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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5화.

광저우 부상자 치료소.

"레아."

"오셨어요? 어떻게 됐어요?"

버선발로 달려 나온 레아는 물었다.

난 현 상황을 최대한 간단하게 그녀에게 들려줬다.

"미국 연합군은 장군을 패퇴시켰어. 처치하지는 못했지만, 큰 부상을 입고 후퇴했어. 그들은 놈을 쫓는 중이고."

연이어 울린 승전보였으나 상황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독일 연합군이 망해버려서 계획이 꼬였기 때문이다.

본래 군단장이 있을 거로 예상되는 우한시에서 서쪽에 해당하는 시안으로 향하려 했으나 함께 합류할 예정이었던 독일 연합군이 망했으니 거기로 갈 이유가 없어진 셈.

덕분에 한국 연합군은 우한의 서쪽이 아닌, 동쪽에 해당되는 상하이 근처로 남하하기로 했다.

미국 연합국과 합류하기 위해서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소수 정예를 뽑아 군단장만 빠르게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마냥 그럴 수만도 없는 게, 카이삭스의 기사 수가 워낙 많고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장군 놈들 때문에 마음대로 돌격하기가 어려웠다.

정확하게는 정보가 적었다.

내게는 아니지만, 현 인류에게 장군급의 전투력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

그들이 대체 몇이나 있는지, 어디에 배치되고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이상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애초에 언제 군단장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효율과 교란을 위해 연합군을 셋으로 나누어 진격한 것인데 벌써부터 하나가 무너졌으니 지휘소는 서로 난리 나서 핏줄 세우며 싸우고 있다.

네 탓 남 탓이 오가는 와중에도 그들을 중재하고 전장의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고는 한다.

관찰자가 말이다.

"광저우에 있어줘. 독일이랑 이집트가 거의 전멸에 가까워서 꽤 소극적이게 됐어."

"저는 걱정 마세요. 베이징은 어때요? 톈진을 공략한다고 하던데."

톈진은 베이징 바로 아래 있는 장군급이 확인된 지역이다.

강철 군주와 미룡이 합세하여 그곳을 공략하기 위한 준비가 예정 중이다.

"그건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을 거야. 그들은 나 없어도 강하니까."

미룡, 강철 군주, 바바리안, 아마존 등등 막강한 헤일로를 가진 네피림들이 존재한다. 러시아와 일본도 큰 도움이 되고 있고, 대한민국의 세인트들이 확실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

거기에 더해 거손이나 충왕, 빛고리에 더불어 혼나비나 소서리스가 꽤 활약하고 있다고 하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한국 연합군은 걱정이 없다.

군단장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미국 연합군도 어찌어찌 장군급 하나를 패퇴시켰다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메타르와 윈드킬은 내가 동행했었던 만큼 그 실력은 보증할 수 있으니.

'결국 문제는 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역할이 이번 카이삭스 공략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뭐부터 해야 할지 고민이군.'

다른 군단장과 달리 카이삭스의 군대는 중국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했고, 도시 하나하나를 성으로 만들어 완전한 수성을 이룩했다.

그곳에 배치된 '기사 대장' 또는 '장군'이라는 놈들 때문에 공략에 많은 시일이 걸리고 위기가 생성됐다.

나라면 그들을 쓰러뜨릴 수 있지만 내가 모든 적을 처치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고 몸이 열두 개나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장군의 숫자가 얼마나 더 많을지도 모른다.

웬만한 랭커들도 겨우 기사 대장 하나에 도륙당하기도 한다.

하물며 장군이 나온다면 어떨까.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모를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분대를 나눴을 때, 기습당한다면 모두 죽는다.

'결국 심리전을 해야 해.'

전술을 펼쳐야 한다.

적의 속을 내다보고 땅따먹기 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다.

일반적인 군단장이었다면 인간을 유린하고 농락하느라 뻘짓을 하고 있겠지만 카이삭스는 다르다.

아니,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전략가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그럼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무엇인가.

인류를 승리로 이끌 선택.

나의 전진 한 번으로 사람이 죽거나 악마가 죽는다.

신중을 기해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섣불리 나서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레아가 물었다.

"장군한테서는 뭐가 나왔어요?"

장군을 죽인 전리품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난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했다.

"카이삭스의 최측근, 13군단의 4장군 도미니언을 처치하였습니다."

"그는 과거 천상의 존재였습니다."

"허나 카이삭스의 타락에 동화되어 그의 심복이 된 가엾은 존재입니다."

"천상의 완전한 깃털을 획득합니다."

"부서진 헤일로를 획득합니다."

"장군의 투구를 획득합니다."

"부서진 헤일로와 천사의 깃털. 그리고 장군의 투구를 얻었네."

"부서진 헤일로요?"

"응, 도미니언은 천사였대. 타락해서 악마가 된 천사인가 봐."

부서진 헤일로, 완전한 깃털.

그리고 장군의 투구를 레아에게 보여줬다.

[부서진 헤일로]

-도미니언의 부서진 헤일로. 이전에는 강한 신성을 담고 있었으나, 그 그릇은 깨져버린 지 오래이다.

[장군의 투구]

-카이삭스가 장군을 위해 만든 투구. 자신의 기술을 각인해놓았다. 이것을 쓴 자는 누구라도 장군이 된다.

보기만 해도 꺼림칙한 것들이었다.

그나마 쓸만한 건 완전한 천사의 깃털 정도. 물론 지금 전투에 사용할 수 있을 만한 것은 또 아니었다.

'헤일로의 강화는 전부 마쳤다.'

아다만티움과 천상의 깃털이 있다면 헤일로의 2차 각성을 노려볼 수 있기도 하다.

분명 그렇게 나와 있었으니까.

하지만 들어가는 재료가 어마어마했고 고작 이거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럼 씨앗은요?"

"아, 아직 심어보지 않았어."

본래 천사였다곤 하나, 악마로 타락한 도미니언은 데몬시드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당연히 씨앗으로 만들어 품에 가지고 있다.

웬만하면 불별도나 한국에 심고 싶었지만 지금 심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장군급은 군단장에 가까운 격을 갖췄으니까요. 트리가드가 될지도 모를 일이겠어요."

"글쎄. 그러려나."

레아의 말과는 달리, 난 그 부분에 있어서는 기대하지 않았다.

타천사라 한들, 군단장과 비견될 힘을 가졌다 한들 그 힘은 오로지 카이삭스에게서 나온 힘이다.

깃털 하나 나왔는데 트리가드가 된다 한들 레벨도 낮을 것이고, 전투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아 보였다.

열매는 소득이 있겠지만, 트리가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한번 심은 나무는 이동시킬 수 없으니까.

"가능성은 낮지만, 그래도 해볼까."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도미니언의 씨앗을 심지 못했다.

"왜 그러세요?"

"메타르인가. 가봐야겠어."

북쪽에서 엘더트리가 심어졌다.

"로노베의 엘더트리가 악으로 침식된 땅에서 자라났습니다."

로노베라면 27군단장이다.

바로 일주일 전쯤에 쓰러뜨린 녀석.

내가 메타르에게 넘겨준 녀석이다.

메타르가 이 녀석을 심었다는 이유는 위급 상황이거나.

'날 부르는 거다.'

"인드리야를 시전합니다."

「인드리야」

-데몬트리는 당신의 눈과 귀가 되고 뿌리가 이어져 이동이 가능하다.

로노베를 떠올리며 눈을 감자, 이내 시야가 천천히 나타났다.

-상황이 안 좋은걸. 데몬시드는?

