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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화 속성 원소 수업 (1)

에이단을 죽일까 고민하던 나는, 늑대인간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에이단의 모습을 떠올렸다.

조잡한 회복 물약을 꺼내 쥐고서 새끼를 향해 웃어 보이던 그 바보 같은 행동.

─괜찮아. 해치지 않아.

에이단의 생사여탈을 두고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죽이는 건 안 된다.

일 처리를 한다면 최대한 조심스럽게 할 수는 있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내가 의심받는 상황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열차를 타고 가다가 테러에 휘말려 세오른 교사가 된 이 상황은 뭐 내가 상정해서 됐나?

결국,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터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거다.

검은 백조 이론이라는 말이 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사건이 벌어지면, 결과를 통해 원인을 끼워 맞추듯 분석하여 사실은 이 사건이 일어나려는 전조가 있었고, 그걸 예측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후 분석은 쉽지만 사전 조사는 어려운 걸 모른 채로, 억지로 끼워 맞춘다는 소리다.

하지만 내 상황을 보라.

이건 검은 백조 이론을 들먹여도 끼워 맞추기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에이단은 이번 일로 총장님의 관심을 받게 됐으니 더더욱 건드릴 수 없어.'

물론, 총장님께 상을 주라고 건의한 건 바로 나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현장에 에이단과 레오, 테이시 삼총사가 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총장 또한 아직 내게 의심을 지우지 못한 상황에서 내가 에이단에게 철저히 벌을 내리라 하면 뭐가 되겠는가.

차라리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남몰래 에이단에게 상을 주라고 건의하는 것이 이미지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실제로 총장은 귀족 중심적인 세오른의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이번에 크게 활약한 평민 소년의 모습에 만족해했다.

'게다가 에이단은 평민인데도 보기 드문 [특이] 계열 마법의 보유자기도 하고.'

자료를 보면 어릴 적에 떠돌이 마법사였던 스승님이 알려 준 거라던데.

[특이] 계열 마법을 알려 준다고 해서 덥석 익히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심지어 그 정도의 스승이 떠돌이라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이게 기연이 아니면 뭘까.

아무튼, 에이단은 그런 특이한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녀석이라 총장의 관심을 이전부터 은근하게 받고 있었다.

그런 에이단을 건드리는 건 위험과 의심을 자초하는 일.

차라리.

'에이단을 이용하는 게 어떨까.'

녀석이 지니고 있는 [특이] 계열 마법도 그렇지만, 뭔가 온갖 사건을 몰고 올 거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하는 행동도 그렇고 마음가짐도 그렇고.

뭔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런 에이단이라면 이 세오른에 숨어든 검은 여명회와도 맞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쁘지는 않지만, 가능성의 일환으로만 열어 둬야겠어.'

그날 밤 이후 에이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는 데다가, 아무리 녀석이 특이한 마법을 익혀도 아직 학생에 지나지 않는다.

향후 며칠, 크게 보면 몇 주는 지켜보는 것이 낫겠지.

판단은 그때 가서 해도 늦지는 않을 거다.

'일단은 회복에 전념하자.'

목소리는 완전히 가셨지만, 아직 후유증으로 몸이 쑤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일 있을 수업이 걱정이긴 한데, 이 추세로 보건대 내일 아침이면 거의 다 회복이 되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 *

테이라 라이언하울은 다 타버린 흔적을 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전소(全燒).

폐공장이었던 자리는 이제 공장이었던 새까만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단장님. 상태가 이래서야 뭘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봐도 남김없이 다 타 버린 거 같은데."

두 부관의 말마따나 공장은 전부 타 버려서 사건에 대한 단서고 뭐고 남아 있지 않았다.

테이라는 군화의 끝으로 잿더미를 툭툭 건드렸다.

"역시 이상하긴 하군. 사람들이 오가지 않은 버려진 공장에 화재가 발생하고, 이 근방에 있는 것들이 전부 다 타 버리다니 말이야."

"혹시 꼬리를 잘릴까 봐 전부 다 태워 버린 걸까요?"

"그렇겠지."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시점에서 어렴풋이 이럴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폐허를 보니 뭔가 입맛이 썼다.

테리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벨보트 릭슨의 죽음. 정체불명의 도둑. 늑대인간. 버려진 공장의 화재. 같은 날 발생한 사건.'

이 모든 퍼즐 조각이 갖춰졌고, 어느 정도 그림까지 그려진 상황.

하지만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퍼즐의 중심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사건의 배후, 범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로이드. 여기 말고 다른 사건은 뭐 더 없었나?"

테리나의 물음에 로이드가 얼굴에 쓴 무테안경을 손가락 끝으로 밀어 올렸다.

머리도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긴 로이드는, 속히 말하면 기사라기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주요 업무는 정보 입수와 정리 및 사건 파악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 외에 특별할 건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세오른 아카데미에서도 늑대인간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세오른 아카데미?"

세오른에 대해서는 테리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마법사들을 육성하는 제국 최고의 교육 기관.

여러 왕국과 제국, 그리고 마탑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설립된 세오른은 그 역사 또한 수백 년은 넘었을 정도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이었다.

특히 귀족들이나 부유한 사람들만이 아닌, 평민과 하층민 또한 능력이 있다면 누구나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곳으로 유명했다.

제국의 안에 있지만, 제국의 손길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운 곳.

그런 세오른에 늑대인간이 나타났었다?

"예. 아무래도 레더벨크의 늑대인간이 하수관을 통해 숨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학생들에겐 큰일이었겠군."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었습니다. 부상자가 둘 정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생명에 지장은 없고요."

"세오른에 숨어든 늑대인간은 어떻게 됐지?"

"현직 교사가 쓰러트렸다더군요."

"하긴. 세오른이라면 교사도 어지간한 마법사가 아닐 테니. 그 늑대인간은? 시체는 남았나?"

"없습니다. 전부 태워 버렸거든요."

"태웠다?"

순간 이 공장을 불로 태운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건 지나친 억측이겠지.

애초에 크립티드 같은 괴물들을 효과적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원소 마법은 화염계가 주류니까.

"흐음. 세오른. 세오른이라...."

"세오른으로 가시겠습니까? 혹시 모를 단서를 얻게 될지도 모릅니다."

로이드의 물음에 테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일단 지금 이 근방에서 단서를 모으는 데 집중한다."

다만, 세오른 또한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둘 필요는 있어 보였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그러기 위해서 그녀가 나선 거니까.

제국에 암약하고 있는 존재들.

놈들의 뿌리를 뽑고, 국가의 안정을 되찾는 것. 그것이 나이트크롤러 기사단의 사명이자 존재 의의였다.

* * *

루드거의 발현계 마법을 가르치는 강의실.

그곳에 모인 학생들은 지난번에 있었던 일들로 저들끼리 계속 떠들고 있었다.

당연히 대화의 주제는 늑대인간과 루드거였다.

"진짜 루드거 선생님이 늑대인간을 사냥하신 건가?"

"군인 출신이었다며. 크립티드 토벌 전과도 세웠다던데, 아마도 사실이겠지."

"와. 첫날부터 분위기 장난 아니라고 생각은 했는데, 진짜였구나."

그 외에도 평민인 리네와 귀족인 뒤네마 로믈리의 싸움도 루드거가 말렸으며, 심지어 어른스럽게 잘 타일러서 보냈던 것도 중간에 언급이 됐다.

첫날 수업을 시작하기 전만 해도 루드거에 대한 평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그렇게 좋지 않았다.

1, 2학년 공동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그렇지만, 수업에서 무엇을 가르칠지에 대해서 잘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업에 들어와 보면 알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 말을 믿은 사람이 대체 얼마나 있었을까.

신임 교사인데, 뭐가 저렇게 당당하냐는 말이 나왔다.

루드거의 과거 행적이 조금 밝혀지면서 평가는 나아졌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시선은 존재했다.

하지만 첫날 수업 때 선보였던 소스코드라는 획기적인 마법.

그것을 보여 준 순간부터 루드거를 향한 학생들의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루드거가 신임 교사이며 몰락 귀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수업을 듣지 않았던 학생들이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강의 시간을 바꿔서 루드거의 수업에 들어오려던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심지어 슬슬 졸업 준비로 바빠질 4학년들도 뒤늦게 강의를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았다고 하니.

그럴수록 루드거의 강의에 대해서 말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같은 교사들마저 루드거의 소스코드 마법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마탑에도 이 소식이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루드거는 이번 늑대인간 사태 때 화룡점정을 찍어 버렸다.

이제 1, 2학년들 사이에서 루드거 첼리시라는 이름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요새 루드거 선생님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네.'

루드거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에렌디르는 그날 있었던 루드거의 모습을 떠올렸다.

황녀인 자신의 신분에도 싸늘하게 제 할 말만 하던 그 남자.

아니, 오히려 묘하게 그녀를 적대하는 것 같기도 한 그 태도는 분명 기가 차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잘못했다 해도 그렇지, 그렇게까지 말할 건 뭐람.

'게다가 정작 리네 후배한테는 살갑게 대했고.'

그때는 워낙 상황이 다급해서 넘어갔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뭔가 억울했다.

세상에 황녀를 무시하고 평민을 챙기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보통 반대 아닌가?

물론 그런 생각도 루드거가 달밤 아래에서 늑대인간과 싸우는 장면을 보며 쏙 들어갔지만.

때마침 강의실의 뒷문이 열리며 여학생 하나가 들어왔다.

애쉬그레이의 단발에 옆머리가 상대적으로 긴 헤어스타일.

리네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향하는 일부 학생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학기 초에 뒤네마와 있었던 사건 때문에 귀족 학생들은 리네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리네는 친구를 사귀지도 못한 채 혼자 다니는 실정이었다.

거의 다 차 버린 강의실의 좌석을 본 리네는 결국 유일하게 빈자리를 향해 갈 수밖에 없었다.

황녀, 에렌디르의 옆이라는 최고로 부담스러운 자리를.

"안녕. 리네 후배. 그날 이후로 잘 지냈니?"

"네, 넵. 에렌디르 선배님."

3황녀의 옆자리.

황녀와 연줄을 만들고 싶어 하는 귀족들조차도 부담감에 피해 가는 그 자리를, 평민인 리네가 앉게 된 것이다.

심지어 에렌디르가 살갑게 인사를 하니 일부 학생들의 시선이 오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 평민이 지금 뭘 하는 거지? 또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지?

리네는 자신을 향한 시선이 더 늘어나자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아으으.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건데.'

솔직히 어디에도 엮이고 싶지 않은 것이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학기 초에 있었던 일은 그저 가벼운,

아니, 가벼운 건 아니지만 해프닝 정도로 끝났다.

잘못한 뒤네마는 그에 따른 벌을 받았으니 그녀도 그 이상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제삼자들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제멋대로 나서는 것이 마냥 불편할 뿐.

그 때문에 귀족 학생들에게 밉보이는 건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드르륵.

강의실의 앞문이 열렸다.

학생들이 전부 입을 다물었다.

"...."

"...."

모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루드거를 응시했다.

그 남자는 첫날 보였던 모습 그대로였다. 움직임이 절제되어 있고, 발걸음에 소리가 없다.

달라진 것이라면 복장.

첫날에는 회색 정장 위에 검은 프록코트, 실크해트를 착용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새하얀 롱 코트. 안쪽에는 검은 정장.

목에는 붉은 넥타이와 더불어 목에 와인색 목도리를 길게 둘렀다.

모자는 쓰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과 조각 같은 외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학생들은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일부 여학생들은 몽롱한 시선으로 루드거를 멍하니 응시했다.

"수업을 시작하마."

그 한마디와 동시에, 루드거가 가져온 서류 더미가 허공으로 촤라락 흩어졌다.

총 80장의 종이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 학생들의 책상 위로 자연스럽게 안착했다.

오늘 가르칠 내용이 적혀 있는, 등사기로 출력한 유인물이었다.

"오늘은 발현계의 특화 중 하나인 <속성 원소>의 기초와 발현 원리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발현계의 4대 특화 중 하나인 <속성 원소>

그것은 마법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야이며, 대부분 사람이 '마법' 하면 떠올리는 가장 대중적인 특화이기도 했다.

다양한 방향으로 마법이 발전한 지금도 아이들은 여전히 마법 하면 불과 물, 얼음과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걸 떠올리니까.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건 이제 막 세오른에 입학한 신입생들도 대부분 익힌 기초 중의 기초.

그것을 다시 배운다고 하니, 뭔가 특색 있는 수업을 기대했던 학생들의 반응은 어딘가 실망감에 물들 수밖에 없었다.

루드거가 다음 설명을 이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너희의 배움에 대한 열정과 욕심을 채울 수는 없겠지. 그래서 나는 오늘 여기서 새로운 방식을 하나 알려 주려고 한다."

"새로운."

"방식?"

원소 마법에 뭐 딱히 필요한 게 있던가?

학생들이 다들 의아해할 때, 이미 심화 과정을 배운 몇몇은 루드거가 뭘 하려는지 눈치챘다.

"너희가 기존에 사용할 수 있는 원소의 힘을 최소 2할에서 최대 8할 이상 올려 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 게 있다고?"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루드거가 지금까지 보여 준 행보가 있었다.

"어떤가."

루드거는 강의실을 주욱 훑으며 물었다.

"이제 좀 흥미가 생기나?"

◈ 37화 속성 원소 수업 (2)

일부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궁금증을 불러일으켜 놓고 바로 알려 주지 않는 것 또한 좋지 못한 일.

루드거는 맨 앞자리에 앉은 학생 하나를 지목했다.

"거기 맨 앞줄의 학생. 안토니인가."

"네, 네! 맞습니다. 선생님!"

"학생은 속성 원소 중 무엇을 사용할 수 있지?"

"그, 그것이... 물과 얼음, 그리고 식물입니다."

"3개인가. 적당하군. 그중 가장 자신이 있는 건?"

"그, 얼음 원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얼음 원소를 구현해 보일 수 있겠나?"

루드거의 말에 안토니는 알겠다고 답하며 오른손 위로 마력의 구체를 띄웠다.

기초적인 마력 방출이 시작됐고, 거기에 본격적으로 마력의 속성이 담기게 됐다.

새하얀 구체.

정확히는 눈을 손으로 꼭꼭 눌러 담은 눈 뭉치에 가까웠다.

"평범하군."

"가, 감사합니다."

"보잘것없다는 소리다."

"...."

루드거의 말에 안토니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봐라."

루드거는 오른손에 마력의 구체를 띄웠다.

그것은 안토니가 만든 것과 같은 얼음 속성의 덩어리였다.

안토니의 것과 매우 똑같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아니, 지금도 달라지고 있었다.

"느껴지는가?"

루드거의 말에 학생들은 답하지 못했다. 그저 홀린 듯이 그가 만들어 낸 얼음의 덩어리를 주시하고 있을 뿐.

안토니가 만든 것이 함박눈 정도였다면.

루드거가 띄운 원소는 그보다 훨씬 더 차갑고 날카로운, 마치 북 대륙의 깊은 지하에 잠들어 있는 만년설 같은 느낌이다.

그저 희고 동그랄 뿐인 얼음이 아닌, 더 강하게 압축되어 눈 결정의 형태를 띠고 있는 루드거의 원소.

푸른 결정은 주위로 차가운 한기를 내뿜어 강의실 자체를 얼음으로 뒤덮을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차이를 알겠나?"

루드거는 결정을 없앴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직도 그 원소가 있던 자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같은 얼음의 원소였지만, 루드거와 안토니의 것은 매우 차이가 심했다.

마력이 더 많이 들어가서?

그렇지 않다. 이건 효율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루드거가 오늘 가르쳐 주려는 것이 바로 이거였고.

"진짜 뭔가 다르잖아?"

"대체, 어떻게 한 거지?"

강의실 분위기가 점차 달아올랐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잘 몰랐지만, 실제로 보니 욕심이 난 것이다.

마법 실력을 더 좋게 만들어 준다는데 마다할 마법사는 없다.

"오늘 있을 수업의 2시간 중 30분은 기초적인 이론을, 나머지 시간은 내가 알려 준 속성 원소의 발현 효율을 올려 주는 방법을 배우게 될 거다."

학생들이 모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루드거의 말에 집중했다.

"발현의 원리에 들어가기에 앞서 <속성 원소>에 대한 기본적인 정리에 들어가겠다. 내가 나눠 준 게 바로 그 내용이다."

학생들이 모두 유인물에 적힌 내용을 눈으로 훑었다.

"속성 원소란 발현계에서도 마력 방출 이후 바로 나타났을 정도로 역사와 계보가 깊은 특화다."

마법은 마력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태초의 마법,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마법은 이런 마력의 발현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것이 발현계의 첫 번째 특화.

<마력 방출>이었다.

그런 마력의 방출에서 발달한 것이 마력에 자연의 원소가 담긴 <속성 원소>다.

"지금 와서는 발현계의 일부로 자리 잡았지만, 초기 원시 형태의 마법에서는 속성 원소야말로 모든 마법의 근간이라고 불렸다."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4개의 마력 구체를 띄웠다.

"현재는 자연 과학을 통해 자신의 마력에 걸맞은 계통의 힘을 발현시키는 것으로 정립이 됐지만, 초기에 속성 원소를 발현할 때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중점을 뒀다."

마력의 구체가 각자 하나의 속성을 띠기 시작했다.

각자 불, 물, 흙, 바람이었다.

"이것이 최초의 4대 속성이다. 속성이 10개 이상으로 늘어난 지금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숫자가 적고 단출하지. 하지만 우리는 이걸 단순히 속성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 4대 원소는 순수한 원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징성을 담고 있으니까."

흙은 단단하고 강건함을.

불은 강력하고 파괴적인 것을.

물은 부드럽고 순응하는 것을.

