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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한편.

데몬시드가 두세 칸씩 계단을 오르고 있을 무렵.

네피림 커뮤니티 게시판은 난리가 나고 있었다.

[속보!! 데몬시드 수령님 축지법 쓰신다!!]

-지금 우리 수령 동지 랭킹 봤냐? 미국이 놀라고 브라질이 시기하고 영국이 선망하는 대한민국을 보여주고 계시다 이거야~

┗ ㅇㅇ:ㄹㅇㅋㅋ

┗ㅇㅇ:계속 미국이 1위길래 데몬시드도 이건 자신 없나보다 했는데 응~ 아니였구연ㅋㅋ

┗ㅇㅇ:데몬시드가 힘을 숨김.

┗ㅇㅇ:미국 1위가 레벨도 높고 국력도 우리보다 강한데 37계단임. 근데 메타르 이 새끼 며칠 동안 등반한 거 아닌가? 데몬시드 뭔데 갑자기 튀어나와서 50계단 완주중임?

┗ㅇㅇ:걍 사기캐임

순식간에 치고 올라간 데몬시드의 현지 반응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미국 1위도 며칠 동안 등반해서 37계단인데 하루 만에 50계단을 돌파 중이니 국뽕이 안 찰래야 안 찰 수가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의 자랑, 데몬시드 50계단 돌파!]

-실시간 등반하시는 중~ 데몬시드! 한국을 더 알려줘!

┗ㅇㅇ:다 망해가는 헬조선 알려서 뭐함 ㅋ

┗ㅇㅇ:근첩 ㄴㄴ

┗ㅇㅇ:이 맛에 국뽕하는구나. 뽕 존나찬다 캬아!

┗ㅇㅇ:그래도 50계단 정도가 한계겠지. 그 이상은 말도 안 돼.

┗ㅇㅇ:이거만해도 어디임 ㅋ 전 세계 랭킹 1위인데?

┗ㅇㅇ:레벨 랭킹은 아직도 5위죠?

┗ㅇㅇ:응 아메리카 형님이 곧 따라잡아 줄거야~ 결국 시간 문제죠?

사람들은 그를 응원하면서도 대부분 50계단을 끝이라 보았다.

미국도 서른일곱 번째 계단에서 지지부진한데 오십 계단만 해도 충분히 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는 데몬시드.

사람들이 놀라긴 아직 일렀다.

[응 아니야~ 60계단 돌파중ㅋㅋ]

-어딜 감히! 오십 계단으로 우리 형의 잠재력을 재단함? 물소 뼈가 만만해?

┗ㅇㅇ:버그 아님? 말이 안 되는데;

┗ㅇㅇ:물소뼈 투구 쓰고 다니는 무리 있던데, 데몬시드 그거 좀 그만 쓰라고 그래... 애들 버릇 나빠져.

┗ㅇㅇ:아가리

[버그라는 애 봐라.]

-우리 형은 원래 초반부터 버그였어~ 9초의 사나이 모름?

┗ㅇㅇ:ㄹㅇㅋㅋ 멸망기 시작부터 9초 만에 킬 내고 랭킹 1위 유지한 우리 형을 네가 뭔데 재단해 ㅋㅋ

┗ㅇㅇ:한때, 나인이라 불린 사나이가 있었다...

┗ㅇㅇ:그는 전설이 되었지..

그리고 이 생난리를 다 지켜보고 있는 푸른 머리의 여인이 있었으니.

랭킹 6위로 밀려난 아마존이었다.

"난 사흘 동안 십칠 계단 겨우 올라갔는데..."

상대적 박탈감이란 게 이런걸까.

안 그래도 커뮤니티는 지옥 광산보다 천상의 계단 보상 정보 글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죽을 위험이 큰 지옥보다는 상대적으로 천상의 계단이 쉽고 많은 보상을 누릴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아마존은 사흘 정도 커뮤니티 인기글로 도배되어 있었다.

한국의 위상을 지키고 있는 네피림이라며 연신 찬양 글이 잇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데몬시드가 나타나자마자 순식간에 묻히고 말았다.

[엘프님에게 메시지 보내기]

-먼저 간다.

허망함 속에서 보내온 쪽지 하나.

이는 아마존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녀 또한 랭커.

누군가에게 지고 싶은 마음이라곤 가져본 적 없는 게이머였다.

물론.

[속보!!!!!!!!!!!!!!!]

(작성자-기레기)

-데몬시드 99층 돌파!

곧 100층을 돌파했다는 데몬시드의 글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

"백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최초로 백 계단을 정복한 네피림이 되었습니다."

"보상으로 천사의 깃털 1개를 획득합니다!!"

천사의 깃털 조각이 아니다.

온전한 깃털을 획득했다.

『천사의 깃털』

-온전한 신성력을 품고 있는 깃털입니다. 이것을 사용한다면 신성력을 얻을 수도, 또는 헤일로를 제작하거나 강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용."

계단은 아직 더 남았다.

그렇다면 깃털을 더 얻을 수도 있다는 말.

곧장 하나 사용해봤다.

"당신의 위명이 천상의 뿔피리로 울려 퍼집니다!"

"모든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천상의 종소리가 깃듭니다."

"신성력이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새로운 능력치를 개화합니다."

"신성력을 깨우칩니다!!"

"최초로 신성력을 깨우쳤습니다!"

"이는 위대한 업적입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신성 스킬 '힐링'을 깨닫습니다."

신성력 스탯과 스킬을 얻었다.

힐링.

레아가 있는 나한테는 그다지 쓸모가 많은 스킬은 아니었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었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스킬이니 뭔가 달라도 매우 다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아직 멈추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데몬시드'님께서 최초로 신성력을 깨우치셨습니다.]

[오직 대한민국에서만 신성이 담긴 유물이 발견됩니다.]

월드 메시지가 터졌다.

최초로 신성력을 얻은 사나이.

대한민국에만 신성력을 전파할 수 있는 사나이.

그게 바로 내가 되었다.

처음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성력이 뭐길래...'

신성력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월드 메시지까지 띄울 정도로 이렇게 대단하게 만든단 말인가.

카오스 게이트 때, 빛무리 성수를 이용해 신성력을 사용해본 적이 있다. 그때는 나름 효과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천상에서는 신성력 자체를 어마어마한 걸로 포장하는 듯했다.

"뭐지? 희한하네."

하지만 한국이 특별해져서 나쁠 건 없다고 본다.

신성력이 전파된다는 소리가 대체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쁜 건 아닌 듯하니까.

"분노의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다음 계단은 고행의 계단입니다."

"다음 계단에 도전하시겠습니까?"

어쨌거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백한 번째 계단. 내 직감 상, 여기부터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나.

"찬란한 신성의 빛이 내리쬡니다."

"고행의 빛이 당신을 더욱 무겁게 짓누릅니다."

저주 계열은 아니었다.

공기 자체가 무거워졌다.

마치 러시아의 화이트가 내리게 했던 무거운 눈송이처럼 말이다.

'중력 열 배, 뭐 이런 건가.'

뿐만이 아니었다.

계단은 어느새 황금빛으로 불타는 성화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 아래의 계단은 촘촘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드리워져 있다.

고행의 계단.

"왜 힐링을 주는지 알겠네."

아픈 거 치료하면서 걸어 올라가라.

뭐 그런 뜻이었다.

몸은 열 배 정도 무거워지고, 그 무게로 발밑엔 가시가 있고, 불타오르고 있으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상관없나."

"성화가 당신을 불태웁니다."

"면역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불은 날 태우지 못했다.

하지만 계단의 가시는 날 상처 입히지 못했다.

해봤자 작은 생채기 정도?

왜냐하면 내 몸은 시드네스로 인해 재구성되어 뼈는 철골로 되어있고, 피부는 엘리스의 단단한 거미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가시를 밟아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고행은 날 시험에 들 수 없었다.

"찬란한 신성이 당신의 상처를 치료합니다."

"치료할 곳이 없습니다."

"가득한 신성의 일부가 당신의 곁을 맴돌다 깃듭니다."

"고행의 첫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신성력이 +1 상승합니다!"

대강 뭔지 알았다.

"쉽네."

이번에도 어렵지 않을 거라는 걸.

천상의 계단 [3]

155화.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졌다.

다리는 악마들의 비웃음 속에서 도끼로 찍혀 허전했고, 팔은 여기저기 잡아당겨져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선에는 빛 하나가 또렷하게 존재했다.

악마들의 피와 살이 산을 이룬 그곳을 죽음의 고비 앞에서 가로질렀다.