-나무는 심었다. 하지만 녀석도 싸우고 있을지 몰라. 우선 데몬시드를 기다리며 대기하는 게 어떤가.

-하지만 놈들이 포로를...

상황을 보니 썩 급박한 상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거대한 성 앞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아마도 부상 당한 장군을 뒤쫓다가 놈이 성으로 숨어들어 난관에 봉착한 모양이었다.

급하게 갈 필요는 없었지만, 마땅히 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광저우에 심어둔 42군단 베파르의 나무에 손을 얹었다. 베파가 친한 척했으나 무시하고 로노베를 떠올리며 스킬을 사용하자 엘더트리가 물결처럼 번지며 날 빨아들였다.

나무의 뿌리로 스며들어 이동되는 어두운 공간을 지나고 어느새 작은 빛으로 빠져나왔다.

"우왁, 뭐야. 데몬시드?"

"정말 왔군."

윈드킬이 놀라 브라질리언 킥을 먹이려다 멈췄고, 메타르 또한 금속으로 이뤄진 검을 드리우다 멎었다.

"환영 인사가 과한데."

"쏘리."

"지금 한창 열이 올라 있어서 말이지."

윈드킬은 내 손을 맞잡아 반가움을 표시했고 메타르는 씨익 미소 지었다.

"상황은?"

"좆같지. 장군 주제에 하는 짓은 송사리나 다름없다. 보이나?"

"성이군."

아주 단단해 보이는 성문이었다.

그 앞에는 꽤 많은 인간들의 토막 난 시체가 자랑스레 걸려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열불이 나는 풍경이었다.

"후난성이다. 놈이 저기로 도망쳤어. 문제는 인질을 데려갔다는 것이고, 저 안에 또 다른 장군이 있을 거라고 감지 타입의 네피림이 예상했다."

"그렇군."

장군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빤스런을 쳤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동료에게.

카이삭스의 최측근이라는 장군급치고는 굉장히 치졸한 판단을 했다.

이 정도면, 23군단의 아임처럼 같은 편이라도 쳐 죽여야 하는 게 악마란 존재가 아닌가 싶긴 한데...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고요하다. 네 명의 기사 대장이 성문을 지키고, 족히 수백이 되는 기사 놈들이 존재해 보인다."

메타르와 윈드킬은 좋은 말로도 상태가 좋다고 하기 힘들었다.

꽤 격전을 펼친 것 같았는데, 그들에 악과 하나씩을 건넸다.

"우효! 데몬시드의 악과! 참을 수 없지!"

"고맙다."

윈드킬은 내가 준 구울의 복숭아를 시원하게 한입에 씹어 먹었고, 메타르는 미노타의 망고를 뜯어 먹었다.

모두 단맛이 감도는 악과를 먹고나자 한결 낫다는 표정을 했다.

"이거 진짜 안 팔 거야? 제발 팔아줘! 너무 맛있다고 젠장!"

"이민 오면 생각해보마."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이런..."

큭큭 한바탕 웃고 나자 이곳에 심어져 있는 로노베의 트리가드.

노베가 다가왔다.

-주인이여, 이 노베가 도움이 될만한 방법을 제안하겠소.

27군단장이었던 녀석만큼, 푸르처럼 말을 할 수 있었다.

아니, 푸르보다 꽤 유창했다.

하지만 생김새가 악마의 표본이라 할 만큼 흉악했다.

머리에 돋아난 두 개의 뿔.

커다란 머리와 덩치.

뭐라고 해야 할까.

트롤한테 큰 귀와 뿔이 달린 느낌이라고 하는 게 편했다.

게다가 무기는 나무 지팡이인지 곤봉을 사용했는데, 무식하게 생긴 것과 달리 머리가 굉장히 좋은 녀석이라 쓰러뜨릴 때 조금 애를 먹었던 놈이기도 하다.

"뭔데."

-걸어 잠근 성문이 문제라면, 성 자체를 부숴버리면 되지 않겠소.

"그러니까, 어떻게 할 건데."

-땅을 부수면 간단하지.

로노베는 무식한 생김새와는 달리 머리가 좋고 마법을 이용한 공격을 선호했던 녀석이었다.

각종 다양한 개 같은 마법으로 우릴 곤경에 빠뜨렸었는데, 그런 녀석이 하는 말이 나름 신용이 갔다.

"나쁘지 않군."

"지반을 부숴버리면 제아무리 단단한 건축물이라도 무너지긴 하지?"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문제는 지반을 어떻게 무너뜨리냐는 것.

그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제 마법이라면 가능하오.

로노베의 마법으로 가능했다.

꽤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지만 메타르가 고개를 저었다.

"인질이 잡혀 있다. 무턱대고 성문을 부술 수는 없어."

-죽지 않았겠소.

"아니, 그 녀석은 죽지 않아."

죽지 않는다.

누구를 뜻하는지 알 거 같았다.

"라이프인가?"

"그래."

미국 2위 라이프.

놈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

그는 기프트 자체가 라이프.

또 다른 생명이다.

그것은 심장일지도, 시계일지도, 펜던트일지도 모를 일.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할 수개의 목숨을 지니고 있는 사나이였다.

"죽지는 않았을 거다."

"회유하려 데려간 건가."

"아마도."

장군의 입장에서도 그만한 능력을 보유한 라이프를 인질로 잡은 이유는 그 힘을 13군단의 것으로 하기 위해.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다.

'로노베의 방식은 안 되겠군.'

위험 요소가 많다.

일단 미국 2위인 라이프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다.

여러 개의 라이프를 가지고 있는 놈은 죽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고, 악마로 변절했다면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다고 라이프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윈드킬의 촌철살인에 메타르가 신음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쉽게 결정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보이자 나는 품에서 씨앗 하나를 꺼내 땅에 심었다.

데빌스톤을 쏟아 넣으면서다.

"뭐 하는 거야?"

"세상이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그런 거지."

"대단한 철학자 나셨군."

씨앗은 금세 줄기가 뻗어 나와 하나의 거대한 나무로 성장했다.

황금빛의 잎사귀를 가진 나무였다.

"도미니언의 엘더트리가 성공적으로 성장했습니다."

"타천의 기운이 섞인 엘더트리입니다."

"당신의 선택으로 진화합니다."

"타락한 채로 둘 수도, 당신의 신성으로 정화할 수도 있습니다."

"도미니언의 영혼을 정화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타락하게 두어 나무를 지키는 가디언으로 두시겠습니까."

처음 보는 선택지가 나타났다.

타락한 천사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선택이 어렵지는 않았다.

'뭐 이쁘다고 정화해.'

평생 트리가드로 내 노동력이 되는 거면 충분했다.

선택하려는 찰나.

"'미소 짓는 자'가 도미니언의 영혼을 정화할 것을 권유합니다."

"그게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 말합니다."

"'쉬지 않는 자'가 역정을 냅니다."

"'가장 고결한 자'도 동의합니다."

"'끝끝내 되참은 자'는 '미소 짓는 자'의 곁에 섭니다."

"'고개 숙인 자'는 침묵합니다."

또 한 번 개지랄 하는 걸 보니, 도미니언의 영혼을 정화해야겠다.

'쉬지 않는 자가 근면이었지?'

내 랭킹 뺏어간 놈이다.

저런 놈이 역정을 낸다면 필시 내게 좋은 일일 터.

게다가 끝끝내 되참은 자는 고행의 대천사 유리엘이다.

그가 미소 짓는 자의 곁에 섰다.

