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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보고 싶을 때 보면 되지, 뭘. 아니,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배려해 줘야 해?"

"그래도 지금 수업 시간인데?"

"나는 충분히 도덕적인 사람이라서 수업은 듣지 않아도 돼."

"아, 그래…."

스티커를 떼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봉투를 마구잡이로 뜯어냈다.

하트 스티커 3장이 찢어졌다.

"아…."

꼭 자신이 편지가 되기라도 한 듯.

연하늘이 그런 소리를 토했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봉투 안에 든 편지를 꺼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간결했다.

「방과 후, 옥상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당신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두 문장이 적혀 있었을 뿐이다.

필체가 유려하고, 편지의 내용이 정중한 것으로 보아 장난을 치려고 보낸 것은 아닌 듯했다.

그건 그렇고.

'…볼 거면 그냥 같이 보면 되지, 왜 몰래 보려고 하는 거지?'

옆에서 쫑긋거리는 토끼 귀.

연하늘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건넸다.

"자. 궁금하면 직접 봐."

"내가 봐도 돼? 상대에게 실례인 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이미 편지를 읽고 있었다.

어찌나 집중해서 읽는지, 손에 쥔 편지가 구겨지기까지 했다.

"역시…."

이윽고 연하늘이 입술을 움직였다.

무언가 짐작이 가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왜 나를 옥상으로 부르는 걸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

먼저 질문한 사람은 나인데.

왜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거지.

나는 의아해하며 생각에 잠겼다.

연하늘이 짐작이 가는 것이 있듯, 나도 짐작이 가는 게 있기는 했다.

이 편지는….

"역시 결투장인가."

"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나한테 편지를 보내겠는가.

무엇보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옥상으로 올라오라고 하면 싸우자는 것밖에 더 돼?"

"…."

"그렇게 보면… 편지에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이유는 1명이 아니라서 그런 건가."

"어, 음, 저기 있지…."

"하늘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

"너도 같은 생각을 한 거 아니야?"

"아, 음… 비, 비슷해. 아주 조금."

연하늘도 동의했다.

나는 생각에 확신을 품었다.

'시기가 너무 절묘하기도 해.'

한편, 내가 그렇게 추론한 데에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나는 며칠 전에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벽뢰를 선보였다.

그로 인해 그들에게 경쟁 대상으로 각인되고 말았다.

어쩌면 그들이 나를 견제하기 위해 조치를 취한 것일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나 하나 견제하겠다고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또 모르는 일이야.'

옥상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가문의 입김이 닿은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만약에 대비해야 했다.

"하늘아, 나 이따가 검 좀 빌려줘."

"어? 검은 왜?"

"쓰게 될 일이 있을지도 몰라서. 너 쓰라고 준 건데, 먼저 쓰게 돼서 미안해."

"아니, 그건 상관없는데… 검으로 혼내 주게?"

"필요하다면."

"…그냥 안 가면 되지 않아?"

"누가 사주한 건지 궁금하잖아."

"…."

가문의 사람이 수작을 부린 거라면 배후를 알아내야 했다.

그러니 옥상에서 기다리는 놈들을 만나 볼 필요가 있었다.

연하늘이 말을 붙인 건 그때였다.

"저기, 있지이."

"응."

"이게 다른 의도로 쓰인 편지라고 생각 안 해 봤어?"

"이것 말고 다른 의도가 있나?"

"예를 들면… 누가 너한테 반해서 고백하려고 보낸 편지라거나…."

"말도 안 돼."

"…왜?"

"내가 인기 있을 타입은 아닐걸?"

게임에서 도견우는 순둥이, 겁쟁이, 울보라는 이미지에 어울리게 선이 가느다란 청년으로 그려진다.

남자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근육이 우락부락한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걸핏하면 겁을 먹고 울기나 하지, 목소리도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지.'

만약 내가 여자라면 도견우 같은 캐릭터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전생을 깨달은 나와 게임의 도견우를 완전히 동일하게 여겨서는 안 되겠지만 내가 전생을 깨달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대략 3개월.

학교 사람들이 내가 변했다는 것을 깨닫기엔 충분치 않은 시간이었다.

아직도 대다수는 나를 겁쟁이로서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가정은 무의미했다.

"…있잖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 인기 많아."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거짓말 아닌데…."

그녀가 내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배려해 주는 게 고마웠다.

교실 뒤편에서 도덕 수업을 흘려들으며.

나는 어딘가 복잡한 얼굴을 한 그녀의 토끼 귀를 만지작거렸다.

* * *

자신은 인기 있을 타입이 아니다.

도견우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전히 도견우의 생각일 뿐이다.

'얘가 나한테만… 아, 그게 아니라, 학교생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모르는 건가?'

연하늘은 견우밖에 친구가 없지만, 그래도 듣는 귀는 있었다.

그녀는 여학생들이 도견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도견우 말이야, 뭔가 변한 것 같지 않아? 저렇게 어른스러웠나?

―우리 반 남자애들과 다르긴 해. 뭔가 여유로워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알게 모르게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기도 하고.

―작년에 같은 반이라서 아는데, 확실히 예전이랑 달라지기는 했어. 내가 알기로는 저렇게 의젓한 애가 절대 아니었거든.

어른스럽고, 여유로워 보이고, 또한 자신감이 넘치고, 의젓하다.

작년까지 어땠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도견우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된 후로 그런 평가를 받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에게 호감을 표시하려 짓궂은 장난이나 치는 남자애들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도견우는 남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나도 견우 괜찮다고 생각해.

―수지 너도!?

반에서 인기가 많은 그 김수지도 인정할 정도였다.

'확실히 그렇기는 해. 내 친구라서 그런 게 아니라, 걔가 다른 남자애들보다 훨씬 낫기는 해. 나만 아는 거지만, 애가 배려심도 넘치는 데다 은근히 잘 챙겨 주기도 하고….'연하늘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의 옆에 붙어 있는 일이 많은 그녀는 다른 여자애들보다 그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것이 묘한 우월감을 불러왔다.

한편, 견우의 배경이 인기를 끄는 또 하나의 요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신검 도가의 사람이잖아. 명가의 사람이란 것만으로도 어딘가 달라 보이지 않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가만히 있어도 기품이 느껴진다는 거지?

―그에 비해서 다른 남자애들은 유치하기만 하고…. 같은 나이인데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지?

―예전에는 몰랐는데, 요새 보면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더라.

―나도 그 생각 했는데. 걔가 아까 검을 가져온 거 보니까, '아, 얘는 우리랑 사는 세상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 있지? 그래서 뭔가… 멋져 보이더라.

대개 일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

나이가 어려 행동반경이 넓지 않은 그들에게 헌터나 몬스터 같은 것은 TV에서나 보는 비일상의 존재로서 여겨지기만 했다.

그런데 비일상의 존재가 자신들과 같은 반에 있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신검 도가의 도견우는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신비감은 호감으로 작용할 만도 했다.

―…있잖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 인기 많아.

그런데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그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서 비밀로 하려다가 냅다 말해 줬더니.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도견우는 빈말로 알아듣기나 했다.

그녀로서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냥 인기가 있는 걸 모르는 채로 나하고만 놀았으면 싶기도 하고… 그래도 걔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알게 해 주고 싶기도 하고….'

나의 작은 도견우로 있어 달라는 마음과.

만인의 도견우로 성장하기 바라는 마음.

연하늘은 갈팡질팡 갈등했다.

그러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서는, 방과 후가 돼 버렸다.

"오늘은 하늘이 너 먼저 가. 나는 따로 볼일이 있거든."

"…정말 가게?"

"가야지, 그럼. 검은 내일 줄게."

도견우가 짐을 챙겨서 일어났다.

연하늘은 어깨에 척 검을 짊어진 그를 보고 망설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가지 말라고 설득하고 싶었다.

"내일 봐."

"…응, 내일 봐."

하지만 그를 붙잡으려니 자신이 꼭 나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필시 상대는 용기를 내서 도견우를 불러낸 것이리라.

그런데 자신이 그를 붙잡아 버리면, 기다리는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안겨 주게 될 터였다.

결국 그녀는 꿍한 마음으로 그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

짐은 다 챙겼건만.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하늘은 책상 위에 올려 둔 가방을 빤히 쳐다보면서 생각에 빠졌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역시 고백하려고 불러낸 거겠지?'

'견우는 절대로 그럴 일은 없다고 여기는 것 같지만….'

'그러면 견우는 생각이 없으니까 거절하겠지?'

'근데 만약에 고백을 받아들이면?'

'둘이 사귀게 되는 건가?'

'그럼 나는 더 이상 견우 옆에는 못 있게 되는 건가?'

"…."

싫다, 정말.

연하늘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웠다.

그녀의 토끼 귀가 축 처졌다.

책가방이 이렇게 무거웠던가.

어깨를 활짝 펼 수 없었다.

그때,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샜다.

'그런데 만약… 견우 말대로 그게 진짜 결투장이라면?'

'혹시 모르는 거잖아.'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견우는 괜찮으려나….'

'견우니까 안 다치겠지?'

'만약 1명이 아닌 여럿이라면?'

'혼자서는 힘들 거야.'

'나라도 가서 도와줘야 해.'

'내 생각보다 위험할 수도 있어.'

'여차하면 누가 선생님을 부르거나, 경찰에 신고할 수 있도록 해야 해.'

'그러려면….'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서 자신이 몰래 뒤따라가야 한다.

그녀의 사고는 그렇게 비약적으로 도약했다.

'이건 엿보러 가는 게 아니야.'

"견우가 걱정돼서 가는 거지."

응, 맞아.

도견우의 친구로서, 그 정도쯤은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연하늘은 냉큼 기운을 차렸다.

책가방이 이렇게 가벼웠던가.

그녀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면서 옥상으로 향했다.

* * *

방과 후.

나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자, 주위를 감싼 펜스 위로 탁 트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오지 않은 건가?'

나는 하늘 아래로 발을 들였다.

펜스 가까이 다가가자, 하교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연하늘도 저 무리 속에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화아악.

나는 감지망을 펼쳤다.

나를 중심으로 생긴 마나의 파장이 옥상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내 감지망에 기척이 걸려들었다.

'3명인가.'

그들은 한곳에 모여 있었다.

이에 나는 물탱크 뒤에 숨어 있는 놈들에게 말했다.

"얼른 나와. 거기 있는 거 아니까."

내 말을 들었는지.

물탱크 쪽에서 소리가 났다.

"네가 먼저 나가 봐!"

"왜 하필 나야!?"

"이럴 때는 큰형이 나가야지!"

옥신각신 다투는 듯한 소리.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얼굴을 확인해 보면 알 일이다.

나는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경고했다.

"얼른 나오지 않으면 물탱크째로 베어 버리는 수가 있다."

"기, 기다려! 지금 나갈게!"

그제야 반응이 있었다.

물탱크 뒤에 있던 놈들이 다급히 뛰쳐나온 것이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금은동?"

"그, 그래! 견우야, 우리! 우금동!"

"우은동!"

"우동동!"

나를 줄기차게 괴롭혔던 세쌍둥이.

게임에서 자신들을 케르베로스란 이명으로 자칭하는 엑스트라 악역.

그들을 보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단번에 상황이 파악됐다.

그러니까….

"또 도승우 놈한테 나를 괴롭히란 사주라도 받았나 보지?"

"뭐?"

"아니면 다른 사촌이냐?"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당한 것이 분해서 보복이라도 가할 생각이었던 건가?"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잘됐네. 나도 바라던 바야."

이놈들을 한 번만 때려눕히는 것은 사실 나도 성에 차지 않았다.

저들이 알아서 빌미를 제공해 주니 고맙기만 했다.

나는 검을 감싼 보자기를 풀고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야! 야! 야! 검은 왜 있는 거야!"

"너 왜 그래!?"

"우리는 그럴 생각 없어!"

"웃기시네."

보아하니 나와 다르게 세쌍둥이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셋이서 기습을 가하면 무기가 없어도 나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안이하게 생각한 것을 후회하게 해 주기로 했다.

'군청검이 없는 게 아쉽네.'

군청검의 역날검 모드를 시험하기 딱 좋은 상대인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칼등과 검집으로 때려눕히는 거로 만족하기로 하자.

그런 생각으로 검을 뽑았는데….

"견우야! 제발 우리 좀 도와주라!"

"우리 좀 도와주라!"

"이렇게 부탁할게!"

"…어?"

번개같이 빠른 속도로.

세쌍둥이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나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32)

우씨 성을 지닌, 금은동 세쌍둥이.

게임에서 강한별과 도견우가 친해지는 계기를 제공하는 그들은 도승우의 사냥개로 통했다.

하지만 그렇게 불리기는 싫었는지, 다른 이명으로 자칭하고는 했다.

그 이명이란 바로….

「우금동&우은동&우동동」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지옥의 수문장!

―삼두견(三頭犬)!

―금강 아카데미의 케르베로스다!

어….

게임에서는 정말 그렇게 나왔다.

전용 포즈도 함께 취하면서.

그로 인해 세쌍둥이는 등장 비중이 적은 엑스트라 악역이라고는 하나, 상당히 인상에 남는 캐릭터였다.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는 SNS에서 세쌍둥이의 대사와 포즈를 따라 하는 챌린지를 했을 정도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투루 볼 상대가 아니었지.'

세쌍둥이는 그래도 케르베로스라고 자칭하고 다닐 만큼, 전투에서 꽤나 연계가 좋았다.

그리고 교활했다.

강한별과 세쌍둥이의 전투에서.

조작이 미숙한 플레이어의 경우, 놈들에게 패배해 스토리 초반부터 진행이 막히는 일이 왕왕 있었다.

오죽하면 그들이 곡소리를 내며 『브레이브 하츠』 커뮤니티에 와서 하소연하고는 했다.

지옥의 수문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반부의 수문장은 확실하다면서.

'그러니 방심해서는 안 돼.'

나는 의심을 풀지 않기로 했다.

이리처럼 교활한 놈들이 겉으로는 내게 굴복하듯 무릎을 꿇으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무릎을 꿇은 게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을지 어떻게 알아?'

어쩌면 저렇게 몸을 수그린 이유는 품속에 암기를 감추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놈들에게 집중한 사이, 어디서 다른 놈들이 기습하기 위해 노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데….'

나는 재차 감지망을 펼쳤다.

옥상에는 이놈들밖에 없는 듯했다.

그러던 그때.

'응?'

옥상 문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기척이 하나 걸려들었다.

익숙한 기척이었다.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연하늘? 집에 간 게 아니었나?'

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옥상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문틈 사이로 하얀 토끼 귀가 슬쩍 엿보이고 있었다.

연하늘이 맞았다.

이 학교에서 토끼 귀를 한 아인은 그녀밖에 없었다.

'쟤가 왜 저기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주위에 이놈들 이외에는 없다는 건데….'

나는 다시 세쌍둥이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무슨 의도로 나를 불러낸 걸까.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라도.

"역시 기절부터 시키는 게 좋겠네."

"뭐!? 그게 무슨…."

"너희가 그러는 척,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을지 어떻게 알고?"

"아니, 야…."

"그러니까 완전히 무력화시켜야지."

"우리는 싸울 의도 같은 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깨어나고 나서 하도록 해."

기절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목을 치면 된다.

일전에 도승우를 기절시킨 덕분에 대강 요령을 터득하기도 했다.

나는 때마침 머리를 내밀고 있는 놈들의 목을 치러….

세쌍둥이가 속사포로 말을 토한 것은 그때였다.

"시키는 거라면 모두 다 할게!"

"그러니 부탁 좀 하자!"

"이제 너밖에 없단 말이야!"

"우리를 후원해 줘!"

"…뭐?"

후원해 달라는 소리를 듣고 나는 들고 있던 검을 내렸다.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할 듯했다.

* * *

내게 해를 입힐 의도가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머리 뒤로 손을 붙인 세쌍둥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말장단은 치우고.

나는 놈들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요지는 간략했다.

"도승우한테 버려졌다는 거지?"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세쌍둥이의 말에 의하면, 얼마 전 검술관에서 내게 농락당한 이후로 도승우의 연락이 뜸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어제 불쑥 연락이 와서는, 더는 자신들을 후원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고.

그뿐만 아니었다.

'도승우가 검술관에 다니지 못하게 조치를 취했다라….'

도승우는 세쌍둥이가 신검 도가에서 운영하는 모든 검술관에 등록하지 못하도록 제명했다는 모양이다.

'도승우의 눈 밖에 나 버린 거네.'

게임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당연하다.

세쌍둥이가 내게 당하는 스토리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니 도승우가 그 일로 말미암아 세쌍둥이에게 실망하고 내친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 전개는 아니었다.

다만 대처가 지나친 감이 있었고, 세쌍둥이를 이제 와서 내친다는 게 의문스럽기는 했다.

생각할 수 있는 추론은 하나였다.

'나한테 져서 그런가?'

이틀 전, 도승우는 내게 패배했다.

놈이 그 일로 애꿎은 세쌍둥이한테 화풀이했을 가능성이 컸다.

시기가 절묘해도 너무 절묘했다.

여하튼, 그래서….

"걔한테 후원받지 못하게 됐으니, 대신에 나한테 후원을 받겠다?"

"이렇게 부탁할게! 제발 부탁이야!"

"너한테 염치가 없는 건 알지만!"

"우리는 헌터가 되고 싶어!"

끈이 떨어져 나간 세쌍둥이는 나를 찾아온 것이다.

아니, 편지로 불러낸 것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무방비하게 머리에 손을 얹은 놈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렇다고 이야기하면 되지, 편지를 써서 옥상으로 올라오라 한 이유는 뭐야?"

"그건 네가 무시할 것 같아서…."

"편지에 이름을 적지 않은 건?"

"그것도 같은 맥락이었어! 우리 이름을 보면 무시할 것 같았거든."

"글씨가 꽤 예쁘던데?"

"그건 우리 글씨는 읽기 힘드니까 대신에 반에서 제일 잘 쓰는 애한테 부탁한 거지."

"그래도 이름을 쓰지는 않았지만, 우리라고 암시를 주기는 했어!"

"뭐? 어떻게?"

"봉투 입구에 스티커를 붙였잖아. 색깔이 다른 스티커로 세 장."

"금색! 은색! 동색! 그것을 봤으면 눈치껏 알아차렸어야지! 넌 눈치도… 미안, 잘못했어! 잊어 줘!"

"후…. 스티커가 하트였던 건?"

"우리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거든!"

"우리 마음이야! 받아 줘!"

"응, 싫어."

세쌍둥이가 내 비위를 맞추러 아부를 떤다.

어떻게든 내 비호를 받아 내겠다고 노골적으로.

놈들이 떠드는 소리에 정신이 사납고, 생각이 많아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딱히 스토리가 그대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스토리에 영향을 주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나비 효과를 불러들이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스토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세쌍둥이의 미래가 달라졌다 한들, 큰 영향을 주지 못하리라.

'이놈들의 미래가 바뀌었다고 해도 배드 엔딩이 뜰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세쌍둥이의 사정은 알 바가 아니다.

아주 꼴좋다.

이놈들에게 사적인 원한을 가진 나로서는 놈들의 처지를 비웃어 주기만 하면 될 뿐이다.

미래를 빼앗기고 절망한 놈들의 얼굴을 감상할 수 있다니,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푼 셈이다.

아주 마음이 후련하다.

그래야 하건만.

"하…."

마음이 썩 후련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했다.

마치 마음속에 고구마가 넝쿨째로 들어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나쁜 사람은 되지 못할 듯했다.

'이 호구… 아니, 도덕적인 놈.'

전생의 나라도 이랬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전생을 깨달았더라도, 누군가의 인생을 파탄 낼 만큼 못되고, 모질어지지는 못할 것 같았다.

"견우야, 제발…."

"…."

세쌍둥이가 눈물을 글썽였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놈들의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만 손 내리고 일어나."

"…어?"

"못 들었어? 일어나라고."

"어, 어!"

화들짝 놀라는 세쌍둥이.

나는 자리에서 허겁지겁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하는 그들을 일일이 손가락질했다.

"똘마니 금, 은, 동. 너희는 오늘부터 내 똘마니고, 빵셔틀이야. 앞으로 내 후원을 받고 싶으면 내 말을 잘 듣도록 해. 빵을 사 오라면 사 오고, 개처럼 짖으라 하면 개처럼…."

"똘마니? 나이도 같은 친구 사이에 무슨 똘마니야!?"

"맞아! 승우도 그러지는 않았어!"

"적어도 부하라고 하자!"

"스읍."

"하던 거 마저 이야기해."

"빵 사 올까?"

"멍멍!"

차라리 잘된 일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는 내게 굽실거리는 놈들을 보며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내가 부려 먹을 만한 놈들을 찾고 있었는데, 이놈들이라면 나쁘지 않아.'

게임의 무대가 되는 학원도시.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학원도시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비하려면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은 편이 나았다.

세쌍둥이라면 그 역할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전력으로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자질구레한 일을 맡기기 충분했다.

"내가 아버지한테 말해 놓을 테니, 이전처럼 검술관을 다니도록 해."

"고마워! 진짜 너밖에 없다!"

"근데 혹시라도 도승우가 너희를 스파이로 삼으려고 이런 짓을 꾸민 거라면… 그때는 진짜로 죽을 줄 알아. 아무리 내가 착해도, 통수 치는 것은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절대 그럴 일은 없어!"

"우리는 스파이 아니야!"

"충성을 맹세할게! 충성! 충성!"

