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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 로맨스 판타지의 악당이 되었습니다

작가 : G식이

소개 : 로맨스 판타지 속 초반 악역에 빙의 해버렸다. 여주에게 파혼 당하고 몰락하는 그런 경험치몹 A로 말이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녀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태그 : #판타지 #순애 #빙의 #회귀

< 1화 > 파혼을 위하여 (1)

로맨스 판타지.

흔히들 줄여서 '로판' 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판타지와 무협같은 웹소설의 장르 중 하나이다. 앞서 말한 판타지와의 차이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판타지 앞에 로맨스가 붙은 만큼 주 타깃층을 여성으로 한다는 것 외에는 별 차이점이 없다.

대체적으로 판타지의 장르의 주인공들이 주요 독자층인 남성들의 이입을 쉽게 하기 위해 남성 주인공을 주로 차용한다면 로맨스 판타지는 마찬가지로 여성 주인공을 차용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주인공이 여자면 로판, 남자면 그냥 판타지다.

물론 장르의 이름에 '로맨스'가 들어가는 만큼 연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야 진짜 로맨스 판타지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판타지 속 주인공이 하렘을 차리거나 무슨 일이든 척척해내는 이야기의 성별만 반전시키면 그것이 로판이 되는 것도 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기에 어떤 로맨스 판타지는 인물 중심의 이야기에 치중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탄탄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진짜 '판타지'를 기반으로 둔 여주 중심의 소설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런점 때문에 판타지 장르 마니아인 내가 로맨스 판타지를 읽었던 것이었고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읽는 거였는데."

요즘 소설들의 클리셰가 무엇인가.

바로 회귀, 빙의, 환생. 줄여서 회빙환이다.

작품 내에서 최강자의 반열에 올랐거나 또는 완전히 실패한 주인공이 다시 성공하기 위해 하는 회귀. 원래는 작품 속 등장하는 책이나 게임의 독자, 플레이어였다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빙의. 마지막으로 환생트럭 맞고 현세에서 죽어 이세계 전생을 당하는게 환생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클리셰에 당하고 말았다.

독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생각.

'소설 속에 들어가 주인공이 되어보고 싶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분명히 있었다. 물론 생각만 했지 간절히 바란적은 없다만. 애석하게도 신이라는 작자는 내 그 찰나에 불가한 생각이 일생일대의 소원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어쩌면 제비뽑기를 했는데 우연히 얻어걸린 걸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사람을 통보없이 이세계로 보내 버릴 수 있겠나.

솔직히 글로는 많이 읽어 보았어도 막상 현실이 되어 '눈 떠보니 이세계?'를 당하고 나면 당사자로서는 심히 당황스럽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혼란스럽기도 하고.

빙의 5년 차인 나로서는 이미 전부 적응이 끝난 이야기지만 나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아 일어나자 마자 볼을 꼬집어 보기도 하고 그랬다.

이후 아버지에게 훈련을 빙자한 아동폭력을 몇년간 당하고 보니 그 고통이, 오감으로 느껴져오는 세상의 생동감이 이것을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말해주었다. 조금 일찍 깨달을 걸 그랬나.

아무튼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 부터는 나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가문의 비전검술도 익히고 가문 내에서 교육 받으라는 것도 순순히 잘 듣고 있으며 집안 어른들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은 물론 나보다 아랫사람에 위치한 이들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솔직히 신분제가 없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소시민으로 살아온 나에게는 꽤나 고역이었다만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확실히 몇년을 그리 지내니 약간의 찝찝함은 남아도 적응이 되기는 하였다.

"도련님 많이 긴장하신 것 같아 보이십니다. 단순히 서로 얼굴 한번 보는 것이니 그렇게 긴장하실 일은 아니라 생각됩니다만."

"아무리 구두라고는 하지만 제 약혼자에요. 켄. 맨날 보는 사라나 클로이와는 다르다고요."

내 옆에 서 있는 노집사는 싱긋 웃으며 '그러시겠죠.' 라고 말하고는 공사장에서 사용하는 착암기 마냥 무시무시한 속도로 떨고 있는 내 무릎을 지긋이 눌렀다.

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히 보인다. 분명 약혼자와 만난다는 생각에 두근거림을 주체하지 못하는 혈기왕성한 십대 꼬맹이로 보고 있겠지. 하물며 그 상대가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에델바이스 가의 장녀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건 틀렸다.

지금 내가 떨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예쁜 약혼자를 만난다는 설렘이 아닌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 두려움에 의해 떨고 있는 것이었기에.

그녀에 대한 소문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에델바이스 가의 흰백합. 황제 마저 칭찬한 미모의 소유자. 절벽 위에 핀 가련한 꽃 등등 죄다 그녀의 미모를 찬사하는 말들 뿐이었지만 딱히 내가 두려워 할 소문들은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미모 뿐만 아니라 인성에 대해서도 꽃과 같다고 찬사하는 이들이 있으니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다름아닌 내가 보증 할 수 있다.

그런 완전무결한 그녀를 내가 두려워 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

그녀가 이 세상. <공녀는 사랑받는다.>의 주인공이었으니까.

***

지금은 나이기도 하지만 내가 빙의한 인물. 데미안 크라우스는 소설 속에서 주연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삼류 악역이 적당하겠지.

제국 3대 무가 중 하나인 크라우스 백작가의 후계자이자 제국에서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한 엘레나 에델바이스의 약혼자.

스팩 하나만 본다면 어디 판타지의 주인공급 스팩이다.

짱짱한 배경에 아름다운 약혼녀까지. 거기에 세간에 천재는 아니지만 수재라고는 불릴 수 있을 정도의 무재(武材)를 타고 났으니 남부러울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성이 그 모든걸 말아먹는다.

어디하나 부족한 곳 없는 가문. 남들이 떠받들어 주는 재능.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약혼녀까지. 이 삼신기를 태어나자마자 가진 이 녀석은 지독하게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제멋대로였다.

그야말로 망나니 그 자체.

만약 데미안이 로판 속 남자 주인공이었다면 이 모든 단점들이 여주인공의 손에 의해 장점으로 탈바꿈되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데미안은 첫번째 남주 후보의 무력을 판별해주는 스카우터이자 여주인공이 가문의 힘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자중하고 또 자중했다.

원작의 데미안이 싸가지가 없어서 문제가 되었다면 나는 싸가지 있게 행동하면 될 일이다. 여주인공과의 약혼도 단지 집안 어르신들이 구두로 한 언약이었을 뿐 딱히 법적인 효력을 가진것도 아닌지라 비교적 쉽게 파할 수 있다.

어느 망나니 인식개변 소설 처럼 주인공이 될 마음은 추호도 없다.

훗날 제국제일검이라 불릴 소드마스터나 이계의 힘을 끌어 사용한다는 황혼의 마탑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제국의 황태자까지.

그녀의 곁에 있기만 하여도 이런 강자들과 피튀기게 싸우게 될 것이고 소설 초반부에 퇴장하는 악역에 불과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소설 속의 데미안이 그랬듯 무대에서 빠르게 퇴장당하고 말 것이다.

애초에 승산이 없는 싸움은 하는게 아닐 뿐더러 삼류 악역에 빙의된 몸으로서 내 주제는 잘 알고 있기에 주제 파악하면서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내 소소한 꿈이다.

조연으로써, 그것도 초반에 퇴장할 악역이 약혼자로서 여주인공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어불성설. 필시 온갖 사건사고에 휘말릴게 뻔하고 그것은 내 꿈과는 완전히 정반대 되는 삶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무대 위에 올라서지 않으면 된다. 그리하면 죽을일도 사건에 휘말리지도 않을터.

그녀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반드시 이 약혼을 파혼해야만 한다.

< 2화 > 파혼을 위하여 (2)

나는 지금 태어난 이래 가장 크게 긴장하고 있다.

두근두근ㅡ

이렇게 터질듯이 펌프질하는 심장이 그 증거다. 아버지와 함께 나간 첫 마수사냥에서도 이리도 크게 뛴적이 없는데 저 여자가 눈앞에 있는 것 만으로도 내 몸은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되는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아는지 본능적으로 전신의 감각을 극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크라우스 백작가의 장남이 꼴사납게 레이디 앞에서 긴장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간신히 예민해진 감각들을 잠재우고는 나는 눈앞의 여인을 마주보았다.

눈과 같이 새하얗고 고운 순백색의 피부와 긴 머리. 잘 세공된 자수정을 그대로 박아 넣은듯 맑고 투명한 자안(紫眼). 저 닫혀있는 입꼬리가 살짝이라도 올라가는 것 만으로도 주변에 있는 남자들의 헛된 상상을 일으킬 것이다.

가히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외모.

글로만 묘사되었던 모든 것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보니 그간 엘레나 에델바이스의 외모를 제멋대로 상상한 내 상상력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 수려한 미모에 나 또한 순간 여러 잡생각이 들었지만 확고한 목적의식 덕분인지 금세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를 그렇게 경계하고 있던 나조차 이럴텐데 그야말로 무방비에 가까웠던 원작 남자들은 어땠을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다.

짜식들 그렇게 간이고 쓸개고 죄다 빼주는 이유가 있었구만.

옆에 서 있는 세상만사 다 겪은 켄 마저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혈기왕성한 십대 놈들이라 한다면 말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꿀을 눈 앞에 둔 벌처럼 왱왱되며 몰려 들었을 테지. 실제로 데미안과 파혼한 그 날 이후에 아카데미에 있던 대다수의 남자들에게 구혼장이 날아왔다고 적혀있었으니.

이제는 아카데미 입학식부터 편지 테러를 당하겠구만.

"반갑습니다. 에델바이스 영애. 저는 크라우스 가의 장남 데미안 크라우스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크라우스 공자. 에델바이스 가의 장녀 엘레나 에델바이스에요."

약간 머뭇거리기는 하였어도 싱긋 웃으며 내 인사에 화답하는 엘레나. 그 미소에 기껏 얌전히 만든 심장에 다이너마이트가 터졌다. 역시 약혼은 되도록 빨리 파혼하는게 좋겠다. 이러다가 진짜 그녀에게 빠져 무슨 헛짓거리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멍해 있는 켄의 구두를 밟아 나가라고 신호를 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켄은 한껏 오해한 얼굴로 내게 윙크를 하며 엘레나가 데리고 온 메이드와 함께 문을 나섰다.

그 둘이 나가자 이제 방에는 남아있는 것은 나와 엘레나 단 둘.

조금 마음 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둘을 내보낸 것은 좋았지만 막상 단 둘이 남으니 내가 다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그 긴장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차를 찻잔에 따라 그녀에게 넘기고는 나도 한잔 따라 가볍게 입가심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가 약혼관계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죠? 에델바이스 영애."

제국에서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녀와 제국의 검술명가의 자제라는 지위 외에는 알려진게 없는 나와의 약혼. 그것도 태어나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 둘이 말마따나 왜 약혼했는지 알 수 없을 이 기묘한 관계에는 사소한 뒷배경이 있다.

나의 아버지인 크라우스 가문의 가주 리처드 크라우스 백작과 그녀의 아버지인 에델바이스 가문의 가주 요하임 에델바이스 공작은 오랜 친구 관계다.

귀족 가문 사이에서 정략혼이 오고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 이 시대에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둘은 '나중에 니 자식이랑 내 자식이랑 결혼하자!' 등의 약속을 하였고 장남으로 나 데미안, 저쪽은 엘레나가 태어나자 둘은 좋다며 우리 둘을 약혼시켰다.

하지만 그 둘도 한번 밖에 없을 결혼에 자식의 의견은 존중되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는지 구두로 약속하였고 아직 정식 약혼은 치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는 정식으로 약혼식을 치르기 전에 만남을 가지는 자리다. 원작에서는 이런 설명은 일도 없이 둘이 이미 정식으로 약혼식까지 치른 사이라고 나오지만 뭐, 나로서는 좋은 편이다. 운이 좋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약혼을 파 할 수도 있을 테니.

데미안 이 녀석이 원작 시작전이라고 해도 싸가지가 있을리가 없는데 그와 직접 만나보고도 약혼을 한 그녀의 선택에 약간의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녀의 성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네..."

내 질문에 작게 대답하고는 내가 따라 준 찻잔을 만지작 거리기만 하고 있는 그녀.

이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소설 초반의 그녀는 자기주장이 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소설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여주가 계속해서 이런 성격이었으면 고구마 100% 였기에 사건이 전개되며 이 성격 또한 고쳐지게 되는데 그 계기가 나와의 파혼이라는 점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학대를 당해서 이런 성격이 된 것은 아니다. 요하임 에델바이스는 딸바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팔불출이었고 그녀의 어머니 또한 자상하고 좋은 어머니였다고 한다.

인간의 성격이 단순히 자라온 환경 하나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이런 모습은 태어날 때부터 지닌 성정이었다.

본연의 외모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남들이 떠받들어 주는 삶이었지만 천성이 유약한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부담이 되었고 그녀를 더욱 작게 만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이었던 데미안과 비교하자면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할 말 못할 말 다하는 데미안의 말에 따랐던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원작에서 데미안은 그녀를 보자마자 약혼하자고 말했을 것이고 유약한 엘레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약혼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특유의 고귀한 분위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어 했는데 빠꾸없는 데미안의 행동력 때문에 성사된 약혼이라니 어찌보면 코메디나 다름 없지만 이런 성격은 이후 데미안과의 파혼이 있고 난 후 달라져 자신에게 오는 구혼장을 모두 거절 할 수 있을 정도는 되게 된다.

아무말도 못하던 병아리가 삐약ㅡ 하고 울 수 있게 된 정도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녀는 그 삐약하고 우는 것조차 못하는 상태다.

이 경우에는 어찌해야 하나.

원작에서 그녀를 바꾼것은 데미안에게 제멋대로 휘둘리는 게 싫다는 부정적인 감정에 의해서다.

단지 그 하나 뿐이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테지만 '데미안'이 그 방아쇠가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원작의 데미안 마냥 싸가지 없이 행동하며 그녀가 바뀔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하는가?

그건 내가 싫다.

무슨 스스로 자폭 스위치를 누르러 가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녀를 위한 삶이 아닌 나를 위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 몸이다.

어차피 내가 나서지 않아도 그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쌓게 해줄 떨거지들은 아카데미에 널려있을 것이고 그것을 원작의 남자 주인공 후보놈들이 알아서 처리해 줄 거다. 나는 그녀에게 있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이미지를 주는 것과 이 약혼을 파혼하기만 하면 된다.

"....."

"....."

우선 대화는 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는 필요할 것 같다.

내 쪽에서 아무말이 없으니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대화를 하기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우물쭈물 하며 찻잔을 만지작 거리고만 있을 뿐이다. 것보다 저거 아직도 안 마셨네...

하는 수 없지. 내가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수 밖에.

나는 옆에 차와 함께 준비되어 있던 은색 푸드커버를 걷어냈다.

그 안에는 여러 디저트들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달달해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원작에서 단것을 좋아한다는 언급 때문에 내가 미리 준비해둔 디저트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커버를 걷어내자 눈에 들어오는 디저트의 모습에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게 보였으니 다행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제가 평소에 단것을 즐겨먹어서 말입니다. 부끄럽지만 영애와의 자리에서 먹으려고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혹시 에델바이스 영애께서도 단것을 좋아하는지요?"

"앗, 네. 네. 좋아해요."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의 모습에 정신을 못차렸는지 대답은 하여도 그녀의 눈은 계속해서 디저트를 향해 있다. 그야 이것들은 우리 영주성 수석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들이 었으니 눈이 안갈리가 있나. 듣기로는 제도에서도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일한 실력자라는데.

나는 준비된 집게로 나와 엘레나의 접시에 각각 한 종류 씩 담고는 그녀에게 건내주었다.

"감사합니다아..."

이게 그렇게도 맛있어 보이나?

아까 단것을 좋아한다고는 말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디저트를 주기 위한 구실일 뿐 나는 단걸 잘 먹지 않는 편이다. 너무 단것은 느글느글 하기도 하고.

웩.

대충 케이크 하나를 잘라 집어먹었더니 너무 달아서 더 먹지를 못하겠다. 서둘러 옆에 따라둔 차를 마셔 입에 가득한 단맛을 중화 시킨다.

사람들은 대체 이게 뭐가 좋다고 먹는건지.

물론 내가 남들보다 단걸 잘 먹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초콜릿도 카카오 함유량이 높은 것만 먹을 수 있었지 일반적으로 시중에 파는 것은 잘 먹지 않았다. 옛날에는 내가 항상 먹던 카카오 99%가 일반적인 건 줄 알고 남들에게 권했다가 몰매를 맞은 적도 있다.

잠시 옛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엘레나의 반응을 보지 못했다. 겉으로 생긴것만 봐서는 하나의 예술품과도 같지만 이건 달아도 너무 달았다. 아무리 단 것을 좋아하는 엘레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애 마음에는 드시..."

"냠~"

우물우물

그게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보여주듯 세상을 다가진것 같은 얼굴로 케이크를 퍼먹는 엘레나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는 것 만으로도 심장이 위태로운데 그녀가 진심으로 행복해 하는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평생 내가, 그것도 사람을 상대로 가지고 싶다는 소유욕이라는 음습한 욕망 따위를 가져본적은 없지만 그녀의 미소는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고 싶게 한다는 마음을 만들어 내는 마성이 있었다.

굳이 파혼을 해야할까. 나는 원작의 데미안과 다른....

꽉-

쓸때없는 생각이 자꾸 기어오르는 것 같아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허벅지를 꼬집었다.

고통으로 되찾은 이성의 방벽은 통제되지 않는 감정을 다시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묻어버렸다.

'미치겠네.'

그녀의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내 감정에 크나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내가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하기에도 이건 너무 이상했다. 예쁜 사람이 미소 하나 지었다고 거기에 소유욕을 느낀다니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닌가.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그녀가 내 곁에 있는 것은 많이 위험한것 같다.

< 3화 > 파혼을 위하여 (3)

"읏, 으으으...."

지금 엘레나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어 있다.

