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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1주

"와~ 좋다!"

데이지가 두 팔을 벌리고 언덕 위를 달렸다. 녀석은 정말로 들떠 보였다.

"아저씨! 진짜 너무하네! 혼자만 이렇게 좋은데 오려고 한 거야?!"

또 아저씨래.

다행히 세아가 데이지 녀석을 제압했다.

"데이지."

저, 저, 봐라. 나한테는 버릇없더니! 세아한테는 꼼짝도 못 하네. 그냥 이름만 부르고 바라보기만 하는데 기가 팍 죽어서는....

"으음.... 아니, 그만큼 좋다 이거지."

데이지는 도망치듯 다시 언덕 위를 후다닥 뛰어다녔다.

그렇지만 데이지 말도 일리는 있다.

같이 나오길 잘한 것 같아.

피와 땀으로 점철된 매일을 보내다가 이렇게 나오니까 기분 전환도 되고.

"이렇게 잘 보존된 석비는 정말 흔치 않습니다!"

반소매 셔츠에 안경을 낀 고고학자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외유를 나온 게 사실 이 사람의 발견 때문이었다.

글로잉스틸 유적 근처에서 발견된 석비.

글자가 대부분 뭉개져서 확인할 수 없는 다른 석비들과 달리 이건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어떤 내용인지.

혹시 내가 아는 사람들의 소식이 담겨 있진 않은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고대의 마법은 정말로 신비하지요. 어떻게 1만 년이나 지났는데 허공에 이런 강력한 결계가 남아 있는 것인지!"

강력한 결계라고 그가 말한 것.

그것은 석비의 전면부를 완전히 뒤덮고도 좌우로 한참을 뻗어 나가는 거대한 '면'이었다.

그 면을 통과하려고 하면, 어째서인지 모든 것이 부스러졌다.

이파리도 부스러지고 돌도 천천히 부스러지고.

처음엔 탁본을 뜨러 다가가다가 사람도 다쳤다고 했다.

근데, 사실 그건 결계 같은 게 아니었다.

비석엔 분명 이렇게 적혀 있었으니까.

[루세라스력 4691년. 라이테나 셀시우스 대공께서 글로잉스틸 인근에 강림한 재앙을 일 검(一劍)에 참하셨다. 그 검의 궤적을 기려 이 석비로 표시하니, 이것을 보는 자는 접근을 유의하라.]

라이테나 대공.

우리 스승님.

나는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을 가만히 즐겼다.

'그러니까... 이게 고대 시대 천하제일인의 일 검(一劍)이란 말이지...?'

난 한 번도, 그의 진심 어린 일격을 본 적 없었다.

그가 보여 준 검강?

그에겐 그냥 장난 같은 거였구나.

그는 세계 유일의 그랜드 마스터였다.

심검(心劍)을 다룰 줄 아는.

'심검쯤 되면... 이런 일이 가능한 거였어....'

아마 내게 보여 주지 않은 이유는 봐도 이해를 못 할 것이라서 그랬던 거겠지.

파스스스....

손에 오러를 담아 비석 앞으로 가져가니, 오러마저도 먼지처럼 흩어져서 날렸다.

"하하...."

1만 년 전의 일 검(一劍)으로 만들어 낸 궤적이... 아직까지도 이런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서, 나는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게, 고대 검술의 끝에 있는 경지구나.

너무나 오싹하고,

너무나 갖고 싶은 이것.

오소소 소름이 돋듯, 저절로 마음이 정해졌다.

'훈련을 더 빡세게 해야겠어.'

나도, 우리 동생들도. 더 팍팍 굴리자!

고대 검술이... 미래다!

"어...? 갑자기 추워진 거 같지 않아?"

"음.... 왜지?"

데이지. 세아.

이 눈치 빠른 녀석들.

* * *

'내가 이걸 왜 하겠다고 한 거지....'

리베라 피에트로는 자신의 결정을 뼛속 깊이 후회했다.

매일 아침 빡센 훈련을 하는 란센 패밀리를 보고 부럽다고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그가 볼 때, 란센은 로버랜드 대륙 전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

그런 강자에게 받는 훈련이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미쳤냐고....'

