오스 게이트가 벌어질 때 불별도는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랭커들이나 다른 악마들도 마음만 먹는다면 내 본진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건 시간문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방비가 되는지 시험해보는 게 맞다.

프랑스 놈들은 그 시험대로 적당한 힘을 가진 랭커였다.

"할 수 있는 건 거의 했다고 본다. 현재로서는 그게 최선이야."

그럼에도 실패한다면? 그때야말로 변화를 꾀해야 할 때.

섬이 주는 안정감은 이제 사라졌다.

하늘을 유영하는 스킬을 지닌 존재들이 꽤 많이 나타나고 있고, 서펜트도 예전의 위용을 부리지 못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섬으로 향할 수 있는 게 지금의 네피림들 수준.

이전에 비해 섬 자체가 주는 장점은 꽤 감소했다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난 녀석의 강함을 믿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더군."

"그가 말입니까?"

"응. 꽤 치밀한 구석도 있었고. 그게 아니었다면 굳이 화성으로 헤일로를 지원까지 해주며 데려오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제정신이..."

"다들 착각하는 게 있더군."

"뭐가 말입니까?"

미간을 좁히는 관찰자를 바라본 데몬시드가 피식 웃었다.

"그 녀석, 제정신이야."

*

볼디시안이 한창 싸우고 있을 때.

레온과 오쿨루스는 데몬시드가 남긴 흔적을 따라 이동했다.

어느새 화성의 항구로 이동한 그들은 정부의 가드를 처리한 직후였다.

"지원! 지원 요청! 지원을...! 컥!"

가드를 처리한 레온과 오쿨루스는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섬인가 본데. 저쪽까지 흔적이 남아 있어. 여기서 남쪽. 그곳에 있는 섬으로 보인다."

"함정일 가능성은?"

"우회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이 근방의 섬은 전부 뒤지는 게 좋지."

"그렇다면, 직진이지."

그때였다.

-그어어어.

좀비 떼들이 나타났다.

"뭐야, 이것들은."

하지만 무시하기엔 수가 많다.

좀비와 스켈레톤이 한데 모여 있는데 그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순식간에 골목 어귀에서 몰려온 놈들은 삽시에 산처럼 불어났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산처럼 쌓여 시체와 시체의 산을 이루며 좀비들이 한데 엉켜서 떨어져 내렸다.

"문지기가 있긴 있나 보군. 이러면 더 할 맛이 나지."

"레온, 여기는 내가 맡겠다. 놈이 눈치챘을지 모르니 지금부터는 속전속결이 맞다. 난 좀비들의 숙주를 찾아 제거하고 볼디와 합류할 테니까."

"오케이. 맡긴다."

고작해야 좀비.

놈들의 숙주는 네크로맨서일 터.

그리 위협적인 적도 아니다.

'볼디시안과 오쿨루스라면 네크로맨서의 카운터니까.'

믿고 맡길 수 있다는 확신이 레온에게는 있었다.

레온이 단박에 수면 위를 박차고 달려간 직후. 오쿨루스는 달려드는 시체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옵시먼트."

그러자 그의 시야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시간이 멈춘 듯, 정지됐다.

"옵시먼트는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정지시킨다. 어디의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는 게 좋아. 우린 네가 상대했던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니까."

오쿨루스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마치 그러면 안 되는 것처럼 눈이 충혈되고 눈물이 흘렀음에도 말이다.

게다가 그와 동시에 오쿨루스의 기프트를 사용해 좀비를 조종하는 숙주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마력의 흔적.

그것을 찾으면 되는 간편한 일.

다른 이라면 모를까 오쿨루스에게 이런 일은 너무도 쉬웠다. 천천히 마력의 흐름을 따라, 좀비들을 조종하는 본체를 찾아내려는 순간.

탕-!

"오쿨로보스!"

총소리와 동시에 외쳐진 스킬.

오쿨루스의 몸을 감싸는 거대한 눈알이 총성으로 시작된 저격을 가까스로 막았다.

'저격?'

보통 저격이 아니다.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랭커에게 총은 더 이상 두려움의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방금의 저격은 마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오쿨루스의 '오쿨로보스'는 눈알을 소환하는 방어 스킬. 와이번의 발톱으로도 뚫지 못하는 눈이다.

'근데 오쿨로보스가...'

현대의 냉병기 저격총 따위에 절반 정도 뚫렸다.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

확실히 탱크도 뚫는 대물 저격총이 있기는 하지만 오쿨로보스의 눈은 그보다 훨씬 견고하다.

방금의 저격은 그것보다 확연하게 높은 수준의 총알이라는 것.

'독일의 레이지도 아니고서야...'

오쿨루스는 총알을 살펴봤다.

오쿨보로스에 박힌 총알은 확실히 크고 길었으며 검었는데 현대적인 실탄과는 거리가 조금 멀었다.

"손가락?"

검게 그을리고 탔지만 확실하다.

손가락이었다.

그때였다.

돌연 살펴보던 검게 탄 손가락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더니 좀비 떼가 있는 곳으로 튕겨 나갔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즉시 오쿨루스는 자신의 눈으로 흔적을 찾아 저 손가락을 쏜 곳이 어디 인지 확인했다.

"오큘러스."

오쿨루스의 헤일로가 떠올랐다.

그는 거대한 눈알에 날개가 달린 기괴한 형태로 변했는데, 즉시 자신을 공격한 본체를 찾아냈다.

'하나가 아니야?'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마력의 흐름으로 보는 본체는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었다.

폐허더미에 하나, 빌딩의 옥상에 하나, 좀비 무리 속에 하나. 그것도 시시각각 변하고 달라졌다.

그뿐만 아니다.

돌연 뇌수가 터진 좀비 머리 위로 헤일로가 생기더니 좀비들끼리 뭉쳐 거대 구울로 변해 달려들었다.

오쿨루스는 즉시 놈을 죽였지만, 몸이 터짐과 동시에 헤일로는 또 다른 스켈레톤에게 넘어가 강화됐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다.

놈은 몸을 바꾸며 조종할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아."

자신의 힘으로도 본체를 찾아낼 수가 없음은 물론이요, 놈에게 농락당하는 듯한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

오쿨루스의 헤일로는 거대한 눈으로 변해 자신이 보는 모든 흐름을 읽거나 눈으로 적의 움직임을 봉인하거나 레이저를 발사하는 것인데 좀비들의 수가 도시 하나를 삼킬 만큼 많다 보니 아무리 죽여도 끝이 없었다.

좀비들이 터지고 분쇄돼도 살이 부서지면 뼈를 맞춰 다시 일어나니 이대로 가다간 놈의 의도대로 그저 힘을 소비하게만 될 터. 어찌할 방도가 없다면 남은 건 하나.

"볼디시안! 볼디! 어디 있어!!"

동료와 합류하여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타당했다.

하늘 높이 떠오른 오쿨루스는 빠르게 볼디시안의 기척을 찾았다.

좀비들이 자기 몸을 사다리처럼 만들어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화살과 총을 쏴대는 방해가 있었으나 그를 죽이기란 요원한 수준이었다.

"볼디!!"

그때 어느 빌딩 옥상에 멍청하게 서 있는 볼디시안을 찾아내자 안도와 약간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뭐 하고 있는 거냐! 구경만 하지 말고 저 거머리들 좀 떼어내란 말이야!"

힘겹게 소리쳤지만 볼디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우두커니 있었다.

"볼디...?"

볼디시안은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하지 못했다.

"볼디!!"

볼디시안의 두 눈은 뽑혀 있었고 두 손목과 발목이 잘렸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슴이 뚫려 있었는데 심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손발과 장기를 훼손당한 채로 그는 꿈틀꿈틀 움직였다.

좀비로 변한 지 꽤 되어 보였다.

"젠장! 영광스러운 전장도 아닌 고작 이딴 곳에서!!"

동료의 죽음에 분노하는 오쿨루스와 함께, 빌딩에서 뼈들이 모여들며 거대한 사신의 모습이 등장했다.

사신의 머리 위에는 헤일로가 떠올랐는데 그 중심에는 군복을 입은 사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박 병장님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잘못했지 말입니다... 제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닙니다! 기, 김 병장님이!"

하나가 아니었다.

건너편 빌라 옥상에는 기괴한 군복의 좀비가 머리 위에 헤일로를 띄워놓은 채 자신을 저격하고 있었다.

"김 일병 개새끼야 조용하고 적이나 죽여라. 한 번 더 죽여버리기 전에. 너 때문에 타 죽을 뻔했잖아!!"

"죄송함다! 죄송함다! 죄송함다! 다신 안 그러겠슴다! 시정하겠슴다!!"

서걱! 김 일병이 변한 사신이 낫을 휘두르자 빌딩이 잘려 나가고 오쿨루스의 날개가 잘렸다.

"미친!"

어마어마한 절삭력.

닿지도 않았는데 풍압만으로 자신의 헤일로로 만든 눈의 날개가 잘렸다.

기우뚱 기울어지는 그때 오쿨루스는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해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거대한 사신과 시체 누더기로 이루어진 김 병장이란 자를 함께 노렸다.

지이잉-!

콰과가가가가가각-!!

'공격은...!'

적중했다.

오쿨루스의 작은 눈 여러 개가 사방에 떠올라 적의 동태를 확인했다.

거대 사신은 본체와 함께 몸이 반으로 갈라졌고 박 병장이란 저격 좀비는 머리통이 터졌다. 추락하는 중이었으나 오쿨루스는 안심했다.

일단 헤일로가 생긴 둘을 죽였다. 둘 중 누군가가 본체인지 몰랐으나 상황은 종료됐으리라 생각했다.

쾅-!!

하지만 아니었다.

"어떻게!!"

"그냥 두면 김 병장님이 절 죽일 검다! 박 병장님한테 또 혼납니다! 심장 주물럭 당하지 말임다!"

상체만 남은 채로 사신을 조종하는 김 일병은 오쿨루스를 보호하는 눈알을 주먹으로 쿵쿵! 내려쳤다.

"그래, 그거라고! 하면 되잖아! 하면! 그때도 그냥 했으면 이 꼴이 안 됐잖아! 개쉐끼야!!"

머리통이 터진 김 병장도 어느새인가 머리가 새로 돋아나 있었다.

다른 좀비의 머리를 제 머리에 끼우더니 살점이 옮겨붙어 와 본래의 얼굴이 재생되어 있었다.

철컥, 쾅-!

김 병장의 살점으로 이어 붙어진 기괴한 저격총에서 불꽃을 뿜었다. 날아오는 건 총알이 아닌, 단검을 쥔 채로 잘려진 팔.

콰직!!

잘려진 팔은 단검을 오쿨루스의 눈알에 박아넣고 중지를 펼쳐 보였다.

콰아아아아앙-!!

손이 터졌다. 네크로맨서의 특기 중 하나인 시체 폭발이었다.

"내 손, 존나게 아프잖아 박 병장 개새끼야!!"

"저도 아프지 말임다! 제가 옆에 있는데 터트리는 건 너무 하시지 말임다!"

김 병장의 떨어진 손은 다시금 좀비들의 살점이 모여 돋아났다.

"이미 죽어서 안 아프신 거 알지 말임다. 김 병장넴."

"뒤질래 일병 새끼야! 어딜 짬찌 새끼가 병장 말에 토를 달아? 그때도 네가 토 달아서 이렇게 됐잖아!"

"죄송합니다! 죄송, 죄송... 그때 김 병장님을 죽일 걸 그랬슴다. 그랬으면 이렇게까지 안 됐는데 말임다!"

"뭐야 인마!?"

"히익! 들리셨슴까? 죄송함다!"

눈알의 실드가 박살 나며 오쿨루스의 눈이 추락했다. 오쿨루스는 떨어지면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분명 거대한 사신의 해골 안에 있는 김 일병이라는 놈도, 김 병장이라는 놈도 모두 시체다.

하지만 시체인데 말을 제대로 구사하고 머리 위에는 헤일로도 있다.

죽은 자가 헤일로라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대체 어떻게...'

좀비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오쿨루스의 머리와 눈은 정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내 좀비들 사이.

손가락을 이어 붙여 만든 헤일로를 머리 위에 띄우고 있는 장발의 사내가 시체를 밟으며 다가왔다.

죽은 사람처럼 새하얀 피부의 사내는 좀비에게 물어뜯기는 오쿨루스를 내려다보고는 등을 돌렸다.

"기다... 려!"

오쿨루스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그 사내를 공격했다.

하나 남은 눈에서 쏘아진 레이저는 단숨에 사내의 가슴을 꿰뚫었다.

누가 봐도 이 좀비들의 주인은 그 사내였다.

"바, 박 병장님!! 안 돼에!! 죽으셨습니까? 이 새끼 드디어 죽었슴까?!"

