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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화이트 [1]

170화.

타닥, 타닥.

임시 캠프의 한쪽.

모닥불의 열기를 쬐며 휴식을 취하며 누워 있는 한 여자를 바라봤다.

'화이트.'

러시아 1위 화이트.

금발의 새하얀 피부. 이국적인 외모임에도 그녀의 얼굴은 썩 기억하기 편했다. 미간에서부터 볼까지 이어지는 얼굴의 흉터가 꽤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외적인 것을 제외하더라도, 나와는 좋은 말로도 좋다라 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소문으로는 헤일로를 얻었다고 들었는데."

왜 거기 쓰러져서 미끼로 쓰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미끼로 쓰여서 죽지 않았으니 명줄이 길기는 길다.

"후우, 그 아가씨는 아직도?"

"응. 뭔가 찾았나."

"놈들 소굴이 있었어. 뭐... 대충 예상하다시피 전멸한 거 같더라고."

"뼈밖에 없었어요."

"놈들이 먹고 싸놓은 배설물에도 흔적이 꽤 있었다. 아마 살아남은 사람은 없겠지."

아마도 러시아 파티는 전멸.

살아남은 건 러시아 1위.

화이트뿐이었다.

"안 일어나나?"

"일어날 때가 됐다."

힐링으로 치료는 전부 했다.

남은 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

"그냥 데리고 가는 게 좋지 않아?"

베이스캠프를 말했다.

이곳은 헬둠 소굴 근처의 임시로 만든 캠프다.

얼어붙은 벽을 파고들어 와서 임시로 만들어진 캠프다.

바바리안이 만든 베이스캠프까지는 거리가 꽤 멀고, 아무리 같은 사람이라도 러시아 1위를 그곳으로 들이는 건 조금 꺼려졌기 때문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모든 이의 죽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화이트를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를 상황 아닌가.

'애초에 그녀와 나는 사이가 썩 좋지 않으니까.'

그녀가 날 좋게 보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안다.

이전 1위.

가면소드 때문이다.

오해로 비롯되어 악연이 되었다.

사정을 설명한다면 오해를 풀 수 있으리라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난 굳이 그러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왜곡해서 듣는 그때의 화이트에게 구구절절 설명해봤자 믿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굽힌다면, 러시아가 굽혀야지 내가 왜 굽히는가.

애초에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런 이유로 악연으로 발전했다.

'지금도 딱히...'

사적으로는 오해를 풀 이유가 없다.

하지만 우린 사적으로만 엮이는 관계가 아니다.

공적으로 러시아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얼굴들이니 개인적 원한이 있어서 좋을 게 없기도 하다.

'원한이랄 것도 아니지만.'

이러나저러나 떠들어봤자, 깨어나는 그녀의 상태를 보고 판단해야겠지.

"그래도 그렇게 할라고... 우리가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잖아? 사람이면 그렇게 못하지. 암!"

"그건..."

"모르는 일이다. 화이트의 입장에선 헬둠이나 우리나 똑같아 보일지도 모를 테니까."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난 강철의 말에 한 표를 건넸다.

화이트 입장에서는 우리나 헬둠이나 똑같은 적일지 모른다. 일행을 잃고, 자기까지 죽을 뻔한 상황.

목숨이 구해졌으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겠지.

솔직히 똑똑하다면 한껏 굽히겠지만, 조금 멍청해서 감정이 앞서나간다면 난리를 피울지도 모른다.

"사람 새끼면 그건 아니지... 구해줘서 고맙다고 발등에 뽀뽀를 갈겨도 모자랄 판에."

그때였다.

화이트의 눈이 스르륵 떠졌다.

그리고 그 즉시 주먹이 날아왔다.

턱,

"목숨을 살려줬는데 주먹부터 날리는 건 어느 나라 관습이냐."

아니나 다를까 화이트는 내게 주먹부터 날렸다.

"놔!"

"묻는 말을 답부터 해라."

우드득!

손목을 꺾어버리자 고통에 찬 비명을 흘렸다.

"빌어먹을 새끼! 이거 놓으라고!"

"귀찮게 하기는."

"고행의 빛을 시전합니다."

단숨에 고행의 빛 5 중첩을 때렸다.

시각과 청각을 비롯한 감각이 사라지자 화이트는 제자리에서 버둥대기 시작했다.

"저거 그거지? 안 보이고 못 듣고 말도 못 하고 감각도 못 느끼는."

"끔찍하네요..."

그 모습을 보며 바바리안과 아마존은 안쓰러워했으나 강철은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하루 이틀은 저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제 처지를 모르는 녀석에겐 적당한 벌이야."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오래 끌 필요는 없다.

난 잠시 뒤, 고행의 빛을 취소시키고 화이트에게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

그제야 놈은 소릴 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입을 열지도 않았다.

"오감이 사라지면 네가 죽는지 아닌지도 모를 거다. 여긴 헬둠이 꽤 많은 지역이니 어쩌면 네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겠지. 말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널 도울 사람도 이곳엔 없겠지만."

이내 자리를 떠나려고 하자.

"잠깐만!"

화이트가 미끼를 물었다.

"내 동료들은 어딨지!?"

"이봐 아가씨. 어딨겠어?"

바바리안이 답답하다는 듯 말하자 화이트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아랫입술을 씹어 삼키는 걸 보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거 같았다.

물론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날, 어떻게 살렸지...?"

이제야 좀 상황 파악이 됐는지 두 팔을 눈 쪽에 올리고 물었다.

"전부 죽였으니까."

"그렇구나. 다 죽였구나..."

화이트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일어나 고개 숙였다.

"고마워."

"고맙다면 말해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걸로 충분하다면."

이윽고 화이트가 지난 일을 말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경청했다.

"우리가 있던 베이스캠프는 작은 마을 하나를 끼고 있는 곳이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티블의 마을이지. 그곳에서 상단 하나를 추적했다. 목적지는 바르바제. 알두바드라는 자가 군림하는 철의 요새라 불리는 곳에."

상단.

그러고 보니 아까 헬둠의 배를 갈랐더니 티블의 시체 하나가 나왔는데 아마도 그게 화이트가 따라나선 상단 일행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잡다한 걸 모으고 있었는데, 그중 미믹을 모으더군. 왜 그러는지는 나도 몰라. 어비스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고, 놈들이 운송하는 물건들이 탐나서 따라나섰을 뿐이니까."

그게 저들의 패착이었다.

"한순간이었다. 헬둠 떼가 나타났고 상단이 털렸어. 처음엔 잘됐다고 생각했지. 저놈들이 원하는 건, 티블의 살이었으니까. 악마가 악마를 잡아먹는다며 고소해했지."

그렇기에 방심했다.

"바르바제의 전사들이 나타났다. 미스릴로 무장한 전사가 헬둠 무리를 쫓아내더군. 그것도 우리 쪽으로."

덕분에 러시아는 헬둠 무리들로 인해 뒤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악수였다.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투는 갈수록 길어졌어. 생각보다 놈들의 수가 많았고 자꾸 은신해버리는 바람에 지지부진한 소모전으로 전투는 늘어질 수밖에 없었어."

눈 덮인 숲속의 추격전은 러시아보다 헬둠에게 더 유리했다.

마지막으로는 헬둠 킹 올라의 등장으로 균형이 무너지며 전멸.

'뭔가 이상하군.'

아무리 그런 상황이라고 해도 러시아 랭커들과 헤일로도 지닌 화이트 파티가 헬둠들로 인해 전멸?

뭔가 미심쩍었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아마존과 강철 군주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존으로부터 메시지]

-반은 거짓말 같아요.

[강철 군주로부터 메시지]

-거짓이 섞여 있을 거다.

[바바리안으로부터 메시지]

-화이트 너무 불쌍한데 좀 도와줄까? 이뻐서 그러는 건 아님.

