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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의 회원들은 가까스로 최강태와 계약할 수 있었다.

모든 죄와 그에 대한 자백을 낱낱히 특검측에 고하는 대신 깎아주기로 한 수명 1년.

물론 자신이 망자들과 맺은 계약을 건드릴 수는 없었으니 그들의 남은 수명을 얹어 늘린 형벌을 줄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S회원들의 순수 수명은 오로지 최강태의 몫. 최강태가 깎아 주기로 한 것은 바로 그 수명 중에 단 1년 뿐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 1,000년이나 999년이나 다를 게 뭐냐고.

그러나 악몽의 고통과 끔찍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고작 1년이 아니라 무려 1년.

자신들이 호텔에서 저지른 악행은 평균 여섯 시간 정도. 하루 24시간이면 그 끔찍한 고문을 무려 네 번이나 겪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일 년이면 고문받아 죽는 횟수만 무려 1,460회였다. 즉, 1년을 삭감해 준다는 건 무려 1,460번 고문받아 죽을 걸 줄여준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웃으며 불길에 뛰어들지 못 할 이유가 없고, 즐겁게 오물 속에서 썩어가지 못 할 이유가 없다.

물론 의식을 회복한 뒤에 계약을 따르지 않고 헛짓거리를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최강태 본인에게는 그쪽이 훨씬 도움이 되었다.

계약을 위반할 시, 전체 형벌 시간이 무려 열 배로 증가하는 계약이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는 1만년짜리 든든한 적금 통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나 다름없던 것이다.

"선생님! 환자가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환자분, 정신이 들어요? 제 말 들립······."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빨리 경찰이든 검찰이든 다 불러줘요! 빨리!!"

그들은 정신을 차리는대로 다급하게 경찰을 불렀다. 아니, 성격 급한 이들은 그들이 오는 걸 기다는 것도 참지 못 하고 직접 검찰로 출두하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대양생명의 우 회장님이 안원희 청장의 불법 정치 자금을 대주고 있었고 그 대가로 안원희 청장은 대양생명의 청탁을 들어줬다?"

"그렇다니까요? 안원희 청장뿐만 아닙니다. 경찰 측에서도, 검찰 측에서도, 우리 할아버지 돈 안 먹은 새끼들을 찾기가 힘들 정도니까. 아, 그냥 종이랑 펜 줘봐요. 내가 써드릴게."

"그, 그러세요."

이성화가 종이와 펜을 건내자 대양생명 회장의 둘째 손주, 우혁준은 자신이 알고 있는 뇌물 및 청탁 관계의 인간들을 모조리 적어 넣었다.

그 대부분이 S회원의 친인척들이었고 이로서 S가 단순한 불법 사교 모임이 아닌, 정재계에 뿌리내린 암덩어리였음이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원희 청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이 씨발럼아."

"······."

결국 안원희도 이성화를 따라 자신을 찾아온 우혁준을 보고 입술을 씹으며 눈을 감는 수밖에 없었다.

***

"시, 실장님. 우리는 어쩌죠?"

"어쩌긴 뭘 어째. 가라앉는 배에 타고 있어봐야 빠져죽기밖에 더 하겠냐?"

"그럼······."

"싹 다 정리해. 흔적이 될만한 건 전부 정리하고 떠난다."

"예!"

대우생명의 실장, 그러나 그 실체는 잉어파의 두목이었던 서청명이 부하들의 작업실 정리를 명령했다.

말이 대우생명의 실장이지 실상은 회장의 의뢰에 따라 온갖 더러운 짓거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런 서청명의 능력을 높이 사서 대우생명의 회장이 자리를 내어준 것 뿐이었기에 서청명은 지금 있는 자리가 전혀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부하들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하아······. 대우생명 똥꼬 닦아주면서 꿀 빨 때가 제일 행복했는데······.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 실장··· 아니, 형님."

"당분간은 동남아 가서 잠수타고 있어야지. 다행히 필리핀 쪽에 아는 동생이 마약 장사하는데 쓸만한 인재가 많이 부족하다더라고. 거기서 돈 좀 벌다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오자. 그때는 마약 루트도 좀 뚫어보고."

"오~! 역시 형님! 저희는 형님만 믿겠습니다!"

"꿈은 야무진데, 그럴거면 좀 더 일찍 출발하지 그랬냐? 그랬다면 이렇게 내 얼굴 보는 일은 없었을 텐데."

"······!"

난데없이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잉어파 식구들이 눈을 부릅뜨며 한 곳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목소리가 들린 위치는 다름아닌 황태식의 뒤쪽.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으로 피범벅이 되어 꿈틀거리는 황태식의 밧줄을 풀어주면서 자신들을 이죽이던 남자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언제··· 누가 들어오는 기척도 못 느꼈는데······."

"너 뭐야!?"

반응은 신속했다. 그들은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연장을 주워들며 최강태를 포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강태는 밧줄을 풀어주자 실 끊어진 연처럼 허물어지는 황태식을 최강태가 조심스럽게 받아 눕혀주었다.

"쯧쯧즛······ 자식 농사 잘못해서 이게 뭔 고생이래. 아니지, 깡패 새끼가 자식 새끼를 번듯한 개 양아치 깡패 새끼로 키워놨으면 풍작인건가?"

"이 새끼가 근데?!"

"뭘 보고만 있어? 죽여!"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잉어파 조직원들을 보고 씨익 미소를 그리던 최강태가 황태식의 어깨를 다독였다.

"얘기는 좀 이따 하자고.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팟!

그와 동시에 사라지는 최강태의 모습.

"뭐, 뭐야?!"

"갑자기 사라졌······."

빠각! 으드득! 퍼억! 쩌엉! 콰드득! 으직······!!

최강태의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잉어파 조직원들의 몸뚱이가 부서지고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두 눈을 부릅뜨고 몸을 벌벌 떨었다.

칼을 들고 달려들어도, 장도리를 들고 달려들어도, 쇠파이프나 각목, 그 어떤 연장을 사용해도 최강태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었다.

너무나도 가볍게 연장을 피하며 주먹을 꽂아 넣을 때마다 조직원들의 몸이 부서진다. 120kg이 넘는 압도적인 체구로 달려들어 막아서도 소용없었다.

쩌엉! 콰앙!! 쿵!!

단순히 무릎을 차올렸을 뿐인데 120kg의 거구가 천장에 부딪히더니 그대로 바닥에 추락한 후, 피를 토하며 정신을 잃었다.

"이, 이게 대체······."

서청명은 자신의 부하 십여 명이 별다른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장난감처럼 부서지자 그 모습에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야, 너."

"저, 저요?"

그 순간, 최강태가 자신을 부르자 서청명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럼 여기 멀쩡한 새끼가 너랑 나밖에 더 있냐? 너 여기 주소 알지?"

"아, 알죠."

"경찰에 여기 신고하고 너는 대충 굴러다니는 빠따 하나 챙겨서 네 팔다리 부러트리고 있어. 나는 이쪽이랑 할 얘기가 있거든."

"제, 제 팔다리를 제가요?!"

"두 번말하게 하면 뒈진다."

"히끅!"

그렇게 서청명이 경찰에 신고하고 울며 겨자먹기로 자신의 팔다리를 불구로 만들고 있을 때, 최강태는 황태식에게 못 다한 얘기를 건냈다.

"실명된 왼쪽 눈은 평생 못 고칠거야. 아작난 사지도 마찬가지고. 아마 평생 네 스스로 걸어서 화장실을 가거나 밥숟가락을 뜨는 일은 없겠지."

"······."

황태식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더 이상 고통받는 건 지긋지긋하니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참, 네 아들이 이걸 너한테 보여달라더라.

그런 황태식에게 최강태는 폰을 들어 하나의 영상을 재생시켜주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어머니랑 같이 살아서 돌아와주세요. 제발······.]

울면서 자신과 어머니의 귀환을 바라는 아들의 모습에 황태식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기쁨이 아닌, 고통의 눈물이었다.

아버지이기에··· 자식 때문에 이런 꼴을 당했어도 아버지이기에··· 부모이기에 자식의 간절한 바람을 차마 외면하지 못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를 괴롭혔다.

아마 이들 가족은 서로의 망가진 모습을 보면서 죄책감과 고통을 죽을 때까지 느끼며 살아가겠지.

그것은 바꿔 말하면 황철고의 가족이 죽을 때까지 순도높은 마력을 뽑아낼 수 있는 고성능 건전지란 말이기도 했다.

그게 바로 최강태가 황태식과······.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얼른 우리 철고 어머니도 구해드려야겠다."

오자연을 구하는 이유였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47화 고양이가 조금 똑똑함

"나 왔어."

"씻고 부엌에 저녁 차려놨으니까 밥 먹······."

거실에서 홈트를 하고 있던 길서연은 순간,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뭐냐, 그 어깨에 걸려있는 건?"

"응? 이거?"

최강태는 자신의 어깨에 축 늘어져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던 까망이의 뒷덜미를 잡아 앞으로 내밀었다.

"고양이."

"아니, 그게 고양이인 건 나도 보면 알거든? 내 말은 고양이를 대관절 또 왜 주워왔냐고 이 문디 자슥아!!"

"귀여워서?"

냐옹~

'윽······!'

때마침 까망이가 울면서 올망똘망한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자 길서연이 한 걸음 물러났다.

"이상하다. 길 여사님은 분명 고양이를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좋아하는 거랑 키우는 건 다르지. 너랑 유진이랑 네 아빠 뒷바라지 하는 것만 해도 등골 빠지는데 고양이까지 뒷바라지 하라고? 난 못 한다. 당장 가져다 놓고 와!"

"에이~ 내가 그런 생각도 없이 얘를 데려왔을까봐? 걱정 마셔. 얘는 정말 여사님 손 하나도 안 빌리고 내가 키울 테니까."

"너 그렇게 말하고 병아리도 결국 내가 키웠잖아! 닭까지 자라서 시골 보냈다가 외할머니가 백숙해 먹었다는 소식 듣고 하루종일 펑펑 울었던 거 기억 안 나?"

"병아리면 삐약이?"

"그래, 삐약이! 왜? 삐약이 얘기 꺼내니까 또 자신 없어졌지? 그러니까 좋은 말 할 때 당장 도로 가져다 놔라."

삐약이 얘기가 나오자 눈가가 촉촉해진 최강태는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삐약이··· 진짜 몸에 좋은 거 많이 먹이면서 잘 키웠는데··· 그걸 할머니가 홀라당··· 맛있었겠지? 하아······."

"······."

삐약이에 대한 추억이 살짝 왜곡된 아들의 모습에 길서연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무튼 걱정마셔. 얘 생각보다 똑똑해서 별로 손 탈 것 같지도 않으니까."

"아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똑똑해봤자 고양이······."

"까망이 앉아. 까망이 손."

까망이를 내려놓고 명령하자 척하니 바닥에 앉아서 그가 내민 손바닥 위로 앞발을 가볍게 올리는 까망이.

"까망이 굴러."

데굴데굴.

이번에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까망이 트리플 악셀."

비교적 간단한 트리플 악셀 역시 무난하게 소화했다.

"까망이 빵!"

냥!

그리고 총을 쏘는 척, 빵!이라고 검지를 튕기며 소리치자 두 발로 일어난 까망이가 심장을 앞발로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린 채 비틀거리다 결국 앞으로 고꾸라졌다.

"봤지? 말 잘 듣는 거."

"······."

아니, 저게 말을 잘 듣는다는 수준으로 퉁 칠 수 있는 수준이었던가?

'애초에 앉아, 손, 굴러야 그렇다 치더라도 김연아급 트리플 악셀이나 영웅본색마냥 총 맞는 연기를 고양이가 할 수 있을 리가······.'

그때였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도도하게 화장실로 향하는 까망이. 두 사람은 말 없이 까망이의 뒤를 쫓았고······.

덜컥.

닫혀 있던 화장실문을 점프해서 앞발로 간단하게 열어버린 까망이는 그대로 화장실에 입장. 닫혀 있던 변기 커버를 열더니 그대로 변기통에 볼일을 본다.

꾹. 지이이이이이잉~

그리고는 버튼을 눌러 비데를 사용하는데 여간 시원해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콰르르르르······.

비데가 끝난 후에는 레버를 당겨 물을 내렸다. 그리고는 변기 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다가오더니 길서연의 앞에 얌전히 앉았다.

냐옹~

"······얘 진짜 고양이 맞니?"

"뭔 소리야? 어딜 봐도 고양이구만."

"아, 아무튼 안 돼! 집에서 키우면 털 날리고, 예방접종에 아프면 병원도 가야하고 돈 나가는 구석이 한 두 군데가······."

5분 뒤.

꾸욱꾸욱~

"어이구, 좋다~ 그래그래, 까망아 거기 좀 꾹꾹 밟아봐라. 우리 까망이가 아들보다 낫네."

냐아~

엎드린 채 까망이에게 등으로 꾹꾹이를 받는 길서연의 표정이 한껏 녹아 있었다. 이미 길서연의 마음속에서 까망이의 서열은 아들보다 위였던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 응? 헐! 웬 고양이야?! 대박! 완전 귀여워!"

함께 집으로 돌아온 최유진과 이민정은 거실에서 길서연의 등에 올라 타 꾹꾹이를 해 주고 있는 까망이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특히 엄마를 닮아 고양이를 좋아하는 최유진의 두 눈은 이미 하트빛으로 물들었는데 어느새 거실로 달려가 까망이를 끌어안고 유난법석을 떠는 것이 여간 좋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이구, 어이구, 좋아죽네, 좋아 죽어. 누가 보면 네 배 아파 낳은 자식인 줄 알겠다?"

"이렇게 귀여운 자식 낳을 수 있었으면 벌써 속도 위반했지. 그런데 진짜 웬 고양이야? 엄마가 데려왔을 리는 당연히 없고."

"네 오빠가 길에서 주워왔다. 뭐··· 다른 고양이들보다는 조금 똑똑한 것 같아서 유예 기간을 줘 보려고. 네 오빠가 알아서 키운다고 약속 했으니까 약속 못 지키면 바로 내다 버릴거다."

"오빠가 그런 기특한 짓을? 꺄악! 어떡해?! 너무 귀여워! 언니, 얘 좀 봐. 털은 완전 새까만데 눈은 오드아이인거. 파랑색이랑 빨간색 오드아이라니··· 완전 유니크하지 않아?"

"진짜 귀엽다······."

감정 표현이 서툰 이민정조차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그릴 정도였으니······.

부엌에서 밥을 먹으며 이를 지켜보던 최강태도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만족스러워 했다.

사실 최강태가 까망이를 집으로 데려온 건 보안 때문이었다.

지구상 최고 성능의 CCTV이자 보안 시설인 까망이를 집에 배치해 놓는다면 자신도 걱정을 덜고 신경을 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족들의 허락을 받지 못 한다면 그림자 속에서 그 임무를 다 해도 상관 없었지만······.

'다행히 반응은 나쁘지 않네.'

덕분에 까망이를 집에서 키우는 것에 대해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만족해하던 최강태가 눈을 부릅뜨며 쉬지 않던 젓가락질을 멈췄다.

"언니도 한 번 안아볼래? 순하고 얌전해서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도 될까?"

"자."

최유진이 건낸 까망이를 조심스럽게 받아든 이민정. 작은 머리와 올망똘망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까망이가 기분좋게 울었다.

냐아~

"······!"

그 순간, 얼굴에 홍조가 더 진해지며 까망이를 소중하게 꼬옥 끌어안는 이민정.

뭉클~

그러자 까망이의 모습이 반쯤 사라졌다. 그녀의 가슴 사이로 조막만한 머리는 말 할 것도 없고 몸통의 절반까지 모조리 파묻혀버린 것이다.

보통의 고양이라면 답답해서라도 발버둥칠만한 상황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까망이는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리고 주인은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 자식이······?!'

"언니, 그러다 숨 막혀 죽지 않을까?"

"아! 미안···!"

덥썩!

이민정이 다급하게 고양이를 품에서 놓아주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최강태가 까망이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아니나 다를까······.

까만 얼굴을 붉게 물들인 까망이의 눈은 반쯤 돌아갔고 헤벌쭉 올라간 입꼬리에는 침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너, 너 이 새끼! 아직 나도 못 해본 걸······!'

"오빠!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고양이 놀라잖아!"

"넌 이게 놀란 얼굴로 보이냐?"

최강태는 까망이의 실체를 알려주기 위해 녀석의 얼굴을 보여주었지만······.

냐아~

까망이의 얼굴은 어느새 평범한 고양이로 돌아와 있었다.

"하여간 이 고양이같은 새끼······."

"고양이보고 고양이같은 새끼라니, 뭔 말이야 그게?"

"그런 게 있어."

최강태는 까망이를 툭 내려놓고는 마저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저도 알바 다녀 올게요."

"응? 저녁도 안 먹고 간다고?"

길서연이 걱정하자 이민정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오늘 급하게 시프트를 바꿔 주느라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옷만 갈아입고 바로 가려고요."

"그래, 그럼. 늦게라도 와서 먹어. 차려놓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민정이 옷만 갈아입고 집을 나서자 저녁을 챙겨먹은 최유진이 향한 곳은 다름아닌 최강태의 방이었다.

덜컥.

"오빠. 나 할 얘기 있는데 들어가도 돼?"

"그런 질문은 보통 문 열고 들어오기 전에 하는 거다. 동생아."

최강태는 여전히 폰 게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미 방 안으로 들어와버린 최유진에게 심드렁하게 충고했다.

"민정 언니 말야."

"왜? 민정이한테 무슨 일 있어?"

"아니, 다른 건 아니고··· 그냥 좀 걱정 돼서."

"왜? 같은 방에서 지내기 불편해서 그래?"

최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불편할 게 뭐가 있어. 평일에는 어차피 내 방 잘 쓰지도 않고 자기만 하는데다 요즘에는 민정 언니가 내 방 청소까지 도맡아 해줘서 엄마도 나도 얼마나 고마워하는데. 난 이제 민정 언니가 없는 삶은 상상이 안 간다?"

"오버 떨지 마시고. 그럼 뭐가 문젠데?"

"오빠 혹시 민정 언니랑 호적 바꿀 생각 없어?"

"죽을래?"

"왜 나한테 그래? 엄마가 나한테 그럴 방법이 없냐고 물어본 건데."

"끄응······."

최강태가 인상을 구기며 침음성을 흘리자 최유진이 대꾸했다.

"뭐, 이 말은 반쯤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란 소리냐?'

"민정 언니 말야. 꾸미는 거에 영 관심이 없던 것 같던데 원래 그래?"

"꾸미는 거?"

"응. 옷이라던가, 헤어라던가, 화장이라던가, 전반적으로 자신을 꾸미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던데? 아니지.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하는 수준? 아니,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무서워한다? 응. 말이 안 되긴 하는데 이게 제일 비슷한 표현일지도······."

"······."

언뜻 들어보면 이상한 표현이었지만 최강태는 동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왜 그런거야? 무슨 일 있어?"

"그건 내가 대답할 얘기는 아닌 것 같고. 나중에 본인한테 물어봐. 대답해 줄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게 왜?"

"언니 어디서 알바하는 지 오빠는 알고 있지?"

"그거야 뭐······."

턱짓으로 동생을 가리키는 최강태. 그것만으로도 최유진이 노래 알바를 하는 카페에서 일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카페에 그녀를 추천한 것도 최유진이었으니까.

"내가 노래부르면서 살펴 봤는데··· 역시나 언니 레벨이 그냥 말이 안 되더라. 화장도 안 하고 머리도 그냥저냥 단정하게 빗질만 한 정도인데도 하루에 번호 따 가는 남자들이 최소 다섯은 넘는다니까?"

"그래서 배 아프냐? 네 번호는 안 따가는데 민정이 번호만 따 가서?"

"뭔 개소리야? 나도 컨디션 좋을 때는 열 명도 껌이거든요? 아무튼 그게 아니라 이 다이아몬드 원석을 그냥 저렇게 방치해 줄 거냐 이거지. 내 말은."

"다이아몬드 원석이라······."

"언니가 작정하고 꾸미면 어디까지 예뻐질 수 있을 지, 오빠 너 정말로 관심없어? 진짜?"

최강태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없겠냐? 완전 많지."

"어때, 오랜만에 한 번 공동 작업 해 보는 건?"

"콜."

오랜만에 두 손을 맞잡은 남매.

그렇게 이민정이 모르는 곳에서 그녀의 환골탈태 프로젝트가 척척 계획되고 있었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48화 삐까츄

"민정아."

"어, 강태야."

방과 후.

최강태는 이민정을 찾았다.

최근 최강태 덕분에 자신감을 찾은 것일까?

딱히 최강태 이외에 친구가 생긴 건 아니지만 괴롭힘도 당하지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이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너 오늘 시프트 없지?"

"응. 애들 보고 바로 집으로 갈 것 같은데. 왜? 무슨 일 있어?"

"뭐, 별 건 아니고. 다른 약속 없으면 세 시간 뒤에 뮤즈에서 보자고. 가능?"

뮤즈는 이민정과 최유진이 알바를 하는 바로 그 카페였다.

"안 될 건 없는데······."

"그럼 그때 보자."

"가, 강태야!"

최강태는 할 말이 끝나자 때마침 등장한 홍준석과 함께 가버렸다.

'뭐지?'

그렇게 홀로 남겨진 이민정의 의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만 갔다.

***

세 시간 뒤.

