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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화 소스 코드(Source Code) (2)

내 수업을 잘 따라오는 학생들 몇 명을 선별해서 소스코드를 가르쳐 주겠다.

그 말을 건네며 당근을 조금 흔들어 줬더니 학생들은 이후 별말 없이 내 수업에 귀를 기울였다.

댕. 댕. 댕.

마력 방출에 이론과 간단한 방식에 대한 설명을 끝내자 수업을 마치는 시계탑의 종소리가 울렸다.

나는 어떤 태클도 받지 않고 무사히 수업을 마쳤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교재에 적힌 내용을 적당히 풀어서 실상에서 쓰이는 팁과 섞어서 대충 설명을 이어 나가니, 학생들도 딱히 수상한 건 느끼지 못한 기색.

첫 단추는 무난하게 끼웠으니 이 분위기를 그대로 다음 수업으로 이어 나가면 되겠지.

내가 강의하는 시간은 일주일에 총 4시간.

2시간씩 나눠서 주에 총 2번의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상당히 여유로운 편이었다.

겉옷을 챙겨 입고 강의실을 나가려 하니 몇몇 학생들이 내게 다가올 듯 말 듯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순간 뭔가 했지만, 나는 뒤늦게 내가 한 가지 빼먹은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참고로 첫날부터 과제를 내거나 하지는 않겠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복습하도록."

"아싸!"

"휴. 다행이다."

내 말에 학생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기뻐했다.

천재들이 모이는 아카데미니 뭐니 해도 결국에는 학생들인 걸까. 숙제 하나로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애들이구나 싶었다.

뭐, 아무리 나라도 첫날부터 대놓고 과제를 주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 말고도 다른 선생님들이 과제를 낼 테니까.

원래 첫날부터 과제를 시키는 선생은 해당 학기에 두고두고 욕을 먹기 마련이다.

수업에 관련해서는 내가 베푸는 모든 것들은 전부 일종의 계산이 깔려 있다고 보면 된다.

다른 교사들에 대한 뒷담화와 불만이 많아질수록, 상대적으로 나에 대한 언급을 줄어들 테니까.

나는 교단 위에 놓인 학생 명단을 챙긴 뒤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내가 나갈 때도 학생들의 시선이 날아왔지만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다음 수업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야 할지, 내 수업을 듣는 강의생 80명에 대한 기본적인 인적 사항이라든지.

또 비밀 결사에 대한 아직 풀리지 않은 정보들 같은 걸 생각하면 지금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 * *

'와. 정말이지.'

세오른 아카데미의 올해 신입생 에이단은 루드거 첼리시의 수업을 듣고 난 뒤 자신이 정말 세오른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어렴풋이 이런 느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굉장했어.'

시골에서 올라온 에이단은 평민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마법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다고 자부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쌓아 온 노력과 어느 정도 운이 따라 준 덕분에 세오른의 입학시험에 붙게 됐고, 그렇게 1학년으로서 부푼 미래를 안고서 첫 수업을 듣게 됐다.

발현계 전반적인 마법에 대해 가르치는 루드거 첼리시의 강의.

솔직히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처음 강의실에 들어왔을 때 다른 학생들의 목소리를 몰래 주워들어 보니, 자신이 선택한 이 수업이 생각 이상으로 말이 많았던 탓이다.

-본래 발현계 수업은 총 2개가 있는데, 이건 그중에서 몰락 귀족이 가르치는 거다.

-원래라면 이곳에 못 들어올 신임 교사였는데, 작년에 퇴직한 사람들 때문에 TO가 5개나 나서 운이 좋아 들어온 거다.

-<아카식 레코드>에서 나도는 소문은 전부 다 가짜에 부풀려진 거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당연히 입이 싸고, 타인을 얕잡아 보는 귀족 학생들이었다.

다만, 시골에서 상경한 에이단은 그들이 선배인 것만 알지 대단한 귀족인 건 몰라서 그들의 말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루드거 첼리시라는 선생님이 그렇게 별로인가?'

그냥 별생각 없이 선택한 수업이라 괜히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에이단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루드거가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깨닫고 말았다.

강단 위에 서 있는데도 분위기 자체만으로 80명의 학생을 압도하는 그 남자는, 마치 치열한 전쟁을 앞둔 군인 같았다.

그리고 이후에 벌어진 일은 더더욱 에이단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여선배 하나와 마법 술식 단축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대화를 나누더니, 하나의 술식을 선보인 것.

루드거 첼리시가 소스코드라 부르는 마법을 마주한 순간, 에이단은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눈앞에 불꽃이 터지는 것 같은 충격.

그것은 여태껏 마주하지 못한 신비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을 때 나타난다는 지식의 빛이요,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한 안목이 확장되는 개벽의 순간이었다.

지나친 비약 같지만 적어도 에이단은 스스로 그렇게 느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코흘리개였던 시절, 자신에게 마법을 보여 주었던 떠돌이 마법사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보여 준 마법은 1위계밖에 되지 않았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술식도 완벽하지 못해 조잡했지만.

그때의 에이단은 너무나도 그 모습이 너무나도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떠돌이 마법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마법에 대한 공부를 이어 나가고, 처음 마법을 마주했을 때의 황홀함은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법 자체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마법에 대한 열정, 그리고 의외로 마법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던 덕에 에이단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성장했고. 그렇게 마법 아카데미인 세오른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할 수 있었다.

이곳이라면 자신의 마법에 대한 갈망을 채워 주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첫 수업을 들었는데.

정말 대단한 걸 목격하고 말았다.

'루드거 첼리시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구나!'

첫인상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진짜였다.

그저 허울뿐인 마법만 보여 주는 것이 아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것을 보여 주는 진짜 마법.

에이단은 이 수업을 듣게 된 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흥."

그때였다.

옆자리에서 그를 향해 노골적인 멸시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고개를 돌리자 어딘가 같은 1학년 남학생 하나가 팔짱을 낀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은 잘생겼지만, 이마가 보이게 가르마를 탄 금발 때문인지 상당히 느끼하게 생겼다.

"이래서 평민들은 안 된다니까. 고작 저런 걸 보고 신기해하고 말이야."

"응? 나한테 한 소리야?"

"그럼 여기에 너 말고 평민이 누가 있지?"

에이단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다. 이미 대다수가 강의실을 빠져나간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아! 나한테 한 소리였구나!"

오히려 순수하기까지 한 반응에 시비를 건 귀족 남학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지금 나를 우롱하는 것이냐?"

"응? 우롱이라니. 에이 설마."

에이단은 멋쩍게 웃으며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눈앞의 상대는 자신이 모욕당했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힌 상황.

"네가 감히 펠리오 남작의 첫째인 나, 제반을 무시해?!"

에이단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아무래도 좋게 넘어가기는 여러모로 그른 것 같았다.

'어쩌지?'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 에이단에게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펠리오 남작가라면 제국의 가장 변방에 있는 거기 아닌가?"

"뭐, 뭐야?! 넌 누구야!"

에이단에게 도움을 주며 나선 것은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키가 작은 하늘색 머리 소년이었다.

제반 펠리오는 그 소년을 보더니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하. 요새 세오른은 이런 꼬맹이도 입학하는 건가?"

"덜떨어진 남작 가문의 자식이 합격한 것보다는 낫겠지."

"뭐야?! 감히 펠리오 가문을 모욕한 거냐?!"

제반이 이를 악물고 마력을 끌어올리려고 하자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년, 레오는 오히려 미소를 잃지 않았다.

"감히 귀족을 모욕한 그 언행에 대가를...."

"해 봐."

"뭐, 뭐?"

"해 보라고. 과연 여기서 네가 마법을 발현시켜서 우릴 공격하면 어떻게 될지."

당당하게 나서는 레오의 말에 제반이 당황했다.

보통 평민이라면 적당히 겁박하면 알아서 고개를 숙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가 아직도 널 부등부등 해 주는 너희 집안인 줄 알아? 정신 차려.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소동을 부리면 귀족이라 해도 얄짤없어. 들어오기 전에 그런 사실도 공지 안 받았나?"

"너, 너...!"

"할 말 없으니 노려보는 것 말고는 할 줄 모르면 알아서 닥치고 있어. 그리고 목소리도 상황 봐서 내고. 주위 안 보여?"

레오의 말에 제반은 아직 강의실에 학생들이 여럿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중에서는 감히 자신이 올려다보지 못할 고위 귀족의 자녀들도 있었다.

"이, 이익! 두고 보자!"

제반은 에이단을 죽일 듯 쏘아보더니 그 말을 남기고 강의실을 떠나 버렸다.

에이단은 이걸 어쩌면 좋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당장에는 자신을 도와준 저 친구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나는 에이단이야."

"나는 레오. 아, 그리고 굳이 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냥 꼴에 귀족이라고 까부는 꼴이 보기 역겨워서 나섰을 뿐이니까."

"너는 참 좋은 사람이구나?"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레오는 에이단을 이상한 사람처럼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됐다. 나는 이만 가 보련다."

"아! 나도 같이 가."

"내가 어디로 가는 줄 알고?"

"다음 수업 들으러 가는 거 아니야? 손에 들고 있는 그거. 구현 계열의 연금 수업이지? 나도 바로 다음 그거거든."

"...쳇. 마음대로 해."

레오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에이단을 쫓아내거나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에이단은 그런 레오의 행동에서 그저 말투가 조금 이상할 뿐,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직감했다.

다음 수업을 위해 교재를 챙기던 에이단을 보던 레오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너무 티를 내지 않고 다니는 게 좋을 거야."

"응? 무슨 티?"

"촌놈티. 평민티. 마법 제대로 못 배운 티. 뭐든지 간에. 너는 그게 너무 많이 보여."

"어, 그런가? 미안. 나 그런 건 잘 몰라서."

"잊지 마. 여기는 세오른 아카데미야. 온갖 대단한 놈들이 가득한 곳이라고."

"대단한 사람? 아. 첼리시 선생님을 보면 알 거 같아."

얼이 빠진 반응에 레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모자란 친구에게는 설명할 것들이 아주 많아 보였다.

"잘 들어. 일단 수업을 듣게 된 이상 너도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 둘 필요가 있어. 그리고 특정 학생들에 대한 것도 조심해야 하고."

"특정 학생들?"

"세오른 내에서도 유난히 압도적인 입지를 지닌 학생들이 있지. 당장 우리 1학년들은 이제 막 들어와서 뭘 모르겠지만, 2학년부터는 그러지 않거든."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플로라 루모스였다.

"2학년의 플로라 루모스. 설마 같은 수업을 듣게 됐을 줄은 몰랐는데, 주의하는 게 좋아."

"왜?"

"성격이 나쁘다는 소문이 파다해. 당장에 작년에 발현계 수업을 맡던 교사가 돌연히 그만둔 것은 그녀의 영향이 컸다고 하니까. 솔직히 이번에도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

레오도 루드거 첼리시의 수업을 떠올렸다. 그가 보여 준 소스코드라는 획기적인 마법은 분명 대단한 것이었다.

그 플로라 루모스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을 정도니까.

다만 플로라 루모스가 고작 이런 일로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노의 불똥이 다른 사람에게 튈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그녀는 피하는 게 좋아."

"다른 사람이 더 있어?"

"있기야 있지. 엑실리온 제국의 존귀한 혈통이 한 분."

"아. 그 소문은 나도 들었어. 2학년에 황녀님이 계시다고 했었지?"

"3황녀 에렌디르 폰 엑실리온. 워낙 고귀하신 분이고 황제께서 애지중지하시니 이곳에 들어올 수 있던 거겠지. 당연히 평민인 우리가 엮여서 좋을 건 없고."

"아. 그분."

에이단은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지녔던 여성을 떠올렸다.

금발이 그렇게 희귀한 건 아니지만, 고귀함마저 느껴지는 금발이라면 오직 한 명뿐이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로이덴 울부르크."

"울부르크라면 그 울부르크? 3대 공작 가문 중 하나...."

"제국에 울부르크가 그거 말고 뭐가 더 있겠냐. 공작 가문 울부르크의 장자 프로이덴. 그는 2학년에서 가장 거대한 파벌을 이끄는 남자야. 정확히는 귀족들만 이루어진 상위 계층 파벌이지만."

"상위 계층... 파벌."

"우리 같은 평민은 길가의 벌레처럼 보는 인간들이라 엮이지 않는 게 좋아. 그나마 다행이라면 프로이덴은 이 수업을 듣지 않는다는 거려나. 참고로 조금 전 너에게 시비를 걸었던 그 머저리도, 그쪽 파벌에 속해 있는 것 같으니까."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밖에 다른 사람 더 없어?"

"...찍혔다고 하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궁금해하다니. 배짱이 두둑하다고 해야 할지, 둔하다고 해야 할지."

레오는 에이단이라는 녀석이 어떤 사람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쁘거나 속이 검은 녀석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몇 명 더 있기는 해."

"오 그래? 그게 누군데?"

"그건 이따가 가면서 설명해 줄게."

"좋아! 아. 이따가 밥도 같이 먹을래?"

"뭐? 내가 왜?"

에이단과 레오는 투덕거리면서 강의실을 떠났다.

강의실에 남아 있는 학생 중 한 사람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 * *

'흠. 여기가 개인 교무실인가.'

교무실. 혹은 연구실이라고 불리는 문 앞에 선 나는 조금 묘한 기분을 느꼈다.

역시 세오른이라 그런지 신임 교사에게도 상당한 넓이의 개인 공간이 주어진 것이다.

입구의 명패에는 루드거 첼리시라는 이름도 적혀 있었다.

'일단 들어가 볼까.'

안쪽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니 확인해 보기로 했다.

나는 문을 열고 교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쪽에 먼저 와 있는 손님을 보고 속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머. 루드거 선생님. 어서 와요."

이곳에서 내가 경계해야 하는 인물 중 손꼽히는 사람.

세오른 아카데미의 총장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 16화 의심 (1)

'저 사람이 왜 갑자기 여기에?'

대체 총장님이 왜 이곳에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껏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내 개인 교무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저쪽이 무슨 목적으로 나를 찾아온 건지 모르는 이상, 뭐가 어찌 됐든 속마음을 드러내는 경우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철컥.

문이 닫히자 방 안에 숨 막히는 고요함이 찾아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손님맞이용 소파에 앉아 있는 총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나를 보면서 싱글벙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총장이었다.

"어때요? 내부 디자인이 참 예쁘죠?"

운을 띄우며 하는 말에 알맹이는 없다.

그러나 방심하지 않는다. 저런 행동 자체가 나를 떠보려는 걸지도 모르니까.

"예. 그렇군요."

"세오른 아카데미는 모든 교사에게 각자 개인의 공간을 제공하죠. 루드거 선생님은 이곳에서 남의 눈치를 안 보고 편하게 하고 싶은 걸 하셔도 되고요."

"그거 마음에 드는군요."

총장의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 또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잘 가공된 아름다운 호박석 같은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총장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 뭔가 몸이 근질근질하다.

나는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총장님께선 여기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제가 오면 안 되는 곳에 왔나요?"

"그저 총장님 정도 되시는 바쁘신 분께서 이런 신임 교사의 개인 공간까지 찾아오는 것이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딱히 제가 못 올 곳을 온 것은 아니네요?"

"하지만 부담스럽죠."

내가 직설적으로 말하자 총장이 입을 다물었다.

사근사근한 미소는 여전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진의를 알기 힘든 묘한 감정이 물에 떨어뜨린 잉크 방울처럼 번져 있었다.

총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딱히 이유는 없어요."

"그렇습니까."

"루드거 씨가 아무리 신임이라 하더라도 세오른 아카데미에 부임한 소중한 교사니까요. 당연히 총장이 된 입장으로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답니다."

"그렇군요."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자 그녀는 뭐가 불만인지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 더 놀라거나 해도 되는데."

"죄송하지만, 이미 충분히 놀라고 있습니다."

거짓말 아니고 정말이다.

내 개인 공간이라 해서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는데 총장이 있는 걸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가.

한밤중에 길 가다 귀신을 마주쳐도 이것보다는 안 놀랄 자신이 있었다.

다만, 내가 먹은 짬이 있어서 겉으로 티를 안 냈을 뿐.

사실 지금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어서, 혹시라도 총장에게 들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다른 선생님들은 다 놀랐거든요."

"저 말고도 들르신 겁니까?"

"루드거 선생님이 마지막이에요."

왜 나를 마지막으로 한 걸까. 그리고 총장은 신임 교사들 면담이라도 할 생각인가?

나는 문득 세오른에 스며든 비밀 결사의 존재를 떠올렸다.

'어쩌면.'

총장도 무언가 눈치를 챈 걸까.

아무리 비밀 결사라 하더라도 꼬리를 완벽하게 감출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총장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이 세오른에 들어왔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겠지.'

나도 몰랐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기겠지만, 이곳에 비밀 결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총장의 태도도 다르게 보인다.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건가?

'가능성은 있다.'

나로서는 좀 억울한데 솔직히 반론의 여지가 없다.

나는 비밀 결사 소속이 아니지만 비밀 결사 간부니까.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지금 내 처지가 실제로 이렇다.

생각해 보면 내 진짜 신분도 그렇게 떳떳한 건 아니라서 들키지 않기 위해 발악해야 하는 건 똑같다.

"그래서. 총장님은 제게 뭘 물어보시려고 온 겁니까?"

"그냥요? 겸사겸사 첫 수업은 어땠는지 확인도 하려고요. 방금 막 수업 끝내고 오시던 참이었죠?"

"예."

"혹시나 학생들이 막 힘들게 하거나 그런 경우는 없었나요?"

"딱히 없었습니다."

오히려 학생들이 내게 질문을 이렇게나 안 해도 괜찮나 싶을 정도였다.

뭐, 내가 의도적으로 다가오지 말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긴 것도 있다지만, 그냥 많이 귀찮게만 하지 말라는 뜻이었지 설마 아무도 안 할 줄은 몰랐지.

아. 그래도 루모스 가문의 딸이 질문을 하기는 했구나.

"흐음. 그거 신기하네요. 이번에 루드거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 명단을 봤는데, 꽤나 유명한 학생들이 많았거든요."

"그렇습니까?"

"명단 안 보셨어요?"

"이제 보려고 가져왔습니다."

나는 손에 쥔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뭐, 루드거 선생님 본인이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황녀님도 계시니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

"예. 그러죠."

황녀?

설마 내 수업에 황녀까지 되는 사람이 들으러 온 건가.

황송이고 자시고 이건 그냥 당황스럽기만 하군.

문득 내게 당돌하게 질문을 날렸던 금발의 학생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라 했더니, 그쪽의 혈통이었나.

"그리고 이번 신입생 1학년들도 많이 있다고 들었어요. 본래 2학년만 가르치실 줄 알았는데, 1학년까지 공동 수업으로 진행하셨을 줄이야."

"딱히 1학년과 2학년의 차등을 나눌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탓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나름의 변화를 준 루드거 선생님의 방법에 찬성하는 쪽이죠. 특히 이번 1학년들 중에서 꽤 대단한 아이들이 몇몇 보이거든요."

"대단한 아이들 말입니까?"

"네. [특이] 계열 마법을 사용하는 아이도 있고, 대단한 집안 출신도 있고, 마탑에서 나름 열심히 키워 온 아이도 있고. 보통 학년이 차이 나면 나름의 격차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신입생에 한해서는 그럴 일이 적을 거 같네요."

학생들을 생각하며 방긋 웃는 그녀의 모습은 아카데미의 총장의 자리에 어울렸지만.

나는 그 미소를 마주할 때마다 피부가 오싹거린다.

일단 이쪽은 양심상 당당하게 뭘 말하고 다닐 신분이 아닌지라, 나는 총장의 말을 들으며 짧게 맞장구쳐 주기만 했다.

"뭐, 어쨌든 저희 세오른은 루드거 첼리시 선생님에게 거는 기대가 커요."

"과분한 평가입니다."

"첫 수업에서도 별다른 문제가 없고 학생들과의 첫인상도 무난하신 거 같으니까 다행이네요. 걱정할 필요를 덜었어요."

총장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예의상 물었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죠."

"네?"

내가 이런 말을 한 것이 의외였던 걸까.

그녀는 살짝 어벙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초승달처럼 눈매를 휘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서요. 여기도 겨우 시간을 내서 온 거랍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루드거 씨도 지금 막 오셨으면서, 이 교무실에 차가 어디에 있고 잔은 어디에 있는지는 아시나요?"

"어딘가 선반 안쪽에 있겠죠."

"땡. 사실 저희는 커피밖에 구비를 안 해 놓았답니다. 차를 마시고 싶으시면 따로 탕비실에 신청을 하셔야 해요."

"그랬군요. 몰랐습니다."

"앞으로 알아가시면 돼죠.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총장은 그 말을 남기고 나가 버렸다.

그야말로 잔잔한 폭풍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 * *

"어땠습니까?"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걷는 총장의 뒤에 노신사 윌포드가 따라붙으며 물었다.

"루드거 씨에 대한 의심은 풀리셨습니까?"

"흠. 글쎄요."

총장은 루드거 첼리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가 자신에게 보인 그 절제된 태도를 말이다.

"좀 긴가민가하네요."

"그렇습니까?"

루드거 첼리시는 독특한 남자였다. 총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누구라도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면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 홀리고 만다.

정확히는 그녀의 눈 자체가 머금은 타고난 마력의 잔향에 홀리는 것에 가깝다.

매혹의 마안.

총장이 지니고 있는 힘이자, 그녀를 이 자리까지 올라가게 만든 일등 공신.

물론 상대에게 매혹의 마안을 사용하는 건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이건 일종의 타고난 체질 같은 거라서, 누구나 눈만 마주치면 그녀가 의도하지 않아도 알아서 걸리고 만다.

그나마 지금은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해졌지만, 예전에는 일상이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총장이 된 지금, 그녀는 자신에게 마안이 없으면 이 자리에 오지도 못했을 거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혹시라도 세오른에 무언가 꿍꿍이를 가지고 들어오는 자들을 색출하는 데는 이거만 한 것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개인 면담을 빌미로 속마음을 떠보려고 했는데.

'내 마안은 상대방의 마력이 클수록 더욱 감화가 잘 되는 편인데.'

그녀의 마안은 4위계 마법사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상대가 정신방어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제다.

특히 마안을 마주한 상대는 지닌 마력이 클수록 더 쉽게 당한다. 마안의 힘은 결국 상대방이 지닌 마력의 총량에 비례하는 것이다.

하지만 루드거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4위계일 텐데 다른 교사들과 반응이 전혀 다르다.

처음 마안을 마주했을 때는 그가 막 총장실에 들어왔을 때였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그 남자는 자신의 마안을 2번이나 마주하고도 어떠한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보지 못한 건가? 아니. 마안을 마주했다는 인식은 있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다는 건.

강철과 같은 의지만으로 그녀가 지닌 마안의 힘에 저항했다는 소리다.

총장은 눈을 빛냈다.

'정말이지.'

재미있는 남자다.

총장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는 법.

"수상한 움직임이 잡혀서 일단 가장 경계심 드는 사람들 위주로 살펴보고는 있는데, 이렇다 할 성과는 없네요."

최근 세오른에 불미스러운 무리가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사소한 것도 그냥 넘길 수가 없게 됐다.

그중 루드거 첼리시는 이곳에 오던 도중에 열차 테러 사건에 휘말렸다.

그게 본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이다.

열차 사건은 눈가림이고, 그 사이에 루드거 첼리시라는 사람이 바꿔치기당한 거라면?

그래서 총장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복이자, 이 세오른의 전력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인 윌포드를 보냈다.

마중을 빌미로 말이다.

"윌포드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흠. 저도 바로 신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수상한 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가요."

윌포드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둘 중 하나이리라.

루드거 첼리시가 정말로 무고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이쪽을 완벽하게 속여 넘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거나.

'당장은 부디 후자가 아니길 바랄 수밖에.'

지금은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으니 루드거에 대한 고민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아. 그래도 한 가지 확신할 수는 있겠군요."

"그게 뭐죠?"

"저 루드거 첼리시라는 사람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걸요."

"평범하지 않다? 무얼 보고 그렇게 말씀하신 건가요?"

"그저 노인의 감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겠군요."

"뭐예요."

윌포드는 일단 루드거 첼리시에게 꽤나 호의적으로 보였다.

