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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 *

"으아아. 죽겠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 버린 어두운 밤.

기숙사로 돌아온 에이단은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세오른에 온 이후로 훈련을 꾸준히 빼먹지 않았다고 자부했는데, 루드거의 훈련은 그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역시 군인 출신이었기 때문일까.

에이단은 자신과 더불어 레오와 테이시를 가르치던 루드거의 고된 훈련을 떠올리며, 쑤시는 몸을 손으로 주물렀다.

'이렇게까지 몸을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루드거가 가르쳐 준 것은 마법의 발현도 술식도 아닌, 말 그대로 몸을 쓰는 방법이었다.

아니, 머리를 쓰긴 썼다. 몸과 머리를 동시에 써야 해서 그렇지.

그것 때문에 에이단은 대체 훈련장의 바닥을 몇 번이나 굴렀는지 모르겠다.

이걸 앞으로 이틀은 더 해야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발전한 느낌이야.'

루드거의 가르침은 몸을 혹사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에이단은 불만을 품지 않고 묵묵히 이행했다.

본능적으로 이 방법이 그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보다 루드거 선생님은 어째서 나를 믿겠다고 하신 걸까.'

그가 제반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내가 사용하는 마법 때문인가?'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교사들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거 하나만 가지고 루드거가 자신에게 무언가 확신을 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루드거는 자신이 직접 [특이] 계열 마법을 사용한 걸 본 적이 없을 텐데 왜 확신을 한 걸까.

자신이 배운 마법은 스승님께 직접 전수받은 거라, 이름만 듣는 것으로는 제대로 알기 힘들 텐데.

'혹시, 루드거 선생님은 내 스승님에 대해서 뭔가 알고 계신 걸까?'

에이단은 그런 생각을 품으며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가 너무 힘들어서, 옷을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로부터 이틀 뒤.

에이단은 목 끝까지 숨이 차라 야외 훈련장을 달리고 있었다.

"허억 허억."

그런 에이단이 향하는 길목에 루드거가 뒷짐은 쥔 채로 서 있었다.

루드거를 발견한 에이단은 더욱 달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뒷짐을 쥐고 있던 루드거가 오른손을 뻗었다.

그 순간, 루드거로부터 새하얀 마력의 구체가 에이단을 향해 날아왔다.

"큭!"

에이단은 그것을 보며 이를 악물고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력을 일으키려는 순간.

턱.

"억?!"

다리가 꼬여서 자리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마법은 피했지만, 에이단은 바닥을 몇 바퀴나 굴러야 했다.

루드거는 그런 에이단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마력의 순환은 순환이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몸을 움직이는 거다. 그걸 겹쳐서 하려고 하지 말고 따로 인지해라."

"네, 넵!"

흙투성이가 된 에이단은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에도 실패했으니 다시 한 바퀴 추가다. 돌아라."

"넵!"

에이단은 다시 훈련장을 내달렸다.

훈련장의 의자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레오와 테이시는 그런 에이단을 숫제 괴물을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세상에. 이쪽은 이미 지쳐서 더 뛸 힘도 없는데, 에이단 쟤는 체력도 좋네."

테이시는 순수하게 에이단의 지치지 않는 체력에 감탄했다.

그녀도 나름 세오른에 들어오기 전부터 체력을 길러 왔지만, 에이단 감히 비벼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에이단을 따라잡으려 했으나, 그녀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의지가 높은 거지."

반면 레오는 체구가 작은 만큼 체력이 테이시보다 딸려서 가장 먼저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보는 눈은 레오가 더 날카로웠다.

테이시가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에이단은 지금 육체적으로 한계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달리는 것은 공개 대련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한 의지 때문이리라.

"흐응."

테이시는 레오의 말을 귓등으로 넘겨들으며 에이단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자신이 그렇게나 나쁘게 굴었는데도 싫다는 소리 하나 하지 않았던 소년.

오히려 웃으면서 같이 밥도 먹자고, 친구라고 먼저 손을 내밀어 준 바보 같은 녀석.

그런 에이단이 열심히 훈련하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땀과 흙투성이에 더러워진 모습이지만, 그것조차도 멋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나간 걸까.

어느덧 에이단은 재차 한 바퀴를 다 돌고 루드거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루드거가 손을 들어 올렸다.

'온다.'

레오와 테이시는 동시에 긴장했다.

불끈 쥔 주먹에 식은땀이 맺혔다.

거의 탈진 직전으로 헐떡이는 에이단을 향해 루드거의 마법이 날아갔다.

기초적인 발현계 마법인 [빛나는 돌]이었다.

맞으면 아픈 정도. 그것도 루드거가 봐주면서 쏘는 거라 집중만 하면 피하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문제는 달리는 상태에서 피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하지만.

에이단이 달리는 자세에서 몸을 옆으로 휙 틀며 루드거의 마법을 피하는 모습을 본 테이시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했어!"

"아직이야. 중요한 건 그다음 과정이니까."

레오의 말대로였다.

마법을 피하고 그다음 반격을 가해야 한다.

에이단은 곧바로 마력을 모았다.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로 마력을 운용하며 술식을 전개시킨다.

몸을 움직이면서 마법을 발현시킨다는, 머리와 몸을 따로 써야 하는 기술.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이겠지만, 아직 마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한 손으로 네모를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세모를 그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니까.

사고의 분할.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것과 마법을 따로 발현해야 한다.

'에이단. 너라면 성공할 수 있어.'

레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법사는 마력을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술식을 새기는 과정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마법을 발현할 때는 어지간하면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래서 마법사들은 항상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은 마법을 안전하게 발현시키기 위해 주위로 방벽을 두르거나 혹은 술식을 단축시키는 길을 택해 왔다.

하지만 개중에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마법을 구사할 때 움직이지 못해 위험하다면, 움직이면서 마법을 사용하면 된다는 생각을 품은 자들이 있었다.

마법사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지 않고 몸을 극한까지 단련시키며 마법을 구현하는 자들.

그들은 학문을 배우고 마법을 탐구하는 자들과 다르게, 직접 움직이며 세상을 떠도는 괴짜이자 언제나 미지에 도전하여 맞서 싸우는 모험가들.

전투 마법사(War Mage).

루드거가 가르쳐 주는 방법은, 이런 전투 마법사들이 익히는 가장 기초라 할 수 있는 싸움 방법인 [기동술식(Moving-Magus)]이었다.

"흡!"

에이단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달리는 다리는 멈추지 않는다.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조차도 없다.

말은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의지다.

몸을 움직이며 동시에 마력을 따로 구현한다.

쉬지 않고 내달리는 에이단의 손 위로 술식이 떠올랐다. 그 광경을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레오와 테이시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펼쳐지는 에이단의 마법.

1위계 기초적인 마법이자, 루드거가 그에게 쏘아 냈던 것과 같은 [빛나는 돌]이었다.

루드거보다 더 보잘것없고 빛난다기보다는 흐릿한 마법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제대로 발현해 루드거를 향해 날아갔다.

터억!

하지만 루드거는 장갑을 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에이단이 쏘아 낸 [빛나는 돌]을 너무나도 손쉽게 붙잡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오와 테이시는 자기도 모르게 '아!' 하고 아쉬움의 탄성을 자아냈다.

겨우 한 방 먹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허억. 허억."

숨을 헐떡이던 에이단은 루드거의 앞에 멈춰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에이단."

"허억. 허억. 네. 선생님."

"합격이다."

털썩.

루드거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에이단은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 어린 미소와 함께.

"대련은 내일이니, 오늘 마지막으로 충분히 휴식을 취하도록."

"허억. 허억."

에이단은 대답을 할 여력이 없었다.

루드거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더니 등을 돌렸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너무 지친 에이단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 47화 학생 대련 (1)

개인 집무실에서 한 통의 편지를 전달받은 크리스 베니모어는 그것을 한 번 스윽 읽고는 곧바로 불로 태워 버렸다.

"그래. 역시 그럴 줄 알았지."

들어온 보고는 세오른의 사용인이 보내 준 자료.

내용은 루드거 첼리시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 평민 녀석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고?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내기에서 이기려고 필사적이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루드거의 발악을 비웃었지만, 그렇다고 크리스 베니모어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정면에 잔뜩 긴장한 채 서 있는 소년을 바라봤다.

"제반 펠리오."

"넵!"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거라고 생각한다."

제반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이번 공개 대련에서 그 건방진 평민을 상대로 이겨야 한다는 걸."

"그냥 이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압도적인 힘으로, 귀족과 평민의 격차를 제대로 보여 주라는 거다."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혹한 요구였지만, 제반 펠리오는 자신이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에이단이 루드거 첼리시에게 무언가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혹시 모를 불안감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크리스 베니모어가 있었으니까.

"받아라."

크리스가 시약병 하나를 제반에게 툭 던졌다.

그것을 황급히 받아든 제반은 안에 차 있는 푸른 액체를 보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 이건?"

"마력 증폭약이다. 대련에 들어가기 전에 마셔라."

"저, 정말인가요? 하지만 이걸 마시면 실격패가 아닙니까?"

"아니. 괜찮다. 미리 복용하면 흔적이 남지 않는 우리 베니모어 가문의 특제품이니 걸릴 일은 없다."

"이걸...."

"마시면 순간 마력이 증폭되지만, 지속 시간이 채 5분도 되지 않는다."

"5분이라. 짧군요."

"그래. 짧지. 그러니 사전 검사에도 걸리지 않는다. 기존의 마력을 증폭시키는 게 아닌 출력의 한계를 늘려 주는 거라 마력을 당겨쓰는 쪽에 가까우니까. 약의 흔적은 효과만 남기고 바로 사라진다. 30분 뒤에 마력 탈진이 오는 것만 주의하도록."

크리스의 말에 제반이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상 보유하고 있는 마력을 한꺼번에 쓸 수 있도록 해 주는 약에 가까웠다.

고작 평민을 상대로 그런 약을 마셔야 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지만.

'그래도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차피 저쪽도 루드거가 뒤에 있는 이상, 자신처럼 무언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놈은 더러운 평민이니까.

아주 심각한 반칙을 저지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며 제반은 굳은 얼굴로 증폭 물약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크리스가 웃었다.

"잘 생각했다. 자, 그러면 가 볼까."

* * *

현재 공개 대련을 앞둔 제2 훈련장의 객석은 오늘 있을 신입생의 마법 대련을 보러 온 사람들로 절반 이상이 차 있었다.

1학년 학생들은 대부분 모였고,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2학년 학생들과 다른 교사들까지 끼어 있었다.

단순히 1학년끼리 싸우는 거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겠지만, 두 교사가 공식으로 허가를 하고 참관하는 대련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루드거 첼리시.

크리스 베니모어.

두 교사는 이번에 세오른에 막 부임했으며, 둘 다 발현계 수업을 담당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한쪽은 몰락 귀족이고, 한쪽은 명문 높은 백작가다.

신분의 차이는 상당히 컸다.

심지어 루드거는 평민을 지지해 주고, 크리스 베니모어가 귀족을 지지해 준다니.

곧 벌어질 대련은 단순히 신입생의 싸움을 넘어 평민과 귀족의 단판 승부로 커지고 말았다.

"과연, 누가 이길까?"

"그래 봤자 신입생 싸움 아니야? 그렇다면 귀족이 더 유리하지. 게네는 어릴 때부터 교육을 따로 받을 거 아니야."

"그래도 이번에 들어온 평민 신입생도 만만치 않다던데? 늑대인간 사건 때 큰 공을 세웠다고 하고."

"그래 봤자 본인이 잡은 것도 아닌데 상대가 되겠냐?"

"혹시 모르잖아. 요즘 말 많이 나오는 루드거 선생님이 도와준다는데."

"그렇게 따지면 반대편에는 크리스 선생님이 있던데?"

"난 그 선생님 잘 모르겠던데. 1학년 담당이었나?"

"어. 안 그래도 서로 같은 발현계인데, 루드거 선생님한테 비교당해서 어지간히도 벼르고 있나 보더라."

"완전 날 잡았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도중 사람들의 시선이 관객석에서도 교사들만 앉을 수 있는 상석을 향했다.

"야. 봐봐. 왔다."

"어. 진짜네."

막 교사 전용석에 들어선 크리스 베니모어는 귀족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차분히 자리에 앉았다.

이지적인 용모의 그였기에 여학생들의 흠모 어린 시선이 자연스럽게 크리스를 따라왔다.

크리스 또한 그런 시선 자체를 가볍게 즐겼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눈빛은, 그가 더 위대한 사람이라는 걸 실감하게 만들어 줬으니까.

그 순간,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그것은 크리스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뭐야?'

대체 누구인가 싶어서 봤더니 그 남자였다.

루드거 첼리시.

긴 흑색 장발을 꽁지머리로 묶은 남자.

날카로운 턱선과 높은 콧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뭇 여성들의 가슴을 울리게 만드는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까지.

검은 면바지에 검은 와이셔츠. 넥타이조차도 검고, 그 위를 덮은 것마저도 흑색 롱 코트다.

전체적인 인상은 말 그대로 큰까마귀(Raven)를 연상케 만드는 검정색의 단일화.

오른손에는 지팡이까지 쥔 그 모습은 마치 명망 있는 마도 가문의 가주처럼 보였다.

"와. 루드거 선생님 봐."

"분위기 미쳤는데?"

크리스의 모습에 정신이 팔렸던 학생들의 시선이 전부 루드거를 향했다.

그러나 루드거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이목이 쏠리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교수 전용석의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봤어?"

"어. 분위기 진짜 장난 아니다. 왜 소문이 그렇게 났는지 알 만하네."

"진짜 몰락 귀족 맞아? 나 다른 귀족 교사들보다 더 귀족인 줄 알았어."

학생들이 그렇게 떠드는 소리를 엿듣던 크리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은 그의 원색적인 시선이 자신의 옆줄에 앉은 루드거를 향했다.

루드거는 이쪽을 돌아볼 법도 한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표한 눈빛으로 훈련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이쪽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반응에 크리스는 이를 으득 깨물었다.

'흥. 그 잘난 태도도 이제 끝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패배를 느끼게 해 주지.'

어차피 이번 싸움은 제반 펠리오가 승리할 것이다.

에이단? 평민이지 않은가.

크리스는 그런 학생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는 평민 학생들의 명단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려고 낭비하는 자신의 시간조차 아쉬웠으니까.

'어차피 평민은 평민.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녀석들이 특혜로 입학해 봤자,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거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관객석의 소란이 극에 달했다.

루드거가 나타났을 때보다 더 시끄러워진 느낌에 크리스는 뒤를 돌아봤고,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총장님. 오셨습니까."

엘리사 윌로우의 등장에 크리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총장은 방긋 웃으며 크리스의 인사를 받아 줬다.

"안녕하세요. 크리스 베니모어 선생님. 와. 여긴 사람이 정말 많네요?"

"총장님께서는 여기에 어쩐 일로...."

"재미있는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 시간이 남은 차에 찾아왔어요."

"그러시군요."

그런 총장을 보좌하듯 뒤따라온 교사는 세오른에서 가장 오래 부임했다고 알려진 약제학의 마리 로스, 그리고 크리스를 비롯한 귀족 교사들의 파벌을 이끄는 휴고 부르테그였다.

세오른에서 가장 이름 있는 사람들이 전부 모이게 되자, 학생들은 설마 이번 대련이 이 정도였을 줄 몰랐다며 저마다 놀라움을 표했다.

그건 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적당히 두 학생이 싸우고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총장이 나설 줄이야.

'역시 평민과 귀족 학생 간의 다툼이라 총장도 어쩔 수 없이 나섰다는 건가?'

총장은 명목상 어느 쪽도 밀어주지 않는 완전무결한 중립이지만, 크리스는 알고 있다.

총장은 귀족보다는 오히려 평민 학생들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걸.

애초에 휴고가 총장과 대립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괜찮으려나.'

혹시라도 총장이 이쪽 일을 방해하면 어쩔지 걱정이 들었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중립을 지키려는 총장이 이번 일에 끼어들 명분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루드거 첼리시.'

총장이 나타났는데도 저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행동.

하지만 이게 또 이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어, 크리스는 괜히 자기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루드거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총장이 먼저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가만히 있던 루드거의 고개가 돌아가 총장을 향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총장에게 목례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총장님."

"네. 루드거 선생님도 안녕하신가요. 잘 지내셨죠?"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루드거 선생님과 크리스 선생님이 학생들의 대련을 봐주시겠다고 하다니. 무슨 일인가 싶었다니까요."

"그저 간단한 내기를 했을 뿐입니다."

"흐음. 내기라. 루드거 선생님은 누가 이기는 데에 걸었나요?"

알면서도 직접 루드거의 입으로 듣고 싶은 것인지 총장은 은근하게 물었다.

"에이단 학생의 승리에 걸었습니다."

"내기는 서로 반대되는 걸 선택하지 않는 이상 성립되지 않으니, 그러면 크리스 선생님께서는 제반 펠리오 학생의 승리에 걸었겠네요?"

"...네. 맞습니다."

크리스도 마지못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총장은 방긋 웃으며 두 손으로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정말 기대되네요. 물론 학생들이 다치지 않는 것이 우선이겠죠?"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했으니까요."

마리 로스가 옆에서 대신 대답해 주었다.

학생들끼리 대련은 아무리 약식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힐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미리 대련에 들어가기 전 가벼운 보호구를 착용한다.

가슴과 양어깨, 그리고 양 무릎에 달 수 있는 금속 보호구. 그것이 서로 공명하며 해당 학생의 몸 위로 얇은 마력의 장벽을 두른다.

마력의 에너지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마법의 충격을 막아 주는 대신 소모되는 형식.

즉 먼저 에너지가 전부 소모될 경우에 패배 처리가 되는, 목숨에 전혀 지장이 없는 안전한 방식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아, 때마침 선수가 나오는군요."

가장 먼저 훈련장의 중심에 선 것은 잔뜩 긴장한 표정의 에이단이었다.

그는 주위에서 스포트라이트처럼 쏟아지는 시선이 익숙지 않은지 벌써부터 토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다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필사적으로 견디는 느낌.

"에이단! 파이팅!"

"저 건방진 제반의 콧대를 확 꺾어 버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응원하는 테이시와 레오 덕분인지, 에이단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평민 학생들은 에이단이 부디 평민들의 위상을 세워 주길 바라며 그를 잔뜩 응원했다.

그때 맞은편 입구를 통해 제반이 등장했다.

"제반! 너만 믿는다!"

"귀족의 자부심을 보여 줘!"

귀족 학생들은 제반을 응원했다. 제반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예의 그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제반은 에이단을 향해 조소를 지어 보였다.

"용케 도망 안 갔네?"

"...."

"긴장한 건가? 쯧쯧. 평민에게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겠지. 차라리 도망을 치지 그랬어. 그랬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패배할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이긴다면."

"응?"

"테이시에게 심한 말을 했던 걸 사과해. 레오한테도."

"뭐? 하하하!"

설마 에이단이 여기서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제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가 이기면 얼마든지 무릎 꿇어 주지."

"그 말, 확실히 들었어."

"하지만 그건 나에게 이기고 나서 해야 할걸?"

제반은 자신이 있었다.

지금 몸 안에 차오르는 이 강력한 마력. 조금 전 무대 위에 오르기 전에 마신 마력 증폭 물약이었다.

지속 시간이 워낙 짧아서 썼는지도 안 썼는지도 모를 물건.

5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제대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이 힘이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같은 마법을 사용한다면, 마력이 지금 넘치는 내 쪽이 이겨.'

마법사의 대련에서 화력이 앞서는 것만큼 유리한 것도 또 없다.

같은 마법을 똑같은 속도로 발현해도, 이쪽이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가능하니까.

현재 제반은 그것이 가능한 상태였다.

고작 5분이지만, 너무나도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다.

대결에 들어가기에 앞서 심판이 에이단과 제반의 상태를 확인했다.

혹시라도 대련에 부정이 개입되어 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함이었다. 제반은 크리스의 말을 믿었기에 떳떳하게 거기에 응했다.

실제로 심판은 제반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윽고 에이단의 상태를 확인하던 심판은 그의 허리춤에 걸린 물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학생. 이건 뭡니까?"

"아, 이건 이번 대련에서 쓸 제 전용 지팡이에요."

