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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우스 [1]

104화.

꿀꺽.

데몬시드와 함께 길을 걷는 아마존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가 걷는 걸음걸이마다 악마들의 시체가 즐비했기 때문이었다.

촥! 쿠웅!

악마로 변이한 광우들의 크기는 일반적인 소보다 3배 정도 크다.

과장 조금 보태서 집채만한 크기라고 볼 수 있는데 데몬시드의 마법인 덩쿨이 땅밑에서부터 창처럼 뻗어져나오면 일순간에 쓰러졌다.

그 속도는 아마존의 눈으로도 겨우 쫓을 정도였으며 눈에 보일 정도로 점점 빠르고 간결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의미없이 찔러넣은 덩쿨로 사체를 찢어 놓더니 이제는 약점을 찾았는지 목덜미나 가슴 부위만 노려 푹 찌르기로 그친다.

'동시에 최대 열 마리. 시전속도는 0.1초. 아니 그것보다 빨라.'

아마존인 궁수다.

궁수가 활을 쏘기 위해서는 눈이 좋아하며 악마들이 범람하는 지금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관찰력은 필수불가결이다.

아마존은 자신도 모르게 데몬시드와 싸우는 걸 상정했다.

하지만 몇번을 상상하고도 그에게 화살 한발을 맞추지 못했다.

대부분은 화살을 활시위에 거는 즉시 몸이 관통당했으며, 눈가림을 통해 쐈다하더라도 손쉽게 덩쿨에 의해 막히고 반격당해 죽임당했다.

그의 대단위 마법도, 붉은 벼락을 부리는 투창도 아니라 단순한 덩쿨 하나로만 상상한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격차. 그로인한 허탈감이 아마존의 가슴을 채우고 있을 때.

누구보다 놀라고 있는 건 다름아닌 데몬시드였다.

'미친 이게 뭐야.'

미로 속에 있는 광우들이 죄다 뛰쳐나오는지 수십에서, 수백마리까지 시체들이 쌓이고 있다.

하지만 그는 벨로나 말고 다른 스킬을 사용하거나 한적이 없다.

벨로나 하나만으로 모든 악마들을 섬멸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법이 아니라 거의 소환이네.'

처음 소환할 때만 마나를 소모할 뿐, 그 이후로는 소모되는 마나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아마도 계속해서 쏟아지는 악마들을 쓰러뜨리고 있어서이지 않을까 싶다.

그도 그럴게.

"벨로나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벨로나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벨로나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계속해서 벨로나의 레벨이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장력이 상승할 때마다 전투의 학습 능력이 높아졌고, 내구력과 힘, 관통력은 따로 말할 필요 없이 직관적인 힘이 크게 증가했다.

처음에는 광우들의 돌진을 저지하는 걸 버거워했지만 지금은 뒷다리를 붙잡고 내팽겨치는 것도 가능하다.

실시간으로 상승하는 경험치.

그리고 레벨의 상승으로 인한 변화가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덩쿨을 모아서 방벽을 만들면...'

쿵! 쿵! 쿠웅!!

"벨로나의 내구력이 상승합니다."

"벨로나의 힘이 상승합니다."

"벨로나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내구 Lv.2〉 ▶ 〈내구 Lv.3〉

이렇게 레벨이 올라간다.

특정 행동으로 인한 경험치를 습득하고 그로 인한 레벨업.

직관적이고 훌륭한 성장 시스템이다.

게다가 따로 명령하지 않아도 자율적으로 적과 아군을 피아 식별해 최적의 경로로 섬멸하는 지능까지.

그야말로 엄청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마법이지 않은가!

'개쩌네 진짜.'

물소뼈 투구를 쓰지 않았던 멍청한 웃음을 흘리는 걸 아마존한테 보일 뻔 했다.

그 정도로 벨로나의 성능은 확실했고 흡족했다.

물론 단점이라면.

'내 경험치 다 뺏어가네.'

이 녀석을 사용하면 경험치를 모조리 빼앗긴다는 게 흠이라면 흠.

하지만 이제와서 경험치는 그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기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수십만의 악마를 잡아도 하나의 엘리트. 하나의 챔피언을 잡는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익히 깨달았으니까.

"숫자가 꽤 많군."

"광우가 아닌 것들도 꽤 많네요. 아마도 미로 때문이겠죠."

미로 속 악마들의 숫자가 상상이상으로 많다. 덕분에 벨로나의 성장이 빨랐지만, 지하로 들어가기 전인데도 이 정도로 많을 줄은 몰랐기에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기네요."

하지만 날 중심으로 펼쳐지는 벨로나의 범위는 반경 십미터를 상회했기에 지하로 통하는 계단까지 도달하기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하 입구에서 멈춰선 아마존은 다른 함정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해보고는 앞장섰다.

"아마존."

"예?"

난 품에서 악과 주머니를 던졌다.

"이건..."

"던전 정보의 보상."

그녀에게 좋을 갖가지 악과들이 들어있는 꾸러미다.

야간시야를 올려주는 추종자의 바나나. 강골의 오디.

건강의 오크전사 키위. 명중과 직감을 올려주는 푸리린의 고추 등등이 들어있는 주머니였다.

"감사합니다."

아마존에게는 거는 기대가 크다.

정부와 연이 닿아 있고, 그로인해 가진 정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만한 인재에게 베풀지 않으면 어디에 베풀까.

앞으로도 내게 던전의 정보를 물어올 어여쁜 제비이니 보상은 후하면 후할수록 좋다.

주머니를 열어본 아마존의 눈이 더없이 총명하게 빛났다.

"가지."

"넵!!"

히든던전이 있든 없든, 오늘 내로 미로를 모조리 돌파하고 보상을 쓸어담으려면 한시바삐 움직여야했다.

미로는 지하로 들어가는 지금부터 제대로 시작이니까.

*

같은시각 불별도.

"브란스, 한동안 기부도에서 안 나오시더니 웬일이세요?"

불별도에 나타난 브란스를 본 레아는 거대 솥에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 썩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가 동시에 나는 스튜를 본 브란스는 눈가를 가늘게 떴지만 구태여 요리에 대한 언급 하지는 않았다.

괜히 한마디 했다가는 시식해보라는 소리가 던져지기 때문이다.

"데몬시드는 어디 있더냐."

"화성님은 소 잡으러 가신다고 하시던데요?"

"소?"

"네. 소가 아주 많은 동네로 마실간다고 하셨어요."

"에잉, 그간의 연구 좀 자랑하러 나왔더니 그새를 못 참고 밖으로 나갔구먼."

"뭔데 그래요?"

레아는 브란스의 손에 들린 약병을 보며 물었다.

"농축액이지."

"농축액이요?"

"오면 말해주마. 그런데 소라... 미노타를 잡으러 간건 아니겠지?"

"글쎄요. 거기까지는 잘... 근데 그건 왜 그러세요?"

"놈들은 의외로 지성이 뛰어나지. 미노타가 멍청하다는 편견은 편견일 뿐이니까."

미노타는 뛰어난 괴력 때문에 다소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지만 그것과 비견될 정도로 지능이 높다.

"물론 그 지능을 멍청할 정도로 우직한 곳에 쓴다는 게 문제지만..."

브란스는 턱을 쓰다듬고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한 걱정이겠지."

다름아닌 데몬시드니까.

"설마하니 놈들이 제단이라도 만들었을라고."

그랬다면 그곳은 이미.

"지옥으로 변했을테니."

*

"우욱!"

지하 미로.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아마존은 헛구역질 했다.

진득한 피냄새.

부패된 시체의 그것과 여기저기 널려있는 살덩어리들이 우릴 반겼기 때문이다.

"괜찮나."

"예...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더 참혹한 모습이라."

"신경쓰지마."

놀란건 아마존 뿐만이 아니다.

상층과 지하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달랐다.

약간의 횃불만이 지하의 어두컴컴한 시야를 밝히고 있었고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토막나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크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진짜로 놀란 부분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사육장..."

사육장.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언젠가 학교에서 체험학습을 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먹는 고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지만 덕분에 그나마 있던 동심이 박살났던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난 그때 이것과 같은 걸 봤다.

가축용 소나 돼지를 키우는 곳.

쇠로 만든 좁은 철창에 소나 돼지를 가둬두고 사료만 먹여 키우는 곳을 말이다. 한치 움직일 수 없고 몸을 뉘일 수도 없는 공간에서 가축을 키우며 때가 되면 도축하는 그곳.

지하 미로의 한켠은 그곳과 똑같은 사육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다만 그곳에 들어있는 건 소나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이 내 기억과 다른 부분이었을 뿐.

그 수가 꽤 많다.

언뜻 보이는 숫자만해도 수백이 넘고 확인하지 못한 공간까지 전부 이런식이라면 사육당하는 사람의 수는 수천이 넘어갈거다.

횡성에 살고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저런식으로 사육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물론 사육당하고 있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을 감시하는 이족보행하는 인간의 몸과 소의 머리를 가진 악마.

미노타우르스와 비슷한 미노타라는 악마도 존재했다.

커다란 덩치와 우락부락한 근육.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는 손에는 무쇠로 만든 거대한 몽둥이는 내게도 꽤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와이번과 서펜트보다 위협적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한 구역의 최강자다운 압도적인 기세를 뿜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인간을 사육하고 시설을 관리할 정도로 지능이 높고 영악한 점은 필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본능대로 행동하는 그들보다, 난 인간을 사육하며 가축으로 삼는 놈들에게 더 강한 분노를 느꼈다.

내 감정이 전해진 탓일까.

땅 밑에 있는 벨로나 또한 움직이려는 낌새가 느껴졌다.

이내 앞으로 튀어나가 당장에 미노타를 죽이려던 찰나.

"뭐냐."

아마존이 내 팔을 강하게 잡았다.

작은 짜증을 느끼며 반문한 그때.

아마존이 눈짓하는 방향을 보니 끼익 끼익, 힘겹게 수레를 끌고 오는 한 인영이 보였다.

짙은 어둠 속에서 횃불의 옅은 빛으로 보이는 인영의 모습은 다름아닌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늦었다. 인간.]

"말조심하십시오. 미노우스의 영광 아래, 상서로운 소가 되고픈 자입니다! 인간이라는 말은 저놈들의 작고 미천한 머리통에나 넣어주십쇼!"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보곤 미노타는 콧김을 한번 뱉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가축의 식량... 수고했다.]

"모든 건 미노우스의 은총입니다! 곧 기약의 날이 오고 있지요, 마논께서도 그분의 은총을 받을 날이 오기를 빌겠습니다."

수레에는 구역질 날만큼 코를 찌르는 냄새를 한 고깃덩어리와 지푸라기가 뒤섞인 무언가였다.

수레를 끌고온 이는 그것들을 양동이로 퍼 날랐다.

사육장에 갇힌 사람들은 철푸덕 떨어지는 사료에 인상을 쓰면서도 이내 고개를 처박고 먹기 시작했다.

"하하하! 맛있지? 아주 맛있지?! 애도 어른도! 남자도 여자도 모조리 내가 만든 사료를 먹을 수밖에 없지!! 하하! 흐헤헤헤헤!! 네놈들 생사가 나한테 달렸다 이거다 빌어먹을 인간 놈들아!"

반쯤 정신이 나갔는지 박장대소하던 놈이 뒤집어쓴 후드가 벗겨졌다.

그는 비쩍 마른 중년 사내였다.

하지만 인간이라기엔 머리 한쪽을 뚫고 나온 작은 뿔이 그가 인간을 버리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광신도의 무리.

사료통에 사료를 전부 부은 놈은 제 할일은 이제 끝났다는 듯 어디선가 작은 꼬챙이를 가져와 사육장의 사람들을 찌르고 비명과 함께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사람들을 보며 즐겼다.

그리고 내가 나선 건 그때였다.

"히, 히익!! 인간! 인간입니다!! 인간이 제 발로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마논이시여! 위대한 미노우스의 은총을 받은 감시자시여! 저 미천한 침입자를 때려 죽여주십시오!!"

내가 모습을 보이자마자 발작하듯 떠들어대는 놈과 함께 사육장의 소 대가리들이 광분하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산채로 해체당해 흩뿌려진 소대가리들 사이로.

"끼에에엑! 케헥!"

내 발에 대가리를 짓밟힌 예의범절 모르는 변절자 놈에게 물었다.

"미노우스가 뭐냐. 개자식아."

곧 놈의 주둥이가 열렸다.

미노우스 [2]

105화.

지하 미궁.

데몬시드에게 머리를 짓밟혀 켁켁 거리고 있는 사내는 도무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악마란 존재가 나타나고 횡성의 소들이 모조리 미쳐버렸을 때.

그는 드디어 인간이 천벌을 받노라라 생각했다.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소와 돼지를 도축한다.

유튜브에서는 먹방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고기를 뜯어먹는 걸로 돈을 벌지 않는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동물을 사랑하기에 비건을 자처하는 이용남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 또한 끝.

소를 닮은 악마의 등장은 그에게 있어 횡성이란 지역 자체에 축복이 내려진 듯했다. 도축 날만을 기다리던 소들은 횡포를 부렸으며 자신을 보며 품평하며 입맛을 다시던 인간들을 도리어 죽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사육하고 가축으로 부리던 소들에게 밟혀 죽는 사람들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이용남은 생애 처음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든 통쾌함을 느꼈다.

그때부터였다.

자신도 소가 되고싶다.

그런 열망을 느꼈다.

운이 좋았는지 어쨌는지 미노타들은 인간을 멸종시키기보단 사육하기에 이르렀고 그러한 복수는 이용남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 충분하고도 남았다.

미노우스의 지하 미궁.

이용남은 그들이 시키기도 전에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죄를 쉴세없이 내뱉음으로서 악마들에게 쓰기 편한 종을 자처하였다.

이는 꽤 적절한 조치였으며 이른바 줄을 잘 잡은 편이었다.

횡성에는 랭커에 준하는 네피림이 없다.

그들이 성장하기도 전에 광우나 미노타들에게 찢겨 죽거나 곤죽이되어 터져 죽었기 때문이다.

이용남이 보건데 제아무리 강한 초월자가 오더라도 이곳의 미궁을 공략하기란 요원했다.

애초에 그래서도 안됐다.

자신 또한 소가 되어 끝없는 죄를 짓는 인간들을 벌해야 했으니까.

'그랬을... 그랬을 텐데...!!'

힘을 쓸 수 없다.

미노우스의 은총을 받아 서서히 악마로 변이하고 있는 자신의 힘으로도 발 하나를 치우기 힘들었다.

'이놈은 머냐. 대체 뭐야!!'

속으로는 열불을 터트렸지만 그가 할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첫만남부터 충격의 연속이었다.

최강이라 보였던 미노우스 미궁의 감시자들 여섯을 찢었다.

시간을 들인것도 아니고 손짓 한번하지 않고 여섯 마리를 동시에 찢은 것이다.

땅 밑에서 솟아난 기이한 나무 덩쿨이 창처럼 감시자를 찔러 두갈래 세갈래로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그야말로 한순간.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탱크 열댓이 와도 전부 박살냈던 감시자들이...!'

그 하나에게 당했다.

감시자들의 피부는 포탄에 맞아도 멀쩡할 정도로 단단했고, 힘은 탱크의 철갑을 손으로 찢을만큼 강했다.

그런데 저 물소뼈를 뒤집어 쓴 사내가 너무나 손쉽게 죽여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네피림이라는 인간을 초월한 자들이 오지 않았던 게 아니다.

허나 랭커라는 자들이 왔음에도 감시자 한명에게 쩔쩔매거나 겨우 하나를 쓰러뜨리고 도망가기 바빴다.

그런데...

'그런데 이놈은 대체...!!'

"귀가 먹었나. 미노우스가 뭐냐고 물었다."

어둠처럼 짙게 깔린 목소리.

이용남은 덜컥 겁에 질렸다.

허나 애써 겁먹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일종의 오기였다.

"미, 미노우스님은 이 미궁을 만드신 위, 위대하신 분이다! 너 따위가 함부로 불러되는 분이 아니다 이놈!"

"뭐가 그렇게 당당하지? 인륜을 저버렸으면서."

"인륜? 설마 저기 있는 가축들을 보고 말하는건가? 너도! 너도 저게 잘못됐다고 보는거냐!"

"당연한 소릴하는군."

용남의 얼굴에 비웃음이 깃들었다.

"어째서지? 인간은 마음대로 소를 가축화하여 도축하는데! 어째서 소는 인간을 사육하면 안된다는거냐! 그거야말로 인간 우월주의 사상이 만들어낸 궤변이다!"

이용남은 당당했다.

자신의 논리에 이견이 있을 리 없다. 이는 그간 비건으로 살아오며 쌓아온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죽음의 끝에 도달했음에도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자신이 뿌듯했다.

말문이 막힌 상대를 보며 자신은 틀리지 않았음을 재차 확신하던 그때.

괴물 같은 사내가 답했다.

"인간이 사육하는 게 당연하지."

뭐가 그렇게 당당하지?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생겨야 당연하다.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랬다. 하지만 이놈은 아니다.

이용남은 순간 궁금했다.

놈이 어떤 논리를 말하든 간 타파할 자신도 있었다.

그러니 물었다.

"왜, 왜 당연하단 말이냐."

놈이 답하기를.

"소가 인간보다 약하니까."

"!?"

약하니까?

이용남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고작 그런 이유로...!"

반박하려 했지만 놈은 틈을 주지 않았다.

"약하기 때문에 사육당하고 가축이 됐을 뿐이다. 거기에 이런저런 사상 이 낄 자린 없어."

"그, 그런 궤변을... 소들의 분노는 정당하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인간들도 약하기에 찢어 죽는게 당연하다! 나한테 화풀이 하지마라!"

"내 분노도 정당하다."

꾸드득.

머리를 짓밟는 힘이 점점 강해진다.

두개골이 비명을 지른다.

놈의 말대로 분노는 정당했다.

왜? 약하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 또한 약하기 때문.

'이놈하고는 말이 안 통해. 이, 이놈은 인간의 상식이 없는 놈이다! 마치 생각하는 게 그들과 같다!'

괴물. 괴물과 말이 통할 리 없다.

이용남은 서둘러 말했다.

"미, 미노우스님에게 안내하겠다!"

"하겠다?"

"하, 하겠습니다!"

그제야 머리통을 드리웠던 놈의 발이 사라졌다.

*

악마 추종자.

놈은 자신을 이용남이라 말했다.

얼굴이 좀 동양스럽다 했더니 한국 사람이라는 점에서 한번 놀랐다.

'미친놈들은 왜 이렇게 많을까.'

솔직히 처음에는 npc가 아닐까 했다. 아니면 새로운 타입의 악마라든가 그런 비슷한 종류라 생각했다.

히든 던전에서 종종 보이는 다른 세계의 네피림이나 타락한 존재라면 능히 그럴 만 했으니까.

'그런데 한국 사람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동물이고 나발이고 어떻게 같은 사람한테 사람이 저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난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사육장에 갇혔던 사람들한테 이놈을 던져주고 싶었지만 그건 미노어쩌고라는 놈이 뭔지 알고 난 이후이다.

"미노우스님은 근면함의 상징이시다. 너, 너희들 나태한 놈들과는 다른 대단하신 분이시지... 인간 놈들의 잔학한 행태에도 개의치 않고 그들을 품어 주겠노라 말씀하신 분이다. 부, 분입니다..."

"이 사육장이 품어주는 결과인가."

"개똥밭이라도 이승이 낫지 않나?"

뻐억!! 퍽! 퍼억!

"컥!"

"개만도 못한 새끼."

사육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주던 아마존이 참지 못하고 놈의 면상을 갈겼다. 경멸 가득한 눈초리가 안 말리면 그대로 때려 죽일 기세다.

가만히 바라보다 진짜 죽겠다 싶을 때 즈음 멈춰 세웠다.

"참아. 아직 미노우스가 뭔지 못 들었어. 이놈은 길 안내도 해줘야 하니까. 참자고, 응?"

"후우, 네."

아마존이 생각보다 성깔있네.

하긴, 이 상황을 본다면 화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마존만이 화내는 게 아니다.

"이 개자식!"

