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7

서열싸움 [2]

136화.

[앞으로는 헤일로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뉘게 될 거다.]

커뮤니티에서 화두에 올랐던 그 말에는 나 또한 동의했다.

헤일로는 강력한 힘이다.

당연히 헤일로의 고유효과는 너무 할 정도로 좋다.

그걸 제쳐두더라도 기본적인 육체 스펙이 몇 배나 뻥튀기되는 효과는 네피림의 전투 방식 그 자체를 바꾼다.

『신의 사자』

모든 신체 능력을 100% 상승시켜주는 헤일로의 능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반드시라고 말할 정도로 앞으로는 헤일로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극명하게 차이 날 게 분명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난 악과를 먹거나, 그것을 농축한 브릭서를 먹어 현재는 모든 스탯의 평균치가 70을 넘어섰다. 평균 능력치가 70이니 헤일로만으로 120%가 상승하여 평균 능력치는 150 정도.

하지만 다른 이들도 과연 그럴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높아봤자 삼, 사십이겠지."

그렇다면 헤일로로 버프 된 신체 능력은 고작해야 칠, 팔십.

신체 능력의 평균치가 팔십 정도라면 강화되어봤자 헤일로를 활성화하지도 않은 내 육체 스펙과 비슷하다.

그럼 내성은 어떨까.

내성도 마찬가지다.

아이템의 효과로 내성이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 네피림들은 내성이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은 지닌 장비나 아이템의 효과로 내성이 올라간 것이고 그마저도 특이한 기프트를 지닌 특성으로 올라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평균적으로 네피림들이 지닌 내성의 수치는 높아 봐야 10% 정도.

십 퍼센트가 백 퍼센트 버프 되어봐야 이십 퍼센트밖에 안 된다.

그리고 바로 그게, 내가 독일과 러시아 1위를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쓰러뜨린 결정적인 이유다.

"저주와 독에 대한 내성을 챙긴 네피림은 많지 않지. 그들이 쉽게 쓰러진 것도 당연해."

대기 중으로 퍼지는 독을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갖추게 되었더라도 미세한 입자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군단장한테는 안 통했는데 말이지.'

푸르푸르는 당연하다고 말할 정도로 독에 대한 내성, 열병에 대한 내성이 갖추어져 있었다.

군단장한테 통하지 않는 거지 그렇다고 내 독이 아무나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하진 않다.

아마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독일과 러시아 1위는 죽었을 것이다.

물론, 자기가 열심히 만든 브릭스를 건네줬다고 브란스한테 꽤 혼이 나기는 했지만, 둘 다 랭킹 1위를 잃어버린 나라다.

이번에 한 번 더 죽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꽤 문제가 많아지지 않겠는가.

까부는 거 보면 그냥 죽여버릴까 하다가도 미룡과 가면과 놀았던 그때가 떠올라서 그러지 않았다.

그들도 내게 살의를 느껴서 그런 신경전을 벌인 건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들과 친해진 것처럼 관계가 좋아지지는 못할 거다.

미룡과 가면 때와는 달리 엘더 레이드 채널이 오픈되어 있어도 우린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아마도, 그들이 우리와는 달리 이번에 1위가 된 자들이라 그럴 거다.

러시아 1위는 당연히 그렇고, 독일 1위도 정보에 의하면 저번 레이드 때 본래 1위가 죽었다고 했으니.

'미룡과 가면은 1위 끼리라는 동질감과 나름의 해방감이 있었지.'

1위이기에,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기에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말도 조심해야 하던 우리에게 엘더 채널은 일종의 탈출구였다.

왜 그렇게 됐는지 뒤늦게 들어간 난 모르겠지만 미룡과 가면이 그러고 놀고 있어서 나도 그렇게 됐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했다.

1위가 가진 고독함, 막중함과 책임감. 그리고 여유가 있었다.

자기 실력에 대한 확신.

한번도 1위를 뺏기지 않은 자신감이 우리에겐 있었다.

그렇기에 터놓고 지냈다.

지금은 그마저도 그립지만.

"그러셨군요."

대한민국 위치의 막사 안.

레아는 내 말을 들으며 간이용 요리 솥에 불을 피우고 스튜를 끓였다.

나만의 상점에서 빵을 팔다 보니 이것저것 다 넣고 끓인 스튜와 함께 적셔 먹는 빵은 나름대로 별미였다.

"자요."

"고마워. 근데 레아 쪽은?"

"저는. 그냥 술래잡기했죠."

"괜찮았어?"

"네. 조금 반성하게 됐어요. 요새들어 힘으로만 다 해결되다 보니까,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적은 신기했어요.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고... 페이블이란 사람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았어요."

싸우다가 조금 친해진 모양이다.

"바바리안은 계속 씩씩거리던데."

"쟈카이라는 사람이었던가요. 그 사람이 물고기처럼 자꾸 공격을 다 피하고 자기만 맞았다고 화내더라고요. 얼굴이 팅팅 부어서 왔는데."

"치료해주지, 그랬어."

"치료를 거절하셨어요."

"단단히 화가 났나 보네."

왜 치료를 거절했는지 알겠다.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며 복수할 생각이겠지.

바바리안다운 생각이다.

"강철이랑 아마존은?"

"두 분은 비기셨대요."

"오... 독일도 만만치 않구나."

"그러게요."

내 말에 동조하는 것치고는 표정이 꽤 좋아 보였다.

"왜 웃어."

"화성님이 버릇없는 타국의 1위들을 손 하나 안 대고 쓰러뜨렸으니까요.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한국의 사기가 굉장히 올라갔어요. 저쪽은 아마 지금쯤 비구름이 몰려온 것만 같은 분위기겠죠."

왜 신나 보이나 했더니.

"참나. 그게 그렇게 좋았어?"

"네!"

희희 웃는 레아의 볼을 조금 쓰다듬어 주었다.

내 일을 자기 일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크흠."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강철 군주였다.

"조금... 이따가 오면 될까."

"아니. 들어와라."

민망한 상황이 연출 됐지만, 레아는 얼굴만 붉힐 뿐 막사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지."

"아, 음. 러시아 쪽에서 공문을 보내왔다. 출발은 사흘 뒤라더군."

"사흘 뒤라. 빠르군."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대표적인 악마들에 관한 자료는 이따 회의실에서 함께 말하기로 했는데, 괜찮나."

뭐가 괜찮다는 거지. 의아해하자 강철이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썩 중요한 내용은 아니니, 쉬고 싶다면 이곳에 있어도 돼."

강철이 은근한 눈으로 레아와 날 번갈아 쳐다봤다.

이상한 오해를 한 모양이다.

"아니, 괜찮다. 회의엔 참석하지."

"그런가. 그럼 알겠다."

강철은 헛기침을 뱉었고, 레아는 입술을 댓발 내밀었다.

*

독일군 지휘 막사.

"크하하하하! 레이지! 네가 손 한번 못 써보고 당했다고? 푸하하!"

"닥쳐라. 쟈카이. 한 번만 더 웃으면 대가리에 총구멍을 내주겠어."

쟈카이는 자기 손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하지만 웃음을 멈출 수는 없는지 볼을 크게 부풀리며 참고 있었다.

"제기랄."

레이지가 욕하자 독일 랭킹 2위 프레블이 찻잔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요."

"무슨 소문."

"저번 레이드. 답지 않게 그 여자가 그런 소릴 했잖아요."

"... 중국 1위? 하, 그 헛소릴 믿으라고?"

중국과 독일의 광산은 맞닿아 있는 편이라 나름의 교류가 있다.

헤일로를 가진 국가이다 보니 얼떨결에 정보 교류를 조금 했었다.

그곳에서 중국 1위.

미룡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건들지 마라. 이번 레이드는 그 혼자 처리한거나 마찬가지니까. 였던가요."

"헛소리. 군단장 레이드는 네피림 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냐.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레이지는 지난 레이드는 떠올렸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독일이 합심하여 정말 겨우겨우 쓰러뜨렸다.

그 땅에서 죽은 네피림의 숫자는 27만 명이 넘었다.

"삼국이 자그마치 17만 명의 피를 흘리며 간신히 얻어낸 승리였고 희망이었다. 우리가 그런 희생을 치르며 얻어낸 승리였는데, 고작 아시아인들이! 게다가 거의 혼자 이겨? 말도 안 돼!"

쟈카이도 레이지의 말에 동의했다.

"이번만큼은 레이지 의견에 동감. 아무리 강하다 해도 안되지. 그리고 한국의 1위는 독을 썼잖아. 알다시피 군단장 레이드에 독은 안 통해. 페이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페이블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군단장들은 대체로 내성이 높다.

웬만한 디버프 공격은 통하지도 않고 통한다 하더라도 그 효율이 극악할 정도로 낮다.

"하지만 그는 독뿐이 아니었죠?"

"..."

"헤일로도 안 꺼냈고요."

쾅-!

테이블을 내려친 레이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페이블의 멱살을 쥐었다.

"그래서 씨발! 페이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엉?"

"그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그 난리를 피웠어도 우린 모른다는 거에요. 미지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죠. 물론, 우리가 그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요. 아, 당신은 아니던가."

"칫."

페이블의 멱살을 놓았다.

레이지는 생각했다. 열받게도 이 능글맞은 여자의 말이 맞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어.'

어느 순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순간, 몸에서 마나가 전부 소진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눈치챈 순간 보인 건, 기울어지는 시야와 등 돌린 놈의 뒷모습.

그리고.

'시시하군.'

이라 말했던 혼잣말이었다.

꽈아악.

말아쥔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레이지. 피나요."

레이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막사를 나갔다.

"레이지. 어디 가나."

"화이트한테."

나가려는 레이지의 어깨를 쟈카이가 잡았다.

"레이지. 우리의 이번 목적을 잊지 말기 바란다. 독일을 위해서야."

독일을 위해.

"... 알고 있어. 너희들 중 하나한테 헤일로가 갈 수 있도록 할 거다."

그게.

"독일을 위해서니까."

막사를 나간 레이지를 바라보는 쟈카이와 페이블의 눈에 걱정이 서린다.

"괜찮을까요."

"레이지는 아직 어리지. 어리니까 당연한 거야. 저 정도 혈기는."

쟈카이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페이블은 달랐다.

"너무 어려요. 이제 스무 살이니까요. 쟈카이, 당신은 스무 살에 뭘 했죠."

"나? 나는 대학가에서 여자친구랑 알콩달콩 재밌게 놀았지. 크크."

손가락으로 성희롱하는 쟈카이에게 시선을 거둔 페이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레이지가 걱정이에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게 걱정이면 막사에서 맘마 주면서 위로라도 좀 해주지 그래. 레이지가 싫다면 나라도."

휘잉.

어느새 페이블은 안개로 변해 사라져 있었다.

널찍한 지휘막사에 홀로 남겨진 쟈카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손에 쥔 맥주를 꿀꺽꿀꺽 털어 마셨다.

*

러시아의 모스크바라고 한여름에서까지 밍크로 만든 털모자를 쓸 정도로 춥지는 않다.

러시아라고 해도 여름엔 나름대로 따뜻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화이트는 그런 계절 감각 따윈 잊었는지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화이트."

"... 레이지."

화이트는 레이지를 보자마자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그가 준 해독제는 훌륭했어. 어디서 얻었는지 궁금할 정도야. 각종 버프는 물론이고 독 내성을 이렇게까지 올려줄 정도니까 말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난 헤일로를 얻어야 해."

"알고 있다."

헤일로를 얻기 위해서는 레이드의 기여도가 높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단장에게 높은 타격을 입혀야 했지만, 전쟁이라는 건 본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법이다.

"이제 알려줘. 당신이 헤일로를 얻었던 방법."

하지만 보다 확실하게 기여도 순위를 높이는 방법이 있다.

화이트는 알고 있다.

본래 독일의 랭킹 5위에 불과했던 레이지가 헤일로를 얻고 랭킹 1위에 올랐음을.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하게 해줘."

이제 레이지는 답했다.

"군단장이 죽기 전에, 그들이 죽으면 된다. 난, 그렇게 가졌다. 너한테, 그럴 각오는 되어 있나?"

그것이 랭킹 5위였던 레이지가 헤일로를 얻게 된 경위였다.

