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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그리고 다음날.

"이건..."

난 높게 솟은 나무 하나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말대로.

답은 악마에게 있었다.

물론.

"철로 된 나무라..."

그들이 알려준 방식과는 조금 다른.

나만의 방식이었지만 말이다.

엘더 레이드 [4]

116화.

평양의 북쪽은 중국.

동쪽은 러시아.

남쪽은 한국군이 북상하는 이때.

중국의 랭킹 1위.

미룡은 평양으로 남하하며 레이드 채널의 채팅방을 보며 미소지었다.

"머저리들."

입에선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채팅방을 보는 눈빛은 썩 날카롭지 않았다.

오히려 둥그렇다.

레이드가 제대로 시작되기 전에는 한껏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자존심부리더니, 역시 수많은 목숨을 어깨에 이고 있어서인지 결국엔 굴복했다.

가면 놈이야 원래 재수가 없고 레벨도 높은 편이라 그럴 수 있다.

인구수도 많고 험난한 환경에서 살아남아 1위가 된 놈이니까.

하지만 데몬시드는 달랐다.

'한국의 인구는 겨우 오천만명.'

그중의 절반은 죽고, 병신이라치면 일천만명 중의 1위.

중국과 러시아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소국.

소국의 1위이니만큼 레벨도 낮다.

대국의 1위가 6렙인데 반해 한국의 1위는 겨우 5렙.

어이없을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난다.

물론 레벨만으로 상대를 판단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보여진 것, 알려진 것이 고작 레벨뿐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레벨은 절대적.

그렇다보니 미룡과 가면소드가 데몬시드를 손아래 동생 보듯 보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모름지기 사람에겐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려하면 구해주지 않고서는 못베기는 측은지심이 있기 마련이다.

"보스, 시간이 됐습니다."

"아, 응."

하늘을 보니 또 거대한 벼락이 내리 꽂힐 시간이었다.

십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는 중국 군대가 제자리에 멈췄다.

이 땅의 벼락을 피할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진군하며 피뢰침을 세워두고 간다면 벼락 맞을 확률은 당연히 적다.

가면 놈이 말했던 것처럼 산이나 땅을 파서 진군한다면 그 또한 벼락을 피할 방법이 될 것이다.

물론 단점도 명확하다.

'느려.'

진군 속도가 확연히 느릴 수밖에 없다. 그냥 걷기만해도 악마들이 쏟아져 나오는 땅인데 피뢰침을 설치하거나 땅굴을 파며 이동한다?

그거야말로 시간을 몇배나 잡아먹는 행위다. 인력 낭비, 힘 낭비, 식량과 각종 자원을 낭비하는 일이다.

'가면 놈은 땅 파면서 오고 있을 게 틀림없어.'

하지만 그렇게 차라리 땅을 파면서 이동하면 벼락과 악마의 습격에 비교적 자유롭다.

물론 시간은 배 이상으로 걸리겠지만 안전하게 오고 싶다면 그 정도 수고는 들이는 게 당연하니까.

하이리턴, 하이리스크.

각각의 장단점이 명확하다.

물론.

중국의 미룡은 명확한 안정성보다는 효율을 더 추구하는 편이었다.

"피뢰침 드론, 띄웁니다!!"

"옵니다!!"

"방벽 세워."

이곳에 사는 악마들은 피뢰침에 쓸 수 있는 모종의 금속을 가지고 있다.

[진철]

-벼락을 부르는 철.

요 근처에 자리잡은 토착형 악마들을 잡으면 한두개씩 발견할 수 있는 손톱만한 철이다. 이 철이 어디서 나오는지, 어딘가로 유입되었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자연재해를 피할 방법이 있다는 게 중요한 점이다.

그렇게 생각한 게 지금의 상황.

"대뢰(大雷)가 반응합니다!"

중국군에 기프트가 드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만든 드론에 진철을 고정시키고 제멋대로 내려쳐질 벼락을 일부러 유도하여 하늘에서 요격당한다.

꽈광-!!

"요격당했습니다! 제트(jet) 타입입니다!"

"후폭풍이 옵니다!"

지면을 변형 시킬만큼 거대한 메가 라이트닝. 그것이 하늘에서 드론을 맞췄다 한들 사라지진 않는다.

번개는 삽시에 분산되어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땅을 들쑤신다.

"드론 격추!!"

"스프라이트 타입으로 바뀝니다!"

"후폭풍 강도 3으로 예상!"

"옵니다!"

콰과가가가가가-!!

그때 비슷한 부류의 방벽을 만들어 내는 기프트를 지닌 이들이 방벽과 베리어를 만들어 후폭풍을 견딘다.

3, 4시간에 한번.

격한 진동과 어마어마한 폭풍으로 방벽과 베리어가 부서진다.

하지만 그 인고의 시간은 짧다.

일부러 낙뢰를 유인해 힘을 분산시켰기 때문이다.

"13회차 기가 라이트닝, 이번에도 무사히 버텼습니다!"

"사망자 0명! 부상자 3명! 경미한 부상입니다!"

"방벽 제거하고 진군한다."

"존명!"

미룡의 입가가 둥글어진다.

"넌 어떻게 할까."

데몬시드.

*

같은 시각, 한국 진영.

데몬시드는 자신이 만든 거대한 나무를 바라보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관찰자."

"예."

"그러니까. 이 진철이라는 걸로 토착화된 악마들은 벼락을 피하고 있었다는 거지?"

"예. 맞습니다. 그리고 제가 확인해본 결과 이건 벽충이라고 불리우는 곤충형 악마의 심장입니다."

관찰자의 기프트.

관찰로 살펴본 결과 진철이라는 금속은 사실 철이 아니라 벽충이라는 벌레가 죽고 난 이후의 딱딱하게 굳은 심장이라는 소리였다.

몇개의 군락을 털어버리고 진철을 얻어내 그중 하나를 씨앗으로 만들어 심었더니 이러한 나무가 나타났다.

나무 표면이 금속의 재질처럼 되어 있고 열매와 나뭇잎은 온데간데 없이 뾰족한 가지들만 앙상하다.

이런 종류의 나무는 처음 본 그는 꽤 놀라워했지만 금세 이런 나무가 탄생한 이유를 유추해냈다.

'온전한 악마가 아닌 일부라서.'

그럴 것이라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무의 효과.

그게 제일 중요했다.

"시드님! 진철 나무에 관한 설명이 사실이라면 이제 저희는 낙뢰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덜자란 벽충 나무』

-불완전한 상태의 악마로 만들어진 나무.

그에게는 이렇게만 보였지만 관찰자의 눈에는 아니었다.

『덜자란 벽충 나무』

-불완전한 상태의 악마로 만들어진 나무.

*진철의 효과를 그대로 간직한 나무이기에 벼락을 부른다. 강력한 에너지를 지닌 벼락을 맞는다면 완전한 성장을 이루게 된다.

아무리 제물을 먹여도 완전히 자라나지 않던 나무.

그곳의 숨은 효과를 알게된 관찰자와 데몬시드는 흥분했다.

"곧 벼락이 칠 시간입니다!"

"관찰자의 말대로라면..."

더 이상 자연재해급의 벼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리고 잠시 뒤.

하늘을 부술듯 우레소리가 사방팔방을 뒤흔들었다.

네피림 군은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각각의 방법으로 방패와 쉴드로 방벽을 만들어 지켜봤다.

"괜찮을까요...?"

"관찰자가 말한거니까. 믿어봐야지. 안된다고해도 일종의 피뢰침 역할 정도는 해줄거야."

그렇지 않다면 약간의 피해는 입겠지만 시도해볼만한 가치는 있다.

"온다!"

그때였다.

콰광-!!

하늘이 번쩍하며 거대한 두께의 벼락이 순식간에 내려꽂혔다.

"방패 올려!"

엄청난 후폭풍이 밀려올 것으로 예상됐지만.

"어?"

"뭐야, 아무것도 안 오는데?"

보이는 것은 벼락 맞아 붉게 달아오른 쇳덩어리 나무와.

"피었어요. 피었습니다! 뭐가 매달려 있어요!"

몇키로 앞을 내다보는 아마존의 눈이 정확하게 나무의 상태를 확인했다.

관찰자의 말대로.

벼락을 맞은 나무엔 열매가 맺혔다.

모두가 두려워할 벼락을 그대로 흡수하여 열린 열매가 말이다.

데몬시드는 급히 표식을 통해 전이했다.

아직 열기가 뜨끈뜨끈한 진철 나무.

나무에 열린 열매와 나뭇잎은 달궈진 금속처럼 붉어졌다 열기가 식어가며 신기한 모습을 보여줬다.

"꼭 사람 혈관같군."

벼락을 맞아서인지 나무 겉표면이 사람 혈관처럼 긴 줄기들이 제멋대로 꼬여있는 느낌이었다.

실타래를 나무 겉부분에 아무렇게나 붙여 놓은 모습이랄까.

조금 징그러운 모습이다.

그와 반대로 열매의 모양은 한입에 털어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원형의 열매. 얼추보면 대추처럼 보인다.

하지만 겉표면은 금속처럼 울퉁불퉁하며 매끈한 부분인데 부스러지는 껍질을 까니 뽀얀 속살이 보인다.

톡.

열매 하나를 딴 데몬시드는 누가 말릴 세도없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맛은 톡톡 쏘는 탄산수 같은 맛.

묘하게 중독될 거 같은 맛이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번개내성이 1% 상승합니다!"

"번개피해가 1% 상승합니다!"

꽤 오랜 기간 찾았던 열매의 효과를 드디어 찾아버렸다.

"게다가 1퍼씩 올려준다고?"

이 지역에서만 만들어낼 수 있는 특수함 때문일까.

진철 나무 열매는 0.01씩이 아닌 0.5%씩 수치가 상승됐다.

열매의 수량은 하나의 나무당 10개도 안되는 수량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승폭이 엄청날 정도로 높다.

'제물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열매와는 달리...'

번개를 맞아야 열리는 나무.

제한적으로 열리는 열매이다보니, 1퍼센트씩 오르는 상승량이 납득이 된다.

데몬시드는 진철 나무의 열매들을 모두 수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로 방향의 모든 군락을 섬멸하면서 간다. 벼락은 이제 걱정할 이유 없을테니까."

"오케이!!"

"다행입니다. 한시름 놓았어요."

"역시 데몬시드!"

"하하하! 다른 놈들은 벼락으로 골치좀 아프겠는데?"

"이제 세시간마다 깨는 거 안해도 되는거야?"

"당연하지!! 데몬시드님이 만든 나무만 있으면 벼락이든 후폭풍이든 우린 걱정할 거 없으니까."

기쁨에 떠들어대는 이들의 말처럼.

한국은 더이상 자연재해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데몬시드는 오히려 벼락이 쉴세없이 내려치기를 바라야하는 입장.

"집결지인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번개 내성을 백퍼센트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겠는데."

물론.

[한국-데몬시드 Lv.5]

-우린 일주일이면 도착. 어쩌면 더 빠를 수도 있음.

거들먹거리는 건 잊지 않았다.

[중국-미룡 Lv.6]

-갑자기? 대뢰는?

악마의 땅에서 치는 벼락을 얘기하는 모양이다.

[한국-데몬시드 Lv.5]

-대뢰? 쉽던데 ㅋ

데몬시드는 흡족하게 채팅을 마쳤다.

[중국-미룡 Lv.6]

-ㅋ..

[러시아-가면소드 Lv.6]

-어제만해도 번개 공략좀 알려달라고 징징거리더니ㅋ

[한국-데몬시드 Lv.5]

-그런 적 없음 ㅅㄱ

[중국-미룡 Lv.6]

-로그 올려보면 나올텐데... ㅋ 초딩이야? 귀엽네,, 데몬시드 며쨜?

[한국-데몬시드 Lv.5]

-서른마흔다섯살 ㅅㄱ

[러시아-가면소드 Lv.6]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존심은 있네. 아주 귀여워.

자존심은 상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내색하는 순간 그들은 물고 뜯을 준비가 되어 있을테니.

눈과 귀를 닫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손은 바삐 움직였다.

[한국-데몬시드 Lv.5]

-너무 늦지는 마라. 평양 가자마자 군단장 목 따버릴 수도 있으니까.

[중국-미룡 Lv.6]

-ㅇㅈ 2주면 우리끼리 다 죽이고 뒤처리나 좀 맡아주면 될듯? 물론 보상으로 나오는 헤일로는 못 갖겠지만.

[러시아-가면소드 Lv.6]

-너희들끼리는 죽었다 깨도 못잡으니까 아서라. 목숨 아깝잖아? 우리 셋이 힘을 합쳐야 한다.

묘한 경쟁심이 표표히 떠오른다.

[한국-데몬시드 Lv.5]

-쫄?

[중국-미룡 Lv.6]

-풉ㅋ

[러시아-가면소드 Lv.6]

-...

[중국-미룡 Lv.6]

-거리가 멀어서 느린가 했는데 그냥 쫄아서 못오는 거였네 ㅋ 어쩐지, 미리 출발한 거 치고는 너무 느리더라. 개쫄보라 땅굴파고 오는거지? ㅋㅋ

[한국-데몬시드 Lv.5]

-두더지도 아니고 땅굴을 판다고? 와, 그건 쫌;;

[중국-미룡 Lv.6]

-코쟁이가 아니라 두더쥐였네 ㅋ

군당장 레이드는 기여도 순위에 따른 헤일로가 보상된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와는 사뭇 다른 힘을 지녔음을 랭커들은 안다.

본능적으로 갈망하는 힘의 욕망이 다르니까.

"출발할까요?"

여지껏 그래왔던 것처럼.

데몬시드는 상대가 누구든, 어느 소속이든 상관없다.

"출발해."

그저 1위.

1위만을 노릴 뿐이었다.

*

같은 시각.

작은 전등에 의지하며 땅굴을 파기에 여념이 없는 러시아 네피림.

