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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화 늑대인간 (3)

"네?! 자, 잠깐만요! 이럴 땐 보통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에렌디르는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늑대인간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 준 교사가 이쪽을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벌점을 부여하겠다니.

분위기를 깨는 것도 깨는 건데, 에렌디르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

"에렌디르. 뭘 잘했다고 소리치는 거지?"

"저는 다른 선생님께 허가를 받고...!"

"시끄럽다. 허가를 받았다 해도 그건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해야 할 일이다. 방금 무슨 꼴을 당할 뻔했는지 모르는 거냐?"

"그, 그건."

"제 몸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입은 살아 있구나."

"윽."

루드거는 상대가 황녀라고 해도 가차 없었다.

에렌디르도 루드거의 말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밤중에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던 것은 황녀라는 신분 덕분이었다.

황녀라는 입장 하나만으로 잔뜩 들뜬 학생들을 고개 숙이게 만들어 기숙사로 돌려보내기 쉬웠으니까.

에렌디르 본인도 황녀로서 학생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게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 역할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결국 본인이 위험에 빠져서야 본말전도다.

그것을 깨달았기에 에렌디르는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루드거의 말은 틀린 게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아이는 벌점을 만회해 주세요."

"뭐?"

루드거의 시선이 리네를 향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그녀를 알아본 루드거는 이윽고 리네가 품 안에 가득 안고 있는 교재에 시선이 향했다.

"리네."

"네, 네. 루드거 선생님."

"아직까지 기숙사에 돌아가지 않고 뭘 한 거지?"

"그, 그게...."

"공부에 대한 열의는 인정한다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걸 모르는 건가?"

"...죄송해요."

루드거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여기서 뭐라고 해 봤자 감정을 소모하기만 할 뿐,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아니었으니까.

"에렌디르."

"네."

"리네를 책임지고 기숙사로 돌려보내라. 그렇게 하면 방금 부여하겠다는 벌점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

"네? 정말인가요?"

"다시 말해 줘야 하나?"

"...아니요. 알겠습니다."

에렌디르는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불쑥 떠오르는 그런 의아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잠깐. 왜 나한테 말하는 거랑 여기 리네 후배한테 말하는 거랑 이렇게 차이가 심하지?'

자신한테는 정신 차리라니 어쩌니 쓴소리를 하면서, 정작 리네한테는 오히려 걱정스럽게 묻고 있지 않은가.

이걸 따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 불길에 휩싸였던 늑대인간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서, 선생님! 저기!"

"알고 있다."

루드거는 리네와 에렌디르를 보호하듯 서며 늑대인간을 응시했다.

마법에 의한 상처가 대부분 아물었다지만, 녀석은 아직도 아른거리는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쪽을 끝없는 적의가 담긴 눈동자로 응시하던 늑대인간이 갑자기 움직였다.

달려드는 것이 아닌, 도망치는 쪽으로.

"앗! 도망친다!"

리네가 그렇게 외치는 것과 동시에 루드거는 늑대인간의 뒤를 쫓았다.

겨우 발견한 늑대인간을 놓칠 생각은 절대 없었다.

리네와 에렌디르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저 늑대인간의 목에도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으니까.

구속구가 털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후 다른 누군가가 발견하면 그때는 증거 인멸조차 힘들어진다.

루드거는 두 다리에 마력을 담고 자리를 박찼다.

늑대인간을 쫓아 어두운 풀숲을 헤치며 정원을 가로지르자, 가까운 연구동 건물의 외벽을 타고 옥상을 향해 기어 올라가는 늑대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날카로운 손톱이 건물 외벽을 손쉽게 파고들었고, 그 거대한 몸뚱이가 이윽고 첨탑이 가득한 옥상에 도달했다.

'놓치지 않는다.'

루드거는 곧바로 와이어 런처를 사용해 허공을 향해 수직으로 치솟아 오르며 옥상 위에 안착했다.

아직까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에렌디르와 리네는 입을 헤 벌리며 감탄했다.

"방금 그거, 부유 마법이었죠?"

"아, 마도?"

발현계 마력 방출로 구현할 수 있는 부유 마법.

그것을 달리면서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루드거의 마력 운용이 믿기지 않았다.

어두운 밤이라 와이어 런처를 보지 못한 두 사람은, 루드거의 그 움직임을 전부 마법의 일환으로 봤다.

옥상 위의 두 실루엣이 서로를 마주 봤다.

멀어서 뚜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크기와 대략적인 모습만으로 누가 루드거인지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 보름달이."

하늘의 구름이 걷히더니 이윽고 차갑고 포근한 은광이 커튼의 자락처럼 쏟아져 내렸다.

오늘은 만월의 밤이었다.

첨탑이 가득 솟은 건물의 옥상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서 있던 루드거가 먼저 움직였다.

늑대인간도 질세라 루드거에게 달려들었다.

두 신형이 서로 교차하며 접전이 벌어졌다.

"와."

"세상에."

리네와 에렌디르는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로 루드거의 싸움을 구경했다.

그만큼 루드거의 모습은 눈을 떼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달빛의 아래에서, 루드거가 춤추듯 움직이며 늑대인간의 공격을 피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피부 위로 느껴지는 살 떨리는 공격들.

그 무엇도 루드거의 몸을 스치지 못한다.

그리고 늑대인간의 공격 틈새를 비집고 격발하는 눈부신 마법.

불, 얼음, 바람. 속성 원소가 화살처럼 쏘아진다.

위력은 2위계 정도였지만, 그것은 정확히 늑대인간의 급소 부위를 철저하게 노리며 타격을 입힌다.

'이곳에 오기 전에 군대에 있었다고 했지.'

에렌디르는 루드거 첼리시에 대해서 떠올렸다.

딱히 관심은 없었지만, 그녀를 전담하는 메이드가 혹시 모르니 읽어 보라고 자료를 가져다줬기에 심심풀이로 본 것이 전부.

그때 그녀가 기억하기로 루드거 첼리시는 군에 몸을 담은 적이 있고, 크립티드를 사냥하면서 전과를 올렸다고 했다.

그 이력으로 적혀 있는 글귀가.

지금 눈앞에 실제로 펼쳐지고 있었다.

에렌디르는 마법사의 싸움이라는 걸 처음 보았다.

아니, 저걸 마법사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을까.

더 절제됐고, 깔끔하고, 냉철했다.

마법사보다는 군인, 아니 그보다는 철저하게 목표를 노리는 사냥꾼에 가깝다.

깨갱!

늑대인간이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옥상 위를 뒹굴다가 경사면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루드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상처 입은 먹잇감이 만들어 낸 빈틈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포식자.

늑대인간을 향해 마법을 사용하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늑대처럼 느껴졌다.

촤자작!

루드거가 쏘아 낸 얼음의 송곳니가 늑대인간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얼음창 3개가 연달아 늑대인간의 몸을 관통해 그대로 옥상 위에 고정시켰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난 늑대인간이라 하더라도 즉사할 수밖에 없는 상처.

싸움은 끝이었다.

'후우. 지치는군.'

루드거는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 상당한 마력을 소모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력을 많이 쓰는 건 좋지 않은데.'

그나마 한스와 만나면서 약을 다시 챙겨 오길 잘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으니까.

원래라면 저 늑대인간을 상대할 때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을 거다.

괜한 마력을 소모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마력을 소모할 경우 몸 상태가 나빠지는 것도 한몫했다.

문제가 있다면 이곳은 세오른이었고.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더러 존재한다는 거였다.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마법 교사가 마법을 안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명색에 세오른의 교사인데 여기서 마법이 아닌, 사냥꾼 시절에 사용하던 도구나 방식을 사용하면 그건 그거대로 의심을 사고 만다.

'더 귀찮아지기 전에 빨리 끝내야겠어.'

이 녀석 말고도 아직 한 마리가 더 세오른에 숨어 있는 상황.

오늘 내로 늑대인간의 처리를 전부 끝낼 생각이었다.

크와악!

루드거가 천천히 다가가자 비틀거리던 늑대인간이 갑자기 팔을 번쩍 들었다.

아직 거리가 있어서 팔을 휘둘러도 닿을 리가 없을 텐데, 뭘 할 속셈이지?

그런 루드거의 의문은, 늑대인간이 집어 던진 건물의 파편을 보는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무슨.'

혹시 몰라서 경계를 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루드거는 곧바로 마력을 방출시켜 몸 주위로 장벽을 둘렀다.

쏜살같이 날아온 파편들은 거기에 맞고 튕겨 나갔지만, 문제는 늑대인간이 다음 행동을 할 시간을 벌었다는 거다.

녀석은 곧바로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옥상 바닥을 강하게 내려쳤다.

콰드득!

늑대인간의 강력한 근력 때문에 옥상의 일각이 무너져 내리며, 녀석의 몸도 저 아래로 떨어졌다.

잔해가 퍼지고 주위로 뿌연 먼지구름이 치솟았다.

루드거는 그 광경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늑대인간이, 도구를 사용했다?'

아무리 크립티드가 아닌 인조 생명체라 하더라도, 늑대를 베이스로 만든 만큼 녀석들에게는 당연히 짐승으로서의 본능이 가장 앞선다.

그나마 머리를 쓴다고 해도 상대가 과연 건드려도 되는 정도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이 전부.

하지만 이전 녀석부터 해서 지금 눈앞의 녀석까지.

늑대인간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위기를 느끼는 순간 도주하는 것도 그렇지만, 특히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집어 던질 줄은 루드거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놓쳤나.'

뚫린 구멍을 통해 건물 내부로 진입한 루드거는 늑대인간 자체가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혀를 찼다.

다만, 완전히 놓친 것은 아니었다.

허공에 은근하게 그의 코를 자극하는 향이 남아 있었으니까.

'혹시 몰라서 싸우던 도중에 추적향을 묻혀 놓길 잘했군.'

루드거는 늑대인간이 남긴 추적향이 풍기는 냄새를 따라 움직였다.

오늘 내로 이 모든 일을 끝낸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는 살고 싶었으니까.

* * *

"테이시! 테이시! 어디 있는 거야!"

"에이단. 아무리 돌아다녀도 안 보이는데. 그냥 포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에이단과 레오는 테이시를 찾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을 열심히 뒤지는 중이었다.

테이시가 동쪽의 숲으로 갔다는 말을 들은 것을 마지막으로, 둘은 해가 저문 지금도 계속 테이시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러나 테이시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한 레오가 먼저 말했다.

"테이시도 안 되겠다 싶어서 알아서 물러났을 거야. 이렇게 찾는 데도 없으면 그런 거 아니겠어?"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테이시가 아무리 멋대로 내기를 했다고 해도, 그걸 제대로 거절하지 않은 우리 잘못도 있어."

에이단의 정론에 레오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테이시가 계속 달라붙는 것이 귀찮아서 그녀를 쫓아낼 심보로 거짓말을 입에 담은 건 그였다.

약간의 죄책감.

그것 때문에 테이시를 찾기 위해 이렇게 돌아다니는 중이었고.

"그래도 선생님들한테 걸리면 우리도 위험해. 남들은 고작 벌점이라 하겠지만, 순위를 신경 써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벌점도 크다고."

"그래도 내버려 둘 수는 없어."

"테이시가 정말 늑대인간을 아직까지 찾고 있다고 믿어?"

"보통은 안 그러겠지만, 테이시니까."

사실 에이단도 자신이 말해 놓고 확신하는 이유를 몰랐다.

다만 자신에게 다시 대련을 하자거나, 평소에 말을 할 때 테이시가 보이는 눈빛은.

언제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사람의 그것처럼 간절하고 강박감마저 느껴졌다.

그런 그녀라면 어쩌면, 정말 늑대인간을 잡으려고 자신의 몸을 망쳐 가며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휴. 알았다. 앞으로 딱 30분만 더 확인해 보자. 그래도 없으면 그때는 돌아가자고."

레오는 이 정의감 넘치는 소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었다.

처음 도와준 것으로 자신에게 친구라며 다가온 이 성격 좋은 녀석은, 중요한 순간에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는 고집불통이라는 걸 충분히 알았으니까.

조금의 휴식을 취한 두 사람이 다시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꺄악!

멀리서 들려오는 여자아이의 비명.

묘하게 낯이 익은 그 목소리는 분명, 두 사람이 애타게 찾던 테이시 프리아드의 목소리였다.

"레오!"

"그래. 들었어. 저쪽이야!"

둘은 풀숲과 나뭇가지를 헤치며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달렸다.

그 순간 맞은편의 풀숲이 흔들리더니 누군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선두에서 달리던 에이단이 그것과 충돌했다.

무언가에 깔린 에이단이 뒤로 넘어졌다.

"아이고. 갑자기 뭐야."

"끄응."

에이단은 뒤로 넘어진 자신의 몸을 강하게 짓누르는 감각에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은은한 달빛을 받으면서도 그 존재감을 잃지 않는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테이시?"

"...에이단?"

테이시도 자신이 지금 누구의 위에 껴안듯 올라타고 있는지 깨닫고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너, 너! 여기에 왜 있는 건데!"

"그야 네 비명이 들려서...."

"뭐?! 비, 비명은 무슨! 그런 적 없거든?"

얼굴을 붉히며 에이단에게 소리치는 테이시를 보며, 레오는 괜한 걱정을 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릉.

"헉! 에이단. 들었어?"

"어. 이거, 정말 그 소문의 늑대인간이야?"

두 사람의 경계 어린 시선이 수풀 너머로 향했다. 에에단과 레오는 모두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때 테이시가 두 사람의 앞에 섰다.

"두 사람 모두. 잠깐만 기다려 봐."

"테이시. 지금 뭐 하는 거야?"

에이단의 물음에 테이시는 평소 같지 않게 우물쭈물하더니, 입술에 손가락을 얹고 두 사람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에이단과 레오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서로를 돌아봤다가, 결국 테이시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조용히 움직인 세 사람은 이윽고 땅이 훅 꺼지는 분지의 앞에 도달했다.

"저길 봐."

조용한 목소리로 테이시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떨어진 낙엽에 가득한 분지의 중심에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저건...."

밤눈이 좋은 시골 소년 에이단은, 저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봤다.

"늑대인간?"

그것은 분명 늑대인간이었다. 곳곳에 상처가 가득하고, 계속 숨을 헐떡이고 있었으나 분명 그랬다.

그리고.

