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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삼키는 레비아탄 [1]

143화.

반나절 전.

균열 안에서도 해는 떴고, 밤은 걷혔다.

즉시 우리는 작전대로 행동했다.

작전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시작합니다."

우웅.

머리 위엔 초승달 헤일로가 나타나자마자 생겨나는 위압감과 함께 아마존은 화살 없는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하늘 위에 나타난 초승달에 시위가 당겨지더니 푸른빛의 물빛 화살이 나타나 쏘아졌다.

아마존은 아무 곳이나 향해 쐈다.

그녀의 앞은 바로 두꺼운 성벽이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그곳을 향해 쐈는데, 하늘의 초승달에서 발사된 화살은 바닷물의 표면 장막을 박살 내며 쏘아졌다.

쾅-!

놀라운 헤일로의 권능이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상황인지는 오직 아마존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몇 초, 몇 분을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숨죽였을 때.

"맞았어요!"

아마존의 외침과 동시에.

쿠궁-

"뭐야 이 진동."

"성벽이 흔들립니다!"

"아니, 땅이 흔들리는 거야!"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고작이라고 할 정도로 진동은 작았을지언정, 승리로 향하고 있는 큰 박동임은 다르지 않았다.

"아마존!"

"예!"

지금부터였다. 지금부터 아마존의 역할이 더욱 막중했다.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

놈이 못 참고 발광할 때까지 몇 번이고 화살을 쏘아야 했으니까.

아마존 다시 화살을 준비할 때.

네피림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우린 우리대로 할 일이 있었으니까.

"빨리, 빨리! 주변 놈들을 최대한 정리해야 한다고!"

"미다스의 손이 갑니다~"

"최대한 넓게! 넓게 만들어!"

"알고 있다고요!"

성벽의 문이 열렸다.

곧장 뛰쳐나온 네피림들은 작게나마 성 밑에 남아 있는 땅을 향해 각자의 기프트와 스킬들을 사용했다.

주로 바닥을 만들 수 있는 네피림들이 먼저 달려 나왔다.

"빨리!"

"갑니다!"

촤악-!

천천히 신중하게 쏘아지는 아마존의 달의 심판과 함께.

온갖 네피림들이 바닥을 만들기 시작했다.

흙을 만들어내는 사람, 바위로 만들어진 벽을 만드는 자도 있고, 시멘트나 금속을 이용하는 자도 있었다.

곧 다가올 전쟁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발판이 존재해야 했다.

한 사람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이 모여 얽히고설키게 될 땅.

풀과 시멘트, 흙과 나무랑 금속들이 뒤섞인 땅은 놈들의 공격에도 쉽사리 부서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물론, 나 또한 가만있지 않았다.

"데몬시드!"

"덩굴 위에 각자의 기프트를 깔아."

벨로나의 가시덩굴 또한, 성의 일대에 드리우며 그들이 만들 땅을 이룰 기틀을 만들어주었다.

어쨌든 간에 땅이 있어야 내 성역도 펼칠 수가 있다.

물론, 방해가 없지는 않았다.

"서펜트다!!"

"고래, 고래! 고래다!!"

"크라켄! 크라켄이다!!"

놈들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이제까지의 탐색전은 집어치우고 마구잡이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적들이 몰려옵니다! 수는. 족히 일천! 바다 위로 보이는 그림자만 일천입니다!"

관찰자를 비롯한 관찰 비슷한 기프트를 가진 이들이 핸드 카운터기를 이용하거나 스킬들을 써서 숫자를 세고 있었다.

바다 위로 보이는 그림자만 일천.

그렇다면 그 수심 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숫자가 있을지 알 수 없다.

"원거리 부대 준비!!"

소서리스와 아마존 부대가 성벽 위로 나타나 활을 겨누고 책을 펼쳐 주문을 영창 하기 시작했다.

바다가 출렁인다.

놈들의 헤엄쳐 오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파도가 그림자를 만들었다.

"쏴!!"

성벽을 덮치는 파도와 함께.

온갖 마법과 화살. 또는 스킬들이 모조리 쏟아졌다.

펑-! 펑펑!!

마법에 따라 부서지고, 그 틈을 타 돌진하던 서펜트들이 화살에 맞거나 작살에 맞아 쓰러진다.

삽시에 바닷물이 붉게 변하고 만들어둔 땅이 무너지며 파도에 휩쓸려간 네피림들이 물고기 밥이 됐다.

"큰 놈들은 내게 맡기라고 해!!"

큰 소리로 소리쳤다.

지팡이를 들어 벼락을 부르고 땅 밑에서는 성역을 펼쳤다.

벨로나의 가시덩굴이 사방에서 몰아치는 거대종들을 옭아매고 창자를 꿰뚫어 무력화 시킨다.

조금이라도 땅을 넓혔기에, 어쨌든 간에 내 헤일로의 활동 반경이 넓어진 것도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작전대로.

나는 다가오는 놈들을 상대로 벨로나의 가시덩굴로 모조리 진압한다.

일종의 디펜스.

오히려 이 정도는 쉽다.

"으랴아아아아아앗!!"

쩍!

-끼이이이이이이이이!!

바바리안이 내 가시덩굴을 타고 뛰어올라 서펜트의 눈을 쪼갰다.

거대한 눈알에서 뽑아낸 도끼와 함께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바바리안의 도끼와 함께.

"가자!"

우르르 쏟아져 나와 서펜트에게 매달려 칼을 찌르는 네피림들.

"저도 거들겠습니다!"

다섯 손가락에서 빛의 고리를 뽑아내 날리기 시작한 빛고리.

그가 날린 빛의 고리는 단번에 바닷속에 숨어든 악마들을 절단한다.

"또 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상황을 전파하는 글로리안.

"비켜!"

군단장 레이드는 싫다며 트라움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던 혼나비.

그녀의 나비들이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며 바닷속 악마들을 교란시킨다.

그들 뿐만이 아니다.

"아까워라."

보석을 던지며 터트리는 보석별이란 랭커와 악마에게서 피어난 푸른 백합을 뜯어 꿀을 마시는 자도 있었다.

그 밖에도, 그림자검, 드루이드, 불꽃해머, 혼나비, 용권, 거대한 손, 고스트 등등.

수많은 자들이 활약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강철!"

아마존 다음으로 활약하고 있는 것은 바로 강철과 레아였다.

"붉은 여왕의 붉은 비가 당신을 치료하고 자원을 회복시킵니다."

붉은 여왕의 관이란 헤일로를 지닌 레아의 성역.

붉은 비.

아군을 치료하고, 적을 병들게 하는 성역이 펼쳐짐과 동시에.

"강철 군주의 기사도가 아군의 모든 능력치를 30% 상승시킵니다."

떨어지는 붉은 비.

그리고 어느새 곳곳에 자리한 강철 군주의 검이 빠르게 격동했다.

이내 자리한 검을 잡는 강철 기사들이 나타났다.

검을 잡은 강철 기사들은 놀라운 공격력과 힘을 보여주며 무차별적으로 악마들을 섬멸하기 시작했다.

그 수가 족히 육백하고도 육십.

어마어마한 숫자의 강철 기사들을 이끄는 강철 군주는 단번에 몰려드는 바다 괴물들을 도륙했다.

"강철 기사들과 아군들 전부를 버프 시키는 성역인가."

훌륭한 성역이다.

강철 기사들의 스펙 자체도 몇 배로 높아졌다.

바바리안이 육백 명 정도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자체적인 강화.

그리고 숫자와 뛰어난 결속력.

강철 군주다운 힘이다.

'이런 거라면 그냥 말해줬어도 됐을 텐데 이상하군.'

특정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하던데, 그럼 지금 이것보다 더 뛰어난 능력이 남아 있다는 건가.

아마도 내 헤일로와 마찬가지로 조건을 만족해야 열리는 기술이 있는 모양이었다.

"기대되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기대됐다.

이제야 비로소.

어깨가 조금 가벼워졌다.

"화성님!"

"레아, 가볼까."

"네!"

벨로나의 가시덩굴은 애초에 내가 직접 조종할 이유가 없다.

위치 설정만 해주고 목표만 지정해두면 알아서 모든 적을 섬멸할 거다.

"뇌령."

그렇다면 나 또한 가만히 앉아서 구경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이것이 데스 서펜트다!"

와이번을 타고 돌아다니며 서펜트들을 사령술로 부활시키는 브란스를 보며 나 또한 창을 꼬나쥐었다.

"운동 좀 해볼까."

탓!

팡-!

도약과 동시에 투창을 날렸다.

가볍게, 트롤 작살을 날리자 단박에 꿰뚫어지는 서펜트와 함께. 작살의 표식으로 전이.

촤자작-!

라이트닝 노바가 꽃처럼 붉게 퍼지며 수면 위에 올라와 있던 놈들을 한꺼번에 감전시킨다.

"서펜트를 처치하셨습니다!"

"서펜트를 처치하셨습니다!"

"서펜트를 처치하셨습니다!"

"서펜트를 처치하셨습니다!"

"서펜트를 처치하셨습니다!"

레아 또한 쌍검을 꺼내 맘껏 휘두르는 중이었다.

그녀의 검에는 핏빛의 기운이 서려 있었는데 핏물이 검날처럼 형상화되어 길이가 제멋대로 늘어나고 줄어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새로 얻은 기프트 스킬 '피의 칼날' 그리고 '피의 난무'였다.

적을 죽여서 나오는 피를 칼날로 만들고 그것으로 난무를 추며 순식간에 적을 도륙하는 무자비한 스킬이다.

평소의 귀여운 모습과는 다르게 악마들을 상대할 때면 참 무섭기 그지없다.

그렇다 보니 한국 네피림들에게는 그녀가 피의 공주, 또는 혈귀라는 이상한 별명으로 불린다고 한다.

"그렇게 불릴 만 하네."

나름대로 이해가 가는 별명이다.

스걱.

쿠우웅-!

레아 때문에 잠깐 한눈팔았더니 청새치처럼 주둥이가 창처럼 뾰족한 녀석이 내 옆구리를 찔러 들어왔다.

-큐

하지만 내 옷깃에 숨어 있던 엘리스가 보이지 않는 거미줄로 녀석을 동강 내 주었다.

[주인 - 데몬시드]

『거짓된 여왕의 딸』

「모략의 거미줄 Lv.3」

「생명력」 – 520/520 ▲

「마나」 - 400/400 ▲

「능력치」

근력 – 17 ▲

민첩 – 24 ▲

건강 – 26 ▲

마력 - 20 ▲

강골 - 13 ▲

놀고 먹기만 해도 강해진 엘리스다.

엘리스는 레벨업을 할 때마다 투자 능력치가 5씩 있어서 전부 마력에 찍어줬다.

스킬은 따로 없다.

나와 있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이미 존재하는 권능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다른 스킬이 존재하지 않아도, 엘리스는 강하다.

보이지 않는 거미줄은 인간에게도, 악마에게도 치명적인 강도와 예기를 자랑하니까.

"다시 집중 좀 해볼까."

아마존은 여전히 활을 쏘고 있다.

점점 바닷속에 울리는 진동도 격해지고 있다.

서펜트들의 난리를 피워내는 것과는 무게감이 다른 진동이 이따금 잊을만하면 올라온다.

마치, 이 균열 안 전체가 울리는 듯한 고동처럼 들려오는 진동.

'작전명 레비아탄의 항문...'

아마존은 지금도 작전대로 제대로 수행 중이다. 아무리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악마라 해도 항문까지 단련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담 놈이 수면 위로 떠 오를 때까지 내가 할 일은 하나다.

휘리릭, 척.

최대한 힘을 아낀 채로 많은 수의 악마를 죽이는 것.

그것뿐이다.

콰자자자작!!

이따금 내려치는 벼락.

그리고 뇌령으로 바다 위로 떠 오르는 놈들을 구워내면 그만.

게다가 바닷물이라 할지라도.

"태워라."

내 공포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물속으로 숨어버리면 별 효과는 없지만, 수면 위로 떠 오르는 순간 바짝 말라 구워지는 건 당연지사.

물론 이것들로는 레비아탄에게 효과적인 수를 내지 못한다. 고작 놈의 병졸들을 죽이는 게 다다.

하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놈은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결국엔 무거운 엉덩이를 들썩이며 모습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바로 지금처럼.

"나왔다!"

"저게 레비아탄?"

"존나 커! 씨바아아아아알!"

중요한 건 바로 지금부터다.

놈의 등장과 동시에 해일처럼 높게 솟아오른 파도, 그 속에서 어마어마할 정도로 거대한 레비아탄의 거구.

놈의 몸뚱이가 하나의 섬처럼 보였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온몸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

거친 돌과 같은 피부와 흉터.

놈은 용과 같았고 악어와 흡사하기도 했으나 고래 같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관찰자!!"

놈의 약점을 찾아야 했다.

등장과 동시에 해일이 덮쳐온다.

하지만 관찰자는 끝끝내 보았다.

이내 파도에 쓸려나가게 될 것을 알면서도 찰나의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그저 눈으로 보고, 입으로 알려줬다.

"퇴화한 오른쪽 눈에서 일 미터 밑으로 이어진 상처 끝부분!!"

푸화아악-!

파도에 휩쓸려 나가는 관찰자의 외침과 함께 네피림들의 모든 무기가 그곳을 향해 집결했다.

그와 동시에.

"레비아탄이 자신의 진명을 드러냅니다!!"

[달 삼키는 레비아탄]

수식언을 드러낸 군단장 레비아탄의 권능과 함께.

달이라도 삼킬 듯 거대한 입을 쩌억 벌린 레비아탄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해 삼키는 베헤모스 [2]

144화.

자신이 만들어낸 바닷속에 떠 있는 바다 괴물들의 시체.

부서진 땅과 헤집어진 덩굴의 부산물들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블랙홀처럼 모든 걸 흡입하는 레비아탄의 모습은 해라도 삼킬 듯 무시무시했다.

진정으로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라 말할 수 있었다.

"강철!"

"데몬시드!"

척!!

빨려 들어가는 강철의 팔을 붙잡아 지지했다.

놈의 입안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문어의 입과 같았지만, 날카로운 이빨 수천 개가 돋아나 있다.

저곳으로 들어갔다간 뼈도 못 추릴 거란 건 한눈에 보면 알 수 있었다.

정말 흉악스러운 모양.

"꽉 잡아!"

클루트를 사용해 허공을 박차며 놈에게서 멀어지기로 했다.

팡-! 팡-!

강철 군주를 들쳐메고 허공을 박차고 있자니 파도에 휩쓸리거나 놈의 흡입력에 버티지 못하고 날아가는 네피림들이 보였다.

"제길!"

강철의 욕지거리와 감정이 전해졌다.

안타까움과 함께 분노가 차올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차례다. 저들 하나하나를 다 구하려 했다간 오히려 우리가 위험해진다.

'어쩔 수 없다.'

자위하며 점차 멀어지던 찰나.

파앙-!

하늘에서 화살이 쏘아졌다.

아마존의 화살이었다.

그녀의 눈으로 이어진 달의 심판이 레비아탄의 벌어진 입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탱-!

놈의 회색빛 입은 단단한 외피에 버금갈 정도로 단단했다.

입속이 전부 딱딱하고 날카로운 송곳 같은 이빨이 돋아난 탓이었다.

"데몬시드!"

클루트로 빠르게 수면을 박차고 허공을 박차며 나아가던 때.

돌연 강철 군주가 소리쳤다.

돌아보니 그녀는 내게 업힌 채로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기사의 검이 부러졌다."

이해 못 할 소리였다.

돌아보니 아직도 입을 처벌리고 있는 레비아탄으로 기사들이 돌격해 검을 찔러 넣었다.

놈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까지 말이다.

허나 검은 족족 부러졌다.

육백이 넘는 기사들의 검이 모조리 부러져 놈에게 먹혔을 때.

강철은 변화했다.

"기사의 충절."

레비아탄의 놀라운 흡입력이 지속되는 중에, 기사들의 부러진 검이 그녀에게로 흘러왔다.

조각조각으로 변한 검의 칼날은 서서히 모여들어 강철의 등 뒤로 향했다.

육백이 넘는 칼날.

그것은 이내 강철 군주를 이루는 여섯 장의 날개가 되어있었다.

그녀의 단단한 갑옷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에게는 강철의 칼날로 이루어진 여섯 장의 날개와 오직 단 한 자루의 검만이 자리했다.

모든 힘을 날개와 검으로 녹여냈다는 것처럼 말이다.

"강철 군주의 기사도 효과가 사라집니다."

모든 능력치를 버프 시켰던 강철의 성역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뿜어내는 위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해져 있었다.

'첫 번째는 성역, 다음은 자기 자신을 강화하는 효과인가.'

그녀의 헤일로.

강철의 관.

두 번째 모습은 강철의 천사를 보는 것만 같았다.

내 품에서 벗어난 강철은 곧장 레비아탄을 향해 돌격했다.

"빨라!"

고속비행.

레비아탄의 흡입력과 결합한 그녀의 비행 속도는 그야말로 섬광이라 할 정도였다.

자고로 속도란 곧 힘.

어마어마한 강철의 빛줄기가 하나의 일섬을 이루어낸다.

촤아아악-!!

엄청난 고속 이동에서도 그녀는 목표를 정확하게 포착했다.

최초에 관찰자가 말했던, 퇴화한 눈의 흉터 일 미터 아래.

관찰자가 관찰한 레비아탄의 약점.

그 부분을 정확하게.

"베었다?"

베어버렸다.

은빛의 일섬과 함께 튀어 오른 레비아탄의 붉은 피가 바다를 적셨다.

"미친."

"나도 헤일로 갖고 싶드아!!"

바바리안의 부러움 섞인 외침과 동시에 놈의 권능 또한 멈췄다.

강인한 흡입력이 멈추어 잠시나마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

그제야 놈의 상처가 제대로 보였다.

작은 섬 하나 급으로 큰 녀석에게서 피가 흘러나왔으나.

'얕아.'

놈의 이빨 하나보다 작은 강철 군주가 낸 생채기는 놈의 크기에 비하면 너무도 얕았다.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는 이르다.

놈에게 낸 상처 하나는 미약하나 이는 곧 레비아탄 공략의 시작일 뿐이니까.

"강철!!"

내 외침과 동시에 강철 군주의 검이 하늘 높이 향했다.

그러자 그녀의 여섯 개의 날개 중 넉 장이 칼날로 변해 레비아탄의 상처를 헤집어 파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강철 날개를 움직여 스스로의 검으로도 날아다니며 레비아탄을 상처 입혔다.

더욱 벌어진 상처에서는 진득한 핏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강철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날개의 칼날을 모아 검에 붙이더니 거대한 대검으로 만들어 놈의 상처에 꽂아 더욱 크게 베었다.

"흐아아아아아아!!"

드드드드드드득!

찔러넣은 상태로 수 미터를 더 베어버린 강철의 기개에 네피림들은 환호성까지 내질렀다.

"지렸다 강철!!"

"천사다! 강철 천사야!"

그 틈을 타 군대는 정비를 시행했고 레아는 그녀에게 집중적으로 버프를 보내며 원호했다.

아마존의 화살도 꽂히며 레비아탄에게 연속해서 디버프를 걸었다.

"레비아탄의 움직임이 둔화합니다."

"레비아탄의 신체가 약화합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

그곳에 내가 빠질 수는 없었다.

까득.

"미노타의 씨앗+4를 섭취합니다."

"몸이 버티질 못할 부하입니다!"

"당신의 단단한 뼈가 이를 버팁니다!"

"인간이 버텨내지 못할 부하에 체력이 13% 하락합니다!"

"아토믹시드가 4% 숙성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4 상승합니다!"