바람은 자유로움을.

학생들은 홀린 듯 루드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저 지루하기만 해야 할 기원에 대한 이론적인 가르침.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흥. 이미 다 알고 있는걸.'

플로라는 그것이 못내 불만이었다.

어차피 속성 원소에 대한 기원을 전부 알고 있는 입장에서, 알고 있는 걸 또 들어야 한다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고역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은근하게 루드거의 목소리에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다.

'진짜. 저런 게 뭐가 재미있다는 건데.'

"이후 속성 원소는 발전을 거듭하며, 자연적인 상징보다는 이성적인 시선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4개였던 원소는 10개까지 늘어났지."

'맨날 아는 말 또 하고, 또 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신비주의 학파와, 현대 과학을 적용시켜서 더 발전시키려는 자연 과학 학파 간에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그냥 얼굴이 좀 잘생기고 목소리만 좋을 뿐이잖아.'

"그러나 결국 우리는 세계의 변화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학파의 가르침이 아닌, 이 자연의 마법을 어디에 사용해야 할지 말이다."

'...그래도 듣다 보니 들을 만하네.'

허공에 띄웠던 마력을 제거한 루드거가 강의실을 스윽 훑어본 뒤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속성 원소 마법이 무엇을 위해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했는지 아는 학생 있나? 맞춘 사람에게 상점 5점을 주겠다. 예시는 화염 원소다."

학생들이 곧바로 손을 번쩍 들었다.

루드거가 한 명씩 지목했다.

"거기."

"불을 밝혀서 어둠을 몰아내기 위함입니다."

"틀렸다. 다음."

"숲을 태워서 개간하기 위해서입니다."

"형식적이군. 다음."

"어, 음. 어둠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인가요?"

"자네는 시를 쓰는 것이 더 어울리겠군."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듣다못한 플로라 루모스가 도도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플로라 루모스."

"무언가를 태워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 순간.

강의실에 정적이 맴돌았다.

플로라의 말은 그만큼 직설적이고 파격적이었으니까.

"그 무언가가 대체 뭔지 정확히 말할 수 있겠나?"

"물론 사람이죠."

학생들이 잔뜩 얼어붙은 채 눈알을 굴렸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품었다. 루드거가 플로라를 강하게 질책할 거라고.

하지만 루드거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다. 플로라 루모스. 상점 5점이다."

진짜라고?

플로라는 별거 아니라며 콧대를 치켜세웠다.

학생들의 시선이 플로라에게 머물었다가 다시 루드거를 향했다.

마치 그게 정말이냐는 시선에 루드거가 입을 열었다.

"속성 원소 마법은 무엇을 위해 발전했는가. 바로 살육이다."

문명이 세워지고 형태가 잡힌 이후, 마법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위계가 나뉘고, 마법의 위계가 높아질수록 위력은 강해지고, 살상력은 높아졌다.

그래.

'살상력'이다.

"처음의 대상은 몬스터였다. 그러나 몬스터들이 거인의 등뼈 너머, 그림자의 대륙으로 쫓겨난 이후에도 마법은 더욱 강해졌지. 대체 왜일까. 크립티드 때문에? 하지만 크립티드는 극소수다. 그렇다면 대체 마법은 무엇을 위해 더 강해지고 더 날카로워졌을까."

바로, 인간이다.

마법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 발전한 것이다.

전쟁. 식민지배. 폭력.

그것이 마법을 더 강화시키고 발전시킨 원동력인 것이다.

지금은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시대였고.

마법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그 말은 금기나 다름없었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마법을 살인 따위에 빗대다니.

루드거는 지금 이 자리에 모두에게 너희는 예비 살인자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전통을 중시하는 마법사들이 한사코 부정하는 현실이기도 했다.

"불은 사람을 태우기 위해서, 물은 익사시키기 위해서, 바람은 무언가를 베고, 전기는 누군가를 지지기 위해서. 인류 역사와 함께 발전한 마법은, 전쟁과 살육이라는 원동력을 업고 커졌다. 그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지. 그래. 결국, 우리가 배우는 이 속성 원소는 무수한 생명의 피와 시체의 위에 지어진 바벨탑이고."

잠시 한숨 고르고.

루드거가 말을 이었다.

"그걸 배우는 너희들은 그 살육의 집행자인 거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강의실에 울릴 정도로 강의실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그만큼 루드거가 말하는 주제는 마법을 배우는 학생들을 넘어 모든 마법사에게 민감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들려오는 루드거의 목소리가.

강의실 전체를 부드럽게 감쌌다.

"과거에 그랬다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라는 보장은 없다. 세상이 바뀐 지금, 불은 무언가를 태우기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내가 나눠 준 유인물의 뒷장을 살펴봐라."

그러고 보니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나눠 준 유인물이 있었지. 루드거가 말한 가르침에 너무 집중해서 깜빡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황급히 유인물을 뒤집으며 뒷장의 내용을 살폈다.

거기에는 여러 구조물의 조잡한 사진이 잉크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림 자체를 알아보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불은 단순히 태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타오르는 힘으로 에너지를 공급한다. 추운 곳에서 불은 파괴가 아닌 생존의 상징이지."

흐르는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고, 그 물이 모인 강은 무수한 배들이 다닐 수 있는 통로가 된다.

바람은 풍차를 돌리며 풍력을 제공하고, 전기는 그 자체만으로 에너지를 보충하며 빛을 낸다.

물과 얼음은 타오르는 사막에서 더위를 씻겨 준다.

"이걸 배우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속성 원소가 가지는 의미는 달라진다."

루드거의 목소리가 강의실을 울렸다.

무언가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닌 만들기 위해서.

세계를 지우기 위해서가 아닌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그게 속성 원소를 배우기 전, 너희들이 배워야 할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커다란 파도가 한 차례 밀려와 전신을 집어삼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느껴지는 것은 불쾌감보다는, 오히려 머릿속에 씌워진 무언가가 벗겨진 것 같은 상쾌함.

심지어 플로라 루모스마저도 입을 헤 벌리며 루드거의 모습을 빤히 응시했을 정도다.

뻔하고 입에 발린 말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루드거가 직접 하니 다가오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힘써라. 내 속성 원소의 가르침은 그것을 위한 수업이다."

루드거는 학생들을 보며 피식 웃더니 강단에서 내려왔다.

"이제 본격적으로 원소 구현을 시작하겠다."

강의실에 모인 학생들은 본격적인 원소 구현에 들어갔다.

자신이 어떤 원소에 특화되어 있는지는, 처음 마법을 배울 때부터 기초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세오른에 입학하기 전부터 마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아이들은 어렵지 않게 마력을 띄우며 거기에 자신의 원소를 덧씌웠다.

루드거는 강의실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학생들이 만든 원소 구체를 하나씩 지적했다.

"조셉. 마력의 흐름을 조금 더 집중해라. 원소 자체는 무난하지만, 마력 방출이 미숙하구나. 그러고도 네가 세오른의 2학년인가? 집중력을 흩트리지 마라."

"네, 넵!"

"이레나 카로맨. 지금 그걸 식물 속성이라고 만들었나? 식물 속성은 그 자체만으로 자연의 싱그러움을 품어야 한다. 하지만 네 것은 늦가을에 지면에 썩어 가는 나뭇잎을 보는 것 같군. 정신 똑바로 차려라. 갓 지면을 뚫고 올라온 새싹을 머릿속에 강하게 이미지 하도록."

"네...."

루드거는 친절하게 말해 주는 일이 없었다. 그가 한마디를 던질 때마다 학생들의 얼굴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그보다 억울한 것은 루드거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상으로 그의 조언은 너무나도 정확했다.

거칠게 말하는 것 같지만 루드거는 학생들의 약점을 제대로 보고 있었고, 또 동시에 어떻게 해야 더 나아지는지에 대한 길까지 제공했다.

처음 들을 때는 자존심이 상하는 거 같으면서도, 그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면 마냥 트집만 잡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는 루드거의 스파르타식 가르침 자체가 두렵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

루드거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할 때마다 학생들은 루드거를 신경 쓰느라 속성 원소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루드거의 잔소리가 날아왔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마법이 장난으로 보이나? 집중력을 유지하지 못할 거면, 내 수업을 들을 가치도 없다."

"죄, 죄송합니다!"

"말하기 전에 자신의 마법에 더 신경을 써라. 귀를 닫고, 눈은 네 앞으로만 향해라."

"네, 넵!"

한 명씩 한 명씩.

루드거가 지나갈 때마다 학생들의 침음성이 파문처럼 퍼지며 하모니를 이루었다.

루드거의 수업을 듣는 평민 소년 에이단은 점점 가까워지는 교사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왜냐면

에이단은 아직 제대로 된 속성 원소를 발현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뚝.

루드거가 에이단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에이단을 향했다.

◈ 38화 속성 원소 수업 (3)

나는 시무룩해진 에이단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적잖게 당황했다.

'얘 대체 왜 이래?'

처음에는 나한테 무슨 반항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때 멈춰 달라 했는데 집어던진 일을 마음에 담아 둬서 은근한 불만을 표하는 건가?

'반응을 보면 딱히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진심으로 죄송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저 모습이 연기일 리가 없다.

즉 에이단은 정말로 속성 원소 마법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속성을 방출시키는 방법을 모르는 거다.

믿기질 않는군.

희귀하다는 [특이] 계열 마법의 소유자가 이런 기초적인 건 못 한다고?

백 텀블링을 하는 아이가 제대로 걷지 못하는 수준이 아닌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나름 기대주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부분에서 막히는 걸 보면 또 그건 아닌 거 같고.

애초에 세오른에 입학하게 된 것도 특이 계열 마법 덕분이었나.

'이대로 무시하는 것도 방법이겠지.'

기초적인 수업조차 따라오지 못하는 녀석을 굳이 챙겨 줄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할수록 다른 학생들의 소중한 시간을 잡아먹는 꼴이니까.

애초에 내가 수업에서 1, 2학년을 같이 듣게 했을 때 말한 것이 있지 않던가.

따라오지 못하는 녀석을 배려해 줄 생각은 없다고.

내 비밀을 알지도 모르는 에이단이, 알아서 수업에서 뒤처진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반가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

굳이 잔정을 베풀 필요는 없다.

세상이란 본디, 이렇게 차가운 곳이니까.

* * *

"에이단.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에이단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저, 그게...."

"원소를 구현조차 하지 않다니. 지금 내게 반항을 하겠다는 건가?"

학생들의 시선이 전부 에이단과 루드거를 향했다.

루드거가 눈썹을 찌푸리며 학생들을 돌아봤다.

"지금 이쪽에 신경 쓰는 학생들은 이미 자신의 구현이 완벽해서 한눈을 파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기억해 뒀다가 직접 확인을 해야겠군."

히익!

학생들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다시 자신의 원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에이단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찌할 줄 몰랐다.

뒷짐을 진 루드거가 물었다.

"에이단."

"...네."

"아직 원소의 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건가?"

"...네. 부끄럽게도."

에이단은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어졌다.

이곳에 들어온 다른 학생들은 모두 훌륭하게 수업의 내용을 따라가고 있는데, 자기만 뒤떨어져서 발목을 붙잡는 기분이었다.

에이단이 세오른에 들어오게 된 것도 일종의 '특례'가 적용된 것이다 보니, 아직 남들이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기초적인 부분이 미약한 탓도 있었다.

"사용할 수 있는 속성 원소는? 그건 알고 있겠지?"

"불, 물, 그리고 바람입니다."

"3개라. 평범하군."

특이 계열 마법을 다룬다고 해서 더 많은 원소에 특화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더 많은 원소를 다룰 수 있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그렇다면 불꽃부터 하겠다."

"네, 네?"

에이단은 루드거의 말에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건 에이단의 옆에 앉은 레오도, 그 뒤에 앉아 있는 테이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가르쳐 주겠다는 거다. 첫 수업부터 따라오지 못해 낙오하는 학생이 생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하, 하지만 저는...."

"나는 내 수업에 그런 녀석이 생긴다는 것 자체를 극도로 혐오한다. 이견은 받지 않는다. 집중해라."

"아, 네!"

"마력을 모아라. 기본적인 발현은 가능하겠지?"

"네."

에이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력의 구체를 만들었다.

1위계 마법이라 부를 수도 없는, 마법에 입문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초 과정이었다.

"그 마력을 속성으로 바꾼다고 생각을 해 봐라. 방금 말했다시피 화염이다."

"해 보겠습니다."

에이단은 자신의 마력 구체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마치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인 양.

테이시와 레오는 말없이 에이단에게 응원의 시선을 보냈다.

"끄으응."

그러나 에이단은 아무리 집중을 해도 불꽃이라는 속성을 제대로 구현하기 힘들었다.

이대로 안 되는가 싶은 순간, 잠자코 지켜보던 루드거가 입을 열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해라. 머리로 아무리 불꽃을 떠올리려 해도 처음에는 힘든 법. 그러니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감각으로 느껴라."

"감각이요...?"

"불꽃의 특징을 하나씩 네 감각에 대조시키는 거다. 첫 번째는 시각이다. 타오르는 불의 형상을 떠올려 보거라. 눈을 감고 집중해라."

"네."

루드거의 조언에 에이단은 집중해서 머릿속에 불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계속 흔들리는 불의 형상을 머리로 떠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중해라. 네 기억 속에 불이 가장 강렬했던 순간을 떠올리는 거다."

"네, 넵."

그렇게 말하니 무언가 가닥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집중하는 에이단은 서서히 기억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시골집에서 땔감을 태우던 시절, 그때의 감각을.

벽난로 안에 타오르는 불.

그것을 지켜보던 자신의 가족들.

그때의 주홍색 불은 난로 안쪽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요동쳤었다.

루드거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이제 불의 소리를 떠올려라."

에이단은 대답하는 대신 루드거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했다.

화르륵.

바람을 타고 일어나는 불과 동시에 타오르는 장작의 소리.

휘날리는 불씨가 사늘한 공기에 식으며 고요함이 종지부를 찍었었다.

에이단의 머릿속에 퍼즐이 하나씩 맞춰졌다.

루드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은 후각이다."

아니, 그것은 그의 깊은 내면으로 인도하는 것이 가까웠다.

에이단은 무의식의 깊은 곳을 누볐다.

불이 장작을 태우면서 내는 매캐한 냄새. 동시에 은근한 숯의 향기도 느껴졌다.

에이단의 가족은 그런 불에 스튜를 끓여 먹기도 했다.

"미각은 없으니, 마지막으로 촉각을 떠올려라. 불을 마주했을 때 네가 피부로 느낀 감각을 되새기는 거다."

루드거의 안내를 따라 에이단은 과거의 기억을 그림처럼 자아냈다.

하나씩 짜 맞춘 감각이 과거의 기억을 뚜렷하게 되새겼다.

그리고 떠올릴 수 있었다.

8년 전.

눈이 내리던 추운 겨울을.

바깥에 진청색의 유리창 너머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이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두꺼운 옷을 꽁꽁 싸맨 그는, 타오르는 불이 꺼지지 않도록 난로에 장작을 집어넣었다.

두 여동생이 에이단에게 춥다고 칭얼대며 달라붙었다.

그렇게 온 가족이 난로 앞에 오순도순 모여앉아 식사를 함께했다.

동생들이 떠들고 어머니가 잔소리했으며, 아버지는 그걸 보며 부드럽게 웃어 보이셨다.

화려한 음식을 먹지도 못했고, 제대로 기우지 못한 옷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왔지만. 분명 그때의 기억은 바로 조금 전에 느낀 것처럼 생생하다.

불은 뜨겁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다.

단지.

그때 느낀 불꽃은 감각은 너무나도 따스해서.

싸늘한 겨울을 포근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바로 그거다."

"아."

잔잔한 수면 위에 파문이 일듯, 루드거의 목소리에 에이단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보았다.

자신의 눈앞에 타오르고 있는 자그마한 불꽃의 구체를.

"...!"

에이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따뜻한 불꽃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았다.

뜨겁기보다는 따뜻했고, 파괴적이기보다는 부드러웠다.

내가, 정말 이걸 구현했다고?

"제법이구나."

루드거의 칭찬에 에이단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 천재라 불리는 학생들에게도 칭찬은커녕 잔혹하게 지적만 하던 루드거가, 처음으로 칭찬의 말을 입에 담은 것이다.

저걸 칭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 루드거가 긍정적인 말을 입에 담은 것이다.

애써 관심을 두지 않는 척하며 귀를 쫑긋거리던 다른 학생들도 루드거의 말에 경악했다.

"그 불꽃은 일반적인 원소를 넘어 너만의 불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의 것을 따라 하고, 남이 가르친 것만 맹목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네 자신이 느낀 불이라는 원소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지. 에이단. 그건 너만의 마법이다."

"이게, 저만의 마법?"

에이단은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사람처럼 자신이 만들어 낸 화염의 구체를 응시했다.

집중력이 풀렸기 때문인가.

화륵.

불은 흔적도 없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그 잔향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기분이었다.

"에이단."

"네, 선생님."

"그 감각을 잊지 마라."

루드거는 그 말을 남기고 다음 학생을 찾아 움직였다.

에이단은 여전히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곁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레오와 테이시가 에이단의 팔을 툭 쳤다.

"에이단. 너 대박이잖아!"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어, 어어?"

에이단을 향한 루드거의 칭찬은 아직 평가를 받지 못한 학생들의 의욕에 기름을 끼얹었다.

루드거는 그런 학생들을 스윽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눈치를 챘겠지만, 내가 이번 강의에 들어가기 전 알려 주려던 방법이 바로 이거다."

학생들이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바로, 경험을 통한 감각의 적용이지."

감각의 적용이라는 말에 학생들이 다음 설명을 기다렸다.

