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

< 아카데미에 위장취업당했다 - sayren >

◈ 1화 제국의 수도로 (1)

대부분의 부모님은 자식이 미래의 직업을 꿈꿀 때, 의사나 판사 같은 상위 직종을 추천하곤 한다.

끝이 '사' 자로 끝나는 직업은 다 인식이 좋으니까.

아니면 최소한 안정적인 철밥통이라 불리는 공무원이라도 좋겠지.

자기 자식이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기를 원하는 부모는 없다.

다만, 내 경우에는 좀 많이 달랐다.

"아들아. 넌 무당이 돼라."

"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맹랑하기만 한 여동생과 함께 철이 들어갈 무렵 어머니가 내게 하셨던 말씀이었다.

집안이 크게 기울거나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돈을 벌고자 열심히 공부해 의사가 되려고 했다. 아니면 과학자나 개발자가 되거나.

그런 이과적인 루트를 착착 짜놓은 내게 어머니가 권한 것은 문과적 루트도, 심지어 예체능도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길이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신학 전공?

"어, 뭐라고요?"

"잘 못 들었으니 다시 한번 말해 주마. 무당이 돼야 한단다."

"싫은데요."

내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무당 따위는 되지 않을 거다. 애초에 왜 갑자기?

그런 나의 당돌한 대답에 어머니는 눈썹을 한 번 파르르 떠시더니, 강경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네겐 무당의 자질이 있단다. 온갖 신령들께서 너를 보살피고 있으시지. 네겐 무당 외에 다른 길은 전혀 없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당의 자질이라니. 그런 재능이 있다니.

황당함을 넘어 그냥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후로 내게 특이한 자질이 있다느니, 무당이 되어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해를 입을 운명이라느니 아들에게 해선 안 될 말들을 주로 했다.

그때의 나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절대로, 싫어요."

"그러지 않으면 너는 언젠가 큰 화를 입게 된다. 다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저를 위한다면 제가 가는 길을 응원해 주셔야죠!"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고 내 방에 틀어박혔던 거로 기억한다.

솔직히 억울하고 화가 날 만도 했다. 사춘기 중학생 때부터 자신의 인생 설계를 제대로 잡은 아이에게 칭찬을 해 주지는 못할망정 다 포기하고 무당이나 되라니?

그 말에 나는 오히려 반발심으로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어머니는 계속 귀찮게 나에게 종교적인 것들을 강요하셨고 온갖 신화와 마법, 주술 등 해괴한 지식까지 가르치셨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 머리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온갖 이성적인 지식을 습득하며 열을 올렸다.

그렇게 10년 이상이 지나고 성인이 되어 어느덧 사회인으로서 자리를 잡게 됐을 때.

나는 죽었다.

그것도 교통사고로.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화를 입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을까.

그리고 더욱 놀라웠던 건 바로 이후의 일이다.

나는 살아 있다. 정확히는 한 번 죽었지만 새로 태어났다는 것이 옳은 말이리라.

내세가 실존하다니. 어머니가 하는 말씀은 전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 진실이었다니.

어리석게도 인간이란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일은 경험해 보기까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는 걸, 나는 죽음이라는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뭘 하고 있냐고?

"수업에 들어가겠다. 전원 교재를 펴라. 지난번에 이어서 마법진을 그리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 주겠다."

마법 아카데미에서 교사를 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 * *

새하얀 증기를 내뿜는 마공학기관차가 역에 도착했다.

철컥! 치이이익!

철과 철이 맞물리며 압축된 증기가 내뿜어지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손님들이 하나둘 열차에 올랐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열차에 탑승하기 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폐부로 스며드는 맑은 공기에 내 몸마저 청명해지는 기분이었다.

하늘은 구름 없이 맑았고, 이제 막 끝나 가는 겨울의 싸늘한 공기에서는 오히려 기분 좋은 상쾌함마저 느껴진다.

엑실리온 제국으로 향하는 마공학기관차의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려 내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장갑을 낀 손과 피부의 사이로 느껴지는 기묘한 이질감.

'인피면구는 확실하게 붙어 있군.'

정체를 감춰야 할 일이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남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열차에 올랐다.

"표를 확인하겠습니다."

열차에 올라타자 차장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걸치고 있는 프록코트의 주머니에서 표를 꺼내 넘겨주었다.

"확인됐습니다. 제라드 씨.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차장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받은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거로 답했다.

넘겨받은 표를 확인해 보니 거기에는 403호라 적혀 있었다.

즉 4번째 차량의 3번 객실이라는 소리였다.

복도는 한 사람만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았지만 길었고, 한쪽에는 문이 큰 간격으로 나 있었다.

내가 지금 탑승한 마도공학열차는 괜히 호화 열차라 불리는 게 아닌지라, 길게 늘어선 복도에는 좌석들이 전부 객실로 구분돼 있었다.

401호.

402호.

403호.

'여기군.'

나는 명패를 확인하고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여는 순간 오래된 나무의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안쪽은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좌우로 나뉘어 있는 푹신해 보이는 좌석과 각자의 짐을 놓을 수 있는 수납공간.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직원을 부를 수 있게 설치된 신호용 벨까지.

'나쁘지 않군.'

무거운 짐 가방은 챙기지 않았기에 나는 몸만 따로 움직여 자리에 가볍게 앉았다.

고급스러운 열차라 그런지 좌석조차 푹신했다.

창밖을 바라보니 북부 산맥의 광활한 풍경이 눈에 밟혔다.

높게 치솟아 오른 뾰족한 산맥의 꼭대기는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어 마치 새하얀 고깔모자를 쓴 거인들 같다.

이 열차는 곧 저 산맥의 틈새를 비집고 나아간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좀 안도해도 되려나.'

내 이름은 제라드.

한때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던 평범한 사회인이었다.

물론 결국 전생의 일이었고, 나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

그렇게 죽었다 깨어난 곳이 지금의 세상.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마법과 과학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세상.

이곳에서 나는 새로운 제2의 인생을 구가하고 있었다.

'제국행 열차에 탔으니 도착할 때까지 푹 쉬면 되겠지.'

엑실리온 제국.

이 대륙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한 이름을 떨치는 국가다.

마법과 기계가 대등하게 공존하며 발전한 마도공학의 발생지이자, 마법사들과 마탑이 존재하는 곳.

나는 지금 그 제국으로 향한다.

'일단 중간에 경유하는 정거장은 대도시 레더벨크인가.'

나는 자리 옆에 꽂혀 있는 안내 팸플릿을 뽑아서 내용을 확인했다.

현재 출발 예정인 마도공학열차의 최종 목적지는 제국의 수도다.

그러나 타국의 국경에서 바로 한 나라의 수도로 향하는 열차가 있을 리가 없는 법.

그것이 아무리 검증받고 돈 많은 사람만 탈 수 있다는, 1등급 마공학열차라 해도 마찬가지.

당연하게도 중간에 경유하는 정거장이 2개가 존재한다.

레더벨크는 그중 첫 번째로서, 어떤 관점에서는 수도보다도 더 유명한 도시라고 볼 수 있다.

바로 모든 마법사 지망생들의 꿈이라 할 수 있는 마법 아카데미가 있는 곳이니까.

'아카데미인가. 참 놀라운 세상이야.'

제2의 삶을 살게 된 지 몇십 년이 지났지만, 그래도 적응이 안 되는 것이 많다.

전생과의 괴리감이 오죽해야지.

하지만 아카데미는 어차피 나와는 연관이 없는 곳. 굳이 신경을 쓸 필요는 없으리라.

덜컹.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열차가 한차례 작게 진동했다.

'슬슬 출발하려 하는 건가.'

빠아아아아앙!!!

내 예상대로 열차가 곧 출발을 알리는 경적 소리를 냈다.

빠르면 1분 내로 이 열차는 광활한 북부 산맥을 내달릴 것이다.

'이 방에서 나 혼자 가는 건가. 편하니 좋겠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403호 객실의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직원은 아니다. 들어온 건 잘 차려입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 훤칠한 키에 내가 입은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갈색 프록코트를 걸치고 있다.

열차의 직원이 저런 옷을 입을 리가 없으니, 나와 같은 객실을 쓸 손님이라는 소리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하필 동승자가 있었을 줄이야.

'눈치 안 보고 편하게 가긴 글렀군.'

그렇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상대가 나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

저쪽에서 인사를 먼저 건넸기에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굳이 말을 오래 섞고 싶지는 않아서 묵묵한 성격인 것처럼 대응했다.

남자도 그런 내 행동에 별로 개의치 않아 하며 내 맞은편에 있는 좌석에 앉았다.

빠아아아아앙───!!!

열차가 우렁찬 경적 소리를 내며 출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덜컹거리며 흔들리던 마공학기관차였지만, 이윽고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흔들림은 사라졌다.

괜히 표의 가격이 비싼 게 아니었다. 어지간한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비싼 값을 하듯, 일반적인 증기 기관차와는 속도나 편의성의 급이 달랐다.

투명한 유리창 바깥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수북하게 쌓인 눈과 그 속에서도 꿋꿋이 서 있는 침엽수들. 그 모든 것을 뒤덮은 새하얀 설산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워서 저절로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하지만 그 모습도 10분이고 20분이고 계속 보다 보면 단조로워서 질리기 마련이다.

나는 팸플릿 옆에 함께 꽂혀 있는 신문을 꺼내 펼쳤다.

이 세상에는 노트북도 스마트폰도 없어서, 지루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것은 책이나 신문 빼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타왕국 내전 종결]

[왕녀파벌의 승리로 끝나]

신문의 1면에는 그런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내전이 일어나서 각지에서 용병들을 대거로 모집했던 것이 유타 왕국이다.

그리고 조금 전 이 마도공학열차가 출발한 기차역이 있던 국가이기도 하고.

블랙레터 글꼴로 인쇄된 기사 사이에 흑백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전쟁의 승리를 알리는 왕녀파의 사진이었다.

"유타 왕국의 내전이 끝났군요."

신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굴을 가린 신문을 살짝 내리며 맞은편의 남자와 마주 봤다.

이렇게까지 직접 물어보면 나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기에 입을 열었다.

"예. 언제 끝나나 했더니 생각 외로 빨리 끝난 거 같아서 다행입니다."

"왕자 파벌이 용병들과 각지의 전력을 대거로 모으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일찍 끝나서 다행이네요."

"그래도 피해가 마냥 없는 건 아니죠."

"그런가요? 아. 자기소개가 늦었군요. 전 루드거 첼리시입니다."

루드거 첼리시. 성이 있는 걸 보면 귀족인가?

하지만 그에겐 귀족 특유의 거만함이나 오만함이 보이지 않는다.

"제라드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성은 없다.

즉 내가 평민이라는 걸 드러낸 것이다.

"아. 너무 불편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몰락 귀족 출신이라서요."

"아, 그러셨군요."

몰락 귀족이라면 이해가 간다.

귀족이되 귀족이 아닌 자들이니까.

"제라드 씨는 어디로 가십니까?"

"제국의 수도인 린데브루뉴로 갑니다. 그곳에 볼일이 있어서요."

"흠. 제라드 씨 정도 되시는 분이 볼일이 있으시다면, 필시 대단한 일이겠죠?"

농담 어린 루드거 씨의 올려치기에 나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일은 아니고, 그저 관광 차원에서 방문하는 겁니다."

"관광이라. 그것도 좋죠. 저도 듣기만 했는데, 엑실리온 제국은 마도공학이 많이 발달해서 볼거리가 아주 넘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는 루드거 씨는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저는 레더벨크로 갑니다."

"레더벨크라면 아카데미가 있는 곳이군요. 혹시 거기에 볼일이 있으십니까?"

"예. 뭐, 자랑은 아니지만 세오른 아카데미에 교사로 부임하게 됐습니다."

"호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제국 최대 규모의 마법 아카데미 <세오른>.

대륙에 존재하는 온갖 기린아들이 모이는 그곳은 이 세상을 짊어질 옥석들을 보석으로 깎아 내는 미래의 온상이다.

당연히 그곳에 모이는 학생들은 최고의 재능을 지닌 아이들로만 구성돼 있고,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도 그에 걸맞도록 엄격하게 엄선된 자들이다.

눈앞의 남자 또한 그중 하나라는 소리.

"젊으신 것 같은데, 실력이 대단하신가 보군요."

"아뇨. 그저 세간이 저를 높게 평가해 줬을 뿐입니다. 사실 아슬아슬하게 턱걸이로 합격한 거거든요."

"그 턱걸이도 만족하지 못해 떨어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을 거 같군요."

"그렇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보다 유타 왕국 내전 이야기 때문에 그러는데, 그 소문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문 말이죠?"

"이번 내전을 왕녀 파벌의 승리로 이끌게 만들었던 주역이 있었다고 합니다."

"흐음. 주역이라."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람은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도, 고위 기사도 아닌 떠돌이 용병이라고 하더군요."

한 국가의 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떠돌이 용병.

아직은 신문에 밝히지 않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은 퍼지고 있었던 걸까.

"용병 마키아벨리. 그게 그의 이름이라 했죠."

"그렇군요."

나는 살짝 심드렁한 어조로 그의 말에 맞장구쳐 줬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군요?"

"허허. 저는 그저 헛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말로는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 거짓말이다.

용병 마키아벨리라는 이름은 나도 익히 알고 있으니까.

애초에 모를 수가 없지.

왜냐면 마키아벨리는.

'내가 제라드 전에 사용하던 신분이었으니까.'

◈ 2화 제국의 수도로 (2)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왜 내게 마키아벨리의 존재를 물은 걸까.

그것도 내가 얼마 전까지 사용하던 가짜 신분을.

설마, 알고서 일부러 그러는 건가?

'무슨 속셈이지.'

순간 유타 왕국의 왕녀 파벌이 보낸 추적자일까 의심해 보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물어본 것 외에는 루드거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빛이나 행동은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단순한 우연?

'세오른의 교사라....'

세오른 아카데미는 머나먼 타국에 머물 때도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한 곳.

이렇게 젊은 청년이 세오른의 신임 교사로 간다는 것은, 그만큼 눈앞의 상대가 대단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라는 뜻.

확실히 처음 볼 때는 몰랐지만 조금씩 느껴진다.

이 사람이 어딘가 심상치 않다는 걸.

하지만 나는 경계심을 끌어 올리는 대신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우연이라고 치자.'

괜히 찔려서 티를 내면 안 된다.

나는 자연스럽게 신문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며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면 신문에 실렸겠죠."

"하하. 뭐, 세간에는 손쉽게 밝혀지지 않는 일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거 재미있군요. 그걸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말하셔도 되는 겁니까?"

"뭐, 안 될 건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라드 씨는, 오늘 처음 뵙지만 왠지 마음이 맞는 것 같아서요."

"세오른의 명망 있는 교사분이 이런 늙은이를 좋게 봐 줘서 고맙군요."

지금 유지하는 신분이 상대방에게 호의를 잘 사는 좋은 이미지라 그런지, 루드거는 나에게 품은 관심을 꺼뜨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없이 조용히 가기는 글렀군.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적당히 대꾸해 주기로 했다.

그래도 말동무가 있는 것이 적적하지 않기도 하고 나쁠 건 없으니까.

"루드거 씨는 세오른에 가시면, 바로 수업에 들어가시는 겁니까?"

"바로는 아니고 좀 기다려야 할 겁니다."

"1학년을?"

"아니요. 저는 2학년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오. 2학년이라니. 보통 신임 교사는 1학년 신입생들을 맡지 않습니까?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어깨너머로 들은 소식이지만, 세오른은 마법 아카데미면서 지구로 치면 대학교에 가까운 이미지를 지녔다.

거대한 부지에 온갖 건물들이 지어져 있고, 거기에서 거주하고 일을 하는 사용인들만 수천 단위라고 했던가.

대도시와 맞닿아 있지만 세오른 자체가 말 그대로 하나의 작은 도시에 가까워, 도시 옆의 도시라는 말까지 돈다.

그런 세오른의 학생은 총 1학년부터 5학년까지.

보통 학년이 높아질수록 아이들이 똑똑해지니, 고학년은 실력 있는 교사가 맡고 신임 교사는 1학년들을 맡는 것이 기본적일 터.

그런데 이번에 새로 부임하면서 2학년이라니.

제법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이상이었군.

'괜히 세오른의 교사가 된 게 아니겠지.'

마법을 가르치는 마법 아카데미.

철과 증기라는 산업 혁명을 이룩한 이 세계지만, 그럼에도 지구와 다른 점을 꼽는다면 역시 마법의 유무일 터.

'판타지 소설에서만 보던 거였는데.'

마법의 존재는 이 세상과 떼어 놓을 수 없었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런 마법은 언제나 선택받은 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면 마법은 사용할 수 없으니까.

다만.

옛날에 고귀한 혈통인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던 것과 다르게, 요즘은 평민도 재능이 있으면 마법을 배울 수 있는 실력 지상주의 관점이 꽤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세오른은 바로 그 실력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는 마법 아카데미의 1위를 달리는 곳이고.

'이쯤 되니 궁금하기는 하네. 대체 어떤 곳인지.'

보통 마법 아카데미라고 한다면, 지구에서 살던 나는 유명한 한 작품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고 나무 지팡이로 마법을 사용하는....

아마 어린 시절에 영화나 책으로 접했던 아이들은 이런 마법 학교에 대한 꿈이나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마법 학교라니.

이만한 로망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세계에는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

마법을 익히고 청춘을 구가하는 학생들이.

'청춘...인가.'

전생에서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런 걸 즐길 여유도 없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미친 듯이 공부만 했고,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으니까.

2번째인 지금의 삶도 전생과 별반 다를 거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심하면 더 심했지.

당장 내가 지금처럼 정체를 숨기고 돌아다니는 데는 다 그런 이유가 있는 법.

'이제 와서 그런 걸 바라는 것도 도둑놈 심보겠지.'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다시 살아가길 어언 27년.

나는 더 이상 불타는 청춘이니 뭐니 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길을 걷고 있었다.

마법 아카데미니 뭐니 하는 것은 그저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

그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눈앞의 루드거라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거짓된 신분으로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는 나와, 세오른이라는 빛나는 무대 위에 선 저 남자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래도 젊은 나이에 세오른의 교사가 되었으니 순수하게 축하는 해 줘야겠지.

'몰락 귀족이라 하니까.'

이 세상은 아직 계급 사회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귀족들은 당연하게도 그런 계급 사회의 정점에 속한 자들이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 있다가 나락까지 떨어진 자들이 존재한다.

국가에 반기를 들었거나 혹은 더 높은 자들에게 밉보였거나 막대한 돈을 빚졌거나.

여하튼 여러 가지 이유로 저 아래 나락까지 떨어진 귀족들.

몰락 귀족.

같은 귀족들에게 더 평민보다도 더 멸시를 받는 것이 몰락 귀족인 걸 감안하면, 눈앞의 루드거라는 남자가 세오른의 교사가 되기까지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해 왔던 거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뭔가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뭐지?'

창밖으로 살짝 시선을 던진 나는 묘한 불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기류가 이상하다.

정확히는 공기가 무겁다.

마치, 무슨 일이 터지기라도 할 것처럼.

"왜 그러십니까?"

그런 내 반응에 루드거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나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오감을 곤두세웠다.

...무언가가 온다.

"지금 뭔가...."

루드거가 입을 열려는 그 순간이었다.

──────!!!

거대한 폭음과 함께 강력한 충격이 마도공학열차를 거칠게 뒤흔들었다.

열차의 객실이 흔들리고, 철로 위를 달리던 열차가 옆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나는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의자 손잡이를 강하게 붙들었다.

"이게 무슨...? 엔진이 터지기라도 한 걸까요?"

루드거가 그렇게 중얼거리듯 물었지만, 나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엔진이 터진 것 같지는 않다.

엔진 하나가 나간 거로 열차 전체가 흔들리는 충격이 일어날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안전성 하면 손에 꼽을 마공학기관차의 엔진이 제풀에 터질 리가 없지 않은가.

무언가가 있는 거다. 이 폭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

내 불안한 상상이 틀리지 않았는지, 열차의 천장에서 쿵쿵 소리가 나며 무언가 분주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동시에 선두의 차량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나는 이게 정확히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챘다.

"습격이로군요."

"습격이요? 이 열차에?"

"마도공학열차의 손님들은 대부분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들이니까요. 그걸 노리는 북부 산맥의 강도들이 일을 벌인 거겠죠."

이 비싼 마공학기관차에 탑승한 손님들은 대부분 돈 많은 사람이다. 당연히 그들이 지닌 금품을 노리는 자들은 많았고, 열차를 노리는 강도의 습격은 간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설마 제국으로 향하는 국경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지금 습격한 놈들도 어지간히도 정상이 아니다.

간이 크다 못해 부어올라서 밖으로 튀어나왔을 정도.

'그보다 조금 전 열차를 뒤흔든 폭발. 평범한 위력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짐작 가는 부분이 있어서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마법인가.'

습격자들 사이에 마법사가 있다.

마법사가 끼어 있다면 이런 과감한 짓을 도전할 만도 하다.

마법사의 힘을 빌려 빠르게 털고 도망치면, 이 험준한 북부 아레트 산맥에서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을 테니까. 추격하는 입장에서도 힘들 테고.

그 부분을 노린 거라면 놈들은 필시 평범한 강도들이 아니다.

이 정도의 화력을 내는 마법사를 보유하고 귀족들이 탑승한 열차를 습격한 간 큰 놈들이 애초에 평범할 리가 없지.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다 보니 마법으로 나쁜 짓을 하는 놈들도 있는 것이다.

"루드거 씨. 일단 숨거나 몸을 피해야 할 거 같습니다."

내 말에 루드거도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거는 짐을 챙겨 들었다. 이 상황에서 가방을 챙기려는 건가. 안에 중요한 것이 담겨 있나 보군.

나도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앞장선 것은 루드거였다.

"혹시 모르니 제가 앞에 서겠습니다."

"예."

일단 내 신분은 돈만 많은 40대 평민이니까.

20대 중반에 아카데미 교사가 된 이 남자가 더 잘 싸우겠지.

루드거는 오른손에 자그마한 나무 지팡이를 꺼내 쥐고 경계를 올렸다.

우리 둘은 객실의 문을 열고 4호 차량 복도의 동태를 살폈다.

아직까지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손님들도 지금은 안전한 객실 안에서 가만히 기다리려는 것 같았다.

'틀린 선택이야.'

이런 객실 자체가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다고 하지만, 지금 습격한 강도들은 평범한 놈들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객실에 가만히 앉아 있다는 건, 나 잡아 달라고 목을 내미는 짓이나 다름없다.

이럴 때는 최대한 놈들과 멀어지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다 쳐도 3호 차량에 진입한 놈들이 아직까지 여기에 들어오지 않다니.'

바로 흩어지면서 손님들의 금품을 갈취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건가?

아니면 그 앞의 1호 차량을 노리는 걸지도 모른다.

1호 차량은 귀족들이 머무는 일등석.

그만큼 엄중하게 보호되어 있는 특실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그쪽이 가장 돈이 많은 황금알이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1호 차량에 시선이 끌릴 동안 우리는 뒤로 물러나면 그만이니까.

이런 마도공학열차는 당연히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서, 위급 상황이 벌어지면 구조 신호가 보내지도록 설비가 돼 있다.

아마 이른 시간 내로 지원 병력이 달려올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챙그랑!