그 얼토당토않은 생각의 결과가 이것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농담을 따먹는 아침 대신, 끔찍한 고통으로 점철된 아침.

"하나. 둘. 하나. 둘."

쉴새 없이 쏟아지는 구령.

다들 구령에 맞춰서 검을 휘둘렀다.

리베라 같은 경우엔 활시위를 당겼다.

그게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할 수도 있지만, 특수 제작한 무지하게 무거운 갑옷을 입고, 역시나 특수 제작한 무지하게 무거운 검이나 활을 든 채로 오러도 쓰지 않고 하는 거라면 이야기가 꽤 달라졌다.

"하악! 하악! 하아악!"

사방에서 숨넘어가는 헐떡임이 들려왔다.

사실 리베라는 그게 자기 입에서 나는 소린지 옆에서 나는 소리인지 분간도 안 갔다.

이미 육체도 정신도 한계에 도달한 지 오래였으니.

"리베라! 가슴이 구부러졌어!"

빠악!

그의 야차 같은 주군은 아주 약간의 요령도 용납하지 않았다.

자세가 어긋날 때마다 귀신같이 날아든 검면이 정수리나 종아리, 어깨를 가리지 않고 후려쳤다.

아팠다.

뭘 어떻게 치는 건지 맞을 때마다 악! 비명이 나올 정도로 아팠다.

이것은 고통과 고통의 밸런스 게임.

완벽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정신과 육체를 갈아 넣는 고통을 견딜 것인가, 아니면 무너진 자세에 뒤따르는 끔찍한 매질을 견딜 것인가.

허우적허우적 그 저울 위를 헤매다 보면, 1초 1초가 모두 지옥이었다.

'내가... 이걸...! 왜!!!'

리베라는 속으로 울부짖으며 활시위를 당겼다.

* * *

신음하는 동생들과 리베라.

하지만 너희가 알까?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긴장하고 집중하고 있는 건 나라는 걸.

'한치도 어긋남 없이, 바짝 쪼아야 돼.'

핵심은 육체를 한계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한계에 이른 육체는 그때부터 고통을 덜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하니까.

이때 중요한 건,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하는 것.

자칫 잘못하면 당장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나쁜 자세가 몸에 새겨질 수도 있다.

"세아! 엉덩이가 빠졌다!"

짜악!

탄성 좋은 검을 가지고 다니며 자세가 흐트러진 녀석들의 허벅지나 등짝, 때론 정수리를 호되게 내리쳐주었다.

자세가 틀렸는지 아닌지, 머리가 아닌 몸으로 깨닫게 하려면 매가 최고다.

"끄읍!"

이를 악물며 다시 자세를 고치는 세아.

옳지 이거다.

어떻게든 고통을 덜고 싶은 육체가 최적화된 움직임을 찾아내다 보면, 마침내 검과 육체의 진솔한 대화가 시작되거든.

그렇게 검령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거다.

"자자! 한 세트 더 남았다! 성장은 한계에서 시작된다! 지금부터가 느는 거야. 지금부터가!"

한계에서 딱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나는 마지막까지 동생들을 쥐어짰다.

이 방법이야말로 실력을 가장 빨리 늘게 하는 방법.

실제로 라이테나 대공의 호라이즌 기사단도 이런 식으로 훈련을 했다.

다만, 나는 거기에 한 가지 과정을 더 추가했다.

'문제는 인간이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거니까.'

완벽한 자세를 익힌 검사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그 검사는 검령과 대화하는 하급 익스퍼트가 될 수 있는가?

내 대답은 '아니다'였다.

물론 될 수 있겠지.

더 나중에.

바로 안 되는 이유는 바로 '적응'에 있었다.

정해진 자세로 반복 숙달하여 찾아낸 최적화는 철저히 그 틀 속에만 고정된 죽은 최적화일 뿐이다.

실제로 싸울 때, 상대가 그 자세대로 검에 맞아 준대?

경우에 따라서는 자세가 좀 무너지더라도 검을 더 멀리 뻗어야 할 때가 있는 거고, 또 때론 아예 자세가 무너진 채로 싸워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정해진 자세를 몸에 새겼다면... 그다음엔 그걸 부숴야 한다.

