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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후의 시간들은 다시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흘러갔다.

성에 도착하고, 이오딘을 만나고, 이오딘이 머리 때문에 식겁을 하며 도망치고, 그리고 그날 저녁 이오딘의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달라진 것은 높아진 내 경지로 인한 변화뿐이었다.

"체검! 정말 다행입니다. 검탁이었으면 더 좋겠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괜찮습니다!"

큰 걱정을 덜었다는 듯이 기뻐하는 이오딘.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떠올랐다.

그녀의 찬란한 금빛 머리칼이 피에 절어 짓밟히던 그 광경이.

나처럼 오러 실드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나를 구하겠다고 내 앞을 가로막았던 그 순간이....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질문이 있습니다."

"하십시오."

"검탁의 경지에 오르면... 그 검이 때론 주인의 의지를 벗어나서 멋대로 움직이기도 합니까?"

"아, 그게 걱정이셨습니까? 검을 내가 통제하지 못할까 봐?"

아니.

그게 걱정이었던 건 아니다.

단지 알고 싶었다.

늑대 괴물이 자폭 공격을 하던 그때, 이오딘이 날 지키려고 했던 건 이오딘 자신의 의지였나, 아니면 검이 제멋대로 움직인 거였나.

"사실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는 겁니까?"

"네. 검이 스스로 움직인다고 하지만, 그 경지에 이르려면 검이 내 자신을 너무나 잘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검이 스스로 행하는 그것이야말로 나의 본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러니까 결국, 이오딘은 제 뜻으로 날 감싼 거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기 목숨보다 내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

그것도 무의식 레벨에서.

난,

그런 사람을 지켜내지 못했다.

"란센 후배?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뭔가, 속에서 울컥 치미는 기분이었다.

* * *

현실도 걱정이기는 했다.

되감은 시간만큼 현실에서도 더 시간이 흘러가는 거면.... 쿠샨시는 지금쯤 엉망진창이 되어 있을 테니까.

지금으로서는 그저 동생들과 리베라를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 했다.

'그때 운명의 책에서 지워진 글자는 8글자. 이번에 실패하면 또 8글자가 지워지는 식이라면, 기회는 총 2~3번 있는 건가? 그중 한 번은 이미 썼고?'

앞으로 적으면 1번, 많으면 2번 안에 성공해야 하는 미션.

하지만 그 기회를 다 쓸 마음은 없었다.

패배 따위 싫었고, 당장 쿠샨시도 걱정되었으니까.

'이번에 성공해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지.'

그러나 지난 열흘 간 뼈를 깎는 수련을 했음에도 검탁의 경지는 요원하기만 했다. 뭔가 알 듯 말 듯 답답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그날 밤도 나는 한참 수련을 하다가 머리를 좀 식힐 겸 정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얼마 걷지 않았을 때, 정원의 바위 위에 걸터앉은 이오딘이 보였다.

그녀는 오늘도 별을 보고 있었다.

"13주신을 보고 있는 거야?"

"어? 어떻게 알았어?"

알지. 잘 알지. 네가 설명해 줬으니까.

"왠지. 너라면 그럴 거 같았어. 13주신을 보면 현재의 위치를 알 수 있으니까. 저걸 보면서 여길 지키고 싶다,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건가?"

이미 다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건네자 이오딘은 좀 쑥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렇지. 지키고 싶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여기서 받았는걸. 먹을 것도, 몸을 누일 집도, 가족 같은 사람들도, 꿈도, 이 검도... 모두 여기서 시작됐어. 그러니까 지켜야 돼. 스승님께 받은 은혜를 갚아야지."

스승님의 은혜라....

이오딘은 죽을 때도 그랬다.

'꼭... 살아남아.... 이젠 네가... 스승님의 유일한... 제자....'

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스승님의 진전이 끊길까 그걸 더 두려워하던 녀석이다.

나는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그런 녀석이 대체 왜 제 목숨을 그렇게 쉽게 내던지는지.

"이오딘."

"응?"

"그럼 죽지 마."

"응?"

"지키는 것도 좋지만, 일단 네가 죽지 않아야 그것도 가능한 거라고.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살 생각을 먼저 해. 이 멍청아."

"뭐?! 선배한테 멍청이?! 아무리 말을 놓기로 했어도 너무 경우가 없는 거 아냐?!"

발끈해서 발딱 일어나는 이오딘.

난 그냥 한숨만 쉬고 말았다.

이건 잔소리 이틀짜리다.

이오딘.

그 잔소리. 고분고분 들어 줄 테니.

이번에는 죽지 말자. 제발.

#23화 움직여라. 제발 움직여라.

주어진 시간 동안 수련에 미쳐 살았다.

매일매일, 그 늑대 괴물을 떠올리며 검을 휘둘렀다.

터무니없는 반응속도를 보이는 놈들을 베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대공이 보여 준 강기를 궁구하고, 영혼을 한 자루 검으로 벼리라던 그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 덕분일까?

내 검기는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움직임은 기민해졌다.

늑대 괴물을 상대로도 먹힐 만한 전략도 몇 개 생각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검탁에는 이르지는 못했다.

"와.... 여기서 보니까... 정말 예뻐요. 사이키델릭 문."

검탁에 이르지 못한 채, 오늘을 맞이했다.

천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형형색색의 달빛을 바라보며 꿈에 젖는 밀로의 눈빛.

녀석을 바라보며 한없이 씁쓸해지는 내 마음.

'막을 수 없었어.'

사실 그동안 무턱대고 검만 수련한 건 아니었다.

이번 시간 여행에 2주라는 긴 시간이 주어진 건, 어쩌면 다가올 비극을 미리 막으라는 그런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에 나도 다방면으로 움직였다.

가장 의심이 갔던 건 밀로가 말한 '시술'.

밀로를 포함해서, 그때 괴물로 변한 교육생들 대부분이 밀로가 말한 '시술'을 받은 학생들이었으니까.

이오딘과 브룩 단장을 설득해서 다방면으로 조사를 했다. '시술', '약', 도시 남쪽에서 솟구쳤던 수상한 광채까지.

결과적으로, 다 실패였다.

일단 아직 내 발언을 진지하게 여겨 주는 사람 자체가 없었다.

조르고 졸라 겨우 문제의 약물을 찾아낸 후에도,

'음....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자세히 조사하려면 3주는 더 걸립니다.'

이런 소리나 들었다. 젠장. 3주면 모든 게 다 끝난 다음인데.

그래서 결국 다시 오늘이 왔다.

별 소득도 없이.

'그래도 해 보는 수밖에.'

조금 더 고강해진 검술과 새로 짜 온 전략이 먹히길.

"크르륵.... 라, 란센 경.... 크륵.... 나, 몸이... 이상해요...."

크르르르-

몸을 뒤트는 밀로, 괴성을 내지르며 변화하는 교육생들을 보며 나는 차갑게 검을 뽑아 들었다.

미안, 밀로.

솔직히 너까지 지킬 자신은 없어.

하지만 적어도...

이오딘만큼은 반드시 지키겠다.

이 괴물 놈들을 막아 내고 오늘에야말로 집으로 돌아간다.

* * *

'움직여! 제발... 움직여...!'

입에서 단내가 났다.

오러와 체검으로 강화된 관절이 삐그덕거렸다.

이렇게 절박하게 검을 휘둘러본 게 언제였나?

크시아스 백작 때도 이렇진 않았다.

손목과 정강이가 날아간 상태로 혈백작 들카슈를 죽일 때, 그때가 이 정도였던 것 같다.

신경이 곤두서다 못해 타 버릴 것 같았다.

기괴한 반응속도를 가진 늑대 괴물을 죽이기 위해, 나는 3배 4배로 움직여야만 했다.

놈들이 회피할 수 없을 때까지 검을 휘둘러 무너뜨리고 내가 원하는 자세를 강요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착실하게 놈들을 베었다.

끼아아아!

반로아로 놈들을 베어 죽일 때마다 잘려 나간 단면이 하얀 불꽃으로 불타올랐다.

삿된 것을 멸하는 성은의 위력이 발휘된 것.

그렇게 죽은 것들은 전과 달리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란센! 역할을 나누자니까! 네가 막으면 내가...!"

"조용히 해!"

이오딘은 전과 마찬가지의 전술을 제안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첫 번째 이유는 이오딘이 죽인 괴물은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그래야 이오딘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렇게.

쿠르르륵! 콰르르륵!

우리 앞을 가로막은 늑대 괴물들의 배와 가슴이 돌연 폭발했을 때, 나는 이미 놈들 앞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전처럼 뒤에서 공격을 걷어 내기만 했다면, 결코 지금 타이밍에 이 위치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란센!!!"

이오딘은 그때처럼 이번에도 날 지키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이번엔 위치상 내 뒤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콰드드드득!

따다당!

폭발하듯 뻗어 나온 수십 개의 촉수가 내 오러 실드를 두드렸다.

깨어진 오러가 반짝이며 흩날렸고 살갗 곳곳이 찢어졌지만, 난 죽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기어코 가까이 붙어서 꽤 많은 촉수를 막아 준 이오딘 덕분에 전투에 지장이 갈 정도의 부상도 피할 수 있었다.

이오딘이 내게 고함을 질렀다.

"미쳤어?! 죽으려고 환장한 거야!!"

난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렸네.... 이번엔.'

어찌나 멀쩡한지, 이오딘은 얼굴까지 시뻘겋게 물들인 채로 나에게 빽빽 소리를 질렀다.

싸우는 중만 아니었으면 멱살도 잡았을 거다.

근데,

죽으려고 환장했다니.... 그게 네가 나한테 할 소리냐?

"떠들 힘 있으면 검이나 한 번 더 휘둘러."

"란센!!"

이오딘을 무시하며 다시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초조했다.

다행히 이오딘을 살렸고,

괴물도 벌써 20마리는 죽였다.

하지만... 불안했다.

'그냥 이기는 게 아니라, 사교도의 성물을 지키는 게 내 임무라면?'

그렇게 생각하면 한없이 불안하기만 했다. 벌써 200마리도 훨씬 넘는 괴물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연회장을 빠져나갔으니까.

이대로는 안 된다.

뚫고 나가서 성물을 지켜야 했다.

'움직여...!'

나는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왜 안 되는 거지?

검이 스스로 움직이는 검탁.

그 경지가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닿지 않았다.

'움직이라고!!'

우우웅!

우웅!

내 손아귀에서 반로아가 애처롭게 울어 댔다.

자기도 움직이고 싶다는 듯이.

움직이게 해 달라는 듯이.

웅-

우웅-!

하지만 결국 끝까지, 반로아가 스스로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역사 개변에 실패했습니다.]

몸이 부서지라 싸우는데, 그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깨어진 인과를 소모하여 시간을 되감습니다.]

아.... 역시 사교도의 성물을 지키는 게 목표였구나.

사르르 지워지는 운명의 책의 문장.

이젠 겨우 '스승님께....' 이 네 글자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럼 이게 마지막 기회인 걸까?

[부디 무운을 빕니다.]

실패.

이오딘도 살리고, 40마리가 넘는 괴물들을 베어 내면서 분투했음에도... 실패.

덕분에 나는 확실히 알았다.

검탁(劍托)에 오르지 못하면, 결코 이 시련을 넘어설 수 없음을.

* * *

"스승님. 검탁(劍托)은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다시 돌아온 처음.

나는 대공을 보자마자 물었다.

그의 눈에 잠시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가 곧 차분해졌다.

"...거의 검탁에 근접했구나. 한 걸음, 아니 반걸음만 걸으면 될 정도야."

내 생각에도 그렇다. 하지만 도무지 그 반걸음을 어떻게 내디뎌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불러도 움직여 주지 않습니다."

"부르니 안 되는 것이다."

"네?"

"너는 네 심장에게 뛰라고 시키더냐? 위장에게 빨리 소화하라고 윽박지르더냐?"

"네? 아, 아뇨."

"그런데 왜 검에게는 자꾸 뭘 시키려 드느냐. 그러지 말고 그저 받아들여라."

"...."

"검탁이란, 검이 네 일부가 되는 것이다. 뭘 시켜서가 아니라, 검이 너의 일부가 되었기에 움직이는 것이다. 검탁이라는 경지로 따로 분류되고는 있지만 결국 검아일체(劍我一體)로 나아가는 과정에 불과하지."

"검아일체...."

이상했다.

대공의 말을 듣는데, 뱃속이 짜릿했다.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한 기분도 들었다.

이게 천하제일검의 가르침인가?

이 길이 맞다는 확신이 든다.

그럼 어떻게 수련해야 할까?

다각다각

말은 쉬엄쉬엄 걷고 있고 연둣빛 들판에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대공은 잠시 멀리 시선을 주었다가 내게 답을 주었다.

"이렇게 하자."

그가 내 허리에 걸린 반로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분간은 검을 뽑지 말거라."

"검을 뽑지 말라고요?"

"그래. 네가 검을 뽑는 게 아니라, 검이 널 뽑게 해라. 그때까진 참아라."

으음....

예상 밖의 지시였다.

이번에도 돌아오자마자 대공과 검을 한 번 부딪힐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아니.... 차라리 잘됐나?'

욱씬.

과거로 돌아와도 입었던 부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몸이 부서질 때까지 검을 휘두른 탓에 아직 내 몸은 엉망이었다.

이런 내 몸 상태를 눈치챘는지, 대공은 이전 시간대와는 다르게 움직였다.

"조금 더 가서 잠시 쉬었다 간다, 란센. 너는 그동안 줄곧 검 자루를 잡고 있도록 하거라. 검이 너를 읽고 네 안에 스며들 수 있게 문을 열어 준다는 마음으로."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대공은 희미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 말거라. 네 눈을 보니 곧 감을 잡겠다. 그럴 수밖에 없겠어."

내 눈이 어떻길래?

그 의미 모를 말을 들으며, 나는 대공의 지시대로 검 자루에 손을 올렸다.

참 이상한 일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사람을 경계하기 바빴는데.

이젠 그가 진짜 내 스승 같았다.

* * *

대공의 말이 옳았다.

정말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주 높은 벽으로 꽉 막혀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야를 넓게 하고 돌아보니, 벽 옆으로 작은 샛길이 있었다.

천하제일검의 가르침이 진리였음을.

나는, 영주성 앞에서 이오딘을 다시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참....

나 이렇게 쉬운 사람인가.

나에겐 울타리가 있다.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울타리.

물론 저 여자가 날 살리겠다고 목숨을 걸긴 했지만....

며칠이나 봤다고 벌써 내 울타리를 넘어 들어온 건지.

두근거리는 심장이 나에게 외친다.

지키라고.

지켜 내라고.

그리고, 이 도시에 드리운 어둠의 목을 베라고.

우우웅-

웅-

이런 내 심장 고동을 따라 반로아도 함께 울었다.

대공의 가르침이 옳았다.

검은 이미 내 신체의 일부였다.

내 심장이 뛰듯, 이 녀석도 운다.

이오딘을 지키고, 이 도시를 구해라. 반로아의 떨림이 이미 나의 진정(眞情)이었다.

영주성 앞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공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곧 깨달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도 더 빠르군."

그 말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이오딘이 아방하게 물었다.

"네? 뭐가요?"

뭐긴 뭐야.

검탁(劍托)이지.

우우우웅-

나는 반로아의 떨림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나'라는 개념을 활짝 열어, 녀석을 그 안에 포함시켰다.

그 순간,

스르릉-

반로아가 뽑혀 나왔다.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었으나, 내가 한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검을 뽑아 든 뒤였고, 이미 검 끝에선 검기가 타올랐다.

"무슨...!"

"감히 대공전하 앞에서...!"

깜짝 놀란 기사들이 칼자루 위로 손을 가져갔지만,

"그만."

대공이 묵직한 기세로 내리눌렀기에 그 누구도 검을 뽑지 못했다.

흥미로운 듯, 흐뭇한 듯, 나를 바라보는 대공의 시선 아래서, 나는 뽑아 든 검을 이오딘에게 겨누고 말했다.

"내 선배라고...? 난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 선배 대접을 해 줄 마음이 없슴다. 그러니까... 한 판 뜹시다. 선배."

"뭐, 뭐요?! 후배! 대체 그 건달 같은 말투는 뭡니까?! 이제 스승님의 제자가 되었으면 응당 품행방정...! 비례물언...! 그리고...!"

이오딘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빽빽댔다.

나는 히죽 얄미운 웃음을 베어 물고 검 끝을 까딱거렸다.

"말이 많슴다. 겨뤄서 꺾으면 될걸. 소원 하나씩 걸죠? 지는 쪽이 이기는 쪽 소원 들어주기. 제가 지면 그 품행 뭐시기 비례 뭐시기 다 들어드립니다. 아, 참고로 제 특이체질은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내가 왜...!"

"왜요? 쫄립니까?"

이오딘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입을 벙긋거리더니 대공을 쳐다보았다. 저거 저대로 둘 거냐는 의미.

하지만 대공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왜 그러느냐 이오딘. 쫄았느냐?"

"하!"

결정타였다.

그렇게 영주성 앞에서 이오딘과 나의 대련이 펼쳐졌다.

'됐다.'

소원권.

장난처럼 꺼냈지만, 사실은 이게 꼭 필요했거든.

#24화 개판이었다

첫 만남 이후로, 이오딘은 날 볼 때마다 꽁해 있었다.

"선배. 왜 그리 죽상이야? 교류회도 잘 끝냈잖아?"

어깨를 툭 치며 묻자 그녀는 입술을 아득 깨물고 나를 노려봤다.

방금 욕설이 목젖까지 올라온 것 같은데...?

하지만 그녀는 결국 꾹 참아 누르곤 다시 날 외면했다.

"아, 왜 그러는데. 단 하나뿐인 후배랑 영영 얘기 안 하려고?"

내가 또 한 번 어깨를 툭 치자,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옳지 않아! 옳지 않다고! 지금 이게 단 하나뿐인 선후배 간의 대화가 맞습니까? 여기는 공적인 자리입니다! 세상에 어느 후배가 공적인 자리에서 선배에게 반말을 툭툭 뱉습니까! 예(禮)가 없는 기사는 강도와 다를 바가 없다! 모릅니까?"

정론을 들어 나를 비난하는 이오딘.

하지만, 이오딘의 잔소리에 쩔쩔매던 후배 란센은 이제 없다.

"응~ 그러면 이기지 그랬어?"

"끅...!"

단 한마디로 진압이 되어 버린 이오딘이 입을 꾹 다물었다.

예법에 맞지 않는 대화를 하느니 아예 나와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낄낄 웃으며 온몸을 쭉 펴서 스트레칭을 한 번 했다.

역시, 긴장을 푸는 데는 스트레칭과 남 놀리는 것만 한 게 없지.

지난 14일.

대공 덕에 깨우친 검탁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오늘이 왔다.

두 번의 실패.

그 치욕을 갚아 줄 날이.

긴장되기보단 되레 설렜다.

검탁(劍托)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드높은 지평을 내게 열어 줬으니까.

"와! 란센 경은 이오딘 경을 상대로도 이기셨던 거예요?!"