나와 엘레나 사이에 놓여진 탁자 위에는 비어있는 찻잔과 과자 부스러기 같은게 남아있는 접시 두개 뿐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 듯 나는 단것을 잘 먹지 못한다. 케이크 조각을 또 작게 잘라 하나를 겨우 먹는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접시 위에 있던 것들 까지 깨끗히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뭐긴 뭐야. 지금 여기 있는 아가씨가 다 먹은거지.

혹시 햄스터가 해바라기 씨를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햄스터에게 씨앗을 주면 그 작은 입으로 옴뇸뇸거리며 씨를 잘게 갉아먹는데 그 모습이 계속해서 씨를 주고 싶을 만큼 아주 귀엽다. 내게 있어 엘레나 에델바이스는 햄스터였다.

이세계가 만화였다면 과자를 먹는 그녀의 옆에는 옴뇸뇸- 이라는 효과음이 붙어있을게 분명하다. 포크로 과자를 하나씩 집어서 천천히 먹는데 그 모습이 꼭 작은 소동물을 연상시킨다.

그 귀여운 모습에 나는 옛날, 햄스터에게 해바라기 씨를 주었던 것 처럼 내 접시 위에 올려논 디저트들도 그녀의 접시 위에 올려 놓았다. 그녀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채 그저 행복한 얼굴로 자신의 접시 위에 올려진 디저트를 즐기었을 뿐이다.

이후 뒤늦게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린 엘레나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게 현 상황이다.

"영애는 제가 생각한것 보다 단것들을 많이 좋아하시나 보군요. 미리 준비를 해두기를 잘했나 봅니다."

"으으으읏! 그, 고마워요...분명 공자님도 많이 좋아하시던 것들이었을 텐데 저에게 다 양보해 주시고...제, 제가 다음번에 올때는 저희 영지에 유명한 파르페 가게가 있는데 거기 있는거 종류별로 하나씩 꼭 가져올게요!"

아니, 괜찮은데. 나 그렇게 단거 못먹어...

많이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아보였지만 그래도 확실히 아까전의 경직된 채 아무말도 못하고 있던것 보다는 많이 나아진 모습이다.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보다 이것들을 마음에 들어하시니 저희 주방장에게 말해주면 아주 좋아하겠군요. 더 드시고 싶으시다면 언제나 말 해주세요."

"정말요?"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는 말에 엘레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가 지금 껏 본 그 어느때 보다 기뻐했다. 그 여파로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이상한 감정은 덤이다.

디저트가 주는 포만감과 만족감의 영향이었을까, 그녀의 모습은 아까전에 안절부절 못한채 찻잔만 만지고 있던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는지 생각이 들 정도로 밝아졌다. 어쩌면 똑같이 단걸 좋아한다는 공통분모를 찾아서 그런걸지도.

이거 괜히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나.

어쨌든 이건 좋은 현상이다. 이제는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으니.

아까 그 상태 그대로였다면 아마 내가 그녀의 의견을 듣는 것은 오늘 밤을 꼬박 새더라도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아마, 나 혼자만 이야기하다가 끝냈겠지.

나는 서로간의 소통을 원했지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내가 이 자리를 통해서 바라는 것은 그녀와 내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이 약혼의 성사를 무효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간의 가장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인 대화가 필요한 것이 었고. 솔직히 단순히 파혼을 하려고 한다면 그냥 내가 그녀에게 믿도 끝도 없이 '우리 파혼합시다.' 라고 말 하면 성사될 일이다.

그녀는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잘 못 하고 남들에게 끌려가는 경향이 있으니 원작의 데미안과는 달리 약혼 대신 파혼해달라고 말한다면 아마 그녀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는 해도 얼떨떨해 하면서 내 뜻대로 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이게 괜한 과민반응 일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녀에게 악영향을 줄 것 같은 방법은 최대한 하지 않을 생각이다.

여기는 기본적으로 내가 읽던 소설속 세상이다. 그리고 소설이라는 것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말은 즉슨 그녀가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모든 소설이 그런것은 아니고 장르나 작가의 성향마다 차이는 있지만 적어도 내가 읽었던 <공녀는 사랑받는다.>의 이야기는 엘레나 에델바이스를 중심적으로 세상이 움직이는 소설이었다.

이건 단순히 내 생각에 불가하지만 만약 내가 한 어떠한 행동이 그녀에게 악영향을 주었을 때 이 세상이 나를 그녀에 대한 악역이라고 생각한다면? 물론 이건 증명되지 않은 나 혼자 만의 망상에 불가할 뿐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불행을 겪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녀를 사랑하는 남주 후보 놈에게 뒤질 수도 있고 어느 모종의 사건으로 크라우스 백작가가 멸문당한다던지 뭐, 이런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최대한 그녀와 원만하게 끝을 보는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파혼만 된다면 그녀가 나를 만날 일도 없고 어차피 원작이 시작되면 옛 약혼자, 아니지 과거의 지인은 생각도 안 날 만큼 사건이 벌어질 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자동적으로 그녀의 이야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된다.

무엇보다 그녀와 가까이 지내면 지낼 수록 내 몸이 자꾸 통제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다.

지난 5년간 내 말을 아주 잘 따라준 몸이었다만 그녀와 만난 순간부터 어딘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감정. 정신적인 부분에서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엇나가려는 경향이 생겼다.

내 눈 앞에 엘레나 에델바이스라는 경계대상이 있어서 망정이지 만약 평소처럼 마음 놓고 행동을 했을 때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면 나는 꼼짝 없이 그 감정에 지배당했을게 분명하다.

다행인 점인 것은 그것이 엘레나의 한해서만 일어난 다는 점일까.

통제되지 않는 감정에 의한 행동은 광증이나 다름없다. 물론 통제를 아예 못할 정도는 아니다. 곰팡이 마냥 자꾸 튀어나오는게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것을 방해해 거슬릴 뿐 집중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정도다.

다만 이렇게 여러군데로 신경을 쓰다가는 언젠가는 정신질환을 앓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때부터는 진짜배기 정신병자가 되는 거다.

나는 정신병자가 되기 싫었고 이 광증에 의해 그녀에게 피해를 줘 패망하는 것은 더더욱 싫다. 그러니 뭐가 어떻게 되었든 본능대로 사는 짐승이 될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녀와 가까워 져서는 안된다.

생각을 완전히 정리하고 나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음, 에델바이스 영애. 실례지만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아, 예! 물론이에요! 그럼 저도 데미안 공자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죠?"

"네. 물론입니다. 구두지만 일단은 약혼자이니 욕만 아니면 아무렇게나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야, 약혼....네. 저희 그, 약혼했었죠."

엘레나는 지금 나와 자신이 어떤 관계이고 어떻게 이자리에 있는지를 떠올렸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음, 마음은 이해한다만 이렇게 당사자 눈앞에서 시무룩해 하니까 좀 그러네.

그냥 이대로 묶어서 어디 못가게 방에...

꽉ㅡ

어허 마구니야 물러가라. 누구를 SM 플레이어로 만들려고.

이 때려죽일 광기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구나. 덕분에 내 허벅지만 고생이다.

엘레나가 저리 시무룩해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결혼은 일생에 단 한번 있는 것.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결혼에 어떤 로망을 가지고 있을 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정략혼과는 달리 나와 그녀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있었다.

지금 이 약혼을 유지해 정식으로 약혼을 맺을 것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되돌아가는지 말이다.

난 당연코 후자를 선택할 것이고 방금전의 반응을 보아 하니 그녀 또한 그걸 원하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엘레나의 성격상 그것을 내 앞에서 말 할 수 있을리는 없으니 내가 그녀가 스스로 말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만 한다.

"엘레나. 지금 당신의 기분이 어떨지는 이해가 됩니다. 생판 남이나 다름 없는 저와 약혼이라니 그야 꺼려하는게 당연하겠죠."

"앗. 그, 그렇지는 않아요!"

"굳이 그렇게 말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엣."

정곡을 찔렀는지 경직된 표정을 보여주는 엘레나.

얼굴에 그렇게 다 드러나는데 그걸 믿겠냐.

"저, 지금 그 뜻은 데미안 공자께서는 저와의 약혼이 싫으시다는..."

"아니요. 그럴리가요. 제가 영애와의 약혼을 싫어할리 있겠습니까. 영애와의 혼인은 제국의 모든 남자들의 꿈과도 같은 일인걸요."

나야 당연히 좋지. 이게 만약에 원작이 없는 세계였다면 나는 지금 이자리에서 공중제비 3바퀴를 돌았을 거다. 성격 좋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미인을 아내로 둔다는데 싫어할 녀석이 어디있겠어.

문제는 여기가 정해진 이야기가 있는 소설 속의 세계라는 것이었고 그 이야기 속에 나와 그녀의 이별은 필수 불가결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운명을 가진 우리의 약혼이 정상적으로 이어질리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라고는 최대한 원작과는 다르게 이 관계를 끝내는게 전부였다.

나는 평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결혼의 가치관을 담아 최대한 그녀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말을 골라가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오로지 저만을 위한 행복 보다는 저와 함께할 반려 또한 행복할 결혼을 원합니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엘레나 아델바이스. 지금 당신은 저를 사랑하고 있나요?"

"그건..."

직설적인 나의 질문에 말을 흐리며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

이건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오늘 지금 이 자리가 초면이었고 이전부터 편지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적도 없는 관계이니 그녀가 심각한 금사빠가 아니고서야 나를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꼭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혼 생활이 불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 그러셨고 다른 가문들 역시 그러하겠죠. 하지만 저희는 그분들과 다르게 선택이라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뜻은?"

"한 평생을 함께할 반려를 한번도 말 섞은 적 없는 타인으로 선택하라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아무리 귀족들간에 정략혼이 유행이라지만 저희 둘의 관계는 단순한 정략혼이 아니지 않습니까. 엘레나양과 저에게는 집안의 강요로 맺어졌던 다른 분들과는 달리 서로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당신이 잘 알지도 모르는 타인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엘레나 에델바이스.

이 약혼은 누군간에 의해 치뤄지는 것이 아닌 너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러니 너가 가장 원하는 답을 선택해라.

나는 그리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던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엘레나 양이 어떤 답을 내놓든 간에 그것을 존중 할 것입니다. 부디 부담가지지 마시고 이야기 해주세요. 지금 저희의 만남은 약혼 전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이 약혼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말하기 위한 자리이니까요."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 마저도 망설이며 말하지 못할 그녀에게 나는 선택을 강요했다.

이내 그녀는 나의 말에 마음을 다 잡은듯 결심한 얼굴을 비추며 내게 말했다.

"그러면 저희 약혼 할래요? 정식으로."

"네?"

< 4화 > 파혼을 위하여 (4)

"돌겠네. 진짜."

모두가 잠든 새벽.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얇은 책 한권을 꺼내고는 작게 내뱉었다.

내 손에 들려있는 책의 연녹색 가죽 커버에는 아무런 제목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야 시중에서 파는 책이 아닌 내가 직접 적은 책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 증거로 책의 내용은 이곳에서 사용하는 글자가 아닌 모두 한글로 적혀 있었다.

첫장은 무질서한 단어의 나열로 채워져 있어 내가 처음 빙의 했을 당시의 다급함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때는 닥치는대로 책의 내용을 떠올려 적어 넣는데에만 집중했으니 책에 적혀있는 글자들은 문장이라고 하기에는 조잡하였고 만약 누가 본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문자인지 지렁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엉망인 글씨체였다.

쓴 당사자인 나도 다시보면 못알아 먹게 생긴것이 여러개 있어 이후 이것을 정리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한장 한장 뒤로 넘겨 도착한 책의 어느 한부분에서 나는 손을 멈췄다.

거기에는 앞에 부분과는 달리 또박또박하게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1. 엘레나 에델바이스와의 파혼. 이후 어떠한 특이점이 발생할지 요주의 할것.]

"요주의는 개뿔."

손에 들린 만년필이 책에서 글씨를 파낼듯이 종이를 긁어댔다.

취소선이 수차례 그어져 이제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문장을 보며 오늘 있던 일들을 떠올려 본다.

분명 계획대로 였다면 오늘 그녀와의 만남에서 파혼을 하거나 아니면 간단한 인사치례만 하고 끝낼 일이 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그녀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아직도 내 귓가를 맴돌고 있다.

'그러면 저희 약혼 할래요? 정식으로.'

"왜 거기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건데..."

그 자리에서 나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권리까지 떠 넘겨 가며 엘레나 스스로가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그야 그녀가 나와의 약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일을 벌인거였지만 일의 결과는 내 상상과는 정반대로 일어나고 말았다.

세상에. 그 엘레나 에델바이스가 내게 약혼 제안이라니.

그녀의 입에서 약혼하자고 말했을 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는 모르겠다만 분명 바보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게 분명하다.

오늘을 위해 소설을 바탕으로 알고 있는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며 수십 수백의 질문과 답변을 준비했었지만 그 중 어디에도 그녀의 약혼 제의에 대한 답은 없었다.

단 한번도 그녀가 내게 약혼을 하자고 말 할것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원작에서 엘레나가 이런 말을 다른 남주 후보들에게 한 적이 있었나? 일단 내 기억에는 없는데."

하기야 소설 속에서 그런 말을 들은 녀석이 있다면 이 남주 후보라는 명칭은 쓸일이 없었겠지.

엘레나 에델바이스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이라는 위치는 이 소설의 장르가 로맨스인 만큼 그녀와 이어지는 캐릭터를 뜻 한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의 주변에 수많은 히로인이 있는 것 처럼 여기에도 그녀에게 반하는 여러 남자 캐릭터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누가 엘레나와 이어질지 명확히 정해지지 않아 다들 약식으로 후보라고만 불렀다.

소설 속에서는 엘레나가 어떤 후보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를 좋아하는 놈들이 서로 도움을 주려고 이것저것 하면서 일어나는 나비효과와 이후 그 사실을 안 엘레나가 뒷수습을 하는 등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형식이였지 남녀간의 서로 썸을 타거나 막 대놓고 연애를 하는 그런 일반적인 로맨스 판타지의 전개 방식은 아니었다.

뭐, 이야기가 마지막 까지 간다면 남자 주인공이 정해지고 로맨스 위주의 전개가 될 수 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완결이 난 소설이 아니었고 적어도 내가 이곳에 빙의하기 전까지의 전개에서는 그녀가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묘사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때의 엘레나는 데미안과의 관계에서 크게 데여 남자에 대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상태여서 그렇지 지금의 엘레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로 그것이 이유가 될 수 있는 가 하겠지도 싶지만 내가 알기로는 지금 그녀의 곁에는 소꿉친구라는 관계로 이루어진 남주 후보 하나가 있는 걸로 알고있다.

비록 지금은 틀어졌지만 내가 안심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대륙 7대 마탑중 하나이자 엘레나의 가문인 여명의 에델바이스와 상극에 있는 황혼의 에르트웬.

그 에르트웬 가문의 적장자이며 훗날 이계의 연결자라고 불리는 대마법사 리처드 에르트웬이 내가 생각해둔 안배였다.

원작에서도 소꿉친구인 엘레나와 리처드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쪽에서는 이미 오래전 부터 엘레나를 짝사랑하고 있었다고 서술되었던 만큼 나는 엘레나가 적어도 나와 리처드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고 하면 당연히 리처드를 고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엘레나가 그 녀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글에 묘사된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 처음 만난 나보다는 가까운 사이일게 분명할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엘레나가 리처드를 생각해 파혼을 할거라고 예상했건만 내 생각만큼 리처드를 이성으로 보지 않았던 걸까.

그 예상은 아주 보기 좋게 빗나갔다.

"왜 그렇게 능력있는 소꿉친구를 두고 나를 택한건지 도저히 알 수 가 없네."

아직 어린 나이에 불구한 지금에도 리처드 에르트웬은 에르트웬 가문이 낳은 마법천재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우리 가문이 무가(武家)로서 이름 높은 것이지 내가 딱히 명성을 떨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딱 검술명가의 장남. 이 정도?

이렇게 같이 지낸 시간, 능력 에서도 차이가 나는데도 그녀가 날 고른게 이해가되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거다.

오늘 있었던 만남에서도 그녀에게 스스로 선택을 하도록 강요했지 약혼을 하자고 강요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와 대화하는 도중 줄곧 나는 나와의 약혼을 하지 말라는 뜻을 넌지시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리 답했다는 것은 그 약혼하자는 말이 온전히 그녀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는 말이된다.

그렇다면 엘레나는 대체 나의 무엇을 보고 그런 답을 내린 것일까.

이세상에서 그녀 자신을 제외하고, 아니 어쩌면 그녀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르는 나로서도 아무리 고민해 보았지만 그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는 건 여기에 대한 해답은 온전히 그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건 아직은 해보는게 어떠냐는 제의일 뿐이지 나는 아직 거기에 대해서 답을 하지 않았어. "

고민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고민을 하지 말고 다른 방도를 생각하는게 훨씬 낫다.

원작의 시작 까지는 아직 1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다. 그 사이에 어떻게든 약혼을 깨는 쪽으로 유도하면 될터. 그렇다면 원작의 데미안처럼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그녀가 내게 학을 때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다시 생각에 잠겨보려고 하지만 앞서 머릴 너무 많이 사용한 반동인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머리가 지끈거리기만 한다.

"아, 모르겠다. 그냥 잠이나 자자."

나는 그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 어두웠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듯 맑고 푸른 하늘을 보여주었다.

침대는 마치 타임머신과 같다. 잠깐 누워있기만 하여도 순식간에 시간을 지워주니 그야 말로 마법 같은 물건이 아닐 수 가 없다. 이전 생에 사용하던 싸구려 침대도 그러했는데 그와 비교할 수 없는 백작가의 물건이라면 더하면 더했지 절대 현대의 기성품보다 못난 점은 없었다.

내방에 있는 침대는 내가 이곳에 빙의하여 바뀌어버린 삶 속에 몇 안되어 만족하는 것 중 하나이다.

깊은 잠에서 일어나서 그런지 목이탄다.