"미노타의 근력을 위주로 모든 신체 능력이 167% 상승합니다!"

"붉은 가시덩굴의 관이 활성화됩니다."

"모든 능력치와 회복력, 속성내성이 160% 상승합니다."

동시에 꺼내 든 것은 내 애창.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이었다.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 +7]

-그렘린 킹의 피와 뼈를 갈아 만든 적창.

〈더 강력한 관통〉

-추가 관통 피해 35% 증가.

〈치명적인 출혈〉

-추가 출혈 피해 60% 증가.

〈강력한 번개 피해〉

-번개 피해 30% 증가.

그간 모았던 모든 지옥석을 알레이슈로 바꿔 강화했다.

알레이슈는 강화 확률을 30% 올려줄 뿐이지만 +7강의 강화 성공 확률은 고작 4 퍼센트.

알레이슈를 써도 34퍼센트가 올라갈 뿐이다.

그럼 이걸 어떻게 강화했느냐.

그건 그레미나티란 광석에 있다.

지옥석 일만 개로 구매 가능한 그레미나티는 강화 실패 때에도 장비가 부서지지 않게 해준다.

내게 지옥석이란 무한.

무한의 동력으로 갈아 넣은 +7 강화 적창은 더욱 강력해진 무기로 탈바꿈되어 내 손에 감겼다.

거기에 온갖 스킬을 감싼다.

"투척+1을 활성화합니다."

"명중률과 관통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투왕의 살기가 창날에 스며듭니다. 관통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카탈린의 뇌신을 활성화합니다."

"이동속도가 +300% 증가합니다."

"번개 피해가 100% 증가합니다."

"무기에 뇌령이 깃듭니다."

"뇌령의 지능이 모두 소모됩니다."

"번개 피해가 300% 증가합니다."

"강처어어어어어얼!!"

모든 걸 담아 투창한다.

콰자자자자작-!!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소닉붐이 터져 나오며 일직선상의 붉은 꼬리를 흩날리며 날아간 적창은 정확하게 레비아탄의 피 분수가 터져 나온 상처로 꽂혔다.

-!!

일순 소리가 멎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 대규모 폭발과 함께 뒤늦게 후폭풍이 불어닥치며 그제야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삐이-!

일순 발생한 거대한 폭발에 이명이 터져 나왔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폭풍에 의해 눈을 뜨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하나는 또렷하게 보였다.

레비아탄의 눈 근처에 커다란 구멍 하나가 생긴 것을 말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시스템 창은 아직 고요하다.

놈은 살아있다.

'강철은?'

강철을 부르며 피하라 말했으나 여파에 휩쓸렸을 게 분명했다.

"멀쩡하네."

헤일로 덕분인지, 강철은 날개가 조금 그을렸을 뿐 멀쩡했다.

허공에 정지한 상태로 레비아탄의 상태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물론, 난 그녀처럼 놈의 상태를 지켜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작 이걸로 끝날 놈이 아니야.'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놈은 아직 멀쩡하다고.

몸에 구멍 좀 났다고 군단장은 죽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주춤하고 있을 때, 연달아 피해를 주는 게 맞다.

왼손에는 미노우스의 뿔창과 드레커니의 용살창을 꺼냈다.

시드로긴과 헤일로도 버프된 내 신체 능력은 무한하지 않다.

놈이 물 밖에 있을 때.

확실하게 승리의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여야 했다. 입 벌린 채로 그을려 새하얀 김을 토해내던 레비아탄의 거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관없다.

애초에 아마존이 레비아탄을 물 밖으로 꺼냈을 때부터.

"달 삼키는 레비아탄이..."

난 승리를 점칠 수밖에 없었다.

"판포비아가 달 삼키는 레비아탄을 공포로 물들입니다."

"레비아탄이 자신의 진명을 공포로 잊습니다."

"그의 신화적 배경이 공포의 효과를 절감시킵니다."

"지속시간이 감소합니다."

"판포비아의 지속시간까지 40초가 남았습니다."

"레비아탄의 권능이 사라집니다."

놈의 권능이 사라졌다는 말.

그 말인즉슨.

"바다가...!!"

"바다가 사라졌다!"

놈이 만들어낸 걸리적거리는 바다가 사라지고 땅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놈들의 전장인 동시에 생명수인 바다가 사라진 곳에서, 놈들은 절대로 우리 인간을 이길 수 없다.

"죽여어어어어!!"

단 40초.

하지만 물 밖에 나온 물고기들을 사냥하는 일엔 많은 힘이 들지 않았다.

"벨로나의 굴레가 활성화됩니다."

건물 크기만큼 굵직한 벨로나의 가시덩굴 수십 개가 동시에 레비아탄을 옭아맸다.

놈의 숨통을 조임과 동시에 내 창은 수 초 동안 레비아탄의 몸 곳곳에 박혀 들었다.

나 뿐만이 아니다.

나와 강철을 비롯한 수많은 네피림들이 떼를 지어 총공격을 퍼부었다.

"헤일로 내놔 이새끼야아!"

"난 잉걸불이라도!"

"죽어어어어!"

각각의 염원을 담은 회심의 일격이 모조리 레비아탄에게 향했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핏물.

일어나는 폭발.

놈의 살점과 함께 비산하는 고깃덩이가 사방팔방으로 흩뿌려졌다.

40초.

판포비아가 허락하는 40초 동안 놈은 꿈쩍도 못하고 이백만에 가까운 네피림이 쏟아내는 공격을 받아냈다.

끝내 놈의 거대한 입에서도 역류한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을 때.

이변은 그때 발생했다.

놈은 피를 토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피를 토하고, 토하고 또 토하더니 어느 순간.

"뭐야 씨발!"

용암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어, 어어?"

용암을 토해낸 순간.

놈의 형태가 바뀌었다.

머리에서는 뿔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찢긴 살점에서는 단단한 다리가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머리에서부터 등까지는 굵은 불타는 갈기가 생겨났고 그것은 꼬리까지 이어져 날카로운 뼈로 변모했다.

단단한 외피는 각각의 근육이 선명히 드러나는 다리들로 바뀌었으며 퇴화하였다 하던 눈은 선명하게 붉은 악마의 것으로 바뀌었다.

"판포비아의 효과가 끝났습니다."

"레비아탄의 다른 이면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해 삼키는 베헤모스]

브란스는 말했다.

성서에 이르기를, 신이 떼어낸 살점이 레비아탄이 되었고 그분의 피가 바다를 이루었나니.

그와 짝을 이루는 자가 대지에 있으니 놈이 바로 베헤모스다.

"레비아탄이 바다라면."

베헤모스는 땅.

허나 놈은 땅으로만 지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

강철이 탄식을 뱉었다.

베헤모스.

놈은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땅을 굴렀다. 놈의 등 뒤로 돌조각이 모여들더니 용암이 폭발했다.

그리고 이내.

허공에 모여든 돌조각은 불타고 용암이 흘러내리며 떨어졌다.

하늘을 불태우는 거대한 혜성 일곱 개가 우릴 향해 떨어져 내렸다.

마치 우리가 품은 승리의 희망을 처참히 불태워 떨어뜨리는 것처럼.

태양을 떨어뜨렸다.

별 삼키는 티타누스 [3]

145화.

하늘에서 떨어지는 해.

아니, 운석을 보며 난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한눈에 봐도 거대한 부피.

태양 수십 개가 동시에 떨어지고 있는 듯한 감각이다. 벌써 살갗은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바다가 사라진 대지는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본 순간 떠오르는 생각은, 두 가지.

'막을 수 있나. 아니면 도망쳐야 하나?'

이 두 가지였다.

그러나 막는 것도, 달아나는 것도 최선은 아니다.

전자는 막다가 타 죽을 확률이 높았으며 후자로는 나 혼자만 살아남고 여기 있는 이백만 명 대부분이 죽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판포비아를 사용합니다."

"베헤모스가 공포에 물듭니다."

"자신의 진명을 잊습니다."

"한번 겪은 공포입니다."

"일부 저항합니다."

"판포비아 남은 시간 20초"

"건강 능력치가 10% 소멸합니다."

"건강-7 소멸"

놈이 만들어냈던 바다는 판포비아로 사라졌지만, 현 시각 떨어지는 불덩어리는 그대로였다.

카오스 게이트에 존재하는 땅으로 만들고 용암을 쑤셔 넣은 놈의 메테오는 권능을 잊었다 한들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젠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이나마 위력을 줄여주는 일뿐.

카탈린의 기프트 스킬을 총동원해서 벼락을 만든다.

카탈린의 벼락과 뇌격, 뇌신을 사용하고 뇌령까지 불러내 메테오를 하늘에서 저격한다.

허나 그걸로도 부족해 보인다.

"라이트닝 오브."

기시기시의 지팡이에 내장된 스킬을 사용하며 벼락에 힘을 담는다.

꽈광-!!

벼락이 내려친다.

하늘을 온통 붉게 만든 벼락이 앙상한 손길을 뻗듯 베헤모스의 메테오로 적격했다.

콰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밤하늘의 불꽃놀이처럼 메테오가 터졌다.

비산하는 불덩어리. 밤에 야경으로 보았다면 아름다웠을 녀석이나 지금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중앙으로 직격하던 메테오 네 개를 박살 냈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없다.

사이드의 메테오는 내버려 두고 부서진 메테오의 파편을 막아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 하나쯤은 녹여낼 열기와 질량을 가졌으니.

"벨로나!"

내 마나를 뭉텅이로 집어 먹은 벨로나가 땅속에서 가시덩굴을 꺼냈다.

그 규모는 차원석을 보호 중인 성 전체를 덮을 만큼의 크기.

두께는 사람 열 명쯤이 양팔을 벌려 둘러서야 할 정도의 두께.

'놈의 목적은 우리들의 목숨만이 아니다.'

포효하며 속내를 감추고 있지만, 놈은 정확하게 자신이 해야 할 목적을 알고 있다.

바로 차원석을 부수는 것.

카오스 게이트란 지키는 것이다.

균열을 복구하기 위해 소모된 차원석의 힘을 악마들의 피로 일구고, 그들의 침공을 막아낸다.

이른바 디펜스 게임.

그렇다면 놈들의 목적도 같다.

성을 부수는 것.

우린 항상 그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주르륵.

과도한 마나 사용으로 몸에 과부하가 오기 시작하고 있다.

"마나가 고갈되었습니다!"

곧장 품에서 브릭스를 꺼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건강이 2 상승합니다!"

"한 시간 동안 건강함이 5 상승합니다."

"생명력과 마나가 100% 빠른 속도로 회복됩니다!"

헤일로로 인해 안 그래도 빠르던 회복력이 더욱 빨라졌다.

차오르는 생명력과 마나를 느끼며 다시 한번 벨로나를 두껍게 감싼다.

"위험! 위험! 더 이상의 마나 사용은 생명을 위태롭게 합니다!"

허나 차오르는 것보다 내가 소모하고 있는 마나가 더욱 많다.

적을 옭아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벨로나의 굴레의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회복력이 더디다.

그러나 괜찮다.

난 혼자가 아니니까.

"화성님!"

양손을 펼치고 일대를 가시덩굴로 막아 세운 내 등을 레아가 감쌌다.

그녀에게서 퍼지는 뜨거운 열기와 온후한 공기가 입과 코로 흘러내리는 피를 점차 멎게 했다.

"피의 축복이 내려집니다."

"생명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회복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한결 낫다.

그러나 안심할 순 없다.

"온다."

느껴진다.

벨로나의 감정이었다.

헤일로로 강화된 벨로나의 가시덩굴에서 약간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무한한 가시덩굴인 그녀에게도 쏟아지는 불덩어리인 메테오는 무섭기 짝이 없는 것이리라.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나와 이들을 모두 죽일 순 없다.

"충격에 대비해라!!"

"모든 실드 스킬을 써!"

"데몬시드를 도와! 방벽을 치라고!"

"뭉쳐! 충격에 대비해! 떨어진다!!"

"에너지 쉴드가 발동됩니다."

"에너지 쉴드가 카탈린의 감전에 동화됩니다."

마지막으로 푸르푸르에게서 다시 빼앗은 은반지에 내장된 쉴드까지 키자.

콰아아아아아앙-!!

충격이 시작됐다.

첫 번째 충격은 버틸 만 했다.

두껍게 쌓아진 벨로나의 가시덩굴이 부서진 메테오의 돌덩어리들을 충분하게도 막아냈다.

그러나 진짜는 그다음이었다.

내 벼락이 부수지 못했던 메테오.

양옆으로 떨어진 메테오 셋.

그것이 주는 충격은 지층이 뒤흔들렸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꺄아아악!"

"붙잡아! 붙잡으라고!"

"끄아악!"

가시덩굴로 막았음에도 피해가 엄청났다.

지면에 직격함과 동시에 터지며 날아온 파편은 벨로나의 가시덩굴로 모조리 찢기고 태워졌다.

그 틈으로 날아든 파편 몇 개에 모여있는 네피림들 수십이 순식간에 통구이가 되어 죽었다.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쉴드나 방벽도 큰 소용이 없었다.

주르륵.

피를 흘리며 벨로나를 유지함과 동시에 레인스톰과 블리자드를 사용해 주변의 열기를 식혔다.

털썩.

"화성님!"

이번엔 꽤 무리했다.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시드로긴의 효과도 끝난 터라 부작용으로 능력치가 조금 낮아졌다.

레아의 회복 능력으로 생명엔 지장이 없지만 마나 탈진이 주요인이었다.

마력을 그렇게 몰방해도 마나는 쓰고 쓰고 또 써도 부족했다.

'아니, 메테오를 막아냈는데 이 정도 피해인 게 다행인 거지.'

거두어진 벨로나와 함께.

레아에게 안긴 채로 주변의 풍경을 확인했다.

"..."

참상이라 할 정도로 모든 것이 불타고 박살 난 풍경.

벨로나의 가시덩굴도 모조리 불타오르고 있는 채였다.

만약 조금만 늦었다면, 그래서 가시덩굴의 방벽이 얇았다면 메테오의 파편은 내 머리로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판포비아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메테오는 그 웅장한 모습과 달리, 우리에게 많은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놈은.

군단장 베헤모스는 아직 살아있다.

사방이 불타오르는 지옥에서.

베헤모스는 굳건히 서서 또렷한 시선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인기가 많은 것도, 문제라니까."

아이고, 아이구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전신이 삐걱거린다.

시드로긴도, 헤일로도 사라지자 축적된 데미지도 올라오는 기분.

온몸이 근육통,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쓰러질 수 없었다.

그러나 내색할 순 없었다.

"우, 우리 산 건가?"

"이제 금방 죽을지도."

절망 같은 상황.

나까지 힘을 빼고 있는다면, 내 뒤에 있는 자들은 아무 희망도 품지 못할 테니까. 푸 확. 내장이 진탕됐는지 자꾸만 피가 역류한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사실 안 괜찮다.

온몸이 아프다. 안 아픈 곳이 없다.

그러나 버텨야 한다.

안 버티면 죽을 테니까.

'자, 이제 어쩐담.'

그렇게 공격했는데도 놈의 상태는 멀쩡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멀쩡해졌다.

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강력한 열기를 뿜어내며 주변을 녹여내고 용암을 흐르게 만든다.

레비아탄과는 달리, 놈은 불이나 용암과 관련된 놈인 듯했다.

크기는 레비아탄보다는 작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작은 건 아니었다.

월드컵 경기장에 넣으면 딱 알맞을 것 같은 크기랄까.

전체적으로 굳건한 네발을 지탱하고 있고 앞발과 뒷발은 용과 비슷한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뿔도 있는 걸 보면 소와 비슷하지만, 또 얼굴은 용과 같고 뾰족한 갈기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쓸데없이 용맹한 모습을 보노라면 적이지만 멋있긴 하다.

레비아탄이 심해 괴물처럼 생겼다면 베헤모스는 근육이 탄탄한 사내처럼 멋들어진 모습이었다.

'또 메테오를 쓰려나.'

한 번 더 쓰면 곤란하다.

이번엔 못 막을 테니까.

시간이 필요하다.

체력과 마나를 회복할 시간이.

그때였다.

"으랴아아아아아앗!"

바바리안이 달려 나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네피림들도 전부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가자! 어차피 천년, 만년 살 것도 아니잖아! 지금 저 새끼 죽이면 우리도 헤일로 가질 수 있다고!"

"와아아아아!"

피식.

"미친놈들."

죽으러 가는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저들도 안다.

죽을 각오로 싸워야 한다는 걸.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는 걸 알고 있는 거다.

내 상태를 누구보다 빨리 눈치채고 뛰쳐나간 바바리안을 선두로.

네피림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어차피 다른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됐으니 상관없어.'

바다가 사라졌다.

바다 괴물들이 사라졌으니 네피림들도 다른 곳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베헤모스만 신경 쓰면 됐다.

쿠웅-!!

놈이 발을 굴렀다.

그러자 땅이 울리고 찍혀진 지면이 뒤틀리며 거대한 바위들이 튀어 나가 네피림들을 공격했다.

동시에 입으로는 불을 뿜으며 다시 한번 발을 구르니 용암이 뿌려졌다.

어쨌거나 시간을 벌었다.

바바리안을 선두로 강철 군주 또한 날개를 펼치며 뛰쳐나갔다.

콰앙-!!

강철의 검이 베헤모스의 옆구리를 베었다.

섬광처럼 베어진 일격이었으나 이번엔 피가 뿌려지는 게 아니라 놈의 단단한 외피가 벗겨졌다.

가죽처럼 보였던 것이 돌처럼 단단한 무언가였다.

그 속엔 용암이 들끓었다.

쾅-!

놈이 황소처럼 돌진하며 거대한 뿔로 지면을 긁었다.

지면과 함께 날려진 네피림들이 일제히 바닥에 처박히는 순간.

바바리안이 비산하는 돌조각을 밟으며 겁 없이 전진했다.

목적지는 베헤모스의 뿔.

거대한 뿔에 착지한 순간, 바바리안은 뒤도 보지 않고 뛰었다.

하늘로 향한 뿔과 그 아래의 머리로 이어진 직선. 그곳에서 바바리안은 달렸고 강철은 주위를 돌며 베헤모스의 시선을 끌었다.

미끄러지듯 달린 바바리안의 목적지는 바로 놈의 코.

"확실하지? 안경!!"

안경을 치켜올린 관찰자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검을 들었다.

"당연하지! 죽여!"

"조상이시여!"

거대 도끼를 꺼내든 바바리안이 베헤모스의 코를 냅다 찍었다.

쾅-!

곁에 나타난 야만 전사의 선조 둘이 나타나 그와 함께 도끼를 찍었다.

푸확-!!

베헤모스의 약점은 코였다.

시꺼먼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끄어어어어!

[나머지 인원들은 왼쪽 발목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강철은 시야가 헝클어진 오른쪽 눈을 공격!]

마구잡이로 뛰어다니며 확성기로 지시를 내리는 관찰자.

레아는 다시 한번 이들을 위해 붉은 비를 내렸고 아마존도 성벽에 서서 놈의 눈에 표식을 새겼다.

푸른 초승달에서 쏘아진 화살.

강철 군주의 강철 칼날.

그리고 빛고리를 비롯한 원거리 저격수들의 공격에 베헤모스의 눈에서 검은 피가 터져 나왔다.

오른쪽 눈과 코에서 피를 터트린 베헤모스가 쓰러지려다 간신히 거대한 몸집을 지탱하고 땅을 구른다.

콰아앙-!!

다시 한번 놈의 등 뒤로 부서진 땅의 파편들이 달처럼 뭉쳤다.

그 수는 어림잡아도 수십 개.

놈의 하늘 위로 쏘아 올려 떨어뜨릴 태양.