"내가 앞으로 잘할지 지켜볼 거야. 똘마니 금, 은, 동."

"근데 진짜 그렇게 부를 거야?"

"우리한테는 우금동, 우은동, 우동동이란 이름이…."

"뒤에 '동'도 붙여 주면 안 될까?"

"똘마니 금, 은, 동. 너희 이름을 외우기도 어려운데 쉽게, 쉽게 가자. 어?"

"…."

"이름은 나한테 하는 거 보고 나서 생각해 볼게. 자, 충성."

"충성! 충성! 흑, 씨바아…."

그리하여.

나는 똥개 3마리를 거두어들였다.

앞으로 잘 부려 먹어야겠다.

* * *

다행이다, 정말.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휴우…."

들키지 않게 문을 살짝 열고서 문틈으로 옥상을 엿본 연하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난 또…. 세쌍둥이였구나.'

우금동, 우은동, 우동동.

세쌍둥이는 성격이 워낙 방정맞고 드센 것으로 유명한 아이들이었다.

여하튼 여자는 아니었다.

도견우에게 편지를 쓴 사람의 정체를 알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자신은 앞으로도 계속 도견우의 옆에 있어도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내가 왜 이러지?'

그녀는 묘한 안도감에 사로잡혔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

그 감정에 집중하자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콩닥거렸다.

막,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한다.

'안 돼, 올라가지 마!'

낯설면서도, 마냥 싫지 않은 기분.

가슴을 간질이고,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민망하고, 쑥스럽고, 부끄럽다.

이 기분에 빠지면 자신을 뜻대로 통제할 수 없을 것 같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된다.

아니, 자신은 무언가가 된다.

그것이 설레면서도 무섭다.

'의식해서는 안 돼.'

그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연하늘은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입꼬리가 올라가지 못하게 얼굴을 주무르고, 두근거림을 진정시키려 가슴에 손을 꼭 얹었다.

귀를 머리에 갖다 붙이듯 누르며,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진정하자, 하늘아. 하늘아, 진정해. 진정하자…."

연하늘은 어둠 속에 잠기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녀가 자신을 다독이듯 몇 번이고 똑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다가 그만, 도견우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연하늘은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그가 뚱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집에 간 거 아니었어?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니까."

"아, 그게…."

뭐라고 답하면 되는 거지?

이 상황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

얼른 말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의심을 살 것이다.

연하늘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만 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 그게 있지! 여차할 때 경찰에 신고하거나 선생님한테 이르러 갈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서…."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굳이?"

"호,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그리고 전에 네가 말했잖아. 우수한 헌터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라고."

"…."

이 바보, 멍청이, 똥토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연하늘은 되는 대로 지껄인 변명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건지 깨닫고, 속으로 토끼 귀를 쥐어뜯었다.

그런데 그 변명이 먹혔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일리가 있네."

"그, 그치?"

도견우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하늘은 내심 뜨악하면서도, 그가 의문을 품지 않게 냉큼 동조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그, 그래서? 일은 잘 해결됐어?"

"어, 쟤네들이 내 빵셔틀이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

"빵셔틀? 어, 음… 그렇구나아."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응? 그건 왜?"

"앞으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만 하라고. 쟤네들 시켜서 사 오라고 할 테니까."

"…."

"너도 쟤네들 막 부려 먹어도 돼."

"아, 응…. 그럴 일이 생기면."

"그리고 여기, 검 돌려줄게. 다행히 한 번도 쓰지 않았어."

하늘 우러러 부끄럽지 않다는 듯이 당당하게 빵셔틀을 얻었노라 말하는 도견우.

연하늘은 그런 짝이 황당하면서도 웃기고, 귀여웠다.

이내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볼일도 끝났으니까 집에나 가자. 따로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응! 아니야, 없어!"

연하늘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의 짝이 되고부터 계속 그랬듯, 오늘도 그녀는 그와 함께 하교했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33)

오색의 마녀

마나를 자연계의 원소로 변환해, 그것으로 마법을 만들거나 속성을 부여하는 원소 마법.

모든 원소 마법은 가장 기본이 되는 일곱 개의 원소에서 파생된다.

이때, 일곱 개의 원소는 일반 원소와 특수 원소로 나눌 수 있다.

일반 원소로 분류되는 화염, 바람, 번개, 대지, 물.

특수 원소로 분류되는 빛, 어둠.

마나를 품은 존재는 그중에 한 가지 원소에 높은 친화력을 지니고, 해당 원소가 다른 원소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차등적으로 다른 원소에 대한 친화력을 지닌다.

그 관계를 동전으로 설명할 수 있다.

동전의 주위로 대지, 번개, 물, 화염, 바람 순서로 일반 원소를 배치한다.

동전의 원소 배치처럼 각 원소의 상극은 화살표 방향대로 결정된다.

물은 화염에 강하고, 화염은 바람에 강하며, 바람은 대지에 강하고, 대지는 번개에 강하며, 번개는 물에 강하다는 식으로 다섯 원소의 관계가 맞물린다.

친화력은 한 원소에서 바로 옆에 있는 원소로 이어지는 순서대로 차이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물 속성에 친화력을 지닌 사람은 번개와 화염 속성에 두 번째로 높은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대지와 바람 속성에 대한 친화력은 그다음이다.

그렇다면 특수 원소인 빛과 어둠은 어디에 배치하느냐 하면.

빛과 어둠은 동전의 양면이다.

두 속성은 서로 강하게 반발한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은 만나지 않기에, 빛 속성에 친화력을 지닌 존재는 어둠 속성에 대해서 극도로 낮은 친화력을 지닌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대신, 빛과 어둠 속성에 친화력을 지닌 존재는 일반 원소에 동등한 친화력을 지닌다.

그것을 동전으로 나타내자면.

이렇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캐릭터마다 쉽게 배울 수 있고, 어렵게 배울 수 있는 원소 마법이 있었지.'

아니, 정정해야겠다.

어렵게라도 배운다면 좋을까.

마법에 재능이 있는 캐릭터가 아니고서는, 친화 속성 이외의 다른 속성을 넘볼 생각은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넘보더라도 친화 속성 바로 옆에 있는 속성까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했다.

잘못하다가는 스토리가 끝날 때까지 원소 마법만 주야장천 배우다가 망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게임으로 했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홍예나가 대단한 사람이기는 해.'

게임에서 마법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등장하는 칠색의 마녀, 홍예나.

일곱 개의 원소 마법에 통달한 그녀가 얼마나 재능 있는 인물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오늘.

나와 연하늘은 그녀를 만난다.

* * *

수업이 끝난 방과 후.

나와 연하늘은 가방을 챙기자마자 학교를 나섰다.

"오색의 마녀님은 4시쯤에 온다고 했으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자."

"응, 그래. 집에 예은이도 있어?"

"이 시간이면 검술관에 가 있을걸."

아직은 오색의 마녀라고 불리는 홍예나.

우리는 집에서 간식이나 먹고 쉬면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니면 한숨 자 두는 게 좋으려나.'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체내 마나를 발현하면 피로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심하면 현기증을 느끼거나, 기절할 수도 있다.

나야 마나를 다루는 것에 익숙해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마나를 처음 다루는 연하늘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잠을 자서 피로를 해소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이에 내가 물었더니.

"오색의 마녀님이 올 때까지 잠이나 잘까?"

"어?"

길을 가던 연하늘이 깜짝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다시 말해 보란 듯 붉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엄마한테 오색의 마녀님이 오면 깨워 달라고 하고, 내 방에서 잠이나 자고 있자고. 아침부터 수업을 듣느라 피곤한데, 그 상태로 마나를 발현했다가는 피로감이 꽤…."

"저기, 있지… 마음의 준비가…."

"웬 마음의 준비? 넌 바닥에서 자. 나는 침대에서 잘게."

"응? 아… 그런 거구나. 근데 보통 반대 아니야? 남자는 바닥에서 자고, 여자는 침대에서…."

"내 방인데."

"응…. 하긴, 그렇지."

"장난이야. 나는 바닥에서 잘 테니, 너는 침대에서 자. 아니면 예은이 방에 가서 자도 되고."

내 침대가 둘이서도 잘 수 있을 정도로 커서 같이 자도 되겠지만, 연하늘에게 부담이 되리라.

나는 그녀를 배려해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으…."

연하늘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내 그녀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아니야, 괜찮아. 너희 집에서 자면 긴장이 돼서 잠도 오지 않을 것 같거든. 잠을 잘 시간도 많이 없을 것 같구…. 오색의 마녀님이 오실 때까지 그냥 네 방에서 쉬고 있을래."

"그래? 그럼 방에서 게임이라도 하고 있자."

나는 연하늘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마저 걸어, 집에 도착했다.

"엄마! 저희 왔어요!"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너희 왔니? 선생님이 이따가 오신다고 했으니까, 방에서 놀고 있으렴. 이따 간식이라도 가지고 올라갈게."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럼 챙기는 것 좀 도와줄래?"

어머니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연하늘은 매번 얻어먹기만 하는 게 미안하다며, 어머니를 도와주러 따라나섰다.

어머니는 딸다운 딸이 생긴 것 같다며 좋아했다.

'그럼 예은이는 딸이 아니란 걸까.'

예은이가 들었다면 삐졌을 만한 소리였다.

나는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거리는 그들을 뒤로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몽실아, 형 왔다."

킁!

"미안한데 오늘은 하늘이가 와서 꺼내주지 못할 것 같아. 너 또 발광할 거 아니야."

뀨응….

우리 안으로 건초를 내밀며.

나는 몽실이가 건초를 먹는 것을 구경했다.

그러고 가만히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연하늘이 간식을 가지고 왔다.

"아주머니가 있지, 내가 베이킹에 흥미가 있다고 하니까, 다음에 같이 베이킹 해 보는 게 어떠냐시더라."

"그래? 엄마 취미 중 하나거든. 나도 가끔 같이 하는데, 시간 되면 너도 같이 하자."

"응! 정말 기대된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아서.

우리는 간식을 먹고,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부쩍 흘렀다.

"견우야, 하늘아! 선생님 오셨으니 내려올래?"

"네! 갈게요!"

어느새 4시가 됐다.

때맞춰 홍예나가 온 듯했다.

나와 연하늘은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는 곧장 아래로 내려갔다.

홍예나는 거실에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게임에서 본 일러스트랑 별로 차이가 없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성.

보기에 따라서는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온 것 같거나, 마녀의 모자를 떠올리게 하는 모자였다.

한편 모자 아래로 고동색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특유의 시니컬한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게임에서 본 홍예나와 큰 차이가 없는 외견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교관 복장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일까.

그녀는 새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케이프를 두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

우리는 홍예나에게 인사했다.

진즉 시선을 눈치챘을 텐데도.

어머니가 준 커피를 마시던 그녀가 그제야 우리에게로 눈길을 향했다.

"네가 나를 부른 거니? 신검 도가의 사람이면 얌전히 검이나 수행할 것이지, 마법까지 배우겠다니 정말 욕심이 많은 애구나. 더군다나 그 나이에…."

"…."

"그것도 모자라 친구도 같이 배우게 해 달라니… 이게 무슨 소꿉장난도 아니고…."

몸을 돌려, 다리를 고쳐 꼬는 홍예나.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탐탁지 않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나.'

재능 없는 사람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원체 시니컬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유람을 방해받아서 언짢은 것이리라.

시기를 고려하면 지금쯤 빛 속성 마법에 통달할 때이기도 했고.

그러니 우리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불려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너희를 가르칠 생각은 없어. 전화로도 말했겠지만, 만약 너희에게 마법을 배울 자질이 없다면 이대로 돌아갈 거야."마치 그렇게 될 것이 확정적이란 투로 말하는 홍예나.

그러나 나는 그녀가 예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럼 지금 당장 확인해 보러 가요. 훈련장으로 안내할게요."

지금이야 냉소적으로 굴지만.

연하늘의 재능을 알아보면 태도가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나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 * *

처음 신검 도가에서 과외 요청을 받았을 때.

홍예나는 마음 같아서는 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나라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십가문 중 하나인 신검 도가의 요청을 거절하고, 그들과 척을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다못해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후…. 어쩔 수 없네.

홍예나는 잠시 유람을 중단하기로 했다.

마법이란 자신의 사상을 세계에 각인시켜, 그것을 구현하는 현상이다.

따라서 마법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사상을 구체적으로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빛 속성 마법에 통달하기 위해 빛이 비치는 곳곳을 누비던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해야 했다.

그렇다고 하나 불쾌감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보나마나 주변에서 남들이 떠받들어 주니까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안 거겠지. 그래서 마법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게 뻔해.

고등아카데미를 졸업한 지는 꽤 됐으나.

홍예나는 3년이 넘게 학원도시에서 생활하며, 명가의 사람들을 여럿 보아 왔다.

그들 대다수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배경이 곧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거만하면서 오만하기 짝이 없는 부류였다.

단순히 좋은 수저를 쥐고 태어난 놈들.

―도견우라고 했나? 그놈도 그럴 테지.

홍예나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가 신검 도가의 연락을 받고 개인적으로 모은 정보에 따르면, 도견우란 인물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토끼 1마리도 사냥하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다는 의미에서 래빗…. 검술에 재능은 없고, 그로 인해 가문에서 무시당하는 위치에 있는 아이라…. 그래서 마법이라도 할 생각인 건가? 아니면 검과 마법을 동시에 배워서 가문의 인정을 받을 생각이라든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때, 홍예나는 코웃음을 쳤다.

어느 분야에서든 재능은 중요하다지만, 마법은 정령술 다음으로 재능의 유무가 중요한 분야였다.

자신에게 검술의 재능이 없으니, 마법이나 배우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발을 담글 수 있는 분야가 아니란 것이다.

마법에 자신의 인생을 파묻은 그녀로서는 더더욱 도견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여자애도 1명 추가라고?

한 번도 마나를 발현한 적 없는 일반인까지 가르쳐 달라니.

홍예나는 자신이 무시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도견우의 의도가 뻔히 예상되기도 했다.

―좋아하는 애랑 같이 수업을 듣고 싶다고 제 아빠를 조른 거겠지. 그러면서 그 여자아이한테 멋진 모습이나 보여 주려는 생각인 거겠고.

아주, 어린 것이 뻔뻔하게.

거의 30년이 되도록 연애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원소 마법만 파고들었던 그녀로서는 심히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을 연애 수단으로 이용하지 마.'

나를 너희 연애 수단으로 삼지도 말고.

누구는 연애도 못 해 보고….

홍예나는 울컥하는 심정을 참고, 훈련장으로 나온 도견우와 연하늘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자질을 확인하는 대로, 평소 연락하고 지내던 사람들을 만나 술이나 마시기로 했다.

혹시 아는가.

그러다 인연이라도 만나게 될지.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생각이었다.

만약 도견우가 그녀의 생각을 읽었다면….

'포기하세요. 포기하면 편해요. 적어도 제가 고등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안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도견우만 아는 미래를 모르는 홍예나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너희에게 알아볼 자질은 가장 기본적인 거야. 체내 마나량, 마나 저항력, 마나 순응력, 응용력, 제어력, 회복 속도, 발현 속도, 효율 등…. 마나를 다루는 데 필요한 것들이지."

"수정구로 다 확인할 수 있어요?"

"수정구는 사용하지 않을 거야.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기도 하고, 걸핏하면 오작동이나 일으켜 부서지기만 하거든. 그것 때문에 주책맞은 부모들이나 애들은 자신의 체내 마나가 방대하다며 호들갑을 떨기도 하는데… 영 믿을 만한 게 못 되지."

"안 물어봤는데요?"

"넌 정말 말을 가리지 않는구나?"

존재의 마력을 측정하는 가장 흔한 아티펙트가 마력 수정구다.

존재가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마나로 측정하는 아티펙트는 그로 인해 마나를 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의 마력을 측정하는 것에 용이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마나로 측정하는 만큼, 오류도 꽤 많은 아티펙트였다.

정확성이 크게 떨어졌다.

수정구로 측정할 수 있는 게 많지 않기도 했고.

그래서 홍예나는 다른 아티펙트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이걸 사용할 거야."

"그걸요?"

모자 속이 보이도록.

홍예나는 도견우와 연하늘에게 모자를 뒤집어 보여 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다가와 모자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당연하게도 모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법의 동물 모자라고 해. 내가 만…."

"네이밍이 구리네요."

"킥."

"…."

자신이 만든 아티펙트라고 자랑하려 했더니.

도견우가 신랄하게 말하고, 연하늘이 웃음을 참았다.

홍예나는 입을 다물었다.

'얘가 아까부터 계속…. 한 대만 때려도 될까?'

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모자이지만 엄연히 아티펙트야. 아티펙트를 발동한 상태로 손을 넣으면, 모자는 손을 넣은 사람의 마력을 분석해서 그에 맞는 동물을 만들어 내지."

"하늘이는 마나를 발현할 줄 모르는데요?"

"마나를 발현하지 않아도 돼. 모자는 너희가 마나를 발현할 줄 몰라도 자동으로 체내 마나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요령은 수정구로 마력을 측정하는 것과 같아. 말로 해서는 잘 알아듣지 못할 것 같으니, 직접 보여 줄게."홍예나는 손에 든 모자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아티펙트가 활성화됐다.

아무것도 없던 모자 속에는 새하얀 빛이 들어차 있었다.

"이렇게 손을 집어넣고 휘저으렴. 그러다 보면 빛들이 뭉치며, 너희의 마력 상태와 가장 어울리는 동물을 만들어 낼 거야."

그때, 손안에서 뭉치던 빛이 더는 변화하지 않았다.

측정이 끝난 것이다.

모자 속에서 손을 뺀 홍예나는 빛의 구체를 하늘 위로 던졌다.

"그리고 이렇게 밖으로 빼내면 동물이 완성되지."

피이익!

빛의 구체가 터지며, 그 속에서 나온 것은 거대한 새였다.

붉은 깃털을 휘날리는 새가 세 사람의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홍예나가 팔을 펼치자, 새는 날개를 가지런히 모아 팔에 앉았다.

"이 아이가 내 마력 상태를 보여 주는 동물이야."

"와아…."

"구현하는 동물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체내 마나량을 유추할 수 있어. 그리고 동물의 실체화율이 높을수록 마나 집중력, 응용력과 마나 효율 등을 파악할 수 있고."홍예나는 새를 구현하기 위해 만든 마나를 체내로 환원했다.

어깨 위에 앉은 새가 마나의 입자가 되어 사라졌다.

"이제 너희도 해 보렴. 누가 먼저 할 거니?"

"하늘이 너부터 해."

"나부터? 난 마나를 발현할 줄…."

"오색의 마녀님이 말했잖아. 마나를 발현할 줄 몰라도 된다고."

"그래도…."

"괜찮아, 너라면 할 수 있어."

"…."

"그럼 너부터 하렴."

의외로 도견우가 먼저 나설 줄 알았더니만.

도견우는 연하늘을 먼저 내보냈다.

홍예나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기에, 망설이던 연하늘에게 모자를 내밀었다.

그런 한편, 그녀의 시선은 연하늘을 훑었다.

'자세히 알 수 없기는 해도 얘가 체내 마나가 많은 것 같기는 하네. 처음에는 저 애가 꼬시려는 목적으로 데려온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의외로 자질이 보여서 데려온 건가?'고작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과연 다른 사람의 체내 마나량을 파악할 수 있을까 싶지만.

어쩌면 얻어걸린 것일 수도 있다.

그녀는 깊이 생각지 않기로 하며, 연하늘의 자질을 확인하기로 했다.

"손 넣을게요."

"그래, 무서워하지 말고 넣으렴."

연하늘이 모자 속에 손을 넣는다.

그녀가 빛 속에서 손을 마구 헤저었다.

그렇게 한참을 젓는가 싶더니.

"아. 더는 안 변하는 것 같아요."

연하늘의 측정이 끝난 듯했다.

"측정이 완료된 거야. 손에 잡힌 것을 놓지 말고, 모자 밖으로 빼내도록 해."

"…네. 에잇!"

모자에서 손을 빼낸 연하늘.

그녀가 빛의 구체를 멀리 던졌다.

이내 빛이 주위로 터져 나가며….

뿌우우우우!

"…."

"…미친."

거대한 코끼리가 튀어나왔다.

성이 난 듯한 코끼리가 힘껏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홍예나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얘 대체 뭐야? 코끼리 뭐야?'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34)

"시바."

왜 훈련장에 코끼리가 있는 거지?

아니, 저게 코끼리가 맞기는 한가?

내 생각보다 너무 사나운데?

상아가 저렇게 무섭게 생겼었나?

찔리면… 아니, 깔리면 죽겠는데?

나는 연하늘이 모자 속에서 꺼낸 동물을 보고 사고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그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다.

'하늘이가 마력 수치가 높아서 모자에서 덩치가 큰 동물이 나올 줄은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코끼리가 나올 줄이야.

물론, 나와서 나쁠 것은 없었다.

훈련장에 코끼리 1마리가 들어갈 공간은 충분히 됐으니까.

오히려 잘 생각해 보면 공룡이라도 나오지 않아 다행인 게 아닐까.

모자에서 공룡이 나올지는 몰라도.

다만 문제는….

뿌우우우우!

"쟤 왜 저렇게 난폭해요?"

코끼리가 미쳐 날뛰고 있다는 것.

놈은 뒷발로 서기도 하고, 긴 코를 크게 휘두르며 괴성을 질러 댔다.

어디 그뿐인가.

휘이이익!

"…!"

"꺄아악!"