에이단은 웃으며 답했지만, 심판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에이단이 가지고 있는 지팡이는 기본적으로 마법사들이 다루는 특이한 재질의 지팡이와 모양 자체가 달랐으니까.

그것은

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 48화 학생 대련 (2)

마법 대련에서 왜 검을 가져왔냐고 묻자니 검의 형태가 뭔가 이상했다.

끝은 뭉툭하고 두꺼운 날은 베는 것이 아닌, 마치 타격을 위한 물건 같아 보였다.

검이라기보다는 마법 지팡이를 검의 형태로 바꾼 것에 가까운 거라, 사실상 검 자체가 지녀야 할 위험도나 살상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심판은 잠시 고민하다가 괜찮을 거라 생각하며 넘겼다.

"좋아. 둘 다 위치로."

심판의 지시에 따라 에이단과 제반은 경기장의 양 끝에 섰다.

함성을 내지르던 관객들도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침묵이 내려앉은 제2 훈련장.

그 중심에서 에이단과 제반은 서로를 강렬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시작!"

심판의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둘은 서로를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다.

동시에 마력을 실처럼 짜 올려서 술식을 발현시킨다.

첫 시작은 상대방에게 가장 먼저 타격을 입히기 위한 견제.

마법사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전의 가장 기초적인 교범은, 우선 상대방과 자신의 격차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것은 1위계 마법의 교환으로 이루어진다.

파앗!

에이단이 발동한 마법은 1위계 물 속성 방출계인 [흐르는 물].

반대로 제반이 발동한 마법은 1위계 불 속성 방출계인 [쏘는 불]이었다.

"오. 빠른데."

"속도는 동일한가."

술식의 구현 속도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법은 동시에 펼쳐졌다.

바꿔 말하면 원래부터 불리할 거라고 생각했던 에이단이 생각 이상으로 술식을 빠르게 구현했다는 것.

그리고 두 사람이 발현한 원소의 차이도 존재했다.

에이단이 쏜 것은 물.

반대로 제반이 쓴 것은 불.

어떤 속성이 더 우위에 있는 건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으리라.

'역시!'

에이단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첫 충돌에서 상대방에게 우위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속성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야 했다.

일종의 가위바위보 같은 건데, 순전히 운으로만 작용하는 건 아니었다.

'제반이라면 분명 불 속성 마법을 쓸 거라고 생각했어.'

이쪽을 싫어하고 성격이 불같은 제반이라면 처음 사용하는 마법은 분명 화력이 가장 높은 불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것은 제대로 맞아 들었다.

심리전을 통해 상대방의 마법을 미리 읽고 거기에 상응하는 마법을 준비한 에이단.

일부 학생들은 단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겠지만, 교사들은 달랐다.

"오오. 시작부터 앞서 나가네요."

기쁜 듯 말하는 총장의 곁에서 휴고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쏘아붙였다.

"아직 승부는 다 나지 않았습니다."

휴고의 말마따나 상황은 에이단이 이기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물과 불. 두 마법이 허공에서 충돌했을 때.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게 상대방의 마법을 없애 버린 것은 불꽃이었으니까.

"세상에."

"뭐야. 불로 물을 이겼다고?"

"마력의 차이가 그 정도나 난다는 거야?"

아무리 속성에 상성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마력이 더 높으면 그런 상성마저 무시한다.

제반이 딱 그러했다.

물을 순식간에 증발시키는 불꽃. 그것은 이윽고 에이단을 향해 날아갔다.

에이단은 황급히 몸을 숙여 날아오는 불꽃을 피했다. 믿기지 않는 시선이 제반을 향했다.

"하하. 봤냐? 이게 너와 나의 차이라는 거다. 하찮은 평민."

제반은 말을 하면서도 마력을 운용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에이단이 회피에 들어가는 사이 그는 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자세를 고쳐 잡은 에이단 또한 바로 마법을 발동했다.

이번에도 서로 1위계 마법이 발동했다.

이번에 제반이 쏘아 낸 건 번개 속성. 에이단이 쏘아 낸 건 불 속성이었다.

퍼엉!

두 마법이 허공에서 충돌하고 상쇄된다.

하지만 조금 전과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 마법이 상쇄된 장소는 조금 더 에이단에게 치우친 위치였다는 것이다.

에이단이 밀리고 있었다.

"하하! 고작 그 정도냐!"

제반은 또다시 마법을 사용했고, 그것은 에이단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마법이 다시 허공에서 충돌.

에이단은 화력에서 밀릴 뻔한 걸 알았기에 마력을 더 많이 집어넣으며 마법을 발동했다.

퍼엉!

세 번째 충돌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에이단의 바로 코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점점 밀린다.

"크윽!"

에이단은 마법 폭발의 충격에 몸을 휘청거렸다.

"에이단이 밀렸어!"

"역시 평민은 어쩔 수 없다는 건가?"

객석에서 저들끼리 떠드는 소리를 들은 제반은 신이 났다.

기회다!

제반은 에이단이 무너진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다음 마법을 사용했다.

이 기회에 기세를 몰아 완전히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조금 전에는 동시에 마법을 사용했지만, 이번에는 제반이 훨씬 더 빨랐다.

재차 발현되는 제반의 마법.

에이단은 자세를 다잡으며 방어를 위해 지팡이를 겨누려고 했으나 곧바로 그 판단을 수정했다.

'아니. 지금 마법을 사용하려 해도 늦어!'

제반은 이미 술식 구현에 들어갔다.

여기서 급하게 따라잡으려고 해도 먼저 마법을 발현하는 것은 결국 제반이다.

속도를 중시해서 술식을 간이로 사용하면 마법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위력 또한 저쪽이 압도적인 우위.

이런 상황에서 루드거의 소스코드가 있었다면 먼저 마법을 발현해서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있겠지만.

'애초에 그건 당장에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조금 전의 전초전으로 술식 구현 속도가 동일하다는 걸 깨달았으니, 여기서는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할 차례였다.

'여기서부터는, 루드거 선생님께 배웠던 걸 사용하는 거야.'

그걸 위해서 지난 3일 동안 몸이 찢어지라 노력하지 않았던가.

에이단은 지팡이를 거두는 대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제반을 향해 달려들었다.

"뭐?!"

"저기서 달려든다고?"

"포기한 건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의아함.

대부분 관객은 에이단이 모든 걸 포기하고 그저 몸을 날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몸을 쓴다는 것은 마법사답지 않은 판단이다.

달려들어서 주먹질이나 하겠다는 건가.

"야만스럽군. 이래서 평민은."

"에이단... 대체 뭘 어쩌려고."

모두가 그렇게 경멸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사이.

제반의 마법이 완성됐다.

"핫! 결국 안 되니까 포기한 거냐!"

제반은 잔혹한 미소를 지으며 2위계 마법인 [불태우는 뇌성]을 사용했다.

재빠른 뇌격으로 번개처럼 상대방의 몸을 꿰뚫는, 2위계 마법 중에서도 매우 강력한 마법이다.

몸에 안전장치가 걸려 있어서 죽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 흘러넘치는 마력을 감안하면 죽을 만큼 아픈 고통은 느끼게 만들 수 있으리라.

제반은 정확히 에이단의 미간을 향해 마법을 조준했다.

"받아라!"

에이단은 겁도 없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결국, 평민은 평민.

그게 에이단의 한계였던 것이겠지.

제반은 그렇게 생각하며 [불태우는 뇌성]을 발동했다.

파지직!

허공에 맺히는 노란 전류가 이윽고 하나의 화살이 되어 에이단을 향해 날아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이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끝이군. 결국 제반이 이겼어.'

크리스는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대련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벌써부터 루드거가 어떤 얼굴로 망가질지 기대하며 그를 돌아봤지만.

"...뭐야."

루드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저 묵묵히 대련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문득 정체 모를 오한과 같은 불안감이 크리스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

크리스의 시선이 다급하게 경기장을 향했다.

그의 눈동자에.

때마침 날아가는 마법과 동시에 에이단이 거기에 반응하는 모습이 보였다.

에이단은 달리는 자세에서 상반신과 고개를 옆으로 틀며 정면으로 날아오는 마법을 회피했다.

파지직!

"크윽!"

에이단의 뺨과 어깨를 [타오르는 뇌성]이 스치고 지나갔다. 고통 때문에 에이단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그것이 전부.

에이단은 멈추지 않았다.

크리스는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경악했다.

그는 에이단이 어떻게 공격을 피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그 불리한 와중에도 상대방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고?'

보통 신입생들이 마법 대련을 하게 된다면 아직 마법사들끼리의 싸움에서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초짜와 같은 행동을 보이고는 한다.

상대방에게서 시선을 돌린다거나, 혹은 마법이 날아오는데 방어는커녕 눈을 질끈 감고 팔을 들어 올린다거나.

고통이 다가오는 걸 깨달았을 때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사람의 본능이니까.

저걸 줄이는 방법은 오랫동안 단련하는 것 말고는 없다.

하지만 에이단은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생.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르는 초짜였다.

남들처럼 교육을 받을 환경도 되지 않은 평민이 아닌가.

'그런데.'

에이단은 미간을 향해 마법이 날아오는데도 겁먹지 않고,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멈추지 않았다.

저건 단순히 운이 좋아서 피한 게 아니다.

담력. 고통 따위는 이겨 낼 수 있다는 강렬한 의지.

그것이 수반되어 자신에게 피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다.

'아니. 하지만 저기서 다시 자세를 잡고 마법을 사용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크리스의 판단은 정확했다. 어차피 주도권은 아직 제반이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 의지에 부응하듯 제반 또한 행동에 나섰다.

자신의 공격이 빗나갔다는 걸 깨닫고 당황하는 것도 잠시, 제반은 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에이단에게 마법을 쓸 틈 따위는....

"...!"

그러나 에이단의 코앞에 만들어진 마법 술식을 본 제반은 눈을 찢어져라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휴고와 마리 선생도 마찬가지였고, 총장도 흥미롭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크리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에이단이 사용한 기술을 바로 알아차렸다.

"기, 기동 술식!"

기동 술식.

전투 마법사들이 익힌다는, 몸을 움직이면서 마법을 발현시키는 실전용 기술.

크리스는 고개를 돌려 루드거를 돌아봤다.

조금 전부터 대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던 그 남자는.

미약하지만,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설마 이걸 가르쳤던 건가!'

필승의 마법이니 그런 걸 가르칠 시간은 없으니, 루드거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크리스도 제반에게 마력 증폭약을 넘겨주지 않았던가.

비겁해도 좋았다. 이기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루드거는 그러지 않았다.

이 남자는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대련에 있어서 상대방을 앞서는 기술인 기동 술식을 저 평민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그걸 3일 만에 배우게 했다고?'

아니. 아니다.

이건 루드거가 3일 만에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에이단이 고작 3일 만에 기동 술식을 배운 것이다.

'고작 평민이, 그런 재능을 타고났단 말인가?'

크리스는 몰랐다.

제반과 자신이 이미 승리의 축배에 취해서 안일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에이단이 루드거의 가르침을 받으며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노력해 왔는지.

바뀌는 건 없다고 속단할 때, 저들이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 물밑에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절대로 모른다.

아마 말해 줘도 모를 것이다.

그만큼 지금 상황은 터무니없었으니까.

'제반! 이 멍청한 놈! 마법을 멈춰!'

크리스는 그렇게 외치려고 했지만, 마지막 남은 이성이 그의 입을 꾹 다물게 만들었다.

여기서 제반에게 지시를 내리듯 외친다면 그건 공정한 대련을 망치는 짓이고, 스스로 이미지를 깎아 먹는 행위였다.

그저 제반이 어련히 눈치를 채고 다른 행동을 취하길 바랄 수밖에 없었지만.

'틀렸어.'

크리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반은 에이단이 달리는 채로 마법을 사용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다음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단이 자신의 마법을 회피했을 때, 당황해서 다음 공격을 이어 나가지 못했으면 차라리 나았으리라.

그러나 어중간하게 타고난 제반의 실력은, 역으로 그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처음 마주하는 이상 현상에 빠르게 대처한다.

그 판단에 틀린 것은 없었지만, 그 이상 현상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연속으로 펼쳐지는 것에 제반은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엇?"

뒤늦게 에이단의 앞에 완성된 마법 술식을 본 제반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술식을 구현하는 마법을 먼저 완성시킬 방법도 없었다.

에이단이 쏘아 낸 마법은 그토록 연습했던 [빛나는 돌].

고작 1위계밖에 되지 않는 단순한 마법이지만.

방심과 경악의 틈새에 펼쳐진 마법인 만큼 매우 치명적이었다.

퍼억!

빛나는 돌이 제반의 술식을 꿰뚫어 파훼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너머 제반의 미간을 강하게 때렸다.

"크악!"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고통까지는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충격에 제반은 뒤로 고꾸라졌다.

그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사고가 얼음물에 잠긴 것처럼 얼어붙는다.

방금 그 5초도 걸리지 않을 짧은 순간의 공방은.

이 싸움의 승패를 가를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반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하지만.

이제 기회를 넘겨받은 에이단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끝났군.'

그 광경을 보며 루드거는 만족스러워했다.

흐름은 완전히 에이단에게 넘어왔다.

이게 주먹으로 다투는 개싸움이었다면 어떻게든 제반에게도 가능성이 있겠지만.

마법 대련은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이것은 철저하게 턴을 소모하는 싸움.

컨디션을 잃고, 흐름을 상실한 순간부터 패배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이단이 제반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다.

"이젠 내 차례야."

"아, 안 돼!"

그러나 제반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발동된 에이단의 마법이 제반의 몸을 무수히 가격했다.

제반의 몸을 두르고 있는 방어구 마력의 총량이 0이 되는 순간, 대련의 승패는 결정지어졌다.

◈ 49화 안티 매직(Anti Magic) (1)

대결은 끝났다.

"승자! 에이단!"

심판의 외침과 함께 관객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전부 에이단을 응원하러 온 평민 출신 학생들의 외침이었다.

"에이단! 멋지다!"

"완전 쩔어!"

"대단해! 대체 언제 그런 기술을 익힌 거야?"

특히 레오와 테이시의 기쁨은 상당했다.

반대로 귀족 학생들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다가, 패배해서 바닥에 널브러진 제반을 노려봤다.

"쯧. 제반 저 자식이 귀족의 명예에 먹칠을 했어."

"평소부터 재수 없기는 했어. 고작 남작 가문 주제에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여기저기 빌붙으려 하던 게 거슬렸는데."

"평민한테도 지다니. 귀족의 수치야."

웅성거리며 날아오는 날이 잔뜩 서 있는 말.

제반은 멍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봤다.

'내가, 졌다고?'

이게 정말 현실인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꿈에서 깨려고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니까.

자신에게 날아오는 혐오 어린 시선과 비난의 화살은 전부 진짜였고.

이 무대의 위에서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닌, 그토록 무시했던 하찮은 평민이었다.

'아니야. 이건, 이건 뭔가 잘못됐어!'

자신이 졌을 리가 없다.

그래. 분명 무언가 착오가 있었을 거다. 저 더러운 평민이 무언가 비겁한 반칙을 사용한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움직이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 빌어먹을 평민 자식이!'

으득.

제반은 자신이 몰래 물약을 마셔서 도핑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애초에 그것이 부끄러운 줄 아는 행동이었다면 그러지도 않았을 테니까.

단지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을 욕보이는 평민을 향한 끝도 없는 증오와 반드시 죽이겠다는 살의뿐.

'죽여 버리겠어!'

제반은 자신의 모든 마력을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

모두가 승자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에이단에게 정신이 집중되고 있을 때라, 누구도 제반의 그런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싸움에서 패배한 사람이, 갑자기 정신이 훼까닥 돌아서 기습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제반은 자신의 모든 마력을 쥐어짜 내서 2위계 마법을 펼쳤다.

술식이 구성되기까지 약 4초.

상대방이 집중해서 대처하기에는 꽤 길지만, 모두가 방심하고 있는 지금 4초는 매우 짧은 시간이다.

"어?"

가장 먼저 이상함을 눈치챈 것은 에이단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제반에게서 풍기는 기세가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그가 막 제반을 돌아봤을 때, 때마침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제반과 눈이 마주쳤다.

"제반?"

살기로 번들거리는 제반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리고 본 것은, 그가 몰래 구현하고 있던 마법 술식이었다.

2위계 화염 마법 [사르는 파도].

대련이 끝난 지금, 에이단은 자신의 몸에 붙은 안전장치를 떼어 낸 상황이었다.

심지어 [사르는 파도]는 2위계 마법 중에서도 범위가 가장 넓은 공격이라, 회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그렇다고 방어하는 것도 시간이 촉박해서 불가능했다.

마법이 발현되었다.

새빨간 불길이 넘실거리며 파도친다.

"어, 어어?"

에이단의 몸 상태를 확인하려던 심판도 당황한 건 매한가지였다.

설마 제반이 이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그는 황급히 지팡이를 꺼내 마력을 끌어 올렸다.

세오른의 사용인인 그이지만, 마법 또한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늦었다.

이미 마법은 그의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파도처럼 덮쳐들 듯 다가오는 뜨거운 불길.

타앗.

에이단은 생각하는 것보다 몸을 먼저 움직였다.

스프링처럼 튀어 나간 에이단은 심판의 뒷덜미를 잡아끌며 자신의 뒤로 넘겼다.

그리고 검 형태의 지팡이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관객들이 눈을 크게 뜨고 경악하는 것이 보였다.

사태를 뒤늦게 깨달은 교사들도 자리에서 하나둘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이 나서기엔 이미 늦었다.

불꽃의 파도는 에이단의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에이단!"

테이시의 외침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에이단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한 채, 그대로 검 형태의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마력을 담아.

내려친다.

촤아아아악!

"어?"

"뭐, 뭐야."

그러자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에이단이 휘두른 지팡이의 궤적을 따라, 제반이 사용한 [사르는 파도] 마법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며 흩어진 것이다.

화르르륵.

이윽고 [사르는 파도]는 힘을 잃고 그대로 허공에서 흩어지듯 사라졌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마법을, 벴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 그 광경에 학생들이 멍하니 중얼거릴 때.

루드거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에이단의 모습을 응시했다.

'위기의 순간이 오니까 그 마법을 사용한 건가.'

에이단은 [특이] 계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다.

여타 4개의 계열과 다르게 [특이]는 현대 마법으로는 제대로 된 분류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마법들이 주류를 이룬다.

에이단이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특이] 계열 마법 중 하나인 [반마법(Anti-Magic)]

다른 이름으로는.

마법을 지우는 마법.

지금 에이단이 사용한 건 바로 그거였다.

"이, 이럴 수가!"

크리스는 그야말로 숫제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제반이 비겁한 짓을 한 것도 돌아 버릴 것 같은데, 거기에 더해 평민이라 생각한 에이단이 반마법을 사용할 줄이야.

'설마, 저 남자는 이걸 알고서...!'

크리스의 시선이 루드거를 향했다.

그는 에이단이 기습을 당했을 때도 놀라지 않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놀라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 남자는 애초에 놀랄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이 대련에서 에이단이 승리할 거라는 걸, 에이단이 [특이] 계열 마법의 소유자라는 걸.

"맙소사."

그건 제반 펠리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모든 마력을 담아서 사용한 [사르는 파도]가 허망하게 사라지는 모습에.

그리고 그것을 잘라 낸 장본인이 에이단이라는 사실에.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이 됐다.

에이단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제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제반...."

"너, 네가 대체 어떻게. 어떻게 평민이 그런 마법을...."

"됐고. 이 악물어라."

"뭐?"

제반이 뭐라고 되물어보기도 전에, 에이단이 움직였다.

퍼억!

불끈 쥔 그의 주먹이 제반의 뺨에 강하게 후려쳤다.

제반의 몸이 지면 위를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쓰러진 제반을 내려다본 에이단은 그를 강하게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적어도 네가 자신의 패배를 달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렇게까지 쓰레기일 줄은 몰랐다."

제반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미 그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에이단에게 완전하게 패배해서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으니까.

뒤늦게 심판이 부랴부랴 나서며 에이단의 몸을 확인했다.

"에이단 학생! 몸은 괜찮나?"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러는 심판님은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시고요?"

"어, 어? 덕분에. 고맙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정말 위험할 뻔했어."

에이단은 연신 고개를 숙이는 심판에게 괜찮다며 오히려 죄송해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선생들과 관객들은 에이단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반마법의 사용자라고 하더니 진짜였네요."

