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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갈 때 오늘도 있을 만찬에 엘레나는 방에서 옷가지를 단정히 하며 때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레나의 방으로 들어온 데미안의 전속 집사 켄이 그녀에게 알려준 것은 데미안이 만찬에 불참한다는 이야기였다.

"오늘 저녁에 있을 식사에 가주님과 데미안 공자님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오시지 못하게 되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켄."

기다리고 있던 데미안과의 저녁 식사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에 엘레나는 아쉬웠지만 데미안과 크라우스 백작이 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갔기에 마냥 아쉬워할 수만은 없었다.

오늘 이실리아관에서 있던 일들을 데미안이 그냥 넘어갈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실리아관을 떠올리니 절로 거기에서 만난 어린 소년. 알폰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크라우스 백작을 똑 닮은 데미안과는 달리 이실리아관의 주인이었던 오늘 본 초상화 속의 여인 아르웬 크라우스를 닮은 그 어린 아이의 얼굴이 말이다.

알폰스 크라우스.

그 아이는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이전의 삶에서도 엘레나와 인연이 닿아 있는 아이였다.

첫번째 삶에서는 데미안의 비틀린 소유욕 때문에 같은 영주성에 지내면서도 자주 마주쳐 본적이 없었지만 이후 데미안과의 파혼 후 시간이 흘러 엘레나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장성한 알폰스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때의 알폰스는 영웅이라 불러도 모자름이 없는 남자였다.

터전을 잃은 백성들을 한명 한명 만나가며 독려하고 크라우스라는 가문의 후계자라는 위치에 있음에 몸을 사릴만도 한데 무너지고 있는 남부전선의 최전방으로 달려가 직접 군대를 진두지휘했다. 그때 당시 나이가 고작 열일곱에 불과했다.

당시 상황이 아무리 어린아이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급박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수만의 목숨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데미안이 행적을 감춘 뒤 비어진 후계자 자리를 채우기 위한 부담감 또한 막중하였으리라. 그런 여러한 악조건 속에서 스스로 일어난 알폰스는 영웅이 맞았다.

하지만 데미안이 아닌 '그'가 그 자리를 대신 함으로써 알폰스 크라우스의 이야기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원하신다면 방으로 식사를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켄의 말에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알폰스 도련님은 어제와 같은 곳에서 식사를 하시나요?"

"네.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저도 그곳으로 가야겠네요. 저는 크라우스의 약혼녀로서 미래에 이곳의 안주인이 될 몸. 가족 간의 식사 자리에 빠질 수는 없죠. 무엇보다 아직 어린 도련님을 혼자 있게 놔둘 수는 없잖아요."

그런 엘레나의 미소 담긴 말에 켄은 잠시 넋을 잃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에 화답하듯 작게 웃으며 엘레나에게 답했다.

"그렇지요. 아가씨께서도 이제 크라우스가 되실 몸이시니. 제가 실언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식사는 6시 종이 울리기 전에 준비가 끝날테니 종이 울리고 움직이시면 됩니다."

켄이 방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6시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성에 울려 퍼졌다.

엘레나는 이곳에 하루 밖에 지내지 않은 사람 같지 않게 곧장 길을 찾아내며 식당으로 향했다. 주인을 보필하기 위해 하루 종일 성의 구조를 파악하려 노력하던 헤일리는 자연스레 길을 찾아내는 똑똑하신 자신의 주인의 모습에 씁쓸할 따름이었다.

문 앞에 도착하자 헤일리가 노크를 두어번 하고는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제와 같은 식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날과는 달리 상석은 비어 있었고 엘레나의 자리의 옆에 있어야 할 이도 지금은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오직 알폰스 만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며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식당에 들어오는 엘레나의 모습을 보자 알폰스의 얼굴에 반가움이 깃들었다.

엘레나의 기억 속에 있던 알폰스 크라우스를 떠올리기에는 눈 앞의 소년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어린아이였다. 데미안이 알폰스 때문에 백작과 이야기를 하러 갈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 시기가 너무 빨랐다. 공교롭게도 빠르게 일을 해결 하고 싶어 움직인 데미안의 행동이 또 다시 알폰스를 혼자 놔두게 만들어 버린거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엘레나가 있었다.

"좋은 저녁이에요. 알폰스 도련님."

"아! 네. 좋은 저녁이에요. 그,..엘레나...누..누나?"

엘레나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중에 나온 '누나'. 알폰스는 자신이 말하고도 혹여 실례가 되지는 않았을까 곧바로 엘레나의 얼굴을 살폈지만 엘레나는 오히려 그 호칭이 마음에 든다는 얼굴이었다.

"누나라... 좋네요. 저에게는 오라버니가 한명 있지만 동생은 없었거든요."

"정말 누나라 불러도 괜찮아요?"

"물론이죠. 도련님은 데미안의 동생이니. 저는 그의 약혼녀, 아직 정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폰스. 우리는 가족이에요."

엘레나의 가족이라는 말에 알폰스는 기뻐하였지만 이내 비어있는 엘레나의 옆자리를 보자 알폰스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 크라우스 백작과 데미안이 없는 이유를 알폰스도 알고 있었다.

알폰스는 고개를 숙이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엘레나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원래라면 형님도 아버지도 이자리에 계셨을 텐데. 괜히 저 때문에 누님께까지 폐를 끼치게 됬어요..."

대륙 제일의 검사 중 한명인 아버지 아서 크라우스. 아직은 어리지만 후계자로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뛰어난 형. 데미안. 그런 둘 밑에서 자란 알폰스는 과연 자신감이 넘칠 수 있을까.

알폰스가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엘레나가 겪어왔던 미래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폰스의 능력이 부족한 자신감을 채워주기에는 주변인들의 능력이 너무나도 뛰어났다. 더군다나 데미안은 크로멜 가의 라인하르트와 더불어 대륙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되어 버리니 그 간극은 더욱 멀어져만 갔다.

엘레나가 알고 있는 미래의 알폰스도 그러한데 지금 이 미숙한 아이는 더 했으면 더 했지 그보다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엘레나는 알폰스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 대신 알폰스에게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도련님은 데미안에게 서운한게 있나요?"

"네? 아니요! 형님께 서운한게 있..."

"그렇다면 왜 오늘 이실리아관에 있을 때 데미안에게 대답하지 못했나요?"

"저는..."

다시 말을 흐리려는 알폰스에게 엘레나는 말했다.

"알폰스,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서로 이해 할 수 없어요. 대화란 다른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에요. 언제까지고 가만히 상대가 먼저 알아주기를 기다리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끝나 버리고 말거에요."

말을 하지 않으면 다른 이는 모른다. 그것이 엘레나가 이전의 삶을 통해 절실히 깨달은 것 중 하나였다. 알폰스는 가지고 있는 자신감이 없다. 그렇기에 형에게, 아버지에게 바라는 것이 있음에도 그것을 쉽사리 말하지 못한다.

엘레나의 말이 알폰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는 모른다. 다만 지금 알폰스가 한가지 결심을 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엘레나의 따스한 목소리가 알폰스의 귀에 들려온다.

"도련님. 서운한것이 있으면 마음에 쌓아두고만 있지 말아요. 도련님은 아직 어리니 응석부리고 싶으면 응석부리면 되요. 데미안이 자신의 동생의 응석하나 받아주지 못할 사람인가요? 그렇다면 실망인데..."

"아, 아니요! 형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제가 말을 하지 않아서...그래서 몰랐기에 그랬던 거에요."

기본적으로 알폰스 크라우스는 선인(善人)이다.

아직 어리지만 생각이 깊은 알폰스가 그에게 말을 하지 못한 이유는 단지 자신감이 없어서 만이 아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형에게 굳이 자신에 의한 짐을 더해주기 싫어했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지 않고 혼자만 품에 안고 가는 것이 알폰스에게도 데미안에게도 좋은 일일 리 없다.

실망할거라는 말에 곧바로 부정하는 알폰스. 엘레나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알폰스의 말에 긍정했다.

"물론 알고 있어요. 단것도 못 먹는 주제에 시종들에게 받은 캬라멜을 버리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일리 없잖아요. 그러니 알폰스, 형을 믿고 그에게 말해줘요."

이야기를 끝낸 엘레나가 스푼으로 앞에 있는 스프를 한숟갈 떠서 입에 넣는다. 약간 식은 스프의 미지근한 온도는 먹기 적당한 상태로 변해 있었다.

"너무 식기 전에 그만 먹도록 할까요?"

엘레나의 말에 알폰스가 웃으며 답했다.

"네."

식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

기쁘다.

오늘 있었던 알폰스와 데미안의 일은 단순히 형제간의 갈등을 넘어서 자신에게 의미가 깊은 일이었다. 이전의 삶에서 '그'가 데미안으로 있을 때 파혼으로 인해 비어버린 1년의 시간에 새로운 이야기가 들어섰다는 것이었으니까.

파혼 후 자신이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1년후 입학할 아카데미에서의 일이 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파혼도 하지 않았고 천천히 그의 삶에 녹아들어가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지 못했던 그의 대한 일들을 곁에서 알아 간다는 것이 행복하다. 그가 아르웬 크라우스를 어떻게 생각했고 아버지, 동생과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자신이 그의 옆에서 함께 겪어가고 있다.

그는 알고 있을까? 그가 알고 있는 미래와 운명이라는 것은 이미 자신의 존재로 인해 백지나 다름 없어 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있을 미래에 불행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오늘 그랬던 것 처럼 내가 그렇게 만들것이다.

"흠흠흠~"

콧노래를 부르며 그의 방을 향해 걸어간다.

손에는 다과와 아직 저녁을 먹지 못한 그를 위한 식사가 들려있었다. 원래라면 시종이 전해주어야 했을 것이었지만 그와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에 내가 대신하여 들고 가고 있다. 아직 그의 방에 가본적이 없었기에 헤일리가 내가 왜 그 위치를 알고 있는지 궁금해 했지만 그것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단지 식사를 전해주러 가는 것 뿐이지만 마치 꼭 한밤 중에 밀회를 위해 나온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조금 들뜨는 것은 사실이었다.

똑똑-

"들어오게."

방문을 두드리자 곧바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을 시종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럼 뭐 어떤가. 어쩌면 갑자기 들어온 자신의 모습에 그가 깜짝 놀라하는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감에 나는 힘껏 문을 열었다.

"오늘 저녁은 고기 스튜인가? 문 너머로 냄새가 풍겨오더군. 그런데 방금 와서 미안하지만 자네 붕대랑 약 좀 가져와.....엘레나? 어째서 엘레나가 여기를?? 아니, 잠깐만! 일단 나가 주..."

"팔..."

그의 당황하는 얼굴은 확실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오른팔과 함께 말이다.

< 17화 > 동생은 누나가 필요합니다. (5)

"따끔하네...."

나는 핏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오른팔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날을 세우지 않은 가검을 들고 하는 대련이라 할지라도 그 검을 들고 있는 이들이 나뭇가지로 고목을 베어버리는 실력자들이었으니 자잘한 상처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 경우가 달랐다.

흘러 넘치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검을 휘두르다 보니 원래의 실력은 발휘 되지 않고 기술이 아닌 육체 본연의 힘으로만 휘두르는 검이 되었다.

하지만 이 대련의 목적은 애초에 기술의 향상을 위한 것에 있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들을 모조리 밖으로 내보내는 것.

단지 그것 하나만을 생각하고 하였기에 검술의 완성도는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아버지도 알고 계셨기에 평소라면 호통치실 엉망인 검로(劍路)들을 묵묵히 받아 주셨다.

속을 곪아내고 있던 감정들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계속해서 가슴을 무겁게 만들고 있는 돌을 내려 놓은 것 같았다.

만약 혼자서 검을 휘두르며 이 감정을 풀어내고자 했다면 절대 지금과 같은 후련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속에 있는 응어리를 풀어낼 때 누군가 그것을 들어 주었으면 한다.

혼자서 외쳐대는 것은 스스로를 그 감정의 골짜기에 떨어뜨릴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어주지 못한다.

기교라고는 하나도 없는 투박한 검은 검의 정점에 오른 검사의 간단한 손놀림 만으로도 튕겨져 나간다.

그럼에도 나는 검에 감정을 담아 다시 한번 휘둘렀다.

그렇게 몇번을 반복하자 결국 내 손에 들린 검은 아버지의 몸에 배어있는 예리한 검기(劍技)를 버티지 못하고 부러져 버렸다.

부러진 검조각이 오른팔을 스치며 땅에 박힌다.

검조각이 스쳐지나간 자리에 얇은 혈선이 그려지며 핏물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프기는 커녕 오히려 개운할 따름이다.

부러진 검.

그리고 자신의 팔에서 흘러나오는 피.

이 두가지를 보자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검을 놓아버린 나의 모습에 아버지의 온정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화는 풀렸느냐?"

"네..."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짧게 생각했어. 너도 알폰스도 나이에 맞지 않게 의젓하다 생각해 신경을 써주지 못한 내 잘못이야. 내가 먼저 너희에게 다가갔어야 했는데. 미숙한 아버지라 미안하구나."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나 또한 알폰스에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우리 부자가 좀 서로 간의 대화가 없는 편이기는 하죠."

분명 처음에는 지금과 같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계실 때만 해도 무언가 문제가 있으면 이리 검을 부딪치며 투닥거리기보다는 대화로 해결을 많이 했으니.

우리 둘 간의 대화가 줄어든 것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의 이야기였다. 언제나 가족 간의 대화는 어머니께서 주도하셨으니 말이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나는 별다른 말썽 없이 커갔고 알폰스 또한 다른 어린아이들과는 달리 조용하고 착한 아이로 자랐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걸지도 모르겠다.

그 거리가 가까웠기에 서로를 믿는다는 생각 하에 방치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대화를 해보려고요. 대련 감사합니다. 아버지."

머리를 아프게 했던 감정들을 모조리 뱉어내니 이제 자신의 대한 혐오감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동생에게 더 나은 형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연무장을 나온 나는 곧장 방으로 돌아와 옷장 옆에 놓여진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아까전 까지만 하여도 굳어있던 얼굴은 펴져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있었다. 다만 새하얗던 흰색 소매는 팔뚝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니 하늘은 어느세 어두워져 달과 별빛만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이면 켄도 마리아도 방으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다른 시종들도 잘 준비를 하고 있을테니 아무래도 내가 직접 처리를 해야겠다.

"으아..귀찮다...붕대나 상처약을 내가 어디다 두었지."

고위 귀족가 도련님으로 빙의를 하고 난 후 생겨버린 고질병이다.

몇년간 시종들이 왠만한 일들을 대신해 주니 원래라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스스로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시종들을 불러 해결할 생각이 먼저 들어 버린다.

고작 5년 밖에 되지 않은 빙의가 다섯배나 되는 소시민으로서의 25년치 삶을 눌러버리다니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외투를 벗고는 피가 나고 있는 소매를 걷어낸 후 이리저리 방을 둘러대며 의약품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붕대와 상처약.

잘 생각해 보니 내 방에 그런게 있을리 없었다.

'아, 피난다.'

'으아아아!! 도련니이임!!! 당장 포션이랑 소독하게 성수도 가져와!!'

'아니, 이거 그냥 종이에 베인거...'

'그것도 덧나면 큰일나요!!'

자잘한 상처 하나만 나도 주위에 있는 이들이 온갖 호들갑을 떨어대며 움직이는 탓에 굳이 약을 구비해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와의 대련을 제외하면 그리 자주 다치는 편도 아니었고. 그리고 언제나 시종들을 부를 방법도 있었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을 가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내 방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은색 종.

이 종을 치면 어떤 시간대에 불구하고 시종들을 부를 수 있지만 지금은 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괜히 성이 부산스러워 지면 십중팔구 엘레나에게 까지 소식이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아마 그녀라면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내게 달려올지도 모른다.

자잘한 상처에 불과하기는 하나 굳이 그녀에게 내가 다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밖으로 나가 포션을 찾아내는 수 밖에 없는 건가. 포션이나 그런 물품들은 기사단에서 훈련할 때 마다 쓰이는 물건이기도 하니 어느 연무장이나 근처 창고 하나만 뒤져도 나올것이다.

"젠장. 그러고 보니 나 아까까지 연무장에 있었지. 그냥 그 때 포션 하나 집어 먹을걸 그냥 여기로 와가지고...."

짐 하나 덜어냈다는 생각에 아무생각 없이 방으로 돌아온게 실수였다. 대체 어떤 바보가 지 다친것도 잊어버리냐.

그렇게 방을 나서려고 할 때 쯤 문 너머로 어떤 냄새가 풍겨왔다. 그 냄새가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내가 평소에 즐겨먹는 고기 스튜의 냄새였으니까. 아무래도 오늘 있을 저녁 식사에 참가하지 못했으니 밥을 먹지 못한 나를 위해 누군가 내 방에 식사를 가져오는 것 같다.

들려오는 발 걸음 소리가 익숙하지 않은 걸 보니 켄이나 마리아는 아닌 모양이다. 아무래도 다른 시종들에게 미리 말을 해논 것 같다. 덕분에 큰 소동 없이 포션과 붕대를 받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똑똑-

"들어오게."

짧은 노크소리가 들리자 나는 밖에 있는 이에게 곧바로 들어오라 말했다.

"오늘 저녁은 고기 스튜인가? 문 너머로 냄새가 풍겨오더군. 그런데 방금 와서 미안하지만 자네 붕대랑 약 좀 가져와....."

우선 상처를 보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자연스래 말을 걸어보았지만 막상 방에 들어온 이의 얼굴을 보자 당황하게 되는 것은 나였다.

시종이라 생각했던 이는 내가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엘레나였다.

"엘레나? 어째서 엘레나가 여기를?? 아니, 잠깐만! 일단 나가 주..."

"팔..."

내 팔의 상처를 보며 작게 읊조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오늘 아침 그녀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단지 약혼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해보자고 말했을 뿐인데 울어버리는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런 그녀가 내 팔의 상처를 보면 어찌 반응을 할지 몰라 숨기려던 것이었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 그리 쉽게 넘어가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왜, 왜 이렇게 다치신 건가요? 설마 아버님께서..? 아버님 그때 식사 자리에서의 말은 그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에, 엘레나? 이건 그, 제가 실수 해서 그런 거니까. 그만! 그만 진정하세요."

엘레나는 내 상처를 보고 흥분했는지 팔에서 흘러 나오는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면서 계속 해서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포션을 가져오겠다며 방을 나가버렸다.