"속성 원소는 해당 원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불이 단순히 뜨겁고, 얼음이 단순히 차갑다는 것은 세 살배기 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진정 마법사라면, 거기에 특별함을 담아야 한다."

"특별함이요?"

"너희가 발현하고자 하는 원소를, 어렴풋이 접한 기억이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마주했던 강렬한 순간으로 떠올려라. 단순한 시각만이 아닌 오감으로 원소를 느끼는 거다."

눈으로만 따르지 마라.

오감으로 원소를 느껴라.

그 조언을 따르자 곳곳에서 학생들의 기쁨에 찬 반응이 터져 나왔다.

"어, 어어? 된다!"

"와! 예전보다 훨씬 더 잘 돼!"

마법을 배우는 것에 기쁨을 느낀 학생들은 더욱 이번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루드거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기억과 경험이 빗대어 원소를 더욱 세심하게 떠올리며 구현을 하니, 기존에 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원소가 구현된 것이다.

심지어 경험과 성향에 따라 원소의 느낌 자체도 달라졌다.

자신만의 색이 입혀진 것이다.

그 순간, 강렬한 함성이 한쪽에서 터져 나왔다.

"헐. 미친. 저거 뭐야?"

"중첩 원소? 저걸 벌써 사용한다고?"

경악 어린 시선이 향하는 곳의 중심에는 플로라 루모스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하나의 원소를 만들어 냈다.

정확히는 2개의 원소를 하나로 합친 형태였다.

불꽃과 얼음.

타오르는 불의 형상이 연푸른색의 얼음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씩이지만 일렁이듯 움직이고 있었다.

이른바 얼어붙은 불꽃이었다.

'흥.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처음에 플로라는 적당히 속성 원소 하나만 만들어 낼 생각이었다.

그저 루드거에게 책잡히지 않을 정도로만 하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감을 통해 원소를 구현하는 법을 이미 깨우치고 있었고, 특유의 마력 공감각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완성도 높은 속성 구현이 가능했다.

하지만 루드거가 웬 1학년 꼬맹이 하나를 세심하게 가르쳐 주고, 마지막에 칭찬까지 했을 때.

플로라의 마음속에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올라왔다.

그녀의 자존심이 이 상황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디 내 것도 칭찬 안 하는지 보자고.'

단순히 하나의 원소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녀는 플로라 루모스였다.

세오른 내에서도 천재라는 칭호를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는 마법의 총아(寵兒).

그런 자신이 펼치는 마법이 고작 단일 원소라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2가지 원소를 만들었다.

그것도 상극이라 할 수 있는 불꽃과 얼음을.

두 마법의 술식을 서로 침해하지 않게 조율하고 서로 엮으면 불과 얼음은 공존할 수 있게 된다.

오히려 각자의 특성이 합쳐져 새로운 형태로 바뀌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속성 원소>의 고급 단계라 할 수 있는 원소의 중첩.

플로라 루모스는 2개의 원소 정도는 손쉽게 합칠 수 있었다.

플로라는 문득 욕심이 들었다.

묘하게 컨디션이 좋고, 정신적으로 고조된 상태라서 그런지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이라면 어쩌면,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삼중 원소 중첩을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얼어붙은 불꽃. 여기에 바람 원소의 술식을 넣어서 소용돌이치게 만든다면.'

2개의 술식이 겹쳐서 만들어진 하나의 마법.

플로라는 거기에 새로운 술식을 하나 더 만들기 시작했다.

기존 2개의 원소 중첩에 하나의 원소를 더한 원소의 삼 중첩.

항상 실패했던 마법이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것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을 완성하고 루드거의 얼굴이 보기 좋게 망가질 걸 떠올리니 벌써부터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 플로라의 안색이 변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 어?'

플로라는 가장 먼저 눈으로 '보았다'.

3가지 색채가 아름답게 섞이려는 순간, 갑자기 형태가 어긋나며 서로 충돌하기 시작하는걸.

그녀의 코를 통해 악취가 스며들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마법이 그녀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실패했을 때였다.

'안 돼!'

결국, 욕심이 화를 부르고 말았다.

3개의 속성이 서로 충돌하며 강렬한 에너지를 자아냈다.

플로라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억제하려 했지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이미 임계점을 벗어난 마법은 그녀의 통제를 벗어났다.

3개의 원소가 하나로 합쳐지며 점점 강렬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어, 어?"

"자, 잠깐."

강의실 중심에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에 학생들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플로라? 플로라! 어서 멈춰!"

옆에 앉은 그녀의 단짝인 셰릴이 외쳤지만, 플로라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그녀는 지금 폭주하려는 마력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점점 힘에 밀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이대로라면 폭발하고 만다.

그렇다면 주변에 최소한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하는 각오로, 플로라는 자신을 중심으로 마력의 장벽을 둘렀다.

이대로 마법이 폭주해도 마력의 폭풍이 바깥으로 퍼지지 않도록.

그리고 플로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그녀의 두 손으로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어?"

플로라는 눈을 떴다.

정면에, 루드거가 서 있었다.

그녀와 마주 본 채로, 두 손은 마법을 최대한 부여잡고 있는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싼 채로.

대체 어떻게? 분명 마력 장벽을 펼쳤는데.

마력의 장벽을 너무나도 쉽게 허물고 들어온 루드거는 자신의 마력을 보태며 말했다.

"집중해라. 플로라 루모스."

"서, 선생님?"

"포기하지 말고 마력을 제어해라."

플로라는 멍한 시선으로 루드거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곧 터질지도 모르는 마력의 폭주에도, 루드거의 눈빛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내가 도와줄 테니."

◈ 39화 플로라 루모스 (1)

폭발하려는 마력의 위를 루드거의 마력이 부드럽게 감았다.

푸른 마력이 곧 터질 것 같은 새하얀 빛의 위를 휘감았다.

사방으로 팽창하며 곧 터질 것 같은 중첩 원소가 동그랗게 뭉치더니 점차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플로라는 그 광경을 보며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 순간, 루드거의 목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집중을 풀지 마라."

자신의 손을 맞잡아 주는 루드거의 두껍고 따스한 손과 힐난하듯 날아오는 질책.

플로라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마력을 다루는 데 집중했다.

"여기서 멈추면, 네 마법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사라진다. 그래도 좋은가?"

그 말에 플로라는 이를 악물었다.

엇나가려던 마법이 점차 안정을 되찾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이도 저도 되지 않는다.

루드거는 말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끝을 보라고.

'그래. 이대로 실패한 채 놔둘 바에야...!'

자신이 펼치려 하는 마법을 이대로 사라지게 둘 수 없었다.

플로라는 자신의 남은 마력을 전부 쥐어짜 내며 그에 응했다.

자신을 도와준 루드거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이 마법을 완성시켜야 했다.

우우웅.

동그랗게 뭉친 3개의 원소가 점점 크기를 줄여 나가더니, 이윽고 희미하지만 무언가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플로라는 자신의 코끝을 스치는 감미로운 향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색이.

흩어지고 제멋대로 날뛰던 색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아니.

그것을 넘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아.'

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자신의 앞에 구현되어 가는 마법을 응시했다.

처음 시작은 오기와 불현듯 일어난 욕심 때문이었다.

이전부터 실패했던 속성 원소의 삼 중첩.

그것에 도전한 이유는 사실, 자신을 무시했던 루드거의 입에서 칭찬의 말이 나오게 하려는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행동 같은 것이었다.

마법에 대한 재능을 타고난 플로라에게 있어, 어려운 고위계 마법조차 결국 언젠가는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플로라에게는 마법은 너무나도 쉽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성공에 기뻐하지 않았으며,

실패에 연연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 마음가짐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실패했던 것을 성공하더라도 기쁨 따윈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성공했구나."

루드거의 그 말에 플로라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넘어오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못 박힌 듯 완성된 원소를 향해 있었다.

날카로운 송곳처럼 얼어붙은 불꽃을 중심으로, 새하얀 바람이 원자 궤도를 그리며 맹렬히 회전하는 모양.

불과 얼음, 바람이 하나로 합쳐진 3개의 중첩 원소.

그것이 자아내는 찬란한 아름다움에 플로라는 시선을 넘어 영혼마저 빼앗기는 착각을 느꼈다.

"예쁘다."

옆에서 그 광경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셰릴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녀가 만들고자 했던 마법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예술품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특히 플로라의 반응은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더 격정적이었다.

그녀를 들뜨게 만드는 건 단순한 시각과 후각적인 쾌감보다도.

가슴에 깊은 곳에서 거품처럼 부글부글 일어나는 정신적 고취감이었다.

지금까지 해내지 못한 마법을 완성했을 때 느끼는, 벽을 넘었다는 성취감.

비록 혼자만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이 기쁨만큼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스스스스.

힘을 다한 마법은 이윽고 화려한 빛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 광경을 홀린 듯 지켜보고 있자니 루드거가 입을 열었다.

"플로라 루모스."

"네. 루드거 선생님."

플로라는 담담하게 루드거의 부름에 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만 그럴 뿐, 속은 그렇지 않았다.

루드거가 여기서 칭찬의 말을 입에 담는다면, 그녀는 너무 기뻐서 눈물을 왈칵 흘릴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지금 그녀는 잔뜩 들뜬 상태였다.

"어리숙한 짓을 저질렀구나."

"네. ...네?"

그러나 루드거의 입에서 나온 그 싸늘한 말에, 플로라는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

그녀는 자신의 욕심을 위해 강의실에 있는 학생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

마법을 성공시켰다는 기쁨에 잊고 있던 현실을 마주하게 되자, 플로라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마법에 도전하고 실패하는 건 누구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실패의 대가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어야만 한다. 다른 학생들이 아니라 너 말이다."

"...죄송합니다."

루드거의 말은 백번 옳았다.

그녀는 다른 학우들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

마지막에 책임감을 느끼고서 마력의 장벽을 둘렀다 하지만, 과연 그걸로 피해를 완전히 막아 낼 수 있었을까.

만약 루드거가 나서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질책하는 것은 플로라 루모스, 네 마법의 미숙함이다."

"네?"

마법의 미숙함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일까.

"처음 원소 중첩을 시전했을 때, 불과 얼음의 원소를 섞었지?"

"예. 그랬었죠."

"불과 얼음은 서로 상극. 그렇기에 서로 섞기 힘들지. 서로의 술식이 충돌하지 않게 만드는 것을 넘어, 술식과 술식이 조화를 이루며 더욱 강한 효과를 자아내야 하니까."

"네, 맞아요."

그리고 플로라 루모스는 그것을 성공했다.

서로 상극인 힘을 섞어서 하나로 된 마법을 구현한 것이다.

"...그런 제 마법이 어디가 미숙하다는 거죠?"

목소리에 서운함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단지 자신을 질책할 거라면 무리한 삼 중첩 마법을 사용하는 것만 하면 될 텐데.

어째서 이쪽이 완벽하게 이룩한 불과 얼음의 중첩 원소를 지적하는 것일까?

플로라는 루드거가 자신의 실책을 빌미로, 기존의 중첩 원소의 평가마저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

루드거는 그녀가 친 마력의 장벽을 넘어서 폭주하려는 마력을 제어하는 걸 도와줬다.

마력에 대한 이해와 술식의 구조를 꿰뚫어 보는 것을 넘어, 마력 장악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본인도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

루드거는 그런 위험을 감수해가면서 그녀를 도와준 것이다.

그런 루드거가 단지 그녀를 무자비하게 깎아내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억울한 것도 없잖아 있었다.

단지 칭찬을, 듣고 싶었는데.

그렇게 실망하려던 찰나, 루드거가 마력을 일으키며 얼음과 불꽃의 구체를 만들어 냈다.

"왜 미숙한지 지금부터 보여 주마."

루드거는 자신이 만들어 낸 두 개의 원소를 하나로 합쳤다.

양 속성의 마력이 충돌하지 않도록 술식을 조정하고.

두 개의 술식을 하나로 합치며.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중첩 원소를 구현한다.

플로라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겠다는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 모든 과정은 분명 그녀가 시도했던 것과 흡사했다.

하지만 결과물은 똑같지 않았다.

"어?"

단순히 불꽃을 얼음처럼 아름답게 만들어 낸 플로라의 중첩 원소와 루드거가 보여 준 중첩 원소는 근본부터 달랐으니까.

플로라 루모스는 자신이 만들어 낸 중첩 원소와 루드거가 만든 중첩 원소를 비교했다.

불과 얼음의 조합.

요소만 놓고 보면 분명 다를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두 원소가 자아낸 결과물은 너무나도 달랐다.

겉모습? 그것도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중첩 원소가 품고 있는 기운 자체가 다르다.

특히 마력에 예민한 플로라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색과 냄새 자체가 그녀의 것과 달랐다.

더 선명하고, 더 향기롭다.

"플로라 루모스. 내가 만들어 낸 이 중첩 원소가 어떤 건지 알겠나?"

플로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네."

"그렇다면 설명을 해 봐라."

"...선생님이 만드신 중첩 원소는 품고 있는 마력의 의지가 다릅니다. 불꽃이 지닌 확산과 주변을 집어삼키는 힘과, 얼음의 속성이 지닌 시린 냉기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반면, 네 것은?"

"네?"

"네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

플로라는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루드가 대신 입을 열었다.

"플로라 루모스. 네가 만들어 낸 그 중첩 원소는 그저 모양만 아름다울 뿐인, 실용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마법이다."

그 통렬한 한마디에 플로라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렇게 심하게 말씀하실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루드거의 진심 어린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쏙 들어가고 말았다.

"마법은 실용적이어야 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의미가 없는 마법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모든 마법의 기본 명제다."

루드거는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마법을 더 나은 방향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무언가를 죽이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만들고 이룩하는 것.

그것이 세상을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다고.

"하지만 플로라. 네 마법은 어땠지?"

"저는...."

"얼어붙은 불꽃. 기본적인 화염의 타오르는 형상의 술식에, 얼음의 원소를 크게 두른 형태로군. 그래. 확실히 아름답지. 타오르는 불의 형태를 그대로 얼려 버렸으니까."

루드거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

플로라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루드거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너는 이 마법을 가지고 서커스단에 취직이라도 할 생각이냐? 아니면, 저 수도의 수정궁에 가서 네 마법을 아름답게 전시라도 할 생각이었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네 마법의 존재 의의는 대체 뭐지? 그저 자신이 중첩 원소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자기 과시일 뿐인가?"

자기 과시.

루드거의 지적은 반박이 불가능했다.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를, 그저 아름답기만 한 마법은.

나는 원소 중첩을 사용할 수 있다는 자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거기에 바람을 섞어, 어느 정도 의도를 부여한 점은 높게 사겠지만. 그마저도 실패했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는 말에 플로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 앉은 셰릴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그녀도 이 상황에서 그렇다 할 위로를 전할 수 없었다.

루드거는 자신이 만들어 낸 [작열하는 냉기]를 그대로 허공으로 뿌렸다.

강의실의 높다란 천장 가까이 올라간 중첩 원소가 폭죽처럼 터졌다.

화르륵!

순간 강의실 안에 있는 모든 학생은 얼음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는 착각을 느꼈다.

새하얀 서리 같은 냉기는 천장에 닿는 일도 없이 강의실 전역에 넓게 퍼지며 은은한 진눈깨비를 흩날렸다.

그것은 아래로 떨어지며 학생들에게 닿기도 전에 녹아내려 사라졌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학생이 느낄 수 있었다.

저것은 번지는 화염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상극인 마법이라는 걸.

불을 진화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최적의 마법이라는 걸.

"플로라 루모스. 네 속성 중첩은 꽤 흥미로웠다. 나는 그 나이에 그 정도의 기술을 발휘하는 마법사는 본 적이 없어."

루드거의 마법에 시선이 빼앗긴 플로라의 눈이 다시 루드거를 향했다.

이쪽을 안타까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녀는 괜히 죄스러워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네가 하는 행동의 방향성은 잘못됐다. 나는 네 실력을 논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을 논하는 거지."

"...."

"마법을 단지 보여 주는 식으로만 사용하지 마라. 그건 오히려 플로라, 네 가치를 낮추는 짓이다."

"제, 가치요?"

"그래. 이건 너를 위한 진심 어린 충고다."

지금까지 이쪽을 신랄하게 까 내렸으면서, 가치를 논한단 말인가.

하지만 플로라는 루드거의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만들어 낸 마법은 그저 실력을 과시하기 위한, 다른 누군가의 칭찬을 이끌어 내기 위한 그저 겉멋일 뿐이라고.

반대로 루드거가 만든 것은, 그녀와 같은 원소를 중첩했음에도 훨씬 더 실용적이었다.

화염이 가지고 있는 힘은 그 화력에도 있지만, 한번 붙으면 제대로 꺼지지 않고 삽시간에 번지는 확장성에 있다.

화재로 벌어지는 커다란 사건들은 언제나 불이 크게 퍼지며 발생한다.

루드거는 냉기에 그 특징을 담았다.

폭발하는 순간 전염병처럼 퍼지고 번지는 싸늘한 한기.

그 목적은 번지는 불을 역으로 집어삼키기 위한 소화(消火)였다.

얼음이라는 걸 순수하게 무기의 형태로 구현시켜 쏘아 내거나, 아니면 넓은 범위에 눈보라를 몰아치게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의 마법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루드거가 만들어 낸 것은 매우 실용적이었다.

'또, 졌어.'

이번에야말로 인정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플로라는 자부심은커녕 자신이 얼마나 조급했고, 또 어리숙했는지 깨닫게 됐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무엇보다 루드거가 자신을 향해 보였던 그 진심 어린 시선.

그것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쪽을 비웃거나 경멸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걱정하는 태도.

'나를 이런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녀를 향한 시선은 언제나 2개뿐이었다.