의도한 건 아니다.

레이지의 헤일로는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태어났다.

넘겨받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화이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우리가 가졌어야 했어. 다시 돌려받을 뿐이야. 주지 않으니 뺏어 주겠어. 반드시."

"... 좋아."

레이지는 생각했다.

이번 군단장이 죽는 날.

그곳에서는 작은 사고가 날 거라고.

하지만 죽음이란 언제나 그렇듯.

이내 잊힐 거라며 위로했다.

'모든 것은, 독일을 위해.'

레이지는 조국을 위해.

"보답받지 못하고 죽어버린 그를 위해서야."

화이트는 죽어버린 인연을 위해.

각자의 목적과 이상을 위해, 피칠로 범벅될 사흘 뒤의 전장을 그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러시아의 지휘 막사 안.

러시아 소속 네피림이 헐레벌떡 달려와 소리쳤다.

"한국군이 출정했습니다!!"

"... 뭐?"

분명 출정은 사흘 뒤였을 터.

그런데 출정했다고?

"출정은 사흘 뒤였잖아!"

"하지만 그들은 이미 우크라이나의 땅을 밟았습니다!"

"젠장!"

방심했다.

헤일로를 노리는 건, 러시아와 독일 뿐만이 아니었다.

"당장 출정 준비해!!"

그건 한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59군단 군단장 바릿느 [1]

137화.

"이래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새로운 1위들한테 전통을 알려주려는 선배의 깊은 뜻이랄까."

랭커들과 약간의 회의를 마친 뒤.

난 곧장 다음날 출정하기로 했다.

딱 봐도 독일과 러시아가 우리와 제대로 협조할 거 같지 않았고, 저렇게 적대적으로 나온다면 굳이 협력할 이유가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굳이 협력할 이유도 없고.'

애초에 레이드 참여를 부탁한 게 러시아였기 때문에 참가한 거다.

가면소드 때문에 그래도 러시아에는 빚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참석한 거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나 또한 그와의 의리를 지킬 이유는 없다.

내가 가면소드랑 우정이 있는 거지 러시아랑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러시아 측이 보내준 자료에 의하면 우크라이나를 잠식한 악마들은 뱀이라더군. 조심해야 할 부분은 땅 밑의 기습과 그들의 독. 군단장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이걸로도 충분해."

[엘더 레이드- 바릿느의 처치]

-악마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아라.

보상-참여자에게 전원에게 엘더 잉걸불 지급.

군단장 처치 기여도 1, 2, 3위에게 차등 헤일로 획득. (헤일로 보유자는 엘더 잉걸불과 에픽 스킬북 지급)

5레벨 이하 네피림 레벨 상승.

이전과는 퀘스트 내용이 다르다.

'그래도 잉걸불이랑 스킬북이면 뭐.'

애초에 군단장 레이드를 참여한 이유가 헤일로의 성급을 올리기 위한 잉걸불 수급 때문이었으니 스킬북까지 준다고 하면 썩 나쁘지 않다.

게다가 그냥 스킬도 아니고 에픽.

이건 좀 기대해볼 만하다.

"헤일로를 잉걸불로 대신해서 주는 거면 꽤 많이 주겠죠?"

"아마 그렇겠지."

저번 기여도 1등이었던 내가 헤일로와 함께 잉걸불 10개를 받았다.

그럼 이번엔 적어도 20개. 최대 서른 개까지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그거면 헤일로의 성급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악의 땅에 들어섭니다."

"59군단 군단장 브릿느의 땅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하락합니다."

"독 내성이 10% 하락합니다."

"심약의 저주에 걸립니다."

발 내딛자마자 조금은 익숙한 온몸을 짓누르는 대악마의 저주.

"악은 가냘픈 미래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미래를 따르지 마십시오. 악이 보여주는 미래는 미지이며 허상일 뿐이니."

"그늘에 기생하는 악의 길을 뿌리치고 빛을 밟아나간다면 곧이어 찬란한 하늘의 품에 도달하게 될 테니."

"용사여, 그늘을 꿰뚫으라."

이번에도 시스템이 주는 격려가 나왔다.

저번과 썩 비슷한 걸 보니.

"이거 매크로였나."

복사 붙여넣기를 한 것처럼 똑같은 걸 보니 매크로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푸르푸르때는 나름 감동까지 했는데 매크로였을 줄이야.

"데몬시드. 정말 이렇게 할 거야?"

"무슨 문제 있나."

"아니, 조금 위험하지 않나. 싶기도 해서 말이야."

한국 네피림은 총 3만.

하지만 난 3만의 병력을 둘로 갈랐다.

"군단장 레이드라는 건, 저번에 보니 꼭 군단장에게 데미지를 입히지 않아도 된다."

"그거야 그렇지. 군단장 발끝 한번 때리지 않은 녀석들도 레이드 보상으로 레벨이 올랐으니까."

"맞아."

애초에 군단장과 맞닿으면 즉사할만한 네피림들이 없다고 볼 순 없다.

그렇다면 어떤 게 가장 효율적일까.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레이드를 마치고 보상을 얻어낼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난 이런 결론을 내렸다.

부대를 둘로 나눈다.

강철 군주의 강철마를 타고 최정예로 만들어진 소수 정예는 곧바로 군단장과 전투를 벌인다.

후속부대는 우릴 저지하는 악마들을 토벌한다.

어차피 이 뒤엔 러시아와 독일 놈들이 하지 말라고 해도 참여할 테니까.

'중요한 건 기여 순위다.'

즉, 헤일로다.

국가에서 보유하는 헤일로 유저의 숫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앞으로는 해당 국가의 국력을 나타내는 지침이 될 것이니까.

"자신 있다. 믿고 따라와 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에잇! 좋아! 잘못돼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어?"

그렇게 나와 랭커 스무 명은 강철 군주의 강철마를 타고 군단장에게 직행하는 중이었다.

많은 군대를 이끌고 가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행군 속도는 느려진다.

강철 군주가 3만에 해당하는 강철마를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당연하다면 당연.

이곳에서의 이동 수단은 오직, 네피림들의 두 다리뿐.

그에 비해 강철 군주의 강철마는 그녀의 정신력이 버텨주는 한, 절대 지치지 않는 고속 이동 수단이다.

큼직한 풍채.

단단한 근육과 다리는 악마들을 그냥 밟아 죽였다.

거기에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시속 백 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려가는 강철마의 속도는 상상 이상.

"이 속도라면 금방 가겠는데!"

강철이 조금 고생해주고 있지만, 이 속도라면 가능하다. 사흘 내로 군단장과 조우해서 쓰러뜨리기가 충분하다, 라고 생각했다.

"이런..."

하지만 며칠 뒤.

우린 난관에 봉착했다.

"여긴 어렵겠어."

강철 군주의 말대로였다.

우크라이나의 도심으로 진입한 순간, 강철마는 힘을 잃었다.

왜냐하면 이곳 대부분이 밀림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는 조형물은 모조리 덩굴과 풀숲으로 우거져있고 지면은 축축한 늪으로 뒤덮였다.

우거진 밀림과 늪.

그 두개의 조건으로 인해 강철마도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휴! 안돼.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 이 앞은 모조리 밀림이야."

스걱.

살금살금 나무를 타고 기어 오던 뱀을 베어 죽인 강철 군주가 내게로 다가왔다.

"어떡할 거지?"

난관에 봉착했지만, 별수 있나.

"나아가야지."

물론, 이 밀림을 무작정 나아가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밀림이 우거져? 늪으로 진군하지를 못한다? 그럼 그것들 모두를 배제해버리면 될 일이다.

화르륵.

내 주변으로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공포와 거짓의 불 Lv.10]

밀림이 왜 밀림이냐.

그것은 높은 습도 덕분이다.

우거진 숲으로 인한 그늘은 해를 막고 오랜 세월 축적된 습기는 늪을 만들어 밀림을 이룬다.

밀림이란 말은 습도가 높고 물기가 가득한 숲이란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태우려고 해도 물기가 많아 잘 타지 않는다.

하지만 내 불은 다르다.

일반적인 불꽃과는 다른 공포의 불이다. 공포란 모든 생물에 내재하여 있는 본능적인 감정.

공포를 장작 삼아 발화하는 공포의 불은 수분 따위로 꺼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밀림도 쉽게 태웠다.

"잘 타는군."

내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전염병처럼 점점 번져, 끝내는 우크라이나 전체를 태우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네."

"상관없겠지. 어차피 여기에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 리 없을 테니까."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불은 거대한 산불처럼 우크라이나 전체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불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무너진 동상.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상징하는 조국 기념비 동상일 기점으로 일대가 전부 늪으로 되어 있는 곳이었기 때문.

그리고 그때부터.

하체는 거대한 뱀. 하지만 상체는 인간의 모습을 한 [네기아]들이 나타나 검과 창을 들고 나타났다.

"꽤 많아."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군."

"이거 괜찮은 겁니까?"

하늘로 날아오르는 글로리안.

도끼를 드는 바바리안.

강철 기사들을 소환하는 강철군주.

활시위를 당기는 아마존과 안경을 고쳐 쓰고 검을 들어 올린 관찰자.

그리고 그 밖의 랭커들이 자신의 무기를 끌어 올리며 긴장했다.

적들의 수는 어림잡아 보아도 수천.

아니, 그마저도 점점 늘어나는 중이다.

그들 중, 완전한 코브라처럼 생긴 덩치 큰 놈들이 있었는데 놈들은 챔피언급의 악마였다.

허나.

그들 모두 내 상대는 아니었다.

기시기시의 뿔 지팡이를 들었다.

"뇌령"

쿠구구궁-!!

먹구름이 몰아친다.

붉은 번개가 하늘에서 서서히 낙하하며 온갖 벼락을 뿜었다.

이번에 새로 얻은 스킬.

뇌령은 자아를 가진 번갯불이다.

녀석은 꽤 제멋대로 움직이고 말도 잘 듣지 않지만, 한가지 목적으로 움직인다.

'피를 가진 적을 섬멸.'

뇌령은 가는 벼락 한줄기가 되었다가 라이트닝 노바처럼 퍼지고, 또 적들 사이를 통과하는 연쇄 번개처럼 제멋대로 전장을 누볐다.

하지만 놈의 힘은 내 마력과 번개 피해 수치에 따른 것.

뇌령 스스로는 노는 것에 불과했으나 놈이 주는 피해는 어마어마한 수준의 것이었다.

콰과광-!!

푸르푸르 때의 레이드로 내 번개피해력은 61% 상승한 상태.

스탯은 그때보다 전체적으로 20% 상승한 상태다. 웬만한 악마라도 내 벼락 한방이면 절명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늪에 닿아있는 뱀들?

"어림없지."

내 벼락을 맞고도 살아있다면, 그건 군단장 아니면 불가능했다.

뇌령은 어느새 둥그런 공처럼 변해 사방으로 벼락을 뿌려대고 있었다.

붉은 오브에서 뿜어져 나오는 벼락은 분수처럼 방사해 내 앞의 네기아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살아 있는 피가 흐르는 것들을 쫓는 카탈린의 감전의 힘이 늪으로 도망치는 뱀들까지 모조리 쫓아가 죽였다.

뇌령 한 번에 수천 마리의 네기아들이 절명했다.

챔피언도 다르지 않다.

이제 나한테 챔피언은 의미가 없다.

그냥 악마나 챔피언이나 거기서 거기인 수준이었으니까.

뇌령은 하나의 소환체.

물론 한번 소환할 때 마나의 절반을 소모하지만 그것 치고는 가성비가 꽤 괜찮은 친구였다.

"개쩌는군."

뇌령 하나만으로 네기아 수천 마리를 홀로 상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뇌령의 지능이 1 상승합니다!"

"뇌령의 지능이 1 상승합니다!"

"뇌령의 지능 1 상승합니다!"

뇌령은 벨로나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방식의 성장체계를 갖췄다.

『뇌령』

-살아있는 피의 번개

「지능」 4

적을 죽이거나 제멋대로 움직일때마다 지능이란 수치가 올라간다.

하지만 올라간 지능은 갑자기 내려가기도 한다.

"지능이 3 소모되었습니다."

아마도 지능은 뇌령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들이 아닐까 싶었다.