"아, 강태야! 여기."

"어."

뮤즈에서 커피를 마시다 최강태가 들어오는 걸 확인한 이민정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그런데 여기서는 왜 보자고 한 거야?"

"그 이유를 설명 해 줄 녀석이 아직 안 도착한 모양이네."

"응? 누가 또 오기로 했어?"

"어. 최유진."

"유진이?"

그렇게 30분이 더 흘렀을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카페 문이 벌컥 열리자 힐끔 입구를 쳐다보았고······.

"유진아!"

"오긴 왔네. 더 늦으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후욱, 후욱······!"

최유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 사람이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오더니 냉큼 최강태의 앞에 반쯤 남은 생크림 딸기 우유를 원샷했다.

"후우~ 이제야 살 것 같네. 우유 좀 마신다. 오빠."

"그러니까 그런 건 마시기 전에 얘기하라고."

"아, 진짜. 오늘따라 학원 원장쌤 촉이 왜 이렇게 날카로운거야. 빠져 나갈만 하면 복도를 순찰하는 바람에 결국 화장실 환풍구로 기어 나왔잖아. 진짜 환풍구가 수리중이었기에 망정이지."

"······학원 탈출에 진심인 편이구나. 너."

투덜거리는 것 치고 뭔가 꽤나 보람에 가득 차 보이는 동생의 얼굴에 최강태는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준비는?"

"모델은 여기 있고, 코디도 지각했지만 도착했고, 군자금은 보시다시피······."

최강태는 폰 케이스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어느 마음씨 좋은 빡빡머리 천사가 선물해준 카드다. 부모님한테 걸릴 걱정없이 마음껏 긁어도 상관없어."

"그 말 진짜지? 후회 안 하지?"

"너야말로 잘 해. 이몸께서 귀한 시간과 자금을 지원해 주겠다는데 A급 모델 가지고 B급 코디했다가 내 눈만 버리면 그날로 부모님 앞에서 달빛 그림 완창해버릴라니까."

"그쪽이야말로 달라진 언니의 모습에 침 질질 흘릴 준비나 하시지?"

"자, 잠깐만!"

두 남매의 얘기를 따라가지 못 했던 이민정이 가까스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말을 끊었다.

그렇게 남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이민정은 혼란스러움을 가까스로 수습하며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군자금이니 코디니 이게 다 무슨 말이야? 모델은 또 뭐고?"

"모델. 코디. 군자금. 문제 있어?"

그러자 최강태는 손가락으로 이민정과 최유진 마지막으로 카드를 순서대로 가리키며 대꾸했다.

당연히 당황하며 자신을 가리키는 이민정.

"모델? 나더러 모델을 하라고?!"

"하아······."

당황하는 이민정에게 최유진이 작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진심으로 설득했다.

"언니, 아무리 그래도 언제까지 무릎 늘어난 츄리닝만 입고 살 수는 없어. 심지어 그 무식하게 큰 뿔테 안경도 자기 얼굴을 가리려고 쓰는 거잖아. 안 그래? 물론 나야 어차피 버릴까 생각한 옷이었고 언니가 안경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해서 나한테 피해가 오는 건 아냐. 나랑 오빠가 이러는 건······."

최유진은 이민정의 손을 꼬옥 잡으며 애틋하게 말을 이었다.

"언니가 지금보다 훨씬 멋지고 당당해졌으면 싶어서 그래."

"아니, 나는 그냥 이민정이 꾸민 걸 보고싶은 것 뿐······."

퍽!

최유진은 오빠의 옆구리에 주먹을 먹여줌으로서 눈치없게 진심을 까발리는 오빠의 입을 막아버렸다.

"언니가 꾸미는 걸 왜 싫어하는 지 정확한 이유를 난 몰라. 오빠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다만 내가 얘기해 줄 수 있는 건 언니가 감추려고 하는 언니 자신이 실은 언니가 가진 최고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거야."

"내··· 무기?"

"그럼! 남녀 상관없이 사람이란 어리고, 예쁘고, 잘생긴 것만으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내가 생각하기에 언니가 가진 무기는 갈고닦기만 하면 그중에서도 정말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을걸?"

"······."

최유진의 확신에도 망설이던 이민정의 시선이 최강태에게 향했다.

마침 추가한 생크림 딸기 우유에 얹어진 소복한 생크림을 숟가락으로 퍼 먹던 최강태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러고보니······.'

[네가 이렇게 예쁠 줄 알았다면 더 일찍 구하러 왔을 걸?]

이민정은 떠올렸다. 이전에 최강태가 한 얘기 중에 그런 부류의 얘기가 있었다는 걸.

"언니가 현실에서 도망치는 걸 선택한다고 해도 나는 언니를 항상 응원할거야. 그만큼 민정 언니가 좋으니까. 내 친언니 같으니까. 하지만 언니가 변화하길 선택한다면 나는 내 능력을 전부 발휘해서 언니를 도울게."

"유진아······."

붉게 물든 이민정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자신을 향해 미소지어주는 그 얼굴이 어찌나 길서연과 똑같던지······.

모녀의 따뜻한 미소에서 이민정은 정말로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오빠도 뭐라고 얘기 좀 해 봐. 생크림만 퍼먹고 있지 말고, 좀."

"나? 뭐, 굳이 내가 얘기할 필요도 없어보이긴 하는데······."

최유진이 워낙 설득을 잘 해서 더 이상 추가적인 설득이 필요할까 싶었지만 최강태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뭔가를 애타게 바라는 이민정의 눈빛에 결국 입을 열었다.

"꾸미면 지금보다 훨씬 예뻐지지 않을까? 뭐, 지금도 충분히 예쁘지만."

"나··· 노력해볼게. 도와줄래, 유진아?"

"결국 내가 침이 마르도록 설득하는 것보다 오빠의 예쁘다는 한 마디가 더 확실했나보구만."

최유진이 입술을 삐쭉이며 투정부리자 이민정이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그, 그런 건 아니고! 유진이 네 덕분에 마음을 바꾼거지 강태는······!"

"네, 네~ 그런 걸로 하시고 서둘러 움직이시죠. 두 분."

자리에서 일어난 세 사람이 향한 곳은 현재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에 가장 핫한 강남 레노아 아울렛이었다.

"세상에··· 무슨 옷이 이렇게 많아?!"

1층 매장에 들어선 이민정이 너무 놀라 커진 눈으로 매장을 스윽 훑어 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매장에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옷들이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찾는 옷이 없다고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옷 매장은 5층까지 있으니까."

"이, 이런 매장이 5층까지 있다고?!"

"걱정 마.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5층까지 찾아보는 건 무리지만 그래도 언니한테 잘 어울리는 옷은 반드시 찾아줄 테니까. 자, 갑시다!"

"자, 잠깐만, 유진아!"

최유진은 기운차게 이민정의 손을 잡아 끌어 앞장섰다.

"신났네. 아주."

최강태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피식 웃다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여유롭게 뒤따랐다.

"음··· 역시 언니는 비율이 치트키라 뭘 입혀도 예쁠 것 같기는 한데··· 역시 처음에는 무난한 게 좋겠지? 이거랑 이걸로 입고 나와봐."

"응. 잠깐만."

이민정은 최유진이 골라준 바지와 흰 티를 가지고 들어가더니 잠시후에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는 수줍게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붉히더니 두 사람에게 물었다.

"어, 어때? 옷이 좀 작은 것 같기도 하고······."

"······."

"······."

두 사람이 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자 이민정이 걱정하며 물었다.

"여, 역시 이상해?"

그러자 반사적으로 도리질치는 최유진.

"아, 아니. 미안 언니. 잠깐 넋이 나가서······. 와, 살다살다 같은 여자한테 넋나간 건 처음이네. 아니, 스타일이 사기적인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진짜 이건 현실 보정도 아니고······."

가늘고 긴 팔로 감당하지 못 할 풍만한 바스트, 그 아래로 아찔하게 굽이쳐 흐르는 잘록한 허리 계곡.

그 허리 계곡을 통과하면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시원하게 쭉 뻗은 다리까지······.

분명 볼륨감 있는 서구적인 몸매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벌어진 허벅지와 허벅지 사이의 라인이라던가 가는 발목은 글래머러스하면서도 슬림하다는 이율배반적인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청스키니랑 흰티만 입혔을 뿐인데 이 파괴력 뭐냐고. 어머, 이게 뭐야, 사진도 완전 잘 나왔어. 진짜 보정 하나도 안 했는데."

최유진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 이민정이 수줍게 최강태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때, 강태야? 네가 보기에도 괜찮아?"

"어. 완전. 겁나 예뻐."

숨도 안 쉬고 튀어나온 최강태의 대답에 살풋 미소를 그리는 이민정. 두 사람의 인정을 받은 덕분일까?

수줍고 창피패하던 모습도 약간은 사라지고 서 있는 모습도 훨씬 더 자연스러워졌다. 그럴수록 그녀의 숨어 있던 매력들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언니, 이번엔 이걸로 가자."

"응, 잠깐만."

다시 탈의실로 들어간 이민정이 다시 나오자 이번에는 세 사람의 감탄이 터져나왔다.

"와~ 어쩜······. 제가 여기서 일하면서 본 손님들 중에 제일 예쁘세요. 다른 것보다 옷핏이··· 완전 예술이시네."

고작 흰티에서 꽃무늬 블라우스로 바꿨을 뿐인데··· 하늘하늘한 블라우스 덕분에 청순미가 부각되면서 하반신에 딱 달라붙는 청스키니가 여성스러운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언니 뭘 좀 아시네?"

"그럼요. 제가 이곳에서 장사만 2년을 넘게 했는데."

"그럼 한 판 붙어보실래요?"

"저야 좋죠. 손님들만 괜찮다면."

"그럼 민정 언니가 입어보고 언니가 봤을 때 가장 괜찮은 코디를 고른 사람이 이기는 걸로 어때?"

"난 상관없는데······."

"콜!

최유진의 도발에 웃으면서 응대하는 직원. 두 사람은 경쟁적으로 이민정을 코디하며 옷을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이 옷이랑 이 옷을 같이 입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요?"

"롱셔츠 원피스랑 니트 베스트말이지? 좋은 생각인데, 언니? 한 번 입어봐."

처음에는 당황하던 이민정도 이제는 자신이 의견을 내서 옷을 고를 정도로 자신감이 상승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감조차 아직도 부족해보일만큼 그녀는 입는 옷들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소화해버렸다.

그러자 오히려 난처해하는 직원.

"옷이 나쁜 건 아닌데, 모델이 너무 완벽해버리니까 확실히 옷이 죽네."

"그건 동감."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 고딩룩부터 캠퍼스룩, 오피스룩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버리는 이민정의 모습에 직원과 최유진은 대체 뭘로 승부를 봐야할지 난처해졌다.

그때였다.

"이 옷 어때? 난 이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건······."

그때까지 심사를 담당하고 있던 최강태가 처음으로 나서서 옷을 추천해 주자 직원도, 최유진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옷을 추천해 준걸까?'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티셔츠 같았는데··· 아냐, 방심하면 안 돼. 최근 오빠가 뜬금 능력자 기질이 있어서 저래 보여도 분명 엄청난 걸 추천해 준······.'

스르륵······.

"이, 이렇게 입으면 될까?"

"······."

"······."

커튼을 열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민정의 모습에 직원도 최유진도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한 얼굴로 최강태가 골라준 옷을 바라보았다.

최강태가 골라준 티셔츠는 단순한 주머니 괴물 캐릭터 티셔츠였다. 그저 삐까츄의 얼굴이 그려진······.

다만 최유진이 입으니 뭐랄까······. 2D가 3D로 변환이 되었다고 해야할까?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의 입체감에 최강태는 만족스럽게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어울리네."

"그래? 그럼 나 이걸로 할게."

"뭐?! 정말이야 언니? 다시 생각해봐! 이건 아니라고! 진짜 아니라니까?!"

"아니, 분명 손님께 잘 어울리기는 하는데··· 다른 좋은 옷도 많은데 굳이······."

"그래도 저는 이게 가장 마음에 드는 걸요."

이민정은 해맑게 웃으며 마음을 결정했고 결국 코디 대결의 우승자는 최유진도, 직원도 아닌 최강태가 되었다.

물론 두 사람이 골라준 옷들도 전부 구입하긴 했지만 두 사람 다 오늘의 패배감을 쉽게 떨치지는 못 할 것 같았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49화 신은 공평하다

"근데 두 사람 혹시 배고프지 않아?"

"그러게. 강태 너는?"

"나야 뭐, 항상 배고프지."

구입한 옷을 일단 호텔로 보낸 세 사람은 아울렛에서 가장 유명한 마라탕 가게를 찾아갔다.

"음~ 아웃스타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집이라더니. 난 괜찮은데 두 사람은?"

"응, 맛있어. 많이 맵긴 한데 계속 당겨."

"사장님! 여기 마라고기전골 하나 추가요!"

"응? 다 먹어 놓고 무슨 전골을 또 시켜? 우린 그렇게 많이 못 먹어. 오빠."

"뭔 소리야. 나 혼자 먹으려고 시킨 건데. 혹시라도 한입만 달라고 했다간 죽는다."

"...."

밥을 먹었으면 소화를 시켜야 하는 게 인지상정. 그렇게 마라탕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세 사람이 이동한 곳은 다름 아닌 코인 노래방이었다.

"내 사랑 그대여~ 내 말 들리나요! 나 지금 그대에게 가고 있어요."

평소 말괄량이 같은 성격과는 정반대로 가슴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시원하게 쭉쭉 뻗어 올라가는 고음. 그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음정.

최유진이 마이크를 잡는 순간부터 어느 샌가 코인 노래방은 그녀의 콘서트장이 되었다.

관객은 단 둘뿐이었지만 가수는 혼신을 다해 열창했고, 그 모습에 최강태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진짜 다른 사람이라니까.'

적어도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대책 없는 여동생 최유진이 아니라 가수 최유진이라는 말이 실감되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저렇게 노래를 잘하고 좋아하는데도 엄마의 기대 때문에 꿈을 놓으려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뭐, 그거야 저 녀석이 알아서 할 문제지. 공부가 됐든, 노래가 됐든, 어설프게 할 녀석은 아니니까.'

"사랑해요. 내 말 들리나요...."

"앵콜! 앵콜!"

노래가 끝나자 이민정은 여운을 삼키며 앙코르를 연호했고 최유진은 후련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 오랜만에 코노 와서 열창했더니 목이 다 아프네."

"그야 혼자서 세 곡을 연속으로 땡기셨는데 목이 아프시겠지."

"그, 그랬나? 이거 미안하네."

오빠의 핀잔에 최유진이 머쓱하게 웃으며 사과하자 최강태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못 불렀으면 중간에 끄려고 했는데, 솔직히 잘 불러서 나쁘진 않았다."

"그럼 다행히고."

최유진은 자리에 앉으면서 마이크를 자연스럽게 이민정에게 건넸다. 그러자 마이크를 받아 든 이민정이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이크를 왜 나한테...."

"원래 예약곡이 없으면 마지막으로 노래 불렀던 사람이 다음 타자한테 마이크를 넘기는 게 코노 국룰이거든."

"그치만 난 아는 노래가 별로 없는데...."

"괜찮아. 무슨 오디션 보는 것도 아니고. 평소 좋아하던 노래나 부르고 싶었던 노래 같은 건 있을 거 아냐. 편하게 불러."

"좋아하는 노래...."

평소 친구도 없고, 어딜 가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그녀에게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음악은 유일한 친구나 다름없었다.

그 때문에 듣는 노래는 많았지만 그걸 한 번도 자신의 입으로 불러 본 적은 없었다. 더군다나 친구들과 노래방에 와서 노래를 부른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민정은 조심스럽게 최강태를 쳐다보았고 폰 게임을 하고 있던 최강태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지자 이민정을 쳐다보며 슬쩍 스테이지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주저하지 말고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에 용기를 얻은 이민정이 앞으로 나가서는 평소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노래를 틀었다.

"응? 이건 설마...."

"호오~?"

전 국민이 전주만 들어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귀에 익은 리듬이 흘러나오자 남매의 얼굴에도 놀람이 서렸다.

설마 이민정이 이 노래를 고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전주에 맞춰 알아서 들썩이는 어깨, 흥분감이 고조되는 심장의 비트까지....

어느새 표정이... 아니, 사람이 달라져 버린 이민정이 감정을 잡고 노래를 시작했다.

"아무 일도 내겐 없는 거야. 처음부터 우린 모른 거야. 오~ 넌 그렇게 날 보내 줄 수는 없겠니."

그러나 노래가 시작되자 남매의 기대감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음정 박자를 무시하고 개 쌍 마이웨이를 부르짖으며 혼자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는 이민정에게 과연 반주가 의미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고찰하게 만든 것이다.

"나 잠시 화장실 좀."

"죽을래? 혼자만 살겠다고? 오빠 너 나가면 진짜 전쟁이야."

"끄응...!"

하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노래 가사 속 주인공이 되어 버린 이민정의 고조되는 감정처럼 노래도 클라이맥스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잊지는 마! 내 사랑을! 너는 내 안에 있어!"

"우윳빛깔! 이민정! 사랑해요! 이민정!"

킬링 파트를 소화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 짜내는 이민정.

그에 화답하듯, 혹인 자신의 목소리로 그녀의 목소리를 묻어 버리기 위해 전력을 다 하려는 듯 최유진이 소리쳤고....

그 옆에서는 최강태가 자신의 귀에 노이즈 캔슬링 마법을 건 채 조용히 폰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노래가 끝나자 감정을 모두 쏟아 낸 이민정이 후련하다는 듯이, 그러나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남매를 쳐다보았다.

"어, 어땠어? 역시 별로지?"

"그게 무슨 소리야? 완전 대박! 듣는 내가 스트레스 다 풀리는 기분이었음. 안 그래, 오빠?"

"어. 안 그래. 너 어디 가서 노래 한다고 하지 마라. 뺨 맞는다."

"최강태, 너 이...!"

최강태의 몸 쪽 꽉 찬 돌직구에 깜짝 놀란 최유진이 그를 타박했지만 이미 어깨가 축 늘어진 이민정은 시무룩한 얼굴로 자리에 돌아왔다.

"저 인간 말은 무시해. 원래 저런 인간이잖아. 그리고 노래방에 우리가 무슨 오디션 보러 왔어? 그냥 신나게 놀고 스트레스 확 풀고 그럼 된 거지."

"고마워. 그래도 진짜 스트레스는 풀린다."

그렇게 웃으며 대꾸한 이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이크를 최강태에게 건넸다.

그러자 마이크와 자신을 번갈아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최강태. 그에 이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예약한 곡이 없으면 마지막에 부른 사람이 다음 사람한테 마이크를 건네주는 게 코노 국룰이라면서?"

"뭐, 그렇다면야."

마이크를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최강태가 화면을 확인하더니....

"대진이네."

"헐, 야 너 설마.... 너 진짜 그거 부를 생각이면 내 손에 죽는...."

삑삑삑삑.

리모콘 검색도 필요 없었는지 망설임 없이 번호를 누른다. 그 모습에 불길함을 느낀 최유진이 만류하려 했지만....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하아... 진짜 저 새끼를 어쩌면 좋냐...."

남자들의 노래방 금지곡 부동의 1위.

특히 이성과 함께 노래방에 가서 불렀다가는 그 자리에서 이성을 모두 화장실로 보낼 수 있는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최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이민정에게 제안했다.

"언니, 우리 화장실...."

그러나 제안은 미처 다 꺼내 보지도 못하고 실패했다. 이미 최강태가 노래 부르는 모습에 혼이 나간 이민정의 얼굴 때문이었다.

딱히 최강태가 노래를 못 부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썩 잘 부르는 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원곡 가수를 과도하게 흉내 내며 오버하는 모습이 살짝 우스꽝스럽달까? 본인은 그게 멋... 속된말로 간지라고 표현하지만 최유진에겐 웃기지도 않는 꼴이었다.

그러나 이민정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임재범이 눈앞에서 저 노래를 직접 부른다고 해도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최유진은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어디에! 있나~여~~~~~ 제 얘기 정말! 들리시~나여~~~!"

그사이, 어느새 킬링 파트인 후렴으로 넘어간 최강태는 기존의 오버를 초월하는... 그야말로 오버의 끝판왕을 보여 주면서 노래와 감정을 말 그대로 가지고 놀았다.

심지어 감정이 너무 북받친 나머지 반주가 흐르는데도 천장을 올려다보며 마이크를 축 내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꼴값 떨고 있네.'

하나 더욱 충격적인 건 옆에 있는 이민정의 반응이었다.

'헐... 울어? 대체 왜?'

최강태의 감정이 전해졌는지 붉어진 이민정의 눈시울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그런데 최유진이 더욱 어이가 없는 건 같은 여자가 봐도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말이 안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용서해! 주~세요! 벌하신다면! 저 받을게요!"

노래는 음정 박자를 무시해 더 이상 노래가 아니라 사실상 샤우팅에 더 가까웠지만 호소력만큼은 진짜였다.

그리고 지금 이 노래가 왜 노래방 남자 금지곡 1순위에서 내려오지 않는지를 누구보다 최강태가 잘 보여 주고 있었다.

"하나 그녀만은... 제발 그녀 하나마아아아안! 허락해... 주~~~~~~소서 베이베."

* * *

"아~ 그래도 오랜만에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노래도 실컷 부르고 기분은 최고다! 언니는?"