이내 빛을 손에 쥐었을 때에서야.

"열여덟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근력이 +1 상승합니다."

"헉! 허억!"

어느새 자신은 지옥도의 속이 아닌 계단의 앞에 서 있었다.

부러진 팔, 꽂힌 검과 도끼.

그리고 잘린 다리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진짜 기분 나쁜 계단."

악마들과 싸우는 건 그럴 수 있다.

나름 익숙하니까.

그녀 스스로도 점점 성장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다양한 악마들과 싸우는 게 일종의 시험이니까.

하지만 악마들과 싸우게만 하지는 않는다.

이 계단 하나하나에는 나름의 설계와 서사가 존재한다.

게다가 저 또렷한 빛은 자신의 과거까지 들춰내서 갈림길에 서게 만든다.

하나의 선택으로, 하나의 목숨.

하나의 선택으로 수십만의 목숨.

무엇을 살릴지, 그 끝에 후회는 없는지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답해야 하는 건, 도전자다.

죽은 부모가 살아 돌아왔을 때도 있었으며,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지금 함께하던 동료를 악마들에게 팔아넘겨야 할 때도 있었다.

허나 그것들 모두가 한순간의 꿈임을 알았을 때의 허망함.

그리고 자괴감과 죄책감은 그녀를 조롱하듯 가슴을 후벼팠다.

뿐만 아니다.

언젠가 자신이 사랑할 사람, 또는 아이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하기도 했다. 그때의 환상은 현실과 같아서 지닌 감정도 동화되어 버렸다.

사랑하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동료 하나를 죽였다. 하지만 동료 한 명을 죽이자 이후 비밀을 위해 둘을 더 죽였고, 다음엔 일곱을 죽였다.

하지만 끝내 아이는 악마는 아이였고 자신은 어느새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 동료들에게 노려지고 있었다.

그때부터는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후회하며 처절하게 싸우고 죽었다.

결과는 등반 실패.

아마존은 열여덟 개의 계단을 올라오며 수많은 죽음을 보았고,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되었다.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사람이기에.

뜨거운 피와 정이 흘렀기에.

죽은 가족을 그리워하기에 때론 대의보다는 소를 중시했고, 그 결과는 도전의 실패와 후회로 남았다.

천상의 계단은 한 번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과 후회로 남게 될 거란 걸 명확히 제시했다.

고작 열여덟 계단.

여기까지 올라오며 수없이 슬퍼하고 아파했던 것들이 고작 열여덟이다.

올라가는 것 자체가 너무나 아프다.

그들이 말하는 대와 소.

그것은 항상 악마와 관련이 있으며 자신의 욕망보다는 세상을 위한 대의를 선택하라 종용했다.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시험은 극단적인 상황만을 제시하게 만들어서 파국으로 치 닿을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래도 결국 보상 때문에 올라서야 하니 찝찝했다.

'조금 더 나은 결과가 있을텐데.'

천상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악마의 토벌만을 원한다고 느껴졌다.

"근데 이 사람은 대체..."

이렇게 힘든 게 천상의 계단이다.

대부분의 네피림들이 계단 등반을 쉽게 포기하는 이유가 이곳에 있다.

몸도 마음도 아프게 하기에.

근데 여기엔 계단의 시련을 쳐부수고 올라가는 사람이 하나 있다.

[천상의 계단 랭킹]

1위-한국 데몬시드 133계단

2위-미국 메타르 39계단

3위-브라질- 윈드킬 29계단

데몬시드.

그가 대체 어떻게 저렇게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지.

아마존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

"이제 조금 아프군."

교회는 꽤 친숙하다.

지하철만 타도 이상한 아줌마 아저씨가 뭐라 말하며 안 믿으면 지옥가고 사탄이 되고 뭐라 했던 걸 들은 기억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에서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것이다.

나만 해도 보육원 시절에는 강제로 참가한 적이 많았고, 훈련소 시절에는 햄버거와 치킨을 먹기 위해 참여한 전적이 있다. 간간이 먹을 걸 쥐여주는 교회는 군인 시절에서도 꽤 좋은 기억이 있는 편이니.

"고행의 스물다섯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신성력이 +1 상승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행.

그로 인해 주어지는 신성력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납득 가능했기에 이해도 쉬웠다.

첫 번째 계단은 어쨌든 간에 신체 능력을 상승시키기 위한 발판이라면 그다음인 고행의 계단은 도전자에게 신성력을 얻게 하는 것이 있다.

솔직히 이제 와서라는 느낌도 있다.

줄 거면 빨리 주지 인제 와서 신성력을 보상으로 얻게끔 하는 의도가 대체 뭘까. 생각해봤지만 이거다 싶은 진실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거라곤.

'더 강한 적이 나타날 거라는 건가.'

참 게임 같은 시스템이다.

그러나 알고 있다.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니다.

마냥 게임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가능성을 보고 더 투자했다는 게 아마도 맞겠지."

가능성.

인류에 대한 가능성이다.

새로운 콘텐츠들은 내가 티타누스를 해치우고 나서야 나타났다.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강적.

솔직히 개인적인 평가로서 운이 좋아서 잡았다고 느끼지만, 어쨌든 간 잡은 건 잡은 거다.

17군단장을 잡았으니 천상에서 보는 시각도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티끌만 한 희망이 조금은 더 커졌을 거라고 보지 않았을까.

그러니 이런 대대적인 투자를 지원한 거겠지.

물론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악마를 두려워하는 건 인류뿐만이 아니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꽤 절망적인 흐름이 느껴지지만, 그건 지금 생각할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생각해봤자 의미가 없기도 하다.

난 강해진다.

우리는 강해질 것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될 일이다.

"고행의 서른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아다만티움 조각 3개를 획득합니다!"

"신성력이 +1 상승합니다!"

물론 이전처럼 마냥 쉽지만은 않다.

가시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짓누르는 압박감은 더욱 무거워진다.

암만 몸이 단단해도 칼날 위에 서서 거인이 어깨를 누르고 있으면 안 박힐 것도 박히게 되기 마련이다.

이제 슬슬 발바닥의 살이 벌어지고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 가시는 점점 창처럼 변해가고 중력의 압박감은 이제는 태산을 짊어진 듯 무거워졌다.

당연하게도 내가 지닌 스킬들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고행의 의미는, 말 그대로 고행이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물론 정말로 아무것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신성력으로 사용하는 신성 스킬.

"힐링."

레아의 피의 축복이랑은 또 다르다.

레아의 기프트는 피를 활성화해 자가 치유 능력을 극상으로 끌어올리는 거라면 신성력을 기반으로 사용하는 힐링은 달랐다.

신성 자체가 피부와 몸속에 스며들어 재생이 아니라 완전한 치유였다.

상처란 재생을 하면 흉이 지기 마련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부분이지만 힐링을 사용하면 흉이 지지 않을 거라고 난 확신했다.

치유 효과도 확실히 빠르다.

'상처 크기에 따라 스며드는 신성력이 달라지는 모양이군.'

서른 번째 계단까지 올라오며 내 신성력은 30 스탯을 돌파했다.

다분히 신성력에 따른 신성이란 자원 게이지가 존재했는데, 마나가 마력 1당 20이 올라가는 것이 비해 신성력은 1당 10이 올라갔다.

덕분에 지금 내 신성은 310.

고행의 계단에 찢긴 발바닥을 치료하는 데에 30 정도가 소모됐다.

발바닥 치료에 30이니 큰 상처를 치료 하는 데에는 2배 3배가 들 거로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고행의 빛이 당신을 짓누릅니다."

"칼날이 당신의 고행을 더합니다."

아무튼 마흔번째에 이르게 되니 슬슬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십 번째에 이르렀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고행의 수문장이 당신의 길을 응원합니다."

쿵!

"응원한다면서 왜 이래."

돌연 계단의 폭이 수백 미터로 불어나더니 넓은 땅으로 변했다.

그리고 새하얀 기계 덩어리가 나타나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 향해 창을 들이밀었다.

『고행의 수문장』

중간 보스 같은 녀석이었다.

척 봐도 스펙이 남달라 보이는 외관을 지녔다.

"느낌상... 챔피언 정도인가?"

챔피언급 악마 정도의 스펙.

풍기는 분위기가 그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챔피언급이면 벌벌 떨면서 무서워했지."

요새들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을 제대로 실감한다.

그렘린 한 마리에 벌벌 떨었던 것도 잊어버리고 이제는 군단장 아니면 긴장하지도 않게 되어버렸다.

