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

25화 실례하겠습니다.

'시발, 저 새끼는 화장실도 안 가나?'

'점심도 안 먹고 진짜 자기만 하네.'

'대체 밤에 무슨 지랄을 하길래 하루종일 쳐 자기만 하냐고?'

'이건 평소보다 훨씬 심하잖아?!'

혜성 공고 3학년 3반에 때 아닌 침묵이 내려앉았다.

물론 최강태가 자고 있을 때는 조용한게 보통 이 반의 분위기였지만 오늘따라 유독 심한 이유가 있었다.

화장실을 가거나, 점심을 먹거나, 기타 이유로 잠시 잠깐 자리를 비울 때면 학생들은 그제서야 숨을 돌리거나 떠들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오늘은 유독 숨통 돌릴 기회가 단 한 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등교를 한 이후로 5교시를 시작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일어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학생들의 불만도 쌓일대로 쌓일수밖에 없었다. 교실밖으로 나가서 떠드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그 짓을 하려다보니 귀찮았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 때문에 최강태에게 다가가서 그를 따지거나 심지어 깨울 용기는 더더욱 나지 않았다.

"네가 가서 한 번 깨워봐."

"미쳤냐? 그러다 우진우랑 일진 새끼들이 어떻게 됐는지 내가 봤는데."

"죽고 싶지 않으면 그냥 닥치고 있자. 저러다 지치면 지가 먼저 일어나겠지 뭐······."

그러나 그들은 알까? 최강태가 일어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씨발, 허리아파 뒈지겠네! 도대체 이 새끼는 언제 돌아오는 거냐고?!'

최강태··· 아니, 정확히는 최강태의 자리에 엎드려 자는 척 하고 있었던 그의 대타가 끊어질 것 같은 허리 통증에 입술을 씹으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겉옷으로 머리까지 덮고 자는 척하는 이 인물의 정체는 다름아닌 우진우였다.

그런데 병원에 있어야 할 이 녀석이 왜 학교에 와서··· 그것도 최강태의 자리에 엎드려 최강태인척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다름아닌 전날 밤 자신을 찾아온 최강태 때문이었다.

[뭐? 그러니까 나더러 지금 네 대역을 해 달라고?]

[그냥 책상 위에 엎드려서 자는 척 하기만 하면 돼. 어때, 쉽지?]

[아니 대체 왜······.]

[다른 건 몰라도 개근상은 놓치지 말자는 주의라서. 조퇴라도 했다간 우리 엄마가 알게 될 거고.]

[자, 잘은 모르지만 네 능력이라면 학교에 안 가고도 학교에 간 것처럼 꾸밀수 있는 거 아냐?]

[가능하지.]

[그런데 대체 왜 날······.]

[너는 이유가 있어서 남들 괴롭혔냐? 그냥 그 새끼가 마음에 안 드니까 괴롭히는거지. 아무튼 걸리면 죽는다. 수고.]

[······.]

선택권은 없었다. 최강태가 찾아와 하라고 한 순간부터 이미 자신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다행히 엎드려 자고 있던 최강태를 누가 찾아와서 깨우거나 말을 거는 불상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는 자신만큼이나 다른 녀석들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진짜 문제는 끊어질 것 같은 허리도, 답답함도 아니었다.

바로 참을 수 없는 생리현상!

남들보다 일찍 다리를 쩔뚝거리며 새벽 일찍 등교를 한 이유도 바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기서 화장실을 갔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그날로 자신은 죽은 목숨. 그러나 이대로 최강태인 척 바지에 지려버린다면?

당장에 통쾌한 복수는 될 수 있겠지. 그 직후 자살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말이지만.

그렇다면 선택지는 한 가지 뿐이었다.

'씨발, 어쩌다 내가······.'

그렇게 우진우는 괄약근을 조금씩 컨트롤해가면서 피눈물을 삼켰다고······.

***

심심풀이 삼아 우진우를 대역으로 세워두면서까지 최강태가 학교를 빠진 이유는 바로 이곳에 오기 위함이었다.

자한 고등학교.

강북에 위치한 고등학교 중에서 심한 문제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아예 중학생 때부터 싹수가 보이는 문제아들의 최종 집합소가 바로 이 학교였다.

때문에 자한 고등학교는 자의든 타의든 자연스럽게 혜성 공고와 어깨를 나란히하는 꼴통 고등학교의 대명사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고.

"좋은 학교네."

학교 정문에서부터 느껴지는 부정적이고 악의가득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기분좋게 음미하며 최강태가 학교에 들어섰다.

학교는 초장부터 개판이었다.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거야 체육 시간일 수도 있으니 그렇다고 치자, 대체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면서 술을 마시며 축구를 관람하는 녀석들은 뭐란 말인가?

제대로 청소되지 않은 교내는 개판이었고 선생님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으며 그마저도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기 바쁜 모습 등······.

대체적으로 혜성 공고와 비슷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었다.

"꼭 신기하게도 이런 쓰레기같은 곳에서도 꼭 더 쓰레기같은 장소에서 쓰레기짓을 일삼는 쓰레기들이 있다니까. 꼴에 사람들 눈은 피하고 싶은건지."

"뭐야, 저 새끼는?"

자연스럽게 학교를 구경하다가 학교의 뒤편으로 향한 최강태는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잔인한 방법으로 학생들 삥을 뜯고 있던 일진 무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금하시느라 대단히 수고가 많으신 와중에 하나만 물어봅시다. 여기, 어디로 가야 서마윤이란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요?"

"뭐? 서마윤?"

"저 미친 새끼가 돌았나······."

일진들은 어이가 없었는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처음보는 놈이 겁도 없이 이곳을 찾아온 것도 그렇지만 다짜고짜 서마윤을 찾는 최강태의 모습이 우스웠던 것이다.

"서마윤이 네 친구냐? 네 친구면 네가 알겠지 왜 우릴 찾아왔대?"

"야, 너 일로 와 봐."

"나? 진짜 가?"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문신 돼지가 최강태를 보며 손짓하자 다른 녀석들이 자연스럽게 이동하여 최강태가 도망칠 수 없도록 뒤를 막았다.

그 모습에 피식한 최강태가 녀석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벽에 서 있던 피해자들을 스윽 훑어 보았다.

"얼굴이랑 팔만 빼고 애들을 아주 알록달록하게 만들어놨네. 저렇게 쥐어짜면 피 말고 뭐가 나오긴 나오냐?"

"이거 진짜 정신병자네? 야, 상황 파악 안 돼?"

"얘 대가리에 문제 있는 것 같은데, 건드려도 되냐?"

최강태의 반응에 일진들은 더욱 황당하다는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문신 돼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최강태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머리가 병신이건 몸이 병신이건 다른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으면 맞아야지."

"다른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으면 맞아야 한다라··· 좋은데?"

자신의 말을 빈정대는 최강태의 모습에 정색하며 다가간 문신 돼지가 주먹을 들었다. 그리고는 자비없이 최강태의 안면으로 내리 꽂히는 주먹.

그 자리에 있던 피해자들도, 가해자들도 모두 같은 결과를 쉽게 예상하며 한쪽은 웃고, 한 쪽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짜악!!

"······!!"

"뭐, 뭐야?!"

"야, 정한구?"

정한구의 주먹을 가볍게 피한 최강태가 되려 호되게 따귀를 올려 붙이자 가죽에 채찍이 작렬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정한구의 몸이 옆으로 힘 없이 쓰러졌다.

"암! 다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했으면 맞아야지. 너희들도 얼굴이 기분 나쁘니까 맴매 좀 맞자."

최강태가 쓰러진 정한구의 몸뚱이를 밟고 건너며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자 남은 일진들이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해, 보고만 있을거야?!"

"죽여!"

그렇게 스무 명이 넘는 일진들이 연장까지 챙겨서 달려들었다.

그리고 30초 후.

"똑바로 서라. 형 기분 좋으려면 아직 멀었다."

퍽!

"커헉!"

"음······. 이쪽이 좀 더 빨갛게 물들면 예쁠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저, 저도요······."

"그치?"

짜악!!

"끄으으으윽!!"

최강태의 손바닥이 옆구리를 작렬하자 게거품을 물며 일진 하나의 다리가 무너졌다.

하지만······.

"죽을래? 누가 마음대로 쓰러지래? 안 버텨?"

"······!"

순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살기에··· 싫어도 죽음을 떠올리게 만드는 눈빛에 허물어지던 다리가 굳어지면서 간신히 버티고 설 수 있었다.

"흐음······. 여기를 조금만 더 새까맣게 만들면 괜찮을 것 같은데."

"사, 살려 주세요!"

흐어어엉······.

이미 교복을 챙겨 도망치고 사라진 피해자들은 최강태의 관심밖이었다. 대신 그 자리에 피해자들과 똑같은 알몸으로 서 있는 일진들.

최강태의 관심은 어떻게하면 이 녀석들을 보다 예쁘고 알록달록하게 꾸밀 수 있는가 뿐이었다.

"서, 서마윤을 찾으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서마윤이 어디있는지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넌 열외."

그때, 한 눈치 빠른 녀석이 서마윤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밝히자 작품에 고심하던 최강태가 보지도 않고 손짓하며 대꾸했다.

'사, 살았다!!'

그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열에서 빠져나온 녀석.

자신의 뒤로 친구들의 살기와 질투가 뜨겁게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놈들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같이 맞아 죽을 생각따윈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저, 저도 서마윤이 어디있는지 압니다!"

"안내는 한 명이면 충분하니까 닥치고 있어. 집중 안 되니까."

이미 본래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일진들의 몸으로 작품을 만드는데 심취한 최강태.

그의 모습에 일진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큰 두려움탓인지 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리가 땅에 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 다 됐다! 어때? 뭐 같냐?"

최강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안내역을 자처한 심지훈에게 완성된 작품을 보여주었다.

쓰러져 기절한 일진들의 상처를 하나로 이어서 보니 뭔가 닮긴했다는 생각에 심지훈도 조심스래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혹시 개······."

"호랑인데?"

"개같은 호랑이네요!"

"······."

다급하게 말을 바꾸는 심지훈의 태도에 최강태는 자신의 작품을 조금 손 볼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가자. 다음에 더 잘 만들면 되지 뭐."

"······."

그렇게 심지훈은 안내역을 자처하길 진심으로 잘 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최강태를 서마윤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

"여기에 그 녀석이 있다고?"

"네. 정한구 그 녀석이랑 몇 번 와 본적이 있어서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주택가를 벗어난 곳에 위치한 5층짜리 외딴 빌라였다.

"몇 층인데?"

"5층이요."

두 사람은 5층까지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동안 빌라를 살고 있는 주민들과 몇 번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연이었을까?

"드나드는 사람 중에 어른은 한 명도 없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서마윤이 이 빌라를 대포 명의로 사서 관리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빌라 거주민들도 전부 가출팸 애들 뿐이고요."

"빌라를 통째로 샀다고? 돈이 꽤 많은 모양이네?"

"가출팸 애들을 이용해서 돈 되는 장사는 가리지 않고 다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집입니다."

502호 앞에 도착한 심지훈이 벨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다 대더니 물었다.

"누를까요?"

"눌러."

딩동.

-누구세요?

안에서 들린 건 앳된 소녀의 목소리였다.

"나 정한구 친구 심지훈라고 하는데 혹시 마윤이 좀 만날 수 있을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정한구가 누군지도 모르고 마윤 오빠 지금 집에 없는데요. 그러니까 마윤 오빠한테 할 말 있으시면 전화를 하시던가 여기는 함부로 찾아오지 마세요. 또 찾아오면 마윤 오빠한테 이를 거예요.

톡 쏘는 듯한 날카로운 짜증과 함께 끊어진 목소리. 그러자 난처해진 심지훈이 최강태를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어, 어쩌죠? 다시 한 번 벨 눌러볼까요?"

"귀찮게 뭐 하러. 그냥 얼굴 보고 얘기하면 되지."

"네?"

으드득··· 쾅!!

"······."

그 직후 일어난 일에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집 밖에 있던 사람도 한 마음 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최강태를 쳐다보았다.

최강태가 잠긴 문고리를 잡아 당기자 문 자체가 박살이 나며 딸려 나왔기 때문이었다.

"실례좀 하겠습니다. 이건 나중에 좀 고쳐야겠네."

최강태는 부서진 문짝을 대충 현관에 기대 세워놓고는 아무렇지 않게 집안으로 입장했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26화 내가...내가 고자라니!

너무 놀라면 사람이 석상처럼 굳어버리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지금 집 안에 있던 아이들이 그러했다.

잠긴 문이 열릴 거라고는··· 그것도 통째로 뜯겨져 나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녀석들이었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이야? 돼지 우리야? 좀 치우면서 살면 누가 쌍욕이라도··· 응?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집으로 들어선 최강태는 집구석을 스윽 훑어보면서 쯧쯧 혀를 찼다.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꾸겨져 쌓여있는 빨래감들과 비닐봉지에 대충 묶어서 구석에 치워둔 쓰레기들은 그나마 양반이다.

언제 먹었는지 알 수조차 없는 반쯤 먹은 도시락은 곰팡이가 피었고, 테이블 위는 담배꽁초를 꼽아 만든 거대 선인장까지 피어 있었으니까.

"그 와중에 삼겹살까지 굽고 있었어? 어디보자, 냉삼이네?"