내게 유리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공격받는 그를 지키기 위해서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당신의 신성으로 도미니언의 영혼을 정화합니다."

"대량의 신성이 소모됩니다."

"도미니언의 엘더트리가 정화됩니다!"

"도미니언의 엘더트리가 악의 기운을 흡수하고 주변을 정화합니다."

"악의 영양분을 흡수합니다."

"신성을 내뿜습니다."

"신성이 회복됩니다. 생명력과 마나 회복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악은 신성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악마의 힘이 감소합니다."

"도미니언의 트리가드가 탄생합니다."

도미니언의 트리가드는 여섯 장의 날개를 펼치며 찬란한 신성력을 내뿜는 신성한 존재.

불꽃처럼 뜨거운 신성을 흩뿌리는 천상의 천사였다.

고결했던 영웅

206화.

발작하길래 정화해봤더니 예상외의 전개가 펼쳐졌다.

'근데 뭐, 그렇게 발작할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겉으로 보기엔 퍽 화려하긴 하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나뭇잎은 조금씩 불타고 있었는데, 나무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불티가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거목 아래,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천사.

도미니언이 자리하고 있었다.

"혹시 이건가."

부서진 헤일로.

완전한 천사의 깃털.

장군의 투구.

이 세 개를 꺼냈다.

도미니언은 멍한 눈으로 헤일로와 깃털을 보며 손을 뻗었다. 장군의 투구를 보고는 서글픈 듯 눈빛이 흔들렸으나 손대지 않았다.

-아아.

천사의 깃털이 찬란히 빛났다.

이내 불에 타 황금빛으로 물들더니 부서진 헤일로로 스며들어, 빛을 잃은 헤일로에 불꽃이 깃들었다.

이 변화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데몬시드는 대충 알 거 같았다.

이 헤일로는 도미니언의 것.

복구하여 다시 사용한다면 다른 트리가드들과 마찬가지로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트리가드-도미니언이 이전 생의 기억을 되찾습니다. 자신의 힘 일부를 흡수하여 옛 영광을 재현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트리가드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고, 새로운 운명과 사명을 부여받은 가디언."

"그게 지금의 도미니언입니다."

시스템 메시지는 내게 알리는 게 아니라, 마치 도미니언에게 선고를 내리는 것만 같았다.

정화되었으나, 넌 천사가 아니라고.

가디언으로서의 목적을 잃어서는 아니 되며 다시 태어난 그대의 사명은 나무를 지키는 것. 오직 그뿐이라며 질책하는 것만 같았다.

[도미니언의 엘더트리]

『보유』

완숙-36 미숙-4

트리가드-Lv. 1 ▶ 19

이전에는 꽤 대단한 천사였던 모양이다.

헤일로를 복구해주니 단번에 레벨이 19로 상승했다.

여섯 장의 날개.

찬란히 불타오르는 헤일로.

손에는 어느새 이글이글 아지랑이를 피워내는 창까지 쥐어져 있었다.

마치 태양의 화신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무들 또한 이글이글 불티를 뿌려대며 열매가 맺었다.

선명한 주홍색으로 불타는 열매는 평범한 이는 만지기만 해도 온몸이 타오를 정도의 열기를 지녔다.

하나를 따서 먹어보자 역시나 놀라운 효과를 지녔다.

"도미니언의 열매를 섭취합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신성력이 2 상승합니다."

"화염 피해가 2 상승합니다."

신성력과 화염 피해!

화염 피해는 차치하고서라도 신성력이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졌다.

'잘됐어. 안 그래도 신성력을 상승시킬 여건이 안 됐었는데.'

신성력은 보유한 것만으로도 악마의 공격 대부분을 피해 감소시켜주고 삿된 기운으로부터 저항력을 강화시켜준다.

신성한 힘이라는 게 본래, 악마의 사이한 힘을 막아주는 것이니까.

거기다 힐링은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회복 수단인 터라 신성력의 스탯을 조금 더 키우고 싶던 참이었다.

데몬시드가 신성력 스탯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천상의 계단을 오르는 것뿐이었는데, 아무래도 순결의 계단은 썩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고행의 빛도 안 통했지.'

그런 꼼수는 안 통한다는 듯 온갖 유혹에 시달려야 했는데, 과감하게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도미니언을 정화해 만든 열매로 신성력을 얻게 될 줄이야.

데몬시드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넘겨줘 신성력 스탯을 가지게 해줄 수도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한국의 세인트들로 인해 승기가 꽤 높아지지 않았던가.

암만 생각해봐도 악마들과의 전투에서 신성력은 필수 불가결이었다.

"선물."

"개꿀!"

"고맙다."

윈드킬과 메타르에게 하나씩 건넸다. 고위 랭커로서 이번 레이드에 그들의 힘은 반드시 필요한 법.

열매도 꽤 많이 열렸다.

서른여섯 개 정도이니, 서른 개만 따서 대부분은 혼자 먹고 나머지는 가까운 랭커들을 주면 될 것이다.

-알 거 같다. 그대로군.

도미니언의 엘더 열매에 신나 하며 따고 있자 그가 말을 걸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정신은 차렸나."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지. 나 천족의 제사장, 태양의 도미니언. 그대에게 깊은 은혜를 입었다.

도미니언은 데몬시드를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천족의 제사장이라. 유리엘 같은 대천사는 아닌 모양이네.'

인간과 천족의 혼혈.

뭐 그런 거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제사장이라 하니 직책은 꽤 높아 보였는데, 트리가드로써의 레벨이나 효과를 보더라도 본래는 꽤 고위 천족으로 보였다.

"기억이 있는 건가."

-부끄럽게도.

그렇다면 이야기가 쉬웠다.

"알려줘. 카이삭스와 너. 어째서 타락하게 된 거냐."

도미니언은 지옥으로 변한 하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주겠다.

도미니언의 불꽃에서 과거의 기억이 다시금 재생되었다.

*

찬란한 천상.

그리고 그렇지 못한 땅 아래.

도미니언은 악마에게 짓밟히는 인간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인류는 버티지 못했습니다. 놈들은 곧 여기까지 밀고 들어올 것입니다. 도미니언 제사장."

"알고 있소."

하지만 아무리 기도를 올려도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기도는 그저 흘러갈 뿐이고 악은 거침없이 나아가니 몸은 굳건하나 마음은 썩어갔다.

"도미니언 대제사장님! 인간이! 인간이 찾아왔습니다!!"

악마도 쉬이 올라오지 못하는 곳이 바로 천상이건만.

수많은 창을 등에 메고 있는 인간은 너무도 손쉽게 천상에 올라왔다.

그리고 말하기를.

"지옥을 정벌하겠다."

뚱딴지같은 소릴 내뱉었다.

당장에 함부로 천상에 올라온 건방진 인간을 처벌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뒹굴었으나 도미니언은 그보다 인간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인계가 어지러운데 지옥은 어찌 갈 것이고 정벌은 어찌한다는 건가. 할 수 있다면 고통받는 그대의 동족부터 살펴야 하는 게 아니오."

"내가 살펴야 할 동족은 모조리 죽었다. 인간의 땅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지금이 비로소 저들의 목을 쳐 날릴 기회임을 모르는가. 땅 위의 악마를 죽여도 결국 심연의 끝에서 기어 올라오는 것이 저놈들이다."

그는 자신을 카이삭스라고 했다.

함께한 동료의 창을 잔뜩 거머쥔 채, 천상에 오른 그는 지옥을 정벌토록 하겠다며 자신을 도우라 말하는 아주 뻔뻔한 인간이었다.