이미 에이단에 대해서 어렴풋이 전해 들은 마리 로스는 입가에 손을 얹으며 호호 웃어 보였다.

반면, 휴고와 크리스는 그야말로 뭐 씹은 얼굴이 됐다.

그저 루드거만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

학생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뜨거웠다.

"방금 봤어? 마법을 칼로 벴어!"

"바보야. 칼이 아니라 지팡이잖아."

"그거나 그거나!"

"그렇다 해도 뭔가 다른 마법을 구현하는 건 느끼지 못했는데. 대체 뭐였던 거야?"

"마법을 없앤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었어?"

반마법의 존재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에이단이 조금 전에 보여 준 퍼포먼스는 거의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제반이 저지른 믿기지 않는 일.

그것마저도 순식간에 잊힐 정도로 에이단의 마법은 대단했다.

놀라워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에이단의 마법이 어떤 것인지 알아차린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저 아이. 조금 전에 반마법을 사용한 거야?"

새하얀 백발에 눈처럼 차가운 인상의 아름다운 소녀가 에이단의 모습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말은 에이단을 아래로 잡아보는 듯했지만, 그녀 또한 이번에 막 세오른에 입학한 신입생 중 하나였다.

이번 세오른 1학년 입학생 중에서 단연코 최고의 자리를 논하기 충분한 소녀.

입학 성적 1위의 수석이자 마탑에서 기대주로 밀어주는 불세출의 신인.

줄리아 플룸하트.

그녀는 에이단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처음에는 그냥 심심풀이 삼아서 흥미 차원으로 구경하러 왔는데. 재미있는 걸 봐 버렸네.'

원래 그녀의 성격이었다면 이런 일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거다.

학생끼리의 대련을 가지고 결말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다만 이번에 유독 사건이 커져서, 학생과 학생이 아닌 평민과 귀족의 싸움으로 넘어갔고.

심지어 그 뒤에는 두 선생의 자존심 싸움까지 번졌다고 하니, 그저 살짝만 보러 왔을 뿐이었다.

'처음 싸울 때는 정말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해서 바로 돌아갈까 싶었는데.'

그러지 않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반마법을 보게 되다니.

'에이단이라고 했지? 평민이 대체 어디서 반마법을 익힌 걸까? 흠. 조금 흥미가 생겼어.'

줄리아는 제반을 때려눕힌 에이단의 모습을 보며 그대로 경기장을 떠났다.

줄리아 말고도 에이단이 보여 준 마법에 관심을 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것은 2학년에서 가장 손꼽히는 권력을 지녔으며, 귀족 파벌의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프로이덴도 마찬가지였다.

'에이단이라고 했나.'

자신의 파벌에 들어오고 싶다는 펠리오 남작가의 자재인 제반이 싸우겠다고 했을 때.

프로이덴은 굳이 그를 말리려 들지 않았다. 애초에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 그의 본심이리라.

그가 누구와 싸우든 간에 자신에게 이빨만 들이밀지 않으면 충분하다고,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설마하니 그 제반이 싸우던 맞상대가 반마법을 사용하는 평민일 줄이야.

'이번 1학년 신입생들은 하나같이 다 만만치 않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이었군.'

프로이덴은 인정할 건 깔끔하게 인정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에이단이 지닌 반마법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물론 그걸 다루는 에이단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가치는 적어도 어중이떠중이 귀족보다는 더 높겠지.

"가자."

프로이덴은 마지막으로 쓰러진 제반을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힐끔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프로이덴을 따라 그의 파벌 학생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프로이덴은 떠나기 전, 교수 전용석에 앉아 있는 루드거를 곁눈질로 살폈다.

'저 선생.'

잠시 그를 응시하던 프로이덴은 이내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는 대련장을 떠났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오늘 있던 대련의 일로 시끄럽게 떠들었다.

새로운 기린아의 등장.

반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 에이단.

"이런."

에이단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원래 반마법을 이번 대련에서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이 세오른에서 활동하면서 앞으로도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스승님께서 그러셨다. 이 마법은 아주 중요하니까 정말 위기의 순간이 아니면 사용하지 말라고. 그러지 않으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거라고.

'스승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바로 이거였구나.'

벌써부터 이쪽을 기대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학생들의 뜨거운 시선을 보며, 에이단은 앞으로 자신의 아카데미 생활이 참으로 고단해질 거라고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아차.'

에이단은 곧바로 교사 전용석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루드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다행히도 루드거는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새까만 복장은 확실히 눈에 띄었으니까.

루드거는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딱히 그가 대련에서 승리했다고 눈에 띄게 기뻐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시선을 마주한 뒤.

끄덕.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줬을 뿐.

"...!"

물론 그것만으로 에이단에게는 충분했다.

루드거가 잘했다고 인정해 주자 에이단은 드디어 자신이 쟁취한 승리가 실감됐다.

"에이단!"

"잘했어! 네가 이겼다고!"

테이시와 레오가 에이단에게 다가와 함박웃음을 지었다. 에이단은 그런 친구들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런 세 사람을 잠시 지켜보던 루드거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련은 끝났으니 이제 다른 볼일을 볼 차례였다.

"크리스 선생님."

루드거의 부름에 시종일관 불편하게 자리에 서 있던 크리스 베니모어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의 시선이 루드거를 향했다.

"아직 저희끼리의 볼일이 남아 있었죠."

그 말에 크리스의 얼굴은 더욱 처참하게 무너졌다.

◈ 50화 안티 매직(Anti Magic) (2)

크리스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루드거와 내기를 제안했었다. 자신들이 맡은 학생 중에서 누가 이번 대련에서 이길지 정하고, 진 사람은 이긴 사람에게 마법 연구 논문 중 하나를 공짜로 넘기기로.

그것을 먼저 제안을 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크리스 본인이었다.

내기를 하겠다고 많은 학생이 보는 앞에서 선언했으니, 아니라고 발뺌을 할 수조차 없는 상황.

크리스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루드거를 강하게 쏘아봤다.

"당신은... 저 평민 학생이 반마법의 소유자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날아오는 대답에 크리스가 울컥하며 외쳤다.

"그걸 알면서도 이 내기를 하셨던 겁니까!"

"흠. 저는 크리스 선생님께서 왜 그렇게 화를 내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크리스 선생님께서는, 에이단 학생이 반마법의 소유자라는 걸 모르셨습니까?"

"...."

그 말에 크리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루드거의 말대로였다.

그는 에이단이 반마법의 소유자라는 걸 몰랐다.

그래. 몰랐으니 이런 대련을 허가한 것이다.

"크리스 선생님께서는 1학년 담당이라고 들었는데, 이번에 입학한 1학년 학생들에 대해 확인을 안 하셨습니까?"

"...."

"무엇보다 에이단은 대련 내내 단 한 번도 반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반마법을 익힌 것이, 대련의 승패에 영향을 주는 거로 보이셨습니까?"

크리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루드거의 말마따나, 크리스는 감히 이번 시합을 가지고 따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알 수 있었는데 알려고 하지 않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였으니까.

평민이라서, 하찮은 아이들이라서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지니고 있던 그 편협한 사상이 결국 돌고 돌아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날아오고 만 것이다.

그걸 대체 누구 탓을 해야 하는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루드거?

평민 주제에 반마법을 배운 에이단?

아니다.

잘못한 것은, 결국 자신이다.

아무런 준비도 철저히 하지 않고, 사전에 정보를 모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막연하게 이길 거라고 착각한.

그의 오만함이 패배의 원인이었다.

"평소에 학생들이 어떤 특기를 지녔는지 잘 확인하셨더라면, 오늘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죠."

"...."

크리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 반마법을 깨닫지 못한 것은 분명 그의 실책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자존심이 상하는 점이 있다면, 이번 대련의 결과는 그 반마법으로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에이단은 대련에서 반마법의 반 자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순수하게, 자신이 세오른에 와서 익히고 배운 것만을 사용해서 제반을 쓰러뜨린 것이다.

비겁하다느니, 반칙이라느니,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야말로, 그는 진짜로 패배하는 거니까.

부들부들 떨며 아무 말도 못 하는 크리스를 보며 루드거가 운을 뗐다.

"내기의 대가로 마법에 대한 학술적인 논문을 걸었던 거로 기억합니다만."

"...그랬죠. 좋습니다. 제가 뭘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그 말에 크리스는 어리둥절했다.

"지금, 대체 뭐라고...?"

"저는 아무것도 받지 않겠습니다."

"아무...것도? 갑자기 왜...."

"갑자기가 아닙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습니다."

루드거의 말에 크리스는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이해했지만, 애써 그 현실을 부정하고 있던 것에 가까웠다.

"내기의 대가로 타인의 가르침을 강탈하는 건, 격이 떨어지거든요."

루드거는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나 버렸다.

더는 자신과 대화를 이어 나갈 생각이 없다는 듯.

그 모습에 크리스는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었다.

'격이 떨어진다고?'

그에게 무시를 당했을 때도, 내기에서 패배를 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짜증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루드거가 내기에서 승리했음에도 자신에게 무언가를 받아 가기는커녕, 그런 내기라는 행위 자체가 격 떨어진다고 말했을 때.

크리스는 짜증을 넘어서 허탈감마저 느꼈다.

그 남자는 마치 거울 같았다. 이쪽의 추악한 모습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비춰 주는 마음의 거울.

그를 적대하고 더욱 강한 증오를 품으며 노려볼수록, 그가 비춰 주는 모습은 더 징그러워진 자신의 모습이었다.

'나를, 이 크리스 베니모어가... 격이 떨어진다고?'

크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입가를 타고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그것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잔뜩 핏발이 선 눈빛으로 루드거의 뒷모습을 노려볼 뿐이었다.

'루드거 첼리시.'

대체 얼마나 더 이쪽의 자존심을 짓밟아야 성이 풀린단 말인가.

용서할 수 없다. 용납할 수 없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이번에 겪은 수모를 배로 불려서 되갚아 주리라.

"크리스 선생."

휴고가 다가오며 그를 불렀지만, 크리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 추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그는 황급히 자리에서 도망치듯 벗어났다.

휴고는 그 모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이윽고 이쪽을 보며 살포시 웃는 총장을 보며 짜증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은 대대적으로 귀족들에게 있어서 수치스러운 날로 기억될 것이다.

'루드거 첼리시.'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그 남자를 떠올리며.

휴고 부르테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 * *

친구들과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던 에이단은 불현듯 제반과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의 시선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제반을 향했다.

세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마주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제반을 향해 다가갔다.

"뭐냐."

제반은 이쪽으로 오는 에이단과 그 친구들을 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날 더 비웃을 거리가 남아 있었나?"

"제반. 대련 전에 한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약속이라는 말에 제반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패배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반 펠리오. 내 친구들에게 심한 말을 했던 걸 지금 이 자리에서 정중하게 사과해."

"지금, 감히... 나한테 사과를 하라고?"

"먼저 내기를 걸고 대련을 신청한 것은 너였어. 제반. 나는 그저 그걸 지키라고 말하고 있어. 어서 사과해. 정중하게."

"...."

제반은 주먹을 까득 말아 쥐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에이단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심지어 기습적으로 날린 일격마저 실패했다.

그냥 패배한 것도 아니고 발악하다가 추하게 패배했으니.

더 이상 그가 세오른에서 서 있을 곳은 없었다.

제반은 괜히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빌어먹을. 전부, 네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나는...!"

"제반."

"닥쳐! 내 이름을 부르지 마! 네놈만 아니었어도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런 추한 꼴은 겪지 않았을 거야! 그래! 전부 네 잘못이라고!"

"...."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떠드는 제반의 모습을 보며 테이시가 울컥해서 나서려 했지만.

에이단이 손을 들어 올려 그녀를 제지했다.

"에이단. 왜?"

"나서도 소용없으니까."

에이단은 알았다. 여기서 테이시가 무슨 말을 해도 제반은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에이단은 제반이 보였던 그 행동을 보며 무언가 크게 깨달았다.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고, 알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이단은 아직도 살기 어린 표정의 제반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자신의 생각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제반은 더욱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젠장! 빌어먹을! 너희 더러운 평민들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세오른에서 지낼 수도 없어! 우리 펠리오 가문은 앞으로 어딜 가서도 고개를 들 수도 없다고! 너 때문에! 너희들 때문에!"

제반은 자신이 저지른 반칙이나 비겁한 행동은 이미 기억 속에서 지웠다.

그저 스스로가 왜 이런 꼴을 겪어야 하는지 원통하고 억울해서 견디지 못할 뿐이었다.

"왜! 왜 너 같은 거한테 그런 능력이 있는 건데? 왜 나한테는 없는데!"

"제반."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는 그저... 우리 가문의 명성을 높이고 싶었을 뿐인데!"

제반은 고개를 푹 숙이며 절규했다.

방법이 잘못됐다는 걸 알아도 그는 멈추지 않았을 거다. 단지 그런 목적을 목표로 삼았으니까.

에이단은 그런 제반을 보며 뭐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저 상태의 제반에게서 사과를 받아 내기는커녕, 제대로 된 대화를 이어 나가기도 힘들었다.

평소라면 적당히 하라고 화를 냈을 테이시조차도, 망가질 대로 망가진 제반의 모습을 보며 말을 아꼈다.

가문을 위상을 높이겠답시고 저렇게까지 행동하는 제반의 모습에, 그녀 또한 가슴을 옥죄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어쩌면 나도, 저렇게 됐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

그 순간, 싸늘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대련이 끝났는데, 아직까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루드거, 선생님."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복장을 갖춰 입은 루드거는 항거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에이단과 그 친구들을 응시하다가,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제반을 향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제반 펠리오. 대련에서 패배해 놓고 꼴사납게 뭐 하는 짓이냐."

"...."

"싸움에서 패배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추하게 기습까지 가한 녀석이, 대체 뭐가 그렇게 억울해서 눈물을 흘리는 거지? 지금 너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루, 루드거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말이 심한 게 아닌가 싶어서 에이단이 나섰지만 루드거는 멈추지 않았다.

"하찮구나. 너무나도 하찮아. 지금 네 모습은, 네가 평소에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던 평민들보다 훨씬 더 못하지 않은가."

"...당신이 뭘 알아!"

결국, 참지 못한 제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루드거를 노려봤다.

"내가, 내가 무슨 기분인지 뭘 아냐고!"

"알아야 하나?"

"...뭐, 뭐라고?"

"내가 그걸 굳이 알아야 하냔 말이다."

"이, 이...!"

제반이 뭐라고 외치려 했지만, 루드거의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럴 생각이 쏙 들어갔다.

타오르던 분노는 삽시간에 꺼졌고, 그 대신 자리 잡은 것은 공포였다.

루드거의 눈동자는, 이쪽을 응시하는 그 싸늘한 시선은.

마치 새까만 어둠 속에서 마주하는 악몽과도 같았다.

"멋대로 시비를 걸고, 멋대로 내기에서 패배하고. 그마저도 받아들이지 않고 무너진 것도 전부 네가 자초한 일이다. 그런데 거기서 너는 또 자신의 기분을 남들이 헤아려 주길 바라는군. 왜 우리가 네 기분을 알아야 하지?"

"그, 그건...."

"여기가 아직도 너희 가문인 줄 아나? 내가 너의 불만을 들어 주는 보모로 보이나?"

"나는, 나는...."

"제 앞가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애새끼가, 자신의 분함만 아기 새처럼 꽥꽥대며 외치기만 하는군.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부끄러운 건지도 모르는 네놈은 마법사로서 실격이다. 뭐가 귀족이고, 뭐가 마법사냐."

평소 루드거와 다르게 거의 폭력에 가까운 말에, 제반은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나, 나는...."

"시끄럽다. 네 변명을 들어 주고 싶지도 않군. 네놈이 조금 전에 보였던 추태는 징계 위원회에 회부할 테니 그리 알고,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라."

협박에 가까운 루드거의 경고에, 안색이 창백해진 제반은 후들거리는 발걸음으로 뒷걸음질을 치더니 이윽고 경기장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지켜보던 삼총사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품었다.

분명 쌤통이지만, 너무 과한 게 아니었냐는.

특히 에이단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에이단."

"네, 선생님."

"기동 술식을 제대로 구현하게 됐군. 잘했다."

"전부 선생님 덕분입니다."

"하지만 이긴 것치고는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는구나."

"그건...."

에이단은 스스로가 왜 이렇게 기분이 저조한지 납득하지 못했다.

분명 모두가 보는 앞에서 멋지게 대련에서 승리했다. 그것에 기쁜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역시 이후 제반의 그 절규 어린 외침을 들었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분명, 통쾌함도 있었어요. 제반은 제 친구들을 욕보였고, 제게 시비를 걸었죠. 그런 제반을 쓰러뜨리고 싶다는 생각은 분명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어요."

"방금 그 떼쓰는 말에 흔들리기라도 한 거냐."

"분명 그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었어요. 네.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었죠. 그런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에이단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솔직하게 토로했다.

루드거는 그런 에이단을 말없이 바라봤다.

이전부터 에이단이 지나치게 정의롭고 올바른 가치관을 지녔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나 마음이 약할 줄은 몰랐다.

자신을 무시하고 깔보던 제반에게조차 동정심을 품다니.

하지만 그 모습이 나쁘냐고 한다면 그렇지 않았다.

에이단은 어리고, 세오른이라는 이 빛나는 세상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다.

학생이니까, 어리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래도 된다. 그를 보고 멍청하다고, 답답하다고 탓할 수는 없었다.

저게 저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었으니까.

"에이단."

"네. 선생님."

"세상을 살다 보면, 언젠가 너는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치게 될 거다."

"네?"

"새겨들어라. 모든 사람이 다 너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너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적대하기도 하겠지. 결국, 그런 거다. 너의 세상과, 다른 사람의 세상은 다른 거니까."

"...그런, 가요."

"하지만 그건 서로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바뀐다."

그 말에 에이단과 테이시, 레오는 살짝 놀랐다는 듯 루드거를 바라봤다.

"자신의 것만 챙기려는 행위가 나쁜 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걸 양보하는 행위도 멍청한 건 아니다. 하지만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적당함이라는 거다."

"적당함...."

"절반이다. 에이단. 이기심도 이타심도 절반 정도면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절반을 가져가는 대신 절반을 양보하면. 그때는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는 날도 오겠지."

그 말에 에이단은 테이시를 돌아봤다.

분명 그녀와의 첫 만남 때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거로 기억한다.

테이시는 마치 가시가 가득한 장미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은 자주 붙어 다니게 됐다.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말고, 배려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너는 그게 불가능해 보이니까. 그러니 말하는 거다. 전부는 아니어도 좋다. 하지만 적어도 절반 정도는 이기적이어도 괜찮다."

절반.

그 말에 에이단은 뭔가 잡힐 듯 말 듯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말이 너무 많았군. 이만 가 보겠다."

"그, 루드거 선생님!"

"뭐지?"

"...그 말씀. 꼭 새겨듣겠습니다."

결연한 얼굴로 대답하는 에이단을 슬쩍 돌아본 루드거는 이윽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경기장을 떠났다.

세 사람은 그런 루드거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말없이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 51화 제임스 모리아티 (1)

홀로 경기장의 어두운 복도를 거닐고 있자니, 모퉁이에서 한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퍼스... 아니, 루드거 선생님."

"세디나인가."

볼륨이 살아 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세디나 로쉔. 지금까지 루드거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는 루드거를 보는 순간 얼굴이 확 밝아졌다.

잠시 주위를 살펴 혹시라도 목격자가 없는지 확인을 한 그녀는 이윽고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내기에서 승리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그래."

"그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번 일로 아카데미 내부에서 관심을 지나치게 받으신 게 아닐지. 다른 멤버들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세디나가 염려하는 것은 그 부분이었다.

루드거는 거짓된 신분으로 세오른에 숨어든 상황이다.

하지만 최근 그가 보인 행보는 지나치게 세오른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을 해도 시선이 따라붙어서 대계에 상당한 지장이 가고 만다.

그 걱정에 루드거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이렇게 될 걸 각오하고 있었으니."

"각오하셨다니...."

"세디나. 세오른의 총장에 대해서 아는가?"

총장의 이름이 나오자 세디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름은 엘리사 윌로우. 젊은 나이에 6위계의 렉서러급을 달성한 유명한 마법사입니다. 지금 세오른의 총장이기도 하고. 절대로 방심할 수 없는 작자입니다."