"아악! 아아아아악!! 아파! 아파아아! 아프다고 박 병장 개쉐끼야아아아! 내 심장 간수 잘하라고!!"

하지만 심장이 꿰뚫린 박 병장이란 자는 금세 다시 일어났다.

대신 김 병장이란 좀비가 가슴을 부여잡고 아프다며 발버둥 쳤다.

"역시 박 병장님이지 말입니다! 하나도 아쉬워하지 않았지 말임다!"

그제야 오쿨루스는 깨달았다.

'리치...'

저들은 하나이며 셋.

셋 모두를 동시에 죽이지 않으면 죽지 않는 괴물이라고 말이다.

*

같은 시각.

프랑스의 1위 레온은 천신만고 끝에 어떤 섬에 도착했다.

무수한 나무들 사이, 각양각색의 열매가 무수히 돋아나 있다.

맡아지는 향기는 침샘을 자극했고 어마어마한 기운이 담겨져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이거란 말이지. 정말 이런 걸 키우고 있었다니. 하!"

이것들 모두를 독식하고 불태워버리면 그놈의 면상이 어떨까 하는 생각만으로 도파민이 뇌수를 뚫을 것만 같았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캬캭!

-캭!

쾅-!!

자신을 막아선 그렘린 두 마리가 꽤 큰 문제였다.

고작 3레벨에 해당되는 그렘린의 수준이 어마어마하게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그렘린의 속도와 힘에 어이가 없을 정도.

강력한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날개로 인한 속도와 근력의 수치가 엄청나게 높을 뿐인 것.

단지 그것만인데 공격 하나하나가 살벌해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래봤자 그렘린이지!"

하지만 그래봤자 그렘린.

둘의 연계가 상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프랑스 1위인 레온을 당해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레온은 자신의 기프트를 사용했다.

머리 위에 떠오른 헤일로는 그의 피부를 질기고 단단한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냈다.

그 즉시, 그렘린들이 공격했지만 그들의 창은 레온의 피부를 뚫어내지 못했다.

그에게 축적된 데미지는 반사되어 큰 폭발을 일으켰다.

쾅-!!

크게 다친 그렘린들은 힘겹게 일어나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칵 카카카카카칵!!!

-캬캭 캬아아아아아아아!

"시끄럽다 이 새끼들아."

사자의 탈을 헤라클레스 같은 모습으로 변한 레온은 그렘린들을 끝장내려 달려갔지만 그러지 못했다.

"음? 거미줄?"

어느새 자신의 몸이 보이지 않는 줄에 의해 갈라져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파지직!

거기에 더해 전류까지 흐르자 맷집이 단단한 레온이라도 잠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괴롭히지 마."

"아이?"

이내 보이는 건 은발의 소녀.

하지만 보통 소녀는 아니었다.

어느새 눈 주변에 다른 작은 눈들이 돋아나 있었고, 그녀의 주위는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햇빛에 반짝거렸기 때문이었다.

"너, 데몬시드의 딸이냐?"

"데몬시드, 아빠. 강철 군주, 엄마."

씨익.

레온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잘됐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도록 이어지지 못했다.

화아아악-!!

쿵!!

"아이 씨, 또 뭐가 이렇게 많이 나와! 나올 거면 한꺼번에 나오라고!"

또 뭔가가 나타났다. 하늘에서 혜성처럼 떨어져 내린 붉은 무언가.

"또 그렘린이야?"

그렘린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앞서 나타났던 놈들보다 덩치가 두 배 가까이 큰 그렘린.

[괴력의 패도적인 마나번 그렘린 그램]

피처럼 붉은 적창을 든 채로, 자그마치 세 개의 수식언을 지닌 챔피언급 그렘린이었다.

하지만 풍기는 기세는 어느 날엔가 마주했던 군단장과 동급.

레온은 섬에 도착한 이래, 처음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군단장 그램

200화.

관찰자는 그래도 납득하지 못했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만약, 그가 졌다면. 혹은 막아내지 못하고 뚫렸다면 어떡합니까."

네크로맨서.

정확하게는 리치라고 해야 할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가 패배했다 해도 불별도를 수호할 이들은 꽤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기대 중인 녀석이 하나 있다.

"그래도 괜찮아. 내 비장의 수가 아직 남아 있거든."

"비장의 수요?"

"꽤 공들여 키운 놈이 하나 있어. 너도 자주 보지 않았나."

놈을 떠올리며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램.

멸망기가 도래한 이후, 최초 연을 맺은 친구이자 불별도의 수호자.

"꽤 각별한 사이거든. 어쩌면 내가 다시 태어나고 처음 사귄 친구 같은 녀석이지."

시작부터 지금까지 녀석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곳을 지키고 있다.

그게 제 사명이라도 된다는 듯.

"관찰자. 수식언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알고 있나."

"악마가 쓰는 능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챔피언급은 그저 네피림과 비슷한 정도지만 군단장급이 쓰는 수식언은 헤일로와 비슷한 정도로 인식하고 있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그러하다. 그럼 수식언을 갖는 방법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수식언이라는 게 신기하게도 네피림은 갖지 못하지만, 악마는 또 아닌 거 같더라고."

레아는 수식언을 갖지 못했다.

아마도 날 제외하면 수식언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은 전무하겠지.

하지만 악마라면 어떨까.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악마들은 본래 수식언을..."

"내 악과를 먹는다면 다르지."

"아."

어쩌면 나 다음으로 가장 많은 악과를 먹은 녀석이라고 한다면 그 녀석밖에 없다.

그런 녀석이, 수식언이 깃든 챔피언급 악과를 그동안 먹지 않았을까?

아니. 녀석은 불별도에 있는 악과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

내준 적도 없지만 그게 자신의 권한이라고 믿으며 누구보다 탐욕스럽게 불별도의 악과를 지킨다.

"하지만 그는 그렘린. 태생적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레벨 3의 그렘린.

챔피언급인 존재가 된다 하더라도 그 레벨은 현재 북으로 남하하는 카이삭스의 기사들만 못 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아무리 레벨을 올려봤자 태생적 한계가 발목을 붙잡을 거라는 것.

이해 못 할 이유는 아니다.

하지만.

"관찰자."

"예."

"나랑 친구인 녀석은 이 세상에 몇 없어. 그램은 그중 하나다."

관찰자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관찰자. 다중 수식언을 가진 챔피언들은 얼마나 강했지?"

"레벨이 낮다 하더라도 꽤 강했죠. 물리와 마법 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라도 하면 공격이 안 먹혀서 꽤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중 수식언에 대해 이야기하던 관찰자의 눈이 이내 치켜 떠졌다.

"그럼 그램은... 몇 개의 수식언을..."

관찰자의 질문에 난 피식 웃으며 답했다.

"글쎄? 수식언이 세 개 이상 되면 제대로 안 뜨더라고."

그램이 얼마나 강해졌을지 궁금한 건, 다른 누구보다 내가 더 했다.

"얼마나 강해졌을까. 기대되네."

*

콰직! 쾅! 쾅!!

"커헉! 컥! 푸확!!"

레온은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다중 수식언을 가진 그렘린이 나타나자마자 상황이 역전됐다.

자신의 헤일로, 라이온하트는 기프트의 힘을 더욱 증폭시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능력을 가졌다.

레온의 기프트는 받은 데미지를 축적해서 방출시키는 카운터적인 면이 강한 힘.

근데 지금, 그 힘이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답은 간단했다.

'마나가...!'

아무리 강력한 스킬이든 헤일로를 가지고 있다 한들. 그것을 활성화할 자원이 없다면 사용할 수 없음은 아주 기본적인 상식.

그램이라는 그렘린은 레온의 마나를 순식간에 다 태워버렸고, 어마어마한 괴력과 재생력으로 그를 무참히 박살 내는 중이었다.

쾅-!!

"컥!!"

손에 쥔 붉은 창은 레온의 어깨를 꿰뚫어 지면과 고정시켰고 주먹은 복부를 강타한다.

얼마나 힘이 강한지 주먹 한 방에 내장이 진탕되고 갈비뼈가 모조리 박살 나고 있었다.

[괴력의 패도적인 마나번 그렘린 그램]

종족 값은 그저 그렘린.

하지만 수식언을 3개 이상 가지고 있는 그램의 힘은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기본적인 스탯이 일반적인 네피림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대부분의 스탯이 100을 넘기는 것은 당연했으니 마나번을 쓰지 않았더라도 레온은 애초에 승산이 없었다.

100이 넘는 근력 스탯에 더해 수식언 '괴력'은 일시적인 힘을 3배 이상 가깝게 상승시킨다.

'패도'는 몸의 재생력을 강화시키고 피해를 입으면 입을수록 광기에 취해 더욱 난폭하고 강력해진다.

'마나번'은 공격 자체에 스며들어 피해를 입힐 때마다 마나를 태웠다.

그것이 아니라도 그램이 지금까지 익힌 수식언은 총 일곱 개.

[괴력] [패도] [마나번] [포효] [뇌풍] [불] [항마력]이 존재했다.

-캬아아아아아악!!

"그렘린 그램의 포효가 당신에게 위압을 가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하락합니다."

"그램의 포효가 동료라 생각하는 자들의 사기를 끌어 올립니다."

"그렘린, '린'과 '란'의 힘이 대폭 상승합니다."

"그램의 항마력이 당신의 공격을 54% 감소시킵니다."

"당신의 공격에 그램의 패도적인이 활성화됩니다."

"상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의 패도가 짙어집니다."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이 '치명적인' 출혈을 일으킵니다!"

"마나번이 마나를 태웁니다."

"마나가 부족합니다!"

"헤일로가 종료됩니다!"

"마나가 부족합니다!"

레온의 스탯은 랭커임을 감안해도 꽤 높은 수준이었다.

평균 능력치가 50을 넘어섰으니까.

하지만 그래봤자 겨우 그 정도.

온갖 수식언을 다 달고 있는 그램에겐 세계 랭킹 6위의 네피림이라 하더라도 그저 섬을 침입한 날벌레 중 하나일 뿐이었다.

"살려줘! 살려주어어어어! 아아악!"

콰드득!

마지막 일격을 박아 넣은 그램은 프랑스의 랭커였던 것을 바다에 내던지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캬캭!

-캬캬캭!

-캬캭!

기부도를 지키는 린과 란에게 한껏 추앙받으며 으스대던 그램은 엘리스를 바라보며 캭캭! 거리고는 다시금 불별도로 날아가 버렸다.

"확실히 강하네요."

이내 빼곡히 돋아난 데몬트리 옆에서 레아와 브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나 상황이 안 좋아지면 가세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져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데몬시드, 그가 말한 대로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었구나. 허허... 저 쪼그만 놈이 저리 강해졌을 줄이야."

"화성님은 이번에 싸우면서 그램이 각성 비슷한 걸 해서, 다른 군단장들처럼 수식언이 축약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셨는데... 그 정도로 강한 적도 아니었네요."

"마나를 태우는 게 사기적이더구나. 하긴, 아무리 강한 네피림이라 하더라도 스킬이 봉인 당하면 그저 힘이 강한 적일 뿐이니까."

"애초에 그는 무기술도 없이, 자기 스킬인 방탄력만 믿고 날뛰던 자였으니까요. 상성이 안 좋았죠."

레아는 대강의 상황을 정리하고 포탈 스크롤을 찢었다.

"어딜 가느냐? 블릭서 만들어야지!"

"항구 쪽에도 상황을 봐야죠. 아마 화성님도 궁금하실 테니까요."

"다녀오거라."

"네~"

*

"그렇게 됐어요."

6위 이집트-파라오 Lv. 7 ▲

7위 일본-머큐리 Lv. 7 ▲

레아의 보고와 함께, 랭킹을 확인한 데몬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던 대로였나.'

기부도의 그렘린들.

엘리스. 브란스와 레아.

그리고 그램. 그들이 있기에 데몬시드는 애초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조금 아쉽다면 그램이 너무 강해서 수식언이 축약되지 않았다는 것.

'어쩔 수 없지. 그램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한 걸로도 충분했으니까.'

애초에 그램이 강할 거라 생각한 건 당연했다.

평소 데몬시드의 대련 상대는 당연히 그램이었으니까.

함께 창을 맞대고 창술을 연마하는 전우이자 동반자가 바로 그램이다.

그건 불별도란 이름을 짓기 전부터 함께 성장했으니, 그램의 강함을 가장 잘 아는 건 데몬시드였으니까.

"한동안 불별도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대량의 랭커가 침입하는 거라면 몰라도, 웬만한 놈들은 그램 선에서 그냥 처리될 테니 말이다.

"협회장님. 그럼 군단장에 관한 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응. 태국이라고 했나?"