옆에서 연둣빛으로 반짝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밀로.

내가 지키지 못했던 녀석.

지금도 내 옆에 딱 붙어서 눈을 빛냈다.

이오딘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밀로 교육생은 왜 이렇게 란센 후배를 좋아하는 겁니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오딘도 이건 못 참을 정도로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교류회 마지막 날 대연회장.

오늘 나는 일부러 밀로를 옆에 붙인 채로 이오딘 쪽으로 와 있었다.

둘 다 지켜 내기 위해서.

그러다 보니 이오딘도 밀로에게 관심을 보였다.

쉴 새 없이 날 향해 눈을 반짝이는 게 신기했겠지. 다른 교육생들은 다 나를 악적 취급이나 하는데.

"아! 이오딘 경! 들어 보세요! 사실 저는...!"

여태 내게 떠들었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반복하려고 자세를 고치는 밀로.

나는 그런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밀로. 이번엔 포기하지 말자."

"네?"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게 무슨...? 아! 란센 경! 저기 봐요! 시작돼요!"

동그란 눈동자를 갸웃거리던 녀석이 화들짝 놀라며 천창을 가리켰다.

뎅-

종이 울리고.

그래.

시작되고 있었다.

사이키델릭 문이 떠오르고, 곳곳에서 교육생들이 괴물로 변이되고.

드디어 왔구나.

"란센 후배!"

이오딘이 표정을 굳히고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후배?"

"이오딘. 내 말 잘 들어. 넌 지금부터 기사들을 이끌고 멀쩡한 교육생들을 피신시켜."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일단 적을 붙들어 놔야 피신을 시키든 말든...!"

"괴물들은 내가 잡아 놓을 거야. 피신이 다 끝나고 나면 여유 병력을 다 모아. 도시 남쪽을 보면 기묘한 빛이 있을 거야. 거기를 습격해서 원흉을 없애."

내 말에 이오딘의 눈빛이 변했다.

당혹을 순식간에 지워 내고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란센 후배. 뭔가 알고 있습니까?"

"절대 망설이지 마."

"대체 무슨 말을...."

"설령 거기서 마주치는 게 사문의 어른이라도. 절대로 망설이지 말라고."

"지금... 사숙을 말하는 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시간을 3번쯤 반복하고 나니 확실히 보이더라.

카시기에르 셀시우스, 일명 사숙.

라이테나 대공의 형.

그 인간.

이번 일과 분명 관계가 있다.

아무튼 나는 해 줄 말을 다 했으니, 이제는 이오딘의 몫이다.

"후배.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혼자 저 괴물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오딘. 저번에 나한테 져서 무슨 소원이든 한 번 들어주기로 했지?"

"잠깐! 그건...."

"지금 이게 그 소원이야. 내 말대로 해. 어차피 네가 있어 봐야 방해만 되니까."

"...."

이오딘이 이를 악물었다.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소원권을 따낸 이유가.

이 순간, 나의 말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시간 없어. 빨리 움직여."

실력으로 찍어 누르는 내 요청에, 결국 이오딘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후배.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망설이고 망설이던 그녀는 주먹으로 내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절대 죽지 마. 란센."

"네네. 선배님."

몇 번 주저하더니, 이오딘은 결국 내 지시를 이행하러 떠났다.

나는 그제야 옆에 있는 밀로를 보았다.

이미 상의는 다 찢겨 연두색 피부가 드러났고, 몸은 상당히 뒤틀려 있었다.

"크르륵.... 라, 란센 경.... 크륵.... 나, 몸이... 이상해요...."

그래, 밀로.

견뎌 보자.

이번엔 다 같이 살 방법을 찾아보자고.

크르아아아!

괴물 하나가 이빨을 쩍 벌리며 내게 달려들고, 밀로는 이번에도 날 보호하기 위해 그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녀석을 죽게 하지 않을 거다.

밀로보다 한발 앞서, 괴물을 벤다.

서걱!

번개처럼 뻗어 나간 검에 목이 잘려 떨어지는 늑대 괴물.

잘린 목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새하얀 불꽃.

그래. 이 맛이지.

반응속도가 0이 된다는 게 이렇게 놀라운 거다.

인간에겐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검속이 빨라도, 공격을 마음먹는 순간과 실제로 공격을 하기까지의 딜레이는 어쩔 수가 없다.

눈앞의 이 괴물들처럼, 예비 동작을 알아보든, 공격 의도를 사전에 읽어 내든, 그걸 보는 순간 피하기 시작하는 놈들을 따라잡는 건 한없이 어려운 것.

하지만 검탁(劍托)을 이루고 반응속도가 0이 되면, 이 한계는 사라진다.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먼저 뻗어 버리는 검을 무슨 수로 피하겠는가?

그래.

바로 이 감각이다.

서걱!

쓰걱!

검을 휘두르는 족족 괴물들의 목이 걸려든다.

"크르륵.... 라, 란센 경? 크륵...!"

내 무용(武勇)에 놀랐는지, 등 뒤에서 밀로가 기괴한 경악성을 흘렸다.

응, 그래. 지켜보라고.

끝없이 몰려드는 괴물들이 보인다.

입가로 길게 미소가 지어진다.

밀로를 살려야 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물론 그냥 살리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크긴 했지만.

'왜인진 몰라도 괴물들은 죄다 밀로를 죽이려고 달려들거든.'

이전 시도들에선 모든 괴물을 잡아 두는 게 불가능했었다.

놈들은 목적이 따로 있었고, 내가 아무리 앞을 가로막아 봐야 다른 놈들은 그냥 벽을 부수고 연회장을 나가 버렸으니까.

하지만 아직 밀로가 살아 있는 이상.

연회장에 있는 300마리 넘는 괴물들은 모조리 녀석을 노리고 달려든다.

'한 마리도 놓치지 않아.'

나의 일부가 되어 사방을 가르는 반로아.

일 검에 머리 하나씩.

까아아아앙!

중간중간 더 강한 괴물들도 섞여 있었다.

내 오러 블레이드를 쳐내고 반격까지 하는 괴물들.

그 반격을 피해 낸다.

검을 떨쳐 더 약한 괴물부터 먼저 잡는다.

찌지직-!

가끔은 내 오러 실드조차 찢어 버리는 소름 끼치는 일격도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마저 몸을 비틀어 피해 버린다.

검이 내게 전해 주는 정보량은 예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훨씬 멀리까지 수를 읽을 수 있고, 때론 수를 읽기도 전에 검이 먼저 움직여 활로를 뚫어 주었다.

취한다.

검에 취한다.

피하고

찌르고

막아 내고

베고

신나.

신난다.

내가 이렇게까지 강했나?

천창을 통해 쏟아지는 형형색색의 달빛.

그 아래 춤을 추는 오러와 칼날과 발톱들.

정신을 놓고 얼마나 싸웠을까?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흐르던 오러가 메마르고, 팔다리가 끊어질 듯 아파 후들거릴 때쯤....

"하아... 하아... 하아...."

드넓은 대연회장엔 내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모두 죽였다.

내 발아래, 하얗게 타오르는 수백 마리의 괴물 사체.

그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이제 현대에서, 나를 상대할 기사가 존재하기는 할까?'

글로리랜드를 통틀어 단 3명. 로버랜드에는 단 2명 존재한다는, 소문만 무성한 그랜드 마스터들이라면... 어떨까?

가슴 깊이 젖어 드는 충족감.

아,

이번 시간 여행.

예상과 달리 너무 오래 걸렸지만,

정말 많은 걸 얻었다.

이제 동생들만 무사하면 된다.

무사할 거다.

똑똑한 세아가 있고, 다들 검술이 뛰어나니까.

나는 그렇게 믿으며, 반로아에 묻은 피를 털고 검집에 넣었다.

싸움은 끝났다. 이제는 뒤처리만이 남았다.

"크르륵...."

뒤를 돌아보니, 이제 완연히 괴물의 모습으로 변한 밀로가 있었다.

"밀로야, 조금만 참아. 분명 원래대로 돌아올 방법이 있을 거야.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 참으면 돼."

나는 녀석의 연둣빛 등을 쓸어 주었다.

헌데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크륵. 란센 경.... 이건 그런 게 아니에요.... 크르륵."

"약한 소리 하지 마. 여기엔 뛰어난 마법사분들도 계시잖아 분명 방법을 찾아 줄 거야."

"미안해요.... 란센 경.... 그런 게 아니야.... 난 알아요.... 느껴져! 크륵. 이건... 그런 돌이킬 수 없어.... 크륵! 나... 기사로 죽진 못해도 ...크라라! 적어도... 사람으로 죽을래요. 크르르륵!"

"밀로!"

막을 수 없었다.

서걱!

밀로는 자기 발톱으로 제 목을 베었다.

퉁. 퉁.

데구르....

바닥을 구르는 녀석의 눈가에는 투명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콰르르륵!

녀석의 몸에 숨어 있던 거대한 악의가 수많은 촉수로 분출되었다.

배와 가슴이 터지고 그저 꿈틀대는 촉수가 나를 노려 올 뿐.

"아...."

나는 반로아를 휘둘러 촉수들을 베어 냈고, 너덜너덜해진 밀로의 곁으로 다가갔다.

"...고생 많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녀석의 사체에 반로아를 꽂아 넣었다.

하얗게 타오르는 녀석의 시체.

마음이 먹먹하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건 알지만....

치미는 안타까움을 억누르지 않고 녀석을 추모한다.

나중에,

그러니까 1만 년 뒤쯤에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 식구로 태어나라. 잘 대해 줄 테니까....

"란센! 란센 후배!"

그러고 한참 있다가 날 부르는 목소리에 축 처진 고개를 들었다.

대연회장의 무너진 벽을 통해, 이오딘이 기사단을 이끌고 들어오고 있었다.

"란센 후배가 맞았습니다! 사숙이 사교도의 사술을 벌였습니다!"

후....

난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허리를 폈다.

하얀 재가 되어 사라지는 밀로의 잔해.

마지막 미련을 떨쳐 내고 이오딘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베었어?"

"베었습니다!"

좋다.

이로써 대공의 근심 하나를 지웠으니.... 많이 부족하긴 해도 아주 조금쯤은 배운 은혜를 갚은 셈이다.

잘했다.

그 말을 하려고 입을 벙긋거리는 순간이었다.

째깍째깍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쏟아진다.

"란센? 후배! 란센!!!"

점점 멀어지는 이오딘의 목소리.

아, 그래.

돌아가는구나. 드디어.

후련하고 다행스러울 줄 알았는데.

막상 맞이하는 이 순간은 어쩐지,

서운했다.

* * *

정신을 차려 보니 밤이었고, 쿠샨시 중심가였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어디 보자.

영주성은 반파된 모습 그대로고.

거리에는 핏자국과 시체와 불에 탄 건물이 널브러져 있고.

"아아아악!"

"끄아악!"

깊은 밤인데도 어딘가에선 아련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쿠샨시는 개판이 되어 버린 것 같다.

#25화 집에 돌아왔구나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내가 고대에 머문 시간은 15일씩 3번, 총 45일 정도이니, 계산대로라면 1주일 정도 지났어야 맞다.

대체 그동안 이 도시엔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일단은 동생들의 안위부터 확인하자.

'역시 없나....'

가장 먼저 찾아간 것은 우리의 저택과 일네온 던전.

혹시 했는데, 역시나 저택은 텅 비어 있었다.

던전에도 우리 식구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비어 있는 게 당연해. 유사시에 방어하기가 쉬운 장소는 아니니까.'

초조한 마음이 불쑥 고개를 치켜들려 했지만, 나는 애써 다독였다.

'아마, 거기 있겠지?'

이 도시에서 영주성 다음으로 방어가 용이한 단 하나의 장소.

나는 얼른 도시의 반대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침착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한시라도 빨리 동생들의 얼굴을 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남작성.

쿠샨시의 시민들에게 보통 그런 별칭으로 불리는 장소였다.

쿠샨시 서쪽,

외성 전체 면적의 5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일명 '구시가지'에 위치해 있다.

타닥!

나는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옛성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과연 현재의 정세가 심상치 않은지 성벽 위에는 횃불을 든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원래 같으면 저 성벽 앞에서 방문 목적을 알리는 게 예의겠지만, 지금은 마음에 여유가 없다.

병사들의 시선을 피해 옛 성벽을 넘은 후에는 구시가지 중앙에 있는 남작성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머지않아, 투박하지만 견고해 보이는 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가 바로 반란 세력의 수장이었던 리베라 피에트로의 근거지.

그가 '남작'이라고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쿠샨시가 생긴 건 40년 전.

하지만 이 남작성은 300년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

300년 전, 글로리랜드에서 쫓겨난 피에트로 가문이 터를 잡은 땅.

크시아스 백작은 당대 남작이었던 리베라의 아버지를 굴복시키고 이 땅을 흡수해 쿠샨시를 세웠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이곳이야말로 쿠샨시의 시작점,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세아라면 여기로 왔을 거야.'

아주 높진 않지만, 구시가지를 둘러싼 단단한 옛 성벽과 중심에 있는 남작성.

이 두 개의 벽으로 보호되는 이곳이야말로 현재 쿠샨시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으니까.

"후우우...."

그래도 초조한 건 어쩔 수 없다.

있겠지? 그래. 다 있을 거야.

다 무사할 거야.

이번에도 훌쩍 뛰어서 남작성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등 뒤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낮고 위협적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쉿. 움직이지 마. 누가 보냈어?"

가느다란 오러 쓰레드가 스멀스멀 뻗어 와 내 주변을 포위했다.

살짝이라도 움직인다면, 내 몸은 순식간에 오러 쓰레드에 난자당할 것이다.

난 감탄하고 말았다.

'익스퍼트 최상급.'

이 정도면 크시아스 백작과 그 심복들이 모두 죽은 현재의 쿠샨시에선 한 손으로 꼽을 만한 실력이었다.

"천천히. 고개 돌려. 빛 앞으로 나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차가운 목소리.

두근.

그 목소리에 심장이 떨린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냐....

까득.

나는 오러를 감싼 손을 뻗어 나를 포위하고 있는 오러 쓰레드를 걷어 냈다.

오렌지색 오러 쓰레드가 설탕처럼 부서져 반짝거린다.

"무, 무슨...!"

경악하는 목소리를 향해, 난 천천히 몸을 돌렸다.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카트리나. 대체 언제 온 거야?"

"악!"

여자, 카트리나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뻣뻣하게 굳었다.

몸은 굳었는데 눈동자는 파르르 떨린다. 샛노란 눈동자가 내 얼굴을 내 손을 내 다리를 빠르게 오간다.

"오, 오빠? 오빠야? 진짜?"

"응. 오랜만이다."

선선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아악! 오빠!"

카트리나가 검을 던져 버리고 내게 달려들었다.

어우, 정신없어.

10년 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난리도 아니었다.

내 뺨을 잡고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내 어깨를 잡고 내 몸을 샅샅이 살펴보고.

새로 생겨난 오른손을 주무르고.

왼쪽 바짓단을 걷어 다리를 확인하고.

"악! 진짜야! 아악! 진짜 다 나았어!"

괴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킁킁 냄새까지 맡을 기세라 나는 녀석을 떨어뜨려 놓으며 물었다.

"언제 돌아온 거야?"

"이틀 전에! 세아가 메시지를 보냈어. 크시아스를 칠 거라고.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일단 돌아오라고!"

카트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왼쪽 팔목에 끼고 있는 팔찌를 들어 보였다.

메시지 마법이 각인된 고대의 팔찌.

저것 역시 왕국을 탈출할 때 가져온 아공간 속의 보물이었다.

"그랬구나...."

온갖 감정이 휘몰아친다.

"잘됐네. 근데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는 거야? 너 분명 익스퍼트 상급이었잖아!"

카트리나 에기온.

에기온 공작가의 마지막 혈육.

이 녀석을 보는 건 거의 반년만이었다.

쿠샨시를 떠나기 위해, 새로운 거점을 찾아 나선 동생들의 리더.

그게 카트리나다.

나보다 딱 2살 어린 25살로 동생 중엔 나이가 제일 많았다.

내가 손과 발을 잃은 이후론 사실상 이 녀석이 식구들을 이끌었다.

그러니 더 반가울 수밖에.

나랑 나이가 같거나 1살 어린 동생들은 들카슈 백작에게 다 죽었고, 그 이후로 그나마 친구처럼 의지할 수 있었던 게 이 녀석이었으니까.

"별별 일이 다 있었어. 이 도시에 있을 때야 오빠가 하도 과잉보호해서 제대로 실전을 경험할 일이 없었잖아? 근데 뭐 밖에 나가니까 마수는 넘쳐나지. 들르는 도시마다 별별 개새끼들이 다 수작을 부리지.... 살아 돌아온 게 용하다니까?"

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25살에 익스퍼트 최상급이라니.

이 정도면 어딜 가도 천재로 인정받을 만한 재능이다.

과연, 왕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기사 가문이었던 에기온 공작가의 후계답다.

아무튼 안심이었다.

밝은 분위기로 보아 다들 무사한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라, 나는 카트리나가 조금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애들은... 다 무사하지?"

카트리나가 활짝 웃었다.

"응! 다들 무사해! 햐.... 오빠까지 돌아왔으니, 이제야 우리 식구들 다 모였다. 이게 얼마만이야!"

"그러게. 다 모였네. 드디어...."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카트리나가 빙글 몸을 돌리더니 남작성을 향해 우렁차게 소리쳤다.

깊은 밤 이미 잠에 든 사람들에 대한 배려 따위는 저 멀리 하늘로 던져 버린 채로.

"다들 나와 봐! 오빠가 돌아왔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병사들의 횃불이 날벌레처럼 흔들렸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쾅!

벌컥!

여기저기서 문이 열리고 다다닥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풀썩.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아니 아예 창문에서 뛰어내려서는 허공에서 뚝 떨어진 건, 까만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묘하게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청년이었다.

바렌 로도나.

로도나 후작가의 마지막 혈육.

나이는 24살로 카트리나보다 한 살이 어리다.

녀석은 나를 말없이 응시하더니, 고개를 짧게 까딱했다.

"형이네? 오랜만."

"오랜만이야. 바렌! 가만 보자.... 너도 최상급이야?"

"어. 누나보다 한 2달 늦었지만."

세상 귀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하는 바렌.

하여튼 성격 한번 쿨하다.

24살에 익스퍼트 최상급이면 대륙이 놀랄 정도구만.

"오빠!"

바렌과 채 인사를 다 나누기도 전에, 붉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데이지가 달려왔다.

녀석은 전력으로 달려와서는 열 걸음 앞에서 나를 향해 다이빙을 했다.

덥석!

날아오다시피 한 데이지를 두 팔 벌려 받아냈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관성에서 녀석의 반가움이 전해지는 것만 같다.

"...너무 과해."

바렌이 옆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튼 바렌. 커다란 고양이 같은 녀석이다.

정작 자기는 아예 창문에서 뛰어내려서 날 제일 먼저 확인했으면서.

막상 확인한 뒤에는 관심 없다는 듯 한 발 물러나 있는 모습이 어릴 때랑 똑같았다.