물론 챔피언도 챔피언 나름이고,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전부 막혔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원래라면 손가락 튕기면 죽을 놈이지만 그래도 고행의 시험.

스킬들이 전부 막혔으니 직접 움직이기는 해야 할 거 같았다.

"창, 못 꺼내네."

인벤토리도 막혔다.

하지만 어느새 곁에는 검과 창과 같은 무기들이 나타나 있다.

싸우라는 뜻이었다.

가볍게 창을 골랐다.

스킬이 막혔더라도 내 기본 능력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내 손에서 돌아가는 창술은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철컥. 후웅-!!

쾅!!

창을 잡자마자 놈이 날아올라 냅다 내려찍었다.

곧장 창으로 막았다.

흘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놈의 힘을 막았기에 뼈가 삐걱거리긴 했다.

그러나 겨우 그 정도.

어깨까지 닿으려던 놈의 창날이 서서히 밀려났다.

"미노우스보다 약하네."

정확하게는 미노우스의 분신보다 약하다였다.

그대로 놈의 창을 튕겨내고 찔렀다.

불티가 튀기며 놈의 몸체 한곳이 뻥 뚫렸다.

미노우스보다 약한 힘.

바릿느보다 느린 속도.

푸르푸르보다 느린 재생력이다.

하기사.

군단장보다 강한 골렘을 찍어낼 수 있다면 천상의 존재들이 뭣 하러 네피림들에게 힘을 내리겠는가.

자기들이 그냥 처리하지.

인간 손을 빌릴 이유도 없을 거다.

악마들이 여러 차원을 전부 정복하고 여기까지 쳐들어왔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쿠웅-!!

수문장이 마지막으로 창을 찔렀다.

하지만 내 근력 스탯은 80을 웃도는 수준. 군단장도 아니고 챔피언급에서도 애매한 수준인 놈의 힘으로는 날 절대 죽이지 못한다.

대충 힘으로 찍어 누르니 수문장이니 뭔지 하는 놈은 고철 덩어리가 되어 찌그러졌다.

"다음."

다음은 수문장과 함께 지면에 칼날이 돋아나 있었다.

다음 층은 수문장의 수가 늘어났다.

그다음은 독가스가 살포되어 있었고 다음엔 온통 물로 채워진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날 막진 못했다.

"다음."

"예순 일곱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

"일흔 여섯 번째 계단을..."

"여든 번째..."

"아흔아홉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마지막 백번째 계단에 오르자.

이번엔 꽤 흥미로운 존재가 나타나 내 길을 막았다.

"백번째 계단에 도전합니다."

"고행의 관리자가 나타납니다."

설마설마했는데 역시나.

"반갑습니다. 데몬시드."

고행의 길. 그 끝을 반기는 건 다름 아닌 천상의 천사였다.

"당신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저희가 준비한 대부분이 당신을 시험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을 시험하겠습니다."

"고행의 대천사 유리엘이 당신을 시험합니다."

"만족하실 겁니다."

고행의 마지막 계단.

그것은.

"당신이 모르는 지옥입니다."

내가 모르는 지옥이 펼쳐졌다.

천상의 계단 [4]

156화.

태초에, 신이 있었다.

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니 거룩한 살점을 잘라 수족을 만들어 부리니.

그것이 최초의 천사였다.

하지만 신이 빚은 것은 천사뿐만이 아니었다.

불완전한 인간을 이루었다.

고결한 천사인 그들은 묻고 싶었다.

하늘 위의 티끌 하나 깨끗한 우리와 달리, 어찌 추악한 것을 이루었냐고.

허나 신의 의중을 그들이 쉽사리 알 수 없는 것이었고 감히 묻지도 못했다. 거룩한 살점으로 세상을 이루는 존재 자체가 빛이자 소금인 신의 의중을 알고자 하는 것.

그것이 신성모독이었다.

그가 우릴 이루었으니, 우릴 어찌 이루었냐고 물을 수 있을까.

온 세상의 아버지시며 주인이신 분에게 감히 그것을 묻겠는가.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신은 가슴을 뜯어 인간을 만들고, 다리를 뜯어 천사를 만들고

이내 뱃가죽을 뜯어 가축을 빚으시니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신은 그것 자체로 균형이란 것을 절로 일깨우게 하였다.

신은 말이 없다.

허나 그가 행하는 행동으로 뜻을 말미암아 짐작할 수 있었다.

균형, 조화, 유지.

그것이 찾아온 순리와 평화에 천사들은 감복했다.

태어나기를 하늘 위에 태어난 이들이 할 수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땅 아래의 인간과 짐승을 내려다보는 것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시간은 흘렀다.

하나의 차원에 하나의 땅.

그것은 9개로 불어났고 인간과 짐승의 땅은 너무 많다 싶을 정도로 더 없이 불어났다.

천사들은 풍부한 감정을 지닌 인간을 좋아했다.

그들에게 몰래 신의 불을 내리고, 안락한 집을 만들 지식도 내렸다.

신은 말씀이 없으셨다.

이 또한 신의 뜻이겠지.

어느 날.

신께서 우릴 배 불리기 위해 만드셨던 짐승이 변하였다.

그것이 최초의 악이었다.

"어째서 우린 너희에게 먹히기만 해야 하는가. 이제부터는 우리가 너희를 먹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저 먹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그것을 거부하다니 말이다.

천사들은 놀라워하며 저 짐승을 데려다가 키웠다.

신의 축복을 받은 영민한 녀석이라며 천사들은 그를 애정했다.

허나 그것이 비극의 발판이 될 줄은 그들은 몰랐다.

어느 날 짐승들은 떼를 이루었다.

그리고 인간을 공격했다.

그저 식량에 지나지 않았던 것들이 자신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니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화들짝 놀란 천사들은 이 사태를 수습해야만 했다. 그들은 신이 쓰셨던 잔을 엎질러 지상에 물을 뿌렸다.

그것은 대홍수가 되어 땅 위를 뒤덮었고 인간과 짐승이 모조리 쓸려나가 땅의 깊은 틈으로 사라졌다.

이만하면 됐다 싶었으나 신의 잔에는 끝도 없이 물이 쏟아졌다.

이것이 신이 자신들을 만든 이유라며 자화자찬의 축제를 벌이던 그들은 잔을 다시 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를 눈치챈 어느 천사가 서둘러 잔을 일으켜 세웠지만, 어느새 세상의 절반이 물로 채워진지 오래였다.

이를 두고 천사들은 다투었다.

신이 빚은 땅을 훼손시켰다는 자들과 이게 최선이었다는 파로 나뉘었고 둘은 맹렬하게 싸웠다.

"인간과 짐승 모두 거룩한 아버지의 자식들이다. 어찌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우리가 그 둘을 죽이는가!"

"신성모독이다!"

"아니다! 우린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거룩하신 분께서는 입을 열지 않으시니 그저 헤아렸을 뿐이다."

"헛소리!!"

싸움은 끝이 나지 않았다.

몇년에 걸친 싸움은 지상의 틈새에서 나타난 새로운 존재로 끝났다.

그것은 짐승과 악마를 모두 잡아먹고 태어난 추악한 생물이었다.

그게 바로 최초의 악마였다.

놈은 자신을 분노라 칭했다.

분노는 땅 위에 자리 잡은 짐승과 인간을 모두 잡아먹으며 무차별적인 살육을 시작했다.

분노의 주먹에선 파괴를 낳았으며 그의 눈빛에서 공포가 새겨졌다.

상처에선 고통이 생겨났고 고뇌가 이루었으며 탐욕과 질투가 태어났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는 역병과도 같은 이들의 행보에 천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인간은 악마를 상대할 힘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감화되어 제 부모를 죽이고, 제 아들을 물어뜯기에 이르렀다.

천사들은 슬퍼했다.

신이 만든 세상이 더럽혀지고 있었다.

고결하고 완벽한 세상이 흙탕물처럼 추악해지니 그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슬픔에 못 이겨 자결하는 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나타났다.

천사들의 자결 방식은 하늘에 올라 태양의 빛에 눈이 멀고 몸이 불태워지는 것이었다.

태양은 신의 빛이자 그의 눈.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천사들은 모조리 불타 죽어 밤하늘을 반짝이는 별이 되었다.

"어찌하면... 어찌하면..."

고민해봤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뵙고 싶다."

악마는 아버지를 뵙고 싶다 부르짖었으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께선 제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잠들어 계신다.