"죽여버려! 이 자식이 저 꼬챙이로 날 찌른것만 몇번인데!"

"죽여! 죽여주십시오! 우리한테 개새끼들도 안 처먹는 사료를 먹였어요!"

"당장 죽여버려요!!"

그러자 오히려 화내는 건 이용남이었다.

"내가 네놈들을 위해 개만도 못한 것들로 알뜰살뜰하게 얼마나 여물을 만들어줬는데!! 배은망덕한 놈들이!"

"뭘로 만든거지?"

놈의 멱살을 쥐고 흔들자 놈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행태를 실토했다.

"흐흐, 당연히 고기랑 짚이지."

"무슨 고기냐는 말이다."

"무슨 고기겠나. 여기 널려 있는 고기들이 과연 소겠어?"

낄낄 웃으며 말하는 놈의 대답과 동시에 사육장에서 풀려난 사람들의 얼굴이 전부 사색이 되었다.

"죽여! 제발! 제발 죽여줘요!!"

"아직 죽이는 건 안됩니다. 대신 죽지 않을 정도로 때리는 건 되죠."

슬쩍 길을 열어주자 앞다투어 희생자들이 놈을 때리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때리는 것부터 발길질까지 그간의 분노가 쌓인만큼 끝도 없이 때려댔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놈의 이빨이 부러지고 코가 뭉개지고 얼굴이 팅팅 붓고 터졌다.

허나 그래도 사람들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너도 먹어! 너도 처먹으라고!"

어느새 사료통에 쌓인 고깃덩이를 가져와 놈의 입에 먹이기도 했다.

그러다 참기 힘들었는지 엉엉 울며 쇠꼬챙이를 가져와 놈을 찌르려는 여인을 막아 세웠다.

"왜요, 왜요! 죽이게 해줘요!"

사람을 죽이게 해달라는 말이 이렇게 슬프게 들리는 건 처음이었다.

슬퍼하는 모습이 안타까웠으나 아직 죽이는 건 안된다.

"사육장, 더 있지?"

힘없이 내 손아귀에 매달려 있는 놈은 피투성이인 채로 힘겹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횡성이 아무리 군이라지만 사람이 이것만 있지는 않을 거다.

여기있는 사람들의 수는 최소 삼백.

아마 더 많을거다.

지상은 미로.

지하는 미궁이다.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곳을 드나든 놈이 필요하다.

"아마존. 희생자들 가운데 네피림들을 우선적으로 무기들을 건네줘."

난 인벤토리에서 그간 굴러다니던 잡다한 무기들을 모조리 꺼냈다.

아마존을 시켜 지상으로 내보내고 싶기는 하지만 불안하다.

아마존이라고 할지라도 미노우나 광우들이 들이닥치면 한번에 이들을 보호하긴 어렵다.

차라리 나와 함께 미궁의 사육장을 모조리 파헤치고 함께 돌아가는 게 차라리 더 안전할테니까.

'이 사람들도 살아야지.'

이제는 힘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세상이다.

미궁에는 꼭 미노우만 있는 게 아니다. 간간히 고블린이나 잡다한 악마들도 있으니 그걸 저들에게 맡기면 자연스레 네피림으로 각성하거나 경험치가 되겠지.

'물론 대부분이 오랫동안 갇혀 있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지만...'

아마존을 보니 수심이 깊다.

아마 저들이 겪을 앞으로의 생존에 대해 고민하는거겠지.

아마 미궁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잡혀있을 거다.

그들 전부를 정부에서 떠안기는 적잖이 부담스러울 터.

가장 베스트는 이들이 성장할 요건을 만들어주고 알아서 터전을 꾸리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되려면 최소한의 무기와 힘이 필요하다.'

무기는 내가 얼추 가지고 있다.

인벤토리에 있는 게 아니더라도 불별도나 기부도에는 내가 그동안 쌓아놓은 무기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것들을 처분함과 동시에 여기 사람들에게 빚을 지워두는 것도 썩 나쁘진 않을지 모른다.

'농사를 꼭 내가 지을 필욘 없지.'

물론 미궁에서 완전히 빠져나간 뒤가 되어야겠지만.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너무 오랫동안 엎드려 있는 사람들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물약으로 치료는?"

"수량이 부족해요. 구매 횟수 제한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게 됐다.

이곳은 비교적 지상으로의 입구와 가까운 편이니.

"어떡하죠?"

"사람 불러야지."

"하지만 여긴 포탈이 안 통하는 곳이잖아요. 그렇다고 따로 연락해서 부를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니, 방법 있어."

[네피림 커뮤니티]

하루에도 수 만건에 달하는 뻘글과 공략글, 그리고 구조 요청을 바라는 글이 올라오는 곳.

일명 '네커'에서 데몬시드가 도움을 원하는 글을 쓴다면?

'시간은 걸리더라도 꽤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러 올거야.'

그때까지 잠시 기다리면 될 일이다.

"크큭, 과연 그때까지 미노우스님이 얌전히 기다리고 계실까!"

그렇게 처맞고도 정신 못차린 이용남이 불안감을 조장했지만 소용없다.

"오히려 좋지."

그쪽에서 먼저 날 찾는다? 찾아가는 수고를 덜어주니 오히려 좋다.

미노우스인지 뭔지 뭐가 됐든.

'자신이 없어.'

그 어떤 놈에게도 질 자신이 없었다.

미노우스 [3]

106화.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벨로나의 성장과 성능을 시험해볼 요량으로 가볍게 마실 나가듯 아마존의 정보를 따라 찾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이곳의 상황과 가축처럼 길러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멸망기에 든 상황이고 같은 사람을 신뢰할 수 없는 세상이라지만 그렇다해도 같은 인간이 가축처럼 길러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나는 게 또 사람이다.

게다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큰 던전이다. 공략하는 거야 어렵지 않겠으나 피해자들을 케어하는 건 나와 아마존만으로는 힘들다.

당연히 도움을 요청하는 게 맞다.

기껏 구한 사람들을 다시 다치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난 곧장 커뮤니티에 글을 썼다.

[횡성에 도움이 필요하다.]

(데몬시드)

-횡성군의 지하 미궁에서 미노타라는 악마들이 있다. 놈들은 사람들을 잡아 좁은 철장에 가두고 자신들이 만든 여물을 먹여 사육하고 있었다. 난 놈들의 씨를 말릴 것이다. 하지만 구출해낸 피해자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 그 수가 천을 넘어갈 듯하니 횡성 근처에 있는 네피림이라면 도움을 주길 바란다.

누구든지 도움을 준다면, 한명도 빠뜨리지 않고 보상하겠다.

부탁한다.

조금 애원하는 조가 되어버렸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도 지하 미궁의 사육장에 갇힌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그들을 어서 빨리 구출하고 소새끼들을 도륙하려면 이게 제일 빠르다.

글을 올리자마자 추천을 빠르게 받고 있다.

금세 인기글로 올라가 댓글도 수백개가 달리기 시작했다.

"역시 랭킹 1위네요. 글 한번에 인기글로 올라가고 댓글이 수백개나 단번에 달리다니..."

"이상한 거 부러워 하지마. 상황이 상황이니까 그런거지. 아마존, 너도 글 쓰면 댓글은 많이 달리잖나. 추종자가 꽤 많은 걸로 아는데."

"데몬시드에 비하면 새털 만큼이죠. 아무리 그래도 랭킹 1위시니까요."

"참나."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한시름 놓았다.

┗(글로리안):바로 달려가겠슴다!

┗(소울피어):나도 간다.

┗(ㅇㅇ):저도 랭킹은 낮지만 한손 보태러 가겠습니다!

┗(ㅇㅇ):횡성? 너무 먼데? 누구 횡성 좌표 찍힌 포탈 있는 사람??

┗(보석별):거래소에 횡성 포탈 올려진 거 있어요.

┗(ㅇㅇ):보석별 눈나 댓글 보자마자 달려갔는데 벌써 다 팔림 ㅋㅋ

[누구 횡성 근처라도 포탈 가지고 있는 거 없음? 거래소에 비싸게 올려도 삽니다.]

(파이어펀치)

-냉무

실시간으로 쓰여지는 댓글을 보니 근처에 있는 네피림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것이다. 빠르면 30분, 늦으면 2시간 정도로 속속들이 도착하겠지.

사람들도 횡성의 사정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악마들에게 가축처럼 길러지고 오물과도 같은 여물을 먹으며 몇달째 길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라도 분노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간에 잘됐어.'

그렇게 한시름 놓고 있자.

"아저씨가 데몬시드에요?"

중학생쯤 되었을까.

아까부터 저들끼리 소근소근거리던 아이가 날 향해 물었다.

"응."

"아저씨가 정말 랭킹 1위에요?"

"... 응. 그런데?"

"우와아."

"쩐다. 진짜 랭킹 1위래."

미궁은 어둡다.

벽에 거치된 조막만한 횃불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다르다.

악과의 섭취로 야간시야가 증가해 어둠 속에서도 밤눈이 밝다.

'...'

팔다리가 성한 곳이 없다.

어린 애들이어서 그랬을까.

손가락이나 팔. 발가락이 하나씩 없는 게 보였다.

꼭 누가 맛만 보는 느낌으로 잘라 먹은 것처럼 말이다.

"랭킹 1위면 금화도 되게 많겠네요?"

"아, 아저씨! 랭킹 1위면 회복약도 개 쩌는 거 있죠? 잘라진 팔다리도 막 무럭무럭 자라는걸로요!"

"..."

"야,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1위님 곤란하게 하지마."

"그럼 기프트나 악마들은 말이 돼? 혹시 모르니까 물어본거지!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도마뱀도 아니고 그런게 쑥쑥 자라나는 약이 있을리가 없잖아."

순진한 물음에 딱히 할말이 없었다.

아직 내가 모르는 최상급의 물약이 있을지는 모른다.

절단된 팔다리를 다시 치료할 수 있는 그런 엘릭서 같은 것들이.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아이들의 물음에 제대로 답해줄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런 물건은 내게 없었으니까.

아이의 질문을 부정한 아이조차 혹시나 모를 기대감이 가득한 눈을 내게로 보내왔다.

비단 아이 뿐만이 아니다.

함께 앉아 있는 다른 이들도 나이에 관계없이 내 대답을 은근히 기대했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침묵하자 그게 대답이 되었는지 한 아이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나 이제 평생 장애인이야...?"

"야! 그런 말 하지마!"

"그럼 뭐! 장애인을 장애인이라고 하지 뭐라고 하는데!"

"애새끼들 존나 시끄럽네. 야! 여기 장애인이 너희만 됐어!? 우리 모두 똑같은데 왜케 떠들어!"

참지 못한 다른 청년이 벌떡 일어나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 또한 어깨 밑으로 팔 한쪽이 비어 있었다.

"제가 뭘요! 틀린 소리 한 것도 아니잖아요! 아저씨도 장애인이고 나도 장애인데 뭐 말하면 안돼요!?"

"근데 이새끼가 확!"

남은 팔로 아이 뺨을 때리려하자 다른 이들이 앞다퉈 말렸다.

"얘!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이녀석은 그래도 너희 구하려다 이렇게 된건데!"

"됐어.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청년은 애써 눈물을 훔쳤다.

어두워 다른 이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난 알 수 있었다.

그렁그렁하던 눈물을 훔치던 청년은 아닌 척 괜히 씩씩거렸다.

아마도 저 청년은 네피림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적들의 세력이 크고 강하다보니 팔 한쪽을 잃고 사육장에 갇힌 신세가 됐었나 보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화를 죽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마도 이렇게 고통 받는 사람들은 셀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내 주위에는 랭커들만 있다보니 잊었지만 평범한 이들은 대개 이런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이렇게되면 둘중 하나다.

'죽거나 약탈자가 되거나.'

참, 좆같은 세상이다.

하지만 이 지경이 됐어도 몇몇 이들이 나에게 기대어린 시선을 보냈기에 난 입을 땔 수밖에 없었다.

"회복 물약에 대한 실험을 해본적이 있습니다. 절단 부위가 존재한다면 어떻게든 붙일 수는 있지만..."

절단 부위가 훼손되거나 놈들에게 먹힌 상태라면 복구할 방법은 없다.

그 사실을 말하자 혹시 모를 기대감에 고개를 들던 이들의 머리가 단번에 숙여졌다.

음울한 기운이 이어졌다.

누구 하나 말하며 떠들지 않았다.

들릴듯 말듯한 한숨 소리가 연이어 퍼질 뿐이었다.

'생각해본적은 있지.'

나는 이전에 한번, 수 많은 푸른 성수들을 모아 합성시킨 전적이 있다.

물론 푸른 성수는 마나의 회복량을 높여줄 뿐이었지만 붉은 성수는 어떨까.

일말의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붉은 성수를 +5나 +6까지 합성하면 절단된 부분이 재생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카오스의 빛무리 성수나 능력치를 올려줄 엘릭서들을 합성 시키면 다른 효과가 나올지도 모르지.'

물론 그걸 지금 할 생각은 없다.

이들의 상황이 안타까운 건 사실이지만 한번 그런 기적을 보인다면.

'끝도 없겠지.'

너도 나도 고쳐달라며 아우성을 쳐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여력이 없을뿐더러 그곳에 허비할 시간도 없다.

'브란스라면...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각종 연금술과 마법학에 능한 그라면 절단된 팔다리도 재생시킬 방법을 알거나 만들어낼지 모른다.

돌아간다면 그에게 한번 상담해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

'만일 가능성이 있다면...'

내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제공하는 게 좋다.

협회에 소속된 사람들.

또는 나를 위해 일해줄 이들에게.

자원은 한정적일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내게 도움이 되는 자,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눌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니.

"아마존."

"네."

"미궁으로 찾아온 네피림들 전부 협회 소속으로 넣어주고, 보상으로는 악과 하나씩 주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이들 중에 괜찮은 기프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협회에서 특별 관리하도록 하고."

"특별 관리요?"

"횡성을 전부 청소할거다. 그럼 남아 있을 사람도 있겠지. 그들에게는 정부와 협조해서 농사나 가축을 키우게해서 유통시킬거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전투에 능한 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비전투직군의 기프트를 가진 사람들도 있을 터.

그런 이들은 전투직군의 사람들이 보호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

본래 전투란 전방에서 싸우는 사람과 후방에서 보조해줄 사람이 필요한 법이니까.

상점에서 식량을 일부 구입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한정적이다.

정부의 예상대로 식량을 확보할 수단이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야하는 게 맞다.

'정부한테만 손 벌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횡성은 협회에서 관리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테니까.

"관찰자한테도 말해놓을테니 함께 의논해서 관리하면 될거다."

"알겠습니다."

관찰자와 아마존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 아마존은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스만트 폰을 꺼내 사람들의 이름과 기프트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곳엔 기프트를 각성한 사람도 있겠지만 아닌 사람도 있을거다.

기프트의 각성 요건은 악마를 처치하는 것이 최우선이고 그걸 어떠한 방식으로 어떤 악마를 잡았느냐가 기프트가 결정되는 최대 요인이다.

'난 농약으로 잡았지만 그것만이었다면 독관련 기프트를 얻는 게 맞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갖고 있던 삽과 그걸로 팠던 구덩이.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인간말종 년놈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을 제물로 쓰는 데몬시드를 얻었을 리 없으니.

기프트를 얻게되는 경로는 아마, 악마를 처치했을 때의 상황과 행동, 그리고 환경적 요인이 작용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니 기프트를 가지지 않은 이들을 모아 여러가지 방면으로 테스트를 진행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물론 협회 사람들을 시켜서 데이터를 수집하면 되겠지. 각성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일단은 각성시키는 게 그 사람을 위해서도 좋다.

이 세상은 기프트가 없으면 이제 할 수 있는 일이 적은 세계니까.

얼추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여기다! 여기 사람들이 있어!"

"어이! 데몬시드! 여기 있냐!?"

"아마존! 데몬시드님과 있나?"

커뮤니티의 글을 보고 찾아온 네피림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바바리안부터 시작해서 저번에 만났던 드루이드와 글로리안.

그리고.

"저도 왔어요."

"이 몸도 왔네."

레아와 브란스까지 찾아왔다.

"나도 한 손 거들러 왔소."

곁에는 다부진 근육과 함께 키는 조금 작은 대장장이, 스미스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로 온갖 랭커와 네피림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백명 정도 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계속해서 도착하고 있어서... 족히 천명 정도는 도착할 거 같습니다."

"하하!"

난 한껏 웃어버렸다.

설마하니 글 한번 썼다고 이렇게까지 모일 줄은 몰랐다.

"아직 살만하네."

그래도 아직.

살만한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미노우스 [4]

107화.

구조는 빠르게 실시됐다.

지원온 네피림들은 빠르게 환자들을 지상으로 이송했다.

자신들의 기프트를 적극 사용했고 아마존과 상위 랭커들의 인도 아래 빠르게 환자들의 구조가 이뤄졌다.

가장 빠르게 횡성으로 온 것은 랭킹 1000위 안의 랭커들이었기에 기본적인 육체능력이 일반인에 비해 탁월하게 좋았다.

하여 아이들 같은 경우는 3, 4명을 한꺼번에 옮겼고 그 속도 또한 현저히 빠를 수밖에 없었다.

일이 빠르게 흘러가자 구조 작업에서 제외된 랭커들과 함께 곧장 다음 사육장에 있을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한 회의가 이어졌다.

"사육장의 위치 확보가 우선적입니다."

미궁이 왜 미궁이냐.

길이 제멋대로 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함정도 있을거고 적들의 매복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일단은 시간 단축을 위한 지도가 필요했다.

난 곧장 피곤죽이 되어 쓰러져 있는 이용남을 바라봤다.

그러자 알겠다는 듯 바바리안을 비롯한 덩치 큰 랭커들이 몰려가 이용남을 툭툭 건드리며 자근자근 밟아대기 시작했다.

"네가 그 개자식이라며?"

"이새끼 대가리 뿔 난거 봐라. 조막만해서 꺾어버리지도 못하겠네, 샹."

"이거 뽑아버릴까요? 잘만 하면 뽑아버릴 수 있을 거 같은데..."

"끄아아악! 사, 살려줘!!"

"살고 싶으면 알고 있는 정보 전부 다 토해내!"

퍽퍽퍽!

죽지 않을 정도로만 밟아대는 실력들이 꽤 익숙해보였다.

"강철은?"

"강철은 지금쯤 관찰자랑 함께 광산에서 일본 놈들 때려잡고 있을 거다. 거기도 꽤 바쁘거든. 아! 물론 나도 바쁜 일 무릅쓰고 온거라고?"

굳이 자기 어필하는 바바리안을 무시하자 이번엔 다른 놈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보는 네피림들이라 가만히 있자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전 56위 고스트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닷!"

"전 106위 리플렉트라고..."

"17위 파이어펀치다. 반갑다."

"저는...."

꽤 많은 이들이 나와 안면을 트려고 했다. 하지만 그거 하나하나 다 받아줄 시간은 없었다.

"오늘의 도움 잊지 않겠다. 보상도 협회의 인력을 통해 건네줄테니 걱정할 거 없을거야. 한명, 한명 인사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시간에도 사육장에 갇혀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난 우선적으로 그들을 구하고 미궁 전체를 정화하고 싶다."

크지는 않지만 한자 한자 힘주어 말하니 슬금슬금 모여들던 네피림들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피어난다.

모두가 그런건 아니다.

나와 안면을 트고 내가 준다는 보상을 받기 위해 모인 이들도 있을거다.

하지만 그런것 하나하나 따져서는 무의미하다.

미궁은 생각보다 넓다.

나 혼자 공략하려면 몇날 며칠이 걸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육장에 갇힌 이들을 무사하게 구조하려면 이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조를 나뉘어서 우선적으로 사육장에 갇힌 이들을 구조하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겠다. 이견 있나."

"없다."

"없습니다."

좋다.

"혹시 모르니 조를 나눈다. 각자 포지션과 기프트의 능력을 공유해서 조를 짜기 바란다."

"데몬시드님은 어디로..."

대충 보니 나와 조를 짜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변절자가 말하길, 자신이 알고 있는 사육장은 총 6개. 하지만 이마저도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왜죠?"

