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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강철은 곧장 포탈을 타고 중국의 국경 인근에 도달했다.

"강철! 여기야!"

그곳엔 이미 포탈을 타고 온 아마존과 바바리안이 있었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상황은?"

"아마존이 보고 있어!"

고막이 아플 듯한 굉음과 충격파가 전신을 때리고, 거대한 지진이 균형을 잡기 힘들게 만들었다. 연신 벼락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는데 위력만으로 보자면 푸르푸르 때의 대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힘이었다.

"찾았...! 아! 놓쳤어! 너무 빨라!!"

그때 아마존이 데몬시드를 찾았으나 금세 놓쳤다. 달의 눈으로도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철은 두 눈을 감고 있는 아마존의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이내 그녀도 눈을 감자.

달의 눈으로 보이는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망막에 담겼다.

"이런..."

휘몰아치는 눈보라.

연이어 터지는 프로스트 노바.

1초에 수백 개씩 터지는 프로스트 노바와 함께 연신 벼락이 내려친다.

동결된 적들은 벼락에 얻어맞아 산산이 깨지고 부서졌으나 수가 많다.

'천, 아니 만인가?'

기사들의 키는 제각각이었다.

큰 자도 있고 고블린처럼 작은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검푸른 갑옷과 창을 장비했는데, 저마다의 이름으로 불리는 기술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

기사 대장이라는 자는 복합적인 기술을 연달아 사용했는데, 기본적인 신체 능력 또한 남달랐다.

수십 개의 뇌령이 쏟아내는 공격을 모조리 피해내며 뇌신으로 변한 데몬시드를 추격하고 있었으니까.

그 속도는 육안으로 쫓아가기 힘들 정도였고, 어쩌다 한번 데몬시드와 기사 대장이 충돌할 때면 발생하는 충격파에 몰려있는 기사들 수백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데몬시드가 제대로 공격하지는 않고 있어. 무슨 문제라도 있나.'

어찌 된 영문인지 데몬시드는 그의 공격 대부분을 피할 뿐,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않았는데 강철은 이내 그 이유를 찾아냈다.

'누굴 데리고 있군.'

누군가를 보호하며 싸우고 있다.

벼락처럼 움직이며 적들의 공격을 모조리 피하는 것 자체로 그가 있던 자리마다 역뢰가 하늘로 치솟았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수의 적들을 무력화시켰지만 그를 쫓는 기사 대장에게는 큰 소용이 없어 보였다.

"놓쳤어!"

또다시 전력으로 움직이는 데몬시드의 움직임을 놓친 아마존은 다시금 달의 눈을 이동시켰지만, 강철 군주는 이제 등에서 손을 뗐다.

"빠르군."

어느새 각국의 랭커들이 속속들이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출발했던 메타르는 아무 거리낌 없이 중국의 국경을 넘어가 버렸고, 그것은 일본의 머큐리도 마찬가지. 하지만 다른 나라의 랭커는 잠시 주춤하다가 가거나 아예 강철이 있는 쪽으로 선회했다.

"좋은 구경거리이긴 한데, 역시 중국이 무너질 정도로 만만치 않은 거 같네. 수준이 이상해."

영국 1위. 마스크였다.

방독면을 쓴, 금발 포니테일의 여자였는데 그녀는 더 이상 전진할 이유가 없다는 듯 강철과 아마존의 곁에 서서 팔짱을 꼈다.

"맞는 말이야."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이번엔 그 잘나신 데몬시드도 꽤 난항인가 봐? 예전처럼 혼자 가서 투쾅하면서 못 잡는 거 보니."

그 옆에는 독일 1위 레이지와 강철과도 안면 있는 독일 랭커들이었다.

작은 경계심을 가짐과 동시에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다.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필요한가 봐.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때?"

러시아 1위. 화이트였다.

"또 군단장을 뺏기고 싶은 거냐?"

"뺏길만하니까 뺏겼었지."

"화이트. 뭔가 달라졌군."

독일 1위. 레이지의 눈빛이 바뀌었다.

명백하게 화이트의 심사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눈치챈 반응이었다.

"사람은 바뀌지 않으면 죽어야지."

"말은 잘도 하는군."

"결국 우리가 온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고, 그 대책이란 걸 생각해봤자 결국 중국의 군단장을 죽이지 않으면 어렵지 않나? 어차피 그럴 거라면 적을 파악하기 위한 데이터는 필요한 법이야."

"돕겠다는 말을 어렵게도 하네."

독일의 3위. 쟈카이였다.

이죽거리는 표정이 여간 사람을 열받게 했지만, 화이트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놈의 곁을 지나갔다.

"겁나면 거기 있든가. 가자."

러시아 랭커들을 이끌고 중국의 국경을 넘어가는 화이트의 뒷모습을 강철은 바라만 보지 않았다.

"바바리안. 따라와라."

"당연하지!"

바바리안은 뒤편에 모인 거손에게 눈짓하며 강철의 뒤를 따랐다.

"미국 1위 실력 좀 구경해보실까!"

데몬시드는 크게 걱정될 게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관심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게 당연.

중국을 집어삼킨 군단장.

그리고 또 하나는 유명하디유명한 미국의 1위.

메타르였다.

*

후웅-!!

거친 바람을 몰고 멈춰선 자는, 메타르였다.

그의 기프트는 철과 관련된 모든 금속을 조종하는 능력이었다.

덕분에 자신이 걸친 갑옷을 스스로 조종해 날아왔는데 그 힘이 Lv. 8에 이르러 대단히 강력해진 것.

"꺼져."

서걱.

메타르는 도착하자마자 자신에게 투창한 기사의 창과 함께, 기사 자체를 날려버렸다. 그의 금속은 가루에서 순식간에 칼날처럼 변하기도 했다.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금가루나 땅 밑에 잠재된 사철. 또는, 전장에 굴러다니는 금속들을 분해해 칼날처럼 연마해 날리거나 하는 공격으로 대부분의 것들을 모조리 처치한다.

"안 죽어? 확실히 다르네. 여긴."

솔직히 메타르의 기프트는 생각처럼 그렇게 특별한 능력은 아니다.

원소 종류나 금속을 다루는 종류의 기프트는 꽤 흔히 있는 편이니까.

하지만 그가 비교적 평범한 기프트를 가지고도 랭킹 1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딱 하나.

0.3초 단위로 이루어지는 판단력과 고정밀의 금속 컨트롤에 있었다.

우리에겐 친밀한 물도 얼마나 빠르게 분사하느냐에 따라서는 어떤 검보다 날카롭게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메타르의 사철도 마찬가지.

그의 주변을 넘실거리는 사철의 가루 하나하나를 컨트롤하며 순간적인 응집과 사출의 위력으로 무엇도 꿰뚫을 창이나 검이 만들어진다.

물론.

"아이기스!"

쾅-!!

이는 완벽한 방패의 역할도 한다.

"다르긴 달라. 내 방패가 뚫리다니."

날아오는 창을 막았을 뿐인데,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아이기스의 방패가 뚫렸다.

고작 챔피언도 아닌, 일반 기사가 날린 투창에 말이다.

그때였다.

[파장의 기사]

순간적인 위기감이 전신의 털을 바짝 서게 만들었다.

메타르는 놈의 창을 아이기스로 막지 않고 하늘로 치솟았다.

그와 동시에 땅에서는 푸른 파장과 함께 일대가 박살 났다.

"무슨..."

하지만 아직 위기는 그대로였다.

하늘에 오르자마자 거창의 위에 자리 잡고 있던 기사가 투창했다.

[반전의 기사]

핏.

살짝 몸을 틀어 피했지만, 어깨가 조금 찢겼다. 머리에 피가 돔과 동시에 헤일로가 떠오른 메타르가 제힘을 발휘하려는 순간.

"반전의 저주에 걸렸습니다."

"생체 신호가 반전됩니다."

"상하좌우가 뒤바뀝니다."

"윽!"

다리를 들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려갔다. 팔을 내리려고 했는데 올라가고 오른쪽을 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왼쪽을 보기 시작했다.

신체 조작의 모든 게 반전.

"제기랄."

메타르는 빠르게 반전된 몸에 적응하며 한차례 전장에서 벗어났다.

간담이 서늘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데몬시드에 대한 의문은 더욱 강해졌다.

"메탈! 괜찮나?"

"아, 그래. 괜찮다. 중국을 점령한 군단장의 수준이 굉장히 높나 보군. 일반 악마들 레벨이 심상치 않아."

최소 10레벨.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재밌네."

메타르의 머리 위에 떠오른 헤일로가 눈부시게 반짝인다.

평범한 랭커라면 일반적인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 진땀을 뺐을 터.

하지만 그런 놈들 수천의 대군과 맞붙으면서도 균형을 유지한다.

아니, 농락하고 있다.

'저건 미룡으로 보이는데.'

번득이면서도 한 번씩 뇌신이 풀리면 데몬시드의 실체가 드러난다.

여인 하나를 어깨에 메고 있는 사내.

그가 바로 데몬시드였다.

"사람 하나까지 살리면서 이만한 숫자의 악마와 싸울 수 있는 랭커."

과연 또 누가 있을까.

"넌 가능하나?"

"아니? 하지만 넌 가능하잖아."

"그렇지."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메타르의 전신에 금속이 모이기 시작했다.

"보여줘야겠어. 계단 랭킹의 수모를 여기서 갚아줘야지!"

금속의 모이는 속도가 빠르다.

어느새 크기가 백 미터는 훌쩍 넘을 정도로 거대해지고 있었다.

"와! 씨발 저게 뭐야! 개 멋있잖아!"

달려가던 바바리안이 거대해진 금속 덩어리를 보며 감탄했다.

그냥 단순히 거대하기만 했다면 바바리안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 또한 헤일로의 고유 능력이 자이언트. 거대화인 만큼 고작 그 정도로 놀랄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바바리안이 놀랐던 이유.

그것은 바로 형태에 있었다.

"나도 건담 갖고 싶었다고!!"

메타르의 헤일로.

그건 금속을 이용한 로봇.

그 자체를 이루는 것이었다.

150미터에 이르는 길이.

단단한 다리와 조립식으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건담을 쏙 빼닮은 몸체.

게다가 왼팔엔 방패와 오른손엔 거대한 총까지 들고 있었다.

완벽한 건담 프라모델의 형태.

사내라면 환장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로봇.

그것도 제일 인기 많은 건담이었다.

이것이 바로 메타르가 1위인 이유.

그리고 또 하나는.

"건담은! 최강이다!"

방패 위에 총을 올리자, 입자포가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이내 그것을 발사하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카이삭스의 기사들이 폭발에 휘말려 그냥 삭제되어 버렸다.

물론, 크기만 한 게 아니다. 상황에 따라 크기 조절도 가능한 건담은 불리한 지형 상황을 최소화한다.

어느새 10미터 정도 크기로 변한 메타르는 건담의 모습을 유지한 채로 기사들 사이로 들어가 방패를 앞세운 채로 탱크처럼 기사들을 짓밟았다.

단순히 금속이기만 하지는 않다.

오른손의 총을 내던진 그는 등 뒤의 검을 뽑아 방패에 꽂았다.

그러자 방패는 형태를 변환하더니 대검으로 변신했고 이내 강력한 플라스마 빛을 발산하며 내려치자.

콰아아아아아앙-!!

그야말로 일도양단.

일직선상의 수백 미터의 지면이 갈라짐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폭발을 만들어내며 기사들을 썰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미국 1위.

메타르의 힘이었다.

"작아질수록 내 힘은 집중되지."

10미터로 거대했던 건담이 이번에는 5미터 정도로 작아졌다.

철컥. 그러자 데몬시드를 뒤쫓던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이 메타르에게 쇄도했다.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기운.

메타르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너도 알아보는 건가. 세계 1위를!"

그때였다.

다시 한번 힘을 집중하는 메타르의 어깨에 살포시.

파직. 붉은 전류가 나타남과 동시에 데몬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데몬시드!"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맙다."

"나는 미국 1위...!"

파직!

"데몬시드으으으으으!!"

허무하게 사라지는 데몬시드의 모습과 동시에 메타르는 기사 대장과 부딪치고 어마어마한 굉음을 만들었다.

중국 멸망 [3]

190화.

미룡을 둘러멘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패를 사용하며 중국과 맞닿은 북한의 국경으로 향했다.

최대한 백두산 근처로 가기 위해서였다.

길을 알려주는 사람도, 길도 익숙지 않으니 최대한 이정표가 될만한 게 백두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하얼빈에서 백두산까지는 쭉 남하만 하면 되는 길.

그렇게 빠르게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길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면 그것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카이삭스의 기사들 수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이었다.

그냥 일반적인 악마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기술을 사용하고 갑옷과 무기를 쥔 기사들의 숫자가 어이없을 정도로 많았다.

나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어처구니없었다.

[파동의 기사]

이 녀석은 내가 싸우며 박살 내고 스쳐 지나간 놈인데, 어쩌다 보니 투구가 벗겨져서 봤더니 얼굴이 낯익었다.

'타오.'

공포에 삼켜져 도망갔던 악마 숭배자 타오였다.

분명 도망갔는데 왜 갑자기 파동의 기사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을까.

그 이유는 한가지로 추론된다.

'이놈들은 살아있는 악마를 기사로 만든다.'

그 예로 키가 작은 질책의 기사 놈 투구를 벗겼더니 얼굴은 영락없는 고블린의 것이었다.

어떤 악마라도 갑옷을 입고, 창을 쥐면 카이삭스의 기사가 된다.

동시에 본래의 본성과 습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기사로서의 본능만을 따르며 적을 섬멸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시체를 일으키는 네크로맨서보다 더 악질이었다.

'살아 있는 자들을 정신 지배하는...'

이렇다 보니 기사의 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늘어났다.

중국이 점령되고 최초엔 그리 많지도 않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숫자를 보노라면 위기감이 샘솟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하얼빈과 비롯한 소도시의 기사들이 점점 불어나 남하하게 된다면 대한민국에는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다.

막아야 했다.

정신 지배.

그럼 그 매개체가 되는 건 뭘까.

"창은 아니겠지."

유력한 후보 중 하나는 창.

하지만 창은 이미 내가 쥐어봤던 터라 잘 알고 있다.

창을 줍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벌써 나 또한 세뇌당해 놈의 기사가 되었어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

"투구."

기사들이 쓰고 있는 투구.

이 투구가 문제였다.

그렇다면 이 투구를 벗기면 정신 지배가 풀리며 쉽게 무력화할 수 있나? 그건 또 그렇지 않다.

머리랑 달라붙어 있는 건지, 투구를 벗기면 이마의 뇌수가 딸려 나온다.

어쨌든 간 무력화시켜 정신 지배를 풀려 해도 결국 죽어버린다.

결국, 기사를 무력화시킬 방법은 처치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내 수준에서 기사들을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대단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카탈린의 감전을 비롯한 뇌격과 뇌신, 그리고 뇌령은 내 존재 자체를 번개의 신처럼 만들어준다.

내가 지나는 자리마다 '역뢰'가 치솟아 몹몰이를 하면서 싸우기만 해도 짧은 시간에 수백 마리의 기사들을 처치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의미가 없다.

시간만 주어지만 기사들의 수는 내가 처치하는 숫자보다 몇 배는 더 늘어나게 될 테니까.

결국엔 놈을 잡아야 한다.

'정신을 지배하는 놈이 있을 거다.'

기사들은 분류되어 있다.

파동, 질책, 표식 등등.

그렇다면 분명히 있을 거다.

세뇌를 전문적으로 하는 녀석이 그게 내가 아직까지 중국을 벗어나지 않은 이유였고, 그 욕심으로 인해 거머리 하나를 붙여버린 연유다.

쾅-!!

"진짜 집요하네. 수준도 단순한 챔피언급도 아니고... 어디 군단장 하나 잡아 와서 만들었나."

수식언도 없고, 단순히 기사 대장이라는 직책만 붙어 있어서 방심했는데 이 녀석의 수준은 최하위 군단장 수준에 필적한다.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

지금 생각해보면 정신을 지배당한 녀석일 테니 수식언도 이름도 없는 게 당연하다.

수준을 보면 군단장 후보에 필적하는 녀석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절로 드는 파괴력과 속도다.

"큭!"

콰아아아앙-!!