선망.

그리고 질투.

가족들, 꼴도 보기 싫은 형제자매들은 말할 것도 없다.

같은 동급생을 넘어 선배까지도 그녀를 질투했고.

그리고 세오른의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을 배워 온 세월이 더 김에도 플로라의 재능은 그것을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그럴 때마다 교사들의 눈빛은 언제나 견딜 수 없는 불꽃 같은 질투심에 휩싸여 있었다.

플로라는 그걸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진짜 재능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재능을 질시하는 자들의 시선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넘어가 줄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더 압도적인 모습을 선사하며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플로라는 루드거가 보여 준 생소한 태도에 난생처음으로 당황했다.

'루드거 선생님.'

마법에 실패할 뻔했던 그녀를 구해 주고.

지금까지 넘지 못했던, 삼 중첩 속성 원소의 벽을 넘도록 도와줬다.

그리고 그녀를 똑바로 봐 주며 따끔하게 훈계까지 했다.

플로라는 문득 자신이 지금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차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다.

마력 고갈 현상.

삼 중첩 원소 마법을 구현하겠다고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한 것이다.

'이쪽은 지쳐 죽을 거 같은데도,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터지려는 마력을 억제한 루드거가 훨씬 더 많은 마력을 소모했을 텐데도, 그는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처음이다.

진짜 '벽'을 느끼는 건.

그리고 그 벽은 과연 넘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을 정도로 높고 두꺼웠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플로라는 호승심이 들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꼭 그를 넘어서고 말겠다고 플로라는 자신에게 강하게 다짐했다.

'뭐지.'

으득.

몰래 입안에 숨겨 놓은 마력 회복 알약을 씹어 먹던 루드거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 40화 플로라 루모스 (2)

플로라를 향한 지적 이후로 나는 여러 학생의 상태를 살피며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알려 준다는 거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니까.'

속성 원소의 발현은 기초 중의 기초다.

누군가는 쉽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기초를 제대로 다지는 것만큼 <속성 원소>에서 중요한 건 없다.

오감을 이용한 원소 발현도 그런 '기초'에 틀을 갖고 발전한 형태에 가깝다.

'사실 나도 기초가 그렇게 중요할 줄은 몰랐었지.'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력으로 일으키는 원소 마법은 단순한 자연에 존재하는 원소와는 조금 다르다.

정확히는 대기 중에 떠도는 마나라는 기이한 힘으로 원소의 흉내를 내는 것에 가까우니까.

물론, 그 '흉내' 자체를 세계가 '진짜'로 인식해서 불 마법에 적중당하면 불에 타고 하는 것이다.

당연히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예를 들면 조금 전 에이단이 일으킨 따스하고 포근한 불꽃 같은 것도 마력으로는 구현할 수 있다.

즉 마법으로 일으킨 원소는 가짜이면서 진짜인, 말 그대로 모순적인 두 개가 공존하는 셈이다.

이게 마법의 신비라는 거고.

그런 마법으로 일으킨 원소는 당연히 마법사의 성향을 따른다.

차갑고 냉철한 사람이 사용하는 얼음 마법과, 혈기 넘치고 다혈질인 사람이 사용하는 얼음 마법은 같은 걸 사용해도 전혀 다른 결과물이 펼쳐진다.

세계를 떠돌며 더 많고 다양한 경험을 한 마법사는 방구석에만 틀어박힌 마법사가 사용하는 것보다 마법 자체에 더 다양한 '감정'을 실을 수 있다.

그래.

결국, 마법 자체는 마력에 인간의 감정을 싣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노래에도 감정이 실린 노래와 그러지 않은 노래가 있는 것처럼.

다만, 지금의 마법은 그저 철저하게 이론과 계산으로만 펼쳐지는 만큼 이런 방법은 아주 오래된, 이제는 역사책에도 남아 있지 않은 방식이다.

아마 마탑의 서고의 맨 구석, 오래되고 다 해진 책에 적혀 있지 않을까.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옛날보다는 극히 일부만 알려진 방법.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면 스승님이 말해 줬기 때문이다.

'이 감각을 통한 원소 극대화도 원래 스승님이 가르쳐 주신 거지만.'

제자인 나한테만 알려 준 방식인데, 이 불민한 제자는 지금 저 살겠다고 스승님의 꿀팁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있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제 목숨이 위태해서요.

아무튼, 마법이란 이렇게나 신비로운 학문인 것이다.

'처음 배울 때가 생각나네.'

처음 이 세상에 마법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역사에 남을 대마법사가 될 거라고 믿었다.

다른 세상에 환생했다는 사실이 그런 희망을 품게 만들기 충분했다.

물론, 그런 꿈은 금방 접게 됐다.

내게는 마법 자체를 배울 뛰어난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본까지는 가능하지만, 그것이 전부.

역사에 바로 남을 대단한 마법사니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나는 마법을 배우는 방향성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건 3위계까지가 내 한계다.

조금 무리하면 4위계의 기본 마법 정도는 사용이 가능하다.

내 수준을 놓고 보면 4위계 초입. 그리고 이게 내 최선이자 한계이기도 했다.

나는 그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니, 차라리 3위계까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질을 높이는 길을 택했다.

기초를 다지고 다진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무엇보다 나는 전생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남들과는 조금 색다른 시선으로 마법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아직 이른 21세기의 과학적 지식을 술식에 접목한 것이다.

소스코드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시였다.

거기에 더해서 스승님의 스파르타식 가르침까지 받게 됐으니, 마법에 대한 기초만큼은 누구보다도 탄탄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고수해 온 방식이 세오른에서 빛을 발했다.

'그때는 왜 이런 걸 시키냐고 투덜댔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거만큼 좋은 게 없기는 해.'

아마 오감을 이용한 마법은 마탑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은 방법일 거다.

그나마 학파 간에 내부에서 밀어주는 중요한 인재에게만 귀띔 정도로만 알려 주는, 맛집의 비밀 소스 같은 것이리라.

나는 그것을 그냥 대놓고 공개했다.

실제로 눈에 띄는 변화나 성과가 있다 보니 학생들도 만족하고 있었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겠어. 플로라 루모스. 설마하니 저 어린 나이에 원소 중첩을 사용할 줄이야.'

원소 중첩은 그냥 서로 다른 원소를 합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마력을 구성하는 술식에 변조를 줘야 하는데, 잘못 손대면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그래서 원소 중첩을 사용할 때는 서로 호완이 잘 되는 원소끼리 합치는 경우가 많았다.

물과 얼음, 불과 바람, 바람과 전기처럼.

그런데 플로라는 불과 얼음이라는, 서로 상극인 원소를 중첩시켰다.

그것만으로 부족한지 거기에 3번째 원소를 중첩시키는, 원소 속성에서도 상당히 고등급 난이도인 삼 중첩 원소를 펼쳐 보인 것이다.

도저히 저 나이에서 보일 법한 실력이 아니다.

플로라가 이 세오른 내에서 괜히 천재라 불리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실감하고 말았다.

'그렇다 해도 실패할 뻔했으니.'

마력 폭주.

그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른 탓에 나도 마력을 너무 소모해서 어질어질하다.

다행히도 미리 입안에 털어 넣은 마력약이 있어서 금방 회복했기에 망정이었지, 그러지 않았다면 학생들 앞에서 꼴사납게 몸을 휘청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플로라를 좀 호되게 혼낸 감이 없잖아 있었다.

예전에 나도 저렇게 새로운 마법의 창안에 자신만만했다가 스승님한테 엄청나게 깨진 적이 있었으니까.

그때의 나도 뭔가 대단한 마법을 발현시키겠답시고 위험한 짓을 많이 했지.

지금 생각하면 자다가 이불을 발로 뻥뻥 찰 일이었다.

원소 중첩 2개를 성공해서 콧대가 으쓱해진 플로라의 모습이 한창 스승님께 마법을 배우던 내 옛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때의 기억이 무심코 떠올라 발작 버튼이 눌리고 말았다.

플로라를 좀 강하게 다그친 것도 그래서였다.

뒤늦게 말이 좀 심했다고 생각해서 '사실 너 걱정해서 그런 거야. 내 마음 알지?' 하고 변명을 하기는 했는데.

'조금 심하게 상처받았을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천재라 불리는 소녀인데, 이 정도는 거뜬히 이겨 내겠지.

나는 플로라에게 신경을 끄고 나머지 학생들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역시. 세오른이라 그런지 고작 단순한 조언 몇 개를 해 줬을 뿐인데도 다들 잘하는군.'

특히 눈에 띄는 학생들이 몇몇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압축된 대지의 원소를 발현하는 학생이었다.

마치 지하 깊은 곳에 존재하는 광맥을 위로 끌어낸 것처럼 생긴 원소를 구현한 것은 머리 위에 짐승의 귀를 단 갈색 피부의 여학생.

'이오나 오벨리라고 했던가.'

첫날에도 본 적이 있다. 애초에 이 강의실 내부에 수인족은 그녀 혼자뿐이었으니까.

그녀는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녀가 훌륭히 원소를 구현했음을 표현했다.

내 행동이 뭔가 신기했던 걸까. 그녀는 '아' 하고 입을 헤 벌렸다.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다른 학생을 살폈다.

다음은 식물의 원소였다.

그것을 펼친 것은 얼굴의 반을 가리는 크고 동그란 안경을 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진청발 소녀였다.

딱 봐도 '나 공부 잘해요'라는 모습의 그녀는 이번 신입생 중에서도 나름대로 명성이 있다는, 연금학파에서 밀어주는 소녀였다.

클라라 하니스라고 했던가. 얘도 제법이다.

그 밖에도.

동부 왕국에서 나름 유명한 귀족가의 쌍둥이 자매도 있고, 마탑에서 밀어주는 신인까지.

심지어 이 신인은 플로라 루모스에게 꽤 라이벌 의식을 품고 있는 거로 보인다.

'올해 신입생이 이상할 정도로 대단한 학생들만 모였다고 하던데. 나도 참 기묘한 타이밍에 들어오게 됐군.'

황금 세대라고 하던가.

이번 1학년들이 그런 아이들이 많다고 얼핏 셀레나 선생님께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중 대다수가 내 수업을 듣고 있다.

부담스러워 미쳐 버리겠군.

좀 적당히 해 줬으면 좋겠다는 심정도 없잖아 있다.

이렇게 잘하는 얘들한테 뭘 하나씩 가르치려고 하니 기가 빨리는 기분이다.

그러던 찰나였다.

수업이 거의 끝나 가는데, 나는 유일하게 속성 원소를 띄우지 못하는 한 학생을 발견했다.

'저 아이는.'

낯이 익다. 그야 그럴 것이 저 눈에 띄는 밝은 회색의 머리카락과 천상의 미모는 모를 수가 없으니까.

당장 전날 제1 훈련장에서 있던 일도 있었고, 늑대인간 사태 때의 일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저 아이를 다른 이유로 잘 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리네."

"아. 루드거 선생님."

"뭔가 잘 안 되는 건가?"

"아, 아뇨. 그게...."

리네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하는 걸 망설였다.

그 옆자리에는 황녀인 에렌디르가 앉아 있었다. 뭐야. 둘이 그때 이후로 친해진 건가?

내가 에렌디르에게 무슨 일이냐는 시선을 보내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리네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마력을 방출하며 구체를 띄웠다.

리네도 세오른에 입학한 만큼 마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재능은 있는 편이니, 마력 자체를 띄우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캐치 했다.

"속성 원소의 발현이 되지 않는 거로군. 아니. 정확히는 속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건가."

"...네."

리네는 아주 극히 나타난다는 무속성 마력의 보유자였다.

* * *

'망했다.'

리네는 괜히 자신이 시간만 잡아먹은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수업의 끝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마치겠다. 다들 오늘 배운 것을 복습하도록. 과제는 그것으로 대체하겠다."

"오!"

"그렇다고 대충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라. 너희들이 오늘 사용한 속성 원소는 전부 기억해 뒀으니 다음 수업 때 확인할 거다."

이번에도 과제가 거의 없다는 소식에 기뻐하던 일부 학생들은 루드거와 시선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제대로 연습하지 않은 녀석들은 티가 나겠지. 그때가 기대되는군."

"수, 수고하셨습니다!"

학생들이 도망치듯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리네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루드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리네."

"네? 네!"

"너는 교무실로 따라오도록."

"헉!"

리네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아직 남아 있던 학생들은 그런 리네를 안쓰럽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발현계 수업에서 속성 원소는 마력 방출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특화인데, 무속성은 그것이 되지 않으니까.

아마 저렇게 부르는 것은 강의를 제대로 이행할 수 없으니, 다른 강의를 알아보라고 권고하기 위함이겠지.

이번이 2주 차일 뿐이지만, 루드거의 수업은 이미 세오른 내에서 역대급이라고 소문이 났다.

특히 이번 속성 원소의 토대를 더욱 강하게 다지는 그의 가르침은 학생들의 기대에 쐐기를 박기 충분했다.

그런 수업을 앞으로 듣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세오른에서 가르침을 넘어, 인생의 절반 가까이 손해가 아닐까.

처음부터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맛보기로 들은 수업을 중간에 그만둔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물론, 대부분 학생은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당사자인 리네는 울상이 됐다.

천천히 복도를 걷는 루드거를 따라 리네가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리네는 따라가면서도 불길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왜 부른 거지? 설마 개인 면담? 그렇다면 나를 수업에서 쫓아내려고 하는 건가?'

비록 그를 본 건 전날 훈련장의 일을 포함해 3번뿐이었지만, 리네는 루드거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알게 됐다.

루드거의 칼 같은 성격을 생각하면 그녀는 좋게 말해서 다른 강의를 알아보게 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루드거의 수업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아아아! 난 끝났어.'

리네는 괜히 우울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학기 초라 강의를 옮긴다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지만, 다른 교사의 강의도 아니고 루드거의 강의에서 빠져야 한다는 건 매우 뼈아팠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보석을 주웠는데, 그것을 다시 길가에 버려야 한다고 해도 이것보다 슬프지는 않으리라.

"들어와라."

벌써 개인 교무실에 도착한 것인지 루드거는 자신의 명패가 적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리네는 교수대로 향하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루드거의 교무실로 들어갔다.

안쪽은 인테리어 자체가 상당히 세련되고 깔끔했다.

장소도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이 남자가 사용하는 곳다운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앉아라."

"네, 넵."

루드거의 말에 리네는 잔뜩 얼어붙은 채 소파에 앉았다.

분명 고급스러운 소파의 가죽은 너무 푹신해서 편안해야 할 텐데, 리네는 허리를 계속 꼿꼿이 펼 수밖에 없었다.

루드거는 집무용 책상에 앉더니 서랍을 열며 서류 더미를 꺼냈다.

그 모습에 리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아! 역시 나를 다른 선생님의 강의로 보내려는 걸 거야!'

이제라도 무릎 꿇고 빌면서 제발 수업이라도 듣게 해 달라고 조를까? 그랬다가 더 경멸하면 어쩌지?!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그 순간, 리네에게 얇은 책 한 권이 불쑥 내밀어졌다.

리네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라는 건 다 할 테니, 제발 수업을 그만 들으라는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저 이 수업 못 들으면 큰일 나요!"

리네의 필사적인 호소에도 루드거는 흔들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건 그런 게 아니다."

"네, 네? 이건... 강의 변경 신청서가 아니네요?"

"그게 무슨 소리지?"

"네? 저, 저 루드거 선생님의 수업을 더 이상 못 듣는 거 아니었나요?"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어서 받기나 해라."

리네는 루드거가 건네준 책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였다.

이게 대체 무슨 책이람. 그런 생각으로 책의 제목을 살핀 리네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무속성 마력의 이해]

책의 표지에 적힌 큼지막한 글자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 41화 과거의 잔향 (1)

"어, 어라? 루드거 선생님? 이건 대체...."

무속성은 원소 자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들었다.

너무나도 희귀해서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그 방법도 알려지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무속성 마력에 대한 책이 있다니?

"읽어라."

"네, 네?"

"거기 있는 걸 읽으면 적어도 지금까지 몰랐던 길이 보일 거다."

리네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난데없이 교무실에 데려오더니 이상한 책까지 떡하니 주는 건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 이거 진짜예요?"

리네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무속성 마력의 이해]라고 적힌 제목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녀가 알기로는 무속성 마력은 극히 희귀해서 세간에 사용법이 제대로 밝혀진 적이 없다고 들었다.

겉표지를 세세하게 살펴보니 책에는 저자 이름도 없고, 심지어 어디에서 출간했다는 인장도 찍혀 있지 않았다.

이거, 가짜 아니야?

그런 의심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만."

"응? 앗!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표정에서 드러난 걸까. 리네는 황급히 자신의 뺨을 매만지며 표정의 관리에 들어갔다.

다행이라면 루드거는 딱히 그런 그녀를 질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읽어 보고 판단해도 괜찮다. 아무것도 모르던 것보다는 도움이 될 거다."

"마탑에서도 무속성 마력에 대한 정보는 없었는데요...."

"내 소스코드는 마탑에 존재한 마법이었던가?"

"...."

너무나도 훌륭한 반박에 리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면 이게 정말로 진짜라고?

"어, 어디서 이런 귀한 걸...."

"인연이 닿아서 구할 수 있었다."

인연이 닿아서 구할 수 있었다고?

그 말에 리네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이런 게 인연이 닿는다고 구할 수 있던 거였나?

어리둥절한 리네가 루드거에게 물었다.

"...그, 루드거 선생님도 무속성 마력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리네가 본 루드거는, 이 남자도 마치 무속성 마력을 실제로 접해 보고 지식을 쌓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소스코드라는 마법을 만들어 낸 루드거라면, 남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조금은."

"정말요?!"