"오빠!"

"형!"

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반로아 왕국 출신의 내 동생들이 날 둘러싸고 반가워하고 있을 때, 던전에서 주워 온 고아였던 세클란은 눈치를 보며 다가와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시선을 돌리니 남작성 난간에 서서 슬쩍 허리를 굽히는 리베라가 보였다.

여태 동생들을 지켜 준 것에 나도 감사를 담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란센!!!!"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를 들은 동생들은 달라붙는 걸 멈추고 웃으며 길을 터 주었다.

쿵쿵 달려오는 곰 같은 아저씨가 보인다.

저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벌슨!"

우리의 마지막 보호자, 벌슨이었다. 그의 뒤로 병아리 같은 꼬마들이 눈을 비비며 줄줄이 따라오고 있었다.

"쌤이다!"

"쌔앰!"

달려와서 붉어진 눈을 훔치는 벌슨.

아기 새들처럼 짹짹거리는 꼬마들.

아, 이제 실감이 난다.

내가 집에 돌아왔구나.

* * *

알고 보니 그때가 벌써 자정이 넘은 때였다.

잠이 들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내가 돌아오니 자연스럽게 회의가 소집되었다.

"딱 좋을 때 돌아왔어. 오빠."

남색 머리칼을 한쪽으로 땋아 내린 세아가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원탁이 놓인 남작성 회의실.

거대한 원탁에 비해 동굴처럼 아늑한 공간과 동그란 돔형 천장 덕에 작게 말해도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내가 떠난 지 1주일이 지났다고?"

"응."

역시 시간비율은 6대 1인가 보다. 대충 계산한 것과 맞아떨어졌다.

"볼일 잘 봤는지....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세아가 슬쩍 리베라 쪽 사람들을 살펴보며 말했다.

내가 시간 여행을 한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는 우리 식구들. 그중에서도 내 직속 동생들과 벌슨 아저씨만 알고 있었으니까.

"마침 내일, 음 자정 넘었으니까 오늘 저녁이긴 한데, 아무튼 쿠샨시 전체 연석회의가 열리거든."

"전체 연석회의?"

"응. 쿠샨시에 존재하는 무력 집단들이 다 모여서 향후의 통치권을 두고 회의를 할 예정이야."

그런 걸 한다고?

내 예상과는 많이 다른 전개였다.

"그런 회의를 주최할 정도로 영향력이 센 인물이 있어?"

쿠샨시의 무력 집단들은 대개가 개자식들이었으니까.

내가 예상한 상황은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대혼란상이었다.

그런데 연석회의라니....

"응. 그걸 해내더라고."

"누가?"

"애쉴리."

"애쉴리?"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기분이 팍 상했다.

"설마, 그 마적단 애쉴리?"

끄덕.

"인신매매범 애쉴리?"

끄덕.

"마약 생산자 애쉴리? 하렘의 애쉴리?"

끄덕.

빠드득.

이가 저절로 갈렸다.

나는 흥분으로 거칠어진 호흡을 숨기지 않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나이트 입센을 죽게 한 그 실눈 새끼?!"

"맞아. 그 애쉴리."

"아니, 그 새끼가 어떻게?!!"

애쉴리.

쿠샨시에 온 지는 5년쯤 된 마적 출신의 양아치.

특유의 사업 수완으로 빠르게 세력을 넓혀서 이젠 제법 무시할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아무리 높이 쳐줘도 쿠샨시의 통치권을 두고 다툴 정도의 거물은 아니었다.

세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나도 놀랐어. 생각보다도... 똑똑하더라. 짜증 나게."

세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현재 상황을 요약했다.

"오빠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우린 막 애쉴리한테 잡아먹히기 직전이었어."

#26화 애쉴리

"처음 3일. 모두가 눈치만 보고 있던 그때, 애쉴리는 대담하게 움직였어. 영지군을 포섭하고 자기랑 비슷한 질 나쁜 패밀리들과 동맹을 맺고, 중립 세력들을 끌어들였지."

세아의 말을 들어 보니,

애쉴리는 상상 이상의 모략가였다.

그전에도 잔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인상은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간 크시아스가 무서워서 일부러 진면목을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놈은 감언이설로 전사들의 불안감과 기대감을 자극했다.

이젠 란센이 쿠샨시를 지배하려고 할 거다.

우리가 세력을 크게 결집시켜 놓아야, 란센이라도 함부로 휘두르지 못할 거다.

이런 식으로 불안감을 자극했고,

자신이 가진 온갖 유흥사업과 돈을 앞세웠다.

지금보다 더 호화로운 생활과 환락을 보장해 주겠다고.

싸우는 것 말곤 별 재주가 없는 영지군 전사들이나 중립 세력한테 그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하렘의 애쉴리'라고 불리는 만큼 효과는 더 강력했다.

"그런 식으로.... 붉은 전사단도 넘어갔다?"

"응. 그것 때문에 판도가 완전 저쪽으로 기울었어."

붉은 전사단은 크시아스 휘하의 영지군 중에서도 최정예였다.

총원 40명. 완숙한 최상급 익스퍼트인 욱살라 대전사의 직속부대로 익스퍼트 중급과 상급으로만 이루어진 악명 높은 전사단.

합격 전술에 능해서, 욱살라 대전사와 붉은 전사단이면 소드마스터도 죽일 수 있다고 공공연히 떠들어 댔다.

'...그게 틀린 말도 아니긴 하지.'

실제로 내가 소드마스터에 올랐던 그때에도 크시아스 백작에게 대들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붉은 전사단 때문이었다.

크시아스 백작만 해도 일반적인 소드마스터보다 강한데 거기에 붉은 전사단까지 있으니 그 위압감이 대단했다.

"그렇게 4일째가 되었을 때부터... 수면 아래에서 세력을 늘리기만 하던 놈이 본격적인 무력 시위를 시작했어. 오빠가 4일이나 안 보이니까 슬슬 욕심이 난 거지."

"내가 죽거나 다쳤다고 생각했겠지."

"맞아. 그때부턴 막 나가더라. 다른 세력들을 힘으로 굴복시키고,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주고, 자기 말을 따르면 당근을, 그렇지 않으면 피의 숙청을."

"디바이드 앤 룰...."

"응. 자경단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더라. 놈을 따르겠다는 쓰레기들이 늘어나고."

"대단하네."

"그 이상이야. 놈은 고작 7일 만에 쿠샨시에 존재하는 무력 집단의 절반을 장악했으니까."

"허."

세아의 말대로 그건 정말 엄청난 수완이었다.

로버랜드는 마수가 창궐하는 지역이라는 특성 때문에 인구의 대부분이 도시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덕분에 도시 하나하나가 작은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이곳 쿠샨시의 인구도 약 75만.

멸망하기 전 반로아 왕국의 수도 반다르의 인구가 150만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단일 도시로서는 굉장한 규모였다.

그런 만큼 이 도시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무력 집단이 존재했다.

시민들이 스스로의 치안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조직한 자경단에서부터, 마수 사냥을 위해 몰려든 용병단과 탐험단들, 각지에서 몰려든 불량배와 도망자들이 조직한 패밀리, 도시의 지배자였던 크시아스의 직속 부대인 영지군과 각종 전사대까지.

어중이떠중이 빼고, 순수 칼밥만 먹고 사는 사람의 숫자만 세어도 1만을 훌쩍 넘긴다.

그런데 단 7일 만에 절반을 장악했다니....

"욕심도 많아. 이 도시를 정말 먹고 싶은가 봐. 붉은 전사단마저 견제하기 위함인지 칼세릭 형제단도 고용했거든. 거기다가... 애쉴리 본인도 익스퍼트 최상급에 올랐다는 소문이 있고."

칼세릭 형제단.

로버랜드에서 이름 높은 용병단 중 하나였다.

단장 칼세릭은 완숙한 익스퍼트 최상급으로 10년 내로 소드마스터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받는 출중한 재능을 가진 남자.

'꽤 낭만을 아는 용병단이라 들었는데....'

그들은 사기와 뒤통수가 난무하는 이 무법의 대륙에서 몇 안 되는, 신의를 가진 용병단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자 나도 등골이 좀 서늘해졌다.

"...내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이 도시 하나에 지금 익스퍼트 최상급이 몇이나 있는 거야? 이 정도면 거의 작은 소왕국 수준의 전력이잖아?

"응. 안 그래도 슬슬 노골적인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거든. 현재 우리 전력은 애쉴리의 절반 수준이니까."

"뭐라고 압박을 하디?"

"...."

무표정하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던 세아가 처음으로 주저했다.

왜 저러지?

대답을 해준 건 원탁 한구석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데이지였다.

녀석은 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재."

뭐?

내 귀가 이상한가?

"사실... 그 새끼가 나한테 편지 보낸 건 벌써 1년은 됐는데.... 이번엔 아예 공식적으로 청혼을 넣더라고."

미친놈이?

두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다.

이 쿠샨시에서도 가장 더러운 성추문으로 유명한 놈이... 누굴 넘본다고?

파트너의 목을 졸라 죽이는 변태 성욕에, 거느리고 있는 첩의 숫자만 해도....

화륵!

지금 누가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동공 안에서 검푸르게 타오르는 불꽃이 보일 거다.

감정이 격해지면 동공 속에 불꽃이 타오르는 게 우리 반로아 왕가와 귀족 가문의 특징이었으니까.

"1년이나 되었다고? 왜 말 안 했어?"

"...말해도 방법이 없었잖아. 입센 경이 그렇게 됐을 때도.... 뭐."

하....

그랬지. 그렇긴 했지.

동네북이었으니까 우린.

저러니까 애가 뱀파이어가 되겠다고 했던 거다.

그것도 모르고 혼내기만 했던 내 자신이 밉다.

내가 점점 흥분하자, 세아가 슥 내 눈치를 보더니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내일 있을 연석회의는 사실상 놈의 대관식이 될 예정이었어. 하지만 오빠가 돌아왔으니 이제 그건 물 건너갔어. 이젠 이쪽의 무력과 인망이 더 강하니까."

그렇지.

그딴 놈이 쿠샨시를 쥐고 흔들게 둘 수는 없지.

"근데 문제는, 이제 놈을 쳐낼 수가 없다는 거야."

세아는 조금 피로한 얼굴이었다.

녀석이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마수토벌 때문에?"

로버랜드에서 도시가 성립하기 위한 첫번째 기준이 바로 주기적인 마수토벌. 그걸 위해선 일정 규모 이상의 전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리베라 피에트로가 분통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애쉴리 그놈만큼은 꼭 처단하고 싶었는데...."

나는 그런 리베라에게 가만히 시선을 주다가 세아에게 물었다.

"쓰레기들이 많지?"

"많다 뿐이겠어?"

세아가 책 한 권을 내게 쓱 밀었다.

살생부라고 적힌 책이었다.

천천히 그걸 넘겨봤다.

맨 앞에는 푸른 글씨로 적힌 명단이 중간에는 붉은 글씨로 적힌 명단이, 마지막에는 검은 글씨로 적힌 명단이 나열되어 있었다.

"푸른색이 그나마 도리를 아는 세력의 명단이야. 검은색이 갱생 불가의 쓰레기들이고 붉은색은 그 중간."

쭉 훑어봤다.

나도 이 쿠샨시에서 14년이나 굴러먹다 보니 대부분이 아는 이름들이었다.

'말이 좋아 중간이지, 붉은색만 해도 개쓰레기들이네.'

붉은색으로 적힌 놈들이 한다는 사업은 마약상이거나 사채업이었고, 자기 영역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잔혹하게 사람들을 대하기로도 유명한 놈들이었다.

검은색은 뭐 말할 것도 없고. 그쪽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납치하는 걸 주업으로 삼는 수준이었으니까.

"참아야 돼. 붉은색 정도는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돼. 그래야 도시를 유지할 수 있어. 근데 이제 문제는.... 검은색도 다 정리하진 못하게 됐다는 거야. 검은색 중에서도 붉은 점 보이지? 걔네도 받아 줘야 돼. 애쉴리 세력이거든."

"...."

검은 명단의 절반 이상에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살생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세아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담담하게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푸른색 명단에 적힌 세력과는 교감을 마쳤어. 그쪽은 확실한 우리 편이야. 전력으로 따지면 전체의 4분의 1정도. 거기에 붉은색까지 일부 회유하면 그럭저럭 통치 기반은 확보할 수 있어."

쿠샨시에 얽힌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설명한 세아.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저 살생부를 뚫어져라 살펴보며 녀석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기 적힌 애들이 내일 다 모인다는 거지?"

"응."

"됐어. 그럼.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고가 많았다, 세아. 그리고 리베라 님. 오늘은 이만 쉬기로 하죠."

"리베라 님이라뇨. 정 없게. 제 주군이시니 그냥 리베라라고 불러 주십쇼."

"알겠다. 리베라."

씩- 웃어 보이는 리베라.

그런데 세아는 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내일 어떻게 할지 전략 안 짜도 돼?"

"걱정 마. 잘 해결할게."

세아가 날 미심쩍다는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나는 그냥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 말았다.

그 사이로 끼어든 건 카트리나였다.

"그래! 세아! 걱정 마! 란센 오빠가 괜찮다잖아! 자! 그러면 오늘은 식구가 다 모인 기념으로 한잔하자! 어린애들은 먼저 자러 가라고!"

카트리나는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히히 웃었다.

사실 쟤도 필요할 땐 신중하고 생각이 많은 타입인데... 오늘은 옛날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내가 결정하면 모두가 믿고 따르던... 우리 패밀리의 전성기 시절이.

그녀가 그렇게 나오자 세아도 더는 파고들지 못했다.

대신 난 리베라에게 할 말이 있었다.

"리베라. 내일 부탁이 있어."

귓속말을 건네자 리베라가 눈을 빛냈다.

"란센 님, 그건...!"

"부탁해."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역시 사람이 시원시원해.

그럼 나도 내일 시원하게 보여 줘야지.

* * *

연석회의는 무너진 영주성에서 열렸다.

그곳이 쿠샨시의 중심이기도 했고, 그 어떤 무력 집단의 영역도 아닌 공백지였으니까.

참가 제한 인원이 3명이었기에, 나는 카트리나와 바렌을 대동했다.

"와.... 진짜 많네."

인원 제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300명 가까운 인물들이 무너진 영주성 위에 바글거렸다.

"란센이다...!"

"정말 란센이야...."

"살아 있었구나...."

내가 등장하자 사방이 분주해졌다.

분분히 길을 비키는 사람들, 속닥거리는 사람들.

"오! 란센 님!"

천천히 중심부로 걸음을 옮기자, 애쉴리가 나를 맞이했다.

'여전히 실실거리네.'

눈동자가 보이지도 않는 실눈을 하고, 항상 실실 웃어대는 그 재수 없는 면상은,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정말 오셨군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놈은 실실 웃으며 내 뒤를 힐긋힐긋 살피더니 웃음기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근데 데이지 양은 안 오셨습니까?"

...시작부터 선을 넘는다.

"데이지는 왜?"

"전 자존심 강한 소녀가 좋거든요."

"...."

어디까지 선을 넘나 싶어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이놈은 계속 입을 놀렸다.

"제가 청혼했다는 소식은 들으셨나요? 예쁘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가 혈연으로 이어지면 신임 백작님께도 절대 나쁜 이야기가 아닙니다."

놈은 나를 '신임 백작'이라 불렀다.

일단 나의 우위를 인정하는 모양새.

하지만 까부는 꼴을 보니, 자기가 확보한 세력에 상당한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음. 오랜만이오. 란센 대전사."

대전사라. 꽤 그리운 호칭이었다.

예전의 호칭으로 날 부른 남자는 얼굴에 칼자국이 가득한 남자였다.

현재, 날 제외하면 쿠샨시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 욱살라 대전사였다.

나는 딱히 인사를 받지 않고 스윽 시선을 뿌렸다.

욱살라 대전사 뒤에는 스스쟌 군단장이 있었다.

영지군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전사로 그 역시 익스퍼트 최상급이다.

'그럼 쟤가 칼세릭이겠네.'

스스쟌 군단장 옆에 있는 또 한 명의 수염 덥수룩한 장년의 남자.

욱살라 대전사에 지지 않는 강대한 오러로 보아 그가 칼세릭 형제단의 단장인 칼세릭이 틀림없었다.

좋아. 확인 완료.

나는 휙 등을 돌려 버리고 자리에 모인 무력 집단의 수장들을 향해 외쳤다.

"듣자 하니, 내가 없는 동안 사고를 친 놈들이 좀 있다던데?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빼앗고 재산을 강탈했다지?"

몇몇 놈들이 움찔 놀라며 웅성거렸다.

볼 것도 없다.

나는 품에서 세아의 살생부를 꺼내 검은색으로 적힌 몇 놈의 이름을 뱉었다.

"카루 패밀리. 4일 전에 일가족을 몰살하고 재산을 강탈했다지? 그 후 저항 의지를 상실한 인근 사람들을 강제로 납치해 노예로 팔았고? 그 돈으로 뭐 했어? 무기 사고 용병 샀어?"

"라, 란센 님 그게...!"

지목당한 카루가 뭐라 변명을 하려 했지만, 난 그저 무미건조하게 입술을 열었다.

"카트리나."

"응!"

스릉-

역시 척하면 척이라니까. 사전에 말을 맞춰 두지도 않았는데 카트리나는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검을 빼어 들고 카루와 그 수행원들에게 달려들었다.

"자, 잠깐!"

"애, 애쉴리 님! 애쉴리 님!"

놈들은 다급하게 애쉴리를 부르며 도망쳤지만, 카트리나의 검을 피할 순 없었다.

카트리나는 삽시간에 피 칠갑이 되어 내 곁으로 돌아왔다.

"익스퍼트 최상급...!"

"언제 저렇게 경지가...!"

"말했잖아. 란센의 동생들은 다 괴물이라고...."

카트리나의 무력에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

"워우- 신임 백작님 무시무시하시다. 시작부터 기강 세게 잡으신다. 하긴, 백작에겐 이런 위엄도 필요하죠."

애쉴리는 빙글빙글 웃으며 내게 친한 척 말을 붙였다.

방금 죽은 카루도 엄밀히 따지면 그의 세력이었지만, 잔챙이 몇 명은 내주겠다는 건지 여유가 넘쳤다.

마음껏 화풀이하라는 투였다.

결국 내가 몸통은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확신을 했기에 나올 수 있는 여유겠지.

나는 놈을 무시하고 계속 살생부를 읽었다.

"다음 로로르란 패밀리."

"응!"

"예예...."

내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카트리나는 옛날 생각이 난다는 듯 신이 나서 달려 나가고, 바렌은 귀찮다는 듯이 말꼬리를 늘였다. 그래도 제 할 일은 깔끔하게 처리한다.

"헤론 패밀리."

"다스비커 패밀리."

"루카스 패밀리."

거침없이 살생부를 읊었다.

그렇게 다섯 개의 세력을 숙청하고 나니, 자리에는 피비린내와 오줌 지린내가 진동했다.