이따금 오브로 변하거나 내가 지닌 번개 스킬들을 따라할 때가 있는데 그런 대규모 기술을 사용할 때, 지능을 소모하는 듯했다.

뭐 솔직히 자기 알아서 채우고 소모하는 터라 내가 신경 쓸 필요는 딱히 없었다.

섬세한 작업을 할 때는 힘들겠지만 이런 전쟁에서 뇌령은 제값을 톡톡히 하는 녀석이니 말이다.

"우리가 나설 차례가 없는데...?"

바바리안의 말이 맞다.

뇌령 혼자서 모조리 다 쓸어버리고 있으니 그들이 나설 틈이 없었다.

"곧 나오겠지. 저 늪이 수상하잖아."

아마존의 말대로 늪은 수상하다.

무너진 동상 한 가운데에 거대한 늪이 자리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알았지만, 동상이란 게 주는 의미가 꽤 있는 모양이다.

북에서도 그러더니 우크라이나에서도 동상이 자꾸 보이는 걸 보니.

아니나 다를까.

"저 동상, 아마도 부서진 차원석인 거 같습니다."

관찰자였다.

역시나.

"그렇다면 이곳에 있으면 놈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

지금 이 땅의 주인.

군단장 말이다.

콰앙-!!

그때였다. 초토화된 뱀들의 사체 사이로 군단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늪에서 폭발하듯 나타난 거대한 뱀이 부서진 동상을 휘감으며 나타났다. 거대한 크기는 빌딩을 휘감을 것처럼 컸고, 몸에서는 무언가가 뚝뚝 떨어졌는데 금세 독 안개를 자아냈다.

독에 절어버린 이무기를 보는 듯한 모양새였다.

『59군단 군단장 바릿느』

-너의 이름을 안다. 데몬시드.

뱀은 금세 형태를 바꿨다.

탈피하듯 바뀌어진 몸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하체는 뱀이고 상체는 여인인 악마였다.

군단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미증유의 기운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손에는 커다란 창을, 옷은 어느새 비늘 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59군단 군단장 바릿느와 마주쳤습니다."

"바릿느의 사안이 당신의 움직임을 경직시킵니다!"

"군단장은 존재만으로 살아있는 생물을 공포에 떨게 만듭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하락합니다!"

"모든 내성이 10% 하락합니다!"

놈은 날 알고 있었다.

군단장끼리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건지, 아니면 지옥에 내 악명이 퍼져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너의 어미가 되어주마.

이 새끼나 푸르푸르나 똑같은 새끼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대화.

군단장과의 대화는 불필요하다.

오히려 위험해진다.

대화의 근절.

놈들에겐 그것이 필요하다.

"좆까."

후우웅-!

내 몸에서 광풍이 불어닥친다.

머리 위에는 찬란히 빛나는 가시덩굴의 헤일로가 떠올랐다.

"붉은 가시덩굴의 관이 활성화됩니다."

"신의 사자가 활성화됩니다."

"모든 능력치와 회복력, 속성내성이 120% 상승합니다!"

"이곳을 당신의 성역으로 선포합니다."

"벨로나의 굴레가 완성됩니다."

"당신의 성역에서 벨로나의 가시덩굴은 무한함을 유지합니다."

"벨로나의 가시덩굴은 관통력과 출혈, 그리고 번개피해가 200% 증가합니다."

"가시덩굴의 성역이 온전히 피로 물들시, 모든 능력치와 속성력이 200 증가하게 됩니다."

"바릿느의 사안을 저항합니다!"

"바릿느의 독안개에 저항합니다!"

"일단 수식언부터 까라. 뱀년아."

일대를 잠식한 회색의 가시덩굴.

엄청난 크기의 가시덩굴들이 모조리 바릿느에게 쇄도했다.

놈은 어느새 거대한 뱀으로 변해 가시덩굴에 저항했으나.

무한히 솟아나는 가시덩굴은 어느새 놈의 몸을 비틀어 찢어버렸다.

놈의 피와 네기아들의 피로 범벅이 되었다.

"헤일로가 피로 차올랐습니다."

"적의 피는 나의 생명과 무한한 자원으로 탈바꿈합니다."

"모든 능력치와 속성력이 200% 상승합니다!!"

평균 능력치가 삼백에 가까워졌다.

벨로나의 가시덩굴의 두께도 통나무만 한 것에서 버스만 한 두께로 두꺼워져 군단장의 숨통을 조였다.

아니, 찢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아!

제아무리 놈이 부수고, 뜯어버려도 가시덩굴은 무한하게 솟아났다.

물론 무한은 아니다.

내 체력과 마나가 소비되며 재생되는 것이었다.

"바릿느가 진명을 드러냅니다!"

"꼬리 조이는 바릿느"

하지만 괜찮다.

놈의 피가 날 회복시킨다.

놈이 흘린 피로 마나가 채워진다.

그러니 무한.

무한한 가시덩굴의 굴레.

이것이 악마들에겐 무덤이 될 나의 무한한 성역이었다.

그리고.

"59군단 군단장 바릿느가 영원한 잠에 빠집니다."

내 성역에 가장 처음 무덤을 만든 악마는 바로 바릿느였다.

59군단 군단장 바릿느 [2]

138화.

"59군단 군단장 바릿느가 영원한 잠에 빠집니다!"

"천상과 지옥에 당신의 위명이 널리 퍼집니다. 천상에서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고 희망을 노래할 것이며, 지옥에서는 당신의 이름을 두려워하며 기피할 것입니다."

"군단장들의 귓가에 '데몬시드'의 이름이 울려 퍼집니다."

"그들은 앞으로 당신을 경계할 것입니다."

"대악마와 싸운 전사들에게 보상이 지급됩니다."

"레이드에 참여한 전원에게 엘더 잉걸불이 지급됩니다."

"레이드에 참여한 상위 3명에게 천상의 헤일로가 지급됩니다."

"기여도 1위를 달성하셨습니다."

『엘더 레이드 기여도』

1위-데몬시드

2위-아마존

3위-강철군주

"이미 헤일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엘더 잉걸불 30개가 지급됩니다."

"무작위 에픽 스킬북 1개가 지급됩니다."

"바릿느의 엄니를 획득합니다."

"바릿느의 심장을 획득합니다."

'심장.'

바릿느의 엄니는 창이다.

그러나 심장은 심장이다.

푸르푸르를 처치했을 때도 심장이란 것이 나왔다.

관찰자에게 보여봤지만 아직까지는 쓸모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가지고 있으면 어디든 쓸모가 있을 것이다.

다름 아닌 군단장의 심장이니.

"그건 그렇고."

당연히 기여도는 내가 1위.

잉걸불 서른 개를 얻었다.

좀 적은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거겠지.

2위와 3위.

그리고 군단장 레이드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잉걸불이 최소 하나씩은 돌아갈 테니까.

대부분은 내가 끝내버려서인지 2위가 아마존이었다.

내가 상대하는 동안 화살로 브릿느를 공격했기 때문이고, 3위는 강철 군주였는데 강철 기사들을 대동해 조금이나마 피해를 줬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바바리안은 헤일로를 얻지 못했지만, 다음 기회가 있을 거다.

'59군단, 군단장 브릿느.'

푸르푸르와 비교해 봤을 때.

놈은 약했다.

진정한 권능을 개방하기 전에 헤일로로 죽여버린거나 다름없었다.

벨로나의 가시덩굴의 굴레.

그것으로 놈의 움직임을 봉하고 갖은 피해를 줬다.

출혈피해, 관통피해, 번개피해 등등. 뇌령은 신나서 놈을 공격했고 브릿느는 막을 새도 없이 무력하게 죽었다.

이전보다 내가 강해진 점도 있지만, 브릿느 자체가 썩 나와의 상성이 좋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늪을 이용한 공격과 독 안개는 충분히 치명적이었고, 그녀 자신이 뱀이기에 재빠른 스피드는 분명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단단한 뱀의 비늘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것들 대부분은 나한테 통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죽었다.

"푸르푸르는 34군단이었지."

브릿느는 59군단.

아마 그 차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상대적으로 상대하기 편했다는 점은 확실했으니까.

'군단장을 상대로는 이게 맞다. 어쭙잖게 놈의 말을 듣기 시작하면 개죽음만 될 뿐이다.'

속전속결.

무자비하게 몰아치며 싸우는 게 뒤탈 없이 깔끔했다.

더는 실수하지 않는다.

내가 실수하기 시작하면, 여기 있는 랭커들 중 몇명은 죽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는 실수할 수가 없다.

이들의 목숨이 내게 달렸으니까.

"이걸 받아도 될지 모르겠는데."

"그냥 기뻐하라고, 강철. 난 받고 싶어도 못 받았으니까!"

"감사합니다. 데몬시드."

강철은 얼떨떨해하고 아마존은 신속하게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는 더 바빠질 거다. 억지로라도 헤일로를 갖게 해줄 테니까."

너무 싱겁게 끝난 감은 있지만, 저들의 표정을 보니 나쁘지 않다.

적어도 누군가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군단장으로 인해 침식되었던 땅이 정화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악마의 힘이 본래의 것으로 돌아갑니다."

"관찰자. 저거, 차원석 맞지?"

"예, 맞습니다."

무너진 동상.

본래는 우크라이나의 상징과도 같은 기념비였던 것.

하지만 지금은 팔과 머리가 무너져 상체만이 남은 거대 조각상이다.

북한에서도 그렇고 우크라이나에서도 그런 걸 보니 해당 국가의 상징적인 기물에 차원석이 깃드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중립 차원석을 수복하시겠습니까."

여지없이 나타났다.

난 생각했다.

북한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우리가 다가가기가 힘들다.

관리하기 힘드니 이곳에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만 내버려 두면 근처의 땅에 사는 독일이나 러시아가 이 땅을 사용하고 먹게 될 게 아닌가.

뻔히 놈들 좋은 일을 해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골탕 좀 먹여볼까."

차원석 수복을 위한 방법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악마들의 천만 명분 악마들의 피를 이 땅에 흘리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엘더 잉걸불 일시금으로."

10개나 소모되는 게 아깝기는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군단장을 또 잡으면 된다.

"엘더 잉걸불 10개가 소모됩니다."

"중립 차원석이 완전히 수복되었습니다!"

"중립 차원석이 대한민국 소속의 차원석으로 입력됩니다!"

"대한민국의 차원이 확장됩니다!"

"이 땅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소속입니다."

"세계 곳곳에 우크라이나가 대한민국의 땅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렇게까지 하는군."

"하지만 악마에게 침식당한 땅의 정화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자리 잡은 악마의 피로 침식을 정화하여 주십시오."

"악마의 피 5,000,000개당 엘더 잉걸불 1개를 생성합니다."

『대한민국 소속 - 우크라이나』

모여있는 악마의 피.

-242,004

관리자-데몬시드

"오...?"

악마 오백만 마리를 잡을 때마다 엘더 잉걸불 1개를 생성?!

"이건 꽤..."

나쁘지 않다. 아니 너무 좋다!

군단장이 죽었다 하더라도 이 땅에 남아 있는 악마의 수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번식행위로 늘어날 예정이기도 하다.

지금만 해도 그렇게 잡아도 대한민국의 악마의 수가 썩 줄어든다는 느낌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대단하네요. 한국이 성장할 밑받침이 되어줄 겁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동시에 다른 국가들은 쉽사리 넘볼 수도 없게 됐네요. 훌륭하신 판단입니다."

관찰자와 아마존이 극찬했다.

골탕 좀 먹어보라고 한 건데 이게 이렇게 흘러가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엘더 잉걸불 10개를 소모해서 만들어낸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앞으로는 여기서 사냥하면 되나?"

"아마 그런 거 같군."

잘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바바리안과 그럴 거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강철 군주.

'엘더 잉걸불 10개까지는 내가 가지고, 그 이후부터는 좀 나눠주면 되겠지. 앞으로 우리 영역은 훨씬 더 넓어질 테니까.'

우크라이나 하나뿐이 아니다.

앞으로 군단장에게 지배당한 땅 대부분을 우리가 먹는다.

그렇게 랭커들 하나하나를 관리자로 지목해 관리하게 한다면 대한민국의 성장력은 어마어마하게 변할 터.