"나도 엄청 즐거웠어. 태어나서 오늘만큼 즐거웠던 적은 없었을 정도로."

"에헤이~ 또 그러신다. 걱정 마. 앞으로 오늘보다 즐거운 날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테니까. 안 그래, 오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 쫌!"

눈치 없이 솔직한 최강태의 대꾸에 최유진이 버럭하자 옆에 있던 이민정이 살짝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그런데....

"너 인마, 말이야 쉽지. 행복이란 게 남이 행복을 쥐여 준다고 해서 행복한 거냐? 본인이 노력하는 만큼 행복한 거지. 지금 이민정이 행복한 건 그만큼 저 녀석 스스로가 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그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실천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게 사는 것도 뭐,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

이민정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그녀는 자신이 누리는 행복이 모두 최강태가 선물해 준 것이라고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최강태는 아니란다. 자신이 노력했기 때문에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보고 있었구나....'

예전의 초라하고 소심한 자신에서 변하기 위해 애써 노력했던 마음과 행동들을 실은 무관심한 척 항상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민정이 쑥스러움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머금은 사이, 최유진이 오빠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콕콕 찔렀다.

"오~ 뭐야, 최강태. 너 방금 쫌...."

"멋있었냐?"

"우리 담탱이 같았다?"

"그러니까 네 담임 선생님께서 나처럼 겁나 멋있고 훌륭하시다는 말?"

"나이는 서른 중반인데 하는 짓은 환갑 넘은 노인네 같다는 말."

"...."

남매는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서로의 볼을 꼬집고는 놓아 주질 않았다.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한 세 사람.

그런데....

흠칫!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아, 미안. 그냥 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서."

어느 정거장에 정차한 버스에 손님이 탑승했다. 목에 카메라를 걸고 있는 남성 손님이었다.

그는 교통 카드를 찍고 남은 자리에 자연스럽게 착석했지만 그를 목격한 최유진은 흠칫 놀라더니 옆에 앉아 있던 최강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스토커가 무서워? 안 보인 지 꽤 됐을 텐데."

"그런 거 아니거든? 그리고 스토커가 안 보이는지 꽤 되는 건 어떻게 알고 있는데?"

"이 오빠는 다~ 아는 수가 있단다.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한숨 자."

"응...."

최강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잠이 쏟아지던 최유진은 결국 오빠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그런 여동생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어 주는 최강태.

"일어나면 스토커 같은 건 기억도 안 날 테니까."

"강태 너...?"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이민정이 놀라자 최강태가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며 검지를 조용히 입술에 가져다 붙였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50화 섬뜩한 선물

조은아 수능/입시 전문 학원.

이곳의 운전기사인 배영우는 학원에서도 선생님들에게 인기가 높은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김 선생님."

"어머, 영우 씨, 이건 또 뭐야? 케이크네?"

"오늘 정현이 생일이잖아요. 특강한다고 수업 시간이 많아져서 케이크도 제대로 준비 못 하셨을 텐데 이걸로 아들 점수 좀 따시라고요."

"헐, 대박. 고마워. 영우 씨. 진짜 영우 씨밖에 없다.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을게. 땡큐!"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아들을 키우는 학원 강사의 아들 생일까지 챙길 정도로 다방면에 꼼꼼한 것도 모자라 잘생기기까지 한 30대 중반의 남성.

심지어 여강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학원에서 배영우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 형~ 제발요. 딱 한 시간만 놀다 들어갈게요. 네?"

"하아... 어머님께는 교통사고 때문에 막힌 길로 돌아가느라 한 시간 늦었다고 연락드릴 테니까 진짜 딱 한 시간만 놀다 가라. 안 그럼 내 손에 죽는다?"

"아 역시 영우 형! 진짜 이게 참어른이지. 땡큐, 형! 내일 봐요!"

배영우는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과 그 학부모들에게도 신뢰가 깊었다. 일단 센스 있고, 성실하고, 외모도 준수하니 어디 하나 모자란 곳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그에게 학원 여선생들이 아쉬워하는 게 있다면 딱 하나.

그가 결혼한 유부남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서 와요, 여보. 많이 피곤하죠?"

"방금 전까지는 그랬는데, 당신이랑 우리 공주님 보니까 완전 회복했습니다요. 쪽쪽쪽쪽쪽!"

"아빠~ 간지러워!"

배영우의 뽀뽀 공세에 웃으며 간지럼을 타는 딸아이와 남편과 딸의 화목한 모습에 기쁜 마음으로 부엌을 향하는 아내, 서주현.

"애는 나중에 놀아주고 얼른 씻고 나와요. 오늘 당신 좋아하는 갈비찜 해 놨어요."

"오~ 우리 마눌님 갈비찜이면 1초도 지체할 수 없지. 금방 씻고 올게."

샤워를 마친 후, 허리에 흰 타월만 걸치고 나온 배영우의 몸이 상당했다.

꾸준히 헬스로 단련된 가슴 근육은 탄탄했고 어깨는 떡 벌어졌으며, 배에는 초콜릿 복근이 선명했던 것이다.

안방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향한 배영우는 식탁에 차려진 두 개의 밥그릇을 보고 물었다.

"배가 고파서 또 먹는 거야? 아님 이게 저녁이야?"

"그냥, 오늘은 당신이랑 같이 먹고 싶어서."

그렇게 대꾸한 서주현은 국그릇에 국물과 건더기를 듬뿍 담아 남편의 밥그릇 옆에 놓았다.

"갈비찜에, 장어국에, 어째 느낌이 좀 싸한데?"

"아니, 그냥 요새 세율이가 하도 동생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니까. 나도 더 늦기 전에 슬슬 둘째를 가졌으면 싶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해야 할 일? 그게 뭔데?"

"세율이부터 재워야지."

"여보!"

배영우는 감격하는 아내와 그날 밤,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본업인 택시를 몰기 위해 아침 일찍 출근한 배영우.

"다녀올게."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와요."

직접 세율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킨 배영우는 콧노래를 부르며 시내를 달렸다.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 그는 현재의 생활에 매우 만족했다. 가족도, 일터도, 무엇하나 즐겁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까.

그런 그에게는 특별한 취미 생활이 있었다.

학교 앞 길가에 차를 정차한 배영우. 등교 시간인 탓일까? 주변에는 배영우 말고도 정차했다 떠다는 차량과 택시가 제법 보였다.

학생들을 등교시키기 위한 목적의 차량이었던 것이다.

그런 차들 사이에서 배영우의 택시는 특별히 눈에 띌 것도 없었다. 흡사 숲에 숨은 나무라고 할까?

"흠흠흠~!"

배영우는 차를 정차시킨 후에 콧노래를 부르며 글로브 박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카메라였다.

"왔다."

그리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기다리던 사람이 눈앞에 등장하자 그는 시트를 뒤로 눕히더니 상체만 살짝 들어 카메라 셔터를 끊임없이 누르기 시작했다.

특수 선팅이 된 차량은 정면에서 확인하지 않는 한 옆으로는 운전자가 뭘 하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시트를 눕혔으니 정면에서는 자세히 보지 않는 한 운전자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배영우도 마음 놓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사진을 찍는 피사체는 다름 아닌 최유진이 아닌가?

"오늘도 예쁘네, 우리 유진이는."

그는 카메라로 확인한 최유진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리더니 사진 위로 글귀를 적어 넣었다.

[항상 너를 지켜 줄게.]

그렇게 글귀까지 새겨진 사진을 출력한 배영우. 그러나 그의 미친 기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

기분 좋은 탈력감에 젖은 배영우의 얼굴. 뿌연 백탁이 그가 들고 있던 사진을 더럽혔다. 마치 최유진을 간접적으로 더럽힌 것처럼....

배영우는 사진 속 최유진의 얼굴에 묻어 있는 자신의 백탁을 보고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일단 이것만 봐도 제정신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의 기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미리 준비해 둔 분홍 봉투에 담아 꽃과 함께 퀵을 시켜 배달을 부탁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이나 연락처를 적지 않아 딱히 누가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이 그녀를 지켜 주고, 누군가 자신을 지켜 준다는 사실을 최유진이 알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했으니까.

물론 기겁한 최유진이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다. 사진에 뿌려 둔 자신의 백탁은 그 무엇보다 치명적인 증거물이 되겠지.

그걸 알면서도 굳이 그런 짓을 해서 사진을 보내는 이유는 단 하나.

뇌를 마비시킬 정도로 짜릿한 스릴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최유진이 신고하면 어떡하지? 혹시라도 자신의 DNA 때문에 잡히면 어떡하지?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과 스트레스가 되레 그의 뇌를 자극하여 극도의 쾌락으로 바꾸어 주었던 것이다.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면서도 알아서는 안 되는 이율배반적인 마음.

"자~ 그럼 오늘도 열심히 일 해 볼까?"

그것을 최유진에게 끔찍한 방법으로 강요한 배영우는 누구보다 정상인같이 밝게 웃으며 영업을 시작했다.

* * *

배영우가 최유진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시간에 맞춰 유치원에서 딸을 태워 집으로 돌아오고, 저녁까지 영업을 하다가 영업이 끝나면 그때부터 다시 학원 버스 기사로서의 업무가 시작된다.

배영우는 학원 버스로 학생들을 학교 앞에서 픽업하여 학원까지 데려다준다. 여기에는 당연히 최유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최유진을 목표로 스토킹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여학생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예쁜 건 사실이었지만 그는 결혼을 하면서 자신의 나쁜 취미를 확실히 끊어 냈다고 생각했으니까.

'안 돼. 지금의 아내와 딸을 잃어버릴 수는 없어!'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하지만....

등하원 시간대 외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학원 버스 기사.

그 때문에 시간을 죽이기 위해 근처 PC방이나 카페에서 쉬는 건 그에게 일상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 시간도 아까워서 돈을 벌기 위해 대리를 뛴 적도 있지만 이렇게 일하다가는 죽겠구나 싶어 얼마 안 가 그만두었다.

그렇게 여느 날처럼 카페를 찾은 배영우. 요새 SNS에서 핫하다는 라이브 카페가 근처에 있길래 향한 곳이 바로 뮤즈였다.

라이브 음악과 맛있는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라이브 카페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노래를 감상하며 편하게 커피를 음미하던 그의 눈앞에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등장했다.

바로 자신이 눈여겨보고 있던 최유진이었다.

'아니,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어야 할 애가 여긴 왜...?'

혹시라도 자신을 알아볼까 서둘러 마스크를 착용하고 모자를 눌러쓴 배영우. 다행히 최유진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이곳에서 처음 노래를 부르게 된, 노래 부르는 유정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정이? 최유진이 아니고?'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싶어 다시 자세히 살펴보아도 최유진이 맞았다. 아마 정체를 감추기 위해 가명을 사용한 것이겠지.

그 순간, 배영우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검은 욕망이 술렁이며 움직이면 안 될 태엽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평소 눈여겨보고 있던 여학생과 자신 사이에 둘만 아는 비밀이 생겼다.

이 사실이 그의 그릇된 욕망과 삐뚤어진 탐욕에 결국 다시금 불을 붙이고 만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자신의 심장을 울렸고, 그녀가 부른 노래의 가사들은 마치 자신을 향한 고백처럼 다가왔다.

배영우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확신했다.

그때부터 최유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스토킹이 시작되었다. 겉으로는 친절한 학원 운전기사인 척, 실상은 최유진과 관련된 물품들은 모조리 수집하면서 탐욕을 채웠다.

"안녕하세요."

"그래, 어서 와라."

아무것도 모르고 차에 탑승하면서 웃으며 인사하는 최유진을 대할 때에는 전신에 소름이 끼치며 쾌락이 극에 달했다.

지금이라도 너를 지켜 주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밝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고 인내했다. 그랬다간 가정이 부서질 테니까.

그렇게 가정의 화목과 자신의 탐욕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며 욕망에 지배된 배영우는 빠르게 망가져 갔다.

그렇게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배영우는 이내 생각해서는 안 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바로 자신의 뮤즈를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자신과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기 위한 계획이었다.

배성우의 말이야 그럴듯하지, 실상은 납치 및 감금 계획일 뿐이었지만.

그러나 섣부른 실행은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도 독이 될 수 있었다.

자신은 완벽하다. 완벽해지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했다. 그러니까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만들어 낼 것이다.

배영우는 자신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최유진의 친오빠라는 녀석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고딩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은 뻔했으니까.

그렇게 모든 계획이 착실하게 진행되던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가장 성가시던 최유진의 아버지, 형사 최정산이 특검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것이다.

계획은 완벽하고 준비도 확실했다. 남은 것은 실행뿐.

자신에게 감사할... 그리고 자신과 행복한 미래를 함께 그려 갈 최유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오르가즘을 느끼는 배영우였다.

그런데....

"여보, 여보 앞으로 소포가 왔던데요?"

"소포? 누가 보냈는데?"

"몰라요. 보낸 사람은 안 적혀 있고 받는 사람만 나와 있던데요?"

거사를 앞두고 퇴근한 배영우의 앞으로 소포 하나가 찾아왔다. 갈색의 밀봉된 서류 봉투였다.

'뭐지?'

누가 보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던 배영우는 일단 방으로 들어가 밀봉된 서류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 순간.

"...!"

"세율 아빠 뭐야? 혹시 누가 돈이라도 보냈어요?"

"아, 아냐! 아무것도...."

눈을 부릅뜬 배영우는 갑자기 서주현이 안방으로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며 사진을 뒤로 감췄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실수를 한 것이다. 당연히 그의 행동은 아내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어머, 깜짝이야! 뭘 그렇게 화들짝 놀라요? 내가 다 놀랐네. 혹시 나 몰래 야한 책이라도 주문한 거 아니에요?"

"야, 야한 책은 무슨...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런 거 아니면 감출 게 뭔데. 내가 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할 일 없는 놈이 이상한 걸 보내서 그래.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요? 알았어요. 일단 씻고 식사... 에잇!"

자연스럽게 식사를 권하는 척 페이크를 주며 남편에게 찰싹 달라붙은 서주현이 남편의 등 뒤로 손을 뻗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아내의 성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장난이었다. 배영우도 다른 때 같았으면 웃으며 받아 줬을 그런 장난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짜악!

"꺄악!"

저도 모르게 아내의 따귀를 올려붙인 배영우.

자신에게 뺨을 맞고 바닥에 쓰러진 아내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여, 여보?"

서주현은 아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놀라 크게 뜬 눈으로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그와 처음 만난 이후로 손찌검은커녕 가벼운 욕 한 번도 자신에게 하지 않았던 자상한 남편이 왜 이러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 미안.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배영우는 봉투와 내용물을 가지고 서둘러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51화 두 명의 최유진

서둘러 집에서 나온 배영우는 숨 가쁘게 달려 아파트 단지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그는 대충 버려진 분유통 하나를 주워다 놓고 자신이 가져온 내용물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후욱, 후욱...."

거칠어진 숨, 진정할 줄 모르는 심장, 커진 동공.... 명백히 흥분하고 있음을 감출 수 없는 모습이었다.

대체 봉투 안에 들어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우편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사진들은 다름 아닌 그가 찍힌 사진이었다. 물론 단순히 자신을 찍은 사진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흥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누가...!'

사진에 찍혀 있는 것은... 바로 택시 안에서 누군가를 사진 찍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유진 이외에 그가 도촬한 사진들. 주로 여고생의 가슴이나 허벅지, 엉덩이 등의 특정 부위를 확대하여 도촬한 사진들까지 들어 있었다.

게다가 더욱 끔찍한 사실은 그 안에 담겨 있던 서류였다.

'사진뿐만 아니라 내 대포 통장이랑 거래 내역까지 전부 확보했다고?'

그는 자신의 작품을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술에는 그에 걸맞은 가치라는 게 존재했다.

배영우는 불법 사이트를 통해 자기 작품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판매했다.

말이야 그럴듯하지, 변태가 도촬한 사진을 같은 변태가 구입했다는 뜻이었다.

배영우 역시 자신의 행위가 떳떳하지 않음을 알기에 대포 통장을 구해서 거기로 돈을 입금받았다.

가족들에게, 세상에 자신의 부끄러운 범죄 행위를 숨기기 위해서....

따라서 이 일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었고 알지 못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의 범죄 사실을 알고 증거까지 확보한 누군가가 이 사진과 서류들을 자신에게 보낸 것이다.

'대체 왜? 이걸 경찰서로 넘기면 날 체포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배영우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가 원하던 스릴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최유진과 자신 사이의 밀당. 그녀가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면서도 그래선 안 되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에서 오는 사랑과 공포가 그가 느끼고 싶어 하는 스릴이었다.

이렇게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공포는 절대로 자신이 원하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화르륵!

그는 망설임 없이 사진과 서류들을 불붙여서 태워 버렸다.

텅 빈 분유통 속에서 타들어 가는 사진들과는 반대로 그의 마음속에 스며든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씨발!'

사진과 서류를 불태운 후에야 그는 자신이 방금 전 아내에게 저지른 짓을 떠올리며 후회했다.

너무 경솔했다. 아무리 경황이 없고 당황했다고 해도 그렇지, 그동안 철저히 숨겨 온 자신의 가면이 그 한순간의 실수로 벗겨질 뻔했다.

자신은 언제까지나 믿음직한 남편, 자상한 아빠여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마음을 추스르고 집으로 돌아온 배영우를 서주현이 불안한 눈빛으로 맞이했다.

"여, 여보, 괜찮아요? 무슨 일 있었어요?"

배영우의 눈에 자신에게 맞아 퉁퉁 부어오른 아내의 붉은 뺨이 보였다.

한데도 자신이 돌아오자 가장 먼저 자신을 걱정해 주는 아내의 모습에 배영우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에 대한 죄책감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이 공들여 길들인 작품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안도와 뿌듯함에 의한 포옹이었다.

"미안해, 주현아. 많이 놀랐지?"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전에 택시 일하다가 진상 손님을 만난 적이 있거든. 그때 제법 문제가 컸었는데 당신한테는 걱정 끼치기 미안해서 말 안 했어. 그런데 아직도 그때 억하심정이 남아 있는지 오늘 이상한 걸 보냈더라고. 그래서 잠깐 흥분했나 봐."

"이상한 거라뇨? 그게 뭔데요?"

"괜찮아. 잘 처리했어. 내일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배영우는 그렇게 아내와 딸아이를 다독이며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평소 루틴대로 딸아이를 등원 시킨 후에 여고 앞으로 이동한 배영우.

그러나 그의 모습은 평소와 같지 않았다. 눈빛은 퀭했고,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왔으며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였던 것이다.

스스로 기분 탓이라고 여기며 글로브박스에서 여느 때처럼 카메라를 꺼내 든 배영우가 촬영에 임했다.

그런데....

흠칫!

셔터를 누르기도 전에 흠칫하여 미어캣인 양 사방을 둘러보는 배영우.

'기분 탓이야. 기분 탓이라고!'

다시 피사체를 정하고 셔터에 손가락을 가져간 순간....

오싹!

"누구야!"

그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주변을 다시금 훑어보았다. 그러나 당연히 그를 감시하는 사람 따윈 있을 리 없었고....

퍽!

그는 신경질적으로 조수석을 향해 카메라를 내던진 후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우편 봉투가 도착한 어젯밤. 그 사진들을 본 이후로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잠을 자는 도중에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계속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감시하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피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겠지. 그런 이상한 협박을 받아서 기분이 뒤숭숭한 거겠지 자위했지만 아니었다.

'분명 날 감시하는 누군가가 있다!'

그는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손님이 손을 흔들어도, 까까오 택시에 콜이 잡혀도 무시하고 하루 종일 달렸다.

자신을 감시하는 누군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하지만 소용없었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시선은 단 한순간도 끊이질 않았고 어디로 도망가든 시선은 계속 자신을 쫓아왔다.

결국 그날은 영업도 허탕을 치고 학원 버스의 운전대를 쥐었다.

"오늘은 쉬는 게 어때요? 당신 너무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더 다잡아야지. 이런 핑계로 쉬고, 저런 핑계로 쉬기 시작하면 일 못 해. 다녀올게."

아내는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으니 오늘은 쉬라고 당부했지만 거절했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의 마돈나... 최유진을 보고 심신의 안정을 얻는 것이 최고의 휴식이었으니까.

그렇게 기쁜 마음을 안고 학원에 도착한 배영우.

"안녕하세요. 오늘도 힘내서 일해 봅...."

평소 같으면 자신을 반갑게 환대해 줄 강사들이 오늘따라 분위기가 너무 차가웠다. 아니, 차갑다 못해 그녀들의 싸늘한 시선이 마치 송곳처럼 심장에 쿡쿡 박혀들었다.

그때였다.

"배 기사님, 잠시 저 좀 보시죠."

"아, 네...."

평소 봄날의 훈풍처럼 자신을 대하던 유화정이 오늘따라 입에 칼을 품은 것처럼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녀를 따라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이동하자 유화정은 자신의 품속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내 그대로 배영우의 얼굴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정색하며 묻는 배영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유화정 선생님?"

"뭐 하는 짓? 그쪽은 뭐 하자는 짓인데? 이런 걸 집에 보내서 뭐, 돈이라도 뜯어내 보겠다고?"

배영우는 바닥에 떨어진 사진들을 주워 확인하였다.