모여 있던 다른 우두머리들이 눈치를 보며 벌벌 떨 때쯤, 애쉴리가 처음과는 달리 어색하게 굳어진 얼굴로 나를 말렸다.

"하하- 신임 백작님. 이 정도 했으면 쟤네도 알아들었을 겁니다. 너무 무섭게만 잡아도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이쯤에서...."

그래.

내 생각에도 이제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긴 한 것 같다.

"다음."

나는 애쉴리를 싹 무시하고 다시 살생부를 읽었다.

이번엔 애쉴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타푼, 더스트, 쿠쿠락 이상 3개 마적단. 엑스, 쉐도워커 이상 2개의 인신매매단."

애쉴리는 더 이상 웃지 못했다.

지금 읊은 조직들은 애쉴리의 직속이거나 그와 긴밀한 동맹 관계에 있는 조직들이었으니까.

"그리고 3개의 마약 생산 업체와 12개의 강제 성매매 업소로 시민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한 애쉴리."

난 실눈 놈을 싸늘하게 내려보며 말을 맺었다.

"사형."

내 선고가 떨어지는 순간,

스르릉-

카트리나가 진하게 웃으며 오러 쓰레드를 뽑아냈다. 곧장 애쉴리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아, 누나. 사이즈 좀 보고 덤벼."

바렌이 그런 카트리나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렸다.

그렇지. 지금 저쪽에 익스퍼트 최상급만 3명.... 아니 애쉴리까지 포함하면 4명인데. 이 정도 사이즈는 내가 직접 나서야지.

터벅.

검 자루에 손을 걸치고 앞으로 대강 걸어 나가는데, 빠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신임 백작님?"

씹어 뱉듯이 말하는 애쉴리.

늘 실실 웃던 눈을 날카롭게 치뜬 상태였다.

살짝 떠진 눈 사이로 노란 눈동자가 파충류의 그것처럼 잔혹하게 빛났다.

늘 가려져 있던 실눈에서 샛노란 눈동자가 떠오르는 순간이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퍽 섬뜩한 순간이겠다.

근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뭐 이 실눈 새꺄. 니가 눈 뜨면 어쩔 건데?"

건방지게.

#27화 다 생각이 있으니까

저벅.

내가 한 발자국 더 다가가자,

챙!

애쉴리는 다급히 검을 뽑아 들고 욱살라와 눈을 마주쳤다.

스르릉!

욱살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묵직한 대검을 뽑아 들고 외쳤다.

"붉은 전사단-!"

쩌렁쩌렁한 고함이 울려 퍼지고 잠시 뒤,

쾅! 쨍강!

영주성 인근에 있던 민가에서 문이 박살 나고 창문이 깨지며 붉은색 가죽 갑옷을 입은 전사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쩔컹쩔컹쩔컹!

그들의 갑옷은 급소마다 철편이 꿰매어져 있어 달릴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난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참가 인원은 3명이라며?"

하여튼 이 무법 도시 놈들 말은 믿으면 안 된다니까.

붉은 전사단의 합류로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애쉴리가 다시 입을 놀렸다.

"란센! 이런 식으로 가면 피차 공멸할 뿐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아직 늦지 않았다! 만용은 그만 부리고...!"

서걱!

20걸음 정도의 거리를 좁히고 날아든 오러에,

시끄러운 머리 하나가 굴러떨어진다.

"무슨...!"

"방금??"

"...!!"

욱살라, 스스쟌, 칼세릭.

적 중 가장 강한 무력을 자랑하는 놈들이 죄다 눈을 부릅뜨고 놀란다.

그래.

너희들도 반응 못했지?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안 가지?

털썩.

애쉴리의 시체가 맥없이 쓰러진다.

나는 뽑아 든 검을 천천히 내리며 입을 뗐다.

"두 가지가 궁금할 거야. 왜 너희가 내 검에 반응도 못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고작 오러 슈팅으로 익스퍼트 최상급의 오러 실드를 뚫었는지."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꽂혀 든다.

궁금하겠지.

너희들 상식으론 이해가 안 갈 테니.

하지만 고대 검술을 익히고 돌아온 나에겐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검탁(劍托)으로 예비 동작도 없이 곧바로 뻗어 나오는 검격인데 반응 못 하지.'

내가 직접 당하면서 배웠기에 잘 안다. 안 그래도 내 속도가 더 빠른데 시작점을 알아보지도 못하면 어떻게 막아 그걸?

'오러슈팅은 익스퍼트 상급의 기교지만, 거기에 고대의 검기를 섞으면 니들 오러 실드 정도야 충분히 깨고 들어갈 수 있고.'

짜릿하다.

익스퍼트 최상급 4명이라면 소드마스터라 해도 쉽지 않은 상대인데.... 지금 내 눈엔 저들의 목이 너무나 가냘파 보였다. 손만 뻗으면 똑! 하고 떨어질 것처럼.

쿵! 쿵! 절컥!

그사이, 붉은 전사단 40명이 방진을 짰다.

고오오오-

40명의 몸에서 흘러넘친 오러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하늘을 뒤덮는다.

'역시 제법이네.'

수많은 오러가 엮여서 강철처럼 단단해지는 모습.

화룡점정은 대전사 욱살라였다.

그가 오러를 끌어올리며 방진의 선두를 차지하는 순간, 질기게 엮였던 오러 위로 철갑이 내려앉듯,

쿠우우웅!

오러의 장벽이 천지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저건 오러 블레이드라도 뚫기 어렵다.

'어지간한 소드마스터는 정말 목숨 걸어야겠는데?'

욱살라가 거대한 대검으로 나를 겨누며 무겁게 말했다.

"란센 대전사. 정말 끝장을 봐야겠소?"

그의 미간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한 방울.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난 어지간한 소드마스터가 아니니까.

"욱살라 아저씨. 하나만 해요. 하나만. 굽히려면 굽히고. 덤비려면 덤비고."

난 안다.

저 아저씨가 왜 저러는지.

뭐 하루 이틀 보나.

"아까 내 검을 보니까 자신이 없죠? 근데 또 다 내려놓고 무릎 꿇기엔 여태 누린 게 아깝나?"

대답은 않고 묵묵히 나를 바라보는 욱살라.

그래. 포기 못하겠지.

전사로서는 뛰어난 사람이지만, 저 인간의 탐욕과 색정은 도를 벗어난 것이다.

저놈에게 전재산을 빼앗긴 가족들과 피눈물을 흘린 커플들의 이름을 나는 온종일이라도 읊을 수 있다.

뒤에서 눈치를 보던 스스쟌 군단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오만하군. 네 맘에 안 드는 사람 다 죽이고 이 도시에서, 아니 이 로버랜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는 넌 얼마나 깨끗하길래 그러지?"

"아니, 뭐 깨끗하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내 머릿속에 스치는 건, 그 이후의 일들이었다.

파괴된 가정의 아이들. 욱살라 놈이 싸지른 사생아들.

이 도시에서,

고아들은 그런 식으로 자꾸만 생겨난다.

근데 이런 얘기를 쟤한테 해서 뭐 하겠어.

나는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 말했다.

"그냥 죽어."

콰아앙!

땅을 박차고 나아간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전사와 전사들 사이를 타고 흐르는 강대한 오러의 사슬.

저런 건 소드마스터라도 부수기가 힘들다.

얼마 전의 나, 그러니까 라이테나 대공에게 배우기 전의 나였다면 꽤나 고전을 했겠지만,

서걱!

"아니??!"

쩌억!

"무슨!"

일 검, 일 검에 목이 하나씩 떨어진다.

단단하면 뭐 해.

공격을 못 막는데 무슨 소용이냐고.

물론 익스퍼트들에겐 오러 실드가 있지만... 그거야 검기를 좀 섞어 주면 오이 자르는 거랑 비슷했다.

붉은 전사단 40명?

솔직히 우습다.

쩌저저적!

검탁(劍托).

검이 스스로 이끌어 나가는, 준비 동작도 없는 그 공격에 전사들은 반응도 못 하고 제 목을 내어 주었다.

'모르면 맞아야지.'

원래 전투라는 게 그렇다.

새로운 전술이 등장하면, 구식 전술을 쓰던 쪽은 손도 못 쓰고 자빠지는 거다.

칼만 들고 싸우다가 갑옷 입은 적을 만나면 죽는 거고, 근접 무기로만 싸우다가 활을 처음 만나면 또 죽는 거고, 보병들로만 설치다가 기병을 만나면 도망치기 바쁜 거고.

이 시대의 전사들에겐 고대의 검술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붉은 전사단들은 자기가 왜 죽는지도 모르고 계속 죽어 나갔다.

"뭐, 뭣들 하고 있어! 다 덤벼! 란센 저 새끼, 죄다 죽일 작정이야! 힘을 합치지 않으면 다 죽는다!"

위기감을 느낀 욱살라가 외쳤다.

붉은 전사단이 아닌, 장내에 모여 있던 다른 조직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난 그들을 돌아보며 등을 떠밀었다.

"맞아. 다 죽일 거야. 그러니까 다 덤벼."

오히려 자신을 도와주는 듯한 내 언동에 욱살라가 눈썹을 와락 구겼다.

"지금 뭐 하자는...!"

"뭐긴, 그 말 그대로. 다 죽이겠다는 거지."

그냥 말만 한 게 아니다.

섬뜩한 살기를 사방으로 퍼뜨렸다.

"으, 으아아아아!"

이대로 있으면 정말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고 느낀 걸까?

세아가 푸른색으로 분류한 이들을 제외하고, 살생부에 붉은색과 검정색으로 적힌 이들은 비명 같은 기합을 지르며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다.

"좋구나."

이미 붉은 전사단의 진형도 반쯤 무너진 지 오래. 새로 달려드는 이들이야 내 기준으론 오합지졸. 오러 블레이드도 필요 없다.

스스스스-

실타래가 풀리듯 뻗어 나가는 오러 쓰레드와 허공을 나는 오러 슈팅이 사방을 난자했다.

우수수-

낙엽처럼 목들이 하늘을 난다.

우박처럼 후드득 떨어진다.

여기도 목.

저기도 목.

"이놈!!!"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욱살라 대전사가 대검을 치켜들며 달려들기에,

서걱.

그 목숨을 거두었다.

단 일 검.

소란스러운 전장에 싸늘한 침묵이 감돈다.

"미, 미친.... 설마. 그, 그랜드 마스터...?"

이제야 나와의 격차를 실감한 걸까?

욱살라 대전사의 옆에서 내 틈을 노리던 스스쟌 군단장이 등을 돌려 달아났다.

저런 대어를 놓칠 순 없지.

"켁!"

붉은 전사단 뒤로 숨어드는 그를 쫓아가 목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또다시 오러 쓰레드.

갈기갈기 찢기는 붉은 전사단.

자, 그럼 다음 상대는 누구?

슥, 시선을 돌리니 잔뜩 굳은 얼굴의 덩치 큰 장년의 전사가 보였다.

'아, 잊고 있었네.'

칼세릭 형제단.

적들 사이에 남은 마지막 최상급 익스퍼트.

검 끝을 까딱이며 그 앞으로 다가가자.

털썩.

단장인 칼세릭이 대뜸 무릎을 꿇었다.

"살려 주십시오."

고개를 푹 숙이고 간청한다.

어라,

나, 이런 전개에는 좀 약하다.

나도 왕년에 무릎 좀 꿇어 봐서 그런지....

'...나쁜 애들이 아니긴 해.'

고용주를 배신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갈취하지도 않는, 이 로버랜드에 몇 없는 낭만 아는 사내.

좋아. 봐줬다.

"거기 무릎 꿇고 손 들고 있어."

까딱 검 끝으로 가리키자, 칼세릭과 그의 부하들이 냉큼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옆을 지나쳤다.

오합지졸처럼 서서 내 눈치를 바라보는 적들 앞에 섰다.

'이제 다 해서 한 70명 정도 남았나?'

끝장을 보자.

오러 쓰레드를 일으키며 다가가자, 70명의 인원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괴, 괴물."

진부하기는.

그런 말은 20살 때도 들어 봤다고.

후욱!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달려들었다.

다섯 명, 열 명씩 단숨에 휘어 감고 조각 내는 오러 쓰레드.

피가 사방으로 흩날린다.

그 피는 내 몸에 닿지도 않았다.

오러가 일으키는 폭풍과 사방으로 뻗는 날카로운 검기에 잘게 쪼개져 날아가 버릴 뿐.

"으아아아!"

"저건... 저건 못 이겨."

적들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구난방으로 도망쳤다.

그 악명 높은 붉은 전사단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이미 놈들이 도망칠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쐐애액!

퍼석!

도망치는 적들의 머리에,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이 꽂혔다.

"어디 도망쳐 봐라! 모조리 꼬치로 만들어 줄 테니! 궁병!!!"

벌떡 몸을 일으킨 리베라 피에트로가 호령하자, 민가 옥상 곳곳에 매복하고 있던 궁수대 또한 몸을 일으켰다.

끼이익!

활시위 당기는 소리 섬뜩하게 울려 퍼진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리베라 피에트로.

쿠샨시 제일의 궁병을 거느린 그는 어제 내가 한 부탁을 성실히 이행해 주었다.

쏟아지는 화살이 생을 찾아 도주하던 놈들의 시야를 절망으로 물들인다.

"아악!"

"3명 제한 아니었어? 으아아악!"

미안.

나도 결국 무법 도시 놈이라서.

"죽여!"

"놓치지 마!!"

사전에 우리와 교감을 나누었던 푸른색 명단의 조직들도 나섰다.

뿔뿔이 흩어진 적들을 추격해 하나하나 땅에 발라 버린다.

앞에는 내가 버티고 있고, 뒤에는 리베라의 궁병대가 있고, 사이에서 푸른색 조직들이 날뛰니....

'상황 정리네.'

싸움은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후우...."

널브러진 시체들 사이에서 나는 잠시 전투의 열기를 식혔다.

자박.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시체와 피 웅덩이를 피해 조심조심 다가오는 키 작은 여자애.

남색 머리칼을 한쪽으로 땋아 내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전장을 슥 둘러본 세아는 작게 한숨을 쉬고 내게 말했다.

"다 죽였네."

"응. 붉은색 명단 이상은 싹 정리했어."

"...왜 그랬어?"

질책도 아니고, 호기심도 아니고,

세아는 그저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세온이가 생각나서."

우리 식구 중 현재 제일 어린 6살짜리 세온이. 녀석이 떠올라서 다 죽였다고.

"세온이?"

"응. 걔가 고아가 된 이유가 있잖아."

"아...."

세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세온이의 아버지는 마약에 빠져서 재산을 다 탕진하다 죽었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붉은 전사단 놈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다 죽었다.

그게 싫다.

"난 그런 식으로 자꾸 고아들이 늘어나는 게 싫어. 우리가 다스리는 도시는, 세온이 같은 애들이 웃으면서 살 수 있는 그런 도시였으면 좋겠어."

"아...."

세아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잘 알겠어. 하지만 그들은 필요악이야. 해충들이지만, 또 정작 없으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어."

그녀의 짙디짙은 푸른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오빠가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그 넓은 지역의 마수를 모두 토벌할 순 없고, 마수가 토벌되지 않으면 이 도시는 죽고 말 거야."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방법이 안 떠올라. 도시를 지켜낼 수 있을 만한 전력을 끌어모아야 하는데.... 단기간에는 도저히...."

나는 고민하는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음!"

세아는 재빨리 내 손에서 머리를 빼내고 나를 찌릿 올려다보았다.

짜식. 옛날엔 좋아했으면서.

"세아. 날 좀 더 믿어 봐."

"응?"

"생각해 둔 방법이 있다고."

"...뭔데?"

"유적 발굴 어때? 그거만큼 돈 되고 사람 끌어모을 수 있는 것도 없잖아?"

"유적 발굴...? 설마...?"

"응. 이번에 다녀온 데가 있거든."

어느새 해는 지고 하늘 위로 별들이 떠오른다.

나는 그 별 중 유독 밝고 전혀 움직이지도 않는 별 하나를 찾아냈다.

'지혜의 여신 미바바르.'

지금은 잊힌 고대의 13주신 중 하나.

손을 뻗어 그녀를 겨눴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그 각도를 맞춰 보았다.

소드마스터의 예리한 감각은, 아주 조금의 오차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여기보다 조금 더 북쪽인가?'

지금도 선명하다.

저 별이 이곳보다 조금 더 높은 각도로 떠오르는 곳.

그 아래에 바로 그 장소가 있다.

한 소녀가 매일 하늘을 올려다보며 13주신을 겨눠 보던 곳.

나의 선배, 이오딘 세롬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어 하던 장소.

기사들의 도시, 글로잉스틸.

이곳에서 멀지 않았다.

'선배는... 결국 그곳을 지켜내고 스승님의 검을 이어받았을까?'

참 이상하지.

바로 어제까지 내 옆에서 떠들던 그 사람이 벌써 1만 년도 전에 죽어 사라진 사람이라니.

그 삶은 어땠을까?

만족스러웠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확실히."

세아가 내 감상을 깨뜨리며 끼어들었다.

"고대 유적이면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어떤 종류고 규모가 어떠냐에 따라 또 다르지. 어느 정도나 되는데?"

규모라....

"인구 20만 정도 되는 도시고. 거리엔 대장간이 가득했어. 뛰어난 기사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어서 기사의 도시라고 불리던 곳이었지."

"정말...?"

항상 무표정한 세아가 놀라 눈썹을 치켜들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귀하디귀한 고대 무기가 드글드글할걸?"

아무렴. 아무 계획도 없이 날뛰었을까, 다~ 생각이 있으니까 죽인 거라고.

글로잉스틸의 발굴 소식이 알려진다면,

로버랜드의 모든 전사들이 엉덩이를 들썩일 거다.

#28화 대발견

아직도 도시에서는 잔당 소탕이 진행 중이었지만, 그건 동생들에게 맡기고 나는 먼저 상인들을 끌고 나왔다.

"따라오라고 해서 일단 오긴 했는데... 괜찮은 거야?"

"그러니까. 유적이 발견됐다는 소문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갑자기 무슨 유적을 발굴한다고...."

"그래도 나는 나오니까 좀 낫다. 도시 안에 있으면 너무 무서워...."

"그건 맞지. 진짜 대숙청.... 너무 많이 죽이는 거 아냐?"

"마수 토벌은 어쩌려고 저래?"

"그러니까! 젠장 내가 왜 여길 와서는!"

상인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저희들 딴에는 목소리를 낮춰서 쑥덕거렸지만, 소드마스터인 내 귀에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훤하게 다 들렸다.

'힘들겠지.'

어차피 여러 도시를 오가는 상인들.

저들의 입장에서는 크시아스가 악행을 저질렀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되레 수많은 전사들을 죄 잡아 죽인 나에게 불만을 품었으면 모를까.

전사가 줄어들면 무역은 그만큼 어려워지니까.

그래서 기대가 됐다.

'이따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도각도각.

말을 타고 앞서다가, 흘깃, 무표정하게 따라오는 칼세릭을 돌아보았다.

로버랜드에서 이름 높은 칼세릭 형제단의 단장.