"..."

내 생각도 비슷하다.

거짓말이라기보다는, 뭔가를 감추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한테 알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신들의 치부이거나.'

엄청난 이득이 될 정보거나.

둘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하나 묻고 싶다. 진지하게 답해주기를 바라."

"뭐지."

"왜, 러시아를 배신한 거야."

배신?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서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나 난감하던 찰나.

나보단 바바리안이 먼저 나섰다.

"배신은 뭔 배신! 배신은 너네가 했지! 자기 랭커 버리고 냅다 도망간 놈들이 누군데! 배신은 우리가 당했다고!!"

"러시아가 그럴 리 없다!! 그는 러시아의 1위야! 어떻게 그를 버리고... 너희는 또 거짓말을...!"

"뭐?! 거짓은 개뿔이...!"

난 바바리안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 데몬시드!"

"됐어. 믿지도 않을 말을 해 봤자 네 입만 아플 뿐이다. 그리고 너."

난 화이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처신을 똑바로 해라. 가면소드는 너처럼 방황하지 않았다."

"!!"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고 있는 남자였다. 네가 하는 건 그저 화풀이일 뿐이야. 두 눈과 귀를 가려봤자 네게 돌아오는 건 없다."

뭔가를 감추고 있다. 하지만 굳이 캐낼 필요는 없겠지.

알아내면 그만이니.

뒤돌아 떠나려는 찰나.

화이트가 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마지막은 어땠지?"

그.

아마도 그녀가 말하는 그라는 자는 러시아의 전 1위.

가면소드를 말하는 거겠지.

'마지막이라...'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다.

그와 했던 대화. 그의 웃음소리.

그리고 스스럼없던 마지막까지.

미숙했다. 하지만 우리의 미숙함이 있었기에, 그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린 성장했다.

화이트는 물었다.

가면소드의 마지막이 어땠냐고.

내가 답할 건 하나였다.

"그는 우리의 영웅이다."

"그런가..."

화이트는 아이처럼 울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 우린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녀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마치 이곳에 없는 그를 추모하는 것처럼.

*

화이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울다 지쳐 쓰러지고 일어났을 때였다.

밤새 울다 지쳐 쓰러진 다음 날.

"다니엘. 아니, 가면소드는 내 형제였어."

"... 그랬군."

화이트는 가면소드의 동생이었다.

어쩐지 심하게 가면소드에 대해서 예민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가 그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보 같은 오빠는 그날도, 위험하다며 나를 떼어놓았지. 난 그때 랭킹 14위였거든. 위험한 곳으로 가는데도 이상하게 즐거워 보였어."

그때는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알 거 같아. 한 번씩 피식거렸거든. 싸울 때 말고는 웃지 않는 오빠가, 채팅하면서 웃고, 바보처럼 낄낄거렸지."

미룡과 나와의 채팅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는 나도, 미룡도 즐거웠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각 나라의 랭킹 1위로서... 우리는 각자의 가면을 쓸 수밖에 없었으니까.

"허풍쟁이가 있다면서... 이 녀석을 돌봐야 하니 난 러시아에 처박혀 있으라고는 말했지. 친동생보다 더 돌볼 사람이 누구였을까. 넌 아닐 텐데. 역시 그 중국의 미룡인가 하는 여자일지도."

"... 그거 나다."

그 시절에는 내가 레벨도 낮고 하니 놈들이 막둥이라며 놀려댔었다.

"네가? 의외네."

"그때는 레벨이 낮았거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었지."

화이트가 쓰게 웃었다.

"... 데몬시드. 미안했어."

"알면 됐다."

그녀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서는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면소드의 친동생이라 하니 나는 그녀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도 의지하던 가족이 억울하게 죽었다면 그렇게 분노했을 테니까.

"용서해달라고는 안 하겠어. 대신... 내가 아는 걸 말할게."

"뭘 말이냐."

"바르바제의 알두바드. 놈은 아다만티움을 제작하고 있다."

화이트의 눈이 번득였다.

"미믹은 그것을 위한 핵심 재료야. 그리고, 또 하나의 재료를 놈은 모으고 있다."

그것은 바로.

"네피림. 놈은 네피림을 잡아들이고 있어. 우린 상단이 지닌 물건이 탐나서 쫓은 게 아니야. 놈들에게 납치당한 러시아 네피림들을 찾기 위해서 놈들을 쫓았던 거다."

"... 그럼 설마."

화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일 뿐이지만... 놈들은 네피림을 아다만티움의 재료로 쓰려는 거 같다."

네피림을 아다만티움의 재료로?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아다만티움은 나도 가지고 있다.

이런 광물을 직접 만드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재료로 미믹과 네피림이 들어간다니.

솔직히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어. 하지만 내 측근들이 놈들에게 붙잡혀 갔다는 건 사실이야."

"그러니까..."

화이트의 말은 이러했다.

"도와달라는 거냐."

"..."

"구할 방법은 있고?"

"... 그것도 딱히."

"알겠군."

가면소드가 푸르푸르전에서 동생을 떼놓고 간 이유.

이제야 알 거 같았다.

"화이트. 네 헤일로 능력은 뭐지."

"그건 왜..."

"도와달라며."

그녀의 기프트는 눈을 내리는 것.

눈송이 하나에 무게감이 깃들고 적에게 달라붙어 둔화시키거나 못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헤일로는 아무래도 기프트를 따라가는 경향이 짙다.

화이트의 기프트가 더 강화됐다면, 철의 요새인 바르바제를 천천히 고립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헤일로는..."

화이트의 머리 위로 눈 결정 같은 헤일로가 떠올랐다. 그러고는 눈송이 하나를 자신에게 떨어뜨렸다.

이내 그녀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기프트와는 반대야."

기프트는 무게를 가중시킨다.

하지만 그녀의 헤일로는 오히려 무게를 없애버렸다.

아니, 중력을 없애버렸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쓸만한데."

"하지만 미스릴 녀석들에겐 통하지 않았어."

정정한다.

"쓸모없군."

생각했던 것보다 꽤 많이 쓸모가 없었다. 물론 바르바제에 미스릴 전사만 있는 건 아니다.

일반 주민들도 있겠지만 큰...

'잠깐.'

화이트의 헤일로는 무게를 없앤다.

그게 생명체만 해당일까?

"네 헤일로는 무기물의 무게도 없앨 수 있나?"

"응. 덕분에 도심지에서 쓰면 건물들이 전부 떠버려서..."

다시 정정해야 할 거 같다.

이 녀석.

"쓸모 있군."

잘만 쓴다면 큰 힘 들이지 않고, 놈들을 공략할 수 있었다.

화이트 [2]

171화.

화이트의 기프트는 눈의 무게를 늘리고 그것들을 알게 모르게 적에게 붙여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간다.

대부분의 레벨이 무게의 증가, 내릴 수 있는 눈의 범위 증가, 그리고 눈송이의 조종에 치중되어 있었다.

몇몇 은신이나 공격 스킬도 존재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대망의 헤일로.

그녀의 헤일로를 강철이나 아마존이 알려준 것처럼 내게 자세하게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대강 알 수 있었다.

눈이 닿는 물체의 무게를 거의 제로로 만들어 떠오르게 한 뒤, 다시금 무게를 수십 배로 부풀려 떨어뜨린다.

화이트의 능력 자체가 광범위한 능력이다 보니 카오스 게이트에서도 꽤 활약하며 대량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는 챔피언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마법 저항이나 극상성인 불을 다루는 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저항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본래는 가면소드가 전위에 서서 그녀를 지키고 후방에서 그녀가 눈을 내려 전투에 방심한 적들을 사살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는데 지금은 예전과 달리 믿음직한 전위가 없었다.

'나쁘진 않아.'

강력한 살상력이 있는 능력은 아니지만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강력해질 수 있는 능력이다.