러시아의 랭킹 1위.

가면소드가 레이드 채널을 닫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그러십니까?"

"일주일."

"예?"

"일주일 내로 간다."

"평양까지 말입니까? 하지만 땅굴 파기 좋은 기프트를 지닌 네피림은 한정적이라 속도가..."

"지금 거대한 암석 때문에 진입이 느려지고 있습니다. 일주일은..."

그러자 가면소드가 자신의 가면을 바꿔 썼다.

본래의 매끈한 것에서 기괴한 모양의 가면. 마치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 것만 같은 괴물을 닮은 가면으로 바꾸자 그의 몸집도 덩달아 커졌다.

"일주일."

담담한 음성으로 말한 직후.

촤자자작, 쾅!

그의 손톱이 칼날처럼 변해 진로를 방해하던 암석을 단번에 조각조각내 버렸다.

피어나는 먼지 사이로 가면소드가 동굴을 긁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주일. 안되면 자살한다."

정모

117화.

일주일 뒤.

한국군은 평양 직할 시라 불리는 강동군에 당도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꽤 완만한 형태로 랭킹 1위들과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이곳에 진지를 꾸리고 애써 벅차는 가슴을 억눌렀다.

"시드님."

아마존이었다.

그녀가 저 멀리 뭔가를 확인한 듯 긴장한 표정으로 날 불렀다.

고작 악마 무리 정도로 이제 저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지난 일주일.

북진하며 우리가 싸워온 악마의 숫자만 수십만이 넘을거다.

그런데 이제와서 악마의 등장에 저런 표정을 짓지는 않겠지.

아마존은 아마도.

"중국인가?"

"예."

중국의 네피림들을 보고 긴장한 표정을 한 것이리라.

"러시아는 아직인가보군."

일주일만에 갈거라고 호언장담했으니 놈도 곧 오겠지.

브로치에 내장된 '내다보는 눈'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막사를 짓고 있는 중국군을 지켜보다 눈을 돌렸다.

"만나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굳이."

먼저 보자고 하면 모를까.

아직 러시아가 오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부터 탐색전을 펼치며 기 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꽤 늦었군."

아니.

아마도 우리가 빠른 거겠지.

데몬시드의 능력으로 벽충 나무로 대뢰를 온전히 흡수하며 온 우리는 여파에 타격을 입지도 않는다.

북한에 퍼진 자연재해에 한국의 피해는 전무.

하지만 과연, 다른 이들도 그럴까.

러시아는 몰라도 중국은 마냥 피해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시드님 말씀이 맞습니다. 아마존. 우리가 먼저 그들을 환영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시드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분이십니다. 근데 중국에 먼저 찾아가는 모습은..."

관찰자가 내 입장을 대변했다.

"그렇군요. 자존심 문제죠."

"예. 저희가 그들에게 머리를 숙일 이유도 없으니까요."

지금으로선 대등한 입장.

굳이 머리 숙이고 인사하러 다닐 필요는 없다.

"관찰자 말이 맞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러시아가 도착할 때까지는 그저 대기하는 게 맞겠지."

강철군주 또한 동의했다.

"난 빨리 만나보고 싶은데..."

"나도. 중국은 얼마나 쌔려나."

파이어펀치와 바바리안은 중국을 보며 호승심을 드러냈다.

나 또한 어떻게 될지 잠시 기다리고 있자.

채팅창이 떠올랐다.

[중국-미룡 Lv.6]

-두더쥐 새끼 언제 오니?

[러시아-가면소드 Lv.6]

-이미 도착해서 거북이 놈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데몬시드 Lv.5]

-땅속이야? 진짜 땅파고 왔다고?

[중국-미룡 Lv.6]

-징그럽네 진짜...

[러시아-가면소드 Lv.6]

-저게 너희들인가? 기다려라. 내가 지금 가지.

미묘한 신경전을 하는 중.

러시아의 가면 놈이 우릴 비웃기라도 하듯 성큼성큼 다가왔다.

"엄청 크네."

"엄청난 거구입니다. 이상한 가면을 썼는데... 어떡할까요?"

가면소드는 혈혈단신.

그 어떤 동료나 부하도 대동하지 않고 홀로 걸어오고 있었다.

가면의 의미를 모르지 않다.

내 입가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온다니 만나줘야지."

"중국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의 미룡도 혼자 막사에서 나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질세라 막사에서 벗어나 걸어갔다.

혹시나 눈치 없이 동행하겠다하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이는 없었다.

턱.

한참을 서로를 향해 걷던 가면과 미룡, 그리고 내가 멈춰섰다.

근처에 백화점이라도 있었는지 무너져 내린 폐허더미 위로 올라선 가면소드는 팔짱을 낀 채로 나와 미룡을 내려다봤다.

"누가 코쟁이라고?"

가면소드는 생전 본적 없는 흉악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털과 살가죽이 그대로 있는 가면.

마치 살아있는 괴물의 얼굴을 그대로 뜯어 만든 듯한 흉측함이었다.

입고 있는 옷 또한 악마의 털가죽을 뜯어내 두른 모양새.

가면소드라는 기프트와는 어울리지 않게 드루이드같은 모양새였다.

허나 그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희열이 담겨 있다.

약간 반가움이 가득한 음성.

날선 말투와는 사뭇 달랐다.

"누가 팬더년이라고?"

가면소드의 말에 미룡 또한 반문했다. 중국을 상징하는 팬더로 인한 부심을 조롱하는 것으로 팬더년이라 불렀던 걸 꼬집고 있었다.

허나 미룡의 입가도 싱긋 올라고 있는 걸 보면 실제로 문제 삼으려 말하는 건 아니었다.

각국의 랭킹 1위.

그것으로 이루어진 인연.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다보니 뭐랄까.

'게임 정모하는 거 같은...'

묘한 반가움이 서려 있었다.

물론.

가진 힘과 세력이 있다보니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끝나지 않겠지만.

지금은 나도 한껏 어울리고 싶다.

"누가 똥양인이라고?"

놀려댔던 걸 되물어주자 미룡과 가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호탕한 가면소드.

미룡은 쿡쿡 웃었고 나 또한 작게 웃어버렸다.

그때였다.

돌연 가면 놈이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는 순간.

가면이 휙, 바뀌었다.

용과 흡사한 모양의 가면.

아니, 거의 투구나 다름 없었다.

그것으로 변하자 털가죽 옷 위로 드리운 놈의 근육이 파충류의 단단한 비늘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찰나의 불과한 시간.

가면소드는 곧장 뛰어올라 미룡을 공격했다.

쾅-!!

"고작 이정도?"

허나 미룡도 대비하고 있었는지 가면의 습격을 팔짱도 풀지 않은 채 가볍게 막았다.

두꺼운 그녀의 용과 흡사한 꼬리가 가볍게 가면의 주먹을 막은 것이다.

통나무처럼 두꺼웠던 꼬리는 이내 4개로 갈라져 채찍처럼 가면소드에게 연격을 먹이기 시작했다.

'신기한 기프트들이군.'

가면을 바꿔쓰는 거에 따라 형태가 변하고 전투방법이 바뀌는 가면소드도 그렇고, 오직 꼬리만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싸우는 미룡도 마찬가지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미룡의 꼬리는 하나였을 때는 용의 그것과도 같았으나, 여러개로 갈라질 때는 용의 수염같았고 또는 금속처럼 변해 칼이나 창처럼 변하기도 했다.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꼬리는 거리에 한계가 없어 보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전하게 팔짱을 낀채로 도도한 얼굴로 미소지은 채였으니까.

그야말로 여왕.

풍기는 분위기가 그러했다.

가볍게 웨이브 진 흑발에 작은 얼굴. 청바지에 크롭 탱크탑. 가볍게 자켓을 걸친 패션은 멸망기에는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녀이기에 납득됐다.

'저 꼬리만으로 모든게 가능할테니.'

다른 방어구가 필요 없는거다.

레벨이 6에 도달한 랭커이니 꼬리의 형태변환과 강화가 고절하다보니 굳이 장비를 걸칠 이유가 없는 것.

비슷한 이유로 가면도 마찬가지였다. 가면에 따른 신체변화가 주된 전투방법이었을테니까.

쾅! 쾅쾅!!

가면소드의 가면이 또 바뀌었다.

이번엔 새의 형태.

독수리를 닮은 뾰족한 부리가 인상적인 가면으로 바뀌는 순간.

그에게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화아아아악-!! 쾅!!

쾅! 쾅! 쾅!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고 그것이 맹렬히 회전하며 미룡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가면을 바꾼 정도로 저 정도의 마법을 사용한단 말인가?

미룡에게만 감탄하다 이번엔 가면의 능력에 꽤 놀랐다.

이번에는 미룡도 미간을 좁히고는 불기둥에서 벗어나기 바빴다.

6개로 분열한 꼬리로 지면을 찍어 순식간에 이동하는 모습은 용이 아니라 거미 같았지만.

"크하하하하하!"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하다는 듯 대소한 가면소드의 시선이 날 향했다.

미룡은 끝났으니 이번엔 내 차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난 잠깐 고민하다가 입꼬리를 올리곤 기시기시의 뿔 지팡이를 들었다.

지팡이를 드는 즉시, 가면소드의 가면이 또 다시 바뀌었다.

이번엔 개 형태.

정확하게는 늑대 가면이었다.

당연하게도 놈의 몸이 늑대인간처럼 바뀌고 혀를 내빼들고 기분 나쁜 침을 흘렸다.

가면이 아니라 마치 진짜처럼.

훙-!

속도에 특화된 가면인듯 순식간에 사라진 녀석은 눈 한번 깜빡이기도 전에 내 앞에 당도했다.

하지만 놈의 발톱은 내게 닫지 못했다.

펑-!!

진즉에 시전해뒀던 강화 워터볼이 놈에게 직격했기 때문이다.

스르륵.

이내 순식간에 내 주위를 맴도는 워터볼이 5개가 되어 기다리고 있자 어느새 가면소드는 곰가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좀 따끔한데!"

"튼튼한데?"

그 찰나의 사이에 곰가면으로 바꿔서 방어력을 올린 듯 하다.

몸을 틀어 어깨로 막았는지 곰으로 변한 한쪽 어깨가 뻐근하다는 듯 주무르고 있었다.

평양으로 올라오며 6렙 챔피언도 워터볼에 머리가 터졌던 녀석이 많다.

한데 그걸 맞고도 욱신거릴 정도로 끝났다라.

'1위는 1위네.'

내가 데몬시드로 농사를 얼마나 잘 지었냐에 따라 강함이 달라지는 것처럼, 가면소드 또한 가면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냐가 관건 아닐까 싶다.

가만히 가면의 기프트를 생각하고 있을 때, 미룡이 난입했다.

퍼퍼퍽-!!

지면 밑에서부터 솟구쳐 나온 미룡의 검은 꼬리가 가면과 날 노렸다.

동시에 공격하며 쉼없이 늘어난 꼬리는 창날처럼 우릴 노렸다.

크아아왕-!

다시 늑대로 변한 가면이 꼬리르 피해 달아났고.

난 벨로나를 불렀다.

"호오. 내 꼬리를 막아?"

"함부로 꼬리치면 안되지."

벨로나의 덩쿨이 미룡의 꼬리를 단단히 잡았다.

꼬리와 덩쿨의 힘겨루기를 하기 시작하자 드득, 트드득하며 벨로나의 덩쿨이 찢기기 시작했다.

'벨로나가...'

여기까지 오며 벨로나의 레벨들은 모조리 10레벨에 가까워졌다.

특히 내구력과 힘은 11레벨일 정도로 내구력이 엄청나다고 자부한다.

한데 벨로나의 덩쿨이 뜯어질 정도면 미룡의 꼬리 힘이 장난 아니라는 소리.

그녀가 왜 아직도 팔짱을 끼고 있는지 알 수있는 대목이었다.

"우리 막둥이 좀 하네?"

어디 공격만 좋을지 볼까.

내 주위를 떠다니는 워터볼 5개를 그대로 날려보냈다.

총알처럼 날아가는 워터볼 다섯개가 미룡의 눈앞에서 분사된다.

산탄총처럼 터지는 5개의 위력은 7렙 엘리트를 순삭시킨다.

과연 미룡은 어떨까.

'꼬리 하나는 벨로나한테 잡힌 상황.'

그녀는 나머지 2개의 꼬리로만 내 워터볼을 방어해야한다.

콰아아앙-!!

어떤 상황이 펼쳐졌으려나하고 보니 꽤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오우! 꼬리가 방패도 되는군!"

가면의 말처럼 미룡의 꼬리는 자체변환이 가능한지 평평하게 넓어져 미룡을 꽁꽁 옭아맸다.

그것으로 완벽히 방어하고 이내 그 꼬리는 금세 공격으로 전환된다.

"꽤 매서운데? 이것도 막을 수 있어?"

딱.

손가락을 튕긴 즉시, 미룡의 꼬리가 수십, 수백개로 갈라져 살아있는 창으로 변해 내게 쇄도했다.

여기서 내 선택은 두가지.

'표식.'

미리 새겨둔 표식으로 이동.

또는.

"리버슬로우."

유니크 스킬 주제에 쓰려고만하면 맨날 제대로 슬로우도 안되는 녀석.

하지만 이녀석도 이번에 수혜를 입었다.

[리버슬로우+1] (unique)

-대상의 흐름을 늦춰 느리게 한다.

-대상이나 공간의 흐름을 느리게 한다.

〈강력한 둔화〉

-지닌 마력에 비례하여 추가적으로 +30% 둔화된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말.

하지만 대상뿐이었던 것에서 공간까지 개념이 확장됐다.

게다가 둔화의 고유효과까지.

이전의 애매했던 슬로우가 아니라는 말씀.

"!"

그 효과는 지금, 제대로 보여지고 있다. 수백개로 불어난 검은 창날같은 미룡의 꼬리가 내 반경 5미터에 들어오자 현저히 느려졌다.