"그래. 그녀가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다."

"루드거 선생님을... 말씀입니까?"

"총장은 세오른에 우리 쪽 사람들이 숨어든 것을 눈치채고 있다. 아마 그녀는 지금, 상대가 교사라 하더라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나는 지금 그 의심을 떨쳐 낼 필요가 있다. 그 때문에 나는 다른 멤버들과 접촉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의심을 덜 받기 위해서 교사의 신분으로 오신 거였는데...."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이번 일로 세오른의 신뢰도를 쌓는다면 남는 장사지.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여, 역시 그랬군요.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이미 루드거에게 콩깍지가 제대로 씐 세디나는 루드거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사실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다.

루드거가 세오른에 와서 두각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는 것은, 총장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기는 했으니까.

다만, 세디나로서는 루드거가 지나치게 관심을 많이 받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없잖아 있었다.

실제로 다른 멤버들의 말을 몰래 들어 보면, 퍼스트 오더인데 이상할 정도로 하는 것이 없다는 말도 나왔을 정도니.

'그래! 역시 루드거 선생님께서 그러셨을 리가 없지!'

그녀는 루드거를 믿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믿고 싶었다.

처음이었다.

자신의 말을 이렇게 잘 들어 주는 사람은.

그런 분을 의심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세디나. 너도 마찬가지다. 네가 지금은 세오른의 학생인 만큼, 지금은 학생으로서 최선을 다해 지내라."

"그, 그런가요?"

"그래. 멤버 중에서 나와 접촉이 용이한 건 너뿐이다.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이니까.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의심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학생을 내가 무턱대고 만나 줄 수는 없다."

"그, 그렇겠죠?"

"모범생으로서 모습을 보여라. 그럴수록 의심의 시선은 거두어질 거다."

"그렇군요!"

"그래. 즉 이건 우리 둘만의 임무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신분에 철저히 적응하는 것. 알아들었나?"

"우리, 둘만의... 임무."

세디나는 루드거가 '우리'라는 말을 써 주자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그 모습을 보며 루드거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설명을 해 줬으면 충분히 납득하겠지.'

세오른의 강사의 일에 심취해서 열심히 하고는 있다지만, 루드거는 검은 여명회의 존재를 단 한시라도 간과한 적이 없었다.

일단 명목상 그는 검은 여명단의 퍼스트 오더라는 칭호를 지닌 간부다.

문제는 아직 루드거는 본인이 간부로서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잠입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암호문을 해석해서 알게 된 거라고는 일단 잠입해서 환심을 사라는 것이 전부.

그 이후에는?

원래 계획이 예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차후 상황을 봐서 새로운 명령이 하달되는가.

루드거는 그걸 몰랐다.

그렇다고 세디나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그녀라고 간부가 무슨 일로 왔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결국, 혼자서 알아내야 한다는 건데.'

아마 제로 오더에게 직접 명령을 하달받았거나, 혹은 다른 퍼스트 오더가 업무를 함께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당장에 알아낼 방법은 결국, 이 세오른 어딘가에 잠입해 있는 또 하나의 퍼스트 오더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

하지만 퍼스트 오더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루드거는 검은 여명회의 의심을 최대한 지우면서 활동해야 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교사로서 더 열성적으로 움직였다.

'총장이 나를 의심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런 총장의 의심을 지우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야. 이걸 변명 삼으면 적어도 조금씩 늘어나는 비밀 결사의 불만을 잠재울 수는 있겠지.'

그리고 이걸 빌미로 주어진 데드라인을 더 늘리는 것도 가능했다.

실제로 이렇게 설명했을 뿐인데도, 세디나는 곧바로 납득한 기색이었으니까.

'아니. 얘는 그냥 퍼스트 오더를 상대로 극단적인 찬양밖에 안 하니까 공정한 예시로는 삼을 수 없으려나.'

하지만 괜찮다.

이런 세디나가 나서서 다른 부하들에게 대신 설명을 해 준다면, 루드거로서는 한층 더 편해질 테니까.

실제로 세디나는 벌써부터 그럴 생각이 가득했다.

'역시 루드거 선생님! 우리가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 생각이 있으셨구나!'

세디나의 사회적인 지위 때문에 조직 내에서도 왕따 비슷한 걸 당하고 있지만, 최근 그녀가 루드거의 전속 부하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멤버들이 그녀를 건드리는 일이 사라졌다.

덕분에 세디나는 이 또한 루드거의 은혜라고 생각하며 더더욱 그를 우러러보게 됐다.

'심지어 나 같은 것까지 걱정해서 저런 뼈 있는 조언까지 해 주시다니! 정말 대단해!'

루드거가 그렇게까지 말했으니 세디나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다른 녀석들에게는 잘 설명하도록."

"네! 제게 맡겨만 주세요!"

"아, 그리고...."

"네! 또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아니. 됐다. 다음에 말하도록 하지. 그리고 예전보다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구나."

루드거가 마지막에 한 칭찬에 세디나는 전신에 찌릿하고 전기가 흐르는 충격을 느꼈다.

"부탁하마."

"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해내겠습니다!"

"죽지는 말고."

"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지 않겠습니다!"

"...그래. 됐다."

볼 때마다 뭔가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세디나를 뒤로하고 루드거는 자리를 떠났다.

* * *

개인 숙소로 돌아온 나는 방에 들어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했다.

'일단 이번 공개 대련을 통해서 나는 대대적으로 총장의 파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게 됐다. 총장 본인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도 입장이 있으니 나를 내치기는 힘들 터.'

당장은 총장의 파벌이 더 우세해 보이지만, 휴고가 이끄는 귀족 파벌도 우습게 볼 순 없었다.

일단 누가 뭐래도 학생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것은 그런 귀족들이 모인 프로이덴의 세력이다.

그런 프로이덴과 함께 손을 잡은 것이 휴고를 위시한 귀족 선생들.

당장은 총장의 권력이 강해 보이지만, 그들이 제대로 총장의 뜻에 반대한다면 총장도 뭘 함부로 결정하기 힘들 거다.

'그리고 내가 총장의 관심을 끈 덕분에 나는 검은 여명회의 간부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는 명분을 얻었다. 다른 비밀 결사 사람들도 내게 함부로 접촉하려 들지 않겠지.'

즉 나는 일정 기간 검은 여명회로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제권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니 검은 여명회와 관련된 것은 일단은 미뤄 두고.

'역시 세오른 쪽이 가장 중요한가.'

이번 공개 대련으로 나는 이제 완전히 휴고의 파벌과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섰다.

하지만 이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2년만 채우고 그만둘 거. 귀족 교사들에게 밉보인다고 해서 뭔가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테니까.

조금 기분 나쁘게 툭툭 건드리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어 온 온갖 인간군상과 비교하면 애교 수준이지.

무엇보다 오늘 대련을 통해서 나는 일종의 가능성을 봤다.

'에이단. 이전부터 느꼈지만, 확실히 괜찮은 녀석이야. 눈치도 적당히 있고, 적당히 선한 면도 있는 데다 노력파이기까지.'

내가 좀 빡빡하게 가르쳤다고는 하지만, 3일 만에 기동 술식을 익힌 것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재능인가. 아니면 집념에 가까운 노력인가.

머리만 잘 쓴다고 해서 기동 술식을 완전하게 익힐 수 없는 걸 생각하면, 몸을 쓰는 것은 타고났을지도 모른다.

반마법, 안티 매직으로 마법을 갈랐을 때의 동작.

그건 분명 검을 훈련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걸 감안하면, 에이단은 실전 전투에서 상당한 두각을 보일 가능성이 컸다.

'하긴. 스승을 생각하면 그럴 만하겠군.'

에이단의 스승으로 추정되는, 아니 사실상 확신하는 마법사를 만난 적이 있었기에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에이단이 딱 한 번 보여 준 자세는 그 인간이 주로 사용했던 검술 교본과 너무나도 똑같았으니까.

평생 혼자 살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줄 알았더니, 꼴에 제자는 하나 들여놨군그래.

'반마법의 소유자인 에이단이라면, 못해도 세오른에서 상당한 위치까지 오르게 되겠지.'

나는 머릿속으로 간단한 계산을 마쳤다.

세오른과 일부 특수한 학생들을 이용해 비밀 결사인 검은 여명회와 맞서 싸우도록 만들기로.

양쪽에 모두 한 발을 걸쳐서 샌드위치가 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나를 짓누르는 이 압력을 약화시키는 거다.

그중에서 역시 가장 거슬리는 건 검은 여명회.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놈들의 세력을 야금야금 긁어먹으며 줄여 놓는다면.

'내가 살 확률은 그만큼 높아지겠지.'

에이단, 레오, 그리고 테이시. 이 삼총사의 능력은 객관적으로도 높게 살 만하다.

아마 가진 바 재능만 따지고 보면 1학년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지 않을까.

거기에 판정안을 지닌 리네까지 추가하게 된다면.

'나쁘지 않겠어.'

물론 이 정도로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니 혹시 모를 보험을 위해서라도 다른 녀석들을 더 물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렇게 서로 충돌하게 만들면 이쪽은 숨통이 트이게 되니까.

'이이제이 방법은 이 정도로만 하고.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힘을 키워야지.'

현재 내 상황은 양쪽의 조직에 압박을 당해서 개인인 내가 짜부라지기 직전이다.

단순히 양 집단을 약화시키는 것만으로는 이 상황의 근본적인 타개책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방법이 뭐가 있을까.

'나 또한 나만의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사실, 나는 혼자서 움직이는 걸 선호했다.

하지만 제국에 오래 머물러야 할 필요가 있는 만큼, 더 이상은 솔플을 할 수 없었다.

사람이 더 필요하다.

한스 말고도 이 전부터 인연을 맺었던 녀석들을 부르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그 조직이 곧 내 힘이 되고, 그 힘이야말로 나를 억압하는 힘으로부터 저항할 수 있게 만들어 주니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녀석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내 방에 놔둔 수정 구슬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한스 녀석에게 건네준 개인 통신 구슬이 울렸다는 것은 오직 하나.

"한스. 무슨 일이지."

[형님이 시키신 대로 일단 주변 일대는 다 확인해 봤소.]

역시 그거 때문인가.

"네 실력을 생각하면 정보는 필요한 만큼 다 얻었을 테고. 그런데도 나한테 따로 연락했다는 것은, 힘이 필요한 거군."

[...거 눈치 한번 더럽게 빠르네. 맞소. 지금부터는 '무력'이 필요한 시기라서 말이오. 형님도 알잖소. 내가 싸움은 젬병인 거.]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아무튼, 이제 형님의 도움이 필요한 일만 남았소.]

"그런가."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용 흑색 롱코트를 챙겨 입었고, 신사 모자를 머리에 썼다.

[그래서 언제 올 거요? 늦어도 주말 전까진 처리해야 할 거 같은데.]

"지금 바로 가지."

[예?]

설마 내가 바로 가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는지, 수정구 너머에서 당황에 찬 탄성이 들려왔다.

"빨리 처리하면 좋지 않나."

[그것도 그런데.... 괜찮겠소? 바쁜 몸일 텐데.]

"어차피 금방 끝날 거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 52화 제임스 모리아티 (2)

레더벨크 뒷골목에 맴도는 공기는 피부를 아리게 만들 정도로 차갑다.

그 어둡고 짙은 남색의 공간 속에서 한스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높기는 더럽게 높구만.'

한스도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봐 왔다고 자부했지만, 제국의 대도시인 레더벨크는 지금까지 그가 봐 왔던 어떤 도시보다도 높았다.

심지어 그가 서 있는 이 허름한 뒷골목조차도 말이다.

마치 벽돌과 황동으로 이루어진 감옥 같다.

'나도 나중에 형님처럼 그 와이어 훅인가 뭔가 하나 챙겨 다닐까.'

그런 거 하나 있다면 이 레더벨크에서 위험한 순간에 도망치기 용이할 것 같았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늑대인간을 쫓을 때 루드거가 사용했던 모습이 멋있어서 그런 거지만.

그 순간, 골목길 너머의 어둠이 일렁이며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귀신이라도 나타난 것 같은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벽에서 등을 뗀 한스는 옷깃을 여미며 인사를 건넸다.

이 광경은 이미 몇 번 봐 왔으니까.

"오셨소?"

스르륵.

어느덧 그림자는 형태를 바꿔 사람의 모습을 취했다.

어깨에 망토가 달린 새까만 인버네스 코트.

금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지팡이를 쥔 손에는 검은 가죽 장갑.

평소와 달리 머리를 묶지 않고 완전히 풀어서 올백으로 말끔하게 넘긴 헤어스타일에 실크해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루드거의 인상이 확 다르게 보였다.

"상황은?"

"음. 일단 내가 알아낸 것부터 말해 주겠소. 우리 아지트가 뒷골목이잖소?"

"그랬지."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 근방에 여러 개의 암흑가 조직이 서로 세력을 분할해서 나누고 있더군."

한스는 자신이 확인한 정보를 정리해서 알려 주었다.

애초에 지난 며칠 동안 열심히 돌아다닌 것은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였으니까.

"놈들은 크게 4개의 조직으로 구분되어 있소. 그중에서 가장 강하고 크기가 큰 대규모 조직 1개와, 나머지 중간 규모 정도의 3개가 있지."

"총 네 군데인가. 대도시라 그런지 좀 많군."

"일단 아래 중간 규모부터 설명하겠소. 가장 먼저 몸이 불편하거나 소외된 자들이 모여서 만든 서커스단이 있소."

"서커스단?"

"이런 도시에서 적당한 재주로 먹고살려면 그게 필수니까. 그런 놈들이 모인 하나의 노동조합이자 일종의 패거리라 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서커스단, 키르쿠스요."

루드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르쿠스라. 좋아. 그다음은?"

"그다음은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곳이지. 어느 도시에 가더라도 뒷세계에는 절대 빠지지 않는 곳."

"사창가로군."

힌트랄 것도 없이 루드거는 정확히 알아맞혔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불편해하거나 불쾌감을 표현하겠지만, 이런 뒷골목에서는 절대 빠질 수가 없는 곳이었다.

이곳은 그런 세계였고.

심지어 21세기 지구에서도 이런 곳은 항상 존재했으니까.

"그래도 마냥 약하지만은 않고, 나름의 노하우가 있어서 하나의 조직으로 먹고사는 느낌이오. 정보를 모으는 데 있어서 능력이 상당하다더구려. 게다가 도시의 여러 사업에도 손을 뻗어 놓고 있으니 말이오. 자신의 조직원인 걸 확인하기 위해서 아주 작은 새까만 장미의 문양을 공유한다던데, 그래서 이름도 검은 장미의 여인들이라고 하더군."

검은 장미의 여인들이라.

루드거는 그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마지막 하나는?"

"마지막으로는 아이와 노인들이 모여서 만든 조합이오. 다 늙어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지만 노하우와 경험이 넘치는 인간들과, 아직 어리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일선에 뛰어드는 아이들."

루드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어린 나이에 노동력 취급을 받으며 일하는 것은 이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당장에 거리를 돌아다니면 신문을 파는 아이들이 가득 넘쳤으니까.

그 외에도 좀도둑에 소매치기하는 아이들도 있고, 혹은 저택의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중에 가장 심한 건 공장이나 광산에서 제대로 휴식도 못 취한 채 막노동을 하는 경우겠지.

"그렇게 노인과 아이들이 모인 이곳을 올드키즈라 하더군. 이쪽도 정보를 모으는 데 주력해서 검은 장미의 여인들과 쌍벽을 이룬다고 하오."

"아이들은 듣는 것이 많으니까."

일단 한스가 알려 준 정보를 정리하자면 이랬다.

서커스단 키르쿠스.

사창가 검은 장미의 여인들.

노인과 아이의 노동 연합 올드키즈.

총 3개가 뒷세계의 중간 규모의 조직이다.

"이제 큰놈이 하나 남았군."

"적사회라고, 뒷골목 갱단이오."

"적사회라. 얼핏 이름은 들어 본 거 같군."

"레더벨크 뒷골목을 주름잡고 있는 놈들이지. 납치, 협박, 약물 및 마약 유통, 주류 산업, 주먹이 필요한 일 등등. 더러운 일 중에서 놈들이 손대지 않은 것은 거의 없소."

앞의 세 조직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뭉치고 뭉쳐서 어쩌다 만들어진 것이라면.

적사회는 말 그대로 세상의 그림자가 고이고, 그 악취에 이끌린 벌레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필연적인 존재들이었다.

"이 뒷골목은 적사회와 나머지 3개의 조직이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루는 상태로 유지되고 있소. 적사회가 패악질을 부리고, 나머지 셋이 힘을 합치는 꼴이지."

"처리해야 할 놈이 바로 그 적사회라는 거로군."

"맞소. 애초에 나머지 세 조직은 자기들을 직접 건드리지 않으면 반응조차 하지 않는 작자들이오. 사실상 위험도 자체는 낮지. 하지만... 적사회 놈들은 다르오."

"그렇겠지. 일단 자잘한 놈들은 전부 제압해서 자기들 밑으로 두거나, 혹은 박살을 낼 놈들이니까."

"조심하시오. 놈들은 세력이 상당히 커서 제압하기 힘들 거요. 최근 우리 아지트를 몰래 지켜보는 눈도 하나씩 붙기 시작했소. 그러니 일단 꼬리부터 차근차근 잡아서...."

자신이 생각해 둔 의견을 내는 한스를 향해 루드거는 고개를 저으며 그 말을 끊어 냈다.

"아니, 됐다. 굳이 꼬리를 먼저 잡을 필요는 없지. 시간 낭비다."

"예?"

"머리를 친다. 그러면 나머지 녀석들도 알아서 숙일 거다."

"아, 아니. 하지만 어떻게 하시려고...."

얼떨떨해하는 한스를 보며 루드거는 피식 웃었다.

"당연히 정면 돌파지."

그러기 위해서 복장도 일부러 이렇게 맞추고 왔다.

한스는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말을 하려 했다가, 루드거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다는 걸 깨닫고 결국 백기를 들었다.

어차피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루드거는 자신이 한 말을 실천할 것이다.

그리고 성공하겠지. 그는 지금까지도 계속 그래 왔으니까.

"하긴. 그 복장도 그렇고. 이번에는 그 신분을 사용할 거요? 거 있잖소. 자칭 범죄 컨설턴트, 뒷세계를 주름잡는 거물."

"그래."

루드거는 그렇게 답하며 주머니에서 한쪽 눈에만 착용할 수 있는 금색 단안경(Monocle)을 착용했다.

평소에 날카롭고 차가운 군인 같던 모습이 단숨에 지워졌다.

그 대신 나타난 모습은 지적이고, 얌전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독사를 품고 있을 것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제임스 모리아티.

그것이 루드거가 이번에 사용할 과거 신분 중 하나였다.

"정말 정면에서 돌파하실 생각이오?"

"왜 그러지?"

"지금 적사회 분위기가 상당히 흉흉해서 그렇소. 답지 않게 날이 잔뜩 선 채로 조직원들이 뭉쳐 다니더군."

"흉흉하다 라. 왜 그런지 알 거 같군."

"형님이 그걸 어떻게 아는데 그러오?"

한스는 자기도 아직 알아내지 못한 걸 루드거가 바로 알 거 같다고 답하자 호기심이 들었다.

"적사회가 지금 뒤숭숭한 것은 아마 그거 때문일 거다. 대부호 벨보트 릭슨의 사망."

"벨보트 릭슨의 죽음과 놈들이 무슨... 아!"

"눈치챘나 보군."

한스는 의문이 풀린 만큼 한층 더 심각해진 얼굴이 됐다.

"벨보트 릭슨과 적사회가 모종의 커넥션이 있던 거였구려."

"그래. 벨보트 릭슨은 이 전부터 더러운 일을 많이 벌였던 거로 악명이 자자했지. 경쟁 사업가의 의문사나, 혹은 공장 건축을 반대하는 판자촌의 화재 사건 등등. 그런 인간이 과연 전부 자기 혼자서 그 일들을 처리했을까?"

"대신 움직여 줄 팔다리가 있었구려."

"그게 적사회이고."

"하긴. 그런 부유하신 분과 마음이 맞아서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해 주는 사람도 필요한 법이지."

