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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응, 내 알 바 아냐

"하암~"

최강태가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3학년 3반의 학생들이 모두 정면을 쳐다보며 자세를 고정했다.

이주연 패거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 흔들리는 동공, 잘게 떨리는 몸까지······.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저 범생이 때문에 이래?'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오는 최강태의 모습은 아무리 나쁘게 보려해도 범생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분명 키는 컸지만 나쁜 남자라기보다는 호남형의 순한 이미지가 더 부각되어 보였던 것이다.

그런 이미지는 졸려서 눈을 비비는 그의 모습과 한층 더 시너지를 일으켜 조금 얼빵하게 비치기도 했다.

"뭐야, 넌? 남의 일에 신경쓰지 말고 가서 잠이나 처 자지?"

다가온 최강태에게 경고하는 이주연의 말이 날카로웠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렇게 떠들면 내가 잠을 못 자잖니. 두 번 말 안 할게. 맴매 맞기 전에 너희 교실로 돌아가라."

흠칫!

맴매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학생들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리는 걸 나세림과 임솔아는 볼 수 있었지만 불행히도 이주연은 보지 못 했다.

"매, 맴매? 이제 보니까 미친놈이구나. 너? 너 혹시 내 남친이 누군지는 알고 개소리······."

짜악!! 우당탕탕···!

그 순간, 귀가 뻥 뚫리는 파육음이 터지며 이주연의 몸이 날아갔다.

그녀의 몸은 수 미터를 날아 교실 벽까지 날아갔고 그녀가 날아간 길을 따라서 엉망이 된 책상과 필기구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주, 주연아!"

"주연아!!"

그녀의 친구들은 눈을 부릅뜨며 이주연을 향해 달려갔다. 뺨이 검붉게 부풀어오른 그녀의 눈은 뒤집어져 있었고 정신은 완전히 놓은지 오래.

어떻게 따귀 한 번에 사람을 이렇게까지 날려버릴 수도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더욱 웃긴 건 책생과 필기구가 엉망이 된 학생들이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누구도, 최강태에게는 입 한 번 벙끗하지 못 한다.

그런 교실 분위기를 뒤늦게 감지한 상황 속에서 최강태를 쳐다보는 임솔아와 나세림의 시선이 이전과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

"두 번 말 안 한다니까. 그거 가지고 너희 교실로 돌아가. 아니면 너희도 두 번 말해야 하나?"

"아, 아냐!"

"돌아갈게! 지금 바로 간다고!"

임솔아와 나세림은 서둘러 이주연을 데리고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이민정은 놀람과 미안함이 뒤섞인 얼굴로 최강태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미안해. 또 도움만 받아서······."

"응? 뭐가?"

"방금 나 괴롭힘 당할까봐 도와준 거 아니야?"

"뭔 소리야?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고 해도 떠들어대니까 그냥 한 대 쥐어박아준 것 뿐인데. 하암~"

최강태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딱히 내 도움은 필요해 보이지도 않더만."

"······!"

최강태가 엎드리기 전 중얼거린 한 마디에 이민정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살풋 미소를 머금었다.

그에게는 별 거 아닌 얘기일 수도 있었겠지만 어쩐지 조금이나마 그에게 인정받은 느낌이 들어 가슴이 뿌듯했기 때문이다.

"점심 시간 되면 깨워."

"그때까지 자려고?"

"드르렁~ 퓨우~"

"하여간······."

이미 코까지 골며 자기 시작한 최강태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다시 자기 자리에 착석한 이민정이 1교시 교과서를 준비했다.

'미, 미친··· 쟤가 이민정이라고? 그런데 이민정이 누구였지?'

'아무튼 보아하니 반장이랑 사이가 가까운 것 같은데 혹시 여친은 아니겠지?'

'작업 걸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약 그것도 모르고 작업을 걸었다면······.'

'아까 우리가 한 얘기··· 설마 듣지는 않았겠지? 만약 듣고 반장한테 이르면 어떡해?!'

'전학 가야지 뭐. 별 수 있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주연 패거리들은······.

"개새끼··· 넌 좆됐어."

"정말로 네 남친한테 말할려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위험한 거 아냐? 네 남친 사람도 죽여봤다면서? 이번에도 그 반장 새끼 죽이면 어떡하려고?"

정신을 차린 이주연과 함께 세 사람은 학교를 조퇴하고 그 즉시 곧장 이주연의 남자 친구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이주연의 남자 친구, 조석진은 조직의 명령 때문에 실제로 사람을 살해 후, 감옥에 다녀온 살해 전과자였다.

때문에 조석진에게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는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세림이나 임솔아의 걱정 역시 그가 정말로 최강태를 죽일까봐 무서워 하는 것도 아니었고.

"너희 둘 설마 오빠가 그 개새끼 죽이고 잡혔을 때 오빠 입에서 너희 둘 이름 나올까봐 쫄아가지고 이러는 건 아니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 살인교사죄 뭐 이런 걸로 법원가면 엄빠한테 죽어. 너도 알잖아. 주연아."

"됐어. 이 씨발년들아. 꺼져. 다 필요없으니까. 친구가 그 개새끼한테 맞고 기절을 했는데 자기들만 살겠다고 이러는 년들이 무슨 친구야."

분노한 이주연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홀로 가버리자 임솔아와 나세림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결국 세 사람은 조석진의 집에 도착했고 이주연은 익숙하게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평일에도 자주 오며 주말에는 살다시피 조석진의 집에서 머물기 때문에 비밀번호를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문이 열리고 익숙한 현관, 익숙한 거실이 눈에 들어왔지만 단 하나,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뭔 소리야, 이건?"

"여, 여자 신음 소리 맞지?!"

"······!"

임솔아의 말에 이주연이 눈을 부릅 떴다. 굳이 그녀가 설명해 줄 것도 없이 그녀의 귀에도 여자의 달뜬 신음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꽂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개새끼가······!"

이주연은 신발 벗는 것도 잊어버린 채 신발을 신고 그대로 신음 소리를 따라 안방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야이 개새끼야!!"

아니나 다를까, 방에서는 한창 뜨겁게 정사를 나누던 남녀가 난데없는 불청객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이불로 몸을 가렸다.

그 순간, 이주연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예상했던대로 바람을 피우던 건 자신의 남자 친구, 조석진이었고 상대는 생전 처음보는 여자였다.

그런데······.

남자 친구의 반응이 이상했다.

"자기, 뭐야 저 미친년은? 설마 너 나 몰래 고딩 첩년 숨겨두고 있었니?!"

"야,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마라. 아가리 찢어버리고 싶으니까. 나 지금 존나 빡친 거 안 보이냐?"

자리에서 일어난 조석진의 문신 가득한 알몸은 이주연도 잘 알고 있었고 익숙했다. 그런데 자신에게 다가와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싸늘한 표정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뭐, 뭐야? 무릎꿇고 사과해도 받아줄까말까 한······."

"야 이 미친년아."

"꺄악!!"

"주, 주연아!"

이주연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터져나오고, 그 모습을 뒤에서 나세림과 임솔아가 지켜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조석진이 대뜸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움큼 쥐어 위로 잡아 당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주연은 두피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 심장이 차가워질 것 같은 그의 시선이 더욱 더 무서웠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무감정한 눈빛.

벌레나··· 혹은 그 이하의 무언가를 쳐다보는 눈빛은 절대로 여자 친구를 쳐다보는 눈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도 조석진은 담배만 피며 자신을 무시했을 뿐, 절대로 손찌검을 하거나 저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본 적은 결코 없었다.

특히 이어진 그의 말은 더욱 더 충격적이었다.

"너 뭔데 내 집을 마음대로 찾아와서 깽판질이냐? 도어락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고?"

"그, 그거야 내가 오빠 여자 친구고 여기서 오래 지냈으니까······."

"그게 정말이야 오빠?!"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 친구의 날카로운 질문에 조석진은 한숨을 내쉬며 무표정하게······.

퍼억!

주먹으로 이주연의 안면을 후려갈겼다. 조석진은 자신의 주먹에 맞고 바닥에 널브러져 꿈틀거리는 이주연을 심드렁하게 쳐다보다가 대꾸했다.

"아니, 진짜 숨겨둔 애인이라도 찾아와서 이러는거면 덜 억울하기라도 하지. 오늘 처음보는 미친년 때문에 우리 사이에 문제 생기면 나 진짜 억울해. 수영아."

수영이라 불린 여인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아무리 조석진이 미친놈이라도 여자에게 저런식으로 주먹질 할 위인이 아니라는 건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저않고 주먹을 휘둘렀다는 건··· 그만큼 조석진이 굉장히 이 상황에 열받았다는 뜻이었다.

"그럼 쟤는 어떻게 이 집을 알고 찾아온건데? 비밀번호는 또 어떻게 알고 있었던거고?"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그 사이, 이주연은 쓰러진 상태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방을 스윽 훑어보았다.

불과 아침까지만 해도 가득했던 자신의 흔적이 완벽히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조석진은 바람을 피우기 위해서 그런 꼼꼼한 사전 준비를 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냥 걸렸으면 걸렸지.

그렇기 때문에 이주연이 느끼는 혼란과 두려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아나, 사내 새끼라면 창자까지 손으로 끄집어낼 수 있지만 계집애한테 손 쓰는 건 진짜 별론데······."

"정말 오빠랑 아무 사이 아니라 이거지?"

"아 진짜 아니라니까! 몇 번을 말해야 되는데?!"

조석진이 답답함에 소리치자 서수영이 대충 옷을 입고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더니 그 상태로 이주연에게 다가왔다.

"그럼 얘들. 내가 알아서 처리해도 되는거지? 오빠."

"맘대로 해."

"그러라네."

치익···!

담담하게 대꾸한 서수영이 피고 있던 담배를 이주연의 허벅지에 비벼 껐다. 마치 그녀가 이민정의 허벅지에 담배를 비벼 끈 것처럼······.

"꺄아아악!!"

"이 정도로 엄살은. 아무튼 기대해. 우리 오빠 기분 잡치게 만들어준 보답으로 내가 너희 셋 자살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자랑할 건 아니지만 언니 특기거든. 사람 괴롭히는 거."

"······!"

"일단 폰이랑 가방부터 언니한테 줄래?"

"제, 제발 그냥 보내주세요. 저희가 잘못했어요······!"

"다신 안 찾아올게요! 이것도 다 얘 때문이에요! 이 씨발년이 억지로 끌고와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온 것 뿐이란 말이에요! 흐어엉······."

그때서야 사태를 파악한 나세림와 임솔아가 이주연을 손절하며 그녀의 탓으로 돌렸지만 서수영은 눈곱만큼도 신경쓰지 않았다.

"응. 내 알 바 아냐."

"······."

그녀의 차가운 미소와 함께 그날 이후로 세 사람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

방과 후.

"전하! 그럼 신이 PC방으로 뫼시겠습니다. 오늘은 핫바에 햄버거 정식이 어떠실런지요? 그리고 중전 마마께서는······."

"아, 미안. 나 만날 사람이 있어서 오늘은 안 되겠다. 먼저 가라."

"엥?! 진짜? 만날 사람 누구? 혹시 여자 친구?!"

'······!'

"여자 친구는 무슨··· 남자다. 새꺄."

여자 친구라는 홍준석의 물음에 곁에 있던 이민정이 흠칫했지만 최강태가 피식 웃으며 꺼낸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자 홍준석이 사색이 된 얼굴로 손을 덜덜 떨며 물었다.

"저, 전하! 혹시 새로운 충신을 구하신 건······!"

"흐음··· 슬슬 과인의 피만 빨아먹는 무능한 신하를 쳐내고 유능한 인재를 구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새꺄. 통촉을 바란다면 실력을 키우던가. 어째 너는 서울대 갈 노력을 롤에 쏟아 부으면서 실력은 한결같이 브론즈냐?"

"나라고 브론즈이고 싶어서 브론즈인게 아니라고. 이 재능충 자식아! 두고 봐. 언젠가는 반역을 일으켜서 내가 네놈을 버스태워주는 날이 올 테니까! 흐흑···!"

눈물을 훔치며 떠나가는 홍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피식한 최강태가 이민정에게 물었다.

"먼저 집에 가 있을래?"

"아니. 나도 호텔가서 아이들 얼굴 좀 보고 가려고. 아까부터 쉬는 시간마다 애들한테 연락와서 혼났거든."

"그래. 그럼. 바래다 줘?"

"아냐. 혼자갈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나?"

이민정이 밝게 웃으며 대답하자 최강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좀 이따 집에서 보자."

"응!"

그렇게 이민정과도 헤어진 최강태가 향한 곳은 다름아닌 강북의 흔하디 흔한 카페 중 한 곳이었다.

그런데 최강태가 디저트 한 상에 생크림이 듬뿍 올라간 딸기 생크림 우유로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있자니 누군가 그를 찾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오래 기다렸냐?"

"아니. 바쁠텐데 불러내서 미안."

"미안하기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태가 부르면 형이 임마. 당연히 날아서 와야지."

최강태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

그는 다름아닌 강북서의 형사이자 최정산의 유능한 부하이며 믿음직한 동료이기도 한 김상태였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35화 비밀 조력자

잠시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던 두 사람은 김상태가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요새 수사는 좀 어때? 일개 형사들이 감당하기에 쉬운 사건은 아닐텐데."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를 깨지. 이건 뭐, 애초에 시작도 못 해보고 게임 끝날 판이다."

"시작도 못 했다고? 위에서 수사를 허락하지 않은건가? 폐교에서 그 많은 시신이 나왔는데?"

"아니, 그 반대다. 시작이야 벌써 했지. 폐교 운동장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모두 부검 들어갔고 수사도 광수대가 맡아서 현재 진행중이다. 문제가 있다면 수사 진행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르다는 거고."

김상태의 대답에 최강태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경찰의 상층부는 이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위에서는 덮을 생각인가보네?"

"그렇겠지. 우리가 입수한 황철고의 장부에도 경찰 간부들의 친인척들이 꽤나 많은 접대와 뇌물 건내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니까."

"장부는?"

"아직 팀장님 손에 있어. 장부는 놈들을 엮어낼 비장의 카드잖아. 물론 그것만 가지고는 놈들의 혐의를 입증할 수 없지만 분명 놈들에게 치명적인 증거인 건 사실이니까. 아마 장부가 우리 손에 있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뺏으려 들겠지. 지금도 사람을 시켜서 염탐 중이고."

"풋!"

"응? 방금 내가 얘기한 것 중에 웃길만한 대목이 있었냐?"

최강태가 피식 웃었다. 그에 김상태가 커피를 마시며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최강태가 다시 되물었다.

"상태 형."

"왜?"

"사람이란 건 정말로 재미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아?"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개도 잘못하면 꼬리를 감추고 고개를 숙이거나 눈을 피하거든?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잘못하면 오히려 더 화를 내고 더 고개를 빳빳이 든단 말이지. 적어도 개보다는 지능이 높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말야. 그런데 이 동물의 권력이 강해지잖아? 그러 적반하장 정도가 아니라 아예 더 큰 죄로 죄를 덮어버린다는거야."

최강태는 생크림 딸기 우유 위에 추가한 생크림을 듬뿍 얹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상 죄 위에 죄를 쌓는 것밖에 안 되지만 권력자들은 그걸로 죄를 씻었다고 착각하는거지. 권력을 쥐면 쥘수록··· 자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똑똑해지는 게 아니라 멍청해진다니, 그런 사람들한테 지배받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생각만 해도 웃기지 않아?"

"넌 웃겨도 난 울 것같다. 지금 그 멍청한 인간들 때문에 수사가 아사리판 날 지경이니까. 하아······. 역시 일개 형사따위들이 나라를 상대로 맞짱을 걸어보려고 했던 건 무리였을까?"

김상태가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자 최강태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리지. 형사가 아니라 검찰총장 할애비가 와도 이건 절대 못 이겨."

"너 설마 형 놀릴려고 부른 건 아니지?"

"그렇게 울상짓지 마. 어차피 이렇게 될 건 뻔히 알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최강태는 최정산과 그의 동료들이 이번 일을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아버지는 훌륭한 경찰이고, 능력있는 형사였지만 이번 일에 관해서만큼은 그런 게 아무래도 좋을만큼 차원이 다른 상대였으니까.

막말로 만약 자신의 아버지가 형사가 아니었다면······.

혹은 적당히 부패하고, 적당히 유연하게 근무하는 그런 형사였다면 최강태는 장부를 다른 식으로 이용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공교롭게도 아버지는 범죄자에게 타협이 없는 강직한 경찰이었고 이번 사건에 대한 열의 또한 남다른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겸사겸사 아버지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드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뭘 어떻게 하려고?"

"그쪽에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데 우리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그래서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좋은 방법은 무슨··· 내가 방법이다."

"······."

자신있게 웃으며 자신을 가리키는 최강태의 모습에 김상태는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냥 네가 뭐 때문에 이러나 싶어서. 역시 아버지가 이번 사건의 담당 형사라서 신경쓰이냐?"

"뭐, 그것도 있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지."

"뭔데?"

"내가 좋아하거든. 탐욕에 찌든 권력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피와 시체 위에 쌓아올린 금자탑을 하나하나 조금씩 무너트리는 거."

"······."

최강태는 삼촌의 습작 소설에서 마족이 되었고 마왕으로 성장해가는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거래를 이행했다.

그 다양한 의뢰 및 거래 속에서 최강태는 알게 된 것이다.

"선한 인간들은 그 어떤 시련을 줘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최선책을 모색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그런 인간들은 아무리 힘든 환경에 쳐해도 오히려 사람들이 모이지. 그런 인간들의 스토리는 감동적이긴 해도 재미는 없더라고. 하지만 탐욕에 찌든 권력자들은 달라. 괴롭히는 맛이 있지. 형도 어릴 때 곤충가지고 놀아봤지?"

"많지."

"곤충을 괴롭힐 때 다리를 떼어내도 가만히 있는 녀석들이 재밌어? 아니면 하나하나 떼어낼 때마다 죽어라 발버둥치는 녀석이 재미있어?"

"그야 뭐······."

"더 강하고, 더 크고, 더 질긴 녀석들일수록 발버둥을 잘 치지. 사람도 마찬가지야. 병들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괴롭혀봤자 재미없어. 어차피 발버둥을 못 치거든. 그런데 잃을 게 많은 녀석일수록, 더 탐욕적일수록, 더 높은 자리에 앉아있을수록 누구보다 더 끈질기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더라고. 난 그 꼴을 구경하는 게 가장 재미있더라?"

"······."

김상태는 최강태의 미소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순수 악.