메테오였다.

"안돼!"

"막아!"

또 한 번의 총공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베헤모스는 멈추지 않는다.

때리든 말든 힘을 집중하고 자신의 권능을 힘껏 뽐낸다.

거대한 입을 벌려 심신을 뒤흔들 포효를 내지르며 하늘 위에 태양을 떠올린다.

"판포비아."

꾸웅-!!

허나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데몬시드!!"

구체로 모여지던 돌들이 다시금 땅으로 떨어진다.

환희에 찬 바바리안과 네피림들의 시선이 날 향한다.

"벨로나."

쿠구구구구구-!!

회색의 가시덩굴이 베헤모스를 감싼다.

허나 이내 뜨겁게 달아오르는 베헤모스의 몸체가 벨로나의 가시덩굴을 금세 태워버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벨로나는 무한이야."

꿀꺽.

삼켜보는 브릭스와 함께.

벨로나의 가시덩굴도 무한하게 땅속에서 자라나 놈을 옭아맨다.

벨로나의 가시는 놈의 갑옷 같은 외피를 뚫어내고 뜨거운 용암이 흘러나오며 태워진다.

벨로나는 불에 약하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벨로나의 굴레는 관통력과 번개 피해력이 붙어 있다.

그 말인즉슨.

가시덩굴이 자체적으로 번개 피해를 자아낸다는 소리.

"벼락."

꽈광-!!

벨로나에 옭아 매여진 채로 베헤모스가 벼락에 직격당했다.

놈의 멋들어진 갈기가 터져나가고 등에 벼락의 상흔이 새겨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벨로나는 놈을 꽉 붙들어 매고 있다.

-데몬시드. 악을 먹고 사는 인간이여! 네가 우리와 다를 게 무엇이냐. 너의 행동과 그릇됨으로 우릴 단죄할 자격이 있다고 보는가!

"프로비던스."

"악마의 속삭임을 저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음험한 현혹을 튕겨냅니다!"

퍼억!

프로비던스가 놈의 현혹을 튕겨냈다. 돌연 가슴 부위가 터져나갔다.

마나가 뭉텅이로 사라지긴 했지만,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벼락과 뇌령으로도 완전하게 부수지 못했던 놈의 외피를 박살 냈으니 말이다.

한 움큼 피를 토해낸 베헤모스는 다시 울부짖었다.

쾅! 쾅!

마치 투우처럼 발작하듯 점프하며 날 향해 질주한다.

피하는 건 간단하다.

그러나 내 뒤엔 사람들과 차원석을 지키는 성이 존재한다.

이대로 피한다면 저 육중한 몸으로 모든 걸 짓밟고 지나갈 게 뻔했다.

딱히 피할 생각도 없다.

이미 조건은 놈의 피로 충족됐으니.

"헤일로가 붉게 물들었습니다."

"붉은 가시덩굴의 관이 완연한 피로 물들었습니다!"

"적의 피를 생명력과 마나로 전환합니다."

"모든 능력치와 속성력이 200% 증가합니다. 모든 스킬이 강화됩니다."

드르르륵!

푹! 푹! 푹! 푹! 푹! 푹!!

한층 더 강화된 벨로나의 가시덩굴이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땅 밑에서 창처럼 솟구친 벨로나가 베헤모스의 거체를 꿰뚫었다.

하나, 둘. 셋을 지나 여섯에서 열개가 되었을 때.

쿠궁-!

베헤모스의 발걸음이 멈췄다.

열 두 개가 꽂히자 무릎을 꿇었고 스물이 넘었을 때 놈이 쓰러졌다.

쿠구구궁.

거대한 모래 먼지를 만들어내며 코앞에서 쓰러지는 베헤모스였으나 방심하지 않았다.

"베헤모스를 공포로 물들입니다."

"지속시간 10초"

"근력이 10% 소멸합니다."

"근력 -7 소모."

공포에 거의 면역이 되었다시피 했는지 이제는 10초밖에 되지 않았지만, 놈을 쓰러뜨리는 데 이것이면 충분했다.

-공포의 축복을 받는 인간아.

"프로비던스."

곧장 프로비던스를 사용해 반사 데미지를 노렸으나 놈은 아무 데미지도 입지 않았다.

저건 현혹이 깃든 말이 아니었다.

-너는 공포의 아들이 될 셈이냐.

"..."

-공포는 곧... 널 잡아먹을 거다.

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으니까.

-그러나 널 먹는다면 그분의 편애는 나를 향하겠지.

이해하지 못 할 말들과 함께.

"판포비아의 힘이 사라집니다."

벨로나의 가시덩굴에 옭아 매여져 있던 베헤모스의 모습이 또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늦었다.

첨벙. 바닥은 어느새 바닷물로 바뀌어 있었다.

[별 삼키는 티타누스]

놈의 이름이 또 바뀌었다.

이름은 티타누스.

반투명한 몸체엔 별빛이 가득하고 단단한 육체는 달팽이처럼 연약하고 젤리처럼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덟 개로 찢어져 벌어진 입은 우주마저 삼킬 듯 밤하늘처럼 깜깜했다.

땅은 레비아탄의 바다가.

하늘엔 베헤모스의 태양을 대신한 별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널 먹고 내가 공포가 되겠다.

"티타누스의 저주가 당신을 겁박합니다. 움직일 수 없습니다!"

"능력이 봉인 당합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첨벙, 놈이 다시금 만들어낸 바다.

아니, 우주 속에서 난 움직일 수도, 헤엄칠 수도 없었다. 별빛으로 가득한 우주에서 내 힘은 봉인 당한 것처럼 그 어떤 것도 써지지 않았다.

"데몬시드!!"

그 상태 그대로.

날 감싸 안는 강철 군주와 함께, 별이 만연한 괴물에게 먹히고 말았다.

시드네스 [1]

146화.

누구나 밤하늘을 올려다본 경험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현실의 삭막함에서 벗어나 우주란 무한한 공간에 대해 막연한 상상력을 펼치고는 한다.

나 또한 그랬다.

다른 어린아이들과 달리.

보육원의 아이들은 따스한 저녁밥을 먹고 부모가 마련한 화목한 가정과 보일러 나오는 따뜻한 집.

그리고 온수와 각종 TV와 컴퓨터가 있는 오락기기가 있는 일반 가정과 달리 보육원 아이들은 저녁을 먹으면 따로 할 일이 없다.

그들에겐 당연한 게.

내게는, 우리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이따금 별을 봤다.

반짝이는 별을 보며 책에서 본 내용들을 말하곤 했다.

별자리에 관한 이야기는 심심해서 할 게 별 보는 거 말곤 없었기에 자연스레 찾아보게 된 귀결이었다.

그렇다.

내 어린 시절의 한켠을 차지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은 환경오염으로 쉽게 찾아볼 수 없었지만.

'신기하군.'

여기서는 별을 찾아볼 수 있었다.

티타누스에게 먹히자 상상하던 뱃속이 아닌 우주에 떠다니게 됐다.

무중력 공간이라는 막연하게 알던 지식을 실제로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정신을 잃은 강철 군주와 함께 말이다.

"강철, 일어나라."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몇 번이고 일어나라 소리쳤으나 일어나질 않는다.

충격으로 정신을 완전히 잃었는지 나한테 안긴 상태 그대로다.

'좋지 않네.'

나름대로 절경인 풍경과 달리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티타누스의 뱃속이라 예상되는 곳에는 꽤 많은 우주 쓰레기들이 존재했다. 놈이 먹어 치운 것들이 한데 뭉쳐 곳곳을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의 집이나 성, 기괴한 건축물들과 산 하나까지도 통째로 먹었는지 둥둥 떠다녔다.

물론 그것들이 위협적이란 소리는 아니었다.

지형과 지물이 공존하면서도 그 바탕에는 수많은 생명체였던 것들이 존재했다. 말라비틀어진 인간.

또는 돌처럼 변한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든 괴물.

뱃속에 들어온 생명체가 어찌 되었는지 단번에 느낄 수 있는 사체들.

그리고 정말 상황이 좋지 않다고 느껴지게 만든 부분은 두 가지다.

첫째는.

"티타누스의 뱃속입니다."

"이곳의 환경은 살아 있는 것의 생기를 빼앗아 갑니다."

"생명력과 마나를 빼앗깁니다."

이곳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생명력과 마나가 사라진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발랑캬르』

사마귀와 바퀴벌레를 합쳐놓은 것처럼 생긴 거대 벌레라 날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있다.

부서진 것들은 티타누스처럼 입이 쩌적 벌어져 삼켰는데 아마도 저놈이 티타누스의 뱃속 청소부 역할을 하는 놈이 아닐까 싶었다.

가만히 있어도 생기가 빨리고, 그렇다고 움직이자니 군단장 뱃속에 자리 잡은 청소부가 걸린다.

웬만하면 그냥 무시하고 뱃속에서 난리를 쳐댔겠으나 그럴 엄두가 안 난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게다가 저 벌레.

'보통 놈이 아니야.'

이곳에서는 내 힘도 동결된 듯 움직이지 않았고 스킬도 써지지 않았다.

그러니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뿜어내는 청소부라도 쉽사리 무시하기엔 어려웠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

그 말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기프트 스킬도, 일반 스킬도 사용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헤일로는? 머리 위에 가시덩굴의 관이 생겼다.

하지만 이내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미증유의 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티타누스의 뱃속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기본적인 능력치랑 아이템 꺼내기는 가능해."

인벤토리를 사용할 수 있다.

능력치 또한 마찬가지다.

전반적인 스킬과 권능이 막혔을 뿐.

"공포의 불은..."

안된다.

신의 선물이라는 기프트.

마력으로 빚은 마법도, 천사의 힘이 담긴 헤일로와 악마의 수식언인 권능조차 모든 게 불가했다.

장비에 내장된 스킬도 불발.

허나 고유효과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껴진다.

물론 미노우스의 뿔창처럼 고유 스킬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유효과.

관통이나 출혈 추가피해는 그대로 유지되는 것으로 보이니 이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가만히 있어도 힘이 빠지는 상황에 전투까지 해서는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이지만.

'놈이 오고 있다.'

기다란 더듬이 두 개를 가진 사마귀인지 바퀴벌레인지 모를 놈이 다가오고 있다.

아마도 저걸로 살아있는 생명체를 감지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어쨌거나 놈은 오고 있다.

작은 바위에 몸을 숨기고 있기는 하나 곧 발각되겠지.

결국 싸워야 한다.

도망치기도 애매하다.

강철이 깨어나지 않고 있다.

헤일로도 없는 강철은 갑옷도 없어 움직이기 편한 옷차림이다.

크롭 티와 반바지. 천으로 된 보호구와 붕대를 감은 손과 발이다.

그마저도 찢기고 베어져 옷이라고 볼 수도 없었고 헤일로와 날개마저 사라져 무방비하기 짝이 없었다.

저 상태에서는 전투의 여파에 휘말려 다치기도 십상이니 내가 나서야 했다.

큰 도움은 되지 않았더라도, 마지막에 날 구하러 물불 가리지 않았던 마음에 보답은 해야 했으니까.

"카이삭스의 창술도 발휘되지 못하지만..."

휘리릭, 척.

수개월간 손발처럼 썼던 창이다.

벌레 한 마리 못 막아서야 랭킹 1위의 이름이 운다.

'미믹 때의 감각도 있으니까.'

그때의 감각은 아직도 내 혀끝에, 아니 손끝에 남아 있다.

그날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창술을 연마했다. 하루를 거르면 그때의 감각이 사라질까 전전긍긍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을 창을 찔렀다.

악마를 토벌하지 않은 날은 많아도 창을 놓은 날은 없다.

미믹의 감각은 내 속에서 항상 간질간질한 무언가라 조금만 연습하면 닿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닿고 싶어도 닿지 않고, 내버려 두면 누가 훔쳐 갈 것만 같은 녀석이라 때문에 자꾸만 손이 갔다.

물론 썩 크게 와닿는 성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고 난 생각한다.

-끼긱.

털썩.

아무렇게나 부유하던 땅덩어리 위로 올라가자 놈이 날 포착했다.

사마귀와 같은 앞발.

바퀴벌레의 몸체를 지닌 청소부 발랑캬르는 등껍질의 날개를 펼쳐 순식간에 날아와 앞발을 휘둘렀다.

서걱.

칼날 같은 놈의 앞발은 한때 미믹의 삶을 살았던 내 눈으로 보기에도 명검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빠르고 날카롭다.

내 등 뒤의 떠다니던 암벽들이 그대로 잘려버릴 만큼.

그러나 청소부의 앞발은 검이라 하기엔 투박하고 검로가 짐승의 그것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

내 창의 적수는 아니었다.

카앙-!!

'힘은 거의 비슷하고.'

놈의 앞발과 맞부딪친 적창이 불티를 뿌렸다.

청소부의 반대쪽 앞발이 내 목을 노렸으나 이미 예상하고 있던바.

놈의 힘과 스피드는 확연하게 빨랐지만, 경로가 투박하다.

뻔히 예상이 갔다.

아무리 강하고 빨라도 무엇을 하려는지 예상하기 쉽다면 대부분 대처가 가능하다.

카차차차차차차차차창-!!

막고 찌르고, 막고 찌른다.

검과 창에는 리치가 존재한다.

당연히 창은 리치에서 이득을 본다.

이 거리감. 거리감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창은 절대로 검에 지지 않는다.

공간이 이처럼 넓게 있다면 더더욱.

카앙-!!

양 앞발로 내려찍는 놈의 공격을 창날과 창대로 그대로 비스듬하게 위로 치켜들어 흘려낸다.

크게 벌어진 틈. 놈의 몸체를 적창의 창날에 그대로 꿰뚫었다.

퍽-!

왠지 지저분해 보이는 녹색 액체가 허공에 부유했다.

하지만 역시 바퀴벌레를 닮은 놈답게 그것으로 죽지 않았다.

고통스러운지 온갖 발버둥이란 발버둥은 전부 치고 있었으니까.

놈이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반대로.

'재밌네.'

난 순수하게 재밌었다.

혼자 수련만 했지, 창술로 악마를 잡아본 지가 꽤 오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힘이 빠졌다.

이 공간 때문이었다.

'이 자식은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생기가 유지 되는 거야.'

의문을 가진 것과 동시에 창을 빼냈다.

그랬더니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놈의 몸체에서 창을 뺐더니 이상한 것들이 튀어나왔다.

"?"

청소부의 몸에서 용암과 함께 비릿한 산성 액이 토해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꿰뚫린 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치 뭐랄까.

거구를 지닌 존재의 식도나 위장을 그린 것처럼 말이다.

-끼기기기긱!! 끼긱!!

놈은 호들갑 떨며 자신의 배에서 튀어나온 흙과 기괴한 물건들을 다시 입으로 넣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용암과 산성액에 의해 다시 뚫린 배 밖으로 나왔고 놈은 멍청하게 다시 그걸 먹었다.

명절에 TV를 틀면 나왔던 둘리 시리즈에 나왔던 뼈만 남은 물고기를 보는 기분.

내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여기 있으면 어차피 죽는다.'

이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는 모든 살아있는 생기를 앗아간다.

결국 이놈을 죽여도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저놈 뱃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놈의 뱃속은 거구의 몸보다 배는 더 큰 무언가로 연결된 풍경이었다.

내 직감은 그저 운에 맡기는 것도 아니요. 신내림 받는 것도 아니다.

명확하게 상승시킨 직감 스탯의 영향으로 나오는 것.

직감 스탯을 얻은 후로, 내 직감을 믿어서 나쁜 일이 생겼던 적은 없다.

난 곧장 흘러나오는 잔해물들을 처먹기 바쁜 청소부의 머리통을 적창으로 터트리고 강철 군주를 안아 놈의 뱃속으로 뛰어들었다.

털썩!

"빙고... 인가."

아까와 같은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생명력과 마나가 소모되는 것도 사라졌고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천장에선 산성액이 떨어지고, 바닥엔 용암이 흐른다.

하지만 몸 디딜 곳이 없지는 않았다. 딱딱한 동굴 비슷해 보이는 곳은 아마도 티타누스의 진짜 뱃속.

정확하게는 장 속이지 않을까 싶다.

치이익.

산성은 갑옷과 옷을 녹였다.

그러나 몸을 녹이지는 못했다.

부산물을 녹이는 건 산성액이 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밑에 흐르는 용암이 녹이는 용도이지 않을까 싶다.

애초에 피할 수도 없고, 마나도 아직은 차오르기 전이라 갑옷과 옷을 최소한만 유지하고 모두 벗었다.

강철의 옷도 그대로 두면 녹을 수밖에 없기에 모조리 벗겼다.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차라리 잘됐다.

옷이 벗겨진 김에 붉은 성수로 몸을 치료하는 시간을 갖는 게 나았다.

옷을 벗으면 상처가 더 잘 보이니까.

내 붉은 성수는 +3 합성으로 이루어진 녀석들이다.

일반적인 회복약이라 불리는 붉은 성수보다 회복력도 빠르다.

자잘한 상처들과 큰 상처들을 단번에 회복시키고 무기를 꺼내 벽을 조금 부수고 안으로 몸을 쑤셔 넣었다.

그제야 산성 액에 몸이 닿지 않아 옷이 녹을 걱정은 없었지만, 슬슬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용암과 산성.

둘의 콜라보가 독 내성이 44%나 되는 내게도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여기서도 오래 있을 만한 환경은 아니었다.

"여기도 스킬은..."

사용되지 않는다.

모든 기프트 스킬과 일반 스킬들.

헤일로와 수식언 모두가 안 된다.

왜 안되는지 생각해보니, 상태창에 디버프가 걸려 있었다.

"티타누스의 제물"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이 디버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금세 알 수 있었다.

'강철이 깨어나면 의논이라도 해보겠지만.'

강철이 깨기 전에 먼저 죽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다.

독 내성이 높은 나도 힘들어지는 공기인데 강철은 어떨까.

헤일로라도 활성화됐다면 속성내성이 강해져 버티겠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 상황.

정신을 잃은 강철의 숨이 점점 가빠진다.

결단이 필요했다.

"이것도 안 되면 그냥 둘러업고 무작정 뛰는 수밖에 없다."

제발 되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스킬을 사용했다.

"시드네스."

그것은 나 자신을 씨앗으로 만들어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스킬.

이곳의 모든 스킬이 봉인됐지만.

나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이 스킬만큼은 티타누스도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생명력을 소모합니다."

"시드네스는 자신을 매개로 하여 씨앗을 발아시킵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매개로 하여 새로운 자신을 창조합니다."

"삿된 것은 버리고 당신의 염원이 가져갈 목록을 상정합니다."

"데몬시드-카탈린의 감전-붉은 가시덩굴의 관-공포와 거짓의 불"

내가 지닌 대표적인 힘.

그것을 매개로 하여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힘.

그것이 바로 시드네스였다.

물론.

"염병."

"강철 군주-강철의 관"

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나와 하나가 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시드네스 [2]

147화.

스킬은 마나를 소모하며 발현된다.

스킬을 쓰기 위해서는 마나를 필요로 한다. 마나가 없으면 스킬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일반인들도 알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이다.

어릴 적, 판타지 종류의 게임을 해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

그 상식이 현실로 튀어나왔을 때.

지식과 현실의 괴리감에 헤매던 네피림은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

머리로는 안다.

그러나 내 몸에 어떻게 작동하는지까지 아는 자는 없다.

우리의 심장은 박동하며 혈액을 전신으로 보내며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 중, 누구도 그 개념을 인지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숨을 쉬는 게 당연한 것처럼.

우리에겐 그게 당연하다.

네피림이 되어 마력을 얻게 되었을 때. 누구나 깨달았을 것이다.