"한스. 벨보트 릭슨이 죽은 지금, 적사회는 자신들의 가장 큰 자금줄이 사라져서 상당히 열이 올랐을 거다. 일단 당장은 얌전히 있겠지만, 조만간 부족한 돈을 충당하기 위해서 움직이겠지."

"...놈들이 몰려다니는 이유가 그거 때문이었구려. 아니 잠깐만. 그렇다면 사실상 형님이 놈들의 원수이자 원흉인 거 아니오?"

"그렇지."

루드거의 시원한 대답에 한스는 벙찐 표정이 됐다.

사실상 루드거가 벨보트 릭슨을 죽였기 때문에 적사회가 잔뜩 화가 난 거니까.

물론, 놈들은 루드거가 죽였다는 사실도 모르니 원수라고 부르기도 뭣하리라.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더 적기라고 할 수 있지. 평소라면 뿔뿔이 흩어져 있어야 할 놈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까."

"...정말로 하실 거요?"

"왜?"

"뭐, 형님이야 일단 마법사니까 갱단 놈들이 몇이 달려들더라도 멀쩡하겠지만, 문제는 적사회도 평범한 갱단은 아니라는 거잖소."

"평범하지 않다?"

"온갖 무기로 무장을 한 것은... 뭐 마법사 앞에서는 총알 따윈 나가지 않으니 그렇다 쳐도, 놈들 사이에서 칼밥 좀 먹은 놈들이 깨나 섞여 있단 말이오."

"흐음."

"왜 거 있잖소. 기사가 되려고 했다가 돈이나 인성 문제로 떨어진 놈들이나, 아니면 용병 일로 잔뼈가 굵은 놈들이나. 적사회에 그런 놈들이 여럿 있소. 애초에 그러니까 적사회가 이쪽에서 1위를 먹은 거겠지."

"준 기사급 전력이 있다, 이건가."

기사가 섞여 있다면 그건 좀 귀찮아진다.

지구에서 기사라고 하면 구시대적인 갑옷 입은 칼잡이를 생각하겠지만, 이곳에서는 그러지 않으니까.

기사란 곧 초인이다.

손에 무기만 쥐고 있으면 날아오는 총알도 튕겨 내는 비범한 신체 능력을 지닌 자들.

마법사들과는 서로 오랜 라이벌이었고, 그렇기에 마법사로선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운 상대가 기사다.

오러를 다루는 놈들은 어지간한 마법은 베어 버리거나 뚫고 들어와 버리니까.

그렇기에 한스는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안전한 길을 택하길 원했다.

아무리 그래도 적진에 멋대로 들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짓이었으니까.

"그거 재미있군."

하지만 루드거는 오히려 그 말에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한스는 자기가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형님. 이래도 정말 갈 거요?"

"안 갈 이유가 있나?"

"준 기사급이 있다고!"

"준 기사는 준 기사일 뿐, 진짜 기사는 아니다. 한스. 네가 잘 모르는 거 같은데, 준 기사와 일반 기사의 차이는 크다. 그리고 그런 기사와 단장급은 더욱 크고."

"아니, 내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일반 기사라면 모를까, 준 기사는 별거 없다."

"...."

루드거의 확신 어린 어조에 한스는 입을 다물고 '그런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루드거의 말이 딱히 틀린 건 없었다.

준 기사와 일반 기사의 차이는 실제로 컸다.

사실 좋게 말해서 준 기사지, 실제로는 기사가 되지 못한 자들이 아닌가.

기사의 곁에서 시중을 들어 주며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견습 기사보다 약한 것이 사실이다.

"...얼핏 들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 보니 자신이 너무 비관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 이름에 기사가 들어가서 괜히 겁부터 집어먹은 거지, 사실 별거 아닌 놈들인 거 아니겠는가?

자신의 걱정이 과했다고 생각한 한스는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물론, 그건 한스의 큰 착각이었다.

준 기사가 일반 기사나 견습 기사에 비하면 약한 건 맞지만, 그렇게까지 크게 약한 건 아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정적이라고 부를 정도라 할 수는 없었다.

준 기사라고 해도 숟가락만 쥐면 상대의 멱을 따 버릴 수 있는 실력자들.

이곳 뒷세계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만으로도 항거할 수 없는 벽에 가까울 테니까.

루드거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한스에게 숨겼다.

어차피 한스가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그는 적사회에 쳐들어갔을 테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한스가 뭘 모른 채로 따르는 것이 더 편할 뿐.

"받아라."

루드거는 한스에게 무언가 하나 툭 던졌다.

한스는 그것을 잡아챈 뒤 바로 확인에 들어갔다.

"네 도움이 좀 필요하다."

"...진심이오?"

루드거가 한스에게 던진 것.

그것은 늑대의 이빨이었다.

◈ 53화 제임스 모리아티 (3)

한스는 루드거가 자신에게 왜 늑대의 이빨을 줬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자신의 체질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나 혼자 가면 분위기가 살지 않으니까. 뒤에서 적당히 으름장을 놓을 덩치가 하나는 필요한 법이지."

"...이러다 싸움 나면 모르오. 난 바로 도망칠 거요."

"그 부분까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아."

한스는 한숨을 내쉬며 늑대의 이빨을 손에 쥔 뒤 자신의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찔러 넣었다.

파스스스.

그리고 직후, 늑대의 이빨을 중심으로 한스의 몸에 검은 털이 우수수 자라나기 시작했다.

늑대의 이빨에 담긴 유전자가 그의 피부를 넘어 피에 접촉함으로써, 짐승의 인자가 발현되는 체질이 발동된 것이다.

으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한스의 덩치가 평소보다 거의 1.5배는 더 커졌다.

이윽고 한스를 대신한 것은 거의 터지기 직전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검은 털의 늑대인간이었다.

한스는 옷이 답답한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어 근처에 조심히 놓았다.

"됐소?"

"흠. 나쁘지 않군. 뭐, 마음 같아서는 바지도 필요 없다고 하려 했는데...."

"...그건 좀 봐주시오."

"그래. 그 부분은 내가 이해해 줘야지."

나중에 변신이 풀렸는데, 바지까지 다 벗고 있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은 또 없을 테니까.

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다행이구려."

"흠. 덩치도 나쁘지 않고. 역시 어떤 짐승의 이빨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변하는 형태가 달라지는 게 확실하군."

"...뭐, 그거야 지긋지긋할 정도로 다양한 경험으로 알 수밖에 없던 일이긴 하지. 알고 싶진 않았지만."

"아쉽군. 얻을 수 있다면 곰이나 호랑이의 이빨도 챙겨 두고 싶었는데 말이지."

한스는 굳이 짐승에게 직접 물릴 필요가 없다.

그의 체질이 발동하는 것은 짐승의 인자가 그의 신체 내부에 접촉했을 때뿐이니까.

즉 바꿔 말하면 해당 짐승의 이빨만 가지고 피부에 상처를 내기만 해도 변신의 조건은 충족한다는 소리다.

"그래도 이 늑대 이빨은 유독 대단한 것 같은데, 맞소?"

한스는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원치 않게 여러 모습으로 변신한 한스였기에 지금 모습이 얼마나 특별한지 더욱 체감이 되었다.

몸에 힘이 넘치고, 평소보다 근골이 1.5배는 더 두꺼워졌다.

단순한 늑대의 이빨이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북 대륙에 존재하는 블랙팽의 이빨이니까."

"허. 사납기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위험한 그 짐승들 말이요? 어쩐지. 뭔가 평소보다 힘이 넘친다고 하더니."

"지금까지 네가 변했던 어떤 것과 비교해도 충분히 상위권이라 자부할 수 있을 거다. 물론, 내가 너에게 혹시 몰라서 선물해 준 '그것'을 사용하면, 너는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겠지만."

루드거의 입에서 나온 '그것'이라는 말에, 한스의 얼굴이 늑대의 상태인데도 확연히 알아보기 쉬울 정도로 찌푸려졌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그런 위험천만한 걸 사용하는 건 좀 그러오. 자칫 잘못하면 내가 야성에 잡아먹힐지도 모르는데."

"혹시 모르니까 가지고 있으라고 넘긴 거다. 세상일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까. 목숨이 위험하다 싶으면 쓰도록 해라.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건 그렇지만...."

한스는 그 거대한 어금니를 떠올렸다.

이빨인데 크기가 워낙 커서, 그 이빨을 깎아서 단검의 형태로 만들어 놓았을 정도.

루드거가 한스를 위해 특별하게 선물해 준 물건이었다.

자신의 체질을 저주라고 생각하는 한스는 꺼림칙해하면서도 그 이빨을 계속 보관해 두고 있었다.

"그러면 가 볼까."

"내가 다시 말하지만, 싸움 나면 나는 바로 튈 거요."

"말했잖아. 너는 그냥 분위기만 잡아 주면 된다고.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 너는 신호를 하면 따라와라."

"후우. 알겠소."

검은 옷을 입은 루드거와, 검은 짐승이 된 한스는 곧바로 골목길의 어둠에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 * *

레더벨크 시내의 외각에 자리 잡은 포지스 가는 다양한 상점과 식당, 음악당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또 일부 구역에서는 기계 태엽으로 이루어진 동력 장치를 만드는 작업장도 있어서, 어른들뿐 아니라 아이들까지 활발히 다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포지스 가의 깊은 곳.

도시의 밝은 바깥과 뒷골목의 중간이라 할 수 있는 경계.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커다란 술집에는 지금 손님 대신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이 우르르 모여서 불편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길!"

개중에 술을 병째로 나팔을 불고 마시는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있었다.

근육이 우락부락한 남들에 비해서 크게 특출할 건 없는 체구였지만, 얼굴은 그러지 않았다.

구레나룻을 길게 기른 그는 한쪽 눈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를 지니고 있어서 그 험악함이 남달랐다.

그런 그가 짜증을 내자 주위의 부하들이 눈치만 살폈다.

그때 조언자 역할을 맡은 부하가 용기를 내서 나섰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지금 내가 괜찮아 보이냐?"

"...솔직히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렵군요."

남자는 적사회를 이끄는 두목, 붉은 뱀 두트리였다.

그런 그가 지금 화를 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적사회의 가장 큰 자금줄이자 큰손이라 할 수 있는 벨보트 릭슨이 급사했기 때문이다.

벨보트와 가장 친하게 지내며 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적사회를 키운 두트리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지탱해 준 커다란 기둥 하나가 무너진 상황.

아직 그들을 도와주는 기둥이 몇 개 더 있었지만, 문제는 벨보트 릭슨이 죽기 전 적사회가 그의 사업에 막대한 금액을 투자했다는 것이다.

사업의 지휘자가 사망했으니 그가 지닌 모든 재산이 다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

대부분 투자자가 나눠 먹겠지만, 떳떳하지 못한 돈을 쓰는 두트리의 입장에선 투자한 원금을 회수하기 어려웠다.

그런 것으로 적사회가 쫄딱 망할 일은 없겠지만,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하니,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그러려고 너희들을 이 자리에 부른 거니까. 아무래도 조만간 크게 사업을 확장해야 할 거 같다."

사업 확장.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소 피와 폭력이 동반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노려보기만 했던 다른 조직과 싸움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걱정하는 자들은 없었다.

그들은 적사회고, 무력만큼은 이 레더벨크 뒷골목의 최고였으니까.

"일단 검은 장미 그년들을 어떻게든 찍어 눌러서...."

두트리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

끼이이익.

술집의 문이 삐걱이며 열리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엉?"

"뭐야?"

처음에는 늦게 들어온 조직원인가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적사회의 조직원이라고 보기엔 남자는 너무나도 말끔한 모양새였으니까.

흑색 인버네스 코트에 손에 쥔 지팡이. 머리에 쓴 검은 실크해트와 한쪽 눈에 쓴 단안경까지.

그 모습은 돈이 많고 여유가 있어 보이는 신사 같았다.

"저 새끼는 뭐야? 이봐. 가게 문 닫은 거 몰라?"

두트리는 술에 취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불청객을 노려봤다.

남자는 그 시선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의 근처에 있는 빈 의자를 하나 가져와 술집의 중앙에 앉았다.

다리를 살짝 벌린 채,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지탱하며 앉아 있는 그 모습에는 어딘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위엄이 넘쳤다.

"저 자식 뭐야."

"미친놈인가?"

적사회 조직원들이 전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노려봤다.

두트리는 술병을 마저 비운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넌 누구냐."

"두트리. 적사회의 두목. 맞나?"

"그래. 그러는 그쪽은... 못 보던 얼굴인데. 우리 구면인가?"

"초면이지."

두트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허어. 우리가 적사회인 걸 알면서도 여기에 혼자 들어왔다고? 형씨.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믿는 구석? 그야 있으니 찾아왔지."

사방에서 노려보는 시선에도 남자는 전혀 겁먹은 모습 없이 당당했다.

두트리는 그 모습에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허세를 부리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 뒷골목에서 오랫동안 전전해 온 그는 실력 없는 놈이 부리는 허세와 진짜 실력자가 내비치는 당당함을 구분할 정도는 됐다.

눈앞의 인간은 그중에 후자였다.

'입고 있는 옷도 고급스러워 보이고, 풍기는 분위기 자체도 범상치 않아.'

이런 사람이 자신을 찾아왔다고?

두트리는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흠. 형씨는 대체 무슨 이유로 날 찾아왔지?"

"내가 최근에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됐거든. 그래서 뭔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아! 사업! 좋지! 이거 사람 잘 찾아왔군그래."

두트리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이 남자가 사업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이 돈이 되고 심지어 더러운 일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복장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뭔가 알고서 찾아온 걸 보면, 분명 이 남자도 벨보트 릭슨과 같은 부류일 터.

돈 많고 속이 검은 부유한 상인.

어떤 방식으로든 돈을 벌고 싶은 고객.

'반드시 잡아야 하는 돈줄이라는 거지!'

하지만 두트리는 섣부르게 기뻐하지 않았다. 아직 상대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가득한 상황에서 무작정 믿었다가 뒤통수 맞기 쉬운 것이 이쪽의 법칙 아니었던가.

상대를 모른다면 절대로 믿지 않는다.

상대를 안다고 해도 반만 믿는다.

배신당하기 전에 먼저 배신한다.

그게 시궁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이고 규율이었다.

"그래서, 형씨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는가?"

두트리의 물음에 남자는 자못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제임스 모리아티라고 하네."

"응? 제임스 모리아티?"

두트리는 뭔가 기시감 느껴지는 이름에 의아해했다. 들어 본 거 같은데, 막상 기억이 나는 건 별로 없었으니까.

그때 그의 부관이자 조언자인 오른팔이 무언가 눈치챘는지 황급히 두트리에게 다가와 그에게 귓속말을 전해줬다.

'제임스 모리아티! 그 남자입니다.'

'누구인데?'

'한때 델리카 왕국의 뒷세계를 주름잡던 거물 말입니다.'

'아.'

두트리도 그 말에 겨우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제임스 모리아티.

사람들이 부르길, 모리아티 교수.

자신을 교수라 칭하며 뒷세계에서 악명이 자자한 범죄 컨설턴트였다.

철강 산업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룬 철의 왕국 델리카.

그곳의 어둠을 주름잡고 빛의 바로 아래에 섰다는 사람이 바로 이 남자였다.

그 소문은 이 분야에 있어서 반쯤은 전설로 통할 만큼 유명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다고?'

두트리는 의심이 들었다.

모리아티 교수가 델리카에서 사라진 건 몇 년 전의 일이다.

소문으로는, 유명한 명예 귀족 출신의 탐정에 의해서 최후를 맞이했다고 알려졌는데.

혹자는 그가 잡혀가서 델리카의 깊은 지하 감옥에서 썩고 있다 하고, 혹자는 그가 잡혀가기 전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도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몇 년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을 리가 없다.

어쩌면 눈앞의 이 모리아티 교수가 가짜일 가능성도 있었다.

'뭐, 확인을 해 보면 되겠지.'

두트리는 헛기침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모리아티 교수셨군요. 이름은 많이 들어 봤습니다."

"알아봐 줘서 기쁘군."

"흐음. 그런데 말이죠, 이게 좀 애매하지 않습니까? 모리아티 교수님이 진짜인지 아닌지 그게 좀 애매하단 말이죠."

"내가 사칭이라 생각하나?"

"몇 년 전에 홀연히 사라지셨던 분이 갑자기 이렇게 눈앞에서 나타났는데 말이죠."

모리아티는 주변을 곁눈질로 스윽 살폈다.

부하들이 허리춤에서 하나둘 무기를 꺼내 쥐고 있었다.

휴대가 용이한 걸 보면 단검보다는 권총에 가까운가.

은은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싸구려 화약의 냄새가 그 생각에 확신을 심어 주었다.

이런 말단들에게 전부 다 총기를 쥐여 줬다는 점에서, 적사회가 새삼 꽤 큰 곳이라는 사실이 실감 난다.

"내가 하나 경고하건대 말이네."

"말씀하시죠."

"총은 어지간하면 뽑지 않는 걸 추천하네."

모리아티가 곧바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촤자자작!

동시에 주위에서 무수한 부하들이 총을 꺼내 쥐고 모리아티를 겨누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벌였다가는 벌집이 될 터.

그러나 모리아티는 전혀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마치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 초연하기까지 한 그 기세에, 두트리는 점점 눈앞의 남자가 진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히 요란하군."

모리아티의 도발 어린 어조에 일부 조직원이 머리에 핏대를 세웠다.

그들은 시선으로 두트리에게 쏠지 말지 물어보았다.

두트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신호를 확인한 부하는 천천히 손에 쥔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노리는 것은 머리가 아닌 어깨.

납탄을 한 발 먹여 주면 본색을 드러낼지도 모르겠지.

철컥.

하지만 총알이 나가는 일은 없었다.

"어, 어어?"

"총이 안 나가잖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술집에 모여 있는 모든 조직원의 총이 먹통이 된 것이다.

"그러게 내가 경고하지 않았나."

당혹감이 번지는 상황 속에서 모리아티는 조용히 웃었다.

"총을 뽑지 말라고."

"마, 마법사!"

모든 총이 갑자기 먹통이 된 것을, 두트리는 모르지 않았다.

이건 마법사들이 사용한다는 마법인 [불의 침묵]이 분명했다.

그렇다는 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다른 건 몰라도 마법사라는 건 확실하다는 소리다.

그 순간, 모리아티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가 술집을 울리고 그 너머 바깥까지 퍼졌을 때.

이윽고 술집의 문이 박살 나며 거한이 하나 들이닥쳤다.

"으헉!"

"저, 저게 대체 뭐야!"

그 거한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거대한 늑대였다.

전신에 검은 털을 뒤집어쓰고, 체고만 2.5m가 넘어 보이는 거대한 덩치. 그리고 양팔에 자라난 날카로운 발톱까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더벨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늑대인간 사태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천천히 술집 안으로 들어온 그 늑대인간은 모리아티의 뒤에 멈춰 섰다.

마치 그를 보호하듯이 말이다.

두트리는 그 모습에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아이고. 진짜셨군요. 제가 귀인을 몰라보고."

"이 정도면 충분히 증명이 됐는가?"

"하하. 충분하다 못해 넘칩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인 대화를 할 수 있겠군."

"예. 어떤 사업을 원하십니까? 저희가 필요한 일이 뭐 있으십니까?"

"그보다는 우선 전할 말이 있네."

"전할 말이요?"

모리아티의 말에 그게 뭐냐며 두트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말이네. 이렇게 더럽고 추잡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예?"

"그게 무슨 의미냐면, 적사회는 오늘부로 이곳에서 사라질 거라는 소리일세."

◈ 54화 진흙탕 속 붉은 뱀 (1)

루드거, 아니 지금은 모리아티인 그가 한 말을 두트리는 모르지 않았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눈치였다.

두트리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다들 죽여!"

두트리의 명령은 재빨랐다.

모리아티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찾아온 거라면, 거래고 뭐고 대판 싸우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두트리의 명령에 부하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작동하지 않은 총을 버리고 손에 단검을 꺼내 쥐었다.

다만, 흐름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제대로 된 흉기를 지참하지 못한 것이 독이 된 것이다.

"이야아아압!"

"죽어!"

하지만 상대는 마법사다.

망설이는 순간 죽는 건 이쪽이 될 터.

사방에서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승산은 있다.