"이놈 혼자 사육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모든 사료를 만드는 건 역부족이니까."

그 수가 꽤 된다.

그렇다보니 이녀석도 구역을 정해서 자기 관할 쪽의 사료만 만들어 전달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얼추 들어보니.

"이놈과 같은 변절자가 꽤 있다. 털어낼 정보가 있다면 얻어내고 아니면 죽이는 게 좋겠지."

"그냥 죽여서는 너무 놈들한테 편한 게 아닐지..."

고스트라고 소개한 녀석이었다.

변절자를 보는 시선이 매섭기 그지 없다.

"미궁에 그놈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 미노타 놈들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여건이 된다면 피해자들한테 던져주는 것도 좋지만 무리해서 데리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알겠습니다."

"고스트. 당신 능력은..."

"유체 상태로 변해 벽을 통과하거나 물리적인 무기를 통과시킬 수 있죠."

"유령이 된다는건가."

"네, 맞습니다."

"매복을 당할 걱정은 없겠군."

"예."

좋다.

빠르게 조를 편성했다.

우선적으로 내가 있는 1조.

1조가 제일 먼저 출발하며 함정이나 매복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고 대부분의 전투를 담당하게 될거다.

그리고 2조는 후방에서 1조를 보조하고 3조와 4조는 찾아낸 사육장의 피해자들을 구조한다.

"기본적으로는 이렇게 가고, 갈랫길이 나오면 조를 또 나눠서 탐색하기로 한다."

"그럼 다른 조끼리의 연락은 어떻게 하죠? 이런 지하에서는 무전도 잘 안터질지 모릅니다."

"커뮤니티 이용해야지. 조장이나 부조장끼리는 전부 친추하자고!"

모조리 친추하고 나서야 탐색이 시작됐다.

*

"고블린이다!"

"죽여!"

미궁은 꽤 다양한 악마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고블린부터 시작해서 가고일. 팔다리가 묶여 있는 늑대인간에서 좀비들까지 말이다.

대부분은 내 선에서 정리됐다.

"우리 따라올 필요 없는 거 아냐?"

"아직 잔몹들이잖아."

"미노타인지 뭔지 하는 소새끼들이 그렇게 쎄다던데. 5렙인가 6렙으로 예상 된다며? 오크들보다 강한 건 확실하겠어."

"미노타 나오면 그때부터 시작이지. 긴장 늦추지 말자고."

그리고 미궁의 감시자들.

미노타들이 거대한 쇠몽둥이를 들고 돌진하기 시작했다.

"왔다!"

"모두 대비해!"

그때였다.

푸푸푹, 촤악!

"...?"

"뭐야?"

"방금 누가 한 거?"

"누구겠냐. 선두에 선 랭킹 1위 님이시지. 진짜 말도 안되게 쎄다."

뭘 어떻게 하는건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어둡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너무 빨랐다.

미노타가 달려들자마자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쓰러졌기 때문이다.

시전 속도, 파괴력이 점점 상승하고 있는 데몬시드의 벨로나였다.

"투구 쓰고 앞이 제대로 보이긴 하나? 난 맨눈으로도 너무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데..."

후방에 있는 2조와 3조들이 쑥덕거리고 있을 때.

레아는 쿡쿡 웃었다.

"옛날 생각나네요. 그때도 이렇게 어두웠는데. 그쵸."

"딱히 옛날도 아니지. 한달전 쯤이잖아."

데몬시드와 레아였다.

둘은 카타콤에서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의 레아는 투구를 쓰고 있음에도 상황이 급박해 제대로 싸우지 못했고, 그건 화성 또한 그랬다.

겨우 한, 두달 전이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 또한 하나의 추억이었다.

지금과 환경은 같아도 상황이 완전 달랐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간단하게 만들어주는 건 역시 새로 얻은 스킬.

벨로나의 덕이었다.

하지만 미궁 깊숙하게 진입하면 진입할수록 벨로나로도 커버하지 못하는 상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궁은 놈들의 진영.

똥개도 제집에서는 한수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있다.

돌연 나타나 기습하고, 매복해 있는 대량의 미노타들이 갑작스레 몰려올때면 벨로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돌진하는 놈들이 있다.

꽤 위협적이다.

몇번의 전투로 놈들의 전투 방식과 힘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레아의 감지 스킬과 고스트의 기프트 능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고스트, 어떤가."

"백미터 앞, 서른마리 정도 있습니다. 꽤 많네요. 매복이 아니라 뭔가를 지키고 있는 거 같습니다."

"맞아요. 그쪽에서 사람들의 생명이 감지되요. 꽤 많아요."

사육장을 찾았다.

"어이 여기 확실하지?"

혹시 몰라 변절자 놈에게 확인하니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 개새끼가 말 제대로 안 해?"

윽박지르자 주변에서 말린다.

"더 때리면 죽을텐데요?"

"그럼 치료해주면 되지."

바바리안은 자신의 붉은 성수를 꺼내 이용남에게 먹였다.

그러자 놈의 상처가 조금 치료되기 시작했다.

놈이 조금 살아나자 바바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이용남을 안면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맞냐고 이새끼야."

"마, 맞습니다! 맞긴한데..."

놈이 안절부절했다.

그때였다.

콰앙-!

벽 한면이 터져나가며 미노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벨로나."

기다리고 있던 데몬시드가 벨로아를 이용해 전방의 미노타를 모조리 꿰뚫었다. 하지만 동시에 쓰러진 놈들을 밟고 뛰어올랐다.

"젠장!"

"막아!"

콰광-!!

생각보다 수가 많다.

게다가 여기 있는 미노타들은 이전의 놈들보다 덩치가 배는 컸다.

가진 힘 또한 강력했기에 데몬시드도 창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단번에 투창한 모습은 뇌창의 그것과 같았으나 그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못했다.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이었다.

벼락을 동반한 투창과 동시에 어두웠던 일대가 붉은 벼락으로 인해 삽시에 확 밝아졌다.

미노타 하나를 꿰뚫고 들어간 적창으로 전이한 데몬시드는 지팡이를 들어 지면을 찍었다.

"프로스트 노바."

화아아아악!!

어두운 미궁이 순식간에 엄동설한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데몬시드가 대부분의 미노타를 처리했지만 거리가 멀어 닿지 않은 미노타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본대를 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쾅!! 미노타의 쇠몽둥이를 흘려낸 레아는 순식간에 놈의 다리와 옆구리를 베어냈다.

"어림없지!"

균형이 흐트러져 주춤한 사이, 스미스가 대형망치로 놈의 턱을 올려쳤고 바바리안이 쌍도끼로 목을 내려쳤다.

촤악!! 쿠웅!

"으랏챠!! 어떠냐!"

"비켜!"

화르르륵!!

성북구의 불주먹.

파이어펀치가 주먹을 내 뻗었다.

일대가 전부 얼었지만 한순간 따스한 온기가 그에게서 나왔다.

불타는 주먹이 그대로 바바리안을 노리던 미노타를 직격하자 고기 익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오늘 저녁은 소불고기인가?"

"소는 언제나 옳지!"

대답한 브란스가 지팡이를 두들기자 쓰러졌던 미노타의 시체들이 일어나 아군이 되어 싸우기 시작했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대다수의 적을 데몬시드 혼자서 맡았고 처리하는 편이라 나머지들은 그에게서 도망친 놈들 몇만 처리하면되니 간단한 일이었다.

"데몬시드! 괜찮나?"

나머지들을 정리하고 그를 돕기 위해 달려간 바바리안과 네피림들이 데몬시드를 보며 멈칫했다.

"괜찮다."

그의 앞에는 자신들이 상대했던 것보다 더욱 거대한 미노타가 산채로 덩쿨에 묶여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엘리트 아냐?"

"맞네, 단단한 미노타라고 뜨네."

"수식어가 단단한이면 물리 공격 거의 면역 아냐? 어떻게 죽인거지?"

"독이야. 저 덩쿨에서 독 냄새가 풍기고 있어."

"조금 탄거 보니까, 불태웠네."

쿠웅.

죽은 엘리트 미노타를 밟아선 데몬시드는 담담하게 뚫려진 벽 안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사육장이 있을 방향이었다.

"자자, 어서 구조하자고."

"지도, 제작하고 있지?"

"넵!"

하지만 빠르게 구조하려는 이들과 달리, 데몬시드는 다가오려는 레아와 네피림들을 멈춰 세웠다.

"왜 그러세요?"

"사육장이 아니야."

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들의 수많은 생명 반응은 확실했다.

하지만 사육장은 아니라니...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빼꼼 내민 바바리안과 네피림들이 경악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제기랄 놈들...!!"

참상을 본 네피림들이 모조리 분노를 참지 못했다. 놈들이 지키던 벽 안에는 살아 있는 자들이 있었다.

다만,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는 게 문제였다. 갓 태어나 보이는 듯한 소의 그것을 닮은 괴물이 말이다.

미노우스 [5]

108화.

악마들은 대체 어디서 올까.

그것은 전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품은 의문일 것이다.

놈들은 왜 올까, 어디서 올까.

그러한 의문은 그들을 섬멸하며, 토벌하다보니 자연스레 알게 됐다.

악마는 다른 곳에서 온다.

다른 차원에서, 세계에서 온다.

히든 던전으로, 카오스 게이트로 하여금 이제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바가 있다.

그들은 이곳과 다른 차원, 또는 다른 세계에서 침투하는 바이러스다.

그럼 한가지 의문이 더 생겨난다.

'챔피언급의 악마는 왜.'

엘리트와 달리 챔피언급은 왜 던전에서만 보이고 밖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혹시 나타나지 않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내가 이제껏 만나본 챔피언 급의 악마들은 모두 히든 던전에 있었다.

또는 카오스 게이트에만 나타났다.

카오스 게이트. 히든 던전.

둘 모두 대한민국의 땅이 아니다.

가설에 힘이 실린다.

왜, 챔피언 급의 악마는 히든 던전에서 나오지 못할까.

그건 아마도 카오스 게이트 안에 있는 차원석의 영향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있는 한 챔피언이나 엘더 급 악마들은 차원을 건너지 못한다.

조무래기 놈들과는 달리 힘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지능이 있는 악마는 생각 했을 것이다.

골몰했을 것이다.

제약을 어떻게 파훼할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난 그 고민의 흔적들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참상이 아닐까라 생각한다.

"제기랄! 미친새끼들...!"

"개자식들!!"

바바리안을 비롯한 네피림들이 분노했다.

당연하다.

인간을 상대로 한 끔찍한 참상이다.

한쪽에는 배가 찢긴채로 축 늘어져 있는 시신들이 쌓여 있다.

모두 인간 여성으로 보였다.

그 옆에는 기괴한 모습의 아이들이 죽어 쌓였고 그들과 달리 조금 움직이는 놈들은 벌써부터 악마의 그것과 같은 뿔과 짐승의 외양을 하며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그래.

아마도 이곳은.

"번식장이군."

인간 여성을 데리고 뭘 했는지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놈들의 번식장이자, 일종의 실험실일 것이다.

브란스는 쯧쯧 혀차며 말문 막힌 나 대신 설명을 이어갔다.

"피로 이어진 진들이 이 공간 전체를 이루고 있네. 심장, 인간의 폐... 목잘린 갓난쟁이... 이것들이 뭘 의미하는지 알겠나."

"제단...입니까."

"맞네."

단순한 번식장이라고 하기엔 잡다한 것들이 많다. 태어난 새끼들을 데리고 여러가지 실험에 이용한 흔적이 여기저기 있기에 추측하기가 쉬웠다.

괴물의 아이는 인간의 배를 찢고 나왔다. 미노타들은 아이들을 상대로 여러 실험을 진행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왕으로 모시는 미노우스의 강림을 위해서. 아니면 챔피언을 넘어선 엘더급의 존재를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좋은 일은 아니었다.

화르륵.

수식언을 이용해 공포의 불을 손안에 피워냈다.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곳이라 모조리 불태우는 편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잠시만요."

하지만 아마존이 급하게 달려갔다.

"살아 있어요!"

눈썰미가 좋은 탓인지 시체더미 사이에서 아직 숨이 붙은 생존자를 찾아낸 것이다.

"괜찮아요?"

하지만 생존자의 몸은 빈말로도 괜찮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몸 대부분은 피멍으로 뒤덮어 있었고 찢어진 상처들이 곯아 구더기가 끓고 있었다.

그리고.

"....."

배가 불러 있었다.

이곳에 있는 누구라 할지라도 생존자의 불러온 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말하지 않았다.

가만히 두면 생존자는 죽는다.

옆에 있는 시체들처럼 배를 뚫고 나오는 괴물에 의해서.

"배를 갈라서 괴물을 죽여야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래야 저분도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텐데요."

"지금 생존자 상태에서 배를 갈랐다가는 저분 생명도 위급해질텐데요..."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더 위험합니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게..."

네피림들이 소근거리며 은근히 내게로 시선을 보내왔다.

결정을 해달라는 소리다.

"성수로 몸을 치료하면 되잖아요."

"성수도 만능약은 아닙니다. 애초에 지금은 마취약도 없어요. 곯은 곳이라면 몰라도 배를 갈라야하고 위생적으로 지금은..."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니 고민하고 있던 그때.

누구도 확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번식장의 생존자였다.

스릉!

"아마존!"

생존자를 케어하려던 아마존은 그녀에게 허릿춤의 단검을 빼앗기고 목에 겨눠졌다.

"다, 당신을 도우려는거에요. 진정하세요."

"닥쳐. 도움이 필요할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이제 와서? 그리고 누가 너희들 도움이 필요하대?"

생존자는 날선 음성으로 외쳤다.

아마존이 아무리 네피림이라지만 목에 칼이 겨누어져 있다면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아무리 단련해도 목을 단련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 죽어가는 임산부가 든 칼에도 그 사실은 다르지 않다.

아마존의 탓은 아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에게 칼을 겨눌지는 몰랐으니 말이다.

"지, 진정하세요. 우린 네피림이고... 그, 랭커들입니다! 당신을 도우려는 거에요."

바바리안의 다급한 외침에도 임산부는 서늘한 비웃음만을 내보였다.

"내 아이를 죽이려고 했으면서, 날 도와? 웃기지마!!"

악을 내지르는 그녀의 눈은 한껏 날카로웠고 아이를 지키려는 어머니의 사나움이 가득했다.

"그 아이는..."

고스트가 아이의 정체에 대해 말하려 했지만 끝마치지 못했다.

그녀가 말을 잘라냈기 때문이다.

"내 아이야!! 아이라고! 괴물이 아냐! 괴물은 너희들이지!!"

약간의 놀람이 대치하는 네피림들의 눈에 깃들었다.

이 한마디로 그녀의 정신적인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존이 위험하다.

우선순위에서 랭커보다 제정신 아닌 생존자가 우선될 리 없다.

아마존을 살리는 게 먼저였다.

"몇날을... 몇날 며칠을 기도했어! 빌어먹을 신에게 기도했다고!! 근데 너희들은 어디서 뭘 했어!! 내가...!! 내가 괴물같은 놈들한테 그런 꼴을 당하는 동안 너희는 뭘 했냐고!!"

악에 받쳐 지르는 여인의 소리에 우리들은 숨조차 편히 쉬지 못했다.

"왜... 왜 빨리 구하지 않았어... 왜. 빨리 구했어야지. 이렇게 되기 전에."

그녀의 음성은 누군가를 탓하기도 했으나 자책하는 듯하기도 한 말 같았다.

묘한 기색이었다.

그런 기시감을 품은 건 나 뿐만이 아닌 듯 했다.

[뭔가가 이상하네.]

브란스의 음성이었다.

입을 열지 않고도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뭐가 이상하냐 되물으려는 찰나.

"난 이제 싫어. 당신 마음대로 해."

돌연 임산부의 칼이 아마존이 아닌 자신의 목으로 겨누어졌다.

"안돼!!"

아마존이 멈추려 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푸우우욱!!

날카로운 검이 목을 관통했다.

대동맥을 관통한 검에서부터 시뻘건 피분수가 튀었다.

아마존의 손에서부터 얼굴과 상체 전반 부위에 모조리 피가 튀었다.

이지를 잃은 임산부의 눈이 돌아가고 다리는 힘을 잃어 쓰러졌다.

"물러나게!!"

하지만 임산부의 죽음은 또 다른 하나의 시작이었다.

쿠웅-!!

브란스의 외침과 동시에 임산부의 시체 밑으로 붉은 진이 그려졌다.

"오오! 전능하신 미노우스시여!"

변절자 이용남이 환희에 차 소리쳤다. 그녀의 밑으로 이어지는 불길한 진과 함께 임산부의 배가 한차례 꿀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죽어 있는 시체와 살아 있는 괴물들이 자연히 발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마에 붉은 삼지창과 같은 표식으로 불타며 타 죽었다.

꾸웅-!!

전신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은 파동이 주변을 휩쓸었다.

"젠장, 죽여! 공격해!"

"안되네!!"

죽은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것.

그것이 문제라는 건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알았다.

발 빠르게 처치에 나섰으나 그들의 무기는 보이지 않는 장벽에 가로막혀 거세게 튕겨져 나갔다.

쿠구구구궁!!

심상치 않은 전조였다.

"미노우스시여!! 당신의 종이! 당신의 종이 당신을 굽어 살폈습니다!!"

이용남은 거세게 몰아치는 광풍에도 두렵지 않은지 두 팔을 벌린 채 환희에 차 있었다.

구속구를 어떻게 벗어냈는지는 지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벨로나."

땅 밑에서 투창하듯 발사된 벨로나의 덩쿨이 이용남을 향했다.

터엉-!!

허나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막혀 목표를 꿰뚫지 못했다.

"하하! 하하하하하!! 신이 온다! 신이!! 너희 인간을 벌하신다!!"

그때였다.

촥!

죽은 자의 배에서, 말도 안되는 거대한 손이 튀어나왔다.

그 손은 갓 태어난 것처럼 붉었다.

손톱은 검었으며 짐승의 것처럼 두껍고 날카로워 보였다.

그것이 나타나자마자 불길한 기운이 미궁에 감돌았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불길함이다.

내 생각은 그저 착각이 아니라는 듯 시스템도 동조했다.

"72군단장 미노우스가 '분신'으로 현 차원에 강림합니다!!"

"차원석의 결계가 작동 합니다!"

"차원석이 그를 약화합니다!"

"72군단장 미노우스의 힘이 70% 감소됩니다!"

"차원석이 미노우스를 밀어냅니다."

"실패합니다!!"

"그의 '분신'은 차원에 속해 있는 네피림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잉태한 어미가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죽음으로 계약되었습니다!"

"차원석이 미노우스의 강림을 저지하지 못합니다!!"

불길함을 가속하는 메시지가 수십개나 연속해서 떠올랐다.

"긴급 퀘스트!"

[미노우스의 '분신'을 저지하라]

-불완전한 상태로 차원에 침입한 72군단장 미노우스의 분신 처치.

「처치관여 보상」

-처치에 관여한 모든 이들에게 만능의 엘릭서가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기여도 보상」

-기여도에 따라 3등까지 엘더 잉걸불이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만능의 엘릭서』

-모든 능력치 +1

『엘더 잉걸불』

-스킬 강화 +1

"신이 강림한다! 신이!! 나의 구세주!! 지구를 파괴로 이끌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서다! 하하! 하하하하하!!"

울림은 더욱 심해졌다.

불길함은 더욱 배가 되었고,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미노우스의 거대함에 미궁은 끝없이 진동하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일단 피하자고! 이러다 미궁이 전부 무너지겠어!!"

"밖으로! 전부 밖으로 나가!!"

네피림들의 반응은 셋으로 나뉘었다.

첫째는 어서 빨리 달아나려는 자.

"젠장, 포탈도 막힌 곳에서 어느 세월에 밖으로 나가냐고 씨발!"

"비켜! 비켜! 이 개자식들아! 여길 오는 게 아니었는데!"

둘째는 공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변절자가 떠들어대는 말에 동조하여 의지를 잃어버린 자.

"이게... 신...?"

"어차피 우린 죽을거야. 죽을 수밖에 없어. 아아, 아아아아!"