기나긴 회의가 이어졌다.

그간 카이삭스는 수감되었고 지지부진한 말들이 이어졌다.

"개죽음이오. 고작 인간 따위의 말에 현혹되어 지옥으로 가다니. 저자가 그럴만한 힘이 과연 있겠소?"

세라핌은 그를 의심했다.

"거론할 필요가 없소. 인간 따위에 의지하여야 할 만큼 우린 나약하지 않소."

케루빔은 오만했다.

"그는 죄를 지었소. 심판해야 하오."

트론은 죄악을 따졌고.

"옳소, 그를 가두고 심문하는 게 어떻겠소. 악의 첩자일지 모르오. 만일 놈이 지옥의 군단장과 연이 있기라도 하다면 천상은 끝이니!"

벌쳐는 그를 거짓을 탐닉하려 했다.

"..."

"난 모르겠군..."

"그의 창은 쓸만해 보이더군."

프린시퍼는 침묵했고, 아크는 시선을 피했으며 에인젤은 탐욕을 드러냈다.

그 상황에서 오직 도미니언.

그만이 카이삭스를 두둔했다.

"난 그를 따라가겠소."

"어찌!"

"신성을 모독할 셈인가!"

"아무것도 안 하고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신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신이 우리를 만든 이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어떻소!"

사흘 밤낮을 설득에 매달렸다.

다른 제사장들은 결코 완강했으나 대제사장이었던 도미니언의 말을 결국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출정이 결정 났다.

끼익.

"나와라. 인간. 아니, 카이삭스."

감옥의 문이 열리고 카이삭스는 당연하다는 듯 나와 창을 쥐었다.

그렇게 출정이 시작됐다.

그와의 출정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도박이었다.

전멸이냐, 승리를 쟁취하느냐의 싸움이기도 했다.

지옥의 악마들에게 인간의 땅을 내어줄 때, 천상의 군대는 지옥으로 들어가 놈들의 머리를 친다.

말은 쉬웠으나 실천으로 옮기기란 무단히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카이삭스는 그걸 해냈다.

용암이 들끓는 지옥을 제패했다.

그의 창은 악을 꿰뚫었고, 악의 총주라 하는 군단장을 소멸시켰다.

도미니언은 추앙받았고, 카이삭스와는 더욱 가까워졌다.

약하디약한 인간의 몸으로 군단장을 토벌하는 카이삭스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는 천족은 없었다.

"이 창은, 내 동료들의 것이다."

카이삭스는 총 열한 개의 창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모두 죽은 동료들의 것이었다. 각양각색의 창은 적재적소에 쓰였고 카이삭스는 언제나 그 공을 동료들이 남긴 창으로 넘겼다.

자신이 힘 따위가 아닌, 동료들이 목숨으로 남긴 창이 해낸 것이라고.

강인하고 고결한 심지를 지닌 영웅이었다.

하지만 도미니언은 염려했다.

동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는 깊은 그리움과 어둠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하나 반대로, 그 때문에 그의 창은 복수의 칼날이 되어 악을 무찌르는 거라며 불온한 생각을 지워냈다.

수개월 후.

카이삭스는 완전한 천상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선봉장으로서 지옥을 정벌했다.

그 옆에는 항상 도미니언과 다른 천족의 제사장들이 함께했다.

-카이삭스여! 천상의 고귀한 잡종들이여. 너희들은 나 사르가타나스의 육신을 밟지 못 하리라!!

지옥은 그들의 예상과도 달리 험난했으며 끝이 없었다.

지옥의 악마들은 천상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 숫자를 가지고 있었고, 군단장과 그 후임자들 또한 무수히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군단장을 죽여도, 그 뒤를 잇는 후계자가 다시금 나타나 복수를 한다며 공격해오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군대는 휘청였다.

거친 풍랑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일렁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카이삭스는 그들을 베고, 꿰뚫었다.

악마의 시체로 쌓은 산을 지르밟아 피로 물든 창을 내질렀다.

'카이삭스. 그가 세상의 빛이다.'

아무 말도 없는 신보다, 도미니언은 카이삭스를 더 빛이라 여겼다.

응답 없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기도해도 신은 답하지 않으니. 나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아니하시니! 내일의 미래는 스스로 구원코자 움직여야 함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백의 전장과 사선을 지나 카이삭스는 결국 도달했다.

"이곳이오. 이곳이... 만마전이오."

지옥의 주인.

군주들이 자리한다는 만마전.

"도미니언. 너는 알고 있는가."

"군주들을 말인가."

카이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야 할 것들은 알고 있다. 만마전을 만든 '탐욕' 그들의 존재를 유지하는 '공포' 그리고 '반역' 또한."

"놈들을 죽이지 않는 한, 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죄의 군주들은 다행스럽게도 스스로 일으킨 반역으로 인해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는 발을 떼지 못하는 지금이 적기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전투.

카이삭스의 창이 떨렸다.

도미니언은 그 떨림을 느꼈다.

그 또한 인간.

신이 가슴을 뜯어내 빚었다는 인간이니 공포와 온갖 감정에 취약하여 스스로를 망치는 종족이었다.

도미니언은 카이삭스가 떠는 모습을 처음 봤다.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가.'

인간의 습성을 알지 못했다.

하여 고민하는 사이 카이삭스는 언제나 그렇듯 달려 나가버렸다.

선봉에 서서.

악을 무참히 도륙했다.

그리고 이윽고.

만마전의 정상.

지옥의 군주들에게 도달했다.

"죄악, 고통... 탐욕까지 있군."

탐욕은 황금빛 이를 드러내며 흉악한 미소를 지었다.

고통은 흥분으로 가득 찼으며 죄악은 카이삭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카이삭스. 만마전에 온 것을 환영한다. 고결한 영혼을 지닌 영웅이여. 굳이 저 잡것들을 데리고 행차하셨구나. 홀로 왔다면 더~ 좋았을 것을.

탐욕이 그를 환대했다.

-칼리어스. 네 등에는 수많은 고통이 매달려 있구나. 그 고통을 어서 빨리 맛보고 싶다.

고통은 육중한 살덩이를 흔들며 흥분을 참지 못했으며.

-네 발끝에 드리운 죄악이 그리도 많건만, 그 창을 등에 메고 다닌다 하여 그 죄가 사라질성싶으냐.

죄악은 카이삭스의 죄악을 논했다.

"닥쳐라. 공포의 노리개들아."

카이삭스의 한마디에 군주들은 발작하며 그에게 짓쳐 들었다.

어마어마한 전투가 벌어졌다.

신화의 창세기에나 나올 법한 전투.

딱 그런 전투였다.

땅이 뒤흔들리고, 지옥이 무너져 내리며 처절한 전투 속에서 고결한 영혼이 방황했다.

-아아! 아아아아!! 고통! 고통이여!! 고통이 나를 위로한다!!

"네놈의 고통을 해방해주마."

카이삭스와 제사장들은 힘겹게 고통의 군주를 물리쳤다.

죄악은 다 죽어가며 그를 저주했으나 탐욕은 아쉽게도 건재했다.

죄악의 목덜미를 쥐어 잡아 뱃가죽에 창을 쑤셔 넣은 카이삭스는 잡혀 있는 제사장들을 신경 썼다.

-카이삭스! 오오! 카이삭스!! 고결한 영웅아! 너는 또다시 죄악을 만들어 볼 셈이냐. 함께 싸운 전우들을 또다시 죽음으로 몰고 다니는구나! 네가 진정한 악마가 아니면 무엇이냐!!