최강태의 순진무구한 미소는 그 단어와 가장 어울리는 색깔의 두려움을 담고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넌 진짜 변태다."

"구제불능의 변태지."

"보통 그런말을 자기 입으로 하냐?"

"그러니까 형은 맛들이지마. 한 번 맛보면 마약보다 빠져나오기 힘든 취미거든."

키득키득 웃던 최강태가 딸기 생크림 우유를 추가하고는 김상태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뭘 하고 있는데? 최정산 반장님이 이대로 두 손 놓고 가만히 계실분은 아니잖수. 실제로 평소보다 퇴근도 훨씬 안 하던데."

"공식적으로 수사가 안 되면 비공식적으로 할 수밖에. 물론 상부에 걸리면 틀림없는 징계감에 자칫 잘못하면 옷을 벗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언제는 그 양반이 그런 거 신경쓰면서 수사했냐? 그냥 하는 거지."

"비공식이라면 제약이 많을 텐데?"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있지. 일단은 목격자와 증인들 확보를 우선해서 확보하려고 노력중이다. 증거도 찾고 있고."

"쉽지 않겠구만."

"영장이 없으니까 아예 만나주지도 않을 뿐더러 잠수 탄 경우도 많고, 연락이 두절된 경우도 심심찮고······. 하여간 여러모로 난항이다. 게다가 비공식 수사다보니까 당연히 공식적으로 처리해야 할 우리 부서 일도 있는거고. 아참,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번에 강북에서 터진 가출팸 사건 있지? 그거 우리 팀이 담당하게 됐다. 심지어 그것도 반장님이 직접 서장님한테 부탁해서 따왔다더라."

"아버지가? 왜?"

"가출팸 사건의 관련자··· 특히, 가출팸 애들이 큰아빠라고 부리는 포주가 이번 버닝 게이트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거든. 폐교 운동장에서 발견된 시신들도 현재 국과수 부검 결과, 상당수가 실종신고 된 미성년자였고."

"일복이 터지셨구만."

"너 그렇게 말하면 나 진짜 운다?"

어쩐지, 김상태의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늘어진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미안 미안. 아무튼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형사 1팀은 지금까지 하던대로 하는 걸로. 디저트는 마저 먹고 들어가. 보아하니 당분이 절실해 보이네."

"남는 건 싸가도 되지? 식구들도 챙겨주려고."

"그러시던가."

"커피 잘 마셨다. 강태야."

"조심해서 들어가슈."

자리에서 일어난 최강태가 손을 흔들며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한참 디저트를 흡입하고 있던 김상태가 불현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나 지금 누구랑 떠들고 있었던 거지? 기억이 안 나네······. 아, 몰라. 일단 마저 먹고 생각하자."

그러나 깊이 생각하기에는 조각 케익이 너무 맛있었던 김상태였다.

***

하늘의 조명이 꺼지고 밤이 찾아오자 지상에 조명이 하나둘 빠르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천루의 옥상 난간 위에서 보석을 뿌려놓은 듯 황홀하게 반짝이는 야경을 내려다보던 최강태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들도 아부지가 비밀수사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기는 한데··· 역시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건 상대가 형사라서 그런건가?"

무심한 듯 보이는 그였지만 실은 자신의 가족 외에도 형사 1팀의 형사들 가족까지 모두 체크하며 그들의 안위를 살피고 있던 최강태였다.

하지만 마력의 공급이 한정적인 상황에서 한두 명도 아니고 그들을 계속 감시하는 건 아무리 최강태라도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마력의 공급을 떠나 솔직히 말해서······.

'귀찮아.'

그래서 최강태는 결심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과연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소설 속에서 얻은 능력이 현실에서도 그대로인 것을 보면 아마 이쪽도 불가능하진 않겠지.'

최강태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이 갈라지며 한움큼의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흘러내린 것은 비단 피만이 아니었다.

그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대해와 같은 마력의 일부가 눈에 띄게 줄어들며 핏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끈적거릴 정도로 농도 짙은 피가 주르륵 흘러 내린 곳은 바닥이었다. 최강태의 그림자가 드리운 바닥.

피는 소리없이 바닥으로 녹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지나자 최강태의 그림자가 더욱 진해졌다.

마치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영혼까지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칠흑.

그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더니 이내 솟아오르며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긴 꼬리, 날렵한 몸통, 쭉 뻗은 네 개의 다리와 수염, 그리고 붉은 눈동자와 파란 눈동자가 이색적인 오드아이까지······.

냐옹~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고양이는 오랜만에 재회한 주인이 반가웠는지 사뿐사뿐 걸어가 주인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반가움을 드러냈다.

"그래, 오랜만이다. 까망아. 그동안 잘 있었냐?"

애옹~

주인의 인사에 보답하듯 배를 까뒤집고 애교를 부리는 까망이.

최강태가 까망이를 잡아 들었다. 그러자 무슨 치즈처럼 아래로 주욱 늘어난 몸통에 비해 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오구오구~ 우리 까망이. 그럼 사료값 좀 벌어볼까?"

냐옹~

주인의 말에 대답한 까망이는 최강태가 놓아주자 날렵하게 착지하더니 그대로 그림자 속으로 다이빙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면처럼 잔잔한 파문과 함께 까망이를 삼키는 그림자.

"지금부터 내가 알려주는 인물들은 한 순간도 빼놓지 말고 감시해."

최강태는 까망이의 머릿속으로 감시해야 할 인물들의 모습과 위치를 알려 주었고 그렇게 최강태의 제1권속. 까망이의 임무가 시작되었다.

"끄응~ 이걸로 됐나?"

'투자 마력이 제법 크긴 하지만 그거야 충전기 좀 더 구하면 언젠가는 해결될 거고, 까망이한테 맡겨두면 더 이상 자질구레한 문제들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지.'

그때였다.

-까톡왔다아이가!

까톡 알림음에 폰을 확인한 최강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가출팸 총포주 서마윤의 배후 세력 확인. 현재 서마윤의 은닉처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음. 곧 체포 영장 발부 예정.]

"땡큐, 상태 형."

충전기 수급 기회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36화 형사도 사람이다

최정산에게 의문의 제보자로부터 제보가 들어온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강원도 홍천군 동면 계월산 기슭에 도끼파로 보이는 의문의 남자들 다수 발견. 속히 확인 바람.]

'뭐, 뭐야 이 제보는?'

제보라기보다는 보고서에 더 가까운 자세한 상황 설명과 인물 추론에 최정산은 황당함을 금치 못 했다.

물론 그 제보자의 정체가 자신의 아들이란 건 더 더욱 상상도 못 하겠지.

하지만 이게 진짜건 거짓이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최정산에게는 반드시 확인해봐야 할 제보였다.

"막내야, 지금 불러주는 주소 근처에 날짜랑 시간 맞춰서 도로 CCTV 좀 조회해 봐라."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막내, 박준현은 화들짝 놀라서 깨더니 입가에 흐르던 침을 다급히 소매로 훔치고 최정산이 주는 메모를 받아서 달려나갔다.

최정산은 그런 막내의 모습이 한없이 안쓰럽고 미안했다.

괜히 자신같은 열정만 많고 무능력한 상사를 만나 부하들만 고생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잠시 후.

"바, 반장님!"

"그래, 준현아. 뭐 좀 찾았어?"

"이, 이거······! 후욱, 후욱!"

다급히 돌아온 박준현은 대답대신 가쁜 숨을 고르며 USB를 최정산에게 넘겼고 최정산은 곧바로 USB를 컴퓨터에 꽂아 확인했다.

그러자 메모에 적어둔 시간 도로 CCTV에 찍힌 영상이 재생되었다.

영상 속에서는 평소 차량 한 대도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에 다양한 차량들이 시시각각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차량들의 행적을 조회해 봤는데 차량은 전부 달라도 모두 강북에서 출발했습니다. 도끼파가 행적을 감춘 시간과도 비슷하고요.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도끼파의 은신처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오오~!"

"드디어 하나 건지는 건가?!"

"잘 했다! 막내야."

영상을 함께 확인하던 선배들의 칭찬이 쏟아지자 박준현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대꾸했다.

"저야 뭐, 반장님이 확인해 보라고 해서 확인한 것밖에 없는데요 뭘. 그런데 반장님은 대체 이런 고급 정보를 어디서 손에 넣으신 겁니까?"

"그러게. 반장님한테 이런 고급 정보원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는데······."

"······."

부하들이 호기심섞인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최정산은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실제로 그런 정보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문자를 보낸 사람도 대포폰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최정산이 망설임없이 박준현에게 지시할 수 있었던 건 대포폰의 번호가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황철고를 신고한 그 제보자 말이다.

'황철고와 USB도 그렇고, 이번 제보도 그렇고···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꾸미는 거지? 대체 날 이용해서 뭘 하려는 속셈이냐!'

최정산은 안개 속에 숨어있는 제보자가 답답했지만 지금 당장은 그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지금 당장 긴급 체포 영장 발부 요청하고 서장님께는 내가 직접 지원 병력 요청할 테니까 영장 발부되는 즉시 출동한다."

"예! 반장님."

***

가출팸의 포주들과 총포주, 서마윤의 측근들이 체포되면서 가출팸 미성년자 인신매매 및 성매매 사건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에 차고 넘쳤다.

특히, 버닝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뜨겁게 달아오른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사람들의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경찰도 검찰도 좋든 싫든 국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총포주 서마윤의 뒤를 봐주던 조직의 체포 영장을 심사해달라?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담당 검사가 신청한 체포 영장을 판사는 곧바로 승인해 주었고 체포 영장이 발부되자마자 최정산은 늦은 밤, 동료 형사들과 함께 강원도 계월산으로 향했다.

최정산은 조수석에서 무장을 다시 한 번 점검하며 뒤에 탑승하고 있던 부하들에게도 주의를 주었다.

"조심해. 뒤가 없는 놈들일수록 무슨 짓을 저지를 지 알 수 없다. 놈들을 체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게 뭐라고?"

"안전입니다!"

"그래, 그러니까 위험하다 싶으면 망설이지 말고 쏴.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까. 특히 우리 막내 다치면 막내 위로 내 밑으로 줄 빠따 맞을 거니까 각오하고."

"들었지 막내야? 네 안전에 우리 목숨이 걸려있다. 그러니까 체포도 좋지만 네 안위를 먼저 걱정해. 형사는 동료 형사가 지켜주는 수밖에 없으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긴장과 각오를 다지며 도착한 계월산 자락. 그곳에는 폐업한 시멘트 공장의 창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응? 이거 분위기가 묘한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설마 눈치채고 토낀건······."

"아냐, 그랬다면 상황통제실에서 연락이 왔겠지."

"막내야."

"네."

박준현은 곧바로 드론을 띄워 창고쪽으로 보냈다. 드론조종 자격증을 가지고 있던 박준현이었기에 드론은 흔들림없이 곧장 창고쪽으로 비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드론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서 영상을 확인하던 1팀 형사들은 이내 눈을 부릅뜨며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아,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분명 창고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적외선 카메라로 확인 결과, 그들 모두가 쓰러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못 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일단 진입해서 육안으로 직접 확인한다."

최정산의 말에 형사들은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그를 따라 창고로 조심스럽게 진입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드론으로 확인한 것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충격적이었다.

"으으······. 사, 살려줘······."

"으어어어어······."

"끄으으으으으······!!"

창고 입구에서부터 널브러진 사람들의 모습에 경찰들은 권총을 굳게 꼬나쥐었던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사지가 부러지고, 기묘하게 뒤틀린 모습으로 널브러진 사람들의 모습은 기괴하고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거품을 물고 고통에 찬 지명을 지르거나 신음을 흘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게 현실인지, 공포 영화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창고에 숨어있던 도끼파 조직원 전원이 끔찍한 몰골로 쓰러져 울부짖고 있었던 것이다.

"빨리 구급차를 불러!"

"예!"

최정산의 명령에 다른 형사가 다급히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 창고를 수색하던 형사 한 명이 안쪽에서 소리쳤다.

"여기 도끼파 두목, 박상일을 찾았습니다!"

외침을 쫓아 간 곳에는 다른 부하들과 똑같이 사지가 기형적으로 뒤틀린 박상일이 창백해진 얼굴로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야, 박상일! 나 알지? 내 말 들려?"

"으으으··· 악마다! 악마가 찾아왔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아니, 그냥 죽여주세요. 흐어엉······!"

"박상일! 정신차려, 임마!! 대체 누구야? 누가 이런 짓을 한 거냐고!"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요? 반장님."

최정산은 믿을 수 없었다. 도끼파의 두목 박상일은 그 역시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경찰서에 잡혀와서 두 손에 수갑을 차고도 태연하게 심문하는 형사의 가족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미친놈이 바로 박상일이다.

그런 박상일이 악마라고 부르며 제정신을 놓을 정도의 인물은 대체······.

그때였다.

"반장님! 여기도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안쪽 방에서 들린 목소리에 최정산이 다급하게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눈을 부릅 떴다.

방 한 가운데에는 이번 가출팸 사건의 주모자이자 총포주인 서마윤이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몰골은 앞서 보았던 조직원들보다 훨씬 심각했는데 그 꼴을 하고서도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상황은 아직 더 남아있었다.

"최, 최정산 형사님 맞으시죠? 저 가출팸 애들 데리고 장사했던 서마윤이라고 합니다! 제발 저 좀 체포해 주세요! 제발······."

"뭐, 뭐라고?"

"제, 제 바지 주머니를 보시면 핸드폰이 있을 겁니다! 그 폰에 지금까지 황철고와 거래했던 내역들 뿐만 아니라 애들을 매매했던 내역들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제발 저를 체포해 주세요! 그렇게만 해주시면 핸드폰 비밀 번호는 물론이고 증인이나 숨겨둔 장부의 위치까지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발···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서마윤은 눈물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울부짖으며 최정산에게 체포해달라고 빌었고 최정산은 이런 상황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서마윤은 필사적이었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도 있었다.

[경찰 손에 넘어가면 더 건드리기도 그렇고··· 좀 아쉬운데? 그냥 증거만 경찰들한테 주고 형이랑 좀 더 놀자 마윤아. 아직 찍고싶은 영상도 많이 남아있거든.]

경찰들에게 체포되는 것만이 그 악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데 물불 가릴 때가 아닌 것이다.

"아무래도 너나 여기 있던 도끼파 녀석들을 반신불구로 만든 건 동일범인 모양인데··· 도대체 누구야? 너를 이렇게 만든 놈이."

"모,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얼굴은? 생김새는? 체형은?"

"몰라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난다고요! 씨발······."

"······."

최정산은 더 이상 서마윤을 추궁할 수 없었다. 그의 표정에서 엿보이는 진심이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진심을 떠나서 상식적으로 자신을 반신불구로 만든 원수를 감싸줄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

"정말이에요! 그 변태 싸이코 악마 새끼··· 분명 다시 보면 알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안개 뒤에 숨어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요. 하고 싶지도 않고!"

"일단 알았다."

서마윤의 말대로 그의 주머니 속에는 폰이 들어 있었고 비밀번호와 지문의 2중 장금 장치를 해제하자 폰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태가 너는 이거 가지고 가서 황철고의 장부 기록과 비교해 봐."

"알겠습니다."

"저기 반장님, 서마윤을 옮기려고 하는데 그······."

"왜? 무슨 문제 있어?"

"그게 아니라 형식적으로라도 수갑을 채워야 하는건지 아닌지 모르겠어서······."

"······."

수갑을 들고 망설이는 박준현의 눈앞에는 연체동물마냥 흐느적거리는 서마윤이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데려가."

"넵."

박준현은 흐느적거리는 서마윤을 들어올려 그대로 구급차에 이송했고 다른 조직원들까지 깔끔하게 정리한 후, 현장을 다른 형사에게 맡기고 병원을 찾았다.

그가 찾은 병원은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강원도의 한 종합 병원 병실이었다.

그 사이, 또 다시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들어온 제보를 통해 최정산은 어느 모텔에 숨어있던 서마윤의 중요 관계자들도 긴급 체포할 수 있었다.

사실 체포라는 말도 무색할 정도로 범죄자들은 예쁘게 포장(?)된 상태인데다가 심지어 굉장히 순순하게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 모두 서마윤의 명령으로 가출 청소년에 대한 갖가지 범죄에 가담한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고······.

이로서 서마윤의 범죄 사실에 대한 증거와 증인을 모두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술이 끝나고 일반 병실로 옮겨진 서마윤이 정신을 차렸다.

결과는 비참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다시는 두 발로 걷거나 두 손으로 수저를 드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시더군. 너는 이제부터 그냥 그렇게 누워서 평생을 숨만 쉬며 살아가야 하는거라고."

"그래서 어쩌라고요? 펑펑 울면서 고쳐달라고 사정이라도 할까요? 그럼 고칠 수 있는 겁니까?!"

"······."

최정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형사로서는 네가 제대로 된 법의 심판을 받아서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길 바랐다. 하지만 그건 네가 저지른 죗값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한 대가인 것도 사실이겠지. 그래서 좋아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 지 솔직히 모르겠구나. 형사 최정산은 이게 분명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인간 최정산은 천벌 받을 새끼가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니까."

"씨발, 존나 솔직하시네······."

"그것밖에 내세울 게 없는 인간이라. 아무튼 네가 건내준 장부와 황철고가 소유하고 있던 장부를 비교 분석해 봤다. 대부분의 거래 내역이 일치하더군. 그리고 너희들이······."

최정산은 이어지는 말을 차마 가볍게 담지 못 하고 주먹을 꾸욱 말아쥐며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감정을 추르스고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들이 거래한 아이들이 폐교에서 발견한 시신들과 대부분 일치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잘 됐네! 그럼 나 체포할 수 있는 거 맞죠?"

최정산의 말에 오히려 활짝 웃으며 체포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서마윤.

"잘 됐다라··· 그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것도 느끼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뭔 헛소리야? 그럼 뭐, 이제와서 반성이라도 할 줄······."

퍼억!!

그 순간, 대꾸하는 서마윤의 안면에 최정산의 큼지막한 돌주먹이 작렬했다.

건장한 체구를 가진 떡대 조폭들도 벌벌 떠는 것이 최정산의 돌주먹이다. 그걸 무방비하게 처맞았으니······.

이빨이 부러진 서마윤이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눈을 까뒤집고 기절하자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최정산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피곤한 것 같은데 씨부리지 말고 좀 더 자라. 취조는 나중에 하마."

그렇게 최정산은 병실을 나섰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37화 실낱같은 희망

한편, 황철고가 입원중인 다른 병실에서는······.