게다가 녀석은 일반 기사들과는 달리 기술을 3가지 이상 사용한다.

표식, 파동, 질책, 반전까지.

지금까지 도망치며 겪어본 바로는 한 번에 4가지 기술을 사용하는 녀석이었는데 그래서 꽤 까다롭다.

블리자드와 리버슬로우의 연계 정도는 가볍게 부수고 들어온다.

파동의 힘으로 빙결과 둔화의 콜라보를 부수고, 내 벼락들은 표식으로 모조리 피해버린다.

거기에 검푸른 기운으로 창을 무한정 만들어내 투창하는데 거기에 모조리 파동이 담겨있어서 막기도 힘들고 피할 방법밖에 없었다.

뇌신과 그루트의 조합이 아니었다면 달아나기도 힘들 상대.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녀석의 직책 때문이었다.

기사 대장이라면 분명 챔피언 취급.

군단장과 달리 챔피언은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남하할 수 있다.

그 밑의 기사들도 마찬가지.

어떻게든 따돌려야 할 거 같은데 나조차 따돌리기 쉽지 않은 녀석들이다 보니 그대로 도망가도 될까 싶었다.

이런 녀석들이 상대라면 백두산에 있는 바리라도 백여 마리 정도가 붙어버리면 힘들 거다.

녀석의 레벨이 조금 더 성장한다면 모를까 아직, 군단장 때의 힘을 찾지도 못한 녀석이라면 인해전술을 남발하는 녀석들에게 쉽게 공략당하고 말 테니까.

'독 저항도 있었으니까.'

페스틱사드를 사용해 본 결과, 당연하게도 독 내성이 있다.

"경험치가 가득 찼습니다!"

"이 이상의 경험치는 소멸합니다."

기사들 잡는 걸로 경험치도 가득 차 버렸다.

챔피언이나 군단장 정도 잡으면 렙업도 이제 가능할 텐데...

'미룡 때문에 이 녀석 잡는 건 힘들어 보이는데.'

역시 최선은 도망치는 것.

지금은 그게 최선.

'역시 도망치자.'

일단 미룡을 안전한 곳에 두고, 랭커들과 녀석들을 막는 게 최선.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희생자가 꽤 생기겠지만, 오래 전투를 치러서 내 마나도 간당간당하다.

뇌신과 그루트로 최대한 속도를 내고, 벨로나로 놈을 막아놓고 도망치기로 결정한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뭐야 저건."

뜬금없이 건담이 나타났다.

방패와 총을 든 건담이 플라스마 입자포로 일대를 날려버리더니 크기를 줄이고 말을 타고 달려드는 기사들 사이로 뛰어 들어가 난동을 부렸다.

총은 던져버리고 방패를 검으로 만들더니 갑자기 무쌍을 찍는 것이 아니던가.

'잘됐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의 네피림은 아닌 듯했다.

저런 대단한 기프트가 있었다면 내가 모를 수가 없을 테니까.

그가 있는 장소는 백두산으로 남하하는 방향.

난 건담이 있는 곳으로 뛰었다.

파직!

"데몬시드!!"

날 아는 듯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맙다."

"나는 미국 1위...!"

콰아아아아아-!!

기사 대장이 놈과 부딪치며 일기토를 벌이기 시작했다.

"미국 1위?"

그놈이 왜 갑자기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잘됐다.

"잘 버티겠네."

미국 1위라면 뒤를 맡겨도 좋을 것이다.

"데몬시드!!"

"데몬시드!"

"대장!"

바바리안과 거손, 강철과 아마존이었다. 그들도 파동 기사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제법 잘 싸우고 있었다.

"미룡?! 아니 미룡이 있어?"

"죽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보자마자 질문 공세였지만 하나하나 답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이야기는 나중에! 미국 1위가 맡고 있는 기사 대장을 조심해라! 쉽게 죽일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그리고.

"기사들은 살아있는 악마들의 정신을 지배해서 만들어진다. 찾을 수 있으면 찾아서 죽여!"

단편적인 말들이었지만 급하기에 어쩔 수 없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들은 한국의 랭커들.

이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내 뜻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따로 만드는 놈이..."

"놈을 찾아야겠..."

"알겠어..."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허공을 박찼다.

최대한 속도를 내 날아가자 은색의 물방울 비슷한 거랑 지나쳤다.

'다른 나라의 네피림인가.'

기묘한 기프트였다.

이내 중국의 국경이 나타났고, 다른 국가의 네피림들이 모여 있는 걸 확인한 순간 난 포탈을 열었다.

위치는 당연히 불별도가 아닌, 기부도였다.

"브란스!!"

"아이고 염병할 깜짝이야!! 뭐, 뭐냐! 또 무슨 난리인 게야!"

화들짝 놀란 브란스의 앞에 미룡을 보였다.

"이 처자는..."

"내 신성으로도 회복이 안 됩니다! 강화 포션 어딨습니까?"

"저주로 인한 회복 불능이로군. 마침 잘됐어! 내 신작을 시험해볼 실험체가 딱... 아니, 환자가 왔구만!"

"뭐든 빨리요."

"자 이걸 먹이게!"

[이름 없는 물약]

-흰 숲의 현자, 브란스가 데몬시드와 피의 축복과 함께 만든 성수.

〈???〉

뭔가 대단히 믿음직스럽지 못한 설명이지만 난 안다.

이 세계의 시스템은 설명이 적거나 애매할수록 강력하다는 것을.

"미룡, 입 벌려."

"삼키지를 못하는데? 데몬시드! 빨리 입을 맞대서 먹여줘라!"

"에라이."

물약을 입에 머금은 채로 미룡과 입을 맞췄다.

그제야 흘리지 않고 삼켰는데 돌연 미룡의 몸에서 작은 빛이 나타났다.

"오오! 역시 내 연구는 틀리지 않았어! 틀리지 않았다고!!"

"뭘 만든 겁니까?"

"흐흐, 자네의 악과가 주는 회복력! 그리고 +5 강화된 성수! 거기에 레아 양의 축복을 하나로 만든 연구였지!"

그게 바로 이거.

"이름은 그래. 축복이라는 의미를 담은 블릭서가 좋겠어."

브란스는 미룡의 상태를 보며 말했다.

"오디에 담긴 강골의 힘을 수백 배 농축했고, 그것을 레아 양의 피의 축복과 함께 붉은 성수의 +5 힘을 내 기프트의 힘으로 섞이게 했지."

그렇게 만들어진 물약의 효과는 오직 뼈를 재생성시키는 것.

"본래의 상태를 되찾아 가는구나."

"확실히. 뼈가 자라나는군요."

미룡의 손과 팔. 그리고 다리의 절단된 뼈들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뼈가 자람과 동시에 신경과 근육들이 재생되기 시작했고 그 위를 매끈한 피부가 깔끔하게 덮였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재생.

메이의 버섯 의수가 아닌, 오로지 재생 능력을 극한으로 높인 물약이 이루어낸 하나의 기적이었다.

신의 기적이라고 말해도 다르지 않을 모습. 만약 양산만 할 수 있다면 모두가 죽지 않을 수도 있을 정도로 엄청난 회복력을 지닌 물약이다.

"이거, 양산할 수 있습니까?"

"안되지. 이거 만드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네. 그마저도 이 작은 양. 게다가 레아 양의 축복과 자네 악과도 여간 들어가는 게 아니야. 무리해서 만든다 해도 한 달에 한 개지."

브란스는 쯧쯧 혀를 찼다.

"신의 눈물이라 불러도 좋을 물약을 보고도 양산할 수 있냐고 묻다니. 이 대단한 업적의 결과물이 한 달에 한 번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게다! 거기다 들어가는 재료 좀 봐라. 자네가 준 +5 강화 성수도 뭐 그리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거던가?"

아니다.

쌍성의 거울로 만들 수 있지만 꽤 많은 붉은 성수가 필요로 한다.

거기에 악과에 더해 레아의 축복까지 필요로 한다면 만들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브란스의 뭐든 조화롭게 만든다는 기프트의 힘을 꼬박 한 달은 부여해야 하는 물약.

말이 한 달이지, 한 달 동안 들어가는 노력을 생각한다면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물약이었다.

"아직 하나 더 있기는 하네만 이건 오직 자네에게만 쓰게. 타인을 소중히 하는 것도 좋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안배를 하는 것도 영웅의 덕목이네.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 쉬어야겠구먼. 한동안 잠을 잘 못 자서... 근데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아 참, 스미스가 자넬 찾더구먼. 맡겨둔 무기를 만들었다고 하던가? 근데 상황이 많이 안 좋나 보군. 내가 가세해야 할 상황인가?"

난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닙니다."

스미스의 무기가 완성됐다.

그렇다면 큰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무기의 성능을 시험해볼 좋은 상황이 펼쳐졌을 뿐이니.

"으음... 데몬... 시드?"

마침 미룡이 깨어났다.

화들짝 놀란 미룡이 일어나 자신의 손과 다리를 보고는 한 번 더 놀랐다.

"데몬시드!!"

"아 그게. 일단 내가 구해서... 읍!"

돌연 미룡의 혀가 입으로 들어왔다.

찐한 키스와 함께 입꼬리를 올린 미룡이 말했다.

"나 이제 난민이네. 한국인 시켜줘."

중국이라는 나라가 사라지면서, 중국 네피림들의 기반이 되는 시스템 또한 사라졌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미룡의 말대로 그녀는 난민이 맞았다.

"그래."

전 중국 1위의 한국 귀화.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카이삭스에 대해 듣고 싶다."

그녀에게는 반드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미룡 [1]

191화.

악마가 나타나고 외국인의 귀화 과정은 정부의 전산 작업을 통해서가 아닌, 네피림의 시스템을 이용해서 귀화하게 된다.

귀화 과정에서 그녀가 네피림이라면 랭킹 안에 들어 각종 보상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네피림의 귀화 과정은 특이하다.

조건은 두 가지.

첫째로는 '귀화할 땅에서 악마를 처치한 전적이 있는가.'이다.

이는 네피림이라면 그렇게 어려운 조건은 아니다.

중요한 건 두 번째부터.

'랭킹 1위부터 100위까지의 랭커 중 한 명 이상의 추천이 있을 것.'

물론, 귀화하려는 자가 전에 있던 국가에서 꽤 높은 랭킹의 보유자거나 가진 힘과 잠재력이 높다면 최소 10권의 랭커의 추천이 필요하다.

이주 희망자가 타국의 1위라면?

당연히 1위의 허가가 필요하다.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온 존재인 레아 등등은 따로 허가가 필요치 않지만, 미룡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타국의 1위.

그녀이기에 오직 대한민국 1위.

데몬시드인 나의 허가가 필요했다.

물론 그렇기에 어려울 건 없었다.

"미룡의 귀화가 허가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소속-미룡 Lv. 7"

"진짜 한국인 되어버렸네."

미룡은 시원섭섭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제 이 세상에 중국이란 나라는 없는데.

"데몬시드, 나 랭킹 2위 됐다?"

"오, 다른 녀석들이 슬퍼하겠는데."

"억울해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왜인지 2위라는 순위를 꽤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그녀의 웃음 속에 그늘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으나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한테 1위는... 무거웠어."

"그랬나."

"조금. 그렇게 크게 무거운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홀가분해."

홀가분하다는 건 정말인 듯했다.

여러 복잡한 심경이 담겨있는 말이었지만 위로의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어설픈 위로 따위로 그녀의 심정을 헤아릴 수는 없을 테니까.

'나라를 잃어버린 심정이라...'

그건 과연 어떤 감정일까.

너무 커다란 것이라 적당한 상실감 따위로는 생각해볼 수 없었다.

고아로 자랐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어디까지나 내 고향이다.

고향이 사라졌다는 말은 돌아갈 곳이 사라진 것이며, 추억의 냄새와 음식. 전통과 분위기가 없어진 것이다.

나로서는 위로할 수 없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미룡은 내 가슴을 주먹으로 툭 쳤다.

"난 이미 한번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원래라면 죽었을 상처였어. 찢겨진 균열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우연히 널 만난 게 내 최대의 행운이었던 걸 테니까."

"그런가."

"응, 이제 새롭게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났잖아? 그럼 된 거지."

그래, 그거면 된 거야. 라고 중얼거린 미룡은 허리춤에 주먹을 올리고는 씩씩하게 물었다.

"그래서, 데몬시드. 네 집은 어디야? 여기는 아니지? 저번에 봤던 할아버지가 있으시던데."

"여기는 아니다. 난 저쪽 섬에 살고 있으니까."

"오... 섬에 사는구나. 몰랐어. 섬, 어디? 저기?"

"응. 저기."

급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관찰자와 강철로부터 계속해서 보고가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강철군주님로부터 메시지]

-기사들의 숫자가 예상보다도 많앙. :( 아마도 네가 말한 그것 때문이겠징... 아직까지는 타국의 랭커들이 재미 삼아 사냥하고 있어서.. 우리도 적당한 선에서는 찾아볼겡! :)

아직 중국에서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는지 랭킹이 내려갔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관찰자님으로부터 메시지]

-볼일이 끝나신다면 우선, 청와대로 한번 와주시겠습니까. 드릴 말씀도 많고, 들을 말도 많습니다.

관찰자는 아마도 미룡의 귀화 소식을 눈치챈 모양이다.

"가봐도 돼? 어차피 나도 이제 저기서 살 거니까."

"구경 정도는 상관없...?"

눈이 동그래져 미룡을 쳐다보니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큰 눈을 반짝거리며 뜨는 걸 보니, 모르고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물어야 했다.

"네가 왜 나랑 같이 살지?"

그러자 미룡은 당연하다는 듯 내게 밀착해오며 말했다.

"날 구했잖아. 목숨을 빚져 버렸지. 그럼 당연히 같이 살면서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게 사람 된 도리 아닐까? 거기다 날 구한 게, 강하고! 새로운 나라에서도 가장 힘이 센 남자라면 더더욱?"

코앞까지 다가와 입술을 핥는 미룡을 보며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건... 어느 나라 법이지?"

"그럼? 나 정도로 이쁘고 대단하고 강한 여자를 길바닥에서 재우려고? 그건 국가적 손실이 아닐까 싶은데."

한 걸음 물러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꼬며 말하는 미룡의 입꼬리가 은근히 올라갔다.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재수가 없지만 그게 미룡이라 납득이 된다.

"당연히 국빈 대우를 해야겠지. 대한민국에서 제일 안전하고 인프라가 구축되고 있는 곳이 있다. 거기서 살면 될 거야."

서초동의 트라움 아파트.

그곳의 최고층 라운지라면 미룡 수준에 맞는 거주지가 될 수 있겠지.

저런 작은 섬에 있는 어중간하고 낡은 오두막이 아니라.

"싫은데?"

"... 왜지?"

"꼭 내 입으로 말해야 돼?"

이젠 짜증 난다는 듯 인상을 구기는 미룡의 모습에 난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 데리고 살라고. 누나가 이런 거까지 하나하나 말해줘야 하는 거니? 막둥아.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게..."

나도 남자다.

미룡의 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머저리가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녀를 밀어내는 이유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오두막에서 나 혼자 사는 게 아냐."

불별도의 오두막.

내 집에는 레아가 함께다.

그녀에게 허락을 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내 집에 한 명의 여인이 들어와 있는데, 또 다른 여인을 들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기억 안 나면 다시 말해줘?"

미룡은 여전히 심통 난 얼굴로 팔짱까지 끼었다.

"저번에?"

"그래, 저번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푸르푸르의 레이드가 끝났을 때였다.

그때 포탈을 열고 가기 전의 대화가 뭐였는지 솔직히 잘 기억 안 난다.

"정말 기억 안 나나 보네. 그래, 그때는... 여러 일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줄게."

미룡은 다시 한 걸음 다가와 내 얼굴을 잡고 말했다.

"난 별로 상관없는데."

"...?"

"네 옆에 빨간 머리 여자애가 있는 거 알아. 그래도 상관없다고."

이건 꽤 당황스럽다.

"우리 우유부단한 막둥이. 누나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그치?"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이는 내가 더 연상..."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내가 너랑 살고 싶다는 거지. 그래서 귀화한 건데?"

"그게 무슨..."