그 순간 복도 유리창을 부수고 한 남자가 난입했다.

아직 채 털어 내지 못한 눈을 어깨에서 흩날리던 그는 우리의 기척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휙 틀어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인상 한번 살벌하군. 약이라도 빤 건가?'

증오와 분노가 뚝뚝 묻어져 나오는 그 모습은, 강도라기보다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였다.

이 추위 속에서 열차를 기다리느라 악에 받치기라도 한 걸까.

"와아악!"

하지만 내가 그런 의아함을 드러내기도 전에, 먼저 녀석이 우리를 발견하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동시에 루드거의 마법이 발현됐다.

지팡이의 앞에 마력이 실처럼 맺혀 새겨지는 술식.

허공에 3차원으로 그림을 그리듯 새겨진 술식은 곧이어 하나의 마법으로 승화했다.

파지직!

푸른 뇌전이 맺힌다 싶더니 한줄기 섬광이 침입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크아악!"

이쪽을 향해 달려들던 강도는 바닥에 엎드리듯 쓰러지더니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루드거를 보며 물었다.

"죽인 겁니까?"

"아니요. 제압만 했습니다."

그렇게 답한 루드거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쓰러진 강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지팡이를 계속 겨눈 채로.

"잠시만요. 루드거 씨. 위험합니다."

"괜찮습니다. 단지 무슨 목적으로 이 열차를 습격했는지 가벼운 심문만 할 거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더 말하려 했지만 루드거는 듣지도 않고 움직였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강도를 발로 밀어서 위를 향하게 만들었다.

"말해. 무슨 목적으로 이 열차를 습격한 거지?"

"크, 크윽. 킥. 키킥."

"이런 상황에서 웃어...?"

"전부, 다, 죽어야 해."

떠듬떠듬 들리는 그 목소리에 깃든 것은 피부가 떨릴 정도로 싸늘한 광기.

몸을 잘게 경련하고 코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강도는 웃었다.

동시에 그가 꽁꽁 싸맨 상의가 풀어지며 안쪽에 숨긴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막대한 양의 폭탄이었다.

"...!"

그것을 본 루드거가 눈을 부릅뜨며 마법을 발동하기 전.

강도는 미리 준비했는지 미리 손에 쥐고 있던 기폭제를 꾸욱 눌렀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4호 차량을 휩쓸었다.

◈ 3화 대열차 습격 사건 (1)

폭발로 일어난 뿌연 먼지가 가라앉았다.

"끄응."

파스스.

웅크리고 있던 나는 몸을 뒤덮은 부서진 잔해를 털며 일어났다.

다행히도 몸에 상처는 없었다. 부서진 파편도 내가 입고 있는 코트를 뚫지 못했으니까.

'혹시 몰라서 튼튼한 걸 입어 두길 잘했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복도와 차량의 벽이 완전히 날아가 있었다.

눈밭 위를 달리던 냉풍이 뻥 뚫린 틈새를 통해 불어 왔고,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칼날처럼 할퀴었다.

"...평범한 강도라고 생각했는데."

전류 마법에 감전당해서 제압된 상황에서 몸에 두른 폭탄을 터뜨리다니.

이건 절대 열차 강도가 보일 행동이 아니다.

그보다 더 심각할 정도로 가혹한, 굳이 말하면 광신도에 가깝지.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함께 죽자는 마인드.

'유타 왕국에서 도망친 왕자파의 잔당? 아니. 놈들은 지금 숨기 바빠. 이건 다른 놈들이야.'

답답함에 손으로 얼굴을 쓸던 나는 덜렁거리는 피부를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얼굴에 찬바람이 그대로 들어온다 싶더니.

"비싼 건데, 아쉽게 됐군."

찌이익.

나는 얼굴에 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었다.

폭발의 충격과 파편에 스친 것 때문에 찢어진 마당에 계속 쓰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주름과 수염이 있는 40대 남성의 얼굴은 더 이상 제 몫을 할 수 없었기에, 나는 열차 바깥으로 인피면구를 집어 던졌다.

조금 안전하게 가나 싶었더니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터질 줄이야.

'그러고 보니 그 남자는 어디에 있지?'

세오른 아카데미에 교사로 부임한다던 루드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직후 나는 깨달았다.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 남자는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거기에 휩쓸리고 말았다는 걸.

반쯤 날아가 부서진 황량한 벽. 흔적도 보이지 않는 루드거.

바깥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보였다.

절벽 아래는 아직도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뿌연 눈구름이 가득 깔려 있었다.

'...분명히 죽었겠군.'

강도라고 생각했던 녀석이 폭탄을 두르고 자폭을 하면 누구라도 당황하겠지.

미리 알고 있었다면 마법으로 대비할 수라도 있었겠지만, 예상 밖의 상황은 언제나 벌어지는 법이니까.

불쌍한 사람이다.

하필이면 그 유명한 세오른 아카데미 교사로 부임하는 날에 죽어 버리다니. 나는 가볍게 묵념하여 루드거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나도 여유 부릴 때가 아니지.'

놈들이 평범한 강도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위험도가 조금 전보다 몇 단계는 상승했다.

녀석들이 수틀려서 전부 다 자폭 공세를 퍼부으면, 아무리 마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이 튼튼한 마공학 열차라 해도 탈선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과격한 짓을 벌이는 걸 보면 그게 진짜 목표일 수도 있고.'

도망치자.

그렇게 판단을 내린 나는 뒤 차량으로 향했다.

드르륵.

그 순간 5호 차량의 문이 열리더니 잔뜩 긴장한 얼굴의 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엇? 손님. 괜찮으십니까? 지, 지금 이게 대체...."

그는 날아간 격벽과 복도에 홀로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살짝 당황해하더니 말을 더듬었다.

나는 차분하게 답했다.

"강도가 습격했습니다. 위험한 화약으로 무장을 하고 있더군요. 하마터면 거기에 휩쓸릴 뻔했습니다."

"그, 그렇군요."

"아무래도 놈들은 1호 차량 위주로 노리는 것 같으니, 저희는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안 그래도 지금 다른 승객분들을 뒤로 대피시키던 차였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나는 안도한 얼굴로 차장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로 좁혀지는 순간, 나는 차장의 멱살을 쥐고 그대로 지면에다가 메다꽂았다.

콰앙!

"크악! 왜, 왜 그러십니까!"

"내 앞에서 그런 알량한 연기가 먹힐 거라고 생각했나?"

"예, 예?"

어리둥절하다는 얼굴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차장의 모습.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말 억울한 그의 표정을 보며 의심을 지웠겠지만, 나는 아니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마정석을 달고 튼튼한 방어 마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마공학 열차가 이렇게 쉽게 뚫리다니. 게다가 그 험준한 아레트 산맥을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습격자가 나타나다니 말이야."

"무, 무슨...."

"열차 내부에서 누가 손을 쓰지 않고서야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 작동해야 하는 마법을 누군가 꺼 버리지 않는 이상."

"...."

그 순간 차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

놈이 손을 움직이며 무언가 꺼내려 했지만, 나는 이미 그럴 줄 알고 대비를 해 놨다.

나는 녀석의 턱 아래에 예리한 나이프를 들이밀었다.

"가만히 있어."

"큭."

"행동이 빠르군. 역시 평범한 강도는 아니었고. 말해. 너희들은 어디서 왔지?"

"...."

"입을 다물겠다는 건가. 뭐, 그것도 좋지."

어차피 크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는 녀석의 목에 나이프를 겨눈 채 녀석을 일으켰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 녀석이 넘어온 5호 차량에도 무언가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움직여."

오른손으로 든 나이프로는 녀석의 목을, 왼손으로는 양팔을 뒤로 꺾듯이 제압한 뒤 녀석의 발을 툭툭 찼다.

크윽.

놈은 이를 악물며 따르지 않으려 했지만, 꺾은 팔을 조금 더 비틀어 주니 바로 움직였다.

진작 그럴 것이지.

"저 너머에 동료는 몇이나 있지?"

"...."

"말하지 않겠다는 건가. 그러면 말을 하게 만들어 줘야겠군."

그 순간.

차장이 넘어온 5호 차량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려왔다.

격벽이 날아가 열차 바깥의 차가운 칼바람 소리가 불어닥치는 4호 차량에서 들릴 리가 없는 작은 소리였지만.

극도로 경계심을 끌어올린 나의 귀는 그 소리를 제대로 포착해 냈다.

철컥.

그것은 많이 들어서 익숙하기까지 한, 금속과 금속이 맞닿은.

...격철을 당기는 소리였다.

거기까지 파악한 나는 차장을 앞으로 밀어내듯 던지며 자리에 바로 납작 엎드렸다.

투타타타타타타타!

직후 내 머리 위로 무수한 총탄의 세례가 문을 뚫고 스쳐 지나갔다.

───!

내가 밀어낸 차장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채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비산하는 파편과 가루. 나는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문 너머를 노려봤다.

총알은 쉽게 그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기관 단총인가. 아주 제대로 준비를 해 왔군.'

그렇다면 이쪽도 손을 쓸 수밖에.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놈들도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총격을 멈추었다.

'자기 동료가 넘어갔는데도 가차 없이 쏴 버리다니. 심지어 어떠한 신호도 보내지 못하게 했는데.'

그렇다는 건 이미 걸레짝이 된 차장 녀석이 미리 말을 해 두었다는 뜻이다.

혹시라도 자신이 넘어간 뒤에 얼마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이미 당한 것이니 가차 없이 쏘라고.

'자폭 테러도 그렇고, 미친놈들이 분명해.'

왜 하필이면 내가 이 열차에 탔을 때 이런 일이....

나는 이 기구한 인생에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묻은 가루와 먼지를 털어 낸 뒤 문 너머를 노려봤다.

직후 문이 박살 나더니 건장한 덩치를 지닌 사람 셋이 복도로 우르르 들어왔다.

"뭐야.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잖아?"

"그렇게 퍼부었는데 안 죽었다고?"

"뭘 멋대로 죽이고 말고를 떠드는 거냐."

나는 저들끼리 떠드는 놈들을 보며 짜증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놈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살벌한 기세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복도는 한 명만 올 정도로 좁았고, 굳이 상대하면 1명씩 상대해야 하지만.

저쪽은 딱 봐도 우락부락한 게, 나보다 체급이 훨씬 더 나가 보인다.

굳이 말하면 싸우고 싶지 않다. 괜한 곳에서 힘을 빼는 건 사양이다.

'이제 와서 항복한다고 해도 안 받아 주겠지.'

이미 이쪽을 죽일 각오로 접근하는 놈들을 보면, 내가 무슨 회유를 하려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다.

녀석들은 나를 살려 둘 생각이 전혀 없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내 무뚝뚝한 말투에 녀석이 불쾌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원래 내 천성 같은 거라서.

"뭐야. 이제 와서 살려 달라고 외치기라도 하게?"

그럴 리가.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 열차를 습격한 거지? 목숨이 아깝지 않나? 이제 곧 구조대가 올 텐데?"

"하! 뭔가 했더니 되지도 않는 협박이었어?"

내 경고에 선두에 선 녀석은 코웃음을 치더니 제 덩치에 어울리는 검을 뽑아 들었다.

나름 진지하게 물어본 말인데, 대답을 해 줄 가치도 없다 이건가.

"단칼에 썰어 주지."

덩치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고, 나는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하지만 반파된 열차의 객실은 한계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내 발걸음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 물러나려 하면 부서진 열차 바깥으로 떨어지고 만다.

"흐흐. 더는 물러날 곳이 없구나."

"그렇군."

여기서 열차 바깥으로 뛰어내리면 루드거의 뒤를 따르는 꼴이 된다.

하지만 정면은 덩치가 막고 있으니 앞으로 가려면 뚫고 지나가야만 했다.

"바쁘니 최대한 빨리 끝내 주마!"

녀석이 그 말을 내뱉으며 내게 달려들려는 순간.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마법을 발동했다.

콰앙!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게 달려들어 검을 내리치려던 녀석의 몸이 포탄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쿠당탕!

뒤에서 멀뚱히 서 있던 놈들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함께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끄으윽. 무, 무슨...."

"마법사?!"

조금 세게 날린 마력이었지만, 꽤 튼튼한 놈들인지 크게 괴로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옷 안쪽에 뭔가를 걸쳐 입었군. 방호복 같은 건가.

그렇다면 더 강하게 가면 된다.

나는 모았던 마력을 방출하며 술식을 새겼다. 허공에 그려지는 삼차원 도형이 이윽고 마법으로 변했고, 순식간에 커다란 바람이 되어 몸을 일으키던 녀석들을 공중에 붕 띄웠다.

당황스러울 거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자신을 쥐는 기분일 테니까.

"어, 어어?"

"이, 이거 놔! 내려놓으라고!"

"원하는 대로 내려 주지."

나는 바람을 이용해 녀석들을 직접 옮겨 주었다.

뻥 뚫린 기차의 바깥으로.

"사, 살려 줘! 부탁이야!"

놈들은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나는 그렇다고 봐준다거나 하지 않았다. 전부 죽일 기세로 열차를 습격한 놈들이다. 자비를 베풀어 봤자 기습이나 하겠지.

그대로 열차 바깥으로 놈들을 집어 던지자 비명이 메아리를 울리며 서서히 멀어졌다.

"쯧."

습격자를 정리한 나는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주머니에서 끈을 꺼냈다.

미용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다 보니 꽤 장발이 되어서, 제때 정리를 하지 않으면 상당히 번거로워진다.

나는 흘러내리는 뒷머리를 목덜미 부근에서 하나로 묶었다.

"이제 좀 낫군."

이제 좀 도망쳐 볼까 생각하던 차에 이번에는 3호 차량의 문이 열리며 새로운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를 처리하면 다른 하나가 계속 나오고.

어째 끝이 없는 것 같군.

이래서 빨리 물러나고 싶었는데.

"이건 또 무슨...."

3호 차량에서 넘어온 놈들은 반파된 4호 차량의 내부와 멀쩡하게 홀로 서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죽여!"

대장인 듯한 녀석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녀석들이 나를 향해 소총을 겨누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래. 어쩌겠어. 여기까지 왔으면 끝장을 봐야지.

"쏴!"

대장이 명령을 내리고 부하들이 방아쇠를 당긴다.

하지만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철컥! 철컥!

"어, 어어?"

"뭣들 하는 거야!"

"초, 총이 고장 났습니다!"

"뭐?"

모두가 그렇게 떠들고 있는 동안에 나는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저렇게 모여 있으면 이쪽에서 처리해 주기 편하니까.

하지만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놈들 사이에서도 마법사가 끼어 있었다는 것.

파아앗!

내가 내지른 마법이 허공에서 상쇄된다.

이쪽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는 마법사는 나를 경계 어린 시선으로 노려봤다.

"설마하니 열차 승객에 마법사가 끼어 있었을 줄이야."

"...."

"뭐가 어찌 됐든, 이렇게 된 이상 너도 함께 죽어 줘야겠다."

뭘 이렇게 된 이상이야. 처음부터 계속 죽이려고 했으면서.

아무래도 이놈들 테러리스트들 같은데,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겠지.

나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테러가 벌어지고 아직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시간은... 아직 조금 부족한가.'

바깥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여전히 차갑고 살풍경하다.

창문 너머로 봤을 때는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를 가로막은 벽이 하나 사라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섭게 다가온다.

열차가 아레트 산맥을 벗어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지원군도 당장에는 오기 힘들겠지.

'어쩔 수 없군.'

위치와 지난 시간을 생각해 보면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은 최소 5분.

'버텨 보는 수밖에.'

◈ 4화 대열차 습격 사건 (2)

"비켜!"

"방해다!"

입구를 막고 있는 사람들을 밀치며 마법사들이 일렬로 섰다.

그들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4호 차량에 홀로 남은 남자를 노려봤다.

몸에 쫙 달라붙는 깔끔한 양복 위에 걸친 금색 수실이 들어간 검은 프록코트.

목덜미에서 질끈 묶은 흑색 장발.

바깥에 휘몰아치는 냉풍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날카로운 눈빛까지.

겉모습부터 풍겨 오는 기세까지, 하나같이 전부 다 심상치 않았다.

실제로 그의 손에, 열차 후방에서 돌입한 자신들의 동포들이 명을 달리했다.

'놈은 대체 누구지?'

열차 습격을 주도한 테러리스트는 눈앞의 남자를 두고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이 열차에 저런 마법사가 탑승해 있었을 줄이야.

사전에 정보 입수가 늦었던 걸까.

'아니. 뭐가 어찌 됐든 상관없어. 이쪽은 마법사만 다섯이라고.'

마법을 배운 고급 인력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거로 모집했다.

혹시 모를 내부 경비 인력이 있다 하더라도 압도적인 무력으로 쓸어 버릴 수 있는 수준.

설마 마법사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래 봤자 상대는 고작 하나. 실력이 출중하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쪽의 숫자가 다섯이 되면 더는 대응할 수 없을 터.

게다가 이쪽의 마법사 중에서 대장이라 할 수 있는 메이헴은 무려 4위계 마법사다.

'상대가 최소 5위계 이상의 이름 있는 마법사가 아닌 이상 절대로 대응할 수 없을 거야.'

이 대륙 전체에서 그 정도로 실력이 있는 마법사는 별로 없다.

특히 저렇게 젊은 나이에 5위계 이상을 달성했다면 이미 소문이 쫙 퍼졌을 터.

그렇다면 상대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4위계.

그것은 정확히, 이쪽의 메이헴과 동등한 수치인 것이다.

눈앞의 남자도 그걸 알고 있어서인지 선뜻 마법을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흠. 마법사가 다섯이라. 확실히 그렇군."

"의외로 수긍하는 게 빠르군. 하지만 그래도 늦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방법을 조금 바꿀 수밖에."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윽고 프록코트의 자락을 휘날리며 부서진 열차의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어, 어어? 뛰어내렸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택한 건가?"

의아해하는 테러리스트들.

그중 마법사 하나가 혹시나 싶어서 부서진 격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래로 떨어져 죽은 거 같습니다!"

"뭐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저 겁쟁이였을 뿐인가."

모두가 그런 결론을 내리려는 순간.

퍼석!

고개를 내밀고 있던 마법사의 머리를 섬광 하나가 꿰뚫고 지나갔다.

균형을 잃은 육신은 그대로 앞으로 기울며 열차 바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뭐, 뭐야!"

"한슨이 죽었어!"

죽었다? 대체 왜? 그보다 방금 그 섬광은 어디서 날아온 거지?

모두가 의아해하는 사이 마법사들의 리더인 메이헴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위를 올려봤다.

"위다! 녀석은 지붕 위에 있다!"

"열차 위라고? 하지만 조금 전에 밖에 뛰어내리지 않았나?"

"설마 비행 마법이라도 쓴 건가?"

"달리는 열차를 비행 마법으로 따라잡아서 올라타는 게 가능해?!"

"시끄럽고 어서 놈을 쫓아!"

* * *

'아쉽게 됐군. 방심시킨 뒤에 하나 더 데려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아래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음.

이쪽이 살아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놈들도 이제 전력으로 나를 죽이려고 들 것이다.

뛰어내리는 척, 벽에 매달린 다음 바로 위로 올라가서 놈들에게 방심을 심어 주었는데.

다섯 명의 마법사 중에서 하나를 데려간 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나.

"어서 올라가!"

"놈을 죽여!"

차량과 차량의 사이로 목소리가 울리더니 이윽고 하나둘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지 않을 거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들에게 유형화된 마력을 쏘아 주고, 그대로 등을 돌려 후방 차량을 향해 내달렸다.

위로 올라오려던 놈들은 머리 위를 스치는 공격에 다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엄폐물이 없는 지붕은 올라가기만 하면 표적이 될 뿐이니까.

쿵쿵쿵쿵.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달리자 차량 안에서 대기하던 놈들도 소리를 듣고 나를 쫓아왔다.

"뒤다! 놈이 후방 차량으로 물러난다!"

"쫓아!"

정말 알기 쉽게도 따라와 주는군.

아무래도 마법사를 하나 없앤 것이 꽤나 효과가 큰 것 같았다.

서로 죽음을 각오하고 자폭을 하더라도, 남의 손에 동료가 죽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걸까.

실로 모순적인 마음가짐이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와 준다면 나야 더 고맙지.'

그럴수록 더 흔들기 쉬워지니까.

* * *

테러리스트들은 열차의 후방으로 도망친 마법사를 잡기 위해 인원을 반으로 쪼갰다.

어차피 상대가 마법사인 이상, 같은 마법사가 아니면 괜히 방해만 될 뿐이다.

마법사들을 보좌해 줄 몇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직 뚫지 못한 1호 차량의 퍼스트 클래스를 노리기로 했다.

그렇게 4호 차량에서 갈라진 두 집단 중 후방으로 향하는 마법사 부대들.

"제길! 어디지?"

"위에 올라간 동포들은? 왜 아무 말이 없어!"

"아무튼, 뒤로 가자!"

그렇게 황급히 앞장서서 문을 여는 순간.

콰아앙!

문이 폭발하며 새빨간 불꽃이 테러리스트들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다섯 명이 까만 숯덩이가 되어 지면이 쓰러졌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꽃은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 후 촛불처럼 꺼졌다.

"이, 이 간악한 놈이!"

"문 앞에 함정을 설치하다니!"

마법사의 리더 메이헴은 죽은 동포들의 시체를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그 짧은 시간에 문 앞에 마법으로 트랩을 설치했다고?'

그 신속함이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그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상대방이 보이는 행동이었다.

보통 그가 아는 귀족 출신 마법사들은 태생부터 거만함에 절어 있어서 몸을 움직이는 걸 극도로 꺼린다.

그들은 언제나 마법을 사용할 때 남들이 보란 듯이 자리에 서서 자신의 마법을 과시하듯 펼쳐 낸다.

하지만 지금 그가 쫓는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니 바로 칼같이 도망치고, 그러면서 상대방의 방심을 불러일으킨 뒤 기습을 가한다. 이게 일반적인 마법사의 방식일 리가 없어.'

지나치게 실리적이고 또 철저하다.

이건 마법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용병, 혹은 사냥꾼에 가까운 움직임이 아닌가.

'녀석은 대체....'

처음에는 동포를 죽인 그저 그런 마법사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 열차에 탑승한 자는 죄다 귀족이거나 혹은 부유한 상인이 대부분.

그들은 전부 불쌍한 평민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그 위에 선 자들이다.

누구 하나 죽어도 충분한 자들이었는데.

'하지만 놈은 달라.'

대체 정체가 뭐란 말인가.

그렇게 고민하던 메이헴은 한층 더 무거워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 조심해라. 이제부터는 우리가 앞장선다. 놈이 무슨 함정을 팠을지 모르니까 최대한 조심히 움직여라."

"네!"

메이헴을 필두로 마법사들이 앞장서서 혹시라도 복도나 벽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지 확인을 해 가며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열차와 열차 사이를 넘어갈 때마다 상당한 시간이 잡아먹혔다.

"조급해하지 마라. 어차피 녀석은 열차의 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일단 놈이 후방 차량으로 도망친 것은 확실했다.

마법사의 리더인 메이헴은 천천히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낀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싱숭생숭한 기분이 드는지에 대한 이유는 금방 깨닫게 됐다.

덜컹! 키이이이잉!

열차의 끝에서 무언가 큰 소음이 울려 퍼졌다.

천천히 움직이던 테러리스트들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아차! 열차를 분리하고 도망친다!"