사람 보는 눈이 확실한 윌포드가 저렇게 말하면 믿어도 되겠지만.

그래도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에도 만약의 가능성은 최악의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니까.

마법사란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도 깊은 고찰을 해야 하는 존재.

무엇보다 그녀는 이곳, 세오른 아카데미의 총장이다.

한 치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자리에 오른 사람이기에 그녀는 모든 경우의 수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 * *

홀로 남겨진 나는 문밖 그녀의 기척이 멀어지는 걸 확인한 뒤에야 어깨에 힘을 빼며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지쳤다.

뇌가 마력을 요구했다.

'갑자기 총장이나 되는 사람이 찾아오다니.'

뭐 본인의 말로는 신임 교사들에게 으레 하는 개인 면담 같은 거라는데.

그걸 총장이나 되시는 분이 갑자기 찾아와서 하는데 누가 믿을까.

다 심문한다고 생각하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나는 곧바로 내 개인 책상 앞에 가서 앉았다.

고급스러운 원목으로 이루어진 책상은 그 자체만으로 상당히 비싸 보였다.

한쪽 벽에는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시계. 다른 한쪽 벽에는 세오른의 지도가 보드에 고정되어 펼쳐져 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창가 좌우로는 붉은 커튼이 펼쳐져 있고, 지금 앉아 있는 의자마저 매우 고급지다.

신임 교사에게 이 정도의 공간을 배정해 주는 세오른의 통에 한차례 감탄을, 그 내부에 온갖 고급진 것으로 채워진 것에 또 감탄을 하며.

나는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명단을 살폈다.

'진짜였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명단에 유난히 길고 멋진 이름을 지닌 학생이 있었다.

2학년 에렌디르 폰 엑실리온.

제국의 이름 엑실리온을 성에 달고 있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가 고귀한 혈통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처음 오리엔테이션 때 나한테 당돌하게 물어보던 그 아이잖아?'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라 했더니 황가였던 건가.

돌아 버리겠군. 하필 황녀님이 내 강의를 듣는다니.

나 말고도 다른 선생님들의 수업도 듣겠지만, 그렇다고 내 부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오른이 아무리 제국에서도 자율권을 보장받는 제삼지역 같은 곳이라 하지만, 황가의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니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면 이쪽도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 세오른에서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까.'

마법 시약 실험을 하거나, 혹은 실전 전투 모의전을 할 때나, 연금술을 하는 경우에 벌어지는 자그마한 사건 사고도 배제할 수는 없다.

최대한 학생들의 안전에 신경을 쓴다고 해도, 교사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학생들끼리 싸우는 일도 있으니까.

그런 상황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서 교사들에게도 학생들을 지키기 위한 의무가 부여되는 거다.

...생각해 보니 지금 이 세오른에는 비밀 결사도 숨어 있었구나.

'돌아 버리겠군.'

아니. 그래도 당장에 무슨 사건이 터지는 건 아니니 일단 차분히 생각하기로 하자.

나는 다른 학생들의 리스트도 꼼꼼히 살펴봤다.

1학년과 2학년들 중에서 상당히 눈에 띄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으니까.

'루모스 가문의 플로라도 그렇고, 다른 왕국에서 온 귀족까지?'

그러다 문득 내 시선이 한 학생에게 가서 멈췄다.

'에이단.'

딱히 대단한 집안에서 자라온 것도 아니고, 어디 저명한 마법사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닌 그저 그런 평민.

이곳에 들어왔으니 분명 재능은 있겠지만, 굳이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도 특이한 점은 찾아볼 수 없는 아이였다.

'어딘가 낯이 익은데.'

묘하게 내 신경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 17화 의심 (2)

'당장은 마땅히 떠오르는 기억이 없군.'

에이단에 대해서 고민을 해 봐도 당장에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나머지 학생들의 인적 사항을 전부 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1학년 정원 총 54명. 2학년은 26명.

대충 1학년과 2학년의 비율이 2:1 정도인가. 명찰의 색깔로 1학년의 숫자가 더 많다고 생각했지만, 생각 이상이다.

'1학년들 사이에서도 주의할 녀석들이 더러 있군. 마탑과 연금학파에서 밀어주는 신인에, 마탑에서 불세출의 신인이라고 광고하던 아이까지?'

세오른에서 평범한 성적을 지닌 학생도 바깥으로 나가면 천재라고 불린다.

그리고 천재들은 다 어딘가 엇나가 있다고 했던가.

그런 놈들이 우글거리며 모인 이곳이니만큼 확실히 일반적인 상식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모든 학생의 명부를 확인한 나는 서류를 책상 위에 놓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피곤하군. 여러모로 피곤해.'

조금 전 총장과의 만남과 대화를 곱씹어 봤다.

총장이 내게 와서 은근하게 떠보는 걸 생각하면, 일단 내가 그녀의 신뢰를 아직 완전히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가서 세오른의 신뢰도까지.

완전한 의심까지는 아니고, 아무래도 반반이겠지.

차후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를 향한 저들의 시선이 갈릴 가능성이 컸다.

'상관없어.'

이미 맡은 바 역할을 하기로 한 이상, 수상한 행동을 보일 생각은 없다.

총장은 현존하는 여덟 개의 위계 중에서 거의 최상위권이라 할 수 있는 6위계의 <렉서러>다.

듣자 하니 7위계를 넘보고 있다던데.

4위계 마법사는 100명이 달려들어도 이길 수 없다.

'총장은 그렇다 쳐도. 가장 큰 문제가 있다면 역시 비밀 결사 쪽인가.'

비밀 결사는 지금 학기 초라서 조용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준동할 기회가 생긴다면 바로 움직일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놈들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세오른 아카데미에 숨어들었냐는 거다.

일부 사용자들을 처리하면서까지 이쪽에 사람을 심어서 뭘 하려는 거지?

말 그대로 세오른의 전복을 바라는 건가? 아니면 세오른에 무언가 있기라도 한 건가?

'어쩌면 제국에 대한 일종의 반역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서류 사이에 끼어있는 신문지를 가져와 활짝 펼쳤다.

블랙레터 글자로 적힌 신문의 기사는 아직까지도 지난번에 있었던 마공학기관차 테러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마공학기관차 테러 사건은 결국 혁명군의 짓으로 밝혀져.]

열차 테러의 배후에 혁명군이 있다는 건 거의 확실시된 듯싶었다.

혁명군. 혹은 해방군.

제국주의의 몰락과 기존의 불공정한 신분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시민들의 저항, 이라는 슬로건을 건 혁명군들은....

'까놓고 말해 테러리스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본래 지구의 역사였다면 이때의 정치가 근대 입헌군주제에 의원내각제가 더해진 느낌이었겠지만, 마법이 존재하는 이 세계는 아직 왕과 귀족들의 권한이 매우 강한 편에 속했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도 근 50년 사이에 온갖 다양한 운동들이 벌어진 걸 보아 이쪽 세상도 내가 살던 지구에서의 흐름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추세였다.

고여서 정체된 마법과 그 반대로 급부상한 과학.

동시에 과학과 마법을 접목하며 탄생한 마법 공학까지.

이 극단적인 변화가 일어난 게 채 한 세기도 되지 않았다는 건 그저 놀랍기만 하다.

혁명군들이 일어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다만, 비밀 결사가 진짜 혁명군들과는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건데.'

까놓고 말해서 진짜 퍼스트 오더였던 루드거 첼리시의 죽음이 그걸 의미했다.

서로 같은 조직이었으면 대체 왜 열차 테러에 휘말려서 녀석이 죽었겠는가.

그때 그가 보였던 반응은 자신이 탄 열차가 습격당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것이었다.

이 테러 자체는 비밀 결사 측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일이라는 소리다.

'비밀 결사와 혁명군은 따로 구분하는 것이 옳겠지.'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루드거 첼리시라는 신분을 지녔던 퍼스트 오더는 전투에 적합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법에 대한 실력은 분명 있었어. 판단도 나쁘지 않았고. 아마 고도의 훈련을 받았을 테지.'

하지만 비밀 결사의 간부라고 부를 정도로 압도적이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특히 마음에 걸린 것은 나와 접선했던 비밀 결사 부하의 반응이었다.

'부하라는 녀석이 내 얼굴을 보고도 나를 그냥 퍼스트 오더라고 넘어갔다. 놈들이 열차에 탔던 루드거의 얼굴을 모르진 않을 텐데도 말이야.'

왜인가?

바로 '외모가 바뀌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거다.

'바뀌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거라면, 죽은 루드거 첼리시의 특성을 알 수 있지.'

즉, 해당 퍼스트 오더의 특징이 변장과 잠입에 특화됐다는 소리다.

그건 내게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적어도 겉모습으로 다른 조직원에게 의심을 살 일은 없으니까.

안심해도 좋겠지.

'일단은 내가 교사로서 활동하는 걸 가지고 비밀 결사에서 뭐라고 하지는 않을 거다. 아카데미의 의심을 지우기 위한 작업이라고 둘러대면 되니까.'

귀찮은 일들은 아래 녀석들을 시키면 되니, 사실상 퍼스트 오더의 자격을 지닌 나는 내 입지를 공고히 다지는 데만 신경 쓰면 된다.

아마 한동안은 별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본격적으로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역시 비밀 결사가 수면 위로 올라와 활동을 하게 될 때.

간부급 인물을 교사로 심은 것부터, 저들이 이 세오른을 어떤 방식으로든 전복시킬 생각이라는 건 확실했다.

'복잡하군.'

세오른이 쉽게 무너질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또 완전히 공략 불가능한 철옹성인 것도 아니다.

아무리 강대한 제국이라도 반드시 무너지기 마련이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다.

특히 요즘처럼 과도기적 형태가 극심한 시대일수록 그 가능성은 현실과 가까워진다.

만에 하나라 할지라도, 비밀 결사가 세오른을 전복시킨다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무시할 수는 없다.

'그 경우에는, 차라리 세오른을 벗어나 비밀 결사에 몸을 의탁하는 게 나으려나.'

아니. 그건 안 된다.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라도 해야겠다만, 그것도 오래 갈 수는 없을 터.

지금이야 루드거 첼리시라는 신분을 뒤집어쓰고 처음 부임한 교사라는 실정으로 행동하니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지금까지 함께 활동해 온 다른 퍼스트 오더들이 과연 루드거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 못 챌까.

'분명 들키겠지.'

배신자라는 것이 들킨다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비밀 결사가 세오른에게서 승리하는 것은 최악의 최악.

차라리 이 교사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일부러 놈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이 가장 생존 가능성이 크리라.

하지만 또 노골적으로 세오른의 편에 선다면 조직은 바로 나의 배신을 눈치챌 것이다.

'극한의 줄타기가 필요한 순간이로군.'

비밀 결사의 목적이 뭔지 모르는 이상, 당장에 뭘 하려는 계획을 세울 수도 없다.

나는 펜을 들어 빈 종이에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정리하는 글귀를 적었다.

-비밀 결사의 퍼스트 오더를 경계. 누구인지 정체를 빨리 알아차릴 필요 있음. 그 이후에는 최대한 접촉 자제.

-교사로서의 포지션은 이대로 유지. 수업에 소홀하지 않도록 매번 긴장감을 늦추지 말 것.

-아카데미 측에 의심을 사지 않도록 일단은 교사의 신분으로 활동하는 데 주력.

대충 적자면 이 3개 정도다.

혹시라도 누군가 이 글을 볼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한국어로 적었으니 이쪽 세상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를 거다.

'흐음. 당장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교사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인가.'

톡톡.

나는 손끝으로 원목 책상을 두드렸다.

뭐, 비밀 결사에서 내게 접촉하면서 왜 움직이지 않냐고 압박하면 의심을 지우기 위한 작업이라고 핑계를 댈 수는 있겠네.

나는 바로 편지를 쓸 새로운 종이를 꺼내며 펜을 들었다.

원래 다른 곳에서 만나기로 한 지인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거기까지 못 간다고 전해야 했다.

'해야 할 게 많군.'

사실 첫날에 미리 처리해야 했는데 워낙 신경 쓸 것이 많아서 까먹고 있었다.

뭐, 이쪽이 아쉬울 건 없으니 녀석도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혹시라도 이 편지를 누군가 뜯어볼 가능성을 생각해서 나는 직접적인 말 대신 최대한 돌려서 적었다.

루드거 첼리시가 지닌 편지처럼, 나 또한 암구호를 사용했다.

마지막에 레더벨크로 오라는 말을 끝으로, 나는 까먹고 적지 않은 문구 하나를 추가했다.

[오는 길에 내 짐도 챙겨 와라.]

* * *

보낸 편지의 답장은 바로 다음 날 왔다.

편지에 적힌 약속은 다음 주말에 레더벨크의 공업 단지에서 만나자는 것.

나로서는 조금 더 일찍 만나길 원했는데, 저쪽도 저쪽 나름대로 일이 바쁘다고 하니 이해해 주기로 했다.

화르륵.

편지를 확인한 나는 즉시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편지를 태워 버렸다.

곧바로 교무실에서 나온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숙소로 향했다.

"저기요...!"

그때 누군가 황급히 다가와 나를 불러 세웠다.

세오른의 사용인인 것 같은데 다른 사람보다 복장이 더 깔끔한 걸 보면 소식을 겸하는 심부름꾼 정도로 보였다.

"루드거 첼리시 선생님 맞으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무슨 용무십니까?"

내가 그렇게 묻자 심부름꾼은 몸을 움찔 떨며 살짝 겁에 질린 표정이 됐다.

이제 하다 하다 사용인들마저 나를 기피하는 건가 싶은 순간, 마음을 진정시킨 건지 심부름꾼이 내게 문서를 하나 건넸다.

"이게 뭡니까?"

"순찰 당직표입니다."

"순찰 당직?"

보통 그건 사용인이나 경비가 하는 거 아니었나? 그걸 왜 교사가 해?

내가 그런 눈빛으로 응시하자 심부름꾼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이, 이번에 총장님의 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입생들이 입학한 지금 세오른의 학생들이 가장 해이해지는 시기라서, 학생들이 무슨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끔 방지한다는 의견입니다."

"그걸 교사인 제가?"

"총장님께서는 선생님들이기에 가장 효과적일 거라고. 그리고 계약서에도 세오른 내부에 벌어지는 문제는 교사들도 나서서 방지해야 한다는 항목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런 조항도 있었지.

다만, 나는 적당히 이쪽의 재량에 맞춰서 알아서 하라는 건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시킬 줄은 몰랐다.

"흐음."

그런데 내 침음성을 다르게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사용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바, 밤을 새워서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저 하교 시간부터 해서 기숙사 통금 시간 전까지만 확인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오늘이 내 차례다?"

"네, 네."

나는 심부름꾼으로부터 말없이 당직표를 받았다.

거기에는 오늘 날짜에 루드거 첼리시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세오른에는 나 말고도 여러 선생님이 있다 보니 이런 순찰 당직도 주에 1번 정도만 하는가 보다.

주말에 걸리면 조금 짜증 나기는 하겠군.

"그, 그럼 저는 이만."

전할 걸 다 전한 심부름꾼은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는지 황급히 내게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심부름꾼을 무시하고 당직표의 명단을 살폈다.

'세오른이 워낙 넓다 보니 정해진 구역별로 교사가 한 명씩 돌아다니는 구조인가.'

오늘 당직은 나 말고도 3명이나 더 있었다. 그중에는 이번에 나와 함께 부임했던 정령학 신임 교사인 셀리나의 이름도 보였다.

뭐, 구역이 다르니 마주칠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만나면 인사 정도는 나누자.

'그보다 원래는 안 이랬다가 총장의 지시로 갑자기 시행했다는 건, 총장 역시 교사 중에서 간자가 심어져 있다고 의심하는 건가.'

아마 교사들을 이렇게 부리는 것도 혹시 모를 수상한 접촉이나 움직임을 색출하기 위함이겠지.

본인이 스파이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섣부르게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총장의 방침이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총장이 직접 이런 지시를 내렸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상대방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끔 경각심을 심어주는 억제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이건 일종의 경고다.

총장의 입장에선 여기서 수상한 놈이 걸리면 좋고 안 걸려도 경고를 보낼 수 있는, 그야말로 손해 볼 일이 없는 방침이다.

'명목상 개강 이후로 들뜬 학생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교사들이 나서서 사건을 방지한다는 거라 딱히 반박할 여지도 없고.'

평범한 학생도 아니고 마법을 부리는 천재들인데 당연히 사고를 치는 스케일도 일반적인 것과는 남다르지 않겠는가.

막아야 한다면 필시 막아야 하는 것이다.

애초에 올해 부임한 신임 교사가 무슨 발언권이 있다고 총장의 명령을 거절하겠는가.

아카데미라도 위계질서는 존재하는 법. 까라면 까야지.

참고로 내가 배정받은 순찰 구역은 <마법 훈련장>이었다.

"...이거 참."

훈련장은 자신의 마법 실력을 마음껏 뽐내기 위한 학생들이 자주 찾는 곳인 만큼 문제가 안 일어나는 게 힘든 곳이었다.

설마, 일부러 노리고 나를 여기로 보내는 건 아니겠지?

부디 아니길 빌며 나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 * *

마법 훈련장은 본관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잘 포장된 도보를 따라 10분만 걸어도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

적당히 가꾸어진 정원의 나무 너머로 커다란 건축물이 보인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초대형 비닐하우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외형이다.

'더럽게 크군.'

지구에서도 어지간한 운동장은 제대로 비비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크기가 아주 인상적이다.

저런 건물이 무려 3채나 있다.

각자 제1 훈련장, 제2 훈련장, 제3 훈련장으로 불리며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제3 훈련장의 경우에는 세오른 아카데미의 학기별 이벤트인 「마법제전」의 메인 무대이기도 하다.

일단 가장 가까운 제3 훈련장부터 살펴봤는데 별다른 문제는 없었으니 패스.

그렇게 다음으로 들른 제2 훈련장에도 사람이 몇 없었고, 대부분 훈련을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흐름.

이제 마지막 남은 제1 훈련장만 확인하면 되려던 차에.

결국 문제가 터졌다.

"감히 천한 평민 따위가!"

옥타브 단위로 찢어지는 것 같은 고성과 함께 훈련장 안쪽에서 마력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불안감이 현실이 됐음을 직감한 나는 곧바로 훈련장 안쪽으로 내달렸다.

복도를 달려 관중석의 난간에 도착했을 때.

한 여학생이 다른 여학생을 향해 마법을 쏘아내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용하는 마법은──2위계 전뇌 마법 [불태우는 뇌성]

2위계 마법이라 해도 상대가 무방비하다면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 있는 마법이다.

'늦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곧바로 술식을 발동시켰다.

저 학생이 만들어 낸 술식도 거의 완성의 단계지만, 소스코드가 있는 나는 3위계 이내 마법에 한해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펼칠 수 있다.

사용하는 마법은 마력으로 만들어진 1위계 방출마법 [빛나는 돌]

그것을 투척하듯 쏘아내 완성되기 직전 술식의 중앙을 꿰뚫어 깨부쉈다.

"누구야!"

술식이 파괴된 학생은 방해를 받았다 생각했는지 분노 어린 시선으로 이쪽을 노려봤다.

◈ 18화 평민소녀 리네 (1)

세오른의 훈련장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워낙 넓은 데다가 그런 훈련장이 무려 3개나 있으니, 어딜 가서도 학생들은 널찍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마법을 펼칠 수 있다.

특히 학기 초에 훈련장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그 명망 높은 세오른의 시설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1학년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잘한 사고들이 터지는 것도 1학년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서도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세오른에 입학한 아이들.

제대로 된 경쟁을 겪지 않은 신입생들은 아직 자신이 최고라는 물이 빠지지 않아 자존심이 강하다.

서로를 향한 양보 따윈 있을 리가 없을 터.

당장에는 서로 데면데면하며 지내겠지만 점차 수업을 진행하며 맞물려 나가다 보면 반드시 충돌하는 구간이 생긴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장 자주 일어나는 곳이 바로 이 제1 훈련장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뭐? 다시 한번 말해 봐."

"...이곳은 모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곳이야. 내가 딱히 나가야 할 이유는 없는데?"

리네는 이쪽을 경멸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는 3명의 학생을 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제국에서도 보기 드문 회색빛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가 호기심 차에 제1 훈련장에 방문했다가 시비가 걸린 것이 조금 전의 일.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이 여기를 사용할 거니까 리네한테 다른 곳으로 꺼지라는 것.

좋게 말을 한 것도 아니고, 평민 따위와 같은 공간을 쓰고 싶지 않다고 일방적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훈련장을 사용하는 학생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여유 공간도 충분하다.

그런데도 이쪽을 콕 짚어서 꺼지라는 것은 누가 봐도 노골적인 시비였다.

그녀에게 시비를 건 대상은 총 셋으로, 여자 하나에 남자 둘.

전부 귀티가 줄줄 흐르는 귀족 가문의 자식들이다.

그중에서 리네에게 직설적인 폭언을 내뱉는 것은 중심에 선 로믈리 백작가의 영애인 뒤네마 로믈리라는 1학년이었다.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금발은 끝부분이 롤처럼 말려 있다.

표독스러운 인상을 보면 딱 봐도 성격이 보통 뒤틀린 건 아닐 거라고 짐작된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어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정 쓰기 불편하면 너희들이나 가지 그래?"

"하! 감히 지금 나한테 말대꾸한 거야? 천박하고 건방진 평민 따위가 감히 나 같은 고귀한 혈통에게?"

"...세오른은 사회 계급과 핏줄로 등급을 나누지 않아. 너는 이곳에 입학했으면서 그런 것도 모르는 거야?"

"그거야 너희들이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인 거겠지. 자기들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다니. 그래서 너희가 천것인 거야."

"맞습니다, 뒤네마 아가씨. 이래서 하등한 평민들은 안 된다는 거죠."

"이래서 아랫것들에게 잘해 주면 안 된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닙니다."

양옆에서 뒤네마의 기분을 맞춰 주며 아부하는 두 남학생.

리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애초에 저들은 이쪽이 무슨 말을 해도 제대로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평민이니까.

여기서 괜히 입씨름을 이어 나가 봤자 피곤해지는 것은 이쪽이 될 터.

리네는 그냥 상종 자체를 하지 않아야겠다며 등을 돌렸다.

문제는 그 행동이 자존심 높은 뒤네마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것이리라.

"...평민 따위가, 감히 내가 말하는데 무시해?"

로믈리 백작은 선민사상에 빠졌으며 평민들을 우습게 여기는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그리고 그런 백작의 외동딸인 뒤네마 또한 아버지의 성향을 짙게 이어받았다.

어릴 때부터 그런 것만 보고 듣고 자라온 그녀이기에, 그런 성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뒤네마는 자신이 이 세오른 아카데미에서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학년은 대단한 선배들이 많으니 그렇다 쳐도, 이번 1학년들 사이에서는 자신이야말로 가장 눈부셔야 한다고.

그렇게 믿었는데.

막상 세오른에 와 보니 그녀에게 뒤지지 않는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평생을 대접받으며 살아온 그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이럴 수는 없어!'

고작 평민 따위와 같은 강의실을 사용하며 수업을 듣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그런 평민 중에서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귀족이란 언제나 고고하고 만인의 위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자신이야말로 선택받은 사람이고, 저 미천한 평민들은 그녀를 돋보이게 만들어 줄 쓰다 버릴 도구에 불과했으니까.

그런 뒤네마에게 리네라는 평민은 거슬리는 존재였다.

처음 눈에 띈 것은 강의실에 있었을 때였다.

주위에서 흔하게 보기 힘든 애시 그레이의 머리 색깔도 시선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뒤네마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 것은 리네의 미모였다.

그녀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미의 여신이 고심을 다해 빚어서 만들어 낸 인형 같았다.

같은 여성인 그녀마저도 순간이지만 부럽다고 생각해 버렸다.

자존심이 상했다.

뒤네마는 그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나 자신도, 그리고 이런 자신을 흔들리게 만든 저 가증스러운 평민도.

뒤네마에게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고, 그 대상은 당연히 자신에게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리네가 됐다.

그래서 콧대를 충분히 누를 생각으로 시비를 걸었다.

'대체 저 건방진 태도는 뭔데!'

이쪽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리네의 눈빛.

뒤네마는 이를 으득 갈며 리네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감히 나를 무시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어?'