'헤일로도 저것만 있지는 않을 거 같으니까.'

러시아의 1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내게 숨기는 게 있기는 있어 보인다.

아니면 진짜 저거뿐일 수도 있고.

어쨌든 쓸만하다.

"바르바제는 철옹성이지."

눈으로 쌓여 있어서 그저 새하얀 성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온갖 단단한 금속을 통으로 붙여 만들어진 철의 요새다.

각각의 첨탑은 미스릴과 함께 포탑까지 설치되어 있어 가까이 다가가는 헬둠 무리를 포탄으로 쏴버리기까지 하니 말이다.

물론 그런 단단한 철옹성을 박살 낼 방법이야 나도 꽤 많다. 하지만 웬만하면 이번 전투에서는 내 정체를 드러내며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직 미스릴이든 아다만티움이든 확실한 것도 아닐뿐더러, 그게 만약 진짜라면 지옥에서도 유명하다 했던 군단장의 말처럼 놈들의 경계가 더욱 심해질 게 분명했으니까.

'아직은 정보가 더 필요하다.'

그리고 화이트의 능력은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놈들이 더 풀 수 있도록 하기 쉬운 헤일로였다.

"거리는 어느 정도냐."

"눈에 보이기만 한다면 가능해."

"꽤 멀군."

"하늘에서부터 내리는 거니까."

화이트의 능력은 지상보다 오히려 어비스에서 더 이점이 있다.

어비스는 24시간 블리자드가 내리는 거 같은 눈이 퍼붓는 곳.

실제로는 눈이 아닌 이상한 잿가루지만 큰 차이는 없다. 어둡고, 춥기만 한 이 어비스에서 화이트의 눈은 잿가루와 다를 바 없을 테니까.

"도와줄 수 있어?"

"도와줄 수는 있지."

화이트의 능력이라면 시도는 해볼 만하다. 하지만 놈들에게 잡혀간 러시아의 네피림을 구하는 일은 확답할 수 없었다.

"이미 죽었을 수도 있고."

"그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시도는 해보고 싶어."

화이트가 내게 매달렸다.

임시로 만든 침상에서 일어나 내 팔을 잡았는데...

"일단... 옷을 입어라."

"아!"

옷도 다 피에 젖어 있었고 찢겨있기까지 해서, 치료하기 위해 벗겨 놓고 담요를 꺼내 덮어놨었는데... 상체를 일으키니 이것저것이 많이 보였다.

"휘유~ 역시 러시아다!"

바바리안이 뒤에서 휘파람 불며 엄지를 척 들었다. 대강 본 모양이다.

화이트는 화들짝 놀라다가도 피식 웃고는 바바리안을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다.

"역시 갓양녀."

이번만큼은 바바리안의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오해가 풀린 화이트는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조용히 좀 해요. 진짜."

"천박하다. 바바리안."

아마존이 인벤토리에서 패딩 하나를 꺼내 화이트에게 건넸다.

화이트는 아쉽게도 패딩을 꼼꼼히 입고는 다시 물었다.

"가능한가?"

"시도 정도야 어렵지 않다. 우리도 물론 바르바제를 공략할 의도였으니. 미심쩍은 게 한둘이 아니거든."

미믹, 아다만티움. 네피림.

바르바제, 알두바드.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되리란 직감이 강하게 들고 있다.

어찌 됐던 놈들은 지옥의 악마.

악마는 죽이는 게 맞다.

그게 아니더라도 미스릴과 아다만티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를 일.

거기다가 장군급으로 추정되는 악마들과 군단장 후보까지. 바르바제를 칠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물론.

"준비가 필요해."

"이해한다."

"움직일 수 있나."

"물론이야. 아... 그리고 치료 고마워. 흉터 하나 없이 치료됐던데 이걸 뭘로 보상하면 좋지?"

"됐다. 넌 녀석의 동생이니까."

녀석에겐, 빚이 있다.

그 빚도 이걸로 끝이겠지만.

"우선, 돌아가지."

"어디로?"

우리의 베이스캠프로.

"할 일이 많다."

바르바제를 치기 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투구 말이오?"

스미스였다.

"얼굴을 가릴 수 있으면 뭐든.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흐음... 그렇군. 알겠소. 적당한 게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보시오."

그에게 적당한 투구를 받으려고 한다.

"갑자기 투구는 왜요?"

패딩을 벗은 아마존이 활과 화살을 정비하며 물었다.

"내 겉모습은 악마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진 거 같아서."

군단장들을 볼 때마다 내 모습을 보고는 데몬시드인 걸 직감한다.

어쩌면 내가 자주 쓰는 벼락이나 덩굴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라피에르때 확신했다.

'내 투구 때문이다.'

물소 뼈 투구라고 알려졌지만 원래 이름은 열병의 투구인 이 녀석.

이 녀석 때문인 게 확실하다.

라피에르를 잡을 때는 오로지 새로 합성된 스킬인 레인스톰과 그루트밖에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라피에르와 만났을 때 놈은 단박에 날 알아봤다.

내 겉모습이 그들 사이에서도 많이 알려진 탓이겠지.

"노파심이긴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하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솔직히 이제는 열병의 투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도 착용하고 있는 네피림 세트는 프리셋으로 한 번에 입을 수도 있고, 한 달에 한 번 모든 생명력과 마나를 회복하는 스킬인 피조물의 영광만 사용할 수 있으면 되니까.

열병의 투구.

꽤 오랜 시간 애용해온 녀석이고, 이걸 써야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기에 썼던 녀석이지만...

'이젠 놓아줄 때도 됐지.'

아쉽게도 열병의 투구는 이제는 썩 좋다고 말하기에는 아쉬운 스펙이다.

『열병의 투구』 (Unique)

-6군단 사령관 아스모디의 부관. 삭스의 유희로 만들어진 물소 뼈 투구.

〈지독한 열병〉

반경 300m 내에 시전자와 아군을 제외한 존재에게 최대, 능력치의 20%를 하락시키는 저주의 오오라를 퍼뜨린다. (소모 값: 분당 5)

〈저주 내성 +5%〉

〈마력 +1〉

투구 자체가 애초에 능력치가 많이 붙지 않고, 마력과 저주 내성까지 채우면서 저주를 퍼뜨리는 '열병의 투구'는 확실히 좋다.

거래소에 내다 팔아도 몇만 금은 받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게는 큰 의미가 없어져 버린 능력치들이었다.

'저주는 면역이 되어 버렸고...'

마력도 이제는 수급이 가능하다.

저주의 오오라는 지금도 물론 쓸 수 있지만 애초에 군단장한테는 통하지도 않는 녀석이다.

군단장을 제외하면 '지독한 열병'을 쓰지 않아도 순삭 시키는데, 굳이 저거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 보니 물소 뼈 투구로 유명한 열병의 투구는 내게 큰 의미가 없다.

습관처럼 쓰고 있던 것뿐.

'내가 있다는 게 알려져서는 곤란해.'

스킬도, 무기도 날 특정할 수 없는 녀석들로 골라 싸워볼 요량이다.

놈들의 통신 체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지금은 일단 조심해보는 게 좋다. 이곳은 지옥이고, 지옥은 본래 놈들의 터전이니 말이다.

스미스에게 투구를 부탁하고는 무장할 무기들을 조금 골라봤다.

녀석들은 갑옷을 무장했다고 하니, 창보다는 메이스 종류가 좋다.

갑옷의 종류도 날씨가 이렇다 보니 추위에 얼어 깨질 금속 종류보다는 천이나 가죽 종류가 좋을 것이다.

스미스가 만든 건, 대부분 평균치보다 높은 능력치를 자랑하는 아이템들이니 아무거나 잡아 써도 되겠지.

"이건 어떠십니까."

스미스는 품에서 북슬북슬한 투구를 내려놓았다.

"이건..."