머리에 열이 올라서 깨닫는 것이 늦고 말았다.

애초에 상대는 굳이 이쪽과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저 시간만 끌면서 도망치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함정을 통해서 일부러 이쪽의 경각심을 일으켜 시간을 끈 다음.

자신은 맨 끝 차량으로 빠르게 넘어가 안전하게 탈출하려는 것이다.

"쫓아! 놈이 도망치게 두지 마!"

이제 다급해진 그들은 함정이고 자시고 도망친 마법사를 쫓아서 죽일 생각밖에 없었다.

그들은 황급히 열차를 내달렸고, 이윽고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12호 차량의 코앞에 도착했다.

그들이 문을 여는 순간 본 것은 원래 있었어야 할 12호 차량의 풍경이 아닌, 눈 덮인 산맥과 철로뿐이었다.

메이헴은 이를 악물었다.

'실수했다. 녀석은 굳이 우리와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걸 계속 상기하고 있어야 했어.'

머리에 열이 오른 나머지 그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설마하니 상대가 이렇게 작정하고 도망을 칠 거라고 누가 예상이라도 했을까.

"제길, 놓친 건가?"

"그 자식. 인상착의는 기억해 뒀다. 반드시 찾아서 죽여 버리겠어."

모두가 그렇게 이를 악물고 바깥을 노려보고 있을 때.

메이헴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의 파동을 느끼고 전신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이게 무슨...."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본 것은

분명 분리된 12호 차량과 함께 사라졌어야 할 그 남자의 모습이었다.

"왜 여기에...."

하지만 중요한 건 저 남자의 존재가 아니었다.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것은 그의 앞에 완성된, 거의 발동 직전의 마법.

그것도 매우 흉포하고 위험한 부류의 원소 마법이었다.

"모두 피해라!"

메이헴은 그렇게 외치며 마력을 최대한 많이 끌어올렸다.

부족한 시간 속에서 최대한 역량을 끌어올려 최대한 튼튼한 마력의 장벽을 만들어 냈다.

화르륵!

직후 거대한 마법이 11호 차량 전체를 집어삼키며 내부를 폭풍처럼 휩쓸었다.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불꽃.

바깥에서 은은하게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똑같은 색의 불씨들.

그것은 미처 대피하거나 반응하지 못한 테러리스트들을 모조리 휩쓸었다.

* * *

"끝났나."

나는 점차 사라지는 마법의 불꽃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놈들은 내가 12호 차량으로 도망갈 거라 생각하고 거기에 정신이 쏠려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함정을 파서 시간을 끌고, 그러는 사이에 차량을 분리하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하지만 그 또한 함정.

처음에는 기습을 가하면서 시간을 끄는 척하면서 도망갔지만.

그 도망가는 것도 결국엔 놈들을 속이기 위한 기만전술에 지나지 않았다.

놈들의 머리에 열이 제대로 오른 것도 도움이 됐다.

덕분에 흐름을 내가 가져갈 수 있었고, 이렇게 한곳에 모아서 일망타진할 수 있었으니까.

'선두 차량에 아직 남은 녀석들이 있는 것 같지만, 마법사들을 모두 처리했으니 상관없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잔해더미에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용케 살아 있었군."

"네놈...."

몸을 일으킨 것은 마법사들을 이끌던 리더였다. 그 순간에 장벽을 펼쳐서 방어를 한 것인지 그는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

그의 몸 상태는 딱 봐도 살아 있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처참했다.

막아 내기는 했지만 완전하게 막지 못한 건지 얼굴이 반쯤 녹아 있었고, 전신이 화상을 입은 상태. 심지어 팔 한쪽은 사라지고 없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보이니 어차피 오래 못 견딜 거 같아서, 나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대체 왜, 죽인 거냐. 세상을 위해 힘쓰는, 우리 동포들이 불쌍하지도 않나?"

"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건 또 너무 신박한 개소리가 아닌가.

내가 황당해하며 입을 다물자, 녀석은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분노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네놈의 손에 죽은 사람들이 불쌍하지도 않냐는 말이다!"

"원래부터 미친놈들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더 미친놈들이었군."

"뭐라고?"

"그러는 너희야말로 열차를 습격해서 승객들을 죄다 죽인 주제에, 뭘 잘났다고 그렇게 떠드는 거지?"

내가 어이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이놈들은 열차를 습격했고, 거기에 있는 승객들을 보이는 대로 죽였다.

그런 놈들이 자기 동료들이 죽었다고 이 악물고 나를 나쁜 놈 취급하는데, 솔직히 짜증 나기만 한다.

"놈들은 죽어도 싼 놈들이었어!"

"애초에 날 죽이려 했던 것도 너희들 아닌가? 이미 우린 서로 죽여야만 하는 상황인데 뭘 이제 와서 네가 나쁘니 어쩌니 떠드는 거지?"

"그, 그건...."

"죽이려다 못 죽였으면 죽어야지."

"네놈은... 네놈은 대체, 누구냐."

녀석은 따지는 것을 포기하고 내 정체에 대해서 물어봤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너머, 바깥에서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무수한 그림자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스르릉.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에서도 섬뜩하리만치 잘 들려오는 검을 뽑는 소리.

활짝 열린 뒷문을 통해 새하얀 섬광이 번뜩이며 마법사를 반으로 갈랐다.

서걱!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실선이 그어진다. 그리고 새하얀 그림자가 마법사를 뛰어넘어 지면에 착지하는 순간, 그의 몸이 쩍 갈라지며 양옆으로 쓰러졌다.

시체에서 피는 흘러내리지 않았다. 잘려 나간 단면이 새하얀 얼음으로 꽁꽁 얼어 있었으니까.

쓰러진 시체 너머로 보이는 건 새하얀 망토를 펄럭이는 여기사의 모습.

"괜찮으십니까?"

이쪽을 돌아보며 걱정스럽게 묻는 여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답했다.

어깨의 견장에 달린 문양은 순백의 독수리의 모양.

그것은 제국의 수호를 담당하는 국경수비대 기사단의 징표였다.

"이제 걱정하지 마시길. 저희 국경수비대가 나섰으니까요."

◈ 5화 콜드 스틸(Cold Steel)

나는 보았다.

새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눈밭 위를 달리며 열차에 하나둘 뛰어오르는 광경을.

인간을 초월한 움직임.

두 다리로 달리는 말을 따라잡고 각력으로 바위를 부술 정도로 강력한 존재들.

그것이 바로 기사다.

그리고 저들이야말로, 엑실리온 제국의 가장 험준한 구역을 담당하는 기사단이었다.

"아아악!"

"제국의 국경수비대다! 모두 도망쳐!"

"살려 줘!"

곳곳에서 테러리스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나하나가 정예급 멤버로 이루어진 국경수비대가 나섰다면, 저 너머의 상황은 어떻게 됐는지 안 봐도 뻔하다.

그렇게 국경수비대가 나서고 1분도 안 걸리는 짧은 시간.

열차 습격 사건은 그렇게 끝났다.

* * *

'끝난 건가.'

국경수비대 산하의 콜드스틸 기사단.

이름만 들으면 별거 없어 보이지만, 이 험준하고 차가운 아레트 산맥에서 활동하는 자들로 이루어진 만큼 개개인의 실력이 상당한 기사단이다.

나는 아직은 멀쩡한 403호 객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처음 앉았던 좌석에 털썩 주저앉았다.

열차 내부는 치열한 싸움을 증명하듯 곳곳에 칼자국과 그을린 자국이 가득했다.

그나마 방어 마법진이 새겨져 있어서 이 정도지, 평범한 열차였다면 이미 탈선해서 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도적들은 전부 토벌했으니 모두 안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곧 열차가 도착하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기사들이 열차 안쪽을 돌아다니며 생존자들을 진정시키는 것이 보였다.

사실 생존자라고 해도 가장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은 퍼스트 클래스의 사람이 전부였지만.

그 외의 객실은 생존자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 아니 사실상 전멸이었다.

열차에 탑승한 사람의 숫자가 적은 걸 감안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래도 테러리스트들을 전부 제거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열차를 습격한 놈들은 기사단에 의해 전원 사망.

마법사를 다수 끌고 온 것치고는 참으로 허망한 결과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 그 마법사를 죽인 게 나구나.'

지금 내가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이제 곧 열차가 목적지에 도착한다.

새하얀 눈이 가득 뒤덮인 산맥을 지나자 싱그러운 초목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깎아지른 얼음 산맥이 사라지고 이를 대신한 것은 넓은 평야.

그리고 지평선의 저 너머에 보이는 것은 엑실리온 제국의 대도시 중 하나인 <레더벨크>였다.

'크군.'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도시의 위용은 한눈에 보일 정도로 웅장하다.

하늘을 향해 탑처럼 높게 치솟은 건축물들. 끝없이 새하얀 연기를 토해 내는 공장의 굴뚝들. 빛에 물든 구름 사이를 노니는 커다란 비행정들까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가의 위로는 태엽과 황동으로 구성된 기계 보트들이 즐비해 있고, 그 사이를 증기선들이 빠르게 오간다.

발달한 기계 공학에 마법이 합쳐져 만들어진 마도 공학.

그것이 이룩한 문명은 흔히들 말하는 '스팀펑크(Steam Punk)'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이제 와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니기는 한데.'

그래도 전생의 기억 때문에 벌어지는 그 괴리감이 자아내는 묘한 느낌은 지우려야 지울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 사고로 사망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쪽 세상에서 아기로 태어난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그것도 벌써 27년 전의 일.

참 세월이 빨리 흘렀구나 싶다.

이 세상은 흔히들 빅토리아 시대와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 부르는 세상에 마법이 깃들고 아인종과 몬스터들이 더해진 독특한 세계다.

차라리 내가 즐겨 하던 게임이나, 혹은 좋아하던 소설 속 세계로 들어온 거라면 모를까... 이곳은 내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연고조차 없는 별세계다.

"괜찮으신가요?"

가만히 좌석에 앉아서 가까워지는 목적지를 응시하는 내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니 반파된 객실의 입구에 가지런한 흑발이 눈에 띄었다.

처음 나를 구해 줬던 그 여기사인가.

그녀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조금 전 테러리스트들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당하신 건 아닌지...."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기사단 여러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저 조금 생각할 것이 있었을 뿐입니까요."

"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다행이라며 가슴에 쓸어내리며 웃는 그 모습은 한 떨기 장미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제 와서 하는 소리지만, 그녀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잡티 없이 새하얀 피부와 백색 갑옷. 그에 대조되는 흑발은 그녀의 강렬한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성격도 모난 곳이 없이 착한 사람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고작 나 같은 사람이 걱정된다고 직접 찾아와 곁에 머물러 줄 리가 없으니까.

콜드스틸 기사단 소속인 걸 보면 능력이 있는 거 같고, 젊어 보이는데 그렇다는 건 재능도 있다는 거겠지.

참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제 이름은 베로니카 드빌레라고 해요. 그쪽은요?"

드빌레.

들어 본 적 있다. 제국에서 이름 있는 기사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가라 했던가.

"저는...."

빠아아아앙───!!!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열차가 도착을 알리는 경적을 내뿜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고, 베로니카는 고개를 돌려 바깥을 살폈다.

"아. 드디어 레더벨크에 도착했네요."

속도를 천천히 줄인 열차가 어느덧 기차역에 완전히 정차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역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아무래도 열차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하러 온 것 같았다. 그들은 곳곳이 부서지거나 망가진 기차의 외형을 보더니 저들끼리 뭐라고 떠들었다.

경찰들이 나서며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벽을 세웠고, 또 그 틈새를 누비고 어떻게든 특종을 노리려는 기자들도 보였다.

과연 대도시답게 레더벨크는 시작부터 북적거렸다.

"사람들이 참 많죠? 이미 소식이 퍼진 것 같네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지금 내게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원래라면 수도까지 가야 할 이 열차가, 의도치 않은 습격 때문에 레더벨크에서 멈춰야 한다는 거다.

그렇다고 이미 지불한 표를 환불받을 방법도 없으니 나는 일단 이곳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드르륵.

그 순간 닫혀 있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승객 여러분들은 나가지 마시고 자리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죠?"

베로니카가 묻자 경찰 중 하나가 되물었다.

"그쪽은 누구십니까?"

"콜드스틸 기사단 소속 베로니카라고 합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군요."

"아, 콜드스틸 기사단 기사분이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레더벨크 광역경찰청 소속 레믈루스 경관입니다."

"네 레믈루스 경관님. 반가워요.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이죠?"

"이곳에 오기 전 아레트 산맥 국경에서 열차 습격 사건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습격자들은 전부 저희가 처리했죠."

"콜드스틸 기사단 여러분들의 노고 덕분에 열차를 습격한 도적 떼를 모두 격퇴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뭔가 석연찮은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석연찮은 것?

그 말에 나는 괜히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불안해졌다.

그러고 보니 뭔가 걸리는 게 하나 있었는데.

"습격자들 사이에 마법사가 끼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마법으로 보호를 받은 마공학 열차가 이렇게 쉽게 습격을 허락했을 리가 없습니다."

"네. 그랬죠."

"이번에 벌어진 테러는 단순히 외부에서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누군가 일을 저질렀음이 분명합니다."

"그건...."

베로니카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경관의 말에 수긍했다.

애초에 저 가정은 비약이 아니다.

실제로 열차 직원으로 위장해서 내부에서 마력의 장막을 해제한 놈과 맞닥뜨렸으니까.

녀석 때문에 테러리스트들은 열차에 쉽게 돌입할 수 있었고, 안에 탑승한 승객들이 죽었다.

"이미 시체로 신원을 조회한다고 해도 혹시 모르니까요. 내부의 생존자 중에서 테러를 벌인 놈들과 내통한 자가 있을지도 몰라 신원만 확인하려는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원이 증명되신 분들은 금방 돌려보낼 테니까요."

"아, 그렇군요."

베로니카는 다행이라며 웃으며 이쪽을 돌아봤다.

그녀의 미소는 퍽이나 안도감이 넘쳤지만, 내 등 뒤에는 오히려 식은땀이 줄줄 흘렸다.

신원을 확인한다고? 그것도 하필 인피면구가 벗겨진 이 상황에서?

나는 차분하게 손끝으로 내 얼굴을 매만졌다.

그래. 확실히 지금 인피면구는 씌워져 있지 않다.

'큰일났다...!'

나는 제라드라는 40대 중반의 부유한 상인으로 이 열차에 탑승했다.

당연히 탑승자 명단에는 제라드라는 인물이 적혀 있을 것이다.

그거까진 괜찮지만, 문제는 지금 내 얼굴이다.

수염도 주름도 없는 이 얼굴을 어떻게 40대 중반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어떡하지.'

나는 테러를 주도하지도 않았고 억울하게 휘말린 승객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당당할 수도 없었다.

제라드는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한 위조 신분.

위조 신분은 어느 나라에서든 중죄다.

운이 좋아야 교수형, 지금 같은 테러로 의심되는 상황과 엮이면 심한 고문까지 당할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신분을 위조할 일도 없겠지.

어쩌지? 이대로 도망쳐야 하나?

'그게 될 리가 없다.'

지금 이 열차에는 콜드스틸 기사단이 있고, 심지어 열차 바깥에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제국의 병사들이 깔려 있다.

여기서 도망치려고 하는 순간, 나는 1분도 버티지 못하고 목이 날아갈 것이다.

도주는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정체가 들킨다.

나는 불안감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 명단 서류를 가져온 경찰이 종이를 넘기고 있었다.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을 하나씩 대조해 보려는 거다.

그가 내게 물었다.

"손님은 몇 호실의 승객이셨습니까?"

"...403호입니다. 여기 표도 있습니다."

나는 일단 차분하게 안주머니에서 기차표를 꺼내 경관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표가 가짜가 아닌 걸 확인하고는 곧바로 서류를 촤르륵 넘겼다.

"어디... 403호. 아. 여기 있군요. 객실에 머문 손님은 둘. 루드거 첼리시. 20대 중반의 남성. 그리고 40대 남성 제라드."

그러면서 고개를 들더니 나를 슬쩍 바라본다.

그것은 마치 둘이 있어야 하는데 왜 혼자만 있냐라고 묻는 것 같았다.

"한 분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습격이 벌어지면서 일어난 폭발에 휩쓸렸습니다. 아레트 산맥의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죠."

그 험악한 산맥의 절벽 아래로 떨어졌으니 시체조차 찾을 수 없으리라.

나의 말에 경찰은 더욱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 왔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도 필사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했다.

들킨다. 이대로 가면 들키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을 벗어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바깥엔 경찰과 병사들이 잔뜩 깔려 있다. 그 포위망은 매우 견고하다.

'도망?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라면, 눈앞의 백색 망토를 펄럭이는 여인 베로니카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테러리스트의 정수리를 갈라서 반토막을 낸 여인이다.

사람을 죽이는 데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지금이야 웃으며 날 대하고 있지만, 내가 수상하다는 게 밝혀지는 순간 누구보다 가장 먼저 검을 뽑을 여인이다.

젊은 나이에 콜드스틸 기사단에 들어간 실력을 생각하면, 열차 바깥의 경찰들보다 훨씬 더 위협적일 터.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칠 무렵.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베로니카가 나를 두둔하고 나섰다.

"잠깐만요. 저분은 애초에 용의자가 아닙니다."

"예?"

"왜냐면 저분은 저희 콜드스틸 기사단이 오기 전 테러리스트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두 눈으로 봤습니다."

"싸우셨다고요?"

경관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리며 명단을 다시 꼼꼼히 살폈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납득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순식간에 바뀐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루드거 첼리시 씨는 생존하고, 제라드 씨가 폭발에 휩쓸렸다는 거로군요."

...어?

아니 잠깐만. 지금 대체 뭐라고?

명단을 더 세세히 확인하던 경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 이번에 세오른 아카데미에 부임하게 된 신임 교사?!"

"네? 세오른의 교사? 정말이에요?"

레믈루스 경관의 외침에 베로니카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희극의 한 장면 같은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며, 나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깨달았다.

정말로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저들은 지금 나를 루드거라 믿고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나는 바로 평정심을 되찾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답하며 나는 루드거가 죽기 전에 떨어뜨렸던 슈트 케이스를 주워들었다.

혹시 몰라서 미리 챙겨 두길 잘했다.

"제가 루드거 첼리시입니다."

◈ 6화 거짓 신분 (1)

이 세상은 아직 사진이 대중화되지 않았다.

대부분 사진은 흑백으로만 존재하며 그마저도 화질이 썩 좋지 않아 세세한 비교가 불가능했으니까.

인물을 비교할 때 결국 복장과 나이대, 전체적인 체격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저들이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미안합니다. 루드거 씨.'

죽은 사람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나까지 죽을 수는 없잖아?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리고 이 상황을 모면하는 데 루드거의 신분은 매우 큰 도움이 됐다.

"이럴 수가. 세오른 아카데미의 신임 교사셨다니. 역시 그때 본 마법은...."

세오른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를 대하는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변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역시, 이러면서 혼자서 뭐라 중얼거렸다.

그렇군. 내가 마법을 사용한 모습을 본 건가.

어쩌면 그 덕분에 더욱 그녀의 신뢰를 얻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를 반쯤 의심하며 심문하려던 경관조차도 곧바로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무례를 범한 점, 용서해 주시길."

"괜찮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 세오른이라는 이름이 정말 대단하구나 싶었다.

제국에 존재하는 유일한 마법 아카데미.

대륙으로 놓고 봐도 손꼽히는 아카데미가 바로 세오른이다.

세오른의 이름은 절대로 가볍지 않았고, 그곳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라고 하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세오른의 교사라니."

"젊은 나이에, 대단하군."

다른 경비병들과 경찰들도 저들끼리 숙덕거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나는 더 뻔뻔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이 순간만큼은 나는 루드거 첼리시가 되는 거다.

"저, 저희가 출구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제국의 미래를 육성하실 분이신데, 어찌 저희가 그냥 보내겠습니까. 저희 때문에 괜히 시간을 낭비하셨는데."

"괜찮은데."

"저희가 죄송해서 그렇습니다."

아니, 너희들이랑 같이 움직이는 거 자체가 불편하다고!

그 말을 외칠 수가 없어서 나는 무뚝뚝한 얼굴로 알겠다고 답했다.

"베로니카 씨.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반가웠습니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베로니카에게 인사를 나눴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쁜 인연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도 같은 생각인지 방긋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어 줬다.

"네, 루드거 씨! 나중에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요!"

"예. 그럼."

미안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볼 일은 없을 거 같네요.

나는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몰려있는 인파를 거슬러 기차역의 출구까지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과연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기차역이라 그런지 출구에서도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이쯤 됐다 싶어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충분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서 움직이겠습니다. 그 이상은 저도 부담스러우니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부디 살펴 가십시오!"

경비병은 내게 경례를 한 뒤 다시 역 안으로 사라졌다.

가볍게 목례를 하는 것으로 인사를 건넨 나는,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저쪽에서 순간 제멋대로 착각해 줘서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가짜 신분이 들통 나서 테러 공범으로 몰렸을 거다.

그래도 위급한 상황을 넘겼으니 이제는 괜찮겠지.

"루드거 첼리시 씨 맞습니까?"

그 순간,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걸 느꼈다.

목소리에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다소곳한 자세의 노신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답했다.

"네. 맞습니다만. 그쪽은 누구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저는 세오른 아카데미의 사용인 윌포드라고 합니다. 루드거 씨를 마중 나왔습니다."

"...마중 말입니까? 저를?"

"예. 열차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해서 급하게 찾아왔습니다만, 무사해 보이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윌포드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이 끌고 온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자. 타시죠. 세오른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

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여기서 사람 잘못 봤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저 윌포드라는 노인이 언제부터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루드거라 확신하는 걸 보니 경관과 헤어지던 모습을 봤을 터.

여기서 아닌 척하고 거절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무엇보다 처음 등장했을 때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데다가, 최대한 숨기고 있지만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이 날카로운 기도.

이 남자.

절대 평범한 사용인이 아니다.

"...그러죠."

나는 어쩔 수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 * *

콜드스틸 기사단의 부단장 베로니카는 떠나간 루드거를 떠올렸다.

'루드거 첼리시.'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봤으니까.

새하얀 불꽃으로 테러리스트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는 그의 모습을.

다른 기사단원들은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눈 하나만큼은 단장보다 더 좋다고 자부하는 그녀는 확실히 보았다.

심지어 상대도 자신과 같은 마법사.

그런 자를, 루드거는 상처 하나 없이 쓰러뜨린 것이다.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그 남자의 행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혹시나 싶어서 손속을 과하게 사용해 테러범을 잔혹하게 죽였을 때도.

루드거의 얼굴은 한 치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공포에 얼어붙은 사람의 반응 따위가 아니었다.

루드거, 그 남자는 모든 상황을 냉철한 이성으로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 아니었어.'

깔끔한 정장과 그 위에 걸친 황금빛 수실이 들어간 심플해 보이면서도 화려한 검은 프록코트.

과묵해 보이는 인상과 진중한 눈빛.

긴 머리카락은 살짝 뒤로 넘겨 목덜미에서 묶은 스타일까지.

잔잔히 뜯어보면 날카로운 인상의 귀공자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신경을 가장 많이 자극하는 것은 루드거에게서 은근하게 뿜어져 나오는 기백이었다.

'처음에 정체를 숨긴 왕족인 줄 알았는데.'