뒤네마는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불시에 벌어진 일이라 뒤네마에게 붙은 두 추종자도 반응하지 못했다.

그것은 리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등을 돌리며 떠나는 자신에게, 그녀가 지팡이를 겨누고 마법을 사용할 거라고.

그것도 이 세오른에서 그런 짓을 저지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감히 천한 평민 따위가!"

마력과 함께 술식이 맺히고 뜨거운 번개의 씨앗이 주위로 튄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리네가 뒤를 돌아보고, 그 푸른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다.

'멍청하긴. 이미 늦었어.'

뒤네마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죽이진 않는다. 하지만 그 대신, 그 잘난 얼굴에 화상 정도는 새겨 줄 생각이었다.

준비된 마법을 저 가증스러운 평민의 얼굴에 쏘려는 순간.

새하얀 섬광이 그녀의 마법을 꿰뚫었다.

흩어지는 번개의 잔향을 보며 뒤네마가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렸다.

"누구야!"

마법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향하고.

그리고 보았다.

객석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남자를.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북 대륙의 얼어붙은 땅 위에 몰아치는 서릿발이 그러할까.

은은한 노기마저 섞인 그 목소리가 귀에 닿는 순간 피부가 반응해 버리고 만다.

이가 저절로 부딪치게 만드는 저 기세와 기백.

다른 학생도 아니고 세오른의 사용자는 더더욱 아니다. 애초에 저렇게 강렬한 인상을 지닌 남자에 대해서 뒤네마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루, 루드거 선생님?"

"순찰을 돌던 도중에 갑자기 마력의 파장이 느껴져서 와 봤더니."

그의 시선이 리네와 뒤네마의 패거리, 그리고 근처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말리지 않은 학생들을 스윽 훑는다.

"이런 문제를 일삼으려 했을 줄이야."

학생들 간의 싸움이라고 할 것도 아니다.

정확히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기습하려 한 사건이다.

"세오른이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였나 보구나."

차라리 정면에서 서로 싸웠다면 그냥 경고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투 의사가 없는 상대방에게 멋대로 기습을 날린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일방적인 과실 치상이다.

그것을 교사가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기까지 했으니.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죠?!"

이미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뒤네마는 오히려 루드거에게 항명하듯 외쳤다.

"이건 응당 귀족으로서 권위를 지키기 위한...!"

"권위? 대체 무엇을 위한 권위냐."

"그건 이 평민이 저를...."

"이 세오른에서 모든 학생은 평등하다. 배움과 가르침, 마법은 그 재능과 열정만 보고 판단할 뿐. 네가 얼마나 고귀한 피를 지녔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대놓고 여기서 귀족 행세 따윈 하지 말라는 루드거의 말.

뒤네마가 입술을 깨물었다.

전혀 반성이 없는 그 행동에 루드거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1학년들이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오히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1학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오른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는 신입생들은 당연히 모든 판단의 근거를 자신이 지금까지 지내 온 환경을 바탕으로 내린다.

자신이 살던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그 알량하고 편협한 사고방식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뒤네마 로믈리처럼.

하지만 모르는 것이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편협한 사고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것을 용서하기보다는 정신을 차리게끔 더 강한 징계를 내리는 것이 세오른의 방침.

"개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런 큰 문제를 일으켰으니 그만큼 징계를 피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알아 둬라."

"너는 당장 나를 따라와라."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등을 돌렸다.

'이쯤 했으면 알아먹었겠지.'

이렇게 경고를 날리면 적당히 사건이 무마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말뿐인 경고는 아니고 실제로 징계는 내릴 생각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동급생을 상대로 비겁하게 기습을 가하려 했으니까

"고작, 몰락 귀족 주제에...."

그러나 뒤네마 로믈리가 한 그 한마디에.

안 그래도 조용하던 훈련장이 더욱 조용해졌다.

"뒤, 뒤네마 아가씨?"

뒤네마의 추종자라 할 수 있는 두 학생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무리 그들이라도 이 행동만큼은 이건 아니다 싶었던 것이다.

떠나려던 루드거 첼리시마저도 발걸음을 멈칫했을 정도.

큰일 났다.

사태를 지켜보던 학생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뒤네마는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지?"

루드거의 한층 더 가라앉은 목소리가 뒤네마를 향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몸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마치 허공을 걷는 것처럼 객석에서 천천히 내려온 루드거가 지면에 착지한 뒤 뒤네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쿵. 쿵.

루드거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뒤네마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멀었을 때는 몰랐지만, 가까이서 마주하니 루드거가 내뿜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모습은 마치 거인.

그저 손가락 하나만으로 자신을 찍어 누를 수 있는, 산처럼 거대한 모습이었다.

"아, 아아."

자기도 모르게 심한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해서는 안 될 말이 존재했는데, 그녀는 그 선을 넘어 버린 것이다.

루드거가 분노하는 것도 당연한 일.

"내게 몰락 귀족 따위라고 했나?"

"아, 으. 아...."

뒤네마는 얼굴에 음영이 진 채로 이쪽을 내려다보는 루드거를 보며 입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만큼 루드거의 분위기를 살벌했으며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학생들이 눈치를 살피며 이거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그때.

"루드거 씨!"

바깥에서 정령학 신임교사인 셀리나가 황급히 뛰어오며 루드거를 불러 세웠다.

그녀도 조금 전 소식을 듣고 막 도착한 참이었다.

하지만 오자마자 본 것은 덜덜 떠는 여학생 하나를 잡아먹을 듯이 응시하는 루드거의 모습이었다.

설마. 혹시나. 어쩌면.

그녀의 뇌리로 불안한 생각이 깃들었다.

셀리나는 황급히 루드거를 말리려는 순간.

루드거가 입을 열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군."

모두의 귀에 들리는 것은 전혀 의외의 말.

"뭐?"

"지금 선생님께서 뭐라고...."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즉석에서 체벌을 내릴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나는 몰락 귀족이 맞다. 하지만 이곳은 세오른이고 나는 세오른의 교사다. 뒤네마. 네가 한 말은 명백히 학생이 교사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하지만 루드거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귀족이고 학생이기 이전에 너는 아직 어리다. 처음이라면 모를 수도 있다."

"아...."

"그러니 네 말실수는 이번에 주의하는 것으로 넘어가겠다. 그러나 다음은 없다는 걸 알아 둬라."

전혀 예상 밖의,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어른스러운 대처에.

학생들은 그저 멍하니 루드거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네가 동급생에게 저지른 그 행동은 그에 걸맞은 징계를 받게 될 거다. 그걸로 깨달은 바가 있길 바라마."

징계라는 말에 뒤네마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항명을 할 수도 없었다.

루드거가 조목조목 한 말은 너무나도 정론이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그녀를 지나치게 봐줬다고 생각할 정도로.

뒤네마가 말없이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자 루드거의 시선이 회색 머리 소녀 리네를 향했다.

"그리고 거기 너. 리네."

"예, 예!"

리네는 루드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다친 곳은 없나?"

"네?"

"다친 곳은 없냐고 물었다."

"아, 아아아 네! 네! 괜찮아요! 서, 선생님이 도와주셔서...."

"그렇다면 다행이군."

루드거는 바로 고개를 돌려 셀리나를 바라봤다.

"셀리나 선생님. 뒤를 부탁합니다."

"아, 네!"

루드거는 셀리나에게 그 말을 남기고 훈련장을 떠나 버렸다.

그가 복도의 어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누구도 감히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하염없이.

루드거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19화 평민소녀 리네 (2)

훈련장에서 벗어난 나는 바로 인적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하교 시간은 한참 지나서 그런지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살펴본 뒤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나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냈다.

'참느라 죽는 줄 알았네.'

알약을 입안에 털어 넣고 그대로 아그작 씹었다.

혀끝에 닿는 쓰면서도 청아한 감각과 함께 입안으로 강렬한 마력이 훅 퍼진다.

'후우. 살겠다.'

약 기운이 퍼지고 뇌에 마력이 공급되니 서서히 망가지던 컨디션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은근하게 들려오던 이명도 라디오 전원을 내린 것처럼 바로 사라졌다.

나는 한적한 벤치에 앉아 숨을 돌렸다.

처음 신호가 온 것은 제2 훈련장에 들렀을 때였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머리가 띵한 기분.

그건 내가 이 세상에 오고 난 뒤에 생긴 일종의 지병 같은 거였다.

'약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그래도 견딜 만하다고 생각해서 제1 훈련장까지만 확인한 뒤에 바로 약을 먹으려고 했는데.

설마 하니 1학년 신입생의 싸움이 거기서 터질 줄이야.

아니, 그걸 싸움이라고 해야 하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기습을 날리려는 걸 싸움이라고 볼 수도 없지.

학교 폭력.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하게 나뉜 상황이었다.

그래서 중간에 끼어들어 가까스로 일이 커지는 것을 막았다.

이후 징계니 어쩌니 말을 하는데, 한 차례 가라앉았던 파동이 훅 치솟는 걸 느꼈다.

어서 입안에 약을 욱여넣으라는 몸의 신호를 느낀 나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문제가 있다면.

설마하니 거기서 나한테 당돌하게 몰락 귀족 따위라고 말할 줄 누가 알았을까.

순간 나한테 한 말인 줄도 모르고 머리로 한 3초 정도 진득하게 고민했다.

애가 진심으로 한 소린가 싶기도 하고, 머릿속에 온갖 복잡하고 긴 장문의 대사가 다 준비되어 있는데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져서 그 끝에 나온 말이 저 한마디였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문제는 이 소리를 들었는데 교사 된 사람으로서 그냥 갈 수가 없지 않은가.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말할 게 뭐냐고.'

그냥 아무도 없이 혼잣말을 했던 거라면 못 들은 척하고 넘겼을 텐데, 주위에 목격자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교사로서 권위를 지키기 위해 일단 뭐라고 말은 해야겠는데,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으니 그럴듯한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원래라면 네가 한 행동은 명백한 교권에 대한 도전이다.

-교칙에 의해서 징계 위원회에 회부될 수 있다.

-벌점을 받거나 혹은 총장님의 귀에도 들어갈지도 모른다.

뭐, 이런 원칙적인 말들을 해야 했는데, 그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막 뱉었는데.'

경황이 없어서 대충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최대한 이미지가 망가지지 않는 선에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무너질 뻔한 표정을 관리하느라 얼마나 혼쭐이 났는지 모른다.

아마 내 얼굴이 조금 일그러져 있지 않았을까. 눈에 핏발도 조금 서고.

'크게 문제 될 일은, 없겠지?'

아무튼, 뒤늦게 셀리나 선생님도 오셨길래 뒷일을 맡기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나는 입안에 맴도는 알약을 꿀꺽 삼키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나마 초기 증상이라 다행이다.

이거 여기서 더 심해졌으면 다른 사람들도 내 이상함을 눈치챘을지도 모르니까.

'약은, 이걸로 마지막인가.'

약통이 비어 있는 걸 확인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분의 약은 미리 부쳐 놓은 가방에 넣어 놨는데, 설마하니 중간에 일이 틀어져서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녀석과 만나기로 한 것이 다음 주말. 그때까지 버티는 건 솔직히 힘들어 보이고, 다시 편지를 보내서 더 일찍 오라고 보채야겠군.'

그게 아니라면 개인 약제실을 빌려서 따로 만들거나 해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기록에 남아 버리니 큰일이다.

일단 이 상태를 보면 5일 정도는 버틸 수 있을 텐데 확신은 못 하겠다.

마력을 소모하는 일이 생기면 그만큼 기간이 줄어드니까.

'그때까지 부디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군.'

점점 맑아지는 머리에 나는 숨을 가볍게 들이마시며 다시 순찰을 나섰다.

* * *

"괜찮니?"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야. 이게 내 일인걸."

리네는 괜찮다고 극구 부인했는데도 자신을 양호실까지 데려다준 셀리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셀리나는 포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사래를 쳤지만, 리네는 진심이었다.

"그... 셀리나 선생님."

"응?"

"그 애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뒤네마 말이지? 으음. 그건 나도 뭐라고 확신할 수가 없겠네. 나도 여기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 맞다...."

"그래도 미리 고지받은 교칙에 의하면, 그냥 싸우는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었으니 퇴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징계는 받지 않을까 싶어."

뒤네마처럼 자존심이 강하고 콧대가 높은 사람일수록 아카데미 측에서 강한 징계를 내리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건 두 사람 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직 뭘 모를 신입생 때라서 처벌이 약한 것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백작가 정도 되는 가문이 뒷배에 있으니 봐주려 하겠지.

"왜? 걱정되니?"

"아뇨. 그냥요. 궁금해서요."

솔직히 노골적으로 이쪽을 노리고 공격을 가한 뒤네마를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부 자업자득. 오히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퇴교가 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단지 그냥 물어본 것은 심란해서 그랬을 뿐이다.

"걱정되니?"

"네?"

"표정이 다 드러나서."

"아...."

리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회색 단발이 그에 맞춰 찰랑거렸다.

"그냥, 막상 와 보니 생각 이상으로 치열한 거 같아서요. 세오른이라고 한다면 뭔가 조금 더 꿈과 이상이 넘치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

"그런데 이번에 귀족 학생과 말을 나눠 보니 그런 게 전혀 아닌 것 같더라고요. 비록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고 끝나겠지만, 이와 비슷한 일이 앞으로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겠지."

셀리나도 리네의 의견에 공감했다.

세오른에서는 왕족도 평민도 다 평등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지켜진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교사들 또한 중립적인 자리에서 최대한 학생들을 중재시킨다 하더라도, 학생들끼리만 있을 때 문제가 터지는 것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심지어 일부 귀족 출신 교사들은 평민 학생들을 차별하고 귀족 학생들을 은근하게 편애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귀족으로서 자부심이 강한 몇몇은 교사가 평민이거나 몰락 귀족 출신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그들을 얕잡아 보는 일도 있었다.

이번에 뒤네마가 루드거에게 한 폭언은 바로 이런 상황의 연장선이었다.

"맞아. 솔직히 나도 루드거 선생님에게 그 말은 심했다고 생각해."

셀리나는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허리춤에 두 손을 얹으며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설마 교사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리네를 보며 셀리나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루드거 선생님이 넘어가신 일이니까. 우리가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거야."

"화 안 나세요?"

"물론 나도 화는 나지. 그냥 애써 참고 있을 뿐이야. 하지만 누구보다 그때 머리가 복잡했던 건 루드거 선생님이셨을 거야."

"아."

리네는 그때 루드거가 지어 보였던 표정을 떠올렸다.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져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굉장히 무서웠을 것이다.

그 눈빛을 마주한 뒤네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을 정도였으니까.

원래도 분위기 잡으면 무서운 루드거 선생님인데, 진심으로 화를 낸다면 대체 얼마나 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루드거 선생님은 뒤네마의 잘못을 이번만 봐주겠다고 넘겼다.

본인이 그 누구보다도 화가 났을 텐데도.

참고 넘어간 것이다.

단순히 상대방의 가문에 굴복해서 그냥 넘어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정말로 모자란 학생을 계도하기 위한 자비에 가까웠다.

그야 그럴 것이, 루드거는 시종일관 뒤네마에게 쩔쩔매기는커녕 그녀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봤었으니까.

그런 모습을 보여 준 사람이 고작 상대방의 가문이 지닌 권위에 물러났을 리가 없다.

솔직히 스스로 몰락 귀족이 맞다고 말하며 뒤네마에게 훈계를 했을 때.

리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전혀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멋있다고도.

"그래서 나도 한번 믿어 보려고. 분명 잘못을 했지만, 아직 어린 학생들이잖아? 바뀔 기회는 있다고 생각해."

"아."

셀리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에헤헤. 미안. 나 너무 아줌마처럼 말했지?"

"아니요. 셀리나 선생님도 충분히 젊으신걸요. 솔직히 세오른이 아니라 바깥에서 만났다면 언니라고 불렀을 거예요."

"어머나~ 칭찬해 줘서 고마워. 리네는 착한 아이구나."

아니, 진짜인데.

셀리나 본인은 자기가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리네가 보기엔 그녀는 교복을 입혀 놓으면 선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아름답고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셀리나는 이미 몇몇 남학생들이 연모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정작 본인이 자각이 없어서 그렇지.

애초에 20대 중반 정도가 그렇게 나이가 많은 건가 싶기도 하다.

"으응. 언니라~. 좋은 어감이네. 내게도 리네 같은 동생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도 셀리나 선생님 같은 언니가 있으면 좋았을 거예요."

"정말? 아이고 예뻐라~."

"헤헤. 그러면 정령학 수업 때 점수 조금 더 주시면 안 돼요?"

"열심히 하는 거 봐서~."

셀리나는 웃으면서 리네의 장난을 장난으로 돌려줬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는 나머지 순찰 구역을 둘러보러 가 볼게. 혹시 몸에 무슨 이상 있으면 꼭 말해 줘야 한다?"

"네. 그럴게요."

셀리나는 손을 흔들며 양호실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리네는 자신의 몸 상태를 살펴보고는 괜찮겠다 싶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루드거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 주셨구나.'

훈련장을 쓸 때 혹시라도 교복이 더러워질까 봐 편한 옷을 입고 갔었다.

당연히 그때 그녀는 명찰이 없어서 누구도 리네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루드거 첼리시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리네, 라고.

'수업을 듣는 걸 기억하셨던 걸까?'

루드거 첼리시에겐 자신은 그저 80명의 수강생 중 하나일 뿐이고, 심지어 눈여겨볼 필요도 없는 평민이다.

그럼에도 루드거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했다.

문득, 그가 뒤네마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오른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잔잔한 수면에 돌을 집어 던진 것처럼, 그 말이 리네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킨다.

말로만 그렇게 떠들었다면 믿지 않고 오히려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드거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행동, 그 흔들리지 않는 신념, 그 목소리가.

리네에게 세오른을 향한 희망을 심어 주었다.

'첫인상은 분명 무서운 선생님이었는데.'

심지어 신임 교사라고 해서 첫 수업을 들을 때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드거가 보여 준 소스코드라는 혁신 때문에 한 차례 놀라며, 그가 단순히 말만으로 이 세오른에 부임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 해도 플로라를 지적했던 그 배려심 없고 안하무인 격인 태도를 생각하면.

여러모로 피곤한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상황을 중재하면서, 자신이 모욕을 당했는데도 해당 학생을 경고하는 것으로 끝냈다.

심지어 본인이 구해 줬으면서 혹시라도 이쪽이 다치지 않았는지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다.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나타나서 구해 준 그 모습이, 순간이지만 마치 동화 속 백마 탄 왕자님을 보는 것 같아서.

무심코 가슴이 두근거리고 만다.

'아니야. 루드거 선생님은 그냥 내게 별생각이 없으셨을 거야.'

그래. 괜히 혼자서 설레발치는 것만큼 꼴사나운 것도 없다.

나는 이곳에 마법을 배우러 온 거지 이런 극적인 만남을 찾으러 온 게 아니니까.

* * *

제1 훈련장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로 순찰에서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기에, 나는 마음 편히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녀석에게 편지를 부쳤다.

다음 주 주말까지 기다리는 것이 힘드니 더 일찍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답장은 이른 아침부터 돌아왔다.

안쪽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처리하던 일이 생각 이상으로 일찍 끝나서 바로 출발하겠다는 것이었다.

만나는 것은 주말인 내일.

약속 장소는 레더벨크의 동부 상업 구역 너머의 공장 지대.

사람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는 적합한 곳이라 생각하며 나는 편지를 태웠다.

'오늘은 금요일. 내일이 바로 토요일이니 하루 정도는 충분히 넘길 수 있겠지.'

개강 이후 첫 주말이라 학생들이 들떠 있겠지만, 설마 전날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함께 점심을 먹던 셀리나 선생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늑대인간, 말입니까?"

"네 늑대인간이요."

세오른에 늑대인간과 관련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20화 아브라함 반 헬싱 (1)

오늘도 헤실헤실 해맑게 웃고 있는 셀리나 선생님은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쫙 퍼졌어요. 도시 괴담 정도로만 존재하는 늑대인간이라니. 웃기죠?"

"...."

"아무리 천재들만 모였다 해도 역시 학생들이구나 싶다니까요. 그런 괴담 같은 거에 은근하게 신경 쓰다니."

셀리나 선생님은 학생들의 상상력이 참 귀엽다며 배시시 웃었지만, 나는 오히려 웃을 수 없었다.

소문의 첫 발원지는 전날 인근의 도시 레더벨크까지 외출을 갔다 온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해가 저문 레더벨크의 어두운 밤.

은근하게 내려앉은 밤안개의 사이로 건물 옥상을 누비는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는 것이 최초의 목격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이들이지 않습니까."

"네. 그렇죠. 그래도 도시 바깥에서 보던 늑대인간이, 세오른에서도 봤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조금 신기하기는 했어요."

"세오른 내부에서도 말입니까?"

도시에서 본 아이들이 소문을 내서 학교 내부의 학생들이 헛것이라도 본 것일까.

"세오른이 워낙 넓어야죠. 그리고 온갖 마법이 판치는 곳이다 보니 마력으로 인해 기묘한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고 하고. 실제로 7대 괴담이 존재하잖아요?"

"7대 괴담 말씀이십니까?"

"네. 모르셨어요?"

"셀리나 선생님은 괴담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군요."

"네, 네?!"

그저 칭찬하려는 생각으로 한 말이었는데, 셀리나 선생님은 어째서인지 조금 과하게 반응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양 뺨이 분홍빛으로 상기된다. 그녀의 머리카락도 조금은 부풀듯이 곤두섰다.

대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녀가 황급히 변명하듯 말했다.

"따, 딱히 저라고 세오른의 학교 괴담 같은 게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세심하게 찾아본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냥, 학생들이랑 대화를 하려면 무슨 주제가 좋을지 고민했을 뿐이고, 절대 그런 거 아니니까요!"

"알겠으니 진정하시죠."

갈 곳을 잃은 두 팔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걸 보니, 자칫 잘못하면 접시와 부딪쳐 음식을 쏟을 것만 같았다.

"아니이. 정말 아닌데에."

그러나 셀리나 선생님은 내 태도에서 무언가 조급함을 느낀 것인지 더 필사적으로 변명을 이어 나갔다.

이대로는 식사가 이어질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할 때 보다 못한 메릴다 선생님이 끼어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루드거 선생님, 첫 수업 때부터 꽤나 화려하게 저질러 주셨다고 하던데, 그거 정말이에요?"

"무얼 말입니까."

"그거 있잖아요. 마법의 발현 속도를 줄여 주는 획기적인 마법을 보이셨다고. 이름이 그, 뭐라고 했지?"

"소스코드!"

셀리나 선생님도 당황하던 것을 잊고 눈에 불을 켜며 그렇게 외쳤다.

그 외침이 얼마나 컸는지, 교사 전용 식당에 순간이지만 침묵이 맴돌았다.

셀리나 선생님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분홍빛 머릿결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귓불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사방에서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그건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하고 있던 교사들의 시선이었다.

왜 그런가 하고 의아해하고 있자, 메릴다 선생님이 상반신을 쭈욱 빼서 내게 들리게끔 설명해 줬다.

"다들 루드거 선생님의 마법에 관심이 있어서 그래요."

"제 마법에 말입니까?"

"어머. 모른 척 잡아떼시는 거예요? 이미 루드거 선생님이 첫 수업에 보여 준 마법은 세오른 내에서 소문이 퍼졌다고요?"

"흠."

나는 고기 한 점을 입안에 집어넣으며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했다.

'관심인가.'

첫날 수업을 할 때부터 어렴풋이 이렇게 될 거라고 짐작하기는 했다.

이쪽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 21세기 컴퓨터 프로그래밍 방식을 차용한 소스코드는 그야말로 혁신적이겠지.

그 파급력 자체는 분명 다른 교사들에게도 닿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했다.

"듣자 하니 엄청 획기적으로 술식 발현 속도를 단축시켰다고 하는데, 그걸 여기서 털어도 되는 거예요?"

"맞아요. 그 정도면 마탑에서 특허를 내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구요."

셀리나 선생님도 호응하고 나섰다.

뭐, 굳이 말하면 틀린 말도 아니다. 소스코드라는 마법은 정체된 지금 마법 사회에 변화의 바람이 될 테니까.

실제로 마법 특허 제도가 존재하는 마탑에 이런 마법을 제공한다면 그야말로 돈방석 위에 앉을 수 있을 테고.

