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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며칠 뒤.

우리는 지옥 광산에 모여 있었다.

필리핀행 레이드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베트남의 영역이 되어있는 광산으로 향한 후, 그곳에서 베트남 네피림들과 합류해 포탈 스크롤을 건네받고 베트남으로 이동한다.

그 후, 베트남에서 비승선을 타고 다 함께 필리핀으로 직행.

이후부터는 베트남과 함께하며 천천히 필리핀을 장악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필리핀의 지형적 특징이 첫 번째고 베트남과 대한민국의 우호를 다지기 위함이 두 번째다.

필리핀은 여러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비승선을 타고 첫 번째 도착지인 마닐라로 향한다 해도 그곳에 군단장이 없다면 결국엔 섬에서 섬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필리핀에서는 포탈이 생성되지 않으니 천천히 단서를 찾아야 한다.

놈이 숨어 있을 장소를 말이다.

'필리핀을 지배한 건 하피.'

하지만 하피가 둥지로 삼는 것은 높기 긴 빌딩이 주류다.

지난번 공격으로 놈의 주거 공간이 개박살이 났기에 어디로 이주했는지 모른다는 게 주요 정보였다.

"마닐라, 아니면 다바오겠죠. 군단장이 다른 작은 섬에 둥지를 틀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우린 청소부 역할이군. 마닐라에서 다바오까지 비승선은 못 타나?"

"예, 그건 안 된다고 합니다. 일단 군단장의 영역에 들어서면 비승선은 힘을 잃게 된다고 하니까요."

"아쉽네."

결국 발품 팔아서 찾아다녀야 한다는 소리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꽤 장기 원정이 될 거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필리핀을 점령한 하피들의 레벨은 오에서 육 정도이고 군단의 숫자도 칠십이니까요.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강철 군주가 소환해준 강철마를 탄 채로 지도를 살펴봤다.

필리핀, 그 아래의 나라는 브루나이와 인도네시아가 보였다.

"여기는 멀쩡한가?"

"인도네시아는 이미 먹혔고, 브루나이는 결사 항쟁 중일 겁니다."

"브루나이가? 꽤 작은 땅인데, 강자들이 많나 보군."

"말레이시아의 땅과 인접해 있어서 인도네시아의 악마들 침공에 비교적 부담이 없을 겁니다. 이쪽만 브루나이고 이 밑은 말레이시아 땅이거든요. 말레이시아가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군단과 수시로 싸운다고 하니 브루나이는 비교적 수월할 겁니다."

"그렇군."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땅이 연결되지 않았음에도 영역이 애매하게 나뉘어져 있는 곳이었다.

덕분에 헷갈렸다.

"마닐라 말인데, 그냥 우리는 마닐라, 베트남은 다바오로 이동해서 레이드를 시작하면 안 되는 건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우린 완전 보디가드구만."

"그런 거죠.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베트남에서 그렇게 요청한 거니까요. 덕분에 저희는 식량과 물자를 건네받게 됐으니 나쁜 거래는 아닙니다."

물자나 식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듣지 않았지만, 관찰자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베트남에서 꽤 출혈을 감수한 모양이다.

'베트남 쌀...'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시기에는 가릴 처지가 아니다.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아진 세상이니 베트남 쌀이라도 그게 어디랴.

"그러고 보니 혈맹 놈들, 횡성으로 보냈다고 했지?"

"예.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그렇다고 죽을 짓을 한 것도 아니라서요. 정부의 관리하에 횡성 농민들의 터전을 지키게 할 겁니다."

수련장에서 정신 차려보니 혈맹은 물론, 이상한 놈들도 죄다 박살 내서 그날로 혈맹은 와해했다고 한다.

혈맹 간부가 화가 단단히 나서 수련장에 찾아왔는데 나한테 두들겨 맞고, 2차적으로 협회 팀들한테 밟혀서 제발 살려만 달라고 애원했다 한다.

솔직히 나쁜 놈들이지만 죽을 짓을 한 건 아니라서 협회와 정부의 감시하에 횡성에서 농사짓거나 근처 악마 토벌팀에 들어갔다고 한다.

"횡성 농사 잘됐으면 좋겠네."

"그러게요."

지금 쌀을 못 먹는 건 아니다.

꽤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점점 천정부지로 쌀값이 치솟고 있다. 어디 쌀 뿐이랴. 김치를 비롯한 한국인의 필수 밥상에 오를 반찬들이 모조리 동나고 있다.

공급은 없고 수요만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실태.

지금까지 거래소에 이런 식량이 판매되고 있는 거 자체가 기적이다.

'금세 없어지겠지.'

하지만 이마저도 사라질 거다.

지금도 김치는 묵은지를 제외하면 없고, 쌀은 1kg에 300금에 판매되고 있으니 말이다.

쌀이 금보다 귀해진 시대.

우리는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나만의 상점에서 빵을 팔고는 있지만 서양인도 아닌데 빵만 먹고 어떻게 험한 세상 살아갈까.

역시 한국인은 쌀을 먹어야 한다.

흰 쌀밥에 갓 담근 김치.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

거기에 라면까지 있다면 금상첨화.

레아 표 특제 스튜를 먹고 출발한 상황이지만 김치와 쌀밥을 떠올리다 보니 금세 배가 고파졌다.

내가 만든 악과는 분명 맛이 뛰어나고 포만감도 채워주지만, 인간은 맛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민족적 공허함이란 게 있다. 내게 그 공허함을 채울 음식은 역시 쌀밥과 김치를 베이스로 한, 한국인의 밥상이다.

"베트남에서 배추도 주기로 했습니다. 고춧가루랑요."

비록 흰쌀의 국적이 한국이 아닌 베트남이라도, 배추가 베트남이라도! 내 공허함은 채워질 것이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켜야겠네."

"그렇죠."

이런 게 민족 투사의 마음이었을까.

이번 작전.

반드시 성공시킨다.

*

한 달 뒤.

"왜... 없지?"

필리핀의 땅이란 땅은 전부 이 잡듯 뒤졌지만 없었다.

무엇이? 군단장이 없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놈이 없다.

한국군은 물론 베트남까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이 새끼 튄 거 아냐?"

"데몬시드 온단 소리 듣고 튀었네."

최초의 사례일지 모른다.

군단장이 도망갔다는 사례 말이다.

"어이가 없군."

꽤 싱거운 싸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싸움조차 성립이 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찾았습니다!!"

낙담하던 그때.

아마존이 놈을 찾아냈다.

"어디야?"

"근데 그게..."

아마존은 지도를 펼쳐 손가락으로 찍었다.

위치를 본 나와 간부진들은 모두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인도네시아 땅이잖아."

필리핀과 맞닿아 있는 인도네시아.

카라켈롱 섬이었기 때문이다.

필리핀 [1]

160화.

카라켈롱.

인도네시아 소속의 섬으로서, 필리핀과 가깝게 맞닿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설마하니 이곳으로 도망쳤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난감하군."

당황스러움이 첫째라면 후에는 난감함에 미간을 좁혔다.

"필리핀에서 카라켈롱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비승선을 제외하면 이 많은 수의 병력을 통째로 이동시킬 수단은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필리핀에서는 비승선 못 쓰잖아."

"그렇죠."

필리핀은 아직까지 군단장의 땅.

비록, 우리가 하피란 하피는 모조리 죽여버렸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군단장의 땅으로 되어있다.

땅을 오염시킨 주범.

군단장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아니 근데 땅 주인이 도망갔는데 여기가 유지가 되는 거야?"

"디버프는 유지되고 있는데?"

"어이가 없네..."

난 저주 면역이라 통하지 않지만, 아직까지 군단장의 저주는 필리핀 전역에 퍼져있다.

놈이 없어도 말이다.

"그럼 우리 이번 레이드는 실패야? 아니 저거 어떻게 잡아...?"

바바리안이었다.

한 달여간의 고생이 전부 물거품이 되려는 순간이기도 했다.

베트남과 함께 마닐라부터 시작해서 필리핀의 땅 전역을 휩쓸었다.

덕분에 하피는 거의 씨가 말랐다.

하지만 도통 군단장이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저 멀리 도망갔을 줄이야.

"남한산성도 아니고 뭐야 이게."

뭐 그렇게 비장한 각오를 하고 온 건 아니다. 이번 무대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 베트남이었으니까.

하지만 놈이 이렇게 도망갔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트라. 어떻게 생각하지?"

"글쎄, 설마 놈이 도망갔을 줄은 몰랐어서... 당황스럽군."

베트남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

놈을 죽이러 가는 거야 어렵지 않다.

나 혼자만 가도 죽일 순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베트남에 헤일로 몰아주기가 성립되지 않고, 그렇게 되면 거래가 불완전해진다.

우린 약속했던 물자와 식량을 받지 못한다. 게다가 놈이 도망친 곳은 인도네시아.

다른 군단장이 점령한 땅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어찌어찌 최소한의 인원과 함께 카라켈롱으로 쳐들어가 70군단 군단장 레이드를 시작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냥 빠르게 죽이고 나온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인도네시아 군단장이나 군단이 나타난다면? 또는 70군단장이 또 도망친다면 어떻게 될까.

시간도 시간이고, 손해가 막심해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한 번 도망간 놈이 두 번이라고 못 할까.

게다가 녀석은 하피의 우두머리 격 놈이니 비행 실력은 수준급일 터.

마음먹고 도망친다고 하면 우리는 놈을 잡을 길이 없다.

게다가 도망치는 놈이 군단장이다.

다른 악마들과는 달리 머리 또한 똑똑할 테니 함부로 따라가다간 어떤 함정에 걸릴지 모를 일.

'똑똑하니까 도망쳤겠지.'

자기 군단을 버려서라도 도망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인도네시아 땅으로 피신한 걸 보면 그쪽 군단장과 내통하고 있지 않다고 보기 힘들다.

그들만의 네트워크로 소식을 전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건 그렇고, 군단장이 다른 땅으로 이동할 줄은 몰랐네... 데몬시드. 넌 알았어?"

"몰랐다."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군단장이 설마 자기 땅을 버리고 떠날 거라는 걸 누가 알았을까.

한 나라의 왕이 자기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고 떠난 격이나 다름없는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봤지만, 방법은 세 가지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비롯한 한국군과 베트남군을 최소한으로 추려서 카라켈롱에 간다는 것이 첫 번째가 되겠군."

빠르게 가서, 놈을 찾아내고 죽이는 게 첫째.

"두 번째는 여기서 놈을 기다리는 것 정도가 되려나."

놈이 다시 오길 기다리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인도네시아와 싸울 각오를 하고 전부 쳐들어가는 것."

정도가 되시겠다.

"인도네시아의 주인은 누구지?"

"23군단 정도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어서..."

23군단.

하피 군단장 놈이 그쪽으로 도망친 이유를 알 거 같다.

"만트라, 선택해라. 우리는 전적으로 너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다."

애초에 한국은 베트남의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으니까.

"이미 한 달이나 허비했다. 여기서 언제 다가올지 모를 놈을 기다리는 짓은 할 수 없다."

맞는 말이다.

이미 한 달이나 소비했다.

네피림들의 불만도 쌓여가고 피로도도 무시할 수 없다.

"쳐들어가겠다. 아무리 그곳이 인도네시아 땅이라 해도, 그곳의 군단장이 저 작은 섬까지 찾아올 확률은 희박하다고 본다. 찾아온다 해도 꽤 많은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어."

만트라가 침투를 강행했다.

베트남은 이번 레이드에 사활을 걸고 있으니 그의 결정을 거스르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한국은 조금 달랐다.

"인도네시아 군단장이 포탈이라도 타고 들이닥치면 어쩔 거지?"

"그건..."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어요."

한국은 혹시 있을지 모를 위험을 배제한 채 강행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베트남이 약조한 식량과 물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목숨보다 소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교적 만만한 70군단장에 비해 24군단장은 꽤 많은 출혈을 예상할 수밖에 없는 강자이기 때문.

한국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겁쟁이밖에 없는 건가?"

만트라는 아니었다.

베트남의 2인자인 롱쓰였다.

만트라가 인상 쓰며 그를 노려봤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는 듯 회의장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분명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위험하다고 하여 도전하지 못한다면, 우린 절대로 강해질 수 없어! 그게 아니면 정말 겁이라도 먹은 건가?"

롱쓰의 도발에 한국 네피림들이 전원 발끈했다.

난 가만히 바바리안을 쳐다봤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이런 일에는 항상 바바리안이 발끈해서 주먹부터 날리곤 했으니까.

사실 조금 바랐는지도 몰랐다.

이런 지지부진한 토론은 나 또한 지겨웠으니.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바바리안은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어조로 놈을 향해 답했다.

"동료의 죽음을 겁내지 않는 놈은 쓰레기일 뿐이다."

의외라면 의외였다.

바바리안이 설마 저런 말을 하다니.

그리고 꽤 감동적이었다.

롱쓰의 겁쟁이냐는 말에 동조하면서도 확실하게 되돌려줬으니까.

바바리안의 말에 롱쓰가 반문한다면 놈은 동료의 죽음을 묵인하는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랭킹 2위다.

현 베트남을 대표하는 자다. 그런 그가 입을 연다면 바바리안의 말에 동조한다는 뜻이고 이는 베트남 전체를 쓰레기로 만들게 된다.

롱쓰는 단번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제야 만트라가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롱쓰의 발언을 사과한다. 녀석도 답답한 마음에 실언한 것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한다."

만트라는 날 향해 고개를 한번, 바바리안을 향해 고개를 한번 숙였다.

"괜찮다. 꽤 과열된 거 같으니 회의는 잠시 쉬도록 하지."

"감사한다."

회의를 잠시 파하고.

만트라가 다가와 다시 사과했다.

"나도 충분히 이해해. 답답하겠지. 우리도 같은 마음이야."

"이해해주니 고맙다."

만트라는 내 옆에 앉아 따라진 차를 단번에 마셨다.

"나쁜 녀석은 아닙니다. 녀석도 악마들 때문에 처자식을 잃었어. 악마라면 자다 깨도 치를 떨고, 한 놈이라도 더 죽이려고 발악하는 녀석이라 조금 화가 많은 것뿐."

"그래서 강행하려는 건가."

"그렇게 막무가내인 놈은 아니오. 이번 일은 베트남의 사활이 걸려 있으니 그랬을 게지. 게다가 헤일로를 얻게 된다면 나를 비롯한 랭커가 얻을 테고, 나와 롱쓰는 확정이다 보니 다급한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군."

만트라는 날 빤히 바라봤다.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어렵나."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하지만 베트남은 위기입니다."

"이야기는 들었다. 태국과 라오스, 캄보디아가 넘어갔다고."

"머저리들이지."

입에 담고 싶지도 않다는 듯 만트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들 이익만을 위해서 움직이다가 공멸한 머저리들. 덕분에 애꿎은 베트남만 전전긍긍하게 됐습니다."

"본래 중국에 요청하려 했어요. 하지만 그곳은 하나로 취합되지 못해. 땅도, 인구도 너무 많기 때문이죠."

"그렇지."

"그렇다 보니 악연으로 시작됐지만, 그래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 한국에 요청한 거죠. 한번 싸워본 상대니까 더 믿을 수 있고."

"그런가."

웃음이 새어 나온다.

생각해보면 베트남과는 제일 처음 싸운 국가이기도 하다.

그때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세상일이란 게 참 어찌 될지 모른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만난 당신은 그때보다 더 강해졌으리라, 내 차크라가 말해주고 있으니까."

"그래 보이나."

"계단 랭킹만 봐도 알 수 있죠. 요 몇 년간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순위라고 떠들더군요."

"그 정도는 아니야. 운이 좋았다."

정말 운이 좋아서였다.

덕분에 많이 강해진 것도 사실.

그러나 이것과 이건 다르다.

"한국군이 위험을 감수할 순 없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만트라는 아마도 날 설득하러 온 것일 터.

그들에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면 우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얻을만한 건 아니지. 우리에겐."

"..."

헤일로나 잉걸불이 아무리 좋다지만 그건 없는 자들에게나 그러한 것.

한국은 이미 헤일로 보유자가 10명이나 존재하고 있다.

이 와중에 고작 70군단장에게 목매고 있을 이유는 없다.

그게 놈들의 함정일지 모를 상황에서는 더더욱.

베트남 입장에서는 답답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남는 게 베트남과의 우호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식량과 물자를 비롯한 금화가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물론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개죽음당하려고 이제까지 이 악물고 살아온 사람은 없다.

그때였다.

끼익.

"부탁, 합니다."

"..."

베트남 1위.

만트라가 무릎을 꿇었다.

"이대로 아무 소득도 없이 간다면, 베트남은 위아래로 천천히 갉아 먹혀 지도에서 사라지게 될 겁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자네가 이러면 내가 뭐가 되나. 어서 일어나."

만트라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주자, 그가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도와주십시오."

"... 나 참."

난감한 친구다.

"하나, 방법이 있긴 해. 물론 너희 쪽에서 약간의 손해는 있겠지만."

사실 방법이 있긴 하다.

성공확률이 그나마 높으면서 한국과 베트남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방법이다.

"손해라는 건..."

"베트남에 헤일로가 두 개밖에 가지 않을 거다."

"그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헤일로가 두 명이 된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는 마음이었다.

이거면 충분하다.

솔직히 랭킹 1위가 타국의 존재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건, 대통령이 다른 나라 가서 무릎 꿇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몰골을 봤는데 어찌 외면할까.

"그 방법은..."

자리에서 일어난 만트라가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그 방법.

그 방법이란 간단한 방법이다.

"나."

작전명.

"나 혼자 군단장 잡아 오기."

다른 땅에 있는 게 위험해?

그럼 나 혼자 가서 군단장을 잡아 족쳐 잡아 오면 될 일이다.

그렇게 하면 한국도 베트남도 위기에 빠지지 않고 안전하게 놈을 죽여 헤일로를 얻을 수 있다.

물론 내가 1위를 먹게 되겠지만.

"좋습니다! 그러겠습니다!!"

베트남은 그걸로도 충분할 것이다.

물론 그 대신.

"조건이 있다."

대한민국의 대출혈 서비스.

무상으로 제공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필리핀 [2]

161화.

이제까지 군단장의 영역은 땅에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70군단장이 하는 꼴을 보면 딱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인접한 국경이 같은 군단장의 땅이라면 차원석이 결계를 치고 있는 게 아니니 마음대로 다녀도 큰 제약이 없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으니.

"아무 제약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나름의 자존심이 상했겠죠?"

"하긴."

군단장은 어쨌든 그 지역의 패자.

아니, 나라의 왕이다.

필리핀을 먹었으니 필리핀의 왕이라 봐도 무방하다. 한데 왕이 제 땅을 버리고 남의 나라로 튀었으니 정말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내가 악마였으면 목매달고 자살했다. 순 미친놈 아냐 이거."

"그러니까 악마겠지."