사진 속 자신과 유화정은 어느 호텔방에서 뜨거운 정사를 치르고 있었다. 서로 가정이 있는 몸이었지만 사진 속 두 사람은 그런 것 따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애 아빠가 보기 전에 먼저 확인해서 다행이지. 너 이런 새끼였니? 몰카로 이런 사진이나 찍어서 여자 협박하는 그런 치졸한 새끼?"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이건 제가 찍은 사진 아닙니다. 제가 몰카 같은 걸 설치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럼 내가 이걸 찍었을까? 하여간 핸들 밥 먹고 사는 새끼, 불쌍하고 귀여워서 좀 놀아 줬더니 버러지 같은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협박을 해? 너 두고 봐. 내가 책임지고 너 이 학원 그만두게 해 줄 테니까."

"...."

자기 할 말만 톡 쏘아붙이고 냉랭하게 떠나는 유화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배영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스윽 훑어보더니 화단의 벽돌을 주워 들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러고는 그대로....

빠악!

털썩....

유화정의 뒤통수를 망설임 없이 후려갈기는 배영우. 유화정은 비명 한번 질러 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럼에도 분이 안 풀렸는지 배영우는 벽돌을 들어 몇 번이고 그녀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이윽고 바닥과 벽돌 그리고 손이 피범벅이 되자 벽돌을 대충 화단에 던진 배영우가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죽은 유화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흥분했네. 그러니까 니미 주제도 모르는 씨발년이 개길 상황 봐 가면서 개겼어야지. 야, 아직도 내가 우습냐? 아직도 우스워?"

발로 툭툭 건드려 봐도 이미 숨을 거둔 유화정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그 썅년들이...."

배영우는 여 강사들이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노려보던 여 강사들 모두가 그와 불륜 관계를 가졌던 적이 있는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배영우는 옷소매로 대충 얼굴을 슥 닦아 내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다행히 목격자는 없다지만 CCTV는 존재했다. 유화정이 돌아가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녀를 찾게 될 것이고 그녀가 살해당했다는 사실 역시 금방 발각되겠지.

하지만 그때까지 분명 짧지만 시간은 존재했다.

배영우는 시체를 옮겨 근처 창고 안에 대충 처박아 두었다.

말끔하게 처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으니 대충 처리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상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체를 처리한 배영우는 옷을 뒤집어 입었다. 핏자국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는 곧장 자신의 차를 몰아 카페 뮤즈로 향했다.

오늘은 최유진이 노래를 부르는 날. 지금 이 시간이라면 출석 체크만 하고 학원을 빠져나온 최유진이 뮤즈의 대기실에서 목을 풀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유진아 조금만 기다려. 오빠가 데리러 갈게!'

이미 마스크가 완전히 벗겨진 배영우의 얼굴은 흉측하고, 크게 삐뚤어진 미소를 숨김없이 그리며 자신의 탐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뮤즈에 도착한 배영우를 카페 직원이 반갑게 맞이했다. 오래된 직원이었기에 단골에다 준수한 외모를 가진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 오늘은 조금 일찍 오셨네요, 손님. 항상 마시던 걸로 드릴까요?"

"아뇨, 오늘은 조금 다른 용무가 있어서...."

"다른 용무요?"

어느새 가면을 다시 착용한 배영우는 선량하게... 그러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혹시 제가 유진이... 아니, 유정 양이 다니는 학원의 운전기사라는 걸 알고 계시나요?"

"아, 전에 말씀해 주셨잖아요. 그래서 비밀도 지켜 주신다고. 저희야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죠."

"그런데 오늘 선생님의 촉이 유난히 날카로운지 유진이가 출석만 하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눈치채셨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께 연락이 가기 전에 서둘러 데려갈까 하는데...."

최유진이 노래 알바를 부모님께 숨기고 있다는 건 뮤즈의 직원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최유진도 배영우가 진짜 학원 버스 기사이며 좋은 사람이라고 인증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로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물론 옷을 뒤집어 입은 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요? 일단 유정이한테 바로 알릴게요."

"부탁드립니다. 서둘러 주세요. 저도 유진이 노래를 더 이상 못 듣는 건 아쉽거든요."

그렇게 직원이 대기실로 달려가 최유진에게 얘기를 전달하자 얼마 안 있어 최유진이 뛰쳐나왔다.

"그게 정말이에요? 영우 오빠, 저 진짜 걸렸어요?"

"그래, 원장 쌤 노발대발하기 전에 어서 돌아가자.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알았어요!"

그렇게 최유진은 배영우를 따라 가게를 내려갔다.

그러다가 주차되어 있는 그의 택시를 보고 의문을 가졌다.

"그런데 학원 차가 아니라 택시네요?"

"학원차를 끌고 오면 너무 눈에 띄잖아. 원장 쌤도 바로 아실 거고. 유진이도 오빠가 낮에는 택시 하는 거 알지?"

"아~ 역시!"

최유진은 의심 없이 조수석에 탑승했다. 그러자 배영우의 눈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는 최유진이 타고 있는 조수석을 열고는 깜짝 놀라 자신을 쳐다보는 최유진의 입을 바로 틀어막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마취제를 주사했다.

"읍읍...!"

그 일련의 동작이 어찌나 신속하고 자연스러웠는지, 주위에 지나다니던 보행자들조차 그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배영우는 마취제를 맞고 의식을 잃은 최유진을 바라보며 스산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조금만 기다려, 유진아. 이제 곧 우리만의 보금자리로 데려다줄 테니까."

그는 곧장 차를 몰아 서울을 벗어났다.

* * *

몇 시간 뒤. 최강태의 집 거실.

"다녀왔습니다."

"응? 너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몰라. 기사 오빠가 말도 없이 일찍 갔다고 하더라고. 무슨 급한 일 있나? 그래서 원장 쌤이 애들 택시비 쥐여 주고는 택시 태워서 보내 줬어."

"밥은?"

"됐어. 피곤해. 그냥 씻고 잘래."

집으로 돌아온 최유진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욕실로 향했다.

그렇다면 배영우가 납치한 최유진은 대체....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52화 영원히 함께야

배영우에게는 남들에게 말 못할 비밀이 많이 있었지만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이것이었다.

스스슥....

어두운 밤.

서울을 빠져나온 택시 한 대가 익숙하게 도로를 가로질러 더욱더 인적이 드문 길을 달렸다.

포장도로는 이내 비포장도로로 바뀌더니 칠흑처럼 까맣게 물든 위험한 산길을 아무렇지 않게 타고 올라갔다.

그러다 차를 타고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곳까지 다다르자 배영우는 차에서 내려 보조석에 쓰러져 있던 최유진을 업어 들고 산길을 올랐다.

"조금만 기다려, 유진아. 우리 보금자리에 다 왔으니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배영우는 행복한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비록 그 행복을 오래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이 죽인 유화정의 시체도 지금쯤이면 발각되었을 것이고, 어떤 빌어먹을 새끼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저지른 범죄들도 만천하에 드러나겠지.

경찰의 추적이 시작되면 자신은 머지않아 잡힐 것이다. 물론 도망치면서 시간을 끌면 몇 달은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살고 싶진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의 피앙세, 최유진과 함께 둘만의 보금자리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함께 이 세상을 떠나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으니까.

"다 왔어, 유진아! 여기가 바로 우리 둘의...."

그렇게 그 어떤 더러움도 묻지 않은, 오직 둘만의 보금자리에 도착한 배영우가 산중에 버려진 창고의 문을 열고 불을 켜는 순간.

"이, 이게 무슨...?"

눈을 부릅뜬 배영우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둘만의 보금자리에 가득 채워 둔 최유진의 모습들, 벽과 천장을 가리지 않고 도배한 최유진의 사진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고 온통 자신의 모습만이 찍혀 있었다.

그것도 최근 사진뿐만이 아니었다.

옛날부터 자신이 저질러 온 범죄들, 스토킹한 여성들, 그녀들을 고문하는 모습과 흉악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까지....

"아니야! 여긴 우리 보금자리가 아냐!"

"하암~ 이제 도착했냐. 생각보다 늦어서 진짜 잠들었네."

"...!"

현실을 부정하며 소리치던 배영우가 깜짝 놀라 뒤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뒤에서 최유진의 목소리가 아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안녕? 생각보다 등이 안락하구나, 너."

"헉!"

최강태는 배영우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놀란 배영우가 손을 풀며 재빨리 그와 거리를 벌렸고....

"읏차."

가볍게 착지한 최강태는 창고 안을 스윽 훑어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법 마음에 드는 곳이야. 삐뚤어진 욕망, 탐욕, 절규, 고통, 비명, 죽어 가는 인간의 분노와 원한의 냄새가 풀풀 풍기거든, 이곳은."

"너, 넌 뭐야! 유진이는 어디로 빼돌렸어?"

"뭔 개소리야? 날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이 누군데."

최강태가 대꾸하면서 창고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반쯤 눈이 뒤집어진 배영우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최강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 보금자리에 함부로 더러운 발을 들이밀지 마!"

그의 손에는 어느새 날카로운 가위가 들려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가위를 휘둘러 최강태를 공격했지만....

퍽!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최강태는 그저 왼쪽 다리를 들어 내지르는 것만으로 달려들던 배영우를 날려 버렸다.

콰앙!

"커헉...!"

벽에 부딪혀 쓰러진 최영우의 몸뚱이 위로 벽과 천장에 붙어 있던 추악한 사진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결국 아무렇지 않게 창고 안으로 발을 들인 최강태는 고개를 돌려 스윽 내부를 살펴보더니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던 사진 한 장을 떼어 내 그것을 쳐다보았다.

피식~!

"이야~ 어릴 때부터 아주 싹수가 노랬구만. 딱 봐도 중학생 때 같은데, 그때부터 싹수가 노랬나 봐? 생긴 걸로 봐서는 굳이 이런 짓을 안 해도 충분히 인기 있었을 것 같은데."

최강태는 가지고 있던 사진을 펄럭이며 배영우에게 이죽거렸다.

거기에는 중학생 시절의 배영우가 짝사랑하던 고등학생 누나를 이곳으로 끌고 와 끔찍한 추행과 고문을 하는 장면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배영우의 눈이 공포에 질렸다.

당시 저런 사진을 찍은 기억도, 찍힌 기억도 없었다. 당시 이곳에는 자신과 피해자 둘뿐이었기 때문에 저처럼 사진을 찍을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저 사진은 무엇이며, 저 사진을 구한 눈앞의 인간은 또 누구란 말인가?

"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경찰이야?"

"경찰은 아니니까 안심해."

"그럼 대체 뭐냐고!"

"음... 심심한 마왕?"

"뭐...?"

배영우는 어이가 없었다. 다만 눈앞의 인간이 자신만큼 미친놈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그는 다시 가위를 들고 있어났다.

이미 계획은 틀어졌다. 그렇다면 여기서 놈을 죽이고 숨어 다니다 기회를 엿본다. 언젠가 찬스는 반드시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반드시...!

"최유진을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

마치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대꾸하는 상대방의 말에 배영우가 눈을 부릅뜨자 최강태가 그를 비웃었다.

"진짜 꿈도 야무진 녀석이야. 그런 너한테 선택지를 하나 줄게. 여기서 도망친 후에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혼자 처박혀서 쓸쓸히 늙어 죽겠다고 약속하면 곱게 보내 줄게. 대신 그 이외의 선택지는 고르는 순간 후회하게 될 거야, 진심으로."

최강태는 항상 선인이든 악인이든 선택지를 준다.

분명 출구가 존재하는, 힘들고 고통스럽긴 해도 분명 살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는 선택지를 제시한다.

이것은 단순히 최강태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선인들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려고, 혹은 타인의 간절한 부탁으로 선택지가 갈리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하지만 악인의 경우....

"죽어!"

최강태가 이 선택지를 제시한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최악을 선택하지 않은 악인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아... 혹시나 했는데 오늘도 역시나인가?"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위해, 자신의 치부와 이곳의 위치를 알고 있는 최강태는 절대로 살려 둬선 안 될 인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배영우의 선택지는 처음부터 하나. 최강태를 죽인다는 것뿐이었다.

팟.

배영우의 움직임이 방금 전과 달라졌다.

방금 전에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마음만 앞세워 달려들었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배운 MMA의 움직임을 그대로 접목해서 접근한 것이다.

자신의 취미 생활을 위해서 납치할 상대를 보다 효율적으로 제압하고 구속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배운 종합 격투기다.

단련된 육체에 격투기가 가미된 그의 움직임은 초짜가 반응하고 대처할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계신 와중에 죄송한데, 너 너무 느려."

"...!"

상대는 다름 아닌 최강태였다.

턱, 휘릭~!

낮은 자세로 파고드는 배영우의 태클을 피할 필요도 없었는지 그가 가위를 내지르는 동작에 맞춰 대충 손을 휘적거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 걸린 배영우의 팔목이 그대로 꺾이면서 중심이 무너지고, 배영우는 그대로 볼품없이 빙글 회전하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이...!"

오기가 발동한 배영우는 몇 번이나 최강태에게 덤벼들었지만 소용없었다.

턱, 으드득! 빠각! 퍼억! 쩌정! 콰직! 콰드득!

최강태가 장난처럼 손만 휘적거려도 배영우의 몸뚱이는 처참히 박살나고, 부러지고, 으깨지고, 찢겨지고, 터져 나가면서 빠르게 엉망이 되어 갔다.

"그, 그만!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쿨럭...!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다시는... 다시는 유진이에게 접근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두 다리로 일어설 수도 없게 된 배영우가 피를 토하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지만 최강태는 되레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뭔 소리야? 그건 네가 결정하는 게 아냐. 살 길을 포기한 순간부터 넌 더 이상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거거든."

"그, 그게 무슨...?"

"글쎄. 그건 이 녀석들한테 물어보든가."

최강태는 말을 남기고 피식 웃더니 밖으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창고에는 정막이 감돌았다. 혹시 자신이 악몽이라도 꾼 것일까? 배영우는 지금 이 상황에서 전혀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끄으으윽...!"

그러나 부러진 팔다리가, 터진 살에서 흐르는 핏물이, 이를 악 다물어도 절로 신음이 흘러나오게 만드는 고통이 억지로 그에게 현실임을 자각하도록 때려 박았다.

'이, 일단은 여기서 도망쳐야 돼! 경찰이 오기 전에 얼른...!'

움직여지지 않는 몸뚱이를 억지로 이끌어 입구로 향했다.

'다행이 문은 열려 있다. 놈이 차키를 가져가지는 않았으니 이대로 차까지만 갈 수 있다면 어떻게든 도망칠 수....'

절그럭....

'응?'

절그럭, 절그럭....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몸이 너무 아픈 나머지 환청을 들은 거라고. 그러나 두 번째는 아니었다. 너무 확실하게 귀에 꽂히는 절그럭거리는 소리.

순간, 불길한 예감이 전신에 엄습했다. 솜털이 곤두서고, 머리가 쭈뼛쭈뼛 서게 만드는 불길함이 문밖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입구로 향하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뒤쪽으로 향한다. 그사이, 절그럭거리던 소음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아...!"

소음의 정체는 다름 아닌 사람의 전신 해골이었다. 그러나 배영우는 뼈만 보고도 그게 누구의 뼈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심지어 해골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우 씨...."

"영우 오빠...."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

뼈밖에 남지 않은 백골들도, 반쯤 썩어서 무너져 내린 시체들도, 차가운 표정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다가오는 그녀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배영우에게 죽은 희생자들이었다.

"오, 오지 마! 저리 꺼지라고! 너희들은 죽었어! 분명 내가 죽여서 여기에 파묻었는데 대체 어떻게?"

"영우 오빠...."

"이제부터 우린 영원히 함께야, 영우 씨."

"안 돼! 끄아아아아아아아아!"

으드득! 콰직!

아무리 발버둥 쳐도 부러진 팔다리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몰려든 그의 몸으로 몰려든 희생자들은 마치 그렇게 하면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을 것처럼 정성스럽게 그의 몸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피를 토하는 비명과 절규가 창고 밖으로 터져 나왔다.

한편, 지붕 위에서 다리를 꼬고 아름다운 밤하늘의 은하수를 감상하며 최강태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불렀다.

"음악 좋고~ 마력 좋고~ 바람도 좋고~ 끄으응! 오늘 하루 아주 나이스구만."

기지개를 한껏 킨 최강태가 지붕에서 내려왔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창고 안을 쳐다보았다.

사지가 망가진 것도 모자라 입에 게거품을 문 채 눈을 까뒤집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배영우는 존재했지만, 거기에 그에게 희생당한 언데드 무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몸을 뜯어 먹고 있는 건 순전히 그가 보고 있는 환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최악이었다.

오히려 환영이기 때문에 그는 최강태가 허락하지 않는 한 영원히 자신의 손으로 죽인 여자들에게 뜯어 먹히며 고통받을 테니까.

"혹시라도 누가 주워 가면 안 되니까."

최강태는 혹시라도 그가 발견되지 않도록 창고 주변에 꼼꼼하게 결계까지 설치한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53화 골목에는 맛집이 많다

시간을 조금 멀리 돌아가서 최강태가 황철고를 반신불수로 만들어 버린 그날.

일을 마치고 폐교 밖으로 나온 그는 버려진 운동장을 방황하는 수많은 원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만."

최강태는 마찬가지로 자신을 보고 흠칫하며 두려움에 떠는 원혼들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영혼이라는 그릇에 한, 분노, 슬픔, 고통 등의 부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찬 원혼들은, 그 에너지 때문에 '흐름'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세상에 잔류하는 서글픈 존재들이었다.

영체인 원혼들 역시 최강태의 겉모습이 아닌, 그 속에 있는 영혼의 실체를 알아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의 생각 한 번, 눈짓 한 번에 자신들 같은 미물은 전원이 소멸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에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 때문에 최강태는 그들을 무시하고 돌아가려 했다.

어차피 구덩이 몇 개만 파주면 신고를 받고 출동한 아버지와 동료 형사들이 그들의 주검을 발견할 것이고 그들의 원한도 다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풀어 줄 테니까.

물론 좋은 마력 영양제인 원혼들을 흡수하여 자신의 힘으로 전환하는 방법도 존재했다.

하지만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최강태는 불쌍한 녀석들을 괴롭히는 취미 같은 건 없었다.

단순히 재미가 없었으니까.

그에게는 지금 여기서 불쌍한 원혼들을 흡수하는 것보다 그 시간을 아껴서 집으로 돌아가 '무리한 도전'을 한 편이라도 더 보는 것이 훨씬 재미있었다.

그런데....

"얼래?"

그가 너무 두려워서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던 원혼들이 어느새 그의 앞으로 몰려와 무릎 꿇고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뭐 하자는 짓이야, 이게?"

최강태는 쪼그려 앉아 가장 가까이에 있던 원혼에게 물었다. 그러자 질문을 받은 원혼이 흠칫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용기를 냈다.

-저희는 당신께서 누군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 같은 건 벌레보다 못하게 여길 만큼 높고 존귀하신 분이라는 건 한 눈에 알아 뵀습니다. 그럼에도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 감히 앞길을 막아섰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부탁?"

최강태는 부탁이라는 말을 건네는 소녀의 모습에서 당연히 황철고와 그 뒤에 있는 무리들에게 복수해 달라는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최강태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저한테는 조금 모자란 동생과 할머니가 있어요. 부모님이 일찍 이혼하시고 저희 남매를 할머니한테 맡기고 떠난 바람에 할머니가 저희 남매를 지금까지 키워 주셨죠. 그런데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세요. 그런데 저희 남매를 키운다고 병원도 제대로 못 가시고....

소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할머니 병원비라도 보태 드리려고 열심히 알바를 해서 모은 돈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할머니께 드리기도 전에 이렇게 되어 버려서.... 부탁드려요! 제발 그 돈을 할머니한테 전해 주세요. 그리고 저 기다리지 마시라고, 이제 전 못 돌아가니까 재훈이를 잘 부탁드린다고. 대신 꼭 좀 전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결국 소녀의 두 뺨에 닭똥 같은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소녀는 자신이 끔찍하게 죽은 사실보다 남아 있는 가족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그에 최강태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 녀석이 가출해서 이런 꼴을 당한 것 같지는 않고.... 뭐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분명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뒤통수가 엄청 아프더니 그대로 기절해 버렸거든요. 정신을 차려보니 처음 보는 호텔에서 이상한 남자들한테 둘러싸여 있었고요....

그때는 회상하던 소녀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최강태는 그녀의 말에 그녀가 가출한 게 아니라 납치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최강태는 시선을 돌려 옆에 있던 다른 여자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너도 안부 전할 사람 있냐?"

-저, 저요?

"어, 너요."

여자는 자신이 지목되자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에 최강태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엄빠가 좆 같아서 가출했는데 딱히 안부를 전하고 싶진 않고... 그냥 아까 황철고 터는 거 보니까 제 속이 다 시원해서... 가능하면 절 이렇게 만든 새끼들 전부 그냥 다 좆 됐으면 해서요.... 이런 이유는 좀 불순한가요?

"아니, 네가 제일 마음에 든다."

다른 원혼들 역시 각자의 사정과 복수심을 가지고 최강태에게 부탁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원혼들의 억울함이야 이미 원혼이 된 시점에서 더 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최강태는 그들이 불쌍하다고 부탁을 들어줄 위인이 아니었다.

"미안하지도 않지만 보다시피 난 성직자가 아니거든. 따라서 공짜로 너희들 부탁을 들어줄 의리는 없다는 거지."

-아....