"아니, 우리집에 포션이 어디있는 줄 알고..."

"데미안! 찾았어요!!"

"네??"

놀랍게도 엘레나는 내 방을 나간지 몇분 지나지 않아 포션을 가져왔다. 개인적으로 챙겨온 것인가 했지만 포션의 병에 새겨져 있는 문양은 이곳 사르함에서 우리 크라우스와 전속 계약을 맺은 공방의 문장이었기에 더더욱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 포션을 가져온 엘레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 상처에 포션을 바르고 있었다.

붉은색의 포션이 상처 부위에 닿자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멎기 시작했다. 이곳이 아무리 검과 마법의 판타지가 있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포션 한번에 상처가 완벽하게 치유되지는 않는다.

그런 것은 신들을 믿는 성직자들이 행하는 기적에 가까우며 포션은 상비약, 피로 회복제 등 복용자의 회복을 도와주는 아이템에 가깝다. 그래도 곧바로 피가 멎어버리는 것이나 자연적인 회복능력을 향상 시켜준다는 것 만으로도 굉장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혹여 상처가 덧날까 싶어 내 피를 닦아낸 손수건에 「클린(clean)」을 걸고는 정성스럽게 상처 부위에 손수건을 묶어주었다. 헌데 가까운 거리 탓일까. 그녀의 부드러운 숨결이 내 살갗에 그대로 닿아왔다.

"엘레나 저기..."

집중하고 있는 탓에 안들리는 것인지 나는 잠깐 고개를 숙여 열심히 손수건을 묶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엘레나?"

"네? 데미안 잠깐만요. 이거 생각보다 어...흐에에에에?!!"

"너무 쎄게 묶었어요."

내 물음에 고개를 든 그녀는 코앞까지 다가온 내 얼굴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쳐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지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며 당황해 하는 모습은 절로 내 입꼬리를 자극한다.

나는 엘레나가 열심히 묶고 있던 매듭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고는 그녀에게 다시 팔을 건내었다.

"이번에는 조금 살살 묶어주실래요?"

"에..아, 네."

그녀가 다시 내 팔에 매듭을 묶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풀어진 얼굴에 손길도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던 처음과는 달리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렇게 잠시후 내 팔에는 그녀의 손수건으로 된 나비가 하나 앉게 되었다.

"예쁘네요. 고마워요. 엘레나. 그런데 엘레나가 왜 제 식사를..."

"그, 그게..."

나는 그녀가 가져온 트레이 위에 올려진 것들을 보았다. 하나는 내 식사로 보이는 고기스튜와 다른 하나는 단거를 먹지 못하는 나와 맞지 않은 디저트들이었다. 내가 단것을 먹지 못하는 것은 이제 그녀도 알텐데 저게 왜 있을까.

나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레나도 내 미소의 의미를 아는지 얼굴을 더욱 붉혔다. 그런 엘레나의 부끄러워 하는 얼굴은 장난을 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나는 아무말 없이 그녀를 향해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갔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내 얼굴은 어느새 그녀의 코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다만 이번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의 얼굴이 매우 빨개졌지만 이전처럼 뒤로 도망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꼭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눈을 감자 나는 다가가는 것을 멈췄다. 대신

뾱-

"헤엣...?"

그녀의 말랑말랑해 보이는 볼을 향해 손가락을 콕 찔렀다. 역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말랑말랑하다. 알폰스의 볼따구 그 이상이야.

엘레나는 눈을 뜨고는 이게 지금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엘레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꼭 한번 만져보고 싶었어요."

엘레나는 그 말에 잠깐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제정신을 차리자

"뎨미아아아앙!!!"

하고 힘껏 내 이름을 불렀다.

< 18화 > 동생은 누나가 필요합니다. (6)

어둡다.

세상을 밝혀주던 황금빛 태양은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더 이상 이전처럼 세상을 밝혀주고 있지 않았다.

무너져 내린 일곱 마탑의 탑주들 중 살아남은 넷이 만들어낸 '희망의 빛'이 현재 이 세상을 밝혀주고 있는 유일한 빛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이이ㅡ!!

소름끼치는 괴성이 온 세상에 울려퍼진다.

세상의 어둠에 몸을 숨긴채 다가오는 이계의 마물들이 내는 소리였다. 듣기만 하여도 마음속의 공포라는 감정을 자극하게 하는 그것들의 울음소리는 많은 이들에게 있어 절망을 안겨주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마물의 불길해 보이는 붉은빛 안광 뿐이었다.

초인(超人)이라 불리우는 기사가 셋은 붙어야 승리를 생각할 수 있는 그것들이 거대한 군세를 이루며 어느 한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곳은 과거 사르함이라 불리던 곳.

크라우스라는 이름 아래에 무궁한 번영을 누리던 황금의 땅이었다. 외신들의 침공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 성벽과 부러진 성의 첨탑이 현재 이곳이 어떻게 변해 버렸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이제 이곳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 되었지만 저 괴물들은 그것과 관계 없이 저곳에 인간들이 살았었다는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은건지 흉포한 울음소리를 내며 먼지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마물들의 돌격에 이미 반쯤 부서진 성벽은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쉽게 허물어졌다.

집은 물론이고 바닥에 깔려있는 벽돌길 까지.

이전에 이곳의 주인이었던 이들이 남겼던 모든 것들이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려 사라진다.

그렇게 완벽하게 폐허로 변해버린 사르함에 남아있는 곳은 단 하나.

과거 크라우스 가문이 기거했던 부러진 첨탑의 영주성 만이 그것들에 의해 부서지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가장 맛있는 것을 나중에 먹기 위해 남겨두고 있는 것처럼 그것들은 영주성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부수고 나서야 성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개체를 필두로 마물들이 영주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한쪽 눈에 베어진 상처가 있는 대장은 잠시 성을 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꼭 사람이 웃는 것을 흉내내려는 것처럼 기괴하게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그것은 자신의 머리위에 떠 있는 검은 태양을 올려다 보았다.

검게 변해 버린 태양이 내뿜고 있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 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본능적인 혐오감을 일으키지만 이들에게 그 빛은 자신들의 신이 내리는 축복과 같았다.

그렇게 자신을 비춰주는 태양빛을 전신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은 자신의 부하에게 눈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라 명령을 내리기 위해 주둥이를 하늘 높이 치켜세웠다.

끼우우우우ㅇ....

그 어느 마물이 내었던 소리보다 크고 우렁찼지만 그 울음소리가 끝까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검게 물들어 버린 세상에 금빛 선 하나가 그어졌다.

대장의 목을 정확히 지나간 그 선은 곧 세계를 왜곡하기 시작했고 선이 지나간 모든 것들이 처음 부터 그러하였던 것 처럼 세상에 그려진 선을 경계 삼아 둘로 나뉘어졌다.

대장의 머리가 떨어진 그 자리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에 전혀 놀라지 않은듯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한 채로 여전히 남아있는 마물들의 무리를 향해 손에 들린 검 한자루를 치켜 세우고는 그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런지 일을 벌인 마물들 조차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그것들에게 공포라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파괴 밖에 모르는 그것들은 자신들을 죽이러 오는 이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 뿐이었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남자의 눈동자와 같은 색의 황금빛 오러를 담은 검은 별다른 무리 없이 마물들을 베어 넘겼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을 이리저리 주유하는 용과 같아, 마치 한마리의 용이 지상에 내려와 마물들을 씹어먹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이곳에서의 그들은 더 이상 포식자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마물의 목이 베어질 쯤 하늘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내려왔다.

그 빛을 타고 내려온 별빛을 품은 여자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그를 향해 달려갔다.

"데미안!!! 갑자기 사라지더니 이곳에는 왜...."

그녀는 자신의 발밑을 적시고 있는 피바다를 보자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시산혈해(屍山血海)

말 그대로 마물들의 시체와 피가 산과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을 부르는 그녀를 보더니 그제서야 여태껏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던 가면을 벗어던졌다.

"미안 엘레나."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만 같은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곧바로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마물들의 피와 달리 아직도 따뜻한 온기를 간직한 붉은색의 액체가 그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원래라면 이정도의 적에게 피를 흘릴 그가 아니었지만 지금 그가 서 있는 이 장소가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흔들어댔을 것이다. 사르함이 무너질 때 죽은 이들의 얼굴을 잊지 못한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흔한 위로의 말 한마디 조차 건내주지 못했다.

그가 가족을 잃어 괴로워하는 것 처럼 그들을 구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 빼낼 수 없을 만큼 깊이 박혀있었다.

"돌아가요."

그녀는 남자의 손을 잡아 이끌며 그렇게 말 할 수 밖에 없었다.

***

살면서 겪는 몇몇 상황은 이미 과거에 한번 겪어보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이 이미 현재를 한번 살고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라고 한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지금 자신에게 있어 그가 피를 흘리는 모습은 떠올리기 가장 싫었던 기억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자신이 걸어갈 미래에는 이전과 같은 절망적인 미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당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함과 죄책감을 지울 수 는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잠깐 이성을 잃었나 보다.

그저 살짝 베인 정도의 상처인데 무슨 죽을 병에 걸린 환자를 본것 마냥 흥분해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는 저기저 구석에 처박아둔 이성이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채 그대로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이후 제정신을 차리고 다음 기회를 기다려보았지만 그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저 그의 장난이었을 뿐이었다.

"뎨미아아아야안...."

"응? 왜 그래요? 엘레나?"

"뵬 그마아아안.."

자신의 원망어린 눈빛에 그제야 그는 자신의 볼을 주무르는 것을 그만 두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자신을 과거의 기억에서 건져내어준 그 미소와 손길을 자신이 싫어할리 없었다. 다만 기대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것이라 그런지 실망감이 조금 컸을 뿐이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계속 만지작 거리던 내 볼을 살짝 쓰다듬어 주고는 내가 가져온 것들을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며 나와 그가 앉을 자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리가 모두 준비되자 나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조용히 준비해온 마카롱을 입에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식사에 참가하지 못했네요. 괜히 제가 기다리게 만들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에요. 미리 켄이 알려주어서 기다리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그 덕분에 알폰스 도련님과 조금 친해질 수 있었거든요."

"알폰스..?"

알폰스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의 얼굴이 미세하기 굳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그리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알폰스의 대한 문제를 완전히 풀지 못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 저 얼굴이 자신과 알폰스가 단둘이 있었다는 것에 질투하는 것이 었다면 하는 실 없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것이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끓고 있는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그에게 물었다.

"오늘 이실리아관에서의 일 때문에 그런가요?"

"....네? 아, 네. 그렇죠. 부끄러운 일이지만 제가 얼마나 알폰스에게 부족한 형이었는지 알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좋은 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잘 감이 오지 않네요."

"그렇다면 평소처럼 하면 되지 않을까요?"

"평소처럼이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데미안. 그 모습에 숨이 턱하고 막혀온다. 나는 서둘러 준비된 홍차를 입에 넣고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솔직히 나는 그가 형으로써 못난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가문이라면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골육상쟁을 벌이기도 하는데 그에 비하면 둘의 관계는 매우 우애가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저 이 형제는 서로를 너무 아끼는 나머지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큰 것 뿐이다.

"네. 평소처럼. 알폰스 도련님은 절대 데미안을 미워하고 있지 않아요. 오히려 형을 매우 좋아하던걸요. 그러니 행동보다는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데미안.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내 말에 그는 잠시 멍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미소로 화답했다.

"시간이 부족....그런가. 조언 고마워요. 엘레나."

그의 얼굴이 풀리는 것을 보니 나 또한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마카롱 하나를 입에 넣을까 하는 순간 내 생각보다 먼저 마카롱을 내 입에 넣어주는 그의 손이 있었다.

무의식에 그만 코 앞의 마카롱을 베어물고 말았지만 그가 내게 먹여준 것이라는 것을 깨닫자 얼굴이 뜨거워져 왔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곧바로 그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는 그것이 당연한 일을 했다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래. 이제 이걸로 가슴 졸일 때는 지났지. 그만 익숙해 지도록 하자. 엘레나 에델바이스.

아무리 그의 앞에 서기만 하면 한없이 약해진다고는 하나 자신은 인류 역사상 최고(最高)의 위치에 오른 대마법사였다. 감정의 동요 따위 잠깐 정신을 집중하면 금방 잠잠히 만들 수 있다.

나는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자연스럽게 그가 들고 있는 마카롱을 갉아 먹었다. 아무래도 내가 계속 부끄러워 하니 그가 이런 장난을 즐기는 것 같다. 싫지는 않다만 언제까지고 그에게 휘둘릴 수 만은 없는 법. 나는 그가 했던것처럼 무표정을 고수하며 마카롱을 온전히 입에 넣었다.

그렇게 마카롱을 입에 넣을때 내 입술이 그의 손가락을 스쳐 지나갔다.

이리 행동하면 분명 그도 당황했을 테지. 이전의 나였다면 감히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었을 대담한 행동이었다.

나는 속으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더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내 생각과는 달리 그는 매우 만족스러웠다는 느낌의 얇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어?

< 19화 > 동생은 누나가 필요합니다. (7)

크라우스 백작가의 영주성은 오늘따라 유난히 활기가 넘쳤다.

봄의 생기는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주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성을 떠들썩하게 만들 수 는 없을 것이다.

지금 성이 이토록 분주해진 이유는 오랜만에 있는 성의 주인의 외출 때문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외출이 아닌 자신의 두아들을 데리고 함께 나들이를 간다는 소식 이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가족간의 나들이가 뭔 대수라고 그리 요란스럽게 행동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영주성의 사용인들은 지난 몇년동안 이곳에서 일한 이들로서 크라우스 백작이 안주인이 죽고 난 후 자신의 막내아들을 밖으로 보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위로 하나 있는 아들 데미안은 열여섯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릴적 부터 지나치게 의젓하였었지만 이제 일곱살이 되는 알폰스는 귀여운 외모와 더불어 데미안과 달리 딱 그 나잇대의 어린 소년의 모습 때문에 성의 사용인들의 귀여움을 듬뿍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이 알폰스를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었는데 여태껏 영주성 밖을 나가본적이 없는 알폰스의 처지를 가여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다.

크라우스 백작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가지 중요한 것은 지금 있을 나들이가 그들이 사랑하는 막내 도련님의 기념비적인 첫 바깥 구경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인지 모두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뭘 그리 자꾸 바퀴를 들여다 봐! 다른데 바쁜거 안보여?"

"야, 근데 아무리 그래도 불안하단 말이지. 이거 혹시라도 가다가 부러지면 어떡하냐."

"그거 때문에 바퀴들 아예 새로 다 갈아끼웠잖아."

"창고에 있던게 이미 삭은 거였으면? 그러고 보니 막내 도련님은 마차 타는 것이 이번이 처음 아니야? 혹시 타시다가 멀미라도 하시면 어떡해."

".....그냥 네가 내려가서 바퀴 새로 사와라. 나는 저 마차 시트를 손 보고 있을 테니."

한 두번이면 족할 마차를 계속해서 점검하고 있고 거기에 한 술 더 떠 혹여 타다가 멀미를 하시지는 않을까 싶어 기존의 마차 시트를 뜯어내고 아예 새로 깔아버리기도 하였다.

주방장은 전날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알폰스가 좋아할 음식들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나들이의 호위를 위해 차출된 기사들은 그 어느때보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 크라우스 가문의 나들이.

그 중심에는 데미안이 있었다.

***

그 날 엘레나와 대화한 이후 나는 며칠 동안 알폰스와 같이 시간을 보내려 노력해 보았다.

시간을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태껏 공부와 단련에 쏟고 있던 시간을 약간만 줄이면 될 일이었다. 솔직히 내가 그 두가지의 쏟고 있는 시간은 과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기에 내게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미래의 벌어질 일들에 대한 불안감들은 나 자신을 그리 여유롭게 만들지 않았다.

이 세상에 정해진 이야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주인공이 아닌 데미안이라는 악역을 배정받은 나로서는 그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엘레나 에델바이스의 이야기' 바깥에 있는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에 대한 불안감들은 나를 계속해서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러니 스스로 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만족하지 못하였다. 엘레나를 만나기 전까지의 내 삶은 끊임 없이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햄스터와 같았다.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그것들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하지만 원작과는 달라진 엘레나와의 관계 덕분일까. 그녀와 보냈던 하루라는 짧은 시간은 나의 많은 것을 바꾸어 주었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나를 향해 웃어줄 때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나는 갑자기 떠오른 그 생각을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사실 이유는 그리 중요치 않다. 그녀가 내 곁에 있음으로 나는 나를 옭아매고 있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었고 그 덕에 지금 동생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났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누님. 이 히아신스의 색. 꼭 누님의 눈동자 색과 같아 누님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어머. 칭찬 고마워요. 알폰스."

물론 그렇게 생겨난 시간이 온전히 나와 알폰스 만의 시간은 아니었다.

현재 엘레나는 우리 영주성에 손님으로 온 상황.

그것도 크라우스 차기 가주의 약혼자라는 신분으로 온 것이다. 아직 반지를 서로 나눈 정식 약혼은 아니지만 현재 성에서 그녀는 차기 크라우스의 안주인 신분으로 대우 받고 있었다.

당연히 약혼 관계에 있는 만큼 나는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그것은 알폰스와의 시간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번에 있던 식사 이후 둘의 관계는 많이 가까워졌는지 알폰스는 엘레나를 '누님'이라 부르며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일을 끝마치고 알폰스에게 가면 둘이서 먼저 이야기 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둘이 같이 웃으며 이야기 하는 모습에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지만 마음 쪽 한 구석에서는 동생을 빼앗긴것 같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물론 알폰스와의 거리도 이전보다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만 그래도 서운한 것은 서운한거다.

어쩔 수 없나. 그동안 내가 동생에게 신경 써주지 못한 업보라고 생각하자.

우리는 지금 저번에 나와 엘레나가 걸었던 이실리아관의 화원에 있다. 백작가의 영주성에는 여러 화원이 있지만 히아신스가 심어져 있는 곳은 이실리아관 밖에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알폰스는 이실리아관에서 내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해했다. 어머니의 일기장에 적혀 있는 일들을 하나 둘 씩 알폰스에게 말해줄 때면 나 또한 그 때의 기억에 잠기게 된다.

이전과 달리 나는 추억에 매몰되지 않았다.

단지 그때의 아름다웠던 나날을 그 자리에 없었던 동생과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더는 어머니와의 추억이 아닌 나, 데미안의 이야기를 하게 되고 나 또한 내가 신경쓰지 못했던 알폰스의 이야기를 듣게되었다.