거실 한 가운데에서 지금도 실시간으로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삼겹살의 자태에 홀린듯 최강태가 다가가 대충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젓가락을 들더니 자연스럽게 상추에 고기 두 점과 마늘을 올려 야무치게 쌈장까지 바르는 최강태.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아이가 사태를 파악하고는 인상을 구기며 최강태를 향해 다가갔다.

"이런 미친 새끼가!"

'아니야! 그거 아니야!'

최강태의 머리채를 잡기 위해 손을 뻗는 녀석. 그리고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다가 사색이 된 얼굴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젓는 심지훈.

하지만 이미 늦었다.

"너도 앉아서 먹어. 고기 탄다."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 채려던 녀석의 손을 어느새 낚아챈 최강태가 그대로 손목을 비틀어 밑으로 끌어 내렸다.

그는 쪼그려 앉아있는 상태, 반대로 상대는 서 있는 상황. 손목을 비트는 것도 모자라 갑자기 끌어 내린다면······.

우드득!

"끄아아아아아악!!"

그야 손목이 망가지고 어깨와 팔꿈치 관절이 탈골되면서 비명이 터져나올 수밖에······.

"이런 씨발······!"

당연히 옆에 있던 친구가 참지 못 하고 달려들자 최강태는 마침 자신의 눈앞에 있던 종이컵을 들어 녀석의 얼굴에 뿌렸다.

문제는 그 종이컵이 삼겹살의 뜨거운 기름을 받기 위한 기름컵이었다는 것이다.

치이이익···!

"아악!! 내 눈! 내 눈!!"

종이컵을 제 자리에 둔 최강태가 이번에는 옆에 있던 소주병을 들어 아무렇게나 던졌다.

빡!

털썩······.

그런데 빙글빙글 돌아가며 빠르게 날아간 소주병은 부엌에서 다급하게 식칼을 챙겨 왔던 녀석의 머리에 그대로 명중하며 녀석을 단 한 방에 기절시켰다.

남은 여자아이들 둘은 서로 손을 잡고 사색이 된 채 어느새 벽에 붙어 덜덜 떨고 있었다.

방금 전, 최강태가 쪼그려앉아 3초도 안 되는 사이에 쓰러트린 세 사람은 인근 일진 크루들조차 피해가는 건 물론이고, 현재 폭력 조직에 속해있는 녀석들이었다.

"역시 삼겹살은 쓰레기장에서 먹어도 맛있네. 근데 너희는 왜 안 먹어? 먹으려고 준비할 거 아니었어?"

도리도리!

자신의 시선에 여자 둘이 흠칫하며 고개를 빠르게 도리질치자 이번에는 심지훈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너는?"

"저, 저도 별로······."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나 혼자 다 먹는 수밖에. 너 할 거 없으면 나 이거 먹는동안 얘들한테 서마윤 어디있는지나 좀 알아봐라."

"제, 제가요?"

심지훈이 자신을 가리키며 더듬거리자 최강태가 삼겹살을 한 움큼 넣은 쌈을 우걱우걱 씹어 삼킨 뒤 대꾸했다.

"응. 나 이거 다 먹을때까지 못 알아내면 네가 처맞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

결국 심지훈은 마음을 굳히고 남은 여자애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다급해진 건 그녀들이었다.

"자, 잠깐만요! 마윤 오빠 찾아오셨다고 하셨죠? 오빠 지금 어디있는지 알아요!"

"버, 번호도 드릴까요?"

최강태는 두 번째 쌈을 우걱우걱 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왼손으로는 심지훈을 가리키며 남은 손으로는 봉지에 들어있는 냉삼을 불판 위에 올렸다.

냉삼이 더 중요했는지 더 이상 이쪽에 신경쓰지 않는 최강태의 눈치를 살피며 심지훈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서 서마윤은 지금 어딨는데?"

"교육하러 갔어요."

"교육?"

"최근에 들어온 여자애가 손님 입술을 물어뜯고 도망쳤거든요. 사실은 버닝에서 일 틀어지면서 폐기했어야 하는 앤데 와꾸가 워낙 좋아서 마윤 오빠가 몰래 뒤로 숨겨서 손님 받으려고 했던 애거든요. 그런데 구해준 은혜도 모르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마윤 오빠가 개빡쳐서······."

"그 여자애 이름은?"

삼겹살에 집중하던 최강태가 처음으로 질문을 던지자 두 여자애가 서로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민정이었지? 김민정? 이민정?"

"아무튼 무슨 민정이었던 것 같은데······."

최강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심지훈을 불렀다.

"에휴, 앉아서 느긋하게 먹기도 힘들겠네. 네비야."

"네? 저, 저요?"

"고기랑 불판이랑 버너 챙겨라."

"······?!"

***

지금은 폐업하고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공중 목욕탕.

그곳에서 난데없이 분노와 짜증에 가득찬 누군가의 고성이 울려퍼졌다.

짜악!!

"야이 씨발년아, 어차피 붙잡힐 거 도망은 왜 쳐, 사람 피곤하게? 도망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랬냐?"

서마윤이 꾸준한 근력 운동을 통해 운동선수 못지않은 다부진 팔로 따귀를 올려 붙이자 한 여자아이가 힘 없이 날아가 바닥에 쓰러진다.

그러나 서마윤은 그녀를 이대로 용서해 줄 생각이 없었는지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퉁퉁 부은 뺨,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 초점없는 눈동자······.

머리와 뺨에서 느껴지는 아픔이 상당할 텐데도 이민정의 표정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보였다.

"하아, 이 썅년 보소?"

그 표정은 서마윤을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

서마윤은 이민정의 턱을 거칠게 쥐더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여자애들을 향해서 강제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너도 잘 알지? 쟤들이 왜 여기에 모여 있는지."

"······."

잘 안다. 너무 잘 안다. 왜냐하면 자신도 이들 무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저들과 똑같은 자리에 서 있었으니까.

그때 봤던 광경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 하겠지.

그때 자신의 눈앞에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던 언니도 지금의 자신과 똑같이 도망치다 잡혀온 사람이었다.

서마윤은 본보기를 보여준다는 말과 함께 가출팸에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은 여자애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았다.

그리고 이어진 건 필설로도 형용이 불가능한 잔혹하고 끔찍한 범죄였다.

[눈 돌리지마. 눈 돌리는 년은 오늘 하루종일 처맞고 밥도 없다.]

결국 그 끔찍한 고문 행위를 끝까지 지켜봐야 했던 여자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구토를 하거나 심한 경우, 기절까지 하는 아이도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끔찍한 고문과 학대 끝에 숨을 거둔 피해자는 드럼통에 담겨 시멘트에 묻히더니 어딘가로 옮겨졌다.

서마윤이 말하길 시멘트가 굳으면 바다에 가져다 버린다고 한다. 평생 가족들은 물론이고 아무도 시체를 못 찾을 거라고······.

서마윤은 이민정의 귓가에 대고 웃으며 속삭였다.

"아무래도 본보기가 부족했던 모양이네. 좋아, 너는 특별히 더 신경써서 다뤄줄게."

"진짜 우리 맘대로 해도 되는거지?"

"이 씨발년, 언제 한 번 먹어보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흐흐흐~"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상관없는데 카메라 앵글은 가리지 마라. 특히 저년 얼굴 가리는 새끼는 뒈진다."

서마윤이 물러서자 대기하고 있던 남자들이 옷을 훌러덩 벗고는 이민정에게 다가갔다.

서마윤은 그 모습을 캠코더로 찍으면서 씨익 미소를 그렸다. 이 영상을 찍어 딥웹 사이트에 올리면 그것 자체로 또 돈이 되니까.

그에게는 한 여자아이가 망가지고,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조차 오로지 돈이었던 것이다.

이민정은 그런 서마윤의 모습을 보면서 삶을 체념했다.

어차피 인생에 아쉬울 건 없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끔찍했고, 앞으로 더 살아봤자 이보다 끔찍했으면 끔찍했지 결코 행복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어째서일까?

주륵······.

"뭐야, 이 년 우는데?"

"오히려 좋지. 안 그러냐?"

"야, 우냐? 이제와서 울어봤자 아무 소용없어. 너 여기서 절대 못 살아나가. 알지?"

결국 눈물을 흘리는 이민정을 이죽이며 그녀에게 손을 뻗는 남자들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쯤에서 구우면 되겠네. 어때?"

"여기보단 저기 창가쪽이 좋지 않을까요? 연기도 금방 빠지고."

"저긴 햇빛이 너무 강해서 안 돼."

"그럼 이쪽은요?"

"오~ 거기 괜찮네."

너무 놀라서 오히려 아무말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시선이 최강태와 심지훈에게 쏠렸다.

그들의 시선을 신경조차 쓰지않고 냉삼 구울 자리를 신중하게 알아보던 두 사람은 마음에 드는 자리를 발견하자 심지훈이 곧바로 고기구울 준비에 착수했다.

"맛있게 굽거라. 고기 한 점 탈 때마다 볼기짝 한 대니라."

"옙!"

그렇게 소중한 냉삼을 심지훈에게 맡겨놓은 최강태가 몸을 돌려 이민정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돌려 최강태를 올려다보는 이민정의 표정 역시 다소 당황한듯 의문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런 이민정의 얼굴을 확인한 최강태가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혜성 공고 3학년 3반 이민정?"

"그, 그런데 누구······."

"나 몰라? 그래도 반장이라 얼굴을 알아볼 줄 알았는데."

"아······."

그제서야 최강태를 알아본 이민정이 얼굴을 붉히며 슬쩍 가슴과 아래를 손으로 가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워낙 결석도 많고, 조퇴도 많고, 설령 학교에 와도 이지메만 당한 터라 친구를 제대로 사귄 적은 없지만 최강태의 얼굴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엄마의 장례식장을 찾아온 얼마 없는 조문객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한편, 그 광경을 어이없이 쳐다보면 사마윤이 캠을 끄더니 잔뜩 짜증난 표정으로 알몸의 남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뭐야, 저 미친새끼는? 대체 어디서 기어들어온 거지? 아 몰라, 빨리 저 새끼 치워."

"예. 형님."

그러자 최강태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온 몸을 뒤덮은 문신과 근육질의 떡대, 사나운 인상이 위협적인 놈이 그에게 다가갔고······.

훙!!

빠르게 접근한 녀석은 망설임없이 최강태의 안면을 향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덥썩!

"허윽······!!"

주먹을 휘두른 녀석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더니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주먹을 가볍게 피한 최강태가 손을 뻗어 움켜쥔 것이 다름아닌 녀석의 분신이었기 때문이다.

"야~ 이 자식 물건 실한 거 보게? 이대로 물 건너 가서 AV데뷔해도 대성할 놈이었구만? 참으로 안타까워."

"자, 잠깐!!"

콰직!!

"······!!"

녀석이 다급게 말렸지만 이미 늦었다.

제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자신의 분신을 움켜쥐고 게거품을 물며 쓰러진 녀석의 눈이 뒤집혔다. 정신을 잃고 기절한 것이다.

'오우! 쒯···!'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남자들이 저도 모르게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렸다.

최강태는 기절한 녀석의 등을 토닥이며 조언아닌 조언을 해주었다.

"걱정 마. 누가 그러는데 앉아서 싸는 것도 연습하다보면 익숙해진다더라. 자, 누구 또 앉아서 쉬하고 싶은 사람?"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27화 네가 미워서 이러는 게 아냐. 돈이 되니까 이러는 거지

"너 뭐야?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최강태를 대하는 분위기가 더욱 더 살벌해진 서마윤이 한껏 차가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 집에 가니까 네 친구들이 친절하게 알려주던데? 냉삼도 챙겨주고. 너랑 다르게 좋은 녀석들이더라."

최강태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고개짓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그곳에선 지금도 심지훈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맛있게 삼겹살을 굽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밖에 있는 놈들은 뭘 했길래, 저런 미친놈들이 여기까지 기어들어오는데 연락 한 번이 없어?!'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리 폐업한 공중 목욕탕이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서마윤은 곳곳에 사람들을 배치해서 감시하고 있었다.

"너무 섭섭해하지 마. 그놈들도 농땡이 안 부리고 열심히 일하고 있더라. 아참, 경찰은 안 불렀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대꾸하는 최강태에게 깜짝 놀란 서마윤이었지만 이내 표정을 추스르고는 말을 씹어 뱉었다.

"그래서, 설마 너 혼자 여길 쳐들어왔다고?"

"혼자 아닌데?"

최강태는 다시 한 번 고기를 굽고 있던 심지훈을 가리켰고 심지훈은 서마윤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환장하겠네."

정말로 그가 혼자 왔을 거란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분명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수작인거겠지.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해봤자 손해인 건 자신이었다.

"이 씨발년은 챙겨두고 저 미친새끼는 시체만 가져와. 아나, 저 정신병자 또라이 때문에 일정 다 꼬였네."

서마윤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캠코더를 다시 키자 옷을 입고 있는 남자들이 저벅저벅 최강태에게 다가갔다.

최강태가 맞아죽는 광경을 촬영하기 위해서 다시 캠코더를 킨 것이다.