최강태의 단호한 거절에 원혼들은 탄식했다.

자신들을 인지할 수 있는 존재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설령 인식한다고 해도 자신들의 소원을 이뤄줄 능력자일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최강태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뭐, 거래 계약이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거, 거래 계약요? 어떤....

"말 그대로 서로에게 필요한 걸 주고받는 거지. 너희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난 그걸 들어주고, 대신 난 너희들에게 내가 원하는 걸 받고."

-하지만 저희는 보시다시피 가진 게 없는 영혼일 뿐인데....

"그거면 충분해. 부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한 원혼일수록 나한텐 좋은 영양제 같은 거거든."

-...!

최강태의 설명에 원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로지 복수를 위해 그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소녀가 손을 들고 물었다.

-저기...!

"말해."

-구체적으로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거죠?

"본래라면 오랜 시간이 지나 원한을 털고 이승을 떠나 흐름으로 돌아가든가, 원한이 쌓여서 몬스터... 흔히 말하는 요괴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랑 계약하면 그런 걸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너희의 영혼은 나에게 귀속될 거고 너희가 가진 부정적인 에너지는 내 마력이 될 테니까."

-그 말씀은....

"너희의 모든 게 내 것이 된다는 뜻이지."

인간이었다면 대체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소리였지만, 죽고 나서 영체가 되자 최강태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원혼들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게 영혼이 귀속된다는 것. 한마디로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그의 노예나 그보다 더 못한 것이 되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혼들의 선택은 동일했다.

-하겠습니다!

-영원히 당신에게 귀속되어도 좋으니, 제발 그 개새끼들을...!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미친놈들을 응징해 주세요!

-저도...!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원혼들은 앞다퉈 최강태에게 영혼을 바치려 했다. 그 무게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상관없을 만큼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최강태는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경고하긴 했지만 애초에 그들의 선택지는 하나뿐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원한이 아니고서야 원혼이 되는 것도 힘들긴 하지. 다만....'

최강태는 가장 처음 대화를 나누었던 원혼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다른 원혼들의 고조된 열기에 잠시 밀려나긴 했지만 그녀는 원혼들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에 속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수들에 대한 복수심과 원망, 분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걸 뛰어넘을 정도로 동생과 할머니에 대한 근심, 걱정, 한탄, 회한이 짙게 자리 잡고 있었다.

즉....

'저 녀석이 원혼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건 복수심이 아니라 그리움인가.'

물론 그녀와 비슷한 사정으로 남아 있는 원혼이 몇몇 더 있긴 했지만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너희는 어떡할래? 고작 작별 인사 좀 하겠다고 영원히 나에게 흡수되는 건 그리 효율적인 거래가 아닐 텐데."

-...할게요. 죽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가 할머니 병을 고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재훈이한테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할 수 있다면 저 계약하고 싶어요!

-저도요!

-저도....

결국 그리움 때문에 원한이 되어 남은 원혼들도 최강태와의 계약에 찬성했다.

"계약은 성사되었다. 그럼 너희는 내가 그 녀석들을 어떻게 조지는지 내 안에서 즐겁게 감상하라고."

최강태는 손바닥을 뻗었고 원혼들은 그렇게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아~!"

원혼들의 부정적인 에너지가 마력으로 전환되어 몸속에 차오르자 최강태의 입에서 기분 좋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물론 이 계약을 기점으로 S회원들의 지옥 체험 기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길어져 버렸지만 말이다.

* * *

서울 순창실업고등학교.

서울에서도 낙후된 지역에 위치한 이 학교의 학생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공부보다는 즉시 돈을 벌 수 있는 일에 관심이 더 많았고... 그 관심이 성실하고 번듯한 목적을 향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퍽!

불행히도 학생들은 더 쉽고, 더 편하게 더 많은 돈을 갈취하는 걸 먼저 배워 버린 모양이었다.

"커헉!"

한 남학생이 배를 부여잡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자 주먹을 날린 교복 차림의 남학생이 명치를 정확히 얻어맞았는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그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강제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재훈아, 재훈아, 우리 재훈아~ 형이 분명 얘기했잖아. 오늘까지 밀린 보호비 안 내면 죽을 거라고. 아니면 형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진짜 한 번 죽어 볼래? 그럼 말을 들을까?"

착!

명찰에 심기훈이라고 적힌 녀석은 주머니에서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꺼내더니 유재훈의 목에 칼을 들이밀며 그를 협박했다.

"형, 제발 살려 주세요.... 진짜 저 돈이 없어요...."

"야, 저 새끼 운다."

"혹시 바지에도 지린 거 아냐?"

"야, 기훈아, 적당히 해. 그러다 진짜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도 우리 재훈이만큼 성실하게 일해서 돈 바치는 노예가 흔한 줄 알아?"

유재훈은 자신의 목에 드리워진 칼에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심기훈은 물론이고 그의 주변에 있는 친구들조차 그의 모습을 비웃으며 구경했던 것이다.

"닥쳐 봐."

심기훈은 거칠게 대꾸한 후, 유재훈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그를 협박했다.

"야, 유재훈, 너 같은 거지새끼 형들이 학교에서 괴롭힘 안 당하게 보호해 줬는데, 거기에 대한 수고비 몇 푼 내는 게 그렇게 힘들어? 아까워? 아주 그냥 좆 같아?"

"그, 그게 아니라 아무리 안 쉬고 일해도 일주일에 40만 원씩 바치는 건 너무 힘든...."

짜악!

"말대꾸는 싸다구. 씨발아, 누가 말대꾸하래? 그러니까 한 달에 200 상납하는 게 힘들다고 해서 일주일에 40으로 바꿔 준 거잖아. 아니, 씨발 사람이 이 정도로 정성을 보였으면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재훈아, 안 그래? 재훈아?"

짜악! 짜악! 짜악!

"자, 잘못...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심기훈은 정색한 얼굴로 유재훈의 뺨을 무감정하게 후려 갈겼고 유재훈은 그저 무기력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다른 피해자들과 유재훈의 눈이 마주쳤다.

맞아서 얼굴이 엉망이 된 그들은 유재훈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고개를 틀어 버렸다.

차마 유재훈을 도와줄 용기가 나지 않았던 피해자들은 유재훈을 외면한 채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걸 그저 다행스럽게 여길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재훈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이 골목은 그런 곳이었다.

대한민국의 법과 정의는 일진들이 담배 피우다 걸쭉하게 내뱉은 가래침보다도 의미가 없는....

그저 폭력을 행사해서 타인을 갈취하는 포식자들과, 그런 포식자들에게 대항 한 번 못 해보고 순순히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기는 피식자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쩐지 맛있는 냄새가 이 골목에서 풀풀 풍기더라니... 여기가 아주 맛집이었구만?"

맛있는 냄새에 이끌린 최상위 포식자가 결국 맛집을 찾아와 버렸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54화 나는 삥 뜯어도 너는 절대 뜯지 마

"뭐야, 저 새끼는?"

"저 교복은.... 혜성공고 새끼네?"

"와~ 쟤 어떡하냐? 누군진 모르겠지만 하필 와도 혜성 새끼가 왔네."

이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최강태의 모습에 일진 학생들이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심기훈은 최강태의 뒤쪽을 슬쩍 쳐다보다 그에게 물었다.

"설마 여길 혼자 왔다고?"

"뭐 대단한 곳이라고. 그나저나 유재훈이 누구냐."

최강태는 얼굴이 알록달록한 아이들을 스윽 훑어보다가 심기훈에게 잡혀 있는 녀석을 확인하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혹시 네가 유재훈?"

"네?"

유재훈은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퉁퉁 부은 눈으로 심기훈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을 무시하는 최강태의 행동에 심기훈의 심기가 몹시 불편했던 모양이다.

"하? 이 씹새끼가 하는 꼬라지 보소. 야, 너 내가 혜성고 새끼들만 보면 죽이는 거 알아? 몰라?"

심기훈은 유재훈의 머리채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최강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정색한 얼굴을 그의 코앞에 들이밀며 눈을 부라렸다.

거의 코와 코가 닿을 정도로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심기훈은 최강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를 협박했다.

"눈 깔아."

"얼굴 좀 치워 줄래? 후회하기 전에."

"눈 깔라고."

최강태는 미소를 그리며 심기훈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심기훈은 최강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오히려 가지고 있던 나이프를 그의 목으로 가져갔다.

그 결과....

콰앙!

"엄마!"

"씨발! 깜짝이야!"

"뭐, 뭐야?"

난데없는 굉음에 깜짝 놀란 사람들. 이내 그들의 눈이 커지면서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기, 기훈아...!"

뿌드득! 뿌득...!

벽에 얼굴이 처박힌 채 몸을 부들부들 떠는 심기훈.

그의 뒤통수를 한손으로 움켜쥔 최강태가 손목에 스냅을 줄 때마다 얼굴이 까끌까끌한 벽에 갈리며 끔찍한 소리를 내었다.

"하여간, 후회한다고 얘길 해 줘도.... 어휴~!"

최강태는 짐짓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심기훈의 친구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최강태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실력에서도, 잔인함에서도 자신들은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털썩....

"꺄악!"

최강태가 손을 놔주자 심기훈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벽에는 핏물이 낭자했고, 그의 얼굴을 확인한 일진 여자애의 입에서는 따가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최강태의 관심은 이미 심기훈에게서 떠났는지 벽에 서 있던 피해자 학생들을 스윽 훑어보더니 심기훈의 친구, 차광석에게 물었다.

"얘들은 뭐 한다고 여기까지 끌고 와서 알록달록하게 만들었어?"

"그, 그게 보호비 연체된 애들 타일러서 수금 좀 한다고...."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힘없고 불쌍한 애들 모아서 열심히 삥 뜯고 있었다는 말?"

"예, 뭐...."

요약이라기엔 너무나도 직설적인 최강태의 대꾸에 일진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그거 좋네!"

"네?"

생각치도 못했던 최강태의 탄성에 일진들도, 피해자 학생들도 뜨악한 표정으로 최강태를 쳐다보았다.

유재훈을 찾아왔길래 분명 그를 구하러 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설마... 아니야, 혜성공고 새끼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니미, 설마 우리 앞마당까지 먹으려고 왔을 줄은....'

남은 일진들은 다급해졌지만 그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얘들한테 구체적으로 삥을 어떻게 뜯는데?"

"그게... 일주일에 40만 원씩...."

"일주일에 40이면 두당 한 달에 160~200은 쥐어짜겠네?"

"그야 뭐...."

껄끄럽게 대답하자 오히려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최강태의 모습에 일진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러자 그는 손을 척하고 내밀더니 당당하게 요구했다.

"내 놔."

"뭐, 뭘요?"

"뭐긴 뭐야. 삥 뜯는 거지. 맞고 줄래? 그냥 줄래?"

그 말에 일진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 그러니까 지금 우릴 삥 뜯겠다고? 이 새끼들이 아니라, 우리를...?"

"그럼 새꺄, 상식적으로 저 알록달록한 새끼들이 돈이 많겠냐? 그 새끼들 삥 처먹은 너희가 더 돈이 많겠냐? 형 세 번 얘기 안 한다. 맞고 줄래? 그냥 줄래?"

"에이, 씨발!"

"다 덮쳐!"

그냥 당할 수는 없었던 일진들은 결국 연장을 챙겨 최강태를 덮쳤다. 하지만 그 결말을 누구보다 바란 사람이 다름 아닌 최강태라는 사실을, 일진들은 알지 못했다.

결국.

"어디 보자...."

피 떡이 되어 쓰러진 일진 하나를 방석처럼 깔고 앉은 최강태가 그들에게 삥 뜯은 돈을 찬찬히 세며 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새끼들 독하게도 뜯어먹었네. 야, 너희는 그거 가지고 꺼져."

"저, 정말요?"

"그럼 다시 돌려줄래?"

"아, 아뇨!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최강태는 그들이 수금한 돈 가방을 뺏어서 피해 학생들에게 던져 주었다. 자신의 목적은 애들의 코 묻은 쌈짓돈이 아니라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었으니까.

피해 학생들은 울면서 최강태에게 거듭 감사하다고 허리를 숙인 뒤 서둘러 골목을 벗어났다.

그렇게 피해 학생들을 보낸 최강태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일진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왜 너희를 사지 멀쩡하게 놔뒀는지 알아?"

그러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젓는 녀석들.

"잘... 모르겠는데요...."

"너희는 지금부터 열심히 일을 해서 나한테 보호비를 바쳐야 하거든. 안 그럼 내가 너희를 죽을 때까지 괴롭힐 테니까. 금액은... 그래, 두당 일주일에 40만 원씩으로 하자. 공평하게. 오케이?"

"네, 네? 그, 그게 무슨...."

"왜? 나보다 약한 사람 괴롭혀서 돈 좀 편하게 벌어 보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

일진들은 눈을 부릅떴다. 가뜩이나 돈을 쓸 곳도 많고 바칠 곳도 많은데, 여기서 돈 뜯어가는 사람이 더 늘어나면 자신들이 정말로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악몽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 참, 참고로 애들 삥 뜯어서 돈 버는 건 반칙이다."

"삐, 삥도 뜯지 말라뇨? 대체 왜...?"

"왜긴 왜야. 나는 편하게 벌어도 되지만 너희는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

억지다.

내로남불도 이 정도면 욕조차 안 나올 수준이다. 그런데도 이 말도 안 되는 억지가 통하는 건 오로지 하나.

절망적일 정도로 거대한 힘의 격차 때문이었다.

"아무튼 열심히 해 봐. 약속을 어기고 나 모르는 곳에서 애들 삥 뜯어 주면 더 좋고. 물론 나한테."

그렇게 푼돈이지만 수금과 마력 보충을 동시에 해결한 최강태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심기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시, 심기훈입니다, 형님."

"그래, 기훈아, 형이 우리 재훈이 누나랑 친구 사이거든? 그런데 재훈이 누나가 먼 곳을 가게 돼서 대신 재훈이 뒤를 형이 봐주게 됐단 말이지. 대충 여기까지 설명했으면 무슨 말인지 알지, 기훈아?"

"아, 앞으로 다시는 유재훈을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아냐, 아냐, 꼭 그럴 필요는 없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쥐어 패고, 지금처럼 삥도 뜯고 그래. 그런 다음 내 얼굴 한 번 더 보면 되지. 안 그래?"

"저, 절대로! 두 번 다시는 유재훈을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진짭니다! 형님!"

심기훈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대꾸하자 최강태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래, 기훈아. 이제부터 너 열심히 노력해야겠더라."

"예? 그게 무슨...?"

"난 말이야. 귀찮은 걸 제법 싫어하는 사람이라 누가 우리 재훈이를 몰래 괴롭힌다고 해도 그걸 찾아낼 생각은 별로 없거든. 그러니까 재훈이가 누구한테 괴롭힘을 당하거나 삥을 뜯기면 그냥 네가 했다고 생각하려고."

"...!"

최강태는 덜덜 떨고 있는 심기훈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 참, 너 애들 코 묻은 돈 뜯어먹는다는 녀석들 어디서 사는지 주소 알고 있지?"

"갈치파 형님들 아지트요?"

심기훈이 말한 갈치파는 다름 아닌 심기훈 패거리와 연관된 불법 사채업자들이었다.

심기훈 패거리가 보호비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의 돈을 갈취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억지로 이곳에서 빌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갈치파는 살인적인 이율로 학생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학생을 뼛속까지 빨아먹는다.

그렇게 피해자가 빌린 돈을 심기훈 패거리들이 또다시 갈취하는 구조였던 것이다.

유재훈도 여기에 몇 번이나 당하면서 그 빚은 이미 수백만 원을 넘어서 수천만 원에 달했다고....

"알아, 몰라?"

"아, 알죠."

"그럼 됐고."

최강태는 심기훈을 일별하고는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던 유재훈을 일으켜 그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어휴~ 교복 꼬질꼬질한 거 봐. 누나가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네. 너 삥 뜯긴 돈 찾고 나면 교복부터 새로 맞춰야겠다."

"아...."

사실 유재훈은 지금 이 상황이 얼떨떨했다.

누나 친구라고는 해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처럼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자. 둘 다 따라와."

그렇게 최강태를 따라 골목을 나선 유재훈과 심기훈은 너무 놀란 나머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큰형님!"

골목길 앞에 쭈욱 늘어선 새까만 최고급 외제 세단들.

한 대에 억은 가볍게 넘을 것 같은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려 세 대나 갓길에 주차되어 있었다.

당연히 차들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정작 떡대들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차 근처에서 대기 중인 검은 슈트의 떡대들은 최강태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깍듯하게 그를 대했다.

"수고는 무슨, 심심풀이도 안 됐구만."

최강태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두 사람을 향해 지시했다.

"우리 기훈이는 가는 길 안내해야 하니까 앞 차 타고, 재훈이는 형이랑 뒤 차 타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심기훈의 양쪽으로 서는 두 명의 떡대. 그에 심기훈의 목울대가 저절로 출렁인다.

꿀꺽....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주먹은 상처가 무수해서 저걸로 한 방 맞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것만 같았다.

본래는 타이밍을 봐서 전력으로 도망갈 생각이었지만....

"안 타? 타기 힘들면 반으로 접어서 태워 줄까?"

"제, 제가 탈게요...."

자신보다 더 큰 폭력 앞에서는 그저 순한 양이 되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탈 뿐이었다.

그렇게 차량이 출발하고 차들이 부드럽게 도로를 달리던 사이....

"하암~!"

"저, 저기...."

폰 게임을 하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최강태에게 유재훈이 용기를 내서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응? 왜? 어디 불편해?"

"그, 그게 아니라 형이 정말로 우리 누나 남자 친구가 맞나 싶어서요. 누나한테 남자 친구가 있다는 얘기도 못 들어 봤고...."

"남자 친구가 아니라 남자 사람 친구. 그리고 네 누나가 너한테 얘기를 못 한 건 그만큼 나랑 네 누나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친구 사이라 그래."

"그런데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남자 친구도 아니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면서...."

"재훈아, 잘 들어. 만남이란 시간이 전부가 아니란다. 네 누나와 나는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럼에도 영혼을 교감한 사이라고 해야 하나...."

"네? 영혼을 교감한 사이요? 그게 뭔데요?"

유재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최강태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있어, 그런 게. 너도 어른이 되고 사는 게 좆 같아질 때쯤 나쁜 악마가 찾아오게 된다면 알게 될 거다."

"지금도 충분히 뭣 같은데...."

"그래서 찾아왔잖아."

"...?"

"큰형님, 도착했습니다."

"오냐."

목적지에 도착하고, 조수석에서 먼저 내린 떡대가 뒷좌석 문을 열어 주며 옆으로 비켜서자 최강태가 차 밖으로 내려섰다.

그는 깨끗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부신 미소를 그렸다.

"키야~ 사람 패기 좋은 날씨구만."

앞차에서 내린 이상준이 최강태에게 다가와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물었다.

"애들 연장 챙기라고 할까요?"

"어허, 어딜 뺏어먹을 게 없어서 내 밥그릇을 뺏어먹으려고! 너흰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혹시라도 부스러기 흐르면 그거나 좀 주워 먹든가."

"큰형님이 직접 나서시는데 부스러기라뇨.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런 건.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십쇼."

"오냐."

신난 최강태의 경쾌한 발걸음과 들떠있는 뒷모습에 이상준은 갈치파 아지트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55화 목숨 빚

"얘는 와꾸가 특A급이네. 와꾸 잘 쳐주는 데가 미누스였나?"

"예, 형님."

"그럼 얘는 미누스로 보내고, 얘는... 오우, 무슨 몸매가... 하여간 요즘 고딩들 발육 상태가 대단해. 이러니 선량한 어른들이 흔들리지 않고 배기나. 얘는 어디로 보내는 게 좋겠냐?"

"요새 핫카이에서 몸매 되는 애들 기존 매매가에서 30% 더 쳐준다고 합니다. 그쪽에 신규 큰손이 미성년자 핫 보디 마니아라고요."

"그럼 얘는 핫카이 결정이네."

자신 앞에 도열한 여학생들을 마치 상품 평가하듯이 세심하게 훑어보며 씨익 미소를 그리는 중년의 남자.

여학생들은 그의 시선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마치 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흠칫 몸을 떨더니 눈물을 글썽였다.

"제발 집에 보내 주세요.... 여기에 대해서는 절대 경찰이나 집에 말도 안 할 거고 빌린 돈도 꼭 갚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흐에엥...!"

결국 겁에 질린 여학생 한 명이 간절히 애원하며 울기 시작하자 눈물을 참았던 다른 여학생들도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광경을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닌지, 중년의 사내, 권장운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그녀들을 향해 일갈했다.

"뚝! 야, 이 썅년들아. 그러길래 기회가 있을 때 꼬박꼬박 갚았어야지, 아니면 좀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든가. 좆 같은 집구석에서 태어난 것도, 빌어먹을 팔자도 다 너희 탓이지, 그게 내 탓이냐? 정 그렇게 돈 갚기 싫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너희 부모님들 면상이나 보러 가자고."

"자, 잠깐만요! 그건...!"

"싫지? 그러니까 닥치고 오빠 말대로 해. 그래야 너희도 살고, 너희 부모님도 산다. 그래도 너희는 여자로 태어나서 다행이지. 사내 놈이었어 봐. 돈도 없고, 운도 없는 새끼들은 진즉에 고기방패로 불려 다니다가 어디 노상에서 칼빵맞고 죽었을걸. 그건 싫잖아. 안 그래?"