마나가 생겼고 이걸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른다.

그냥, 각성하니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대부분의 감상이다.

나 또한 그러려니 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브란스를 만나 동료로 삼게 되었을 때, 나는 마나라는 것에 대해 더 심층적으로 알게 됐다.

'마나는... 결국 탯줄이지.'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브란스는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큰 소질이 없었다.

현자라는 별명을 가진 것치고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인상을 구기자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이긴 했다.

'마나가 무엇이냐. 그거야 미지의 힘이지. 그게 어디서 오느냐? 나야 모르네. 귀공은 대기 중의 공기란 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아는가? 모르지. 현자라 불리는 나와 같은 자들은 그것을 알아가려 힘쓰는 자들이지만, 아마도 평생 모를 걸세.'

선문답 같은 말들 속에서.

난 그나마 마나라는 것에 대한 힌트를 얻어냈다.

태아는 스스로 숨을 쉬지 못한다.

산모의 탯줄과 태반이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그러므로 숨을 쉰다.

마나도 그와 비슷하다.

'탯줄과 태반.'

마나를 얻게 되었을 때.

네피림들은 마나와 연결된 모종의 탯줄과 태반이 몸속에 각인된다는 게 브란스의 이론이었다.

태반은 능력치로 존재하는 마력.

마나는 어딘가로 연결된 에너지 자체를 빌려 쓰는 행위라 하였다.

탯줄이 어디로 연결되었느냐 물으니 브란스는 당연히 신이라 하였지만 난 굳이 신을 믿지는 않았다.

아직 우리가 밝혀내지 못한 미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 미지를 내가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각설하고.

내 안에는 마력의 태반이 존재한다.

그리고 마나의 탯줄이 연결되어 있다라는 개념을 장착하면 마법, 즉 스킬이라는 게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지 얼추 이해된다.

17군단 군단장 레비아탄과 베헤모스가 변한 티타누스의 몸체 안에서는 마법의 발현이 정지된다.

하지만 그 권능은 외부에서 발현되어 내 마나 자체를 압박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앉아 있는 사람을 손으로 억눌러 못 일어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외부 작용으로 마법의 발현을 막는다면 내부는 어떠할까.

이전의 공간에서는 생명과 마나를 앗아가려 했으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단순한 마법만을 억제한다.

그렇다면 내 신체 내부에서 발현되는 마법은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꽤 많은 선택지가 나타났다.

하지만 쓸모가 있는 건 몇 없었다.

신체 내부로 스킬을 펼친다고 하더라도 그걸로 용암과 산성비로 오염된 대기 안, 그리고 티타누스의 몸속을 빠져나갈 방법과 연결 지어 생각할 만한 건 하나밖에 없었다.

'시드네스.'

나 자신을 씨앗 화하여 주변의 영양분을 빨아들여 새로 태어나게 한다는 신기한 개념의 스킬.

혹시 모를 위급 시에, 또는 치료할 수 없는 심각한 신체의 훼손이나 저주에 걸렸을 시, 쓸모가 있을 거 같아 배워둔 스킬이었다.

물론 이게 작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내 몸을 씨앗으로 만들어 다시 태어난다는 설명 자체가 너무 두루뭉술한 게 첫째요, 둘째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티타누스의 뱃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뭐라도 해봐야 했다.

이대로면 나는 물론이고, 강철까지 꼼짝없이 죽게 생겼으니까.

역시나 내 예상대로 시드네스는 몸 내부에서부터 진행되어 점차 외부로 뻗어가는 스킬이었다.

한번 진행되어가는 스킬은 점차 내 의식을 확대했고 신체의 구조 자체가 인간의 것과는 달라졌다.

그건 확실히 현 상황을 타개할 수도 있을 만큼 거대한 것이었으나 내 예상과는 다른 게 몇 개 있었다.

첫째는 내 신체 능력과 스킬을 재구성하는 일에 강철 군주가 끼어들었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매개로 하여 새로운 자신을 창조합니다."

"삿된 것은 버리고 당신의 염원이 가져갈 목록을 상정합니다."

"데몬시드-카탈린의 감전-붉은 가시덩굴의 관-공포와 거짓의 불"

"염병."

"강철 군주-강철의 관"

내 대표적인 힘.

기프트와 헤일로, 그리고 수식언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강철의 기프트와 헤일로가 끼어들어 있는 건 예상 밖이었다.

아마도 서로 옷을 벗고 있는 상태에서 살을 붙이고 있어서였을까.

인간에게는 독이 되는 불완전 요소가 가득한 티타누스의 뱃속이라는 환경도 한몫한 듯싶었다.

"주변의 영양분을 빨아들입니다."

내 몸과 강철의 몸이 녹아내렸다.

하나의 씨앗으로 변해 내가 파둔 티타누스의 장벽 속에서 기생하듯 나는 뿌리를 점점 뻗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본능이 날 이끌었다.

"영양분이 가득합니다!"

"성장합니다!"

파 뿌리처럼 가늘었던 뿌리가 점점 커지고 더욱 길게 놈의 장벽을 뚫고 영양분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나 자체가 식물이 되어버린 감각이지만 글쎄, 썩 나쁘지 않았다.

영양분이라는 게 어찌 보면 놈의 생기를 빼앗는 것 아니겠는가.

조금 전까지 놈에게 내 것을 빼앗기다 지금은 내가 도로 빼앗고 있으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맛이라 해야 하나.'

놈의 몸은 식물이 된 나의 관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용암과 산성이 가득합니다."

"성장 과정에서 화염과 독에 대한 내성이 대폭 상승합니다."

느껴졌다.

처음엔 너무 뜨겁고 맛이 이상했던 용암과 산성의 기운에 점차 적응하게 되는 게 느껴진다.

용암은 햇빛 대신이라 생각하게 됐는지 따스했고 산성비는 깊은 산속의 옹달샘처럼 달고 맛있었다.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더 성장하여 영역을 확대하시겠습니까?"

이상한 친절함이 나타났다.

당연히 예스였다.

내 뿌리는 점점 더 넓고, 깊게 퍼져나갔다. 티타누스의 몸을 좀 먹으며 나는 성장한다.

내가 기생한 것은 거대한 티타누스의 작은 일부일 뿐인 장.

고작 이것으로 끝낼 생각은 없다.

이제야 제대로 반격에 나섰는데 고작 이걸로 끝이겠는가.

'전부 처먹는다.'

이렇게 된 이상, 장은 물론이다.

장 전체, 놈의 손과 발. 이윽고 머리까지 뿌리를 뻗어 놈의 모든 것을 쪽쪽 빨아 먹고 다시 태어나주리라!

더욱 날카로워진 것만 같은 내 직감이 생전 없던 경종을 울리고 있다.

절대로 멈추면 안 된다고.

물론, 나 또한 그럴 생각이었다.

*

같은 시각.

대한민국의 카오스 게이트 안은 절망만이 엄습하고 있었다.

바닥을 보였던 바닷물은 다시금 땅이 사라지고 차올랐다.

하늘에서는 불덩어리가 아닌 별이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파괴력은 더하면 더했지, 이전의 불덩어리보다 덜하진 않았다.

바닥에선 바닷물이 사라져 숨넘어가던 서펜트와 같은 괴물들이 다시금 살판 난 듯 날뛰기 시작했다.

"젠장! 후퇴! 후퇴해!!"

"안돼! 헤엄! 난 헤엄 못쳐! 으악!"

희망이 보였던 전쟁터는 단 두 명의 죽음에 아비규환으로 바뀌었다.

사기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해처럼 나락으로 떨어진 지 오래.

티타누스 이 절망을 지켜보겠다는 듯 고요했으나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누구 하나 싸우지 않았다.

모두가 겁에 질려 소릴 지르고 도망가거나 절망에 빠져 삶의 의지를 잃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건 랭커들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정신 차려 개새끼야!! 움직여! 움직이라고!!"

바바리안이 달려드는 서펜트의 머리 위에 올라타 머리뼈를 박살 내고는 소리쳤다.

멍청하게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랭킹 15위에 있는 푸른 백합이었다.

푸른 백합은 바바리안을 보며 고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의미 없어. 우린 죽었어. 헤일로를 가진 사람 둘이 죽었잖아. 그것도 데몬시드와 강철 군주가."

"아니! 둘은 안 죽었어! 지금도 저 안에서 싸우고 있을 거다! 그 둘은 너처럼 그렇게 쉽게 삶을 포기하는 자가 아니야!!"

"그래? 그럼 저 아가씨한테도 물어보지,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바바리엔에게 멱살을 쥐어진 푸른 백합이 눈을 흘겼다.

이내 그곳을 따라가자.

붉은 피와 같은 헤일로를 지닌 여인이 보였다.

붉은 비는 아직도 네피림을 회복시키고 각종 버프 효과를 주고 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녀 자체는 괴물의 시체로 쌓아 올려진 산 위에 주저앉아 눈이 죽어 있었다.

바바리안을 아랫입술을 한 움큼 베어 물었다.

씁쓸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러나 절절해지는 가슴의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는 고통 축에도 끼지 못했다.

"젠장!!"

푸른 백합을 들쳐 멘 바바리안이 괴물들의 시체 위를 뛰어넘어 레아까지 잡아 들었다.

"이 상황이 되어서도 사람을 살리려고? 왜? 랭커여서? 아니면 여자들 구해줬으니 보상으로 몸이라도 요구하고 싶어서?"

자포자기했는지 놀리듯 말하는 백합의 비아냥에 바바리안은 미간을 좁힐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진 않았다.

"아니, 나를 위해서다."

"..."

"이곳에 있는 누구도, 목숨을 빚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어. 내가 그랬듯, 너희들도 마찬가지일 뿐이야. 내가 너희를 살리는 이유도 그와 같지. 내가 살기 위해서다."

"... 말 진짜 못하네."

"닥쳐!"

머쓱한지 소릴 내지른 바바리안은 달려드는 괴물들의 머리를 밟고 성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난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왜?"

"데몬시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죽을 놈이 아니야."

탁!!

성문 앞으로 도착한 바바리안이 뒤를 돌아봤다.

"놈은 안 죽었다. 반드시 살아있어. 구하러 가면 된다."

"말도 안 돼. 죽었어. 아무리 그라도 저런 괴물 뱃속에서 살아남는 건 못해. 애초에 아무 공격도 안 통하는 적한테서 어떻게 구해낸다는 거야."

괴물 뱃속에 들어간 사람을.

그러나 바바리안은 그녀들을 내려놓고 말없이 도끼를 들었다.

"미쳤어."

성문을 닫으려는 도르래가 돌아간다.

닫히는 성문의 틈으로, 바바리안이 천천히 걸어갔다.

"네 말대로, 그놈 못 구하면 우린 진다. 전멸이야. 하지만 만약 그놈 구하면. 우린 살 수 있다. 간단하지?"

"이제 보니 죽으려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너였네. 바바리안."

"야만 전사는 원래, 죽을 듯이 싸워야 사는 법이니까."

문이 완전히 닫히려는 순간.

척.

"맞아요."

레아가 일어났다.

탓.

그 곁에는 아마존이 내려섰다.

"아직 희망은 있어. 내 헤일로를 사용하면 돼. 세상에 약점이 없는 생물은 없을 테니까. 그렇지! 관찰자?"

"맞습니다. 약점이 없다면, 그건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일 테니까요."

관찰자, 아마존, 바바리안. 레아.

거기에 브란스와 글로리안. 아직도 싸우고 있는 꽤 많은 네피림들까지.

"데몬시드에게는 빚이 있어."

"한 두 번도 아니지. 목숨 구제야 우리나라 사람들 전부 그렇잖아."

"난 강철 군주를 구하고 싶다. 그녀에겐 은혜를 입었어."

"나도!"

"나도 가고 싶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백합의 눈에는 하나같이 전부 자살 희망자들로 보였다.

이미 죽었을 게 뻔한 사람을 구하겠다고 불나방처럼 불 속으로 뛰어드려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네가 그러니까 15위인 거지."

"혼나비."

백합의 눈이 찢어졌다.

어느새 주위엔 나비들이 줄기차게 모여들고 있었다.

랭킹 9위 혼나비였다.

"뭐, 상관없나."

이해하려다 포기했다.

백합도 일어났다.

"가는 거냐?"

"난 분위기에 휩쓸리는 성격이라."

하지만 그들의 굳은 결의와 달리.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상황은 영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뭐야 저건?"

"나무뿌리 아냐?"

"그렇기엔 금속 같지...?"

"어! 저기 꽃봉오리!"

반투명한 액체 상태 같던 티타누스의 놈의 몸을 뚫고 나온 나무뿌리.

동시에 놈의 몸 전체를 뒤덮은 이끼가 창궐했고 금속처럼 보이는 가시덩굴이 몸 전체를 옥죄었다.

발광하며 난리를 쳐대는 거구는 이내 머리를 꿰뚫고 피어난 거대한 떡잎과 꽃봉오리에 힘없이 축 늘어져 숨을 헐떡였다.

잔인한 풍경과 달리 전쟁터에 진득한 달라붙은 꽃향기가 가득했다.

꽃봉오리의 꽃이 활짝 만개했을 때.

"어?"

"17군단 군단장 티타누스가 영원한 안식을 맞이했습니다!!"

"카오스 게이트가 성공적으로 종료 됩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악몽이 순식간에 종료되어 있었다.

시드네스 [3]

148화.

반투명한 거체를 지닌 티타누스는 자기 몸 곳곳에 뿌리 뻗은 기괴한 기생 식물에 몸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그것은 몸속에 자리 잡은 종양이나 암 덩어리처럼 점점 자신의 영양분을 빨아먹고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물론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다.

티타누스는 제 몸에서 기르는 자체적인 괴물들을 대거 투입해 몸 안에서부터 식물과 싸웠다.

뿌리를 불태우고, 뜯어내고, 먹어 치우며 종식해 일단락시켰다.

그러나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한 순간.

이번엔 다른 쪽으로 전이가 되어 순식간에 힘을 빼앗겼다.

티타누스는 한두 해 살아온 대악마가 아니다.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이니다보니 몸속에 병마나 기생충이 자리 잡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확실한 회충 제거를 위해 큰 노력을 기했고 결국에는 어렵지 않게 퇴치했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생전 겪어본 적 없는 이 종양은 마치 고도로 발달한 지능이 있는 것처럼 자기 몸을 제멋대로 휘젓고 농락하듯 뿌리를 진두지휘하여 모든 영역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라 자신과 하나가 되어있는 레비아탄과 베헤모스의 자아까지 따로 불러내 기생충 제거에 힘을 썼을 정도였다.

그만큼 위협적이었고, 재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티타누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차 몸 곳곳으로 전이되어 결국 쓰러졌다.

처음에는 배가 아팠고, 다음엔 뒷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으며, 이내 가슴과 앞발. 그리고 목으로 이어져 전반적으로 몸 전체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내 자신의 뇌까지 뿌리를 뻗어 게걸스레 힘을 빨아들이는 놈을 보노라면 치가 떨릴 지경.

허나 이미 전이될 대로 전이된 종양 녀석을 그가 어찌할 수는 없었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으나.

죽음 앞에서는 이다지도 다른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의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낳으시고 또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것이 티타누스의 마지막 말이었다.

신화적인 괴물의 마지막 유언으로는 꽤 서글픈 단말마의 절규였다.

물론.

데몬시드의 알 바는 아니었다.

그는 티타누스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뿌리를 강철로 이룹니다."

"육체를 재구성할 영양분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뿌리가 손상됩니다. 감전으로 적의 신경 세포를 교란합니다."

"더 많은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흡수하시겠습니까?"

"더 많은 영양분을 흡수합니다."

"영양과다입니다!"

"영양분을 더 흡수하시겠습니까?"

"축적된 많은 영양분을 따로 저장할 저장소를 만듭니다."

"저장소 3,152,210개를 만듭니다."

정신없이 올라가는 메시지.

시야를 확인한 눈은 사라지고 온몸이 뿌리가 되고 각각의 유기적인 전달체가 존재하여 신경전달로만 상황을 파악하기에 급급했다.

"화염 피해를 입었습니다. 개체는 화염 피해에 취약합니다."

"신체 재구성에 필수적 요소로 우선순위에 둡니다."

"화염 내성에 영양분을 소모합니다. 화염 내성이 상승합니다!"

"화염 내성에 영양분을 과소모합니다! 화염 내성이 상승합니다!"

"화염 내성이 극에 이릅니다!"

"화염 내성이 화염 면역으로 상승합니다!"

『화염 면역』

-불에 대한 어떤 손해도 입지 않는다.

화염 면역!

데몬시드는 신이 났다.

더 이상 놈의 용암에 피해를 입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저 화염마저도 뿌리를 뻗어 녹아 있는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었다. 물론, 놈의 신체 전반에 걸쳐서 존재하는 산성과 독도 마찬가지.

"독 내성이 극에 이릅니다!"

"독 내성이 독 면역으로 상승합니다!"

"저주 내성이 극에 이릅니다. 저주 내성이 저주면역으로 상승합니다!"

마법 발현을 억제했던 저주에도 영양분을 소모해 면역에 이르게 되었다. 면역되니 그것조차 그의 영양분으로 전락했다.

"영양분 251,770을 흡수합니다."

"영양분 612,300을 흡수합니다."

"경험치 6,500,320을 획득합니다!"

"영양분 15,455,000을 흡수합니다."

"영양분 25,321,255를 저장소에 저장합니다."

끝도 없이 올라가는 영양분.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괴물이 지닌 생명의 힘이란 무궁무진했다.

그뿐만 아니다.

"수식언 '별을 삼키는'을 흡수합니다."

"흡수에 실패합니다."

"수식언의 능력 일부 중, 가장 뛰어난 부분을 흡수합니다."

"만유인력을 습득합니다."

"뿌리 증식을 중단합니다."

"더 이상 뿌리 뻗을 장소가 없습니다!"

"흡수를 중단합니다."

"뿌리를 거둡니다."

"영양분을 한곳으로 모읍니다."

미친 듯이 빨아먹던 흡수를 멈췄다.

이제는 흡수할 것도 없다는 판단과 함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씨앗이 되어 뿌리를 뻗고 장성한 식물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건 당연히.

"개화를 진행합니다."

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육체를 재구성합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데몬시드는 많은 것을 보았다.

시드네스가 판단하기로, 꽃을 피우기에 적절한 위치는 티타누스의 머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놈의 뇌에까지 뿌리를 뻗어 꽤 많은 다양한 기억을 보았다.

이는 영양분을 따로따로 저장소에 관리하며 얻어지는 부수적인 효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딱히 대단한 기억은 없었다.

그저.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나.'

어느 악마가 찾아와 속삭였다.

그저 바다와 육지, 하늘을 오가며 살아왔던 그에게 아버지라는 말은 생소하면서도 자연스레 눈물 흘리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왜 태어났는지.

어째서 살아가는지조차 모른 채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괴물에게 악마의 달콤한 한마디는 그를 완전한 악마로 만들기에 충분한 감미로움이 있었다.

스스로 태어나는 자는 없다.

모두 뿌리가 존재한다.

우리의 뿌리는 아버지로 시작됐다.

허나 아버지는 어째서 우릴 찾지 아니하는가.

아버지는 어찌하여 따스한 손길로 우릴 보듬지 아니하고, 넓은 품으로 우릴 안아주지 아니하시는가.

설마 그가 천상의 권위 따지는 그들에게 갇혀 고통받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으실까!

그렇게 티타누스는 악마의 한마디에 그를 따라나섰고 군단장이 되었다.

그 이후의 일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다.

티타누스는 별마저 삼킨 괴물.