"그런 사람을, 옛날에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세상에. 저 말고도 무속성 마력의 소유자가 있었다니. 그래서 그분은 지금 어디 계세요?"

"없다. 죽었거든."

"아...."

그렇게 말하는 루드거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회한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리네는 그렇게 느꼈다. 평소의 냉철하고 날카로운 루드거의 모습이, 지금 이 순간은 마치 물에 젖은 솜처럼 어딘가 먹먹하게 느껴졌으니까.

리네는 자신이 괜한 걸 물었다는 듯 조심해졌다.

"죄송해요."

"됐다. 결국, 지나간 옛일이니."

"그러면 이 책은, 그분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건가요?"

"그래. 자신이 일생 동안 자신의 마력을 연구하며 담은 결과물이다. 마탑에도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지."

"이걸 왜...."

마탑에 넘기지 않았고 자신에게 준 거냐고.

리네는 그 뒷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그녀가 그걸 바랐으니까."

아. 여성분이셨구나.

그보다, 그걸 바랐다는 건 무슨 소리일까.

리네는 문득 다른 무속성 마력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마탑에 넘기는 게 공공적으로 더 좋은 게 아닌가요?"

"어차피 마탑에 넘겨도, 탐욕스러운 노인들이 가득한 그곳은 이 책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거다. 아니, 몇몇은 인정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고 저들끼리만 돌려 보겠지. 그럴 바에는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훨씬 더 낫다. 그래서 가지고 있었지."

언젠가 이 책에 걸맞은 사람을 만나면 넘겨주기 위해서.

그 대답에 리네는 루드거를 다시 보게 됐다.

"그러셨구나."

"그 책을 보고 열심히 노력하면, 너도 분명 거기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다른 속성의 마법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루드거의 대답에 리네는 괜히 시무룩해졌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리네도 남들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원소 마법을 사용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실망스러운가?"

"솔직히 말하면, 예. 딱 하나의 원소라도 좋으니 다뤄 보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2개 3개 이상을 다루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5개 이상을 다룬다.

문득 리네는 수업 때 루드거가 보여 준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대체 몇 개나 되는 원소를 다루신 거지?

불, 물, 땅, 바람을 보여 줬고, 심지어 처음에는 얼음 원소까지 사용했다.

그렇다면 5개?

역시 세오른의 교사라는 걸까.

"하나의 원소라."

정작 루드거는 리네의 속마음도 모른 채, 그녀가 한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

"리네.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하나의 원소만 다루는 것은 절대로 우습게 볼 것이 아니다."

"네? 하나라도 다루면 다행 아닌가요?"

"모든 사람은, 정확히는 마법사들은 타고난 원소가 최소 2개는 존재하지. 그렇다면 1개의 원소만 다루면, 그건 대체 뭐라고 생각하지?"

"어, 음. 재능이 없는 사람이요?"

"아니."

루드거는 고개를 저었다.

"단일 원소만 사용하는 사람은, 해당 원소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끝없는 재능을 지닌 사람인 거다."

루드거의 말에 리네는 믿기지 않는지 입을 헤 벌렸다.

그러나 루드거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마법사 중에서 극히 일부지만, 속성 원소를 단 하나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원소를 다루지 못한다고 해서 약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상이었지.

"리네. 마법사가 사용하는 원소 마법이 같은 속성의 마법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예를 들면 불 속성 원소를 다루는 마법사가, 뜨거운 화재의 불길을 제압한다든가."

"어, 그건 아니지 않나요?"

리네에게도 그 정도 상식은 있었다.

화염 원소를 쓸 수 있다 해서 실제 불을 다룰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착각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불 마법사라면 불을 다루니 뜨거운 불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고.

금속을 다루는 마법사라면 온갖 금속을 다루니, 전쟁에서 대단한 힘을 발휘하지 않겠냐고.

그건 틀린 말이다.

원소의 '발현'과 해당 원소를 '다루는 것'은 전혀 별개의 개념이다.

"그래.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태생적으로 단 하나의 원소만 타고난 마법사들이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일반적인 마법사가 다루는 속성 원소와는 전혀 다르지."

남들이 최소 2개 이상의 원소를 사용할 수 있을 때.

오직 1개의 원소밖에 다루지 못하는 단일 속성 마법사들.

그들은 다른 속성 원소를 다루지 못하는 대신, 자신이 다루는 원소만큼은 '지배'할 수 있다.

"세간에 알려진 단일 속성 마법사에게는 마탑에 해당 원소의 '색(色)'의 칭호를 내린다. 그자들은 모두 자신의 원소에 극의에 달한 자들이라는 소리지."

"단일 원소를 다룬다는 게 그런 거였군요...."

리네는 자신의 식견이 짧음을 통감하며 얼굴이 발갛게 상기됐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단일 원소라도 좋으니' 하고 있었으니, 루드거의 입장에서는 퍽이나 우습게 보였을 것이다.

우습게 보던 단일 원소조차도 이런 대단한 벽이었다니.

그렇다면 정말 원소를 다루지 못한 채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리네는 덜컥 겁이 났다.

"리네. 너는 무속성 마력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지?"

"어... 말 그대로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요?"

리네는 고민하다가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그런 건 지나가는 어린아이에게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 나올 거다."

"...죄송합니다."

"세간에서는 무속성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무속성 마력에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 건지는 명확하지 않다."

"네? 정말요?"

"대표적인 예시로 소리의 마력이 있겠군."

소리의 마력이라는 말에 리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머리를 살짝 갸웃거렸다.

"소리의 마력이라는 게 따로 존재하나요?"

"그래."

"하지만 소리는 그, 정확히 대기라는 매질을 타고 전해지는 일종의 파동으로...."

"바람 속성과 같다고 보는 건가?"

"저는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아니. 틀리다. 바람 속성과 소리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에서 파생되기는 했지만, 소리는 정확히 말하자면 진동에 의한 파동에 가깝다."

"어, 다른 건가요?"

"굳이 공기가 아니라도 소리의 파동은 물속에서도 퍼진다. 그러면 소리가 물 속성이라 할 수 있는가?"

"그건... 아니네요."

설명을 하는 것에 약간 재미가 붙은 것인지, 루드거가 대뜸 하나 더 물었다.

"그렇다면 독은 무엇일까."

"독...이요?"

"무속성이라 불리는 것보다는 조금 흔하지만, 그래도 독을 다루는 마법사 또한 희귀하다. 그들이 다루는 독은 과연 자연의 원소라 할 수 있을까?"

"어, 음.... 식물, 이라거나?"

"그렇다면 동물이 지닌 독은 뭐지?"

"그, 그것도 있네요."

리네는 자신이 아는 지식에서 독에 대해 설명했다.

"으음. 애초에 독 자체가 식물이나 자그마한 짐승이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 낸 일종의 자기방어 수단이잖아요? 그것을 자연의 원소라 하는 건 좀 애매하지 않을까요."

"그래. 과학의 발전과 함께 화학적인 지식이 깃든 지금에서 독을 자연의 속성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독은 결국 속성으로 존재한다. 마력 자체가 무언가를 부패시키고, 녹이는 게 독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게 아니라면 분해 속성이 따로 존재해야 할지도 모르지."

"그건, 그렇네요?"

"하지만 무속성을 제외한 10대 원소에서 독은 속성에 끼지도 못한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런 걸까?"

"어, 사용하는 사람의 숫자가 적어서요?"

"그렇게 따지면 빛과 어둠 속성의 마력을 지닌 사람도 거기에 해당된다. 그들도 희귀한 케이스니까."

"하지만 빛과 어둠은 자연에 존재하잖아요."

"그렇다면 묻겠다. 리네. 자연이란 무엇이지?"

"네? 그야...."

리네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쏙 다물었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거기에 내포된 속성, 원소란 무엇인가.

자연? 그건 세계가 아닌가? 그런데 세계라고 하면 너무 포괄적인가? 그러면 원소?

"복잡해 보인다는 얼굴이구나."

"어, 음. 네.... 생각해 보니까 뭔가 명확하게 정의하진 못할 거 같아요."

"당연하다. 인간은 애초에 세계를 함부로 정의하지 못하니까."

"네?"

도저히 마법을 가르치는 교사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말에, 리네는 순간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입을 헤 벌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도 루드거는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마법사들은 자신이 이성적이라 판단하고, 이 세상을 그런 이성의 틀 안에 집어넣어서 보려고 하지."

"그, 그야 당연하죠. 애초에 마법이라는 것이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 신비를 표출하는...."

"그것부터 틀에 박힌 생각이라는 거다. 리네. 더 자유로운 사고를 가져라. 지금 10대 속성 중에 존재하는 금속이 언제 나타났다고 생각하지?"

금속은 본래 속성 원소로 평가되지도 않았다.

금속이란 결국 땅에서 나오는 것. 그 자체를 흙이자 대지의 속성이라고 뭉뚱그려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고, 철로 만들어진 온갖 기계와 도구들이 점차 대중적으로 퍼지게 되면서.

금속은 당당하게 10대 원소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됐다.

"얼음도 그렇다. 얼음은 결국 물이 어는점 아래로 내려가면서 일어나는 변화일 뿐이지. 그러면 결국 물과 얼음은 같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결국 물의 속성과 얼음 속성은 별개로 나뉘어 있다.

빛도 어둠도 마찬가지다.

"리네. 너는 지금의 마법이 마치 더는 개량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무언가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아...."

루드거의 그 말에 리네는 번개 하나가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기분을 맛봤다.

어깨가 움찔 떨리며 그녀의 허리가 꼿꼿하게 섰다.

여태까지 그녀는 마법 자체를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그야말로 아득한 단계의 무언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마법은 더는 바뀔 수 없는가?

그렇지 않았다.

리네가 무언가를 느낀 것을 눈치챈 루드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드디어 깨달았군. 바로 그거다. 마법사란 마법을 지배해야지, 마법에 지배당해서는 안 되는 거다."

루드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이 시대의 미래를 책임질 세오른 아카데미의 풍경.

분명 대단하고 멋진 곳이지만.

이곳이 완벽한 곳이냐고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세상은 변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세상의 일부에 속한 우리도 변하지. 그건 마법도 마찬가지다. 초기에 4개의 원소였던 속성은 어느덧 10개가 됐지만, 그 10개가 모든 것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속성이 존재할 수도 있지. 그게 20개가 될 수도 있고, 30개가 넘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렇기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네가 지닌 무속성 마력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무속성이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새로운 속성으로 이름을 얻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분명 미래의 어느 순간엔 그렇게 될 거다."

그 말에 리네는 무언가 흐릿한 환상을 봤다.

아무것도 없던 자신이, 무언가 한 분야에서 대단한 업적을 이룩한 성공한 미래의 모습을.

그것은 그녀가 꿈에 그리던 모습이고 또 너무나도 눈부셔서, 자기도 모르게 가녀린 손으로 주먹을 꼬옥 말아 쥐었다.

창가에서 시선을 뗀 루드거가 몸을 돌렸다.

아.

현실로 돌아온 리네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창가에서 내려오는 빛을 등진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루드거의 모습은 어째서인지 평소에 보여 주는 강압적인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다.

강철의 기둥 같던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그녀와 같은, 마법을 배우는 한 명의 탐구자였다.

"다르다고 두려워하지 마라. 미지를 겁내지 마라. 네가 남들과 다른 무엇이 되는 게 아닌, 역사에 남을 선구자가 될 수 있음을 믿어라."

리네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술을 뗐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무겁고 거대한 무언가가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조차 어그러져 말로서 형상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답답하고 괴로운 느낌은 아니었다.

이건 지금껏 맛보지 못한 극상의 환희였다.

루드거가 한 그 말이, 지금까지 그녀가 품고 있던 불안한 미래를 단숨에 찢어 버렸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감사를, 감사 인사를 전해야....

"그러니 앞으로 잘해 봐라. 오늘 건넨 책은 꼭 읽어 보도록. 이건 너에게만 주는 개인 과제다."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더니 가벼운 바람을 일으켰다.

순풍은 그대로 리네의 몸을 부드럽게 휘감더니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고는, 교무실 바깥까지 안내했다.

"아, 저...!"

교무실의 문턱을 넘자 마법이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통이 탁 트였다.

리네는 바로 뒤를 돌아보며 루드거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철컥.

그보다 문이 닫히는 것이 더 빨랐다.

◈ 42화 과거의 잔향 (2)

루드거와 한 차례 면담을 겪은 리네는 어딘가 꿈을 꾸는 것 같은 몽롱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품 안에는 루드거가 건네준 무속성 마력에 대한 책이 꼬옥 안겨 있었다.

정신이 어딘가 팔려 있는 와중에도, 이것만큼은 반드시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빠른 발걸음으로 복도를 거닐던 리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리네."

"어, 엇? 서, 선배님?"

이쪽을 부르는 부드럽고 듣기 좋은 목소리.

자신과 같은 발현계 수업을 듣는 2학년이자, 세오른 내에서도 유명도를 따지만 단연코 최고를 달리는 제국의 3황녀.

에렌디르가 리네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님이 여기는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걱정이 돼서 혹시 몰라서 기다리고 있던 거야. 루드거 선생님한테 불려 갔잖아."

"네? 아, 아! 그랬죠. 맞아. 헤헤."

"음?"

뭔가 이상한 리네의 반응에 에렌디르는 더욱 수상함을 느꼈다.

"리네. 혹시 루드거 선생님이 너에게 무슨 해코지를 했다든가...."

에렌디르는 이 전부터 루드거의 행동을 자체를 그렇게 좋게 여기지 않았다.

첫인상이 최악이었기 때문이리라.

첫 오리엔테이션 때 루드거는 자신의 수업에서 무슨 내용을 가르칠지 말해 주지도 않은 채 배짱을 부렸다. 그것 때문에 <아카식 레코드>에서도 학생들 사이에서 말이 많이 나왔으니 오죽했을까.

실제로 루드거에게 약간 날 선 어조로 질문을 먼저 날린 것도 에렌디르 그녀였다.

올바른 정의로운 가치관을 지닌 그녀에게, 루드거의 행동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형태였다.

이후에 수업 내용은 상당히 대단해서 그녀도 감탄했지만, 그것만으로 처음에 박힌 나쁜 인식이 바로 풀리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지난번 늑대인간 사태로 오히려 그녀에게 싸늘하게 말하는 루드거의 태도에 더욱 뿔이 난 상황.

자연히 루드거가 리네를 교무실로 데려갔다고 하니, 나쁜 생각부터 드는 건 당연했다.

"그, 그렇지 않아요!"

리네는 황급히 루드거를 변호했다.

"루드거 선생님은 그냥 저한테 상담을 해 줬을 뿐이니까...! 그, 절대 막 저에게 손을 댔다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루드거 선생님은 그런 변태가 아니에요!"

"뭐어?"

그렇게 말하자 오히려 당황한 건 에렌디르였다.

에렌디르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더니 상당히 놀란 어조로 말했다.

"나, 나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리네 후배는... 은근히 엉큼하구나."

"예, 예?!"

"그냥 강의를 옮기라거나, 혹은 강제로 다른 수업을 들으라고 쫓아내는 거에 대해서 말한 거였는데. 나, 남자와 여자의 그런 관계를 떠올리다니...."

"어, 어? 자, 잠깐만요! 그런 거 아니에요!"

리네도 자신이 무언가 큰 착각을 했다는 걸 깨닫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당황해서 필사적으로 뭐라고 말하려는 리네의 모습에, 에렌디르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하하. 알았어. 내가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런 거로 여길게."

"...정마알."

"그래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네. 없었다니까요."

"그러면 그 책은 뭔데?"

"아."

에렌디르는 리네가 처음 보는 책을 품 안에 안고 있는 걸 발견하고 그걸 지적했다.

애초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 리네는 지금 저 책을 매우 소중한 무언가처럼 조심히 다루고 있었다.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이건, 루드거 선생님께서 주신 거예요."

"루드거 선생님이?"

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렌디르는 조금 믿기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루드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 남자의 성격상 자신의 수업 자체를 따라오지 못하는 리네를 챙겨 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수업에서 쫓아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 저에게 이걸 익히면 수업을 따라오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어요."

"정말?"

배시시 웃는 리네의 모습에 에렌디르는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그 루드거가 이런 호의를 베풀어 준다고?

그 남자는 당장 이전 수업 때만 해도 학생들의 속성 원소 구현을 통렬하고 잔인하게 지적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것이 전부 맞는 말이며,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림으로써 의욕을 고취시키겠다는 방식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에렌디르는 그런 방식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잠깐. 그때도 유독 리네한테 친절하게 대했던 것 같았는데.'

늑대인간이 습격했을 때.

루드거는 황녀인 자신은 오히려 모질게 대하고, 리네에게는 조금 부드럽게 말했던 기억이 났다.

물론 그때의 기억은 약간 루드거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약간의 왜곡이 들어갔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 리네를 따로 불러서 서적까지 건네준 걸 보면.

설마....

에렌디르는 문득 생각난 말이 있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때 리네가 무언가 고민을 하더니, 에렌디르에게만 들리게끔 조심히 물었다.

"혹시, 선생님께서 절 좋아하시는 게 아닐까요?"

"...."

에렌디르가 속으로만 품고 있던 생각을 정작 리네가 본인 입 밖으로 냈다.

에렌디르는 이걸 대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래."

"아니구나."

리네도 본인이 뭔가 말해 놓고 사실 좀 아니구나 싶었다.

하지만 막상 그런 말을 내뱉고 나니 의심이 들기도 했다.

진짜 루드거 선생님이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 자랑 같지만, 리네는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나 정도면 예쁘지 않나?'