대신에 유연성을 채운다.

편안해진 자세에 새로운 긴장감을!

그 방법은, 하나뿐.

"좋아! 세트 종료! 자 그럼 간다!"

그대로 검을 치켜들고 기진맥진 녹초가 된 제자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들 기겁을 했다.

"으헉! 또야?!"

"시작할 때도 팼잖아! 또 패?!"

이것이 다 기민한 유연성을 주기 위한 나의 깊은 뜻!

쩌엉! 쩍! 쩌적!

팔을 달달 떨면서도 어떻게든 대항해 보려 하는 아이들을 팼다.

검을 쳐서 날리고 패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패고.

매 순간 순간, 새로운 방식으로 패고 또 팼다.

잘 못 막는 애들은 일부러 더 팼다.

가령,

캐치 소로아 같은 애들.

"못 막아? 못 막아? 이것도 못 막아?!"

열의가 없다?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인 이상 생존본능까지 없지는 않을 거다.

"큭! 악! 크윽! 크아아악!"

집중적으로 패기 시작하자 캐치의 눈에도 점점 독기가 서렸다. 움직임이 갈수록 민활해진다.

그렇지! 이거다 캐치! 할 수 있잖아?!

적당히 달아오르면 또 타/겟(깃)/을 바꿔서 팼다.

그 와중에 악을 쓰고 달려드는 아이들의 공격을 모조리 쳐서 날려 버리고 가뿐히 피해 버리는 건 기본.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나는 자상하게도 입을 쉬지 않고 계속 가르침을 내려줬다.

"무예란 본디 안 맞으려고 만들어진 것. 즉, 맞다 보면 무예의 본질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검령과도 만날 수 있다.

뻐억! 빡!

오늘도 아침 수련은 평화로웠다.

* * *

나이트 벌슨은 혼란스러웠다.

'이게 맞나...?'

현재 그는 영지군의 총교관을 맡고 있다.

익스퍼트를 포함, 기존에 있던 병력 약 3,500에 신규 모집 인원 약 3,400명, 합쳐서 약 7천 명 규모로 편성된 영지군의 훈련 총책을 맡은 것이다.

그만한 적임자가 또 없었다.

그는 왕실 근위 기사단장으로서, 수천 명의 근위대를 이끌고 제국군을 몇 번이나 격파했던 명장이기도 했으니까.

각종 전술, 전략은 물론 병종별 전투기술과 훈련 커리큘럼까지, 그의 머릿속엔 없는 게 없었다. 심지어 그 하나하나가 대륙 전체에서도 보기 드문 초엘리트 수준의 지식.

하지만 그토록 경험 많은 벌슨도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건 처음이었다.

"여기 커리큘럼입니다. 병종별로 방패술이나 장창술 같은 각자의 무기술과 제식을 익히게 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그것 하나만큼은 뼈에 사무치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은 그가 교관, 그러니까 리베라와 도련님들과 아가씨들에게 훈련 계획을 전달하던 그 순간에 일어났다.

"오호."

"호오?"

"무기술과 제식이라?"

"그거 재밌겠군요."

벌슨의 말을 받는 교관들의 상태가 어둡고 어두웠다.

들끓는 살기.

그것은 군인이 보여 줄 만한 살기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그래. 도시 하나쯤은 불태워 버릴 왕이나 황제 같은... 그런 희대의 학살자가 보여 줄 법한 광기.

"걱정 마요 아저씨. 확실히 조져 놓고 올 테니까."

수석 교관을 맡은 카트리나의 얼굴 위로 잔혹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주 재밌겠군요."

"배운 걸 베풀 수 있다니. 이렇게 기쁠 수가."

그 뒤로 리베라와 세아 등등이 시커먼 오오라를 뿜어냈다.

꿀꺽.

어쩐지 긴장이 된 벌슨은 마른침을 삼킬 뿐이었다.

잠시 뒤, 그들이 나간 연무장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벌슨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꼭 닫고 갓 끓여 낸 뜨거운 연기 커피를 잔에 따랐다.

컵 가득히 차오르는 까만 연기.

호륵- 마시면 까만 연기가 진한 향과 쌉쌀한 맛을 남기고 코로 사라진다. 그리고 컵 밑에 깔려 있는 진한 액기스는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고소함을 입 안에 남긴다.