녀석들이 옷을 입고 있는 이유는 서마윤이 유명한 크루들에게 직접 섭외한 유망주들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놈들이 미리 연장을 가지고 있던 이유는 이번 일을 예상해서가 아니라 1차적으로 집단 강간을 마치고 나면 2차적으로 연장이 쓰일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별의 별 미친놈들이 많았고 그런 놈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게 돈벌이가 된다는 걸 서마윤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서마윤의 생각에 최강태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마계에서 태어났으면 귀하게 쓰였을 인재들이 애먼 곳에서 태어난 탓에 고생만 하는구나."

"뭐래?"

"몰라. 미친놈이 하는 말을 내가 어떻게 아냐?"

슉!

그 순간, 가장 가까이 접근한 녀석을 시작으로 열댓 명이 달려들어 최강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가장 뒤쪽에서 달려들던 녀석은 생각했다. 자신의 차례는 오지 않을 거라고.

아마 앞에서 거의 처리가 끝나고 자신은 완전히 부서져 망가진 녀석의 몰골이나 구경하게 되겠지.

하지만 이 예상은 시작부터 화끈하게 빗나갔다.

슥, 퍽!

내리치는 야구 배트를 슬쩍 피함과 동시에 안면에 주먹을 꽂아넣고······.

휘릭··· 퍽!

몸을 회전하여 들어오는 각목을 피함과 동시에 깔끔한 회축으로 뚝배기를 후려갈긴다.

처음 덤벼든 두 명이 어처구니없이 순삭당하자 뒤따라 들어가던 녀석들도 직감적으로 느끼고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하지만 녀석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퍼퍽! 쩌엉! 파팟, 우지끈! 빠각! 으드득! 콰직!!

"으아아아아!!"

"끄아아아악!!"

"파, 팔이! 내 팔이······!!"

아무리 필사적으로 연장을 휘둘러도 마치 최강태의 몸에 기름을 발라놓은 것마냥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지나간다.

그에 반해서 최강태의 공격은 무슨 자석에 이끌려가듯 상대를 놓치는 법 없이 무조건 명중했다.

주먹으로 얼굴을, 팔꿈치로 갈비뼈를, 역회축으로 관자놀이를, 무릎으로 코뼈를, 어깨로 가슴뼈를······.

잡아서 누르면 팔꿈치가 부러지고, 잡아서 비틀면 손목뼈가 박살난다. 그저 가볍게 잡고 휙 돌리는 것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면 어깨가 아작나고 다리가 뒤틀렸다.

'어휴, 병신 새끼들. 나처럼 눈치라도 있었으면 저런 꼴은 안 당하지.'

비명을 지르며 끔찍한 고통과 함께 병신이 되어가는 일진 크루의 유망주들.

그 사이에서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으며 일진들을 망가트리는 최강태의 모습에 삼겹살을 굽고 있던 심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열댓 명의 유망주들이 병신이 되는데는 고작 1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 이게 대체······."

"표정 변화가 상당히 볼만하네. 왜, 기대하던 장면이 안 나와서 실망했어?"

처음에는 최강태가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생각으로 들떠있던 거의 표정이 이내 경악으로 물들더니 황당함을 넘어서 두려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최강태는 씨익 웃으며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그렇게 실망할 필요 없어. 남이 못 찍으면 내가 찍으면 되지. 안 그래?"

"가, 가까이 오지 마!"

최강태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뒷주머니에서 나이프를 빼 든 서마윤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여자아이를 낚아채더니 그녀의 목에 칼끝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어이쿠, 그렇게 내가 좋았쩌요?"

"······!"

서마윤은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자신은 분명 옆에 있던 여자아이를 인질로 잡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여자아이가 아니라 최강태가 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냐, 난 남자한테 안겨있는 취미는 없어서."

최강태가 서마윤의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슬쩍 비트는 순간, 거짓말처럼 녀석이 빙글 돌더니 등부터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커헉······!"

그렇게 바닥에 쓰러져 움찔거리는 서마윤을 놔두고 이민정에게 다가간 최강태.

"아, 저, 그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도저히 감도 안 잡히던 그때, 최강태는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

"춥다. 감기들라. 그거 입고 다른 애들이랑 같이 나가있어. 돌아갈 곳이 있는 녀석들은 돌아가도 좋고. 밖에 있는 놈들은 내가 다 처리했으니까."

"······."

따뜻했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이라 체온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떨림이 멈추지 않았던 몸이 어느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조, 조심해······."

"조심할 게 남아있나?"

그에 대한 고마움에 용기를 내서 건낸 한 마디.

하지만 그게 무의미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민정이 고개숙여 민망해하자 최강태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 뭐, 그래도 걱정해줘서 고맙다."

'······!'

씨익 웃는 최강태의 얼굴을 놀라서 쳐다보는 이민정.

그녀는 지금까지 맞으면서 자라왔다. 그리고 집을 나온 이 상황에서도 운명은 변함이 없었다.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 남자의 손은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보통 남자의 손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는 자신을 폭행하거나, 탐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래서 본능적으로 남자의 손길이 다가오면 소름이 돋고 피가 차게 식었다.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데······.

최강태의 손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고 포근하달까?

"얼른 나가. 이 뒤부터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거든."

"으, 응!"

이민정이 서둘러 여자애들을 데리고 나가자 최강태는 안쪽에서 문을 걸어 잠그더니 서마윤이 가지고 있던 캠코더를 주워 들었다.

"역시 야스도 감상보다는 직접 하는게 최고지. 그동안 지켜보기만 하느라 얼마나 답답했겠어. 안 그래?"

"그, 그게 무슨······."

바닥에서 움찔거리던 서마윤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최강태가 씨익 웃더니 남아있던 알몸남들에게 지시했다.

"촬영 펑크나면 안 된다면서? 아까 찍으려던 거 마저 찍자고. 주연배우가 좀 바뀌긴 했지만··· 뭐, 큰 문제는 없겠지. 안 그래?"

"자, 잠깐만! 아니, 잠깐만요! 지금 저희더러 서마윤을······."

알몸남들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마윤을 가리키며 더듬거리자 최강태가 오히려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문제 있어? 너희들 박는 거 좋아하잖아. 아니면 박히는 쪽이 사실은 취향이었다던가?"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십쇼! 형님!! 저희는 정말 그런 취향 없습니다!"

알몸남들이 울면서 무릎꿇고 두 손을 싹싹 빌며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에이~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그러는 너희는 드럼통에 시멘트 부어서 바다에 수장시킨 여자애들이 너희한테 당할 때도 용서해달라고 빌면 용서해 줬니?"

"······!"

그 말에 서마윤의 눈이 커졌다. 배신한 여자아이들의 처리를 아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녀석이 그걸 어떻게?!'

"우리 프로답게 일 할 때는 똑바로, 열심히 하자. 저렇게 되고 싶은 건 아니잖아."

최강태는 턱짓으로 가장 처음에 당한 알몸남을 가리켰다.

소중이가 완전히 으깨진 녀석은 사타구니에서 흥건하게 피를 흘린 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자신들은 선택권이 없음을 깨닫게 된 알몸남들이 각오를 다지고는 서마윤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마! 야 이 개새끼들아! 뒈지고 싶어?! 오지 말라고!"

"씨발, 닥쳐! 우리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맞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개새끼야!"

그렇게 서로를 향한 고성방가가 오가고 거리가 좁아지며 분위기가 뜨거워지던 무렵.

"형님! 삼겹살 다 구웠는데요."

"오, 타이밍 굳. 안 그래도 출출했는데."

최강태는 심지훈에게 캠코더를 맡기더니 아예 자리를 잡고 삼겹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찍어. 특히 배우 얼굴을 신경써서 찍어야 되는 거 알지?"

"제, 제가 저걸 찍으라고요?"

"그럼? 아하! 너도 보는 것보다 하는 게······."

"목숨 걸고 촬영하겠습니다!"

결국 심지훈은 촬영내내 구역질을 하면서도 캠코더를 놓치지 않았다고······.

그렇게 모두가 절망한 가운데 단 한 명, 배부른 감독만이 행복하게 부른 배를 두드리며 촬영 장소로 돌아왔다.

"꺼억~ 어우, 배부르다. 제대로 찍은 거 맞지?"

"그, 그럼요······.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심지훈이 혼자 죽을 수는 없다는 각오로 캠코더를 내밀자 최강태가 가볍게 거절하며 대꾸했다.

"목숨을 걸었는데 잘 찍었겠지. 그럼 촬영 2부로 넘어갈까?"

"촬영 2부요? 2부도 있었습니까?"

"그럼. 우리 주연배우가 설명해 줄테니까 모두 주목."

"······!"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시간에 정신을 반쯤 잃어가던 서마윤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강태가 말하는 2부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엉망이 된 몸으로 다급히 최강태에게 기어가 눈물콧물을 질질짜며 목숨을 구걸했다.

"사, 살려주세요!!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면 시키는 건 뭐든 다 하겠습니다!! 바, 발이라도 핥을까요?!"

"정말 시키는 짓은 다 할 거야?"

"무, 물론입니다!!"

"그럼 자리로 돌아가. 2부 촬영해야 하니까."

희망의 난간에서 절망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네가 잘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네가 이걸로 돈을 많이 벌었길래 나도 따라서 돈 벌어 보려는거지. 게이 집단 강간이랑 게이 스너프 필름이면 매니아들 쪽에서는 수요가 좀 있겠지?"

"모르긴 몰라도 환장하지 않을까요?"

심지훈의 대꾸에 최강태는 다시 서마윤을 쳐다보며 씨익 미소를 그리며 그의 뺨을 다독였다.

"네가 미워서 이러는 게 아냐. 네가 돈이 되니까 이러는 거라고."

[네가 미워서 이러는 게 아냐. 네가 돈이 되니까 이러는 거지.]

"······!"

그 순간, 서마윤이 눈을 부릅떴다.

그가 하는 말도, 그의 미소도······.

자신을 내려다보며 잔인하게 말을 내뱉는 최강태의 모습이 자신과 겹쳐 보였던 것이다.

"걱정 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넌 아직 쓸모가 많거든. 그러니까 눈 딱 감고 참아보자?"

"자, 잠깐만!! 제발 살려······!"

"카메라 레디~ 액션!"

어느새 연장을 챙겨든 알몸남들의 연장이 서마윤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28화 상반되는 마음

움찔움찔······.

"우웩···!"

심지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토악질했다.

목이 쉬었는지 더 이상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서마윤의 모습이 제법 참혹했기 때문이다.

멀쩡한 관절같은 건 남아 있지도 않았고 뼈까지 잘근잘근 부서져서 무슨 연체동물마냥 처참한 몰골로 널브러져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즉에 죽고도 남았겠지.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저 참혹한 몰골에도 서마윤은 몸을 움찔거리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끈질기게 증명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저런 상태로 사람이 살아있는거지?"

"말 했잖아. 필요한 구석이 남아있어서 아직은 안 죽일거라고."

"네?"

담담하게 대꾸하는 최강태의 말에 경악하는 심지훈과 알몸남들.

죽고 살리는 게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법이던가? 물론 죽기 직전까지 팬다거나, 죽을 때까지 패는 건 사람의 마음대로였지만······.

죽어야 정상인 부상을 입고도 사람을 살아있게 만든다는 건 더 이상 인간의 영역, 상식의 영역이 아니었던 탓이다.

"거기 알몸 원숭이들."

"저, 저희요?"

"그럼 여기에 알몸 원숭이들이 너희말고 또 있냐? 너희는 저기 널브러져 있는 새끼들 챙겨서 대충 숨어있어."

"숨어 있으라고요?"

알몸남들이 놀란 건 다른 게 아니었다. 이대로 경찰서로 가서 자백하라고 해도 목숨이 아까워 가야할 판국인데 되려 풀어주는 것도 모자라 숨어 있으라니?

"너희들 데리러 갈 경찰은 따로 있으니까 그때까지 숨어 있으라고. 너희도 아직까지는 필요한 놈들이니까. 자수하는 새끼는 뒈진다."

"아, 넵······."

그렇게 최강태 왈 알몸 원숭이들은 초주검이 된 크루의 유망주들을 분주하게 옮기기 시작했다.

"네비."

"넵!"

"너는 지금 내가 알려주는 주소로 우리 주연 배우 정중히 모시고 가서 배달해."

"주연 배우면 저기 흐물흐물거리는 저거 말씀하시는거죠?"

"그래."

"넵······."

심지훈은 만지기도 싫은 처참한 몰골로 아직도 움찔거리는 서마윤을 건져(?) 빨리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현장을 정리한 최강태는 이민정을 비롯한 여자애들이 기다리고 있는 망한 목욕탕 휴게실로 향했다.

똑똑똑.

가벼운 노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여자애들이 움찔하며 서로 더욱 밀착하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최강태에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시선에 담긴 경계심과 두려움이 상당했다.

최강태는 그런 아이들을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돌아갈 녀석들은 돌아가도 좋다고 말 했을텐데."

그가 그렇게 말 한 이유는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이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 아이가 주춤거리다 결국 울먹이며 대답했다.

"돌아갈 곳이··· 없어요······."

"집이 너무 무서워요······."

"학교 가기 싫어요. 학교 가면 애들이 괴롭힌단 말이에요."

두려움과 불안은 전염병과 같다. 한 아이가 울먹이며 대답하자 뒤를 이어 아이들의 진심이 쏟아져 나왔고 결국 아이들은 울음을 참지 못 했다.

"하아······."

최강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집이 무서워서 도망친 아이들에게 대책없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될 뿐더러 억지로 돌려보내봤자 금새 다시 가출하거나······.