물론, 그건 표면상으로 알려진 일반적인 상식이다.

"저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나는 겸손을 떨며 아닌 척했지만, 특허 신청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안다.

아직 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새로 개발한 마법을 마탑에 제공하는 것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좀 많이 다르다.

마탑에는 분명 마법 특허 제도가 존재한다.

돈이 부족한 마법사들은 그런 특허 제도를 이용해 돈을 벌고 싶어 하지만, 그런 허울 좋은 모습은 단지 표면적인 것일 뿐.

특허라는 것도 마탑에서 제대로 인정을 해 줘야만 특허가 된다.

문제는 보통 특허로 제출하는 여러 마법은 마탑에서 온갖 핑계를 대면서 낮게 후려치는 것이 태반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그냥 그런 핑계만 대는 거면 모를까, 이걸 악용하는 놈들이 있다는 거지.'

다른 신임 교사들은 아직 마탑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있겠지만, 마탑이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 곳인지 나는 이미 겪어 본 적이 있어서 관점 자체가 다르다.

정말 마탑의 그 꼰대 심사 위원들이 트집 잡을 여지가 없는 새로운 마법을 개발했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후원자나, 혹은 귀족 가문의 뒷배가 없다면 말 그대로 특허로 낼 마법을 강탈당하고 말지.'

혹은 이쪽이 그에 불만을 품고 특허 신청을 하지 않으면 뒷골목 같은 데에 끌려가서 강제로 마법을 토해 내게 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었고.

즉 마탑에서 사용하는 특허 제도란 유명무실한, 그저 허울만 좋은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내 마법을 돈을 벌기 위해 마탑에 바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해도 돈은커녕 백이 없어서 쫓겨나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니까.

'그나마 지금 루드거의 신분은 낫지.'

몰락 귀족이지만, 세오른에서 현역으로 교사 일을 하고 있으니 인지도적인 부분에서는 나쁘지 않다.

다만, 그런 루드거의 신분으로도 자칫 방심하면 눈뜬 채로 코 베여 가는 것이 지금의 마탑이다.

고이고 정체되고, 늙은이들의 치기 어린 탐욕이 끈적거리는 진흙처럼 만연한 곳.

아무리 나라도 그런 곳은 질색이다.

그리고 세오른에서 일부러 소스코드를 보인 것은 어느 정도 계산이 들어간 행동이었다.

일단 학생들에게 소문을 내서, 소스코드라는 획기적인 마법이 루드거 첼리시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이야기를 흘리는 것이다.

학생들 사이의 소문은 퍼지고 퍼져 교사에게로, 교사들의 사이에서도 소문은 퍼지며 세오른의 바깥까지.

그렇게 마탑의 귀에 들어가게 되겠지.

이쪽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며 특허 신청을 하는 것은 스스로 목을 들이미는 짓.

그러나 저쪽이 새로운 마법의 등장에 안달이 나서 내게 접근하면, 그때는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그리고 루드거라는 신분의 위상은 더욱 높아지겠지.

아무것도 없는 세오른의 신임 교사보다는, 상당한 재능을 지닌 세오른의 교사로.

이런 명함 하나를 지니고 있다면, 주위에서 나를 쉽게 무시하지 못할 거다.

조금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내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이만한 것이 없다.

'다만, 문제는 다른 교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노린다는 것이려나.'

지금도 그렇다.

그나마 셀리나 선생님과 메릴다 선생님은 성격이 좋아서 넘어가지만, 다른 교사들은 내게 노골적인 질투심을 보내오고 있었으니까.

특히 이번에 나와 함께 부임한 교사 중 하나인 크리스 베니모어의 눈빛은 그야말로 들끓고 있는 마그마를 보는 것 같다.

저러다 눈빛으로 사람도 죽이겠군.

"그래도 아쉬운데...."

"학생들에게 먼저 선보이는 것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죠."

나는 적당히 그렇게 둘러댄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여기에 있다가는 시선 때문에 체할 것 같아서였다.

"전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다음 수업이 있어서."

"아, 네! 수고하세요!"

"잘 가요~."

인사를 건네는 두 선생님에게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답한 뒤, 빠른 걸음으로 교사 전용 식당에서 벗어났다.

* * *

메릴다는 떠나가는 루드거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처음 봤을 때부터 대단한 남자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조금 전 대화를 나누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루드거 첼리시. 저 남자는 다른 교사들조차 눈독을 들이는 그 소스코드라는 마법을 정말 학생들을 위해 선보인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마탑에 공개하기는커녕, 지금까지 꽁꽁 감추고 있다가 첫 수업 때 보여 줬을 리가 없지.'

메릴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루드거의 행동은 요즘 마법사 같지 않았다.

요즘 마법사라 하니 조금 표현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마법사들은 예전부터 그랬다.

지나치게 냉철하다 보니 공감 능력이 많이 결여되어 이기적이고, 타인을 향한 배려가 부족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최근에는 그런 경향이 훨씬 더 심해졌다.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는 스승조차 제자를 믿지 못해 자신의 비전을 절대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지금 마법계다.

그녀 또한 비슷한 상황을 겪었기 때문에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루드거는 어떤가.

그는 저 대단한 마법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주위에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마법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사용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린 학생들이라 하더라도 마법을 사용하는 걸 그렇게 보여 주면, 눈치 있는 몇 명은 그 가닥을 잡을지도 모르는데.'

저 남자는 자신의 마법이 빼앗긴다는 그런 걱정조차 하지 않는 걸까?

그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뿐.

하나는 봐도 모를 정도로 마법이 어려운 것이거나.

'혹은.'

빼앗겨도 상관없다는 각오가 돼 있거나.

'에이, 설마.'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조금 전 식사를 할 때 보여 준 그 당당한 태도.

그게 설명이 될 리가 없다.

'저런 사람이 나와 같은 신임 교사라니.'

그렇게 생각할수록 괜히 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메릴다는 한숨을 내쉬며 옆을 돌아봤다.

그녀의 동기이자 친한 친구인 셀리나는 떠나간 루드거의 자리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이쪽도 적잖게 푹 빠졌네.

메릴다는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저은 뒤, 바로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손끝으로 셀리나의 목덜미를 툭 건드렸다.

"히야악!"

"셀리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왜. 루드거 선생님이 먼저 가서 섭섭해?"

"메, 메릴다 선생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에요!"

역시 셀리나는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메릴다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동안 셀리나를 골려 줬다.

물론, 도중에 토라진 셀리나를 달래 줘야 하는 것은 덤이었다.

* * *

이론 수업이 끝난 다음 날 토요일.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정오부터 나는 세오른의 인근 도시인 레더벨크에 와 있었다.

일단 명목상 인근의 도시를 둘러보기 위한 간단한 산책, 이지만 실상은 선약이 있기 때문이었다.

약속은 저녁이고, 시간이 꽤나 남았지만.

나는 일단 레더벨크가 어떤 곳인지 둘러보기 위해서 더 일찍 나왔다.

'도시 자체는 꽤나 멋들어지게 생겼군.'

마공학이 발달한 도시 레더벨크는 500km가 넘는 렘지어 강이 중앙으로 흐르는 거대한 도시다.

흐르는 강과 땅 위에 놓인 무수한 철로는 도시의 생명력을 심어 주는 혈관이었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활기가 가득하다.

온갖 상업과 마법, 공학의 중심지가 되어 있는 레더벨크는 세오른 아카데미와 맞닿아 있어서 가장 발달한 도시라는 명성까지 거머쥐었다.

나는 레더벨크의 중심가인 '센터포드'를 걸었다.

다른 구역과 다르게 이곳에서는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와 숙녀들이 조용히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레더벨크의 부흥을 상징하는 장소인 센터포드.

부자들이 거주하는 주택 단지인 이곳은 가로수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고 도로마다 증기차와 골렘 마차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한적한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주말임에도 조용한 카페에 배인 은은한 원두의 향과 내가 마시는 커피의 향이 섞이며 묘한 정취를 일깨운다.

'멋지군.'

아름다운 곳이고 이런 곳에서도 한 번쯤은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이 어렴풋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터다.

'집값 하나는 확실히 비싸겠어.'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값을 계산한 나는 이번에 다음 구역으로 향했다.

레더벨크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돌아다니는 번화가인 '그랜드채플'.

고딕 리바이벌 양식의 거대한 백색 성당이 우뚝 서 있는 곳이었다.

괜히 번화가가 아닌지, 그곳에는 정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온갖 것들이 가득했다.

황동으로 만들어진 외연 기관에서 새하얀 증기를 내뿜는 기계들과 그런 기계들을 만지는 정비공들.

자그마한 태엽 기계 장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

아코디언, 첼로, 바이올린을 켜며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과 그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시민들까지.

"...."

그렇게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며 노을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댕. 댕. 댕.

도시 곳곳에 솟아 있는 거대한 시계탑이 6시가 됐음을 알리며 종소리를 울렸다.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초봄이다 보니 해가 일찍 저물고 피부로 닿는 공기는 빠르게 싸늘해졌다.

나는 걸치고 있는 검은 코트의 앞섶을 여미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레더밸크의 아름다운 모습만 보았지만, 이번에 향해야 할 곳은 그 반대.

강렬한 빛의 아래에 선명하게 드리워진 그림자.

이 도시의 추악한 민낯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머리에 쓴 챙이 넓은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 쓰며 나는 렘지어 강의 수면에서 일어나는 뿌연 물안개 사이를 걸었다.

타오르는 주홍빛 불길의 구름마저 서쪽 너머로 떠내려가고 짙푸른 하늘이 레더벨크 도시 전역을 뒤덮었을 때.

나는 짙은 안개가 일어나 있는 공장 지대의 골목길 앞에 섰다.

사람은 없다.

길거리 부랑자들도 구걸을 포기하고 골목길 깊은 곳으로 돌아갔고, 거친 기침을 토하면서 일당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꼬마들도 집으로 갔다.

이곳에 있는 건 오직 나 혼자뿐.

가로등의 주홍색 빛이 안개와 맞닿아 뿌옇게 흩어진다.

그 공허한 고요 속에서, 나는 매연의 때가 잔뜩 낀 벽돌에 등을 기댄 채로 만나기로 한 사람을 기다렸다.

'일찍 온다더니 늦는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가 등을 기대고 있는 골목길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릉.

그것은 인간의 성대로는 절대로 낼 수 없는 소리.

나는 벽에서 등을 뗀 뒤 골목길 안쪽을 응시했다.

회색의 안개와 검은 어둠이 반쯤 뒤섞인 미지의 공간 안쪽에서 붉은 눈동자 한 쌍이 떠올랐다.

'이거 참.'

나는 전날 셀리나 선생님이 식당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학생들이 늑대인간을 봤다는 그 소문.

그녀 본인은 그저 괴담 같은 거라고 넘어갔지만 글쎄.

지금 저걸 보면 과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졌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녀석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움직임.

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뚫어져라 보다가.

바로 주먹을 들어 올려 녀석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쿠웅!

"크악!"

굵은 비명이 안개 사이로 짧게 울려 퍼진다.

나는 한심하다는 얼굴을 숨기지 않으며 내 앞에 주저앉은 녀석을 내려다봤다.

"왜 늦었나 했더니 이런 장난질을 하려는 거였나."

"이런 제길. 그래도 오랜만인데 좀 놀라면 어디 덧나오?"

그렇게 말하며 아픈 머리를 손으로 슥슥 매만지는 녀석은 내가 만나기로 한 지인이자, 내 부하라 할 수 있는 녀석.

"오랜만이다. 한스."

"오랜만이오. 형님."

학생들 사이에 늑대인간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었다.

◈ 21화 아브라함 반 헬싱 (2)

"씁. 그보다 히스...."

루드거는 본명을 말하려는 한스의 말을 끊었다.

"지금은 루드거다. 루드거 첼리시라고 불러라."

"루드거 첼리시 말이오? 아. 그러고 보니 편지로 보냈을 때 그런 이름이었지.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요? 왜 원래 만나기로 했던 수도에서 안 만나고?"

"설명하면 길다. 그보다...."

루드거는 한스의 모습을 스윽 보며 고개를 저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고를 몰고 다니는 건 여전하구나. 이번에는 또 그게 무슨 몰골이냐."

"젠장. 누가 이렇게 되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아시오?"

현재 한스의 모습은 길 가다 누가 봐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칠 법한, 늑대인간의 형태를 닮아 있었다.

다만 지금이 어두워서 그렇지, 밝은 대낮에 이 모습을 봤으면 사람들은 도망보다는 오히려 의아함을 느꼈을 것이다.

한스의 모습은 늑대인간의 그 특유의 포악함이 전혀 없었으니까.

정확히는 오히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움마저 지니고 있었다.

"이번엔 또 뭐에 물린 거냐."

"모르오. 무슨 털 수북한 갈색 강아지였는데, 이놈이 웬 아줌마 품에 있다가 갑자기 냅다 달려들어서 날 물 줄 누가 알았겠소?"

"그 몰골을 보니 어떤 종류인지는 대강 알겠군."

반인반수 형태인 한스는 갈색의 털을 지녔다.

다만, 야생을 누비는 늑대의 어둡고 칙칙한 색감이 아닌 오히려 눈에 띄는 밝은 쪽에 가깝다.

무엇보다 얼굴의 형태가 늑대와 많이 다르다. 늑대의 긴 두상보다는 조금 더 입이 짧고 눈이 똘망똘망한.

그래.

저 모습은 귀여운 애완견으로 명성이 높은 [포메라니안]을 꼭 닮아 있었다.

한스가 말한 자신을 물었다는 털 수북한 강아지가 바로 포메라니안이었던 것이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너는 참 재밌는 체질을 타고났어."

"이런 제길. 남의 일이라고 비웃지 마시오. 나는 무슨 저주라도 받은 게 아닌가 싶은데."

한스는 조금 특이한 체질을 타고난 인간이다.

바로 짐승이 자신을 물면 해당 짐승의 인자가 발현되어 그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흔히들 보름달을 보면 갑자기 인간의 피부를 찢고 야성이 폭발한다는 전설 속의 늑대인간.

그게 바로 한스였다.

'다만, 일반적인 늑대인간과는 다르다는 것이 흠이려나.'

늑대인간은 이름에 적혀 있다시피 오직 늑대의 모습으로만 변신하며 보름달에 반응하지만, 한스는 그러지 않았다.

한스는 보름달을 봐도 멀쩡한 대신, 오직 짐승에게 물릴 경우에만 강제로 변이를 일으킨다.

그것도 자신을 깨문 짐승으로.

늑대한테 물리면 웨어 울프가.

호랑이한테 물리면 웨어 타이거가.

곰한테 물린다면 웨어 베어가.

이런 식으로 변할 수 있는 한스는 꽤나 대단한 힘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지만.

'요즘 같은 문명과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도시 속에 늑대나 호랑이, 곰이 어디에 있어?'

어디 깊고 험준한 산속에 들어가야 겨우 발견할까 말까 한 놈들이다.

그리고 물려야만 변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도 참 어처구니가 없다.

야생의 포식자급 짐승들에게는 물리면 그냥 변신이고 자시고 한 방에 죽는데, 물려야 변신이 가능하다니?

죽고 싶지 않으면 차라리 변신을 할 생각 자체를 접는 것이 낫다.

그러다 보니 한스가 도시에 쉽게 접할 수 있는 동물이라고 해 봤자 길가에 돌아다니는 길고양이나 들개, 혹은 귀부인들이 키우는 애완견들이 전부다.

심지어 그가 지닌 특이한 체질이 모종의 작용을 하는 건지, 동물들이 한스만 보면 좋아라 달려드는 문제까지 겹치는 것이다.

털 같은 것이 피부에 스치는 건 상관없지만.

동물들이 좋다고 깨무는 순간, 이 저주받은 능력이 눈을 떠 버리고 만다.

변하는 것에 본인의 의사 따윈 없다.

그것을 제어할 방법도 당장에는 마땅하지 않았다.

한스는 조금만 방심하면 자그마한 짐승에게 물려 강제로 반인반수의 형태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모습 또한 그랬다.

마법과는 다른 미지의 힘.

한스가 지닌 것은 사실상 초능력에 가까웠다.

"받아라."

루드거는 주머니에서 녹색 시약이 담긴 주사 앰플을 꺼내 한스에게 던졌다.

한스는 황급히 두 손으로 앰플을 잡고는 기쁜 얼굴로 바로 자신의 팔뚝에 꽂았다.

푸욱!

그러자 곧바로 변화가 일어났다.

몸에 수북이 자랐던 털이 줄어들고, 커졌던 덩치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똘망똘망한 귀여운 포메라니안 얼굴도 조금 비열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로 바뀌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한스는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만져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진짜 형님 아니었으면 또 몇 날 며칠은 고생을 하며 지냈을 거요."

"생각해 보면 그렇군."

루드거가 한스와 만나게 된 것도 꽤 옛날의 일이다.

그때 한스는 자신의 체질을 제어하지 못해 괴물이라 불리며 여기저기서 쫓기던 신세였다.

그래도 짐승으로 변하는 힘이라면 어디 뒷골목에서 왕 행세를 할 수 있었는데, 천성이 싸움을 못 하는 녀석이라 핍박을 피해 이곳저곳을 떠돌기만 했다.

그때 루드거를 만나게 된 것은 한스에게 있어서 일생일대의 천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죽을 뻔했지만요."

"그랬지. 나는 네가 도시에 떠도는 크립티드라고 생각했다."

크립티드(Cryptid)는 몬스터가 사라진 지금, 도시 곳곳에서 은연중에 나타나는 괴생물체를 뜻했다.

일종의 몬스터의 잔재라 볼 수 있는 녀석들.

실체가 존재하는 몬스터와 비교하면 조금 초자연적인 현상에 더 가까웠다.

마수, 영수, 그 외에 기묘한 짐승들. 혹은 부정적인 감정이 마력과 반응해서 형상화된 존재들.

그것이 바로 크립티드였다.

루드거가 한스를 찾았던 것도 그런 크립티드 토벌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스를 처음 마주했을 때, 루드거는 자신이 상상하던 늑대인간이 아닌 걸 깨닫고 꽤 당황했다.

그야 그럴 것이, 그때의 한스는 치와와를 닮은 반인반수의 형태였으니까.

이른바 웨어 치와와였던 것이다.

"나중에 네가 말도 제대로 할 줄 아는 인간이라는 걸 알고 꽤 놀랐지."

"그게 놀란 거였소? 나는 오히려 금방 치료제를 개발하는 형님의 행동에 더 놀랐는데."

"치료제는 아니다. 중화제에 가깝지."

"그게 그거지."

한스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형님이 만들어 준 이 약이 없었으면 나는 진짜 어디 뒷골목에서 괴물이라고 사냥을 당했을지도 모르오."

루드거도 그건 부정하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이번에 가명이 루드거 첼리시라니. 그것도 세오른 아카데미의 교사? 대체 루드거 첼리시라는 신분은 언제 또 만든 거요? 듣자 하니 좀 날린 것 같던데. 편지로 갑자기 세오른의 교사가 됐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상황을 설명하면 좀 길다."

루드거는 마공학열차에서 벌어졌던 테러 사건부터 해서, 어쩌다 자신이 세오른의 교사가 됐는지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한스의 얼굴은 이상하게 일그러지다가 또 놀란 듯 변했다.

마지막 말을 들은 한스는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큭큭. 푸하하하! 진짜 형님도 참 대단하시오. 어떻게 거기서 자기가 루드거라고 할 수 있었소?"

"살려면 해야지."

"나 같았으면 어버버해서 오히려 수상하게 여겼을 텐데. 심지어 원래 루드거가 뭐 정체불명의 비밀 결사 소속이었다고?"

"그것도 퍼스트 오더라 불리는 간부더군."

"흠. 퍼스트 오더. 퍼스트 오더라."

"혹시 뭐 아는 거 있나?"

한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할 때 보이는 그의 버릇이었다.

"흠.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아니, 확실히 기억에 있소. 최근 제국 뒷세계의 정세가 아주 떠들썩한 건 들어 본 적 있소?"

"아니. 아직."

"뭐, 완전 최근의 일이라 모를 수도 있지. 최근 새로운 놈들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꽤 강하고 미친놈들만 모였다고 하더군. 아 글쎄 놈들이 서로를 칭할 때 회원이니 어쩌니 하면서 무슨 무슨 오더로 등급을 매기지 뭐요?"

"아무래도 놈들이 확실한 거 같군. 조직의 이름은?"

"검은 여명단이랍디다. 누구는 검은 여명회라고도 부르고요."

검은 여명단. 혹은 검은 여명회.

루드거는 그 이름을 속으로 곱씹었다.

자신과 엮인 그놈들은 확실히 보통이 아니었으며 정상도 아니었다.

세오른에 그 정도의 사람들을 심었고, 사용인들을 암살해서 신분을 감추고 잠입까지 했다.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놈들이었다.

"놈들에 대한 정보는 더 없나?"

"워낙 최근의 일이라 나도 자세히는 모르오. 아는 것도 조직의 이름, 그리고 계급 정도지. 그런데 형님이 지금 거기의 퍼스트 오더가 됐다고?"

"된 게 아니라, 원래 퍼스트 오더였던 녀석의 탈을 뒤집어쓴 상황이지."

"그거 지금이야 운이 좋아서 넘어간 거지만, 자칫 실수하면 들키는 거 아니요?"

"그래."

그리고 들키게 될 경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고문을 당하게 될 거다.

루드거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니 대비를 해야지."

그렇게 약통을 꺼낸 루드거는 안에 있는 약을 먹으려다, 지난날 다 먹었다는 걸 깨닫고 한스에게 팔을 내밀었다.

"내 가방."

"아. 여기 가져왔소."

한스는 바로 골목길 어둠에 숨겨 놓은 검은색 슈트 케이스를 가져와 루드거의 손에 들려 줬다.

루드거는 자신의 짐 가방이 멀쩡한 걸 확인했다.

"열지는 않았군."

"내가 미쳤다고 형님 가방을 열어 보오? 애초에 열고 싶어도 못 열구만."

한스는 진절머리를 치며 루드거의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부정했다.

"알고 있다. 그보다 세리단과도 만났나?"

"그 꼬맹이 말이오? 뭐 만나기는 진작 만났지. 애초에 거기서 형님 대기하고 있던 차였는데."

"그건 미안하게 됐군."

"아니 뭐 미안할 거까지야. 뭐 형님이나 우리나 이런 일이 터질 줄 알고는 있었겠소?"

루드거는 짐 가방을 열고 안에 담겨 있는 자신의 개인 용품들을 모두 살폈다.

짐을 부치기 전에 정리해서 넣었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이 그대로였다.

루드거는 약통에 든 알약 2개를 꺼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한스가 살짝 안쓰러운 시선으로 그런 루드거를 바라봤다.

"형님도 고생이 많소."

"글쎄. 너만 할까."

"아니 뭐 나도 그러긴 한데, 생각해 보니 형님이나 나나 죄다 약물 달고 사는 입장이로군."

"그나마 마약과 달리 부작용이 없어서 망정이지."

"그래서 앞으로의 방침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뭐 마땅한 방법이라도 있소? 의도치 않게 생긴 신분이니 제약이 꽤나 많을 텐데."

"그건 차차 고민해 봐야겠지."

원래라면 세오른의 힘을 이용해서 놈들을 억제하거나 혹은 계획을 방해할 생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세오른이 검은 여명회를 처리해 주길 바라는 것은 너무 낙관적인 바람이다.

조금 더 이쪽도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놈들의 뿌리를 뽑을 필요가 있었다.

"흠."

열었던 슈트 케이스를 다시 잠그려던 루드거는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서 한스에게 툭 던지듯 질문했다.

"한스. 그보다 이미 2일 전에 이곳에 도착했으면 바로 당일에 만나자고 하지 그랬나. 왜 이틀이나 더 기다려 달라 한 거지?"

"그게 무슨 소리요?"

"무슨 소리냐니. 그제 밤 늑대인간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이곳 레더벨크에 쫙 퍼졌다. 심지어 세오른에도 널 목격했다는 사람이 있었어."

"예? 형님. 그게 무슨 소리요? 전 레더벨크에 온 게 오늘이었는데."

"뭐?"

루드거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묻고 말았다.

그건 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레더벨크에 늑대인간 소문이 돌고 있었다고요? 내가 오기 전부터?"