"그래서, 나랑 같이 안 살아? 나 같은 랭커를 놓치면 대한민국은 꽤 아쉬워할 거 같은데?"

그건 그렇다.

미룡을 잡아놓기 위해서는 오두막을 증축해야 한다는 기묘한 조건이 생겨버렸지만 말이다.

"나, 싫어?"

"아니."

싫지 않다.

"그럼, 좋아?"

"... 좋은 쪽에 속하지."

"그럼 됐네."

미룡은 내 목을 두 팔로 휘감았다.

"그거 알아?"

숨결이 맞닿는 거리.

"뭘..."

"나, 아까 첫 키스였다?"

미룡은 싱긋 웃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고는 한쪽 눈을 가리던 안대를 풀러 바닷가에 내던졌다.

푸르푸르의 레이드 때 잃어버렸던 한쪽 눈도 블릭서로 재생된 것이다.

난 혹시 몰라 물었다.

"입술도... 재생됐나?"

뭐 그런 식의 농담이 아닐까 물었으나 미룡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며 웃었다.

"하하! 참나. 그런 게 어딨어. 나보다 약한 남자는 성에 차지 않았을 뿐이야. 매력을 못 느꼈거든. 어릴 때부터 그런 곳에서 자란 탓이려나."

어릴 때부터.

미룡의 말에 자동적으로 흑사회가 떠올랐다.

"그래서, 언제까지 여기 세워둘 거야? 이야기해달라며. 그놈."

카이삭스.

그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 우선 먼저 갈 곳이 있다."

"어딘데?"

"뉘우치는 대장간. 그곳에 있는 자에게 받을 물건이 있다."

"대장간? 아... 시스템 대장간?"

"응."

꽤 오래간만의 방문이다.

뉘우치는 대장간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크게 증축되어 꽤 많은 대장장이의 일터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스미스는 그곳을 군림하는 왕이나 다름없었는데, 브란스의 말에 따르면 지옥의 어비스에서 올라와 대장간에서 내 무기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심적으로 안정되는 장소에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대장장이의 미신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뉘우치는 대장간은 대한민국 네피림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라 미룡의 귀화 작업부터 완료하고 들어가려 했었다.

당황스러운 고백 비슷한 무언가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나도 가볼래. 한국의 대장간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니까."

"따라와라."

"뉘우치는 대장간에 입장합니다."

포탈이 열리고 그곳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반기는 철 냄새.

그리고 뜨거운 열기와 연신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였다.

지금 시간에도 이곳에는 꽤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는데, 난 그들을 보자마자 투구를 썼다.

"꼭 그거 쓰더라. 가리지 않아도 괜찮은 거 아니야?"

"이젠 습관이라서."

물소 뼈 투구로 유명한 열병의 투구를 썼다. 그러자 날 알아본 네피림들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쓰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 모습을 보자 미룡이 납득했다.

갈라진 인파 속으로 걸어가며 스미스가 있을 장소로 향했다.

최초의 뉘우치는 대장간과는 거리가 다소 멀어졌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옛 감성이 묻어 나왔다.

카타콤의 어둠침침한 모습과 함께, 검은 산양의 투구를 쓰고 있는 리벨롬의 모습이 말이다.

"리벨롬. 스미스는 어디 있나."

스미스는 이제 리벨롬을 연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무기를 강화해주는 건 자신이 믿을만한 대장장이에게 맡긴 지 오래였다. 새로운 리벨롬은 뒤편에 새롭게 생긴 공간을 바라보며 스미스가 있을 곳을 가리켰다.

"스미스."

스미스는 내가 올 때까지도 한 자루의 창을 바라보며 골몰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모를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스미스."

내가 다시 한번 부르자.

스미스는 모루 앞에 앉은 채로 날 올려다보고는 내게 창을 찔렀다.

후욱!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다.

의아해하며 스미스의 찌르기를 피하며 창대를 맞잡았다.

꽤 날카로운 기습이었지만 내게는 한없이 느리게 보인 공격이었다.

그래서 스미스의 공격에 화가 나기보다는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내 궁금증은 금세 풀렸다.

"맞군. 다행이오!"

"맞다니, 뭐가 말입니까."

"데몬시드, 그대를 사칭한 놈이 있었소. 하마터면 이 소중한 창을 놈에게 건넬 뻔했지 뭐요."

"그런 놈이 있었습니까."

"그렇소! 트롤의 발바닥에 밟혀 죽일 놈이었지. 아무튼 건넬 수 있게 되어 다행이오."

스미스는 내게 창을 건넸다.

생각보다 창이 완성이 빨랐다.

일주일 정도 되었나.

고작 그 시간 만에 만들었을 줄은 몰랐다.

아무리 헤일로의 능력 자체가 광물을 다루는 것에 있다고는 하지만 다름 아닌 파브라움이었으니까.

게다가 장인이나 다름없는 스미스가 공들일 게 뻔하니 꽤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다.

"공을 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오. 그저 내 노력이 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지."

"무슨 뜻입니까."

"파브라움. 그것은 그 자체로 완성된 광물이오. 순수한 창의 형태를 만드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첨가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외다."

이 자체로 이미 완성된 광물.

그것으로 만든 창.

창의 외형은 순수하다.

오로지 찌르기를 위해 제작된 창.

그 외형은 투박해 보일 지경이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완벽했다.

[시해의 창] (Legendary)

-파브라움으로 만든 창

〈인적의 편린〉

-단창이 흡수한 시전자의 스킬 데미지 520% 증가.

〈무너지지 않는 신념〉

-전투 중 파괴 불가.

〈시해 Lv. 2〉

-격을 갖춘 적을 죽일 때마다 단창의 위력 증가. (+20%)

〈극〉

-극렬한 관통. (추가 피해 120%)

〈회귀〉

-주인이 원할 시, 언제든 그에게 돌아간다.

〈영원한 각인〉

-최초의 마법을 영원히 각인하여 창의 운명을 결정한다.

완벽.

이 이상의 감탄사가 또 있을까.

단연코, 내가 만져본 창 중에서 이 창이 가장 완벽했다.

미룡 [2]

192화.

적당한 무게감.

무게중심에 따른 밸런스.

게다가 레전더리 등급에 어울리는 각종 고유 효과들.

투창을 자주 사용하는 내게 있어서 이보다 완벽한 창은 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시해의 창은 강한 적을 죽이면 죽일수록 단창의 위력이 증폭되는 효과를 지녔다.

시해라는 효과 때문인데, 이 효과는 레벨에 따른 데미지 증가가 다른 고유 효과에도 적용된다.

시해의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강력해지는 성장형 무기인 셈!

그러니 어찌 완벽하다 하지 않을까.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리벨롬의 망치로도 강화가 되지 않는 것이오."

"그렇군. 그건 조금 아쉽네."

강화 불가라 쓰여져 있지도 않은데 리벨롬의 망치로 강화가 안 된다는 건 다르게 생각해보면 리벨롬의 망치 말고 다른 걸로 강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검증은 해봐야겠지.

"리벨롬. 망치 좀 빌려주겠나."

제3대 리벨롬은 주춤하다가 내게 망치를 건넸다. 줄 서고 있는 네피림들이 웅성웅성거리긴 했지만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했다.

망치를 쥐자.

"뉘우치는 망치로 강화할 수 없는 무기입니다."

"억지로 강화하면 뉘우치는 망치가 파손될 위험이 있습니다!"

확실히 그렇다.

스미스의 말대로 뉘우치는 망치로는 시해의 창을 강화할 수 없었다.

레전더리 등급의 무기 정도면 리벨롬의 망치로는 한계가 있는 모양.

하지만 강화가 안 된다는 소린 아니니 언젠가 강화할 수 있는 다른 망치를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스미스. 당신 헤일로에는 강화하는 그런 능력은 없는 겁니까?"

"파브라움 밑의 모든 금속은 내 손으로 다룰 수 있는 게 느껴지오. 하지만 파브라움의 강화는 정확하게 내 손을 벗어났지. 확언할 수 있소."

"그렇군요."

강화는 불가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솔직히 시해의 창의 능력치를 보면 이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이기도 하다. 애초에 시해의 창은 점점 강해질 고유 효과를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고맙습니다. 훌륭한 창입니다."

"훌륭한 금속 때문이지 않겠소."

스미스와 서로 바라보며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파브라움은 더 있소?"

"만들면 되기는 합니다. 재료는 얼추 모았으니까요."

"내가 아까 강화는 불가하다 했지만 그건 지금까지의 일이오."

"그렇군요. 파브라움으로 망치를 만들게 된다면 또 모를 일이죠."

"망치까지는 내 욕심이지만, 리벨롬의 망치를 파브라움으로 강화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지 모르오."

리벨롬의 망치를 파브라움으로?

확실히 시도해서 나쁠 건 없다.

최악의 경우엔 리벨롬의 망치가 강화 효과를 잃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성공했을 때의 효과가 기대되는 부분이다.

"미룡. 중국에도 장비를 강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나."

"있었어.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로는 각국에 몇 개씩 존재하는 걸로 기억해."

그렇다면 보험용으로 하나 더 구하게 되면 시도하는 게 낫겠다.

"스미스. 관찰자에게 말해 놓을 테니 강화 망치를 하나 더 구하게 된다면 그때 시도해보는 걸로 하죠."

"알겠소. 아, 참. 이걸 잊을 뻔했군. 잠시만 기다리시오!"

이내 스미스가 대장간 한편에 걸려 있는 무언가를 건넸다.

뿔과 독니, 그리고 깃털이었다.

"이게 뭡니까."

"저번에 내게 맡겼던 군단장의 부산물들이오. 강력한 마력을 담고 있어서 그간 만지지 못했다가, 이번에 헤일로를 얻고 만질 수 있게 됐지."

그런데 왜 재료 그대로일까.

뭔가 장비들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스미스에게 맡겼던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헤일로를 얻고도 이것들을 손대지 않았다.

'손대지 못한 건가.'

못 한 건지 안 한 건지는 그에게 물으면 될 일이었다.

"만들려면 만들 수 있었소. 하지만... 왠지 느낌이 기이해서 말이오."

"기이하다?"

"이 재료들을 만지고 있으면... 어디선가 이들을 부르는 기분이 들었소. 무기로 만들지 않고 이 자체로 사용할 수 있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지."

그리고 나온 결론은.

"데몬시드. 그대에겐 군단장으로 만든 트리가드가 있지 않소."

트리가드.

본래 그들의 것이었던 군단장의 부산물. 스미스는 이것을 그들에게 건네볼 것을 제안했다.

"본래 주인에게 돌아가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들에게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면 무기로 만들어도 되긴 하지만... 그대가 정해보시오. 난 그대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니."

"일단 알겠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

가능성이 존재한다.

더욱 강해질 기회도 있다.

'천천히 가자. 급하게 가다가는 체할 수도 있으니까.'

시간을 들여서 전투력을 강화하고 대비하여 공을 들여야 했다.

중국이 무너진 지금.

한국은 초비상 사태에 돌입했다.

하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오히려 그렇기에 내실을 쌓아야 한다.

시해의 창을 보면 알 수 있다.

시간을 들이니 이런 창이 나왔다.

트리가드도 아마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파브라움을 더욱 많이 만들면 한국의 전력도 강화될 것이다.

'중국이 무너진 건 시작일 뿐이야.'

악마들은 어떻게든 지상을 정복하려고 애쓸 것이다. 지상을 점령해야 천상으로의 길이 열리는 듯했으니까.

악마는 그저 단순한 짐승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더한 전장을 겪어온 전문가들이니...

"결국엔 힘을 키워야 해."

인간이 인간으로 있을 수 있기 위해서는 힘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아저씨. 내 무기도 만들어줄 수 있어요?"

"본인은 대한민국의 랭커들 무기만 만드는 사람이외다. 중국 랭커 무기 만들어줄 이유는 없소."

"저 이제 한국 랭커예요. 자그마치 2위인데? 안 만들어줄 거예요?"

"으음? 사실이오?"

"그렇게 됐습니다. 근데 미룡. 너한테 무기가 필요한가?"

꼬리를 주로 사용하는 미룡에게 따로 무기가 필요하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꼬리가 잘렸을 때도 방비해야 될 거 같아서. 나름의 교훈을 얻었지."

"그렇군."

난 스미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무기를 주로 사용하시오."

"전부 다루는 편이에요. 어릴 때부터 대부분의 무기는 익혔거든요. 그래도 역시 편한 건 단검이려나. 적당한 걸로 하나 만들어주세요."

스미스는 미스릴로 만든 단검 하나를 건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이걸 쓰고, 후에 다시 오시오. 파지법이나 검날을 보고 어떤 전투를 주로 하는지 봐서 다음에 제대로 맞춤으로 만들어줄 터이니."

"장인은 장인이네. 그렇게도 만들 수 있는 거구나..."

미룡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품에서 뭔가를 건넸다.

"이건..."

"아다만티움 조각이요. 몇 개 얻었거든. 이거면 대금으로 충분하죠?"

"또 오시오."

스미스는 의외로 낯을 가리는 편이라 누구한테 또 오라는 말은 잘 안 하는데, 미룡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대장간을 떠나며 한마디 해주자.

"그래? 잘됐네. 데몬시드 네가 깍듯하게 경어를 쓰길래 나도 예의를 좀 차렸지."

"그랬나."

"아무한테나 예의를 차리진 않아. 나, 미룡이잖아."

"참나."

어이가 없지만 싫지는 않다.

죽상을 하는 것보단,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가 보기 좋으니까.

"자! 이제 다음은 어디로 가?"

"아직까지는 시간이 있을 테니까..."

"드디어 집으로 가는 거야?"

"집은 나중에."

관찰자는 청와대로 와달라고 했지만, 아직 거기는 가 봤자다. 지금도 네피림들은 중국의 국경에서 카이삭스의 기사들과 투덕거리고 있을 테니까.

아직 괜찮다.

'스미스의 말도 있었고.'

라피가 있는 섬으로 가보려 한다.

이름 없는 무인도라 라피섬이라고 부르는 불별도의 남쪽 섬이다.

원래라면 백두산으로 향하는 게 맞다. 백두산 지킴이.

바리에게 바릿느의 독니를 건네주면 어찌 변할지 궁금하기도 하니까.

효율을 생각해도 그게 좋다.

하지만 검증이 필요하다.

만일 군단장의 핵심 부산물을 건네면 트리가드가 어떻게 변할지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돌연 옛 기억이나 힘을 찾아서 날 적대할 수도 있는 법 아니겠나.

그렇게 되면 꽤 골치 아파진다.

그러니 제압하기도 쉽고, 없어져도 상관없는 라피에르로 가는 게 맞다.

거기서 한번 시험해보고 난 뒤에 백두산으로 향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

"간다."

라피섬의 좌표가 적힌 포탈을 열고 들어서자 라피는 작은 새의 모습으로 엘더트리의 나뭇가지에 있었다.

라피의 깃털을 닮은 나뭇잎이 풍성한 나무. 그 아름다움에 미룡은 감탄을 터트렸다.

"라피."

-피!

피피거리면서 날아온 라피는 내 머리맡 위를 날았다.

[라피에르의 엘더트리]

『보유』

완숙-6 미숙-13

트리가드(라피)-Lv. 3

레벨은 저번보다 한 단계 상승했고 열매의 완숙도도 높아졌다.

하지만 바리처럼 큰 변화가 보이지는 않았다.

"뭐야 이게?"

미룡은 트리가드를 처음 본지라 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악마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니까.

"이 커다란 나무는 또 뭐고. 설명해줄 거지?"

"엘더트리. 군단장을 씨앗으로 만든 뒤 심어서 키운 거다. 녀석은 트리가드. 이 나무를 지키는 가디언이고."

"음?"

이내 미룡은 미간을 좁히더니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두산에 그거. 역시 너였구나? 인파 애들이 꽤 많이 죽어 나갔다고 하던데... 그랬구나. 우리 막둥이가 만든 게 원흉이었구나."

은근히 옆구리를 툭툭 치는 미룡의 모습에 난 어깨를 으쓱했다.

"남의 땅에 마음대로 와서 도굴해가는 도둑놈들 잘못이겠지."

"그래. 어차피 상관없으니까. 그래서. 얘는 왜? 여기서 뭐 하려고?"

"스미스가 줘보라고 해서 말이야."