"환자분 야간 정기 체크하러 왔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 고생많으십니다. 들어가십쇼."

황철고의 병실 앞을 지키던 경찰 두 명은 간호사의 부탁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기꺼이 길을 비켜 주었다.

이 병원에서 평소 자주 봤던 간호사였고 중환자의 야간 체크는 정기적으로 해 왔던 일이었기 때문에 전혀 의심할 여지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병실에 들어선 간호사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긴장감에 더해 어째서인지 호흡이 조금 거칠어지고 식은땀도 흘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괜찮으세요?"

그때 병실 안에서 황철고를 감시 겸 상태를 지켜보고 있던 순경이 간호사를 걱정하며 묻자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식은땀을 닦아냈다.

"아, 괜찮아요. 요새 업무가 많아서 그런지 살짝 몸살 기운이 있어서······."

"아~ 몸살··· 그건 참 힘들죠. 쉬어야 할 때 제때 못 쉬고 혹사하시는 간호사 여러분도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환자분 상태 좀 체크할게요."

간호사는 순경을 지나쳐 침상에 누워있는 황철고에게 다가갔다.

아직 의식을 차리지 못 한 듯 누워있는 황철고에게 딱히 큰 변화는 없었다.

간호사는 평소처럼 바이탈을 체크하고, 소변통을 갈아주더니 팔다리를 주물러 혈액 순환을 도와주었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같았다. 순경도 아무 의심없이 폰을 보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 주사는 뭡니까?"

"아, 이거요? 영양보조제입니다. 환자가 의식없이 포도당만 혈액으로 섭취할 경우, 자칫 심각한 후유증이나 장애가 남을 수 있어서요. 장기 의식불명 환자의 경우, 이렇게 수액에 가끔씩 영양보조제를 첨가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호사가 뜬금없이 주사를 꺼내들자 순경이 건낸 질문에 병원에서 몇 년을 근무한 신용할 만한 간호사가, 전문가로서 한 답변이다.

의료종사자라면 모를까. 의료지식이 낮은 순경이 의문을 가지기에는 근거가 너무 부족했다.

아니, 오히려 의문을 가지는 것보다 납득하는게 훨씬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탁!

"그럼 우리 정하나 간호사 쌤이 먼저 맞아야겠네요. 지금 영양제가 필요한 건 이 친구가 아니라 쌤인 것 같으니까."

"······!"

정하나는 눈을 부릅뜨며 깜짝 놀랐다.

분명 3미터는 떨어진 벽에 기대 의자에 앉아있던 순경이 어느새 자신의 뒤에 나타난 것도 모자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사기를 빼앗아 들었기 때문이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당장 그거 돌려주세요! 안 그럼 소리지를 거예요?!"

"걱정 마십쇼. 주사 놓는 건 처음이지만··· 뭐, 대충 팔뚝에 찔러서 짜내면 되겠죠."

"저기요! 형사님들!! 여기 이 사람 미친 것 같아요! 내 말 안 들려요?!"

"네~ 안 들릴거니까 목아프게 소리지르지 마시고요. 자꾸 이러면 아프게 주사 놓습니다."

순경의 장난스런 대꾸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바로 문밖에 서 있을 경찰 중 누구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간호사의 팔을 낚아챈 순경이 주사기를 그녀의 팔로 가지고 갔다.

"이거 놔요! 이거 놓으라고!!"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순경의 억센 손아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간호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장난끼 가득한 순경의 얼굴은 주사기 속에 든 액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사기 바늘이 살갗에 닿는 순간, 간호사가 속사포처럼 진실을 털어놓았다.

"죄,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어떤 사람이 저한테 큰 돈을 주면서 이 일을 시켰어요! 저는 정말 이 환자분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요! 흐어엉······."

"무슨 일이야?!"

"응?"

간호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밖에서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경찰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가 크게 놀랐다.

순경은 두 경찰에게 주사기를 건내며 상황을 설명했다.

"아무래도 정하나 씨가 사주를 받은 것 같습니다. 이건 국과수에서 정밀 분석 해봐야 알겠지만······."

"설마 독이라고?"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미친······."

"아니 대체 여기는 어떻게 알고?"

두 경찰은 순경이 건낸 주사기와 다리에 힘이 풀린 정하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병실에는 의식 없이 누워있던 황철고와 순경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셋 셀 때까지 눈 안 뜨면 맴매 맞는다. 셋."

갑자기 셋을 외치고 의식이 없던 황철고에게 손바닥을 들어 보이자 황철고가 기겁하며 눈을 번쩍 떴다.

"자, 잠깐! 하나둘은 어디가고 왜 셋인데?!"

"생략했다."

"······."

황철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순경의 얼굴이 최강태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음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자신이 실은 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녀석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비상식은 녀석에게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너 정하나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지?"

"그놈들한테 간호사 하나 매수하는 건 일도 아니니까. 너는 모르겠지만 경찰들은 설마 놈들이 이렇게 빨리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 한 것 같고."

"그런데 왜 가만히 있었어? 오호라~ 우리 철고 많이 죽고 싶었구나?"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것보다야 죽는 게 더 나으니까."

황철고는 허망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자신의 의지로는 팔다리 하나,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 한다.

혼자서는 밥 한술 못 뜨고 소변조차 제대로 해결 할 수 없는 빌어먹을 몸뚱이.

아마 평생을 남의 시중이나 받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그냥 방구석에서 굶어죽어 썩어가겠지.

"그 정도로 절박했으면 혀라도 깨물지. 그러라고 치아는 남겨둔 건데. 그럴 용기는 또 없었나봐?"

"크윽······!"

정곡을 찌르는 최강태의 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황철고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를 돌리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이러려고 찾아왔냐? 날 구해주고 나한테 협조를 받기 위해서? 날 이렇게 만든 네놈한테? 웃기지마. 차라리 그 잘난 능력으로 세뇌라도 하던가. 내 뜻으로 네놈에게 협조하는 일 따위 절대로 없을 거다."

"우리 철고··· 의지는 갸륵한데 하나 착각하는 게 있구나."

"착각?"

"네가 죽어봤자 나한텐 1도 도움이 안 돼. 네가 고통스럽게 오래 살아남아야 나한테 도움이 되거든. 그런 의미로 짜잔~ 오늘도 우리 철고를 괴롭히러 왔답니다!"

최강태가 주워든 것은 탁상 위에 올려져 있던 거울이었다.

덥썩!

"크윽···!"

"거울아 거울아~ 우리 철고네 부모님은 현재 어디 계시는지 알려줄 수 있겠니? 수리수리 마수리~"

최강태는 황철고의 머리채를 잡아 고정시킨 후, 거울을 향해서 대중적인 마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정말로 거울의 표면이 물결처럼 일렁이더니 황철고의 얼굴이 아닌 다른 사람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황철고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떠졌다. 거울에 비친 사람은 다름아닌 황철고의 아버지, 황태식이었다.

"아, 아버지···!"

쇠사슬에 두 손이 묶여 매달려 있는 황태식의 모습은 실로 끔찍했다.

전신은 자신의 피로 흠뻑 젖었고, 살은 찢기고, 근육은 뭉개지고, 다리 뼈가 뒤틀려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저런 끔찍한 모습으로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야~ 이거 보는 순간 스카웃 욕심 나더라. 진짜 재주좋은 놈들이야. 마법을 쓰지 않고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드는데 숨만 간신히 붙어 있게 만드는 인재는 우리 업계에서도 드물거든."

"너 이 개새끼!!"

"워워~ 진정하시고. 너도 실은 알고 있잖아? 저게 내 작품은 아니라는 거. 나라면 저렇게 엉성하게 안 했지. 그럼 다음 작품을 관람해볼까?"

최강태가 마치 테블릿PC마냥 거울 표면을 손가락으로 밀어 넘기자 비추던 화면이 넘어갔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춰진 모습은 다름아닌 황철고의 어머니, 오자연이었다.

"······!!"

"오우~ 이건 좀······."

오자연의 모습은 어떤 의미로는 황태식보다 더욱 끔찍했다. 몸에 상처가 있거나 구타를 당한 건 아니지만······.

마약에 잔뜩 취한 듯 게거품을 물며 꿈틀거리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많은 남자들의 흔적이 엿보였다.

더욱 끔찍한 건 그런 상황에서도 마약과 남자를 찾으며 더러운 바닥을 기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나도 이거는 보면서 좀 불쌍하더라. 자식 농사 잘못 지은 게 죄지. 아니, 네 엄마는 무슨 잘못을 지었다고 이런 끔찍한 꼴을 당해야 하는거냐? 어휴, 참 안타깝다. 안타까워. 차라리 그래서 아들 있는 곳이라도 알면 말이라도 했지. 아무것도 모르는 애비 애미를······. 에잉! 쯧쯧쯧. 그래도 다행히 이제는 죽을 수 있겠지."

"주, 죽는다니? 그게 무슨······."

"그놈들이 어떻게 알고 여기 간호사를 매수했겠냐? 친절한 키다리 아저씨가 귀띔해준 덕분이지. 그럼 이제 용도가 다 한 인질들은 폐기 처분 될 거고. 자식 새끼 때문에 개고생하던 저 두 사람도 비로소 안식을 얻을 수 있게 됐다는 말씀. 감동했냐? 그렇다고 너무 고마워하진 말고."

"······!"

최강태는 비로소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와 돌아온 업보를 깨달은 황철고의 얼굴에 씨익 미소를 그렸다.

아마 지금 녀석은 자신의 몸이 불구가 된 것 이상으로··· 그 수십 배에 달하는 고통을 받고 있겠지.

그 증거로 녀석에게서 흘러들어오는 마력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증가되었다.

다시 거울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최강태는 거울을 제 자리에 두고 병실을 나서려고 했다.

"자, 잠깐!! 이대로 간다고?!"

"응? 말 했잖아. 난 너 괴롭히러 온 거라고. 볼일 다 봐서 가는건데 무슨 문제 있어?"

"그, 그래! 거래를 하자!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할게! 증인이 되라고 하면 증인이 되고 진술이든 증거든 원하는 건 전부 다 줄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우리 부모님 좀 구해줘! 너라면 할 수 있잖아? 응?!"

황철고가 눈물콧물을 질질 짜며 간절히 애원하자 최강태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꾸했다.

"말 했잖아. 난 한 번 신용잃은 고객님과는 거래 안 한다고. 아무렴, 내가 네 도움없이는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황철고는 부서질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최강태의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에게 당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놈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물론이고 그놈들도··· 그놈들의 뒷배조차도 저 자식에겐 장난감에 지나지 않겠지. 가지고 놀다가 언제든지 흥미가 떨어지면 망가트릴 수 있는 장난감······.'

그걸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폐교에서 총을 꺼내는 어리석은 짓은··· 아니, 그 이전에 그를 적대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기 때문에 후회인 것이다. 황철고는 문을 열고 나서는 최강태를 잡을 명분도, 실리도 없었다.

그런데!

"뭐, 깨진 신용이라도 죽어라 노력하면 아주 조금은 가망이 있지 않을까 싶긴 해. 너한테 그럴 의지와 용기가 있느냐의 문제겠지만."

드르륵··· 탁!

"······!"

황철고는 눈을 부릅떴다. 굳이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 아주 실낱같은 가능성이란 걸······.

물론 이걸로 자신의 몸을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최강태는 그런 자비로운 인간이 아니니까.

다만 부모님을 구할 수만 있다면······. 자신 때문에 죽는 것 이상의 고통을 받고 있을 부모님을 구할 수만 있다면···!

"저기요! 밖에 아무도 없어요?!"

"뭐야? 응? 황철고 너 언제 일어났어?!"

"최정산 형사님 좀 불러주세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서요!"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38화 계란으로 바위치기

똑똑똑.

"들어와."

서류 업무를 보고 있던 강북서 서장 마필중이 허락하자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안으로 입장했다.

최정산이었다.

척!

자신의 앞에 서서 절도있게 거수 경례를 올린 최정산에게 마필중은 시선만 힐끔 올려보더니 짧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수사 현황 보고 드립니다. 현재 버닝 게이트에 연루된 미성년자 매매 조직의 총포주 체포 및 증거품, 증인 확보. 총포주의 장부와 황철고의 장부 거래 내역에 일치하는 점을 다수 발견했습니다. 피해자들은 모두 폐교에서 발견된 시신들과 일치했고요."

"그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고. 다른 건?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려고 찾아온 건 아니겠지?"

"황철고가 입을 열었습니다."

"······!"

최정산의 보고에 마필중은 눈을 부릅뜨며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정말이야?! 아니 어떻게? 황철고는 의식불명 상태인 거 아니었어?"

"어젯밤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은 물론 법정 증인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물론 완전히 신용할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놈이 뭐라고 하던?"

"S."

"S?"

"예. 자신이 수발을 들던 VVIP들의 모임 이름이 'S'라고 하더군요. 정재계 거물급 인사들의 친인척으로 구성되어있고 기존 회원의 추천과 본인의 능력이 검증되지 않으면 이 그룹에는 발도 못 붙인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일단 한 번 회원으로 가입하고 나면 누릴 수 있는 권력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버닝에서 누렸던 유희는 그 일부분에 불과하다더군요."

"하기야, 그런 새끼들이 뒤에서 남들 모르게 작당하면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딨겠어. 실제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연쇄 살인 사건도 지들 입맛대로 조작하고 있는데 말야. 에이··· 쓰레기같은 새끼들."

혀를 차며 자리에 착석한 마필중은 최정산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증거는? 지금 폐교에서 발견된 애들이 버닝에서 불법으로 성매매하던 애들이고, 그 애들을 판매한 일당이 서마윤이라는 총포주란 것만 확정된 사실 아냐. S인지 S라인인지 그 새끼들이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잡았어?"

"죄송합니다. 황철고의 장부가 있긴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놈들을 엮는 게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장부에 기재된 S의 회원들이 버닝에 출입했다는 사실은 입증하기 쉽지만······."

"그것만 가지고 놈들을 체포하는 건 불가능하지."

마필중의 말에 최정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 쪽은? 놈들이 놀았다는 호텔 쪽에는 무슨 단서 없어?"

"황철고의 말로는 프로 청소부들을 시켜 단서가 될만한 건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처리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제공했다는 스위트룸에서도 피해자들의 지문이나 머리카락, 심지어 한 방울의 혈흔도 발견되지 않았고요."

"하기야··· 그런 쪽에는 누구보다 치밀한 새끼들이니······."

마필중이 팔짱을 끼고 푸념을 늘어놓자 최정산이 무거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다 입술을 열었다.

"서장님."

"왜?"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대로는 힘듭니다. 서장님도 아시잖습니까? 피해자들 부검 결과도 힘들게 아는 지인 통해서 전해 들었다가 그마저도 걸려서 아예 우리 애들 접근 금지 먹은 거. 부탁드립니다. 서장님. 저희가 정식으로 수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이대로 두면 광수대 놈들··· 그냥 황철고랑 서마윤 수배 때리고 사건 덮을 게 뻔합니다!"

"알아. 나도 안다고. 내가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잖아!"

마필중도 오죽 답답했는지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하지만 S와 황철고 사이를 증명하는 증거가 없잖아. 증거가. 지금 당장 청장님한테 달려가서 광수대가 사건 덮으려고 서두른다고 말리기라도 할까? 대체 무슨 근거로? 심지어 장부에 따르면 그 청장의 조카가 S의 회원일지도 모르는데?"

"형님!"

"정산아. 이건 우리 스타일대로 일단 덮어놓고 덤빈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서 그게 통했을 지 몰라도 이번에도 똑같이 상대하다간 우리가 역풍 맞는다. 네 눈에는 내가 지금 옷 벗는 게 무서워서 이러는 것 같냐? 나 마필중이야! 증거만 있어봐. 청장 멱살을 잡아서라도 범인 새끼들 반드시 잡아낼 거라고."

"정말 증거만 있으면 됩니까?"

"······뭐?"

최정산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몇 번 조작하더니 마필중에게 건냈다. 폰을 받아든 마필중은 폰에 띄워진 사진을 확인하더니 눈을 부릅떴다.

"이건······!"

사진은 극히 평범했다.

어느 호텔의 로비를 배경으로 미소를 그린 외국 여성이 찍힌 사진일 뿐이었으니까. 아마 찍은 사람도 그녀의 애인이나 친구겠지.

문제는 배경에 걸쳐 그녀의 뒤로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현 창우 그룹 회장의 아들 성제준 이사, 포털 사이트 네이브 사장의 처남이자 현 동화 일보 사회부 부국장 한동희, 현재 여당인 온누리당의 당 대표의 아들이자 SH바이오의 최대 주주인 김열 씨. 모두 황철고의 장부에 기록된 S의 회원들입니다."

"대체 이 사진을 어디서······. 설마 또 네 마니또가 보내준거냐?"

"마니또 아닙니다!"

"그럼 수······."

"수호 천사도 아니고요."

"크흠! 얘는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그런데 대체 이런 사진은 어디서 구했대?"

"이미 국내 SNS에 존재하는 해당 시간, 해당 호텔에 관련된 사진 CCTV는 전부 삭제되거나 조작된 지 오래입니다. 이 사진은 미국 SNS에 미국인이 올린 사진이고요. 하지만 검색해보니 이미 사진은 오래전에 삭제되고 없더군요. 아마 그쪽에서도 이 사진의 존재를 알고 손을 쓴 거겠죠."

"그러니까 네 마니··· 크흠! 조력자는 어떻게 이 사진의 존재를 알고 구해 온 거냐고."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모로 이상한 녀석이라······."

"이상하지만 우리 보다는 훨씬 능력있는 친구인 것 같구만."

최정산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 했지만 표정을 보아 마필중의 말이 대단히 마음에 안 드는 건 확실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안 돼. 확실히 그만한 면면이 모여서 호텔을 찾아간 건 특이한 일이지만 얼마든지 둘러댈 수도 있고. 이걸로는 증거가 부족해."

"다음 사진을 봐 주십시오. 서장님."

"다음 사진?"

마필중이 손가락을 드레그하여 사진을 넘기자 이번에는 똑같은 호텔의 똑같은 로비지만 다른 자리에서 셀카를 찍은 어느 여성의 사진이 나왔다.

"예쁜 처자네. 그런데 이 처자가 무슨 문제라도?"

"여성이 아니라 왼편 아래쪽에 놓여있는 컵을 확인해 보시죠."

"컵?"

진한 검은색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유리잔은 얼음이 가득 담겨있어 보기만 해도 눈이 시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마필중의 눈이 커지더니 컵 부분을 손가락으로 집어 확대시키자······.