마치 물속에서 쏘여진 화살이나 총알처럼 말이다.

"지리는데! 똥양인!"

"좀 치네?"

씨익.

웃으며 지팡이로 지면을 두들겼다.

"아까보니 불을 피하던데."

화르르륵!!

"이번에도 잘 피해보라고."

사방으로 피어나는 푸른 불꽃.

불타는 수식언의 권능이 푸른 불기둥을 사방 천지에 피워냈다.

새치기

118화.

[불타는 데몬시드]

수식언에 불타는이 들어가 있는 내 불꽃은 공포의 불.

영혼에 각인된 공포의 불이다.

다른 것들과 비슷하게 공포의 불.

내 수식언도 레벨이 증가했다.

북한에 자리잡은 악마의 숫자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많고 강해서 수식언의 레벨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사방에 피어난 푸른 불기둥들은 그 고행의 산물이다.

『수식언』

[영혼에 각인된 공포의 불 Lv.5▶9]

5였던 레벨은 이제와선 9가 됐다.

나조차도 불태우려 했던 불꽃은 이제 전혀 뜨겁지 않았다.

레벨이 오르니 제어가 가능해지게 된 것이다.

제어력이 강해지니 활용도 또한 놀랍도록 늘어났다. 손짓 한번에 어느곳에서라도 불꽃이 피어난다.

반경 20미터.

마나가 허락하는 한, 내 불꽃은 절대로 꺼지지 않는다.

이제야 진정한 권능.

수식언이라 이름 붙을만하게 변한 것이다.

피어오른 불기둥은 내 뜻대로 허공에서 뭉쳐져 하나의 구를 이뤘다.

또 하나의 푸른 태양이 떠오른 것만 같은 모양새.

불길만으로 효과적인 타격을 주기는 어려운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는 게임을 조금만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불꽃. 열기의 압축.

압축된 열기의 형태가 붕괴됐을 때 일어나는 폭발.

그것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나름의 속도가 필요하다.

하늘 위에 뭉쳐진 불은 공처럼 압축되고 이내 거스트로 순식간에 땅으로 내려 꽂힌다.

메테오라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효과도 그에 미치지는 않는다.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불.

나는 이를 '낙화'라 부르기로 했다.

떨어지는 푸른 유성과도 같은 모습.

낙화의 크기는 대략 지름 5미터.

아직은 숙련도가 낮아 꽤 시간도 걸리고 날아가는 속도도 느리다.

수백마리의 뭉쳐있는 악마들을 상대로는 효과적이지만 소수의 강자들 간의 싸움에서는 써먹기가 애매한 녀석이기는 하다.

하지만.

'슬로우가 강화되서 얘기가 다르지.'

리버슬로우에 꼬리 수십개가 잡혀 있는 미룡이라면 가능하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이미 둔화에 걸린 꼬리 때문에 피하기 힘들 터.

낙화의 폭발 반경은 30미터.

이번엔 꼬리를 방패처럼 만들어 몸에 감싸는 것도 어려울거다.

내 불꽃은, 꺼지지 않으니까.

"칫."

아니나 다를까 미룡이 혀를 찼다.

스걱!

가면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미룡은 나머지 꼬리들을 하나로 만들어 둔화에 걸린 꼬리를 잘라냈다.

잘라냄과 동시에 꼬리를 날개처럼 넓적하게 만들어 공중으로 회피했다.

콰아아아앙-!!

이 모든걸 찰나의 순간에 해냈다.

역시 랭커는 랭커.

한 국가를 대표하는 랭커답게 순간 판단력이 제법이다.

하지만 하늘로의 회피는 명백한 그녀의 실수였다.

"벼락."

카탈린의 벼락이 순식간에 허공에 있는 그녀를 직격했다.

콰지직-!

순간 모든 꼬리를 하나로 만들어 자신의 몸을 감싸 방해했지만 지상으로 추락하는 건 어쩌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의 내 벼락은 보통 벼락이 아니다.

현재, 벽충 열매로 인해 내 번개 피해력은 자그마치 46퍼센트.

웬만한 악마들은 벼락 한발로 숯덩이가 되어버린다.

미룡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돌연 땅에서 묘한 진동이 일어난다 싶던 그때였다.

푸왓-!

발밑의 지면이 부서지며 그 안에서 가면소드가 튀어나왔다.

묘한 손톱.

두더지의 손톱과 괴상한 가면을 쓴 채로 말이다.

"똥양인!"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 근접전은 약하지?'라고.

발밑에서 튀어나온 놈에게 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벨로나가 튀어나와 놈을 저지하려 했으나 그녀의 덩쿨은 가면의 발톱에 순식간에 썰려나갔다.

날카롭기가 엄청나다.

제아무리 악과로 단련된 나라도 제대로 맞았다간 팔다리가 잘려 나갈 것처럼.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내게는 무적의 회피기가 있으니.

"뇌신."

"체력과 마나가 30% 소모됩니다."

파지지직-!

〈불온〉

-불안정한 전류가 신체를 지배하여 모든 공격을 1초 동안 회피한다.

가면소드의 발톱이 날 베려는 순간.

내 신체는 붉은 번개로 화했다.

"!!"

헛손질을 했다는 자각과 동시에 가면 속, 놈의 동공이 확장됐다.

그와 동시에.

〈뇌신〉

-이동 속도 +300%

모든 번개 속성의 피해 100% 증가.

(소모값: 체력의 30%)

(지속시간: 10초)

유유히 놈을 통과한 나는 놈의 등에 손을 가져갔다.

'카탈린의 감전'

파직!!

"끄으으윽!!"

오징어 익는 냄새와 함께 뇌신 상태로 무너진 폐허더미 위로 이동했다.

이동속도 300% 증가. 표식을 쓰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

폐허 위에서 내려다보니.

미룡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겨우 헐떡이고 있었고, 가면은 감전당해 태워진 채로 겨우 고개만 들고 있었다.

난 가만히 지팡이만 든 채로 그들을 내려다보다 말했다.

"반갑다. 데몬시드다."

똥양인도, 소국도 아닌.

데몬시드라고.

*

타닥타닥.

피어오른 모닥불 사이로 이전과는 사뭇 다른 시선이 오갔다.

"강하더군."

미묘한 신경전을 이어가던 가면소드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전력을 쓴 건 아니었지만,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였겠지. 인정한다. 동양인. 넌 최약체가 아니다."

"5레벨 주제에 강하더라."

미룡 또한 동의했다.

의외로 인정할 건 인정했다.

조금 비아냥거리는 건 조금 밉상이었지만 말이다.

"아메리카와 다른 국가들도 지금쯤 엘더 레이드를 공략 중일거다. 우리만 특별한 건 아니란 소리지."

"그렇군."

짝!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의도인지 가면소드가 박수를 쳤다.

"실력은 잘 알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거라 생각하지만 내가 공격한 이유는 실력 확인차 일종의 검증이었다. 등을 맡겨야 하니까."

"알고 있어."

"안다."

가면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어나갔다.

"정찰조에 의하면 엘더. 즉, 군단장은 평양에 있다고 한다. 북한의 역대 수장들 동상 쪽에 특히 검은 먹구름이 짙게 생성되어 있다더군."

정보가 꽤 빠르다.

벌써 거기까지 알아냈다는건가.

"녀석이 움직인다면, 우리가 좀 더 편하겠지만..."

"움직이지 않을 확률이 높나?"

"아마도."

자기 땅이 쑥대밭이 되어있는데 어째서? 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나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 말이다.

"오만하거나 또는 게으른거겠지."

"난 전자의 가능성에 걸겠어."

가면의 말에 미룡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만하다고? 이유는?"

"이 땅의 대뢰. 그 번개의 강력함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거야."

대뢰의 강력함.

지상의 형태를 변형시킬 만큼 강력한 벼락이다.

한번 떨어지면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길 정도로 강한 자연재해다.

피부로 느낀 강력함이니 모를 수 없다.

"그게 왜 있겠어. 그 대뢰는 군단장이 만든 벼락이 틀림없어."

"음..."

은연중에 느끼고 있던 부분이다.

대뢰의 출처.

그것이 어디서 왔겠는가.

왜 이 땅에 도사리겠는가.

그것은 당연, 악마의 땅이기에.

이 땅을 집어삼킨 악.

34군단장 푸르푸르 때문이다.

군단장 푸르푸르가 다스리는 악마들은 푸리린.

그들은 날아다니는 사슴이면서 동시에 번개를 부린다.

그 수장격 인물인 군단장의 벼락은 그들보다 더욱 고강한 것일 터.

당연한 생각의 흐름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

"어떻게 공략할 셈이지."

내가 물었다. 일단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다.

"알다시피 푸르푸르의 수식언은 번개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거다."

여기까지오며 필드에 나타난 챔피언들의 수식언은 대부분 바람, 아니면 번개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 이유가 나는 이 땅에 자리잡은 군단장의 영향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공장에서 찍어낸 상품처럼 비슷한 수식언을 가지고 있지 않을테니까.

"아까의 대련에서 너희들은 번개 내성을 따로 쌓지 않은 거 같은데."

"아이템말고 그걸 어떻게 쌓아? 당연히 내성은 없지."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미룡은 자신의 꼬리를 만졌다.

"내 꼬리는 기본 패시브가 모든 내성이 십 퍼센트야. 방어 형태로 전환하면 최대 삽십퍼센트까지 올라가지. 굳이 따로 내성을 쌓을 필요 없어."

"난, 팬더와 다르다. 가면을 쓰면 번개 내성이 올라가지. 나름의 대비책은 되어 있다. 물론, 러시아의 네피림들도 각자 나름 내성을 챙겼지."

"그렇군."

나름의 대비는 있는 모양이다.

하기사, 그래도 군단장 레이드인데 아무 준비도 안 했을 리 없지.

이들도 한 국가의 대표이니 말이다.

"우린 진철을 이용할 거야. 드론으로 진철 여러개를 띄워서 놈의 벼락을 유도하거나 방해할 수 있겠지."

자그마한 금속.

벼락을 부른다는 진철을 보이며 말했다.

드론으로 벼락을 유도라.

"대뢰를 그걸로 피한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러시아는?"

"우린 땅 파고 왔다. 평양으로의 진입도 괜히 힘 빼지 말고 땅속으로 진입해서 기습하는 게 어떠냐. 바로 군단장과 레이드 뛰는거지."

"진짜 두더쥐냐구..."

"나쁜 방법은 아니네."

하지만 그렇게 효과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군단장이 있는 곳으로 기습한다 하더라도 저 안에 있는 수많은 악마들과 싸워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다른 방법이 있나?"

"있긴 있지."

난 품에서 씨앗을 꺼냈다.

"뭐지? 씨앗?"

"그걸로 뭐하게? 아, 그러고보니 너 시드였지?"

"난 여기 오기 전에 72 군단장, 미노우스의 분신과 싸우고 왔다."

그때 +5 씨드라는 놈에게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6이라면? +7이라면?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난 결국 그것들을 만들어냈다.

재료는 오는 동안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했으니까.

[푸리린 씨앗+7]

[푸리린 씨앗+6]x3

[미노타 씨앗+5]x11

[고블린 씨앗+6]x43

[오크 씨앗+6]x18

[구울 씨앗+5]x138

"놈이 안 나온다면 제 발로 나오게 만들면 그만이지."

열 받아서 나오지 않고는 못 베길 정도로 괴롭히면 그만이다.

우리는 이 땅의 침략자.

그들이 수성전을 원한다면, 응당 그에 맞춰서 날뛰어주면 그만인 법.

"러시아엔 이런 말이 있지. 산적이 있다면 산을 불태우면 된다고."

"재밌는 말이네?"

"방금 내가 지어냈다."

"..."

가면의 헛소리를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거나 할 얘기는 다 했으니까.

"그럼, 내일 보지."

"알겠다."

"그래, 내일."

우리 셋은 서로 악수하고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시드님!!"

"무슨 일이야?"

어제 의논한대로 씨드라를 내세워 싸울 궁리를 하고 있던 내게, 관찰자가 급하게 찾았다.

"러시아도 중국도 안 보입니다!"

"뭐?"

얼빠진 소리를 내자, 아마존도 급히 달려와 말했다.

"중국이 먼저 쳤습니다!!"

"어...?"

중국이 먼저 처들어갔다고?

어안이 벙벙한 그때.

"러시아가 있던 곳에서 거대한 땅굴이 있는 걸 확인했다더군."

중국이나 러시아나.

"하."

각기 따로 움직였다.

쌓아진 우정은 온데간데없고 배신감이 치밀었다.

하지만 이해했다.

'보상.'

저들이 먼저 나선 이유.

그건 바로 레이드의 보상 때문이다.

아무리 우정을 쌓았다 한들 저들은 각국의 랭킹 1위.

어쨌든 간에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고 보상은 놓칠 수 없는 법.

"하, 어이가 없군."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우리도 간다."

가만히 앉아서 보상을 빼앗기고 있을 미련함 따위.

적어도 내게는 없었다.

콰즉.

"수식언 '마나번'을 획득하셨습니다!"

"마나번이 불타는에 흡수됩니다!"

군단장 푸르푸르 [1]

119화.

북한의 땅 전체에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어 항시 어둡고 추우며 초목은 시들어 삭막했으나 이곳.

놈이 있을 평양은 우리가 본 어떤 곳보다 더욱 어둡고 삭막했다.

분명 시간은 아침일텐데 이곳은 여지없이 밤과 같다.

그래서일까.

평양의 중심부는 회오리치는 먹구름이 방벽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평양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회오리 바람의 방벽이었다.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팔짱 낀 미룡은 꼬리를 하나로 모아 방벽을 그대로 갈라버렸다.

날카롭게 벼리고 벼린 그녀의 꼬리는 마치 도검과 같았다.

한순간 갈라진 방벽의 틈으로 중국군을 이끌고 진군을 시작했다.