'어쩌면 더 끔찍한 꼴을 당할 수도······.'

분명 나이와 상관없이 범죄자의 소질을 가진 아이들도 있고 서마윤이나 그에게 가담했던 놈들처럼 미성년자임에도 흉악범 이상의 범죄자들 역시 분명 존재했다.

최강태는 그들이 미성년자라고 봐주고, 자비를 베풀어줄 마음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 모든 미성년자들이 범죄자이고 악인이란 건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눈앞의 아이들처럼 힘이 없고, 약해서 피해받는 아이들이 절대다수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집과 가족은 최후의 피난처이자 최고의 보루였다.

그런 집과 가족들을 피해 도망쳐나왔다는 건 아이들 나름대로 살기위해서 필사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다는 뜻이겠지.

최강태는 다시 밖으로 나와서 폰을 꺼내 들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빡빡아. 나다. 너 지금 바로 보육원 몇 개 매수해야겠다."

-네? 보, 보육원이요?! 애들 가지고 장사하실 것도 아닌 분이 갑자기 보육원은 왜······.

"쓰읍! 빡빡이가 말대꾸?"

-서울쪽으로 알아보면 되죠?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자금은 얼마나 투자할까요?

"저번에 인천 뭐시기더라? 그거 정리하면서 주운 용돈 있잖아. 거기서 20억만 쓰자. 쓰다가 부족하면 나중에 더 투자하면 되니까."

-2, 20억이요?!

"왜? 너무 적나?"

-어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정도면 보육원 몇 개 정도가 아니라 몇십 개도 운영할 수 있을 건데. 그런데 형님. 하나만 진짜 딱 물어보면 안 될까요?

"뭐?"

-정말로 보육원을 매수하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뭐, 민짜들 데리고 장사하려는 목적이라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는데 형님이 그러실 분도 아니고.

구영식은 정말로 궁금했다.

보통 거대 조직에서 보육원을 매수하거나 후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사회 봉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연히 탈세와 자금줄로 이용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사의 아들인 최강태가 그럴 리는 없고, 실제로 자신들을 수중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영식이파를 범죄에 동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빡빡아."

-예 형님.

"매운 것만 먹다보면 단 것도 땡기고 공부만 하는 범생이도 가끔은 일탈하고 그러지?"

-그, 그렇죠?

"나도 그래. 사람을 질리도록 패다보면 말야. 그게 질려서 가끔 사람을 구하고 싶을 때가 있거든."

-아······.

구영식은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 했다.

대체 얼마나 사람을 패고 또 패야 패는 게 질려서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지 자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아무튼 소림사 애들 손에 먹을 것 좀 싸서 보내. 겸사겸사 정리할 것도 있으니까. 보육원은 너한테 일임하지만 가능하면 경영이 힘들고 믿을만한 보육 교사들이 있는 곳으로 알아봐라. 청소년 쉼터도 괜찮고."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최강태가 다시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자 훌쩍이는 아이들이 처량한 눈으로 최강태를 쳐다보았다.

울먹이는 녀석들이 몇몇 있긴 해도 대충 분위기는 수습된 모양이었다. 그 가운데, 이민정이 아이들을 다독이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이민정."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이민정이 고개를 돌려 최강태를 바라보았다. 그에 최강태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이민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언니!"

이민정이 다독여 주던 여자아이가 그녀의 손을 덥썩 잡으며 또 다시 울먹인다. 아마 이민정이 나쁜 짓을 당하러 간다고 착각한 거겠지.

그에 최강태가 피식 웃더니 소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안 잡아먹을 테니까. 그냥 얘기만 하려는 것 뿐이야."

"들었지? 언니 다녀올게."

이민정은 자신의 손을 꼬옥 잡고 놓지 않던 소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낸 후 최강태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이 이동한 곳은 목욕탕의 옥상이었다.

옥상에 올라오자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안 추워? 추우면 내려가고."

"아니, 너무 좋아."

이민정은 옥상에 버려져 있던 평상에 앉아 눈을 감고 바람을 만끽했다. 그녀의 입가에 살풋 미소가 감돈다.

"잘 어울리네."

"응? 뭐가?"

"옷 말이야. 남자 옷이라서 크거나 이상할 줄 알았거든."

이민정은 알몸이었기에 급한데로 크루의 유망주들 중 가장 체구가 작은 녀석의 옷을 벗겨 입혔다.

그런데 걱정과는 다르게 이민정의 키가 커서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 코디를 무난하게 소화해냈던 것이다.

"그런가?"

이민정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옷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워낙 스타일링에 관심이 없었고 신경을 쓸 여유가 있는 삶도 아니었으니······.

옷은 대충 몸을 가리고 따뜻하거나 시원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강태는 이민정의 옆에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그러자 움찔 놀라서 슬쩍 거리를 벌리는 그녀.

최강태가 자신을 슬쩍 쳐다보자 이민정도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채고 다급히 최강태에게 사과를 건냈다.

"미, 미안! 네가 무섭다거나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이민정에게 최강태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됐어, 임마. 무슨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원래 마음의 상처라는 게 그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몸에 새겨진 상처보다 더 크고 아픈 법이거든. 그런데 이게 참 지랄맞은게 수술이나 치료가 불가능해서 가만히 놔두면 갈수록 상처가 더 크고 고통스러워진다는 거지."

"······."

이민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숨죽여 울었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이고, 턱 밑으로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지만 최강태는 옆에서 조용히 하늘만 바라보았다.

아마 이민정에게는 이렇게 마음놓고 울 시간조차 없었겠지. 그 소중한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고마워. 구해줘서······."

"별 말씀을."

최강태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냈고 이민정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이민정이 손수건을 다시 건내주자 손수건을 두 손으로 감싸쥔 최강태. 그런데 다시 손을 떼고나니 놀랍게도 손수건이 사라져 있었다.

그에 깜짝 놀라 최강태를 쳐다보는 이민정.

"너 이런 것도 할 줄 알았어?"

"내가 잘 하는 것보다 내가 못 하는 걸 찾는게 더 빠를걸?"

"······!"

오른손으로 가슴어름의 빈 허공을 움켜쥐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가리듯 스쳐지나가는 순간, 허공을 움켜쥐고 있던 최강태의 손에 어느새 샛노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예쁘다······."

"받아."

"저, 정말 내가 받아도 돼?"

최강태는 말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꽃다발을 내밀었고 이민정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 들어 향기를 맡았다.

"향기도 좋다. 이거 무슨 꽃이야?"

"메리골드. 혹시 그 꽃의 꽃말이 뭔지 알아?"

"미안······. 잘 모르겠어."

"반드시 찾아올 행복."

"······!"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 이민정에게 최강태가 자연스럽게 제안을 건냈다.

"너 나랑 거래 하나 할래?"

"거, 거래? 이렇게 갑자기? 그치만 난 가진 게 없는 걸······."

이민정은 미안함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넌 분명히 가지고 있어. 그것 때문에 내가 널 찾으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걸."

"내가? 내가 뭘 가지고 있는데?"

"악의."

최강태가 슬쩍 미소를 그리는 순간, 이민정은 심장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느낌이 들며 소름이 끼쳤다. 마치 눈앞의 남자가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고 느낌은 온 것보다 빠르게 사라지자 이민정은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악의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인데?"

"말 그대로야.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 연민, 그리움도 가지고 있지. 이 상반되는 감정의 충돌에서 느껴지는 괴로움에 끌렸다고 할까? 아주 순도높은 마력의 냄새가 나더라고."

"나, 난 반장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어······."

"이해할 필요 없어. 그저 선택하면 돼. 앞으로도 지금의 감정을 끌어안고 괴로움에 발버둥칠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그 순도높은 마력과 끔찍한 기억,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맡기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것인지. 뭐, 난 어느쪽이든 재밌을 것 같지만."

"······."

마치 홀린 듯 최강태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이민정이 입술을 열었다.

"난······."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29화 포주들의 최후

"응? 내가 왜······."

정신을 차린 이민정은 두 뺨에 흐르고 있던 눈물을 닦아내며 깜짝 놀랐다.

'나 뭘 하고 있었지?'

자신이 왜 멍하니 있었던 건지도, 왜 뜬금없이 울고 있었던 건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야, 이민정. 내려가자. 밥 왔다."

"밥?"

"밥 안 먹을거야? 배 안 고파?"

꼬르륵~

그때마침 눈치없게 울리는 배꼽 시계에 이민정이 주린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푹 숙인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 눈치없게 왜 하필 지금······!'

피식~

"배 많이 고픈가보네."

"그, 그게······."

"가자."

그렇게 최강태는 이민정과 함께 아래로 내려갔고 이내 눈을 부릅뜨며 한 순간에 얼어 붙었다.

'뭐, 뭐야 이 무서운 사람들은?!'

검은 정장에 큰 떡대, 번쩍거리는 머리와 험상궂은 인상까지······. 한 눈에 봐도 위험한 사람들임을 알아볼 수 있는 떡대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떼거리로 찾아왔다.

그녀가 무서워서 경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더욱 경악스러운 일은 지금부터였다.

"내려오셨습니까. 큰형님!"

"오냐."

"이번에 새 식구로 애기들도 큰형님께 인사시켜 드리려고 데려왔습니다. 뭐하냐, 언능 큰형님께 인사 안 박고."

"사장님과 다른 형님들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정필수라고 합니다!"

새 식구 대표로 정필수라는 녀석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인사하자 최강태가 녀석에게 딱 한 마디를 건냈다.

"숙여."

그에 곧바로 고개를 숙이는 정필수.

"호오~"

최강태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심혈을 기울여 녀석의 민머리를 닦아냈고······.

번쩍!

"좋아."

자신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치자 만족스럽다는 듯이 정필수를 지나쳐 휴게실로 들어섰다.

우걱우걱~!

"야, 그 군만두 내꺼야!"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지!"

"아, 진짜! 누가 탕수육에 소스 부었어!"

아이들을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휴게실에선 이미 걸신이라도 들린 것마냥 아이들이 중국 음식을 무서운 기세로 먹어치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 먹네."

"차이나 타운에서도 가장 맛 좋기로 유명한 곳에서 포장해왔습니다. 조금 식긴 했지만 맛이야 보증된 거나 다름없죠."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차이나 타운은 빡빡이가 완전히 접수한 모양이네?"

"이게 다 큰형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소문이 인천바닥에 쫙 퍼지고 나니까 차이나 타운 뿐만 아니라 인천에 있는 조직들 전부가 먼저 와서 사장님한테 인사하더라니까요? 이제 인천은 완전히 사장님, 그리고 큰형님 손바닥 안에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흐음~"

차이나 타운을 접수하고 구영식의 조직이 더욱 커졌다는 소식에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 최강태.

'단순히 인천을 먹어서 기분 좋은 건 아닌 것 같고, 어째 큰형님 웃는 게 느낌이 쎄한데······.'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구영식의 오른팔, 이상준은 최강태의 미소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빡빡이, 너 이름은?"

"이상준입니다. 큰형님."

"그래, 상준아. 너 발은 빠르냐?"

"네?"

***

최강태는 서마윤을 실어서 구영식에 보내기 전, 그의 스마트폰을 따로 챙겨 두었다.

서마윤은 육성으로 통화하는 것보다 텔레그램을 더 자주 애용했다.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어서 방을 폭파하면 증거를 찾기가 힘들고 추적도 매우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명령과 거래는 이 텔레그램으로 실행했다. 오히려 그 덕분에 최강태가 이용하기도 편했고.

[금일 오후 8시. 삼촌, 이모들은 강북 심파동에 동하 페인트 창고로 집결할 것.]

시간과 목적지까지 설정하고 폐업한 동하 페인트 창고에서 사람들을 기다리자 시간에 맞춰 속속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아 뭔데 갑자기 이런 데서 집결하래?"

"간부들끼리 모여서 회식할 각은 아닌 것 같지?"

"미친놈아 이런 곳에서 회식하고 싶냐? 할 거면 클럽이나 주점으로 모이라고 했겠지."

"이번에 너희 쪽에 새로들어온 애 예쁘다면서? 열일곱?"

"열여섯. 아 빨리 교육해야 하는데 왜 갑자기 부르고 지랄이야?"

"교육은 니미, 빨리 따먹고 싶어서 발정난 개새끼구만, 크크큭!"

그렇게 저들끼리 떠들어대며 어느덧 페인트 창고에 모인 인원만 무려 오십 명이 넘어갔다.

그렇게 8시가 지나고 8시 15분이 지나도 더 이상 도착하는 사람이 없자 창고의 문이 저절로 닫혔다.

쾅!

"뭐, 뭐야?!"

"문이 닫혔다!"

"씨발, 안 열려!"

"그보다 불 좀 켜! 너무 어둡잖아!"

문이 닫히고, 외부의 빛이 차단되자 창고 안은 순식간에 어둠이 지배했다. 포주들은 혼란스러워했고 다급히 폰을 꺼내 불을 밝히려는 순간.

번쩍!

"아악!"

"조명이 켜졌다!"

"그런데······."

천장의 조명이 켜지고 밝은 빛이 창고 안을 들이차면서 사람들도 시야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앞에 드러난 상황은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것이었다.

"뭐야? 큰아빠는 어디가고, 저 새끼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들의 시선은 한 곳으로 향했다. 바로 2층 난간 위에 모습을 드러낸 최강태였다.