코로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를 들어 올려, 느닷없이 우리를 향해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 눈이 부릅떠지고, 연하늘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회피 본능은 조용했다.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행여나 그녀가 다치지 않을까 품으로 끌어들이며, 정면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웨이트트레이닝 기구가 눈앞까지 날아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산들바람의 요람>

부드러운 역풍에 맞은 것처럼.

기구가 날아드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홍예나가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켜 속도를 줄인 것이다.

"왜 난폭하냐고? 존재를 구성하는 마나가 성질이 거칠고, 드센 부류에 속해서 그런 걸 거야. 겉보기에는 얌전하게 생겼는데, 의외로 한 성깔 하나 보구나?"

"네!? 전 안 그러는데요!? 견우야, 나 그런 성격 아니야!"

"마녀님이 장난치는 거야. 단순히 성질이 거칠어서 그런 거야."

"하지만 성격도 마나의 성질에 영향을 주는 것은 맞거든. 마나에는 무의식, 기억, 감정, 심리, 성격 등 마도학에서 영혼을 논하는 요소가 깃들어 있으니까."

"근데 그런 말이나 할 때예요?"

손짓으로 바람을 움직이는 홍예나.

그녀가 공중에서 멈춰 있던 기구를 바닥에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안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뿌우우우우!

미쳐 날뛰는 코끼리의 눈에 우리가 들어왔으니까.

놈은 물건을 집어던지는 걸 넘어, 이제는 아예 달려들려 하고 있었다.

"얼른 마나로 환원해야 하지 않아요!?"

"하고 싶지, 나도. 그런데 그게 힘들어."

"아티펙트를 멈추면 되잖아요!"

"모자에서 한 번 꺼낸 동물은 아티펙트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상태로 여겨져서, 끄더라도 소용없어. 아티펙트는 진즉 멈추기도 했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동물과 모자는 독립적인 존재지만, 동물과 그 동물을 만든 사람은 의식적으로 연결돼 있어. 그러니 그 사람이 의식 속에 연결된 패스를 끊고, 마나로 환원해야지. 문제는… 하늘이라 했나?"

"네, 네! 맞아요, 연하늘."

"패스를 의식할 수 있을 것 같니?"

"…."

"마나를 다룰 줄 모르는 네가 그걸 의식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미안, 내 착오야. 너한테 이렇게 방대한 마나가 있을 줄은 몰랐어."

"다른 방법은 없어요?"

"있긴 하지, 2개나. 하나는 저놈이 존재를 유지하는 마나를 다 소진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마나가 정말 방대하기는 한 모양이구나. 기다리려면 꽤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그동안 날뛰게 두었다가는 피해가 상당할 것 같고…."

"으…. 죄송해요. 견우야, 미안해."

"코끼리를 죽이거나 제압하는 것은 어때요?"

"저 코끼리는 진짜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러니 존재를 유지하는 마나가 남아 있는 한, 그 마나를 다 소진할 때까지 죽어도 계속 살아날 거야. 제압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꽤나 고생 좀 해야겠네."

"끙…. 나머지 방법은요?"

"패스를 강제로 끊는 방법이야."

그때, 머리 위로 코끼리의 앞발이 떨어졌다.

홍예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수인을 맺었다.

그녀가 펼친 방벽이 허공에서 앞발을 막아 냈다.

그러나 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방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슨 동물이 이렇게 강해요?"

"단순한 동물이 아니니까. 존재가 마나로 구성된 놈이니 평범한 동물보다도 강하고, 어느 정도 마법에 내성을 지니는 거지. 그렇다 쳐도… 어마어마하네. 바람의 방벽으로는 막지 못하는 건가. 그럼 여기에다 물의 원소를 더해서 방벽의 성질과 강도를 높이고, 대지의 원소로 공격을 가해 놈을 넘어뜨리면…."

"그래서 패스를 강제로 끊는 방법이 뭔데요?"

"간단해. 쟤를 기절시키는 거야."

"…."

앞으로 내민 오른손으로 방벽을 유지하고.

왼손으로 허공을 휘젓는 홍예나.

그녀가 발현한 마나가 물로 변해, 금이 간 방벽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방벽이 수복되며, 푸른색으로 변했다.

그 상태로, 그녀는 말을 이었다.

"다행히 패스는 의식 얕은 곳에 연결되어 있어.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만 해도 패스의 연결 고리가 약해질 정도로."

"그래서 기절을 시킨다는 거네요. 하늘이가 아예 패스를 의식하지 못하게."

"그렇게 하면 연결 고리가 약해진 패스가 자동으로 끊어지고, 이놈은 마나로 환원되겠지. 그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야."

연하늘을 기절시켜 패스를 끊어 버린다.

홍예나의 말대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선택한다면, 내가 연하늘을 기절시켜야 했다.

홍예나는 코끼리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나.'

"견우야…."

허리에 찬 군청검에 손을 얹으며.

나는 연하늘을 바라보았다.

붉은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내 그녀가 체념한 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괜찮아, 난."

"…."

"나는 그것만으로 괜찮아. 오히려 나 때문에 너한테 폐를 끼치는 게 싫은걸."

"…."

"그러니 부탁할게. 날 기절시켜 줘."

사실, 마음은 그러지 않을 테건만.

연하늘이 희생을 자처했다.

나는.

"…알았어."

그녀의 뜻을 꺾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결심을 굳혔으니 나도 결심을 굳혔다.

나는 군청검을 뽑아 들었다.

새까만 날이 등 뒤에서 홍예나가 마법으로 밝히는 빛에 반사돼, 군청색의 빛을 흩뿌렸다.

그 빛이 그녀의 얼굴에 드리웠다.

"하늘아, 그동안 즐거웠어."

"…어?"

"아마 나는 너와 보낸 나날을 절대 잊지 못할 거야."

"어어… 저기, 견우야? 왜 날 죽일 것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기절만 시키는 거잖아?"

"먼저 가 있어. 나중에 따라갈게."

"자, 장난이지? 그런 거지? 응?"

"우리 집을 지키려면 이럴 수밖에 없어. 미안하게 됐다."

"아… 너무해. 널 믿었는데…."

"검 내려친다. 눈 감아."

"어떻게 이럴 수…! 어?"

장난이다.

나는 연하늘에게 검을 내리치는 척하며,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눌렀다.

"…나 죽이려던 거 아니었어?"

"내가 너를 죽이기는 왜 죽여? 그냥 장난 좀 친 거지."

"너어는 진짜…. 미워, 진짜 미워."

내가 검을 내리치는 동작에 속아,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연하늘.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내 품속에서 고개를 들어 올리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뒷머리를 누른 손에 더 힘을 주었다.

"눈 뜨지 마. 계속 감고 있어."

"…."

"얌전히 내 소리나 듣고 있어. 들리지?"

"…응."

"그 소리에 의식을 집중하도록 해. 집중이 안 되면 내 심장이 뛰는 숫자라도 세든가."

"…."

요점은 연하늘의 의식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절시킬 필요까지 없다.

그녀가 패스를 의식하지 못하게끔, 다른 곳으로 의식을 돌리면 된다.

그래서 나는 가장 쉽게 의식을 돌리는 방법을 취했다.

내게 배신당했다는 충격에 빠뜨려 패스를 의식하지 못하게 하고.

그 상태를 이어 나갈 수가 있도록 내 가슴으로 끌어온 것이다.

'코끼리가 보이기 때문에 계속 생각하고, 의식하게 되는 거야. 그러니 코끼리가 보이지 않도록 눈을 감게 하고, 내 심장 박동을 세게 해서 생각을 다른 곳으로 전환시킨다면….'패스를 끊을 수 있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등 뒤를 곁눈질했다.

뿌우우….

코끼리의 형체가 흩어지고 있었다.

마나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코끼리가 있었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연하늘을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럼에도 연하늘은 안겼던 자세 그대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코끼리 사라졌어. 눈 떠도 돼."

"…."

내 말에 연하늘이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연하늘색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 때문에 화났나? 그런 거겠지?'

연하늘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새빨갰다.

붉은 눈망울에는 습기가 차올라 있었다.

"하늘아, 괜찮아? 미안, 내가 장난이 지나쳤지? 네 의식을 돌리기 위해서였다지만…."

"175번."

"응?"

"175번 뛰었다고…."

"어, 음… 잘 셌네."

"…응."

연하늘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우는 건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과하러,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려고 했다.

"울지 마,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싫어, 보지 마. 그리고 사과하지 마. 나, 화 안 났으니까."

"그럼 왜 나를 안 보…."

"그건… 그냥 지금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 조금만, 조금만 이러고 있게 해 줘."

"그래, 알았어."

얼굴을 보여 주기 싫다는 듯, 자꾸 나를 피하는 연하늘.

나는 눈을 마주치는 걸 포기하며, 대신 어깨를 살며시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그녀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누구는 고생하며 막고 있었는데, 저것들은 뒤에서 염장이나 지르고, 어휴…."

한편, 홍예나가 우리를 보며 뭐라 투덜거렸다.

하지만 나는 연하늘에게 집중하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 * *

연하늘이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나는 홍예나를 시켜, 코끼리가 난동을 부린 현장을 정리하게 했다.

"내가 왜 정리를 해야 하는지…."

"따지고 보면 마녀님의 아티펙트로 일어난 일이고, 아까 자신의 착오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마녀님이 책임지고 치워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너는 말대답을 꼬박꼬박하는구나. 알았어, 치워 주면 되잖니."

홍예나가 못마땅해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책임 소재가 없지 않다는 자각이 있는지 결국 내 말을 따랐다.

그녀가 손짓으로 바람을 일으켜, 아무 짝에나 패대기쳐 있던 기구들을 원래 위치로 옮겼다.

이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하늘이는 어땠어요?"

"…코끼리를 불러낼 정도로 체내 마나가 방대하다는 것, 존재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마나 효율이 높다는 것, 내 마법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마나 저항력과 응집력이 높다는 것, 실체화율이 높을 정도로 구상력과 제어력이 상당하다는 것 등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

홍예나의 시선이 굳은 얼굴을 하고 평가를 기다리는 연하늘을 향했다.

나는 홍예나의 눈빛이 반짝인 것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 시점에서.

그녀가 할 말이 예상됐다.

"그래, 인정할게. 너는 마법사가 되어야 할 운명을 타고났구나. 내가 많은 사람들을 봐 왔지만, 그 나이에 너만 한 재능을 지닌 사람은 1명도 본 적이 없어. 아인이면 부모와 유전자가 달라 재능이 유전될 확률이 0%에 수렴하는데… 베이스가 되는 몬스터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건가? 그렇다고 해도 마도 민가의 사람도 우습게 보일 재능을 타고났다니 굉장하네."

"그럼…."

"가르칠 보람이 있을 것 같네. 아니, 너 같은 애의 재능을 알아보고도 지나친다는 건 그야말로 마법의 발전을 무시하는 행위와도 같겠지.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언젠가 네가 유명한 마법사가 됐을 때 숟가락이라도 얹을 수 있도록, 내가 너를 가르쳐도 되겠니?"역시나,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마법에는 깐깐한 홍예나가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찬사를 받은 연하늘의 토끼 귀는 하늘로 치솟았다.

그녀의 붉은 눈이 크게 떠지고, 그녀가 환호하며 답했다.

"아니에요! 제가 부탁드릴게요! 제 스승님이 되어 주세요! 저한테 마법을 가르쳐 주세요!"

"그래,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전수해 주도록 할게."

연하늘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홍예나는 그녀의 대답에 기분이 좋은지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연하늘에게 기쁜 일은, 내게도 기쁜 일이었다.

"이걸로 된 거죠? 그럼 앞으로…."

"내가 하늘이를 제자로 들이겠다고 했지, 언제 너를 제자로 들이겠다고 했니?"

"…."

"내게 마법을 배우고 싶으면 너도 자질을 증명해 보렴."

"쳇."

겸사겸사 묻어가려고 했더니만.

좋다 말았다.

나는 짧게 혀를 찼다.

홍예나는 내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떨어진 모자를 주워 들어서는 재활성화했다.

'그래도 뭐… 사실 나도 확인해 보고 싶기는 했어.'

자신의 마력 상태와 가장 적합한 동물을 불러낸다니,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일이다.

게다가 게임에서 마법의 동물 모자는 홍예나의 교관 연구실에서 배경으로 등장하기만 할 뿐,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아티펙트였다.

전생에 게임의 고인물이었던 나로서는 더욱 흥미가 끌렸다.

'뭐가 나오려나….'

새하얀 빛을 머금은 모자 속으로 나는 손을 집어넣었다.

이내 손바닥에서 마나가 흘러나와, 그것이 빛에 섞여 뭉치기 시작했다.

나는 구체가 최대한 커질 때까지 빙빙 휘저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손에 쥔 구체는 변화하지 않았다.

측정이 끝난 것이다.

그것을 모자 속에서 빼내며….

'가랏! 너로 정했다!'

나는 순간 동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대사를 내뱉었다.

물론, 마음속으로.

차마 육성으로는 창피해서 그럴 수 없었다.

여하튼 그렇게 구체를 던졌더니.

화아악!

저 멀리 떨어진 빛의 구체가 응축된 힘을 폭발시켰다.

눈부신 빛이 주위로 퍼져 나갔다.

"…."

잠시 후, 빛의 세기가 줄어들면서 눈이 적응해 갈 때쯤.

나는 그 속에서 걸어 나오는 형체를 볼 수 있었다.

척!

네 발로 서 있는 짐승.

꼭 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동물은 머리 주위로 무성해 보이는 갈기를 휘날리고 있었다.

놈이 포효했다.

크르릉!

오금을 저리게 하는 듯한 소리.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동물의 정체를 확신했다.

'…사자야.'

사자가 틀림없었다.

백수의 왕, 사자를 불러내다니.

내가 마법에 소질이 있는 것으로 봐도 된다는 걸까?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엥?"

나는 완전히 드러난 동물의 정체를 확인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뀨릉?

"시바?"

몸은 사자가 맞는데, 머리는 토끼였으니까.

* * *

"참… 괴상한 동물을 불러냈구나."

"음… 굉장히 창의적인 동물이네."

"아니, 이런 게 나올 수가 있어요? 아티펙트가 고장 난 것은…."

"그만큼 네 마력 상태가 사자를 완전히 구현할 정도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뜻인 거야."

토끼의 머리를 취하고 있는 사자.

아니, 사자의 몸을 취한 토끼라고 해야 할까.

도견우가 모자 속에서 나온 동물을 보고 당황했듯, 홍예은과 연하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과 달리, 뭐라 명명할 수 없는 동물이 소리를 냈다.

뀨릉?

"…."

사자의 꼬리를 살랑이며.

사자의 갈기로 뒤덮여 있는 토끼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위엄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동물이었다.

오히려 웃음을 유발했다.

푸훗!

"아, 웃지 마요. 연하늘, 웃지 말라니까?"

"미, 미안해! 근데 있지… 웃기는 걸 어떡해!"

"차라리 토끼나 나올 것이지, 왜 저딴 게 나와서는…."

연하늘과 홍예나는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들은 도견우가 질색하는 반응을 보이든 말든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홍예나는 도견우가 불러낸 동물을 진지하게 관찰했다.

'머리가 흠이기는 해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균형은 나쁘지 않아.'

머리만 빼고 보자면.

그가 불러들인 동물은 수컷 사자에 걸맞은 균형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나와 관련된 능력이 균형 있게 자리 잡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수컷 사자보다는 덩치가 조금 작았다.

'동물의 덩치가 체내 마나량과 연관이 깊다고 할 때, 체내 마나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구나. 그렇다고 적은 편이라고 단정 짓기에도 애매한 수준인가.'체내 마나량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다.

후천적으로 늘릴 수 있는 방법은 제한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도견우의 체내 마나량은 마법사로서 대성하기에 어려운 수준이었다.

'뭐,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마법사로 전향할 생각은 없다고 하니,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 검술에 마법을 보조로 사용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수준이야.'홍예나는 그렇게 도견우의 가능성을 가늠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건대, 그녀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검술을 보조할 마법을 배울 거라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가르칠 수 있어. 나로서는 하늘이 1명한테만 집중하는 게 좋기도 하고. 그럼에도 가르칠 만한 메리트가 있다면….'저 동물의 털색이 하얗다는 것.

홍예나는 그 점에 주목했다.

'백색 토끼… 아니, 백색 사자인가.'

동물의 털색은 그 사람이 어떤 원소에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지표였다.

대표적인 일반 원소로 여겨지는 물은 청색 계열, 번개는 황색 계열, 화염은 적색 계열, 바람은 녹색 계열, 대지는 갈색 계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표적인 특수 원소로 여겨지는 어둠은 흑색 계열이었고, 빛은 백색 계열이었다.

도견우의 경우에는 빛 속성에 대해 높은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이가 어둠 속성에 친화력을 지녔다면, 이 애는 빛 속성에 친화력을 지닌 건가.'

특수 원소에 친화력을 지닌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대단히 공교롭게도 홍예나는 각기 빛과 어둠 속성에 친화력을 지닌 아이들을 만난 것이다.

그러자니 고민이 되었다.

그들이 아직 자신이 통달하지 못한 속성에 대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특히 그녀는 빛 속성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기 위해, 전국을 유람하던 중이었다.

'쟤네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쩌면 빛과 어둠 속성에 대한 이해력을 높일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늘이를 잠깐 지켜본 바로는, 내가 저 애는 가르치지 않겠다고 하면 제자가 되겠다는 다짐을 철회할지도 모르고….'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홍예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연하늘의 볼을 꼬집던 도견우에게 말했다.

"얘, 검술을 보조할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그랬니?"

"네, 맞아요."

"그 정도면 하늘이를 가르치면서 짬을 내서 가르치지 못할 것도 없지. 좋아, 내가 가르쳐 줄게. 어중간하기는 해도, 자질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니까."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처음에는 명가 태생 특유의 자만심을 지닌 아이라고 생각했건만.

연하늘의 의식을 돌리는 기지를 발휘하던 것을 보면, 마냥 독선적인 인물은 아닌 듯했다.

그렇기에 홍예나는 겸사겸사 그도 가르치기로 했다.

'빛 속성에 친화력이 높은 아이이니, 5개의 일반 원소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네. 어디까지나 노력하기에 따라서지만.'

그리하여.

홍예나는 1명의 제자와 1명의 수강생을 받아들였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35)

5년

"하늘이가 코끼리를 꺼냈다고?"

"갑자기 뭐가 우는 소리가 들려서 뭔가 싶었는데, 나중에 들어 보니까 코끼리였다지 뭐야. 그 말을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다행히 피해는 없더라고."그날 저녁 식사 자리의 화제는 당연 연하늘이 코끼리를 불러낸 일이었다.

아버지는 밥을 먹다 이야기를 듣고 푸핫 웃음을 터뜨렸고, 어머니는 아직도 간담이 서늘한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편, 예은이의 반응은 예상 가능했다.

"또 나 없을 때 재밌는 거 하고…. 나도 동물 꺼내 보고 싶어!"

나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여동생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에 오색의 마녀님이 오면 한번 부탁해 볼게."

"안 돼. 그러다 코끼리처럼 위험한 동물이라도 뽑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오색의 마녀님이 말했다면서. 모자 속에서 나오는 동물은 그 사람의 성격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성격이 영향을 주기도 한다지만, 큰 영향은…."

"나는 나처럼 착하고 얌전한 동물 뽑을 자신 있어!"

"엄마는 우리 딸이 거짓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정말 착한데…."

"착한 아이는 편식을 하지 않아요."

"칫, 이게 다 엄마를 닮아서 그런 거거든요?"

"갑자기 왜 엄마를 걸고넘어지니? 엄마가 뭘 어쨌다고?"

"엄마, 머리 자르고 나서 더 나빠졌어! 예전에는 안 이랬는데!"

"엄마는 나빠진 게 아니라 강인해진 거란다. 그리고 엄마는 예전에도 이랬거든?"

"하하…."

가정이 화목하다는 증거다, 아마도.

오늘도 어머니와 예은이의 언쟁은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이럴 때는 조용히 빠지는 게 상책이다.

나는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끔 저녁을 먹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식탁에서 눈이 마주친 우리는 동질감을 느꼈다.

'아들아, 아빠는 사실 긴 머리가 좋단다.'

'저도요, 아… 네?'

'하지만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는 희생도 필요한 법이거든.'

'….'

'너희를 위한 내 희생을 알아주렴.'

'아, 네….'

왜 아버지의 눈빛에서 다른 의사가 읽히는 걸까.

아무래도 나와 아버지의 교감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듯했다.

나는 시선으로 대화하는 것을 포기하고,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 그래서 말인데요. 하늘이가 오색의 마녀님의 눈에 들게 됐다고 했잖아요."

"나는 직접 보지 않았지만… 하늘이의 재능이 대단하기는 했나 보네. 전화로 연락했을 때는 그렇게 깐깐한 태도로 얘기하던 오색의 마녀가 하늘이를 무상으로 가르치겠다는 것도 모자라, 정식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니…."

"그만큼 하늘이의 장래가 촉망된다는 뜻이겠죠?"

"당연하지."

"그럼 가문에서 후원해도 되지 않을까요?"

사실, 이전부터 말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동안 연하늘이 가문에서 후원할 만한 재능을 보이지 못해, 보류하고 있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색의 마녀의 제자가 되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정당하게 후원을 받을 만한 명분이 만들어졌으니, 보류할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후원이라…. 짜식, 이걸 노리고 있었구만."