"이 여자는 누군데?"

"이름 고우림. 나이 17세. 가출 신고된 가출 청소년으로 황철고와 서마윤의 장부에도 기록되어 있는 아이이며 현재 위치는······."

최정산은 깊이 숨을 고르더니 대답을 이었다.

"국과수 영안실입니다."

"······!"

두 사진이 SNS에 업로드 된 시간을 확인한 마필중. 그 시간은 고작 10분 차이였다.

"가해자로 의심되는 S의 회원들이 호텔에 입장하고 10분 뒤에 피해자가 호텔에 입장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호텔밖으로 다시 나오는 사진이나 영상, 증거물 따위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고요. 이래도 놈들을 수사할 증거가 부족한 겁니까? 서장님!"

"······."

마필중은 신중하게 고민하다가 폰을 주인에게 돌려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그 사진들 복사해서 바로 내 폰으로 보내. 장부도 복사해서 똑같이 보내고."

"어디 가시려고요?"

"계란으로 바위 치러 간다. 왜?"

***

"후우······."

대한민국 경찰들의 최고 존엄을 눈앞에 두고 마필중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평소에도 자주 찾아오는 곳이었고 같은 고등학교 출신에 경찰 대학도 두 기수 위의 선배라 알고 지낸 세월이 꽤 깊었다.

그래서 평소에도 자주 찾아오던 친한 선배의 집무실이었는데······.

"제가 기별할까요?"

"아냐, 내가 하지."

똑똑똑.

비서관을 물리고 직접 노크한 마필중이 안에 기별했다.

"선배님. 저 필중입니다."

"들어와."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마필중은 집무실 안으로 입장했다.

한참 난에 물을 주고 있던 경찰청장 안원희는 반가운 후배의 방문에 진심으로 그를 환대했다.

"하하하! 자네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건 처음이구만. 자리에 앉지."

비서관에게 커피 두 잔을 부탁한 안원희가 마필중에게 자리를 권했다.

"죄송합니다. 바쁘신 분을 불쑥 찾아봬서."

"바쁘지. 바빠. 요새 난에 빠져서 그런가. 난을 가꾸다보면 하루가 그냥 훌쩍 지나가지 뭔가? 하하하하! 자네는 난 같은 거 배우지 말게. 이게 시간도 시간이지만 돈이··· 어휴."

"명심하겠습니다. 선배님."

"그나저나 무슨 일인가? 보아하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안원희는 비서관이 타 준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고 마필중은 자신의 폰을 꺼내 몇 번 조작하더니 안원희에게 조심스래 내밀었다.

"뭔가 이건?"

"이번 폐교 암매장 사건과 관련된 중요 참고 사항입니다. 선배님께서 직접 확인해 주셨으면 해서 가져와 봤습니다."

"······."

자료를 확인하던 안원희의 사람 좋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더니 종국에는 더없이 차가워진 얼굴로 폰을 주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자네와 자네 팀원들이 조직의 규율도 어기고 멋대로 다른 부서의 사건을 조사중이라던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 같군. 이런 중요한 증거물을 가지고 제대로 보고도 하지 않은 이유는 뭔가?"

"광수대가 이번 사건을 단순 불법 성매매 조직의 소행으로 사전 종결하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저는 이 증거물을 가장 먼저 광수대에게 넘겼을 겁니다."

"그 말은 가볍게 듣고 넘길 수가 없겠는데? 마 서장. 설마 광수대가 사건을 은폐해거나 조작하려 했다. 이 말을 하고 싶은건가?"

"광수대의 생각은 아니겠죠. 광수대에는 그럴 권한도, 능력도 없으니까요."

"이보게. 마 서장! 아무리 같은 고등학교 후배고 경찰 대학 후배라지만 봐주는데도 한계가 있어."

안원희가 눈을 부릅뜨고 으름장을 놓자 마필중이 지지않고 대꾸했다.

"그래서 제 목을 걸고 찾아와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리는 겁니다. 선배님! 선배님을 누구보다 존경했던 저 마필중이가! 더 이상 선배님한테 실망하지 않으려고요. 납치범 칼에 옆구리가 찢어지면서도 인질을 구출하고 범인을 체포하던 경찰 중의 경찰이 대체 왜 이렇게 되신 겁니까?! 뭐가 무서워서요?"

"길게 말 안 하겠네. 당장 지금 가지고 있는 증거들 원본 전부 가져오고 복사본을 처분하겠다고 약속하면 오늘 있었던 일은 불문에 부치지."

"선배님!"

"자네가 아니라 자네 가족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고도 이 땅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장부를 확인한 자네라면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안원희가 소리치자 오히려 마필중의 목소리는 담담해졌다.

"그래서··· 가족들이 다칠까봐 눈을 감고 귀를 닫고 계신 거라고요? 조카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두 눈으로 빤히 보고도요?"

"피해자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버려진 아이들 때문에 내 조카의 창창한 앞날을 망칠 수는 없네."

"그 조카의 패륜 때문에 자기 발목이 잡힐까 우려하신 건 아니시고요?"

"마필중! 어디서 말을 그 따위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마필중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을 도끼눈 뜨고 노려보는 안원희를 내려다보며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청장직을 퇴임하시면 여당에 공천을 보장 받기로 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깨끗하고 청렴한 경찰 청장의 이미지로 남으시려면 아무래도 조카 분의 흠은 감춰두는 게 낫겠지요. 예비 정치가로서의 선배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마필중은 안원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외쳤다.

"경찰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 개새끼야!"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 나가는 마필중. 한동안 넋이 나갔던 안원희가 그제서야 제정신을 찾더니 마필중의 등에 대고 외쳤다.

"뭐, 뭐라고?! 야, 인마! 너 거기 안 서?!! 두고 봐! 너 내가 반드시 이번 주 안으로 옷 벗길 테니까!!"

방을 나서던 마필중은 선배의 호언장담에 가운데 손가락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39화 판 뒤집혔다

마필중이 안원희를 만나고 다음 날.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경찰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 개새끼야!]

그가 안원희에게 진심을 담아 내뱉은 외침은 언론을 타고 전국으로, 전국을 넘어 외신으로까지 보도대며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아, 좀 비켜봐요! 출근 좀 합시다!"

"서장님은 언제 출근하십니까?! 예상이라도 하실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나 출근해야 된다고!"

그 덕분에 강북서 앞에는 이른 새벽부터 몰려든 기자들 때문에 바늘 하나 꼽기 힘들만큼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치카치카~

한편, 그 광경을 서장실 창문을 통해 심드렁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마필중의 손은 규칙적으로 칫솔질을 하고 있었다.

똑똑똑.

"드우와(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서장실의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최정산이었다.

"말씀 들었습니다. 어젯밤은 퇴근도 안 하시고 숙직실에서 주무셨다고요?"

그르르르르··· 퉷!

"숙직실에서 자다가 여기로 옮겼다. 순경들이 내 눈치 보느라 제대로 잠도 못 자더라."

양치를 마치고 입가를 닦은 마필중이 자리에 앉아 서류를 훑어 보았다. 그의 모습은 마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담담해 보였다.

그 모습에 최정산은 피식 미소를 그리며 말 했다.

"계란으로 바위치러 가신다더니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러 간다는 뜻이었습니까?"

"저 녀석들만 해도 골치아파 죽겠는데 너까지 호들갑떨지 마라. 골 울린다."

내부고발.

마필중이 안원희를 그냥 찾아간 것이 아니었다.

지참한 녹음기를 통해 그와의 대화를 모두 녹취했고 이걸 S와 연관이 없는 국내 언론, 그리고 외신에 아낌없이 뿌려버린 것이다.

덕분에 안원희는 꼭두새벽부터 출근해서 해명을 해야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미 야당과 국민들이 합심하여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고······.

설상가상 실제로 광수대가 이번 사건을 조기에 마무리 지을려는 검찰 측과의 합의 증거들이 언론사와 네티즌 수사대의 집중 공격에 속속 발견되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다.

"이제 정말로 청장직은 날아가 버렸네요."

"애초에 내 자리가 아니었나보지 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여전히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마필중의 모습에 최정산은 진심어린 존경심을 느꼈다.

딱히 뭘 더 하지 않아도 가만히만 있으면 다음 청장 자리를 꿰 찰 가장 유력한 후보가 바로 마필중이었다.

하지만 이번 내부고발로 사실상 청장 자리는 물 건너 가게 되었으니 사람이라면 아깝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정산아."

"예. 서장님."

"내가 경찰이 가오 빠지면 뭐라고 했지?"

"개새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개새끼. 우리는 폼나게 경찰하다 멋있게 옷 벗자. 경찰이 그거면 된 거 아니겠냐?"

척!

최정산은 흔들림없이 절도있는 거수경례로 자신의 진심을 대신했다.

***

"뭐, 특검?! 아빠 그게 진짜야? 아빠가 버닝 게이트 특검에 들어간다고?"

"어휴, 기지배야. 고막 떨어지겠다!"

짝!

얼마나 놀랐는지 최유진의 목소리가 대충 3옥타브는 올라가자 옆에 있던 길서연이 깜짝 놀라 등짝 스매시를 날렸다.

"그렇게 됐다."

"그래서 어울리지도 않게 퇴근길에 삼겹살을 사오셨구만? 앞으로 더 얼굴보기 힘들어 질테니까 각오하라고."

"그런 건 아니고······."

"아니기는 뭘, 그런 거 맞구만."

길서연의 핀잔에 최정산은 말 없이 고기를 뒤집었다. 물론 최정산은 마누라가 왜 저렇게 뾰루퉁해 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함께 있던 이민정이 대신 얘기해 주었다.

"버닝 게이트 특검이면 위험한 거 아니에요? 뉴스 보니까 경찰, 검찰은 물론이고 정치가나 기업인들 외에도 조폭이나 위험한 사람들 역시 많이 연관된 것 같던데······."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반대?"

대답한 사람은 야무지게 쌈을 싸고 있던 최강태였다. 그는 고기 두 점에 마늘 한 점을 쌈 위에 올리며 대꾸했다.

"특검이면 사실상 공개 수사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저쪽에서도 섣부르게 건드리지 못 하거든. 언론사와 국민들의 눈이 특검을 주시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단점도 있어. 지금부터 내가 너 조진다고 선포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저쪽도 발 빠르게 증거를 없애거나 조작하려고 혈안이 되겠지. 아무래도 이번 특검은 단순한 특검이 아니니까."

"그렇구나······."

설명을 마친 최강태가 완성된 쌈을 한 입 크게 우물거리는 사이, 최정산이 말했다.

"강태의 말처럼 그래서 지금부터는 속도전이 될 것 같다. 되도록이면 빠르게 저쪽보다 증거와 증인들을 확보하기 위해선 특검팀 전원이 24시간 풀로 움직여도 모자라겠지. 그래서 말인데··· 아마 다시 집에 오는 건 특검팀이 해산하고 난 뒤가 될 것 같구나."

"다 좋은데 너무 무리는 하지 마. 당신 철인 아니야. 당신도 인간이고 이제 나이도 오십이 다 되어 간다고. 경찰 일도 좋고, 열정도 좋지만 제발 자기 자신도 좀 생각합시다."

"노력해볼게. 야야, 고기탄다. 얼른 먹어."

다 익은 삼겹살을 각자에게 배분하고 다시 불판 위에 고기를 올리던 최정산을 아들이 불렀다.

"근데 아부지."

"응?"

"특검 성공하면 돼지 말고 소 먹는거지?"

"······."

"소 먹는거지?"

"······그래. 소 먹자."

"열심히 해야겠네."

"그래, 열심히 해야지."

동상이몽을 꾸는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

버닝 게이트 특검은 시작 전부터 대한민국 전체를 뜨겁게 달구었다.

예정된대로 특검팀 수사팀장으로는 검사로 재직했을 당시, 철혈의 검사로 악명이 높았던 이&박 로펌의 이성화 변호사가 팀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수사관으로는 물론 강북서의 형사 1팀이 선정되었는데 마필중을 언론이 다룰 때, 마필중과 함께 버닝 게이트를 암암리에 수사중이었다는 사실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마필중과 최정산을 비롯한 강북서 형사 1팀은 국민들의 존경과 응원을 담은 의미로 '라스트 폴리스'라는 웃지 못 할 별명까지 얻게되었다고······.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라스트 폴리스라 불리는 우리 경찰의 마지막 자존심인 여러분과 함께하게 돼서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그럼 시작부터 끝까지 한 번 멋지게 일 해 봅시다. 우리."

"예! 팀장님."

"그럼 바로 시작하죠."

그렇게 지금까지 형사 1팀이 수집한 증거들과 증인들을 토대로 특검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무렵, 그들의 표적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야~ 고것 참 야무지게도 숨어 있었네. 짱구야, 아들내미 얼굴 똑디 나오게 사진 잘 찍어라."

"예. 형님."

찰칵. 찰칵!

경상북도 지방의 작은 초등학교 앞.

건널목 맞은편에 세워진 회색 세단에 두 남자가 타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남자는 조수석에 앉아있던 남자의 지시대로 목표물의 얼굴이 나오도록 셔터를 거듭 누르고 있었다.

그가 찍고 있는 소년의 이름은 김서준. 바로 김상태의 하나뿐인 외동 아들이었다.

"애 얼굴에 그늘진 거 보소. 그러게 어차피 들킬 거 뭐한다고 사서 고생하는 건지. 참··· 애만 불쌍하지. 안 글냐?"

"형님. 사진은 일단 다 찍었는데 어떡할까요?"

"사진 예쁘게 출력해가지고 형수님한테 퀵으로 보내. 쓸데없이 다른 말 적지말고 사진만 보내도 똑똑하신 분이니까 무슨 뜻인지는 잘 아실 거다."

"그래서 사진은 제대로 찍은 거 맞아?"

"그래, 일단 보내기 전에 한 번 확인을······ 엄마, 깜짝이야!"

뒷좌석에서 자연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반응했던 조수석의 사내, 조강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안녕?"

"안녕같은 소리하네. 넌 또 뭐냐? 언제부터······."

"사진이 영 못 쓰겠네. 서준이가 너무 뚱뚱하게 나왔잖아. 키도 5cm는 작아 보이고."

"응? 어? 카메라?! 언제?"

짱구는 최강태가 디카를 돌려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제서야 자신의 손에 카메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새끼가 뒈지고 싶나?"

슉!

조강수는 몸을 틀어 경고도 없이 손을 뻗었다. 문제는 그의 손에 날카로운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노리는 부위는 최강태의 목.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어서 그대로 둔다면 최강태의 목에 칼이 파고 들었겠지.

하지만 조강수의 뜻대로 되는 일은 없었다.

덥썩, 우드득!!

"끄아아아아아악!!"

그 좁은 공간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숙련된 칼잡이의 손목을··· 심지어 카메라에서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가볍게 낚아챈 최강태가 간단히 손목을 틀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손목이 뒤틀리며 뼈가 부러지고 인대가 끊어진다. 조강수는 그 끔찍한 고통에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고······.

"형님! 그거 안 놔?!"

짱구가 조강수를 구하기 위해 다급히 주먹을 날렸지만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빡!

"끄아아아악!!"

"헉! 죄, 죄송합니다!"

최강태가 비틀어 잡은 손목을 틀어 짱구의 주먹을 막았고 결과적으로 부러진 조강수의 손목에 짱구가 주먹질을 한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참 시끄럽네. 보채지 않아도 손 봐 줄테니까 얌전히 기다려."

"······!"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조강수와 짱구가 사색이 된 얼굴로 최강태를 쳐다보았다. 상대는 어려보이지만 그 실상은 자신들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프로 중의 프로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내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문을 열고 탈출하려 했다.

하지만······.

덜컥덜컥.

"무, 문이 안 열려?!"

"분명 안 잠겨 있는데?!"

문고리를 거듭 잡아당기고, 유리창을 두들기며 탈출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카메라를 확인한 최강태가 그것을 아공간에 챙겨 두고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희 둘한테 이번 일을 시킨 녀석이 누구야? 순순히 대답 안 해주면 더 좋고."

까드득, 까드득!

덜덜덜덜······.

최강태가 씨익 웃으며 주먹을 풀자 조강수와 짱구의 얼굴은 사색이 되다못해 핏기가 가셨다.

냐옹~

한편, 밖에서는 최강태의 권속, 까망이만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다가 따사로운 햇살 아래 식빵을 구울 뿐이었다.

***

경기도 인근의 한 골프장.

스무 명이 넘는 양복 무리들을 이끌고 TW건설의 사장, 장태원이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팡!

그런데······.

"나이스 샷! 장 사장 의외로 골프에 재능이 있나봐? 잘 날아가네."

눈앞에 초대하지 않은 뜻밖의 불청객이 찾아왔다. 검은 양복 무리들은 빠르게 장태원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최강태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보는 젊은 친구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지금 찔리는 거 그거. 그것때문에 왔지. 순순히 얘기해준다면 조용히 돌아갈게. 쓸데없는 반항을 한다면 모조리 벗겨먹을 테니까 주의하고."

"하아······. 경찰은 아닌 것 같은데 별 미친놈을 다 보겠군. 치우고 따라와라. 난 먼저 갈테니까."

"예. 사장님."

"현명한 선택은 아니지만 좋은 선택이야. 나한테."

최강태는 장태원의 선택을 존중하며 달려오는 떡대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

잠시 후······.

"이, 이게 대체······."

장태원은 눈앞에 벌어진 일에 경악에 찬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40화 고마운 미친놈

"나나 너같은 나쁜놈들은 참 살기 쉬운 세상이라 다행이야.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제끼고, 방해되는 새끼들 죽이고, 도움될만한 놈들은 매수하고, 그러다보면 순식간에 위로 올라갈 수 있거든. 안 그래?"

"대, 대체 원하는 게 뭐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뒷걸음질을 치던 장태원이 바닥에 철푸덕 넘어졌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최강태의 등 뒤로 사지 불구가 된 자신의 부하들이 아직도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찬 곡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건장한 체구도,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연장도, 그 무엇하나 악마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소리를 즐기며 미소를 그리는 최강태의 모습이 장태원에게는 악마로 비쳤던 것이다.

"말 했잖아. 순순히 협조하면 얘기만 듣고 가겠지만 안 그럼 다 벗겨 먹을 거라고."

"이이······!"

장태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최강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드라이버가 들려 있었고 주저없이 최강태의 머리를 향해서 그것을 내리쳤다.

슉.

하지만 옆으로 몸을 틀어 가볍게 장태원의 공격을 피한 최강태는 슬쩍 발을 내밀었다.

