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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도 아주 간혹 몬스터들이 전투 도중에 도망치기도 했었는데, 게임이 현실로 반영된 이곳에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우끼?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나무를 타는 것에 능하고, 재빠른 놈들을 모두 쫓기란 쉽지 않다.

지금의 내게는 무리였다.

그래서 나는 공격을 피하는 틈틈이 반격을 가했다.

깡!

느낄 수 있다면, 칠 수 있다.

나는 회피 본능으로 감지한 즉시 검집으로 돌을 쳐 냈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몇 번 쳐 내니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나는 체내 마나를 검집에 씌우고, 돌덩이를 하늘 높이 쳐올렸다.

──!

날아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덩이가 파공음을 내며 돌아갔다.

우끼!?

퍽!

그 위치에 파킷 에이프가 있었다.

놈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그대로 돌덩이를 맞고, 나무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콰직!

끼익….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쉽게도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면으로 추락한 놈은 이제 언제든 잡을 수 있으니까.

'오호라, 이렇게 하는 건가?'

나는 조금 전의 감각을 상기하며, 다시금 돌멩이를 쳐 냈다.

끼끼끽!?

…콰직!

이번에도 명중했다.

또다시 한 놈이 바닥에 떨어졌다.

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즉사해 버린 모양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홈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나는 1마리도 아닌 7마리나 나무에서 떨어지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됐느냐면.

끼… 끼잉….

"그러게 변화구도 배웠어야지."

나는 놈들이 던져 대던 돌덩이처럼 지면에 파묻혀 있는 놈들의 숨통을 끊어 주었다.

놈들은 저항도 못 한 채로, 내 검이 심장부를 찌르는 것을 봐야 했다.

'어렵지 않게 처리하기는 했는데… 그만큼 마나도 좀 소모했네.'

마석을 꺼낼 시간은 없다.

주위에 숨어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헌터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리라.

나는 체내 마나를 회복하기 위해 대기에 녹아 있는 마나를 흡수했다.

그러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02:26:11

이제 대략 34분이 지났다.

수령의 호수로 가려면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감안했을 때, 체력 소모는 이보다 더 심하리라.

'이 상태로 놈을 죽일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다.

수령이 약체화되었다고 하더라도, 3랭크를 무시할 수는 없다.

'최대한 체력과 마나를 온존해서 수령의 호수에 도달해야 하는데… 어라?'

그때, 놈의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데굴데굴 굴러 나오는 게 보였다.

사과처럼 생긴, 빨간 열매였다.

"이건…."

나는, 이 과일을 알고 있었다.

가문에서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전생에 이 게임의 모든 엔딩을 본 내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활력의 열매]

◆ 소모품 분류

―열매

◆ 상세 설명

―파킷 에이프가 즐겨 먹는 열매로, 포션의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 효과

―복용 시, Hp를 50 회복한다.

내가 아는 그 열매가 맞았다.

'그러고 보니 게임에서는 이놈들이 출몰하는 곳 근처에서 높은 확률로 이 과일을 찾을 수 있었지.'

이 열매만 있는 게 아니다.

파란 열매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잠깐 파밍 좀 해야겠네."

나는 행동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고는 파킷 에이프의 배를 뒤져 다른 열매는 없는지 찾았다.

그렇게 열매를 모은 뒤에는….

"마석을 빼내지만 않으면 사체는 소멸하지 않을 테니… 좀 그렇지만 이렇게 해야겠네."

서걱.

나는 놈들의 주머니를 뜯어냈다.

놈들의 주머니는 신축성이 좋아서 열매를 담기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몬스터도 생명인데… 미안하네."

양심에 찔리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나부터 잘되고 봐야지.

나는 놈들의 사체를 한곳에 모아, 1마리씩 가슴 부위에다 커다랗게 피로 쓴 글자를 남겼다.

[마] [석] [꺼] [내] [지] [마] [요]

"이렇게 하면 알아듣겠지."

도중에 헌터들이 마석을 꺼내 가면 내가 얻은 주머니는 소멸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안에 넣어 둔 과일이 와르르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조치를 취했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몬스터는 죽고 전리품만 남기고 사라져서 이렇게 주머니를 이용할 생각도 못 했겠지.'

물론 파킷 에이프의 전리품 중에 놈의 주머니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무조건 주머니가 나오리라 단정할 수는 없었으니 이런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너희 주머니, 잘 쓸게."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사체들.

어느 사체는 눈을 반쯤 뜨고 있고, 어느 사체는 눈을 감고 있었으며, 어느 사체는 머리가 뭉개져 있었다.

나는 그런 놈들의 명복을 빌어 주고 자리를 떠났다.

'수령의 호수로 향하면서 도중에 눈에 들어오는 열매를 찾는 거야.'

아니면 원숭이들을 찾아도 되고.

활력의 열매를 베어 문 나는 아예 나뭇가지를 뛰어 움직이기로 했다.

* * *

그 시각, 절벽 위.

사람들은 사용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느긋하게 평가전을 보고 있었다.

밀림에서 생사를 건 전투를 벌이는 아이들과 대비되는 광경이었다.

물론 평가전에 참가하는 자녀를 둔 부모들의 경우는 달랐다.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떡해…. 죽은 거 아니에요?"

"직전에 체내 마나로 잘 방어했어. 머리가 조금 어지럽기는 하겠지만 죽은 건 아니야."

"몬스터들을 약화시켰다고 해도, 에이프들이 무리를 짓고서 다니면 소용없는 거 아니에요?"

평가전이 시작되고 20분이 지났다.

그때쯤 평가전에 참가한 대다수가 밀림 초입부에 들어서고 몬스터들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나무를 타고 오가며 공격해 대는 1랭크 몬스터, 파킷 에이프.

놈들에게 기습을 받은 참가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미 실전을 치르고, 수왕류에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그들이라도 황색 게이트의 시련 앞에서는 결국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두각을 드러내는 참가자들도 몇몇 존재하기는 했다.

"불필요한 동작이 많기는 하다만 나름 현명하게 대처하는구나."

"놈들의 공격이 아무리 빠르더라도 결국 몸을 보호할 엄폐물이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 법이죠."

신검 도가의 수재, 도승우.

그는 방패를 들어서 공격을 막고, 주변에 있는 바위나 나무에 숨어서 몸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놈들의 공격이 멈춘 순간에 역습을 가했다.

"벽면 보행이 능숙하구나."

"제 아들이 배우는 게 빠르더군요. 얼마 전에 가르친 겁니다."

신검 도가의 가주, 도예익.

도예익은 그의 실력을 칭찬했다.

그러자 도승우의 아버지 도범준은 흡족한 얼굴로 너스레를 떨어 댔다.

"그러니 승우가 대련에서 진 것은 상대가 견우라서 방심…."

그가 그렇게 한창 주변 사람들에게 제 아들을 자랑하려던 때였다.

"오."

사람들의 시선이 도시은이 비치는 화면으로 이동했다.

빛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아니, 푸른 전격이었다.

벽뢰.

<수왕류 공격식 제5형>

벼락꽃, 도시은.

그녀가 발도 자세를 취하는 한편, 나무에서 날뛰는 파킷 에이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직후, 도시은이 빛줄기만 남기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우끼!?

도승우의 보법과 비교할 수 없는 유려한 보법을 펼치며.

도시은이 빛줄기로 잔흔을 남기고 순식간에 나무를 오른 것이다.

그리고.

사자 맹공

4연격.

그녀가 번개처럼 굽이치듯 움직여 파킷 에이프들을 양단했다.

사람들은 푸른 전격을 몸에 두른 그녀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벽뢰구나! 틀림없이 벽뢰야."

도예익도 감탄을 금하지 않았다.

아직 빛줄기가 굵지 않다고 하나, 도시은은 벽뢰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길지 않았다.

"승우도 그렇고, 시은이도 그렇고 실력이 부쩍 늘었구나."

"다 가주님 덕분입니다."

"시은이가 들으면 좋아하겠군요."

"하지만 걱정이 되기도 하는구나. 이제 밀림 초입부이거늘…."

"…."

도예익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손주들의 실력에 기뻐하면서,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놈들을 상대로 시간을 지체하고, 체력과 마나를 소모해서는 나중에 수령과 싸우기 힘들 거다. 애들이 과연 체력 배분도 생각하고 있을지 걱정이 되는구나."

"승우라면… 잘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만…."

도예익은 말꼬리를 흐렸다.

파킷 에이프는 밀림에서 출몰하는 몬스터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 더욱 상대하기 까다롭고, 강한 몬스터가 등장할 것이다.

그런데 손주들은 그것을 고려하고 체력 배분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스크린에 비치는 손주들에게 직접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 그때가 되면 알겠지.'

시간이 지나면 답이 나오리라.

도예익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다른 손주들의 실력을 보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깡!

"…무슨 소리냐."

마치 야구 배팅을 하는 듯한 소리.

도예익은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러 화면을 찾았다.

도견우가 나오는 화면이었다.

깡!

…콰직!

"…."

도견우가 파킷 에이프들이 던지는 돌덩이를 검집으로 쳐 내고 있었다.

그렇게 쳐 낸 돌덩이는 정확하게도 나무 위에 있던 놈들을 요격했다.

놈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쟤가 지금… 뭘 하는 것이냐?"

"…."

도예익은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홈런.]

도견우의 시점으로 보이는 화면에 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가문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한 번이야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런데 도견우는 지금 그 우연을 몇 번이고 실현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겹치는 우연이 있다면, 그건 의심할 여지 없는 필연이었다.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나무에 있는 놈들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허…."

거기까지 상황을 받아들이고.

도예익은 도견우의 기행을 보고는 탄식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의미의 탄식이었다.

"감이 좋은 놈이구나."

주위가 어둡고, 공격이 워낙 빨라 잘 보이지도 않을 테건만.

도견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것처럼 공격을 피하고, 정확히 놈들을 향해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도예익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가, 가주님, 지금 승우가 새로운 몬스터와 전…."

"우선 견우부터 보자꾸나."

"…."

"승우야 안 봐도 잘하겠지."

도예익은 도범준의 말을 자르고는 계속해서 도견우를 바라보았다.

그것으로 참관석에 있던 사람들은 가주의 관심이 누구에게 향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도시은도, 도승우도 아니었다.

도견우였다.

"너희도 같이 보자꾸나. 저 아이가 어떤 행동을 보여 줄지."

"…."

도예익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때쯤 도견우가 파킷 에이프들의 주머니를 떼어 내는 기행을 선보이고 있었다.

"제가 봤을 때, 견우는 평가전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지금 저러고 있을 때입니까?"

"범준아."

"네, 가주님!"

"네 눈에는 지금 저 아이의 의도가 보이지 않는 것이냐."

"…."

"견우가 손에 쥔 열매를 보거라."

붉은 열매를 베어 무는 도견우.

도범준은 그 모습에 기가 차서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그는 도예익이 도견우에게 관심을 보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도견우가 멍청했으니까.

"무슨 열매인지도 모르고 먹다니, 조심성이 없는 아이로군요. 감정도 제대로 하지 않은 물건에 손대는 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나…. 대체 상준이가 교육을 어떻게…."

"네 눈은 장식이냐."

"…."

"그게 아니면 머리가 없는 것이냐. 서브 로드라는 놈이 견우가 먹은 게 뭔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냐?"

"저건…."

도예익의 꾸중을 받고 도범준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그는 도견우가 먹고 있는 열매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활력의 열매…."

"열매를 먹는 데 망설임이 없던데, 상준이가 잘 가르쳤나 보구나."

"제가 가르친 게 아니라 견우가…."

"겸손 떨 필요 없다. 네가 아니면 누가 가르쳤겠느냐."

"…."

"그리고 네가 알려 준 건 아무래도 활력의 열매만이 아니었나 보구나."

얼굴이 구겨진 도범준.

떨떠름한 얼굴을 한 도상준.

도예익은 그들의 반응을 무시하며, 입가를 끌어 올렸다.

[찾았다.]

"기력의 열매도 찾았군."

"…."

화면에서는 도견우가 나무에 걸린 푸른 열매를 따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그랬듯.

도견우는 확인 과정도 거치지 않고 대뜸 열매를 입에 가져다 댔다.

"파킷 에이프들이 있는 것을 보고 단번에 열매의 존재를 떠올린 건가? 헌터들도 잘 생각하지 못하는 건데, 제법 상황에 잘 대응하는구나."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22)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기력의 열매]

◆ 소모품 분류

―열매

◆ 상세 설명

―파킷 에이프가 즐겨 먹는 열매로, 포션의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 효과

―복용 시, Mp를 50 회복한다.

파킷 에이프들이 출몰하는 곳에서 열매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활력의 열매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색이 다른, 푸른 열매.

나는 나무에 매달린 열매를 땄다.

아삭.

기력의 열매를 베어 물자, 안에서 달콤한 과즙이 흘러나왔다.

'활력의 열매는 식감이 청량했는데, 이건 진득한 편이네.'

꼭 달콤한 해열제를 맛보는 기분.

캐릭터 슬롯에서 조작하는 것으로 해당 캐릭터에게 열매를 쓸 수 있는 게임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과즙을 넘긴 나는 마나가 회복되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호수로 향하면 되겠어.'

손가락에 묻은 과즙을 핥으며.

나는 근처에 보이는 열매를 따서 주머니에 채워 넣었다.

이 정도라면 체력과 마나 소모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탁!

나는 그대로 나뭇가지 끝을 달려, 바로 앞에 있는 나무의 가지 위로 뛰어올랐다.

그런 식으로 나무 사이를 뛰면서 호수로 가는 시간을 줄이려 했다.

'열매를 찾느라 시간을 소모했어. 이렇게라도 그 시간을 만회해야 해.'

나무 사이를 뛰어야만 하는 만큼 마나 소모를 무시할 수 없긴 했다.

그때마다 나는 기력의 열매를 먹어 체내 마나를 충당했다.

휙!

파직!

이따금 숨어 있던 파킷 에이프들이 내가 점프한 순간을 노려 돌덩이를 던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깡!

…끼엑!?

회피 본능이 발동했으니까.

공중에서 몸을 비튼 나는 검집으로 놈이 던진 돌덩이를 돌려주었다.

'저놈들을 쫓을 필요는 없어.'

뒤돌아보지 않아도 결과는 명중.

목표로 하던 나뭇가지보다도 한참 아래에 있는 나뭇가지를 밟은 나는 돌덩이가 날아온 방향으로는 제대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맞았으면 된 거다.

어차피 이 게이트의 공략 조건은 모든 몬스터의 토벌이 아닌, 단순히 수령만 토벌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굳이 죽이러 가는 것은 시간과 힘만 낭비할 뿐이다.

탁!

나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윽고 밀림의 생태가 변했다.

'나무가 낮아졌어. 잎은 넓어졌고. 바닥도 질척거리는 것 같고.'

게이트 안의 세계는 극단적으로는 열대와 냉대가 공존하기도 할 만큼 일반 상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갑자기 주위 환경이 변하는 것도 드물지 않았다.

'게임에서는 환경이 바뀌게 되면 출몰하는 몬스터가 달라지는데….'

나는 기척을 죽이고 나아갔다.

파킷 에이프가 아닌 다른 몬스터와 맞닥뜨릴 가능성이 큰 만큼, 주위에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케로케로.

나는 몬스터들을 발견했다.

마치 노란 모자를 쓴 것처럼 생긴 두꺼비들이 질퍼덕거리는 땅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놈들도 이 게이트에 있던 건가.'

나는 전생의 기억으로 발아래 있는 놈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머드 케로(Mud Kero).

습기가 찬 환경에서는 모든 속도가 한 단계 증가하는, 1랭크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는 몬스터였다.

'수령의 호수로 향하려면 저놈들을 지나치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그런데 머드 케로의 성가신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놈들은 입안에 있는 점액을 뱉어 원거리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데다, 공격 명중률이 높았다.

놈의 점액에 맞았다간 일정 확률로 마비 상태에 걸리기도 했다.

상당히 성가신 놈들이었다.

'피하는 거라면 자신 있기는 해도, 문제는 놈들의 서식지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는 건데….'

놈들의 공격이 강하지 않더라도, 마비 상태는 골치 아프다.

다행히 방법이 있기는 했다.

'놈들의 서식지를 이동하는 틈틈이 해독제를 찾아야겠네.'

머드 케로가 주로 서식지로 삼는 진흙탕 일대에서는 놈들의 기운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는 꽃이 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하얀 꽃.

그 꽃의 뿌리는 마비 상태를 푸는 해독 작용을 했다.

이에 나는 그 꽃을 찾는 것으로 행동 방침을 내렸다.

이제부터 그 꽃을 찾으면서 이동할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케로케로.

"…."

기척을 느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넓적한 나뭇잎 아래로 몸을 숨긴, 나무 기둥에 착 붙어 볼을 부풀리는 머드 케로가 있었다.

[몬스터를 조우했습니다.]

[머드 케로(Rank. 01) x 1]

양서류 특유의 눈이 나를 본다.

"시바."

그러고 보니 머드 케로는 설정상 밀림의 환경에서 자신을 숨기는 데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게임에서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미처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 순간, 전투가 벌어졌다.

아래에 있던 놈들도 반응했다.

[몬스터를 조우했습니다.]

[머드 케로(Rank. 01) x 4]

* * *

"…젠장."

전투는 쉽지 않았다.

두 놈은 내 움직임을 봉하기 위해 끊임없이 점액을 발사했고, 한 놈은 양서류 주제에 머리도 좋아서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놈은 긴 혀로 나를 견제하려 들고는 했다.

'이걸 애들 보고 하라고? 난이도가 너무 높은 것 아니야?'

중학생이 된 사람들이면 모를까, 아직 초등학생에 불과한 나한테는 꽤 어려운 평가전이었다.

'아니면 내가 운이 나쁜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머드 케로는 무리를 짓지 않고서 단독으로 행동하는 몬스터였다.

그런데 나는 운이 나쁘게도 하필 단독으로 행동하던 놈들을 5마리나 조우하고 만 것이다.

'행운이 낮아서 그런가. 게임에서 행운은 크리티컬 확률하고 회피율, 드롭율 등에 영향을 줬었는데….'

어쩌면 게임이 현실이 된 세상에서 행운 수치는 다른 부분에도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행운을 올릴 순 없고….'

나는 혀를 찼다.

행운 수치는 올리기도 쉽지 않고, 회피 본능이란 특성을 가지고 있는 내게는 중요도가 떨어졌다.

체력, 민첩, 근력, 내구, 마력.

나는 행운 수치는 우선 순위에서 마지막으로 관심을 두고 있었다.

여하튼 전투는 어찌어찌 끝냈다.

"저것들이 까불고 있어."

케로케로….

게임에서는 불가능한 플레이였다.