죄악은 제사장 세라핌의 목을 쥐었다.

탐욕은 도미니언과 케루빔의 육신을 빼앗아 카이삭스를 농락했다.

"카이삭스! 흔들리지 마라! 우리의 걸음은 여기서 멎겠으나, 너의 걸음은 지옥의 끝까지 걸어가 이 종말을 끝낼 것이다!!"

도미니언은 죽음을 예감했다.

하여 소리쳤다. 용기를 내라고.

자신들의 죽음이 있어야, 이 세상의 비극을 끝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다른 제사장들도 침묵했다.

말 한마디, 한 번의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아무리 군주들의 고통스러운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작은 신음하나가 인간 영웅의 한 걸음을 늦추게 할까 봐.

그로 인해 그를 멈추게 할까 봐서였다.

-카이삭스. 또 동료들을 죽게 내버려 둘 셈이구나. 너는 내다 버린 네 친우들처럼 이번에도 이들을 버려 발밑에 끌고 다닐 것이야.

"닥쳐라 마녀! 카이삭스 현혹되지 마라! 우린 너의 걸음을 기원한다!!"

도미니언을 의심하지 않았다.

고결한 그는 이겨낼 거라고.

이윽고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군주 모두를 죽이고 끝끝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거라 믿었다.

그것이 자신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일이며 동시에 세상을 지킬 방법이었으니까.

"나는, 나는 죽고 싶지 않아...!!"

그러나 한가지 예상치 못한 일이 있다면.

"...!!"

탐욕의 속삭임에 현혹된 세라핌이 피눈물 흘리며 내뱉은 한마디.

고통을 참지 못한 그의 작은 신음성과 함께 그 물기 가득한 나약함이 카이삭스의 빈틈을 만들어냈다.

"안돼! 안돼!! 카이삭스!!"

"오, 신이시여..."

군주들은 그 작은 틈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또 동료를 잃게 될 슬픔과 고통을 떠올린 카이삭스의 빈틈을, 놈들은 기어코 비집고 들어갔다.

고결한 영웅은 저항했으나 결국 타락했고, 군주들의 수하가 되었다.

도미니언의 이야기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전부 듣자마자 데몬시드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세라핌 이 개새끼..."

타락한 천사들 [1]

207화.

"세라핌이 개새끼네."

"세라핌이 나약했군."

"세라핌 이 새끼가 모든 원흉이군. 초반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산채로 찢어 죽을 새끼."

데몬시드는 물론이요, 메타르와 윈드킬도 이야기를 듣자마자 하게 된 것은 당연하게도 세라핌의 욕이었다.

세라핌이 그 고통을 인내했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을지 모르니까.

우리가 이 고생을 안 해도 됐을 거란 결론 때문이었다.

-고결한 영웅은 타락하여, 군단장이 되었다. 군주의 자리를 꿰찰 수도 있었으나 다른 군주들을 명백하게 반대했지. 하여 지닌 힘에도 불구하고 열세 번째 군단장의 직위에 오르게 된 것이 내가 아는 모든 것이다.

도미니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혼미해졌다.

"그러니까 본래는 군주급인데, 군단장의 위치에 있다는 겁니까?"

메타르의 물음에 도미니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리 났군. 결국 군주와 싸우는 거나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잖아?"

윈드킬과 메타르는 낙담했다.

데몬시드도 아쉬움을 버리지 못했다.

'죄악은 확실하게 죽었겠고, 탐욕이 꽤 건재했어도 최소 동귀어진이나 어쩌면 처치했을지도 모르겠어.'

그만큼 카이삭스의 힘은 대단했다.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걸까.

데몬시드는 자신의 창을 내려다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베어 물었다.

"도미니언. 묻고 싶은 게 있다."

-답하겠다.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지금의 카이삭스는 이전보다 더 강해진 상태인가?"

이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방금 보여준 전투에서보다 카이삭스가 더 강해졌다면, 그는 확실한 군주급 그 이상이라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도미니언은 고개를 저었다.

-영웅의 타락으로 그의 힘은 확실하게 강해졌다. 하지만 카이삭스의 힘을 두려워한 군주들이 그의 힘을 분산시켰다. 지금 그대들이 싸우는 존재들이 분산된 힘의 방향이다.

분산.

카이삭스의 기사들을 뜻했다.

"그렇군."

"군주들이 카이삭스의 힘이 분산되게끔 그를 유도했다는 겁니까."

-맞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

윈드킬의 말에 동의했다.

그나마 다행.

카이삭스의 힘은 약화되어 있다.

"지금의 내 힘은 카이삭스에 비해 어느 정도일 거 같나."

-...

도미니언은 데몬시드를 내려다봤다.

허공에 발을 떼고 있던 도미니언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땅으로 내려섰다.

데몬시드의 눈과 가슴, 그리고 손에 쥔 창을 내려다본 도미니언은 한동안 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창, 이 창을 사용한다면... 사 할의 가능성이 있다.

"그런가."

"데몬시드가 그 정도라면..."

"좆됐네 이거..."

고작 4 할.

데몬시드는 납득하지 못했다.

-그는 모든 무기술의 대가다. 아무리 대단한 무기가 있다고 한들, 그에게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하지만 도미니언은 데몬시드의 의문을 쉽게 납득시켰다. 제아무리 강인한 무기가 있다 한들, 싸우는 도중에 빼앗길 위험이 크다는 것.

그만큼 카이삭스는 노련한 전사였고 힘이 분산되어 있대도 그는 여전히 고강한 존재였다.

'일이 어렵게 됐군.'

도미니언의 말대로다.

시해의 창에는 회귀 스킬이 붙어 있지만, 뭔가에 억압당한다면 회귀가 느려지거나 불가능해진다.

도미니언은 그 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설명한 것이다.

카이삭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상황이라는 건 크게 변하지 않았다.

'힘의 분산.'

군주들로 인해 힘을 분산시킨 카이삭스와 싸운다고 쳐보자.

어찌어찌 힘겨운 전투로 그를 죽이기 전까지 갔다고 한들.

'분산시켰던 힘을 복구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모두가 개죽음당할 것이 분명했다.

진정한 카이삭스의 힘은 지금의 인류가 버텨낼 재간이 없었으니까.

이 점을 도미니언에게 말했으나 도미니언은 의외로 괜찮다고 말했다.

-그대가 있으니까.

데몬시드를 정확하게 짚어 말하는 도미니언의 말이 이어졌다.

-날 정화하지 않았나.

"그렇군..."

"무슨 소리지?"

"뭐야, 데몬시드. 무슨 말이야?"

그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만 하나는 안다.

'나머지 장군들을 전부 정화하면 그건 막을 수 있다는 거군.'

그렇다면 할 일은 바뀌지 않았다.

장군을 죽이고 정화한다.

-나와 함께 타락한 제사장들을 정화한다면 그대들과 함께 싸우며 그가 분산한 힘을 거둬들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결계를 치겠다는 건가."

-비슷하다.

이해한 바가 일치했다.

"그럼..."

"하던 일을 계속 해야 한다는 거군."

부상을 입고 도망친 장군.

놈과 함께 있는 다른 장군도 잡는다.

그리고 붙잡힌 인질도 구한다.

-누가 도망쳤소?

"파워라는 녀석이었다."

-파워... 그는 예로부터 겁이 많았지. 함께 있는 것은 그럼 아크겠군.

파워와 아크.

-내게 생각이 있다. 들어보겠나.

데몬시드와 메타르는 서로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

후난성 안.