권장운은 울면서도 입을 다문 여학생들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권장운은 자신의 사업에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다. 아니, 이 업계에서는 어리고 예쁜 미성년자일수록 큰돈이 되었기에 여학생을 더욱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런 권장운에게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돈 없고, 연줄도 없는 반반한 여학생들은 그야말로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다.

눈앞의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되는 억지로 감당하지 못할 빚을 만든 후, 그것을 가지고 협박해 자기 마음대로 조종한다.

그 결과, 여학생들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지거나 심한 경우엔 죽음을 맞기도 하지만, 그녀들의 불행과 고통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모두 권장운의 지갑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렇게 여학생들의 정신교육을 끝낸 권장운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고 보니 기훈이네 수금 날짜가 오늘 아니냐? 기훈이 그 자식한테 연락은 없었고?"

"아직 없었습니다, 형님."

"그 새끼 감시 잘해라. 요새 배때기에 기름 좀 차더니 생각이 많아 보이더라."

"예, 형님."

권장운의 지시에 그의 부하들이 고개 숙여 대답했다.

그 모습에 권장운은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더니 불을 붙이며 연기를 깊숙이 폐부로 빨아들였다.

후우~!

그는 높이 솟아 천장에 부딪혀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만족의 미소를 씨익 그렸다.

"하여간 요새 애들 똘똘해. 써먹기에 따라서는 대기업 못지않게 벌어다 주니.... 세상에 이보다 편하고 쉬운 장사가 어디 있냐. 안 그래?"

"맞습...."

"여기 있지~!"

그 순간, 권장운의 눈이 커졌다. 부하들에게 건넨 질문에 대한 답이 놀랍게도 문밖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교복을 입고 있는... 딱 봐도 고딩임을 알 수 있는 앳된 청년이었다.

문제는 청년의 뒤로 펼쳐진 광경이었다.

"끄어어어...."

"구급차, 구급차 좀 불러 줘...."

엉망이 된 몰골로 쓰러져 곡소리만 흘리고 있는 자신의 부하들. 그들 주변에는 연장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즉, 자신의 부하들이 연장까지 사용했음에도 눈앞의 고딩 하나를 어쩌지 못했다는 뜻이다.

최강태는 너무 놀라서 어벙하게 있는 사람들을 스윽 훑어보다 권장운의 얼굴에서 시선을 멈추더니 풉, 하고 웃었다.

"갈치파란 이름은 누가 지어 준 거냐? 너 나중에 그분 찾아가서 큰절이라도 해야겠다. 이름 잘 지어 줘서 고맙다고."

"...!"

권장운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무참히 헤집어 버리는 최강태의 놀림에 악귀처럼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소리쳤다.

"뭐 해, 병신들아! 저 새끼 잡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부하들.

그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애써 표정을 더욱 사납게 하고는 최강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고딩이 설마 우리 애들을 혼자서 저렇게 만들었을까.'

'분명 뒤에 숨어 있는 놈들이 있다. 아마 이 새끼를 치는 순간을 노려서 기습하겠지. 비겁한 새끼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떡대들이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훙!

가장 접근한 녀석이 빠르게 주먹을 날렸다. 남산처럼 솟은 배와 우람한 팔 근육에서 뿜어져 나온 묵직하고 속도가 실린 매서운 주먹이었다.

턱, 콰득!

"끄아아아악!"

하지만 최강태는 그런 녀석의 주먹을 피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붙잡아서는 그대로 손목을 비틀어 버렸다.

그러자 손목이 돌아갈 수 없는 각도로 돌아가 꺾이면서 녀석의 입에서는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휘릭, 우당탕...!

다시 한번 최강태가 손목을 튀기자 녀석이 빙글 돌더니 그대로 등부터 바닥에 떨어져 기절했다.

"이 새끼가!"

그사이 다른 녀석이 빠르게 파고들어 장도리를 휘둘렀지만, 최강태는 그것을 가볍게 피하며 녀석의 안면에 주먹을 먹였다.

퍽!

"커헉!"

코뼈와 치아들이 부러지면서 쏟아져 나온 핏물이 허공을 가르고, 주먹을 얻어맞은 떡대의 몸뚱이가 날아가 벽에 부딪힌다.

다른 놈들 역시 마찬가지.

"으아아아아!"

악착같이 달려들어 무기를 휘두르고, 주먹을 휘둘러 봤자 최강태는 그것들을 우습게 피하며 간간히 돌려 차거나 주먹을 휘두를 뿐.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떡대들이 제대로 저항조차 못 해 보고 픽픽 쓰러져 나가기 일쑤였다.

최강태는 서 있는 떡대가 남아 있지 않자 쓰러진 떡대를 스윽 훑어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마치 갓 태어난 강아지들처럼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벌벌 떨고 있는 여학생들이었다. 그녀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저 숨죽여 최강태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는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입구 쪽으로 턱짓하며 심드렁하게 말을 건넸다.

"영화 끝났는데? 관람 끝났으면 그만 가 봐."

"그, 그치만...!"

그녀들은 권장운의 눈치를 살폈다. 최강태의 말을 따라 멋대로 도망쳤다가 또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자 최강태는 피식 웃더니 자연스럽게 소파로 다가가 상석에 몸을 파묻었다.

"그럼 남아서 쿠키 영상까지 보고 가든지."

최강태는 권장운에게 시선을 옮기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용병 녀석들도 나름 고급지게 패는 맛이 있었지만 이런 녀석들도 불량 식품같이 끊을 수 없는 맛이 있다니까. 안 그래?"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순간, 권장운은 흠칫 몸을 떨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다섯 명의 부하들이 순식간에 정리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는데.

그제야 문밖에 쓰러져 있던 나머지 부하들의 모습도 이해가 된 권장운이었다.

권장운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랍에서 회칼을 꺼내 최강태를 겨누었다.

"너, 누구야? 누가 보낸 새끼냐고!"

"호들갑 떨지 말고 칼 집어넣어. 누가 보면 사람 잡으러 온 줄 알겠네."

최강태의 여유로운 대꾸에도 권장운은 초조한 시선으로 그를 살폈다.

눈에 익은 교복은 틀림없는 혜성공고의 교복이었다. 문제는 혜성공고에도 뜯어먹은 애들이 너무 많아서 누구의 사주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내 고객 놈들 중에 이만한 실력자를 섭외할 능력 있는 고객 놈이 있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장운아, 장부 가져와 봐."

"장부? 그게 무슨...?"

빠각!

"끄아아아악!"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다음에는 뚝배기다."

권장운의 입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가 반문하는 순간, 어느새 날아온 재떨이가 그의 왼쪽 어깨를 강타한 것이다.

뼈가 부서지고 팔이 덜렁거리는 끔찍한 고통 와중에도 최강태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최강태와 눈이 마주친 권장운은 뼛속까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쳐다보는 최강태의 눈동자는 무감정 그 자체.

마치 벌레나 그 이하의 것을 쳐다보는 것처럼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죽는다. 굳이 최강태가 말하지 않아도 권장운은 단숨에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으으으...!"

권장운은 두려움에 얼굴이 파랗게 질린 상태로 다급히 금고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회칼을 아무렇게나 던져 둔 뒤, 남은 한 팔로 서둘러 금고 문을 열었다.

금고 안에는 수많은 장부와 비상금이 들어 있었다. 물론 여기 있는 돈들도 자신이 가진 재산의 일부일 뿐이었지만.

"여, 여기 있습니다!"

최강태는 권장운이 건네준 장부를 스윽 훑어보았다.

거기에는 자신이 억지로 돈을 빌려준 학생들의 이름과 빌려준 날짜, 금액, 이자율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최강태는 장부를 훑어보다 권장운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이만큼이 네 목숨값이라는 거지?"

"네? 제, 제 목숨값이요?"

"이거 말고 내가 널 살려 둘 다른 이유가 있어?"

"...!"

의뭉스러운 질문이었지만 그 말이 권장운의 심장을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그는 등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그럼 내가 널 지금 살려 주면 넌 이 돈만큼 나한테 빚이 생기는 거네?"

"비, 빛요?"

"어, 상태야, 애들이랑 다 같이 올라와야겠다."

최강태는 그를 무시하고 밖에 있던 이상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이상준과 빡빡이들이 오는 동안 최강태가 옆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학생들에게 물었다.

"거기 말 좀 묻자. 권 사장이 그쪽들한테 이자를 얼마나 받았어?"

"이, 이자요?"

"어."

"월 500%요...."

"10만 원을 빌리면 원금 떼고 이자만 50만 원이라는 소리네?"

"선이자 30%는 원금에서 떼고 빌려주니까 사실상 7만원이죠."

돌아가는 꼴이 묘하게 흐르자 눈치 빠른 권장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르셨습니까, 큰형님."

때마침 도착한 이상준과 빡빡이들.

그리고 이상준을 알아본 권장운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최근 인천을 장악하고 무서운 기세로 서울의 뒷세계 이권을 장악해 가는 영식이파의 두목, 구영식.

그 구영식의 오른팔인 이상준 또한 얼굴이 팔린 인물이었고 권장운 역시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 고딩... 아니, 저분은 구영식이 아닌데? 그럼 이상준이 저렇게 깍듯이 대하는 이유가 뭐지?'

한편, 그들을 따라온 심기훈과 유재훈은 오면서 봤던 광경과 방 안에 펼쳐진 지옥도에 뜨악한 표정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이상준과 빡빡이들은 평온했다.

최강태가 직접 나선 이상, 그들에게는 당연한 광경이었으니까.

"얘가 나한테 이 장부만큼 목숨 빚을 졌거든?"

"큰형님께 목숨 빚도 지고, 아주 운이 좋은 친구네요. 이자율은 어떻게 됩니까?"

"자, 잠깐...."

떨리는 목소리, 방황하는 손.

"월 500%. 아 참, 선이자 30%도 잊지 말고."

"걱정 마십쇼. 저희 사장님이 이쪽 방면에는 프로시잖습니까. 단 1원도 남김없이 회수하겠습니다."

"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쇼!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대단하신 분인지 모르고 제가 감히 미친 짓을...!"

쿵!

권장운은 무릎까지 꿇고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용서를 구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최강태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그에게 물었으니까.

"뭔 소리야? 네가 잘못한 게 뭔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너도 알잖아. 이건 비즈니스야, 비지니스. 넌 나한테 목숨 빚을 졌으니, 그냥 그걸 갚으면 되는 문제라고. 이게 어려워?"

"그러지 마시고 제발...!"

권장운은 울면서 최강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했지만 최강태는 무감정한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뒤는 맡긴다."

"옙, 살펴 들어가십쇼, 큰형님."

"아 참, 쟤들도 집으로 보내주고."

"예, 큰형님."

자리에서 일어난 최강태가 유재훈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봤지? 이제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그림이나 열심히 그려. 누나도 너한테 그 말을 전해 달라더라."

"...!"

최강태의 말에 눈을 크게 뜬 유재훈이 이내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죽여 흐느꼈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56화 너, 납치된 거야

갈치파의 사무실을 떠난 최강태는 남은 계약을 지키기 위해 유재훈, 유재아 남매가 지냈던 동네도 향했다.

다 쓰러져 가는 노후한 주택들, 추위가 유독 사무치는 거리, 노인들의 눈에는 활기가 없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개들은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과거에서 멈춰 버린 마을.

이곳에서 불과 한 시간만 차를 타고 가면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빌딩 숲을 만날 수 있었기에 과연 이곳이 그곳과 같은 서울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최강태는 계단을 올라가기 직전 꺾어 지르는 마지막 골목길에서 주위를 살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기억이 끊겼다고?"

-네....

고개를 끄덕이는 유재아의 영혼.

CCTV도, 블랙박스도 존재하지 않는 좁은 골목. 목격자도 기대할 수 없는 마당에 시간도 오래 지나서 그나마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도저히 여기서 그녀를 납치한 범인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상황.

하지만!

'본래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 법이지.'

화아악!

그 순간, 최강태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마력이 무서운 속도로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마력은 순식간에 마을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가더니 이내 마을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사람은 이 이변에 대해 눈치챌 수 없었다. 최강태가 마력을 퍼트려 지배한 대상은 다름 아닌 이 마을의 터주대감, '쥐'였기 때문이다.

찍!

빛과 사람을 피해 하수구의 어둠 속에서 활발이 활동하던 시궁쥐들은, 그 순간 일제히 행동을 멈추고는 최강태가 위치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 보자....'

최강태는 자신이 지배한 쥐들의 뇌 내 데이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확인하였다.

쥐가 기억하고 말고는 관계없었다.

쥐의 뇌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태어나서 보고, 들었던 모든 메모리. 최강태는 바로 그 데이터를 전부 초고속으로 들여다볼 뿐이었으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뇌가 녹아내릴 정도의 데이터 처리 속도였지만 그에게는 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의 가벼운 작업이었다.

'빙고.'

최강태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유재아가 납치당하던 그날, 그 광경을 어둠속에서 지켜보고 있던....

정확히는 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갉아 먹고 있었을 뿐이지만 우연찮게도 정확히 그녀가 납치당하던 순간을 목격한 쥐가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유재아를 기다리고 있던 복면인들은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는 순간, 소리 없이 나타나서 그녀를 급습했다.

"읍읍...!"

유재아는 발버둥 쳤지만 덩치 큰 복면인의 억센 손길을 벗어날 순 없었다. 한편, 다른 복면인은 수건으로 그녀의 코와 입을 막고 마취제를 주사했다.

순식간에 약 기운이 돌자 유재아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복면인들은 유재아를 데리고 은밀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이동했다.

'저 정도면 사전에 유재아의 동선을 충분히 파악한 다음 계획을 짰다는 건데....'

상대는 인신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프로가 확실했다. 아마 단서 없이 저들을 추적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하지만 최강태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문제였다.

'까망아.'

-냥~!

최강태의 부름에 응답한 까망이, 정확히는 까망이의 분신이 쥐에게 빙의되었다.

그리고 최강태를 통해서 과거를 보고 있는 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는 것처럼 냄새 역시 맡고 있었다.

물론 쥐가 그림자의 냄새를 맡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까망이가 빙의된 순간, 쥐는 더 이상 평범한 시궁쥐가 아니었다.

쥐로 빙의된 까망이는 두 사람의 그림자 냄새를 정확히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 찾았어?'

-냐앙~!

'지금 그 녀석들 어디 있는데?'

까망이는 과거의 쥐로 빙의되어 맡은 그림자의 냄새를 현실에서 추적하기 시작했다.

일단 현세에 존재하기만 한다면 까망이가 한 번 냄새 맡은 그림자를 놓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까망이는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내 그 위치를 주인의 머릿속으로 전송하였다.

"호오라~ 여기 계셨구만."

* * *

베트남 호치민.

동양의 파리라는 별명을 가진 이곳은 같은 돈을 가지고 있다면 실제 파리보다 훨씬 더 부유하게 생활하며 귀족 같은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캬~ 여기가 천국이지! 어때, 형 따라오길 잘 했지? 너희는 인마, 나 아니었으면 전부 깜빵에서 콩밥 먹고 있었어. 알아?"

"누가 아니랍니까? 존경합니다, 형님! 진짜 빠지는 타이밍이 기가 막혔습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꼼짝없이 잡혔을 테니까요."

"한국은 그것 때문에 아주 뒤집어졌다는데 우린 여기서 팔자 좋게 술이나 마시고 있네요. 이게 전부 형님 덕분입니다."

"당연하지! 야, 적셔!"

짠.

호치민의 유명한 야시장에서 동생들과 함께 차가운 맥주잔을 부딪치는 조문규.

동생들과 함께 가난한 동네의 여자들을 납치해서 인신매매로 큰돈을 번 조문규는 버닝 게이트가 터지기 바로 직전에 전 재산을 싸 들고 베트남으로 도망쳤다.

도망친 이유는 그가 손을 대고 있던 또 다른 범죄인 사기도박과 관련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도주는 호재로 작용했다.

한국에서 터진 버닝 게이트의 소식을 베트남에서 접한 조문규는 자신의 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형님, 당분간 벌어 놓은 돈으로 즐기면서 산다고 해도... 그 이후엔 어쩌실 겁니까?"

"창명아, 여기도 여자는 많다. 너 한국에서 베트남 여자가 얼마나 인기 많은 줄 모르지? 우리나라 농촌만 가 봐. 돈은 있는데 여자가 없어서 발만 구르는 노총각 새끼들이 발에 차인다고. 우리 정도 실력이라면 오히려 한국보다 여기서 돈 벌기가 훨씬 쉬울걸. 여기 있는 여자들 잡아다 한국으로 수출한다고 생각해 봐라. 저출산에 기여도 하고, 농촌 성비 불균형도 해결하고. 야, 씨발! 우리 같은 애국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안 그래?"

"역시 형님! 저희는 그냥 형님만 믿고 가겠습니다."

"오냐!"

그날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신 조문규는 여자들을 옆에 끼고 떠다는 동생들을 보내곤 같이 놀던 여자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야, 어디가? 한 잔 더 해~!"

"오빠 너무 마셨어."

그를 부축하던 여성이 어눌한 한국어로 그를 만류했다.

술에 너무 취한 탓일까? 땅바닥이 출렁거리고 폭풍우를 만난 배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런데....

'응...?'

여자가 자신을 부축하여 가는 곳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호치민의 최고급 호텔이 아니었다.

그보다 으슥한... 점점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자신을 이끌고 가는 여성.

느낌이 찝찝했지만 제대로 몸을 가눌 정신도 없었기에 그녀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호텔도, 모텔도 아닌 작은 승합차였다.

"뭐야? 이 차는?"

드르륵!

"어어?"

차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뻗어 나온 수많은 손아귀에 잡혀 순식간에 차 안으로 끌려 들어가 버린 조문규.

툭.

보조석 창문이 열리고, 여성에게 봉투를 건넨 승합차가 출발하자 여성도 조용히 그길로 사라졌다.

* * *

촤악~!

"어푸푸...! 뭐, 뭐야?"

복면을 벗기자 찌푸린 눈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강렬한 빛. 그리고 연이어 덮쳐 오는 차가운 물벼락에 술기운이 달아난 조문규가 눈을 번쩍 떴다.

주변을 둘러봐도 알 수 있는 건 이곳이 허름한 창고 안이라는 것뿐. 정면에는 한눈에 봐도 위험해 보이는 베트남 청년들이 연장을 꼬나든 채 도열해 있었고....

그 앞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의자에 다리를 꼰 상태로 앉아 있었다.

"안녕?"

최강태가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조문규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

"뭐, 뭐야? 너 누구야! 이거 당장 안 풀어?"

"아직도 상황 파악 안 돼? 너 납치된 거야."

"나, 납치?"

조문규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눈앞의 남자는 외모나 말이나 한국인이 분명했는데....

기껏해 봐야 스무 살 안팎으로 보이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을 납치해서 이곳으로 끌고 올 이유가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 얘들은 신경 쓰지 마. 내가 명령하기 전까지 움직이는 일은 없을 테니까. 베트남 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성실하고 착하더라고. 돈 주니까 말 잘 듣던데? 물론 내 돈이 아니라 네 돈이지만."

"뭐, 뭐라고? 너 한 푼이라도 내 돈에 손대기만 해 봐!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찢어 죽여 버릴 테니까!"

"네, 네~ 그건 너 알아서 하시고요.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너 유재아라고 알아?"

"유재아? 그게 누군데? 그딴 년 모르니까 당장 이거 풀어! 너 지금 실수하는 거야. 씨발 새끼야, 나 사라진 거 알면 내 동생들이 무슨 수를 써서든 여길 찾아낼 거고, 갱단 애들 끌고 와서 네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거다! 그러니까 빨리 풀어! 안 풀어?"

조문규가 이토록 당당할 수 있었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문규와 그의 두 동생은 몸속에 GPS칩을 이식하는 수술을 했는데, 그것 덕분에 서로 어디에 있든 반드시 추적해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동생들만 무사하다면 동생들은 반드시 자신을 찾아낼 것이었다.

이것은 의리 같은 게 아니었다. 행동력은 좋지만 머리가 딸리는 두 동생들은 본인들의 분수와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자신을 찾을 거라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문규의 희망은 최강태의 말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뭐? 동생이라면 얘네들?"

딱.

최강태가 손가락을 튀기자 베트남 갱단원들 몇몇이 피범벅이 된 고기 덩어리 두 개를 끌고 와 그의 앞에 던져두었다.

"...!"

눈을 부릅뜨며 입을 벌리는 조문규.

전신이 피범벅이 되어 간신히나마 숨이 붙어 있는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동생들이었던 것이다.

"어쩌냐, 믿었던 동생들까지 그 꼴이라서."

"대, 대체 저한테 바라시는 게 뭡니까? 원하시는 게 있다면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조문규의 모습에 최강태는 고개를 주억이며 씨익 미소를 그렸다.

"자세가 아주 바람직해졌구만.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니.... 좋아. 기회를 줄게. 그냥 간단한 퀴즈만 맞히면 돼. 맞추는 즉시 풀어 줄 거지만, 틀리면 조금 따끔한 벌칙이 있겠지. 어때? 그냥 죽을래? 아니면 도전해 볼래?"

"퀴, 퀴즈요? 그거 정말이죠? 정말 퀴즈만 맞추면 풀어 주는 거죠? 혹시 일부러 못 맞힐 퀴즈를 내는 건...."