루드거에게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품은 베로니카가 황실에서 고귀한 신분을 마주했을 때 느끼던 것과 흡사했다.

그래서 루드거가 세오른 아카데미의 교사로 부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남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납득했다.

아니, 오히려 세오른이라는 그 거대한 이름조차도 이 남자에게 훈장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고기가 헤엄을 잘 치고, 새가 창공을 누비는 것을 신기해하는 사람은 없다. 루드거가 세오른이라는 자리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게 너무 당연하다고 수긍해 버린 것이다.

그 강렬한 기시감은 이름을 들었을 때 확신이 됐다.

'루드거 첼리시. 들어 본 적 있어. 최근 명성이 자자한 젊은 마법사. 최연소 4위계를 달성하고 마탑에 논문을 12개나 제출, 심지어 난제 중 하나인 랭거스터 공식을 재정립했다고.'

그 외에도 들리는 바로는 군에서 장교로 부임한 전적도 있으며, 크립티드 사냥으로 전공까지 세웠다고 한다.

'이번에 세오른으로 부임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궁금하기는 하다.

마침 그녀의 동생이 세오른에 다니고 있으니까.

혹시라도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동생에게 물어봐야겠다.

그가 가르치는 수업은 어땠냐고.

* * *

기차역을 벗어나기만 하면 바로 도망치겠다는 나의 계획은 시작부터 차질을 빚었다.

설마하니 아카데미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서 이쪽을 데리러 왔을 줄이야.

너무 과한 행동이 아닌가 싶었지만, 세오른 아카데미라고 하니 또 납득이 갔다.

제국 제일의 아카데미에 부임하는 교사라면 어딜 가도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고급 인력이 테러에 휘말렸다고 하니 세오른에서도 걱정이 됐겠지.

사람 하나 보내서 편히 모시는 것도 이해한다.

'큰일이군.'

나는 마차의 내부를 살폈다.

푹신한 붉은 의자와 주위에 보이는 화려한 문양들. 어떻게 봐도 고급스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마차였다. 빠르게 달리는데도 흔들림이 거의 없다.

이 검은 마차를 이끄는 것은 증기를 내뿜는 말 형태의 골렘이었다.

기계와 마법이 반쯤 섞여서 만들어진, 최신 마법 공학의 결과물 중 하나인 이 운행 수단을 보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마차를 몰고 있는 저 노신사, 윌포드도 범상치 않았다.

그가 내게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정갈한 복장으로 숨길 수 없는 다부진 몸까지.

'상대는 최소 기사 출신.'

기사는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쉽게 노쇠하지 않는다. 오히려 늙은 기사는 더욱 경계해야만 했다.

그들은 초인적인 신체에 연륜까지 갖췄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도망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여기서 핑계를 대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게 뻔해. 몰래 도망칠 수도 없는 데다가, 만약 성공한다 하더라도 신고가 들어오면 바로 추적이 들어올 거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일단 내가 기존에 사용하던 제라드라는 신분에 관한 일이다.

이 가짜 신분이 사실상 사망 처리를 받아 사라졌으니 새로운 신분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돈과 시간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필요한 것도 정규 루트가 아닌 뒷세계. 처음 방문하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정보를 모으고 새 신분을 만들 때까지 머물 장소를 구하는 것도 일이다.

기존의 신분을 상실한 나는 불법 입국자나 다름없는 상황.

신분이 없다는 건 인권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어디 끌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도 알아줄 사람은 없다는 소리다.

이 모든 가능성을 고려한 끝에 나는 일단은 도망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당장은 몸을 사릴 타이밍이었다.

'이제 와서 억지로 의심을 살 행동은 하지 말자.'

일단은 세오른 아카데미로 가자고. 뒷일은 거기서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다그닥. 다그닥.

빠르게 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늦춰졌을 때, 나는 드디어 세오른 아카데미에 도착했음을 직감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 마차의 앞창이 옆으로 드르륵 열리더니 윌포드가 말을 걸어왔다.

"루드거 님. 도착했습니다."

윌포드의 말에 나는 슬쩍 창밖의 풍경을 살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웅장하고 거대한 대문.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진 광활한 부지였다.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는 깔끔하고 정갈하게 포장되어 있었고, 그 좌우로 푸른 나무들이 균일하게 심어져 세련된 아름다움을 더했다.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빛 속에서 세오른 아카데미의 건물들이 하얗게 빛났다.

저건 본관, 저건 별장, 저긴 공원, 저기는 강당인가?

하나하나가 스케일이 큰 것은 둘째치고서, 이 부지의 넓이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도시보다 더 큰 거 아니야?

정문을 지키는 경비가 곧바로 문을 열어 주며 이쪽을 향해 가볍게 묵례를 했다.

정문을 지나가면서 나는 근방에 얼마나 많은 마법이 새겨져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겹겹이 쌓인 마법진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원래의 형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미쳤군.

정문으로 들이닥치는 간 큰 녀석은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그런 녀석이 있으면 1초 만에 가루가 되어 사라질 거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를 이끄는 강철마가 멈춘 곳은 본관보다 더 안쪽에 있는 건물이었다.

왕관처럼 높게 솟은 그것은 그야말로 웅장한 성이었다.

"이곳입니다. 내리시지요."

가방을 챙기려 하자 윌포드가 나를 말렸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테니, 굳이 짐은 들고 가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죠."

마차에서 내린 나는 윌포드의 뒤를 따라 분수대와 아름다운 석상들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안쪽대로 장관이었다.

유리창에서 비치는 빛이 내부에 은은하게 반사되듯 퍼지며 포근한 색감을 자아냈고 피부를 부드럽게 감쌌다.

어디선가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부는 중세 유럽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는 것 같이 세련되면서도 깔끔한 디자인.

맞닿은 도시인 <레더벨크>가 증기를 가득 내뿜는 스팀펑크 분위기라면, 이쪽은 훨씬 더 판타지에 맞춰져 있다.

-하하하.

-아이, 하지 마.

윌포드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니 중간중간 사용인들이나 아카데미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뒤에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데, 설마 내가 시골 촌뜨기처럼 보여서 험담하는 건 아니겠지?

괜히 찔리는 터라 나는 옷매무새를 매만지거나 머리를 정리했다.

어느덧 나는 커다란 승강기 앞에 도착했다.

여기서 이걸 또 타고 간다고?

"이쪽으로."

나는 윌포드와 함께 승강기에 탑승했다. 바깥에서 봤을 때도 높다고 생각은 했지만, 거의 30층까지 있는 걸 보니 다시 한번 놀랍기만 했다.

이것이 과연 제국의 스케일이구나 싶었다.

승강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붉은 융단이 깔린 긴 복도와 그 끝에 원목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문이 있었다.

"총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 일인걸요."

나는 복도를 건너 총장실 문 앞에 섰다.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려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안쪽에서 나른하면서도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만나서 반가워요."

유리창을 등지고 책상에 앉아있는 여인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저자가 바로 세오른 아카데미의 총장.

현존하는 8위계 중에서 최소 6위계인 렉서러 이상이어야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눈앞의 그녀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일류 마법사.

외모만 보면 이십 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막 서류 정리 작업을 하고 있던 것인지 오른손에는 만년필을 쥐고 있던 그녀가 펜을 소리 내서 놓으며 나를 응시했다.

커튼처럼 흘러내리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등 뒤에 난 유리창의 빛을 받으며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

바깥의 머리는 하얀데, 안쪽은 은근하게 분홍빛을 띠고 있는 투톤 헤어다.

'뭐지.'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이쪽을 향하는 순간,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받았다.

영혼의 깊은 곳에서 저 모습에 아름다움을 느끼고 만 것이다.

나는 그 묘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드거 첼리시입니다. 총장님께서 부르셔서 왔습니다."

일단은 지금의 나는 루드거 첼리시니까.

◈ 7화 거짓 신분 (2)

머리카락의 바깥은 백발. 안쪽은 벚꽃색과 같은 연분홍빛의 기묘한 투톤 헤어의 미인.

총장은 화사하게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네. 만나서 반가워요, 루드거 씨. 그보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듣자 하니 테러 사건에 휘말리셨다고 하던데."

"별일 없었습니다. 위험한 순간에 콜드스틸 기사단의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어머.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저도 꽤 전전긍긍했거든요. 모처럼 뽑은 신임 교사인데 혹시라도 다치면 어쩔까 싶어서. 그렇게 되면 저희의 체면도 안 서잖아요?"

대놓고 자신의 체면을 운운하는 걸 보면 평범한 성격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하긴. 원래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은 다 어딘가 뒤틀려 있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것이 마법사라는 족속이라면 더더욱.

내 스승님도 그랬고. 눈앞의 그녀도 마찬가지겠지.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혹시, 몸이 안 좋거나 그러신 건 아니죠?"

은근한 시선으로 눈웃음을 지으며 이쪽을 응시하는 총장을 보며, 나는 혹시나 무언가 들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총장이 이전에 루드거를 만난 적이 있었나? 그러면 내가 달라진 걸 눈치채고 있지 않을까?

불안한 생각이 스쳐 갈 무렵 그녀의 목소리가 내 상념을 일깨웠다.

"서류로만 봤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인데, 꽤나 훤칠하시고 괜찮으시네요?"

다행히도 실제 루드거와 총장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빈말이라도 칭찬 감사합니다."

"아뇨. 빈말이 아니에요. 이거, 아무래도 개강하면 학생들의 반응이 뜨겁겠는데요? 이런 미남이시라니."

"과찬이십니다."

"자, 일단 이거 받으세요."

총장은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사전에 공지는 했지만, 그래도 계약은 철저한 게 좋으니까요. 계약 기간은 2년. 급료는 거기에 적힌 대로예요. 식주(食住)는 자동적으로 제공이 되니까 알아 두시고요."

나는 계약서를 받아들고 내용물을 꼼꼼히 살폈다.

어차피 예비 신분이 나오는 순간 금방 때려치우고 나갈 거라서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안쪽에 적힌 내용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 뭐야. 잠깐만.'

계약서에 적힌 것은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라운 것들이었다.

'한 달 급료가 제국 금화 30닢이라고?'

제국 금화 한 닢은 대륙의 공용 화폐인 '데나르'로 따지면 100만 데나르나 한다.

즉 제국 금화 30닢이면 3,000만 데나르라는 소리고, 이건 내가 살던 지구로 치면 거의 3억 원에 가까운 거금이다.

이게 무려 한 달 급료란다.

월급이 3억. 이쯤 되면 장기를 떼 가는 게 아닌지 의심을 해 봐야 했지만, 이곳은 세오른 아카데미다.

제국 제일의 마법 아카데미인 것이다.

내가 살던 지구에서도 어디 강남학원의 일타강사 연봉이 100억까지 하지 않았던가.

충분히 가능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학기별로 보너스가 붙고, 연말에 보너스가 또 붙어? 심지어 성과에 따라 급료 인상 가능? 학생들의 교직원 평가가 좋으면 오른다고?'

정말 무난하게만 가도 보너스를 챙길 거 챙기고, 그렇다면 연봉은 5억 데나르가 넘는다.

계약 기간이 2년이니 다 합치면 10억 데나르 이상.

이 돈이면 어딜 가서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심지어 허가만 받으면 부업도 할 수 있단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급료가 이 정도인 것도 대단한데, 수업을 진행할 때의 지원금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교원 평가에 따라 지원금이 더 나올 수 있다는 것까지.

거기에 더해 집도 따로 구해 주고, 식사도 이곳에서 때울 수 있으니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돈이 나갈 일이 없다.

'2년 버티면 10억 데나르. 지구 돈으로 치면 무려 100억 원. 심지어 그것도 최소로 잡은 거다. 잘하면 급료까지 인상 가능하고, 계약이 끝난 이후 연장도 가능.'

그저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것이, 제국 제일의 아카데미?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은 대체...?

"어때요. 괜찮죠?"

"...나쁘지 않군요."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다. 이건 대박이다. 그것도 초대박.

심호흡을 하고 계약서를 다시 읽어 본다.

역시 꿈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통째로 굴러들어 온 황금 호박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 정도의 돈을 줄 정도로 세오른이 대단한 것도 맞지만, 동시에 그만큼 세오른의 교사로서 지닌 무게감도 상당하다는 거지.'

과연, 내가 그 자리를 감내할 수 있을까?

온갖 기라성 같은 천재들이 판치는 이곳에서, 내가 과연 교육자로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내 미천함이 하루 만에 드러나지 않는 게 오히려 기적이겠지.'

그래도 스스로 입을 털며 허세를 부리는 것에는 자신이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환경에서 자라 왔으니까.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상황을 분석했다.

'연봉만 보면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부담스럽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와서 거절할 수도 없어. 루드거는 이미 이곳의 교사가 됐다. 그리고 나는 그런 루드거 첼리시가 됐고.'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거절을 할 수가 있나?

이미 교사로서 부임이 확정된 상황인데, 이제 와서 갑자기 안 하겠다고 뻗댈 수도 없다. 그러면 당연히 수상하게 생각하겠지.

사실상 내가 내려야 할 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하는 수밖에.'

나는 지금 이 루드거 첼리시라는 신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마음을 굳혔다.

이곳에서 눈 딱 감고 2년만 버티면 된다.

그래. 2년만 지나면 이 삶을 끝낼 수 있는 것이다. 돈도 많이 주고 움직이는 것도 자유로우니 군대보다 더 낫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나는 계약서를 총장님께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사기. 허세. 분위기 잡기.

그건 내 주특기니까.

"계약 내용. 전부 확인했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앞으로 잘 부탁해요. 루드거 선생님."

"예. 잘 부탁합니다. 총장님."

나는 이쪽을 향해 미소 짓는 총장님과 악수를 하였다.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무표정을 유지하느라 진땀을 뺀 것은 비밀이었다.

* * *

총장과의 만남을 끝낸 나는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윌포드 씨의 안내를 따라 배정받은 숙소로 향했다.

과연 세오른 아카데미라고 해야 할까.

부지 내에 존재하는 교사 전용 건물조차 비싸 보인다.

동화에서나 보던 것 같은 2층짜리 주택이 내 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개강까지는 아직 3주의 여유가 있으니, 그때까지 푹 쉬시면 됩니다."

윌포드 씨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마차를 이끌고 사라졌다.

떠날 때도 절도 있는 태도를 잊지 않는, 그야말로 신사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 볼까.'

슈트 케이스를 챙겨 든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안쪽으로 들어오니 느낌이 또 사뭇 남달랐다. 가구도 어지간한 건 다 갖춰져 있었고, 관리를 꾸준히 했는지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욕실을 확인해 보니, 이건 또 이것대로 놀라웠다.

새하얀 타일이 가득 깔린 욕실은 그야말로 귀족들이 사용해도 이상할 게 없는 모습이었다. 온수도 잘 나오고, 거품 목욕을 할 수 있는 욕조까지 있다.

마도 혁명이 일어난 세계라 납득이 간다.

털썩.

집 안 구석구석을 확인한 나는 푹신한 소파에 눕듯이 앉았다.

'이제부터 내가 아카데미 교사...인가.'

오늘 하루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의도치 않게 테러에 휘말리고 다른 사람으로 착각을 받고, 심지어 어쩌다 보니 세오른 아카데미까지 와서 교사 일을 하게 됐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

이제 와서 갑자기 사라지면 루드거라는 사람에 대해 수소문을 할 테고, 내 진짜 얼굴이 팔린 이상 제국에서는 발붙일 곳도 없게 되겠지.

변장한 얼굴도 아니고 진짜 얼굴이 팔린 게 너무 치명적이었다.

결국, 나는 루드거 첼리시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말이지.

"후우. 힘들군."

이 세상에 오게 된 것도 어느덧 27년이 지났다.

어떠한 특이한 능력도 없이 그저 전생의 기억만 가진 채로, 나는 이 세상에서 환생했다.

다만, 현생의 부모라는 존재가 워낙 막장이라 결국 나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면서 온갖 사건에 휘말리면서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겨온 기구한 삶이다.

그런 나에게도 지금 같은 상황은 그저 당황스럽기만 하다.

어쩌다 보니 아카데미 교사가 됐다니.

그것도 제국에서 으뜸가는 세오른 아카데미란다.

이걸 단순히 '어쩌다'라는 말로 퉁쳐도 되나 싶다.

'이거 사실상 위장 취업이잖아.'

심지어 내가 노리고 한 게 아니라, 위장 취업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만둘 수도 없었다.

이른바 기호지세(騎虎之勢)였다.

여기서 내리는 순간 호랑이한테 잡아먹힌다. 그게 지금 내 상황이었다.

호랑이한테 떨어져서 잡아먹혀 죽거나, 호랑이가 먼저 지치냐의 싸움.

'그래. 2년. 2년만 버티면 된다. 그거면 충분해.'

어차피 새로운 신분 하나가 필요하던 차였다.

이런 상황에서 루드거라는 신분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루드거 첼리시는 먼 타지에서 제국으로 넘어온 남자. 이곳에서 그를 아는 사람과 마주칠 일도 없을 터.

나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금 더 루드거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루드거의 슈트 케이스를 챙겨 들고 2층의 침실로 올랐다. 방 안에 들어온 나는 창가에 커튼을 치고 방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혹시 모를 외부의 감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걸리는 건 없군.'

이제 괜찮아졌다 싶어서 나는 바로 가방을 열려는 순간.

덜컥.

"흠?"

뭐야 이거. 가방이 잠겨 있잖아?

나는 가죽 재질로 이루어진 슈트 케이스를 세세히 확인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금속 잠금쇠에 미세한 마법진이 각인돼 있었다.

'이건... 보안 마법이로군.'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렇기에 세세한 마력 운용이 필요한, 나름 난이도 높은 마법진이 이런 곳에 새겨져 있을 줄이야.

'역시 세오른 아카데미에 부임하는 교사라 이건가.'

슈트 케이스에서 한 발짝 떨어진 나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포기한 건 아니고 열 방법을 궁리하기 위함이었다.

'시약이 있으면 편할 텐데, 기존의 짐은 미리 소포로 부쳐 뒀으니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써야겠군.'

나는 적당히 수건 하나를 챙겨서 그것에 바로 물을 적셨다. 물에 젖은 수건을 곁에 놔둔 뒤, 나는 막대기 하나를 챙겨 끝에 자그마한 불을 일으켰다.

기초적인 발현계 원소 마법이라 할 수 있는 「파이로」였다.

크기는 라이터 불꽃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 열기는 상당하다.

나는 막대기 끝에 맺힌 불을 슈트 케이스의 잠금쇠에 가져다 댔다.

뜨거운 열기가 황동을 달구기 시작했다.

몇 분 정도 지나 황동이 가열되며 붉게 물든 순간, 나는 젖은 수건을 들이밀었다.

치이이익.

물이 증발하는 소리와 함께 가열된 금속이 빠르게 식어 갔다. 순간 잠금쇠가 뒤틀렸고, 거기에 새겨진 마법진 또한 뒤틀렸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마법진의 효과가 사라지진 않는다.

마법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견고한 성벽에 순간이지만 틈새를 만들 수는 있지.'

바로 지금.

나는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력을 날카롭게 쏘아 마법진의 중앙을 꿰뚫었다.

마법진에 있어서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부위.

파칭!

'됐다.'

그것을 부수자 마법진의 효과가 사라졌다.

동시에 달칵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이런 걸 여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이런 슈트 케이스에 마법진이나 결계를 각인하는 일이 드문 건 아니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보안에 매우 민감하다 보니, 보안 마법은 기본 소양에 가깝다.

본인이 펼치지 못하면 지인이나, 혹은 전문적으로 각인해 주는 업체에 부탁하기까지 한다.

이런 경우 강제로 보안 마법을 없애려 했다가는 역으로 내용물을 폐기해 버리는 술식이 발동된다.

자신의 자료를 드러낼 바에야 없애겠다는, 마법사들 특유의 극단적인 사상의 발로다.

그렇다고 안전하게 보안 마법을 해제하려면 이게 어떤 식으로 구현된 건지 마법을 분석해야 한다. 당연히 그 과정은 매우 오래 걸리고, 한시가 급한 내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방법이었다.

굳이 마법을 분석할 필요가 없는, 꼼수에 가까운 방식.

'마법진이 어디에 새겨졌는지 위치와 그 재질만 알면 충분하지.'

보통 이런 마법진을 새기는 곳은 튼튼한 금속이 주류를 이룬다. 가죽 가방 전체에 마법진을 새길 수는 없으니까.

가죽은 마력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써 효율이 매우 나쁘다.

천이나 종이도 마찬가지다. 마목(魔木)의 껍질을 벗겨서 만든 양피지를 제외하면, 천이나 종이에 마법진이나 결계를 새기는 것은 최소 6위계 이상 아크 메이지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대로 마력의 전도율이 무난하게 좋은 것은 금속이다.

가장 대중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철과 황동. 그보다 더 좋은 재질은 은, 금, 그리고 백금.

제일 좋은 건 원석을 세공해서 만든 보석이지만, 재료 자체가 워낙 비싸다 보니 고위 귀족이 아닌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당연히 값이 저렴한 철이나 황동이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두 재질의 공략법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마법진이 새겨진 금속을 가열해서 팽창시킨 뒤, 빠르게 찬물로 식혀서 다시 수축시키는 방법.

금속에 새겨진 마법진은 금속의 팽창과 수축의 과정에서 어긋나고 비틀린다.

이렇게 어긋나더라도, 마법진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자동적으로 복구되려고 한다.

그러나 그때 생기는 빈틈은 매우 치명적이다.

그 순간에 내 마력을 날카롭게 흘려 넣어 마법진의 핵심 술식을 파괴하고 무효화한다.

'잘 먹혀서 다행이군.'

뭐, 흔히 알려진 방법은 아니고 과학적 지식을 적당히 적용해서 만든 꼼수일 뿐이다.

대부분 마법사는 역사와 전통에 목을 매는 놈들이다 보니 과학을 경원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이런 부분에 대비를 하지 않는 경우가 파다했고, 그건 역으로 이쪽이 바라던 바였다.

'진짜 미친놈이라면 아예 마법진으로 뒤덮인 철제 케이스를 들고 다녔겠지.'

다행히도 루드거 첼리시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슈트 케이스를 열어 안에 뭐가 있는지 내용물들을 확인했다.

'흠, 이건.'

◈ 8화 거짓 신분 (3)

루드거의 슈트 케이스 안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물건은 없었다.

그저 갈아입을 의복과 서책이 전부.

그 외에 여러 서류와 잡다한 물건들 정도려나.

'뭔가 더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교재와 마법책, 논문은 하나로 뭉쳐서 따로 놔두고, 옷도 적당히 추려서 치웠다.

책들의 경우에는 마법책 말고도 대중 소설이나 유명한 과학자의 에세이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별 잡다한 걸 다 읽었군그래.

그 외에 물건들은 편지 몇 장, 신분증, 개인 소유 도구들이 전부.

도구라고 해도 휴대용 회중시계나 마법의 매개체로 사용할 소형 파이프와 돈이 담긴 지갑 정도다.

나는 바로 신분증과 서류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루드거 첼리시. 북 대륙의 중소왕국인 퀘오덴의 몰락 귀족 출신. 형제자매는 없고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셨군.'

나쁘지 않다.

몰락한 귀족이지만 명목상 귀족이라는 직위를 지니고 있으니 어딜 가서도 크게 무시당하지는 않을 거고, 가족이 없으니 나를 알아볼 사람도 없다.