지옥에서도 유명해지고 있는 데몬시드를 삼키고자 때를 기다렸다가 찾아온 악마였다.

목적은 하나였다.

어서 빨리 구천의 하늘 중 마지막 하늘을 정리하여 천상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만나 뵙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달과 해. 그리고 별마저 삼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그마한 씨앗 하나는 삼키지 못한 채.

티타누스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게 전부인 내용.

인제 와서는 아무래도 좋을 내용이기도 했다. 그는 그런 것보다 자신의 성장과 진화로 이어지는 홍수와 같은 정보의 파도에 허덕이고 있었다.

"육체의 구성을 선별합니다..."

"이전의 틀을 사용합니다..."

"틀이 너무 나약합니다."

"틀을 강화하는데 영양분을 소모합니다."

"강철과 거미줄을 사용합니다..."

"철골로 기본 틀을 구성합니다."

"거미줄로 혈관과 각종 장기를 구성합니다."

"신체 능력을 재분배합니다..."

"마력을 주로 사용한 이력이 있습니다. 마력과 건강을 위주로 재분배를 실시합니다..."

티타누스가 쓰러져 잊고 있었지만 시드네스의 스킬은 이제 시작이었다.

이 스킬의 본래 목적은 적을 쓰러뜨리는 게 아니라 육체의 재구성.

새롭게 태어나는 것에 있으니까.

"헤일로를 재구성합니다..."

"헤일로의 효율이 떨어집니다."

"헤일로를 강화합니다. 강철이 사용됩니다. 모략이 사용됩니다."

"벨로나가 강철과 모략의 구심점으로 사용됩니다."

"티타누스의 심장이 사용됩니다."

"푸르푸르의 심장이 사용됩니다."

"바릿느의 심장이 사용됩니다."

"수식언을 재구성합니다..."

"수식언의 재구성에 만유인력이 사용됩니다. 모략이 사용됩니다."

"영양분이 대거 사용됩니다."

"천사의 고리와 악마의 날개가 대척을 이룹니다."

"하나의 뿌리로 연결됩니다. 뿌리는 인간의 필멸로 구성됩니다."

"기프트를 재구성합니다..."

"기본 스킬을 재구성합니다..."

"불필요한 부분은 제거합니다."

"어지럽게 분류된 것을 하나로 통일합니다."

"투왕의 살기가 판포비아로 흡수됩니다. 프로비던스가 판포비아로 흡수됩니다."

"레그릿지, 거스트가 클루트와 통일됩니다."

"카이삭스의 창술과 카이삭스의 표식이 하나로 통일됩니다."

"워터볼과 레인스톰이 하나로 통일됩니다."

"블리자드와 프로스트 노바가 하나로 통일됩니다."

그리고 이윽고.

"모든 영양분을 소모합니다."

"꽃봉오리가 만개합니다."

"시드네스가 종료됩니다."

이내 그가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

여름만 되면 풀이 무성해졌다.

어릴 적엔 풀 냄새가 싫었다.

내가 지낸 보육원은 산속에 인접해 있어 여름엔 잡초가 무성해졌고, 습하고 벌레가 많고 모기도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식물의 신비함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이 있다.

왜 이놈들은 해마다 뿌리 뽑고, 제초를 그렇게 해도 살아나는 걸까.

이 생명력의 근원은 어디일까에 대해서 말이다. 흙에 영양분이 있다는 소리도 그때 처음 들었던 것 같다.

흙은 그냥 더럽고 벌레들이 가득하게 살아가는 곳인데 식물은 이상하게 그곳에 뿌리를 뻗고 살아간다.

어릴 적 의문은 커서도 마찬가지였으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먹고 살기 바빴으니까.

식물에 대해 고민하기엔 당장 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쉬는 날이 되어 하릴없이 유튜브 영상을 바라보다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식물의 뿌리에서는 수백만에 가까운 미생물들이 번식하고 그것으로 식물은 미생물들과 상생하며 성장하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렇게 말하며 한가지 실험을 했는데, 식물의 신경에 기계를 연결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

또는 살갑게 구는 사람을 분류하여 역할을 수행하고 식물 신경과 연결된 기계 팔에 장난감 검을 꽂아 자신에게 못되게 군사람을 기억할까? 라는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식물은 자기 잎을 뜯고 아프게 했던 사람이 다가오자마자 장난감 검을 미친 듯 흔들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식물의 생명력과 지능은 인류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 인간보다 뛰어나게 오랜 세월을 자생하며 살아온 생물이 아니냔 말을 하고 싶다.

"..."

식물로서 새롭게 태어난 손은 아기 손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악마의 손처럼 강인했다.

뼈는 단단한 강철로 이루어졌고, 혈관과 피부는 거미줄로 구성되었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했다.

신체 능력이 재구성되며 스탯이 저절로 분배되었다.

대부분은 마력.

이제는 기본 마력 스탯이 100이 넘어 150에 이르게 되었다.

마나의 총량만으로도 3,000에 육박하고 헤일로와 시드로긴을 사용하면 더 높아진다.

그리고 알 수있다.

'회복력도...'

이전과 비교할 바 없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육체.

그게 가능했던 건 내 신체의 구성을 도운 티타노스의 엄청난 생명력, 그리고 의도치 않은 우연 때문이었다.

내가 피어난 꽃봉오리.

그곳에는 나만 있지 않았다.

은발을 늘어뜨린 여인.

강철 군주가 함께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녀와 비슷한 생김새를 지닌 소녀가 있었다.

언뜻 보면 딸처럼 보이는 소녀.

강철과 같은 은발을 지닌 소녀는 엄마와 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똑 닮은 외양을 지니고 있었다.

"너도 섞였을 줄이야."

바로 거미 여왕의 딸.

모략의 거미줄이란 수식언을 지닌 내 펫이자 악마.

엘리스.

왜 섞였는지는 알고 있다.

엘리스는 항상 내 옷 속을 제집처럼 만들어 돌아다니는 녀석이니까.

아마도 내 몸에 붙어 있었을 거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섞였을 리 없으니.

그건 그렇고 난감하게 됐다.

강철과 엘리스가 나와 한 몸이 되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지만.

"강철이랑 딸이라도 낳은 거 같네."

엘리스의 인간 모습은 너무도 강철과 나를 닮아 있었다.

업데이트 [1]

149화.

카오스 게이트는 종료됐다.

생각보다 치열한 전투였다.

푸르푸르와 바릿느 때와 비교해도 한국의 전력은 꽤 높았다. 헤일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네 명이었으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놈은 강했다.

최초에 32군단. 후에 59군단, 그리고 17군단의 군단장들.

군단장의 앞에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그들이 지닌 힘의 숫자라는 걸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을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요."

레벨업 당시, 시드네스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난 이번에 꼼짝없이 놈의 양분이 되어 죽었을 것이다.

한 번의 선택이 날 살리고, 한국을 살린 것이나 다름없다.

솔직히 이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하기란 어려웠다.

내가 식물로 변해 놈의 뱃속에서부터 모든 영양분을 빨아먹고 새로운 육체로 재탄생했다는 걸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감사는 표해야 했다.

레아를 비롯한 네피림들은 내가 죽은 줄 알았다며 그때의 절망감을 몸소 표현했다.

그래도 결국에는 날 구하려고 했다고 하니 감사 인사를 해야겠지.

난 자리에 모여 있는 이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말뿐인 감사로는 부족할 것이다.

돌아간다면 협회의 사람을 시켜 랭커들을 선별하여 악과와 브릭서. 그리고 수식언의 악과까지 내어줄 요량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 혼자 강해져서는 안 된다.

함께할 동료는 필요하다.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온 겁니까?"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

관찰자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관찰자라도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솔직히 시드네스로 놈을 죽이고 탈출하게 된 사실을 떳떳하게 말하기가 썩 그랬다. 나도 아직 정확하게 이 스킬의 내용을 면밀하게 파악한 게 아니기 때문인 점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좀 애매한 게.

"근데... 이 아이는 대체 뭔가요."

레아가 강철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는 강철을 엄마처럼 따르며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는데 생김새가 그녀와 판박이였다. 긴 속눈썹과 머리칼은 은색으로 촉촉하게 빛났고, 강단 있는 눈매와 날렵한 콧대는 날 닮았다.

나중에 크면 사내 여럿은 울릴 것 같은 어여쁜 아이.

바로 거미 여왕의 딸.

앨리스였다.

"몰랐습니다. 강철 군주와 아이를 낳으셨다니."

"놀리지 마."

관찰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자기 기프트를 사용해서 벌써 누군지 파악했을 테지.

불별도를 자주 오갔던 그는 앨리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능력을 갖추고 왜 펫이 되었는지도 아니까.

그러니까 놀리는 거다.

"이야~ 나도 몰랐는데? 아니 뭐. 남녀가 헐벗고 있으면 뭐, 아이가 생길 수도 있는 거지. 난 그쪽으론 깨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상황이 상황이잖아. 나도 마누라가 임신했는데... 좋은 친구가 되겠군."

물론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놀리기만 하려는 놈도 있었다. 놀리지 말라고 하자마자 바바리안이 너스레를 떨며 놀려댔다.

그런데.

"결혼했었나?"

"아, 얼마 전에. 그냥 뭐. 임신했으니까 결혼했다고 하는 거지. 결혼식을 올리기엔 이상한 세상이잖아. 너도 저번에 본 적 있을 거다. 같은 파티 동료였거든."

"그건. 축하할 일이군."

"뭘."

답지 않게 쑥스러워하는 대머리를 보며 악수했다.

맞잡는 바바리안의 손은 두꺼웠다.

그리고 단단했다.

굳은살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손.

전사의 손이었다.

"손이 말랑말랑하구먼."

몸이 재구성되어 그런지 내 손에는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았다.

말랑말랑하고 촉촉하다.

그러나 쉽게 상처 나지 않을 피부를 지닌 상태이기도 했다.

"삼촌이라고 불러보렴. 내가 네 아빠랑 아주 막역한 사이거든."

"아빠?"

앨리스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아빠라고 부르니 나도 놀랐다.

'말 할 수 있는 거였나.'

시드네스에 함께 섞여서 앨리스의 몸도 새롭게 재구성됐다.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인간이었다.

언어를 구사하기 위한 발성기관도 인간과 같으니 말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내심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건 조금 달랐다.

막상 아빠라며 말을 해버리니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꼬마야. 엄마는 누구니?"

혼나비였다.

나비 한 마리를 건네며 싱긋 웃어줬는데 앨리스는 인상 쓰더니 검지를 휘적이더니 나비가 반으로 갈라져 떨어졌다.

모략의 거미줄.

그녀의 권능은 여전했다.

"뭐, 뭐야?"

당황한 혼나비와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아마존이 입을 열었다.

"엄마는 정말 강철인가요?"

순수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이 불러온 파문은 썩 좋지 않았다.

"아니요. 제 아이예요."

"네?"

레아가 선언했다.

눈가는 촉촉했지만 굳은 결심을 한 터인지 목소리엔 떨림이 없었다.

"제가 키울 거예요. 그러니까 제 아이죠. 그렇죠?"

날 보며 말하는 자세가, 뭐랄까.

내가 나쁜 놈이 된 것만 같았다.

'누가 보면 내가 사생아라도 낳아서 온 줄 알겠네.'

혼외자식을 데리고 왔지만, 그래도 사랑으로 보듬겠다는 드라마에 나올 법한 본처에 빙의한 모습이랄까.

요새 로맨스 소설을 많이 보더니 뭔가 이상한 상상을 잔뜩 한 모양이다.

"어머..."

"데몬시드,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최악이네."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진짜였..."

아마존은 놀랐고, 혼나비는 쓰레기라며 매도했으며 글로리안은 뭔가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있자, 정말 그렇게 굳혀지는 느낌에 어쩔 수 없이 강철을 바라봤다.

"..."

그러자 강철은 내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숙이며 앨리스를 안아버렸다.

"강철... 네가 그러면 진짜 같잖아!"

"어머, 어머."

"진짜였다고? 아니 진짜?"

뭔가 상황이 이상해지자 브란스가 헛기침을 하며 난입했다.

"이 아이는 내 손주네."

"네?"

"브란스. 상황 이상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사실인데 왜 난리야?"

브란스는 이상하게 혼란을 가중했다. 사실만을 말하고 있었지만, 굳이 지금 말해서 좋을 사실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머릿속만 복잡하게 만들 말이었으니까.

"꼬마야 엄마가 누구야? 진짜 강철이야?"

아마존이 묻자 앨리스는 날 향해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

그리고 강철 군주를 가리켰다.

"엄마."

"어머어머어머!"

"진짜라고? 티타누스 뱃속에서 주워 온 애가 아니라?"

"그게 말이 되나? 5년 전이면... 강철 군주는 미성년자였던 게..."

"이 쓰레기!!"

오해와 오해가 겹겹이 쌓였다.

엉킬 대로 엉킨 실타래를 푸는 방법을, 나는 하나밖에 모른다.

화르르륵!

푸른 불꽃이 사방에 넘실거렸다.

"아 뜨거! 아 뜨뜨뜨뜨!! 위험하잖아! 이거 물로도 안 꺼지는 불인데!"

"꺄아아악!"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엉킨 실타래를 푸는 법.

그건 실타래를 불태우는 것뿐.

*

어느 정도 오해가 풀린 뒤.

대부분의 네피림들은 카오스 게이트를 나갔다. 그러나 나와 랭커들을 비롯한 몇몇 이들은 나가지 않았다.

전장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죽은 사람이 많다.

주검과 유품을 정리하고, 악마들의 사체 중 중요한 부분들을 수거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서펜트는 독니와 아랫배의 비늘이 극상품일세. 적당히 유연해서 뭘 만들어도 쓸만하거든."

스미스도 발 벗고 나서서 악마들의 소재를 채취하고 있었다.

'티타누스를 씨앗으로 만들지 못하는 건 아쉽군.'

내게 양분을 전부 빼앗겨서인지, 놈을 씨앗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만큼 놈에게 빼앗은 게 많으니 이거까지 욕심낼 순 없었다.

"뭐 하고 있나."

강철이었다.

앨리스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내 곁에 다가와 앉는 그녀를 보았다.

전투가 끝나서인지, 그녀는 갑옷을 입지 않았다. 내가 챙겨 두었던 크롭티와 츄리닝을 입은 채였다.

은발은 포니테일로 묶어 목덜미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저물어가는 황혼에 빛나는 그녀의 은발은 옆에 앉아 거미줄을 꼼지락거리는 앨리스와 함께 반짝거렸다.

"그냥, 풍경을 보고 있었어."

"풍경?"

강철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카오스 게이트의 풍경.

이른바 살풍경이라 말해도 좋은 피와 괴물의 시체로 이루어진 전장의 흔적을 왜 보고 있냐는 물음이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이전과 또 다르다고 생각하거든."

바다가 사라진 이곳의 평원은 넓다.

그리고 푸르렀다.

내가 심었던 나무들은 전쟁의 여파로 사라졌지만, 풀과 식물은 아직도 죽고 자라나고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 덕에 그 난리 통에도 잡초는 무성하고 이름 모를 풀은 또 새 생명을 퍼뜨리고 죽어간다.

"뭐가 다르지?"

"이곳도, 우리처럼 변하니까.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기억하나."

"삭막했지."

"맞아. 풀 한 포기 없었지."

그러나 몇 번의 전쟁을 겪고 나서야 이곳의 땅은 푸르렀게 변했다.

"전쟁의 아픔과 죽음도, 전부 받아들여 생명으로 키워낸 것 같다... 라는 감상이 조금 들어서."

"... 그건 이번 일 때문이겠군."

"반은 그렇지."

강철은 안다.

티타누스의 뱃속에 들어갔을 때.

내가 시드네스를 사용하였을 때.

앨리스와 강철은 나와 하나가 되어있었다 봐도 무방했다.

어렴풋하지만 그녀도 그때의 기억이 있다고 했다.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은연중에 네 의지를 느꼈어.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한 감정도. 그리고..."

"뭐냐."

"어쩌다 보니 네 기억도 조금 봤다."

"... 그러냐."

무슨 기억이었을까.

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썩 보기 좋은 과거란 게, 내게는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

"몸은, 괜찮나."

"이전보다 월등히 나을 정도로."

"그런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고 육체를 재구성할 때 따로 나뉘어 탄생했다.

나는 그녀가 가진 기질을 얻었다.

그녀 또한, 나에게서 받아 간 것이 있다고 한다.

전체적인 능력치겠지.

내 상태창만 보더라도 이전과는 확실하게 달라진 느낌이 보인다.

『이화성』

「데몬시드 Lv.7」

「생명력」 – 2000/2000 (+200)

「마나」 - 3120/3120 (+80)

「능력치」

근력 – 82 ▲

민첩 – 73 ▲

건강 – 90 ▲

마력 - 152 ▲

철골 - 100 ▲

「세부 능력치」

명중+20▲ 시야+15▲ 야간시야+20▲ 직감 +10▲ 방어력+80 마나재생+30▲ 냉기내성+10%▲ [독면역] [저주면역] [화염 면역] [공포면역] 수면내성+30%▲ 물리피해 +33%▲ 화염피해 +53%▲ 번개내성 +86%▲ 번개피해 +66%▲

힘든 적을 잡아서일까.

레벨도 상승해서 7이 되었다.

하지만 카탈린의 감전이 사라졌다.

물론 사라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데몬시드로 완전히 흡수된 상태였다.

솔직히 이게 긍정적인 변화일지 아닐지는 아직 확언할 수 없었다.

'스킬은 그대로 있으니까.'

우선은 능력치부터, 마력이 눈에 띄게 높아져 있는 상태였다.

아마도 시드네스로 티타누스의 영양분을 과도하게 흡수하면서 전체적으로 올라야 할 능력치가 마력에만 과 투자된 것으로 보인다.

강골은 철골로 변화했다.

이 변화가 주는 게 무엇일지는 모르겠으나 나빠 보이진 않는다.

세부 능력치도 전체적으로 2배 가까이 상승했다고 보면 편하다.

독과 화염, 저주와 공포는 내성이 아니라 면역으로 바뀌었다.

이제 독과 화염, 저주와 공포는 내게 아무런 효과를 가지지 못한다.

이는 엄청난 장점이었다.

또다시, 막강한 군단장이 오더라도 어렵지 않을 싸움을 할 만큼 말이다.

물론 이는 신체적인 특징.

시드네스로 인해 재탄생한 내 능력은 꽤 여러 가지가 바뀌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헤일로.

그리고 수식언이었다.

업데이트 [2]

150화.

[가시덩굴의 관]

-천상의 힘이 담긴 헤일로.

〈신의 사자〉 『3급』

-모든 능력치 200, 회복력 200%, 모든 속성내성 200% 상승.

신의 사자는 같다.

여기까지는 기본적인 헤일로의 공통적인 효과니까. 물론 본래 160% 상승 폭을 보여줬지만, 지금은 200%라는 게 다르다면 다르다.

잉걸불로 강화하면 강화하는 대로 상승 폭은 더욱 올라가게 되겠지.

〈벨로나의 굴레〉 『5급』

-무한한 가시덩굴의 성역.

*관통력 300% 증가.

*출혈 300% 증가.

『덩굴의 흡혈』

-적의 피를 흡수하여 생명력과 마나로 전환한다.

『악멸』

-헤일로가 완전히 붉게 물들 시, 모든 능력치와 속성력 300% 증가.

『강철의 맹세』

-가시덩굴이 지면이 아닌 금속의 매개체로도 소환할 수 있다.

『거짓의 여제』

-성역을 지키는 거짓의 여제가 나타나 적을 섬멸하고 가시덩굴을 거미줄과 강철로 뒤덮어 경감률을 높인다.