"새끼잖아?"

크기가 작은 녀석은,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새끼였다.

◈ 29화 보는 사람, 해결하는 사람 (1)

에이단과 레오는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늑대인간.

이번 세오른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고 간 장본인이 지금 저기에 있다.

하지만 저건 아무리 봐도 새끼였다. 심지어 끙끙거리는 걸 보니 어딘가 다친 것이 분명했다.

"조금 전에 우연히 발견했어."

테이시가 비명을 지른 이유. 별다른 생각 없이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늑대인간을 발견해서였다.

그 사실이 괜히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힌 테이시가 이내 콧대를 세웠다.

"어때? 내기는 내가 이긴 거지?"

"발견만 했잖아. 내기는 사로잡는 거 아니었어?"

레오의 지적에 테이시가 바로 발끈했다.

"그래? 그럼 내가 지금 당장...!"

"테이시. 잠깐만 기다려 봐."

에이단은 분지 안으로 내려가려는 테이시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켁!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아, 미안. 나도 모르게."

"너, 레이디한테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면 뭔데!"

테이시가 곧바로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흐흥. 에이단 너, 내가 저 늑대인간을 발견한 것 때문에 조급한 거지? 은근히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너도 나한테 패배하는 걸 신경 쓰고 있었구나."

"테이시. 뭔가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어?"

이쪽의 도발에 되레 진지한 질문이 돌아오자, 테이시는 김이 빠졌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가."

"저기 있는 건 늑대인간의 새끼야. 늑대인간한테 새끼가 존재하는 게 가능한지는 둘째치고서, 지금 저기 있는 새끼는 몸 상태가 딱 봐도 안 좋아 보이잖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거 같고."

"그래. 그런데 그게 왜?"

"그런데 봐. 주위에 낙엽이 덮여 있어. 게다가 이 주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교묘한 위치야. 세오른이 아무리 넓다지만 숲에 이런 곳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어."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저 새끼 늑대인간이 혼자서 이곳에 자리를 잡고 낙엽을 모았다고 생각해?"

거기까지 말해 주자 테이시도 무언가 깨닫고 입을 합 다물었다.

즉 에이단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다친 새끼 늑대인간이 혼자서 이곳까지 왔을 리가 없다.

도움을 준 무언가가 더 있다는 소리다.

"대체 누가?"

"누구인지는 몰라. 어쩌면... 또 다른 늑대인간이 있을지도 모르지."

에이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새끼 늑대인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쪽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갑자기 달려들지도 모르니까.

새끼라고는 하지만, 덩치는 어지간한 대형견보다 크다.

위험의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었다.

'어?'

늑대인간을 세심히 살피던 에이단은 이상한 걸 발견했다.

낙엽에 뒤덮여 흉상밖에 보이지 않는 늑대인간의 목덜미 부근에,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눈에 힘을 줘서 살펴보니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저건, 목줄... 같은 건가?'

그 순간 에이단은 저 늑대인간이 단순히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에이단? 뭐 해?"

에이단의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레오가 부른 순간이었다.

에이단은 무언가 결심했는지 분지 아래로 주욱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에이단! 야, 야!"

레오는 당황했고, 그건 테이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황급히 에이단의 뒤를 쫓았다. 5m 이상 되는 분지의 중심까지 내려온 에이단은 늑대인간 새끼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에이단! 지금 뭐 하는 거야! 위험하다고!"

"뭔가 이상한 게 있어서 그래."

에이단은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 순간 눈을 감고 있던 새끼 늑대인간이 눈을 부릅뜨더니 에이단을 응시했다.

에이단은 조심스레 다가가려던 상태에서 멈칫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키고, 숨 막히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꿀꺽.

에이단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나는 해치지 않아."

그렇게 말을 한 것은 늑대인간의 눈빛을 봤기 때문이다.

적의가 없다. 살의도 없다.

이쪽을 응시하는 그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는, 마치 시골 강아지의 순박함만 가득했다.

저런 눈빛을 지닌 늑대인간이 사람을 습격하고 둘이나 병실로 보냈다고?

에이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레오와 테이시도 그런 에이단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쪽을 응시하던 새끼가 곧바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에이단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새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예상대로 녀석은 얌전했다.

손으로 머리를 한 번 쓸어 주니 오히려 기분이 좋은지 그르렁거리는 소리마저 냈다.

"많이 아팠구나."

에이단은 그렇게 말하며 낙엽 바깥으로 드러난 상처를 살폈다.

'짐승에게 물린 게 아니야?'

몸에 새겨진 흔적은 다른 짐승의 습격을 받아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에 베인 자국에 가까웠다.

머리를 쓸던 손으로 목을 살펴보니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냥 단순한 늑대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가 더 있어.'

에이단이 거기까지 생각을 했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이상을 파악한 레오가 소리쳤다.

"에이단! 피해!"

에이단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소리가 들려오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직후 거대한 충격이 그의 몸을 강타했다.

"커흑!"

3m 이상을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군 에이단은 어지러움을 바로잡으며, 자신을 날린 정체불명의 존재를 바라봤다.

'늑대인간!'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이쪽을 어깨로 들이받은 녀석은, 새끼 늑대인간보다 덩치가 1.5배 이상은 더 커다란 성인 늑대인간이었다.

녀석은 에이단을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새끼를 지키듯 섰다.

"지, 진짜 늑대인간이야."

테이시는 그 모습을 보며 바르르 떨더니, 이윽고 무언가를 각오했는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마력을 일으켰다.

늑대인간 또한 테이시가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를 노려봤다.

"야, 야! 너 뭐 하는 거야!"

옆에서 레오가 말리려 했지만 테이시는 듣지 않았다.

늑대인간이 눈앞에 있다. 세오른을 혼란으로 몰고 간 이 모든 사태의 근원.

녀석들만 없으면, 놈들만 처리하면.

가문을 되살릴 수 있다.

몰락해 버린 가문. 자신에게 괜찮다며 힘겹게 미소 짓던 어머니의 모습.

평소에 자신에게 달라붙던 주제에, 가문이 망하니 바로 돌아선 쓰레기 같은 인간들.

내가 해야만 해.

오직 나만이, 프리아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어.

눈앞의 늑대인간은 그것을 위한 확실한 발판이었다.

고작 늑대인간 하나를 사냥했다고 해서 망해 버린 가문이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다.

그건 테이시도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좋다.

상점을 받거나 혹은 레더벨크 시에서 내려온 포상금을 챙기거나, 이름을 알려도 좋다.

그러기 위해서 마법을 익혔고, 성공을 위해 세오른에 왔다.

'나는...!'

늑대인간이 테이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빠르다. 그리고 매우 위협적이다.

테이시는 술식을 짜 올리려 했지만, 눈앞에 달려드는 늑대인간의 기세에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술식이!'

조급함 때문에 술식이 어긋나 버렸다. 겨우 끌어모은 마력이 무의미하게 흩어졌다.

물에 젖은 종이가 찢겨 나가듯 사라지는 술식의 모습 너머로, 이쪽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다가오는 늑대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아. 끝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테이시는 몸에 옆으로 훅 밀려나는 걸 느꼈다.

늑대인간이 휘두른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바로 코앞 허공을 스쳐 지나갔다.

데구르르.

누군가와 바닥을 함께 구른 테이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 어?"

"테이시! 괜찮아?"

"에이...단?"

위기에서 그녀를 구해 준 것은 에이단이었다. 자신이 계속 귀찮게 굴며 싸우자고 한 남자아이.

그가 조금이라도 그녀를 미는 것이 늦었다면, 테이시는 그대로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너, 너. 왜 나를...."

"친구가 위험한데 그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잖아."

친구.

그 한마디에 테이시는 말문이 턱 막혔다.

에이단은 그런 테이시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늑대인간을 바라봤다.

"움직임이 뭔가 이상해. 어딘가 크게 다친 거 같아. 아마 그 때문에 피할 수 있던 거겠지."

과연 그 예상대로, 어둠 속에서 살짝 드러난 늑대인간의 가슴팍에는 아직 아물지 못한 커다란 구멍이 3개나 뚫려 있었다.

에이단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고의가 아니었어. 우리는 네 새끼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할 생각이 없어."

"에이단? 지금 뭐 하는 거야! 늑대인간에게 말이 통할 리가 없잖아!"

테이시가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냐며 뒤에서 외쳤지만 에이단은 진지했다.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눈앞의 늑대인간을 응시하며 에이단이 계속 말을 이었다.

"너. 우리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

"그게 무슨...."

레오와 테이시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늑대인간의 반응이 이상했다.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녀석이 흥분을 가라앉히더니 다시 새끼를 향해 다가갔으니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오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진짜 말이 통한다고?"

"조금 전에는 새끼가 위험할까 봐 과하게 반응한 거야."

"하지만 에이단. 녀석은 2명이나 되는 학생을 습격했어. 지금은 새끼 때문에 얌전하지만, 언제 갑자기 본색을 드러낼지 몰라."

레오의 지적은 타당했지만, 에이단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늑대인간의 새끼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주했던 에이단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 새끼의 눈동자를 본 순간, 에이단은 분명 무슨 소리를 들었다.

제발 도와달라는 말을.

"레오. 테이시. 내 말이 억지라는 건 알아. 그래도 한 번만 믿어 줘."

에이단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늑대인간을 향해 다가갔다.

크르릉.

어미로 추정되는 녀석이 그런 에이단을 보며 잇몸을 드러내며 위협했지만, 에이단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위험하지 않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괜찮아. 헤치지 않아."

그런 생각으로 거리를 조금씩 좁히자, 에이단을 노려보던 늑대인간도 적의를 드러내는 걸 멈췄다.

그보다는 새끼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걸 써."

에이단은 평소에 챙기고 다니는 포켓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약병 하나를 꺼냈다.

저주와 해주 계열의 약제학 수업을 들을 때 완성한, 아주 기초적인 회복약이었다.

실력이 미흡해서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숨을 헐떡이는 새끼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 충분한 도움이 될 터.

그런 생각으로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새하얀 빛줄기 하나가, 어미의 몸통을 관통했다.

"어, 어?"

천천히 다가가던 에이단도, 뒤에서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오와 테이시도 놀라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미 늑대인간의 몸을 관통한 그것은 은색으로 빛나는 금속이었다.

처음에는 날카로운 창인 줄 알았던 그것이 이윽고 형태가 무너지더니 그물로 변해 어미의 몸을 그대로 속박했다.

저건 <연금>을 이용한 금속 마법?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모두가 당황하는 순간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가 뚝 떨어져 내렸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검은 그림자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람.

"루드거, 선생님?"

기습적인 공격으로 늑대인간을 제압한 루드거는 이곳에 학생이 셋이나 있을 줄 몰랐다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다 낯이 익은 모습이군. 에이단. 레오. 그리고 테이시 프리아드.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이 늦은 시간에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었지?"

이름이 호명된 세 사람은 몸을 흠칫 떨었다.

망했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교사한테 걸릴 줄이야! 심지어 상대는 피도 눈물도 없다고 평가받는 루드거 첼리시가 아닌가.

"너희 셋에게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나중에 묻겠다. 일단 뒤로 물러나라."

테이시와 레오는 그 말에 따랐다.

하지만 에이단은 달랐다.

그는 루드거와 늑대인간의 사이에 끼어들며 루드거의 앞길을 막아섰다.

"잠깐만요!"

"...에이단.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루드거의 싸늘한 목소리에 에이단은 몸을 바르르 떨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루드거 선생님!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기다려 달라?"

"지금 저 늑대인간은 뭔가 이상해요! 아니, 그러니까 정확히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잠시만 저 늑대인간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 재고해 주세요!"

에이단은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그러지 않으면 루드거가 당장이라도 저 늑대인간 모자의 숨통을 끊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헛소리가 아닙니다. 어쩌면 저 늑대인간은...."

"듣기 싫다. 물러나라."

"루드거 선생님!"

"물러나라고 했다."

루드거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에이단은 비켜서지 않았다.

루드거는 그런 에이단을 응시하다가 그의 어깨너머, 몸이 묶여 있는 어미의 얼굴을 혀로 핥아 주는 새끼 늑대인간의 모습을 발견했다.

포악함 따윈 전혀 없이, 그저 순수하게 자신의 가족을 걱정하는 그 모습.

누워 있던 새끼가 몸을 일으켰다. 몸 전체를 뒤덮은 낙엽이 밀려나고 낙엽에 가려진 나머지 몸이 드러났을 때.

루드거는 보고 말았다.

그의 눈썹이 아주 약간이지만 꿈틀거렸다.

"어?"

루드거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에이단은 그런 루드거의 미묘한 변화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선생님이 왜 저러시지?

에이단이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려고 했다.

턱!

그 순간 그의 몸이 무언가에 강하게 잡아당겨진 것처럼 허공을 날았다.

뒤로 밀려난 에이단의 몸이 상처 없이 지면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바람의 마력을 이용한 완충 효과.

전부 루드거가 한 짓이었다.

"선, 생님?"

보이는 것은 검은 프록코트를 입은 루드거의 뒷모습.

늑대인간들은 거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에이단이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루드거의 마법이 발현됐다.

화르르르륵!

순식간에 일어나는 뜨거운 불길.

그것은 두 늑대인간을 삽시간에 집어삼키며 사방으로 눈부신 빛을 뿌렸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느껴지는 열기. 그것은 분명, 상대방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공격 마법이었다.

불길에 삼켜진 늑대인간에게 비명은 없었다.

그럴 틈도 없이, 고통마저 느끼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졌으니까.

이윽고 마법의 불길이 완전히 가라앉았을 때.

늑대인간이 있던 자리에는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 재만 가득했다.

"기숙사로 돌아가라."

루드거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너희들의 일탈 행위에 대한 책임은 내일 묻겠다."

그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 30화 보는 사람, 해결하는 사람 (2)

루드거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조금 전까지 늑대인간이 있던 자리를 응시했다.

그의 손으로 흔적도 없이 전부 태워 버렸다.

늑대인간이 아닌, 실험체라는 증거까지 전부 다.

안도해도 좋았다.

이제 끝이었으니까.

그러나 루드거의 마음은 전혀 편해지지 않았다.

멀리서 마법으로 불을 밝힌 다른 교사들이 하나둘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루드거는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 * *

세오른 아카데미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늑대인간 사태는, 신임교사 루드거 첼리시가 늑대인간을 제거함으로써 결말을 맺었다.