그러다 보니 아버지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오색의 마녀의 제자가 되기도 했고, 내 추천이 있다면 신검 도가의 재단에서 후원을 받을 수 있겠지. 그러지 않더라도 그 애가 사는 보육원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다고 들어서,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됐네. 하늘이를 내세운다면 하늘이도, 보육원도 재단의 후원을 받을 수 있게 손을 써 볼 수 있을 테니까."

"정말요?"

"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 될 거다."

하늘이뿐만 아니라 하늘이가 사는 보육원도 후원을 받을 수 있게 될 거라니.

하늘이가 알게 되면 기뻐하리라.

나만 해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들뜬 참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말을 꺼냈다.

"다만 오색의 마녀의 이야기도 들어 봐야지."

"오색의 마녀님이요? 왜요?"

"헌터가 정식으로 제자를 들인다는 의미는 곧 그 제자의 후견인이 되어 아낌없이 후원해 주겠다는 뜻이야. 그러니 가문에서 하늘이를 후원하기 전에 먼저 오색의 마녀한테 어디까지 후원할 건지 물어봐야지."

"아…."

"그 사람 성격상, 어쩌면 우리 가문과 관계되고 싶지 않아서 자신이 전부 후원하겠다고 할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뭐… 하늘이가 사는 보육원만 후원해야지."

"가능하면 하늘이가 재정적으로 궁핍하지 않을 방향으로 해 주세요."

"그래, 알았다. 걱정하지 마. 나나 오색의 마녀나 그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아낌없이 후원하고 싶은 마음은 같을 테니까."

오색의 마녀 홍예나.

그녀가 연하늘을 후원할 경우는 가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후원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나는 연하늘이 풍족한 환경에서 마법사가 되기를 바랐다.

그래야 내 전력이 늘어날 테고.

'하늘이가 흑화하지 않을 테니까.'

연하늘이 인생에 절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연하늘이 기하급수적으로 분열해, 세상을 잠식하고 멸망시키는 엔딩은 사양이었다.

나는 그녀가 중간 보스로 거듭나지 않게 하기로 거듭 다짐했다.

"그나저나 너도 마법을 배우기로 했다며?"

"네, 맞아요. 저는 검술을 보조할 마법 위주로…."

"그 말은 너도 결국 자질을 보였다는 건데…. 하늘이가 코끼리를 불러냈다는 소리만 들었지, 네가 뭘 불러냈는지는 듣지 않았네."

"…."

"그러고 보니 그러네. 견우 너는 뭐가 나왔니?"

"맞아! 오빠는 뭐 나왔어!?"

"…백사자요."

"오, 그냥 사자도 아니고 털이 흰 백사자라고? 알비노를 뽑은 건가. 나는 마법은 잘 모르지만, 알비노를 뽑았다면 대단할 걸 뽑았나 보네. 어쩌면 하늘이보다 네가 더 재능 있는 거 아니냐? 이거, 신검 도가에서 나중에 대마법사가 나오는 거 아닌가 몰라!"

"내가 아들 하나는 잘 낳았다니까."

"마법 배우면 나한테도 알려 줘!"

"하하…."

나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 * *

그렇게 오색의 마녀에게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시간은 바쁘게 흘러갔다.

열두 살의 끝자락.

아버지는 가족들을 불러 모아서는 충격적인 발표를 꺼냈다.

"정식 발표는 일주일 후에 있을 예정이지만, 레굴루스 클랜의 서브 로드로 취임하는 게 확정됐어. 오늘 본가에서 가주님을 만나서 확언을 받고 오는 길이야."

"축하해. 드디어 서브 로드가 되는 거구나."

"당신이 그동안 뒷바라지를 해 준 덕분이지. 안 그랬으면 도중에 지쳐서 나가떨어졌을 거야. 정말 고마워, 당신밖에 없어."

"네? 서브 로드라고요? 아빠, 그게 무슨 소리예요?"

"뭔지는 모르지만 아빠 축하해요!"

어째 아버지가 가정의 달에 본가를 방문한 이후로,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아졌다 싶더니만.

알고 보니 서브 로드가 되기 위해 실적을 채우러 일에 치여 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에서는 없던 일이었으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게임에서 얼마 없는 언급으로는.

아버지는 형제들과 경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 가주의 자리를 노리지 않고, 지부장을 고수하며 가정에 헌신하는 인물로서 묘사되었다.

그런 아버지가 서브 로드가 됐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혹시 나 때문인가?'

아무래도 전생을 깨달은 내가 아버지의 심경에 변화를 준 듯했다.

나로서는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가 서브 로드가 됐다는 뜻은 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과 경쟁을 벌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내 걱정과 달리, 쾌활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동안 나 때문에 본가에서 다들 기를 펴지 못했었지? 이제부터는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녀. 견우처럼 사고를 팍팍 치고 다녀도 되고! 내가 다 커버 쳐 줄 수 있을 테니까."

"저는 사고 친 적 없는데요."

"그건 네 생각이고."

아버지에게 내가 문제아로 인식되는 게 억울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라면, 말릴 생각은 없었다.

어찌 보면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아빠가 서브 로드가 된 만큼, 그 덕을 톡톡히 볼 수 있겠네. 가문에서나, 학원도시에서나.'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축하해 줬다.

아버지가 가주를 목표로 한다면, 아버지를 도와줄 용의도 있었다.

* * *

내 열두 살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바로 고래잡이였다.

의학적인 용어로 대체하자면 포경 수술이라고 했다.

포경 수술이란 남성의 음경 귀두부를 드러내기 위해 음경을 뒤덮은 포피를 잘라 내는 수술로….

'…안 하면 안 되나.'

자세한 과정을 상상하려니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괜히 남자로 태어난 게 원망스럽고, 후회가 든다.

전생에서도 고래를 잡은 나로서는 한 번 더 경험해야 한다는 현실에 눈앞이 어질어질하기만 했다.

'그래도 헌터가 되면 군대 입대는 두 번 하지 않아도 돼서 그나마 낫다고 위로해야 하나….'

물론, 고래잡이는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다.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 아버지는 갑갑해하던 내게 강제하지 않았다.

―포경 수술? 뭐,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좋기는 하지.

같은 남자로서 내 심정에 공감하는지.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안 돼, 해야지. 꼭 해야지.

―엄마, 같은 반 애들도 대다수가 아직 하지 않았다던데, 요즘에는….

―같은 반 애들이 안 한다고 해서 너도 안 할 거니? 네가 언제부터 애들을 따라 했다고.

―….

―엄마도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지금은 하는 게 싫고, 무섭겠지. 하지만 이다음에 커서 어른이 되면 언젠가 엄마한테 고맙다고 하는 날이 올 거야. 그러니 병원 가자, 응?

―…엄마는 여자인데 이해한다고요?

―내가 너랑 예은이를 낳느라고 출산의 고통을 두 번 겪은 사람인데 그것도 이해를 못 하겠니?

―….

―견우야, 엄마를 믿어. 나중에, 음… 불편할 수도 있어. 요즘에는 위생에 문제가 없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안 하면 청결하게 관리하기 번거로울 거야.

―네에….

―그리고… 여자들한테 인기 많은 남자가 되려면 하는 게 좋아.

―견우야, 그거 뻥….

―당신은 조용히 해.

―넵, 마님.

―적어도 엄마는 한 쪽을 선호해. 너는 깨끗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여자는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고.

―…네, 알겠어요. 할게요.

어머니의 의지는 확고했다.

선택을 망설이던 나는 끝내 포경을 결단할 수밖에 없었다.

결코 인기를 얻고 싶다는 속셈으로 결심한 것은 아니다.

전생에서 고래잡이를 경험한 내가 어머니의 감언에 속을 리 없었다.

다만 확실히 관리하기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기도 했고.

연하늘의 의견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 어떻게 생각해?

[연하늘]: 남자들은 그런 걸 하는구나... 처음 알았어 (@ㅡ@;)

[연하늘]: 잠깐! 원장 선생님한테 물어보고 올게!

(잠시 후)….

[연하늘]: 안 해도 되지만 그래도 하는 게 좋대!

[연하늘]: 아프고 무섭겠지만 힘내...

[나]: 후... 그래...

여하간 그리하여.

이날, 나는 어머니가 모는 차를 타고 비뇨기과를 찾게 된 것이다.

"괜찮아, 견우야. 마취하면 하나도 아프지 않을 거고, 30분밖에 안 걸릴 거래. 끝나면 엄마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네에…."

마법과 과학이 발달한 세상이건만.

이상하게도 포경 수술 방면으로는 전생의 세상과 수준이 비슷했다.

개연성이 없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그나마 전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세상의 포경 수술은 부작용이 0%에 수렴한다는 것.

그래서 포경 수술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긍정적인 편이라고….

사전에 인터넷에서 정보를 조사한 나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견우 환자, 들어오세요."

그러나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다.

나는 어머니의 배웅을 받고, 당당하게 수술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바지를 벗고, 침대에 누워 수술 시간을 기다렸다.

이윽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거참, 실하네."

…선생님, 그건 성희롱인데요.

나는 오늘 처음 보는 남자들에게 아랫도리를 깐 수치스러움을 참으며 수술을 받아야 했다.

"오늘 널 남자로 만들어 주겠다."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

"이 수술실을 나가게 될 때는 다시 태어난 기분을 느끼게 될 거야."

"…."

마취해서 아래쪽에 감각이 없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저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리하여.

싹둑싹둑….

이 세상에 환생하고 12년.

내 거시기는 진정으로 바깥세상을 보게 됐다.

'소리가 참 섬뜩하네….'

* * *

도견우가 고래를 잡으러 간다고 한다.

원장 선생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남자가 되러 간 것이라고.

아직 그 의미가 이해가 되지 않는 연하늘은 새삼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인지할 뿐이었다.

'그게 벗겨지는 거구나….'

보육원에서 생활하다 보니.

연하늘은 보육원 선생들을 도와서 자신보다 나이 어린 아이들의 몸을 씻겨 주고는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자연히 '그것'을 접할 수 있었다.

여성과 달리 돌출된 형태를 취하는 '그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귀엽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된다는 게 너무나 충격적이기만 했다.

'세상에, 자른다니….'

여성인 자신도 상상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칠 지경이건만.

포경 수술의 당사자가 되어야 하는 도견우의 심정은 오죽할까 싶다.

연하늘은 수술을 받고 있을 그가 몹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술이 잘못될 경우는 없다지만, 불안한 것은 불안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를 올렸다.

"부디…."

견우 꼬추가 무사하게 해 주세요.

견우가 남자가 되게 해 주세요.

* * *

천만다행히도 수술은 성공했다.

그동안 껍질에 숨어 있던 자라가 세상으로 고개를 내뺐다.

나는…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응….

'마취가 풀리면 아프겠지….'

생각만으로도 두렵다.

아무래도 상태가 괜찮아질 때까지 너무 격렬한 활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당분간 훈련은 중단하고, 온전히 휴식에 전념해야겠다.

나는 손으로 바지를 살며시 만져, 음경을 보호하는 종이컵을 확인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걷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우리 아들, 울지 않고 잘 참았네. 잘했어. 이제 엄마랑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갈까?"

"네에…."

오늘만은 어머니가 미웠다.

나는 내 걸음걸이에 신경을 쓰는 어머니를 따라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 후에는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예은이와 연하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중성화 잘 끝내고 왔어!?"

"견우야, 괜찮아?"

"중성화가 아니라 포경 수술이야. 그런데 하늘이 너는 웬일이야?"

"네가 어떤지 보려고 왔지. 그래서 수술은? 어떻게 됐어?"

"보시다시피."

궁금해하는 예은이하고 연하늘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나는 종이컵으로 인해 산처럼 솟은 바지 부위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예은이는 신기해해했고, 연하늘은 불쌍하다는 듯 동정했다.

"오빠, 멋지다! 바지에 꼭 사자가 살고 있는 것 같아! 거기서 막 레이저 빔도 나올 것 같고!"

"맞아, 오빠는 사자를 키우고 있어. 사자왕 가오가이거야."

"응?"

"아, 여기서는 없었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니? 언제까지 그러고 있어야 한대?"

"상처가 아물 때까지. 한 2주 정도 차고 다니라고 하더라."

"그때까지 힘들고 불편하겠어…. 아픈 건? 괜찮아? 약은 먹었어?"

"…안 그래도 조금 통증이 있어서 오는 길에 먹었어. 지금은 그럭저럭 견딜 만해."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 앞으로 약도 잘 챙겨 먹도록 하고.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

"그럼… 나 부축이나 해 줘."

"알았어."

"오빠! 나도 도와줄게!"

연하늘이 순순히 어깨를 빌려준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기우뚱기우뚱 집으로 향했다.

그런 한편, 예은이도 보조하겠다며 내 허리에 매달렸다.

나와 예은이의 키 차이가 있어서 큰 보탬은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배려가 고맙기만 했다.

"쟤가 참…. 누가 보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으로 생각하겠어."

뒤에서 어머니가 어처구니없어하며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나는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어흥."

나는 남자가 됐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36)

그로부터 다시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 6학년, 13세가 되는 해.

예은이가 초등학생이 됐다.

올해부터 신검 도가의 직계들이 벌이는 평가전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너는 6개의 원소를 통달한 내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렴."

홍예나는 육색(六色)의 마녀가 되었다.

헌터 협회에서 빛 속성 마법에 통달했다는 것을 증명한 그녀는 아주 거드름을 피워 댔다.

"그동안 저를 연구 자료로 썼으면서 그런 말이 나와요?"

"…그래서 너도 공짜로 배우고 있는 거잖니. 그런데 나이를 먹고도 어떻게 스승에 대한 예의가 없니?"

"하늘이가 제자로 들어간 거지, 저는 제자로 들어간 게 아니니까요. 제가 돈 주고 과외를 받는 입장인 걸요. 무상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저놈의 주둥이 진짜…. 너는 검술에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사람을 화나게 하는 언변에 재능이 있었을 거야."

한편 나는 그녀의 밑에서 마법을 배우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연하늘과 비교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스승님, 이렇게 하면 될까요?"

"간단히 요령만 알려 준 거고, 설명도 다 끝난 게 아닌데… 그걸 시범만으로 보고 따라 하니?"

홍예나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연하늘은 마나를 다룰 줄 알게 되면서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다 불과 1년 만에 어둠 속성 마법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2년 만에 다른 원소 마법도 입문하게 되었다.

"쟤는 진짜… 대단하네."

과연 게임에서 재앙의 마녀로 흑화하는 연하늘이라고 해야 할까.

앞으로는 장난도 쉽게 치지 못할 듯했다.

장난으로라도 그녀의 마법을 맞고 싶지 않았다.

* * *

14세.

나와 연하늘은 중학생이 되었다.

아버지가 힘을 발휘한 덕에 우리는 같은 중학교 같은 반에 입학할 수 있었다.

똘마니 금, 은, 동도 같은 중학교에 배치됐다.

그러다 보니 나는 으레 세쌍둥이를 부려 먹고는 했다.

"오늘 점심은 영 그런 것 같던데, 매점에서 사 먹을까?"

"음… 오늘 메뉴가 뭐지? 아, 고기반찬이 많이 없구나. 편식은 예은이만 하는 게 아니라, 너도 한다는 걸 아주머니도 아셔야 해."

"그래서 안 갈 거야?"

"그래, 가자. 그런데 매점에 사람이 붐빌 것 같은데… 날도 덥고…."

"이럴 때를 위해 걔네들이 있는 거 아니겠어?"

"응?"

"전화해 볼게. 안 받기만 해 봐."

"…너는 걔네한테 가차 없구나."

"아, 받았다. 야, 똘마니 금."

[나한테는 우금동이라는 이름이, 후…. 무슨 일인데?]

"이따 점심 같이 먹자고."

[어? 네가 웬일이냐. 좋지, 그러면 우리가 너희 반으로….]

"그러니까 먹을 것 좀 사 오라고."

[…네가 그럴 놈이었을 리 없지.]

"하늘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매점에서 찾지 못하는 것도 좋고."

[야! 그럴 바에는 배달을 시켜! 배달을!]

"음… 나는 지난번에 먹은 카스텔라가 맛있더라. 그거랑 딸기 우유 마실래."

"똘마니 금, 들었지?"

[집에서는 나도 사랑받는 장남인데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메뉴는 톡으로 보내 줄게. 끊는다."

매번 내 말을 한 번에 받아들이는 일이 없다고 해도.

후원이 걸려 있다 보니 세쌍둥이는 내 말을 거스르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우리를 위해 매점에서 음식을 사 왔다.

"야! 밥 먹자!"

"웬일로 빨리 왔네?"

"점심시간 전이 체육이었거든. 그래서 중간에 몰래 빠져나갔지."

"은동이 형이 매점으로 빠져나간 사이에 나랑 금동이 형이 은동이 형인 것처럼 행동했지. 선생님이 바뀐 줄도 못 알아보더라."

"그래, 수고했어. 하늘아, 여기."

"고마워, 견우야."

"씨…. 사 온 건 우리인데, 왜 쟤한테 고맙다고…."

"똘마니 금. 지금 하늘이한테 뭐라 하는 거 아니지?"

"누가 사 왔으면 뭐 어때!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그치, 금동이 형!?"

"맞아, 금동이 형!"

"그, 그렇지! 하늘아, 맛있게 먹어! 또 먹고 싶은 건 없어? 내가 얼른 사 올게."

"하늘아, 나 없을 때 쟤네가 뭐라 그러면 나한테 알려 줘. 내가 혼쭐을 내 줄 테니까."

"아… 아니야, 그럴 필요는 없어. 너희도 정말 고마워."

여담으로 연하늘은 중학생이 되며 눈에 띄게 분위기가 변화했다.

머리카락은 더 길어지고, 젖살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징조를 보여 주었다.

검술관에서 체력을 단련하고, 검을 배워서 그런지 신체의 굴곡이 군살 없이 도드라졌으며.

홍예나에게 마법과 예법을 배워서 그런지, 동작 하나하나에서 고아한 분위기가 묻어나기도 했다.

아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거나, 초등학생 때 그녀를 무시했던 사람들도 순간 연하늘에게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그냥… 음… 더 예뻐졌다.

* * *

거기서 1년이 흘러서 15세.

중학교 2학년.

17세가 된 도시은이 학원도시에 들어가는 해였다.

"누나가 학원도시에 들어가게 되면, 당분간 얼굴은 보지 못하겠네."

"그러게. 너랑 평가전을 하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검을 겨루던 것도."

연초에 있는 가문의 모임에서.

나는 고등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나이가 된 도시은에게 축하를 건넸다.

아마도 당분간 그녀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학원도시에서 보내는 생활이 워낙 바쁠 테니까.

그러자니 못내 아쉬움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래서 그런 말을 꺼낸 것이리라.

"견우야."

"어, 누나."

"학원도시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도시은과 헤어지려던 그때.

그녀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에 나는 그녀의 마음에 답하며,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

"그래, 기다리고 있어. 2년 뒤에 따라갈게. 나도 누나가 다니는 아카데미에 지원할 거야."

"금강 아카데미에? 그렇게 된다면 자주 볼 수 있겠네. 기다릴게."

내가 학원도시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2년이란 시간이 남았다.

달리 말하면 게임의 스토리가 시작되기까지 2년이 남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2년. 긴 것 같으면서도 어찌 보면 짧은 것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도시은에게 포부를 밝히며, 그날부로 더욱 단련에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연하늘이 무게를 늘린 추를 달고, 검을 휘두르던 내게 질문했다.

내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강해지고 싶어서."

"하지만 너는 지금도 강하잖아. 시은이 언니가 학원도시에 들어가고 나서는 네가 고등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은 친척들 중에서 제일 강하다고 말했잖아. 지금도 충분하지 않아?"

"그래도 부족해. 더, 더, 더 강해지고 싶어."

지금 실력으로도 학원도시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응할 수 있기는 하리라.

그렇게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죽으면 세이브 포인트로 되돌아갈 수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한 번 죽으면 거기에서 끝난다.

그렇기에 이 상태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더, 더, 더 강해지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단련하는 데에는 성장 속도가 더디고, 한계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의미가 없어 보이는 단련이 쌓이고 쌓여, 어떤 식으로든 내게 의미가 될 것이다.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 어느 정도로 강해지고 싶은 건데?"

"글쎄… 세계 멸망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중2병이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러게 누가 장난치래?"

"흠…."

장난친 게 아니라 진심이었는데.

하지만 이 세상의 미래를 모르는 연하늘은 내가 한 말을 중2병의 발언으로 넘겨짚은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가 이해할 수 있게끔 현실적인 목표를 제시하기로 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최강으로 통하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지?'

그때, 딱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는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보다 강해지고 싶어."

"너희 할아버지를 말하는 거지? 수왕이라고 불리는 신검 도가의 가주님."

"맞아. 나는 할아버지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고 싶어."

"세외의 존재보다 강해지고 싶다니, 목표가 정말 굉장하네."

"원래 목표는 높게 잡아야 하는 법이니까. 그러지 못할 거라는 법도 없고."

"하긴, 그렇기는 하지."

수왕, 수왕, 수왕….

연하늘은 할아버지의 이명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내가 옆에서 응원해 줄게. 네가 수왕님보다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뭐래. 너도 같이 단련해야지."

"하지만 나는 마법사인걸?"

"마법사는 체력 안 중요해?"

"스승님이 지금도 충분하댔어."

"안 돼, 나만 고생할 수는 없어."

"와…. 너어는 진짜…."