나는 놈들의 연계가 생각보다 마냥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놈들을 교란했다.

결과, 놈들은 동족의 공격에 당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고 있으면 사이좋아지겠네."

나는 서로 혀가 꼬인 놈들을 보고 키득거렸다.

놈들은 혀를 풀지 못하고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 인증샷 좀 찍을게."

케로케로….

나는 그런 놈들을 내버려 뒀다.

저대로 혀를 잘라 버리면, 놈들은 출혈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 싸움을 걸어올 것이다.

귀찮은 일은 사양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사진을 찍고 나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이내 찾고 있던 꽃을 발견했다.

"…찾았다."

진흙 속에서 자라고 있는 하얀 꽃.

꽃의 정보를 확인한 나는 조심스레 뿌리를 캐냈다.

그러고는 대충 뿌리를 닦고 꿀꺽 삼켰다.

"쓰네…."

[진흙 영초 뿌리를 복용했습니다.]

[30분 동안 마비 저항력이 11% 상승합니다.]

[진흙 영초를 중복으로 복용할 시, 마비 저항력을 최대 15%까지 올릴 수 있습니다.]

꽃의 상태에 따라 마비 저항력이 상승하는 폭이 각기 달랐다.

나는 다른 진흙 영초도 복용해서는 마저 마비 저항력을 올렸다.

"이 정도면 되겠네."

마비 저항력을 15%까지 올렸다면 머드 케로의 마비에 걸리지 않는다.

이후로 나는 진흙 영초를 찾아 가며 밀림을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응?"

"모, 몸만 제대로 움직였다면…."

한창 앞으로 나아가던 중.

저 아래로 사람이 1명 보였다.

"…큭!"

그 사람은 검붉은 모자를 쓴 듯한 머드 케로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저건….'

라들 케로(Ruddle Kero).

2랭크 몬스터였다.

게임에서는 캐릭터가 주로 다루는 능력치가 50은 넘어야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던 수준.

'누군지는 몰라도, 고전할 만하네.'

사전에 할아버지가 설명한 것처럼.

게이트에 있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약체화되어 있었다.

라들 케로도 그런 듯싶었다.

겉보기에는 땀처럼 보일지 모르나, 물기가 번들거리는 피부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군데군데 칼에 깊이 베인 상처가 눈에 띄기도 했다.

놈은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흠…."

그렇다고 하나 놈은 2랭크였다.

비록 놈이 약체화되었다고 해도, 그 전투 센스는 무시할 수 없었다.

'저쪽은 마비에 걸렸나 보네.'

한편, 내게서 등을 돌린 저 친척은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건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굳이 내가 도와주지 않더라도 필시 근처에서 보고 있을 헌터들이 적절한 때에 도와주러 올 것이다.

"음…."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기는 그랬다.

'어쩔 수 없네.'

나는 누군지도 모를 친척을 돕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 오지 마!"

라들 케로의 신경은 저 친척에게 쏠려 있었다.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그 틈을 타 놈에게 접근해, 단숨에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후우…."

검 끝에 마나를 모으며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눈알을 굴려 내가 서 있는 위치와 라들 케로의 위치를 파악하는 한편, 그곳으로 가기 위한 진로를 찾았다.

나무 몇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저 나무 기둥을 밟고 내려간다면 노리는 위치로 떨어질 수 있으리라.

<수왕류 공격식 제7형>

보법을 펼친다.

발바닥에 모은 마나를 폭발시켜, 조금 전에 점 찍은 나무 기둥을 밟아 지면으로 떨어진다.

아직 놈은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사자 고락(獅子 高落)

떨어지는 높이에 비례해서 그만큼 공력이 올라가는 공격식.

검 끝에 모인 마나가 반응한다.

나선형으로 회전한 마나가 급격히 세를 부풀리며 나를 감싼다.

키이이익!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사자가 포효하는 것처럼 흉흉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때쯤.

…케로?

[몬스터를 조우했습니다.]

[라들 케로(Rank. 02) x 1]

놈도 그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놈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나는 바람을 찢어발길 듯한 검격을 놈의 정수리에 내리꽂았다.

──!

검과 나를 감싸던 마나가 어느새 놈을 뒤덮었다.

마나의 폭풍.

사자의 발톱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폭풍이 놈을 휩쓴다.

제일 먼저 정수리가 터져 나가며, 놈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갈기갈기 찢어진다.

그것으로.

"휴…."

"너, 넌…."

라들 케로가 절명했다.

방벽을 둘러 놈의 살점과 혈액이 몸에 튀는 상황을 배제해 버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잖은 마나를 소모했다.

아삭.

나는 기력의 열매를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제때 방벽을 펼치지 못해 꼴이 엉망이 된 친척을 돌아보았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이거 먹…."

"도견우…."

이왕 선행도 했겠다, 이참에 마비를 푸는 진흙 영초와 열매도 나눠 주려고 했는데.

"아, 씨."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고, 나는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너였냐?"

도승우였다.

나는 라들 케로의 눈알을 모자처럼 머리에 얹고 있는 놈을 보고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놈에게 주려던 주머니를 즉각 거두어들였다.

한편 놈도 잔뜩 얼굴을 구겼다.

"내가 언제 도와달라고 했지?"

"오지 말라면서 무서워 벌벌 떤 게 누구였는데, 그런 소리가 나온대?"

"…네가 오지 않았더라도 나 혼자 해치울 수 있었거든. 그런데 네가 치사하게 막타나 노려선…."

"아, 그래? 정말 미안하게 됐네."

내가 도승우를 구해 줬다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최악이었다.

그만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실수를 만회하고자, 나는 얼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너 뭐 하냐?"

"네 막타를 가져간 게 미안해서, 몬스터 좀 끌고 오려고."

"뭐?"

"내가 아까랑 거의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줄 테니까, 그때는 너 혼자 알아서 싸우도록 해."

"…."

"이번에는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갈 길이나 갈게."

"…농담하는 거지?"

"내가 왜 너한테 농담을 하겠어. 우리가 그런 사이도 아니고."

마침 저기에 머드 케로가 있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돌멩이를 주워, 놈을 향해 던졌다.

케로?

별다른 타격도 되지 않는 공격에.

머드 케로가 기우뚱 몸을 돌렸다.

놈이 우리를 발견했다.

[몬스터를 조우했습니다.]

[머드 케로(Rank. 01) x 1]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야! 야! 잠깐, 멈춰! 멈추라고!"

"멈추기는 뭘 멈춰? 저놈은 이미 널 인식했거든? 난 간다. 안녕!"

"야! 도견우우우!"

친척을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다.

그러니 몬스터의 도움을 빌린다.

이게 바로 차도살인이 아닐까.

'뭐, 저놈 실력에 죽을 리도 없고, 만약 위험해지면 헌터들이 나와서 도와주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돌아와! 이 새끼야아아아!"

저 뒤편에서 도승우가 목을 놓아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안타깝게도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잘 들리지도 않았다.

한편으로는 어리석기만 했다.

'저렇게 소리를 크게 지르면 어떡해. 이 근처에 있는 몬스터란 몬스터는 다 불러들이겠다는 건가?'

물론, 내가 알 바는 아니다.

지가 알아서 하라지.

오히려 나야 몬스터를 만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으니 좋은 일 아닌가.

나는 한 번도 뒤돌아보는 일 없이 자리를 떠났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23)

그 시각, 절벽 위.

가문의 사람들은 도승우를 남기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는 도견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야! 도견우우우!]

도승우가 절규하듯 외치는 소리가 실감 나게 들려오고 있었다.

다른 화면에서는 그가 울먹거리며 부르짖는 모습이 잡혔다.

[돌아와! 이 새끼야아아아!]

네가 이러면 안 된다는 듯이.

마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의 얼굴을 한 도승우.

그러면서도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듯했다.

[아니지? 장난이 지나친 거….]

그러나 도승우의 바람과 다르게.

그는 결국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도견우가 끌어들인 몬스터는 물론, 그가 외친 소리를 들은 몬스터들이 잇달아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케로?]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케로?]

[몸만 제대로 움직일 수 있었으면 너 같은 건… 제길!]

수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도승우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의 얼굴은 용맹한 사자가 아니라, 포식자를 앞에 둔 피식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쫓아오지 마!]

도승우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며 몬스터들로부터 도망친다.

아직 마비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모한 만큼, 나름 현명한 대처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스크린을 보던 사람들은 실소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자가 두꺼비에게 쫓기다니… 승우도 별거 아니었구만."

"잘 도망치네. 그래, 그렇게 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도망쳐라, 도망쳐라, 어서."

가문의 사람들이 조롱했다.

자신과 도승우의 체면이 상하는데 도범준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가주님! 도견우를 당장 잡아들여 벌을 내려야 합니다! 지금 저놈이 경쟁에 눈이 멀어 승우를 죽이려고 몬스터를 끌어들인 것을 보십시오! 우리 가문이 경쟁을 장려한다 해도, 이건 정도를 벗어났습니다!"

"상준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는…."

얼굴을 붉히며 탄원하는 도범준.

도예익은 다만 허허 웃기만 했다. 그러고는 가족들과 평가전을 보던 도상준에게 의견을 물었다.

'견우가 또….'

도상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제발 사고 좀 치지 말라고 그렇게나 일렀건만, 자신의 아들은 듣는 척만 하고 들어 먹지 않았다.

정말이지 괘씸한 아들이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듯, 도상준은 자신의 신세를 체념하고 도견우를 두둔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냐?"

"네. 경쟁전에서 저런 비슷한 일이 몇 번이고 일어났었는걸요. 그보다 더 심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요."

"흠, 그렇기는 하지."

"견우에게 정말 승우를 죽이려던 의도는 없었을 겁니다. 지금 저희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근처에 헌터들이 있을 거라 판단해 가볍게 장난을 친 거라고 봅니다."

"장난? 장나아안!? 도상준, 너…!"

"그리고 승우가 말하기도 했고요. 견우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혼자서도 라들 케로를 죽일 수 있었다고요. 명분은 승우가 먼저 준 겁니다."

"명분이라…."

재미있다는 듯.

도예익은 그 말을 나직이 읊조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상준이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고작 이런 일로 평가전을 중단하고, 지금까지 잘하고 있는 아이를 괜히 꾸짖을 수는 없지."

"견우가 들으면 좋아할 겁니다."

"감사드립니다, 가주님."

도예익이 도견우에게 손을 들었다.

그제야 도상준은 안도했다. 옆에서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불안해하던 아내, 한지애도 안심할 수 있었다.

"쟤가 정말…."

게이트에서 자생하는, 잘 모르는 열매와 꽃을 겁도 없이 먹지 않나.

몬스터들을 상대로 위험천만하게 전투를 벌이지 않나.

오직 도견우가 나오는 화면만 보는 그녀는 번번이 가슴을 졸여야 했다.

그러나 그녀도 얌전히 단념하고,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부모였다.

"다치지만 말렴, 다치지만."

"나도 저 열매 먹고 싶다…. 엄마, 이따 오빠한테 가면 나도 저 열매 먹어 볼 수 있겠지?"

그녀가 두 손을 모으며 빌었다.

그러면서 눈치도 없는 딸내미에게 꿀밤을 때려 주었다.

"그나저나 신기하구나."

한편, 도예익은 밀림을 나아가는 도견우를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그의 시선은 형형하게 빛났으며, 도견우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도예익은 조금 전, 도견우가 보인 검술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그는 도승우를 구하고자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찍는 공격식 제7형을 펼쳤다.

그때, 찰나에 지나지 않았으나.

―파직!

나선형으로 두른 바람 속에서.

도견우는 푸른 전류를 일으켰다.

그것은 분명….

'벽뢰였다.'

자신이 잘못 보았을 리 없다.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돌이키며.

도예익은 화면에 나오는 도견우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 * *

어느 순간, 나무들 사이의 간격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지면의 색과 특징도 달라졌다.

머드 케로들이 볼을 부풀리며 내는 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밀림이 끝나 가고 있어.'

나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머드 케로들의 서식지를 벗어나, 호수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기인가.'

거대한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밀림이 끝나는 지점에 자란 나무에 착지했다.

그때쯤 메시지가 떠올랐다.

[다음 공략 조건을 전달합니다.]

[호수에 있는 수령을 토벌하시오.]

목적지에는 제대로 도착한 듯했다.

'먼저 온 사람은… 5명인가.'

나는 빠르게 사람들의 수를 훑고, 전황을 확인했다.

그들은 수면에 뜬 발판을 밟거나, 아예 수면을 뛰어다니며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보아하니 수면 위에서 싸우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수면을 밟는 것만으로도 어려운데, 그 상태로 몬스터들과 싸워야 하니 고전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발판을 밟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자칫 무게중심을 잘못 두었다가는 발판과 함께 뒤집힐 수 있었다.

그나마 저들이 나이가 많은 편이라 저만한 실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시은이 누나도 저기 있네.'

도시은은 독보적이었다.

그녀는 발판을 이용하는 일 없이, 호수 위를 뛰어다니며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수왕류 공격식 제5형>

사자 맹공

일순 전격이 발생하고.

그녀가 물보라를 나부끼며 나아가 놈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키이익!

이목구비도 없이, 어린아이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몬스터들.

몸이 푸른 비늘로 뒤덮인 놈들이 도시은의 검에 베여 절명했다.

그 기세를 타서 도시은은 호수 중심부로 내달렸다.

키이이익!

그곳에 수령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신체가 비늘로 뒤덮인, 푸른 피부를 띄는 여성형 몬스터.

놈은 푸른 피를 뚝뚝 흘리는 한편, 왼팔과 꼬리가 잘려 있었다.

헌터들이 한 짓이리라.

척 보기에도 놈은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놈은 오른손에 쥔 창으로 도시은의 검을 어렵지 않게 쳐 냈다.

이에 그녀가 다시 공격을 가하려 걸음을 내디디려고 한 찰나.

샤아악!

"…!"

수령이 아가미가 있는 입을 찢어 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직후 수면이 거칠게 요동치고.

도시은이 질주하려던 방향에 돌연 새로운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수하 몬스터들을 부른 건가."

아니, 만들었다고 해야 하나.

게임에서 보스로 통하는 몬스터는 수하 몬스터들을 부를 수 있었다.

나는 미간을 모았다.

'수령이 많이 약해졌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어서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겠는데?'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수령에게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도시은도 모처럼 기회를 엿봤다가 수하 몬스터들이 새로 나타나면서 뒷걸음질을 치는 형국이었다.

그런 한편, 그녀나 다른 사람들의 상태가 짐작되기도 했다.

'…다들 지쳐 있어. 마비에 걸려서 움직이기 힘든 사람도 있어 보이고.'

당장 도시은만 해도 그랬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호수 외곽까지 거리를 물릴 필요가 없었다.

수하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틈틈이 수령에게 접근해 볼 만도 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뒤로 물러난 것은 힘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도시은이 조금 전에 보인 움직임으로 추측했을 때, 아무래도 그녀 역시 마비에 걸린 듯했다.

"음…."

과연 나 혼자서 수령과 수하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내 기프트로 놈들의 공격을 피하며 기회를 엿볼 수도 있겠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그 전에 내 체력과 마나가 바닥나 지쳐 쓰러질 확률이 높았다.

수면 보행을 펼치고 싸우는 것도 고려한다면 더더욱.

너무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저기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데…."

이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숨을 어느 정도 고르자마자 다시금 전투를 시작하는 도시은은 물론이고 다른 친척들과 협력해야 했다.

문제는 나보다 나이도 많은 데다, 콧대도 더럽게 높은 사람들이 잘도 협력하겠다는 것.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저것들을 어떻게 설득하지?"

주변에 몬스터의 기척도 없겠다, 나는 편안히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호수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지켜보며 머리를 굴렸다.

아삭.

그러면서 활력의 열매를 먹었다.

저들처럼 수령과 싸워야 하는 만큼 체력을 비축해 둘 필요가 있….

"아."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이렇게 고민할 필요 없이, 저들을 회유할 방법은 이미 손안에 있었다.

* * *

체내 마나로 신체 능력을 끌어올려 어느 정도 해독했다고 생각했더니, 아무래도 2랭크 몬스터 라들 케로의 마비 독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강했던 모양이다.

도시은은 이따금 검을 휘두를 때면 몸이 저릿해지는 감각을 느끼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른쪽 어깨, 왼쪽 다리. 이래선 무리 속으로 깊이 파고들 수 없어. 몸만 제대로 움직였다면….'

뜻대로 몸에 힘을 줄 수가 없었고, 마비가 일어난 마나 회로를 자극해 자칫 마나 폭주를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도시은은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고, 마비가 찾아오기 전에 뒤로 걸음을 물렸다.

키이익!

"…."

그로 인하여 기껏 뚫어 놓은 길도 수령의 수하들에게 막히고 말았다.

벌써 몇 번이고 일어난 양상에.

그녀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방법이 없는 걸까.'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친척들이 앞으로 나서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사이, 최대한 체력과 마나를 회복하려고 했다.

'…이제 들어가야 해.'

그러나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다른 친척들의 상태는 도시은보다 더 좋지 않았다.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한 그녀는 전세가 기우는 것을 보고는 전투로 돌아가기로 했다.

첨벙!

수면을 박차자, 물보라가 인다.

도시은이 앞으로 나선 것을 깨달은 친척들이 길을 만들어 주며 비킨다.

그녀는 그들이 만들어 준 길을 뛰어 수령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수령의 수하들이 중간부터 버티고 있을 따름이었다.

<수왕류 공격식 제6형>

도시은의 푸른 눈은 간격을 좁히며 자신을 막아서려는 놈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왼발을 앞으로 쭉 내디뎌, 수면 위에서 브레이크를 밟아 급히 몸을 틀었다.

촤악!

그녀가 일으킨 마찰로 인해, 순간 물결이 위로 솟구쳤다.

후두둑 떨어지는 물결이 앞에 있는 몬스터의 시야를 차단했다.

바로 그때, 그녀의 검이 번쩍였다.

사자 난무(獅子 亂舞)

물결을 맞으며 푸른 빛으로 빛나는 칼날이 정확히 놈의 목을 베었다.

휙!

놈의 목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도시은은 목이 사라지고 난 나머지 균형을 잃고, 수면 위로 무너지는 놈의 사체를 지나쳤다.

그리고 다른 놈들에게 나아갔다.

휘익!

서걱!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난무.

다만 눈앞에 있는 적을 상대하러, 상황에 맞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몸을 회전시켜 마나를 씌운 칼날에 공격력을 증가시키는 검술.

수면 위에서 추는 도시은의 춤은 일격에 놈들의 숨을 끊어 냈다.

"후우…."

그러고 나서 다시 숨을 가다듬고,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뚫으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키이익!

"…윽!"