"저는 어머니에 대해서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있었어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가족은 형님과 아버지 뿐이니까."

"그럼 이실리아관에는..."

"제가 이실리아관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간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어요. 그냥 언제나 형님과 아버지께서 저를 통해 보고 있는 누군가가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이 대화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내 동생은 내 생각보다 상당히 어른스럽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게 일곱살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인지 의심될 정도다. 사실 알폰스도 나 처럼 빙의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되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쓰신 일기장을 보고, 또 이렇게 형님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저도.....만약 어머니께서 저를 보신다면 어떤 말을 하실지 궁금해져요. 저도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어보고 형님과 아버지께서 기억하고 있는 그 곳에 같이 있고 싶어요."

어쩌면 알폰스는 나와의 대화를 통해 이전보다 더 어머니의 대한 그리움을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폰스는 내게 괜찮다고 말했다.

"그래도 저는 괜찮아요. 저에게는 저를 이렇게 생각해주시는 형님이 있고 세상에서 가장 강하신 아버지도, 그리고 예쁘고 상냥하신 누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형님은 저를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행복한 아이에요."

비어진 어머니의 자리는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공백을 채울 추억은 앞으로 쌓아가면 된다. 다만 내가 걱정이 되는 것은 원래 악역이었던 나의 존재가 앞으로의 미래의, 내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른 다는 것이었다.

원작에서의 크라우스 가문은 데미안을 제외한다면 선역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행복했는지는 나는 모른다. 그들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소설 속 조연이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내가 데미안이고, 내가 크라우스의 차기 가주이자 그들의 가족이다.

나는 나의 가족이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것을 떠올리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미래에 대한 불안감들이 다시금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감고 있던 눈을 떠 엘레나를 찾았다.

히아신스의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알폰스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언제 그랬냐는듯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그녀와의 파혼을 생각하던 내가 이런 꼴이 되다니 참으로 웃긴 일이다. 분명 언제가는 멀어질 것을 알고 있는데도 지금 나는 왜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것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그녀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기에 그녀에게 의존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보여주었던 엘레나 에델바이스 그녀의 모습에 이끌리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 두가지 전부 다 맞을지도 모른다.

내가 다가가자 고개를 돌리며 알폰스와 대화할 때와는 또 다른 얼굴을 하는 엘레나.

나는 그런 그녀에게 똑같이 웃어주며 말했다.

"엘레나. 지난번에 함께 피크닉을 가자고 했던거 기억하십니까."

이 불확실한 감정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 내가 그녀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졌다는 것은 틀림 없었다.

< 20화 > 막간

어제 엘레나는 데미안과 함께 이전에 약속했었던 나들이를 나갔었다.

이전에 데미안에게 꽃을 좋아한다고 말해서 그런지 데미안이 고른 장소는 데이지가 잔뜩 피어난 한 언덕이었다. 그곳은 데이지 뿐만 아니라 넓고 탁 트여있는 풍경 덕에 사르함에서도 영주성에 있는 화원에 꿀리지 않는다고 알려진 명소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엘레나가 그 언덕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 본 풍경은 가슴을 뻥 뚫어주는 것 같은 상쾌함을 가져다 주었었다. 그 아래로 피어난 데이지의 하얀 꽃잎들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거리는 모습은 이실리아관의 있는 화원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전에 약속했던 디저트도 매트도 모두 준비해둔 데미안이었다.

그렇게 단 둘이 그 장소에 오붓이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면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이 완성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있던것은 엘레나와 데미안 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

"음? 아버지 여기에 와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럼 여기가 내 영지인데 한번도 안 와 봤겠냐. 물론 조금 오래되기는 했지만 말이야. 생각해보면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처음 마음을 전한 곳도 이곳이었지."

"와! 정말이에요?"

"...의외네요. 전 당연히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략혼인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어머니께서 아버지랑 결혼하실 이유가 없는데 말이죠."

"나한테는 분명 아들이 두놈이 있었는데 내 착각이었던건가. 어째 알폰스 저 아이만 내 아들인 것 같구나."

데미안의 아버지 아서 크라우스 백작과 동생 알폰스 크라우스.

그 둘 또한 이 나들이에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던 걸까라고 엘레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데미안의 이런 행동은 자신이 지난번에 말했던 말 때문이라는 결과 밖에 나오지 않았다.

가족과의 시간.

분명 엘레나는 그것이 데미안에게 부족하다고 말했었다. 그 말을 들은 이후의 데미안은 이전 보다 더 알폰스와 많은 시간을 보내었고 엘레나가 보기에도 요즘 그 둘의 사이는 이전보다 확실히 가까워 진 것이 느껴졌다.

이전의 삶에서도 알폰스와 데미안의 우애가 두터웠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둘의 관계에 미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거리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알폰스와 데미안의 관계에도 변화가 있을 수 는 있겠지만 적어도 이전과 같은 관계를 반복하는 것을 막았다는 사실은 엘레나에게 있어 큰 성취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이런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변화는 지금 이 삶이 엘레나가 겪었던 그 어떠한 시간선과도 동일한 길을 걷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변화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알폰스와 데미안의 관계 뿐만 아니라, 엘레나 에델바이스와 데미안 크라우스의 사이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엘레나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처음 만났었던 그 때와는 달리, 이전에는 보이지 않는 벽을 치며 다가오지를 않던 데미안이 오히려 스스로 조금씩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작은 변화 하나가 그녀가 이번 회귀를 통해 느낄수 있었던 가장 큰 기쁨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시아버지와 도련님과 함께하는 나들이를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만.

데미안이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엘레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가족을 잃었을 때, 그녀가 가족을 잃었을 때 서로 그 아픔을 나누었기에 그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속이 좁지는 않다.

그래도, 그래도 약혼자와 한 약속인데...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하지 말자고 스스로 몇번이나 되내였던 엘레나였지만 그래도 그때의 분위기와 약속을 생각하면 당연히 단 둘이 가자고 말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주위에 히아신스 향기가 가득하던 그곳에서 그가 말했다.

'엘레나. 지난번에 함께 피크닉을 가자고 했던거 기억하십니까.'

'아, 네! 물론이죠.'

'좋은 장소 한곳이 떠올라서 그런데...'

'좋아요!'

데미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좋다며 답을 내놓은 엘레나. 그 모습에 데미안은 고맙다며 작게 웃으며 말했고 그것을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알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알폰스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 웃어보았지만 데미안의 눈을 속일 수 는 없었다.

'알폰스.'

'아, 형님. 그, 두분이서 조심히 다녀오세..'

'너도 같이가자.'

'네?' '엣.'

'물론 아버지도. 생각해보니까 알폰스 너는 성 밖을 나가본적이 없었지. 이참에 가족 모두가 다같이 나들이를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어떠니?'

'조, 좋아요!! 자, 잠깐!! 형님 저 바로 준비하러 갈게요!!'

'어? 알폰스? 아직 아버지께 이야기 안했....가버렸네. 그럼 저도 아버지께 이야기하러 가야겠네요. 엘레나. 방으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네에.....'

데미안의 사소한 행동들이 얼마나 엘레나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지는 엘레나 본인도 잘 알고 있다만 그래도 이 때 데미안의 말에 머릿속의 든 생각들을 다시 떠올려 보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어쩌면 그때 피크닉을 가자고 약속을 하던 때에도 데미안은 데이트 신청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나들이를 나가자고 한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때 약속이라 말하면서 알폰스와 크라우스 백작을 불렀을리 없으니 말이다.

아직 데미안과 함께 있던 시간도 얼마되지 않았으니 데미안이 엘레나보다 자신의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는 하다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 서운한 마음을 완전히 지워낼 수 는 없었다.

약혼녀인데 동생한테 밀린다는 것의 패배감이란, 그래도 이전에는 애초에 저울에 올려질 기회도 없던걸 생각하면 이걸 좋아해야하는 것인지 말아야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엘레나였다.

"아가씨. 언제까지 누워계실 거에요."

"헤일리....나 오늘 여기서 꼼짝도 안할거야. 오늘은 그냥 이불 속에서 살래."

초월을 경험한 적이 있는 엘레나라고는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크라우스 가문의 피크닉을 다녀온 그 다음날 엘레나는 실망감, 기쁨, 부끄러움 등 여러 감정의 영향으로 인해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녀의 전속 하녀인 헤일리는 삐진 어린애 처럼 이불속에서 꿈틀 거리는 모습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계속해서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려 하였다.

물론 엘레나는 마음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다만 헤일리가 방을 나가지 않고 자신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이불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헤일리. 왜 짐을 정리하고 있는 거야?"

"아, 이거요? 오늘 아가씨 방을 옮긴다고 해서 말이죠. 여기는 손님방이잖아요. 아직 정식으로 약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가주님께서 아가씨와 데미안 공자님의 관계를 보고 그냥 손님방에서 지내게 할 수 는 없었던 모양이에요."

"어? 그러면 나는 이제 어느 방에서 지내게 되는 거지?"

"그건..."

똑똑-

헤일리가 말을 꺼내기 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헤일리는 노크 소리에 일어나실 자신의 주인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엘레나는 정말 오늘 하루 종일 침대에 있을 것 처럼 이불을 푹 덮은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헤일리는 한숨을 쉬며 방문을 살짝 열었고 그 자그만한 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제는 익숙해진 얼굴인 데미안의 전속 집사 켄이었다.

"켄 아저씨. 안녕하세요."

"헤일리. 아가씨는?"

"아가씨께서는...음, 어제 있었던 피크닉이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자리에서 일어나시지 못하시네요."

"이런...도련님께서 아가씨를 찾으시던데. 아마 오늘 방을 옮기는 것 때문에 같이 시내에 나가시려고 하셨던 모양이야. 안타깝구만. 도련님께는 내가 잘 말해두겠ㄴ.."

"켄. 어디로 가면 되나요?"

갑자기 활짝 열리는 문.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나온 것은 엘레나였다.

순백색 머리카락은 방금 말린 것 처럼 뽀송뽀송 했고 옷차림 또한 미리 준비라도 해두었던 것 처럼 단정하기 그지 없었다. 방금전까지 침대에 누워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헤일리는 그런 엘레나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켄은 그저 갑자기 나타난 엘레나의 모습에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

헤일리는 알고 있다. 지금 저건 엘레나가 마법으로 이루어낸 일이라는 것을.

여태까지 쓰고 있지 않았을 뿐이지만 저 정도의 기적을 부릴 수 있는 실력이 아가씨에게 있다는 사실을 헤일리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자신이 몇시간에 걸쳐 만드는 모습을 한순간에 마법으로 해내는 모습에 헤일리는 또 다시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유가 그 때문이기를 빌었다.

***

달리고 있는 마차의 안.

어제와 똑같은 마차였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이 나와 그 단 둘 뿐이라는 점일것이다.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니, 아마 웃고 있을게 분명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우중충했던 기분이 지금 그와 단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햇빛이 들어오는 것 같다. 애써 기쁘지 않은척, 멀쩡한 척 하려고 하여도 내 얼굴은 솔직하기만 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고민이 있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요즘 고민이 있을 만한 일이 있었나? 알폰스와 관련된 문제는 어제를 끝으로 완전히 풀렸을 텐데 어째서 그는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 어제 헤어질때만 해도 그 어느때보다 활짝 웃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나의 시선을 눈치채고 나를 바라보자 얼굴빛이 더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설마 그 원인이 나인가?

그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려고 할때 먼저 입을 연것은 그였다.

"미안해요. 엘레나."

갑작스러운 그의 사과에 잠깐 사고가 정지되어버렸다. 하지만 이성을 되찾는 것은 빛보다 빨랐으며 하늘에 닿은 나의 지성은 그가 어째서 나에게 사과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원인을 곧바로 찾아내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도 나오는 뻔한 이유였다.

"어제 일 때문에 많이 피곤해 하셨다고 켄에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의 약속을 이용해 저희 가족일에 끌어들이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그럼 그렇지.

그도 내가 그와 단둘이 피크닉을 가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알폰스와 크라우스 백작과 같이 갔던 것은 순전히 그들이 그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알폰스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그날 바로 아버지에게 달려갔던 것 처럼 그는 언제나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일을 우선시 하니 말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으며 그에게 답했다.

"아니에요. 어제는 저도 즐거웠는걸요."

즐겁기는 했다. 돌아오고나서 계속 꽁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약 그가 나를 두고 알폰스와 크라우스 백작하고만 피크닉을 떠났더라면 많이 섭섭해 했을 것이다.

마음이라는게 참 갈대 같다. 이러면 또 저쪽으로 흔들리고 저러면 또 이쪽으로 흔들리게 된다.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나? 이전의 나는 좀 더 똑 부러지고 흔들림 없는 아이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왜 이럴까.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그 기분 좋은 질문을 속으로 계속 반복하였다.

여전히 잘못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보니 무언가 속에서 간질이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를 그의 바로 옆으로 옮기고는 손을 들어 그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그는 내 이름을 불렀고

"에에레냐아?"

"풉."

나는 늘어지는 그의 발음을 듣고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지금 이게 그가 나를 놀릴때 느끼던 감정인가. 왜 그가 이런 행동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볼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었다.

"데미안. 저는 정말 괜찮아요. 저 또한 당신의 가족이 아닌가요."

영주성에서 지내면서 모두에게 한번씩은 했었던 말. 하지만 정작 그에게는 이리 말해본적이 없었다.

나의 말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전처럼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맞아요. 엘레나. 당신은 제 약혼자 입니다."

아직 제대로 된 식도, 반지도 나누지 않았지만 그의 이런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

마차의 도착지는 사르함의 중심지 한가운데 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모이는 것이 느껴진다. 과거에 수 없이 많이 받아본 사람들의 시선이었지만 거기에 담겨있는 감정이, 곁에 있는 이가 있으니 이전과는 조금 색다르게 느껴졌다.

나와 그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도심을 누비고 다녔다.

길가에서 파는 군것질거리도 사서 먹어보고 떠돌이 음악가의 거리 공연을 감상하기도 하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총 세번의 삶을 사는 동안 나는 이곳 사르함의 거리를 제대로 즐겨본적이 한번 도 없었다.

첫번째는 데미안에 의해 1년 내내 영주성에서 지내야만 했었고 두번째는 나 스스로 이곳을 떠났었다. 다시 사르함에 왔을 때의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 가깝거나 이미 치열한 전장으로 변해버린 후 였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리의 사람들의 미소는 영원할 것이고 지금 나와 거리를 걷고 있는 그와의 시간 또한 변치 않을 것이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우리는 어느 순간 부터 한 공방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으로 자신을 인도한 것은 다름 아닌 그였다.

"데미안 여기는?"

"아, 이제 방을 옮기게 되셨으니 새로운 가구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엘레나의 취향에 맞추어 고르시면 됩니다."

"네?"

"크라우스에는 한가지 전통이 있습니다. 안주인을 떠나보낸 이실리아관의 남은 물건들은 몇가지를 제외하고 정리를 합니다. 원래라면 어머니께서 떠나셨을 때 정리를 시작했어야 했지만 저 때문에 아버지께서 건들이시지 않고 계셨습니다만."

"그런데 왜 제가 가구를....?"

"헤일리에게 못 들으셨습니까. 이제부터 그곳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

한순간에 영주성에 딸려있는 별채의 주인이 되어버렸다.

아니, 언젠가는 될 생각이었고 그곳에서 그와 함께 사는 상상도 여러번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주인이 되었다고 들으니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분명 기쁘다는 감정을 느끼고는 있지만 감정이 상황의 변화를 따라잡지를 못하고 있다.

"엘레나. 당신이 그러셨지요. 우리는 '가족' 이라고. 어젯밤 아버지와 이야기는 이미 끝내두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희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까지 앞으로 1년 정도 남았으니 옷 또한 골라두는 것이 좋겠군요."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가구를 고르고 난 뒤에는 곧바로 의복점으로 가도록 하죠."

아이러니 하게도 복잡했던 머리를 정리하게 만들어준 것은 그의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모두 내가 원하던 일들 아닌가?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공방에 발을 들이려는 순간 머리 속에 번개가 치며 그동안 내가 한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락...안했어요."

"네?"

"아버지께 연락하는 거 잊고 있었어요..."

그동안 그와 다시 만났다는 것에 심취해 이곳에 있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이틀의 한번은 연락해야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야 자신은 저번 삶에서 약혼은 하지 않고 그대로 공작저로 돌아왔으니 첫번째 삶에서 들었던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이것도 첫번째 삶에서 아카데미에 가기전 데미안이 자신을 공작저로 보내지 않으려 영주성에서 감시했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으면 잊어버릴 뻔한 기억이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영주성으로 돌아온 그날 밤.

크라우스 백작의 통신구를 통해 공작저로 돌아오라고 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21화 > 팔불출 (1)

돌을 깎아 만들어진 원탁.

그와 마찬가지로 원탁을 만들때 같이 깎아 만든 것 같은 원탁을 둘러싼 일곱 의자에는 지금 현재 대륙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대마법사들이 앉아 있었다.

이곳에 올 수 있는 이들은 대륙에 일곱개 밖에 없는 탑의 주인들 뿐. 과거 일곱 마탑이 세워지면서 만들어진 '탑주 회의'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워낙 중요한 장소인지라 이곳으로 오기 위해서는 탑주가 되어야 알게되는 각 마탑에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이동진을 이용해야 했고 이곳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는 오직 이 장소에 있는 탑주들만이 알고 있다.

그 장소에 대한 언급 또한 맹세로 인해 언급이 불가능하여 그야말로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완전히 격리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장소에 마법계의 거물들이 모여 있다면 당연히 무슨 거대하고 중대한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물론 과거에 이 회의를 통해 마법계의 역사를 새로 쓰게만들었던 사건들 또한 여러 있었지만 애초에 이런 장소가 만들어진 이유는 대륙 각지에 떨어져 있는 일곱 마탑의 화합과 교류였기에 그 후예들은 선조들의 뜻을 곡해하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마법사들에게 있어 지고한 경지인 대마법사라는 위치에 오른 이들이었기에 대기에 있는 마나가 무거워지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소의 분위기까지 무거웠던 것은 아니다.

모든 탑주들이 자리에 앉자 하늘색 눈을 가진 청년이 주변을 한번 훑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선언했다.

"지금부터 7836회 마탑 월례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현재 탑주들 중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알려진 대마법사. 풍천의 탑주 테오도르 아이올로스가 회의의 진행을 맡았다.

