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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후두둑.

무너져 내리는 바르바제의 대장간.

푸른 용암이 들끓어 펑펑 터져가는 이곳에서, 운 좋게 대부분이 폭발에 휘말려 상승기류를 타 올라갔지만 난 아니었다. 미믹을 이끄는 리덤의 트롤 짓으로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아직 지하에서 내가 얻지 못 한 게 한 가지 있다.

최초에 어비스로 내려온 이유.

바로 군단장 후보였다.

"날 원망하나."

군단장 후보, 알두바드는 폭발하는 대장간을 바라보면서도 담담했다.

아니, 왠지 모를 홀가분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아니. 원망이랄 게 있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고, 미리 깨닫지 못한 우리의 불찰일 뿐."

쿵.

알두바드는 터지는 용암을 바라보다 말했다.

"네 이름은?"

딱히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데몬시드."

알두바드의 동공이 조금 확장됐다가 가라앉았다.

"그대의 일화는 이 깊은 지옥에서도 들려오더군. 지옥의 유명인을 만나게 될 줄이야... 이거 영광이로군."

"날 보는 악마들은 죄다 그런 소리를 하더군."

"할 수밖에! 지옥의 군주들이 여덟 개의 지상과 천상을 집어삼킬 때도 그대만 한 위험을 느끼진 못했지. 다른 누구도 아닌 신화에 가까운 괴물을 그대 손으로 죽이지 않았나."

신화의 괴물.

레비아탄, 베헤모스, 티타누스.

놈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건방진 사슴도 그대가 죽였다지. 모르긴 몰라도 지옥의 존재 중에선 그녀가 죽기를 바란 자가 꽤 많을 테니 그대에게 호감 가진 자들도 찾아보면 많겠지. 어쨌든 간에 자네를 모르는 게 더 이상한 법이야."

건방진 사슴.

푸르푸르를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도 되겠나."

"뭐지."

"그 아다만티움. 신기하군. 이제 갓 태어난 것 같은 냄새와 모양이다. 어디서 얻었는지 알 수 있나."

"나는 말할 수 없다."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하지만 알려줄 수 없었다.

놈들은 나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나 잘 알고 있다.

내가 데몬시드임을 밝힌 이상.

아다만티움을 만들어낸 것이라 말한다면 지옥에 소문이 퍼질지 모른다.

혹시라도 그런 상황이 퍼지면 지금까지의 일이 낭패된다.

알릴 수 없었다.

다만.

"미믹은, 내가 잘 쓰겠다."

"!!"

이것만큼은 말해줄 수 있었다.

이것으로. 놈은 알 것이다.

알두바드는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대강의 상황을 이해했다는 투였다.

"그랬군. 완벽히 속아 넘어갔군. 결국... 난 틀리지 않았던 건가... 울티마여. 우린 올발랐던 것이오."

그것으로 놈과의 대화는 끝이었다.

"흐아아아아아압!!"

트롤이 놓쳤던 울티마의 망치가 날아들었다. 그것이 다시금 벽면에 처박히며 푸른 용암이 사방에 터졌다.

"뭐 하는 짓이지?"

날 노린 게 아니었다.

대장간 중앙에 있는 도가니를 향해 집어 던진 것이었다.

덕분에 도가니는 터져나가 안에 있던 용암이 분수처럼 치솟았다.

"데몬시드여! 난, 신을 믿지 않는다. 지옥의 군주들은 신을 되찾기 위하여 싸운다지만 난 아니야! 바르바제를 세운 초대 성주. 울티마의 의지를 따를 뿐. 울티마의 의지가 결합된 아다만티를 믿을 뿐이다!!"

놈은 도가니 속에 직접 손을 집어넣었다. 푸른 용암에 의해 화상을 입으면서도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주먹만 한 금속이었다.

전체적으로 은색의 베이스에 푸른 기가 감도는 기묘한 금속.

난 그것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아다만티.'

완전한 아다만티움이 아닌.

우르펄에서 추출한 아다만티.

아다만티움이 되기 직전의 광물.

그것일 거라 짐작했다.

"어차피 네가 아니라도 바르바제에 미래는 없었다! 울티마의 기술을 팔아넘겨 연명할 목숨 따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놈은 그간 모아놓았을 게 분명한 아다만티를 제 입속에 넣어 씹었다.

이전에 보여줬던 놈의 권능이었다.

"아다만티는 아다만티움에 가깝다. 오히려 더욱 유연하지. 데몬시드여. 내가 어째서 군단장 후보가 되었는지, 바르바제의 성주가 되었는지를 몸소 알려주도록 하마!"

꾸룩. 꾸르륵.

놈은 돌연 입가에서 피거품을 끓었다. 그러더니 이내 놈의 몸에서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더니 이내 땀이 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은색의 땀은 놈의 몸을 뒤덮고 점점 거대해져 갔다.

"울티마는 바르바제를 지킬 거신병을 창조했다고 하지. 지금에서도 종적을 감췄으나 바르바제의 티블은 누구나 거신병을 가슴에 품는다! 나 또한! 바르바제를 영원히 지킬 거신병으로 새롭게 태어나리!!"

놈이 삼킨 아다만티가 온몸을 뒤덮고 액체로 꿀렁거리더니 거대한 거인의 형상으로 변했다.

[땅을 씹어 삼키는 알두바드]

아다만티뿐만이 아니었다.

놈은 변화하면서 주변에 널려 있는 미스릴과 푸른 용암. 그리고 온갖 돌들을 모조리 씹어 삼켰다.

점점 거대해지며 모습을 갖춰가는 거신병의 형태가 대장간의 지하를 벗어나 지상을 뚫어나갔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아앙-!!

쿠우우우우웅!!

분수 모양으로 딱딱히 굳어 있던 용암석을 부수고 나타난 거신병.

금속이 부딪치며 내는 굉음이 철판을 손톱으로 긋는 듯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거신병..."

금속 덩어리로 이루어진 거신병.

뼈대는 아다만티와 미스릴.

외부는 주변의 암석을 모조리 집어삼켜 만들어진 거신병이었다.

단단한 갑옷과 손에 든 방패와 망치는 하늘에 닿을 듯 거대했다.

"드디어 호적수를 만났구만!!"

의기양양한 바바리안이 거신병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단숨에 도끼를 휘둘렀다.

거대한 몸집치고는 빠른 속도였다.

텅!!

하지만 거신병의 방패에 막혔다.

육중한 덩치에 비해 반응속도가 조금 느리지 않을까 했지만, 아니었다.

거신병의 움직임은 그 크기와 반비례하지 않았다.

"어?"

거기다 기술적인 부분도 그대로였다. 거신병은 방패로 바바리안을 밀치고 그대로 망치로 찍었다.

쾅!!

"아악!!"

머리통을 얻어맞은 바바리안이 피를 흘리며 나자빠졌고 그와 동시에 헤일로를 지닌 랭커들이 득달처럼 달려들었다.

가장 빠른 것은 강철 군주.

강철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든 그녀였으나 그녀의 몸은 거신병의 몸체에 비하면 한없이 작았다.

보이지 않는 번개가 둘러져 있었으나 거신병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다만티라해도 아다만티움의 능력은 일부 가지고 있다는 건가.'

강철 군주의 검과 거신병의 망치가 부딪쳤다. 당연하게도 튕겨 나간 건 강철 군주였다.

다행히 큰 상처를 입진 않았지만 거신병의 힘에 꽤 당황한 듯 보였다.

그 이후 앞다퉈 네피림들이 달려들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거신병이 망치를 한번 휘두르자 지반이 튀어 올라와 커다란 장벽을 만들었다. 놈은 그 위에서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게도 보여라. 그대의 힘을.

날 도발하는 놈을 바라보며 난 생각했다.

'미완이군.'

후두둑, 떨어지는 갑옷.

아무리 단단하게 만들었다 해도, 거신병의 갑옷은 철과 암석이다.

놈이 말하는 거신병의 모습이 고작 저런 돌덩어리는 아닐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놈이 아다만티를, 아니. 하다못해 미스릴이라도 많은 양을 집어삼켜 만전으로 싸웠다면 나 또한 괴로운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벌어진 전투. 부족한 물량.

그것이 지금 보여지는 거신병을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다.

미완의 거신병. 하지만 뿜어내는 존재감만큼은 거대했다.

해야 할 일은 같았다.

"프리즌 블러드가 흥분도를 낮추고 평정심을 유지합니다."

"카탈린의 벼락."

꽈광-!!

하늘에서 한줄기 벼락이 떨어졌다.

붉은 벼락.

거신병은 방패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난 승리를 점쳤다.

그저 암석으로 만들어놓았을 뿐인 방패로 내 벼락을 막을 순 없다.

쿠웅-!!

하지만 아니었다.

놈은 내 벼락을 막아냈다.

아니, 정확하게는 방패로 흡수했다.

"그렇군."

놈이 먹어 치운 아다만티.

뼈대를 이뤘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때때로, 이동했다.

방금은 방패로 아다만티를 이동시켜 방패 전체를 씌워 벼락을 막았다.

-울티마를 위하여!!

그러나 아다만티움보다는 아니다.

하지만 아다만티는 흡수만 할 뿐, 몇배로 힘을 증가시켜 방출하는 능력 자체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 해도 성가시군."

조막만 한 아다만티를 이동시켜 적재적소에 쓰는 이유.

최소한의 양으로 거신병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게 효율적이니까.

그 말은 또 다른 의미로 아다만티를 거신병 전체를 뒤덮지 못함과 동시에 이동으로 인한 시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초 단위의 싸움에서 아다만티의 이동은 놈의 명백한 단점이 된다.

그 반증으로 거신병의 몸 전체에는 어느새 어비스의 눈이 쌓여 있었다.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잘난 방패로도 떨어지는 눈 전부를 막을 수는 없는 거 같군."

어비스에서 살아가기에 눈치챌 수 없는 눈. 어비스의 존재이기에 익숙한 눈이지만, 이번만큼은 그 익숙함이 죽음으로 이끄리라.

"데몬시드! 빚은 이걸로 갚았다!!"

푸확! 피 토하는 화이트의 모습과 함께, 거신병의 움직임이 끼긱거리며 둔해지기 시작한다.

거대한 몸체를 띄우지는 못해도, 무게를 증가시켜 둔화시키는 것 정도는 화이트라도 가능했다.

거기에 더해 화이트 오일.

눈으로 이루어진 빙판에 기름을 부은 듯한 기름.

그녀의 화이트 오일이 거신병의 거체를 미끄러뜨렸다.

균형을 잃은 찰나의 기회.

난 절대 놓치지 않았다.

"스미스!!"

난 곧장 아다만티움을 던졌다.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두 손을 꽉 쥔 스미스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아다만티움을 모든 힘을 쥐어짜 내 다시 내게로 날려 보냈다.

쩌엉-!!

내가 만들어낸 아다만티움은 주먹만 한 크기에서 점점 끝이 뾰족해지고 긴 장대로 늘어났다.

-이럴 수가!! 어떻게 아다만티움을 고작 한순간에...!!

이윽고 내 손에 다시금 들렸을 때.

아다만티움은 광석은 완전한 하나의 창으로 변모해 있었다.

조금 짧은 단창.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울티마여...!!

거신병의 방패가 들어 올려졌다.

넘어지는 순간에도 놈의 방패에 순식간에 아다만티가 씌워졌으나.

파지지직!! 뇌신과 온갖 벼락의 힘이 창에 담겨 증폭되어가는 내 창을 놈을 결단코 막지 못 하리라.

-!!

방패를 뚫고 거신병의 가슴을 꿰뚫은 시뻘건 일창.

그것은 바르바제를 지나 어비스 한편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바르바제의 거신병 [2]

179화.

쿠구구구구궁-!!

뇌신으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아다만티움의 창은 놈의 아다만티를 꿰뚫고도 어비스에 큰 구멍을 만들어냈다.

거신병의 방패와 가슴엔 거대한 관통상이 생겨났는데, 그 속에 알두바드의 찢겨진 상반신이 드러났다.

쿠구구궁! 거신병이 부서져 내렸다.

콰아앙!!

묘한 먼지구름이 생성되고 무너져내린 거신병의 잔해 사이 알두바드는 힘겹게 피를 토했다.

"울티마... 울티마시여... 바르바제를 지키...지 못해... 죄송..."

새까만 바르바제의 하늘을 바라보는 알두바드의 눈은 빛을 잃어갔다.

난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승천, 그게 정확히 뭐지?"

사전적 의미를 뜻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바라는 승천.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지옥에 있어야 할 게 당연한 놈들이 어째서 승천을 바랄까.

왜 지상을 갈구할까.

"승... 천... 본래..... 우리의... 우린, 돌아... 간..."

하지만 아쉽게도 알두바드는 내 의문을 시원스레 해결해주지 못했다.

놈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17군단장 후보 알두바드를 처치하였습니다!"

"알두바드의 망치를 획득합니다!"

"아다만티를 획득합니다!"

"가공된 미스릴을 획득합니다!"

"가공된 지옥석을 획득합니다!"

"성주의 부서진 미스릴 갑옷을 획득합니다!"

"알두바드의 편지를 획득합니다!"

"우르펄을 획득합니다!"

"17군단장 후보 레이드 순위 기여도 1위를 기록합니다!"

"잉걸불 29개를 획득합니다!"

"예이이이이잇!!"

"바르바제는 대한민국 거다!!"

알두바드가 죽자마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직 바르바제의 미스릴 전사들은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으나, 사기가 많이 떨어진 상황.

그들의 패배는 시간문제였다.

오늘부로, 바르바제는 멸망한다.

그건 기정사실이었다.

"하하하하핫!! 어때! 데몬시드! 나 화이트! 쓸모 있었지!? 내 눈이 아니었다면 쓰러뜨리기 힘들었지!!"

꽤 무리했는지 연신 피를 토하며 쓰러진 채로 소리치는 화이트.

난 그녀를 보며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는 손을 위로 올렸다.

"눈은 너만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저번 시드네스 때 레인스톰 말고도 하나로 합성된 스킬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블리자드.

초반엔 자주 사용했지만, 국가 단위의 전쟁에서는 그다지 사용할 일도 없는 광범위 스킬이다.

온 세상을 눈으로 덮어버릴 강렬한 눈보라는 분명 매력적인 스킬이지만 일개 악마들은 몰라도, 군단장급에겐 통하지 않는 스킬이 된 뒤로는 자주 사용하지 않았다.

범위 스킬이란 게 으레 그렇듯, 단일 공격보단 위력이 절감되는 게 당연하고 대부분의 내성이 갖춰져 있는 군단장에겐 통할 스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신으로 군단장과 싸울 때면 몰라도, 다른 이들과 함께해야 할 때 블리자드는 팀킬이 가능하기에 쓸래야 쓰지 못하는 스킬이 됐다.

물론, 이제는 아니다.

시드네스로 합성된 블리자드는 지금도 범위 내의 피아식별을 구분하며 공격하고 더욱 강력해졌다.

그 이유는 프로스트 노바.

프로스트 노바는 본래 날 중심으로 원형으로 퍼져나가는 냉기 파장.

하지만 그게 이제는...

"블리자드."

블리자드로 떨어지는 날카로운 우박 하나하나에 시전 된다.

내 마력, 그리고 마나의 양의 비례하여 블리자드의 범위는 좁게는 십 미터, 크게는 수십 킬로로 늘어난다.

어비스에 있는 티블의 성 하나쯤이야 모조리 집어삼킬 정도로 말이다.

그 정도 넓이의 눈보라에서 발생하는 눈송이와 우박 하나가 만들어내는 수백, 수천에 달하는 프로스트 노바를 과연 피할 수 있을까.

이것들을 모조리 막아낼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블리자드로 인해 발생하는 프로스트 노바의 발동 조건은 물리적 접촉.

땅에 내려앉는 순간.

건물의 지붕에 닿는 순간.

또는, 어깨나 머리에 닿는 순간.

프로스트 노바는 발동한다.

퍼퍼퍼퍼퍼퍼퍼퍼펑-!

적게는 한 번에 수십.

많게는 수백, 수천의 프로스트 노바가 만들어지는 광경을 보노라면 마치 눈의 폭죽이 터지는 것만 같다.

원형으로 퍼져 모든 것을 앗아가는 차고 시린 프로스트 노바는 앞뒤 구별 없이 모든 것을 얼려버리니까.

"미스릴이 마법 저항이 높다고 해서 영향이 없는 건 아니겠지."

허공에서 터지는 프로스트 노바는 하나가 터지면 그 주변에 있던 우박이 또 다른 노바를 만든다. 하나의 노바가 터지면 당연히 근처의 눈송이 수백 개가 연달아 터지는 것이다.

파도처럼 덮쳐오는 노바의 연쇄 작용을 버텨낸다 한들, 끝은 없다.

끝없는 랠리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금씩 누적되는 대미지를 최소화하기 위한 발버둥뿐.

프로스트 노바도 강력하지만, 블리자드 자체가 주는 물리적 대미지도 무시하지 못한다.

하늘에서부터 유성처럼 내려꽂히는 얼음덩어리를 맞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미지가 누적될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프로스트 노바는 중첩되면 될수록 상대의 움직임을 둔화시킨다.

물론 나와 동료들은 블리자드 속에서 자유롭다.

「블리자드」 (Fusion)

-데몬시드로부터 합성된 마법. 빛조차 얼릴 눈보라로 범위 내의 적을 공격한다. (관련 마법의 보유 수에 따라 대미지가 강화)

[프로스트 노바]

-눈보라 속, 눈송이 하나하나에 프로스트 노바가 깃든다.

[스노우아머]

-눈과 노바는 냉기 내성을 올리고 쌓이면 쌓일수록 단단하게 뭉쳐 시전자와 동료들을 보호한다.

내게 닿은 눈송이는 내 몸에 스며들어 하나, 하나의 갑주로 변한다.

완벽한 공방 일체의 스킬로 탈바꿈된 것이다.

[스노우아머 (84)]

지금 내 스노우아머의 스택은 84.

그렇게까지 오래 유지되는 녀석은 아니지만 이 정도 스택이면 못 막는 건 거의 없다 봐도 무방하다.

예를 들자면.

콰창! 꽝-!!

"죽어라! 인간!!"

기습적인 미스릴 전사의 창이 스노우아머에 의해 가로막혔다.

끽, 끼기긱!! 한 번에 스노우아머의 20스택이 사라졌다.

이 한 번의 공격으로 말이다.

이미 알두바드와 싸울 때 카탈린의 역장을 펼쳐놓은 상태.

모든 공격을 반사 시키는 역장.

그건 미스릴 전사의 물리적 공격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꿍-! 콰장창!!

"컥, 크윽."

쿵.

자기 창에 복부를 찔린 미스릴 전사가 쓰러졌다.

"쳇."

화이트가 혀를 찼다.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썼으면 좋았던 거 아냐? 애초부터."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공격만 할 수는 없지 않나. 게다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알두바드의 성장 가능성은 대단히 높았다."

주먹보다 작은 크기의 아다만티가 아니라 조금 더 많은 양을 확보하거나 꽤 많은 양의 미스릴을 삼킨 상태였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더해 내가 아다만티움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쉽게 이겼을까.

미리 스미스에게 헤일로 제작을 위한 천사의 깃털과 아다만티움의 투자로 헤일로를 제작하지 않았다면?

아다만티움을 제련하기 까다로웠을 테고 결과적으로 알두바드를 쓰러뜨리는 데 많은 시간과 희생을 필요로 했었을 것이다.