기사들과 대장들을 대동한 옥좌 위에는 한 명의 장군이 자리해 있었다.

[13군단의 8장군 아크]

투구를 쓰고 있음에도 눈 부위에서 연신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군이었다.

그 앞에는 부상 당한 채, 인간 하나를 끌고 온 장군이 있었는데 그는 메타르와 윈드킬과 싸우고 도망간 바로 그 장군이었다.

[13군단의 6장군 파워]

-그건 뭐냐 파워. 꼴사납게 도망친 것도 모자라. 혹까지 달고 오다니.

-아크!! 너 따위가 감히 내게 그런 모욕을 주는 건가!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딱히 맞는 말도 아니지! 틀렸다! 난 도망친 게 아니라 놈들의 전력을 확인하고 온 것이다. 게다가 전리품까지 챙긴 것이지!

아크와 파워는 보자마자 으르렁거렸다. 아크는 파워의 말을 믿지 않았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파워의 거짓부렁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더럽혀진 흉갑과 피비린내.

이것만으로도 파워는 싸우다 도망친 것이라 보기 적당했다.

-전리품...

-그래! 전리품!!

파워는 당당하게 제 손에 잡혀 있는 인간을 내던졌다.

"큭! 제기랄..."

그의 손에 내던져진 인간은 미국 2위.

라이프였다.

-놀라운 힘을 지녔다.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더군. 심장을 터트려도 마찬가지다. 제약은 있는 모양이겠지만, 우리의 아군으로 만들기에 썩 적당한 녀석으로 보인다만?

어떠냐는 식으로 당당히 허리춤에 두 팔을 가져가며 가슴을 편다.

아크는 그런 파워를 내심 한심하게 여기며 인간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대동해 있는 기사 대장이 검푸른 기운을 그러모아 카이삭스의 투구를 만들어냈다.

-그런 힘을 지녔다면 능히 아군으로 만들어 카이삭스님의 힘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게 옳다. 인간, 투구를 써라. 그럼 너는 편해진다.

"헛소리를! 내가 너희 같은 악마가 될성싶으냐!! 아무리 죽여봐라! 난 죽지 않고! 고통을 참고 인내해 결국엔 네놈들 심장을 취할 테니!"

라이프는 놈들의 헛소리를 비난하며 얼마든지 고문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놈들을 도륙하고 이곳을 탈출하고는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의 힘은 장군들에게 미치지 못했다. 기껏해야 기사 대장 하나를 처리할 수 있는 정도.

하지만 이곳에는 장군도 기사 대장도, 일반 기사들도 무수히 많았다.

난동을 피워봤자 빠져나가기란 요원했다.

-기개는 넘치는군. 저항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을...

아크는 라이프를 내려다보다 손사래 쳤다. 그러자 기사들이 라이프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이내 대장들까지 물리자 파워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파아아아아아!!

-파워. 상황을 말해라. 이미 적들이 널 따라 이곳까지 왔다. 게다가 바로 앞에서 강력한 신성의 힘이 느껴져... 그리우면서도 역겨운 그 힘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크는 파워가 이 모든 상황의 주범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걸 탓한다고 해서 상황이 좋게 변하리라 보지도 않았다.

-난 몰라! 놈들이 강했다! 아파서! 너무 아파서!! 아파서 여기 왔어! 아크! 너와 내가 힘을 합치면 그래도 그놈들을 처리하지 못할 건 없어! 카이삭스님에게도 면이 선다!!

-겁쟁이 파워. 너는 대체 왜 그 모양으로 사는 거냐.

-닥쳐! 난 겁쟁이가 아냐! 그저 죽는 게 무서울 뿐이다!

-그게 겁이 많다는 거다.

-닥쳐라!! 난 그래도 네놈처럼 알아도 모르는 척, 항상 눈을 감고 다니지는 않아!

한동안 논쟁을 벌이던 파워와 아크는 일순, 변화를 눈치챘다.

-비켜라!

콰아아앙-!!

일순 벽을 부수고 날아든 황금빛으로 불타는 창.

파워를 향해 날아든 투창을 한 손으로 막아낸 아크는 거대한 신성력의 힘에 건틀렛이 박살 나며 부서졌다.

휘리릭, 푹.

강력한 위용을 뿜어내던 창은 힘을 잃고 바닥에 박혀 들었고 이내 찬란한 불꽃이 파문처럼 퍼지며 거대한 공동을 모조리 감쌌다.

그리고 이내 성문에서는 누군가가 걸어왔는데, 찬란한 여섯 장의 날개에서 불티를 흩날리는 탄내 나는 천족.

바로 도미니언이었다.

그는 바닥에 꽂힌 자신의 성창을 잡으며 서글픈 눈으로 타락한 형제들을 바라봤다.

-도미니언?

-그 꼴은 대체 뭐지? 어떻게...

-내 그대들을 구원하리.

도미니언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파워를 공격했다.

-캬아아아아악!! 아파! 아파아아아!!

-미안하다 형제여.

파워는 곧장 도망치려 했으나 도미니언의 결계에 막혀 달아나지 못했다.

그즈음 되자 아크 또한 검푸른 기운 속에서 창을 꺼내 그를 겨눴다.

-카이삭스님을 배신한 거냐.

-단 한 번도 그를 배신한 적이 없다.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보탬이 되어주지도 못한 한심한 것이 바로 우리다.

-헛소릴! 지금 이게 카이삭스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네가 하는 짓은 명백한 배신이다! 배반자 도미니언! 널 여기서 처단한다!

*

타닥, 탓! 콰아앙-!!

후난성의 길목을 바람 타며 달리고 있는 사내는 데몬시드 일행이었다.

"정말 괜찮을까?"

"상관없다. 어차피 그는 죽지 않아."

"애초에 도미니언이 말한 작전이잖아. 알아서 하겠지. 안 그래?"

"맞다."

메타르의 의심을 데몬시드와 윈드킬이 거뒀다.

애초에 이 작전은 도미니언이 말한 것.

-내 힘은 보다 면밀하게 감지한다. 내 형제들의 힘, 잡혀간 인간의 힘도 모두 느낄 수 있다. 그는 살아있어. 지금은 어딘가로 이동 중이다.

하여 그가 장군들의 이목을 끌어 그들을 붙잡아 놓은 사이, 동료를 구하라는 것이었다.

-바깥은 본인이 처리하겠소.

27군단 로노베의 트리가드 또한 성 밖에서 도움을 주기로 했다.

데몬시드 일행은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를 붙잡혀 있는 사람을 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이프는 괜찮을 거다. 카이삭스의 투구가 씌워졌다고 해도 그냥 벗겨내도 될 거야."

그는 여러 개의 목숨을 지닌 자.

고개를 끄덕인 데몬시드가 도미니언이 알려준 방향으로 속도를 냈다.

화악-!!

대기하던 기사 둘의 머리가 터졌다.

퍼퍽!

"앞에 대장급 둘!"

"데몬시드! 둘은 우리가 맡겠다."

"넌 라이프를 구해줘!"

"알았다."

기사 대장의 공격과 투창을 간발의 차로 피하며 구애의 춤을 시전한 데몬시드는 대장급 둘을 춤추게 만든 뒤, 나머지를 그들에게 맡겼다.

쾅-!!

놈들이 만든 성 지하로 향하면 향할수록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곳은 감옥이었다.

검푸른 금속으로 이루어진 감옥이었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결박되어 투구가 씌워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하게 변화하지는 못한 느낌이 강했다.