기본적으로 상위 위계에 오를 수록 노화가 느려지는 마법사들의 특성상 그의 저 젊은 청년의 모습은 그가 다른 이들과는 달리 '벽'을 넘어섰다는 증거였다.

테오도르의 선언을 끝으로 탑주들은 각자 준비해온 자료들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이 모임의 목적이 마탑간의 친목을 위해서 라고는 하나 그들 또한 마법사라는 이름을 지닌 마법을 연구하는 학자였기에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닐 지라도 마법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한 탐구심은 그 어떤 마법사들 보다 컸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 '친목'이라는 의미는 서로간의 지식 교류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으니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첫번째로 발표할 기회를 가져간 것은 적염의 탑주였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있는 모두가 볼 수 있게 자료를 공중에 띄운 후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저희 연구팀이 화정석 정제식 계량을 시도한 결과 기존보다 1.37초 정도 빠른 속도와 정제 과정에서 생기는 불순물들을 완전히 제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조금만 더 연구해보면 정제속도를 더 줄일 수 있을 것도 같더군요."

"오오. 정제식의 계량이라니 그거 꽤 오랫동안 변동이 없던 것 아닙니까. 설마 이번년도 회비는 적염이 가져가는 것 입니까?"

가만히 앉아 그녀가 띄운 자료를 보고 있던 황금의 탑주가 박수를 치며 칭찬을 해대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이 귀를 쫑긋 세운 것은 그녀의 말이 아닌 황금의 탑주가 말한 회비에 대해서였다.

회비.

정확히 언제부터 걷기 시작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초대 탑주회의 때는 이런걸 걷은 적이 없다고 한다. 아마도 후대에 생긴 것일 텐데, 그 기원이 어쨌든 간에 이 회비라는 것은 나름대로 탑주회의 의미를 더해주는 중요한 장치가 되어 버렸다.

월 마다 열리는 이 탑주회의의 시작은 각 탑으로 부터 회비를 걷는 것으로 시작된다. 딱히 이들이 이곳에서 돈이 될 만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매월마다 걷힌 회비는 연말에 있을 '올해 최고의 연구'를 뽑는 자리의 상금으로 사용되게 된다.

매해 마다 각 마탑은 마법이라는 신비의 기술을 통해 엄청난 돈을 쓸어담고 있지만 회비로 내는 돈은 마탑의 재산이 아닌 탑주의 개인적인 사비에서 지출 되는 만큼 그 의미가 더욱 깊다. 탑주로서의 체면도 있어 매월마다 내는 회비 또한 그리 적은 금액이라고 할 수 없는 정도다.

대부분의 탑주들이 돈에 대한 욕망보다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탐구심이 더 깊은 쪽 이었지만 그렇다고 돈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야 돈이 있어야 새로운 연구를 시작 할 수 있고 마탑을 존속 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월마다 일곱명의 탑주한테서 걷어지는 어마어마한 돈들. 그런데 그런 돈들이 무려 열두번이나 걸쳐지다니. 그렇게 모인 금액은 제국의 황제가 보아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이렇게 자극하는 것은 다름아닌 승부욕이었다.

각기 서로 다른 분야를 중점으로 발전해 나간 일곱 마탑.

위계라는 절대적인 개념이 있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것은 마법사로서 개인의 평가가 아닌 자신이 주인이 되어 이끌고 있는 탑에 대한 평가다.

탑주들이 발표하는 자료들은 모두 그들이 손을 쓰지 않고 탑 내에서 가르침을 받은 마법사들이 독자적으로 연구해낸 결과물들이다. 이것은 탑주의 능력이 아닌 그들이 주인으로 있는 탑의 역량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시가 된다.

그렇기에 승부욕이 불 탈 수 밖에 없다.

단순히 가장 뛰어난 마법사를 뽑으라 하면 지금 회의의 의장을 맡고 있는 테오도르 아이올로스를 넘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가장 뛰어난 마탑을 뽑으라고 한다면?

물론 위대한 마법사를 만들어 낸 것도 중요한 요소이겠지만 역대 탑주들 중에서 테오도르 정도의 대마법사가 없었던 마탑은 이 세상에 없다. 지금 여기에 있는 탑주들만 하더라도 천재 중 천재라 불리우는 이들이며 시간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와 같은 위치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재능 보다 자신들이 이끌고 있는 마탑이 내놓는 성과로 승부하기로 한 것이다.

탑주의 자리에 오른 이들의 승부욕을 정상인의 범주에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고위 위계에 오른 대마법사들로서 누구보다 이성적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누구보다 어린애 답고 유치 할 수도 있는 이들이다.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 내가 준비해온 자료를 보라고."

"어차피 지난번과 똑같은 해양 생물들 생태지도 아닙니까."

"아니지!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데.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글루카만 제도에서 잡히는 킹스타 크랩의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고!!! 여기에는 아주 복잡한 이유가 있는데..."

"어차피 결론은 그 킹스타 크랩 못 먹게 된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걸 여기서 왜 말해요. 당신네 마탑이 있는 게르마니아 해상연합 재상한테나 말하지. 그것보다 이번에 제 제자 중 한명이 만들어 낸 개량 골렘 도식도인데 말입니다..."

"킹스타 크랩은 중대사항이다!"

"아 쫌."

이어지는 청해의 해양 생물 생태지도. 황금의 새로운 골렘 등등 여러가지 아이템들이 나왔지만 아직 연초라서 그런지 그나마 유의미한것은 적염에서 말한 화정석 개량 정제식 정도가 끝이었다.

이제 발표는 돌고돌아 아직 까지 발표를 하지 않은 탑주, 여명의 차례가 왔다.

여명의 탑주. 요하임 에델바이스.

다섯가지 속성을 모두 사용하는 엘리멘탈 마스터로 알려진 그는 언제나 탑주회의에서 혁신적이지는 않아도 괜찮은 아이템 정도는 꾸준히 가져왔기에 몇몇 탑주들은 그의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놓여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올때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다.

거기에 이상함을 느낀 탑주들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니 확실히 그는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의장인 테오도르도 요하임이 여태 탑주회의에 참가하면서 이토록 고민이 있어 보이는 얼굴을 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걱정을 담아 물었다.

"여명. 자네 무슨 일이 있는겐가. 안색이 좋지 않구만."

"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좀."

"저 친구가 좀 팔불출이지 않습니까. 딸아이가 사춘기라도 왔나보죠."

"그런거 아니다."

황혼의 깐족거리는 말에 요하임이 차갑게 대답했다.

'딸 문제구만.'

요하임은 부정했지만 방금전 그 반응을 통해 탑주들은 지금 저런 요하임의 반응이 그의 딸 엘레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레나를 비롯하여 탑주들의 자식들은 모두 여기에 있는 이들과 만남을 가진적이 있었다.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엘레나의 모습은 작고 여린 내성적인 성격의 아가씨로 품에 안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귀여운 꼬마 아가씨였다.

그런 아이가 이제 사춘기가 올 나이가 되었다니 탑주들의 얼굴에 아쉬운 빛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 요하임에게 말을 건내는 이가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딸을 둔 녹음의 탑주 헤론 세피어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애들이 빨리 크는것 만큼이나 그 시기도 금방 지나갈테니까요. 짜증을 내는 것도 한 순간이랍니다."

이제는 말도 안 붙여주지만요...라고 뒷말을 덧붙이며 그 특유의 생명력 넘치는 녹빛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시들어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말을 꺼내고서는 자기가 우울해 하는 헤론의 행동에 요하임은 황당해 하며 서둘러 헤론의 오해를 바로 잡으려 했다.

"네? 아니, 사춘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닙니다. 오해 하지 마세요."

"그럼 네가 뭐 때문에 그리 우울해 하고 있는 건데. 네녀석이 그렇게 신경 쓸일이라면 엘레나 그 아이 일 말고 달리 뭐가 있어."

"음..."

모두가 시선을 요하임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탑주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요하임은 작게 입을 열었다.

"딸에게서...연락이 안 옵니다."

***

"다들 괜한 호들갑을..."

요하임은 자신의 집무실을 향해 걸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요하임의 말을 듣자 가장 호들갑을 떨던 것은 황혼의 탑주. 프란츠 에르투웬이었다.

'뭐? 연락이 안된다고?? 아니, 너 이자식 왜 여기에 있어!! 당장 딸 찾으러 가야지!'

'아니, 실종된게 아니라 약혼자 집에 보냈는데 연락이...'

'약호오오오온?????? 너 이자식 우리 리처드는!!! 우리 리처드는 어디에 두고 어떤 놈한테 시집을 보내려는거야아아아아!!!!!'

'네 녀석 아들 이름이 왜 튀어나오는지는 모르겠다만 엘레나는 지금 크라우스 영주성에 가 있다.'

'크, 크라우스?? 아서 크라우스 걔네 집에 엘레나 그 아이가 왜 가!! 너, 너희 설마 나한테는 말도 안하고 태중혼약을 맺은거는 아니지?'

'맞다만.'

'이...이 개자식들아!! 아카데미 때도 그렇고 또 나만 빼 놓고 지들 끼리만 놀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약혼을 논다고 표현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프란츠는 그대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거품을 물어댔지만 다른 탑주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요하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요하임은 그 시선을 참지 못하고 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렇게 얼굴에 티가 났던 것인가."

요새 자신의 딸아이 때문에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것은 맞았지만 남들이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딸이 그렇게 위험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따지고 보면 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인 소드 마스터의 곁에 있는데 위험할리가 있겠나.

아서에게서 엘레나가 안전하게 도착했다고 연락까지 받았다. 일단 크라우스 영주성에 들어갔으니 엘레나가 외부의 위험에 노출될 일은 없게 된 것이다.

다만 걱정인 것은 엘레나에게 준 수정구에서 연락이 오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설마 누군가 의도적으로 연락을 막고 있는 것인가...'

요하임에게 있어 엘레나가 연락을 하지 않는 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엘레나는 언제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 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자연스래 누군가 연락을 막고 있다는 쪽으로 생각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아서는 아닐테고...그러면 그 녀석?"

요하임은 곧바로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워냈다. 엘레나의 약혼자가 될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는 2년전 그날 밤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봐두었다.

제사람들을 구하겠다고 만신창이가 된채로 진흙탕을 구르고 있던 어린 소년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그리 무모하게 행동했다가는 괜히 엘레나의 얼굴에 눈물 흘리게 만들까 보자마자 쓴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그럴리 없지..."

몇년 동안 아서에게서 칭찬이라면 모를까 자신의 아들에 대한 걱정은 들어본적이 없다.

그렇게 머릿속을 채우던 잡생각들을 지우고 자리에 앉아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연락을 하고 싶지만 그러다가 오늘 탑주회의 때처럼 그 성의 사용인들에게 이상한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갑자기 수정구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요하임은 이번에는 드디어 딸에게서 연락이 왔다 생각하고 활짝 웃으며 수정구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거기에 비치는 얼굴을 보고는 부패 흑마법에 걸린 시체 마냥 빠르게 얼굴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우스운 꼴은 대체 뭐냐."

[사람 면전에 대놓고 우습다니. 말이 심하구나.]

"너는 거울을 안보고 사는건가?"

요하임에게 연락이 온것은 다름 아닌 엘레나가 현재 지내고 있는 성의 주인이자 요하임 자신의 오랜 친구인 아서 크라우스였다. 평소에도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이기는 하다만 오늘 수정구에 비쳐진 아서의 모습은 요하임이 보기에는 노망이 든게 아닌가 싶었다.

"다 커가지고는 머리에 왠 화관을 쓰고 있는 거야."

[이거? 이거 우리 막내가 만들어 준거다. 역시 나를 닮아서 그런지 손재주가 좋은 거 같아.]

"네가 아니라 아르웬이겠지. 어디 피크닉이라도 간거..."

요하임은 말을 하기를 멈추었다. 지금 이 녀석이 자신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작은 아들이 만들어 준 화관만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가 있었다.

"너 설마."

아니나 다를까 수정구 속의 녀석은 옛날과 다름 없는 장난스러운 미소로 자신의 손목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리고 이 팔찌는 우리 며늘아기가 만들어 준...]

"이 씹새끼가."

요하임은 아서가 보여주는 꽃팔찌를 보자마자 욕을 내뱉었다.

여명의 탑이 있는 이 에델바이스 가문의 영지, 메로힘은 매우 추운 기후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자생하는 꽃들의 종류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요하임은 꽃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서 기후 조절 마법과 거래를 틀고 있는 상인들을 이용하여 성 안에 작은 화원을 만들어 주었다.

그때 딸의 고맙다는 미소는 아직도 요하임이 기억하고 있는 인생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그리고 꽃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 예쁘고 향기가 좋은 꽃을 하나 꺾어 엘레나에게 건내 주었다가 처음으로 딸에게 손으로 맞은 것 또한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저 밉상인 놈이 있는 남부는 다양한 꽃들이 자란다는 것을 요하임도 잘 알고 있다. 젊은 시절에 자주 놀러 갔었고 녀석이 자랑하는 거대한 화원과 영지 곳곳에 있는 꽃밭들 또한 여러번 보았다.

그러니까 저 쪽은 이곳과는 달리 꽃이 그리 귀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널린게 꽃밭이니 엘레나가 여기에 있을 때와 달리 꽃을 엮어 화관을 만들든 꽃팔찌를 만들었든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요하임의 이성은 정확히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로서의 질투심이 눈 앞의 놈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왜 그리 화를 내고...]

"불러."

[뭐?]

"당장 네 아들하고 엘레나 부르라고. 내가 거기로 텔레포트 하기 전에."

< 22화 > 팔불출 (2)

피크닉에서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한동안 보지 않고 있던 초록 책을 서랍장에서 꺼내었다.

그 책에는 엘레나와의 파혼 후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 1년간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와 앞으로의 계획이 적혀있었는데 계속 엘레나와 약혼을 유지하게 되어버렸으니 자연스레 여기에 적혀있는 계획들 또한 모두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아니, 이건 잘된 일인가..."

여기에 적혀 있는 계획표는 굳이 비유해보자면 어린시절 만들었던 잘 짜여진 방학 시간표와 같았다. 아이의 자유는 단 일도 포함되지 않은 정말 철저하게 부모님의 바람대로 만들어진 시간표. 계획대로만 움직인다면 명문대는 반드시 들어갈 것 같은 그런 시간표 말이다.

실제로 나는 엘레나를 만나기 전 까지 그런 시간표 속에서 살아왔다. 누가 이렇게 하라고 명령한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나 스스로에게 미래에 대한 대비라고 말하며 나를 아무리 달려도 끝나지 않는 챗바퀴에 속에 스스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착실히 계획을 이행한 결과. 나는 처음 목표로 잡았던 크라우스 백작가의 후계자로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다만 알폰스와의 일로 알 수 있듯 그렇게 한다 하여 내가 원하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 가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원작의 데미안처럼 파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유는 모두 나의 가족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그러기 위한 노력이 오히려 가족과의 관계를 소홀하게 만들어 버렸으니 '나'라는 인간을 더 나아지게 만들어 준다고 하더라도 더는 필요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엘레나와 만난 이후로 이 녀석을 꺼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네."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은 단순히 내 시간 계획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설 속에서 일어났던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적혀있다.

크라우스 백작가는 평범한 백작가문이 아니다. 이 대륙에 하나 밖에 없는 제국의 원로가문이며 제국 건국 이전부터 남부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던 명문가다. 작위가 백작일 뿐이지 대대로 승작을 거부해 왔을 뿐 다른 백작가와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

그런 명문가의 후계자로서 나는 어릴 적 부터 대륙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들은 내가 책을 통해 얻은 정보에 대한 믿음을 준다.

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소설 속 몇장 몇화에 일어나는 일이 지금 여기서 발생한 일 때문에 이렇게 되는 구나' 라는 것을, 나는 그것에서 이어지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 내게 들려오는 정보들은 내가 알고 있는 미래를 확신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안정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엘레나와 약혼을 이어가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엘레나 에델바이스와 이어지는 데미안 크라우스의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고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였기에 나는 더 이상 이 책에 적혀 있는 내용으로 안심할 수 없었다.

책을 한번 훑어본 나는 책을 다시 원래 있던 서랍장에 돌려 놓았다.

아무리 그래도 엘레나와의 약혼이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내어 주지는 못했다. '미래' 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무겁다. 설령 불확실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렇게 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책을 찢지도 태우지도 못한채 다시 서랍장에 넣어둘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여기에 대한 생각은 그만하도록 하자.

불확실한 미래에 얽메인 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이라는 것을 요 며칠간 제대로 알 수 있지 않았나.

엘레나와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단순히 헤어지게 될 사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버렸다. 처음에는 쉽게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고작 며칠 같이 있었다고 이제는 보내기 싫어지다니 더군다나 나는 그녀의 곁에 있는 내가 겪을 미래 또한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결국 그녀를 조금이라도 내 옆에 붙잡아두기 위해 아버지께 이실리아관을 넘겨달라고 말까지 해버리고 말았다만.

나의 그 행동이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지옥에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짓이나 마찬가지 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상하게도 내 마음 속은 사이다를 들이 부은 것 마냥 상쾌하기만 했다. 이성과 감정의 괴리감에 나는 내 머리를 톡톡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내 머리가 어디 이상하게 변했나."

무슨 정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히로인도 아니고 내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복잡해지는 내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 나는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회상해 보았다.

웃고 있는 알폰스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니 머리가 조금 정리되는 것 같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우리 가족에게 이런 분위기가 나오는 것은 처음 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진정으로 가족의 행복을 바랬다면 이런 쪽으로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이제와서 이 모습을 되찾은 것을 생각하니 아쉬우면서도 다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기뻤다.

그렇게 내 기억의 필름은 돌고돌아 꽃밭에 앉아 있는 엘레나를 비춰주었다.

우리 가족과 나란히 앉아 있는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그 얼굴에는 작은 실망감 또한 함께 비쳐졌다. 그 이유를 깨닫는 것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곧장 감고 있던 눈을 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뭔 짓을 한거지."

생각해 보면 그때 엘레나와 한 약속은 데이트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런 약속에 가족을 끼워 넣다니 제아무리 가족관계 개선에 생각이 몰려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누가봐도 내 잘못이었다.

엘레나가 착하기에 웃으며 따라갔던 것이지 누가 데이트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내심 실망했을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약간 힘이 없어 보였는데 그게 이것 때문이었나.

그리 생각하니 가슴에 화살 하나가 박히는 것 같다.