행군 속도는 거의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악마에 대비하는 조심스러움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더욱 빠른 속도를 원했다.

'곧 눈치챌거야.'

러시아든 한국이든.

당연한 소리지만 레이드의 보상은 제한적.

이쯤이면 슬슬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니 빨리가서 많은 점수를 미리 확보해두는 편이 이득이었다.

헤일로는 3등까지 준다고 하지만 1등이 당연히 더 좋은 헤일로를 받을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물론 첫째는 그것을 위한 일환이고, 두번째는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

참여 보상만으로 1레벨씩 레벨업을 한다지만 솔직히 말해서 한 국가에 헤일로를 둘 이상 가지고 있다면 자국이 더 부강해질 것은 당연하니까.

시대는 변했다.

오로지 힘. 힘만이 모든 것을 이룬다.

불변의 진리를 위했을 뿐이다.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자위하며

탓-! 부서진 승용차의 지붕을 밟고 뛰었다.

아니, 날았다고 보는 게 맞다.

꼬리로 땅을 후려쳐 높이 날아오른 순간, 미룡은 아직 벙쩌있는 악마들을 보며 희열이 가득한 미소를 내보였다.

"죽어."

촤자자자작-!!

콰콰쾅-!

미룡의 꼬리가 수백개로 늘어났다.

순식간에 화살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그녀의 공격에 밀집해 있던 악마들이 모조리 도륙당했다.

'이거지.'

자신의 공격을 너무도 쉽게 막아버린 데몬시드가 이상한 것이다.

미룡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십만에 가까운 중국 네피림들이 모조리 뛰쳐나가 싸우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엘리트와 챔피언들이 튀어나왔고 미룡은 그것들 하나하나를 무참히 찢어발기며 전진했다.

전진, 또 전진. 그 속도는 가히 무쌍이라 부를만 했다.

미룡은 세 걸음을 전진할 때마다 악마 수십마리와 엘리트 한두마리의 목을 모조리 떨어뜨렸다.

초 단위로 움직이며 오로지 효율만을 추구하며 싸우는 그녀의 전투는 예술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비켜!"

콰즈즉!!

꼬리 수십개를 모아 거대한 손으로 만들어 지면과 함께 긁는다.

한바탕 쓸려나간 악마들과 함께 묘한 구조물들이 그녀의 눈에 비쳤다.

그것은 북한의 역대 지도자를 기린 동상이었다. 거대한 동상 둘은 사람의 형태를 했는데 하나는 머리가 없고, 하나는 상체 전반이 없었다.

그것만이라면 미룡이 눈여겨보지 않았을테지만 부서진 동상에는 수많은 인간이 빨랫줄처럼 널려있었다.

아니, 박혀 있었다고 해야할까. 그들 중에는 북한의 중진과 지도자로 보이는 자의 시체도 걸려 있었다.

허나 중요한 건 아니었다.

미룡은 부서진 동상 위를 바라봤다.

머리만 날아간 동상 위에는 한 여인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인간과 닮은 외관.

푸른 머리가 낭창낭창 아름답게 하늘거렸으나 머리 중간에 돋아난 사슴뿔은 묘한 감상을 자아냈다.

한쪽 무릎을 올린 채 잠들어 있는 듯 곤히 있는 모습은 마치 조각상 같기도 했다.

미룡이 기묘한 감상에 젖어 있을 때였다.

콰르륵!

근처의 지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면?"

땅이 무너져내리고 그 안에서 가면소드가 튀어나왔다.

그의 주변엔 러시아 네피림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었는데 꼴을 보아하니 여기까지 땅굴을 파서 온 듯하다.

진심으로 두더지같은 행세에 어처구니가 없을 찰나.

가면소드가 미룡을 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팬더년. 팬더놈들과 함께군."

뒤집어쓴 가면 사이로 놈의 입꼬리가 기분 나쁘게 보였다.

서로 가타부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이곳에 도달한 걸 보면 같은 생각임을 알 수 있으니.

"너도 데몬시드가 적잖이 위협적이었나보지?"

"닥쳐. 코쟁이."

가면소드는 호탕하게 웃었다.

굳이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속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상황도 아니었고 말이다.

"저건가."

"아마도."

적을 확인한 순간.

가면과 미룡의 대화는 거기서 단절됐다.

[34군단 군단장 푸르푸르]

그녀가 반쯤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푸리린과 비슷한 형태의 사슴과 인간이 결합된 모습이 아닐까 했다.

허나 아니었다.

그녀는 완벽한 인간의 형태에 머리에 사슴의 뿔을 가지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뭐라고 해야할까.

이제까지 대부분의 악마들은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지 않았기에 오는 기묘함이랄까.

인간과 가까운 형태지만 명백하게 인간이 아닌 느낌을 주고 있다.

분위기가, 공기가 말하고 있었다.

격이 다름을.

"어이, 미룡! 쫄았나!?"

누구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던 그때였다.

콰직. 쾅-!

돌연 소릴 내지른 가면소드가 곰가면을 쓴 채로 땅을 내려치더니 푸르푸르에게 쇄도했다.

"일단 한방!"

동상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녀를 크게 긁었다.

기형적으로 거대한 곰발톱이었다.

누구라도 제대로 먹힌 기습이다라고 생각한 찰나.

"!!"

그의 공격은 크게 빗나갔다.

"어떻게!"

빗나갈 수 없는 공격이 빗나갔다.

기괴한 억제력이 자신의 발톱을 물리적으로 밀어냈다.

"설마."

미룡 또한 가볍게 꼬리를 날려 공격했다.

쿵쿵쿵!

하지만 꼬리는 푸르푸르의 몸에 닿으려는 직전, 궤도가 바뀌어 애꿎은 벽만을 찔러댔다.

"베리어다! 놈의 몸 전신에 정전기 같은 뭔가가 펼쳐져 있어!"

가면소드가 소릴 질렀다.

물리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무슨 공격이든 물리적으로 밀어내버렸으니까.

완벽 회피 쉴드나 다름없었다.

가면소드는 순간 가면을 바꾸고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물리공격을 회피한다면 마법 공격으로 데미지를 주면 될 일.

허나 그때였다.

후웅.

작은 실낱같은 바람이 불어닥쳤다.

일순, 가면이 만들어낸 불은 삽시에 사라졌고 푸르푸르는 어느새 작은 활을 쥔채로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다만, 화살은 존재하지 않았다.

"피해!"

미룡의 세포가 경종을 울렸다.

그때였다.

푸르푸르의 시위를 놓았다.

뎅- 당겨진 활시위가 허망한 소음을 자아낸 순간.

파직.

가면소드의 근처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그리고 그 즉시.

콰아아아앙-!!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꽂혔다.

그 위력은, 그들이 두려워하던 자연재해 그 자체.

대뢰라 이름 붙인 거대한 벼락이었다.

*

같은 시각.

"여기 흔적이 있습니다!"

"여기도요!"

한발 늦은 진입. 타국의 네피림들이 나아간 흔적이 보였다.

흔적들을 보아하니 어제 싸웠던 미룡의 전투 흔적이 그대로 보였다.

꼬리를 창처럼 이용한 융단폭격.

흔적이 고스란히 보여있어 이것만 가지고도 그녀가 어떻게 싸웠는지 뻔히 보였다.

아주 깔끔하게 도륙을 하고 갔기에 우리는 비교적 편하게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근데 괜찮습니까?"

관찰자의 물음엔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엘더 레이드. 그게 시작도 전에 끝나버리면 어쩌나싶은 초조함이었다.

"괜찮을거야. 우린 상대해봤어."

군단장.

그것이 지닌 힘을 말이다.

비록 힘의 절반만을 지녔고 분신이었지만 군단장의 힘은 진짜였다.

절대 가볍게 여길만한 레이드 보스가 아니라는 소리다.

더군다나 여긴 놈의 땅.

놈을 억제할 만한 것이 없는 곳에서 섣부른 전투는 죽음을 부르기 십상이다. 보상에 눈이 멀어서야 낭패를 보기 쉽다는 뜻이다.

'게다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미노우스보다 푸르푸르가 더 강할 거라고 생각한다.

미노우스는 물리적인 공격이 주를 이룬 녀석이었다면, 푸르푸르는 그와 반대되는 녀석일 확률이 높으니까.

근거없는 생각은 아니다.

내가 멸망기 초반에 입수한 푸르푸르의 반장갑을 보면 알수 있다.

[푸르푸르의 반장갑] (magic)

방어력 +5

-번개와 태풍의 악마, 푸르푸르가 어린 시절 애용했던 반장갑. 그녀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볼트 1일 2회)

내구력 +10% 증가.

번개 내성 +5% 증가.

푸르푸르는 번개와 태풍의 악마.

번개와 더불어 바람까지 부린다.

기시기시와 싸웠을 때도 느꼈지만 벼락과 바람의 시너지는 여간 까다로운 편이다.

한데 군단장의 자리에 오른 푸르푸르의 힘은 얼마나 강력하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직감적으로 미노우스보다 강할거라 생각됐다.

"데몬시드."

강철군주였다.

그녀가 강철마를 탄 채로 멀리 있는 바람의 장벽을 가리켰다.

"저 안이다."

강철군주가 가리킨 그때였다.

검은 회오리바람이 맹렬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는 방벽 안.

그 안에 무언가의 형체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소리와 함께 번쩍하며 일대가 광활한 빛에 휘말렸다.

직후, 방벽이 출렁거리며 격한 진동과 함께 광풍이 불어닥쳤다.

"대뢰?"

마치 대뢰가 떨어진 것처럼.

"데몬시드!"

"알고 있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벌써 시작한 모양이군."

랭킹 10위 팔라딘의 말처럼, 엘더 레이드를 벌써 시작한 모양.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폭음이 들려올 리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가지 않을건가?"

"가야지."

하지만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본래 보스 공략은 준비를 아무리 해도 부족한 법. 공략법에는 직업적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지금 내 무기는 둘.

바로 씨앗과 물뿌리개였다.

"본업해야지."

먼저 시작한 레이드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초조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힘을 빼놓기로 했다면, 완벽을 기한 후 가도 늦지 않다.

막타 치는 건 내 전문이니까.

[진철]x13

게다가 내게는 아직 씨앗이 있고, 제물이 있다. 이것은 군단장 푸르푸르를 무력하게 해줄 것이다.

*

지축이 흔들렸다.

단 한번의 활시위.

그것으로 떨어진 대뢰는 일대를 그야말로 초토화시켰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활시위를 날린 34군단 군단장 푸르푸르는 여전히 긴 속눈썹으로 눈을 반쯤만 뜬 채로 귀찮은 벌레를 처리하듯 손을 휘적거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광풍이 불어닥쳐 중국의 네피림들 대부분이 날아가거나 겨우 실드를 만들어 버텨냈다.

"가면!!"

가면소드를 불러보지만 그는 대답이 없다.

무릎 꿇은 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는 새까맣게 타버린 상태였다.

대뢰를 정통으로 맞아 커다란 크레이터의 중심에 있는 그는 누가봐도 죽었으리라 생각되는 모습이다.

물론 미룡의 모습도 정상은 아니다.

떨어져내린 대뢰의 여파에 그녀 또한 무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한들 그녀가 할수 있는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공격해! 공격!!"

"안됩니다! 모조리 회피하고 있어요!"

"아, 아아악!!"

무심한 표정.

손가락을 튕기는 것으로 바람을 날려 네피림들을 도륙하고 있는 저것에게 일말의 감정은 없었다.

그저 귀찮은 날벌레를 죽이기 위한 행위일 뿐.

오히려 그것이 더 미룡을 화나게 했으나 상황은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녀석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장난치듯 네피림들을 죽이고 있는데 이쪽에선 아무리 공격해도 맞질 않는다.

그 어떤 공격도.

당연히 미치고 팔짝 뛸 지경.

"보스!!"

픽픽.

팔다리가 잘려나간다.

사람들이 쓰러져 죽는다.

'왜...'

나름의 대비는 했다.

진철을 이용한 드론.

중국 랭커들과의 연계. 디버프를 비롯한 상태 이상과 화력집중.

하지만 모든 게 소용없다.

손가락으로 튕겨대는 바람이 뭐든 격추시킨다. 애초에 대기의 흐름이 드론이 뜰수 없는 환경을 만든다.

푸르푸르의 신체로 은은하게 번져 있는 전류가 물리 공격이나 마법을 모조리 회피시켜 버린다.

모든 게 통하지 않는다. 빌어먹을 동상을 부수려 해도 소용이 없다.

통렬할 정도의 무력함.

그것이 전장을 덮쳤다.

무력함은 이내 절망으로 바뀌었다.

절망은 공포로 둔갑했고, 죽음까지 불사하겠다 목놓아 울던 이들은 죽음의 공포 앞에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욕지거릴 뱉어가며 달아나는 이들 사이로. 미룡의 눈은 오직 군단장, 푸르푸르를 향했다.

흠칫.

눈이 마주쳤다.

반쯤 감긴 눈.

푸르푸르는 미룡을 보고는 내려놓았단 활을 잡아 시위를 당겼다.

천천히 당겨지는 활시위. 단두대의 칼날이 하늘 높이 끌어 올려져 떨어져 내리기 직전인 기분이 바로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허나 미룡의 감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놈이 시위를 놓기 전에 빠르게 자리에서 이탈하는 게 신상에 좋았다.

'대뢰를 연속으로 쓰지는 못해.'

그랬다면 진작 여기 있는 네피림 전부가 말살당했을 것이다.

나름의 쿨타임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활시위를 당기는 것도 약간의 제약이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피할 수도 있다.

'대뢰가 내려치기 전에 스파크가 튀었어.'

그것으로 위치를 조정하는 것일 터.

약간의 틈이 있다면 피할 수 있다.

뎅.

그녀의 감상을 일깨우듯 대악마의 활시위가 놓아졌다.

주변으로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가면을 죽인 대뢰의 징조였다.