"하여튼 하피 새끼 아니랄까 봐, 존나 영악해서는 도망치는 꼴이란..."

자존심.

솔직히 그러면 안 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악마들의 수장 격 인물이 바로 군단장 아니던가.

그런 놈이 지레 겁먹어 도망쳤으니 적잖이 자존심이 상하겠지.

가만히 있던 인도네시아 군단장은 놈을 보고 놀려대지 않았을까.

같은 군단장이 적에게서 도망쳐 왔으니 치욕이라며 죽이지나 않았을지 모르겠다.

'근데 정말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간 건가. 난 필리핀 와서 딱히 한 게 없는데.'

대부분의 일은 내 밑의 네피림들이나 협회의 신성들이 다 했다.

난 그냥 만트라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거나 군단장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유추하며 회의한 게 전부.

'하긴, 내가 아니더라도 여기 있는 녀석들이 약하진 않으니까.'

베트남과 함께하느라 전면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간간이 보여준 한국의 저력은 표표하게 드러났다.

나와 레아, 아마존과 강철 군주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헤일로를 쓰지 않고도 베트남보다 강했다.

그리고 굳이 헤일로를 쓰지 않더라도 이들 밑으로 치고 올라오는 랭커들의 저력도 무시하긴 힘들었다.

이들 대다수는 협회 소속.

한 번씩 내 악과와 브란스가 열심히 만들고 있는 브릭서를 토대로 강해져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간혹 베트남인들은 하피의 매혹에 빠져 곤욕을 치렀으나 한국군은 비교적 그런 일이 적었다.

내가 미리 양산한 '하피의 포도'를 섭취하기도 했고 웬만하면 먼저 나서는 일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와 북한에 자리한 히든 던전들로 그들은 강해졌다.

사냥터가 넓다는 말은 근만큼 강화할 장비나 숨겨져 있는 스킬북을 찾을 확률이 높다는 것.

'비록 그 땅 때문에 죽을뻔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땅으로 많은 랭커들이 수혜를 입는 중이다.

난 그들이 잡는 악마들로 하여 500만 마리를 잡을 때마다 잉걸불을 하나씩 얻고 있고 말이다.

그 이후로 카오스 게이트도 나타나지 않았다.

티타누스의 죽음은 군단장들 사이에서도 꽤 충격이었던 걸까. 아니면 대대적인 전쟁 준비라도 하고 있는 걸까.

놈들이 뭘 하는지까지 내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비교적 평화롭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기에 지금의 한국은 내가 없어도 70군단의 군단장 정도는 자력으로 레이드가 가능한 정도라고 나는 판단한다.

놈도 그러니까 도망간 걸 테고.

"정말로 혼자 가실 거예요?"

"아니, 혼자서는 안 가지."

레아가 걱정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그럴만하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만트라한테는 혼자 간다고 말했지만 혼자서는 못 간다.

"어디 있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한국에는 천리안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닌 궁수가 한 명 있지 않은가.

"아마존."

"네!"

후드를 눌러쓴 채였지만 왠지 음성이 밝았다.

"난 아마존과 함께 간다. 나머지는 모두 여기서 대기하도록."

"하지만 위험할 수 있잖아요."

"레아의 말이 맞다. 꽤 먼 지역으로 비행해야 하지 않나. 내 헤일로라면 그게 가능하다."

레아의 의견에 동조하며 강철 군주는 헤일로까지 꺼내 들었다.

강철 칼날로 여섯 장의 날개를 만들어 비행하는 강철 군주의 속도는 확실히 빠르다.

"빨리 가는 게 능사는 아니니까. 오히려 눈에 띄지 않게 가는 게 좋다."

"... 그런가."

풀이 죽은 채로 자리에 앉은 강철과 함께 이번엔 혼나비가 손을 들었다.

"내 날개는 강철처럼 안 시끄러워."

"혼나비. 데몬시드는 내 날개를 시끄럽다고 한 적이 없다."

"그게 그 말 아냐? 조용히 가고 싶다잖아."

이제 알았지만 둘의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혼나비."

"내 날개는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지만 조용해. 내가 알기로 아마존은 장시간 비행할 수 있는 스킬이 없는 걸로 아는데?"

아마존을 쳐다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단시간이라면 허공을 박차며 유지할 수 있지만 장시간 비행에 적합한 스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존은 내 클루트처럼 허공을 발판 삼아 2단 점프를 할 수 있는 스킬이 있는 걸로 안다.

하지만 그걸로 1, 2시간이 걸릴지 모를 거리를 비행하는 건 어려웠다.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나가 필요했고, 아마존은 나처럼 삼천에 달하는 마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내가 아무리 악과와 브릭서를 랭커들에게 지급해도, 마력을 키우는 것은 온전히 본인의 몫이다.

나조차 마력을 올려주는 악과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난 가능해. 내 나비들은 내 손과 발이 되어주고, 날개가 되어주기도 하는 녀석들이니까. 물론 당신은 알아서 할거지?"

자신만만한 태도.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내가 아마존을 안고 가면 된다."

난 클루트를 수시로 써도 된다.

내 신체 능력은 한 번의 도약으로도 꽤 많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그리고 187이나 되는 마력 스탯은 3740이라는 마나를 보유하게 해주고 클루트는 한번 사용하는 데 소모 마나가 별로 되지 않는다.

'악마의 눈물' 열매로 이번에 악마들을 깡그리 제물로 바쳐서 하나 먹었더니, 때마침 강화되어 그나마 있던 60의 마나 소모도 많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알다시피 저번에 몸이 재구성되면서 레그릿지와 거스트, 클루트가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루트] (Fusion)

-데몬시드로부터 합성된 마법. 집중이 유지되는 한, 한 번의 시전으로 공간의 제약 없이 거닐 수 있다.

「레그릿지」

-벽에 붙을 수 있다.

「클루트」

-허공을 박찰 수 있다.

「거스트」

-거친 돌풍을 만들어낸다.

여기까지는 원래 있던 스킬들이다.

하지만 직접 사용해보면 조금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루트를 시전하면 몸이 가벼워진다. 바람에 타고 있는 기분.

허공을 박차면 거스트의 돌풍에 휘말린 것처럼 바람을 타고 꽤 먼 거리를 가볍게 도약할 수 있다.

집중이 끊기지 않는 한, 이 버프는 사라지지 않는다.

300정도의 마나를 소모하면 영원히 끊기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거기에 더해.

「윈드레짓」

-그루트를 유지하고 있는 중, 적을 공격하는 즉시 집중이 풀리며 근력에 비례한 100% 물리 피해와 속도에 비례한 광범위 바람 피해를 준다.

+1 강화한 그루트에 공격 스킬까지 새롭게 달려버렸다.

집중이 풀리는 즉시 버프 스킬이 공격 스킬로 전환되는 방식이다.

합성된 후, 유니크로 바뀌어서 그런지 스킬의 효과가 꽤 대단하다.

주력으로 사용할 스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정도는 아니어서, 그루트를 사용하다 간간이 잡몹 처리할 정도로 사용할 즘은 됐다.

어쨌든 이렇게 그루트가 있다 보니 굳이 혼나비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거스트의 스킬 때문인지 한 번의 도약으로 수백 미터는 점프할 수 있었고 내 신체 능력은 백 미터에 불과한 도약을 오백 미터로 가능하게 해줄 만큼 강한 다릿심을 갖고 있으니까.

"저, 저를 안고 가신다고요?"

"왜. 무겁나?"

"아니요! 전혀요!"

"... 요새 저희 식당 자주 오시는 거 보면 무거워지셨을지도 몰라요."

"사장님!"

화들짝 놀라 소리치는 아마존의 시선을 레아가 외면했다.

뭔가 둘만의 비밀이었던 것처럼 아마존이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레아가 은근히 질투가 심해.'

귀여운 정도의 질투지만 지금은 작전을 위한 회의 중이다.

공과 사는 구별하는 게 좋으니 나중에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겠다.

"그런데 말입니다."

"말해."

"아마존을 안고 가신다고 하셨는데, 그럼 돌아오실 때는 어쩌실 겁니까."

"음..."

생각해보니 돌아올 때는 군단장을 잡아 와야 하는데 그러면 필연적으로 아마존을 안고 올 수가 없다.

"데려가야겠군."

"혹시 모르니 글로리안도 데려가세요. 하피의 크기가 그렇게 큰 편은 아니지만, 굳이 협회장님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을 겁니다."

"어, 그래."

그렇게 나와 아마존. 그리고 혼나비와 글로리안이 카라켈롱으로 떠나게 되었다.

*

안 그래도 많은 시간을 허비한 상황.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펄럭!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는 글로리안과 아마존을 들고 나비 날개로 비행을 시작하는 혼나비.

그리고.

"그루트."

후우우웅-!!

그루트로 바람을 타고 도약하는 데몬시드가 있었다.

"너무 빠르잖아요!"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진 데몬시드를 보며 혼나비와 글로리안이 화들짝 놀랐다.

"이래야 멀리 간다."

그루트의 특성상, 강한 다릿심으로 도약해서 더욱 멀리 나갈 수 있다.

그렇다 보니 필연적으로 빠른 속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기에 데몬시드로서는 저들과 발을 맞추기가 조금 불편했다. 힘을 줄이면 그만큼 더 많은 도약을 해야 하기 때문이고 그러면 발을 더 많이 움직여야 하는 피로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빨라서 나쁠 건 없었다.

"아마존, 보이나."

"네! 어느새 둥지를 만들어서 쉬고 있어요!"

"팔자 좋네."

"자기 자식들 버리고 도망가놓고 지는 쉬고 있어? 웃기는 새끼네."

혼나비와 글로리안이 군단장을 욕하고 난 더욱 속도를 올렸다.

"혼나비, 대장님이랑 가까이서는 못 나는 거예요?"

"지금 따라가기도 바빠. 그리고 저 사람 주위엔 바람이 너무 불어. 내 날개로는 버티기 어려워. 보시다시피 나비 날개라서 연약하잖니."

데몬시드는 한편 도약하며 점점 더 편한 자세를 찾고 있었다.

그루트를 이렇게 오래 사용해본 건 처음이라 그도 점점 능숙해지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거스트로 저항을 낮추면 편하네.'

도약만으로 거스트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따로 정면의 바람을 날려 보내 저항력을 줄이고 도약하면 보다 멀리 날아갈 수가 있었다.

그저 스킬을 사용하기만 그치는 게 아니라 숙련이 되면 될수록 그루트는 성능이나 활용도가 높아질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따로 거스트를 사용하면 그만큼 마나가 소모되기는 하지만, 그렇게 부담될 정도도 아니야.'

게다가 거스트를 이용하면 폭발적인 속도를 낼 수 있다.

공기를 저항하고 그만큼 추진력을 붙여서 사용하게 된다면.

콰앙-!!

"우왁!"

"뭐, 뭐에요!"

어마어마한 폭발력과 함께한 속도를 만들어낼 수가 있었다.

'재밌는데.'

슬슬 익숙해지니 도약이라기보다는 저항 없이 나는 것에 가까웠다.

바람을 타는 기분이 이런 기분이었나 싶을 정도.

그동안은 장비에 저장된 플라이나 카이삭스의 표식을 이용해 간접적 비행을 이뤘지만 이렇게 자유롭게 날게 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데몬시드! 앞에!!"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혼나비의 목소리에 앞을 보니.

"슬슬 도착했나."

섬으로 보이는 땅과 함께 하늘을 날아다니며 사냥감을 물색 중인 와이번 무리가 포착됐다.

"어떡하실 겁니까."

"저놈들한테 허비할 시간은 없다."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나 했더니 와이번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어 반문하니 글로리안은 앞을 가리켰다.

"꽤 많은데요."

두, 세 마리가 있나 했는데 안개가 조금 걷히자 한 무리가 있었다.

수는 십여 마리.

그 뒤로 더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상관없어."

하지만 고작 그것들로 데몬시드를 막을 수는 없었다.

팡-! 팡-! 팡-!!

허공을 박찬 데몬시드는 와이번 무리의 수장으로 보이는 엘리트의 머리를 단번에 찍어 눌렀다.

콰아아앙-!!

그루트의 윈드레짓이었다.

세 번의 도약으로 가속도를 높였다.

근력에 비례한 물리 피해.

속도에 비례한 광범위 폭풍이 칼날처럼 휘몰아쳤다.

엘리트급 와이번의 머리가 순식간에 박살 나며 주변으로는 폭풍이 휘몰아쳐 와이번들의 날개와 몸체를 모조리 찢어 놓았다. 단 한 번의 발차기가 만들어낸 효과였다.

"미친..."

"아마존, 위치는."

"가깝습니다. 여기서 2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구름 안이에요."

구름 안.

어딘지 대강 느낌이 온다.

"와이번 소굴로 들어갔군."

와이번은 구름 위에 둥지를 튼다.

그들은 구름을 단단하게 뭉칠 수 있는 생물학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비교적 눈에 띄지 않고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군단장이란 자가 자기 종족도 아닌, 와이번의 소굴로 들어가 몸을 피하고 있다는 건 조금 우스운 일이었다.

"가자."

쾅-!

하늘로 솟구치는 데몬시드와 일행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놈들의 소굴로 가면 갈수록 와이번과 하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목숨을 버리며 결사 항쟁하듯 데몬시드 일행을 막아섰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데몬시드의 어마어마한 속도와 가속력이 만들어낸 윈드레짓에 한 방 맞으면 대부분은 폭풍에 휘말려 날아가거나 갈가리 찢겨나갔다.

하늘의 왕자라는 와이번의 타이틀은 데몬시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저벅.

구름 위를 거니는 데몬시드는 어느새 수많은 와이번을 도륙했다.

점점 많아지는 하피들을 썰어내며 거대한 둥지 안.

"피곤해 보이는군."

천천히 눈을 뜨는 군단장의 앞.

데몬시드는 놈이 무언가를 품고 있음을 보았다.

그렇게 부리나케 도망갔던 놈이, 지척에서 악마들이 썰리고 있는데도 달아나지 않았다.

분명 놈이 도망갔을 때를 대비한 방법도 생각은 해 두었다.

그런데도 놈은 달아나지 않았다.

데몬시드는 그 점이 의아했다.

하지만 인제 보니 의문이 풀렸다.

"알을 낳고, 품기 위함이었나."

70군단 군단장.

그녀가 도망친 이유는 새끼의 잉태 때문이었다.

필리핀 [3]

162화.

군단장은 좋은 말로도 상태가 좋다 할 수 없었다.

마음 졸이며 도망 다녀서일까.

아니면 뱃속에 품은 아이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잉태란 어쩔 수 없이 모체의 영양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니 몸이 쇠하는 건 당연지사니까.

-너를 알고 있다. 데몬시드.

"내가 유명하긴 해."

군단장은 그를 알고 있었다.

'이쁘게 생기긴 했네.'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고는 하나, 하피는 하피였다.

그중에서도 으뜸이라 하는 군단장.

여왕 격인 인물이니 이전의 미모가 어찌했을지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우아한 미모와 함께 우수에 찬 눈빛, 그리고 새하얀 나신은 다 죽어가는 노인도 벌떡 일으킬 만큼 고혹적이었다.

아름답다는 말로도 부족한 여왕의 기품이 그녀에게는 존재했다.

-너희 인간들은 이리도 집착스럽구나. 내가 너희가 두려워 떠난 줄 아느냐. 터전을 망치는 잡스러운 벌레들이 아이에게 해를 끼칠까 멀어진 것을 이리도 쫓아오다니.

제 입으로는 절대 도망쳤다고 하지 않는 거 보니, 창피한 줄은 자신도 아는 모양이다.

이렇게 변명으로 제 몸을 뒤덮은 깃털처럼 방벽을 쌓고 있으니.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아름다운 미모에서 터져 나오는 비난과 저주는 그 나름의 맛이 있었다. 괜히 매도당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족속이 있는 게 아니라고, 데몬시드는 생각했다.

"그게 도망의 이유인가."

-닥쳐라. 더러운 수컷 주제에 감히 하늘의 여왕을 입에 올리더냐!

"뭔 말을 못 하겠군."

-... 지금이라도 네 죄를 사하여 줄 수도 있다. 너의 씨를 다오. 그리하면 모든 것을 용서해주마.

간드러진 목소리였다.

미려한 마력도 묻어 있었다.

"70군단 군단장 라피에르가 날개를 펼칩니다."

"그녀가 당신을 위해 노래합니다."

"면역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고작 그것뿐.

아무런 효과도 주지 못했다.

"내가 씨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걸 주는 건 좀 그런데."

그러자 라피에르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뿐.

-나를 봐다오.

알을 품던 그녀는 자신의 날개를 펼치며 속살을 보였다.

팔을 대신하는 4개의 날개.

크고 고운 날개 깃털은 오묘한 빛을 자아내고 있었다.

미증유의 마력을 품은 날개깃과 반대로 그녀의 속살은 볼품없었다.

"말랐군."

-난 이리도 쇠약해져 있다. 지옥에서도 유명한 전사야. 너는 이리 나약한 암컷을 상대로 고약한 짓을 일삼을 것이냐. 가녀린 암컷을 희롱하고 힘으로 몸을 취한다 한들, 그것은 도리어 네 명예를 더럽힐 것이란다.

유혹하지 못하자 동정을 일으키기 위해 제 몸을 들췄다.

가녀린 암컷을 도륙해봤자 명예롭지 않다는 옛 시대의 기사나 통할법한 말들을 쏟아내면서 말이다.

"확실히 쇠약해졌어."

하나 쇠약해졌다는 말은 거짓으로 보이지 않았다.

날개깃 속 그녀의 나신은 몇 달은 못 먹은 사람처럼 말라 있었으니까.

물론, 데몬시드에게는 오히려 좋았다.

"어차피 널 죽일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러니까 상관없겠지. 넌 네 땅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베트남의 심판을 받게 될 거다. 물론 사형이지."

-날 농락할 셈이었더냐...!

"그러면 네가 죽인 사람들은 이제껏 곱게만 죽여줬나? 유혹하고, 농락하며 알을 낳게 만드는 종자처럼 부리고 끝에는 잡아먹었다지."

하피들 때문에 필리핀의 대다수 사람은 죽었다.

여인과 아이는 물어 뜯겨 죽었고, 사내들은 정기를 빨리고 노예처럼 부려지다 결국엔 잡아 먹혔다.

한 달 동안 필리핀을 두루두루 다닌 데몬시드는 그들의 참혹함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악마는 인간을 죽인다."

그리고.

"인간도 악마를 죽인다."

그뿐인 이야기다.

이걸로 라피에르와의 대화는 끝.

나머지 이야기는 전투가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캬아악!

군단장이 날개를 펼쳤다.

역시 보통의 하피와는 달리 거대한 날개와 우아한 깃털의 색은 그녀를 여왕이라 칭할 만했다.

아름다운 얼굴과 비견되는 날카로운 이빨들 사이로 미려한 음색이 새어 나왔다. 여왕의 음색은 모든 수컷을 유혹할만한 것이었으나 데몬시드에겐 통하지 않았다.