"지금 당장 사과를..."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 지난번에 그녀가 내 방에 온것은 예외로 친다 하더라도 지금은 모두가 잠들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인데 그런 늦은 시간에 그녀의 방에 내가 찾아가는 것은 아무리 약혼자라 하여도 선을 넘었다.

그리고 단순히 사과 하나로 그녀가 용서해 줄지도 의문이다. 아니, 엘레나 그녀라면 그럴지도. 다만 내 마음은 편하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그때 약속했던 것을 이루어주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에 빠져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나의 눈에 책 한권이 들어왔다.

"이거다."

아무래도 방법을 찾은 것 같다.

***

내가 방에서 찾아낸 책은 사르함의 도시 계획도였다.

그 책을 찾아내자 나의 머리는 순식간에 해답을 만들어내었다. 나는 계획도를 펼쳐 그녀와 어디로 가야할지 이동경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르함은 남부에서 손 꼽히는 대도시 중 하나로 잘 발전된 만큼 거리의 풍경 또한 아름답다고 평해도 될 정도다. 내가 엘레나의 대해 아는 정보는 제한되어 있지만 최대한 그녀가 흥미를 가질 만한 것들 위주로 갈 곳을 정해 놓았다.

그리고 내가 밤을 새운 것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나와 함께 거리를 걷는 내내 그녀의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세계에는 과학이 발달한 것이 아니라 마법이 발달한 세계였지만 발전한 분야가 다르다 하더라도 내게도 익숙한 먹거리가 몇몇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솜사탕이었는데 그녀에게 솜사탕 하나를 사서 건내주자 그녀는 손으로 솜사탕을 톡톡 건들이더니 쭈욱 뜯어 입에 한번 넣고는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솜사탕과 그것이 남긴 단맛에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팔던 사람 말로는 아직 사르함 외에 어디를 가본 적이 없다고 하던데 그 때문인가. 메로힘에는 아직 솜사탕이 없던 모양이다.

물론 나는 단것을 먹지 못하기에 내 몫은 사지 않았다. 엘레나가 건내기에 한움큼 먹긴 하였지만 진한 설탕 맛에 나는 차마 얼굴을 찡그리지는 못하고 복잡 미묘한, 괴상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것이 또 재밌었던 모양이다만.

"데미안. 당신 얼굴 이상해요."

"이건 엘레나가 저에게 그걸 먹여서..."

"음. 어제 있던 일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세요."

"그거는 아까 마차 안에서 다 푸신 것 아니었습니까. 제 볼도 꼬집으셨으면서."

"그건 데미안도 저에게 똑같이 했잖아요. 흐으음? 데미안 솜사탕 한번 더 드실래요?"

"됐습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내가 한짓이 있으니 얌전히 당하고만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게 솜사탕을 먹인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 값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엘레나의 볼을 열번 정도는 주무르는 것으로 받도록 하자.

그렇게 우리는 거리를 돌아다니다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공방에 도착했다. 엘레나는 갑자기 가구를 사러 온것에 의아해 했지만 그녀가 앞으로 지낼 이실리아관의 있는 이전 물건을 그대로 쓸 수 는 없었다고 설명하자 그녀도 납득하는 것 같았다.

다만 나도 엘레나도 한가지 잊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아."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는 엘레나의 모습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였더니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연락...안했어요."

"네?"

"아버지께 연락하는 거 잊고 있었어요..."

엘레나의 말에 나는 머리에 망치로 한대 얻어 맞은것 같았다.

원작의 엘레나가 아카데미 입학 전까지 크라우스 성에서 지냈다는 묘사가 있어 나는 그동안 엘레나가 이곳에 지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요하임 에델바이스 공작.

엘레나의 아버지이자 나 또한 한번 뿐이지만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현재 일곱 마탑 중 하나인 여명의 탑의 탑주로서 마법실력이 매우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거기에 한가지 사실을 더 알고 있다. 그가 어마어마한 팔불출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원작에서의 엘레나가 아버지에게 하는 연락을 빼먹었을리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대로 요하임이 이곳으로 날아와 데미안을 보고 파혼을 선언했을 테니 말이다. 아마도 데미안의 감시하에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내가 원작의 데미안과 달라서 발생한 일이다.

그리 생각하니 되려 안심이 되었다. 나는 원작의 그 녀석과 달리 구릴게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엘레나는 사르함에 계속 있고 싶습니까."

"네? 어, 그,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내 말에 얼굴을 붉히는 엘레나. 그녀의 반응에 잠깐 머리가 띵하더니 그제야 내 말이 무슨 뜻으로 들렸을지 생각해내었다.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마음 속에 두고만 있던 말이 그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아, 아니 이게 아니라...잠시만요. 그, 아카데미에 입학식전 까지 이곳에서 지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은거였습니다. 그동안 당신이 어디로 떠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엘레나가 메로힘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저도 잊고 있었나 봅니다."

나의 말에 그녀는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에요. 그야 저는 이제 이실리아관의 주인인걸요. 그러니 앞으로도 사르함에 있는 것이 맞겠죠?"

어쩐지 나의 동의를 구하는 것 같으면서도 앞으로 이곳에 있겠다는 그녀의 답에 나는 서둘러 손을 올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렸다.

"그렇다면...일단 오늘은 돌아가도록 하죠. 돌아가서 공작님께 말씀드리도록 해요."

그녀는 내 손을 잡고는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설마 원작에서도 그녀를 크라우스 성에 1년 동안 있게 해준 요하임인데 엘레나가 부탁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연락은 이제부터라도 자주 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풀리게 될것이라 생각하며 우리는 마차에 올라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성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수정구를 들고 계시는 아버지를 만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채 말이다.

아버지가 들고 계시는 수정구에는 엘레나도 나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 비춰져있었다.

[엘레나. 오랜만이구나.]

"아, 아버지..."

수정구에 비치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요하임의 얼굴에 엘레나를 얼마나 생각하는지는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다만 그 따뜻한 목소리는 어딘가 약간 화가 나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일단 메로힘으로 돌아오도록 해라.]

"네?"

갑자기 돌아오라는 요하임의 말에 엘레나도 나도 심지어 수정구를 들고 계시고 있던 아버지 또한 당황스러워 했다.

"야! 다짜고짜 무슨 말을 하는..."

[넌 입 다물어라. 물론 거기 서 있는 네 녀석도 같이 와라. 내가 할 말은 이것으로 끝이다. 이틀내에 출발했다는 소식을 못전할 경우 내가 직접 이곳으로 와서 엘레나와 함께 데려가도록 하지. 이상.]

"뭐? 야! 야 요하임!!.....이 자식이 지 할 말만 하고 끊어버려?!!"

아버지는 수정구를 연신 두드리며 요하임을 계속 불러댔고 나와 엘레나는 폭풍처럼 지나간 요하임의 모습에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 23화 > 팔불출 (3)

아버지께서는 요하임의 행동에 크게 화를 내시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사르함에 계속 있게 하실 생각은 아니셨던 것 같다.

그 일이 있고 다음날 아버지께서는 기사단의 재정비와 시종들에게 마차를 준비하라 명하셨다.

요하임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그렇게 욕을 하셨으면서도 우리를 메로힘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셨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우리가 출발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 대마법사 요하임 에델바이스가 직접 텔레포트로 이곳에 행차해 우리를 데려갔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뒤끝은 있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최대한 늦게 보내실 생각이신지 준비가 전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요하임이 말한 마지막 기한인 이틀째 되는 날 출발하라고 말하셨다.

사실 그것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찬성이었다.

남부에서 북부까지의 거리가 거리인 만큼 메로힘까지 가는데 적어도 며칠은 마차를 타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크라우스에는 워프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수준의 마법사가 존재 하지 않았다.

요하임이 게이트를 열 수 있던 곳으로 가는데만 하여도 어느정도 시간이 걸릴텐데 요 며칠간 외출이 잦았던 탓에 곧바로 출발하였다가는 엘레나의 체력으로는 부담이 될 것이 뻔했다.

어제 나와 함께 사르함의 도심지를 걸을 때만 하여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지 않았음에도 돌아가는 길에 졸음을 버티지 못하고 내게 기대어 잠들었던 엘레나다. 그러니 그녀에게 하루 정도는 휴식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 메로힘에 가는데 사용할 마차는 우리 가문의 마차가 아닌 엘레나가 타고 온 에델바이스의 마차였다. 지나가면서 얼핏 보았는데 누가 마법사 가문 아니랄까 온갖 마법이 덕지 덕지 붙어 있어 현대의 장갑차를 연상케 해주었다.

엘레나의 말로는 주변 환경에 맞추어 마차 내부의 기온을 변화시켜 주고 언제나 최적의 상태를 유지케 해주는 마법도 걸려있었다고 했었나. 외부로 부터의 충격을 막기 위한 상위 방호 마법 또한 걸려 있다고 한다.

거기에 마차가 움직이면서 발생하는 흔들림을 내부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법이라던지 뭔가 불편할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마법으로 인해 해결되어 있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마법이라는거 정말 편해 보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마법사 할껄. 왜 하필 무가(武家)의 자식으로 빙의를 해가지고 말이야.

무력적인 측면에서는 몰라도 세상 살아가는데는 정말 편해보이는 기술임은 틀림 없었다. 혹시나 해서 엘레나에게 물어본 결과 나에게는 마법에 대한 재능이 없다고. 아니, 애초에 기사는 마법을 다룰 수 없다고 한다.

기사가 걸어가는 길과 마법사가 걸어가는 길은 똑같은 '끝'을 향하지만 그 길은 서로가 닿을 수 없는 평행선과 같아 기사가 초인으로서 행하는 이적(異跡)을 마법사는 이루어 낼 수 없고 마찬가지로 기사 또한 마법사가 마법으로 행하는 이적을 따라할 수 없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원작에서도 신성력과 오러를 동시에 사용하는 인물은 있어도 마법과 오러를 동시에 사용하는 인물은 등장한 적이 없었다.

이 로맨스 판타지, 설정이 너무 빡빡한거 아닌가. 그 맛에 읽었던 것이기는 하다만.

결국 어릴적 부터 계속 꿈꿔왔던 마검사의 꿈은 접어야만 하였다. 옆에서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알폰스도 마법과 기사의 길은 양자택일이라고 하니 심히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고민해 봤자 어차피 너의 재능은 검사란다 알폰스.

원작에서의 알폰스는 뛰어난 기사였고 실제로 알폰스는 크라우스 가문의 남자 답게 검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만약 알폰스가 원한다면야 마법을 배우는 것을 막지는 않겠다만 굳이 그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알폰스는 금세 마법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언제나 몸을 움직여 왔던 나도 오늘 하루 만큼은 수련도 공부도 모두 내려놓고 간만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데미안으로 빙의한 이후 하루도 검을 놓은 적이 없었는데 막상 이렇게 스스로 검을 놓아보니 무언가로 부터의 해방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느껴졌다.

몸은 그 어느때 보다 편하다가 말하고 있는데 내 마음은 그렇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는 편이 나았던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방을 나섰다.

검을 휘두르기 위해 연무장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는 괜한 생각들에 머리가 어지러워 질것 같아 머리를 비우기 위해 걷는 것이었다.

머리를 비우기 위한 산책은 영주성 본관을 한바퀴 도는 것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산책을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고 할때 나의 눈에 새하얀 빛 하나가 들어왔다.

마치 별빛과도 같던 그 빛을 찾아 고개를 올려보니 테라스에 나와 밤하늘을 보고 있는 엘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순백색 머리카락은 어두운 밤에도 마치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것 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일찍히 잠자리에 들었다고 들었는데 중간에 잠이라도 깬 것일까. 그녀는 하늘하늘한 잠옷 차림 그대로 테라스에 서 있었다. 그런 옷차림 때문인지 어딘가 무방비해 보이는 엘레나의 모습에 나는 그녀를 향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엘레.."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을 멈추었다.

밤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내가 있는 이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 있는 별과 같았다.

마치 나와는 다른 별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괜히 내가 말을 걸어 엘레나의 시간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나는 기척을 죽인채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방으로 돌아가는 발을 멈춰 세운 것은 저 위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빤히 보고만 있다 가시는 것인가요? 데미안."

어째서 말을 걸지 않았냐며 추궁하는 것 같은 엘레나의 말에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를 몰라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사람 얼굴을 수치심으로 터트릴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때의 감상을 그대로 그녀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엘레나는 자신의 말이 거리 때문에 닿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밑으로 내려가기 위해 난간 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놀라 서둘러 내력(內力)을 끌어올려 자리를 박차 올랐다.

그녀가 뛰어난 마법사라는 사실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열여섯이라는 나이에 제5위계 티페레트(Tiphereth)에 오른 천재 마법사는 마법계 역사상 엘레나와 리처드 에르투웬 그 두 사람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엘레나인 만큼 3층 난간에서 뛰어서 내려오는 것 정도 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웠을 테지만 그녀가 입은 하늘하늘한 잠옷 때문인지 아니면 엘레나 특유의 불안감을 유발하게 하는 분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내 몸이 먼저 움직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단 한번의 도약으로 엘레나가 서 있는 난간에 도달한 나는 서둘러 엘레나를 품에 안아들고는 테라스로 내려왔다.

평평한 바닥이 발에 밟히자 그제야 세차게 뛰던 가슴이 진정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난간 위에 올라간 것이냐고 엘레나를 꾸짖으려 했던 마음도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는 머리에 의해 사그라들어 갔다.

괜한 행동을 한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나마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그래도 그녀를 향한 걱정에 나선 것이니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고 속으로 되내이며 애써 뜨거워지는 얼굴을 가라앉혔다.

"데미안..."

품안에서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 얼굴을 붉히며 버벅거리던 엘레나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호흡은 길게 늘어져 있었으며 작게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여태 내가 봐왔던 엘레나가 맞나 싶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다.

이제 그만 엘레나를 품에서 내려놓으려 하였지만 그녀가 내 옷을 꽉 붙잡고 있어 하는 수 없이 나는 난간에 걸터 앉은채 엘레나가 손을 놓을 때 까지 계속 안고 있어야만 했다.

품에 안겨있는 그녀는 정말로 어딘가로 날아가버릴 것 같이 가벼워 나도 모르게 무심코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몇분을 있었을까. 엘레나가 나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빼자 나 또한 그녀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 주었다.

그제야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한 엘레나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물었다.

"왜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려고 하셨던 거에요."

역시 이 질문을 피할 수는 없구나.

"별을 보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보여 방해하지 않으려 그랬던 겁니다."

이렇게 답하니 그녀도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 대신 나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나와 마찬가지로 난간에 걸터 앉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위험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엘레나 정도의 마법사라면 떨어지는 와중에도 부유마법으로 몸을 띄울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내가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아도 되었던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붙잡았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녀가 만일 하나 이곳에서 떨어져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버리지 못했다. 엘레나는 자신의 뒤를 받치고 있는 내 팔이 마음에 들었는지 꼭 뒤로 넘어갈 것 처럼 기대며 장난을 쳐댔다.

"위험해요 엘레나. 그러다가 제가 팔을 빼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헤헤...당신이 그럴리가 없잖아요."

그야 그렇다만 저는 지금 당신의 행동 때문에 수명이 깎여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지금의 엘레나는 평소와 좀 다르다. 사람이 바뀐것은 아닌데 뭔가 마음이 많이 풀어져 있다고 해야하나, 완전히 자기 기분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건지 그녀와의 거리가 평소보다 더 가깝게만 느껴졌다.

내 팔에 기댄 그녀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보더니 별빛을 눈에 담고는 내게 말했다.

"데미안 그거 알아요? 메로힘과 사르함의 밤하늘은 똑같이 별이 빛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 조금씩 달라요."

우리가 서 있는 땅은 둥그니까 서 있는 장소에 따라 보이는 별자리와 보이지 않는 별자리에 미세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레나가 이렇게 말하니 그녀가 꼭 메로힘의 하늘을 그리워 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그녀처럼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똑바로 바라 볼 수 없었다.

다만 이런 생각은 이어지는 엘레나의 말에 그대로 씻겨져 나갔다.

"그러니 메로힘에 가면 그때는 제가 데미안에게 알려줄게요. 당신이 이곳에서 나에게 해주었던 것 처럼 나도 당신에게 메로힘의 하늘을, 내가 사랑하는 그곳을 알려주고 싶어요."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난간에서 내려와 내게서 등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그, 그러면 이제 저는 내일을 위해 다시 들어 가야할 것 같네요. 잘자요 데미안."

평소와는 거리감이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방금 전 말은 엘레나도 부끄러웠는지 밤눈이 좋은 나의 눈에는 그녀의 귀끝이 붉게 물들었다는 것이 훤히 보였다.

나는 침대 위에 누운 그녀를 향해 손을 살짝 흔들어 주고는 창문을 닫으며 자리를 떠났다.

방으로 돌아오자 마자 침대에 누운 나는 문득 내 방에 놓여져 있는 전신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그 거울은 창을 타고 들어온 달빛에 의해 반짝이고 있었는데 거울이 놓여진 위치 때문인지 침대에 누워있는 나의 모습 또한 온전히 거울에 비춰지고 있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한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불을 얼굴까지 올려 덮었다.

내가 보았던 그 거울 속 소년의 얼굴은 방금 전 엘레나와 마찬가지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

다음날 아침.

메로힘으로 갈 준비가 끝난 크라우스 가문의 영주성 앞에 한 남자가 공중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 누가 크라우스의 땅에서 저리 행동할 수 있겠냐만은 그는 상관없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아들을 보내기 위해 밖에 나와있는 크라우스 백작을 보며 이리 중얼 거렸다.

"역시 너라면 이 날 출발 시킬 줄 알고 있었다."

"너..너 이 자식!!"

"네녀석 성격이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출발 시켜줄리가 없을 것 같았다. 정말이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군."

"야! 요하임!! 너야말로 네가 올거면 일찍 좀 말을 하란 말이다!!"

"시끄럽다. 아서. 기사단까지 준비해준 것은 고맙다만 역시 내가 직접 데려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 내가 온거다. 불만 있냐?"

"그냥 나를 물 먹일려고 한거 잖냐!"

"잘 알고 있군."

에델바이스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 위에 내려온 그는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마차에 한번 툭 치더니 이내 허공에는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마법 술식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지금 발동하고 있는 마법은 지정된 좌표로 사물을 이동시키는 「텔레포트(teleportation)」.