"예. 예전에 말씀드린 대로 태국과 캄보디아, 라오스와 미얀마는 네 명의 군단장이 나뉘어 지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넷은 형제라고 하는데... 우선적으로 그들을 처리하는 게 좋겠죠."

"그래. 카이삭스를 상대하기 전에 전력을 더 끌어올릴 필요가 있으니까. 그렇게 하자."

어제, 오늘 회의를 거듭한 결과.

메타르와 나의 강력한 의지로 인해 13군단장 카이삭스를 공략하는 건 다음으로 미뤄졌다.

애초에 공략을 할 수가 없다.

'미룡도 기사 대장은 처치할 수 있지만 그 위의 '카이삭스의 장군' 이란 녀석은 쓰러뜨리지 못했다고 하니.'

기사 대장보다 한층 더, 강력함을 선보이는 장군이란 녀석이 있는데 군단장인 카이삭스를 어찌 잡을까.

생각도 못 할 일이다.

최소 레벨이 8이나 9까지 랭커들의 전력을 끌어올린 다음 공략해도 될까 말까 한 상대라고 생각.

발 빠르게 움직여 다른 국가를 집어삼킨 하위 군단장들을 사냥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협회장님의 힘이라면, 군단장의 시체를 방패막으로 쓸 수 있으니, 제가 생각해도 이것보다 좋은 대안은 없어 보입니다."

"응."

우리의 대안은 이렇다.

우선, 랭커들끼리 모여 군단장을 처리하고 그 사체를 내게 건넨다.

그럼 난 군단장으로 엘더트리와 트리가드를 만들어 중국에서 뿌리 뻗는 카이삭스의 군대를 약간이나마 저지하도록 하기로 했다.

이는 메타르의 아이디어였다.

'나야 나쁠 게 전혀 없지.'

가만히 있어도 엘더트리와 트리가드들이 만들어진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애초에 트리가드는 오로지 데몬시드의 명령만을 들을 수밖에 없으니까.

'저들은 악과에 대해서도 몰라.'

적에 의해서 엘더트리가 쓰러지는 게 아닌 이상, 열매에 관한 건 알 수가 없을 거다.

다가가면 군단장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트리가드가 공격할 테니까.

"그럼 제일 먼저 공략할 곳은? 동시 공략에 나선다고 했던가."

"예, 태국과 캄보디아, 라오스와 미얀마입니다."

"아 거기."

베트남과 중국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나누어진 땅덩어리 때문인지 여러 명의 군단장이 지배한다는 곳이다.

"총 네 명의 군단장이 각각의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우선적으로 그곳들을 공략해 엘더트리를 세우자는 의견입니다."

"데몬시드. 할 수 있겠나."

메타르의 물음에 데몬시드는 답했다.

"못할 거 없지."

한국은 말레이시아와 일본, 베트남, 러시아와 협력하여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를 동시 공략한다.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군단장의 넘버는 확실한가?"

"확실하다.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지만 전부 사십 번 대의 넘버로 확인한 전적이 있다."

40번 대 군단장 네 마리. 그렇다면 공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10번 대 넘버에 비하자면 지금의 인류는 약하다.

하지만 30번 대 아래라면 어떨까.

그들과 비교해서 인류는 그렇게까지 약하지 않다.

데몬시드를 비롯한 최정상의 랭커들은 그들보다 월등히 강하다.

'게임이 아니니까.'

무리해서 강력한 군단장을 억지로 레이드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놈들의 여파를 막을 수 있다면 막고, 그 시간 동안 약한 군단장을 토벌하며 힘을 천천히 키우면 된다.

"그럼 지금부터, 인류는 군단장 사냥을 시작한다."

언제까지 사냥만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세 달 뒤.

한국, 일본, 러시아, 베트남, 말레이시아까지 합세한 군단장 공략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40군단, 파멸의 군단장 로임.

44군단, 강탈의 군단장 샥스.

51군단, 속삭이는 군단장 발람.

53군단, 예언의 군단장 카미오.

그들을 성공적으로 처치하며 랭커는 한 번 더 크게 도약했다.

하지만 그 틈에 데몬시드는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은 이란.

27군단, 수학의 군단장. 로노베가 지배한 땅이었다.

물론 로노베는 현재 데몬시드의 창에 찔려 유명을 달리한 직후였다.

"다음은 어디지?"

"파키스탄. 32군단장 아스모다이라는 녀석이다. 바로 갈 수 있나?"

"어차피 이 근처잖아. 중국과 맞닿은 군단장은 전부 처리하는 게 낫다. 카이삭스에게 하위 군단장들은 자기 부하로 만들기 좋은 녀석들이니."

데몬시드는 각 나라들이 힘을 합쳐 군단장을 처리하는 사이.

중국과 인접한 서부 국가의 군단장을 재빠르게 처리했다.

"조금 쉬었다 가는 게 좋지 않아? 몸은 성수로 회복한다 해도 정신까지 회복되는 건 아니잖아."

"괜찮아. 예상 시간보다 군단장의 처리가 늦어지고 있다. 더 시간 끌어서 좋을 건 없어."

데몬시드, 메타르, 미룡, 윈드킬까지. 단 넷이서 지금까지 공략 성공한 군단장은 전부 다섯.

42군단-베파르-우즈베키스탄.

45군단-비네-타지키스탄.

39군단-말파스-아프가니스탄.

35군단-마르쇼시아스-방글라데시.

27군단-로노베-이란.

전부 중국과 인접한 국가를 점령한 군단장들이었다.

데몬시드는 이들을 모조리 잡아 엘더트리와 트리가드를 만들었고 중국 국경 인근에 모조리 심었다.

당연히, 군단장의 힘이 담긴 재료들을 내어주며 말이다.

덕분에 꽤 많은 양의 악과를 얻었고 새로운 스탯과 스킬까지 익혔다.

그것과 더불어 많은 수의 트리가드를 얻었으니 어느 정도는 카이삭스의 기사들이 퍼지는 걸 막아줄 것이다.

새로 얻은 스킬 덕분에 엘더트리를 관리하는 것도 간단해졌다.

「인드리야」

-데몬트리는 당신의 눈과 귀가 되고 뿌리가 이어져 이동이 가능하다.

악마에게 지배당한 땅이 아니라면, 모든 데몬트리는 뿌리를 매개로 하여 순간이동이 가능했다.

덕분에 데몬시드는 어디에 있든 제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한순간에 자신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동이 가능해졌다.

'엘더는 엘더끼리만 가능하지만.'

그래도 편한 건 사실이다.

"네팔은 이미 먹혔다지?"

메타르가 말하자 브라질의 윈드킬이 답했다.

"그렇다더라. 제기랄~"

"네팔은 운이 나빴지. 인도랑 중국 사이에 끼어 있었으니까.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카이삭스의 장군'이라는 녀석이 갔다더군."

"그럼 네팔의 군단장은?"

"새로운 장군이 됐겠지."

장군이라는 말에 미룡이 흠칫했다.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그동안 조용한 게 이상하긴 했지. 기사 대장급만 보내다가 안 되니까 장군들도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야."

"데몬시드. 어떡할 거냐."

자연스레 그에게 시선이 모였다.

휙. 촤악.

데몬시드는 로노베의 머리통에서 시해의 창을 뽑아 피를 털었다.

시해의 창으로 죽인 군단장만 다섯, 파키스탄까지 처리하면 여섯이 된다.

격이 높은 상대를 죽이면 죽일수록, 시해의 창은 끝없이 진화한다.

슬슬 때가 됐다.

"시작해야지."

13군단장 카이삭스의 레이드.

이제 시작할 때가 됐다.

바바리안

201화.

지난 석 달.

우리는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이제는 카이삭스를 남겨두고 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일주일간 휴식?"

"죽을지도 모르잖아. 그 정도 휴식은 있어야지."

일주일의 휴가였다.

"데몬시드. 넌 뭘 할 거냐?"

메타르의 물음에 따로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글쎄. 따로 할 일은 없다."

불별도로 돌아가서 이번에 얻은 씨앗들을 심거나 엘더트리를 확인하고 트리가드들도 한번 보고 그램과 브란스와 인사나 하겠지.

"난, 건담을 조립할 거다."

메타르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취미 생활을 이야기했다.

"좋아하거든. 프라모델."

"그러냐."

지난 석 달간 메타르와는 꽤 친해졌다. 미국의 랭킹 1위래서 뭔가 다를까 했지만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프라모델 좋아하는 아저씨였다.

뿐만 아니다.

브라질의 윈드킬과도 어느 정도는 친분이 생겼다 말할 수 있었다.

메타르, 윈드킬, 미룡.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 함께 소수 정예로 하위의 군단장들을 처치하고 다녔으니, 그간 말로 하지 못할 다양한 일들을 많이도 겪었다.

괜한 경쟁심에 무리하다 죽을 뻔했다든지, 아니면 합의되지 못한 욕심에 서로를 다칠 뻔하게 하기도 했다.

그럴 땐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고, 서로 욕지거릴 내뱉기도 했다.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기에, 누구 하나 합이 안 맞으면 위험한 순간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전투가 시작되면 우린 서로를 의지했고 적보다 서로의 눈이나 위치를 확인하며 싸우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꽤 합이 맞고, 합이 맞다 보니 자극적인 전투 후의 환희도 함께하여 더욱 커졌다.

함께 기뻐하면 본래의 희열보다 두 배, 세 배는 더 기쁨에 찼다.

"윈드킬, 너는?"

"난 우리 이쁜이들을 귀여워해 줘야지. 악마 죽이는 거 말고, 그거보다 더한 쾌락은 없지."

브라질의 윈드킬.

기프트의 이름답게 그는 폭풍을 몰고 다니는 바람의 사나이. 그렇기 때문인지 여자 밝히기로 소문난 바람둥이였다.

미룡에게도 심심하면 껄떡거리다가 처맞고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미룡은?"

"차."

"차? 먹는 차?"

"아니, 타는 차. 차 운전하는 거 좋아해. 바바리안이 차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한번 가보려고. 관심 있어? 같이 갈까?"

"그럴까."

바바리안이 그런 취미를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대부분의 휴식은 불별도의 악과를 수확하거나 나무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소일거리를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니 내가 진정 취미로 하는 일은 없었구나 싶은 참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언제 나눈 거야."

"청와대에서 인사 좀 했지. 푸르푸르 레이드 때에도 바바리안은 나랑 몇 번 마주쳤었거든."

"그랬군."

미룡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왜? 질투?"

"질투는 무슨."

질투 따위는 아니다.

그저, 나도 몰랐던 사실을 미룡이 알고 있으니 조금 놀랐을 뿐.

그러고 보면 가까이 지내는 자들의 취미도 모르던 삶이다.

레이드의 준비야 대략적인 건, 협회나 정부에서 알아서 해줄 터.

'차라...'

그러고 보니 차는 회사에서 지원해준 연식 오래된 차밖에 타보지 못했다.

남자 중에 차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드문 것처럼 나도 어릴 적에는 차에 대해서 꽤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집도 없고, 빚도 있어서 애써 외면해 왔을 뿐.

"근데 지금 세상에서도 차를 탈 수가 있나?"

악마로 인해 도시가 폐허가 되고, 도로가 마비된 곳이 허다하다.

그런 곳에서 차를 탈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가보면 될 일이지."

*

파키스탄에 자리 잡은 32군단장 아스모다이를 빠르게 처리한 우리는 각각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하루를 푹 쉬고 나서 미룡과 나는 바바리안의 거처로 향했다.

"확실히 지금 세상에서 차를 수집하는 취미는 꽤 고상하다고 할까."

"그렇기는 하지."

먹고 살기가 더욱 피폐해진 지금인데 누가 자동차를 신경 쓸까.

굴러간다 해도 소음 때문에 악마의 어그로를 끌기 쉽고, 도로가 난장판이라 차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애초에 차를 타는 이유는, 빠르고 편하게 멀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네피림들에게 차에 대한 메리트는 사라진 지 오래다.

"차보다 우리가 빠르니까. 연비도 좋은 편이고... 애초에 포탈 열어서 이동하는데 차가 필요하지는 않지."

"맞지."

차는 이제 구시대적인 이동 수단.

체감상, 조선시대의 가마꾼과 가마를 보는 듯한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럼에도 차가 주는 나름의 로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저기다."

생각해보니 꽤 가깝게 지낸다고 생각했어도 트라움 아파트를 제외하면 랭커들의 거처에 간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바바리안이 머물고 있는 집은 조금 놀라웠다.

"이게 집인가."

"왜, 나름 멋있는데?"

바바리안이 사는 곳은 안양이었다.

안양의 한 폐차장과 합쳐져 있는 정비소를 개조해서 만든 것 같은 집이었다. 타이어와 폐차들이 탑처럼 쌓여져 있는 곳이었는데, 어디서 가져왔는지 헬리콥터랑 비행기도 있었다.