만약, 생각대로만 된다면 전 세계를 대한민국의 땅으로 바뀌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

군단장 브릿느를 잡았을 때보다 지금이 더 가슴이 뜨거워졌다.

관리자로 내가 적혀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엘더 잉걸불을 빼고 넣고 하는 건 나만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꼭 군단장을 잡지 않더라도 앞으로 잉걸불을 수급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정말 나쁘지 않다.

아니, 너무 좋다.

"관찰자."

"예."

"네피림들 전부 북한으로 올려."

"알겠습니다. 저희가 오기 전에 이미 오백만 마리쯤 됐다고 보고가 왔었으니 금방 채울 수 있을 겁니다."

북한까지 우리 것으로 만들면 관리하는 지역은 2개가 되겠지만 괜찮다.

난 혼자가 아니니까.

'아마존과 강철이 있으니까 거점 관리는 믿고 맡길 수 있어.'

누구보다 앞서서 할 것이다.

이제는 그들도 헤일로가 있으니까.

이전에는 몰라서 안 했지만, 지금은 알게 됐으니 반드시 해야 한다.

잉걸불은 앞으로 네피림이 강화하는데 필수조건으로 들어갈 재료이니까.

생각지도 못한 이득에 싱글벙글하고 있어서였을까, 불청객이 찾아온 걸 늦게 알아차렸다.

"... 늦었군."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독일과 러시아의 랭커들이 자리해 있었다.

"....."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독일도, 러시아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음이 맞으리라.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레이드가 끝났음을 알았을 테고 어느 나라가 헤일로를 독식했는지 알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노려보기만 하는 것도 안다.

'우린 헤일로가 넷이니까.'

한국의 헤일로는 넷.

러시아와 독일은 합쳐봤자 하나.

일반적인 수 싸움으로 본다면 헤일로를 가진 우리가 유리하다.

솔직히, 나랑 레아만으로도 저들을 상대하는 건 충분할 거다.

내 헤일로의 능력만큼, 레아의 것도 광범위한 치유와 피해를 동시에 주는 성역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들은 이전처럼 우릴 대하기가 꽤 힘들 거다.

지금 이곳은 차원석을 수복하기 전의 중립지역이 아니다.

엄연한 대한민국의 차원이 되었다.

그 말인즉슨, 저들은 포탈 스크롤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니까.

마음대로 도망갈 수도,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다.

따지고 싶기는 한데, 따졌다가 이곳에서 싸움이라도 났다가는 전멸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한국과 러시아, 그리고 독일이 군단장 레이드를 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오는 건 대부분 아는 사실.

하지만 군단장 레이드를 하다가 전사하는 사람이 많아도 누구든지 고개를 끄덕일 거다.

설령.

'독일과 러시아가 전멸해도.'

의심할지언정, 납득할 거다.

군단장과의 전쟁이란 그런 거니까.

본래 군단장 때문에 모인 인원이다.

구심점이 사라졌으니 언제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이곳의 강자는 그들이 몇 번이고 깔보던 아시아인인 우리.

바로 한국이었으니까.

*

스윽.

"똑똑하군."

한국 네피림의 대표.

한국 1위, 데몬시드는 독일과 러시아의 곁을 지나며 중얼거렸다.

똑똑하다.

정말로 똑똑하다는 칭찬의 말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 싸움을 걸면 죽는 건 너희다. 그러니 지금처럼 입 다물고 있는 게 똑똑한 거라며 비꼰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독일과 러시아는 입술을 꾹 깨물 정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말대로 지금은 똑똑했어야 했으니까.

한국이 그들의 바로 곁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도 그들은 주먹을 말아쥐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었다.

독일과 러시아가 아시아인이라며 깔보며 깎아내린 게 바로 어제다.

하지만 바로 오늘 동안, 영원할 것 같았던 그 구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독일과 러시아는 애써 눈을 피했다.

부들거리는 손을 움켜쥐며 태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그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때도..."

하지만 아무리 거센 폭풍이라도 걸쇠를 풀고 창문을 열어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때도, 이런 식이었나."

러시아의 1위. 화이트였다.

"그때?"

조용히 군림하듯 지나가던 폭풍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때였다.

그의 곁에 선, 여기사의 머리 위로 찬란한 빛의 헤일로가 떠올랐다.

헤일로의 모양은 강철 조각을 엮어 만든 듯한 은빛의 헤일로.

이내, 삭막한 대지에는 어느새 수십 자루의 검이 꽂혀 있었고 그것들은 분노하듯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금세라도 뽑혀 나와 자신을 도륙을 내버릴 것처럼 말이다.

"...."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아니었나."

데몬시드가 되물었다.

하지만 화이트가 다시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가지."

한참이나 답하지 않자, 데몬시드는 피식 웃고는 한국 네피림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독일과 러시아만이 한참이나, 한참동안이나 돌처럼 굳어 자리를 떠나지 못할 뿐이었다.

그렇게 군단장 레이드는 끝이 났다.

정부의 야욕

139화.

위잉.

손안에서 총알과 권총이 제멋대로 분해되며 회전한다.

"그래도, 아시아인한테 빼앗긴 건 조금 그렇지 않나? 아무리 운이 좋아 헤일로를 얻었어도 그건 아니지."

독일 1위.

레이지의 총을 제멋대로 분해해서 가지고 노는 사내는 아메리카 1위.

메타르였다.

그의 앞에 독일 1위, 레이지는 메타르의 시선을 피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놈은... 강했다."

"알아. 강하겠지. 그러니까 너희들을 빼돌리고 한국 혼자서 군단장을 처리한 거 아니겠어. 덕분에 한국은 헤일로가 넷이나 생겼지만."

끼긱, 끼기긱.

레이지의 권총이 메타르의 손 위에서 회전하다가 꽈배기처럼 비틀렸다.

"똑바로 해라. 아시아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게 둘 셈은 아니잖나."

"..."

비틀어진 고철 덩어리가 된 권총.

하지만 그것은 이내 메타르의 손에 의해 점점 펼쳐지며 다시 원래대로의 권총의 모양으로 돌아왔다.

철 자체를 다루는 미국 1위.

메타르의 기프트였다.

원상 복구된 권총에 총알을 한 발, 한발 끼워 넣은 메타르가 피식 웃으며 레이지에게 건넸다.

"그날, 널 살린 내 선택을 후회하게 하지 마라. 알겠나, 레이지."

"... 알겠다."

*

우크라이나 땅을 대한민국의 것으로 만든 한국 네피림 인원들은 모두 서처동의 아토 협회로 포탈을 탔다.

총인원 3만 명.

비록 몇 명이 죽기는 했다.

하지만 큰 피해 없이 원정을 마무리했기에 축배를 들어야 함이 옳았다.

더군다나, 이번엔 한국의 헤일로 보유자가 둘이 더 생겼으니 경사가 아니면 무엇일까.

오늘 같은 날은 시원하게 축배를 들어 즐기는 것이 맞다.

이미 연락을 갖춰 놓았는지, 협회 마당에는 정부 사람들이 정장을 쫙 빼입고 우릴 환영했다.

"축하합니다!"

하지만 데몬시드의 예상과 달리 축하 자리엔 꽤 부담스러운 인물도 여럿 있었다.

TV에서나 봤던 장관들이나 대통령까지 자리에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데몬시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의 자신은 확연할 정도로 차이가 있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대통령이란 단어가 주는 위압감은 사실상 존재했다.

대통령은 한 나라의 지도자.

또는 그 국가의 얼굴이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변한 뒤.

지금도 그럴까.

데몬시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윤태호라고 합니다."

"데몬시드입니다."

"기프트명 말고 실명을..."

"아니 됐네. 언젠가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는데, 오늘이 되었습니다. 자, 축하할 날이니 함께 하시지요."

"... 그러죠."

솔직히 썩 내키지 않는 자리였다.

전사들끼리 막중한 긴장감을 내려놓고 즐기는 자리에 정치인들이 끼어 있으니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준비는 꽤 했는지 음식은 물론, 아름다운 미인들이 함께 자리해 전장의 긴장을 풀게 했다.

어디선가 보았던 유명한 연예인들이 전사들과 식사하며 분위기를 둥글게 누그러뜨렸다.

데몬시드는 대통령과 함께 그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한차례 위기는 물러갔지요. 보기 좋지 않습니까. 비록, 가혹한 전장에 대해서 제가 감히 무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 풍경이 오래 유지되었으면 합니다."

"그렇습니까."

보기 좋은 광경.

그 말에는 데몬시드도 동의했다.

적은 희생으로 큰 수확을 얻었다.

데몬시드의 시선이 강철 군주와 아마존으로 향했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는 대통령과 달리 데몬시드는 그렇지 않았다.

이 광경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자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축하해주려는 의중은 알겠으나. 미리 말씀하셨다면 따로 시간을 냈을 겁니다. 오늘은 조금 아쉽군요."

아쉽다.

대통령의 눈썹이 움찔했다.

꽤 직설적인 화법.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빙빙 돌려가며 제 원하는 바를 드러내는 정치인들의 화법에 익숙해진 대통령은 데몬시드의 화법이 썩 신선했다.

'싫지는 않군.'

의중을 알아내려고 아웅다웅하는 것보다야 저리 직설적으로 제 감정을 말해주는 편이 시원시원하기는 했다.

물론 그것만으로 그가 대통령을 어찌 생각하는지까지 파악했다는 것이 조금 서글픈 진실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데몬시드는 전우들끼리 편하게 축하할 자리를 원했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끼어들어 자리의 분위기가 변한걸 탐탁지 않아 했다.

별생각 없는 이들이야 연예인들 보며 희희낙락하지만, 협회 간부진들은 썩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전우들끼리의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합니다. 정치인이란 솔직하게 말해서 배려가 많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제 밥그릇 뺏길까 두려워 어쨌든 간 사람을 휘 두려고만 하지요.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사람도 그리 다르지는 않습니다."

꽤 솔직한 언사였지만 데몬시드는 시큰둥했다.

왜냐면 정치인의 화법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정부에 대해서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없으면 외교 쪽의 불편함이나 타국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기가 수월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정도.

정부가 비록 많은 정책을 펼치고 이전의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건 안다.

없으면 안 될 조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예의 없이 접근하는 건 조금 아니었다.

대충, 왜 이리 급하게 찾아왔는지도 알 거 같았으니까.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이름이 퍼졌습니다.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저도 오래간만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아마도 우크라이나의 차원석을 수복했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우크라이나의 땅이 대한민국의 소속이 되었음이 전 세계에 선포됐으니.

"대한민국은 앞으로 북한,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땅으로 선언하고 이를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아마도 많은 노동력이 있어야 하겠지요."

"..."

맞는 말이다.

북한과 우크라이나를 관리하려면 어쨌든 간에 네피림의 무력이 필요하지만, 그 밖에도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허허벌판인 땅으로 내버려 둔 채로 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생활하기 위해서는 수도관도 필요하고 전기나 각종 생활시설은 물론, 건축물 또한 필요로 한다.

하루 이틀 살고 말 것도 아니니까.

그렇기에 각종 노동력이 필요로 해지는데, 아마도 정부에서 그런 노동 인력을 충당해주겠다는 말로 보였다.

협회와 정부가 협력하자는 말.

상부상조하자는 뜻이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거라니요. 정부가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에 무엇을 요구한단 말입니까. 해야 할 일이니 할 뿐이죠."

다만.

"협회장께서 이따금 저와 식사를 같이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앞으로 종종 뵐 사이니까요."

"그렇군요."

데몬시드와의 식사자리.

대통령은 그것만으로 자신의 위치를 국민에게 인지시키고 자신의 자리를 견고히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어느 누가 랭킹 1위와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웬만한 랭커들도 하기 쉽지 않은 일이라고 단연코 말할 수 있다.

데몬시드와의 식사.

정치인에겐 그것만큼 충분한 보상이 따로 없었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영토는 더 넓어질 겁니다. 아마, 난민도 받을 수밖에 없겠지요."

"..."

무너지기 직전의 나라.

겨우겨우 카오스 게이트를 막았으나 그럼에도 위태로운 나라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그런 나라의 국민은 자신의 조국을 버리고 난민이 되어 타국으로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강인한 나라에 기댈 수밖에 없겠지.