미룡의 생각대로 징조가 있다.

징조가 있다면 피할 수 있다.

그녀는 순간 꼬리로 지면을 박찼다.

직후 꼬리를 이용해 후폭풍에 대비하려 했다.

그녀는 아직 레이드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

하지만 그녀의 대비와는 달리.

스파크가 튀었음에도 대뢰가 떨어지지 않았다.

쿠궁-!

우레소리와 번쩍임이 동시에 일어났지만 이 근처는 아니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

"뭐야 저게?"

어느새인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기괴한 나무를 향해서였다.

나무를 향해 떨어진 대뢰는 어떤 후폭풍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반쯤 감겨 있던 푸르푸르의 눈이 온전히 떠졌다.

무미건조한 표정에 분노가 깃든다.

그녀의 눈은 오직 한 사내를 보고 있었다.

"데몬시드!"

모두가 달아난 이곳에 어느새 보스룸에 들어온 사내. 뼈 투구를 쓰고 있는 한국의 랭킹 1위.

데몬시드였다.

데몬시드는 미룡과 가면소드를 스윽 보고는 군단장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는 창을 꺼내 투창했다.

꽤 신속한 행동이었으나.

미룡은 혀를 찼다.

"소용없어! 저 녀석은 무슨 공격이든 전부 왜곡시켜!"

미룡이 소리쳤으나 이미 늦었다.

무의미한 데몬시드의 투창이 군단장 푸르푸르를 향해 날아갔다.

이내 그녀의 몸에 전류가 흘렀다.

푸른 전류. 여지껏 모든 공격을 회피해온 그 기술이었다.

미룡은 대비했다.

그의 공격은 빗나간다.

이는 확정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녀석이 뭘 했는지는 몰라도.'

대뢰가 엉뚱한 곳에 꽂혔다.

일단 후퇴하고 의논한다면 확실한 방안을 떠올릴지 몰랐다.

하지만.

푹-!

"어?"

모든 종류의 공격을 회피했던 군단장의 기술이 어이없게도 데몬시드의 것만은 정확하게 맞았다.

마치 군단장 자신도 이게 맞을 줄 몰랐다는 것처럼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서.

왈칵, 피를 토했다.

군단장 푸르푸르 [2]

120화.

왈칵.

피 토하는 푸르푸르는 자신의 복부에 꽂혀 있는 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찔렀어?

푸르푸르, 그녀의 목소리는 아리따운 용모와는 달리 거칠었다.

"던져서."

가볍게 답하자 푸르푸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야.

딱히 곧이곧대로 대답해줄 의무는 없었다.

창이 꽂힌 채로 활을 들었다.

이내 날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피해! 대뢰가...!"

뎅-

놓아진 활시위.

내 주변에 튀기 시작한 스파크.

하지만 난 움직이지 않았다.

콰광-!!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하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뭐야?"

미룡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

그건 푸르푸르도 마찬가지였다.

궁금하다는 듯 날 쳐다보고 있지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진철을 이 근처 여기저기에 모조리 심어두고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생각대로군.'

어쨌거나 푸르푸르는 번개와 바람을 다루는 군단장.

그렇다면 밖에서 얻은 진철을 전투에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벼락을 끌어당기는 나무.

진철로 만든 벽충 나무.

그거라면 놈의 번개를 대신 맞아줄거라는 믿음 아래.

그 결과는 보이는대로다.

놈은 아주 강력한 수단 하나가 막힌 상태. 레이드 승률이 조금은 올라갔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72군단 군단장 푸르푸르]

하지만 아직 기뻐하긴 일렀다.

'수식언이 나타나지 않았어.'

인간처럼 보이는 모습은 필시, 진짜 모습이 아닐거다.

직함이 아닌, 수식언이 드러나는 순간이 진짜 싸움의 시작.

아직은 초석일 뿐.

섣불리 움직일 필요 없다.

차근차근, 놈의 성향과 전투 습관.

그리고 능력들을 뽑아내면 된다.

"벨로나."

땅밑에서 솟아난 벨로나가 동상 위의 푸르푸르를 향해 뻗어나간다.

그 속도는 쏜살같았으나 큰 수확은 없었다.

"..."

벨로나의 덩굴이 푸르푸르의 장막을 뚫지 못했다.

궤도가 빗겨나간 느낌.

뭔가에 막혔다기보다는 미끄러진 느낌이 강했다.

'저거 때문이었나.'

자체적으로 뿜어내는 전류가 모든 공격의 궤도를 비틀어낸다.

아마도 저것으로 인해 가면과 미룡의 공격을 모조리 피히낸 거겠지.

러시아와 중국의 네피림이 약해서 아무것도 못한 건 아닐거다.

그들도 최정예들을 모아 왔을테니.

이해했다.

왜 아직도 수식언을 이끌어내지 못했나 했는데 저것 때문이었다.

"녀석한테는 어떤 공격도 안 통해!"

때마침 미룡이 외쳤다.

미룡은 어느새 가면소드가 있는 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치료할 셈인가.'

조금이라도 승기를 잡기 위해서는 가면소드를 치료하는 게 맞긴하다.

숨이 멎지 않았다면 그가 있는 게 조금이라도 도움은 될테니까.

상황은 알았다.

난 즉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벨로나가 푸르푸르를 옭아메기 시작했다. 궤도를 비틀어낸다면 속박해버리면 그만이다.

꽁꽁 묶어낼 수는 있는지 여러 방면에서 확인해보는 게 우선이다.

'투창이 먹힌 건 스미스의 창, 올바르 때문이었군.'

와이번으로 만든 창.

스미스의 제작품이었다.

[포착의 올바르] (unique)

-명장 스미스가 자신의 은인을 위해 심사숙고하여 만든 창. 와이번의 발톱과 이빨로 만든 고급품이다.

〈강화불가〉

〈강력한 관통〉

〈명중 +20〉

스미스가 만들어준 세개의 창중, 제일 별로다 싶은 창이었다.

와이번을 소재로 만들었으나 서펜트로 만든 클라렌트처럼 독이 폭발하는 그런 대단한 고유능력이 있지는 않은 녀석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도하게 붙은 명중 스탯이 있었지만 전투에 큰 도움은 되지 않으리라 생각되던 거였다.

'강적을 상대로는 썩 쓸모가 있어 보이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보니 과도하게 붙은 명중 스탯 때문에 먹혀들었으리라.

명중에 이런 효과가 있는지는 나도 몰랐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생각해보니 악과 중에서도 명중을 올려주는 녀석이 있어서 내 명중 스탯은 저 창이 없더라도 7에 해당한다.

올바르를 장비하면 총 27의 명중률을 지닌 것이다.

푸르푸르가 내 공격을 허용한 이유는 명중 스탯 때문임이 확실하다.

평범한 성장으로 명중률을 올리기란 쉽지 않으니 말이다.

'벨로나는 먹히지 않겠군.'

그런 이유로 벨로나는 아쉽게도 레이드에서 쓰임을 다 했다.

벨로나의 덩굴로 놈을 옭아메려 했으나 자체적으로 뿜어내는 전류에 벌써 바짝 타버리고 어느새 칼날에 베인듯 조각조각 찢겨나갔다.

독 데미지라도 줄 수 있으려나 싶었지만 그마저도 차단한 모양.

"괜찮아."

벨로나는 성장의 여지가 있다.

지금은 통하지 않을지언정, 다음 군단장 레이드때는 더 강해질테니.

어쨌거나 꽤 거슬리는 베리어다.

가볍게 워터볼을 몇발 쏴봤으나 먹히지 않는다.

고속으로 쏘아진 물방울마저도 놈의 베리어가 전부 궤도를 비튼다.

툭.

그때 놈이 손가락을 튕겼다.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내 고개가 기울었다.

스걱!

본능적으로 피해낸 뒤로는 바람의 칼날이 벽면을 베어냈다.

쿠구궁,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나씩 주고 받은 상태.

다음은 내 턴이다.

푸르푸르와 나는 탐색전을 이어가고 있다. 전투는 꽤 단순하게 이어지는 것 같지만 하나씩 주고 받는 기술의 힘은 절대로 만만하지 않다.

몇번 공방을 이었을 뿐인데 놈이 앉았던 동상은 물론이요, 주변의 구조물들이 모조리 박살났다.

'마음 같아서야 나도 벼락이나 쏴대고 싶지만...'

번개의 수식언을 지닌 놈한테 벼락을 쏴봤자 큰 의미는 없으리라.

내성도 강할테고 무의미하게 패를 다 보일 필요는 더더욱 없다.

놈은 아직 수식언도 드러내지 않은 상태.

간단하게 1페이즈 상태란 뜻이다.

2페이즈가 시작되기 전까지 나 또한 패를 아끼면 아낄수록 좋다.

그렇다면 어떻게 피해를 입혀서 2페를 보느냐는 건데...

내 힘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며 놈이 본모습을 드러내게 하려면 간단하게 생각하면 된다.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카이삭스의 표식으로 전이합니다."

"라이트닝 노바가 전개됩니다."

파직, 쾅-!

순식간에 푸르푸에게 꽂혀 있는 올바르로 전이.

자연스럽게 라이트닝 노바가 전개되며 놈에게 피해를 준다.

-!

그리고 이내.

척, 촤악-!

뽑혀진 올바르와 함께 푸르푸르의 선혈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놈에겐 강력한 베리어가 있다.

그렇다면 올바르의 명중 스탯으로 차근차근 피해를 주는 게 옳다.

썩 나쁘지 않다.

왜냐면.

[카이삭스의 초급 창술+1]

-카이삭스의 정수가 담긴 창술.

〈강력한 창술〉

-창술 추가피해 30%

내 창술도 강화됐기 때문이다.

강화됐는데 아직도 초급이라고 붙은 게 어이가 없지만 어쨌거나 강화는 강화.

창술의 추가피해만 붙었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

그리고 대뢰가 봉인된 지금의 푸르푸르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베리어만 있으면 다 될줄 알았나."

여인의 얼굴로 짐승처럼 이를 드러낸 푸르푸르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허공을 할퀴었다.

곧장 칼날과도 같은 바람이 그대로 날 찢어발기려 날아왔으나.

"어림없지."

내 손에서는 수많은 표식이 새겨진 창들이 흩날렸다.

부채처럼 촤르륵 펼쳐진 해골기사의 창들이 아무렇게 사방으로 흩뿌려진 즉시.

전이.

콰과광-!

허공을 베어내는 바람.

그리고 즉시 이어진 라이트닝 노바와 함께 푸르푸르의 등을 찍어 눌렀다.

쾅-!!

-꺄아아악!

등을 찌른 채로 바닥에 고꾸라진 푸르푸르를 바라보며 확신했다.

'쥐고만 있어도 명중이 올라간다.'

그 말인즉슨.

올바르를 쥔 상태로는 내 다른 스킬들도 전부 명중 보정이 된다는 뜻.

굳이 창으로 싸우지 않아도 된다.

"벨로나."

벨로나의 덩굴이 솟아 올랐다.

푸푸푹-!

찔러댔으나 푸르푸르의 신형은 어느새 허상으로 변해 있었다.

먼지로 변해 사라지더니 허공으로 나타난 놈의 모습은 썩 좋아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 창이 문제야.

확신한 듯 내 창을 바라보는 푸르푸르의 눈에 분노가 깃들었다.

"그래서 네가 뭘 할수 있는데."

놈은 미련하게도 다시 활시위를 잡아 당겼으나 어림없다.

콰광-!

우레소리가 우렁차지만 내게로 뻗지는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악!!

또 한번 자신의 벼락이 어딘가로 새어버리자 거칠게 포효했다.

-죽여버리겠어!!

"생각보다 지능이 높진 않네."

군단장이래서 꽤 긴장했는데 지능 수준이 그렇게 높진 않다.

뭐랄까.

어린애를 상대하는 기분이다.

챔피언급 악마들과 크게 차이가 없는 지능은 실망마저 안겨줬다.

분노에 차 소리지른 것치고 푸르푸르는 내게 효과적인 일격을 가하지 못했다. 벼락은 내 데몬트리에 막혔고, 바람을 날릴라치면 표식으로 전부 피했다. 공격이 회피당하는 즉시 난 몇번이고 놈을 찔렀다.

그게 몇번 이어지자 놈은 발로 지면을 박차며 열받아 했지만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죽이겠어! 죽여버리겠어!!

"시끄럽다. 임마."

벨로나의 덩굴이 푸르푸르를 쫓았다. 이제는 자신의 베리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날개를 꺼내 하늘로 날아올라 덩굴을 피했다.

푸리린과 흡사한 그림자 같은 날개였다. 그녀가 수십개의 덩굴을 피해 하늘로 날아오르던 그때.

푹.

-컥!

은밀히 전이한 내가 놈의 옆구리에 다시 한번 창을 꽂아 넣었다.

이번엔 올바르가 아니다.

왼손엔 올바르. 오른손에는 [독니의 클라렌트]를 장비한 채였다.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합니다."

"맹렬한 독의 위력이 반감됩니다."

아쉽게도 놈은 독에 대한 내성이 있어 폭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체적인 독만으로도 꽤 많은 피해를 입을 게 자명하다.

푸확!

아니나 다를까 놈이 이번엔 꽤 많은 피를 토했다.

비틀거리다 땅으로 떨어졌다.

나 또한 멀찍이 떨어져 지면으로 내려섰다.

"끝장을 내!"

멀리서 미룡이 소리쳤다.

"닥쳐."

모래먼지가 걷히고 푸르푸르의 모습이 내비쳤다.

하지만 난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다.

"왜 끝장내지 않는거야! 지금이면 할 수 있잖아!"

"닥치라고 했다. 미룡."

그녀는 모른다.

무지에서 오는 다급함이다.

하지만 난 안다. 군단장의 힘은 고작 이 정도가 아니다.

저들은 악이다.

악마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장난감으로 생각한다.