"그래. 나는 그게 너인 줄 알았는데."

"아니, 나도 오늘 왔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형님도 내 성격 알잖소. 내가 그제 왔다면 바로 만나자고 했겠지, 여기서 이틀 동안 죽치고 있었겠소?"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렇다면 지금 퍼진 늑대인간 소문은 대체 누구 짓이지?

아우우우우!!!

그 순간 안개가 뒤섞인 어둠 너머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야생 짐승들의 위험을 마주하지 않게 됐다고 하지만.

이 상징적인 짐승의 울음소리를 지금 자리에 있는 두 남자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형님."

"어."

루드거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위를 경계했다.

바람을 타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귓가에 작게나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진짜 늑대인간이다."

"소문이 아니라 진짜였단 말이오?"

"아마도."

그 순간 루드거와 한스는 동시에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벽돌로 지어진 공장과 공장의 사이.

그 높은 옥상 위를, 때마침 검은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가로지르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검은 털을 지닌 짐승이 피처럼 붉은 안광의 궤적을 허공에 흘렸다.

짐승 특유의 역한 냄새가 코끝에 후욱 끼쳐왔다.

저건 가짜 따위가 아니라고 본능이 느낀다.

피부 위로 솟은 닭살을 손으로 쓸어내며 한스가 물었다.

"미친, 진짜였잖아.... 형님, 일단 자리를 뜰까요? 저놈이 당장 우리를 인지하진 못한 거 같은데."

"그것도 시간문제다."

늑대인간은 주위를 빠르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멀리까지 떠나가는 일 없었다. 녀석은 공장 지대 주위를 배회하며 이곳저곳을 누비는 중이다.

놈은 지금, 먹잇감을 찾고 있는 것이다.

'방금 늑대인간의 목에 뭐가 있던 거 같았는데.'

늑대인간이 찰나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루드거의 눈은 짙은 안개를 꿰뚫고 늑대인간의 모습을 선명하게 훑었다.

특히 시선을 끌었던 것은 녀석의 목에 달려 있는, 인식표와 비슷한 무언가.

'잡아먹은 사람의 물건인가? 아니야. 오히려 목줄과 같은 구속구에 가까웠어.'

어쩌면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무언가를 착각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 늑대인간이 하필 레더벨크에 나타나고, 세오른에 소문이 퍼졌다는 사실이 못내 걸렸다.

"한스. 아무래도 확인을 해 봐야겠다."

"확인이라굽쇼? 설마 저 늑대인간을 잡겠다고?"

"저 늑대인간, 뭔가 수상하다. 어쩌면 누군가 인위적으로 놈을 풀었을지도 몰라."

"예? 그걸 대체 누가...."

"그걸 지금부터 확인해 봐야겠지."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슈트 케이스에서 물건들을 하나씩 챙겨 들었다.

허리에 가죽 벨트를 둘렀다. 다기능 벨트에는 비어 있는 홀스터들이 가득했다.

루드거는 온갖 물건들을 벨트의 빈 슬롯에 하나씩 집어넣었다.

투척 무기. 근접 무기. 시약이 담긴 약병들.

마지막으로 새까만 빛을 띠는 리볼버 두 정.

척.

루드거는 총기를 빠르게 점검한 뒤 등허리에 교차하듯 꽂았다.

철컥.

루드거는 양 팔뚝에 기계 장치가 달린 건틀렛까지 착용을 마쳤다.

하나씩 장비를 착용해 나가는 루드거의 모습을 보며 한스는 예전 그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형님이 그거 사용하는 것도 오랜만에 보는구려."

온갖 장비들이 추가됐는데도 루드거의 외형은 바뀌지 않았다.

그만큼 지금 사용하는 도구들은 매우 은밀하고, 또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 물건들이었다.

"크립티드 사냥꾼으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나. 그때도 가명을 사용하지 않았소?"

"그랬지."

"그 이름이 뭐였더라? 형님이 가명을 하도 많이 써야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대. 바, 반 뭐시기?"

"반 헬싱."

장비를 모두 착용한 루드거는 슈트 케이스를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아브라함 반 헬싱."

그것은 한때 루드거가 사냥꾼으로 활동할 때 사용한 이름이었다.

◈ 22화 기계태엽도시의 사냥꾼 (1)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대륙 남부의 중소국가 중 하나인 두르망 왕국은 갑자기 들끓는 크립티드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다.

도심 한복판에 늑대들이 돌아다니고 기괴한 짐승들이 밤이 될 때마다 사람들을 잡아먹으며 하루가 멀다고 피 냄새가 끊이지 않는 악몽이 한 달이 넘게 지속된 것이다.

경관들조차도 속수무책이었고

병사와 기사들을 투입해도 크립티드는 보란 듯이 기사들을 농락하며 그들의 포위망을 피해 갔다.

사태는 해결되는 일이 없이 지지부진 늘어졌다.

그중 가장 악명이 높은 크립티드가 하나 있었다.

두르망 왕국의 대도시 중 하나인 제보당(Jévaudan)에서 활동하던 괴수였다.

이 녀석은 무려 정예 병력이라 할 수 있는 기사를 셋이나 잡아먹은 희대의 괴물이었다.

제보당의 악몽이었으며 왕국의 공포로 군림한 최악의 크립티드.

제보당의 괴물.

두르망 왕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크립티드를 토벌하는 자에게 막대한 포상을 내리겠다는 공문을 뿌렸다.

소문을 들은 대륙의 온갖 프리랜서 마법사, 떠돌이 기사, 유명한 용병단들이 두르망 왕국에 모였고 대대적인 크립티드 토벌 작전에 들어갔다.

무수한 크립티드들이 죽었고, 적잖은 사람들 또한 죽었다.

그때 흘린 피가 지면을 붉게 물들였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때 벌어진 사냥을 '피의 밤'이라 불렀다.

피의 밤은 여러 사람에게 명성을 심어 주기 충분했다.

그때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하나 있었다.

단신으로 가장 악명이 높았던 제보당의 괴수를 격파하고, 그 외의 크립티드의 최대 사살 전과를 올린 자.

유명한 마법사도, 명성을 날리던 고위급 기사도, 정예로 이루어진 특급 용병단도 아닌 그는.

고작 일개 사냥꾼이었다.

그 사냥꾼은 온갖 도구와 무구를 다루는 데 능통했으며, 피의 밤 이후로 1년 동안 두르망 전역을 돌아다니며 크립티드를 무려 세 자릿수 넘게 격파한 전적을 세웠다.

자신의 정체를 잘 드러내지 않아 신비주의자로도 유명한 그 사냥꾼의 이름이 바로.

'아브라함 반 헬싱'이었다.

* * *

장비를 모두 갖춘 루드거는 대로변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눅눅한 밤안개가 코트 위로 가득 내려앉았다.

가로등 주위로 뿌연 주홍색 불빛이 안개의 물을 먹은 것처럼 흐릿하게 퍼진다.

질척한 진흙의 냄새의 사이로 은근하게 풍겨 오는 짐승의 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추억이군.'

꽝!

루드거는 곧바로 길거리에 날려 있는 드럼통 하나를 발로 걷어찼다.

쿠당탕!

드럼통이 쓰러지면서 나는 강렬한 소음이 공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먹잇감을 찾아 헤매던 늑대인간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 흉악한 눈동자가 대로변 중심에 홀로 서 있는 루드거를 발견했다.

크르릉.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늑대인간이 루드거의 앞에 내려섰다.

'크군.'

루드거는 늑대인간의 모습을 더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체고는 약 2.5m 이상. 눈동자는 핏발이 서 있고 전신에 검은 털이 가득하다.

양손에는 날카로운 손톱이 뾰족하게 솟아 있었는데, 그 예기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섬뜩하다.

저기에 걸리면 강철도 종이처럼 찢기리라.

하지만 무엇보다도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늑대인간의 목에 채워진 금속 구속구였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늑대인간의 목에 저런 것이 그냥 달려 있을 리가 없다.

이성을 잃은 짐승이 저 스스로 자처해서 목에 저런 걸 찼을 리도 없다.

그렇다는 건 단 하나.

'누군가 의도적으로 저 늑대인간을 키웠거나 만들었다.'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장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인 데다가 과학이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했으며, 그가 알고 지내던 한스만 해도 짐승에게 물리면 그 짐승으로 변하는 체질을 지녔으니까.

뭐, 어디 비밀스러운 조직에서 늑대인간을 실험체로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

'문제는 왜 하필 이 타이밍이냐는 거지.'

지금까지 별다른 소식도 없이 잠잠하다가 하필 세오른 아카데미가 개강하고 난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건이 터졌다?

그것도 그가 부임한 이 해에?

너무 노골적인 상황에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뭐, 일단 녀석을 잡아 족쳐 보면 알 수 있겠지.'

루드거는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늑대인간은 눈앞의 인간이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향해 전의를 끌어올리자 불쾌감을 느낀 것인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우우우우!!!

가슴을 펴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짓쳐 들며 포효한 늑대인간이 루드거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네 다리로 지면을 빠르게 질주하는 늑대인간은 자동차보다 더 빨랐다.

루드거는 그 움직임을 주시하며 뒤로 슬쩍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 루드거가 있던 자리에 늑대인간의 발톱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쳤다.

크르르!

늑대인간이 두 팔을 쉬지 않고 휘둘렀다. 루드거는 계속 백 스텝을 밟으며 회피에 전념했다.

툭.

루드거의 갈색 구두 끝이 지면에 닿는 순간 기묘한 파장이 주위로 퍼져 나갔다.

크와앙!

늑대인간의 공격이 한 번 빗나갈 때마다 루드거는 계속 발끝으로 지면을 두드리며 마력의 파장을 퍼뜨렸다.

스치기만 해도 뼈까지 갈려 나갈지도 모르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루드거는 늑대인간의 공격을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크와아아!

약이 바짝 오른 늑대인간이 포효를 내지르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 상태로 덮쳐, 피하지 못하게끔 붙잡을 생각이었다.

머리를 썼군.

모자챙에 가려져 있던 루드거의 입이 미소를 머금었다.

키이이이잉!

루드거에게 달려들려던 늑대인간이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지면에 고꾸라졌다.

철벅!

바닥에 깔린 진흙의 위로 늑대인간이 주욱 미끄러졌다.

"어, 어어?"

멀리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한스는 갑자기 늑대인간이 풀썩 쓰러진 모습에 눈을 크게 뜨며 의아해했다.

저놈이 뭘 잘못 먹은 건가?

"머리가 좀 많이 울릴 거다."

루드거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늑대인간의 등을 살며시 지르밟았다.

늑대인간은 인간보단 짐승에 가깝다.

그리고 갯과이다 보니 평범한 사람은 듣지 못하는 고주파에 특히나 민감하다.

루드거가 늑대인간의 공격을 피하면서 발을 구른 것은 바로 그런 마법을 발현하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음파와 진동 마법을 적당히 혼합한 마법은 인간에게는 아무렇지 않겠지만, 일정 대역대 너머의 소리를 듣는 늑대인간에게는 다르게 다가온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늑대인간의 귀를 울리고, 뇌가 흔들리는 초음파가 주변 일대를 계속 뒤흔들고 있었다.

"굳이 비싼 은 같은 걸 사용할 필요도 없지."

애초에 죽이는 것이 아닌 당장에는 제압이 목적이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방법은 없었다.

자, 그러면 대체 어디서 이런 녀석을 만들었는지 확인을 한번 해 볼까.

루드거가 주사기를 하나 꺼내 녀석의 피를 채취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삐이이익!

"여기다! 여기서 소리가 났다!"

"다들 빨리 움직여!"

호루라기를 부는 소리와 함께, 안개 너머에서 제복을 갖춰 입은 경찰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2일 전부터 늑대인간의 소문 때문에 순찰을 돌던 경찰들이 이곳에 일어난 소란을 듣고 몰려온 것이리라.

'하필 이 타이밍에.'

루드거가 잠시 한눈을 판 그 찰나의 순간, 얌전히 있던 늑대인간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루드거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 넘어지는 불상사를 면했다.

루드거는 곧바로 늑대인간의 반격을 경계했지만, 늑대인간은 애초에 루드거에게 관심 자체가 없었다.

녀석은 머리를 몇 번 흔들더니 이내 등을 돌려 달아났다.

'이런.'

설마 늑대인간이 이런 상황에서 도망을 칠 줄이야.

루드거는 한숨을 내쉬며 주위에 퍼뜨린 고주파 마법을 해제했다.

마력 등을 들고 다니는 경관들이 하나둘 등장하자 루드거도 슬슬 자리에서 물러나야겠다고 판단했다.

"저기다! 저기 누군가 있다!"

"수상한 사람은 모두 구속해!"

어느덧 늑대인간은 공장의 벽을 기어 올라가 옥상에 오르는 중이었다.

루드거는 그런 늑대인간을 쫓아 달렸다.

마력 등과 호루라기 소리를 피해 골목길을 내달린다.

어두운 골목길을 질주하던 루드거는 늑대인간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허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촤악!

건틀렛의 손목 아래에 달려 있던 기계 태엽이 빠르게 돌아가더니 이윽고 와이어 달린 갈고리가 옥상을 향해 쏘아졌다.

철컥!

갈고리가 옥상 난간에 고정된 순간 톱니바퀴가 회전하며 와이어를 빠른 속도로 감았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힘.

루드거는 그 반동을 이용해 옥상으로 날아올랐다.

통칭 와이어 런처라 불리는, 루드거가 사냥꾼으로 활동할 때 애용하던 물건이었다.

루드거는 옥상 위로 화려하게 착지했다.

촤르르륵!

와이어를 당겨 갈고리를 회수한 루드거는 저 멀리 도망치는 늑대인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놓치지 않는다.'

루드거는 두 다리에 마력을 둘렀다.

마법사들 또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마력으로 자신의 육체를 강화시키는 방법이 널리 퍼진 지금 세상이다.

루드거는 강화된 각력으로 옥상을 박차고 늑대인간의 뒤를 쫓았다.

후우웅.

공장지대의 밤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저 멀리 도망치는 늑대인간의 모습이 점차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늑대인간은 달리면서 무언가 기묘한 기척에 뒤를 돌아보다가, 자신을 쫓아오는 루드거를 발견하고는 더욱 도망치는 속도에 박차를 올렸다.

공장의 옥상과 옥상 사이를 쉬지 않고 건너뛰던 늑대인간은 저 아래 커다란 철로 위로 뛰어내렸다.

때마침 마정석을 잔뜩 실은 화물 열차가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쿠웅!

늑대인간은 화물칸 위에 거칠게 착지했다.

루드거도 놓칠세라 아래로 뛰어내려 화물칸 위에 내려섰다.

다리에 실은 마력을 발바닥에서 흘리며 착지의 충격을 최소화한다.

루드거는 가볍게 어깨를 손으로 툭툭 털며 늑대인간을 응시했다.

늑대인간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루드거를 돌아봤다.

덜컹 덜컹.

열차의 위에서 루드거와 늑대인간이 3칸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마주 봤다.

열차가 내달리며 부는 강한 바람에 루드거의 코트 자락이 흩날렸다.

주위로 주홍색 가로등이 가로로 길게 늘어나며 빛을 난반사하듯 흩뿌렸다.

"원래는 그냥 적당히 제압만 하려고 했지만."

크르르릉.

"그럴 수는 없겠군."

녀석의 상태와 주위에 경관들이 소란을 듣고 찾아오는 걸 보니 그럴 여유가 없어졌다.

뺨 끝을 스쳐 지나가는 밤바람과 열차의 선두에서 내뿜는 증기로 시야가 순간이지만 흐려졌다.

훅!

그 틈새를 뚫고 늑대인간이 루드거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서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는 꽤나 날카로운 움직임.

그러나 그런 늑대인간의 움직임은 이미 루드거가 몇 수 앞을 꿰뚫고 있었다.

촤라락!

루드거를 향해 달려들던 늑대인간은 귓가를 울리는 기묘한 소음에 달려드는 걸 멈췄다. 그것은 짐승으로서 지닌 일종의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과연 그 판단은 옳았다.

늑대인간의 목덜미 양쪽으로 날카로운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으니까.

"감이 좋군."

늑대인간의 목의 피부를 가르고 지나간 그것은 팽그르르 회전하며 루드거에게로 돌아갔다.

그것은 날카로운 칼날이 부채처럼 펼쳐져 있는 부메랑이었다.

조금만 멈추는 것이 늦었다면 저 날카로운 원형 톱날이 늑대인간의 목을 갈랐을 터.

늑대인간은 목에 흐르는 상처를 빠르게 재생시켰다.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에 분노한 녀석의 전신에 핏줄이 돋아났다.

"방금 그걸로 한 번에 끝내려고 했는데."

루드거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허리춤에 걸어 놓은 지팡이 하나를 꺼내 쥐었다.

이번에는 루드거가 달려들 차례였다.

오른손에 지팡이를 쥐고 왼손으로는 마력을 모아 [빛나는 돌] 마법을 만든다.

그것을 그대로 총알처럼 쏘아 내 늑대인간의 한쪽 안구를 노렸다.

휙!

늑대인간은 고개를 바로 숙이며 [빛나는 돌]을 회피했다. 그 순간 루드거는 왼손의 검지를 까닥였다.

그러자 늑대인간을 스쳐 지나간 [빛나는 돌]이 허공에서 선회하더니 늑대인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빠악!

뒤통수에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늑대인간이 당황하는 사이 루드거가 늑대인간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향해 지팡이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늑대인간이 두 팔로 그것을 막으려는 순간, 톱날 부메랑이 날아와 늑대인간의 두 손을 꿰뚫었다.

루드거가 예상하고서 미리 던져 놓은 것이었다.

크와악!

당황하는 늑대인간은 팔이 움직이지 않자 대신 입을 쩌억 벌리며 루드거가 휘두르는 지팡이를 그대로 물었다.

까드득!

강력한 치악력이 지팡이를 부술 듯이 깨물었다.

늑대인간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지팡이를 물었으니 뭘 어떻게 하지 못할 터.

이대로 팔의 상처가 재생되는 순간 바로 눈앞의 건방진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늑대인간의 속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루드거는 바로 다음 동작을 취했다.

스르릉.

지팡이의 자루와 손잡이가 분리되더니 그곳에서 새하얀 도신이 튀어나왔다.

너무나도 의외의 광경에 늑대인간은 입에 문 지팡이의 빈껍데기를 놓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팡이 칼.

흔히들 소드스틱이라 부르는 이것은 정면에서 사용하는 무기보다는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는 암기에 가깝다.

그리고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싸움 속에서 이것을 뽑는 순간은 오직 하나.

상대방을 반드시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뿐.

루드거의 몸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했다.

촤악!

허공에 새하얀 실선이 하나 그어졌다.

너무나도 가늘지만 선명한 그 빛은 늑대인간의 목을 부드럽게 갈랐다.

◈ 23화 기계태엽도시의 사냥꾼 (2)

'씁. 어후. 진짜 하마터면 나도 수상한 사람으로 몰려서 잡힐 뻔했네.'

루드거의 슈트 케이스를 챙겨 든 한스는 갑자기 현장에 들이닥친 경찰들의 시선을 피해 어두운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곳에 도착한 건 오늘이었지만, 이미 레더벨크 도시의 지도를 머릿속에 넣어 놓은 한스이기에 길을 헤매는 일은 없었다.

'그보다 늑대인간을 잡으러 간다니. 대체 언제쯤 돌아오려고.'

그렇게 생각을 하던 차에 허공에 무언가가 한스의 앞에 뚝 떨어졌다.

그의 발치까지 굴러온 그것은 거대한 늑대의 머리였다.

히익!

한스는 어깨를 움찔 떨며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놀랐나?"

맞은편 골목길의 어둠 속에서 루드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구두와 가죽 바지. 그 위에 입은 새하얀 와이셔츠와 갈색 가죽 조끼. 바깥에 걸친 거무칙칙한 롱코트와 더불어 머리에 쓴 모자까지.

모르고 마주쳤다면 자리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르는 위압감이 풍기는 생김새.

한스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외쳤다.

"이런 젠장! 형님! 좀 나타날 때는 말 좀 하고 나타나시오! 하마터면 가방을 떨어뜨릴 뻔했잖소!"

"안 그랬으면 된 거지."

"어우 씨. 그보다 이게 그 늑대인간이오? 뭐, 형님의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닌데, 용케 그 상황에서 이 무시무시한 놈을 잡았나 싶군그려."

혀를 빼문 채로 죽은 늑대인간의 머리를 확인한 한스는 몸을 바르르 떨며 루드거에게 검은색 슈트 케이스를 넘겼다.

그것을 받아든 루드거는 등을 돌려 앞장서서 걸었다.

한스도 그런 루드거의 뒤를 쫓았다.

"저 머리, 저대로 놔둬도 되는 거요?"

"그래. 더 이상 필요 없다."

"아니, 그러면 왜 가져온 거요?"

"너 놀래라고."

"...아직도 아까 골목길에서 형님 골려 주려던 거 마음에 담아 놓고 있었소?"

루드거가 말이 없자 한스는 한숨을 푹 쉬며 두 손을 들었다.

"알겠소. 내가 졌소. 내가 졌으니까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맙시다."

"하는 거 봐서."

그렇게 골목길을 벗어난 두 사람은 어느 정도 행인들이 보이는 인적 있는 도로로 나왔다.

"그래서 방금 그 늑대인간의 정체가 대체 뭐였소? 진짜 크립티드요?"

"아니. 누군가 인공적으로 만든 실험체였다."

"실험체? 돌겠군. 이 도시에 있을 때만은 나도 몸 좀 사려야겠소. 그걸 만든 놈들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니까."

"안 그래도 그거 관련해서 너한테 할 말이 있다."

"할 말? 나 지금 갑자기 엄청 불안해졌는데, 안 들어도 되는 거요?"

"...."

"아, 알았소! 뭔지 말이나 해 보시오."

"원래 계획했던 일을 조금 앞당겨야겠다."

"원래 계획? 설마...."

"수도보다는 여기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드는군."

루드거는 한스를 향해 주머니 두 개를 툭 던졌다.

한스가 그것을 받아 들어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하나는 금화가 가득 담겨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그의 짐승화 중화제가 들어 있었다.

"형님. 이건...?"

"우리도 슬슬 자리를 잡아야 하지 않겠냐."

"그게 이 레더벨크라고요? 세오른과 맞닿았고, 비밀 결사인 검은 여명회가 있을지도 모를 이곳에서? 심지어 대도시인 만큼 뒷골목의 갱단까지 있는데?"

"그래."

"돌겠군."

"자금은 넉넉하니 열심히 해 봐라."

"형님은?"

"나는 일단은 아카데미 교사의 신분인지라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한다. 총장은 아직 나를 의심하고 있어."

"그래서 지금 이걸 나 혼자 다 하라고?"

루드거는 고개를 저었다.

"다 하라는 게 아니다. 일단 중요한 정보부터 모으라는 거다. 이 도시의 갱단이 누가 있고 마피아는 있는지, 뒷골목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또 거기서 어떻게 자리를 잡을 수 있겠는지. 그걸 알아내고 내게 말하면 돼."

그때는 내가 나설 테니까.

루드거의 뒷말을 알아먹은 한스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건 또 내 전문이지."

* * *

아카데미의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챙겨 왔던 짐을 숙소에 모두 풀었다.

한스 혼자에게 일단 정보 수집 일을 맡겼지만 괜찮을 거다.

못 미더워 보이지만 정보를 모으는 능력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까.

괜히 내가 자주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나만의 세력을 키워야 하겠지.'

일단 당장에 움직일 수는 없으니 준비 작업만 해 놓기로 했다.

아직 총장이 나를 의심하고, 비밀 결사인 검은 여명회가 정확히 뭘 하려는지 확실히 모르는 이상.

섣불리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

짐 정리를 간단하게 끝낸 나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복기했다.

'그 늑대인간. 순수 크립티드가 아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실험체였어.'

늑대인간의 존재는 새삼 놀랍지도 않다.

이 세상에도 몬스터는 존재했고, 지금은 대륙의 바깥이라 할 수 있는 그림자장벽 너머로 쫓겨났다지만, 그 흔적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

크립티드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시다.

몬스터의 아종인 놈들은 지금 와서는 몬스터라는 명칭보다는 도시 전설이나 혹은 마력의 비이상적인 발생으로 인해 나타난 괴담에 가깝다.