그는 감정을 철저히 숨긴 채 나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칼세릭? 생각은 해 봤어?"

"...다른 형제들까지 다 데리고 투신하라는 말씀 말입니까?"

"그래. 얘기한 대로 조건은 최고로 맞춰 줄게."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멋대로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형제들에게 물어는 보겠지만 확답을 드리긴 어렵습니다."

"그래?"

"예. 그래도 저희 목숨값을 다 갚을 때까지 향후 1년간은 저희 5형제가 목숨을 다 바쳐 보필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죄송합니다...."

대규모 숙청을 거행하는 바람에 현재 쿠샨시는 심각한 인력 부족에 직면했다.

칼세릭 형제회는 익스퍼트 전력만 30명이 넘어가는 대형 용병단.

그걸 통째로 꿀꺽하면 참 좋을 텐데....

사실 칼세릭의 속셈은 뻔했다.

'우리에게 몸을 의탁할 만큼의 가치가 없다 생각하는 거겠지.'

쿠샨시(市)는 로버랜드 전역으로 보면 중하위권 도시.

동대륙인 올드랜드와 서대륙인 글로리랜드를 잇는 황금의 교역로에서도 비교적 비중이 낮고.

그러니 꽤나 잘나간다는 칼세릭 형제단의 눈에 찰 리 없었다.

내가 자신들을 살려 주는 대가로 1년의 봉사를 요구했으니, 그것만 채우고 바로 떠날 작정이겠지.

'금세 망할 도시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마수는 어떡할 거냐며 불안해하는, 저기 상인들처럼.

그러니 역시 궁금했다.

저 칼세릭이 이따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1시 방향으로 기수를 살짝 튼다."

"예!"

하늘에 떠오른 미바바르를 보며 행군의 방향을 조정했다.

풀밭이 가득한 구릉지대를 지나 조금씩 땅이 질퍽해지더니, 급기야 이끼와 나무로 뒤덮인 습지가 나타났다.

"북쪽 습지?"

"여기 정말 유적이 있어?"

수군대는 상인들을 이끌고 말에서도 내린 채, 행군을 이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여기다."

하늘을 보면 확실했다.

미바바르가 딱 기억 속의 그 각도 그대로 떠 있었다. 다른 주신들도 마찬가지.

"여기가 맞습니까? 장관이긴 합니다만...."

칼세릭이 오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말대로 절경이긴 했다.

불쑥불쑥 솟은 큰 바위와 깎아지를 듯 높이 선 암석기둥들이 죄다 이끼와 나무로 뒤덮여 미로를 형성했다.

땅은 질퍽하고 얕은 물이 찰랑찰랑하다.

자연이 가꾼 정원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이곳의 진가는 그게 아니지.

'오랜만이야. 한 1만 년 만인가?'

다른 이들에겐 그저 마구 솟은 바위와 암석 기둥으로 보이겠지만, 내 눈은 그 안에서 익숙한 거리와 실루엣을 찾아낸다.

슬프달까. 반갑달까.

선배.

선배는 진짜 나랑 아득히도 먼 곳에 살았던 거구나.

천천히 다가가 바위 위에 손을 얹었다.

아름답고 번성했으나, 어느새 사라져 버린 그곳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응. 여기 맞아."

내 대답을 들었는지, 따라온 상인들도 휘적휘적 고개를 돌렸다.

"유적은... 전혀 안 보입니다만...."

한 상인이 그렇게 말하곤 제 입을 가렸다.

그래야지. 하루아침에 수백 명을 학살한 신임 백작 앞인데 입조심해야지.

나는 실실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잘 봐. 지금 눈에 보이는 게 다 유적이니까."

"그... 잘 보니까 그런 것도 같습니다...."

열심히 처세술를 발휘하는 상인을 보며 나는 씩 웃고 칼을 빼어 들었다.

"히이익!"

깜짝 놀라는 상인을 뒤로하고 앞에 이끼로 가득한 바위 앞에 섰다.

"눈 크게 뜨라고."

사사삭!

이끼와 나무로 뒤덮인 바위 위로 이발사처럼 섬세하게 검을 휘둘렀다.

잘려 나간 이끼와 나무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자...

"벼, 벽??!"

찰흙으로 빚어 구운 것처럼,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벽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건축 기법은... 마도 시대 건데...?"

눈썰미가 있는 상인 하나가 벽에 달라붙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상인들이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바라보며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자! 다들 뭐 하고 있어! 이끼랑 나무들을 뜯어내!"

"네, 넷!"

100명의 병사들이 내 지시를 따라 후다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 여기도!"

"여기도 벽입니다!"

"헉! 여기 문이 있습니다!"

이끼와 나무, 진흙과 연못으로 가려져 있던 고대의 건물들이 속속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자, 자, 보이는 대로 끄집어내서 내 앞으로 모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가장 먼저 걷어 냈던 건물의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건물 안에도 이끼가 가득했다. 벽면은 뚫고 들어온 나무뿌리가 칭칭 휘감았고, 바닥은 물이 고여 찰박찰박했다.

하지만 햇불을 들어 올리고 진흙을 걷어 내자 금세 반짝이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역시. 기사의 도시답게 처음부터 이런 게 발견되네.

나는 그것들을 한 아름 안고 밖으로 나와 쏟아 냈다.

"저, 저건!"

상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비싼 옷에 진흙이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쏟아 낸 물건들을 살피더니 경악을 내뱉었다.

"이런 습지에 있으면서 녹이 하나도 안 슬었다고?"

"틀림없어! 이 광택. 두드렸을 때 나는 이 소리! 습기에도 녹슬지 않는 재질!"

"루, 루세라스 강철!"

"고대 무구야!!"

아까까지만 해도 미적지근하던 상인들의 눈이 벌게졌다.

루세라스 강철로 만들어진 고대 무구는 어느 대륙을 가나 사랑받는 값비싼 보물이었으니까.

'뭐, 실상은 기사 후보생도 하나쯤은 구비하고 있던 보통의 물건이지만, 그것만 해도 이 시대에는 엄청난 보물이지.'

고대의 무구 제조 기술은 지금과 비교도 안 되었다.

검기 수련을 위해 일부러 조악하게 만드는 철검을 제외하면, 현대 기준에선 죄다 세기의 명검.

그러니까,

발견은 지금부터가 시작.

"여, 여기도 발견됐습니다!"

"여기도 있습니다!"

곳곳으로 흩어진 병사들도 저마다 물건들을 들고나와 내 앞에 쏟아 냈다.

"또 검이? 아니 갑옷도?"

"무슨 검이랑 갑옷이 이렇게 많이 나와?! 우연인가?"

"잠깐! 저건 고대 금화잖아! 수집가들한테 엄청 비싸게 팔리는데...!"

쏟아지는 보물들에 정신을 못 차리는 상인들.

그러다가 문득 똑똑한 상인 하나가 깨닫는다.

"잠깐! 잠깐!"

"뭐? 왜 그래?"

"안 볼 거면 비켜! 나도 좀 보자! 와... 고대 검이 벌써 3자루나!"

"아니, 잠깐만! 다들 좀 보라고!"

"아, 왜!"

똑똑한 상인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끝도 없이 펼쳐진 큰 바위들과 절벽처럼 깎아지를 듯 서 있는 암석 기둥들.

모두 이끼와 나무에 뒤덮여 있어 그 본색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지금 그러니까! 저 바위랑 기둥들이 죄다... 건물이라는 거 아냐!?"

"!"

"!!"

그제야, 다른 상인들도 상황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뭐, 뭐? 설마..."

"진짜야? 저게 다...?"

그들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향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들의 춤사위.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환영한다. 고대 도시 글로잉스틸에 온 것을."

"!!!"

벼락을 맞은 듯 어깨를 움찔거리는 상인들.

그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도시였어.... 그냥 유적이 아니라, 고대 도시 하나가 통째로 발견된 거야...."

고작 건물 10개 정도를 털었는데도 벌써 많은 보물이 나왔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건물을 다 털면 얼마나 많은 보물이 나올까?

"이 정도면 그냥 광산이잖아? 고대 유물이 나오는 광산...."

그들은 깨닫는다.

로버랜드 북서쪽에 위치한 별 볼 일 없는 도시 쿠샨이, 고대 유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제권을 형성할 것임을.

"아~ 이거 유적이 너무 커도 문제네. 전사와 탐험가들이 많이 있어야 이걸 다 발굴할 텐데~"

나는 기지개를 켜며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이러려고 상인들을 데려왔으니까.

저 상인들은 오늘 본 것을 이제 대륙 전역으로 퍼뜨릴 것이다.

쿠샨시가 많은 전사와 탐험가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과 함께, 돈이 아주 많을 거라는 사실도.

"저...! 백작님!"

"백작님! 잠시 얘기 좀!"

올 때까지만 해도 힐긋힐긋 쑥덕거리던 상인들이 갑자기 내게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10년 만에 상봉한 가족 대하듯이 간절했다.

이제 내가 좀 달리 보이나 보네?

지금부터는 내 차례다.

"아아, 자세한 내용은 도시로 돌아가서. 내일쯤 얘기하자고. 내일쯤."

내 거절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는 게 귀여웠다.

자, 그럼 상인들이 태세 전환하는 모습은 잘 봤고.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내 옆에 서 있던 칼세릭.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묵직하게 서 있던 그가 지금은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언제 저기까지 갔는지, 고대 검과 갑옷을 만져 보며 감탄을 토했다.

잘하면 침도 흘릴 것 같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때?'

눈썹을 치켜들어서 묻자, 칼세릭은 유물을 내려놓더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역시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걸음걸이였다.

그렇지. 루세라스 강철로 만들어진 고대 무구를 보고도 눈이 돌아가지 않으면 그건 전사가 아니지.

그가 내 눈치를 살살 보며 입을 뗐다.

"저, 저기 란센 백작님.... 그게...."

나는 싱긋 웃었다.

"왜? 할 말 있나? 1년 뒤에 떠날 칼세릭 경?"

내가 말했지?

후회하지 말라고.

* * *

며칠 뒤.

로버랜드 전역으로 하나의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쿠샨시(市)에 엄청난 돈벌이가 생겼다!'

'고대의 무기와 갑옷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신임 백작은 현재 인재가 부족하다!'

그 소문에, 로버랜드에 넘쳐나는 전사들과 탐험가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형님! 쿠샨시에 돈벌이가 좀 된다는데요?!"

"얘들아! 짐 챙겨라!"

각 도시에서 어깨 좀 펴고 다닌다는 왈짜패들도,

"이건 엄청난 기회입니다."

"그렇지. 이제 쿠샨시의 지배자는 엄청난 힘을 손에 쥘 거야."

"네. 한 지역의 패자, 어쩌면 5왕(王) 바로 아랫급 정도까지는 올라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지금 합류하면 초창기 멤버가 되는 건가?"

"인생 역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아. 쿠샨으로 간다."

무력은 있으나 아직 둥지를 찾지 못한 용병단과 전사대들도,

"도시 규모의 유적!"

"이건 가야지! 무조건 간다!"

"도시면 그 일대에도 분명 뭔가 있어! 그런 거 발견하면 인생 역전이다!"

고대 유적이라면 환장을 하는 탐험가들과,

"자네! 소식 들었나?! 마도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허허 이미 집 팔아서 전사들 고용했다네. 자네도 가는가?"

"아하...! 집을 팔면 되겠군! 같이 갑세!"

마도 시대 연구에 인생을 건 학자들까지, 모두가 떨쳐 일어났다.

유물 러시!

보물과 기회 그리고 지식을 찾아, 로버랜드 곳곳에서 전사들이 쿠샨시(市)로 몰려들었다.

* * *

"쿠샨시?"

소식은 빠르게 퍼져 로버랜드의 서북면에 웅크린 거인의 귀에도 들어갔다.

190cm가 넘는 큰 키에 옅은 금빛의 머리칼.

따분하게 누워서 포도알이나 따먹던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크시아스가 죽고 고대의 도시가 발견돼?"

남자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 뱅글뱅글 맴돌다가 실실 웃음을 흘렸다.

"하늘이 우리를 돕는구나?"

"참으로 그렇습니다."

"군대를 준비해. 날래고 경험 많은 놈들로."

"네."

"알지? 속도는?"

"생명입니다."

"좋아! 오늘은 기병 훈련이다!"

남자는 설렘을 숨기지 못하고 뛰다시피 밖으로 나섰다.

노르베르쥬의 심장, 아일룬 초원 지역의 지배자.

로버랜드 5왕(王) 중 일좌를 차지하는 남자.

질풍왕 하룬.

그의 심장이 오랜만에 뛰는 순간이었다.

#29화 수련

유적에 대한 소문은 순조롭게 퍼지고 있었고,

피비린내로 점철된 숙청도 끝이 났다.

세아의 살생부에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적힌 조직은 싸그리 정리했다.

단순 가담자는 살려 주었지만, 죄질이 나쁜 놈들은 과감하게 솎아 냈다.

그간 우릴 괴롭힌 놈들의 경우엔, 눈 한 번 흘긴 원한까지 이자 톡톡히 쳐서 갚아 줬다.

피와 비명으로 가득했던 지난 사흘은 이제 이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모두에게 확고하게 알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 우리가 이 도시를 다스린다."

아직 동이 트기도 전 새벽 5시.

나는 동생들을 연무장에 집합시켰다.

요 며칠, 많이 피곤했을 텐데도 다들 눈을 반짝였다.

그 맘 이해한다.

다 끝났으니까.

크시아스 아래에서 겪은 그 오욕과 고통으로 점철된 세월이.

마침내 끝났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떨쳐 일어나 이 도시를 우리의 둥지로 만들었다.

이 넓은 도시 어디에도,

이제 우리를 핍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진짜는 지금부터야. 저 밖에 들끓는 마수들로부터 도시를 지켜내야 하고, 이 도시 안으로 기어들어 올 무뢰배들을 통제해야 하고, 욕심만 그득한 로버랜드의 강도 백작들과 기 싸움을 벌여야 해."

한마디 한마디. 뱉을 때마다 동생들의 시선이 깊어졌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 꿈의 초입에 서 있는 거야. 빼앗기기만 했던 우리 인생에서 처음으로."

꿈.

나는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이 도시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도 있고, 왕국을 세워서 무너진 가문을 재건할 수도 있어. 그리고 어쩌면... 제국에게 복수하고 반로아 왕국을 되찾을 수도 있겠지."

모두의 눈에 격정이 서렸다.

어린 나이에 왕국을 떠나왔지만 그래도 다들 기억하고 있었다.

나이가 좀 많은 동생들은 부모님의 얼굴과 아름다웠던 기사왕국 반로아를 기억했고, 그보다 어린 동생들도 마지막까지 우리를 위하며 죽어 간 기사들과 그들이 전해 준 가문의 절기들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긴 시간 보잘것없이 살았지만,

사실은 단 한 순간도 보잘것없지 않았다.

드높은 이상과 긍지, 그리고 사명감을 늘 가슴에 품었으니까.

그러니까 하나의 도시를 차지한 이 순간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하지만 모두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꿈의 출발점이었다.

화륵! 화르륵!

반로아 왕국 귀족의 혈통들답게.

하나같이 동공 깊숙한 곳에서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리 밝지 않은 희미한 빛이지만, 아직 동이 트지 않았기에 제법 반짝거렸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고 시선을 돌렸다.

우리와는 다른 혈통을 가진 형제들에게.

"반로아 왕국 출신이 아닌 동생들도 마찬가지야. 너희도 너희만의 가문을 세우게 될 거야."

그 말에, 세클란을 비롯한 아이들이 울컥하는 게 보였다.

쿠샨시(市)에 와서 우리가 거둔 수많은 고아 중 유독 무예에 재능이 있었던 아이들.

나는 그들도 공평하게 호명했다.

"알아. 다 알지는 못해도 조금은 알아. 너희가 겉도는 느낌을 받고 있다는 거. 그건 어쩔 수 없어. 우리의 과거가 서로 다르니까. 내가 너희의 아픔을 알 수 없듯이, 너희도 마찬가지야. 왕국에서 도망치며 고귀했던 신분을 잃어버리고, 유서 깊은 가문이 멸문당하는 그건, 서로 알 수가 없잖아?"

나는 세클란과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돌아보았다.

"과거가 달라. 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거야. 우리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그 안에서 모두가 각자 한 가문의 주인으로서, 언제까지나 동료이자, 친구이자, 가족으로서, 함께 하는 미래 말이야."

아이들이 입속으로 '가문....'하고 중얼거린다.

눈빛이 복잡해진다.

그렇겠지.

이 무법 도시 쿠샨에서 저마다의 기막힌 사연으로 부모님을 잃은 고아들에게... 자신만의 가문이라는 말은 그 울림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의 가족, 울타리, 가문.

"그러니까, 우리는 더 강해져야 돼. 더 큰 꿈을 꾸기 위해. 가문을 재건하고 창건하기 위해. 그래서 이렇게 일찍 불렀다. 앞으론 매일매일 이 시간마다 수련을 할 거야."

동생들은 자세를 바로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좋은 눈빛이다.

내 동생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재능도 하나같이 출중하다.

이 녀석들이 얼마나 빠르게 무럭무럭 자랄지 기대가 된다.

"내가 최근에 알게 된 검술이 있어. 그걸 가르칠 거야. 오러는 사용금지. 이건,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는 순수한 검술이니까."

내 설명에 카트리나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어? 오러를 가르쳐 주는 게 아니었어?"

"오러 말고 검 그 자체에 대해 배울 거야."

"그런 게 나한테도 의미가 있을까? 그 시간에 오러를 수련해서 소드마스터를 노리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최근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카트리나는 얼른 소드마스터가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드마스터라....

"장담할게. 이걸 배우면, 더 강해질 거야. 소드마스터보다 더."

확신한다. 카트리나가 고대 검술을 익스퍼트 하급 수준까지만 익혀도 어지간한 소드마스터에겐 쉽게 지지 않을 거라고.

고대 검술 자체도 워낙 강하지만, 현대의 오러 검술과 합쳐지면, 그건 아예 사기가 되었다.

그러니 이게 맞다. 카트리나가 오러로 소드마스터가 되려면 아무리 빨라도 몇 년은 더 필요할 테지만, 독검(讀劍)의 경지에 올라 검기를 뽑는 건 금방일 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전 대륙이 깜짝 놀랄 거다.

"설마... 오빠가 갑자기 강해진 이유가, 그거야?"

"맞아."

내 짧은 긍정에,

화르륵!

아이들의 기세가 바뀌었다.

배우고 싶다는 열기가 뜨겁게 느껴진다.

"자, 그럼 우선 검... 뽑아!"

채챙 챙!

총원 17명.

동생들이 일제히 검을 뽑는다.

"지금부터 규칙을 전달한다. 첫째, 교육 시간 동안 난 너희의 형이나 오빠가 아니다. 스승님이야. 절대 봐주지 않아. 둘째, 현 시간부로 하루 24시간, 그 어떤 상황에도 검을 뽑은 채 절대 손에서 떨어뜨리지 않는다."