"급하게 만들었소만... 헬둠이오."

"괜찮군요."

헬둠은 원시 호랑이를 닮은 외관이지만 털이 도드라지지는 않았다.

피부에 돋아난 광물과 함께 털이 섞이고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헬둠의 부산물로 장비를 만들기 위해 여러 테스트를 진행 중이었는데, 그나마 머리 가죽 부분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하였다.

게다가 만드는 것이 사용한 건, 내가 잡아 온 헬둠 챔피언.

헬둠 킹 헬라의 머리였다.

이걸 보이면 지옥에서도 날 인정해줄 거라 시스템이 말해줬지만, 글쎄.

놈들과 교류할 생각은 별로 없어서 굳이 그래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보다는 투구로 만들어 쓰고 다니는 게 더 이득이겠지.

『올라의 투구』 (Magic)

-명장 스미스가 만든 헬둠 킹 올라의 투구. 헬둠의 가죽을 그대로 보존하여 만든 투구라 단단하고 질기며, 허리 부근까지 떨어져 내리는 갈기는 착용자의 취약 부위를 보호한다.

〈강화 불가〉

〈방어 +50〉

〈마법 내성 10%〉

〈민첩 +7〉

〈설야〉

-눈과 가까이 있을 때, 모습이 흐릿해져 은신 효과가 강화됩니다.

급하게 급조한 것 치고는 스탯이나 효과가 쓸만하다.

솔직히 얼굴만 가릴 수 있다면 아무거나 상관없었는데 멋까지 있어서 이 정도면 대만족이었다.

"좋은데요."

"그렇다면 다행이오, 자신 있게 내보이긴 조금 조잡한 것이라. 시간만 더 주신다면 희대의 명작을 만들어보겠소이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딱 좋다.

호랑이 비슷한 녀석의 얼굴.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외관.

시야가 조금 가리지만 상관없다.

고행의 빛으로 요즘도 간간이 눈과 귀를 막고 다니기도 하니까.

이번의 전투가 아마 좋은 훈련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오, 멋있는데? 옛날 영화에나 나올법한 인디언 족장 같다. 혼자서 권총 든 군인들 죄다 썰어버리는..."

새하얀 털.

투구만 썼는데 허리까지 내려오는 복슬복슬한 털들 때문이다.

"그럼 다녀오겠다."

무기는 스미스가 시험작으로 만들고 있는 미스릴제 메이스와 검을 챙겼다.

『미스릴 메이스』

-명장 스미스가 만든 미스릴 메이스.

〈강화 불가〉

〈치명적인 파괴〉

〈강력한 마법 파괴〉

『미스릴제 숏소드』

-명장 스미스가 만든 미스릴 숏소드.

〈강화 불가〉

〈치명적인 관통〉

〈강력한 마법 관통〉

『미스릴제 롱소드』

-명장 스미스가 만든 미스릴 롱소드.

〈강화 불가〉

〈치명적인 절단〉

〈강력한 마법 절단〉

미스릴로 만든 거라 그런지 모두가 '치명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추가 피해 60%의 엄청난 효과지만 다른 고유 효과는 없어 아쉽다.

아직 연구 중인 물건이라 스미스는 쓰다 부서져도 좋은 거라 말했다.

"미스릴의 함유가 적어서 썩 내보이기 힘든 시험작이오. 그래도 쓰고 싶으시다면야..."

"알겠습니다."

이것 만해도 충분하다.

'스미스는 무기만 만들어도 레벨이 오르는 타입이라고 했던가.'

비전투직 대부분은 그런 식이다.

악마를 잡지 않아도 레벨이 오른다.

나만 해도 나무만 성장시켜도 경험치가 오르긴 하니까.

'스미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겠어. 관찰자를 비롯해서 헤일로 제작 순위 0순위야.'

지금도 이런데 헤일로를 가지게 된 스미스는 과연 어떻게 될까.

절로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정말 괜찮겠소. 이걸로..."

"괜찮습니다."

내가 할 일은 그렇게 과격한 게 아니니까. 난 메이스와 검들을 휘둘러보다가 적당히 됐다 싶을 때, 허리와 등에 착용하고 캠프를 나섰다.

"다 됐어? 이제 갈 거지?"

"그래. 따라와라 화이트. 이번 작전에서는 네가 제일 중요하니까."

"바라던 바야."

"아, 대장! 이거요."

"이건 뭐지?"

보기엔 그냥 에어팟처럼 생겼다.

아니, 정정하겠다.

에어팟이었다.

"이걸 왜..."

"크흠, 그냥 에어팟이 아닙니다."

캠프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나왔다.

"누구?"

"저번에 인사드렸는데..."

"아 죄송합니다."

저번에 인사를 한꺼번에 받을 때 했던 사람 중 하나인 모양이다.

공사다망한 사람이다 보니 이렇게 사람 얼굴이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

'아니 핑계지. 기억해야 했는데.'

그래도 생사를 함께하는 사람들 얼굴과 이름 정도는 기억하는 게 맞다.

"223905위 알바트론입니다."

순위를 들어보니 기억 못 할 만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이름만큼은 기억하도록 하자.

"전 통신 쪽 기프트를 가지고 있거든요."

"아, 그럼 이걸로...?"

"예! 이거만 끼고 있으면 같은 차원 내에서는 얼마든지 통신이 가능하죠! 꽤 편하실 겁니다. 제가 레벨은 비록 5렙밖에 안 되지만 에어팟 하나에 몰빵한 사람이라..."

꽤 신이 났는지 묻지 않은 것도 신나며 말한다.

공대생한테 기계 관련한 것들을 물어보고 답변받은 느낌이랄까.

사람은 좋아 보였다.

"듣기랑 말하기도 가능한 겁니까."

"물론이죠! 캠프 파티들은 전부 제 에어팟 없으면 못 나갑니다!"

"훌륭한 기프트군요."

"헉! 데, 데몬시드님께서..."

뭔가 감동한 눈치지만 이만 퇴장하기로 했다.

같이 있다가는 쓸데없이 기 빨릴 타입으로 보였으니까.

"제가 이걸로 위치를 알려드릴게요. 달의 눈은 여기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눈보라가 너무 심하면 조금 늦어질 수도 있겠지만요."

"알겠다."

아마존의 헤일로가 위치를 탐사하고, 나는 에어팟으로 정보를 받아 놈들을 사냥한다.

나쁘지 않은 작전이다.

애초에 바바리안한테 놈들 성에 대한 위치는 전달받았다.

아마존은 혹시 모를 원군이나, 추격자를 확인하고 원조하게 될 것이다.

강철과 나머지는 각각의 위치에서 대기할 것이다.

화이트의 능력이 한순간에 효과를 내기는 어렵다.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으니 우린 밖에서 오랜 시간 공을 들일 거다.

바르바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초석.

그것의 시작이었다.

내게 그 정도 일은 쉬운 편이니까.

.

.

.

사흘 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지.'

하지만 내 생각보다 더 놈들은 집요했고, 체계적이었다.

"쫓아라! 반드시 잡아라!!"

"놈의 목을 잘라 효수하겠다!"

현재, 난 티블의 성.

바르바제에 숨어든 상태였다.

어쩌다 이리되었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틀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화이트 [3]

172화.

바르바제의 성은 단단한 성벽은 물론이요, 각종 마법이 걸려 외부의 침입을 완벽하게 저지했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 마법이라는 게 꼭 만능은 아니다.

어비스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눈까지 막아주지는 않았다.

"어서 쓸라고. 이 잿가루가 다~ 우리 검이 되고 갑옷이 되는 녀석이다~ 이 말이지!"

"알았으니까. 빨리 치워요."

"에밀리, 오늘따라 눈이 많지 않아?"

"무슨 소리예요. 눈은 원래 많았는데! 빨리 치워요, 장사해야 하니까. 놀지 말고 빨리 치우라고!"