나는 시종을 불러 찬물을 한잔 들이키고는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과학이 아닌 마법으로 움직이는 분무기. 이곳에서 지낸지 꽤 오랜시간이 지났음에도 언제봐도 신기할 따름이다. 몸에 부딪히는 물방울들이 남아있던 잠을 앗아간다.

방으로 돌아가니 언제왔는지 모를 켄과 그의 손에 준비되어 있는 의복이 눈에 들어온다.

고급진 흑색 원단으로 만들어진 옷의 왼팔 부분에는 크라우스 백작가의 상징하는 용이 금사(金絲)로 새겨져 있다. 사치라고 하기에는 단정하고 고아하다.

수건으로 몸에 묻어있는 물기를 닦아 내고는 자연스래 켄에게서 옷을 건내받아 입었다.

"백작님께서 조찬에는 오시지 말라고 하십니다."

"음? 저 뭐 잘못했어요? 갑자기 아들 아침을 굶기시네."

"그게 아니라 동쪽 별관에서 에델바이스 가의 아가씨와 같이 드시라고 하셨습니다."

"....완전히 붙여 두려고 하시는 구만. 아버지께 알겠다고 전해줘요."

얼굴을 찡그리는 내 모습에 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왠지 언짢아 보이십니다만. 설마 도련님. 아가씨께 무슨 실례라도?"

"아니, 제가 얼굴을 찡그리는데 왜 제가 실례를 끼친게 되는거에요? 상식적으로 엘레나 영애가 했다고 생각하는게 맞지 않나?"

"그럴리가요. 도련님게서 무의식적으로 뭔가 했다면 모를까 엘레나 영애는 아니죠."

"켄. 제 집사 맞아요?'

"농담입니다. 농담. 그런데 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약혼녀를 얻으셨는데 기뻐 하셔야죠. 제 나이 50 평생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혹시 진짜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요?"

순박한 노집사의 얼굴에 걱정이 드리운다. 나는 켄에게 걱정 말라고 일러두고는 옷매무새를 마저 가다듬고 아침이 기다리고 있을 별관으로 향했다.

아침의 저택은 생각보다 부산스럽다. 사용인들은 일어나자마자 각 창문에 달려있는 커튼을 치고 외부 내부 할것 없이 청소를 시작한다. 내가 데미안의 몸에 들어오고 나서는 최대한 모범생처럼 굴었더니 만나는 이들 마다 모두 웃는 얼굴로 내게 인사를 하며 맡은 일을 하러 떠났다.

옛날에는 시녀들이 아버지 어머니 몰래 먹으라고 캬라멜이나 간식들을 쥐어줬는데. 지금은 몸이 어느 정도 자라서 그런지 간식을 주는 일이 없어져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내가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내게 호의를 표하는 것 까지 싫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어제 있던 일이 떠올랐다.

"아, 켄. 주방장에게 조찬 이후에 어제와 같은 디저트를 준비해 달라고 해주세요."

"도련님은 단걸 잘 안드시...아. 네 알겠습니다."

켄은 잘 알겠다는 얼굴로 웃으며 답하고는 별관, 이실리아관의 문을 열었다.

"도련님. 그러면 아가씨와 좋은 식사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켄도 좋은 아침 되기를."

켄이 열어준 문을 지나 들어가자 햇빛에 의해 반짝이는 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쪽 면이 연금술사들의 공방에서 만들어진 유리로 된 이실리아 관의 벽은 저택 내부에서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꽃들의 정원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공간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 내눈에 들어오는 것은 꽃이 아닌 한 사람이었다.

순은 같이 새하얀 백발이 유리를 통과한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다. 마치 지상에 별이 내려온 듯 밝은 빛을 내고있는 그녀는 주변의 다른 것들을 눈에 들어오지 않게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상당히 위험하다.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손을 다리 뒤로 숨겨 꼬집고는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엘레나."

수정 같이 맑은 자줏빛 눈에 내 얼굴이 담기자 그녀가 웃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데미안."

< 5화 > 파혼을 위하여 (5)

크라우스 백작가가 대귀족이라고는 하지만 아침 메뉴 마저 휘황찬란한 성 처럼 화려하지는 않다.

귀족이라고 해서 음식에 금가루를 뿌려 먹지는 않는다. 물론 하자고 한다면 할수는 있겠지만 굳이? 라는 생각이 앞설 뿐더러 괜한 사치는 오히려 귀족이기에 좋지 않다.

시종이 준비된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오늘의 아침은 주방장의 특제 소스로 양념된 작은 스테이크와 적당히 잘 구워진 계란 후라이. 그외에도 따뜻한 스프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모두 한입에 먹을 수 있게 작고 양도 그리 많지 않았다.

엘레나가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작게 잘라 소스에 한번 푹 찍고는 그대로 입에 넣었다. 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엘레나.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나는 안심하고 식사를 시작 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도 나이프를 들고는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사용된 고기가 최상급이어서 그런지 부드러운 살코기에서 베어나오는 육즙이 예술이다. 입맛이 고급으로 변한지는 꽤 된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식(美食)은 언제나 질리지 않는다.

"데미안은 고기를 좋아하나요?"

"네?"

잠시 맛의 황홀경을 경험하고 있어 주위의 시선을 신경쓰지 못했는데 바로 맞은 편에 앉은 엘레나는 내가 스테이크를 먹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보고 있었다.

"물론 좋아 합니다만. 정확히 말하자면 고기보다는 맛있는 걸 먹는 것을 즐긴다고 하는게 맞겠네요. 엘레나의 입에는 어떤가요?"

고기는 진짜 어지간하게 품질이 좋지 않은게 아닌 이상 잘 구우면 거의 다 맛있으니 맞는 말이지.

"제 입맛에도 잘 맞아요. 크라우스의 주방장은 정말 못하는게 없네요. 디저트의 수준도 그렇고 정말이지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을 정도에요."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성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똑같이 말씀해 주신다면 주방장도 기뻐 할 것입니다."

설마, 그게 나하고 약혼하자는 이유는 아니겠지?

손을 모으며 감탄하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그것이 그녀의 약혼사유가 아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런거라면 좋을 텐데. 주방장의 요리가 그리워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끼어드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은가.

엘레나는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드문 드문 눈에 들어오는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모습에 연신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한낱 꽃 따위보다 지금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지만 지구의 러시아와도 같은 차디찬 눈의 땅, 메로힘에서 자란 그녀에게는 남부의 이런 모습이 색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메로힘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들거든요. 아버지께서 온도를 조정해주시는 마법을 걸어둔 유리화원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제가 유리창 너머에서 햇살을 받고 있는 꽃들을 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내가 알기로는 메로힘에서 일본 삿포로의 눈축제와 같은 행사가 있는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마도 내가 그 축제에 갔다면 저런 반응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 자란 나로서는 똑같이 사계절이 존재하는 이곳 보다는 1년 내내 눈이 있는 지역이 오히려 더 이국적이고 새롭게 느껴지니 말이다.

'그것보다..'

이 녀석 텐션 너무 높지 않나?

어제와는 완전 딴판인데.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그 엘레나 에델바이스가 맞나?

약혼 하자는 것도 그렇고 점점 원작에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엘레나의 이미지와 많이 멀어져 가고 있다. 설마 원작이 시작되었을 때의 그 성격을 완성시킨 것이 데미안이었던 건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와는 관계 없는 일이야.'

그녀의 성격이 원작에 비해 어떻게 바뀌었든 데미안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녀로서는 오히려 더 좋을 지도 모른다. 지금 부터 내성적인 부분을 많이 고쳐두면 이후에 있을 쓸데없이 고생할 일들을 미리 줄일 수 있는 셈이니 이것이 그녀에게 악영향이 될리는 없는 일이다.

그녀의 하이텐션의 성격에는 신경을 끄기로 결론 내린다.

이후에는 그녀가 이곳 사르함에 와서 보고 느낀 점과 감탄했던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고 그것을 내가 적당히 호응해 주는 형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졌다.

때마침 켄에게 말해둔 디저트가 도착해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아, 데미안! 여기에 오는 길에..."

"그러시군요. 그것 참 신기한 일이었겠네요. 자, 여기 마카롱입니다. 드세요."

"와! 고마워요."

냠!

"...아, 데미안! 마카롱 하니까..."

"그러시군요. 제도에 그렇게 유명한 가게가 있었다니 다음에 같이 한번 가보는 것 어떻겠습니까? 아, 여기 마카롱입니다. 드세요."

"와! 고마워요."

냠!

"...아무튼 그래서 엄청 신기했어요! 저 그런거 보는 거 처음이었어요!!"

"그러시군요. 여기 마카롱입니다. 드세요."

"고마워요!"

냠!

엘레나의 말이 끝나지 않는다.

마치 무한루프에 빠져 있는 것 마냥 나는 그녀가 한가지 이야기를 끝낼 때마다 마카롱을 건내주고 그녀는 그 마카롱을 먹고 또 이야기를 계속한다.

아이처럼 좋아라 하며 말하는 것이 귀여워 한번 물려줬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뭐지? 레퀴엠인가? 나는 이 대화의 끝을 볼 수 없는거야?

엘레나의 입은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대체 원작의 데가놈은 무슨 짓을 했길레 이렇게 말 많은 아이를 그렇게 말이 없게 만들었을까. 생각해 보면 원작에서도 남주 후보 놈은 아니지만 엘레나가 한 동성 친구와 대화를 할 때는 말이 굉장히 많아졌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엘레나가 마음의 문을 열어준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고 그렇다면 엘레나가 나를 그 정도로 편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인데, 이유는 몰라도 나를 그리 생각해 준다는 것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비록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 되어 있다만.

어느세 준비된 마카롱이 전부 떨어졌다. 다른 디저트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것 까지 사용하다가는 아마 우리는 오늘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할게 분명하다. 지금이 딱 끊고 밖을 둘러보기 적절한 타이밍이다. 나는 어제의 궁금증을 해결할 겸 대화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왔다.

"엘레나. 한가지 물어볼게 있습니다."

"? 아,아아.. 너무 제 이야기만 했네요. 죄송해요. 그, 너무 신이나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엘레나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만 저희 약혼에 대해 물어볼게 있어서."

"약혼? 아! 그러고 보니 저희 약혼식은 언제 할까요?"

"네?"

이건 또 뭔 소리여.

나는 그녀의 말에 벙찐 표정을 지었지만 엘레나는 그런 내 얼굴을 보지 못했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역시 봄이 좋겠죠? 아니, 봄에 해야해요! 활짝 핀 꽃에 둘러싸여 식을 올리는 것은 예전부터 꿈꿔온 일이었거든요. 아, 그것은 결혼식 때 하고 약혼식은 데미안이 저희 집으로 와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메로힘이 다른 건 몰라도 풍경 하나는 보기 좋으니까요."

"에? 네? 어, 잠깐. 잠깐만 진정해요. 엘레나."

폭주기관차 마냥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 그녀를 간신히 멈춰 세웠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가는 아직 성인식도 안된 몸으로 2세 계획까지 들었을지 모른다.

이건 너무 급발진인데.

뭐라 지적을 하고 싶어도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아무리 봐도 진심이라 무슨 말부터 해야하는지 짐작이 가지를 않았다. 원래라면 두근거려야 할 심장도, 그녀의 얼굴을 보면 항상 기어나오던 음습한 욕망도 그녀의 기세에 짓눌려 당황스럼 만이 내게 남았다.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해야 할지 기나긴 고심 끝에 나는 그냥 원론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이미 원작과 많이 틀어진 것으로 보이는 엘레나의 성격으로 보아 어떤 반응일지는 미지수 였지만 그래도 한번 속 시원하게 말 하는게 나을것 같았다.

저 웃는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엘레나. 저희 아직 약혼에 대해서 명확히 이야기 하지 않았잖아요. 무엇보다 약혼은 아직 시기상조..."

"네?"

차갑다.

단 한마디였지만 그 말 한마디가 내게 주는 느낌은 영구동토에서 불어오는 블리자드 그 이상의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햇살 처럼 따스한 미소를 비춰주던 얼굴은 차가운 달빛으로 변했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까와는 정반대되는 목소리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데미안."

"네, 엘레나."

분명 날씨는 따뜻한데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은 얼음장 처럼 차가웠다. 엘레나는 내 손의 온기를 탐하듯 계속해서 손을 어루만져댔고 나는 손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에 몸을 떨었다. 절대 그녀의 분위기에 겁먹은 것은 아니었다.

가느다란 그녀의 손에 점점더 힘이 들어갔다. 아프지는 않았다. 단지 그녀가 내게 왜 이러는지 의문 만이 남을 뿐.

하지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할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내게 말했다.

"데미안이 그랬잖아요. 저의 선택을 존중해 주겠다고. 그리고 저는 당신과의 약혼을 선택했어요. 그거면, 그거면 충분한것 아닌가요?"

절대 녹지 않을 것 같았던 얼음이 녹아내려 물이 떨어졌다.

얼어붙어 있던 그녀의 얼굴에는 물기가 가득했으며 나를 바라보는 자주빛 눈동자는 흘러넘칠 것 같은 물방울로 일렁거렸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에요."

부서질것 같다.

살짝 만지기만 해도 금이 가는 살얼음이 이러할까. 어딘지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홀려버리기라도 했는지 나는 내가 절대 꺼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미안해요."

내 손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두손으로 맞잡았다. 여전히 얼어붙을 것 같이 차가웠지만 그래도 지금은 잡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할것 같았다.

"당신에게 불안감을 주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서로를 알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려고 하던거였어요. 그게 전부에요."

그리 잡은 손을 당겨 그녀를 내 품으로 끌어당겼다.

품 안에 쏙 들어온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그녀가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가슴에 닿아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이 점차 안정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내 품에 안긴 그녀의 모습에 어째선지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동시에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6화 > 어림도 없지. (1)

사람들은 말한다.

여명의 탑의 주인 '백야의 마녀'의 마법은 신역(神域)에 도달했다고 말이다.

신위를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범주를 뛰어넘은 초월자들이라고 해도 금기시되는 그야말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미 온 세상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현인신(現人神)으로서 추앙받고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이계에서 건너온 바깥의 신들이 도래했을때 하늘이 열리고 땅이 뒤집어지며 그곳에서는 수만의 마물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여파만으로 이계에 가장 가까웠다던 대륙 7대 마탑 중 하나인 '황혼'이 무너져 내렸고 그들이 대지에서 서서 본격적으로 군세를 형성하자 영원불멸할 것 같은 인간들의 제국은 수십개로 쪼개져 사분오열(四分五裂) 되고 말았다.

대륙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인간들이 무너지자 변방에서 살아가고 있던 이종족들은 오죽할까. 아예 멸종을 당한 종족도 있었고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전부인 이들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대륙의 끝은 아니었다.

그렇게 절망 뿐이 남아있는 지상에 살아남은 이들을 규합하고 세상이 멸망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초월자들을 한대모아 외신들에 대항하게 만든 이는 누구인가.

하늘이 열린 후 고개를 들었을 때 보이는 심연을 걷어내고 빛을 세상에 다시 내린것은 누구인가.

신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리는 것으로 모자라 범접하는 것 조차 불가능 했던 신체(神體)를 조각내고 조각내어 완전히 파멸시킴으로서 신살의 위업을 이루어낸 영웅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지않는 태양이자 여명의 탑주. '백야의 마녀' 엘레나 에델바이스.

그 모든 위업을 일궈낸 이 영웅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이 대륙에 단 한명도 없었다.

멸망을 코앞에 둔 세상을 구해내자 사람들은 그녀를 영웅으로 추앙했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모든 사태의 원인이 되는 이계의 신을 파멸시키자 그녀를 신으로서 모셨다. 자신들이 믿고 있던 신들 조차 이루어내지 못한 일인데 그것을 모두가 보는 눈 앞에서 증명해낸 그녀가 신이 아니고서는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살아남은 모든 초월자가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고 그들 중에서도 그녀를 신으로 믿는 이들이 생겨났으니 평범한 범인들 사이에서는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업이 정말로 신위에 오른 것이었을까. 그녀는 마침내 그 어떤 신들도 건들지 못한 천리(天理)를 뒤집어 버렸다.

***

"엘레나 아가씨. 일어나세요. 거의 다 도착했어요."

"으긋...응으으....음?"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이끌려 어둠 속에 잠겨있던 의식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아가씨라니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다. 비록 미모는 젊은 시절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제는 100여년을 훌쩍 넘긴 나이인만큼 이리도 낯간지러운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이는 없었다.

같이 전장을 누비던 전우들 마저 자신을 보며 신님 신님 거리는데 다른 이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나를 이렇게 살갑게 부르는 이는 대체 누구일까?

감겨있던 눈을 떠보니 그리운 얼굴 하나가 들어왔다. 100여년이 넘는 오래된 삶을 살았지만 그녀의 기억은 그 누구보다 또렷했고 빛나는 지성은 기억의 바다에서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소녀를 금세 건져내었다.

"헤, 일리....?"

"네. 아가씨의 담당 시녀이자 메로힘의 귀염둥이 헤일리에요. 그보다 아가씨 아직 잠이 덜 깨신것 같으시네요. 어떻게 이런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그렇게 푹 잠을 주무실 수 있으신 건지. 그래도 지금은 정신 차리셔야해요! 곧 약혼자 분을 만나시는데 이렇게 눈곱 잔뜩 붙은 흐리멍텅한 얼굴로 만나실 수 는 없잖아요!!"

"뭐?"

헤일리의 속사포 같이 쏟아지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한가지는 똑똑히 귀에 들어왔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엘레나는 곧바로 마차의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창한 봄의 햇살. 크고 작은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잘 가꾸어진 도시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마차가 모퉁이를 하나 돌자 저 멀리 아름다운 성이 하나 보이기 시작한다.

높게 솟은 첨탑과 굳건해 보이는 성벽. 자신은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다.

지금 보는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자신의 기억 속에 한번 들어왔던 것들이라는 걸 그녀는 보자마자 눈치 챌 수 있었다.

"진짜 돌아왔구나....."