무엇보다 거리가 먼 것도 아니고, 모리아티는 보란 듯이 술집의 중앙에 앉아 있었으니까.

걸리는 것은 그 뒤에 듬직하게 서 있는 검은 늑대인간이었지만.

이쪽은 쪽수만으로 100명에 가까웠다.

"역시."

사방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적사회 갱단을 보며 한스가 시선으로 물었다.

이제 어쩌실 거요?

한스는 솔직히 자신을 보고도 겁을 먹을지언정, 도망치지 않은 적사회를 보며 내심 감탄하던 차였다.

충성심? 아니다. 그것보다는 상대가 누구더라도 달려들어서 목을 물어뜯을 정도로 독기가 넘치는 것이다.

남부의 밀림에 서식한다는 붉은 뱀의 이름 그대로.

적사회는 그런 놈들이었다.

루드거는 한스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행동으로 보였을 뿐.

퉁.

루드거는 손에 쥔 지팡이를 들어 올려 그대로 지면에 가볍게 툭 쳤다.

그 순간, 지팡이를 중심으로 그림자가 넘실거리기 시작하더니 술집 전체로 화악 퍼져 나갔다.

"어, 어어?"

"이, 이게 뭐야!"

적사회 조직원들은 그림자에 당황하며 움직이려고 했지만,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몸은 움직였으나 그것을 자신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쪽에 가까웠다.

어둠은 술집 내부의 빛을 모조리 삼켰다.

가로등이 없는 바깥의 골목길보다도, 루드거가 만들어 낸 그림자가 훨씬 더 짙고 어두웠다.

빛이 완전히 사라진 칠흑.

그리고 이 안에서, 오직 한 명.

루드거 본인만큼은 아무렇지 않게 움직일 수 있었다.

"크아아악!"

"뭐야! 아악!"

"아무것도 안 보여!"

어둠 속에서 비명이 울려 퍼진다. 전부 적사회 조직원들이 내뱉는 단말마였다.

지팡이의 안에서 꺼낸 소드스틱. 루드거는 그것을 쥐고서 조직원들을 하나씩 빠르게 제거해 나갔다.

"사, 살려 줘!"

"두목! 도와주십쇼! 두목!"

동료들이 하나둘 죽어 나가고 그 소리가 고스란히 들리자, 나머지 조직원들은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포.

그러면서 착실히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니 정신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으아아! 죽어! 죽으라고!"

"커헉!"

"여기다!"

공포에 미쳐 버린 조직원들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사방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것은 가까운 곳에 있던 다른 동료들을 향했고, 순식간에 술집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난전으로 번졌다.

이건 단순한 마법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어둠과 그림자를 이용한 뒤, 상대방의 약해진 마음에 공포를 심어 넣는 저주까지 더해진 복합 마법에 가까웠다.

발현 계열 속성 원소.

3위계 어둠 마법.

[우매한 자의 꿈]

정신력이 강하거나 제대로 된 실력자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말단들만 가득한 공간에서는 무엇보다도 큰 효과를 발휘하는 마법이었다.

"이런 제길! 뭣들 하는 거야! 어서 막아!"

두트리는 이를 악물며 그렇게 외쳤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의지는 이런 어둠 따위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믿고 있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그의 명령에 따라 지금까지 두트리의 근처에서 호위하듯 서 있던 두 남자가 움직였다.

촤악!

두 사람이 검을 휘두르자 칼끝에 오러가 실리며 마법으로 이루어진 어둠을 교차하듯 갈랐다.

이윽고 마법이 해제되며 주위에 다시 빛이 돌아오고, 술집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두트리가 입술을 떨었다.

"이, 이런."

술집은 그야말로 참상을 방불케 하는 난장판이었다.

100명에 가까운 부하들 주에서 살아 있는 건 채 10명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런 녀석들도 피투성이에 상처가 가득해 거의 다 죽어 가는 중이었다.

두트리의 핏발 어린 시선이 그 참상의 중심에 서 있는 모리아티를 향했다.

'그 늑대 괴물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늑대인간은 그 틈에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고 모리아티 혼자만 있었다.

시체들의 사이에서 소드스틱을 쥐고서 가만히 서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죽기 직전에 나타난다는 사신 같았다.

사방이 피로 범벅이 돼 있는데도 모리아티의 몸에는 피 한 방울 튀어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이 세상과 동떨어진 존재 같아서 두트리는 자기도 모르게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죽여!"

두트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남자가 움직였다.

머리를 삭발에 가깝게 친 덩치와, 머리를 길게 기른 호리호리한 장발의 남자였다.

둘은 양쪽으로 갈라지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모리아티를 향해 쇄도했다.

그 속도는 가히 신속.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엇' 하는 순간에 접근을 허용하고, 바로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준 기사.

기사가 되지 못했지만, 일반인에 비해 아득한 신체 능력을 지닌 자들.

'우습게 볼 건 못되겠군.'

조금 전 자신이 펼친 마법을 가른 것도 그렇고, 오러를 다룰 줄 아는 녀석들이다.

기사단에 들어가는 정기사급은 아니어도 거의 거기에 준하는 수준.

견습 기사보다는 더 강하다.

'그렇다고 질 것 같지는 않지만.'

루드거는 슬쩍 뒤로 물러나며 발아래로 약병을 흘려 냈다.

퍼엉!

직후 약병이 폭발하며 보랏빛 매연이 주변으로 확 퍼져 나갔다.

"독인가!"

장발의 검사는 뒤로 물러나며 두트리를 보호했다. 누가 뭐래도 물주가 죽으면 끝이니까.

덩치는 몸에 오러를 두르며 혹시 모를 독에 저항하고자 했다.

그 순간, 매연을 뚫고 암기가 날아왔다.

채채챙!

덩치는 차분하게 검을 휘둘러 암기를 모조리 쳐 냈다.

갑자기 날아오는 공격이었지만, 그는 초월적인 반사 신경으로 그걸 모조리 쳐 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쳐 낸 암기 사이에 독약병이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퍼엉!

폭발한 시약병에서 흘러나오는 독액이 그대로 팔뚝에 끼얹어졌다.

"크아아악!"

치이이익!

하지만, 아무리 오러를 일으켜도 피부에 직접 접촉하는 독은 쉽게 막아 낼 수 없었다.

루드거가 던진 건 체내에서 반응하는 독보다는 모든 것을 용해시키는 화학 약물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러 실드급으로 몸을 보호하지 못하는 이상 이것을 막아 내지는 못한다.

"이, 빌어먹을!"

순식간에 한쪽 팔을 못 쓰게 된 덩치는 살기 어린 시선으로 보랏빛 매연을 향해 남은 팔로 칼을 휘둘렀다.

촤악!

커다란 검풍이 몰아치며 매연이 찢겨 나갔다.

곧바로 루드거를 추격하려던 덩치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의아해했다.

"어디지?"

"조심해! 아래다!"

그 순간 뒤에서 지켜보던 동료가 경고를 해 줬지만, 이미 늦었다.

푸욱!

아래의 그림자에서 불쑥 튀어나온 루드거의 소드스틱이 그대로 덩치의 턱을 뚫고 정수리까지 튀어나왔으니까.

"마법사라고 근접전을 하지 않는 건 아니라네."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며 시체에서 소드스틱을 뽑아냈다.

덩치의 시체가 기우뚱하더니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상대가 마법사라 해서 거리를 벌리고 다음 마법을 준비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패배의 이유였다.

그렇기에 루드거는 오히려 상대방의 허점을 찔러 곧바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동료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장발남은 이를 악물었다.

"네놈. 도대체 정체가 뭐냐."

"아까 말했잖은가. 제임스 모리아티 교수라고."

"애초에 그렇게 싸우는 마법사에 대한 소문이 안 퍼졌을 리가 없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소식이 없던 것도 이상하고. 정체를 숨기고 있었나?"

"그걸 말해 줄 의무가 있을까. 곧 죽을 사람인데."

루드거는 장발남을 비웃으며 그 어깨너머의 두트리를 향해 조소를 지어 보였다.

두트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주, 죽여! 녀석을 죽이라고! 돈값을 하란 말이야!"

적사회의 가장 큰 무력을 담당하던 두 사람 중 하나가 당했다. 이제 믿을 건 자신을 지켜 주는 이 장발남뿐이었다.

장발남은 '칫' 하고 혀를 차며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동료를 죽인 루드거의 행동을 보면 전투에 대한 경험이 매우 풍부해 보였다.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심리전부터 해서 마법사인데도 근접전을 서슴지 않는 행동까지.

간과한 채로 넘어갈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안 덤비나?"

"물러나면 봐줄 건가?"

"이봐!"

장발남의 말에 두트리가 사색이 되며 외쳤다.

"지, 지금 날 배신하겠다고?!"

"배신이고 자시고, 지금 꼴을 봐. 나랑 비슷한 실력자인 녀석이 쪽도 못 쓰고 죽었어. 나보고 저런 괴물과 싸우라고?"

"돈을 줬잖아!"

"그 돈이 목숨보단 귀중하지는 않지."

"2, 2배! 아니, 3배를 주겠어! 그것도 죽은 친구의 몫까지 합쳐서! 그러니까 녀석을 죽여!"

평소에 받는 돈이 많았던 차에 3배라는 말이 나오자 장발남은 귀가 솔깃해졌다.

3배? 그 정도면 도전해 볼 가치는 있었다.

그가 평소에 받고 있던 돈도 상당히 많았으니까.

'가능한가?'

처음에는 루드거의 존재가 상당히 위협적이었지만, 그가 싸우는 방식을 보지 않았던가.

본디 싸움이란 상대방의 방식을 이해하고, 수를 읽어 내는 것이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안 된다면, 어떻게든 방심을 유도하고 허점을 찔러 내는 것이 최우선.

실제로 루드거도 그렇게 싸우지 않았던가.

그것만 조심하면 어떻게든.

그 순간, 루드거가 허리춤에서 총을 뽑아 이쪽을 향해 쏘았다.

챙! 챙!

"크윽!"

쏘아진 2발의 총탄을 검을 휘둘러 튕겨 냈다. 하지만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어딘가 이상했다.

총알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마력을 담아내는 것에 가까운....

'마력탄? 이런 미친. 이런 물건까지 쓴다고?'

도저히 그가 알던 마법사가 보일 행동이 아니었다. 괴짜 마법사가 가끔 이상한 짓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건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정도가 아닌가.

그 순간, 루드거가 재차 마력탄을 쏘아 냈다.

그것을 검으로 튕겨 내던 장발남은 이대로 거리를 유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자리를 박차고 달려들었다.

루드거는 재차 뒤로 물러났다.

준 기사인 장발남의 쫓는 속도가 월등히 빨랐지만, 루드거가 물러난 자리 아래로 시약병이 또르르 굴러다니고 있었다.

'조금 전에 본 걸 내가 똑같이 당할 것 같으냐!'

이미 루드거의 싸움 방법은 봐서 눈치채고 있었다.

저것은 독 안개를 퍼뜨리는 병. 장발남은 그것이 발동하기 전에 먼저 검을 휘둘렀다.

발동하기 전에 먼저 베어 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내 일그러졌다.

'검이...!'

병을 베어 내자 거기서 튀어나온 끈끈한 액체가, 그의 검을 바닥과 고정시켰던 것이다.

어떻게든 검에 오러를 둘러 떼어 내려고 했지만, 몇 초라는 빈틈이 발생했다.

루드거는 그의 미간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막을 수 없다면 피한다!'

이쪽의 반사 신경이라면 상대방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만 보고도 날아오는 총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루드거의 모습을 집중해서 뚫어지라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복부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아래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어?"

그의 배를 뚫고 검은 창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었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그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창이 등에서부터 그의 복부를 꿰뚫은 것이었다.

"어, 어떻게...?"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보통 시전자를 중심으로 발동하는 것이 아니었나?

마법을 사용하고 그것을 멀리 회전시켜서 뒤를 노렸다?

그렇지 않다. 그랬다면 그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루드거에게서는 시선을 떼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단 하나.

이 마법은, 말 그대로 다른 방향에서 발동해서 그를 노린 것이란 소리였다.

전혀 다른 곳에서 날아오는 마법이라니.

"이런 건, 들어 본 적이 없...."

타앙!

루드거의 마력탄이 그의 이마를 꿰뚫어 버렸다.

결국, 준 기사급 전력 둘은 루드거에게 상처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두트리는 숫제 저승사자를 마주한 얼굴로 자리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뚜벅. 뚜벅.

루드거는 그런 두트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빛을 등진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 그러면."

하지만 그가 이쪽을 보며 웃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해 봄세."

◈ 55화 진흙탕 속 붉은 뱀 (2)

어둠을 틈타서 도망친 한스는 술집의 문밖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안쪽의 싸움이 끝나길 기다렸다.

루드거와 적사회의 싸움에 그가 나설 이유는 없었다.

겉모습은 이래도 그는 싸울 줄 모르니까.

2m가 넘는 검은 털의 흉악한 늑대인간이 가만히 앉아 있는 광경은 마치 꿈에서나 볼 법한 기이한 모습이었다.

'오.'

귀를 쫑긋거리며 안쪽의 상황을 전해 듣던 한스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났네.'

안에서 들려오던 치고받는 싸움의 소리가 정적이 내려앉듯 멎었다.

마지막으로 들렸던 것은 적사회의 두목이라 할 수 있는 붉은 뱀 두트리의 고통에 찬 비명.

아마 필요한 정보나 그런 것들을 뽑아내기 위해 고문이라도 하고 있던 거겠지.

그 소리마저 그쳤다는 것은 전부 끝났다는 뜻이다.

그 예상대로 술집 안에 들어가니 진득한 피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어우."

늑대의 형상이 되어 더욱 후각에 예민해진 한스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시체들을 밟지 않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루드거는 프론트 바(Front Bar)에 앉아 투명한 유리잔 안에 담긴 술을 조용히 홀짝이고 있었다.

"다 끝난 거요?"

"그래."

루드거는 되돌아보지 않은 채 답했다.

"그 준 기사급 둘은?"

"네 발아래에."

한스의 주위로는 시체가 가득했다.

정확히 어떻게 됐는지 한스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어휴. 이 상태를 유지하니까 냄새에 예민해져서 머리가 아주 돌아 버리겠군."

한스는 곧바로 루드거가 건네준 약물 앰플을 팔뚝에 박아 넣었다.

푸욱.

부풀었던 덩치가 쪼그라들며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한스는 미리 챙겨 둔 웃옷을 빠르게 걸쳤다.

그는 주변의 살풍경한 모습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형님도 참 대단하시오. 이런 곳에서 술이 넘어가오?"

"그냥 적응이 된 거지."

"그보다, 그거 무슨 술이요? 냄새가 되게 좋아 보이는데."

인간으로 돌아갔음에도 변신의 영향으로 조금 예민해진 그의 후각은 루드거가 마시는 술 냄새를 기가 막히게 포착했다.

향이 상당히 달콤하다.

루드거의 잔 안에 담긴 술 자체에 불순물이 없을 정도로 깨끗해 향미가 상당히 깊어 보였다.

이 정도면 상당히 비싼 술일 텐데.

"고르고뉴 산 38년이라고 하는군."

"헉! 그 귀한 술 말이오? 이런 제길! 나도 좀 주시오!"

"언제는 비위 상한다더니?"

"역겨워서 토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마셔야지!"

루드거는 술을 병째로 건넸고, 한스는 적당히 빈 잔 하나를 챙겨 자신도 거기에 주르륵 따랐다.

시체가 가득한 허름한 술집.

피와 술 냄새가 기이하게 뒤엉킨 곳에서 두 남자는 나란히 앉아 대작을 했다.

"그래서 두트리 그놈은 확실히 죽인 거요?"

"아직은 죽이진 않았다. 필요한 정보를 뽑아내고 그 이상으로 써먹을 곳이 있으니까."

"하긴. 이제 이곳에 새로 자리를 잡고 이사를 했으니... 그 뭐냐? 형님이 예전에 해 줬던 말 있지 않소. 떡 돌리러 왔다고 하나?"

"그렇지."

"대체 떡 돌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이사 왔으니 뭐 반갑다는 그런 거 아니겠소?"

"정확히 봤다."

"이쪽을 주름잡으면서 동시에 악명도 만만찮게 쌓은 적사회이니... 산 채로 넘기면 다른 조직 녀석들이 아주 좋아 죽겠구먼."

물론, 아직 적사회의 전부를 없앤 것은 아니었다.

이런 대도시를 주름잡는 놈들인 만큼, 당연히 전체 인원은 천 명을 훌쩍 넘으니까.

하지만 그 천 명의 적사회가 전부 완전한 적사회인 건 아니다.

오히려 이 자리에 모인 100명이 핵심 인원이면 인원이었지.

"조직의 머리가 사라졌으니 나머지는 사실상 와해될 일만 남았구려. 형님은 어찌하시겠소? 잔챙이들을 전부 흡수?"

"아니."

루드거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쓸모없는 오합지졸들로 인구수를 늘려 봤자 조직이 제대로 유지될 리가 없다.

"이쪽은 그냥 필요한 소수만 사용한다. 물론 하청으로 다룰 녀석들은 필요하겠지만, 전부는 아니야. 적당히 머리 잘 돌아가고, 인성 좋은 놈으로 뽑아 둬."

"흐음. 조금 돌아가자 이거구먼."

"한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끝냈다. 나머지 자료는 저 위의 2층의 집무실에 올라가면 녀석의 서류와 비밀 장부가 전부 있을 테니, 그걸 보고 진행하면 될 거다."

"하이고. 또 바빠지겠군."

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이 몇 날 며칠을 개고생해 가며 정보를 얻고 자료를 모으며 정리를 했는데.

루드거는 단 하룻밤 만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끝내 버린 것이다.

물론 그만큼 루드거가 대단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한스로서는 조금 불공평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아니지. 나야 목숨 걸고 안 싸우고 안전한 길을 택했으니, 이걸로 불평불만 가질 수는 없잖아.'

물론 위험한 정보를 모을 때는 그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에게는 이 특이 체질의 힘을 빌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기에 루드거가 더욱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가 형님형님 부르며 따를 이유도 없으리라.

"그런데 아지트가 정해져도 일단 형님이랑 나, 우리 둘밖에 없지 않소? 어찌하시려고?"

"없으면 늘려야지."

"늘린다고? 하지만 조금 전에는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고...."

"그런 어중이떠중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한스.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여럿 있다는 걸."

"아."

그 말에 한스는 곧바로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진심이오?"

"왜 그러지?"

"왜냐니, 그야...."

"아. 그러고 보니 너는 그쪽이랑 사이가 안 좋았군."

"크흠. 내가 사이가 안 좋다기보다는 좀...."

한스가 망설이는 데에는 루드거가 부르려는 '아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루드거가 직접 부를 만큼, 각 분야에서만큼은 확실히 능력이 있는 자들이기도 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인성은 책임을 못 진다는 것이려나.

"아니 그런데, 그 고집불통들이 온다는 거요? 어지간한 말로는 꿈쩍도 안 할 텐데."

"이미 편지 보냈다. 의외로 하던 일만 마무리하고 온다더군."

"아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불편한지 한스는 술잔을 다 비울 때까지 계속 투덜거렸다.

"그렇게 싫나?"

"싫다기보다는 일단 불편한 게 맞지 않겠소. 정상인이 하나도 없는데. 뭐, 이런 체질을 지닌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그냥 사이좋게 지내면 되지 않나?"

"후우. 형님은 몰라서 하시는 소리 같소만, 하나같이 성격이 지랄 맞은데 어떻게 사이가 좋아지오? 개중에는 나를 무슨 실험체 취급하던 놈도 있는데."

"그랬던가?"

"그랬소. 확실히 그랬소. 그나마 형님 있을 때는 조금 얌전한 편인데, 없어지면 진짜 나 죽을지도 모르오. 여기에 계속 있을 거요?"

"나는 지금 루드거 신분을 유지하느라 바쁘다."

"바로 그거요! 형님이 세오른 교사로서 자리 비울 때마다, 내가 얼마나 피가 말릴지 생각은 안 해 봤소?"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죽기라도 하겠어?"

물론 죽지는 않겠지만, 거의 죽기 직전의 스트레스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루드거에게 따져 봤자 이미 벌어진 현실이다.

"...하아. 생각해 보면 또 이런 구린 일을 하는데 그 자식들만큼 제대로 할 수 있는 놈들이 없긴 하겠구려."