좁쌀만한 희망을 짓이겨버리면 찾아오는 황망한 절망.

악은 그러한 것을 좋아한다.

"데몬시드님!"

멀리서 레아와 한국 랭커 무리가 달려왔다.

"밖은?"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푸리린이 나타나 조금 애를 먹고 있죠."

아마존이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관찰자는 쓰러져 있는 푸르푸르를 보고는 안경을 고쳤다.

"죽었습니까?"

"그렇게 보이나?"

"예. 정확하게는 죽어가고 있는..."

그때였다.

아마존이 아무 거리낌없이 쓰러져 있는 푸르푸르에게 화살을 쐈다.

회익, 푹.

꽂힌 화살이 점멸하더니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아마존의 폭발화살이었다.

"죽은 거, 아닌가요?"

제 몸이 폭발해 산산조각 났어도 아무 미동도 없는 걸보면 확실히 죽었다고 볼 수 있었겠지만.

아니다.

"시스템이 조용해."

누구보다 요란하게 떠들었어야 할 시스템 창이 조용하다.

이유는 둘중 하나.

"죽은 척을 하고 있거나."

그도 아니라면.

"... 본체가 아니거나."

나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자.

태양을 가린 검은 먹구름이 마치, 날 비웃듯 천둥으로 번쩍거렸다.

그 즉시.

"피해!!"

꽈광-!!

수십 개의 벼락이 내려쳤다.

이내 피어난 모래 폭풍 사이로.

[34군단 군단장 푸르푸르]

[34군단 군단장 푸르푸르]

[34군단 군단장 푸르푸르]

[34군단 군단장 푸르푸르]

[34군단 군단장 푸르푸르]

[34군단 군단장 푸르푸르]

다양한 인간의 모습으로 푸르푸르의 이름을 단 군단장이 나타났다.

"쉽지 않네."

군단장 레이드, 역시 쉽지 않았다.

군단장 푸르푸르 [3]

121화.

분신술.

대한민국 사람에게 분신술이라는 단어는 꽤 친근한 편이다.

동양권 매체에서 흔히 쓰여지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어릴적 본 애니메이션. 또는 영화에서 자주 쓰여지는 술법과도 같은 게 분신이라서다.

어릴적 분신술을 써보는 상상을 한번쯤은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분신술로 나는 편히 쉬고, 분신에겐 숙제시키는 상상.

어른이 되어서는 여러 분신으로 투잡, 쓰리잡을 뛰게해서 돈을 버는 상상을 말이다.

한창 빚 갚기에 여념이 없을 때.

몸이 두개, 세개라도 부족할 때 나도 그런 상상을 했었다.

물론 상상만으로 취급했던 게 눈 앞에 펼쳐질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데몬시드, 이건?"

바바리안의 물음이었다.

이지경이 된 세상에서 분신술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우리가 생각한 분신술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것이었지만 말이다.

"보이는대로."

눈에 보이는대로의 상황이다.

군단장인줄 알았던 녀석이 사실은 푸르푸르의 분신이라는 소리.

썩을... 이라는 욕이 자연스럽게 목구멍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온다!"

역시 군단장.

녀석의 분신이었기에 지능적인 부분도 다소 아쉬움이 있던 거였다.

'어쩐지 아무리 찔러도 상처가 회복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했더니...'

저 분신들.

재료가 된 것은 단순한 인간.

아니, 네피림들이지 않을까 싶다.

각기 다른 무장을 하고 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갑옷을 입고 있다.

"저거, 카오스에서 팔던 갑옷아냐?"

"맞네요. 저도 입어봐서 알아요."

"초반엔 국민템이었으니까."

어디 한군데 다친 구석은 없어 보이는 놈들이다. 군단장의 힘에 매료되어 스스로를 자처했거나 광신도로 타락한 북한군이 아닐까 싶다.

"인간 말종들이니 사양할 필요는 없다는거지?"

"빨갱이 새끼들이 다 그렇지."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바바리안과 일행들은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우리도, 우리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아아! 아아아!

-머리가! 머리가 아파! 머리가!

꽤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들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먼저 움직인 자가 있었다.

"현혹되지 말자고!"

쾅-!!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거대한 곰이 돌덩이를 잡아 던졌다.

그러자 푸르푸르의 분신들은 하나같이 바람을 날리거나 피해 달아났다.

"살아 있었나."

"덕분에."

가면소드였다.

아직 숨을 헐떡이는 걸 보니 완전히 회복된 상태는 아니었다.

이내 미룡도 다가와 꼬리로 분신들을 공격했다.

이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아프잖아, 씨발년아!

미룡의 꼬리에 작은 생채기를 입은 분신이 욕지거릴 뱉었다.

하나만 있을 때와는 달랐다.

각각의 자아가 아직은 남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분신이 아니라 꼭두각시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 같았다.

"한명일 때보다는 약해! 이 정도면 우리도 상대할 수 있어."

한명일 때와는 확실히 수준 차이가 났다. 기본적으로 베리어를 가지고 있지만 효율이 좋지 않아 보인다.

티끌만한 생채기였지만 이전과 달리 공격이 통한다는 게 중요하다.

일단 통한다는 걸 알게되면 도전하기 마련이다. 미지에 겁을 낼 지언정 방법을 알면 끝없이 탐구하는 게 바로 인간이니까.

"데몬시드! 잠시 쉬고 있어! 이놈들은 우리가 상대하고 있을테니까!"

"맞아요, 회복하세요."

딱히 다친 곳은 없지만 마나가 조금 소비되기는 했다.

저렇게 호언장담하니 잠시 성수를 마시고 휴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놈도 상황을 지켜보려는 거 같으니까.'

어디에 있는지 모를 본체.

아직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면 놈의 생각은 둘중 하나.

상황을 지켜보며 전력을 분석하고 있거나.

"악마란 것들은 대개 그런식이지. 놈에겐 이 모든 게 놀이일게다."

놀고 있거나.

나 또한 브란스의 생각과 같았다.

"방심하지말게. 군단장은 그저 힘이 강해 올라서는 자리는 아니니."

"의미없는 소모전은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건, 나 또한 장담할 수 없군. 우리에겐 의미가 없는 것이... 그들에겐 삶의 목적이기도 한 법이니까."

우리에겐 의미 없는 게 그들에겐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

브란스의 말엔 깊이가 있었다.

"한가지 확실한 건. 우린 놈의 영역에 있고, 아직 놈의 면상도 보지 못했다는 거겠지."

맞는 말이다.

군단장이라는 뜻은 한 군단의 장이라는 뜻이다.

군단을 통솔하는 지휘자.

한데 34군단의 군단장이라는 푸르푸르는 지금까지 군단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않았다.

응당, 군단장이라함은 군대를 통솔하고 전쟁을 치루는 게 옳다.

하지만 이곳에는 어떠한 방벽도 군대도 없었다.

있는 건 그저 무분별하게 존재하는 어중이떠중이 악마들과 간간이 나타나는 푸리린들의 모습들 뿐.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악마 군대를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왜일까.'

왜 카오스 게이트에서 싸우는 것만 못한 수준의 전투가 벌어지는걸까.

묘한 찝찝함이 가시질 않았다.

게다가 브란스의 말대로 우린 놈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것이 주는 사실이 꽤 크게 다가왔다.

놈은 우리를 안다.

하지만 우리는 놈을 모른다.

'내가 놈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자신의 땅에 침입한 침입자.

하지만 푸르푸르는 굳이 우릴 공격하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뒀다.

왜일까.

'나라면 자기한테 도착하기 전에 벼락이라도 날려서 요격했을텐데.'

놈은 그러지 않았다.

전쟁에 대비하지도 않았다.

왜일까. 왜 그랬을까.

'그럴 필요가 없어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끄악!!"

꼭두각시인지 분신인지 하는 놈들부터 족쳐야 한다는 것이다.

"제기랄! 뭐야 이새끼들은!"

팔라딘이었다.

그는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미 잘려진 팔뚝을 부여잡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앞에는 팔다리가 잘린 푸르푸르의 꼭두각시가 있었다.

-죽여줘... 죽여줘.

꼭두각시는 팔다리가 잘려도 죽지 않았다. 잘린 부위에서 전류가 흘러나오며 죽지 않고 움직였다.

잘린 팔과 다리도 전류로 이어져 의지대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마치 전류가 실처럼 잘린 팔다리를 연결해 놓은 것처럼.

"젠장, 저 자식이 내 팔을...!"

팔라딘의 팔을 분신 가져갔다.

그리고는 마치 제 것처럼 쓰기 휘둘러대며 쓰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하! 난 팔라딘이다! 내 망치는 적을 부수고 나도 부수지!

망치를 들고 있는 팔라딘의 팔이 분신의 옆구리에 붙어 움직였다.

번득이는 뇌전만 아니라면 팔다리가 허공에서 제멋대로 춤추는 듯 보였을 기괴한 모습이다.

더군다나 머리가 잘려도 움직였다.

"목을 잘라도 움직이니까, 머리를 터트려! 머리를 터트리면 더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게 말처럼 쉽냐고!"

안 그래도 베리어 때문에 명중률이 떨어지는데 머리를 터트리라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번개를 조심해! 번개에 닿고 내 팔이 잘렸어!"

흘러나오는 번개에 팔이 잘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번개는 전압이다. 압에 의한 전류로 인간을 태워버릴지언정 잘라버리진 못한다. 저렇게 칼로 자른 듯 깔끔하게는 더더욱 말이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나.'

"아가씨, 나이스!"

돌연 바바리안이 쾌재를 불렀다.

레아가 분신의 머리통을 베어냈다.

베었다기보다는 부쉈다는 게 맞았다.

"아, 안돼!"

쩌억!

분신을 부순 즉시 포탈이 열렸다.

놈의 배가 갈라지며 피처럼 시뻘건 포탈이 열렸다.

포탈은 무언가가 수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마치 사람의 얼굴과도 같은 형상을 지녔다.

지옥으로 가는 문 같았다.

"여기도! 여기도 포탈이 열렸어!"

또 하나의 분신을 죽이니 똑같이 배가 갈라지며 포탈이 열렸다.

놈의 분신이 죽으니 하늘에서는 또다시 벼락을 내리쳤다.

또 다른 분신이 내려온 듯 했다.

이제보니 분신은 하나의 통로인 모양이었다.

"악취미군."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검붉은 포탈.

한눈에 봐도 불길함이 극에 달아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제와서 포탈이라니.

이 포탈이 어디서 이어졌을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악마의 뱃속으로 이어졌는지, 아가리로 이어졌는지 모르지 않는가.

그때였다.

"쫄?"

가면소드가 먼저 나섰다.

말릴 새도 없이 포탈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졌다.

"미친 새끼."

가면소드를 욕한 미룡도 곧장 다른 포탈로 향해 뛰어들었다.

"비켜!"

그 둘이 뛰어들자 머뭇거리던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둘 포탈로 향하기 시작했다.

"제가 보기엔 괜찮아 보입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요."

관찰자가 조심스럽게 선언하자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하여튼, 이상한 놈들이야."

"화성님. 가실거죠?"

"가야지."

함정이라고해도 어쩔 수 없다.

아니, 상관없다.

뭐가 나와도 전부 박살을 내줄테니.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낫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척.

레아의 견갑에 표식을 새겼다.

만일의 상황이 벌어져 갈라지더라도 이렇게하면 금세 만날 수있을테니까.

"브란스는 여기 계셔 주십쇼."

"알겠네."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 브란스는 이곳에 있는 게 낫다.

다시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그는 전투력이 강한 편이 아니니.

잠시 뒤.

내 눈앞에는 사슴이 있었다.

머리 위에는 무성한 푸른 뿔을 지니고 있는 거대한 사슴.

산등성이처럼 굴곡있는 등뼈를 덮은 가죽과 털은 푸른 번개가 쉴세없이 요동치고 있는 기묘한 사슴.

그 사슴은 스르륵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내가 아끼던 장갑이야.

놈의 음성이 전신으로 퍼졌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있는 곳은 어느 산꼭대기였다. 그 아래로는 악마들이 자리했고 산의 밑으로는 한창 요란한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네피림들이다.

'일부러 나만 여기로 소환했나.'

장갑.

아마도 내가 특전으로 받았던 반장갑을 말하는 거 같았다.

-내가 지녔던 반지. 그것도 네가 가지고 있구나.

푸르푸르의 음성이 거세진다.

거세진 음성과 함께 번갯불이 동시에 튀겼다.

날숨과 들숨에서 천둥이 묻어 있는듯 기괴한 울림이 산골짜기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내게 줘라.

반장갑과 은반지.

은반지에는 쉴드가 내장되어 있고 장갑에는 번개 내성과 볼트 마법이 내장되어 있다.

지금은 둘다 잘 사용하지 않지만 초반에는 값을 톡톡히 한 녀석들이다.

"줄 수 있다."

난 은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냈다.

그러자 거대한 사슴.

아니, 푸르푸르는 스르륵 인간과 흡사한 모습으로 변해 내게 다가왔다.

손을 뻗었지만, 난 반대로 손바닥에 놓인 반지를 꽉 쥐었다.

-반지를 망가뜨리면, 네 영혼을 꼬아 창부의 음부에 꽂아 넣겠다.

악마는 악마라는걸까.

입이 꽤 지저분했다.

"... 내 질문에 답한다면 주지."

당돌하단 표정으로 날 물끄러미 바라본 푸르푸르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왜 이곳에 왔지?"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악마는 어째서 찾아왔는가.

꽤 포괄적인 질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놈은 간단하게 답을 내뱉었다.

-아버지를 만나뵙기 위해서다.

"아버지? 아버지가 누구지?"

-모든 것을 낳으신 아버지는 온 세상에 단 하나뿐.

놈이 말하는 바를 알았다.

"신을 찾고 있군."

악마들이 어째서 신을 찾지?

애초에 신이 있는건가.