"군단장이 진명을 드러냅니다."

[바람과 춤추는 라피에르]

하지만 그때였다.

파직.

-꺄아아아아아아아악!!

붉은 번갯불과 동시에, 데몬시드의 치명적인 투창이 이어졌다.

시작은 거대한 왼쪽 날개였다.

팔 대신 4개의 날개를 지닌 그녀의 날개 하나가 적창에 꽂혔다.

그것도 투창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꺾여 부러져버렸다.

너덜거리는 날개의 고통 속에서도 날아올랐으나, 그녀의 수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레인스톰."

쿠구궁!

폭풍우가 몰려왔다.

동시에 비가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이 정도 폭풍우는 라피에르를 억압하기엔 미미했다.

하늘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녀였고 라피에르의 수식언은 바람과 춤추는.

그녀에게 있어 제아무리 강력한 폭풍이라도 소꿉장난하는 것과 같았다.

어느 바람이든 그녀에게는 왈츠는 추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으니.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데몬시드의 레인스톰은 그저 폭풍우라 부르기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레인스톰] (Fusion)

-데몬시드로부터 합성된 마법. 거대한 비구름을 불러 강력한 빗방울을 떨어뜨리고 조종한다.

「워터볼+1」

-닿는 즉시 분산되어 터진다.

본래 데몬시드의 워터볼은 강화되어 산탄총처럼 강력한 데미지를 발생시켰다. 하지만 워터볼이 레인스톰에 흡수되어 이제는 워터볼을 비처럼 내리게 될 수 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강화 워터볼의 강력함을 지니게 됐다는 말이었다.

덕분에 마나 소모량은 꽤 늘었지만 데몬시드가 걱정할 양은 아니었다.

게다가 워터볼의 스킬들은 대부분 내재되어 있어 그가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집중."

강화 워터볼은 집중과 분산으로 이루어졌었다.

산탄총처럼 터지며 광범위한 범위와 데미지를 자아냈던 분산과 최대 5개까지 몸 주위에 띄워놓고 축적하여 사용했던 집중.

물론 이제는 다르다.

-데몬시드!! 네 영혼은 끝내 아홉 지옥의 윤회에 깔려 비통할 것이다!

연쇄적으로 폭음을 자아내는 빗방울과 정신없이 처맞고 있는 라피에르와 달리, 눈먼 빗방울들은 모조리 데몬시드의 곁으로 모이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처럼 작은 빗방울.

그것들 수십, 수백 개가 살아 있는 듯 천천히 데몬시드의 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콰앙!

레인스톰에 얻어맞고 날개가 꺾인 라피에르가 지면에 처박힌 그때.

후웅. 떨어져 내리던 빗방울이 갑자기 허공에서 멈췄다. 정지 상태의 소형 폭탄급 빗방울들이 데몬시드의 손에 따라 물고기 떼처럼 라피에르의 곁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유영했다.

바닷속에서 죽음을 앞둔 상어나 고래를 노리는 작은 물고기들처럼, 수천, 수만의 빗방울이 그녀의 곁을 맴돌며 농락하듯 맴돌았다.

-이런 권능을 가졌다 들었던 적이 없다. 넌 대체 뭐냐!

"사람은 누구나 성장하는 법이지. 너희들도 그렇다던데. 신의 뱃가죽에서 태어난 너희들도."

-... 데몬시드. 너는 강대한 힘을 가졌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고 너의 것이라 보느냐.

"무슨 소리지."

-인간을 네피림이라 칭하는 것을 지옥의 존재들도 알고 있다. 이전의 뜻이야 신의 자식이었으나 그것이 지금도 같으리라 보느냔 말이다.

라피에르는 비릿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들었다.

-신이 너희에게 힘을 주었겠느냐. 그럴 리가. 그렇다면 우리가 주었겠느냐. 너희들의 힘은 고결한 척하는 위선자들이 주었을 것이다. 그저 나기를 하늘 위에서 태어나기만 한 콧대 높은 흰 것들이 말이야.

그러니 언제든.

-네 그 강대한 힘도 얼마든지 도로 회수해 갈 것이다. 하늘 위의 지고하다 떠들어대던 대천사가 제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일말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어 희망의 불씨는 커졌다지. 하나 이 전쟁이 끝난 뒤. 입에 발린 말로 자애를 칭하던 놈들이 고작 백 년도 살지 못하고 죽을 너희들의 힘을 그대로 놔둘 성싶냔 말이다.

라피에르는 하늘을 향해 입이 찢어질 듯 비웃었다.

-아니! 절대로!! 놈들은 우릴 배신 하고, 인간을 배신하고, 결국엔 저희를 낳은 어버이까지 배신한 족속이다. 놈들을 믿는 건 바보 천치들이나 하는 짓거리지!

이내 라피에르는 데몬시드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

-우리와 함께해라. 지옥의 군주께서는 네게 영원의 힘을 약속할 것이니.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우리는 무엇보다도 빼앗기는 것이 싫다. 우린 저들과 다를 것이다. 결단코!! 다르다.

데몬시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째서 악마란 것들은 이리도 얄팍한 마음을 간지럽히는 걸까.'

본래 그리 태어났기 때문인가. 아니면 저들만의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태생이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진화한 것인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고심하고 있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니 말이다.

살기 위해 하는 그저 그런 말이라기엔 나름의 진실성이 보였다.

그조차도 악마이기에 하는 가증스러운 연기임을 배제할 순 없었겠지만 그런데도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놈에게는 있었다.

'흔들리기는 하네.'

솔직한 심정으로 그는 흔들렸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결국에 네피림의 힘은 부여받았다.

신의 선물, 기프트라는 이름으로 악마를 물리친 대가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대여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스템의 구속 안에서 자유롭되 언제든 빼앗길 수 있는 힘.

악마란 족속은 이렇게도 인간의 의심과 고민을 손쉽게 파고들었다.

"흔들리긴 하네."

-그렇지? 넌 알고 있을 게야. 군주의 입에도 오르내리는 존재이니. 모를 수가 없지. 하니 그렇다면 우리와... 우리와 함께 하자! 너라면 감히 군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을지 모를 것이니라!

다 부러진 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러나 데몬시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녀의 날개를 잡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을 뿐.

"넌, 군단장 중 몇 번째로 강하나."

-... 뭐?

"몇 번째로 강하냐 물었다."

-그건...

"아마도 칠십 언저리겠지. 군단장 중에서도 최하위. 맞지 않나."

-군단장의 힘을 그깟 숫자놀음으로 재단하려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러면 너보다 약한 군단장은 몇이냐. 말할 수 있나?"

-....

데몬시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현대 사회의 말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하피의 어미야."

-....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 급이 맞아야 한다고 말이지."

까드드득.

라피에르의 눈이 분노로 치밀었다.

치욕과 모멸의 분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몬시드는 제 할 말을 다 했다.

"나, 랭킹 1위. 너, 군단장 중 최약체. 70위 따리, 이게, 급이 맞아?"

데몬시드는 라피에르의 머리채를 잡아 올리고는 두 눈을 똑똑히 마주치며 말했다.

"영입 제안하려면 지옥의 군주라는 새낀지 뭔지부터 내 눈앞에 데려와. 그 정도 예의는 차려야 나도 제대로 생각해주지. 어딜, 글로리안 같은 놈이 스카우트 제의를 이렇게 해."

-너 이 자식이!!

데몬시드는 픽 웃으며 라피에르의 머리채를 잡은 채로 놈이 품었던 둥지 안으로 들이밀었다.

"난 널 살려서 데려가야 한다. 근데 난동을 피우면 내가 널 죽일 수밖에 없잖아. 이번엔 내가 제안한다."

데몬시드는 라피에르의 둥지 안.

그녀가 낳은 커다란 알을 보여주며 말했다.

"알, 중요한 거지? 내버려 둘 테니 얌전히 따라와라. 아니면 박살을\ 낸다."

-네가 어찌 인간이라는 거지?

"뭐 그럼 악마란 거냐."

-악마보다 더한 놈이 네놈이다.

"날 이 이상 악마로 만들지 말아줘.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데몬시드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곤 알을 톡톡 건드렸다.

작은 힘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알을 위태롭게 균열이 생겼다.

-이 악마보다 지독한 것!

"칭찬, 감사한다."

라피에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필리핀 [4]

163화.

-제안이 있다!

"제안은 그럴 위치에 있는 놈이나 하는 거다. 까불지 마."

으르렁거리자 라피에르는 한껏 위축된 눈으로 고개를 떨궜다.

-알이 깨어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있게 해다오.

솔직히 데몬시드의 입장에서는 이 알마저 깨버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이 녀석이 태어나봤자, 사람 먹는 악마가 될 게 뻔하니까.

하지만 될 수 있으면 이 녀석이 협조해주는 편이 편했다..

필리핀으로 돌아가는 내내 도망치려 하거나 자결이라도 하면 이 고생들이 모두 쓸모가 없어지니까.

게다가 왠지 모를 어미의 심정에는 동정이 생기기도 한다. 그에게 어머니 따위 있어 본 적도 없지만.

"언제 깨어나는데."

-이제 곧 깨어난다. 그래서 내가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니라.

"한 시간. 그 이상은 어렵다."

-너무 적어. 하루는 기다리게 해다오. 너도 자식이 있을 것 아니냐. 이 어미의 마음을 헤아려라.

"싫다."

-어버이께서는 가슴의 살점을 떼어내 인간을 만들었다던데, 어찌 너희 인간들은 이리도 잔인하더냐.

"너희는 뱃가죽을 떼어냈다던데 왜 이렇게 먹을 게 없어. 쌀 내놔, 김치 내놔 이 자식들아!"

퍽! 퍽! 라피에르를 때리던 데몬시드의 손이 순간 멈췄다.

우웅.

파동이 느껴졌다.

무슨 파동이냐 하면 공간의 파동.

이른바 포탈이 열리려는 징조였다.

데몬시드는 라피에르를 놓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때였다.

-시끄럽군.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하기 그지없는 검붉은 포탈이 열렸다.

와이번이 만든 구름 위.

맑은 하늘이 삽시에 어둠으로 뒤덮였다. 불길함 그 자체가 등장한 듯한 세상의 일변이었다.

데몬시드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놈이 이 땅의 군단장이라고.

-아임!! 위대한 23군단의 군단장 아임이여! 나 70군단의 군단장 라피에르를 도와다오! 너와 거래를 하겠다!!

놈이 나타나자마자 라피에르는 희망을 찾은 듯 고래고래 소리쳤다.

얻어터진 얼굴에 환희가 가득 찬 미소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제일 꺼렸던 상황인데.'

23군단 군단장 아임.

그게 인도네시아를 장악한 군단장의 넘버와 이름이었다.

놈의 첫인상은 묵직한 중년의 얼굴을 지닌 사내였다. 사내다운 턱수염을 지녔고 옷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어깨엔 검은 비단뱀을 두르고 있었는데 놈의 눈빛엔 귀찮음과 짜증이 한껏 묻어 있었다.

-라피에르. 하피의 어미여.

-그렇다, 나다. 아임! 내가 바로 70군단의 어머니인 라피에르다!

-군단장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버러지처럼 남의 땅에 도달해 역병을 몰고 온 부정한 것아.

-... 뭐?

콰직!

아임은 데몬시드의 곁을 지나 라피에르를 곧장 짓밟았다. 징그러운 지렁이를 짓밟는 것처럼.

_크아아아아아악!

콰직! 콰직! 퍽! 퍽! 콰직! 우드득!!

한참이나 놈은 라피에르를 짓밟고 그녀의 삶을 유린했다.

-네년은 군단장으로서의 자긍심도 없는 것인가. 걸레처럼 아무것에나 다리를 벌리며 연명하는 저열한 암컷의 말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나.

-끼아아아아악!

-내 거룩한 땅에 추잡한 네년의 몸뚱이에서 난 것을 떨어뜨리지 마라. 모조리 태워버릴 것이니.

아임은 둥지 안의 라피에르가 낳은 알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게 문제인가. 지옥의 유명인.

지옥의 유명인.

데몬시드는 놈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

-라피에르. 알이 깨어날 때까지라고 너는 이 자와 약조했다. 그 약조.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야. 그것은 나, 23군단의 군단장 아임이 보증 섰으니 말이야.

쩌적. 아임이 알에 손을 가져가자 불길한 불길이 치솟았고.

이내 알이 깨어났다.

-아, 아아! 내 아이다! 내 아이야! 나의 뒤를 이을 여왕이...!

하지만 알의 내용물은 온전하지 않았다.

아임. 그가 채 온전하지 못한 알을 억지로 깨운 것으로 보였다.

안에는 하피라 부를만한 것이라기엔 그저 살덩어리가 꿈틀댈 뿐이었으니.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발버둥 치고 있었다.

끽끽거리는 것이 마치, 어미를 찾는 듯했으나.

-좋은 먹이군.

하나 그마저도 아임이 데리고 있던 검은색 비단뱀이 라피에르의 알 속에 있는 새끼를 꿀꺽 삼켜버렸다.

-아아, 아아아아아!! 아임! 아이이임!! 아이이이이이임!!

라피에르가 성치 못한 몸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임은 사악한 웃음을 참지 못하며 그녀를 걷어찼다.

쾅-!

-넌... 넌 언젠가 천상의 창에 목구멍을 꿰뚫릴 것이다! 네 화염은 천상의 아궁이를 때울 불로 전락할 것이야! 영원토록 고통받을 것이다!!

-군단장이란 것이 그런 조잡한 저주밖에 하지 못하니 네 한계가 그것뿐이라 생각하지는 않는 건가. 수캐에게 날갯짓이나 해댈 암캐 따위가.

라피에르는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아임은 문제는 해결됐다며 그녀의 목을 지르밟고 데몬시드를 보았다.

-문제는 해결됐다. 이 추잡한 것을 데리고 나가준다면 좋겠군.

"그걸로 만족하나."

데몬시드의 물음에는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아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있을 것이다. 유명인. 이따위 창녀로 더럽혀진 추잡한 무대가 아닌, 화려하고 합리적인 그대와 나의 무대가. 언젠가 초대하겠다. 내 땅은 이따위 창녀의 저급한 땅과는 다르니.

23군단 군단장도, 데몬시드도 서로가 작금의 상황을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합의되었다.

데몬시드는 짓밟혀있는 라피에르의 날개를 잡고 말했다.

"그때가 그렇게 늦지는 않을 거야."

-아무렴, 그대와 어울리는 그때를 나 또한 고대하지.

발끝부터 검붉은 불길을 타고 사라져가는 아임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내게 빚을 졌음을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그대들의 동료. 나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 기억하겠다."

화르륵.

사라지는 아임의 모습과 함께, 데몬시드는 다소 씁쓸한 둥지 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힘겹게 품었던 둥지 안에는 알껍데기 조각이 조금 존재할 뿐, 이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 딸아... 나의 다음을, 이었을... 여왕이여...

"..."

축 처진 채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라피에르를 잡아 발걸음을 돌렸다.

'라피에르도, 아임도 악마. 인간의 적인 악마다. 악마는 죽여야 한다.'

데몬시드는 필리핀으로 돌아가는 내내, 계속 그것만을 중얼거렸다.

약해지지 않으려, 복잡해지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는 것처럼.

*

며칠 뒤.

"감사합니다. 데몬시드."

필리핀에서의 마지막 밤.

필리핀은 정화되었다.

오늘은 그 마지막 밤.

달을 등진 채, 커다란 모닥불 사이에서 성공적인 레이드를 축하하는 시간이었다.

난 협회의 간부진들과 술잔을 기울이다 만다라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베트남은 큰 고초를 겪었을 겁니다."

"거래였을 뿐이다. 너무 그렇게 머리 숙일 필요 없어."

"아니요. 위아래를 확실히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뒤탈이 없으니까요."

"그러고 싶다면야 뭐."

꿀꺽, 마시는 맥주가 목을 타고 탄산이 식도를 긁었다.

일이 다 끝난, 한 여름밤의 얼음장처럼 시원한 맥주.

이것보다 더 좋은 극락은 없었다.

"자자! 소서리스들은 맥주를 더 얼려라! 맥주가 부족하다 이거야!!"

"우리가 무슨 당신네들 냉장고인 줄 알아요! 벌써 몇 시간째야!"

"하하하하! 시원한 게 좋잖아!"

바바리안이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맥주를 들고 소서리스들을 칭찬했다. 이 냉장고들이 없었다면 이번 레이드는 실패했을 거라며 소리치자 사람들은 웃고, 소서리스들은 질색했다.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23군단의 군단장과 잠깐 조우했을 뿐이야."

"23군단..."

만트라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필리핀을 점령하는 건 먼일로 미루어야겠군요."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지."

군단장이 직접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인도네시아는 여러 섬과 땅이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영역이다.

꾸준한 공세가 이어진다면 필리핀을 지키려다 카오스 게이트로 침공당하는 낭패를 겪을 수도 있다.

게다가 23군단이라는 놈의 넘버를 생각하면 조심하는 편이 좋다.

"애초에 우리도, 베트남도 필리핀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상관없지. 너무 걱정만 할 필요는 없어."

"예, 맞는 말씀입니다."

라피에르는 죽었다.

베트남의 1위와 2위가 헤일로를 얻었고, 나는 잉걸불 10개를 얻었다.

5레벨 이하의 한국 네피림들은 모두 한 단계 레벨이 성장했고 이후 베트남에서는 약속한 대로 식량과 물자를 전달하기로 약조했다.

"그런데 물자는 어떻게 주는 거지?"

"광산을 이용할 겁니다. 그러는 게 가장 편하니까요."

"그렇군."

베트남과 한국은 지옥 광산이 비교적 가깝게 위치하고 있으니 사람들을 여럿 보내 물자를 건네받으면 간단한 일이다.

식량은 주류가 쌀이고, 각종 곡물과 고추, 배추 등의 작물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물자는 철근과 시멘트가 대부분이었고 말이다.

악마의 침공으로 건물이 많이 무너져서 그런 종류의 물자가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고 하니 적당한 거래였다.

"아, 그거 알고 있습니까."

"맥주가 맛있다는 거 말고는 잘."

"중국이 몽골을 먹었답니다."

"몽골? 중국이?"

"예. 그렇다고 하더군요. 저희가 필리핀에 있을 때, 레이드를 성공시켰다고 합니다. 정부에서 온 연락이니 확실할 겁니다."

"미룡인가?"

"예, 중국 1위인 미룡을 주축으로 움직여 점령했다고 합니다."

몽골이라.

몽골은 한국에서도 노리던 땅이었다.

중국과 러시아를 위아래로 두고 있어 정치적으로도 꽤 용이 한 땅이었는데 레비아탄 때문에 주저하고 있던 땅이기도 했다.

그 사이에 중국이 점령할 줄이야.