철의 요새 바르바제.

언제나처럼 빗자루로 눈을 쓸던 그들에게 재앙은 슬그머니 찾아왔다.

"어?"

"뭐 하는 거예요.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내려와요."

"에밀리! 에밀리!! 나, 나 왜...!"

"랄스!!"

그들의 몸이 떠오른다.

"적습이다!!"

"지하로 대피해!!"

"몸이! 몸이 떠오릅니다!!"

"젠장 대체 무슨 일이...!"

하지만 티블만이 아니었다.

쿠구구궁!!

"꺄아아악!!"

처음엔 가벼운 물자들부터 시작하여 상자, 마차, 횃불과 작은 것들부터 뿌리뽑혀 나와 떠오르기 시작했다.

화이트의 능력은 무게라기보다는 정확하게는 중력이지 않을까 싶었다.

"우선 주민들부터 구해라!!"

쿠궁!!

가만히 있어도 집과 건물이 뿌리뽑혀지는 모습은 내가 봐도 섬뜩했다.

"잘 되고 있지?"

"잘하고 있다."

"좋았... 어."

이 모든 게 화이트가 내리는 눈.

헤일로의 눈 때문이었다.

마력 고갈로 조금 힘들어 보이기는 하지만 어쩌겠나. 이번 작전은 화이트의 헤일로가 핵심인걸.

나는 헤일로로 소모되는 마나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마나가 많았으나, 화이트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지금 몇 시간째 은밀하게 눈 속에 숨어서 헤일로를 쓰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지금부터 작전을 실시한다."

알바트론의 에어팟 한쪽을 가져가 말하자 곧장 대답이 들려왔다.

-바바팀 확인.

-강철팀 확인.

-아마팀 확인.

-거손팀 확인.

4개의 부대로 나뉜 인원.

바바리안과 강철, 아마존과 거대한 손 네 명을 주축으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있는 팀이다.

우리의 작전은 이렇다.

화이트의 헤일로는 미스릴 전사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미스릴 갑옷이 100% 마법 내성을 보유한 것은 아니지만 그에 가까울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인즉슨 미스릴을 장비하지 않은 사람과 건물은 허용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건물과 주민들이 떠올라 동서남북으로 찢어진다면 바르바제는 어떻게 될까.

'전사들을 나누어 수색조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

도구를 사용하고 마을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을 절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니까.

'거스트.'

"거스트를 시전합니다."

그루트로 합쳐진 거스트.

돌풍을 만드는 스킬. 단독으로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후우우웅-!!

섬세한 바람 조작으로 한쪽은 동쪽.

또 한쪽은 서쪽.

그리고 나머지는 남쪽으로 보낸다.

떠오른 건물들과 바르바제의 티블들이 내 바람으로 향해 날아간다.

이렇게 하면 놈들은 나온다.

아니, 나와야 한다.

바르바제는 어비스의 강자들.

바깥을 두려워하는 약자들이 아니다. 미스릴을 무장한 자신 넘치는 강인한 어비스의 전사들이니까.

'반드시 나온다.'

우린 그러면 각각 나뉜 팀으로 그들을 각개격파 하여 전력을 약화한다.

물론, 놈들의 전력이 예상보다 높다면 철수한다.

당연히 인간은 아닌 놈들이다.

날아가 버린 성의 구성원을 죽으라 내버려 둘 수도 있다. 우리 생각보다 똑똑한 놈들이라면 진작 우리의 작전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도 나올 거다.

-바르바제의 성문이 열립니다!

-수색팀, 출발했습니다.

-동문에서도 나옵니다. 미스릴 전사 스무 명과 일반 전사 열 명 정도!

-서문도 나왔습니다. 인원은 미스릴 전사 열 명과 일반 전사 서른입니다.

-남문도 나왔다. 미스릴 전사의 수는 약 마흔. 일반 전사는 일백이다.

놈들은 이 구역의 패자.

알고도 나가야 했다.

그게 집단을 유지하는 방법이니.

"미스릴 전사는 장군급."

동문에서 스물, 서문에서 열. 그리고 남문에서 마흔.

예상한 대로 남문에서 가장 많은 미스릴 전사들이 나타났다.

"서문은 거손, 동문은 바바. 남문은 강철과 아마존."

시작은 기습.

전투의 승패를 확신할 수는 없으나 우위는 우리에게 있다.

'공격 우선권, 그리고 철수하는 것까지. 놈들은 어쩔 수 없는 약점이 존재하니까.'

비전투 인원.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왔다가 기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

만일, 놈들의 전투력이 막강하여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아군을 오래 쫓을 수 없다.

전투의 승리보다 바르바제의 주민들을 보호하는 게 우선일 테니까.

만일 주민을 보호하지 않더라도 그쯤 되면 바르바제 자체가 위험에 빠졌으리라는 건, 알 테니 말이다.

"데몬시드."

"우리도 출발한다."

이번 작전의 키포인트는 적군의 전력 소모와 러시아의 포로 구출.

그리고 군단장 후보의 전력과 그들이 보유한 대장 기술의 확인 등이다.

적진에 들어가는 거 자체가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다.

하지만 확인해야 했다.

아다만티움이 사실인지 아닌지.

'러시아의 네피림들은 겸사겸사 구할 수 있으면 구하고.'

지금도 화이트의 헤일로는 계속 유지되는 중이다. 혼란은 잠들지 않고 더욱 소란스러운 이때.

이때가 바로 기회였다.

탓-!

바르바제의 성문은 미스릴로 만들어졌다. 덕분에 대부분의 마법에 내성이 있어 잘 통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최대 전력을 쏟아붓는다면 조금 다르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확신이 필요해.'

괜히 벌집을 건드렸다가 꿀벌이 아니라 말벌이면 큰일이지 않은가.

이곳은 지옥.

어비스의 특수성이라면 군단장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으니까.

"정말 괜찮을까."

"날 믿어라."

성문은 닫혔다.

하지만 우린 굳이 성문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 그루트는 다소 시선을 잡아끄는 요소가 있으니 기각.

화이트의 헤일로를 사용한다.

"꽉 잡아라."

"걱정 마!"

화이트를 안아 들고 멀리 떨어진 숲에서부터 그루트를 사용한다.

후웅-!

높이 도약하는 순간, 화이트의 눈송이가 내게 닿는다.

무게가 사라지고 중력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자 내 도약은 바르바제의 성벽 위까지 치솟았다.

"적이다! 적습이다!!"

첨탑 위의 병사가 소리쳤다.

그리곤 곧장 내게 쇠뇌를 쐈다.

바람을 가르는 쇠뇌가 정확하게 내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자연스레 손이 뻗었다.

잡기 위해서였다.

"잡으면 안 돼!"

흠칫.

출수했던 손을 비틀어 손등으로 쇠뇌를 쳐냈다.

"석화의 마법이 당신을 돌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높은 등급의 마력과 신성력이 이를 저항합니다."

"석화의 마법이 소멸합니다."

"석화?"

"놈들은 돌과 관련된 마법을 쓴다. 애매하게 대응하면 돌이 돼!"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 노려보니, 화이트는 시선을 피했다.

"깜빡했어!"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군. 가면이랑은 완전 반대야."

"시끄러워."

탓!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건물 뒤편으로 숨어 미스릴제 검을 꺼냈다.

투구는 헬둠의 올라를 착용한 상태.

지금부터는 은밀, 신속하게 이동하며 정보를 얻기만 하면 된다.

혹시 모를 만일의 상황에서도 완벽한 대응책이 준비되어 있다.

"바르바제에 침입한 최초의 인간입니다."

"경험치 10,000을 획득합니다."

"바르바제의 역사서를 획득합니다."

'별걸 다 주는군.'

역사서를 챙겨놓고 눈을 감았다.

지금은 눈보다 감각이 더 중요하다.