난 품에서 라피에르의 깃털을 꺼냈다. 붉은 바탕에 오묘한 기운이 서려 있는 하나의 깃털.

하피의 여왕.

라피에르의 깃털이었다.

-피?

라피는 곧장 깃털을 보자마자 반응했다.

이내 몸집을 싸울 때처럼 부풀리더니 깃털을 냅다 삼켜버렸다.

"데몬시드 소유의 트리가드가 본래의 힘을 되찾습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열매의 성장력이 상승합니다!"

"트리가드의 활동 반경이 더욱 넓어지게 됩니다!"

"트리가드의 레벨 제한이 사라집니다!"

거대한 새에서 점점 몸이 얄팍해지더니 사람과 비슷한 형태의 몸으로 바뀌었다. 이전과 같은 여왕의 풍모를 풍기기 시작한 것이다.

하피의 여왕.

라피에르와 흡사한 모습으로.

'완전 같지는 않다. 미묘하게 조금 다르지만, 라피에트와 비슷해.'

오히려 내가 봤던 힘 빠진 라피에르보다 더욱 강한 기운이 흘러넘친다.

용모도 생기발랄하다고 해야 할까.

동시에 그녀가 날개를 펴자 오로라와 같은 빛이 나타나며 엘더트리 자체도 잔잔한 빛을 뿌렸다.

"열매가..."

미숙과였던 열매가 완숙으로 물들어 간다.

이 땅에 충만한 대지의 힘이 퍼져나가니 라피의 힘이 더욱 거대해졌다.

이전보다 더.

난 곧장 상태창을 확인했다.

[라피에르의 엘더트리]

『보유』

완숙-34 미숙-0

트리가드(라피)-Lv. 10

레벨은 3에서 단번에 10으로.

악과는 단숨에 34개가 되었다.

이전 군단장의 깃털 하나로 완벽하게 바뀐 모습.

지금의 라피는 오히려 군단장이었던 때보다 더욱 강인해 보였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강해질 거라고 생각됐다.

라피는 나와 미룡을 보더니 이내 점점 다가왔다.

"군단장에 필적하는 거 같은데."

미룡의 눈이 변했다.

파충류의 것처럼 세로로 길게 가늘어졌으며 스미스에게 받은 단검을 쥔 채로 꼬리를 곧추세웠다.

이해가 된다.

나 또한 시해의 창을 쥔 손에 힘을 가득 쥐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창을 거뒀다.

-피~

라피는 하피의 모습으로 내게 이전과 같은 애정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창을 쥔 내 손에 얼굴을 부비는 라피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라피."

-피?

"말을 하지 못하는 거냐."

-피이?

라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해도 되겠군."

군단장의 부산물로서 성장은 해도, 이전의 기억을 찾지는 않는다.

그저 힘만을 취할 뿐.

트리가드는 여전히 가디언.

라피의 열매 하나를 따서 먹어보자.

"용장이 발휘됩니다."

"마력이 2 상승합니다."

"민첩이 2 상승합니다."

"바람 피해가 2% 상승합니다."

"악익-공포의 나래가 엘더의 힘을 갈취합니다!"

"공포의 나래 레벨이 상승합니다!"

본래라면 마력만 올랐다.

하지만 이젠 민첩과 바람 피해까지 덤으로 올라간다.

눈부신 성장이었다. 게다가 덤으로 악익의 레벨까지 올랐다.

훌륭하게 성장한 엘더트리와 라피를 칭찬해주고 싶지만, 아직 하나 더.

확인해볼 것이 남아있었다.

'오랜만이네.'

엘더트리.

그 중심에 찬란하게 빛나는 열매 하나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녀석.

빛나는 악마의 열매였다.

"안 먹어볼 수는 없지."

빛나는 열매는 대부분 스킬을 얻게 해주기 마련이다.

엘더 열매.

군단장의 빛나는 열매는 과연 어떤 스킬을 얻게 해줄까.

찬란한 열매였다면 기프트를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과한 걸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난 당장 빛나는 엘더 열매를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미룡 [3]

193화.

"빛나는 엘더 열매를 섭취합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구애의 춤 +1을 습득합니다!"

"...?"

「구애의 춤 +1」 (Epic)

-지정한 상대에게 화려한 구애의 춤을 추게 만든다. 마력 저항력이 높다면 저항한다. 하지만 한번 걸리게 되면 시전자의 해제 없이는 절대로 춤을 멈출 수 없다. (피격 시 해제)

용장 때문에 강화돼서 얻은 건 좋았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다.

훌륭했다.

그런데.

"뭐야 이건."

그런데 스킬 자체가 문제였다.

구애의 춤이라니. 상대방을 춤추게 해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뭐... 춤을 추게 만든다면 전투를 할 수 없을 테니까.'

무방비한 상태에서는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을 테니 물론 걸리기만 한다면 대단히 좋은 스킬이다.

걸리기만 한다면 좋긴 한데...

"뭔가 좀... 가오가 안 사는..."

죽고 사는 전쟁터에서 돌연 춤추는 적이라니. 그런 상대를 공격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은가.

물론 승리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는 게 맞긴 하지만... 역시 좀 애매하다.

"뭔데 그래?"

"구애의 춤."

"어?"

"구애의 춤을 시전합니다."

"어? 어...? 뭐야?"

미룡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리를 모으고 두 팔을 활짝 펴더니 이내 날갯짓하듯 팔딱거리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뭐야! 뭐냐고!! 야! 데몬시드! 너 나한테 무슨 짓 했어!!"

"흠... 확실히."

군단장 상대로는 아직 모르겠지만, 랭커들 상대로는 아주 효과적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구애의 춤을 추게 된다면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또 없을 것이다.

정정하겠다.

구애의 춤.

이 녀석 아주 훌륭한 스킬이다.

"춤, 잘 추네."

"너 죽어! 진짜로!!"

살기 등등한 눈빛으로 퍼덕거리며 춤추니 굉장히 우스꽝스럽다.

이걸 뭐라 해야 하나.

요 근래 본 것 중에 제일 웃기다.

"풉."

"야, 웃어? 죽을래 진짜? 빨리 이거 풀라고!!"

"구애의 춤을 해제합니다."

이내 춤이 멈춘 미룡은 창피함에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한동안 자리에 주먹만 쥔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흠, 도망갈까.'

춤만 추게 하는 거라길래 별생각 없이 사용해봤는데 상상 이상의 후폭풍이 날 덮칠 거 같았다.

"후우. 내가 참는다."

"오... 정말?"

"빛나던 열매. 그거 먹고 스킬이라도 새로 생긴 거지?"

"맞아. 어떻게 알았어?"

"왠지 그럴 거 같더라. 스킬 생기면 써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니까. 그리고 너 엄청 기대하던 얼굴이었는데 열매 먹고 되게 실망한 표정이었어."

내 표정으로 유추한 모양이다.

"구애의 춤이래. 걸리면 춤을 추게 되는 저주 계열의 스킬인가 봐. 쓰기에 따라서는 쓸만해 보여."

"흐음..."

"왜?"

"그냥, 네가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건지 대충 그려져서. 흥미롭네."

그러고 보니 미룡에게 내 기프트를 제대로 설명해준 적이 없었다.

내적 친밀도가 높다곤 해도, 미룡은 본래 타국의 랭커.

우리는 서로 기프트에 관한 자세한 부분들을 말하지는 않으니까.

'이젠 상관없겠지만.'

미룡은 가만 날 쳐다보더니 손을 펼쳤다.

"흑사회의 보스는 은원을 잊지 않는 법이지."

"은원?"

"자다가 칼 맞고 싶지 않으면 방금 일의 사죄로 열매를 내놓으라는 뜻."

"아..."

그 정도야 쉽다.

어차피 라피의 열매들이 전부 완숙되어버려서 수거해가려던 참이니.

하나 정도야 뭐.

"자."

2개만 남기고 전부 수거했다.

깃털로 쌓여진 겉껍질.

두꺼운 껍질 안에는 달걀노른자 같은 열매가 있었는데, 식감이나 맛도 노른자와 비슷했다.

달고 고소한 맛.

"어? 왜 이렇게 맛있어?"

"내가 키운 악과들은 대부분 이런 느낌으로 맛있지."

절로 어깨가 올라간다.

"마력이랑 민첩. 바람 피해력도 올랐다는데? 뭐야 이거? 성능이 진짜 미쳤잖아! 혼자 몰래 이런 거 먹고 다녔던 거야!?"

"그런 셈이지."

"완전 사기잖아!"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최초엔 나도 고생 좀 했어."

미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군단장의 씨앗을 심은 거랬지? 다른 악마들의 씨앗은 이런 수준까지 오르지는 않았겠어. 초창기에는 고생깨나 했겠네."

"최초엔 무인도에서 각성해버려서 꽤 고생했지."

"그런 과거가 있었어? 몰랐네."

"가면서 이야기하자."

라피의 목을 조금 긁어주고는 난 다시 포탈을 열었다.

이번엔 푸르푸르였다.

-?

"이거 먹어라."

이번에도 물론 긴장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푸르는 내가 던진 뿔을 자신의 뿔로 받더니 물처럼 흡수시켜버렸다.

"데몬시드 소유의 트리가드가 본래의 힘을 되찾습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 제한이 사라집니다!"

"열매의 성장력이 상승합니다!"

"트리가드의 활동 반경이 더욱 넓어지게 됩니다!"

라피에르 때와 같은 메시지.

찬란하게 빛나는 엘더 트리와 푸르의 변화가 이어졌다.

내재된 벼락의 힘이 더욱 강해졌는지 벌써부터 피부가 찌릿찌릿했다.

외양의 변화 또한 같다.

사슴의 몸에 인간 소녀와도 같은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변했다.

-강해졌어. 더.

"뭘 할 수 있게 됐지."

-벼락. 더 강해졌어. 반경 더 넓어졌어. 나, 어디든지 갈 수 있어.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반경이 넓어졌다는 말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더 자세하게."

-저것 봐.

푸르는 어느새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엘더 트리를 툭 치자 푸른 빛과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엘더트리가 사라졌다.

"!?"

-이동시킬 수 있어.

엘더트리.

그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푸르의 손안에 작은 씨앗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 소리였군."

푸르는 되게 기뻐 보였다.

-더 넓은 곳으로 갈 수 있어. 나무를 더 크게 키울 수 있을 거야.

그러고는 날 쳐다보더니.

-가도 돼?

라고 물었다.

'32군단장이었어서 그런가.'

할 수 있는 게 많은 모양이다.

[푸르푸르의 엘더트리]

『보유』

완숙-42 미숙-1

트리가드(푸르)-Lv. 15

확실히.

푸르의 레벨은 남달랐다.

라피에르가 십 레벨이었던 것에 반해, 푸르는 십오 레벨이 되었다.

'레벨이 15가 되면 나무를 씨앗으로 바꿔 이동할 수 있게 되는 걸지도.'

어쨌든 간에 좋은 타이밍이다.

푸르는 여기 있기에는 아까운 스펙을 지녔으니 말이다.

중국의 국경 경계선 근처로 옮겨 놓으면 카이삭스의 기사들을 막기에 꽤 용이할 거다.

덤으로 열매의 수확량도 오르고 푸르의 레벨도 오를 테니 일석이조.

아주 좋다.

'이쪽은 라피 혼자만으로도 충분하겠지.'

라피도 레벨이 올랐고, 활동 반경도 넓어졌으니 불별도 근처로 오는 악마들을 자동 사냥해줄 것이다.

"알았어."

수락하자 푸르는 곧장 눈을 감았다.

이내 푸른 빛무리로 변해 내 손에 있는 씨앗으로 스며들었다.

"가자."

"묻고 싶은 게 많지만... 괜찮겠지."

미룡의 눈이 조금 슬퍼졌다.

아마도 가면 소드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냥 사슴의 형태였다면 몰라도, 반인반수의 모습이 된 지금의 푸르는 놈을 떠올리기 쉬웠으니까.

꽤 놀란 모양이었다.

처음을 라피가 아니라 푸르를 보여줬다면 꽤 난리가 났었겠지.

"걱정할 거 없다."

"그래. 그냥 놀랐을 뿐이야."

난 바로 포탈을 찢었다.

'푸르 자식.'

엘더 열매를 수확하기도 전에 나무를 씨앗으로 만들어버려서 어떤 효과로 진화했는지 알아볼 틈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적당한 곳에 푸르를 심으면 다시 나무로 자라날 테니까.

"여기는?"

"백두산."

"아 여기가 거기구나."

바리가 만들어낸 지독한 독무.

난 거스트로 독무를 조금 치워내며 걸었다.

"독 저항은 있나?"

"꽤 높은 편이야. 난 용이니까."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런데 조금 의아하다.

"여기는 없네? 트리가드였나?"

"그러게. 사냥 나간 모양이야."

아니면.

"사냥당하고 있거나."

그때였다.

돌연 바리나무의 열매 하나가 흔들리더니 땅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열매는 반으로 쪼개지며 그 안에서 작은 실뱀 하나가 나타났다.

-샤!

바리였다.

"이 녀석이 열매를 소모했다는 건."

한번 죽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미룡. 주변에 뭐가 있는 모양이다."

"여긴 백두산이랬지... 그럼 놈들이 벌써 내려왔겠네. 볼일 봐.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까."

"알겠다. 조심해라."

걸어가던 미룡이 이내 걸음을 멈추고 날 돌아봤다.

"나 미룡인데?"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별 뜻 없이 말했다.

그런데 미룡은 눈물을 흘렸다.

"걱정 받는 거. 기분 좋네."

"..."

"다녀올게."

"그래."

미룡이 사라지고 난 바리에게 바릿느의 독니를 건넸다.

녀석은 독니를 한 번에 삼켰다.

"데몬시드 소유의 트리가드가 본래의 힘을 되찾습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 제한이 사라집니다!"

"열매의 성장력이 상승합니다!"

"트리가드의 활동 반경이 더욱 넓어지게 됩니다!"

"걱정 받는 기분... 그랬나."

중국의 최강자. 누구도 그녀를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보다 강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아무도 자신을 걱정해주지 않는 세상에서, 그녀는 어쩌면 굉장히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푸르일 때도 그랬지만 바리나무에서도 빛나는 열매가 나타나진 않았다.

라피 때는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바리는 라피나 푸르가 그랬던 것처럼 하체는 뱀, 상체는 인간이 됐다.

이전에 보았던 군단장 바릿느와 비슷한 여성체였다.

한 손에는 건네준 독니와 비슷한 창을 쥐고 있었다.

-샤~

하지만 여전히 말은 하지 못했다.

내 몸을 옥죄면서 비벼댔는데 뱀이었을 때는 몰라도, 여성의 몸으로 이리하니 썩 난감했다.

상태창을 켰다.

[바릿느의 엘더트리]

『보유』

완숙-51 미숙-14

트리가드(바리)-Lv. 13

바리의 레벨은 13.

라피보다 높고 푸르보다 낮다.

"바리, 너 근데 왜 죽은 거냐."

-샤!

바리는 손에 든 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창끝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 실력이 형편없었다.

"갑옷 입은 놈들이 온 거지? 검푸른 기운 흘리면서, 파동 쾅쾅거리는 놈."

카이삭스의 기사들.

놈들이 내려왔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놈들은 점점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샤! 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바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라고? 그럼 누군데?"

열매를 수확하여 한입 씹어 먹으며 물으니 바리의 그림을 해석했다.

"엘더 열매를 섭취합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지면 감지가 1 상승합니다."

"부가 능력치, 지면 감지를 개화합니다."

"지면 감지? 이건 뭐지."

『지면 감지』

-땅의 울림으로 적을 감지한다.

새로운 스탯을 얻어 버렸다.

바리의 레벨이 오른 효과인 모양.

지면 감지.

썩 나쁘지 않았다.

'바리가 뱀이라서 땅의 울림에 민감한 건가.'

아마 그래서 이런 스탯을 얻게 된 게 아닐까 싶다.

-샤! 샤아!!

그 와중에도 바리는 그림을 그리며 어떻게든 설명하려 애썼는데 대충 보니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놈들이 맞는 모양이다.

"하긴, 여기에 파동 기사 놈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

바리가 말하는 건 아마도.

각국에서 몰려온 네피림 랭커.

"가자."

타국의 랭커일 확률이 높았다.