친척들에게 후방을 맡겼건만.

어느새 친척들은 놈들에게 밀려나 호수 외곽까지 멀어져 있었다.

도시은은 혀를 찼다.

이대로 놈들에게 후방을 내준다면, 자신은 배후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수령을 상대해야 했다.

부담이 가중된다.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왕류 공격식 제3형>

수령이 바로 근처에 있었으나.

도시은은 아쉽더라도 길을 돌아가 후방을 정리하기로 했다.

사자 철편

그녀의 검이 몬스터를 후려쳤다.

철퇴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놈이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얼굴로 수면에 슬라이딩하며 멀리 날아갔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즉사였다.

그녀는 그대로 다른 놈들도 죽이려 보법을 펼쳤다.

그런데 검을 올려치려던 찰나.

'몸이…!'

오른쪽 어깨가 삐걱거리면서 돌연 허공에서 동작이 멈췄다.

마비가 일어난 것이다.

그녀에게는 불운이었을 그 상황은 역으로 놈들에게 행운이 되었다.

키이익!

놈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가까스로 마비에서 헤어난 그녀는 얼른 놈들에게 대응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조금 늦었다.

'1마리는 상대할 수 있어. 하지만 나머지 2마리는….'

자신이 한 놈을 상대하는 사이, 필시 다른 두 놈이 그 틈을 타서 공격할 것이다.

그녀는 낭패감에 이를 악물었다.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충격을 최소화해서….

첨벙!

그때, 도시은은 인기척을 느꼈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재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직후, 그 존재가 그녀를 지나쳤다.

"나는 왼쪽, 누나는 오른쪽."

귓가를 스치고 간 목소리.

도시은은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 달리, 몸은 거의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존재가 느닷없이 왼쪽으로 움직이자….

'아, 그런 거구나.'

자신의 몸이 자동으로 오른쪽으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대로 눈앞에 있는 몬스터에게.

푹!

키이이….

도시은은 검을 찔러 넣었다.

그렇게 셋 중 하나를 없앤 그녀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확인하고자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쯤 그 존재도 나머지 두 놈을 쓰러뜨린 참이었다.

"…도견우?"

가문에서 겁쟁이란 소리를 들으며, 래빗이라고 조롱당하던 도견우.

예상치 못한 존재를 눈에 담고.

도시은의 눈이 놀란 듯이 커졌다.

도견우는 그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뜸 화제를 꺼냈다.

"누나, 나랑 협력 안 할래?"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24)

"협력?"

"응, 협력."

어깨 위를 스치듯 흔들리는 단발.

혼혈임을 짐작게 하는 이목구비와 주위에 펼쳐진 호수처럼 푸른 눈.

격한 전투를 벌였을 텐데도 여전히 고아한 미모를 잃지 않은 도시은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하긴 내가 도중에 전투에 끼어들어 뜬금없이 협력하자는 말을 꺼냈으니 의아하게 여길 만도 했다.

'그건 그렇고… 열네 살이라 그런가? 앳된 면이 있기는 하네.'

게임에 등장하는 도시은의 경우, 그녀는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하게 대응하며 카리스마를 보이고는 했다.

강한별보다 연상이라 그런 것인지 냉철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으로서 묘사된 것이다.

그런데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도시은은 그런 분위기와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었다.

나름 신선한 기분이었다.

여하튼.

"일단 여기에서 대화하긴 그렇고, 다른 데로 가서 얘기할까?"

"…그래, 그러자."

이내 어깨를 으쓱인 나는 턱짓으로 호수 언저리를 가리켰다.

수령과 그 수하들이 활동하고 있는 수면 위였다.

근처에 있는 놈들을 물리쳤다지만, 놈들의 수는 줄어든 만큼 채워졌고,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에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대화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이에 우리는 자리를 벗어나고 나서 마저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몬스터를 조우했습니다.]

[수동(Rank. 01) x 6]

나보다 키가 조금 작은 몬스터들.

어린아이 같은 형체를 한 수하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비켜."

"저쪽에 있는 놈들은 내가 맡을게."

그러나 나와 도시은이 힘을 합치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대로 놈들을 뿌리치고, 호수에서 나와 풀밭으로 올라왔다.

그러자 놈들의 추격이 끊어졌다.

"놈들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이제 편하게 대화할 수 있을 거야."

"얘기해 줘. 협력이라니?"

"말 그대로지."

"…."

"나랑 누나가 힘을 합치기만 하면, 수령도 쓰러뜨릴 수 있지 않겠어? 누나도 싸워 봤으니까 알 거 아니야. 혼자 수령을 상대하기 힘들다고."

"…."

"그러니 같이 쓰러뜨리자는 거야."

나는 털썩 풀밭에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옆에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그녀는 권유에 응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 혼자 상대하기 힘들기는 해. 하지만 너랑 협력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변하는 것은 없을 거야."

"수령의 주위에 있는 놈들 때문에? 그놈들이 수령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을 테니까?"

"그래, 맞아."

도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나도 염두에 둔 문제였다.

'우리 둘로 부족하기는 하지.'

어디까지나, 우리 둘로는.

"다 생각이 있어서 꺼낸 말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뭐?"

나는 그녀의 뒤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그녀도 내 시선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창 수하들을 상대하던 친척들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나처럼 그동안 상황을 보고만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쪽이든 피로한 기색이었다.

"우리끼리 협력하자는 게 아니야. 다 같이 협력하자는 거지."

"그럼…."

"수령의 수하들을 상대하는 역할은 저 사람들한테 맡길 거야."

"…."

"우리는 수령만 상대하면 돼."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저들을 설득할 차례다.

나는 풀밭으로 올라오는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형, 누나들."

"아, 견우야. 아까 네가 시은이랑 같이 싸우는 거 잘 봤…."

"우리한테 협력하는 게 어때?"

"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친척들.

이윽고 그들은 내 제안을 듣고는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우리가 왜? 네가 뭔데?"

"…."

그래,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 * *

그 시각, 절벽 위.

평가전에 참가한 사람들이 조금씩 호수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때쯤, 가문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화면의 태반은 수령이 있는 호수로 전환되었다.

"다들 고전하고 있군요."

누군가가 끙 소리를 냈다.

이에 화면을 보던 몇몇 사람들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령을 약체화시켰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상대하기에는 일렀던 게 아닐까요?"

"애들이 수면에서 싸우는 것에는 거의 경험이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주위에 몬스터들이 저렇게 많아서는 수령에게 접근하기도 힘들겠는데요."

도시은만 해도 그렇다.

제일 먼저 호수에 도달한 그녀는 어떻게든 수령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모색했었다.

그러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고, 잠시나마 수령과 무기를 섞는 것에 그쳤을 뿐이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그들은 수령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수하 몬스터들이나 상대하며 이따금 도시은에게 도움이나 주는 것밖에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문의 사람들이 난이도가 높다는 말을 꺼낼 만도 했다.

더군다나.

"아이들이 많이 지친 것 같군요. 밀림을 헤치고 호수까지 오느라고 체력을 꽤 소모했을 겁니다."

"시은이도 마비에 걸린 마당이니, 다른 애들 상태는 오죽하겠어."

"저 상태로 수령을 상대하려 하니 상황이 저럴 수밖에…."

게이트에서 처음 벌이는 강행군에 참가자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화면에 나오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피로감이 내비쳤고, 그들이 거칠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는 했다.

[헉, 헉…!]

[씨, 그만 나와라, 좀….]

[…푸헙!]

급기야 발판에 발이 미끄러지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져 수면을 걷다가 물속에 빠지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호수에 도달한 사람들은 어느 순간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상황을 관망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으로 흘러가자.

"가주님."

"…."

내내 평가전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도예익에게 진언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하니, 난이도를 낮추는 것이 어떨지요."

도예익의 장남, 도우준.

현재 가주 도예익의 직계 중에서 가장 차기 가주로 유력시되고 있는 그가 대표로 나섰다.

"아이들이 약하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아이들의 체력 상태를 고려해 상황을 개선하는 게 낫지 않을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맞습니다, 가주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괜히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도우준이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거들었다.

"흠…."

도예익은 짧게 침음을 흘렸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비슷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저 애들에게는 무리였던 건가….'

열일곱 살이 되지 않은 손주들.

그들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이미 그들은 충분한 실력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실망하지는 않았다.

다만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서정진이 제자를 들였다고 했다.'

명가를 배경으로 둔 것도 아니면서 오로지 본연의 힘으로 경지에 올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헌터.

투귀, 서정진.

세상은 싸움에 미쳐 있는 서정진을 도예익과 같은 현 십가문의 수장들에게는 미치지 못할 거라고 여기고 있으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필시 검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자신이 그를 앞설 것이다.

그러나 '전투'에서는 달랐다.

함부로 장담할 수 없었다.

'그놈은 괴물이다.'

그는 어느 분야에서든 천재라 불릴 재능을 가지지 못했기에, 우습게도 역설적으로 분야를 가리지 않고서 자신을 단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기에 얽매이지 않고 온갖 무기를 다뤘으며, 뿐만 아니라 모든 전투와 생산 계열을 넘나드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비록 정점에 오른 분야는 없더라도 모든 분야에서 일정 경지에 도달한 존재가 투귀라고 할 수 있었다.

도예익이 하나의 승부가 아니라,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쏟아붓고 싸워야 하는 전투에서의 우위를 쉬이 장담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렇기에.

'그 괴물이 들였을 만한 제자라면 그놈을 뛰어넘을 괴물이 틀림없다.'

도예익은 서정진이 들인 제자에게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는 한편으로 경계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라도 그 제자가 지닌 재능과 서정진의 노력과 집념이 절묘하게 합쳐지기라도 한다면.

"…."

그야말로 한 시대를 이끄는 영웅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십가문의 권세를 뛰어넘을 영웅이.

그렇게 되면 새로운 질서 체계가 이 나라에 자리 잡게 될지 몰랐다.

기존에 입지를 공고히 한 명가들이 바라지 않을 상황이었다.

물론, 그런 걱정보다도….

'내 손주들이 그 자식의 제자한테 지는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다.'

사실 그런 마음이 더 앞섰다.

도예익은 서정진과 비슷할 정도로 강한 승부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그의 손주들과 서정진의 제자는 그와 서정진의 승부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도예익은 승부욕에 불타 이번 평가전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가주님,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는 게 낫겠구나."

그런데 의욕이 지나쳤던 듯싶었다.

도예익은 고전하는 손주들을 보며 자신을 질책했다.

결국 그는 헌터들에게 명령하여, 평가전의 난이도를 낮추는 것으로 방침을 수정하려고 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잠깐."

도예익은 결정을 번복했다.

그의 시선이 호수 외곽을 비추는 화면에 꽂혔다.

"…."

어느새 호수에 도달한 참가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 중심에 도견우가 있었다.

[나한테 붙어.]

자신하는 듯한 도견우의 목소리.

도견우는 패착이 드리운 얼굴을 한 참가자들과 다르게 명백히 대조되는 얼굴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얼굴이, 참가자들의 시점에서 촬영되는 화면 대부분을 채웠다.

"허…."

똑같은 화면을 몇 개나 접하고 만 도예익은 탄식을 흘렸다.

이내 탄식은 헛웃음으로 이어졌다.

그의 입가가 호를 그렸다.

"아이들이 뭔가 할 생각인 듯한데, 그걸 보고 판단하도록 하지."

얼마나 자신이 있어서 그러는지.

도예익은 자신감에 찬 얼굴을 한 도견우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 * *

"시은이라면 뭐, 인정할 수 있어. 수령하고 전투를 벌일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근데 도견우 너는 우리한테 보여 준 게 없잖아. 우리가 왜 도와야 하지? 뭘 믿고?"

"다 같이 협력하자는 건 찬성이야.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네가 수령에게 접근하도록 협력하는 것은 좀 그렇다."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까불어? 네가 도승우를 이겼다고 우리가 뭐 다시 볼 줄 알았냐?"

"다시 보기는 했지. 그런데 그걸로 우리랑 맞먹으려고 들면 안 되지."

"이게 완전 무시하네?"

"…."

나와 나이가 같거나 적은 친척은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친척은 대놓고 분노를 표출해 댔다.

'1명씩 말하지, 정신 사납게….'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동안 가문에서 래빗이라 불리며 조롱당하던 내가 협력을 제의하니, 저들이 불만을 보일 만도 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차분히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당연히 해결책도 마련해 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말로 싸우지 말고, 검으로 결판을 내자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지.'

친척들의 상태창은 진즉 확인했고, 애초 그들은 잔뜩 지쳐 있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대련을 신청해 그들을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이해시키겠다면서 일일이 대련을 벌여 시간과 체력을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00:52:34

남아 있는 시간도 얼마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대련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설득하기로 했다.

"그럼 내가 수령과 싸우지 않으면 누가 싸우려고?"

"그런 건 네가 걱정할 필요 없이 우리끼리 결…."

"싸울 수나 있어? 그 몸으로?"

"뭐?"

"수령하고 싸울 힘은 남아 있냐고. 이제 마비는 다 풀렸어?"

"…."

내 말에, 조금 전까지 화를 내던 친척들이 뭐라 말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도 그렇고, 지금 자신들이 힘에 부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거봐, 없잖아."

"…."

"그래서 나한테 협력하라는 거야."

이내 나는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카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파킷 에이프의 주머니였다.

나는 그들이 볼 수 있게 내용물을 모조리 쏟아 냈다.

와르르.

"…."

활력의 열매, 기력의 열매 그리고 진흙 영초의 뿌리가 나왔다.

나는 그것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친척들에게 말했다.

"공짜로 도와달라는 말은 안 해. 나한테 협력하면 이것들을 넘길게. 솔직히 다들 아쉬울 거 아니야?"

"…."

"체력만 있으면, 마나만 있으면, 또 마비에 걸리지만 않았으면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 아니야. 안 그래?"

나는 친척들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걸려들었다.

내 말에 정곡을 찔린 것이다.

나는 계속 말을 잇기로 했다.

"그러니 이걸 먹고 힘을 회복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어른들에게 창피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자고. 제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대로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 주고 끝낼 거야?"휙!

"…어?"

나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한테 대뜸 활력의 열매를 던졌다.

그 사람이 반사적으로 잡고 나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먹어, 싸우고 싶으면."

"…."

나는 결단을 촉구했다.

그러자 망설임을 보이던 그가 냉큼 활력의 열매를 입에 댔다.

아삭.

열매를 베어 무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침묵 속에서 퍼지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그들의 조바심을 더 부추기려 계속해서 열매를 던졌다.

사람들이 열매를 받았다.

"나한테 붙어."

"…."

"협력해 줘."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삭.

조금 전까지 나를 욕하던 친척들이 내 편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내 나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도시은에게 뿌리를 건넸다.

"누나도 먹어. 마비가 풀리지 않아 싸우기 힘들 거 아니야."

"…고마워."

도시은도 이제 내게 협력할 마음이 확실히 선 듯했다.

그녀가 뿌리를 씹었다.

그러다 쓴맛이라도 난 것인지, 살며시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가 얼른 꿀꺽 삼켰다.

'이걸로 마비 상태는 사라졌어.'

나는 마비가 풀린 것을 확인하고 도시은의 상태창을 닫았다.

그사이, 호수에 도달한 친척들도 흐름에 따라 내게 협력하기로 했다.

"이게 기력의 열매인 거지?"

"나는 마비를 풀고 싶은데…."

"고맙다. 잘 먹을게."

"도견우, 너…."

"살아 있었냐?"

그중에 도승우도 있었다.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하마터면 얼굴을 몰라볼 뻔했다.

"그래서? 너도 협력하게?"

"…젠장."

놈의 상태는 많이 좋지 않았다.

결국 놈도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용할 수 있는 말은 많으면 좋다.

나는 기꺼이 뿌리를 내주었다.

"자, 주목. 이제 작전을 설명할게."

"…."

내게 대가를 받아서 그런지.

그들이 고분고분 내 말을 따랐다.

나는 수령을 공략하기 위한 작전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시은이 누나."

"응."

"누나는 수령의 왼쪽을 견제해. 나는 대신 오른쪽을 견제할게."

"알았어, 그렇게 할게."

"왼쪽이야. 까먹으면 안 돼."

나는 도시은에게 따로 당부했다.

그러자 그녀가 동의하는가 싶더니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꼭 왼쪽이어야 해?"

푸른 눈을 깜빡이며 묻는 도시은.

나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야 누나가 나보다 더 강하니까."

"응?"

"상대적으로 오른쪽보다 왼쪽이 더 힘에 부칠 거 아니야. 그러니 대신 누나가 힘 좀 써 달라는 거지."

"아, 응… 그렇구나."

"할 수 있지? 잘 부탁할게."

"…."

수령은 왼팔이 잘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왼팔에 대한 방비가 미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오른쪽을 견제하고, 그녀가 왼쪽을 견제하는 것이다.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여하튼, 그리하여.

[몬스터를 조우했습니다.]

[수령(Rank. 03, Boss) x 1]

[수동(Rank. 01) x 17]

수령 공략전이 시작되었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25)

첨벙첨벙.

수면을 달린다.

발바닥 전체에 퍼뜨린 체내 마나가 부드럽게 수면을 밀어낸다.

발을 떼는 지점에서 파문이 일며, 호수 전체로 퍼져 나간다.

첨벙첨벙.

그때마다 수면이 철썩이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첨벙첨벙.

그 소리는 하나가 아니다.

기감을 넓히고 귀를 기울여 보면, 다른 사람들이 수면을 차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첨벙첨벙, 첨벙첨벙, 첨벙첨벙….

굳이 그들을 눈에 담지 않더라도, 그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키이이!

거리는 선두에 서 있는 몬스터들과 접전이 일어날 정도로 가까워졌다.

"석우 형."

이제 곧 전투가 벌어진다.

나는 살기를 드러내는 놈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 견우야."

"수하들은 형한테 지휘를 맡길게. 나랑 누나는 수령을 상대해야 해서 그쪽에는 신경을 쓰지 못할 거야."

"알았다. 뒤에서 잘 받쳐 줄게."

도석우는 평가전에 참가한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나름의 인정을 받고 있기도 했다.

도석우의 지휘라면 다른 사람들도 군말 없이 따를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속도를 늦춰, 다른 사람들보다 뒤로 물러났다.

도시은도 속도를 늦췄다.

이윽고.

"놈들을 좌우로 떨어뜨려!"

"길을 뚫는 것을 우선해!"

전투가 시작됐다.

도승우를 비롯해, 내 나이 또래의 친척들이 선두에서 함성을 질렀다.

그들이 제각기 수하들과 맞붙어, 뒤에 있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만들어 주었다.

"놈들을 밀어 버려!"

"계속 뛰어!"

뒤이어 두 번째 전투가 발생했다.