"그건 걱정 마. 네가 답을 알고 있는 문제들이고 난 거짓말 안 하거든.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최강태의 스산한 미소에서 불길함을 느낀 조문규였지만 거절할 이유도, 그럴 여유도 없었기에 곧바로 승낙했다.

"하죠! 그래서 문제는요?"

"자~ 그럼 문제 나갑니다. 사진 속 인물은 누구일까요?"

최강태는 크게 인쇄한 사진을 조문규에게 보여 주자, 조문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인물 퀴즈라길래 당연히 역사 속 위인들이나 연예인을 생각했던 조문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의 등장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자, 잠깐만요! 저 여자애는...!"

"자~ 카운트 들어갑니다. 5, 4, 3, 2...."

조문규는 비 오듯 식은땀을 흘리면서 입술을 달싹였지만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납치한 여자라는 건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이름까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1."

"유, 유재아!"

방금 최강태의 입에서 나온 유재아라는 이름을 간신히 떠올린 조문규가 간발의 차이로 답을 외쳤다.

그러자 최강태는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고, 그게 정답을 맞혀서 김이 빠졌다는 뜻으로 착각한 조문규의 입꼬리가 서서히 말려 올라가던 순간.

"땡! 답은 엄지은 씨였죠. 우리 도전자 조문규 씨께서 2년 전에 납치해 중국으로 팔아 버리신 분인데 기억 안 나셨나요? 안타깝네요. 자~ 그럼 벌칙 수행하겠습니다!"

최강태가 조문규의 돈으로 고용한 베트남 갱단원이 무감정한 표정으로 해머를 들어 올렸다.

그가 여자들을 납치해서 팔아 번 바로 그 돈으로 고용한 갱단원이 말이다.

"자, 잠깐...! 안 돼!"

콰직!

"끄아아아아아아악!"

해머는 무정하게도 조문규의 발등을 그대로 부숴 버렸다.

조문규의 끔찍한 비명 속에서도 최강태는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도전자께서는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도전자께서 열심히 활약해 주신 덕분에 문제는 아직도 더럽게 많이 남아 있으니까."

"아아...."

콰직! 으드득! 빠각! 퍼억!

그날, 아무도 찾지 않는 베트남 창고에는 섬뜩한 파육음과 고통에 찬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고....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57화 나의 주인, 나의 마왕

"티, 팀장님! 팀장님!"

"웬 호들갑이야? 운석이라도 떨어졌냐?"

"그게 아니라, 빨리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뭔데 또...."

팀원들의 재촉에 강북서 출입구를 나선 최정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피 떡이라는 말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세 명의 남자가 빨간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된 채 출입구 앞에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거...."

"이건 또 뭔데?"

"모르겠습니다. 저놈들 위에 곱게 놓여 있던데요?"

최정산은 김상태가 건네준 분홍 봉투를 개봉하여 내용물을 확인하였다.

[선물입니다. -고스트가]

"쓰벌...."

"뭐라고 적혀 있길래 욕이 튀어나옵니까?"

"선물이란다, 이것들이. 너는 가서 이것들 신원 조회해보고 일단 이것들이 여기로 옮겨졌을 당시의 CCTV랑 목격자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경찰들을 건너편 건물 옥상 난간에서 확인한 최강태는 아버지를 향해 살포시 미소를 그리며 거수경례를 가볍게 올렸다.

"항상 수고가 많수. 그럼...."

검은 연기와 함께 최강태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깊은 밤.

종이 박스를 가득 실은 리어카가 힘겹게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콜록, 콜록...!"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는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르자 기침을 토했지만 할머니의 위태로운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전에도 폐지를 주워 팔고, 오후에도 폐지를 주워 팔고, 여전히 쉬지 않고 저녁까지 나와 폐지를 줍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

손녀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

자신이 대신 죽었어야 했는데... 아직 어린 손녀딸을 먼저 보낸 회한과 슬픔이 할머니의 마음을 지독하게도 괴롭혔다.

하지만 무엇보다 할머니를 괴롭힌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다.

손녀딸을 지켜주지 못한 할미가 무슨 염치가 있어 낯을 들고 살까? 남은 손자라도 번듯하게 키우고 싶어서, 아쉬운 소리 듣고 살지 않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그런데....

빵빵!

"아, 씨발! 할매, 좀 비키라고! 길 전세 냈어?"

뒤따라 언덕을 오르던 노란색의 고급 스포츠카가 경적을 울리더니 운전석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젊은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는 갓길로 리어카를 끌고 있었던 데다가 맞은편에 오는 차도 없어서 얼마든지 지나갈 수 있었지만 남자는 일부러 경적을 울리며 할머니를 위협한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저 운전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리어카를 더욱 갓길로 붙일 붙였다.

어찌나 가까이 붙였는지 연석에 리어카 바퀴가 닿아 덜컹거릴 정도였지만 더욱 황당한 건 그럼에도 스포츠카는 지나가지 않고 계속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할머니가 먼저 가라는 듯이 언덕길에 겨우 멈춰 서서 손짓하자 마지못해 지나가는 스포츠카.

그런데....

"아나, 개민폐네, 할매가. 씨발 그러니까 이 야밤에 리어카는 왜 끌고 나와서 길막을 하고 지랄이야."

"오빠, 너무 그러지 마. 흙수저로 태어나 추하게 늙은 것도 서러울 텐데."

"그게 왜 내 탓이야? 할매가 가난하게 태어난 게 죄지. 안 그래, 할매?"

"에이, 또 그런다. 미안한데 할머니, 이것도 좀 버려 줄래요?"

할머니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들으라는 듯이 창문을 열고 소리치는 남자와 그런 그를 말리는 척 할머니를 비웃는 그의 여자 친구.

심지어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 친구는 부탁을 빙자하여 마시고 있던 뜨거운 커피를 리어카에 던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다 뚜껑이 열려 김이 펄펄 피어오르는 커피가 옷에 튀자 화들짝 놀란 할머니가 몸을 떨었지만 여자는 풉 하고 비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 실수. 할머니 미안."

"븅신! 크크!"

부아앙!

그렇게 속도를 내서 순식간에 언덕을 넘어 사라진 스포츠카. 하지만 얼마나 놀랐는지 할머니는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 * *

"아, 씨발 냄새.... 방금 창문 열었을 때 살짝 들어온 거 같은데. 냄새 배이겠네. 좆 같은 거."

"난 진짜 저렇게 추하게 늙지는 말아야지. 아니, 저렇게 늙으면 그냥 자살할 거야."

"근데 왜 아직도 살아 있어?"

"뭐래, 죽을래?"

"ㅋㅋㅋ 농담이야. 농...."

끼이이익!

"꺄아아악!"

그 순간, 말을 끊은 남자는 눈을 부릅뜨며 핸들을 옆으로 꺾었다. 갑자기 차도로 뛰어든 검은 실루엣 때문이었다.

콰앙!

결국 인도에 차를 들이받은 남자. 다행히 사람을 치지는 않았지만 놀란 가슴은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뭐야! 오빠, 미쳤어?"

터진 에어백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여자 친구가 차에서 내려 분개했다. 그에 덩달아 차에서 내린 남자가 도로를 가리키며 변명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방금 도로에 검은 고양이 같은 게 튀어나와서...."

"검은 고양이? 그딴 게 어디 있는데!"

"저, 저기... 응?"

그러나 고양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고양이뿐만 아니라 다른 차들도, 사람도, 마치 자신들만 다른 세상에 고립된 것처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않는 줄 알았다. 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뭔데 이건 사람 가는 길을 처막고 지랄이야?"

콩.

최강태는 자신의 앞을 들이박은 스포츠카를 발로 툭 찼다. 조금만 옆으로 비켜서 들이박았으면 끔찍한 사고가 날 뻔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최강태처럼 자칫 잘못했으면 인명 사고로 이어질 뻔했던 문제를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또 있었다.

"뭐야, 이 미친놈은? 야! 너 이 차가 얼마짜리인 줄 알아?"

이미 전면부는 대파되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차가 무시받자 잔뜩 성이 난 남자가 최강태에게 성큼성큼 걸어와 손을 뻗었다.

턱, 으드득...!

"끄아아아악! 팔목! 내 팔목 부러진다!"

"오, 오빠!"

하지만 잡으려던 멱살은 어디 가고 오히려 최강태가 자신의 팔목을 가볍게 잡아 꺾자 남자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강태는 스포츠카를 스윽 훑어보더니 그의 손목을 놓아주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이 차가 그렇게 비싸?"

최강태의 질문에 남자는 부러진 손목을 부여잡고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악에 바쳐 소리쳤다.

"다, 당연하지! 못 해도 2억은 넘는다고! 너... 각오해. 네가 파손한 분만큼 돈 몇 백은 우습게...."

번쩍!

'...!'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두 사람은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갑자기 최강태가 손을 뻗더니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차를 한 손으로 잡아 들어 올린 것이다.

그러나 진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쾅쾅쾅쾅쾅쾅...!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린 차를, 무슨 두더지 잡기라도 하듯 바닥에 연신 내리찍는 최강태.

한 번 바닥과 충돌할 때마다 처참히 부서져 나간 스포츠카는 이내 원형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최강태는 스포츠카였던 고철을 바닥에 툭 던져 놓더니 그것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이젠 얼만데?"

"그, 그게...."

남자도 그의 여자 친구도... 지금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 그것도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끔찍한 악몽.

아니면 어떻게 사람이 한 손으로 차를 들어 올려 장난감처럼 망가트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심장을 서늘하게 파고드는 악마의 짓궂은 미소를 보고 있으면 싫어도 이게 현실임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강태는 어느새 가랑이 사이가 축축하게 젖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너희는 얼마야?"

"...!"

* * *

놀란 가슴을 어느 정도 추스른 할머니가 다시 리어카를 끌고 올라가려 했다.

한 번 멈췄던 만큼, 무거운 리어카를 다시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대로 내려갈 수도 없었다.

언덕 정상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제법 많은 양의 박스를 수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다시 다리에 힘을 주는데....

'응...?'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리어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뒤에서 누군가가 밀어주는 것처럼.

할머니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리어카에 쌓인 폐지 때문에 좀처럼 뒤쪽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의문을 한 아름 안고 열심히 발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언덕 정상에 위치한 편의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고, 다리야.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할머니는 다리를 두들기며 리어카 뒤로 향했다. 하지만 리어카 뒤에는 아무도 없었고....

'뭐지? 벌써 갔나?'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도와준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할머니, 이거 드세요. 많이 힘드셨죠?"

"...!"

할머니... 정순자의 눈이 커지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을 도와준 고운 처자가... 편의점에서 급하게 따뜻한 두유를 사서 건네주는 소녀의 미소가,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아야...! 우리 재아, 왜 이제 돌아왔어. 할미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자신의 손녀, 유재아를 꼭 빼닮은 그녀의 모습에 정순자는 오열하며 그녀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자 소녀는 다급하게 정순자를 말리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하, 할머니, 오해세요. 저는 재아가 아니라 재아 친구 윤아라고 하는데요."

"유, 윤아? 재아가 아니라?"

그제야 눈물을 닦고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정순자. 그녀의 말처럼 재아와 닮긴 했지만 확실히 다른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네... 재아가 혹시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랑 자기 동생을 부탁한다고 해서 와 봤는데, 괜찮으세요?"

"재아... 우리 재아 불쌍해서 어떡해.... 하늘도 무심하시지! 데려가려거든 재아 대신 이 할미를 데려가든가!"

"할머니!"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 내는 정순자. 윤아는 그런 할머니를 부축하며 꼬옥 안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실대로 밝히고 싶었다. 자신이 재아라고.... 할머니 눈앞에 있는 윤아가 바로 당신 손녀딸이라고....

하지만 밝힐 수 없었다. 사실을 밝히는 순간, 자신은 소멸할 거라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기억도 모두 사라지고 흔적조차 남지 않을 거라고.

그것이 자신의 주인... 최강태, 마왕과의 계약이었다.

[가족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다 할게요! 그러니 제발....]

방금 전, 정순자가 스포츠카를 타고 있던 남녀에게 무슨 꼴을 당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 본 유재아는 최강태에게 필사적으로 사정했다.

[죽음이라는 순리를 거스르고 다시 가족들을 만나겠다라.... 괜찮겠어? 지켜보는 것보다 더 지옥이 될 수도 있는데?]

[상관없어요. 저는 제 손으로 가족을 지키고 싶어요. 이렇게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건.... 더는 참을 수 없어요!]

[보던 중 제일 마음에 드는 모습이네. 좋아. 계약을 하자. 너에게 새로운 육신을 주지. 대신 너는 네 정체를 누구에게도 발설해선 안 돼. 그 순간 네 존재는 소멸하고 네가 존재했던 흔적들도 모두 사라질 거거든.]

[네! 할게요. 그런데 전 주인님께 뭘 드리면 되죠? 이젠 정말로 더 이상 가진 게 없는데....]

[넌 그냥 내가 주는 육신으로 가족들 곁에서 열심히 살아가면 돼. 평생 동안 널 그리워하는 가족들 옆에서 네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가족들을 지켜봐야 하는 너의 괴로움이 곧 나의 양식이자 마력이 될 테니까.]

그때는 최강태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저 가족을, 할머니와 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말한 괴로움이 무엇인지, 심장을 뜯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왜 가슴이 욱신거리는지....

'그래도 감사드려요. 나의 주인, 나의 마왕이시여....'

괴로움을 감내할지언정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할머니를 안아 드리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테니까.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58화 한계 배틀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 아부지."

"그러게."

결전의 장소를 목전에 두고 최강태의 긴장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S의 회원들을 가지고 놀고, 그 어떤 기업이나 조직들도 발아래에 놓고 깔보던 그가 이토록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최강태는 그런 자신의 심정이 잘 드러난 낮게 깔린 목소리로 아버지, 최정산에게 물었다.

"준비는?"

척!

최강태의 물음에 최정산은 품속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보이며 대답했다.

"서장님께서 직접 하사하신 개카다. 백만 원 이상 못 긁으면 시말서 쓸 각오하라더군."

"별걱정을 다 하시네. 한도는?"

"무제한."

"캬~ 역시 우리 서장님! 클라스가 남다르시다니까. 사랑합니다!"

최강태가 두 손을 높이 뻗으며 마필중에게 고백하는 사이, 어느새 가게 안으로 들어간 가족들 중, 길서연이 문을 열고 빼꼼 고개만 내밀었다.

"뭐 해? 안 들어와?"

"신경 쓰지 말고 놔둬. 일행이라고 오해할라."

"요새 저 둘이 죽이 착착 잘 맞네. 무슨 일 있나?"

"오빠야 원래 이상했지만, 요새 아빠도 만만찮은 것 같던데."

"그, 그래도 멋있잖아요. 강태도, 아저씨도."

길서연과 최유진이 심도 깊게 부자의 정신 상태를 체크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이민정이 두 사람을 따라갔다.

"크흠! 좀 춥네. 우리도 들어...."

모녀의 대화에 뻘쭘해진 최정산이 옆을 쳐다봤지만 거기에 아들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어느새 누구보다 빠르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 * *

"음~ 비싼 가게라 그런지 밑반찬부터 때깔이 다르네."

기본 상차림의 밑반찬을 맛본 길서연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길 여사의 인증 마크라면 기본 하나만큼은 확실한 음식점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일까? 최유진과 이민정도 간간히 밑반찬을 집어먹으며 젓가락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간이 너무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게 딱 좋은데? 이것만 해도 밥 한 공기는 먹을 수 있겠다. 오빠 너, 밥 먹을...."

"저기요! 여기 밥 한 공기 추가요!"

"...."

이미 최강태의 앞에 비어 있는 밥 한 공기를 발견한 최유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문하신 횡성 한우 투 플러스 꽃모둠 나왔습니다."

"와...."

"헐...."

"대박...."

직원이 가져온 한우 모둠이 담긴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며 그저 탄성만 터트렸다.

쉬지 않고 터져 나오는 핸드폰 카메라 플래시.

지금까지 괜찮은 연기력으로 호평받았던 조연들이 초라해보일 만큼 주연은 그 비주얼만으로도 압도적인 무대 장악능력을 보여 주었다.

"이런 말 하긴 뭐한데... 왜 고기가 아름답지?"

"세상에... 마블링 봐."

치이익...!

그 순간, 직원이 고기 한 점 한 점을 빠르게 숯불 위로 올려 굽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눈동자도 더욱 반짝였다.

"자~ 그럼 고기 익기 전에 빨리 잔부터 드시고."

길서연의 말에 그녀와 최정산은 시원한 맥주잔을, 최강태와 최유진, 이민정은 각각 콜라와 사이다가 든 잔을 들었다.

"크흠! 버닝 게이트 수사를 훌륭히 완수하시고 멋지게 1계급 특진해서 광수대 1팀 팀장으로 발령받으신 우리 최정산 경감님,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내가 운을 띄워 주자 최정산은 볼을 긁적이다가 멋쩍게 웃었다.

"하하하, 이게 뭐, 나 혼자 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고. 여러모로 도와준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지. 특히 든든하게 후방 지원을 맡아 주신 우리 길 여사님께 이 영광을 모두 바칩니다."

"오올~ 아버지 센스!"

"이크, 이러다 고기 타겠다. 아무튼 건배!"

"건배!"

건배사를 마치고 음료를 들이켜는 사이 어느덧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었다.

"이 부위는 치마살이고요. 육즙과 지방이 풍부해서 새순이나 죽순 같은 야채와 함께 싸서 드시면 단맛과 쫄깃한 감칠맛을 함께 느끼실 수 있습니다."

직원은 오래된 경험과 노하우를 통해 먹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면서 알맞게 익은 고기를 가족들에게 나누어 배분했다.

하지만....

"아, 저는 됐으니까 다른 사람 먼저 주세요."

"오빠 너... 미쳤니?"

"세상에...."

단호하게 고기를 거절하는 최강태의 모습에 가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실 누구보다 먼저 불판에 달려들 줄 았았던 최강태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한껏 진지한 모습으로 인내했던 것이다.

"고작 방금 먹은 밥 두 공기 정도로 배가 찼을 리도 없고...."

"갑자기 배가 안 좋아졌나?"

"강태야, 너 어디 안 좋아?"

가족들의 걱정에도 요지부동인 최강태.

"설마 오빠 너...!"

그런 최강태의 진의를 꿰뚫어 본 사람은 단 한 명. 여동생 최유진 뿐이었다.

그때였다.

"어? 저것들은 다 뭐야?"

"누가 저렇게 많이...."

"단체 손님이 예약이라도 잡았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꽃모둠(특) 행렬. 모둠을 담은 접시는 가족들의 옆 테이블로 세팅되었고....

드르륵.

"응?"

가족들의 시선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최강태에게 집중되었다.

최강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수저를 챙겨 옆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앉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거기 있으면 아무도 못 먹어."

"...!"

너무나도 담대한 선전포고. 그러나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가족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하지만 저건 너무 많지 않아?'

그러나 그건 쓸데없는 걱정에 불과했다.

치이익~!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기름을 뚝뚝 흘리는 고기들이 살짝 갈색 빛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어김없이 최강태의 젓가락이 찾아왔다.

"허어~!"

뜨거운 김을 불어 내면서도 쉬지 않는 턱.

씹을 때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육즙과 기름의 찬가의 혀가 즐겁고, 위가 즐겁고, 영혼까지 즐거웠다.

와구와구~!

구운 고기는 구운 고기대로, 생고기는 생고기대로 기름장에 살짝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최강태.

맛있게 숙성된 투 플러스 한우 생고기는 기름장만 살짝 찍어도 그 자체로 진한 육향과 풍미로 입이 행복했다.

문제는 속도였다.

"여기 모둠특 세 개 추가요! 그리고 차돌 된장 하나랑 밥 세 개 더 주시고. 그나저나 속도가 영 안 나네. 나 이러면 텐션 떨어지는데...."

최강태의 중얼거림에 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렸다.

숙련된 직원들이 불판을 두 개나 사용하고도 최강태의 먹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켜. 내가 구울 테니까."

"사, 사장님!"

결국 보다 못한 사장이 직접 출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과연 사장이라고 해야 할까? 혼자서 두 개의 불판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최강태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고작 그 정도로 이 몸을 감당할 수 있겠어?'

'어쭈? 한번 해보자는 거지, 지금?'

"여기 빈 테이블에 숯불 두 개 더 올려!"

"수, 숯불을 두 개 더요?"

"빨리!"

마치 응급 환자를 눈앞에 둔 의사처럼 다급하게 소리치며 고기를 불판 위로 올리는 사장.

'단순히 굽기만 해서는 안 된다! 한 점도 태우지 않고 최상의 맛과 퀄리티로 네놈을 쓰러트려 주마!'

'기개는 가상하다만 글쎄... 그게 과연 가능할까?'

불판의 열기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살아 있는 눈매로 최강태를 힐끔하는 사장, 그런 사장에게 호응하듯 한껏 거만한 얼굴로 고기를 한 움큼 입에 집어넣는 최강태.

그러나 승부는 더 이상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와~ 대박. 저걸 혼자서 다 먹는다고? 먹방BJ인가?"

"저만한 양은 해밥도 안 될걸. 고기를 그냥 빨아들이는 수준인데?"

"사장님도 장난 아니다. 혼자서 불판 네 개를 도맡아 굽는데 한 점도 태우는 게 없네."