"레벨3 이상의 네피림. 또는 젊은 여인들을 먼저 받을 겁니다. 그럼 대한민국은 더 부강해지겠죠."

네피림을 우선하여 받으면 악마들의 토벌은 더욱 수월해진다.

그 외의 경제 활동으로도 이어지고 출산율도 더 나아지기 마련이다.

벌써 난민 수용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데몬시드는 조금 감탄하며 와인을 들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야.'

확실히 그런 부분은 정부 쪽에서 알아서 해주면 편하다.

사람은 혼자서 살지 못하는 동물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데몬시드는 어렴풋이 그 의견에 동감은 했지만, 오늘처럼 확연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정부와의 협력.

썩 내키지는 않는다.

불쾌한 구석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서, 더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정부의 도움이 필요한 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이건 극비 사항입니다만."

대통령은 조심스럽게 데몬시드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캐나다는 사실상 미국에게 대부분의 네피림이 넘어간지 오랩니다."

"...그렇습니까."

미국과 캐나다.

지리적인 위치를 생각해보면 미국과 캐나다는 가깝다. 하지만 인구밀도는 캐나다가 현저히 낮다. 땅은 넓고 인구는 그리 많지 않으니 희망이 없다고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캐나다에서 특출난 네피림이 나왔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미국으로 넘어가는 것도 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캐나다 1위가 미국으로 넘어간 이후, 랭커들 대부분이 전부 그를 따라 미국으로 들어갔다더군요. 그 사실을 알게 된 국민도 자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아마도 근 시일 내에 캐나다는 군단장 차지가 되겠죠."

물론 그 이후.

"미국은 캐나다의 군단장을 잡고 그 넓은 땅을 차지하겠군요."

"실패한다면 큰 위기가 되겠지만,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미국의 1위가 타국의 1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더군요."

"..."

"캐나다의 1위도 그걸 알기 때문에 바로 꼬리를 말고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고 보고 있습니다."

미국 1위.

데몬시드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것과 관련해서 땅에 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말씀하시죠."

"우크라이나는 대한민국의 소속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땅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예."

"북한도 곧 그렇게 되겠죠."

"그럴겁니다."

북한이 대한민국의 소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건 앞으로 시간문제.

세상은 변할 것이다.

대통령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태껏 미소를 띠던 대통령 윤태호의 입이 우묵하게 닫혔다.

"그럼 다음은 어디입니까."

"..."

입은 우묵했으나, 눈빛만큼은 야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대한민국은 강해질 겁니다. 러시아, 일본, 중국, 미국. 그들보다 더 부강해질 수 있겠죠. 이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걸 준비가 됐습니다."

"..."

"대한민국은 항상 아파졌습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죠. 그 이유를 협회장님은 아십니까."

"약하기 때문이었죠."

약했기에 그랬다.

약했기에 위로, 아래로 침략당하며 아프기만 했다.

"주변국은 항상 살쾡이처럼 우릴 괴롭혔죠. 독도를 제 것이라 우기고, 우리의 역사를 도둑질하며 말입니다."

이를 갈며 말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첫인상과는 꽤 달랐다.

인자한 면모 뒤에 숨죽이며 갈아온 칼날 같은 날카로움이 있었다.

"앞으로 세상은 변할 겁니다. 세계의 땅이 바뀌겠죠! 각 나라는 지역으로 탈바꿈하고 주인 잃은 땅을 누가 차지하냐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대통령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데몬시드도 알 거 같았다.

"대한민국의 영토를 더 넓히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이에 대통령은 다시 만면에 미소를 띠며 와인 잔을 들었다.

"우리에겐, 당신이 있으니까요."

썩 좋은 대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금이라도 날 호구 취급하는 순간.

대통령은 바뀌게 될 테니.

군단장의 기습 [1]

140화.

정부의 축하연 이후.

한 달이 지났다.

무더위에 찌들었던 날씨는 한풀 꺾이고 장마와 태풍이 몰아쳤다.

쉼 없이 몰아친 태풍과 비바람으로 한차례 불별도에 만들었던 오두막이 날아갈 뻔하기도 하고, 비가 새어 물바다가 되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평안하고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태풍이 지나간 뒤, 우리의 목표는 북한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대부분 네피림들이 모조리 북으로 올라가 악마 토벌에 힘쓴 덕에 어렵지 않게 북은 대한민국 소속의 땅으로 탈바꿈했다.

"북한이 대한민국 소속의 땅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 이후에 내가 할 일은 여태껏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에서 얻은 네기아들과 군단장의 씨앗을 심어야 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민첩이 0.04 상승합니다."

네기아의 열매는 뭐라고 해야 할까.

겉껍질은 돌처럼 딱딱했는데, 안에 든 열매도 딱딱했다.

견과류 비슷한 맛이 나는 게 고소했으며 맛도 좋았다.

난 곧장 열매의 이름을 바꿨다.

"네기아의 아몬드로 변경합니다."

딱 아몬드 맛이었다.

견과류라 맛도 고소한데 더불어 민첩까지 올려줬다. 일정 이상 상승하자 한도에 걸린 것처럼 멈췄었는데 네기아로 그 한계가 뚫렸다.

시스템상에서 딱히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민첩 Lv.2가 0.04 상승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오크 전사의 키위는 건강 Lv.2.

미노타의 망고는 근력 Lv.2.

네기아의 아몬드는 민첩 Lv.2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근력과 민첩, 그리고 건강은 각각의 열매에 따라 한도가 달랐다.

근력과 건강은 40 부근이었는데 민첩은 60부근에서 멈췄으니까.

「능력치」

근력 – 72 (+14)

민첩 – 63 (+4)

건강 – 70 (+14)

마력 - 72 (+6)

강골 - 50

「세부 능력치」

명중+15 시야+10 야간시야+14 직감 +8 방어력+80 마나재생+10

냉기내성+5% 독내성+44% 저주내성 +5% 화염내성 +15% 공포내성 +100% 수면내성+10%

물리피해 +13% 화염피해 +13% 번개내성 +76% 번개피해 +56%

요새는 기본 능력치보다는 세부 능력치에 더 힘을 주었던 거 같다.

아무래도 군단장의 현혹이나 권능의 피해가 상당하다 보니 속성내성이나 관련 스탯을 올리는 쪽으로 치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딱히 몸을 움직일 필요가 없긴 했지."

헤일로의 강력함.

그리고 늘어난 스탯과 스킬들로 많은 움직임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헤일로 자체가 넘사벽일 정도로 강력했다.

해서 중립 차원석을 수복하고 남은 엘더 잉걸불 20개를 전부 헤일로 강화에 쑤셔 박았다.

"벨로나의 굴레도 사기지만, 신의 사자도 그만큼 사기야. 회복력이랑 속성 내성 상승이 말도 안 돼."

벨로나의 굴레는 강력하다.

그러니 신의 사자를 집중적으로 올리기로 했다.

본래 7급에 해당했던 신의 사자는 이번에 잉걸불 20개로 모조리 3급까지 올려버렸다.

〈신의 사자〉 『7급』

-신체에 천상의 힘이 깃듭니다.

모든 능력치 120% 상승. 회복력 120% 상승. 모든 속성내성 120% 상승.

〈신의 사자〉 『3급』

-신체에 천상의 힘이 깃듭니다.

모든 능력치 160% 상승. 회복력 160% 상승. 모든 속성내성 160% 상승.

3급에서 2급으로 강화하기 위해서는 잉걸불 12개가 필요했다.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엘더 잉걸불의 수량이 높아졌기에 더는 올리지도 못했다.

"높일수록 효율은 별로네."

잉걸불만 많이 잡아먹고 상승치는 그렇게 극적인 변화가 없다.

120%에서 160%로 변했을 뿐.

물론 그 정도도 뿌듯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사실.

"상관없지. 앞으로 더 많아질 테니까."

군단장을 잡으면 잡는 대로.

땅을 수복하면 수복하는 대로 엘더 잉걸불은 점점 불어난다.

그걸로 강화하면 되는 문제이니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강해질 수단은 아직도 많았으니까.

"에픽 스킬북을 개봉합니다."

군단장 바릿느를 토벌하고 얻은 에픽 스킬북.

내가 가진 에픽급 스킬은 카이삭스의 표식과 투왕의 살기 정도다.

투왕의 살기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창과 같은 무기를 사용할 때는 항상 사용하고 있는 유용한 스킬이다.

대체로 나보다 약한 자들을 상대하기 좋은 스킬이다.

물론, 나는 나보다 약하거나 레벨이 낮은 악마들을 상대하는 경우가 적어서 활약하는 일이 드물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제 에픽 스킬 하나가 더 생긴다.

그게 주는 기대감은 오랜만에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프로비던스] (Epic)

-골드캐넌에 유폐된 소서리스의 어머니가 만들어낸 대마법. 모든 악마의 속삭임을 저항하여 반사한다.

"속삭임?"

모든 악마의 속삭임.

가령 예를 들면 군단장이 말로서 날 현혹했던 그것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볼 수 있다.

그러한 속삭임에 깃든 미증유의 힘을 저항하고 되돌려주며 피해를 주는 스킬인 듯했다.

"꽤 골치가 아팠는데 잘됐어."

에픽 스킬치고는 강한 임팩트가 있는 스킬은 아니지만 아주 유용한 스킬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것만 있으면 앞으로 전투 중에 정신이 나갈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스킬북은 개봉했으니 그다음은 군단장의 부산물들이다.

[브릿느의 심장]

-59군단 군단장 브릿느의 심장.

[브릿느의 독니]

-59군단 군단장 브릿느의 독니.

물론 난 푸르푸르의 것도 있다.

[푸르푸르의 심장]

-34군단 군단장 푸르푸르의 심장.

[푸르푸르의 뿔]

-34군단 군단장 푸르푸르의 뿔.

물론 문제가 있다.

"어디에 쓰는건지 모르겠다."

심장과 독니, 심장과 뿔.

군단장의 심장은 곧 대악마의 심장.

하지만 이걸 어찌 사용할지는 감정서를 써봐도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는 않는다.

독니와 뿔이야 무기로 만들면 그만이라 상관 없을 거로 생각했지만.

[저의 힘으로는 아직 군단장의 힘이 깃든 걸 제련하기엔 부족합니다...]

스미스가 거절했다.

아직 자신은 부족하다면서 말이다.

억지로 했다간 대악마의 기운에 감화되어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

그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스미스는 무기를 만들면 만들수록 경험치를 얻고 레벨이 성장하는 편이니 기다리면 될 일이다. 아마도 힘내고 있으니 가까운 시일 내에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 싶다.

'군단장은 많으니까.'

군단장은 많고, 그들에게 지배당한 땅도 많다. 전 세계의 나라 중, 절반이 넘게 악마의 땅이 되었다.

그들과의 싸움에서 프로비던스는 어떤 스킬보다 유용하게 작용할 것이다. 부족한 부분이 보완되었으니 군단장 레이드에 박차를 가해도 될 듯싶다.

'경쟁자가 있으니까.'

안 그래도 며칠 전.

[캐나다가 미국 소속의 땅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멕시코가 미국 소속의 땅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놀랍게도 미국은 동시에 캐나다와 멕시코의 군단장을 토벌하고 그곳을 자신의 땅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랭커들 수준이 꽤 높다고 들었는데 정부의 정보가 거짓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관찰자에게로부터 메시지]

-멕시코 랭커들 대부분이 미국의 산하로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캐나다의 사례를 보고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 같습니다.

[아마존에게로부터 메시지]

-정부에서는 현시점의 강대국을 미국, 중국, 영국, 독일, 브라질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아마존이 말하는 강대국에는 대한민국도 당연하게 포함이었다.

현시대의 강대국 기준은 군단장을 토벌하고 자국의 땅을 넓힐 수 있는 국가를 말하는 것이니까.

저 네 개의 국가들은 헤일로를 보유하고 있으며, 잠재적으로 군단장을 토벌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이다.

미국은 그걸 해냈다.

아마도 헤일로의 보유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다른 국가들도 점차 힘을 키워낼 것이다.

세상이 한번 망하고 나서야 시대는 새바람을 타고 흐르는 것만 같았다.