사람들은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수하들을 붙잡았다.

그렇게 길이 만들어졌다.

저 앞에 수령이 있었다.

"누나, 가자."

"응."

나는 도시은에게 신호했다.

이내 우리는 늦췄던 속도를 높여, 장애물이 없는 길을 내달렸다.

첨벙!

수면이 우는 소리가 거칠다.

그만큼 시야가 빠르게 밀려난다.

사람들과 수하들을 지나친 시야는 이제 수령만 담고 있었다.

키이이익!

그렇게 우리가 놈을 인지했듯이, 놈 역시 우리를 인지했다.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순간.

놈이 힘껏 창을 내리쳤다.

그 힘으로 생겨난 바람과 물살이 우리를 향해 쇄도해 왔다.

탁!

우리는 그 즉시 방향을 틀었다.

사전에 협의했던 대로 나는 오른쪽, 도시은은 왼쪽으로 갈라졌다.

덩달아 놈의 시선이 분산됐다.

키이이!

오른쪽 그리고 왼쪽.

놈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가면서 우리의 움직임을 쫓았다.

한편, 우리는 놈을 사이에 두고서 시선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끄덕.

도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공격하겠다는 뜻이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그녀의 발걸음에 맞추기로 했다.

직후, 그녀가 몸을 숙여 가속했다.

<수왕류 공격식 제3형>

사자 철편

철의 채찍을 휘두르듯.

검신에 마나를 씌워 길이를 늘린 도시은이 검을 휘둘렀다.

칼날을 매개로 하는 마나가 휘면서 수령에게 변칙 공격을 가했다.

깡!

그러나 수령은 잠시 주춤했을 뿐, 몸을 돌려 창으로 공격을 튕겨 냈다.

그러고는 곧장 창의 궤적을 이어 그녀에게 반격을 가하려고 했다.

나는 그 틈을 노려.

<수왕류 공격식 제1형>

사자 열참

등을 보인 놈에게 참격을 날렸다.

바람을 가르는 참격의 소리가 마치 사자가 포효하는 것만 같았다.

키이익!

놈은 그 공격을 피해 냈다.

수면을 미끄러지듯 자리를 벗어난 놈이 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첨벙!

놈이 내게 시선이 간 틈을 타.

도시은이 단숨에 거리를 좁혀서는 놈에게 접근한 것이다.

다시금 그녀의 칼날이 빛났다.

첨벙!

나도 그 즉시 수면을 박찼다.

수령과 도시은이 검과 창을 섞는 그 상황 속으로 뛰어들었다.

팅!

도시은의 검이 튕겨 난다.

놈의 창이 떨어진다.

내 검이 그 창을 쳐 낸다.

그녀가 갈무리한 검을 휘두른다.

놈이 황급히 걸음을 뒤로 물려서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

회전하며 수거한 창으로 검을 막아 공격을 피해 낸다.

동시에 발로 반원을 그리며 전진한 놈이 창을 크게 휘둘렀다.

휘릭!

창이 빠르게 휘몰아친다.

공격과 방어의 전환이 자유롭다.

그 탓에 쉽사리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우세한 것은 우리였다.

챙!

조급해할 것 없다.

나와 그녀는 놈의 공격을 막으며, 돌아가며 숨을 골랐다.

반면 놈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우리를 막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익.

수하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놈이 숨을 고를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우리와 주고받는 합이 늘어날수록, 놈은 점점 힘에 부쳐 갔다.

…!

결국 빈틈을 드러냈다.

우리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 즉시 검에 마나를 압축했다.

<수왕류 공격식 제2형>

사자 조흔(獅子 爪痕)

압축한 마나로 검에 예기를 더해, 그대로 적에게 짐승이 파헤친 듯한 검흔을 새기는 검술.

서로의 생각이 일치했다.

푸슉!

거의 동시에.

나와 도시은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놈의 옆구리를 베어 냈다.

"쳇, 가죽이 더럽게 단단하네."

"가죽이 아니라 비늘."

"그거나 그거나."

키이…익….

아쉽게도 상처는 깊지 않았다.

그러나 사자 조흔으로 생긴 상처는 상처 수복이 더뎠다.

놈은 전투를 벌이는 동안 계속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죽을 것이다.

끝내 우리를 이기지 못하고.

"3랭크도 별거 아니네."

"방심은 금물이야."

"하지만 누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

이 상태로.

기세를 몰아간다.

수령은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호수의 지배자로 군림하던 자신이 한낱 인간들에게 당한 것도 모자라, 그들에 의해 수면 위로 끌어 올려져 인간 새끼들의 상대가 돼야 했으니 그렇게 느낄 만했다.

더욱이 자신을 끌어 올린 인간들은 자신과 인간 새끼들의 힘을 맞추려 팔과 꼬리를 잘라 가고, 출혈이 심한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다.

'인간 따위가, 감히 인간 따위가…!'

몬스터 중에는 단순히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이지를 지니고 사고할 수 있는 몬스터도 존재했다.

인간 여성의 형태를 취한 수령이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수령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일차원적으로 분노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굴욕감을 느꼈다.

'감히, 감히….'

인간 따위가 이 호수의 지배자를 토끼 사냥하듯 대한다는 말인가.

수령은 그 감정에 몸을 맡길수록 자신에게 접근하려는 인간 새끼들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그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눈이 푸른 여자는.

'그놈은 다른 놈들과 다르다.'

몇 번 합을 주고받았을 뿐이지만 수령은 그것만으로 그녀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경계했더니….

'이놈은 대체 뭐냐!'

한 놈이 더 있었다.

여자보다 키가 작은 남자.

그의 실력도 그녀 못지않았다.

'성가신 놈!'

치고 빠질 때를 잘 알고 있다.

남자는 자신이 여자를 상대할 동안 기회를 엿보고 있다 틈을 노리거나, 여자가 숨을 가다듬으러 물러날 때 잽싸게 그녀의 자리를 대신해서는 자신을 방해해 왔다.

그때마다 대응하려고 하자, 놈은 자신의 심기를 건드릴 듯 말 듯 경계선에 발을 걸치고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고는 했다.

마치 공격이 어디로 들어올 것인지 알고 있는 듯한 몸놀림이었다.

'팔을 잘리지만 않았어도….'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남자는 자신이 팔이 없는 왼쪽을 집요하다시피 파고들었다.

아주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남자는 여자보다도 훨씬 더 성가시고 위험한 상대였다.

수령은 원통해하면서도 별수 없이 남자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수왕류 공격식 제2형>

남자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만 여자의 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다.

사자 조흔

수령은 뒤늦게 대응했다.

겨드랑이 안쪽으로 들어온 칼날이 비늘을 부수고, 살을 찢어, 나아가 뼈를 건드리기 직전에 몸을 틀어서 가까스로 치명상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첨벙!

왼쪽 그리고 오른쪽.

두 인간이 이 흐름을 잇기 위해 수면을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끝을 내려 하고 있다.

샤아아악!

수령은 목이 찢어져라 울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죽더라도 저들은 꼭 죽일 것이다.

그렇게 격한 감정에 휩싸인 수령은 고통을 뒤로 밀었다.

휘릭!

다시금 검과 창과 검이 충돌한다.

수령은 온 힘을 다해 창을 휘둘러 달라붙는 두 인간을 떼어 내는 한편, 긴 리치를 이용해 그들을 위협했다.

──!

바람 소리가 거세다.

격정적인 움직임에 수면이 잠시도 잔잔해질 틈이 없이 요동친다.

챙!

휘두르고, 내지르고, 올려친다.

인간들이 피하고, 막고, 튕겨 내며 물러나지 않고 대응한다.

바람 소리, 물살 소리.

두 소리에 섞여 금속음이 울린다.

한 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파문처럼 퍼져 나간다.

키이이이익!

자신의 생명을 소진하며.

수령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듯 공격을 몰아붙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두 인간이 뒷걸음질하고 있었다.

키릭.

인간들도 이제 힘에 부쳤다.

그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금속의 춤에 끝이 보이고 있었다.

수령은 저들이 물러나지 못하도록 물고 늘어지기로 작정했다.

그러니 먼저 남자를 향해….

바로 그때였다.

<수왕류 방어식 제3형>

남자가 검을 비스듬히 돌려서는, 칼끝에서 칼등으로 이어진 도신으로 수면을 갈랐다.

──!

물보라가 거세게 일었다.

물보라 속에서 칼날이 솟구쳤다.

그리고 검이 만든 궤적을 따라….

사자 장막(獅子 帳幕)

물보라와 도신에 깃든 마나가 만나 앞을 가리는 장막이 솟구쳤다.

키익!?

장막이 남자를 가렸다.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 기감으로 장막 너머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공격 대상을 잃은 수령은 직감에 의지하여 창을 휘둘렀다.

휘익!

창이 장막을 수평으로 베었다.

그러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에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그렇더라도 남자는 근처에….

<수왕류 공격식 제5형>

그때, 여자의 기척이 느껴졌다.

수령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여자가 앞발을 크게 내딛는 한편, 자세를 낮춘 채로 검을 몸 안쪽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 직후.

파직!

푸른 전격이 튀었다.

굵은 줄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사자 맹공

조금 전부터 간간이 튀기던 전격과 비교할 수 없는 전격.

그녀가 수면을 전격으로 번쩍이며 돌진해 오고 있었다.

위험하다, 피해야 한다.

수령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그러나 퇴로는 없었다.

<수왕류 공격식 제5형>

그 퇴로에 남자가 있었으니까.

그도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파직!

남자에게서도 전격이 솟구쳤다.

맑은 하늘로 치솟는 푸른 전격은 1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듯했다.

전격이 전류를 튀기는 소리는 마치 용이 포효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 사자였다.

사자 맹공

그 사자가 움직였다.

푸른 전격을 몸에 휘감은 남자가 몸 안쪽으로 끌어들인 검을 밖으로 크게 휘둘렀다.

* * *

도견우와 도시은이 협공한다.

처음 합을 맞춰 보는 것일 텐데도 매끄럽게 합이 맞는다.

수령은 두 사람의 연계에 말려들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절벽 위.

화면을 보던 사람들은 거짓 없이 솔직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읊조린 말을 부정하려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싶군."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가능할 겁니다. 말해 놓겠습니다."

도예익도 그 광경에 빠져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전투를 화면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아쉽기만 했다.

이에 직접 보는 것보다 못하지만, 다양한 각도에서 보기 위해 화면을 조정하기로 했다.

잠시 후, 화면 몇 개가 흔들리더니 촬영 각도가 바뀌었다.

그중 한 화면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의 입가가 말아 올려졌다.

"둘이 합이 잘 맞는구나."

전투를 공중에서 촬영한 화면.

도견우와 도시은이 움직이는 것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정수리만 보이는 그들은 춤을 추듯 수령을 중심으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꼭 팽이 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푸슉!]

마침내 그들의 검이 닿았다.

수령의 옆구리를 벤 것이다.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허허. 견우가 승우를 이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구나."

"…."

도견우의 실력을 확인한 사람들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도시은의 짐밖에 더 되겠냐던 사람들의 우려와 다르게, 그는 지금 그녀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실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큭…. 저놈이 어떻게…."

도승우의 아버지, 도범준도 끝내 도견우의 실력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다 계속 화면을 보기 괴로운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좀 피우고 오겠습니다."

"보아하니 이제 끝날 것 같은데, 잠깐만 기다리거라."

"…알겠습니다."

도범준은 도예익에게 예를 표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려고 했으나, 도예익이 그를 붙잡았다.

가주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한 그는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마저 전투를 지켜보아야 했다.

[파직!]

한편, 도예익의 말대로 전투가 끝나갈 조짐을 보였다.

수령이 사력을 다해 만든 흐름이 도견우의 방어식에 의해 끊기면서, 놈이 허를 찔린 것이다.

[<수왕류 공격식 제5형>]

돌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도시은.

그녀가 움직이자, 전격이 폭발했다.

[사자 맹공]

마치 벼락이 치는 것처럼.

그녀를 중심으로 전격이 피어났다.

맑은 하늘로 치솟는 푸른 전격은 흡사 꽃이 피는 것을 보는 듯했다.

"…."

사람들은 그 광경에 넋을 잃었다.

그간 벽뢰의 징조만 보이던 그녀가 완벽하게 벽뢰를 일으킨 것이다.

"하하! 네가 드디어 해냈구나!"

2대 가주의 업적이 재현되었다.

도예익은 수면 위로 피어난 꽃이 화면을 하얗게 물들이는 것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던 그때였다.

"저, 저기!"

"…뭐?"

누군가 다른 화면을 가리켰다.

원거리에서 호수를 담은 화면.

그 화면에서는 수면 위로 피어오른 번개의 꽃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리고 왼편에서도.

[파직!]

"…."

사람들은 제 눈을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다. 말도 안 된다.

도시은이 일으킨 벽뢰가 어쩌다가 저기까지 미치고 만 것이리라.

그 생각을 부정하듯.

[파직!]

왼편에서 힘차게 번개가 치솟았다.

도견우가 서 있는 수면.

그곳에서 그를 감싸는 푸른 전류가 굉렬하게 꽃을 피웠다.

"말도… 안 돼…."

거울처럼 세상을 비추는 수면.

그 수면 위로 푸른 빛을 발하는, 두 떨기의 꽃이 피어났다.

화면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 장면은 하늘에서 떨어진 두 갈래의 번개가 지상을 꿰뚫는 것처럼 보였다.

[사자 맹공]

이윽고 꽃은 맹렬한 기세로 날뛰는 사자가 되어 포효했다.

2마리의 사자가 수령을 덮쳤다.

[키이이….]

아래에서 위로, 벽뢰가 상승한다.

수령은 두 사람이 휘두른 칼날에 세 동강으로 나뉘었다.

단말마도 남기지 못한 놈의 사체가 물속으로 가라앉지 못하고 수면에 붕 떠올랐다.

그렇게 수령이 죽은 것으로.

[게이트를 공략했습니다.]

게이트에 있던 사람들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래, 1명이 아니었구나!"

그 메시지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도예익은 흩날리는 벽뢰 속에 있는 도견우를 바라보며 환희했다.

웃음이 멎지 않았다.

"그동안 토끼인 줄로만 알았는데, 너 역시 사자 새끼였구나."

"…."

하긴, 신검 도가의 피를 이었으면 토끼로 태어날 수 없지.

도예익은 체통을 지키는 것도 잊고 연신 어깨를 들썩였다.

한편, 그가 내뱉은 말로 인해….

[신검 도가의 가주의 인정을 받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이명 '사자 새끼'를 얻었습니다.]

도견우는 메시지를 받았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26)

일전에 벽뢰를 일으킨 이후로.

나는 다시금 그 현상을 재현하러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집중하면 간신히 전류를 방출하는 수준에 이르렀을 뿐, 전투 상황에서 써먹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파직!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어떻게 벽뢰를 일으킬 수 있는지.

'몸이 나가는 게 매끄러워.'

올바른 호흡, 검과 나의 일체화, 감각의 극대화, 정확한 자세와 동작, 신속한 몸놀림, 적절한 마나 발현, 마나 회로의 이상적인 활성화 등.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어우러지자 검술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그동안 내가 펼친 검술이 얼마나 우악하고 조잡했는지 알 수 있었다.

굉장히 신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대로 세상을 직시했다.

파직!

세상이 푸르게 부시도록 번쩍인다.

내가 흘리는 마나가, 내뱉는 숨이, 나로 인해서 흔들리는 기류가 전부 푸른 전류로 승화하고 있었다.

파지직!

내가 내달리자, 전류도 내달렸다.

가시화된 전류가 마찰을 일으키며 더욱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일정 속도에 달했을 때.

쿠오오.

벽뢰의 소리가 바뀌었다.

소리가 거칠어졌다.

쿠아아아!

꼭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소리.

내 주위를 휩쓸던 벽뢰는 세차게 수령을 향해 내달렸다.

맞은편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도시은의 벽뢰가 내달린 것이다.

키에에엑!

그렇게 두 줄기의 벼락이 내리쳐 수령에게 전격을 선사하고.

나와 도시은의 검이 벽뢰를 가르고 놈을 사선으로 베어 냈다.

키이이….

세 동강으로 나뉜 수령의 신체가 비스듬히 무너진다.

이윽고 평가전이 끝났음을 알리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신검 도가의 가주의 인정을 받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이명 '사자 새끼'를 얻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보스 몬스터를 잡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이명 '보스 베이비'를 얻었습니다.]

[게이트를 공략했습니다.]

"…이건 뭐야?"

* * *

게임에서는 특정 업적을 세우거나, 사람들에게 일정 평가를 받게 되면 이명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뜬금없이 이명을 얻은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평가전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내 평가를 달리하게 된 거겠지.'

애초 메시지에도 나와 있었다.

할아버지의 인정을 받았다고.

아무래도 할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모습을 보여 준 모양이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그렇기는 해.'

그렇게 자화자찬하며 나는 이명을 확인하기로 했다.

사자 새끼와 보스 베이비.

이명을 얻는 조건이 조건이다 보니 강한별이 중심이 되는 게임에서는 등장한 적이 없는 이명이었다.

[사자 새끼]

◆ 이명 기원

―신검 도가의 현 가주 도예익이 신검 도가에 걸맞은 실력을 보인 도견우에게 보내는 찬사.

◆ 효과

―신검 도가의 위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정 관심을 받는다.

―'수왕류'라는 이름이 붙은 스킬의 효과를 10% 올린다.

먼저, 사자 새끼.

수왕류를 사용하는 내게 있어서, 수왕류의 효과를 10%나 올려 주는 이명은 제법 쓸 만할 것 같다.

'대신 저 이명을 장착하고 다니면 사자 새끼라고 불리게 되는 건가….'

찬사의 의미가 담긴 이명이라지만 듣다 보면 기분이 상하기도 하겠다.

그래도 효과는 그만한 값을 했다.

다음으로 보스 베이비.

[보스 베이비]

◆ 이명 기원

―어린 나이에 보스 몬스터를 죽인 업적이 반영된 이명.

◆ 효과

―보스 몬스터와 전투를 벌일 시, 최우선 공격 대상이 될 확률이 대폭 증가한다.

―보스 몬스터와 전투를 벌일 시, 모든 신체 능력이 원래 신체 능력치의 10%만큼 상승한다.

평상시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보스 몬스터하고 전투를 벌일 때는 이만한 이명이 없을 듯했다.

효과가 무척 뛰어났다.

'원래 신체 능력치의 10%라….'

게임에서도 보스 몬스터와 관련된 이명이 몇 개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보스 베이비의 효과와 같이 보스 몬스터에 제한을 두지 않고, 모든 신체 능력을 10%나 올려 주는 이명은 흔치 않았다.

'원래 능력치에서 10% 올리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이것도 어디야.'