화이트의 헤일로는 아직도 유지된 상태로, 바르바제의 허공에는 날아가지 않은 주민들과 건물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구조하기 위한 병력도 남아 있는 상태. 우린 되도록 놈들의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네피림이 붙잡혀 있을 장소를 찾아야 했다.

"뭐 하는 거야?"

"조용히 해. 지금 동태를 살펴야..."

"저쪽에 아무도 없어. 내가 봤어."

"... 언제 봤지?"

"눈송이로?"

"너..."

그런 능력이 있다곤 말 안 했다.

화이트는 혀를 내밀어 놀리고는 씩 미소 지었다.

"저쪽이 수상해. 이 난리가 났는데도 저쪽만큼은 몇 시간 전부터 병력 이동이 없어. 내가 봤을 땐 저기가 놈들한테 가장 중요한 곳이야."

"... 좋아."

화이트가 가리킨 쪽은 내성.

내성을 가로막고 지키고 있는 미스릴 전사는 둘.

덩치는 2m에 달했고 새하얀 피부와 달리, 우락부락한 근육과 머리의 뿔이 인상적인 전사들이었다.

거기에 녹빛이 만연한 미스릴 갑옷과 무기를 들고 있는 건 당연지사.

[차가운 수문장 리아누스]

[뜨거운 수문장 로아투]

미스릴 장비를 착용한 장군급으로 추정되는 수문장들이었다.

'둘 정도라면...'

할만하다.

마법 내성이 높다고 해도 물리 내성이 높은 건 아니다. 미스릴제는 그들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

"가능해?"

화이트가 속삭였다.

난 투구를 바로 쓰고 답했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난 데몬시드.

따로 스킬을 쓰지 않더라도 기본 스펙만으로 따라올 자가 없는 남자다.

놈들이 아무리 강력한 장비를 착용한 장군급이라 해도.

내게는 같다.

탓-!

"적이다!"

"로아투! 막아라!"

"어딜 겁도 없이 바르바제를!"

후웅-!!

로아투의 창이 찔러 들어왔다.

작게 도약해 놈의 창을 피하고 돌려차기를 먹였다.

뻑-!

"컥!"

"젠장할 놈이!"

쩌저저적!!

리아누스가 권능을 사용했다.

놈의 검에 얼음이 생겨나 대검처럼 거대해졌다. 놈은 그것을 곧장 휘둘렀다.

스미스의 미스릴제 검으로 받아치자 째앵-!! 어긋난 검명이 울려 퍼졌다.

쩌적.

"하! 그딴 허술한 검으로 바르바제에 침투한 거냐? 안일한 새끼!"

"..."

미스릴제 검에 금이 갔다.

시험작이라고 하더니 이 정도로 약했던 건가.

'아니, 내가 너무 힘으로 썼다.'

미스릴 함유가 적어서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나도 모르게 힘 대 힘으로 받아쳐 버렸다.

그사이에 쓰러졌던 로아투가 일어나 창과 몸을 자신의 권능으로 불태우기 시작했다.

"장군급 맞네."

"뭐라는 거야! 죽어라!"

"로아투 흥분하지 마! 침착하게 상대하면 놈은 쉬운 상대다!"

한 번에 끝내지 못한 탓에 놈들의 연계가 시작되고 말았다.

'연계가 제법...'

챙-! 퍽!!

"큭!"

육체적인 스펙은 내가 높다.

하지만 스킬을 사용하지 않으니 조금 애먹을 수밖에 없다.

'장비는 놈들이 한 수 위야.'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로아투는 창은 불타다 못해 이글이글 익어가기 시작했고, 놈의 발밑의 눈이 녹으며 용암처럼 들끓었다.

리아누스의 검과 지면은 차갑게 얼어붙으며 위협한다.

그런데도 미스릴제로 만들어진 장비는 놈들의 권능을 쉽게 받아들였다.

'제법이군.'

미스릴 전사들의 전투술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났다. 악마라 하면 단순히 인간보다 우월한 육체 스펙으로 찍어 누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티블.

수문장 이놈들은 아니었다.

어둠에 숨어들며, 명백하게 허점을 찌르고 유려한 기술을 사용했다.

아니, 검술뿐만이 아니다.

간간이 단검을 던지고 채찍을 이용하는가 하면 듣도 보도 못한 무기를 꺼내 오로지 승리만을 위했다.

서걱!!

헬둠의 털 일부가 반듯하게 썰렸다.

그 뒤로, 눈과 함께 얼어붙은 지면이 반듯하게 잘려 나갔는데, 제아무리 시드네스로 만들어진 철골과 거미줄이 있다해도 반드시 잘릴 거란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미스릴 검. 그리고 창.

놈들의 검술과 창술은 요근래 보기 힘들 정도로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쓰러뜨리지 못할 정도는 또 아니었다.

예전에야 챔피언이 두려웠지만, 지금은 손 하나 까딱하면 죽일 수 있는 게 챔피언이기도 했다.

개체마다 차이는 있지만, 미스릴이 없다면 겨우 그 정도의 챔피언급이라는 소리. 무기술은 뛰어났지만, 권능은 크게 특별한 정도는 아니었다.

"넌 누구냐.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놈이 아니구나."

굳이 답하지 않았다.

놈에게 정보를 줘서 좋을 게 없다.

내 정체를 감출 작정이기에 제대로 싸울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스킬도 자제하는 중이기도 했다. 애초에 미스릴 갑옷은 대부분의 마법을 튕겨내는 녀석이라고 했으니 쓸 이유도 없었다.

'리버슬로우도 안 통하니까.'

공간의 흐름을 느리게 만드는 리버슬로우도 미스릴을 입은 놈에겐 통하지 않았다.

아마 다른 것도 비슷하겠지.

'판포비아는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판포비아를 쓸 필요까진 없었다.

통할 거라고 생각되는 거라면 당연히 헤일로의 벨로나 정도.

아니면 악익으로 바뀐 공포의 나래.

블루헬 정도라고 생각한다.

'레인스톰도 큰 효과를 주기엔 애매해 보이고.'

확실하게는 써봐야 알겠지만 아마 큰 효과가 없지 않을까 싶다.

잠시 발을 묶을 정도가 아닐까.

물론이라고 할 정도로 독도 통하지 않았다. 페스틱사드를 흘려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웬만한 방어체계는 갖춰져 있다.

"누구냔 말이냐! 정체를 밝혀라!"

서걱!

쿠구구궁!! 우지끈!

'까다롭네.'

이쯤 되니 성 밖에서 싸우고 있는 다른 동료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마법은 방어. 이런 금속으로 무기를 만드는 것 자체가 사기다.

게다가 놈들의 검술도 까다롭다.

분명 힘과 속도는 내가 우위에 있지만, 공격 궤도가 기민하달까, 기괴하달까. 피하기가 쉽지 않다.

인간의 전투법과는 조금 다르고 터프하다. 상처 입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전투술과 신체적으로 인간보다 우월한 티블의 사거리나 유연함은 예측하기 힘든 궤도로 공격이 날아왔다.

애초에 검 자체도 얼음으로 이어붙어져 약간 곡선을 그리고 있는 곡검이라 이들 특유의 검술과 합쳐져 위협적이었다.

'바바리안의 말대로다. 챔피언보다 더 까다로운 면이 있어.'

게다가 이런 놈이 하나도 아니다.

성문 좀 두드리니까 우르르 쏟아져 나오지 않았나.

물론 조금 어렵다 뿐이지 불가능이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창, 좋아 보인다?"

콰창-!!

로아투의 창과 내 검이 부딪쳤다.

한번 금이 간 검이 부서짐과 동시에 놈의 창을 잡았다.

"하하! 멍청한 새끼! 맨손으로 내 창을 잡으면 네 손이 녹을 거다!"

"로아투 멀어져!!"