여러 학생은 이번 사건이 단순히 부풀려진 헛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떠들었지만, 실제로 늑대인간을 목격했다는 증인이 다수라 그런 의견은 쏙 들어갔다.

보름달의 아래에서 루드거가 건물 옥상에서 늑대인간과 혈투를 벌인 것은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다 퍼진 상황.

학생들은 이미 <아카식 레코드>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서 떠들었다.

-이번에 진짜 늑대인간이었다는 데 사실이야?

-나 그거 실제로 봤어. 연구실 건물 옥상에서 이번에 새로 들어온 선생님이 늑대인간이랑 싸우는데, 어우 진짜 멋있더라.

-거짓말 아니야?

-실제로 연구실 3동 건물 옥상의 일부가 부서졌고, 싸움 흔적이 있었다던데.

-와. 그러면 진짜 신임 교사가 늑대인간 잡은 거야?

-신임 교사여도 전직 군인 출신이었다면서? 그러면 충분히 가능하지.

-대단하다.

그래서 늑대인간은 대체 뭐였냐는 소리와, 어디서 그런 게 나타났냐는 의문도 있었다.

누군가는 늑대인간이 사실 어딘가의 비밀 실험체가 아닐까 하는 흑막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서조차 없는 상황에서 그런 의견은 제대로 타지도 않는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아. 나 걸려서 벌점 5점 받았어.

-나도. 이러면 학사 경고가 조금 위태로운데.

-응. 난 5점 가지고 아무렇지도 않아~. 상점 미리 받아 뒀어~.

-너 어디 사냐.

이번에 늑대인간을 잡겠답시고 나선 학생들 대부분이 발각되어 벌점 세례를 맞았다.

무려 전교생 중에서 130명.

심지어 개중에는 3학년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시끄러울 만도 했다.

영웅이 되기 위해 나섰는데 해결은커녕 벌점만 받아 버렸으니, 대부분 학생은 내가 왜 그랬는지 후회감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건 에이단과 레오, 테이시도 마찬가지였다.

"아악! 망했어! 망했다고! 하필이면 루드거 선생님한테 찍혀서는!"

현재 세 사람은 총장과의 면담을 위해 면담실로 불려 온 상태였다.

에이단은 여전히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지 진중한 얼굴이었지만 테이시는 달랐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했다.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절대로 허점을 허용해서는 안 됐는데, 이번 늑대인간 사태로 보상은커녕 루드거에게 제대로 찍혀 버렸으니.

테이시는 괜히 분한 마음이 들어서 에이단을 노려보았다가 이내 입술을 짓씹으며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에이단의 탓을 할 수만은 없었다.

에이단이 없었으면 그녀는 이 자리에 설 수도 없었으니까.

늑대인간의 공격에서 몸을 날리며 그녀를 구해 준 것도 결국 에이단이었다.

'그래. 나는 그냥,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내가....'

스스로가 너무나도 바보같이 느껴져서 테이시는 제복의 치맛자락을 떨리는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면담실의 문이 열렸다.

자리에 앉아 있던 에이단, 레오, 테이시 삼총사는 벌떡 일어났다.

총장. 겉은 새하얀 머리카락이지만, 안쪽은 분홍빛을 띠는 특이한 머리카락 색을 지닌 그녀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면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 총장의 뒤를 따르는 것은 냉철한 인상의 남자.

전날 밤 늑대인간을 쓰러뜨린 장본인, 루드거 첼리시였다.

루드거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복장은 지난날 입은 검은 프록코트가 아닌 붉은 롱 코트였지만, 그 흔들림 없는 정갈함은 여전했다.

"자자. 셋 다 편하게 앉아요."

총장의 말에 에이단을 비롯한 세 사람은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총장 또한 비어 있는 상석에 앉았다.

"루드거 선생님도 앉으세요."

"저는 여기 서 있겠습니다."

"뭐, 본인이 그게 편하시다면야. 자,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가 너희 셋을 왜 불렀는지 알겠니?"

누구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세 사람이 모인 이유는 오직 하나. 가장 가까이서 늑대인간을 목격하고 거기에 휘말렸기 때문.

설마하니 총장과 대면하게 될 줄은 몰랐던 테이시는, 루드거가 정말 작정하고 이를 갈았다고 생각했다.

그저 벌점을 주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총장에게까지 일러바쳤다는 게 무슨 뜻인가.

평범한 징계로는 절대로 끝내지 않겠다는 선포가 아닌가.

'망했어!'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것은 일종의 오기였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것을 그녀는 절대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에이단과 레오가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는 모습에 자극을 받은 것도 있었다.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에이단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하면서도 에이단의 시선은 루드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너희를 왜 불렀을 거 같니?"

"...단순히 벌점만 주려고 그런 것 같지는 않네요."

"그 말이 맞다."

루드거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너희 셋은 세오른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 숲까지 들어가 위험을 자초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 뻔했지. 조금만 상황이 틀어졌어도 이 자리의 누군가는 죽어 있었을 거다."

괜히 찔리는 게 있는 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결과적으로 누군가 죽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너희들의 안일한 행동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총장님께 건의를 드린 것도 그 탓이다."

심각했는지 깨닫는다.

그 말이 이 쪽에게 절대로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면담실에 무거운 분위기가 맴돌자 총장이 두 손으로 박수를 '짝' 하고 쳤다.

"자자. 다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얼굴 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렴. 그리고 루드거 선생님. 학생들에게 겁을 주는 말은 좀 심했어요."

"총장님. 이건 그렇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물론 루드거 선생님의 분투 덕분에 다친 사람이 없이 끝난 것도 맞고, 학생들이 안일하게 군 것도 맞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좋게 끝났잖아요?"

"...저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직 아이들이니까요. 그리고 겁을 주듯 말씀하신 것치고는, 루드거 선생님은 꽤 제게 세세히 설명을 해 주셨던데요? 에이단?"

"네, 네!"

갑자기 자신이 호명되자 에이단은 황급히 대답했다.

"이야기 들었단다. 위험에 빠진 테이시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면서?"

"아, 아뇨 그건... 그냥."

"학생들 사이에 경쟁은 중요하지만, 역시 그보다는 서로 돕고 사는 것이 보기 좋지. 그리고 두 사람도, 에이단을 지키기 위해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았고."

총장의 입에서 하나둘 흘러나오는 칭찬의 말에, 에이단을 비롯해 레오와 테이시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맴돌았다.

총장님이 왜 저러시지?

"너희들의 행동은 분명히 잘못된 게 맞아. 그래서 나는 일단 루드거 선생님의 의견을 받아 너희에게 각자 벌점을 10점씩 주기로 했어."

10점!

5점도 아니고 10점이면 다른 학생들보다 2배는 더 까인 수치다.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되는 것은 분명 확실할 터.

"하지만."

그 순간 총장의 청아한 목소리가 세 사람을 상념에서 일깨웠다.

"너희들이 그 위기의 순간에 보인 행동은 분명 칭찬받아 마땅한 것. 그러니 너희 셋에게 전부 상점을 10점씩 주겠어."

"네?"

"그, 그게 정말인가요?"

벌점 10점. 하지만 거기에 더해 상점 10점으로 인해 사실상 벌점은 사라진 상황.

총장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이단. 너는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몸보다 동료를 먼저 생각하는 용기를 보였구나. 그런 너에게 상점 10점을 추가로 부여하겠어."

"헉!"

"레오. 너는 다급한 순간에서도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걸 잊지 않고, 이쪽의 흔적을 일부러 남기며 다른 사람들이 잘 따라올 수 있도록 했지."

"그, 그걸 어떻게...."

"그런 너에게 상점 10점을 추가로 주겠어. 그리고 테이시 프리아드."

"네, 넵!"

"늑대인간을 마주하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려던 용기. 누군가는 만용이라 하겠지만, 너도 깨달은 바가 있겠지. 그 흔들림 없는 마음을 언제까지 유지하도록 바랄게."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에게도 상점 10점을 부여하겠어."

이로써 세 사람은 벌점 10점에서 오히려 상점을 더 많이 받게 됐다.

아직도 이게 현실인지 받아들이지 못한 세 사람을 보며 미소 짓던 총장이 앉은 채로 루드거를 돌아봤다.

"루드거 선생님도, 불만 없으시죠?"

"...그게 총장님의 뜻이시라면."

루드거는 한발 물러서며 이견 따윈 없다고 선을 그었다.

총장이 손뼉을 짝짝 쳤다.

"축하해. 얘들아.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렴."

"아, 네! 감사합니다! 총장님!"

"그렇다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자. 시간 너무 잡아먹었다. 다들 어서 돌아가렴."

세 학생은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면담실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나가던 에이단은 자리에 멈춰 서서 루드거를 돌아봤지만, 루드거는 나가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때 루드거 선생님이 보였던 그 반응은, 대체 뭐였던 걸까.

에이단은 해결되지 못한 의문을 품으며 면담실을 떠났다.

문이 닫히고 면담실에는 루드거와 총장만 남게 됐다.

"에휴. 루드거 선생님. 이제 만족하세요?"

총장이 그렇게 말을 한 것은 학생들의 기척이 완전히 멀어졌을 때였다.

"정말 놀랐어요. 루드거 선생님 본인이 제게 저 아이들을 잘 봐달라고 부탁을 하다니."

고개를 뒤로 젖히며 두 다리를 흔들던 총장이 반개한 눈으로 루드거를 힐끔 살폈다.

"거기에, 이 모든 일은 제가 한 것처럼 해 달라니."

"거기서 제가 한 것처럼 하면 별로 좋은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알아요. 좋은 경찰 나쁜 경찰이라는 거죠?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다니. 아쉽지 않으세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아, 그래요? 뭐, 본인이 괜찮다는데 저도 그 이상은 묻지 않을게요. 결과적으로 학생들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니까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총장은 세오른의 모습이 보이는 창가를 향해 다가가 그 가녀린 손끝으로 투명한 유리창을 쓸었다.

"루드거 선생님. 늑대인간을 직접 처리하셨다고 하셨죠?"

"예."

"거기서 뭘 보셨죠?"

"무엇을 말입니까?"

"뭔가 특이한 게 있지 않았나요?"

어딘가 날카롭게 마저 느껴지는 총장의 말에도, 루드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 건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예. 저는 그저 늑대인간을 쫓았고, 학생들에게 위협이 될까 봐 제거했을 뿐입니다. 제가 군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흐음. 뭐, 그러면 어쩔 수 없고요."

총장도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루드거가 학생을 지키며 늑대인간과 싸운 것은 이미 전교에 퍼질 정도로 유명했으니까.

"아무튼, 다시 한번 루드거 선생님께 감사를 드려야겠네요. 덕분에 죽은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 당당한 태도, 좋아요. 앞으로도 좋은 모습. 기대할게요?"

루드거는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총장과의 대화를 끝낸 루드거는 자신의 교무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루드거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가 보고 놀랐던 것.

남들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낙엽에 가려진 새끼 늑대인간의 몸.

그것은 분명, 짐승의 털이 자라지 않은 인간 아이의 것이었다.

그래.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 아직 늑대화가 되지 못한 인간의 몸이었다.

'샴수스 학파는 늑대를 실험체로 삼아 늑대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놈들은... 사람을 실험체로 삼아 늑대인간을 만든 것이었다.

늑대에게 인간의 유전자를 대입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로잡아 짐승의 인자를 강제로 섞은 것이다.

위급해지자 손으로 부서진 잔해를 집어 던진 늑대인간의 그 기이한 행동도 이제야 납득이 갔다.

이성이 없어야 할 놈답지 않게 왜 머리가 그렇게 잘 굴러가나 했다.

새끼 늑대인간은 당연히 아이일 거다.

그런 새끼를 지키기 위해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그 어미일 터.

'가족, 이었나.'

레더벨크와 세오른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3마리의 늑대인간은

실험체로 사용된 가족이었던 것이다.

아이와 두 부모.

그저 불행한 사건에 휩쓸린, 일반인들.

루드거는 그 셋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조용히

루드거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내 행동에 후회는 없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루드거는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위험에 빠지는 것은 그였을 테니까.

실험체는 전부 없애야 했고, 이쪽이 연관되어 있다는 그 연결 고리를 끊어야 했다. 그 이외의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이미 늑대인간으로 인해 사망자가 나왔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들 누군가를 죽이고 잡아먹은 것이다.

그래서 죽였다.

그래.

분명 그거면 된 거다.

'눈동자.'

제 어미를 핥으며 마지막에 자신을 돌아보던 새끼의 그 맑은 눈동자.

자신을 죽이려는 마법을 발현하는 와중에도 이쪽을 응시하는 그 눈빛에는 루드거를 향한 질책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단지 하나.

이 끔찍한 삶을 끝내 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뿐.

"...."

루드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31화 보는 사람, 해결하는 사람 (3)

한적한 정원의 벤치에 앉은 에이단과 레오, 테이시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이 꿈만 같은지 아직도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테이시였다.

"우리, 진짜 벌 안 받고 넘어갔구나. 아직도 꿈만 같아."

"그러게."

"설마 총장님이 나서서 우리를 두둔해 주실 줄이야."

"그러게."

항상 테이시와 날 선 대화를 나누던 레오도 이번만큼은 그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이윽고 에이단을 향했다.

너는 뭐 할 말이 없냐는 시선이었다.

"야 에이단. 에이단?"

"응? 어,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거야?"

상점을 받아 기쁜 두 사람과 다르게 에이단은 시종일관 심각한 얼굴이었다.

"에이단, 무슨 고민 있어?"

"아니. 고민이라고 해야 하나. 그...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뭔가 이상하긴 한데."

"뭔데 그래. 뜸 들이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해 봐!"

테이시가 강하게 보채자, 에이단은 망설이다가 자신이 품고 있던 고민을 두 친구에게 털어놨다.

"그냥 뭔가, 이상해서."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어제 늑대인간. 너희들은 못 본 것 같지만, 그 늑대인간의 목에는 이상한 은색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어."

"뭐?!"

"쉿!"

테이시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레오가 바로 조용히 하라는 자세를 취했다.

"조용히 해. 혹시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세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며 혹시라도 다른 목격자가 없는지 확인한 뒤, 서로 고개를 맞대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말해 봐. 그게 정말이야?"