[시해의 단창] (Legendary)

-이름 없는 금속의 단창

〈인적의 편린〉

-단창이 흡수한 시전자의 스킬 대미지 300% 증가.

〈무너지지 않는 신념〉

-전투 중 파괴 불가.

〈시해 Lv. 2〉

-격을 갖춘 적을 죽일 때마다 단창의 위력 증가. (+10%)

〈극〉

-극렬한 관통력.

〈회귀 각인〉

-한번 각인된 주인이 원할 시, 언제든 그에게 돌아간다.

"화려하군."

시해의 단창.

아다만티움 자체가 주먹만 한 정도라 짧은 단창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아이템에 붙은 고유 능력들이 화려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였다.

물결 무늬가 있는 단창.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기는 하다.

'이름 없는 금속은 뭐지.'

분명 아다만티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름이 없다니. 사실은 아다만티움이 아니었다는 말이었을까?

시스템이 굳이 이런 구별을 해놓았을 리는 없다.

"아다만티움이 아닌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건 아다만티움이 없다면 대체 뭐란 말인가.

꽤 당황스러웠지만 생각해보니 아다만티움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이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금속이라면 아다만티움이 아니라 해도 분명 내게는 이득이니까.

게다가 난 이걸 만들 수 있다.

물론 조건이 갖춰져야 하고, 만들 수 있는 양은 한정적이지만 그렇다 해도 만들 수 있는 인공 금속이라는 게 중요하다.

단창이 장창이 될 수도, 내 온몸에 도배도 가능하다는 소리니까.

'슬슬 장비 바꿀 때가 되긴 했지.'

언제까지 네피림 초보 세트를 사용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건 그렇고 이름이 없다라..."

그렇다면 이름을 정해줘야 하는 게 제작자의 자세이지 않은가.

"파르바움으로 할까."

미믹이 되지 못했다면, 이런 걸 만들어낼 수 없었을 테니까.

파르바움.

딱 좋은 이름이다.

"시해의 단창 정보가 변화합니다."

[시해의 단창] (Legendary)

-파르바움으로 만들어진 단창.

"뭐, 어차피 장창으로 고칠 거지만."

파르바움을 다시 만들어서 장창으로 개조시켜야 한다.

아무래도 단창은 써먹기가 애매하기도 하고, 내가 창을 쓸 때는 웬만하면 투창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회귀 각인 덕분에 이 상태로 투창해도 상관은 없지만 아무래도 짧다 보니 무게감에서 조금 아쉽다.

파르바움을 조금 더 많이 만들어서 장창으로 만들어 쓰는 게 더 나을 거다.

"재료는 충분하니까."

알두바드를 잡아서 오르펄도 얻었고 잉걸불도 충분하다.

밑의 대장간을 뒤지면 미스릴과 지옥석도 충분할 테니 파르바움을 만드는 건 앞으로 시간 문제.

그때까지는 바르바제를 다시 고쳐서 정비하는 것만이 남았다. 바바리안은 거인화하여 다시금 날뛰기 시작했고 그건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땅을 씹어 삼키는 알두바드를 성공적으로 데몬시드화 하였습니다."

[땅을 씹어 삼키는 알두바드]

성장 기간: 665일.

그럼 최초의 궁금증을 해결할 때가 왔다.

군단장 후보를 심어도 트리가드로 변할까였다.

알두바드를 처치하고 잉걸불이 나온 이상, 결과는 예상되는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씨앗을 심을 때는 기대되는 법이지."

군단장의 씨앗은 대개 666일이라는 성장 기간을 가지고 있다.

알두바드 또한 그와 비슷한 665일이라는 기간으로, 그에 걸맞은 나무가 나오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얼추 맞았다.

모든 게 얼어붙은 새하얀 바르바제에 우뚝 솟은 나무가 자랐다.

거대한 나무는 금속의 성을 부정하듯 울창한 잎을 만들어내 바르바제의 은은한 빛을 만들어냈다.

어비스.

그 속의 추위와 쌓이는 잿가루를 막아줌과 동시에 잎에서는 은은한 빛을 만들어 주변을 밝혔다.

"따스하네."

이 어둡고 추운 지옥.

이곳을 떠나고 싶어 했던 알두바드는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됐다.

대신 이제는 바르바제를 비추고, 눈과 추위를 막아줄 기둥이 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거신병을 닮은 트리가드 또한 나타나 바르바제에 몸을 일으켰다.

"네 이름은 울티마다."

-울, 티마...

울티마의 거신병.

그가 죽기 전까지 바랐던 염원을 이젠 죽어서 이룰 것이다.

지옥의 바르바제를 영원토록 지키며 말이다.

"바르바제를 정화하였습니다."

"천상의 축복이 바르바제 일대에 이어집니다!"

"지옥을 정화한 영웅에게 천상의 보상이 주어집니다."

"바르바제를 공략한 전원, 천상의 깃털을 보상으로 받았습니다."

천상의 빛이 지옥에 닿았다.

무너져내린 바르바제에 말이다.

천상의 빛은 어두운 어비스를 비추고 혹한의 추위를 물러가게 했다.

앞으로 바르바제에서 활동할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구원이었다.

바르바제의 거신병 [3]

180화.

"데몬시드. 궁금한 게 있다."

"뭐지?"

"왜, 바르바제에 심었나. 지옥이 아닌, 한국에 심는 게 좋았을 텐데. 백두산 근처에 군단장 나무를 심었어도, 백두산은 상대적으로 동쪽에 있으니, 서쪽에도 심으면 좋았던 게..."

왜 지옥에 심었느냐.

순수한 의구심에 휩싸인 강철이 물었다.

바르바제에 알두바드를 심은 이유.

이유야 많다.

"우린 한동안 여길 지켜야 된다."

대장간의 우두머리인 알두바드는 말했다. 누군가에게 기술을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기술을 원한다고.

"사려던 걸 빼앗겼으니. 본래 주인이 한 번쯤 나타나겠지."

"본래 주인?"

"군단장, 또는 더 위의 존재일지도 모르지."

운이 좋았다.

아직 파르바움 제조 기술이 넘어가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알두바드는 아마도 최대한 아다만티를 만들어서 뽑아낸 다음, 기술을 팔려고 했던 것 같았다. 갈수록 미믹의 수가 적어졌다고 적혀 있었으니까.

알두바드는 그 나름대로 바르바제를 위해서 일한 것이다.

상황이 종료되고, 대장간을 조사하며 나온 놈의 일기에 의하면 복합적인 심정이 다소 적혀 있었다.

[서력 252년 2월 25일]

-그가 왔다. 위대하고 치졸하며 탐욕의 허기를 채우지 못하는 그가 우리의 기술을 가지고 싶어 했다. 그는 말했다. 우리의 금속이 신의 금속이라 불리는 아다만티움일지도 모른다고. 아다만티움? 우린 그게 뭔지 몰랐다. 처음엔 날 겁박하고, 내 아들들을 잡아 협박했으나 난 굴복하지 않았다. 내 핏줄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날 원망했지만 어쩌겠나... 모두를 위해서였다. 바르바제를 위해서. 우리가 나고 자란 이 성을 위해서였다. 우린, 울티마의 염원으로 하여금 다시금 승천해야 한다. 본래 우리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것을 위한 희생이었다.

난 틀리지 않았다.

[서력 308년 4월 12일]

-다시 그가 왔다. 지옥을 위한 일이라며 날 설득했으나 재차 거절했다. 그래봤자 어쩌겠나. 이 기술의 비법을 알고 있는 건 오직 나 뿐. 제아무리 대장간을 들락거려봤자 아다만티움 제조법을 그는 모른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밖에 모르니 제아무리 위대한 그라도 애가 탈 것이다. 난 그 어떤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으니... 이미 잃을 것도 없다. 자식들은 날 떠났다.

[서력 327년 6월 9일]

-제조법을 팔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본래 미믹은 썩어 넘칠 정도로 많은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너무 많은 미믹을 죽였을까? 이제는 미믹이 없다. 미믹이 없으면... 아다만티는 만들지 못한다. 어느 악마가 말하는 걸 들었다. 미믹의 시초가 되는 왕이 죽었다고. 그래서 미믹은 앞으로 사라질지도 모를 거라고. 예전엔 헛소리라 치부했지만, 지금은 정말일지도 모르겠다... 바르바제의 거신병을 더는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정녕 그에게 기술을 팔아야 연명할 수 있는 삶이란 말인가. 승천을 원하는 것이 이토록 괴롭다. 정녕 바르바제는 울티마가 못다 한 염원을 스스로 이루지 못할 존재들이란 말인가...

[서력 327년 7월 23일]

-지옥의 위대한 그가 왔다. 그는 내게 말했다. 미믹은 앞으로 보이지 않을 거라고. 누군가의 미믹의 왕을 죽였다고 말하며 자신도 일조했다고 고백했다. 제조법을 넘기지 않으면 미믹의 씨를 말리겠다 협박했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미믹이 없으면 나의 기술은 그저 쓰레기가 될 뿐... 난 선택해야 했다. 약조를 부탁했다. 바르바제의 거신병을 만들 거라고. 그는 약조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위대하며 치졸한 그이기에 난 믿었다.

그의 일기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미믹은 갈수록 사라지고 있었고, 군단장인지 뭔지도 미믹을 죽이고 있었다. 제조법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미믹이 없다면 써먹지 못할 기술이니 그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위대하고 치졸한 그...'

놈들이 말하는 승천이란 이 지옥에서, 인간이 사는 지상의 땅을 뜻했다.

춥고, 해가 없는 이 땅에서 사는 것을 그들은 원치 않았다는 듯이.

애초에 이 땅은 자신들의 땅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다.

아니, 어쩌면 지상이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그들도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 거로 보입니다. 그 이유를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군요. 조금 더 조사가 필요할 거 같습니다."

관찰자는 그들 또한 어비스가 태생이 아닌 존재라 했다.

그럼 어째서 여기 사는 것일까.

의아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설마 본래 천상의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럴 리 없었다.

그들은 악마였으니까.

그의 일기는 여기서 끝.

나머지는 거신병이 있었다면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거란 알두바드의 회한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여기 적혀 있는 바에 의하면 놈은 반드시 다시 찾아온다.

어느 군단장이라 적혀 있지는 않으나 군단장은 군단장.

대비를 해야 함이 옳다.

그리고 우린 여기서 아직 뽑아 먹을 다양한 정보와 전리품이 존재한다.

"네 이름은, 울티마다."

665일이라 조금 불안했지만 알두바드의 씨앗에서도 트리가드는 만들어졌다.

거신병 울티마.

"나무랑 축복 때문에 그래도 여기는 덜 추워서 사람들이 좋아하네요."

헬둠이 아니라서 괜찮을까 했는데 이 녀석도 그런 효과가 있었다.

만들자마자 동료들을 다치게 하지는 않을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다른 군단장과 달리 울티마는 조용했다.

관심이 없는 건지 머리가 좋은 건지 판단할 수 없었기에 처음엔 조심했다. 이내 악마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망치를 던져 죽이는 걸 보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거신병 울티마는 어비스에서 살아가며, 데몬트리를 지키고 바르바제를 지킬 것이다.

알두바드, 그가 원했던 것처럼.

물론 그가 그렸던 그림과는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바르바제엔 거신병이 존재할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열매도 맛있고."

녀석의 열매는 특이했다.

일단, 간단하게 말하자면 겉껍질이 아다만티처럼 되어있다.

물론 열매의 크기가 구슬 크기처럼 작았지만 아다만티는 아다만티.

이 녀석을 먹기 위해서는 최소 아다만티의 무기나 파르바움 무기가 없으면 먹을 수도 없었다.

힘겹게 껍질을 제거하면 안에는 뽀얀 속살이 나왔는데, 맛은 달고 떫은 것이 보리수 열매를 먹는 거 같았다.

물론, 효과는 제대로였다.

"땅을 씹어 삼키는 알두바드의 열매를 섭취하였습니다."

"울티마의 보리수로 이름을 변경합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철골이 2 상승합니다."

"마법 내성이 2% 상승합니다."

철골과 마법 내성이 상승했다.

특성상 마력이 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법 내성은 꽤 좋았고, 철골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강골이 철골로 변했고, 여기서 더 강화되면 뭐로 변할지 궁금했으니.

"협회장님. 와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생존자들 때문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바르바제의 대장장이들에게 피를 뽑히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처우에 대해서."

"러시아들은 알아서 했나?"

"예, 러시아 1위. 화이트가 러시아 네피림들과 인질들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어떡할까요? 그녀는 자신들이 생존자들을 러시아로 데려가 보호하고 싶다는 입장입니다."

"... 크게 상관은 없지."

물론 한 명은 빼고서다.

"봤나?"

"예. 그 부분 때문에 협회장님의 힘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인질들 중.

유독 눈에 띄는 자가 있다.

신체적 결손이 대단히 많았으나, 누가 봐도 천사임을 모를 수 없는 생존자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현재 치료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상처 입었던 터라..."

"내가 가보는 게 좋겠군."

웬만한 치료로는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은 천사.

하지만 내 신성력을 기반으로 한 힐링이라면 또 모른다.

그녀에게는 들어야 할 말과 사연이 많았으니까.

*

이름 모를 천사의 이름은 규리엘.

[상천사 규리엘]

악마의 고문인지 전투 중 사라진 것인지 팔과 다리가 전부 잘려져 나갔고 그대로 상처는 아문 지 오래.

대부분의 피부는 갈라지고 찢어져 고목처럼 변해 있었고 이빨과 혀를 비롯한 안구도 적출되어 있었다.

그저 살아있는 거 자체가 신기한 수준의 상태였다.

"화이트."

천사의 앞에는 화이트를 비롯한 러시아 네피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르바제의 건물을 기프트로 개조시켜 마련한 작은 회복실이다.

"음...? 아, 왔어?"

"상태는 어떻지?"

"대부분의 치료 약이 효과를 보이지 않고 있어. 시간을 들여야..."

"내가 해보지."

규리엘의 상태를 보니 굳이 듣지 않아도 알만하다.

데몬시드가 힐링을 사용하자 내 손길에서 황금빛 물결이 퍼져나갔다.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온기가 퍼져나가는 따스한 빛이었다.

"반응이 있습니다!"

곧장 반응이 왔다.

규리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까지 어떤 회복 스킬을 사용해도 아무 반응도 없던 규리엘이 처음으로 반응한 것이다.

신성력의 신비를 다시금 목격하게 된 순간이었다.

"역시 신성 스킬이 있어야 천사를 치료할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천사의 처우는..."

주변이 시끄러웠다.

데몬시드는 관찰자를 불렀다.

"관찰자. 사람을 물려라."

"알겠습니다. 모두 물러나 주시죠. 환자에게 좋지 않습니다."

"뭐요? 저 천사는 저희가 구해냈습니다. 당신이 뭔데 가라마라..."

당연하게도 러시아 네피림들이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나름의 권리 주장은 당연했다.

대장간에 인질로 잡혔던 러시아 네피림들이 천사 규리엘을 지상까지 탈출시켰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전투 중에 지반에 깔려 죽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에겐 아쉽게도 데몬시드의 알 바가 아니었다.

화이트의 얼굴을 봐서라도 인도적으로 처리할 생각이었으나 놈들의 태도를 보니 영 아니었다.

저들은 러시아의 1위. 화이트를 존중하는 모습도 보기 힘들었다.

"물러나도록 하지."

"화이트!!"

화이트는 관찰자와 날 한번 바라보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어차피 우린 천사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회복은 그에게 맡기는 게 맞아."

"하지만 화이트! 저 천사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어떤 천문학적 수준의 이득을 가져다줄지 모릅니다!"

"러시아를 위해서도 천사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천사를 구한 건 우립니다."

이에 화이트는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데몬시드와 한국군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구할 수도 없었다. 우린 그녀를 치료할 수도 없는데 고집부려서 되는 게 뭐가 있지?"

"하지만 소유권은 저희에게 있습니다. 저희가 목숨 걸고 구한걸, 당신은 저 아시아인에게 넘기려는 겁니까? 러시아의 피가 묻은 전리품입니다!!"

화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러시아에서 화이트의 위치와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 대략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화이트는 미안한 투로 물었다.

"데몬시드. 다시 찾아와도 되겠나."

"바르바제의 손님으로서 응대하지."

"... 알겠다."

바르바제는 명백한 한국의 것.

러시아는 손님으로서 초대하겠다는 데몬시드의 선포였다. 러시아인들은 얼굴을 구겼지만, 이곳에서 그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는 자는 없었다.

거신병과의 싸움에서 그가 보여준 일격이 어비스에 또 다른 구멍을 냈다는 걸 그들도 모르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화이트."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한마디씩 내뱉고 사라지는 러시아인들을 바라보던 데몬시드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누가 그냥 가도 된다고 했지?"

"...?"

"당신이 나가라고..."

데몬시드는 러시아에게 말했다.

"너희의 목숨 빚을, 난 아직 받지 못했다. 러시아는 도움을 받고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치졸한 국가였나."

"그게 무슨..."

"우릴 구한 건 당신이 아니라 러시아 1위. 화이트다!"

데몬시드는 화이트를 바라봤다.

"그렇게 생각하나?"

화이트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데몬시드의 말이 맞다. 나 혼자서는 해내지 못했을 일이야."

"그런..."

"하! 참나. 좋습니다. 러시아는 배상할 겁니다."

"뭘 원하는 거죠?"

데몬시드는 답했다.

"너희들이 바르바제에서 챙긴 미스릴과 지옥석. 그리고 금화. 모두를 내려놓고 가라."

"그런 날강도 같은..."

"싫으면 나한테 죽든가. 원래 거기서 죽을 목숨들 아니었나."

"크윽..."

"화이트! 이 부당한 처사를 당신은 보고만 있을 겁니까!"

하지만 화이트에게 말한다 한들, 상황이 바뀌는 건 없었다.

"말끝마다 화이트, 화이트. 너희들은 화이트의 의중은 대놓고 무시하면서 책임을 논할 때만 형편 좋게 그녀를 찾는군. 그게 러시아의 방식인가."

"말이 심하군..."

"너, 아까부터 까불던데 이름과 랭킹이 어떻게 되지?"

"라인, 랭킹은 5위다."

"그래. 그럼 너부터."

데몬시드는 손가락을 튕겼다.

튕겨낸 손가락에서는 붉은 번갯불이 날아들어 러시아 랭킹 5위, 라인을 날려버렸다.

콰아앙-!!

"끄아아악!"

보수한 회복실의 벽면과 함께 날려 보내진 라인과 러시아 네피림들이 전류에 감전되어 몸을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이지 못했다.

뇌전이 가지는 마비 증세였다.

'더럽게 약하네.'

데몬시드로서는 최소한의 힘으로 죽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날린 것.

하지만 저들에겐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졌다.

"데몬시드. 그 정도로 하지."

화이트가 나서니 짐짓 놀랐던 데몬시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화이트의 얼굴을 봐서, 이만하도록 하지. 하지만 너희들이 바르바제에서 얻은 것들은 모두 내놓고 가라. 그게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을 테니."

화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깨달았다.

데몬시드가 갑자기 저런 것은 자신을 위해서라는 걸.

러시아 랭커들을 때려눕히고 분위기를 일부러 험악하게 만들어 화이트가 참견할 구석을 만들었다.

화이트를 위해서였다.

'눈치챘겠지.'

러시아에서 가지고 있는 자신의 입지가 그렇게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일부러 저런 것이다.

사내다운 강압적인 리더십.