먼저 간 미룡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내 발걸음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타국의 랭커끼리 싸울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그리고 만약 싸운다 하더라도, 미룡은 세계 랭킹에서도 2위였던 녀석.

함부로 싸움 걸 멍청이는 없다.

.

.

.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지."

"무슨 소리야?"

"아니. 뭐... 왜 이렇게 됐냐고."

미룡은 벌써 한 놈을 두들겨 패서 피떡으로 만들어놓은 이후였다.

상대는 다섯.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타국의 랭커.

"동양인!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나! 우린 이탈리아의 랭커다!"

"역시 미개한 동양인답군. 우린 한국을 돕기 위해 왔단 말이다! 이탈리아는 절대로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거다. 너희 나라의 랭킹 1위가 과연 이 일을 알고도 너흴 가만둘까?"

그들은 이탈리아의 랭커였다.

상황이 퍽 과격했다.

"무슨 일이야."

"저 새끼들이 은근슬쩍 내 몸을 만지려고 하잖아. 그냥 한국의 네피림인 줄 알았나 봐. 느끼한 새끼들."

대충 감이 온다.

'고작 다섯인가.'

그 다섯으로 바리를 한번 죽이기까지 했던 놈들이라는 것.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바리. 당한 건 갚아줘."

-샤!

한껏 파워업한 지금의 바리.

놈들이 당해낼 수 있을까.

마침 딱 좋은 상대가 있는데 사용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덤으로 이탈리아 랭커의 전투력도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

'마침 본때를 보여주기엔 적당한 스킬까지 얻었으니까.'

게다가 미룡은 이제 한국 네피림.

당한 건 제대로 갚아준다.

그게 바로 한국임을 놈들에게 똑똑히 알려줘야 했다.

그런데.

"어디 갔지?"

돌연 사라졌다.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말이다.

마치 순간이동으로 사라졌거나.

아니면 은신이라도 한 것처럼.

"인비저블이야."

"인비저블?"

"투명화. 이탈리아의 랭킹 1위가 바뀌지 않았다면 맞을 거야. 조심해. 놈의 투명화는 웬만한 방법으로는 알아낼 수 없으니까."

이탈리아의 랭킹 1위. 놈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동료들까지 전부 투명화할 수 있는 투명 인간.

그 때문일까.

그저 투명해지는 것만이라면 움직이는 소리나 발소리가 조금이라도 들려야 할 법도 한데, 놈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음. 소리로 특정할 수 없었다.

'지면 감지도 별 소용이 없군.'

이번에 얻은 능력치인 지면 감지도 별 소용이 없다. 모습을 감췄다고 해도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움직일 때마다 지면의 진동이 느껴지기 마련.

무게가 있기에 고작 투명해진 것으로는 날 속일 수 없지만, 놈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비행이 가능한 걸지도.'

그렇다면 바리가 당한 것도 이해된다.

이 정도의 인비저블이라면 제아무리 독무로 돌돌 감싸고 다니는 바리라도 당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탈리아 1위. 놈도 7레벨쯤은 됐을 테고 원거리 공격 정도는 하겠지.'

그간 다양한 기프트 스킬과 따로 얻어 놓은 마법도 상당하겠지.

게다가 놈은 혼자가 아닌 다섯.

다양한 공격 수단이 존재할 거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내 입꼬리는 슬며시 올라갔다.

휘잉-

제아무리 놈의 투명화라도 미세한 바람까지 조절하진 못한 모양.

다른 사람이라면 눈 뜨고도 코 베였겠지만 고행의 빛으로 수련한 내 기감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딱히 없다.

"카탈린의 역장을 시전합니다."

뭘 해도 내겐 통하지 않을 테니.

이탈리아의 말로

194화.

이탈리아.

파스타나 스파게티의 고장으로 유명한 나라. 아쉽게도 가방끈 짧은 내가 아는 이탈리아에 대한 지식은 딱 거기까지. 이탈리아의 랭커가 어떤 기프트를 지녔는지 헤일로를 몇이나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한가지 알고 있다면.

'이탈리아 1위는...'

세계 랭킹 15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 정도.

[네피림 세계 랭킹]

1위 미국-메트리 Lv. 8

2위 한국-데몬시드 Lv. 7

3위 브라질-윈드킬 Lv. 7

4위 한국-미룡 Lv. 7

5위 영국-마스크 Lv. 7

6위 프랑스-레온 Lv. 7

7위 이집트-파라오 Lv. 7

8위 일본-머큐리 Lv. 7

9위 독일-레이지 Lv. 7

10위 러시아-화이트 Lv. 7

11위 한국-강철 군주 Lv. 7

12위 호주-하토르 Lv. 7

13위 베트남-만트라 Lv. 7

14위 아프리카-엔키두 Lv. 7

15위 이탈리아-카바 Lv. 7

세계 랭킹 15위, 카바.

"바리, 제압해."

저들이 바리를 공격한 이유는 단순히 악마로 보였기 때문일 터.

어쩌면 바리가 먼저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국을 도우러 온 네피림들인데 제대로 모르고 한 일 가지고 목숨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즈음.

돌연 놈들이 전부 사라졌다.

바로 앞에서 미룡에게 얻어맞아 피떡이 됐던 놈도, 우릴 향해서 시끄럽게 소리치던 놈들도 어느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인비저블.

투명 인간이 된 놈들은 사일런스 마법이라도 익혔는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나름의 냉병기를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놈들이 움직이면서 발생하는 바람.

대기의 흐름까지는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까지 가능하다 해도 괜찮았다.

바리나 미룡이라면 몰라도, 놈들은 내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으니까.

"카탈린의 역장을 시전합니다."

쾅-!!

돌연 미룡의 곁에서 폭음이 발생했다.

"괜찮아."

순간적으로 꼬리를 펼쳐 막았는지, 그녀의 몸 주변은 두꺼운 파충류의 꼬리로 감싸져 있었다.

하지만 공격이 상당했는지, 그녀의 꼬리가 일부 까맣게 그을렸다.

'원거리 공격이었다. 하지만 미룡이 맞기 직전까지 소리도, 모습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는 그들이 행하는 공격까지도 모습을 감출 수 있다는 뜻.

놈의 투명은 대상을 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영역 내의 아군 모두를 투명화시키는 능력인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원거리 공격 수단까지 투명화하진 못할 테니.

놈들의 공격이 시작된 순간, 바리는 입으로 검은 독무를 뿜어내며 그 속에 스며들었다.

그러고는 점점 독무의 영역을 넓혀갔는데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진 독무는 주변의 풀과 돌을 녹이고 지면을 검녹의 색으로 물들였다.

자신 있게 독 내성이 꽤 높다고 말했던 미룡까지 달라진 바리의 독무에는 인상을 찡그릴 정도.

'미룡까지 저럴 정도인데 이탈리아의 랭커들 전부가 독 내성이 있을까?'

단언컨대 아니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몸이 투명으로 변했다 한들, 넓게 퍼져가는 독까지 어쩌지는 못한다. 랭커라 해도 누구나 독에 대한 내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으니까.

"크아악!"

아니나 다를까, 랭커 중 하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재빠르게 퍼진 독무를 피하지 못하고 한 모금 들이마신 모양.

투명이 풀리고 모습이 드러났다.

얼굴은 혈관이 도드라져 보랏빛으로 변했고 금세라도 죽을 듯 게거품을 물더니 피를 토했다.

그러자 바리는 독무 속에서 수십 마리의 구렁이들을 소환하여 놈의 사지를 결박했다. 앞서 제압하란 명령을 수행한 것이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독으로 만들어낸 것 같은 수백 마리의 뱀들을 일대에 퍼뜨렸다.

모습을 감춘 나머지 놈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쯤 되면 나올만한데 말이지.'

동료가 죽기 직전이다.

맞아서 얻어터진 것도 아니고 맹독에 당한 거라 저대로 두면 죽는다.

동료애가 없는 건지, 아니면 진짜 우리 모두를 죽일 생각인지 모습을 드러낼 조짐이 없다.

'웬만하면 안 죽이려고 했는데...'

상대가 죽일 마음이라면 같은 마음으로 상대해주겠노라 생각할 무렵.

이변이 발생했다.

"...!"

"프리즌 블러드가 당신의 피를 얼어붙게 만듭니다."

땅이 사라졌다.

백두산의 전경이 사라졌다.

바리의 모습도, 독무도 하늘도 땅도 모든 것이 사라져 있었다.

"내 손..."

아니 손과 다리.

내 몸 전체도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땅도, 하늘도, 나 자신조차 사라진 이곳엔 오직 어둠뿐이었다.

이윽고 내가 내뱉는 말소리마저 내 귀로 들리지 않았다.

당황으로 물든 사고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공포로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리즌 블러드로 침착함을 유지하자 대강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헤일로로군.'

일대의 모든 것을 투명화시켰고, 적의 몸까지 투명하게 만들어 정신 착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침착함을 유지해보면 알 수 있다.

'몸이 만져진다.'

얼핏 사라졌다 생각할 수 있으나 사라진 게 아니다.

그저 투명해졌을 뿐.

소리까지는 어찌했을지 모르겠지만 내 '지면 감지'로 명확히 느껴진다.

주변에서 발광하고 있는 미룡과 바리의 움직임이 말이다.

'아마도 나랑 같은 상태겠지.'

놀라서 날뛰고 있을 것이다.

발밑에서부터 느껴지는 진동.

그것으로 명확하게 느껴진다.

미룡과 바리.

그리고 이제 막, 걸어오고 있는 세 명의 발걸음도 말이다.

*

액체화된 거울처럼 일대를 반구 형태로 뒤덮고 있는 성역.

그 밖에서 이탈리아의 랭커. 카바와 일행들은 바닥으로 내려섰다.

"카바, 안쪽은 어때?"

"예상했던 그림은 아니네. 서로 날뛰면서 싸워주길 바랐는데."

이탈리아 랭킹 1위.

카바는 자신의 헤일로로 만든 성역 안쪽을 보고는 심드렁했다.

"가면 쓴 놈은 그냥 가만히 있고, 여자는 꼬리로 자기 몸을 덮었다. 그리고 독뱀 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광하는 중이야."

"의외네. 카바의 '올 인비저블'에 당하면 제정신 유지하기가 힘든데..."

"상관없다. 이제 태워 죽일 거니까."

카바의 기프트.

겉으로 보기에는 투명화 능력으로 보이지만 정확하게는 빛의 굴절이다.

굴절은 모습을 감추기도 하지만, 빛을 한점으로 모을 수도 있는 법.

카바의 헤일로.

올 인비저블 안에는 수많은 빛을 굴절시키는 렌즈가 견고하게 쌓여 있다. 그것은 주변 모든 것을 투명하게 만들 수도, 빛을 모아 태워 죽일 수도 있는 법.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모이기만 하는 빛의 열은 순식간에 태양의 열기와 비슷해져 '올 인비저블' 안은 하나의 인공 태양이 된다.

수천, 수만, 수억 개의 렌즈가 빛을 한점으로 모으게 한다면 일순간이지만 별이 폭발과 비슷한 슈퍼노바에 한없이 가까워진다.

카바의 성역 안.

올 인비저블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른 채,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게 이탈리아 1위.

카바의 힘이었다.

"카바. 괜찮겠어? 저 둘, 모두 고위 랭커로 보였는데."

"게다가 아까 가면 쓴 놈 말이야... 그거 한국의 1위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동료의 의문을 카바는 묵살했다.

"애초에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뭔데. 한국의 1위가 중국에 혼자 갔다가 갇혀서 그런 거잖아. 그런데 여기서 유유자적 여자랑 악마 끼고 놀고 있었겠어? 게다가 내가 알기로 한국 1위는 꽤 터프한 전투 방식을 지녔다고 들었다."

하지만 놈은 악마 비슷한 소환수를 부릴 뿐, 딱히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령 한국 1위라고 해도."

씨익.

카바는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고작 이 정도에 죽는다면 그게 그놈 운명인 거지."

카바의 머리 위에 떠오른 투명한 듯 보이는 헤일로에서 빛이 발광했다.

그러자 그가 만든 성역 안에서도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빛이 생성됐다.

잠시 후.

됐다 싶을 정도까지 성역의 안에 빛을 모아 모조리 지져버린 카바가 피식 웃으며 동료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별거 없잖아? 랭커든 1위든, 별로 상관없었지. 나한테는."

"알버른만 아쉽게 됐군."

"그만큼 놈의 독이 강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 알잖아."

"방심하는 순간 죽는 건, 얼마나 강하든 아니든 매한가지지. 자, 그럼 이제 저기로 가볼까? 암만 봐도 저 나무에 열려 있는 열매가 수상해."

동료들이 나무가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카바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표정이 꽤 진지했다.

"뭐야, 왜 그래?"

"너희들 움직이지 마."

"갑자기 왜..."

그때였다.

올 인비저블의 성역이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모든 것이 녹거나 새까맣게 불탄 숯덩이가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건 하나의 꽃.

정확하게는 꽃봉오리였다.

"태양열에 한없이 가까운 극도로 뜨거운 열기였을 건데..."

"그냥 조금 그을린 정도잖아?"

그때였다.

쩍.

봉오리가 열리며 연기를 뿜어내는 순간.

-샤캬!

봉오리의 틈에서 빠져나온 반은 뱀이고 반은 여인이 눈을 치켜떴다.

뱀처럼 갈라진 사안.

그것에서부터 녹색의 빛이 부채꼴처럼 이탈리아 랭커들을 덮쳤다.

"큭! 몸이...!"

"아, 아아악! 몸이 몸이 돌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만 아니라, 발끝부터 서서히 돌로 변하고 있었다.

석화.

뱀 여인의 사안은 석화의 마법을 담고 있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상황.

뱀 여인은 농락하듯 천천히 다가와 손에 든 투박하고 구부러진 창으로 이탈리아 랭킹 3위의 어깨를 꾸욱 찔러넣었다.

"끄아아아악!"

"레고노!!"

"아, 안돼..."

후두둑!

이탈리아 랭킹 3위. 레고노의 신형이 한 줌 핏물로 변해 녹아내렸다.

창에 깃든 어마어마한 독물 때문이었다.

쿠우웅.

쾅! 쾅! 콰앙! 쾅!!

지면에서부터 거대한 검은 기둥들이 치솟았다.

그것들은 이내 살랑거렸는데.

"꼬리?"

자세히 보니 파충류의 그것을 닮은 거대한 꼬리 수십 개가 지면에서 샘솟아 있었다.

콰득.

그리고 꽃봉오리에서는 한 마리 검은 용이 헤일로를 머리에 드리운 채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비늘로 뒤덮이고 두 개의 뿔을 지닌 동양의 흑룡.

그것이 단번에 꽃봉오리를 빠져나와 돌로 변해가는 이탈리아의 랭킹 2위 보거즈를 씹어 찢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꽃봉오리에서 한 사내가 나오자 반쯤 벌어진 봉오리는 이내 활짝 피어 꽃이 되었다.

꽃에서는 치명적일 정도로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카바는 금세 정신이 혼미해졌다.

맡아본 적 없는 향기에 취해 침이 턱을 따라 흘렀고, 이내 참을 수 없는 갈증과 공복에 고통스러웠다.

그 꽃의 향기 속에서 걸어 나온 물소 뼈를 뒤집어쓴 사내는 카바에게 씨앗 하나를 입에 넣어 주었다.

"이게 배고픔을 해결해 줄 거다."

카바는 낼름 씨앗을 삼켰다.

그리자 그의 배가 부풀어 올랐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악!!"

황홀한 포만감에 몸서리치던 그는 곧 배가 찢어졌고, 그 안에서 뱀을 닮은 히드라가 튀어나와 그를 모조리 뜯어 먹었다.

그것이 이탈리아 1위였던 자의 마지막 말로였다.

구애의 춤 [1]

195화.

13위 베트남-만트라 Lv. 7

14위 아프리카-엔키두 Lv. 7

15위 한국-바바리안 Lv. 7 ▲

솔직히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봐줄 수는 없었기에 적당히 두드려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놈의 힘이 강했고, 무엇보다 명확하게 우릴 죽이려고 했기에 놈의 살기에 호응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날 죽이려고 하는데 나라고 죽이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생각보다 매서웠다.