아닌 것이 아니라 리네는 실제로 어지간한 귀족들조차도 눈길을 이끌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보기 드문 희귀한 머리카락 색도 머리카락 색이지만, 거기에 어울리는 천상의 미모는 세오른에서 남학생들 사이에 리네의 이름을 오르내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문득 리네는 자신이 루드거와 함께 있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뭔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리네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랑 그러는 건....'

리네는 은근히 이런 쪽으로는 보수적인 성격이 강했다.

혼자서 멍한 얼굴이 됐다가 고개를 바로 젓는 리네의 모습을 보던 에렌디르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식사는 했니?"

"네? 아, 아뇨. 아직."

"그러면 같이 먹을래?"

"저, 정말 그래도 돼요?"

설마 했던 황녀님의 식사 제안에 리네는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에렌디르라면 자기 말고도 같이 밥을 먹겠다는 사람이 줄을 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리네의 착각이었다.

에렌디르는 지금까지 누구와 함께 다닌 적이 거의 없었다. 황녀라는 신분은 대단했지만, 그것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로부터 기피를 받았다.

간혹 말을 거는 귀족 가문의 학생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접촉했을 뿐. 순수하게 에렌디르라는 사람이 좋아서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보는 건 3황녀였지, 에렌디르가 아니었다.

그래.

에렌디르는 까놓고 말하면, 세오른 내에서도 혼자 다니는 아싸였던 것이다.

그런 에렌디르였기에 모처럼 친해진 후배에게 용기 내서 식사 제안을 한 것이다.

'세상에. 나한테 밥 같이 먹자고 한 사람은 선배가 처음이야!'

그리고 학기 초의 사건 때문에 내내 혼자였던 리네의 눈에는 그것이 선배님의 대단한 자비처럼 비쳤다.

리네의 대답이 늦어지자 거절이라 생각한 건지, 에렌디르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금발을 비비 꼬며 말했다.

"아니, 뭐. 싫거나 불편하면 어쩔 수는 없는데...."

"아뇨! 먹을래요!"

리네와 에렌디르에게 이 순간 처음으로 밥을 같이 먹는 친한 사람이 생겼다.

* * *

리네를 돌려보낸 나는 교무실에 혼자 앉아서 조금 전 그녀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나는 그녀가 어떤 힘을 지녔는지 알고 있다.

'무속성 마력. 속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건 그렇게 놀라울 일이 아니야.'

나에게 있어서 무속성이니 지금까지 발견되지 못한 새로운 형식의 마법이니, 그런 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한테 마법이란 언제나 새로운 것이었으니까.

마법이 없던 세상에서 살던 나였기에, 오히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마법은 항상 신비의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의 주민인 마법사들보다도, 다른 세계의 기억과 지식을 가진 내가 훨씬 더 마법을 마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꽉 막힌 사고방식을 지닌 작금의 마법사들은 자신의 삶에 고립되어 정체되었지만.

죽음과 새로운 삶을 얻으며, 거기에 마법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은 나는 다른 이들보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한 차원 달랐다.

뇌의 리미터가 풀렸다고 해야 하나.

새로운 마법을 발견하는 여타 마법사들이

-무속성 마력?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다!

하고 입에 거품을 물때도 나는

-무속성 마력?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인데, 그런 것도 있을 수 있겠지.

하고 융통성 있게 넘어가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마법을 바라보고 인지하는 관점 자체가 이 세계의 마법사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깐깐한 스승님조차 나를 가르칠 때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혀를 내두르셨지.

다만, 내가 리네를 보며 신경을 썼던 것은 그녀가 지닌 마력이 아닌, 그녀의 눈동자였다.

무속성 마력은 그녀가 지닌 힘 일부일 뿐.

진짜는 바로 '눈'이다.

'그 눈동자.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더니.'

나이가 지긋하신 내 스승님께서는 지금 와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온갖 오래된 고서들을 지니고 계셨는데, 대표적으로 수백 년은 더 지난 몬스터들과 악마에 관한 책이었다.

지금이야 아주 소수의 크립티드를 제외하면 몬스터가 없다고는 하지만, 옛날에는 이 대륙에는 온갖 몬스터들이 득실득실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몬스터들을 부리는 악마까지도.

'순간이지만 그녀가 보였던 그 눈빛.'

나는 리네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은은한 청색을 띠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

그러나 조금 전 대화를 나눌 때, 나는 리네의 눈동자 색이 미묘하게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진청색의 홍채 사이에 떠오르는 것은 하늘의 별빛처럼 반짝이는 새하얀 빛.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담은 고요한 수면을 닮았다.

그 특이한 눈동자를 내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

'선과 악을 구분한다는 눈, 판정안(判定眼).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리네는 저 판정안의 소유자야.'

판정안은 타인의 선악을 구분해 주고, 그것을 넘어 자신에게 적의가 있는지 없는지도 뚜렷하게 보여 주는 눈이다.

마법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오히려 말 그대로 기적과 신비에 가까운 능력.

이 판정안의 가장 대단한 점은 인간들의 틈새에 숨어 있는 '악마'들의 모습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 악마들이 거의 전설로만 취급받고 있지.'

지금 사람들에겐 악마는 그저 동화 속에서만 나오는, 머리에 뿔 달리고 붉은 피부를 지닌 나쁜 놈들일 뿐이다.

어린아이를 겁주기 위한 거짓의 산물.

하지만 문헌을 보면 아무래도 악마는 실존했던 것 같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에 악마도 있겠지. 나도 죽었다 다시 살아났는데, 그런 거라고 없을까.'

그리고 리네의 눈은 그것과 크게 연관이 있었다.

기록으로만 존재하던 판정안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두 눈으로 보고 말았으니.

다르게 말하면 악마를 구분하는 판정안의 존재가 악마도 실존 여부도 결정하는 것이 아닌가.

판정안의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나타났다 하면 시대를 불문하고 큰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리네의 판정안은 완전히 각성한 상태가 아니었고, 본인도 아마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모르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깨닫게 되리라.

'이것도 결국 인연이라는 건가.'

내가 리네에게 넘겨준 무속성 마력에 대한 책.

설마 '그녀'가 집필한 그 책이 돌고 돌아 리네에게 돌아가게 될 줄이야.

리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조금 골치가 아프군.'

그녀가 판정안의 소유자라는 걸 깨닫게 된 것도 그렇고, 과거의 인연을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도 그렇고.

'세오른에서 이런 일에 엮이게 되다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네가 저 판정안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이 세오른에 숨어든 비밀 결사 단원들을 모조리 색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특히 지금 당장 나에게 가장 위협적이라 할 수 있는 건 아직도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퍼스트 오더였다.

대체 정체가 뭐고, 어디에서 뭘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세디나 로쉔에게 물어보는 것도 그렇고.

'최대한 경계를 한다고는 하는데, 짐작이 가는 게 있어야지.'

그 퍼스트 오더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나도 최대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네의 판정안이 제대로 가동한다면, 어쩌면 내게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에이단과 그 친구들을 위시한 삼총사와 거기에 더한 리네까지.

이 아이들의 힘을 교묘하게 이용하면 어쩌면....

'아니, 됐다. 일단 퇴근부터 하자.'

외투를 챙겨 입고 교무실을 나서기 위해 문을 연 나는, 이윽고 문 바깥에서 꺄악 하는 소리를 듣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야야."

문에 이마를 부딪쳤는지 머리를 감싸 쥔 채로 바닥에 주저앉은 진청발의 소녀.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는 당황스러운 속마음과 다르게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여긴 어쩐 일이지? 플로라 루모스."

◈ 43화 프레임 워크(Framework)

"플로라 루모스. 여기에는 대체 어쩐 일이지? 그것도 도둑처럼 기척을 죽이고 문 근처에서 서성거리다니 말이야."

루드거의 지적에 플로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헛기침을 하며 교복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루드거가 문을 열면서 부딪친 이마는 아직도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녀는 애써 괜찮은 척을 하며 입을 열었다.

"흠흠. 반가워요, 루드거 선생님. 그냥,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도도하게. 우아하게.

스스로 되뇌듯 그렇게 행동했지만,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는 건 감출 수 없었다.

루드거는 그걸 지적하려다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수업 내용과 관련된 질문이라면 언제든 찾아와도 상관없지만, 이렇게 바깥에서 기다릴 필요까지는 없었을 텐데."

"아뇨. 그거 말고요. 일단은 루드거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감사의 말?"

"제가, 그... 마법을 실패해서 폭주할 뻔한 걸 구해 주셨잖아요."

왜 찾아왔나 했더니 그거 때문이었나.

그런데 감사하다고 전하러 왔다고?

루드거가 의외라는 시선으로 응시하자 플로라는 발끈했다.

"왜요?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아무것도 아니다."

"씨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고마움을 입에 담는 적이 없어서 그런지, 플로라는 그런 자신이 매우 어색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도 뭔가 피부가 간질거리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꼭 이 말은 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덕분에, 저도 다치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교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너무 딱 잘라서 말하는 루드거의 목소리는, 마치 자신에겐 사심 따윈 전혀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플로라는 다행인 것 같으면서도 그게 또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쪽도 괜찮냐고 물어봐 줘도 되는 거 아닌가.

감수성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남자 같으니라고.

그래도 일단 사과를 하러 온 자리니 불평 어린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의 말씀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녀는 자신의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비비 꼬며 발했다.

루드거는 그 말에 또 뭔지 곰곰이 떠올렸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가 뭘 말하는지 깨달았다.

중첩 원소 마법을 사용할 때 그거 가지고 잔소리를 했던 걸 말하는 것이리라.

-의미 있는 마법을 사용해라. 네 가치를 낮추지 마라.

그거였나.

"알았으면 됐다."

"...그보다 그, 선생님은 괜찮으세요?"

플로라의 물음에 루드거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뭘 말이지?"

"마력 소모가 심하셨을 거 아니에요. 저도 마력 억누르느라 진이 다 빠졌는데, 선생님은 저보다 더 힘드시지 않았어요? 원래 이런 건 도와주는 사람이 몇 배나 되는 부담을 안는 거잖아요."

"아무렇지 않다."

루드거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마력 고갈로 기절할 뻔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미리 챙겨 놓은 마력 회복약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꼴사납게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평소에 마력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서 약을 많이 챙겨 놓길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그 준비한 약을 플로라의 폭주를 막아 내는 데 거의 다 소모하게 됐지만.

'뭐, 그건 또 만들면 되니까.'

이곳은 세오른.

당연히 약제학 수업을 가르치는 곳도 있으며, 연구동에는 교사들 또한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한 약제실도 존재한다.

원하는 약제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약제실에는 어지간한 재료들도 다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교사들은 원할 때마다 그냥 출입 명부만 작성하고 바로 실험을 해도 상관없었다.

플로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물었다.

"그, 루드거 선생님은 원소를 몇 개나 다루세요?"

"그건 왜 묻지?"

"그냥요. 수업 때 5개나 다루시던데. 그거면 꽤 많은 거 아니에요?"

루드거는 갑자기 플로라가 왜 이렇게 자신에게 질문을 많이 하는지 의아했다.

천재라는 아이들은 대부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에고가 강하기 때문에 남과 이렇다 할 대화를 이어 나가지 않는다.

루드거는 플로라도 그런 부류라고 생각했다. 이번 수업 때 제멋대로 삼 중첩 속성 원소를 사용하려 했던 것도 그것의 일환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아직 학생은 학생이라 이건가.

자신을 가르치는 교사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거겠지.

루드거는 뭐라 답할지 고민했다.

'사실 뭐, 원소는 그냥 거의 다 다룰 줄 아는데.'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10대 원소.

루드거는 그것을 '전부' 사용할 줄 알았다.

단 하나의 원소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대신 해당 원소에 극의를 이룬 단일 속성 마법사와는 정반대라 할 수 있었다.

전 속성 사용자.

하지만 그렇기에 어느 하나의 원소에도 일정 수준을 이루지 못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대단한 재능에 만능처럼 보이겠지만, 정작 루드거 본인은 자신을 이도 저도 되지 못한 잡캐라고 평가했다.

'그렇다 해도 여기서 다 쓸 줄 안다고 말하면 그거대로 문제고.'

마탑의 역사 속에 남아 있는 마법사 중에서 가장 많은 원소를 다뤘다고 알려진 게 8개다.

이것은 마법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위자드 북>에 명시된 공식 1위의 기록이다.

그런데 루드거는 지금 그 1위의 기록을 이미 깨부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아마 마탑은 한 번 더 뒤집히다 못해 난리가 날 거다. 성질이 급한 인간이라면 루드거를 산 채로 해부하고 싶어 하리라.

정작 루드거는 자신이 이 10대 속성 원소를 전부 다룬다는 것을 별로 특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초에 스승님도 나한테 별로 좋은 소리는 안 하셨고.'

전생의 삶 이후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지내며 루드거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존재를 꼽으라고 하면 당연히 1위가 스승님이다.

어릴 때부터 마법을 가르쳐 주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과 그 외 잡다한 팁과 여러 가지 지식을 전수해 주신 분.

본인은 순수하게 루드거가 특이하고 재미있어서 그저 애완동물 하나 키운다는 생각으로 제자로 들인 거지만.

그걸 감안해도 루드거는 스승에게 꽤 큰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워낙 성격이 괴팍하신 분이라, 루드거의 소스코드 마법을 보면서도 '나쁘지 않네'라고만 평가했을 정도.

당연히 10대 원소를 모두 사용하는 루드거에게 '고작 그런 거로 어디 가서 잘난 척하면 돌 맞는다'라고 충고를 해 준 것도 그런 스승님이었다.

그래서 루드거는 스승의 진지한 조언과 가르침의 아래에, 자신이 10대 원소를 모두 다룰 줄 안다고 해도 절대 자만심을 품거나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객관적으로 10대 원소를 전부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의 심각성은 인지하고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알리거나 하지는 않았을 뿐.

그래서 루드거는 그냥 이번 수업 때 보여 준 5개의 원소로 넘기기로 했다.

"그 5개가 전부다."

"5개라.... 의외로 많네요."

"질문은 그걸로 끝인가?"

"아. 소스코드 관련된 것도 있어요. 소스코드는 수업을 듣는 모든 학생에게 다 전해 주는 건가요?"

첫 수업 때 루드거는 일부러 소스코드를 보여 주며 학생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그것은 단순히 보여 주기에 그치지 않았다. 루드거는 실제로 학생들에게 소스코드를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다만 누구에게, 얼마만큼, 그리고 언제 가르쳐 줄지는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보니 공지를 안 했군. 모두에게 전부 똑같이 알려 주지는 않는다. 이 마법은 내게도 밑천이나 다름없으니까. 조건이 있지."

"그 조건이 뭔가요?"

"상위 5명 정도에게만 내가 직접 전수해 주는 것."

그 대답에 플로라는 흥미롭다는 듯 미소지었다.

"5명이라. 좀 적네요. 그래도 총 정원이 80명인데."

"그럴 만한 마법이니까."

"평가는요? 학기 마무리 평가로 내리시는 건가요? 세오른은 한 학기에서도 총 4번의 파트를 나눠서 평가가 진행되잖아요. 평가마다 순위가 계속 바뀌어서 결정하기 힘드실 텐데."

"그럴 걸 예상해서 방법을 고안해 뒀다. 바로 이거지."

루드거는 곧바로 손바닥 위로 하나의 마법 술식을 떠올렸다.

새하얀 마력의 선으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자칫 단조롭게 비칠 수 있었지만, 그것이 자아내는 복잡한 구조는 절대로 이 마법을 우습게 여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플로라 또한 마법 자체에서 느껴지는 색감에 나지막한 감탄사를 흘렸다.

"그건... 일부, 네요? 정확히 선생님께서 보여 주셨던 소스코드 마법의 일부."

"정확히 봤다."

루드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라의 말대로, 그가 지금 선보인 마법 술식은 소스코드를 구성하는 메인 부품 중 하나.

"나는 이걸 <프레임 워크>라 부른다."

"프레임 워크...."

"내가 발현하는 마법인 소스코드는 총 4개의 프레임 워크로 구성되어 있지."

"그러면 분기별로 상위 5명에게 이 프레임 워크를 주시려는 거예요?"

"그래. 학기를 4개의 파트로 나눠서, 4개의 프레임 워크를 각자 한 개씩 전수해 준다. 즉 꾸준히 상위 5위 안에 들지 못하는 녀석은 제대로 된 마법을 받지 못하는 거지."

한 번만 5위 안에 든다고 해서 완전한 소스코드를 받을 수 없다.

결국, 소스코드라는 마법을 제대로 전수받고 싶다면, 한 학기 동안 정말 죽어라 수업을 듣고 과제를 꾸준히 제출하며 시험을 잘 치러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걸 깨달은 플로라는 조금 황망한 눈빛으로 루드거를 응시했다.

"...되게 계산적이시네요."

"궁금한 건 이걸로 풀렸나?"

"그런데 이걸 저한테 막 보여 주셔도 돼요?"

"뭘 말이지?"

"그 프레임 워크인가 하는 거요. 괜히 제가 분석하면 어쩌시려고."

플로라는 아직도 루드거의 손 위에 떠 있는 프레임 워크 술식을 가리켰다.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 해도 그렇지 술식을 이렇게 대놓고 계속 드러내고 있는 것은 마법사로서 보일 모습이 아니다.

그만큼 상대방을 신뢰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한 일.

'아.'

루드거는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개발한 술식을 남들에게 오래 보여 주지 않는다.

논문으로 내거나 특허를 제출하면 모를까, 이 술식을 베껴서 자기 거라고 우기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는 골치가 아파지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마법사들이 철저하게 자신만의 비전 마법을 비밀로 두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루드거는 자신의 실수를 인지했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판단했다.

"상관없다."

"네?"

"어차피 너라면 보여도 상관없으니까."

특히 상대가 플로라 루모스라면 더더욱.

플로라 루모스는 천재다.