그건 과거, 자신의 오빠였던 가면소드 또한 그러했음을 떠올리게 했다.

'나도, 저렇게...'

화이트는 두 눈을 꾸욱 감았다가 다시금 떴다.

"다음에 보도록 하지. 이번엔, 정말 고마웠어. 여러모로."

데몬시드는 어중이떠중이들을 내려다보다 화이트에게 말했다.

"러시아는 모르겠지만, 화이트 너는 내 전우다."

"하하, 오빠가 널 왜 좋아했는지 알 거 같은 기분이야. 세심하단 말이지. 배려심도 깊고. 강단도 있어."

싱긋 미소 짓은 화이트는 말했다.

"고마워. 나, 간다!"

화이트는 그렇게 바르바제를 떠났다. 마지막으로 웃음 지었을 때.

화이트는 가면소드와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매가 맞군."

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천사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 전념했다.

탐욕의 군주

181화.

알두바드가 죽은 후로 사흘.

바르바제는 여전히 분주했다.

"자자! 여기 빨리!!"

"여기 뭔가 있는데? 도움!!"

워낙 치열한 전투였던 터라 바르바제의 대부분이 파손된 상태.

굳건한 성벽도 성문도 부서지거나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그것들을 재건시키는 일은 초인에 가까운 네피림이라도 꽤 시일이 걸리는 일이었다.

바르바제의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와 지하까지.

반파된 시설물들을 다시금 만들고 복구하는 작업은 앞으로도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할 일이었다.

물론, 바르바제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까앙-! 깡!!

복구 작업 사흘.

벌써 지하에서는 곡괭이 소리가 연신 들리기 시작했다.

"미스릴 매장량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감히 예상하기는 어렵지만 수십 톤은 되어 보이더군요."

"이미 가지고 있는 미스릴 양도 어마어마해. 가치로 따지면 금화 수백만 금? 아니 수천만 금일지도 몰라!"

정제된 지옥석과 미스릴.

그리고 지상에서는 손쉽게 볼 수 없는 다양한 금속들이 즐비했다.

물론 러시아 놈들이 뱉은 것들까지 다 합치면 천문학적인 수준.

"스미스. 준비는 잘 되어 가나."

"물론이오!"

난 그에게 파르바움 광석을 건넸다.

주먹만 한 크기 3개와 시해의 단창이었다.

지난 사흘.

난 그동안 대장간과 알두바드의 거처를 샅샅이 뒤져 긁어모을 수 있는 재료란 재료는 모두 긁어모았다.

파르바움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제된 지옥석과 미스릴, 그리고 악몽의 파편과 잉걸불, 우르펄과 아다만티가 필요하다. 다른 건 다 구할 수 있다고 해도, 악몽의 파편은 아니었다.

'천사의 피는 아무래도 힘들지.'

리안이라고 했던 바르바제의 학자.

놈의 방에서 찾아낸 조합식에서 악몽의 파편을 만들 조합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들어가는 재료가 심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덕분에 지금 만들 수 있는 파르바움 광석은 3개가 전부.

그마저도 바르바제에 남아 있던 재료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만들 재료야 대강 있지만, 재료만 있다고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악몽의 파편은 돌과 비슷하다.

네피림과 악마, 천사의 피를 조합식에 적힌 재료들과 함께 섞어 돌로 굳혀야 하는데, 연금술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있어야 성공 확률이 높았다. 나는 물론이고, 관찰자도 그런 지식은 없었기에 파르바움을 양산하는 일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그래도 3개 정도면 단창이 장창이 될 수 있겠지?"

"어렵지 않소!"

이전보다 자신감이 가득 차 있는 스미스를 보니 웃음이 절로 났다.

"저번처럼 망치로 한번 때리면 만들어지는 거 아닙니까."

"그건 다소 정밀도가 떨어지지. 제대로 만들고자 한다면 역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게 제일이오. 이른바 디테일이란 것이지."

"역시 그런가...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스미스한테 맡기면 될 일.

바르바제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전부 얻은 셈이었다. 시해의 단창이 장창이 된다면 투창하기도 편하니, 내 최고의 창이 되어줄 것이다.

'강화도 될 테니까.'

스미스는 헤일로를 얻었다.

헤일로를 얻은 스미스는 각종 대장 기술의 버프를 얻고, 광물의 지배를 바탕으로 손쉽게 불순물을 제거함과 동시에 조형을 이룬다.

거기에 이제까지 아쉬웠던 부분인, 강화 불가 속성도 없어지니 스미스의 활약은 귀추가 주목됐다.

강화까지 되는 스미스의 무기.

이건 참을 수 없었다.

'시해의 창은 시간이 걸릴 거고.'

어차피 한동안은 상관없다.

큰 위기는 넘긴 상태.

악몽의 파편도 관찰자가 연금술사를 알아보기 전까지는 파르바움을 더 만들어낼 수도 없으니 고착됐다.

브란스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런 불경한 걸 왜 만드냐며 잔소리를 들었는데 그래서 만들 수 있냐 없냐 했더니 없다고 해서 시간이 걸릴 거 같다.

지옥석이나 미스릴 생산은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할거고, 그것들은 협회의 재산이 되어 활약 중인 네피림들에게 우선적으로 지원될 것이다.

"의외라면 미믹인가."

미믹들을 이끌던 리덤.

그놈은 난장판 속에 떠난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떠나지 않았다.

-어딜 가도 우린 죽습니다! 그러니 당신과 공생하겠습니다! 우릴 받아주십시오! 왕이시여!!

미믹으로 변했던 날 제대로 기억하는 모양인지, 날 왕이라며 공생하자고 청해왔다.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미믹이 만들어낼 블랙펄은 있어서 나쁠 게 없으니까.'

아무리 스미스가 있다고 해도 그 혼자서 이 많은 광물을 소화해낼 수는 없다. 협회 소속에도 대장장이 스킬을 가진 비전투직군은 꽤 된다.

관찰자는 전투직의 네피림도 꽤 많이 포섭했지만 비전투직 네피림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대장장이를 직업으로 가진 자들도 꽤 있었는데, 그들을 대거 불러 바르바제에 놓고 미스릴 단조를 맡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아니지만, 그들에게 블랙펄은 미스릴을 단조 시킬 유일한 재료이니 미믹의 존재가 필요하긴 했다.

"챔피언 미믹들은 전부 죽어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우르펄은 내가 만들면 그만이니까."

물론 재료가 부족하기는 하다.

다른 건 몰라도 천사의 피.

그건 꽤 희소한 물건이니 말이다.

"천사라..."

지난 사흘.

난 꽤 오랜 시간을 천사의 회복에 전념했다. 대부분의 신성을 사용했고, 전부 소모되면 다시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힐링을 썼다.

그렇게 천사. 규리엘은 깨어나자마자 그런 말을 했다.

"그들은 시작부터 정해진 것을 부정하는 부정한 존재들이었다."

혀가 잘려 어눌한 발음이었으나 통역 시스템으로 대강의 뜻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와서는 기억도 나지 않을 자신의 처지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젠 우리가 하늘에 서겠다. 너희가 이제는 땅 아래에 존재하라.

그렇게 전쟁이 시작됐다.

천상에 오르려는 지옥의 악마와 이를 막는 천사들의 전쟁을 말이다.

"이 세상은 아홉의 하늘. 아홉의 땅, 아홉의 지옥이 있다."

이를 통틀어 구천이라 한다.

처음 만난 팔다리가 잘린 천사는 날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말이다.

데몬시드는 뭔가를 묻기보다 말하고 싶은 걸 말하라며 부추겼다.

"더 말해."

규리엘은 말을 이었다.

"그들은 차례차례 정복했다. 첫 번째 하늘, 두 번째 땅. 이내 여덟 번째 하늘까지 모조리 점령했지. 나는 여섯 번째 하늘을 지키던 상천사였다."

패잔병. 그녀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패잔병이었다.

그러다 잡혔고, 팔다리가 잘린 채, 종국에는 피를 뽑히기 위한 재료로서 지금까지 연명한 자였다.

"수많은 천사가 죽었다. 나 또한 하늘에서 떨어졌다. 날 살린 건 인간이었다. 인간에게 도움받았지. 하지만 그들은 곧 날 팔았다."

"그랬군."

"걱정 마라.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아."

눈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규리엘은 데몬시드를 보는 듯 고개를 돌렸다.

"처음엔 날개였다. 그들은 내 날개깃을 뽑았다. 그러다 못내 잘라냈다."

다음엔 다리였다.

"날개를 잘라냈음에도 내가 달아날 것을 우려해 다리를 잘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지옥에선 해가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빛이 없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을 뿐. 존재함을 이미 아니까.

하지만 마지막 눈을 잃고 팔까지 잘렸을 때.

그녀는 희망을 잃었다.

"평생을 존재하던 날개와 팔다리가 잘리자 하늘 위의 천사라도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애초에 위대한 그분들과 달리, 우리의 태생은 인간과 섞여 있으니 그럴만하지."

"그런가."

"놀라지 않는군."

"이미 한번 봤으니까."

대천사의 진짜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이해가 쉬웠다.

태초의 천사들은 땅 위의 인간이나 짐승을 애완동물 다루듯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했다 하였으니까.

상천사라 말하는 규리엘은 아마 천사와 인간의 혼혈인 모양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대는 위대한 전사로군. 이미 대천사님들을 마주할 정도로."

규리엘은 고름 섞인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나의 고통도 끝이라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홀가분하다."

"살고 싶은 생각이 없나 보군."

왜 이렇게 말을 쏟아내나 했더니 그녀는 더 살아갈 의지가 없는 자였다.

고통의 연쇄를 끊어준 데몬시드에게 약간의 호의를 담아 이야기했을 뿐이라 생각됐다.

"지옥으로 더럽혀진 내가 어떻게 다시 천상으로 올라갈까. 그저 드디어 끝난 고통의 종식을 바랄 뿐..."

죽고 싶다는 말이었다.

팔다리나 날개가 잘려 재생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

살아도 제 손으로 식사도 할 수 없는 신체를 가졌으니 죽고자 하는 것도 이해한다.

최소 수십 년을 악마들의 손아귀에서 노리개처럼 굴려지다 종국에는 재료로서 취급되지 않았나.

이제라도 죽음을 바랄 수 있게 되었으니 죽음이 그녀의 구원인 셈.

데몬시드는 그녀의 구원을 앗아갈 자격도, 이유도 없었다. 죽고 싶어 하는 자를 살려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더군다나 이제 막 처음 마주한 천사라면 더더욱 말이다.

죽음을 원한 천사다.

그것이 구원으로 변질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겠지.

데몬시드는 규리엘에게 더 살아보라 말할 이유도 자격도 없었다.

"한가지 질문이 있다."

"무엇이든."

"이곳을 찾아온 군단장이 있나."

알두바드는 말했다.

이곳을 찾아온 놈이 있다고.

그는 그에게 제조법을 팔려고 했다.

놈은 위대한 지옥의 주인이며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찾아온 위대하며 가장 치졸한 자라 하였다.

이곳으로 곧 찾아올지도 모르겠지만, 우선은 놈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아니면 넘버라도.

"..."

규리엘은 답하지 않았다.

극심한 두려움과 동시에 분노를 눈빛에 담아낼 뿐.

덜덜덜. 그녀가 누워있는 침상의 테이블에 놓인 찻잔이 떨렸다. 한참을 그녀는 두려움과 분노에 떨었다.

그리고 힘겹게 말했다.

"지옥의 위대한 군주 중 하나. 그러나 동시에 가장 추악하다 일컬어지는 대악마... 그는 여덟 번째 지옥의 수장이자, 여덟째 지옥의 주인이다."

여덟 번째 지옥의 군주?

"네피림이여. 절대로, 지옥에서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라.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럼 뭐라 부르지."

메마른 입술로 그녀는 간신히 답했다.

씨익.

규리엘은 미소 지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지. 날 구원해준 은혜다."

그때였다.

돌연 규리엘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그는 추악한 탐욕이다."

"갑자기 왜..."

"관찰자!"

"모르겠습니다! 관찰되지 않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데몬시드는 온갖 방어 스킬을 적용시켰다. 규리엘은 여전히 공중에 떠오른 채 경고하고 있었다.

"절대! 절대!! 그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아홉 지옥의 주인을 떠올리지 말라! 생각하지 말라! 그들은 닭의 목을 비틀듯 너희를 비틀 것이야! 그의 이름은 오늘 이후로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라!! 그의!! 그의 이름은...!!"

우드득!! 털썩!

"마몬, 이다..."

스윽.

규리엘의 목이 비틀어져 떨어졌다.

"죽었습니다..."

"방금 그건 뭐지?"

"갑자기 왜..."

고작 이름을 말한 것.

그것만으로 천상의 존재가 죽었다.

'마몬.'

데몬시드가 아무리 군단장을 죽이고 지옥을 정화해도, 불온함의 발걸음은 착실하게 인류를 위협하고 있었다.

악몽의 파편 [1]

182화.

푸른 잔불이 남아 있는 촛대 위.

넘실거리는 촛불 속에 비추는 것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인물과 손가락이 세워진 체스판이 있었다.

잘린 채로 체스판 위에 세워진 손가락에서는 여전히 핏물이 그득했으나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존재는 심드렁할 뿐이었다.

그때, 체스판 위의 손가락 중 하나가 절로 구부러졌는데 그러자 근처에 있던 다른 손가락들이 입을 벌려 놈을 씹어 삼켰다. 그제야 옥좌에 앉은 자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땅을 씹어 삼키는 알두바드! 탐욕의 지식에 매료된 자여, 하나 그 지식에 목매다가 허망하게 가버린 어리석은 괴물아. 아아! 가여워라! 아아! 어리석어라!! 아아! 추악해라... 큭!"

쿵! 쿵! 쿵!

참을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린 그는 만찬으로 가득한 테이블을 주먹으로 쿵쿵 때렸다.

체스판 위의 손가락들.

이는 군단장 후보들이었다.

한참을 아쉬워하고 끅끅 웃음을 참던 탐욕의 뒤를, 또각. 또각.

한 여인이 다가왔다.

"군단장 후보 하나가 죽은 거치고는 너무 기뻐하는구나. 탐욕."

"울티마의 자식이니까."

울티마의 자식.

이에 여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울티마...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야. 갑자기 흥겨워졌어."

"그만큼, 우릴 즐겁게 해주던 존재도 없었지. 울티마... 그리운 이름이지 않은가. 릴리스."

푹!!

릴리스라 불린 여인의 손이 탐욕의 목을 찔렀다.

푸화확!!

검은 핏물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이내 핏물은 멈추고 찢긴 목에서 금화가 샘솟자 언제 그랬냐는 듯 탐욕의 목이 다시금 붙었다.

"네 추악한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시간이 언제가 지나도, 고뇌의 손길은 짜릿하군. 가지고 싶을 만큼. 이 손 한 짝만 내게 준다면, 네가 그토록 바라는..."

탐욕은 고뇌의 손등에 키스했다.

"순결을 내가 안겨다 주지."

고뇌는 주먹을 쥐어 탐욕의 머리통을 터트렸다.

퍽!!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난자했으나 터진 머리통의 입은 연신 광소를 뱉어내고 있었다.

"캬하하하하하하!"

유쾌한 듯 웃는 탐욕.

미간을 찌푸린 고뇌는 팔짱을 꼈다.

"그래서, 울티마의 자식은?"

박살 난 머리통이 다시금 수복된 탐욕이 말했다.

"승천을 목전에 두고도 자존심에 목메다 죽어버렸지. 울티마와 같은 절차를 밟으며 죽더군. 아니, 오히려 그의 자식다웠다. 어리석어. 그러나 고결하지."

"피는 속이지 못하는가."

"피라... 흥미로운 단어로군. 짐승과 섞여도 천상의 와인은 역시나 승천을 원한다... 감미로워. 아아주!"

탐욕은 품에서 금화를 꺼내 와인잔에 한가득 담고는 차오른 붉은 와인을 감미롭다는 듯 마셨다.

"탐욕."

"알고 있다. '그놈' 때문이겠지. 엉덩이 무거운 고뇌께서 친히 탐욕이 차린 만마전을 찾아온 것은."

"감상은?"

씨익.

마몬의 황금 이빨이 반짝였다.

"만마전과 바꿔도 좋을 만큼."

"그 정도인가."

쿵!

탐욕은 발작적으로 옥좌에서 일어나 와인잔에 가득 담긴 금화를 입안에 털어 넣어 음미했다.

"으음! 으으으으음!!"

"지랄 말고 빨리 말해라."

"키하하하하하하!!"

미친 듯 웃던 탐욕인 이내 웃음을 뚝 끊어버리곤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공포가 될 거다. 우리가 원하는 공포가."

이에 고뇌의 매혹적인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

규리엘이 죽고 난 뒤.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마몬이라는 악마의 유래나 정보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네피림 중에서 일곱 번째 지옥의 군주를 아는 자는 없었지만, 성경에 적힌 마몬은 알고 있었다.

"탐욕의 악마요? 알고 있죠. 성경에 나와 있는 악마잖아요. 성경에서는 재물을 그와 동일시하니까요."

탐욕의 악마.

추악한 탐욕 마몬(mammon).

하지만 아쉽게도 이렇다 할 정보를 찾아내기란 어려웠다.

알두바드의 일기장에 쓰여진 대로,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추악하다는 말이 붙을 정도로 유쾌한 성격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마몬...'

그리고 아홉 군주.

이번 원정에서 얻은 악마들의 정보는 고작 그것뿐.

"후우."

마른세수를 하자 레아가 다가와 과일을 건넸다.

이쁘게 깎아 놓은 악과들이었다.

"며칠 만에 집에 들어와서 저는 쳐다도 안 보고... 무슨 일 있었어요?"

"... 아니. 별일 없었어."

놈이 바르바제로 직접 행차한다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사료된다.

바르바제엔 이제 천상의 축복이 닿고 있었으니까.

지상에 올라와 천상의 계단으로 유리엘에게 확인받은 부분이었다.

'군주는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켜야 할 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절대로, 그들의 진명을 부르지 마십시오. 절대.'

유리엘에게 규리엘이란 천사를 아느냐 했더니 그는 슬픈 눈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뭔가 슬퍼 보이는 눈이라 거기서 더 자세히 물어볼 수 없었다.

마몬에 대한 것도, 유리엘은 알려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죄송합니다.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당신의 적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유리엘과의 대화는 그걸로 끝.

"이번엔 저 버리고 가셨으니까. 다음엔 저도 데리고 가셔야 해요."

"아, 응. 별일 없었지?"

"네, 저쪽 섬들이 조금 시끄러웠던 거 빼면 별일 없었죠."

"저쪽? 아..."

불별도의 서쪽과 남쪽에 위치한 푸르와 라피.

푸르푸르와 라피에르를 심은 트리가드들이 있는 섬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확인은 해야겠네."

며칠 지나기도 했고, 트리가드들은 자신의 엘더트리 근처를 배회하는 악마들을 사냥하며 나무의 양분으로 삼고는 한다.

제물을 더 넣지 않아도 자동 성장 시스템이라 주기적으로 한 번씩 방문하는 게 좋다.

열매도 열매이고, 트리가드의 레벨 성장을 보는 맛도 있으니까.

"다녀올게."

"저도 같이 가요!"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을 텐데."

"요새 맨날 저 놓고 다니시잖아요. 이런 거라도 같이 가고 싶은걸요."

"그랬나."

"그랬다니까요? 무신경해!"

"별로 재미없을 텐데."

"재미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함께 하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그래, 그럼."