'하긴, 악마도 있는데 신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

신을 보기 위해서 이 난리를 피운다라... 이건 꽤 허탈한 사실이다.

"신이 이 땅에 있는건가?"

-하늘 위에 있겠지.

"그럼 하늘 위에서 난리를 치면 되지 왜 우리 땅을 침범한거지."

-하늘로 가기 위함이다.

놈은 그것을 끝으로 더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하늘로 가기 위해서는 지구의 모든 땅을, 정확하게는 차원석을 부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모양이다.

대강 이해됐다.

잠시 고심하고 있자니 푸르푸르가 불현듯 4개의 손가락을 펼치며 날 똑바로 노려봤다.

-너는 총 네번의 질문을 했다.

"네 답을 이해하기 위해서 했던 질문들이다."

-그것은 계약에 없던 내용이다.

푸르푸르가 한걸음 다가왔다.

-최초의 물음에 답한 것으로 은반지를 가져간다.

내 손안의 은반지가 사라졌다.

또 한걸음 다가왔다.

-두번째 물음에 답한 것으로 장갑을 가져간다. 이는 정당한 대가이다.

내 손에 끼워져 있던 푸르푸르의 반장갑이 사라졌다.

놈은 또 한걸음 다가왔다.

-세번째 물음에 답한 것으로 네 육신을 가져간다. 이는 정당하다.

"뭐?"

돌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놈이 또 다가왔다.

이제는 코가 맞닿을 거리였다.

-네번째는, 네 혼을 가져가겠다. 너는 이제 나의 인형이다.

코로부터 연기가 피어난다.

그것이 멈출 길 없이 놈의 입가로 스며들었다.

-악마와의 거래는 조심했어야지.

'저게 내 영혼...?'

길고 가는 혀를 내밀어 내 혼을 맛보고 있는 푸르푸르의 모습은 여지없는 악마의 그것이었다.

군단장 푸르푸르 [4]

122화.

내 영혼이라는 것은 연기처럼 코에서 빠져나와 놈의 긴 혀에 휘감기고 빨려나가고 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입도 열리지 않는다.

혀도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당연히 스킬도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딱 하나.

쓸 수있는 게 있었다.

화르륵!!

푸른 불꽃이 전신으로 불타올랐다.

-네가 어떻게...!

놈은 내게서 피어는 푸른 불꽃의 근원을 아는 듯 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군단장급에 오른 녀석이라면 당연히 수식언에 대해 알고 있는 녀석일테니.

푸르푸르의 혀에 휘감기던 내 혼이 도로 내 코속으로 들어갔다.

움직이지 않던 몸의 제어가 풀렸다.

"상대의 마나를 일부 태웠습니다."

급하게 인벤토리에서 창을 쥐고 놈을 노려봤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내가 지닌 수식언.

악마들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벌써 내 혼이 빨려 죽었을테니까.

'방금 그건 뭐였지. 질문으로 인한 계약?'

뭔지 모를 억제력이 날 억압했다.

나도 모르게 계약되어 이행을 이룬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어쨌거나 죽다 살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어찌 공포의 불을 쓸 수 있는 것이냐.

당혹감으로 물든 군단장의 얼굴.

놈의 표정을 한번더 뒤바꿀 일격이 중요했다.

푸르푸르는 자신의 손에 붙은 불길을 털어 지워냈다.

겨우 저 정도로 털어낼 불길이 아니건만 놈은 그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괜찮다.

내 불은 오늘을 위해 강해졌으니까.

-?

불길이 없어진 손에서 묘한 기운을 감지한 푸르푸르가 미간을 좁혔다.

-불에서는 위대한 공포가, 하지만 동시에 추잡한 거짓이 깃들어 있군. 게걸스레 내 마나를 훔쳐간 걸 보면 말이야.

푸르푸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위대한 공포. 추잡한 거짓이라 내뱉은 그녀의 기색이 불편하게 바뀌었다.

-너, 인간이 맞긴 하니?

나름 이해한다.

악마의 관점에서 보면 내 불꽃은 매우 기형적일 것이다.

그도 그럴게.

『수식언』

[공포와 거짓의 불 Lv.10]

난 결국 얻어냈다.

거미여왕에게 있던 수식언.

마나번을 말이다. 마나번을 습득한 이후로 내 수식언의 명칭이 이렇게 바뀌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거짓의 군주, 벨리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푸르푸르 또한 극혐하며 추잡한 거짓이라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아무튼 상관없다.

중요한건 내가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점이고 놈의 마나를 불태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제기랄.

푸르푸르는 마치 오물을 보는 듯한 눈길로 내 불꽃에서 멀어졌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난 주머니에서 한웅큼 씨앗을 꺼내들었다.

"씨드라."

뿌려지는 여러 개의 씨앗.

[고블린 씨앗+7]x13

[오크 씨앗+7]x18

[구울 씨앗+7]x13

가볍게 +7 강화 씨앗들이었다.

씨-드라의 스킬 설명은 이렇다.

『씨-드라』

데몬시드를 강제 성장시켜 무작위로 공격하는 씨드라를 만든다. (씨앗의 수준에 따라 강함이 달라진다.)

씨앗의 수준에 따라 강함이 달라진다.

하여 이 씨앗을 합성해서 강화했을 때. 씨드라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렇다면 씨드라 스킬 자체가 강화됐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서른 개를 먹던 악마의 눈물이 백개의 제물을 먹어치울 때까지 몇번이고 열매를 개화시켰다.

점점 늘어나는 제물의 수에 눈물을 머금기까지 했단 말이다.

그리고 얻어냈다.

『씨-드라+1』

데몬시드를 강제 성장시켜 무작위로 공격하는 씨드라를 만든다.

〈각인〉

-씨-드라가 주인을 알아보고, 명령을 수행한다.

추가된 건 고작 하나.

각인.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죽여버려. 씨드라."

군단장 레이드는 이제 시작이었다.

*

"하."

포탈로 들어서자마자 레아가 본 것은 용암이 들끓는 척박한 땅.

그곳을 먼지나게 달려오는 수십만의 악마들과 높게 치솟은 산봉우리들이었다.

검은 산봉우리는 천둥 번개가 몰아치는 기이한 곳이었다.

하나의 봉우리에서 수천에 달하는 푸리린들이 날개를 펼치고 낙하했다.

마치 네피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숨 돌릴 틈 없이 한순간에 몰려들었다.

지상에는 지상대로의 악마 대군이 달려들고 하늘에서는 하늘을 제집처럼 날아다니며 벼락을 뿌리는 푸리린들이 기승을 부렸다.

"젠장! 더럽게 많잖아!"

콰직! 콰즈즈즈즉!!

욕을 내뱉는 바바리안.

"죽어! 죽어! 죽어어어!!"

여과없이 분노를 표출하는 팔라딘.

우드득.

피융-! 퍽!

말없이 화살을 쏘는 아마존.

"전군, 돌격!!"

일백의 강철기사들을 이끌고 전장을 휩쓰는 강철군주.

온갖 불길을 뿜어대는 파이어펀치.

"내 어머니의 이름 아래, 빛으로 인도되는 사악한 무리를 토벌하리. 나로 하여금 빛이 여명으로 이루어..."

그들의 후방에서 연신 마법서를 꺼내들고 영창중인 소서리스들.

이제야 비로소 진짜 전쟁이라 할만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러시아와 중국의 1위.

가면소드와 미룡이었다.

"크하하하! 팬더년! 겨우 그거밖에 안되냐!? 난 벌써 1,235마리째라고!"

"닥쳐!"

노는 듯 싸우는 가면소드와 미룡.

확실히 랭킹 1위들이라 그런지 기프트를 사용하는 측면에서는 예술이라 부를 정도로 기교가 능했다.

네피림들이 힘겹게 한마리씩 상대하는 것에 비해 그들은 한번에 수십에서 수백마리까지 사냥했다.

그야말로 일인군단.

중국과 러시아의 일부가 달아났음에도 개의치 않고 자기들 멋대로 전장을 휘젓고 다니는 중이다.

'화성님이랑 같은 사람들...'

강철군주나 다른 기프트들도 능력의 특성상 전쟁에 특화된 이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단 일격으로 수백의 악마들을 쓸어버리는 호쾌함을 보이지는 못한다.

능력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겁이 없어.'

저들은 정상인이라면 하지 않을 법한 위기속에 자신을 내던진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린다.

대개는 그 한치의 차이로 죽거나 살거나 하는편인데, 저들은 절대로 움츠리지 않는다.

속눈썹이 잘릴 지점까지 깊게 파고들었다가 단번에 모조리 다 죽인다.

랭커와 일반인의 차이는 과연 저런 작은 디테일이 아닐까 싶은 찰나.

레아는 쌍검을 지면에 꽂아 넣고 잠시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투구에서 흐르는 땀이 턱끝에 걸려 작게 빛났다. 하지만 흘리는 땀보다는 붉은 피가 더욱 많았다.

물론 자신의 피는 아니었다.

악마들의 피였다. 붉고, 푸르고, 보랏빛으로 번득이는 걸쭉한 피가 검과 갑옷을 점칠하듯 번져 있었다.

땅은 용암으로 거품이 지글지글 터져나오는 터라 가만히 있어도 더운데 쉴틈 없이 몸을 움직이니 이대로 발화해도 될 정도로 뜨겁다.

"나도... 멈춰서서는 안돼."

"체력이 30% 이하입니다."

"타이탄의 모든 효과가 4배 증가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힘들면 힘들수록 힘의 증가폭이 커지는 스킬.

타이탄 덕분에 오히려 힘이 넘쳤다.

레아의 능력치 평균은 30 언저리.

이것들이 4배로 상승하자 120에 가깝게 상승한 상태.

지금은 랭킹 1위.

데몬시드보다 능력치만으로는 한창 우월한 상태였다.

[뇌풍의 푸리린 이림]

[마성의 오우거 오르미]

[굴탄의 비홀더 파사]

이 전장에서 중요한 건 많이 죽이는 게 아니다.

각자의 역할이 존재한다.

그리고 레아의 역할은 하나.

'챔피언.'

챔피언급의 악마들을 잡는 것.

쾅-!!

레아의 발돋움이 지면을 부순다.

용암이 파도처럼 차오르며 눈먼 악마들을 뒤덮는 순간.

서걱!

"뇌풍의 푸리린 이림을 처치하셨습니다."

"마성의 오우거 오르미를 처치하셨습니다."

"굴탄의 비홀더 파사를 처치하셨습니다!"

"단 일격에 챔피언 데몬 3마리를 격퇴했습니다. 놀라운 업적입니다!"

"오오, 제법인데?"

"데몬시드랑 같이 있던 여자네."

푸확!

한웅큼 피를 토한 레아가 자신의 심장을 움켜잡으며 주저앉았다.

타이탄의 효과는 발군.

하지만 제대로 사용하기에는 아직 그녀의 몸이 완성되지 않았다.

"신체가 한계에 도달합니다."

"타이탄이 종료됩니다."

"피의축복이 활성화됩니다."

급하게 피의 축복을 자신에게 사용하며 휴식을 취하는 순간.

-죽어라!

때를 놓치지 않고 악마들이 접근했다.

챔피언급은 아니었으나 그만큼 막강한 엘리트급 악마들이었다.

뒤늦게 움직였으나 한발 늦었다.

'팔 하나면...'

전장의 순간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를만큼의 긴박한 판단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몸을 비틀어 팔 한짝을 내어주더라도 죽지 않아야 한다. 팔 한쪽을 내어주는 정도로 살수 있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으니까.

일격에 죽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찰나.

그 찰나를 조금이라도 버티면 반격의 때는 오기 마련이니까.

촤악-!!

"끄아아아아아아!!"

몸을 비틀었으나 피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피할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일부러 내어줬다는 편이 맞다.

하지만 이 정도로 고통스러울지는 몰랐다.

'괜찮아. 팔은 붙어 있어...!'

덜렁거리며 절반 가까이 잘려나갔지만 아직 붙어 있다.

그렇다면 승산은 있다.

팔을 붙일수도 있을 것이며, 이 위기에서 살아남을 확률도 높아졌다.

팔 하나를 내주는 대가로 그 정도면 싸게 먹힌 축이다.

촤악-!!

-끄억!

놈의 목을 베어냈다.

'얕아!'

하지만 얕았다.

페이탄의 효과가 끝났고 반동으로 인해 전체 능력치가 감소했다.

그걸 감안하지 못한 결과였다.

얕게 베인 놈이 뜯어질 듯한 목을 부여잡으며 다시 달려들었다.

'아직, 아직...! 죽기 싫어!'

열망하던 그때였다.

콰아앙-!!

돌연 하늘과 땅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수십의 용이 산등성이에서 머리를 치켜 들고 일어났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레아도 익히 알고 있는 녀석들.

바로 씨드라였다.

거대한 존재감이 급부상했다.

레아에게 달려들던 놈들이 주춤하는 사이. 미룡의 꼬리가 놈들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괜찮나?"

"아, 네..."

미룡이 레아에게 손을 건넸다.

하지만 수십가닥으로 갈라진 그녀의 꼬리는 현재진행형으로 적들을 섬멸하는 중이었다.

"저게 뭔지 아니?"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미소 지었다.

그것으로 답은 충분했다.

*

"힘이, 느껴진다."

씨드라가 강화되었을 때, 추가된 것은 고작 하나.

씨드라들이 주인이라는 존재를 깨닫고 말을 듣게 됐다는 것 하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세월.

이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말로 못다한 불편함을 얼마나 감내했던가.

이 자식들 때문에 팔자에 없는 대장장이 흉내를 내기도 하지 않았던가.

눈물이 앞을 가렸다.

리벨롬의 행세를 하며 알바했던 눈물의 세월이...

"생각해보니 그 정도는 아니군."

조금 감격에 겨웠었나.

하지만 그만큼 감동이기는 하다.