그녀의 천재성은 루드거도 소문으로만 들어서 몰랐지만, 오늘 수업에서 삼 중첩 속성 원소를 조금 도와줬을 뿐인데 완성한 걸 보고 확실히 깨달았다.

-아. 얘는 내 수업에서 뭘 해도 1등 먹겠구나.

만에 하나라도 1위를 못해도 꾸준히 5위 안에 들 테니, 어차피 프레임 워크 하나 정도를 보여 줘도 문제 될 일은 없을 터.

그녀라면 충분히 소스코드 마법 전체를 전수받을 수 있으니까.

"네, 네?!"

하지만 플로라는 루드거의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더니 이내 평소의 도도함은 온데간데없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그그그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왜 그렇게 당황하지? 틀린 말은 아닐 텐데. 어차피 너는 내 수업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하고 프레임 워크를 받아 갈 생각이지 않나."

"아, 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건 반칙이라구요.

플로라 루모스는 루드거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했다.

이쪽에게는 보여도 상관없다니.

그런 건 마치, 나를 특별하게 취급하는 것 같잖아.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것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퉁명하게 아닌 척해도, 이 남자가 자신을 제대로 봐 주고 있다는 사실에 플로라는 입꼬리가 움찔거리며 계속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면 난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루드거가 등을 돌리자 플로라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불러 세우고 말았다.

"아, 선생님!"

"또 뭐지? 더 궁금한 게 남아 있는 건가?"

"아뇨. 그,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쪽을 돌아보며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루드거의 얼굴을 보자, 플로라는 얼굴이 폭발할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 그 말을 들은 상태로, 도저히 루드거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눈빛이 닿기만 해도 피부가 간질간질해지고, 솜털이 오소소 돋아난다.

이상하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루드거는 혼자서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플로라의 모습을 싱겁게 보더니 이내 등을 돌리며 자리를 떠났다.

떠나가는 루드거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플로라는 겨우 이성을 되찾으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진정해. 플로라 루모스. 너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언제나 도도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능력으로 타인을 손쉽게 농락하던 게 자신 아니던가.

루드거에게는 비록 첫날 도전했다가 처참하게 깨지고, 이번에도 또 패배했지만. 아직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넘어서기 위해 다짐하지 않았는가.

벌써부터 이렇게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됐다.

플로라는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그 평민 소녀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깜빡했다.'

아닌 척해도 묘하게 루드거가 리네를 따로 부른 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 44화 위험한 내기 (1)

마리 로스 선생님이 가르치는 약제학 수업이 모두 끝난 이후, 에이단은 루드거가 지난번에 가르쳐 줬던 속성 원소의 감각화를 떠올리며 마법 연습에 몰두했다.

그런 에이단의 곁에는 이제는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레오가 있었고, 최근에 합류해서 에이단과 자주 지내는 테이시도 함께였다.

세 사람은 1훈련장에서 저마다의 원소를 구현시키며 속성 원소의 숙달에 힘을 썼다.

"후우. 거의 다 됐다."

에이단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구현된 바람의 원소를 보며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시골의 넓은 들판을 달리며 느낀 포근하고 시원한 바람의 기억.

그것이 지금 눈앞에, 완벽하지는 않아도 거의 흡사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속성 원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이 이 정도의 원소를 구현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에이단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전부 루드거가 가르쳐 준 방법 덕분이었다.

'역시 굉장해.'

그가 해 준 조언은 빼먹을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실용적이었다.

루드거의 조언뿐만 아니라 그가 수업 때 내비친 마법을 대하는 태도는 에이단의 심금을 울리기 충분했다.

'역시 내가 그때 루드거 선생님을 의심했던 건 착각이었던 걸까?'

루드거가 보이는 말과 행동은 언제나 차갑고 싸늘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마법을 얼마나 좋아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고찰하는지 잘 느껴졌다.

마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나쁠 리가 없다.

무엇보다 루드거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남들이 가르쳐 주지 않는 그런 소중한 방식을 수업 때 학생들에게 전수해 줄 리가 없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에이단은 루드거에게 무언가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루드거가 나쁜 사람이라고 느끼지는 않았다.

그 모순된 감정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졌기 때문일까.

겨우 구현한 바람 원소가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쩝 하고 입맛을 다신 에이단은 레오와 테이시를 바라봤다.

두 사람도 땀을 흘려 가며 속성 원소 구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첫 수업에서 에이단이 보여 준 따뜻한 불꽃에 두 사람도 감명을 받은 탓이었다.

그 좋은 모습을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때마침 훈련장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들어왔다.

'저 애들은....'

일부 학생 중에서 에이단의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었다.

약간의 푸른 기가 맴도는 검푸른 머리카락.

그것을 이마가 보이게 가르마를 탄 정갈한 헤어스타일.

반대로 창백하게 느껴질 정도로 새하얀 피부와 오뚝한 콧날, 그리고 가늘게 뜬 날카로운 눈이 눈에 띄었다.

타고난 귀티가 철철 흐르는 그는 2학년으로 보였는데, 주위 학생들이 모두 그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누구지? 귀족 학생들이 저렇게 모일 정도라니. 엄청 대단한 사람인가 보네.'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때마침 그도 고개를 돌려 에이단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에이단은 문득 레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귀족 학생들과는 어지간하면 눈을 오래 마주치지 말고 관심도 갖지 말라고 했던가.

'서로 친해지면 좋은데 왜'라고 물어볼 정도로 에이단도 멍청하지는 않아서, 그대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상대도 딱히 이걸 가지고 지적하지 않았다.

에이단은 적당히 휴식도 취했으니 다시 마법 연습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어라? 이게 누구야."

몰려 있던 귀족 학생 중 하나가, 큰 소리로 말하며 에이단에게 다가오기 전까지는.

그 목소리에 집중이 풀린 레오와 테이시도 마력을 거두고 상대를 바라봤다.

에이단을 응시하면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학생.

"아, 너는."

낯이 익다 했더니 학기 초에 에이단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레오에게 쓴소리를 듣고 물러났던 펠리오 남작가의 장자인 제반 펠리오였다.

"쟤는 또 왜 갑자기 아는 척이야?"

그를 알아본 레오의 표정이 삽시간에 썩어 들어갔다.

제반 펠리오는 그걸 신경 쓰지 않은 채 일부러 보란 듯이 에이단 일행을 향해 다가갔다.

"속성 원소 구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 에이단 씨 아니신가?"

일부러 속성 원소를 구현하지 못했다는 부분을 강하게 지적하는 제반.

에이단을 비롯한 친구들이 그의 속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레오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이봐 제반. 우리는 지금 마법 연습하느라 바쁘니까 너는 저 구석으로 꺼지시지그래?"

"하. 누구인가 했더니 그때 그 건방진 평민인가? 결국 둘이 잘 붙어먹고 있었구만?"

레오의 시선이 제반의 어깨너머, 이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귀족 학생들을 향했다.

저들은 아무래도 제반을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 저 일행의 중심에 선 남자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제반. 선배님들 계시니까 뭐 이 기회에 좋은 모습이라도 보이려는 거냐?"

레오는 귀족 학생들의 중심에 선 선배가 누구인지 아주 잘 알았다.

애초에 저렇게 유명한 인사는 세오른에서도 몇 없었으니까.

프로이덴 울부르크.

엑실리온 제국의 3개 공작 가문 중 하나인, 늑대를 상징하는 가문 울부르크의 장자.

제반이 갑자기 시비를 거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귀족 학생들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그 남자의 파벌의 눈에 띄기 위해서, 제반은 일부러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우리는 네 그 장난질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으니 당장 꺼져. 여기는 마법을 연습하기 위한 공간이야."

그런 레오의 말에 제반은 코웃음으로 응대했다.

"평민 따위가. 감히 고귀한 혈통인 이 몸에게 이래라저래라하지 마라."

"네가 아직 상황을 이해 못 해서 그러는데...."

"그리고 내가 말을 건 건 에이단인데, 왜 너 같은 꼬맹이가 멋대로 끼어드는 거지?"

빠직.

꼬맹이라는 말은 레오에게 있어서 역린에 가까운 말이었다

레오는 유독 또래에 비해서 키가 작았으니까.

몇몇 여학생들은 그런 레오를 귀엽게 여겼지만, 레오는 그런 취급 받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레오에게 있어서 자신의 작은 신장은 아킬레스건이었다.

"너...."

"레오. 진정해. 그냥 나한테 맡겨."

에이단은 화를 내려는 레오를 말리며 앞으로 나섰다.

이대로라면 상황 자체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제반. 갑자기 이제 와서 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조용히 지나가 줘. 나는 친구와 싸우고 싶지 않아."

제반은 에이단의 말에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렸다.

"친구? 내가 왜 네 친구야. 이 더러운 쓰레기가."

"어, 아니었나?"

"너, 미쳤냐?"

저 평민은 이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자기 혼자 세상 고고한 것처럼 맑은 눈동자로 이쪽을 응시하는 것도 거슬린다.

"평민이면 평민답게 귀족 앞에 머리를 조아리란 말이야."

"...제반. 나의 대체 뭐가 너에게 거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서 사과할게. 미안해. 그러니 이만 없던 일로 하면 안 될까?"

에이단으로서는 최대한 제반을 배려해서 양보를 해 준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이유 없는 적의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소년은, 그렇다고 굳이 싸움을 자초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제반은 그런 에이단의 말에 코웃음으로 대응했다.

"없던 일? 좋아. 그러면 없던 일로 해 줄 테니 딱 하나만 해."

그러면서 손으로 자신의 발아래를 가리켰다.

"꿇어."

"너...!"

그 선 넘는 행동에 보다 못한 테이시가 나섰다.

"적당히 해. 귀족으로서 체통도 없는 거야?"

"뭐야. 몰락 귀족 따위가 어딜 멋대로 끼어들어?"

그 말에 테이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뭐?"

"같은 귀족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집안이면 좀 닥치고 있어. 그 역겨운 냄새가 나한테까지 날 거 같으니까."

"...너, 죽고 싶어?"

테이시에게 가문의 일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하지만 제반은 그런 테이시의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후볐다.

테이시의 몸에서 마력이 넘실거리자 제반이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누가 몰락 귀족 아니랄까 봐,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니 그런 꼴을...."

"제반 펠리오."

"응?"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은 다름 아닌 에이단이었다.

하지만 에이단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좀 더 무겁게 내려앉은 그의 목소리에 제반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제반. 네가 나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건 나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어. 그걸로 네가 나를 욕보인다고 한다면, 그래. 그건 넘어가 줄 수 있어. 하지만."

에이단이 제반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제반을 노려봤다.

"내 친구들을 건드리는 것만큼은, 참지 않아."

"하, 하하. 참고 안 넘기면 어쩔 건데? 어? 좋아. 그러면 어디 한번 해보자고."

제반은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새하얀 장갑을 꺼내 에이단을 향해 집어 던졌다.

"마법 결투다. 무서우면 도망치든가."

자신의 가슴팍에 맞고 떨어지는 장갑을 보며 에이단은 고개를 저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해야겠다면?"

"...좋아."

에이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단!"

"야, 대체 뭘 어쩌려고 그래!"

테이시와 레오가 그런 에이단을 말렸지만, 에이단도 진심이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직감.

제반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좋아. 그러면 덤벼. 그리고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죄송하다고 비는 거야. 어때? 괜찮지?"

"네가 그 말을 지키겠다고 다짐한다면 말이야."

"하하하! 그래! 얼마든지! 나를 이길 수 있다면 말이야."

제반은 자신이 있었다.

같은 세오른의 1학년이라 하지만 에이단은 아직 마법의 기초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초짜.

저런 녀석이 대체 어떻게 세오른에 입학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평민이니 또 무슨 혜택을 받은 거겠지.

어릴 때부터 개인 교사에게 마법을 배워온 제반은 그런 에이단에게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을 중심으로 싸움이 벌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싸늘한 목소리가 현장에 있던 모든 학생의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

* * *

나는 지금 순찰을 돌고 있었다.

늑대인간 사태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또 언제 갑자기 무슨 사건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총장님의 말씀 하에 순찰은 한동안 계속될 거라고 했다.

귀찮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인지라, 나는 그냥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을 한다는 생각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리 학생들이라 하더라도, 늑대인간 사태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문제를 일으키겠어?

─그리고 나는 내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깨닫는 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 뭘 하는 거지?"

거의 싸우기 일보 직전인 두 학생을 보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조금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전후 상황은 들어 봐야 하니까.

그러니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설마하니 내가 나타날 줄은 몰랐는지, 일부 학생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거참. 누가 보면 무슨 귀신이라도 나타난 줄 알겠어.

"거기 둘. 지금 뭘 하려는 거냐."

나는 이 사건의 중심에 선 두 학생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중에 하나는 특히 낯이 익었는데, 누구인가 했더니 갈색 머리의 시골 청년 에이단이었다.

...또 너냐.

농담으로 소년 만화 주인공 같다고 했는데, 이쯤 되면 진지하게 진짜가 아닌가 싶었다.

그 상대는 귀족 학생인가. 아마 이름이 제반 펠리오라고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낯이 익지 않은 걸 보면 그저 그런 녀석이라는 거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훈련장에서 자신의 마법을 갈고닦지는 못할망정 서로 싸움질이나 하려고 하다니."

천천히 다가가자 근처에 몰려 있던 학생들이 나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

묘하게 내 취급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알아서 비켜 주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제반을 그냥 무시하듯 지나치고, 사태의 중심에 선 나는 에이단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설명해라."

"그, 그것이...."

"이건 정당한 대결입니다!"

그때 제반이 내 뒤에서 소리쳤다.

나는 말 없이 그를 돌아봤다.

내가 무시한다고 생각해서일까? 녀석은 자신의 분노를 감추지 않은 채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당한 대결이다?"

"예. 저는 에이단과 마법 대결을 하려는 겁니다. 절대 싸움이 아닙니다."

"마법 대결이라. 이번에 들어온 1학년들이 갑자기 대결한다는 것도 웃기는군."

"1학년은 그러면 안 됩니까?"

이 자식 이거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나?

평소라면 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칠 녀석이 도리어 뻔뻔하게 나가자 나도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왜 그런지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제반의 등 뒤로, 그를 지지하듯 서 있는 다른 학생들 때문이었다.

전부 귀족들.

특히 그중에서 한 녀석이 눈에 띄었다.

'저 녀석은....'

어디서 본 거 같은 얼굴인데.

대충 주위에 거느린 부하들을 보니 대장격 되는 녀석인가.

그 또한 나를 보더니 살짝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제1 훈련장에서 평민과 귀족의 대립이라. 이 상황 어딘가 낯이 익는데.'

어째 익숙하다 싶었는데, 지난번에 있었던 리네와 로믈리 간의 싸움과 똑같았다.

다만 리네의 경우에는 기습을 당한 것이고, 이번에는 서로 각 잡고 싸우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골치가 아파 왔다.

뭐 남학생들끼리 싸우는 거야 이런 세상이라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지만, 왜 하필 내가 순찰을 돌 때 이런 사건이 터지냐는 거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이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에이단이다.

"제반 펠리오. 그리고 에이단.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 가지고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다. 그러니 이만하고 전부 기숙사로 돌아가라."

"루드거 선생님!"

"돌아가라고 했다."

제반을 강하게 노려보며 말하자, 아무리 귀족 파벌을 등에 업은 녀석이라 하더라도 교사의 권한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는 없는지 이를 악물었다.

"그냥 놔두지 그러죠."

그때였다.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학생들의 시선이 내가 들어온 입구와는 정반대 쪽의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 한 남자가 나를 응시하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크리스 선생님."

이번에 나와 함께 세오른에 들어온 신임 교사이자, 귀족 파벌에 소속된 크리스 베니모어였다.

◈ 45화 위험한 내기 (2)

크리스 베니모어의 등장에 정리되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특히 귀족 학생들의 반응은 뜨거웠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크리스 베니모어는 고귀한 혈통을 지닌 귀족 출신이며 다른 귀족 학생들을 뒤에서 밀어주는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루드거는 그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크리스 베니모어 선생님.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어려울 것 없습니다. 말 그대로니까요."

"말 그대로다?"

"아무리 저희가 교사라 하더라도 학생들의 모든 행동을 다 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심지어 이야기를 들어 보니 두 학생 다 자의에 의해 대련을 하려는 것 같은데, 그걸 굳이 교사가 나서서 말리는 건 너무 지나친 자유 침해가 아닌지?"

크리스의 능글맞은 말에 루드거는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지만, 그것도 아주 찰나였다.

루드거는 슬쩍 다른 학생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반응을 보니 크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들이 더러 보였다.

아무리 루드거라 하더라도 서로 정정당당하게 대련을 하겠다는 것에 끼어드는 것은 오히려 교권 남용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한 방 먹었군.'

귀족 학생들을 편애하는 교사 크리스 베니모어.

그의 등장으로 학생들이 기세가 상당히 올랐다.

루드거는 한발 물러나 주기로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교사의 허가 없이 학생들이 제멋대로 마법 대련을 벌이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학생들끼리 크게 다치면 그건 세오른에서도 손해니까요."

"물론 그렇죠.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무얼 말이죠?"

"저희 둘이 참관을 하는 겁니다."

크리스의 말에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루드거 선생님과 크리스 선생님이 참관?"

"두 선생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마법 대련을 해야 한다고?"

상상만 해도 부담스러움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일.

일부 학생들은 당황했지만, 귀족 학생들은 달랐다.

그들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선생님이 직접 나서서 봐주겠다고 했으니, 위험하다는 걸 빌미로 대련을 막을 명분이 사라진다.

"아니면 이것도 위험하다고 말릴 생각이십니까? 루드거 첼리시 선생님."