그분을 깨워 우리들의 실태인 추악한 것을 보여줄 수 있을 리 없다.

"죽여라."

천사는 악을 소멸하기로 했다.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악마와 천사의 전쟁은 천마 대전이라 불리며 수백 년을 싸웠다.

하지만 불리한 일이었다.

인간들은 힘이 없어 가축과 다를 바가 없었고, 악마들은 그들을 먹어 힘을 키우고 회복하기까지 했다.

손색이 커지는 것은 당연, 하늘 위의 천사들이었다.

점점 줄어드는 천사의 수.

그와 반대로 끝도 없이 불어나는 악마들의 전쟁이 이어졌다.

전쟁의 승패는 날마다 달랐으나 싸우면 싸울수록 천사들은 어찌 불리해지기만 했다.

수백 년이 지나 천년에 이르렀을 때.

구천의 하늘까지 지배당하기 전.

하여 천사들은 결단을 내렸다.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

인간과 짐승을 이용해야 한다는 방식이 말이다.

인간과 짐승 또한 자신들과 같은 아버지가 빚으신 자식들이 아니던가.

그분을 위해 싸우는 건 그들 또한 당연한 일.

신의 도구를 사용했다.

이번에는 자신들을 위함이 아닌, 땅 위에 사는 존재들을 위해.

자신들의 형제자매를 위하여.

그렇게, 네피림이 탄생했다.

*

고행의 대천사.

유리엘이 말하는 세계의 진실은 아주 작은 편린에 불과했다.

단편적으로 말해주는 이야기는 시작과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이며 어찌 보면 천상의 치부였다.

물론 그것들을 듣게 된 나는 솔직히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개인적으로 교회는 싫어서."

"..."

천사가 어쩌고 악마가 어쩌고저쩌고해도.

결과적으로 천사들이 트롤짓해서 악마가 태어났다. 이런 얘기가 아닌가.

인간이 어쩌고, 악마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솔직히 너무 먼 이야기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은 다르지 않았고, 그들이 해야 할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왜 보여주신 겁니까."

"당신은 알아야 하니까요."

"제가 왜요."

"저희는, 당신에게 많은 것을 걸고 있습니다."

"군단장을 죽여서입니까."

유리엘은 어렴풋한 미소만 지었다.

"군단장이라 칭하는 이들은 몇 번의 해를 걸쳐 사라졌다가도, 다시 채워졌습니다."

군단장이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언제든 다른 악마로 채워질 수 있는 자리.

"중요한 것은 뿌리겠죠."

"분노를 말하는 겁니까."

"예. 뿌리를 근절시키지 않는 한, 인간과 저희의 위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까요."

17군단장 티타누스.

놈의 힘은 확실히 달랐다.

17군단장이 그 정도인데, 한 자리 숫자 군단장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지금의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분노라는 놈 또한.

"당신은 어느 정도로 강합니까."

"저는 강하지 않습니다. 당신과 비슷하거나 그 아래겠죠."

고행의 대천사 유리엘.

그가 나와 비슷하거나 아래라고 겸양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천사들이 강하지 않다는 것에 나름 이해했다.

악마들은 점점 강해지며 진화하는 사이, 그들은 그저 존재했을 테니.

"당신보다 강한 천사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교회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대천사 중에서도 유명한 이들을 안다.

용기의 대천사 미카엘, 가브리엘 등등은 만화에서도 많이 나오니까.

"제일 강한 분은 누굽니까."

순수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유리엘에게는 조금 난감한 질문이었는지 말하기를 꺼렸다.

"그분들의 강함을 제가 이야기하는 건 굉장한 결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누구누구가 있습니까?"

이 정도는 말해줘도 된다는 듯, 유리엘은 대천사의 이름을 말했다.

"순결과 절제, 자선과 근면, 친절과 겸손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행입니까."

유리엘은 말없이 웃었다.

"미카엘이나 성경에 나오는 천사는 없는 겁니까."

"...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이미 하늘의 별이 되신 분들을 거론하기란 너무나 슬프니까요."

"아..."

미카엘, 가브리엘 등등의 천사들은 이미 죽어 하늘의 별이 된 모양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어쩌면 천상의 상황이 더 좋지 않은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에 인간에게 걸어보고 전부 투자하는 느낌.

"그럼 하나 더."

꼭 알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악마에 관한 것도 아니요, 신의 부재에 관한 것도 아니다.

"내 랭킹 죽인 거 누굽니까."

미노우스의 분신을 죽였을 때.

하늘의 존재가 카탈린의 감전이 얻을 랭킹을 지워버렸다.

그때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냥 넘겼지만, 누군지는 꼭 알아야 했다.

'순결과 절제, 자선과 근면, 친절과 겸손이 있다고 했다.'

내 생각에 절제나 근면. 이 둘 중 하나가 아니지 않을까 싶다.

형평성을 야기하며 제멋대로 내 기프트 랭킹을 내려버린 놈이라면.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근면입니까."

근면 성실이란 말을 살면서 한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성실한 놈들 대부분은 남의 부정함을 싫어한다.

자기가 성실하니까.

똑바로 땀 흘려야 값진 성과를 받았을 때, 더욱 가슴이 벅차다며 떠드는 놈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

고행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왜인지 그게 답이라 생각되었다.

'근면.'

계단을 오르다 보면 놈 또한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제멋대로 이룬 일에 대한 죗값을 반드시 치르게 되리라.

"그런데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뭐가 말입니까."

"저의 모습을 보고도요."

"아. 뭐..."

솔직히 유리엘의 모습은 객관적이라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가 생각하는 천사의 모습은 인간과 닮은 미형에 등 뒤에는 여러 장의 날개가 존재하고 머리 위에는 링이 있다는 것이지만.

'조금 다르긴 하네.'

애초에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중심에 거대한 눈이 있고 원형의 몸을 한 새하얀 구체였다.

금속처럼 보이지만 살처럼 움직이는 걸 보면 마냥 단단해 보이진 않았다.

중앙의 눈과 연결된 각각의 눈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보였고 하나하나 따로 움직였다.

구체의 뒤에는 수십 장의 날개가 존재했다.

솔직히 천사라기보다는 악마라고 하는 게 더 현실적인 모습이랄까.

신성한 빛과 헤일로가 아니었다면 나라도 곧장 창을 박아 넣었을 만큼 기괴한 모습이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데몬시드. 당신은 저희 천상의 영웅입니다. 영웅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면 성심성의껏 모든 것을 해소해드리지요."

"왜 직접적으로 힘을 주지 않고 기프트란 형식으로 힘을 주는 겁니까."

"저희는 인간의 가능성에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단순한 힘이 아닙니다. 힘을 가지고만 있다면 의미가 없지요. 저희가 악마에게 패퇴하는 것은 그들의 성장에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악마보다 인간의 성장을 더 높게 친다는 소리였다.

그저 힘을 주는 것보다 그것을 성장시키는 힘이 더 크다는 걸 그들은 이미 느꼈고 인간의 가능성에 많은 걸 걸었다는 말이었다.

"필멸의 인간은 유한한 삶 속에서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납니다. 저희는 신이 인간을 빚을 때, 가슴의 살을 떼어 만든 이유를 그것이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감정말입니까."

"예. 그 무엇보다 뛰어난 인간의 감정은 같은 형제자매인 무엇보다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힘도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만큼 강해지지 않았겠지요."

"감정..."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살기 위한 집착, 죽음의 공포, 동료의 죽음과 그 속에서 피어난 애정.

확실히 맞을지도 모른다.

아무 감정도 없다면, 강해질 이유도 살아갈 이유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

"답변은 되셨습니까."

"네, 매우."

고행의 대천사 유리엘.

그는 나에게 많은 호감을 품은 듯했다.

원래 그런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음성에서 느껴지는 상냥함은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

"다음 계단으로 가시겠습니까."

"고행은 이걸로 끝입니까? 마지막치고는..."

"당신이 첫 번째니까요. 당신 이후의 사람들은 큰 벽을 마주할 겁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이란 벽을 마주할 거란 소리지요."

나라는 벽.

무슨 뜻인지 알 거 같았다.

다음의 고행을 오를 이들에겐, 마지막 계단에서 나타날 존재가 내가 된다는 소리였다.

날 복사한 무언가가 마지막 보스가 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조금은 미안하면서도 안심됐다.

"그럼 다음은 뭡니까."

"순결의 계단이겠군요."

순결.

"순결은 어떤 걸 성장시켜줍니까?"

"신성력과 마나. 그리고 기본적인 신체 능력치가 이전과는 달리 두 배가 오를 것입니다."