다만 문제가 있었다.

나는 미간을 모았다.

'이걸 장착하면 보스 몬스터에게 어그로를 끌게 되는 건가.'

효과가 큰 만큼, 대가도 컸다.

최우선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니 상당한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파티에서 주로 어그로를 담당하는 가디언 계열과 궁합이 좋은 반면, 딜량을 담당해야 할 내게는 궁합이 그리 좋지 않을 듯싶었다.

그나마 회피 본능의 도움이 있다면 어느 정도 나아지긴 할 것 같다.

'이건 상황을 보고 사용해야겠네. 무작정 사용할 게 아니라.'

나는 손으로 메시지를 치운 다음, 상태창을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겼다.

"음…."

[이명 '래빗'을 이명 '사자 새끼'로 교체하겠습니까?]

[예 / 아니오]

이명은 하나만 장착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자 새끼를 장착하려면 기존에 장착한 이명과 바꿔야 했다.

즉, 게임에서 도견우를 대표하는 이명 래빗을 해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래빗의 효과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래빗]

◆ 이명 기원

―신검 도가의 기풍에 어울리지 않는 도견우를 가리키는 명칭.

◆ 효과

―신검 도가의 위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정 관심을 받는다.

―회피율을 30% 올린다.

래빗의 효과에서 언급하는 관심이 긍정적인 관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회피율을 30%나 올려 주는 효과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행운 수치가 25인 내가 래빗을 해제한다면 회피율이 크게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행운을 올릴 수도 없고.'

행운 수치를 올리는 것은 어려워서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신체 능력을 올리는 게 나았다.

무엇보다.

'내 무기를 잊어서는 안 돼.'

게임에서 도견우가 지닌 강점이란 회피 본능을 이용한 전투에 있었다.

기프트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회피율은 포기해서는 안 됐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어쩔 수 없네."

[예 / 아니오(선택)]

사자 새끼의 효과가 아쉽지만.

역시 평소에 착용하는 이명으로는 래빗만 한 게 없었다.

'사자 새끼는 공격력이 필요하거나, 가문 모임에 참석할 때 사용하는 게 낫겠네.'

나는 메시지를 닫았다.

그때쯤 도시은이 말을 걸어왔다.

"게이트를 공략했다는 메시지를 보고 있던 거야?"

"뭐… 그렇지?"

"그런 것치고는 허공을 너무 오래 응시하는 것 같던데…."

"아아… 그동안 게이트에서 받은 메시지들을 보고 있었거든."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이명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단순히 헌터의 위상을 높이거나, 사람들에게 이미지를 각인하기 위한 홍보 수단으로 받아들이고는 했다.

시스템이 떠오르는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에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렇구나. 그리고… 자, 여기."

"누나, 이건…."

게이트가 제공하는 메시지 이외에 다른 메시지를 볼 수 없는 도시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고는 손에 쥔 것을 건넸다.

"게이트 키야. 수령을 쓰러뜨리니 나한테 떨어지더라고."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게이트는 그녀가 공략에 가장 크게 공헌했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그런데도 그녀가 내게 키를 넘기니 의아하기만 했다.

그러자 도시은이 말하기를….

"네가 협력을 제의하지 않았다면 게이트를 공략하지 못했을 테니까."

"…."

"게이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너한테 이렇게 키를 넘기는 거야."

고마워, 네 덕분이야.

그녀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기며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나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 그럼 내가 받아 갈게."

"응."

나는 도시은에게서 키를 받았다.

아티펙트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녀는 이번 평가전을 끝낸 공로를 내게 넘기기로 한 것이다.

그러던 그때였다.

탁!

일순 물소리가 들리고.

우리 둘만 서 있던 호수 중심부에 한 여자가 착지했다.

레굴루스 클랜복을 입은 걸로 보아 가문을 받드는 헌터인 듯했다.

"게이트 공략을 축하드립니다."

"…."

우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여성.

이내 그 여자가 고개를 들어서는 용건을 꺼냈다.

"게이트 키를 저에게 넘겨주시면, 제가 가주님께 전달하겠습니다."

"…."

그러고 보니 게이트를 공략한 후에 근처에 있는 헌터에게 게이트 키를 넘기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요."

"그럼 게이트 키는 잘 받았습니다. 도견우 도련님과 도시은 아가씨께서 주축이 되어 게이트를 공략했다는 이야기도 보고하겠습니다."

"네, 잘 부탁할게요. 그런데 저희는 어떻게 나가면 될까요?"

이 세상을 나가는 게이트는 반드시 게이트 키 근처에 생성된다.

그녀가 게이트 키를 가져가게 되면 게이트의 위치도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이 근처 어디에 생성되었을 게이트를 염두에 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한쪽을 가리켰다.

"게이트는 지금 저곳에 있습니다. 저는 평가전에 참가한 분들이 모두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갈 생각이니 돌아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배웅이 필요한 거라면 제가…."

"아니에요, 저희끼리 갈 수 있어요. 저희가 부축이 필요할 정도로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닌데요, 뭘. 그치?"

"네, 저희는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게이트는 호수 외곽에 있었다.

그동안 몸을 숨기고 있던 헌터들이 평가전에 참가한 사람들을 부축해, 그곳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 전에 짚고 넘어갈 게 있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십시오, 도견우 도련님."

"평가전에서 얻은 전리품의 경우, 소유권이 어떻게 되나요?"

"그건…."

평가전을 치르기에 급급하다 보니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전리품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기에.

나는 하다못해 수령에게서 나오는 전리품이라도 챙기고 싶었다.

'게이트 보스의 사체가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데, 그걸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지. 그리고 수령은 3랭크나 하잖아?'

나는 수령의 사체를 곁눈질했다.

세 동강으로 분리된 놈의 사체는 가라앉지 못하고 봉인 마법이 걸린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굉장히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가문의 게이트에서 얻는 전리품은 기본적으로 소유권이 가문에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무래도 문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런 내 의도를 알아차린 것인지 여성이 수령의 시체를 힐끗거렸다.

그러더니 통신 아티펙트를 사용해 연락을 넣으려고 했는데….

"아, 단장님. 다름이 아니라…."

[가지고 싶으면 가져가거라.]

"…."

[전리품은 승자의 몫이지.]

그녀가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대뜸 할아버지의 음성이 흘렀다.

설마 할아버지가 연락을 받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우리는 그 자리에서 벙찌고 말았다.

계속 우리를 지켜본 듯했다.

"어… 가주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전리품의 소유권은 해당 몬스터를 쓰러뜨린 당사자에게 있습니다."

여하튼 좋은 게 좋은 거다.

직접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나는 수령의 사체를 뒤지기로 했다.

"잘됐네요. 그럼 수령의 전리품은 저희가 가져가도록 할게요. 누나도 같이 싸웠으니까…."

"나는 괜찮아."

그때, 도시은이 전리품의 소유권을 내게 양보한다는 말을 전해 왔다.

"정말?"

"응, 너 가져."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고맙게 받아 갈게."

이내 나는 수령의 가슴을 갈라서, 그 안에서 마석을 꺼냈다.

마석이 놈과 단단히 결합돼 있어 뜯어내기 위해 힘을 줘야 했다.

그렇게 마석을 뜯어내고.

'마석 말고 다른 것은 없나?'

나는 마나의 입자가 되어 사라지는 놈의 사체를 주시했다.

그때, 물속으로 떨어지려고 하는 형체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낚아챘다.

[중급 신체 능력의 법석]

◆ 소모품 분류

―법석

◆ 상세 설명

―대상자의 신체 능력에 기여하는 힘이 깃들어 있다.

◆ 상세 효과

―흡수 시, 잔여 포인트를 1 얻는다. 이때, 80 미만 신체 능력에 한하여 잔여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다.

"…."

"법석이네? 잘 나오지 않는 건데 좋은 것을 얻었구나. 밖에 나가서 감정해 보도록 해."

"…누나, 진짜 고마워."

"응?"

도시은은 모르리라.

내가 손에 쥔 노란 보석이 얼마나 희소성이 높은 법석인지.

대박이었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고생한 보람은 있네, 정말.'

특정 능력치를 올려 주는 게 아닌, 원하는 능력치를 올려 주는 법석은 무척이나 귀했다.

게다가 중급이었다.

'이 법석은 잔여 포인트로 바꿔서 때가 되면 사용해야겠다.'

신체 능력의 수치가 70을 넘으면 성장이 쉽지 않은 것을 고려할 때, 그때 가서 요긴하게 쓸 수 있겠다.

"이제 우리도 가자, 누나."

"응, 그래."

나는 흡족해하며 법석을 챙겼다.

이제 게이트를 나가기로 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견우야."

도시은이 앞서가던 나를 불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이 누나 혹시….

"혹시 법석을 달라는 건 아니지? 미안한데, 이제 이건 내 거야."

"…."

괜한 불안감이 들었다.

행여나 그녀에게 법석을 빼앗길까.

나는 허리에 찬 가방을 사수하듯, 몸을 움츠리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녀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이내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축하한다고."

"뭐가?"

"이번에 벽뢰를 일으킨 거. 그만 말하는 걸 깜빡했어. 정말 멋지더라. 다시 봤어."

"…고마워. 누나도 멋지더라."

하긴, 줬다 뺏을 사람은 아니지.

나는 경계심을 풀었다.

게이트를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던 서포터들이 다가왔다.

그들이 내 몸을 샅샅이 살폈다.

"크게 다친 데는 없는 것 같군요. 치료할 수 있는 부분은 치료하고, 자연 치유에 기댈 수 있는 부분은 조금만 손을 대겠습니다."

상처는 서포터들의 치유 마법으로 빠르게 아물었다.

남아 있는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깨끗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수고했다! 특히 시은이하고 견우의 실력이 인상 깊더구나."

무어가 그렇게 기쁜지 껄껄 웃는 할아버지를 비롯해 다른 어른들이 게이트에서 나왔다.

가족들도 있었다.

나는 가족들에게 향하려 했는데….

"엄마, 압…!"

"정말 장하다! 네가 2대 가주님의 기록을 깨뜨렸구나!"

"…!"

할아버지가 길을 막더니, 별안간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안긴 나도 놀랐을 지경인데,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도 모두 놀란 듯싶었다.

'내가 벽뢰를 일으켜서 그런 건가? 엄청 좋아하시네….'

할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로.

나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거나, 눈을 크게 뜬 사람들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만하지 말고 겸허하게, 끊임없이 정진하거라."

할아버지도 그 시선을 알 텐데 개의치 않고 내 등을 두드렸다.

나는 가만히 있기만 했다.

'할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은 지가 얼마나 됐더라?'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어렸을 적, 토끼 사냥에 실패하고 래빗이라고 조롱당하게 되면서.

아마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관심이 떠나갔던 것 같다.

그러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다시금 가문의 인정을 받게 되니 기분이 좋기는 했다.

그런 한편.

'상태창.'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속으로 읊조려 상태창을 꺼낸 나는 할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게 화면을 조작했다.

[이명 '래빗'을 이명 '사자 새끼'로 교체하겠습니까?]

[예(선택) / 아니오]

이명을 교체했다.

이것으로 할아버지가 나에게 품는 호의가 더 커질 것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럼… 가주님."

"그래, 견우야. 왜 그러느냐."

"제가 보고에 들어가도 될까요?"

내 질문에 할아버지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암! 당연히 되고말고!"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27)

담력

평가전이 끝났을 때쯤에는 어느덧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게이트 공략이 쉽지 않았을 텐데 다들 정말 고생 많았다. 이 경험이 너희에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마. 그럼 이제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쉴 사람은 편히 쉬도록 하거라."할아버지가 인공 게이트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제야 사람들이 안도했다.

이내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하나둘 자리를 떠나갔다.

"시은이랑 견우는 자리에 남거라. 지금 바로 보고로 가자꾸나. 선물은 빨리 받을수록 좋은 법이지."

"네, 가주님."

"만약 너희 중에도 따라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따라와도 좋다. 대신 보고에는 들어갈 수 없다만."

"…."

할아버지가 먼저 걸음을 떼고.

자리에 남아 있던 나와 도시은은 얼른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우리가 어떤 보물을 고를지 궁금했는지, 조용히 뒤를 따라왔다.

당연히 가족들도 있었다.

"잘했다. 절벽에서 지켜봤는데, 딱히 나무랄 게 없더라고. 벽뢰도 이제 제대로 쓸 수 있는 것 같고."

"아, 아빠."

"근데 열매는 어떻게 안 거야?"

내 어깨에 턱 손을 얹는 아버지.

아버지는 내 실력을 칭찬하면서도, 내가 게이트에서 자생하는 열매를 알고 있던 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예전에 책에서 본 적이 있거든요. 거기서 나온 거랑 비슷하게 생겨서 혹시나 했던 거죠. 운이 좋았어요."

"네가 알고 먹은 거라면 상관없지. 그래도 감정을 하지 않고 먹을 때는 주의하도록 해. 게이트에 자생하는 동식물 중에는 비슷하게 생겼으면서 사실 전혀 다른 경우도 있거든."아버지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아버지의 걱정을 모르지 않았기에, 나는 감정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수긍하기로 했다.

"네, 앞으로는 조심해서…."

수긍하려고 했는데….

"'혹시나'?"

"…."

어머니가 생긋 웃고 있었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결국 먹어서 확인했다는 거네?"

"어, 엄마…."

아버지가 슬금슬금 물러나고.

어머니가 내게 바짝 다가와서는, 두 어깨를 주물렀다.

아니, 세게 꼬집고 있었다.

그러며 목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잘못 먹어서 배탈이라도 나거나, 독이 들었으면 어쩌려고 그랬니?"

"파킷 에이프가 멀쩡하게 먹길래 독은 없을 거라고 생각…."

"말대답."

"…앞으로는 알고 먹을게요."

"조심해서도 먹어야겠지?"

"네에."

다행히 주위에 사람들이 있어서 어머니는 크게 꾸짖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어깨에서 손을 놓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때, 시선이 느껴졌다.

도시은이 신기하다는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가족들이랑 사이가 좋아 보여서."

"누나네는 안 그래?"

"우리는… 평범한 편일걸? 아마."

함께 수령을 쓰러뜨렸기 때문인지.

그녀는 말수가 없던 이전과 달리, 나와 드문드문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그때였다.

"나도 열매 먹고 싶어!"

예은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뒤에서 나를 덥석 껴안으면서.

"오빠, 열매 남아 있는 것 없어? 나도 먹어 보고 싶은데…."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예은이.

예은이가 내게 매달리며 보챘다.

'이럴 것 같더라니….'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침 수령과 싸우기 위해 챙겨 둔 기력의 열매가 하나 남아 있었다.

"자, 여기. 너 주려고 빼 둔 거야."

"와아! 오빠 최고!"

나는 허리 가방에서 열매를 꺼내, 예은이에게 건넸다.

예은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끈적거리지만 엄청 달다!"

"활력의 열매도 먹어 볼래?"

"응? 나 주는 거야? 고마워, 언니!"

예은이가 열매를 먹는 게 복스럽고 흐뭇하게 보였기 때문일까.

나와 보폭을 맞춰 걷던 도시은도 허리 가방에서 열매를 꺼냈다.

그 덕분에 예은이는 활력의 열매도 맛볼 수 있게 됐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보고에 도착했다.

* * *

본관에서 가장 지하에 있는 보고는 몇 겹에 중첩된 결계 마법에 의해 철통같은 보호를 받고 있었다.

내가 알아차린 것만 해도 그런데, 알아차리지 못한 것까지 고려하면 보안 수준이 만만치 않으리라.

"본가에서 보관하는 보물은 대부분 신검 도가의 역사와 관련이 있고, 가문을 상징하는 것들이지. 그만큼 중요한 곳이다 보니, 역사를 통틀어 가주 이외에 본관의 보고에 출입한 사람이 많지 않단다."

"…."

"너희도 이제 그 많지 않은 부류에 들어가게 됐구나."

그렇게 말을 마치고.

할아버지가 철문에 마나를 흘리고, 사자의 얼굴이 돌출된 문고리에다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문고리를 좌우로 밀었다.

'…미닫이문이었구나.'

보고의 장치가 작동했다.

철문 2개가 덜커덕 소리를 내며 좌우로 밀려났다.

이내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마나가 짙어.'

마나의 기운을 동반한 바람.

보고에 보관된 보물들이 품고 있는 기운이 새어 나온 것이다.

나는 밀도가 높은 마나를 느끼고 철문 너머를 들여다보려고 했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문밖에서는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은폐 마법이 걸려 있지. 확인하려면 들어가서 하도록 해라."

할아버지가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그러고는 품속을 뒤졌다.

"시은아, 견우야."

"네, 가주님."

"이것을 끼고 들어가거라. 그래야 보고가 너희를 허가받은 대상으로 인지할 테니까."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목걸이.

나와 도시은은 할아버지가 건네준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이제 안에 들어가도 되나요?"

"그래,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안에서 원하는 보물을 한 점 골라서 밖으로 나오려무나."

"정말 아무거나 골라도 되나요?"

당연한 일이지만.

가문에서 내주는 보물의 소유권은 완전히 내게 있는 게 아니었다.

영약이나 소모품 같은 것을 제외한 보물은 가문에서 대여해 주는 거라고 보는 게 맞았다.

그렇더라도 할아버지가 본가에서 보관하는 보물을 내어 주겠다는 것은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조금 전에 할아버지가 말했듯이, 저 안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보물이 즐비하고 있을 터였다.

'게임에서 신검 도가의 보물 중엔 일격에 상대를 죽이는 검도 있다고 언급됐었는데….'

그렇다면 게임에서 설정상 언급된 사기급 아이템을 챙길 수도 있겠다.

이에 나는 재차 확인을 받기 위해 할아버지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할아버지 왈.

"가주로서 공식적으로 말해 놓고, 한 번 한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지. 보고에서 너희가 원하는 무엇이든 한 점 가지고 나와도 된다."

"오."

"단."

할아버지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바라건대, 너희에게 가장 필요한 보물을 골랐으면 좋겠구나. 혹시나 너희가 그러지는 않겠다만, 만약에 너희가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 보물을 고른다면, 그때는 너희에게 실망할지도 모르겠구나."

"…."

"현명하게 선택하기를 바라마."

사실, 기대도 안 했다.

할아버지가 그런 보물을 우리에게 척 내줄 리가 없었다.

나는 괜히 욕심이나 부리지 않고, 사전에 점 찍어 둔 보물을 고르기로 했다.

"참고로 안에 설치된 보안 마법이 너희가 밖으로 가지고 나갈 보물을 확인할 것이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내가 허가한 보물 외에 다른 보물을 몰래 가져갈 생각은 하지 말거라."

"…."