그리고 셋째는.

"파이어펀치. 넌 안 도망가나?"

"보상이 개쩌는데 이걸 튀면 미친놈이지. 처치 관여만해도 올스탯에 기여도에 따라 차등 보상이잖아. 게다가 엘더급인 대악마라해도 분신. 다른 나라 랭킹 1위 쌈싸먹는 데몬시드가 있는데 도망칠 이유 있나?"

"하하하! 그건 맞지! 이 친구 뭘좀 아는데!?"

공략을 원하는 자들이었다.

"우린 미궁 깊숙하게 들어왔다. 어설프게 도망가다 돌더미에 깔려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싸우는 게 낫지."

"무엇보다 데몬시드 옆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하다고 본다. 안 그래?"

"옳소!"

피식.

그들의 태도에 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브란스. 밖으로 나갈 방법. 있습니까?"

"없네. 이곳은 대악마의 둥지가 되었어. 분신이라지만 저것이 강림한 이상, 무슨 짓을 해도 텔레포트를 비롯한 공간 이동 마법이 억제되었네. 하지만..."

브란스는 은근한 눈으로 날 처다봤다.

"매개체를 이용한 공간 도약은 아마도 가능하겠지. 그렇지 않나?"

표식을 말하는 것일 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표식은 거리가 짧아요."

"지상으로 이동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겠구먼."

브란스의 주름이 깊게 패였다.

하지만 그 바탕에 작은 장난기가 섞여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달아나지 않나? 자네 짝을 데리고 가는 것 정도는 가능할텐데."

시답잖은 농담질. 난 품에서 선별한 씨앗을 꺼내 답했다.

[푸리린의 씨앗+5]x10

"굳이?"

달아날 필요성 따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분신 [1]

109화.

"72군단 군단장 미노우스가 일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선포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감소됩니다."

"격이 다른 악마의 저주가 대기를 오염시킵니다."

"상태이상 '둔화'가 적용됩니다."

"상태이상 '취약'이 적용됩니다."

"상태이상 '질병'이 적용됩니다."

「둔화」

-몸이 무거워집니다. 이동 속도가 30% 하락합니다.

「취약」

-취약 상태는 모든 종류의 공격에 20% 더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질병」

-각종 질병에 더 쉽게 노출됩니다.

"피해요! 피해!!"

"부상자들 빨리 옮겨! 걸을 수 있는 사람을 최대한 멀리 벗어나!"

"으악! 발이! 발...!!"

"콜록, 콜록!"

"제길..."

지상의 미로가 무너져 내렸다.

땅이 갈라지고 거대한 격동이 알을 깨려는 짐승처럼 태동했다.

진동하는 지면처럼 불길함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기어가는 듯하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불온함에 부상자는 패닉에 빠져 자신의 죽음조차 회피하지 못했다. 피하지 못하고 돌에 깔려 죽거나 갈라진 땅속으로 떨어지는 이들이 부지기수.

거기에 더불어 각종 상태이상이 몸을 휩쓸었다.

안 그래도 부상을 입었던 이들은 더욱 움직이지 못하고 쓰러졌다.

존재만으로 죽음을 부르는 존재.

대악마란 그런 존재였다.

"신이다! 신이 강림했다!"

변절자들은 신을 부르며 무릎 꿇었고 대악마의 위용에 감동해 눈물까지 흘리며 달아나는 이들을 비웃었다.

"달나자미라라! 신을 경배해라! 도망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변절자들의 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몸집은 비대해지고 털이 수북히 자라나 미노타의 외양과 흡사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숨어있던 변절자는 미노우스를 부르짖으며 학살을 이행했다.

"염병할..."

크기부터 이제껏 보았던 악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30미터에 달하는 크기. 소의 머리, 양옆과 이마에 자리한 거대한 뿔은 창처럼 견고하고 날카로웠다.

짐승의 얼굴을 한 머리와 몸이었으나 갓태어난 신생아마냥 혈관이 전부 보이는 몸은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두꺼운 상체, 쇠사슬이 달린 거대한 쌍도를 갈라진 땅에서 뽑아내는 위용은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

드르르륵! 바닥을 질질 끌어대는 쇠사슬의 소음이 털을 삐죽 서게한다.

쿵!!

발굽은 땅을 진동시킨다.

등 뒤에 돋아난 검은 촉수와 같은 날개는 진짜 악마가 무엇인지를 인지하게 했다.

"미친, 저걸 어떻게 잡아...!"

두 번의 카오스 게이트와 갖은 전투로 잔뼈가 굵어진 네피림이라 할지라도 이만한 악마의 존재는 여지껏 느껴본 적이 없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전신의 감각을 쭈뼛 곤두서게 했다.

"난 랭커도 아니라고! 씨발 데몬시드가 보상 준대서 냉큼 왔더니... 난 안돼! 난 갈거야! 갈거라고!"

"이봐! 개새끼야! 도망가지마!"

그때였다.

쾅-!!

지면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퀘에에에에에에!!

거대한 괴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괴성을 질렀다.

갑자기 나타난 대악마.

그에 상응하는 크기의 괴물.

일부 네피림들은 그 정체를 곧장 유추할 수 있었다.

"데몬시드?"

데몬시드가 부리는 소환수.

씨드라였다.

지옥광산에서 일본 놈들을 모조리 도륙했던 잔악무도한 놈.

어떠한 의미에서는 적군보다 더 무서운 놈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든든한 괴물이었다.

"데몬시드! 데몬시드다!!"

"데몬시드가 싸우고 있다!"

그것만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었다.

데몬시드.

한국의 랭킹 1위인 그가 싸우고 있다는 것 하나로 말이다.

"저기다! 저기 데몬시드다!"

공중에 고고하게 떠 있는 데몬시드.

그가 씨드라의 상공 위에서 지팡이를 높게 들었다.

그와 동시에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황금빛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상태이상 질병이 감소됩니다."

"상태이상 취약이 감소됩니다."

"상태이상 둔화가 감소됩니다."

"체력이 소폭 회복됩니다."

*

같은시각.

"염병."

"마법에 성수의 힘이 깃듭니다."

빛무리 성수를 한병 들이킨 후 다시 레인스톰을 여러번 펼쳤다.

이러다간 다 죽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분신이라지만 놈이 펼친 디버프의 효과가 생각보다 너무 치명적이다.

오랜만에 꺼내든 빛무리 성수의 효과에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크기가 너무 커.'

표적의 크기가 크다는 건 맞추기 쉽다는 장점이기는 하지만, 상대가 생각보다 녹록치 않다.

"분신이라더니."

분신 주제에 단단하기는 또 엄청나게 단단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것저것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상황이 썩 여의치 않다.

'사람들이 전부 대피하지 못했다.'

저렇게 거대하게 자라날 줄은 몰랐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게다가 놈이 나타나자 우후죽순 솟아난 미노타들과 변절자들이 부상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부상당해 있던 사람들인데 미노우스의 디버프와 함께 공격 당하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씨드라를 꺼내 놈을 대항하고는 있지만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신경쓸 게 너무 많아.'

게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본 실력을 제대로 뽐낼 수도 없다.

레인스톰은 남아있던 빛무리 성수를 사용해 아군을 위한 광역 버프가 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광역 마법은 딱히 그렇지 않다.

블리자드는 피아를 구별하지 못했고 카탈린의 뇌격도 하나하나의 벼락을 조종하기는 요원하다.

"씨드라는 생각처럼 조종되고 있기는 한데..."

"벨로나의 덩쿨이 찢겨집니다."

"내구 경험치를 얻습니다."

꽤 버겁다.

벨로나의 덩쿨로 씨드라를 억압해 의도대로 조종하는 것은 생각했던 것처럼 어렵지만 가능은 했다.

애초에 다른 방법도 없었다.

무너지는 미궁 속에서 그나마 안전하게 빠져나올 방법은 씨드라를 성장시켜 지반을 무너뜨리는 거였으니까.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꽤 많은 네피림들이 돌더미에 깔려 죽었을거다.

"이 개새끼들아 주인 말 좀 들어!!"

벨로나를 직접 조종해 씨드라의 대가리를 미노우스에게 향하는 일 자체가 버겁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몇번이나 벨로나의 덩쿨이 찢겼는지 모른다.

그럴수록 내구 경험치를 얻어서 내구 레벨이 벌써 7을 넘어가고 있지만 그만큼 마나 소모도 격해지기 시작한다.

합성한 푸른 성수로 버티고는 있지만 슬슬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대피할 때 까지만...'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일이다.

긍정적인 사고로 바라보자면 벨로나의 내구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구력과 힘이 올라감에 따라 씨드라의 제어가 한결 편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괄목할만하다.

물론.

놈이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그아아아아아아아아!!]

스걱!!

쿠구구구궁!!

미노우스의 거대한 쌍도가 씨드라의 목을 베어버리고 땅에 처박힌다.

쾅!

떨어지는 시드라의 머리가 요동치다 푸르르 시들었다.

"상성이 꽤 좋지 않은데."

놈은 나타남과 동시에 일대를 부수고 몸집을 부풀렸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놈의 발밑의 땅이 갈라지며 용암이 흘러넘쳤다.

아니, 진짜 용암은 아니다.

용암과 비슷한 지옥의 물결이다.

일반 용암에서 말라비틀어진 괴물같은 것들이 앞다투어 손을 뻗어낼리는 없으니 말이다.

미노우스의 쌍도가 휘둘러진다.

다시 한번 씨드라의 목이 베어지고, 그 틈에 다른 씨드라가 놈을 물어 뜯기 시작한다.

한번 주춤하지만 놈 또한 이빨이 있다는 듯 씨드라의 목을 물어 뜯어 떼어내 버렸다.

'+5 정도로는 이게 한계인가.'

놈의 힘은 50퍼센트 감소된 상태.

본체도 아니고 분신이다.

수식언조차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그런데 이 정도인가."

엘더급.

대악마라 칭해지는 군단장의 위용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했다.

그때였다.

놈의 등 뒤에 돋아나 있는 촉수와 같은 날개가 쫘악 펼쳐졌다.

그것은 마치 창날처럼 씨드라의 몸과 머리를 단숨에 꿰뚫었다.

이제 남은 씨드라는 5마리.

상황이 썩 좋지 않다.

난 지상을 내려다봤다.

"브란스. 됐습니까?"

-훌륭하네.

머릿속에 울리는 브란스의 음성에 내 입꼬리가 끌어 올려진다.

아무 생각 없이 씨드라를 풀어 놓은 게 아니다.

기껏 풀어놓은 씨드라를 억압한 것은 네피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브란스는 미궁이 무너짐과 동시에 자신만의 마법으로 네피림들을 보호했다.

그들 하나하나로 하여금 거품같은 베리어가 씌워져 탈출에 성공했다.

-맘껏 날뛰시게!

역시 숲의 현자.

거미굴에서 그를 구한 건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벨로나."

씨드라를 억압하던 벨로나의 덩쿨이 스르륵 풀려난다.

그와 동시에 다섯마리의 씨드라가 모조리 포효하며 미노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콱! 콰직!!

[그어어어!!]

놈이 벗어나려 했지만 어림없다.

"리버슬로우."

"상대의 격이 너무 강합니다!"

"리버슬로우의 효과가 감소합니다."

"벨로나가 미노우스의 다리를 성공적으로 옭아맵니다."

"리버슬로우의 효과가 소폭 상승합니다!"

"벨로나의 덩쿨이 찢겨집니다!"

"벨로나의 내구력이 경험치를 얻습니다!"

"내구력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내구가 Lv.8로 상승했습니다!"

"벨로나의 덩쿨이 성공적으로 미노우스를 옭아맵니다!"

"적창을 장비합니다."

"카탈린의 벼락이 손안에 감돕니다."

"투왕의 살기를 사용합니다."

"적창에 살기가 감돕니다."

"관통력이 10% 증가합니다."

"스킬, 투척을 사용합니다!"

콰지지지지직!!

파앙-!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벼락이 담긴 적창이 미노우스의 허벅지를 향해 날아갔다.

'저 거구를 지탱하는 다리부터.'

분신이라 그런지 갓 태어난 피부는 혈관이 비쳐보일 정도로 붉다.

가죽이 뒤덮지 않은 상태.

지닌 힘이 강할지언정, 모든 공격을 쉽게 받아들인다면 공략이 어렵지 않다.

파직, 퍼억!

[그아아아!!]

씨드라를 상대하느라 날아오는 내 투창을 미처 보지 못했다.

거대한 쌍도를 휘두르고는 있으나 놈의 입장에서 내 크기는 한없이 작다. 내가 날리는 투창도 이쑤시개만하니 썩 무시했다가 큰코를 다친 격.

"꽤 아플거다."

적창의 강화는 아직 +3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강력한 출혈을 일으킨다.

놈의 허벅지에 꽂힌 적창이 벌써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출혈을 일으킨다. 저 상처는 쉽게 낫지 않는다.

계속해서 놈을 갉아먹는 부상으로서 존재한다.

[그르르]

그제야 드디어 놈이 날 봤다.

머리는 소의 그것.

하지만 눈빛은 영락없이 오싹한 악마의 그것이었다.

전신이 오싹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허나 썩 기분 나쁜 소름은 아니었다. 오히려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쿠웅! 버티지 못한 놈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플라이의 사용 시간이 종료됩니다."

"레그릿지를 사용합니다."

레그릿지로 씨드라의 머리 위로 위태롭게 안착한 난 인벤토리에서 창을 여러개 꺼냈다.

사냥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데몬시드! 너만 재미보냐!"

바바리안이었다.

놈이 벨로나의 두꺼운 덩쿨을 밟아 달려나가며 미노우스의 종아리에 쌍도끼를 찍고 매달렸다.

"미친."

"하하하! 바바리안님이 나가신다!"

종아리에 붙은 바바리안과 벨로나의 덩쿨을 잘라내려 미노우스가 대도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때 여러대의 화살이 동시다발적으로 날아들었다.

"익스플로젼 애로우!"

미노우스의 손목에 박힌 화살 수십대가 단번에 폭발을 일으키며 터졌다.

"데몬시드 혼자 활약하게 둘 수는 없지!"

두 주먹을 부딪친 파이어펀치가 전신에 불을 일으키며 기 모으듯 주먹을 내질렀다.

"불주머억!!"

이내 주먹을 닮은 불길이 삽시에 미노우스의 가슴을 타격했다.

삽시에 메케한 연기와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타버리다 못해 녹아내린 살갗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노우스의 비명이 사방 천지에 쩌렁쩌렁 울렸다.

"하핫! 별것도 아니네! 괜히 긴장했잖아!"

그 상태 그대로 미노우스의 다리를 난도질하며 내려온 바바리안은 인벤토리에서 양손 도끼를 꺼내 놈의 발굽을 퍽! 찍었다.

피분수가 용솟음쳤다.

"아가씨!"

"네!"

바바리안의 외침에 호응한 건 다름 아닌 레아였다.

오크 왕의 거대 도끼를 꺼내 다른 쪽 무릎을 찍어버리자 미노우스의 무릎이 털썩 꺾였다.

콰광!

지면에 무릎꿇은 미노우스의 고개가 털썩 꺾였다.

양손의 쌍도는 지팡이처럼 지지하며 겨우 쓰러지지 않은 상태.

다 쓰러지기 직전의 먹잇감.

내 씨드라들은 약화된 먹잇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콰작!

머리고 어깨고 할것 없이 물어 뜯기 시작하자 핏물이 바닥으로 사방으로 흘러 넘쳐 떨어졌다.

그 정도가 되자 숨어있던 네피림들이 다 뛰쳐나와 자신만의 기프트를 사용해 놈을 타격했다.

'너무 쉬운데.'

얼마 때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 죽어가자 다른 네피림들도 의기양양한 얼굴로 한마디씩 뱉어냈다.

"좆밥인데?"

"대악마도 별거 없네!"

착실하게 죽어간다.

하지만 뭐랄까.

'직감 스탯 탓인가.'

이 상황이 영 불안한 건 나 혼자 뿐인가.

"막타는 내꺼다!"

네피림들이 모두 달려가던 그때.

꾸웅-!

기묘한 파장이 미노우스에게 퍼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스르륵.

놈의 이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니, 드러나기 시작했다.

[피 묻은 뿔의 미노우스]

피 묻은 뿔.

그것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도망쳐!!"

놈이 흘린 핏물.

거대한 피 웅덩이 속에서 삼지창과 같은 날카로운 뿔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솟구쳤다.

분신 [2]

110화.

쿠구구구구!!

한발 늦었다.

뒤늦게 소리쳤다.

미노우스의 날카로운 뿔은 피가 있는 곳이 어디라도 솟아났다.

자신의 반경 수십미터를 모조리 뼈로 도배해버린 미노우스는 이전과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혈관이 비쳐보이는 이전의 얄팍한 피부 따위가 아니다.

단단한 뿔들로 뒤덮인 몸.

그것은 마치 하나의 비늘 갑옷처럼 몸 전체를 단단하게 두르고 있었다.

소를 닮은 얼굴조차도 검붉은 뿔들로 뒤덮어져 있었다.

원형으로 퍼져나간 수십개의 거대 뿔들로 네피림의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달려나가다 몸이 뚫려 죽은건 고사하고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분해된 자들 또한 많았다.

비교적 원거리 공격을 선호하는 네피림은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근접 전투 직군인 자들은 대부분 죽었다.

"젠장!"

"바바리안! 괜찮나?"

"끄떡없어!"

어중간하게 근접한 이들은 전부 죽었지만 아예 딱 달라붙어 있었던 바바리안들은 피해가 크지 않았다.

"놈한테 달라붙어 있어! 어중간하게 있으면 죽는다! 죽고 싶은거냐!"

"젠장! 갑옷 둘러서 이제 딜도 안 박히잖아! 어, 어떡해야 하는데!"

바바리안도 바로 눈치챘는지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하지만 몸 전체가 뿔이 돋아난 가시갑옷을 있은 듯한 미노우스에게 이제와서 달라 붙는다한들 유효한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단단한 뿔이 돋아나 있는 놈의 몸.

가시갑옷을 입은 놈은 바바리안의 도끼도, 절단의 고유 효과가 붙어 있는 레아의 양날도끼도 통하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비켜!!"

파이어펀치의 불주먹이 다시 한번 미노우스를 강타했다.

퍼엉-! 소리와 함께 화염이 폭발했다.

"오오! 역시 랭커!"

하지만 잠시 뒤.

매케한 검은 연기가 속에서 미노우스의 쌍도가 파이어펀치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앙-!!

"큭!"

본능적으로 몸 날려 피했으나 그보다 더한 충격은 제 힘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분신이고, 절반짜리 힘..."

그럼 본체는 대체 얼마큼 강하다는건지 벌써부터 충격이다.

힘이 약화된 미노우스가 이 상태인데 푸르푸르는 대체 어느 정도로 강할까. 제대로 땅을 지배한 군단장.

엘더급은 말이다.

"어쩔텐가. 후퇴를 종용하는 게 좋지 않나. 제대로된 정비를 갖추고 다시 싸우는 것도 방법일세."

브란스였다.

곁의 검댕을 잔뜩 묻힌 스미스도 일단 후퇴하는 걸 바랐다.

"한번 재정비하는 게 좋을거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전사들의 무구를 재정비하고 내가 강화시킨다면 전쟁에 승리할지도 모르오!"

어쨌거나 상황이 좋지 않다.

삼지창 같은 뿔들 수십개가 솟구쳐 올라 씨드라는 물론이요 벨로나의 덩쿨들도 모조리 끊겼다.

하지만 놈의 변화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콰아아아아-!

입에서는 검은 스모그를 토해낸다 싶더니 시뻘건 화염을 흩뿌렸다.

놈의 불꽃이 얼마나 뜨거운지 삽시에 대기가 달아올랐다.

하지만 놈은 그것으로 공격을 하는대신 자신의 쌍도를 달구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검붉고 투박한 쌍도는 시뻘겋게 달아올라 타오르기 시작했다.

"페이즈 투라는거지?"

아무리 차원석으로 약해졌다해도 너무 약하다 싶었다.

내가 조금만 빨리 깨달았어도 네피림들의 피해가 적었을 것을.