초월을 이루어낸 아서로서는 마법사가 아님에도 이 공간의 흔들림을 감지하고 또한 술식을 베어버릴 수 있었지만 만약 그러했다가는 저 마차가 무사하지 못할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검을 뽑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있는 텔레포트 또한 아서가 검을 뽑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요하임이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요하임이 일부러 아서를 골리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것이기도 했다.

"그러면 나중에 연락하도록 하지. 잘 있어라."

마차를 감싼 백색 빛과 함께 요하임은 원래 이곳에 없던 사람 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정확히 이곳에서 에델바이스의 마차만을 가지고 사라진 것이었다.

그렇게 요하임의 마법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대기에 온전히 흩어졌을 쯤 아서는 크게 웃으며 자신의 아들을 불렀다.

"내가 말했지? 저 녀석 반드시 이렇게 갑자기 아침에 와서 이러고 사라질 거라고. 내기는 내 승리구나 아들아."

아서의 말에 화답하듯 성의 문이 열리며 분명 요하임과 함께 이곳에 없어야 할 데미안과 엘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의 친구분이라고 했을 때 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음, 엘레나. 그렇게 부끄러워 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냥 저희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시라고 생각하시면 된다니까요."

그런 데미안의 말에 엘레나는 손으로 어제와는 다른 의미로 붉어진 얼굴을 가리느라 답하지 못했다.

< 24화 > 팔불출 (4)

빈 마차와 함께 사라진 요하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두번째 방문에 그는 첫번째 때와는 달리 여유로운 모습이 아닌 시뻘개진 얼굴에 한 손에 크라우스의 영주성은 가뿐히 날려버릴 마력이 담긴 마력 덩어리를 들고 있었지만 내 곁에 서 있는 엘레나를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이전과 같은 얼굴로 되돌아 갔다.

다만 그의 손에는 여전히 그 마력 덩어리가 사라지지 않은채 그대로 들려있었다.

차마 엘레나 앞에서 화를 내지 못하고 있는 요하임의 모습에 아버지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요하임도 결국 참을 수 없었는지 아버지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역시 대마법사야. 그 짧은 시간에 저 멀리 떨어진 메로힘과 사르함을 한순간에 오가다니 정말 대단한걸."

"아서!!! 감히 네놈이 나를 광대로 만들어?!!!"

"광대짓을 한게 누군데 왜 엄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그러냐? 갑자기 와서 제멋대로 마차를 들고 사라진게 내 잘못인가?"

자신의 오랜 친구를 놀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 된 입장에서도 그리 좋다고 보기에는 힘든 모습이었다. 솔직히 지금 내 관심사는 아버지의 말보다는 요하임이 언제 저 손에 들린 마력 덩어리를 아버지께 던질지에 가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아버지라면 저거에 직격으로 맞는다고 죽을 것 같지는 않다만 혹시라도 요하임의 실수로 저것이 우리 뒷편에 있는 성으로 떨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요하임 공작이 제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저런게 눈 앞에 있다면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당사자들은 거기에 대해서 전혀 걱정을 안하고 있는 모습이다만. 그 만큼 둘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소리겠지만 옆에 서 있는 입장에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라도 저것을 쳐낼 준비를 하기 위해 조용히 허릿춤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려 놓고는 그가 어서 저 폭탄을 아버지에게 던지기 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다행이게도 요하임이 그것을 아버지를 향해 던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로서 요하임 스스로도 그런 것으로는 아버지께 상처 하나 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거다.

만약 그가 진심이었다면 이곳에 오자마자 상위 위계의 마법을 퍼부었겠지, 저 커다란 마력 덩어리는 자신이 이 정도로 화가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요하임은 결국 체념했는지 손에 모여있는 마력 덩어리를 흩어 없애고는 아버지와 대화를 이어가는 것을 포기했다.

사실상 패배선언이나 다름 없는 요하임의 모습에 아버지는 마치 이겼다는 얼굴을 한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내게 있어 낯설기는 커녕 평소의 아버지와 똑같았지만 눈 앞에 아버지에게 당한 요하임 본인이 있는데 평소처럼 웃으며 맞장구를 쳐줄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나와 엘레나를 보더니 대뜸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려대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아...그러면 짐은?"

"아까 네녀석이 전부 보내버리지 않았냐."

"그렇겠지. 사용인은...아까 마차에 타고 있던 게 헤일리와 켄이었으니 더는 필요 없을 테고, 이번에는 진짜로 마지막이겠지.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이들이 네가 역용술로 변장시켜 놓은 사용인이 아니라면 말이야."

"....너 혹시 실력이 퇴보하기라도 한거냐. 천하의 대마법사 요하임 에델바이스가 역용술 같은 잡기를 간파 못하지는 않을텐데."

"그냥 한번 해 본 말이다. 설마 내가 딸아이도 못 알아 볼까봐."

요하임은 그렇게 말하며 따뜻한 눈빛으로 엘레나를 보더니 또 나를 볼때는 뭔가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알 수 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팔불출 아버지에게 받은 것 치고 이 정도 평가면 충분히 후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딸을 네 같은 놈에게 넘겨 줄 수는 없다!' 라는 소리를 듣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아닌가.

원작에서 진작에 요하임이 데미안을 만났어야 했는데.

만약 그랬다면 데미안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엘레나와 데미안의 약혼은 이루어 질 수 없었을 텐데 말이다. 데미안의 행동은 자신의 친구를 믿고 딸을 맡긴 요하임에게 있어 큰 배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가문의 이름에 먹칠 할 생각은 물론 그에게 그런 배신감을 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요하임은 처음 마차와 함께 사라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팡이를 바닥에 한번 톡 쳤다. 그러자 그때와 똑같은 마법식이 주변에 펼쳐지더니 내 어깨를 잡고 있는 요하임과 나와 엘레나를 포함한 세명에게 백색의 빛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내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더니 새하얀 빛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찰나에 불가한 순간이었지만 나는 공간의 움직임을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었고 그 기이한 감각에 의도치 않게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여러 소설 속에서 묘사하기를 텔레포트는 처음 경험하는 사람에게 있어 속이 울렁거린다고들 하던데 내 몸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기에 그런 것인지 하얀 색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나는 정확히 앞과 뒤, 위와 아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리 된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계속 되지 못했다.

찰나는 말 그대로 매우 짧은 시간이었기에 내 시야를 가리고 있던 빛은 순식간에 눈에서 걷어졌고 이후 나의 눈에 비쳐진 세상은 더 이상 크라우스 백작가의 영주성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백색의 고성 뒤에 높게 솟은 탑이 이곳이 어딘지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나의 영지. 메로힘에 온 것을 환영하네. 데미안 크라우스."

요하임의 말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작은 눈꽃이 코 위에 내려 앉았다.

***

"와."

창 밖에 펼쳐진 풍경에 나는 순수한 감탄을 내뱉었다.

도시 곳곳에 내려앉은 눈으로 이루어진 설경은 정말로 아름답다는 말이 부족하지 않았다. 사르함에도 겨울철이 되면 눈이 내리기는 하지만 이런 느낌을 만들어 내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지금 봄이 되며 날씨가 조금 풀리기 시작한게 이 정도라고 하니, 만약 겨울철이 된다면 정말로 눈이 산을 이룰 만큼 이나 쌓이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것은 여명의 탑에서 알아서 조절을 한다고 한다.

만약 여기에 있는게 에델바이스가 아니라 크라우스 였다면 기사들이 단체로 나와 제설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크라우스가 남부에 위치해서 정말 다행이다.

도시를 둘러 싸고 있는 성벽 바깥에는 정상이 만년설로 덮여 있는 하얀 산맥이 보이는데 마치 하늘 끝에 닿을 것 같이 높은 저 산에는 과연 생물이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르함을 걸치는 룬프라우드 산맥은 그나마 숲과 나무들이 어울러져 있어 생명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지만 저 곳에는 정녕 생명체가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게 할 정도로 보이는 그대로 아무것도 묻지 않은 백색의 도화지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산 꼭대기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은 살갗을 찢고 살아있는 것들을 본연의 모습 그대로 얼어붙게 만드는 혹독한 냉기의 폭풍이 휘몰아 치고 있지만 그런 곳에도 살고 있는 생물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의 손을 수백년 동안 타지 않은 저 높은 곳에는 용이 한마리 살고 있다.

"지금 당장 만날 일은 없겠지만...그래도 눈에 닿는 거리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좀 기분이 그러네."

저 산에 살고 있는 용이 사악한 악룡은 아니다.

여느 판타지에서 등장하는 용들 처럼 오만하고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지혜로우며 삿된 것으로 부터 세상을 지키기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기본적으로 선역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다.

내가 알고 있는 것도 당연히 저 산에 살고 있는 용이 소설 속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나 중요한 역할로 말이다.

하늘의 끝이라 불리우는 펠리오로스 산에 사는 그 용은 훗날 엘레나의 스승의 역할로 원작에 등장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용과 엘레나가 만나게 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5~6년은 지난 이후의 일이었으니 당장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아마, 지금 쯤 잠이나 자고 있지 않을까.

만약 내가 그때까지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에 대한 생각을 그 이상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틈만 나면 원작의 지식을 가지고 불투명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나에게 있어 별로 좋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은 잘 알고있다.

다만 그렇게 생각을 지워내고도 자꾸만 생각이 가는 것이 그와 별개로 개인적으로 용이라는 생물에 대해서 흥미가 가기 때문인것 같다.

"당장 크라우스만 해도 용과 얽힌 전설이 있기도 하고, 음...용이라..실제로 보면 어떨지 궁금하기는 하네."

마물과 같은 것은 이곳에 빙의하기 전에도 비슷한 것들을 여럿 보기는 했지만 용, 그러니까 드래곤을 닮은 생물을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험악하기로 유명한 룬프라우드 산맥에도 용의 아종이라 알려진 생물들은 살지 않았으니 말이다.

애초에 사르함은 그곳에 얽힌 전설 때문인지 용종들이 올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메로힘에는 간간히 와이번이라던지 드레이크도 보인다고 한다니 운이 좋으면 이곳에 빙의하고 나서 처음으로 용을 닮은 생명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설경을 보았을 때와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할 때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곧바로 문을 열려고 문 앞으로 다가갔지만 막상 문 앞에 서자 문을 여는 것을 망설였다.

그 이유는 문을 두드리던 것이 엘레나 또는 켄이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과는 달리 완전히 제 삼의 인물이었기 때문 이었고 그가 왜 내 방 문을 두드렸는지에 대해 생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를 계속 밖에 서 있게 만들 수 없던 나는 문을 열어 주었다. 방에 들어온 그는 준비되어 있는 의자에 앉더니 열려있는 창문을 보고는 내게 물었다.

"바깥의 풍경을 구경 중이었나?"

"네. 풍경이 사르함과는 다른 멋이 있더군요."

내 방문을 계속해서 두드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엘레나의 아버지 요하임 에델바이스 공작이었다.

나는 그가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아들에게 푸는 쪼잔한 사람이 아니기를 빌며 자리에 앉았다.

< 25화 > 팔불출 (5)

나와 요하임이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전에 엘레나와 함께 했던 자리에서 말했듯 나는 이전에 한번 그와 만났던 적이 있었다.

다만 그 첫만남 당시 내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지라 내 기억이 잘 못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주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곧바로 헤어졌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맨정신으로 그를 마주하는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라는 소리다.

심지어 2년 전과는 달리 나와 요하임의 관계는 엘레나로 인하여 직접 만나지 않았음에도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고 그것은 이전까지 파혼을 목표로 두고 있었던 나에게 있어 생각치 못한 기습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친구라는 점과 오늘 있었던 일들을 통해 그가 그렇게 꽉막힌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를 대하는데 있어 평소 아버지에게 하는 것 처럼 행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친구네 부모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긴장하게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이전에는 그저 아버지의 친구, 엘레나와 파혼 이후에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요하임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다면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기에 상황이 너무나도 달라져 버렸다.

아직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린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엘레나와 약혼을 이어가게 되었고 그렇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눈 앞에 있는 이 남자는 내 약혼자의 아버지가 되어버린다.

즉, 내게 장인어른이 되는 사람으로서 그에 대한 생각도 준비도 안된 나에게 요하임과의 독대는 긴장이 될 수 밖에 없는 자리였다.

무엇보다 불과 몇시간 전에 아버지가 요하임에게 한 짓이 있는데 걱정이 되지 않을리가.

넓게 보았을 때 나와 엘레나 또한 아버지의 짓굳은 장난에 가담한 공범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팔불출 아버지인 그가 엘레나를 질책할리는 없으니 지금은 온전히 나만을 걱정해야 할 때였다.

하지만 다행이게도 그는 뒤끝 있는 아버지와는 달리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인 것인지 요하임이 아버지의 장난에 대해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요하임은 내가 열어놓은 창 밖의 풍경을 보고는 조용히 내게 말했다.

"메로힘의 설경(雪景)은 남부의 꽃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지. 척박해 보이는 대지임에도 사르함 못지 않은 절경들이 여럿 있으니 이곳에 있을 때 한번은 둘러보는 것이 좋을거다."

나는 요하임의 조언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어째 그가 묘하게 사르함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건 내 착각이겠지.

이후에도 우리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분위기가 무겁지는 않았다.

그저 지난 2년동안 어떻게 지냈냐, 또 그때 처럼 몸을 험하게 굴리거나 한 것은 아니냐, 다음 년도 아카데미에 입학은 할것인가 등등 매우 간단한 질문들이었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요하임의 말에 답할 수 있었다.

오히려 '우리 딸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이 날아올 거라 생각하고 있던 내게 있어 그의 질문들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게 안부를 묻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이 느껴졌다.

그리 생각하니 더는 그와 대화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실은 어제 딸아이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네."

아니, 그런데 거기서 갑자기 그런 주제를 꺼내시면.

갑자기 요하임이 엘레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내게 말하니 내 기분은 처음 그와 대화를 할 때로 돌아가버린 것만 같았다. 그녀가 요하임에게 나에 대한 험담을 했을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만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왠지 모르게 두렵게만 느껴졌다.

그것이 괜한 걱정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약혼자의 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주제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 누구라도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럴 위인은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 이야기를 꺼내려는 요하임의 얼굴은 어딘가 쓸쓸해 보여 그런 그의 모습은 그렇지 않아도 최대치에 임박한 긴강감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내 평생 엘레나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네."

"네?"

"그 아이가 꽃을 많이 좋아하거든.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히 남부에 다양한 꽃이 많이 피어있으니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았지. 그곳에 사는 자네야 말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만 크라우스 영주성의 화원은 제국 내에서도 손 꼽히는 명소이기도 하니 말이야.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그는 이내 내게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데미안. 엘레나가 웃으며 내게 이야기 할 수 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자네 때문이었네. 대체 그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아이가 너에게 빠져들었던 것일까. 나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해."

그건 저도 궁금합니다.

요하임의 말에 나는 이번 만은 여태까지 잘만 대답했던 입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나와 처음 만났었던 그때부터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요하임의 질문에 대한 답은 절대 내게서 찾을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엘레나 그녀만이 알고 있는 답이었다.

하지만 요하임도 애초에 내게 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얇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메로힘을 둘러보다 이곳에서 살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내게 말만 하게. 겨울성에 빈 방은 많으니 말이야."

"그거 농담이시죠? 저는 크라우스의 소가주입니다만."

"자네에게는 동생이 한명 있지 않은가. 아서 그 녀석은 앞으로 100년은 넘게 살것 같더구만 그냥 동생에게 소가주직을 넘기는 건 어떤가? 그 가주라는 자리 내가 앉아 있어 봐서 아는데 해야할 일만 많지 별로 쓸 때 도 없다."

이후 문을 열고 나가면서 당연히 농담이었다고 말하는 요하임이었지만 그 말을 꺼낼때의 얼굴이 어찌나 진지하던지 단순히 농담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힘들었다.

이 팔불출 아버지는 내가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농담이라도 한번 했으면 진짜로 겨울성에 없던 방도 만들어 버릴 위인이었다.

"아, 이걸 말하는 걸 잊을 뻔 했군. 모처럼 자네가 메로힘에 왔으니 이참에 가신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이틀 후 연회를 열려고 생각하고 있네만."

"저는..."

"나도 알고 있네. 아서에게 들어보니 자네는 여태 사교계에 나가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그 놈 머릿속에는 예나 지금이나 검 밖에 없는 것 같아. 그래도 이번 기회에 한번 참가해 보는 것이 어떤가. 앞으로 에델바이스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려면 연회는 피할 수 없는 일이네."

"다시 한번 더 말씀 드리지만 저는 크라우스의 소가주입니다. 연회는...네, 말씀대로 이번 기회에 한번 경험해 보는 것으로 하죠."

"크라우스나 에델바이스나, 아무튼 잘 선택했네. 지금 제도(帝都)에서 유명한 부티크의 주인이 메로힘에 와 있으니 그녀에게 엘레나의 새로운 드레스를 의뢰하는게 좋겠어. 자네는 운이 좋은 줄 알아."

말은 저렇게 했지만 드레스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드레스가 이틀만에 지어질리 없으니 말이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 요하임이 사전에 미리 계획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마 이번 연회의 목적은 단순히 그가 엘레나의 새로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엘레나의 약혼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별 다른 말 없이 그의 제안에 응한 것이었고 말이다. 만약 내가 여기서 요하임의 제안에 거절을 했다 하더라도 금방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렇게 요하임을 떠나보내고 무언가를 놓친것 같은 찝찝함에 자리에 다시 앉아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길한 기분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연회라고 하면 그, 춤을 춰야 하는건가?"

생각해보면 나라는 녀석은 검무(劍儛)를 출 수는 있어도 평범한 춤은 전생이든 현생이든 태어나서 단 한번도 춰 본 적이 없는 놈이었다.

아무래도 엘레나에게 메로힘의 안내를 부탁하려고 했던 생각은 접는게 좋겠다.

***

나는 데미안의 몸에 빙의를 한 이후 살아남겠다는 일념하에 성실히 학업과 단련에 임하였다.

그리고 그 학업이라는 것에는 귀족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과 예의범절 또한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 춤이라는 것은 여전히 생소한 것 중 하나였다.

왜냐면 그 춤이라는게 필수적인게 아니었으니까!

내가 짠 인생계획에도 내가 연회에서 다른 사람과 춤을 춘다는 것은 들어가있지 않았다.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굳이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꼭 연회에 참가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나는 구석이나 발코니로 들어가 얌전히 술이나 마실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경우가 다르다.

춤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는 하였지만 나는 이틀 뒤에 있을 연회의 주인공이었고 로맨스 판타지에서 언제나 연회의 주인공들은 춤을 췄었다.