솔직히 레비아탄 이후로 한동안은 땅을 점령할 생각이 없었던 터라, 중국에 뭐라 말할 자격은 없었다.

"중국은 꽤 많이 점령하는 거 같은데 괜찮으려나 모르겠군."

"레이드에 성공했다고 해도, 모두 점령하는 건 아니니까요. 저희가 알고 있는 건 몽골 레이드에 성공했다는 것과 몽골의 군단장 넘버가 55군단이라는 것 정도니까요."

"본래 중국과 몽골은 예전부터 서로 사이가 안 좋았으니..."

"국경이 인접한 나라 중 사이가 좋은 나라를 찾는 것도 손에 꼽을 겁니다. 역사란 그런 거니까요."

"하긴."

"그럼 전 이만."

"그래, 헤일로. 축하해."

"감사할 뿐입니다. 언젠가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반드시 불러주십시오. 베트남은 언제나 한국의 편에 설 것입니다. 그런 약속이었으니까요."

"그래."

만트라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사라지고, 관찰자가 급히 다가왔다.

"러시아가 미국과 손잡고 에스토니아를 쳤다고 합니다. 넘버는 68군단. 레이드는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여기저기서 승전보를 올리네."

인류가 여기저기서 승리하고 있다니 참 마음이 좋았지만, 그게 러시아라 하니 썩 마음이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들도 베트남과 같았습니다."

"미국에 헤일로를 몰아달라고 요청했나 보군."

"예."

러시아가 헤일로를 얻었다라.

썩 껄끄러운 녀석이다.

그때는 홧김에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으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억울하기도 하다. 가면의 진짜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내게 악감정을 품었으니까.

'오해를 풀긴 해야 하는데...'

귀찮기도 하다.

가면 말고 러시아인들한테 그렇게까지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기 살겠다고 자기 나라 랭킹 1위 버리고 간 것도 러시아 아니었나.

"귀찮아. 애도 아니고."

현 러시아 1위, 화이트가 내게 악감정을 품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아마도 러시아 놈들이 정보를 왜곡한 탓이겠지. 나 몰라라 겁나서 도망가놓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으니 한국이 배신했다는 것처럼 모호하게 말했을 것이다.

'뻔하지.'

그래도 한편으로는 화이트에 대한 좋은 감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가면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한다는 소리이기도 하니까.

'슬퍼한다라...'

네피림들이 모닥불 사이에서 술에 취해 춤추는 걸 구경하니 울부짖는 레피에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닥불 때문일까.

불길에 휩싸여 태어나 삼켜진 새끼 하피의 모습과 오열하는 레피에르의 절규가 자꾸만 귓가에 아른거린다.

"왜 그러세요?"

레아였다.

어느새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냥. 언제까지 군단장을 죽여야 할지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

술을 먹어서일까.

조금은 감성적이게 된 기분이다.

밤도 깊고, 술에도 취했으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리다 보니 대체 언제까지 싸워야 할까 싶은 회의감도 막연하게 들었다.

아마도 그래서일 거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

"화성님."

"응."

"필리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있었어요. 하피들의 눈을 피해서 땅굴을 파고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생존자가 있었군. 다행이네."

필리핀의 생존자.

하기야, 하피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니 땅굴을 팠다면 비교적 놈들의 눈을 피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물론 몇 달이나 땅굴에서 생존한 건 고통스러웠겠지만.

"네, 다행이죠. 그 사람들은 아이처럼 엉엉 울었어요. 드디어 살았다면서 감사한다면서요."

살려줘서 고맙다고.

"그 사람들을 살린 건, 화성님이에요."

"내가 아니더라도..."

"아니요. 이번 군단장은 영악했어요. 화성님이 직접 가서 데려오지 않았다면 몇 번이고 그런 식으로 전투를 피하고 또다시 필리핀을 완전한 악마의 땅으로 물들였겠죠. 화성님 덕이에요. 필리핀이 평화를 되찾은 건."

맥주잔을 놓고 레아를 바라봤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비친 레아의 모습은 붉은 머리와 어우러져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잘하셨어요."

내 머리를 쓰다듬는 레아의 모습에 난 피식 웃고 말았다.

"고마워."

"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인걸요."

"그래."

어렵게 생각할 필요 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자.

악마가 죽고, 인간이 살았다.

지금은 그거면 충분했다.

아니. 앞으로도 그거면 충분하다.

어렵게 생각하면 할수록 놈들은 내 정신을 갉아먹을 테니.

군단장 씨앗 [1]

164화.

흰 쌀밥.

그리고 갓 담근 김치.

거기에 플러스 달걀 올린 라면까지.

이것만 해도 수라간 밥상 부럽지 않을 정도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횡성에서 보내온 돼지 목살을 스테이크로 굽고 자체적으로 키운 콩나물까지 올려주면 그제야 진짜다.

"화룡점정. 콜라까지."

크으.

보기만 해도 만족스러운 한 상이지 않은가. 쌀밥 한술 떠서 김치 올려서 먹다가 목 막히면 라면 국물과 함께 면발을 흡입한다.

느끼하다 싶으면 김치를 한입 먹고 라면과 콩나물, 목살 스테이크를 한 번에 집어서 한입에 털어 넣는다.

우걱우걱 씹어먹다 콜라를 벌컥 마시면 뜨거워진 식도가 시원하게 내려가니 이게 바로 천국이다.

"횡성에서 보낸 고기랑 서초동에서 보내온 김치지?"

"네!"

인생 뭐 있나.

맛있는 거 먹고 행복하면 그만이지.

횡성에서 보내온 고기와 서초동에서 김치를 보내왔다.

이번에 베트남에서 얻은 쌀과 각종 식량을 토대로 담근 것이다.

협회 네피림들한테 먼저 돌리고 소량은 판매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김치와 쌀에 열광했다.

가격도 적당한 수준이었다.

물론 쌀과 김치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정부에서 관리하에 판매하고 있는 서초동에 와야 했지만, 서초동에 깔린 좀비 떼의 위험을 감수하고도 올 정도로 김치는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여론이라는 게 언제나 그렇듯, 좋은 소리만 들려오지는 않았다.

[한국은 자체적인 식량 대처가 되어있지 않나? 왜 베트남 쌀로 한국 네피림 목숨을 담보삼아 받지?]

-정부가 너무 무능함

┗김치만세:이 새낀 왜 사냐?

┗김치맨:걍 뒤져 ㅂㅅ아

┗작성자:미개한 새끼들 한국 정부의 무능함을 감싸는 거냐? 너희들이 매국노랑 다른 게 뭐지? 국민의 역할은 정부가 올바른 통치를 하도록 돕는 것에 있다.

┗ㅇㅇ:말투에서부터 찐따력이 충만한 걸 보니 어그로인듯

┗김치에초밥:한국인들이 고생해서 얻어온 쌀과 김치를 거저 받으면서 왜 이딴 똥 글을 싸는 것이무니까? 이해가 안 되무니다.

[나도 한마디 하자면...]

-우리가 얻은 거에 비해서 베트남이 더 많은 걸 얻은 것 아닌가? 헤일로랑 식량을 교환했다고 하던데 우리가 손해 본 거 같은데 나만 그럼?

┗ㅇㅇ:그렇게 느낄 수 있지만 우린 보조만 한 거고 위험한 일들은 전부 베트남이 했다고 하더라

┗애국보수기레기:현시대에서 식량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식량만 받은 게 아니라 건축에 필요한 물자들까지 어마어마한 양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베트남 정부가 가지고 있던 금화의 4/1에 해당하는 금액을 건네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들 모두가 헤일로보다 값이 높냐라고 한다면 애매한 감은 있습니다만, 그것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 베트남은 저희와 든든한 우호 관계를 지니게 되었고 태국을 비롯한 타국에 점령된 악마들을 저지하는 역할도 해주겠죠. 무엇보다 우호적 동맹국을 만들었다는 게 혼란의 도가니인 세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ㅇㅇ:세줄요약좀

┗애국보수기레기:ㄴㄱㅁ

┗김치맨:애레기년 시원시원하네 ㅋ

아무튼 그러하다.

"썩 나쁘지 않았다고 보는데 난. 어쨌든 간에 30만 명 정도 되는 네피림들이 큰 피해 없이 레벨업 했으니까."

그래도 사람들 생각은 조금 다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렇게 뜨겁게 토론하는 거 보니.

[베트남은 헤일로 보유자가 2명이나 생겼고 우린 그 답례로 베트남 쌀을 받은 것임?]

-정부는 정신 나갔냐? 한 명이라도 한국 헤일로를 만들 생각은 안 하고 쌀이랑 김치에 영혼을 팔아?

┗ㅇㅇ:김치는 팔만하지...

┗ㅇㅇ:그만큼 한국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방증.

┗ㅇㅇ:꼬우면 니가 농사하던지

┗흰쌀밥이애옹:흰쌀밥이 주는 감동을 네가 알아? 아냐고 씨발년아

확실히 단기적으로 보면 우리가 손해 보는 그림이 맞다.

하지만 식량 생산량의 10%를 매년 지급하게 되어있는 베트남에서는 나름의 값을 지급한 셈이기도 하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온 세상 사람들이 헤일로를 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게다가 장기적으로 10년 20년을 내다본다면 무상 지급될 베트남의 식량은 천문학적인 수준.

절대 손해 본 장사는 아니다.

베트남이 악마의 침공으로 망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베트남에 쌀이 그렇게 많음?]

-제곧내

┗ㅇㅇ:베트남이 원래 전 세계 쌀 수출 국가들중 3등인가 그랬을걸

┗작성자:1등은 누군데

┗ㅇㅇ:인도 2등이 태국

┗작성자:우리나라는?

┗ㅇㅇ:한국은 순위에 있지도 않음ㅋ 뭔 한국이여 ㅋㅋ 지들 먹을 쌀도 제대로 못 지었는데

┗ㄴㄴ:그건 아님, 우리나라는 땅이 작아서 쌀 생산도 그렇게 높지 않아서 순위권에 없는거임

┗ㅈㄹㄴ:우리나라는 수출 루트를 못 뚫어서 그랬던 거고 수출 자체를 하기는 했음 쥐젖만큼이지만.

┗ㄴㄴ:그럼 뭐함 베트남도 악마들 때문에 농사 개씹창났는데

┗ㅈㄹㄴ:우리나라보단 나을 듯

그래도 한마디 해주고 싶은 건 사실이기도 하다. 닉을 새로 파서 몰래 정보를 흘려볼까 했으나, 이미 다른 누군가가 중요 정보를 흘린 이후였다.

[속보, 한국. 베트남에게서 매년 쌀 생산량의 10% 무상 제공받기로 거래했다.]

-제곧내

┗ㅇㅇ:이게 진짜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겠네. 식량 걱정은 없어도 된다는 소리 아냐.

┗ㅇㅇ:쌀에 한정해서는 그렇네

┗김치맨:김치는?

┗김치에초밥:김치가 피료하무니다!

조회수에 비해 댓글이 별로 많이 달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역시 진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베트남도 나름 머리를 쓴 거죠. 식량 받고 싶으면 우리가 망하지 않게 서로 상부상조하자! 라고요."

"전 세계에서 살아남은 나라들은 승전보를 올리고 있고, 이대로 유지만 돼도 한국은 먹지 못해 아사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겠지. 일단 식량이 풍족해서 나쁠 건 없어. 어려운 사람도 도울 수 있고."

그렇긴 하다.

레아와 강철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오두막을 나섰다.

"어딜 가나."

"나는 나대로 농사 좀 해야 해서."

"다녀오세요~"

밥도 먹었으니 일을 할 차례다.

그동안 미뤄두고 있었던 일이 있지 않은가.

"군단장 씨앗도 심어야지."

군단장 씨앗.

푸르푸르부터 바릿느에 이어 이번에 라피에르까지.

"티타누스를 씨앗으로 삼지 못한 건 정말 아쉽네."

시드네스로 영양분을 쪽쪽 빨려서인지 씨앗으로 만들지 못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육체가 재구성되며 더 좋은 것들을 얻었으니 불만은 없다.

"어디가 좋으려나..."

그건 그거도 군단장들의 씨앗을 심을 새로운 섬을 찾아봐야 했다.

"불별도는 악마의 눈물이 너무 크게 자라버려서..."

일명 눈물 나무라고 부르는 녀석이 너무 거대해서 다른 군단장 나무를 심기가 애매해졌다.

뭔가 군단장은 일반 데몬트리와는 조금 다른 성장방식을 가지고 있을 거 같기도 했고, 혹시나 저렇게 거대하게 커지게 되어버리면 한 섬에서 키우기가 꽤 난감하기 때문이다.

"뭔가 양분 다 빨아먹고 난리 칠 거 같기도 하고... 군단장이니까."

이 자식들이라면 뭔 일이 발생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불별도 근처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섬을 물색해볼 참이다.

무슨 일이 나타날지 모르니 사람이 없을 만한 섬을 찾는 게 제일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불별도와 기부도 주변엔 섬이 많았다.

이번에 내가 가볼 곳은 이전에는 오봉도라고 불렸던 불별도보다 몇 배는 커다란 섬이다. 이곳의 지형이 마치 봉황의 머리 다섯 개가 붙은 모양과 같다고 하여 오봉도라 이름 붙여진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는 서해안 끝자락에 있는 섬이었다. 물론 지금은 어쩌다 보니 이곳에 자리 잡은 악마들이 있을 뿐이지만.

그루트로 허공을 도약하며 살펴보니 살아남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사람은커녕, 시체의 흔적도 크게 보이지 않았다.

"하긴, 벌써 몇 달이나 지났으니까."

악마가 나타난 지 이제 반년이 조금 지났다.

그날로부터 대다수 섬은 고립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나를 비롯한 네피림들은 섬에 고립되었어도 살아남았지만, 대개는 거래소가 오픈되면서 포탈을 타고 섬에서 탈출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나처럼 섬에서 계속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아직도 섬에 사는 사람은 나처럼 강하거나 아니면 괴짜겠지."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하고 자신만의 터전을 꾸린 자.

아니면 사연이 있어 떠나지 못한 자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여긴 없겠어."

사람의 흔적이 보이진 않는다.

있는 건, 꽤 다양한 악마들의 발자국과 배설물로 보이는 흔적들뿐.

이 정도면 크게 상관없겠지.

누군가 있다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끔, 내가 조금 도와주면 될 일이다.

승봉도의 중심에 내려서자 당연하게도 악마로 보이는 놈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언뜻 보이는 건 역시나 고블린.

그리고 짐승 악마화된 정도.

보기 드물게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졌다던 늑대 비슷한 놈도 보이지만, 딱히 토종 늑대는 아니겠지.

대충 둘러보니 짐승무리와 고블린 무리가 주를 이루는 것 같다.

각각의 영역을 사이에 두고 공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무작정 달려드는 멍청이들도 없는 거 같고."

경계만 할 뿐. 달려들진 않는다.

혹시 몰라서 판포비아의 패시브 능력을 켜두기도 했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해서 꺼두지만, 여기서는 켜둬서 나쁠 게 없어 보인다.

"판포비아를 활성화합니다."

"격이 낮은 상대는 당신을 두려워하며 공포에 질립니다."

"공포에 질린 상대는 확률적으로 환각을 보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며 최악의 경우 사망합니다."

투왕의 살기가 판포비아에 흡수된 뒤로 관련 스킬을 활성화해 놓으면 가만히 있어도 동식물들이 벌벌 떨며 얼어 버린다.

살심과 공포가 뒤섞이자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공포에 빠뜨려서 평소에는 꺼놓을 수밖에 없다.

레아도 환각에 빠져 한동안 악몽을 다시 꿨을 정도니 자중했지만.

"여기선 그럴 필요 없겠지."

판포비아를 활성화해두자 은근히 날 경계하며 다가오던 놈들의 기척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또는 뒤집어져서 거품을 물거나.

신경 쓰지 않고 씨앗을 꺼냈다.

군단장의 씨앗.

우선 푸르푸르의 것이다.

[땅 비트는 푸르푸르의 씨앗]

성장 기간-666일.

성장 기간 666일.

다른 군단장의 씨앗을 살펴봐도 모두 666일이었다. 군단장의 성장 기간은 모두 666일로 통일인 거 같다.

"흠."

씨앗의 크기는 내가 이제까지 데몬시드화 했던 것들과는 다르다.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군단장의 씨앗을 심기 주저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에 있었다.

"크긴 크네."

씨앗의 크기가 죽순만 하다.

씨앗부터 겁나게 컸다.

이 정도로 거대한 씨앗이니, 아무 곳에나 대충 심기 불안했다.

상식적으로 씨앗이 거대하니 다 성장한 나무 또한 거대할 거로 생각하는 게 상식적이니까.

대충 심으면 뭔 일이 나도 대차게 일어날 거 같아 자중한 것이다.

푸른빛이 감도는 거대한 씨앗.

겹겹이 감싸진 단단한 갑옷과 털이 그녀의 웅장하면서도 교활한 악마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대충 땅에 박으면 되겠지."

총알을 완벽하게 준비했다.

우수수 떨어지는 데빌스톤.

필리핀행에서 악마의 시체들을 데빌스톤으로 스톤화해서 챙겨뒀다.

그 수가 수천이 넘어가니,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666일이면 악마 666마리.'

"땅 비트는 푸르푸르의 씨앗에 제물 성장이 이루어집니다."

인벤토리에서 대충 천 개 정도 쏟아 넣으니 땅에 박아둔 씨앗에서 번갯불이 튀며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씨앗이 벗겨지고 떡잎이 성장한다.

떡잎에선 넉 개의 줄기가 나와 푸른빛과 함께 끝을 모르고 하늘로 길게 뻗어나갔다.

줄기는 점점 두꺼워지고, 뿌리는 땅을 빠르게 파고들었다.

지상의 양분을 빨아들이듯, 땅은 금세 쩍쩍 갈라졌고 메말라갔다.

돌연 하늘에서 먹구름과 함께 벼락이 떨어지고 폭풍이 휘몰아치니 괜히 불길함이 엄습했다.

마치 대악마의 부활이라도 나타나는 것만 같은 징조가 아닌가.

하지만 푸르푸르의 나무는 아직도 성장하는 중이었다.

울창한 나뭇잎은 없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 나무는 번개를 닮은 가지만이 먹구름이 닿을 듯 뻗었고 닿자마자 굉음을 자아내며 전역으로 강력한 낙뢰를 흩뿌렸다.

쾅! 꽈아앙-!!

여기서 보일 정도로 낙뢰의 파괴력에 바닷물이 분수처럼 치솟았고, 눈 뜨고 있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부서뜨려야 하나.'

예상한 것보다 주변에 미치는 변화가 너무 불길했다.

하지만 내가 고민하는 사이, 나무는 더욱 빠르게 성장했고 푸르게 빛나는 잎이 울창해짐과 동시에 서서히 열매가 맺혔다.

무르익어가는 열매의 모습은 뭐라 형용하기 힘든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뭐랄까.