'올 인비저블이라던가.'

디테일하게 들어가자면 '반물질'에 가까운 렌즈 비슷한 것으로 빛을 굴절시켜 투명하게 만들거나 빛을 모으거나 하는 능력이었다.

큰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이탈리아 1위, 카바.

그는 명백한 랭커였다.

확실히 강했고, 대처가 조금만 늦었다면 꽤 위험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살았어."

미룡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 방어로는 아마 뚫렸을 거야. 기껏 치료해줬는데 또 다칠 뻔했다니까? 안 다쳐서 다행이지만."

"웬만하면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한국을 도우러 온 놈들이니까?"

"그렇지. 그게 아니더라도..."

"쓸데없는 생각이야. 그 새끼들 그 능력으로 뭔 짓을 하고 다녔을지 생각하면 악마보다 더한 놈들이라는 거 뻔하잖아."

"그건 그렇지."

미룡을 보자마자 음심을 품은 놈들이다. 동료들을 모조리 투명화시켜서 평소에 뭔 짓을 했을지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괜한 죄책감 갖지 마. 극한에 몰리면 악마 편에 섰을 놈들일 테니까."

"하긴."

한국을 돕게 됐을지도 모를 전력을 잃은 건 분명 안타깝지만 크게 상관이 있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 정도 투명화로는 군단장과의 싸움에서 큰 도움도 안 될 테니.

"근데 그거 어떻게 한 거야?"

"뭐?"

"그거. 네더블룸이랬나?"

"아."

네더블룸.

7레벨에 오르면서 찍은 방어 스킬이다.

「네더블룸」

-지옥의 거대한 강철 꽃을 소환해 시전자를 보호한다.

간단한 설명.

하지만 그렇기에 방어도는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강철 꽃이라는 것 자체가 시드네스로 강철 군주와 뒤섞인 다음 나타난 스킬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 예상처럼 대단위 방어 스킬이었고, 강도 또한 단단했다.

하지만 꽃이라서였을까.

네더블룸은 들어온 데미지에 비례하여 꿀을 생성하고 항거할 수 없는 향기가 발생한다.

향기에 취한 적은 이탈리아의 1위가 그랬던 것처럼 심각한 갈증과 공복에 시달리는 기아 상태가 된다.

당연히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고 아귀처럼 배를 채우기 위해서만 움직이게 된다.

어떻게 보면 방어 이후에 적을 취약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공방일체의 스킬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무 씨앗이나 먹여서 씨드라를 발동시킨 것뿐.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샤~

어쨌든 이탈리아 놈들 때문에 바리의 전투력이 상승한 건 잘 알았다.

아직 랭킹 1위와 싸우기엔 조금 부족하지만, 그 아래의 존재들과 맞닥뜨리는 건 문제 없어 보였다.

웬만하면 안 싸우는 게 최고겠지만 이만하면 카이삭스의 기사들이 몰려와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챔피언급이 아니라면 뭐.'

상관없겠지.

바리가 먹을 경험치로는 기사들이 넘쳐나고 있으니까.

"조금 더 렙업하자."

-샤!

지금 레벨이 13이니 15쯤 되면 또 달라질 거라 생각된다.

푸르가 15렙이 되고 엘더트리를 이동시킬 수 있게 된 걸 보면 할 수 있는 게 더 많이 늘어난 거라 봐도 무방하니 말이다.

"미룡."

"응? 왜."

미룡은 쓰러뜨린 이탈리아 놈들의 시체를 뒤지며 파밍 중이었다.

"이제 이동하려고. 엘더 트리를 심어야 해서. 바쁘면 여기 있어. 잠깐 다녀올 거니까."

"아냐. 같이 가. 다 했어."

미룡은 손을 탁탁 털면서 내게 다가왔다.

완전한 동양 흑룡으로 변했던 미룡은 어느새인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헤일로, 역시 그쪽이었나."

"어? 아아, 그렇지? 기프트 자체가 미룡이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더라고... 난 나름 만족해."

"그렇다면 됐다."

미룡의 미는 '꼬리 미' 자라고 한다.

용의 꼬리로 해석되는 미룡의 기프트는 이름 그대로 꼬리를 사용하며 싸우기 마련인데, 용의 꼬리인 만큼 헤일로 역시 용 그 자체가 되어 싸우는 식이었다.

지면에서 거대한 꼬리들이 치솟으며 자신은 용으로 변하는 헤일로라니.

역시 전 중국 1위다운 스케일이다.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웅장한 자태만 보더라도 꽤 강력한 헤일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미룡은 완패했다고 한다.

카이삭스에게.

"이 자식들 개털이네. 뭐 별거 없어. 그냥 능력만 믿고 까불어대던 놈들인 게 뻔해. 아, 서쪽으로 갈 거지? 이쪽은 러시아랑 가까운 쪽이잖아. 백두산이니까."

"응. 서쪽으로 압록강을 따라가면 수풍호라는 곳이 나온다. 그곳에 심을 생각이야."

"거기 나도 가본 적 있어. 꽤 큰 강이 있는 곳이지. 근처에 산도 많으니 적당해 보여. 응."

서쪽의 포탈 스크롤도 없으니 적당히 그루트로 허공을 밟으며 나아가다 보니 미룡이 입을 열었다.

"데몬시드. 네 기대와 달리 난 카이삭스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어."

"그게 무슨 소리냐."

미룡은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지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괜히 더 닦달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자 그녀가 말하기를.

"카이삭스는 그저 바라만 봤어. 중국은 13군단장 카이삭스의 장군들에게 멸망 당했다. 아쉽게도 내게서 군단장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도움을 줄 수 없어."

꽤 아쉬운 말이었다.

군단장에 대한 정보가 없다.

중국은 군단장과 싸우지도 못했고, 그 밑의 장군이라는 놈들과 싸우다가 멸망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말을 받아들이기란 꽤 쉽지 않았다.

중국은 현재 남아 있는 국가들 중 가장 많은 인구수를 보유한 나라.

게다가 네피림의 수도 그에 못지않게 거대한 인원을 가진 나라였다.

그 수준도 크게 낮지 않았다.

미룡은 세계 랭킹 2위였으니까.

그렇다 보니 그녀가 하는 말은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만한 전력을 갖춘 나라가 군단장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했다니.

"이유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군."

"변명이라면 변명이지만... 연충들이 꽤 많았다."

"연충?"

"변절자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았어. 흑사회 일부는 전부 변절한 뒤였다. 대충 알고 있기는 했지만... 설마 카오스 게이트 안에서 한 번 더 변절할 줄은 몰랐으니까."

변절.

많은 게 생략된 말이었지만, 나는 미룡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사들로 변절했나 보군."

"... 알고 있었구나."

"널 중국에서 구해낸 게 나잖아. 이상할 정도로 급속도로 불어나는 기사들을 보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대충 예상할 수 있지."

"카이삭스는 지금까지의 군단장들과는 달라. 놈은 악마가 아닌 인간이라도 자신의 군대로 받아들였으니까."

이건 또 처음 듣는 사실이다.

"인간, 네피림도 말인가?"

"그래."

"누구나가 원한다면 기사가 된다. 놈들의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푸른 기운이 유약한 마음을 비집고 찾아와 하나의 투구를 만들어내더군."

"역시."

카이삭스의 투구.

그것으로 인해 악마든 인간이든 기사가 된다.

카이삭스의 기사가 말이다.

'아무 전조도 없는 건가? 분명히 따로 투구를 만들어내는 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예상 밖이었다.

"몇 번 당하니까 걷잡을 수 없었어. 알다시피 사람은 원하지 않았어도 공포에 빠지면 군중심리에 도취되기 마련인 생물이잖아? 그래서 그렇게 됐지. 안타깝게도 우린 중국인이 변한 기사와 싸우고, 랭커가 변한 장군급과 싸우다가 멸망했어. 어이없게도."

천년의 역사가 애석하게도 중국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고 한다.

미룡은 그때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자신이 그렇게도 지키려 한 조국이 허망하게 패망한 것에 엄청난 배신감과 허탈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간의 내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 그래서였어. 깨어나자마자 한국인 시켜달라고 했던 건. 물론, 도움받아서 고맙고 중국도 없어졌으니까 다른 방법도 없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제 지쳤어."

우뚝.

멈춰 선 미룡을 바라보며 난 뭐라 대답해줘야 할지 몰랐다.

나라를 대표하는 네피림이 짊어질 중압감은 각자마다 다르지만 절대로 없을 수는 없다.

그게 힘을 가진 자의 의무니까.

"미룡."

고개 숙인 미룡의 어깨를 잡았다.

항상 당당하던 그녀의 어깨는 한껏 위축되어 있었다.

"나, 그래서 이번엔 다르게 살려고."

"...?"

돌연 내 목을 두 팔이 휘감는다.

"중국에서는 아무도 의지하지 않고 살아왔어. 근데 그러니까 망했지 뭐야? 그러니까 이번엔 의지할 거야. 물론 다른 사람 말고 너한테."

"..."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려고. 그럼 머리 아플 필요도 없고 편하잖아. 일단은."

"그래."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걱정한 게 손해라고 생각될 정도로 미룡은 미룡이었다.

"여기에 심게?"

"응. 여기가 적당해."

엘더트리 씨앗을 근처에 심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풍천호 근처의 산꼭대기로 올라온 상태.

씨앗을 심자 순식간에 뿌리를 내리고 엘더트리가 생겨났다.

"새로 이사한 곳은 어때."

-좋아. 여기.

푸르는 나무에서 나타나자마자 주변에 번개를 뿌리며 악마들을 사냥했다.

풍천호라 불리는 거대한 강이 있어서 이쪽엔 카이삭스의 기사들이 몰려들어도 지리적 이점이 높았다.

푸르는 대뢰를 떨어뜨리며 싸우는 편이니 말이다.

이전과는 달리 레벨도 15까지 올라갔으니 챔피언급이 온다고 해도 혼자서 대충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수준이라면 군단장이었던 그때와 비교해도 흠이 없는 상태니까.

"열매나 먹어볼까."

군단장의 부산물을 가져다주니 레벨이 오르고 열매의 효과도 달라졌다.

아니, 업그레이드됐다.

라피는 조금 빈약했고, 바리는 썩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게 큰 이득이라 보기는 조금 어려웠다.

하지만 그 셋 중 가장 높은 넘버를 가졌던 푸르라면 어떨까.

기대된다.

역시 농사꾼이 되어버린 걸까.

악마를 잡든 군단장을 잡든, 역시 씨앗을 키워 열매를 먹어볼 때가 제일 두근거린다.

"엘더 열매를 섭취합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2 상승합니다."

여기까지는 이전과 동일.

중요한 건 다음부터다.

"새로운 능력치를 개화합니다!"

"침투를 습득합니다!!"

"침투?"

『침투』

-적의 견고한 방어력을 침투하여 데미지를 입힌다.

침투.

일반적으로 장비에 달린 고유 효과인 관통과는 다르다.

관통의 효과 또한, 견고한 벽이나 방패를 관통시키며 전진한다.

관통력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 무기의 급이 나뉘기도 한다.

모든 방어구는 방어력이 존재하고 거기에 더해 방패에는 '물리 경감'이라는 효과가 있다.

네피림 대부분은 경감력을 관통력으로 상쇄시킨다.

관통은 검이나 창에 부여되어 있으며 그 관통력이 얼마나 높냐에 따라 관통하느냐 하지 못하느냐로 나뉜다.

예를 들자면 내가 가진 '변색된 뼈 방패를 예로 들자면.

[변색된 뼈 방패] (Unique)

-위대한 대전사들의 뼈를 이어 만들어진 방패. 오랜 세월, 전장의 피가 묻어 변색된 오크 족의 뼈 방패.

〈물리 경감-(65%)〉

〈마법 저항-(43%)〉

〈녹음진 혈맹〉

〈근력 +1〉

〈건강 +2〉

물리 경감이 65퍼다.

100의 데미지를 주게 된다면 확률적으로 최대 65의 피해를 상쇄시키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미노우스의 뿔창을 예로 들어보자.

[미노우스의 뿔창] (Unique)

-명장 스미스가 자신의 은인을 위해 심사숙고하여 만든 명창.

대악마의 말석, 미노우스의 뿔로 만들어 그의 힘이 담긴 창이지만 온전한 힘을 담아내지는 못했다.

〈강화 불가〉

〈치명적인 관통〉

-추가 관통 피해 60%

〈맹렬한 출혈〉

-추가 출혈 피해 50%

〈피 묻은 뿔〉

-피를 매개로 미노우스의 치명적인 뿔을 소환한다.

치명적인 관통은 60%의 관통 추가 피해가 부여되는데 이를 방패에 적용시키면 물리 경감의 60% 관통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어력과 더해 경감률이 높은 장비를 갖추거나 보호막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어떻게 될까.

날이 들어가질 않으니 아무리 공격해도 피해를 주긴커녕, 자기 무기만 날이 부서지고 무뎌진다.

그런데 만약 침투의 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제아무리 강력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

그 말이었다.

게다가 내가 얻은 건 능력치.

단순한 스킬이 아니다.

능력치였다.

열매를 먹으면 먹을수록 능력의 힘이 강해지는 능력치.

만일 이건 100까지 올려버리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

난 곧장 미룡을 돌아봤다.

"뭔데? 너 눈이 이상한데? 자, 잠깐만. 주먹은 왜 쥐어? 뭐야? 뭐냐고!"

황급히 도망가는 실험체, 아니 미룡을 쫓아가다 고개를 돌렸다.

"딱 좋을 때 왔네."

중국의 국경을 넘어 카이삭스의 기사들이 서서히 남하하고 있었다.

그 중심.

그곳엔 [키아삭스의 기사 대장]도 있었으니 샌드백으로는 딱 적당했다.

"일단."

"구애의 춤 +1을 시전합니다."

"춤 한번 춰봐라."

구애의 춤 [2]

196화.

저물어가는 해.

길게 늘어진 땅거미 속에서 오직 하나의 그림자만이 우뚝 섰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것은 푸른 피로 뒤덮여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건담.

미국 1위, 메타르였다.

메타르의 헤일로, 건담의 팔 한쪽은 뜯겨졌고 전신의 파츠들이 너덜너덜 종이짝처럼 찢겨져 있었다.

하지만 고통에 찬 비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희열에 찬 사자후였다.

그럴 만도 한 게 메타르의 앞에는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이 치열한 공방 끝에 드디어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메타르 또한 대부분의 자원을 소모할 만큼의 강적. 하위 군단장에 필적하는 힘을 지닌 존재였다.

"괜찮나?"

"괜찮아. 피곤해 죽겠군..."

미국 2위. 라이프였다.

메타르는 라이프의 부축을 받으며 헤일로를 해제했다.

그러자 건담의 금속 파츠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고 메타르의 신형이 나타나 어깨동무했다.

"보상은?"

"창. 이상하게 별다를 게 없는 창이다. 이만한 힘을 지닌 존재라면 드랍템도 적당한 걸 뱉어야 하는데..."

그래도 많은 걸 알았다.

"중국이 망한 이유를 알았어."

"나도 알 것 같더군."

종족이라고 해야 할까.

카이삭스의 군단이라 해야 할까.

이들은 그냥 강했다.

"일반 기사의 레벨에 10레벨에 가깝다면 말 다 했지."

그들의 창술은 뛰어나도 너무 뛰어났다. 신체 능력도 수준급. 입고 있는 갑옷도 웬만한 공격은 대부분 튕겨낼 정도로 고급품이다.

게다가 놈들의 창은 기괴한 파동을 일으키며 일대를 파괴하고, 순간이동이나 다름없는 이동기는 재앙이며 생체 신호를 반전시키는 저주는 사람을 무방비하게 만든다.

중국이 망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놈들은 그냥 강했다. 군단장의 강함은 감히 예상할 수 없을 정도.

터무니없이 강하다란 말이 어울리는 놈들이었다.

"대한민국의 1위인 그, 데몬시드도 도망갔을 정도다. 하지만 메타르. 넌 보여줬어. 천상의 계단 따위는 역시 전투력과는 관련이 없었다고."

씨익.

메타르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당연하지. 최강은 나. 그리고 미국이니까."

라이프는 메타르를 보며 마주 웃어주고는 길을 재촉했다.