고대 검술의 시작은 검령과 소통하는 것.

그러려면 일단 검과 무조건 친해져야 한다.

그게 내 신체의 일부로 느껴질 때까지.

"밥은?"

바렌이 중얼거리듯 묻길래 즉답해 줬다.

"밥숟갈은 한 손으로만 들어도 되잖아?"

그러자 이번엔 카트리나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그럼 화장실은?!"

두말할 것도 없지.

"큰 거든 작은 거든, 검을 반드시 손에 붙이고 해결해. 잘 때도 놓지 마."

"에엑?! 말도 안 돼!"

"스스로 실천해. 빠르게 강해지고 싶다면."

"그러다 다치면?"

"다들 익스퍼트잖아. 자기 칼에 자기가 다치면 나가 죽어야지."

나는 엄격하게 말하고는 동생들을 한 번 쭈욱 둘러봤다.

아,

동생들이 아니지.

이 순간만큼은 제자들이다.

마음은 아프지만...

빡세야 한다. 빡셀수록 좋다. 그래야 이 험난한 땅에서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

스르릉-

난 검을 뽑아 들며 규칙을 마저 전했다.

"셋째, 언제 어디서든, 알아서 막고. 알아서 반격한... 다!"

짜아아악!

낭창하게 휘어진 훈련용 검의 넓적한 면으로 카트리나의 뺨을 후려쳤다.

미안. 카트리나. 그치만 매는 연장자부터 맞아야지.

카트리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허공에 뿜어지는 침방울.

"!!!"

눈을 동그랗게 뜬 동생, 아니 제자들.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자고로 당해 봐야 실력이 빨리 느니까 어쩔 수 없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맞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검을 휘둘러 봐야, 검과의 소통도 깊어지는 거니까.

절대로 악감정은 없어.

짜악!

이번엔 데이지의 손목을 검면으로 때렸다.

"아악!"

데이지가 손목을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너, 저번에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아저씨 오지랖 좀 떨지 마?'

그랬었나?

딱!

"꺅!"

이번엔 세아가 정수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넌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반란 세력하고 협력했었지?

난데없이 폭력이 쏟아지자, 동생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며 난리가 났다.

그렇지. 반응해라.

실전처럼 집중하라고.

그러려고 무자비하게 패는 거니까.

절대 악감정은 없다.

"으악!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웃어! 웃고 있어! 때리면서 웃고 있다고!"

"미치광이야!"

큼, 동생들 실력이 쭉쭉 늘 걸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나 보네.

* * *

패기 시작하고 한 30분쯤 지난 뒤부터였던 것 같다.

아이들이 휘두르는 검에 점점 살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왜 안 맞냐..."

"웃지 마시죠! 열받으니까!"

"악! 그렇다고 울상 짓지 마! 그럴 거면 때리지 말라고!"

"죽어.... 죽어.... 제발 죽어...!"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나왔지만,

사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험하게 놀아와서 이런 건 서로 익숙했다.

다들 눈을 반짝거리며 어떻게든 나를 한 번이라도 건드려 보려고 기를 쓰고 있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그런데...

'쟤는 왜 저러지?'

은발 머리 하나가 자꾸 눈에 밟혔다.

'어디 아픈가?'

캐치 소로아.

21살. 남자.

카트리나와 함께 탐색을 나갔다가 반년 만에 돌아온 녀석인데... 녀석의 표정은 내 기억과는 전혀 달랐다.

'왜 이렇게 불안해 보이지?'

묘하게 맥이 없고 집중을 못 했다.

내 기억 속에 캐치는 항상 눈을 반짝이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몸을 굴리던 아이였는데....

"잡아! 사방에서 한 번에 덮친다."

"간다!"

귀찮음을 달고 사는 바렌조차 눈을 매섭게 뜨고 달려드는데.

"..."

캐치는 옆에서 눈치 보며 시늉만 하기 바빴다.

빠아악!

하도 이상해서 일부러 머리통을 때려 주었는데도,

"..."

그 흔한 욕설 한마디 안 하고 슬금슬금 뒤로 빠져 버린다.

짜아악!

쩍!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지.

일부러 쫓아가서 손등도 때리고 종아리도 때렸는데, 캐치는 몇 번 막아 보려고 시도하더니 황급히 다른 동생들 사이로 숨어 버렸다.

전에 봤을 때보다 실력이 늘기는커녕, 원래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진짜 왜 저러지...?'

모두 불타오르는데, 혼자만 그림자 속에 처박힌 느낌.

내가 알던 캐치와 너무 달랐다.

반면에,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더 뜨거운 녀석도 있었다.

"오빠 한 번 더! 으랏차!"

카트리나 에기온.

녀석은 얼굴이 퉁퉁 붓고 눈탱이 밤탱이가 되었는데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사자 갈기 같은 오렌지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끝없이 달려들었다.

아무리 패도 녀석의 투지는 마르질 않았다.

짜아악!

오, 제대로 들어갔다. 이젠 못 일어나겠지?

"허잇차! 한 번 더!"

쩌어억!

진짜 끝났네.

"크어! 이번엔 진짜다!"

빠아악!

아차, 너무 세게 때렸나?

"오케이! 파악했어!"

'...'

아니 대체 왜 이렇게 튼튼해??

카트리나는 소드마스터인 나조차 경악할 정도의 체력과 맷집을 자랑했다.

카트리나가 무한한 에너지를 뿜어내자, 분위기는 점점 격해졌다.

원래 5만큼 때리려고 했는데, 10만큼 패게 됐달까?

"언니... 그만하자."

"누나... 안 아파...?"

결국 다른 아이들이 은근슬쩍 카트리나를 말리고 나섰다.

"이거 놔!! 크아! 한 번 더!"

그런 아이들을 뿌리치며 날뛰는 카트리나.

그녀의 넘치는 에너지가 강제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어딘가 불안하고 주눅 들어 보였던 캐치 소로아마저 그 분위기에 휩쓸려서 정신없이 칼을 휘둘렀을 정도.

결국 이 지독한 폭행은 카트리나가 기절한 다음에야 끝이 날 수 있었다.

원래 생각했던 시간을 한참 넘겨 버린 다음이었다.

"헉... 헉...."

"아이고...."

"아파!"

숨도 못 고르는 녀석. 끙끙대는 녀석. 성질내는 너석.

나는 이 다양한 동생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솔직히, 감탄했다.

'...생각보다 더 빠르겠는데?'

카트리나가 큰 역할을 했다.

다들 재능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열의와 투지까지 있다면...

전 대륙을 놀라게 할 날이 벌써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특히, 캐치 소로아.

'재능이 엄청나.'

카트리나가 만든 분위기에 휩쓸려서 잠깐이지만 집중을 했던 캐치.

그 잠깐 사이에 녀석이 휘두른 검은 빠르면서도 한없이 정교했다.

재능이 뛰어난 동생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일 정도로.

근데... 왜 저럴까?

지금도 그랬다. 불안해 보이고, 눈치 보고.

일단 무심히 칭찬을 던져 보았다.

"캐치."

"응?"

"너 잘하더라. 검이 아주 예리했어."

하지만 녀석은 쓰게 웃었다.

"아냐, 형. 어차피 난 해도 안 돼. ...훈련 끝났지? 나 밥 먹으러 간다?"

그리곤 맥없이 검을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멀어졌다.

'뭐? 해도 안 돼?'

거 되게 아련하게 말하네.

신경이 많이 쓰였다.

하지만,

'...일단 지켜보자."

무심함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는 것, 일종의 내 철학이었다.

다들 자기 몫의 짐이 존재한다는 것. 그걸 남이 섣불리 들어 줄 수도 없고 들어주는 게 옳지도 않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잠시 쉬게 해 주거나, 옆에서 같이 걸어 주는 것, 한마디 응원이나 조언. 타이밍을 봐 가면서 그렇게 무심하면서도 상냥하게, 다가가자.

무슨 고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라 캐치.

* * *

그날 밤.

"후.... 고되다."

캐치 소로아는 피곤한 얼굴로 방에 돌아왔다.

땡그랑-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적당히 던져두고 씻으러 들어갔다.

후끈후끈하게 씻은 후엔 곧장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항상 검을 손에 붙이라던 란센의 말을 지킬 생각 따윈 없었다.

어차피 자긴 해 봤자 헛수고니까.

"누우니까 좋다..."

워낙 피곤한 하루였으니, 눈만 감으면 잠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잠이 안 와."

정신이 점점 말짱해졌다.

"오랜만에 검을 휘둘러서 그런가...."

사실,

검을 사랑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단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을 정도로.

캐치는 중얼거렸다.

"...나도 잘하고 싶었다고."

소로아 백작가의 장남이었으니까.

가문의 빠르고 정밀한 검을 이어야 했으니까.

더 강해져서 동생을 지켜야 했으니까.

그냥 검이 좋았으니까.

아침이고 밤이고 항상 검을 휘둘렀었다.

하지만 지금은...

"검을 아무리 휘둘러도... 나는 안 되잖아."

깨닫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는걸.

21살. 익스퍼트 중급.

그것도 굉장히 수준이 낮은 중급.

도시에 돌아와 보니,

한 살 어린 잘츠란은 벌써 상급이 되었다.

검술이 특기가 아닌 세아와의 대련에서도 패했고,

두 살 어린 미카에게도 졌고, 심지어 친동생인 제페토에게도 졌다.

친동생한테 졌다. 동생을 지키긴 개뿔. 되레 지켜 달라고 부탁해야 할 판이었다.

'검 말고... 다른 거....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오러가 문제였다.

오러는 항상 그의 뜻을 잘 따라 주지 않았다.

참혹한 오러 지배력.

'란센 형이 가르쳐 준다는 검술은 오러가 없어도 된다지만.... 결국 오러가 약하면 그것도 별수 없는 거 아냐?'

캐치의 상식으론 그랬다.

그렇기에 그는 절감했다.

여기가 자신이 한계라고.

많다. 그런 사람들. 20대에 중급에 오르고 영영 상급이 못 되거나, 아니면 50살이 넘어서 겨우 상급이 되거나.

평생 익스퍼트 중급.

새로운 검술을 익혀 봐야 조금 더 강한 익스퍼트 중급.

"...."

깨어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이불을 뒤집어쓰는데,

웅-

우웅-

아까 바닥에 던져둔 검이 자꾸 울어 댔다.

가끔 검이 우는데 왜 그러는지 캐치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시끄러. 시끄럽다고."

그저 베개로 귀를 틀어막으며 침대 깊숙이 파고들었다.

#30화 꿈의 형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는 영주성 옆에 있던 어느 대저택.

숙청을 하고 좋은 점은 공짜 집이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목 좋은 자리에 아주 근사한 물건으로.

'도시 전경도 잘 내려다보이고 좋네.'

나는 회의실 한 켠에 열려 있는 크고 높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았다.

무너진 건물들은 아직 여전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길거리에 시체가 보이지는 않았다.

도시는 조금씩 일상을 회복했다.

불을 밝힌 밤거리에서 사고팔고, 마시고 노는 사람들.

철컥.

회의실 문이 열리고 체구가 작은 남색 머리, 세아가 종이 뭉치를 잔뜩 들고 들어왔다.

종이 뭉치를 받친 손에는 날이 시퍼런 검이 들린 채였다.

세아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거 꼭 해야 돼? 회의할 때도?"

손에 든 검을 묻는 거다. 내가 24시간 어떤 일이 있어도 떨어뜨리지 말라고 했으니까.

"응."

"...그 어떤 검술 이론 책에도 24시간 검을 붙이고 다니라는 얘긴 없던데."

"내가 그 책 쓴 놈들보다 100배는 더 대단한 검사야."

"...."

"좀 참아. 나중엔 나한테 절할걸?"

폭- 작게 한숨을 쉰 세아는 따지는 걸 포기하고 책상에 가져온 서류 더미를 올려 두었다.

나는 녀석의 조그마한 머리꼭지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왜 먼저 보자고 했어?"

안 그래도 전체 회의를 잡은 상태였다.

그런데 세아는 회의 시작 1시간 전에 먼저 보자고 나를 호출했다.

굳이 단둘이 할 이야기라니.... 뭘까?

"내가 전에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던 거 기억해?"

"전에? 아... 시간 여행?"

"응. 운명의 책을 통한 시간 여행. 그게 정말로 역사를 바꾸는 건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고 했잖아."

"그랬지."

"뭔가 짚이는 거 없었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알 방도가 없지 않은가? 이미 1만 년도 전의 과거인데. 내가 뭘 했다 한들 그 흔적이나 남아 있을까?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따로 조사를 해 봤어."

스윽.

세아가 서류 더미에서 종이 한 장을 빼서 내게 건넸다.

대충 읽어 보니 200년 전 발굴된 엘릭서의 발굴 보고서였다.

"이건...?"

"보면 알겠지만, 200년 전에 발굴된 엘릭서는 절반만 남아 있는 병이었다더라."

"진짜네.... 그럼 역시 내가 과거에서 한 행동이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건가?"

"일단 그렇게 보이기는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확신 못 해. 그런데 이번에 글로잉스틸 유적을 발굴하다가 이런 게 나왔어."

척.

서류 더미를 뒤적인 세아는, 이번엔 여러 번 접힌 종이 한 장을 빼서 책상 위에 펼쳤다.

그것은 탁본이었다.

꽤 큰 기념비에 먹을 묻혀 통째로 찍어 낸 탁본.

"어...?"

기념비에 새겨진 건 하나의 부조된 그림.

그 밑에 글씨도 쓰여 있었지만, 대부분이 파손되어 읽을 수 없었다.

'...가 도시를 지켜 냈다?'

읽을 수 있는 부분은 딱 이 정도.

하지만 내 관심을 끄는 건 글자 부분이 아니었다.

부조된 그림이 낯이 익었다.

입과 꼬리에 길쭉한 촉수를 품고 털 없는 늑대인간처럼 생긴 괴물. 그 괴물의 목을 치는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이거 나랑 이오딘 아냐?'

그냥 언뜻 보기에도 그랬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오빠가 보기에는 어때? 난 다른 것보다도 이 검이 신경 쓰였어. 뒤집은 반달 모양의 크로스가드. 이런 디자인은 흔치 않아."

맞다.

고대와 현재를 오가며 숱한 검을 보아왔지만 나 역시 저렇게 생긴 검은 딱 하나밖에 보지 못했다.

'반로아.'

잃어버린 우리 왕국의 이름이 붙여진 왕의 검.

손잡이 윗부분, 미끄러지는 칼날로부터 손을 보호하는 크로스가드를 살펴보면 틀림없었다.

윗면이 평평하고 아래가 둥근 반달 모양. 그 안에 새겨진 섬세한 별자리.

그걸 알아보는 순간, 오만 감정이 다 휘몰아쳤다.

'...그 일이 기념비로 남은 거야?'

그리고 우리를 기념해 준 사람들은... 이미 먼 옛날에 다 죽어서 늪지대에 파묻혔고...?

인생. 이거 대체 뭐냐?

괜히 치미는 이상야릇한 감정을 누르고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답했다.

"나 맞아."

"역시. 이번에 갔을 때 저런 괴물하고 싸운 거야?"

"싸웠지."

"그럼 95퍼센트 이상이네. 오빠일 확률."

탁본을 다시 차곡차곡 접어 넣은 세아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로써, 오빠가 건너간 곳이 실제로 과거고 거기서 행한 일이 역사를 바꾼다는 가설을 받아들여도 되겠어."

"음.... 그럼 문제 될 수도 있다고 했지?"

"맞아.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신중해야 돼. 오빠의 행동 하나하나가 현재를 심각하게 바꿀 수도 있으니까."

"근데... 사실 내가 뭘 어쩔 수가 없는 부분도 있어. 운명의 책 자체가 '역사 개변'이라는 걸 원하던데?"

이번에 있었던 회귀 현상을 세아에게 설명했다.

세아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운명의 책. 대놓고 의지를 가진 물건이었네?"

"그러니까. 내가 조심을 하려고 해도 얘가 시키면 그냥 역사를 바꿔야 돼. 별수 없어."

세아는 고개를 숙이고 깊이 생각에 빠졌다.

혼자 중얼중얼 빠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 목표가 뭘까? 시간을 되돌릴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이라면... 멸망을 막는 거? 그럼 우리는? 함부로 쓰기엔 너무 위험한.... 아냐.... 정보가 너무 적어. 애초에 고대 문명은 왜 멸망했지?"

잠시 뒤 생각을 정리했는지 세아는 다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럼 당장은 정보 수집만 좀 더 신경 쓰자. 과거의 변화가 현재를 어떻게 바꾸는지 추적해 보고, 루세라스 문명에 무슨 일이 있었나 알아보고."

"그래. 노력해 볼게."

"근데 덕분에 시도해 볼 만한 게 많이 생겼어."

"시도?"

"응."

탁.

세아가 로버랜드 지도를 펼치고 쿠샨시 부근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에,"

녀석은 한 단어 한 단어 또박또박 말했다.

"드라키움을, 심는다면?"

"!!!"

머릿속에 천둥 벽력이 터졌다.

드라키움.

대지의 정수라 불리는 절세의 보물이었다.

그 씨앗을 비옥한 대지 깊숙이 묻어 두고 아주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면, 대지의 마나를 듬뿍 머금은 구슬, 드라키움이 만들어진다.

기사에겐 천고의 영약이고 마법사에게 지고의 마도구.

그 드라키움의 씨앗이 자라는 데 걸리는 시간이... 바로 1만 년!

심장이 두근거렸다.

"세아! 넌 진짜 천재야!"

"뭐... 드라키움 말고도 시도해 볼 건 많아. 자세한 건 내가 계획 세워서 보고할게. 지금은... 운명의 책을 발동시킬 방법부터 확실히 하자."

아, 그거야 그렇지. 운명의 책을 써야 뭐든 가능한 거니까.

근데,

"그 방법은 이제 대충 나온 거 아냐? 사교에 반응하잖아? 운명의 책."

"맞아. 아마 크시아스가 따르던 종교도 그 사교였겠지."

"그렇지. 다만 문제는 사교도의 유적이나 예배당이 어디인질 모른다는 거고..."

내 말에 세아의 남색 눈동자가 반짝! 했다.

"있어. 하나. 확실하게 사교와 관련된 장소가."

"있다고? 어디?"

"카슈 시(市)."

카슈. 혈백작 들카슈가 다스리던 도시. 내가 들카슈를 죽인 후, 크시아스에게 복속되었던 땅.

"거기에... 사교도가? 왜?"

"크시아스가 어디서 사교의 지식을 얻었겠어?"

"아!"

"시기상으로도 정황상으로도 거의 확실해. 들카슈도 사교도였고, 크시아스는 그의 진혈을 빼앗으며 사교의 지식을 얻은 거야."

"그럼 카슈 시에도 사교도의 예배당이 있다...?"

"높은 확률로."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그쪽은 동쪽. 카슈 시(市)가 있는 방향이다.

나를 한 번 몰락시켰던 절망의 땅.

"잘됐네. 안 그래도 크시아스의 잔당들을 쓸어 버리러 가야 됐는데."