"어흠!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아아, 잘 들리나요? 여러분."

확성기를 이용해서 포주들에게 말하는 최강태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당신이 우리를 부른 건가요?"

가장 앞에 있던 여성이 최강태에게 궁금했던 바를 물었다. 그러자 최강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이곳으로 초대한 장본인이죠."

"아니, 분명 아이디는 큰아빠··· 서마윤의 아이디였는데 어떻게······."

"지금 서마윤은 어디있지?! 그리고 이 상황은 뭔데?"

"우리는 바쁘다고! 할 말 없으면 당장 보내줘!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손해가 얼마인 줄 알아?"

자신에게 따져 묻는 포주들의 모습에 최강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더니 심드렁하게 물었다.

"혹시 자신이 가출한 청소년들을 착취하고, 괴롭히고, 이용해 먹은 것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뉘우쳤다거나 그럴 생각이 있다는 사람은 거수~"

그러자 돌아오는 반응이 화끈했다.

"뭔 개소리야?!"

"야, 대꾸하지 말고 그냥 가자. 시간만 낭비했네."

"서마윤은 뭐한다고 저런 미친놈한테 폰을 맡긴거지?"

"너희 먼저 가라. 난 올라가서 저 미친새끼 교육 좀 시키고 갈 테니까."

포주들이 분개하며 나서기 시작하자 그 모습에 최강태가 피식 웃으며 다시 한 번 말 했다.

"안타깝네. 반성하는 척이라도 했으면 멀쩡히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딱.

최강태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우우우웅······.

사방에 굳게 닫혀있던 셔터가 올라가며 드디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밖으로 나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뭐, 뭐야? 이 사람들은?"

"저기, 누, 누구세요?"

사람들이 더듬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쪽은 남녀 합해서 오십. 그러나 창고를 포위하고 있던 검은 정장의 빡빡이 무리들은 얼핏 봐도 200명이 가뿐하게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선두에 있던 이상준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최강태를 향해서 소리쳤다.

"큰형님! 그래서 앞으로 반성하고 착실하게 살겠다는 기특한 녀석은 어디 있습니까?"

"없어."

"그렇습니까? 안타깝네요. 들었지? 얘들아."

"예! 형님."

이상준은 담배 연기를 깊이 폐부에 들이마신 후, 연기를 뿜으며 최강태의 명령을 하달했다.

"큰형님 말씀이시다. 나중에 확인해서 이 새끼들 중, 사지 한 군데라도 멀쩡한 새끼 있으면 전원 팔 한짝씩 부러질 각오해라."

"예, 형님!"

우렁차게 대답한 떡대들이 연장을 손에 쥐고 접근하자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포주들이 사색이 되어 최강태를 향해 무릎꿇고 애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앞으로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일에 눈도 돌리지 않겠습니다!"

"사,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미성년자들 이용해서 돈 벌어먹지 않겠습니다!"

"저는 진짜 제가 돌보는 애들 제 친동생처럼 소중하게 대했다고요! 애들 데리고 돈 벌이라니··· 그런 불쌍한 애들 데리고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그러나 난간에 걸터앉은 최강태는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즐기면서 그들에게는 눈치조차 주지 않았다.

그 사이, 어느새 접근한 영식이파 빡빡이들이 무섭게 연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퍼억! 빠악! 쩌걱! 까앙!

"제발 살려주세요!"

"가만히 있어, 새끼야. 덜 아프게 박살나고 싶으면."

"이런 씨발!!"

결국 참다 못 한 몇몇 포주들이 힘을 합쳐 빡빡이들에게 대항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쭈, 재롱피우냐?"

"좋아, 이 새끼는 다구리 확정."

아무리 포주들이 배짱좋고 싸움을 좀 한다고 해도 상대는 그쪽 분야의 프로. 심지어 숫자도 네 배는 더 많다.

그러다보니 반항하는 놈들은 순식간에 제압되고, 오히려 본보기로 삼아 더 혹독하게 몰매를 맞자 사람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자, 잠깐만요! 저는 여자······!"

까앙!

"꺄아아악!"

"여자면 뭐? 여자 포주가 착취한 애들은 덜 불행하고 덜 괴롭데? 이거 너무 괘씸한데?"

"야, 오버하지마. 큰형님 말씀 못들었어? 요새 트랜드가 남녀평등이라 여자라고 더 심하게 패지 말라더라."

"아쉽네. 너 큰형님 덕분에 산 줄 알아라."

잠시 후, 사지가 부러져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하는 포주들의 비명과 눈물과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울려폈다.

그렇게 가출한 아이들의 피를 빨아 먹으며 배를 불리던 포주들의 최후는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끄응~! 달콤하구만."

처참한 몰골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포주들에게서 순도 높은 마력이 흘러나와 몸속으로 스며들자 최강태는 기분좋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리 끝났습니다. 큰형님. 저놈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경찰에 신고해 둬. 어차피 범인은 못 찾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예, 형님."

최강태에게 어떻게? 무슨 수로? 이런 질문이 얼마나 의미없는지는 누구보다 구영식과 그 측근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되묻는게 얼마나 위험한지도.

최강태가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면 경찰에 신고하면 되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 걱정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적어도 그들만큼은 최강태가 얼마나 비상식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인지 조금은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 오지 않은 녀석들도 있을 테니까 리스트 뽑아서 처리하고."

"알겠습니다. 큰형님."

"보육 교사랑 쉼터 심리치료사같은 인재들은?"

"지금 사장님이 최선을 다해서 0순위로 섭외중입니다. 보육원 몇 곳은 벌써 매수해서 리모델링 들어갔고 리모델링 끝날 때까지는 교사들을 아이들이 지내는 해당 거주지로 보내서 치료와 교육을 우선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물론 신체적으로 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이나 부족한 물자들도 빠르게 지원할 예정이고요."

"미성년자 애들을 치료하려면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할텐데?"

"그런 부분은 이미 서류상으로 준비 끝났으니 걱정 푹 놓으시라고 전하셨습니다."

이상준의 대답에 최강태는 피식 웃었다.

"그래, 수고해라."

"살펴 가십쇼!"

"살펴 가십쇼! 큰형님!"

이상준과 패거리들은 떠나는 최강태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그를 배웅했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30화 백마 탄 마왕님

서마윤 산하의 가출팸 포주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더불어 그들에게 착취당하던 아이들도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렇다고 행복해졌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여전히 상황은 거지같았고 앞날은 캄캄할 뿐이었으니까.

그건 이민정도 마찬가지였다.

"넌 어떡할래? 너도 집으로 돌아갈래?"

최강태는 카페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이민정을 찾아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번에 끔찍한 일을 경험한 가출팸 아이들중 일부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걸 선택했다.

그렇게 돌아간 대부분의 아이들은 호기심 때문에, 반항심 때문에, 홧김에 가출했다가 무서운 경험을 한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지옥같은 경험을 하고도 집으로 돌아가는 걸 꺼려했다고 한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에게 착취당하는 게,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고통받는 것보다 더 낫다는 거겠지.

최강태의 질문에 이민정이 처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너한테 쭉 얘기 안 하고 있었는데 사실 나··· 엄마가 최근에 돌아가시고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거리로 나온 거야.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봤자 혼자인건 마찬가진걸. 혼자는 무섭기도 하고······."

"그래?"

"응······."

이상했다. 본래 알고 있던 이민정의 사정과, 지금 그녀가 말하는 그녀 자신의 사정이 전혀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어. 그동안 엄마 혼자서 날 키우다가 얼마 전에 병에 걸려 돌아가셨고······. 너랑 선생님이랑 조문도 왔었잖아. 기억 안나?"

"그러고보니 그런 적이 있었지."

이것은 거래로 인한 기억 변조의 결과였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와 관련있는 모든 사람들이 변조된 사실을 현실로 인식할 것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들도 그렇게 수정 되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그런데 반장."

"왜?"

"어떻게 알고 날 구하러 와 준 거야···?"

고개를 살짝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이민정의 뺨이 살짝 홍조를 띄었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시고 친인척 한 명 없이 어두운 성격 때문에 학교에서도 지독한 왕따를 당했다.

그래서 학교도 자주 나가지 못 한 탓에 그 흔한 친구 한 명 없었고······.

설상가상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었던 엄마도 병을 얻어 돌아가신 바람에 이제 자신의 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아무도 없는 집이 무서웠고 혼자가 무서웠다. 누구라도 옆에 있어줬으면 하길 바라서 사람을 찾아 가출했다.

이것이 그녀의 상황에 맞춰 최강태가 변조한 기억이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기억 변조는 당사자에게 심각한 혼란을 초래해서 자칫 이성이 붕괴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을 변조했다고 한들, 그녀의 끔찍한 경험은 바뀌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래로 말끔히 사라졌지만 가출팸에서 당한 공포는 여전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 했던 사람이 자신을 구하러 와주었다.

최강태.

같은 반 반장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인연도, 친분도 없는··· 그저 같은 반 학생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나쁜 놈들을 물리치고 자신을 구해주던 그 모습은 동화책에서만 보던 백마 탄 왕자님 그 자체였다.

특히 나쁜 놈들을 쓰러트리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의 손길은 난생 처음 겪는 신선하고도 생소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마 기억 변조 전에도 후에도 아버지의 애정을 받지 못 한 그녀에게 자신을 지켜주고 위로해주는 남자의 손은 태어나 처음이었던 거겠지.

"겸사겸사지 뭐. 내가 서마윤한테 볼일이 있어서 쫓고 있었는데 거기에 운 좋게 네가 있었달까?"

"치~ 뭐야, 그게."

이민정이 살짝 토라진 듯 빨대로 커피만 빨아 마시자 최강태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이건 네 탓도 있다. 네가 이 정도로 예쁘다는 걸 진작에 알았으면 더 빨리 구하러 왔겠지. 안 그래?"

"······!"

그 순간, 홍조가 뺨에서 얼굴 전체로 퍼져나가더니 더욱 고개를 푹 숙인 그녀.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더 빠르게 줄어들어갈 뿐이었다.

"아무튼 앞으로 학교에서 얼굴 가리고 다니기만 해 아주."

"이, 이거 내가 혼나야 하는거야?"

"대답은?"

"으, 응!"

"좋아!"

얼떨결에 대답하긴 했지만 최강태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망설이던 자신의 고민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이민정이었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잘 곳은 있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싫고, 지금 지내고 있는 곳도 딱히 돌아가고 싶진 않을 거 아니야?"

"······."

이민정은 무거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갈 곳이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그에게 도움만 받았는데 다시 도와달라는 말을 꺼낼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괜찮아. 서마윤도 없고 포주들도 다 잡혀 갔는걸. 그 사람들만 없으면 나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다음부터 구라를 치려거든 좀 더 구라에 혼을 담아서 쳐. 얼굴에 거짓말이라고 다 써 있으니까."

"지, 진짜?!"

"이런 게 구라라는거다. 푸하하하하!"

"유치해!"

유치한 장난에 최강태가 박장대소하자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훔치던 이민정이 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낼 곳이 없으면 따로 마련해줄게. 다행히 며칠 지내기에 안성맞춤인 숙박업소를 알고 있거든. 방이 많아서 너뿐만 아니라 이번에 가출팸으로 들어온 아이들도 같이 지낼 수 있을 거다. 학교도 가깝고."

"그, 그치만 그건 너무 미안하고 부담스러워서······."

"그런 말은 주머니에 백원짜리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 하는 말이고. 주머니에 먼지밖에 없는 녀석은 얼굴에 철판 깔고 닥치는대로 도움 받아. 그렇게 살아남아서 나중에 성공하면 빚을 갚던가."

"만약 성공해도 빚을 안 갚으면?"

"음······. 그건 모르겠네. 내 빚 떼어먹고 멀쩡히 살아있는 놈을 못 봐서?"

"풋!"

이민정이 웃자 최강태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같은 놈이 착한 일 하는 건 진짜 드문 일이거든? 그러니까 도와줄 때 도움 받아. 그게 도와주는 사람에 대한 답례야."

"알았어. 도와줘서 고마워. 이번에 진 빚은 꼭 성공해서 갚을게. 살고 싶으니까."

"훌륭한 마인드군."

최강태는 그 뒤로도 한 시간 정도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떠들었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토라지고, 때로는 투정 부리고, 때로는 눈물 흘리기도 하면서··· 시간이 지나는지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친구··· 혹은 그 이상처럼 보였다.

그렇게 카페를 나선 두 사람의 이야기는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저, 정말 여기야? 잘못 찾아온 거 아니고?"

"이 아가씨가 속고만 사셨나."

이민정은 자신이 당분간 지내게 될 숙소를 올려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숙박업소라고 하길래 여인숙이나 민박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호텔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제법 규모가 상당한······.

"정말 이런 곳에서 지내도 괜찮은 거 맞아?"

"괜찮아. 괜찮아. 내가 아는 빡빡이 건물이거든. 그러니까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

"아는 빡빡이?"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전체 대실했으니까 방은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서 지내면 되고. 애들은 먼저 들어갔다니까 혼자 자기 무서우면 누구 하나 꼬셔서 같이 자던가. 그럼 난 간다."

"고마워! 강태야! 조심해서 들어가!"

"오냐."

돌아가던 최강태는 그저 머리 위로 손만 휘적이며 그렇게 떠나갔다.