얘가 어딜 내빼려고.

나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강한별이 필요하고, 그의 동료들이 필요하고, 여러 조역들이 필요하며, 연하늘이 필요했다.

그녀를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결국 그날도 연하늘은 나와 함께 단련에 임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내년이면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는 건가."

16세, 나는 중학생의 마지막 시기를 맞이했다.

홍예나는 어둠 속성 마법에 통달해 칠색의 마녀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잘 가."

몽실이가 죽었다.

* * *

신검 도가에서 사냥용으로 태어난 몽실이는 제법 나이가 많았다.

그러니 토끼의 수명을 고려하고, 해가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기미를 보이던 것으로 볼 때, 몽실이의 죽음은 머지않아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충분히 인지했었고, 받아들일 각오도 했었다.

하지만 내 착각에 불과했다.

―그동안 즐거웠어….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몽실이는 곤히 잠든 것처럼 죽어 있었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눈을 감고 있던 몽실이가 낯설게 느껴지기만 했다.

몽실이가 죽었다는 실감이 들자, 상실감을 느꼈다.

그래, 상실감.

나는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은 토끼에게 마음이 뜯겨 나간 듯한 고통을 경험했다.

―몽실이는 네가 잘 보살펴서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오빠, 울지 마….

―몽실이가 자유롭게 뛰놀 수 있게, 좋은 곳에다 묻어 주도록 하자.

전생을 깨닫고 5년이 되어.

나는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전생을 깨닫기 전의 도견우로 돌아가서, 울보처럼 엉엉 울었다.

그렇게 실컷 울고 나서 마음이 진정됐지만, 여전히 몽실이가 떠나간 자리는 허전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괜찮아?"

"어, 이제는 괜찮아."

"…."

연하늘은 그런 나를 걱정했다.

나는 그녀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게 애써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연하늘과 알고 지낸 지도 어언 5년이다.

내 심정을 꿰뚫지 못했을 리 없다.

그녀는 내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 내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말을 꺼낸 것이다.

"내 귀 만질래?"

"…."

파닥파닥.

연하늘이 손으로 자신의 귀를 접었다 폈다 했다.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

평소의 연하늘답지 않게, 손으로 자신의 귀를 파닥이면서 동요를 부르는 연하늘.

그 모습이 황당하고, 웃기면서, 귀여웠다.

한편으로 그녀의 귀를 만지고 싶다는 감정이 샘솟았다.

만지고 싶다. 만지고 싶다. 만지고 싶은데….

"아니야, 고마워. 마음만 받을게."

"아…."

"네 귀를 만지게 되면, 몽실이가 생각날 것 같거든."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몽실이와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정중히 거절했다.

연하늘은 의기소침한 기색이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꼬리도 만지게 해 주려 했는데…."

"…!"

그녀가 그 말을 툭 내뱉은 것이다.

나는 그만… 유혹에 지고 말았다.

냅다 반응하고 만 것이다.

"꼬리 만져도 돼?"

"어?"

"네가 방금 꼬리도 만지게 해 주려고 했다면서."

"어어… 그랬지, 네가 기운이 없어 보이니까. 근데 몽실이 생각…."

"한번 만져 볼래."

"…너는 지조가 없구나."

"괜찮아, 몽실이도 이해해 줄 거야."

"아… 그러니…."

연하늘의 눈이 짜게 식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반응을 개의치 않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에휴, 너란 애는 그런 애였지. 그래, 만져.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내 꼬리를 만지게 해 주면 기운이 나는 거지?"

"그럼, 당근이지."

어쩔 수 없다는 듯.

연하늘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순순히 허락했다.

이내 그녀가 내게서 몸을 돌리며, 꼬리가 보이게 엉덩이를 내주었다.

"와…."

"이게 감탄할 일이야?"

"그럼 안 감탄할 일이야?"

"…나는 네 마음을 잘 모르겠어. 이게 뭐가 좋은 거지?"

치마 위로 볼록 솟아 있는, 앙증맞고 귀여운 토끼 꼬리.

나는 하얀 털 뭉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너도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꼬리는 귀보다 더 민감한 기관이야. 그러니까 막 만지면 안 돼, 알았지? 나 아프게 하면… 다시는 못 만지게 할 줄 알아."그 말은 다음에도 만지게 해 주겠다는 건가?

나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괜히 물었다가 연하늘이 철회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언제 그런 적 있어?"

"가끔 내 귀 만질 때 그러면서."

연하늘의 투덜거림을 흘려들으며.

내 손은 점점 하얀 꼬리로 근접하고 있었다.

'드디어 만지게 되는 거구나.'

전에 읽은 아인 심리학에 따르면.

아인은 대개 친애하는 사람에게 귀를 만지게 해 준다고 한다.

그리고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꼬리를 만지게 해 준다고.

즉, 연하늘이 나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감회가 새롭네.'

내 5년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나는 감동에 벅차며, 아직 해명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손을 댔다.

손끝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

그때, 연하늘이 등줄기를 찌르르 떨며 곧추 폈다.

나는 그녀가 손길에 적응하게끔, 살며시 꼬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아…."

"와, 진짜 부드럽다. 귀보다 훨씬 부드러운데?"

"자, 잠깐…! 견우야! 잠깐만…."

"왜? 아파?"

"아니이, 아픈 건 아닌데…."

"그럼 계속 만진다?"

"…."

뭐라 말하려다 잠잠해진 연하늘.

등 뒤에 있는 나로서는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만지지 말란 말이 없으니, 계속 만져 보기로 했다.

"오, 역시나."

"왜, 왜 그러는데?"

"그동안 궁금했거든. 토끼 꼬리는 둥글게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꼬리가 말려 있을 뿐이야."

"…."

"그래서 네 꼬리도 그렇게 되어 있나 했는데, 몽실이랑 똑같이 되어 있었네. 꼬리가 말려 있던 거였어. 잡아당기면 이렇게…."

"꺄악! 너, 너 지금 뭘…."

"이렇게 쫙 늘어나잖아."

"느, 늘리지 마…. 뭔가, 뭔가 창피하단 말이야…."

"이렇게 늘리니 꼬리가 제법 기네. 그리고 굉장히 얇고."

"그, 그만 만져…."

"꼭 솜털을 만지는 것 같네."

연하늘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간다.

나는 부들부들 떠는 그녀를 구경하며, 그녀가 아프지 않게끔 꼬리를 만져 댔다.

"이, 이제 그만…."

"고마워, 하늘아."

"…으응?"

"네 덕분에 울적한 기분이 날아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 화낼 수 없잖아."

"그럼 더 만져도 될까?"

"너어는 진짜…. 다음에, 다음에 만지게 해 줄게. 이쯤에서 그만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다음에 또 만지게 해 준다는 약속을 받은 게 어디인가.

나는 꼬리를 만지던 손을 놓았다.

그제야 연하늘이 기진맥진해 하며 책상 위로 상체를 떨어뜨렸다.

"너 때문에… 이게 뭐야…."

"미안, 많이 아팠어?"

"…몰라! 말 안 해 줄 거야."

"다음에도 만지게 해 줄 거지?"

"…너 하는 거 봐서."

* * *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16세의 겨울이 될 때쯤.

우리는 금강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어디까지나 필기시험이지만.

어찌 됐든 그때를 기점으로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 흘러….

"이날이 오기는 했네."

해가 바뀌어, 나는 17세가 됐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37)

내가 전생을 깨닫고 5년이 지났다.

5년이란 시간은 내 몸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키가 커지고, 어깨가 넓어진 데다, 앳된 얼굴은 젖살이 빠지게 되면서 윤곽이 도드라졌다.

입 주변에 난 솜털은 며칠에 걸러 면도해야만 할 정도로 굵어졌으며, 목젖이 나오게 되며 목소리가 낮고 중후해지기도 했다.

…고래도 잡았다.

이외에도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게임의 도견우랑 비슷하게 생겼네. 아니, 조금 다른가?'

느낌상 내가 더 키가 큰 것 같다.

순둥해 보이던 얼굴도 어느 정도 날렵해진 것 같고.

5년 동안 죽어라 하고 노력했는데, 그 정도 소득은 있어야 마땅했다.

게임의 강제력 같은 게 작용해서, 게임의 도견우와 똑같이 성장한 게 아니기를 바랐다.

'내가 도견우의 초기 능력치보다 더 좋으니 달라진 게 맞겠지.'

거울 앞에 서서 옷을 입으며.

나는 새삼 내 변화를 눈에 담고, 뿌듯함을 느꼈다.

물론, 아쉬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피부도 태우고, 근육이 우락부락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게임의 도견우와 달라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체질은 어쩔 수 없었다.

이왕에 몸을 만드는 겸, 남자로서 여자들에게 인기 있을 몸으로 만들고 싶었건만, 내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하면 된다,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과장을 보태면 이래선 여자들에게 보호받아야 할 남자로 여겨지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렇게 환생하고서 처음으로 냉혹하고 잔인한 현실을 깨달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피부라도 태울까…. 이왕 하는 거, 게임의 도견우와 차별성을 주기 위해 머리도 금발로 물들이고, 피어싱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면 조금 세 보이는 이미지를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이 얼굴로 그 짓을 하면 기생오라비라고 불리게 되려나?'그러자니 참 고민이 되었다.

나는 거울을 뚫어져라 노려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아래층에서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견우야! 하늘이 왔어! 이제 그만 내려오렴!"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네! 잠깐만요!"

거울을 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어느새 연하늘이 우리 집에 올 시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황급히 셔츠 단추를 채우고, 어젯밤에 꾸린 짐을 챙겼다.

당연히 군청검을 챙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지금 내려갈게요!"

금강 아카데미의 입학 실기 시험을 치르기 위해.

오늘, 학원도시로 떠난다.

* * *

아카데미 입학시험은 보통 필기와 실기로 나뉜다.

필기시험은 학원도시에 있는 해당 아카데미가 아니라, 특별시·광역시 단위에서 치러진다.

이는 전국 곳곳에 있는 수험생들이 번거롭게 학원도시에 와서 시간과 비용을 허비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학원도시의 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실상은 필기도 합격하지 못할 수준이면 사람 붐비게 학원도시에 들어오지 말란 소리지.'

학원도시는 대기 마나와 차원이 안정적이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게이트나 던전, 몬스터의 출현이 잦았으며, 그 외에도 여러 신비로운 현상이 발생하기에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곳이었다.

바꿔 말하면, 우수한 헌터를 양성하거나 기술을 연구하기 위해 적절한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학원도시는 보안을 유지하고, 기밀을 유출하지 않기 위해서 외부에 개방되는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필기시험이 학원도시 밖에서 행해지는 이유는 그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었다.

헌터가 되고 싶다는 동경에 휩싸여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지원한 응시자.

그리고 헌터에게 필요한 기초 지식이나 기본적인 인성을 갖추지 않은 응시자를 쳐내는 것으로 최대한 지원자의 허수를 줄이기 위해서.

'그렇게 허수를 거른 다음에 학원도시에서 실기 시험을 치르는 거고.'

당연하게도 나와 연하늘은 허수에 포함되지 않았다.

우리는 작년 가을에 필기시험을 치러, 작년 겨울에 합격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해가 바뀌고 1월이 되어, 이제 실기 시험에 응시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오늘 학원도시로 떠나는 것이다.

"짐은 다 챙긴 거 맞니? 학원도시에서 2주일이나 보낼 건데, 잊은 건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어제 다 확인해 뒀어요. 하늘이가 닦달하기도 해서 몇 번이나 확인했는걸요."

"내가 언제 닦달했다고 그래?"

"그리고 잊은 게 있으면 학원도시에서 사면 되죠."

"후…. 그래. 견우 네가 그러지는 않겠지만, 학원도시의 물가가 비싸다고 괜히 돈 아끼려고 하지 말고, 엄마가 준 카드를 꼭 사용하렴."

"그 카드는 사실 내 카드…."

"아빠가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니잖니? 하늘이 너도 마찬가지야. 칠색의 마녀님도 말했겠지만, 후원금이 네 돈이 아니라고 쓰는 것에 주저하지 말렴. 쓸 때는 써야 해. 그러라고 있는 돈이니까."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집 앞까지 따라 나와서 어머니는 학원도시로 떠날 준비를 한 나와 연하늘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동안 어머니의 눈에 닿는 곳에 있던 우리가 먼 곳으로 떠난다니 걱정이 되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걱정을 풀어 주려 밝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 못 믿겠어요? 잘할 수 있어요."

"널 못 믿어서 이러는 거야."

"…."

어머니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배신감에 할 말을 잃었다.

"네가 그동안 믿을 만한 모습을 보여 줬어야지.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 보렴."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도, 저는 효도하고 착한 아들이었다고…."

"그건 네 생각이고."

"…."

"엄마는 네가 하는 걸 보면 안심하지 못하겠어. 에휴…."

내가 이렇게 신용이 없었나.

나는 어머니 뒤에 서 있던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아버지라면 나를 알아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사고 좀 작작 쳤어야지."

"제가 언제 사고 친 적이 있어요?"

"견우 넌 그걸 자각하지 못하니까 더 괘씸한 거야."

"…."

"이렇게 말해도 너는 알아듣지 못할 것 같다만… 학원도시에서는 사고 좀 치지 말아라. 네 커버 쳐 주는 아빠 고생하게 하지 말고."

설마 아버지도 내 편이 아니었을 줄이야.

"오빠! 보고 싶을 거야! 학원도시에서 맛있는 거 사 와야 해!?"

"그래, 예은이 네가 최고다. 엄마, 아빠는 필요 없어."

그래도 여동생 예은이밖에 없었다.

나는 혀를 차는 부모님을 뒤로하며, 잠옷 차림을 한 예은이를 껴안았다.

예은이가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여하튼 그렇게 가족들과 인사하고.

"그럼 가 볼게요."

"그래, 도착하면 연락하고."

"돌아올 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하늘이도. 너희가 먹고 싶은 걸로 준비해 놓을 테니."

"네, 그럴게요! 견우는 저한테 맡겨 주세요!"

"오빠! 언니! 시험 잘 봐!"

아침 공기가 서늘했다.

나와 연하늘은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가족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꼭 합격해서 돌아올게요."

"다녀올게요, 어머님! 아버님!"

* * *

남편을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한지애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아….

―네, 구해 주셔서 감사합….

젊었을 적.

길을 가던 한지애는 갑작스레 생긴 차원 왜곡 현상에 휘말려,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었다.

그때 그녀를 구해 준 사람이 바로 자신의 남편, 도상준이었다.

두 사람은 그 만남에서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이가 가까워졌고, 서로를 갈구했으며, 서로에게 영원을 맹세했다.

그러나 사랑은 순탄하지 않았다.

―어디 다녔어요? 결혼하기 전에.

―네? 아… 그냥 회사 경리로….

―어머나, 그래요? 되게 의외네. 어디 술집에라도 다닌 줄 알았더니.

―형수님, 그게 무슨….

―그래서, 남자 하나 잘 잡아서 신분 상승한 기분이 어때요? 속된 말로 막 째지나? 짜릿한가? 난 명가에서 태어난 사람이라 잘 모르겠네.

―….

―자기가 뭐 신데렐라라도 된 것 같지? 참 나, 제 분수를 알아야지.

―척 보니까 사람이 아주 싸게 생겼네. 막내 아주버님은 무슨 생각으로 결혼했는지…. 진짜 보는 눈이 없었나 보네.

도상준은 신검 도가의 사람이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십가문 중 하나이자, 제일가는 검술명가로 알려져 있는 신검 도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지애에게는 너무나 격이 높은 가문이었다.

그와 가정을 꾸려 신검 도가의 사람이 된 그녀는 가문의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고, 가문의 사람들에게 홀대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도상준이 난처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하려,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수그리고, 참고, 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알았지, 견우야? 사촌들이랑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야 해, 응?

―네, 엄마!

자신의 그런 마음가짐은 도견우에게도 영향을 주고 말았다.

도견우도 가문의 사람들을 대할 때 언행이 조심스러워지고, 그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체면이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피하려고 한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는 기본적으로 서열 의식이 존재하듯,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동물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사이에도 알게 모르게 서열 의식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세대끼리 경쟁을 통해 우수한 검사를 배출하고자 하는 신검 도가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도견우가 가문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스스로 서열을 낮추는 꼴이었다.

이성보다 비이성에 좌우되는 경향이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고, 감각적으로 수왕류를 펼치는 법을 알고 있는 듯하구나.

―감사합니다!

그나마 도견우는 가주 도예익에게 신동이라고 불릴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재능이 그를 가문의 서열 의식 속에서 줄타기하게 했다.

그러다 삐끗하고 줄에서 미끄러지듯, 사달이 난 것이다.

―스, 승우야!

처음 펼치는 평가전에서.

도견우는 대련 도중, 자신의 사촌 도승우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어, 어떡해. 피가….

―이게!

도견우는 크게 당황해 버렸고.

도승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반격을 가했다.

그 결과, 도견우는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도승우에게 두들겨 맞는 창피를 당했다.

그때, 한지애는 대련에 끼어들어 도승우를 멈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평가전에 개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간절히 평가전이 끝나기를 빌기나 해야 했다.

그리고 평가전이 끝났을 때.

―견우야!

―엄마….

―어디 봐, 꼴이 이게 뭐야….

한지애는 눈물이 범벅이 돼서 돌아온 그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서럽게 우는 아들의 모습을 보니 그녀도 눈가에 물이 차올랐다.

그때, 도승우의 어머니가 찾아온 것이다.

―동서! 이건 너무하지 않아!?

―네? 형님, 그게 무슨….

―견우가 휘두른 검에 잘못해서 팔이 잘리거나, 얼굴에 상처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어? 앞으로 애 보고 조심하라고 해! 알았어!?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도견우가 도승우를 베기는 했으나, 도승우가 도견우에게 입힌 상처도 만만치 않았다.

둘 다 정당하게 벌인 대련이었으니,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울분을 삭이고 있었건만.

도승우의 어머니가 대뜸 그런 말을 해 댄 것이다.

한지애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고,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형님, 그럼 승우는 견우한테….

―지금 내 말에 대꾸하는 거야?

그러나 한지애는 맞설 수 없었다.

도승우의 어머니는 가문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괜히 대들었다간 어떤 보복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동서, 진짜 처신 똑바로 해!

결국 한지애는 사과하고 말았다.

자식의 억울함에 소리를 높이지 못한 것도 모자라, 그 자식이 보는 앞에서 사과하는 자신이 너무나 굴욕적이고 치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견우야, 엄마가 미안해….

―아니에요, 괜찮아요. 엄마, 울지 마세요.

도견우는 마음씨가 너무나 착했다.

자신과 도상준이 바란 대로 착하고, 바르고, 남들을 배려하고, 양보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란 견우는 어미로서 못난 자신을 용서하고 위로해 주었다.

한지애는 그런 아들의 마음씨에 그만 기대고 말았다.

그때 그래서는 안 됐다.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도승우의 어머니에게 지지 않았어야 했다.

―왜 나한테는 얘기 안 했어?

자신이 나약한 모습을 보였기에.

마음씨가 고운 도견우는 자신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사촌들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꾹 참기만 했다.

그 진실을 접하고.

한지애는 어머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든 탓이다.

그렇기에….

―네 아들 싸가지 없는 건 어떻고? 애가 너를 닮아서 그런지 예전부터 볼 때마다 한 대 때리고 싶더라? 괜찮아, 견우야! 잘 때렸어!

그 아이가 홀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고, 도승우를 쓰러뜨렸을 때.

한지애는 과거와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고, 이번에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머니란, 부모란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고 아이를 지켜야 하는 검이자 방패다.

세상 어느 누구도 편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는 반드시 편을 들어 주어야 한다.

믿어 주고, 지지하고, 응원해 줘야 한다.

그때, 한지애는 잘잘못이 어떻든 도견우의 기를 죽이지 않기 위해, 그의 행동을 칭찬했다.

도승우의 어머니와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맞서 싸웠다.

얄궂게도 그때 비로소 진정으로 어머니가 된 것 같았다.

―나 머리 자르려고.

그 마음을 잊지 않기로 했다.

세상이 적으로 돌아서는 일이 있을지라도, 도견우의 편을 들 것이다.

물론, 도견우가 정말 잘못을 저지르는 일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자신의 아들은 착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 애를 보면 정말 불안하다니까.'

한편으로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도견우가 하는 행동을 보면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까지 크게 잘못되지 않은 게 용했다.

부모는 자식을 걱정하기 마련이라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아들은 특히 유별났다.

어떤 의미에서는 말썽꾸러기 도예은보다 더 걱정이 됐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학원도시에 들어간다고 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하늘이가 있어서 망정이지. 저 애 혼자서 학원도시로 보냈으면 걱정을 달고 살았겠어.'

도견우의 소꿉친구, 연하늘.

그나마 그녀가 옆에 있어서 안심이 됐다.

'그러니 하늘아.'

저 멀리, 세상으로 발돋움하려는 아이들을 응원하며.

한지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옆에서 견우 좀 잘 챙겨 주렴. 견우를 부탁할게.'

* * *

"그런데 말이야.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응, 뭐가?"

"언제부터 우리 엄마, 아빠를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부르게 된 거야?"

"…아, 그거? 저번에 어머님이랑 아버님이 5년이나 알고 지냈는데도 계속 정 없게 아주머니,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어디 있냐고 서운해하시더라고."

"그래서?"