흉갑이 생겨났으나 건틀렛과 각반이 존재하지 않은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저항하고 있었다. 힘겹게 저항하는 중이라고 보는 게 맞다.

곧장 감옥을 부수고 투구를 뜯어냈으나 절규에 찬 비명과 함께 죽어버리기 일쑤였다.

'살릴 수 없나...'

안타까움에 인상을 찌푸릴 때쯤.

감옥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라이프!"

한달음에 달려가자 기사 둘과 기사 대장 하나가 누군가에게 투구를 씌워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척!

데몬시드를 발견하자마자 창을 들이밀었지만 느리다.

퍼펑-!

기사 둘의 머리가 터져나감과 동시에 기사 대장의 창을 비스듬히 피한 데몬시드는 땅에 등이 닿을 듯 회피하다 구애의 춤을 사용했다.

움찔 멈춰 서며 저항하려 하는 기사 대장을 보며 천천히 놈의 심장에 시해의 창을 쑤셔 박았다.

"라이프. 정신이 있나."

-으, 으으으!

아쉽게도 투구가 씌워진 상황.

데몬시드는 투구를 뜯듯 벗겨내려다 멈추고 힐링을 사용했다.

-자네 동료는 투구가 씌워졌을 확률이 높아.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신성을 주입하면 어쩌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

도미니언의 말이었다.

자신을 정화한 것처럼 신성을 주입하면 타락을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으으! 으으으으으으윽!!

그리고 도미니언의 예감은 적중했다. 검푸른 기운을 쏟아내던 투구는 이내 데몬시드의 신성력 앞에서 힘을 잃고 터져나갔다.

쾅!!

"살았나."

"내가... 어떻게..."

라이프는 분명 살아있었다.

"파동을 익혔군."

"머릿속으로... 으윽."

정신 지배를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여파가 남아 있는 걸까.

그의 곁에는 검푸른 파동이 존재하고 있었다.

"파동, 쓸 수 있는 건가?"

어쩌면 이 감옥에 있는 네피림.

이들 모두가 카이삭스의 파동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힘은 분명.

'도움이 된다.'

이번 전쟁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타락한 천사들 [2]

208화.

-제기라아아알!! 아크! 아크으으!! 죽여! 저놈을 당장 죽여어어어!!

무너진 성안.

파워는 도미니언의 창에 맞아 바닥을 동동 굴렀고, 8장군 아크는 도미니언의 몸에 창 수개를 박아 넣었다.

-몸을 사리지 않는 건가. 네가 이렇게 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아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만의 성역을 완성해 자신들을 가둔 것은 능히 칭찬할만하다.

도미니언, 자기 자신을 미끼로 두어 성안의 병력을 착실하게 줄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전술로는 탁월했고, 효율적으로도 흠잡을 것 없었다.

제 목숨을 잃게 될 일만 빼면 말이다.

아크의 중얼거림에 도미니언은 답했다.

-때론, 죽음이 안식을 가져다주지. 나의 죽음으로 죽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오히려 마음은 편할 테니.

-무슨 소리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아크. 파워.

도미니언은 아크의 창에 몸이 고슴도치처럼 되었으나 그럼에도 오로지 파워만을 공격했다.

불타는 성화로 파워를 찌르고, 찌르고 또 찔렀다.

아크와 파워가 제아무리 공격한다 한들, 날개가 찢기고 다리와 팔이 부서져도 파워만을 공격했다.

-어이가 없군.

아크는 생각했다.

도미니언을 아무리 공격해도 그의 강인한 정신력은 고통을 인내하며 파워를 죽이는데 모든 힘을 다했다.

'파워는 죽는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비명을 내지르던 놈은 이제 와서는 서서히 작은 신음과 토혈을 토해낼 뿐.

아크는 파워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의 눈구멍에서는 또다시 검은 피눈물이 흘렀다.

-또다시 눈을 감는가.

도미니언이 이를 비난했으나 아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죽어가는 적의 도발에 발끈할 정도로 그는 파워만큼 호전적이지도, 어리석지도 않았으니까.

-네가 사라지면 결계도 사라진다. 결계가 사라지면 난 성에 들어온 모든 인간을 죽이고, 그들을 기사로 만들어 더욱 굳건한 성벽을 쌓을 거다. 네 모든 희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음을 보여주마.

그러나 무릎 꿇은 도미니언은 웃음을 흘렸다.

-왜 웃지?

-왜 내가 죽을 거라 생각하나.

-죽지 않는 자는 없다. 너 또한...

스르륵.

도미니언이 죽었다.

작은 불티로 흩어져 사라지는 도미니언을 보며 아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죽은 자에게 말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으니까.

동시에 놈이 펼친 결계도 사라졌다.

-위협적이군.

인간들의 공격은 위협적이었다.

가장 강한 인간이 둘.

그들을 주축으로 성안의 기사들은 완벽하게 공략되고 있었다.

인간의 수가 많은 것도 많은 것이지만 둘을 주축으로 한 공격대의 숙련도가 제법이었다.

하나하나의 힘은 약하다.

하지만 서로의 힘을 협력하여 하나처럼 융화되는 것을 보노라면, 마치 바닷속의 정어리 떼가 뭉쳐 상어를 물리치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파워, 죽었나.

-커, 커어... 빌, 어먹... 을.

파워는 연신 피를 토하고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곧 죽을 상황.

녀석을 카이삭스에게 데려간다면 상처를 치료하고 그를 복원시켜줄 것이었다.

하지만 아크는 눈을 감았다.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죽는다면 그 또한 운명.

제 모자람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아크는 창을 꼬나쥐었다. 자신이 할 일은 제 성의 파리들을 치우는 일.

정어리 떼가 뭉쳤다 한들, 결국 정어리. 꿰뚫어 죽이면 그저 한낱 식사거리로 전락할 놈들이 아닌가.

치우면 될 일이다.

-...

하지만 생각과 달리 아크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움직일 수 없었다.

-왜냐.

무너진 성벽.

그곳에는 불티를 휘날리는 여섯 장의 천족이 성스러운 불길을 만들어내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방금 죽어 가루가 된 천족.

도미니언이었다.

-왜 살아 있는 거냐.

이유는 간단했다.

-글쎄, 벌이라도 받는 모양이지.

죽지 않는 벌이라.

아크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그것참, 부러운 벌이군.

-지금만큼은 나도 동감이다.

쿠우우우웅-!!

도미니언과 아크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타나길 반복했다.

맞부딪칠 때마다 불티와 파동의 힘으로 주변이 가루가 되거나 불타 폭발했는데, 그 엄청난 격동에 전쟁의 흥분도는 더욱 높아졌다.

"죽여! 죽여라!"

"머리를 노려! 이놈들 투구가 망가지면 별거 아냐!!"

"지원이다! 적군의 지원 병력이...!"

쿠우웅!!

"아니 흙벽이... 이거 누가 한 거야?"

"어이 비켜!!"

콰아아앙-!!

돌연 두꺼운 흙벽이 생기더니 돌덩어리가 날아들어 카이삭스의 기사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돌덩어리는 흙으로 빚었는지 터짐과 동시에 진흙으로 변해 기사들을 진탕 속에 구르게 만들었다.

꽤 놀라운 마법이었는데, 메타르는 이 마법의 주인을 금세 깨달았다.

'로노베.'

27군단장 로노베.

놈의 마법이었다.

멀리서 곤봉인지 지팡이인지 모를 것을 든 괴상한 괴물의 원조였다.