"능력은 뛰어나니까."

당장에 루드거가 사용하는 온갖 장비들을 만드는 데 지대한 일조를 한 것이 그들 중 하나가 아닌가.

"형님은 그보다 괜찮겠소?"

"뭘 말이지?"

"일단은 세오른의 교사가 아니오? 게다가 이전 신분들과 다르게 이번에는 맨얼굴이 팔린 바람에 좀 위기 아니었소?"

"그랬지.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움직이고 있던 거고."

"그쪽에서 형님을 조금 의심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면 이렇게 막 밖에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요?"

한스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세오른에서 의심을 하고 있다면 루드거가 이렇게 도시로 외출을 나가는 행동 자체를 좀 자제해야 하는 거 아닌가?

특히 상대방이 마법사인 이상, 무슨 방법으로 몰래 감시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당연히 매사에 조심해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정말이오? 상대는 마법사지 않소?"

"한스. 너는 마법사들을 뭐라고 생각하지?"

"흐음. 마법사가 뭐 있겠소? 마법을 쓰면 마법사지. 그래도 굳이 질문에 대답한다면... 매우 이성적이고 냉철한 탐구자? 그런 느낌이오."

"비슷하게 봤군. 네 말마따나 마법사들은 상당히 이성적이다. 아니,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조금이라도 실수를 용납하려 하지 않아."

마법을 발현할 때부터 차분한 마음가짐은 필수다.

물론, 마법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당장 본인이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마법사로서 기본 소양이다.

특히 계위가 높은 마법사일수록 더더욱.

"총장은 6위계 마법사지. 심지어 머리도 잘 돌아가. 그런 사람이 나를 의심하고 있으니, 네 걱정도 이해는 한다."

"그런데도 괜찮다는 거요?"

"만약에 총장이 나를 의심해서 계속 눈을 붙여 놨다고 하자."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다가 내가 눈치를 챈다면? 그걸 가지고 왜 날 몰래 지켜봤냐고 따진다면? 그렇다면 총장으로선 어떨 거 같나."

"그건...."

한스는 침음성을 흘리며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들키지 않고 몰래 추적을 해야 하는데 들킨다? 그건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 아닌가.

거기서 뻔뻔하게 '당신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게 된다면?

"안 들키면 되지 않소?"

"안 들키는 건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들킬 가능성은 만에 하나라도 '혹시' 존재할지 모르지. 한스. 너는 여기서 어떤 걸 고려할 거지?"

"...흐음. 확실히 후자겠구려. 정말 들키지 않을 확신이 없다면 건드리지 않아야 할 테니까."

"상대는 세오른의 교사이고, 진짜 실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 그런 대상을 함부로 미행했다가 걸리면, 아무리 총장이라 하더라도 상당히 난처해지겠지."

"그러니 괜히 미행해서 손해를 볼 바에는 안 하는 게 낫다?"

"마법사란 그런 거다. 게다가 나는 지금까지 교사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 줬지. 여기서 실수를 저질러 내게 실망을 준다면 총장의 입장은 상당히 난처해지겠지."

총장이 교사를 믿지 못해 미행을 저질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총장의 입지는 나빠질 것이다.

물론 지금 총장의 성격을 생각하면 최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겠지만, 그런 '여지'를 줬다는 부분에서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총장의 자리. 심지어 교사들도 모두 자신을 따르는 것이 아닌 반대 파벌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총장이라고 뭐든지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럴수록 더욱 조심해지겠지. 그 자리는 그런 곳이니까."

"아하. 그렇구려. 그러니 형님은 그 빈틈을 노려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여도 상관없다는 거고?"

"물론, 너무 노골적으로 굴면 걸리겠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까."

루드거가 교사로서 이미지를 관리하고, 내실을 확실히 다지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 덕분에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외출을 해도 총장은 조금 의심을 할지언정, 그를 추적하거나 미행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오늘처럼 귀족과 평민 사이에 대련이 벌어져서 세오른이 시끄러워진 날이라면 더더욱.

"이해가 됐소. 그렇다면 당장에는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거군."

"그런 거지."

"그래서 이렇게 다들 모여서 이제 조직을 하나 이룬다 치면, 이름은 어떻게 할지 정해 뒀소?"

"이름?"

"이제 형님도 나도 제대로 레더벨크에 자리 틀고 지내려는 거 아니겠소. 그렇다면 이제 조직의 이름도 확실히 정해야겠지. 뭐, 계급이니 뭐니 그런 건 없애 버린다 쳐도 이름이 없으면 분위기가 안 살지 않겠소?"

"그것도 그렇군."

쪼르르륵.

빈 잔에 술을 다 따르고 나니, 어느덧 술병이 비어 버렸다.

나름 고급진 술이었고, 맛도 있었기 때문인지 아쉬움이 밀려들었지만.

술은 아직 차고도 넘쳤다.

"지금 모을 놈들 다 모으면 몇이지?"

"흐음. 형님이랑 나 포함해서, 한 예닐곱 정도 아니겠소?"

"적군."

"적지. 하나의 조직을 구성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하지만 사람은 더 들어올 거다. 아마 몇 명 더 추가되면, 딱 10명 정도가 나쁘지 않겠지."

"10명? 적당하군. 그래서 이름은 정했소?"

"이름. 이름이라...."

루드거는 문득 전생에서 봤던 유명한 동명 소설의 원작이자 시를 하나 떠올렸다.

오래전에 읽었지만, 워낙 유명한 명작이라 아직까지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소설이었다.

거기에 한 등장인물이 존재한다.

자신의 죄업을 억누르며 법으로 처리하기 힘든 자들을 심판했던 자.

결국에는 그 스스로마저 없애 버렸던 자.

"<U.N.오웬>."

"<U.N.오웬>? 조직 이름이, 언노운? 뭐요 이거. 그냥 정체불명의 뜻을 말장난으로 바꾼 거요?"

"그래."

"어감 한번 좋아서 마음에 드는구려."

그렇게 루드거가 만들 새로운 조직의 이름은 <U.N.오웬>으로 정해졌다.

"형님. 마지막 한잔?"

"그래."

짠.

새로운 조직의 탄생을 축하하며, 루드거와 한스는 마지막 남은 잔을 경쾌하게 부딪치며 건배를 나눴다.

골목길 속.

피비린내 나는 술집에서 벌어진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 56화 조교 차출 (1)

공개 대련이 있고 난 다음 날.

"으어어. 지친다."

에이단은 흡사 좀비와 같은 발걸음으로 복도를 휘청휘청 걸어갔다.

지금도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일부 학생들이 그에게 접근해서 말을 걸어오거나 친한 척을 했던 것이다.

다른 학생들의 지나친 관심은 에이단에게 있어서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라 오히려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으윽. 왜 이렇게 된 걸까."

"그야 네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활약을 했으니까 그러지. 바보냐?"

에이단의 혼잣말을 들은 레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핀잔을 날렸다.

"그런가?"

"어휴. 너는 이런 부분에서 전혀 자각이 없구나."

레오는 에이단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단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애초에 에이단은 자신이 잘났다는 걸 뽐내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마법사로서의 성공하겠다는 마음가짐보다는 순수하게 마법이 좋아서 세오른에 입학을 한 케이스.

이런 사람이 세오른에 에이단을 포함해 대체 몇이나 있을까.

"애초에 귀족을 상대로 마법 대련에서 승리한 것도 모자라서 마법을 없애는 기묘한 마법까지 썼는데, 관심을 안 받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 렇겠지?"

"에이단. 그보다 그때 사용한 마법은 대체 뭐였던 거야?"

에이단의 곁에 평소보다 한 발짝 더 가까이 붙어서 걷던 테이시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에이단이 사용했던 마법을 꼭 알아내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에이단은 대답을 망설였다.

"어, 음. 그냥... 어릴 적에 배운 거야.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라고? 야. 그게 별거 아니면 우린 뭐가 되냐."

"맞아. 마법을 지우는 마법이라니. 그런 건 들어 본 적 없어. 말 돌리지 말고 어서 대답해."

"으음."

에이단은 대답을 망설였다.

스승님께서 이 마법을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했기 때문이다.

다른 학우들의 끈질긴 질문에도 필사적으로 대답을 회피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해 줘도 상관없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정말로 괜찮을까?'

에이단은 잠시 고민했다.

테이시와 레오. 모두 이곳 세오른에서 그가 사귀게 된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가 반마법을 사용하기 전부터 친해진 사이였기에 이 관계에 정치적인 계산이 섞여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문득 스승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살다 보면 항상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 생길 거야. 그럴 때는 네 마음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

마음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라.

스승님 본인은 가볍게 말했지만, 에이단은 그 가르침을 절대로 잊은 적이 없었다.

에이단은 결정을 내렸다.

"좋아. 알려 줄게."

"어, 정말?"

에이단이 진지하게 대답하자 도리어 테이시가 놀랐다.

사실 강하게 몰아붙이듯 물어보기는 했지만, 조금 전 수업이 끝난 이후에 다른 학생들의 질문 공세에도 입을 꾹 다물던 에이단의 모습을 보며 별로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분명 에이단에게도 말 못 할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냥 찔러나 보자는 식이었는데, 이런 대답이 돌아오다니.

"일단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자."

세 사람은 학생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장미공원으로 향했다.

* * *

눈부신 태양 아래에 나긋한 향기가 가득 찬 장미공원.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장미가 만개해 있는 공원의 한적한 벤치에 앉은 에이단은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음. 뭐부터 말해야 하냐면."

그러다 결국 처음부터 말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사용한 건 반마법이라고 해서, 마법을 없애는 마법이야."

"그건 봐서 알겠어."

"반마법이라 부르는구나."

레오와 테이시의 상반된 반응.

에이단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으음. 그리고 이 마법을 가르쳐 준 건 떠돌이 마법사인 내 스승님이었는데, 사실상 반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건 이제 나밖에 없대."

"뭐? 왜?"

"특이 체질만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나도 몰랐는데 스승님이 그렇대."

"특이 체질이어야 가능한 거라니...."

"그 스승님이란 사람은 누군데?"

테이시와 레오가 가장 궁금한 건 에이단의 스승이었다.

대체 누구길래 떠돌이 마법사가 반마법을 가르친단 말인가.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어딜 가서도 이름을 올려도 이상할 게 없을 텐데.

그 말에 에이단은 검지로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나도 몰라."

"뭐어?!"

"...그걸 말이라고 하냐?"

테이시와 레오의 날카로운 시선에 에이단은 두 손을 내밀며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야! 진짜인걸! 애초에 스승님을 만났을 때는 내가 8살밖에 안 됐을 정도로 아주 어렸으니까. 10년도 더 전이잖아."

"10년...."

"게다가 워낙 자유분방하고 갈피를 잡기 힘드신 분이라서, 지금도 어디서 뭘 하는지 잘 몰라. 연락도 안 되고. 떠나실 때도 바람처럼 사라지셔서, 이름을 여쭤볼 틈이 없었어."

"뭐야. 그러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으음. 그래도 그분 실력을 생각하면 어디에서 잘 살고 계실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반마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마법을 가르쳐 준 스승을 두고 이렇게 태평한 반응이라니.

테이시는 그런 에이단의 행동에 뭐라고 말을 하려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에이단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자기도 모르게 납득해 버렸다.

테이시는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에이단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는데.'

문득 테이시는 자신이 에이단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아아! 아니야! 내가 관심이 있다니! 나한테는 우리 가문을 되살리는 것만 중요해!'

테이시는 곧바로 잡념을 지우며 머리를 좌우로 거세게 흔들었다.

양 갈래로 묶은 붉은 머리카락이 거기에 맞춰 흔들렸다.

'그냥 호기심, 단순한 호기심일 뿐이니까. 그래. 단지 그뿐이야.'

테이시가 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을 때 가만히 듣고 있던 레오가 의문점을 제기했다.

"그보다 신기하네. 아무리 10년 전이라 하더라도, 네가 사용한 반마법이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다니."

"으음. 워낙 희귀해서 그런 게 아닐까?"

"마법은 희귀할수록 더 유명해질 수밖에 없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니까. 하물며 그 마법이 다른 마법을 지우는 거라면 더더욱."

반마법은 분명 살상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마법사에 비해서 반마법 자체로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은 확실히 적어 보였다.

하지만 단 하나, 마법사를 상대할 때 반마법은 그 자체만으로 말도 안 되는 성능을 보인다.

"에이단. 그 반마법이라는 거, 마법의 위계에 상관없이 전부 통하는 거야?"

"음. 그건 나도 잘 몰라. 솔직히 제대로 사용한 것도 이번이 거의 처음이라서. 지금까지는 마땅히 사용할 일이 없었거든."

"스승님이 그런 건 말 안 해 줬어?"

"그렇게 세세하게 설명해 주신 적은 없는데. 스승님이 그런 성격이 아니셔서. 게다가 나도 그때는 그냥 마법을 배운다는 것이 좋아서 생각 없이 배우기만 했고."

"어휴."

레오는 에이단의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다.

무책임하고 설명이 없는 비밀주의 스승님과, 그저 마법이 좋아서 배우기만 하면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철없던 시골 꼬마 아이의 합작이었다.

"그런데 레오, 그건 왜 물어봐?"

"그냥. 옛날에 얼핏 들은 것이 있는 것 같아서."

"들은 거?"

"너희 스승님. 이름도 모르지?"

"어, 어? 응. 이름을 안 여쭤봤지. 어쩌면 알려 주셨는데 내가 기억 못 하는 걸지도 모르고."

"아마 이름을 말 안 한 게 맞을걸. 그런 사람이, 지난 10년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는 것이 걸려.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어디 신문 한 페이지에 이름을 장식해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잖아."

"그, 런가?"

에이단은 이런 쪽으로는 문외한이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네가 아직 자각이 없어서 그러는 거 같은데, 반마법이라는 건 존재 자체만으로 분명 시끄러워질 만한 마법이야. 특히 마법계 전체가."

"하지만 그런 거치고는 다른 얘들은 잘 모르는 눈치던데."

"그렇다는 건 그만큼 비밀스러웠다는 뜻이겠지. 지금 마법을 배우는 학생들은 알기 힘든, 뭐 그런 거."

그러자 듣고 있던 테이시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선생님들은 알고 계시지 않았어? 몰랐다면 선생님들도 에이단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텐데."

"선생님 중에서도 일부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사람들이 있었어. 반마법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걸 사용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다는 걸 처음 본 반응이었지."

"너는 그 와중에 그걸 확인했어?"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관중석에 앉아 반마법을 사용한 에이단을 멍한 얼굴로 지켜봤을 때, 레오는 도리어 관객들의 반응을 집중해서 살폈다.

그중에 마치 처음부터 이럴 걸 알았다는 듯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인 사람이 몇 있었다.

반마법에 대해서 알고, 에이단이 사용하는 것도 알며, 그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놀라지 않은 사람들이.

"일단은 총장님."

"총장님? 뭐, 총장님이야 대단한 분이시니 아실 법하고. 또 더 있어?"

"교직에 오랫동안 재직한 거로 보이는 휴고 선생님과 마리 로스 선생님도 있었어. 그 외에 신임 교사들은 모르는 눈치였고. 다만...."

"다만?"

"루드거 첼리시 선생님은 달랐어."

"루드거 선생님이...?"

"그래. 루드거 선생님은 마치 에이단의 반마법에 대해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어."

에이단은 문득 그날 루드거의 모습을 떠올렸다.

항상 한결같은 사람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생각해 보니 반마법을 사용했는데도 여전한 그의 태도가 뭔가 이상했다.

"어쩌면 루드거 선생님은, 에이단이 사용한 반마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게 아닐까?"

"알고 계셨다고? 만약 알았다면 대체 어느 정도로?"

"그거까진 모르지. 다만 추측하건대, 에이단의 스승님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그러자 테이시가 나서서 반박했다.

"에이.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억측이잖아. 애초에 루드거 선생님이 알면서 티를 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 안 해 봤어?"

"오히려 모르는 건 너야, 테이시."

"뭐어?"

"생각해 봐. 루드거 선생님은 대체 무엇 때문에 에이단에게 잘해 준 걸까."

"잘해 줬다니?"

레오의 말에 테이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잊었어? 속성 원소에 대해서 강의할 때, 루드거 선생님은 에이단에게 칭찬을 해 줬잖아."

"아니 그거야 에이단이 잘했으니까...."

"그 냉혈한이? 플로라 루모스 선배 못 봤어? 그 천재한테도 쓴소리 험한 소리 아끼지 않던 사람이 루드거 선생님이야."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다음이야. 루드거 선생님이 크리스 선생님과 했던 내기 기억나?"

"그거야 당연하지."

"그때 루드거 선생님은 에이단이 승리한다는 쪽에 걸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야. 이상하지 않아? 지금껏 에이단은 딱히 알려진 것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어."

"그건...."

"그런 에이단의 무엇을 보고 루드거 선생님은 귀족 학생을 상대로 에이단이 이길 거라고 확신했을까? 그리고 왜 개인 시간을 써 가면서 기동 술식이라는 기술도 가르쳐 준 걸까?"

레오가 말을 하면 할수록 테이시는 말이 적어졌다.

듣고 보니 레오의 말이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확인해 보니 기동 술식은 군부에서 특별한 사람들만 사용하는 실전형 기술이라 하더라고."

"루드거 선생님이 군 장교를 역임했다고도 했잖아."

"바로 그 부분이야. 군에서 배운 가르침. 군 장교. 반마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눈치. 나는 여기서 연관점을 찾았어."

"그게, 뭔데?"

테이시가 물었고, 에이단도 레오의 추측에 흥미를 품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쩌면 에이단. 루드거 선생님은 네 스승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지도 몰라."

"루드거 선생님이? 하지만 어떻게?"

"그건 자세히 모르지. 다만, 내 추측은 그래. 루드거 선생님은 군 장교로 지낼 때 너희 스승님을 만났을 거야. 그렇게 하면 이야기가 풀려. 네 스승님이 그런 실력을 지녔으면서 유명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건, 알려지면 안 되는 군의 비밀스러운 부대 출신이기 때문이겠지."

레오는 자신의 추리가 거의 맞다고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던 에이단은 조금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아는 군인이라 하면 규율에 철저하고 항상 절도가 있는, 그래 말하자면 지금 루드거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 스승님은 군인이라기보다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한량에 가까웠다.

'아니, 비밀 부대 출신이라면 일반적인 군인과 다를지도 모르겠구나.'

어떻게 보면 레오의 추측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드거 선생님은 내 스승님에 대해서 알고 계실까?"

"너한테 보여 준 행동을 고려하면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않고서야 너한테 잘해 줄 리가 없잖아. 어쩌면 두 분이 서로 친하셨을 수도 있지."

반마법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고, 남한테 관심을 주지 않을 것 같은 루드거가 에이단에게 시간을 써 가며 기동 술식을 가르쳐 준 것도 그렇다.

레오의 말은 확실히 납득이 갔다.

"그럼, 루드거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스승님에 대해서 알려 주지 않을까?"

테이시의 물음에 에이단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아직은 확신이 없으니까. 게다가 괜히 또 선생님을 귀찮게 만들고 싶지 않아. 이미 충분히 도움을 받았는걸."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야."

그렇게 슬슬 대화가 무르익어 갈 즈음 테이시는 무언가 떠올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보다 너희들 그 소문 들었어?"

"소문?"

"무슨 소문?"

"그러니까...."

* * *

나는 지금 입사 동기인 신임 교사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일단 같은 입사 동기들이기도 하고, 아무리 나라도 최소한의 인맥의 유지는 필수니까.

이게 마냥 귀찮은 일은 아니다.

가만히 앉아서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으면, 다른 선생님들이 알아서 소식을 물어다가 저들끼리 주고받고 하니까.

특히 셀리나 선생님은 수다를 떠는 것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밥을 먹으면서도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물론, 짜증 난다거나 하지는 않다.

오히려 셀리나 선생님의 저런 행동은 이 모임의 분위기 메이커였으니까.

그래도 물어 오는 정보는 10개 중 1개가 들을까 말까 한, 타율이 1할도 채 되지 않는 그다지 영양가가 없는 것에 가까워서 크게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는데.

"아 참. 루드거 선생님은 그거 안 하세요?"