"응. 확실해. 내가 루드거 선생님을 말리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어."

"구속구라니. 그 늑대인간이 평범한 늑대인간은 아니라는 말이야?"

"어쩌면 정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실험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레오도 무언가 생각이 미쳤는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최근에 들은 소식이 있어."

"뭔데?"

"이 세오른에 수상한 사람들이 숨어 있다고 말이야."

"수상한 사람들? 뭐야 그거. 뭐 비밀 조직 같은 거 말하는 거지? 그거 그냥 학생들끼리 만든 비밀 동아리나 헛소문 같은 거 아니야?"

학생들끼리 비밀스럽게 모임을 갖는 일이야 세오른에서 특이할 건 없었다.

테이시의 물음에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고작 그런 거였다면, 그가 수상하다고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나도 확실하지는 않아.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비밀스러운 조직이 세오른에 스며든 건 확실한 거 같아. 특히 이번 늑대인간 사태를 보며 깨달았어."

"자, 잠깐만. 그러면 세오른에 위험한 사람들이 있다는 거잖아."

"아직까지는 의심의 단계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봐야겠지. 에이단. 너도 그렇게 생각해?"

"응. 솔직히 누군가를 의심하는 것은 좋지 않은 짓이지만, 그래도 뭔가 걸리는 건 확실하니까. 그리고 나는 그, 특히...."

에이단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아니, 아니다."

"뭔데?"

"루드거 선생님 때문이구나?"

테이시의 꿰뚫어 보는 말에 에이단은 차마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부터 계속 에이단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전날 루드거가 보여 주었던 과격한 행동 때문이었다.

"루드거 선생님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젯밤에 보았던 선생님의 모습은 어딘가 수상했어."

"수상했다고?"

"너희들은 루드거 선생님께 가려져서 제대로 보지 못했겠지만, 나는 정면에서 마주 보고 있었잖아. 그때, 루드거 선생님은 무언가를 보셨어."

그때 루드거가 보였던 찰나지만 확실했던 반응.

에이단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물어보기도 전에 루드거는 그를 강제로 치우며 늑대인간을 불로 태워 버렸다.

에이단의 말을 들은 레오가 턱을 괬다.

"그건, 루드거 선생님이 증거를 인멸하려고 했다는 거야?"

"뭐어? 루드거 선생님이? 그게 말이나 돼?"

테이시는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되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쪽을 도와주고 늑대인간과 치열하게 싸운 루드거 첼리시가 오히려 비밀스러운 무언가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확실한 건 아니야. 다만, 루드거 선생님이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때의 선생님은, 뭔가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다급해 보였으니까."

"...."

"...."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

세오른의 교사가, 그런 위험한 짓을 저지를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진짜라면? 루드거 첼리시가, 입에 담기도 위험한 비밀스러운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면?

사실 늑대인간을 죽인 것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거였다면?

"너희 바보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나갔잖아."

테이시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저으며 두 사람을 질책했다.

"루드거 선생님도 무언가 생각이 있으셨겠지. 그리고 아까 총장님과 면담할 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어? 뭐가?"

"딱히 못 느꼈는데."

"어휴. 바보들. 총장님이 우리 칭찬하실 때 하신 말씀은 기억 안 나? 각자 뭘 잘했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전부 하나씩 꼬집어 주셨잖아."

"어, 맞아. 그랬었지. 다른 거에 신경 쓰느라 미처 떠올리지 못했네."

"생각을 해 봐. 당시 현장에 없던 총장님이 그걸 어떻게 알았겠어?"

"어, 그건...."

"당연히 누군가 총장님께 전부 말해 준 거잖아. 그리고 우리가 뭘 했는지 총장님께 말해 줄 사람이 누구인데?"

루드거 첼리시.

그 사람뿐이었다.

"루드거 선생님은 아닌 척해도, 우리가 뭘 했는지 전부 다 확실히 보고 계셨던 거야. 우리를 혼내려고 했다면 우리가 잘했던 행동을 총장님께 말하지 않았겠지."

"아."

테이시의 말을 듣다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면담실에 총장과 루드거 둘만 들어온 것도 그렇고, 총장이 상을 준다고 하자 루드거가 한발 물러나며 양보한 것도 그렇다.

"전부, 루드거 선생님이 계획한 일이었단 말이야? 대체 왜?"

"그건 나도 모르지. 그래도 루드거 선생님은 우리를 배려해서 총장님께 우리에게 좋은 말씀만 해 주셨어. 그런 루드거 선생님을 의심하는 건 솔직히 너무 나간 거 아니야?"

에이단과 레오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생각해 보면 그랬다.

루드거가 수상한 사람이었다면, 첫 수업 때부터 소스코드라는 획기적인 마법을 가르쳐 줬을까?

정체를 숨겨야 하는 사람이,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런가?"

에이단은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루드거에 대한 미묘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존경스러운 선생님이지만, 어딘가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그래. 테이시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지금 당장 고민해도 의미도 없는 일이고."

"흥. 알면 됐어."

"그보다 배고프다. 너희들 밥은 먹었어?"

"아니. 아직."

"테이시는?"

"나는 왜?"

"안 먹었으면 같이 식사하러 가지 않을래?"

"뭐, 뭐?"

테이시는 에이단의 말에 자신이 지금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뭐? 식사?

나랑?

"지금 그거, 정말이야?"

"왜?"

"그, 그야... 식사는... 그...."

괜히 부끄러워진 테이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배배 꼬며,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친구끼리... 하는 거잖아...."

"우리는 이미 친구잖아?"

"...!"

이쪽을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짓는 에이단을 보며 테이시는 귓불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레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지 못한 저 철부지 아가씨와 눈치 하나는 끝장나게 없는 자신의 친구를 보자니.

앞으로 세오른의 생활이 다사다난할 것 같았다.

* * *

"아! 루드거 선생님!"

퇴근길.

숙소로 돌아가던 나는 셀리나 선생님과 마주했다.

이쪽을 먼저 발견하고 강아지처럼 호들갑을 떨며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선생이라기보다는 재학 중인 학생에 가까웠다.

진짜 나이 속인 거 아니야?

"퇴근하시나요?"

"예."

"소식 들었어요. 어제, 늑대인간을 루드거 선생님께서 잡으셨다고 들었는데."

"예. 제가 처리했습니다."

"와아. 정말요?"

이쪽을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셀리나 선생님.

그래도 같은 신임 교사인데 이쪽을 너무 올려다보는 게 아닌가 싶다.

"최근 다 루드거 선생님의 이야기밖에 안 해요. 그보다 늑대인간은 대체 어떻게 잡으신 거예요? 무슨 방법이라도 있었나요?"

"잠시만요."

"예?"

"오늘은 제가 좀 바빠서, 이야기는 다음에 해 드리겠습니다."

내 단호한 말에 셀리나 선생님은 약간 어른에게 혼난 아이처럼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죄송해요. 괜히 바쁜데 불러서."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셀리나 선생님도 푹 쉬십쇼."

"네. 루드거 선생님도 잘 들어가세요."

셀리나와 인사를 나누고 그녀와 헤어졌다.

다른 교사들과 다르게 나 같은 거한테도 관심을 가져 주는 좋은 사람이다.

다만, 나는 입장이 입장이다 보니 누군가와 가까워질 수 없었다.

단체로 식사 정도 같이하는 건 가능하지만, 그것이 전부.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개인 숙소로 돌아오자 문 앞에 소포가 하나 와 있었다.

소포를 챙겨 든 나는 집 안에 들어가 내용물을 확인했다.

한스가 내게 보내 준 자료였다.

최근 레더벨크에서 행방불명 된 사람들과 특정 사람들이 모이는 구역들.

촤라락.

내용물을 가볍게 확인한 나는 내 개인 서재로 향했다.

서재의 한쪽 벽에는 레더벨크 시의 지도와 함께 곳곳에 사진이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서류의 일부 내용을 오려서 지도의 한쪽 구석에 고정시켰다.

레더벨크의 폐공장이 가득한 구역.

버려진 슬럼가.

이 근방에 실험실이 있다.

거기까지의 작업을 마친 나는 곧바로 휴대용 수정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마력을 흘려 넣자 이윽고 수정구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보내 준 자료는 다 확인했소?]

"그래."

[형님이 어제 말해 준 대로 그 근방을 확인해 봤소. 버려진 공장 하나에서 건장한 덩치들 열 명 정도가 바삐 오가더군. 거기가 확실한 거 같소.]

"그렇군."

[그리고 개인적으로 따로 알아보라고 했던 걸 확인해 봤소. 도시 외곽에서 최근 노동자 몇 명이 행방불명됐다더군.]

"그중 3인 가족도 있었나?"

[있었소. 일가족 전체가 사라진 유일한 경우더군. 경찰들은 별로 조사도 안 하고 쉬쉬하며 넘겼지만, 이웃들이 오죽 불안해했어야지. 좀만 찌르니 술술 흘러나왔소.]

"...알겠다. 곧 가마."

나는 그 말을 남기고 통신을 끊었다.

잠시 벽에 고정된 지도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나는, 평소와 달리 칙칙한 갈색 코트를 걸치며 숙소를 나섰다.

* * *

어두운 밤.

하늘에 깔린 짙은 구름으로 별빛과 달빛마저 사라진 레더벨크의 공장 지대.

매연을 뿜지 않은 채 우뚝 선 공장의 굴뚝은 그 자체로 도시의 그림자에 죽어 간 사람들을 기리는 묘비였다.

실제로 고단한 환경에서 죽는 사람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묘비라는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버려진 구역이라 불리는 슬럼가는 간혹 보이는 가로등조차 없어 황량한 느낌을 강하게 미쳤다.

보이는 거라고는 바닥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시궁쥐가 전부.

부랑자들조차 구걸을 포기하고 피해 가는 그곳에, 루드거가 도착했다.

"오셨소?"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한스가 루드거를 반겼다.

한스는 루드거의 행색을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루드거는 이미 중무장을 하고 온 상태였다.

당장 그에게서 풀풀 풍기는 써늘한 기운부터가, 그가 앞으로 있을 싸움을 철저히 대비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혼자 가실 거요?"

"도와달라 하면 도와줄 건가?"

"아니 뭐, 그래도 뭐 쫄따구 한둘 정도는 내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됐다. 혼자서도 충분해. 안쪽의 녀석들은?"

"마흔 명 가까이 있소. 다만, 이놈들도 자기들 발등에 불 떨어진 걸 아는지 슬슬 뜨려고 하더군. 한 3일만 늦었어도 허탕을 쳤을 거요."

"놈들의 전력은?"

"별거 아닌 놈도 총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좋을 거요. 뭐, 마법사인 형님한테 총기류는 안 먹히지만, 개중에는 강화 갑옷을 착용한 놈이 셋 정도는 있으니."

"정예 전력은?"

"흑마법사가 둘."

"그렇군."

입구는 폐수 처리용으로 뚫어 놓은 커다란 파이프 관.

바로 실험실을 향하려던 루드거는 발걸음을 멈추며 한스에게 물었다.

"한스. 내가 물었던 일가족."

"예."

"거기에 있던 아이는 몇 살이었지?"

"아이 말이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한스는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위를 올려다봤다.

하늘에는 우중충한 구름이 가득했다.

"7살이었소. 완전 어린 꼬맹이였지."

"...7살인가."

루드거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그랬군."

◈ 32화 진실을 향한 발걸음 (1)

루드거는 커다란 폐수관으로 꾸며진 비밀 실험장의 입구로 향했다.

곳곳에 녹이 슬고 악취를 가득 풍기는 것이 진짜처럼 보였지만, 조금 깊이 들어가니 바로 바뀌었다.

내벽이 깔끔하게 변하고, 풍기던 악취마저 사라진다.

두런두런.

저 너머에서 은은한 주홍 불빛과 함께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루드거는 곧바로 기척을 죽이고 천천히 움직였다.

"하. 진짜 지루해 죽겠네. 이제 얼마나 더 있어야 하지?"

"글쎄다. 아직 이틀 이상 여유가 있으니까 좀 더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니야?"

"하필이면 그 빌어먹을 실험체들이 탈출할 게 뭐냐고."

"아직 우리가 꼬리 잡힐 일은 없으니까 괜찮을지도 몰라. 혹시 모르니 다 정리하고 자리를 뜨려고 하기도 하고."

"그래도 차라리 이렇게 경비 서는 게 낫다. 지금 안에서는 장비 정리하니 뭐니 난리잖아."

"어차피 곧 교대 시간이야."

"아오. 그 개 같은 새끼들만 탈출 안 했어도."

루드거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입구에서 하염없이 경비만 서는 것이 지루했던 둘은 수다를 떠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나 그때 밖에 있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관리를 잘못했나?"

"실수가 있었다나 봐. 납치했던 꼬맹이가 약발을 잘 안 받아서 크립티드화가 덜 됐다고 하더라고. 아마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거 같은데."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 실험 약물 더 투약하려고 녀석을 끄집어내려다가 저항이 생겼지."

"그거 약물 투약하면 엄청 고통스럽다 들었는데, 진짠가?"

"고래고래 비명 지르는 거 보면 그렇겠지 뭐.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부모가 거기서 지랄을 떨었다는 거야."

"뭐? 부모가? 이미 늑대인간이 됐는데도 지 새끼를 지키려 했다고?"

"그래. 과학자들도 설마하니 아직도 이성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던 거지. 그놈들이 예상하는 거 이상으로 발악을 한 나머지 안쪽이 난장판이 됐고."

"제길. 그래서 그놈들이 탈출한 건가. 그러면 좀 위험하지 않아?"

"푸핫! 위험은 개뿔. 걱정하지 마. 안 그래도 그거 관련해서 믿음직한 사람에게 부탁했다 들었으니까. 하여튼, 그 애새끼는 내가 그때 있었으면 아주 뒈지게 밟았을 거다. 우릴 이렇게 개고생시키게 만들었잖아."

그렇군.

루드거는 더 이상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전부 알았으니까.

철벅.

루드거가 지면에 고인 물을 밟으며 낸 소리에, 한창 수다를 떨던 두 사람은 바로 입을 다물고 이쪽을 응시했다.

"뭐야. 거기 누구야?"

"쥐새끼 아니야?"

입구 주위는 마력등이 빛을 밝히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루드거가 서 있는 곳은 더욱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어둠 속에서 두 줄기 빛이 날아와 그들의 미간을 꿰뚫는 것이 더 빨랐다.