턱!

"허억!"

철푸덕!

그러자 스윙의 원심력과 노쇠한 몸뚱이를 감당하지 못 한 장태원이 최강태의 발에 걸려 볼품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최강태는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가 허리를 숙이더니 그가 놓친 드라이버를 주워들었다.

"취미가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언제라도 기분 좋은 일이지. 안 그래?"

"취, 취미가 비슷하다니? 아! 형씨도 골프를 좋아하는구려! 우, 우리 이럴 게 아니라 필드에서 공이라도 치면서 오해를 푸는게······."

취미가 비슷하다는 말에 살아남을 가능성을 엿본 장태원이 다급히 그를 꼬드겼지만 최강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아니. 그거 말고. 말이 안 통하면 일단 사지부터 아작내놓고 협박하는 거 말야. 나도 그거 좋아하거든."

"자, 잠깐!!"

"자~ 따끔합니다."

콰작!!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주저없이 내리친 드라이버는 장태원의 발목을 그대로 부숴버렸고 장태원의 입에서는 끔찍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최강태는 장태원의 얼굴쪽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더니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혹시 장주원이라는 이름 알아? S라는 모임의 회원인데 아 글쎄 이 놈이 제일 좋아하는 취미가 여자를 기절할 때까지 때린 다음에 기절한 여자를 강간하는 거라지 뭐야? 하여간 취향도 유전 타는 건지 지 애비를 꼭 빼다 박았으니. 어휴······."

"그, 그걸 어떻게?!"

장태원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식의 취향은 둘째치고 자신의 고약한 성적 취향은 아내도 모를 정도로 기밀 사항이었다.

그런데 처음보는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대, 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게 있으니까 나한테 이러는 게 아니오?!"

"음~ 그럼 일단 가볍게 네가 보유한 회사의 주식과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세탁한 비자금과 해외 계좌에 꿍쳐둔 자금을 받아볼까?"

"······!"

장태원은 두 눈을 부릅뜨며 다급하게 변명했다.

"돈을 주는 건 상관없지만 그걸 전부 처리하려면 아무리 나라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단 회사로 돌아가서 바로 처리하도록······."

빠각!!

"크아아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

"다음부터는 관절을 두 개씩 부술거야. 관절이 다 박살나면 갈비뼈를 한 대씩 부러트리고, 부러트릴 갈비뼈가 없으면 이빨인데··· 자기가 즐겨쓰던 방법이니 굳이 설명 안해도 잘 알겠지 뭐."

장태원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곳은 대한민국에서도 상류층만 이용하는 필드였고 때문에 평소에도 돈 많은 사람들의 이용이 끊이질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어째서인지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으면 누가 한 번쯤은 듣고 기웃거릴법 한데 정말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장태원은 최강태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몸이 부서지는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조차 없었으니까.

그는 다급하게 스마트폰으로 일을 처리하고는 최강태에게 보고했다.

"처, 처리했습니다! 제가 가진 회사 주식은 바로 처분 할 수 없어 일단 위임 신청을 해 뒀고, 처분 가능한 재산을 바로 처분해서 말씀하신 계좌로 송금했습니다!"

"어, 빡빡아. 들어온 거 확인했다고? 그래. 알았다."

구영식에게 사실을 확인한 최강태가 쪼그려앉아 눈을 맞추자 장태원이 애원했다.

"그럼 이제 살려주시는······."

"말 했잖아. 전부 벗겨먹을 거라고. 듣자하니 부자가 쌍으로 S의 똥구멍을 꽤나 닦아줬던데 너만한 악당이 설마 똥 묻은 휴지를 그냥 버리지는 않았겠지?"

'미치겠네! 대체 그건 어떻게 아는 거냐고?!'

장태원은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방금 전부터 최강태가 하는 모든 얘기들은 사실상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들만 아는 최고 기밀들이었다.

그런데 최강태가 손바닥 보듯 알고 있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측근들의 배신을 의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태원은 측근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을 배신했다면 저기서 사지가 연체동물마냥 부러진 채 나뒹굴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 그것까지 알고 계신다면 제가 그 증거들을 모두 넘겨드렸을 때 저와 제 아들이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실텐데요?"

"그래서 어쩌라고?"

"······."

장태원은 결국 그것만은 얘기할 수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 가운데 최악의 선택지였다.

으드득! 콰작! 빠각!!

갈비뼈까지 갈 것도 없었다. 양쪽 다리 관절과 골반뼈가 으스러지는 순간, 장태원은 모든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럼 벗겨먹을 것도 전부 벗겨먹었으니까······."

"살려 주시는······."

"기분좋게 나머지도 몽땅 부러트려볼까?"

"자, 잠깐만요! 약속이 다르잖습니까!!"

"응? 난 그런 약속 한 적 없는데?"

"이런 개······!"

콰직!!

***

"이, 이게 대체······."

신고를 받고 출동한 특검팀장은 어이가 없었다.

조폭 출신 건설사 사장을 체포하기 위해서 기껏 무장하고 찾아왔더니 상황이 전부 끝나 있었기 때문이다.

막말로 피의자들을 건져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더욱 황당한 건 수사팀원들의 반응이었다.

"이야~ 오늘도 문어가 풍년이구만."

"수갑은 필요없으니까 서둘러서 병원으로 이송시켜."

팀원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경찰들을 지휘하여 떡대들을 이송하였고 최정산은 기절한 장태원의 몸 위에서 그의 스마트폰을 발견하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반장님?"

이성화는 최정산에게 다가가 지금 상황에 대해 물었고 최정산은 깊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어떤 미친놈께서 무슨 목적이 있어 우릴 돕는 것 같은데······."

"미친놈이요?"

"빌어먹게도 그 미친놈의 도움이 우리에겐 아주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최정산은 폰을 확인하고는 이성화에게 건냈고 그가 건낸 폰을 받아서 확인한 이성화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떠졌다.

"이, 이건······!"

폰에는 S의 청부로 짐작되는 각종 비리와 청부 살인, 폭행, 담합에 관련된 정보들과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들의 위치 또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아마 장태원이 S의 허튼 수작을 대비하기 위해서 숨겨둔 보험이겠지.

"이 개새끼들이···! 설마 수사팀 가족들의 사진을 찍어서 협박까지 하려 했을 줄은······. 지금 당장 수사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 인력을 지금보다 더 보강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장태원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증거들일 뿐이지만 그 정도만 해도 S의 실체와 범죄 사실을 증명하는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이 정도만 해도 출국금지는 물론이고 구속 영장까지 신청할 수 있을 테니까요. 서둘러 움직이죠. 장태원이 구속됐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아마 밀항을 시도하는 자들도 있을 테니까요. 그나저나······."

이성화는 폰을 슬쩍 들어올리며 최정산에게 물었다.

"대체 누굽니까? 이 고마운 미친놈은."

"글쎄요. 저도 알고 싶어 미치겠습니다."

***

한편, 두 사람이 궁금해하는 미친놈은 현재 서울 신평화동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

감소하기 시작하는 인구 증가 정책의 일환으로 정부는 해외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과 고려족의 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그에 대한 혜택 등도 준비했다.

신평화동 역시 그 혜택 중 하나였다.

신평화동은 조선족과 고려족 출신 귀화자들에게 매우 싼 값으로 거주지를 제공했고 그 덕분에 이 동네에는 조선족, 고려족 출신의 귀화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귀화 신청이 이어지고, 귀화에 실패한 사람들이 불법체류자로 남아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범죄율도 월등히 높아졌다.

때문에 지금은 차이나 타운만큼이나 이국적인 모습을 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기피하는 위험한 동네가 된 것이다.

최강태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 바로 황철고에게 받은 정보 때문이었다.

장태원에게 S의 실체와 그들의 범죄에 대한 어느정도 증거를 확보할 수는 있었다. 하나 정작 이번 버닝 게이트와 관련된 중요 증거들은 그에게 없었다.

버닝 게이트 관련 담당자는 장태원이 아니라 황철고였기 때문이다.

드르륵.

황철고가 알려준 식당을 방문한 최강태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호오~"

한창 바쁠 점심 시간인데도 가게 안은 텅텅 비어있었다. 손님도, 주인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가게를 스윽 훑어보니 급하게 도망친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벌써 토꼈구만. 특검이 터지자마자 발빠르게 움직인건가? 눈치 빠르네."

최강태는 2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사장실로 짐작되는 방 역시 사람만 깔끔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문이 활짝 열린 금고만이 자신의 텅 빈 속을 보여줄 뿐이었다.

"읏차."

그가 소파에 모로 눕자 탁자 위로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사뿐하게 뛰어 올랐다.

까망이었다.

냐앙~

"까망아. 그놈들 지금 어디있냐?"

주인의 물음에 까망이는 주위를 빙글거리며 코를 킁킁거리더니······.

미야옹~

이곳 그림자에 남은 냄새와 똑같은 냄새가 나는 그림자를 찾아낸 까망이가 울었다.

"잘 했어."

그 순간, 미소와 함께 누워있던 최강태의 모습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

서해안의 어느 작은 포구.

정박해 있는 배들을 제외하곤 평소에도 조용한 이 포구 마을에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여러대의 승합차에서 내린 이들을 반긴 사람은 번개호의 선주, 박철민이었다.

"아이고~ 서울에서 먼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배를 급하게 구하신다 그래서 일단 급하게 정비를 하긴 했는데··· 노후가 심한 배라 많이 힘들겁니다."

"긴 말 할 것 없소. 날래 출발하시오."

"거참 성격들도 급하시네. 하기야 뭐, 우리 배 찾는 손님치고 느긋한 분이 잘 없긴 하지. 저기 저 번개호라고 보이지요? 저 배에 탑승하시면 됩니다."

"설마 저 작은 배에 40명이 넘은 이 인원이 다 타라는거요?"

번개호를 확인한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자 박철민이 너스레를 떨었다.

"잘 구겨타면 괜찮아요. 저게 저래봬도 컨디션 좋을 땐 80명도 태운다니까?"

"80명은 무슨··· 10명만 타도 가다 침몰하겠구만."

"에헤이~ 의심도 많으신 양반이네. 내가 직접 운항하는데 설마 침몰할 정도로 태우겠습니까? 그런데 이 손님도 일행인가? 어째 분위기가 색다른 것 같은데?"

"······!"

그 순간, 밀항을 계획했던 조선족 조직원들이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그에 최강태는 넉살좋게 웃으며 용건을 꺼냈다.

"아~ 난 밀항 쪽은 아니고. 그거 하려는 사람들한테 볼일이 좀 있어서."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41화 사후처리 총괄팀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유통망을 가진 BG그룹.

그곳에서도 회장 다음으로 실세 중의 실세로 꼽히는 최상윤 이사실에 소란이 일어났다.

쨍그랑!

난데없이 터져나온 꽃병 깨지는 소리는 다름아닌 사람의 이마에서 터져나온 소리였다.

최상윤이 자신의 맞은편에 서 있던 검은 양복남의 머리에 감정을 가득 실어 꽃병을 집어던진 것이다.

깨진 꽃병 조각과 함께 쏟아진 물과 꽃들 위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사내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봐요. 김 실장."

"예. 이사님."

최상윤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자신이 던진 꽃병에 맞은 남자를 불렀다. 그러자 김성준이 고개를 들며 높낮이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김 실장님 직함이 뭐죠?"

"사후처리 총괄팀 팀장입니다."

"사후처리 총괄팀이 무슨 일을 하는 부서였죠?"

"경영진께서 업무에 집중하실 수 있도록 업무에 연관되지 않은 사적인 문제들을 전반적으로 케어하고 관리하는 부서입니다."

"그쵸? 우리 가 싼 똥치우라고 만든 부서지 그냥 앉아서 돼지 새끼마냥 주는 돈이나 처먹으라고 만든 자리 아니죠, 김 실장님?"

"그렇습니다."

대답하는 김성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고 최상윤은 그런 김성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뚜벅뚜벅 그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짜악!

다짜고짜 뺨을 올려 붙였다.

"그럼 칼밥이나 먹던 범죄자 새끼들 모아서 번듯한 직장도 주고, 그럴듯한 감투도 주고, 남들은 평생 만져보기 힘든 월급도 챙겨주는 우리는 뭡니까?"

"당연히 은인이십니다. 목숨으로 갚아야 할······."

"근데 칼밥 먹는 새끼들은 원래 은혜를 원수로 갚습니까? 돈을······."

짜악!

"처먹었으면."

짜악!!"

"처먹은 값을······."

짜악!!!

"해야할 거 아니야!!"

퍼억!!

김성준이 고개를 바로 할 때마다 더욱 강해지던 따귀는 마침내 주먹으로 바뀌어 김성준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김성준은 부러진 치아를 손바닥에 받아서는 다시 뒷짐을 지고 본래 처음의 자세로 돌아왔다.

그런 짓을 당하고도 그의 눈에서는 그 어떤 독기도, 원망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로봇처럼······.

김성준을 한껏 갈구고 나서 속이 후련해진 것일까? 최상윤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 일에는 뭔가 석연찮은 부분들이 많아요. 김 실장님도 아시겠지만 황철고 그 자식이 나이는 어려도 그런 어리숙한 실수를 저지를 그릇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황철고의 체포부터 증거물 압수와 현재 상황에 이르기까지··· 수사의 진행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르단 말이지. 이게 과연 경찰들만의 능력으로 이뤄낸 성과일까요?"

"특검 팀 뒤에 배후 세력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가능성의 여부가 아닙니다. 황철고의 암살이 실패한 것도, 강북 가출팸과 버닝, 그리고 버닝과 우리 모임에 관한 증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드러난 것도 제3의 세력이 미리 오랜 시간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 정체를 밝혀내서 반드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 전에 지금 터진 문제는 확실히 해결 하시고요. 우리한테 문제가 생기면 당신들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시죠? 김 실장님."

김성준은 꾸벅 고래를 숙인 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러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부하들이 곧바로 손수건을 내밀며 허리를 숙였다.

부하 한 명은 김성준이 대충 부러진 이빨과 피를 닦아낸 손수건을 받아들면서 물었다.

"최 이사, 정리할까요? 팀장님."

"놔 둬. 아직 쓸모가 많은 친구니까. 쥐고있는 목줄이 많은 개가 높이 올라갈수록 우리한테도 도움이 되지."

"그리고 말씀하신 조선족 청소부들 위치 파악했습니다."

"팀원들 준비는?"

"전원 대기 중입니다."

"곧바로 이동한다."

이내 BG그룹의 사후처리 총괄팀을 태운 여러대의 승합차들이 서해안을 향해서 출발했다.

***

"아이고~ 어쩌냐, 너희들 이제 배 못 탈 것 같은데······."

최강태가 이죽이며 다가오자 이들의 우두머리인 양훤이 부하 몇을 보며 최강태를 향해 고개짓을 하더니 본인은 다른 부하들을 이끌고 배로 향했다.

미친놈과 말을 섞을 시간도 아깝다는 뜻이었다.

명령을 받은 부하들 역시 최강태를 오래 볼 생각은 없었다. 자칫 상대와 놀아주다가 배를 못 타게 되면 지체없이 출발할 거란 건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날카롭케 번뜩이는 칼을 뽑아든 녀석들의 눈에는 살기가 흘러 넘쳤다. 이대로 최강태를 죽여 바다에 던져버린 후, 그대로 말항선을 타고 중국으로 도망갈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얘들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네?"

슉!

그 순간,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조선족 폭력조직의 칼잡이가 무서운 속도로 최강태에게 달려들었다.

품속으로 파고드는 움직임부터 칼을 휘두르는 속도와 급소를 노리는 정확도까지······. 확실히 칼 좀 가지고 놀던 일진들과는 레벨이 달랐다.

턱, 우드득···!

"크아아악!!"

빠각! 뻐억! 쩌엉!!

그러나 그뿐이었다. 개미의 몸집이 다르다 해도 인간의 눈에는 같은 개미인 것처럼 최강태의 눈에는 그놈이 그놈들이었다.

칼을 들고 빠르게 찔러들어오는 손목을 간단히 낚아채 꺾어 버리고, 뒤이어 들어오는 녀석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동시에 주먹을 박아 넣는다.

따로 급소를 노리고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때리는 부위가 곧 급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얻어 맞으면 얼굴뼈가 부서지고, 갈비뼈는 맞으면 갈비뼈가 부러진다.

함부로 두 팔을 올려 가드하는 것 역시 위험했다. 최강태의 주먹을 가드한 팔뼈 자체를 박살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을 처리하기 위해서 달려든 네 명의 칼잡이들은 순식간에 쓰러트린 최강태의 모습에 양훤도 걸음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니 누구니? 보아하니 짭새는 아닌 것 같고, 그 아 새끼들이 보낸 청부업자구나. 니가 지금 이러고도 그놈들이 무사할 수 있을 것 같니? 내가 손가락 한 번만 까딱하면 니 뒤에 있는 놈들 이 나라에서 매장되는 거 순식간이야. 내가 그 정도 준비도 아이했을 거 같니?"

"그래서, 널 건드리면 그 시한폭탄을 터트리겠다고?"

"말귀를 좀 알아먹는 간나 새끼구나. 근데 표정이 왜 그러니? 진짜 말귀를 알아먹은 거 맞니?"

최강태가 씨익 웃으며 자신들에게 다가오자 양훤은 인상을 찌푸리며 폰을 들어올렸다.

"내가 여기다 한 마디만 하면 너희는 끝장이야! 지금 이게 장난같니?"

"당연히 장난이 아니어야지. 장난이면 넌 진짜 먼지나게 맞는다?"

"뭐, 뭐?!"

오히려 자신들을 달려오는 최강태의 모습에 당황한 양훤이 그를 향해서 소리쳤다.

"뭘 보고만 있니? 가서 저 새끼 죽여라!"

으아아아아아!!

양훤은 결국 폰을 품속에 다시 갈무리 한 후, 서둘러 밀항선에 승선했다. 그 사이, 자신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괴성을 지르며 최강태를 향해 몰려갔지만······.

'무슨 관운장이 현신한 것도 아니고 저게 말이 되니?!'

자신의 부하들 중에서도 추리고 추린 정예들이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휩쓸려 나간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무기가 칼이고, 자신의 부하들은 칼질에 이골이 난 전문가들이었지만 그런 사실은 최강태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부하들의 칼은 스치지도 않고, 대신 최강태의 주먹은 뻗는 즉시 부하들의 몸뚱이를 두들겼다.