각종 원소 내성 또한 대폭 상승한다.

전체적인 버프였다.

관통력과 출혈은 본래 200% 상승이었지만 이제는 300% 상승이다.

덩굴의 흡혈과 악멸은 그대로다.

악멸의 모든 능력치가 300%로 증가했지만 크게 변화한 건 없다.

변화는 그다음이다.

강철의 맹세.

그리고 거짓의 여제다.

다분히 강철 군주의 기프트에 영향을 받은 듯한 스킬.

강철의 맹세는 가시덩굴이 이제 지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

티타누스 때처럼 온 세상이 바다여도 금속만 있다면 가시덩굴을 만들어낼 수가 있게 됐다.

저 금속이란 건 아마도 거의 무기가 될 것이다. 전장에서 눈먼 무기들은 어디든지 존재하는 법이니까.

강철이 검으로 강철 기사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나 또한 그리됐다.

다음은 거짓의 여제.

앨리스의 수식언과 강철의 기프트가 뒤섞인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아직 제대로 사용해보지 않아서 뭐라고 할 순 없다.

가시덩굴을 거미줄과 강철로 뒤덮어 경감률을 높이는 건 좋았다.

가시덩굴의 특성상, 불이나 참격에 취약했는데 강철로 뒤덮인 가시덩굴이라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

거짓의 여제가 솔직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벨로나가 뭘 하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물론, 기분 좋은 변화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든다면 수식언.

『악익』

[공포의 나래]

-탐욕스러운 공포는 언제나 공포의 제물을 원한다.

『블루헬』

-공포의 푸른 지옥을 소환한다. 지옥의 영향권에 있는 자는, 모든 자원이 불태워지며 자원의 양에 따라 중력의 억압을 받는다.

수식언이 사라졌다.

대신, 악익으로 바뀌었다.

뭔가 하니 이 녀석이 수식언이었다.

강렬한 푸른 불꽃으로 이어진 날개.

새의 것과는 다르다.

약간 불로 만들어진 기다린 촉수와 같은 날개랄까.

'중력...'

그러고보니 '별 삼키는'이라는 티타누스의 수식언을 흡수하려다 일부인 만유인력을 흡수했다고 했다.

그게 아마 블루헬이란 곳에 스며들지 않았을까 싶다.

중력으로 적을 억압하는 지옥도가 생겨난 배경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블루헬은 기본적으로 내가 지닌 공포의 불과 마나번으로 이루어졌다.

아직 제대로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벨로나의 성역과는 또 다른 방식의 광범위 공격 기술이었다.

'천사의 광휘와 악마의 날개라.'

날개가 생겨 좋은 점이라면 아이템이나 스킬에 의존하지 않고 비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좀 찜찜해.'

수식언이 왜 갑자기 날개로 바뀌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스킬이 여러 개 합쳐지고 흡수되고 했지만, 헤일로와 큰 변화는 없다.

간단하게 이 정도.

모두 시드네스가 만든 변화였다.

'원래 이 정도 스킬은 아닌 거 같았는데...'

티타누스, 그리고 강철 군주와 앨리스가 만든 합작품이 아닐까 싶다.

"내 강철에는 이제, 번개가 깃들었다. 은뢰, 보이지 않는 번개라더군."

"은뢰..."

앨리스의 수식언.

모략의 거미줄은 본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다.

그 특성이 내가 지닌 카탈린의 감전과 만나 뒤섞인 게 아닐까 싶다.

"기사들이 은뢰를 사용하면 앞으로 전투는 더욱 수월해지겠지."

"헤일로는?"

"헤일로는 큰 변화가 없다. 은뢰를 쓰게 되었다는 것 말고는..."

강철은 이내 날 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평상복 차림이었던 그녀의 몸으로 강철의 갑주가 철컥 채워졌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는 것이었다.

"은혜를 입었다."

"... 은혜까지야."

낯간지럽다. 강철은 이렇게 한 번씩 정말 기사처럼 굴어서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리고 감사를 전한다면 나야말로 강철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했다.

티타누스의 권능으로 온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을 때, 강철이 날 구하려 했다.

덕분에 상처 없이 놈에게 삼켜졌지, 그게 아니었으면 어디 한군데가 절단 났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놈의 배 속에 있던 청소부 배를 뚫지도 못했고 결과적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시드네스를 사용할 수 있었던 건, 강철이 날 감싼 덕분이었다.

"나야말로 고마웠다."

다른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악수를 받는 강철은 엘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끔, 보러 가도 될까."

엘리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불별도에 오는 사람은 아직도 관찰자가 전부다.

그만큼 비밀 유지에 신경 써야 하는 곳이고 아무나 오가게 둘 수는 없는 곳이라 그렇다.

그러나 아마존과 강철 군주는 상관없으리라 본다. 이번 전투에서 둘은 헤일로의 힘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앞으로의 전투에서 그들의 힘은 반드시 내게 필요하다.

아니, 그들은 한국에 필요하다.

[카오스 게이트 순위]

1위-데몬시드

2위-아마존

3위-강철군주

4위-피의축복

5위-바바리안

6위-소서리스

7위-혼나비

8위-거대한 손

9위-빛고리

10위-충왕

군단장마다 급이 있다는 것도 이번 기회에 확인할 수 있었다.

"기여도 순위 1위부터 10위까지 헤일로를 지급합니다."

"이미 헤일로를 지니고 있습니다."

"보상이 엘더 잉걸불로 지급됩니다."

"기여도 1위 보상으로 엘더 잉걸불 50개를 획득합니다."

"카오스 게이트 1위 보상으로 간이 성역을 지급합니다."

"1위 보상으로 1,000,000 금화를 지급합니다."

"찬란한 엘릭서를 지급합니다."

17군단 군단장 티타누스.

놈은 급이 다른 놈이었다.

그래서인지 단번에 한국은 10명의 헤일로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1위부터 10위.

모두 헤일로가 지급되었다.

기여도 순위는 레벨 순위가 아니다.

보다 큰 피해를 준 네피림들의 순위이기에 레벨 순위와는 관계없는 이들도 몇 보였다.

소서리스는 그렇다 쳐도 빛고리와 거대한 손, 그리고 충왕이란 자는 이번에 꽤 운이 좋은 듯했다.

'아니, 그건 아닌가.'

기프트 컨셉에 따라, 아니면 찍은 스킬에 따라 성향이 나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다수의 악마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스킬이 있는가 하면, 단일 딜링이 높은 스킬이 있기도 하니 말이다.

순위에 들어갔으니 단순한 운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협회에 얘기해서 저들의 지원을 고려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거대손과 충왕은 모르지만, 빛고리는 저번에 만나봤던 터라 마음이 든든했다.

게다가 하나 더.

"헤일로 제작이 해금됩니다!"

"엘더 잉걸불을 비롯한 재료들을 수급해 헤일로 제작이 가능해집니다."

"헤일로 제작은 뉘우치는 대장간에서 가능합니다."

잉걸불과 함께 재료를 모으기만 한다면 이제 헤일로를 직접 제작할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직접 제작인만큼, 약간의 하자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것으로도 전력은 강화된다.

아쉬운 사람들이 있기는 하니까.

'관찰자 같은 비전투 계열은 헤일로를 얻기가 힘드니까.'

비전투 계열이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이번에도 관찰자의 역할은 컸다.

그런 만큼 그가 헤일로를 얻는다면 기프트 능력이 더 강화될 것이다.

카오스 게이트를 나선다면 최우선으로 관찰자의 헤일로 제작을 위해 필요 재료란 것을 모아야겠다.

변화는 이것만 있지 않았다.

"통합 네피림 순위가 갱신됩니다."

통합 네피림 순위가 갱신되었다.

통합 네피림. 이게 무엇인고 하니.

"그렇군."

네피림들의 레벨 순위가 국가 단위가 아닌 전 세계 단위로 나온 것이다.

[통합 네피림 레벨 랭킹]

[1위 미국-메타르 Lv.8]

[2위 중국-미룡 Lv.7]

[3위 브라질-윈드킬 Lv.7]

[4위 영국-마스크 Lv.7]

[5위 한국-데몬시드 Lv.7]

물론 내 성적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기프트가 둘이기 때문에 원래 레벨이 낮았다.

그나마 오늘 레벨업을 했지만, 미국 1위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요새 많이 쉬기도 했고.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이니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건 사실이다.

1위 보상이고 나발이고 가 문제가 아니다.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개인적인 게 아닌 나라 단위의 자존심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5위.

독보적 1위를 달리는 미국의 1위 메타르를 제외하고는 그래도 비슷비슷한 정도라 노력한다면 순위를 조금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니, 올려야 한다.

"지옥 광산이 확장됩니다."

"지옥 광산은 앞으로 더 많은 위협과 더욱 많은 보상이 발견됩니다."

"지옥 대장간이 발견됩니다."

"지옥 대장간은 악마들을 위한 무기가 만들어지는 곳입니다."

"그들을 토벌하십시오."

지옥 광산의 확장.

업데이트였다.

내가 티타누스를 잡아서인지 갑자기 대형 업데이트가 쏟아져나왔다.

지옥 광산의 확장은 썩 나쁘지 않다. 안 그래도 슬슬 지옥석의 채굴량이 적어지고 있다.

무기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지옥석이 꽤 많이 필요한데, 벌써 텅텅 비어가고 있어 어찌해야 하나 막막했는데 타이밍이 좋았다.

"앞으로 지옥 광산에 챔피언 악마가 나타납니다."

"그들은 지옥석을 지키고 군락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명심하십시오. 엘더 또한 이전에는 챔피언이었음을 상기하셔야 합니다."

아마도 지옥 광산의 난도가 꽤 높아질 것 같은 예감이다.

저렇게까지 경고하는 걸 보면 앞으로 지옥 광산은 같은 네피림끼리 가 아닌 악마들과도 싸우게 될 장소로 변모할 듯하다.

"천상의 계단이 해금됩니다."

"천상의 계단은 천상으로 향하는 도전자를 시험합니다."

"도전에 성공할수록 많은 보상이 도전자를 지원합니다."

"천상의 천사가 당신을 시험합니다."

"그릇을 보고, 신심을 시험하며 당신에게 신성력을 내릴 것입니다."

지옥 광산과 천상의 계단.

안 그래도 시험해볼 게 많았는데 때마침 잘 되었다.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다.

썩 괜찮은 변화였다.

그리고 하나 더.

"통합 국가 전투력 랭킹이 새롭게 갱신되었습니다."

"해당 국가의 전체 네피림들에게 순위 보상이 주어집니다."

[통합 국가 전투력 랭킹]

-다음 보상까지 29일.

[1위 미국]

[2위 한국]

[3위 중국]

[4위 브라질]

[5위 일본]

국가별 전투력 랭킹.

이건 또 신선한 순위였다.

"2위라..."

"국가 전투력 랭킹 2위 보상이 주어집니다."

"천사의 깃털 조각 3개를 획득합니다."

"아다만티움 조각 3개를 획득합니다."

『천사의 깃털 조각』

-헤일로 제작의 핵심 재료.

『아다만티움 조각』

-헤일로 제작의 핵심 재료.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국가 랭킹도 올려야겠네."

할 일이 많았다.

업데이트 [3]

151화.

티타누스를 토벌한 이후.

세상은 또다시 바뀌었다.

이제 막 익숙해져 가며 평화를 추종하던 지옥 광산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 더욱 깊은 지역이 드러났다.

그곳의 악마들은 지능이 있었고, 마을을 이루며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전략을 사용할 줄 알며, 무기를 쓰고 함정을 이용해 사람을 죽였다.

더욱 밑으로 향하는 지옥 광산과 달리 천상의 계단은 꿈에서나 보았던 하늘로 향하는 계단이 나와 천사의 시험을 받게 되었다.

이는 대개 선택이었다.

올바른 선택.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것이냐.

소를 위해 대를 희생할 것이냐 등등, 세기의 난제 같은 문제를 천사가 일러주고 답을 받았다.

말만으로 상황을 알게 하는 건 아니었다.

도전자의 정신을 어느 세계로 밀어 넣어 직접 겪게 하여 올바른 답을 이룰 수 있도록 하게 하였다.

물론 선택지에 따라 적과 싸우기도, 아군이 배신하기도 했다.

"시드님."

"무슨 일이야."

"보고 할 게 있습니다."

"아, 응. 말해."

"... 근데 지금 뭐하십니까?"

"어? 아, 엘리스 옷을 좀 사줘야 할 거 같다고 해서 고르는 중이야."

"아, 네."

이미 산처럼 쌓아 올린 여자아이 옷을 보며 관찰자는 헛기침을 뱉었다.

거래소에 눈을 떼지 않은 모습을 보니 벌써 딸바보라도 된 건가.

관찰자는 당연하게 불별도에서 엘리스의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있는 강철 군주를 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인도 말입니다."

"아, 인도. 거기 망하지 않았나."

"예. 인도에는 15군단 군단장, 라볼라스가 지배하고 있죠. 한데 거기가 이번에 인접한 나라인 파키스탄을 침공했답니다."

"...?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거래소에서 옷 고르는 걸 멈춘 데몬시드가 관찰자를 바라봤다.

군단장은 차원의 영향을 받는다.

차원석이 무너지지 않는 한, 거대한 존재감 때문에 침투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사실이다.

"꾸준한 침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 군단장이 아니라."

"예."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다.

군단장은 각 국가 간의 차원을 침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아랫급의 악마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한국만 해도, 북한을 집어삼킨 푸르푸르의 부관인 기시기시가 군대를 대거 이끌고 한국으로 침투했었으니.

본래 인도는 인구수가 중국과 비슷할 정도로 많은 곳이다.

14억 명이라는 숫자를 집어삼켰으니 악마들의 힘도 한층 강해졌거나, 수가 증식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많은 악마를 대거 옆 나라를 공격하는 데 사용했다면, 파키스탄이 막아낼 리 만무하다.

인도의 땅 크기에 비해, 파키스탄은 꽤 작다 할 수 있으니까.

"지원 요청 안 했다던가?"

카오스 게이트가 아니라 현실에서 침공당했다면 동맹국의 지원으로 위기를 타파할 수 있다.

"여기저기 지원 요청은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당했다더군요."

"흠..."

"파키스탄뿐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지원군을 보내기 힘들었겠죠."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나로 힘을 합해 단결하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각각의 파벌로 나뉘어서 정부가 제힘을 못 쓰는 경위가 있는 나라도 존재하니까.

대표적인 게 중국이다.

"인도 바로 옆이 중국이잖아."

"저희와 달리 중국은 신경 쓸 곳이 많으니까요. 중국도 중국 나름대로 침공하는 곳이 많다고 합니다. 게다가 거긴 내전이 심하기도 하고요."

우리나라는 중국과 러시아가 존재하기에 외세의 침략을 걱정할 필요가 적어지기는 했다.

위로 중국과 러시아가 지형적으로 방패처럼 다른 군단의 침투를 막아주는 꼴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말입니다."

"괜찮으니까 말해."

"필리핀으로 여행 가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여행?"

뜬금없이 무슨 여행이냐며 쳐다보자 관찰자는 태블릿 PC를 꺼내 지도를 보여줬다.

"필리핀이 꽤 문제입니다."

"필리핀 거기 망한 곳 아닌가."

몇 달 전인가 필리핀에서 어느 군단장의 분신이 골치를 썩였는데, 그 탓에 인력이 충분치 않아 카오스 게이트에 실패했다고 들었다.

"거기 군단장이 상대하기 꽤 껄끄러운 녀석이라서요. 기본적으로 비행하는 종족이다 보니..."

"여기저기 퍼졌다는 건가."

"예."

지도를 보면 알다시피 필리핀은 하나의 땅덩어리라 보기 어렵다.

꽤 많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지형적 특성 때문인지 필리핀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군단을 풀어 옆 나라를 공격하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필리핀 밑으로는 브루나이와 옆에는 베트남. 위로는 대만과 홍콩이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아, 대만은 망했다고 했던가?"

"그랬는데, 중국이 공략에 성공했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됐군. 그럼 지원 요청은 베트남에서겠어."

"맞습니다. 아시다시피 베트남 1위인 만트라와 저희는 일면식은 있으시니까요."

만트라.

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처음에는 적으로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대국을 볼 줄 아는 녀석이었지라며 데몬시드는 생각했다.

나라를 위해 서로의 목숨은 빼앗지 말자고 했을 정도의 녀석이었으니까.

"중국도 요청했나?"

"아니요. 베트남에서 단독으로 한국만을 요청했습니다."

"중국을 견제하나 보군."

"그것도 그렇겠지만 베트남 상황이 너무 안 좋거든요."

"베트남이?"

"예. 얼마 전 베트남 옆의 캄보디아가 망해서 태국과 공동 작전을 펼쳤지만 실패했습니다. 겨우 목숨만 건졌다고 하더군요."

군단장 레이드에 실패했다면 그럴만하다. 도망쳤다는 걸 보면 겨우 목숨만 건졌을 테고 꽤 많은 랭커들이 죽었다는 소리일 테니.

"그런데 웃긴 게, 그 이후에 태국이 라오스와 협력해 다시 캄보디아를 공격했고, 점령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베트남 없이?"

"예."

이야기가 꽤 재밌게 돌아간다.

"막타 친 건가."

"맞습니다. 몰래 말이죠."

그렇다면 베트남이 꽤 열받을 만하다.

"재밌는 건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또 있어?"

"그때 함께 협력했던 라오스도 그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어서 전멸하다시피 했고, 태국만 남아 헤일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태국에만 헤일로가 3명.

결국 태국만 이득을 보았다.

"베트남과 라오스가 이를 갈고 있지만, 태국은 발뺌한다더군요. 그 와중에 라오스의 랭커들이 대거 죽은 상황에 카오스 게이트가 터졌고 라오스가 멸망했습니다."

"개판이네."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

"더 재밌는 건 지금부터죠."

재밌는 거라고 말했지만, 관찰자는 한숨을 쉬었다.

"태국도 망했습니다."

"걔들은 또 왜?"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라오스가 망하자 라오스로 돌격했거든요. 욕심 부린 거죠."

그 결과.

라오스에 많은 인력을 투자해 점령에 성공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카오스 게이트에서 군단장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그대로 끝.

덕분에 태국과 라오스, 캄보디아는 모두 군단장의 손에 들어갔다는 통쾌하면서도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 천벌 받았다고 하고는 우리도 그럴 입장은 못 되는군."

마냥 욕할 순 없었다.

한국도 티타누스의 카오스 게이트를 막아내지 못했다면 태국과 똑같은 길을 걸었을 테니까.

"그럼 필리핀보다 캄보디아나 그런 곳부터 차근차근 먹는 게 낫지 않나."

"군단장의 힘이 막강해서, 필리핀부터 치면서 힘을 키우겠다더군요."

생각해보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차원석이 3개인 태국엔 그만큼 막강한 녀석이 자리 잡았을 테니까.

티타누스 같은 녀석일지도 모른다.

"필리핀의 땅은 건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대신..."

"만트라가 헤일로를 얻게 해달라고 했겠군."

"맞습니다."

썩 내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도 얼마 전에 큰 피해를 본 직후다.

대형 업데이트로 가려져 있을 뿐이지, 지난 카오스 게이트로 죽은 네피림의 수 만해도 40만 명이 넘는다.

이 상황에 다른 땅을 또 점령하게 된다면 다음 카오스 게이트는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도 땅은 필요 없잖아."

"차원석을 수복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나쁘진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필리핀 때문에 악마들이 판치는 건 피해가 크니까요."

여기서 관찰자의 제안이 이어졌다.

"제가 봤을 때, 저희 전력이라면 필리핀의 군단장은 큰 피해 없이 레이드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필리핀을 점령한 놈들은 70군단이라고 하니까요."