'어쩔 수 없다.'

제대로 준비를 갖추고 시작된 레이드가 아니다.

내가 인생을 살며 뼈저리게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는 해봤자 의미가 없다는거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한 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어릴땐 그걸 모르고 밤새,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한걸 고민했다.

난 왜 부모가 없을까.

부모는 왜 날 버렸을까.

세상은 왜 이리 날 모질게 굴까.

이제는 안다.

고민이 잘못되었다.

부모가 없고, 버려지는 것을 고민해 봤자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

그걸 중점으로 생각하는 것뿐.

"후퇴는 없습니다."

"뭐 다른 방안이라도 있나보군."

방안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연습으로는 딱 입니다."

진짜를 상대하기 전.

연습 상대로 제격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뿐.

물론 나만을 위한 생각이 아니다.

한국의 네피림들을 위해서다.

'어차피 죽을 놈은 죽는다.'

그런 세상이다.

죽을 놈은 죽는다.

하지만 살아서 강해질 놈은 어떤 환경이 찾아와도 강해지기 마련이다.

한국의 네피림은 약하다.

난 그들을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지만 누구나에게 베풀 수는 없다.

누가 잠재력이 뛰어난지까지 알아낼 능력은 없다.

하지만 오늘. 지금 여기.

"여기서 살아남는 놈들은 진짜가 될겁니다."

오늘 여기서 살아남아 승리한 자들.

그들의 재능이 곧 진짜다.

나와는 달리 레벨도 낮고 기프트도 뛰어나지 않은 그들은 이곳에서의 전투가 더 높이 날게 될 발판이 되어 줄 것이다. 여기서 살아남는 이들은 진짜 군단장. 엘더급 대악마를 상대해야 할테니까.

저런 반쪽짜리가 아니라 말이다.

그러니 도망치기보다는 함께 싸우는 편이 이롭다.

한국은 더 강해져야 한다.

더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지킬 수 있으니까.

"분신이라지만 대악마네. 너무 자만하는 것 아닌가?"

브란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내 말이 오만하다고 여기는 듯 하다. 충분히 그럴만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은 변치 않았다.

"많은 사람이 죽을 걸세. 아니! 많은 네피림이 죽겠지!"

브란스의 실망 섞인 힐난에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대충 보면 안다.

랭커라지만 수준 낮은 실력.

각자가 지닌 기프트의 무지함.

그것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는 플러스가 아닌 제로, 아니. 마이너스에 가까운 정도다. 이 상태로 북한에 간다한들 무얼 할수 있을까.

아무것도 못하고 눈먼 공격에 맞아 의미없는 개죽음만 당할거다.

그리고.

"한국은 쉽게 후퇴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이란 나라는 위기가 닥쳐오면 닥쳐올수록.

그것이 극복하기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강해지는 나라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바바리안이 기함성을 내질렀다.

어디서 소릴 지르나 했더니 그는 어느새 미노우스의 허리춤에 있었다.

가시처럼 돋아나 있는 놈의 갑옷을 암벽등만하듯 올라타는 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무식한 새끼!"

"어그로 끌어! 바바리안이 뭔가 하려고 한다!"

"저러다 뒤지는 거 아니냐고!"

"뭐든 해봐야지! 이러다 다 죽는다고! 안 그래!?"

살아남은 네피림들이 미노우스의 시선을 돌리려 공격을 감행했다.

랭킹 17위 파이어펀치는 계속해서 불주먹을 날렸고, 32위 커터와 56위 고스트는 원거리 공격을 감행했다.

그 밖에도 수많은 네피림들이 바바리안 하나를 위해서 목숨 걸고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다.

그들의 행동은 미노우스의 화를 돋구기에 충분했다.

불타는 쌍도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느린 속도다.

왜일까.

'갑옷 때문인가.'

온몸에 돋아난 뿔로 만든 갑옷.

그것으로 놈의 민첩성이 감소됐다.

하지만 파괴력은 더욱 늘었다.

불타는 쌍도는 한번 바닥을 내리칠 때마다 화염을 널리 퍼뜨렸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과 동시에 삼지창같은 뿔들이 콰과광! 솟구쳤다.

"간다! 간다! 씨발 간다!!"

그럼에도 바바리안의 무모한 암벽타기는 계속 됐고, 이쯤되자 그가 무엇을 노리는지 대강 알수 있었다.

몸에 뿔이 돋아나지 않은 곳.

그곳은 턱이었다.

정확하게는 턱밑.

목까지 둘러져 있는 갑옷중에 유일하게 피부를 덥지 않은 곳.

바바리안은 턱밑을 노리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싸워서는 노릴 수 없는 곳. 몸집의 격차 때문에 보이는 약점이라면 약점인 부위였다.

"저게 약점이 맞긴한가?"

브란스의 의문은 타당했다.

나도 저거 하나에 목숨을 걸기엔 애매하지 않나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그는 확신을 갖고 움직였다.

바바리안의 성격상 뒷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이미 방아쇠는 당겨졌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을 때.

그는 움직였고, 그를 위해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바리안은 지금, 군단장 공략에 작은 희망이 된 상태.

그렇다면 같은 네피림으로서 해줄 수 있는 건 이에 호응하는 것뿐.

내가 투창하려고 하자.

돌연 스미스가 내 팔을 잡았다.

"뭡니까."

"이걸로 하시오."

촤르륵.

스미스가 인벤토리에서 길이가 3미터에 달하는 거창 3개를 꺼냈다.

창날은 마치 화살촉처럼 기묘한 디자인이지만 창대 자체는 심플하기 그지 없다.

창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작살입니까?"

"보면 알것이오. 당신이 맡긴 무기는 아직 완성을 끝내지 못했으니, 이거라도 쓰시오. 그 조잡한 해골 놈들 창보다는 훨씬 좋을테니."

[트롤 작살]

-명장 스미스가 만든 무기.

트롤을 잡을 때 사용되는 거대 작살이다. 한번 박히면 빠지지 않는 갈고리형 작살 촉으로 트롤이라 하더라도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다.

〈강화 불가〉

〈맹렬한 관통〉

〈근력+5〉

"오..."

확실히 내가 보급용으로 쓰던 해골기사의 창보다 스펙이 좋다.

힘을 올려주는 것도 좋지만 고유 효과가 꽤 높다.

맹렬한 관통.

처음보는 고유효과다.

아마도 '강력한'보다 더 높은 등급의 고유효과가 아닐까.

'이거라면...'

나쁘지 않다.

"작살 촉이 무거워서 대포로 발사하는 물건이지만... 당신이라면 크게 상관없겠지."

바로 맞췄다.

일반인이라면 드는 것조차 힘들겠지만 나 데몬시드.

근력이 50에 육박하는 남자.

이런 작살 정도는 한손으로 손쉽게 드는 건 차치하고 얼마든지 투창 가능한 남자중의 남자다.

"일단 한발."

물론 그 전에.

페스틱사드로 작살을 독으로 물들인다. 투왕의 살기로 관통력을 더하고 시드로긴으로 도핑을 완료한다.

이제는 슬슬 진심을 다해야 할 때.

바바리안이 있으니 카탈린의 감전은 쓰지 않는다.

관통력과 독으로만 승부 본다.

위치는 당연히.

'내가 꽂아둔 적창.'

미노우스의 오른쪽 허벅지.

레아가 선물해준 브로치에 내장된 마법.

내다보는 눈에는 보인다.

온몸을 뒤덮은 뿔 갑옷 사이로 아직도 흘러내리는 적창의 출혈 효과가.

물론 같은 곳은 노리진 않는다.

아무리 갑옷이라도 관절 부근은 유연하고 나약하기 마련.

정확하게는 허벅다리 아래, 무릎 뒤편의 관절 부위를 노린다.

다른 네피림들에게 어그로가 끌려 있는 지금이 바로 적기.

"가볍... 게!!"

말은 가벼우나 행동은 전력을 다해 투창한다.

투척 스킬의 보정을 받아 날아간 트롤 작살은 정확하게 미노우스의 무릎을 찔렀다.

쿵!!

육중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오!"

회심의 일격! 다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놈이 고스트에게 어그로가 끌려 잠시 움직인 찰나. 관절 부위가 아닌 뿔 부분을 맞춰버렸다.

쩌저적!

물론 놈에게 충격이 없는 건 아닌지, 뿔갑옷에 금이 가면서 피가 터져 나왔다. 미리 꽂아준 적창의 출혈효과가 더 높아져서 주춤거렸다.

몸이 기우는 그때.

바바리안은 그 타이밍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았다.

"상남자는 역시 도끼지!"

인벤토리에서 꺼낸 듯한 거대한 양날 도끼.

자기 몸보다 거대한 도끼를 꺼내 턱밑으로 올려쳤다.

"선조시여!"

그와 동시에 선조를 부르짖자.

그의 곁에 그와 똑닮은 무기를 쥔, 하지만 다른 모습의 환영 둘이 나타나 바바리안과 똑같이 미노우스의 턱을 후려쳤다.

쾅-!!

"피 묻은 뿔의 미노우스가 치명적인 공격을 허용합니다!"

그 공격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인류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군단장을 무릎 꿇렸다.

"승부다! 랭킹 1위!"

요동치는 미노우스의 곁에서 떨어지는 바바리안이 날 보며 외쳤다.

승부.

좋은 울림이다.

치명적인 일격을 맞았으나 미노우스는 아직 건재하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고 무릎이 박살났으나 놈은 아직 살아 있다.

아니, 아직 힘이 여력이 있다.

"좋지."

기분 좋은 호승심이 끓어 올랐다.

그들의 강함이 상승하기를 바랐지만, 처치 기여도의 1위를 빼앗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판포비아."

"72군단장 미노우스의 수식언이 60초간 봉인됩니다."

"그의 권능 효과가 사라집니다!"

두껍게도 놈을 감쌌던 뿔 갑옷이 사라지고 혈관이 비춰보이는 놈의 맨몸이 드러났다. 턱밑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 피를 주워 담으려던 놈이 어느새 날 쳐다봤다.

난 허공을 밟아 놈의 머리보다 더 높은 상공에 위치해 있었다.

-공포시여... 어째서...!

"뇌격."

놈의 말과 동시에 쏟아지는 뇌격.

범람하는 벼락 속에서 난 두개의 작살과 드레니커의 창을 놈의 머리에 찔러 넣었다.

콰앙-!!

"트롤 작살이 맹렬한 일격을 가합니다!"

"드레커니의 용살창이 치명적인 일격을 가합니다!!"

"통렬한 일격에 72군단장 미노우스의 신체가 붕괴됩니다!"

"72 군단장의 '분신' 처치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카탈린의 감전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처치관여한 네피림 전원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엘더급 악마의 '분신' 처치 기여도 1위부터 3위까지 '엘더 잉걸불'이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수없이 베푼 자가 당신의 욕심을 거두어 갑니다."

"기여도 순위가 재측정됩니다."

"카탈린의 감전이 등수에서 완전히 제외됩니다."

"뭐?"

[1위 데몬시드]

[2위 바바리안]

[3위 파이어펀치]

울음소리

111화.

"엘더급 악마의 '분신' 처치 기여도 1위부터 3위까지 '엘더 잉걸불'이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수없이 베푼 자가 당신의 욕심을 거두어 갑니다."

"기여도 순위가 재측정됩니다."

"카탈린의 감전이 등수에서 완전히 제외됩니다."

"72군단장 미노우스의 뿔을 획득합니다."

기여도 순위.

[1위 데몬시드]

[2위 바바리안]

[3위 파이어펀치]

[4위 피의축복]

[5위 테디베어]

[6위 드루이드]

.

.

.

1위는 당연히 나다.

본래라면 카탈린의 감전까지도 랭킹에 등재가 되어 보상이 두배가 되어야 하지만...

'그 꼴은 못보겠다 이거군.'

보통 보상이 아니다.

자그마치 엘더 잉걸불.

스킬 강화의 아이템이다보니 제한을 둔 걸로 보인다.

솔직히 이게 공평한 상황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쉽긴 하다.

처음부터 그랬다면 모를까 갑자기 이제와서 바뀌어버렸으니까.

'다른 랭킹에서도 빠졌군.'

일반적인 순위 랭킹에서 카탈린의 감전이란 이름이 빠졌다.

물론 결투장에서도다.

"이건 너무 아쉬운데..."

아직 뇌창을 이겨보지 못한 상태라 다시 한번 도전하고자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다른 건 형평성에 어긋났던 일이니 그렇다쳐도 이건 너무 아쉽다.

앞으로 평생, 뇌창을 넘어설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수없이 베푼자라... 어떤 놈이지."

시스템에 간섭할 정도의 존재라면 역시 신과 관련된 자.

악마들이 창궐하는 상황이니 당연히 떠올려지는 건 하나다.

신의 사자.

'천사.'

단서는 충분했다.

악마의 주적은 천사.

그리고 푸르푸르의 레이드 퀘스트 보상으로도 나와있다.

헤일로는 본래 천사들의 머리 위에 있는 걸로 유명한 링을 뜻한다.

그것으로 생각해볼 때, 이 시스템의 존재 의의는 아마도 악마에게 대항할 강력한 천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해 본다.

'1위부터 3위.'

안타깝게도 레아는 4위에 그쳤다.

아무래도 가지고 있는 기프트나 스킬들이 원거리와는 거리가 제법 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것 보다.

"이겼다!!"

"이겼어! 이겼다고 씨발!!"

"데몬시드가 있는데 지겠냐고!!"

"얼마 안 때렸는데 레벨업했어!"

"나도!"

놈이 쓰러지고 축제 분위기가 됐다.

누군가는 레벨업으로 기뻐하고.

누군가는 살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또 누군가는 절망했다.

"신이...! 신이...! 아아, 힘이..."

미노우스의 등장으로 광우들과 변절자들이 강력하게 변화했었다.

하지만 놈이 쓰러진 지금.

변절자들은 힘없는 인간으로 변모했고 광우도 그저 일반적인 소로 변해 있었다.

"할 일이 많겠어."

미노우스를 쓰러뜨렸지만 횡성은 앞으로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횡성에서 구조한 자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꾸려야 할 것이다.

여기 있는 소들을 키우고 약간의 방어채계를 갖춘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본다.

협회와 정부에서 약간의 지원을 해준다면 농사와 더불어 꽤 많은 양의 소들을 번식 유통하여 살수 있겠지.

그렇다면 더욱 풍족한 생존을 꿰찰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꽤 걸리겠지만."

거기까지는 내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아마존."

"... 네."

"괜찮나?"

"괜찮습니다..."

주저앉아 있는 아마존의 멘탈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미노우스를 깨웠던 여인에게 인질이 되어서 그랬을까.

잠시 고민하고 있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면식이 있던 여자였어요. 이 근처에서 활동하던 네피림이었죠."

"... 그랬군."

아마존이 너무 어이없게 인질이 되었다고 느끼긴 했다.

일반인이 아니라 네피림이라면 그런 상황으로 번진 이유도 납득된다.

"그래서 방심했습니다."

아마존은 자신의 활을 꽉 쥐었다.

이번 일은 그녀에게도 꽤 충격적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삐끗 잘못했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그럴만하다.

악마한테 당한 것도 아니고 같은 사람에게 그런 일을 당했으니 여러모로 생각이 많겠지.

'내버려두는 게 낫겠군.'

잠시간은 혼자 생각할 시간을 두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다.

난 아마존을 내버려두고 바바리안에게 다가갔다.

"오! 데몬시드!"

여기저기 다친 구석이 많이 보였지만 안색은 좋았다.

"잘 봤다. 2위, 축하해."

"오우! 1위, 축하한다. 아깝게 막타는 뺏겼지만!"

씨익.

건치를 드러내며 웃는 바바리안의 모습에 나 또한 미소짓게 된다.

"근데 말이야. 마지막에 그거 네가 한거지?"

"뭘 말이냐."

"놈의 갑옷이... 그러니까 수식언이 사라진 것 말이야."

"맞다."

"아니 그럼 진작 썼으면 안됐던거야?"

"리스크가 있는 힘이야. 확실한 때가 아니면 쓰기 힘들었다."

"아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판포비아를 쓴 탓에 이번엔 강골의 능력 일부를 잃었다.

"능력치 강골 -2 소멸합니다."

마력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강골은 본래 23 정도였기에 10퍼센트가 사라져도 2정도에 그쳤다.

이번엔 운이 좋았다.

'같은 상대한테 몇번이나 통할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지.'

판포비아는 공포에 관한 것.

정신적인 영향을 주는 스킬이다.

군단장급 되는 놈들이라면 쓰면 쓸수록 내성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 확실한 때.

최적의 때에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뭐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오늘은 먼저 빼지 말라고! 널린 게 소들이겠다. 소고기 파티하자고!"

바바리안의 선언에 다른 네피림들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좋아! 고기는 나한테 맡겨! 우리집이 원래 정육점이었으니까!"

"나도 도와주지!"

바바리안과 덩치 큰 무리들은 곧장 사방에 널려 있는 소들을 모았고 그들을 도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는 다친 이들을 치료했고 나머지는 아까 끝내지 못했던 구조 활동을 이어나갔다.

할 일이 많다.

나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데몬시드.."

"왜 그러십니까, 브란스."

"저놈들은 어찌할텐가."

"흠..."

난민들을 위해 무기를 만들겠다며 뛰어다니는 스미스와 달리, 브란스는 눈엣가시 같은 이들을 보며 말했다.

힘을 잃고 탈력감에 주저앉아 있는 변절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글쎄요. 그걸 정하는 건 제가 아니라 저들이겠죠."

사육장에 갇혀 고통받던 사람들.

그들이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

횡성은 어느새 어둠이 찾아왔다.

본래는 어둡고 칙칙해야 할 어둠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밝고 시끄러웠다.

"내가 어? 미노타 한마리를 헤드락걸고! 도끼로 이새끼 골통을 빡!빡! 박살내고 있을때 응? 갑자기 미노우스 씹새끼가 크어어어 하고 나타나서 이새끼 뭐야하면서 어? 기어 올라갔지. 힘들었어. 아마 백두산도 그놈 몸 타는 것보단 쉬울 걸?"

바바리안은 소고기와 맥주를 들고 있는 네피림들 가운데 자신의 영웅담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거야 우리가 이 한목숨 걸고 어그로를 끌어줬으니까 가능했던 거라고. 우리 희생 잊지마라, 대머리!"

"그래!"

"하하하하! 당연하지! 나도 너희들에게 목숨을 빚졌다! 너희들도 나한테 목숨을 빚졌으니까 쌤쌤이지?"

"그건 아니지! 너가 아니더라도 데몬시드가 잡았을껄?"

"크하하하! 그건 반박하기 힘들구만!"

풍족할 정도의 양을 가진 소고기와 함께 맥주는 전투의 긴장을 풀어 헤치기에는 충분했다.

조금 날카로운 성격을 지닌 이들도 지금만큼은 한껏 풀어져 대충 땅바닥에 머리를 눕고 코를 골며 졸기도 했다.

여기저기 피어있는 모닥불을 보며 난 레아를 향해 물었다.

"생명 반응은?"

"이제 없어요. 지하에는 더이상..."

"그래, 고생했어. 레아도 가서 좀 쉬고 있어."

"네,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고 가실건가요?"

"저놈들이 아직도 한창이니까."

"알겠어요. 자리 만들어두고 있을테니까요!"

"응. 그리고 여기 있는 네피림들한테 전부 악과 배급해줘. 약속은 약속이니까."

"알겠어요."

약속은 약속이다.

그리고 이번 레이드로 꽤 다양한 잠재력을 지닌 네피림들을 봤다.

그들에게 인색해서 좋을 건 없다.

일주일 뒤엔 저들과 함께 목숨 걸고 진짜 군단장을 잡으러 가야하니까.

"카탈린의 감전도 5렙이 됐고. 스킬 강화는... 역시 제한이 있네."

벨로나, 판포비아같은 스킬은 아니나 다를까 강화할 수 없었다.

기프트도 물론.

잠시 고민하던 난, 카이삭스의 표식을 강화하기로 마음 먹었다.

노말 스킬에 쓰기엔 아깝고 그렇다고 레인스톰이나 블리자드에 쓰기도 조금 아쉬운 감이 있었다.