"가겠습니다."

순결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도 아주 어려울 건 없어 보였다.

해봤자 성교육 비슷한 시련이 내려지겠지. 유리엘한테 딱히 궁금한 것도 없고 진짜 궁금한 건 제대로 말해주지도 않을 거 같았다.

+1씩이 아니라 +2씩 오른다는 뜻이니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고행의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완전한 아다만티움 광석 1개를 획득합니다."

"신성력이 +10 상승합니다."

"신성 스킬 '고행의 빛'을 획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가지 당부하겠습니다."

"뭡니까."

"군단장들을 얕보지 마십시오."

"순결의 계단에 도전하시겠습니까."

유리엘의 걱정 섞인 음성이 썩 거슬리기는 했으나 곧장 계단에 올랐다.

그리고 바로 실패했다.

"순결의 첫번째 계단의 완주에 실패합니다."

어쩔 수 없었다.

"왜 강철이랑 아마존이 나오는 거야... 나참."

강철과 아마존이 나체로 나타나는데 그걸 성공할 리 없지 않은가.

순결.

아주 무서운 시련이었다.

수련장 [1]

157화.

데몬시드가 한참 순결의 계단에서 패배를 흥미롭게 곱씹던 그때.

커뮤니티는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어서오세요, 대한 신성 제국으로.]

-저희 대한 신성 제국은 간절한 신심과 기도만 있다면 신성력을 얻고 기적을 행사할 수 있답니다.

┗폿팡퐁커리:빛 있으라, 그곳에 데몬시드 있을지니...

┗글로리안:영광! 영광! 영광!

┗고스트:정신 나갈거가태 성불해버릴거가태!

┗소서리스:데몬시드! 데몬시드! 데몬시드! 데몬시드!

┗ㅇㅇ:미국이 놀라고 일본이 질투하고 브라질이 부들거리는 대한 신성제국으로 요~ 코소!

┗ㅇㅇ:다들 신났노 ㅋㅋ

[그냥 숨만 쉬어도 신성력을 얻을 수 있는 나라가 있다?]

-구라치지마셈 ㅋㅋ

┗ㅇㅇ:나 먼저 사제 전직할게~

┗ㅇㅇ:전직되는거임?

┗ㅇㅇ:되겠냐 병신아 ㅋㅋ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본인 밑바닥에 보이지도 않는 랭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올시다. 근데 글쎄, 죽기 직전 신께 기도를 올렸더니 신성력이 생겨버렸더래요?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하니... 단순히 바바리안이었던 제가, 빛의 추종자란 기프트로 전직이 된 게 아니겠습니까. 하와와와와~

┗ㅇㅇ:구라 니은

┗ㅇㅇ:ㄹㅇ 전직 됨? 어떻게 함?

┗ㅇㅇ:선생님. 저희는 선생님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지금 배를 굶고 있는 토끼 같은 자식 넷 중 하나가 깊은 상처를 입어 치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보기....

┗다이아:어그로꾼한테 개상거지 새끼들 다 몰려왔네 ㅉ 가독성 떨어지는 거 봐라. 말도 못하는 놈들 ㅉ

┗ㅇㅇ:그러는 지도 어그로 끌려서 찾아와서 댓글 달고 있죠? ㅋㅋ

┗다이아:어디 사냐? 다이다이 ㄱ?

┗ㅇㅇ:아재요...

대한민국 국민에게만 신성력의 발현 가능성이 주어진 것.

그것 자체로 한국은 지난 카오스 게이트의 실의를 잊고 환호와 희망으로 가득한 떡밥을 굴렸다.

그리고 이 떡밥에 정점을 찍은 글이 하나 올라왔다.

[저, 전직 했는데요...?]

작성자-(세인트)

-안녕하세요. 인천에 거주 중인 사람인데요... 저 전직했어요. 세인트래요. 데몬시드님께 감사합니다. 기도할 때 데몬시드님한테도 기도할게요. 아니요. 데몬시드님한테만 기도할게요!

┗ㅇㅇ:구라 아님?

┗ㅇㅇ:쪽지로 돈 보내주면 인증한다고 할듯 ㅋㅋ

┗ㅇㅇ:구라 아닌거 같은데? 저거 진짜 자기 기프트 인증한 거잖아.

제목 밑에 닉.

저건 진짜 기프트를 걸었을 때만 나타나는 인증 닉이었다.

세인트.

이 사람은 진짜였다.

원래 가지고 있던 기프트로 장난 글일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악마가 나타나고 유흥거리가 많이 사라진 이때 기프트 전직은 이들에게 하나의 유흥이었다.

┗ㅇㅇ:어떻게 전직함?

┗작성자:원래 아마존이었는데 어느 교회 탐사하다가 유물 발견하고 세인트로 전직했어요.

게다가 직접 전직 과정까지 알려주니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당연했다.

그와 동시에.

[세인트로 전직 파티 구합니다 3/4 너만오면 고]

[희든 직업 파티 괌 쌔끈빠끈한 언니들 듬직한 상남자들이 캐리해줌]

[교회 탐사하실분 구합니다.]

[우리나라 교회 존나게 많네 ㅅㅂ]

[무너진 교회 찾아다니는 것만 해도 일년 걸릴듯 ㅋㅋㅋ]

[내가 알기로 우리나라 교회가 7만개 정도 있었던걸로 암]

[이틈을 타서 부처님한테 기도해서 파계승 전직하러 가실 분?]

수많은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난리가 났네."

혼나비는 인상 쓰며 커뮤니티를 꺼버렸다. 사람들이 흥분해서 엄청난 글을 써대는 까닭에 자신이 원하는 글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럴 만도 하지, 이거 약간 게임에서 말하는 히든직업 같은 거잖아. 정말 기프트 전직하려는 사람 말고도, 유물 팔려는 사람도 많을걸?"

혼나비의 곁에는 드루이드가 자신의 애묘를 쓰다듬었다.

"고스트 얘는 언제 와?"

"곧 오겠지. 북한에서 히든 던전 찾은 것도 걔잖아. 기다려보자."

"근데 너 갈 거야?"

"어딜."

"필리핀."

"아... 가야지. 이번엔 위험한 것도 없고 그냥 자리만 지켜도 되잖아."

베트남과 공동전선 필리핀행.

다른 근접 직군이라면 몰라도 혼나비는 나비를 이용한 원거리 공격과 근접 공격 전부 가능한 랭커이다보니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가야 했다.

게다가 정부에서도 웬만하면 위험한 일이 없을 거라며 신인 네피림들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으니까.

"가야지, 반드시 가야지."

"그래? 다행이네."

드루이드는 안심했다. 이전에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트라움 아파트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았던 혼나비다.

이번 카오스 게이트에서도 꽤 많은 사람이 죽어서 이번에도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모양.

아마도 이번에 헤일로를 얻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때 봤어? 백합이 내 헤일로 얻자마자 얼굴 팍 구기는 거? 내가 그때 10년 묵은 체증이 확 풀리는데...!"

깔깔 웃던 혼나비는 멀리서 고스트가 다가오는 걸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튼, 백합도 헤일로 얻겠다고 지옥 다니고 계단도 오르고 난리잖아. 내가 불참할 수는 없지."

"그래?"

"그리고 데몬시드가 나한테 브릭서도 보냈어. 이거 완전 대출금이잖아?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고 먹으면 빚은 갚아야 하니까..."

"크크, 그렇긴 하지."

랭커들은 대부분 데몬시드.

협회에 빚이 있다.

그들의 잠재력을 평가했다며 악마의 열매나 브릭서를 내어주니까.

신체 능력을 상승시키는 지고의 명약을 받고도 먹지 않을 랭커가 과연 있을까? 백이면 백 먹는다.

그리고 자존심 강한 랭커들은 빚을 지면 어찌 됐든 갚아야 속이 시원한 사람들이다.

"해야지. 반드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데몬시드나 그 측근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

천상의 계단에서 퇴장한 뒤.

난 집에서 이번에 얻은 보상 목록들을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거 드시고 하세요."

"응, 고마워."

소파에 앉아서 상태창을 보고 있으니 레아가 수박을 잘라 줬다.

한 손에 아울베어의 수박을 들고 먹으며 상태창을 확인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물리피해가 0.04% 상승합니다."

아직 따사로운 여름.

시원한 에어컨과 함께 먹는 아울베어의 수박은 별미 중 별미였다.

"200계단 오르면서 얻은 능력치가..."