말라비틀어진 손과 손가락이 꽃봉오리처럼 말아져 있는 모습이랄까.

썩 보기 좋은 형태는 아니었다.

회색의 겉껍질과는 달리, 열어보니 안에는 작은 푸른 열매가 있었다.

맡아본 적 없는 향. 탄내와 함께 달달한 향이 동시에 맡아졌다.

하나 먹어보니.

"엘더 열매를 섭취하셨습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2 상승합니다."

"나이쓰!"

열매 하나당 올스탯 +2

이건 확실하게 개이득이다.

역시 군단장의 열매.

이전 것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마력도 올랐어.'

브란스의 브릭서 중에서도 올스탯을 올려주는 게 있다.

하지만 그건 결함이 있다.

'마력을 올려주진 않지.'

브릭석의 재료는 악과.

마력을 올려주는 악과는 이제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더 열매는 그게 가능하니 드디어 마력을 올릴 수단을 얻었다.

물론 엘더 열매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엘더의 힘을 기아 상태인 당신의 악익이 갈구합니다!"

"악익-공포의 나래가 엘더의 힘을 제물로 삼아 갈취합니다!"

"악익-공포의 나래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악익은 내가 지닌 수식언이 변한 악마의 날개를 뜻한다. 당장 상태창을 확인해보니 확실히 변했다.

『악익』

[공포의 나래 Lv.2]

-탐욕스러운 공포는 언제나 공포의 제물을 원한다.

『블루헬』

-공포의 푸른 지옥을 소환한다. 지옥의 영향권에 있는 자는, 모든 자원이 불태워지며 자원의 양에 따라 중력의 억압을 받는다.

『프리즌 블러드』 (Passive)

-당신의 피는 얼어붙어서, 항상 침착함을 유지한다.

놀라려는 찰나.

어쩐지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런 건가."

감정의 동요.

패시브 스킬이지만 판포비아처럼 on, off가 가능했다.

"나쁘지 않네."

지금까지는 썩 나쁘지 않았다.

"넌 누구지."

거대한 푸르푸르의 나무 사이.

나무의 뿌리 부근의 공간에서 푸른빛을 휘감고 다가오는 존재가 있었다.

형태는 사슴.

크기는 꽤 작지만 무수한 사슴뿔을 지닌 존재는 생전, 푸르푸르의 외관과 꽤 많이 닮아 있는 녀석이다.

난 곧장 적창을 무장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나, 나무를 수호... 너, 나의 주인.

놈은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군단장 씨앗 [2]

165화.

난 아직도 기억한다.

34군단 군단장 푸르푸르.

놈과의 싸움은 진짜 악마가 무엇인지를 내게 깨닫게 해준 녀석이자, 첫 군단장 레이드였다. 그날의 고통과 무력감. 그리고 동료의 상실을 안겨준 최악의 군단장.

그게 바로 푸르푸르였다.

그런데 푸르푸르가 부활했다.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나, 수호. 너, 주인...

어눌한 발음. 앳된 목소리.

신비한 백색과 푸른빛이 감도는 아주 작은 새끼 사슴이다.

내 허리 정도까지 오려나.

다 자라지 못한 무성한 뿔의 흔적은 녀석을 푸르푸르라고 말하지만, 이전과 상태나 분위기가 달랐다.

"앉아."

-앉아?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알려주자, 녀석은 눈치보다 스르륵 주저앉았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손바닥을 위로 하여 올리자 곧 알아듣고 일어났다.

그제야 난 물었다.

"넌 뭐지?"

-몰라, 나무에서 태어났어. 나무를 지켜. 너를 제외한 모두를 죽여.

단편적인 말이지만 대강 이해했다.

데몬시드에서부터 태어난 군단장의 잔재 비슷한 걸로 보였다.

악마의 나무에서 태어나, 이것을 지키는 나름의 수호자 비슷한 역할을 부여받은 듯하다.

평범한 악마가 아닌 군단장.

놈들을 씨앗화하여 성장시키면 이런 형태가 되는 모양이었다.

"누구로부터 지킨다는 거지?"

-내 것을 노리는 모든 적.

녀석은 거대한 푸르푸르의 나무 위.

손아귀처럼 열려 있는 악과를 보았다.

"열매를 지킨다는 소리군."

-맞아. 열매. 지켜.

솔직한 말로 꺼림칙하기는 하다.

녀석의 교활함으로 보건대, 거짓일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새롭게 태어난 척.

순진한 척하며 아무것도 모르며 간을 보다가 어느 순간 날 배신하고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

아직 믿을 수 없다.

제대로 싸운다면 당연히 예전보다 더욱 강해진 나로서야 승산이 높다.

지금 싸운다면...

'9할은 내가 이겨.'

확실히 자신 있다.

하지만 뒤통수를 맞는다면?

방심한 상태에서 맞는 칼침은 아무리 단련해서 뼈아픈 법.

검증의 시간은 필요하다.

"네 힘은 어느 정도지?"

-알 수 없어. 적, 지금 없어.

갓 태어나서 모른다는 컨셉인가.

확실히, 일리가 있다.

질문을 바꿔보자.

"날 죽일 수 있나."

-아니, 넌 주인. 난 지켜야만 해...

"날 지킨다는 뜻인가?"

-아니, 나무를 지켜.

"그렇군."

난 나무의 주인.

놈은 나무의 관리자, 경비병이라 생각하면 편할 거 같다.

"그러니까 날 공격하지 못한다는 거냐."

-이유가 없어. 넌 주인...

"그래도 공격할 수는 있지? 때릴 수는 있을 거 아냐."

-... 못해.

"그런 컨셉인가."

하긴,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살인 의심자한테 '너 사람 죽일 거지?'라고 묻는다고 누가 바른대로 대답하겠는가.

"내 명령은 듣나?"

-주인, 명령. 수호 다음.

나무를 지키는 게 최우선.

내 명령은 그다음이라는 뜻으로 보였다.

"흠... 네가 할 수 있는 공격 수단은 뭐가 있지?"

-...

놈은 이내 먼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뿔이 번쩍거렸다.

그와 동시에.

꽈광-!!

하늘에서 대뢰가 떨어졌다.

"깜짝이야."

분명 놀랐다고 생각했는데 몸과 마음은 차분하기 그지없다.

새로 얻은 스킬 때문이었다.

"강하네. 꽤."

-나, 강해.

나무의 크기 때문인지 유효 사거리도 넓고 공격력도 꽤 높다.

물론 푸르푸르가 직접 사용할 때의 벼락과 비교하자면 손색이 있기는 하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연달아 몇 번이나 쓸 수있지?"

-해볼게.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힘... 들어.

연속으로는 여덟 번이 한계.

하지만 이만한 양의 벼락을 한 번에 여덟 번이나 사용한다는 거 자체가 오버 파워긴 하다. 몸이 어지간히 강하지 않은 이상, 이 정도 힘을 견딜 사람은 네피림에서도 헤일로 보유자 말곤 없어 보인다.

"최대 사거리는 얼마까지냐."

-그게 뭐야?

"... 얼마나 멀리 쓸 수 있지?"

-보이는 곳까지.

"얼마나 멀리 보이지?"

-저기, 날아오는 사람까지.

"...?"

날아오는 사람?

"여기 사람이 있다고?"

-응, 저기.

놈이 바라보는 방향.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드네스로 신체가 재구성되기도 했고, 시야 점수가 18까지 상승한 내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수준.

자아잔틴의 눈에 내장된 스킬.

내다보는 눈까지 사용하니 그제서야 작은 점이 보인다.

더욱 자세히보니.

"강철?"

강철이 헤일로를 키고 날개를 펼친 채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여기서 불별도까지는 거리가 꽤 멀리 있는 편인데."

그루트를 사용해서 왔는데도 삼십 분은 걸렸던 거리다.

체감상으론 서울에서 수원 정도의 거리였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래도 꽤 먼 거리라는 건 다르지 않았는데 거기서 날아오는 강철 군주를 보고 있다는 건, 놈의 시야가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말이었다.

'강철이 오는 거야 놀랐으니까 오는 중이겠지.'

갑자기 어딘가 익숙한 대뢰가 연달아 쳐대니 뭔가 잘못돼서 내가 싸우고 있는 거라 확신했을 것이다.

-이쪽으로 와. 적, 지켜야 해.

놈의 뿔이 푸르게 빛났다.

"멈춰!"

하지만 한발 늦었다.

꽝-!!

거대한 벼락이 내리쳤다.

정확하게 강철의 머리 위로.

"피했나?"

강철의 헤일로는 2단계로 나뉜다. 강화된 강철 기사들을 부리는 것.

그다음엔 강철 기사들이 쥔 검이 조각으로 변해 날개로 변하는 것.

2단계 형태로 변하면 강철은 방어력을 버리고 공격과 이동에 올인된 상태이다.

방어력을 버린 공격 일변도.

그런 상태의 강철이 놈의 대뢰를 맞았다면 큰 피해를 보았을 게 뻔하다.

죽진 않았을 거다.

강철도 나와 뒤섞이면서 어느 정도 번개 내성을 갖췄을 테니까. 피부도 엘리스의 거미줄로 이루어졌을 테고.

하지만 분명 다쳤을 것이다.

-적, 빨라.

놈의 시선을 따라가니 강철이 있었다. 다소 멀쩡한 모습.

'아.'

그녀의 몸에는 약간의 번갯불이 튀었는데 은색으로 빛나는 번개를 두르고 있었다.

강철이 말했던 은뢰였다.

정말 큰 피해는 없어 보였다.

"멈춰."

-왜? 적이야.

놈은 명백히 강철을 적으로 보고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존재를 적으로 인식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연달아 쏘아지는 대뢰.

바다가 출렁이고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용오름과 함께 내려치던 대뢰 또한 하늘로 치솟아 오르기까지 한다.

'푸르푸르의 권능을 그대로 쓰는 건가.'

이전에 보았던 푸르푸르의 권능을 본능적으로 놈 또한 쓰고 있었다.

하지만 발동 간격이 늦고, 정확도 또한 조금은 떨어졌다.

'아니, 강철이 강해진 건가.'

생각해보니 아니다.

놈이 약해진 게 아니다.

나와 강철이 강해진 탓도 어느 정도는 있으리라.

-왔어.

그때였다.

지아잔틴은 거둔 순간.

은빛이 번쩍함과 동시에 강철이 나타났다. 그녀의 검은 명백하게 나무의 수호자를 노리고 있었다.

은빛의 일섬.

'강해졌군.'

확실히 이전과 달리, 강철은 놀라울 정도로 강해졌다.

이 정도라면 70군단의 군단장 라피에르와 1대1로 싸웠어도 무난하게 이겼으리라 생각되는 실력이었다.

59군단장 바릿느와 싸워도 7할의 확률로 승기를 장담하지 않을까.

서걱!

강철의 검이 사슴의 목을 베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일격.

'굳이 막을 이유는 없지.'

막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막지 않았다.

놈이 죽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대로 죽고 나무가 시들어서 상관없기도 했다.

아직 내게는 군단장의 씨앗이 두 개나 있고, 손해를 본다고 할지언정 신용하지 못할 놈을 내버려 두는 것도 영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녀석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노련했다.

"가짜군."

강철이 검에 묻은 흰색의 피를 털었다.

떨어진 사슴의 목은 어느새 액체처럼 변해 있었다.

"나무 수액같군."

"데몬시드. 무슨 일이지? 왜 푸르푸르와 같은 놈이...!"

강철이 극도로 경계심을 높이던 그때.

돌연 푸르푸르의 나무에서 불길한 열매 하나가 떨어졌다.

손아귀처럼 생긴 겉껍질이 벗겨지고 푸른 열매가 빛을 발하더니 이전의 사슴으로 나타났다.

이전보다 확실하게 거대해져 있었다.

-적, 사살. 나무, 지켜.

"그런 거였군."

어떤 방식인지 알 거 같았다.

"데몬시드!"

그리고 이제는 멈춰야 했다.

"멈춰. 적 아니다."

-...

굳이 놈의 목에 창을 겨누지는 않았다.

엘더 나무에 창을 겨눴다.

예상대로, 놈은 그제야 멈췄다.

"너, 이름이 뭐냐."

-없어. 이름. 적, 섬멸...

"푸르라고 해 그럼."

-푸르? 푸르...

*

"신기하군. 정말 푸르푸르가 아닌가? 비슷하게 생겼는데..."

"나도 동감이야. 근데 아니야. 너도 봤잖아. 열매에서 태어나는 거."

"그건 그렇다만, 그래도..."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듯했다.

하긴, 이해한다.

두 눈으로 봤으면서도 나도 아직 선뜻 믿음이 가는 얼굴은 아니니.

"그러면 나머지 두 개의 군단장 씨앗도 이 근처에 심을 건가?"

"그럴 생각이야. 우리 섬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심으면 되겠지."

엘더트리에서 나타난 군단장과 똑닮은 수호자들은 오로지 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 근본이 데몬시드가 됐던 군단장의 것에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행동의 제약과 나무를 지킨다는 점은 얼추 믿을 만해 보인다.

나무의 열매도 열매지만, 바깥에서 간간이 나타나는 악마들을 퇴치하는 데 쓰면 딱이라 내가 사는 섬 주변에 심을 예정이다.

"대한민국 동서남북으로 심어보는 건 어때? 그러면 한국은 더 안전해질지도 모른다."

"씨앗이 남아돌면 그러지."

다가오는 자는 무조건 적으로 보는 걸 보면, 함부로 아무 데나 심을 수 있는 녀석은 또 아니었다.

지금은 섬 주변을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나중엔 모를 일이니까.

강철에게 푸르푸르의 열매를 건넸다.

"먹어도 되나? 영..."

"찝찝해도 먹어보면 생각이 바뀔거다."

그래도 내가 걱정돼서 한걸음에 달려온 사람인데, 고생한 값은 줘야지.

물처럼 스르륵 녹아내리는 열매의 맛에 조금 놀란 강철은 이내 떠오른 효과에 더욱 놀랐다.

"마력이 올랐다!"

"그리고 다른 건 없나."

"다른 거? 딱히 없다만."

"그렇군."

역시 그렇다.

챔피언 열매도 엘더 열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레아에게 예전부터 수식언이 담긴 열매를 먹어보라 했지만, 그녀에게 수식언이 생기지는 않았다.

이번에 심은 군단장.

즉, 엘더 열매도 마찬가지.

'용장 스킬 때문일 리는 없고, 아마도 나 이외엔 수식언이 생기지 않는 건가.'

데몬시드 그 자체의 능력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강철은 그래도 나랑 몸이 섞이면서 얻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쉽군."

"응? 뭐가 말인가."

"아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안 되는 일을 고민해봤자 시간 낭비일 뿐. 내가 할 수가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게 옳다.

"이대로 다른 씨앗도 심을 건가?"

"그래야지."

군단장 씨앗을 심은 것 자체로, 승봉도의 섬 주변이 뇌우에 휩싸였다.

이건 나무의 자체적인 효과로 보였는데 그리 썩 나쁘지 않다.

불별도의 남쪽에도 하나 심을 예정.

"근데 바릿느는 심기 애매하군."

라피에르까지는 괜찮다.

녀석은 본래 하피.

비행이 가능하니까.

섬에서 움직이는 게 꽤 자유롭다.

활동 반경도 꽤 높을 것이고.

하지만 바릿느는 아니다.

"뱀은 제한적이지."

바릿느는 솔직히 너무 빨리 죽여버려서 무슨 능력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 일대를 독 구름이나 늪으로 만들 거 같긴 한데, 푸르나 라피와 같은 녀석들과 비교하자면 활동 반경이 확실하게 좁을 게 분명했다.

"그럼 이건 어떤가."

"뭐가?"

"우리 땅을 자꾸 침범하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강철의 이야기는 내 고민을 털어줄 중요한 내용이었다.

'백두산이라...'

썩 나쁘진 않았다.

군단장 씨앗 [3]

166화.

불별도의 남쪽 부근.

이름 모를 섬에 라피에르를 성장시키고 난 뒤 알았다.

"푸르가 끗발이 있는 거였네."

라피에르의 나무를 성장시키고 열매를 먹자, 마력+1과 악익의 경험치를 조금 얻었다.

아무래도 70군단장이라 푸르푸르보다는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타난 수호자.

트리가드라 이름 붙인 라피에르의 화신과도 같은 녀석이 나왔다.

-피?

"이놈은 말도 못 하네."

70군단장이라 그런가.

이 녀석은 제대로 언어도 구사하지 못했다.

생긴 건 작은 새.

마젠타라고도 불리는 물총새의 모습과 굉장히 닮았다.

하지만 싸울 때는 몸집을 크게 부풀려 맹금류 못지않게 싸우고, 크기는 와이번을 능가했다.

대체로 바람을 자유자재로 부리며 바람을 칼날처럼 날리거나 일대에 사이클론을 만들어 싸웠다.

푸르보다는 약했지만 그래도 적의 기습을 알리기엔 썩 괜찮은 능력을 갖춘 트리가드였다.

"네 이름은 라피다."

-피!

덩실덩실 거리며 춤추는 꼴을 보자, 푸르 때와는 달리 마음이 조금 쉽게 누그러졌다.

"그럼 가볼까."

그러면 이제 하나 남은 씨앗.

바릿느를 심으러 가야 했다.

"너도 가는 거냐."

"나도 상황을 보고 싶다."

"... 그래."

포탈을 찢고 이동했다.

곧장 보이는 건 백두산 천지.

이곳에 둥지를 튼 여러 악마들과 그들을 사냥하기 위해 준비 중인 네피림들이 언뜻 보였다.

근데 한국 사람은 아니었다.

"하긴, 북한이 우리 것이라고 해도, 백두산은 놈들도 반반이었지."

"맞다."

북한은 확실히 대한민국의 땅이 되었다. 하지만 북한도 중국과 백두산을 반반했던 터라, 지금도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유하고 있다.

그 정도야 뭐 어쩔 수 없다.

차원석도 그렇게 인지하고 있으니.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저놈들, 은근히 넘어온다더군."

"그래."

백두산 근처엔 악마들이 많다.

그들이 둥지를 짓고, 소굴을 만들기 딱 적당한 은신처를 제공하는 거대한 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곳을 사냥터로 쓰는 네피림들이 꽤 있었고, 발견된 히든 던전 또한 많았는데 덕분에 놈들이 종종 모르는 척 우리 땅을 침범하는 편이 많다고 한다.

"종종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지."

"중국은 예전부터 그랬지."

미룡과의 정이 있어서 웬만하면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중국은 옛날부터 그리 좋아하는 나라는 아니었다. 솔직히 중국을 좋아하는 사람도 드물 거다.

하는 짓들이 안하무인인데 뭐 이쁘다고 좋아하겠나.

"이곳에서 실종된 네피림이 꽤 있다. 악마만의 짓은 아닐 거라고... 난 확신한다."

"..."