덕분에 양훤의 귀에는 가죽북 터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그 주먹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는지 어퍼컷을 맞은 놈은 머리 위로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고 스트레이트를 맞은 놈들은 몇 미터를 날아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심지어 칼을 맨손으로 잡아서 부러트리거나, 정면에서 정권을 내질러 맨주먹으로 칼을 부수는 모습을 볼 때는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빠, 빨리 시동을 걸라! 너도 죽고 싶니?!"

"이, 이상하다? 이게 왜 이렇게 안 걸리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 걸렸는데······."

밀항선의 선주, 박철민은 배의 시동이 걸리지 않자 양훤의 눈치를 살피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시동이 잘만 걸리던 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전혀 시동이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썅간나 새끼!"

푹!

"커헉!"

결국 참다 못 해 박철민을 찔러 죽인 양훤이 조타실을 차지하고는 시동을 걸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엔진은 조잡한 소리만 웅웅웅웅 울리다가 결국 꺼질 뿐이었다.

"왜?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시동이 잘 안 걸려?"

"······!"

양훤은 눈을 부릅떴다.

부하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붉은 피를 여기저기 뒤집어 쓴 악귀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천연덕스럽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너······!"

"내가 아까 말 했지.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장난이면 나한테 맞는다고. 왜, 중국가서 그걸로 협박하면 더 뽑아 먹을 수 있는데 이렇게 버리긴 아까운 카드라 이거냐?"

스핏!

놀람은 짧았고 행동은 신속했다.

최강태가 눈치없이 떠들며 자신의 반경 안으로 들어온 순간, 양훤은 망설임없이 빠르게 몸을 날리며 칼을 휘둘렀다.

이 거리에서 자신의 칼을 피한 상대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거고.

하지만······.

턱, 쨍그랑!

양훤은 자신의 칼을 맨손으로 잡은 것도 모자라 악력만으로 산산히 부숴버린 최강태의 미소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난 누구랑 달리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라서. 이 꽉 깨물어라."

빠악!

***

"어, 그래 빡빡아. 지금 내가 불러주는 계좌랑 페이퍼 컴퍼니에 박아둔 블랙 머니, 그리고 중국쪽 회사의 투자금을 전부 회수해서 내 앞으로 챙겨놔. 대충 170억은 될 거다."

구영식에게 용건을 끝낸 최강태는 전화를 끊더니 양훤이 가지고 있던 크고 묵직한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하였다.

거기에는 돈이 아닌 잡동사니가 한 가득 들어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도구는 다양한데 대부분 혈흔이나 말라붙은 애액이 묻어 있었다는 점이랄까?

이것이 바로 양훤이 가지고 있던 비밀 클럽의 증거품이었다.

피해자의 DNA와 S의 회원 DNA가 함께 묻어있는 이 증거물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증거 목록이었으니 말이다.

"늦었네."

최강태는 자신 말고도 이걸 찾기 위해 찾아온 일단의 무리들을 반갑게 환영해 주었다.

승합차에서 내린 검은 양복 무리들은 발 빠르게 김성준의 뒤에 도열했고 김성준은 상황을 빠르게 스캔하였다.

조선족 조직으로 확실시 되는 놈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과 비명을 흘리고 있었고 그 가운데 혼자서 자신들을 맞이하는 정체불명의 상대.

나이는 어려 보였지만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피차 신분을 밝히기는 곤란한 것 같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말씀드리죠. 그 가방, 아무래도 저희들이 찾고있는 물건 같은데 얌전히 넘겨 주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그에 걸맞는 사례를 지불할 용의도 있습니다."

"싫다면?"

"······."

최강태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하자 김성준은 말 없이 품속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 소음기를 장착하였다.

그 모습에 최강태가 피식 웃으며 경고했다.

"미리 말 해 두는데. 그거 방아쇠 당기면 후회한다. 너?"

"후회는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이고요. 얌전히 주는 돈이나 처받고 돌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김성준은 소음기를 장착한 총구를 최강태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웃고 있는 그의 이마를 향해 말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42화 취미 생활

경기도 용성시의 4성급 호텔 로열 스위트룸.

날을 잡고 호텔을 통째로 예약한 이들이 이곳에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테이블 위와 바닥에는 한 병에 수백만원이 넘는 양주들이 나뒹굴고······.

남자들은 스튜어디스, 아이돌 지망생, 여배우, 모델 출신 등의 다양한 미녀들을 옆에 끼고 정신없이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방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 놀다가 노래가 꺼지면 술을, 마시고 여자를 품다가 다시 노래를 틀고 놀기를 반복한다.

이미 술과 약에 취한 여자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의 몸을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가 질리면 술과 약을 마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씨발!!"

확!

술을 마시던 일강 제철 회장의 손자, 안수형은 다 마시고 빈 술잔을 쳐다보다 뭐가 그렇게 열 받았는지 술잔을 그대로 던져버렸다.

와장창!!

당연히 벽에 부딪힌 술잔은 박살이 났고 큰 소리와 함께 깨진 유리조각과 얼음이 바닥에 흩어졌지만 누구도 그걸 놀라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술 마시다 귀신이라도 봤냐? 왜 벽한테 컵을 던지고 지랄이래."

"나중에 저 벽한테 사과해라. 수형아."

"크크크큭!"

친구들이 놀리자 안수형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버럭 소리쳤다.

"아니, 씨발 너희들은 화도 안 나냐? 왜 우리가 서울도 아니고 이딴 촌구석에 숨어서 놀아야 하는데? 우리가 무슨 죄 지었냐? 어?!"

"그걸 왜 나한테 따지냐, 병신아. 그리고 용성 정도면 촌구석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지.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밖에 안 되는데."

"그리고 수형아. 우리 죄 지은 거 맞아. 크크큭! 우리가 죄를 지었으니까 대한민국이 이 난리가 나고 우리 가족들도 우리같은 못난 새끼들 똥 닦아주려고 불철주야 좆뺑이 치는 거 아니겠냐?"

"그런데 우린 여기 모여서 또 술이나 마시고 있네?"

"인생이 씨발 그런거지.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사는 건데 뭘 어쩌라고. 자, 마셔!"

술잔이 오가고 또 다시 값비싼 양주를 위 속에 부어 넣는다.

취기가 더욱 더 올라오고, 향로에서 타오르는 마약 연기에 정신이 조금씩 더 몽롱해지는 와중에 안수형이 다시 한 번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니 막말로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갈 곳 없는 애새끼들, 어차피 길바닥에서 굶어 죽을 거 우리같은 산업 역꾼들이 유용하게 써 먹을 게 죄냐? 막말로 우리가 공짜로 데려왔냐고? 내 말이 틀려?"

"우와~ 니미, 지가 지보고 산업 역꾼이래. 푸하하하!"

"그럼 잘나신 산업 역꾼께서 헌법도 돈으로 바꿔 보던가.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빌려줄 테니까."

"나도 찬성!"

거실에서 저들끼리 헌법을 개정하네 마네 농담 따먹고 있을 때, 마침 안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나온 남자가 대충 허리에 수건을 두르며 대꾸했다.

"난 지금도 별로 상관없는데. 어차피 돈이랑 권력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는 게 이 나라잖아. 별 차이 없지 않아?"

"오~ 도진혁. 그러고 나오니까 진짜 무슨 드라마 찍는 것 같다야. 애는?"

"기절했어. 확실히 간만에 모여서 회포를 푸는 건데 좀 심심하긴 하네."

배우 도진혁은 술과 약에 취해 뻗은 여자를 발로 밀어내더니 자리에 앉아 술을 마셨다.

"조금만 참아. 어차피 꼰대들이 금방 해결해 줄거고, 냄비같은 국민들도 금방 끓었다가 잠잠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식을 테니까. 그 사이에 국회에서 사건 좀 몇 개 터트려주고 연예인 관련 기사 몇 개 터트려주면 더 효과가 좋겠지."

"애초에 대한민국 경찰, 검찰 중에서 우리 돈 안 먹은 새끼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걱정마. 우리 절대 안 잡혀."

"캬~ 진짜 이런데 어떻게 이런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대한민국 만만세다!"

"그렇게 행복하냐?"

"그럼! 좀만 있으면 이 좆같은 상황도 끝나고 다시 마음껏 놀 수······. 근데 너 누구야? 왠지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술과 약에 취한 야당 간부 지승호의 아들, 지호준은 눈을 비비며 상대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얼굴을 가져갔다.

그러자 최강태는 씨익 웃더니······.

"우연이네. 나도 행복하거든."

짜악!!

난데없이 따귀를 갈겨버렸다.

우당탕···!

따귀를 처맞은 지호준은 바닥을 구르다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아파! 아프다고!!"

지호준의 비명과 함께 방을 가득 채우던 희뿌연 연기가 말끔하게 사라지고, 술과 약에 취해있던 S의 회원들도 제정신을 되찾았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저새낀 뭐야? 호준이는 또 왜 저러고 있는건데?"

"밖에 사람들은? 경호팀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한 사람이 다급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가 그 상태 그대로 얼어 붙었다.

"이, 이게 대체······."

문 밖에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경호팀 인력들.

방음 효과가 너무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스위트룸이 너무 시끄러웠던 것인지 복도를 가득 채운 경호팀의 곡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으으으······ 으아아아!!"

결국 두려움을 이기지 못 한 남자가 대답도 않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최강태는 그를 잡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잡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는 검은 떡대들을 발견한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인상으로 보나 착용하고 있는 슈트로 보나 경호팀 인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저, 저기! 미친놈이 방에 침입······!"

퍼억!!

그러나 경호팀이라고 믿었던 떡대가 가타부타없이 날린 주먹에 그대로 안면을 얻어맞고 기절한 남자가 그들의 손에 끌려 돌아왔다.

"큰형님. 주변에 남은 잔바리들은 정리했고 말씀하신 녀석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이 녀석은 누군지 모르겠는데 도망치는 것 같아서 일단 가지고 왔습니다."

"오냐. 온 김에 여기 있는 여자들 데려가서 보살피고. 중요한 참고인들이니까 몸 상하지 않게 신경쓰고."

"예. 큰형님."

뒤쪽에 대기중이던 부하들에게 고개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떡대들이 방안으로 밀려들어와 순식간에 여자들을 챙겨 나갔다.

술과 약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여자들은 반항은커녕 미동도 없이 그렇게 옮겨졌다.

한편, 지금 이 상황에서 한 곳을 주시하는 남자가 있었다. 떡대들이 데려온 엉망진창의 몰골이 된 남자를 자세히 관찰하던 그의 눈이 커졌다.

"서, 설마 김 실장?!"

"잘 아는 얼굴인가봐? 오른손은 미안하게 됐어. 분명 경고는 했는데 도무지 말을 들어먹어야 말이지."

최강태는 처참히 뜯겨진 손목 부위만 남은 김성준의 오른손을 잡아 흔들며 씨익 미소를 그렸다.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방아쇠를 당긴 결과, 총이 폭발하며 김성준의 오른손도 같이 날아가버린 것이다.

물론 날아간 오른손이 어찌되도 좋을만큼 처맞았던 건 덤이었고.

"너 대체 뭐야?! 특검이 이런 식으로 폭력을 쓰고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최상윤이 눈을 부릅뜨며 최강태를 협박했지만 그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뭐래, 내가 정말로 특검팀처럼 보여? 진심?"

덥썩.

"뭐, 뭐야?!"

최강태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손을 뻗어 가장 가까이 있던 S 회원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현재 파프리카 TV에서 남캠 순위 2위에 랭크된 BJ 현율이었다.

최강태는 현율의 머리채를 자신의 발밑으로 내동댕이 친 후, 그대로 밟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그런데 서툴면서도 잔인하게 상대를 짓밟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딘가 익숙했다.

'그러고보니 저건······.'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무자비하게 밟고 있는 최강태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의 발에 밟히고 있는 현율과 매우 닮아 있었다.

남캠으로 파프리카 TV의 정점에 서기 위해 반쯤 여자들의 노예를 자처했던 현율은 오히려 BJ 생활이 길어질수록 여성에 대한 혐오가 심해졌다.

그래서일까? 현율은 S의 존재를 알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이 모임의 회원이 되고난 후, 남들보다 더 강한 여성 혐오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힘이 없는 여자들을 밟고, 차고, 망가트리면서 자신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울부짖는 그녀들의 모습에 삐뚤어진 쾌락을 느꼈던 것이다.

"이래도?"

최강태는 반병신이 되어 꿈틀거리는 현율을 자랑스럽게 선보이며 이죽였고, 그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 그럼 대체 우리한테 왜 이런 짓을······."

"취미 생활."

"취미 뭐?"

"취미 생활 몰라? 너희들이 돈으로 이 나라를 가지고 노는 게 취미 생활인것처럼 나는 돈으로 이 나라를 가지고 노는 너희들을 가지고 노는 게 취미 생활이라고."

사람들은 최강태가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들을 찾아와서 이렇게 행패를 부리는 이유가 다름 아닌 취미 생활이라고?

최상윤은 최강태를 노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지금이야 즐겁고 재밌겠지. 그런데 뒷감당이 되겠어?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작심하면 대한민국에서 못 할 게 없다라는 걸 설마 모르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이래서 끊은 수가 없는 거야. 너희처럼 자기가 최상위 포식자인줄 착각하는 벌레들을 밟는 쾌감은 다른 취미 생활로는 느낄 수가 없는 카타르시스거든. 자, 지금부터 너희한테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두 가지 선택지?"

딱.

최강태가 손가락을 튕기자 문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빡빡이들이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의아함을 느끼자 최강태가 스산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설명했다.

"정확히 세 시간 뒤에 이곳을 경찰에 신고할 거야. 너희는 저 문을 통해서 밖으로 빠져 나가던지, 아니면 기다렸다가 경찰에 체포 당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돼."

"그, 그 말 진심이야? 우리더러 이대로 도망쳐도 된다고?"

"그걸 순진하게 믿냐? 당연히 함정일 게 뻔하잖아."

녀석들은 최강태의 진의를 의심했고 최강태는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대꾸했다.

"너희들이 굳이 함정을 준비해야 할만큼 대단한 녀석들이었다면 나도 즐거웠겠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는 아니니까 안심해도 좋아. 저 문을 나가서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을 끌고 이곳으로 돌아오던, 외국으로 탈출하던 그건 너희 마음이야. 대신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명심해야 할 사항?"

"저 문을 너희 스스로 나가는 순간, 내 목숨을 걸고 장담하는데 너희는 그 선택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난 분명 경고했다."

최강태의 미소에서 섬뜩함을 느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판단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어떡할래?"

"미쳤냐? 여기서 경찰한테 잡히게? 그랬다가 메스컴이라도 타면? 난 바로 아버지한테 모가지라고. 모가지!"

"그래, 일단 여길 벗어나서 생각하자. 일단 이곳을 빠져 나가기만 하면 방법이 있겠지."

자신들이 이곳에 모였다는 사실을 감추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서 놀았다는 증거까지 확실하게 제거해야 했다.

그럴러면 지금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고.

물론 위험부담은 훨씬 커지겠지만 애초에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이상 물불 가릴 여유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난 나가겠어!"

"나도!"

사람들은 최강태의 눈치를 살피며 슬슬 문쪽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최강태는 소파에 앉아 그들의 모습을 보며 웃기만 할 뿐, 정말로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열린 문을 통과할 때도 마찬가지.

최강태의 부하들이 자신들을 막아 설 줄 알고 잔뜩 긴장했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을 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전혀 제지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렇게 스위트룸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앞다퉈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구경하던 떡대 중 한 명, 이상준이 최강태의 곁으로 다가와 자신의 생각을 건냈다.

"저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큰형님."

"뭐가."

"큰형님께서 취미 생활을 끊지 못 하시는 이유 말입니다. 저희도 웃음 참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여간 인심써서 기회를 줘도 왜 마지막 동아줄을 제 손으로 끊어버리는 건지······. 정말로 미련한 놈들이네요."

"너도 슬슬 보이는구나? 맞아. 그 맛에 기회를 주는거지. 저런 놈들은 절대 제 살 길을 고르지 못 하는 법이거든. 그렇게 마지막 희망을 놓치고 나서야 비로소 더 큰 절망에 빠지는 법이기도 하고."

몰랐다면 모를까, 최강태의 능력을 어느정도 알고 있는 이들이 보기에 S의 회원들이 지껄이는 말들이나 뻔뻔한 행동들은 그야말로 철부지 아이들의 재롱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걱정? 두려움? 그딴건 개미 발톱의 때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저희도 처음에 저랬습니까?"

"아니."

"그건 다행······."

"저거보다 더 했지. 내가 얼마나 웃었는지 기억 안 나냐?"

"······."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43화 해결사

"이런 병신같은 새끼가···!"

빠악!

BG그룹의 회장이자 최상윤의 아버지 최평수는 성난 분노를 주먹에 담아 아들의 얼굴을 그대로 후려 갈겼다.

아버지의 주먹을 얻어맞고 바닥에 널브러진 최상윤. 그는 쓰러지기가 무섭게 다시 일어나 최평수의 앞에 섰다.

하지만 그가 다가오는 순간 그의 몸에서 훅 끼쳐 나오는 술냄새에 최평수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네 병신 짓거리 수습할 때까지 자숙하라고. 그럴 자신 없으면 차라리 외국이라도 나가서 짱박혀 있으라고 했어? 안 했어?"

"그렇게 말씀 하셨······."

짜악!!

최평수의 따귀가 다시 한 번 아들의 뺨에 작렬했다.

붉게 달아올라 부풀어 오른 뺨 아래로 그보다 더 붉은 피가 흘렀지만 감히 닦아낼 엄두도 내지 못 하고 고개를 숙이는 최상윤이었다.

"그런데? 자숙하겠다고 기어코 안 나가고 뻗대던 새끼가 결국 일을 저질러?"

최상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외국에 나가지 않은 건 순전히 회사에서 자신의 몫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만에 하나라도 외국에 나가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자신의 지분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먹어 치울 테니까.

하지만 정말로 사고를 칠 생각은 없었다.

"그저 회원들과 긴밀하게 모여 앞으로의 일을 의논한다는 것이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을······."

짜악!

"펴, 평소처럼 요란하게 놀지는 않았습니다! 충분히 대처할 수 있고 변명할 수 있는······!"

"닥쳐!!"

짜악!!

우당탕······!

최상윤은 무게까지 실어 뺨을 날리는 아버지의 따귀에 비참한 몰골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최평수는 그런 아들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다면서 크게 꾸짖었다.

"이 머저리같은 새끼야! 지금 이 상황에서 너희 병신 새끼들이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특검한테는 그보다 맛좋은 먹잇감이 없을텐데 뭐? 평소처럼 놀지 않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어? 그 대처는 누가 하는데? 어?!"