"그렇군."

칠십이라면 꽤 낮은 순위다.

34군단 푸르푸르, 59군단 브릿느.

17군단 티타누스까지 겪어보지 않았던가. 그러니 70군단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긴 하다.

"웬만하면 베트남에게 몰아줘야 하니 저희는 뒤에서 뒷짐만 지고 있으면 될 겁니다. 그것만으로 베트남은 저희에게 식량과 더불어 대량의 물자와 금화를 건네기로 했으니까요. 쌀은 매년 생산량의 10%를 걸기도 했습니다. 본래 쌀 수출로는 베트남이 전세계에서도 꽤 알아주니까요."

그렇다면 썩 나쁘진 않은 조건이다.

일면식도 있는 사이이고, 그들을 악마가 크는 것보단 그래도 인류가 성장하는 게 더 도움이 될 테니까.

한국의 식량은 알다시피 망해있어서 이제 막 복구하려는 참이다.

굶어 죽는 사람이 어마어마하다는 것만 대충 알고 있다.

여름이 지나, 겨울이 온다면 지금보다 아마 더 심해지겠지.

이 상황에 식량은 매력적인 거래다.

"게다가 이번에 저희 헤일로 보유자가 10명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들과 더불어 저 레벨 네피림에게도 썩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레벨? 그렇군."

대충 관찰자의 생각을 알았다.

군단장을 잡으면 5레벨 이하의 네피림은 반드시 레벨업한다.

약간의 참여만으로도 말이다.

베트남을 뒤에서 돕는 것만으로 우리의 힘을 알리며 동맹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한국은 큰 피해 없이 저 레벨 네피림들을 키우기도 쉬우며 동시에 베트남에서 식량과 많은 자원을 얻어낼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인 작전이었다.

"날짜는?"

"13일 뒤입니다."

"2주면 적당하네."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러기로 한 거 아니야?"

"협회장님이 거절하시면 당연히 없던 일 되는 거죠."

단호하게 말하는 관찰자의 태도에 괜히 데몬시드는 머쓱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하는 듯한 쑥스러워하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가끔 이러신단 말이지.'

전장에서는 그렇게 카리스마 있고 용맹한데, 이럴 때 볼 때는 그도 그냥 평범한 사람 같아 보였다.

"일단, 그렇게 추진하자. 해서 나쁠 게 없고, 나도 헤일로 얻은 사람들 전력 좀 평가하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류 가방을 정리하던 관찰자가 생각났다는 듯 한 가지를 물었다.

"그런데, 협회장님."

"응?"

"천상의 계단은 도전해보셨습니까."

"아니. 왜?"

"그것도 랭킹이 있더라고요. 지금 미국 1위가 압도적으로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 보상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선착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중에 해도 상관은 없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자국의 1위가 어디서든 1등 하는 걸 보고 싶다는 마음을 관찰자는 애써 억눌렀다.

안 그래도 지난번 전쟁에서 죽을뻔한 사람인데 벌써부터 무리하며 움직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없으면.'

한국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바람 앞 등불 신세가 아니던가.

그는 그만큼 한국을 상징하는 사람이며 이 나라의 기둥이 된 사람이다.

'물론 본인은 별로 자각하지 않은 듯하지만.'

그래서 관찰자는 이번 베트남 건을 가져오면서도 많이 고민했다.

분명 이득인 일이지만, 아직 티타누스 토벌을 완료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여 그가 거절한다면 바로 거절할 일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게 지금의 세상이었고, 그 없이 진행했다가 큰 피해를 보기라도 한다면 그건 국력이 낮아지는 일이요, 국가 랭킹이 내려가 손해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니.

"아, 관찰자."

"예. 말씀하시죠."

"광산은 어때?"

지옥 광산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번 업데이트로 지옥은 변했다.

"광산의 대형 지옥석이 있는 자리들이 심층부로 들어가는 입구의 포탈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식이구나?"

"예. 심층부로 들어서면 티블이라는 악마 종족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꽤 강력한 종족이고 영악하기까지 해서 위험하지만, 그들이 지닌 장비나 대장 기술들이 뛰어나 지옥석으로 만들 수 있는 장비들이 대거 늘어나고 있다더군요. 안 그래도 바바리안과 스미스씨가 나서서 그쪽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바바리안과 스미스가?"

"예. 아시다시피 녀석, 헤일로를 얻어서 굉장히 신났으니까요. 스미스씨는 지옥의 대장간을 구경하고 싶다고 따라나섰습니다."

이해할만한 이유다.

자기도 헤일로 갖고 싶다고 브릿느 때부터 노래 노래를 불렀으니.

"바바리안의 헤일로가 뭐랬지."

"간단하게 말하면 거대화입니다."

"신날만하군."

거대화.

일명 자이언트.

단순하지만 그만큼 강력하다.

종종 거대한 외관을 지닌 군단장이 나타나곤 하는데 그때 바바리안의 헤일로가 큰 힘이 될 것이다.

"그 밖에도 헤일로를 얻은 이들이 바바리안과 함께 지옥을 공략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새롭게 헤일로를 얻은 이들은 지옥을 자기 무대로 정했다.

"아, 지금은 아직 의심이기는 하지만 지옥에서 아다만티움 조각이 발견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아다만티움 조각.

헤일로의 핵심 재료 조각이었다.

"소문?"

"예, 지옥 심층부에 자리 잡은 각각의 마을 장로들이 있는데 그들이 아다만티움 조각을 갖고 있다는 찌라시가 돌았습니다. 확실한지는 더 조사를 해봐야겠죠."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대거 인력을 투자 해볼 만하다.

"아마존은?"

"아마존을 비롯한 다른 랭커들은 천상의 계단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꽤 높은 순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헤일로 재료를 보상으로 준다고 합니다. 아마존은 아직 얻지 못한 거 같지만 열 계단에 한 번씩 보상이 주어지는 시스템 같더군요."

다른 재료라면 천사의 깃털일 거다.

천상의 계단이니 천사의 깃털이 보상으로 나올 법도 하다. 그에 관련한 걸 고민하고 있자 관찰자가 엘리스를 바라보다 전단지 하나를 건넸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엘리스를 이곳으로 데려가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건 뭐야?"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네피림 아카데미입니다."

아직 부족한 어린아이들을 성숙한 네피림으로 만들기 위한 훈련소였다.

아직 각성하지 못한 아이들을 상대로 보다 안전한 각성과 전투 훈련을 알려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훈련받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니, 그게..."

데몬시드는 강철과 놀고 있는 엘리스를 보았다.

그리고는 고소를 머금고 말했다.

"엘리스가 애들 다 썰어버릴지도 몰라서 안 돼."

"아..."

그러고 보니 그녀.

엘리스는 평범한 소녀라기엔 다소 문제가 있었다.

"시드. 이것 봐라. 엘리스가 많이 잡았다."

강철이 흥분한 듯 소리쳤다.

다가가 보니 바닷가에서 모래 장난이나 하는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해변 근처의 기괴한 바다 악마들을 잡아내고 있었다.

거미줄로 그물을 펼치듯 잡아 붙잡힌 놈들은 거미줄의 날카로움에 모조리 토막 나 죽어 있었다.

"우리 엘리스는 천재일지도 몰라."

"살인의 천재인 건 조금..."

설레발치는 어머니처럼 뿌듯해하는 강철의 모습에 데몬시드와 관찰자가 쓰게 웃었다.

"꽤 많네요. 그리고 이 녀석들. 섬에서 보이던 녀석들이 아니죠?"

"필리핀에서 온 녀석들이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상체는 인간.

하지만 팔과 하체는 새의 것.

그중에서도 맹금류의 발톱이 유난히 길고 날카로운 녀석.

"요새 한창 보인다 싶더니, 이 녀석들 필리핀에서 건너온 거였군."

하피들이었다.

업데이트 [4]

152화.

하피.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접한 인간형 악마로 잘 알려진 녀석이다.

인간의 얼굴과 몸을 지니고 팔과 다리가 맹금류의 것으로 변해 있는 하피는 어디선가 한 번쯤 본적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게임을 하다 보면 종종 봤던 터라 하피 자체는 익숙했다.

커뮤니티에서도 어쩌다 한 번씩 하피의 목격담이 나타나기도 했으니까.

ㅇㅇ:나 하피봄 존나 빠르더라.

┗ㅇㅇ:이쁨?

┗ㅇㅇ:이쁘냐?

┗작성자ㅇㅇ:사람 낚아채서 목부터 뜯어먹더라...

┗ㅇㅇ:와우...

┗ㅇㅇ:그래서 이쁨?

꽤 영양가 없는 대화지만, 맹금류의 날개와 발을 지닌 탓에 속도가 빠르고 발톱이 갈고리처럼 날카로워서 잠깐 한눈팔면 사람 머리가 잘려져 사라진다고 한다.

고속비행을 즐겨하는 녀석들인데 노래로 사람을 홀리기도 해서 상대하기가 꽤 까다로운 녀석들이다.

"대신 방어력은 형편없어서 땅에 내려와 있는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쉽다. 놈들의 둥지에 미리 함정을 설치하거나 하는 쪽으로 말이지."

"상대해본 적 있나."

"내가 있던 곳에 가끔 나타났다. 여성형 악마로 남자들만 잡아가서 모조리 뜯어 삼키고는 알을 낳지. 번식력도 남다른 녀석들이야."

강철 군주는 하피들을 말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꽤 불쾌한 기억이 있는 모양이다.

'남자들을 잡아가서 알을 낳는다.'

아마 번식행위를 강제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피의 목소리는 매혹 계열의 마법이 걸려 있으니 성적으로 흥분시켜 씨를 받아내고 먹어버리는 게 아닐까. 암컷 사마귀가 교미 후, 영양 보급을 위해 수컷 사마귀를 먹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하피들이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렇지?"

"그렇긴 하지."

하긴, 엘리스도 바닷가에 날아다니던 하피를 잡았는데 뭐 그렇게 어려울라고.

필리핀이 하피들의 나라가 되었다지만 내가 그렇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내가 지닌 스킬들은 원거리 용이 많고, 하피들이 아무리 많아봤자 하피라서 내게는 썩 위협적이지 않다.

산책 다녀오는 느낌으로 다녀오면 될 것이다.

어차피 베트남에서도 한국은 위급할 때를 대비해 자신들을 보호해줄 요량으로 지원 요청한 것일 테니.

하지만 생각해보니 제일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필리핀까지는 어떻게 가?"

"그렇군. 필리핀은 섬이잖아."

바다 한가운데 있는 여러 섬이 모여 있는 게 필리핀이다.

가까운 거리까지는 지옥 광산을 이용해서 베트남으로 간다고 해도, 어쨌든 바다를 건너야 하는 건 같다.

전쟁이라는 게 하고 싶다고 금방금방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챙겨야 할 게 많다.

수십만 명을 수용할 막사나, 식량. 그리고 물자 등을 고려해야 하며 이동 수단을 비롯하여 이것저것 돈이 꽤 많이 드는 게 전쟁, 아니 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협회와 정부가 손을 맞잡고 국익을 위해 어찌어찌 해냈지만, 바다를 건너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바다는 인간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악마가 도래하고 인간은 바다로 나설 수 없게 되었다.

땅 위에 있는 놈들이야 토벌하면 그만이지만 인간은 물속에선 한없이 나약해진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건 물론이요, 마음껏 움직이지도 못한다.

관련 기프트를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대부분의 네피림들은 물속에서 평범한 인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태국이랑 베트남은 한번 필리핀으로 갔었댔지? 어떻게 갔다고 했나."

강철 군주가 관찰자에게 물었다.

"그거야 당연히 배를 탔죠."

"바다엔 각종 괴물 때문에 배를 움직이기 어려운 거 아니었나?"

관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뉘앙스를 보니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 있는 모양.

이내 뭐냐고 물어보니.

"섬에 있는 군단장 레이드 퀘스트를 받으면 하늘에서 배를 내려준답니다. 하늘을 나는 배를요."

"오..."

"우와 정말요?"

하늘을 나는 배.

이른바 비승선이란 것이었다.

"수십만 명을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라고 하더군요. 꽤 큰 비용을 투자해야 하지만, 가장 안전하게 건너갈 방법이라고 합니다."

이건 몰랐던 사실이다.

"백만금 정도 소모되지만 그건 저희가 지급할 금액은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몸만 가면 된다는 거지?"

"예."

그럼 뭐 더 이상 신경 쓸 이유는 없어 보인다. 솔직히 준비는 관찰자와 협회 간부진이 할 것이고, 보조적인 건 정부가 알아서 도우며 콩고물을 얻어 먹을 테니까.

난 2주 뒤까지 차분히 쉬면서 휴가를 즐기면 될 일이다.

'아직 데몬시드 스킬도 찍지 못했으니까. 충분히 시간을 들이자.'

시드네스로 데몬시드와 카탈린의 감전이 하나로 합쳐졌다.

게다가 7레벨로 올라가면서 찍을 수 있는 스킬 목록이 나타났다.

당연히 레벨이 오르자 스탯 포인트는 이전과 같았다.

총 6개.

기프트 레벨 1업당 3개이니 하나로 합쳐졌어도 손해 보는 건 없었다.

당연히 전부 마력에 투자했으니 그다음은 스킬이었는데... 이게 조금 고민이었다.

스킬 포인트는 3개.

기프트가 2개였으니 본래 2개여야 정상이지만 3개가 됐다. 그런데도 배울 수있는 스킬의 목록은 5개로 불어나 있다 보니 아직도 고민이었다.

〔데빌스톤〕

-악마의 육과 혼을 돌로 만들어 제물로 사용할 수 있다.

〔네더블룸〕

-지옥의 거대한 강철 꽃을 소환해 시전자를 보호한다.

〔센트헬〕

-지옥의 향기를 퍼뜨려 적을 마비시킨다.

〔카탈린의 역장〕

-피로 만든 번개의 꽃잎으로 역장을 펼친다. 모든 공격을 반사한다.

〔카디텍션〕

-거대한 지옥의 꽃에서 피어난 번개의 눈으로 모든 것을 간파한다.

이렇다 보니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데빌스톤은 일단 찍을 거긴 한데.'

내 데몬시드는 제물이 인간으로만 한정되었다. 하지만 데빌스톤을 찍으면 이제 눈치 보며 사람 시체를 수집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건 효율의 문제라기보다는 도덕적 개념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였다.

예전에야 하루살이 같은 목숨이고 언제 죽을지 몰라 다른 사람의 시체로 내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지금도 내 목숨이 그러한가.

아니다.

대한민국 모두가 죽어도 난 죽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다.

게다가 내 위치는 랭킹 1위. 어쩌다보니 한국을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이런데 함께 싸우다 전사한 동료의 시체에 손을 대어야만 한다는 점이 항상 내 마음속의 죄책감이 날 짓눌렀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이 더러운 악마 놈들을 제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스킬 포인트가 1개라도 난 손해를 감수하고 데빌스톤을 찍었을 테니까.

[데빌스톤]

-악마의 육신과 영혼을 돌에 가두어 데몬시드의 제물로 사용한다.

제물의 효과는 1일.

약간의 마나를 소모하지만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정도다.

사람을 제물로 했을 때는 기본적으로 30일 정도의 효과가 있다.

하지만 데빌스톤은 고작 1일.

어이가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만큼 많이 죽이면 되는 일이고 사람 시체를 쓰는 것보단 나으니.

그러면 이제 다음은 두 개.

'카탈린의 역장은 하나 찍어두는 게 좋을 거 같고.'

모든 마법을 반사해 데미지를 주는 카탈린의 역장은 나 자신에게 미리 걸어두기만 하면 되는 스킬이다.

싸우기 전에 버프처럼 걸어두고 싸우면 될 일이니 어려운 것도 없고, 찍어서 나쁠 게 없다.

물론 보호 스킬이 하나 더 나와서 애매하기는 하다.

'네더블룸이냐 역장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네더블룸은 지옥의 거대한 강철 꽃을 소환해서 막아주는 방패형이다.

아마도 대단위 규모의 충격에도 용이하게 방패막이로 이용할 수 있어 보인다.

'그때는 꽤 힘들었지.'

베헤모스의 메테오를 막을 때, 가시덩굴을 극대화해서 간신히 막았지만 애초에 벨로나의 가시덩굴은 내구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

강철이 둘린 지금이면 모를까 그때는 정말 죽을 뻔했다.

'그때 네더블룸이 있었으면 아마 약간의 피해만 입고 막았겠지.'

네더블룸.

땅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거대한 꽃이 수만 명을 감싸 광역기를 막아주는 그림이 절로 상상됐다.

하지만 역장은 개인 단위.

네더블룸의 광역 보호 스킬에 비해서는 조금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다.

물론 모든 공격을 반사하는 강력한 스킬임은 틀림없지만 말이다.

'센트헬은 별로고.'

완벽하게 양학용이다.

약한 악마들한테는 통하겠지만 챔피언급이나 군단장 급에는 통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센트헬에 이런저런 스킬을 중첩하거나 한다면 분명 쓸모는 있겠지만 굳이?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예전과 달리 광범위한 스킬보다는 웬만하면 군단장 레이드에 쓸만한 스킬을 찍는 게 좋으니까.

다음은 카디텍션.

사우론의 눈이 떠오르는 유틸성의 스킬로 보였다.

숨어 있는 적을 찾아내는 스킬로 꽤 괜찮아 보이지만, 아쉽게도 한국엔 아마존이라는 달의 눈을 가진 아군이 존재한다. 굳이 내가 이거까지 찍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싶다.

'생각하다 보니 찍을 게 정해졌네.'

공격 스킬이 썩 없어서 아쉽지만, 이번엔 이 정도로 충분해 보인다.

게다가 데몬시드와 카탈린이 합쳐져서 스킬 포인트를 3개씩 얻게 되었으니 지금은 아쉬워도 다음엔 더 좋은 스킬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니까.

곧장 네더블룸과 역장까지 스킬을 찍고 나자 관찰자가 돌아간다며 인사를 했다.

"돌아가게?"

"예, 필리핀행이 정해졌으니 준비할 게 많으니까요. 네피림들의 지원도 어떻게든 끌어내야 하고... 아시다시피 이번에 좀 많이 죽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

카오스 게이트에서 많은 네피림들이 죽었다.

죽음이란 익숙해지기 힘들다.

대규모로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면 랭커들도 죽음 공포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한다. 그런데 보통의 네피림들은 어떻겠나.

경험이 많지 않은 이들은 지레 겁먹고 레이드에 참여하지 않는다.

"협회와 정부의 홍보가 중요해 보입니다. 이번엔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광고 좀 해야죠."

"그래, 고생이 많다."

"그럼, 2주 뒤에 뵙겠습니다."

작별 인사를 마치고, 곧장 엘리스가 썰어버린 하피를 씨앗으로 바꿨다.

생각해보니 하피를 심으면 뭐가 나올지 모르는 상태.

심어보고 열매가 뭘 주는지 한번 알아보는 게 좋겠다.

"데빌스톤을 사용합니다."

"서펜트의 데빌스톤을 획득하셨습니다."

"이런 식인가."

탁.

손안에 들어온 검은 돌.

이게 데빌스톤이었다.

중심부는 조금 붉었는데 악마의 혼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리라.

곧장 엘리스가 토막 낸 놈들을 짜 맞춰 데빌스톤으로 모조리 만들고 적당한 곳으로 가 하피 씨앗을 심었다.

"데빌스톤을 사용합니다."

"데몬시드가 성장합니다."

하피의 성장기간은 89일 정도.

악마의 시체들을 꽤 많이 모아두고 데빌스톤을 사용하자 하피의 씨앗이 완전하게 성장했다.