네피림들간의 싸움이 번지면 당연히 최악은 죽음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이 많지 않은 백두산.

시체를 숨길 곳도, 내버려 두면 사라지는 곳도 당연한 곳이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어질 만도 하다.

"물론 물증은 없다. 정황상의 의심만 있지만..."

"그걸로 우리가 나서기엔 상황이 매우 복잡해 지지."

미룡과 내가 사이가 좋다고 한들, 그게 국가 간의 동맹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중국은 워낙 인구가 많은 나라기도 하고, 파벌이 다섯으로 나뉘어져 관리하고 있다고 하니까.

자칫 잘못되면 중국과 전쟁을 벌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질 자신은 없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귀찮다.

그렇게 싸운다고 해서 얻을 게 있는 것도 아니다.

악마들 때문에 지금도 고통받는데 사람끼리 싸울 필요가 뭐 있을까.

그러니 아예 차단하려고 한다.

"한국 네피림들 다 철수시켰지?"

"예, 전부 철수했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관찰자였다.

백두산 근처에서 활동하는 한국 네피림들은 모두 철수시킨 지 오래.

남은 건 중국인들뿐이었다.

난 바릿느의 씨앗을 가지고 플라이를 사용해 천지의 중심으로 향했다.

바릿느의 씨앗을 떨어뜨렸다.

퐁당. 빠져 떨어지는 와중에 데빌스톤을 왕창 뿌렸다. 중국인들이 뭘 하는 건지 몰라 구경하고 있을 때.

씨앗이 발광하며 자라났다.

콰과광!!

엄청난 속도로 물속에서 치솟는 바릿느는 단숨에 구름까지 닿아 가지를 뻗었고 푸른 잎을 자아냈다.

동시에 열매가 생기고, 그중 하나가 나무 위에서 뚝 떨어져 천지 아래로 퐁당 빠졌다.

"독 구름이 몸속을 침투합니다."

"침투하지 못합니다. 독을 면역하였습니다."

강철과 관찰자에게 손짓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재빠르게 이곳에서 벗어난다.

어리둥절한 중국인들에게도 말했다.

"도망가라. 난 분명 말했다."

하지만 역시나 중국인들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

중국의 바이산시 지린성 인근.

한마디로 백두산과 가까이 살고 있는 이들을 뜻했다.

본래 백두산은 악마들의 기세가 날로 갈수록 강해지고 수가 어림잡을 수 없어 기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북한에 자리 잡은 군단장이 무너지고 대한민국이 이곳을 정화하면서 백두산에 터를 잡은 악마들의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는데, 덕분에 숨겨진 던전과 희귀한 보물들이 발견되어 중국인들의 노다지가 되었다.

오죽하면 저 멀리 하얼빈에서도 백두산을 찾아오기 시작했을까.

처음 몇 번은 한국인과 부딪쳤다.

시작은 실수였다고 물러났지만, 생각해보니 억울했다.

"중국의 인민들이 피땀 흘려 북한을 정화했는데, 왜 우리가 눈치 보며 악마를 잡아야 하지?"

이 말을 한 이는 중국의 랭커였는데 그를 토대로 그의 의견에 동감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덕분에 백두산은커녕, 중국과 맞닿아 있는 북한 땅을 수시로 넘나들며 악마들을 사냥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저 말을 한 랭커는 미룡에 의해 개박살이 났지만 한번 시작된 침범은 멈출 줄 몰랐다.

"어이, 북한에서 재미 좀 봤다며?"

"봤지, 봤지! 한국인들은 살결이 꽤 뽀얗던데? 크크큭."

"이 사람이! 큰일 날 소릴! 걸리면 흑사회 놈들한테 뼈도 못 추리고 죽는다는 거 몰라!?"

흑사회.

중국의 뒷세계에 종사하는 이들을 총칭하는 말이었다.

흑사회의 우두머리는 랭킹 1위.

미룡이었으니까.

"안 걸리면 되지. 안 걸리면. 그 높으신 분들이 굳이 백두산까지 오지는 않으시니까."

"그래도 그렇지... 그러다 자네들 큰 벌 받을걸세!"

"헛소리할 거면 하나라도 더 잡아, 장 씨. 한국인 만나면 더 좋고. 놈들은 황금 고블린이나 다름없잖아?"

"맞지, 맞지! 크하하!"

"쯧."

그때였다.

쿠구구구궁!!

돌연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다.

"뭐야! 지진인가?"

"백두산 터지는 거 아냐?"

"설마 인제 와서 화산이 터질라고!"

"어이, 저거! 저거 뭐야?"

백두산 천지.

그 꼭대기에 하늘로 뻗은 거대한 나무가 자라나 있었다.

"수, 숨이!"

"끄아아악! 아아악!"

돌연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백두산 천지의 깨끗한 물은 검은 독으로 얼룩지고, 주변엔 녹색의 독 구름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무기! 전부 무기 들어! 적이다!"

"해치우면 돼! 쫄 거 없어!"

"헉!"

그리고 늪으로 변한 물속에서 스르륵, 거대한 이무기 한 마리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컥!"

"어, 어억!"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

그 눈을 보자마자 누구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이무기의 사안이었다.

온몸이 마비된 듯 꼼짝도 할 수 없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그들에게 드리운 죽음은 서서히 다가왔다.

천지에 자리를 잡고 있던 수백 명의 중국인들이 모조리 움직임이 멈췄다.

자그마한 목소리도 낼 수 없어 적막감이 맴돌았다.

스르륵, 스륵.

겁에 질린 고요함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거대한 이무기뿐.

'제발, 제발...!'

이무기는 천천히 그들을 내려보다 덥석 하나를 물어 삼켰다.

그리고 또 하나.

또 하나를 물어 삼켰다. 움직일 수 없는 공포 속에서, 그들은 차례차례 삼켜지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아아악!!"

그때였다.

중국인 중 하나가 사안을 깨뜨렸다.

들고 있던 칼로 자기 허벅지를 베었는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백두산에 있는 중국인 중 제일 레벨이 높은 자였는데, 곧장 언월도를 들고는 이무기를 향해 베었다.

쾅-!!

그의 언월도에서 파이어볼이 나타나 그대로 이무기에게 쏘아졌다.

쿵!

"됐어!"

환희에 찬 기함을 내뱉었으나.

"움직여! 이봐 움직이라고!"

그를 제외한 그 누구도 사안의 제약에서 풀려나지 않았다.

"젠장!"

식은땀을 줄줄 흘렸으나 이무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어느새 몰려든 독 구름에 달아나려는 찰나. 독 구름이 뭉쳐 하늘 위의 용으로 변해 유영했다.

"안돼! 안되에에에에에!!"

콰아아아아앙!!

그대로 달아나는 놈을 향해 용의 꼬리가 직격했다.

그리고 그날.

백두산 일대의 중국인은 모조리 멸절했다.

*

"쾌적하군."

백두산은 고요해졌다.

악마도 인간도 없다.

있는 건 나무와 바리뿐.

-샤~

샤샤거리는 이 녀석은 바릿느의 씨앗에서 태어난 트리가드.

바리.

지금은 내 팔에 감겨 실뱀처럼 애교떨지만, 독 구름을 제 몸처럼 여기며 용처럼도 변할 수 있는 녀석이다.

백두산 인근의 악마와 인간의 씨를 모조리 말려버린 원흉. 독 구름을 살포한 녀석이기도 했다.

"악마들이 많은 곳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네."

이번 일로 많은 걸 알았다.

우선 트리가드가 사람이나 악마를 잡아먹으면 이 또한 나무의 영양분이 되어 열매가 맺힌다는 거였다.

내가 제물을 바치지 않아도 열매의 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은 대단한 이점으로 다가왔다.

바릿느의 열매는 악익의 경험치 소량과 올스탯 +1을 올려줬다.

"열매가 많이 열렸네."

푸르푸르를 성장시켰을 땐, 열매가 여섯 개 정도였는데, 바릿느는 일대의 생명체를 전부 잡아먹어서 그런가.

처음엔 다섯 개였지만 지금은 꽤 많은 열매가 무르익었다.

다 익은 건 스무 개 정도.

'아직 다 익지 않은 것도 있군.'

크기가 아직 성장 중인 열매도 있다. 그 수는 서른 개 정도.

다섯 개밖에 없던 것이 스무 개로 늘고, 덜자란 과실이 서른 개 생겼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이루어진 상황인지 보니 제물 성장보다 편하고 효율이 꽤 높았다.

손가락만 한 뱀이 둥그렇게 똬리를 튼 것 같은 모양의 열매.

나무에서 길게 내려와 녹음 진 색으로 발광하는 모습은 백두산의 전경을 더욱 신비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맛은 그냥 달달한 열매의 맛. 입에 넣는 순간 물처럼 녹아 내린다. 푸르푸르의 열매도 그랬지만 군단장 열매는 대개 이런 식인 듯했다.

"북한이랑... 우크라이나에도 몇 개 심어둬야겠네."

군단장을 잡는 족족, 심어둘 곳이 꽤 많았다. 북한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도 다른 국가의 불법 사냥이 이루어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엘더트리의 수확량을 높이기 위해서도 악마가 많은 곳에 심어두는 게 좋다.

"그렇다고 군단장이 있는 곳에 심을 수는 없고..."

엘더가드가 강하기는 하다만, 군단장에 비할 바는 아니다.

솔직히, 중국이 마음먹고 이 녀석을 토벌하려고 한다면 할 수 있을 거다.

트리가드의 힘은 상황에 따라 다르고 열매의 보유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백만의 네피림 군대를 막아낼 정도로 강하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푸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원거리 저격이 가능한 그놈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바리는 독 구름을 자기 몸처럼 만들어 공격하거나 사안으로 마비시키는 것이 주된 공격 스타일.

몇만 정도의 군대는 가능해도 제대로 레이드한다면 당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럴 명분은 저들에게 없지만.

바릿느의 엘더트리는 명백히 대한민국의 땅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바릿느의 엘더트리]

『보유』

완숙-21 미숙-34

트리가드-Lv.2

물론 엘더트리의 상태창을 보면 '아직은'이라고 해주고 싶다.

트리가드의 레벨.

그것이 존재하는 한, 녀석의 강함도 날이 갈수록 강해질 거란 소리니까.

지금은 미약하나, 이후에는 군단장급의 힘을 되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시간이 약이겠지."

-샤아~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엘더트리를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찰나.

[바바리안에게로부터 메시지]

-데몬시드, 바쁜 거 알지만 지옥 광산으로 와줄 수 있나?

-무슨 일이냐.

-광산 심층부에서 군단장 후보들이란 놈들이 나타났거든. 와서 봐줬으면 좋겠다. 이놈들 이거, 가만히 놔두면 군단장 되는 거 아냐?!

"군단장 후보?"

군단장 후보를 씨앗으로 만들어 심으면 어떻게 되려나.

그럼 트리가드도 나올까.

호기심은 해결하는 법은 역시,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법뿐이었다.

어비스 [1]

167화.

대규모 업데이트 이후.

난 아직 지옥 광산의 심층부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로는 쾌적하지 못한 환경이 첫째요, 다음으로는 크게 이득 볼만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옥의 심층부에는 악마들이 군락, 마을, 도시, 성을 이루며 살아간다.

각각의 지배계층이 존재할수록 집단의 수준 또한 높아졌는데, 그놈들 잡아봤자 주는 장비의 수준이 내가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심층부의 악마들은 티블이라 불렸는데, 놈들은 인간과 퍽 닮은 외관을 지녔다. 이마에 돋아난 뿔, 검은 흰자, 지옥에 적응한 푸른 피부.

의복을 만들어 입고, 치장과 등을 하는 걸 보면 인간과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일부 네피림들은 그들과 싸우는 것을 꺼렸다. 지옥에서 싸우며 식량을 구하고, 지옥석을 캐며 무기를 만드는 티블을 보면 절로 동질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 심층부라 불리는 어비스에서 그들이 발견됐다.

미스릴로 무장한 종족과 그들의 우두머리라는 군단장 후보라는 악마가 말이다.

"미스릴?"

심층부, 네피림들 사이에 어비스라 불리는 지옥은 포탈로 이동하지 못하는 곳이다.

덕분에 바바리안의 안내를 받아 어비스로 이동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어비스는 매우 어두웠다.

지하라 해가 없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용암도 없어, 의지할 건 푸른 빛을 자체 발광하는 버섯과 몇몇 발광석이 전부였다.

또한 추웠다. 해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으나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닿자마자 녹아 사라지는,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잿가루가 눈처럼 내렸기 때문이다.

"미스릴을 장비한 놈들?"

"그래. 대부분의 마법을 상쇄시킬 뿐만 아니라 매우 단단하지. 덕분에 우리 팀 동료도 몇 죽었어. 단단한 개새끼들이지."

"적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냐."

"미스릴로 무장한 전사들이 백여 명 정도다. 전투력도 꽤 높아서 레벨 7 이상으로 보고 있어. 각각의 수식언도 있다."

"챔피언이 집단을 이룬 셈이군."

"거의 그렇지."

챔피언급 악마가 집단을 이루고 장비를 무장한 채 싸운다.

이 정도면 챔피언이 아니라 제너럴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 아닌가 싶다.

"각각이 장군급이라고 보는 게 맞겠군."

"장군? 하긴, 그 정도가 맞아. 나도 챔피언급은 많이 만나보고 쓰러뜨렸지만, 놈들은 수준이 다르니까."

챔피언과 군단장 사이.

장군급이라 평가되는 녀석들은 어느 정도의 힘을 지녔을까.

'생각해보니.'

대악마라 불리는 군단장들은 굳이 대단한 무기를 사용한 적이 없다.

푸르푸르때도 장비를 크게 사용하지 않았고, 바릿느나 라피에르도 그랬다.

군단장급 악마에게는 장비가 필요 없을 만큼 강력한 권능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권능을 얼마나 더 갈고 닦느냐로 강함을 판별하지 않았을까.

'본래 야만적인 성향이 강할수록 도구에 의지하지 않으려 하니까.'

그런데 이놈들은 도구를 사용한다.

그 점이 꽤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랭커는 누구누구가 있나."

"우선 나와 충왕, 그리고 거손이 있다."

거손은 거대한 손을 말하는 것이다.

티타누스 때 헤일로를 얻은 랭커이기도 했다. 충왕과 거손은 나야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바바리안과는 연이 있는 모양이다.

"셋뿐인가?"

"다들 바쁘다더군. 어비스의 환경은 위보다 심해서 체력이 약한 랭커들은 전부 배제했어."

확실히.

지옥이 들끓는 가마솥 안이라면 어비스는 냉동창고 안이었다.

지옥의 심층부.

어비스는 평균 기온이 측정 불가할 정도로 기온이 낮은 지옥과 극명하게 대립한 겨울의 나라였다.

"24시간 블리자드 세계라고 보면 이해하기 편할 거다."

"그건... 무섭군."

"여기 있다 보면 몸도, 손가락도 얼어서 제대로 싸우지 못해. 옷도, 갑옷도 얼어서 깨지고는 하지. 어비스 상층은 그래도 시원한 편이지만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추워져."

덕분에 이곳에 나타나는 악마들은 대부분 냉기 내성 장비를 둘둘 두르고 있다고 한다. 지옥의 심층이라길래 가열하게 뜨거울 그거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반대라는 게 신기했다.

"이렇게 추운데, 놈들은 잘도 금속을 가공해서 입고 다니는군."

"스미스 할아범도 그게 궁금하다고 계속 이곳에 붙들려 있는 중이지."

씩 미소 지으며 말하는 바바리안의 코에서 콧물이 주욱 흘러내렸다.

"바바리안. 네 냉기 내성은 현재 어느 정도지."

"나? 자그마치 십 퍼센트지!"

"그렇군."

내 냉기 내성은 18%.

바바리안보다 8% 더 높은 거치고는 그렇게까지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육체 자체가 평범한 인간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철골과 엘리스의 거미줄이랑도 연관이 있을지 모르지. 아니면 건강과 마력, 성력 때문일지도.'

물론 아예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바람은 시리고 눈으로 인해 신발과 의복이 젖으면 젖을수록 피부의 감각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어비스의 추위는 날카롭게 뼛속을 파고들 것이다.

바바리안만해도 온몸을 장비와 털옷으로 둘둘 둘렀지만, 콧물을 질질 흘리며 오들오들 떠는 중이니까.

고작 이 정도 내성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 말이다.

"어, 다 왔군. 저기다. 우리 캠프."

"아무것도 없는데."

"위장은 기본이지."

바바리안이 암벽을 두드리고 주먹으로 툭툭 쳐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지?"

"여기다 멍청한 놈아!"

"크하하하하! 저기였네!"

돌연 눈 벽이 박살 나며 사람이 튀어나와 바바리안을 욕했다.

이전 바바리안 파티에서 봤었던 여성 네피림이었다.

아마도 아이를 가져서 결혼했다는 그 사람인 듯했다.

몸도 불편할 텐데 이런 곳에 있는 건 위험하지 않나 싶어 바바리안을 바라보자.

"아, 두 번째 부인님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 위험한 곳에 임신한 아내를 데려오기는 그렇잖아."

"... 그렇군."

세상이 이렇다 보니 하렘을 차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바바리안도 그랬을 줄은 몰랐다.

'하긴, 바바리안이니까.'

뭘 해도 대충 납득이 된다.

"위장이 완벽해서 나도 찾기 힘들단 말이지. 보시다시피 온통 하얀 세상이잖나."

"어둡고 말이지."

"그렇지."

지옥에 해가 있을 리 만무하니 이곳은 온통 어둡고 추울 뿐이다.

어둡고, 춥다. 두 개의 콜라보가 가져오는 환경적 요소는 재난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그곳이 지옥이니까.

"자, 이쪽으로. 얘들아! 구세주 오셨다!"

두꺼운 눈 벽을 밀고 나가자 안에는 다소 온화한 온기가 느껴졌다.

여기저기 켜져 있는 발광석과 가장 안쪽에는 대장간을 만들었는지 들어가면 갈수록 열기가 후끈했다.

"안녕하십니까! 저 랭킹 1823위 스마이트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 894위 레이션입니다!"

"저, 전! 592위 큐라레에요!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4921위 그리즈에요."

"355위 팬텀입니다."

처음 보는 이들이 줄줄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사람들부터, 건성 고개만 까딱이는 사람까지.

대부분 인상이 꽤 밝아 보였다.

바바리안과 함께 다니는 파티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는 항상 시원시원한 웃음을 띠고 있으니 주변 사람에게도 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으니까.

바바리안 파티의 캠프는 동굴이었다. 자연적 발생한 동굴 안에 터를 잡고 입구를 스킬로 단단히 막아 적의 침입에 대비한 상태였다.

"여긴 산인가?"

"그럴 거라고 생각해."

동굴의 공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는데, 한편에서는 연신 곡괭이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이곳에 터를 잡고 내부 공간을 늘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위치가 좋거든. 그리고..."