원래는 모두 폐허가 되어 부서져 있어야 할 건물이 멀쩡하게 남아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죽었던 사람이 웃는 얼굴로 살아있고 세상은 멸망하기 이전의 생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저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소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만들었을 뿐인데 그것이 이리 실현될 줄이야.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마법의 수식은 모두 머릿속에 남아있었지만 그럼에도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 가득하다.

그 이해되지 않는 반쪽짜리 수식이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회귀'는 그야말로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네? 아가씨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야. 아무것도."

"에이, 거짓말. 갑자기 그런 얼굴을 지으시는데 아무일도 아니겠어요? 분명 약혼자 분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제가 그럴 줄 알고 미리 다 준비를 해놨다구요. 제가 알아본 결과 아가씨의 약혼 상대이신 데미안 공자께서는 이 근방에서 친절하기로 유명하다구요. 얼굴도 엄청 잘 생겼어요! 아, 아가씨는 이미 초상화를 보셨..."

"헤일리. 조용."

엘레나의 차가운 대답의 헤일리는 꾹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무심코 마력이 흘러나와 버렸다.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미 오래전의 일의 불과했지만 그때 그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엘레나. 오, 아름다운 나의 엘레나. 너는 내것이다. 나만의 것이야.'

'어째서 다른 곳에 눈을 두는 거지? 네 눈은 오직 나만을 바라보라고 있는 것이다. 남에게 시선을 주지 말란 말이다. 다음에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두눈을 파내겠다.'

'왜 그런말을 하는 것이지. 네가 나를 떠나겠다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너는 절대 나를 벗어나지 못해!! 엘레나 에델바이스는 나 데미안 크라우스의 것이라고!!!!'

"쯧."

과거 그의 진흙탕 같은 집착에 희생되었던 나날들을 생각해 보면 치가 떨려온다. 과거로 돌아온 기념비 적인 날이 하필이면 그와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라니.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속이 매쓰꺼워지지만 그래도 약혼식이 끝난 이후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이라면 별다른 복잡한 절차 없이 약혼을 파할 수 있으니 따지고 보면 최적의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딱 기다려라 데미안. 만나자 마자 네놈의 턱주가리를 날려버려 주마.'

그런 무서운 생각과 함께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며 손을 풀고 있는 자신의 주인의 모습에 정말 저분이 자신이 알고 있는 아가씨가 맞는지 혼란스러운 헤일리였다.

크라우스 가문의 성에 도착하기 까지는 별로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사르함에 들어온 후였고 영주성은 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남부의 대영주라는 위용의 알맞게 성은 크고 화려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무너지고 다 부서져 가는 폐허가 아닌 뛰어난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예술품과도 같았다. 성의 정문에는 크라우스 백작가의 상징인 검을 휘감은 용이 새겨져 있어 마치 용이 문을 수호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정복을 입은 기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제국에서 손 꼽히는 검술명가 답게 그들의 기세는 드높았다.

성의 주인되는 크라우스 백작이 대륙에 다섯명 밖에 없는 소드 마스터인 만큼 그의 가문의 병사들의 실력이 없을리 없다. 생각해보면 데미안은 참으로 돌연변이 같은 존재다. 크라우스 백작은 물론 데미안의 동생인 알폰스는 모두 뛰어난 무인에 인격자였지만 오직 데미안 만은 자신의 아버지와 닮은 것은 외모 뿐 그 외 모든것이 단점 투성이인 남자였다.

마차에 새겨진 에델바이스 가문을 상징하는 늑대를 확인하고 다가온 기사들에게 헤일리가 신분을 증명하는 백금패를 보여주었고 이후 별다른 검사 없이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가씨. 긴장하지 마시구요. 평소 하던대로만 하시면 되요. 아, 그렇다고 너무 의기소침해 계시지는 마시구요. 데미안 공자님이 잘나간다고 하시지만 어디 우리 아가씨만 하시겠어요? 당연히 우리 아가씨가 최고지. 북부최고미녀! 아니 제국, 대륙제일미!! 우윳빛깔 엘레나!!!"

"헤일리. 너가 그런 말을 하니까 더 긴장되는 것 같은데?"

"헉! 알았어요!! 저 이야기 끝날 때 까지 숨 참을게요! 흡!"

"프흡.. 농담이야.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마 순식간에 끝날테니까."

그와 대화를 나눌 생각은 일도 없다. 지금 엘레나의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데미안을 때리는 것 뿐. 회귀 이전의 데미안은 가문에서 파문되었을 뿐더러 뒤늦게 찾아 복수를 하려고 했어도 세상의 멸망이 코앞으로 다가와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의 신경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돌아옴으로서 자신의 손으로 그를 단죄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를 헛으로 넘길 생각은 없었다. 아직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지만 어차피 녀석은 쓰레기라고 불러도 모자람 없는 인간이다. 이왕 파혼할거 화끈하게 저질러 주는 편이 자신의 정신건강에 이롭다.

그러니 옆에서 헤일리의 입에서 들려오는 데미안의 선행들은 그의 본질을 알고 있는 자신에게 있어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어째선지 이전 생에서 들어본적 없는 죄다 처음듣는 낯선 이야기들이었지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실상은 모두 조작된 것일게 분명할 터.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럼 아가씨 힘내세요!"

어느덧 데미안이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헤일리는 두손을 불끈 쥐며 응원을 보내왔고 나 또한 두손을 불끈 쥐며 기도(氣道)를 가다듬었다.

비록 내가 마법사이기는 하다만 무인들의 정점에 이른 이들과 싸워본 몸이다. 일반적인 무가의 자제라면 몰라도 그 게으른 데미안 정도는 지금의 간단한 호신술 정도로도 제압이 가능할것을 확신했다.

신역에 도달했던 감각이 방안의 존재감을 감지해내었다.

소드 마스터는 아니더라도 그의 근접한 경지에 오른 강자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데미안은 아닐테고 그렇다면 그의 전속 집사인 켄인가? 이전에 그와 자주 마주친 것은 아니라 잘 몰랐지만 이런 실력을 숨기고 있었을 줄 은 몰랐다.

"엘레나 에델바이스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헤일리가 문을 노크하며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린다. 그러자 방 안에서 느껴지던 기세가 더욱 휘몰아치는게 느껴졌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헤일리가 문을 열자마자 나는 켄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헤이스트」 까지 사용하며 데미안을 향해 달려들었고 곧바로 마력으로 강화된 주먹을 그의 턱을 향해 내려꽂았다.

쾅ㅡ!

사람의 몸과 몸이 부딪쳤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까지 사용하며 내지른 주먹이니 어느정도 단련한 무인이라 할지라도 맨몸으로 맞는다면 어디 한군데가 부러질 정도의 충격은 되었을 거다.

하지만 눈 앞에 나타난 결과는 내가 생각 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 입니까. 엘레나 에델바이스."

분명 턱이 부서진채 드러누웠어야 할 데미안이 내 주먹을 여유롭게 잡아채고는 크라우스 가문 특유의 용을 닮은 금안(金眼)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그'와의 첫만남이었다.

< 7화 > 어림도 없지. (2)

"그래서 아가씨의 약혼자이신 데미안 공자님은....음? 아가씨? 갑자기 왜 웃으시는 거에요?"

"아, 아?....너무 기뻐서. 너무 기뻐서 그래. 헤일리."

남부의 따사로운 햇살이 마차의 창을 통과해 들어온다.

그와 함께 헤일리가 조잘대는 소리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한번 회귀했던 지난 삶에서 다시 몇십년이 흘러 또 한번 반복되는 풍경이었지만 헤일리가 들려주는 소식은 내 입가에 미소를 안겨주기에는 충분했다.

"아가씨. 아가씨 요즘 좀 이상하신 거 아세요? 처음 성에서 약혼에 대해 들으셨을 때는 멍한 얼굴이셨다가 지금에 와서는 세상 다가진 사람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고 계시고. 혹시 어디 아프신거는 아니죠?"

"아니. 나는 그 어느때 보다 멀쩡한걸. 그런 좋은 사람이랑 결혼한다니 당연히 기뻐해야지. "

"그, 아직 약혼이에요. 아가씨."

헤일리는 내 대답에 턱을 괴고는 일부러 불안하다는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흐으음... 이거 괜히 데미안 공자님 좋은 이야기를 했나보네요. 아가씨 그렇게 긴장 놓고 계시면 안돼요. 사람은 실물을 보고 판단을 해야한다고요. 소문으로 듣기에는 착한 사람일지 몰라도 실상은 전혀 다를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우리 아가씨 이렇게 순진하셔서 어떡해."

헤일리의 쓸데없는 걱정이 시작되었다. 전에는 이때 데미안의 칭찬을 계속해서 내게 들려줬던 것 같은데 아마 그때 긴장하고 있던 나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였겠지. 지금은 너무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니 반대로 걱정이 되는 것일테고.

하지만 헤일리가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는 지금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비록 가장 가까운 곁이 아닌 먼 발치에 불과했지만 데미안이 아닌 '그'를 수십년간 지켜보았었는데 그의 성정 하나 모를까.

자연스레 엘레나는 그와 지냈던 과거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얼굴을 찌뿌리고는 고개를 흔들며 떠오르는 기억들을 다시금 기억의 바다에 묻어버린다.

분명 행복했던 시간들도, 엘레나 자신이 그에게 빠져들었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들도 있었지만 그 추억들이 어떻든 결과적으로 그건 실패한 삶이었다.

그의 옆에 있기는 커녕 스스로 뛰쳐나와 제멋대로 굴다가 그를 다른이에게 빼앗겨 버렸고 이후 여러 사건의 끝에 다시금 비어진 그의 옆자리에 들어가기는 커녕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그를 떠나보내야 했었다.

'아니, 처음부터 잘못 되었던 거야. 그러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시작하면 되는거야.'

첫번째 회귀를 하였을 때 그를 자신이 알고 있던 데미안과 동일시 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과 멀어지려고 온갖 수를 쓰던 그였는데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주먹을 날려 약혼을 파기시켜 놓다니, 주어졌던 기회를 제 스스로 차버린 꼴이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그를 데미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자신은 그와 이어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와 달리 자신의 감정에 대해 방황할 필요도 없고 이전처럼 그의 곁을 떠날 생각도 없다. 가지고 있는 정보도 그와의 관계도 다른 녀석들과 서 있는 출발선 부터가 다르다. 여기서 패배한다는 것은 이전처럼 나 스스로가 뛰쳐나가지 않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데미안 기다리고 있으세요. 더 이상의 실수는 없을 테니까.'

그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자신도 알고 있다.

이전에는 그것을 몰랐기에 왜 자신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원망도 했었지만 이제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이 엘레나 에델바이스는 그가 걱정하고 있는 모든 것을 치워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여자라는 걸 자각하고 있다.

신(神)을 죽였고 천리(天理)조차 거슬러 올랐다. 그런데 고작 천리에서 파생되는 운명의 억지력 정도 쯤이야 그게 무엇인지 인지만 하고 있다면 문제 될 일은 하나도 없다. 설령 일이 틀어진다 하더라도 방해물은 치워버리면 될 일.

이제 자신이 해야할 것은 그와 앞으로 어떤 행복한 삶을 살 것인지 미리 생각 하고 있으면 된다.

"헤일리?"

"네? 아가씨 왜 부르세요?'

"아이는 몇명이면 좋을까? 역시 한명은 너무 적겠지? 음...적어도 세명? 아니 네명이면 적당하려나?"

"세상에.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실실 웃으며 말하는 엘레나와 그런 자신의 주인의 모습에 질린 듯한 얼굴을 하는 헤일리.

이후 엘레나의 입에서는 나름 진지한 가족 계획이 흘러나왔고 헤일리는 그 말을 얌전히 듣고 있으면서도 정말 자신이 알고 있던 엘레나가 맞는지라는 의문과 함께 피부로 느껴지는 이질감에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크라우스 백작가에서 보낸 초대장에 세뇌마법이라도 걸려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가 어느덧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크라우스 백작가의 성에 도착하고 있었다.

***

마음가짐을 달리 하니 세상이 달라 보이는 걸까.

처음에는 그저 증오스럽기만 하였던 백작가의 성이 지금은 오랜만에 다시오는 정겨운 집처럼 느껴질 정도다.

첫번째 삶에는 데미안이 자신에게 온갖 상처를 안겨준 고문실이었고 두번째 삶에서는 '그'가 자신의 연인과 지내던 집으로써 이 성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답답함과 아픔을 동시에 주는 공간이었다.

그런 곳이 마음가짐 좀 달리 했다고 집처럼 느껴진다니 참으로 웃긴일 아닌가.

과거 그러했던 것처럼 안내를 받으며 천천히 그가 있을 방을 향해 걸어나간다. 이전과 같은 긴장감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있을 곳을 찾은 것 처럼 안심이 되었다.

사람이 사는 집에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체취가 묻어난다고 했나. 단순히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많은 이들이 거주하는 성이었지만 그럼에도 여기저기에서 그의 흔적이 느껴져 왔다.

미세하게 맡아지는 그의 향기를 따라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사용인이 안내하고 있는 곳과 동일했다. 그렇게 방 문 앞에서니 언제부턴가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문 너머에 내가 알고 있는 '그'가 있다. 데미안이 아니라.'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의 체향과 존재감에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서둘러 두손으로 해벌레 웃고 있을 얼굴을 가리고는 흥분을 가라앉히도록 한다.

후우우우...후우우....

수차례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겨우 거쌔게 뜀박질 하고 있는 심장을 잠재운다. 풀어져 있는 얼굴도 이리저리 만져대며 원상태로 되돌리고는 헤일리를 바라봤다.

"헤일리. 지금 나 어때? 어디 이상한데 없지? 그렇지?"

"지금 가장 이상한건 아가씨 정신인데요...뭐, 얼굴은 언제나 평소처럼 아름다우십니다!"

"그냥 아름다운걸로는 안돼! 북부제일, 아니 대륙 최고는 되어야 한다고!"

그러자 헤일리는 내말에 약간 질색한듯 입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엑. 아가씨. 그, 안 부끄러우세요..? 아가씨께서 그 정도로 예쁘시기는 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 말하는 건...."

이거 전에 네가 나한테 말해 준거 거든!!!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약간 다듬는 정도로 끝내고 헤일리에게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었다. 헤일리는 내 신호에 고개를 끄덕이며 노크를 두번 정도 하여 안에 있는 이들에게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고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이전에는 문을 열자마자 그를 향해 달려들어 턱에 주먹을 날렸었다. 그 덕에 대화라고 할 것도 없이 곧바로 우리는 서로 파혼을 선언했었지만 그렇다면 평범하게, 원래의 엘레나 아델바이스로 들어간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문이 열리자 자신과는 대비되는 밤의 어둠 처럼 새까만 흑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다.

의자에 앉아있는 이는 자신의 머리색과 같은 검정색의 원단에 금사로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정복을 입고 있었다. 분명 방문이 열렸을 때만 하여도 화산같이 폭발할 것 같은 기세를 내뿜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부터 깔끔하게 갈무리 되어 그를 고고한 귀공자로 만들어 주었다.

용의 것을 닮은 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고 이내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언제나 보아도 아름다운 색이다. 과거 데미안을 보았을 때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던 그 색이 지금은 하늘에 떠있는 태양처럼 밝고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눈을 마주한지 몇분이나 되었을까. 나에게는 영겁처럼 느껴졌던 그 시간이 실제로는 찰나에 불과했는지 벽에 붙은 시계의 시간은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이전에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그야 당연히 많았지. 그는 자신의 연인과 있을 때는 언제나 그녀에게 저런 얼굴을 지어주었으니까. 저런 미소를 나에게 지어준 적은 그가 내 품에서 숨을 거두기 전 그 단 한번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헌데 이제는 그 미소가 자연스레 나를 향해 있었다. 이것 하나 만으로도 내가 회귀하기 전 느꼈던 모든 감정들과 괴로움이 보상받는 것 같았다.

곧이어 부드러운 미성이 내 귀에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에델바이스 영애. 저는 크라우스 가의 장남 데미안 크라우스라고 합니다."

그 미소와 함께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이미 머리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를 포기하였다. 이성이 제거되어 본능밖에 남지 않은 머리는 오로지 내 욕망만이 가득한 상상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신위에 다다른 지성이 그걸 내 몸으로 행하지 않도록 막은 것이었다.

만약 그것을 여과없이 드러냈을 경우 그가 무슨 눈으로 나를 볼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이성과 욕망이 뒤섞인 머리가 판단하길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의 나는 그가 나에게 말해준 그저 형식적인 한마디 만으로도 너무나도 행복해 한다는 것이었다.

이거 너무 쉬운 여자 아닌가. 나.

< 8화 > 어림도 없지. (3)

과거와는 달라진 반응.

이전에도 내가 주먹만 날리지 않았더라면 받았을 환대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전의 삶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마냥 아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잘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것을 되풀이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그가 지금 나에게 미소를 지어준 것 처럼 앞으로 겪을 수 많은 일들 사이에서도 그가 나만을 바라 볼 수 있도록 내가 바꿀 것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진 탓에 그만 인사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생각을 정리하고는 그의 인사에 답했다.

"....반가워요. 크라우스 공자. 에델바이스 가의 장녀 엘레나 에델바이스에요."

으아아아아앗!! 너무 딱딱해!!!!

웃는다고 웃어보았지만 너무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걱정이다. 입에서 튀어나온 말도 긴장한 상태에서 말한거라 그런지 돌처럼 딱딱하기 그지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을까. 이것 때문에 이전 처럼 그가 바로 파혼하자고 말하면 어떡하지? 등의 온갖 걱정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다행이도 그런 내 걱정과는 달리 그는 딱히 불쾌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 있는 이들 때문에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옆에 서 있던 집사에게 말을 해 헤일리와 함께 밖으로 돌려 보냈다. 헤일리는 문 밖으로 나가면서 나에게 잘해보라며 한쪽 눈으로 윙크를 하고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나갔다.

문이 닫히자 방안에는 정적이 찾아온다. 이제 이 방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나와 그.

단 둘 뿐.

'어?'