"돌아가자. 한국에서 괜히 힘 빼면서 싸우는 건 조금 낭비였다고."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덕분에 적들의 전력을 대충 알았다.

"어쩔 거지?"

"인원을 꾸려서 한국과 베트남에 미국의 병력을 주둔시켜야 한다. 이놈들의 수준은 이미 보통을 벗어났어. 일반적인 네피림들은 단순한 기사들조차 상대하지 못해."

최선은 하루빨리 카이삭스라는 군단장을 죽이는 것.

하지만 현 인류의 힘으로는 역부족.

아니, 개죽음일 뿐이다.

불꽃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부나방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현재 인류의 전력으로는 놈을 잡는 건 어렵다. 만약 희생을 감수하고 처치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출혈을 예상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힘을 더 키울 수밖에 없어. 그게 최선이다."

메타르의 판단은 그랬다.

힘을 더 키운다.

다행스럽게도 이 정도로 강한 적이니만큼 경험치도 많이 줄뿐더러, 얻을 수 있는 장비도 많다.

적들의 강함에 비해 창과 갑옷은 뭐 하나 빠진 것 같은 옵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쁘지 않은 장비들이지 않은가.

"뭐가 됐든, 우선 돌아가자고."

"아아, 그래. 가자고. 금방이라도 곯아떨어져 잘 거 같으니."

그때였다.

쾅-!!

지면이 뒤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충격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깜짝 놀라 확인해보니, 저 멀리 하늘에서 거대한 벼락이 뻥뻥 쏘아지고 있었다.

한방, 한방이 지축을 뒤흔들 정도.

엄청난 에너지가 함축된 벼락의 힘에 메타르도 눈가를 좁힐 정도였다.

"누구지? 대한민국에 저 정도의 벼락을 사용하는 자가 있나?"

"아니, 내가 알기로는 없다. 대한민국의 1위라는 데몬시드가 벼락을 쓴다곤 하지만 그의 벼락은 피처럼 붉다고 하더군. 저건... 아니겠지."

그럼 대체 누가?

다른 나라의 랭커들인가?

"얼굴이라도 확인해봐야겠다."

"괜히 갔다가 구워지는 건 아닐는지 모르겠군."

"지금 나라면 모를까. 라이프. 넌 안 죽잖아."

"안 죽어도, 아픈 건 싫다고."

메타르는 라이프에게 부축받은 상태로 갑옷의 금속을 조종해 몸을 허공으로 띄워 이동했다.

속도는 점점 빨라지더니 그야말로 순식간에 벼락이 쏟아지는 지점까지 이동했다.

"저건 뭐야?"

"악마? 아니 저게 왜... 지들끼리 싸우고 있는 거지?"

"아니, 악마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푸른 사슴.

아니, 반인반수였다.

하체는 사슴의 그것이요, 상체는 소녀와 여인 사이의 인간.

하지만 손에 쥔 지팡이를 땅에 찍을 때마다 거대한 대뢰가 고막을 강타하고 전신을 울리니, 신비로운 겉모습에 속아 가까이 다가갔다간 그야말로 뼈도 못 추릴 수가 있었다.

저게 무엇인지는 차치하고.

"일단 내버려 두는 게 좋겠어."

"그래."

저 벼락은 명백하게 강기슭을 올라오는 기사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메타르는 잠깐의 틈도 없이 한번 떨어질 때마다 기사들 수백을 곤죽으로 만드는 대뢰에 기함했다.

그러고는 이내 경악했다.

"메타르."

"나도 보고 있다. 저 자식. 대체 저기서 뭘 하는 거지?"

말은 그렇게 했으나 정말 궁금해서 한 말은 아니다.

메타르의 시선에는 물소 뼈 투구를 쓴 사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기사들을 대거 이끌고 온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이 존재했는데...

"왜, 춤을 추고 있지."

"저런 해괴망측한 춤을..."

기사 대장은 데몬시드의 앞에서 두팔을 퍼덕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굉장히 격 떨어지는 춤이었다.

방금 전, 메타르는 저 기사 대장과 싸우며 모든 힘을 소진했다. 지금도 두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전력을 다해 겨우 쓰러뜨렸다.

일부 랭킹에서나마 자신을 월등하게 제쳤던 데몬시드조차 도망칠 정도로 고강한 존재라며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니다.

앞서 치열하게 싸웠던 게 민망할 정도로 데몬시드의 앞에 있는 기사 대장은 꽤 추했다.

그리고 놈은 기사 대장이 고강해서 달아났던 게 아니었다.

쓰러뜨리지 못한 게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는 거지.'

놈의 옆에 있는 여인.

데몬시드가 둘러메고 있었던 여자.

이제 보니 누군지 알겠다.

"중국 1위. 살아 있었나."

다 죽어가더니 지금은 또 멀쩡하게 싸우고 있었다.

상처의 회복.

그리고 회복 불가능이라 생각됐던 상처들이 말끔히 치료되어 있었다.

결손되었던 신체들도 말이다.

'한국에는 저 정도의 고등급 회복이 가능한 건가.'

그게 가능한 건 한국인가, 아니면 데몬시드인 건가.

"근데, 저기서 뭘 하는 거지? 어떻게든 무방비한 상태이니 척결하려면 지금이 적기일 텐데."

춤추는 기사 대장의 앞에서 데몬시드는 붉은 창을 쥔 채로 가만히 바라보더니 툭 찔렀다.

"찔렀는데?"

"어림없어. 싸워봐서 안다. 기사 대장의 갑옷은 웬만한 무기로는 흠집조차 안 나. 이상한 검푸른 기운이 베리어처럼 공격을 일부 상쇄시키지."

그렇기에 데몬시드도 달아나며 여러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기사 대장을 따돌리지 못했다.

웬만한 공격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파동이었던가. 아마 그거였겠지."

놈들이 다루는 파동의 힘.

상처의 회복조차 늦추는 그 기괴한 힘이 방어까지 돕는다.

그러니 메타르도 모든 전력을 쏟아붓고서야 간신히 죽였던 것이다.

전력을 다해도 닿을까 말까 한 놈에게 힘없이 툭 찌르는 창이라니.

메타르는 어이가 없었다.

"무슨 방법인지는 몰라도 절호의 기회를 놓쳤어."

"저주의 일종이겠지. 하지만 저런 종류의 저주는 공격당하는 순간 풀리기 마련이다. 이제 제대로 싸우겠군."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왜 춤을 멈추지 않지?"

기사 대장의 춤은 멈추지 않았다.

그 뒤로도 계속.

계속해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어?"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은 쓰러졌다.

이토록 허무하게.

*

"구애의 춤 +1을 시전합니다."

"적이 당신의 고강한 마력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이 구애의 춤에 빠집니다."

주변의 정리는 푸르랑 미룡에게 맡기고 기사 대장을 손쉽게 춤추게 만들었다.

"쉽네."

육중한 덩치의 기사 대장이 우스꽝스럽게 퍼덕거리며 춤추는 꼴이란 나름 보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계속 춤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안타깝게도 구애의 춤은 누군가가 건드리는 순간 춤이 멈추는 나름의 제약을 가지고 있다.

그건 공격도 마찬가지.

"시해의 창을 쓰기에는 너무 강하니까... 역시 적창이네."

적창의 관통력은 몇 번 확인해봤지만 기사 대장의 갑옷을 뚫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기에 쓸모가 있다.

"침투가 어느 정도의 데미지를 주는지 한번 볼까."

큰 힘을 쓰지는 않는다.

그저 툭.

"공격에 침투가 스며듭니다."

창끝이 검게 변했다.

예상한 대로 갑옷을 뚫지는 못했다.

"구애의 춤 +1이 해제됩니다."

구애의 춤은 해제됐고 기사 대장의 춤이 멈춘 순간.

"구애의 춤 +1을 시전합니다."

"적이 당신의 고강한 마력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이 구애의 춤에 빠집니다."

다시 춤에 빠졌다.

"흠..."

내가 찌른 부위는 놈의 옆구리.

분명 기사 대장의 갑옷 부위긴 했지만, 그 밑의 허리 부분은 이음새가 존재했다.

열심히 춤추는 기사 대장의 이음새를 바라보며 잠시 기다리자.

"효과가 있긴 하네."

핏방울이 주륵 떨어졌다.

침투로 인한 데미지를 입은 것이다.

게다가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걸 보니 적창의 출혈 효과가 침투에도 적용되는 것 같았다.

"적창의 출혈은 상처 부위를 아물지 못하게 하고 계속 피를 내게 하지."

직접 창으로 상처 낸 것은 아니지만 침투의 힘으로 데미지를 입었기에 출혈 효과가 적용된 거 같았다.

현재 침투 스탯을 간단하게 10 정도만 올렸는데도 이 정도다.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훌륭한 능력치였다.

무기가 아니더라도 침투는 내가 발휘하는 모든 공격에 적용됐다.

창, 벼락, 불 등등 말이다.

"침투력을 100 정도로 키우면 어느 정도로 데미지가 입으려나."

시스템이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으니 조금 답답하기는 하다.

이렇게 일일이 확인해봐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여섯 번째 공격인 힐링에도 침투가 적용되나 확인해보던 중.

"구애의 춤 +1을 시전합니다."

"적이 당신의 고강한 마력에 일부 저항합니다."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이 구애의 춤에 약간 저항합니다!"

어느새 피투성이로 변한 기사 대장이 구애의 춤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운인가."

단순히 운인 건지, 아니면 구애의 춤에 저항력이 생긴 건지 알아봐야 했다.

기사 대장에게 힐링을 사용하며 실험을 이어 나가던 와중, 다시 한번 구애의 춤을 약간이나마 저항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저항력이 생기는 거군."

여섯 번쯤 되니 저항력이 생겼다.

군단장급이 되면 아마도 절반.

두 번까지는 돼도 세 번째는 완전히 저항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삭스한테는 아마 통하지도 않을 가능성도 있지. 군단장들은 마법 내성도 일부 갖추고 있으니까."

힐링을 사용하며 공격을 이어가던 도중, 슬슬 완전히 구애의 춤에 저항하려는 녀석을 향해 마지막으로 시해의 창을 꺼냈다.

"마지막이니까 참아봐."

적창으로 찔렀을 때와 같다.

큰 힘을 들이지 않은 찌르기.

하지만 적창 때와는 달랐다.

큰 저항 없이 갑옷을 뚫고 들어가는 시해의 적창은 천천히 갑옷과 놈의 두꺼운 가죽을 갈라 심장을 보호하는 뼈까지 뚫어 심장까지 도달했다.

이 일련의 과정이 매우 천천히 이뤄졌지만 나는 손안에서 상식적으로 전해졌어야 할 저항감을 느끼지 못했다.

굉장히 말도 안 되는 관통력이었다.

"시해의 창이 격을 갖춘 적을 처치하였습니다."

"시해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시해 Lv. 3 달성."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 창'을 획득합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경험치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경험치가 유실됩니다."

"대량의 금화를 획득합니다."

난 곧장 창을 확인해봤다.

[시해의 창] (Legendary)

-파브라움으로 만든 창

〈인적의 편린〉

-단창이 흡수한 시전자의 스킬 데미지 530%▲ 증가.

〈무너지지 않는 신념〉

-전투 중 파괴 불가.

〈시해 Lv. 3〉

-격을 갖춘 적을 죽일 때마다 단창의 위력 증가. (+30%▲)

〈극〉

-극렬한 관통. (추가 피해 130%▲)

〈회귀〉

-주인이 원할 시, 언제든 그에게 돌아간다.

〈영원한 각인〉

-최초의 마법을 영원히 각인하여 창의 운명을 결정한다.

시해의 레벨이 오르자 인적의 편린과 관통력이 올라갔다.

"챔피언 잡았다고 오를 줄은 몰랐는데... 이놈이 그 정도의 격이 있는 녀석이었나."

난 기사 대장의 창을 미믹의 스킬인 애장 속으로 보관했다.

창의 애정도도 올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이 창에 서려 있는 기억도 얼추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최근의 것이라면 잠깐의 집중으로 충분하다.

잠시 뒤.

"그랬군."

난 창에 서린 기억을 떠올렸다.

조금 의아하긴 했다. 챔피언치고는 너무 강하다 했더니 이 녀석.

"군단장이었군."

카이삭스에게 도전했던 하위 넘버의 군단장이었다.

"어쩐지 강하더라니."

아무리 카이삭스라도 챔피언급의 악마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 터.

비록 혼은 잠식당해 권능도 사용하지 못해 껍데기만 남았을지언정 군단장은 군단장.

강한 이유가 있었다.

"대충 오십에서 육십 정도."

그 넘버의 군단장이었을 거로 추정된다. 아니면 그만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일 터.

하지만 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이거... 오히려 이득 아닌가."

군단장급을 마구마구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시해의 창은 격을 갖춘 놈을 죽이면 죽일수록 강해진다.

내게는 그럴 힘과 수단이 있다.

"역시 사람은 템빨이지."

게다가 아직, 시해의 창은 완전하지도 않다.

〈인적의 편린〉

-단창이 흡수한 시전자의 스킬 데미지 530%▲ 증가.

〈영원한 각인〉

-최초의 마법을 영원히 각인하여 창의 운명을 결정한다.

난 아직, 시해의 창을 쥔 채로 마법을 사용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벼락이냐 신성이냐."

카탈린의 벼락이냐, 아니면 악마들이 취약한 신성력이 담긴 힐링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꽤 즐거운 고민만을 남긴 채.

시해의 창을 인벤토리에 넣고 기사 대장의 창을 꺼내 쥐었다.

"그럼 대강 다 확인해봤으니 파동부터 배워볼까."

『카이삭스의 파동 10,000/146』

-횟수를 전부 채우면 카이삭스의 파동을 온전히 체득합니다.

『카이삭스의 질책 10,000/18』

-횟수를 전부 채우면 카이삭스의 질책을 온전히 체득합니다.

『카이삭스의 반전 10,000/2』

-횟수를 전부 채우면 카이삭스의 반전을 온전히 체득합니다.

스킬 확인은 이제 끝났다.

남은 건, 다시 성장하는 것뿐.

내 성장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카이삭스의 마창술을 다 배우기 전까지 쉴 생각 따윈 없었다.

구애의 춤 [3]

197화.

기사 대장의 창은 크고 길다.

창날은 뾰족하기보다는 뭉툭했다.

대신, 날에 해당하는 부위가 크고 넓었는데 창이라기보단 도끼 같았다.

이런 창을 두고 사람들은 폴암 류 무기의 결정판.

할버드라 부르고는 했다.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 창]

-카이삭스의 군단 소속 기사 대장에게 주어지는 마창.

〈치명적인 관통〉

-추가 관통력 60%

〈카이삭스의 파동〉

〈카이삭스의 표식〉

〈카이삭스의 질책〉

〈카이삭스의 반전〉

-착용 제한-

〔카이삭스의 마창술〕

대장답게 기사 대장의 창에는 총 4가지에 해당되는 스킬이 있었다.

기본적인 옵션이야 그냥 카이삭스의 창과 다를 바 없었지만, 붙어 있는 스킬의 수가 달랐다.

물론.

"카이삭스의 반전을 시전합니다."

"적의 생체 신호를 반전합니다."

"카이삭스의 반전 10,000/3"

굳이 이 창, 저 창 바꿔쓸 필요 없이 이 녀석 하나면 기술 습득은 충분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꽤 무거운 편이었지만, 내 근력 스탯이 높아서 문제 될 건 없었다.

'우선 파동부터.'

카이삭스의 마창술은 대부분 좋은 스킬들이지만 표식을 제외하고 가장 효율이 좋은 건 역시 파동이다.

『카이삭스의 파동 10,000/3,746』

-횟수를 전부 채우면 카이삭스의 파동을 온전히 체득합니다.

파동만 사용하며 우선적으로 배우려고 하는 중이다.

"빡세네. 이놈들 말고 좀 약한 악마들 많은 곳에서 싸우고 싶은데... 아닌가. 꼭 죽이지 않아도 사용만 해도 횟수는 채워지니까 죽지 않는 놈들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네."

애초에 백만 번의 횟수였던 게, 만 번으로 줄어든 거다. 이 정도로도 감사해야 할 정도.

애초에 만 번이 조금만 고생하면 채울 수 있는 횟수다.