"어머님이랑 아버님은 진짜 부모처럼 여기고 편하게 불러도 된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어떻게 편하게 부를 수 있겠니? 그래서 타협해서 어머님, 아버님이라 부르기로 한 거야."

"흠, 그런 거였구만."

"다른 뜻은 없으니 혹시나 오해하지 마."

"무슨 오해?"

"모르면 됐어. 그보다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가자. 역에서 쌍둥이들이 기다리겠다."

"늦으면 늦는 거지, 뭘. 우리가 똘마니들 기다리게 하는 게 미안해서 서둘러 가야 해?"

"음… 그럼?"

"짐도 많은데 천천히 가자. 걔네는 기다리고 있으라지. 늦어도 돼."

"내가 너랑 5년을 알고 지냈지만, 너는 참 무사태평하구나."

"아, 맞다."

"왜 그래?"

"고등아카데미에 들어가면 외모에 변화를 줘 볼까 하는데, 어때?"

"…굳이? 갑자기 무슨 일이야? 왜? 학원도시에서 여자라도 꼬시려고?"

"왜 그런 눈을 하고 그래? 사람 무섭게…."

"흥, 몰라! 그래서 어떻게 바꿀 생각인데?"

"일단 머리는 금발로 염색하고…."

"너는 검은 머리가 더 잘 어울려."

"나 아직 말 안 끝났거든? 마저 들어 봐."

"에휴…. 그리고?"

"피어싱도 하고, 선탠을 해서 피부를 그을…."

"견우야."

"어."

"내가 막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가슴골이 보이고 다리 노출이 많은 옷을 입고, 배꼽이나 여기저기에다 피어싱을 하고, 이상한 문신도 하고, 피부도 태우면 어울릴 것 같아?"

"아니, 절대 안 어울릴 것 같은데. 너 설마 그렇게 할 생각은 아니지?"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야."

"…."

"왜 그러는지 몰라도, 너는 그냥 지금 이대로가 딱이야. 그리고 어머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니?"

"…싫어하려나?"

"집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

"그냥 이대로 있어. 괜히 변화 주려고 하지 마. 너는 꾸미는 걸 못하니까, 내 말만 들어."

"후…. 그래, 그냥 이렇게 살련다."

"잘 생각했어."

그렇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갔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38)

학원도시

게임의 무대가 되는 학원도시.

전생에서 한국의 최남단에는 마라도가 위치하고 있었지만, 내가 환생한 세상에서 최남단에는 학원도시가 위치하고 있었다.

"견우야, 저기! 저기 보인다!"

"…그러네. 이제 보이네."

"저게 사람이 만든 섬이라니, 정말 굉장하다…."

이제 곧 학원도시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선장의 안내 방송을 듣고.

배 안에서 빈둥대던 나와 연하늘은 다른 사람들처럼 갑판으로 나가서 학원도시를 눈에 담았다.

수평선 끝에 있던 어렴풋한 형체가 점점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네. 하늘이가 감탄할 만도 해.'

연하늘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나는 게임에서 학원도시에 대해서 묘사된 내용을 떠올렸다.

서울을 그대로 축소한 것만 같은, 25개 행정 구역으로 이뤄진 인공섬.

우수한 헌터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 기관의 종합체.

헌터에 의한 자치권이 보장되는, 한국 헌터들의 지상낙원.

그만큼 어두운 면도 깃들어 있는, 힘 있는 자의 무법지대.

'앞으로 그런 곳에서 3년을 보내야 하는 거구나.'

전생에 이 게임을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가슴이 설레기도 하는 한편,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로 고생할 걸 생각하면 마냥 설레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은 순수하게 좋아하기로 했다.

그런데 세쌍둥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웨엑…."

"…."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나서부터, 심각한 뱃멀미를 일으킨 세쌍둥이.

우리를 따라 갑판에 나온 놈들은 학원도시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구역질만 반복하고 있었다.

죽을 것처럼 난간에 매달려서는, 바다에 토사물을 흩뿌리는 모습이 추하기만 했다.

나는 그런 놈들을 보고는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배를 그렇게 오래 탄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힘들어하는 거야?"

"네, 네가 뱃멀미를 겪어 봤어?"

"겪어 봤어어…?"

"겪어 봤냐… 우웨엑!"

한심하다, 한심해.

저런 애들이 똘마니라니 창피하다.

아니, 똘마니라서 저런 건가?

나는 쯧쯧 혀를 차 댔다.

"아니, 헌터가 되고 싶다는 놈들이 뱃멀미도 못 견디면 어떡해?"

"그래서 하늘이가 뱃멀미에 적응하는 마법을 걸어 준다 했더니… 웁!"

"네, 네가 걸어 주지 말라 그랬… 우웁프아악!"

"지가 마법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한 주제웨엑…."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갈 때, 공항 라운지에서 많이 먹었을 때부터 알아봤다.

참 많이도 쏟아 낸다.

끼룩끼룩!

오죽하면 맛집이란 소문이라도 났는지, 갈매기들이 세쌍둥이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을 지경이었다.

"견우야, 애들이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마법을 걸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언제 틀린 말이라도 했어? 마법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줄여야지. 만약 마법을 파훼하거나,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어떻게 할 건데? 그때는 뱃멀미 때문에 싸워 보지도 못하고 죽으려고? 애초에 검을 쓴다는 놈들이 말이야, 마법에 의존해서야 되겠어?"

"저, 저 꼰대 새끄엑…."

연하늘은 세쌍둥이가 걱정되는 모양이었지만 괜찮다. 저 정도로는 안 죽는다.

내가 세쌍둥이의 체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본인들이 정말 죽을 것 같으면 저렇게 말할 힘도 없으리라.

저래 보여도 5년 동안 내 밑에서 구르고 굴러 성장한 놈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꼰대가 아니다.

'나는 당연한 소리를 한 건데.'

마법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마법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개선하고, 단련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강해지는 것이다.

뱃멀미를 마법에 의존하지 않고 개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세쌍둥이에게 악감정은 없다.

정말, 하나도.

오히려 이제는 정이 든 편이었다.

그래서 모질게 구는 거다, 응.

"아니, 왜 배를 타자고 한 거야…."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워프 게이트나 탈 것이지…."

한편 세쌍둥이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나서도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놈들 딴에는 배를 탄 것이 그렇게 불만인 듯했다.

'뭐,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입국이라고 해야 하나.

학원도시는 보안 강화를 위해 제주도를 경유해서만 입국할 수 있었다.

이때, 입국에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은 주로 세 가지였다.

하나는 우리처럼 배를 타고 가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행기를 타고 가는 방법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워프 게이트만 이용했어도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워프 게이트 타는 거 기대하고 있었는데…."

"워프 게이트으…."

세쌍둥이가 아주 귀가 닳도록 중얼거리고 있는 워프 게이트였다.

대격변에서 살아남은 인류가 만들어 낸, 인공 게이트와 함께 세상을 발달시킨 아티펙트로 반드시 거론되는 워프 게이트.

좌표 사이의 거리를 0으로 만들어, 차원을 도약해 지정한 좌표로 가는 워프 게이트를 이용한다면 단숨에 학원도시에 입국할 수 있었다.

'그만큼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물론, 신검 도가의 직계인 내게 부담이 되는 비용은 아니었다.

그 가문의 후원을 받는 세쌍둥이나, 칠색의 마녀 홍예나의 후원을 받는 연하늘도 마찬가지로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여건은 됐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배를 타고 학원도시에 입국하기로 한 이유가 존재했다.

'강한별도 이렇게 입국했으니까.'

게임 『브레이브 하츠』에서는 투귀 서정진에게 가르침을 받은 강한별이 세상으로 하산해, 배를 타고 학원도시로 가는 대목에서 프롤로그가 끝이 난다.

「강한별」

―와, 저게 학원도시구나!

그때, 플레이어는 강한별을 통해 학원도시를 구경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나는 게임과 같은 장면을 보기 위해 굳이 배를 타기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

'하늘이가 배를 타 보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작년에 있었던 일이다.

나와 함께 필기시험을 준비하던 연하늘이 문득 생각이 난 듯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학원도시는 인공섬이잖아. 그럼 학원도시에 살면 바다를 보는 일이 많아지겠지?

―아마 그렇겠지. 그건 왜?

―아니, 그냥…. 나는 바다에 가 본 적이 없으니까,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서.

―바다에 가 본 적이 없다고?

―응, 나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데? 내가 바다에 갈 일이 어디 있었겠어.

―….

―사진이나 영상으로 본 게 다지.

내가 연하늘과 소꿉친구가 되고, 그녀가 우리 가족과 왕래하게 된 지 5년이나 지나는 동안.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갈 때면 종종 연하늘을 데려가고는 했다.

그런데 나는 그때 그녀의 말을 듣고, 어쩌다 보니 그녀와 함께 바다에 놀러 간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전에 바다 위에 떠 있는 학원도시를 찍은 사진을 봤는데, 엄청 예쁘더라고. '우리나라에 저런 곳이 있다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학원도시는 차원이 불안정하고, 대기 마나의 상태가 여기와 다르니까. 그러다 보니 여기와 다른 환경이 조성되는 거지.

―맞아, 그래서 신비한 곳인 것 같아. 아, 얼른 가고 싶다. 가서 바다도 보고, 배도 타 보면서, 그 사진에 나온 전경을 보고 싶어. 그 전에 필기시험부터 합격해야겠지만.

―그럼 꼭 합격해야겠네.

―응! 그래야지.

그 일이 기억에 선명히 남아서.

나는 연하늘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배를 타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역시 그러기를 잘한 것 같다.

"전경이 너무 예쁘다. 이제는 바다의 색도 바뀌었어. 정말 주변 환경과 다른 거구나."

연하늘이 기뻐하고 있었으니까.

그거면 된 거다.

세쌍둥이는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놈들의 이름을 불렀다.

"똘마니 금, 은, 동."

"…."

"그러고 자빠져 있을 바엔, 안에서 마실 거라도 사 오도록 해."

"사람이 힘들어하는데 너는…."

"하늘아, 마시고 싶은 거 있어?"

"나? 음… 바닷바람도 불고 날씨가 좀 쌀쌀하기도 하니까 따뜻하고 달달한 거로 마시고 싶어. 따뜻한 딸기우유 같은 건 없으려나? 없으면 딸기나 초코가 들어간 게 좋아."

"들었지? 나는 핫초코로 부탁해. 아, 따뜻한 거로."

연하늘도 세쌍둥이를 부려 먹는 것에 이제는 별다른 저항감을 가지지 않았다.

메뉴가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로 익숙해진 것이다.

한편, 주문을 받게 된 세쌍둥이는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하늘이도 타락했어…."

"평생 셔틀이나 하게 생겼네…."

"홧김에 민트초코나 사다 줄까?"

"잔말 말고 얼른 사 오기나 해. 그리고 민트초코 사 오면, 알지?"

그때는 바다에 확 빠뜨려야겠다.

민트초코를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 취향이 아닐 뿐이다.

여하튼 나는 세쌍둥이를 내쫓고는, 연하늘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때, 그녀가 가볍게 키득거렸다.

"말은 그렇게 매몰차게 하면서도, 사실은 쌍둥이들이 걱정돼서 안에서 쉬다 오라고 그런 거지? 그냥 들어가서 쉬라고 하면 되지, 괜히…. 쑥스러웠구나?"

"…."

…아닌데. 진짜 아닌데.

연하늘이 멋대로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오해를 정정하려다가, 오해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정정하기 위해서는 말이 길어질 테고, 그래서는 되레 변명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기 때문이다.

"됐고, 구경이나 하자."

"응! 그나저나 날씨가 춥다아…."

"마법으로 덥히면 되지 않아?"

"…네가 마법에 의존하지 말라며."

"너는 해도 돼."

"왜 나는 해도 되는데?"

"내가 옆에 있잖아."

"…."

"너는 마법사고, 나는 검사니까. 만약 한쪽이 불리해져도 다른 한쪽이…."

"응, 그러면 그렇지."

"뭐가?"

"그런 게 있어. 아, 그런데 이제는 막 손도 시렵네에…."

"그러게 마법으로 덥히라니까."

"…."

"아니면 들어가서 몸이나 녹일까?"

"됐어. 그냥 쌍둥이들이 가져다줄 따듯한 음료를 마시면서 녹일래. 이대로 바다나 보자."

* * *

세쌍둥이가 음료를 사 왔다.

그러고는 안에서 쉬고 있겠다면서 음료만 건네주고 돌아갔다.

후륵.

그들이 주고 간 핫초코를 마시며.

나는 상태창을 띄웠다.

[개인 정보]

이름: 도견우 (남자·17세)

이명: 래빗 외 2개 [+상세 내역]

소속: 라온 중학교

[보유 기프트]

회피 본능

[신체 능력]

체력: 37 → 65(62+3)

근력: 34 → 59

내구: 32 → 55

민첩: 43 → 71(68+3)

마력: 30 → 48

행운: 25 → 32

잔여 포인트: 1 [+상세 내역]

5년간 이룬 성취가 기록돼 있었다.

체력, 근력, 내구, 민첩이 크게 상승했다.

체내 마나량은 크게 늘지 않았지만, 대신 마나 효율이 높아졌다.

행운은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써서 많이 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충분히 뿌듯한 성과였다.

다만 아쉬움이 없던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환경만 갖추어졌더라면 더 올릴 수 있었을 텐데….'

각 능력치가 50을 넘기면서부터 성장 속도가 더뎌졌다.

필요한 경험치가 늘어나기도 했고, 자신을 한계에 몰아붙이는 역치도 높아진 탓이다.

그러다 보니 평소 하는 단련으로는 능력치를 올리는 것에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학원도시에서 단련하고, 게임의 스토리를 겪게 되면 다시 잘 오르게 되겠지.'

필시 그렇게 될 것이다.

마냥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한편 생각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강한별은 아직 못 만나겠네.'

게임에서 강한별은 입학시험이 아닌, 서정진과 이사장의 모종의 합의로 특례 입학 하게 된다.

그러지 않아도 투귀의 제자라는 이유로 주목받던 그가 더욱 주목받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의 운명이라면 운명이겠다.

지금쯤 시험이 있는지도 모른 채로 서정진의 밑에서 구르고 있으리라.

결국 강한별을 만나게 되는 것은 금강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가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를 만나는 것은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듯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때,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나를 이상하게 여긴 것인지.

연하늘이 불쑥 말을 붙였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시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금강 아카데미의 실기 시험은 다른 아카데미보다도 워낙에 어렵기로 유명하잖아."

"이제 와서 긴장이라도 되는 거야? 전에 금강 아카데미는 껌이라면서?"

"껌이라고는 말 안 했는데."

"그래도 무조건 들어갈 거란 뉘앙스는 맞았잖아. 네가 너랑 나는 강하니까, 시험이 어떻더라도 합격할 수 있을 거라며. 세쌍둥이도 못 미덥지만 붙을 거라고 했고. 이제 와서 말 바꾸는 거야?"

"아니, 우리는 붙을 거야."

"그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금강 아카데미의 시험이 어떻든, 잘할 수 있을 테니까. 그치?"

"그래, 그래."

합격할 거라는 보장이 없는데도 연하늘은 내 장담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나는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 말을 걸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혹시 너희도 금강 아카데미에 시험을 보러 가는 거니?"

"…."

"방금 금강 아카데미라고 하는 걸 들은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니라면 미안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온 여성.

갈색 머리칼을 지닌 그녀는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왔다.

'얘를 여기서 보네.'

나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야 게임에서 강한별의 파티원 중 1명으로 나오는 캐릭터였으니까.

'자칭' 아싸, 고은비.

설마 고은비가 우리와 같은 배에 타고 있었을 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금강 아카데미에 지원하는 거 맞아. 너도 거기 지원하는 거야?"

이참에 안면이나 터야겠다.

* * *

게임의 설정에 따르면, 레인저 계열 캐릭터인 고은비는 명랑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사람들을 두루두루 사귀는 것에 능해서, 금강 아카데미의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로 통했다.

그런데도 툭하면 말하고는 했으니.

「고은비」

―에이, 내가 어떻게 인싸야? 나는 친구도 많이 없는걸? 나는 아싸야, 아싸!

이 기만자.

전생의 나는 그 메시지를 보고, 어처구니없었다.

친구가 많다는 기준이 얼마나 되기에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까?

오죽하면 그녀가 얻는 이명으로는 '자칭' 아싸, 다정한 기만자, 마당발 등이 있었을 정도다.

그것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듯, 게임에서 그녀는 주변 사정에 어두운 강한별에게 정보를 물어다 오는 역할을 수행했다.

"잘됐다! 나도 거기 지원하거든. 여기서 같은 아카데미에 지원하는 사람을 만나니까 되게 반갑다. 나는 고은비라고 해. 앞으로 잘 지내 보자."

그런 그녀가 먼저 다가와 줬으니,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녀에게 접근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도견우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이름이 도견우라 하는구나. 만약 시험에서 만나게 되면 그때는 같이 협력하고 그러자."

"그건 시험 내용에 따라 다르지. 만약 적으로 만나게 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견제하고 그러지는 않을게."

"내 말이 그 말이야. 우리 서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자는 거야! 상대를 떨어뜨리려고 견제하지 말고."

내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명랑한 얼굴로 호응하는 고은비.

게임에서 본 모습 그대로였다.

'동물로 따지자면 친화력이 높고, 귀여운 강아지상이라고 해야 하나.'

나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고은비를 강아지의 품종 중 하나인 웰시 코기로 묘사하고는 했다.

그중 게임을 모르는 사람들도 알 정도로 유명한 짤방이 하나 있었다.

갈색 강아지 귀를 한 고은비가 '정보'라는 뼈다귀를 물고 주인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꼬리를 흔들던 짤방이었다.

'말풍선으로 '멍!' 소리도 냈었지.'

그 짤방을 떠올리자니.

나는 고은비에게 더욱 친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얘가 낯을 가리네.'

나와 달리 연하늘은 내 뒤에 숨어 낯을 가리고 있는 판이었다.

사람의 경계심을 허물어뜨린다는 고은비의 미소도 연하늘에게는 통하지 않은 듯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고 연하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너도 이름 알려 주지 않을래? 사실 배에 처음 탔을 때부터 너한테 계속 시선이 갔거든. 내가 예쁜 사람을 좋아해서! 머리카락이 정말 예쁘다. 염색한 게 아니라 자연인 거지?"

"…연하늘이라고 해. 안녕."

"응, 안녕! 혹시 괜찮으면 귀 좀 만져 봐도 될까? 와, 토끼 귀라니…."

"음… 미안해."

휘익, 하고 고은비가 거리를 좁히려고 하자 내 뒤에 완전히 숨는 연하늘.

연하늘이 나를 방패로 세워서는 등을 밀어 대고 있었다.

그러고는 내게 속닥거렸다.

"어떻게 좀 해 봐. 나는 저렇게 활발하고 반짝거리는 사람은 어렵단 말이야!"

"그냥 나한테 하는 것처럼…."

"어떻게 널 대하는 것처럼 대하니? 너는 친하지만, 쟤는 처음 봤잖아. 게다가 나 같은 아싸한테는 너무 부담되는 스타일이라고…."

…여기도 아싸가 있었네.

아, 얘는 진짜 아싸인가.

나는 연하늘의 속닥거림을 듣고는 혀를 내둘렀다.

어쩔 수 없이 연하늘을 대신해서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어… 얘가 좀 낯을 가려서 그래. 그리고 아인의 귀는 예민하다 보니 함부로 만지면 안 되거든. 꼬리도 마찬가지고. 네가 이해해 줘."

"아, 그렇구나. 그것도 잘 모르고 멋대로 만지겠다고 해서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고은비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그녀는 연하늘의 태도를 파악하고, 더는 부담을 주지 않으려 조심했다.

그러다 몇 마디 더 말을 나누고는 손을 흔들며 물러났다.

"그럼 나는 같이 온 애들이 있으니 이만 돌아가 볼게. 견우야, 하늘아, 다음에 또 보자!"

"그래, 다음에 봐."

"…안녕, 잘 가."

이윽고, 마침내 배가 항구에 다다랐다.

근미래적인 느낌을 풍기는 건물과 저 멀리 구름에 가려진 세계수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 여객선은 학원도시에 정박합니다. 오늘도 당 여객선을 이용해 주신 승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잊은 물건이 없는지 유의하여,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하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수험생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39)

강한별이 재학하는 금강 아카데미.

금강 아카데미는 매년 이루어지는 학원도시의 아카데미 평가 순위에서 1위를 기록할 만큼 정평이 나 있는 교육 기관이었다.

'또 세계 순위로는 5위였나.'

그 정도로 금강 아카데미의 위상은 대단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한국의 역량으로 말이 되느냐고.

내가 전생에 산 세상의 사람이라면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들으면 누구나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란 바로….

'한국 게임이니까!'

그랬다.

그 한마디로 납득할 수 있으리라.

게임이 한국에서 제작됐다 보니, 한국의 위상이 높게 설정되는 것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세상에서 한국은 헌터 강대국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고 있었다.

물론, 게임 내적으로는 그럴듯하게 세계관이 받아들여질 만한 설정이 존재하기는 했다.

한국은 영토가 좁았고, 그로 인해 대격변 당시 몬스터로부터 빠르게 영토를 수복할 수 있었다는 설정이다.

'그 결과, 학원도시를 계획할 만한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해서 학원도시가 창업된 지 거의 150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지원하는 금강 아카데미는 이 도시의 역사와 함께 설립된, 전통 있는 곳이기도 했다.

여하튼.