근력+17 민첩+23 건강+25 마력+35 명중+3 시야+3 직감+3 방어력+20 냉기내성+8% 물리내성+8% 올스탯+1 성력+106

기본적으로는 이 정도다.

"그리고..."

천사의 깃털 조각 43개.

아다만티움 조각 38개.

완전한 천사의 깃털 3개.

완전한 아다만티움 광석 5개.

거기에 스킬로는 신성력을 사용하는 '힐링'과 '고행의 빛'을 얻었다.

장비를 착용하지 않았을 때의 수치를 확인해보자면...

『이화성』

「데몬시드 Lv.7」

「생명력」 – 1800/1800→2300/2300▲

「마나」 - 3040/3040 →3740/3740▲

「신성」 - 1060/1060▲

「능력치」

근력 – 82 →99▲

민첩 – 73 →96▲

건강 – 90 →115▲

마력 - 152 →187▲

철골 - 100

성력 - 0 →106▲

「세부 능력치」

명중+23▲ 시야+18▲ 야간시야+20▲ 직감 +13▲ 방어력+100▲ 마나재생+30▲ 냉기내성+18%▲ 번개내성 +86%▲ [독면역] [저주면역] [화염면역] [공포면역] 수면내성+30%▲ 물리내성+8%▲ 물리피해 +33%▲ 화염피해 +53%▲ 번개피해 +66%▲

이렇게 된다.

『힐링』

-신성한 힘으로 신체에 깃든 모든 삿된 것을 치료한다.

『고행의 빛』

-고행을 원하는 자에게 빛을 앗아간다.

또 이렇게 모호한 설명이다.

힐링이야 뭐 상관없지만, 고행의 대천사 유리엘이 건넨 스킬은 뭔가 껄끄럽다.

고행을 원한다면 빛을 앗아간다.

이게 꼭 적을 상대하기 위한 스킬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벌을 주는 듯한 스킬 같았다.

이제는 이런 부족한 설명도 익숙하다. 천상의 존재들은 부족한 일부러 부족한 설명을 내놓는 거 같았다.

나머지는 스스로 찾으라는 것처럼.

그렇다면 찾아줘야지.

"어디보자..."

간단하게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 한군데 있기는 하다.

콜로세움의 수련장.

결투장은 서로 싸우는 곳이지만 수련장은 허수아비를 때리며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는 곳.

"수련장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입장료 10 금화가 필요합니다."

입장료는 단돈 10금!

싸다.

이내 포탈이 열려 들어가니.

"수련장-42# 입장합니다."

42채널에 입장 됐다.

"음...?"

수련장에는 이전에 한번 들어와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절대 쓰러지지 않는 허수아비를 때리는 사람이 꽤 있었는데 지금은 별로 없다.

조금은 휑하다. 42채널이라 그런가 싶어 허수아비를 향해 고행의 빛을 사용해보려는 찰나.

"잠깐, 잠깐! 뭐 하는 거야?"

돌연 말없이 허수아비 때리던 험상궂은 아저씨가 날 막아 세웠다.

"뭐가 말입니까."

"허수아비 때리려면 사용료를 내야지! 젊은 사람이 거참. 기본 허수아비는 백금! 개인실 이용할 거면 천금이야."

"사용료요?"

금시초문이다.

허수아비를 때려야 한다면 시스템이 알아서 금화를 거둬 갔을 텐데, 웬 배불뚝이 아저씨가 돈 내라고 하니 당황스럽다.

"이 양반 이거 정말 모르나 보네. 여긴 혈맹이 꽉 잡는 거 몰라? 내가 어린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인데, 혈맹한테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리니까 그냥 간단하게 사용료 지불하고 써."

"혈맹..."

내가 모르는 사이, 무슨 길드가 수련장을 장악하고 사용료를 받아먹고 있던 모양이다.

요새 군단장 레이드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였을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협회에서 회의할 때도 크고 작은 집단들이 어쩌고 하더니 이런 거였나.'

애초에 협회는 생존을 위해 네피림들을 더 강하게 만들고, 히든 던전이나 각종 정보를 취합하기 위해 내가 설립한 집단이다.

지금은 히든 던전에 집착할 이유가 없고 크게 관심도 없어서 도와달라고 요청 오는 것만 간간이 마실 가듯 가고 있는 편이다.

아무튼 협회에서도 한 번씩 말이 나왔던 집단이 혈맹과 비슷한 놈들을 말하는 듯했다.

'솔직히 부수는 거야 쉽다만.'

이런 일에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는 게 현실적이다.

산재해있는 중요한 일들이 아직도 많은데 혈맹이라는 깡패 집단 부수러 다니기엔 시간이 아깝다.

"사용료 안 내? 내가 어? 만만해 보이나 본데 내가 한마디만 하면 혈맹 간부들이 온다고! 랭킹들이 다 일만 이상이야!"

혈맹 간부들 랭킹은 1만 정도인가 보다.

꽤 귀여운 랭킹이다.

"그럼 살짝 불러보시죠."

"뭐, 뭐?! 이 양반이 내가 만만해! 나 어릴 때는 어? 어른이 말하면! 군말 없이 예, 죄송합니다. 제가 몰랐습니다! 하면서 어!?"

알아서 와준다면 편하긴 하다.

고행의 빛 스킬도 좀 확인해볼 겸.

근데 이 아저씨.

소리 지르는 거 무시했더니 꽤 당황했는지 내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눈치를 살살 보기 시작했다.

"혹시, 랭커십니까? 죄송하지만 기프트명이 어찌 되시는지."

웃기는 아저씨다.

불러보라고 강하게 나오자 지레 겁먹었는지 인상 쓸 때는 언제고 반질반질한 미소를 보인다.

좀 꼴 보기 싫었다.

"고행의 빛."

아저씨를 상대로 스킬을 사용하자.

"억! 어억! 뭐야! 앞이! 앞이 안 보입니다! 어억!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아! 제가 귀인을 몰라뵈고 어어어!"

고행의 빛.

이 녀석은 아마도.

"실명 스킬인가."

상대의 눈을 가리는 스킬인 듯했다.

수련장 [2]

158화.

혈맹 꼰대를 상대로 몇 번 시험해본 결과.

고행의 빛이 가지고 있는 스킬의 효과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진짜 변태 같은 스킬이네."

본래는 남에게 사용하는 스킬이 아니라 자신한테 쓰는 걸로 보였다.

고행의 빛은 기본적으로 생물이 가지고 있는 시각을 앗아간다.

눈의 빛을 앗아가는 스킬이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평생 죄를 짓고 살아서 그렇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 없이 착실하게 살겠습니다아!"

물론 원거리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고, 신체적 접촉이 가능해야 쓰는 기술이라 전투 중에 사용하기는 조금 번거롭다.

"신기하네."

그런데 신기한 건, 고행의 빛은 스킬을 중첩시킬 수 있었다.

"!"

처음엔 시력이 사라지고 다음엔 가져가면 청력이 사라졌다.

3중첩은 발성을 잃었고 4중첩에는 냄새를 맡지 못했으며 5중첩에는 모든 감각기관을 느끼지 못했다.

간단하게 5중첩까지 이어지자 피부로 느껴지는 바람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른바 촉각의 부재.

혈맹 아저씨는 연신 뻐끔거리며 뭐라 말하지만, 소리를 내지 못했다.

눈도 안 보이고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고, 냄새도 못 맡고 감촉을 느끼지도 못하게 된 꼰대 아저씨는 바닥에서 발버둥 치다 기절했다.

"고문용으로는 쓸만하겠네."

전투에서 쓰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해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역시 자기 자신을 수련하기 위한 훈련용으로 보였는데, 막상 나한테 써보기는 좀 겁나는 스킬이기도 했다. 유리엘이 내게 이 스킬을 준 저의가 뭘까.

생각해봤지만 딱히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고행의 계단을 통과한 자기 나름의 보상이라고 생각했겠지.

"흠..."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전투를 겪으며 폭음 때문에 귀에 이명이 터진 적은 있어도 눈이 멀거나 감각이 죽어버린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악마란 것들은 도통 무슨 능력을 갖췄을지 모를 일.

"대비를 해야 하려나."

전투 중에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눈이 멀 수도 있고, 청력이 손상될 수도 있으며 충격으로 신체의 감각기관이 훼손될 수도 있다.

그럼 그럴 때 어떡해야 할까.

대부분은 죽을 거다.

미국이 싸웠던 군단장도 노래를 이용해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어 죽여버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이상한 권능을 지닌 군단장이 또 없으리라 단정 지을 순 없다.