그 사실을 깨달자 머리가 다시금 뜨거워 지기 시작한다.

스스로도 자기가 이렇게 외설스러운 사람이었는지 다시 되돌아 보게 만들 정도로 오늘 따라 야릇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 같다. 그가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심지어 오늘 처음 만난 약혼녀에게 그럴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음에도 지금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욕망이었다.

한창 때의 남녀가 단 둘이서 방에 앉아있다.

사용인들은 이미 자리를 떠났고 인간을 뛰어넘은 초월적인 감각에도 이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은 자신과 그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설령 누가 올것 같아도 그건 인식저해결계를 치면 되는 일이다.

중요한건 이 방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모를 것이라는 거다.

'솔직히 나 정도 되는 여자라면 손댈만 하지 않은가?'

엘레나는 총 3번의 삶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외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고 있었다. 소드마스터, 대마법사, 제국의 황제 등 명예와 신분을 떠나 남자라고 한다면 자신을 향해 눈길을 돌리지 않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미의 여신을 숭배하는 사제들도 그 여신이라는 작자도 자신보다는 못해 보였다. 실제로 그 때문에 여신에게 저주를 받았던 적도 있지 않은가. 물론 곧바로 보복해 신좌에서 떨군 후 불이 날 정도로 볼기짝을 때려주었다만.

초월자라 불리는 이들 중 몇몇이 자신의 미모에 홀려 욕망을 이겨내지 못해 덤벼들었다가 되려 당한 이들도 있었고 말이다. 그 중에 그는 없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연인도 없고 자신에게 적대감도 가지지 않고 있다.

어, 이러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거 아닌가?

만약 이성적으로 생각을 했더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엘레나였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엘레나가 온갖 망상을 하고 있을 동안 데미안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그의 자그만한 움직임에도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정말로 자신의 망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정말 약간의...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역시나 그런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단지 옆에 놓여져 있던 티 세트에서 세트 두개를 꺼내고는 내게 한잔 자신에게 한잔 씩 따랐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향긋한 향을 풍기고 있는 차를 자신에게 건내주고는 처음 보았을 때와 변함없는 평온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에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고 있던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신마저 뛰어넘은 대마법사가 욕망에 휘둘려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다니 자신의 손에 죽었던 외신(外神)들과 다른 수많은 신령들이 보았더라면 어이가 털려 스스로 신좌에서 내려와도 할 말이 없는 없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그런 욕망에 질 남자였다면 자신이 이렇게 빠져들지도 않았을 텐데 그걸 잊고 제멋대로 기대하고 있었다니 부끄러워 죽겠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자신이 그에게 있어 그리 매력적이지 않는 것인가 하는 마음에 괜한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그 때문에 괜히 또 시무룩해져 그가 넘겨준 찻잔을 이리저리 만지기만 하고 있을 때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저희가 약혼관계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죠? 에델바이스 영애."

"네..."

하지만 여기서 대화가 더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나의 반응에 내가 아직도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나는 망상으로 인한 수치심에 뭐라 말을 꺼낼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방에 조용해지려고 할때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려 보니 그가 준비해둔 티세트 옆에 있는 접시 위에서 나는 것이었다. 푸드커버가 덮여져 있어 그동안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모양이다. 접시 위에 올려져 있는 디저트들은 당장 제도에서의 유명한 쇼콜라티에가 만들어낸 것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크라우스 백작가에는 제도에서 일하던 쇼콜라티에 한명이 주방장으로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첫번째 삶에서 이곳에서 느꼈던 유일한 기쁨이 언제든 그가 만들어낸 디저트를 먹을 수 있었다는 것까지 떠올리니 이런 작품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 갔다.

내가 디저트에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는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평소에 단것을 즐겨먹어서 말입니다. 부끄럽지만 영애와의 자리에서 먹으려고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혹시 에델바이스 영애께서도 단것을 좋아하는지요?"

"앗, 네. 네. 좋아해요."

'거짓말. 단거 하나도 못 먹으면서...'

그가 단것을 잘 먹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가 데미안이 아니라는 증거 중 하나였다. 데미안은 자신으로서도 잘 먹지 못할 정도의 단것을 잘만 먹었으니 말이다.

그가 이것을 준비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을 위해서 였을 것이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이었겠지만 나는 그가 한 말과 저 디저트를 보며 문득 바로 이전의 삶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여기와 같은 장소였지만 분위기는 지금과 달리 살벌했던 그 때를 말이다.

그 자리에서도 저 디저트들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비록 나에 의해 바닥에 엎어져 엉망이 되어 버렸지만.

'애써 준비한게 엉망이 되었군.'

그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진 디저트들을 보며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지금의 저 눈과는 달리 베일것 같은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

'굳이 대화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군요...음, 굳이 존칭을 사용할 필요도 없겠지. 엘레나 에델바이스. 그대가 파혼을 원하는 것 같으니 원하는 대로 해주마.'

그것이 끝이었다. 이후의 대화는 없었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헤일리와 함께 백작가를 떠났다.

그렇게 이전의 나와 그는 첫단추 부터 잘못 매여진,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슴 속에 남겨진 미련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던 걸까, 자꾸만 묻고 묻어도 다시 생각나게 만든다. 이렇게 이전과 달라지는 현재를 보면 볼 수록 말이다.

그가 접시에 정성스래 디저트를 올리기 시작한다. 모든 종류의 디저트가 하나씩 접시에 올라가자 그제서야 그는 웃는 얼굴로 내게 건내 주었다.

이전의 그도 내가 그리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처럼 똑같이 행동했을 텐데, 이 멀쩡한 다과들을 보니 자신에 의해 뭉개졌던 디저트들이 되려 떠오른다.

내가 뭉개버렸던 거였다. 그의 선의를.

이제는 없던 일이 되었다 한들 이미 한번 그의 선의를 짓밟았었다는 걸 기억하기에 그에게 미안했고 또한 고마웠다.

그가 주었던 것들 중 케이크 한 조각을 골라 포크로 다시 작게 한번 자르고는 입에 넣었다.

"냠~"

역시 실력하나는 확실한 주방장 답게 케이크는 환상적인 맛이었다. 극상의 초콜릿과 생크림. 거기에 푹신하고 촉촉한 반죽까지 완벽 그 자체였다.

그렇게 천천히 케이크를 음미 하면서 지금 입안에 퍼지는 이 달달함을 앞으로도 계속 느낄 수 있기를 나는 바랬다.

< 9화 > 어림도 없지. (4)

입 안에 단맛이 가시지를 않는다. 이제는 침까지 달게 느껴질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디저트를 입에 넣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거절해애애애애.....'

여태까지 먹으면서도 물리지 않게 맛있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가 자신에게 주는 것인데 바로 눈 앞에서 거절할 수 있겠는가. 먹어야지. 보통 남자들은 이렇게 많이 먹는 여자를 싫어하지 않나 싶었지만 그가 보기에는 여전히 합격점이었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내 접시 위로 디저트들을 올려두었다.

물론 엘레나도 여자인 만큼 자신의 체형에 민감하기에 아무리 데미안이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더는 위험하다 싶어 거절하려고 했지만.

'귀엽네.'

데미안의 이 한마디에 격침되어 버리고는 군말 없이 자신에 접시에 쌓여가는 디저트를 입에 넣었다.

분명 데미안 본인도 알지 못한 무의식에서 튀어나온 작은 소리였을게 분명하지만 그만큼 진실한 말이 따로 없었고 그런 본심에서 튀어나온 귀엽다는 말은 엘레나의 동기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마침내 그 많던 디저트들이 그녀의 입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삶을 여러번 반복했다고는 하지만 평생을 귀족으로 살아왔던 엘레나에게 있어 연심을 품고 있는 상대에게 별로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대가를 받아버렸는데.

결국 그의 말과 미소에 거절하지 못하고 먹어버린 것은 자신이었다.

'맛있기는 했어....아니! 그래도! 그래도오오!!'

하지만 어찌되었든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아 머리에서 열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데미안에게 그런 말까지 들었으니 엘레나의 얼굴이 붉게 변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미래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읏, 으으으...."

차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가 없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그는 지금 이런 자신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기만 했다. 그 모습이 퍽이나 보기 좋았지만 그래도 심통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영애는 제가 생각한것 보다 단것들을 많이 좋아하시나 보군요. 미리 준비를 해두기를 잘했나 봅니다."

"으으으읏! 그, 고마워요...분명 공자님도 많이 좋아하시던 것들이었을 텐데 저에게 다 양보해 주시고...제, 제가 다음번에 올때는 저희 영지에 유명한 파르페 가게가 있는데 거기 있는거 종류별로 하나씩 꼭 가져올게요!"

그런 마음에서 나온 미약한 반항이었을까. 그가 단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말을 꺼내었다. 이런 내 말에 그도 순간 당황했는지 웃고 있던 얼굴이 순간 굳어버렸다. 이후에 그에게 억지로 파르페를 먹여주면 그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며 먹을지가 절로 상상이 되었다.

거절할까? 아니면 거절하지 않고 억지로라도 먹을까? 그야 약혼녀가 주는 선물인데 거절 할 수 는 없겠지.

싫은 얼굴을 하면서도 묵묵히 내가 떠주는 파르페를 먹는 그의 모습이 그려지자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래. 지금의 일은 훗날 설욕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에 대해서 은근히 아는 것이 많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무엇을 싫어하는지.

하늘마저 베어가를 수 있게 된 소드마스터가 되었으면서 유령을 무서워 한다던가, 술은 또 엄청 약하면서 취할때까지 주독을 날리지 않다거나 등 지금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이 정보들을 잘만 이용한다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의 여러 모습들을 보다 다양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니 장작을 넣은 모닥불 마냥 의욕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와 단둘이 있는 이 자리도 적응이 되어버린 것인지 심장의 고동이 안정되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여전히 평소보다 배는 두근 거리는 심장이었지만 그래도 더이상 삿된 욕망에 휩쓸려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나의 분위기가 안정되었다는 것을 그도 느꼈는지 그가 슬슬 우리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려고 할지는 대강은 알고 있었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뜻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분명 그가 원하는 것은 나와의 파혼이었을 테니까.

그가 입을 열었다.

"음, 에델바이스 영애. 실례지만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아, 예! 물론이에요! 그럼 저도 데미안 공자님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죠?"

"네. 물론입니다. 구두지만 일단은 약혼자이니 욕만 아니면 아무렇게나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야, 약혼....네. 저희 그, 약혼했었죠."

멀쩡한 정신으로 그가 자신과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말을 듣자. 가슴이 뜨거워진다. 당장이라도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줘 그와의 관계를 보다 확고하게 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가 운명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래. 그 빌어먹을 운명.

이 세상에는 운명(運命)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것은 필연, 반드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마치 그물처럼 운명이라는 실타래에 엮여 있다. 설령 그것이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은 초월자나 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 그리고 첫번째 삶에서의 데미안과의 파혼. 이어서 내가 겪었던 여러 사건들. 이 모든 것이 하늘이 정해둔 이치에 따라 실현되는 운명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데미안, 아니 '그'는 본인이 맞이할 운명을 알고 있다.

데미안이 어떻게 파멸했는지 어떠한 삶을 살게 될 것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엘레나가 알고 있던 데미안이 엘레나와 마찬가지로 회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데미안인 그는 본질적으로 원래의 데미안과는 다른 존재다. 그것은 지금 엘레나 자신의 눈에 보이는 찬란히 빛나는 그의 영혼으로 확인이 가능했다.

이전의 삶에서 찬탈해온 외신들의 신성(神聖)이 그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온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기본적으로 운명이라는 것은 원래 이세상에서 난 것들에게 부여되는 것.

그렇기에 천리를 거스른 자신과 바깥에서 온 이방인인 외신. 그리고 마치 외신들과 같이 이계에서 온 그는 누구보다 운명의 억지력에서 거리가 먼 존재였다.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아직은 운명이라는 억지력에서 벗어나기에 약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운명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그는 몰라도 자신은 알고 있다.

그가 '데미안' 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 자신과 같은 초월자가 되었었다는 것을.

아직은 이른 이야기였지만 그는 분명 그렇게 될것이고 어떻게든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의 고민이 자신에게 있어 걸림돌이 될지 알고 있었기에 미리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너무 조급해해서는 오히려 일을 망칠 뿐이다. 차근차근 그가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하나씩 바꿔 가면 그는 분명 빠른 시일내에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눈치가 빠른 남자였으니까.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마.

"엘레나. 지금 당신의 기분이 어떨지는 이해가 됩니다. 생판 남이나 다름 없는 저와 약혼이라니 그야 꺼려하는게 당연하겠죠."

아니야.

"앗. 그, 그렇지는 않아요!"

정말로 내 기분을 안다면 밀어내지 말아줘.

서둘러 아니라고 말해보지만 그에게 내 맘은 닿지 않는다. 내 진심이 닿기 까지에는 아직 그와의 거리가 너무 멀었고 그 거리를 뛰어넘어 내 맘을 담아 전하기에는 내가 너무 미숙했다. 긴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연애라는 것은 나와 거리가 먼 영역이었다.

첫번째 삶에는 사랑을 알지 못했고.

두번째 삶에는 사랑을 깨닫자 마자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이 세번째 삶에서 나는 이 사랑이라는 것의 위력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굳이 그렇게 말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그가 눈 앞에서 나를 거부하는 모습에 이미 그럴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상처 받는 것은 왜일까. 이미 나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이게 사랑이라는 것을.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기에 아파하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랑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도 고통은 고통이었기에, 그가 나를 밀어낸 이유를 알고 있어도 나는 그에게 물었다.

"저, 지금 그 뜻은 데미안 공자께서는 저와의 약혼이 싫으시다는..."

"아니요. 그럴리가요. 제가 영애와의 약혼을 싫어할리 있겠습니까. 영애와의 혼인은 제국의 모든 남자들의 꿈과도 같은 일인걸요."

그말을 들으니 이게 또 뭐라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저 입발린 말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랑이라는게 사람을 참 감성적으로 만들게 한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하지만 저는 오로지 저만을 위한 행복 보다는 저와 함께할 반려 또한 행복할 결혼을 원합니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엘레나 아델바이스. 지금 당신은 저를 사랑하고 있나요?"

나는 순간 이 물음에 솔직히 대답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 그 시간이라는 개연성의 부족이 내 입을 닫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그가 곧바로 파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내가 파혼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랄까. 분명 첫번째 삶과 두번째 삶의 자신이라면 모를까 이미 나는 그 의도를 다 알고 있는 몸이다.

그러니 이런 수작질은 통하지 않아요.

"꼭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혼 생활이 불행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 그러셨고 다른 가문들 역시 그러하겠죠. 하지만 저희는 그분들과 다르게 선택이라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뜻은?"

"한 평생을 함께할 반려를 한번도 말 섞은 적 없는 타인으로 선택하라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아무리 귀족들간에 정략혼이 유행이라지만 저희 둘의 관계는 단순한 정략혼이 아니지 않습니까. 엘레나양과 저에게는 집안의 강요로 맺어졌던 다른 분들과는 달리 서로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곧 클라이막스가 온다는 것을.

예상했던 것 대로 곧이어 그는 나에게 선택을 하라 말했다.

"저는 엘레나 양이 어떤 답을 내놓든 간에 그것을 존중 할 것입니다. 부디 부담가지지 마시고 이야기 해주세요. 지금 저희의 만남은 약혼 전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이 약혼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말하기 위한 자리이니까요."

이 정도 판이 깔렸으면 말해도 되겠지.

이건 어디까지나 약혼의 대한 생각을 말하는 거니까. 이 대답의 기준이 되는 것이 사랑일지 아니면 경제적 이득에 대해서 일지는 그가 판단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여태껏 그가 말했던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든 간에 나는 그가 정해준 파혼과 약혼 이라는 선택지 중에서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면 되는 거다.

당연히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면 저희 약혼 할래요? 정식으로."

"네?"

그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를 들으니 그간 답답했던게 뻥 뚫리는 것만 같다.

아무튼 당신이 선택하라고 해서 한거에요. 참고로 무르기는 없습니다.

< 10화 > 어림도 없지. (5)

우리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 났다.

그는 내게 묻고 싶은게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때마침 크라우스 백작이 저녁 만찬에 초대를 한 덕분에 우리는 식당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는 분명 내가 파혼을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그로서는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는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알아내야 한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의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엘레나 에델바이스부터 데미안 크라우스에 이어서 이 모든 세상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틀어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운명을 바꿀수 있다고 내가 그에게 말해주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초월자로 가는 길은 누군가 제시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그 스스로 깨달은 신념을 이정표 삼아 가는 것이기에 내가 말한다 한들 그에게 주어진 길의 이정표를 바꾸어 버릴뿐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와 어떻게 거리를 줄일지이다. 저렇게 가슴이 설레이는 미소를 지어주어도 속으로는 나를 경계하고 있을게 분명하니 그것 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당장은 딱히 이렇다할 무언가가 없었다. 그는 나를 식당으로 에스코트 하고 있는 중에도 고민이 많은듯 수심에 잠긴듯한 얼굴이었기에 대화를 나누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보였다.

그가 지금 속으로 어떤 걱정을 하고 있을지 짐작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나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만 조금 신기한 것은 이렇게 생각이 다른데 가 있으면 자그마한 실수라도 있기 마련인데 고민하는 와중에도 그는 에스코트 하는데 있어 단 한번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식당이 가까워 지자 그는 고민하기를 그만둔 것 같아 보였다. 가족을 중요시 하는 그 다웠다.

데미안이 식당의 문을 열기전 말했다.

"음, 엘레나? 혹시 저희 아버지께서 뭐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냥 무시하셔도 됩니다."

"네?"

"그게 정신건강에 이로워요. 아, 그보다 아까 약혼은 대체..."

"들어가도록 하죠."

나는 데미안의 말을 끊고 그가 잡은 식당 손잡이를 밀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나와 데미안을 위해 준비된 비어있는 두 자리와 상석에 앉아있는 크라우스 백작. 그리고 그의 어린 동생 알폰스 크라우스가 자리에 착석해 있는 모습이었다.