벨로나로 이놈들의 신체를 억제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그런 힘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수십. 아니, 일백에 가까운 씨드라의 머리들이 존재하겠으나 지금은 그보다 많다.

합성 씨앗이 +7을 넘어가는 순간 씨드라의 머리가 하나 더 돋아났다. 그렇다. 이제는 한마리에 4개의 머리를 지닌 강화 씨드라가 나타난 것이다.

+7 합성 씨앗으로 만든 씨드라들의 몸집은 삼십미터에 육박.

둘레는 수미터에 이른다.

용이라봐도 무방한 놈들은 하나에 머리가 넷.

서른마리 정도를 풀었더니 일이십이 넘는 머리가 오직 하나의 적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보기만해도 장관인 모습.

그러나 뿌듯한 나와는 달리 푸르푸르의 표정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하.

푸르푸르는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

일백의 머리가 순차적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꼴이 마뜩찮은 모양.

물론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브레스."

백이십의 머리가 내 명령 한번에 아가리에 기운을 모았다.

빛의 입자들이 모여들었다.

그것들이 한번에 쏘아진 순간.

"레이저 쇼 같네."

한여름 밤의 레이저쇼 같은 광경이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수놓았다.

군단장 푸르푸르 [5]

123화.

악마들의 산이 무너져 내렸다.

하늘에 대항하듯 높게 솟아 있던 흑산은 무너지고, 그들의 터전은 모조리 돌덩이가 되어 굴러떨어졌다.

덕분에 씨드라들도 갈 곳을 잃고 떨어져 내렸으나 겨우 그 정도로 시들어버릴 놈은 없었다.

자그마치 +7강 씨드라.

보통의 방법으로는 죽지 않았다.

씨드라의 머리 위에 올라타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이전과는 사뭇 다른 너덜너덜한 모습의 푸르푸르가 나타났다.

팔다리는 여기저기가 없어져있고 복부마저 뻥 뚫려 있는 참혹한 모습.

끈적한 핏물을 흘리고는 있지만 난 방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머리 위엔 이제야 자신의 진정한 수식언을 드러낸 채 였기 때문이다.

[땅 비트는 푸르푸르]

'땅 비트는?'

분명 번개나 바람에 관련된 게 아닐까 했다.

그런데 '땅 비트는'은 이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식언이었다.

창을 쥔 손속에 의문이 가득한 때.

돌연 눈앞이 번쩍였다.

시야를 앗아갈 만큼, 전조 없는 섬광이 내 눈을 가렸다.

그야말로 찰나.

하지만 그 찰나가 주는 변화는 내 심장을 철렁이게 만들었다.

쿠구구궁-!

빛은 소리보다 빠르다.

뒤늦게 들려온 소리와 함께.

섬광으로 나가버린 시야가 돌아왔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백여개가 넘는 씨드라의 머리가 전부 떨어져 내리는 현실이었다.

"!!"

귀가 멀어버릴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벼락의 향연.

스프라이트처럼 분사되는 수백개의 낙뢰가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일반적인 벼락과는 다르다.

앞서 보았던 대뢰와도 다르다.

놈의 벼락은 칼날처럼 씨드라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버렸으니까.

콰아앙-!!

무너지는 산봉우리와 함께 굴러떨어지는 씨드라의 머리가, 몸체가 산을 뒤덮는다. 무너지는 씨드라의 모습에 플라이를 킨 채로 마른침을 삼키자 이내 달라진 모습의 푸르푸르가 안개 속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그게 본모습인가."

전체적인 모습은 이전에 보았던 '뇌풍의 기시기시'랑 같은 모습이다.

하체는 사슴의 것인데 반면, 상체는 인간과 흡사하다.

얼굴엔 원시 부족민과 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각종 장신구들이 코와 귀에 잔뜩 걸려 있었다.

머리에 돋아난 무성한 사슴뿔도 그녀의 신비로움을 더 해주고 있었다.

"34군단 군단장 푸르푸르가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대악마는 존재 자체로 살아있는 종에게 두려움을 부여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30% 하락합니다!"

"공포 내성이 이를 저항합니다!"

"군단장 푸르푸르가 이곳을 자신의 땅이라 선포합니다!"

"'비틀어진 땅'의 영역 내에 있는 네피림은 전원 비틀어진 취약함의 저주에 걸립니다!"

『비틀어진 취약』

-받는 번개 피해 20% 증가.

"번개 내성으로 '비틀어진 취약'의 효과가 감소됩니다."

씨드라의 브레스로 사라졌던 먹구름이 다시금 드리운다.

하늘을 뒤덮는 건 당연하고 이제는 지면까지 은은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푸르푸르가 움직였다.

사슴의 하체로 허공을 사뿐히 점프하던 놈은 자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콰광-!!

그러자 이변이 발생했다.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이 땅을 비틀었다.

"..."

평범한 벼락이 아니었다.

놈은 마치 나에게 보란듯 자신의 벼락을 네피림들이 싸우고 있는 전장 한복판을 향해 날렸다.

벼락이 내리치자 거대한 폭음과 함께 땅은 거대한 구멍이 생김과 동시에 일그러졌다.

마치 잡아 뜯어 비튼 것처럼 기괴한 모습으로 지형이 바뀌고 있었다.

땅속으로 파고든 전류는 땅밑에서 솟아져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

그것만으로 주위에 있던 네피림들은 모조리 몸이 절단 나 죽어갔다.

하늘과 땅을 오가며 끝없이 이어지는 벼락.

그것이 바로 그녀의 권능이었다.

-내 벼락엔 폭풍이 깃들었다. 네가 사용하는 권능과 같지.

설명 또한 친절했다.

두번째 수식언을 얻은 나의 불은 마나번이 자연스레 합쳐졌다.

영혼의 불임과 동시에 마나번의 효과까지 가지고 있는 내 수식언.

말인즉슨.

'푸르푸르도 두개의 수식언을 하나로 사용한다는 뜻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저런 조화를 부리지는 못할테니까.

-궁금해하는 얼굴이구나. 왜 가르쳐주었냐는 표정이야. 그렇지?

"그래."

수긍하자 푸르푸르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굳이 싸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

-우리가 싸울 이유가 있나?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도 난 아니야. 왜 싸워야 하는데? 난 땅을 갖기위해 이들과 전쟁을 벌였고 승리했다. 그걸 너희들이 지탄할 자격이 있을까?

생각지도 못한 말이다.

싸울 생각이 없다라.

-이 땅에 내려 앉으며 많은 것을 보았다. 너희들의 역사란 것들이지. 인간이란 자들은 때론 우리들보다 더 많은 것을 부수고 죽이지. 너희들은 같은 이들끼리 싸우고 죽이며 남의 것을 빼앗지 않니. 나 또한 그랬어.

그런데 왜 자기가 공격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굴고 있었다.

"그거야..."

-어차피 그들이 미리 알려줬겠지. 우리가 너희들의 땅을 가지고 싶어한다고. 우린 정당하게 싸웠다. 그리고 승리했지. 그런데 너는 무슨 권리로 내게서 이 땅을 빼앗으려 하는거냐. 우리들의 목숨을 노리는거냐.

"..."

-내 인내심을 이제 한계에 달했다. 가만히 있는 내 터전에 찾아와 헤집어 놓은 것, 그래 이 또한 작은 유희라 생각하면 나름 즐거웠어. 하지만 이 이상은 참기 힘들구나.

그녀의 음성은 마치 어머니의 것처럼 나긋나긋하고 자상했다. 하지만 그 속에 자그마한 노기가 깃들어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게 됐다.

자상한 어머니의 훈육을 듣는 것처럼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녀석의 입장에서 우리는 그저 침입자일 뿐이라는 건가.'

한데도 그걸 넘어가주려 한다.

악마답지 않은 태도였다.

불필요하게 자상했다.

불필요하게 자애로웠다.

-네가 오는 걸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내 물건을 지니고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지. 하여 지켜봤다.

그녀는 또다시 한걸음씩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상한 말로 내 혼을 빼놓으며 안쓰러움 가득한 낯으로 걱정하면서.

-내 물건을 찾으니 알겠어. 너도 우연히 얻은 물건일 뿐이었더구나. 힘겨운 나날을 내 물건으로 이겨냈으니 넌 내 아들이나 다름없단다.

푸르푸르는 더욱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적의 따위는 없다는 듯.

-위에 자리한 자들이 마음대로 내 물건을 네게 건넸더구나. 무엇을 위해 건넸는지 아느냐. 널 그저 부리기 쉬운 말로서 쓰기 위함이었다. 이 어찌나 잔악한 마음씨일까.

위에 자리한 이들.

역시 악마가 있다면 하늘 위의 천사도 있다는 뜻일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다.

-아들아. 어미 없이 힘들었지?

아들.

돌연 뭉클한 감정이 피어났다.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돈다.

그동안 엄마 없이 살았던 보육원에서의 기억과 서러움이 올라왔다.

머리는 알고 있다.

저 악마가 내 어머니가 아닐 거라는 걸.

하지만 감정은 쉼 없이 요동쳤다.

굳게 다문 입은 자꾸만 한번도 불러본 적 없는 엄마라는 단어를 내뱉으려 힘없이 벌어진다.

목놓아 부르며, 왜 이제 왔냐고. 그동안 힘들었다며 토로하고 싶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뀐다.

악마들이 들끓는 전장이 아닌 산속에 위치한 평화로운 보육원이었다.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는 중 난 보육원의 입구를 바라봤다.

어느 아줌마가 찾아와 나와 함께 있던 생원을 데려갔다.

예전에 자식을 버렸던 부모라고 선생님을 말씀하셨다.

시간이 지나 반성하고 아이를 되찾으러 온 거라며 그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

그 뒤로 나는 한동안 보육원의 입구를 멍하니 바라봤다.

언제고 내 어머니가 날 버렸음을 반성하고 찾으러 오지는 않을까해서.

나도 엄마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이 떠올랐다.

저 녀석도 있는데 나라고 없지는 않을 것 아닌가. 왜 모두가 가지고 있는 어머니를 난 없어야만 하는가.

나도 있을거다. 아니, 분명히 있다.

없을 수가 없다!

-아들아.

어머니의 목소리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성이었으나 날 부르는 걸 느낄 수 있다.

난 손에 쥔 공을 놓고 달려갔다.

엄마도 날 쳐다보고 있다.

서로 처음본다. 처음보는 얼굴이다.

꿈에서조차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다.

날 아들이라 부르며, 내가 엄마라 부를 관계라는 걸.

굳이 자질구레한 인과관계나 서류상의 작업이 필요치 않다.

엄마다.

어머니다.

어머니는 말없이 웃고 계셨다.

평생을 그렸던 어머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평생을 그렸던 어머니가 날 찾아왔다.

친구들은 틀렸다.

한번 버려진 아이를 찾아올 부모는 없다는 짓궂은 친구들의 비난적인 생각이 나만을 빗겨나갔다.

환희가 차올랐다.

친구들은 울고 있었다.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물 흘렸다.

미안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게는 있었고, 저들에게는 없었을 뿐인 이야기다.

나 또한 슬퍼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게는 이제, 엄마가 있다.

난 이제 혼자가 아니다.

가족이 있다.

의지할 따스한 품이 존재했다.

"엄마...!"

그때였다.

"안되네!!"

불현듯 들려온 노호성이 달려나가던 내 발걸음을 멈췄다.

보육원의 안에는 한 노인이 있었다.

누구일까.

늙고 병든 노인이었다.

인상이 험악해서 무서웠다.

"꾀임에 넘어가서는 안돼! 한번 놈의 꼬드김에 넘어가면 돌이킬 수 없어!! 주변을 보게!!"

하지만 노인의 목소리는 험상궃은 얼굴과 달리 익숙했다.

나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아들아.

흠칫! 어머니의 손을 잡기 직전, 놀라 뒷걸음질하고 주변을 살폈다.

보육원의 풍경이 무너져 내린다.

울고 있던 아이들의 모습이 씻겨져 나가고 지나칠 현실이 망막에 새겨졌다.

전장이었다.

붉은 땅은 용암과 피가 뒤섞여 매캐한 냄새를 만들었다.

하늘과 땅으로 이어진 번개 줄기는 존재만으로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중이었다.

"으으윽! 안돼!!"

어느새 전장의 양상은 악마들에게 기운 상태였다.

땅은 천재지변을 겪은 듯 비틀어져 기괴한 꼴이었고 벼락은 아무렇게나 내리쳐 네피림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화성님!!"

레아 또한 악마와 싸우는 중 날 불렀다. 왼팔을 크게 다쳤는지 한손으로만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정신차려 똥양인...!"

"데몬시드!!"

미룡과 가면소드도 마찬가지였다.

'몇초나 정신을 잃고 있었지?'

나도 모르는 새에 빠져 들었다.

놈의 간악한 속삭임에!

내가 정신을 놓은 사이, 푸르푸르와의 격전을 치뤘는지 가면소드는 팔이 뜯겼다. 미룡은 꼬리가 전부 잘려 간신히 살아 있었다.

바바리안과 아마존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도끼와 활을 쏘고 있었다.

넝마가 된 강철군주는 한자루 검을 쥔 채로 산처럼 쌓인 시체 위에서 힘겹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다른 네피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마다의 적을 상대하며 부러진 검과 무기를 들고 싸웠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모두 죽어가고 있었다.

푸르푸르가 아무렇게나 내려치는 벼락이 힘겹게 쌓아올린 네피림의 모든걸 유린하고 있었다.

-쯧, 쥐새끼가 괜한 소릴.

그렇다.

내 앞에는 어머니가 아닌, 34군단 군단장, 푸르푸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아닌 악마였다.

내게 어머니는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대가는 혹독했다.

내 몸은 이미 놈에 의해 넝마가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손에 쥐어진 창은 빼앗긴 지 오래.

내가 지닌 창들은 어느새 내 몸에 박혀들어 있었다.

난 죽어가고 있었다.

군단장 푸르푸르 [6]

12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