"여기서 뭘 타고 가야 하지…."

선착장에 내린 나와 연하늘, 세쌍둥이는 수험표를 받기 위해 금강 아카데미로 향하기로 했다.

이미 근처에 있는 정거장에서는 우리처럼 시험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줄 선 정거장 표지를 유심히 살폈다.

"하늘아, 23구라 적혀 있는 정거장 표지가 있는지 찾아봐."

"지금 보고 있어. 저기가 19니까, 23구는 그럼… 아, 찾았다!"

금강 아카데미의 위치는 제23구역, 서울로 치자면 강남구에 있었다.

나는 연하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정거장 표지로 고개를 돌렸다.

표지에 크게 23이라 적혀 있었다.

"저기 가서 줄이나 서자."

캐리어를 끌고 우리는 정거장으로 향했다.

학원도시에서 수험 기간에 맞춰서 배차 간격을 줄인 덕분인지 다행히 줄이 금세 빠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줄 앞으로 온 우리는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승차입니다.]

서울에서도 들어 본 익숙한 기계음.

자리가 꽤 널널했다.

비어 있는 자리를 둘러보던 나는 뒤따라 탄 연하늘에게 2인석을 가리켰다.

"하늘아, 저기에 앉자."

"응, 그래."

연하늘을 창가 자리에 앉히고.

나는 그 옆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버스가 출발했다.

[다음 정거장은….]

차창 너머로 풍경이 지나간다.

우리는 조용히 차창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터널을 나오자.

"와아…."

도시적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연하늘은 절로 감탄했다.

버스가 달리고 있는 언덕길 저편에 서울에서는 본 적도 없던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건물 사이로 가려지지 않는 세계수가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푸른 하늘, 회색 빌딩, 푸른 녹음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풍경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아래로 펼쳐진 강이 반짝이고 있기까지 했다.

"저 강이 그림강인 거지?"

"…맞아, 그림강."

"정말 그림처럼 예쁘다…. 강물이 엄청 맑은 것 같아. 서울에서 보던 한강하고 다르게."

학원도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강.

그림강은 중심부에서 자라고 있는 세계수와 함께 학원도시를 상징하는 자연물이었다.

연하늘은 전경에 매료된 듯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직접 보니 예쁘긴 예쁘네. 다만….'

나는 하늘에 드문드문 보이는 검은 점을 응시했다.

멀리서 보느라 의식하기 힘들지만, 가까이서 본다면 학원도의 미관을 해치고 있을 점들.

눈에 들어온 것만 해도 모두 8개.

'게이트.'

학원도시 상공에는 저것보다 많은 게이트가 포진해 있을 것이다.

만약 저것들을 공략하지 못하고, 게이트 침식률이 올라간다면.

'멸망 엔딩이 확정이겠지.'

그때는 지금 보고 있는 전경이 끔찍한 모습으로 변모하리라.

세계수에는 몬스터들이 터를 잡고.

그림강은 사람들의 피로 물들어서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강이 되리라.

게임의 엔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마냥 감탄할 수만은 없었다.

"…."

그렇게 한참.

나는 상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금강 아카데미의 입학 실기 시험은 일주일 후로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시험은 수험표를 배부받는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험자 이름 좀 확인할게요."

"도견우요."

"어디 보자, 도견우…. 번호가…."

"번호는…."

전 계통을 통틀어 1만 명 이상이 재학하고 있다는 금강 아카데미.

부지를 직접 둘러보겠다는 이유로, 정문 입구에서 내린 우리는 선택을 후회해야 했다.

그만큼 금강 아카데미의 부지가 넓어도 너무 넓었으니까.

길을 헤맨 끝에 겨우겨우 입학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견우 학생, 신분 확인했습니다. 수험표를 발부하기에 앞서서, 먼저 서약서를 제출해 주세요. 서약서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저기 뒤에 가서 작성해서 오세요."

"여기 있어요."

금강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모든 아카데미에 지원하는 사람은 자필로 쓴 서약서를 제출해야 했다.

서약서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면, 실기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은 시험에서 일어나는 재난·재해·테러와 같은 상황을 제외한 모든 불상사에 대해 본인이 책임을 진다고 서약하는 문서였다.

'생사가 오갈 수 있는 시험이니까 사전에 서약서로 못을 박는 거지. 시험을 치르다 죽더라도 아카데미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여담이지만 정보에 따르면, 놀랍게도 실기 시험을 보러 오는 사람 중에는 서약서를 제출하려는 순간이 돼서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지원을 철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자신은 각오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직접 그 순간이 닥쳐오면 사람 마음은 달라지는 법이다.

자원해서 군대 훈련소에 들어간 사람이 왜 '내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퇴소해도 됩니다.' 하는 교관의 말에 흔들려서 퇴소 충동을 느끼겠는가.

하지만 나는 조금의 불안도 없이 교직원에게 서약서를 제출했다.

"유서도 있으면 같이 주세요."

"유서는 안 썼는데요."

"유서는 의무가 아니기는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지금이라도 제출할 거면 뒤에서 유서를 쓰고 오세요."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네, 그럼 수험표 받아 가세요."

내가 왜 유서를 써?

나는 시험에서 죽을 걱정을 하지 않기에 유서를 고려하지도 않았다.

이내 수험표를 발부받았다.

'아티펙트인가.'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기.

나는 배지처럼 생긴 수험표를 이리저리 살폈다.

겉면에 '금강'이라고 적혀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이 수험표야말로 내가 학원도시에 일주일 일찍 도착한 이유였다.

"이따 정각에 시험 유의 사항을 설명할 예정이니 설명을 들을 거라면 102호 강의실로 가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102호 강의실이면 바로 옆이다.

수험표를 발급받는 용건을 끝낸 나는 접수처에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연하늘은 찾았다.

마침 그녀도 접수를 마친 듯했다.

"수험표는 받았어?"

"응, 여기. 유의 사항을 들을 거면 102호 강의실로 가라고 하더라고."

"나도 들었어. 가서 자리나 잡자."

"쌍둥이들은 안 기다릴 거야?"

"걔네는 알아서 오겠지. 가자."

"음…. 그래."

정각도 얼마 남지 않았겠다.

우리는 시험 유의 사항을 들으러 102호 강의실을 찾았다.

잠시 후, 설명회가 시작됐다.

[이미 아는 분들도 있을 테지만, 시험은 사실 다음 주부터가 아니라 오늘부터 시작된 셈이죠.]

[다들 수험표를 부착해 주세요. 아, 수험표는 심장하고 가까운 쪽에다 부착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바이털사인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에게 수험표가 보이도록 높이 들어 올린 교직원.

나와 연하늘은 그가 하는 말에 수험표를 부착했다.

[지금 이 시간부터 여러분은 실기 시험이 끝날 때까지 계속 수험표를 달고 있어야만 합니다. 저희가 여러분의 상태에 이상이 없는지 그리고 조난당했을 경우에 대비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파악해야 하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수험표를 몸에서 1시간 이상 떼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탈락으로 처리될 겁니다. 물론, 그 전에….]

잠시 텀을 두고 교직원이 말을 이었다.

[자격을 증명해야겠지만요. 수험생이라는 자격을요.]

[여러분은 수험표는 받았지만, 실기 시험을 치를 수험 번호는 아직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수험표를 보세요. 수험 번호는 적혀 있지 않고, '금강'이라고만 적혀 있을 겁니다.]

[실기 시험이 있는 전날까지, 여러분은 그 수험표에 수험 번호가 떠오르게 해야만 합니다. 네, 이렇게요.]

교직원이 수험표를 기울였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강'이란 글자 밑으로 번호가 떠올랐다.

[수험표를 계속 부착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수험 번호가 떠오르고 난 이후부터입니다. 그럼 수험 번호를 어떻게 띄우느냐 하면….]

[수험표에는 실기 시험에 앞서, 여러분의 기초 능력을 확인하는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그 문제를 풀어 떠오르게 하면 됩니다.]

[문제는 저희가 보유한 문제 중에 난이도별로 무작위로 30문제가 출제됩니다. 한 번 띄운 문제는 그 문제를 풀거나, 날짜가 바뀔 때까지 계속 고정됩니다. 만약 자신이 풀지 못하는 문제가 나왔다 싶으면, 날짜가 바뀌고 새로 문제를 띄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겁니다.]

[딱 한 문제. 여러분은 30개 문제 중에서 딱 한 문제만 푸는 것으로 수험 번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수험생들 간에 차별성을 줄 수 없겠죠?

교직원이 싱긋 웃으면서 한 말에 호응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험표는 문제를 푸는 횟수에 따라서 색이 변화합니다. 5개는 회색, 10개는 황색, 15개는 녹색, 20개는 적색, 25개는 청색, 30개는 흑색으로요.]

[여러분에게는 그 색에 따라서 가산점이 주어질 겁니다. 가산점을 얻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여러분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참고로 본인의 수험 번호는 시험 당일 전까지 확정된 게 아닙니다. 수험 번호는 시험 당일이 되는 순간 확정됩니다. 그리고 그때, 수험표에 시험 장소가 떠오를 겁니다.]

[여러분은 제시간까지 시험 장소로 찾아오면 됩니다.]

[이상으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의 건투를 빌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

교직원은 강단에서 내려갔다.

* * *

수험생의 자격을 증명하라.

금강 아카데미가 매년 벌이는 자격시험은 워낙 유명했다.

입학 실기 시험에 대비하고 있다면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나는 당황하지 않고 시험 내용에 대해 생각했다.

'올해는 문제를 푸는 방식이라….'

작년에는 식물의 씨앗을 자라게 해서, 수험 번호를 찾는 시험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험 유형은 다르다고 해도, 금강 아카데미가 평가하는 항목은 다르지 않은 듯싶었다.

'혼자 머리를 굴리든, 그게 아니면 여럿이서 협력하든 간에 해서 일주일 사이에 문제를 해결하고, 수험표를 지키라는 건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몇 사람들은 설명을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혼자서도 시험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혹시 혼자 왔어? 나도 혼자 왔는데, 우리 같이 팀을 짜지 않을래?"

반면에 협력하기 위해서 즉석에서 팀을 이루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급조하려는 경우는 몇 없고, 팀을 이루려는 사람들은 이미 무리를 짓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자격시험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사전에 팀을 모을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후원받는 가문의 인연을 통하거나, 아는 사람들끼리 협력하거나.

"이쑤시개소드마스터 님 찾아요! 어디 계세요!?"

또 커뮤니티나 SNS를 통한다거나.

팀을 구성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연하늘이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그녀가 행동 방침을 묻고 있었다.

"야! 도견우! 어떻게 할 거냐!?"

"같이 협력해도 될 것 같은데."

"당연히 같이할 거지?"

어느새 세쌍둥이도 몰려왔다.

놈들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얼굴을 본 나는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아니, 각자 알아서 하기로 하자."

"엥? 아니, 왜?"

"문제가 무작위로 떠오른다던데, 그럴 거면 협력해서 뭐 해. 둘이서 1개를 푸는 것도 아니고, 둘이서 2개를 풀어야 할 텐데. 그래서는 시간만 더 쓰는 꼴이지."

"쟤네는 협력하는 것 같은데…."

"쟤네는 문제를 혼자 풀 자신도, 수험표를 지킬 자신도 없어서 그러는 거고. 아니면 단순하게 그냥 남들 따라 협력하는 거고. 그런데 우리가 그럴 실력이 없어? 자신이 없어? 아니잖아."자격시험은 단순히 자격을 묻는, 그동안 헌터가 되기 위해 준비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까지 어려울 것 없는 시험이다.

굳이 협력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수험 번호만 떠올릴 거면 모를까, 가산점을 획득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손해이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풀어 주다, 내가 문제를 풀지 못하게 될 테고, 그러다 보면 가산점도 많이 얻을 수 없겠지.'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실기 시험이 있을 때까지 일주일.

그때까지 최대한 많은 문제를 풀어 가산점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다.

협력이나 할 시간은 없었다.

게다가….

"너희랑 우리랑 숙소가 다르잖아. 거리도 꽤 떨어져 있는 것 같던데, 협력했다가는 매일 합류하기 위해 시간을 써야 할걸?"

"윽…. 그건 그렇지."

학원도시의 숙박업소들은 수험 기간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나아가 여러 나라에서 시험을 보러 오는 수험생들로 만원을 이룬다.

그로 인해 숙박할 방을 잡으려는 경쟁이 워낙 치열했다.

그런 나머지, 세쌍둥이는 나와 연하늘이 묵는 숙소와 다른 숙소를 예약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각자 알아서 하기로 하자.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해서 시험도 보지 못하고 떨어지는 일은 없기를 바랄게."

"쳇, 그럼 어쩔 수 없겠네. 알았어! 그럼 시험 당일에 보자."

그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수긍했다.

그런 한편.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고, 짐을 풀어야 하기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대로 헤어지기로 했다.

"가자, 하늘아."

"응, 숙소 위치는 알고 있지?"

"당근이지."

나와 연하늘은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체크인하러 왔는데요."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도견우랑 연하늘이요."

"네, 확인해 보… 어, 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저, 그게…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 전산 장애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두 분이 같은 방을 예약한 것으로 되어 있네요."

"…."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러니까 나랑 연하늘이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건가?

내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네에에!?"

아, 깜짝이야.

연하늘이 새된 소리를 질렀다.

토끼 귀가 삐죽 솟구쳤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40)

수험표

"불편을 일으켜 정말 죄송합니다. 사전에 전산 시스템을 살피지 못한 저희 측의 명백한 잘못입니다."

데스크 직원으로부터 소식을 접한 호텔 지배인이 우리를 찾아와서는 정중히 사과했다.

그 뒤로 데스크 직원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래….'

졸지에 그들의 정수리를 보게 된 나는 혀를 내둘렀다.

예약한 방이 중복됐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다.

참 황당하기만 했다.

학원도시가 시험을 치르러 오는 사람들로 붐비는 이 시기에는 숙박 예약이 쇄도하면서 이따금 전산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는 했다.

명색이 과학과 마법을 선도한다는 학원도시에서 그런 일은 없으리라고 우스갯소리로 여기고 있었건만.

설마 우스갯소리로 여기던 그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내가 시설이 좋지 않은 곳을 고른 것도 아니고, 23구에서 이름 있는 곳을 골랐는데도 전산 오류가 발생했다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바로 학원도시이기도 했다.

학원도시 특유의 대기 마나 상태와 차원의 불안정성이 어우러지게 되며 이따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어쩌면 전산 오류도 그러한 연유로 일어나게 됐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

'내가 행운이 낮아서 그런가?'

그러다 보니 괜한 생각도 든다.

현재 내 행운 수치는 32.

연하늘은 나보다 더 낮았다.

그러니 나와 연하늘의 낮은 행운이 얽히고설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늘아, 우리는 인연이 아닌가 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장난이야."

물론, 정말 짐작이 맞는다고 해서 연하늘과 멀어질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불행을 짊어지겠다.

나는 같은 방을 쓰게 된 상황에 넋이 나간 연하늘을 대신해 호텔 지배인과 대화하기로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 주실 건데요?"

"…두 분께서 결제한 숙박 대금은 즉시 환불 처리를 해 드리고, 무상으로 저희 호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또한 23구의 상업 시설에서 이용할 수 있는 할인 쿠폰도 같이…."

"방은 지금 하나밖에 없는 건가요? 추가 요금을 더 지불해서라도 방을 잡을 용의가 있는데 다른 방이라도 잡을 수 없을까요?"

"죄송합니다. 예약한 객실 외에는 만실인 상황이다 보니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호텔 지배인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수험을 치르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 평소와 달리 여분의 객실을 마련해 놓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방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와서 방을 구하려 하더라도 어디나 만실이겠지.'

뻔히 예상이 가는 일이었다.

운이 좋게 비는 방이 있을지라도 찾느라 꽤 고생해야 할 것이다.

하나 남은 방에 투숙하는 것만큼 더 나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지배인이 말을 추가했다.

"다행히 저희 호텔은 침대가 넓어 두 분이서 잠을 자기에도 충분히 여유가 될 겁니다. 그리고 침대는 여유분이 있어서, 원하시면 사이즈를 변경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

다행이라면 그나마 다행인가.

생각 끝에 결정을 내린 나는 이내 연하늘의 의향을 묻기로 했다.

"하늘아, 어떻게 생각해?"

"뭐, 뭘 어떻게 생각해야?"

"같이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으으…."

우물우물.

연하늘은 당황함이 여실한 얼굴로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 끝끝내 입을 열었다.

"응…."

* * *

원룸인 것 치고는 방이 꽤 넓었다.

둘이서 일주일 동안 생활하기에는 문제가 없을 듯했다.

"침대도 이 정도면 적당하겠고… 굳이 침대 사이즈를 늘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는 짐을 둘 공간만 줄어들 테니까."

나는 적당한 곳에 캐리어를 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방으로 들어오는 연하늘을 눈에 담았다.

연하늘은….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아니, 나랑 엘리베이터를 타고부터 상태가 더욱 심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다 큰 성인 남녀가 한방에서 잘 수 있어? 하루도 아니고 그것도 일주일씩이나.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저기, 우리 아직 성인 아니거든? 뭐, 고등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부터는 법적으로 준성인으로서 인정받기는 하는데…."

"이게 무슨 드라마 같은 일이야. 아니, 요즘 드라마도 이런 식으로는 전개 안 한단 말이야!"

"요즘에는 어떻게 전개하는데?"

"일단 확 덮치고…! 너, 설마…."

"뭐야, 그 눈은?"

"…아니야. 네가 그럴 리 없지."

"…."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더니.

연하늘이 별안간 짜게 식은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뭐지? 지금 무시당한 것 같은데.'

그 시선이 묘하게 사람의 자존심을 긁는 것 같았다.

괘씸해서 응징을 가해 주기로 했다.

"아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설마, 너 진짜…. 나, 난 준비…."

"무슨 망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좀 하지그래."

나는 토끼 귀를 세게 쥐었다.

그러자 그녀가 강한 자극에 놀라, 내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나는 그녀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침대 위로 쓰러질 때까지 계속 괴롭혀 댔다.

"너어 진짜아…."

"뭐, 진짜."

"어머님한테 이를 거야."

"그래? 그럼 한 번 더…."

"미안, 안 이를게."

"후,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어야지. …많이 아팠어?"

"흥, 몰라!"

한바탕 몸싸움을 벌이니 진정됐다.

침대에서 고개를 든 그녀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조금 전과 달리 조심스럽게 그녀의 귀를 만져 주었다.

그녀는 가만히 내 손길을 받았다.

"어릴 때는 같이 자기도 했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여기고 그래?"

"그때는 초등학생이었잖아. 그때랑 지금이랑 같니? 그리고 그때 예은이도 같이 잤었고."

"헌터가 되면 길바닥에서 자거나, 다른 성별끼리 지내는 일도 왕왕 있을 텐데, 뭘."

"으… 그건 그렇기는 한데…."

"그렇게 나랑 자는 게 싫어?"

"어?"

"뭐, 네가 싫다 하면 어쩔 수 없고. 정 그러면 나는 다른 데서 잘게."

"다른 데? 다른 데 어디?"

"사우나에서 지내도 되고, 똘마니들이랑 같이 묵어도 되고. 지낼 데야 많으니까."

불편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었다.

나는 연하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차라리 그렇게 지낼까도 생각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싫은 건 아니야…."

"…."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연하늘이 내 옷깃을 꽉 붙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이내 기어들어 가듯 말했다.

"싫은 건 아닌데… 진짜, 진짜, 진짜 싫은 건 아닌데…."

내 팔뚝에 툭 머리를 박는 연하늘.

옅은 하늘색 머리카락 아래로 간간이 그녀의 붉어진 얼굴이 드러났다.

'지금 내가 갈까 봐 이러는 건가?'

그런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나는 왠지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그럼 좋은 거야?"

"뭐? 아니, 좋은 건…."

"좋은 건 아니야? 그럼 싫어?"

"아니이, 좋은 건 맞는데… 음? 오, 아, 이게 좋다는 뜻이 그런 게 아니라…."

"음, 오, 아, 예에."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응."

"너어는 지인짜…."

바로 조금 전에는 울먹거리더니.

어느새 연하늘이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옷깃을 붙잡던 그녀의 손은 이제 내 팔을 꼬집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키득거렸다.

"그럼 나랑 자고 싶다는 거지?"

"뭐?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그냥 너랑 자는 게 싫은 게 아니고, 같이 자도 된다고…."

"그게 그거지."

"뭐가 그게 그거야. 전혀…."

"아니면 정말 똘마니들한테 간다? 방은 너 혼자 쓰고, 나중에 시험장에서 보기로 하자."

"…."

"그럼 된 거지?"

"…하나도 안 됐거든?"

"그래?"

"걔네랑 같이 쓰면 좁을 거야."

"그러겠지."

"그리고 걔네 방 엄청 더러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걔네 성격 보면 알잖아."

"방을 안 치울 것 같기는 하지."

"보나 마나 환기도 안 할 거야. 빨래도 신경 안 쓸 것 같고…."

"그래서?"

"그에 비해서 이 방은 많이 넓어. 나 혼자 쓰고도 남을 정도로."

"원룸인데?"

"…그냥 걔네한테 가 버리든 말든, 너 마음대로 해. 나도 이제 몰라."

"그래? 그럼 여기 계속 있지, 뭐."

"…."

"내가 여기 말고 어디를 가겠어. 나도 너랑 방 같이 쓰는 게 좋지, 똘마니들보다. 안 그래?"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야, 근데 하늘아, 나 지금 아픈데 그만 좀 꼬집으면 안 돼?"