내가 5년동안 데미안으로 살면서 이 세상의 장르가 정녕 로맨스 판타지가 맞는지 고민을 한 적이 있기는 하여도 역시 주인공인 엘레나와 엮여서 그런 것일까 나는 이번 연회에서 내가 그녀와 춤을 추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요하임은 내가 사교계에 나가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말로는 그저 연습삼아 나가보라고 하였지만 에델바이스 공작가 휘하의 가신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약혼자인 내가 부족한 모습을 보인 다는 것이 내게 어떠한 영향을 줄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적어도 최소한의 기준은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춤, 이것만은 도저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춤을 추지 않는다고 한다면 약혼자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엘레나에게 춤을 신청하는 녀석들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아름다운 여자가 눈 앞에 있는데 춤 못추는 약혼자가 눈에 들어올리가 있나.

그리 다가오는 남자들을 그녀가 거절하는 것을 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역시 그녀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의존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켄이라면 충분히 경험이 많겠지."

지금 내가 이 성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단 두명. 엘레나와 켄이 전부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내가 직접 말하기에는 체면이 서지를 않는다.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결심 했으니 엘레나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일단 보류다.

그런 점에서 켄은 오랜 시간동안 크라우스의 집사로 지냈으며 여태까지 그가 나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때 그는 젊은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연회에 참가했던 경험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경험 많은 켄이라면 나에게도 분명 유의미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종이 어디 있더라. 아, 여기 메로힘이었지."

켄을 부르기 위해 은종을 찾아보았지만 이곳이 항상 지내던 크라우스 영주성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나는 5년 동안 길들여진 습관에 자조하며 밖으로 나가 그를 찾아보려고 하였지만 그럴 틈도 없이 내 방에는 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이번에 찾아온 손님은 지금 나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하게 해줄 수 있는 이였지만 동시에 내가 지금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엘레나였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내 방에 찾아왔는지는 어제 했던 이야기를 통해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엘레나 죄송하지만 겨울성의 안내는 다음에 부탁해도 될까요. 지금은 켄에게 가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나는 엘레나에게 말하고서 켄을 찾기 위해 방문을 넘...지 못했다. 어째선지 문을 막고 있는 엘레나는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고 평소의 그녀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당당함과 장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겨울성은 에델바이스 가문에게 버프라도 주는 장치가 있는 건가.

"고민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네요. 데미안."

엘레나의 말에 나는 흠칫 놀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내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을 알아낸다는 것이 이제와서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엘레나의 모습은 꼭 내가 무엇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방금전 요하임이 내게 떠나면서 짓던 것과 똑 닮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도와드릴까요?"

그런 그녀의 말에 나는 거절할 생각도 하지 못한채 무의식적으로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26화 > 별과 함께 춤을

에스텔리아 아카데미의 도서관은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이라고 알려진 곳의 도서관 답게 여러 장서들을 보유하고 있다.

단순히 책의 보유량만 따진다면 지식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마탑의 서고와 비견될 정도였기에 언제나 이곳에는 공부에 열정적인 학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도서관의 책들이 반드시 학업에 관련된 책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여타 다른 이유로 도서관에 들리는 학생들도 존재했다.

지금 도서관에 혼자 남아 책장을 넘기고 있는 데미안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림이 있기는 한데 알아보기 참 어렵게 해놨네."

데미안은 도서관 구석으로 들어가 책에 그려져 있는 동작들을 따라해보았다.

몸을 움직이는 것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데미안이었지만 책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 워낙 불친절했던 터라 현재 데미안의 동작은 반쯤 자신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두명이서 같이 짝을 이루어 움직이는 동작을 혼자서 허공을 잡으며 움직이고 있으니 그 모습은 남들이 보기에 썩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데미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들어간 것이고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 도서관에 있는 이는 데미안과 도서관 관리인 단 둘 뿐이었지만 제아무리 축제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 하여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 더 있을지는 혹시 또 모를 일이었기에 데미안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몸을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기숙사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축제 때문에 자신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사람이 없는 도서관이 더 나았다. 만약 기숙사에서 지금과 같은 짓을 하다가 라인하르트나 리처드에게 걸린다면, 그런 끔찍한 미래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축제.

여태까지 살면서 춤이라는 것과는 구만리 거리를 유지하던 데미안이 지금 이렇게 춤을 연습하는 이유는 지금으로 부터 삼일 후 열리는 졸업 축제 때문이었다.

현재 에스텔리아 아카데미는 교직원 부터 학생들까지 모두 그 졸업 축제의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엉덩이 무거운 교수들이 직접 나서서 축제 준비를 할 정도였으니 그들이 얼마나 이번 축제에 신경을 쏟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슨 학교 졸업 축제에 그리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졸업 축제는 그저 평범한 졸업 축제가 아니었다.

일곱 마탑의 자제들부터 시작하여 대륙에서 명망 높은 귀족들의 후계들이 모두 이번 연도 졸업예정자들이었다.

결정적으로 그중에는 미래에 황실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1황자와 1황녀도 있었기에 평등한 교육을 모토로 내세우고 있던 교수진들도 올해의 졸업 축제 만큼은 심혈을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학생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축제를 즐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말이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지..."

몇번을 움직여 보아도 딱히 달라지는 것 같지가 않자 데미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난 시간동안 미래를 대비한답시고 여러가지 노력을 해온 데미안이었지만 이번에 자신이 맞닥뜨린 난관은 여태 해온 노력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결국 혼자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하려 할때 데미안은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서둘러 자세를 바로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급하게 자세를 바꾼 탓에 데미안의 몸짓은 매우 어색했고 그것은 보는 이에게 있어 더 큰 의문을 자아낼 뿐이었다.

"....지금 혼자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가요?"

"일단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는 말아 줄래."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눈빛에 데미안은 순순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눈 앞에 펼쳐 놓은 책을 보여주었고 그 책을 본 엘레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간다는 얼굴을 한 엘레나는 데미안에게 책을 돌려주며 말했다.

"음, 그런데 갑자기 이건 왜 보고 계셨던 거에요? 당신은 그런거에 관심 없었잖아요."

"이번에 열리는 졸업 축제 때문에. 졸업 예정자들은 반드시 연회에 참가해야 한다고 하잖아. 그래서 그런거지."

"학교 행사나 이상한 부분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시면서 이런건 또 기억 못했나 보네요."

엘레나의 말에 데미안은 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책에는 그렇게 세세한 건 적혀 있지 않았거든."

"그건 당신의 손에 있는 책도 마찬가지에요. 발행년도도 오래되었고 사교계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지 춤에 관한 책은 아니라고요."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여기서 그나마 춤에 대해 그림이라도 있는 건 이 책 뿐이었는 걸."

"그리고 연회에서 꼭 춤을 춰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왜 그렇게 춤에 대해 집착하는 거에요. 평소처럼 테라스나 연회장 구석에서 술이나 마시면 될 것을 당신 답지 않게 안 하던걸 하려고....춤 신청이라도 받으셨어요?"

엘레나의 말에 데미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데미안에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노엘 인가요..?"

"그래."

그 대화를 끝으로 둘 사이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데미안은 여전히 아무말 없이 책을 읽고 있었고 엘레나는 그 옆에 앉아 데미안에게서 고개를 돌린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소리 없이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에 결국 먼저 입을 열게 된 것은 데미안이었다.

"내가 노엘이랑 춤을 추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겠다는 건 알겠는데 이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어떻게 황녀님의 춤 신청을 거절 할 수 있겠어."

"제가 당신이 노엘과 춤을 추는 것을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요."

"아니, 지금 네 행동에 다 드러나고 있거든. 그 아이를 아끼는 것은 잘 알겠는데 내가 좀 부족해보여도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봐서 좀 봐주면 안되겠니."

"노엘이라면 당신이 거절 했어도 아무말 없이 받아들였을 거에요."

"그래. 그랬겠지. 만약 그랬으면 나는 졸업 할때 까지 반에서 그녀의 원망어린 눈빛을 받았을 테지만 말이야."

"어차피 졸업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잖아요?"

"....원래 이런거에 대한 뒤끝은 좀 길게 남아. 애초에 그런 일을 안 만드는게 최선이고."

"그건 경험담인가요?"

"아니, 아버지한테서 들었어. 예전에 연회에서 춤 신청을 거절했다가 거절 당한 영애가 몇년이 지난 이후에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고 하더라. 뭐, 노엘이 그럴리는 없겠지만. 내 인간관계가 좁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만약 내가 그곳에서 꼭 춤을 춰야했다면 어차피 노엘 이외에 선택지는 없었다고. 그러니 딸아이를 달라는 소리는 안할테니 허락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하지만 데미안의 변명에도 여전히 엘레나는 마음에 들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어째서 엘레나가 그러는 것인지 그 이유를 데미안은 알 턱이 없었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감정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그것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 굳게 닫힌 입도 무의식을 막을 수는 없었고 그녀의 불만은 매우 작은 소리로 새어나오게 되었다.

"애초에 저는 당신의 선택지 위에 없었군요..."

"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데미안. 제가 연습상대가 되어드릴게요. 당신이 실수라도 노엘의 발을 밟는 일은 없도록 해야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손을 건내며 말하는 엘레나의 말에 데미안은 매우 얼떨떨해 보였다. 이내 그의 얼굴에는 당황이 아닌 걱정이 담기기 시작했고 그는 여전히 엘레나가 건낸 손을 잡지 않고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그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야 나는 '데미안'인걸."

"아직도 그런걸 신경쓰고 있었어요? 그럼 지금 제가 당신과 이렇게 마주보며 대화를 하고 있는건 어떻게 설명할건가요."

"첫만남에 다짜고짜 주먹을 날린게 누군데 그래. 알겠어. 너가 괜찮다면야. 그래도 일부러 내 발을 밟는 건 하지 말아줘."

데미안이 손을 잡자 그녀는 얇게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

내 감각은 지금 그 어느때 보다 예민해져 있다.

코 앞에 서 있는 그녀의 숨결이 그대로 내게 흘러들어온다. 몇센티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 우리는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고 내가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갔다가는 그녀와 닿게 될 정도로 우리의 거리는 가까웠다.

단순히 거리로만 따지자면 지금보다 가까웠던 적은 이전에도 몇번이고 있었지만 이렇게 서로를 가까이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닿을락 말락하는 엘레나와의 거리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발자국 몸을 움직일때 마다 혹여라도 그녀의 발을 밟지는 않을까 신경을 써야만 했다.

평소의 나였다면 그것은 눈 감고도 해낼 수 있을 정도 였지만 지금은 바로 눈 앞에 있는 엘레나가 있기 때문인지 머리 속 생각 대부분이 그녀로 채워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는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내 스스로 내 발을 밟는 것으로 잡념을 털어낼 수 밖에 없었다.

"데미안. 자꾸 자신의 발을 밟으시면 어떡해요. 발은 괜찮나요?"

"미안합니다. 그, 몸이 오늘따라 뜻대로 움직이지가 않는군요."

내 양손은 모두 그녀를 잡고 있는데 묶여 허벅지를 꼬집는 짓도 못한다.

나름대로 그녀의 미모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더니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것 같다. 자꾸만 그녀를 향해 다가가려는 내 발걸음을 막으려면 내가 내 발을 밟는 수 밖에 없었다.

계속 내가 발을 밟아대자 엘레나는 잠시 눈을 감더니 방법이 생각났다며 내게 말했다.

"데미안. 한번 눈을 감아보는 건 어때요?"

"하지만 그러면 제가 밟는게 제 발이 아니라 당신의 발이 될 수 도 있어요. 엘레나."

"괜찮아요. 그리고 데미안이 저에게 온전히 몸을 맡기면 그럴 일은 없을거에요."

결국 나는 엘레나의 말대로 눈을 감고 그녀의 손을 잡게 되었다. 시야가 가려지니 절로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와의 정확한 거리를 잴 수 없게 되었으니 눈을 떳을 때 보다 그녀와 부딪칠 수 있는 위험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천천히 제 호흡을 따라해봐요."

엘레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인다. 그 목소리를 따라 나는 가까이서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을 느끼며 그녀와 똑같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

나와 그녀의 숨결이 온전히 뒤섞여 전혀 분간이 되지 않게 되자 그녀가 나를 이끌며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잡이가 되어 주는 노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오직 엘레나 뿐, 그녀는 나를 움직이는 바람이었고 나는 그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새가 되어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꽤 오랜시간이 지난 것 같았음에도 내가 그녀의 발을 밟는 불상사는 눈을 감은 이후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시간의 흐름도 잊은채 그녀와의 춤에 빠져들게 되었다.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니 자신감이 조금 붙은 것인지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떳다.

그리고 눈을 뜨자 들어온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엘레나의 얼굴에 나는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그대로 발이 꼬여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나 진짜 춤 못추네.

***

엘레나가 떠나간 자리에 데미안은 떠나지 않고 혼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가 도와준 춤의 연습은 성공적이었다. 역시 그림으로만 보고 어정쩡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직접 짝지어 몸을 움직였던 편이 확실히 더 도움이 되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고 그녀의 움직임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기에 단 한번의 연습만으로 데미안은 춤이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을 할 수 있게 되어 엘레나와의 연습은 아주 짧게 끝났다.

데미안은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다 놓았다.

심장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소보다 더 격하게 뛰고 있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애써 가슴의 두근거림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계속해서 해보았지만 방금전의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심장은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버려야 한다. 버려야 하는데 말이지."

파혼 이후에 서로 없는 사람처럼 살 것이라 생각했던 두 사람은 미래를 바꾸기 위해 힘을 합쳤고 그렇게 엘레나와 데미안은 자신들 만이 가지고 있던 여러 비밀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미래를 바꾸었다.

죽었어야만 했던 황녀를 살리고 외신을 따르는 이교도들이 아카데미에 침범하는 것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게 존재하는 법이다.

그녀와 이러한 관계가 된 것은 그저 의견이 같았기에 생긴 우연이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을 생각하는 것은 과욕이며 오만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데미안 크라우스라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27화 > 뜻밖의 손님들 (1)

요하임이 말했던 연회 날이 되자 겨울성의 문은 아침부터 들어오는 마차들로 인해 복작거렸다.

에델바이스 가문은 북부의 맹주일 뿐 아니라 대륙에 일곱개 밖에 없는 마탑의 주인이었기에 이번 연회에 단순히 가문 휘하의 가신들만이 참석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겨울성 앞에 모여든 이들은 많았다.

물론 성이 그 사람들을 전부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는 내가 걱정할 바가 아니다. 어차피 저들 중 연회장에 들어올 수 있는 이는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진정으로 내가 걱정해야 할 일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대한 것일 거다.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엘레나와의 연습으로 나는 능숙하다고는 못해도 춤이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을 해내는데 성공했다.

어차피 엘레나 이외에 다른 사람과 춤을 출 일이 생기지는 않을테니 그녀와 합만 어느정도 맞춰둔다면 적어도 그자리에서 망신살 일은 없을 것이다.

"많이 부담스러워 보이십니다. 도련님."

"마음이 편하지는 않죠."

나는 내 오른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며 켄의 말에 답했다.

반지에 새겨진 작은 용은 입에 붉은 보석 하나를 물고 있었다.

내게 이런 취향의 반지를 끼는 취미는 없었지만 앞으로 있을 자리를 생각하면 끼기 싫어도 손에 끼워 넣어야만 했다.

만든이의 취향이 심히 의심되는 이 반지는 단순한 반지가 아닌 크라우스의 주인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물품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원칙대로라면 크라우스의 소가주 직책을 달고 있는 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오직 가주를 상징하는 물건이지만 아버지께서는 내가 메로힘으로 떠나기 전에 반지를 내게 맡기셨다.

그때는 왜 그러셨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으나 오늘 있을 연회를 생각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왜 반지를 맡기셨는지 설명이 된다.

반지는 일종의 증표다.

내가 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위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식이며 크라우스와 척을 질것이 아니라면 찝쩍대지 말고 꺼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번 연회에 참가하는 이들의 눈이 옹이구멍이 아닌 이상 이 반지를 못알아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제국에서 손 꼽히는 권력자의 신물(神物)을 못 알아볼 정도로 지식이 얕은이가 연회에 참가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재밌는 일이겠지만 애초에 연회의 주최자인 요하임이 그런 사람을 연회장에 발을 들이는 것을 허락했을리 없었다.

이렇듯 반지는 나의 신분을 남들에게 알려주는 물건이기도 하였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사실 내 위치를 알리는데 사용하기에 이 반지는 너무 과분하다고 할 수 있다.

연회를 시작할 때 요하임은 나를 대중에게 누구인지 소개할 것이고 내가 입고 있는 정복에 새겨진 가문의 문장만 보더라도 내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이 반지를 손에 끼우지 않더라도 내가 크라우스인지 알게 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소리다.

그러니 아버지가 이것을 내게 맡긴 것은 대중이 아닌 나에게 전하는 메세지다.

이 반지를 가지고 있는 동안 크라우스를 대표하는 것은 아서 크라우스가 아닌 데미안 크라우스라는 것을 기억하고, 가문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른 이들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그것을 보여달라는 뜻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와 같은 뜻인데, 아버지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나는 아버지가 내게 건낸 반지에 담긴 뜻 보다는 오늘 있을 엘레나와의 춤이 더 신경 쓰였다.

"켄. 역시 춤을 안 출수는 없겠죠?"

"지금까지 아가씨와 열심히 연습하셔 놓고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은 충분히 잘 하시고 계신답니다. 그러니 걱정은 모두 내려 놓으시고 오늘 있을 연회를 즐기도록 하세요."

켄은 웃으며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켄의 위로에도 나는 고민을 내려 놓을 수 없었다.

확실히 엘레나와의 연습으로 인해 나의 실력은 이전과 비교한다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보는 이들의 몫이었다.

나야 어떤 말을 듣던간에 별 상관은 없다만 나 때문에 엘레나에게 악영향이 가도 좋다는 것은 아니었기에 걱정을 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하지만 연회의 시작은 코 앞으로 다가왔고 내게 시간을 되돌리는 재주 같은 것은 없었기에 나는 여태까지 해왔던 그녀와의 연습을 떠올리며 엘레나를 맞이하러 방을 나섰다.