그 안에는 꽤 많은 양의 덤프트럭과 굴삭기 등등, 공사장을 일삼는 장비들이 즐비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꽤 방대했다.

바바리안이 이곳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시설이었다.

"오! 왔나!?"

바바리안은 상의 탈의한 채로 트럭 밑에서 나타났는데, 차를 수리하고 있었는지 얼굴에 기름이 조금 묻어 있었다.

"바바리안. 오랜만이다."

"어! 소식은 들었다. 저어~쪽 군단장들 전부 쑤시고 왔다며? 고생했어! 식사는 했나? 우리 마누라 음식솜씨가 꽤 제법인데 어때?"

평소에도 동네 형 같은 친근함이 있는 바바리안이었지만 집에 찾아오니 더욱 정감 있었다.

"우린 먹고 왔어. 차나 보여줘! 그때 나한테 차 태워준다고 했잖아."

"성미가 급하구만? 이 바바리안님의 애마를 보고 싶으시다는데 어쩔 수 없지. 자, 따라오라고!"

바바리안은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건물 지하로 우리를 안내했다.

"안녕하세요."

지하로 통하는 길은 꽤 크고 넓었는데 걷다 보니 한 여인을 만났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였다.

"어, 여기는 내 동료들. 인사해. 우리 와이프."

가볍게 묵례하자 싱긋 웃어 보였다.

저번에 지옥에서 본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예전에 카오스 게이트에서 본 기억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여기는 내 아들."

"귀엽네. 몇 살이야?"

"한 살? 아니 영 살이라고 해야 하나."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바리안의 처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저번에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 몇 달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아이를 낳았다는 것도 신기한데, 애의 발육 상태가 남달랐다.

"이렇게 큰데 한살이라고?"

아이의 크기는 슬슬 걷고, 뛰어다닐만한 나이의 크기였다.

"아직 돌도 안 지났어. 날 닮아서 그런지 성장이 남달랐다니깐!?"

와하하하! 웃어 재끼는 바바리안 덕에 난 애써 웃어 보였다. 부외자가 왈가왈부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난 바바리안의 친자가 아닐 확률에 마음속으로 무게추를 걸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5개월 만에 나왔다고? 역시 네피림이라 그런지 꽤 빠르네."

"그치? 아주 튼튼하다니까."

미룡은 엄마 품에서 자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품에서 엘릭서를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네피림의 아이들은 발육이 빨라 순식간에 자란다는 보고를 중국에서도 몇 번이고 받았어. 하지만 네 아이는 그것보다 훨씬 성장이 빠르네. 장차 랭커가 될지도 모르니까... 이건 내 선물."

네피림의 아이.

그 한마디로 아이의 발육이 빠른 이유가 납득되어 버렸다.

그리고 조금 안타까운 이유도.

"뭐 이런 걸 다!"

"집에 초대받았는데 빈손으로 오는 건 예의가 아니지. 받아도 돼. 아이 이름은 뭐야?"

"고맙게 받으마. 아들 이름은 은철이다. 내가 동철이니까. 은철이. 어때 귀엽지 않아?"

"할 거면 금철이로 하지. 왜 은철이야?"

"너무 반짝거리면 오래 못 살잖아. 지금 세상은 은 정도가 딱 좋지."

"하긴."

바바리안이 은철이를 쓰다듬자 곧장 눈 뜨며 잠투정을 시작했다.

"세게 쓰다듬지 말라니까. 은철이 또 깨잖아."

"하하하! 뭐 어때! 애는 울면서 크는 거지."

미룡이 준 엘릭서는 와이프에게 전달하고 다시금 지하로 걸어가는 바바리안의 등을 보니 새삼 커 보였다.

"저게 가장의 등인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슬쩍 뒤돌더니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난 어처구니없어서 긍정했다.

"조금."

"흐흐! 데몬시드. 너도 곧이지 않냐. 우린 나름 축복받은 거야. 예전 같았으면 열 달을 꼬박 채우고 나와서 삼 년이고 육 년이고, 십 년이고 애 키우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젠 아니잖아."

바바리안은 그게 왜인지 후련하면서도 조금 섭섭해 보였다.

"애가 훌쩍훌쩍 큰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아마도 네피림의 핏줄이라고 그런 거겠지. 조금 아쉬워."

"조금 놀랐다."

"나도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솔직히 처음엔 내 자식이 아닌 줄 알았어. 어디 이상한 놈팡이 새끼 애를 뱄나? 나 몰래 다른 놈이랑 뒹굴었나? 싶은 의심이 꼬리를 물었지. 근데 애가 태어나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걸 보니까 내 애가 맞다 싶더라니까."

바바리안은 씨익 미소 지었다.

"뭘 보고 확신하나."

"일단, 고놈 고추가 실한 것이 내 아들이 틀림없다."

미룡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바바리안의 농담에 나도 헛웃음을 흘렸다.

"게다가 얼굴이 그냥 내 아들이야. 성깔 더러워 보이는 게 딱이지. 아무튼 네피림 핏줄은 그런 모양이더라고. 그게 좋으면서도 참 서글퍼."

네피림의 아이.

그들의 성장이 빠른 이유는 한가지로 유추해볼 수 있었다.

"몇 년 지나면, 저놈도 금방 커서 전장에 나가겠지."

"각성은 했나."

"아직 기프트를 발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힘이 남달라. 제대로 맞으면 와이프도 멍들게 한다니까. 와이프도 초기엔 꽤 잔뼈 굵은 네피림이었는데도 육아에 벅차 한다고."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했다.

아이의 성장이 저리도 빠르다니.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의 현실이 오늘따라 뼈 아팠다.

아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 어느새 지하 차고에 도착했다.

"자, 여기가 내 차고. 여기 밖에 순환 고속도로랑 연결되어 있어서 여기서 타고 나가면 바로 고속도로야. 공사하는 데 애 좀 먹었지."

바바리안의 지하 차고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꽤 많은 차가 있었다.

"뭐든 타고 싶은 거 타. 틈날 때마다 내가 관리해둬서 연료도 다 빵빵하고 운전도 가능하거든."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다양한 차종이 즐비했다.

수십억은 호가하는 고급 스포츠카부터 고급 세단들까지.

내 인생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차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난 이거 타봐도 돼?"

"포르쉐? 역시 차 좀 볼 줄 아는구만? 차 키는 안에 있으니까 타고 나가봐. 고속도로도 내가 포크레인으로 쫘악 밀어놨거든. 시원하게 달리고 와!"

미룡은 검은 포르쉐를 타고 곧장 고속도로를 달리러 나갔다. 혹시라도 나타날 악마에 대한 걱정이 있었지만, 미룡이니 그럴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악마가 두려워할 여자였으니까.

"데몬시드. 너는?"

"글쎄, 난 차에 관해서는 잘 몰라서... 뭐가 좋은 건지도 잘 모르겠군."

삐까뻔쩍한 차들을 보니 괜히 몰았다가 망가지는 게 아닐까 무섭기도 했다. 소시민적인 옛 습관 때문일까.

뭔지 모를 거부감에 차를 만지는 것도 조금 꺼려졌다.

"차를 꼭 좋다고 타나. 그냥 타고 싶으면 타는 거지.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골라봐."

바바리안의 종용에 못 이겨, 차 한 대를 골랐다.

"키야~ 역시 우리의 랭킹 1위. 차 고르는 것도 내가 제일 아끼는 차를 골라버리네 크큭."

"좋은 건가?"

"좋지. 롤스로이스니까."

"이게 롤스로이스? 그냥 튼튼해 보이는 걸 고른 건데."

"기왕 골랐는데 한번 타봐. 이 녀석 마력도 상당하고 승차감도 끝내줘."

등 떠미는 바바리안에 못 이겨 차를 타서 시동을 걸어보자 웅장한 엔진음에 한번 놀라고, 이내 잔잔한 승차감에 또 놀랐다.

"천천히 한번 몰아봐. 네가 움직이는 것보다야 느리지만, 그래도 차가 주는 스피드와 편안함이 있지."

부우웅.

안정적인 배기음을 토해내며 고속도로를 내달리자 왠지 모를 편안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저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릴 뿐인데 묘한 안정감에 사로잡히자 바바리안이 히죽 웃었다.

"뭔가 편안하지 않아?"

"차가 좋아서인가. 왠지 편하네."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그간 하던 괜한 걱정도 사라지지. 옛날에야 차 타면서도 전전긍긍했지만, 이제는 차가 오히려 옛 평화를 상기시키니까."

그제야 나는 차를 타니 마음에 편안해지는 걸 알았다. 좋은 차를 타서인 것도 맞지만, 그보다는 옛 평화.

악마가 나타나기 전의 세계가 주는 향수로 인한 것이었다.

그 시절의 안정감.

적어도 목숨을 걱정할 필요가 없던 세상을 떠올리며 운전하니 자연스레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 때문에 묘한 안정감이 내 몸을 뒤덮었다.

"나도 사실, 차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여기 있는 차들은 대부분 형의 취미였어."

바바리안은 가만히 도로를 바라보다 이야기를 꺼냈다.

"형이 있었나."

"있었지. 이 롤스로이스가 형의 드림카였거든. 능력도 없고, 돈도 못 버는 주제에 심심하면 차 사진만 보면서 나중에는 사고 싶다, 사고 싶다 노래를 불렀지."

결국 못 타고 죽었지만.

사인은 어디에나 있는 죽음이었다.

"출근하다가 악마가 나타나 교통사고로 죽었어. 흔한 이야기지."

바바리안은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묘하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은 형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말해줬다.

"나랑 달리, 형은 공부를 잘했어. 어릴 때 가출해서 부모님도 손절한 나를 불러내 밥도 자주 사줬지."

"좋은 형이었군."

"그랬지. 밥은 먹고 다니냐며 콩나물국밥을 사주는데... 그 몇천 원 안 하는 밥이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깡패짓하며 애들 두들겨 패댄 걸 무용담처럼 말하며 맛있게 먹었지."

콩나물국밥.

오랜만에 들어보는 음식이었다.

"얼마 전에 생각나서 와이프 닦달해서 먹었는데... 이제는 별로 맛없더라. 나름 랭커로 성공해서 입맛이 까다로워졌나 봐. 아님 와이프 음식솜씨가 별로였거나. 크큭."

"그러냐."

바바리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까. 차가 보이더라. 사람들이 버리고 간 차, 아니면 지키지 못한 차. 남겨두고 간 차. 악마들 때려잡다 각이 보이면 차를 모았지. 왜 그렇게 차를 좋아한 걸까 하면서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형이 드림카라 불렀던 고급 차들을 모아두며 관리하고 차를 운전했다.

"데몬시드."

"그래."

"카이삭스, 잡으러 갈 거지?"

"그래야지."

일주일의 휴가를 받았지만,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석 달 동안, 힘을 키운 건 우리뿐만이 아니라 카이삭스의 군단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혹시, 혹시라도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 차 네가 가져라."

난 브레이크를 밟았다.

롤스로이스가 스키드마크를 그려내며 급하게 정지했다.

"헛소리 마라. 바바리안."

"뭐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러냐? 그냥. 혹시 모르니까 말한 거야."

낄낄 웃는 바바리안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공짜로 주는 건 아니다? 내가 이 차 구하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당연히 대가가 있지."

"뭔데."

"내 아들. 은철이. 너한테는 나름 조카잖아? 친구 아들이면 조카지."

바바리안은 씁쓸한 눈으로 도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마누라들이야 억척같아서 알아서 잘 살겠지. 은철이도 알아서 할 거다. 내 아들이니까. 그래도... 혹시 상황이 안 좋아진다면, 우리 아들. 부탁한다. 그 녀석이 이 차를 몰 수 있는 나이까지는 살았으면 해."

나는 말없이 액셀을 밟았다.

그리고 저 멀리 고속도로 한 바퀴 돌고 돌아온 검은 포르쉐를 보고 강하게 액셀을 밟았다.

"어? 어어!? 야야! 야! 이 새끼야!!"

끼이이익! 쿠웅-!!

포르쉐와 박고 한 바퀴 구른 롤스로이스에서 터져 나온 에어백의 푹신함을 만끽한 나는 천천히 차에서 빠져나와 포르쉐를 바라봤다.

포르쉐에서는 미룡이 뒷목을 잡고 나오고 있었다.

"뭐야? 범퍼카 놀이야?"

"야! 데몬시드!!"

바바리안은 내 멱살을 쥐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난 차 고칠 줄 모른다. 네가 고쳐."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버럭버럭 소릴 지르는 바바리안을 바라보며 답했다.

"은철이 차 태우려면 네가 수리해야 할 거 아냐."

"너 그게 말이라고!"

난 바바리안의 멱살을 쥐었다.

강하게 틀어쥐니 바바리안이라고 해도 내 힘을 감당하지는 못했다.