"엄살 부리는 거 다 알거든?"

장난을 친 것에 대한 복수란 듯이.

그녀가 팔을 꼬집는 것도 모자라, 그대로 뱅뱅 돌리기까지 했다.

이제는 옆구리로도 손이 들어온다.

"너 지금 마나 사용…!"

"흥, 내가 언제?"

비겁하다.

나도 체내 마나를 끌어올려서까지 토끼 귀를 건드리진 않았는데.

나는 매서운 손길을 떼어 내기 위해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다 보니 다음에 연하늘이 작게 중얼거린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예쁜 옷도 챙겨왔을 텐데…. 시험만 생각하고 괜히 칙칙한 것만 챙겼네."

* * *

"나 씻을 거야! 훔쳐보기만 해 봐."

"안 훔쳐봐."

캐리어에 든 짐을 풀고.

연하늘은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 후다닥 욕실로 들어갔다.

이내 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며 내게 거듭 강조했다.

"훔쳐보기만 해 봐, 훔쳐보기만 해 봐, 훔쳐보기만 해 봐…."

붉은 눈에 힘을 주는 연하늘.

쏘아보는 시선이 꽂히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혀를 찼다.

"안 봐, 안 본다고, 안 본다니까?"

"진짜, 진짜, 진짜 안 볼 거지?"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면 홧김에 욕실에 들어가는 수가 있어."

"어디 그러기만 해 봐…."

으름장을 놓듯 말하고 있었지만, 정작 흠칫한 기색이 역력했다.

연하늘은 앙다문 얼굴을 끝으로 욕실 문을 닫았다.

이에 나는 그녀가 들어간 욕실에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돌리려고 했는데.

그만 시선이 멎고 말았다.

"…."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상태에서 정면에 위치한 욕실.

그 욕실 벽면이 하필이면 반투명한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안에 들어간 연하늘이 흐릿한 실루엣으로….

'하늘아, 미안.'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

간신히 구분될 정도로 어렴풋한 실루엣만 봤을 뿐이다.

아니, 실루엣도 못 봤다.

나는 욕실을 눈에 담지 않기 위해 황급히 몸을 돌렸다.

쏴아아.

잠시 후, 물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묘하게도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계속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되네….'

나는 끙 소리를 냈다.

그동안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와 같은 방을 써야 하는 상황에 당혹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티를 내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나까지 부끄러워해 버렸다가는 연하늘이 더 부끄러워할 테니까.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그녀를 대하고 있었건만, 난데없이 기습을 당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겨우 이런 걸로 당황해서는 안 돼. 당장에 아카데미 학생이 되더라도 노숙이나 혼숙하는 일이 많을 텐데, 이런 일로 당황해서는….'

그래도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같은 침대를 쓰는 일은 없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쳐 버린 나는 얼굴을 구겼다.

어떻게든 의식을 돌려야 했다.

'하늘이가 씻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이거나 풀어야겠다.'

그때 마침 가슴에 부착하고 있던 수험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수험표를 떼어 냈다.

"이렇게 하면 된다고 했었나."

나는 '금강'이라 적힌 부분 하단에 체내 마나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하단에서 내가 흘린 마나가 반투명한 조각이 되어 떠올랐다.

"…."

수험표에서 일정 범위를 유지하며.

조각으로 변한 마나가 떠다녔다.

그 수가 수십 개는 되는 듯했다.

'이 조각들을 맞추라는 건가.'

문제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수험생 본인이 직접 문제를 보고 유추하라는 것이리라.

나는 떠다니는 조각들을 살피고, 그 형태에 주목했다.

어떤 조각과 어떤 조각의 형태는 자연스럽게 합쳐질 것 같았다.

입체 퍼즐이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조각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퍼즐이 맞아.'

2개의 조각이 합쳐졌다.

조각은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듯이 이음새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길로 조각들을 맞춰 나갔다.

손가락 마디처럼 작았던 조각들이 점점 크기가 커졌다.

수십이 넘는 조각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 같았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형태가 같은 조각이 너무 많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각끼리 미세한 차이가 없었다.

혹시나 하고 겹쳐서 확인해 보니 완벽히 일치한 것이다.

'그냥 무시해도 되는 건가.'

똑같은 A, B, C 조각이 있다.

그리고 세 조각과 합쳐질 수 있는 D, E, F 조각이 있다.

이때, 아무 조합으로 맞추더라도 퍼즐을 완성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시험이 이렇게 쉬울 리 없어.'

나는 생각을 환기하기로 했다.

다른 접근 방식이 있을 것이다.

육안으로 의지하지 않고….

"아."

내가 왜 육안으로만 보고 있었지.

불현듯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즉시 나는 체내 마나를 발현해, 시력을 향상시켰다.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마나적 현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내 생각이 맞았어.'

겉보기에는 단순한 조각이었으나, 내부에 마나 회로를 품고 있었다.

형태가 같은 조각일지라도 해도, 내부를 들여다보면 마나 회로가 제각기 달랐다.

이중 퍼즐이었던 셈이다.

'육안과 마나적 시야를 활용해서 푸는 문제였던 거구나.'

그렇다면 더는 거리낄 게 없다.

형태가 다른 조각은 육안으로, 형태가 같은 조각은 마나 회로로 보고 맞추면 되는 것이다.

물론, 마나 회로만 보는 것으로도 퍼즐을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흩어져 있는 조각을 통해 마나 회로의 전체적인 양상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굳이 어렵게 갈 필요는 없어.'

애초 자격을 묻는 시험이다.

필시 금강 아카데미가 그런 의도로 문제를 출제하지는 않았으리라.

기본 능력만 보이면 된다.

이윽고 머지않아.

"…됐다."

나는 입체 퍼즐을 완성했다.

수험표 위 허공에서 단면이 많은 형체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꼭 다이아몬드를 연상케 했다.

아니, 다이아몬드가 맞으리라.

"…."

금강 아카데미의 상징석이 바로 다이아몬드였으니까.

나는 내부의 술식이 활성화돼서, 푸른빛을 발하게 된 다이아몬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마나가 저 안에 깃들어 있다니, 무언가 기분이 감개무량했다.

공백으로 있던 수험표 하단부에 수험 번호가 떠올랐다.

나는 수험 번호를 확인했다.

"문제 푼 거 축하해."

"아, 하늘아."

그때, 어느새 나온 것인지.

연하늘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하얀 가운을 입은 그녀에게서는 은은한 향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언제 나왔어?"

"나온 지는 꽤 됐지. 그런데 네가 문제를 푸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던 거야."

"아, 그랬구나."

나는 수험표에 흘려 넣은 마나를 체내로 환원했다.

푸른빛을 반짝이던 다이아몬드는 마나의 입자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자 연하늘이 아쉬워했다.

"아, 조금 더 두지. 예뻤는데."

"은근히 마나 소모가 심하더라고. 그리고 나도 이제 씻어야지."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네가 씻고 있는 동안 나도 문제나 풀고 있어야겠다."

"그래, 그러고 있어."

"1시간 안에 씻고 나와야 해. 이제 계속 수험표를 부착해야 하잖아."

"알고 있어."

이제 보니 둘이서 같은 방을 써서 좋은 점이 있기는 했다.

1명이 몸을 씻고 있는 사이에, 다른 1명이 수험표를 도둑맞지 않도록 지킬 수 있으니까.

연하늘에게 수험표를 맡긴 나는 몸을 씻으러 가기로 했다.

"아, 하늘아."

"왜 그래?"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욕실에서 반쯤 몸을 내민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훔쳐보지 마."

"안 훔쳐볼 거거든!"

"진짜지? 믿는다."

"내가 훔쳐볼 일 같은 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씻기나… 와아…."

쏴아아.

음, 오, 아, 예에.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41)

아침 공기가 차다.

다리를 에는 추위를 느낀 연하늘은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으으…."

춥다, 너무.

추위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고, 서서히 의식이 부상한다.

그럼에도 지난밤의 피로가 쌓인 연하늘은 잠을 깨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알람은 아직 울리지 않았다.

조금 더 자도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연하늘은 눈을 뜨는 대신, 눈을 감은 채로 이불을 더듬었다.

그렇게 해서 끌어 오려고 했다.

"으응?"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인지.

이불이 끌려 올 기미가 없었다.

꼭 무언가에 깔린 듯했다.

'…뭐지?'

미약하게 짜증이 인다.

연하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더 잠자고 싶다는 의식은 생각보다 본능을 더 앞서게 했다.

다리에 이불을 덮는 것을 포기한 그녀는 몸을 둥글게 웅그렸다.

그러고는 온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아, 따뜻해.'

온기가 느껴지는 무언가.

겨우 몸이 살짝 닿았을 뿐인데도 몸이 따스해지고, 편안해진다.

연하늘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꼼지락꼼지락.

이 온기를 더 느끼고 싶다.

연하늘은 몸을 바짝 붙였다.

손끝에 벽처럼 단단하고 넓은 무언가가 닿았다.

그녀는 그곳을 향해 파고들었다.

"아…."

몸이 기분 좋게 데워지는 느낌.

무엇보다 귀에 거슬리는 일 없이 묵직하면서도 낮게 박동하는 소리가 심신을 안정시키는 것 같다.

꼼지락꼼지락.

한편,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다리도 따뜻한 곳을 찾아냈다.

손끝에 닿는 것보다 더 단단한 무언가에는 빈 공간이 있었다.

연하늘은 재빨리 그 공간 속으로 자신의 다리를 집어넣었다.

안타깝게도 공간이 넓지 않다 보니 두 다리가 들어갈 만큼 충분치 않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 대신, 차선책으로 남은 다리를 무언가의 위에 턱 하고 얹었다.

맨살의 면적이 많은 다리는 보다 직접적으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 너무 좋다.'

연하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는 이대로 무언가의 품에 안겨 잠을 청하기로 했다.

생각이 미친 것은 그때였다.

'…잠깐.'

무언가의 품에 안겼다고?

그 순간.

침잠하던 의식이 번쩍 떠졌다.

"…."

그녀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현실을 부정해 보려 한들, 눈앞에 있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새액새액.

귓가에 숨소리가 들리는 거리에서.

도견우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그가 잠이 든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자신은 도견우에게 안겨 있었다!

그녀는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가 자고 있어 상황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일까.

"…."

그러자니 동요가 가라앉았다.

연하늘은 조금 전과 달리, 차분히 도견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속눈썹이 참 길었다.

평소 옆에서 본 적은 있어도, 정면에서 이렇게 가까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얘는 진짜 피부가 좋네.'

잡티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톤이 밝은 얼굴.

화장을 잘 받게 생겼다.

이전부터 든 생각이지만, 피부는 어머님의 피부를 물려받은 듯했다.

'이런 얼굴로 썬탠을 하겠다니….'

좋은 피부를 태우겠다니 안타깝다.

5년이나 알고 지낸 소꿉친구지만 알다가도 모를 도견우였다.

이내 시선은 입술로 향했다.

'…예쁘다.'

얼굴 톤이 밝아서 그런 걸까?

입술이 유난히 붉다.

그 입술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의식이 빨려들 것만 같다.

연하늘은 무심결에 손가락을 뻗어 입술을 만지려….

"…."

"…."

그때, 도견우와 눈이 마주쳤다.

허공에서 어정쩡하게 손을 멈춘 연하늘은 사고가 마비되었다.

직후.

"꺄아아악!"

"뭐, 뭐야!? 왜 이래!?"

연하늘은 새된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란 토끼 귀가 삐죽 솟고,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그러다 보니 얼떨결에 토끼 귀가 도견우를 찰싹 때리게 됐다.

그런 한편.

"하늘아, 그쪽은! 아…."

쿵!

도견우의 가슴팍을 밀치고 굴러간 연하늘이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아야야…."

"야, 괜찮아?"

"나, 난 괜찮아…."

연하늘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떨어져서 아픈 것보다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도견우를 올려다볼 용기가 나지 않은 탓이다.

* * *

간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을 정도다.

연하늘과 같이 자느라고 긴장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학원도시 특유의 환경 때문이었다.

'시끄러워서 잘 수가 있었어야지.'

사람이 많은 곳에는 자연히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마나가 주위를 떠돌기 마련이다.

의지, 감정, 생각, 잔념 등이 깃든 마나는 그런 식으로 주위를 떠돌다 대기에 녹아 있는, 어떤 의사도 없는 순수한 마나와 섞이며 차원에 균열을 일으킨다.

몬스터는 그 균열에서 출몰한다.

그런데 이곳은 학원도시였다.

마나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학원도시.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흘리게 되는 마나는 일반인이 흘리는 마나보다 더 자극적이다.

그 잔류 마나가 그렇지 않더라도 차원이 불안정한 학원도시의 대기 마나를 건드리고 있는데, 어제부터 시험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입국하기 시작한 실정이었다.

그들의 마나까지 더해지게 되면서 균열이 출몰하는 빈도와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키에에엑!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이다.

밤중에 출몰한 몬스터들의 기척과 놈들이 지르는 소리가 워낙 신경을 쓰이게 해서.

'그래도 자다가 일어나서 놈들을 토벌하러 갈 일은 없었으니 다행이지….'

그런 일이 워낙 잦다 보니 학원도시에는 비상사태에 대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는 웬만한 사태에 대비할 수 있게 보호 마법이 걸려 있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몬스터의 습격을 받을 걱정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밖이 소란스러웠을 뿐이지.

'앞으로 이 도시에 살게 되면 매일 몬스터의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 건가….'

금강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부디 방음이 잘되기를 바랐다.

한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은 나는 수험표를 달았다.

그러고는 연하늘을 불렀다.

"하늘아, 이제 나와도 돼. 나는 옷 다 갈아입었으니까."

"으, 응…."

이내 먼저 옷을 갈아입은 연하늘이 욕실에서 어색하게 걸어 나왔다.

침대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는 여전히 창피해하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

"10초 줄 테니까 기분 전환해."

"…알았어. 10초 좀 세 줄래?"

"10, 9, 8…."

"후우…."

"…3, 2, 1. 끝."

"뭐야, 왜 중간은 안 세?"

"너 보니까 안 세도 될 것 같아서.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

나도 아침에 일어난 일로 놀랐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로 했다.

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야만, 연하늘도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사소한 해프닝으로 여기기로 했다.

아주 사소한 해프닝….

나는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연하늘과 아침을 먹으러 갔다.

그러면서 일정을 논의하기로 했다.

"같은 문제를 푸는 것도 아니니까 따로 행동하기로 하자."

"시간적으로는 그게 낫긴 한데… 그래도 저녁은 같이 먹는 건 어때? 가능하면 점심도."

"나쁘지 않네. 그럼 그렇게 할까? 점심은 그때 상황 보고 결정하고, 저녁은 같이 먹기로 하자."

"응, 좋아."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나하고 연하늘은 문제를 확인하러 수험표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어제 풀었던 문제와 달리 허공에 웬 점들이 떠올랐다.

'이 점들로 뭘 하란 거지?'

맞은편에 앉은 그녀의 수험표에도 비슷한 점들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검은 점의 개수나 분포한 형태가 달랐다.

그녀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견우야, 마나적 시야로 봐 봐."

"어제랑 비슷한 문제란 거구나."

그 말에 감을 잡고 체내 마나를 발현한 나는 다시금 점들을 살펴보았다.

그제야 하얀 점으로 위장하고 있던 검은 점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

[⠫⠨⠶⠀⠈⠍⠗⠚⠒⠀⠘⠥⠠⠹⠺⠀⠠⠞⠐⠕⠃⠨⠲]

[⠘⠯⠘⠡⠚⠉⠵⠀⠻⠈⠧⠶⠺⠀⠘⠂⠣⠐⠗⠲]

"이건…. 하늘아, 종이 있어?"

"여기 있어."

게임에서는 플레이어들이 자신이 게임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실감을 느낄 수 있게, 여러 문자를 이용해 암호 문제를 풀게 하고는 했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곧장 점들을 종이에 옮겨 적었다.

'…점자야.'

틀림없었다.

그때쯤 그녀도 나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듯했다.

"하늘아, 인터넷으로 사전…."

"지금 점자 사전을 찾는 중이야. 아, 찾았다. 링크 보내 줄게."

"고마워."

사전을 찾을 수고를 덜었다.

나는 연하늘이 보내 준 링크를 통해 점자를 해석했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았다.

[영웅들의 발자취가 모이는 곳]

[가장 귀한 보석의 설립자]

[불변하는 영광의 발아래]

굉장히 추상적인 문구였다.

해석한다고 다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문장이 익숙했다.

『브레이브 하츠』의 고인물이었던 내가 그 문장이 가리키는 바를 모를 리 없었다.

나는 게임에서 짤막하게 지나갔던 언급을 떠올렸다.

「명예의 전당 큐레이터」

―학생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영웅들의 발자취가 모이는 곳, 명예의 전당에.

게임에서 플레이 기록을 돌아보는 콘텐츠로 통했던 명예의 전당.

당연히 이 세상에도 명예의 전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얼른 연하늘에게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이건 특정 장소로 가서 문제를 풀라고 말하는 것 같아."

"특정 장소? 해석한 거야?"

"일단 첫 번째 문장만. 나머지도 얼추 유추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해. 첫 번째와 연관 지으면…."

"혹시 내 것도 봐 줄 수 있어? 나는 원석들의 가장 오래된 사교장인데."

"원석은 금강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말하는 걸 거야. 그리고 뒷부분은… 아마도 금강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브릴리언트 카페일 거고."

그 후,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와 연하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부터 따로 움직여야 했다.

"나는 명예의 전당으로 가 볼게."

"응, 나도 가 볼게. 이따 연락해."

* * *

제23구에 위치한 명예의 전당.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 생각이 맞을 거야.'

가장 귀한 보석이란 주관적이다.

그러나 출제자의 의도를 생각하면 가장 귀한 보석이란 다이아몬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다이아몬드는 곧 금강 아카데미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따라서 가장 귀한 보석의 설립자란 금강 아카데미의 설립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첫 번째, 두 번째 문장을 연결하면 명예의 전당에서 금강 아카데미의 설립자를 찾으란 뜻이 된다.

'여기 어디인데….'

당연히 설립자는 죽어서 없다.

이 경우에는 명예의 전당에 있는 설립자의 흔적을 찾으란 뜻이리라.

한편으로 그 흔적에 대한 단서가 세 번째 문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불변하는 영광의 발아래라….'

명예의 전당에서 영광은 업적이다.

혹은 업적을 세운 그 사람 자체다.

즉, 영광은 설립자를 가리킨다.

그 설립자가 불변한다는 뜻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흔적을 찾으란 거겠지.'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많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고 마는 그림이나 사진은 아닐 것이다.

기념비나 동상 등일 확률이 높다.

이때, '발아래'에 주목해야 한다.

'발아래를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 얼굴만 나온 기념비일 리가 없어.'

같은 이치로 다리 윗부분만 나오는 두상, 흉상 등도 제외해야 한다.

발아래까지 다 나오기 위해서는 전신상밖에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곳에 설립자의 전신상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건가."

나는 그 전신상 앞에 섰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여기 어디에 문제와 관련된 단서가 있으리라.

그러던 그때.

'…스티커?'

전신상의 발아래로 시선이 갔다.

누가 장난을 친 것인지, 발아래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스티커에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아티펙트의 일종이다.

내가 아티펙트를 활성화하기 위해 체내 마나를 불어넣자, 스티커에 문구가 출력되었다.

[수험 번호 확인 중….]

[수험 번호 확인.]

[금강 1532]

[Clear!]

[Color: White(2)]

"…이런 거였구만."

암호를 풀어 정해진 장소를 찾아가 수험표를 인증하는 문제였나 보다.

따로 풀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수험표로 문제를 띄워 보기로 했다.

내가 지금 문제를 푼 게 맞는다면, 새로운 문제가 나타날 것이다.

'…문제가 달라졌어.'

아까와 다른 문제였다.

세 번째 문제가 나타났다.

수험표에 두 번째 문제를 푼 것이 제대로 반영된 셈이다.

그렇다면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볼일을 마친 나는 새로운 문제를 풀기 위해 움직이기로 했다.

"이건 이렇게 하면 되겠네."

세 번째 문제는 근력을 강화하는 스트렝스란 마법 술식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네 번째 문제는 술식에서 오류를 찾아내고, 정확하게 발동할 수 있게 수정하는 것이었다.

다섯 번째 문제는 좌표 문제였다.

다만 두 번째 문제와 달리, 찾아간 좌표에서는 신체 능력을 요구하는 과제를 추가로 수행해야 했다.

그렇게 다섯 번째까지 끝냈을 때.

[수험 번호 확인 중….]

[수험 번호 확인.]

[금강 1532]

[Clear!]

[Color: White(4) → Gray(5)]

수험표가 회색으로 변했다.

가산점을 획득한 것이다.

'수험표를 검은색으로 물들이려면 25개는 더 풀어야 하는 건가.'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쓴웃음을 지은 나는 계속 문제를 풀어 나가기로 했다.

한편 이때를 기점으로.

'…따라붙는 수가 늘었네.'

내 뒤를 밟는 놈들이 생겨났다.

하이에나 같은 놈들.

놈들 눈에는 수험표를 지닌 내가 먹음직스러운 토끼로 보인 듯했다.

내 수험표의 색이 변화해 갈수록, 또 날이 갈수록 나를 노리는 시선이 늘어나고 있었다.

"…."

마침 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