쳇,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아쉽게도 몰래 보물을 가지고 나갈 생각은 접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내 생각을 꿰뚫어 본 듯한 할아버지의 눈초리를 피했다.

"그럼 시간은 개의치 않아도 되니 안에 들어가서 차분히 살피거라."

* * *

보고에 발을 들인 순간.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감추던 보안 마법이 덮쳐들었다.

하지만 목걸이의 효과가 작용하며, 보안 마법은 우리 몸을 탐색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우리의 출입을 허가한 것이다.

그로부터 몇 걸음을 떼자.

"아, 보인다."

그동안 은폐 마법에 감추어져 있던 보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

"아…."

공간에 비해 안치된 보물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허전하다는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눈에 보이는 보물 하나하나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위엄을 자랑하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는 보물을 눈에 담은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도시은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는지, 감탄사를 흘렸다.

"가까이 보러 갈까?"

"아, 응. 그러자."

계속 넋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보고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도시은은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며 보물을 구경했다.

'뇌정(雷精)도 여기에 있구나.'

[뇌정]

◆ 소모품 분류

―영약

◆ 상세 설명

―뇌조의 기운이 응축된 내단.

◆ 상세 효과

―흡수 시, 체내 마나를 소모하는 모든 공격을 번개 속성으로 변환한다.

―흡수 시, 캐릭터의 친화 속성이 번개 속성으로 변경된다.

―흡수 시, 번개 속성 공격에 대한 비약적인 내성을 지닌다. 그리고 접촉한 공격을 Mp로 환원한다.

―흡수 시, 번개….

게임에서도 구하기 힘들었던 뇌정.

나는 벼락이 담긴 듯한 구슬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탐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한테 그렇게 필요한 것은 아니야.'

이제 나는 벽뢰를 사용할 수 있어, 뇌정이 보유한 효과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게다가 뇌정은 구하기는 힘들어도 아예 구할 수 없는 게 아니었다.

만약 뇌정이 필요해지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면 될 일이었다.

'본가의 보고에 언제 또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일인데, 다른 곳에서도 구할 수 있는 보물을 고를 순 없지.'

게임 스토리에 따르면, 나는 다시 이 보고에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고려하면 두 번.

그러니 할아버지의 말대로 현명히 본가의 보고에서만 얻을 수 있는 걸 고르는 게 나았다.

이를테면, 검이라든가.

'아, 게이트 키는 저기에 있구나. 아마 저게 게임에서 강한별이 받는 게이트 키인 거겠지? 음… 청색은 게임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건데.'

게이트 키가 안치된 곳을 지나.

나는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무구들을 찾을 수 있었다.

"…."

벽에 걸려 있는 검들.

나는 거리를 두고 검들의 자태를 일일이 살폈다.

'수왕검도 있네.'

신검 도가 가주의 자격을 나타내는 보검인 수왕검은 벽면의 정중앙에 걸려 있었다.

"아."

이내 한 검이 눈에 들어왔다.

[수연검(水煙劍)]

◆ 장비 분류

―한손검

◆ 상세 설명

―신검 도가의 2대 가주 도민건이 애용한 검 중 하나.

―적색 게이트 '운디네의 섬 V'에서 물의 정령왕 운디네의 가호 속에 기존의 낡은 모습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한 검.

―주인을 시험한다.

◆ 상세 효과

―체력 +3, 근력 +3

―착용 시, 체내 마나를 소모하여 물방울을 만들어낸다.

―(해금 조건: 근력 50 이상)

물방울이 자욱이 퍼진 물안개라는 의미가 담긴 수연검.

게임에서도 등장하는 검이었다.

'시은이 누나를 상징하는 검이지.'

마치 물안개가 일렁이는 것만 같은 검신을 바라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게임에서 도시은이 등장할 때부터 수연검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녀는 이 시기에 얻은 게 아닐까 싶었다.

이에 나는 한쪽에서 검을 살피던 그녀를 부르기로 했다.

"시은이 누나, 이쪽으로 와 볼래?"

"응, 왜?"

"이 검 어때?"

"아…."

나는 수연검을 가리켰다.

그러자 도시은이 검을 발견하고는 나직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는 내가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수연검을 쳐다보았다.

'자신과 잘 맞는 무구는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던데, 검과 교감이라도 하는 건가?'

도시은은 모르는 듯했지만 그녀는 수연검을 보게 된 순간부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푸른 눈도 크게 떠져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넌지시 말을 붙였다.

"정말 괜찮은 검인 것 같지 않아? 체내 마나를 물방울로 치환한다니, 벽뢰랑 상성이 좋을 것 같아."

"…그러게."

실제로 게임에서 도시은은 그렇게 수연검의 힘을 사용해, 벽뢰를 크게 증폭시키고는 했다.

벽뢰와 상성이 좋은 검이었다.

그때, 그녀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이 검으로… 고를 거야?"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흔들리는 푸른 눈.

도시은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가 불안해하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수연검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나는 게임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을 한 그녀를 보고 키득거렸다.

"솔직히, 수왕류를 쓰는 사람이면 다 탐을 낼 만한 검이 아니겠어?"

"아… 그렇지…."

"근데 나랑 안 맞을 것 같아."

"어?"

"누나랑 달리, 나는 체내 마나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거든. 그래서 수연검을 잘 다루지 못할 것 같아."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수연검은 정말 좋은 검이었지만, 내가 사용하기에는 부담이 됐다.

마력 수치가 30이 조금 넘는 내게 마나 소모가 큰 전투 스타일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누나의 기연을 뺏을 순 없지.'

그런 이유가 컸다.

악역이 얻게 될 기연이면 모를까, 강한별과 함께 선역의 편에 서게 될 사람들의 기연을 뺏고 싶지 않았다.

괜히 내가 그들의 기연을 먹었다가 잘못해서 게임 스토리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었으니까.

"오히려 나는 수연검은 누나한테 더 어울릴 거라 생각하는데,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

"…좋아. 아니, 좋아. 너무 좋아."

그래서 나는 수연검을 도시은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벼락꽃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는 모습이 퍽 웃겼다.

이내 그녀가 화사하다 싶을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마워."

"고마우면 나 좀 잘 챙겨 줘."

"잘 챙겨 주라니… 어떻게?"

"가문에서나 몇 년 뒤에 가게 될 학원도시에서나, 내가 도와달라 하면 누나가 도와달라고."

"아, 응.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줘. 나쁜 일만 아니라면 힘이 닿는 대로 도와줄게."

"정말? 약속한 거다?"

"응."

나한테 코가 꿰인 줄도 모르고.

도시은은 수연검을 두 팔로 안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하려고? 혹시 너도 검을 찾는 거라면… 찾는 거 도와줄게."

"고맙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나는 도시은의 배려를 거절했다.

그러고는 수연검이 걸렸던 벽에서 조금 더 걸음을 옮겼다.

"나도 이미 찾았거든."

"…그래?"

도시은을 상징하는 검이 있다면, 그녀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도견우에게도 그런 검이 존재했다.

도견우를… 아니, 나를 상징하는 검.

이윽고 나는 그 검을 눈앞에 두고 입가를 끌어 올렸다.

"이 검으로 하려고."

"그건…."

날이 한쪽에만 달린 검.

별다른 장식은 찾아 볼 수도 없는, 검신이 새까만 검이었다.

나는 벽에 걸린 그 검을 꺼내서는, 조명 아래에서 검을 기울였다.

'확실해.'

보는 각도에 따라 군청색의 빛을 흩뿌리는 검.

군청검(群靑劍)이었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28)

게임에서 도견우가 강한별과 함께 신검 도가와 얽힌 문제를 해결하고, 그 보상으로 얻게 되는 군청검.

군청검은 게임에서 얻는 무기 중 도견우와 상성이 가장 잘 어울리는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수왕류를 전문으로 하는 도견우를 한 단계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러니 내가 보고에서 고를 검은 이것밖에 없어.'

보고에는 게임에서 언급되지 않은 검들이 존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군청검만큼 나와 잘 맞는 검은 없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끌림을 느꼈다.

지잉.

도시은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군청검을 인지한 순간, 그때부터 다른 검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상에 나와 검만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검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내가 부르고 있는 건가.

'검이 울고 있어.'

착각이 아니었다.

내 손에 쥐어진 검이 반갑다는 듯 미약하게 몸을 떨며, 맑은 소리를 전해 오고 있었다.

그때 확신했다.

내게는 이 검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군청검의 정보를 열람했다.

[군청검]

◆ 장비 분류

―한손검

◆ 상세 설명

―신검 도가의 2대 가주 도민건이 애용한 검 중 하나.

―뇌각수(雷角獸)의 뿔을 소재로, 100일 동안 담금질하여 만들어진, 세상에 단 한 자루밖에 없는 검.

―주인을 시험한다.

◆ 상세 효과

―체력 +3, 민첩 +3

―착용 시, 체내 마나를 소모하여 역날검으로 전환할 수 있다.

―착용 시, '수왕류'란 이름이 붙은 모든 스킬의 레벨을 1 올린다.

―스킬 「전류 친화」

―(해금 조건: 민첩 50 이상)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군청검은 수연검에 뒤처지지 않는 성능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니, 내게는 군청검이 더 앞섰다.

수연검이 마나를 물방울로 변환해, 그것을 전도체로 삼아 자유자재로 수왕류의 공격력을 올리는 반면.

군청검은 단지 장비하는 것만으로 수왕류의 경지를 끌어올렸으니까.

마나 소모가 적은 방향을 선호하는 내게는 군청검이 더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마나를 어떻게 흘리면 되는 거지?'

칼날과 칼등의 위치가 반대로 되는 역날검 모드도 있었다.

상대를 상처 입히는 것을 두려워한 도견우의 유약함을 상징하던 한편, 상대의 Hp를 0으로 떨어뜨리는 게 무조건 사망으로 귀결되지 않는 게임에서는 불필요했던 기능.

하지만 게임이 현실이 된 세상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상대의 Hp를 0으로 만들게 되면 정말 상대를 죽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학원도시에 들어가 많은 적들을 상대해야 하는 이상, 적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다.

군청검은 그런 목적에도 부합했다.

'아, 이렇게 흘리면 되는 건가.'

딱히 내가 게임의 도견우와 같이 불살주의를 관철하려는 건 아니다.

누군가를 죽여야 할 경우가 생기면 나는 원하는 엔딩에 도달하기 위해 응당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죽여야 할 적이 아니라면 그리고 죽여야 할 이유가 없다면, 되도록 죽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살인을 익숙하게 여길 정도로 미래를 위해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살인 기계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살았다가는 어느 순간 세상 사람들에게 고립되고 말리라.

"오, 됐다."

이윽고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군청검을 역날검으로 바꿔, 본래 칼날이었던 부분을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훑었다.

타격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날이 칼등처럼 무뎌져 있었다.

반대로 칼등 부분은 날이 서 있어, 살짝 만진 것만으로도 손가락 끝에 피가 맺혔다.

'이 정도라면 시비를 거는 놈들을 마음껏 때릴 수 있겠는데? 그래도 잘못해서 급소 부위는 때리지 않게 조심해야겠네.'

역날검도 결국 검이다.

칼등으로 휘두른다고 믿고 설치다 자칫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다.

손가락 끝에 맺힌 피를 핥은 나는 군청검을 원상태로 되돌렸다.

그러고는 검집에 넣었다.

"누나, 다 골랐으니 그만 나가자."

"그래, 다들 밖에서 기다리시겠다."

나도, 도시은도.

원하는 검을 손에 넣게 된 우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보고를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자, 할아버지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필요한 것은 골랐더냐. 오호, 둘 다 검을 고른 모양이구나."

"…."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가운데.

할아버지는 그들의 시선을 등지고 우리가 보고에서 가지고 나온 검을 건네받았다.

"수연검과 군청검인가. 두 검 모두 굉장히 좋은 검이지. 어쩌다 보니 둘 다 2대 가주님께서 애용한 검을 고르게 됐구나."

"네, 가주님."

"소중히 다루거라. 여기 있다."

할아버지가 검을 돌려주었다.

나와 도시은은 검을 돌려받으며, 할아버지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한편.

"가주님."

"그래, 견우야. 왜 그러느냐."

나는 흐뭇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에게 용건을 꺼냈다.

내가 본가에 오게 된 목적이면서, 지금까지 말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용건이었다.

"검을 새로 얻기도 했고, 오랜만에 가주님을 만나 기뻐서 그러는데요."

"그래서?"

요놈 봐라, 하듯.

한쪽 눈썹을 꿈틀거린 할아버지가 추임새를 넣었다.

나는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데, 할아버지의 검을 한 수 받아 보고 싶어서요. 저한테 가르침을 주시면 안 될까요?"

"…!"

"호오."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할아버지의 뒤로.

아버지가,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이 소스라치는 기색이 엿보였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손주에게 한 수 가르쳐 준다라…. 허허, 생각해 보니 내가 너희들하고 검을 나눈 적은 없는 것 같구나."

한편 할아버지는 내 부탁을 받고는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수염을 쓰다듬는 할아버지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래, 좋다. 손주의 깨달음을 위해 할아버지로서 못 해 줄 것도 없지."

"…!"

"네. 감사합니다, 가주님!"

"하지만 시간이 늦었기도 한 데다, 게이트 안에서 고생한 너하고 바로 대련하는 것은 힘들겠구나. 그러니 내일 아침에 하도록 하자꾸나."

할아버지가 선뜻 허락했다.

나는 혀를 내두르고 있는 가족들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할아버지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걸로 담력을 얻을 수 있겠어.'

* * *

내가 가주님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그 이야기는 삽시간에 본가에 퍼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일어나는 대로 아침도 먹지 않고 본가를 떠나려던 가문의 사람들이 나와 할아버지의 대련을 보기 위해 본가에 남았을 정도라고 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사용인들도 흥미를 보이고 대련을 참관할 만한 핑계거리를 찾고 있다나 뭐라나.

다들 참 할 짓도 없다.

이에 아버지가 말하기를.

"나도 그렇고, 다른 형들도 그렇고. 다들 가주님을 대하기 어려워해서 대련을 신청할 엄두도 못 내는데, 손주뻘인 네가 덥석 대련을 청하니 난리가 날 만도 하지."

"그럼 아빠는 한 번도 할아버지랑 대련한 적이 없는 거예요?"

"…젊었을 적에 몇 번 있긴 했지. 가주님이 내 실력을 확인해 보겠다며 대련하게 된 거지만."

"대련을 신청한 적이 없는 거네요."

"그래, 욘석아. 우리 형제들 중에서 대련을 신청한 사람은 둘째 형이랑 넷째 누나밖에 없을 거다."

"아빠는… 겁쟁이였구나."

"아들아."

"네, 아빠."

"세상에 지는 승부에 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승부는 없단다. 아빠는 지는 승부는 하지 않아."

"아, 네…. 그래도 인정."

"그러는 사람이 나한테 연애하자고 그렇게 졸졸 따라다녔어?"

"어허, 당신! 내가 언제 그랬다고. 따라다닌 건 내가 아니라 당…."

"응?"

"…내가 당신 좋다고 따라다녔지. 아들아, 모름지기 남자라면 때로는 질 것을 각오하고서도 임해야 하는 승부가 있는 거란다. 그렇게 해야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거야."

"아, 네…."

"그래도 지는 것이 있으면 그만큼 오는 것도 있다고, 내가 낮엔 져도 밤에는…."

"애들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나는 낮에도 밤에도 다 이겨!"

"크흠! 어쨌든 우리 세대는 몰라도, 네 사촌들 중에서는 네가 처음으로 가주님에게 대련을 신청한 셈이지. 그러니 다들 놀랄 수밖에. 도대체 겁이 없는 건지… 내 아들이지만 정말 놀랍다."이야기가 곁길로 새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여하튼.

"몸은 잘 풀었느냐."

"네, 가주님. 다 풀었어요."

나는 할아버지와 검을 주고받으러 훈련장으로 나섰다.

"…."

우리의 대련을 참관하는 사람들은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며 나는 군청검을 뽑았다.

"첫수는 양보해 주마. 네가 원하면 그보다 더 양보해 줄 수도 있고."

할아버지는 훈련용으로 사용하는 목검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내게 선공을 양보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첫수는 양보해 주지 않아도 돼요. 가주님이 진심으로 휘두르는 검을 받아 보고 싶거든요."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구나."

"저는 만용을 부리는 게 아닌데요."

"…."

"어차피 제가 가주님하고 대련하면 지는 것밖에 더 있을까요? 그리고 가르침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지금 제 수준에서 받을 수 있는 가르침은 전형적이기만 하겠죠."

"…그걸 알고 있으면서 왜 나한테 한 수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이냐."

할아버지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목소리에서는 언짢음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나는 기가 죽는 일 없이 말을 이었다.

"가주님은 엄청 강하니까요."

"…."

"우리나라에서 최강이잖아요."

"크흠…. 섣부르게 말하지 말거라. 나는 그중 하나일 뿐이다. 어쨌든, 더 말해 보려무나."

"그러니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몸으로 직접 깨우치는 것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가주님 같은 강자의 검을 받아 보는 귀중한 경험을 언제 하겠어요?"

"다시 말해, 내 검을 받는 것으로 강자를 상대하는 역치를 높이겠다는 뜻이냐?"

"네, 맞아요."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할아버지의 프레셔를 받는 것으로 담력을 얻기 위해서였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의 검을 받으면서 몸으로 깨닫는 것도 있기는 하리라.

나는 할아버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내 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네가 한 말이 틀리지는 않겠구나. 보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그 세상을 경험해 보기라도 해야 하는 법이지. 네 생각이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 신검 도가의 사자라면 그래야지."

"그럼…."

"그래, 좋다. 네가 그리 부탁하니, 내가 보는 세상을 보여 주마."

"…감사합니다, 가주님."

"감사는 내 검을 받은 뒤에 해라. 받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

"물론, 전력을 다하지는 않을 거다. 그랬다가는 네게 보여 주는 세상이 저세상이 될 수도 있으니까."

"…."

"네가 거의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검을 보여 주도록 하마."

할아버지가 중단세를 취했다.

그 순간, 기류가 바뀌었다.

거대한 압박감이 기지개를 켰다.

메시지가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프레셔에 노출됐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80% 감소합니다.]

…내가 지금 잘못 본 건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메시지를 계속 응시해도,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어디를 보는 것이냐."

"…."

"똑바로 나를 쳐다보거라."

"…."

"만약 이것이 실제 전투였더라면, 너는 이미 목이 날아갔을 거다."

"…."

"두려워하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두려움을 마주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이지. 날 보거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무언가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몸이 찌부러질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몸이 덜덜 떨렸다.

회피 본능이 반응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나는 이를 악물었다.

군청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느새 땀에 흠뻑 젖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든 할아버지를 쳐다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거인처럼 보였다.