푹! 푹!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로, 입구를 지키던 두 사람은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루드거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가죽 장화에 검은 바지, 주머니가 가득 달린 회색 조끼와 그 위에 걸친 허름한 갈색 코트까지.

얼굴에는 코까지 올라오는 검은 두건을 둘렀으며 머리 위에는 이마까지 내려오는 후드를 뒤집어썼다.

루드거는 유령처럼 고요한 발걸음으로 시체를 지나 비밀 실험실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곤 그가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으아악! 살려 줘!"

입구 근처에서 순찰하던 남자는 어둠 속에서 나타나 동료들을 모두 죽여 버린 괴물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놈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른다.

마치 신기루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그와 함께 순찰하던 동료들을 순식간에 죽여 버렸으니까.

'입구를 지킨 새끼들은 뭘 한 건데!'

그렇게 생각하던 그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어?"

몸이 기우뚱거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정강이 아래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대체, 대체 왜?"

그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고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정강이의 아래로 그의 두 다리가 잘려 나가 있음을.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뒤늦게 고통이 밀려왔다.

"크흡!"

그는 이를 으득 깨물며 등 뒤의 어둠을 노려봤다.

거대한 통로 너머는 불빛이 전부 꺼져서 새까맣기만 했다.

그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등골이 싸늘해지고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녀석이다.

갑자기 나타나 그의 동료들을 모두 죽여 버린 침입자.

녀석이 벌써 그를 쫓아온 것이다.

저벅.

침입자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장막을 헤치며 나타난 그는 얼굴을 꽁꽁 감쌌기에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건장한 체격을 보면 남자인 건 분명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너, 너. 우릴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알았어? 저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거 같은데, 넌 이제 끝장이야."

남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후드에 서린 그림자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목이 탔다.

차라리 살려 달라고 빌어야 하는지 고민이 드는 순간, 통로 너머에서 다수의 사람이 우르르 몰려왔다.

"여기다! 여기서 소리가 났어!"

멀리서 마력등을 들고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용병들이 보였다.

전부 총기류를 챙기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는 특히 중무장한 덩치가 눈에 띄었다.

자신을 구하러 온 동료를 발견한 남자가 외쳤다.

"이봐! 이쪽이야! 이쪽! 하하하! 넌 이제 끝장이다! 이런 좁은 길목에서 벌집이나 돼... 커헉!"

루드거는 떠드는 녀석의 입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단검을 뽑자 피가 튀며 시체가 옆으로 쓰러졌다.

때마침 몰려온 병력이 루드거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저기다! 쏴 버려!"

과연 잘 훈련된 병력이라 그런지 루드거에게 정체가 뭐냐고 묻지도 않고 바로 총구를 겨누었다.

루드거는 그러는 사이에도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쏴!"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지만, 기다리던 격발은 없었다.

"어?"

"뭐, 뭐야."

철컥. 철컥.

방아쇠를 아무리 당겨도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총 자체가 고장 난 것이 아닌, 화약이 먹통이 된 것이다.

쏘라고 지시를 내렸던 대장의 뺨을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이런 경우를, 그는 나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불의 침묵]! 마법사다!"

세상이 바뀌면서 화약으로 인한 무기가 등장하게 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런데도 마법사와 기사는 이 세상에서 손꼽는 전력으로 자리를 지켰다.

이유는 하나.

기사와 마법사에게는 총기가 전혀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초인적인 신체 능력을 지닌 기사들은 평범한 총알은 쉽게 피하거나 베어 낼 수 있었다.

반대로 마법사들은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불의 침묵]이라는 마법이 그걸 가능케 했으니까.

[불의 침묵]

말 그대로 마법사를 중심으로 일정 범위 내의 화약의 성능을 억제하는 마법이다.

그 위력은 3위계의 마법사가 사용할 경우 기관총까지 무력화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5위계 정도가 사용하면 대포를 무력화시킬 수 있으며.

6위계인 렉서러급 마법사가 사용한다면 그때부터는 전쟁의 판도가 달라진다.

총과 화약의 시대가 찾아와도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루드거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3위계가 끝.

그러자 루드거는 자신이 그 이상 넘어가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기존의 마법을 강화하는 것으로 부족함을 메꿨다.

일반적인 3위계 마법사가 [불의 침묵]을 사용했을 때 유효 범위는 최대치가 반경 20m.

그리고 루드거가 사용하는 [불의 침묵]의 유효 범위는.

──무려 반경 200m다.

"이런 제길! 전부 칼 뽑아!"

샴수스 학파 소속 사람들의 판단은 빨랐다.

그들은 의미가 없어진 총기류를 버리고 곧바로 검과 곤봉을 꺼내 쥐었다.

파지직.

곤봉 위로 전류가 흘렀다.

루드거는 그 모습을 보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양손에는 각자 리볼버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멍청하긴! [불의 침묵]을 사용하면 네 무기도 무용지물...!"

퍼억!

루드거를 비웃던 남자가 미간에서 피를 뿌리며 뒤로 쓰러졌다.

모두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방금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무, 무슨."

"대체 어떻게...?"

루드거는 분명 총을 쐈다. 하지만 그가 쏘아 낸 건 총알이 아니었다.

마법.

정확히는 형상화된 마력의 탄환.

그렇기에 총을 쏘는데 소리도 없고, 불의 침묵 자체에도 영향받지 않았다.

"이, 이...!"

"동등한 싸움을 해 주길 바랐나?"

루드거는 병사들을 비웃으며 마력의 탄환을 마구잡이로 쏘았다.

타타타탕!

그러나 대충 쏘는 것 같으면서도 총구는 정확히 미간을 겨냥해 머리를 날렸다.

순식간에 피와 비명이 난무했다.

"이런 멍청한 놈들! 모두 비켜!"

거대한 갑옷을 차려입은 덩치가 정면에 나섰다. 검은색의 합성 금속으로 이루어진 강화 갑옷은 루드거가 쏘아 낸 마력탄을 손쉽게 튕겨 냈다.

공학이 발달하며 만들어진 강화 갑옷이라는 외장 슈트였다.

속도는 느리지만, 매우 튼튼하며 어마어마한 힘을 내서 대(對) 기사 전용으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저건 좀 귀찮겠군.

"죽어!"

강화 갑옷을 입은 덩치가 양팔을 넓게 벌리며 루드거를 향해 달려들었다.

쿵쿵거리며 걷는 그 모습은 마치 탱크가 돌진하는 것 같은 위압감을 풍겼다.

루드거는 당황하거나 겁먹지 않았다.

들어 올린 리볼버를 회수한 뒤, 허리춤에서 초승달 형태의 카람빗 단검 두 자루를 꺼내 쥐었다.

"마법사 주제에 근접전을 하겠다고?"

그렇게 외치며 루드거의 멱살을 쥐기 위해 팔을 뻗는 순간, 루드거의 신형이 무너지듯 사라졌다.

뭐지? 어디로 사라진 거야?

강화 갑옷의 남자가 그 광경에 당황하는 순간, 그의 팔뚝을 타고 무시무시한 격통이 내달렸다.

갑옷과 갑옷의 틈새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크아악! 뭐, 뭐야!"

정확히 갑옷의 이음매 사이로 칼을 찔러 넣은 것이다.

"대체 어떻게? 아니, 그보다 너무 빨라서 보이지도 않았...."

왼팔을 움직이려는 순간, 왼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겨드랑이 아래로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스치듯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그다음은 양쪽 발목이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두 다리의 힘줄이 잘려 나가 그는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사, 살려...."

촤악!

루드거는 그 이상 듣지도 않고 카람빗 단검으로 목을 그어 버렸다.

"젠장! 게이브가 당했어!"

"비켜! 내가 나선다!"

이번에 나선 것은 조금 다른 형태의 강화 갑옷이었다.

검은색이 아닌 더 누런빛을 띠는 황동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양어깨 뒤로 새하얀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증기 기관으로 만들어진 강화 외골격.

두 손으로 쥐고 있는 것은 거대한 포신이었고, 그 포신의 끝이 연결된 것은 등 뒤에 매달린 커다란 테슬라 코일이었다.

"죽어!"

파지지지직!

보랏빛 전류가 통로를 집어삼켰다. [불의 침묵]으로는 억제가 되지 않는 테슬라 건의 고압 전류는 사방으로 퍼지며 불똥을 튀겼다.

"크하하하! 어떠냐!"

그러나 그는 웃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가 쏘아 낸 고압 전류가 루드거의 코앞에서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무, 무슨."

아니, 정확히는 그의 앞에 솟아오른 금속 하나에 반응해서 거기에 스며들고 있었다.

저건 연금술을 가미한 금속 마법?

설마 속성 원소 중에서 금속을 다루는 놈이었다고?

낭패다. 금속 속성 원소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에게는 고압 전류를 쏘아 내는 테슬라 건이 통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루드거가 재차 뽑아낸 리볼버가 마력을 쏘아 냈다.

그것은 정확히 테슬라 건의 포구를 가격했고, 그대로 폭발시켰다.

파지지지직!

사방으로 전기가 가득 퍼지며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까맣게 타 버렸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루드거를 노려봤다.

그의 반신은 이미 까맣게 타서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허억. 허억. 이, 이 미친놈. 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건데."

괜히 억울해서 그렇게 따졌지만, 루드거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그를 그냥 지나쳤다.

죽이지 않는다.

어차피 저 상태로 살아남을 수도 없으니, 고통 속에서 더 오랫동안 놔둘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몇 명을 처리했지?'

대강 스무 명 정도.

아직 안쪽에 절반 정도 되는 병력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다가오지 않는 걸 보니 안쪽에서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시선이 느껴졌다.

벽을 가득 채운 파이프 틈새에서 날아오는 시선.

노골적으로 이쪽을 탐색하는 눈빛이었다.

'벌레를 이용한 흑마법인가.'

안쪽에 흑마법사가 둘 있다고 했었지.

흑마법사 중 일부는 벌레의 시야 공유를 통해 남들이 확인하기 힘든 구역도 탐색할 수 있다고 들었다.

아마 지금 지켜보고 있는 것도 녀석일 터.

"후우."

루드거는 숨을 가볍게 내쉬며 오른발을 들어 올려 지면을 가볍게 굴렀다.

퉁.

바닥과 그의 부츠가 충돌하며 나는 소음.

그것은 파동이 되어 안쪽으로 넓게, 그리고 깊게 퍼져 나갔다.

* * *

실험실의 안쪽.

그곳에서 과학자들은 잔뜩 불안에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괜찮은 거 맞습니까? 당장 자료를 파기하고 실험 약을 챙겨야...."

"아, 괜찮다니까 그러네."

심약한 과학자를 말린 것은 목에 문신이 새겨진 금발의 남자였다.

복장도 상당히 가벼운 차림이었는데, 쥐고 있는 무기도 없어서 마치 나들이를 나온 게 아닌가 싶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가 이 실험실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흑마법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민머리 거구의 남자도 마찬가지.

민머리 남자의 이름은 베론.

금발 남자의 이름은 브뤼노.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벌레 형제라 불리는, 뒷세계에서도 나름대로 명성이 있는 흑마법사였다.

"어차피 상대는 하나니까."

동생인 브뤼노가 벌레로 확인한 정보를 입에 담았다.

그래.

놀랍게도 침입자는 고작 하나였다.

강화 갑옷 2명에 총기류로 무장한 병력을 혼자서 쓸어 버린 녀석이 고작 하나라니.

"대, 대체 누가...."

"그야 우리도 모르지. 어쩌면 제국의 보안국에서 우리를 알아차린 걸지도 모르겠어."

"보, 보안국!"

보안국.

제국의 최정예로만 구성되어 있는 조직.

그중에서 보안국 소속의 기사단이 하나 있다.

나이트크롤러 기사단

당연히 평범한 기사단과는 조금 다른 자들이다.

그들의 무서운 점은 개개인의 무력도 무력이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혹함에 있었다.

기사지만, 여타 기사들처럼 고지식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의 약점을 철저하게 비집으며 파고들어 목숨을 끊는다.

나라에 해악이 된다고 판단되면 세 살배기 어린아이까지 가차 없이 죽일 수 있는 자들.

그야말로 뒷세계의 악마라 불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싸우는 방식이 좀, 영 이상하단 말이지."

벌레로 더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녀석이 무슨 술수를 부린 건지 모르겠는데 보냈던 벌레들로부터 신호가 모조리 끊겼다.

설마 이쪽이 지켜보는 걸 눈치챈 건가.

혼자서 온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형. 준비해야겠어."

"그래."

형인 베론이 몸을 일으켰다. 실험실을 지키는 부하들 또한 잔뜩 긴장한 채 방패와 무기를 들었다.

입구에서 실험실 중앙으로 이어진 통로.

그곳을 뚫어지라 응시하며 침입자를 맞이할 준비가 된 그때였다.

우우웅!

기묘한 파장이 실험실 내부를 훑고 지나가더니, 이윽고 불이 전부 꺼지며 어둠이 내려앉았다.

"뭐, 뭐야! 어서 불 켜!"

"예비 전력기 돌려!"

다급하게 움직이는 부하들을 보며 동생인 브뤼노가 형을 돌아봤다.

"형. 아무래도 녀석이 수작을 부린 것 같은데?"

"...."

"형?"

베론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브뤼노가 베론을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큰 덩치는 실루엣으로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런 베론의 실루엣이.

목이 잘려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 33화 진실을 향한 발걸음 (2)

"이런 젠장! 형!"

브뤼노는 베론의 목이 잘려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반응했다.

그의 옷의 틈새에서 무수한 벌레들이 꿈틀거렸다.

브뤼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녀석이 사용한 건 소리의 파동을 이용한 거였어. 그리고 금속까지 사용했지.'

속성 원소는 총 10개로 나뉘어 있다.

<불> <물> <바람> <땅> <식물> <전기> <금속> <얼음> <어둠> <빛>.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속성.

소리 마법의 경우에는 대기의 진동을 이용하는 것이기에 바람 원소의 파생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루드거가 테슬라 건을 막을 때 사용한 것은 <금속> 속성 마법.

'금속은 땅에서 파생된 원소. 보통 다룰 수 있는 속성 원소는 비슷한 계열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브뤼노가 판단한 루드거가 사용하는 원소 마법은 <바람>과 <땅>, <금속>으로 총 3개였다.