이 부분들을 생각한다면 스스로 감각을 차단할 수 있는 고행의 빛은 어찌 보면 다른 버프 스킬보다 효과적인 스킬이다.

"쓰기에 따라서는 나쁘지 않겠어."

아무리 단련한 격투가라도 눈을 감고 싸우라고 하면 전투력의 70%가 하락할 것이다.

이는 찰나의 판단으로 죽고 살고 하는 전쟁터에서는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부분.

그러니 시력이 상실했을 때.

청력이 훼손됐을 때를 고려하여 훈련하는 것도 필요해 보였다.

"해볼까."

필리핀행까지는 앞으로 일주일.

훈련 상대들도 속속들이 도착할 걸로 보이니 썩 나쁘지 않았다.

"너 뭐냐?"

"병길이 형 저기서 왜 발광해?"

"몰라. 저 새끼가 했나 보지."

"또야? 혈맹이 개 좆으로 보이나."

아무래도 허수아비는 그냥 심심했는데, 적당한 움직이는 허수아비들도 나왔겠다.

훈련용으로는 딱이었다.

*

아토 협회 안.

집무실에서 안경을 벗고 눈 사이를 문지르는 관찰자는 필리핀행 관련 조약과 참여 네피림 인원을 체크하다 고개를 젖히고 허리를 폈다.

"좀 쉬세요."

"그럴 순 없죠...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이런 거라도 꼼꼼하게 해야지."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이번엔 안전이 보장됐잖아요."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이전 카오스 게이트도 안전할 거로 생각했었잖습니까."

하지만 상황은 완전 반대.

돌연 10번대 군단장이 튀어나와서 인명피해가 엄청났다.

데몬시드가 아니었다면 이백만이 넘는 네피림들이 모조리 죽었을 거다.

그리고 군단장이 나타난 대한민국은 아비규환이 되고 금세 절멸했겠지.

안전 보장?

이 세상에 그런 건 없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세상인데 그런 게 어딨을까.

"내가 좀 무리해서 누구도 죽지 않는다면, 그걸로 된 거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 무리해도 성수 좀 마시면 다 낫는데 뭘."

"성수 만능주의에 빠지시면 안 돼요. 그것도 결국 사람의 몸에서 재생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거고 후에 후유증 있잖아요."

그만큼 소모된 힘은 결국에 채워야 하는 법.

큰 상처를 입고 치료된 네피림들이 수일 동안 혼수상태가 된 채로 지내는 일도 적잖이 많다.

"그건 많이 다쳤을 때잖아. 소서리스. 오늘따라 말이 많으시네요? 그럴 거면 서류 한 장이라도 더 보죠."

"걱정해줘도 난리지."

절레절레 고갤 저은 소서리스는 다시 서류 더미에 파묻혔다.

작은 체구와는 달리 그녀는 소서리스 직군 1위.

이번에 헤일로까지 얻은 랭커였다.

본래 관찰자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협회로 완전히 들어오게 되면서 중직을 꿰찼다.

소서리스가 대개 그렇듯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그녀는 똑똑하기가 남달랐다.

아무튼 덕분에 관찰자의 노동이 대폭 줄어들었으니 그로서는 소서리스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잔소리가 조금 많았지만.

"어디 가세요."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인 그녀가 물었다.

어느새 일에 집중하고 있는지 중요한 서류들이 그녀의 주위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바람 좀 쐬러."

"다녀오세요~"

지이잉.

탕비실에 들어가서 커피머신으로 커피를 한잔 뽑은 관찰자는 향을 음미하며 테라스로 나갔다.

서초동의 중심부에 자리한 협회 테라스는 뷰가 꽤 좋은 편이다.

탁 트인 폐허 뷰.

아직은 폐허더미가 가득하지만 이것도 그나마 꽤 사라진 거다.

하루가 다르게 폐건물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상가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걸 보면 고생한 보람이 생긴달까.

조금씩 도로가 보이고, 성역이 씌워지는 걸 보면 약간이나마 세상이 안전해지고 있다는 걸 몸소 느낀다.

"살풍경이네."

물론 성역을 두드리고 있는 어마어마한 좀비 떼를 보고 있노라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짹짹.

[관찰자님. 지금 커뮤니티 봤어요?]

테라스에 참새 한 마리가 날아들더니 돌연 굵직한 사내의 음성을 뱉었다.

이번에 협회에서 영입한 버드맨이었다.

새로 빙의해서 원거리 교신과 정보 수집에 특출난 사내였다.

"커뮤니티는 갑자기 왜요."

[혈맹이란 길드 있잖습니까. 안 그래도 한번 처리해야겠다고 하셨잖아요.]

"아, 네. 그랬죠. 놈들이 또 뭔가를 했습니까?"

[아, 뭔가를 한 건 아니고... 지금 걔들 얻어터지고 있다고 해서요. 커뮤니티가 난리 났습니다.]

혈맹.

아저씨들 모여서 어중간한 사람들한테만 힘자랑하는 사람들이다.

애매하게 사람들한테 돈을 갈취해대서 한번 손을 봐줘야겠다며 벼르고 있었던 참이기도 했다.

근데 얻어터지고 있다니 그것참 속 시원하다.

"어딥니까? 혈맹 때리는 곳은."

다른 길드 단체랑 싸우고 있나 싶었으나 아니었다.

[지금 좋은 구경거리라서 42채널 수련장으로 가보시죠.]

커뮤니티의 반응을 보니, 확실히 뭐가 터지긴 터진 모양이다.

좋은 구경거리라고 하는 걸 보면 이미 42채널에 많은 관중이 포진해 있는 듯한 뉘앙스다.

커피 한잔을 쥔 채로, 관찰자는 아무 의심 없이 수련장으로 포탈을 탔다.

그리고.

"푸웃!"

관찰자는 시끄러운 관중들 사이에서 깡패들을 때려잡고 있는 사내를 보고 곧장 커피를 뿜었다.

"아이씨, 뭐야."

"헉, 관찰자다."

"관찰자가 커피 뱉었는데?"

"관찰자님 사인 좀요!"

사람들의 관심은 감사했으나 관찰자는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대중들은 데몬시드의 민얼굴을 모른다.

하지만 불별도를 항상 드나드는 관찰자는 안다.

그 사실이 주는 현상은 명확했다.

'협회장님 저기서 뭐하시는...'

혈맹 길드원들을 맨손으로 두드려 패는 사내가 데몬시드란 사실을.

오직 관찰자만 알았다.

"저게 바로 현실판 리신인가 뭔가 하는거냐?"

"저 사람 진짜 눈도 귀도 안 들리나본데? 한번도 이쪽 안 봤어."

"눈은 천으로 가리고 있잖아."

"소리도 안 들리나 봐. 일부러 폭죽 존나 터트리는데 한번을 안 놀람."

"뭔데? 무도가야?"

"나도 모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관찰자는 데몬시드가 뭘 하는 건지 대충 유추가 가능했다.

'훈련... 이신가?'

그럴 거라고 믿는 편이 심장에 좋아 보였다.

눈은 천으로 가렸다.

하지만 귀까지 안 들려 보이는 건 대체 뭘까.

"어이! 이쪽이다! 와라!"

"흐랴앗!"

눈을 가린 상대를 적으로 혈맹 길드원들은 소리를 질러 데몬시드의 관심을 끌며 반대쪽으로 공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아무것도 안 들리는 것처럼 모든 공격을 막고 반격했다.

콰직-!

얼굴 뼈가 아작나는 소리와 함께 혈맹원 하나가 허수아비랑 함께 수련장 담벼락에 처박혔다.

"쟤들이 약한 거야 리신이 강한 거야?"

"리신이 강한 거지. 혈맹 놈들도 나름 잔뼈 굵은 놈들이야. 저렇게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질 놈들 아니라고."

"그런가?"

"분명 관련 기프트를 사용하고 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돼."

수련장은 기본적으로 안전 체계가 바로잡혀 있다.

아무리 큰 손해를 입어도 상처 입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수련장에서 대련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라서 혈맹원은 감히 데몬시드에게 다시 덤비지 못했다.

"고작 한 놈을 상대로 뭣 하는 거야! 전부 한꺼번에 덤벼!!"

"가자!"

관찰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기프트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들, 기본적인 육체 스펙으로도 챔피언을 때려잡는 게 데몬시드다.

솔직히 저들이 칼을 무장했어도 데몬시드를 쓰러뜨리긴 어려웠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파파파팍!!