이제 인류에게 악마는 절망이 아니라 새 시대를 이끌 희망의 재료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미국이나 우리처럼 앞으로 자국의 영토를 점차 넓혀갈 나라들이 많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도 뒤처질 순 없으니 당장 군단장 레이드를 알아보고 있었다.

최소한의 피해로 군단장 레이드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일단은 정보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찰을 보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부분에는 정부와 협력하여 천천히 군단장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점령할 땅이기에 대한민국과 가까운 곳이 하나 있었다.

바로 몽골이었다.

몽골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한국과 가까운 편에 속하는 넓은 땅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나라이나, 지금에 와서는 군단장이 차지한 몰락한 나라일 뿐이었다.

러시아는 아직 몽골을 칠 여력이 없고, 중국은 북쪽보다는 남쪽에 자리한 군단장에 눈을 돌리고 있으니 몽골에 레이드를 가는 것은 지금이 딱 적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몽골로 결정되고 정찰병을 보냈지만, 문제가 하나 생겼다.

"차원석의 균열이 생겼습니다."

"7일 후, 카오스 게이트가 열리게 됩니다."

타이밍 나쁘게도 카오스 게이트가 생겨나 버린 것이다. 한동안 대한민국은 침공하지 않던 악마군이 우릴 향해 선전포고를 내밀었다.

이거에 대해 랭커들은 말이 많았다.

이번 기회에 하위 랭커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장으로 만들자, 또는 상위 랭커들은 카오스 게이트를 참석하지 말고 몽골 레이드를 가자.

이런저런 말들이 꽤 많았다.

공교롭게도 시기가 겹쳤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군단장 레이드를 겪다 보니, 카오스 게이트를 쉽게 보는 경향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건, 커뮤니티에서 잘 모르는 이들일 뿐.

랭커들은 오히려 레이드는 뒤로 제쳐놓고 카오스 게이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시스템 창을 보면 안다.

"대한민국의 차원석 효과가 90% 저하됩니다. 차원석의 균열을 복구하기 위해 더 많은 악마를 수용합니다."

"시간의 제한이 없습니다."

"현재 차원석의 레벨은 3입니다."

"5배 많은 악마를 수용합니다."

"악마의 피로만 차원의 균열을 닫을 수 있습니다."

북한과 우크라이나 영토를 얻어버려 인지 카오스 게이트의 수준도 덩달아 올라가 버린 것 같았다.

커뮤니티에서는 어차피 군단장만 없으면 걱정할 거 없지 않냐는 소리가 나왔으나 난 아니었다. 적어도 나와 랭커들은 이 문제를 꽤 크게 봤다.

"군단장은 나오지 않아도, 이 정도면 분신들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카오스 게이트에서 전략과 전술을 펼치는 악마들도 많았죠. 한국은 그동안 무지성 돌격하는 이들하고만 싸웠기에 아직 악마들이 어떤 잔인한 전술을 펼치는지 모릅니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습니다. 만일, 저희가 몽골 레이드를 성공하고 왔다고 해도, 카오스 게이트의 방어에 실패한다면..."

대한민국은 군단장의 것이 된다.

"설령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도 앞으로 생각하면 신중하게 다가가야 할 일일지도 모릅니다."

몽골을 정복한 뒤를 말하는 것이었다.

"몽골은 넓은 땅입니다. 그 땅을 차지하게 된다면, 차원석의 레벨은 더욱 높아지겠죠. 카오스 게이트의 수준도 현저히 높아지게 될 겁니다."

아직 군단장이 카오스 게이트로 나오는 일은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차원석의 레벨이란 게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지금, 굳이 빠르게 영역을 넓히기가 조심스러워졌다.

당장 지금.

"군단장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내 말에 입 튀기며 토론하던 랭커들의 입이 싹 다물어졌다.

우크라이나와 북한을 먹은 지금.

차원석 레벨이 올라가 군단장이 튀어나올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럴 리 없다고 단정을 짓기는 어렵다.

"그 경우도 있을 수 있겠군요."

"몽골행은 취소해야겠군."

"군단장이 어디 도망가지는 않을 테니까요."

전장은 항상 최악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하는 게 맞다.

만일 카오스 게이트에 군단장이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랭커들이 자릴 비운 사이 한국은 망한다.

당연히 모두 참가해야 한다.

"지금부터 카오스 게이트는 군단장이 나올 걸 염두에 두고 회의하도록 한다."

카오스 게이트는 기본적으로 악마들의 침공이다.

악마들은 군단에 속한 이들이고, 그 배후에는 군단장이 있다.

난 높은 확률로 이번 카오스 게이트는 군단장이 나오리라 본다.

"그동안의 대한민국은 챔피언급 하나만으로 침략하기엔 수준이 맞지 않았어. 그래서 조용했던 거지."

봄에서 여름.

그리고 한풀 꺾인 늦여름이 될 때까지 그들은 잠잠했다.

그 이유를 그저 짐작만 했었으나, 이제 보니 철저한 계산 하에 결정된 움직임이라 보는 게 맞다.

'지옥에는 내 이름이 퍼져있다.'

그들도 생각하고 머리를 쓸 줄 아는 놈들이다. 바릿느만해도 지옥에 퍼진 내 정보들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바로 꺼내 날 흔들려고 했다.

놈들은 바보가 아니다.

속전속결로 죽은 바릿느에 대한 이야기도 널리 널리 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침공한다는 건, 그만한 대책이 있다고 판단하는 게 맞다.

"그게 무엇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린 만반의 대비를 갖춰 놈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우린, 만만한 놈들이 아니라고."

증명해야 했다.

물론, 겁먹기만 할 이유는 없다.

우린 4명의 헤일로를 보유하고 있으니까.

*

일주일 뒤.

포탈을 타고 카오스 게이트로 넘어온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네피림들이 화들짝 놀랐다.

왜냐하면.

"여기 왜 바다가 된거야?"

카오스 게이트 안.

이전에는 차원석이 있는 성채를 필두로 광활한 숲으로 변모했던 곳이.

이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대서양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차원석이 있는 성은 차원석의 레벨이 올랐기 때문인지 바다 한가운데서도 크고 높아 우뚝 선 웅장한 모습.

하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우린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 앞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섬 위에 만들어진 성 아래로, 바다를 유영하는 거대한 바다 괴물들이 호시탐탐 튀어 오르며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저거 서펜트야?"

"서펜트만 있는 게 아니야. 바다에 사는 악마란 악마는 다 모였군."

꽤 다양한 바다 괴물들의 총집합.

대부분이 인간 따위는 한입에 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

인류는 악마들에게 대항할 힘을 길렀다.

그러나 그건 땅 위에서의 일.

아직 우리는 바닷속까지 정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놈들은 아주 정확하게 우리의 허를 찔렀다.

"독 안에 든 쥐 꼴이로군."

수십 만 마리의 바다 괴물들이 성 주위를 맴돌며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7군단 군단장 레비아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차원석에 의해 그의 힘이 일부 약화하였습니다."

다소 힘이 약화한 상태인 군단장 레비아탄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군단장의 기습 [2]

141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는 망슈의 해안 근처에 있는 작은 섬이자 도시인 몽생미셸이란 성이 있다.

한 수도사가 대천사의 부름을 받고 만들었다는 바다 위의 성이다.

아무튼 몽생미셸은 바다 위의 성으로서 수백 년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킨 대단한 성이다.

카오스 게이트에 들어와 변화한 바사라 성채를 본 내 감상은, 몽생미셸의 성을 보는 듯 놀라웠다.

바다 위의 성.

그것만 보자면 가슴이 웅장해질 정도로 아름답지만 안타깝게도 주변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현 상황은."

"보이다시피 고립된 상태입니다. 저희를 노리는 서펜트와 바닷속 악마들이 대단히 많아요. 그 크기도 숫자도 엄청날 정도로 말입니다."

적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끝없이 이어진 대해는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적들의 수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지형 자체가 바뀌었어요. 아마도 군단장의 짓일 거로 생각하지만."

눈이 좋은 아마존 또한 적의 수를 제대로 알아낼 수가 없었다.

"물의 깊이를 알 수는 없나."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하나 알아낼 수 없다.

섣불리 움직이기 굉장히 힘든 상태였다.

"야단났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카오스 게이트에 참가한 네피림들은 전원 차원석이 자리한 바사라 성채로 포탈을 탔다.

성과 약간의 도시가 지어진 이곳엔 약, 이백만에 가까운 네피림들이 모여 있다.

이전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숫자였지만, 모두가 함께 싸울 전사라기에는 손색이 많아 보였다.

"난 돌려보내 줘! 나, 난 군단장이 나온다는 소린 못 들었단 말이야!"

"군단장이라니 제기랄! 이번에는 절대 안전하겠지, 하면서 온 건데...!"

"빠, 빨리 랭커들이 쓰러뜨려 주면 안 되나요? 저 아이가 있어요. 금방 오겠다고 했는데...!"

총체적 난국이란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싶다.

"혹시나 차원석 건드리는 사람 없게끔 협회 인원에게 감시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악마를 상대하면서 하나 알게 된 게 있다면, 그건 같은 인간이라도 언제 머리가 돌아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다는 거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한 대비 정도는 제대로 해야 했다.

"설마하니 이곳이 바다가 됐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덕분에 우리가 준비한 대부분의 작전이 쓸모가 없게 됐다."

강철 군주였다.

"어쩔 수 없지. 어느 정도 변화는 있을 줄 알았지만 설마 바다가 됐을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으니까."

성의 첨탑에 올라 내려다보니 서펜트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가 첨벙첨벙하며 떨어졌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성벽에 부딪혀 파도가 새하얗게 부서졌다.

돌고래 웃음소리 같은 얄팍한 소리가 바닷속에서 울려 퍼졌다.

"놀리는 건가."

"그런 걸지도. 놈들도 알고 있겠지."

바다는 저들의 영역.

그리고 인간은 이 좁은 성안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것도 말이다.

"하늘을 날거나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 자들을 따로 분류해야 돼."

활공할 수 있는 자는 정찰병으로 삼고 원거리 공격자는 첨탑에 새워 교대로 놈들을 감시해야 했다.

그리고.

"그럼 나머지는?"

"그들이 싸울 방법은 차차 생각해봐야겠지. 뾰족한 수가 나오기 전까지는 방법이 없다."

랭커들은 자신의 기프트 스킬말고도 스킬북으로 배운 스킬들이 있다.

그것 중에는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것도, 바다 위를 걷거나 하늘을 날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백만 명의 네피림 중, 절반의 절반 정도만이 이에 해당하겠지.

나머지는 이곳에서 할 수가 있는 일이 물고기 밥이 되는 거 말곤 없을 거다.

슬쩍 보니 카오스 게이트의 보상만을 노리고 날로 먹으려는 놈들이나 머글들도 보였으니까.

"데몬시드!! 저번 군단장 레이드 때 당신이 전부 다 했다고 들었어! 그럼 이번에도 그렇게 해주면 안되는 건가! 우린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당신은 할 수 있잖아! 빨리 끝내줘! 어려운 거 아니잖아!"

아니나 다를까 벌써 징징이들이 찡찡거리기 시작했다.

"난감하군."

"신경 쓰지 마라. 저들은 모르니까 할 수가 있는 무지에서 비롯된 말이다."

강철이 애써 위로했으나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낫다.

난 지팡이를 들었다.

기시기시의 지팡이였다.

『기시기시의 뿔 지팡이+6』 (Epic)

-34군단 부관 기시기시가 애용하는 뿔 지팡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조상의 뿔을 이용해 만든 지팡이.

〈번개 피해+20%〉▶〈번개 피해+50%〉

〈마력 +5〉▶〈마력 +20〉

〈라이트닝 오브(1)〉

[라이트닝 오브] (d-15)

-번개의 구슬을 생성해 일정 시간동안 연속해서 벼락을 쏘아낸다.

+6강을 한 뿔 지팡이.

내가 이 녀석을 아직도 애용하는 이유는 단연 마력+20을 올려주기 때문이다.

6강 정도하면 다른 무기들은 새로운 고유효과가 나타나지만 기시기시의 뿔 지팡이는 그렇지 않았다.

다만 번개 피해와 마력이 높아졌다.

솔직히 애매한 고유효과가 나오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나았다.