"살아라.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원망해도 상관없다.

날 조금 원망하는 것보다, 바바리안이 살아남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오직 살기 위해서니까.'

난 바바리안의 죽음을 원치 않는다.

절대로.

"하... 젠장."

바바리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평소의 미소를 지닌 바바리안으로 돌아왔다.

"이거 고치려면 골머리 좀 썩겠어."

개박살이 난 롤스로이스와 포르쉐를 보며 난 슬그머니 브릭서 하나를 내려놓았다. 바바리안의 눈이 매서워지는 걸 느끼며, 하나 더 내려놓았다.

"은철이가 삼촌한테 선물도 못 받았군."

"나 참."

마지막으로 은철이 몫까지 내려놓자 바바리안의 얼굴이 활짝 폈다.

"다음엔 여기서 경주 한번 할까."

"좋지."

호탕하게 웃는 바바리안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석양은 그렇게 저물었다.

그리고 며칠 후.

전쟁이 시작됐다.

13군단의 장군들 [1]

202화.

봄에 시작된 악마의 침공은 어느새 시간이 흘러 사계절의 마지막 정서를 드러냈다.

"눈이네요."

단단한 함박눈이 내렸다.

"화이트. 너냐."

"나, 아니거든? 그냥 자연 눈이야."

"벌써 그렇게 됐나."

정신 차려보니 겨울이었다.

가을은 언제 도망갔는지, 시원함을 느껴볼 새도 없이 겨울은 우리의 코끝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중국과 맞닿아 있는 국경.

북한의 신의주.

이곳엔 한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네피림들이 모여 있었다.

7만에 가까운 병력.

오늘은 드디어 13군단과의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날.

한일러 연합군의 출정 날이었다.

"출정 날에 눈이라니... 좋은 징조인가?"

"좋은 징조는 개뿔. 눈 때문에 미끄러지거나 시야 때문에 눈먼 창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그, 그러게 말입니다. 갑자기 땅속에서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죠?"

떨어져 내리는 눈을 보며 한마디씩 떠들어대는 랭커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겁에 질린 사내에게로 향했다.

"저 사람 누구였지."

바바리안이 관찰자를 향해 속닥거리자 그가 답했다.

"충왕입니다. 저래 보여도 헤일로까지 가지고 있는 랭커이니 괜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게 저 사람이야? 생각했던 거랑은 완전 딴판이네."

17군단장 티타누스 때 기여도 탑텐에 들어 헤일로를 얻은 랭커였다.

"랭커라고 해서 싸우는 걸 즐기지는 않으니까요. 충왕만이 아닙니다. 그, 화성의 리치도 싸우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나서지 않으니까요."

"리치? 그게 누군데."

"의정부에 있던 네크로맨서요."

"아, 뭐 전직이라도 했대? 왜 갑자기 리치?"

"협회장님이 그렇게 부르십니다."

"아, 그래? 그럼 리치네."

가벼운 납득과 함께 바바리안이 잔뜩 긴장한 충왕의 어깨를 두들겼다.

"너무 겁내지 말라고. 뭐...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잖아?"

약간의 안쓰러움과 동정, 그리고 주변인들이 함께 동요할까 걱정하여 격려해줬지만, 썩 효과는 없었다.

"랭킹 3위의 바바리안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오늘 여기서 다분히 죽을 수도 있다는... 그런 말씀이시군요? 젠장, 괜히 따라왔어..."

"어? 아니 뭐... 그게 그렇게 되나?"

눈송이가 잔뜩 내려앉은 민머리를 긁적인 바바리안은 헛기침하고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내버려 두셔도 됩니다."

"그런가? 좀, 걱정되는데..."

"겉보기엔 저렇습니다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죽기 싫어서 꽤 꼼꼼하게 싸우는 편입니다. 충왕이란 기프트를 보면 아시다시피..."

"곤충으로 변해서 싸우는 건가? 가면라이더 비슷한 거야?"

관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육한 곤충이나 벌레를 이용해 싸우거나 강화한다더군요. '제작 헤일로'가 아니라 기여도로 따낸 '기여 헤일로'인 만큼 화력적인 측면에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봅니다."

제작 헤일로보다 기여도로 얻은 헤일로가 강하다는 이야기는 랭커들 사이에서도 은연중 퍼져가는 이야기다.

큰 차이는 없지만 미묘하게 기여도로 얻은 헤일로가 강하다는 이야기 때문에 몇몇 랭커들은 일부러 헤일로를 제작하지 않고 군단장 레이드 때를 노리기도 했다.

"그건 다행이군. 관찰자도 이번에 헤일로 얻었지?"

"예. 운이 좋았습니다."

관찰자의 헤일로는 기여 헤일로.

그만큼 강력한 헤일로의 고유 능력을 얻게 됐다.

물론, 가진 기프트와 연관된 헤일로였지만 전투에도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수준이었다.

덕분에 이번 전장에서는 관찰자도 랭커로서의 자부심과 기대감을 한껏 안고 출전했다.

"근데 데몬시드는 언제 오는 거야?"

7만 명에 가까운 고위 랭커들이 오직 데몬시드 하나만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들릴 곳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들릴 곳?"

"예. 마지막으로 엘더트리를 확인하신다더군요. 아시다시피 이번 작전은 협회장님의 엘더트리가 가장 핵심적인 전략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 난 잘 모르겠어서. 정말 그거한테 맡겨도 되는 거려나?"

고위 랭커들 중에서도 트리가드를 모르는 자는 없다. 군단장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지닌 놈들을 그들이 모를 리 없으니까. 하지만 이전 공략에서 그들을 이용한다는 말에는 자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좀 찝찝하지 않아? 그놈들 결국 우리가 잡았던 군단장이잖아."

"도움이 된다면, 뭐든 써야죠. 그게 협회장님의 뜻입니다."

"데몬시드가 그렇다면야 뭐..."

그때였다.

근처의 나무 뒤편에서 돌연 데몬시드가 나타났다.

"뭐야, 언제 왔어?"

"방금."

"방금? 포탈이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하는 바바리안을 무시한 채 데몬시드는 곧장 소리쳤다.

"출발한다."

*

지난 시간, 연합 국가의 정보원들이 목숨 걸고 얻어온 정보에 의하면 군단장이 있을 장소로 손꼽힌 곳은 바로 중국의 우한.

현, 중국의 소도시에는 '기사 대장'이 배치되어있고, 요충지에는 '장군'이 자리를 지킨다는 정보 또한 입수한 지 오래된바.

중국의 땅은 넓고, 카이삭스의 병력은 이전보다 더욱 많아졌다.

하여 각 나라는 연합군을 구축해 각각의 위치에서 카이삭스의 전력을 줄이고 한곳에서 뭉치기로 했다.

"선양으로 간다고?"

바바리안이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고는 위치를 확인했다.

"군단장이 우한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까요. 최대한 주변 전력을 지우고 합류하는 게 맞긴 해요."

"우한을 중심으로 동쪽엔 항저우, 서쪽엔 청두, 북은 베이징, 남은 홍콩이 있다."

한일러는 북한에서 출발해 선양시를 무너뜨리고 곧장 베이징으로 출발해 장군 하나를 쓰러뜨리고 간다.

"미국과 브라질은 베트남과 합세해 홍콩을 치고 후베이성에서 우리와 합류할 거다."

나머지 연합군은 미얀마에서 출발해 쿤밍을 공격하고 청두와 충칭을 공략하여 후베이성에서 합류하기로 입을 맞춘 상황.

'네피림의 행군 속도로 예상해봤을 때, 베이징까지 천천히 간다고 해도 사흘은 걸리고, 베이징에서 시안까지는 보름은 걸릴 거리.'

시간은 꽤 촉박했다.

'고작 칠만인가...'

뒤를 둘러본 데몬시드는 고작 7만밖에 모이지 않은 병력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었다.

카이삭스의 기사들은 기본 레벨 자체가 너무 높아서 랭커들이 아니고서야 모여봤자 개죽음만 되기 때문이다.

평균적인 레벨이 올랐다 한들, 헤일로의 보유자가 지난 삼 개월 동안 늘어났다고 해도 그건 소수.

모인 병력은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 수가 적든 많든.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

적을 무찌를 것.

"출정한다."

다를 건 없었다.

"지옥의 땅에 진입합니다."

"사특한 기운이 휘몰아칩니다."

"지옥의 망념이 침입자의 힘을 억압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하락합니다."

데몬시드를 선두로, 우측엔 일본, 좌측엔 러시아가 함께했다.

일본의 1위 머큐리.

그녀는 수은을 조종하며 온갖 다양한 신병이기를 만들어내는 자였다.

특이하게 수녀 복장을 한 여성이었는데 검은 단발이 어울리는 네피림이었다. 그녀는 수은으로 자신의 등에 날개를 만들어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를 따라 비행에 유리한 자들은 함께 날아올라 일대를 둘러보며 적의 동태를 확인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니 카이삭스의 기사들이 대거 나타났다.

"우선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적들은 우리가 먼저 처리한다. 진군에 방해되는 악마들부터 처리해!"

머큐리의 수은이 대물 저격총으로 변해 공중에서 쏘아졌다.

탕-! 타앙-!!

공중에서 요격하는 총소리와 함께, 아마존의 헤일로가 떠올랐다.

말을 탄 채로 활시위를 당기며 놓자 거창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기사들의 머리에 화살이 한 대씩 꽂혔다.

픽, 쓰러져 떨어지는 기사들의 섬뜩한 소리와 함께 화이트가 강철 마에서 사뿐히 떠올랐다.

"눈이 와서 나한테는 차라리 좋아."

눈 결정을 닮은 화이트의 헤일로가 나타나자 폭설이 쏟아졌다.

군대의 진군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적들에게만 쏟아지는 폭설은 그들에게 매우 위협적이었다.

직접적으로 그들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움직이지 못하게 하거나 둔화시키는 것만으로도 놈들의 전투력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속도를 올린다."

그 상황에 데몬시드가 속도를 올렸다. 강철 마를 탄 랭커들은 큰 번거로움이 없었으나, 그렇지 않은 병력들은 재빠르게 발을 놀려야 했다.

단번에 기사들을 강철 마로 짓밟으며 진군하자 선양으로 가는 관문이라 할만한 작은 성문이 나타났다.

"성을 만들어놨군."

곳곳에 드리운 첨탑.

그리고 단단한 암벽과 지옥의 광물들로 이루어진 성벽은 그들이 공성전을 하기 위해 만든 건축물로 보였다.

"데몬시드!"

"그대로 속행한다."

데몬시드는 강철 마의 등을 밟고 단번에 도약했다.

허공을 밟고 폭발적으로 도약하는 데몬시드의 창에는 시해의 창이 잡혀 있었고, 그는 단박에 단단한 암석들로 막힌 성문을 향해 투창했다.

쇄애애애애애액-!!

꽈광-!!

카이삭스의 기사들과 기사 대장이 막고 있는 성문. 수만의 군세가 막고 있는 성문이었으나 그들은 데몬시드의 투창까지 막아내지는 못했다.

대뢰처럼 뻗어진 투창은 기사 대장의 몸을 뚫고 성문을 단박에 뚫었다.

아니, 성문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의 투창이 흩고 지나간 곳에는 뇌전에 녹아버린 성문과 흔적조차 남지 않은 도심의 거대한 크레이터였다.

"으악! 미친!!"

천지가 뒤흔들리는 거대한 폭음.

원자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굉음이 이명을 자아내고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으하하하하!! 호쾌하다! 호쾌해! 이래야 데몬시드지! 가자! 진격해라!!"

"우와아아아아아!!"

"죽여! 죽여어어!"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데몬시드가 연 성문으로 연합군이 쇄도했다. 폭발에 휘말린 카이삭스의 기사들이 다시 밀집했으나 이미 승기는 연합군에게 흐르고 있었다.

파직. 쿠르르르릉!!

카탈린의 표식으로 시해의 창이 있는 곳까지 이동한 데몬시드는 창의 위력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뒤를 돌아본 데몬시드의 시야에는 저마다 승전보를 알리고 있는 랭커들의 활약이 엿보였다.

지난 삼 개월.

강해진 것은 데몬시드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또한 군단장을 쓰러뜨리며 레벨을 올렸고 스킬을 갈고 닦았다.

삽시간에 성을 무너뜨린 한일러 연합군은 선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매서운데."

데몬시드는 미룡을 거의 죽음에 가깝게 만들어 놓았던 적을 만났다.

[13군단의 7장군 프린시퍼]

장군급의 등장이었다.

*

같은 시각 광저우.

미국, 브라질, 베트남이 함께한 연합군은 광저우를 정복하려 애썼다.