직접접으로 자주 사용하면서 범용성이 좋은 스킬은 역시 표식이었다.

에픽 등급의 스킬이라 될까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강화가 된다.

엘더 잉걸불.

이녀석은 여지껏 친절하지 않던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게 친절했다.

〈세트〉 [카이삭스의 표식 Lv.2] (Epic)

-마창사로 이름 높은 카이삭스가 생전에 남겨놓은 다섯개의 카이삭스식 마창술 중 하나.

〈미리 새겨 놓는 표식을 통해 번개 속성의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다.〉

〈번개 내성 5%▶10%〉

*〈라이트닝 노바〉

(소모값: 총량의 7%▶5%)

스킬 강화가 완료된 이후의 설명이 보였다.

다른것도 전부 봤지만 이녀석만큼 강화하기 좋은 스킬은 없다.

무엇보다 좋은 게 마나 소모량을 줄여주면서 노바까지 발생시킨다고하니 전이만 해도 주변에 공격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번개 내성도 5% 상승했고.'

나쁘지 않다.

내가 가장 많이 쓰는 스킬이 표식이라 해도 무방한데 이 정도의 효율이라면 당연히 이것말고는 없다.

"엘더 잉걸불을 사용합니다."

"카이삭스의 표식을 강화합니다."

"강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난 잠시 주변을 바라보다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에게 가볍게 투창했다.

트롤작살을 던져 한마리를 잡고 표식으로 전이했다.

"카이삭스의 표식으로 전이합니다."

"라이트닝 노바가 발생합니다."

"라이트닝 노바가 카탈린의 감전과 공명합니다."

"카탈린의 라이트닝 노바가 발생합니다!"

파지지직! 촤아아-!

-그어어!

순간 붉은 전류가 퍼득이면서 내 중심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발생한 노바.

그 성능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렬했다.

"좀비를 처치하셨습니다!"

"좀비를 처치하셨습니다!"

"아울베어를 처치하셨습니다!"

"좀비만 있는 건 아니었네."

노바의 범위가 꽤 넓다.

그래서 그런지 숲 근처에 있던 아울베어도 죽은 모양이었다.

직접적으로는 처음 보는 녀석이었지만 몸집이 탱크만한 곰인지 부엉이인지 모를 녀석이었다. 녀석들을 데몬시드로 바꾼 후, 자리를 떴다.

관찰자의 공략 글에 따르면 아울베어의 레벨은 5레벨 정도라고 했던 걸 보면 노바의 파괴력이 그저그런 수준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카탈린의 감전도 레벨이 오른 탓이겠지."

미노우스를 잡고 레벨업했다.

카탈린의 감전 레벨은 5렙.

배운 스킬은 여지껏 그랬던 것처럼 번개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5렙의 스킬이니 이전과는 다르다.

데몬시드와는 달리 같은 있던 스킬을 강화시킬 수는 없지만 대신이라고 할 만큼 쓸만한 스킬이 생겨났다.

[카탈린의 뇌신]

-신체에 뇌가 깃든다.

〈불온〉

-불안정한 전류가 신체를 지배하여 모든 공격을 1초 동안 회피한다.

〈뇌신〉

-이동 속도 +300%

모든 번개 속성의 피해 100% 증가.

(소모값: 체력의 30%)

(지속시간: 10초)

뇌신.

수치만보면 어마어마한 스킬이다.

궁극기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역시 리스크가 있다.

체력의 30%를 소모시키는 위험천만한 스킬.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뇌신에 있는 불온은 모든 종류의 스킬을 회피할 수 있고 뇌신 자체의 능력치가 탁월하게 좋다.

-음메~!

잠시 스킬을 확인하고 있자 어디선가 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밤이라 잡아놓은 소들은 전부 잠에 빠졌을 텐데 웬 울음소리일까.

확인해보니 사육장 한켠에 어린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꼬챙이 같은 걸 쥐고서.

"자업자득이지."

변절자들.

그들 몇몇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소처럼 취급 받으며 말이다.

"야, 안 먹어? 빨리 여물 먹으라고 개새꺄!"

찰싹! 찰싹! 푹!

"으아아악!"

"먹어! 안 먹어? 어디 소 새끼가 사람 말을 안 들어? 뒤질래?"

중,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아직도 모여서 변절자들을 찌르고 때리고 놀고 있다. 자신들이 당했던 것 그대로 돌려주며 말이다.

"그, 그만! 그만해라!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소가 사람처럼 말하네. 음메~ 하고 울어야지. 안 그래?"

"미친놈들! 너희들이 악마다! 너희들이 진정한 악이야!!"

"너희들이 원했던거잖아. 동물 애호가 소박이 새끼들아."

아쉽게도 변절자들의 비명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활활 타오르는 바베큐가 한창인 곳에서, 사육장에서는 말소리 대신 소 울음소리가 합창처럼 퍼져나왔다.

진짜 소가 냈다기에는 얄팍하기 짝이 없는 조잡한 울음소리가 말이다.

-음메에에!!

-음메!!

횡성에는 소가 있다.

하지만 그 소들은 평생을 슬피 울 것 같았다.

엘더 잉걸불

112화.

횡성 사건 이후.

난 불별도에서 시간을 보냈다.

겸사겸사 휴식도 취할 겸, 북한으로 가기 전에 악마 퇴치가 아닌 본업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내 본업.

"잘 자랐는데?"

불별도의 데몬트리들을 오랜만에 관리하고 있었다.

이번에 잡아본 미노타.

아울베어 등을 심고 제물로 성장시키니 썩 괜찮은 녀석들이 나왔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건."

미노타를 심으니 겉껍질이 소나무 같은 나무가 자라났다.

근데 열린 열매는 노랗고 길쭉했는데 한눈에 보자마자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많은 해외 품종이 떠올랐다.

"망고네."

실제 망고와는 달리 길쭉한 모양의 커다란 씨는 없었다.

하지만 모양과 맛은 망고와 흡사했는데 당도는 그렇게 달지 않고 적당히 달짝지근했다.

"미노타의 악마의 열매가 지닌 이름을 변경하시겠습니까."

변경.

5렙이 되어서일까.

이제는 열매가 지닌 고유 이름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었다.

"미노타의 열매를 미노타의 망고로 변경합니다."

미노타의 망고를 하나 다 먹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근력이 0.04 상승합니다!"

다른 능력은 없었지만 근력 상승.

높은 수치로 인해 막혀 있던 근력을 다시 한번 끌어올릴 열매였다.

본래라면 용장의 효과가 있더라도 0.02가 올라야 정상이다.

하지만 데몬시드 자체가 강화되어서 또 다른 추가 스탯이 발현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기본 스탯이 0.02에서 용장 효과로 0.04가 된다.

"망고 많이 먹어야겠는걸."

미노타의 망고를 하나 더 먹고 아울베어의 열매를 바라봤다.

이녀석도 제물 성장시키니 커다란 나무로 변했는데 열매는 미노타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겉보기는 딱 수박인데."

초록과 검정의 적절한 조화.

사람 머리통만한 열매의 크기.

누가 봐도 수박이었다.

통통!

한번 두드려주고 힘을 좀 줘서 반으로 쪼개보니.

쫘악!

붉은 속살이 나를 반겼다.

"수박 맞네."

수박 특유의 수분기 가득한 향긋함이 주변을 가득채웠다.

인벤토리에 있던 숟가락을 꺼내 시원하게 파먹어보니.

역시 수박 맛이 맞다.

안 그래도 슬슬 더워지는 6월.

아울베어의 수박은 여름을 나기에 적절한 과일이었다.

물론 냉동고에 넣어서 시원하게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물리피해가 0.04 상승합니다!"

"물리피해?"

이건 또 신박한 스탯이다.

물리피해라니!

"화염피해까지는 봤는데... 물리 피해력도 있을 줄은 몰랐네."

스킬 시험해보다가 우연히 잡은거라 별 기대도 안 했는데 물리 피해력을 올려줄 줄이야.

횡재한 기분이다.

[관찰자. 아울베어 서식지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관찰자님에게로부터 메시지]

-아울베어는 간간히 목격담만 이어질 뿐 서식지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게 없습니다. 무리지어 다니지 않고 단독 생활을 한다는 것 밖에요. 필요하시면 알아볼까요.

[부탁해.]

-알겠습니다.

관찰자도 잘 모른다니 할 수 없다.

부엉이를 닮았으니 숲에 살고 있을 거 같은데... 한국의 70퍼센트가 산인 곳이니 뒤지다보면 몇마리쯤은 금세 나올지 모르겠다.

-캬캭!

일반적인 데몬트리가 아닌, 챔피언급들의 상태를 보며 잘자랐다 칭찬하니 그램이 가슴을 크게 폈다.

내가 없는 때에 언제나 불별도를 자신의 것처럼 관리해주는 그램이 있기에 마음 한켠이 든든하다.

"그램, 이거 하나 가져라."

-캬캭!?

이번에 스미스한테 받은 작살이다.

이미 3개나 있고, 그중 하나를 준다고해서 내 전투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다. 불별도의 수문장이나 다름없는 그램의 전투력이 올라간다면 그 또한 나를 위한 일이다.

아낄 필요가 없다.

'어차피 창을 또 만들고 있으니.'

내가 의뢰한 서펜트를 재료로 한 무기 말고도 이번에 미노우스가 떨어뜨린 뿔을 가지고도 무기를 만들고 있다.

저번에 보물방에서 얻은 미스릴까지 사용해 만들어줄테니 작살 하나쯤은 그램에게 준다고 무슨 상관일까.

-캬캭! 캬캬캬캬캭!!

그램은 새 걸 받았다며 뒤뚱뒤뚱 작살을 하늘 위로 들고 한껏 춤사위를 뽐냈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한번 써볼래?"

-캭!

기다렸다는 듯 바닷가로 날아가 두리번거리더니 작살을 있는 힘껏 투창했다.

쾅!

"?"

바닷물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기괴한 굉음이 들려왔다.

-캬캬캭!

그램은 신나하며 거대하게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둠칫둠칫거리다가 바다속으로 풍덩 들어가 작살에 꽂힌 무언가를 들고나왔다.

-캭!

쿵!!

불별도의 해변가에 떨어진 물체.

길이는 15미터쯤 되어 보이는 뿔 두개가 달린 뱀장어 같은 괴물이었다.

하지만 특이하게 얼굴은 산양의 그것을 닮았는데 크기가 크기인지라 작은 배 하나쯤은 그대로 삼키고도 남을 정도였다.

"이걸 한방에 잡아?"

안타깝게도 머리를 한방에 꿰뚫려서인지 즉사했다.

트롤 작살의 고유 능력의 강함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램의 신체 능력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인하다는 증거였다.

"최소 5렙 정도는 되어 보이는데..."

물속에서의 전투라면 성가셔질게 뻔하니 6렙이라봐도 무방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렘린 레벨이 3인데 이런 녀석을 원큐에 잡다니.

내가 그렇듯.

그램 또한 천천히 성장하고 있었다.

이제와서는 그렘린 중에 그램이 제일 강하지 않을까. 왕을 자처해도 충분할 정도로 강하다는 느낌이다.

근데 그건 그렇고.

"씨-서펜트를 너무 잡았나."

이 근방에 서펜트를 너무 잡다보니 많았던 놈들이 어디론가 가버렸는데, 그래서 이런 게 있던 모양이다.

"카프리콘. 신기한 악마네."

생긴건 꽤 흉악하지만 그램이 잡을 정도면 썩 대단한 녀석은 아닌 거 같았다.

상체는 산양이고 하체는 뱀장어처럼 생겨서 먹으려면 못 먹을 것도 없지만 굳이 그럴 마음이 생기진 않는다.

카프리콘을 데몬시드로 만들어서 적당한 위치에 심었다.

[카프리콘의 씨앗]

성장기간-142일.

물뿌리개로 몇번 물을 주자 허리춤까지 오는 얇은 나무로 자라났다.

그리고 맺힌 열매는 작고 붉다.

"앵두 느낌인데."

맛도 비슷하다.

아울베어와 카프리콘의 열매 이름을 변경하고 몇개 더 집어 먹었더니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수면내성이 0.04 상승합니다."

"수면 내성?"

확실히.

저주에 관한 것 중에는 잠들게 하는 능력도 있을 것이다.

전투 중에 잠에 빠진다면 그보다 더 무기력할 수 없다.

"세상에는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많은 능력이 있을테니까..."

수면.

이것에 대한 방비는 내성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미지의 위험.

그것에 대한 대비는 아무리 해도 부족한 법이니까.

"그램, 이 녀석. 주위에 더 있어?"

-캬캭!

"더 잡아와 줄래?"

-캭!!

나한테 맡기라는 듯 든든한 얼굴로 가슴을 퉁퉁 치더니 바다 멀리 떠나버렸다.

그램한테 맡기면 카프리콘 열댓마리는 더 잡아올테니 녀석에게 맡기고 난 불별도의 중심. 챔피언급 데몬트리들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본래 보물방에서 나온 뒤에 제일 먼저 했어야 할 일이었는데 벨로나를 시험해본다고 심지 못했다.

[악마의 눈물의 씨앗]

성장기간-666일

보물방에서 얻었던 아이템.

악마의 눈물.

엘더 잉걸불보다는 하위템이 아닐까 싶은 아이템이었다.

스킬 하나를 랜덤으로 +1 강화시켜준다는 에픽 아이템.

하지만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데몬시드로 만들어본 녀석이었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이녀석.

나무로 심어서 열매를 맺게 한다면 과연 어떤 효과를 지닌 열매로 태어날지 여간 관심이 간다.

'스킬 강화 하나를 날렸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랜덤 스킬 강화였다.

그럴바엔 적은 가능성에 모든걸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하에 데몬시드로 만들었다.

워터볼이나 돌진 같은 녀석이 강화되어 봤자 지금의 나한테는 썩 도움이 되지는 않을테니까.

"후우, 심어볼까!"

은정의 물뿌리개는 횡성을 다녀온 뒤로 수량이 빵빵하게 채워져 있다.

성장기간 666일?

어림없다.

이 녀석의 가능성이라면 제물 스물남짓 정도는 아낌없이 주리라.

"성공적으로 제물을 바칩니다."

"성공적으로 제물을 바칩니다."

"성공적으로 제물을 바칩니다."

.

.

.

스무번이 넘는 제물을 바친 그때.

"악마의 눈물이 완전한 성장을 이룹니다!"

빛을 머금고 하늘 끝까지 성장한 데몬트리.

그것은 오묘한 빛을 냈다.

"무지개?"

무지개색으로 발색을 띄는 나무.

그것이 악마의 눈물이 성장한 나무였으며 크기 또한 꽤 거대했다.

챔피언급 나무들이 어린애들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옛날 공룡들이 살았다던 선사시대에나 있을법한 거대한 나무처럼 크고 색또한 아름다워 멍하니 바라보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었다.

진짜 악마의 나무 같다는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런 상관 없었다.

불별도가 뭍에서도 꽤 잘 보이겠다고 생각되기는 했지만 상관없다.

그램이 있고, 레아가 있고 브란스가 있고 스미스가 있으니까.

중요한 건 녀석의 열매다.

"하나... 하나가 열린건가."

여지까지의 데몬트리와는 다르다.

이 거대한 나무에 오직 하나.

하나의 열매만이 열렸다.

색은 검다.

손안에 들어올만큼 적당한 크기.

하지만 그것의 형태는 절대로 과실이라 부를만한 게 아니었다.

"이게 열매라고?"

무지개색으로 자리한 나무.

오묘하게 빛나는 잎사귀에 자리한 불온하게 빛나는 열매.

그것의 형태는 완연하게 검은 해골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인간보다는 뭐랄까.

악마의 그것에 가까운 두개골이라 표현하면 적당해 보인다.

먹거리로서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모습. 은연중 풍기는 분위기는 먹어서는 안되는 녀석 같다.

이걸 과연 먹어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난 믿는다.

"데몬시드는 날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그리고 먹지 않는다면 이걸로 무엇을 하겠나.

먹어야 한다.

먹다 죽어도 먹는다.

그게 나 데몬시드다.

콰즉!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식감은 사과와 흡사.

하지만 베어무는 즉시 입안에서는 물렁해져 액체처럼 변했다.

"?"

의외로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약간의 향 정도.

뭐랄까.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참외의 속을 긁어내고 먹는 느낌.

달지 않은 참외를 먹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건 첫맛이고 액체로 변해 목구멍을 넘어간 순간은 맥주를 마신 것처럼 시원했다.

물론 목구멍을 넘어간 뒤엔 가슴부터 배까지 순간 후끈해졌다.

뜨끈한 보약을 마신 기분.

그리고 이변은 그때 발생했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 여러 책이 내 몸에서 솟구쳐 나와 일목요연하게 자리했다.

책.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익힌 스킬들이었다.

[제물성장] [페스틱사드] [씨드라] [시드로긴] [아토믹시드] [카탈린의 감전] [카탈린의 증폭] [카탈린의 벼락] [카탈린의 뇌격] [카탈린의 뇌신] [워터볼] [투척] [돌진] [레인스톰] [블리자드] [리버슬로우] [용장] [벨로나] [카이삭스의 초급 창술] [거스트] [투왕의 살기] [레그릿지] [클루트] [프로스트 노바]

이미 강화된 데몬시드와 표식은 제외되어 있었다. 이것으로는 더이상 강화하지 못한다는 뜻. 그것들은 내 주위에서 빛나며 빙글빙글 회전했다.

그러다 이내.

기괴한 손가락이 나타났다.

길쭉한 4개의 손가락을 지닌 손.

그것은 돌연 허공에 나타나 내 스킬들 중 하나를 지목했다.

그것의 이름은.

"아니, 하필 저게!!"

워터볼이었다.

"워터볼이 강화됩니다!"

하필 걸려도 워터볼.

미치고 팔짝 뛸 지경.

그러나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한발 남았다...!"

내가 먹은 것은 열매.

그렇다면 반드시 발휘되어야 하는 궁극의 패시브가 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용장은 먹은 것을 효율을 높인다.

사라지려던 악마의 손가락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선택된 것은.

"나이쓰으!!"

"카탈린의 벼락이 강화됩니다!!"

카탈린의 벼락이었다.

엘더 레이드 [1]

113화.

미처 몰랐지만 사용해보고 알았다.

'기프트까지 가능.'

악마의 눈물로 만들어진 열매는 기프트 스킬까지 강화가 가능했다.

이는 군단장 레이드를 하며 보상으로 받은 엘더 잉걸불보다 한층 더 뛰어난 효과이기도 했다.

물론.

「워터볼+1」

-대기중의 수분을 모아 날린다.

▶〈매우 강한 관통〉

▶〈분산〉

▶〈집중〉

확률이 랜덤이라는 게 문제였다.

〈매우 강한 관통〉

-지닌 마력에 비례하여 최대 20%의 관통 피해를 입힌다.

〈분산〉

-지닌 마력에 비례하여 워터볼 하나가 수십에서 수백 개로 분산되어 넓은 범위를 공격한다.

〈집중〉

-최대 5개까지 워터볼을 만들어 주변에 띄운다.

"별로 기대 안 했는데..."

생각보다 강화된 스킬의 효과가 좋았다. 워터볼에 관통 효과가 붙은 건 당연히 좋다.

하지만 진짜 좋은 건 분산. 그리고 집중의 효과였다.

"그러니까. 산탄총처럼 날아가다 터진다는거지?"

집중으로 최대 5개까지 만들어서 띄울 수도 있으니 위급시에는 워터볼이 든든한 방어이자 공격용 스킬이 되어줄 듯하다.

"워터볼."

게다가 이번에 나타난 고유효과들은 전부 지닌 마력에 비례하여 피해가 늘어나는 것들.

바닷가를 향해 한번 써보니.

콰앙-!

그 효과는 내 생각보다 뛰어났다.

높게 치솟은 바닷물이 3, 4미터 올라갔다 떨어졌다.

"원형으로 퍼진걸보니 예상대로네. 이정도 파괴력이면 5렙 정도는 순삭시킬 수 있겠어."