그 거인이 경고했다.

"그럼 간다."

할아버지의 목검이 들어온다.

나는 그 목검을 피하기 위해….

'...어?'

이게 뭐야.

왜 목검이 눈앞에 있는 거지?

───!

사고가 따라가지 않는다.

그러니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러니 움직일 수 없다.

그렇다면….

파직!

본능에 맡길 수밖에 없다.

* * *

탕! 휘익! 툭! 탁! 툭! 터더덕….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떠올라 몇 바퀴나 회전한 도견우가 바닥을 구른다.

그러다 훈련장 외벽에 부딪혀서야 겨우 굴러가던 것을 멈췄다.

"…."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본 광경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본 것이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들 태반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도견우에게 다가온 도예익이 검을 내리치고 있었으니까.

그 정도로 도예익이 보인 움직임은 인지 범위를 벗어난 경지에 있었다.

"하…."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들이 느낀 경이는 퇴색되어 갔다.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 쓰러져 있는 도견우를 보며 조소를 흘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렇게 질 거면서 뭐 하러 덤벼?"

"가주님께서 첫수를 양보하겠다고 말하셨을 때 그냥 들었어야지."

"있어 보이는 말이나 꺼내 놓고서 결국 저런 꼴이나 보이려던 거였어? 진짜 창피하다."

"가주님에게 아양이나 떨려 하고, 사자가 아니라 이리 새끼 아니냐?"

열두 살이라는 나이에 벽뢰를 일으켜, 2대 가주의 기록을 깨뜨린 도견우.

하룻밤 새에 자신의 가치를 드높인 그를 은연중 아니꼽게 여기고 있던 사람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비웃고, 깔보고, 조롱해 댔다.

그렇게 해서라도 도견우의 가치를 깎아내리려고 발악했다.

"흠…."

도예익은 그들이 지껄이는 소리에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오로지 바닥에 쓰러진 도견우에게 향하고 있었다.

'벽에 처박아 버릴 생각이었다.'

도예익은 정면에 있는 벽을 보고, 도견우가 자신의 검에 맞고 날아가 바닥을 구른 경로를 더듬었다.

그는 자신이 의도한 방향과 달리, 왼쪽으로 굴러가 그곳에 있는 벽에 몸을 부딪쳤다.

그것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내 검에 반응했다는 건가.'

자신이 목검을 내려치던 그때.

도견우는 찰나와도 같은 그 순간에 검을 틀어 자신의 공격을 받아 내, 그 방향으로 회피한 것이다.

"…."

그리고 그렇게 요란하게 구른 것은 충격을 완화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렇게 해서 공격을 흘려보냈다.

"허…."

고작 열두 살밖에 안 되는 아이가.

자신의 공격에 대응했다는 말인가.

도예익은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내 그의 입가가 올라갔다.

"정말 무서운 놈이로구나."

이런 귀여운 사자 새끼를 보았나.

그렇게 나직이 중얼거렸다.

* * *

인지를 초월한 공격.

나는 눈앞까지 당도한 목검을 보며 아무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파직!

다만 회피 본능이 호소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공격을 받는, 찰나와도 같은 시간.

그때 내가 어떻게 움직인 것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

정신이 들었을 때는 훈련장 바닥에 얼굴을 맞대고 있었으니까.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고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

저만치 떨어진 거리에서 사람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건대, 짐작이 가는 게 하나 있기는 했다.

'뻔하지, 뭐.'

아마 첫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꼴사납게 나가떨어진 내가 우습다며 비웃고 있을 것이다.

'그럼 직접 받아 보든가.'

마음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상대할 가치도, 그럴 힘도 없었다.

겨우 한 번 공격을 받았을 뿐인데 기력이 쭉 빠진 것만 같았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엎드려 있기도 불편해, 나는 천장이 보이게 몸을 뒤집었다.

할아버지가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괜찮으냐."

"…안 괜찮은 것 같은데요."

"말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구나."

"…."

"하긴, 직전에 내 공격을 흘렸는데 어디 다치거나 그랬을 리가 없지. 다쳤다고 하더라도 구르면서 생긴 찰과상밖에 없을 거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일이 아니란 듯 시원하게 껄껄 웃는다.

나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 기운이 남아 있는 듯한데 한 번 더 검을 받아 볼 테냐?"

"…."

아까 그 공격을 또 받아 보라니.

내가 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 지금 나는 벌레를 씹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히죽거렸다.

"아니면 이대로 그만할까?"

그렇다고 담력을 얻지 못한 상황에 끝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복잡한 머리를 굴렸다.

바로 그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킬을 얻었습니다.]

[담력 Lv 1]

[담력 Lv 1]

◆ 스킬 분류

―조건 발동형

◆ 상세 효과

―프레셔에 의해 하락하는 능력치를 5%까지 보전한다.

―프레셔에 노출될 경우, 집중력과 회피율이 5% 상승한다.

"아…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란 거냐?"

떠오를 거면 진즉 떠오를 것이지.

나는 담력을 얻은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메시지를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더 이상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한 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감사를 표했다.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찼다.

"허, 좋다 말았구나. 몸도 괜찮으면 한 판만 더 하지 그러냐. 다음에는 아까보다 살살 상대해 주마."

"아니에요, 가주님! 감사합니다!"

이미 얻을 것은 얻었다.

더는 할아버지의 검을 받아 내느라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단칼에 사양했다.

결국 할아버지는 아쉬워하면서도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의 눈이 대련을 관람하던 사람들에게 향한 것이다.

"그래도 내가 가르쳐 주기로 해 놓고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지. 기분이다! 누구든 좋다. 너희 중에 내 검을 받아 볼 사람이 있다면 모두 앞으로 나와라!"

"…!"

"어제 평가전에 참가한 사람들은 1명도 빠짐없이 나오도록 하고."

대련을 참관하던 이들은 하나같이 날벼락을 맞은 듯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들을 보며 키득거렸다.

"꼴 좋네."

어디 직접 받아 보세요.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29)

할아버지가 가르침을 주겠다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적어도 한 수라도 받아야 했다.

그 결과, 내 대련을 참관하러 온 사람들은 졸지에 할아버지와 대련을 벌이게 됐다.

"큭!"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전법이다! 그러나 목적 없이 도망만 다녀서는 포식자에게 쫓기는 피식자의 꼴밖에 더 되겠느냐."

"…죄송합니다."

큰아버지, 둘째 큰아버지는 무난히 할아버지의 검을 받고 물러났다.

다음으로 셋째 큰아버지, 도범준.

도승우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음!"

이내 셋째 큰아버지가 돌아가고.

큰고모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훈련장으로 걸어 나왔다.

할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렸다.

"구두를 신고 싸우겠다는 거냐?"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을까요. 저도 알았더라면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오지는 않았겠죠."

큰아버지들과 달리.

큰고모는 할아버지를 대하는 것을 상대적으로 덜 어려워했다.

그래서 그런지 대수롭지 않아 하며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한쪽에 가지런히 모았다.

"저는 신발 없이 상대하는 거니까, 그걸 감안해서 봐주셔야 해요."

"그럴 일은 없다."

싹싹하게 구는 큰고모.

할아버지는 코웃음을 치는 한편, 마냥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직후 두 사람의 검이 부딪혔다.

'…대단하네.'

할아버지가 큰고모에게 어느 정도 너그러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큰고모의 검술은 현란했다.

쾌를 토대로, 환(幻)을 섞어 넣은 검술이 할아버지의 움직임을 봉하듯 몰아붙이고 있었다.

첫째 큰아버지도, 둘째 큰아버지도, 셋째 큰아버지도 저만큼 할아버지를 몰아붙이지는 못했었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오빠들을 따라잡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나를 이기기에는 아직 멀었다."

"…!"

할아버지가 검을 크게 휘둘러서는 큰고모의 검을 올려쳤다.

검을 쥔 큰고모의 손이 솟구치며, 빠르게 이어지던 검술이 끊겼다.

환상이 사라졌다.

할아버지의 검은 그 틈에 움직여, 큰고모의 목 언저리에 닿았다.

"무엇이 부족했는지는 알았겠지."

"…한 수 배웠네요. 감사합니다."

대련이 끝났다.

큰고모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구두를 벗어 놓은 곳으로 이동했다.

"와…. 오빠, 나도 큰고모하고 같은 검술을 배우고 싶어! 너무 예쁘다!"

"그러게. 대단하기는 하더라."

조금 전만 해도 졸린다고 칭얼대던 예은이가 눈을 빛낼 만도 했다.

나도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큰고모의 검술을 보고 환검에 대해 관심이 생길 정도였다.

'이제 아빠 차례인가.'

그리고 이윽고.

아버지가 할아버지 앞에 섰다.

"아빠! 힘내라, 힘!"

예은이가 큰소리를 내며 응원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피식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챙!

대련이 시작됐다.

아버지가 재빨리 달려들었다.

아버지의 검은 고모의 검과 달리 화려함이 없었지만, 깨끗했다.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고, 상황에 즉각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몇 번 합을 주고받고부터는 할아버지에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끝나는가 싶더니….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 거지?'

멀리 떨어져서 들리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검을 부딪친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듯했다.

직후, 아버지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치링!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검을 이용해, 그 힘을 반동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할아버지에게 뛰어가며,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치링!

아버지의 행동이 과감해졌다.

찌르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품에 깊이 파고들어, 할아버지가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아빠가 왜 저러지?'

조금 전, 할아버지가 건넨 말이 무언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휘익!

아버지의 검이 닿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검이 먼저 아버지의 목젖에 닿은 것이다.

"…졌습니다."

"그래도 실력이 녹슬진 않았구나."

"매일같이 현장에서 구르고 있는 몸이니까요."

아버지가 패배를 인정했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검을 거두고, 아버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그 후에 자리로 돌아온 아버지는 영 밝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마 당신이 사람이 변한 것처럼 매섭게 검을 휘두를 줄은 몰랐어."

"그걸 이제 알았어? 나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라고."

"아빠! 제가 이기라고 응원했는데, 지면 어떡해요!?"

"어이구, 우리 딸! 그랬어? 아빠가 져서 미안해. 그리고 응원 고맙다."

어머니하고 예은이가 말을 걸자, 아버지의 얼굴이 누그러지긴 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물었다.

"가주님이 뭐라고 하신 거예요?"

"어?"

"아까 보니 가주님과 무슨 대화를 나누던 것 같던데, 아빠 움직임이 그때부터 달라져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야. 애들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야. 마저 대련이나 지켜보자."

내 머리를 대뜸 헤집으며 아버지가 완곡히 말을 돌렸다.

'그렇게 말하면 캐물을 수 없지.'

나는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했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했지만, 답하지 않으려는 아버지를 배려해서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은… 시은이구나."

"네, 가주님. 잘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세대의 차례가 지나가고 그 아랫사람 세대의 차례가 왔다.

할아버지는 훈련장에 등판한 도시은을 보고 입가에 호를 그렸다.

"네가 가진 모든 힘을 선보여 봐라. 어디, 손녀의 벽뢰를 맞고 싶구나."

"그 전에,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 그래, 말해 보거라."

"저도 견우가 그랬던 것처럼 가주님의 한 수를 받아 보고 싶습니다."

"…."

저 누나는 왜 저러는 거지?

담력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고.

나는 도시은을 빤히 쳐다보았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황당하다는 반응을 드러내고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저도 몸으로 직접 깨우치고 싶습니다."

"호오."

그럼에도 도시은은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탁했다.

할아버지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 좋다. 어디 받아 보거라."

"네."

"…."

도시은이 수연검을 쥐었다.

'도대체 어떻게 움직인 거지?'

들고 있던 검을 목검으로 교체하고 자세를 취하는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의 검을 관찰하고자 사소한 동작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눈을 한 번 깜빡한 사이, 할아버지를 놓치고 말았다.

'언제….'

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거리.

할아버지는 한 걸음 만에 좁혀서는 도시은의 눈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마나를 발현한 기색도 없이.

내가 보고,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리고 검을 내리쳤다.

기초식 제1형, 사냥의 자세.

단순히 내려치는 동작 한 번으로.

탕! 휘이이익! 쿵!

"윽…."

"…."

조금 전에 내가 그랬듯.

도시은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할아버지의 검을 받은 그녀가 순간 지면에서 떠올라, 뒤에 있던 벽으로 날아가 처박힌 것이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반면.

"이번에는 제대로 날아갔군. 역시 그건 피했던 건가…."

"…."

할아버지는 벽에 달라붙은 것처럼 주르르 내려오는 도시은을 보면서 영문을 모르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한순간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시선이 내게 향한 것 같기도 했다.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시은이 누나도 역시 할아버지는 못 당하는구나.'

한편 나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는 도시은을 걱정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부축을 마다하며, 할아버지에게 걸어갔다.

"한 수, 잘 배웠습니다."

"그래, 너와 검을 나눌 수 있어 무척 즐거웠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서포터에게 가서 검사라도 받거라."

"네."

"…."

절뚝절뚝.

그렇게 도시은은 가족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안 다쳤으면 좋겠는데. 그 누나가 다칠 사람은 아닐 테지만…."

이따 문자나 보내 볼까.

나는 그녀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다시 다른 사람들의 대련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가주님, 가르침을 부탁드…."

"너도 내 검을 받아 보겠느냐."

"…네?"

"어디 한번 받아 보거라."

도시은의 뒤를 이은 사람이 별안간 할아버지의 검을 받고 날아갔다.

"다음! 너도 한번 받아 보거라."

"다음!"

그 후에도, 그 후의 그 후에도….

할아버지는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손주들을 벽에 처박아 버렸다.

그렇게 사람들이 검에 맞고 날아가 벽에 처박히던 와중에….

"다음! 그래, 승우구나."

"자, 잘 부탁…."

"너도 한번 받아 보거라."

"…."

도승우의 차례가 됐다.

내 입꼬리는 자연히 올라갔다.

'도승우 저놈도 날아가겠네.'

이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두고두고 보게 간직해야 한다.

나는 도승우의 대련을 영상으로 담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냈다.

동영상 촬영 버튼을 누른 그때.

탕! 휘이이이이잉! 쾅!

"…커헉!"

할아버지의 검을 맞은 놈의 발이 지면으로부터 떨어져,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들이 그러했듯, 괴상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날아가 벽면에 처박혔다.

"오."

계속해서 같은 위치에 충격이 전해진 탓일까?

훈련장 벽면이 살짝 패여 있었다.

도승우는 그 부근에 끼어서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도승우의 가족들이 놈을 꺼내기 위해 황급히 달려가야 했을 정도다.

'잘 나왔는데?'

나는 그 모든 장면을 담았다.

도승우가 날아가는 속도가 빨라서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긴 했지만,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이걸 나만 혼자 볼 수 없지.'

연하늘한테도 보여 줘야겠다.

나는 그녀에게 톡을 보내려 했다.

"아, 맞다."

그제야 깨달았다.

어제 본가에 도착한 이후로 그녀의 톡을 보지 않고 있었다.

도승우와 싸우랴, 평가전을 치르랴, 할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느라 워낙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날짜가 바뀌어서야 들어간 톡에는 그녀가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연하늘]: 나 지금 정상이다?

[연하늘]: (사진)

[연하늘]: 자! 인증샷이야

연하늘이 사진을 보내 놓았다.

노을이 지는 산의 경관을 배경으로 찍은 셀카였다.

연하늘은 쑥스러워하며 손가락으로 V 자를 만들고 있었다.

"허, 참…."

그러고 보니 내가 인증샷을 찍어서 보내라고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산 정상을 찍어서 보내라는 뜻이었지, 셀카를 찍어서 보내란 뜻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오해한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음…."

사진이 제법 잘 나오기는 했다.

정상에 오르느라 땀을 흘린 탓인지 하늘색 머리칼이 뺨에 달라붙은 게 보였다.

수줍어하는 토끼 귀가 제법 귀엽기도 했고.

'…저장해야겠다.'

나는 그 사진을 저장했다.

그러고는 뒤늦게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 미안, 톡 이제 봤어. 본가에서 일이 있다 보니 바빴거든

[나]: 사진 잘 나왔네

그때, '1' 표시가 사라졌다.

연하늘이 톡을 읽은 것이다.

[연하늘]: 괜찮아 ^^

[연하늘]: 하루 늦으면 뭐 어때

[연하늘]: 그럴 수도 있지

[연하늘]: 우리가 무슨 사이도 아니고

"응? 뭐야?"

메시지가 갑자기 삭제됐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연하늘]: 괜찮아 ^^

[연하늘]: 하루 늦으면 뭐 어때

[연하늘]: 그럴 수도 있지

[연하늘]: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연하늘]: 보육우언 애들이 장난친 거야!

[연하늘]: 오해하지 마!

굉장히 당황해서 보낸 듯한 톡이었다.

"지금 보육원 애들이랑 놀고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육원 애들이 장난쳤다고 해도, 굳이 삭제할 필요가 있었나?

그냥 연하늘의 생각을 존중하기로 했다.

[나]: 오키 :D

[연하늘]: 어쨌든 나는 보낸 거야

[연하늘]: 그러니까 너도 보내 줘

"인증샷? 내가 보낼 게 있나…."

나는 갤러리를 뒤적였다.

그녀가 사진을 보내 주기도 했으니, 나도 보내 줘야 할 것 같았다.

'아, 이거면 되겠네.'

마침 어제 찍은 사진이 있었다.

나는 갤러리에서 사진을 전송했다.

[나]: (사진)

[나]: 자, 인증샷

어제 게이트에서, 서로 혀가 묶인 머드 케로들 앞에서 찍은 셀카였다.

[연하늘]: 어디야? 숲 같은데...

[연하늘]: 본가에 간 거 아니었어?

[나]: 게이트에 들어가 찍은 거야. 본가에 있는 인공 게이트에서

[연하늘]: 와... 이런 건 처음 봤어

[연하늘]: 근데 평범한 건 없어?

[나]: 평범한 거? 그게 뭔데?

[연하늘]: 음...

[연하늘]: 프사로 할 만한 거?

[나]: 나는 그런 거 잘 안 찍는데

[연하늘]: 안 찍으면 말구...

[나]: 그것보다 이거나 봐 봐

[나]: (동영상)

[연하늘]: 이건 뭐야? 누구야?

[나]: 내 사촌 놈

그 후로도 계속.

나와 연하늘은 톡을 주고받으면서 어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이번 일로 알았다.

도견우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앞으로도 아들은 계속 사고를 칠 것이다.

당장 본가에서 일어난 일만 해도 그랬다.

'승우한테 대련을 신청하지 않나, 가주님께 당돌하게 말하지 않나…. 애가 변해도 너무 변했어.'

겨우 이틀 동안 벌어진 일이건만.