보통 마법사들의 경우에는 다룰 수 있는 속성이 2~3개 정도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4개까지.

5개부터는 타고난 재능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마법사들은 상대가 다루는 원소를 기본적으로 3개라고 깔고 간다.

그게 기본 상식이고 당연한 거였으니까.

'바람 원소라면, 자그마한 날벌레들은 상성이 좋지 않다. 그렇다면 덩치가 큰 녀석으로 풀어야겠군.'

혹시 모르니 루드거가 4개째의 원소를 다룰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았다.

브뤼노의 소매에서 튀어나온 것은 두꺼운 갑각을 지닌 거대한 지네였다.

남부 밀림에서 잡아 온 특이개체를 흑마법과 아종 교배를 통해 만들어진, 일반적인 생태계에서는 볼 수 없는 벌레였다.

하지만 브뤼노가 뽑아낸 지네의 목이 순식간에 잘려 나가고.

그 날카로운 검기가 그의 목을 노리는 데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크윽!"

브뤼노는 몸을 비틀어 루드거가 휘두른 칼날을 비껴 내듯 막아 낼 수 있었다.

옷 아래에 감춰진 그의 몸 주위로는 단단한 풍뎅이들이 사슬갑옷처럼 둘려 있었다.

'근접전을 벌인다고? 설마 워 메이지인가?'

브뤼노는 곧바로 루드거와 거리를 벌리려 했다.

그 순간, 루드거의 정면에 술식이 하나 새겨졌다.

브뤼노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건, [요동치는 불꽃]!'

콤마 몇 초 만에 새겨진 타오르는 불꽃을 형상화한 것 같은 마법의 술식.

3위계 화염 원소 마법인 요동치는 불꽃은 1초도 걸리지 않아 강렬한 화염을 내뿜으며 브뤼노를 집어삼켰다.

"크아아악!"

브뤼노의 비명과 함께 불길이 일며 주위가 밝아졌다. 입구만 뚫어지라 노려보던 병사들은 뒤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저, 적이다!"

"대체 어떻게!"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브뤼노는 뜨거운 열기에 몸을 뒤틀었다.

벌레를 다루는 자에게 있어서 가장 까다로운 마법이라고 한다면 단연코 화염 속성이었으니까.

다른 3개의 계통과 전혀 관계없는 원소를 다루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대, 대체 어떻게."

벌레가 모조리 타고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지만, 브뤼노의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전신 화상에 얼굴이 반쯤 녹아내린 그는, 자리에 털썩 쓰러진 채로 루드거를 응시했다.

방심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이쪽과 극상성일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

"너는, 대체 누구냐."

"...."

펑!

루드거는 대답 대신 리볼버를 뽑아 브뤼노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동시에 예비 전력이 가동되며 실험실 안쪽에 빛이 돌아왔다.

"허억!"

"버, 벌레 형제가 죽다니."

안쪽의 경비를 담당하던 병사들은 브뤼노와 베론 형제의 시체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 모두가 힘을 합쳐도 형제 중 하나의 손에서 전부 정리되는데, 침입자는 혼자서 형제를 다 제압해 버린 것이다.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저런 괴물과 싸울 수 있을 리가.

모두가 두려움에 루드거로부터 뒷걸음질을 치는데, 목이 잘려 나가 쓰러진 베론의 시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부욱!

"...!"

루드거는 곧바로 반응했다. 그대로 몸을 앞으로 날리는 순간, 조금 전까지 루드거가 있었던 자리에 거대한 손이 공간을 할퀴고 지나갔다.

맨들맨들한 갑각에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 달린, 벌레의 앞다리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얼이 빠지고 말았다.

"죽은 거 아니었나?"

루드거는 들썩이며 움직이는 베론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목이 잘려 나간 베론의 몸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 루드거를 덮친 것은 기괴하게 변형된 그의 오른손.

베론이 아직 인간 형태인 왼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에는 입이 달려 있었다.

"놀랐다. 설마 이런 기습을 당할 줄이야."

"...벌레화인가."

"오. 알고 있었나?"

벌레를 다루는 브뤼노.

반대로 형인 베론은 커다란 덩치에, 벌레도 다루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왜 벌레 형제라 불리나 싶더니.

'그런 거였나.'

베론은 자신의 몸 자체가 일종의 벌레처럼 변이를 일으킨 흑마법사였다.

저런 몸이 자연적으로 변할 리가 없으니, 사실상 자신의 몸을 흑마법의 실험으로 쓴 것이다.

흑마법사들이 왜 정신 나간 미친놈들로 가득한지 베론은 그 예시를 단적으로 보여 줬다.

"그렇다 해도 머리가 잘려 나갔는데 멀쩡할 줄이야."

"내 몸은 이미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거든."

그 말과 동시에 '꾸드득!'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베론의 몸이 변화를 일으켰다.

그의 몸을 두르고 있던 검은 로브가 팽창하더니 이윽고 무수한 가시가 튀어나왔다.

루드거는 뒤로 물러났다.

안 그래도 거대한 덩치의 베론이 더욱 커다랗게 변하며 루드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러 곤충을 섞은 것처럼 생긴 끔찍한 형태의 괴물.

이쯤 되면 저게 흑마법사인지 크립티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동생 녀석을 죽이다니. 슬프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책임은 져 줘야겠어.]

베론의 양팔이 뒤로 당겨진다 싶더니 화살처럼 루드거를 향해 쏘아졌다.

루드거는 곧바로 와이어 런처를 사용해 위로 날아올랐다.

베론의 찌르기가 루드거의 발아래를 스쳐 지나갔고, 뒤에 포진해 있던 병사들이 거기에 꿰뚫렸다.

"으아아악!"

"도망쳐!"

부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 나가는데도 베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움직임 한번 날래군. 그야말로 날벌레가 따로 없어.]

베론은 고개를 들어 루드거를 찾으려 들었다.

쿠구궁!

그 순간, 천장의 철제 구조물들이 무너지더니 베론의 머리 위로 와르르 떨어져 내렸다.

쿠과광!

상당한 무게의 철근이 떨어졌음에도 베론은 멀쩡했다. 갑각에 약간의 흠집이 생겼을 뿐, 상처는 없었다.

[이런 거로 시선을 끌 생각이었나?]

베론은 거대해진 머리를 돌리며 와이어를 타고 지면 위로 내려앉은 루드거를 바라보았다.

명백히 도발하는 행동이었지만, 루드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귀찮게 됐군.'

베론의 몸은 이미 평범한 벌레의 영역을 벗어났다.

저렇게 거대해진 덩치에 몸을 두르는 갑각도 단단하기에, 사실상 흑마법사를 넘어선 괴물이라 불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래서 흑마법사 놈들은.'

루드거는 리볼버를 쏘려다가 그만두고 무기를 전부 회수했다.

백날 쏘아 봤자 녀석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오. 포기하는 거냐?]

베론은 그런 루드거의 행동을 보며 그를 비웃었지만, 루드거는 대신 베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뭘 하려는 거지?]

이쪽을 향해 팔을 뻗는 루드거의 행동은 베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걸 넘어 불쾌감마저 불러일으켰다.

무슨 마법이라도 사용하려는 건가?

하지만 지금의 베론에게 4위계 이상 마법이 아닌 이상 타격을 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가 판단컨대 루드거는 3위계의 마법사였다.

술식 전개 속도가 기이할 정도로 빨랐지만, 그것이 전부.

그런 루드거가 자신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 이 귀여운 침입자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조금 너그러운 마음으로 구경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베론은 그렇게 판단했다.

"이 상황에서 이런 걸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흠?]

"뭐, 어쩔 수 없지."

루드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실험실 내부에 새하얀 빛이 가득 찼다.

* * *

"쓰읍. 후우. 아직도 쌀쌀하네."

버려진 공장 바깥에서 루드거를 기다리고 있던 한스는 아직도 싸늘한 밤공기에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몸을 떨었다.

루드거가 안으로 들어간 지 벌써 30분이 지났다.

'이제 슬슬 끝날 때가 됐는데.'

루드거는 애써 티를 내진 않았지만, 한스는 그가 적잖게 분노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자신이라도 그랬을 테니까.

7살짜리 꼬마 아이와 그 부모를 납치해서 인체 실험으로 써먹는 놈들이라니.

아무리 그도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라지만, 이런 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저 샴수스 학파는 그 선을 넘어도 너무 심하게 넘었다.

'좀 늦네. 역시 흑마법사가 둘이나 있는 건 힘들었나?'

그 흑마법사가 벌레 형제라는,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 놈들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한스는 루드거 그 양반이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루드거는 죽었으면 진작 죽었을 사람이다.

그러지 않았다는 건 오직 하나.

그만큼 그가 강하다는 소리.

'본인은 별로 티를 내지 않는 것 같지만.'

애초에 사냥꾼으로 활동할 때 제보당의 괴물을 단신으로 사냥한 인간이 아닌가.

그 괴물이 잡아먹은 기사의 숫자만 다섯이 넘었는데. 루드거는 그걸 혼자서 사냥한 거다.

심지어 루드거는 신분은 '아브라함 반 헬싱'이라는 사냥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립 탐정.

괴도.

범죄 컨설턴트.

용병.

예술가 등등.

그는 여러 얼굴을 지녔으며, 그가 과거에 지녔던 가면은 항상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번쩍!

슬슬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버려진 공장 전체에서 눈을 아프게 만드는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화르르륵!

동시에 빛은 화염으로 변해 폐공장을 그대로 불바다로 만들었다.

커다란 공장 하나를 날려 버린 무시무시한 위력.

한스는 저게 누구의 짓인지 아주 잘 알았다.

'그걸 썼구만.'

한스 본인도 그거라고 지칭했지만, 사실 저게 대체 어떤 능력인지는 한스도 잘 모른다.

언제 한번 루드거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 돌아온 거라고는 '진짜 마법'이라는 이상한 대답뿐.

'마법이면 마법이지, 진짜 마법은 또 뭐람?'

아무튼, 루드거가 저걸 사용했다는 건 그만큼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는 의미이리라.

그리고 그만큼 루드거도 진심이었다는 소리고.

* * *

루드거는 실험실 안에 있던 자료와 실험체들에게 사용한 실험약을 슈트 케이스에 담아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스가 그를 맞이해 줬다.

"왔소? 일단 자리부터 뜹시다. 너무 화려하게 저질러서 버려진 공장이라도 경찰들이 들이닥칠 거요. 안쪽은?"

"전부 처리했다."

루드거는 베론을 쓰러뜨린 뒤 실험실 깊은 곳을 확인했다.

어둠 속에서 철창 안에 갇힌 끔찍한 실험체들의 모습.

전부 저마다의 일상을 구가하던 평범한 일반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은 결국 부서지고 말았다.

육체가 변이하고 이성을 상실해 가며, 더는 인간으로 부르기도 힘들어지는 경계를 넘나들며 고통을 겪는 자들.

루드거가 그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자비란, 고통 없이 보내 주는 것뿐이었다.

루드거는 그렇게 실험실을 모두 날려 버리고, 과학자들을 죽인 뒤 그들의 연구 보고서와 실험 결과물을 챙기고 나왔다.

"이게 그거요?"

루드거에게 받아든 슈트 케이스 안쪽에서 붉은 액체가 담긴 앰플을 보며 한스가 물었다.

"그래."

"세상 참 무서워졌소. 설마 이런 곳에서 사람을 상대로 인체 실험을 하는 놈들이 있었을 줄이야. 나는 과학자나 발명가라는 놈들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거뿐만이 아니다."

"예? 또 뭐가 있소?"

"그 정도로 커다란 비밀 실험실을 그들이 어떻게 구했다고 생각하지."

"그건...."

"뒤에서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준 사람이 있다."

"...그거 여간 보통 일이 아니구려."

저 정도의 실험실을 남들 몰래 지으려면 보통 돈이 필요한 게 아닐 텐데.

그만큼 저들의 뒤를 지원해 준 배후가 빵빵하다는 소리였다.

"걱정 마라. 이미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까."

"그거 정말이오?"

"그래."

루드거의 대답에 한스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형님 설마."

"왜."

"그... 아니죠?"

루드거는 뭐가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한스를 한 번 응시했을 뿐이다.

아.

저거 절대 못 말리겠네.

곧바로 깨달은 한스는 슈트 케이스를 받아들었다.

"나는 먼저 아지트에 가 있겠소. 일 끝나고 들르실 거면 오시구려."

한스는 루드거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루드거는 한동안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멀리서 공장이 타오르며 자아내는 새빨간 불길이 어두운 폐공장 지대를 밝게 비추었다.

그것은 마치 꺼지기 직전 가장 화려하게 타오르는 촛불 같았다.

* * *

"이딴 것을 밥이라고 가져온 거냐!"

쨍그랑!

화려한 저택의 안. 대부호 벨보트 릭슨은 메이드가 가져다준 음식이 담긴 접시를 집어 던졌다.

그것에 얻어맞은 메이드가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접시에 담긴 음식이 그녀의 옷과 얼굴을 더럽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부축하거나 돕지 못했다.

새하얀 수염이 지긋하게 자란 60대 노인은 그런 메이드를 혐오스럽게 노려보며 혀를 찼다.

"이딴 걸 음식이라고 내놨나? 돈을 줘도 그 값을 제대로 못 하는 쓰레기들 같으니라고."

벨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벗어났다.

그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매우 성공적인 자본가로 우뚝 선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성공을 거머쥐었을 때, 거울 속의 벨보트를 맞이한 것은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그는 결국, 이 자리까지 오기 위해 젊음을 바친 것이다.

그러니 그 젊음을 되찾고자 했다.

그래서 흑마법사들이 모종의 실험을 한다는 것을 지원해 줬는데.

최근 실험체 중 일부가 탈출해서 실험에 차질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제길! 멍청한 놈들! 쓰레기 같은 놈들!

내가 너희들에게 대체 얼마나 되는 돈을 투자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벨보트는 속으로 그렇게 성을 내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실험 자체는 무의미하지 않았다. 조만간,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거야.'

나약해진 인간의 육체를 전성기로 되돌릴 약.

젊음의 비약이 머지않았다.

단순히 젊어지는 것을 넘어 더 건강하고, 더 강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불 꺼진 자신의 커다란 방의 전등을 하나 켜려는 순간이었다.