반나절 만에 삼천 번을 채웠으니 하루 이틀 정도면 파동을 배우겠지.

"근데... 언제까지 바라보고 있을 거지? 볼일이 있다면 말을 해라."

파동으로 기사 하나를 쓰러뜨린 내 시선의 끝에는 미국 1위. 메타르라는 사내가 삐딱하게 서 있었다.

"딱히. 난 휴식을 취하는 것뿐. 네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 텐데."

"..."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지만, 미룡이 알려줘서 알았다.

굳이 여기서 휴식을 취할 필요도 없을 텐데 근처에서 아까부터 계속 날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구경도 못 하나? 한국은 친절하고 인정이 많다던데, 널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군."

"시비 거는 건가?"

"딱히. 팩트만 말했을 뿐이다."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건만, 이놈은 왜인지 나한테 괜한 적개감을 가지고 있어 보였다.

"메타르. 왜 괜히 지랄이야?"

"... 미룡. 네가 살아 있음에는 나 또한 영향을 끼쳤다.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지랄이라니. 말이 심하군."

"너 없었어도 데몬시드가 어련히 알아서 잘 살렸을걸."

"아니, 데몬시드도 내게 고맙다고 했다. 그렇지 않나?"

"내가 그랬나?"

까드득.

메타르의 이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내 어깨를 밟고 가지 않았나."

"? 아! 그게 너였나. 몰랐군. 맞아, 미룡. 녀석의 도움을 받았다."

"정말?"

"미룡, 어서 내게 사과하고 감사의 성의를 보여라."

"응, 싫어~"

까득.

저러다 이빨 부서지겠다.

"애초에 왜 여기 있는 거야? 슬슬 정리됐으면 돌아가야 하는 거 아냐? 한국에 네 숙소 정도는 제일 좋은 곳으로 배정해줬을 텐데."

"어디서 쉬든 내 마음이지. 안 그런가 라이프."

"맞지, 맞지. 이 땅 전부가 데몬시드의 것이 아니니까."

웃기는 놈들이다.

미국 1위, 메타르와 2위 라이프.

놈들은 뜬금없이 나타나 내가 싸우는 걸 가만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거기다 속닥속닥거리면서 날 품평했는데 기분이 묘했다.

'안 들릴 거라 생각하는 건가.'

꽤 멀리 있어서 안 들릴 거라 생각하지만 내 스탯이 워낙 높아서 대부분의 말들이 잘 들린다.

-녀석은 대체 어떻게 카이삭스의 군단들이 사용하는 기술을?

-기사 대장의 창을 쓰는군. 그 창에 내장된 스킬을 쓰는 거 같다.

-하지만 메타르 너도 있는데 못 쓰잖아. 감정 스크롤도 써봤는데 아무것도 안 떴다고 하지 않았나?

-그걸 알아내려고 이러는 거 아니냐. 조용히 하고 잘 살펴봐라.

대화는 대강 그런 식이었다.

카이삭스의 마창술.

그걸 어떻게 내가 쓰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푸념과 비밀을 알아내려 애쓰는 몸부림이었다.

내 기준에서는 퍽 귀여웠다.

아무리 지켜본다 한들 카이삭스의 마창술은 따로 스킬을 배운 후계자가 아니면 쓸 수 없으니까.

나 말고는 사용 가능한 사람이 전무하다 할 정도로 없을 거다.

저렇게 지켜보고 있어봤자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미룡은 잘 모르니까.'

저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야, 꺼지라는 말 안 들려? 산업 스파이 새끼들아."

나랑 있을 때는 그래도 좀 점잖은 척을 했던 걸까.

미룡의 말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미룡, 내버려 둬. 어디서 휴식을 하든 저들 말대로 우리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그래도 괜히 찜찜하잖아."

"괜찮아."

조금만 더 가까이 왔다면 푸르의 대뢰가 직격했겠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하게 사거리를 벗어나서 날 염탐하고 있었다.

'일 미터만 가까이 오면 푸르가 반 토막을 냈을 텐데 칼 같단 말이지.'

사거리를 정확히 계산해서 더 다가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역시 랭커는 랭커.

이탈리아 놈들이랑은 다른 세계 최정상의 랭커다운 판단력이다.

'물론 죽일 생각도 없지만.'

이탈리아 랭커들을 도륙한 참이다.

세계 정상급이나 다름없는 미국의 랭커까지 죽이고 싶진 않다.

이탈리아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미국은 아니다.

현재까지도 유일한 Lv. 8 네피림.

메타르는 인류에게 필요한 존재다.

놈이 내게서 알아내고 싶은 게 있는 것처럼, 나도 알고 싶은 게 있다.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역시 내가 메타르에게 궁금한 점이라면 레벨이다.

경험치가 가득 차도 레벨이 오르지 않는 현 상황에서, 메타르는 대체 어떻게 레벨을 올렸나.

그것도 놈은 한참 전에 8레벨을 찍는 기염을 토한 명실상부한 랭킹 1위이지 않은가.

'슬슬 악마들도 사라졌고.'

달이 뜬 지도 한참.

이제 슬슬 전투를 마무리할 때가 되기도 했다.

"메타르."

"...?"

"교환하지 않겠나."

"교환? 뭘 말이냐."

"내가 파동을 쓸 수 있는 비밀을 알려주지. 대신 너 또한 그에 상응하는 레벨의 한계 돌파 방법을 말해라."

메타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미룡도 고개를 갸웃했다.

"데몬시드. 설마 상한 돌파 조건을 모르는 건가? 그 레벨인데도?"

어째 분위기가 이상했다.

뭐라고 할까.

'병신 보는 기분인데.'

조금 모자란 놈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메타르와 라이프 말고도 미룡 또한 마찬가지.

"아니지. 네가 그 정도 상식조차 모를 리는 없지. 대한민국이 아무리 작다 해도 헤일로를 가진 자가 그렇게 많은데... 그렇군. 날 놀리는 건가."

메타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럼 데몬시드가 그런 당연한 것도 모르고 이 레벨까지 성장했겠어? 당연한 거 묻지 말지? 격 떨어지게."

미룡이 냉담하게 답했다.

메타르와 미룡은 본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난...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

청와대 국무회의실.

둥그렇게 둘러져 있는 책상과 빼곡하게 앉아 있는 자리에는 타국의 랭커들과 관계자가 자리해 있었다.

좌측부터 영국, 브라질,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있었고 우측에는 일본, 베트남, 호주, 아프리카, 이집트가 차례대로 자리해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귀빈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을..."

그때였다.

벌컥!

"비켜라."

"너나 비켜라. 왜 괜히 옆으로 와서 걷는 거지?"

"길이 같으니까. 걸음은 나보다 느리군."

"빨리 걸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물소 투구를 쓴 사내와 멀끔한 금발의 호쾌한 사내가 나타났다.

대한민국의 1위, 데몬시드와 미국 1위 메타르였다.

세계 랭킹, 1위와 2위의 당찬 걸음에 저마다 경계와 긴장을 했다가도 둘의 투닥거림에 얼빠진 얼굴을 했다.

"왜 저러나 몰라."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 젓는 미룡과 뒤에는 미국 2위, 라이프까지 함께였다.

"데몬시드. 기다렸다."

"아, 어."

강철이 벌떡 일어나 자신의 자리를 데몬시드에게 건네고 자신은 일어서서 그의 뒤를 지켰다.

"미룡, 반갑다."

"별로 반가워 보이는 얼굴은 아닌데... 랭킹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이해 좀 해줘."

"...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한국에 온 걸 환영한다."

"고마워."

대통령까지 자리를 비켜주자 데몬시드는 모여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한국의 데몬시드다."

소개는 그걸로 끝.

오만하다고 평가할 만큼 간단한 소개였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데몬시드라는 이름 넉 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데몬시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전 세계 고위 랭커들이 모인 이유는 다음과 같았으니까.

"알다시피 중국은 망했다. 때문에 주변국은 꽤 위험에 처했지. 가장 위험한 건 베트남과 한국, 그리고 러시아가 되겠지."

중국 말고도 군단장에게 지배된 나라가 근접해 있는 베트남은 더욱 어렵게 됐다.

솔직히 한국보다 더 위험한 건 베트남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베트남은 이 일을 어떻게 보지?"

그러자 만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베트남은 한국과는 달리 지형적 특징에 의해 베트남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덕분에 악마들의 진입을 철저히 막고 있죠."

"대책이라는 건..."

"늪입니다."

미국은 언짢음을 내비쳤고 다른 나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베트남의 습한 지대는 지난 미국과의 전쟁으로도 익히 알려진 사실.

그 지형을 기프트로 더욱 강화시키고 넓혔다면 악마의 진입을 늦추고 저지하기엔 충분할 것이다.

"저희는 한국과의 동맹을 통해 헤일로를 확보했죠. 운이 좋았습니다. 덕분에 국경의 늪지화를 더욱 대대적으로 펼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베트남은 괜찮다는 소리.

제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갑옷을 입은 채로 늪에 빠지면 진군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고, 공격에 취약해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시선은 러시아 쪽으로 향해 있었다.

"우리도 지금 당장은 괜찮아. 베트남이 늪이라면 우린 눈이니까."

베트남이 늪이라면 러시아는 눈.

애초에 화이트의 눈이라면 손대지 않고도 적들을 눌려 죽이거나 허공으로 낙하시켜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데몬시드는 보지 못했지만, 이번 북한의 국경에서도 화이트는 자신의 눈으로 대활약했다.

상대하기 힘든 카이삭스의 기사들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눈을 내려 하늘 상공으로 올려 떨어뜨리기를 반복했으니 말이다.

그 숫자가 수천에 이르니 가히 장관이라고 할만했다.

떨어지는 기사들이 아래의 기사들과 부딪쳐 죽는 모습은 사기적이라고 할 만큼 강력한 힘이었으니까.

'군단장과 싸울 때는 약하지만.'

전쟁이라면 화이트의 강함은 또 남다르다. 제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무게나 낙하의 데미지에 저항하는 적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그럼 남은 건 한국이군."

호주의 1위, 하토르가 중얼거렸다.

데몬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시피, 13군단의 숫자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사람, 악마 할 것 없이 자신의 기사로 만드는 카이삭스의 힘은 시간과 결합되면 더욱 강해지기 마련이니까."

점점 불어날 것임이 자명한바.

"베트남도, 러시아도, 그리고 한국도 지금은 괜찮겠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힘들어질 거다. 우리의 적은 13군단의 악마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

카오스 게이트, 지옥의 어비스 등등 인간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마음 같아서야 여기 모인 랭커들과 레이드를 꾸리고 싶지만 내 판단으로 그건 시기상조다."

인류는 아직 약하다.

데몬시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영국의 마스크다. 묻고 싶은 말은 많지만, 우선 그녀에 대해 말해주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은데."

데몬시드는 미룡을 바라봤다.

미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중국에 있던 와중, 죽어가는 그녀를 발견해 치료했다. 그 다음은..."

미룡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중국의 미룡. 아니, 이제는 한국의 네피림이 된 미룡이다. 궁금한 게 많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중국은 어떻게 망했는지가 궁금하겠지. 숨길 생각은 없어. 다른 나라도 우리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크니까."

미룡은 허심탄회하게 제 조국의 치부를 드러냈다.

악마 숭배자. 카이삭스. 내부 분열.

카오스 게이트의 실패.

그것들을 말하자 회의실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발언해도 되겠나."

메타르였다.

"데몬시드의 발언에 동의하는 바다. 난 오늘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과 접전을 치르며 전력을 다하고 나서야 겨우 쓰러뜨릴 수 있었다. 알다시피 기사 대장은 챔피언이다. 그렇다면 군단장은 어떨지, 굳이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대강 알 수 있겠지."

메타르 또한 놈들의 위험설을 설파했다. 데몬시드와 눈을 마주치며 자리에 다시 앉자, 웅성거림이 커졌다.

"13넘버는 그 정도인가... 그렇게까지 보이지는 않는데."

"놈이 특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한국보단 베트남이 더... 아무튼 이쪽은 망했군."

"러시아도 힘들어지겠어. 주식이라도 됐으면 좋았을 텐데."

"주식보단 코인 아니냐? 지금은 다 망했지만. 코인 마렵네."

소란스러워지는 상황에서 한 명의 랭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계 랭킹 3위. 윈드킬이었다.

"인접한 국가들뿐이 아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또 다른 하나가 무너지게 되겠지. 그것도 모르는 건가? 남 일처럼 생각할 일이 아니다."

윈드킬의 말에 라이프가 동의했다.

"미국은 13군단장을 인류 최대의 위협으로 보고 있다. 놈은 큰 제약 없이 자신의 군대 숫자를 불릴 수 있는 힘을 지녔다. 놈의 기사가 되면 고블린이라도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까."

일단 주변 국가는 초토화될 거라 봐도 무방했다.

"한국은 적당히 막아내겠지."

메타르는 데몬시드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주변 랭커들이 웅성거렸다.

"저 메타르가 다른 사람을..."

"역시 데몬시드는 다른 건가?"

"미룡을 구해낸 것도 놈이다. 카오스 게이트에서 살아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처음이니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타국의 랭커가 손을 들었다.

"데몬시드. 네 힘은 어느 정도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 넌 누구지."

"프랑스의 레온이다."

프랑스의 레온.

데몬시드는 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관찰자님으로부터 메시지]

-육체파 기프트의 프랑스 1위입니다. 맞은 데미지를 되돌려주는 카운터로 유명한 랭커입니다. 성격은 호승심이 강해서 아무한테나 시비를 걸고 맞아준 뒤, 카운터 쳐서 골탕 먹이는 걸로 유명한 프랑스의 악동입니다.

관찰자의 빠른 피드백으로 상대의 정보를 알아낸 데몬시드는 레온에게 되물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한국의 전력을 알아야 하니까. 더군다나, 미국의 1위를 꺾은 적 있는 인물이라면 더 그렇지 않나?"

메타르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상황 자체가 재밌다는 듯 입을 열지는 않았다.

데몬시드가 어떻게 할지 흥미롭다는 표정만을 지은 채였다. 하지만 데몬시드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채로 레온의 물음에 답했다.

"내 힘은 중요하지 않다. 카이삭스는 나 혼자 강하다 해서 쓰러뜨릴 수 있는 적이 아니니까."

"겁이라도 먹었나?"

싸구려 도발이었다.

상황이 흥미진진해지자 저들끼리 떠들어대며 웅성대던 소음이 멎었다.

데몬시드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레온.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레온은 일어난 채로 두 팔을 벌려 어깨를 으쓱거렸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너무 지레 겁을 먹은 것 같아서 말이야. 우리가 등을 맡겨도 되나 싶어서.... 뭐 대충 알만하지 않나? 앞으로 세계를 주도해야 하는 정상의 인물들이 이리도 겁이 많아서야 되겠어?"

명백한 도발에 강철이 나섰다.

"프랑스의 레온, 경고하는데 적당히 까부는 게 좋을 거다."

"여자는 빠져. 어딜 건방지게 사내들 하는 일에 끼어들어!"

벼락같은 노호에 강철이 검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미룡이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겠어?"

"그럴 이유가 있나?"

"이탈리아가 공석인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

이탈리아의 공석.

그 이유를 미룡은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순간 국무회의장에 서릿발 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수틀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

그것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공석인 이탈리아의 존재들이 증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때였다.

"한 대 맞아주지."

레온이 입을 열었다.

"내 기프트는 카운터다. 맞은 힘에 비례하여 몇 배로 되돌려주지. 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데미지는 되돌리지 못해. 어디, 증명해보겠나?"

증명.

증명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나 레온은 증명을 요구했다.

증명은 그저 핑계.

세간에 떠들썩한 데몬시드의 힘을 평가해볼 요량만이 그득했다.

"증명해서 내가 이득 볼 게 없어 보이는데."

"겁먹은 건 아니겠지?"

"그럴 이유가 있나."

레온은 피식 웃으며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이를 테이블에 던지자.

"아다만티움? 이 많은걸..."

아다만티움 조각이었다.

족히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수.

"잠깐의 내기로 이만한 가치라면 충분하지 않나?"

"훌륭하군."

그리고 잠시 뒤.

프랑스 1위 레온은 두 팔을 퍼덕거리며 괴상한 춤을 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