레아의 손을 잡고 포탈 스크롤을 찢어 우선 푸르에게 향했다.

언제봐도 울창한 나무.

열매는 며칠 전과 비교해서 그렇게 많지 않다.

혹시 모를 위험이 있을까 봐 열매를 전부 수거하지 않았는데, 그때랑 비교해서 한 개 정도가 생긴 정도였다.

"인사도 안 하냐."

-...

푸르는 푸른 사슴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살짝 핥았다.

그러고는 다시 나무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기하네요..."

"그렇지?"

어차피 푸르와 놀려고 온 건 아니라서 엘더트리만 확인했다.

[푸르푸르의 엘더트리]

『보유』

완숙-2 미숙-12

트리가드(푸르)-Lv. 2

상태창을 보니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레벨이 상승한 걸 보면 근처의 뭣 모르는 악마들한테 벼락을 때려 먹인 거 같았다.

"별일 없었지?"

나무 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매를 노린 짐승들이 있었어.

"사람은 없었지?"

-인간은 없었어. 모두 죽였어.

"그래 잘했다. 지금처럼만 해."

그다음은 라피에르.

저장해놓은 포탈 스크롤을 찢어 들어가니 푸르가 있던 곳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우릴 반겼다.

새의 깃털을 닮은 나뭇잎의 다채로운 색깔이 인상적인 엘더트리다.

하지만 회오리치는 소용돌이가 섬 사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냥 중이네."

라피는 섬 주위에 배회하는 해양 악마들과 와이번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딱 보니까 놀면서 싸우고 있어 보여서 내버려 뒀다.

푸르와 달리 라피는 딱히 말을 할 줄도 모르니 상태창을 보는 게 상황 파악에 빠르다.

[라피에르의 엘더트리]

『보유』

완숙-5 미숙-15

트리가드(라피)-Lv. 2

라피도 푸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섬이다 보니 마주하는 악마들이 몇 없기 때문인 걸로 보였다.

그래도 라피가 있는 섬에는 악마들이 꽤 많은지 완숙된 열매가 푸르가 있는 곳보다는 많았다.

다섯 개 중 두 개를 따서 레아와 나눠 먹었다.

라피의 열매는 마력을 올려주는 편이라 앞으로도 기대가 많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마력이 2 상승합니다."

"마력이 올랐어요!"

"응. 바빠 보이니까 다음으로 가자."

다음 포탈 스크롤을 찢었다.

당장 보이는 건 짙게 깔린 운무.

물론 독 운무였다.

"자리 비웠나 보네."

푸르와는 달리, 라피나 바리는 원거리 공격이 안되는 녀석들이다 보니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은 모양이다.

운무가 깔려 있으니 웬만한 악마나 사람은 접근도 못 할 테지만 그래도 조금 불안한 감이 없지는 않다.

[바릿느의 엘더트리]

『보유』

완숙-31 미숙-26

트리가드(바리)-Lv. 4

"오... 벌써 레벨이 4네."

"푸르랑 라피는 2였죠? 꽤 높네요?"

"역시 백두산이라 그런가 봐."

악마도 악마지만.

중국인들이 그만큼 정신 못 차리고 넘어온다는 소리겠지.

어쩌면 이제는 슬슬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겠다. 바리를 쓰러뜨리면 꽤 진귀한 보물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독, 괜찮아?"

"예, 저도 독은 괜찮아요."

피에 관련된 기프트 중에 독의 해주에 관한 스킬이 있어서 그런지 레아도 독은 상관없었다.

"열매 좀 따가볼까."

바리의 열매는 모든 능력치를 0.5씩 올려주는 뛰어난 효과를 지녔다.

잘 익은 완숙 열매가 서른하나가 있으니 3개 정도만 남기고 수거해가면 될 거 같다.

몇 개는 그 자리에서 먹고 인벤토리에 넣자 기척을 느꼈는지 곧장 바리가 날아왔다.

검녹색의 독무로 자신을 용으로 만든 바리가 천둥같이 울부짖으며 쇄도했다. 아마도 열매 때문인 듯했다.

'확실히.'

이전에 봤을 때보다 레벨이 올라서 그런지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전보다 크기도 2배 정도는 더 커졌는데 독의 수준도 더 높아졌다.

트리가드의 레벨이란 게 생각보다 더 이들의 능력을 높여주는 모양.

'나쁘지 않네.'

아가리를 벌린 채, 부딪치기 직전.

바리는 멈춰 섰다. 그리고는 독무는 씻은 듯 사라지고 그 안에서 작은 구렁이가 나타나 내 팔에 휘감겼다.

-샤아~

다른 트리가드들과 달리 꽤 애교가 많은 녀석이다.

"어머, 귀여워라."

팔에 휘감겨 애교부리는 바리를 보자 레아가 귀여워했다.

한번 쓰다듬어주려 했지만.

-샤아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레아를 위협했다.

"스읍, 안돼."

대가리를 한대 툭, 때리자 아프다는 듯 내 겨드랑이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프진 않을 텐데, 생각보다 감성적인 녀석이었다.

"바리. 전투 중이었니."

-샤아~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숫자가 꽤 많았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니 바리의 몸 곳곳에 꽤 많은 상처들이 즐비했다. 열매 하나를 따 바리에게 먹이니 금세 치료됐지만 상황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트리가드 바리가 당신에게 기억을 공유합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이런 것도 되나.'

수락하자 바리가 바로 전의 전투를 영상으로 보여줬다.

꽤 많은 숫자의 중국인들이었다.

'일만 정도인가.'

냄새를 맡은 건지, 아니면 바리한테 당한 게 있어서인지 꽤 많은 놈들이 몰려들었다.

대부분은 바리의 독이나 거체에 쓸려나갔지만, 독에 대비한 노련한 자들은 꾸준하게 피해를 입혔다.

제대로 공략을 준비한 공격대였다.

바리는 죽어도 열매만 있다면 금세 부활할 수 있기는 하지만, 기분이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강철 말이 맞았네."

백두산의 국경 근처에 트리가드 한 마리 더 놓아야 할 거 같다.

물론 저놈들은 쓸어버리고 말이다.

딱히 정체를 드러낼 필요도 없다.

귀찮은 일은 사양이니까.

헬둠 투구를 쓰고 판포비아의 패시브를 활성화했다.

"판포비아를 활성화합니다."

"격이 낮은 상대는 당신을 두려워하며 공포에 질립니다."

"공포에 질린 상대는 확률적으로 환각을 보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며 최악의 경우 사망합니다."

"바리, 가자."

-샤아!

독무로 제 몸을 부풀리는 바리의 머리 위에 탑승하면 이걸로 끝.

독무 때문에 내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테고, 판포비아의 패시브 때문에 웬만한 놈들은 공포에 질려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다.

그냥 타고 있는 거 자체로 말이다.

"레아는 잠시 있어."

"아, 네, 네넵..."

판포비아를 활성화해서인지 레아도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후웅.

바리를 탈고 날아가자 이쪽으로 이동 중인 중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백두산을 타면서 바리를 쫓아온 모양인데, 어림없다.

"가자."

-!!

바리의 울부짖음과 동시에 중국인들이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판포비아의 패시브가 활성화되자 대부분이 겁에 질려 쓰러지거나 게거품을 물었다.

"리더는 저놈인가."

눈에 띄는 놈이 있다.

이 상황에서도 공포를 밀어내며 동료들을 다독이는 녀석이다.

십만 중국 공격대의 리더.

'랭커겠지.'

미룡이 있었다면 대화를 했겠지만.

미룡을 제외한 중국인은 안타깝게도 나와 대화할 자격이 없다.

"먹어 치워."

어차피 이놈들을 내가 죽인다고 해도 별 이득은 없다.

바리의 밥이 되어 열매의 양분이 되는 게 차라리 더 낫다면 낫다.

겁에 질려 도망가는 놈들을 먹어 치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근데, 저건 또 뭐야."

와해되는 대열.

그중에서도 공포에 질려 달아나는 놈들 중.

이상한 놈들이 몇 있다.

"이, 이 정도라곤 안 했잖아 젠장!"

피막이 있는 날개. 머리 위에 돋아난 뿔을 동시에 꺼낸 놈들이 날개를 꺼내 도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검게 변한 혈관과 눈.

난, 저런 놈을 이전에 본 적 있다.

"악마 숭배자."

"긴급 퀘스트!"

-악마 숭배자를 처치하여 그가 가진 악몽의 파편을 파괴하십시오.

보상-보물지도.

예전처럼 긴급 퀘스트도 떴다.

옛날엔 이 퀘스트로 미믹이 즐비한 보물 방에 들어갔었다.

하지만 이번엔 보상보다 악몽의 파편 그 자체에 눈길이 쏠렸다.

"파르바움. 만들 수 있겠네."

파르바움을 만들기 힘든 이유가 악몽의 파편이 없어서였는데 횡재한 셈.

중국이 내전으로 난리라더니 그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수가 이렇게 많으면 악몽의 파편을 뿌리는 놈을 만날 수도 있겠어.'

다음 여정이 정해졌다.

중국의 악몽을 뿌리 뽑아야겠다.

악몽의 파편 [2]

183화.

악마 숭배자는 여러 국가에서도 참 골치 아픈 족속들이다.

안 그래도 번식력 높은 악마들.

한 번씩 싸움을 거는 카오스 게이트와 군단장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악마 숭배자들은 벽지 모퉁이에 슬어가는 곰팡이처럼 자꾸만 증식한다.

전 세계적으로 악마 숭배자들은 배척당하지만 그럼에도 어둠의 그늘에 숨어 자신의 세력을 구축한다.

저기 목숨이 경각에 달하니 이제 와 본성을 드러내는 악마 숭배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중국 공대에 속해 있는 인원은 일 만에 가까운 수.

이만한 인원에 포함된 악마 숭배자가 얼추 봐도 일천이 넘어간다.

중국이 얼마나 많이 썩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가만히 놔둬도 바리가 다 죽일 판.

내가 목표로 삼은 것은, 그나마 악마 숭배자들 중 강해 보이는 놈.

판단은 간단하다.

"제일 빨리 도망가는 놈."

빠른 놈 몇을 잡아 오면 될 일.

중국인은 포탈 스크롤도 찢지 못했다.

여긴 명백한 한국의 땅.

중국으로의 포탈은 열리지 않는다.

"대충, 일천 정도인가."

솔직히 그냥 중국인이었다면 웬만해선 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악마 숭배자들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악마 숭배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류의 적이기에 즉결 처형의 권리는 인간에게 있다.

국적이 다르다 하더라도 그건 크게 다르지 않고 이곳은 명백하게 한국의 땅. 권한은 내게 있다.

"헤일로를 활성화합니다."

"신의 사자 『1급』이 발동됩니다."

"모든 능력치와 회복력, 속성내성이 300% 상승합니다."

이번에 얻은 잉걸불로 신의 사자를 1급으로 만든 지 오래.

비록 잉걸불이 서른 개나 필요했지만, 후회는 없다. 250%였던 능력치 상승 폭은 이번에 300%로 올라갔으니까.

"벨로나의 굴레가 소환됩니다."

"성역이 활성화됩니다!"

"컥!"

덕분에 아쉽게도 벨로나의 굴레 급수는 3급으로 멈춰 있지만 괜찮다.

벨로나는 지금도 강하니까.

강철로 뒤덮인 벨로나의 가시덩굴은 내 의도에 알맞게 놈들을 잡았다.

가시덩굴에 잡힌 악마 숭배자는 총 열일곱.

도망가는 놈들은 그냥 내버려 뒀다.

가만 놔둬도 바리가 알아서 할 테니.

"우리에게 왜 이러는 거요!"

"우린 사람이야! 너도 우리랑 같은 인간이잖아!!"

"너넨 인간 아니잖아."

후웅. 푹! 플라이로 떠올라 검은 혈관이 도드라진 악마 숭배자의 심장을 뽑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쥐어뜯었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저번에 봤는데, 여기 있더라고."

"훼손된 악몽의 파편을 획득하였습니다."

악몽의 파편.

손쉽게 얻기는 했지만 예상했던 바라고 해야 할까.

훼손된 악몽의 파편을 얻었다.

"미, 미친놈이다!!"

"악마다! 악마야아아!!"

"아니, 악마는 너희잖아요."

[훼손된 악몽의 파편]

-훼손된 악마 숭배자의 증표.

이미 악몽에 담긴 힘은 훼손되어 파르바움을 만들 재료로서의 가치는 없어진 상태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몇 개 챙겼다.

퍽, 푹, 푹, 퍽!

"악마다! 저분이 진짜 악마다!!"

"아니, 악마 아니라고... 머리 위에 헤일로 안 보여? 엄밀히 말하자면 천사에 한없이 가까운... 됐다."

이놈들이랑 말을 섞어 봤자지.

잡은 열일곱 중, 열 놈에게서 훼손된 악몽의 파편을 수거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을 바라봤다.

지금부터는 꽤 신중해야 했다.

"악몽의 파편. 이거 어디서 놨냐."

누가 만들어주든 어떤 루트를 통해서 얻었든 알아내야 했다.

내가 만들긴 어렵고, 누가 만드는 걸 뺏는 게 제일 쉬운 방법이니까.

"우리의 위대하신 그분이 내린 은총이다. 데몬시드. 너도 은총을 받고 싶은 건가? 한국의 랭킹 1위도 우리와 형제가 되고 싶은가 보지?"

돌려 까려고 하는지 이죽거리며 비아냥거린다.

하지만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나한테 그런 값싼 도발은 안 통한다.

"프리즌 블러드가 발동합니다."

"당신의 피가 얼어붙습니다. 흥분이 가라앉습니다."

"어, 되고 싶다. 이거 누가 줬어? 어떻게 얻으면 되지? 악마한테 머리라도 잠깐 숙이면 되는 건가?"

"....."

"말, 하라고. 나도 악마 숭배자 한번 해볼게."

툭툭, 뺨을 때리니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꾹 다문다.

"예전에도 너처럼 이렇게 입을 꾹 다문 놈이 있었지."

이름이 뭐랬더라.

까먹었다.

붉은 성수의 회복 능력을 증명시켜준 고마운 녀석이었는데 꽤 오래돼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도 악마숭배 하고 싶다니까?"

"저, 정말이십니까?"

"정말이지 그럼."

그래도 바보는 아니라 그런가.

악마숭배를 하고 싶다고 해도 영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작전을 바꾼다.

"말하는 놈만 살려준다. 나 데몬시드. 한 입으로 두말 안 한다. 잘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녀석들은 입을 다물었다.

눈알만 굴리고 있는 걸 보면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 악몽의 파편 어디서 얻었냐."

"..."

푹.

"훼손된 악몽의 파편을 획득하였습니다."

"다음. 어디서 얻었어."

"저, 저는 웨이한테 받았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웨이가 누군데."

"저, 저기 있는 놈입니다!"

"이 비겁한 놈!"

"나, 나는 별로 악마 숭배자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았다고! 네가 강해지고 싶다면서 날 꼬드겼잖아!!"

훌륭하다.

분명 자기가 선택한 삶이면서도 남 탓을 아주 유창하게 한다.

재능이 있다.

변절자의 재능이 아주 탁월하다.

"너, 이름은?"

"타, 타오입니다."

"좋아. 타오. 난 내게 도움이 되는 녀석은 극진히 대하는 편이다. 네가 웨이보다 나한테 더 도움이 되나?"

"무, 물론입니다! 웨이가 알고 있는 것들 대부분은 저도 압니다! 모, 모두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헛소리! 말단 주제에 네가 뭘 안다고 그딴 소릴 짓거리는 거냐!"

"너라고 해 봤자 하는 짓거린 애들 납치해서 숭배자로 만드는 것밖에 더해? 네가 하는 건 나도 다 해!"

돌연 웨이와 타오 사이에서 온갖 욕설과 저주가 오갔다.

중국인답게 꽤 시끄러웠기에 귀가 먹먹해짐을 느꼈다.

타오의 변심에 다급해진 다른 숭배자들도 앞다퉈 정보들을 토해냈다.

"악몽의 파편이 어디 있는 줄 압니다! 제가 안내할 수 있습니다!"

"타오보단 제가 더 낫습니다!"

"메이! 메이 할멈입니다! 메이 할멈이 악몽의 파편을... 억!"

메이 할멈.

놈이 그걸 말하는 순간 스스로 몸이 터져버렸다.

"멍청한 놈."

웨이가 터져버린 놈을 보며 혀를 찼고 다른 숭배자들은 두려움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메이 할멈은 어디 있지. 타오, 알고 있나."

"그, 그거까지는..."

"알고 있소."

타오는 모르겠다 말했지만 웨이는 당당하게 답했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놈도 이제는 협조하기로 한 모양이다.

"저 버러지보단 내가 아는 게 많소. 그러니 날 풀어주시오. 안내하지."

비장한 표정이나 음성으로 보건대 나름의 리더십이 있다.

"좋아."

꽈드드득!!

가시덩굴에 묶인 숭배자들을 모조리 찢어버리고 웨이와 타오만 남겼다.

"타오."

"네, 네!!"

"웨이가 거짓 정보를 말하는 걸 전달해준다면 살려주는 건 물론이고, 너한테 이걸 주마."

"이건..."

"너희들이 가지고 싶어 했던 거."

바릿느의 엘더 열매.

그것을 보여주자 타오의 목울대가 탐욕스럽게 고저를 그렸다.

"웨이. 너도 그렇게 다르진 않아. 날 메이 할멈이 있는 곳까지 안내한다면 마찬가지다. 어차피 너희들 죽여봤자 나한텐 큰 이득이 없으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악마한테 붙는 것보단 나한테 붙는 게 더 나을 테니까."

그렘린의 사과를 하나씩 던져주며 먹으라 지시했다.

놈들은 의심 가득하면서도 달콤한 내음에 참지 못하고 한입씩 베어 물었는데 이내 놀라워했다.

"악마보다, 내가 더 낫지 않나?"

"..."

"무, 물론입니다!"

"나한테 도움이 될 때마다 주마. 그럼 너희들은 굳이 악마한테 대가리 숙일 필요가 있을까."

"대신, 당신한테 숙여야 하잖아."

"악마보단 낫지. 난 성과를 보일 때마다 너희에게 열매를 줄 테니까."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열매를.

웨이는 고심했다.

꽤 신중한 성격으로 보였다.

"열매 열 개를 미리 주십시오. 그럼 당신 말대로 하겠습니다."

"네가 뭔가를 요구할 상황이 아니라는 건 모르는 건가."

생각보다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이다. 타오가 한심해 보일 정도로.

"좋다."

난 인벤토리를 열어 수중에 있던 열매를 보여줬다.

그간의 레벨업과 군단장 처치 보상으로 인벤토리는 수백으로 늘어나 있게 된 지 오래. 악과 열 개? 수백 개라도 보여줄 수 있었다. 어차피 그렘린의 사과는 근력을 올려주고, 40 이상의 근력 수치를 가진 나한테는 아무 효과도 없는 열매였으니까.

"나, 나도 충성할게!!"

"나도! 나도!!"

열매에 눈독을 들인 평범한 중국인들이 달려들었다.

"어딜 끼어들어! 이건 내 거야!"

"머저리 놈들이!"

동시에 타오와 웨이가 악마의 모습을 드러내며 중국인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악마 숭배자가 강하긴 강한 모양인지 꽤 손쉽게 중국인들을 처리했다.

'기존 기프트를 유지하면서 악마 숭배자의 힘도 사용 가능한 건가.'

보통 네피림보다 강한 신체 능력.