"벨보트 릭슨."

"뭐, 뭣?! 누구냐!"

방의 중앙에 누군가 있었다.

벨보트는 마력등을 켜려고 했지만, 무슨 이상이 생긴 건지 불이 켜지지 않았다.

달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벨보트는 정체불명의 침입자와 단둘이 방 안에 갇힌 셈이다.

"겨, 경비! 경비!"

"불러도 못 들을 거다."

이미 방 안에는 소리 차단막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물론 대부호의 집인 만큼 이런 마법을 사용하면 곧바로 경보가 울리겠지만.

루드거의 마법은 너무나도 은밀해서 경보 마법에도 걸리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루드거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벨보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벨보트 릭슨. 너에게 하나 묻겠다."

"뭐, 뭐야. 넌 누구야! 정체를 밝혀!"

"7살짜리 아이가, 괴물이 된 자신과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도 이 끔찍한 현실에서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하는데."

콰득!

루드거가 팔을 뻗어 벨보트의 멱살을 쥐고 그의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댔다.

어둠 속에서 그의 안광이 붉게 빛났다.

"그걸 알면서도 태워 죽일 수밖에 없는 사람의 기분이, 과연 어떨 거 같나?"

◈ 34화 진실을 향한 발걸음 (3)

루드거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다친 제 어미를 핥으면서, 그를 올려다본 그 맑은 눈동자를.

자신을 죽이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는 데도 오히려 고맙다며 웃은 그 순수함을.

잊을 수 없다.

절대로, 잊을 수 없다.

"모,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그보다 넌 대체 누구야!"

"몰라?"

루드거는 멱살을 쥔 벨보트 릭슨을 바닥에 패대기치듯 집어 던졌다.

늙어서 몸 상태가 나빠진 벨보트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허리를 부여 쥐었다.

"크흑. 너, 너는 대체 뭐냐."

"이게 뭔지는 아나?"

루드거는 주머니에서 하나 미리 챙겨 놓은 실험약을 꺼내며 벨보트의 앞에 툭 던졌다.

투명한 유리관 안쪽에 담긴 루비를 녹인 것 같은 붉은 액체.

이것을 만들도록 지시를 내렸던 벨보트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이, 이건."

"이제야 알겠나?"

"내, 내게 원하는 게 뭔가. 돈을 바라는 건가?"

벨보트는 상대가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걸 깨닫고 저자세로 나갔다.

자신의 방 안에 몰래 숨어들 수 있는 실력자인 데다가, 대체 어떻게 얻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관여한 실험의 약물까지 가지고 있었다.

설마 보안국의 나이트크롤러 기사단이?

'제길! 그 벌레 형제는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이쪽이 무슨 생각으로 거금을 들여가며 투자를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실험체가 탈출하는 걸 놓치지 않나, 이 정체불명의 인간이 자신의 거주지까지 찾아오게 만들지 않나.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불만을 표출할 수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건 틀림없었으니까.

"자, 자네가 몰래 들어온 것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겠네. 그리고 그쪽도, 남몰래 나를 찾아온 걸 보면 바라는 게 있어서겠지?"

"바라는 거?"

"그래. 뭘 원하나. 역시 돈인가? 내게는 돈이 많으니까. 자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줄 수 있네."

그러나 루드거에게 돌아온 대답은 벨보트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대답."

"뭐, 뭐?"

"방금 내가 한 질문에 대답해라."

"자네가 한 질문이라니."

벨보트는 최대한 머리를 굴리며 루드거가 했던 질문을 상기했다.

7살짜리 아이 어쩌고 하는 거였는데.

벨보트는 혹시나, 하고 입을 열었다.

"혹시 그 탈출했다는 실험체를 없앤 것이 자네였나?"

"...."

"하하! 그랬군! 자네였어! 이거, 말을 하지 그랬나. 크흠. 갑자기 날 집어 던진 것은 뭐, 서로 오해가 있었다고 치지. 자네 덕분에 그래도 상황이 크게 번지지 않았으니까."

"일단 내가 묻는 거에나 답해라."

"아, 알았네 알았어! 그 7살짜리 아이, 실험체겠지? 그게 뭐가 문제인가? 이미 괴물이 됐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기 전이었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았지."

"...."

"어차피 사람들이 존재하는지도 모를 하층민 아닌가. 그런 놈들이 몇이나 죽었다 한들 그게 뭐 슬퍼할 일인가? 오히려 그 목숨을 다해 훌륭한 결과물을 냈으니, 그들은 숭고한 희생을 한 걸세."

숭고한 희생.

벨보트 릭슨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노동자니 빈민이니, 사회의 저 진흙탕을 뒹구는 하층민들이 몇이 죽는다 한들,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회에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저열한 것들.

오히려 그들이 실험체로서 인간의 젊음을 가져다주는 약물을 완성하는 데 초석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자신에게, 그것을 넘어 인류에게 공헌하는 길이 아닌가?

"더러운 천민이 백날 천날 공장에서 땀 뻘뻘 흘리며 일한다고 한들, 과연 돈 몇 푼 쥘 수 있겠는가."

차라리 그 무의미한 생명을 더욱 가치 있게 쓰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다.

누군가 약물 개발을 위한 실험체가 된다는 건.

벨보트에게는 그런 의미였다.

"대답은 충분히 됐나?"

"그래. 충분히 됐어."

"그러면...."

"너무 차고 넘쳤지."

콰득!

루드거는 벨보트의 목을 움켜쥐었다.

벨보트는 눈을 부릅뜨며 두 손으로 루드거의 팔뚝을 붙잡았지만, 그의 우악스러운 손길은 늙은 몸으로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크륵! 왜, 왜!"

제대로 대답했잖아!

벨보트의 눈동자는 루드거를 향해 그렇게 항의하고 있었다.

루드거는 대답하지 않은 대신, 자신이 가져온 약물이 담긴 병을 벨보트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댄 뒤 그의 입가에 부었다.

끄르륵!

벨보트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목이 잡혀 있어서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꿀꺽.

벨보트의 목구멍을 통해 붉은 약물이 넘어갔다.

동시에 벨보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끅! 끄아아아아악!"

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벨보트의 육체가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루드거는 벨보트의 목을 놓은 뒤, 물러나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세월의 풍파를 맞아 주름이 가득한 피부가 팽팽하게 변하더니, 이윽고 좌우로 갈라지며 털이 우수수 자라났다.

하지만 그의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자라난 털이 후드득 빠지며 시뻘건 맨살이 드러났고, 그것이 마치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벨보트는 병 하나에 담긴 약을 전부 마셨다.

실제로 실험체들의 경우에는 약에 담긴 아주 일부의 양만 투여받았고, 그것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심하게 변이를 일으킨 걸 생각하면.

다 늙어 버린 벨보트가 마신 용량은 이미 기준치를 한참 초월했다.

"끄으아아악! 왜! 왜!!!"

몸이 찢어지고 뒤틀리며 변하는 와중에도 벨보트는 루드거를 향해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지고, 짐승의 모습과 반쯤 뒤섞이게 됐을 때.

벨보트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는 건 인간의 울음소리도, 짐승의 울음소리도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

끄르아아아아악!!!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너는 뉘우치기는커녕 내 말을 이해조차 하지 못하겠지."

그러면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너도 네가 다른 사람에게 한 고통을 그대로 느껴 봐라.

루드거는 펼쳐 놨던 소리 차단 마법을 해제했다.

띠리리리리링!

동시에 마력에 감응한 경보가 저택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뒤를 이어 괴물이 된 벨보트의 고함이 맴돌았다.

크와아아아악!

"이게 무슨 소리야?!"

"침입자다! 벨보트 님의 처소에서 들렸어!"

"벨보트 님! 벨보트 님!"

쿵! 쿵!

바깥에서 몰려온 경비가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잠긴 문이 부서지며 안으로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개중에는 벨보트를 지키기 위해 고용된 프리랜서 마법사도 있었다.

"괴, 괴물이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다들 비켜!"

마법사는 곧바로 화염 마법을 펼치며 괴물을 불태웠다.

괴물은 기괴하게 생긴 모습과 다르게 너무나도 손쉽게 불에 타올랐다.

생명력이 얼마나 끈질긴지 불에 타면서 몸이 재생되고, 또 그것이 타 버리는 과정이 계속 지속됐다.

마법사도 위기감을 느끼고 자신이 지닌 마력을 모두 쏟아부어서 화염을 일으켰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났을 때.

더 이상 재생이 불가능해진 괴물의 육체가 붕괴했다.

"허억. 헉. 드디어 끝났다."

"벨보트 님은?"

"찾아!"

아무리 성격이 나쁜 인간이라지만 그들에게 월급을 주는 고용주였기에, 사람들은 벨보트 릭슨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됐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벨보트는 보이지 않았고, 그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현장의 모두가 결국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벨보트 릭슨이, 저 괴물에게 잡아먹혔다는 걸.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

동시에 그들은 알지 못했다.

벨보트의 방 안에 숨겨진 비밀 금고.

커다란 초상화 뒤의 비밀스러운 공간 안에 숨겨 놓은 벨보트의 재산이 담긴 금고가.

누군가에 의해 탈취되었다는 걸.

* * *

"왔소?"

한스가 알려 준 아지트는 레더벨크의 상업 구역의 골목길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허름한 집이었다.

다 닳아진 간판과 삐걱거리는 문, 기름때가 가득한 건물 외벽과 유리창까지.

그러나 심각한 것은 외관뿐이었고, 안쪽에 들어가니 냄새도 없고 인테리어가 아주 깔끔했다.

겉은 평범한 주점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저 눈속임일 뿐.

"제법 괜찮은 곳을 골랐군."

"공장 지대에 인접해 있는 상업 구역이오. 구하느라 애 좀 먹었지."

"주변 입지는?"

"아직 확인이 끝나지 않았지만, 레더벨크 뒷골목 생태가 꽤나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은 확실하오. 시간이 더 필요하지."

"그렇군."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가져온 금고를 바닥에 놓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한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뭐요? 가지고 오느라 좀 애 좀 썼겠는데."

"별로."

"그래서 이거, 금고요? 생긴 게 딱 그런데."

"그래. 마법으로 보안이 걸려 있었지만, 오는 도중에 해제했으니 바로 열어 보면 될 거다."

한스는 그 말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금고의 문을 열어 보고 내용물을 확인한 한스는, 곧바로 금고의 문을 닫았다.

"...너무 많은데?"

"그중 일부를 일하는 데 보태서 써라. 나머지는 일단 적당한 곳에 숨겨 두고."

"뭐, 그렇다면야 나야 상관없지. 그보다 지금 가실 거요?"

"그래."

"좀 지쳐 보이는데 쉬다 가시지. 형님 전용 방도 따로 놔뒀소."

"확인은 나중에 하지. 어차피 조만간 다시 찾아올 거 같으니까."

"그때는 무슨 신분으로 올 거요?"

"뒷세계에서 움직일 때 가장 어울리는 거."

"아, 그거 말이요?"

한스도 그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루드거는 오늘의 싸움으로 꽤 지쳤을 테니까.

"푹 쉬시오. 나도 내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 볼 테니까."

"그래."

루드거는 피곤한 발걸음으로 아지트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뒷골목의 공기가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려 피부에 아교처럼 달라붙었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길을 걸을 때마다 더 깊은 골목의 어둠 너머에서 이쪽을 탐색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뒷골목의 하이에나들.

그들은 루드거를 훑듯이 살펴보더니 이윽고 자신들이 건드릴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물러났다.

골목길을 완전히 벗어나게 됐을 때 루드거는 머리에 뒤집어쓴 후드를 벗고, 입과 코를 가린 두건을 내렸다.

아직도 몇몇 증기선이 돌아다니는 렘지어 강을 응시하고 있으려니, 레더벨크 중심에 우뚝 선 시계탑에서 커다란 종소리가 퍼져 나갔다.

댕! 댕! 댕!

자정을 알리는 소리였다.

루드거는 어둠을 담은 렘지어 강을 계속 응시했다.

한 아이가 자신에게 보인 그 눈동자의 기억이, 강물에 완전히 흘러내려 갈 때까지.

* * *

[대부호 벨보트 릭슨의 사망]

다음 날 레더벨크 시에 발부된 신문의 1면을 장식한 헤드라인이었다.

악덕 기업가이자 레더벨크의 손꼽히는 대부호 벨보트의 죽음은 레더벨크를 뜨겁게 달구기 충분했다.

심지어 그의 사인이 늑대인간의 습격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더더욱.

해당 괴물은 저택 내부의 경비를 서고 있던 마법사에 의해 퇴치되었지만, 벨보트 본인이 사망해 버린 건 상당히 큰 이슈였다.

혹자는 벨보트가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벨보트가 사악한 흑마법을 사용했다가 제어하지 못해 화를 입었다고 떠들었다.

기자들이 몇 날 며칠을 릭슨 저택의 앞에서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끼익.

그때 검은 자동차 한 대가 기자들의 뒤에 멈춰 섰다.

"응?"

기자들이 의문을 품으며 차에서 내린 사람을 응시했다.

누구지?

내린 사람은 총 3명이었는데, 전부 다 같은 복장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황금 견장을 달고 있는 검은 제복.

통칭 블랙 코트라 불리는, 허락받은 사람만이 입을 수 있는 복장을 알아본 기자들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보, 보안국!"

"그것도 나이트크롤러 기사단이야!"

보안국은 딱히 비밀스러운 조직이 아니다. 오히려 양지에서는 어마어마한 명성을, 음지에서조차 무시무시한 악명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기자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히 가십거리를 위해서 저택의 입구까지 찾아왔지만, 보안국이 나섰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종.

기자들의 머리에서 하나의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이, 이럴 게 아니야. 어차피 안에 들어가지 못할 거, 보안국과 관련된 내용이라도 써야 해.'

'보안국이 나설 정도면 그만큼 중대한 사항이라는 뜻이겠지. 심지어 선두에 선 저 사람은....'

금색과 적색의 수실이 조화롭게 들어간 블랙코트와 완벽하게 대비되는 차가운 은발.

그것을 이마가 보이게 위로 넘긴 날카로운 인상의 여인은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

테리나 라이언하울.

제국의 수호를 상징하는 라이언하울 후작가의 가주이며.

보안국에 소속된 나이트크롤러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이었다.