"응. 지금 거기 총독도 크시아스의 혈족이야."

그럼 뭐 볼 것도 없네.

"결정. 여기가 안정되는 즉시 카슈시(市)를 정벌한다."

할 일이 또 생겼다.

카슈를 얻고 다시 한번 운명의 책을 발동시키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세력과 힘을 키워야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아가 서류 더미를 만지작거렸다.

뭔가 말을 꺼내길 주저하고 있었다.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을 뚜벅 뱉어 버리는 녀석이 왜 이러지?

"왜? 무슨 일인데?"

"...사실 본론이 남아 있어. 이건 일단 오빠랑 나만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래서 먼저 보자고 한 거야."

"뭔데?"

주저하던 세아는,

"오빠의 목표는 뭐야? 진짜 목표. 정말 하고 싶은 거."

밤바다같이 깊은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내 목표...?"

나는 쓰게 웃고 말았다.

"뭐, 우리가 행복하기만 하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게 내 공식 입장이긴 한데..."

만약 진지하게 내 진심을 묻는 거라면,

"사실은 뻔한 거 아냐?"

화르륵!

시야가 일그러진다.

지금 내 동공에는 검푸른 불꽃이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을 거다.

내가 반로아의 핏줄임을 증명하는 이 현상처럼, 내 마음도 사실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제국의 황제, 로크슈탈렌 갈로틴의 목을 베고, 제국을 조각조각 찢어 버리고,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영원한 왕국 반로아를 재건하는 거. 그게 내 목표지. 사실은. 그래."

그것은,

하루아침에 부모 형제를 잃은 나의 복수이자,

반로아의 마지막 왕족인 나의 의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목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늘 무표정한 세아의 얼굴 위로,

설핏 미소가 번졌다.

"그럴 것 같아서. 그래서 준비해 봤어."

세아가 서류 더미에서 두꺼운 종이 뭉치 하나를 꺼냈다.

그 겉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해상 3면 확장 지계>

"이건...?"

"제국은 강해. 터무니없이. 그 저력을 다 파악할 방법도 없지만, 얼핏 드러난 전력만 봐도 말이 안 돼. 사실상 글로리랜드 서부를 제외하면 북부고 남부고 이미 다 제국령이거나 제국의 속국이니까."

팔락!

세아는 커다란 지도를 펼치고, 손가락으로 세 지점을 이었다.

"그러니 힘을 합쳐야 해. 바다를 통해."

제국의 서쪽, 아바론드와 노바레아 그리고 브리든시아와 이오리아와 힘을 합친다.

제국의 남쪽, 바다 건너 데쓰랜드의 북단인 아란드리아와도 힘을 합친다.

제국의 동쪽은 우리가 맡는다.

"선결 조건은 질풍왕 하룬이 다스리는 '아일룬 지방'과 해상왕 자파르가 다스리는 '샤말룬 지방'을 차지하는 거야. 그걸 하지 못하면 이 계책은 시작도 못 해."

세아는 그 작은 입으로 엄청난 이야기를 쏟아 냈다.

질풍왕 하룬과 해상왕 자파르.

드넓은 대륙 로버랜드, 강도 백작들만 우글거리는 이 땅에서 왕의 칭호를 쓸 수 있는 이는 딱 5명뿐이었다.

5왕(王).

본신의 무력은 소드마스터를 아득히 뛰어넘고, 따르는 세력은 글로리랜드의 어지간한 왕국에 필적한다는 걸물들.

세아는 로버랜드의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 절대자를 무려 두 명이나 무릎 꿇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일룬과 샤말룬을 차지하면, 동대륙 올드랜드와 서대륙 글로리랜드를 잇는 황금의 교역로를 우리가 틀어쥐게 돼. 더군다나 로버랜드 최대의 항구도시, 마샨카를 통해 글로리랜드 서부와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길도 열리지."

세아의 계획을 단순화하면 이랬다.

아일룬과 샤말룬을 정복한다.

글로리랜드 서부와 남대륙의 아란드리아와 동맹을 맺는다.

함께 교류하며 부강해져서 제국을 3면에서 압박한다.

"나는 이걸 삼전계(三戰計)라고도 불러. 이걸 성공하려면 세 가지 싸움에서 이겨야 하거든."

첫째, 우리가 제국의 동서 대륙 간 교역로를 봉쇄하여 제국을 약화시킨다. 제국의 맹렬한 반발을 이겨내야 함은 물론이다.

둘째, 지중해를 통과하는 해상무역로를 제국으로부터 지켜 낸다. 남대륙 아란드리아의 협력이 필수적.

지켜낸 해상무역로를 통해 3개의 축이 긴밀히 교류하며 서로를 부강하게 만든다.

최종적으로, 더 부강해진 동맹의 힘으로, 일제히 제국을 친다.

이 세 가지 싸움에서 승리할 때 삼전계 또는 해상 3면 확장 지계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아직 공공연하게 하기엔 좀 위험한 것 같아서. 일단은 우리 둘이서만 먼저 확인해 보고 싶었어."

나는 세아가 건네준 서류를 훑어보았다.

얼마나 열심히 준비를 한 건지.

페이지 페이지마다 자료가 가득했다.

제국의 전력 분석부터,

글로리랜드 서부와 아란드리아에 대한 상세한 정보, 그걸 바탕으로 한 전략 제안까지.

녀석이 한 모든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수 페이지의 근거가 빼곡히 달려 있었다.

'이 정도였나...?'

똑똑한 줄은 알았지만...

이 좁은 쿠샨시에 갇혀서, 천하를 내려다볼 줄이야.

나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녀석과 눈을 마주치고,

"해 보자. 세아야."

손바닥을 내밀었다.

세아는 천천히, 그러나 힘 있게 내 손을 잡았다.

그날 우리는 꿈의 형태를 정했다.

정밀하고 명확하게.

세계의 형태마저 바꿔 버릴, 큰 꿈을.

<삼전계(三戰計) >

#31화 정예 군대를 위한 첫걸음

아까만 해도 한적하던 회의실이 왁자지껄해졌다.

"아.... 이거 칼 진짜 거치적거리네."

"그러니까."

"어허. 그게 거치적거린다는 건 곧 수련이 필요하다는 뜻!"

세아와 대화를 마무리하고 나자 얼추 회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17세 이상 동생들 전원과 벌슨 아저씨, 리베라와 칼세릭, 등등이 모였다.

쿠샨시의 핵심이 모두 모인 셈.

사실 동생들은 그냥 견학차 자리만 차지한 거고, 실제 대화를 나누는 건 7명 정도였다.

회의의 주제는 신규 전사 모집.

시작은 리베라가 열었다.

"현재 쿠샨시에서 정규군으로 동원 가능한 병력은 3,400명입니다. 크시아스 백작이 있을 때 쿠샨시 영지군이 7,500명이었으니 절반 넘게 줄어들었지요."

그가 준비한 자료를 확인하자 현재 상황이 명료하게 드러났다.

'마수를 통제하려면 최소 2,000명은 더 충원해야 하고, 크시아스 잔당이 남아 있는 카슈시(市)까지 도모하려면 최소 7,000명은 더 필요하다고? 흠...'

세아가 다 죽이면 안 된다고 말렸던 이유가 이 종이 위에 뚜렷이 써 있었다.

원래 같으면 꽤 긴 시간 2,000명은커녕 500명도 못 구했을 것이다.

뭐, 그 문제는 '글로잉스틸'을 발굴하면서 한 방에 해결했지만.

리베라도 그 점을 언급했다.

"하지만 병사야 뽑으면 되니까 걱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도 로버랜드 전역에서 전사들이 몰려들고 있는 상황이고요. 그보다 시급한 건 익스퍼트 이상 고위 전력의 부재입니다. 중대형 마수를 잡을 때 필수인 그들이 없으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죠."

'숫자로 보니 정말 심각하긴 하네....'

실력이 있는 놈들일수록 크시아스랑 붙어먹으며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으니, 숙청을 피해 가지 못했다.

익스퍼트 하급은 80명이 줄어서 100명.

중급은 50명이 줄어서 10명.

상급은 25명이 줄어서 5명.

최상급은 6명이나 있던 게 다 죽고 리베라 하나 살아남았다.

물론 여기에 내 동생들과 칼세릭의 부하 4명을 합치면 아~주 조금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역시 그 정도로는 많이 아쉬웠다.

우리는 카슈시(市)까지 도모해야 했으니까.

벌슨 아저씨가 종이를 뒤적거리며 끼어들었다.

"확실히... 문제군요. 익스퍼트라 해도 군기가 바짝 선 정예를 뽑아야 할 텐데, 이 로버랜드의 익스퍼트들은 다들 제멋대로이니...."

오, 벌슨!

방금 로버랜드 토박이인 리베라와 칼세릭을 의식해서 말을 한 번 순화했다.

우리끼리 있었으면 '명예도 모르는 도적 같은 놈들'이라고 말했을 텐데 '제멋대로' 정도로 순화하다니.

그걸 느낀 걸까?

칼세릭이 픽 웃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골라서 군대를 만들 수 있겠소? 이 로버랜드에서?"

오,

저것도 사실상 포로인 자신의 입장을 고려해서 말을 한 번 순화한 거다.

원래는 '하여튼 글로리랜드 샌님 새끼들은... 그따위로 빡빡하게 굴면 맞아 죽기 십상이지.'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어쨌든,

확실히 이건 문제였다.

나는 벌슨 아저씨에게 동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마치 글로리랜드의 정예병들처럼 상명하복이 확실하고 절도가 있는 군대.

그러려면 병사는 물론이고 지휘관인 익스퍼트들도 가려 뽑아야 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사람을 가릴 형편이 아니라는 거고.

벌슨 아저씨와 칼세릭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살짝 뜨거워지는 분위기.

리베라가 시원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려고 했다.

"뭐, 적당히 절충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절충이라....

그게 현실적인 방법이지.

근데,

우리가 현실적으로 굴 필요가 있나?

자고로 그런 말이 있다.

어떤 일이 잘 안 풀린다면,

혹시 돈이 부족한 건 아닌가? 그리 생각해 보란 명언이.

"병사든 익스퍼트든 엄격하게 가려 뽑을 거야."

나는 선언했다.

이견의 여지 따위는 없다.

"흠...."

칼세릭이 눈썹을 찌푸리고,

"아, 하지만...."

리베라가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나는 엄숙하게 말했다.

"다들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어."

왜들 이런 걸로 기 싸움하고 그러는 거야?

"우리는 돈이 많아. 그것도 아~주 많아."

고대 유적 글로잉스틸에서 돈이 쏟아지는데!

"확실하게 인센티브를 챙겨 주면 돼. 일단 이렇게 시작해 볼까?"

나는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에 탁! 내려놓았다.

"일반 영지병 월급 12달론."

"!"

"!!"

이견을 보이던 칼세릭과 리베라는 물론이고 내 동생들까지 죄다 눈을 부릅떴다.

세아조차 내 말을 한 번 곱씹었다.

"12달론. 12만 아스."

1달론은,

금 10g.

달리 표현하면 금 2핀, 그러니까 5g짜리 금화 2닢과 같다.

쿠샨시의 시민 대부분은 세금 내고 나면 한 달에 채 1달론도 손에 쥐지 못했다.

12달론이라는 건,

가장 작은 화폐단위인 아스(1g짜리 철편)가 12만 개나 있어야 하는 어마어마한 금액.

보통 로버랜드의 일반 전사들은 한 달에 5달론에서 6달론 정도를 벌었고, 숙련된 엘리트 전사가 되어야 10달론을 겨우 벌었다.

그런데 일반 전사라도 영지군에 소속만 되면 12달론을 주겠다고 선언했으니 놀랄 만도 하지.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거기에 엘리트 전사는 월급으로 15달론을 주고 5년간 복무를 마치면 루세라스 강철로 만들어진 고대 검과 갑옷을 하사하는 걸로. 질 좋고, 깨끗하게 수선된 상품(上品)의 물건으로."

"!"

"!!"

이번엔 다들 입까지 헤 벌렸다.

상품(上品)의 고대 검과 고대 갑옷이라는 건 그 가치만 해도 1,500달론에 이르는 보물이었지만, 그나마도 물량이 없어서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5년만 복무하면 그걸 거저 준다니.

전사라면 눈이 돌아갈 수밖에.

똑똑

나는 손등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려 주의를 환기시켰다.

"어때? 이 정도면 빡빡하게 굴어도 지원할 거 같아?"

반대의견을 말하던 칼세릭도, 리베라도 말이 없다.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할 뿐.

거봐. 돈이 많으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니까?

"좋아 결정. 그럼 이제 익스퍼트급 전사들의 급여도 결정해 보자고. 아주 파격적으로."

모두가 날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과도한 투자가 아닌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진짜 군대를 만들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제국군과도 맞설 수 있는, 제식과 전술을 뼛속까지 박아 넣은 엘리트 정규군.

어려서 벌슨 아저씨에게 철저히 배웠던 전술, 전략을 써먹을 수 있는 최정예.

세아가 만들어 낸 삼전계(三戰計)를 실현시킬 전쟁의 전문가들.

그걸 위한 투자니까.

* * *

쿠샨시(市) 곳곳에 공고가 붙었다. 신임 백작 란센이 정규군을 모집한다는.

"정규군? 뭐 이런 애매한 도시에서 굳이? 할 거면 차라리 서쪽으로 좀 더 가서 질풍왕의 군대에 들어가지. 요새 거기도 조건 좋게 대대적으로 모집하드만."

"그치. 안 그래도 신임 백작이 돈 펑펑 써서 먹고살 거 많은데, 뭐 하러 정규군을 해? 답답하게."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 신임 백작이 아직 돈을 본격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뜨뜻미지근하던 전사들의 반응은 공고를 실제로 확인하고 난 다음 180도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벌?!"

"뭐여 이게!"

"똑바로 읽은 거 맞아?"

"좀 비켜봐, 나도 보게!"

정규군을 모집한다는 공고마다 전사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월급 12달론? 미친. 이렇게 벌면 7년만 벌어도 은퇴할 수 있겠다!"

"소박하네. 난 10년!"

"부자 소리 들으려면 15년은 일해야지! 이야... 평생 돈 걱정 없이 살겠다."

"어? 내 눈이 이상한가? 엘리트 전사는... 고대 무구를 준다...? 저거 맞아?"

"미친!"

유적 발굴 소식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든 2만 5천 명의 전사들이 술렁거렸다.

도시 전체가 들썩였다.

"와.... 나 질풍왕 군대에 들어갈까 고민하다 여기 왔는데. 진짜 다행이다."

"이건 해야지. 안 하면 아래 달린 거 떼야지."

"맞아! 아래 달린 거 떼든, 위에 달린 거 떼든, 여튼 떼야지! 가즈아!"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칼밥 먹는 이들은 죄다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도시 곳곳에 세워진 모병소로 전사들의 지원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1주일 뒤.

쿠샨시(市) 영주성 앞 광장.

나는 빼곡하게 몰려든 전사들을 둘러보았다.

무려 2만 명이나 된다.

도시에 유입된 전사들 전체의 80퍼센트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

'그런데... 익스퍼트들은 생각보다 적네?'

쓱 훑어봤지만, 익스퍼트 최상급은 아예 보이질 않았다.

상급도 6명 정도밖에 안 보였고, 중급은 기대보다 적고 하급만 좀 많이 있는 편.

'이게 다 질풍왕 하룬 때문이지.'

쿠샨시의 서쪽, 아일룬 지방을 다스리는 질풍왕.

그가 최근 군비를 증강하며 대대적으로 전사들을 모집하는 바람에 명망 있는 익스퍼트들이 그쪽으로 많이 빨려 들었다.

안 그래도 가려 뽑아야 하는 익스퍼트들인데 모집단 자체가 작아지니, 속이 쓰리다.

'그래도 선발 기준을 낮출 수는 없어.'

나는 전사들을 가만히 관찰했다.

역시나, 로버랜드의 무법자들 아니랄까 봐 벌써 개판 5분 전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익스퍼트를 계속 여기 세워 둘 건가!"

"아니 내가 칼밥을 20년을 먹었는데 이런 애송이들이랑..."

"뭐요 아재! 함 대가리 부딪혀 볼까?!"

"니가 죽어 봐야 세상 무서운 줄을 알지?"

보통 모병 과정에선, 일반 전사와 엘리트 전사(오러 유저), 익스퍼트를 모두 구분해서 선발하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나는 그걸 싹 무시하고 경력과 경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전사들을 다 한 자리에 모아 두었으니, 시끌시끌할 수밖에.

특히 익스퍼트들의 불만이 높았다.

어느 도시를 가나 대우를 받는 그들에게는 일반 전사들과 뒤섞여 있는 지금 상황이 황당했으니까.

"영주 나와! 뭐야 이게!"

"영주가 20대 어린애라더니 영 아무것도 모르나 보네! 이거 이러면 큰일 납니다?!"

심지어 감히 나까지 거론하며 언성을 높이는 자들.

하지만 나는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맘대로 떠들어라. 내가 괜히 대우를 최고 수준으로 한 줄 아나.'

지금 내가 저들에게 보고자 하는 건 단 하나였다.

'통제력.'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절도를 가지고 행동하며 철저히 상명하복할 수 있는 통제력.

기껏 도시의 망종들을 다 정리했는데, 새로운 깡패들을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지금부터 진행될 선발 프로그램도 다 '통제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는 천천히 무너진 영주성의 돌무더기 위로 올라섰다.

"우우우-"

"우-"

잔뜩 성이 났는지 감히 도시의 지배자를 향해서 거침없이 야유를 퍼붓는 전사들.

하지만,

"주목!!"

쿠우우웅!

"...."

"...!"

내 한마디 외침에 야유를 보내던 모두가 입을 닫았다.

오러까지 끌어올려 외친 내 목소리가 2만 명의 전사들이 내뱉는 야유를 홀로 압도했으니까.

땅이 흔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했던 외침 탓에, 나와 가까이에 서 있던 전사들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기까지 했다.

하여튼 이것들은 실력을 안 보여 주면 계속 기어오른다니까.

나는 오만한 시선으로 전사들을 주욱 살폈다.

"지금부터 첫 번째 선발 시험을 시작한다. 너희들 앞에 무너진 성이 보일 거다."

전사들의 시선이 크시아스의 무너진 영주성과 그 앞에 놓인 수많은 포대기에 머물렀다.

설마?

하는 표정들이 얼굴 위로 떠올랐다.

응. 맞아 그거.

"지금부터 이 돌무더기를 지정된 장소로 옮긴다. 너희가 옮긴 돌의 무게는 모두 기록될 것이며 옮긴 무게순으로 1차 합격자를 가린다."

잘됐지 뭐야.

무너진 영주성을 정리해야 했는데, 마침 이렇게 2만 명이나 되는 일꾼이 모였으니까.

이제 저들이 알아서 무너진 잔해를 4km 밖에 있는 외성 지역으로 옮겨 줄 거다.

그러면 그 석재를 재활용해 유입된 전사들을 수용할 주거 단지를 만들 계획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

시험 내용으로도 딱 좋았다.