크리스는 일부러 루드거를 도발하듯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학생들을 감싸고도실 정도로 아이들을 아끼실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감싸고도는 게 아니라 혹시 모를 위험의 가능성을 고려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희 둘이 나선다면 그럴 위험도 없겠죠. 어떻습니까? 저 두 학생도 서로 한번 붙어 보고 싶어 하는데."

이쪽을 향한 노골적인 의도가 느껴지는 크리스의 말에 루드거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전부터 크리스 베니모어는 루드거 첼리시를 별로 좋게 여기지 않았다.

세오른에 들어온 신임 교사라고 하지만 몰락 귀족인 루드거와 달리, 크리스는 아직도 현역 귀족이었으니까.

귀족주의적인 성향이 짙은 크리스에겐 루드거의 존재 자체가 이전부터 계속 거슬렸다.

'루드거 첼리시.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다른 평민 교사들은 그래도 딱 평민이라는 티가 났다. 뭐만 하면 호들갑을 떨고 고귀함도 없고, 전혀 절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루드거는 달랐다.

그는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도 고고히 빛났다. 귀족인 자신보다도 훨씬 더 귀족 같았다.

몰락한 주제에 그는 자신의 빛을 잃지 않았다. 그것이 크리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래로 추락했으면서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목에 힘을 주고 뻣뻣하게 서 있단 말인가.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자신을 보고도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그저 고개만 까닥인 루드거의 행태에 크리스는 속으로 무언가 울컥 넘어온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휴고 선생님께서 우리 파벌로 부르자 했을 때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루드거는 심지어 휴고한테 대놓고 자신은 그런 곳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것이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곳? 뭐가 그런 곳이란 말인가.

대체 뭘 믿고 저렇게 행동하는 걸까. 소스코드라는 대단한 마법을 만들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래 봤자 그게 전부 아닌가.

크리스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럴수록 루드거를 향한 어두운 감정은 점점 짙게 쌓여만 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크리스는 제대로 루드거에게 한 방 먹일 기회를 얻었다.

"어떻습니까. 루드거 선생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 보겠습니다."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며 에이단을 돌아봤다.

너는 정말로 제반과 마법 대련을 하고 싶냐는 의미의 시선이었다.

"...네. 반드시."

에이단은 굳은 의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단도 처음에는 이런 싸움 없이 말로 해결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반은 선을 넘어도 너무 심하게 넘었다.

자신의 친구에게 그런 심한 말을 하다니.

에이단은 그것만큼은 제반을 용서할 수 없었다.

루드거는 그 모습에 남들 모르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크리스를 돌아봤다.

"에이단 학생도 하겠다고 하니, 크리스 선생님의 말씀대로 참관을 조건으로 허락하도록 하죠."

"오, 그거 다행이네요."

"그러면...."

"아. 루드거 선생님. 잠시만요."

"또 뭐죠?"

크리스는 겨우 잡은 이 기회를 쉽게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저희도 내기를 한번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내기?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군요."

"보아하니 루드거 선생님께서는 저 평민 아이를 꽤 신경 쓰시는 거 같은데 말이죠."

"평민이 아니라 에이단입니다. 차별주의적인 발언을 주의해 주길 바랍니다."

"아, 에이단 학생이군요. 제 수업을 듣지 않아서 몰랐습니다. 아무튼, 저는 제반 펠리오 학생을 꽤 재능 있는 마법사로 여기고 있거든요."

입에 발린 말이었지만, 제반은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인 건지 벌써부터 감격스러운 표정이 됐다.

루드거는 늘 그렇듯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서 정확히 뭘 하자는 겁니까."

"서로 누가 이길지 정하는 겁니다. 물론 저는 여기 있는 제반 펠리오 학생이 이기는 쪽에 걸죠."

"선생이나 되는 자가, 학생들 보는 앞에서 내기를 운운하는 것도 웃기군요."

그 말에 크리스는 속으로 짜증이 넘어왔지만, 가까스로 참으며 미소를 유지했다.

"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 뭐, 싫으면 어쩔 수 없고요. 하긴, 저라도 루드거 선생님처럼 지는 쪽에 걸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에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루드거가 은근하게 에이단을 챙기는 쪽으로 몰아가니 자연스럽게 루드거, 에이단과 제반, 크리스 구도로 흘러가게 됐다.

거참.

루드거는 그런 크리스의 행동이 우스웠다.

이쪽은 그저 깔끔하게 거절하고 물러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쪽도 아쉬운 마음은 지울 수 없었다.

애초에 말릴 수 있던 대련을 부추긴 것은 크리스고, 심지어 지금 이쪽을 은근하게 건드리는 것도 그였다.

이렇게 당하는데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자니 보는 눈이 너무 많았고, 또 루드거도 짜증이 났다.

왜 내가 물러나야 하는 거지?

지금까지 이쪽을 적대시한 크리스를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건 단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처음부터 마음에 맞지 않은 인간을 상대로 심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저쪽에서 이쪽을 직접 건드리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 조금은 어울려 주지.'

안 그래도 에이단 이 녀석의 진짜 실력을 이번 대련으로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던 참이었다.

루드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 선생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니, 저도 그 유흥에 한번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오. 의외로군요. 루드거 선생님이 이걸 받아들이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루드거 선생님은 어떤 학생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에이단입니다."

루드거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에이단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여기서 루드거가 자신을 선택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건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크리스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아니, 사실 이러길 바랐다는 듯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요."

"내기의 결과물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결과물? 흠. 뭐, 저희가 그래도 세오른의 교사지만 마법사이지 않습니까. 서로 같은 발현계 수업을 가르치는 교사이기도 하고요."

그 말에 루드거가 살짝 놀란 듯 반문했다.

"발현계셨습니까?"

"...."

루드거는 정말 몰라서 묻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조차도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 크리스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 빌어먹을 몰락 귀족이!'

그 외침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크리스는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리스가 루드거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크리스 베니모어는 발현계 수업을 당당하기 위해 세오른에 들어왔다. 본인은 그 사실에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루드거 첼리시라는 듣도 보도 못한 몰락 귀족이 자신과 같은 발현계 수업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심지어 루드거가 담당하는 건 2학년이었고, 크리스 본인은 그보다 더 낮은 1학년을 담당하게 됐다.

더 실력 있는 사람이 더 높은 학년을 담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 즉 크리스 베니모어는 루드거 첼리시보다 한 수 아래라는 것을 이미 기본적으로 깔고 갔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루드거는 자신의 수업에 1, 2학년 모두 듣게 해서 1학년 중에서 재능 있는 학생들을 대거 자신의 수업에서 빼가는 만행까지 저질렀으니.

그가 루드거를 싫어할 이유는 충분했다.

'감히 나를 그렇게 욕보여 놓고 무사할 줄 알았나?'

정작 루드거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 자체에 자각이 없었다.

크리스 베니모어가 자신과 같은 발현계 담당 교사인 줄조차도 몰랐으니까.

그 사실이 크리스 베니모어의 자존심을 더욱 강하게 짓밟고 말았다.

루드거는 크리스의 행동을 겨우 이해했다.

'어쩐지. 나한테 묘하게 적대적인가 싶다 했더니, 같은 발현계 수업 담당이었군.'

크리스가 화낼 만도 했다. 자기라도 같은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과 비교를 당하면 충분히 화가 날 테니까.

심지어 이쪽은 소스코드와 원소 마법의 감각화라는, 보통 수업에서는 절대 가르치지 않을 팁을 마구잡이로 풀었으니.

알게 모르게 학생들 사이에서 크리스가 겪는 비교는 더 심해졌으리라.

크리스는 겨우 분노를 진정시키며 안경을 고쳐 썼다.

"크흠. 아무튼, 각자 자신이 발현계에서 연구했던 일부 마법이나 이론 분야를 제공하는 거로 하죠. 아, 물론 중요한 자료까진 아닙니다만, 그 정도는 돼야 내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제공해야 할 이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명시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각자 재량에 맡기죠."

재량에 맞긴다. 그 말만큼 어려운 것은 없으리라.

음식으로 치면 재료를 적당히 넣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으니까.

너무 말도 안 될 정도로 쓸모없는 걸 넘기면, 자신의 수준이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드러내는 셈이고.

그렇다고 너무 좋은 걸 줘 버리면 막대한 손해를 보는 거니까.

결국, 마법사들 사이에서 '적당히'는 자신의 명성에 흠집이 가지 않을 정도, 그러면서 손해를 입지 않을 딱 그 중간선이라는 소리였다.

루드거는 그게 뭐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습니다. 다만 지금 당장 대련을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니,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하도록 하죠."

"시간이라면 어느 정도?"

"3일 뒤가 적당하겠군요. 그때 공개 대련을 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흠. 3일이라. 뭐 적당하군요."

혹시라도 상대가 자신이 밀어주는 학생에게 무언가 조처를 할지도 몰랐지만, 3일이라는 시간은 그러기에는 상당히 촉박했다.

새로운 마법을 가르친다거나 하는 건 천재라 하더라도 3일 내로 배울 수 없으니까.

그저 남은 기간 동안 상대방에 대해 분석하거나, 혹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전부.

"그렇다면 3일 뒤에 다시 이 자리에서 하는 거로 하죠."

"좋습니다."

두 교사의 동의하에 이루어진 공개 대련.

그것은 순식간에 세오른 전역으로 일파만파 퍼져 나가기 충분했다.

* * *

모두가 이번의 만남을 어떻게든 소문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에이단은 아직도 자리에 남아 있는 루드거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괜히 자기 때문에 루드거가 이번 일에 휩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어 사과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저, 루드거 선생님.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됐다."

루드거는 에이단의 말을 차갑게 끊어 냈다.

"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에이단. 네가 지금 고민해야 할 일은 벌어진 일을 두고 죄송해하는 것이 아닌, 제반 펠리오를 상대로 어떻게 대련에서 승리할 지다."

"어, 음. 맞는 말씀입니다."

루드거의 말은 정론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후회한들 늦었으니까.

그래도 에이단은 뭔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머리에 열이 올랐을 때는 몰랐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니 과연 자신이 제반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지 불분명했다.

그는 이제 막 마법을 배우기 위한 초짜였지만, 제반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지?"

루드거는 그런 에이단을 쏘아보며 강하게 몰아붙였다.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할 셈인가?"

"그, 그건...."

"에이단. 너는 너 자신이 하겠다고 내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때의 네가 한 대답은 단지 분위기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꺼낸 거짓이었나?"

"...그건, 아닙니다."

"그래. 아니겠지. 그만큼 진심이라는 걸 나도 알았으니까 받아들인 거다."

"하지만 실전은...."

"다르지. 제반은 귀족 집안 출신으로서, 세오른에 들어오기 전부터 개인적인 교육을 받았을 테고. 이미 너와 출발 지점부터 다르다. 너도 잘 알고 있군."

에이단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루드거의 말은 전부 옳았으니까.

"그렇다고 반드시 패배한다고 속단하는 것도 이르다. 에이단. 싸움에 있어서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지?"

"어, 음. 글쎄요. 역시 실력일까요?"

루드거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라 하더라도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죽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세상은 단순히 힘의 이치로만 흘러가지 않지. 싸움은 찰나의 순간에 그 승패가 뒤집히니까."

"그러면 그게 대체 뭐죠?"

"넌 이미 그걸 가지고 있다."

루드거의 지적에 에이단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바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이] 계열 마법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걸 중요한 순간에만 사용하면 돼."

루드거가 크리스의 내기를 쉽게 받아들인 이유는 단 하나다.

그는 에이단이 이 싸움에서 이길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제 순수한 실력으로만 이기고 싶어요!"

그러나 에이단은 달랐다.

자신을 세오른에 입학하게 만들어 준 이 마법은 분명 고마운 것이지만, 그걸로 이기는 건 뭔가 내키지 않았다.

"루드거 선생님! 제게 가르침을 내려 주세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루드거를 응시하는 에이단.

그런 에이단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루드거는 속으로 당황했다.

'이놈 왜 이래?'

◈ 46화 위험한 내기 (3)

솔직히 처음에 크리스가 나에게 에이단과 제반의 대련을 가지고 내기를 제안했을 때.

나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내심 기뻤다.

이건 무조건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내기였으니까.

제반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건 아니다. 그 또한 세오른에 입학한 마법의 길을 걷는 학생. 분명 재능과 지니고 있는바 실력은 충분할 터다.

특히 부유한 상인 가문이나 귀족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조기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 왔기 때문에, 평민 학생들보다 학기 초부터 월등히 앞서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한 지 겨우 2주가 지났을 무렵.

아직 평민 학생들이 귀족을 따라잡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무렵이다.

하지만 괜찮다.

에이단은 일반적인 학생들과 다르니까.

내가 괜히 이 녀석을 '소년 만화 주인공'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크리스 베니모어 선생은 그걸 전혀 모르는 것 같지만.'

1학년 발현계를 담당하고 있다면, 1학년 중에서 특이한 학생들이 누가 있는지 학생들의 명단 정도는 다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크리스는 에이단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크리스 베니모어는, 평민 학생들의 명단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아마 본인이 가장 신경 써야 할 귀족 가문 학생들의 이름만 외우고 있었겠지.'

교사로서 실격이지만, 뭐 이해는 한다.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살아가고, 앞으로도 귀족으로 살아갈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자신과는 사는 세계가 전혀 다른 평민을 기억 속에 집어넣으라면 당연히 불쾌해하겠지.

그럴 바에는 그냥 관심조차 주지 않는 판단은 상당히 현명하다.

계급으로 판단하느니 학생을 차별한다느니, 그걸 탓할 생각은 없다.

이곳은 그런 세상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겠지.'

에이단이 마법적인 지식이 부족해도 세오른에 입학할 수 있던 것은, 순전히 그가 지니고 있는 [특이] 계열의 마법 덕분이었다.

일종의 입학 혜택을 받은 건데, 그렇다고 그게 에이단이 나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희귀한 마법을 익힌 학생들이 세오른에 더 많이 모이는 것이 지금 총장이 가장 바라는 일이니까.

'아마 뒤늦게 에이단이 어떤 마법을 익혔는지 깨닫게 된다고 하더라도 늦었다.'

이미 내기는 성립됐다. 몰랐다는 이유로 무효를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사전에 정보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자신의 모자람을 드러내는 행위나 마찬가지.

크리스는 아마 에이단의 비전을 깨닫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 내기 자체를 이어 나갈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이놈은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뭐? 자신만의 힘으로 이기고 싶다고?

얘가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순간이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뒤늦게 이 에이단이라는 녀석이 얼마나 외골수적이고, 정의로운 성격인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던 늑대인간도 돕겠다고 나서는 놈인데, 오죽할까.

정신 차리라고 한마디 해 줄까 하다가 나는 살짝 고민에 빠졌다.

'이 기회에 한번 확인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에이단이라는 사람이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을 갖췄는지.

그래. 그의 말마따나 [특이] 계열 마법 하나만 밀고 가면, 솔직히 너무 원툴이지 않은가.

본인의 의지, 또 무언가를 새로 배울 수 있는 본인의 재능을 이 기회에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속성 원소 발현은 너무 기초적이니 그것만을 가지고 에이단의 재능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더 확실한 걸 가르쳐 봐야겠지.'

나는 에이단을 슬쩍 내려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에이단이 어깨를 흠칫 떠는 게 보였다.

"에이단."

"예, 예."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좋다. 남은 기간 3일 동안 나는 너에게 대련을 대비하기 위한 방법을 전수해 줄 것이다."

"네? 그게 정말인가요? 하지만 그건...."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아마 크리스 선생도 제반을 상대로 몇 가지 조언을 하거나 기초적인 마법을 다듬는 걸 가르쳐 주겠지. 이건 너와 제반의 대결이 아닌, 나와 크리스 선생 사이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니까. 선생으로서. 마법사로서."

"그러면... 저도 루드거 선생님의 마법을 전수받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의 전수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필승의 마법 같은 것은 없다. 애초에 남은 기간은 고작 3일. 이 사이에 무언가를 배우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으니까."

속성원소 구현 같은 완전 기초적인 것이라면 모를까, 굳이 그걸 다시 되새길 필요도 없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가르칠 것이 없는 것도 아니지."

마법사와 마법사의 대련은 순수하게 마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술식의 구현 속도?

마력의 방대함?

마법의 정확성?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법사가 싸울 때 마법으로만 싸운다는 건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에이단. 너에게 마법사를 상대로 싸울 때, 어떻게 싸워야 할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마."

"저, 정말인가요?"

"그래. 다만, 남은 기간은 3일. 촉박하니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거다. 아주 힘들겠지.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할 건가?"

"네! 하겠습니다."

에이단은 결심했는지 큰 소리로 답했다.

그래. 좋은 태도다.

물론, 거절해도 어차피 봐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 바로 들어가지."

"네, 네? 정말이요?"

설마 지금 당장 시작하게 될 줄은 몰랐는지 에이단이 살짝 벙찐 얼굴이 됐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우리 둘을 지켜보던 두 사람을 눈짓했다.

"너희 둘도 마찬가지다."

"네?"

"저, 저희도요?"

레오와 테이시. 두 사람은 내가 부르자 당황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했다.

아무렴. 에이단 혼자만 움직일 것도 아니고, 보아하니 앞으로 계속 쭈욱 같이 지낼 거 같은데.

실력을 올린다면 삼총사 쪽에 전부 쏟아부어야지.

남은 기간 3일.

크리스와 제반은 이미 자신이 이겼다고 김칫국을 거하게 마시고 있겠지.

지금은 그들의 축배를 방해할 생각이 없다.

상상 속에서 축배를 얼마나 들이키는지는 본인의 자유.

하지만 과연 3일 뒤에 벌어지는 일을 보고도 그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까.

조금.

기대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