그렇게 최강태를 배웅하고 조심스럽게 호텔로 들어선 이민정.

꿀꺽······.

이런 곳이 처음이다보니 긴장감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어서오십시오. 호텔 라즈입니다. 예약자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민정이라고 하는데요······."

"이민정 님. 확인되셨습니다. 카탈로그에서 원하는 방을 선택해주시면 되고요. 룸서비스는 전액 무료로 무제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저, 정말요?!"

"물론이죠."

프론트 직원의 친절한 안내와 함께 이민정이 고른 곳은 2인실 비지니스 룸이었다.

스위트룸은 벌써 아이들이 차지한 상태고 그녀가 원하면 교체도 가능했지만 애초에 너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언니!"

"민정 언니 왔다!"

"언니 여기 대박! 진짜 겁나 좋아!!"

"언니 여기 사장님이랑 아는 사람이야? 우리 여기서 언제까지 살 수 있는거야?"

이민정이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던 여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이민정을 반겨 주었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어느새 그녀는 여자 아이들의 정신적지주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글쎄, 당분간 여기서 지내다가 쉼터가 완성되면 그곳에서 살 수 있대."

"그럼 우리 집으로 안 돌아가도 되는거야?"

"나 진짜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데······."

집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방금 전까지 좋아서 방방 뛰던 애들이 급 우울 모드로 바뀌어 눈물을 훌쩍인다.

그 모습에 이민정은 웃으며 서둘러 아이들을 다독였다.

"걱정 마. 대장 오빠가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사람은 안 돌아가도 되고 너희들이 어디서 지내는지 엄마 아빠한테 알려주지도 않는다고 하니까. 물론 보호소에서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돌아가도 되고. 학교도 다시 다닐 수 있대. 학교가기 무서우면 보호소를 찾아오시는 선생님한테 공부를 배울 수도 있고."

"정말?!"

"와, 대박!"

"대장 오빠 완전 멋져!"

"근데······."

그러자 중학생 고학년 정도로 보이던 여자애가 은근슬쩍 눈을 개슴츠레하게 뜨며 이민정에게 슬쩍 물었었다.

"아까 창밖으로 보니까 대장 오빠랑 같이 온 것 같은데 지금까지 대장 오빠랑 같이 있었던거야? 혹시 언니~~"

"응? 아, 아냐! 그런 거 절대 아냐! 그냥 커피 좀 마시면서 얘기 좀 나눈 게 전부······."

"데이트다!"

그러자 이제야 막 10살이 넘었을 것 같은 소녀가 정곡을 찔렀고······.

"데이트 맞네!"

"언니 대장 오빠랑 사귀는거야?!"

"진짜?!"

커플 탄생의 징조에 소녀들은 눈을 하트빛으로 반짝이며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들처럼 이민정을 단단히 포위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정말···."

결국 사랑 이야기가 고팠던 소녀들을 떼어내는 데 이민정은 남은 기력을 전부 쏟아부어야만 했다.

***

한편, 이민정을 호텔까지 데려다 준 최강태가 향한 곳은 집이 아니었다.

"너 이광호 맞지?"

한적한 골목, 쌓여있는 쓰레기와 오물 때문에 낮에도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골목에 최강태가 서 있었다.

그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지금 그의 눈앞에 다른 쓰레기마냥 널브러져 있는 한 남자 때문이었다.

얼굴에는 맞은 상처가 가득했고 손에는 녹색 소주병이 꼭 쥐어져 있다.

굳이 코를 가까이 대지 않아도 쓰레기 냄새를 가뿐하게 능가하는 술냄새가 남자의 몸에서 풍겨져 나왔다.

"너 뭐야? 저리 안 꺼져?! 확 씨···!"

무슨 배짱이 남아있는 것인지··· 인사불성 상태에서도 흐리멍텅한 눈을 들어 최강태를 위협하는 이광호.

그러나 말이 위협이지 다른 사람이 보기엔 술주정뱅이의 휘적임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최강태는 그런 이광호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스산한 미소를 그렸다.

"사는 게 지옥이라고 생각하지? 그건 착각이야. 내가 진짜 지옥이 뭔지 가르쳐줄게."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31화 생지옥

"헉!"

이광호가 기함을 터트리며 일어나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주 봤던 골목, 자주 봤던 쓰레기들, 그리고 그 사이에 인간 쓰레기마냥 널브러져 있는 자신.

익숙한 상황이었다. 도박에 돈을 탕진하고 술에 만취하면 집보다 이곳에서 더 자주 잤을 정도였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것은 지난밤에 꾼 꿈이다.

어떤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가 자신을 찾아온 것 같은 기분······.

그 섬뜩한 미소와 함께 그가 내민 손이 내 머리에 닿는 순간, 오랜만에 모든 근심걱정을 잊고 잠에 빠질 수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꿈이 찾아왔다.

고은하.

수수하지만 현명하고 자상했던 여자. 가진 거 없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볼품없는 내가 이 세상 최고의 남자라고 생각해 주었던 여자.

그녀를 만나서 뜨겁게 사랑했고, 처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결혼을 강행했다.

은하는 나를 믿고 따라와 주었다.

반지하에서 시작된 월세 살이. 빠듯한 형편에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샐 정도로 최악의 신혼집. 최악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월세집에서 살았던 3년의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은하는 없는 살림에도 불평불만 한 마디 없이 현명하게 내조를 해 주었고 오히려 남편이 기가 죽을까봐 매일 응원해주며 미소를 그렸다.

그녀의 미소 한 번, 응원 한 번이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루종일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전전해도, 밤 늦게까지 대리 운전을 뛰면서 진상 손님들에게 욕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다녀오셨어요? 오늘도 고생했어요. 여보.]

단지 그 한 마디면··· 그녀의 미소 한 번이면 모든 게 다 행복했으니까.

그렇게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힘든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던 나에게 신은 더 큰 선물을 주었다.

응애! 응애!

[축하드립니다. 예쁜 공주님이세요.]

[여보, 고생했어. 정말로 고생했어······. 흐흑!]

[푸훗! 이 사람도 참··· 애는 내가 낳았는데 왜 당신이 울어요? 그나저나 애 이름은 정했어요?]

[민정이. 민정이 어때?]

[이민정··· 예쁘네. 민정아 너도 좋지?]

세상을 다 가진 기분? 그런 시시한 게 아니었다. 그걸 어떻게 필설이나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처음 세상에 태어난 나와 은하의 소중한 딸, 민정이를 안아드는 순간, 그 작고 연약하고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눈에 담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자신은 이 아이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이 아이를 위해, 아내를 위해 죽겠다고······.

행복한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딸이 태어나면서 일은 더 고되고 힘들어졌지만 행복은 열 배, 백 배, 천 배, 만 배가 되어 돌아왔다.

몸이 부서질 것 같아도 집으로 돌아와 아이와 함께 반겨주는 아내의 미소를 보면 천근만근 무겁던 어깨가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굽었던 허리가 펴졌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다보니 나를 지켜보던 지인에게 기회를 얻어 작은 중소 기업에도 취직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아내에게 알렸을 때 아내가 어찌나 행복해하던지······.

울면서 좋아하는 모습은 마치 내가 아니라 그녀가 취업에 성공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고졸 출신의 빽도, 돈도 없는 놈이 꼴에 사대보험에 가입된 번듯한 직장에 출근한다. 심지어 잘 다녀오라고 현관에서 배웅해주는 아내와 귀여운 딸까지 있다.

엘론 머스크? 벨 게이츠? 다 필요없다. 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남자다. 그때는 정말로 그런 만족감에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세계적인 금융 위기가 닥치고 중소 기업들이 줄도산을 이어가는 가운데, 내가 다니던 회사 역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하루 아침에 실직자가 된 것이다.

애는 더 커서 들어갈 돈은 더 많은데··· 일 자리가 좁아진 노가다판조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밀려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꼴에 남자라고, 가장이라고······. 아내와 아이를 걱정시킬 수는 없어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금방 재취업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아내의 걱정 가득한 배웅을 받으며 당당하게 출근하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공원 밴치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때부터 나는 돈에 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악마가 찾아와 속삭였다.

[야, 너 돈 안 필요하냐? 빠르게 급전 땡길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나랑 같이 안 가볼래?]

회사때부터 알던 지인의 소개로 도박장에 처음 발을 들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부하고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도박이라니······.

그걸로 인생 망치는 사람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TV만 틀어도 도박으로 인생 망한 사람들의 얘기는 수도꼭지처럼 나온다.

그러나 돈이 급한 건 현실이었고, 처음에는 매몰차게 나갔던 도박장을 나중에는 구경만 한다는 명분으로 조금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신을 소개해 준 지인이 한 시간도 안 돼 몇 달치 월급을 쓸어가는 걸 보는 순간, 그만 눈이 돌아버렸다.

저 녀석도 따는데 나라고······!

그 생각으로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그때 손목을 잘라버렸어야 했다.

처음에는 땄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도박장에서 따게 해 준 것이었다. 더 깊은 지옥으로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렇게 패 몇 번에 월급 몇 달치가 오가다보니 어느새 금전감각은 상실 돼 버렸고, 두세 달 치 월급이 날아가도 금방 딸 수 있다는 생각에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를 도박장으로 꼬신 지인 역시 도박장과 짜고 연기를 한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호구들을 물색해서 녀석은 도박장으로부터 일당을 받고 나는 도박 중독자가 되는 거지.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도박 중독자가 되었다.

내가 돈을 못 따는 건 내가 운이 없어서가 아니다. 밑천이 부족해서다!

그렇게 믿고 적금까지 깨가며 도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내가 나를 말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통장을 챙긴 채 도박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바닥없는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마냥 돈은 금새 또 바닥나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돈을 가지러······.

[당신 민정이 밑으로 적금 들어놓은 거 있지?]

[다, 당신 미쳤어요? 안 돼요! 그건 절대 안 돼요! 민정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그것밖에 믿을 게 없다고요!]

[아 따서 갚는다고! 나라고 민정이가 미워서 이러는 줄 알아?! 이게 다 민정이랑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 거잖아! 그런데 왜 협조를 안 해주는데 왜?!]

[안 돼요! 절대 이 돈만큼은······!]

[좋은 말로 할 때 내 놔. 내 놓으라고!]

손을 들어올린다. 잔뜩 겁에 질린 아내의 머리 위로··· 잔뜩 화가 난 악마가 손을 후린다.

민정이는 방에 숨어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그 모습을 쳐다본다. 이내 겁에 질린 아이가 울면서 달려와 엄마를 때리지 말라고 말렸지만 소용없다.

그 악마는 귀찮다는 듯이 자신의 딸로 발로 차 버린다. 운이 나빠 탁자 모서리에 머리가 부딪힌 아이가 기절하자 아내가 놀라서 딸에게 달려간다.

그런데도 그 악마는 신경쓰지 않고 집안을 뒤집어 엎어 기어코 민정이의 적금 통장을 찾아냈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도박장이었다.

나는 꿈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우리 밖에서 동물을 구경하는 관람객처럼······.

"그만해!!! 이 미친 새끼야!! 멈추라고!! 으아아아아아아!!!"

쾅쾅쾅쾅쾅······!!

그 악마가 내 아내를 향해서 손찌검을 할 때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자신의 세상이나 다름없는 딸을 발로 찼을 때는 그를 저주하고 또 저주하며 주먹이 부러지도록 자신과 저들을 가로막는 벽을 두들겼다.

그러나 주먹이 부러지고, 부러진 뼈가 튀어나와 손이 피범벅이 되어도 벽은 부서지지 않았고 악마는 멈출 수 없었다.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 악마는 날이 갈수록 더욱 지독해졌다. 돈을 짜내기 위해서 아내를 강제로 일 시키고, 돈을 잃은 분풀이로 딸을 때려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딸은 언젠가부터 그 악마만 보이면 경기를 일으키며 숨었고, 결국 아내는 딸을 지키기 위해 딸과 함께 도망쳤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그 악마는······.

"아, 안돼······. 제발······. 멈춰······."

그러나 기필코 처자식을 찾아낸 악마는 더욱 가혹하게 아내와 딸을 협박하며 괴롭혔다.

그리고 결국······.

퍽! 털썩······.

그 악마의 손에 아내가 죽었다.

***

크허허허헝!! 흐어어어어어엉!!!

이광호는 그 자리에 엎드려 목이 쉬도록 목놓아 울었다. 주먹으로 얼마나 바닥을 두들겼는지 주먹이 부러져 피가 흘렀지만 느끼지 못 했다.

숨을 쉴 수조차 없을 정도로 괴롭고, 심장을 뜯어버리고 싶을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감정과 기억.

무뎌졌을 터인 감정이, 잊혀졌을 터인 기억이 마치 1초 전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꿈속의 악마.

자신은 그저 웃어주는 것만으로 세상을 안겨주었던 아내를 그 손으로 때려 죽이고, 세상 그 자체였던 보물같은 딸을 때리며 만족감을 느끼던 바로 그 악마였던 것이다.

왜 이 소중한 감정을 잊고 살았을까? 왜 이 당연한 걸 이제서야 깨달았을까?

"여, 여보! 민정아!!"

그는 눈물과 콧쿨과 침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집을 향해 달려갔다.