6렙이나 7렙도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할 거 같았다. 관통력과 분산의 효과가 꽤 좋긴 했지만 내 관심은 의외로 집중으로 이어졌다.

"최대 다섯개..."

난 이걸 늘릴 방법을 알고 있다.

"리버슬로우."

집중으로 모아두던 워터볼을 해제하면 단번에 쏘아진다.

하지만 슬로우를 걸면? 집중 효과에서 벗어나려던 순간 워터볼은 슬로우의 영향으로 이도저도 아닌 상태가 되어버린다.

"워터볼."

몽글몽글.

내가 지닌 워터볼을 총 10개가 된다. 리버슬로우의 효력이 유지되는 한 이는 무한정으로 늘어날 수 있을거라 생각했으나.

"강화되서 이런 꼼수는 안 통하나."

'집중'에 영향을 받은 워터볼은 내 움직임에 따라 날 따라오지만 리버슬로우가 걸린 녀석들은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원래의 워터볼은 리버슬로우를 걸어도 내 손과 하나된 듯이 움직였는데 강화가 된건지 패치가 된건지 이전의 꼼수가 통하지는 않았다.

아쉽지만 5개가 한계다.

물론,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한정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기는 하지만.

"전투시에는 서른 개 정도가 한계려나."

서른개를 만들어내는 시간은 5초 정도, 그 이상은 전투시에 써먹기는 꽤 어려울 것이다. 그럼 이걸 한번에 터트리면 어떻게 될까.

콰아아아앙-!!

"시원시원하네."

전방으로 10미터 정도가 폭사됐다.

하늘 높이 치솟는 바닷물이 햇빛과 만나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시원시원하게 출렁이는 파도와 맑은 하늘이 썩 기분 좋았다.

악마들이 즐비한 세상만 아니라면 더 오늘을 즐겼겠지만 마냥 기뻐하기엔 아직 일렀다.

"연습 좀 하면 3초대에도 끊을 수 있을 거 같긴한데..."

워터볼이 강화됐을 때는 욕을 뱉었지만 막상 써보니 꽤 좋다.

'리버슬로우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을 거 같고.'

급박한 전투 상황일 때야 리버슬로우를 쓰는 일이 적에게만 있었지만, 레이드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한방 딜을 노려볼 수도 있을 듯하다.

몇번을 더 사용해보고 나서야 기대하던 카탈린의 벼락을 살펴봤다.

[카탈린의 벼락+1]

-벼락을 생성한다.

벼락을 집어 던지거나 하늘에서부터 떨어뜨릴 수도 있다.

▶〈강력한 번개피해〉

▶〈연쇄번개〉

〈강력한 번개〉

-지닌 마력에 비례하여 최대 30%의 추가 번개 피해를 입힌다.

〈연쇄번개〉

-벼락이 한번 내려친 후, 잔류 번개가 연쇄적으로 퍼져 〈강력한 번개 피해〉 데미지를 입힌다.

"연쇄 번개라..."

좋은 울림이다.

연쇄 번개. 일명 체인 라이트닝이라고도 불리는 그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느낌은 비슷하다봐도 무방할 것이다.

"초등학교 때 돈 모아서 피시방가면 아저씨들이 전부 체라소서를..."

그 낭만의 스킬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그래도 연쇄라는 단어가 주는 기대감은 이루말할 수 없다.

당장 써보기로 했다.

"카탈린의 벼락."

콰광!!

바다 한곳이 터져나갔다.

폭발의 반경은 워터볼과는 차원이 다르게 컸고 넓었다.

벼락이 내려쳐진 곳을 불규칙한 전류가 연쇄적으로 퍼득였다.

어찌보면 표식을 썼을 때 나타나는 라이트닝 노바와 흡사했지만 수십개의 번갯줄기가 조금 더 큼직큼직한 걸보면 확실히 파괴력은 더 높아 보였다.

"바다에 써서는 제대로 확인해보기가 어려운데..."

악마들이 많은 곳에서 써봐야 제대로 위력을 측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벼락 자체의 위력도 강해졌지만 역시 연쇄적인 번개 피해의 위력이 궁금했으니 말이다.

'리버슬로우로 벼락도 좀 멈춰놓고 한번에 써보고 싶은데.'

적당한 악마가 없을까 고민하다 고개를 털어냈다.

"북으로 올라가면서 시험해봐도 상관은 없겠지."

얼추 위력은 알았으니까.

그보다는 이녀석이 문제다.

[악마의 눈물]

수확기간-999일.

하나의 열매를 맺는 나무.

악마의 눈물의 수확기간이 전보다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늘어나는건가."

은정의 물뿌리개에 있는 제물 하나당 평균적으로 30일을 줄여준다.

999일.

천일에 가까운 수확기간을 줄이려면 삼십이 넘는 숫자의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여기서 더 늘어날 거 같단 말이지.'

한번 늘어난 이상.

녀석의 성장기간은 점점 더 늘어날거란 예감이 들었다.

내가 가진 은정의 숫자는 총.

『은정의 물뿌리개』 (unique)

-검은 산양의 정욕을 바치는 항아리였으나 흰숲의 현자가 은인을 위해 개량한 은정의 물뿌리개가 되었다.

〈은정:476〉

알뜰살뜰하게 애도하며 모은 양이 꽤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

한두 번 정도야 더 제물을 바쳐도 상관없지만 그 이상은 부담스럽다.

군단장 레이드가 어떤 변수를 창출해낼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웬만하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한다.

화염피해나 물리피해 그리고 다른 내성을 올려주는 열매등을 섭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제물을 쓸 곳이 많다.

예를 들자면.

'마나번.'

거미여왕을 죽이고 심은 마나번의 수식언을 얻기 위해서는 꾸준하게 녀석의 열매를 수확해야 했다.

두번째 수식언을 획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를 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지닌 불타는이라는 수식언은 레벨이 오른다.

그렇다면 마나번 또한 그럴 터.

상대의 마나를 터트릴 수 있다면 육체파는 몰라도 마법을 사용하는 놈들에게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바나 다름이 없다.

그것은 군단장이라도 마찬가지다.

푸르푸르는 의도치 않게도 폭풍과 번개를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것의 자원이 되는 게 뭐겠는가.

당연히 마나다.

"물론 스킬 강화를 놓치긴 어렵지."

워터볼과 카탈린의 벼락이 강화된 효과를 보면 차마 지나칠 수 없다.

그러니 계산을 잘하든가 아니면 제물을 더 모아야 하는 게 맞다.

"제물이라..."

그러고보니 관찰자와 강철을 주축으로 아직도 지옥광산을 정벌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 둘은 광산의 땅을 넓히는데 주력하고 있어서인지 횡성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으니까.

"지옥에 가면 좀 있으려나."

아마도 꽤 많을거다.

그러고보니 사람들이 쌓아놓은 지옥석도 많을테니 한번 회수하러 다녀오긴 해야했다.

"알레이슈로 아이템 강화도 해야하고... 할 게 너무 많네."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허나 그것들 전부가 강해지기 위함이니 빼먹을 수도, 게으를 수도 없다.

강해지기 위함이란 결국,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함이니까.

쿵! 쿵쿵!!

어느새 크고 작은 카프리콘의 사냥을 마친 그램이 가슴을 피며 콧김을 내뱉었다. 열댓마리는 되어 보이는 걸보니 무리를 사냥해온 모양이다.

카프리콘의 수박을 던져주며 그램을 한껏 칭찬해주고 악마의 눈물에 제물을 들이 부었다.

"스킬 강화좀 하고."

"제물을 성공적으로 바칩니다!"

"제물을 성공적으로 바칩니다!"

"제물을 성공적으로 바칩니다!"

.

.

.

*

보름 뒤.

파주.

본래라면 젊은 군인들이 지켜야 할 군사 분계선이 자리한 곳.

굳건히 지켜야 할 철망은 산산이 부서져 있고 짙은 전투의 흔적만이 아스라이 남은 이곳에서.

대한민국의 최정예 네피림.

5만명이 집결해 있었다.

결연한 낯으로 서 있는 그들은 오로지 북부를 바라봤다.

누군가는 비장했고 또, 누군가는 긴장했으며 또는 흥분을 감추며 자신이 든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다양한 감정과 시선이었다.

이곳에 서 있는 이유도, 목적도 각각 달랐으나 한가지만은 같았다.

그것은 북방의 땅.

네피림이 공통되게 바라보는 북부엔 어둡고 음산한 기운이 전역에 짙게 깔려 있었다.

악마에게 굴복해버린 땅.

악으로 변모한 옛 고향을 탈환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촤악.

푸른 포탈이 열렸다.

5만명의 앞에 열린 포탈.

그곳에서 나오는 사내는 물소의 뼈를 뒤집어 쓴 자.

대한민국의 랭킹 1위.

데몬시드였다.

"출발하지."

스윽, 대충 둘러본 그는 곧장 출발을 명했고 모여있는 랭커들은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거침없이 불온한 땅을 밟자마자 여러 메시지 창이 그들을 경고했다.

"악의 땅에 들어섭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하락합니다."

"번개 내성이 10% 하락합니다."

"심약의 저주에 걸립니다."

"공포가 당신을 사로잡습니다."

발 내딛자마자 온몸을 짓누르는 대악마의 저주.

음산한 바람소리가 꼭 그들을 한껏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허나 그럼에도 그들은 걸어 나갔다.

"악은 가냘픈 미래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미래를 따르지 마십시오. 악이 보여주는 미래는 미지이며 허상일 뿐이니."

"검은 그늘이 하늘을 가리게 할 것이고 악은 당신을 똑바로 지켜볼 것이나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그늘에 기생하는 악의 길을 뿌리치고 빛을 밟아나간다면 곧이어 찬란한 하늘의 품에 도달하게 될테니."

경고이자 독려.

허나 그런다 한들, 그들의 막연한 두려움을 씻어내긴 어려웠다.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구.

악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은 천차만별이었으나 살육과 피의 육질만은 쫓는 붉은 눈과 흉악한 이빨이 악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다.

막연한 공포가 드리웠다.

악의 발톱에 찢기고, 이빨에 물어 뜯기는 미래가 그려졌다.

"나, 난 못해! 못한다고!!"

"씨발! 씨발!!"

북으로 향하는 걸음을 얼마나 향했다고 벌써부터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나는 이들이 나타났다.

한껏 비틀린 도로.

기괴하게 꺾인 산과 미묘하게 구부러져 쌓여 있는 시체의 탑은 심약한 자들의 공포를 부추기기 적당했다.

산에서 들에서, 물에서 뛰쳐나오는 악마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오는 광경은 제아무리 굳건한 마음이라도 심약하게 만들었다.

"이 멍청한 놈들! 그러고도 너희가 한국을 대표하는 전사들이냐!!"

참다못한 바바리안이 소리쳤으나 강철은 고개 저으며 그를 말렸다.

"왜! 지금 저놈들이...!"

화를 주체하지 못했으나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

바바리안이 강철의 만류에도 도망가는 놈들을 도로 잡아오려는 찰나.

"우리가 할 일이 아니야."

"...!"

그는 보았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그늘.

어둠이나 다름없는 그늘에서 어느새 붉은 빛 수십 개가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었다.

일직선상의 붉은 빛.

마치 벼락이 제자리에 멈춰서기라도 한 듯한 것들 수십개가 말이다.

그리고 이내, 하늘에서는 벼락의 비가 떨어져 내리니.

시야를 가득 메운 적의 군대가 붉은 파도에 휩싸여 사라졌다.

신의 천벌과도 같은 위력.

달아나려던 자들의 가슴에 스며든 절망에 희망이 피어났다.

그녀의 말대로.

이탈자를 막는 건, 그들의 일이 아니었다.

선두에 선 그의 힘을 보는 순간.

없던 희망도 피어날 것이니까.

"준비해."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엘더 레이드 [2]

114화.

전장의 지형은 전체적으로 지좆대로였다.

본래라면 뻥 뚫려 있어야 할 도로는 아스팔트 자체가 비틀려 꼬아져 있었고, 여기저기 뾰족한 첨탑들이 기형적으로 곳곳에 솟아 있었다.

첨탑의 재료로 보이는 건 건물에 박혔을 철근들과 사람, 총기 등등이 한데 뒤섞여 꽈베기처럼 꼬여 뾰족한 형태를 이뤘다.

기형적인 조형물의 존재가 단순히 악마들의 자기 과시인지, 아니면 모종의 이유가 있는지 궁금했지만.

콰광-!!

아쉽게도 지금은 그런 걸 궁금해할 여유는 없어 보였다.

"데몬시드! 조금 더 뒤를! 후방을 노려줘! 당신 스킬의 여파로 우리 인원까지 감전되고 있어!"

"확인."

콰지지직!!

붉은 벼락이 하늘 위에서 우르르꽝꽝! 존재감을 발휘한다.

번쩍!

벼락이 내려치고 지면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

콰앙-!!

1차적인 폭발, 그 규모 또한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본래라면 해봤자 1미터 반경의 피해를 줬다면 지금은 최소 5미터에서 잘 박히면 10미터다.

거기에 더해.

파지지지직-!

연쇄 번개가 뭉쳐있는 적들을 타고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

그 한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듯 벼락 한방에 100마리 정도가 쓰러지는 걸보면 확실히.

'강화가 개꿀이군.'

스킬 강화 효과가 어마어마했다.

"젠장! 아가씨! 무기 하나만!"

"여기요!"

"오우! 존나 무겁고 좋구만!"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내 감상.

물밀듯 몰려오는 적들의 후방을 섬멸하고는 있지만 전체를 나 혼자 감당할 수는 없는 법.

내 스킬로 없애지 못한 적.

벼락에서 운이 좋아 빠져나온 놈.

그런 놈들은 군대의 코앞까지 몰려왔고 근접전에 특화된 네피림들이 한창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젠장! 고블린이 뭐 이렇게 힘이 쎈거야!"

"군단장 땅이잖나. 개좆밥 악마들도 2배에서 3배정도 강해진거지!"

"제기랄!"

"하하! 똥개도 제집에선 한수 먹어주는데 이 지랄맞은 새끼들이라고 안 그럴까! 안 그래? 파펀!"

"그래서. 무섭나?"

"하하! 전혀! 오히려 좋지! 경험치도! 돈도 두배니까!"

콰직!

구울의 대가리를 찍어버린 레아가 볼에 묻은 피를 스윽 닦았다.

"끝이 없어요."

이내 날 지키겠다는 듯 앞에 섰다.

"악마의 종류는 크게 고블린과 구울이에요. 하지만 그 숫자가 경이로울 정도로 많은 걸 보면..."

"잠깐 사이에 폭발적으로 불어난 거라고 보면 되겠지."

왜 불어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곳에 원래 인간이 살았으니까.

카오스 게이트에 패배한다고해서 인간이 모조리 사라지는 건 아니다.

대한민국만해도 네피림 모두가 카오스에 참여하는 건 아니다.

인류 절반이 네피림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네피림인 건 아니다.

민간인이 있다는 소리.

그리고 북한은 그 민간인들이 어마어마하게 학살당했을 것이다.

악마의 땅으로 변이한 이 땅에서.

어중간한 네피림.

민간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극도로 적으니까.

그들은 먹히거나 죽고, 좀비가 되거나 구울이 되고 아니면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날 양분이 된다.

그렇기에 고블린과 구울의 숫자가 엄청난 것이다. 이제 막 발디딘 군대의 길목을 막아설 정도로.

"엘리트다!"

"비켜비켜! 바바리안이 가신다!"

레아에게 건네받은 양손도끼를 들고 뛰어든 바바리안이 엘리트 데몬과 싸우기 시작했다.

종족은 고블린.

순간이동이라는 수식언을 달고 있는 녀석이었지만.

"으라쌰!"

콰직!!

순식간에 대가리가 반으로 갈라지면 수식언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강해졌다고 한들 고블린 정도의 엘리트는 바바리안 선에서 정리가 가능했다.

"그래봤자 고블린이지!"

튄 뇌수를 털어낸 바바리안이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순간.

"또! 또 있다!"

또 다시 엘리트가 나타났다.

많고 많은 숫자의 악마들이다.

애매한 수식언을 보유한 악마들이야 쌔고 쌨다.

"맡겨 달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꽤 까다로운 수식언을 가진 적이다.

파지직!

[번개의 구울 롤란]

"으악!"

번개의 수식언을 지닌 놈을 때릴 때마다 작은 전류가 퍼졌다.

치명적일 정도로 강력한 전류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감전되면 인간의 몸은 긴장으로 수축한다.

깜짝 놀라 무기를 떨어뜨리거나 다리에 힘이 풀려 무방비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네피림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다.

전류는 무기를 타고 바바리안의 손과 몸을 태웠다.

"빌어먹을!"

엉덩방아를 찧은 바바리안이 욕지거릴 내뱉으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바바리안은 한가지를 간과했다.

이곳은 푸르푸르의 영역.

녀석은 수식언도 수식언이지만.

"바보같은! 저 녀석은 엘리트가 아니라 챔피언급입니다!"

관찰자의 외침에 바바리안이 눈을 치켜떴다.

엘리트는 수식언과 종족명만이 있으나 녀석은 이름도 있다.

챔피언이 맞다.

"채, 챔피언이 어떻게 바깥에...!"

바바리안의 의문이 답을 찾기 전.

챔피언 구울이 움직였다.

바바리안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기 위함이다.

허나 실패했다.

쿵!

은색의 갑옷을 걸친 강철기사의 저지로 인한 일이었다.

"이곳은 악마의 땅이니까!!"

여러 강철 기사들을 대동한 강철군주가 구울의 몸을 베며 소리쳤다.

그렇다.

이곳은 악마의 땅.

말인즉슨 차원석이 없는 곳.

존재의 억제를 받지 않는 곳이다.

그러니 엘리트든 챔피언이든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었다.

조금 이상한거라면.

"직급은 없군."

"아, 그렇네요. 확실히..."

본래 챔피언급이라면 왕이라던가 기사라던가 하는 직급이 있을 터.

하지만 녀석은 없었다.

구울의 특징인가? 싶었으나 우리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여기도다! 여기도 챔피언이다!"

[벼락의 고블린 슈슈프]

엘리트, 그리고 챔피언의 존재 또한 이곳에서는 심심찮게 볼수 있었다.

"시드님."

"엘리트들이 진화한 형태인가?"

엘리트들 중에서는 간혹, 물음표로 지정되어 있는 녀석들이 있었다.

그들이 인간을 먹고 힘을 키워 이름을 깨달아 진화를 이뤘다면 이러한 상태가 이해 된다.

"꼭 왕이어야만 힘을 키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작금의 상태가 바로 몰락한 나라를 먹어 치우고 이룬 악의 성장이었다.

"소서리스. 잠시 맡긴다."

"저, 저희들로는 역부족입니다!"

난 후방에서 지원사격하는 소서리스 부대와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계속 여기에서 벼락만 날릴 수는 없었다.

"잠깐이면 된다."

카탈린의 벼락은 좋은 스킬이다.

강화를 이뤄 이전보다 강한 피해력과 범위를 갖췄다.

고작 소모값이 100정도인 스킬로 그 정도의 피해를 준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사기였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누군가와 함께 싸우며 쓸 수있는 스킬은 아니다.

벼락 자체는 몰라도, 연쇄 번개는 아무래도 표적을 한정지을 수가 없다보니 같은 네피림이라 할지라도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니 챔피언을 상대로 벼락을 날려댈 수 없다.

악마들 수십만 마리가 몰려오기는 하지만 내게는 아직 여유가 있다.

그리고 난 아직.

내가 지닌 스킬들을 사용하고 시험해보아야만 한다.

그래야.

'군단장을 잡을 수 있을테니까.'

쿠우웅-!

고블린 챔피언이 거대한 몸집과 몽둥이로 네피림들을 날려보냈다.

난 몰려있는 그들 사이로 걸어가 지팡이를 들었다.

"워터볼."

집중 효과로 순식간에 다섯개의 워터볼이 만들어졌다.

-그륵!

"챔피언 고블린의 레벨은 5렙으로 나옵니다!"

고블린의 레벨은 본래 2레벨.

녀석이 챔피언인 걸 감안해도 꽤 높은 레벨이다.