비어있는 자리에 나와 데미안이 앉자 시종이 자리로 미리 준비된 요리를 가져왔다.

하지만 식사가 시작되지는 않았다. 상석에 앉아 있는 크라우스 백작이 요리에 손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긋이 고개를 돌려 나와 데미안이 앉은 쪽을 바라보았다.

아서 크라우스.

남부의 지배자이자 현대륙의 다섯 밖에 없는 소드마스터(Sword Master)라는 칭호를 가진 초월자.

마흔을 넘긴 중년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입신(入神)의 든 경지 덕인지 과거 내가 그러했듯 그의 몸은 아직까지 전성기와 같은 젊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열여섯이 되는 자신들과 별 나이차가 없어보일 정도의 젊은 모습. 그의 정체를 모르는 이가 그를 본다면 절대 소드마스터인 크라우스 백작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의 장난기 가득해 보이는 청년의 얼굴이었다.

실제로 그는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리 격식을 중히 여기는 편은 아니었다. 보통 권위적인 성향이 강한 무가(武家)의 다른 가주들과는 달리 아이들에게 장난을 많이 치며 정을 중히 여기는 상냥한 아버지였다.

그럼에도 옳고 그름은 확실해 첫번째 삶에서 데미안에게 누구보다 가혹하게 처벌했던 사람이기도 하였고.

검은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 데미안이 누구를 닮았는지는 그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데미안이 장성했을 때의 모습은 지금 눈 앞에 있는 크라우스 백작과 쌍둥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닮았으니 말이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 작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엘레나. 오랜만에 보는구나. 너가 기억할지는 모르겠다만 어릴적에 한번 만난적이 있단다. 그때는 귀여운 꼬마 아가씨였는데 이제는 너희 어머니를 닮아 아주 아름다운 숙녀로 자랐구나."

"백작님은 제 어릴적 기억 그대로의 모습이시네요. 덕분에 떠오르는 것도 쉬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매일마다 주름이 늘어난다고 투덜 거리시는데 말이죠."

이 말은 사실이었다. 아버지께서는 가끔 마탑에서 돌아오시면 씩씩 거리는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 볼때마다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까. 어릴때는 몰랐다만 크라우스 백작과 아버지의 관계를 떠올리면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이야기였다.

크라우스 백작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는 박장대소를 하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하하하하!!! 그 녀석 아직도 벽을 넘지 못한거냐? 녀석, 허구한날 나에게도 수정구로 연락해 불만을 털어 놓기만 하고 자기가 연락해 놓고 막상 내 얼굴을 보면 더 화내더니만 집에 가서도 그리 투덜댔구만? 고맙다. 엘레나 덕분에 녀석을 골릴만한게 한가지 늘었어."

"별 말씀을요."

솔직히 말하자면 크라우스 백작은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 중에서도 천재라고 불리는 이였기에 아버지의 불평이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 누가 이제 막 마흔을 넘기는 나이에 초월자의 격에 다다르겠는가. 그 기록을 갱신하는 이가 지금 내 옆에 한명, 동부에 한명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크라우스 백작은 역대 최연소로 초월자가 된 남자였다.

아무튼 크라우스 백작, 아니 시아버님은 지금 내게 있어 가장 든든한 아군이다.

첫번째 삶에서 백작이라는 직위와 소드마스터라는 절대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데미안 사건을 묻어버리지 않고 스스로 공론화 시켜 나와 아버지께 무릎까지 꿇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먼저 그에게 주먹을 날려 파혼을 했던 두번째 삶에서도 언제나 나의 파혼을 아쉬워 하시던 분이시다.

현재 나의 가장 열렬한 약혼 지지자이시며 앞으로 나와 데미안의 사이를 진전시키기 위해 물밑에서 도와주실 분. 이전에는 나를 그 놈과 같이 있는 시간을 늘려버린 원흉이었지만 지금은 그와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어줄 기회를 누구보다 많이 만들어주실 예정이다.

크라우스 백작은 나에게서 데미안에게로 노선을 틀었다. 대화의 주제는 놀랍게도 나의 아버지인 요하임 에델바이스에 대해서였다. 그가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었나? 내 기억 속에 이때쯤 아버지께서 남부로 내려 오신 기억은 없는데.

"그러고보니 데미안. 너도 어릴적에 요하임 그 녀석 만난거 기억하고 있냐?"

"갑자기 제머리를 잡고서는 '딸아이를 울렸다가는 백야빙옥(白夜氷獄)에 처박아주마.'라고 말하시던 분이었기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말에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아빠는 대체 무슨 말을 하며 돌아다니신 거야?!!

그럴리는 없겠지만 방금 전 데미안의 말 때문에 혹여 요하임이 데미안에게 무슨 짓을 하여서 그가 자신을 밀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 까지 간 엘레나였다.

크라우스 백작이 웃으며 데미안에게 물었다.

"뭐? 하하하하!! 그때 네 나이가 몇이었지?"

"그때가...열넷이었죠. 누군지도 모르는 분이 갑자기 다가오셔서는 알 수 없는 말들을 하시길래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말 하나 하나에 딸아이를 많이 아끼신다는 것이 느껴지시는 분이 셨습니다."

"네?"

분명 백야빙옥에 가둬버린다고 하였으니 다음에는 더 심한 말이 나올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엘레나에게는 뜻밖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후 데미안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엘레나는 얼굴을 붉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하고 있지만 속으로 꾹 참고 있는다고... 싫은 것을 싫다고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말하기 어려워 하는 아이라 옆에서 많이 살펴주고 아껴주라 하셨습니다. 또 단걸 아주 많이 좋아하니 처음 만날 때는 우선 과자부터 쥐어주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면 경계를 좀 풀거라고."

아빠!!!!

요하임이 팔불출이라는 것을 엘레나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설마 데미안에게 직접가서 이렇게 이야기 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을 끔찍하게 아끼는 요하임인 만큼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 자체가 그를 내심 마음에 들어했다는 것 이니 기분은 좋았다만

그거랑 수치심은 별개라고!!!!!!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얼굴.

고개를 살짝 돌려 재밌다는 듯 말하고 있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니 그는 웃고 있었다. 정확히는 부끄러워 하는 자신을 보면서 말이다.

누가 보기에는 그가 나를 조롱한다고 생각할 수 도 있는 상황.

하지만 지난 몇십년간 그를 봐온 내가 느끼는 것은 달랐다.

'부끄럽지? 이제 내가 싫지?'

그 웃는 눈은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얼탱이가 없어졌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귀엽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리 느꼈다. 파혼을 하고 싶다면 그 데미안처럼 윽박지르고 난폭하게 굴면 될것을 사춘기 남자애의 장난 수준의 공격에 오히려 내쪽에서 피식할 정도다. 그리 생각하니 부끄러운것도 서서히 가시는 것 같았다.

거기에 때마침 우리 든든한 아군께서 지원을 해주셨다.

"아, 아아!! 그런거였어! 단걸 안 먹는 니 녀석이 단걸 무더기로 준비해달라고 했다길래 내 이상하다 싶었더니. 그런거였구나. 그런거였어!"

크라우스 백작의 말에 데미안이 방금 전 나와 같이 움찔 거렸다. 나는 그틈을 놓치지 않고 데미안에게 감동받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네? 분명 공자께서는 단걸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뭐라? 저 데미안 크라우스가? 웃기는 소리. 저 놈은 혀에 문제라도 있는지 단걸 하나도 못 먹는다. 그런데 단걸 좋아한다고? 오, 데미안 너 설마..."

크라우스 백작이 음흉한 얼굴로 데미안을 바라보자 데미안은 곧바로 백작의 말을 끊었다.

"단거 먹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 유언비어 퍼트리지 마십시오."

"유언비어는 네 입에서 나오는 거고. 내가 널 키우는 동안 네 녀석이 캬라멜 하나 들고 다니는 걸 본적이 없다."

"본 적이 없다니. 많지 않았습니까? 어릴때 매일마다 주머니에 캬라멜 무더기로 들고 다녔는데. 그리고 절 키운건 마리아죠. 아버지께서 키워주신건 제 맷집이고."

"그건 시종들이 쥐어준거였잖냐. 네가 그거 안 먹고 상자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다는 걸 이 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냐? 그리고 너 말 잘했다. 오늘 어디 한번 내가 키운 맷집 좀 보자."

갑자기 분위기가 식당이 아닌 연무장으로 변해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그의 어린 동생 알폰스의 말이 결정타가 되어 데미안에게 박혀 버렸다.

"아, 맞아요! 지난 번에 형 방에서 상자 하나를 열어봤는데 예쁘게 포장된 캬라멜과 사탕들이 있었어요! 그거 먹으려고 했는데 형이 먹으면 안된다고....소중한거라고.."

그 말에 데미안은 더는 반격하지 않았다.

'어머머.'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바로 옆에 앉아있는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귀끝이 붉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 모습에 지금 당장이라도 저 얼굴을 끌어안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오늘의 승리를 생각하며 간신히 끓어오르는 욕망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어서 크라우스 백작의 윙크가 이어졌고 어린 알폰스는 자신이 말하고 나서 굳어버린 형의 모습에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거리고는 식사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나도 다시 식기를 들어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입에 들어오는 요리는 분명 달콤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이상하게 달달했다.

역시 이번 회귀는 매우 성공적인 것 같다.

< 11화 > 어림도 없지. (6)

불이 꺼진 백작가의 복도.

성에 상주하는 사용인들도 모두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가 잠에 빠졌을 늦은 시각 어둠이 드리운 복도에 작은 불꽃 하나가 일렁거리며 움직인다. 엘레나의 전속 하녀 헤일리가 불이 켜진 촛대 하나를 들고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헤일리의 옆에는 그녀의 주인 엘레나 에델바이스도 함께였다.

그녀들이 이 늦은 밤에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백작가의 물건을 훔치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에델바이스 공작가 또한 북부의 대영주로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부유한 편이었으니까.

둘의 걸음은 한방의 문 앞에서 멈춰섰고 누가 들을까 싶어 아주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창문이 없고 오로지 책장과 벽난로, 그리고 몇개의 푹신한 의자와 책상 하나의 아늑한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준비되어 있는 의자 중 하나에는 이미 선객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그녀들을 이곳으로 부른 크라우스 백작이었다. 그의 곁에는 얼굴에 주름인 자글자글하지만 인자해 보이는 노집사 켄과 회색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중년의 하녀 한명이 서 있었다.

"불을 모두 꺼두어서 찾아오기 어려웠을 텐데 잘 찾아왔구나."

"헤일리가 밤 눈이 밝은 편이어서요. 백작님께서 잘 설명해 주신데다가 문틈 사이로 빛이 보이는 방을 찾으면 되었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엘레나로서는 이 저택에서 가장 강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장소를 찾으면 되는 것이었기에 밤의 어둠은 딱히 문제 되지 않았다. 아무리 크라우스 백작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기운을 갈무리 했다고는 하나 초월자인 이상 그녀의 기감을 벗어날 수 는 없다.

"백작님이라...너무 딱딱하구나. 시아버님이나 편하게 아버님이라고 부르거라. 어차피 가족이 될 사이가 아니더냐."

"네. 아버님."

서로 웃으며 답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백작의 어린 외형 때문인지 이질감을 주고 있었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 중 거기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은 아직 백작의 젊은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헤일리 뿐이었다.

동갑이라고 알려진 에델바이스가의 가주 요하임 에델바이스도 상당히 동안에 속하는 편인데 눈 앞에 있는 크라우스 백작은 20대 청년의 모습 그대로 였으니, 더군다나 자신의 주인 되시는 엘레나의 약혼자인 데미안과 똑 닮지 않았나. 그렇기에 더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크라우스 백작은 자신의 곁에 있는 이들을 가리키며 엘레나에게 한명씩 소개 시켜주었다.

"이쪽은 켄.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이는 마리아라고 한다. 나 보다는 실질적으로 그 아이를 키운 것은 이 둘이었지. 데미안이 어릴 적 부터 같이 지낸 친구들이니 아마 나 보다 더 그 아이에 대해 잘 알것이다."

"무슨 그런 말씀을. 도련님은 스스로 자라신 편이었지요. 저희가 한것이라고는 그저 곁에 있었던 것 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 곁에 있는 것 조차 많이 못해주었지. 그 아이가 지 어미를 떠나 보내는 순간에도 말이야."

백작의 자조어린 말에 마리아도 켄도 뭐라 답하지 못했다. 데미안에게 있어 그는 좋은 아버지였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그저 못해준게 많은 못난 아비에 불과했었다. 다만 엘레나는 이전의 삶에서 알폰스와 데미안의 입으로 크라우스 백작에 대해 들었기에 그 둘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 백작에게 엘레나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회귀는 그녀 만의 것이었고 그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오직 그녀 뿐이었기에 지금의 엘레나 에델바이스는 아버지들의 태중혼약에 의해 맺어진 반쪽짜리 약혼자를 만나러 온 반쪽짜리 약혼녀에 불과했다.

"이런, 잠깐 못보일 꼴을 보여줘 버렸군. 부디 기억에서 잊어주게나."

그래도 그런 반쪽이어도 위로의 말을 건내는 것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제가 오늘 처음 데미안 공자를 보았지만 그분이 아버님을 원망하고 계시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식사 자리만 하여도 어느 귀족가문이 그리 허물 없이 서로를 대할 수 있겠어요."

이런 내 말이 조금의 위안이 되었던 걸까. 그는 굳어진 얼굴을 풀어내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그래. 네 눈에 그리 보였다면 그런 것이겠지. 말해줘서 고맙구나. 나도 참,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옛날 같지가 않구만."

"그 모습으로 그리 말씀하시면 저희 아버지께서 매우 화내실걸요."

"끌끌. 마음껏 화내라고 해라. 꼬우면 젊어지는 마법이라도 개발하던가. 녀석도 애먼 사람에게 자꾸 화풀이를 하는 건지. 쯧쯧. 그래도 엘레나 너는 그놈말고 너희 어머니를 많이 닮아서 다행이다. 다행이야."

백작이 웃자 방의 분위기가 다시 돌아왔다.

특히 헤일리는 살것 같다는 기분을 사람이 얼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까지 담아내고 있었다. 백작도 그런 헤일리의 얼굴을 보았는지 애써 웃음을 참으려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정도에 그치고는 말을 이었다.

"크흠!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할까."

크라우스 백작, 켄, 마리아 마지막으로 엘레나까지. 엘레나를 따라온 헤일리를 포함하면 다섯이지만 이들이 모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데미안과 엘레나의 거리를 줄이는 것. 저녁 만찬이 끝나고 백작이 엘레나에게 전음을 보내어 이곳으로 오게 한 이유는 이 하나를 위해서였다.

"오늘 식사 자리에서 보아하니 엘레나 너는 이미 데미안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더구나."

직접 말하지 않았는데도 다른 이들에게 보일 정도로 그렇게나 티가 났던 걸까. 자각하고는 있었지만 제3자에게 직접 들으니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네. 그,..."

만약 백작이 자신의 연심에 의문을 느낄까 미리 준비해온 대답들은 몇가지 있었다. 하지만 백작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야 수 없이 많으니까. 설령 오늘 처음 본 이들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지. 나중에 말해주고 싶을 때가 된다면 그때가서 말하려무나. 그보다 생각해보면 내 아들이지만 참 운도 좋아. 이런 어여쁘고 착한 아이가 그리 신호를 주는데 받아주지를 못하니. 정말이지 누굴 닮은건지."

"우선 백작님은 아니지요. 백작님은 얼굴에 다 티가 나니 말입니다."

"맞아. 이게 다 켄. 자네 때문이야. 자네를 어릴적 부터 데미안 곁에 두는게 아니었어. 자네 때문에 데미안이 목석이 다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내 아들 혼삿길을 막아버리다니 이걸 어떻게 책임질거야?"

"아니, 그게 왜 제탓이 되어버리는 겁니까? 도련님이 타고난 성정이 그런것을."

"무슨 소리! 그 녀석 어릴 적에는 나를 꼭 닮아 얼마나 감정표현이 풍부했는데!! 자네가 너무 애를 빡빡하게 굴리니까 애가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거 아닌가."

"굴리기는 백작님이 더...."

"아무튼! 그래서 다들 무슨 방도라도 있나?"

백작의 말에 곧바로 답을 내놓는 사람은 없었다.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나로서는 애초에 연애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하나도 몰랐기에, 헤일리의 경우에는 항상 내 곁에만 있어 연애라는 것을 해보았을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나를 부른 아버님과 켄을 믿어보았지만 그 결과는 이미 둘의 대화로 증명되었다.

이제 믿을 만한 사람은 마리아 한명 뿐이었다. 마리아는 잠깐 고민을 하는것 같았지만 이내 답을 내놓았다.

"음, 아가씨 한번 울어보시겠어요?"

""""에?""""

***

시간은 다시 흘러 다음날 아침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침식사는 그와 단둘이 할 수 있도록 크라우스 백작이 도와주었고 장소의 선정은 그의 전속 집사 켄이 해주었다. 식사장소가 된 동쪽 별관, 이실리아관은 과거 그의 어머니인 아르웬 크라우스가 직접 가꾸던 화원이 있는 곳으로 종종 그가 들리는 곳이라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앞서 지냈던 본관과는 다르게 정원에서 바람에 실려 풍겨오는 꽃냄새와 함께 느껴지는 그의 흔적이 내 가슴을 살랑살랑 건들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이곳에 도착했고 우리는 서로 식사를 하면서 어제의 문답을 반복할 뿐 그 이상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내가 넘지 못하게 쉴새 없이 말을 걸었기 때문이었지만 아마, 이때 내가 그에게 말한 것이 이전의 삶에서 그와 대화한 것의 사분의 일은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고 무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결국 그의 입에서 약혼의 대한 이야기가 튀어 나왔다.

"엘레나. 저희 아직 약혼에 대해서 명확히 이야기 하지 않았잖아요. 무엇보다 약혼은 아직 시기상조..."