'어디 보자. 전적이 엄청나게 화려하군. 마탑에 논문을 12개나 제출한 데다, 최연소 4위계? 심지어 군 장교까지 했다고?'

역시 세오른의 교사라 이건가 싶었다.

젊어 보이는 나이에 이 정도나 되는 전적이라니.

'가르치는 과목은 마법 발현과 그에 따른 특화인가. 마력 방출과 속성 원소가 메인이군.'

발현이 특화인 걸 보면 아무래도 과목에서 실전 전투를 가르칠 확률도 높았다.

나는 편지를 펼쳐 내용물을 살펴봤다.

혹시나 지인과 대화를 주고받은 게 있다면 사소한 버릇 같은 걸 캐치해서 익혀 둬야만 했으니까.

'편지의 내용은 별거 없네.'

지인과 주고받은 거로 추정되는 편지에는 곧 아카데미에 부임한다거나 어떤 책이 좋다거나,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다거나 하는 형식적인 대화가 전부였다.

군에 몸담았을 때도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없었던 거 같다.

범생이 스타일이었던 걸까.

사적인 내용이 거의 없는 걸 보면, 편지를 주고받은 대상과도 딱히 그렇게 친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남은 건....'

개강 이후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기초적인 수업 내용과, 이 세오른 아카데미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는지에 대한 정보다.

일단은 부지 내부를 돌아다니며 세오른의 지형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꼬르르륵.

당장에 바깥으로 나가려던 나는, 배에서 울리는 우렁찬 소리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열차에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

'내일부터 하지 뭐.'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정신적으로 지쳤다.

일단 밥부터 먹고 오늘은 푹 쉬도록 하자.

* * *

그로부터 2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세오른 아카데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이곳의 지리에 대해서 파악했다.

처음 봤을 때 예상했던 대로, 이 세오른 아카데미의 부지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했다.

'괜히 사람들이 세오른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군.'

나는 한적한 카페의 야외 벤치에 앉아 평화로운 경치를 구경했다.

대충 확인할 것도 다 끝났고, 지금은 앞으로 있을 수업에 대해서만 고민하던 중이었다.

'개강 시기가 다가와서 그런가. 학생들이 자주 보이네.'

세오른 아카데미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제복 디자인도 남자들 건 멋지고 여자애들 건 예쁘다.

제국에서 명망 있는 디자이너가 제작한 제복이라고 했던가.

과연 마법을 가르치는 아카데미라 그런지, 개중에는 빗자루를 타고 날거나 이상한 기계 인형을 타고 움직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서로 웃으면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는 청춘들을 보니 참 좋을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세상에 오고 난 뒤로 매일이 치열한 전쟁이었는데, 저런 아이들은 타고난 재능과 환경 덕분에 축복받은 삶을 사는구나.

"흠."

이쪽을 스쳐 지나가는 여학생 둘이 나를 슬쩍 보더니 저들끼리 뭐라고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평소에 못 보던 사람이 개강 전날부터 이렇게 있으면 나라도 의심이 들겠다.

나는 괜히 눈치가 보여서 커피를 홀짝였다.

다 마시고 어서 숙소로 돌아가서, 1주일 뒤에 있을 오리엔테이션이나 준비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남은 커피를 전부 마시고 일어나려는 순간, 내 옆 테이블에 한 여성이 와서 자연스럽게 앉았다.

새로 온 손님인가 생각하는 순간, 그녀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왜 2주일 동안 연락이 없으셨던 겁니까?"

"...?"

나도 모르게 돌아가려는 고개를, 내 본능적인 직감이 멈춰 세웠다.

──턱.

나는 자연스럽게 다 마신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

지금 나한테 한 소리인가?

나는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나한테 말을 건 게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한 건데 여기서 내가 반응하면, 그보다 쪽팔린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주위에 다른 사람들은 없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건 나와 내 옆 테이블에 앉은 여성뿐.

즉 저 사람은 지금 나한테 말을 건 것이다. 아니, 이걸 말을 걸었다고 해야 하나?

내가 계속 침묵을 유지하고 있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하고 노심초사했습니다. 다른 회원들도 퍼스트 오더 님께서 어떻게 되신 게 아닌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

회원.

퍼스트 오더.

초면에 나를 걱정하는 사람.

이것만으로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단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매우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고.

* * *

'뭐지.'

나는 손에 쥔 커피 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저 평범하게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서 풍류를 즐기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이상한 여자가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어온다.

그런데 내게 하는 말들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다.

나를 높여 부르는 정중한 어조에 회원들이 어쩌고 하는 말투.

정신 이상자? 아니다. 저건 진심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잘못 찾아온 걸까? 아니다. 그녀는 제대로 찾아왔다.

─내가 아닌, 루드거 첼리시라는 사람을 찾아온 거다.

상황을 판단한 순간 내 입이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잠시 확인할 것들이 있었다."

"이번 테러 사건에 관련해서입니까? 그건 그저 사고였을 뿐입니다. 하필이면 반란군 녀석들이 퍼스트 오더 님이 탑승한 기차를 습격할 줄 누구도 몰랐으니까요."

"다른 것도 다. 세오른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

"사전에 전해 받으신 정보가 있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말로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의 차이는 크니까."

"그, 그렇군요."

뭔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여성.

에라 모르겠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는 그쪽 일은 잘 처리했나?"

"네. 물론입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아카데미 요인 암살을 전부 완료했습니다. 대부분 사용인이었지만요."

뭐? 아카데미 요인을 암살해?

순간 몸을 들썩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조직 내 배신자가 드러나 그쪽도 처리했습니다."

뭐? 배신자? 처리?

배신자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나는 당황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물었다.

"처분이라. 어떤 방식으로 했지?"

"사지를 뽑아서 갈아 본인의 입에 쑤셔 넣었습니다. 나머지 몸통은 들개에게 먹이로 줬다고 하더군요. 제가 직접 보지는 않았는데 다른 회원들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배신자에게 어울리는 최후라고 할 수 있겠죠."

"...."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미친놈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내 정신은 더욱 차분해졌다.

주변 공기가 한층 무겁게 가라앉자 옆에 앉은 여성이 몸을 움찔 떠는 것이 느껴졌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직접 듣고 보고를 했어야 했는데...!"

"됐다. 그보다 지금 갑자기 날 찾아온 이유는?"

"그, 그것이. 퍼스트 오더 님이 이곳에 들어오셨는데 지난 보름 가까이 아무런 소식이 없으셔서...."

"그래서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제멋대로 움직였다?"

말을 하면서 분석한다.

저쪽은 나를 루드거가 아닌 퍼스트 오더라고 불렀다.

이름 앞에 퍼스트가 들어간 걸 보면 조직 내에서도 꽤 높은 자리일 가능성이 크다.

그걸 믿고 조금 허세를 부려 봤더니 그게 정답이었나 보다.

"히, 히익! 죄송합니다!"

곧바로 이쪽을 향해 고개를 숙일 것 같은 여성에게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조용히 해라. 주변 사람들의 의심을 사고 싶은 건가?"

"흡. 죄, 죄송...."

"죄송하다는 말도 하지 마라."

"...."

"그래. 안 그래도 슬슬 확인할 때가 됐지. 지금 멤버는 얼마나 모였지?"

"네, 네?"

"회원들이 얼마나 이 안에 있냐는 거다."

"아!"

그녀는 최대한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현재 서드 오더 31명과 세컨드 오더 7명이 잠복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퍼스트 오더 님은 계획대로 먼저 들어오셔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흠. 적당하군."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최대한 주워들은 정보를 조합했다.

대충 눈치챈 것은 퍼스트 오더라는 자가 나 말고도 하나 더 있다는 것과, 이놈들이 거의 40명 가까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

규모는 크지 않지만 세오른에 이 정도의 숫자를 심을 정도라면 그 능력도 범상치 않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지금 눈앞의 이 녀석은 내 정체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려나.

오히려 두려움과 존경이라는, 경외 어린 시선을 실시간으로 보내 온다.

'역시 퍼스트 오더 님!' 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일 정도.

저런 모습을 보니 최소 무언가 이용해 먹을 수 있어 보인다.

"알겠다. 확인도 끝났으니 나는 이만 일어나 보지."

"아! 그 차후 접선을 하실 경우에 지정된 장소로 오시면 됩니다."

약속 장소? 아니 그런 곳도 있었어?

하지만 이제 와서 '거기가 어디지?'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차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라고? 지금 너 따위가 내게 멋대로 오라 마라를 논하는 거냐?"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자 녀석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이 보였다.

이쪽의 허세가 제대로 먹혀든 것인지, 새끼 다람쥐처럼 몸을 덜덜 떨며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저, 저는 단지...."

"변명은 듣기 싫다. 앞으로 접선이 필요할 때는 이쪽에서 정한다. 장소도 시간도 마찬가지다.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정말 알려야 할 것이 있다면 나와 같은 퍼스트 오더가 부르는 경우에만 허락하겠다. 아니면 그보다 더 위."

"더, 더 위라면 설마 제로 오더 님?"

제로 오더가 있구나.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였다.

"그래. 그분의 말씀 외의 자잘한 건으로 나를 귀찮게 굴지 말도록. 알겠나? 이건 경고다."

그러니까 처신 잘하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려고 하는데 '저기' 하고 뒤에서 녀석이 나를 불렀다.

자리에 멈춰서며 고개만 살짝 돌려 녀석을 응시했다.

"뭐지?"

"그, 그것이... 저희를 부르실 때 어떻게 하실 건지...."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따로 설명을 안 했구나.

하지만 나도 모르는 방법을 바로 설명을 해 줄 수 있을 리가.

"...그걸 내가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하나?"

"히익!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이번만 넘어가겠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 * *

쿵쿵쿵!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바로 다급하게 2층의 침실로 올라가 옷장 안에 넣어 둔 슈트 케이스를 꺼냈다.

루드거의 슈트 케이스에 담겨 있던 편지들을 침대 위에 흩뿌린 뒤 하나둘 확인한 나는, 불안한 상상이 결국 현실이 됐다는 걸 깨달았다.

"...하, 젠장."

편지를 보면서 느꼈던 기이한 이질감.

어째서 가족도 없는 지인과 이런 형식적인 말을 굳이 편지로 주고받았는가.

이렇게 화려한 전적을 지닌 남자가 왜 이렇게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사생활을 자제했는가.

그 모든 의문이 드디어 풀렸다.

-애초에 이건 평범한 편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편지 내부에 적혀 있는 특정 단어의 특수한 문자들을 훑었다. 내가 본능적으로 느꼈던 그 이질감은, 바로 이 문자들이 지닌 일정한 패턴에 있었다.

그래.

이건 '암호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걸리지 않게 사용하는 그들만의 암구호.

편지들을 집어 던진 나는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를 다시 읽었다.

'몰락 귀족? 가족이 없어? 심지어 제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중소국가의 외지 출신?'

그 모든 것이 가짜.

화려하기까지 한 과거의 흔적들까지 전부 다 거짓.

루드거 첼리시라는 존재는 누군가에 의해 공을 들여서 만들어진 신분이었던 것이다.

왜 몰랐을까. 왜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상적인' 신분을 내가 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걸까.

'그럼, 열차에서 만났던 그 루드거의 정체는....'

이 세오른 아카데미에 숨어든 비밀 결사에 소속된 멤버.

심지어 퍼스트 오더라는 명칭을 지닌 간부.

그리고 내가 지금, 녀석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침대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미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데 아주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이 루드거 첼리시라는 신분이...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위험한 핵폭탄이었다니.

완전 조졌군.

◈ 9화 위장취업 (1)

나는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당장에 무언가를 할 힘이 나지 않았다.

이쯤 되니 괜히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하면 비밀 결사 간부가 열차 테러에 휘말려서 죽어?

세오른 아카데미에 사람 거의 40명 가까이 간자를 심어놓은 비밀 결사 간부라면, 그 상황에서 생존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아."

그래 안다. 이렇게 화를 내도 죽은 녀석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한 감정 소모일 뿐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나는 이제 루드거 첼리시가 됐고, 이 빌어먹을 신분을 유지하면서 2년을 버텨야 한다.

'솔직히 그냥 아카데미 측에 들키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그 정도면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살아온 경험이 있으니 그럴싸하게 교사 흉내 정도는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마법은 쓸 줄 알고, 이론적인 지식은 모자라지 않게 있으니까.

2년 정도면 무난하게 보낼 수 있다는 건 만용이 아니라 철저한 계산으로 이루어진 확신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비밀 결사라니. 심지어 간부라니.

게다가 말하는 걸 보니 보통 위험한 놈들이 아니다. 아카데미 일부 요인 암살? 배신자 처리? 그 방식도 상당히 잔혹하다.

뒷세계의 갱스터나 마피아들도 이런 짓은 안 한다. 일부 질 나쁜 녀석들이나 할 법한 과격한 행동이 아닌가.

새로운 미션이 추가돼서 난이도가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건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닌가.

노멀 모드에서 바로 헬 모드가 된 셈이다.

"생각하자."

이제 나는 이 거짓된 신분이 들키면 안 되는 대상이 하나 더 늘었다.

아카데미와, 정체 모를 비밀 결사.

이 두 집단 중 하나라도 내가 루드거가 아니라는 것이 들킨다면 나는 그날부로 바로 끝장이다.

총장의 손이든, 혹은 제국의 법이든, 아니면 비밀 결사의 자체 숙청에 의해서든.

지금 내게는 죽음이 그 어떤 순간보다도 가까웠다.

"생각해야 한다."

루드거 첼리시는 비밀 결사단의 간부다.

루드거라는 이름도 만들어진 신분이니 가명이겠지만 아무튼, 그는 통칭 퍼스트 오더라 불리는 직책에 올라 있다.

이 아카데미에 스며든 비밀 결사단 중에 퍼스트 오더는 나를 포함해서 단둘이라 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당장에 알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나머지 퍼스트 오더가 누구인가다.

그걸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 저쪽에서 내게 다가와 접선을 하지 않는 이상 당장에 알 방법도 없었다.

'일단 세컨드 오더와 서드 오더는 무시해도 된다.'

진짜 루드거는 조직 내에서도 상당히 성격이 괴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작 목소리 좀 깔고 허세 좀 부렸을 뿐인데도 사색이 된 부하의 표정을 보면 충분히 유추가 가능한 사실이었다.

성격이 개차반이니 부하 되는 입장에서는 어지간한 일로는 이쪽을 건드리려고 하지 않을 터. 그건 내 쪽에서 환영하는 일이다.

결국 나는 루드거의 신분과 동등한 간부, 다른 퍼스트 오더 하나만 신경 쓰면 됐다.

문제가 있다면 그 퍼스트 오더가 대체 누구이냐는 건데.

'뻔뻔하게 물어볼 수는 없다. 아무리 그래도 간부가 어떻게 다른 간부를 모르겠어. 그런 짓을 했다가는 바로 의심받지.'

이제 나는 아카데미와 제국뿐만 아니라 제국에 암약해 있는 비밀 결사의 존재까지 감당해야 할 판이었다.

호랑이 한 마리의 등에만 올라타고 있는 줄 알았는데, 무려 두 마리의 등 뒤에 올라타 있었다니.

나도 참 대단한 놈이구나 싶었다. 서커스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어느 한쪽이라도 수틀리는 순간 끝.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거의 죽는다고 봐야 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할 수밖에 없어.'

나는 곧바로 슈트 케이스 안에 담겨 있던 책들을 꺼내 들고 그 옆에 편지를 펼쳤다.

'우선 정보를 얻는 것이 먼저다.'

이 편지는 놈들의 조직에서 사용하는 암구호가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것을 해석할 필요가 있었다.

모든 암구호에는 일정의 패턴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패턴을 분석할 수 있는 건, 바로 가방 안에 담겨 있던 이 책이겠지.

'마법 아카데미의 교사이니 마도서는 제외. 그 외에 평범하지 않은 서적이 몇 권 있었지.'

나는 책들을 훑어봤다.

[호밀밭의 감시자] [링게르크 철학서] [전체주의의 흔적] [백 년의 고독]

소설, 자서전, 비소설 부분의 베스트셀러까지.

그중에서 내 눈에 띄는 하나의 책이 있었다.

[신사의 교양]

'이거로군.'

나는 기차에서 보았던 루드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의 사소한 행동이나 일부 정갈하지 못한 행동들. 다리를 조금씩 떤다거나 손을 툭툭 흔든다거나.

그 남자가 정말로 진지하게 신사의 교양에 대해서 고찰하고 이 책을 읽었다면 그런 행동거지를 보였을 리가 없지.

'심지어 이 책이 가장 손때를 많이 탔군.'

표지 일부가 마모되어 변질되어 있었다.

그만큼 많이 읽었다는 소리인데, 과연 그럴 이유가 있었을까?

'이 책이 암구호의 해석본으로 사용되고 있던 거였어.'

[신사의 교양]의 책을 펼쳐 페이지를 넘겼다.

촤르르륵.

책의 사이사이에 보이는 손때가 탄 흔적들.

일부 페이지는 읽지 않았고, 일부 페이지는 종이가 닳도록 읽었다.

그 불규칙 속에 숨어 있는 규칙성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마모된 특정 페이지를 유심히 살펴보니 글자들 사이에 무언가가 보였다.

나는 곧바로 편지를 가져다 옆에 대조해 봤다.

'대륙은 통일된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나라별로 언어가 조금씩은 다르다.'

루드거 첼리시의 흔적이 퀘오덴 왕국에서 비롯되었으니 퀘오덴 어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특히 편지에는 퀘오덴 왕국에서 사용하는 일부 고유 명사나 방언의 흔적들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다.

북부의 작고 척박한 왕국이지만 의외로 꽤 많은 대문호를 배출한 퀘오덴은 그 방언에 사용되는 단어만 2만여 개이며, 그중에서 고급 어휘는 무려 8,000개에 달한다.

분명 이게 암호의 포인트겠지.

그쪽 언어의 배열과 이 편지 사이의 연관성을 생각하면 암호를 구분하는 것도 어렵진 않다.

나는 퀘오덴 어를 알고 있으니까.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퀘오덴 어로 코드를 짜서 확인하니 편지 사이의 단어들 사이의 연관성이 보였다.

<인사> <이별> <송별회> <새 만남> <까마귀> <눈동자> <별빛> 등등.

그 옆에는 숫자를 상징하는 일부 단어들이 혼재하게 섞여 있었다.

숫자는 이 암호 코드북의 페이지를 나타내는 것일 테고, 그 외 단어를 조합해서 해석하면....

'퍼스트 오더. 세오른 아카데미에 교사로 잠입해서 저들의 환심을 사라. 이후 지령은 상황을 봐 가며 전달하겠다.'

이렇게 된다.

결정적인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도 충분했다.

나는 [신사의 교양] 책을 덮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후우."

남은 2년.

나는 아카데미의 교사로서, 그리고 비밀 결사의 간부로서 살아야 했다.

물론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교사로 2년을 안전하게 보낸다 하더라도 비밀 결사라는 벽이 남아 있으니까.

놈들의 존재는 내게 있어서 아주 거슬렸다.

중간에 수틀리면 살해당할 확률이 가장 높았으니까.

'그렇다고 나 혼자서 비밀 결사를 모두 없앨 수는 없어. 조직의 구조가 대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오른 아카데미에 간자를 심었을 정도니까. 꽤 위험한 놈들인 건 확실해.'

개인으로 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놔두자니 이 비밀 결사는 내 발목을 붙잡는 족쇄라, 그걸 지워 없애야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카데미의 힘을 이용해야겠지.'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있다.

오랑캐를 다뤄 오랑캐를 제압한다.

세오른 아카데미는 그냥 학교가 아니다. 무려 제국의 미래를 육성하는, 시대의 미래를 상징하는 곳이다.

아카데미라는 이름을 지녔음에도 어지간한 나라에 영향을 줄 정도로 거대한 권력을 지닌 곳이니 마냥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세오른과 비밀 결사가 서로 맞붙게 된다면, 아무리 대단한 비밀 결사라 하더라도 무조건 밀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 머무는 병사가 몇이고 마법사가 몇 명인데. 심지어 제국령 안쪽이라 기사단이 움직일 가능성도 있다.

놈들도 그걸 아니까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대신 스파이를 심은 거고.

즉 나는 비밀 결사에 들키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놈들의 정보를 캐내고 아카데미에 그 정보를 흘리면 되는 거였다.

'물론, 지나치게 길면 꼬리가 밟히겠지.'

비밀 결사 측에서 배신했다고 숙청을 가할 수도 있고, 역으로 아카데미 측에서 나를 스파이라 의심하고 배제할 수 있었다.

결국,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어느 한쪽에 기우는 순간 나를 기다리는 건 예약된 파멸뿐.

긴 장대를 쥐고서 외줄을 타는 거나 마찬가지다.

절대 어느 한쪽에도 치우쳐서는 안 됐다.

'일단은... 일주일 뒤에 있을 첫 수업부터 생각하자.'

지령에서도 딱히 뭘 하라는 건 없었다. 환심을 사라는 것은 교사로서 일단 확실하게 이미지를 각인하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일단은 교사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다.

세오른은 똑똑한 학생들이 다니는 곳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모자란 모습을 보였다가는 오히려 학생들에게 물어 뜯길지도 모른다.

원래 한창 성장할 나이에 재능 있는 아이들은 으레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선생마저도 무시하지 않던가.

이곳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는 걸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깨달은바.

'...여러모로 고려해야 할 것이 참 많군.'

학생들에게 우습게 보여서도 안 되고

아카데미 측에서 수상하게 보여도 안 되며

비밀 결사 녀석들에게도 들키면 안 된다.

이게 대체 뭐 하자는 짓인가 싶었지만, 이 모든 것을 견디면 그에 걸맞은 보상이 나온다.

그래.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개인 서재에 들어가 마법 교재를 펼쳤다.

앞으로의 계획도 짜고, 수업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준비도 해야 했다.

남은 2년.

놀고 지낼 수만은 없었다.

* * *

개강 첫날이 찾아왔다.

방학 기간 동안 고향으로 내려갔던 학생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새로운 학기와 함께 올해의 신입생들까지 들어왔다.

기존 1학년이었던 학생들은 2학년으로 올라가며 앞으로 어떤 새로운 수업을 들을 수 있을지 기대감에 부푼 가슴을 안고 교문을 넘었다.

강의실 곳곳에서 학생들이 몇 달간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며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모두 같은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는 배움의 추종자들이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다 같은 학생인 건 아니었다.

떠드는 학생들과 조용한 학생들.

자연스럽게 학생들 사이에 분위기가 갈리고, 그 흐름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사회에서의 신분이 결정지었다.

세오른 아카데미 내부에서는 학생들은 크게 3개로 급이 나뉜다.

왕족과 귀족, 그리고 고위 성직자의 집안 출신을 필두로 한 상위 계층.

부유한 상인을 필두로 한 중산 계층.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난한 평민들이 차지하는 하위 계층.

똑같은 학생이라 하더라도 신분을 무시할 수는 없었고, 그에 따라 알게 모르게 벽을 세우며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급을 나누게 됐다.

귀족들은 밝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반면, 반대로 평민들은 눈치를 살피거나 저들끼리 조용히 모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곧 있을 발현 계열 수업 강의실도 마찬가지였다.

"야.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이번 발현계 이론과 원소의 이해 수업 있잖아. 새로 들어온 신임 교사가 한다던데?"