널리 알려진 그녀의 이명은 호국경(Lord Protector).

지금까지 제국의 위협이 되는 자들을 무수히 베어 온 사자의 외침은 그녀를 뜻하는 상징적인 말이 됐다.

저택을 향해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움직이는 테리나의 모습에 기자들이 좌우로 쩌억 갈라지며 길을 비켜 줬다.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지닌 그녀는 제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여기사의 우상이었다.

"문 열어."

보안국이 나서자 입구를 지키던 경비조차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그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문."

테리나가 경비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열어."

"네, 네!"

사색이 된 경비가 곧바로 움직였다.

굳게 닫혀 있던 릭슨 저택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 35화 나이트크롤러(Nightcrawler)

테리나 라이언하울과 두 부관이 등장하자 릭슨 저택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사건 현장을 검사하던 경찰들은 테리나를 보더니 몸을 빠릿하게 세우며 그녀에게 경례했다.

"테, 테리나 후작님!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는 테보란 경감이라고 합니다!"

"어, 그래. 고생이 많군."

"실례가 아니라면, 테리나 후작님께서 이곳에는 대체 어쩐 일로 오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못 들었나? 이 시각 부로 릭슨 저택에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권은 전부 우리 보안국이 받아 간다."

"보, 보안국에서 말입니까?"

수염과 구레나룻을 길게 기른 테보란 경감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단순한 살인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보안국이 나설 정도라면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란 소리다.

보안국은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닌 이상 잘 나서지 않으니까.

"시, 실례했습니다! 다들 철수!"

경감과 그 부하 경찰들이 현장에서 발 빠르게 벗어났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여전히 저택 내부에 벌어진 사건을 눈독 들이는 하이에나 떼 같은 기자들을 대문에서 막아서는 일이었다.

보는 눈이 사라지자 테리나를 따라온 남녀로 이루어진 두 부관 중 앳돼 보이는 여기사가 어깨에 힘을 풀었다.

"어휴. 분위기 잡느라 혼났네요."

"어허. 엔야. 보는 눈이 없더라도 나이트크롤러 기사단의 명성에 걸맞게 행동해라."

옆에서 질책하는 선배 로이드의 잔소리에 여기사, 엔야가 눈을 흘겼다.

"아니, 선배. 아무리 그래도 굳이 여기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엔야 너는...."

"그만해라 로이드. 남들 앞에서만 그런 모습을 안 보이면 된다."

"거 봐요. 단장님도 저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이 조그마한 게 진짜."

부관 로이드는 결국 고개를 저으며 백기를 들었다.

나이트크롤러 기사단은 제국의 중심을 지키는 기사단답게 엘리트들만 모이는 곳이었지만, 은근 선후배 사이에서 말을 편하게 하는 곳이기도 했다.

전부 기사단장인 테리나 본인이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규율 자체가 느슨한 건 아니다.

해야 할 일은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처리하는 건 나이트크롤러 기사단의 유구한 전통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이트크롤러 기사단의 기강이 무너지지 않은 건, 현 단장인 테리나 라이언하울의 장악력과 카리스마가 그만큼 굉장하다는 증거다.

"잊지 마라.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여기에 찾아왔는지."

"네."

"네."

이번 사건은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 보안국까지 나서야 하는 중대 사항으로 평가됐다.

특히 크립티드와 흑마법에 대한 연관이 있다는 부분에서, 기사단장인 테리나가 직접 나설 정도였으니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아직까진 떠도는 소문에 불과하지만, 죽은 벨보트는 이전부터 수상한 움직임을 보여 우리 보안국에서 예의주시해야 할 리스트에 명단을 올린 남자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괴물에게 살해당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

테리나의 말에 로이드와 엔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곧바로 릭슨의 방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침입자가 들어온 거로 보이는 부서진 유리창과 타 죽은 괴물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검은 자국들.

그리고 주변으로 흩뿌려진 벨보트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까지.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괴물이 나타났고 릭슨이 살해당했다고 했다.

그들의 진술이 전부 동일하며 일관된 걸 생각하면,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렇게 10분이 넘도록 혹시 모를 단서를 찾아 움직였지만, 딱히 이렇다 할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뒤져 볼 건 다 뒤졌다고 생각하며 로이드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팔짱을 끼고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테리나가 갑자기 한쪽 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것은 그때였다.

"단장님?"

"여기로군."

테리나가 응시한 건 벽에 잔뜩 걸려 있는 그림들이었다.

벨보트는 과연 레더벨크에 손꼽히는 대부호답게 자신의 넓은 방 안에 온갖 화려한 미술품으로 장식을 해 놨다.

벽에 가까이 다가간 테리나는 그림의 액자 테두리를 이것저것 만져 보더니, 이윽고 구석에 있는 벽화를 들어 옆으로 치웠다.

"단장님? 그 그림은 대체 왜?"

"뒤에 공간이 있다."

그게 정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새하얀 장갑을 낀 테리나의 손끝이 벽의 중심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드르륵 소리와 함께 벽이 옆으로 밀려나듯 열렸다.

가로세로 1m밖에 되지 않는 비밀스러운 공간.

누군가 들어가기에는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이건 대체 뭘까요?"

엔야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빈 공간을 응시하며 물었다.

팔짱을 낀 테리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기와 위치를 보아하니, 아마 비밀 금고를 숨긴 장소였을 거다."

"비밀 금고요?"

"벨보트 릭슨은 대부호이자 악덕 기업가로 악명이 높았으니까. 제국의 시선을 피해서 탈세한 자금이나 검은돈들도 있었겠지."

"이 금고가 그걸 담아 두는 곳이고요?"

"하지만 금고는 없다."

무언가 깨달은 로이드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군가 가져간 거로군요."

"그래."

"그렇다면 누가 그걸 가져갔을까요? 저택의 사용인들? 일단 가장 의심스러운 집사부터 심문을 해 볼까요?"

벌써부터 의욕이 넘치는 엔야의 말에 테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의미 없을 거다. 집사는 이 일과 관련이 없어."

"네?"

"벨보트 같은 인간이 자신의 비자금을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놨을 리가 없다. 아마 본인만 알도록 철저하게 숨겼을 거다."

"하지만 여기는 비어 있잖아요."

"알려 주지 않았다고 모두가 모르는 건 아니지."

당장에 테리나 또한 이 비밀스러운 공간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기업가, 대부호, 상인들은 하는 생각들이 다 비슷하거든. 은행에 계좌를 만드는 것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아. 언제나 당장에 쓸 수 있는 현물이나 금화를 자신의 손에 닿는 곳에 놔두고 싶어 하지.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

"그러면 누가 가져간 걸까요?"

"그걸 이제 알아봐야지. 단순한 추측일 뿐이지만, 금고를 훔쳐 간 사람은 릭슨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 거다."

"하지만 벨보트 릭슨은 늑대인간에게 잡아먹혔다고 했잖아요."

"그게 늑대인간인지도 의심이 드는군. 아직도 남아 있는 흔적을 봐라. 이 넓은 방의 절반 가까이 되는 바닥이 불에 탔어. 마법으로 태운 거라 화재로 번지지는 않았다. 정밀한 범위의 화염으로만 태웠다는 소린데, 그런데도 저 정도 크기다."

"그렇다는 건...."

"크립티드, 늑대인간은 아무리 커도 그 체고가 3m에 불과하다. 그것도 매우 크다지만, 그런 녀석을 태워 죽여도 저 정도로 커다란 흔적은 남지 않아."

그리고 실제로 늑대인간을 목격한 사람들은 처음에 녀석을 '괴물'이라고 착각했다고 한다.

어둡고 공포심에 질려서 사람들이 무언가 착각을 일으켰을지도 모르지만.

흔적을 보면 그게 아니었다.

"결과만 말하면 벨보트 릭슨의 죽음에 누군가가 개입해 있다는 거다. 부자연스러운 죽음. 괴물의 등장. 벨보트의 안 좋은 소문까지. 확인할 게 많이 남아 있겠어."

무엇보다 테리나의 마음에 걸리는 건, 안에 들어 있어야 할 금고를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가져간 정체불명 침입자의 실력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흔적을 찾으려 해 봤지만, 상대는 이런 일에 있어서 프로라는 듯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금고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럴 리가. 이곳에 분명 금고는 있었어. 그것도 어젯밤까지는.'

바닥에 아직 먼지가 쌓여 있지 않은 것이 그 증거다.

아무리 밀폐된 공간이라 하더라도 공기와 먼지는 통하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대체 누가 가져간 걸까.

흐릿한 신기루를 손으로 잡으려는 이 느낌, 어딘가 낯설지 않다.

'뭔가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익숙한데.'

테리나 라이언하울은 불현듯 과거의 기억 하나를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

대륙을 뜨겁게 만들었던 한 도둑이 있었다.

밤의 어둠을 두른 것처럼 흐릿하며 움직임이 워낙 신출귀몰해 그의 진짜 얼굴을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미스터리한 자였다.

그 어떠한 삼엄한 경비도 손쉽게 뚫고 들어가 귀중품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털어 버리는, 많은 부자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또 분노하게 만든 장본인.

괴도 <아르센 뤼팽>.

'설마 그 괴도가.... 아니, 아니야. 활동을 멈춘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지금 와서 다시 움직였다고?'

하지만 그 방식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본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지인, 혹은 공범이나 제자일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었으니까.

"로이드."

"네, 단장님."

"이밖에 레더벨크에서 벌어진 사건 중 특이한 건 뭐 없었나?"

"어, 음. 하나 있었습니다."

"뭐지?"

"버려진 공장 지대의 공장 중 하나가 화재로 전소됐다고 합니다. 그것도 벨보트가 사망한 당일에요."

"거기로군."

버려진 공장에 불이 날 일이 뭐가 있을까.

심지어 위치도 때마침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외진 곳이다.

"가지."

* * *

세오른과 레더벨크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늑대인간의 사태는 악덕 대부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참고로 나는 지금 내 숙소의 방에서 앓아눕고 있었다.

'끄응.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준비하고 갈걸. 오늘 수업이 없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쑤시는 몸보다도 붕 뜨는 머리와 은근하게 다가오는 편두통이 제일 골치 아프다.

침대에 누운 나는 알약 3개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으적으적.

남들이 보면 두통약이나 진통제처럼 여기겠지만, 이건 말 그대로 마력을 보충해 주는 씹어 먹는 마나 포션이다.

보통 마력을 회복하는 거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동으로 회복을 하거나, 혹은 물약으로 마시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약제학이 발달한 현재.

마력 회복약은 가루로 빻아서 물에 타서 마시거나, 혹은 나처럼 전분을 섞어 알약으로 만들어 먹는 것도 가능해졌다.

물약으로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것보다 가루나 알약이 보관과 휴대성에 더 용이하니까.

즉 마력을 회복시켜 주는 알약 자체는 별로 신기할 게 없는 세상이다.

이제는 같은 약이어도 얼마나 효과가 더 좋으냐의 차이일 뿐.

그러다 보니 약제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들인 재료에 비해 얼마나 좋은 효능을 발휘하는지에 대한 효율이다.

효과

위험도

그리고 효율성.

이 3가지를 종합해서 약의 등급을 가장 좋은 1급부터 가장 낮은 10급으로 매긴다.

현재 내가 복용하고 있는 알약은 내가 직접 만들어 낸, 내 오리지널 회복약이다.

지금 내 '체질' 때문에 위험도를 조금 높인 대가로 효과 또한 극대화시킨 물건.

내 특제이다 보니 임상을 맡긴 것도 아니라 등급표가 붙지 않은 거지만.

아마 이 정도면 상당히 높은 등급을 받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나는 그걸 지금 밥 대신 씹어 먹고 있고.

'힘을 너무 써서 문제였어. 항상 속전속결로 승부를 냈는데, 하필이면 자신의 육체를 그런 식으로 바꿔 버린 흑마법사일 줄 누가 알았을까.'

벌레 형제.

그중 형인 베론 때문에 나는 이 세계의 마법이 아닌, 내가 사용하는 '진짜 마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술식도 이 세계의 지식도 아닌 내가 원래 살던 세계의 오컬트와 신화적 지식이 가미된 마법을.

문제가 있다면 이게 후유증이 장난 아니라는 거다.

내가 주기적으로 마력을 보충해 주는 약을 먹는 것도, 이 마법을 배웠기에 겪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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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나를 계속 괴롭히던 소리가 서서히 옅어지더니 이윽고 사라진다.

이 목소리는 마력을 이용해야만 억누를 수 있는 거라, 나는 평소에 숨만 쉬어도 마력을 소모하는 체질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주기적으로 부족한 마력을 보충해 줘야 한다.

'좀 낫네.'

두통이 가시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번 늑대인간 사태는 일단 내가 나서면서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됐다.

흔적도 없이 전부 태워 버렸으니 해당 늑대인간에게서 실험체의 증거물을 찾을 수는 없을 터.

문제가 있다면, 그때 현장에 있던 목격자겠지.

'에이단.'

늑대인간을 죽이려는 나를 막아 세웠던 1학년생.

그렇게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갈색 머리카락에, 호감이 가는 인상.

하지만 녀석의 가장 대단한 점은 성격에 있겠지.

친구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날린다거나, 자신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자처해서 나서는 그 행동은 세오른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래.

굳이 표현하면, 꼭 어디 소년 만화풍 게임이나 소설에서 나올 법한 주인공 같은 아이였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고, 내 기억 속의 에이단은 누구보다도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내 수업에 집중하던 모범생이었다.

남들이 어딘가 쫓기듯 마법을 배우는 것과 다르게 순수하게 마법이 좋아서 세오른에 입학한, 즐기는 노력파.

그런 녀석이 늑대인간의 비밀을 목격해 버리고 말았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아마 [1막. 세오른의 늑대인간]이라는 타이틀이 막 떠오르지 않을까.

'거기서 무리하게 늑대인간을 죽인 내가 의심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나마 다행이라면 같이 있던 레오와 테이시 프리아드는 눈치를 못 챘다는 거지만.

에이단이 말해 준다면 또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대체 어떻게 하면 1학년이 이런 사건에 휘말리고, 또 진실을 향해 다가간단 말인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상황이 꼬여서 이렇게 되다니.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앞머리를 뒤로 쓸어 올렸다.

이렇게 되면.

떠오르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죽여야 하나.'

◈ 36화 속성 원소 수업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