각종 기프트를 이용한 공성 병기와 함께 광저우의 방벽을 무너뜨렸고, 병력을 잘게 쪼개 침투조를 이용해 적군의 전력을 차근차근 섬멸시켜 어렵지 않게 광저우를 점령했다.

"여기에 장군은 없었군."

"아마 우한 근처에 배치되어있겠지. 장군이라는 놈들은 군단장을 보호하는 게 우선일 테니까."

윈드킬의 말에 대답하는 자는 잔뜩 부풀어 오른 전투식량을 가져온 메타르였다.

"다쳤나."

"별거 아냐. 그것보다. 데몬시드는?"

"지금쯤, 선양을 점령했겠지. 예상하기로 베이징에 장군이 하나 있으니 거기서 꽤 애를 먹을 거야."

"그 데몬시드가?"

메타르의 말에 윈드킬은 헛소리라도 들은 듯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헛소리 마, 메타르. 미룡도 아니고 데몬시드가 그럴 리 없잖아."

이에 메타르 또한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녀석이 장군급에 애먹는다면, 우린 군단장 토벌을 할 수 있을 리 없긴 하니까."

데몬시드.

지난 삼 개월간 그의 강함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그 둘이 잘 알았다.

기본 스펙은 우월 그 자체.

전투에 돌입했을 때, 스킬의 분배와 상황판단은 물론이고 쓰는 스킬 하나하나가 모조리 강력하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의 창.

데몬시드의 창은 제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은 적이라도 뚫어낸다.

그 창만 있다면.

"놈은 무적이라고, 메타르."

피식 웃은 메타르는 은은하게 빛나는 까마귀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

"이건?"

"독일에 있는 네피림의 기프트다. 쿤밍으로 향했던 독일 연합군이 뭔가 보내온 거겠지."

메타르가 까마귀에게 팔을 내주자.

반투명한 까마귀는 이내 메타르의 팔에 안착해 부리를 벌려 소리 냈다.

-쿤밍! 쿤밍! 장군 출현! 퇴각! 퇴각! 이집트! 전멸! 이집트! 전멸! 영국! 독일! 퇴각! 퇴각!

펑, 터지며 사라지는 까마귀의 모습과 함께 메타르의 목울대가 고저를 그렸다.

"윈드킬."

"어, 알고 있어."

까마귀가 보고한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분명 서쪽의 상황이 좋지 않고, 이집트가 전멸했다지만 그것보다는 지금 느껴지는 기운 때문이었다.

느껴진다.

어마어마하게 강한 존재감이.

"예상보다 빠른데. 장군이 이렇게 막 움직여도 되는 거야?"

윈드킬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장비를 정비하고 광저우의 성문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이미 카이삭스의 기사들을 대동한 장군 녀석이 저 멀리서 진군하고 있음이 포착됐다.

[13군단의 6장군 파워]

"카이삭스의 기사들은 모두 군단장인 카이삭스에게 지배당하고 있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그들이 보는 시야 또한 그가 바라보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메타르가 윈드킬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연합군을 지휘했다.

"바로 대응한다... 이거군. 역시 이제까지의 군단장과는 다르네. 데몬시드 말처럼 인간이었어서 그런가."

"그럴지도. 전술을 알고, 다른 악마들처럼 오만하게 우릴 기다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만트라가 도착하며 베트남의 원거리 전력이 배치를 마치고 윈드킬이 바람을 일으켜 날아가려는 순간.

메타르가 말했다.

"긴장해라. 데몬시드는 여기 없다."

윈드킬의 머리 위로 헤일로가 떠오름과 동시에 미소가 선명해졌다.

"나 윈드킬이야. 데몬시드가 없어도 저깟 놈은 끔살이지~"

후와아아아-!!

세찬 바람과 함께 날아간 윈드킬이 허리케인을 일으키며 전장의 한복판에 떨어졌다.

호탕하게 싸우러 가는 윈드킬을 바라보며 메타르는 제 손안에 잡힌 커다란 씨앗을 바라보다 다시 품에 집어넣고 전장으로 향했다.

*

쿤밍시.

영국, 독일, 이집트, 아프리카 연합군이 있는 쿤밍의 전장은 다른 곳보다 치열했으나 결과는 처연했다.

"젠장! 젠장! 젠장!!"

[13군단의 4장군 도미니언]

기사 대장만 있다고 전해 들은 쿤밍시에서 돌연 장군이 나타난 것이다.

장군은 4명의 기사 대장을 거느렸는데 그들조차도 일반적인 대장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지녔다.

최초에 선봉에 선 이집트 랭커들은 순식간에 썰려나갔고, 영국과 아프리카의 랭커들이 기사 대장 둘을 죽였지만 장군에게는 어쩌지 못한다.

독일의 1위. 레이지는 최초에 나타난 장군의 일격에 팔 한쪽을 잃고 전장에서 이탈했다.

랭킹 1위답지 않은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잃은 한쪽 팔은 타들어 갈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이마저도 불능의 저주에 걸려 조금도 치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젠장!!"

할 수 있는 건 욕지거리뿐.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째서인지 장군이라는 놈이 재빠르게 달아난 레이지를 쫓아왔기 때문.

"왜! 왜 따라오는 거야! 도망가잖아! 살려줄 수 있잖아! 가만 내버려 둬도 되잖아!!"

억울함에 소리쳤으나 들려오는 대답은 미치고 팔짝 뛰게 할 것들뿐.

-나는, 본래 사냥을 좋아하거든.

사장군 도미니언이라는 놈은 다친 사냥감을 쫓아가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제정신 아닌 놈이었다.

꾸욱.

도미니언이 창으로 상처 입은 팔뚝을 찌르자 레이지의 비명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젠장, 이 미친 새끼들은 전부 세뇌 걸려서 말도 못 한다더니..."

-그건 그들의 격이 낮아서겠지.

도미니언은 친절하게도 하나하나 설명해주며 다시금 레이지를 찔렀다.

피할 수 있도록, 느려터진 찌르기였으나 레이지는 피하지 못했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지? 반전의 저주를 창끝에 담았다."

몸의 생체 신호가 역전된 탓에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독일 1위의 랭커가 허망하게 죽는 순간이었다.

"레이지!! 놈이 준 걸 심어!!"

저 멀리.

기사 대장의 창에 찔려 죽어가고 있는 사내의 외침이 들려왔다.

독일의 랭킹 3위, 쟈카이였다.

기사 대장의 창에 가슴을 찔리는 중에도 그의 눈은 형형하게 레이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놈이 준 것...'

그것을 떠올린 레이지가 피를 토하며 욕지거릴 내뱉었다.

"젠장! 젠장! 젠장!! 또 그놈한테! 또 그놈한테에에에에에!!"

레이지는 힘겹게 인벤토리에 손을 뻗어 주먹만 한 씨앗을 꺼냈다. 지면에 꽂아 넣고 한껏 피를 토하자.

근처의 피를 모조리 빨아 먹고 찬란한 빛과 함께 일대를 뒤덮을 거대한 나무로 자라났다.

한껏 자라난 열매 하나가 땅으로 떨어지자 곧장 땅 밑에서 어마어마한 바닷물이 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크악!"

순식간에 일대를 바다로 만들어버린 열매 속에서 상체는 사람이되, 하체는 물고기인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42군단장 베파르.

정확하게는 베파르의 트리가드였다.

'우즈베키스탄의 42군단장 베파르... 줄 거면 더 강한 군단장을 줄 것이지.'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는 레이지의 눈앞에서 베파르와 13군단의 4장군 도미니언이 치열한 공방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뿐.

정확하게 34 합을 버티지 못하고 트리가드는 꼬챙이에 꽂힌 물고기처럼 절명했다.

레이지는 그 모습을 보고는 오히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네 안배 따위 도움 되지 않았다.'

데몬시드.

-시답잖은 짓을 하는군.

도미니언의 창이 레이지를 향하려는 순간.

채앵-

도미니언의 창에서 불티가 튀었다.

-네피림. 이건 뭐냐.

힘겹게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엘더트리의 나무 속에서 나타난 창 한 자루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엘더트리에서 나타나는 물소 뼈를 뒤집어쓰고 창을 쥔 사내.

"데몬, 시드..."

"어, 조금 늦었다."

데몬시드였다.

13군단의 장군들 [2]

203화.

파문처럼 번져가는 거대한 베파르의 나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

물소 뼈의 투구와 갑옷과 망토를 두르고 나타난 채로, 검붉은 창을 쥔 사내는 데몬시드였다.

"데몬, 시드..."

"어, 조금 늦었다."

동네 마트라도 다녀온 듯한 어조로 말하는 데몬시드는 레이지에게 겨누어져 있는 도미니언의 창을 손쉽게 막아냈다.

'괴물 같은 놈.'

저 창질 한 번에 독일의 랭커들 수십이 나가떨어졌다.

놈의 창은 빠르고, 파괴적이다.

하지만 데몬시드는 저 무시무시한 도미니언의 창을 한 손으로 받아친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찌르기를 손쉽게 받아치고 역공을 펼친다.

쿠구구구구구구궁-!!

'재수 없는 자식.'

하지만 마음속 피어난 안도감의 정체엔 데몬시드, 그가 있었다.

-너, 어떻게 파동을 쓰는 거지? 그리고 그 창은 대체 뭐냐!

데몬시드는 도미니언의 물음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스킬을 사용하며 놈을 고립시키고 공격할 뿐.

-제기랄!

콰과광-!

땅 밑에서 강철로 뒤덮인 가시덩굴이 솟아 도미니언을 찌른다.

채채챙-! 놈은 가시덩굴을 창으로 꿰뚫어 막아냈다.

하지만 가시덩굴 속에 또 다른 가시덩굴이 생겨나 놈을 뒤쫓았고, 놈은 다시 한번 창을 내찔렀다.

우웅-!

격동의 힘이 깃든 도미니언의 일창이 데몬시드를 향한다.

"피... 해..."

레이지는 목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로 힘겨운 몸으로 그를 말렸다.

이집트의 랭커들이 한순간에 몰살당한 이유는 바로 도미니언의 창.

파동멸창이란 스킬 때문이었다.

파동의 기운을 창끝에 응축시켜 단번에 찌르기의 형태로 퍼뜨린다.

부채꼴로 퍼져나간 파동은 전방의 모든 것을 부수고 파멸시키니 제아무리 데몬시드라도 저 일창을 맞으면 무사하기 힘들다.

상처를 입으면 회복조차 불능에 빠지니 웬만하면 피해야 했다.

하지만 데몬시드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이지의 앞에 서서 발뒤꿈치를 붙이고 자세를 잡았다.

"피해! 멍... 청한 놈아!"

울컥! 솟아나는 핏덩이를 게워내고 소리쳤다.

다 죽어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기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데몬시드의 가치는 높았다.

어차피 레이지는 끝났다.

전투는 연합군의 패배로 기울었고, 퇴각만이 살길이다.

이 상황에 데몬시드마저 상처 입는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저놈에게 몰살당할 게 분명했다.

고작, 자신 하나를 살리기 위한 희생으로서는 너무 뼈아픈 출혈.

하여 레이지는 그를 말렸다.

데몬시드를 걱정해서가 아니다.

자신 또한 독일의 랭커.

조국을 사랑하며, 조국의 네피림들을 책임져야 할 사명이 있는 자다.

'저놈이 살아야 다른 이들이 살아!'

하지만 데몬시드는 레이지의 피 토하는 외침에도 굳건했다.

힘겹게 움직여 하나 남은 손으로 데몬시드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가시덩굴에 붙잡힌 채, 파동멸창을 쏘아내는 도미니언의 기술에 붉은 벼락이 튀는 창을 단단히 잡았다.

"날, 버려...라! 날 버려야..."

레이지의 외침은 아쉽게도 데몬시드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그보다 먼저.

"죽기 싫으면 꽉 잡고 있어라."

그의 창이 쏘아졌기 때문이었다.

검푸른 파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붉은 대뢰.

그게 도미니언의 마지막이었다.

*

13군단장 카이삭스의 레이드를 시작하기 전.

나는 이례적일 정도로 강력한 카이삭스의 공략을 진행하기에 앞서, 엘더트리의 수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그 이유는 카이삭스의 군대가 다른 군단장을 집어삼켜 자신의 수하로 부린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남서쪽.

부탄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다.

아주 예전에 카오스 게이트에 실패하여 군단장에게 지배당한 땅인데 미얀마와 인접해 있어 연합군이 우연히 카이삭스의 군대를 그곳에서 보았다.

은밀히 따라가 본 결과는 꽤 충격적이게도 카이삭스의 군대가 하위 군단장이었던 69군단장 데카라비아를 굴복시켜 자신의 종복으로 만들어 데리고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그 이야기가 알려진 뒤.

우리는 빠르게 중국과 인접한 군단장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많은 엘더트리가 내게서 만들어졌다.