"신임 교사가 1학년도 아니고 2학년을 가르친다고? 제법 실력이 있나 봐?"

"어쩔 수 없지. 전임자가 나가 버렸는데. 소식 들어 보니 나름 과거 전적이 화려하다던데? 군 출신에 논문도 많이 냈다 하더라고."

"그러면 대단한 사람 아니야? 평범하진 않은데."

"그런데 그거 알아?"

"뭔데?"

"그 사람. 몰락 귀족 출신이라 하더라고."

몰락 귀족이라는 말에, 대화를 주도하던 파벌의 입가에 자연스럽게 비웃음이 깃들었다.

귀족이라는 고결한 이름에 먹칠을 하는 자들.

몰락 귀족은 귀족들 사이에서 부유한 상인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나마 평민들에게는 조금 꺼드럭댈 수 있는 정도?

세오른의 교사로 부임했으니 실력은 있겠다만, 상위 계층 학생들에게는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시에 귀족 학생들은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몰락한 귀족 출신 신임 교사라면 수업에서 학점을 따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고.

과연 어떤 사람일지에 대해 저마다 대화가 오가는 순간, 강의실의 앞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앞문으로 향했다.

열린 문을 통해 한 남자가 강의실에 들어오고 있었다.

◈ 10화 위장취업 (2)

그 남자는 마치 새벽녘 물안개가 피어오른 고요한 호수 같았다.

차갑고 싸늘하고 정적(靜的)이다.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수면처럼, 행동 하나하나가 절제되고 조용하며 군더더기가 없다.

강의실의 문이 닫힐 때도.

구두의 발걸음이 강단 위로 오를 때도.

책상 위에 서류를 놓을 때도.

소리가 없다.

그 고요함이 수면 위의 파문(波紋)처럼 강의실 전체를 집어삼켰다.

"어...."

계속 떠들던 귀족 학생들조차 그 분위기에 휩쓸려 입을 꾹 다물었다.

얌전히 있던 학생들은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단상 위에 선 주인공에게 시선을 향했다.

훤칠한 키에 걸맞은 정장은 주름 하나 잡혀 있지 않았다. 그 위에 몸에 딱 맞는 검은 프록코트가 더해진다.

세련된, 그러면서도 과하지 않은 복장.

남자가 머리에 쓴 실크해트를 벗어서 가볍게 던지자, 교단 구석의 옷걸이를 향해 부드럽게 날아가 안착한다.

그 일련의 동작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와중에, 모자에 가려진 그의 외모가 드러났다.

날카로운 턱선과 올곧은 콧대. 흔들림 없는 눈동자.

강인한, 그러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눈빛은 도저히 신임 교사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남자치고는 긴 머리카락은 목덜미 부분에서 깔끔하게 묶었다.

꿀꺽.

몰래 뒷담화를 하던 일부 귀족 학생들이 그 기세에 짓눌려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만나서 반갑다. 이번에 새로 세오른 아카데미에 부임하게 된 루드거 첼리시라고 한다."

그가 입을 열고 소리를 내는 순간.

몽환적으로 흩뿌려 놓은 수채화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한 정적에 잠겨 있던 강의실의 분위기가 현실로 돌아왔다.

* * *

"일단 개강 첫날이니 바로 수업에는 들어가지 않겠다. 다만, 그에 앞서 사전에 공지를 하도록 하마."

나는 벗어 놓은 프록코트를 천천히 옷걸이에 걸었다.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미리 떠올린 말들을 그저 타이밍에 맞춰서 읊으면 그만이었으니까.

이것은 일종의 연극이다.

나는 무대 위의 배우이고, 학생들은 관객인 것이다.

호흡에 맞춰,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독백을 이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

대본은 전부 머릿속에 있으니까.

"내 수업은 발현 계열이다. 하지만 순수하게 발현계만 가르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보다는 조금 더 실전에 가깝게, 원리를 넘어 실생활에서 적용하는 데 주력할 테니까."

좌중을 스윽 훑자 몇 명이 어깨를 움찔 떠는 것이 보였다.

좋은 반응이다.

이 신분의 과거에 군인이 들어가 있으니, 이런 말투와 강렬한 눈빛을 유지해도 이상하게 보는 학생이 없었다.

"그리고 수업은 2학년뿐 아니라 1학년도 신청이 가능하다. 즉 1, 2학년 공동 수업이라고 볼 수 있겠지."

내 말에 곳곳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모인 학생들은 전부 2학년이니 당황할 만도 했다.

하지만 학년별로 수업이 무조건 나뉘어야 한다는 교칙은 없으니 딱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소음이 서서히 잦아드는 순간, 나는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그만."

우뚝.

순식간에 강의실 내부의 소음이 사라진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이쪽으로 몰린다.

"2학년 입장에서 1학년과 같이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불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1학년을 배려한다고 초보자들이나 배울 법한 뻔한 것을 가르치지는 않을 테니까."

그 말에 곳곳에 안도에 찬 반응이 흘러나온다.

세오른 아카데미의 수업 방식은 지구로 치면 고등학교보다는 오히려 대학교에 가깝다.

다만 완전하게 대학교의 그것도 아닌지라, 조금 애매하게 섞여 있다고 보면 된다. 상점과 벌점 제도가 바로 대표적인 예시다.

세오른의 학생들은 자신의 특기에 맞춰 듣고 싶은 강의를 선택하고, 해당 과목을 이수하여 학점을 챙긴다.

이곳 학생들은 어딜 가서도 신동 소리 듣는 아이들.

비록 1학년이라 하더라도 2학년에 비해 크게 꿀리는 점은 없다. 나는 거기에 착안점을 둬, 1학년과 2학년의 공동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왜?

2학년들끼리만 모이면 필연적으로 교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미 1년 동안 서로 충분히 알게 된 2학년들의 호기심과 주된 대상은 같은 학년의 동급생이 아닌, 신임 교사인 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 막 입학한 1학년이 같은 강의실에 있다면?

2학년들의 신경은 1학년 후배들에게 분산되게 된다.

그러면 나에 대한 말이 나오는 경우도 확연히 줄겠지.

불만이 있을지언정, 그 이상 파고들지는 않는다.

1학년의 존재는 혹시라도 내 교사로서 자질을 의심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연막이자 방파제인 셈이다.

"왜 1학년들도 수업을 듣게 해 주시는 거죠?"

누군가 번쩍 손을 들고 말했다.

살펴보니 웨이브 진 금발을 허리까지 길게 기른 여학생이었다.

이쪽을 향하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은 어딘가 고지식한 느낌이 강하다.

주위에서 그녀를 알아보고 저들끼리 뭐라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지? 좀 잘나가는 아이인가?

자세히 살펴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다.

저 얼굴... 어디서 많이 봤는데.

'뭔가 떠올리기 꺼림칙한 그런 사람이....'

일단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을 해 주기로 했다.

"그들에게도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회란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내 수업을 단지 정해진 학년만 들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교육자로서 절대 옳지 않은 태도지. 학년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에게 동등한 가르침을 내리는 것. 그게 내 생각이다."

뭐, 여기서 왜 3학년 이후는 언급하지 않냐고 묻겠지만.

당연히 그들도 원한다면 내 수업을 들을 수 있다. 다만, 3학년들은 당장 자기들이 배우는 필수 과목을 소화하기도 힘들 터.

사실상 여유가 있는 것은 2학년까지겠지.

"물론, 그만큼 내가 가르치는 수업은 학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소리다. 기존의 것과 확실히 다르다고 자부하지."

뭐, 그냥 생각 없이 막 내지르는 건 아니다.

수업에 대한 대비는 확실히 해 놓았으니까.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서 내가 지니고 있는 팁 정도 몇 개 푸는 거야 못 할 것도 없지 않은가.

"정확히 무슨 수업인지 설명을 해 주시지 않으면 납득하기 힘듭니다."

"궁금하면 내 수업을 들으러 오면 된다. 미리 말해 주는 건 재미없으니까."

의도적으로 속을 긁듯 말하자 금발 머리의 이마에 작게 주름이 파인다.

미안하지만 당장에 무엇을 가르칠지는 알려 줄 생각은 없다.

오히려 안달 나게, 더 궁금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무엇을 가르칠지 모르는 미지의 수업만큼,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들이 경계하는 것은 없을 테니까.

"다만, 한 가지 경고하지. 내가 신임 교사라서 학점을 쉽게 따겠다는 그런 어쭙잖은 생각을 가지고 내 수업을 들으려는 녀석이 있다면."

일부러 호흡을 가다듬으며 뜸을 들인 뒤.

마지막 한마디를 강하게 내뱉는다.

"그때는 내가 손수 진짜 교육이란 게 무엇인지 뼈에 새겨 주겠다."

즉 마지막 말을 해석하면 그거다.

제발 내 수업 들으러 오지 말라고.

1학년과 같이 수업을 들어야 한다면 2학년의 입장에서는 꽤 자존심이 상할 거다.

심지어 대놓고 수업이 만만치 않다고 경고까지 했으니, 자존심 높은 녀석들은 '그딴 수업. 안 듣고 말지!' 하고 넘길 가능성이 컸다.

이렇게 대놓고 지뢰를 뿌렸는데, 그걸 밟고 터지면 솔직히 밟은 놈 잘못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그냥 내뱉으면 그건 교사로서 실격이겠지만.

나는 이런 과정을 그럴싸한 이유로 포장하는 것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다.

다 이유가 있다고. 수업을 들으면 알 거라고.

무책임한 공수표를 뿌리는 짓이나 다름없지만, 뭐 어쩌겠는가.

정공법으로 살아오지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당연히 이런 것뿐인데.

"이상이다. 질문 있나?"

나는 학생들이 우르르 손을 들며 내게 따질 것을 각오하고 그렇게 물었다.

* * *

강의실 내부는 조용했다.

루드거가 질문이 있냐고 물었을 때 학생 중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다들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만 살피고 있을 뿐.

질문이 없는 건 아니다. 과제는 어떤 방식으로 할 건지, 수업의 정확한 커리큘럼은 어떤 건지, 혹은 이 전에 무엇을 가르쳤는지에 대한 사소한 질문도 좋았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루드거 첼리시의 기백에 압도된 것이다.

'저게 신임 교사라고?'

'군인 출신이라더니, 분위기가 장난 아닌데.'

'최소 4위계라는 말도 있던데. 진짠가?'

젊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압박감.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건 절대로 기분 탓이 아니다.

상대가 몰락 귀족이라고 무시하던 귀족 학생들조차 루드거의 시선을 피하며 마른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상위 계층이 그런데 다른 학생들이 감히 나설 수 있을 리가.

모두가 루드거의 말을 들으면서 은연중에 느낀 것이다.

저 남자는 절대로 모든 말을 허투루 내뱉지 않았다고.

눈빛. 말투. 확신에 찬 목소리까지.

사람이 진심으로 자신의 수업에 자부심을 가지지 않은 이상 절대 이런 반응을 내보일 수가 없다.

대체 뭘 가르치려고 저러는 거지? 이론에 구애받지 않는 거면 실전인가? 그렇다면 실전의 방식은 어떻게?

모두의 머릿속에 그런 복잡한 생각만 거품처럼 일어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루드거 첼리시라는 교사가 진행하는 수업은,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는 거다.

"질문 없나?"

재차 묻는 그의 목소리.

그것은 마치 질문을 원하는 사람의 그것 같지만 학생들은 속지 않았다.

여기서 손을 들어 입을 여는 순간, 바로 루드거에게 찍히고 말 거다.

저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눈빛을 봐라. 절대 질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절절히 전해진다.

처음 손을 들어 올렸던 금발의 여학생도 지금은 가만히 있었다.

"없군. 그렇다면 개강식은 이걸로 끝내겠다."

개강 첫날.

숨 막히는 오리엔테이션은 그렇게 끝났다.

* * *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 학생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을 떠났다.

나는 강단 위에서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봤다.

일단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으니까, 전부 알아들었겠지?

그런데 질문을 하라고 했을 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은 것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당장 전날 밤까지만 해도 온갖 질문을 받을 각오를 하고 그에 대비한 대답까지 준비했는데, 전부 무용지물이 되다니.

보통 이런 아카데미라면 하나같이 에고가 강한 아이들만 모여 있는 거 아닌가?

나는 오히려 얘들이 나를 우습게 여겨서 질문 세례를 쏟아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했던 걸까.

'아니. 잠깐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사실 의도적으로 내 말을 씹고 있던 거라면?

들어 본 적 있다. 21세기 한국에서도 그런 경우가 자주 있지 않은가.

새로운 교생 선생이 오면 학생들이 일부러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고 무시하는 행위.

특히 여선생에게 그러는 경우가 많다.

주로 일진 학생들이 선생으로부터 반의 주도권을 가져가기 위해 하는 방법이다.

은근하게 혼잣말로 '아, 겁나 시끄럽네' 이렇게 한마디 던져 주고 거기다가 대고 화를 내면 '선생님한테 한 말 아닌데요?'라는 대답이 날아오는, 그야말로 알고도 못 막는 기술.

어쩌면 내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은 것은 이와 비슷한 경우일지도 모른다.

'음.'

일부러 무섭게 가려고 최대한 진중하게 말했는데, 그게 역효과였던 걸까?

어쩌면 이런 강압적인 말투나 행동이 스스로 천재라 생각하는 학생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걸지도 모른다.

'그러면 좀 큰일인데.'

군대에서 후임이 선임을, 직장에서 부사수가 사수를, 학교에서는 학생이 선생님을 무시하는 것.

이걸 흔히들 먹혔다고 표현한다.

이러다 초반에 분위기의 주도권을 놓칠 경우 앞으로의 수업에 차질을 빚게 되는 건 자명한 일.

그렇다면 조금 더 사근사근한 태도로 대해야 하는 걸까?

'아니. 이제 와서 갑자기 그러면 더 이상하게 받아들여질 거야. 그냥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밀고 가야지.'

괜히 웃으면서 친근하게 대하는 것은 오히려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내 천성도 그렇고 지금까지 연기해 온 신분은 대부분 이런 성격이었으니까.

게다가 이곳에 온 지 어느덧 3주.

이미 사람들은 루드거가 어떤 사람인지 알 사람은 다 안다. 전적에 군인이 떡하니 들어가 있는데 이제 와서 아닌 척 바꾸는 것도 웃긴 일이다.

나는 옷걸이에 걸어놓은 프록코트를 착복하며 모자를 썼다.

그러는 와중에도 강의실에 남아 있는 학생들은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이쪽을 분석하려는 시선은 확실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래도 몇 살이냐, 혹은 여자 친구 있냐는 상투적인 질문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입도 뻥긋 안 할 줄은 몰랐다.

무섭구나. 요즘 애들은.

* * *

뚜벅. 뚜벅.

느긋한 발걸음으로 강의실을 벗어난 나는 천천히 복도를 거닐었다.

어차피 개강 첫날이라 오늘의 할 일은 이걸로 끝이었다.

아직 수강 신청 정정 기간이 끝나지 않았으니 강의를 바꿀 사람은 바꾸고, 아닌 사람은 그대로 정하면 된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첫 수업은 3일 뒤.

그때까지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학생들로부터 수업의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도록 하자.

적어도 교사로서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피해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정면을 확인하는데, 복도를 걷던 학생들이 전부 나를 보더니 길을 피해 가는 것이 보였다.

남학생도 여학생도 하나같이 내가 걸어오는 걸 발견하면 화들짝 놀라며 벽이나 창가로 붙는다.

뭔데. 왜 그러는데.

설마 벌써 만만하게 보이는 신임 교사의 소문이 아카데미 전체에 쫙 퍼진 건가?

듣자 하니 대학교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처럼 아카데미 내부에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커뮤니티가 있다는데, 설마 그거 때문인가?

앞으로의 수업이 꽤나 험난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을 거는 여인을 응시했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루드거 첼리시 씨 맞으시죠?"

"예. 맞습니다."

끝이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분홍빛 머리에, 어딘가 양처럼 포근한 미소가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제복을 입고 있지 않은 걸 보니 학생은 아닌 것 같고.

혹시?

내가 무언가 알아보기도 전에 그녀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 역시!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셀리나라고 해요. 이번에 새로 세오른 아카데미에 부임한 신임 교사죠. 루드거 씨의 동기라 할 수 있겠네요."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내가 무슨 용무로 찾아온 거냐는 시선을 보내자, 셀리나는 조금 당황스럽다는 듯 눈치를 살피더니 기어가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그... 혹시 식사하셨나요?"

◈ 11화 첫 수업 (1)

처음 식사를 제안받았을 때.

나는 드디어 내게도 봄이 오는가?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와 같이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임 교사라고 하니 친분을 도모하려고 식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괜히 그런 거로 가슴 두근거리는 착각이 허락되는 건 한창 뜨거운 청춘일 때뿐이다.

실제로 셀리나를 따라가 보니 나 말고도 3명이나 더 있었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

하나같이 나 마법사요, 라고 외치는 것처럼 개성 있게 생겼다.

"허허허. 안녕하십니까."

가장 먼저 내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 것은 매우 푸근한 인상의 남성이었다.

살집이 두툼하고 전체적으로 인상이 동글동글하다. 나이는 꽤나 먹은 것 같은데 허허로이 웃는 모습이 친근한 옆집 아저씨 같았다.

나는 그와 가볍게 악수를 했다.

"루드거 첼리시입니다. 발현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브리노입니다. 소환 계열에서 골렘을 담당하고 있죠."

그다음으로 내게 말을 건 것은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한쪽 눈가를 가린 요염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어머. 잘생기신 분이시네. 반가워요. 전 저주와 해주 계열에서 매혹과 환각을 담당하고 있는 메릴다라고 해요."

"예. 반갑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은 앞의 둘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짙은 청색 머리를 올백으로 올리고 얼굴에 무테안경을 쓴 남자였는데, 외모만 보면 상당히 깐깐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지 시종일관 표정을 찡그리고 있었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쪽도 나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픽 돌렸다. 자기소개조차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뭐야 이 사람?

내가 의아해하고 있자 메릴다가 호호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설명해 줬다.

"크리스 베니모어 선생님이세요. 보시다시피 우리 같은 평민과는 다른 귀족이시죠."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군.

베니모어 가문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있다. 제국의 유서 깊은 백작가라고 했던가.

크리스로서는 같은 아카데미 교사라 하더라도 평민 따위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겠지.

나의 경우에는 신분상 몰락 귀족이니, 현재 귀족인 그에게 경시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설마 루드거 선생님도 저희 막 평민이라고 무시하시는 건 아니죠?"

"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절대 아니라며 답하자 메릴다 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살포시 웃으며 물러났다.

흠. 결국 이번에 새로 부임한 신임 교사는 나를 포함해서 5명인가.

귀족 하나와 몰락 귀족 하나, 그리고 평민 셋이라.

하지만 모두가 이 세오른 아카데미의 교사가 된 만큼, 자신이 가르치는 분야에서만큼은 어딜 가서도 절대 꿀리지 않은 실력자들이라는 거겠지.

"흥. 나는 여기에 더는 못 있어 주겠군. 나 말고도 새로 부임한 녀석들이 어떤 놈인가 했더니 몰락 귀족에 평민들이라니."

슬슬 밥이나 같이 먹으러 가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크리스의 싸늘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 말에 브리노는 어색하게 미소를 흘리고 셀리나는 몸을 움찔 떨며 당황, 메릴다만이 크리스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흘겨봤다.

나? 나는 그냥 별생각 없다.

귀족들이 선민사상에 빠져 있는 걸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냥 갈 거면 알아서 가라,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크리스가 나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잘난 척하지 마라."

그러더니 이내 몸을 돌려 떠나 버리는 게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 나를 콕 짚어서 저러는 걸까.

본래 루드거와 아는 사이였나?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동료 교사들과 친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저쪽과는 별로 친해지기 힘들 거 같군.'

나는 사라진 크리스를 무시하며 나머지 세 사람을 살폈다.

같은 시간에 부임한 동료 교사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 중에 비밀 결사에 심어 놓은 첩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혹시 이 셋 중에 퍼스트 오더가 있는 건가?'

현재 세오른 아카데미 내부에는 거의 40명에 가까운 비밀 결사단원이 숨어들어 있다.

물론 이 넓은 부지를 지닌 세오른 아카데미 전체 인구를 생각하면 40명은 아무것도 아닌 숫자지만, 그렇다고 길을 가다가 마주치지 않을 확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서드 오더를 제외하면 세컨드 오더 들 중 누군가는 학생으로 잠입했을 수도 있다.

특히 퍼스트 오더의 경우에는 교사들도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단 루드거가 퍼스트 오더로 교사의 자리를 차지했으니까. 다른 퍼스트 오더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

문제는 그게 누구냐는 거지.

차라리 나처럼 이번 학기에 같이 들어왔다고 말했으면 추측할 수 있는 범위가 확실히 좁혀지겠지만.

그 끄나풀이 말한 '먼저 들어왔다'라는 말이 어떤 방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는 게 문제였다.

먼저라는 기간이 나보다 훨씬 더 전이었는가. 아니면 나와 비슷한 시기지만 조금 일찍이었는가.

당연히 나로서는 같은 동기라며 밥을 먹자고 한 이들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를 이렇게 부른 것도 은근하게 나를 떠보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정말 한 치도 방심할 수 없겠군.

나는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동료 교사들을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그래도 혼밥은 안 하니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품으며.

* * *

정령학 신임 교사 셀리나.

얼마 전에 막 세오른 아카데미에 부임한 그녀는 소환 계열의 정령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됐다.

그녀는 부푼 가슴을 안고 들어오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세오른 아카데미는 제국을 넘어 다른 왕국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이곳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그 자체만으로 어딜 가서 대접받기 충분한 자격을 지닌, 미래를 책임질 천재들이다.

그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만약에 실수하면 어떡하지? 내가 못 가르치면? 게다가 여긴 귀족 아이들도 많잖아!'

평민과 귀족의 차이는 크다.

마공학이 발달한 덕에 세계가 점차 바뀌어 평민들도 하원 의원이 되며 정치에 끼어드는 세상에 됐다 하지만, 여전히 신분의 벽은 높았다.

이번에 교사의 자리가 5개나 난 것도, 작년까지 해당 수업을 담당하던 교사들이 퇴직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어째서 그만뒀는지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머리를 조금만 쓸 줄 알면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 오기 전, 지인 마법사들이 귀족 학생들의 텃세를 누누이 경고했으니까.

은근하게 교사를 우습게 보며 이겨 먹으려는 학생들이 있다고, 너는 특히 마음이 여리니까 먹히지 않게 조심하라고.

셀리나는 덜컥 겁이 났다.

'심지어 이 학교에 황족까지 다닌다고 하는데.'

셋째 황녀가 2학년이라고 했던가. 그녀의 담당은 1학년이라 당장 연관은 없겠지만, 세오른에 그 정도나 되는 사람이 다닌다고 하니 긴장감이 배가 됐다.

개강 첫날 오리엔테이션은 무난하게 끝낸 것 같지만, 낮은 자존감 때문에 여전히 불안한 것도 사실.

셀리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자신과 같이 이번에 부임하게 된 다른 신임 교사들과 친분을 다지기로 했다.

그래도 서로 힘든 일을 공유할 수 있는 동료가 생기면 아카데미 생활이 더 나아질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메릴다와 친분을 맺고, 사람들을 하나둘 부른 끝에 마지막 남은 한 명을 찾아가게 됐다.