"아니 손이...!"

"면역되었습니다."

이 정도 화력 따위 내게는 아무 피해도 주지 못한다.

"이, 이놈이...!!"

"로아투!"

"어딜!"

삐끗! 쿵!

"내 화이트오일 맛이 어떠냐!"

리아누스가 화이트의 스킬로 인해 미끄러져 넘어졌다.

"기름?"

화이트의 애매한 도움이었지만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로아투의 근력은 나와 비슷하다.'

이대로 두들겨 패는 것도 방법.

하지만 한가지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고행의 빛."

마법 내성.

모든 스킬의 마법을 저항한다.

하지만 신성력은 어떨까.

신성력도 마법으로 치는 걸까?

내 호기심은 곧 로아투의 반응으로 쉽게 알 수 있었다.

"눈! 내 눈이! 눈이 안 보여!!"

"통하네?"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음에도 절대로 창을 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창을 붙잡고 있는다고 목숨까지 보전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컥!"

스미스의 미스릴제 숏소드로 놈의 목을 단숨에 일곱 번 찔렀다.

푸른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나왔다.

"로아투!!"

휘리릭, 척. 로아투의 창을 손에 쥔 나는 리아누스를 향해 돌진했다.

로아투가 죽자, 리아누스는 사방을 얼리며 검을 휘둘렀다.

동료의 죽음에도 침착하게 검술을 펼치며 사방을 얼음 바닥으로 만들었지만, 창을 쥔 나는 조금 달랐다.

"아아, 로아투... 멍청한 녀석. 끝까지 내 발목을 잡다니..."

털썩.

접전 끝에 리아누스도 쓰러졌다.

신성 스킬이 통한다는 걸 알자마자 전투는 너무나 손쉬워졌다.

"화이트."

"응!"

놈들의 품을 뒤져 내성으로 통하는 열쇠로 문을 열자.

처처처척!!

수문장들과 비슷할 정도의 전사들 수십이 이미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죽여라!!"

"젠장!"

난 급히 화이트를 안고 뛰었다.

생각보다 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안전하게 도망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 쓰지 않은 묘수가 하나 있었다.

『파르바의 미믹 쿠키 상자』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놈들의 검술과 금속, 그리고 대장장이 기술을 모두 빼앗을 방법.

이거라면 그런 일이 가능했다.

미믹 [1]

173화.

"찾아라! 샅샅이 뒤져! 절대 놓치면 안 된다!!"

타다닥!

달려 나가는 기사들과 불안에 떨며 집 문을 걸어 잠그는 티블들을 바라보며 난 잠자코 상자를 닫았다.

'이 익숙한 감각.'

한때.

한 나라를 장악했던 전설의 미믹.

옛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기지개를 켜며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내 착각만은 아니었다.

"파르바의 미믹 쿠키를 섭취합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미믹의 힘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스킬을 획득하셨습니다."

"스킬 '파르바의 미믹'을 깨닫습니다."

"당신의 몸이 미믹으로 변화합니다!"

"과거, 당신은 미믹이었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합니다."

『왕을 시해한 미믹』

「생명력」 – 2530/2680

「마나」 - 2860/3060

「신성」 - 1060/1060

「능력치」

근력 – 100

민첩 – 98

건강 – 115

마력 - 187

철골 - 101

성력 - 106

『어빌리티』

하급 단검 애정도 (0%)

-단검 보유량: 0자루

하급 도끼 애정도 (0%)

-도끼 보유량: 0자루

중급 검 애정도 (1%)

-검 보유량: 1자루

상급 창 애정도 (1%)

-창 보유량: 1자루

『고유 스킬』

[소화] [애장] [은신] [깨물기] [낼름] [심미안]

파르바의 나라.

미믹 왕의 나라에서 수많은 미믹을 먹어 치우며 놈들의 어빌리티와 애정도를 흡수한 과거의 영광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물론 손실은 있었다.

창 애정도가 최상급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고작 상급이었다.

아마도 그때 미믹화가 풀리며 아이템을 전부 떨어뜨린 이유에서이지 않을까 싶다. 그 이후로 파르바의 세상이 무너졌으니 어쩔 수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쉽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처럼 나 또한 후회를 길게 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채우면 되니까.'

앞으로 내가 겪을 수많은 전투의 전리품들을 챙기다 보면, 옛 영광을 되찾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

오히려 금세 되찾을지 모른다.

티블의 성, 바르바제에서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쿠키 아껴놓지 말고 먹을걸.'

설마 쿠키를 먹는다고 스킬이 생길 줄은 몰랐다. 고작해야 미믹으로 변신하게 될거라 생각해 굳이 먹지 않고 아껴놓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먹어서 각종 무기들을 저장해놨으면 진작 무기술이 높아졌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다. 지금이라도 얻었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전에 먹어뒀던 장비들도 싹 사라진 상태.

하지만 이제부터 미믹으로 변해 아이템으로 애정도를 키우면 내 무기의 숙련도는 갈수록 늘어날 거다.

'일단 미스릴 무기 다 먹는다.'

이렇게 된 마당이니 미믹으로 변한 상태로 미스릴 무기란 무기는 싸그리 먹어 치우겠다.

수문장이었던 로아투와 리아누스의 검과 창은 이미 저장해둔 상태.

덕분에 애정도가 1% 올랐다.

벌써부터 그들의 손에 익숙해져 있는 무기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하니 예전의 감각이 떠오른다.

-정말 안 들키는 거 맞겠지?

물론 내 집중을 방해하는 녀석이 있었다. 나와 같이 미믹 과자를 먹은 화이트였다.

-네가 입만 다물면 안 들킨다. 그러니까 제발 조용히 좀... 해!

-아, 오케이.

놈들이 열심히 뛰어다니며 날 찾고는 있지만 미믹으로 변한 지금의 내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을 터.

철골 때문에 외관이 강철로 뒤덮였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이곳의 대장 기술이 꽤 좋은 편인지 단단하게 걸어 잠근 상자들 옆에 있으니 크게 튀지도 않았다.

그건 화이트도 마찬가지.

'이대로 있다 보면 경계도 사그라들겠지.'

간간이 에어팟으로 보고해오는 이들의 상황을 들어보면 큰 피해 없이 미스릴 전사들의 수를 줄였다는 승전보가 들려오기도 했다.

상황 자체는 썩 나쁘지 않다.

미믹으로 변한 채 놈들의 경계가 사그라들기를 조금 기다려보자.

기다리다 보면 때는 언제고 오니까.

*

하루 뒤.

'배고프다.'

미믹의 몸이 가성비가 좋은 몸이라 생각했지만, 썩 그렇지는 않았다.

내 몸 안에 아무런 장비도 들어있지 않아서일까. 신기하게 허기가 졌다.

배고파서 기운이 없고 몸이 허했다.

빨리 뭐라도 입 안에 넣고 싶은 갈증이 유독 심했다.

하지만 성안의 경계는 풀어질 생각을 안 했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게 분명하다! 놈은 독 안에 든 쥐야! 샅샅이 찾아!"

하긴, 하루 만에 경계가 누그러지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기는 했다.

자기 집에 살인범이 숨어들었는데 그냥 내버려 둘 놈이 어디 있을까.

날 찾기 전까지 놈들의 수색은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소화』

-강력한 소화액으로 무엇이든 소화할 수 있다. 완전히 소화된 물건에 깃든 기억을 엿볼 수 있다.

『애장』

-미믹의 뱃속은 넓다. 어떤 물건이든 상태를 보존하며 보관할 수 있다.

『은신』

-움직이지 않는 한, 일반 상자의 기척을 유지한다.

『깨물기』

-근력과 민첩에 비례한 깨물기로 적을 깨문다.

『낼름』

-미믹의 혀는 길다.

『심미안』

-애장품을 잘 느낀다.