다만, 이번 것은 내게 만루 홈런짜리 소식이었다는 것이 평소와 다른 점이려나.

나는 셀리나 선생님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거라 하면 무슨 말씀이신지."

"루드거 선생님은 지금까지 계속 혼자서 일을 하셨잖아요. 자료 수집이나 교재 정리, 과제 확인까지. 맞죠?"

"맞습니다."

아니 뭐, 그게 교사의 역할이고 일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셀리나 선생님이 천진무구하게 내게 물었다.

"루드거 선생님은 조교를 왜 안 두시나요?"

"...."

...그런 게 있었어?

◈ 57화 조교 차출 (2)

셀리나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쥐고 있던 식기를 테이블에 조용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직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거짓말이다.

사실 나는 조교가 있는 건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면 다른 선생님들이 혼자 다니는 걸 못 봤던 것 같은데.'

대부분 교사는 곁에 사람들을 끼고 다녔었다.

그때는 그게 조교인지도 모르고, 그냥 교사에게 개인적으로 질문을 하기 위해 따라다니는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잡일을 시키는 사용인이거나.

그게 조교였구나.

그러면 설마, 지금 나 빼고 다 조교들을 뽑아서 부려 먹고 있던 건가? 나만 그걸 몰랐고?

내 대답에 셀리나 선생님은 상당히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네에? 그, 그러면 지금까지 과제 정리나 학생 명단, 수업 준비 자료 같은 건...."

"전부 제 손으로 했습니다."

"아, 안 힘드세요?"

힘들 일이 있나?

아, 확실히 혼자서 80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일일이 지도해 주고, 자료를 정리하고, 수업 내용을 준비하는 건 좀 귀찮기는 했다.

특히, 이런 부분에서 제일 어려운 건 역시 제출한 과제를 일일이 명단과 확인하는 일이겠지.

그래도 지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힘들 건 없습니다."

"그, 그러시구나. 루드거 선생님은 강의실에 학생이 몇 명이었죠?"

"80명. 정원 다 채웠습니다."

그 말에 함께 식사를 하던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러면 개강 이후 80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지금까지 혼자서 다 맡아 오셨던 거예요?"

"보통 이러지 않습니까?"

"보통은 안 그래요."

"안 그럽니까?"

"네."

그랬군.

다른 교사들을 깊게 살펴보지 않았으니,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러면 셀레나 선생님도 조교를 뽑으셨습니까?"

"네. 저는 그래도 일손이 별로 많이 필요하지 않아서 3명만 뽑았어요."

별로 필요하지 않다면서 3명이나 뽑아?

뭐, 다른 사람들은 한 10명씩 데리고 다니나?

나는 주변을 스윽 훑다가 문득 식당 바깥을 지나가는 한 교사의 모습을 발견했다.

신경질적이고 히스테릭해 보이는 인상의 교사, 크리스 베니모어였다.

지난번 내기의 패배 이후로 항상 저기압인 그의 뒤로 안절부절못하는 학생들이 8명이나 따라붙어 있었다.

...많군.

"루드거 선생님도 이 기회에 뽑으시는 게 좋아요. 심지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80명이나 된다면서요? 그러려면 5명 이상은 필요하실 텐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메릴다 선생님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힘에 부치실걸요?"

"당장 필요한 겁니까?"

"당장 한꺼번에 뽑을 필요는 없고, 조금씩 늘려 나가도 상관없어요."

"그렇군요."

흠. 저렇게까지 권해 주니 나도 귀가 솔깃해진다.

게다가 주위 반응을 살펴보니, 조교를 하나도 두지 않으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지나치게 끌어 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일단, 가까운 시일 내에 적당한 사람을 뽑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저도 그러면 최대한 빨리 조교를 뽑아 보도록 하죠."

"루드거 선생님은 인기가 많으시니, 공문을 올리면 서로 하겠다고 지원하는 학생들이 많을 거예요."

"빈말이라도 칭찬 감사합니다."

"빈말 아닌데...."

"그럼 저는 식사를 마쳤으니,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인사를 건넨 뒤 식당을 벗어났다.

* * *

"흠."

교무실로 돌아온 나는 조교 모집에 대한 자료집을 읽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신임 교사라 하더라도 조교를 들일 수 있으며, 보통은 6명 이상은 둔다. 뽑아 두기는 해야 한다는 거군.'

하긴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스승과 제자가 존재하는데 마법 아카데미야 어련할까.

마탑만 해도 학파별로 스승이 존재하고, 그 아래로 제자만 수십이나 된다.

물론, 제자라는 이름을 빌미로 노동력을 부려 먹는 노예 쪽에 가깝지만, 일단 명목상은 그러하다.

그것이 일종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는데, 마법을 가르치는 세오른 또한 이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세오른에는 학원생 제도도 있었다.

세오른의 마지막인 5학년 이후 졸업을 포기하는 대신, 지도 교수의 아래에서 마법을 연구하고 논문을 제작하는....

그래, 까놓고 말해서 21세기의 대학원생들이었다.

참 혁신적인 아카데미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말이다.

아무튼, 그런 부분은 차치하고서.

'당장은 힘에 부치는 일이 없으니 조교를 뽑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그래도 잡일 처리를 해 주는 녀석이 하나 정도 있으면 나쁘진 않을 거란 말이지.'

어차피 여긴 진짜 마탑도 아니고, 아카데미라서 내 비전 마법의 자료를 털릴 보안 문제를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수업과 관련된 자료만 정리하게 하면 되니까.

'조교가 되면 기본적으로 학점을 더 준다거나, 혹은 교사의 개인적인 가르침을 더 받을 수 있는 정도가 전부.'

반드시 비전 마법을 전수해 준다거나 하는 의무는 없다.

애초에 그런 조약이 있으면 교사들이 오히려 반발했겠지.

조항을 눈으로 다 훑어본 나는 다리를 꼬며 양손에 깍지를 꼈다.

'굳이 뽑는다면 유능한 사람으로 고르는 게 좋겠지.'

조교를 뽑을 가장 간단한 방법은 공고를 올리는 것이다.

내 이름을 걸고 조교 몇 명을 모집하겠다고 하면 신청자들이 생기고, 그중에서 내가 추려 내는 방식이다.

기본적으로 졸업을 앞둔 사람들이 조교를 많이 한다고는 하는데, 딱히 나이에 제한은 없었다.

오히려 신임 교사들은 자기 수업을 듣는 1, 2학년을 위주로 뽑는다고 했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으로 골라야 하나.'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서 조교를 뽑으면 내 강의 한정으로 반장의 역할을 부여받을 터.

그렇다면 학생들을 잘 지휘 통솔하며 붙잡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몇 있긴 하다.

대표적으로 플로라 루모스와 에렌디르 폰 엑실리온이다.

두 사람은 일단 고위 귀족이자 왕족이고, 본연의 카리스마도 있어서 분위기를 휘어잡는 데 능통하다.

'다만, 이 두 사람이 내 조교 따위를 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지.'

일단 플로라 루모스는 솔직히 내가 좀 많이 지적을 준 것이 있어서 뽑기 뭣하고, 황녀 에렌디르의 경우에는 내가 더 껄끄럽다.

황녀에게 조교를 시키다니.

아무리 신분의 평등을 주장하는 세오른이라 해도 이건 도가 지나치다.

그녀가 하겠다고 쌍수를 들어도 내가 거절해야 할 판이었다.

'결국, 선택지는 보류인가. 적당히 공문을 올리면 알아서 몰려올 건 아는데, 그래도 조금 걸리는군. 검증되지 않은 녀석을 고르는 건 사양이야.'

굳이 뽑는다면 부려 먹기 편한 녀석이 훨씬 더 좋을 터.

지금 당장 고민을 해도 정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기에 나는 일단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외투를 챙겨 입고 교무실을 나온 나는 복도를 걷다가 문득 익숙한 기척을 느끼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세디나."

"네, 넵!"

내 부름에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있던 세디나 로쉔이 화들짝 놀라며 튀어나왔다.

여전히 나를 경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녀는 나를 몰래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얘는 일과도 없나?

"무슨 볼일이 있나?"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녀는 내게 혼이 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면 돌아가라고 말을 하려던 나는 잠시 그녀의 위치를 생각고 입을 열었다.

"그런가. 때마침 잘됐다."

"네, 네?"

"너, 내 조교가 돼라."

"네. 아, 네."

세디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5초 후.

"...네?!"

세디나가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한마디 했을 뿐인데, 참 반응이 다채롭군.

"싫은가? 싫다면 억지로 시키지는 않겠다."

"아, 아닙니닷! 크흡!"

내 말에 세디나는 황급히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혀를 깨물고 말았다.

두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는 그 모습이 진짜 다람쥐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승낙하겠다는 건가?"

끄덕끄덕.

세디나는 입을 열지 못한 채 고개를 위아래로 격렬하게 흔들었다.

"하겠다니 다행이군. 아직 기간은 남았으니, 조교 신청 서류를 작성해서 내 교무실로 찾아오도록."

"저, 정말입니까? 정말 제가 조교를 해도 괜찮은 겁니까?"

"안 될 이유는 없지. 아니면, 내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

"아, 아닙니다!"

"기간은 2일이다. 기억하도록."

나는 세디나에게 할 말을 남기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는 검은 여명회의 멤버로서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을 보면 정보를 모으는 데 특화되어 있다.

그런 그녀를 곁에 두고 다닌다면, 검은 여명회에 대해서 알아낼 기회가 더 생길 터.

그때마다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접촉을 할 바에야, 차라리 교사와 조교로 활동하면 접선의 기회가 훨씬 더 쉬워진다.

무엇보다 제삼자의 의심 어린 시선도 지울 수 있을 거다.

그녀를 고른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일단은 세디나 한 명은 확정이고. 나머지는 차후 천천히 늘려 가면 되겠지.'

충실한 노예 하나를 생각보다 빠르게 얻었군.

* * *

에이단과 제반 펠리오의 공개 대련이 끝나고 며칠 뒤.

여전히 그날의 대련 이야기가 학생들 사이에서 맴돌았지만, 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그들은 다 타 버린 장작보다는 새로운 가십거리를 찾기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번에 학생들이 떠드는 것은 모두의 입방아에 오르기 충분한 주제였다.

"어라. 뭔가 평소보다 더 떠들썩하네요?"

리네는 자신의 곁에 앉은 3황녀, 에렌디르에게 편하게 물었다.

황녀와 평민이라는 계급의 차이가 아득한 둘이었지만, 서로 친한 친구가 없는 관계였기에 누구보다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서로 그런 자잘한 건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아, 리네 후배 왔구나. 요즘 학우들 사이에서 기묘한 소문이 도는 것 같아."

"기묘한 소문이요?"

"어. 루드거 선생님이 조교를 모집하고 있다는 말이라거나."

"와. 그건 좀 솔깃하네요."

루드거 첼리시가 지금까지 조교를 뽑지 않은 건 학생들 사이에서도 나름 유명한 이슈였다.

대부분 교사가 조교를 꼭 뽑는 것을 생각하면, 신임 교사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뽑지 않은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었으니까.

우스갯소리로 루드거는 사실 조교를 둬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을지도 모른다는 말마저 돌았다.

'물론, 루드거 선생님이 그러실 리가 없지만.'

그런 철저한 남자가 그런 부분에서 허점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학생들도 그냥 농담으로 하는 말이기도 하고.

그런 루드거가 조교를 뽑겠다고 한다면, 아마 루드거의 교무실 앞은 서로 자기를 뽑아 달라고 외치는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지 않을까.

시끄럽고 귀찮은 걸 싫어하는 듯한 루드거라면, 그것이 싫어서 조교를 뽑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역시 가장 뜨거운 소문은 다른 거겠지."

"다른 거요? 또 뭐가 더 있어요?"

"응. 리네 후배는 세오른 7대 전설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어?"

"7대 전설이요? 아뇨. 전 못 들어 봤는데...."

리네는 그런 부분에서 문외한이었기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 역시 모르는구나."

"어, 네. 저 그런 건 잘 몰라서...."

"뭐, 그런 것도 당연하지. 애초에 7대 전설이니 뭐니 하는 건 그냥 소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학생들이 더욱 열을 올리는 주제였다.

세오른 7대 전설.

그중 대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 학교의 어딘가에 세오른의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이었던 자의 던전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초대(初代)의 방이라 불리는 곳.

그 외에 또 유명한 전설을 꼽으라면, 고백을 하면 반드시 이뤄 주는 아름다운 꽃나무가 있고.

"지금 가장 떠들썩한 건 바로 그거겠지."

"뭔데요?"

"소원을 이뤄 주는 만능의 돌."

에렌디르의 말에 리네는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다.

소원을 이루어 주는 돌이 있다고?

"그게 세오른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이야."

"네? 정말요?"

리네는 그 말에 의아해했다.

세상에 소원을 이뤄 주는 돌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런 리네의 반응을 본 에렌디르는 거지를 들어 올리더니 좌우로 흔들었다.

"리네 후배는 뭘 잘 모르는구나."

"어... 뭐가요?"

"세상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신비가 얼마나 많은데. 고대에 존재했다는 몬스터와 악마, 그리고 여전히 세상 곳곳에 산재해 있는 크립티드들. 비밀스러운 유적과 미지의 신들까지."

그렇게 말하는 에렌디르의 눈동자는 미지를 향한 호기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런 세상에서, 모든 마법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이 세오른에 그 신비한 돌이 없을 리가 없지! 물론 만능이라거나 소원을 뭐든지 들어주는 정도는 무리겠지만, 분명 그에 상응하는 힘을 지닌 아티팩트인 건 틀림없어!"

"어, 네."

리네는 평소와 다른 에렌디르의 모습에 내심 당황했다.

황녀로서 위엄을 유지하고, 항상 고고하게 행동하던 에렌디르에게 이런 취미가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한번 빠지니 주위 반응은 안중에도 없는 걸 보면 꽤 중증일지도 모른다.

"선배는 그... 좀 잘 아시네요?"

"앗. 미안. 내가 이런 거에 관심이 좀 많아서. 좀 그랬지?"

"아, 아뇨! 오히려 더 보기 좋아요."

리네는 에렌디르의 이런 모습이 신선하게 비쳤다.

세오른 바깥에서였다면 눈을 마주칠 수도 없는 까마득히 높은 존재가 그녀 아니었던가.

언제나 고고하고 당당하며 만인의 앞에서 카리스마를 떨쳐야 하는 황녀가, 사실 다른 사람들처럼 개인의 취미가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나쁘게 볼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무튼, 지금 만능의 돌 때문에 세오른 자체가 시끄러워졌어."

"아, 그래서 그랬구나."

리네와 에렌디르 말고도 모든 학생이 만능의 돌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흥. 만능의 돌이라니. 유치해서 못 들어 주겠네.'

플로라 루모스는 그런 학생들의 말을 엿들으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세상에 그런 만능의 돌이 있었으면 학생들 귀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어른들이 차지했겠지.'

애초에 그런 물건이 실존하면 국가 차원에서 나설 일이 아닌가.

결국, 만능의 돌이라는 건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저절로 탄생하는 헛소문일 뿐이다.

저런 전설 같은 걸 진심으로 믿는 모습이라니. 저러고도 마법사가 되려는 건가.

이따가 방과 후에 찾아보자니 어쩌니 떠드는 학생들을 보면 같은 세오른의 학생이라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뭐, 나는 그냥 내 일만 하면 그만이니까.'

오히려 플로라가 신경 쓰는 부분은 가끔 흘러나오는 루드거에 관한 소식이었다.

'조교를 뽑는다고? 루드거 선생님이?'

그 철저한 초인 같은 남자가 조교를 뽑다니.

아니 물론 조교 정도는 당연히 선생님이니 뽑을 수 있는데, 막상 뽑는다고 하니 과연 누구를 뽑을지 궁금해졌다.

'보통 조교의 경우에는 교사의 이미지를 대변하니까 모자란 사람이 하지는 않을 텐데.'

루드거 정도의 선생이라면, 조교도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춰야 할 터.

굳이 말한다면 바로 자신처럼.

'아이참. 나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플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자처해서 루드거의 조교가 되겠다고 하다니. 그건 너무 나갔다.

루드거가 직접 그녀에게 조교가 되지 않겠냐고 물어본다면 모를까.

'뭐, 그렇게 해 준다면 고민 정도는 못 할 것도 없기는 한데.'

뭐 뽑는다고만 했지, 바로 뽑을 리는 없으니 시간을 두고 봐도 나쁘진 않을 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교실의 앞문이 드르륵 열리며 한 여학생이 들어왔다.

'뭐야.'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작은 체구와 불륨감이 느껴지는 갈색 단발머리. 그런 그녀는 다른 학생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품 안에 가득 껴안은 자료를 강단 위에 툭 올려놨다.

"곧 선생님께서 오시니 모두 정숙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돌하게 말하는 그 여린 목소리에 플로라는 멍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조교를 벌써 뽑았다고?'

◈ 58화 조교 차출 (3)

내가 세디나 로쉔에게 준 기간은 2일.

그때까지 느긋하게 조교 신청서를 제출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디나는 그런 내 말이 무색하게끔, 1시간 뒤에 신청서를 깔끔하게 적어 와서 내 숙소까지 찾아왔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면서 말이다.

"...."

그만큼 조교가 되고 싶어 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였고, 세디나는 그렇게 정식적인 과정을 통해 내 조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수업 시간.

나는 세디나에게 수업 자료를 건네준 뒤에 먼저 가서 강단 위에 가져다 놓으라고 하곤 천천히 강의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일단, 학생들에게 내 조교가 누구인지 각인시킬 필요는 있으니까.'

세디나가 어딘가 부족하고 여려 보여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철저하고 똑 부러지게 대한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 주곤 하는데, 그녀가 검은 여명회에 들어온 이유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그녀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건 퍼스트 오더라고 착각하고 있는 내 앞에서일 뿐.

그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하지만, 그래도 부려 먹기는 편하니까.

'이제 슬슬 들어가면 되겠군.'

드르륵.

강의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강단 위에 서 있던 세디나가 날 발견하더니 황급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했다."

"네, 네."

고작 한마디 했을 뿐인데, 세디나는 감격에 몸을 부르르 떨고는 강의실을 나갔다.

나는 자연스럽게 강단 위에 올라 학생들을 스윽 살폈다.

'반응이 뭔가 이상한데?'

대부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 반응은 내가 세디나를 조교로 뽑아서 그런 게 확실한데.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게다가 쟤는 또 왜 저래.'

특히 플로라 루모스의 시선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너무 눈에 띌 정도였다.

어떻게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면서도 표독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는데, 순간 내가 무슨 죄인이 된 줄 알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며 다른 학생들의 반응을 살폈다.

'개강하고 시간이 꽤 지나서 그런가, 슬슬 몇몇 학생들의 눈빛이 바뀌기 시작하는군.'

이 전까지는 학기 초라서 서로 염탐하듯 눈치만 살피며 자신을 숨기던 일부 학생들.

이제 탐색전이 끝났다는 걸까.

몇몇 학생들의 기세가 수업 초기에 비해 꽤 바뀌어 있었다.

그 계기라고 한다면 저기 있는 에이단이겠지.

"어, 응?"

에이단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몸을 움찔 떨었다.

에이단과 제반 펠리오가 벌인 공개 대련은 잔잔하던 초기 세오른의 분위기에 파문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그 전에 늑대인간 건도 있었지만, 평민과 귀족 학생 간 사이의 대립이라는 노골적인 이벤트가 결정타였겠지.

굳이 에이단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었고, 우연히 에이단이 선두를 끊었을 뿐이니까.

어떻게 보면 저 녀석에게는 참 운이 없던 일이라 볼 수 있겠지.

뭐가 어찌 됐든 세오른에 하나의 바람을 몰고 온 것은 사실.

거기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슬슬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할 타이밍.

굳이 문제가 있다면 그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니면 반대일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점이다.

'지금 교실 분위기가 시끄러운 것도 그런 탓이겠지.'

교사가 조교 하나 뽑았다고 놀라거나 신기해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이쪽을 노려본다거나.

그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면, 역시 학생은 학생이구나 싶다.

"조용."

저들끼리 뭐라 떠들던 학생들이 내 한마디에 조용해졌다.

어차피 모든 소란은 결국 학생들 사이의 일이다.

굳이 내가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는 소리.

"수업을 시작한다."

교사는 수업만 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