"와... 이거 실화냐? 세계관 최강자들의 싸움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지네."

두 남자 사이의 뜨거운 진검 승부에 어느덧 식사 중이던 다른 손님들조차 하나둘 모여들어 구경하거나 폰으로 촬영을 시작했고....

옆에서 힐끔힐끔 구경하던 최정산이 아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여보 당신은 둘 중 누가 이길 것 같아?"

"쓸데없는 거 신경 쓰지 말고 고기나 먹어요. 괜히 아는 척 해서 일행인 거 티내지 말고. 여기 고기 진짜 맛있네. 한 판 더 시킬까? 어차피 우리 돈도 아닌데."

"난 찬성~ 언니는?"

"저도 그럼 조금만 더...."

'힘내라. 아들! 넌 할 수 있어!'

홀로 유일하게 아들을 마음속으로 응원하던 최정산도 젓가락을 들어 살치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맛있다!"

* * *

"결제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잘 먹었습니다."

"아~ 잘 먹었다!"

식사를 마친 식구들이 기분 좋게 가게를 나서고....

"아쉽게 됐네요. 오랜만에 붙어 볼 만한 호적수였는데."

"하하하! 이 승부는 부디 다음 기회에 결판을 내도록 하죠. 그때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귀빈을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은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오늘 두 사람의 승부는 무승부.

사장은 단 한 점도 태우지 않고 최상의 퀄리티로 고기를 대접했으며, 최강태는 단 한 점도 남기지 않고 주문한 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문제는 고기의 수량이었다.

[저, 사장님! 꽃모둠 특짜리가 전부 소진됐는데요? 개별 부위로 내갈까요?]

창고에서 고기를 체크하던 직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최강태는 젓가락을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사장도 그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

최강태는 결코 배가 불러서 젓가락을 놓은 게 아니었다. 사장도 그걸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은 이유는 단 하나.

이 승부는 투 플러스 횡성 한우만을 취급하는 본점에서도 가장 비싼 가격만큼이나 높은 퀄리티를 자랑하는 꽃모둠(특)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가족들.

"뭐 하는 거래니? 저 두 사람."

"몰라. 자기들만 아는 끈끈한 뭔가가 있나 보지."

"어? 손님들이 강태한테 사인받고 있는데요?"

"먹방 BJ인 줄 알았나 보네. 아니지, 이참에 정말 먹방BJ로 데뷔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와꾸도 나쁘지 않고, 먹는 거야, 뭐... 굴삭기로 퍼먹어도 거뜬한 인간이니까. 두 분 생각은 어때? 괜찮지 않아?"

"먹방BJ? 그거 돈 많이 번대?"

"장난 아니지. 인기 많아지면 광고 찍고 방송 출연하고 월 억대도 벌 수 있을걸."

"그래?"

월 억대라는 딸의 말에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는 길서연.

그렇게 모녀가 최강태의 장래를 설계하는 동안,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는....

띠링.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문자 착신음에 집에서 뉴스를 보고 있던 마필중은 기분 좋게 웃으며 폰을 확인했다.

"응? 그러고 보니 최정산이 가족들 회식 날짜가 오늘이었던가? 이 친구 또 형님 카드라고 손 벌벌 떨면서 얼마 못 쓴 거 아냐?"

최정산의 성격이라면 그럴 만했다.

길서연과 같이 산 세월이 길어서 그런가, 검소가 몸에 배었는지 회식하라고 카드를 줘도 중국집에서 탕수육과 양장피 정도를 추가시키는 게 전부였으니까.

물론 그것 때문에 큰 소리 치면서 개인 카드를 건네준 것도 있었지만.

"어디 보자~ 그래도 정산이 성격에 50만 원이라도 썼으면 노력한...."

그날 밤.

게거품을 문 채 기절한 마필중이 병원으로 실려 갔다.

* * *

후욱, 후욱....

'언니, 나 너무 무서워.... 어디 있어? 빨리 데리러 와 줘.... 밖에 나가면 꼭 데리러 온다고 약속했잖아....'

"가영아~ 어디 있니? 더 있으면 해도 떨어지고 위험해요. 숨바꼭질 끝났으니까 얼른 나오자. 교회로 돌아가야지?"

가까워지는 발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작은 몸뚱이가 애처롭게 떨었다. 제발 그대로 지나가라고, 자신을 찾지 말아 달라고 신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건만....

불쑥!

"꺄아아악!"

수풀 앞에 멈춰 선 두 다리 아래로 불쑥 남자의 얼굴이 거꾸로 튀어나오자 가영이의 입에서 찢어질 듯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 가영이를 보며 씨익 미소를 그리는 남자.

"여기 있었네? 우리 가영이~ 그러니까 전도사님이 항상 말했잖아. 전도사님은 숨바꼭질 도사라서 우리 가영이가 어디로 숨든 다~ 찾아낼 수 있다고."

"...!"

"이제 교회로 가야지?"

"자, 잘못했어요! 저 정말로 교회 가기 싫어요! 무섭단 말이에요...!"

닭똥 같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가영이를, 전도사는 웃으며 끌고 갔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59화 성천주 교회

"거룩하신 성천주님의 사랑 한이 없고, 그분의 성육신 하늘 아버지 만세무궁이로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박수를 치며 즐겁게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들.

행복한 미소, 들뜬 분위기.

어딜 봐도 평범한 종교 활동이고, 교회의 모습이었다.

"이 정도로 하늘 아버지께서 듣고 기뻐하시겠습니까? 자 박수 소리도, 목소리도 더 크게~!"

전도사 조만식이 강단에서 사람들을 부추기며 분위기를 더욱 끌어 올렸다.

그에 어울려 맞춤용 단체 티셔츠를 차려입은 청년회가 더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분위기를 고조시키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하며 찬송을 따라 불렀다.

곧 교회 바깥으로까지 찬송가가 울려 퍼질 정도로 분위기가 고조되자, 드디어 이 자리의 주인공인 하늘 아버지, 서중권이 강단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 아버지!"

"이쪽 한 번만 봐 주세요!"

"사랑합니다. 하늘 아버지!"

서중권의 등장에 그동안 끌어올렸던 분위기가 미지근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폭발적인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심지어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거나 오열을 하는 등, 고작 모습을 드러냈을 뿐인데 그 반응이 열정을 뛰어넘어 광적이기까지 했다.

전도사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고 단상 위에 선 서중권은 신도들과 함께 찬양하며 분위기에 어울렸다.

때때로 서중권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면 신도들은 기이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찬양에 열을 올렸다.

만약 서중권과 신도들 사이에 청년회가 가로막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신도들은 몇 번이나 그를 향해 뛰어들지 않았을까?

그렇게 찬양을 마친 서중권이 눈을 감으며 두 손을 모았다.

"기도합시다."

서중권을 따라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 사람들.

그들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오늘도 거룩한 예배당에 어려운 걸음을 해 주신 형제자매님들께 성천주님의 은총이 있을지어다. 아멘."

"아멘!"

"성천주의 대리자이자 그분의 생육신께서 주관하는 자리에 감히 사탄 마귀가 침범하지 못할 지어다. 아멘."

"아멘!"

"사탄의 권세가 득세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탈출하여 성천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당신의 자녀들에게 무궁한 은총과 치유가 있을 지어다. 아멘."

"아멘!"

고작 기도가 끝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눈물을 흘리거나 숨이 가빠오는 신도들의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서중권은 그런 신도들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거룩한 자리에 모여주신 형제자매님들,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오늘도 사탄의 권세를 이겨 내고, 성천주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묵상하는 형제자매님들이야말로 구원의 방주에 오를 자격이 있음을 믿습니까?"

"아멘!"

"좋습니다. 그럼 오늘도 성천주님의 은혜로운 말씀 묵상하며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그 뒤 이어지는 설교는 별거 없었다. 신도들의 반응이 워낙 광적이고 적극적으로 호응해서 그렇지.

요는 성천주야말로 이 세상을 심판할 단 한 명의 유일신이며 서중권 본인은 성천주의 생육신... 그러니까 구원의 방주에 탈 자격이 있는 자신의 자녀들을 선별하기 위해 육신을 입은 성천주라는 것이다.

때문에 신도들은 성천주와 생육신인 서중권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를 성천주의 또 다른 이름인 하늘 아버지라고 불렀다.

멀쩡한 사람이 들었다면 미친놈이라고 욕하거나 개무시했을 이야기.

하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신도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에게 성천주는 정말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일신이었고 서중권은 그 신의 심판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줄 단 한 명의 구원자였으니까.

"왜 세상 사람은 다투고 싸우고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가?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탐욕과 질투라는 마귀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 똑똑합니다. 절대 멍청하지 않아요. 그것만 이겨 낸다면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입니다. 그런데 왜 마귀한테 지는 걸까요? 왜 탐욕과 질투를 떨쳐낼 수 없는 걸까요? 김춘식 성도님.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목을 받은 김춘식에게 서중권을 비롯한 모든 신도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에 얼떨떨해 하던 김춘식은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서, 성천주님을 믿지 않아서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야 마귀 사탄의 권세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분은 성천주님과 그분의 생육신인 하늘 아버지뿐이니까...."

"...."

김춘식의 대답이 끝났지만 서중권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만 들썩였다.

그에 신도들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김춘식이 자신이 잘못 대답했나 속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서중권이 고개를 쳐들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 서중권의 두 눈에서 눈물이 펑펑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목이 멘 목소리로 마이크에 대고 소곤거렸다.

"이렇게 지혜로운 김춘식 성도님들 무지하다고 멸시하고, 손가락질하던 세상 사탄 마귀들은 모조리 불지옥에 떨어질 지어다.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성도 여러분, 모두 참 진리를 깨우친 우리 김춘식 성도님께 뜨거운 축하의 박수 보내 드립시다."

짝짝짝짝짝짝짝짝...!

"더 크게!"

우레와 같은 축하의 박수와 환호 소리, 생전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와 칭찬에 김춘식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세히 뜯어보면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들.

하지만 서중권은 그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특유의 기세와 입담만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렇게 열광적인 예배가 끝나고....

성도들을 모두 배웅한 서중권은 자신을 따르는 청년회와 함께 어딘가로 빠르게 향했다.

"아이고, 우리 군수님, 기다리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공사다망하신 와중에도 한 주도 빼먹는 일 없이 와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가 찾아간 곳은 교회 뒤편에 위치한 주차장이었다. 거기서 군수, 장동필을 만난 서중권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군수는 무슨.... 예배당에 나왔으면 다 같은 하늘 아버지의 자식인 거 아니겠습니까? 오늘 하신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항상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제 안의 마귀 사탄이 전부 정화되어 마음이 깨끗해지니, 어떻게 한 주라도 예배를 빼먹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하여간 우리 군수님 신앙심을 다른 성도님들도 본받으시면 좋을 텐데.... 아 참, 이번에 저희 교회 과수원에서 사과를 수확했는데 이게 어찌나 달고 맛나던지. 군수님 차에 실어 놨으니까 댁에 돌아가셔서 가족분들과 맛나게 드시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가는 사이, 청년회에서 사과 박스 한 상자를 장동필이 타고 온 차의 트렁크에 실었다.

그러자 슬쩍 사과 박스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장동필의 비서가 장동필을 쳐다보더니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리는 장동필.

"성천교회에서 가꾸는 작물들이야 전 국민이 알아주는데 말해 뭐 하겠습니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 아버지."

"그럼 조심히 살펴 가십쇼, 군수님!"

서중권이 허리 숙여 인사하자 천천히 차를 타고 떠나는 장동필.

차가 사라질 때까지 숙인 허리를 펴지 못하던 서중권은 차가 사라지고 나서야 천천히 허리를 들더니....

"카악~ 퉤!"

그대로 가래침을 긁어모아 땅에 뱉었다. 그러고는 장동필이 사라진 방향을 싸늘하게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니미, 기생충 같은 날강도 새끼가 한 주를 안 빼먹고 돈 뜯어 먹으러 기어오네. 저 개새끼한테 신의 불벼락이 쏟아질 지어다. 아멘?"

"아멘."

"하늘 아버지, 서장님께서도 면담을 청하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 씨발. 하여간 이 나라가 망하면 그건 무능해서 망한 게 아니야. 나라에 도둑놈들이 많아서 망하는 거지. 내 피 같은 돈을 쪽쪽 빨아먹는 좇 같은 개쌍놈의 모기 새끼들."

다시 한 번 가래침을 긁어모아 뱉은 서중권은 숨을 고르더니 웃으며 말했다.

"바쁘신 분을 더 이상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죠. 자, 이동합시다."

* * *

교회의 일반적인 교리는 주일이 곧 안식일이라는 점이었다.

즉, 예배를 드리는 것과 의식주와 관련된 행위 이외의 모든 활동을 자제하고 그날 하루만큼은 편하게 휴식을 취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성천주교의 교리는 달랐다.

"성도님들, 조금만 더 힘냅시다. 몸을 혹사할수록 영혼이 맑아지고, 맑은 영혼에는 마귀 사탄이 침범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따라서 성도님들이 힘들다고 생각하면 그건 구원의 방주와 성천주님께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아, 아멘!"

청년회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사람들....

그들 중에는 벌써 열여섯 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도 심심치 않았다. 특히 일하는 사람들 중에 고령의 노인들이 많았기에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쿵!

"할머니!"

"할머니, 괜찮으세요?"

혹독한 노동에 버티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눈을 까뒤집으며 말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할머니.

그걸 발견한 청년회 회장, 한준회가 빠르게 달려오더니 서둘러 할머니의 맥을 짚었다.

그 순간, 눈을 크게 뜬 청년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는 게 아니겠는가?

그는 두 손을 모아 쓰러진 할머니 앞에서 기도를 드린 후 눈을 뜨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외쳤다.

"이정자 성도님께서는 불철주야 몸을 아끼지 않고 교회와 하늘 아버지를 위해 헌신한 끝에 드디어 구원의 방주에 오르셨습니다. 모두 축하의 박수를 보내 줍시다!"

짝짝짝짝짝!

울면서 박수를 치는 한준회.

보통의 상황, 보통의 사람이라면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호통을 치고 구급차를 불렀겠지.

그러나....

짝짝짝짝짝짝짝...!

"축하해요. 정자 할머니!"

"정자 할머니가 하늘 아버지를 위해서 헌신하기는 정말로 열과 성을 다 바치셨지, 암!"

"세상에 얼굴 평온하신 것 좀 봐. 부럽다...."

부러움과 선망이 가득한 얼굴들.

더러는 박수를 치고, 더러는 기도를 하며, 죽은 이정자 할머니를 축하했다.

"자~ 여러분도 열심히 노력하고 헌신하면 구원의 방주에 오를 수 있습니다. 모두 이정자 신도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하늘 아버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합시다."

사람들은 더욱더 열과 성을 다해 일했다.

착취를 당한다는 생각은 일절 없는지 코피를 흘리며 대충 닦아 내고, 잠이 오면 청년회에서 주는 음료를 마시며 어떻게든 버텨 냈다.

딴에는 하늘 아버지가 기도를 올린 성수라고 하는데....

정말로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이 주는 음료만 마시면 오던 졸음이 싹 달아나고 몸에 활력이 넘쳤다.

문제는 음료를 마실수록 머릿속에 그 음료밖에 생각이 안 난다는 것이었지만.

하지만 모두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교회와 서중권을 위해서 봉사하는 건 아니었다.

* * *

그날 저녁.

"그러니까... 이 성도님들이 성천주님과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싫어서 도망갔다가 잡혀 온 분들이라고?"

"예, 미처 교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하늘 아버지."

"벌할 것이 뭐가 있겠어요. 우리 청년 회장님이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헌신하는 거야 성천주인 내가 다 알고 있는데."

짜악!

말과는 다르게 곧바로 한준회의 뺨을 망설임 없이 올려붙이는 서중권.

한준회가 곧바로 고개를 다시 원위치로 돌리자 이번에도 서중권은 따귀를 있는 힘껏 갈겼다.

짜악! 짜악! 짜악!

뺨이 붓고, 코피가 터지고, 입술이 찢어져도 한준회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서중권은 그런 한준회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에 묻은 자신의 피를 닦아 냈다.

"청년 회장이니까 딱 이 정도로만 끝내는 거예요. 성천주님은 실수에는 관대하지만 잘못에는 자비가 없는 분인 거 아시죠?"

"명심하겠습니다."

고갯짓으로 한준회를 옆으로 물린 서중권이 잡혀 온 신도들을 훑어보며 싱긋 미소를 그렸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거기에는 전도사 조만식의 손에 잡혀온 신가영의 얼굴도 있었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60화 진짜 성천주?

다시 시간을 돌려 최강태가 폐교에 있었을 당시였다.

"그러니까, 다른 계약을 하고 싶다고?"

끄덕.

눈앞의 원혼, 신지혜 역시 유재아와 마찬가지로 확실히 특이한 원혼 축에 속했다. 복수보다는 다른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저를 죽인 놈들도 밉지만 그놈들에게 원한을 갚는 것보다 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해야 할 일?"

-혹시 강원도에 있는 성천교회라고 아세요?

"아, 성천교회! 모르는데, 왜? 거기 무슨 문제 있어?"

신지혜는 어두운 표정으로 자신의 사정을 고했다.

-저희 부모님은 평범한 분들이셨어요. 아버지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셨고 어머니는 전업 주부셨죠. 올해로 열네 살의 여동생도 있고요. 동생이랑은 항상 싸우기만 하고, 그러다 엄마에게 꾸중이나 듣고, 그냥 그렇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줄 알았어요. 작년까지는....

"딱 보니 뭐가 삐끗했구만?"

어느새 자리를 잡고 앉은 최강태가 어디서 났는지 모를 팝콘을 뜯기 시작했다.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서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정리 해고를 당하셨어요. 그 탓에 가족들은 잘못하면 길거리로 쫓겨날 판국이었고.... 어쩔 수 없이 저희 가족은 강원도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죠. 저희 사정을 들은 작은할아버지가 강원도로 부르셨거든요.

"딱 보니 작은 할아버지가 성천 뭐시기랑 연관이 있구만?"

-네... 작은 할아버지는 그때 당시 이미 성천교회의 열렬한 신도셨더라고요. 그리고 부모님을 하늘 아버지라는 인간... 아니, 악마에게 소개시켜 줬어요.

"하늘 아버지?"

-성천교회의 목사예요. 자신이 유일신인 성천주의 성육신이라나, 뭐라나...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하면서.... 한눈에 봐도 사이비 냄새가 팍팍 나더라고요. 그런데 더 웃긴 건 저도 처음에는 그 악마가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는 거예요.

"딱 보니 하늘 뭐시깽이가 팍팍 지원해 줬겠구만. 집이라든지 가전제품이라든지 생활비라든지."

-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직접 본 것도 아니신데....

"뭐, 나 정도 되면 앉아만 있어도 별의별 경험을 다 하는 법이지. 예를 들어 장가도 안 갔는데 아들딸이 있다거나, 나도 모르는 내 분신이 있다거나."

최강태가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타락한 용사를 쓰러트리며 마왕의 몸으로 세계의 구원자가 된 최강태.

그러다 보니 온갖 날파리가 꼬이는 건 기본이었는데, 그 가운데 자신을 사칭하거나, 혹은 자신의 자녀를 사칭하여 사이비 종파를 일으키는 놈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사기꾼들의 레퍼토리를 지겹도록 경험하다 보니 그의 말처럼 딱 보기만 해도 견적이 나오는 것이다.

-맞아요. 말씀하신 대로 그자는 가진 것 없이 쫓겨나다시피 강원도로 이사 온 저희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줬죠. 저희는 그게 독인지도 모르고 감사하다며 받아들였고요. 정신을 차려 보니 그 악마의 도움 없이는 더 이상 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이더라고요. 그때부터였어요. 그 악마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부모님은 헌신이라는 명목 아래, 짧게는 10시간부터 심할 때는 20시간이 넘는 노동을 강요받았지만, 그렇게 뼈 빠지는 노동 끝에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경찰에 신고도 해 봤지만 경찰은 교회를 찾아와서 조사하는 척만 하고 그냥 돌아갔어요. 오히려 경찰에 신고했다는 사실만 들켜서 그날은 혼자 24시간 동안 깜깜한 독방에 갇혀 있어야만 했죠. 이미 경찰도 한패였던 거예요.

"경찰뿐만 아니라 그 지역 행정 시설들은 전부 그 교주 녀석 돈을 좀 먹었을 거야. 본래 그런 쪽에 머리가 좀 돌아가는 놈들은 가장 먼저 하는 짓이 지역 유지들 매수거든."

-역시 잘 아시네요. 결국 저희 가족은 밤을 틈타서 도망가려고 했어요. 어딜 가든 이 지옥보다는 살 만할 테니까. 하지만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가지고 있던 차도 뺏긴 데다가, 마을 사람들은 전부 그 악마의 하수인이라 가족들의 힘만으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어요.

"당연히 실패했을 테고."

-네... 그리고 우리 가족을 잡아온 악마... 서중권 그 개새끼는 나랑 내 동생이 보는 앞에서....

쿠구구구구구....

그 순간.

피눈물을 흘리는 신지혜의 주변으로 공간이 흔들리자 원혼들조차 깜짝 놀라 거리를 두었다.

"호오~!"

최강태는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바라마지 않았던 특대용 충전기를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찾아낸 덕분이었다.

'이거 계약서 다시 써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