미믹의 스킬은 그렇게 대단할 게 없었다.

왕을 시해했다는 이름치고는 평범한 스킬들밖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왕을 시해한'이라는 수식언은 그냥 칭호 정도로만 생각하는 게 맞겠다. 미믹 스킬을 얻은 거 자체가 내게는 이득.

이 정도로 만족하는 게 맞다.

그건 그렇고 배가 고팠다.

미믹이 아니라도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

숨는 것도 중요했지만, 일단 배를 채우고 싶었다.

'어떡할까. 변신 해제할까.'

변신을 해제하고 인벤토리에서 악과나 먹을 걸 먹는다면 손쉽게 배를 채울 수는 있을 것이다.

스킬도 생겼으니 배만 채우고 다시 미믹으로 변신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냉철한 머리와는 달리,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내게 항상 만족스러운 공복감을 내어주던 악과.

다양한 맛과 향을 자아내는 최상의 음식이 나는 왜인지 끌리지 않았다.

그보다는 내 근처에 있는 철과 도구의 쇳내가 군침을 흘리게 했다.

'미믹으로 변한 탓인가.'

전투의 흔적.

고결한 기사의 전투가 깃든 물건.

오래되어 절절한 사연이 있는 물건.

그런 귀중품의 자극적인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마치, 고풍스러운 레스토랑 주방에서 나는 고급스러운 스테이크 냄새라고 할까. 아마도 심미안이라는 스킬 때문이겠지. 덕분에 냄새인지 뭔지가 느껴져서 군침이 자꾸만 돈다.

정말 참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예를 들면 내 옆의 상자.

어비스의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는 해를 보지 못해서 그런지 검고 붉다. 부스러기 같은 광석이 조잡하게 묻어 있는데, 나는 안다.

이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무기지만 관리되지 않아 녹이 슨 사연 많은 무구들이다.'

왜 이것들이 몇 상자째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입안에 털어놓고 녹슨 무구를 품어 새것처럼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혓바닥...! 집어넣어!

-아앗, 나도 모르게 그만...

어느새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화이트가 내가 눈독 들인 상자를 탐하려 했다. 혓바닥을 꺼내 찰싹 때리자 시무룩하게 침을 흘렸다.

그녀 또한 미믹으로 변한 탓에 나와 같은 갈증을 겪는 모양.

이대로는 위험하다.

갈증을 해결할 방법이 필요했다.

변신을 풀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이건 뭔데 이렇게 사슬이 많지.'

꽤 많은 상자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숨어들었는데, 한쪽 상자들은 모두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보통 쇠사슬도 아니다.

마법의 냄새가 났다.

그때였다.

끼이익. 타다다닥.

여러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 빨리빨리 옮기자고!"

"조심해! 잘못했다간 다리만 남기고 군주님 품으로 돌아갈 테니!"

"하하하! 사슬에 묶여 있는데 어떤 얼간이가 미믹한테 밀리겠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마차에 상자들을 하나하나 옮겼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슬에 묶인 것들은 미믹인 모양이었다.

'다행이군.'

그렇다면 이야기가 쉬워졌다.

가만히 있어도 이놈들은 나와 화이트를 그곳으로 데려갈 테니까.

"어이! 이건 사슬이 없는데!?"

"아니 정말이잖아? 베리 자식. 이런 거 하나도 체크 안 하고 뭘 한 거야!"

"빨리 묶어!"

"아, 알았어!"

드르르륵.

내 몸을 휘감는 사슬의 구속력이 점점 강해진다. 단단하게 묶여 오는 사슬의 힘에 고민했지만, 지금은 몸을 맡겼다. 여차하면 내 몸 하나 정도는 빠져나갈 여력은 있기 때문이다.

"으악! 이봐! 이것 좀 들어줘! 너무 무겁다고... 이 녀석!"

"엄살은... 헉! 뭐야 이거! 어이! 이거 우리끼리는 절대 안 돼! 다들 와봐! 빨리빨리!"

날 들던 사내가 사람들을 여럿 불렀다. 일꾼들 열댓 명이 모여서야 날 겨우 들었는데 저마다 욕지거릴 뱉어내며 사라지니 괜히 열이 뻗쳤다.

"이거 뒤에서 밀어야겠는데? 말이 꿈쩍도 못 하잖아."

"나 참... 애먹이긴."

"상품에 흠집 나니까 때리지 말라고. 알두바드께서 화내실라."

"어르신 요청이지 이것도?"

"당연하지! 우리 바르바제가 이렇게 융성해진 게 다 알두바드 어르신의 힘이 아니겠나."

"하긴, 안 그래도 요새 세상이 흉흉한데, 다른 마을 녀석들은 다 우릴 부러워하더라고. 카칵!"

"그거야 당연하지! 바르바제보다 잘 사는 티블 놈들이 어디 있던가!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하하하!"

내 예상은 얼추 맞았다.

미믹을 대량으로 필요로 하는 자.

그런 시설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마도 어비스에서도 융성한 성을 지닌 바르바제엔 아다만티움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알두바드.

일꾼들이 어르신이라 부르는 티블이 비밀의 중심적인 사내.

놈이야말로 아다만티움 사태의 근간이 되는 녀석이리라, 생각됐다.

만약, 정말로 놈이 아다만티움으로 무기를 만들 수 있다면...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다소의 위험이 있다 한들.

설령 함정이라 한들.

나는 그 함정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내.

바르바제의 지하로 향했다.

*

대장간이라고 한다면,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용광로와 함께 망치를 두드리는 대장장이들을 떠올린다.

냉병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장인의 마음을 품고 완벽에 가까워지려 까칠해지기 마련이다.

나 또한 바르바제의 성에는 미스릴을 다루며 구슬땀이 서린 장비를 만드는 대장장이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미스릴을 다루는 기술에 있어 우리보다는 그들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해 옮겨진 나는, 생소한 광경에 기함하게 됐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지옥의 대장간은 생경한 것이었다.

드르르륵, 콰아앙-!!

티블들은 날 비롯한 미믹들을 이끌고 지하로 들어갔다.

성의 지하는 통로가 매우 크고, 넓었는데 아래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쇠와 땀. 그리고 고약한 냄새들이 주를 이루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귀가 먹먹해질 굉음이 잇따라 들려왔고, 때로는 비명을 내지르는 고통에 찬 절규도 있었다.

"어르신! 저희 왔습니다!"

해맑은 미소로 일꾼 중 하나가 어르신이라는 자를 보며 인사했다.

하지만 그 어르신이라는 놈은 고개만 끄덕일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것을 내심 아쉬워한 일꾼들은 미믹을 내려놓고 서둘러 돌아갔다.

"어르신의 일을 방해하면 우리 모두 모가지가 날아갈 테니 어서 가자고."

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아니, 가만히 바라봤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대단하군.'

쿵, 쿵, 드르르륵. 콰아아앙-!!

대장간의 한편엔 거대한 쇠사슬을 잡고 이동하는 트롤들이 존재했다.

엄청난 크기의 트롤들이 어깨에 쇠사슬을 메며 움직이면 중앙의 커다란 망치가 하늘 위로 치솟았다.

고블린들이 머리 위에서 트롤들을 채찍질하자 그들이 사슬을 놓았고, 연결된 거대 망치가 그대로 낙하했다. 아래에는 대장장이들이 쓰는 틀에 짜인 주형이 있었는데, 트롤들이 다시 거대 망치를 끌어 올리자 주형에 찍힌 장비를 꺼냈다.

무기가 만들어지는 모습은 인간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웅장했고, 또한 치열했다.

"실패군."

그 중심에 서 있는 자.

[17군단장 후보 알두바드]

놈이 바로 아다만티움 사태의 원인이자, 바르바제의 주인임과 동시에 우리가 찾았던 군단장 후보.

알두바드였다.

미믹 [2]

17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