녀석을 착용하는 순간, 내 마력 수치는 정확하게 92가 된다.

마력이 높아져서 공격력이 얼마나 높아졌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전보단 확실하게 마법이 강화된다.

"벼락."

이 상태로 사용하는 카탈린의 벼락.

이전보다 확실하게 거대해진 붉은 벼락은 신의 천벌이라 부를 만큼 커다랗고 엄청난 힘을 가졌다.

콰아아앙-!!

내 벼락에 직격당한 바다는 구멍 뚫린 듯 출렁이고 이걸로 생겨난 파도는 첨탑 끝까지 차올랐으니까.

바다를 직격하고 연쇄 번개 효과로 주변이 붉은 뇌전이 차오른다.

내 화려한 퍼포먼스에 네피림들이 환희를 드러냈다.

허나 그들이 예상하는 것과 달리, 내 벼락은 17군단의 악마들을 그리 많이 잡아내지는 못했다.

"두 마리 정도인가."

이내 떠오른 서펜트는 두 마리.

그리고 자잘한 상어 비슷한 악마들 몇 마리가 전부다.

본래라면 한꺼번에 수백 마리는 잡았어야 할 내 벼락도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에선 큰 힘을 쓰지 못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7군단 군단장 레비아탄이 만든 해를 삼킨 바다가 모든 종류의 공격을 약화합니다."

놈들이 바닷물에 잠겨 있는 한.

내 힘은 온전하게 놈들에게로 전해지지 못한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혹시 몰라 블리자드로 바다를 얼려볼까 했지만, 그마저도 어렵다.

레비아탄이 만든 바다는 얼어도 그 강도가 약하고 서펜트들이 조금만 건들어도 금세 무너졌다.

"이럴수가..."

굳이 절망하라고 보여준 건 아니지만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다.

"헤일로도 마찬가지입니까?"

관찰자였다.

"내 헤일로는 어디까지나 땅이 있어야 한다.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다에서 사용하는 건 힘들어."

내 헤일로는 어디까지나 가시덩굴.

하지만 가시덩굴은 땅이 있어야 무한하게 피어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성 주변에 가시덩굴을 만들어 싸우는 것뿐.

하지만 그마저도 놈들이 싸워주지 않는다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가시덩굴도, 벼락도 결국엔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법.

"아직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큰일이군요."

내 벼락으로 주위를 맴돌던 놈들이 달아났지만 금세 다시 몰려들어 참치 떼처럼 원을 그린다.

군단장 레비아탄은 성격이 급하지 않은 놈인지 움직일 생각도 없다.

"이번 카오스 게이트는 힘들겠군."

브란스였다.

그의 말대로 힘든 전쟁이 예상됐다.

이유는 놈들이 며칠이고, 한 달이고 쳐들어오지 않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만약, 놈들이 몇 년을 저러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 인간은 미쳐버릴 것이다.

"악마라는 것들은 수명에 제한받지 않지. 식량에 관한 것도 우리 인간과는 달리 몇 년은 먹지 않아도 끄떡도 없으니 말일세."

외통수.

놈들은 저렇게 주위를 빙빙 도는 것만 해도 우릴 말려 죽일 수 있다.

아마도 군단장 레비아탄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거다.

"레비아탄. 설마하니 그 유명한 이름이 나타날 줄이야."

"아는 게 계십니까."

"모를 수가 없지. 흰 숲의 현자로 불렸던 나니까."

레비아탄.

성서에 나오는 바다 괴물.

바다의 왕이라고 불리는 자.

"신이 떼어낸 살점이 레비아탄이 되었고 짝을 이루는 괴물을 함께 넣으면 바다가 넘쳐 떼어 놓았다는 그 괴물이지 않은가. 모를 수가 없네."

유명한 이야기다.

성경에도 나오는 녀석이니까.

"놈은 느긋한 성격을 지녔지. 하지만 한번 정하면 입을 열어 단번에 해를 삼킬 정도로 포악하다네. 놈에겐 이 성조차 작아. 단번에 삼킬 만한 것이리라 보네."

"..."

"그럼 왜 삼키지 않는 겁니까?"

"말했잖나. 느긋한 성격이라고. 지옥에서도 유명한 경계할 자도 있으니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려는 거겠지."

브란스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지옥에서도 유명한 자.

그건 나를 뜻하는 말이었다.

"지옥의 군단장들은 바보가 아니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웅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도 유념할 것이네. 그리고 카오스 게이트는 언제나 악마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은 것인가. 자신이 치려는 곳이 어떤 이력을 가졌는지 모를 바보스러운 악마는 없네."

그러니까 브란스의 말은 한마디로.

"단단히 준비를 했다는 거군요."

이길 수 있는 확신이 있기에, 싸움을 걸었다는 소리였다.

"데몬시드. 자네는 확실한 근거가 생길 때까지 힘을 드러내지 말게. 이 싸움은 조급해하는 쪽이 질 것이야."

"알겠습니다."

브란스의 말엔 나도 동의한다.

조급한 쪽이 지는 싸움.

놈은 사냥꾼이다.

확실한 때를 기다리며 심해 속에 은둔하는 사냥꾼. 그렇다면 나 또한 이곳에 서서, 굳건히 버틸 수밖에 없다.

'벨로나로 이곳으로 뛰어드는 공격은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가시덩굴은 성의 땅에서 돋아나 다가오는 놈들을 모조리 찌르고 옭아매 도륙할 테니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 나머지는 안타깝게도 다른 이들에게 맡겨야 한다.

"아마존."

"네."

"강철."

"그래."

이번만큼은 내가 아닌, 그녀들이 활약해주어야 할 때였다.

*

하루가 지났다.

한번은 바다 괴물 수백 마리가 헤엄쳐오며 해류를 만들어냈다.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 성벽을 뒤흔들 생각이었나 보지만 내가 만든 벨로나의 가시덩굴은 무한하게 증식하여 파도를 막고 주변으로 달려든 악마들을 찔러 주위를 피로 물들였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하루에 두 번, 많으면 세 번.

놈들은 호시탐탐 차원석이 자리한 성을 노렸다.

독에 꽤 자신이 있는 네피림이 성 밖으로 내려가 독을 뿌렸지만 유의미한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났을 때.

일이 터졌다.

"무슨 일이지."

성안에는 차원석을 위한 건물만이 자리한 게 아니다.

일반적으로 성이란 성벽과 함께 그 안에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존재한다. 여러 설비와 함께 휴식이나 거주할 수 있는 집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백만 명이나 되는 인원을 수용하기에는 얄팍하기 짝이 없지만, 절반 정도는 각각 건물 안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뜬금없이 사람 열댓 명이 죽었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새벽에 갑자기 성벽에 오르더니 몽유병에 걸린 사람들처럼..."

성벽에서 뛰어내려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말이었다.

보초를 서던 이의 말에 따르면 마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고 했다.

이를 조사해보니.

"세이렌이군. 심약한 자들을 현혹하는 종류의 어여쁜 악마들이네."

새벽.

노랫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 노래에 감화된 이들은 말릴 새도 없이 떨어져 죽었다고.

"자살은 아니었군요."

이곳에서의 수성도 벌써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아니어도 점차 사람들의 마음에는 불신과 불안감이 차올랐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알면서도 이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새벽녘에 들려오는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기 전에 귀마개를 만들어 꽂고 자라는 것뿐.

그리고 다음 날.

보초를 서던 보초병들 몇몇이 떨어져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바사라 성채 안.

가장 깊숙한 곳.

웅장한 푸른색의 차원석이 자리한 신비로운 공간에 원탁을 둘러앉은 랭커들의 모습이 보였다.

서로를 바라본 랭커들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들도 알고 있다.

이 많은 사람이 모였어도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낮에는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였다.

성 주변의 악마들을 잡을 수 있는 한, 잡아들였다.

하지만 그 수는 이렇다 할 정도로 많지 않았고 우리가 놈을 잡으면 놈들은 좋다며 동족 포식을 감행했다.

일주일간, 지지부진한 성과만이 이루어지고 있는 게 현실.

열심히 머리를 싸매고는 있지만 역시 기댈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아마존은?"

"찾고 있습니다."

이 회의에 아마존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강철 군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인가?"

"예. 잠도 자지 않고 있습니다."

성 꼭대기.

아마존은 그곳에서 연신 헤일로를 띄우며 무언가를 찾고 있다.

아마존의 헤일로는 무언가를 찾고 저격하는 것에 특화되었다.

나와 레아의 헤일로는 광범위한 범위를 성역으로 만든다.

하지만 아마존과 강철은 달랐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힘을 강화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아마존은 저격.

강철은 강화였다.

그렇다.

지금 아마존은 찾고 있다.

바닷속.

심해에 몸을 숨기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17군단의 군단장.

레비아탄의 위치를.

"괜찮을까요. 그녀에게만 사활을 걸기엔 상황이..."

물론 회의적인 의견도 있다.

군단장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바다.

그것을 헤일로로 꿰뚫어 보기가 쉽지 않을 거란 의견이었다.

그녀의 헤일로가 천리안에 버금가는 능력을 지녔다 해도, 일반적인 바다도 아니고 권능으로 만들어진 것.

당연히 그에 대한 방비도 갖춰져 있지 않을 거란 말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일단은 기다려볼 수밖에 없지."

"며칠이 걸리든, 몇 달이 걸리든. 언젠가는 찾아내지 않겠어?"

설령 몇 년이 걸리든 아마존은 찾아낼 것이다.

내가 아는 아마존은 쉽사리 포기를 입에 담는 여자가 아니니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걸어보는 수밖에.

그리고 사흘 뒤.

아마존을 호위하던 강철이 회의장으로 달려와 소리쳤다.

"찾았다. 드디어 찾아냈어!!"

지지부진한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강철의 외침이 성안에 울려 퍼졌다.

군단장의 기습 [3]

142화.

아마존의 헤일로는 푸르렀다.

그리고 초승달의 모양과 같았다.

아마존의 헤일로는 나와 레아의 것처럼 광범위한 범위를 성역으로 만들어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 버금갈 만큼의 자기 자신을 강화하는 데에 있었다.

[푸른 달의 관]

〈신의 사자〉 『9급』

-신체에 천상의 힘이 깃듭니다.

*능력치 100% 상승.

*회복력 100% 상승.

*속성내성 100% 상승.

〈달의 눈〉

-떠오른 달을 눈으로 삼아 어떤 적이라도 포착하여 표식을 새긴다.

〈달의 심판〉 『7급』

-표식이 새겨진 표적에만 반드시 명중시킨다.

*관통력 150% 증가.

*둔화 150% 증가.

*약화 150% 증가.

그녀가 지닌 달의 헤일로의 권능은 저격에 특화된 것.

달의 눈은 내가 지닌 카이삭스의 표식과도 비슷하지만, 완전 다르다.

달의 힘을 빌려, 광범위한 범위를 수색하는 그녀에게서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적은 없고, 표식이 새겨지면 반드시 명중한다.

완벽한 저격을 위한 권능.

그것이 아마존의 헤일로다.

우리는 지난 2주.

여러 가지 시도를 했지만 전부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드디어.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

"괜찮나."

"괜찮습니다."

말은 괜찮다고 하지만 지난 2주 동안 그녀는 잠시도 쉬지 못했다.

달의 눈을 빌려 바닷속 어딘가에 자리 잡은 군단장을 찾아낸다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힘들어 보일 일이었으니까.

고생의 의미로 브릭스를 건네자 단번에 들이키고 조금 기운을 차렸다.

악과에는 기본적으로 자양효과와 버프 효과도 들어가 있으니까.

"어떡할까요."

그녀는 명령을 기다렸다.

얼마든지 군단장을 저격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건드릴 수 있나."

"제 헤일로는 저격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덕분에 공격 능력은 강하지 않지만."

"놈을 열받게 할 수는 있겠군."

이번만큼은 그녀의 역할이 중요했다. 꼭꼭 숨어 있는 놈을 찾아냈다는 걸 칭찬해주고 싶은 부분.

그리고 놈에게 유효한 타격을 먹일 수 있을 거란 것도 대단했다.

"이쑤시개라도 수백 개가 박히면 움찔 정도는 할 테니까요. 보이는 외관으로는 제 화살은 제대로 박히지도 않을 것 같지만요."