추하게 울면서 몸을 비틀거리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흠칫하며 몸을 피했지만 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겨우 집에 도착했지만 집에서는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미소로 반겨주던 아내도··· 사랑스러운 딸도······. 그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 학교! 지금 이 시간이면 학교에 있겠구나!"

우뚝!

이광호는 서둘러 딸이 다니는 학교를 가려다 멈칫했다. 딸이 어떤 고등학교에 재학중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다시 한 번 구제불능의 쓰레기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입술을 깨물며 그는 딸의 방을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거기라면 학교에 대한 단서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딸이 다니는 학교가 혜성 공고라는 사실을 알아낸 이광호가 딸을 만나려 다급하게 집을 나섰지만······.

처음에는 뛰어가던 그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멈춰섰다.

자신은 지금 미치도록 민정이가 보고 싶었지만 과연 이민정도 똑같은 생각일까? 아니다. 분명 자신을 보는 순간 경기를 일으키며 끔찍한 공포를 느끼겠지.

자신이 딸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건, 절대로 민정이의 앞에 나타나면 안 되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아아······."

그 사실을 깨달은 이광호는 길거리에 힘없이 무릎꿇고 주저앉아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

입에서는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눈에서는 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자 거리를 걷던 사람들도 그를 힐끔거리면서 자연스럽게 피해갔다.

하지만 이광호의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고, 그 결과 현실이 어떻게 되었는지만 눈에 보일 뿐이었다.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딸을 만나러 갈 면목도,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내의 무덤을 찾아갈 용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자살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딸이 없었다면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차도에 뛰어들어 죽고싶을만큼 세상 누구보다 죽음이 간절했다.

자신에게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1분 1초가 지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적어도 딸을 위해 죽기로 맹세했다면···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내의 몫까지 민정이에게 헌신해야했다.

지금까지 저지른 죗값을 용서받고자 하는 그런 파렴치한 각오가 아니다.

이것은 그저 속죄였다.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세상 누구보다 불행하게 만든 악마가 짊어지고 가야 할 당연한 속죄.

그러니까 죽어서 편해질 생각은 할 수조차 없다.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괴로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이 지옥을 버텨나가며 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해야한다.

그런 각오로 이광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척거리며 홀로 쓸쓸히 멀어져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어느 건물의 옥상 위에서 최강태가 지켜보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차도로 뛰어들지 않은 걸 보면 전혀 가망성이 없는 건 아닌가? 물론 그런다고 해서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이걸로 거래는 완료했다. 이민정. 네 아버지는 매일 달콤했던 행복과 그 이상의 절망을 꿈꾸며 모든 순간을 지옥같은 현실에서 살아가게 되겠지.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속죄하는 것도, 감당하지 못 하고 무너져 폐인이 되는 것도 전부 이광호의 몫이겠지만."

그렇게 최강태는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32화 악몽보다 소중한 것

"전하! 기침하셨사옵······."

여느때처럼 버스표를 끊기 위해 오늘도 노력을 아끼지 않던 홍준석이 여느때처럼 집을 나선 최강태에게 허리를 굽히며 두 손을 내밀었다.

주군의 가방을 학교까지 무사히 옮기는 건 최강태의 제1 친구이자 제1 충신인 자신이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소처럼 주군을 향해 충성심을 보이던 홍준석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리를 숙이던 그의 자세 또한 딱딱하게 굳어서 그대로 석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최강태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나오는 한 여학생 때문이었다.

홍준석은 당연히 최유진의 얼굴을 알고 있다. 심지어 같은 학교도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교복이 같을 수도 없었다.

"이게 머선 일이고!!"

"시끄러워."

최강태는 대충 가방을 던져준 후 귀를 후비적거리며 그를 지나쳐 걸어나갔다. 그러자 가까스로 최강태의 가방을 받아든 홍준석이 다급하게 최강석을 따라 붙었다.

"뭐, 뭐야 저 유진이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미인은?! 설마 어젯밤 같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같이 집에서 나온거야, 주군?!"

"호들갑 떨지 마. 엄마도 있었고 최유진도 있었으니까."

"헐! 설마 엄마도 있고 여동생도 있는 집에 같은 학교 여학생을 데려와서 그렇고 그런 짓을··· 깡태 너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어버린거냐고!"

"······."

꿍!

자기 혼자 머릿속 소설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던 홍준석의 머리 위로 탐스러운 혹 하나가 볼록 솟아 올랐다.

"그래서 진짜로 어떻게 된 일인데? 쟤는 어디서 알게된 거고?"

홍준석이 자신들 뒤를 조용히 따라오는 이민정을 고개짓하며 물어보자 최강태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

지난 밤.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다 같이 호텔 스위트룸에서 자게 된 이민정.

자신을 좋아하는,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들과 한 방에서 수다를 떨고, 맛있는 걸 먹으며, 드라마를 보다 조용히 잠이 들었다.

오늘만큼은 정말로 그 어느 때보다 편하게 잘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잠드는 이민정의 얼굴에는 그 믿음이 미소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야, 이 썅년아? 그래서 손님 앞에서 혀를 깨물었다고? 이거 완전 미친년이네. 너 입고 먹고 자는데 드는 돈은 우리가 땅 파서 가져오는 줄 아냐? 먹을 거 주고 잘 곳 줬으면 받은 만큼은 일 해야 할 거 아냐! 안 되겠다. 너 오늘 그냥 죽어라.]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웃음, 교육을 빌미로 쏟아지는 무자비한 구타와 욕설······.

"······나봐."

"언니! 언니!"

"꺄악!"

소리를 지르며 깨어난 이민정은 어느새 자신의 곁에 모여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얼굴은 물론이고 옷까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그녀의 모습은 한 눈에 봐도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다.

"왜, 왜 그래, 언니? 가위 눌렸어? 계속 끙끙거리면서 괴로워하던데······."

"언니 괜찮아?! 세상에 땀 좀 봐······."

"어디 아파? 병원 갈래?"

자신을 걱정해주는 아이들에게 애써 미소를 그려 보이는 이민정.

"괜찮아. 언니 아픈 곳 없어. 그냥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호텔 밖으로 나와 주변을 산책했다. 제법 쌀쌀한 바람을 쐬고나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가출팸에서 당한 지독한 기억들이 떠나질 않았다.

그 악몽 때문에 잠도 오질 않았고, 잠을 자는 것도 무서웠다.

"흐흑······."

결국 이민정은 아무도 없는 공원 벤치에 앉아 홀로 흐느껴 울었다.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최강태의 연락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고 그가 건내준 번호였다.

이민정은 몇 번이나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며 고민했다.

최강태의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은데··· 그의 얼굴이··· 그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너무 보고 싶은데 이미 자신은 그에게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미 많은 민폐를 끼쳐놓고 더 이상 그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하면서 움츠러들고 억누르고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게 당연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아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최강태에게 이렇게 늦은 시간에 먼저 전화를 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이 아무래도 좋을만큼 지금은 그의 목소리가 너무 듣고싶었다.

하지만 막상 통화가 연결되자 그녀는 겁이 났는지 다시금 거짓말하며 전화를 다급히 끊으려했다.

"아, 미안! 전화 잘못 걸었다. 자는데 깨워서 미안해."

-어딘데?

"응? 갑자기 어디냐니? 그건 왜······."

-잔말말고 어디냐고.

"여기는······."

얼떨결에 호텔 근처 공원에 있다고 얘기해버린 이민정.

-기다려.

뚝.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 최강태!"

전화가 끊어지자 당황해서 소리치던 이민정이 다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은 왜 물어본 거지? 서, 설마 정말로 올 생각은······."

"이미 왔는데?"

"꺄악!"

"하암~"

난데없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경기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폴짝 뛴 이민정은 놀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거기에는 잠옷 차림으로 하품을 하는 최강태가 서 있었던 것이다.

"저, 정말로 왔잖아?! 아니, 그건 둘째치고 방금 전화를 끊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말 했잖아. 네가 이렇게 예쁜줄 알았다면 더 빨리 구하러 왔을 거라고."

최강태는 벤치 뒤에서 돌아 나오더니 벤치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런데 그 옷은 뭐야? 혹시 잠옷?"

"어때? 귀엽지?"

최강태는 자신이 입고 있던 잠옷의 어깨 부분을 펄럭이며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전체적으로 핫핑크 바탕에 하얀 토끼가 뛰노는 것 같은 공주님 스타일의 파자마가 유독 시선을 강탈했다.

"자, 잘 어울리네······."

"딱 보아하니 잠이 안 와서 산책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최강태는 이민정을 스윽 훑어 보았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과 살짝 울먹이는 목소리. 식은땀의 흔적이 역력한 옷까지······.

"잠들기가 무서운건가?"

"역시 너한테 뭘 숨기거나 거짓말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구나."

"당연하지. 누굴 속이려고."

이민정은 피식 웃고는 그의 옆에 앉아 악몽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다.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준 최강태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기억도 거래할래?"

"뭐?"

"손 볼 게 제법 많아져서 귀찮긴 하겠지만 그 정도 투자할 가치가 있는 고순도 마력이니까. 특별히 같은 반에 미녀 한정 서비스로 거래해 줄게. 어때?"

"······."

이민정은 당최 최강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신기했다. 이런 경험이 낯설지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이전에도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장난은 아닌거지? 지금."

"나는 거래 가지고 장난 안 해. 상대방이 먼저 거래를 파기한다면 모를까."

지금은 인간 최강태가 아닌, 마왕 최강태로서 인간 이민정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말임에도 최강태의 제안에 대한 신뢰도는 상식을 아득히 초월했고, 덕분에 이민정도 이 비상식적인 대화를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만약 내가 거래를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는거야?"

"당연히 지금 네 악몽과 관계된 그 모든 과거와 기억, 현실들이 전부 사라지거나 바뀌게 되겠지. 걱정마. 너는 그 사실이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 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테니까."

"혹시 그렇게 해서 바뀐 기억이 있을까? 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이 상황이 낯설지가 않아서······."

"······."

"있구나······."

최강태가 묵언으로 긍정하자 이민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거래한 기억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최강태의 말이 사실이라면 잔인할 정도로 철저하게 왜곡된 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난······."

이민정은 깊이 고민했다. 절대로 다시 오지 않을 기회란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에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답을 내렸다.

"안 할래."

"······."

이민정은 싱긋 웃으며 단칼에 거래를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최강태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 계기가 바로 이번 일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가출팸에 관한 모든 기억을 지워버린다는 건······.

결국 최강태에 대한 기억과 감정도 지워버린다는 뜻이었다.

한 마디로 죽을만큼 힘든 기억조차 포기 못 할 정도로 그에 대한 감정과 기억이 소중하다는 뜻이겠지.

"후회해도 난 모른다."

"걱정 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나한텐 그것보다 더 행복한 기억이 있으니까."

"······."

최강태는 자신을 위해서 애써 미소짓는 이민정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 우리집으로 가자."

"응? 뭐, 뭐라고 했어, 방금?!"

"우리집으로 가자고."

"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최강태의 담담한 태도에 이민정은 더욱 더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서 소리쳤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쿵쾅거려서 상대에게 들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지만 의외로 최강태는 개의치않고 할 말을 이어나갔다.

"너 이대로는 혼자서 못 잘 거 아냐. 그렇다고 애들이랑 같이 자다 또 애들 다 깨울거야? 그렇다고 이대로 몇날며칠을 밤 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그게 너희 집으로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나랑 있으면 괜찮은 모양이니까. 너."

"······!"

이민정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본심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고 심장은 더 크고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기절할 지도 모를만큼······.

"쓸데없는 기대 하지마. 우리 아부지 형사인건 너도 알지? 어머니도 계시고 여동생도 있어서 네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안 될 거니까."

"누, 누가 쓸데없는 기대를 한다고! 그리고 내가 뭘 노력한다는건데?!"

"응? 새벽에 나 덮치려고 음흉한 계획같은 거 생각하던 거 아니었어? 창피해 하지 마. 상대가 나라면 당연한 생각이니까."

"아니라니까!"

이민정이 빼엑 소리를 지르자 최강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였다.

"하여간 구라를 치려거든 혼을 담으라니까."

"야!!"

잠시 후.

최강태의 집.

"······그래서 뭘 했다고?"

"자꾸 민폐 어쩌구 시끄럽게 떠들길래 그냥 데려왔는데?"

"······."

길서연과 최유진은 현관에 서 있는 최강태와 그의 어깨에 걸쳐진 이민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특히 이민정의 상태가 압권이었는데 입에는 청테이프를, 몸에는 밧줄이 꽁꽁 감겨져 있었던 것 것이다.

"오빠 너 혹시 납치라는 말은 학교에서 안 배웠니?"

"유진아, 아빠한테 전화해라. 퇴근할 때 튼튼한 빠따 하나 사오라고도 얘기하고. 최강태 너 그 애 빨리 안 풀어줘!? 이 밤중에 무슨 난리야, 이게 지금?!"

최강태는 길서연이 더 날뛰기 전에 이민정을 내려주었고 길서연은 서둘러 그녀를 풀어주었다.

"어휴,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아가씨. 얘가 또라이긴 해도 원래 이 정도로 맛이 간 놈은 아니었는데······."

"아, 아뇨! 저야말로 아드님께 신세를 져서···! 이런식으로 인사를 드리게 돼서 정말 죄송합니다!"

"······네?"

"뭔 상황이래, 이게 지금?"