도견우가 벌인 기행은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그는 가문의 사람들 앞에서 벽뢰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역대 가주 중 최강으로 손꼽히던 2대 가주의 기록을 깨뜨림으로써, 최연소 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그로 인해 가문의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고 말았다.

토끼 1마리도 사냥하지 못한다며 래빗이라고 조롱당하던 아들에 대한 평가가 바뀐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돋보일수록 적이 느는 법이야.'

사자에게 조그마한 토끼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대상에 불과하다.

도견우가 가주에게 말했던 것처럼, 사자가 전력을 다해 토끼를 사냥하러 나설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대상이 사자 새끼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사자 새끼가 특출난 모습을 보인다면 더더욱.

자신의 입지를 위협할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으리라.

그가 그들의 견제를 받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어쩌면 그가 성체가 되기도 전에 처리할 궁리나 세울 놈들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걸 두고 볼 수는 없지.'

적은 가문의 사람들뿐만 아니다.

앞으로 도견우는 세상으로 나가, 수많은 적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도상준은 아버지로서 자신의 아들이 그들에게 사냥당하지 않게 지켜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자신의 힘으로는 급격히 성장하는 도견우를 지키기에 부족했다.

형제들을 상대하기도 버거울진대, 다른 맹수들을 상대할 힘이 있을 리 없었다.

레굴루스 클랜의 지부장이란 직함은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지라도, 가족들을 지키기에 마땅치 않았다.

그들을 지키려면 더 높은 자리가 필요했다.

―네 힘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거냐. 이래서는 견우를 지킬 수 없겠구나.

신검 도가의 가주, 도예익.

도상준의 아버지는 그가 품은 고민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그때, 도상준은 흠칫했다.

―예전에 네가 말했었지. 너는 형제들과 싸우기 싫고, 가족들만 있으면 되니 그 자리에 있는 것에 만족한다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냐.

―….

―네 아들의 유약함은 너한테서 나온 거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애는 풀이나 뜯어 먹고 살지 않고 맹수로 살기로 결심한 것 같더구나. 그럼에도 네 생각은 변함이 없느냐.

―저는….

―네가 과연 그 아이를 감당하고, 비호할 수 있을 것 같더냐.

―….

―만약에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그 아이를 내게 맡겨라. 대신 내가 그 아이를 비호하는 방패가 되어, 그 아이에게 모든 것을 전수하겠다.

―…!

거기까지 들었을 때.

그동안 망설임을 보이던 도상준은 마침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듯, 도견우를 위협하는 적들을 쓰러뜨리려는 듯.

그는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그래도 실력이 녹슬진 않았구나.

―…감사합니다.

―지키기 위해서는 뺏어야 한다.

―…네.

도예익은 만족한 듯했다.

도상준은 그가 마지막에 건넨 말을 가슴속에 새겼다.

그러고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지키기 위해 뺏어야 한다라…."

"응? 뭐라 그랬어?"

"아무것도 아니야."

약육강식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말로 그래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육식동물도, 초식동물도 관계없이.

지키기 위해서 뺏어야 하고.

살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설령 상대가 형제들이 될지라도.

"…다들 곤히 자고 있네."

"애들이 많이 피곤했을 만도 하지."

본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신호가 걸려 운전을 멈춘 도상준은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앉아서 조는 도견우와 그의 무릎을 베고 자는 도예은이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잃고 싶지 않았다.

"당신한테 말할 게 있어. 앞으로는 집에 들어오는 게 늦어질 거야."

"아까 아버님과 대화한 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렇지, 뭐."

눈치도 빠른 아내다.

그는 조수석에서 묻는 한지애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올라갈 수 있는 만큼 올라가려고, 승진 좀 하게."

"아버님 자리를 노리겠다는 거야?"

"글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고… 지금보다는 높이 올라갈 거야."

"그래서 지금 실적을 늘리기 위해 집에 늦게 들어온다는 거구나."

"그렇지, 뭐. 다행히 내가 지금까지 한 게 있으니까, 서브 로드 자리를 올해 안으로 얻을 수 있을 거야."

"응원할게. 나도 당신 뒷바라지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노력해야겠네."

"당신은 그러지 않아도…."

"당신만 자식을 지켜야만 한다는 법이 어디 있어? 엄마도 부모인데 안 지키나? 싫어, 나도 싸울 거야."

"…그래, 그럼 뒷바라지 부탁할게."

"안 그래도 언제 갈까 고민했는데, 이따 가서 머리나 잘라야겠다."

"저, 지애야."

"왜요, 상준 오빠?"

"…정말 자를 거야?"

"왜? 싫어?"

"아니, 당신이 하면 뭐든 다 좋지. 이제 곧 여름이기도 하니 괜찮네. 시원하겠어. 단발 좋지, 응…."

신호가 바뀌었다.

끝끝내 본심을 말하지 못한 채로 쓴웃음을 지으며.

도상준은 차를 몰았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30)

편지

본가에서 보낸 주말은 보람찼다.

그러자니 월요일인데도 학교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하고.

나는 제일 먼저 연하늘을 찾았다.

'하늘이는 아직 오지 않았나 보네.'

교실 창가 쪽, 맨 뒷자리.

연하늘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가방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학교에 오지 않은 듯했다.

그녀에게 본가에서 겪은 일을 직접 말해 주고 싶었건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녀가 등교하기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이나 하고 있기로 했다.

"어?"

도시은에게 톡이 와 있었다.

시간상 등굣길에 보낸 듯싶었다.

"이 누나가 웬일이지."

그동안 연락한 적이 없었다 보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은지 모르겠다.

나는 절뚝거리며 훈련장을 떠나던 그녀를 떠올리며 톡을 확인했다.

[도시은]: 주말은 잘 보냈어?

[도시은]: 다음에는 나랑 대련하자

[도시은]: (고양이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이모티콘)

내가 아는 도시은과 어울리지 않게 발랄하고 귀여운 이모티콘이었다.

이런 이모티콘을 좋아하는 걸까?

이모티콘과 똑같은 표정을 취하는 그녀를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속이 뻔히 보였다.

'나랑 그렇게 대련이 하고 싶은가.'

대련이야 못할 것도 없기는 했다.

우리 둘의 수준이 비슷하기도 해서 서로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도시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 그래, 좋아 :D

[나]: 그런데 누나 몸은 괜찮아? 안 다쳤어?

나는 도시은에게 톡을 보냈다.

마침 그녀도 톡을 보고 있었는지, 금세 읽음 표시가 사라졌다.

[도시은]: 시간이 지나니까 괜찮아지더라고

[도시은]: 걱정해 줘서 고마워

[도시은]: ...너는 괜찮아?

[도시은]: (고양이가 빼꼼 고개를 내미는 이모티콘)

도시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모티콘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나는 씰룩거리는 입가를 억누르며, 그녀와 톡을 주고받았다.

어쩌다 보니 톡이 계속 이어졌다.

"누구랑 톡 하는 거야?"

"아, 왔어?"

연하늘이 등교한 것은 그때였다.

자리에 턱 하고 가방을 내려놓은 그녀가 머리 위에서 내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그녀가 입을 앙다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틀 만에 본 토끼 귀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사촌이랑 하고 있었어."

"사촌? 네가 보낸 영상에서 나온 그 사람? 피융 하고 날아가던."

"걔는 아니고 사촌 누나."

"흐음… 그렇구나. 사촌들이랑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던데, 사이가 좋은 사촌도 있었구나."

"이 누나랑은 이번에 친해졌어."

"그래? 몇 살인데?"

"우리보다 2살 많지. 14살. 아마 너도 학원도시에서 보게 될 거야."

"…예뻐?"

"음, 예쁜 편이지? 꽤."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도시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학원도시에 들어가는 나이가 되면 일러스트처럼 성장해 있을 것이다.

연하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나는 그녀의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있었다.

"흐음… 그렇구나아."

"…."

그런데 어째 연하늘은 내 대답에 기분이 상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고, 목소리에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토끼 귀가 한 번 삐죽 솟았다가, 축 처지기까지 했다.

"좋겠네. 예쁜 언니랑 친해져서."

"어… 뭐, 그렇지. 딱히 예쁜 게 밥 먹여 주는 건 아니지만…. 아니야, 먹여 주나?"

"계속 톡 하고 있던 것 같던데, 나 같은 애한테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마저 해."

"…."

흥 소리를 내며.

연하늘이 고개를 홱 젖혔다.

자연히 토끼 귀도 크게 흔들렸다.

'왜 저러지?'

나를 무시하려는 듯이,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하는 연하늘.

그러면서도 그녀는 곁눈질로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당황했다.

아무래도 삐진 게 맞는 것 같은데, 대체 뭐 때문에 삐진 건지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설마 예쁘다고 한 것 때문에?'

그럴 리는 없다.

사촌 누나가 예쁘다고 말한 것과 연하늘이 삐진 게 무슨 상관인가.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나는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너도 예뻐."

"…뭐?"

"너도 예쁘다고. 특히 토끼 귀…."

퍽퍽퍽!

…내가 맞을 짓을 한 건가?

별안간 토끼 귀가 하늘로 치솟은 연하늘이 나를 퍽퍽 때려 댔다.

"아, 갑자기 왜 때리는 거야?"

"네가 그런 소리 하니까 그렇지!"

"내가 잘못한 거야?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때린다고?"

"아니이… 아니야, 잘못한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내가 맞지. 난데없이 때려서 미안해. 그렇더라도 애들이 다 듣는데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니? 나 하나도 안 예쁘단 말이야."

"알았어. 앞으로 그런 말은 안…."

"누가 언제 하지 말랬니?"

"…."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란 거지.

나는 어깨를 문지르며 연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런 건, 그… 분위기란 게 있잖아, 무드. 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어쨌든 다른 사람들이 있는 데서는 하지 마."

"아, 어, 그래."

"지금 건성으로 들었지?"

"아닌데."

"거짓말."

손으로 토끼 귀를 머리에 갖다 붙이는 연하늘.

나는 그녀가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키득거렸다.

그녀가 보여 주는 반응이 정말 재미있었다.

'그래도 기분은 풀어진 것 같네.'

빨갛게 익은 얼굴을 식히기 위해.

연하늘이 손부채를 팔랑거렸다.

나도 옆에서 공책을 부쳐 주었다.

그러고는 오늘 학교에 가져와서 바닥에 내려놓은 것을 건넸다.

"자."

"이게 뭐야?"

"본가에서 가져온 검이야."

"검이라고?"

"어. 너도 검을 배우고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소유할 검이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

까만 보자기에 싸여 있는 검.

그녀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나는 그녀가 눈으로 볼 수 있게 보자기를 풀어, 검을 들어 올렸다.

스릉.

검집에서 검을 뽑자, 서늘한 날에 연하늘과 교실 전경이 비쳤다.

"이왕 배우는 건데, 좋은 검으로 배우는 게 좋지 않겠어? 검술관에서 사용하는 검도 나쁘지는 않다지만, 그래도 본가에 납품하는 검보다는 못할 거야."

"이거… 나 주는 거야?"

"어, 너 개인적으로 연습하라고."

"…고마워. 나는 맨날 받기만 하네. 정말 잘 쓸게."

연하늘이 조심스럽게 검을 받았다.

내가 한 것처럼 검의 상태를 살핀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우리도 보여 주면 안 돼!?"

"나도! 나도 보여 줘!"

"나는 만져 볼래!"

언제부터 우리를 보고 있었는지.

반에 있던 아이들이 우리를 향해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자리까지 다가오면서 간절히 부탁하기도 했다.

대다수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던지라, 검에 호기심을 보이는 듯했다.

그 심정이 어렴풋이 이해가 갔다.

"어차피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보여 주지 못할 것도 없지. 그 대신, 보기만 하도록 해. 괜히 만졌다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우와! 정말 고마워!"

나는 아이들이 모두 볼 수 있게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늘이 너도 헌터가 될 거야?"

"너도 검술관에 다녀?"

"아, 나는…."

"와, 진짜 좋겠다!"

아이들은 검에 환호하는 한편으로, 연하늘에게도 관심을 보냈다.

그들에게 관심을 받을 줄 몰랐던 그녀는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마냥 싫지는 않은지, 수줍어하며 질문에 답해 주었다.

'본의 아니지만 하늘이가 이제야 반 애들이랑 말을 트게 된 건가.'

연하늘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핀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학교에 검을 가져오기를 잘했다.

나는 여자아이들과 수다를 떨게 된 그녀를 대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담임 선생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견, 우, 야?"

"아, 선생님."

"학교에 검을 가져오면 안 된단다. 그것도 진검이라니…. 위험하니까 얼른 집어넣지 않으련?"

"네에."

다행히 내가 신검 도가의 사람이라 혼이 나지는 않았다.

"왜 하필 우리 반에 배정돼서는…. 다른 선생님들은 얌전한 애였다던데 얌전하기는 뭐가 얌전해. 1년만, 1년만 참자. 후…."

담임 선생이 뭐라고 한탄했는데, 나는 못 들은 것으로 하기로 했다.

* * *

나하고 연하늘은 느지막한 시간에 점심을 먹고는 했다.

그러다 한가하면 소화도 시킬 겸, 오후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교정을 산책했다.

오늘도 다를 바 없었다.

그때,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어, 견우야.]

"아빠?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그게 있지, 방금 홍예나 헌터한테 연락이 왔거든.]

"아, 네."

오색의 마녀, 홍예나.

나는 이름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근처에 벤치가 하나 있었다.

"하늘아, 저기 가서 앉아 있자."

"응, 그래."

[하늘이도 옆에 있는 거야? 둘이 맨날 붙어 다니는구나.]

"밥 먹고 산책 중이었어요."

"그런 얘기는 왜 해!?"

[아주 좋을 때다.]

작은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연하늘.

나는 그런 그녀를 벤치에 앉히며, 옆자리에 앉았다.

입지가 좋았다.

나무 그늘이 직사광선을 막아 주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시원했다.

저 아래로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홍예나 헌터가 뭐래요?"

[오늘 서울로 올라왔다는데, 내일 바로 볼 수 있냐고 하더라고. 내일 시간 되냐?]

"검술관에 가는 날이기는 한데…. 완전식을 배우는 날은 아니라서 하루 걸러도 상관없긴 해요."

[그럼 내일로 한다고 말할까?]

"잠깐만요. 하늘아, 내일 시간 돼?"

"내일? 나는 괜찮아."

"하늘이도 괜찮대요. 그러면 내일 보자고 해 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렇게 말해 두마.]

아버지에게 감사하다고 말한 뒤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때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연하늘이 물었다.

연하늘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토끼 귀도 따라 움직였다.

"전에 말한 교관님 얘기인 거지?"

"맞아. 내일 보자고, 시간 되냐는 전화였어."

"그럼 내일 만나게 되는 거구나…. 어떤 사람이야?"

"이름은 홍예나라 하고, 다섯 가지 원소 마법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야. 그래서 오색의 마녀라는 이명으로 불리고 있는 거고."

"대단한 사람인 거지?"

"한 가지 원소를 다루기도 힘든데, 다섯 가지나 다루면 굉장히 대단한 사람인 거지."

강한별이 학원도시에 들어갈 때는 칠색의 마녀라 불리게 되지만.

연하늘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연하늘은 그것만으로도 걱정이 되는 듯했다.

"그런 사람한테 배우는 거구나…. 잘할 수 있을까?"

"너는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응… 열심히 해 볼게, 나. 근데… 내 귀는 왜 만지는 거야?"

"너 기운 나라고."

"내가 아니라, 네가 나는 거겠지."

째릿 나를 흘겨보는 연하늘.

하지만 연하늘은 투덜거리면서도 만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싫어하지 않을 정도로 귀를 만지기로 했다.

"이제 곧 점심시간도 끝나니까 여기서 좀 쉬다가 가자."

"그래, 그러자."

바람을 맞고,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그늘 아래에서 토끼 귀를 만진다.

이게 바로 평화가 아닌 듯싶다.

우리는 그렇게 벤치에 앉아 있다, 오후 수업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교실로 돌아갔다.

"5교시가 뭐더라?"

"도덕이야."

"그건 왜 배우는 거지? 안 배워도 나는 도덕적인 사람인데."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나만큼 착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럼 공부 안 해도 100점 맞을 자신 있어?"

"당근이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도덕 교과서를 꺼내러 책상 서랍을 뒤졌다.

그러던 그때였다.

"어? 이게 뭐지?"

"…."

서랍에 웬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를 손에 쥔 나는 봉투 앞면과 뒷면을 살폈다.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누가 넣은 거지? 점심시간 전에는 못 본 것 같은데…."

편지 봉투는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봉투 입구에 스티커 3장이 붙어 있었을 뿐이다.

금색, 은색, 동색 하트 스티커.

"하늘아, 너 짚이는 거…."

"…."

"하늘아?"

"아… 어, 응…. 뭐라 그랬어?"

"뭐 짚이는 거 없냐고."

"아니, 없는데…."

"…."

뭐야, 얘는 또 왜 이래.

편지에 시선이 꽂힌 채로 연하늘의 눈이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중간 보스의 소꿉친구가 되었다 (31)

발신인을 알 수 없는 편지라니.

누가 장난을 친 게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끼리 편지로 장난을 치는 일이 곧잘 있고는 했다.

전생의 나도, 현생의 나도 몇 번 받아 본 적이 있었다.

'행운의 편지라 했던가?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어쩌고저쩌고… 뭐, 그런 거.'

편지에 따라서 내용은 달랐지만, 대체로 형식은 유사했다.

편지를 읽고 난 후에 24시간 안에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서 다른 사람에게 보내지 않으면 불행이 찾아올 거라는 형식.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였던가.

그 편지를 읽고 덜컥 겁이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서 돌린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쩌면 이것도 그런 건가 보네. 누군지 몰라도 5학년이나 됐으면서 아직도 이런 장난을 치나…."

"그건 아닐 것 같은데…. 그걸 쪽지로 돌리지, 누가 편지로 돌리겠어. 장난을 치겠다고 편지 봉투까지 준비하지는 않을 거 아니야. 게다가 하, 하트 스티커까지 붙이고…."

"하긴, 그렇기는 하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연하늘을 곁눈질했다.

'쟤는 아까부터 왜 저러지?'

연하늘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토끼 귀가 연신 파닥거리는 한편, 시선은 내 편지에 꽂혀 있었다.

목소리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녀 딴에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둔감한 사람도 연하늘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편지 내용이 궁금한가 보네.'

사실 나도 마찬가지이기는 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보낸 편지인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편지 봉투를 뜯어보기로 했다.

그때 그녀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여기서 열어 볼 거야?"

"그럼 어디서 열어 보는데?"

"스티커를 붙인 것을 보면 너한테 편지를 쓴 사람은 조용한 장소에서 혼자 보기를 원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