놈들의 공격에 맞기 직전.

반격에 나선 데몬시드의 공격에 혈맹원들은 추풍낙엽처럼 날아가 건물 곳곳에 처박혔다.

"이야, 지린다."

"저 사람 랭커 아냐?"

"기프트가 뭔지 도통 모르겠으니..."

"드루이드들 중에서 호랑이랑 합체한 사람들도 저렇게 쌔던데."

"저 사람은 그냥 사람이잖아."

"무림인이랑 합체한 거 아님?"

헛소리들이 난무하는 와중에.

관중석의 구경하던 사내 하나가 육중한 체구를 과시하며 나섰다.

"521위, 다이아다. 리신에게 도전장을 건넨다."

"오오오오!"

"다이아다! 근데 리신 아니잖아..."

"다이아가 여기에? 역시 커뮤니티 지박령답군."

"저 사람이 누군데?"

"커뮤질하면서 댓글로 사람들이랑 맨날 싸우는 분탕맨이야."

"누가 나보고 분탕이래!"

덩치는 거의 2m.

온몸이 커다란 근육과 더불어 파마머리 장발.

옛날 미국 레슬러를 보는 듯한 겉모습과 함께 기프트명 다이아.

온몸을 다이아처럼 만들 수 있는 근접 전투 직군으로 꽤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사내다.

"근데 왜 벗고 다니는 거야?"

"관종이잖아."

그때였다.

"흐랴아아아아압!"

괴성과 함께, 다이아의 헐벗은 상체가 다이아처럼 번쩍번쩍 빛났다.

그대로 돌격.

"다이아 박치기!"

육중한 멧돼지.

아니, 코뿔소와 같은 돌진에 관중석이 요동치는 한때.

그를 상대하는 리신은 혈맹들을 상대한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아무리 리신이라도 이거 일나는 거 아닌가 싶던 그때.

퍽!!

"오우!"

콰창창!! 다이아의 다이아스킨이 무참하게 깨졌다.

몸을 뒤덮은 다이아스킨이 조각조각 떨어지고 다이아는 그대로 고꾸라져 게거품을 물었다. 사람들은 다이아가 흘린 다이아 조각을 가져가려다 데몬시드에게 얻어맞고 도망쳤다.

관찰자는 뭔지 모를 상황을 바라보며 쓰게 웃다가 협회 네피림들에게 쪽지를 돌렸다.

[수련장 42채널로 집결. 혈맹 토벌 및 수련 목적.]

협회장이 판을 만들었으니, 이 판으로 이득을 보는 건 아랫사람의 몫이었다.

수련장 [3]

159화.

처음엔 눈이었다.

내 능력치는 이제 평균치가 100을 넘거나 근접해 있다.

장비를 착용하면 당연히 전부 백을 넘어서는 엄청난 스탯을 보유 중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고작 눈을 가린 걸로는 내 전투력이 크게 감소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눈을 가려고 건강 스탯이나 재구성된 청력과 후각은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상대의 발소리, 숨소리, 심장 소리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시끄럽게 소리치는 고함 속에서 내 청력은 그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애초에 상대가 너무 약해서 그런 걸지도 몰랐지만 퍽, 수련이 되지 않았다.

하여 다음엔 귀를 닫았다.

귀를 닫으니 고요했다.

어떠한 잡음도 들리지 않았다.

눈도 귀도 들리지 않아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고요함 속에서도 후각은 영민하게 발달하여 예민해졌다.

시각과 청각이 차단되니 자연스럽게 후각과 촉각이 예민해지는 것이다.

후각으로 상대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 해외 영상을 보면 두 눈을 다친 강아지가 주인과 놀며 뛰어노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후각이 예민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물체가 어디 있는지를 후각만으로 대강 아는 것.

나 또한 그랬다.

적의 냄새, 땀 냄새, 흙냄새, 허수아비의 짚 냄새의 구별로 적을 판별했고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고행의 빛이 없었다면 몰랐을 내 신체 능력의 수준이었다.

후각으로 주변의 물체들을 파악하며 움직이다 보니 청각과 시각의 부재에도 슬슬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다음엔 목소리를 지웠다.

이건 크게 상관이 없었다.

소서리스들과 달리 네피림들은 훈련하면 목소리를 내지 않고도 스킬을 발현할 수 있으니까.

물론 나 또한 그랬고, 수련장에서는 스킬을 쓸 생각도 없으니 크게 상관없는 문제였다.

난 이 상태로 계속 싸웠다.

그리고 이내 후각을 지웠을 때.

난 이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은 고독함을 느꼈다.

느껴지는 것은 피부에 닿는 공기.

바람, 또는 지면에서의 얄팍한 진동이 전부였다.

그것들이 모든 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고, 내 상황을 상기시켜주는 하나의 자극이었다.

발이 땅을 딛는 감촉.

이질적인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고 내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피부의 촉각이 이렇게 예민하고 많은 정보를 취합할 수 있다는 것은 오늘 또 새롭게 느꼈다.

눈과 귀, 후각이 없어도 싸울 수 있구나. 옛날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감각을 느끼니 이 나이 먹고도 조금 신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건 내가 천재라서가 아니라 월등하게 높은 스탯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촉각만으로도 어느 정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느꼈으니까.

'떼로 덤비면 확실히 어지럽네.'

지면에서 느껴지는 발소리.

지면에서 전해지는 진동의 크고 작은 것들과 내 주변을 감도는 대기의 어그러짐으로 상대의 공격을 파악하고 회피하는 건 어려웠다.

작은 정보만으로 여러 가지를 취합하고 그것으로 고려해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은 몸이 무거운 녀석. 이 녀석은 다소 가벼운 녀석. 하지만 그것 외에도 사용하는 기프트의 존재가 날 어렵게 했다.

갑자기 지면에서 뭔가가 튀어나온다든지, 아니면 갑자기 허공에서 뭐가 날아든다든지 말이다.

필연적으로 몇 개는 맞을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으로 맞고 공격.

솔직히 나와의 실력 차이가 너무 나는 이들이라 가능한 수법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나도 크게 다칠 수밖에 없는 게 현실.

'그래서 할 만해.'

오히려 만만한 상대이기에 훈련이 성립되는 거다. 정말 강한 놈이었다면 나도 꽤 많이 다쳤을 테니까.

뭐가 뭔지도 모르게 얻어맞기만 했을 확률이 높다.

저주 면역이 있는 나로서는 이런 고행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고행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는 수행.

굳이 고통을 참을 이유는 없다.

가만히 있으면 삶이 편하고 윤택한데 왜 스스로 고통을 부여하는가.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편하게 살기만을 원한다면, 편하게 살다 처참히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도 생각한다.

'저주 면역도 만능은 아닐 거야.'

어느 방법을 통해서, 어떤 종류에 의해서 면역을 뚫고 침투할지 모른다는 거였다.

계단을 오르고 난 뒤.

난 그런 종류의 생각을 많이 했다.

천상의 계단에서 난 티타누스 때처럼 스킬을 사용하지 못했다.

저주는 아니었다.

어떤 요소 때문인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다.

내가 얻은 모든 것들은 모두, 천상의 시스템에 기반하여 얻게 된 것.

그러니 그들이 도로 가져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티타누스에서도, 계단에서도.'

난 무력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나의 행보는 도약이었다.

항상 죽음의 끝에서 도약했고, 꾸준한 도약으로 점점 진화했다.

강해졌고,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

그러나 때때로 튀어나오는 내 힘에 대한 무력감을 느꼈을 때.

나는 참을 수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그러니 그 누구도.

내 힘을 막거나, 앗아갈 수 없게 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 그런 방법을 알 수는 없다. 그러니 힘을 잃었을 때를 대비하고 그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면 난 무엇이든 하려고 한다.

'내 스킬을 쓰지 못하게는 해도, 스탯으로 발달된 신체 능력이 막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티타누스 때도, 천상의 계단에서도 그건 같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스킬의 발현을 막는 것뿐이 아닐까.

만약 내 가설이 진짜라면 스킬에 의존하는 것보단 육체적 훈련에 시간을 쏟아야 할지 모른다.

게다가 여러 스킬을 얻은 이후.

난 전투에 있어서 내 신체를 적극 활용하지 않았다.

처음엔 두려워서.

이후엔 스킬에 의존해서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걸 완전하게 단련해야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살아남을 테니까.

살아남는다.

그것이 제1의 명제.

그다음은 살아남으며 쌓아온 내 힘을 잃지 않는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