메타르는 놈을 상대할 때를 떠올렸다.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진흙에 빠졌고, 기름에 미끄러졌으며 흙벽에 가둬지고 모기떼를 부려 온몸에 두드러기와 간지러움을 유발했던 개고생을 말이다. 적으로 만나면 열불이 뻗치는 상대가 아군이 되니 이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진짜 사기라니까.'

적을 자신의 종으로 만드는 스킬.

데몬시드의 스킬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사기적이었다.

그 상황에.

쾅-!

"이 씨발놈들아 내가 왔다!!"

"개자식들아!"

"으아아아아아!!"

돌연 성의 바닥이 부서지더니 그곳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행색은 남루했지만 모두 무기 하나씩을 쥔 채로 푸른 파동의 스킬을 사용했는데, 파괴력이 남달랐다.

"라이프!!"

그 사이에는 라이프도, 데몬시드도 존재했다.

폭풍을 불러일으키며 싸우고 있던 윈드킬도 데몬시드를 발견하며 피식 미소 지었다.

"라이프를 구하라고 했더니, 오만 사람 다 구했네."

윈드킬은 대장급과 전투를 시작했고, 메타르도 마찬가지.

데몬시드는 전쟁의 양상을 지켜보다가 도미니언이 싸우는 곳으로 향했다.

"굳이 힘들게 싸울 필요 없지."

도미니언의 결계 안으로 들어간 데몬시드는 아크와 호각으로 싸우는 그를 바라보다 시해의 창으로 죽어가는 파워를 찔렀다.

푹.

"13군단의 6장군 파워를 처치하였습니다."

부서진 헤일로와 깃털 등등 아이템이 쏟아져 나왔다.

데몬시드는 파워를 씨앗으로 만들어 곧장 심어 키웠다. 웅장한 성 꼭대기에 거대한 나무가 주렁주렁 열렸다.

물론 신성으로 정화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대량의 신성이 사용됩니다!"

인질들을 회복시키느라 신성을 조금 소모하기는 했지만, 도미니언의 열매로 신성을 빠르게 회복 중이라 상관없었다.

꽤 늘어나기도 했으니 파워를 정화하는 것 정도야 손쉽다.

높게 솟은 나무.

파워의 엘더 트리는 도미니언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본래 신성이라 함은, 황금빛의 찬란함을 떠올리기 쉬운데 파워의 것은 오히려 빛이 없었다.

'투명하군.'

투명한 나뭇잎.

반투명한 나무의 몸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겉껍질과 열매 또한 퍽 투명한 편이었다.

열매를 하나 따먹은 데몬시드는 특이하게도 그녀의 열매가 신성력과 은신을 올려준다는 걸 깨달았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신성력이 2 상승합니다."

"은신이 2 상승합니다."

신성력과 은신.

신성력은 좋았지만, 은신 자체가 주는 메리트는 조금 적었다.

지옥의 어비스에 나타나는 헬둠을 잡아도 은신 스탯은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할 수 없다.

아무래도 파워의 급이 떨어지기 때문이라 지레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열매에서는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여인이 태어났다.

파워였다.

데몬시드는 부서진 헤일로와 깃털을 내주었고 이내 기억과 힘을 되찾은 파워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울고만 있을 건가."

-저는, 저는...

파워는 앞서 도미니언이 말했던 것처럼 겁쟁이였다.

태생이 겁이 많았으나, 그녀는 현명하고 몸을 숨기는 기술이 뛰어나다고 하였다. 그러나 데몬시드는 파워에 대한 평가를 높게 치지 않았다.

'할 일이 많다.'

싸우지 못할 녀석 하나하나 케어할 시간 따위는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데몬시드가 이곳에서 할애하는 시간만큼, 다른 곳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한 상황.

데몬시드는 파워를 내버려 뒀다.

시해의 창을 말아쥐며 힘겹게 싸우고 있는 도미니언의 전장에 참전했다.

"구애의 춤."

들이닥치자마자 구애의 춤을 시전했으나 아크는 꽤 노련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데몬시드가 나타나자마자 지면을 부숴 제 몸을 감췄다.

명백하게 그를 경계하는 모습이었는데, 데몬시드는 도미니언과 눈빛이 오가며 단박에 뛰어들었다.

쾅-!

하나 아크는 그곳에도 없었는데, 데몬시드는 가만히 눈을 감아 발끝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신경을 집중했다.

바릿느의 열매를 먹고 그가 올린 감지 스탯은 벌써 30을 돌파.

땅에 발을 붙이는 존재라면 웬만해선 데몬시드의 감지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대여, 뒤!

"알아."

퐈악-!

벽면을 부수고 들어온 아크의 창날이 데몬시드의 투구를 조금 부순다.

부러진 물소의 뿔과 함께 데몬시드는 아크의 창을 단단히 잡았고, 동시에 헤일로가 떠오르며 가시덩굴이 솟아올라 그를 옭아맸다.

-흐아아아압!!

도미니언이 찬란한 불꽃을 일으켜 그를 찔렀으며, 가시덩굴은 그가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더욱 단단하게 옭아매기 시작했다.

쿵! 쿠웅! 쿵!!

거대한 파동을 일으키는 아크의 힘 앞에 벨로나의 가시덩굴이 부서졌다 솟아나기를 반복했다.

예상보다 저항이 거셌다.

그때 시해의 창이 데몬시드의 손아귀에서 파동의 힘을 머금었다.

"카이삭스의 파동을 인적의 편린을 이용해 증폭시킵니다."

"세트 효과로 300% 데미지를 추가로 입힙니다."

도합 860%의 추가 데미지.

검푸른 파동이 데몬시드의 창끝에서 발현됐다.

-!!

공간이 뒤틀릴 듯 거대한 파동이 물결처럼 번지고 일대가 그 여파에 휩쓸려 땅이 뒤흔들렸다.

쩌적, 쩌저저저저적!!

성은 조각조각 나 무너져 내리고, 지반이 뒤틀려 제멋대로 뒤틀어졌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저항하던 아크의 흉갑이 박살 나고 몸과 투구마저 가루가 되어 파동 속에서 지워졌다.

-나는! 나는...!!

하나 아크는 포기하지 않았다.

데몬시드의 파동을 점차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 또한 파동을 익힌 자.

그의 파동에 점점 융화되어 가는 모습은 데몬시드에게 하나의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카이삭스에게는 쓰지 못할 스킬.'

그의 힘을 받은 장군급 존재가 가능하다면 그 또한 분명히 가능할 터.

이는 분명한 소득이었다.

데몬시드의 생각과 함께.

아크의 저항은 이어졌다.

하지만 그 끝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크, 이젠 눈을 떠.

어느새 등 뒤에는 울기만 하던 파워가 은신을 벗어던지고 단검을 아크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아...

"13군단의 8장군 아크를 처치하였습니다!"

아크가 쓰러졌다.

파워는 아크를 소중하게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데몬시드는 도미니언을 바라봤다.

-그런 거죠.

둘이 연인 사이임을 은연중 알린 도미니언의 언질과 함께 데몬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살려주마."

데몬시드의 힘이 죽은 아크에게 퍼지고 하나의 씨앗으로 변모했다.

씨앗은 이내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파워의 엘더 트리와 쌍을 이뤘다.

이내 열매가 열리고 아크의 트리가드가 나타났다.

그는 본래의 힘과 기억을 되찾고, 파워와 재회한 뒤 데몬시드에게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눈 감고 싶지 않소. 부디 그를 지옥에서 구해주시오."

그는 답하는 대신, 창을 쥐고 전장으로 향했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