이동이 자유로운 악마의 날개. 개인의 기프트와 악마에게 부여받은 자그마한 권능을 사용할 수 있어 보였다.

어중간한 힘을 지닌 네피림이라면 악마 숭배자로 전직하는 게 쉽고 빠르게 강해질 방법으로 보이긴 했다.

난 바닥에 떨어뜨린 악과를 다시 인벤토리에 넣으며 딱 열 개를 반으로 나눠 웨이와 타오에게 건넸다.

"웨이는 메이 할멈이란 놈에게 날 안내해라. 그리고 타오는 웨이를 감시해라."

"알겠습니다!!"

"난, 성과를 보인 놈에겐 아낌없이 베푸는 편이다."

"충성하겠습니다!!"

일이 꽤 편하게 돌아간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타오와 웨이.

썩 괜찮은 조합이었다.

*

중국 지린성의 도시 지린시.

쑹화강이란 커다란 강이 도시 중심을 통과하는 형태의 도시다.

큰 강줄기 덕분에 나름의 도시로 발전했던 곳이지만, 이곳 또한 악마의 침공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옛, 쑹화강의 물은 맑고 깨끗했지만, 지금은 먹지도 못할 물이 되었습니다. 그냥 먹으면 죽어요. 독이 된 지 오래거든요."

사람의 시체, 악마의 사체들과 더불어 온갖 질병이 퍼져있어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타오는 주절주절 떠들었다.

"저도 그랬죠. 먹을 물도 없고, 악마를 잡기란 저희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악마 숭배자가 됐다는 거냐."

"예."

타오는 보란 듯이 쑹화강의 물을 손으로 떠먹었다.

"악마 숭배자가 되면 더럽혀진 물을 먹어도 아무 해도 없거든요."

"그렇군."

살기 위해 됐다.

나름의 변명이었다.

"사연이 있었네요. 그쵸?"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 할멈이란 자는?"

"저도 자세하게는 모릅니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는 알죠. 쥐굴입니다."

"쥐굴?"

"예, 저희가 쥐굴이라 부르는 곳에 숨어 사는데... 각종 약초나 부산물들로 약을 만들거나 하죠."

"너희는 서로를 기프트명으로 부르지 않는군."

"저희는 네피림이 아니니까요."

악마 숭배자라고 한다면 악마에 미쳐 있는 광신도 놈들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했다.

죽일 놈들이란 건 다르지 않지만.

"여기부터는 저희를 따라주십시오."

"메이 할멈을 지키는 놈들은 꽤 많으니까요."

웨이와 타오가 말한 대로, 쥐굴이란 곳에 도착하자 근처에는 악마 숭배자로 보이는 놈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대부분 상태가 썩 좋지 못했는데, 신체적 결손이나 훼손된 부상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의수... 인가.'

대부분 새하얀 팔이나 다리를 달고 있었는데, 결합 부위의 색이 달라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기계도 아니고 말랑말랑한 사람 손인데, 새하얗다는 것만 빼면 그 수준이 수준급이었다.

"저건 뭐지?"

"아, 메이 할멈의 버섯이죠."

"버섯?"

저 손과 다리가 말인가.

"예, 버섯을 신체에 이식시켜서 손과 발로 형태를 잡는다고 하는데... 저도 자세한 건 잘 모릅니다. 다만 버섯이다 보니 조심하지 않으면 툭툭 끊기기 마련이죠. 일상생활 하는 데만 쓴다면 상관없지만, 전투에는 쓰지 못할 버섯입니다."

"그렇군."

버섯을 손과 발로 만든다니.

꽤 신선했다.

전투에서는 다소 손색이 있겠지만, 부상자들을 위해서는 꽤 훌륭한 처치로 보였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으나 한번 잃어버린 손과 발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기적은 보기 힘드니 말이다.

"웨이, 저들은?"

"신입이다."

"호오."

입구를 막고 있던 덩치는 나와 레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비켜섰다.

경비의 얼굴이 썩 능글맞았다.

아니나 다를까, 놈이 지나가는 레아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아니, 때리려고 했다.

"어?"

우드득.

그저, 내가 더 빨랐을 뿐.

그뿐인 이야기다.

"아! 아아! 아아아악!! 내 손!!"

우득, 우드드드드득!!

"이, 개자식이! 뭐해! 당장 죽여!!"

수수깡 같은 놈의 손목을 아작내며 목을 잡아 꺾으려는 순간.

-그만하지.

쥐굴 안에서 노인의 음성이 천천히 울려 퍼졌다.

동시에 쥐굴에선 수십 마리의 쥐 떼가 나타나고 그 뒤를 노파 하나가 지팡이를 짚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버섯을 키우고 있는 노파.

"당신이 메이인가."

"그렇네. 지옥의 유명인이여."

그녀가 메이 할멈이라 불리는 쥐굴의 주인이었다.

악몽의 파편 [3]

184화.

지옥의 유명인.

나는 그녀의 통찰력에 조금 놀랐다.

지금 나의 모습은, 정체를 밝힐만한 근거가 있는 것을 무엇 하나도 착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헬둠의 투구.

알두바드의 부서진 미스릴 갑옷을 조금 개조시켜 입었는데, 그런데도 단번에 데몬시드인 것을 알아채니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놀라셨나?"

"조금."

노파는 끌끌 웃더니 굽어진 허리로 뒷짐 지며 등을 돌렸다.

"지옥에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눈과 귀가 있지."

"..."

"산이 높을수록 풀은 낮은 법. 잡초는 잡초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지. 이 쥐굴도 마찬가지고."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지옥의 눈과 귀가 밝았다. 나는 노파를 따르는 등에 버섯을 키우는 쥐들을 바라봤다.

[버섯 쥐]

아마도 노파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것은 이 버섯 쥐일 것이다.

여기 오는 도중에도, 이런 기괴한 버섯들과 쥐의 기척을 꽤 느꼈는데, 이제 보니 노파의 수족이었다.

눈과 귀.

생각이 많아졌다.

"궁금한 게 많겠지. 따라오시게."

노파는 쥐들과 함께 쥐굴이라 부리는 굴속으로 들어갔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대화의 주도권을 쥔 것은 내가 아니라 노파였다. 지금 당장 무력으로 모든 것을 제압할 수도 있었지만, 우선은 잠자코 기다려보기로 했다.

앞서 보았던 환자들을 치료한 버섯의 활용이 궁금한 게 첫 번째요, 두 번째는 노파의 반응이 썩 적대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떡할까요."

"따라가지. 타오, 웨이. 너희들은 밖을 지켜라."

"알겠습니다."

"옙!"

지팡이를 쥔 노파의 뒤를 따랐다.

쥐굴은 그 이름대로 깊고 투박했으며, 습하고 냄새가 났다.

"목이 컬컬해요."

"공기도 별로 좋지 않고... 아마 버섯 때문이겠지."

버섯의 균사체가 흩날린다.

균사체 자체에 발광 효과가 있는 건지 이따금 황과 적으로 빛났다.

굴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밝아졌다. 많은 균사체 무리와 벽에 돋아난 버섯들 덕분이었다.

잠시 후, 꽤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이건."

"환자들이지."

그곳에는 앓는 소리를 내는 붕대 감긴 환자들이 꽤 많이 있었다.

팔다리가 잘린 사람부터, 온몸에 화상을 입거나 독에 중독된 사람. 꽤 다양한 환자들로 가득했다.

"하, 할머니. 아파요. 아파요..."

"조금 더 참거라. 버섯이 곧 네 기억을 따라 다리가 될 거란다."

한쪽 눈과 다리를 잃은 소녀가 고통에 호소했다.

노파는 그녀의 눈과 다리에 돋아난 버섯들을 살펴보고는 착실히 호전되고 있다며 격려했다.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버섯을 이식한 탓인지, 소녀의 눈꺼풀과 다리에는 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노파는 다리의 버섯 머리를 뚝 분지르고는 얼추 모양을 잡기 시작했다.

그러자 발과 비슷한 게 만들어졌는데 이쯤이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환자들 사이를 걸었다.

"눈까지 버섯으로 대체 되는 건가."

"버섯은 놀라운 힘을 지녔지. 사람도 마찬가지고."

"무슨 소리예요?"

"사람은 팔다리를 잃어도 기억에 의존해 존재한다는 소리다. 버섯은 그 기억을 토대로 본래 존재했던 그대로의 균체를 구성하지.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리든 눈이든, 내장이든 버섯은 그 자리를 완벽하게 꿰찬다는 뜻이네. 귀여운 아가씨."

팔다리와 눈, 그리고 각종 장기까지 버섯으로 대체할 수 있다.

이는 꽤 놀라운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리 만능한 능력은 아닐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버섯은...'

균이다.

결국 숙주의 힘을 빨아들여 자생하는 식물 중 하나.

저들의 말로가 어찌 될지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은 저들의 신체를 대신할지라도 언젠가 상황은 역전되겠지."

"눈치가 빠르시구만."

노파는 부정하지 않았다.

"버섯이라는 건 결국 증식하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이야. 하지만 그 시간은 꽤 길어. 언제 죽을지 모를 파리 같은 목숨이 바로 인간 아닌가."

환자들이 있는 공동을 지나, 노파의 방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의자에 몸을 뉘었다.

"이런 지질맞은 세상에서 팔다리 없는 병신으로 사는 것보다, 약간의 희망을 쥔 채로 사는 게 좋지.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젊은이는 희망에 살고, 노인은 추억에 산다고."

지질맞은 세상.

그 말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어차피 신체적 결손을 지닌 시점에서 이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기는 이미 글렀다.

인간 사회가 복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중국처럼 땅덩어리가 넓은 곳은 마냥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전투로 인한 장애.

전장에서 장애는 약점으로 취급된다. 약하면 죽는 게 전장이니까.

"그래서 숭배하는 건가."

"그런 편이네. 숭배자가 된다 하여 없던 팔이 다시 생기지는 않거든. 하지만 둘이 섞이면 괜찮아진다네."

"버섯의 증식도 느려지겠군. 이전보다 튼튼해지고."

"그렇지."

숭배자가 된다는 뜻은 악몽의 파편을 이식받고 반인반마가 된다는 뜻.

그럼 당연히 비약적으로 신체 능력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신체적 장애가 생긴 사람들은 그녀의 버섯과 악마의 힘에 의지해 살아가야만 하는 것.

노파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런 식으로 이끌고 있었다.

자신들은 살기 위해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자, 내 이야기는 다 했다. 지옥의 유명인. 어떤 선택을 할 게냐."

노파는 의자에 앉은 채로 손깍지를 끼고 말했다.

"..."

나는 고민했다.

전투 중 장애가 생긴 네피림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역에 걸쳐 많다.

랭킹이 100위대에 있던 랭커도 팔 한쪽이 사라지면 전투력의 감소로 이어지고 랭킹이 서서히 내려간다.

나는 초반에 활약했던 랭커들 몇몇이 지금은 비루하게 살아가고 있는 보고를 받아본 적도 있다.

그런 자들에게 다시금 신체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단순히 대한민국이 가질 수 있는 전력의 증가로만 이어지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희망.

그들에게 주어진 희망은 또 다른 세상의 희망으로 전이될 것이다.

아니, 버섯처럼 증식되겠지.

그런고로 메이 할멈의 기프트는 특별하다고... 생각됐다.

물론 버섯에 모든 신체 주도권을 빼앗겨 좀비처럼 변한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그 정도는 차차 연구를 통해 개선해나가면 될 일이다.

굳이 악마를 숭배하지 않아도.

'노파의 기프트 버섯은 사람의 신체를 모방하여 자라나게 한다. 진짜 손과 팔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걸 보면 속에 뼈까지 구현됐겠지.'

뼈가 있으나 그 성분은 버섯이므로 한없이 유약하다.

하지만 내 악과의 능력 중 하나인 강골이 부여된다면 어떻게 될까.

버섯 팔은 튼튼해지고 더 강한 힘을 내는 것도 가능할 거다.

물론 피부에 해당하는 버섯 부분은 장비적인 부분으로 강화한다면 전투의 쓰임도 높아지겠지.

그리 생각했을 때 메이 할멈의 기프트는 활용도가 굉장히 높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역시 악마 숭배자라는 것뿐.

"악마는 죽어야 한다."

나는 노파에게 버릇처럼 읊조렸다.

악마는 죽인다.

악마 숭배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가. 그럼 그렇게 하시게."

메이 할멈은 시원하게 수락했다.

자신과 여기 있는 이들 전부를 죽이라면서.

"저항하지 않나."

"우리가 숭배하는 악마조차, 그대를 두려워할 텐데 우리가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을까. 나는 그저 아파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조금 더 연명하게 만들었을 뿐. 저들의 미래 따위를 걱정하고 슬퍼하지는 않았어. 그저... 앓는 소릴 내는 녀석들이 처음엔 거슬렸고 후에는 쓸만하다고 여겼을 뿐이지."

노파는 큰 짐을 덜어 놓은 것처럼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내 기프트는 보이는 대로 버섯을 키우는 능력이라네. 노인네가 이런 기프트를 얻었다 해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 버섯을 키웠고 먹을 게 없어서 그거라도 먹었지. 어쩌다 보니 식량이 가장 중요해진 상황에서 죽음의 순번이 늦어졌을 뿐이야. 덕분에 아들을 잃고 며느리가 죽는 것도 보았지. 후에는 손주마저... 그럼에도 자식들의 죽음을 핑계 삼아 여직까지 연명하고 있을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없어. 죽어가는 이들을 암만 살려봤자... 가장 소중한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니까. 그렇지 않나."

노파는 자신의 방 한쪽에 있는 석관을 열었다. 거기엔 부부 한 쌍과 그 둘을 닮은 소녀 하나가 있었다.

셋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온몸이 전부 새하얗다는 것과 관이 열리자마자 움직이려 한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생기란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본능에 의해 움직이려는 것 정도.

"애초에 살지 못할 상처였어."

씁쓸하게 말하는 노파의 말에는 회한이 뚝뚝 떨어졌다.

그걸 살려보고자 버섯을 이식했으나 몸의 회복보다 버섯의 증식이 더욱 빨랐다는 말이었다.

"버섯은 언뜻 보면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거든. 자신의 세포를 늘려나갈 뿐이지. 처음엔 그걸 몰라서 죽게 만들었다네."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주가 나란히 죽지도 살지도 못한 상태로 있기에 그녀의 삶은 지옥.

"죽음을 바라는 자에게 죽음을 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벌은 없겠지."

"..."

그건 벌이 아닐 테니까.

게다가 내가 중국으로 건너온 태초의 목적은 숭배자를 벌하니 어쩌니 같은 게 아니긴 하다.

"악몽의 파편을 가지고 있나."

악몽의 파편.

그것 하나를 위해 찾아온 거니까.

"악마의 대척자가 그런 추악한 것은 어찌 묻나."

"있냐 없냐를 물었다."

"..."

노파는 말없이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어 작은 항아리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항아리였다.

마개를 여니 시큼한 썩은 내가 났고 항아리를 털어내니 벌레와 지네가 뛰쳐나오고 나서야 불길한 돌멩이 서너 개가 떨어져 내렸다.

내가 찾던 악몽의 파편이었다.

"이건 어디서 난거지, 만들었나."

"그럴 리가. 받았을 뿐이네."

받았다라.

"날 전도시킨 녀석이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더라도, 노파는 전투력이 그렇게 강한 인물이 아니다. 악마 숭배자로서의 지위도 그리 대단치 않다.

중국에 뿌리 깊이 박힌 숭배자들의 끄나풀 중 하나일 뿐이라는 소리다.

"내게 필요한 건 악몽의 파편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 그렇구먼."

노파는 눈을 감았다.

한참을 고민하는 것처럼 신음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얼빈. 오충을 찾아보시게."

"알겠다."

나는 그대로 악몽의 파편을 품에 넣고 노파의 방을 나섰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서려고 했다.

"무슨 짓이지."

우리가 들어왔던 문은 사라져 있었다.

버섯으로 가득 찬 것인지, 원래 버섯만이 즐비한 방이었던 건지 모를 정도로 온 세상이 버섯으로만 가득했다.

메이 할멈은 버섯 속에 스며든 상태로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콜록!"

그 상태에서 레아가 기침했다.

입에서 버섯이 자라나며 숨을 쉬지 못해 고통스러워했다.

-버섯은 예민하지. 어디서든 잘 자라는가 싶지만, 마냥 또 그렇지는 않아. 조금만 온도가 높아도, 온도가 낮아도 죽어버리는 게 버섯이야. 물론 내 버섯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야.

"무슨 짓이냐."

-데몬시드. 지옥의 군단장도 두려워하는 아이야. 하지만 그래봤자 너도 인간 아니더냐. 몸에서 버섯이 자라난다면 어쩔 게냐.

드륵, 드륵!

석관이 움직이고 그 안에 자리했던 메이 할멈의 아들 내외가 움직였다.

그들의 몸은 어느새 전부 버섯이 피어 있었는데 사내는 내게 달려들어 나를 꽉 붙잡았다.

보통 힘이 아니었다.

게다가 며느리는 자신의 팔을 고무처럼 늘어뜨려 나의 다리를 붙잡았으며 손주는 작은 단검들을 공중에 띄워 고속으로 회전시켰다.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버섯 좀비는 자신과 동료에게 마법으로 된 푸른 갑옷을 입혔다.

모두 기프트를 사용했다.

"기프트를 쓰는군. 버섯이 완전히 증식을 마치면 그들의 기프트까지 네가 조종할 수 있는 건가."

-그런 편이지. 무얼, 너무 겁내지 마시게. 자네 또한 그리될 테니. 그리하면 나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지! 내 아들도! 며느리도! 손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게다!!

꾸드드득.

빠져나가려 했으나 버섯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치고는 단단했다.

평범한 네피림보다 더 단단했다.

마법으로 이뤄진 갑옷은 별 볼 일 없었다. 버섯이 더 질겼다.

"버섯이 꽤 질겨. 앞서 봤던 사람들은 연약하던데. 이건 다른 건가."

-그거야 그런 버섯이니까. 버섯의 종류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 아니겠나... 근데. 그리 여유로워도 되겠는가? 자네 여인은 다 죽어가고 있네만. 자네도 큰 차이는 없지.

이내 나의 입과 몸에서도 버섯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기생 버섯이 당신에게 기생을 시작합니다."

"생명력과 마나가 소모됩니다."

"생명력과 마나가 소모됩니다."

"생명력과 마나가 소모됩니다."

"생명력과 마나가 소모됩니다."

-발버둥 쳐봤자 일세. 이 버섯의 벽은 무한으로 증식하지. 자네 힘이 아무리 강한들 부술 수 없어. 그리고 버섯은 자네 몸속에서부터 증식해. 얌전히 내 아들이 되시게.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노파의 음성에 나는 엉뚱한 답으로 되받아쳤다.

"버섯구이, 안 먹은 지 꽤 됐네."

-... 뭐?

화르륵.

버섯이 불타기 시작했다.

악마 숭배자

185화.

『악익』

[공포의 나래]

-탐욕스러운 공포는 언제나 공포의 제물을 원한다.

『블루헬』

-공포의 푸른 지옥을 소환한다. 지옥의 영향권에 있는 자는, 모든 자원이 불태워지며 자원의 양에 따라 중력의 억압을 받는다.

내 등 뒤엔 불로 이루어진 날개가 나타났다.

날개라기보다는 불로 만들어진 촉수에 가까운 악마의 날개다.