루드거 첼리시.

평민은 아닌 귀족 출신의 남자. 하지만 가문이 몰락했기 때문에 접근하기 부담스러운 신분은 아니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와.'

처음에 복도의 인파가 좌우로 쩌억 갈라지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혹시 말로만 듣던 황족이 행차한 걸까?

그런 예상을 깨고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건 단정한 복장의 남자였다. 회색 정장. 검은 프록코트. 머리에 쓴 실크해트까지.

'와, 세상에.'

처음 루드거를 마주했을 때 셀리나가 품은 감상은 극상의 감탄이었다.

몰락한 귀족이라고 들었는데.

그를 보면서 셀리나는 자신의 편협한 사고를 고칠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 위엄을 흩뿌리며 천천히 걷고 있는 그는, 그녀가 지금까지 보아 온 어떤 귀족보다도 훨씬 더 귀족 같았으니까.

걸음걸이 하나하나가 그림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셀리나는 뒤늦게 루드거를 찾아온 목적을 떠올리며 황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무, 무서워.'

그가 발걸음을 멈추며 이쪽을 돌아봤을 때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셀리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루드거에게 같이 식사를 하지 않겠냐고 조심히 권했다.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

당장 루드거가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평민 따위가, 라는 말을 내뱉을 것만 같아서.

"그러죠."

그러나 루드거는 너무나도 손쉽게 그녀의 제안을 승낙했다. 그녀가 길을 걸을 때도 보폭을 맞춰 주며 그녀와의 간격을 유지해 줬다.

그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타인을 향한 배려가 느껴졌다.

'보기와는 다르게 되게 따뜻한 성격이구나.'

다른 동료들에게 소개를 해 줬을 때도 루드거는 상대가 귀족이니 평민이니 하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크리스 베니모어 선생이 대놓고 그를 적대하는 태도를 보여도 루드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보통은 욱하거나 짜증을 낼 법도 한데, 그 고귀함을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

마치 홀로 하늘 위의 구름에 올라 서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듣게 된 말이지만, 그는 군 장교 출신이면서 심지어 마탑에도 여러 학술 논문을 제출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루드거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구나.'

그녀도 저런 카리스마 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심지어 식사를 할 때도 루드거는 그저 말없이 조용히 밥만 먹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다루는 자세도 얼마나 절제되어 있는지, 마치 그 혼자만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지나가던 학생들조차도 힐끔힐끔 바라볼 정도니 말 다 했지.

정작 본인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혹은 주변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다는 듯 행동한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조각상 같았고, 그 모든 과정에서 일종의 신념마저 느껴졌다.

식사가 끝나고 서로 인사를 나누며 개인 숙소나 교사동으로 흩어질 때도 루드거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모두가 나중에 보자고 손을 흔들 때도 루드거는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인사를 대신했다.

분명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저 모습마저도 그답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메릴다와 함께 숙소로 돌아가던 셀리나는 오늘 있던 루드거와의 짧은 만남을 떠올렸다.

셀리나는 흡, 하고 숨을 들이쉬며 의도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만들어 보았다.

곁에서 함께 걷던 메릴다가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고 물었다.

"셀리나. 뭐 해? 얼굴을 찡그리고."

"메릴다 선생님. 저 이러니까 조금 세 보이지 않나요?"

"뭐?"

메릴다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다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하하! 셀리나. 지금 그거 루드거 선생님 흉내 내는 거지?"

"네?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셀리나에게 메릴다가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뭐, 그럴 만도 해. 루드거 선생님은 우리와 같은 신임 교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남다른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 사람 과거를 생각하면 그럴 만하더라고."

"네?"

"아. 셀리나는 이런 소식에 어두웠지? 나는 이번에 같이 들어오는 사람들이 다 어떤 사람들인지 확인했거든. 저 사람 군 장교 출신이었어."

"그, 그래요?"

"더 대단한 건, 셀리나 너나 나나 다들 마탑이나 정령 학회를 등에 업고서 이곳에 추천을 받아 들어온 거지만. 그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는 거야.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혼자만의 힘으로 들어왔지."

"와. 어쩐지. 첫인상부터 남다르더라고요."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수업 방식도 뭔가 대단하겠지.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밖에 없어. 너무 남한테 휘둘리지 말자. 괜히 강해 보이는 척 안 해도 괜찮아. 우리도 세오른의 교사가 됐으니까."

"아, 네!"

오늘 처음 만났지만 서로 금방 친해진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교사 전용 숙소로 향했다.

* * *

개강 첫날 오리엔테이션 이후로 3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 3일은 강의 정정 기간이기에 아직 자신이 어떤 강의를 들을지 선택을 내리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꽤나 바쁜 시간이었으리라.

물론, 나한테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대망의 첫 수업. 나는 조금 들뜬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3일 전에 나는 충분히 경고를 던졌다. 내 수업은 지뢰나 마찬가지라고.

이미 나에 대한 소문은 학생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졌을 거다.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설마 내 수업을 들으려는 학생들이 있겠어?

아니, 있기는 하겠지. 다른 수업의 자리가 나지 않아서 억지로 학점을 이수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

그건 충분히 고려하던 바다. 중요한 건 가르칠 학생들의 숫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내가 편해진다는 거지.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학생들은 최소 15명부터 최대 80명까지.

사람이 적다고 강의가 폐쇄되는 일은 없으니 적으면 적은 대로 잘 이끌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물론, 최소치인 15명일 가능성은 없으니 적당히 30명 정도로 타협하면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나는 문을 열고 강의실에 들어갔다.

'응?'

그리고 나는 보았다.

강의실의 안쪽을 가득 채운 학생들을.

그 숫자는 내가 생각하던 30명을 넘어 그 2배 이상.

아니, 사실상 강의실이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많아?

◈ 12화 첫 수업 (2)

약 3일 전, 오리엔테이션 첫날.

루드거가 자신의 수업 방식을 비밀에 부치며 배짱을 보였을 때 학생들 사이에서의 반응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신임 교사가, 그것도 몰락 귀족 출신의 남자가 세오른 아카데미에서 그런 행동을 보였다는 것에 적잖은 학생들이 반감을 품은 것이다.

특히 귀족 출신 학생들이 가장 분노했다.

─어딜 감히 몰락 귀족 출신의 신임 교사 따위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루드거의 오리엔테이션을 목격한 학생들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일부 자존심 높은 귀족 학생들만 괜히 무시당한 것 같아서 씩씩거렸을 뿐, 그날 강의실 내에 있던 50여 명의 학생 중에서 40명 가까이 루드거의 배짱에 오히려 감탄했다.

그래도 세오른 아카데미의 교사로 들어온 사람인데 뭔가 믿을 구석은 있지 않겠는가?

물론, 아직 루드거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없으니 학생들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개강 첫날, 수업을 잘못 들었다가는 한 학기 동안 고통받을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

루드거에 대한 정보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딱 한 번 믿고 수업을 들어 볼 텐데, 그게 아니면 스스로 자처해서 실험용 쥐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여러 학생이 고민하는 순간 둘째 날 아침.

세오른 아카데미의 학생 전용 마법교류통합장, 통칭 <아카식 레코드>라 불리는 커뮤니티에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제목: 이번에 새로 온 루드거 첼리시라는 교사 소식 들었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지어진 제목.

당연히 학생들은 그것을 클릭할 수밖에 없었고 기다렸다는 듯 내용물들이 주르륵 펼쳐졌다.

스크롤이 아래로 쭈욱 내려가는 내용물을 요약하면 이거였다.

루드거 첼리시에 대한 극단적인 예찬하는 글.

최연소 4위계. 군 장교 부임. 크립티드 사냥 공헌. 프리랜서 마법사로서 마탑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루드거에 대한 과거 행적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퍼스트 오더를 어떻게든 띄워 주기 위한 비밀 결사의 필사적인 뒷공작이라는 걸 모르는 학생들로서는 '정말 그런가?'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 충분했다.

특히 가장 열과 성을 다한 사람은 루드거에게 가장 먼저 접촉했던 서드 오더 회원이었다.

'퍼스트 오더 님의 수업을 망칠 수는 없어! 최대한 많은 학생이 듣게 만들어야 해!'

그분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하고 엄청난 실력을 지녔는지에 대한 글만 온종일 작성했다.

그렇게 2일 동안 끈질기게 루드거에 대한 찬양하는 글을 올리며 관심을 끈 덕분인지, 지나친 찬양으로 반발하는 사람 이상으로 루드거의 수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특히 1학년도 같이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점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들의 관심을 자극한 것이 컸다.

그렇게 정정 기간 동안 루드거의 수업을 들으려는 학생들의 숫자는 급격하게 늘어났고, 최대 정원인 80명을 가득 채우는 기염을 토하고 말았다.

그리고 대망의 수업 첫날.

학생들은 모두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품으며 자리에 앉아 루드거를 기다렸다.

절반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절반은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호승심으로.

그리고 수업을 알리는 오전 9시 정각이 되는 순간.

강의실의 문이 열리며 루드거가 들어왔다.

* * *

이 상황은 대체 뭐냐.

강의실에는 빈자리가 하나도 없이 자리가 가득 차 있었다.

많아 봤자 30명 정도라고 생각했던 인원이 최대치를 달성한 것이다.

80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앞둔 나는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대체 왜지?

분명 나는 3일 전 오리엔테이션에서 내 수업이 지뢰라는 경고를 은연중에 뿌렸을 텐데?

바보가 아닌 이상 이 교사의 수업을 듣는 건 손해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나?

무엇보다 제복의 명찰이 푸른색인 학생들.

이번에 새로 입학한 1학년들이다.

강의실에 모인 학생들의 숫자 중 6할 이상을 1학년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1학년들은 또 왜?'

2학년과 같은 수업을 듣는데 쟤들은 왜 들어온 거지? 선배들이랑 같이 수업을 듣는다는데 부담스러워서 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

1학년이 더 많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쯤 되면 누군가가 나를 의도적으로 골탕 먹이기 위해서, 내가 모르는 어디선가 나에 대한 악의적인 정보를 뿌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

'어쩌면 내가 너무 학생들을 우습게 본 걸지도 모르겠네.'

세오른 아카데미라 하면 당연히 입학부터 치열한 경쟁을 치른 끝에 엄선된 학생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에서 내로라하는 아이들이 모인 곳인 만큼, 일반적인 학생이라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나는 내 실수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의 행동이 학생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자존심에 불길을 지핀 거라고.

저 시선을 보라.

내가 혹시나 실수라도 했다가는 어떻게든 물어뜯겠다는 야생의 하이에나 같은 눈빛.

오늘이 첫 수업인데 이런 압박감이라니.

이대로 가면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먹히고 만다.

'이렇게 된 이상, 이쪽도 최선을 다해 강의를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강의실에 모여 있는 학생들의 면면을 살폈다.

하나같이 개성이 가득한 머리 색을 지닌 아이들이 가득하다. 이쪽 세상에서는 저런 게 흔하다는 거겠지.

그중에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특히 더 눈에 띄는 몇몇이 있었다.

특히 머리 위에 인간이 아닌 짐승의 귀를 달고 있는 여학생. 남부 대륙의 사막 지대에서 지낸다는 수인족이다.

뭐, 마법도 있고 마녀도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수인이 뭐 신기하겠냐마는 이 세계에서 아인종은 매우 소수 인종이다.

하물며 이곳이 세오른 아카데미라면 더더욱.

수인족들은 50년 전까지만 해도 식민 지배를 당해 노예처럼 부려지던 종족이기도 했고,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을 향한 차별과 핍박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도 그렇다.

주위에서 은근한 시선으로 수인족 학생을 바라보는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그 증거.

저 아이, 이번에 입학한 거 같은데 앞으로의 생활이 많이 고단하겠군.

'뭐, 내가 지금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긴 하지.'

일단은 수업의 진행이 우선이다.

"발현계의 전반적인 과정을 가르칠 루드거 첼리시라고 한다."

"전반적인 과정이라면 4대 특화 전부 다 말인가요?"

누군가 손을 번쩍 들며 그렇게 말했다. 어딘가 재수 없는 인상의 남학생이었다.

나는 곧바로 녀석에게 경고를 날렸다.

"질문은 내가 허락했을 때만 해라."

"...네. 알겠습니다."

"처음이니 이번만 넘어가마. 하지만 만약에 또다시 내 수업의 흐름을 멋대로 끊는 녀석이 있다면 벌점을 부여하겠다. 교사의 권위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벌점이라는 말에 일부 학생들이 그런 건 듣지 못했다며 경악 어린 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그만큼 잘한 학생에게는 상점이 부여될 거다. 상점이 높은 학생일수록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지니 열심히 하도록."

뭐, 점점 졸업이 가까워지는 3학년부터면 모를까 한창 신날 때인 1학년이나 2학년들은 벌점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익히 아는 사실이다.

다만, 이걸 대놓고 교사가 입 밖으로 꺼내서 경고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큰 법.

"일단 조금 전 질문에 답하자면 '그렇다'이다. 발현 계열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방출>, <속성 원소>, <염동>, <강화>의 전반에 대해서 하나씩 차근차근 가르쳐 줄 거다."

내 말에 대다수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내가 발현계 수업을 진행한다고 하지만, 같은 계열 내에서도 특화는 엄연히 또 다른 분야다.

조금 전에 말했던 <방출>, <속성 원소>, <염동>, <강화>가 내가 말한 [발현계]의 4가지 특화들이다.

흔히들 발현 4대 특화라고 부른다.

보통은 이 중에 2개만 가르쳐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나는 무려 4개를 가르친다고 한 것이다.

학생들로서는 내가 허세라도 부리는 것인 양, 믿을 수 없는 거짓말처럼 들리겠지.

하지만 이건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어느 한쪽에도 일류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살아온 세월이 있다 보니 전반적인 지식의 스펙트럼은 꽤 넓다고 자부한다.

그러니.

"수업에 들어가겠다."

이때를 위해서 준비했던 걸 보여 준다.

* * *

"있잖아, 셰릴. 저 선생님 정말 재미있지 않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셰릴은 밀려드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고개를 향했다.

긴 남청색 머리카락을 허리 아래까지 기른,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의 소녀.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 모습은 마치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인형 같아서, 그녀의 근처에 앉아 있는 남학생들조차 계속 힐끔거리고 있다.

"플로라. 너 설마 또...."

"'또'라니. 실례잖아.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러니?"

장난스럽고 은근하게 되묻는 플로라에게, 셰릴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플로라 루모스.

엑실리온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귀족 가문인 루모스 공작의 여식.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한 폭의 그림을 옮겨 놓은 것처럼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문무를 모두 겸비한 그녀는 세오른의 2학년 내에서 '천재'라는 타이틀로 유명했다.

세간에서 천재라 불리는 학생들조차 세오른 아카데미에서는 범재가 된다.

온 도시와 나라에서 천재들만 모인 세오른은 학생들의 수준을 지나치게 상향 평준화시켰고, 재능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상대적 범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영재 소리를 듣던 아이가, 이곳에서는 뒤에서 세는 것이 더 빠른 처지가 되는 것은 별로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플로라는 그런 세오른에서도 자타공인 '천재'라 불리는 소녀.

그녀의 마법에 대한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집안도 좋고 외모도 아름다우며 본인의 능력까지 뛰어나니 그 누구라도 선망할 수밖에 없는, 세오른에서도 손꼽히는 유명인이었다.

단 하나.

성격에 결함이 있는 것만 빼면 말이다.

플로라 루모스는 세오른 아카데미 내부에서도 교사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그녀는 천재이기에 누군가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으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고, 역으로 승리를 쟁취해 냈다.

교사가 진행하는 수업의 중간에 잘못된 술식을 지적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다.

오히려 그녀는 교사가 가르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마법을 즉석에서 고안해 내,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해당 교사를 박살을 내 버린 일도 있었다.

1학년 때부터 그런 악명을 꾸준히 쌓아 왔고, 그것은 2학년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

특히 발현계 쪽을 특기로 삼은 그녀 때문에 작년에 발현계 수업을 담당하던 교사가 둘이나 나간 일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런 플로라가 2학년이 되었고, 다시 발현계 수업을 들으러 온 것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첫 등장부터 범상치 않다고 평가받는 루드거 첼리시의 수업을 말이다.

플로라의 친구인 셰릴은 제발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길 기도했지만, 플로라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그 바람은 헛된 희망에 불과해 보였다.

듣는 수업마다 교사들의 영혼까지 털어 진을 쭉 빼먹는다고 해서, 교사들 사이에서 떠도는 플로라의 별명은 루모스가의 소악마.

그녀에게 당해 본 사람들이 소악마는커녕 대마왕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모자랄 정도로 치를 떨던 걸 생각하면, 소악마는 퍽이나 귀여운 별명이다.

그런 플로라가 이번 학기의 먹잇감을 루드거로 정한 것이다.

"셰릴. 솔직히 웃기지 않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직 20대로밖에 안 돼 보이는데 발현계의 4대 특화를 모두 익히고 있다니 말이야. 아니. 익힐 수는 있지. 그런데 그걸 전부 가르치겠다는 건 솔직히 과장 아닐까?"

"그건...."

셰릴도 그 부분은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신임 교사로서 자존심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럴 능력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진가를 확인하지 못한 당장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진짜 4대 특화를 다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하게 익힌 건가?'

마법에는 총 5개의 계열이 존재하고, 계열마다 또 특화가 갈린다.

[구현] 계열의 <물질 생성> <변환> <연금>의 3개의 특화.

[발현] 계열의 <방출> <속성 원소> <염동> <강화>인 4대 특화.

[소환] 계열의 <정령> <골렘> <마법수> <강령술> 4대 특화.

[저주와 해주] 계열의 <점성술>, <매혹>, <환각>, <약제학>, <위치크래프트>, <인챈트>의 6대 특화.

그리고 마지막 5번째 계열인 [특이]다.

[특이]의 경우에는 세간에는 마법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분명히 마법으로 발현이 가능한 부류를 뜻한다.

가문에서 대대손손 내려오는 비전 마법이나 혹은 스스로 특이한 방식을 개척한 자가 이런 [특이] 계열에 속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런 특이 계열의 경우에는 어떤 교사도 가르치지 않는다.

때마침 루드거가 매직 보드 위에 하나의 마법 술식을 새겼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보드에 마력을 흘리자 술식이 저절로 그려졌다.

3위계 화염 원소 마법 중 하나인 [요동치는 불꽃]이었다.

"요동치는 불꽃이다. 발현이라는 기본을 깔고서 가열, 연소, 압축, 가속, 팽창, 확산이라는 총 7개의 요소가 서로를 보완하며 술식을 이루고 있지."

고작 3위계일 뿐인데도 술식을 이루는 7개의 요소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며 발현시켜야 하는 마법이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이 자리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사용이 가능했다.

"오늘은 첫 수업인 만큼, 본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너희들의 흥미를 돋울 만한 걸 가르쳐 주마. 바로 술식을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더 빠르게 발현하는 방법이지."

술식을 빠르게?

학생들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샘솟았다.

"어디 보자. 속도는, 그래. 기존의 것보다 3배 이상 빠르다고 보면 되겠군."

그 말에 학생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 13화 첫 수업 (3)

"뭐야. 술식 발현 시간을 줄인다고?"

"그게 가능해?"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아직 잘 모르는 1학년들과 다르게 2학년들은 루드거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첫 수업에 기초를 가르치기에 앞서, 마법을 발현시키는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드는 법을 보여 주겠다고 하다니.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마법의 발현 속도는 언제나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넘어야 하는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목숨이 오가는 전투 속에서 1초라는 시간은 크다.

특히 실시간으로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과 다르게 마법을 발현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마법사들에게는 그 위험의 체감이 훨씬 절실히 다가온다.

과학의 발전으로 마법사들도 예전만큼의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가 적어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마법사들이기에, 오히려 이런 부분에 더욱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루드거가 한 말은 단순히 학생들의 기대감을 만족시키는 걸 넘어 모든 마법사가 눈에 불을 켜고 염원하는 것이었다.

플로라의 단짝인 셰릴이 그녀에게 물었다.

"플로라. 저 말이 정말 사실일까?"

"흐음. 글쎄. 지금까지 제대로 된 술식 단축이 나온 적이 있던가?"

마법의 발현 시간을 줄이는 방법은 분명 존재했다.

기존의 마법을 미리 매개체에 저장시켜 놓음으로써 발휘하는 스크롤 마법이 대표적인 예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단발성이라는 한계가 있다.

한 번 마법을 발휘한 스크롤은 효력을 잃게 되니까.

아니면, 마법을 미리 발현시키고 그것을 저장하는 [기억의 잔향]이라는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도 계속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고, 숙련도에 따라 최대로 쌓을 수 있는 스톡의 한계가 정해져 있다.

"마법 자체의 술식 구조를 바꾸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고 보는데 말이지."

결국, 시간을 단축시키려면 근본적인 술식을 개량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마법은 수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역사에 길이 남을 마법사들이 계속 다듬고 고안하며 만들어 낸 가장 최적의 방식이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3위계 화염 원소 마법이겠지만, 그 마법의 이면에는 역사 속 수많은 천재의 발자취가 담겨 있다는 소리다.

현대에 아무리 천재라 불리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기존의 마법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 손댈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해서다.

그건 이미 백 년도 더 전부터 결론이 나온 사안이었다.

그건 플로라 루모스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런데도 굳이 바꾼다고 한다면, 취하는 것이 있는 만큼 무언가를 잃을 수밖에 없어.'

술식 발현 속도를 빠르게 올린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부분이 약해지고 만다.

위력이 줄어든다거나, 범위가 좁아진다거나 아니면 정확도가 떨어진다거나.

그렇다고 술식에 들어가는 요소를 줄인다면, 그걸 과연 기존의 마법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다.

그때부터는 전혀 별개의 마법이 되고 만다.

정통성을 매우 중시하는 마법사들이 본다면 거품을 물 일이다.

'만약 정말 그런 생각으로 술식을 빠르게 하겠다고 한 거라면.'

플로라의 시선이 가늘게 좁혀졌다.

'실망이 매우 클 거예요. 선생님.'

아니. 차라리 플로라는 루드거가 부디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그녀가 더 물어뜯기 쉬워질 테니까.

'우리 잘나신 황녀님도 그렇게 느낀 것 같고.'

금실을 짜 올린 것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자신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는 3황녀.

이쪽과 다르게 올곧고 당당한 것을 좋아하는 그녀에게도 루드거의 발언은 거슬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을 증명하듯 황녀님의 얼굴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점점 강의실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려는 순간.

루드거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만. 잡담은 거기까지다."

학생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지만, 분위기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본인도 모르는 바가 아닌지 루드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궁금한 것이 많아 보이는군. 좋다. 보여 주기에 앞서 간단한 질문 몇 가지를 받아 주마."

그 순간 학생들이 바로 손을 들었다.

루드거는 가장 먼저 손을 든 학생을 가리켰다.

"말해 보도록."

"2학년의 알렉스 살레인이라고 합니다. 루드거 선생님께서 마법 발현 속도를 단축시키신다고 하셨는데, 그게 정확히 뭡니까?"

"발현 속도 단축은 말 그대로 단축이다. 질문을 하려면 더 정확하게 하도록. 다음."

"2학년의 달리아입니다. 혹시 술식 발현을 단축시키신다는 것은 술식을 개량하시겠다는 의미인가요?"