"죄, 죄송합니다······."

"내 새끼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죽여버렸을 놈을 그래도 핏줄이라고 한 자리 맡겨놨더니··· 썩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최상윤은 허리를 깊이 숙인 뒤 조용히 물러났고 최평수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분을 삭혔다.

"상윤이 저 새끼 감시 철저히 해. 만약 한 발자국이라도 제 방에서 나간다면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놔도 상관없다."

"예. 회장님. 그나저나 호텔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상윤 도련님의 말씀으로는 김 실장도 그쪽에 당한 것 같은데······."

"특검 쪽은 아닌 것 같다고?"

"예. 수법도 그렇고 인력도 그렇고, 특검에서도 장태원을 취조하는 쪽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는 것이 특검팀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특검쪽 인간이었다면 도련님이 지금처럼 돌아오지도 못 했겠죠."

"······."

차라리 돈이라도 달라고 협박했다면 이해라도 하지, 용성시에서 S의 회원들을 위협했던 미지의 인물은 그것을 취미 생활이라 밝혔다고 한다.

'평범한 미친놈은 아니겠지.'

이 자리까지 올라오면서 최평수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겪어 봤지만 단연코 이런 미친놈은 처음이었다.

'세 시간이나 유예 시간을 줬다는 건 그놈에게도 그만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아마도 녀석들이 먹고 마셨던 술이나 마약의 증거물을 채취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겠지. 그걸로 우리쪽이나 특검쪽에 딜을 할 심산인가?'

물론 그것도 정확한 추론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되려 인질을 붙잡고 있는 쪽이 더 돈이 될 테니까.

뭐가 됐든 미친놈의 마음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회장님."

"왜?"

"일강 쪽에서 센터의 해결사들을 고용해 투입했다고 합니다."

"센터의 해결사들이면··· GMC의 용병부대?"

"그렇습니다."

GMC의 용병부대가 투입됐다는 말에 최평수의 표정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안 회장이 자기 아들 일로 꽤 급했던 모양이야. 하기야, 나와는 달리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니 그럴 수밖에. 해결사들이 투입됐다면 걱정할 필요는 크게 없겠지만 그래도 상황을 주시하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보고하고."

"예. 회장님."

***

"저기 큰형님."

"왜?"

"근데 왜 쓸데없이 세 시간이나 주신 겁니까? 그냥 그놈들 보내고 바로 신고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럼 발악을 못 하잖아. 최소한 할 거 다 해보고 절망할 시간 정도는 줘야지. 원래 밟아주는 사람의 의무는 상대가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볼걸 후회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뭘 해도 의미가 없다는 걸 친절하게 알려주는 거라고. 알겠냐?"

"아아~ 잘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그때였다.

치직.

-손님 다섯 분 입장하십니다.

무전기를 통해 손님의 입장 소식이 전해지자 최강태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

GMC 용병 클럽.

국내에서는 외국인 노동자 인권 센터로 위장한 곳이자 일부 기업이나 정치가들에게는 센터의 해결사로 더 잘 알려진 불법 해결사 집단이었다.

보통은 해외에서 활동을 더 많이 하고 국내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특유의 전문성과 높은 임무 성공률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덕분에 억 소리나게 비싼 의뢰비용에도 최근에는 이곳을 찾는 기업과 정치가들이 많아지는 추세였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으니까.

오늘도 의뢰를 받고 별다른 문제 사항 없이 스위트룸까지 도착한 용병들은 마지막으로 작전을 점검했다.

"총기 사용은 금물. 타겟은 포획이 최우선이지만 포획이 힘들다면 살인을 허가한다. 스트라이커팀 목표 완수 이후, 클리어팀은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방에 남아있는 모든 흔적을 제거한다."

끄덕.

팀원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팀장 자한 압둘라가 돌입을 지시했다.

그런데······.

굳게 닫혀 있어야 할 문은 열려있었고 그 너머로 타겟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푸하하하하!"

믿을 수 없게도 타겟은 거실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사이다와 치킨이 놓여 있었는데 치킨을 뜯으면서 TV를 시청하는 그 모습에선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역으로 자한과 팀원들이 되려 당황스러운 지경이었던 것이다.

자한은 혹시라도 함정이 숨어 있을 까 싶어 주변을 빠르게 훑었지만 사람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인간은 오직 눈앞의 목표물 뿐.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부비 트랩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으니 이대로 목표를 완수하면 그만이다.

팟!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빠르게 몸을 날려 고속으로 접근하는 자한.

그 몸놀림과 속도는 싸움 좀 잘 하는 조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혹독한 훈련과 수많은 실전을 통해 숙련된 용병의 움직임은 인간의 한계에 육박하고 있었다.

눈깜짝 할 사이에 거리를 지우고 접근하는데 성공한 자한의 나이프가 상대의 목을 노렸다.

스핏.

어차피 죽여도 상관없었으니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 그러나 상대가 반응해서 가까스로 피한다면 그 틈을 노려 적을 제압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깡!

"······!"

자한이 눈을 부릅떴다.

본래라면 아마추어의 목을 그냥 베고 지나가도 이상하지 않았을 일격. 아슬아슬하게 피했다면 그나마 이해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뭔가? 지금 자신의 나이프를 가볍게 막아선 저 물체는?

'다, 닭뼈?!'

놀랍게도 철판도 자를 수 있는 자신의 티타늄제 나이프를 막아낸 물체는 무기도 아닌 닭다리 뼈였던 것이다.

"이제야 왔냐?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네."

그 사이, 뒤따라 들어온 용병들이 빠르게 최강태를 포위하고 나이프를 휘둘렀다.

모두 신속, 정확하게 인간의 급소를 노려 망설임없이 찌르거나 베는 움직임이 실로 프로다운 솜씨였다.

그야 이들 모두 각 나라의 특수 부대에서 수많은 실전 경험을 거치고 은퇴한 프로들이니 그럴 수밖에.

아마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반응도 못 해보고 이미 황천길을 건너고 있었겠지.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의 육체적 한계에 육박한 이들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애초에 인간을 초월한 악마의 왕이었다.

휙, 깡!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할 수 있는 공격은 피하고, 피하기 어려운 공격은 뼈로 때려 방향을 돌린다.

아니면 공격을 슬쩍 흘려서 되려 적의 아군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슉슉슉···!

그 와중에도 자한은 신중하게 기회를 엿보며 공격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밀리는 순간, 자신들은 끝장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빠르게 손을 놀려도, 그의 나이프 끝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칼끝이 최강태에게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너무나도 여유롭게 나이프를 피해버렸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이었지만··· 최강태에게는 별 거 없었다. 그러다보니 초조해 진 건 되려 용병들이었다.

용병들은 굳이 나이프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수많은 실전을 거친 프로답게 사람을 죽이는 군용 무술에도 능했고 그들의 사지가 곧 무기나 다름없었으니까.

한 순간에 수많은 공방이 오간다. 남들이 본다면 액션 영화를 촬영하는 게 아닌가 착각을 해도 무리가 없겠지.

마치 합을 맞춘 것처럼 공방이 오고갈 수 있는 이유도 최강태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감에 차 있던 용병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리고, 이내 낭패로 변하다가 초조함으로··· 종국에는 절망감으로 변질되어 가는 그 표정이 맛있었기 때문이다.

'후퇴한다!'

이제는 눈앞의 괴물이 정말로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러웠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임무는 실패했다. 눈앞의 괴물을 제압하기는커녕 죽이는 것조차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무리라는 걸 깨달았다.

시선으로 작전을 전달한 자한이 곧바로 최강태에게 달려들었다.

부하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자신은 붙잡히거나 죽게 되겠지만 상관없었다.

그게 자신의 임무였으니까. 이미 이쪽 업계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부하들은 자신의 행동에 맞춰 신속하게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렇게 훈련받았고, 그렇게 살아남았다.

자신이 프로인만큼 저들 역시 프로다. 애초에 성공 가능성이 없는 의뢰를 진행할 마음은 없었다.

팀장으로서의 임무는 다 했다. 저들도 팀원으로서의 임무를 완수했다.

문제가 있다면······.

"올때는 마음대로 왔어도 갈 때는 아니란다~"

자신들의 각오와 실력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괴물이 상대라는 사실이었다.

쩌엉!

"커헉······!"

방검복을 입은 뱃가죽을 주먹이 파고든다. 포탄을 정면에서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배가 뚫려 사라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뇌를 뒤흔드는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최강태의 목소리가 귓가를 나직하게 파고든다.

"실망할 거 없어. 최근에 먹어본 녀석들 중에 너희가 가장 맛있는 놈들이었으니까."

'그것 참 눈물나게 영광이네. 젠장······.'

눈이 감겨온다. 자한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괴물같은 상대방의 움직임에 비하면 자신은 쓰러지는 속도조차 달팽이처럼 느렸다.

눈이 감기고 쓰러지는 와중에도 팀원들이 악마의 손에 붙잡혀 농락당하는 게 보였다.

'니미 어쩐지 오늘따라 저녁이 더럽게 맛있더라니······.'

자한은 쓰러지는 동료들을 끝으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치직

-큰형님 두 번째 손님 들어옵니다.

"그 전에 접시 좀 치워라."

-넵!

그렇게 최강태는 한동안 행복한 코스 요리를 마음껏 음미했다고······.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44화 끝나지 않는 악몽

"이걸로 끝인가?"

"예. 큰형님. 더 이상 오는 놈들은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럼 현장 예쁘게 정리해서 특검팀한테 넘겨 줘. 조선족 녀석들이랑 걔들이 가지고 있던 증거물이 제일 중요하니까 빼먹지 말고."

"예. 큰형님!"

"그럼 난 들어간다. 오랜만에 원 없이 팼더니 오늘은 꿀잠 잘 것 같네."

"살펴 들어가십쇼!"

"들어가십쇼!"

최강태가 떡대들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간 다음 날.

문자 그대로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브리핑 자료는"

"준비 끝났습니다!"

"기자들은?"

"전부 팀장님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출발할까요?"

"그래야지."

특검팀 팀장 이성화는 최정산을 비롯한 팀원들과 함께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 특검팀이 구속 영장을 발부받으면서 대한민국 거물급 인사들의 친인척들이 연달아 굴비엮듯 쇠고랑을 찼기 때문이다.

비밀에 감춰져 있었던 대한민국의 검은 사교 모임 S가 실존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고, 그들의 면면에 다시 한 번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정말 충격적인 사실은 따로 있었다.

"범인들 전원이 의식불명?"

"보나마나 쇼하는 거겠지. 재벌들, 정치인들, 쇠고랑만 찼다하면 멀쩡하던 놈들도 내일 죽을 날 받아놓은 것처럼 지랄하던 게 어디 하루이틀 일인가?"

"그럼 조사는? 재판은 어떻게 되는건데?"

"그걸 이제부터 봐야지."

이렇듯 국민들의 이목은 특검팀의 기자회견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려일보의 김한수 기자입니다. 특검팀이 출범되고 이제 고작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수사 대상이 대상인만큼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라고 염려되는데 너무 일찍 구속 영장을 신청하신 게 아닐까 국민들의 우려가 높습니다. 이에 대해 답변 부탁드립니다."

기자의 질문에 이성화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사건에 국민들의 관심과 분노가 얼마나 큰지 저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번 사건은 시간과의 승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거와 증인의 확보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고 수사는 난항에 부딪히겠죠. 그 때문에 팀원들 역시 불철주야 잠도 아껴가며 수사에 매진했고, 국민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과 협조에 힘입어 불과 일주일 사이에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피의자들이 의식불명의 중태라고 하던데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현재 피의자들은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고 있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뭐라 말씀드리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피의자들의 의식 여부와 상관없이 저희들이 수집한 증거물과 증인들은 피의자들의 지독한 죄질을 충분히 입증함에 모자람이 없기에 피의자들은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기자들의 쉴 새 없는 질문 공세에도 이성화는 유연하게 대처했고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팀원들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국내 제일 로펌 변호사님은 말씀하시는 것도 다르네. 안 그러냐?"

"그러게요. 누가 들으면 진짜 우리가 다 한 줄 알겠어요."

"하아······. 우리가 고생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공을 전부 독차지 하자니 뭔가 민망하구만."

"그렇다고 미지의 조력자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실상 우리가 그 녀석에 대해서 아는 게 없으니까요."

그렇게 브리핑을 마치고 수사본부로 돌아온 이성화 일행은 본부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던 최정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 혼자 식사하고 계셨어요? 밖에 나가서 제대로 한 끼 식사라도 하시지······."

"브리핑 잘 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팀장님."

"반장님께서 보기에도 제가 많이 뻔뻔해 보였죠? 저도 대답하면서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그게 팀장님 잘못은 아니죠."

"그렇다고 반장님 잘못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울적해하지는 마세요. 실제로 팀원들이 불철주야 가리지 않고 고생한 건 사실이잖아요. 안 그래요?"

이성화의 위로에 최정산은 피식 웃더니 팀원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뜻을 알아차린 김상태가 다른 팀원들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자 최정산이 말을 이었다.

"팀원들의 노고를 폄하하거나 팀의 성과를 부정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다만?"

"제 자신이 한심해서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반장님이 한심하다뇨? 반장님이 아니셨다면 이번 사건을 여기까지 끌고 오지도 못 했을 거예요. 그런데 왜······."

의아해하는 이성화에게 최정산이 물었다.

"팀장님께서는 '고스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스트란 자신들을 돕던 의문의 조력자에게 붙인 임시 코드네임이었다. 흔적도, 증거도, 그를 추정할 수 있는 그 어떤 단서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랄까?

"특검팀 팀장과 저 개인의 생각, 어느쪽을 듣고 싶으신가요?"

"가능하면 둘 다 들을 수 있겠습니까?"

"특검팀 팀장으로서는 묵과할 수 없긴 하죠. 그가 우리를 도와준 건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그가 행한 상해, 폭행, 협박으로 추정되는 행위들은 절대로 묵과할 수 없으니까요. 눈앞에 있었다면 거두절미하고 체포했을 겁니다."

"개인으로서는요?"

"은인이죠. 더없이 큰 빚을 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감사하고 있어요. 그 악마들을 체포할 수 있게 도와준 것에 대해, 법의 심판대에 올릴 수 있게 협조해 준 것에 대해서 말이죠. 솔직히 고스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번 특검은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쇼에 불과했을 거예요. 우리는 정재계의 타락한 범죄자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뭐, 이런 빌어먹을 연극?"

"그 전에 특검이 출범하는 일도 없었겠죠. 고스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시작조차 하지 못 했을 테니까."

"그러고보니 그렇군요. 폐교에서 황철고를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한 것도, 그곳에 묻혀있던 피해자들을 발견한 사람도 모두 사실은 고스트라고······."

"사실입니다. 그 공훈을 의도치않게 우리가 가로챘죠."

"반장님의 심사가 복잡할만도 하네요."

최정산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경찰로서 자경단의 존재를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정의를 위해서라고 해도, 상대가 범죄자라고 해도, 공권력의 허가없이 함부로 휘두르는 폭력은 대단히 위험하니까요. 게다가 그 거대한 힘이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면······."

"큰 위협이죠."

"그걸 알면서도 저는 어느 순간부터 고스트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믿었던 공권력을 우습게 가지고 노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오히려 이용하는 범죄자들 앞에서 무력하게 좌절하고 있을 때, 고스트는 아랑곳않고 놈들의 악의와 범죄를 우습게 짓밟아 버렸으니까요."

"마치 배트맨이나 슈퍼맨처럼요. 그야 동경하게 되죠.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슈퍼 히어로들을······. 그래서 아까 전부터 반장님 표정이······."

"이런 제게 아직도 경찰의 자격이 있는 건지 조금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최정산의 솔직한 대답에 이성화는 피식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그걸 고민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스스로가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경찰임을 자부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고요. 우리는 하루하루가 버겁고 필사적인 평범한 사람들이지 고스트같은 초인이 아니니까. 아, 그리고 두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두 가지요?"

"네. 하나는 국정원이 고스트의 조사에 착수했다는 사실이죠. 더 이상 검찰과 경찰의 위신이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상부의 방침에 따라 고스트의 존재를 공표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고스트가 덮어둘 수 있는 존재는 아니잖아요? 반장님의 말씀대로 그만한 무력과 정보 공작 능력을 가진 존재의 실상은 반드시 파악할 필요가 있고 장차 대한민국의 득이 될 지, 실이 될 지 판단을 해야 하니까요."

최정산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두 번째는 뭡니까?"

"설레발일수도 있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대통령 표창 받을 거 같은데요? 우리팀."

"그러려면 이번 사건을 제대로 마무리 지어야겠지요."

"고스트가 물어다 준 미끼로 일은 더 많아졌으니까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라니까요?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기억도 안 나고."

"행복한 비명이죠. 우리가 비명을 지르는 덕분에 더 이상 애꿎은 피해자가 비명을 지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네요."

최정산의 말에 이성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서울대학병원 종합 검사실.

이곳에 모인 의사들은 난생 처음 겪는 황당한 상황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바이탈 상으로는 별 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멘탈에 무슨 문제가 생긴건가?"

"그랬더라도 차트에는 표시가 되었을 텐데요. 멘탈이라고 해도 결국 호르몬 분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결과물이니까. 하지만 보시는 바와 같이 호르몬도 정상입니다. 갑상선 호르몬이나 멜라토닌 수치도 이상 없고요."

의사들은 황당했다.

잠을 자는 척이 아니었다. 환자는 실제로 수면 상태였다. 그것도 꿈을 꾸는 상태인 렘 수면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외부의 충격이나 자극에도 반응이 없었고 심지어 식사를 하지 않은 채 10시간이 경과했지만 몸에는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그야말로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되어버린 것이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길래 일어나질 않는 걸까요?"

"글쎄. 일어나기 싫을 정도로 행복한 꿈이라도 꾸나?"

의사들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지금 단체로 의식불명에 빠진 S의 회원들이 어떤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지······.

***

"오, 오지마! 씨발아! 다가오지 말라고!! 가까이 오기만 해 봐! 죽여버릴거야!!"

"오~ 우리 쌍년이 성깔있다 그치?"

사내는 뚜벅뚜벅 걸어서 다가갔고 여자는 뒷걸음질을 쳤지만 이내 다리가 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약기운에 취해 제대로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확!

"꺄아악!!"

여자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확 틀어버렸다. 두피가 벗겨질 것 같은 고통에 입에서는 절로 비명이 터져나왔지만 그보다 더 황당한 것은 눈앞의 남자였다.