블루헬은 푸른 불꽃의 지옥을 소환하여 영향권에 있는 자를 불태움과 동시에 마나와 같은 자원을 소모해 중력을 발동시킨다.

언뜻 보면 벨로나와 비슷한 무한의 굴레가 이어지는 마법이다.

내가 그간 성장시킨 공포의 불.

그리고 마나번과 중력이 합쳐진 권능은 악마의 날개로 변해 블루헬이라는 막대한 권능을 부여한다.

권능은 스킬과 다르다.

스킬은 한정적 조건과 규격에 맞춰진 힘을 시전자에게 부여한다.

시전자가 스킬을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은 대부분, 강도와 범위뿐.

자유자재로 변형시키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게 스킬과 권능의 차이.

권능이란 말 그대로 권능.

누군가 규격에 맞춰 만들어놓은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가 조절하고 변형하여 손과 발처럼 다루는 힘을 뜻한다.

물론 권능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 모두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수식언이 악익으로 변한 나는 그게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코와 입으로 들어간 버섯의 균사체들을 말살하는 것이 간단했다.

한마디로.

"버섯은 버섯일 뿐이지."

메이 할멈의 버섯은 내게 아무런 위해를 끼칠 수 없다.

-그럴 수가!! 내 버섯을 고작 그 정도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어!! 아무리 불이 버섯을 태운다 한들! 독까지 태울 수는 없을 터!!

"나, 독 면역이라."

"메이독을 면역하였습니다."

"메이독. 직접 만든 독인가 보군. 뭐 그래봤자 그 수준인 독이겠지만."

난 컥컥거리는 레아를 들어 불꽃으로 그녀의 몸속에 자리 잡은 균사체를 모조리 태워버렸다.

꽤 세밀한 컨트롤이 필요한 작업이었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파르바의 미믹' 스킬을 얻은 이후, 난 대부분의 무기술에 관한 숙련도를 가지게 되었고, 덕분에 손기술과 미세한 컨트롤에 대한 숙련 또한 자연스레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날 억압하려 한 버섯 좀비 가족은 모조리 불타 사라졌다.

버섯이 제아무리 강해봤자 식물인 이상 상성 상 불을 견디진 못한다.

그게 기프트로 생성된 버섯의 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잠시 뒤.

모조리 타버린 쥐굴의 한쪽.

온몸에 버섯을 돋아나게 한 채로, 불길을 견디는 노파가 나타났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이 괴물!!"

"뭐래."

콱!

노파의 목을 잡아 틀어쥐었다.

"한 가지 묻지."

"그냥 죽여라! 죽여!!"

노파는 울고 있었다.

제 자식들을 버섯 좀비로 만들어 부려 먹으면서도, 막상 그들이 불타 사라지니 슬픈 모양이었다.

"너, 악마 숭배자가 맞긴 한 거냐."

"..."

노파의 기프트는 꽤 훌륭하다.

전투적 능력은 그리 대단치 않지만 다른 부가적인 부분이 쓸만하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숭배자인 것이었는데, 노파는 이상하게 악마화의 흔적이 없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지금도 악마로 변하지 않은 걸 보면 말이다.

"역시 그랬나. 하긴, 당신은 버섯을 이식하지 않았으니까."

굳이 필요 없었다는 뜻이리라.

'잘 됐군.'

악마 숭배자가 아니라면 오히려 써먹기는 더 좋다.

"살리시게요?"

"이 노인네 능력은 쓸만해."

죽이기엔 아깝다.

하는 짓거린 토막 내 죽여도 시원찮지만, 능력이 그런 쪽이니 살리는 게 더 이득이다.

"관찰자에게 말하면 알아서 할 거다. 감옥에 관련된 기프트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언뜻 들었던 것 같거든."

거기 가둬두고 사람들을 돕게 만든다면 될 거다.

내 악과, 버섯, 그리고 관찰자가 합쳐진다면 증식의 위험도 또한 낮아지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버섯 자체의 강도도 나쁘진 않았으니까. 근데..."

메이 할멈의 얼굴에 피어난 버섯.

그 일부를 툭툭 뜯어내자.

"뜨, 뜯지 마! 안돼! 하지 마라!!"

돌연 경기를 일으킨다.

탄 부분의 껍질이 뭔가 수상해서 뜯어봤더니, 안에는 노인의 피부가 아닌 다른 게 있었다.

"노인네가 아니었군."

얼굴 거죽을 뜯어내자 노인네의 것은 사라지고 새파랗게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조금은 음침한 보라색 머리칼을 지닌 여성이었다.

"보지 마! 보지 마아!!"

"가족 얘기도 다 거짓말이군. 참나, 완벽히 속았네."

"상종을 하면 안 될 여자였어요..."

"이해는 된다만."

이런 세상이다.

젊은 여자의 얼굴보다는 노인의 얼굴로 있는 편이 눈에 띄지 않고, 괜한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법이니.

"상관은 없지."

녀석은 앞으로 한국에서 관리하고 가둬두며 부상자들을 위해서 일하게 만들거니까. 난 메이의 뒷덜미를 잡고 방문을 열었다.

"아, 아악!"

방문 앞에는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환자들이 서 있었다.

나름의 적개심을 지닌 채로.

물론 전부 악마로 변해 있었다.

"제가 정리할게요."

"먼저 나갈게."

"넵!"

"어딜 가려고!!"

스걱. 촤악!

날 막으려던 악마 숭배자를 단칼에 베어버린 레아가 쌍검을 든 자세로 등 뒤에서 무쌍을 펼쳤다.

소리만 들어도 안다.

애초에 여기 있는 놈들의 수준으로는 레아의 털끝도 건드릴 수 없다.

난 그대로 메이를 끌고 쥐굴 밖으로 걸어 나갔고, 레아는 안에 있던 악마 숭배자 전원은 도륙하고 나왔다.

"하여튼, 기분 나쁜 굴이야."

푸른 불꽃이 기분 나쁜 굴을 모조리 불태웠다.

*

대한민국 협회 지하.

"안녕하십니까! 랭킹 12013위! 락! 입니다!! 데몬시드님과 피의 축복 님을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영광! 또 영광!"

"말씀드린 대로 락의 능력이면 크게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마법적 요소들은 물론이고, 포탈까지 원천에 차단할 수 있는 기프트니까요."

"포탈까지? 대단하군."

"가, 가, 가, 감사!! 감사합니다!!"

너무 긴장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지만, 다행히 메이를 가두는 건 완벽했다.

메이는 단순한 감옥에 갇혔다.

철창 감옥.

하지만 락이 기프트를 사용한 것만으로 그곳은 철의 요새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안녕하십니까. 8525위 침사입니다."

"예."

40대 중년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침사라고 소개하며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품에서 침통을 꺼내 침들을 허공에 띄웠다.

"저분을 잡아주시겠습니까. 락씨."

"예! 침사님."

"꺼져! 꺼져어!! 내 몸에! 내 몸에 손대지 마!! 개자식들아아아아!!"

락이 스킬을 써서 메이를 결박하자 침사가 침들을 그녀에게 꽂았다.

그러자 발광하던 메이는 한순간에 조용해지고 침사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침술을 마무리했다.

"됐습니다. 저 침이 뽑히지 않는 이상은 누군가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갖지 못할 겁니다."

"대단하군요."

"아닙니다. 어떤 행동을 강제할 수도 없을뿐더러 유도하는 것 정도니까요. 지금은 차분함을 유지하게 했고, 적대 감정을 누른 것일 뿐이죠. 그 두 개가 합쳐져서 저렇게 된 것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훌륭한 능력이었다.

물론 전투에서 활약하기엔 힘든 능력들이었지만 분명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훌륭하다 평가될 기프트다.

관찰자가 알뜰살뜰 모은 협회의 고급 인력들이기도 했다.

"그럼 환자들을 데려오죠."

한국에서 이루어진 첫 번째 환자는 나도 잘 알고 있는 랭커.

거대한 손이었다.

요새 들어 한창 주가를 달리고 있는 랭커다. 현재 랭킹은 8위에 육박하는 고위 랭커 중 한 명.

그는 입이 무거운 사내이고, 항상 두꺼운 외투를 입고 다니며 잘려진 손들이 팔뚝과 어깨, 다리에 매달려 있는 얼핏 기괴한 사내다.

썩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외관이지만 그에게는 안타까운 사연 하나가 존재한다.

"정말... 제 것에 가까운 손을 얻을 수 있는 겁니까."

그는 최초.

악마가 나타났을 때의 사고로 두 팔을 잃었다. 그렇기에 거대한 손이라는 기프트를 얻었는지도 몰랐으나, 메이의 의수가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이기도 했다.

"가보시죠. 이미 준비는 전부 마쳤습니다."

메이는 초점 없는 눈으로 가만히 있었는데, 침사는 말했다.

"대가를 주고, 원하는 바를 말하시는 게 다른 반발이 없을 겁니다."

거손은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손을... 얻을 수 있다면. 원하는 게 무엇이든 대가를 치르겠다."

이에 메이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더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손들로 외투를 벗고 팔뚝 아래로 거칠게 잘려 나가 아문 두 팔을 건넸다.

"대가는, 천금."

거손은 곧장 금화 주머니를 건넸고 메이는 그의 팔에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이 닿자마자 조그마한 버섯 하나가 살을 뚫고 자라났다.

"네 손을 상상하면서 움직여봐."

아물었던 상처 부위를 뚫고 자라나기 시작하는 버섯들은 근육의 섬유질처럼 이어져 자라났다.

순식간에 자라나는 모습은 약간 신기에 가까웠다.

메이는 자라나는 버섯들을 올바르게 조율했고 이내 거손의 기억과 비슷한 두 손이 생겨났다.

"내가 다룰 수 있는 버섯의 가지는 수백 가지. 그중에서 제어는 어렵지만 가장 빠르고 질긴 녀석이니까. 당신이라면 쓸만하겠지."

눈꺼풀이 반쯤은 감긴 채로 말하는 메이의 모습에 거손은 감격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고맙, 고맙... 고맙다...!"

덩치 큰 사내가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은 괜히 마음이 짠했다.

"관찰자 어때."

"문제없어 보입니다. 버섯은 본래 분해와 공생, 그리고 기생으로 분류되어 있다고 하죠. 거손의 버섯은 공생으로 보입니다. 일정 이상의 증식을 거치고 있지 않아요. 그가 크게 다치지 않는 이상은 괜찮을 겁니다."

"그렇군. 그럼 이걸."

"이건..."

"강골의 브릭서다. 먹여봐."

"알겠습니다."

버섯이 뼈와 근육과 피부까지 모방한다면 강골의 브릭서는 반드시 그에게 필요하게 될 거다.

"거손, 이걸..."

"아."

거손은 눈물을 닦고 아직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으로 브릭서를 잡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 또한 고개를 끄덕여주자 조금은 힘겹게, 하지만 착실하게 손을 움직여 브릭서의 마개를 열고 마셨다.

"아..."

"효과는 있습니까."

"네! 확실히... 움직이기가 조금 편해진 거 같습니다!"

"관찰자."

"골밀도가 올라갔습니다. 의수의 뼈대도 마찬가지군요. 예상하신 대로 효과가 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다.

이거라면 앞으로 협회의 네피림들은 부상으로 은퇴하는 일은 없겠지.

전력의 보존을 꾀할 수 있을 거다.

계속 손을 움직여보며 기뻐하는 거손을 보며 난 등을 돌렸다.

"어딜 가십니까?"

"중국에 할 일이 남아 있거든."

하얼빈의 오충.

놈을 잡아서 악몽의 파편을 더 모아야 했다.

"중국... 거기는 지금 카오스 게이트 중일 겁니다. 너무 소란을 일으키시면 외교 문제가..."

"걱정할 거 없어. 조용히 다녀올 거니까. 거기에 악몽의 파편이 꽤 많아 보이니까... 그럼 다녀온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촤악.

포탈 스크롤을 찢은 데몬시드가 사라지고 관찰자는 곰곰이 생각해보다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악몽의 파편이면, 중국의 악마 숭배자들을 다 쑥대밭 만들겠다는 뜻이잖아..."

뭘 조용히 다녀온다는 건지.

관찰자는 어이가 없어 웃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협회 계단을 올랐다.

"알아서 하시겠지. 중국은 금방 쑥대밭이 되겠어."

외교 문제라며 겁주긴 했지만, 중국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런 문제로 태클을 걸지는 않을 테니까.

큰 상관은 없었다.

"관찰자!! 큰일 났어요!!"

"급할 때는 이제 말을 놓네..."

협회 소속의 랭커. 이제는 11위까지 올라온 소서리스였다.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급하게."

"급보에요."

"뭔데 그래요..."

소서리스가 들고 온 급보를 읽어보는 관찰자의 눈이 삽시에 진지해졌다.

"중국! 이번에 망할 수도 있대요!"

카오스 게이트 중인 중국.

그들이 이번엔 실패할 확률이 너무도 높다는 미국의 공문이었다.

13군단장 [1]

186화.

대한민국 네피림 협회 회의실.

뉘엿뉘엿 넘어가는 노을이 지고 있으나 이곳은 꽤 부산스러웠다.

관찰자를 비롯한 협회 중진들과 함께 현 정부의 인사들이 함께했으나 분위기는 엄숙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 이번 회의에 모여주신 랭커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림과 동시에..."

"본론부터 들어가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알겠습니다."

대통령까지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회의의 시작은 미국에서 보내온 하나의 공문 때문이었다.

"중국이 너무 많은 땅을 점령했음을 우려하는 공문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마존이 손을 들며 말했다.

"중국은 그만큼 강한 네피림들이 많은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저희와는 인구수 자체가 다르다고요. 그러니 그 정도는 허용 범위라고 생각하며 점령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물론 그렇죠. 저희 네피림 수에 비하면 중국은 10배가 넘습니다. 그들 딴에는 그랬을 겁니다. 대한민국의 사례를 그들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일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마존님. 혹시 중국이 몇이나 되는 땅을 점령했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만... 넷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요."

아니다.

"다섯입니다."

정확하게는 다섯의 나라였다.

중국과 맞닿은 곳.

홍콩과 대만, 몽골을 비롯한 인접한 나라의 군단장을 처치했다.

그들 또한 바보는 아니기에 당연히 차원석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고 땅을 소유했다.

그 정도는 월드 메시지가 뜨기에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다섯. 하지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중국은 강하다고."

이전 시대의 대한민국 인구수는 5천만 명. 반면 중국은 14억에 이르렀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이번에 중국이 군단장 하나를 더 토벌했습니다. 물론 훌륭한 업적이지만 차원석까지 활성화 시켰다는 게 문제입니다."

"벌써 여섯이라는 거군요."

"예, 중국은 너무 들떠있어요."

중국이 먹은 땅이 여섯 개.

그쯤 되자 랭커들도 우려의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희가 북한과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곧바로 카오스 게이트로 17군단장 레비아탄이 침공했죠."

"..."

그런데 중국은 벌써 여섯 개.

대체 얼마나 강력한 군단장이 침공할지 예상조차 안 된다는 소리였다.

"미국은 그 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우려를 표하고 있죠."

군단장 토벌을 성공시킴과 동시에 인류는 헤일로를 얻고 잠시간의 부흥을 겪었다. 하지만 그 평화에 젖어 미래를 그려나갈 때도 악마들은 여전히 인류를 부수고자 움직인다.

"최소 20위권 안의 군단장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최선을 가장했을 때.

최악의 경우.

"한 자릿수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

한 자릿수.

군주에 해당하는 존재들이 나설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차원이 넓어지고 커진다는 뜻은 큰 힘을 지닌 군단장이 들어갈 공간이 된다는 뜻.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다.

한국은 이미 한번 겪었으니까.

"그럼 저희는 어떡합니까."

만일 한 자릿수의 군단장이 중국을 지배하기라도 한다면?

"지금과 같은 생활은 어렵겠죠."

겨우 찾은 안정.

점점 복구 영역을 확대 중인 성역.

서초동의 평화가 깨지는 날은 대한민국의 걸음이 또다시 무너지는 날이 될 것이다.

"데몬시드의 엘더트리가 신의 한 수가 되겠군."

중국이 무너진다면 국경의 경계선에서 넘쳐나는 악마들을 트리가드가 일부 막아주긴 할 테니까.

시간적 여유가 생기긴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시간 문제.

중국을 집어삼키고 힘을 키우고, 번식을 도모한 악마들은 쉴 새 없이 대한민국의 땅을 넘볼 것이다.

"저희에게 넘어오는 악마들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군단장은 토벌한다 해도 곧 새로운 이들이 빈자리를 채우게 됩니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라는 소리죠."

그런데 중국이 사라지게 된다면 남아 있는 나라들이 어깨에 이어야 할 무게가 너무 무거워진다.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한데 그것이 지금 깨지게 된다면...

"지구는 놈들의 것이 되겠죠."

"헬 게이트가 열리게 될 겁니다."

콰직.

거손이었다.

새로 생긴 손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는데, 힘 조절에 실패해 캔 커피가 붕대와 테이블에 튀었다.

"아이, 뭐야?"

"죄송합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손 생겨서 좋은 건 알겠지만, 상황이 상황인데 좀..."

"미안합니다. 형님."

바바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그래서, 저희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이렇게 모여서 중국 걱정만 하고 있으라는 소린 아닌 거 같은데..."

어느새 도끼를 꺼내 관자놀이를 긁는 바바리안의 모습에 회의를 진행하던 비서실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각국의 공문에 따르면, 중국이 카오스 게이트에 돌입한 지 오늘로써 벌써 사흘째라고 합니다. 혹시라도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각국의 중진들이 모여 대안을 모의하자고 하더군요."

"그게 뭐야. 그, 그거 아닙니까?"

"정상회담?"

"어! 맞아. 정상회담!"

이에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는 대한민국으로 정해졌습니다. 날짜는 이틀 뒤. 그래서 말인데..."

대통령은 언짢은 기색을 풍기며 물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

하얼빈, 헤이룽장성.

악마가 침략했을 때 한 번 무너졌지만, 금세 수복해 다시 한번 하얼빈을 상징하게 되었던 헤이룽장성이 또다시 무너졌다.

콰아아앙-!! 콰드드득!

"데몬시드! 중국은 절대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물소 뼈 투구를 뒤집어쓴 채로 강철 덩굴을 만들어내 성을 부수고 날아오르는 악마 숭배자들을 모조리 찢고 있는 사내.

데몬시드 때문이었다.

그의 손아귀에 잡혀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인파의 간부, 오충.

중국 랭킹 40위에 속하는 레벨 6의 랭커였지만 데몬시드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생쥐일 뿐이었다.

"말해. 네 머리가 누구냐."

"흑사회의 머리는 당연히 미룡...!"

"책임 돌리려고 하지 말고. 천지인인지 천지똥인지 하는 거 있잖아."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놈들은 꼭 말로 하면 안 듣지?"

꽈드득. 촤악-!!

데몬시드는 오리발 내미는 오충의 팔을 비틀어 뽑아버렸다.

"끄아아앙아악!!"

"빨리 말해. 형 바빠."

오충의 눈은 검게 충혈되었고 이내 혈관이 도드라짐과 동시에 뿔이 돋아났지만, 결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

"끄으으으윽!!"

"발버둥 치지 마 좀. 실수로 죽여버릴 거 같으니까."

나머지 한쪽 날개와 팔도 찢어버리자 그제야 오충은 게거품 물며 덜덜 떨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목숨만은... 뭐, 뭐든 하겠습니다!!"

"너희들은 꼭 팔다리 하나씩은 뽑아야 이런 식으로 변하지."