그리고 나는 지금이 어제 마리아가 말했던 것을 해야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아가씨. 여자에게 있어 눈물은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어요. 특히 아가씨처럼 어여쁜 아가씨라면 더더욱 강력해지죠."

'그렇지만 마리아? 어떻게 눈물을 제 마음대로 흘릴 수 있겠어? 그보다 그런걸로 도련님의 마음이 움직일까. 내가 장난 삼아 흘렸던 눈물에는 아무런 반응도 안하시던데.'

'그건 켄 당신의 연기가 알폰스 도련님의 애교보다 못한 수준이어서 그런거고요. 그리고 도련님은 이상한데서 감이 좋으시니 단순히 눈에 흐르는 물은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어요. 감정이. 정말로 슬퍼하는 감정이 담겨야 합니다.'

'아니 그런데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그야 옛날에 도련님께서 자꾸 몸을 혹사하시면서 훈련을 하셨을때 해봤지요. 당신도 많이 당해봤으면서 왜 그래요?'

'무슨 소리...? 아니? 그럼 당신 여태까지 그거 다....!!'

애써 떠올린 어제의 기억이 더 난잡해지기 전에 나는 떠올리기를 그만 두었다. 핵심은 켄과 마리아의 다툼이 아니라 지금 그에게 서운한 감정을 담아 울어야 한다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아가씨께서는 오늘 처음 도련님을 만나셨죠. 그러니까 이건 서로 조금 더 알아가고 난 후에 써먹는게 효과가 좋아요. 같이 지낸 시간이 많으면 많을 수록 담아내는 감정에 진실성이 생기니까요.'

마리아는 조금더 그와 시간을 가지고, 그에게 더 많은 감정을 느낀 후에 하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그녀가 나의 회귀를 모르기에 한 말이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그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게 나 말고 누가 있을까?

"데미안이 그랬잖아요. 저의 선택을 존중해 주겠다고. 그리고 저는 당신과의 약혼을 선택했어요. 그거면, 그거면 충분한것 아닌가요?"

그를 향한 서운함, 슬픔을 떠올려 담아야 한다.

이것은 자신이 있었다. 고작 몇시간 전의 일을 떠올리면 될 뿐이니.

내가 회귀한지 아직 24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이제야 19시간을 조금 넘었을 뿐이다.

그 말은 그가 내 품에서 숨을 거둔지 고작해야 19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바로 눈앞에 살아있는 그가 있었기에 잠시 잊을 수 있던 것이지 완전히 없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 적은 시간이었다.

몇년전도 아닌 고작 몇시간 전의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묻으려고 해도 묻히지 않은 그 강렬한 기억의 파편이 저절로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식어가는 그의 체온이 손을 타고 느껴졌다.

조금씩 멎어가는 그의 심장 박동이 귓가에 들려온다.

마지막으로 조용히 자신에게 미소지어 주었던 그의 얼굴이 눈에 비춰졌다.

그 모든 기억을 떠올리고 나자 나는 내 눈에서 따뜻한 물이 한 줄기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물 때문에 일렁거리는 시야에 그의 당황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손은 차갑게 식었던 그의 체온을 떠올렸던 것의 반동인지 마력이 자동적으로 차가운 한기로 변해 내뿜어 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에요."

이 말을 뱉어낸 후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이리 슬픈 기억을 떠올렸는지 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그저 슬픔과 비통함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을 뿐. 그렇게 서서히 현재의 기억은 잊혀지고 과거만이 나를 채워가기 시작한다.

이제는 매개체가 되는 나조차 시려올 정도의 한기의 나는 무심코 눈 앞에 보이는 그의 손을 잡아버리고 말았다.

분명 차가워야할 그의 손이 지금은 매우 따뜻하게 느껴진다.

"미안해요."

눈 앞에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나를 끌어안아 한기를 온기로 덮어주려는 그가 있었다.

"당신에게 불안감을 주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서로를 알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려고 하던거였어요. 그게 전부에요."

그가 무어라 말하는지는 솔직히 잘 들리지 않았다.

이때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내게 말을 하고 있다는 것과 따뜻한 온기, 거세게 뛰는 심장.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내가 떠올렸던 그 모든것이 거짓이라며 부정해주듯 살아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에 안도했던 걸까.

나는 그렇게 원래의 목적도 잊은채 그의 품에 파고 들었다.

< 12화 > 막간

나는 내 품안에서 훌쩍이고 있는 엘레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내력(內力)까지 활성화 시키며 품에 안고 있던 덕일까, 멈추지 않을 것 처럼 펑펑 흘러내리던 눈물은 점차 줄어 들었고 얼음장 같이 차가웠던 그녀의 몸은 다시 온기를 되찾아갔다.

귀족 집안의 도련님으로 살아서 그런지 이제는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돈 많은 크라우스 백작가 답게 손수건은 부드러운 실크 재질의 고급품이었지만 나로서는 눈물을 닦아 주는 내내 그 고운 얼굴에 상처가 나지 않을까 행동이 조심스러워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사춘기 여자아이들은 이렇게 감정기복이 심한가?'

열여섯이면 사춘기가 올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잘 모르겠다.

내가 관심법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속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나.

하지만 단순히 어린 소녀의 사춘기로 치부하기에는 엘레나 에델바이스가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은 내게 있어 충격적인 일이었다.

소설 속 엘레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은 강철과도 같이 단단하여 그녀가 작중 눈물을 흘린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소설과는 많이 바뀌어 버린것 같지만 지금 내 품에 안겨있는 이 아이도 고작 하루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보았음에도 내 앞에서의 그녀는 활발하고 밝은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방금전 까지만 하여도 나와 웃으며 이야기 하던 아이가 이야기의 주제가 바뀌었다고 눈물을 터뜨리다니, 오히려 당황스러운 것은 내 쪽이다.

혹시 연기 였던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그녀의 눈에 담긴 회한과 슬픔, 원망의 상대는 틀림없이 나, 데미안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데미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가 원작의 데미안을 알고 있다면 오히려 증오어린 눈으로 나를 한대 쳤겠지, 내 품에 이리 얌전히 안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순전히 나를 향한 감정이었다는 것인데 어제도 그렇고 그녀가 내게 호의를 품을 만한 일이 있었는가?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 이상의 고민은 괜한 두통을 불러 올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제도 이에 대해 생각하다가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포기했는데 지금에 와서 괜한 망상을 덧붙여 추리해 봤자 어차피 엉터리 해답 밖에 나오지 않을게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은 안될 것 같았다. 내 말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그녀를 다시 울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 물론 이 데미안의 몸은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지만 나에게 사람을 울리는 취미 같은 건 없다.

울고 있는 것 보다 웃었을 때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데 왜 그걸 모르는지. 이러니까 초반에 삼류악역으로 탈락했지. 이 새끼는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구만.

'이제는 진짜 모르겠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매우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음은 어차피 원작이 시작하면 남주 후보 중 누군가에게로 떠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괜한 생각 가지지 말자.

나는 어디까지나 소설의 악당일 뿐이니까.

악당은 주인공에게 상처를 입히고 증오를 받아내는 역할이지 사랑을 받는 역할이 아니다. 내가 어떠한 발버둥을 하더라도 나에게 부여된 것이 데미안이라는 악역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내 안위를 위해 이렇게 일찍 파혼하려고 하는 내 행동이 괜한 짓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는 거였으니.

어쩌면 원작이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꽤 오랫동안 그녀의 약혼자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미안 크라우스와 엘레나 에델바이스의 파혼은 절대적인 것. 한 사람의 운명도 바꾸지 못한 내가 세계의 분기점이나 되는 큰 사건을 비틀 수 있을리가 없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떠나게 될 것이다.

단지 그것을 단순히 '이별'이라는 것으로 끝나기를 바랄 뿐.

그러니 지금 나의 행동은 단순히 그 미래에 있을 어떠한 일의 부채감을 지우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건가요? 같이 영주성을 구경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까지 내 품에 기대고 있는 엘레나를 토닥이며 작게 그녀를 불렀다.

흐르던 눈물은 내가 모두 닦아 주었다.

그녀의 눈가는 약간 빨갛게 변했을 뿐 그리 크게 부은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내 눈에는 아름다워 보일 뿐이다.

아까전의 흐트러졌던 호흡도 이제는 평상시의 안정된 상태로 바뀌었다는 것은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으니 알아 차릴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군요. 여기서도 화원이 훤히 보인다고는 하지만 직접 가서 보는 것이 더 좋을 겁니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꽃향기는 향기롭거든요. 물론 이실리아관에 볼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랍니다."

그녀가 내 말에 따라 천천히 기대고 있던 가슴에서 떨어졌다.

엘레나는 피부가 매우 하얗기 때문에 특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에 있어서는 티가 많이 났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내게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였다.

고민을 약간 지워낸 탓일까, 상당히 가벼워진 마음에 그녀의 행동을 보자마자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내 웃음소리에 그녀는 더 작게 몸을 웅크렸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그저 귀여울 따름이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부디 제게 당신께 이실리아관을 소개 할 수 있는 영예를 얻을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묵묵부답인 엘레나. 나는 거기에 몇가지 말을 더 붙였다.

"그러고 보니 이실리아관의 이름에 대한 유래를 설명해드리지 않았네요. 이실리아라는 이름은 초대 크라우스의 안주인의 이름이라고 한답니다. 그래서 초대 가주 께서는 그분의 이름을 따서 이 별관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후로 이실리아관은 크라우스의 안주인이 지내는 공간으로 자리매김 했지요."

움찔-

"엘레나. 저의, 차기 크라우스 백작의 약혼녀로서 미리 여기의 길은 익혀두는게 좋지 않을까요."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손 하나가 내가 내민 손을 꽉 잡아 쥐었다.

얼굴을 가리는 손이 하나 없어지자 그녀의 반쪽 얼굴이 드러났다.

가려지지 않고 드러난 곳의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올라간 입꼬리와 웃고 있는 자줏빛 눈이 내 눈에 비춰졌다.

그 얼굴을 보자 어쩌면 그 날이 왔을 때 슬퍼할 것은 그녀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슴 구석 한켠에 나지막이 들어왔다.

< 13화 > 동생은 누나가 필요합니다. (1)

크라우스 백작가의 영주성은 크라우스 가문이 제국 건국 초기 때부터 존재해왔던 원로 가문인만큼 가문의 역사를 함께해온 영주성 역시 그 유구한 역사를 여러 일화를 통해 간직하고 있다.

이실리아관 또한 영주성과 동시대에 만들어진 건물 답게 이 건물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이 이실리아라는 이름의 유래였다.

초대 크라우스 가문의 안주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별관. 이실리아관.

그렇기에 이곳은 대대로 크라우스 가문의 안주인들이 사용해 왔고 기나긴 시간 동안 수차례 공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안주인들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여러가지의 모습으로 조금씩 남아있다.

지금 우리가 거닐고 있는 이 꽃밭 또한 그런 흔적 중 하나였다.

이 화원은 데미안과 알폰스의 어머니이자 당대 크라우스 가문의 안주인이었던 아르웬 크라우스가 이실리아관에 남긴 흔적 중 하나로, 화원 한 구석에서 불어오는 히아신스의 꽃내음은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와 자주 걷던 화원이었지만 그녀가 떠나간 이후 우리 가족 중 이곳에 오는 이는 가끔 마다 들리는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오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난 후에는 단 한번도 이실리아관에 오지 않으셨고 알폰스는 어째선지 이실리아관에 발을 들이는 것을 꺼려했다.

그렇기에 이 곳을 걸을 때의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화원은 사용인들에 의해 깨끗히 관리가 되고 있었지만 고용된 입장에 있는 그들이 이 곳을 마음 놓고 감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업무가 끝나면 서둘러 화원 밖으로 나가기 바빴고 결과적으로 이곳의 방문객은 오로지 나 혼자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화원에도 오랜만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그 뒤의 배경에 꽃까지 놓이니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나의 손을 살포시 잡은 엘레나는 내가 이끄는대로 천천히 움직였다.

화원(花園)은 꽃을 감상하기 위한 공간.

그 공간에 서 있는 이상 우리 사이에 있어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천천히 걸으며 구역마다 바뀌는 꽃의 변화와 조금씩 달라지는 향기를 맡는다. 화창한 봄의 하늘은 푸르렀고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의 모습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단 둘이 걸으니 여태까지 혼자 걷던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향도 평소에 맡던 것과는 다르게 느껴져왔다. 계속해서 비어 있던 한 쪽이 채워지는 느낌이랄까, 알 수 없는 충만감이 차올랐다.

아마도 오랜만에 누군가와 같이 이 거리를 걸어서 그런것이겠지. 나는 그렇게 자꾸만 간질거리는 마음과 조금씩 기어나오려고 하는 본능을 치워내고는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녀의 뒤에 피어있는 히아신스들은 그녀의 눈과 같은 보라색이었다.

자연스럽게 꽃에 녹아드는 그녀의 모습은 가끔씩 사람의 이성을 저 멀리 날려 보낼 때가 있다.

몇번이고 느끼는 것이었지만 참으로 비현실적인 외모다. 저 정도는 되어야 로맨스 판타지의 주인공을 한다는 말인가.

그녀는 언제 부턴가 세계가 보여주는 그림 속에 빠져 들었는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잔잔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 어떠한 화가도 그리지 못할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조용하다.

새들의 지저귐도 꿀벌들의 윙윙거리는 날개소리도 저 푸르른 세계에 묻혀버린다.

잠시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로 한다.

그렇게 몇분이 지났을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은 구름을 움직여 해를 가렸다.

그림자가 세상에 드리우자 우리는 마치 약속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다시 걷기 시작했다.

***

화원에서 나오자 그녀의 기분은 완전히 풀어졌는지 처음 만났을 때의 엘레나 에델바이스로 변해있었다.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한 눈동자와 어딘가 무심해 보이는 그 얼굴은 내가 소설을 읽으며 떠올렸던 엘레나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런데 왜 이리 새로워 보이지?

분명 저 모습이 내가 알고 있는 엘레나가 맞을 텐데 낯설어 보이는 이 느낌은 뭘까.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그녀를 만나고 나서 내가 본 건 웃는 엘레나. 우는 엘레나. 부끄러워 붉어진 엘레나 같은 것 밖에 없었다.

아니, 이브이도 아니고 뭐가 이리 다양해.

떠올리고 나니 내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엘레나 에델바이스라는 인물의 모습이 참으로 뒤죽박죽으로 바뀌어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처럼 머리가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엘레나."

"네? 데미안. 왜 부르세요?"

"아니. 그냥 불러 봤습니다."

나의 물음에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자 그제야 제자리를 찾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만족감에 무심코 입꼬리가 올라갔다. 엘레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엘레나의 표정 처럼 정해진 결말도 쉽게 바뀌면 좋을텐데. 그렇지 않다는게 한스러울 뿐이다. 그래도 원작과는 다른 엘레나의 행동 덕에, 마음이 가벼워 진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내려놓고 순응해 버린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처럼 고민만 하며 끙끙 앓고 있던 때보다는 마음이 편해졌다.

"화원은 어떠셨습니까?"

"아, 확실히 여기서 바라 보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 있었어요. 고마워요 데미안. 이런 경험을 하게 해주어서."

"자고로 꽃은 좁은 독실에서 보는 것 보다는 넓고 탁 트인 곳에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겁니다. 인공적인 것에 자연을 온전히 담아낼 수 는 없는 법이니까요."

내 말에 엘레나는 작게 웃으며 수긍했다.

켄과 엘레나가 데려온 메이드는 자리를 비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켄은 그렇다 쳐도 이름이...헤일리였나? 원작에서는 데미안에게 계속해서 신변을 위협 받아 엘레나의 학대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끝에 가서는 데미안을 고발하는데 일조하던 녀석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그 둘은 나와 엘레나를 배려해서 자리를 피한듯 하다.

원래도 내가 에스코트하려고 하려고 했으니 뭐.

나는 아직도 여운이 남은건지 창 밖의 화원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날씨 참 좋네요."

"그러게요."

"다음에도 나갈까요?"

"...바구니."

"?"

"바구니에 디저트도 챙겨서 나가요."

단거 그만 먹어... 몸 안 좋아진다.

하지만 엘레나는 마법사니까 어떻게든 하겠지.

나는 엘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매트도 챙겨서 나가도록 하죠. 당분간은 계속해서 맑을 것 같으니 조금 멀리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사르함에는 경치가 좋은 곳이 많거든요."

그런 내 말에 그녀가 뾰루퉁한 얼굴로 답했다.

"경치라면 메로힘도 지지 않아요...."

"뭐, 그렇겠지요. 매트 깔고 앉았다가는 얼어 죽겠지만."

메로힘. 그곳은 기후가 불곰국이나 다름 없는 곳이다.

눈이 내릴때는 눈으로 성을 만들어도 될 정도로 많이 내리는 지역이니. 에델바이스 가문이 마법명가라서 다행이지 우리 같은 무가(武家)가 그곳에 있었으면 자원이라도 많지 않는 이상 진작에 망했을 거다.

"언젠가는 메로힘에서도 하도록 합시다. 얼음 위에 매트 깔고 앉아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래도 일단 오늘은 이실리아관 부터 마저 둘러 보도록 하죠."

북극에서 살아남기 보다는 500년된 고성에서 살아남기가 먼저였다.

***

"이분은?"

"저희 어머니십니다."

엘레나가 벽에 걸려있는 한 초상화의 앞에 서서 물었다. 그 초상화의 옆에도 다른 초상화들이 일렬로 걸려있었지만 그녀는 정확히 아르웬 크라우스의 초상화를 찾아내었다.

이실리아관이 안주인들의 집 역할을 한 덕에 이곳에는 역대 안주인들의 초상이 걸려있었다. 그렇기에 어머니, 아르웬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엘레나가 정확히 아르웬의 초상을 꼭 집어 지목한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 초상화 속 인물과 아주 닮은 사람을 그녀는 이미 한번 만나 본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흰색 천을 주웠다.