내가 이번에 잡은 늑대인간도 크립티드의 일종이지만, 이건 정확히 말하면 가짜에 불과하다.

'예로부터 늑대인간을 만들어 내는 실험이나 주술은 알음알음 존재해 왔으니까.'

늑대의 발자국이 찍힌 물에 여러 약재를 넣고 거기에 늑대의 털을 섞어서 만든 저주의 물약이 존재한다.

평범한 인간도 이걸 마시면 짐승으로 변할 수 있는 변신 물약.

당연히 이건 흑마법이다.

흑마법은 국가 차원에서 금지를 내리고 있어서, 걸렸다가는 이유 불문 무조건 사형이다.

뒷세계에서도 거의 떠돌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늑대인간을 대놓고 만들다니. 심지어 실험체로서의 표식까지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어지간한 세력이 손을 댄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목줄을 걸어 놓은 걸 보면 야생의 늑대를 생포해서 인간의 인자를 섞은 건가?

구속구의 표식, 그 외에 늑대인간의 시체에 새겨진 여러 실험의 흔적들까지.

그건 분명 과학이 깃든 결과물이었다.

인간을 타락시켜 짐승으로 변이시키는 물약은 이제는 거의 사라진 흑마법사들의 전유물.

거기에 과학이 끼어들었다는 건.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걸 종용했다는 것.'

그렇다면 그게 누구일까.

저 정도의 실험체를 비밀스럽게 만들려면 보통 공간으로는 부족하다.

꽤 큰 실험실이 필요하고, 심지어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아야 한다.

공간, 은밀성, 그리고 실험의 여부까지.

그 모든 걸 고려하면 막대한 자금줄을 댈 수 있는 큰손이 이번 일에 끼어 있다는 말이 된다.

귀족, 혹은 백만장자.

'제국 내부에 수상할 정도로 돈 많은 자가 있나 보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의심이 가는지도 모르겠고, 일단 늑대인간을 처치한 데다가 녀석의 혈청까지 채취를 끝냈으니 더 이상 이 건으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거다.

모처럼의 주말인데 더 이상 귀찮은 일에 엮이기도 싫고, 내일 일요일이니 푹 쉬도록 하자.

'그보다 다음 수업은 어떻게 할지, 또 준비해야 하네.'

여러모로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골치가 다 아프다.

* * *

평화로운 일요일을 보내고 새로운 주의 시작을 알리는 월요일 아침.

나는 간단한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 식사를 때운 뒤, 본관에 있는 내 개인 교무실에 출근했다.

수업은 내일이지만, 일단은 신임 교사라서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게 사회생활이니까.

집무실 책상에 앉은 뒤 숙소에서 챙겨온 오늘 자 신문을 펼쳤다.

레더벨크나 세오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단하게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뭐냐.'

바로 오늘 아침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분의 1면에는 대문짝만하게 하나의 제목이 박혀 있었다.

[레더벨크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살인마. 아직도 기승!]

-지난 일요일, 레더벨크에 5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나왔다. 이로써 총 사망자는 10명을 넘게 됐다. 범인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목격자들에 의하면 그것은 검은 털을 지닌 끔찍한 짐승이라고 한다. 경찰들은 놈이 그저 미치광이 살인마일 뿐이고 금방 체포하겠다 발표했지만, 시민들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다.

'뭐지 이건.'

나는 신문의 1면에 적힌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내가 지난주 토요일에 죽여 버린 늑대인간 사건이었다.

하지만 신문에서는 일요일에 사망자가 나왔다고 했다.

그것도 무려 5명이나.

'그때 나는 확실히 놈의 숨통을 끊었어. 그런데도 새로운 희생자가 나왔다는 건, 하나가 아니었단 뜻인가?'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삐익! 삐익!

업무용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반투명한 수정구가 묘한 소리를 내며 점멸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

'총장이 부른다.'

정확히는 교사들을 모으기 위한 일종의 신호 아티팩트다.

이것은 회의를 할 내용이 있다는 소리였다.

'가야겠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걸이에 놓은 외투를 걸쳤다.

문득 지난주 금요일에 셀리나 선생님이 식사 도중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늑대인간을 목격했다는 학생들의 증언이 있다고 했던가.

'레더벨크의 희생자, 아카데미 내에서의 목격담까지.'

내가 사냥한 한 마리를 제외한다고 쳐도, 나머지 늑대인간의 숫자는 최소 둘은 더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그런 불안한 생각을 애써 접으며 나는 교사들이 모이는 회의장으로 향했다.

웅성웅성.

본관의 높은 층에 자리 잡은 회의장은 교사들로 가득했다.

각자 자신이 가르치는 분야에서만큼은 확실히 실력이 있는 자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대부분 눈동자에 담긴 것은 호기심이었지만, 그것이 나를 향한 호기심이 아닌 내가 발명한 소스코드를 향한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루드거 선생님! 여기예요!'

저 구석진 자리에서 낯익은 분홍 머리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셀리나 선생님을 발견한 나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저 사람이 바로 루드거 첼리시?'

'꽤 대단한 마법을 발명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

'몰락 귀족 출신이라고 하던데, 꼴에 분위기 잡기는.'

일부 교사들 사이에서는 몰락 귀족 출신인 나를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그들의 적의와 질투 어린 시선은 상당히 따가웠지만, 나는 그냥 가볍게 무시했다.

셀리나 선생님의 옆의 비어 있는 자리에 앉자 그녀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주말 잘 보내셨어요?"

"푹 쉬었습니다. 셀리나 선생님도 잘 쉬셨습니까."

"네. 저도 정말 오랜만에 푹 쉰 거 같아요. 그보다 소식 들으셨어요?"

"이번에 모인 거 말입니까?"

"어젯밤 1학년 학생 둘이 괴한에게 습격당해서 크게 다쳤다고 해요."

셀리나의 설명을 들어보니 상황은 이러했다.

지난밤.

아카데미 바깥으로 외출했다가 기숙사로 돌아오던 1학년 학생 둘이 세오른 내부에서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상당한 중상이었으며, 심지어 세오른 내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큰 충격을 선사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막 눈을 뜬 학생 중 하나가 말하기를.

끔찍한 짐승이 자신을 공격했다고 한다.

"지난주부터 나돌던 늑대인간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요. 인근 도시인 레더벨크에도 피해자들이 나왔다고도 하고."

"그렇군요."

단순히 헛것을 봤다고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것이, 피해자의 몸에 새겨진 상처는 마치 짐승이 할퀸 것 같다고 한다.

이번에 교사들을 모두 모은 것도 그런 이유이리라.

일단 세오른의 교사들도 유사시에는 전력으로 활동해야 하는 것이 계약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내부 경비나 사용인들만으로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힘들다는 소리겠지.

'상대가 늑대인간이면 괜한 인력을 쏟아붓는 것보다 정예라 할 수 있는 교사들을 보내는 것이 훨씬 더 낫겠지.'

세오른의 교사라고 해서 그냥 평범하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명망 높은 세오른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점에서 교사들의 실력도 어느 정도 보장이 된 셈.

"총장님이 오십니다."

얼굴에 주름이 있는 50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여성이 말하자, 저들끼리 뭐라고 대화를 나누던 교사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누구인가 싶어서 보는데 옆에서 셀리나가 설명해 줬다.

"마리 로스 선생님이세요. 세오른에 20년 이상 부임하신 분이시죠. 가르치는 분야는 약제학이고요."

"그렇군요."

이 세오른에서 20년 이상 부임? 그렇다는 건 그만큼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는 소리다.

그녀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니 다른 교사들도 다 입을 다물고 있다.

"총장님께서 오십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총장이 들어왔다.

그녀는 언제 봐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매혹적인 황금안과 더불어 백발과 연분홍색의 투톤 헤어는 자연스럽게 사람의 시선을 잡아끈다.

"모두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 제가 이렇게 급하게 부른 것은 여러분들에게 공지할 사항이 있어서예요."

총장은 시간을 끄는 일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회의장에 모인 교사들이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최근 세오른 내부에 괴한이 나타났다고 해요. 실제로 어젯밤에는 올해 입학한 신입생이 둘이나 습격당해 중상을 입었죠."

"범인은 누굽니까?"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다만 목격자에 의하면 늑대인간, 즉 크립티드의 짓이라 하더군요."

소문의 늑대인간이 언급되자 교사들 사이에서도 파문이 일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총장님. 뭐 착각하신 거 아닙니까? 이 세오른에 크립티드라뇨."

그렇게 노골적으로 들고 일어난 것은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탐욕스러운 중년인이었다.

기름진 탁한 금발을 깔끔하게 2대 8로 가르마를 타고 콧수염까지 길렀는데, 얼굴에서 심술이 가득 묻어나는 관상이었다.

어느 학교에나 꼭 하나씩 있다는 꼰대 주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군.

다만, 그가 등장하면서 회의장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무슨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휴고 부르테그 선생님?"

"이곳은 세오른입니다. 엑실리온 제국의 비호를 받고 있는 곳이죠. 그런 세오른에 늑대인간이라니, 학생들이 그저 떠도는 괴담만 믿고 무슨 착각을 벌인 게 아닌가 싶군요."

"휴고 선생님. 뭘 모르시는 거 같은데, 제가 조금 전 피해자가 둘이나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피해자 둘 다 귀족 가문의 자식들이었죠. 그렇기에 저는 더 늑대인간의 짓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휴고 부르테그는 좌중을 한번 쓰윽 훑었다.

"저는 이번 범인이 같은 세오른의 학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평민이요."

"뭐라고요?"

"그러지 않고서야 그 많은 학생 중에서 귀족의 자제들만 다쳤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 세오른에서 늑대인간이 습격을 했다? 차라리 그 말보다는 오히려 일부 학생들이 일부러 늑대인간인 척하고 사건을 벌였다는 것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군요."

그 말은 분명 그럴싸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나는 휴고의 말에 무언가 본능적인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저건 순수하게 이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총장의 말에 트집을 잡고, 이번 사건의 잘못을 특정 학생들에게 떠넘기려는 짓이지.

분위기를 훑어본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대충 알겠군.'

세오른도 하나의 조직인 이상, 내부에 파벌이 존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학생들이 평민과 귀족으로 서로 편이 갈라지는데 교사들이라고 오죽할까.

당장에 교사들도 평민 교사와 귀족 출신 교사들 간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에 나와 같이 들어온 신임 교사 크리스 베니모어도 몰락 귀족 운운하며 식사를 거절했었지.

'마냥 검은 여명회가 불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또 그건 아닌 것 같군.'

차라리 휴고 혼자서 저렇게 까불거리는 거라면 몰랐을까, 문제가 있다면 은근하게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다는 것.

일종의 귀족 출신 교사들이 뭉치며 하나의 파벌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파벌은 총장의 파벌과는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고.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이런 내분의 상황이라니.

세오른의 실태가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할 때 자그마한 벌레 한 마리가 벽을 기어오며 내 어깨 위에 올라탔다.

뭔가 싶어서 손으로 튕겨 내려는 순간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벌레가 아니었다. 벌레의 모습을 한 작고 얇은 종이였지.

다행히도 아직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쥐고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끔 내용물을 확인했다.

대부분 교사의 관심은 지금 총장과 휴고의 신경전에 몰려 있어서 다행이었다.

"...."

내용물을 확인한 나는 살짝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실험체 3마리 탈주. 즉시 생포 요망. 여의치 않을 경우 제거.」

이 메시지를 보낸 것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 늑대인간을 만든 배후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에 적힌 문장이었다.

「실험체 소재를 빼앗길 경우에 이쪽의 신분이 탄로 날 위험이 있음.」

아,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 24화 검은 여명회 (1)

쪽지를 구겨서 안주머니에 넣은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일단 검은 여명회가 이번 늑대인간 사태와 관련이 있는 건 알겠다.

다만 다급하게 생포, 여의치 않을 경우 제거해 달라는 걸 보면 아마 늑대인간의 탈주 사건은 이쪽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겠지.

'문제가 있다면, 이게 들킬 경우에는 검은 여명회가 크게 타격을 입는다는 건데.'

놈들이 타격을 입는다면 그건 내게 있어서 호재나 다름없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속으로는 쌍수를 들고 반겨야 하는 상황.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마지막에 적힌 문구다.

-이쪽의 정체가 들킬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즉, 이 루드거 첼리시라는 신분이 늑대인간 실험체를 만든 것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소리다.

잡아야 하는 건 최소 3마리. 아니, 이제는 2마리.

즉 나는 세오른 측보다 먼저 늑대인간을 발견해서 잡은 다음에 놈들을 죽여야 한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늑대인간에게 표식이 있었지.'

아마 이 표식 자체가 실험을 한 놈들과 연관이 있을 거다.

문제는 루드거 첼리시가 거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이 돼 있다는 소리겠지.

솔직한 심정으로 이게 나와 관련이 없었다면 그냥 세오른이 처리하도록 일을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내가 연관되어 있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들키면 죽는다.

"루드거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쪽을 걱정스럽게 되묻는 셀리나 선생님의 질문에 괜찮다고 답하며 나는 머리를 굴렸다.

일단 늑대인간이 무려 3마리라는 것은 확인이 끝났다.

내가 하나 잡았으니 남은 건 2마리.

각자 세오른에 하나, 레더벨크에 하나겠지.

'놈들을 사냥해야 한다.'

그러는 사이 총장과 휴고의 신경전은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갔다.

"뭐, 휴고 선생님이 편협한 사고로 그렇게 구는 건 본인의 자유죠. 다만, 주어진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길 바랄게요."

"그래서 순찰을 강화하겠다는 겁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숫자도 조금 더 늘리고, 무엇보다 늦은 밤 학생들이 전부 귀가하기 전까지는 교사인 저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 말에 휴고는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학생이 걱정되는 것보다는, 자기 정도 되는 사람이 고작 사용인들이나 하는 순찰을 돌아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사태의 심각성은 다른 교사들도 인지하고 있는 바다.

휴고라 하더라도 대놓고 반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뭐, 그러죠."

"좋아요.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도 모두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경고해 주세요. 혹시라도 그걸 어길 시에는 벌점을 부여해도 상관없어요. 이건 총장인 제가 직접 내리는 지시니까요. 아시겠죠?"

"쯧. 알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교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둘 뿔뿔이 흩어졌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려 했지만, 몇몇 사람들이 내 앞길을 막아서는 것이 먼저였다.

"루드거 첼리시 선생 맞나? 만나서 반갑네. 나는 점성술을 담당하는 데니엘 마스라크라고 하네."

"루드거 선생. 이쪽은 강화 수업을 담당하는...."

그들이 내게 접근하는 이유야 뻔했다.

바로 소스코드 마법에 대해서 물어보려는 거지.

그들의 눈빛에 어린 탐욕이 그걸 말해 줬다.

"죄송하지만,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그들의 관심을 뿌리치고 회의장을 나섰다.

* * *

나는 곧바로 내 집무실로 향하는 대신 인적이 드문 창고로 이동했다.

적당히 이쯤 됐다 싶어서 자리에 멈춰 섰다.

"나와라."

회의장에서 내게 메시지를 보낸 녀석이라면, 분명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터.

메시지 몇 줄로 모든 의사를 다 전달할 수는 없을 테니 하고 싶은 말이 분명 있을 거다.

내가 말하기 무섭게 기둥 너머에서 쭈뼛거리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저...."

"말해라."

첫인상은 다람쥐 같은 인상의 소녀였다.

아니, 어디서 많이 봤다 싶더니 내가 세오른에 들어오고 보름이 지난날에 내게 접근하려 했던 검은 여명회의 부하 중 하나였다.

"무슨 일이지?"

"그, 그러니까...."

그녀는 나와 다시 마주하게 될 줄 몰랐는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면서 기둥 뒤에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는데, 나는 녀석이 세오른의 제복을 입고 있는 걸 보고 조금이지만 놀랐다.

설마하니 이곳의 학생이었던 건가.

대부분 검은 여명회 멤버들이 사용인으로 잠복해 있는 이유는, 학생의 신분은 단순히 조작하는 것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곳에 들어오려면 다른 건 몰라도 입학시험을 통과할 정도의 재능이나 걸맞은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건데.

설마하니 말단으로 보이는 이 녀석이 이곳의 학생, 그것도 이번에 입학한 1학년이었을 줄이야.

첫 만남 때는 이 녀석도 제복을 입고 있지 않아서 몰랐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따라와라."

"아, 네."

내가 앞장섰고, 그녀가 뒤를 따라왔다.

나는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커피는 좋아하나?"

"네?"

* * *

나는 한적한 카페에서 서드 오더 학생과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그녀는 조금 전부터 어찌할 줄 바를 모른 채 어깨를 잔뜩 움츠린 상태였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스윽 살폈다.

새하얀 피부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그리고 볼륨감이 넘치는 갈색의 단발머리에 조금 여리여리한 체구까지.

귀가 안 보이고 앞머리도 길어서 눈을 가리기 직전이다.

말 그대로 자그마한 다람쥐를 보는 것 같다.

그때 내 으름장에 벌벌 떨던 모습에서 잘못 본 게 아니었나 보다.

나는 내 앞에 놓인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놓았다.

딱.

"히익!"

커피잔과 테이블이 맞닿으며 소리가 나자 녀석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름."

"네?"

"두 번 묻지 않겠다. 이름."

"세, 세디나 로쉔입니다."

"진짜 이름인가?"

"네, 네."

"가명이 아니라고?"

이거 의외다.

이 세계에서 성씨가 있다는 것은 평민이 아닌, 그보다 더 높은 계급이라는 걸 의미한다.

귀족, 성직자. 혹은 부유한 대상인.

그런 모자랄 것이 없는 환경에서 자란 녀석이 왜 비밀 결사에 들어갔고, 이곳에 입학할 정도의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가장 낮은 서드 오더밖에 되지 않는 건지.

'아니. 오히려 이런 집안 출신일수록 더 대접을 못 받을 수도 있지.'

가장 이상한 부분은 이 정도의 재능을 타고난 녀석이 서드 오더밖에 안 된다는 것인데.

뭐, 그건 나중에 묻도록 하고.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말해라.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어, 저... 주위가...."

"음성 차단 마법을 펼쳤다. 우리가 여기서 소리를 질러도 바깥으로 대화가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거다."

"음성 차단 마법이요? 여, 역시 퍼스트 오더 님."

계속 나를 퍼스트 오더라고 하니까 참 이상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불편하다.

"일단 호칭부터 개선을 해야겠군. 앞으로 나를 퍼스트 오더 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예?!"

내 말에 세디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며 눈을 부릅떴다.

거짓말 조금도 안 보태고 나라가 망해도 저런 표정은 안 지을 것 같았다.

"괜한 의심을 사고 싶은 거냐? 나는 지금 세오른의 교사. 그리고 너는 학생이다."

"네, 네. 그랬, 었죠."

"앞으로 나를 부를 때는 루드거 선생님이라고 불러라."

"제, 제가 어찌 불경하게...."

"명령이다."

"며, 명령."

명령이라고 강하게 말하니 그녀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황송해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름을 불러도 된다는 사실 자체가 기쁜지 입술이 자꾸 올라가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황은?"

"아, 예. 전부 설명하겠습니다. 최근 늑대인간 사태는 저희 검은 여명회, 아니 정확히는 이쪽과 손을 잡은 산하 단체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갑자기 똑 부러지는 말투로 바뀌는 것에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해라.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하게."

"퍼스트, 아니 루드거 선생님도 알다시피 검은 여명회 내부에서도 파벌은 존재합니다. 특히 이번 일을 가장 열심히 추진했던 건 다른 퍼스트 오더 님인 빅터 드레드풀 님이셨죠."

"그래. 그랬지."

사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나는 전부 알고 있는 척을 하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빅터 드레드풀. 기억해야겠군.

"뒷골목의 흑마법사와 비윤리적인 실험을 일삼아서 협회에서 쫓겨난 과학자들을 모아서 만들어 낸 샴수스 학파는 기존에 하던 대로 크립티드 실험에 들어갔습니다."

"정확히 어떤 실험을 위주로 했지?"

"그건 극소수만 알고 있어서 저도 거기까지는.... 아, 그러고 보니 루드거 선생님께서 빅터 님이 도와달라고 하셨을 때 이름을 빌려주셨죠."

"이름만 빌려줬을 뿐이다. 설마 그게 이렇게까지 돌아올 줄은 몰랐지."

아무래도 반응을 보면 루드거는 빅터라는 인물과 나름 가까이 지냈던 것 같다.

다만 그것이 지금에 와서 독이 된 거고.

샴수스 학파는 크립티드를 연구했을 거고, 그 실험체가 결국에 탈출해서 지금의 상황이 벌어진 거겠지.

"일단은 그쪽의 잘못이니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하도록 내버려 둬야 했지만, 하필이면 탈출한 실험체 중 하나가 하수관을 통해서 세오른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전날 피해자가 생긴 거였군."

"예. 이건 저희 검은 여명회에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죠."

"...."

"앗, 죄송합니다. 제가 말이 너무 많아서.... 제가 흥분하면 또 자주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터라. 여, 역시 저 같은 건...."

내가 빤히 응시한 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세디나 로쉔의 태도가 눈에 띄게 소극적으로 변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첫 만남 때 버벅거리는 것과 다르게 의외로 설명을 잘해서 그저 감탄했을 뿐이다."

"그,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의외로 말은 잘하는군. 더 설명해도 좋다. 듣기 좋았으니."

"저, 정말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칭찬 몇 마디를 던져 주니 바로 화색이 되어 설명을 이어 나가는 세디나.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얘가 설명을 멈추면 나는 더 이상 정보를 알아낼 수 없다.

지금 내가 퍼스트 오더라는 껍질을 뒤집어써서 세디나의 존경심을 받고 있을 때 뽑아낼 건 전부 뽑아내야 했다.

'의외로 이용해 먹기는 쉽군.'

일단 세디나 로쉔은 검은 여명회에서도 가장 아래인 서드 오더 회원이지만, 그녀 자체의 능력은 상당히 출중하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부터 해서 설명을 이어 나가는 것까지, 대화 자체가 끊이지 않고 상당히 매끄럽다.

내게 몰래 쪽지를 보낸 것도 그녀의 마법 중 하나였겠지.

하지만 이 정도의 실력을 지닌 녀석이 왜 서드 오더밖에 되지 않았는가.

'겉돌고 있군.'

일단 세디나가 성씨가 있다는 건 그녀의 집안이 상당히 좋은 곳이라는 것.

'자기소개에서 성을 말할 때 거부감을 일으키는 반응. 즉 집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거부감? 반항감?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종류의 무언가.'

문제는 본인이 스스로의 의지로 검은 여명회에 들어왔겠지만, 다른 회원들의 시선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는 거겠지.

어쩌면 스파이일지도 모르는 데다가, 그녀 자체도 어딘가 나사 하나가 풀린 성격이다 보니 다른 멤버와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 은밀히 마법을 보낸 것, 정보에 대해 빠삭한 것, 세오른에 입학한 것까지. 가진 바 능력이 뛰어난 것에 비해서 직책이 낮다. 조직 내부에서는 대충 이용하다 버릴 말 정도로 생각하는 거로군.'

성격이 더러운 것으로 알려진 내게 전담시키듯 보낸 것만 봐도 대충 견적이 나온다.

세디나 본인은 검은 여명회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충성을 맹세할 정도로 열정적이겠지만, 정작 그 조직 자체가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다니.

본인도 그걸 아는 건지 더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더 수렁으로 빠져든다.

'검은 여명회 입장에서는 일단 데리고 있기는 하겠는데,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망설여지는 계륵 같은 존재.'

아니. 애초에 퍼스트 오더급 되는 간부가 그녀를 신경 쓸 리가 없다.

아마 목숨을 던져야 하는 임무 같은 거에 대충 소모품처럼 써먹으려 하겠지.

안 봐도 그녀의 미래가 그려진다.

'세컨드 오더 선에서 알아서 처리할 생각인가.'

회의에서 세오른 내부에 새겨진 균열을 본 것이 조금 전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검은 여명회의 내부에 새겨진 균열 또한 볼 수 있었다.

세상에 완전한 집단은 없다.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는 거다.

'이거 어쩌면....'

세오른과 검은 여명회에 샌드위치처럼 납작하게 껴 있는 상황에서, 양쪽 진영이 서로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활로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잘만 하면 세디나를 통해 무언가 챙길 수 있을지도?