카이삭스의 공략이 시작되기 전까지야 악마를 잡고 열매를 채취하는 데에 그쳤으나, 고작 그 정도의 쓰임으로만 마무리하기엔 트리가드의 존재가 아까웠다.

하여 골몰에 골몰을 거듭한 끝에 엘더트리를 씨앗으로 만들어 일이 생기면 땅에 심으라 말하게 된 거다.

한국에서 중국에 있는 엘더트리로 이동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악마의 땅이 되어버린 중국에서 중국으로는 이동이 가능했다.

개화하자마자 내 소유물인 엘더트리의 존재를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고, 때문에 살릴 수 있었다.

'괜히 살렸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난 거치고 살려놓은 대상이 썩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말이다.

"데몬..."

"어, 조금 늦었다."

이미 다 죽어가고 있기도 했다.

팔 한쪽은 어디 버려두고 왔는지 보이지 않았고 몸 여기저기 창으로 찔린 상처들이 보였다.

창에 서려 있는 저주 때문인지 치유 효과의 감소로 회복이 안 되고 있어서인지 몰골이 말이 아니다.

'왜 이렇게 젖었냐.'

레이지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날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는데, 바닷물을 닮은 푸른 잎사귀 속의 조개 같은 열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더니 트리가드가 나타났다.

인어를 닮은 외관의 베파르.

그제야 왜 물에 빠진 생쥐 꼴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독일 연합군은 쿤밍을 빠르게 점령하고 수성하여 주변의 전력을 약화시킬 계획이었는데, 장군 녀석이 기사들을 대동해 기습한 모양.

그렇다 하더라도 장군 하나에 너무 피해가 컸다.

'하긴 먼저 공격해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으니까.'

레이드를 시작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격이 거세다.

-그렇군. 네가 그 데몬시드인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자, 창을 맞댄 상태로 힘겨루기를 하는 4장군 도미니언이 이죽거렸다.

"날 아나."

-네가 없었다면 진즉, 아홉 번째는 우리의 것이 되었으리라 말하는 자들이 많지. 지옥의 모두가 너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지옥의 유명인.

"너는?"

도미니언의 투구 속, 희열 가득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물론 나 또한.

그 즉시 도미니언의 공격이 이어졌다.

도미니언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악마로 전신에는 검푸른 갑옷을 착용했고 투구의 머리끝에는 새하얀 깃이 장식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장군임을 알려주는 표식이었다.

아무튼 도미니언은 재빠른 찌르기를 선호하며 기사 대장과는 차원이 다른 창술을 선보였다.

속도.

오로지 속도에 모든 스탯을 몰빵한 것만 같은 창술을 구가하니 나로서도 놈의 찌르기를 따라가지 못했다.

채채채채채채채채채채챙-!

더군다나 놈은 파동을 쓰며 표식으로 거리를 벌리고 조금만 방심하면 반전의 저주를 창끝에 담아 찌르니 한순간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막강한 녀석이었다.

-위명이 자자한 데몬시드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인가?!

"설마."

확실히 속도는 빠르다.

빛처럼 보일 지경.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것뿐이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가시덩굴의 관을 활성화합니다."

"벨로나의 굴레가 시전됩니다."

"카탈린의 뇌신 +1을 시전합니다."

"이동속도 500% 증가, 번개 피해력이 200% 증가합니다."

"지속시간 30초."

"체력의 30%가 소모됩니다."

파지지지직!

놈이 빠르다면 나도 그에 맞춰서 빨라지면 될 일이다.

쾅-! 챙-! 콰아아앙!!

벨로나의 가시덩굴이 쫓기 시작한다. 놈은 강철로 강화된 벨로나의 가시덩굴을 몇 번 파괴했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덩굴은 무한.

굳이 악익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그와 동시에 놈과 순식간에 맞부딪친 세 번의 창.

놈의 창은 시해의 창과 맞부딪치며 찌그러지고 갈라졌다.

-너, 어떻게... 어떻게 그분의 창술을... 네가 어떻게!!

도미니언은 가시덩굴에 붙잡힌 채로 마지막 필살의 발악을 시도했다.

레이지가 발작적으로 난리 치며 피하라고 했으나 글쎄, 내 눈으로 봤을 때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래봤자 파동.'

카이삭스의 파동은 강력하다.

아무리 그걸 응축시켜 창끝에 담았다 하더라도 파동은 파동.

퍼져나가는 힘이다.

'파동을 가로지를 힘이 있다면,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파지지지지직!

시해의 창은 사용하는 스킬의 데미지를 증폭시킨다.

"카탈린의 대뢰를 시전합니다."

"시해의 창에 대뢰가 깃듭니다."

"대뢰의 데미지가 560% 상승합니다."

"상급 창술을 펼칩니다."

"투창에 보정이 들어갑니다."

-!!

한 발짝 늦은 소음이 대기를 가른다.

검푸른 파동의 중심을 가르는 붉은 벼락이 도미니언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며 어두운 하늘을 붉게 덧칠했다.

소리가 멎은 세상.

거대한 벼락이 땅에서부터 하늘로 나아간 역뢰의 광경에 모든 전장이 일순 정지한 듯 멎었다.

휘릭, 척.

순식간에 시야를 벗어난 시해의 창은 내 손길 한 번에 회귀한다.

꾸욱, 도미니언의 어깨를 밟은 나는 놈의 목에 창을 겨눴다.

놈의 창은 이미 부서진 지 오래.

옆구리와 무릎 아래로는 이미 놈의 신체가 분해되어 사라지는 중이었다.

-어떻게... 벼락에 파동을.

난 지난 삼 개월 동안 모든 마창술을 전부 섭렵한 정통 계승자. 파동, 표식, 반전, 질책을 배운 지 오래.

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필요치 않다.

"왕위를 계승 중이다."

그저 카이삭스 마창술의 정통한 계승자가 되었기 때문이니까.

질기기도 질긴 도미니언의 목을 찌르자 놈의 숨통이 그제야 끊어졌다.

"카이삭스의 최측근, 13군단의 4장군 도미니언을 처치하였습니다."

"그는 과거 천상의 존재였습니다."

"허나 카이삭스의 타락에 동화되어 그의 심복이 된 가엾은 존재입니다."

"천상의 완전한 깃털을 획득합니다."

"부서진 헤일로를 획득합니다."

"장군의 투구를 획득합니다."

"대량의 경험치와 금화를 획득합니다."

"경험치가 가득 찼습니다. 전투에 기여한 자들에게 경험치가 전달되고 일부는 소멸합니다."

도미니언이 내게 패한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

하나는 시해의 창 때문이다.

창과 창이 맞부딪칠 때마다 시해의 창은 놈의 창을 갈랐다.

놈의 창은 부딪칠 때마다 망가지고 찌그러졌지만 내 창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역시 파브라움의 위대함.

신에 한없이 가까운 광물로 만든 무기 다운 면모였다.

'무기 차이.'

[시해의 창] (Legendary)

-파브라움으로 만든 창

〈인적의 편린〉

-단창이 흡수한 시전자의 스킬 데미지 560% 증가.

〈무너지지 않는 신념〉

-전투 중 파괴 불가.

〈시해 Lv. 6〉

-격을 갖춘 적을 죽일 때마다 단창의 위력 증가. (+60%)

〈극〉

-극렬한 관통. (추가 피해 160%)

〈회귀〉

-주인이 원할 시, 언제든 그에게 돌아간다.

〈영원한 각인〉 (철뢰)

-최초의 마법을 영원히 각인하여 창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간 군단장들을 죽이고 다니며 시해의 창의 레벨은 6을 달성했다.

덕분에 이전보다 스펙이 더욱 올랐고 각인 또한 마쳤다. 그뿐이랴, 군단장을 잡으며 새로운 전투법을 익혀 난 드디어 레벨이 상승했다.

『이화성』

「데몬시드 Lv. 8」

레벨이 상승해 새로운 스킬도 익혀 '카탈린의 대뢰'도 익혔다.

그것을 시해의 창에 각인시켰지만, 마창술도 쓰는 편이다.

마창술의 세트 효과가 제법 남다르다. 이것만 사용해도 웬만한 악마 놈들은 손쉽게 죽일 수 있다 보니, 내 부족한 전투력을 보완해줄 마지막 화룡점정과도 같은 스킬이었다.

〈멸망한 세계의 마창술〉

-세트 효과

2중: 마창술 데미지 +100% 증가.

4중: 마창술 데미지 +300% 증가.

5중: 마창술 데미지 +500% 증가.

"모든 마창술을 익혔을 시, 새로운 스킬 개방."

아직 4개밖에 없지만 그것만 해도 세트 효과로 카이삭스의 스킬 효과가 300% 증가된다. 내가 쓰는 파동은 저들이 쓰는 것보다 훨씬 우월하다.

게다가 시해의 창은 내가 사용하는 스킬을 560% 상승시키고 그럼 도합 860%의 데미지가 뻥튀기되는 공격 효과를 낼 수 있는 것.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효과다.

이런데 고작 장군급 따위가 날 어찌할 수 있을까? 한 번에 둘이나 셋 정도가 공격하면 모를까, 일대일에서 장군급 정도로는 날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엘더 씨앗을 맡긴 건데."

다 죽어가는 레이지의 꼴을 보니, 이거 참 어이가 없다.

"왜, 이렇게 되기 전에 씨앗을 심지 않은 거냐. 분명, 위기가 닥치면 씨앗부터 심으라고 했었을 텐데."

창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레이지에게 묻자 놈이 힘겹게 말했다.

"나도, 랭... 커다."

"..."

멍청하다 일갈할 수 있었으나, 하지 못했다. 나 또한 랭커이기에 레이지의 말에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동료... 들은..."

"글쎄."

애초에 카이삭스의 마창술에 당했다면 치유 효과의 감소로 살릴 수 없다. 놈의 저주는 치유 효과도 감소하면서 점점 신체의 세포 자체를 파괴하고 분해해 버리니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그냥 죽는다고 보면 된다.

물론 치료 방법이 없지는 않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저주 효과는 사그라들어서 그때까지 참거나, 또는 월등히 뛰어난 치료 약을 사용하면 되는 일이다.

만약, 두 가지 방법도 안 되는 상황이라면 마지막 방법도 있기는 하다.

"사람들을 데려오지."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작전은 변경이다. 우선 독일 연합군을 치료하는 게 먼저였다.

살릴 사람은 살리는 게 우선이니.

"누구를..."

"모르나. 대한민국은 예전에 신성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꿨거든."

"그게 무슨..."

내가 신성력을 깨우친 그날.

대한민국은 한때 전직, 대항해시대가 열린 전적이 있었다. 덕분에 신성력을 보유한 기프트로 전직한 자들이 꽤 많았는데, 그들의 스킬 중 하나가 바로 저주를 해주시키는 것이었다.

"세인트를 데려오마."

카이삭스의 저주? 오직 대한민국만이 이들의 저주를 해주 할 수 있었다.

13군단의 장군들 [3]

204화.

[13군단의 7장군 프릭시퍼]

중국을 빼앗긴 그날로부터 3개월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미룡은 단잠에 빠지지 못한다.

이는 중국을 대표했던 네피림으로서의 죄책감과 그날 마주했던 죽음의 공포 때문이었다.

그래.

자신의 몸 열한 곳을 창으로 찌르고, 손과 발을 무자비하게 뜯어낸 악마.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오랜만이야."

7장군 프릭시퍼.

놈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미룡을 알아봤다는 듯 창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그때, 네 옆에 있던 친구는 지금 없나 보네. 육 번이었던 놈 있었잖아. 혹시 싸웠니?"

말을 걸지만, 놈은 침묵한다.

미룡도 말은 걸고 있지만 크게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그녀 또한 그날의 두려움과 복수할 희열의 긴장으로 몸이 떨려올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괜찮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니까.

"미룡. 아는 자인가."

"신세를 좀 졌지."

강철 군주.

"그럼 반드시 갚아줘야겠구만?"

"그러게요."

바바리안과 아마존.

새롭게 터를 잡은 곳의 동료들은 이전의 곳보다 더 강한 자들이니까.

"힘이 강한 녀석이야. 붙잡히면 끝이니까 최대한 잡히지 말도록."

"오케이! 간드아아아앗!"

알아들었다는 것과는 반대로 바바리안이 거대화하여 돌진했다.

힘이 강하다는 말에 힘겨루기를 하러 간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던 미룡의 입가가 이내 호선을 그렸다.

"저런 멍청이 싫어하지 않아."

"미룡! 기사 대장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우린 장군을 우선 공략한다!"

소리치며 질주하는 강철의 외침과 동시에 바바리안이 프릭시퍼와 부딪쳤다.

쾅-!!

도끼와 창이 부딪쳐 파공음이 터지고 모래 먼지가 부왁 퍼져나갔다.