아마도 이 땅을 지배한 군단장의 존재 때문이리라.

하지만 스킬을 시험해볼 딜미터기로서는 딱 적당하다.

'일단 한발.'

워터볼이 날아간다.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의 구속력을 자랑하는 워터볼이 챔피언의 앞에서 순간 분사된다.

수개에서 수백개로 분사.

고블린 챔피언은 순간 몽둥이로 워터볼을 쳐내려 했으나.

파앙-!

결판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크아아아악!!

몽둥이와 함께 놈의 오른팔이 물방울들과 함께 소멸했다.

허공에 뜬 약간의 핏물이 비릿한 냄새가 존재했던 팔의 흔적을 말해줬다.

"마력에 비례한 파괴력... 좋네."

난 곧장 나머지 워터볼 4발을 녀석에게 날렸다.

쾅-!

존재 자체가 지워져버린 고블린 챔피언과 함께 한창 난동을 피우고 있는 다른 챔피언으로 향했다.

"관찰자. 놈의 레벨은?"

"7렙입니다!"

[마법저항의 오크 마동]

마법저항.

마법사에게는 꽤 까다로운 놈이다.

허나 상관없다.

이번엔 마법이 아니라 투창을 시험해볼 생각이었으니까.

차아악.

달려가다 멈춰서 손을 뻗는다.

한손은 목표지점을, 한손은 창을 잡고 한껏 끌어올린다.

팽팽한 고무줄처럼 당겨진 창은 이내 내 손을 벗어나 활처럼 쏘아진다.

"투척."

「투척+1」

-무기를 투척했을 때, 명중률과 데미지를 높여준다.

〈더 강한 관통〉

-15% 추가 피해 관통.

나는 악마의 눈물 성장시켰다.

그것 때문에 소비한 제물만 수백.

하지만 랜덤으로 강화된 스킬의 수는 고작 여섯.

투척은 그중 하나다.

관통 추가피해가 생긴 게 고작이지만 썩 나쁘지는 않다.

푹!!

-끄어어어어!!

챔피언 오크의 가슴에 정확히 꽂혔다.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는 놈이었고 해골기사의 창이었지만 녀석은 내 창에 심장을 꿰뚫리고 말았다.

시스템창으로 놈의 경험치와 금화가 속속들이 들어왔지만 이제와서 내게는 큰 의미가 없는 일.

"이쪽에 지원좀!! 챔피언이다!"

"8렙입니다!"

이번엔 구울 챔피언.

하지만 일반적인 챔피언은 아니었다.

[순신의 구울 왕 마도라]

왕이란 칭호가 붙은 놈.

이곳에 있는 어중이떠중이 챔피언과는 격이 다른 놈이었다.

확실히 몸도 수식언도 조금 다르다.

격이 다름을 한눈에 보여주는 녀석은 순식간에 네피림 서넷의 배를 뚫어 죽여 제 손목에 여럿 끼워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난 다시 한번 투창했다.

이번엔 해골기사의 창이 아니다.

스미스가 만든 제작 창이다.

[독니의 클라렌트] (unique)

-명장 스미스가 자신의 은인을 위해 심사숙고하여 만든 창. 서펜트의 독니와 뼈대, 그리고 비늘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고급품.

〈강화불가〉

〈강력한 관통〉

-30% 추가 피해 관통력

〈근력 +5〉

〈맹렬한 독〉

-서펜트의 독이 그대로 묻어 있다. 50% 독 추가 피해를 준다. (독 내성이 없는 적에 한하여 독이 폭발한다.)

쏜살처럼 날아간 창.

놈은 순간 내 투창을 보며 자신의 팔에 끼웠던 네피림의 시체로 막으려 했으나 어림 없는 일.

푹-!

그들의 시체를 꿰뚫고 날아가 놈의 옆구리에 정확하게 박혀 들었다.

스미스가 만들어준 걸작.

이 창에 매력은 서펜트의 독니를 그대로 사용한 창날에 있다.

서펜트의 독.

그리고 내가 페스틱사드로 덧입힌 독의 효과는 놈들의 독 내성을 거의 없는 걸로 만들 정도.

제아무리 강한 적이라 할지라도 서펜트와 내 독이 합쳐지는 순간.

-끅...

퍽!

내부에서부터 독이 돌며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터진다.

물론 독내성이 강한 녀석에게는 효과가 반감하지만 웬만하면 통한다.

물론.

스미스가 만들어준 창은 이거 하나만이 아니다.

서펜트를 소재로, 와이번을 소재로, 미노우스의 뿔을 소재로 한 창이 내게는 세가지나 있다.

주력으로 삼는 창은 벌써 다섯개.

스미스의 창과 내가 지니고 있던 두개의 창이었다.

제작된 창은 강화 할 수 없지만 내 적창과 드레커니의 용창은 달랐다.

[카탈린을 그리는 적창 +6]

-그렘린 킹의 피와 뼈를 갈아 만든 적창.

〈강력한 관통〉

〈맹렬한 출혈〉

〈번개 피해〉

-번개 피해 10% 증가.

[드레커니의 용살창+6] (unique)

-용살자 드레커니가 애용했던 창.

〈더 강력한 관통〉

〈맹렬한 폭발〉

〈용살〉

-용족 한정 추가피해 30%

알레이슈는 대단한 광물이다.

알레이슈 하나당 강화 확률을 30% 높여줄 뿐만 아니라 여러번 중첩 사용이 가능했다.

물론 제약이 있다.

중첩 사용해도 강화 확률을 30% 이상 높이지는 못한다.

그럼 무슨 이득이 있나.

그 대신, 강화 실패시 장비 파괴를 막아주는 효과를 지녔다.

그렇게 내가 지닌 모든 주력 장비를 +6까지 만드는 기염을 토했다.

많은 좌절의 나날이 눈앞을 스쳤다.

하지만 난 승리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엘더 레이드 [3]

115화.

타닥타닥.

타오르며 불씨를 뿜어내는 모닥불 사이로, 발걸음이 바삐 움직인다.

"여기! 여길 잡아당겨!"

"먹을 건 충분하지?"

"여기서도 거래소는 이용돼."

"그건 다행이네."

한차례 전투가 끝나고 꿀맛 같은 휴식의 시간이 찾아왔다.

"현재 우리 위치는?"

"개성입니다. 저희는 평양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쭉, 적진으로 향합니다."

"얼마나 걸리지?"

"차로는 세시간에서 네시간정도 걸리지만 도보로 간다면 일주일 정도 걸릴 것으로 소요됩니다만..."

"방해가 없다는 전제인가?"

"네, 거리적인 시간 계산입니다."

도보로 일주일.

네피림들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과 비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앞에는 그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릴 죽이고싶어 안달난 살육에 미친 악이 도사리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모른다.

"전사자는?"

"1,452명입니다. 부상자는 53명입니다."

"부상자들의 상태는 어떻지."

"레아님을 비롯한 힐러들이 돌보고 있으니 시드님께서 신경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가."

군용 막사 안.

난 내 전용 자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관찰자와 강철군주, 아마존을 비롯한 랭커들이 모여 회의를 나누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논의한다.

난 그들을 내버려두고 막사 뒤편으로 향했다.

잠시 뒤.

그곳에는 나무 한그루가 자라났다.

이 땅에 널려 있는 구울을 씨앗으로 만들어 심은 거였다.

구울 나무에는 복숭아가 열렸다.

물론 진짜 복숭아처럼 중심부에 씨앗은 없었지만 달고 수분기가 가득한 물숭아였다.

난 물복숭아를 한입 씹어먹고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용장이 발휘됩니다."

"인내가 0.4 상승합니다."

인내.

새로운 능력치였다.

하지만 그렇게 크게 와닿지는 않는 능력치였다.

"먹겠나?"

"그래도 됩니까?"

구울의 나무는 열매가 꽤 많이 열리는 편이었다.

레벨이 낮아서인지, 아니면 군단장의 힘을 받은 악마라서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열매가 많다.

본래 한 나무에 열개남짓 열리는 경우가 평균인데 구울의 나무는 복숭아가 서른개 남짓 열렸다.

관찰자에게 수거를 명하고 회의하고 있는 랭커들에게 돌리라 말했다.

"어차피 이제는 슬슬 알잖나."

"그렇긴 합니다."

협회를 설립한 뒤.

랭커들을 악과로 꼬셔 히든 던전이나 각종 중요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지도 꽤 지났다.

이제는 슬슬 간간이 거래소에 팔아넘긴 악과의 출처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낸 자들이 꽤 많다.

내가 뇌창임과 동시에 데몬시드인걸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던 것처럼.

저들은 알면서도 굳이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게 당연히 자신들에게 해로 돌아오게 될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전투 후에 몸이 피곤할텐데도 저들은 고생해주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있는 네피림 전원에게 악과를 돌리고 싶지만 양은 한정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나머지는 어떡할까요."

"대장들에게 돌려."

"알겠습니다."

5만에 가까운 인원이다.

당연히 각 부대의 대장을 뽑았다.

"난 됐으니까, 볼일 봐."

"어디 계실겁니까?"

"나무 위에."

"알겠습니다."

관찰자는 날 꼭 어린아이처럼 대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봤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다.

"전장을 너무 헤집고 다녔나?"

조금 찔리는 부분이 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플라이로 나무 위로 올라가 안착한 뒤 풍경을 조금 구경했다.

삭막하기 그지 없는 곳.

하늘은 하루종일 먹구름이 깔려 해를 본 적이 없다. 이곳의 전체적인 특징은 어둡고, 건조한 편이다.

그리고 간혹.

쿠구궁-

먹구름 속에 번쩍거리는 요란한 천둥소리가 이어진다는 것.

그리고.

"온다!!"

"대비! 대비! 충격에 대비해라!"

콰광-!!

어마어마한 크기의 벼락이 이따금씩 내려친다는 것 정도다.

콰즉.

관찰자가 따가지 않은 복숭아를 하나 더 먹으며 바삐 움직이는 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벼락의 수준이 자연적인 건 아니네."

내려치는 벼락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벼락이 아니다.

아마도 악마의 힘이 깃든 벼락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멀리 내려치는데도 이정도의 진동과 태풍을 만들어내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저것을 보고 나서야 왜 이렇게 높게 솟은 첨탑이 많은지 알았다.

"피뢰침이지."

그것은 일종의 피뢰침이었다.

중구난방으로 내려치는 벼락을 피하기 위해 악마들이 만든 피뢰침.

지금 간부들이 회의하는 것도 평양까지의 일정을 짜는 것도 있지만 어떻게 저 벼락을 피하며 갈지에 대해 논의하는 바가 크다.

휴식을 취하기 위한 막사는 동서남북으로 피뢰침이 있는 곳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동 중에는 그렇게 벼락을 치할 수 없는 노릇이라 머리를 합쳐 난관을 헤쳐나가려 하는 중이다.

"농땡이세요?"

광풍에 의해 날아간 천막을 잡으러 가는 네피림들을 구경하던 난 어느새 올라와 나뭇가지에 안착한 여기사를 보곤 피식 웃었다.

"그럴리가."

투구를 벗은 여기사.

붉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레아였다.

"농땡이가 아니면요?"

"내 나름대로 이 상황을 타계해보려고 준비중이지."

딱히 랭킹 1위라고 놀고먹으려 나무 위로 올라온 건 아니다.

난 머리가 그렇게 좋은 사람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 대비책을 내놓을만큼 센스가 뛰어난 편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 뿐이다.

"어떻게요?"

"나랑 같은 상황인 놈들한테 좀 물어볼 수밖에 없지."

그닥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나만 이렇지는 않을테니까.

[엘더 레이드 채널]

[중국-미룡 Lv.6]

-다들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려?

[러시아-가면소드 Lv.6]

-놈들의 공세가 격하다. 예상 루트대로라면 2주는 걸릴지 모르지.

[중국-미룡 Lv.6]

-느려터졌네.

[러시아-가면소드 Lv.6]

-우리쪽은 지리적으로 멀다. 3주도 굉장히 타이트하게 잡았다고 볼 수 있지. 똥양인의 땅에 사는 너희들과는 다르게 말이지.

블라디보스톡 쪽에서 집결하여 온다고 들었을 때부터 러시아의 도착이 꽤 소요될거라고 예상했다.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거리적인 측면에서 3배 정도 멀기 때문이다.

저쪽은 길도 트여지지 않아서 그야말로 산행을 감행해야하기 때문에 그 정도는 걸린다.

'러시아는 7만명 정도랬던가.'

그만한 인원이 포탈을 타야했으니 이래저래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타국으로 포탈을 탈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들과의 대화에서 알았지만, 타국의 좌표찍힌 포탈 스크롤이 있다고해도 각 나라의 차원석 때문인지 작동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물론, 러시아 사람이 중국 땅을 밟고 있어도 안된다.

자신의 국적과 맞는 땅에 밟고 있을 때, 포탈은 효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중국-미룡 Lv.6]

-이래서 코쟁이들이란. 우린 일주일이면 끝나는데... 그러니까 미리미리 왔으면 됐잖아!

[러시아-가면소드 Lv.6]

-미리와서 2주다. 닥쳐라 계집

[중국-미룡 Lv.6]

-데몬시드. 너는?

[중국-미룡 Lv.6]

-이새낀 왜 대답이 없어? 죽었나?

[러시아-가면소드 Lv.6]

-5렙이 랭킹 1위인 나라이니... 벼락에 맞아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역시 하찮은 똥양인의 피는...

[중국-미룡 Lv.6]

-야, 야! 진짜 죽었어? 진짜 허접? 이건 좀 변순데?

[러시아-가면소드 Lv.6]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마라. 계집. 내가 네년보다는 강하니 레이드는 성공할거다.

[중국-미룡 Lv.6]

-너 없어도 그냥 잡으니까 좀 닥쳐.

여기까지가 최신 대화다.

벼락에 관한 건 저들도 같은 상황인 듯 하다.

은근히 자존심 때문에 서로 그런 정보 교류는 못하고 있어 보였다.

'미친 새끼들. 여기까지와서 자존심 싸움하고 있네.'

하지만 저 꼬라지를 보니 나도 왠지 껄끄러워진다.

벼락에 관한 걸 묻는 순간.

[중국-미룡 Lv.6]

-쫄?ㅋ

[러시아-가면소드 Lv.6]

-소국에서 대쫄보가 나왔군. 벼락 좀 맞는다고 사람 안 죽음.

이라면서 놀려댈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다고 이렇게 대책없이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법.

벼락의 위험성은 피부로 느끼고 있는 중이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벼락 치는걸로 땅이 울리고 태풍이 몰아치는데 이걸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충 3시간에 한번씩 치는 벼락이 내 머리로 떨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여기서는 자존심은 조금 내려놓아야 한다.

한국 대표의 자존심.

하지만 그것도 한국이 살아 있어야 부릴 수 있는 것 아니던가.

우리가 죽으면 한국은 끝.

일단 살아야 한다.

[한국-데몬시드 Lv.5]

-문제가 생겼다.

[중국-미룡 Lv.6]

-뭔데 우리 막둥이. 누나한테 상담해봐, 다 알려줄게.

[러시아-가면소드 Lv.6]

-악마들이 많다거나 너무 강해서 못간다는 헛소릴 씨부릴꺼면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라. 2주는 걸리겠군.

'생각보다 상냥한데...'

아니. 아직이다.

이놈들은 감추고 있다.

자신의 안에 있는 추악한 비방.

처형수에게 마지막날 성대한 식사를 차려주는 것처럼, 이 녀석들도 날 놀리기 위해 일차적인 상냥함으로 자신을 덮은 것이다.

"난 속지 않아."

"네? 뭘요? 뭐가요?"

[한국-데몬시드 Lv.5]

-벼락 때문에 진군할 수 없다.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면 공유 바란다.

[중국-미룡 Lv.6]

-막둥이 쫄았어?

[러시아-가면소드 Lv.6]

-그냥 맞아보셈. 시원함.

"이 개새끼들이..."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개잡놈들의 염병 떨기가 시작됐다.

[중국-미룡 Lv.6]

-문제가 생겼다길래 난 또 뭔가 했는데 벼락? 고작 벼락??? 나 같으면 고추뗐다 ㅇㅈ?

[러시아-가면소드 Lv.6]

-데몬시드. 형님으로서 알려주건데 벼락 좀 맞는다고 사람 안 죽는다. 경락 마사지 받아봤나? 맞으면 몸 풀리니까 맞는 걸 추천하지.

[한국-데몬시드 Lv.5]

-개새끼들.

[중국-미룡 Lv.6]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러시아-가면소드 Lv.6]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국-데몬시드 Lv.5]

-다 웃었으면 공략좀.

한국의 랭커들은 알까.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차마 눈물이 앞을 가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난 어떻게든 공략을 알아내야만 했으니...

내 정성이 갸륵해서일까. 이놈들이 정보를 말해주기 시작했다.

[중국-미룡 Lv.6]

-피뢰침 만들면 되잖아. 그거까지 누나가 가르쳐줘?

[러시아-가면소드 Lv.6]

-넌 너희 나라도 모르는군. 여길봐도 산이고 저길 봐도 산이다. 산 파고 들어가서 쉬면 되잖나.

그들의 대안은 의외로 심플했다.

피뢰침을 만들어라.

산을 파고 들어가라.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법은 아니었다.

[한국-데몬시드 Lv.5]

-그런걸 누가 몰라. 다른 방법은 없냐고 묻는거다.

[중국-미룡 Lv.6]

-넌 아직 초입이지? 그러니까 이런걸 물어보겠지.

[러시아-가면소드 Lv.6]

-역시 사천왕중 최약체 답다.

[한국-데몬시드 Lv.5]

-우린 세명이잖아.

[러시아-가면소드 Lv.6]

-닥쳐라! 그런건 아무래도 좋아!

[한국-데몬시드 Lv.5]

-미친놈아 공략 말해!!

[중국-미룡 Lv.6]

-좀 더 가봐. 군락을 만든 악마들이라면 답을 알고 있을테니까.

[러시아-가면소드 Lv.6]

-꿀 빨려고 하지말고 사냥해라. 답은 놈들이 쥐고 있다.

답은 악이 가지고 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확실한 듯하다.

생각해보면 이곳에 살고있는 악마들도 벼락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피뢰침을 설치한 것일 터.

조금 더 가보면 산속에 사는 놈들말고 다른 방식으로 삶의 터전을 꾸려놓은 놈들이 있을 것이다.

악마의 생태를 학습해야 한다는 말이 썩 보기 좋지는 않지만 어쩔 수 있나.

일단 나아가는 수밖에.

나무에서 내려 막사로 들어갔다.

아직도 침 튀기며 회의하고 있는 간부들에게 자존심 굽히고 얻어낸 정보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아니 글쎄! 정찰단을 꾸려서 피뢰침을 설치해두고 진군하자니까!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

"아냐아냐. 산으로 들어가. 산이 피뢰침이 되어줄거다. 산속을 파고 들어가서 편하게 쉬자고."

"글로리안. 니가 날아가서 산 꼭대기에 피뢰침을 설치하는건 어떠냐."

"가다가 벼락맞아 죽으란거냐?"

"..."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사람 머리라는 게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번개를 유도해보는 건 어떨지."

"먹구름을 부술 수는 없나?"

꽤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도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대안은 없는 상황.

난 그들에게 성자처럼 랭커들에게 얻어낸 정보를 내 것인양 하사했다.

"답은 악이 가지고 있다..."

"역시 데몬시드! 랭킹 1위는 역시 역시 다르다니까!?"

"역시 협회장..."

"1위는 다르네."

"데몬시드, 그는 신인가?"

저마다의 찬사가 날 옥죄었다.

괴로웠으나 위에 있는 자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었다.

난 한껏 찬사를 받아들이고 막사로 돌아가 쉬었다.

3시간에 한번씩 내려치는 벼락소리에 잠을 깨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

그리고 다음날.

"이건..."

난 높게 솟은 나무 하나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말대로.

답은 악마에게 있었다.

물론.

"철로 된 나무라..."

그들이 알려준 방식과는 조금 다른.

나만의 방식이었지만 말이다.

엘더 레이드 [4]

11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