"일단 실험체를 잡으면 증거 자체를 남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생포를 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지금 세간이 시끄러워진 상황에서 결국 최대한 빠르게 제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3마리나 되니 저희도 최대한...."

"아니. 두 마리다."

"네?"

나는 안주머니에 넣어 놨던 늑대인간의 구속구를 꺼내 세디나에게 보여 줬다.

"이, 이건 설마...."

"한 놈. 이미 잡았다."

"대, 대체 언제...."

"이틀 전. 레더벨크에서."

설마 벌써 셋 중 하나를 잡았을 줄은 몰랐는지 그녀의 얼굴이 몽롱하게 풀려 갔다.

"여, 역시 퍼스트 오더 님."

아주 제대로 존경한다는 표정이다.

원래부터 신뢰도를 맥스를 찍은 상태인데, 그걸 더 뚫은 느낌.

"아무튼, 이제 남은 건 두 마리인가."

"예, 예."

"하수관을 통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고 했으니, 일단 그쪽을 중심으로 수색을 넓혀 가야겠군. 아직 세오른 측에서는 이 정보를 모르고 있겠지?"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과연 며칠이나 더 갈지...."

"그럼 바로 움직여야겠군."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디나는 벌써 끝이냐는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봤다가, 무례하다 생각했는지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둘러놨던 소리 차단막을 해제했다.

"세디나 로쉔. 이야기는 잘 들었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만나지."

"네, 네! 그... 루드거, 선생님."

스스로 말해 놓고 부끄러운지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세디나.

이렇게 보면 딱 제 나이대의 풋풋한 소녀 같다.

이런 아이가 어쩌다가 검은 여명회라는 흉흉한 조직에 들어오게 된 걸까.

뭐, 본인에게 본인 나름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겠지.

"그럼."

나는 커피를 비운 뒤 카페를 떠났다.

* * *

플로라 루모스는 오늘 공강이라 여유롭게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평소라면 그저 농땡이를 피웠을 그녀였지만, 최근 그녀에게 마법의 의욕을 불태우는 한 선생 때문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가 없게 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치형 기둥이 길게 늘어진 야외 회랑을 걷던 도중이었다.

'어?'

멀지 않은 곳의 카페의 2층 유리창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당장 그녀가 듣는 수업을 가르치는 교사가 바로 저 남자인데.

루드거 첼리시.

그런데 그 남자의 태도가 뭔가 수상하다.

'맞은편의 여자애는 또 누구지?'

평소보다 어딘가 부드러운 느낌마저 풍기는 루드거는 지금, 한 여학생과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25화 검은 여명회 (2)

'뭐야. 지금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거야?'

루드거는 한 여학생과 무언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귀에 아무리 신경을 기울여도 멀리 떨어진 둘의 대화가 들리는 일은 없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플로라는 그저 루드거가 학생에게 진로 상담을 해 준다거나, 혹은 강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 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두 눈으로 보았다.

루드거와 소녀 주위로 펼쳐진 기이한 마력의 장을.

'저거 뭐지? 마법? 색깔을 보면 소리를 차단하는 건가?'

플로라 루모스에게는 남들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하나 있다.

그녀가 세오른에서도 천재라는 칭호를 유지할 수 있던 이유.

처음 보는 마법이나 배우지 못한 마력의 술식도 단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이유.

그건 바로 플로라 루모스가 <마나의 공감각>이라는 특이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나의 '색'과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 사람은 마나나 마력 자체를 시각적인 것으로만 인지한다.

타인이 사용한 마법의 술식 자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오감 중 오로지 시각뿐이니까.

하지만 플로라는 거기에 더해 색을 느낀다.

그녀는 잘 짜인 마법 술식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고, 또 맛있는 요리의 향기로 느낀다.

귀족 태생인 그녀는 이런 것에 워낙 예민하다 보니 술식이 조금이라도 엇나가는 그 이질감을 누구보다도 손쉽게 찾아낸다.

유난히 다른 색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튀거나, 혹은 무난한 냄새 사이로 악취가 섞여 있거나.

플로라가 '잘못된' 마법을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그랬다.

당연히 그녀는 제대로 된 마법을 느낄 때도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감각으로 본다.

지금 루드거의 주위에 떠 있는 색감처럼.

과연 자신의 견제가 먹히지 않던 선생답게, 루드거의 주위에 펼쳐진 마법의 술식 또한 지적할 부분이 없이 완벽했다.

멀어서 냄새는 느껴지지 않지만, 테라스의 유리창 너머로 마력의 색은 너무나도 뚜렷했다.

'마법을 사용하면서 대화를 나눌 정도라니.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호기심이 들었다.

평범한 교사였다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 테지만, 상대가 루드거라고 하니 궁금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우연인 척 한번 가 볼까?'

거기까지 생각을 했다가 플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속 보이는 짓이 아닌가.

그리고 이러면 꼭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절대 아니야!'

루드거는 자신이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었다.

첫날, 그녀가 모두의 앞에서 얼마나 큰 모욕감을 느꼈던가.

물론, 패배 자체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정정당당한 결투에서 패배한 걸 가지고 상대방을 헐뜯는다니, 그건 그녀의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않았다.

이쪽이 패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루드거가 선보였던 소스코드라는 마법은 강렬했으니까.

애초에 그런 마법, 들어 본 적도 없다고.

그러니 순수하게 마법으로 그를 뛰어넘는다. 자신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래도... 뭔가 신기했지.'

루드거가 소스코드 마법을 펼쳤을 때, 플로라는 난생처음 보는 감각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각적인 쾌감과 감미로운 향기.

특히 루드거가 펼친 소스코드 마법은 마치 은색과 회색의 무수한 금속들이 치밀하고 견고하게 짜 맞춰진 한 폭의 유려한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플로라 루모스는 스스로의 특이 체질과 재능 때문에 마법 자체에 자부심을 넘어 이제는 무료함마저 느끼던 차였다.

그러나 루드거가 보여 준 소스코드는 그녀의 무료해진 감정에 다시 불씨를 일깨웠다.

만약 다른 것이 있다면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까지 쌓아 온 이미지라는 것도 있어서, 플로라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한번 슬쩍....'

플로라가 움직이려는 순간.

"플로라? 여기서 뭐 해?"

"꺄악?!"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플로라는 등을 바짝 세우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절친인 셰릴이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셰, 셰릴이구나.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냐니.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말을 한 건 플로라였잖아."

"아, 아 맞다. 그랬지?"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셰릴은 은근하게 걱정하는 시선을 보내왔다.

플로라가 루드거의 발현 계통 수업 첫날 역으로 된통 당했다는 건 이미 유명하다.

그 때문에 평소 플로라를 고깝게 여기던 몇몇 학생들이 그녀를 비웃는 일이 발생했다.

셰릴은 그것이 못내 걱정이었다.

"으응?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저기에 뭐 있어? 구경하고 있던 거 같던데."

"아니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어서 공부나 하러 가자."

"흐음."

플로라는 셰릴의 등을 떠밀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저 멀리 떨어진 카페의 2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 * *

세디나 로쉔에게 정보를 얻어 낸 나는 그녀에게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곧바로 내 개인 교무실로 돌아왔다.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괬다.

'일단 정리를 해 보자.'

흑마법사와 미친 과학자들이 손을 잡은 샴수스 학파라는 곳이 있다. 늑대인간을 실험체로 만든 건 바로 이쪽이었다.

검은 여명회와는 별개의 집단이지만 서로 손을 잡은 동맹, 혹은 잠시나마 뜻을 함께하는 정도는 된다.

그런 샴수스 학파와 손을 잡은 건 검은 여명회의 간부 중 하나인 빅터 드레드풀.

세디나의 설명으로 짐작건대 검은 여명회 내부에서 발명이나 연구 쪽을 담당하는 것 같다.

'문제는 바로 이 샴수스 학파에서 발생했다.'

샴수스 학파가 몰래 실험하던 늑대인간 실험체 3마리가 탈출해 버린 것이다.

실험실의 위치는 정확히 모르지만, 레더벨크에서 난동을 부린 걸 보면 그 근방이라는 거겠지.

이 늑대인간을 사건 초기에 조속히 생포했으면 모를까, 이미 도시에는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황. 사망자까지 나왔으니 단순히 없던 일로 덮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늑대인간 중 한 마리는 세오른에 숨어들어와 학생 둘을 병원 신세 지게 만들었다.

그나마 세오른에서 사망자가 없는 건 다행인 일이지만, 문제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더 심각해졌다는 것.

'그쪽에서 잘못한 일이니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는 게 옳지만, 문제는 이 샴수스 학파의 실험을 검은 여명회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해 줬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는 내 신분의 원주인인 루드거 첼리시까지 엮여 있다.

다른 회원이 걸려서 색출당하는 거라면 나로서는 대환영이지만, 여기에 내가 끼어들면 다르다.

내가 살려면 남들보다 먼저 늑대인간을 잡아야 한다는 소리다.

'일단은 아카데미 내부에 숨어든 늑대인간을 없애는 것이 우선이겠지.'

때마침 경비 순찰이 강화된 참이다.

늑대인간의 실존 여부는 제외해도, 세오른 내부에 괴한이 떠돌고 있다는 건 확실하니 교사들은 밤늦게까지 순찰을 돌겠지.

내가 여기서 늑대인간을 제거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다는 거다.

'사냥꾼 일은 꽤 오래전에 그만뒀다고 생각했는데.'

5년 전 피의 사냥을 끝내고 사실상 잠정 은퇴를 했다.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너무 유명해져서다.

아브라함 반 헬싱이라는 가명을 쓴 것도 당연히 내 진짜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제보당의 괴물을 사냥한 뒤 너무 유명해진 나머지 내게 접근하려는 놈들이 많아진 게 화근이었다.

그래서 해당 신분을 은퇴 처리하고 새로운 신분을 바꿨다.

'그렇게 몇 번이나 신분을 바꿨더라.'

마지막으로 사용한 신분이 돈 많은 부유한 중년인 '제라드'였고, 그것을 끝으로 지금 루드거 첼리시가 됐다.

진짜가 아닌 가짜의 삶이지만, 나는 딱히 불만이 있다거나 답답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한 번 죽고 나서 이쪽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그런 걸까.

조금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남들과는 다르게 변해 버렸다.

'그렇다 해도 또 죽는 건 싫지만.'

이미 한 번 죽어 봤으니 오히려 죽는 게 더 싫어졌다.

기왕이면 더 오래, 더 편하게 살고 싶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이번에 제국의 수도로 향하던 것도 그 일환이었는데.

그놈의 열차 테러 하나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로 바꿔 버렸다.

'일단은 늑대인간을 잡는 데에 집중하자.'

다른 누가 발견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처리해야 한다.

나는 늑대인간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 * *

세오른의 학생들 사이에서 늑대인간의 소문은 뜨거운 감자였다.

그냥 소문으로만 치부하던 학생들조차도, 이번에 다친 학생이 둘이나 생겼다는 소식에 늑대인간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학생들이기에 특히 이런 소문은 더 부풀려지기 마련.

당연히 교사들은 그런 학생들의 호기심과 왕성한 혈기를 최대한 억눌러야 했다.

"공부해 공부! 무슨 헛소문을 믿고 있어! 오늘 거 반드시 시험에 낼 테니 집중해! 나중에 틀린 놈들은 알아서 해라."

"다들 이번에 순찰 강화 주간이니까 해가 지면 바로 숙소로 돌아가세요. 혹시라도 돌아다니다 걸리면 벌점입니다."

"벌점 받고 질질 짜지 말고 알아서들 사려라."

그런 선생님들의 경고에 일부 소심한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바로 기숙사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은 학생들도 적지는 않았다.

자고로 자존심이 강한 아이일수록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하고 싶어지는 법.

"야. 늑대인간이라니. 솔직히 궁금하지 않냐?"

"어쩌게?"

"이거 우리가 잡자."

"뭐? 잘못하다 걸리면 벌점이라는 거 못 들었냐?"

"야. 생각을 해 봐. 그거야 우리 걱정해서 하는 말이고. 오히려 늑대인간을 잡으면 학교 측에서 잘했다고 상을 주지 않겠냐?"

"그러다 늑대인간 찾기도 전에 선생님들한테 걸리면 어떡하게?"

"안 걸리면 되지!"

심지어 레더벨크 도시에서 늑대인간을 잡으면 포상금을 준다는 공문이 신문에 실린 것도 컸다.

특히, 아직 세오른에서 자신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현실의 쓴맛을 보지 못한 1학년들은, 늑대인간을 사냥함으로써 영웅이 되는 자신의 모습을 꿈꿨다.

대단하다고 칭송을 받고 싶고, 또 또래의 이성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여 주고 싶은 것이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일 때다.

"에이단. 너는 어떻게 생각해?"

벌써부터 늑대인간을 잡고 난 뒤 받을 포상금으로 뭘 할지 설레발을 치는 학생들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레오가 물었다.

때마침 매직 보드에 적힌 공식의 필기를 마친 에이단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되물었다.

"응?"

"뭐야. 안 듣고 있었냐."

"왜? 뭐 물어봤어?"

"너는 늑대인간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아, 그거?"

에이단은 멋쩍게 웃었다.

"뭐, 선생님들이 조심하라고 했으니 그냥 사려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걸리면 벌점이라고 하잖아."

"쯧.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레오 너는?"

"나도 딱히 나서는 걸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야. 애초에 피해자가 나올 정도라면, 이런 건 교사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둘에게 한 여학생이 다가왔다.

양 갈래로 크게 묶은 붉은 머리카락. 새침하게 올라간 눈꼬리가 상당히 매력적인 미인이었다.

그녀는 에이단의 책상 앞에 서서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퉁 하고 내려쳤다.

레오는 '저 여자, 또 왔네' 이런 반응이었지만, 에이단은 달랐다. 그는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노려보는 여학생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테이시. 좋은 아침이야."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받은 소녀, 테이시 프리아드는 에이단의 인사에 오히려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반응에 레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야. 그때 대련에서 패배했으면 이제 좀 그만할 때 되지 않았냐?"

"패배? 그건 무승부였어. 나는 아직 에이단과 제대로 결판을 내지 못했다고. 그리고 이건 나와 에이단의 일이야. 너는 끼어들지 말아 주겠어?"

"어휴."

레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테이시 프리아드가 에이단에게 이렇게 다가온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계기는 실전 마법 대련 때 있었던 일이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에이단은 테이시와 대련을 하게 됐고, 거기서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

상황은 테이시에게 유리했지만, 문제는 에이단이 지니고 있던 특이한 마법이었다.

"이번에 다시 제대로 붙어. 서로 힘 숨기는 거 없이 전력으로."

"어, 어? 그, 글쎄."

그때의 대련은 무승부라는 상당히 애매한 결과로 끝났지만, 테이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는 거의 몰락해 버린 가문 프리아드 자작가를 되살리기 위해서 테이시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마법을 공부하고 노력을 해 왔다.

세오른에 들어온 그녀는 1학년 내에서 자신이 최고여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실제로 그녀는 입학성적이 5위권 안에 들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

그런데 대련 수업에서 순위권 바깥, 그것도 마음가짐도 느슨한 평민에게 제대로 된 승리를 따내지 못했다는 것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그때 에이단이 보여 주려고 했던 마법.

그건 분명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분야의 것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대련의 끝을 알리지 않았다면 어떤 마법인지 볼 수 있었을 텐데!

"아무튼, 오늘 붙어. 수업 끝나고 저녁에."

"미안한데 테이시, 오늘은 안 될 거 같아."

"그럼, 내일!"

"내일도 좀...."

"왜!"

"왜냐니. 그야 밖에 늑대인간이 돌아다니는데 밤에 활동할 수 없잖아. 선생님들한테 걸리면 벌점이라고."

"흐응."

에이단의 변명에 테이시는 팔짱을 끼더니 이윽고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걸 핑계로 나한테 도망치려는 거지? 다 알아. 겁먹었구나?"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이것에 걸려서 에이단이 '뭐? 그럴 리가 없잖아!' 하고 외치길 기대한 테이시였지만, 에이단의 반응은 달랐다.

"응. 그래. 그러면 그런 거로."

에이단은 괜히 친구─테이시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겠지만─와 싸우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입장을 양보하기로 했다.

그 어른스러운 대처가 오히려 테이시의 프라이드에 흠집을 새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눈썹을 치켜세운 테이시는 에이단의 얼굴에 대고 외쳤다.

"승부야! 에이단!"

"응? 무슨 승부?"

"대련을 할 수 없다면, 다른 거로 하면 되잖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늑대인간."

그 주제가 나오자 에이단과 레오는 서로를 마주 봤다가 다시 테이시를 응시했다.

대체 무슨 터무니없는 제안을 꺼낼지 벌써부터 불안감이 든 것이다.

"늑대인간을 먼저 잡은 사람이 내기에서 이기는 거로 하자. 어때? 설마 겁먹고 도망치지는 않겠지?"

"아니...."

"그래. 할게."

"레오?!"

에이단은 위험하니까 안 된다고 거절하려 했지만, 대신 그의 말을 가로챈 레오의 행동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진 사람은 이긴 사람한테 소원 들어주기!"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무르지 말라고."

레오의 도발 어린 어조에 테이시는 '물론이지!'라고 답하며 자리를 떠났다.

"레오. 왜 갑자기 그런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아들인 거야?"

"바보야. 거기서 네가 안 한다고 하면 쟤가 또 우리를 귀찮게 할 게 뻔하잖아. 그러니 적당히 맞장구쳐 주면서 넘긴 거야. 봐봐. 바로 갔잖아. 이제야 평화가 찾아온 거지."

"그래도... 거짓말은 나쁘잖아. 애초에 늑대인간 같은 건 신경도 안 쓸 건데."

"멍청아. 지금 그게 문제야? 어차피 늑대인간은 선생님들이 알아서 처리를 해 줄 거야. 우린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승부니 뭐니, 애초에 판가름이 날 리가 없다는 거야."

"그런데 테이시는 진심으로 보이던데. 저러다 테이시 혼자 늑대인간을 잡겠다고 하다가 선생님들보다 먼저 마주치면 어쩌려고?"

"야. 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혼자서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겠지."

"어, 음. 그러긴 한데, 솔직히 테이시라면 충분히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설마."

에이단과 레오는 테이시가 사라진 강의실의 뒷문을 동시에 돌아봤다.

"...."

"...."

아무리 그래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할 리가.

하지만.

그런 말에 확신을 담아서 '없다'라고 답을 할 수 있는가?

"...진짠가?"

"그렇다니까."

당장 그들이 지난 며칠간 봐 온 테이시는 한다면 반드시 하는 성격이었다.

위험한 일이 있더라도 이를 악물고 오기로 해내는 독한 성격의 소유자.

그게 테이시 프리아드였다.

두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바로 창밖을 내려다봤다.

그곳에 익숙한 붉은 머리가 씩씩거리며 어디론가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 방향은, 여자 기숙사가 있는 곳이 아닌 그 반대쪽.

학기 초에 교사들이 절대로 가지 말라고 경고하던 위험한 숲이 있는 방향이었다.

""큰일 났다.""

그녀를 말려야 했다.

◈ 26화 늑대인간 (1)

세디나 로쉔은 몽롱한 얼굴로 루드거와의 꿈같은 만남을 떠올렸다.

퍼스트 오더 님이 자신을 인정해 주셨다.

언제나 실수를 남발해서 검은 여명회 내부에서도 겉도는 자신을, 루드거 첼리시가 인정해 준 것이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제국 굴지의 대상인 가문인 로쉔. 세디나는 그곳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남들에겐 좋은 집안으로 보이겠지만, 세디나에게는 로쉔 가문은 지옥보다 끔찍한 곳이었다.

그녀가 지닌 로쉔이라는 성은 언제나 저주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라왔고, 그것은 가문에서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로쉔.

그 증오스러운 가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세디나는 검은 여명회에 들어왔다.

로쉔을 없애기 위해서. 그리고 검은 여명회에서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해서.

그것이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그 길을 선택했다.

이곳이라면 나는 달라질 수 있다고.

로쉔 가문의 별 볼 일 없는 여식이 아닌,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검은 여명회는 세계에 저항하는 곳인 만큼, 소속된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의 밑바닥을 구르는 하층민이나 범죄자였다.

그런 곳에서 로쉔이라는 성을 지닌 세디나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존재였다.

-뭐? 성이 있어? 진짜야?

-로쉔? 대체 그런 대단한 집안의 사람이 여기에 왜.

-조심해. 몰래 숨어든 스파이일 수도 있어.

-빌어먹을 상위 계층들 같으니라고.

질척한 진흙탕에서 올라온 자신들과는 다르게, 스스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세디나를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마법에 재능이 있고 세오른에 입학을 했음에도 서드 오더라 불리는 건 그런 이유였다.

로쉔이라는 이름은 결국 검은 여명회에서도 그녀를 겉돌게 했다.

'나는 단지, 인정받고 싶었을 뿐인데.'

증오스러운 가문을 없애고 싶었다. 그래서 검은 여명회에 들어왔다. 잘 먹고 잘살고 그런 건 그녀의 목표가 아니었다.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자신을 경계하고 멸시하는 시선도 점차 나아질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세디나를 향한 검은 여명회 멤버들의 경계는 더 심해졌고, 오히려 세오른에 입학할 능력마저 지녔다는 이유로 그녀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됐다.

본래라면 세컨드 오더 이상의 자리를 차지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실력자인 세디나였지만.

퍼스트 오더의 관심조차 받지 못한 채로, 다른 멤버들의 견제 때문에 계속 서드 오더라는 말단에만 머무르게 됐다.

쓰다 버리기 좋은 말.

그저 조금 쓸모 있는 인간.

로쉔 가문의 이름 정도는 써먹을 수 있겠지.

그 의도가 너무나도 여실히 전달되어 세디나의 여린 가슴을 잔혹하게 후벼 팠다.

'하지만 그분을 만났어.'

이제는 지쳐서 뭐든 좋다고 생각했을 때.

조직 내에서 그녀에게 명령이 내려왔다.

그녀보다 조금 더 높은 등급에 있는 세컨드 오더가 내린 명령이었다.

퍼스트 오더.

코드네임 <존 도우>.

다른 퍼스트 오더들과 다르게 진짜 모습과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존재.

그에게 접촉해서 임무의 경과를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루드거 첼리시라고 불리는 이 남자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밝힌 적이 없는 변장의 귀재이자 잠입과 암살에 특화된 간부였다.

하지만 성격이 매우 더럽다는 흠이 있었다.

같은 비밀 결사 멤버라 하더라도 거슬리면 자리에서 바로 두들겨 패거나 심하면 죽이기까지 하는 사이코패스.

심지어 그런 행동을, 검은 여명회의 대장이라 할 수 있는 제로 오더가 묵인하기까지 한다.

같은 퍼스트 오더 간부가 아닌 이상, 루드거는 검은 여명회 내에서 두려움의 상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루드거에게 왜 연락을 안 하냐고 물어야 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건, 사실상 그의 손에 죽으라고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세디나 로쉔은 분해서 눈물이 났다.

죽으라고 가라는 검은 여명회의 동료들이나, 그것을 제대로 거부하지 못하는 겁쟁이인 자신이나.

그 이상으로 더 싫은 것은 이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다시 로쉔 가문의 여식으로 사는 것이었다.

'나는 싫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그녀는 가문을 끔찍하게 증오했다.

그래서 루드거에게 다가갔다.

그가 자신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죽음을 각오한 마음가짐으로.

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니 그 남자의 카리스마는 상상 이상이어서, 세드나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고 말았다.

말실수를 하고, 목소리를 떨고. 그의 앞에서 하지 말라는 행동은 거의 다 저질러 버렸다.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루드거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살의조차도 내비치지 않았다.

소문대로 성격이 더럽고 괴팍한 건 대화를 하면서 느꼈지만, 결국 그게 전부.

루드거는 별말 없이 그녀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는.

루드거는 오히려 그녀에게 설명을 잘한다고 칭찬까지 해 줬다.

단순히 입에 발린 말이라면 이렇게까지 기쁘지 않았겠지.

하지만 루드거의 말에는, 그의 행동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퍼스트 오더가 아닌 루드거 선생님이라고 칭호를 정정해 주는 것부터 해서, 이쪽이 하는 말을 아닌 척해도 누구보다도 귀를 기울여서 들어 줬다.