이번 연회는 나와 엘레나의 약혼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기에 연회장에 입장할 때 내가 그녀를 에스코트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겨울성의 구조를 빠삭하게 알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틀간 방 안에서 춤 연습만 한 것은 아닌지라 그녀가 있는 방까지의 가는 길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방 문 앞에서자 나는 방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여러번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삐둘어진 곳은 없는지 다시 한번 더 옷차림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이전과 다를게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나는 문을 작게 두드리며 그녀를 불렀다.

"엘레나. 지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와도 돼요."

엘레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문 틈으로 방을 들여다 보는 순간 나는 이전과 같은 데자뷰를 느끼며 방으로 들어오는 것도 잊어버린채 멍하니 서있는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아침의 이실리아관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와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더 강렬한 빛이 내 눈에 비춰졌다.

이곳에는 그때와 같은 햇빛은 없었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별처럼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내가 입고 있는 검은빛의 크라우스 가문의 정복과 대비되는 순백색의 드레스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어우러져 반짝이고 있었고 그렇게 지상에 내려온 별로 변모한 그녀의 모습은 내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서로의 모습을 본 우리는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어떤가요?"

엘레나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옴과 동시에 멈춰있던 머리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제야 내가 무슨 추태를 부리고 있던 것인지 깨달았고 나는 서둘러 그녀를 향해 있던 시선을 수습하고는 그녀에게 손을 건내며 말했다.

"무척 아름답습니다."

"다, 다행이네요! 너무 과한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데미안이 그렇게 말해준다면 안심이에요..."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자 나는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아파하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내 손을 잡고 있는 엘레나 역시 내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손에 힘을 주어왔다.

우리는 그렇게 손을 맞잡고 겨울성의 복도를 걸었다.

내게 가까이 붙은 그녀에게서는 라벤더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손을 타고 느껴지는 그녀의 맥박과 체취에 여태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걱정들은 그녀의 대한 생각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연회장으로 가지 않고 이렇게 엘레나와 계속 걷는 것은 어떨까.

나는 그리 생각하며 연회장을 향해서 아쉬운 발걸음을 내딛는 수 밖에 없었다.

***

눈 앞의 거울 속에는 새하얀 순백색의 소녀가 한명 서 있었다.

"역시 마담 샬롯이야."

그녀가 만들어낸 드레스는 언제나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자신의 외모를 과신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만든 이 드레스가 있다면 오늘 만큼은 확실하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거기에 더불어 헤일리가 몇시간 동안 붙어서 꾸며준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가 보아도 이 이상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엘레나. 지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서둘러 그에게 들어오라 말했다.

연회가 있기 전 이틀간 그와 춤 연습을 하며 그에게 자신의 외모가 통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근래 들어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만큼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과 그의 거리가 줄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서로의 숨결이 곧바로 느껴지는 그 거리에서 나와 눈이 마주칠때 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희미하게 얼굴을 붉히는 그의 모습은 그가 내게 빠져들고 있다는 확신과 함께 성취감을 주었다.

그러니 지금 이 모습이 확실한 결정타가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은 스스로가 보아도 완벽했고 요즘들어 자신에 대한 면역력이 약해진 그라면 필히 그 어느때보다 동요하게 될 것임을 자신했다.

다만 여기서 내가 한가지 놓치고 있던 것이 있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 부터 그에게 빠져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밤하늘 같이 어두운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검은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 정복은 팔에 크라우스를 상징하는 검을 휘감은 용이 금사로 자수 되어 있었다. 이전에도 그가 처음 나를 만났을 때 입었던 옷으로, 그가 주로 즐겨입는 옷이었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특유의 절제된 분위기와 함께 이전과는 다르게 반쯤 이마를 드러내어 용을 닮은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이는 그의 모습은 내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던 나는 방 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모습에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우리는 마치 처음 부터 약속이라도 했던 것 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은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차려! 엘레나 에델바이스!!'

"어..어떤가요?"

정적 속에서 가까스로 정신줄을 부여 잡은 나는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고 그는 잠시 눈을 몇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무척 아름답습니다."

"다, 다행이네요! 너무 과한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데미안이 그렇게 말해준다면 안심이에요..."

그렇게 말한 나는 그의 손을 잡고는 그에게 기대었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미 정리가 되었는지 처음과 같은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런 멍청한 여자 같으니.

그가 나를 보고 느꼈을 떨림을 여태 자신은 그를 보며 몇번이고 느껴왔는데 말이다. 연회를 위해서 준비했을 것이라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았다니. 이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오늘 그에게 딱히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그저 헤어스타일에 색 다른 변화를 주었다는 것뿐, 그런데 열심히 공들여 준비해 온 자신과 무승부라니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이런 패배는 익숙한 일이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래도 자신에게 눈을 때지 못하던 그의 모습을 보았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할때, 자신의 손을 붙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는 것이 느껴졌다.

힘이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에 담긴 온기가 더 확실하게 느껴져 기분이 좋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갑자기 손에 힘을 주었을까.

그것에 대한 의문은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심장 소리가 답이 되었다.

그와 손을 잡고 있는 지금, 내 심장은 어느때 보다 거세게 뛰고 있었지만 내 손을 타고 느껴지는 떨림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닌 손을 잡고 있는 그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그에게 기대어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여태까지 나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 중 지금 가장 두근거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소리없이 작게 웃고는 내 손을 붙잡고 있는 그 손을 꽉 잡아쥐었다.

< 28화 > 뜻밖의 손님들 (2)

안타깝게도 내가 엘레나를 데리고 길을 벗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발을 끌며 느리게 걸었기 때문인가, 연회장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가장 높은 상석에는 이 겨울성의 주인이자 연회의 주최자인 요하임이 앉아있었고 그와 조금이라도 대화를 해보기 위해 열심히 꼬리를 흔들고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저마다 나름대로 연회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주인공이 등장할 시간이다.

문이 열리며 나와 엘레나가 연회장 안으로 발을 들이자 이곳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아직 열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별과 같이 빛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괜히 내가 문을 열자마자 그녀의 모습을 보고 얼탄 것이 아니란 말이다.

엘레나를 향해서 시선이 집중되니 자동적으로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나에게도 사람들의 시선이 닿기 시작했다. 요하임이 여기에 있는 이들을 초대할때 어떤 말로 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들이 내가 크라우스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야 지금 나를 향한 시선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들을 보면 감히 크라우스의 후계자에게 보낼 만한 것들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담기는 감정들은 어쩔 수 없다만 지금 이들의 눈빛에 담긴 감정들은 그리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게 그런 눈을 하는 이들이 아직 감정을 숨기기에는 미숙한 십대들이라는 것을 보면 적어도 여기에 있는 이들 중 상식이 없는 이는 없는 모양이다. 그들의 보호자로 보이는 자들은 복마전이나 다름 없는 사교계에서 몇번이고 구른 이들 답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했다.

그럼에도 나를 볼때마다 조금씩 묻어나오는 감정을 내가 못 느꼈던 것은 아니었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나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채 엘레나의 손을 꼭 쥐고는 저 멀리 상석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며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요하임을 향해 걸어갔다.

그를 향해 가는 길을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갈라진 홍해와 같이 열린 길을 통해 우리는 요하임의 앞에 도착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향해 내려오더니 내 어깨를 잡고는 아쉽다는 얼굴을 하면서 내게 나직이 말을 걸었다.

"아쉽군. 자네는 어떻게 내 딸을 바로 옆에 두고도 그렇게 여유로워 보일 수 있는 건가?"

"제가 얼굴에 티가 잘 안나는 편이라. 아니, 그러면 꼴사납게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채로 이들 앞에 선 모습을 보고 싶으셨던 겁니까? 저는 지금 공작님 덕분에 사교계에 첫데뷔를 하게 생겼는데, 성격도 참 나쁘십니다."

내 대답에 요하임은 작게 웃더니 불만어린 내 시선을 가볍게 흘려내었다.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긴 했지. 네 녀석은 아서 그 놈을 똑 닮았거든. 그래서 간만에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거라 생각..."

"아버지?"

요하임과 내 귀에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

어쩐지 아무리 북부라지만 실내인데도 왜 이렇게 손이 시렵나 했더니 이전처럼 엘레나의 마력이 그녀의 감정과 동화되어 분출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때와 같이 연회장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를 눈치 챌 수 있던 것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나와 가까이에 있는 요하임 뿐이었다.

요하임은 딸의 북풍한설과도 같이 차가운 눈빛을 보자마자 헛기침을 하더니 내게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는 밑에 있는 이들에게로 서둘리 시선을 돌렸다.

아, 도망쳤다.

짓궂은 장인 어른을 쫓아내준 엘레나는 요하임이 시선을 거둔 틈을 타 아무말 없이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를 보내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지 못한채 그녀와 마찬가지로 윙크로 답했다.

하지만 요하임이 우리에게서 시선을 돌린것은 잠시뿐이었고 그는 연회장을 한번 훑어보더니 곧바로 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의 신호를 받은 나는 엘레나와 함께 그의 옆에 섰고 연회장의 모든 이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내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을 때와는 다른 무거운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불청객이 껴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내가 부른 이들은 모두 모인것 같군."

요하임의 말 한마디에 연회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대중들을 짓누르는 힘이 있었다. 지금의 이 자리에 서 있는 그는 팔불출 아버지가 아닌 북부의 지배자이자 대륙에 일곱개 밖에 없는 마탑의 주인이었으니 나를 대할 때와 똑같은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웠다.

'불청객?'

하지만 지금 내 머리 속을 채우는 것은 달라진 요하임의 모습보다는 그가 말한 '불청객'의 정체에 대해서였다. 밑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요하임의 기세에 짓눌려 말을 꺼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그에게 굳이 그가 말한 '불청객'의 정체에 대해서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약 그 '불청객'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위해가 된다면 요하임은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말을 꺼내지 않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그냥 듣는 사람 꼬우라고 일부러 말했다는 것인데...설마 아버지인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아무리 아버지라고는 해도 이틀안에 사르함에서 메로힘까지 오시기에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연회에 참석하려고 하셨으면 처음부터 우리와 같이 이동을 하셨겠지 그런 생고생을 하면서 일부러 메로힘에 왔을리 없다.

무엇보다 내가 아버지가 오셨다면 알아채지 못했을리 없다. 아무리 아버지께서 소드 마스터라는 지고의 경지에 서 계신다고는 하나 나 또한 그에 미치지는 못해도 어느정도 실력을 자신해도 될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내가 아버지와 몇년을 넘게 검을 나누었는데 기척 하나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라는 소린데. 지금 당장 내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굳이 정체를 알지 않아도 될 '불청객'에게 왜 이리 신경이 쓰이는 건지. 나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모르겠지만 불확실하기는 해도 내 감은 내게 이리 말해주고 있었다. 그 '불청객'이라는 사람과 엮이면 심히 앞날이 피곤해 질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미 눈치챈 이들도 있겠지만 내가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내 딸 엘레나의 약혼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라네.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이 아이가 엘레나와 약혼하게 된 아이지."

그래도 지금은 정체불명의 불청객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다. 개인적인 호기심과 불안함은 이제 그만 집어 넣도록 하자.

나를 소개하는 요하임의 목소리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분위기 만큼은 달라졌다는 사실은 듣는 이들에게 있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잡념을 털어낸 나는 나를 향해 있는 시선들을 똑바로 마주하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번에 엘레나 에델바이스 양과 약혼하게 된 데미안 크라우스라고 합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

하지만 내력을 담아 말한 말은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의 귀에 닿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귓가에서 곧바로 울리는 내 목소리에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내 입에서 나온 크라우스의 이름에 놀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소개에 이곳에 모인 이들 상당수가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가장 놀란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나에게 노골적인 눈길을 주던 십대 남아들이었다.

검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이들일수록 제국을 건국한 용사와 더불어 회자되는 크라우스의 시조에 대한 전설을 모를 수가 없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용이 실존하는 이 세계일수록 이 세상에 유일한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에 대한 전설은 에스텔리아 제국의 건국 신화와 비슷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문에 그런 전설이 있는지 알게 된 것은 데미안에게 빙의한 이후의 이야기였지만, 그야 책에 적혀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알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어차피 소설이란게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 중심으로 전개 되는 것이지, 초반에 탈락하는 악역이자 이후에 단 한번 정도 밖에 얼굴을 안 비치는 크라우스 가문에 얽힌 전설 따위 독자들이 알 수 있을리 없었다.

아무튼 그와는 별개로 크라우스의 오래된 전설 말고도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버린 대륙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현 크라우스의 가주이자 나의 아버지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기에 저들은 언제 그랬냐는듯 나를 향했던 눈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나는 굳이 그런 이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해야할 말을 묵묵히 이어나갈 뿐이었다.

"크라우스와 에델바이스는 오랜시간 서로에게 있어 든든한 우방이었지요. 그 인연이 저와 엘레나 양의 약혼으로 이어지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 말에 거짓은 없었다.

며칠전 까지만 해도 파혼에 목 매던 놈이기는 했어도 그녀와 약혼을 하게 되어 기쁘다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원작 남주 후보 녀석들만 해도 그녀와 약혼관계까지 간 이들은 없지 않았는가.

"물론 단순한 말로는 그 마음을 표현하기에 부족하겠지요. 그러니 저, 데미안 크라우스는 지금 이 자리에서 크라우스의 가주 대리라는 이름 하에 이 약혼을 기점으로 크라우스는 앞으로도 영원히 에델바이스와 함께 하겠다는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내 손가락에 걸려있는 반지는 크라우스의 가주를 상징하는 신물.

자리가 자리인 만큼 내가 고작 열여섯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라고 하여도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말은 실제로 그와 같은 효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말은 저렇게 거창하게 했어도 이것은 크라우스는 앞으로도 에델바이스와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겠다는 정도의 의미 밖에 없다.

그래도 지금 여기에 있는 이들의 머릿속에 나라는 인간이 누구인지 각인 시켜주는 것에는 이보다 확실한 것은 없었다.

가문과 가문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가주만의 권한. 더군다나 나의 말에 요하임이 얌전히 있다는 것을 보았다면 그들은 단순히 나를 엘레나의 약혼자로서만 생각하면 안되었다.

'나와 당신들을 동등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라는 걸 알게 해주는데 가문과 직위만한게 없다. 이 정도면 반지를 맡기신 아버지께서도 충분히 합격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나의 짧은 자기소개는 사람들의 박수 갈채를 받으며 끝이 났다.

약혼에 대해서 이견을 내고 싶어 하던 이들이 있더라 하더라도 자신의 주제를 알고 있다면 설령 에델바이스의 가신이라 할지라도 말을 꺼내서는 안될 자리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이도 이 자리에 서 있는 이들 중 낄 곳 안 낄 곳을 파악하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멎자, 연회장은 미리 준비된 악단들이 연주하는 음악소리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연주의 시작과 함께 요하임의 연회를 시작하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미리 준비라도 해둔건지 연회장의 많은 이들이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이미 나는 선약이 있는 몸이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내게 살며시 웃으며 말을 걸었다.

"데미안?"

"네. 알고 있어요. 흠, 흠...엘레나. 부디 저에게 당신과 춤을 한 곡 출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

"데미안 여기에 있으세요. 제가 마실 것 좀 가져올게요."

"아니, 괜찮습니다.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아까 제 앞으로 넘어질 뻔한 분이 누군데 그래요? 그냥 얌전히 여기 앉아 계세요."

"그건..."

내 말이 끝이 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발코니를 나와 마실것을 가지러 떠났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난간에 등을 기대고는 그녀가 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저 멀리서 불어오는 메로힘의 차가운 바람은 뜨거워진 얼굴을 식혀준다.

여태껏 연습한게 있던 만큼 오늘 그녀와의 춤을 출때 남들에게 추태라고 할 만한 짓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곡이 끝나자 다른 이들이 우리를 향해서 박수를 쳐주었으니 성공적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게는 아니었다.

춤을 추는 내내 나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춤을 배웠던 첫날밤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름다운 드레스와 풀무장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완벽하게 꾸며진 그녀의 미모는 내가 이틀간 연습을 통해 적응했다고 자신한 나를 완벽히 부숴버렸다.

그래도 춤을 추는 동안 실수를 저지르는 일은 없었지만 하필이면 곡이 끝났다는 것에 순간 적으로 발에 힘이 풀려 그녀에게로 몸이 쏠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남들 눈에는 춤이 끝나자마자 내가 그녀를 안은 것 처럼 보인 모양이지만 누구보다 가까이에 있던 그녀만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냐. 이 녀석아."

갑자기 내 귀에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내가 마음이 풀어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주변에 있던 이들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각을 죽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경계심에 서둘러 검을 꺼낼 준비를 하였지만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녀석은 그러지 말라며 손을 흔들어대면서 검을 꺼내려는 내 행동을 만류했다.

"얌마! 그건 쓰지마!! 여기서 드래곤 하트의 마력을 사용했다가는 요하임 녀석 뿐만 아니라 아서 그 자식한테도 알려진다고!!! 나는 단순히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왔다 이 말이야."

"당신은 누굽니까."

나는 반지에 오러를 불어넣는 것을 멈추고는 그에게 물었다.

이 순간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 눈 앞에 있는 이가 요하임이 말했다는 '불청객'이라는 사실 하나 뿐. 그럼에도 여전히 그에 대한 경계심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곁에 나타나서 말을 거는 이를 신뢰할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하. 녀석. 저 재수 없는 눈빛이랑 얼굴은 진짜로 아서 그 자식을 빼닮았구만. 그래, 그렇게 궁금하다면 알려주도록 하지!"

아, 하나 더 알아냈다. 나를 보면서 아버지 이야기를 하거나, 과장된 몸짓을 하면서 말하는게 딱봐도 아버지나 요하임의 지인이다.

그 남자는 검은색 로브의 후드를 벗어 던지더니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연회장을 향해 달려갔다.

"나의 이름은 프란츠 에르투웬!! 일곱 마탑 중 하나인 황혼의 탑의 탑주이자! 에르투웬 가문의 가주!!...어? 야!! 어디가는 거야?!! 사람이 소개하는 건 끝까지 들어야지!!! 아니 무슨 이런것 까지 지 애비를 닮은...."

뒤에서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말들은 전혀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사람의 얼굴만이 떠올라 있었다.

저 해질녘의 노을을 닮은 그 주홍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진 인물은 내가 알기로는 단 두 사람 밖에 없었기에, 나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레나가 있을 연회장의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내 생각대로 머릿속에 있던 그 인물은 엘레나의 앞에 서 있었다.

"리처드 에르투웬."

1년은 지나고서야 만날거라 생각했던 원작의 남주 후보 중 한 사람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 29화 > 뜻밖의 손님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