'어, 어째서?'

"비명소리 예쁘네. 좀 더 질러봐."

짜악!!

'어째서 내가 저기 있는건데?!'

최상윤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비명 소리가 예쁘다면서 자신의 뺨을 때리는 상대는 다름아닌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기 자신에게 맞고 있는 이 몸뚱이는 누구인가?

최상윤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 얼굴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성질이 남달라서 이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팔을 깨물었던 여자였다.

지금도 마찬가지.

꽈악!

"아악! 이 씨발년이?!"

'아, 아니 잠깐만! 왜 몸이 멋대로··· 목소리도 안 나오잖아?!'

빠악!

"꺄아아악!!"

'끄아아악!!'

그러나 자신의 주먹에 얼굴을 맞고 쓰러진 여자의 고통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최상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방금 전의 충격으로 이 여자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생생하게 기억났던 것이다.

"푸하하하! 저 병신 새끼. 방금 물린 거 봤냐?"

"야, 암캐 교육이 안 돼 있네. 괜찮냐? 바꿔줄까?"

"씨발! 아가리 닥쳐! 이 씨발년은 내 손으로 죽인다."

'······!'

최상윤은 분노에 가득찬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이윽고 최상윤은 쓰러진 여자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무참히 휘두르더니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골프채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피를 흘리며 기절한 여자를 향해 골프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숨이 끊어져도 계속해서······.

최상윤은 여자의 안에서 그 끔찍한 고통을 전부 겪고 있었다. 짐승 이하의 괴물같은 자신의 표정과 폭력을 고스란히 자기 자신이 그대로 느끼며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렇게 악몽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이걸로 끝난 줄 알았어?"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45화 선 계약

최상윤은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깬 것일까?

하지만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생소한 호텔방에 또 다시 처음보는 여자의 모습이 창문에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게 있다면 자신을 탐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잔인하게 미소짓는 면면들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과 진짜 자신이 바로 앞에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대체······.'

"지금 이 상황이 혼란스럽지? 대체 왜 자기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그치?"

그때였다. 눈앞에 있던 YTX조선 회장의 삼남, 박동수가 다가와 이죽이자 최상윤의 눈이 부릅 떠졌다.

모습은 박동수였지만 그의 진짜 실체가 다른 사람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누, 누구야?!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건데?!'

"너는 왜 그랬냐?"

'뭐?'

최상윤이 의아해하자 박동수의 껍질을 뒤집어 쓰고 있던 최강태가 최상윤을 불렀다.

물론 그가 부른 최상윤은 여자에게 빙의가 된 진짜 최상윤이 아닌, 술을 마시며 주사를 준비하고 있던 기억 속의 최상윤이었다.

"야, 상윤아."

"왜?"

"우리 왜 이러고 있냐?"

"뭐래? 븅신 새끼가 ㅋㅋㅋ. 벌써 약 기운 돌았냐? 재미있으니까 이러는 게 당연하잖아. 재미없었으면 죽어도 이런 짓 안 하지."

"근데 진짜 우리 이래도 되는거냐?"

"이 새끼가 약 기운 세게 돌았나보네. 갑자기 현타왔냐? 야, 인마. 대한민국에서는 돈 있고 힘 있는 놈이 법이고 정의야. 그러길래 누가 돈 없고 힘 없이 태어나래? 안 그러냐?"

최상윤은 자신이 겁탈하고 있던 여자의 뺨을 때리며 물었지만 이미 눈을 까뒤집고 게거품을 물고 있던 여성은 대답하지 못 했다.

숨을 쉬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이 씨발, 이번 거는 내구도가 생각보다 약하네. 금방 망가져 버렸잖아."

"그럼 얘는 어때? 보아하니 제법 튼튼해 보이던데."

"너 먹을 거 아니었어?"

"친구 사인데 그 정도야 양보하지."

"그럼 나야 땡큐지. 오~ 박동수. 이번 일 꼭 기억한다."

"별 말씀을······."

최강태는 자신의 앞에 있던 여자를 기꺼이 최상윤에게 양보했다. 최상윤은 웃으며 새 주사와 약물을 준비하더니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는 사색이 되어 울부짖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 다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 제발 살려주세요! 시키는 건 뭐든 다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공교롭게도 울부짖으며 목숨을 구걸하는 그녀의 애원과 그녀의 안에서 최강태에게 애원하는 최상윤의 말이 똑같았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다름아닌 최상윤의 입에서 나왔다.

짜악!!

"닥쳐, 이 씨발년아. 너는 그냥 예쁘게 놀다 가면 되는거야, 알았지? 반항하다가 내 몸에 스크래치라도 생기면 그냥은 안 죽일 거니까 얌전히 있어. 뭐, 이 약을 맞으면 싫어도 그렇게 되겠지만."

'아, 안 돼······!'

최상윤은 항상 거울로 봤던 자신의 잘생긴 얼굴이 악마처럼 보였다.

또한 여자의 애원이 소용없다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악마는 자신이었으니까.

최상윤은 약을 쓴 것도 모자라 끔찍한 폭행과 겁탈 속에 여자를 죽여가면서 최강태에게 물었다.

"넌 뭐한다고 보고만 있어? 애 잡아서 너도 즐겨. 인마."

"아냐. 나도 충분히 즐기고 있어. 그러니까 부담갖지 말고 하던 거 열심히 해."

"그래? 그럼 그러지 뭐."

최강태는 스산하게 웃으며 최상윤을 응원했다.

그렇게 자신이 저지른 무자비한 폭력과 겁탈 속에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죽어나간 최상윤은 죽음과 동시에 또 다시 눈을 떴다.

이번에도 다른 호텔, 다른 여인의 몸으로 깨어나 자신의 친구들과 자신을 확인한 최상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이제 고작 3라운드구만. 네 남은 수명에 더해 네가 죽인 사람들의 수명까지 더해서 경기 뛰려면 적어도 1,000년 이상은 아직 더 뛰어야 한다고. 아참, 누가 보살펴주지 않으면 죽을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에프터 케어는 이몸께서 확실하게 보장해 줄 테니까."

'대, 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돈입니까? 돈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아니, 우리 BG그룹 회장만 되면 회사의 모든 자금을 당신에게 바치라고 해도 바치겠습니다! 노예가 되라면 노예가 되고 감옥이든 봉사든 기부든 뭐든, 제가 지은 죗값 달게 치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이 끔찍한 악몽에서 절 꺼내 주세요! 네?!'

"쯧쯧쯧······."

최강태는 최상윤의 애타는 절규에 혀를 차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길래 기회를 줄 때 잡았어야지. 내가 뭐랬어? 나가면 그 순간을 후회하게 만들어 준다고 했지?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 너만 이런 게 아니라 그때 너랑 같은 선택을 한 다른 놈들도 다 좋은 꿈 꾸고 있으니까."

최상윤은 피눈물을 흘렸다. 그때 만약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목에 칼을 들이밀고 나가라 협박했어도 절대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이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라면 최상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진짜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개가 되라 하면 개가 되고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달라고 하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 여기서 꺼내 달라고!!'

"마음은 잘 알겠는데 그러고 싶어도 안 돼. 이미 계약을 해버렸거든."

'계 계약이라니? 그게 무슨······.'

"혹시 원한깊은 원혼은 구천을 떠돌아다닌다는 속설 알아?"

들어본 적은 있다. 하지만 세간에 떠도는 미신과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미 폐교에서 계약을 해 버렸단 말이지. 너희들에게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 말야. 아주 칼을 갈고 있던데?"

'······!!'

"역시 원한 깊은 원혼들은 좋아. 마력은 순도가 높아서 맛이 남다르거든. 계약 내용은 네가 지금 겪고 있는대로 자신들이 당한 고통을 그대로 갚아주는 것. 너희들때문에 잃어버린 자신들의 남은 수명까지 그대로 얹어서 고통받는 시간을 늘려주는 것. 이 두 가지야. 뭐, 나머지 자질구레 한 게 좀 남아있긴 한데 그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고."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최상윤의 눈이 덜덜 떨렸다.

그런 비과학적인 얘기를 어떻게 믿겠는가? 자신들에게 죽은 피해자들의 원혼을 계약에 따라 대신 복수해준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말이다.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런 꼴을 당해놓고 믿지 못 한다는 게 더 힘들 정도였으니까.

"나야 개이득이지. 원혼들에게 순도높은 마력을 뽑아 먹고, 또 이런 식으로 오래가는 건전지들을 손에 넣었으니까. 하여간 너희처럼 죄많은 새끼들은 이래서 좋아. 조금만 괴롭혀줘도 순도 높은 마력이 쭉쭉 뽑혀 나오거든. 여튼 열심히 고통받아. 꾀 부리지말고."

'자, 잠깐! 어디가?! 나도 데려가!! 나 좀 깨워달라고 제발!!!'

최상윤의 피를 토하는 간절한 절규에 최강태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여기가 싫어?"

'그, 그걸 말이라고···! 아, 아닙니다! 제가 잠시 실성했습니다! 여길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정말로 시키시는 건 뭐든 다 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럼 나랑 계약 하나 할래?"

"계, 계약이요?"

최강태의 스산한 미소에 최상윤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불안함을 느꼈다.

***

S회원들을 정리하고 오랜만에 인천 소림사를 찾은 최강태.

"빡빡이 너 요새 신나 보인다?"

"어휴~ 제가 신이 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나라 꼴이 이 모양 이 꼴이니 그저 나라 걱정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 아니겠습니까?"

번쩍!

"······."

구영식은 너스레를 떨면서도 은근히 자신의 왼팔··· 특히 팔목을 강조하면서 최강태에게 어필하였다.

"그건 뭐냐?"

"역시! 천것들과 달리 형님께서는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이게 이번에 롤락스 70주년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전세계에 딱 70개만 풀린 녀석인데 어떻습니까? 역시 시계는 주인을 잘 만나야 간지가 나는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진짜 이거 구하려고 얼마나 똥꼬쇼를 했는지··· 그래도 노력한 값어치만큼 이쁜 녀석이 아닙니까? 크하하하하!"

구영식의 자랑질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빡빡이들이 소곤거렸다.

"또 시작이네. 니미럴······."

"저 소리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째다."

"난 벌써 귀에 딱지가 앉았다."

"하여간 저런 시계는 대체 어디서 구해가지고는······."

그 사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최강태가 구영식에게 다가가더니 씨익 미소를 그렸다.

싱긋~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점점 웃음기가 사라지던 구영식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른다.

최강태의 미소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이제는 그의 미소만으로 대충 어떤 말이 나올지 짐작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 경지로 짐작하건데 저 미소는 결코 자신에게 이로운 미소가 아니었다.

척.

아니나 다를까, 손을 뻗으며 이어지는 최강태의 말에 구영식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맙다. 빡빡아. 그런 귀한 시계를 어렵게 구해서 선물할 생각을 하다니··· 형은 진짜 감격해서 눈물이 막 앞을 가리려고··· 따흑!"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뭐야? 내 선물 아니야? 나 지금 되게 감동했는데? 눈물 막 글썽글썽 거리는데?"

말과는 다르게 차갑게 정색하며 말하는 최강태의 모습에 구영식은 바로 손목에서 시계를 풀며 두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그, 그게 아니라 좀 더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해 드릴려고 그랬죠. 하··· 하하······."

"그렇지? 역시 빡빡이! 내가 인마, 너 많이 아끼는 거 알지?"

"무, 물론이죠······."

'크흑! 내가 저걸 어떻게 구했는데······. 잘 가라, 내 아가······.'

'크흡!'

'푸흡!'

'살을 꼬집어 뜯어서라도 참아. 여기서 웃음 터지면 사장님한테 죽는다.'

'그치만 저 얼굴을 보고 어떻게 웃음을 참습니까?!'

'제발 그냥 죽여줘···!'

결국 구영식은 피눈물과 함께 시계를 최강태의 손목에 채워주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빡빡이들은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고······.

한편, 시계를 선물받고(?) 기분이 좋아진 최강태는 소파에 앉아 시계를 구경하다가 대뜸 시계를 풀더니 이상준을 불렀다.

"상준아."

"예. 큰형님."

"이거 홍당무에 올리면 얼마나 받겠냐?"

"호, 홍당무면 중고 거래 사이트요? 중고 거래 하시게요?"

"응. 나 시계 별로 안 좋아해. 그냥 이거 팔아서 돈으로 바꾸는 게 낫지."

······!

최강태의 심드렁한 대꾸에 빡빡이들이 경악하며 구영식을 쳐다보는 순간.

으드득!

아니나 다를까, 구영식이 쓰고 있던 만년필이 산산조각 나 책상위에 흩어졌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애써 미소를 잃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최강태에게 제안했다.

"그, 그럼 형님. 호, 혹시 저에게 파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오~ 그럴래? 아참, 나 보증서같은 건 없는데 괜찮냐?"

"······보증서는 저에게 있습니다."

"잘 됐네! 상준아. 아는 사람이라고 네고 많이 깎지 말고 제대로 받아. 5%이상 깎아 줬다간 죽는다?"

"옙."

'악마다.'

'악마야.'

'악마네.'

'저게 바로 창조 경제···!'

빡빡이들이 감탄하고 있을 무렵, 최강태는 피식 웃으며 구영식에게 USB 하나를 던져주었다.

"자."

"응? 헉! 이게 뭡니까?"

USB를 받아든 구영식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최강태가 대꾸했다.

"나도 선물을 받았는데 답례는 해야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에 그게 도움이 좀 될 거다."

"제, 제가 하고 있는 일이라면······."

"너 지금 본격적으로 서울 진출하려고 내가 뒤흔든 기업들, 정치가들 뒤로 개구멍 파고 있잖아. 설마 내가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혀, 형님! 앞으로도 목숨 바쳐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구영식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지금 그가 건네준 파일의 값어치는 고작 롤락스 70주년 시계 따위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그런데 고작 롤락스 시계 따위가 아까워 최강태를 원망했다니··· 구영식은 진심으로 반성하며 최강태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다시 한 번 자각했다.

물론 최강태가 구영식에게 선물을 준 이유는 단순했다.

키우는 개가 크고 유능할수록 자신이 더 편해지니까.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46화 1년 깎아 드립니다.

특검 수사 본부 앞에 도착한 검은 세단.

한숨을 깊게 내쉰 한 남자의 시선에 창밖으로 굶주린 하이에나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하이에나보다 더욱 악질적이었다. 하이에나는 맞서 싸우기라도 하지. 지금의 자신은 저들의 먹잇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후우······."

결국 차문을 열고 내린 안원희의 등장에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듯이 터져나왔다.

"안원희 청장님! 조카분께서 불법 클럽 S의 회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데 사실입니까?"

"청장님! 조카분께서 S의 자금줄을 이용해 대포 통장으로 불법 정치 자금을 조달했다는 증거가 나왔는데 사실입니까?!"

"청장님! 한 말씀만 해 주시죠!"

"청장님!!"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빽빽한 기자들 사이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나아가는 안원희의 표정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마치 이 정도 위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종일관 담담했던 안원희의 표정이 한 순간이나마 찌푸려지던 순간이 있었다.

다름아닌 저 멀리 서 있는 마필중을 발견했을 때였다.

경찰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찾아온 그는 안원희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의 추한 선배님의 모습이 아닌, 그동안 경찰로서 선배님께서 보여주셨던 멋진 모습만 기억하겠습니다.'

그가 경찰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찾아온 이유는, 그를 경찰이 아닌 같은 직장의 존경했던 선배로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남기기 위함이었다.

'마필중······!'

이내 고개를 확 돌려버린 안원희는 그렇게 서울지검으로 입장했다.

***

"정말 이렇게 아무 말씀도 안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 상황에서 묵비권이 본인에게 유리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

이성화는 증거물들을 버젓이 들이밀며 안원희를 압박했지만 안원희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고용한 변호사가 이성화에게 대꾸했다.

"형사소송법 제309조.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으로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 형사소송법 제308조의 2.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아니하고 수집한 증거는 증거로 할 수 없다.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텐데요?"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면 사인에 의한 위법행위로 획득한 증거의 증거능력은 목적의 정당성, 방법의 상당성, 피해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을 고려한 비례의 원칙에 따라 침해되는 사익과 형벌권 실현이라는 공익을 비교형량하여 공익이 현저히 더 큰 경우에 인정될 수 있다는 사실도 역시 알고 계시겠군요."

그러면서 이성화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에 대한 판례야 뭐, 저보다 더 많이 배우신 것 같은데 굳이 입 아프게 언급할 필요도 없겠죠. 아시다시피 저희가 수집한 증거들은 모두 민간인 제보자의 제보를 받고 획득한 증거물인지라. 특검이 공권력을 이용해서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증거물을 취득했다는 사실은 글쎄요. 금시초문이군요."

"대한민국에 아무런 목적 없이 피의자들을 폭행하고 그 증거품만 취득해서 특검에 신고했다? 지금 저희 의뢰인에게 그런 황당무계한 소리를 믿으라는 겁니까?"

"믿으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이니까 설명해드렸을 뿐이죠. 아직 대한민국에 정의가 살아있다는 좋은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팀장님의 동화같은 이야기는 둘째치고 현실 정의에 대한 판단은 사법부가 내리겠죠."

현재 심사중인 증거품목들을 언급하는 변호사.

변호사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취득한 증거 목록이 효력 없음을 주장했고, 이성화는 공익과 개인의 인권을 따져 보았을 때, 공익으로 얻는 국가의 질서와 정의 실현 목적이 더욱 크다면 증거로 채택 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었다.

물론 이에 대한 판단은 법원에서 내리게 되겠지만.

"꽤나 자신있는 모양이시네요."

"그야 이 나라에서 가장 상식있고 이성이 뚜렷하신 분들께서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곳이니까요. 조금만 상식과 이성이 있다면 지금 의뢰인께서 당하고 계신 고초가 얼마나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상황인지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주실 겁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돌발 변수가 발생하고 말았다.

"티, 팀장님!"

"무슨 일이죠?"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피의자들이 모두 의식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울면서 자수를 하겠다고 했답니다. 변호사도 필요없으니까 제발 자기 죗값 좀 치르게 해 달라고······. 무기징역이든 사형이든 얼마든지 받겠다고, 어떤놈은 차라리 사형을 시켜달라고 애원했다던데요?"

"네?! 그, 그게 무슨······."

어깨를 으쓱하는 형사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혼란이 가득한 이성화. 그리고 얼굴에 핏기가 싹 빠진 안원희까지······.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최강태가 씨익 미소를 그렸지만 그 누구도 최강태를 인식하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