데몬시드는 악몽의 파편을 보여주며 이걸 건넨 자가 누구냐 물었다.

"야고입니다!!"

"야고?"

"에, 예!! 랭킹 4위의 저희 보스..."

"인파인지 뭔지 하는 거기? 걔 지금 어디 있는데."

"호, 홍콩입니다! 하지만 지금 카오스 게이트에..."

꽈드득!

목을 비틀어 죽여버린 데몬시드는 이내 손을 털었다.

"퀘스트 보상이 정산됩니다."

"보물 지도를 획득합니다."

악마 숭배자들의 악몽의 파편을 부술 때마다 퀘스트 보상이 차곡차곡 중첩됐다.

"이놈들 죽이는 게 천상에 그렇게 이로운 일인가. 잘 주지도 않는 퀘스트로 보상을 건넬 만큼."

조금 의아했다.

그래봤자 훼손된 악몽의 파편일 뿐인데 천상은 그것의 말소를 원했다.

어쩌면 이놈들의 파편을 부술 때마다 천상에 이로운 효과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은 모르는 그런 거 말이다.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죽일 놈들 죽이는 것뿐이니까.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면 된다.

"웨이."

"일 다 보셨습니까?"

바깥으로 나오자 타오와 웨이가 데몬시드를 반겼다.

"홍콩으로 간다."

"홍콩이요?"

"설마..."

"야고. 알고 있나."

이내 타오와 웨이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중국의 랭킹 4위를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야고는 사람의 척추를 뽑아서 채찍처럼 쓴다던데, 꼭 가야 합니까?"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그래봤자 4위지만.

"그는 흑사회의 천지인 중 인파의 파벌 간부니까요."

"아, 그거."

우리나라에서는 삼합회로 더 잘 알려진 중국의 뿌리 깊은 조직폭력배였다. 안 그래도 중국은 세 개의 파벌로 나뉘어서 자주 충돌이 있다더니 그것 중 하나인 모양이다.

"예. 당연하죠. 무너진 정부 대신 중국을 유지하고 있는 게 지금의 흑사회니까요."

"그럼 랭킹 1위도 그건가?"

"예, 랭킹 1위, 미룡. 그녀가 흑사회의 용두입니다."

흑사회의 용두.

두목이란 뜻이었다.

"오랜만에 미룡 좀 만나겠네."

아무래도 뿌리를 타고 올라가다 보면, 파벌 하나쯤은 무너질 거 같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머리인 미룡을 만나게 될 테니까.

"좋아하지 않을까."

대신 썩은 부분을 도려내줄 테니.

'미룡은 미룡대로 썩은 놈들 뿌리 뽑을 수 있고, 나는 나대로 악몽의 파편을 얻을 수 있으니까.'

이게 바로 일석이조.

덤으로 친구 얼굴도 보게 될 테니 일석삼조라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모은 악몽은 서른둘.'

역시 큰 집단을 털어버리니 수확이 꽤 쏠쏠하다. 악몽의 파편 하나당 파르바움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니 벌써 주먹만 한 파르바움 32개를 얻었다 봐도 무방할 정도다.

"전신 갑옷을 맞춰도 될 정도로 보이는데."

나부터 풀셋으로 맞추고, 그 이후는 랭커들에게 무기 하나씩 맞춰주면 딱 좋을 것이다.

물론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만큼 파르바움으로 만든 무기는 효과가 엄청나니까.

중국에서 10번째로 큰 도시가 바로 하얼빈인데 악몽의 파편 수가 너무 적은 게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놈들 파편을 더 쪼개서 먹다니. 귀찮은 짓을 해놨어."

"그러게요. 미리 쪼개놔서 제대로 된 악몽은 몇 개 없어요."

"어쩔 수 없지."

그 부분이 조금 아쉽지만, 솔직히 이쯤 얻었으면 이 정도 선에서 끝내도 상관없다. 시간도 시간이고, 이놈들 찾으러 다니는 것도 꽤 골머리가 아프니까.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외교적 문제로 커질 심산이 크다.

'어찌 됐든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제대로 된 설명 정도는 필요할 테니까.'

역시 미룡이 와주는 게 편하다.

그럼 구구절절한 다른 설명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럼 다음으로 가볼까."

홍콩행 포탈 스크롤을 찢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찢으려 했다.

내가 찢지 못한 이유는 그보다 먼저 포탈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가 아니다.

한 번에 수십 개의 포탈이 여기저기 중구난방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위치가 제각각.

방향과 고저도 제각각이었다.

사방팔방에 포탈이 길게 늘어지고 터지고 조각조각 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포탈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들이 세상에 균열을 만들었다.

쩌적!! 쾅-!

그 균열이 폭발하며 틈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도, 도망쳐어어어!!"

촤악!!

찢겨지는 사람의 신체와 더불어 균열 속에서 악마들이 뛰쳐나왔다.

흑갑을 입고 창을 든 기사들.

그들은 무차별적으로 균열 속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을 찢어 죽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미룡?"

"데... 몬시드."

한쪽 눈의 안대.

강인한 용의 꼬리가 인상적인 미녀.

미룡이었다.

"미룡!"

난 그녀를 바로 안아 들었다.

이유로 첫째는 그녀가 심각하게 다쳤다는 것이고 둘째는...

"도...망쳐...!"

미룡이 피를 토하며 도망치라 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느껴본 적 없는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그리고 이내.

"중국이 카오스 게이트에 실패하였습니다."

"13군단의 군단장 카이삭스가 새로운 땅의 지배자로 군림합니다."

"악의 땅으로 물들어 갑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하락합니다!"

예상했던 불안감은 현실로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놀란 것은 바로 군단장의 이름.

"카이삭스...?"

군단장의 이름 때문이었다.

13군단장 [2]

187화.

[중국의 차원이 무너졌습니다.]

중국이 무너졌다는 사실은 월드 메시지로 빠르게 전파됐다.

협회에 모여 회의하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요, 각국의 랭커들도 빠르게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중국이 무너졌다는 소리는 다른 나라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뜻이나 다르지 않았으니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이 오늘 저녁내로 한국으로 오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미국은 이 사실을 빠르게 인지했고 행동으로 보여줬다.

회담은 본래 이틀 뒤였으나, 중국으로 인해 오늘 당장으로 급하게 바뀌었다.

급보를 받은 대통령과 협회는 당장 그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중국에서 단독 행동하는 데몬시드를 걱정했다.

"중국이라니! 지금 중국이 어떤 상황인데 거길 혼자 간답니까!! 랭킹 1위라는 자가 그렇게 제멋대로 행동하고 다니면..."

정부 측 인사는 답답함에 분노했고 협회의 랭커들은 정부 인사를 싸늘하게 반응했다.

"... 그럼, 장관님은 그분의 행동을 막을 수 있으십니까."

"그 무슨...!"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분의 행동을 저지할 수는 없을 겁니다. 게다가 협회장님은 의미 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 분입니다. 외교부 장관님. 혹시 현재 레벨이 몇이나 되십니까."

"저는... 레벨 3입니다."

관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상위 랭커들의 평균 레벨은 5입니다. 그런데 협회장님은 7이죠. 최초부터 지금까지 그분은 항상 저희의 앞에서 대한민국을 이끌었습니다. 제멋대로 행동한다고 하셨습니까? 하지만 그 제멋대로인 점 덕분에 대한민국은 벌써 수많은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장관께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배불리 음식을 드실 수 있는 이유의 도처엔 항상 그분이 계십니다."

"그, 그거야... 랭킹 1위이니..."

관찰자는 서늘하게 비웃었다.

"잠깐의 예를 들어보죠. 이번에 그분이 중국으로 향하신 이유의 시작은 백두산이었습니다."

"백두산은 갑자기 왜..."

"예로부터 대한민국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았다는 말이 있을 만큼 민족적인 상징이 투철한 성산이죠. 그래서인지 그곳엔 다양한 악마들과 던전이 존재했는데, 중국인들이 틈만 나면 국경을 넘어 그곳으로 불법 사냥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 자국민이 다치거나 죽는 일이 과연 발생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다. 많이 죽었다.

거의 유린 당하며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정부에도 몇 번 관련 이야기를 전달해 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중국 측에 조심해달라고 약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뿐.

그러나 그것만으로 중국인을 통제할 수 있었을까.

아니, 아무 소용없었다.

누구도 해결하지 못할 일.

하지만 그는 달랐다.

"이번에 그분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백두산에 나무를 심으시자 이후로 중국인들은 백두산에 오지 못하게 됐죠. 중국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이유도 그 과정에서 악마 숭배자들을 발견했고 도중에 메이라는 네피림을 영입하기도 하셨습니다."

관찰자의 일목요연한 설명에 정부 인사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뭐라 말하고 싶었으나 관찰자는 한마디도 쉬지 않고 말했다.

"메이라는 네피림의 기프트 덕분에 지금도 전투 불능에 빠진 부상자들이 빠르게 전선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가치로 따지자면 얼마나 대단한 수치인지, 외교부 장관님은 알고 계십니까?"

"그, 그게..."

"거손의 팔이 보이십니까. 그는 본래 두 팔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분이 '제멋대로' 행동한 결과로 다시금 팔을 얻었죠. 한국의 네피림들은 아무리 전투 중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어도 다시 싸울 수 있게 됐습니다. 전보다 강한 팔과 다리를 의수로 달 수 있게 됐죠. 모두 협회장님의 '제멋대로'인 행동 덕분입니다. 저희가 왜 그분을 제약할 수 없는지 이제 제대로 아시겠습니까."

외교부 장관의 얼굴은 울긋불긋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대통령이 상황을 중재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외교부 장관이 흥분한 듯합니다. 제가 대신 협회 분들에게 사과하겠습니다. 장관?"

"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상황이 상황이고, 위치에서 얻게 된 편한 생활을 영위하시다 보니 잠깐 잊고 계실 수 있지요. 전, 이해합니다."

신랄하게 무능력한 정부의 고위 인사들을 비꼬는 관찰자의 말에 대통령도 조금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시급을 다투는 일이 되었습니다. 정상회담도 회담이지만 그보다는 안위가 걱정되는군요. 어서 빨리 데몬시드를, 아니 협회장을 데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요. 이미 쪽지는 보냈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협회의 랭커들을 보내는 게 낫겠죠. 대략적인 위치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각국의 랭커들이 한국으로 모이기로 협의가 되었다.

아무래도 중국과 가장 가까운 것은 러시아와 한국, 그리고 베트남인데 그중에서도 한국은 랭커들의 수는 많지 않지만 질은 높다. 지금은 다양한 국가가 빠르게 따라오고 있지만, 아직도 한국의 헤일로 보유자는 전 세계에서도 가장 많으니까.

'협회장님이 실종된 상태라는 소리라도 퍼졌다가는 괜한 소란이 일어날 수가 있어. 아마도 정부에서도 그런 사태를 우려하는 거겠지.'

한국은 강하다.

하지만 수치로 계산해봤을 때, 네피림이 가장 적은 국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중국과 인접한 국가들 중, 베트남과 한국이 가장 무너지기 쉬운 국가라 분류되었을 터.

둘 중 하나가 무너지면 그들이 지어야 할 부담감도 만만치 않다.

그것이 한국에서 정상회담이 열리는 이유 중 하나였다.

'미국과 베트남은 사이가 별로니까.'

그런 중요한 회담에 대한민국의 랭킹 1위가 없다면 말이 안 된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을 무시하는 행위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어떻게든 데몬시드가 있어야 했다.

"아마, 미국과 브라질, 그리고 영국을 중심으로 회담이 이루어질 거 같습니다. 이후엔 아마도..."

"중국의 군단장 레이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겠군요."

"그렇습니다. 군단장이 땅을 지배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악마의 힘은 증대하고 영역은 확장되죠. 그리고 땅은 오염되어 변질합니다. 예를 들어 북한의 땅에서는 작물이 잘 자라지 않더군요."

"정화되었다고 들었는데..."

"뿌리 깊은 땅속까지 정화가 되지는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물론 그게 단점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북한의 땅 깊은 곳에서 특수한 광물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아직은 밝힐 수 없지만, 특수한 작물을 발견하기도 했고요."

변질된 광물과 작물.

이게 이롭게 작용할지 어떨지는 어떻게 사용하기에 달렸다.

"광물에 대한 부분은, 다음에 따로 이야기를 하도록 하고 우선은 그를 데려와야 이야기가 진행될 겁니다."

이에 바바리안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데몬시드는 걱정할 거 없을 겁니다. 군단장 세 마리가 나타나도 그놈은 알아서 빠져나올 테니까."

이상하게 걱정이 되지 않는다는 점은 협회 랭커들 전부 동의하는 바였으나 정부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고자 했다.

"만일, 그가 실종... 또는 전사하게 될 경우 대한민국의 대표로서 나설 네피림은 누가 되겠습니까."

자연스레 랭커들의 시선이 관찰자에게 모였지만 그의 눈은 강철 군주에게로 향해있었다.

*

카이삭스.

한참 성장하기 시작할 무렵. 하나의 스킬을 얻고 난 후, 나는 한 번도 그 이름을 잊어본 기억이 없다.

스킬의 이름은 카이삭스의 표식.

카이삭스란 자가 누구인지, 어떤 싸움을 고집하던 자인지 명확하게 알려줬기 때문이다.

〈세트〉 「카이삭스의 표식 +1」 (Epic)

-마창사로 이름 높은 카이삭스가 생전에 남겨놓은 다섯 개의 카이삭스식 마창술 중 하나.

〈미리 새겨 놓는 표식을 통해 번개 속성의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다.〉

〈번개 내성 10%〉

*〈라이트닝 노바〉

(소모 값: 총량의 5%)

*〈카이삭스의 초급 창술+1〉

-카이삭스의 정수가 담긴 창술.

〈강력한 창술〉

-창술 추가 피해 30%

〈창술 숙련〉

-창술의 숙련도 50%

지금도 자주 사용하는 스킬.

카이삭스의 표식이라는 스킬의 진정한 주인.

그게 바로 카이삭스였으니까.

'단순히 동명이인은 아니겠지.'

스킬의 기억에서 봤던 카이삭스의 마지막 모습은 수 개의 창을 등에 짊어지고 외롭게 싸우는 전사였다.

그런 그가.

어째서 군단장이 되었을까.

미칠 듯 궁금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내게 여유는 없었다.

"사, 살려줘! 살려줘어어!"

"제발, 제발!!"

"아아아악!"

철컥, 촤악! 후두둑!

인간이 학살당한다.

검은 갑옷.

검푸른 기운을 넘실거리는 창을 든 기병들이었다.

[질책의 기사]

"개씨발 놈들! 죽어!!"

도망치던 중국 네피림 하나가 마법 책을 펼치며 불꽃을 발사했다.

직업형 기프트 중 하나인 소서리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질책의 기사라 쓰여진 자는 불꽃에 맞기도 전에 창을 투창해서 그를 찔러 죽였다.

"컥!!"

빨랐다.

'반응속도가 빨라.'

네피림이 책을 펼치고 마법을 쓰기 시작할 때 반응해서 던졌다.

다른 녀석도 마찬가지다.

질책의 기사 한 마리를 둘러싸며 공격 중임에도, 꽤 멀리서 원거리 사격을 가하는 상대의 공격을 정확하게 반응해서 투창했다.

마치 원거리 공격에만 반응하는 스킬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차원의 균열이 생기고 카오스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악마의 대부분은 검푸른 기운을 흘리는 기사 타입.

[질책의 기사]

[파동의 기사]

[표식의 기사]

질책과 파동, 그리고 표식이었다.

'카이삭스의 마창술은 다섯 개라고 쓰여져 있었지.'

그가 군단장이 된 지금.

그의 힘을 받은 악마들은 기사로 거듭나 각각의 마창술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게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저희 어떡합니까!?"

"도망쳐야지."

그때였다.

타오가 겁에 질려 소리치자 그걸 듣고 표식의 기사가 다가왔다.

-히이이잉!

놈이 탄 말이 앞발을 들며 투레질을 하는 것과 동시에.

놈이 창을 던졌다.

검고 단단한 기사의 창.

"우왁!"

벙쪄있는 타오를 밀치자 놈이 있던 곳으로 정확하게 창이 꽂혔다.

쾅-!!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표식의 기사.

그 이름에서 예상되듯.

파직!

놈은 타고 있는 말과 함께 창이 있는 곳으로 전이했다.

검푸른 스파크와 함께 벽에 꽂힌 창을 뽑아 겨누는 놈을 바라보며, 난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날 상대하던 놈들 기분이 어땠을지 이제야 공감이 되네."

상대해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으나 그보다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도망... 큭."

내 품에서 의식을 잃은 미룡.

그녀부터 살리고 봐야 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지체할 시간이 없다.

지금만 해도 균열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고 쏟아져 나오는 카이삭스의 기사들은 늘어나기만 한다.

학살되는 중국인의 숫자는 어마어마하게 많을 정도.

'상황이 좋지 않아. 언제 군단장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다.'

콰아아아앙-!!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

아니나 다를까, 챔피언급 악마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겨우 창을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주변을 모조리 반파시켰다.

순간이동을 밥 먹듯 사용하는 걸 보니, 저 괴물은 여러 가지 마창술을 익힌 듯 보였다.

이 상태에서 군단장이라도 나타났다간 상황이 꼬일 대로 꼬인다.

챔피언까지 나오는 걸 보면 군단장이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

'중국은 끝났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이곳이 하얼빈이라는 것. 홍콩이었으면 큰 낭패를 입을 뻔하기도 했다.

하얼빈은 그나마 백두산과 크게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니까.

"우, 우리는 같은 편이다! 이러지 마! 난 악마 숭배자라고!!"

타오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놈을 죽이려던 표식의 기사가 이내 고개를 갸웃하고는 창을 내 쪽으로 겨누기 시작했다.

"죄, 죄송! 죄송합니다!! 으아악!"

타오는 날개를 펼쳐 도망가기 시작했고 기사들은 미룡을 안고 있는 내게로 다가왔다.

"악마 숭배자라고 봐주는 거냐. 이러면 안 되는데 좀 부럽네."

지금만큼은 타오가 부러웠다.

웬만하면 조용하게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

[파동의 기사]

콰아아앙-!! 쿠우웅!!

파동의 기사가 날 향해 파동을 흩뿌렸다.

창으로 바닥을 찔렀을 뿐인데 주변 일대가 모조리 부서졌다.

"카이삭스의 파동이 회복력을 감소시킵니다."

파동.

창에 담긴 파동의 힘이 이러한 효과를 보인 듯했다.

파직!

동시에 표식의 기사가 내 쪽으로 순간 이동하며 일창을 찔렀다.

난 급하게 놈의 창을 피하며 카탈린의 벼락을 일으켰다.

콰광-!!

벼락에 맞은 녀석과 함께 연쇄 번개가 주변으로 퍼졌다.

철컥.

"이걸 버텨?"

챔피언급도 아니고 그냥 군단에 속하는 악마가 내 벼락을 버틸 줄이야.

놀랍다.

놈들이 흘리는 검푸른 기운과 갑옷 때문으로 보였다.

"카탈린의 벼락 +1을 시전합니다."

"연쇄 번개가 퍼집니다."

표식의 기사는 자기가 새겨둔 표식으로 이동했고, 파동의 기사는 내 벼락 세대를 더 맞고서야 쓰러졌다.

"중국, 망할 만했네."

이만한 기사들이 일반적이라면 중국은 물론이요, 다른 나라들도 멸망할 수밖에 없다.