후웅-! 그 사이를 강철의 날개가 퍼덕여 먼지를 걷어내고 그녀의 검이 프릭시퍼의 허벅지를 베었다.

"얕아!"

강철이 소리쳤고 바바리안이 화답했다.

"야 이 새끼 힘 존나 세!"

조금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바바리안이 힘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헤일로를 켠 소서리스가 지팡이를 겨눴다.

"약화시키면 그만이죠. 파-티그!"

지팡이와 공명하는 수십 개의 매직북이 중첩의 마법을 만들어냈다.

18개에 달하는 매직북이 하나의 마법을 중첩시키고 그것을 발동시킨다.

파-티그. 약화, 정확하게는 적을 피로하게 만드는 저주 계열의 마법.

비록 다른 놈도 아니고 13군단의 장군급이니 비록 약화의 효과가 감소하기는 하겠으나 지금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척-! 카이삭스의 질책을 사용하려던 프릭시퍼를 바바리안이 막았다.

"어딜!"

바바리안이 몸을 빼려는 프릭시퍼를 붙잡았다. 이내 파-티그에 적중당한 프릭시퍼의 무릎이 땅에 닿았고, 미룡은 꼬리로 땅을 때리며 쇄도했다.

화아악-!!

미룡의 머리 위로 검은 비늘의 헤일로가 떠오르며 전신이 용의 비늘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내 동양의 용으로 변한 미룡이 프릭시퍼를 물고 하늘로 승천했다.

동시에 땅에서는 미룡의 꼬리에 해당되는 기둥들 여덟 개가 솟구쳤다.

미룡의 기프트는 용의 꼬리.

헤일로는 전신이 용으로 변했지만, 그녀의 기프트는 여전히 꼬리다.

와작와작 깨물다가 꼬리로 다시금 땅으로 내치는 순간 거대한 폭음과 함께 땅이 진동했다.

동시에 땅속에서 솟아난 꼬리들이 연속적으로 프릭시퍼를 쾅! 쾅! 때리기 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역시 갑옷이 단단해.'

갑옷도 단단하고 놈 자체도 터프하다. 움직이지 못하고 연계에 당해 당하고는 있지만, 피해를 최소화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

"피해!"

그때였다.

잠자코 맞고만 있던 놈이 창을 뻗었다.

카이삭스의 파동이었다.

쾅-! 콰아아앙-!!

'땅에?'

자신의 꼬리를 향해서가 아니라 지면을 향해 파동을 사용했다.

동시에 지반이 무너져 내리고 지하의 넓은 공간이 나왔다. 베이징의 지하 철도가 있던 공간이었다.

"젠장, 모두 들어가지마!"

푹-!!

"바바리안!!"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바바리안이 프릭시퍼의 창에 등을 찔렸다.

"등은 검사의 수치..."

마지막까지 헛소릴 내뱉은 바바리안이 프릭시퍼의 발에 차여 벽에 처박혔다.

바바리안이 찔리자 강철 군주가 그를 살리기 위해 뛰어들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바바리안을 지켜! 놈은 혼자다!"

"우린 대장 놈들을 맡는다!"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브리핑을 들으며 미룡도 준비했다.

솟아오른 꼬리의 비늘들이 서서히 그녀에게 모여들며 용의 체구가 하나의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번째 형태.

'용인'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용의 비늘로 뒤덮인 그녀는 기다란 꼬리를 채찍처럼 사용하는 용인이 되었다.

이내 지하로 뛰어들며 어두운 지하 속에서 피 튀기는 혈투가 벌어졌다.

파지지지직!!

강철의 검이 프릭시퍼의 옆구리를 베고 전류가 놈의 몸을 파고든다.

동시에 미룡의 주먹과 꼬리가 놈을 붙들었고, 아파 죽겠다며 소리치는 바바리안이 놈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프릭시퍼의 입장에서는 퍽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놈들의 연계가 상당했고 아무리 때리고 찔러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싸우는 놈들은 마치 죽음을 두려워 않는 광전사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프릭시퍼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이유를 깨달았다.

'치유사가 있다.'

대머리의 등을 크게 찔렀건만 어느새 치료되어 있었다. 분해의 저주로 치료조차 힘들었을 상처가 어느새 말끔하게 아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황금빛 기류가 그들의 몸에 흘러들더니 저주가 사라지고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싸워도 싸워도 쓰러지지 않는 적이 이상하다 했더니 회복 술사가 있었다.

프릭시퍼는 그게 지상에서 황금빛 기운을 뿌려대는 존재들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세인트 부대! 피해! 놈이 온다!!"

"어딜!"

쾅! 들러붙는 거머리 같은 바바리안을 뿌리친 프릭시퍼가 다시 한번 올라가려다 미룡의 주먹이 처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내 미룡마저 찌르고 걷어차 뜯어내자 이번에는 강철 군주가 막았다.

보이지 않는 전류로 몸의 감각을 둔화시키는 놈의 검은 썩 매서웠다.

-이 검... 대체.

강철 군주의 검은 유달리 자신의 갑옷을 쉽게 파고들었다.

미스릴 따위로는 카이삭스의 갑옷을 파고들 수 없다. 대체 이것이 뭔데 이리도 쉽게 갑옷을 베어내는지 의아하며 프릭시퍼는 자신의 창을 다시 한번 지면에 꽂았다.

콰아아아앙-!!

파동의 힘으로 일대를 모조리 부숴버리자 지하가 무너지고 모래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동시에 떨어지는 암벽을 밟아 뛰어오른 프릭시퍼가 세인트들의 앞에 당도하는 순간이었다.

-!

돌연 자신의 다리에 벌레들이 들러붙었다. 충왕의 벌레들이었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바퀴벌레 같은 딱정벌레 수백 마리가 달라붙어 갑옷을 갉아 먹기 시작했는데 그 고통이 어마어마했다.

-크윽!

처음으로 프릭시퍼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릴 정도였다.

그때 프릭시퍼의 앞에 왜소한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충왕이었다.

곤충의 더듬이 같은 것들이 엮어져 하나의 헤일로로 떠오르자 그의 몸이 좁쌀만 한 수만 마리의 딱정벌레로 변해 프릭시퍼의 몸에 들러붙었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크아아아악!!

갑옷을 씹어먹으며 안의 속살에 독까지 주입하고 있는 딱정벌레들은 뜯어내려 해도 뜯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강하게 흡착해 있는지 몇 마리를 뜯어내도 곧장 다시 들러붙어 고통을 줄 뿐.

파동을 일으켜 떼어내려 했으나 고작 백 마리 정도가 떨어져 나갈 뿐 들러붙는 벌레들이 더욱 많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땅 밑에서 거손의 거인의 손이 솟아올라 프릭시퍼를 붙잡았고, 이내 세인트들의 앞을 막은 안경을 번득인 채로 레이피어를 든 사내.

관찰자가 동그란 과녁 비슷한 헤일로를 띄운 채 나타났다.

"거손, 그대로 잡고 있으세요."

"걱정 마십쇼!"

이내 관찰자의 눈이 프릭시퍼의 약점을 찾았다.

그곳을 레이피어로 푹 찌르자 단단한 갑옷이 순두부처럼 갈라졌다.

하지만 프릭시퍼는 관찰자의 찌르기보다 벌레들의 고통이 더욱 심해 몸부림쳤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번 찌른 곳을 다시 정확하게 찔렀다.

가장 잔인한 것이 찌른 곳 또 찌르기라 하던가.

관찰자의 헤일로는 상대의 약점 부위를 찌르면 찌를수록 표식이 생기고 데미지가 중첩되어 커다란 고통을 선사했다. 이내 세 번을 찌르자 프릭시퍼의 옆구리가 퍽! 터졌다.

터져나간 옆구리와 함께 바닥으로 푹 쓰러진 프릭시퍼가 비명을 토해내며 자신의 창을 잡았다.

"막아! 깔아뭉개!!"

바바리안이 프릭시퍼를 깔아뭉개고, 미룡이 놈의 팔을 짓밟았다. 강철 군주가 놈의 다리를 찔렀으며 소서리스가 덩굴을 소환해 그를 붙잡았다.

쿵! 쿠우우웅!!

한참을 발버둥치던 프릭시퍼가 눈앞의 안경 사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데몬시드냐.

안경을 치켜세운 그는 레이피어로 프릭시퍼의 목을 찌르며 답했다.

"설마, 저 따위가요."

그게 베이징을 지키던 장군.

프릭시퍼의 마지막이었다.

*

쿤밍.

"이쪽 환자 저주 해주 해주십쇼!"

"잠시만요. 저 신성력 회복 중이요."

"저도요."

"제가 해드릴게요. 여기 오세요."

"넵!"

장군의 기습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던 쿤밍의 전장이 정리되어 간다.

부상자는 치료받고 저주는 해주 되어 한결 편안함을 안겨준다.

"너는 오천 금."

손이 잘리고 팔다리가 잘려도 웬 이상한 버섯 여자가 나타나 부상자들에게 의수를 달아줘 버렸다.

본래의 손과 다리보다 더욱 튼튼한 것들을 말이다.

레이지는 새로 생긴 제 팔을 말아쥐다가 붉은 머리 여자가 다가오는 걸 보고 슬쩍 고개 숙였다.

붉은 머리의 여인.

성숙미가 돋보이는 여인이 부상자를 돌보자 빠르게 저주가 사라지고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는 피처럼 붉은 헤일로가 떠올라 산뜻한 피의 비를 내리는 여인은 꽤 많은 힘을 소진해 일대에 축복을 내리고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의 랭커.

피의 축복. 레아라는 여자였다.

"가, 감사합니다."

"아니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저는 저주를 해주하고 상처를 치료할 뿐, 사라진 팔과 다리를 돋게 한 건 저기 있는 메이니까요."

"예."

떨떠름하기는 했다.

솔직히 믿지 않았다.

전부 죽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놈 말이 허풍이 아니었다.

포탈도 생성되지 않는 땅에서 어떻게 치유사들을 데리고 오더니 부상자들을 속속들이 치료해버렸다.

'한국은 어떻게...'

어떻게 이만한 힐러들을 보유하고 있는 건지 의아할 따름.

하지만 자꾸만 그 재수 없는 얼굴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납득시킨다.

데몬시드.

그놈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레이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데몬시드가 나타나 그를 불렀다.

"광저우로 가라."

"광저우? 거긴 미국 연합군이 있는 곳이지 않나."

"미국과 합류해라."

이집트는 대표자를 잃어서 통솔이 불가하다. 이대로 퇴각시키고 나머지 영국과 독일, 아프리카는 미국과 합류해서 진군하는 게 낫다.

오히려 바라던 일이었다.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장군 하나를 상대로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했다.

놈이 안배한 대로 씨앗을 심어 꼴사납게 도움을 요청해 연명했을 뿐.

그게 자존심 상하고 굴욕적이었지만, 레이지는 감사함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도 현실 파악을 못 하지도 않았다.

"아까는... 그..."

다만 솔직하지 못할 뿐.

쭈뼛거리고 있자 데몬시드는 레이지에게 씨앗 하나를 넘겨줬다.

"놈들의 전력이 예상외로 뛰어나다. 트리가드의 힘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병력의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씨앗을 손에 쥐여주고 떠나가는 데몬시드를 향해 레이지가 물었다.

"넌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느냐, 침착할 수 있느냐, 모든 걸 대비할 수 있는 거냐. 물으려 했으나 목구멍이 콱 막혀 나오지 않았다. 머뭇거리고 있자 데몬시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카이삭스는 이제껏 보지 못한 강적이다. 놈과의 전투는 지금보다 더욱 치열하겠지.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 아니, 많은 자들이 죽겠지."

"...너라도 말인가."

데몬시드는 고개 숙인 레이지를 내려다보다 자신의 투구를 벗었다.

레이지는 데몬시드의 맨얼굴을 보고는 두 눈을 치켜떴다.

그 안에는 씁쓸하게 웃고 있는 평범한 사내의 낯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도 인간이야. 레이지."

그저 평범한 인간.

그렇다. 우리는 모두 평범했다.

하지만 평범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에 특별해지려 발버둥 치는 것뿐.

투구를 뒤집어쓴 데몬시드가 떠나고 레이지는 주먹으로 제 얼굴을 치고는 일어났다.

"레이지. 괜찮나? 얼굴 왜 그래? 설마 데몬시드한테 맞은 거냐?"

쟈카이였다.

하지만 그 옆에 독일 2위인 프레블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지는 고개를 내젓고 물었다.

"프레블은."

"... 죽었다."

레이지의 눈이 물기 가득 물들었지만,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 말했다.

"광저우로 간다."

"더 싸울 거냐."

망설임이 깃든 쟈카이의 음성에 레이지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 녀석도 싸울 테니까."

도미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