원래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가리던 천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관련된 물건들을 모두 이실리아관으로 보내었다. 이 초상화를 제외하고도 어머니가 그려진 모든 것들을 말이다. 이곳에 있는 초상화들 중 유일하게 어머니의 초상화가 흰색 천으로 가려져 있던 것은 혹여 이곳으로 왔을 때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 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미워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얼굴을 보기만 하여도 눈물 부터 흘리기에 그리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천이 땅에 떨어져 있다니. 성의 사용인이 실수 한 것이라면 다시 되돌려 놓았으면 되었을 텐데 왜 되돌리지 않았던 것일까. 이실리아관의 가려진 초상화에 대해 모르는 사용인은 없을텐데.

그 이유는 곧바로 밝혀졌다.

"어....혀, 형아...."

"알폰스."

어머니의 물건으로 가득한 방에서 한 아이가 나왔다.

초상화의 그려진 여인을 똑 닮은 아이가.

< 14화 > 동생은 누나가 필요합니다. (2)

이 세상의 원작이 되는 소설 <공녀는 사랑받는다.>에서 데미안 크라우스는 악역이다. 그것도 초반부에 탈락하게 되는 악역. 한번 쓰러진 악역을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가 보았던 소설의 전개에서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주인공이 중심인 독자의 입장에서 딱히 따로 서술하지 않는 이상 조연에 불과한 데미안은 엘레나의 본격적인 행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일 뿐이지만 그래도 나름 제국 3대 무가(武家)인 크라우스 백작가의 후계자라는 설정이 붙어있는 놈이다.

남주 후보들 중에 데미안과 같은 제국 3대 무가의 출신이자 후에 소드 마스터(Sword Master)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하늘의 검' 라인하르트 크로멜이 있었기에 당시 소드 마스터라는 지고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음에도 라인하르트가 보여준 위용 탓인지 소드 마스터가 가주로 있는 크라우스 백작가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는 독자들도 있었다.

가주인 아서가 직접 엘레나와 요하임에게 무릎까지 꿇으며 사과를 하였지만 독자들은 '사실은 뒤에서 이를 갈며 복수할 때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후에 악역으로 등장할 듯.' 이라는 등의 추측들을 세우며 데미안의 재등장을 예상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크라우스라는 가문에서 망나니는 오직 데미안 크라우스. 이 한명 뿐이였다.

이후 이야기가 어느정도 전개되고 난 이후에 크라우스 백작가가 다시 등장을 하기는 한다. 알폰스 크라우스라는 소년을 통해서 말이다.

알폰스는 데미안을 대신하는 백작가의 새로운 후계자였으며 엘레나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크라우스 가문이 남부의 대영주이자 지배자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마냥 영지가 비옥하고 위치가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가장 큰 원인은 크라우스가 이름 난 검술명가로서 순수하게 무력이 강하기 때문이 아닌 마수들이 들끓고 있는 룬프라우드 산맥의 수호자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마다 한번씩 산맥에 서식하고 있는 마수들은 사람들이 사는 곳을 향해 대규모 이동을 시작하는데 그 마수들의 행진으로 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고 가장 앞에 서서 지휘하는 것이 크라우스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소설 속에서 흑막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이교도들이 나타나 그들에 의해 여태껏 유지되고 있던 전선이 붕괴되어 버린다. 이후 남부의 대부분이 몰락하고 아서 크라우스가 지키고 있는 사르함만이 최후의 보루로 남게 된다.

그런 사르함을 지원하기 위해 제국의 여러 가문이 지원을 가게 되는데, 그 중 하나에는 당연하게도 에델바이스 공작가도 있었고 지원온 인물 중에는 뛰어난 마법사로 성장한 엘레나가 있었다.

주인공이 행차함으로서 이미 그 이교도들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 엘레나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남주 후보들에 의해 이교도들은 빠르게 처리 된다.

이때 알폰스는 크라우스 후계자의 위치에 서서 엘레나를 만나 과거 데미안이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하고 엘레나의 마수 토벌이 원할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로 등장했다.

독자들이 생각한 데미안의 복귀는 커녕 데미안 이 자식은 이름만 나올 뿐 알폰스의 말로는 행적조차 묘연한 상태였다. 그 말에 독자들은 데미안이 몬스터 웨이브의 원인아니냐, 쫄아서 튀었네 라며 말이 많았다.

그런 형을 둔 덕인지 알폰스의 등장은 반응이 괜찮았다.

자신의 형의 과오를 마치 자신의 일인 것 처럼 사과하였고, 토벌전 내내 행동 하나 하나가 영웅이라고 불리어도 좋을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일각에서는 새로운 남주 후보냐며 호들갑 떠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이 에피소드로서 크라우스 가문에 쓰레기는 데미안 크라우스 밖에 없다라는 것이 증명되어 버렸다. 이쯤 되면 데미안이라는 인간은 진짜 신이 엘레나에 대한 유일한 악의를 담아 만든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래서 내 몸이 엘레나만 관련되면 그 모양 그 꼴인건가. 진짜 환장하겠네.

물론 지금은 내가 데미안이고 그런 착한 동생이 있다는 것에는 감사해 하고 있다. 예전에 주변 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동생이라는 존재는 성별 할것 없이 크면 클수록 옛날에 있던 성격을 죄다 버리게 된다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미래를 알기에 그랬던 걸까.

데미안 같은 쓰레기를 형으로 두고도 알아서 잘 컸다는 미래를 알고 있기에 어쩌면 나는 안심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직 그 아이가 열살도 안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채 말이다.

***

나와 엘레나의 머리 위에 걸려있는 초상화.

그 그림 안에는 한 여인이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연한 갈색빛을 띄는 머리카락에 에메랄드를 닮은 녹안(綠眼). 자리에 있는 것 만으로도 편안한 느낌은 주는 그녀의 분위기가 그림 속에 잘 녹아있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색을 가진 어린 소년이 지금 내 앞에서 떨고 있다.

주위를 한번 둘러 보았다. 사용인도 없이 온것인지 우리 외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길을 잃어버린 걸 수 도 있다. 크라우스 영주성은 그 크기가 엄청나니 어린아이가 길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수행원을 곁에 두는 것이다.

복도에 장식되어 있는 갑옷들만 보아도 그렇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 하여도 그것에 깔려 넘어졌다가는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대체 시종들은 어딜가고 알폰스를 혼자둔거란 말인가. 미래에 어떻게 자라든 간에 지금 알폰스는 이제 일곱살이 된 어린아이였다.

그 때문인지 무심코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혀, 형...그게에..."

그런 내 얼굴을 보자 말을 흐리는 알폰스의 손에는 무언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어린아이의 작은 손에 다 가려질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황금으로 된 반짝 거리는 금줄이 알폰스의 손 틈 사이로 흘러나온다. 금줄에 걸려 있는 것은 우리 가문의 문양이 조각된 목걸이였다. 그 목걸이가 무엇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천이 내려가 있는 어머니의 초상화, 어머니의 흔적이 가득한 이실리아관. 그리고 알폰스의 손에 들려있는 로켓.

그제야 지금 일이 어찌 된것인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구겨졌던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무릎을 꿇어 알폰스와 눈높이를 맟춘 후 말했다.

"알폰스. 시종들도 없이 혼자 여기에 오면 어떡해. 그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미안해..."

"항상 이 시간에 여기에 온거야?"

"...."

알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긍정의 의미라는 것은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실리아관에 가는 시간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날이 아니었고 말이다. 만약 엘레나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이실리아관은 비어있는 것이 정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알폰스는 사용인 없이, 내 눈을 피해 이실리아관에 가고 있었던 걸까.

이실리아관이 딱히 금지된 곳은 아닌데 말이다.

'아버지.'

사실 거기에 대한 답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이 가고 있었다. 가문 내에서 알폰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옆에 서 있는 엘레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나와 눈을 맞추었다.

엘레나가 싱긋 웃으며 알폰스에게 인사를 건냈다.

"어제 저녁에 뵈었죠. 엘레나 에델바이스라고 해요."

엘레나의 인사에 침묵을 고수하던 알폰스는 결국 입을 열었다. 알폰스도 아직 어리지만 귀족의 예법을 배우고 있으니 레이디의 인사를 말 없이 무시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알폰스 크라우스 입니다. 그리고...저, 그냥 알폰스라고 불러도 돼요. 형ㅇ..형님의 약혼자시니까요."

"네. 알겠어요. 알폰스 도련님."

마지막에 부드럽게 미소짓는 엘레나의 모습에 그만 알폰스의 귀가 빨개지고 말았다.

역시 미모의 힘은 대단하다. 단숨에 알폰스를 무너뜨렸어.

나는 알폰스의 손을 잡아 쥐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엘레나. 아무래도 알폰스를 방으로 데려다 주어야 할것 같네요. 아쉽지만 오늘 이실리아관 탐방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도록 하죠."

"음, 아쉽지만 그래야 할 것 같네요. 그러면 내일 다시하는 걸로 할까요?"

"죄송합니다...괜히 저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알폰스의 머리를 살짝 쓸어주었다.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내 쪽이었다. 알폰스는 내가 오늘 있던 일에 대해 물어볼까봐 계속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대화해야 할 상대는 알폰스가 아니었다.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에 다시금 머리가 지끈 거린다. 엘레나와의 약혼에 이어 이번에는 알폰스라니. 크라우스 가문의 문제는 나만 있는게 아니었단 말인가?

마치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 처럼 여태 내게 일어났어야할 사건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 15화 > 동생은 누나가 필요합니다. (3)

알폰스를 방으로 데려다 준 후 나는 엘레나와 내일을 약속하고는 다시 이실리아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실리아관에 도착하자 역대 안주인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추억의 회랑으로 걸어갔다. 가문의 기나긴 역사만큼 많은 여인들의 초상화가 있었지만 내가 아는 얼굴은 단 한명 뿐이다.

그 초상화들의 나열 끝에는 아직 천을 덮지 않은 어머니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화공의 훌륭한 솜씨 덕에 초상화 속 그녀는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장이라도 의자에서 일어나 움직일 것 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그것이 내게 남아있는 그녀와의 기억들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했다.

알폰스가 있었던 방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눈에 익은 방의 배치가 들어왔다.

몇년이 지났는데도 이곳은 여전히 바뀐 곳 하나 없이 그때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다만 알폰스가 다녀갔기 때문인지 단정하게 개어져 있어야 할 침대의 이불은 조금 구겨져 있었고 누군가 급하게 배개 밑에 숨긴 것으로 보이는 것이 삐죽 튀어 나와 있었다. 알폰스가 이곳에 와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씩 머리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침대로 다가가 배개를 들추자 알폰스가 읽다 만 것으로 보이는 낡은 책 한권이 놓여 있었다.

익숙한 필체다.

아니, 필체 뿐 만이 아니라 안에 적혀있는 내용 또한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것이 이것은 아르웬, 나의 어머니의 일기장이었으니까.

예전에 가끔 어머니께서 혼자 무언가를 적고 계신것을 보았지만 그것에 대해 물어보면 어머니는 항상 비밀이라며 내게 그 책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후 기억에서 잊고 살았는데 어머니의 방인 이곳에 남겨진 것을 알폰스가 찾아낸 모양이다.

글의 시작은 데미안이 태어나고 나서부터 적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글이 꾸준히 적혀 있지는 않았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날을 떠올리기 위해 그때의 강렬한 기분을 적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글을 읽고 있는 나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가 쉬웠다.

그녀의 글에 적혀 있는 데미안은 내가 아니었지만 그녀와 나의 추억 또한 분명하게 이곳에 남겨져 있었다.

이 글로 인하여 내가 느낀 것은 어머니의 빈자리에 대한 상실감이 아닌 과거의 느꼈던 따스함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는 행복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같은 글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가지는 것은 아니듯 알폰스는 내가 느꼈던 것과는 다르게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아르웬 크라우스가 세상을 떠난 것은 알폰스가 두살 때의 일이었다.

당시 남부에는 전염병 하나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원인이었다. 어렸던 알폰스가 걸리지 않은 것이 천운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치료제가 만들어지기 전 까지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그 중에는 크라우스의 안주인 또한 포함 되어 있었다.

두살짜리 갓난아기에 불과했던 알폰스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을리가 없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는 알폰스가 이 일기를 보았을 때 그 추억을 가지고 있던 나와는 달리 더욱 어머니의 빈자리에 대해 통감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모르는 어머니를 잊지 못한 형과 아버지의 사이에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을 지도.

어머니를 이른 나이에 잃은 알폰스에게 있어 가족은 나와 아버지만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알폰스에게서 이미 떠나간 이의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추억을 하되 그 그림자에 잡아 먹혀서는 안되었다.

아마 그 사실을 알기에 아버지가 알폰스를 이실리아관에 가지 못하게 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알폰스를 위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땠을까. 내가 알폰스에게 좋은 형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럴리가.

이제와서 눈치 챈 주제에 좋은 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앞으로 내게 닥칠 미래를 준비해야 했었다는 말은 변명에 불과하다.

솔직하게 인정하자.

악당인 나와 달리 앞으로 있을 미래에도 선역으로 있을 알폰스였기에 나는 그 아이에게 무심했다.

***

나는 어머니의 일기를 들고 이실리아관을 나왔다.

초인이라 말 할 수 있는 육체를 지녔것만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손에 들려있는 어머니의 작은 일기장은 마치 무거운 철근을 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잘못을 알았으면 바로 잡아야한다.

하지만 가족을 가진것도 누군가의 형이 되어 보는 것도 모두 이번 삶이 처음이었다. 나는 이상적인 형의 모습을 모르고 만약 내가 그렇게 바뀐다 한들 그 아이가 느끼던 상실감을 모두 매워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엘레나와의 약혼이라는 무거운 돌을 내려 놓았더니 또 새로운 돌이 굴러와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해진 운명같은 것이 아닌 나의 잘못으로 인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엘레나 때 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 같다.

어찌해야할지 고민하며 걷다가 어느세 내 방 앞까지 도착하니 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눈 앞에 나타났다.

"도련님. 오늘도 고민이 많아보이십니다."

"아? 켄.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저야 도련님의 전속 집사로서 도련님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보다 도련님께서는 왜 그리 비 오는 날의 하늘 처럼 우중충한 얼굴이십니까. 아, 에델바이스 영애에 대한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미 아가씨께선 도련님에게 푹 빠져...."

"그런거 아닙니다."

이 아저씨는 내가 기분이 안 좋으면 다 엘레나 관련된 걸 줄 아나.

능글맞게 웃는 노집사의 얼굴에 무거운 기분이 약간 덜어진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와 알폰스를 가장 오랫동안 지켜 본것이 켄과 마리아 부부였나. 그렇다면 혹시 켄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켄에게 그에 대해 묻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그 둘이 알폰스에게 이상한 점을 느꼈었다면 곧바로 우리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마리아가 알폰스를 그냥 두었을 리 없다.

마리아의 성격이라면 분명 어머니를 알지 못하는 알폰스를 가엽게 여겨 이것 저것 신경 써주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알폰스의 감정의 골은 매워지지 못했다.

이걸 해결하려면 제3자가 아닌 가족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러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그 얼굴을 떠올리자 곧바로 켄에게 말했다.

"켄. 아버지에게 가서 말씀 해주세요. 오랜만에 아들이 대련을 좀 하고 싶다고."

"예? 갑자기요? 그런데 그 꼴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평소에 멀쩡한 상태에서 하여도 슬라임이 되어 나오시지 않습니까. 엄청 피곤해 보이시는데 오늘은 쉬시고 내일 하시는게 어떠실지."

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답했다.

"괜찮아요. 오늘은 평소 처럼 빡빡하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냥 아들과 아버지간의 '대화'를 할 생각이니까. 그런 내 답에 켄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거 뒷수습할 때가 문제겠군요."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건데..."

"도련님이 그리 말씀 하셔도 가주님 성격상 평범하게 끝날리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최대한 조심 해주셨으면 합니다. 에델바이스 영애께서 놀라실 수 도 있지 않습니까."

"큰 소리는 나지 않도록 할게요."

"아니, 크게 다치지 마시라는 소리였습니다. 괜히 피떡이 되어서 나오시면 안되니 말입니다. 그 때문에 영애께서 놀라시면 어떡합니까?"

"....."

할 말이 없네.

잠시후 켄이 아버지에게 말을 하러 떠나자 나는 성 뒤에 있는 연무장을 향해 걸어갔다.

***

크라우스 가문은 명성 높은 무가 답게 연무장이 여러 곳 존재했다. 그 중에서도 내성 바로 뒤에 있는 연무장은 크라우스 가문의 혈족만이 사용하는 곳으로 가문의 이름 아래 서약한 기사라 할 지라도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었다.

나는 연무장에 도착한뒤 뒷편에 준비되어 있는 가검들 중 하나를 골라 들었다.

대련은 대련일 뿐. 목숨을 앗아가는 생사결을 펼치는 것도 아닌데 진검으로 대련을 할 이유는 없다. 과거에 진검으로 했다가 목숨을 잃는 이들이 많아져 그와 같은 무게에 날을 세우지 않은 가검을 이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한들 오러를 담아 낼 수 있는 검사라면 그것은 진검이나 마찬가지 이겠지만.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잠잠하던 대기 중의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자유로워야 할 마나의 흐름이 무언가 강대한 힘에 이끌리고 있는 것 처럼 어느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오셨습니까?"

그 거대한 흐름의 중심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소드 마스터(Sword Master).

평소에는 억누르고 있던 그 지고한 경지에 오른 이의 강대한 존재감이 여과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래. 그런데 네가 먼저 나에게 대련을 청하다니 의외구나. 무슨 깨달음이라도 있던게냐?"

아버지의 흥미로워 하시는 얼굴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아니요. 그건 아니고. 아버지와 오랜만에 대화도 할겸 화를 풀 곳이 필요해서 말입니다."

그말에 아버지는 딱히 답을 하시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실 뿐이었다.

눈을 한번 깜빡이자 아무것도 없던 그의 손에는 검이 한자루 들려 있었다.

나 또한 아무말 없이 검을 들었다.

잠시후 바람 소리만이 머무르던 고요한 연무장에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16화 > 동생은 누나가 필요합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