"어떻게 생겼는데?"

"서펜트의 열 배 정도 크고, 용이랑 악어를 섞은 느낌이에요. 하지만 몸 자체는 동양의 용과 흡사해요."

용이랑 악어가 섞인 느낌.

대충 예상이 된다.

"단단해 보이나 보군."

"네. 웬만한 검은 튕겨낼 정도로 두껍고 단단한 피부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몸의 부피가 크고, 단단한 피부를 가지고 있더라도 조금만 찔려도 아픈 부위들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눈 같은 부위들 말이다.

특정 부위에 표식을 새길 수 있다면 이번 전쟁은 한결 편해진다.

군단장이 모습을 드러내면 우리 또한 속전속결로 싸울 수 있으니까.

'결국엔 군단장만 죽이면 돼.'

나머지 악마들이 수백만 마리가 있든 수천만 마리가 있든 상관없다.

군단장을 잃은 악마들은 결국엔 우릴 어쩌지 못하니까.

적장의 목을 베어야 승리하는 건 인간이나 악마나 같다.

"눈, 가능한가."

"그게..."

"불가능한가?"

"아뇨. 눈이 없어요."

"... 뭐?"

아마존은 머리 위에 초승달 같은 헤일로를 띄워놓고 한쪽 눈을 손으로 가렸다.

어느새 하늘에는 푸른 초승달이 생겨났는데 저게 아마 눈의 역할을 하는 달인 모양이다.

"확실히 눈이 없어요. 눈이 있을 부위들은 이미 상처가 난 건지 아니면 퇴화를 한 건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럼 다른 부위들은 없나."

"아직까지 따로 약해 보이는 부분이 있지는 않아요."

조금 시무룩한 표정의 아마존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넌 네 할 일을 다 했다."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다.

이런 쪽에 있어서는 나름 전문가라 할 사람이 우리에겐 있다.

"용이랑 악어가 섞인 군단장의 약점이 될만한 곳이요? 눈도 퇴화해서 없는 레비아탄의 약점. 글쎄요."

여러 악마를 관찰한 관찰자는 세 가지 부분을 꼽았다.

"눈을 제외하면 세 가지네요."

"어디지."

"일단은 겨드랑이입니다."

"... 꽤 흥미롭군."

확실히 인간의 겨드랑이 부분은 아주 연약한 피부를 지녔다.

하지만 바닷속에 사는 레비아탄에게도 겨드랑이가 존재할까.

"어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역시, 지느러미 안쪽이겠죠. 그 부분은 취약할 겁니다."

"다른 부위는?"

"역시 눈이지만 퇴화했다고 하니 항문일까요."

"항문이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존재하는 항문.

어류들의 생식기는 겉으로 드러나지, 있는 편이 거의 없으니 역시 약점이 될만한 부분은 항문이 유효해 보인다.

"브란스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악마인 레비아탄의 항문을 공격한다는 미친 소릴 들으니 할 말이 없어지네만. 공격할 수는 있나?"

"네, 달을 레비아탄이 있는 심해 아래로 몰래 내려놓으면 가능해요. 일단 표식만 새기면 되니까요."

그런 것도 가능한 모양이다.

"쯧. 위대한 신화적인 업적이 될 일일진대 항문 공격이라니. 에이."

브란스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탐탁지 않아 했지만, 항문을 공격하자는 것을 반대하진 않았다.

항문이 가장 연약하다는 건 브란스 또한 동감하는 부분이었다.

"크큭! 군단장의 항문을 공격? 아마존도 참 잔인하구먼! 푸하하하!"

바바리안은 그냥 웃겨 죽으려고 했고, 아마존은 그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파파박! 엄청난 고속 연사가 바바리안을 향해서 뿌려졌다.

"야이! 죽일 셈이야!"

"닥쳐."

몇번 활을 더 쏘고는 내 뒤로 도망온 바바리안의 모습을 보니 전쟁 중임에도 웃음보가 터졌다.

"이러면 못 쏘겠지?"

내 등 뒤로 도망친 바바리안이 놀리자 아마존의 머리 위로 헤일로가 떠 올랐다.

그리고 이내 바바리안의 등으로 초승달 모양의 표식이 생겼다.

"하, 항복! 항복항복!!"

그제야 싹싹 빈 바바리안을 보고 나서야 아마존의 머리 위로 헤일로가 사라졌다.

진지한 회의 중이었는데도 우스꽝스러운 둘의 모습에 한참을 웃고 나서야 사람들을 모아 전체적인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우선, 아마존이 녀석을 도발한다."

"항문 공격으로 말이지."

"크크큭."

"그 뒤엔, 나와 레아, 그리고 강철을 선두로 레비아탄을 공략한다."

레아의 헤일로는 광역 힐.

아군에게는 강력한 치유 효과를 발휘하지만, 적에게는 각종 질병을 유발하는 피의 비를 내린다.

아마존의 화살 또한 적을 약화하니 궁합이 잘 맞을 것이다.

"그리고 강철은..."

"놈이 수면 위로 드러난 순간. 나는 나대로 공격하겠다."

"그래."

강철의 헤일로는 아직 나도 제대로 확인해보지 못했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성역이 발동되는 형식인데,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는 권능을 지녔다고 한다.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성역이라 함께 싸우며 판단하기로 했다.

"알고 있겠지만, 바다 위에서는 내 헤일로의 성역은 발휘되기 어렵다."

벨로나의 가시덩굴은 역시나 땅이 존재해야만 한다.

수심을 알 수 없어질 정도로 깊은 레비아탄의 바다에선 쓰기 어렵다.

"이번엔 나도 육탄전을 감행해야 한다."

기본적인 능력치는 헤일로로 버프를 받게 된다. 그러니 놈이 수면 위로 떠 오르기만 한다면 가능하다.

헤일로와 벼락이 큰 쓸모를 다하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약하지는 않다.

애초에 기본 스탯으로만 봐도 다른 네피림들은 어린아이처럼 농락할 정도로 능력치가 높기 때문이다.

근력만 봐도 현재 내 근력은 81까지 상승했다. 근력이 81이란 소리는 헤일로를 활성화하면 200 가까이 올라간다는 소리.

근력이 200이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 대부분은 으스러뜨릴 힘을 발휘한다. 그 힘으로 창을 쥐고 레비아탄을 찌른다면 놈의 가죽이 얼마나 두껍다고 한들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물론 놈은 바보가 아니다.

한 번의 분노로 수면 위로 떠 오르기는 하겠지만 계속해서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싸워주지는 않을 거다.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이번 한 번뿐일 거다."

놈이 단 한 번.

열이 뻗쳐 주면 위로 올라왔을 때.

그때가 아니면 가망이 없다.

같은 수법에 두 번이나 당해줄 만큼 군단장은 바보가 아니니까.

놈이 올라왔을 때.

모든 역량을 끌어올려 단번에 친다.

군단장만 없으면 바다도 사라질 테고 물이 없어진 해양 악마들을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니까.

"결행은 내일.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내일 결행한다. 의의는?"

"없습니다!"

"당연히 없지!"

"없어요."

"좋습니다."

"작전명은 레비아탄의 항문인가?"

장난기 가득한 바바리안의 말을 끝으로 회의를 끝마쳤다.

결행은 내일.

내일이 되어야 전쟁에서 이기느냐 마느냐가 결정될 것이었다.

*

그날 밤.

"잠이 안 오세요?"

"조금."

이른 새벽녘.

잠이 오지 않아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성벽을 거닐었다.

보초를 서는 네피림들과 인사를 나누다 아마존이 있는 걸 발견하고 함께 산책 겸 성벽을 거닐었다.

"내일, 잘 할 수 있을까요."

"불안한가."

"네. 조금은요."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렇다 할 격려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하는 사이 바람이 불었다.

꽤 강한 바람이라 항상 그녀의 얼굴을 가려주던 후드가 벗겨졌다.

"아."

황급히 후드를 다시 썼지만 이미 그녀의 얼굴을 본 이후였다.

정확히는 머리칼과 눈.

"네피림들 중에 간혹, 기프트 때문에 얼굴이 변하거나 머리와 눈의 색이 변화한 자들도 있다고 들었다."

"네... 저도 그중 하나죠."

대표적인 예로는 강철 군주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은 은발.

눈동자와 눈썹 또한 같은 색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마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존의 머리 색과 눈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레벨이 오를수록 진해져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모르겠지만요."

가끔 그런 네피림들이 있다.

왜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가리고 다닐 만큼 흉하지는 않다만."

"그냥, 전 눈에 띄는 게 싫어서요."

"그런가."

그랬을 줄은 몰랐다.

멸망기 초기 때부터 아마존은 항상 랭커에 등재된 인재였다.

그런데 설마하니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꽤 가깝게 지내는 사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걸 생각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부러 남한테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

이런 세상이 되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때의 일 때문이었을까.

정을 두어봤자 좋을 게 없다고 여겨 크게 관심 가지지 않았다.

언제 배신당할까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았고, 환경이 온통 사람이 죽기만 하는 전장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반성해야겠군.'

적어도 내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가지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난 요새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

"이런 날일수록, 생각나요."

"가족?"

"네. 진짜 가족은 아니에요. 가족처럼 절 챙겨주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오래전에 헤어진 가족.

나도 모르게 보육원이 떠올랐다.

유달리 날 잘 딸랐던 여동생.

내게 가족이 있다면, 그 녀석 말고는 없었으니까.

'이쯤 되었는데도 연락이 닿지 않는 걸 보면 죽었겠지.'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아직도 가족을 찾는 글들이 올라온다.

검색하기 쉽게 제목을 '사람을 찾습니다.'로 통일하는데 나 또한 그곳에 몇 번이고 글을 올렸다.

여동생의 이름, 보육원의 이름. 찾는 사람의 이름 등을 적어서 틈날 때마다 올리고 있지만, 연락이 없다.

멸망기가 도래하고 조금 살만해졌을 때부터 찾아보곤 있지만 없다.

이쯤 되면 죽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오래전에 헤어진 동생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연락이 닿지는 않더군."

"그러셨군요."

"못난 오빠였지. 항상 잔소리만 듣고 말았어. 마지막엔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고 싸우고 헤어졌지."

결혼에 관한 부분이었다.

녀석은 반대했다.

생각해보니 녀석의 말을 들었다면, 내 인생은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도 있다.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후회는 언제나 가슴에 남으니까.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건.

"저도. 그래요. 마지막에 싸웠어요. 그리고 죽었죠. 많이 후회되어요."

아마존도 나랑 비슷한 방식으로 헤어진 모양이었다.

"너도, 나도. 어쨌든 가족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난 그렇게 생각한다.

"... 네. 살아야죠. 죽고 싶지 않아요. 지금까지처럼, 전 살 겁니다.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는 거라고 하니까요."

후웅-

또 한 번 바람이 불었다.

아마존의 후드가 벗겨지고 묶인 푸른 머리칼이 휘날렸다.

어둠에 물들어 빛나 보이던 달은 사라지가 횃불처럼 환하게 빛나는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태양 빛에 반짝이는 푸른 머리와 눈동자는, 조금 전과 달리 불안함이 해소된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전, 아직 행복해지지 않았거든요."

'닮았네.'

동생이랑 닮았다.

얼굴이 닮았다는 건 아니다.

미소. 환한 미소가 닮았다.

"가시죠. 대장님."

"그래."

우린 때론, 구차하고 치졸한 작전명을 내세우며 살아남을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죽기 전에, 그래도 난 행복한 사람이었지라며 죽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살아야 했다.

더없이 강한 강적을 결국에는 쓰러뜨려서라도.

살아남는 것.

우리에겐 그게 가장 중요했다.

*

용암이 가득한 레비아탄의 뱃속.

발끝에는 서서히 차오르는 용암.

뚝뚝 떨어지는 산성비는 옷과 갑옷은 물론이요, 세상 모든 것을 모조리 녹여낼 힘이 담겨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리고 내 품에는 갑옷이 모조리 녹아내린 강철 군주가 안겨 있었다.

후회스럽지만 이미 늦었다.

죽기 직전이나 다름없는 상황.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금으로부터 반나절 전을 이야기해야 했다.

달 삼키는 레비아탄 [1]

1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