바바리안은 겉옷을 벗어 자기 부인에게 건네고는 품에서 돌조각 몇 개를 보여줬다.

"이게 뭔지 아나?"

푸르게 빛나는 돌멩이다.

난 이걸 본적이 있다.

내 무기에도 섞여 있었으니까.

"미스릴이군."

"알아볼 줄 알았다니까. 역시."

미스릴. 인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금속이다.

금속과 연관이 있거나 무기와 관련된 기프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에야 네피림들에게도 생소한 금속일 것이다. 시스템에서도 미스릴을 보상으로 건넨 적은 잘 없었으니까.

"여기서 미스릴이 나오거든."

"그렇다면... 아다만티움이 나올 수도 있겠네."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지."

미스릴과 아다만티움.

그리고 어비스의 지옥석.

이 광물들 때문에 바바리안은 혹한의 환경을 이루는 어비스를 떠나지 못하고 탐사 중인 것이다.

아다만티움이 나올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데몬시드! 오셨소?"

"스미스. 오랜만입니다. 요새 통 얼굴을 안 보이더니 여기 계셨군요."

"허허허! 노인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놈들이 여기 있다는 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스미스는 이곳에서 채굴하는 미스릴로 무기를 만들고 있었는지, 송골송골 맺힌 땀이 얼굴에 가득했다.

다행히 스미스의 얼굴은 좋아 보였다.

그의 직업적 특성상, 지상보다는 이곳을 더 좋아할 거 같긴 하다.

희귀한 광물로 만든 무기라는 건 대장장이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하니까.

"일 보십시오. 바바리안과 이야기 좀 나누다 들리겠습니다."

"배려 감사하오. 그럼 기다리겠소!"

스미스가 물러가는 걸 바라보고 있으니 바바리안이 따뜻한 커피를 한잔 가져와 내게 건넸다.

"할아범이 제일 신났어. 미스릴은 할아범이 살던 곳에서도 굉장히 희귀해서 만져볼 일이 없었다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이것저것 잔뜩 만드는 중이야. 우리 미스릴 채굴량이 그걸 못 따라가는 중이지."

채굴량.

슬쩍 둘러보니 동굴 한편에서는 연신 지하에서 들려오는 곡괭이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그랬나. 미스릴이 채굴된다면 인원을 더 투입해도 좋겠군."

"그게 어려워. 이곳의 환경이 너무 가혹하잖나. 그리고... 지금은 나름 정착했지만 초반엔 광부들이 많이 죽었거든. 놈들 때문에..."

"상황이 안 좋은 거냐."

"아, 지금은 괜찮아. 하지만 전에 기습당한 적이 있거든. 하필 우리가 탐사를 떠났을 때라 꽤 많은 사람이 죽었지."

"아까 말했던 장군들인가?"

"아니, 놈들도 분명 우리의 적이지만, 그들뿐만이 아니지. 지옥에 헬뮤트가 있다면 이곳엔 또 그에 걸맞은 놈이 있기 마련 아니겠어."

"그렇군."

헬뮤트.

지옥석을 갉아먹고 자생하는 지옥의 악마.

지옥엔 헬뮤트가 있다.

그리고 어비스엔.

"헬둠이라고 하더군."

헬둠이 있었다.

"몸 곳곳이 얼음과 미스릴로 되어있지. 기본적으로 단독행동하는 놈들이지만 수가 많고 냄새를 잘 맡아. 헬뮤트가 거북이라면 놈들은 호랑이지. 한번 정한 사냥감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덕분에 피를 꽤 봤다."

그런 놈들이다 보니 이곳에 사는 악마들 대부분이 강하다는 거였다.

"티블도 이놈들 때문에 금속을 가공하고 장비를 입는 수준이 남달라진 게 아닐까 싶다."

"군단장 후보라는 놈도 말인가."

"그렇지. 그만큼 헬둠이라는 놈들은 위협적이니까. 놈들도 광물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여긴 환경이 잔인하거든."

그건 동감하는 바다.

어둡고, 춥고. 인간이든 악마든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이다.

"머리 위에 군단장 후보라고 적혀 있는 놈들은 내가 봐왔던 군단장들이랑 풍기는 분위기가 얼추 비슷했다. 직접 붙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왜지."

"솔직히 부피가 크면 맞추기도 쉽지. 하지만 녀석들은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크기를 지녔다. 그리고 개개인의 무기술도 각자 다르지."

이른바.

"놈들은 기본적으로 검술과 관련된 육체 기술이 뛰어나다. 혹시나 있을 단점은 놈들의 갑주로 보완하고, 짐승과 달리 무딘 공격력은 날카로운 검과 검술로 해결했지."

한마디로.

"놈들은 기본적으로 격투술에 능한 전사들이다."

"흠, 그런가."

"흠, 그런가가 아니라니까... 아직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무기가 얼마나 강한지, 놈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이군."

"솔직히 그렇다."

미스릴이 뛰어나다고 한들.

놈들이 강하다 한들.

'군단장 후보일 뿐이 아닌가.'

군단장도 아니고 후보다.

군단장도 단독으로 때려잡는 게 나인데 겁낼 이유가 있을까.

"네가 헤일로를 쓴다면 어떻지."

"1대1이면 반반이겠지."

바바리안은 고심스럽게 자신의 실력을 털어놨다.

"환경적 요인을 생각하자면 6대 4정도라고 감히 평가한다."

헤일로를 쓴 바바리안이 4할의 승률을 점쳤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왜냐하면 군단장도 아니고 군단장 바로 아래인 후보일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바바리안의 눈은 나름의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내 헤일로가 그나마 마법적 요소가 없어서 후하게 평가한 편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바바리안은 큰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왜냐 물으니.

"놈들은 절대 혼자 안 다니거든. 개자식들이 그만한 힘을 지녔으면서도 최소 3인 1조로 뭉쳐 다니더군. 빌어먹을 놈들이야. 게다가 군단장 후보, 놈은 저 요새에서 절대로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놈들의 습성 때문이었다.

"그놈들은 절대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게 가능했다면 벌써 한 마리 잡아서 갑옷이나 다 뺏었겠지."

그게 아직까지 바바리안이 미스릴 갑옷이 없는 이유였다.

'미스릴이라.'

천상의 계단을 오르며 아다만티움 조각과 광석을 몇 개 얻기는 했다.

하지만 조각은 새끼손톱만 했고, 광석은 주먹 크기 정도다. 갑옷이나 무기를 만들 정도는 아니어서 헤일로의 강화 재료로만 생각했다.

근데 왜 미스릴로 장비를 만들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미스릴을 베이스로, 아다만티움을 섞어서 장비를 만들면 더 품질이 좋아지지 않으려나.'

헤일로의 강화도 물론 중요하다만, 장비의 중요도도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인간은 본래, 도구를 사용하며 발전하기 시작한 종이니까.

"그리고 이번에 바르바제로 가는 행상 하나를 털었는데... 거기서 중요 정보를 입수했어. 이게 진짜인지는 나도 정확하지는 않은데."

답지않게 뜸을 들인다.

괜찮다고 말해보라 하니.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아다만티움 무기를 군단장에게 선물하겠다고 하더군."

"미스릴이 아니라?"

"그래, 미스릴이 아니라."

그보다 상위의 광물,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무기를 말이다.

어비스 [2]

168화.

군단장은 그 자체로 강하다.

강인한 발톱과 이빨이 무기요, 단단한 신체가 갑옷이다.

현대 과학으로 진보했다 자화자찬한 인류를 순식간에 무지렁이로 만든 지고의 존재라 칭할 만했다.

인류가 만든 총과 미사일. 핵과 관련한 폭발물 대부분이 그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총과 미사일은 그들에게 간지러웠고 폭탄은 간식이었으며 핵은 심기를 조금 불편하게 만들 뿐이었다.

핵으로 인한 방사능으로 더욱 위협적인 군단장이 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인류도 성장했다.

최초는 군단장의 토벌. 이후엔 17군단장 티타누스의 소멸이 그들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싶다.

악마들 또한 하나의 집단.

위기를 느꼈으니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인류에 대적하기 위해 광물을 꼽았을 확률이 높았다.

본래 광물이란 것은 하늘 위의 천상보단, 악마들의 땅에 가까울 테니까.

'미스릴로 무장해도 아찔해지는데, 아다만티움 무기가 나온다니...'

확실히 쉽게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도와줘라!"

바바리안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미스릴제 갑옷을 둘러 입은 장군급 악마는 그렇다 쳐도 아다만티움 무기가 튀어나와 버린 상황.

바바리안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스케일의 범주는 이미 벗어났다.

"그럴 필요 없어. 이 건은 국가 단위로 움직여야 할 부분이다."

바바리안의 캠프는 열악하다.

바바리안과 오래 인연을 맺었거나 긴 유대감이 있는 자들로 파티가 구성됐는데 그 숫자가 현저히 적었다.

"90명 정도인가."

"비전투 직군을 빼면 40명 남짓이야. 사람을 더 구해와야 하는데..."

"이 환경이면 올 사람도 안 오지."

"맞다. 어비스 초입 부근이야 상관없지만 여기까지 오면 대부분은 못 하겠다고 도망가버려. 큰돈 벌 수 있다고 꼬드겨도 안 되지. 게다가 저번에 기습당한 게 컸어. 전부 죽거나 도망가버렸으니까..."

그래서.

"날 부른 거군."

바바리안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네가 커뮤니티에 한 줄만 쓰면 사람들 죄다 몰려오잖냐. 사람들은 아직 몰라, 어비스 초입의 티블만 몇 번 마주쳐서 미스릴은커녕 아다만티움 뒤집어쓴 군단장 후보가 있는 줄은 아무도 모를걸!?"

"... 웬만하면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거 같은데. 아무튼 이런 거라면 날 부를 게 아니라 협회에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일개 파티가 감당하기엔 스케일이 너무 커졌어."

국가 단위로 움직여서 저지해야 할 국면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만큼 악마들의 행동은 위협적이니까.

미스릴로 만든 무기를 장비한 군단장도 위협적인데 아다만티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하다.

'바바리안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한국의 네피림 대부분을 여기로 데려와도 모자라.'

군단장들에게 납품하기 위한 아다만티움 장비를 제작하기 위해, 고작 마을 단위의 악마들이 공정을 하고 있을 리가 없다. 최소 나라 단위의 티블 집단이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문제가 있다."

바바리안은 또 문제가 있다면 죽상을 했다.

"너무 추워서 아무나 데려왔다간 동상 걸려서 얼마 못 있어. 냉기 내성이 있는 네피림만 데려와야 해."

그러고 보니 이곳 날씨는 어마어마하게 춥다.

게다가 이곳에 깔린 즐비한 악마들은 이 혹한의 냉기에 적응한 존재들.

그런지 보니 내성도 없는 네피림은 그들에겐 좋은 사냥 거리로 전락할 뿐이라는 게 바바리안의 소견.

"아니면 내성을 챙겨줄 장비를 파밍 하든지 해야 하는데..."

"헬둠인지, 티블을 사냥할 인원 자체가 적다는 거군."

"맞다. 덕분에 우리 파티만 겨우 적당량을 챙겼을 뿐이지. 아직 우리도 부족한데 남 챙겨줄 여력이 있겠어? 말도 안 되지."

바바리안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목이 탔는지 뜨거운 차를 원샷 때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상황이 썩 좋지 않기는 하다.

"커뮤니티 글 한 번만..."

"글쎄... 애매하군."

"왜! 글 한 번이면 되잖아! '네커' 인기스타시잖아! 위대하시잖아!"

"... 하아, 바바리안."

안타깝게도 바바리안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현실이 있다.

"지금 사람들이 제일 열광적으로 빠져있는 게 뭔지 아나?"

"뭔데? 계단? 랭킹?"

"아니."

그건 다름 아닌.

"기프트 전직이다."

"뭐? 그게 뭔데? 전직도 돼?"

어비스에 있느라 현재 유행 중인 교회 탐사 챌린지를 바바리안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신성력이 개방돼서 종교적 유물을 찾으면 세인트로 전직할 수 있는 챌린지가 요새는 유행이다."

그 화력이 얼마나 강한지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도 아직 엄청나다.

교회를 탐사하고 인증사진을 찍어 올릴 정도. 그마저도 안되면 절이나 무슨 사이비 건물을 뒤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렇게 세인트로 전직한 사람들이 나오는지 보니 유물을 거래하며 커뮤니티가 엄청나게 활성화된 상태다.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다.

그렇다 보니.

"지금 내가 글을 올린다 해도 큰 효과는 없을 거다."

"아니 그래도... 네가 올리면 사람들이 좀 달라지지 않으려나?"

"세인트로 전직하고 싶어 하는 거 자체가 아직, 일반인인 사람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전쟁의 전위에 서는 것보다 후위에 서며 치료하는 게 편하고 좋기 때문이다."

사람을 치료하면 감사를 얻는다.

게다가 원하면 돈도 얻게 된다.

명예와 부를 동시에 노릴 수 있고, 전위보다 안전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간의 전투로 사람들은 너무 많은 죽음에 노출됐고, 죽음을 보았다.

그 상황에 세인트가 나왔다.

세상 편하게 돈 벌고 놀고 싶다는 인식이 만연하게 깔려 모두 세인트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혹한기의 10배 추위를 방불케 하는 어비스로 와달라? 누가 지원하겠냔 말이다.

"물론 오는 사람은 있겠지."

나와 인연이 있거나, 내게 목숨을 빚진 사람들이 오겠지.

하지만 그 수는 현저히 적을 거다.

그마저도 냉기 저항이 있는 사람은 적을 테니 그 중 절반은 돌아갈 거다.

지금과 큰 차이는 없겠지.

"젠장... 그럼 어쩌지?"

"도움을 불러야지."

장군급 악마를 공격하는 일이야 랭커들 불러서 치면 된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꽤 많은 인원이 투입되어야겠다.

대대적인 전술이 필요하다.

"일단, 관찰자한테 연락해."

관찰자한테 이 사실을 말하면 일단 어떻게든 된다.

오랜 경험이다.

잠시 후.

[관찰자로부터 메시지]

-어비스의 지원이요? 알겠습니다. 내성 보유자들로 추려서 보내겠습니다. 지금 출발할 인원과 3일 뒤 출발할 인원의 명단, 드리면 될까요.

역시 관찰자다. 일이 빠르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빠릿빠릿하게 나온다.

"인원은 대충 이걸로 되겠고."

명단을 보니 얼추 이름 있는 네임드들로 추려졌다.

하지만 이보다 많아야 한다.

어비스의 특성상, 내성이 없는 자들은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성을 찾아야지.'

우선 그것부터.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일이다.

어비스에 뿌리를 뻗고 사는 악마들을 족치다 보면 냉기 내성 하나 가지고 있는 씨앗이 안 나오겠는가.

게다가 어비스는 버려진 마을, 숨겨진 던전이나 유적 등 아직 우리가 탐사하지 못한 미지의 공간이 수없이 많은 지역이다.

그곳을 찾다 보면 바바리안처럼 냉기 내성이 있는 장비도 나오겠지.

우선 그것부터.

"할 일은 다르지 않아."

악마를 죽인다. 이번에도 내가 우선하게 될 일은 그것뿐이다.

*

"헬둠의 열매를 섭취합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냉기 피해가 0.04% 상승합니다!"

"은신이 0.04% 상승합니다!"

헬둠을 잡으면 냉기 내성의 열매가 나오지 않을까 했지만, 아쉽게도 아니었다. 눈 내리는 설산을 이 잡듯이 뒤져, 싸우다 도망가고, 싸우다 도망가며 눈 속으로 은신하는 녀석을 겨우 잡았지만, 냉기 피해만 올랐다.

"은신은 뭐람."

일이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우선 냉기 내성을 확보해야 나도 그렇고 다른 네피림들도 움직이기가 수월할 텐데 말이다.

"바바리안. 이곳에 자생하는 다른 악마는 없나."

"셀 수 없이 많지. 하지만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포식자는 없다. 이곳 놈들은 기본적으로 은밀히 움직이면서 상대의 뒷덜미만 노리거든."

어비스의 대표적인 악마는 이곳에 자리 잡아 군락을 이루는 티블.

그리고 헬둠이 있으나 다른 악마가 없는 건 아니다.

대부분 어비스의 추운 날씨에 적응해 사는 놈들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쌓인 눈이나 눈보라에 모습을 감추고 기습하는 게 기본이다.

한마디로 잡는 건 어렵고, 기습당하기는 쉬운 껄끄러운 녀석들이란 것.

"티블의 동태는?"

"감시하고는 있는데 지금까지는 별 차이 없어. 우리가 놈들 성안까지 들여다보지는 못하니까."

"마을 안이라... 아마존은 뭐하지?"

"아마존 지금 계단 오른다고 낑낑대고 있던데? 부를까? 내가 부를 때는 씨알도 안 먹히지만 너는 다르지!"

"불러봐. 지금 계단 오르는 게 문제가 아니야."

"오케이! 근데 강철 군주는 뭐 하는지 알아? 수색하려면 강철기사단이 꽤 괜찮은데."

"불러보겠다."

그리고 잠시 후.

아마존과 강철이 도착했다.

"대, 대, 대, 대장. 오, 오, 오랜만입니다!"

새하얀 롱패딩을 입고 찾아온 아마존은 세상 추위를 혼자 맞는 것처럼 덜덜덜 떨고 있었다.

한겨울에 내다 버려진 새끼고양이처럼 떠는 모습에 내가 다 애처로웠다.

반면 강철은 변함없이 강철로 무장한 채, 주변을 살폈다.

"그 정도인가? 아마존은 추위를 잘 타는 것 같군."

"강철이 이상한 거예요! 패딩도 얼어서 터지고 있는데 왜 안 추운 거야? 금속 갑옷이라 더 추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엄살이 심하군. 기사는 떨지 않아."

"말도 안 돼..."

강철은 아마도 나와 같은 이유로 이 추위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 모양.

강철은 날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 또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뭐야? 둘이 수상해~"

"징그럽게 굴지 마라. 바바리안. 콧물이나 닦도록. 더럽다."

"이 날씨에 콧물이 안 나는 게 이상한 거라고~ 강철. 아마존 좀 봐."

"코, 콧물 아니에요! 습기에요!"

"습기는 그렇게 추잡하게 얼지 않을 텐데~ 안 그래?"

"조용히 안 해!?"

오자마자 시끄러워지는 둘을 데리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려는 찰나.

걸어가던 바바리안이 문득, 멈춰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데몬시드. 근데 이거 말이야."

"왜 그러지?"

"이 나무 근처에 있으니까 별로 안 춥지 않아? 이거, 네가 지금 성장시킨 나무 말이야."

"...?"

"아니, 나 방금 여기로 오니까 엄청나게 추워졌는데? 여긴 괜찮다니까?"

바바리안의 위치는 데몬트리에서 오십 미터쯤 멀어져 있었다.