그것이 너무 기뻐서.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퍼스트 오더 님. 아니, 루드거 첼리시 선생님은 정말로 대단해.'

첫 만남 때부터 그를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때는 긴장감과 두려움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만남으로 그녀는 확실히 깨달았다.

이것은 경외.

자신이 진심으로 모시며 섬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향한 끝없는 숭배심.

자신이 특별해서 이런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아주 약간, 지금까지 겪어 온 불행과 노력에 아주 약간의 보상을 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루드거 첼리시는 조직의 간부로서 부하에게 약간의 선행을 베풀어 준 걸지도 모른다.

이런 거로 벌써부터 기고만장해지는 것은 너무 이른 판단이다.

그래도.

그렇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제대로 잘했다고 칭찬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 * *

하교 시간이 되고 해가 저물 무렵이 되자 루드거는 겉옷을 챙겨 입고 장비를 모두 점검했다.

본격적으로 늑대인간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신속함이 필수였고, 당연히 사냥에 필요한 도구들은 모두 준비해 두어야 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은밀성이 높은 물건들이라 지나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의심하는 일은 없을 터.

그렇게 생각하며 교무실을 나선 루드거는 때마침 자신을 찾아오던 휴고와 마주하게 됐다.

"어! 루드거 선생!"

"...휴고 부르테그 선생님."

휴고 부르테그.

엑실리온 제국에서도 역사가 깊고 유명한 마법 명가 부르테그 후작가의 가주.

그러나 지나친 마법 권위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현대 과학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조금씩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가문.

오전에 있던 회의에서 총장과 대립각을 세운 대표 격인 남자가 루드거를 찾아온 것이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허어. 이 사람아. 내가 자네를 찾아오려면 뭐 큰 볼일이랄 것이 있어야 하나?"

벌써부터 친근하게 구는 휴고의 태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휴고는 루드거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자네. 아직 다른 교사들과 제대로 얼굴을 트지 않았지? 이번에 새로 들어온 다른 교사들이랑만 친하게 지내는 거 같던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자신에게 쩔쩔매기는커녕 굽히는 것조차 하지 않는 루드거의 딱딱한 태도에 휴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일단 아쉬운 건 이쪽이었으니 휴고는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흠흠. 내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교수들을 소개해 줄까 하는데."

"...."

휴고의 은근한 제한에 루드거는 그가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건지 단번에 눈치챘다.

파벌 영입.

휴고는 루드거를 귀족들로만 이루어진 교사들 파벌에 데려올 속셈이었다.

늑대인간 때문에 학생들이 불안에 떠는 이런 상황에서도 세력을 위한 편 가르기 싸움인가.

루드거는 휴고의 그런 태도가 웃겨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이 편합니다."

"뭐?"

루드거의 직설적인 거절에 휴고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쪽이 좋게좋게 말을 해 줬는데, 몰락 귀족 따위가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거절을 해?

"자네, 내가 이곳에서 몇 년 동안 교사로 지냈는지는 아나?"

"제가 알아야 합니까?"

"자그마치 15년이네. 마리 로스 그 할망구를 제외하면 내가 다음으로 높다는 소리야. 자네에겐 까마득한 선배이자 상급자라는 소리고!"

"상급자 말입니까?"

"그래!"

"그거 이상하군요. 제 상급자는 오직 총장님뿐인데 말이죠."

총장.

그 단어에 휴고가 이를 으득 깨물었다.

휴고에게 있어서 총장이라는 이름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열등감과 분노를 일깨우는 역린에 가까웠지.

곧바로 표정 관리에 들어간 휴고가 입을 열었다.

"루드거 선생. 자네가 이곳에 오기 전에 군부에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그저 잠시 머물렀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크립티드를 사냥하면서 혁혁한 전공도 세웠다고 하지 않았던가."

벌써 거기까지 정보를 얻은 건가.

아니, 어차피 검은 여명회에서 의도적으로 흘린 스펙이라, 휴고 정도 되는 사람이 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루드거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서 하는 말이야.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싶은 생각 없나? 우리 귀족 파벌의 지원을 받으면 충분히 가능하네."

휴고는 자신이 물러날 수 있는 부분에서 최대한의 양보를 선택했다.

그는 지금 조바심이 나 있었다.

총장의 파벌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특히 지금의 총장인 그녀는 젊은 나이임에도 6위계 렉서러급 마법사인 데다가 타고난 정치 능력까지 지니고 있어서 휴고조차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 여자만 아니었어도 내가 다음 총장이었는데!'

휴고는 그것이 못내 불만이었다.

심지어 지금 총장은 귀족 학생들에게 잘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평민들을 더 챙겨 주는 행보를 보여 오는 것이다.

이번에 들어온 신임 교사가 무려 5명인데, 그중 3명이 평민이고 1명은 몰락 귀족.

순혈 귀족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루드거 첼리시, 이 남자를 우리 파벌에 꼭 데려와야 해.'

그가 몰락 귀족 출신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상황이 다급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루드거 첼리시는 젊은 나이에 4위계를 이룬 마법사인 데다가, 꽤 실력이 있는 남자였다.

크립티드 헌팅에 전과를 올린 것만 해도 그랬다.

출신을 제외하면 이보다 더 탐나는 인재는 없었다.

그래서 휴고 본인이 직접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네. 그러니 어떤가? 우리와 손을 잡는 게."

"그 손을 잡는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일입니까."

이번에는 거절의 대답 대신 질문이 돌아왔다.

휴고는 루드거가 드디어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뭐 일이랄 것이 있는가. 우리끼리 친분을 다지고, 다른 귀족들에게 후원을 받으면서 그분들의 자제들을 더 잘 챙겨 주면 되는 걸세."

"즉, 귀족 학생들에게 편의를 봐준다는 겁니까?"

"어허. 그저 조금의 융통성을 발휘하는 거라네."

휴고는 루드거가 거의 다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이 남자가 군인을 했던 것도, 어떻게든 업적을 세워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생각이었던 거겠지.

휴고는 루드거의 행적을 그렇게 판단했다.

"그렇다면 안 되겠군요."

"뭐, 뭐라고?"

설마 여기서 거절의 대답이 돌아올 줄 몰랐던 휴고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자, 자네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예. 학생들에게 차별적으로 대우를 하라는 말씀.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차별이 아니네! 그저 융통성을 좀 발휘하자는 거지!"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만약 총장님이 특정 평민 학생들에게 더 좋은 혜택을 주며 그걸 융통성이라고 포장해서 말한다면, 그것을 따를 의향이 있으십니까?"

"뭐? 아니 평민하고 귀족이 같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바로 그겁니다."

"뭐?"

휴고는 멍한 얼굴이 됐다. 바로 그거라니. 뭐가 그거라는 건데?

"융통성이란 결국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것이 아닌, 쌍방에게 모두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귀족에게만 융통성이 적용된다면 그건 더 이상 융통성이 아닙니다. 특혜죠."

"아니, 그러니까 귀족이...."

"세오른 내부에서는 평민도 귀족도 왕족도 없습니다. 모두 마법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일 뿐. 저는 이 생각을 굽힐 생각이 없습니다."

"이...!"

휴고는 루드거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분노를 삭인 휴고는 한쪽 입술을 말아 올리며 루드거에게 이죽거렸다.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군. 자네가 이곳에 온 시점에서 이미 총장이 손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루드거는 진심이었다.

애초에 그는 휴고 같은 남자와 엮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가문을 일으켜 세우도록 도와준다고?

그랬다간 이쪽의 가문이 가짜라는 것이 들통난다. 휴고의 입장에서는 도움을 주겠다는 말이었지만, 루드거에게는 자신의 정체를 탄로 나게 만들 오지랖에 불과했다.

애초에 그는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생각조차 없었다. 유일한 목적이라면 이곳에서 정체를 들키지 않고 2년을 버티는 것뿐.

게다가 휴고와 손을 잡고 총장에게 대적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봐도 휴고와 총장은 동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휴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루드거가 보기에는 총장이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괜히 이상한 짓을 했다가 총장의 눈에 찍히면 그건 그거대로 피곤해지지.'

산속에 호랑이가 떡 하니 존재하는데, 여우와 손을 잡는 머저리는 없다.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고 줄타기를 하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상대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들러붙으니 루드거도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총장이다.

귀족의 권위주의적인 성격보다는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는 총장 쪽이 더 편하니까.

"저는 이만 순찰을 돌아야 하기 때문에, 먼저 가 보겠습니다. 휴고 선생님도 위험하실 수 있으니 먼저 들어가 보시죠."

"자네, 후회하게 될 걸세."

"새겨듣죠."

루드거의 도발 어린 말에 휴고의 얼굴이 삶은 문어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그의 두툼한 뺨이 푸들푸들 떨렸지만, 휴고는 이미 떠나가는 루드거의 등에다 대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쪽을 응시하는 루드거의 그 모습에 겁을 먹은 탓이었다.

이쪽이 훨씬 더 선배이고 명망이 높은데 겁을 먹다니!

휴고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에잇!"

휴고는 애꿎은 지면을 발로 쿵 구르며 씩씩거리며 떠났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걸리는 학생이 있다면, 벌점을 매길 생각을 품으며.

* * *

휴고와 헤어진 루드거는 바로 바깥의 순찰을 돌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세오른 내부에서 마력등이 켜지며 주위로 불빛이 알음알음 퍼졌다.

기척이 없이 고요해야 하는 밤이 찾아온 것이지만, 묘하게도 어둠은 생기를 띠고 있었다.

루드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가까운 수풀로 향했다.

"기숙사로 바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지 못했나 보군."

마법으로 수풀을 헤치자 안쪽에 숨어 있던 학생들이 숨을 집어삼켰다.

아연한 얼굴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3명의 학생을 응시하며 루드거는 싸늘하게 말했다.

"아니면, 들었는데 배짱을 부린다거나."

"저 선생님. 그, 그게 아니라...."

"너희 전부 벌점 5점이다."

◈ 27화 늑대인간 (2)

그 후 나는 순찰을 돌면서 거의 20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을 사로잡아 벌점을 매기고 기숙사에 강제로 되돌려 보냈다.

아니, 이 자식들은 왜 밤이 됐는데도 계속 돌아다니고 있어.

1학년들이야 신입생이니까 철이 없다고 해도, 2학년들도 끼어 있는 걸 보니 머리가 아파 왔다.

'그만큼 이번 늑대인간 사태에 다들 관심이 있다는 거겠지.'

이미 해는 저물고, 주위에 어둠이 깔려 있다.

내부 경비원이 돌아다니고 다른 교사들도 순찰을 돌고 있지만, 아직도 이 세오른 부지 내부에 꽤 많은 학생이 숨어 있었다.

'학생이라 해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아이들이니, 평범한 사용인들은 숨어 있는 녀석들을 찾지 못하겠지.'

그것이 자신들의 모험심에 더욱 부채질했으리라.

솔직히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생각이었지만, 지나갈 때마다 하나둘 눈에 띄는데 거슬려서 가만히 놔둘 수가 있어야지.

괜히 무시하고 넘어갔다가는 놈들이 교사한테 안 들켰다고 기고만장해져서는 더 미친 듯이 날뛸 것이 눈에 선하다.

그건 못 참지.

'많기도 하군.'

대부분 학생은 늑대인간을 자신들이 사로잡겠다는 만용에 사로잡혀 있었다.

교내에서 걸리면 벌점인데 왜 저러나 싶었더니, 레더벨크 시에서 공문이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늑대인간을 처치하거나 생포하면 도시 자체에서 포상금을 내린다고 했던가.

학생들이 눈이 돌아갈 만도 하다.

'영웅이 되고 싶다는 심리와 더불어, 잡으면 돈도 주고 명성도 올라가는데 그것에 눈이 안 돌아갈 녀석은 없겠지.'

돈이 부족한 평민들에게도 늑대인간을 쓰러뜨려서 얻는 상금은 매우 매혹적이리라.

평민의 경우에는 세오른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장학금을 지원해 주는 제도가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마법 교재나 여러 준비물까지 전부 다 제공해 주지는 않으니까.

마법사들에게 돈이 나갈 곳은 매우 많다.

그건 학생으로서도 마찬가지다.

이번 사건에서 영웅이 되면 그 능력을 눈여겨본 스폰서가 생길지도 모르니 다들 눈이 뒤집힐 만하겠지.

몇몇 남자애들은 그저 이성의 관심을 얻고자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해 이런 짓을 벌인 것 같지만.

'그래도 일단 대충 다 돌려보낸 거 같으니, 다시 추적을 시작해야겠어.'

시간을 많이 소모했다.

게다가 사태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까지 학생이 많이 몰릴 줄은 몰랐다.

다른 교사들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더 열심히 움직이겠지.

만약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먼저 늑대인간을 발견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일반적인 크립티드가 아니라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사태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산불처럼 번지고 만다.

'그러니 그 전에 내 선에서 처리한다.'

나는 늑대인간이 세오른 아카데미로 숨어들어 온 가장 유력한 루트인 하수 처리장으로 향했다

세오른은 방대한 부지를 지닌 만큼, 사용하는 물도 꽤 많기에 부지 외곽에 거대한 하수처리시설이 존재한다.

렘지어 강에서 엄청난 양의 물을 끌어오며, 또 동시에 거대한 토관을 통해 대량의 물이 방류되는 곳.

그때 마주쳤던 늑대인간의 덩치를 생각하면, 토관을 통해 거슬러 올라왔을 확률이 높다.

'다행히도 이곳까지 온 사람은 아직 없나 보군.'

대부분 교사는 순찰을 돌며 학생들을 돌려보내거나 아니면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지.

나처럼 늑대인간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움직일지를 고민하거나 그 흔적을 쫓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 그럴 것이 이건 마법사의 방식이 아니니까.

이건 사냥꾼의 방식이다.

어두워진 하수처리장을 돌아다니던 나는 드디어 흔적 하나를 발견했다.

'발자국.'

수풀 위에 뚜렷하게 찍혀 있는 발자국은 새겨진 지 며칠은 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넘어가겠지만,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쓸어 보니 확실했다.

'찍힌 크기를 비교해 보면, 그때 마주했던 녀석보다 약간 작은 정도. 꽤 위협적이겠어.'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발자국의 종류가 2개나 된 것이다.

전부 다 늑대인간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이었다.

심지어 그중 상대적으로 더 크게 찍힌 것은 최근에 난 거로 보였다.

이거 설마, 두 마리 전부 다 세오른에 들어와 있는 건가?

'한 놈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찍힌 자국을 보면 레더벨크에서 사람을 잡아먹은 녀석이 여기까지 온 건가.'

나는 천천히 움직이며 발자국의 흔적을 쫓았다.

두 발자국은 처음에는 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였지만, 이윽고 양쪽으로 갈라졌다.

작은 건 오른쪽으로, 큰 건 왼쪽으로.

설마하니 여기서 이놈들이 서로 흩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본래 늑대가 고독한 이미지이지만, 실제로는 무리를 이루는 짐승이다. 당연히 그 성향을 짙게 물려받은 늑대인간도 마찬가지.

보통이라면 서로 뭉쳐 다녀야 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놈들은 지금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선택을 내려야 했다.

* * *

'큰일이야. 늦어 버렸어.'

세오른에서도 보기 드문 애쉬그레이의 머리카락 색을 지닌 리네는 품 안에 마법 교재를 안고서 세오른 부지를 달리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깜빡하고 잠이 든 것이 조금 전의 일이었다.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며 창밖을 살핀 그녀는 해가 저문 것을 보고 다급하게 도서관에서 뛰어나왔다.

기숙사를 향해 달리면서도 리네는 자신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바보! 이 멍청이! 왜 하필 거기서 졸아 버린 건데!'

최근 며칠 동안 자는 시간을 줄여 가면서 과제와 공부에 몰두했던 탓인지 피로가 누적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지금 세오른이 뒤숭숭해서, 교사들도 수업이 끝나면 딴짓하지 말고 바로 기숙사라고 돌아가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조금만 더 공부해야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펼쳤다가 깜빡 졸아 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컨디션 조절도 엄연히 학생의 본분.

깜빡 졸았다고 해서 그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이대로 교사에게 걸린다면 벌점을 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아으. 그래도 벌점 받는 건 좀 뼈아픈데.'

돈이 쪼들리는 그녀는 세오른에서도 장학금으로 연명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세오른은 해당 학생에게 벌점이 있을 경우에 장학금의 지원 금액이 줄어든다.

벌점이 심각할 때는 장학금 신청 자체가 반려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 일로 그렇게 심하게 벌점을 받지는 않겠지만, 벌점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그래도 최대한 들키기 전에 빨리 기숙사에 돌아가면 되지 않을까?'

기숙사 사감의 눈도 피해야 했지만, 교사가 아닌 사감의 경우에는 그래도 어떻게든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리네는 조마조마한 발걸음을 이어 나가며 가로등이 켜진 도보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이미 벌점은 확실하다고 생각한 상황. 혹시라도 걸리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기면서까지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너무했어. 어떻게 아무도 안 깨워 주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리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라면 친구라도 사귀면서 서로 친해져야 하는 게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의 기본 사항이지만, 하필이면 학기 초창기부터 귀족과 시비가 붙어서 소란에 휩쓸린 영향이 컸다.

뒤네마 로믈리가 징계까지 받은 탓에 리네는 귀족 학생들에겐 귀족을 욕보인 건방진 평민이 되었고.

다른 평민 학생들에게는 귀족들에게 찍혔으니 가까이 가면 안 되는 취급을 받았다.

그래도 사건이 있고 바로 다음 날 괜찮냐고 물어보는 몇몇 남학생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의 외모에 혹해서 그럴싸한 핑계로 접근하는 녀석들이 전부였다.

리네는 그런 사람들과 굳이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서관 사서도 자리를 비웠고. 애초에 날 깨울 생각도 없었구나.'

아마 도서관의 사서 일을 하는 사용인도 귀족들의 편에 선 사람일 것이다.

이미 밉보이고 있구나.

자신의 처지가 괜히 서러워져서 리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서 돌아가서 씻고 오늘 수업 때 들은 내용이나 정리하자며, 그렇게 다짐하던 찰나였다.

──바스락.

"거, 거기 누구세요?"

리네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며 몸을 흠칫 떨었다.

나무가 심어진 어둠 너머의 풀숲이 크게 움직인 건, 분명 잘못 본 것이 아니리라.

"어, 어서 나오세요. 안 그러면 사람 부를 거예요."

최근 돌고 있는 늑대인간의 소문은 리네도 익히 들은 바였다.

헛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실제로 다친 사람이 둘이나 있지 않던가.

어쩌면 정말로 소문의 늑대인간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골을 타고 싸늘한 공포가 흘렀다.

설마 진짜 늑대인간?

리네가 덜덜 떨리는 발을 움직이며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수풀 안쪽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리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히야아악! 살려 주세요! 저 하나도 맛없어요! 저 같은 거 먹어도 배탈만 날 거예요!"

그러나 기다리던 늑대의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고통 또한──없었다.

리네는 질끈 감았던 눈을 힐끔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가로등의 불빛을 받으며 어둠 속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금발.

여기저기 나뭇잎이 붙어 있지만, 그 고귀함은 전혀 빛이 바래지 않았다.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 이쪽을 기묘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그녀는 리네보다 한 학년 높은 선배이자.

이 나라의 황녀였다.

"나 참. 잡아먹는다니 어쩌니. 초면에 너무 실례 아니니?"

"어, 어?"

리네는 눈앞의 상대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아니, 애초에 저 상징적인 사람을 몰라볼 리가.

"화, 황녀님?"

3황녀 에렌디르 폰 엑실리온.

그녀의 모습은 루드거의 강의실에서도 본 적이 있어서 리네는 곧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황녀를 보고 놀라서 잡아먹지 말라느니 외쳤으니, 당장 불경하다고 뭐라 한 소리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네가 고개를 숙이려 하자 에렌디르 황녀가 그녀를 만류했다.

"아니야. 됐어 됐어. 뭘 그런 걸 가지고."

"하, 하지만...."

"애초에 먼저 놀라게 한 건 내 잘못이야. 그리고 여기는 세오른이야. 잊었어? 세오른에서는 모두가 평등해. 너나 나나 마찬가지야."

에렌디르의 당당한 말에 리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헤' 하고 벌리고 말았다.

설마하니 황녀 본인의 입에서 세오른의 이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렌디르는 몸에 붙은 나뭇잎을 손으로 툭툭 털어 내는 데 열중할 뿐.

"어, 그 황녀님은 그런데 왜 여기에...?"

"황녀님이라 부르지 말라니까. 너 1학년이지? 그러면 그냥 평범하게 에렌디르 선배라 불러도 좋아."

"제, 제가요?"

"나는 그게 더 편하니까. 애초에 세오른에서 내 직위를 가지고 멋대로 굴 생각은 전혀 없거든. 우리 후배는, 이름이 리네라고 했던가?"

"어? 저를 아세요?"

"같이 발현계 수업을 듣잖아. 내가 기억력이 좋거든."

"대단하시네요."

"뭐 사실 그 수업이 워낙 특이해야지. 기억에 꽤나 강렬하게 남아 있어서 그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너도 꽤 눈에 띄고 말이야."

아. 머리카락 색을 말하는 건가? 리네는 멋쩍게 미소 지었다.

살다 보니 머리카락 색 때문에 황녀님의 관심도 받게 될 줄이야.

"그래서 우리 리네 후배는 왜 밤늦게 여기서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선생님들께서 경고하지 않았던가?"

"그, 그게 말이죠...."

리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이 왜 이 늦은 밤에 혼자 움직이는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전부 전해 들은 에렌디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어? 아무도 안 깨웠다고?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아뇨. 그래도 결국 졸아 버린 제 잘못이니까요."

"아니! 이건 두고 볼 수 없어. 이렇게 졸렬한 짓을 벌이다니. 당장 해당 사서에게 한마디를...."

"그, 그보다! 선배는 여기서 뭐 하고 계셨던 거예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리네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 나 말이야? 나는 지금 아직도 기숙사에 돌아가지 않은 학생들을 찾아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어. 지금 다들 워낙 시끄러워야지."

"어... 선배도 학생 아니에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허락을 받고 움직이는 거니까."

"아, 그렇구나."

"아무튼, 어서 돌아가도록 해. 아, 이대로 쭈욱 가면 다른 선생님이 계시니까, 이쪽 길로 돌아가면 안 들킬 거야."

"아, 네! 감사합니다!"

리네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리를 뜨려는 그 순간이었다.

크르릉.

리네와 에렌디르, 두 사람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짐승이 내는 소리였다.

"...리네. 뒤로 물러나 있어."

에렌디르는 어둠을 노려보며 자신의 지팡이를 뽑아 들었다.

어둠 속에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이윽고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가로등 불빛에 늑대인간의 모습이 드러났다.

"...설마 늑대인간의 존재가 진짜였을 줄이야."

"소문이, 가짜가 아니었다고요?"

"뭘 놀라고 그러니. 너도 나 처음 볼 때는 놀랐으면서."

"그, 그거야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면 누구나 놀라죠!"

"아무튼, 이거 큰일이네."

눈앞의 늑대인간은 딱 봐도 약해 보인다거나 하지 않았다.

이쪽을 응시하는 눈동자에 깃든 것은 명백한 살의.

리네도 에렌디르도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그래도 세오른의 학생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당할 수는....

"──비켜라."

그 순간 허공에 강렬한 불길이 일었다.

고열의 화염이 늑대인간을 집어삼키며 가죽을 통째로 태워 버렸다.

캐애애앵!

늑대인간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불을 피하는 짐승의 본능 때문인지 직격타를 면해서 죽지는 않았지만, 살과 가죽의 곳곳이 타고 녹아내려 타격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 상처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으나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법이 날아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리네가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외쳤다.

"루드거 선생님!"

루드거 첼리시.

검은 정장에 검은 프록코트라는, 여전히 정갈하고 세련된 복장.

루드거의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이 늑대인간에게서 벗어나 리네와 에렌디르를 향했다.

그 기백에 잠시 눌려 있는 두 사람에게 루드거가 입을 열었다.

"리네. 그리고 에렌디르 폰 엑실리온."

"네!"

"네, 선생님."

두 사람은 루드거가 구하러 와 준 것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벌점 5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