"그렇지 않다. 술식은 그대로 유지하되, 속도를 더 줄이겠다는 거다."

그 말에 곳곳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 진짜야? 진짜 술식 속도를 빠르게 한다고?"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지금까지 어떤 마법사도 해내지 못한 난제가 아니었어?"

말도 안 된다고.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고.

같은 생각을 한 건 플로라도 마찬가지였다. 술식을 건드리지도 않고 개량하지도 않으면서 마법의 발현 속도를 단축시키겠다고?

설마 무수한 반복 시행을 하며 숙련도를 올려야 한다는 그런 뻔한 방법은 아니겠지? 그러나 저 당당한 루드거의 표정을 보니 어딘가 배알이 꼴렸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플로라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루드거의 싸늘한 시선이 그녀에게 날아와 꽂혔다. 마치 넌 대체 뭐냐는 그 눈빛에 플로라는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플로라 루모스입니다."

그녀의 자기소개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플로라다. 플로라가 나섰어."

"하하. 저 교사도 이제 끝이군."

학생들 사이에서도 플로라의 명성은 자자했다. 그건 이번에 입학한 새내기들도 마찬가지였다.

2학년의 천재. 이 세오른 내에서도 천재라는 이명을 유지하는 그녀는 이미 1학년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그런 그녀가 수업 첫날부터 바로 루드거의 방식에 이견을 제기하니 학생 모두가 관심을 집중하는 것도 당연했다.

"질문을 허락한 기억은 없지만, 이번만 넘어가 주도록 하지. 그래. 학생은 대체 무엇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거지?"

"당연히 술식을 단축시키는 것입니다. 손을 대지 않고 어떠한 개량도 없이 술식의 발현 속도를 단축시킨다는 건, 그저 반복 숙달로 빠르게 하겠다는 것 말고는 없으니까요."

"왜 없다고 생각하지?"

"지금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했으니까요. 역사에 남을 천재들조차도, 고 위계 아크 메이지도 해내지 못했죠. 그런데 선생님께서 그걸 하신다고 하니 저로서는 믿을 수가 없어서요."

지금도 마탑에 무수한 마법사들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매일 머리를 쥐어짜 내며 탐구를 이어 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옛날과 다르게 더 이상 진척을 보이지 못하는 분야는 존재했고, 술식 단축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시였다.

아무리 세오른 아카데미라의 교사라 하더라도, 신임 교사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허세를 넘어 마법학계에 대한 전반적인 모독에 가까웠다.

웅성웅성.

플로라의 말에 학생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견에 동조했다.

루드거를 믿는다거나 그의 편을 들어주는 학생들은 없었다.

조금씩이지만 강의실 분위기가 루드거에게 적대적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루드거는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그 어떠한 외부의 압력도 그에게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는 듯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라. 재미있는 말이군. 나는 다르게 본다. 나는 오히려 개량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생각하지."

"네?"

"마법은 전통과 연사를 중시하지. 하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 정체를 불러 왔다. 과학이 발전한 지금, 마법은 그 자리를 위협받고 있지."

"...지금 그 발언은 과학이 마법보다 우월하다는 건가요?"

"천만에. 마법도 결국 과학과 마찬가지로 더 발전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개량의 여지는 없다'라는 말은 틀렸다는 거지."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했던 사람들은 전부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 내가 최초가 되겠군."

"...지금 진심으로 하시는 소리신가요?"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지."

뻔뻔하기까지 한 당당함에 플로라는 기가 찼다.

지금 저 교사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는 건가?

"뭐, 당장 이해를 못 한 거 같으니 지금 바로 수업을 진행해 보도록 하지. 플로라라고 했나? 내가 지금 매직 보드에 적은 [요동치는 불꽃]의 술식을 구성하는 데 평균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아나?"

"...펼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막 3위계에 도달한 마법사라면 10초. 숙달되고 위계가 높아지면 5초 이내로 더 짧아지겠죠."

"그래. 하지만 위계를 늘려서 속도를 늘린다는 시답잖은 방식은 나도 반기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건 지금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수준에 맞춘 것이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빠르게 해도 5초겠네요."

"본인의 이야기인가?"

"네."

"호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그렇다면 직접 선보일 수 있나? 여기 강단 위에 서서 말이지."

다분히 도발적인 말에 플로라는 겁먹지 않았다.

"좋아요."

플로라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교단에서 내려가 강단의 위에 섰다. 그녀는 개인 지팡이를 들어 올려 바로 [요동치는 불꽃]의 술식을 펼쳤다.

바탕은 발현. 속성 원소는 불꽃. 거기에 가열, 연소, 압축, 팽창, 확산, 가속이라는 요소까지.

허공에 피어오르는 것은 타오르는 화염 형상의 마법의 술식.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술식의 발현.

그 속도는 마치 휘몰아치는 바람과 같아서, 눈여겨보던 학생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역시 세오른의 천재. 역시 루모스 가의 여식.

플로라가 어떠냐는 표정으로 루드거를 돌아봤다.

루드거는 손에 쥔 금빛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발현까지 걸린 시간 4.78초. 2학년으로 보이지 않는 속도로군. 과정도 완벽했다."

"별거 아니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느리다."

자만해하고 있던 플로라에게 날아오는 건 루드거의 싸늘한 목소리였다.

"...네?"

"3위계 마법사 중 [요동치는 불꽃]을 가장 빠르게 펼친 기록은 4.41초다. 그보다 더 빠른 사람은 없었지. 여전히 느려."

"...저도 익숙해지면 더 빨리할 수 있어요."

"나는 그 4.41초조차도 느리다고 말한 거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너무나도 당당한 루드거의 선언에 모두가 당황했다.

루드거는 왜 자신이 그런 말을 한 건지 직접 보여 주기로 했다.

강단의 위에 선 루드거가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잘 봐라. [요동치는 불꽃]은 이렇게 사용하는 거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그마한 지팡이를 들어 올려 허공을 가리킨다.

지팡이 끝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이윽고 술식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발현을 바탕으로 한 술식 이후로 펼쳐지는 건 응당 [요동치는 불꽃]을 구성해야 할 가열과 연소의 단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한 줄기 직선으로 이루어진, 의미도 뜻도 모를 너무나도 당연한 마력의 흐름이었다.

[요동치는 불꽃]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학생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허공에 [요동치는 불꽃]의 술식이 완성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

강의실 전체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못 본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루드거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자신이 어떻게 마력을 운용하는지 천천히 보여 줬으니까.

첫 시작은 [요동치는 불꽃]의 술식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방식과 전혀 다른 마력의 운용.

그런데 그 결과는 달랐다.

완성된 것은 [요동치는 불꽃]의 술식.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교과서에 실린 것과 똑같을 정도로 완벽하다.

대체 어떻게?

시작과 끝만 존재하고, 중간 과정은 잘려 나가 사라진 것 같다.

뒤를 향해 돌을 던졌는데, 정면의 과녁에 화살이 박힌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심지어 그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1초? 아니. 거의 0.3초도 걸리지 않았다.

학생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봤나?"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것을 해낸 루드거의 목소리는 어떠한 높고 낮음도 없이 평탄하다.

이것이 당연하다는 듯.

그에겐 자신이 해낸 것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에 대한 감흥이 존재하지 않았다.

"바, 방금 그건 대체."

"혹시 못 본 녀석들을 위해 한 번 더 보여 주지."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며 기존의 술식을 파훼하고 조금 전에 보였던 과정을 다시 반복했다.

이번에는 더 천천히. 모두가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학생들은 자신이 놓친 것이 있지 않을까 눈을 부릅뜨며 루드거가 새기는 술식을 노려봤다.

지팡이의 끝에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그것이 다시 처음처럼 이상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그리고 바로 [요동치는 불꽃]이 완성됐다.

"미, 미친."

"저게 가능해?"

"다시 봐도 모르겠어."

아티팩트도 아니다. [기억의 잔향]이라는 마법도 아니다. 구현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다.

아무리 빨라도 그 과정은 반드시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저건 과정을 건너뛰고 오직 결과라는 것 하나만 보여 줬다.

활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쏘고, 화살이 날아가서 목표물에 명중한다.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

마법도 마찬가지다. 술식을 펼칠 때 이와 같은 흐름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루드거의 방식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화살을 쏘고 화살이 날아가는 과정이 생략됐다. 그런데 결과물은 동일하다.

"아니, 방금 대체 뭘 어떻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놓치지 않고 지켜본 플로라조차도 루드거가 보여준 방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누가 와서 봐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신비로움? 새로움? 혁신적인? 그런 단어들이 뇌리에서 소용돌이쳤다.

"드디어 다들 눈빛이 바뀌었군."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강의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정도로 학생들은 루드거가 다음으로 할 말에 집중했다.

"조금 전 내가 펼친 [요동치는 불꽃]의 발현 속도는 0.24초다. 기존의 기록과는 확연히 다르지.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처음 펼친 술식은 [요동치는 불꽃]이 아니었으니까."

그래. 바로 그 부분이었다.

전혀 다른 술식을 사용하는데 결과물은 또 원래 목표로 하던 것이라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나는 분명 술식을 사용했다. 정확히는, 술식을 위한 술식을 사용한 거지."

"술식을 위한... 술식?"

"그게 대체 뭐야?"

저마다 중얼거린 학생들이 재차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걸, 소스코드(Source Code)라고 부른다."

◈ 14화 소스 코드(Source Code) (1)

내 말에 학생들이 숨을 집어삼킨다.

누군가는 소스코드가 대체 무엇인지 모르기에.

또 누군가는 새로운 마법의 등장에 경악했기에.

누군가는.

또 누군가는.

하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은 동일했고, 그 모든 감정은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안다.

'하긴. 얘들 입장에서는 진짜 놀랄 만도 하겠네.'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이쪽 세계는 지구로 따지면 19세기 정도다.

과학이 아닌 마법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본래 내가 생각하는 역사보다 훨씬 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래도 21세기에 살던 입장에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컴퓨터를 이용한 전산 시스템의 부재가 바로 그러했다.

'소스코드는 입력값만 넣으면 곧바로 정해진 결과물을 출력해 주는 일종의 설계도. 나는 그것을 마법에 접목시켜서 만들었다.'

물론 이건 나 혼자서 만든 게 아니다.

정확히는 아이디어는 내가 냈지만, 실질적인 구성과 완성은 내게 마법을 가르친 스승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도 내가 만든 것에 대한 지분은 있으니까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문제가 없을 터.

스승님의 성격을 생각하면 딱히 이런 걸 가지고 뭐라 하실 분은 아니다. 그보다는, 일단 마주치면 내가 겪게 될 일들이 문제였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소스코드라는 술식은 지구에 살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일종의 꼼수에 가까운 방식이다.

알고리즘은 알아도 컴퓨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입력과 출력, 코드에 대해서 모르는 학생들에게는 믿기지 않은 일이겠지.

무엇보다 마법사들은 지나친 선민의식과 자신감 때문에 그 수준이 정체됐고, 그러면서도 과학을 우습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그런 그들이 과학적인 느낌을 중시한 방식을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

입에 거품을 물며 '이런 건 마법이 아니야!' 하고 외치겠지.

그런 놈들이랑 비교하면 나는 그래도 사고의 방식이 자유롭다.

'물론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 치고는 긴가민가했지만.'

소스코드라는 소프트웨어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하드웨어라는 본체와 프로그램, 데이터가 필요하다.

여기서 하드웨어는 마법을 펼칠 수 있는 지팡이, 혹은 마법사 그 자체를 뜻한다.

프로그램은 짜 놓은 마법 술식이며, 데이터는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마력이다.

결국, 내가 사용한 소스코드란 인간이라는 생체 하드웨어를 통해

마력이라는 데이터를 소모하고

술식이라는 프로그램을 따라

마법이라는 소프트웨어를 발현시키는 과정이 한꺼번에 담긴 마법인 것이다.

이 소스코드만 있다면 복잡한 마법 술식도 그저 약간의 마력만 불어넣는 것으로 완성된 결과물을 출력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남들이 마법을 구현하기 위해 술식을 한 획씩 신중하게 그릴 동안에, 나는 그냥 도장처럼 꽝 찍는다는 소리.

자필과 인쇄의 속도 차이를 생각하면 쉽다.

아무리 필사가 빠른 인간이라 하더라도 금속 인쇄로 찍어 내는 사람의 속도를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사람은 조급하면 실수를 남발하게 된다.

술식이 어긋나거나 혹은 끝처리가 잘못됐거나, 마력의 흐름이 뒤엉키거나 순서가 맞지 않는 경우.

당연히 마법은 그 신비로운 힘을 잃고 발휘되지 않는다.

혹은 마력이 역류해서 목숨이 위험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프로그래밍 된 소스코드는 그런 것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확실하게 정해진 값만 내놓는다.

그 속도는 감히 다른 마법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물론 6위계급 이상 되는 마법사가 펼치는 건 이보다 더 빠르겠지만.'

그 인간들은 머릿속에 슈퍼 컴퓨터가 들어 있는 초인들이니 애초에 제외하고.

아직 제대로 여물지 못한 세오른 아카데미 학생들의 입장에선 이 소스코드야말로 정말 대단한 혁명이겠지.

'단점이 없는 것도 아니지. 사용이 가능한 건 3위계 마법까지가 한계라는 거. 그 이상부터는 마력 용적량 때문에 과부하를 일으키니까. 그리고 이 소스코드 만드는 것 자체가 토 나오게 복잡하고 힘들다는 것 정도려나.'

괜히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디버깅에 온갖 패턴을 다양화하면서 테스트를 거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이거 하나 만들겠다고 머리를 엄청 싸맸으니까.

다만, 한번 만들고 나면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어서 매우 편리하다.

특히 3위계 이하 마법은 귀찮게 술식을 일일이 만들며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결국, 이 소스코드란 마법은 재능을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를 최대한 따라잡기 위해 만들어진 발명의 산물인 셈이다.

이렇게까지 해도 일류가 되지 못하는 내 처지가 오히려 슬프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천재들만 모인 이 아카데미에서 교사로서 2년 동안 잘해 먹으려면 이런 밑천이라도 털면서 수업을 진행해야지.

뭐, 이 정도 했으면 그래도 우습게 보는 일은 없어지지 않겠어?

부디 그래야 할 텐데 말이야.

* * *

소스코드라는 획기적인 마법 발현 술식의 등장에 학생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강의실 전체에 내려앉은 침묵은 뜨겁기까지 했다.

특히 1학년들은 그야말로 눈에서 레이저라도 뿜어져 나올 기세.

반쯤 속는다는 느낌으로 루드거 첼리시의 수업을 선택했는데 이런 걸 목격하게 되다니.

일부 학생들은 등골이 써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만약, 그때 순간의 치기에 못 이겨 다른 선택을 내렸다면.'

'이 수업을 오늘 내가 듣지 못했다고 한다면.'

술식을 위한 술식.

상식을 초월하는 새로운 방식의 마법 발현.

그것의 등장을 두 눈으로 목도하지 못하며, 거기에 더해 그 배움의 기회조차 박탈당하게 된다.

그것은 마법사의 길을 걸으려는 학생들에게 상상하는 것만으로 뼛속의 골수까지 냉기가 치밀고 속이 욱신거리는, 그런 끔찍한 악몽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학생이 같은 생각을 품었다.

그리고 루드거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됐다.

분명 그의 첫인상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매우 진중하고 깊이 있으며 강렬한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마법 아카데미 교사에게 중요한 건 결국 마법 실력이다.

그저 남들이 한 말을 반복하는 거로는 학생의 존경심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새로운 마법을 보게 된 학생들은 모두 루드거에게 존경을 넘어 경외심이라는 감정을 품었다.

무엇보다 루드거의 행동도 놀랍다.

세기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두의 앞에서 시연했음에도, 그의 표정은 어떠한 흥분의 기색도 없다.

그 자연스러움에 학생들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만다.

이 남자에게는 이 소스코드라는 획기적인 마법조차 그저 당연하게 모두의 앞에서 펼칠 수 있는 것이었나.

어쩌면.

이 획기적인 마법 말고도 다른 비장의 한 수가 더 존재하는 게 아닐까?

저 정도를 발명하고도 저런 심드렁한 반응이라면, 분명 다른 대단한 무언가가 없을 리가 없다.

그 순간.

강의실에 존재하는 80명의 마법 아카데미 학생들의 마음에 불꽃이 일었다.

저 마법을 배운다면.

그의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바꾼다면.

'나는 더 발전할 수 있다!'

그 강렬한 의지가 눈빛으로 드러나고, 후끈 달아오르는 분위기를 타고 루드거를 향해 쏘아진다.

루드거는 반개한 눈으로 그저 그렇다는 반응이었지만, 차려입은 옷 안쪽의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눈빛들이 왜 저래?'

그냥 적당히 대단하다, 괜찮은 선생님 같다는 의견 정도만 나오길 기대하던 루드거에게 있어서 학생들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막 지층을 뚫고 튀어나오는 용암보다 뜨거운 눈빛.

거기에 델 것만 같아서 루드거는 더욱 자신의 마음에 채찍질을 가하며 마음을 다잡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일단 이쪽의 비밀 패를 하나 깠으니 한동안은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언제까지 이거로만 밀고 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카데미에서 자신이 사기꾼인 걸 들키지 않으려면, 비밀 결사에 자신이 가짜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앞으로도 더 많은 것을 준비해야 했다.

'어디 끝까지 가 보자.'

살아남기 위해서.

우선은 강단 위에 올라와 있는 이 공작가의 여식부터 어떻게 해야 했다.

"플로라 루모스."

흠칫.

루드거가 펼친 소스코드 마법에 정신이 팔려 있던 플로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루드거의 차갑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사늘한 칼날이 되어 심장을 헤집는 기분이었다.

'이, 이 사람은 대체....'

스스로가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재능도 갖췄다.

누구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을 품었던 자들에게는 그녀가 직접 실력을 몸소 보여 주었으니까.

아카데미의 교사라 하더라도 그녀의 앞에서 쩔쩔맸다.

아무리 나이가 더 많아도, 더 오랫동안 마법이라는 학문을 배워도, 더 노력해도.

그녀는 선생들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남자는 다르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도,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타인에게도 휘둘리지 않는다.

마치 지면에 깊게 박혀서 우뚝 서 있는 강철의 기둥을 보는 것 같다.

풍랑이 몰아쳐도, 비가 내리고 눈이 내려도 녹슬지 않고 마모되지 않으며.

이쪽이 어떤 결점을 잡아내려 해도 상흔조차 나지 않는다.

'대체 이 사람의 어디가 신임 교사라는 거야. 소스코드? 그런 마법은 들어 보지도 못했어.'

그 위압감은 왕족을 몇 번 마주쳤던 플로라조차 한 수 접어 줄 정도.

그 고귀한 황녀님조차도 루드거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정도였다.

"마법 술식의 획기적인 단축 방법. 궁금하던 의문이 드디어 풀렸나?"

"...네."

플로라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그렇게 답했다.

자세를 단정하게 유지하며,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는다. 흔들리지 말라고 자신에게 되뇐다.

그런 그녀의 행동이 웃기기라도 한 걸까.

루드거의 입가에는 미미하지만 미소가 맺혀 있었다.

마치 이쪽의 필사적인 강한 척은 이미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처럼.

"플로라 루모스."

"...네. 선생님."

"너는 네 자신의 편협함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질문을 했다. 인정하나?"

플로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쥔 플로라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네... 인정, 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뼈저리는 패배감.

평소에 느껴지던 학생들의 선망 어린 시선이 지금처럼 아프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문득, 잊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괜한 치기로 인정받고 싶었던 그녀의 목표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필사적으로 참았다.

아직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으니까.

"스스로가 알고 있다니 이 이상의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네 행동은 명백히 교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 내가 처음 경고했다시피 이것을 그냥 넘기지 않을 거다."

"...네."

"플로라 루모스. 너에게 벌점 10점을 부여한다."

벌점 부여.

그것이 그렇게 신기할 것도 없었지만, 그 대상이 플로라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흠결이라는 걸 만들지 않았던 세오른의 천재.

벌점이라는 것과 전혀 연관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던 그녀였기에 고작 10점밖에 되지 않는 벌점조차도 거대했다.

완벽해야 할 공예품에 미약하게나마 새겨진 흠결.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크고 아프게 다가온다.

"불만이 있나?"

"...아니요.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플로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세상에."

"그 플로라가...."

다른 학생들조차 그 플로라가 벌점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물며 이것이 억지로 트집을 잡은 것이 아닌, 본인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합리적인 처벌이었다는 것.

플로라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강단에서 내려와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그 순간 루드거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하지만 네가 보여 준 [요동치는 불꽃]의 술식은 내가 보아 온 그 어떤 것보다도 완벽했다."

발걸음을 멈추고 강단을 돌아본다.

루드거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나 변함없는, 한없이 올곧은 시선으로.

"나는 실력이 있는 학생은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니 플로라 루모스. 상점 10점이다."

상점 10점.

이로서 그녀에게 새겨진 벌점 10점은 사실상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

플로라는 선망하던 일부 학생들은 다행이라 생각했고, 그녀를 시기하던 일부 학생들은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플로라는 전례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비록 벌점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벌점을 받았다는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아니 어쩌면 평생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점이라니.

플로라는 루드거가 준 상점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자신에게 감히 덤벼들려 한 이 어리석은 학생에게 내리는 승자의 자비라고. 그 칭찬조차도 그저 기만일 뿐이라고.

그것이 역으로 플로라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자리에 돌아와 앉자, 노심초사하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셰릴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플로라. 괜찮아?"

셰릴은 플로라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았다. 정확히는 어릴 때 겪어 온 일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다.

그런 플로라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신임 교사에게 역으로 질책을 들었으니 얼마나 치욕스러울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응. 괜찮아."

플로라는 방긋 웃으며 답했다. 그 여유 있는 모습은 평소의 그녀와 다를 바가 없어서, 전혀 상처 입은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 괜찮은 거구나. 그래. 플로라니까 이런 건 금방 털어 낼 수 있는 거겠지.'

셰릴은 속으로 안도했다.

혹시라도 그녀의 친구가 자칫 나쁜 방향으로 엇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지금도 그렇다. 플로라는 평소처럼 같은 얼굴로 강단 위를 응시하며 수업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셰릴은 보지 못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강의실 누구도 알지 못했다.

플로라의 눈동자 안에 타오르는,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뜨거운 불길을.

* * *

나는 자리에 돌아가 앉은 플로라의 상태를 살폈다.

뒤늦게 루모스 가문이 제국에서 유명한 공작가라는 걸 떠올렸다. 그렇다는 건 저 아이는 공작가의 여식이라는 소리다.

이거 혹시 방금 있던 일 가지고 가문의 힘을 이용해서 압박을 넣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일러바친다거나?

이곳이 세오른이라 하지만, 그래도 학생들은 아직 어리니까 그럴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었다.

다만, 자리에 앉은 플로라의 표정은 평온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에 이상한 부분은 없다.

음. 그래.

보아하니 머리도 좋고 똑똑한 아이니까 이런 거로 좀생이처럼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겠지.

애초에 상점을 준 것도 굳이 싸우지 말고 앞으로 잘해 보자는, 일종의 화해 시도였으니까.

그걸 받아 준 것 같아서 정말 기쁘다.

"그러면 첫 수업을 시작하겠다."

◈ 15화 소스 코드(Source Code)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