"진짠데? 와, 어비스에서 이렇게 안 추운 곳이 있다고? 이거 뭐냐?"

"어 진짜네요? 여기도 춥긴 마찬가지지만..."

아마존도 동의했다.

"그렇네."

데몬트리 근처는 뼈 시릴 한파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춥지 않은 건 아니지만 기온이 조금 높아진 느낌이랄까.

'이런 효과가 있었나?'

그래서 불별도가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더웠던 걸지도 모른다. 인제 와서 생각하니 무성한 나무 사이의 오두막이 찜통처럼 더웠던 것도 이러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아니겠지.'

이곳 기온이 높아질 정도로 뜨거운 나무였다면 우리 집 오두막에 에어컨을 돌린다 해도 더웠어야 했다.

"데몬시드! 이거만 심고 다니면 여기 평균 기온 올라가는 거 아냐?"

"빠, 빨리 심어줘요! 너무 추워!!"

"잠깐 실험 좀."

콧물이 쏙 들어간 채로 방방 뛰는 바바리안과 아직도 춥다고 징징거리는 아마존을 진정시키고 품에서 새로운 씨앗을 꺼냈다.

백 미터쯤 멀어진 곳에 씨앗을 심고 성장시키니.

[검은 산양의 추종자 나무]

야간 시야를 올려주는 나무다.

어비스는 해가 없지만, 천장의 검은 구름에서 눈이 펑펑 내린다.

그중 일부는 녹고, 일부는 쌓이는 곳인데 해조차 없다 보니 어둡기는 어둡고, 춥기는 냉동고보다 춥다. 이곳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냉기 내성이 필수지만, 야간 시야도 있으면 좋다.

물론 그거 때문에 심은 건 아니다.

'차이가 없다면 편하지.'

어느 데몬트리나 어비스의 기온을 높여준다면 물론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겠지.

"어, 여기는 추운데?"

"으아악, 추어!!"

"역시 그렇군."

생체 온도계인 바바리안의 콧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아마존의 흰색 패딩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찢어져 오리털을 뿌렸다.

좋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헬둠 씨를 말려야겠군."

헬둠.

이 녀석의 나무만이 이곳 기온을 잡아줄 열쇠였다.

"나이쓰! 이제 추위에 벌벌 떨 필요가 없겠구만!"

"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베이스캠프 주변은 이제 추위가 덜하긴 하겠지."

약삭빠른 헬둠을 잡아 씨앗으로 만드는 일이 먼저지만 말이다.

어비스 [3]

169화.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눈보라 속.

새하얀 무언가가 눈 숲을 질주했다.

"북동쪽, 400m 방향. 나무 뒤."

아마존이 달의 눈으로 위치를 확보하고 화살을 날려 표적의 다리를 맞춰 이동을 늦게 만든다.

"확인했다."

그러면 땅 위에서 강철 군주가 강철 날개를 펼치고 표적을 쫓는다.

표적은 당연, 헬둠.

헬둠은 온몸이 얼어붙은 호랑이와 흡사한 외관을 지녔다.

하지만 곳곳에 솟아난 광물과 미스릴로 이루어진 발톱은 수많은 생명을 도륙할 학살자임을 알렸다.

채앵-! 쾅!!

강철의 날개와 검으로 헬둠을 몰아세우던 강철 군주가 돌연 물러났다.

그때였다.

"으럇챠!"

거인의 크기로 거대해진 바바리안이 양손 도끼로 단숨에 헬둠을 내려쳤다.

쾅-!!

머리부터 직격당한 헬둠은 단번에 반으로 나뉘다 못해 박살이 났다.

'거인화랬나. 나쁘진 않군.'

바바리안의 헤일로.

[거소의 관]

단순 무식한 그의 전투 방법과 썩 어울리는 헤일로였다.

몸이 거대해지면 힘도 커진다.

군단장 중에는 거대한 본체를 지닌 존재들이 많으니 바바리안의 헤일로는 분명 큰 도움이 되겠지.

"크기가 커질수록 힘은 늘어나지만 스태미너는 약해진 댔던가."

"아, 엉. 존나 힘드네. 휴! 그래도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회복력은 높아지지. 일장일단인 헤일로야."

거소의 관.

거인이 될 수도, 소인이 될 수도 있는 헤일로라고 한다.

"어울리는 헤일로다."

"고맙다."

헬둠은 랭커 셋이서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수준의 힘을 지녔다.

물론 한국 최정예 랭커들이고 헤일로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다른 이들은 헬둠을 잡는 게 거의 어렵다고 보는 게 맞겠지.

"신체 능력도 높지만, 환경적 요인이나 은신하는 능력이 까다롭군."

"맞아. 한번 숨으면 찾기 힘들어. 아마존 아니었으면 놈이 도망갔는지, 그냥 숨어 있는지 모를 정도니."

호랑이과의 맹수라 그런 걸까.

어비스에 적응한 토착 생물이라 그런 걸까.

놈은 눈보라로 쌓인 눈 속에 숨어들어 은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발톱은 미스릴이 물들어 있어 웬만한 방패는 전부 부서질 정도이고, 완력도 상당해 쉽게 잡기 힘들다.

여기 있는 셋이니까 쉽게 잡았지, 어두침침해서 잘 보이지도 않고 추위 때문에 움직이기도 힘든 곳에서는 확실히 놈과 싸우는 건 바보짓이다.

"으음..."

"괜찮나."

"그냥 스쳤을 뿐이다."

강철이 어깨를 조금 다쳤다.

놈과의 접전에서 발톱에 조금 긁힌 모양이었다.

"추위 때문에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 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어렵긴 하지."

추위가 주는 둔화.

전투에선 쥐약이었다.

"힐링."

"힐링을 시전합니다."

"신성력을 소모하여 상처를 치유합니다."

황금빛 물결이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강철의 상처가 치유되고 주변엔 온화한 온기마저 흩뿌렸다.

"오오~ 치유까지~"

바바리안이 능글맞은 눈빛을 보냈다.

"흐응... 그렇구나."

"어이어이~ 아마존. 너도 어디 다쳤다고 빨리 치료해달라고 해."

"안 다쳤어."

"그래? 그러길래 누가 뒤에 숨어서 화살이나 날리래?"

"너도 여기 파묻혀 있고 싶어?"

껄껄거리면서 아마존을 놀리는 바바리안을 무시하고 쓰러진 헬둠으로 가까이 갔다.

요 며칠.

헬둠을 잡고 있다.

녀석은 눈에 띄지 않고 숲에 숨어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아마존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벌써 열 마리째인가.'

순조롭다.

놈이 냉기 내성을 채워주지는 않지만 헬둠의 데몬트리가 주변의 기온을 높여주기에 베이스캠프 근처에 계속해서 심고 있다.

덕분에 캠프 주변은 기온이 높아져 조금 살만해지기 시작했다.

지하의 광질도 속도가 붙어서 미스릴의 채굴량도 많아지고 있다니, 헬둠의 사냥을 가열차게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녀석의 열매로 인한 냉기 피해도 나쁘지 않다.

"시드. 이거 봐라."

"음? 이건..."

강철 군주가 헬둠의 배를 가리켰다.

배가 꽤 부풀어 올라가 있다.

"새끼라도 뱄나."

"그건 아니다. 젖이 나오지는 않았으니까."

강철이 곧장 검을 꺼내 배를 갈랐다.

그러자 나온 것은.

"우엑... 존나 징그러."

놈이 먹은 티블이었다.

"어쩐지 좀 둔하다 싶더니, 배가 불러서 둔했던 거였네요."

"비교적 오래된 게 아니군. 몇 시간 전에 사냥에 성공했던 모양이다."

"흠... 행상인가? 전사는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바르바제는 기본적으로 요새다.

철옹성이기는 하지만 어비스에 달랑 요새 하나만 있지는 않다.

교류하는 곳이 있는지 행상인들이 이따금 존재한다. 이들은 거대한 마차 비슷한 것을 몰고 바르바제의 요새로 찾아온다고 몇 번 들었다.

보통의 티블처럼 피부가 하얗고 이마엔 뿔이 달려 있다.

하체 부근은 녹아버렸는지 잘렸는지 보이지 않지만, 상체는 비교적 온전했다. 아마 통째로 몇 놈을 삼킨 모양이었다. 헬둠의 크기라면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어, 편지 있는데요."

"어디 봐봐. 뭐라고 적혀 있는데."

"으음..."

네피림으로 각성하게 되면 모르는 언어나, 글자도 통역할 수 있게 된다.

정확한 통역은 힘들어도 대충 내용은 간파할 수 있다.

아마존이 누리끼리한 편지지를 펼치고는 읽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알두바드에게."

"알두바드? 누구려나."

"계약서 같은 게 아닐까."

"조용히 좀 해봐요."

아마존은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친애하는 알두바드에게.

이번에는 그대의 간곡한 요청에 수량을 맞췄으나 점점 놈들을 수급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소. 그대도 알다시피 놈들의 개체수가 급감하고 있지 않소. 요 수개월 한 번도 그대의 요청에 어긋난 적 없으나 이번만큼은 약조를 지키지 못하겠더군. 다른 건 몰라도 미믹은 맞추지 못할 것이오.

"미믹?"

"잘은 모르겠지만... 바르바제의 알두바드라는 사람이 다른 상단에 미믹을 요청했나 보네요. 근데 미믹이면 그 상자로 변장하는 악마 아닌가. 그걸 왜 요청하지?"

미믹이라.

그 이름을 여기서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근데 악마들이 같은 악마인 미믹을 왜 필요로 하는걸까.

의아하다면 그 부분이 꽤 의아했다.

"놈들에겐 필요한가 보지."

"함정 설치하려고 하는 거 아냐?"

"아니면 뭔가를 숨기려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철의 요새 바르바제는 꽤 많은 보물이 있을 것이다. 미스릴 장비를 무장한 전사들이 즐비하니 성의 보물과도 같은 무기도 존재할지 모른다.

"알두바드... 바르바제의 요새에서 꽤 높은 신분일지도 모르겠어."

바르바제의 알두바드.

기억해두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다.

"대충 다 했나."

"어, 다 뒤져본 듯? 여기에 나무로 만들 거지?"

"추우니까."

베이스캠프 주변엔 이미 많이 심어 둔 상태다.

그곳만 갑자기 푸른 잎이 자란 데몬트리가 우후죽순 솟아 있어서 다른 곳에도 만들어둘 예정이다.

"데빌스톤을 제물로 사용합니다."

"헬둠 씨앗이 완전히 성장합니다!"

데몬트리가 되자마자 추위가 조금 가시며 울창한 푸른 잎이 그늘이 되어 눈을 막아준다.

게다가 헬둠의 열매.

겉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먹었을 때 알싸함과 함께 먹으면 속이 든든하고 뜨거워졌다.

"나도나도! 얼어 죽겠어!"

"기다려라."

한 알을 건네니 바바리안이 헬둠 열매를 먹고는 감탄사를 자아냈다.

"크으! 이거지. 보임? 나 연기 남."

먹자마자 아랫배에 든든하게 내려가 열기를 만들어낸다.

바바리안의 대머리와 몸에서 새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이후에 안 사실이었지만, 헬둠의 열매는 먹는 것만으로도 두 시간 정도 냉기의 침입을 막아준다.

물론 철골과 냉기 피해는 덤.

맛도 뭐 고추랑 구운 마늘을 먹는 맛이라 썩 나쁘지 않았다.

"헬둠의 열매를 헬둠 마늘로 변경합니다."

앞으로 마늘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다.

불별도의 텃밭에 상추랑 깻잎을 심어 두고 있었는데, 마늘은 없었다.

설마하니 나무에서 마늘이 열릴 줄은 몰랐는데 텃밭을 늘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삼겹살엔 마늘이지.'

다른 요리에도 마늘이 없어서 잡내나 향이 부족했는데 이참에 잘됐다.

많이 따가서 다진 마늘로 만들어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두면 요리할 때마다 쓸 수 있겠지.

'레아한테 삼겹살 좀 보내달라고 할까. 넉넉하게 캠프 인원 전부가 먹을 양이니까... 100인분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

레아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서 식자재 쪽은 나보다 더 빠삭하다.

횡성과 정부 쪽과 연이 닿아 있어서 레아가 말만 하면 비교적 쉽게 고기를 건넬 것이다.

'자기 빼놓고 또 위험한 데 갔다고 뭐라 할 게 뻔하니까...'

슬슬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삼겹살 파티로 구상 중인 그때.

"대장님. 저기 뭔가가 있어요."

아마존이 또 뭔가를 찾았다.

"헬둠인가."

"아니면 티블일지도 모르지."

"어... 아뇨? 파묻혀 있는 게 사람처럼 보이는데... 가볼까요?"

사람? 아마존의 답변에 나와 강철, 바바리안의 표정이 전부 애매해졌다.

이 근처엔 우리를 제외하면 사람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베이스캠프에 존재하는 파티들도 헬둠의 사냥이나 탐사를 진행 중이지만 그들의 위치는 우리와 반대쪽이기 때문이다.

"매복이 있을지 모른다."

"함정일지도 몰라! 헬둠 새끼들 일부러 미끼 놓고 은신하잖아."

바바리안과 강철의 의견에 동의했다. 헬둠은 사냥꾼이다.

미끼를 놓고 매복하는 전술을 펼치기도 하는 머리 좋은 짐승이다.

어쩌면 티블의 함정일지도 모른다.

"조심해서 가보도록 하지. 파묻힌 자는 아직 살아있나?"

하지만 함정임을 알아도 사람이라면 응당 구하는 게 맞다.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하나 보기 힘든 곳에서 티블과 헬둠같은 악마 빼고 사람이라니 당연히 구해야 했다.

"아직 살아 있어요. 미세하게 숨을 쉬고는 있으니까요."

그럼 결정이다.

"강철."

"알겠다."

강철의 날개에서 강철 조각 몇 개가 날아가 지면에 꽂히더니 이내 말을 탄 강철 기사로 변했다.

함정일지도 모르는 일.

우선 그녀의 기사들을 보내 확인하고 구하는 게 맞다.

"가라."

강철마를 탄 기사들 다섯이 전속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일부러 요란하게 달리는 중.

그때였다.

-콰아!

숨어있던 헬둠이 나타났다.

"역시."

"한 마리가 아닌데?"

한 마리가 아니다.

자그마치 세 마리.

집채만 한 크기의 헬둠 세 마리가 강철의 기사들을 단숨에 찢어 놓았다.

하지만 그 속에 비었다는 것을 놈들이 눈치챈 순간.

"갈게요!"

아마존의 활시위가 놓아졌다.

팟, 팟팟.

표식이 생김과 동시에 헬둠의 다리에 아마존의 화살이 꽂혔다.

-크아아아앙!

거대한 울음소리와 함께 바바리안과 강철 군주가 뛰쳐나갔다.

하늘에선 아마존의 화살이 연신 저격하고, 바바리안은 거대해진 상태로 놈들을 무차별적으로 도끼로 찍는다.

그리고 강철은 고속비행으로 혼을 빼놓으며 날개의 칼날을 이용하며 보이지 않는 번개로 감전시킨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잡겠다 싶던 그때.

쾅-!!

[쳐부수는 헬둠 킹 올라]

"챔피언이다!"

"이런..."

돌연 챔피언이 나타났다.

콰아아아앙-!!

놈은 보통의 헬둠보다 머리 하나는 거대했고, 몸에 돋아난 광물들의 크기나 숫자도 많았다.

그리고 수식언.

발을 한번 내려치니 땅이 울리고 파편들이 날려지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헬둠 자체가 스펙이 뛰어난 녀석이다 보니 챔피언이 등장하자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으랏챠챠챠챠!!"

바바리안이 거대화해 헬둠 킹 올라의 머리에 발차기를 먹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헬둠 두 마리가 바바리안에게 달려들었고 도끼가 단숨에 한 마리를 찍었다.

쩍!

하지만 다른 한 마리는 바바리안의 어깨에 붙었는데 강철의 검이 놈의 목을 베어버렸다.

나머지 한 마리는 숨었고, 헬둠 왕, 올라 또한 어느새 눈 속으로 스며들어 은신한 상태였다.

상황은 점점 고조된 것과 반대로 고요함만이 엄숙하게 내려앉은 그때.

내가 움직였다.

"네가 나서면 긴장이 풀어지잖아."

"사람은 구해야지."

바바리안의 푸념 섞인 웃음과 함께 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놈들이 내려놓은 미끼로 다가간 순간.

크와왕-!!

헬둠 한 마리가 날 덮쳤다.

동시에 내 머리 위에는 헤일로가 떠올랐다.

굳이 벨로나를 부를 필요도 없다.

쾅-!!

"휘유~"

"맨손으로 박살 내면 박탈감 와요!"

"신의 사자로 신체 능력이 250% 상승합니다."

헤일로로 버프 된 육체 스펙은 헬둠 놈들과 비교해도 월등히 뛰어나다.

내 근력은 아무 버프 없어도 100이 넘는다.

250% 상승이면 300이 넘는다.

그 말인즉슨 맨손으로도 헬둠 정도는 때려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놈들의 은신.

고행의 빛으로 단련한 감각과 직감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다.

물론 챔피언도 마찬가지다.

-크와와아아아아!!

"역장."

"카탈린의 역장이 시전됩니다."

"투사체를 반사합니다."

헬둠 킹, 올라가 날려보낸 미스릴 조각을 역장으로 반사한다.

푹! 푹푹!!

쾅-!!

자기 기술을 맞고 쓰러졌으나 아직도 일어날 기운은 있는 듯 덜덜 떨면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길래 마음을 곱게 먹고 살았어야지. 사람을 미끼로 쓰면 쓰나."

난 적창을 꺼냈다.

꺼냄과 동시에 투창.

붉은 적창이 놈의 목을 꿰뚫었다.

쿠웅-!!

"쳐부수는 헬둠 킹 올라를 쓰러뜨렸습니다."

"그는 어비스의 골칫거리였습니다."

"올라의 머리를 보인다면 어비스의 누구라도 당신을 존중할 것입니다."

"아직 살아 있어!? 얼어 죽은 거 아냐?"

"성수는 내게 있다."

헐레벌떡 달려온 바바리안과 강철이 말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힐링."

성수보다 내가 쓰는 힐링이 더 빠르고 상처를 치료하는 데 효과가 좋다.

눈 속에 파묻혀 있던 사람은 여자였는데 복부엔 할퀴어진 상처가 크게 있었고 어깨엔 송곳니에 물린 자국이 커다랗게 있었다.

네피림이라해도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었다.

힐링을 사용하자 상처가 치료되고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근데 이 사람... 얼굴이 익숙한 거 같아요. 대장, 그렇지 않아요?"

"나도 익숙하다. 이 여자..."

"야, 야!! 이거!!"

일행이 한마디씩 하자 나도 기억이 났다.

이 사람.

"러시아 1위 아냐?"

러시아 1위, 화이트였다.

화이트 [1]

1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