무거운 돌을 들고 4km씩 종일 옮겨야 하는 작업은 육체를 한계 상태로 만드니까.

이걸 통해 기초 체력이 떨어지는 자들을 걸러 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아니 백작 나으리. 지금 그게 말입니까, 트름입니까?"

바로 이렇게, 천지 분간 못하는 놈들을 걸러 낼 수도 있었다.

"아니, 내가 전사 경력이 20년인데... 돌을 나르라굽쇼?"

"익스퍼트들은 뭐 하고 있으면 됩니까? 따로 자리 마련해 주시는 거죠?"

내가 제시한 당근은 분명 아주 다디단 것이었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다.

그 당근을 위해서라면 어지간한 불만도 참고 견딜, 자제력이 있는 사람도 있고, 때려죽여도 그게 안 되는 사람도 있는 거다.

엘리트 전사, 그리고 익스퍼트.

이들이 과연 돌이나 옮기는 막노동을 인내할 수 있을까?

첫 번째 시험은, 이들의 자제력을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

그러니,

나는 처음부터 마음을 정했다.

"왜? 돌 옮기기 싫어?"

눈에 띄는 익스퍼트를 향해 묻자 그가 불만스럽게 답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내가 익스퍼트인데...."

그래. 그렇겠지.

익스퍼트. 모든 전술과 전략의 기반에 서 있는 비대칭 전력. 어디를 가든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한 핵심 인재. 그런 이들에게 노가다를 하라니... 납득을 하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그래서 난 마음먹은 거다.

"아아, 너무 고~귀하셔서 돌을 옮기기 싫으시구나? 그럼 방해하지 말고 지금 당장 꺼지면, 안 될...까?"

이들을 최대한 띠껍게 대하기로.

———

*12달론은 원화로 치면 1,200만 원 정도 됩니다. 하지만 로버랜드의 평균 임금 수준이 대한민국의 절반 정도로 낮고 세금은 막대하기 때문에 실제 로버랜드의 서민들에게 12달론은 약 3,000만 원 정도의 가치로 느껴집니다.

#32화 역사를 써낼 것이다

도발은 효과적이었다!

"하? 백작님이 개념이 없네...."

"익스퍼트들을 이렇게 대우해서 도시가 굴러가긴 하겠슴까?"

"좀 철이 없는 것 같은데."

저마다 인상을 팍 쓰며 한 마디씩 늘어놓는 익스퍼트들.

익스퍼트들이 알아서 나서 주자, 엘리트 전사들은 뒤로 빠져서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역시 로버랜드의 전사들이야.

도시의 지배자 앞에서도 아주 거침이 없어.

근데,

니들이 지금 누구한테 까부는지는 알고 있는 건가?

"한마디."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딱히 외친 것도 아니었지만, 웅혼한 오러가 섞인 내 목소리는 청동 종 같은 울림을 주며 사방을 장악했다.

"딱 한마디만 더 해 봐."

조용-

아주 조용해졌다.

워낙 야성미 넘치는 놈들이라 그런지 위험 감지 능력도 야생동물급이다.

'눈치만 빨라서는....'

한 놈 잡아서 시범 케이스 제대로 한번 보여 주려고 했는데....

어쨌든 성공적으로 기를 죽여 놨으니 이제는 분출구를 마련해 줄 차례였다.

로버랜드의 전사들은 워낙에 지랄맞아서 계속 억누르기만 하면 상대가 어떻든 간에 받아 버리게 마련이었으니까.

나는 뿜었던 기세를 흩어 버리고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물론 실력이 있으면 바로 뽑아야지. 그럴 만한 실력이 있으면 말이야. 제페토 나와 봐."

"네!"

은발 머리의 청소년 하나가 영주성의 잔해를 밟고 올라와 내 옆에 섰다.

제페토 소로아.

19세.

요즘 의욕을 상실한 캐치 소로아의 친동생이었다.

나는 뺨이 살짝 붉어진 제페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익스퍼트급 전사들과 눈을 마주쳤다.

"얘가 마침 소드 익스퍼트 중급이거든. 만약 너희 중에 얘를 꺾는 전사가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채용할게. 어때?"

그제서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들에 화색이 돌았다.

"워우- 그래도 백작님 도리를 아는 분이셨네."

"근데 거 시험이 너무 쉬운 거 아뇨? 내 조카뻘 되겠는데."

글쎄. 쉬운지 어쩐지는 직접 겪어 보면 알겠지.

"백작님! 그런데 저도 쟤를 상대해야 하는 겁니까?"

모두가 납득하는 분위기인데, 의문을 제기하는 전사가 있었다.

'아, 익스퍼트 상급이네.'

6명의 상급 익스퍼트, 이 자리에 모인 전사 중 제일 고수들이었다.

"물론 상급은 다른 애가 붙어야지. 모양 빠지게 중급이랑 싸우게 둘 순 없잖아?"

다들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마 조금 뒤엔 생각이 달라질 거다.

"카트리나. 저들 6명은 네가 상대해."

"예입!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자 갈기 같은 오렌지색 머리를 일렁이며 앞으로 나서는 카트리나.

녀석이 숨기지 않고 오러를 뿜어내자, 상급 전사들의 얼굴에 감탄이 서렸다.

"와.... 저 나이에 최상급이야?"

"신임 백작의 동생들이 다 하나같이 천재들이라더니...."

그들은 자기들끼리 숙덕이다가 카트리나에게 물었다.

"평가는 어떤 식으로 하실 거요? 스무 합 이상 버티기? 뭐 이런 건가?"

그러자 카트리나는 호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건 짜잘짜잘해서 싫다! 그냥... 다 덤벼! 날 이기면 6명 다 합격이다!"

그 말에 상급 익스퍼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무 자신감이 과한 거 아닌가?"

"지가 무슨 백 승의 자히르 님이라도 되는 줄 아나...."

"어이, 아가씨.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하쇼. 딱 보니까 셋만 붙어도 이길 거 같구만 무슨?"

보통 오러 쓰레드를 뽑아내면 그때부터 익스퍼트 최상급이라고 친다.

하지만 같은 최상급이라 해도 사람마다 실력의 격차는 굉장히 컸다.

이제 막 최상급이 된 보통의 전사는 상급 익스퍼트 3명을 한꺼번에 꺾기도 어려워했지만, 노련하고 재능까지 뛰어난 이는 상급 10명을 무난히 꺾어 버리기도 했으니까.

저들의 눈엔 카트리나가 애송이로 보였던 것이다.

저벅저벅.

하지만 카트리나는 개의치 않고 어슬렁어슬렁 그들에게 다가갔다.

검은 이미 뽑은 채였다.

내가 24시간 항상 검은 뽑은 채로 들고 다니라고 시켰으니까.

"뭐.... 맞으면 정신 차리겄지."

"봐주지 말고 갑시다."

그제야 상급 익스퍼트들도 각자 무기를 뽑아 들고 카트리나와 대치를 시작했다.

나는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자, 그러면 어디부터 구경해 볼까?'

한쪽에서는 제페토가 도전자들을 한 명 한 명 상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카트리나가 6명을 한꺼번에 상대한다.

결과야 뻔히 예상됐지만, 싸움 구경은 언제 봐도 재밌는 거니까.

* * *

소로아 가문은 정교하고 빠른 검술로 유명했다.

반로아 제일의 쾌검수는 언제나 소로아 가문에서 나왔다면서, 벌슨 아저씨가 추억에 잠겨 말한 적이 있었다.

제페토 소로아의 검도 그랬다.

익스퍼트 중급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검격.

내딛고 물러서는 발은 귀신처럼 신출귀몰했다.

그리고 이 녀석.

묘하게 자신한테 심취했다고 해야 하나? 그게 사람의 속을 박박 긁어 대는 효과가 있었다.

도전자의 검을 가볍게 피하고 번개처럼 검을 찌르며 한마디.

"느려."

노골적으로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마디.

"시시했어."

다음 상대도 비슷했다.

따당!

한 호흡에 다음 상대의 검을 튕겨냄과 동시에 목에 검을 드리우고 한마디.

"뻔했어."

10여 합을 겨룬 끝에 상대의 갑옷 끈을 잘라 버리고 또 한마디.

"나쁘지 않은 실력이었어."

그 깔보는 듯한 말투가 19세란 어린 나이와 합쳐지자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다.

패배한 전사들은 하나같이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젠장! 고작 19살짜리한테...!"

"죽을래...."

쾌검술의 특성상, 승부는 빨리 끝났고, 수치를 당하기 싫었던 전사들이 도전을 포기하는 바람에 금방금방 정리되었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하여튼 재능 있다니까.'

일정 경지 이하의 전사들에게 있어서 제페토의 빠르고 정교한 검술은 사기 그 자체였다.

반응 자체를 하기가 어렵고 반응을 해도, 정교한 검식에 순식간에 말려들어 버리니 손도 쓰지 못하고 지는 것이다.

물론 진짜 노련하고 재능 있는 전사를 만난다면 상대적으로 단조로운 검식이 되려 약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페토는 이곳에 모인 60명의 중급 전사를 압도함으로써, 자신의 재능이 진짜임을 증명했다.

한편 카트리나는,

"3번! 발이 보인다! 3번!"

날뛰고 있었다.

양 떼 속에 뛰어든 사자처럼.

여섯 명의 익스퍼트 상급에게 각각 번호를 붙여서 하나하나 조져 놓는 솜씨가 굉장했다.

"1번은 X나 약해서 토끼가 박아도 갈빗대가 박살 날 거야. X나 약해 1번!"

빡! 빠악!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면서도 번뜩이는 검면으로 전사들의 뺨따귀와 볼기짝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많이 늘었네.'

동생들에게 고대 검술을 가르쳐 준 이후로, 두 번째로 빠르게 실력이 는 게 바로 카트리나였다.

워낙 싸움광이라서 그런지, 검에 대한 이해도와 경험이 굉장히 높았고 체력이 엄청나서 연습량도 압도적이니 실력이 안 늘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카트리나보다 더 빨리 실력이 늘어난 사람이 제페토의 형인 캐치 소로아.

'근데 그 녀석은 영 비실거린단 말이지.'

캐치의 경우 오러에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워낙 어려서부터 지독하게 쌓아 올린 기본기와 뛰어난 검술 재능이 있었기에 고대 검술을 빠르게 흡수하는 중이었다.

좀만 더 하면 검기도 뽑아낼 것 같은데... 여전히 불안해 보이고 맥이 없었다.

잠깐 생각이 샛길로 샌 사이, 카트리나의 대련은 끝을 향해 치달았다.

얻어맞다 못해 도망을 치기 시작한 상급 전사 하나.

카트리나는 눈이 뒤집혀서 그 뒤를 추격했다.

"5번! X나 오리 같은 놈! 전사가 도망을 쳐?! 오리 새끼!"

쌍욕을 뱉어내며 기어코 따라붙어 정수리에 검면을 내려찍는 카트리나.

그 뒤로는 이미 얻어터져서 정신을 잃은 전사들이 줄줄이 쓰러져 있었다.

이로써,

내 방침에 반발한 전사들은 모두 꼬리를 말았다.

로버랜드 인간들은 대체로 성격이 개차반이었지만, 적어도 실력으로 지고 나면 대놓고 군말을 하진 않았다.

뒤에서는 몰라도 말이지.

나는 기가 팍 죽은 전사들을 내려다보며 마무리를 지었다.

"이제 돌을 옮긴다. 하기 싫으면 군소리 말고 조용히 돌아간다. 실시!"

전사들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에이 씨! 월급이 12달론이다!"

누군가 한 명이 달라붙자 그 뒤를 따라 우르르 잔해를 향해 달려들었다.

엘리트 전사나 익스퍼트들 중에서는 결국 자존심을 꺾지 못하고 침을 탁! 뱉고 떠나 버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젠장...."

"익스퍼트인 내가 막노동이라니...."

"후.... 고대 무구다. 고대 무구. 참아야 한다."

더 많은 숫자의 전사들은 결국 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만큼 내가 흔들어 보인 당근이 크고 맛있는 거거든.

하지만,

장담하는데...

당근이 큰 만큼 그걸 쟁취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거다.

전사들은 나름 열심이었다.

자기들 딴에는 성질을 죽이고 묵묵히 내 지시를 따랐을 터다.

누군가 보았다면 기적이라고 칭했을지도 모른다. 로버랜드 전사에게 이런 자제력이?

개미처럼 착실히 일하는 전사들.

감동적인 풍경이었다.

"아니 싯팔!"

허나 마법의 시간은 결국 그 끝을 고했다.

"언제까지 하냐고! 대답해 새꺄!"

그도 그럴 게,

높이 떠올랐던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도 내가 시험 종료를 알리지 않았으니까.

전사들은 이상함을 느꼈고 급기야 분노했다.

"언제 끝나냐고!"

"...."

"대답 안 해!?"

시험 보조를 맡은 수하들은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입 열면 가만 안 둔다고 신신당부했으니까.

"벙어리야?! 왜 말이 없어!"

"야이 시박!! 너 일로 와 봐!"

행실이 불량한 전사들이 속출했고

"억! 어억!"

"아악! 그만! 잘못!"

그들은 내 동생들과 정예전사들에게 늘씬하게 얻어맞고 쫓겨났다.

"하.... 모르겠다."

"그냥 생각을 비우자."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마지막까지 불친절하게 진행된 시험은 자정을 훌쩍 넘은 시간에야 겨우 끝이 났다.

끝까지 참고 인내한 이들만이 살아남았다.

총지원자 2만 명 중,

7천 명 합격.

이제 1차 시험이 끝났다.

* * *

부서진 달이 휘영청 떠오른 새벽.

잔해가 말끔히 사라진 영주성 앞 공터에선 여전히 시험이 한창이었다.

"하나!"

"둘!"

란센이 준비한 2차 시험은 창 1만 번 찌르기였다.

살아남은 지원자들은 구령을 따라 모두 일제히 창을 찔렀다.

자세가 조금만 어긋나도 옆에서 발길질이 날아들고 욕설이 쏟아졌다.

오러를 품고 있는 엘리트 전사나 익스퍼트들은 버틸 만했겠지만, 일반 전사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진즉에 한계에 부닥쳤다.

이미 하루 종일 무거운 돌덩이를 옮긴 상태였으니까.

후들후들

팔이 떨린다.

다리가 진동한다.

이미 옷에는 소금이 새하얗게 내려앉았고, 진이 다 빠져서 땀 대신 맑은 물이 줄줄 흘렀다.

전사들은 흘깃 영주성의 폐허를 올려다보았다.

가장 높은 곳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검푸른 머리칼의 남자가 보였다.

정말 묻고 싶었다.

'대체 언제까지 하는 거야...?'

어느덧 여명이 밝아 왔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24시간을 채우게 생겼다.

그런데도 시험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딴짓을 해! 다시! 하나!"

잠깐 눈동자 돌아간 걸 가지고 바로 옆에서 쪼인트가 날아왔다.

"나약한 새끼!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꺼져! 당장 종 치고 꺼지라고!"

교관은 악질이었다. 귀에 입을 바싹 붙이고 소리를 질러댔다.

머리가 왕왕 울렸다.

처음 돌을 옮길 때는 아무 말도 안 해서 답답하게 하더니, 이제는 옆에서 아예 쌩난리를 떨어 댔다.

댕- 댕-

결국 참지 못하고 종을 울리는 지원자들이 점점 많아졌다.

'아... 종소리. 제발....'

저 종소리가 멘탈을 자꾸 흔들었다.

'나도... 그만할까?'

'할 만큼 했잖아...?'

'저렇게 많이 포기하는데... 이젠 나가도 안 쪽팔리잖아?'

댕- 댕-

정말로 독하거나, 아니면 그만큼 절박한 전사들만이 마지막까지 견뎌 낼 수 있었다.

아침 9시.

2차 시험 종료.

합격자 5천 명.

"겨우 끝났다...."

"해냈어...."

탈진해서 주저앉는 지원자들. 그들의 귓가에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아침 먹고 3차 시험 시작합니다!"

아직도 안 끝났다고?

대체 언제까지 하는 건데?!

이번에도 교관들은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아... 난 못해."

결정타였다.

2차 시험을 이겨 낸 독하디독한 5천 명의 지원자 중 다시 1천 명이 여기서 마음이 꺾여 우르르 빠져나갔다.

'악마야.'

'이 시험을 고안한 인간은 정말 악마야.'

'란센 백작... 개가튼 인간!'

모두가 치를 떨며 란센을 노려봤지만, 정작 그와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 * *

'드디어 마지막이네.'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은 지원자들을 내려다보았다.

3차 시험의 내용은 특기 평가.

방패, 활, 장창, 기마술을 모두 평가한다.

원래 방패를 잘 쓰는 사람은 당연히 고득점을 받는 거고, 오늘 처음 방패를 들어 봤는데 잘하는 사람도 고득점을 받는 거다.

활, 장창, 기마술 다 마찬가지.

사실 이게 이번 선발 시험의 핵심이었다.

'누가 어디에 재능이 있을지 모르니 다 평가를 해야지.'

사방에서 모여든 근본 없는 전사들을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각각의 재능과 특기를 파악해야 그에 맡게 병종을 꾸리고 훈련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테니까.

동시에 이 평가는 전사들의 정신력을 극한까지 쥐어짜는 평가이기도 했다.

방패술 훈련을 받을 때는 아침이었는데, 궁술 훈련이 끝날 때쯤엔 해가 뉘엿뉘엿 졌고 장창 훈련은 캄캄한 밤에 이루어졌으며, 기마술 훈련은 동이 트고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진행되었으니까.

지원자들은 48시간 동안 한잠도 자지 못하고 극한의 훈련을 받은 셈이었다.

엘리트 전사나 익스퍼트들이야 오러가 있으니 견딜 만했겠지만... 그런 그들조차도 정신적으로 지쳐서 포기하는 이들이 속출할 정도였다.

그렇게, 48시간이 지난 뒤.

나는 완전히 뻗어 버린 지원자들의 앞에 섰다.

모두가 나를 애처롭게 올려다보았다.

'설마... 더 있나요?'

'십팔...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순 없어. 차라지 죽자 죽어.'

처음의 건방지고 건들건들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애처로움과 간절함 속에서 빛나는 날카로운 독기.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거지.

지휘관으로서 가장 짜릿한 순간 중 하나가 아닐까?

"수고했다."

모두가 듣고 싶어 하는 그 말을 내가 해 줄 수 있다는, 그 무한한 권력감!

"현재 인원 3,426명. 전원 합격이다. 따라와 줘서... 고맙다."

정적. 그리고 이어지는 약간의 울먹임.

그 후엔 천둥 같은 함성.

"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구아아아아아! 크흐아아아!"

말소리는 없다. 그저 괴성만이 난무할 뿐.

그 고고하던 익스퍼트들도 일반 전사들을 끌어안고 소리를 질러 댔다.

'결국 골라냈네.'

2만 명 중 3천 4백 명.

누구는 너무 적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고르고 골라낸 이들이기에,

역사를 써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33화 1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