"포도네."

하피 씨앗이 성장한 열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검붉은 포도송이였다.

한 알을 따먹어 보자 맛도 포도랑 똑같았다.

"하피의 포도를 섭취합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매혹 내성 0.04를 획득합니다!"

"상위의 면역체계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무효화 됩니다."

"매혹 내성?"

아쉽게도 나는 썩 필요가 없는 녀석이다. 매혹 종류는 프로비던스로 반사할 수 있고, 이번에 시드네스로 몸이 재구성되면서 얄팍한 저주 종류는 대부분 면역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쓸만하긴 하겠어."

내가 아니다.

브란스가 있다면 이걸로 매혹 저항 포션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해.'

모두가 같이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번 여정에서 단 한 명의 목숨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난 당장 브란스를 찾아갔다.

그런데 웬걸.

선객이 있었다.

"남편의 바람기를 잡아줄 묘약이라... 그런 게 있기는 하지. 묘약이라기보다는 방법인데, 들어보겠느냐?"

"네!"

레아와 브란스가 뭔가를 진지하게 얘기 중이었지만, 굳이 엿듣지 않기로 했다.

천상의 계단 [1]

153화.

탁.

식칼로 무를 써는 레아는 강철과 꼭 손을 잡고 불별도를 거니는 엘리스를 보며 눈가를 가늘게 떴다.

레아는 요 근래에 심기가 불편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강철 군주가 찾아와 엘리스와 시간을 보냈다.

그거까지는 별로 상관없다.

레아 또한 강철과는 좋은 관계가 있었고, 그녀 자체를 나쁘게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요즈음은 자꾸만 신경 쓰였다. 문제 대부분은 이화성.

바로 데몬시드였다.

"데몬시드. 엘리스랑 제주도를 가보고 싶은데 괜찮겠나."

"제주도?"

"제주도에 뿌리내린 곤충 종류의 악마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인다고 한다. 히든던전이 꽤 많이 발견되고 있다고도 하니, 엘리스와 산책 겸 다녀올까 싶은데. 내가 어쩌다 보니 아카데미 인솔자가 되기도 해서."

"그래? 그럼 나도 갈까."

"그, 그러겠나?"

탁!

"뭐야? 무슨 소리야? 레아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벌레가 좀 있어서..."

힘 조절에 실패해 도마까지 썰어버린 레아는 황급히 치워버렸다.

"조심해야지."

"네, 그럴게요."

싱긋 미소 지은 레아는 그가 뒤돌아서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꼬리를 내렸다.

여간 문제가 아니었다.

데몬시드는 데몬시드대로.

강철은 강철대로.

또 엘리스는 엘리스대로 레아의 심기를 거슬렀다.

부엌 정리를 마친 레아가 강철과 데몬시드 옆으로 끼어들었다.

"엘리스는 어쩜 이렇게 이쁠까? 엄마. 해봐. 엄, 마."

그러자 엘리스는 레아를 힐긋 보고는 강철을 가리키며 말했다.

"엄마."

그리고 레아를 가리키고는.

"레아."

이내 데몬시드에게는.

"아빠."

라고 말했다.

레아의 볼에 경련이 일었다.

눈빛은 어느새 차게 식었다.

"데몬시드! 이것 봐라. 벌써 엄마, 아빠 말고 다른 말도 가능해졌다.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흠, 천재일지도."

데몬시드와 강철 군주의 꼬락서니를 보자니 왠지 열불이 끓어 올랐다.

"역시 그렇지? 아이는 조기 교육이 필수라던데... 역시 아카데미를 보내는 게 맞겠어. 내 동생도 아카데미에 보내려고 하거든."

"사촌 동생 말인가?"

"응, 저번에 봐서 알겠지만 그 녀석도 네피림이 되겠다고 떼쓰고 있거든. 아마 삼촌 때문이겠지."

"그렇군."

레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강철군주의 사촌 동생? 삼촌? 자신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저번에 강철을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인가...?'

강철이 레이드 불참을 선언했을 때.

데몬시드는 한번 그녀를 찾아갔다.

생각해보니 남녀가 한집에 있던 것이었다!!

'남녀가 한 집에! 한 방에! 한 침대 위에서!!'

분명 사촌 동생도 있었다고 이야기 중이었지만 레아에게 그런 자질구레한 이야기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근데 엘리스는 너무 어리지 않나? 수틀리면 전부 죽여버릴지도 몰라."

"엘리스는 착한 아이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거다."

"그건 그렇고 아카데미라니. 출산율이 높아졌다더니 벌써 이런걸 계획하는 건가?"

"세상이 이러니까. 죽기 전에 뜨겁게 사랑하고 결실을 맺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와 강철은 고개를 절로 끄덕거리며 아이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강철의 얼굴이 붉어져 홱 고개를 돌렸다.

레아의 붉은 눈동자는 그녀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왜 그러지?"

"아, 아니다. 아무것도."

레아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때, 둘 다 헐벗고 있었죠.'

티타누스의 머리 위에 핀 꽃.

그곳에서 둘은 헐벗고 나타났다.

물론 엘리스도 그곳에 있었지만, 레아의 안중은 아니었다.

"제주도는 언제 갈 거지?"

"시간 괜찮으면 지금부터 가도 상관없다. 마침 시간이 비니까."

"그럴까."

물론 그곳에서 레아는 외톨이었다.

저 공간에서 레아는 완벽한 타인.

어떻게 끼어보려 해도 쉽사리 끼어들 수 없었다.

뭐랄까.

자신이 모르는 서로 간의 끈끈한 무언가가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저번 카오스 게이트 이후로 둘의 사이가 급속도로 가까워진 느낌이다.

마치 자신은 섞일 수 없는 서로 간의 비밀을 공유한 것만 같은 사이?

물론 레아는 안다.

시드네스로 인해 데몬시드가 간신히 살아남았고, 어쩌다 보니 저 셋이 뒤섞여 신체를 공유하게 됐다는 걸.

관찰자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레아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저렇게 가까워지게 된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엘리스에 대한 것도, 엘리스가 왜 둘을 상대로 엄마 아빠라 부르게 된 경위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서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감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

얼마 전 브란스가 그랬다.

'본래, 바람난 남편의 바람기를 잡기란 쉽지 않지. 남자란 놈들은 원래 항상 새것을 찾기 마련이거든.'

'새것이요?'

'손에 익은 건, 손에 익은 대로 좋고 익지 않은 건, 익지 않은 대로 좋은 것 아니겠나. 길들이는 맛이 있으니 옛 귀족 부인들은 남편의 바람기를 잡으러 흰 숲의 현자를 찾곤 했지.'

브란스는 바람기를 잡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알려주기도 했다.

'함께 바람난 여자를 죽이면 된다.'

'... 현자 맞으신거죠?'

'물론! 그것도 방법이지만 그건 하수다! 굳이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지. 원래 억만금을 받아도 가르쳐 주지 않는 건데... 크흠.'

'그렇죠? 방법이 있는 거죠!?'

'바람기를 잡을 방법! 그건 말이다. 새 여자를 붙여주는 거지!'

썩 쓸모가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게 왜 방법인데요...'

'이 여자, 저 여자를 붙여주다 보면 결국 질려서 돌아오게 되어있다. 남자란 그런 생물이거든. 모든 쉽게 질리고 질리게 되면 결국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지. 조강지처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 어쩔 수 없는 폭풍이라 생각하거라.'

결국 남자의 바람기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만큼은 이해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조각내고 구겨 넣을 수 있었다면 세상의 크고 많은 문제 중 대다수는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역시 어쩔 수 없으려나.'

레아는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의 딸.

시대적 상황을 보노라면 공주였다.

그렇기에 그 시대상의 교육을 받았던 터라 높은 계급이 사내가 처와 첩을 여럿 두는 것은 보기 좋은 풍조는 아니었으나 대부분 그렇게 했다.

귀족의 결혼이란 건 정치적인 거래가 밑바탕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애초에 레아 또한 원치 않은 결혼을 시작으로 비극이 일어났던 사람 중 하나이지 않던가.

언제쯤 다시 자기를 봐주려나 싶어 마음이 아파오기는 하지만, 결국 그녀가 인내해야 할 부분이었다.

결국, 모든 선택은 자신이 감내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레아, 여기서 뭐 해."

"네?"

"제주도 갈 준비해야지."

"... 저도요?"

"그럼 당연히 레아도 가야지. 우리 어디 놀러간 적 없었잖아. 물론 제주도에 깔린 악마 토벌이 주된 목적이기는 하지만, 겸사겸사."

겸사겸사란 말이 있다.

레아는 오늘부터 그 말이 좋아졌다.

데몬시드는 머쓱한 듯, 볼을 긁으며 이런 말까지 첨부했다.

"제주도는 원래 한국에서 신혼여행으로 많이 가기도 하고... 데이트로도 많이 가는 곳이거든."

시무룩하던 레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화성님도 신혼여행 제주도로 가셨어요?"

"난 안 갔어. 그땐 돈이 없었거든. 생략한 거지."

그리곤 레아를 내려다보며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이 처음이야. 나도."

그게 물론, 단둘이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레아는 이걸로도 충분했다.

"네! 같이 가요!"

*

제주도에서 돌아온 뒤.

난 자리에 앉아 하면에 떠오른 창 하나를 유심히 지켜봤다.

[천상의 계단 랭킹]

1위-미국 메타르 35계단

2위-브라질 윈드킬 27계단

3위-영국 마스크 23계단

4위-미국 점퍼 17계단

5위-한국 아마존 14계단

모바일 게임을 하다 보면, 어김없이 나오는 콘텐츠들이 있다.

무한 어쩌고 콘텐츠.

나는 천상의 계단도 그것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무한한 계단을 오르는 게, 모바일 게임의 주류 콘텐츠 중 하나인 무한한 탑을 오르는 것과 똑같다.

자세한 방식은 다를지언정, 비슷한 시스템이라 나름대로 친숙했다.

그렇다.

너무 친숙한 게 문제였다.

그래서 오히려 손에 안 간다는 말이 맞았다.

"이런 거 지루하단 말이지..."

막상 하면 쭉쭉 올라가는 재미가 있지만 그건 잠깐뿐.

이내 어마어마하게 지루해진다.

그렇다고 하지 않으면 보상을 받지 못하니 그만큼 경쟁력에 뒤로 밀리기 마련. 랭킹에 손해가 오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숙제 같은 거랄까.

게임에서는 무한한 콘텐츠와 재미를 위해 무한의 탑을 그렇게 어렵게 만들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에서 난이도를 상승시켜 멈추게 하고 그만큼 과금 유도를 하는 식이다.

그렇다 보니 천상의 계단이 처음 나왔을 때, 도전 욕구가 샘솟는다기보다는 시작하기가 막막하다는 감상이 더 맞았다.

그래서 뒤로 미루고 미뤘지만.

"해야지."

결국 해야 했다.

랭킹 1위부터 10위까지 한국 네피림의 이름이 아마존밖에 없다는 것이 첫째요, 보상이 꽤 짭짤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다음 레이드까지 일주일.

일주일 동안 가만히 놀고 있을 수는 없고 멀리 가기엔 애매하니 천상의 계단을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지옥은 바바리안이랑 스미스가 열심히 정벌 중이니.'

지금 와서 끼어들기도 좀 그렇다.

랭킹 1위란 아래 순위들의 사냥터에 함께 가면 민폐가 되어버리기 마련이고 그곳엔 랭킹도 없으니.

"가볍게 1위 한번 해볼까."

하기로 정했다면 지체할 이윤 없다.

"천상의 계단에 입장하시겠습니까."

바로 입장을 누르니.

촤악.

포탈이 나타났다.

황금빛 포탈.

천상의 느낌이 물씬 나타났다.

미국 1위가 35계단을 오르는 중이라니 40계단 정도만 오르면 충분할 거다. 이왕 하는 거 1등 하지 않으면 체면이 서질 않으니까.

황금빛 포탈로 이동했다.

그러자 눈부신 빛이 내려섰다.

눈부셨으나 뜨겁지는 않았다.

시원했고 또는 포근했다.

오묘한 색의 오색구름이란 이런걸 뜻하는구나 싶었다.

베이지색 구름의 결 사이사이에 채도 높은 색들이 은근하게 뿌려져 있는 듯한 모습.

한번 뜯어 먹어보고 싶은 구름 사이 웅장한 계단이 쿵쿵쿵 등장했다.

보통의 계단은 아니었다.

크기만으로 따지자면 거인이 올라갈 만한 계단이었다.

머리 하나 정도까지 올라가 있는 계단이 여명의 빛 위로 이어져 있었다.

[천상에 오르려는 자, 그대는 무엇을 원하고자 하는가]

[힘인가, 아니면 명예인가]

[헌신인가, 아니면 분노인가]

선택지가 떠올랐다.

천상에 오르려는 이유.

도전의 근원에 물으니 나 또한 곰곰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엔 살기 위해서였다.

악마가 뿌리내린 잔인한 현실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힘을 갈구했다.

이후엔 명예를 얻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정상에 오르니 나라를 대표할 언행을 갖췄다.

다음엔 또 살기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내 삶의 기저엔 분노가 자리 잡아 있었다.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다.

날 배신하고 죽이려 했던 놈들.

그 연놈들을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

나는 아직도 그것에 분노하며.

또한 후회한다.

[분노하는 도전자여]

[그대는 분노의 계단을 오르라]

[그 끝엔 언제나 빛이 있을지니]

계단의 크기가 줄어들었다.

난 내게로 맞춰진 기분이 들었다.

미묘하게 분위기도 달라졌다.

'살기가 느껴진다.'

어느새 찬란하던 빛이 쇠약해졌다.

해를 가린 먹구름처럼 어두컴컴해져 작은 불만이 계단의 끝을 아른아른했다.

구름 속에서는 불꽃이 피어난다 싶더니 어느새 용암들로 바뀌었다.

순식간에 천상이 아닌 지옥으로 변한 풍경과 함께.

[지옥에 있는 자여, 오르라. 그 끝에 그대가 찾는 빛이 있으니.]

계단을 오르라 종용받았다.

"이런 식인가."

이내 한 계단을 오르자.

"분노의 계단을 오릅니다."

"분노의 계시가 내려집니다."

"면역되었습니다."

"??"

"첫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건강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다음 계단에 도전하시겠습니까?"

"..."

[...]

아마 예상하건대.

"저주 면역 때문인가."

내게는 천상이 보여줄 환상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천상의 계단 [2]

154화.

저주 면역.

시드네스로 육체가 재구성될 때.

나는 저주면역을 얻었다.

17군단장 티타누스의 저주 탓에 놈의 뱃속에서 아무 능력도 사용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저주면역을 얻은 이유엔 놈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주면역의 수비 범위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는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분이다.

저주라는 개념 자체가 현대에는 생소하고 광범위하여 어느 것을 막아주는지까지는 아직도 모호하다.

하지만 여기서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저주 면역이라는 건 꽤 광범위한 방어체계였다.

"설마 여기서 발동될 줄이야."

아마도 천상의 계단은 도전자에게 만들어둔 환상을 심어두고 그곳을 돌파하면 성공하는 식인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저주면역이 발동해버릴 리가 없으니 말이다.

"다섯 번째 계단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다섯 번째 계단까지 5초 만에 돌파했다.

아무것도 없는 계단을 오르는 일은 어려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계단은 당신의 분노를 잠재울 것입니다."

"빛이 있는 곳까지 오르십시오."

"천상의 그늘이 당신을 감쌉니다."

"몸이 무거워집니다."

"하늘의 꾸짖음이 깃듭니다."

"면역됩니다!"

"다섯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마력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다음 계단에 도전하시겠습니까?"

"흠."

괜히 눈치를 살피게 된다.

남들은 다 고생고생하며 올라가는 거 같던데 이거 참.

"이거 내가 올라가도 되려나."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였지만, 이 또한 내 능력인데 어쩌랴.

성큼성큼 올라갔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능력치를 부여받았다.

기본적으로는 근력과 건강 종류였고 5를 기준으로 마력이 주어졌다.

"여섯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일곱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여덟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아홉은 신에게 가장 가까운 수이자 동시에 미완인..."

"아홉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열 번째 계단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너무 쉽다.

너무 쉬워서 건방지게도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올랐다.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라 흠칫하며 금세 손을 뺐다.

그러나 금세 다시 넣었다.

"열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뭐 열 번째라고 딱히 다른 건 없었다.

다른 게 있다면.

"천사의 깃털 조각 3개를 획득하셨습니다!"

천상의 깃털 조각.

이걸 얻었다. 가만 보니 다섯 번째는 마력을 주고, 열 번째는 천상의 깃털 조각을 주는 모양이다.

물론 더 올라가 봐야겠지만... 딱히 다를 건 없어 보였다.

"스무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서른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마흔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이게 맞나..."

"마흔아홉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마나 재생이 1% 상승합니다."

한층, 한 층을 오를 때마다 각각의 능력치가 올라갔다.

기본 능력치일 때도 있고, 세부 능력치로 빠진 것들이기도 하다.

명중이나 시야, 마나 재생이나 소성 내성이나 피해력까지도 말이다.

+1이나 1%씩 오르다 보니 적다고 느낄 수 있겠으나 50계단, 100계단, 1,000계단까지 생각한다면 그 수치는 절대로 적지 않았다.

물론 천 계단까지 존재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태라면 백 계단은 능히 오를 테니 상승한 능력치의 합만 백에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확실히 일반 네피림들은 계단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전투력이 많이 올라가겠어.'

기본적으로 네피림이 능력치를 올릴 수가 있는 방법은 엘릭서를 먹든지, 레벨업으로 올리는 방법 말고는 딱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벨은 경험치만 채운다고 되는 게 아니라 일정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법. 그걸 제외하면 네피림이 기본 능력치를 올리는 일은 아이템을 제외하면 별로 없다.

그렇다 보니 그들에게 천상의 계단은 능히 전투력과 생존력을 올려주는 고마운 콘텐츠이다.

'물론 오를 수가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천상의 계단 랭킹]

1위-한국 데몬시드 49계단

2위-미국 메타르 37계단

3위-브라질 윈드킬 28계단

4위-영국 마스크 25계단

5위-미국 점퍼 17계단

6위-한국 아마존 15계단

랭킹을 보니 당연하게도 1위를 차지했다.

잠깐 미국 1위인 메타르가 한 계단을 더 오르기는 했지만 날 따라오기엔 아직 멀었다.

'아마존한텐 미안한 짓을 했군.'

5위였는데 나 때문에 6위가 됐다.

더 분발하라는 의미로 응원의 쪽지를 보내주자.

간단히 메시지를 보내고 오십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렸다.

쿵!

"면역되었습니다."

"오십 계단도 별거 없네."

"오십 번째 계단을 완주하셨습니다."

"아다만티움 조각 5개를 획득하셨습니다."

오십 번째는 아다만티움을 얻었다.

꼭 지옥에 가지 않아도 얻을 건 얻을 수 있는 모양이다.

"감질나니까 이제 뛰어볼까."

슬슬 계단 오르는 것도 지겹다.

애초에 대한의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면 계단을 하나씩 오르는 일은 없다. 두 계단씩 성큼성큼 올려야 답답하지 않지.

"오십일 번째 계단을..."

"오십 이번째 계단을..."

"육십 번째 계단을 완주..."

"육십 네 번째 계단을 완주..."

성큼성큼 뛰어가기 시작하자 시스템 메시지가 급속도로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 자식들도 웃기는 게 얼마나 날로 먹으려고 전부 환상을 보여주는 걸로 시련을 준비했을까 싶기도 하다.

"버그 검수 안 하지?"

이런 게 바로 날먹이라 하던가.

썩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