"파동의 기사를 처치하였습니다."

"대량의 경험치와 금화를 획득합니다."

"부서진 마창 갑옷을 획득합니다."

"파동의 마창을 획득합니다."

「파동의 마창」

-카이삭스의 군단 소속 창기사에게 주어지는 파동의 마창.

〈치명적인 관통〉

-추가 관통력 60%

〈카이삭스의 파동〉

-파동을 창끝에 집중시켜 강력한 파동과 50%의 회복 감소를 부여한다.

-착용 제한-

〔카이삭스의 마창술〕

옵션 자체는 나쁘지 않다.

카이삭스의 파동.

카이삭스의 마창술을 익히고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장비 스킬.

어쩌면 진즉 내가 얻었어야 할 스킬일지도 모를 녀석을 보며 난 묘한 감정을 느꼈다.

-히이이잉!

하지만 감성에 젖어 있을 시간을 놈들은 내게 주지 않았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몰살당하고 있고, 중국의 땅은 더욱 진득한 악의 기운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표식의 기사가 날 향해 말을 타고 돌진했다.

아까 도망쳤던 녀석이었다.

파직! 표식으로 또다시 전이한 녀석이 내 등 뒤에서 창을 찔렀다.

창의 담긴 힘과 마력은 이전보다 더욱 강화되어 있었다. 서서히 중국의 땅이 악으로 물들어가기 때문이리라. 놈들은 이 땅의 버프에 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니.

"너만 표식을 쓸 거라 생각 마라."

파직!

찔러오는 놈의 창을 나 또한 표식으로 피했다.

"카이삭스의 표식 +1을 시전합니다."

"라이트닝 노바가 전개됩니다."

촤자자자자자작-!!

"표식의 기사가 라이트닝 노바로 감전됩니다!"

"감전으로 인해 경직됩니다!"

"파동의 마창을 착용합니다!"

"카이삭스의 파동을 시전합니다!!"

우우웅-!!

창끝에 모인 파동.

'아.'

어떤 방식인지 알 거 같았다.

표식과 다르면서도, 고유한 기술적 흐름이 존재했다.

표식에 접목된 기술의 이론이 파동에도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었다.

그 흐름을 따라 파동을 창끝에 담았고 표식의 기사를 찔렀다.

콰아아아아앙-!!

찌르자마자 표식의 기사는 온몸이 분해되어 터졌고 일대가 파동의 흐름으로 뒤덮여 충격파가 발생했다.

"카이삭스의 표식이 파동의 흐름을 느낍니다!"

"세트 스킬의 인연이 당신을 이끌고 있습니다."

"카이삭스의 파동을 1,000,000번 사용하면 온전한 스킬을 체득합니다."

"근력과 마력의 수치가 높습니다."

"능력치의 보정으로 카이삭스의 파동 10,000번으로 줄어듭니다."

「카이삭스의 파동 1/10,000」

-횟수를 전부 채우면 카이삭스의 파동을 온전히 체득합니다.

"... 지리는데."

누군가 그랬다.

위기라는 씨앗 속에는 언제나, 기회라는 꽃이 피어나기 마련이라고.

지금의 내게 딱 맞는 말이었다.

중국 멸망 [1]

188화.

카이삭스의 파동.

파동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챈트 개념에 가까운 스킬이었다.

창끝에 파동의 힘을 집중시키고 창으로 공격을 가하면 발동되는 종류였는데, 그 범위와 파괴력은 얼마나 오래 힘을 집중시켰느냐가 관건이었다.

『카이삭스의 파동 126/10,000』

-횟수를 전부 채우면 카이삭스의 파동을 온전히 체득합니다.

파동의 기사가 떨어뜨린 파동의 마창은 평범한 네피림에게는 그냥 조금 튼튼한 창에 불과할 뿐일 테지만 내게는 달랐다.

"만 번 채우기도 좀 시간이 걸리겠어. 그냥 쓰는 것도 아니고 적에게 피해를 입혀야 횟수가 체크되니까."

그냥 사용만 해도 되는 거라면 허공에 대고 몇 번이고 사용했겠지만, 적에게 피해를 입혀야만 횟수가 체크되는 식이라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물론 시간문제일 뿐이다.

파동뿐만이 아니다.

카이삭스의 파동 횟수를 채우며 기사 몇 놈을 잡다 보니 질책의 기사가 떨어뜨린 창까지 획득했다.

[질책의 마창]

-카이삭스의 군단 소속 창기사에게 주어지는 질책의 창.

〈치명적인 관통〉

-추가 관통력 60%

〈카이삭스의 질책〉

-사정거리 안의 적의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200% 물리 피해력으로 반드시 반격한다.

-착용 제한-

〔카이삭스의 마창술〕

이 또한 파동과 마찬가지.

『카이삭스의 질책 126/10,000』

-횟수를 전부 채우면 카이삭스의 질책을 온전히 체득합니다.

스킬 시전 횟수만 채우고 나면 온전히 습득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질책은 시전 스킬이라기보다는 패시브적인 스킬이다.

창을 쥐고만 있으면 적의에 반응해 자동반사적으로 반격하게 되는 스킬인데,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악마들을 상대하기엔 최적의 스킬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 손에는 한쪽엔 파동, 한쪽에는 질책의 창이 쥐어져 있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카이삭스의 기사들을 상대로 최대한 감각을 높이며 지금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내가 필요한 휴식은 아니었다.

미룡 때문이었다.

"..."

몸의 상처는 이미 치료했다.

신성력을 기반으로 힐링을 사용하자 상처의 대부분이 아물었다.

회복력 감소 디버프가 짙게 깔려 있어서 회복하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지만 말이다.

덕분에 미룡이 입은 상처들로 하여금 전투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미룡의 상처는 꽤 심각했다.

전신 타박상과 골절.

그리고 절단된 부위들도 꽤 많다.

미룡의 기프트인 꼬리 부위는 어차피 다시 돋아날 테니 상관없었지만 다리나 팔 부위가 문제였다.

발목은 쥐어뜯기라도 한 듯 발이 사라진 상태이었고, 오른쪽 손가락 중지와 검지. 그리고 왼쪽 팔뚝 아래로는 반듯하게 잘려져 있었다.

복부와 가슴 부근의 관통상이 여럿 있었는데, 난 이것들이 창에 의한 관통상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파동으로 인한 상처라는 것도 말이다.

"파동의 '분해'로 인해 힐링의 회복률이 70% 감소합니다."

''분해'라는 디버프 때문에 회복률이 감소해 회복까지 더뎌.'

평범한 붉은 성수로는 어림도 없다.

내 신성을 모두 쏟아부은 힐링으로도 상처의 회복이 더디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만 같은 기분. 게다가 내 힐링으로는 잘려 나간 팔다리를 회복시킬 수도 없다.

'한국으로 데려가야 해.'

메이한테 데려가 팔과 다리를 수복시켜야 했다. 그리고 몸의 회복을 위한 다른 조치가 필요하다.

솔직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다.

"미룡이 아니라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맞아. 지금 중국은 너무 위험하다."

그냥 일반적인 악마들도 돌아다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카이삭스의 기사들이 배회하고 있다.

그리고 저 곳곳에 꽂혀진 거창.

비스듬히 꽂힌 거대한 창의 끝에는 사람 하나는 올라가도 충분한 공간이 있다.

그곳에는 '반전의 기사'가 존재했는데 녀석은 기계처럼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들에게 투창했다.

놈의 창을 맞은 중국인들은 모두 균형을 잃고 넘어지며 움직이질 못했다. 조금만 스쳐도 몸을 가누지 못했는데 아직까지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내지 못했다.

'관찰자가 있었다면 달랐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법.

투창의 기사가 보여주는 사정 범위는 꽤 넓어서 비행 스킬이나 기프트가 있는 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들은 공중으로 날아가는 자들을 우선적으로 투창하니 나 또한 그루트로 날아가기 어렵다.

혼자도 아니고 정신을 잃은 환자를 업고 가야 했으니까.

그렇다 보니 현재는 폐건물 안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고, 거리를 배회하는 카이삭스의 기사 놈들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다.

"몸이 또 차가워졌나."

여름의 계절이 지나 가을이 왔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악으로 물든 땅은 삭막하며 서늘하여 기온이 꽤 낮았다.

어비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지만, 상처 입은 환자에게는 꽤 추운 기온이었다. 난 미룡을 뒤에서 안은 채로 건물 벽에 기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브란스한테 붉은 성수를 맡기지 말 걸 그랬군."

+5 합성 붉은 성수라면 이 디버프를 뚫고 미룡을 회복시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악과와 성수를 이용한 실험에 착수한다고 하기에 있는 걸 전부 내어줬더니 아쉬움이 생겼다.

숲의 현자라 칭하는 브란스니까 이번에도 또 대단한 걸 만들어내겠지 하는 생각에 내줬었다.

어차피 난 신성 스킬인 '힐링'이 있었으니, 붉은 성수의 존재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기도 했고 말이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봤자 의미가 없지만 자꾸만 아쉽다.

미룡이 제정신만 차렸어도, 몸이 회복되기만 했어도 중국을 빠져나가는 건 조금 수월할 텐데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미룡을 살리는 게 먼저다.

"너까지 죽지 마라. 미룡."

악과를 잘게 씹어 미룡의 입 안에 넣어주고는 한숨을 뱉었다.

그녀와의 친분도 친분이지만 카오스 게이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미룡은 살아야 한다.

13군단장 카이삭스.

그에 대해서도.

철컥, 철컥.

카이삭스의 기사다.

요 몇 시간, 놈들과 싸우며 계속해서 도망 다녔지만, 이상하게 놈들은 내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냈다.

아마도 파동 때문이겠지.

카이삭스의 기사들은 대체로 파동, 진동이나 울림에 민감하다.

생물은 기본적으로 살아있는 것 자체로도 진동을 발생한다.

날숨과 들숨에서 나타나는 파동과 심장의 고동 소리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쾅-!!

"씨발."

놈들은 내가 아무리 숨어 있어도 이렇게 잘 찾아내 버린다.

기댄 벽 뒤에서 튀어나온 창날에 어깨를 긁혔다.

"파동의 창날에 피격당해 회복률이 50% 감소합니다."

"디버프 '분해'가 활성화됩니다."

「분해」

-자연 회복률 50% 감소, 상처 치유량 최대 70% 감소.

그와 동시에 나 또한 공격한다.

"질책의 창이 반응합니다."

질책의 창으로 인한 자동 반격.

나도 모르게 뻗어나간 일창은 기사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다.

퍽!

동시에 오른손으로 쥐었던 파동의 창 또한 놈의 복부를 향한다.

콰아아앙-!!

폐건물이 깔끔하게 무너졌다.

파동의 힘이 실린 창의 일격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파괴력이 높았다.

"벌써 쫙 깔렸나."

후두둑.

벽을 부수고 나왔더니 벌써 기사들이 도처에 쫙 깔린 상황.

투창을 하려는 자들과 말을 타고 달려들려는 놈들, 그리고 저 멀리 거창 위에서 날 주시하는 놈까지.

내가 아무리 지옥의 유명인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

"사인 말고 다른 건 좀 곤란한데."

수는 어림잡아 칠십.

하지만 기사 하나하나가 체감상 10레벨을 능가하는 힘을 지닌 놈들.

[카이삭스의 기사 대장]

그 속에 챔피언도 섞여 있다.

도망만 다니기엔 어려워 보였다.

"몸 사릴 때가 아니란 거군."

혹시나 군단장이 나타날까 최대한 몸을 사렸지만, 이 정도로 몰려왔다면 어쩔 수 없다.

이제는 승부수를 띄워야 할 차례.

"헤일로를 활성화합니다."

"시드로긴을 발동합니다."

"파동의 기사의 데몬시드를 섭취합니다."

"파동의 기사의 잠재력을 일시적으로 78% 발휘합니다."

"아토믹시드의 숙성도가 1% 상승합니다."

"신의 사자로 모든 능력치가 300% 증가합니다."

"블리자드 +1을 시전합니다."

「블리자드」 (Fusion)

-데몬시드로부터 합성된 마법. 빛조차 얼릴 눈보라로 범위 내의 적을 모조리 얼어붙게 만든다. (관련 마법의 보유 수에 따라 대미지가 강화)

「프로스트 노바」

-눈보라 속, 눈송이 하나하나에 프로스트 노바가 깃든다.

「스노우아머」

-눈과 노바는 냉기 내성을 올리고 쌓이면 쌓일수록 단단하게 뭉쳐 당신을 보호한다.

진즉 시전해둔 블리자드의 얼음조각이 놈들을 덮친다.

콰쾅! 콰아앙-!

우박이 떨어짐과 동시에 연쇄적으로 터져나가는 프로스트 노바.

웬만한 악마들은 이것만으로도 모조리 죽을 만큼 강력하지만, 이곳의 놈들은 다르다.

악의 땅으로 한껏 버프 된 놈들은 고작 블리자드로 죽지 않는다.

"스노우아머 중첩 52"

스노우아머의 중첩을 높이고 방어력을 상승시킴과 동시에.

"리버슬로우 +1을 시전합니다."

리버슬로우 발동.

「리버슬로우 +1」 (Unique)

-대상이나 공간의 흐름을 느리게 한다.

〈강력한 둔화〉

-지닌 마력에 비례하여 기본 둔화에 더해 추가적으로 +30% 둔화된다.

"적들이 둔화 저항에 실패합니다."

"빙결과 함께 둔화에 이점이 부여됩니다."

"적들이 발이 동결됩니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은 붉은 벼락으로 치닫는다.

"카탈린의 뇌신 +1을 시전합니다."

악마의 눈물 열매로 강화시킨 카탈린의 뇌신이었다.

「카탈린의 뇌신 +1」

-신체에 뇌가 깃든다.

〈불온〉

-불안정한 전류가 신체를 지배하여 모든 공격을 3초 동안 회피한다.

〈뇌신〉

-이동 속도 +300% ▶+500%

모든 번개 속성의 피해 100%▶200% 증가.

*〈역뢰〉

-뇌신이 된 채로 지나는 거리마다 역뢰가 치솟아 오른다. (번개 피해력 비례.)

(소모 값: 체력의 30%)

(지속시간: 10초 ▶30초)

거기에 더해.

"카탈린의 뇌격 +1을 시전합니다."

「카탈린의 뇌격 +1」

-아주 강력한 벼락을 연이어 떨어뜨린다.

*한 번의 소모마다 24번의 뇌격을 떨어뜨리고 〈치명적인 관통〉 〈통렬한 번개 피해〉 〈매우 강한 출혈〉 피해를 입힌다.

(소모 값: 400 H+M)

"카탈린의 뇌령을 시전합니다."

"기시기시의 뿔 지팡이에 내장된 라이트닝 오브를 시전합니다."

마나가 순식간에 2/3가 털렸다.

하지만 아직이다.

"벨로나의 굴레를 소환합니다."

"성역을 펼칩니다. 적들은 달아날 수 없습니다."

"거짓의 여제가 소환됩니다."

"악익 '공포의 나래'를 펼칩니다."

"블루헬을 소환합니다."

이 감각.

티타누스 때가 마지막이었던가.

모든 힘을 사용하는 일이 잘 없다 보니 묘한 희열마저 느껴졌다.

"한번 해보자고."

*

같은 시각.

대한민국의 청와대.

그 건물 앞으로 랭커들이 모였다.

제일 먼저 익숙한 얼굴은 베트남.

베트남의 만트라였다.

만트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10위권 내외의 랭커들.

그 옆에 오스트레일리아.

즉, 호주의 랭커들이 있었고 옆에 러시아의 화이트가 있었다.

"독일도 왔군."

독일의 레이지를 비롯한 이집트의 팔콘, 프랑스의 레온. 영국의 마스크.

일본의 머큐리와 브라질의 윈드킬.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합 레벨 1위.

미국의 메트리까지 등장했다.

총 열다섯 개의 국가 랭커들이 모여 있는 대한민국의 청와대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환영합니다. 랭커 여러분!"

대통령이 직접 그들을 환대했다.

레드카펫까지 깔고 대통령이 직접 나와 그들을 환영했지만.

미국의 1위, 메트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하며 대통령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신경 쓰지 않았다.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대통령이 묻자.

그가 단조롭게 답했다.

"데몬시드. 그는 어디 있지."

데몬시드.

그 이름을 듣자마자 대통령의 안색이 어색하게 바뀌었다. 변화를 눈치챈 메트리가 무어라 말하려던 그때.

-!!

먼 하늘에서부터 천지개벽할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아악!"

"뭐, 뭐야!!"

"저건..."

"저게 뭐지?"

"흐흐, 난리를 치고 있구만."

어느새 북쪽의 하늘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데몬시드의 위치는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데몬시드."

그는 저기 있었다.

중국 멸망 [2]

189화.

수천 개의 벼락이 내려치는 하늘.

미국 1위.

메타르는 본능대로 행동했다.

이곳은 타국이고 미국의 대표로서 지켜야 할 예의나 태도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지금 느끼는 감정.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고자 했다.

"타르!"

같은 미국 랭커가 메타르를 불렀지만, 그는 자신의 몸을 허공에 띄웠다.

떠오르는 검은 사철과 함께 콰직! 날아오른 그는 붉은 벼락이 내리치는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나 참."

"말릴 새도 없네."

하지만 그건 메타르 뿐만이 아니었다.

"야! 머큘! 머큐리 어디가아!!"

일본의 1위 머큐리도 헤일로를 띄우고는 온몸이 은색의 무언가로 변하더니 대단히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미국과 일본이 그렇게 사라지자 다른 랭커들도 마찬가지였다.

관심 없다는 나라도 몇몇 있었으나 대부분은 강 건너 불구경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앞다투어 날아갔다.

상황이 그리되자 대한민국의 네피림들도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자리를 지켰지만, 저들이 저렇게 가버렸다면 자신들도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었다.

척.

그건 물론 강철 군주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잡은 사내가 있었으니.

"관찰자."

관찰자였다.

"당신은 지금, 대한민국의 대표입니다."

데몬시드가 자리를 비운 지금.

강철 군주는 대한민국의 대표 격 랭커로 선정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강함.

다양한 전투에서 제한적이지 않으며 가능한 최대의 강함을 표출할 수 있는 전사. 관찰자의 기프트로 봤을 때, 그게 가능하며 가장 강한 랭커는 대한민국에서 데몬시드를 제외하면 강철 군주가 제격이었다.

"그건, 감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데몬시드가 메시지까지 무시하고 이렇게 오랜 시간 있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에 휘말렸다는 것이니!"

랭커들의 쪽지에도 데몬시드는 답이 없었다.

이제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이번 군단장이 점령한 중국의 땅은 메시지가 닿지 않는 환경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서라도 작금의 상황을 보노라면 데몬시드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으니까.

강철은 자신을 말리는 관찰자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말리는 게 아니다."

하지만 관찰자는 강철 군주를 말리려고 손목을 잡은 게 아니었다.

그는 강철에게 포탈 스크롤을 넘겨줬다.

"백두산 인근의 좌표가 기록된 포탈 스크롤이다. 굳이 날아갈 필요 없어. 포탈을 타면 되니까."

"아."

"상황이 바뀌었다. 이미 다른 랭커들한테도 전한지 오래야. 너도 가라. 이곳은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알겠다!"

사라지는 강철을 바라보며 관찰자는 망연자실해 있는 대통령과 남아있는 각국의 정부 측 인사들을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협회장님은 괜찮겠지. 그분이 잘못되면... 미래는 없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