세상에 납치당한 피해자가 가해자 부모에게 되려 고개숙여 사과하는 상황이라니······.

길서연과 최유진은 황당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33화 3학년 3반의 불문율

분위기가 어느정도 수습되자 네 사람은 거실에 모여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이민정이 자신의 사정을 담담하게 밝히고, 길서연과 최유진은 그녀의 얘길 듣는 쪽이었다.

이민정의 얘기가 이어질수록 길서연은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더니 이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녀의 얘기를 경청했다.

이윽고 그녀의 얘기가 끝나자 길서연은 울먹이면서 이민정에게 다가가 그녀를 품속에 꼬옥 안아주었다.

"장하다! 이렇게 힘들고 괴로워도 나쁜 생각 안 하고, 나쁜 길로 안 가고, 버티고 힘내줘서 참으로 장해. 분명 돌아가신 네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실거야. 이렇게 예쁘고 소중한 딸이 이렇게 바르고 강하게 커줘서 고맙다고."

"흐흑······. 으아아아앙!!"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길서연의 손길과 체온에 끝끝내 참고 또 참았던 이민정이 오열했다.

그러자 길서연은 이민정의 등을 다정하게 다독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옳지, 옳지. 남들 눈치보지 말고 기분 풀릴 때까지 울어. 속에 쌓아두면 병 난다. 하여간 그 육시럴 새끼들, 내 손으로 잡았으면 뼈까지 씹어먹었을 건데······. 강태야! 너 그 자식들 설마 그냥 보내준 건 아니겠지?"

"걱정 마슈. 앞으로 평생동안 침대 위에 누워서 숨만 쉬게 해줬으니까. 혼자서는 화장실가서 오줌도 못 쌀 걸?"

"잘 했다! 그런데 너 지금 부엌에서 뭐 하냐?"

"출출해서 라면 끓이는데? 여사님도 한 젓가락 하쉴?"

"······."

대범한건지, 무신경한건지······. 이 상황에서 라면을 끓이는 최강태의 행동에 길서연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근데 최강태 너 그 새끼들은 어떻게 찾아서 어떻게 조진건데? 너 원래 깡다구만 있었지 싸움은 개못하잖아?"

"어허~ 마왕님한테 그 무슨 실례되는 소릴!"

"뭔 개소리야? 요즘엔 중2병이 아니라 고3병이 유행이냐? 아, 원래 또라이였지······. 아무튼 그래서 저 언니는 왜 납치해서 데려온 건데?"

최유진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며 묻자 최강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숙소를 구해주긴 했는데 혼자서는 못 자고, 같이 자도 악몽 때문에 가위 눌려서 통 잠을 못 자더라고. 근데 나랑 같이 있으면 떨지도 않고 편해보여서 데려왔지. 혹시 이 집에서 나랑 같이 자면 푹 잘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근데 하도 싫다고 거절하길래 열받아서 그냥 데려왔지. 뭐 문제 있어?"

푸흡!!

"뭐, 뭐라고?!"

최유진은 마시던 물을 뿜었고 길서연은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이민정과 최강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민정은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더니 자리에서 다급히 일어났다.

"늦은 밤에 민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저 얼른 돌아가 볼게요! 재미없는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다급히 일어나는 이민정을 길서연이 만류했다.

"아니, 민정이가 민폐라고 할 게 어딨어? 저 또라이가 마음대로 데려 온 건데. 야, 또라이."

"응?"

"굳 잡!"

척!

서로 씨익 웃으며 엄지를 척 하니 치켜 세워주는 모자의 모습에 옆에서 지켜보던 최유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렴 우리 민정이가 편하게 자는 게 중요하지 그거 말고 뭣이 중헌디?"

"고럼! 역시 길 여사님이 뭘 좀 아시네. 방은 저 방 써. 좀 더럽긴 해도 길바닥에서 자는 것보다는 나을거다."

"야, 이 미친놈아! 거긴 내 방이잖아! 그리고 안 더럽거든? 줄 거면 네 방이나 주던가!"

"라면을 먹는데 뭐가 심심하다 했더니 브금이 없었네."

[너와 함께 했던··· 그 모든 순간을··· 그리는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여······.]

"언니!! 짐 풀 거 있어요?! 없으면 그냥 바로 이불이랑 베개만 꺼내서 깔고 자면 되겠네. 나 진짜 저런 개같은 오빠만 있고 예쁜 언니가 없어서 서운했는데 너무 잘 됐다~!"

"네? 네?!"

"이 작은 또라이는 또 왜 이런데? 그나저나 노래부르는 가수 누구냐, 강태야? 목소리가 많이 귀에 익다?"

"······!!"

최강태가 폰으로 녹음된 최유진의 노래의 도입부를 틀자 번개처럼 다가가서 이민정을 챙기는 그녀의 모습에 이민정과 길서연이 당황했다.

"인디 가순데. 아직 데뷔를 안 해서 말해줘도 모를걸."

"그래? 신기하네. 근데 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같지?"

최강태가 노래를 끄고는 폰을 다시 챙기자 최유진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어느정도 사태가 수습되자 이민정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강태한테도 갚을 수 없을만큼 큰 은혜를 입었는데 여기서 더 민폐를 끼칠 수는······."

"아휴~ 그런 거 따지지 말어. 우리 가족이 워낙 유별나서 오지랖 부리는 거 좋아하거든. 남편이 형사라 그런가 범죄 피해자들 보면 남 같지도 않고. 안 그래? 딸."

"뭐, 다른 건 몰라도 오지랖 넓은 건 인정. 그리고 방 얘기가 나와서 갑자기 당황한 건 있지만 민정 언니처럼 예쁜 언니가 있었으면 했던 것도 사실이니까."

"······."

길서연은 물론이고 최유진 역시 웃으며 자신을 반겨주자 울먹거리던 이민정이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그러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최유진을 쳐다보는 최강태.

"내, 내가 울린 거 아니거든?!"

"누가 뭐래?"

후루룩~

"그, 그게 아니라··· 저 너무 고마워서······. 이렇게 좋아해도 되나 싶어서······. 죄송해요······."

이민정은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아내며 사과했고 길서연은 그런 이민정을 다시 한 번 꼬옥 안아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부터 이곳을 그냥 우리집이다 생각하고 얼마든지 편하게 있어. 민정이 넌 지금부터 내 딸이니까. 알았지?"

'이건 아무리봐도 딸이 아니라 며느리 각인데······.'

최유진은 굳이 자신의 생각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자신보다 눈치 빠른 길서연이 그걸 몰라서 딸이라고 한 건 아닐 터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 봐봐, 며느리감 생겼다고 입꼬리가 귀에 걸린거.'

"자자, 대충 정리됐으면 그만 자자. 민정이는 유진이랑 당분간 같이 지내고 강태 너도 얼른 들어가서 자라. 내일 학교 지각하겠다."

"응? 나 족발 배달 시켰는데?"

"······."

***

"그렇게 된 것이군요. 주군."

"그렇게 된 것이다. 준석아."

사정을 전해들으며 걷다보니 어느새 학교에 도착한 세 사람.

홍준석은 자신의 반으로 이동하기 전에 다급히 이민정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흠칫 놀라는 이민정.

아직까지 최강태 이외의 남자가 불쑥 다가오면 조금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홍준석은 깊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중전 마마."

"주, 중전 마마?"

"대충 흘려들어. 그냥 원숭이 한 마리라고 생각하면 더 편하고."

'원숭이?'

원숭이··· 아니, 홍준석이 손을 흔들며 멀어지자 이민정도 최강태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갈수록 이민정의 고개가 자꾸만 밑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그 원인은 그녀에게 향하는 수많은 시선들 때문이었다.

"딱 보니까 얼굴 전부 뜯어 고쳤네."

"가슴도 돈 좀 들였겠다. 자연적으로 저렇게 말랐는데 가슴은 큰 게 말이 되냐?"

"부자면 이런 똥통 학교에 다닐 리 없고. 원조네. 씨발, 더러워······."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꽂히는 수많은 시선들과 수군거림에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밀물처럼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어릴 적부터 소심했던 그녀는 남다른 발육 때문에 남녀 학생을 가리지 않고 놀림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친구들의 놀림은 소심한 그녀를 더욱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으며 학년이 지날수록 더 더욱 그녀를 궁지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지메가 시작되고 왕따가 되었다.

그래서 한 여름에도 최대한 몸을 가리고 다녔다. 몸에 새겨진 흉터와 몸 자체를 가리기 위해서······.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게 또 눈에 띄어서 악의적인 괴롬힘의 이유가 되었으니······.

사실 이민정은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휘우우우우웅!!

"뭐, 뭐야?!"

"으악!"

갑자기 때아닌 돌풍이 불어닥치며 수많은 학생들이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거나 팔을 잘못 짚어 팔에 금이 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친 학생들 전원이 바로 이민정을 흠잡던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 깜짝 놀란 이민정이 숙여가던 고개를 번쩍 들며 놀란 눈으로 최강태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겁 먹지마. 너 잘못한 거 없어."

"······응!"

최강태의 격려에 기분좋은 용기를 얻은 이민정이 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 붙었다.

***

교실에 들어서도 웅성거림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건 아이들의 잘못이라기보다 그만큼 드러난 이민정의 외모와 스타일이 말도 안 된다는 뜻이겠지.

"왜 저 자리에 연예인이 와서 앉아있냐?"

"존예······."

"근데 저 자리 누구 자리였더라?"

"몰라."

"존예······."

그렇게 남학생들이 이민정을 몰래 훔쳐보며 흐물흐물 녹아가고 있을 때, 여학생들 역시 이민정의 얼굴과 몸매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평가에 열심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에도 이민정이 고개를 숙이는 일은 없었다. 자신의 곁에 누가 있는지, 누가 자신을 지켜주는 지 이제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런 그녀조차도 이들의 등장에는 등골이 오싹하며 얼굴에 핏기가 가실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썅년이 겁대가리 없이 학교를 또 왔네?"

"오올~ 민정이 왔어? 존나 오랜만이다. 씨발년아? 너 내가 우리 눈에 띄지 말랬지? 죽여버린다고."

"야, 얘 자신감 완전 뿜뿜인데? 화장까지 한 거 실화냐? 존나 미쳤네."

다른 반에서 찾아온 세 명의 여학생이 소란스럽게 떠들며 이민정을 찾아왔다.

이주연, 나세림, 임솔아.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5년.

반이 바뀌어도 이민정을 찾아와 죽어라 괴롭히던 세 명의 여학생들이다. 계기도 별 거 없었다.

그냥 마음에 안 든다. 단지 그뿐.

세 사람이 점점 더 다가오자 이민정의 몸이 점점 더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눈동자도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식은땀은 어느새 손바닥 가득, 흥건했고 자꾸만 세 사람이 자신에게 저지른 끔찍한 괴롭힘들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체육복을 훔쳐간다던가, 교과서를 숨겨놓는 가벼운 괴롭힘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민정이 아무말도 못 하고 당하기만 하자 수위는 점점 더 높아졌고······.

이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그녀에게 머리 위로 오수를 쏟아 붓는다던지, 다른 친구들 앞에서 일부로 시비를 걸어 뺨을 때리고 넘어트린다던지, 책가방 속에 칼날을 넣어 손을 다치게 만드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돈을 뜯거나 돈이 없으면 기절할 때까지 폭행하는 등, 괴롭힘의 수위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갔다.

그리고 사태는 더 더욱 심각해져 어느 날.

쿵!

[아 뭐야, 살아있네?]

[다리만 부러진 것 같은데? 생각보다 튼튼하네.]

[아깝다. 좀만 더 세게 밀걸······.]

이민정은 자신들이 밀어놓고 계단 위에서 다리가 부러진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보고 더 이상 학교에 올 수가 없었다.

"존나 용감한건지, 존나 개빡대가리인건지, 아직도 상황 파악 안 돼? 왜? 우리가 정말로 널 못 죽일까봐 시험해 지금?"

"개빡치네. 어떻게 씨발 이 년은 보면 볼수록 빡이치는걸까? 죽여버리고 싶게."

지금도 그랬다. 얼굴만 보면 식은땀이 나고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만약 혼자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겁 먹지마. 너 잘못한 거 없어.]

턱.

이주연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평소같았으면 얌전하게 따귀를 맞았을 이민정이 자신의 손을 낚아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힘이··· 이 년 원래 이렇게 힘이 셌나?'

아무리 뿌리치려해도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이민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 아파!"

"야, 이 미친년아 이거 안 놔?!"

"겁먹을 거 없어. 난 잘못한 거 없으니까."

"뭐래? 이 미친년이? 빨리 놓으라고!"

옆에서 나세림이 가세하고 나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던 이주연. 그녀가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지며 죽일듯한 눈으로 이민정을 노려보았지만······.

"어쭈? 개긴다 이거지?"

지지않고 자신을 노려보는 이민정의 모습에 독기가 임계치를 넘어섰다.

그러나······.

"근데 이 븅신 새끼들은 뭐 하는 짓거리야, 다들? 단체로 약 처먹었나?"

세 명의 여학생은 주위를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신들을 향해 말 없이 엄청 다급한 얼굴로 조용하라는듯 검지를 입술에 붙이는 모습이 우스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아이씨, 더럽게 시끄럽네. 잠도 못 자게······."

돌아온 마왕의 현대 생활 백서

34화 응, 내 알 바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