한없이 평화롭고,

고요했다.

'절대로 창밖을 보지 않을 거야.'

벌슨은 다짐했다.

아까의 그 살벌한 기세를 볼 때, 창밖을 보는 순간 교관들을 말리고 싶어질 것 같았으니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 도련님들도 스트레스 좀 푸셔야지....'

요즘 아침마다 어떤 지독한 훈련을 당하고 계신지, 벌슨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병사들의 고통을 성실히 외면했다.

다행히 방음이 잘 되는 창문은 그의 집무실 안에 평화로운 고요를 선사했다.

"알고 있나?! 무예는 본디 안 맞기 위해 만들어졌다는걸!"

카트리나의 목소리가 그 방음창조차 뚫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벌슨은 얼른 연기 커피 한잔을 더 내리고 눈을 감았다.

"나는 몰라...."

작게 중얼거리며.

* * *

기본 훈련 4주가 지났다.

벌슨 아저씨와 동생들은 내가 맡긴 훈련 임무를 완벽 그 이상으로 수행해 줬다.

단 4주 만에 정예병 비스무리하게 환골탈태한 병사들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훈련을 계속 시키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이젠 더 이상 그럴 여유가 없었다.

"변경에 마수가 위험할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당장의 교역로는 임시 고용한 전사들로 어떻게든 지키고 있지만, 이대로 더 방치하면 웨이브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리베라는 웨이브를 경고했다.

마수들은 평소에는 영역 생활을 하며, 자기들끼리도 싸워 댔다.

하지만, 점점 숫자가 불어나 영역이 겹치고, 서로 마주치는 일이 잦아지다 보면 어느 순간 거대한 변화를 일으킨다.

싸움을 딱 멈추고, 오직 인간만을 죽이기 위해 다 함께 몰려드는 것.

그게 바로 웨이브.

로버랜드에 살면 모를 수가 없다.

웨이브로 인해 멸망한 도시의 전설이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대륙이 바로 로버랜드였으니까.

거기에 세아의 경고도 뒤따랐다.

"훈련은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니 아무 말 안 했지만, 적어도 토벌은 서둘러야 해."

녀석이 지적한 건 몬스터웨이브와는 또 다른 포인트였다.

"질풍왕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전사를 대규모로 모집하고 있는데... 자칫하면 카슈시(市)를 빼앗길 수도 있어."

"카슈를?"

어딜 노린다고?

내가 혈백작 들카슈를 죽이고 그 지경이 되면서 겨우 복속한 카슈를?

"응. 질풍왕의 숙원이 키날로시(市)와 카슈시를 장악하는 거라서."

"...그랬어?"

"만약 그가 이 두 도시를 손에 쥐게 되면 로버랜드의 서북면으로 올라가는 교역로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되니까. 그러면 노르베르쥬 전체를 복속시키는 거나 다름없지."

노르베르쥬는 로버랜드의 서북면을 통칭하는 말이다.

쿠샨시(市), 카슈시(市), 키날로시(市), 모두 노르베르쥬의 입구에 존재하는 도시들이었고.

"그동안은 제아무리 질풍왕이라도 키날로를 탐낼 수 없었어. 마법사의 도시 키날로는 그 자체로도 막강한 군사력을 가졌지만, 다른 도시들이 키날로와 군사동맹을 맺고 질풍왕을 견제했으니까."

"...그중 가장 큰 동맹이 크시아스랑 들카슈였구나."

"그랬지. 키날로 다음은 자기 차례니까."

"근데 둘 다 죽었고."

"응. 힘의 공백 상태. 내가 질풍왕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 키날로와 카슈를 반드시 복속하려고 들 거야."

"무슨 얘긴지 알겠다."

"삼전계(三戰計)를 이루려면... 되려 키날로와 카슈를 우리가 먼저 도모해야 돼. 그게 질풍왕을 꺾고 아일룬을 정복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야."

결국 세아의 요청 사항은 간단했다.

마수 토벌을 최대한 빨리 끝낼 것.

그 후, 질풍왕보다 빠르게 카슈와 키날로를 도모할 것.

"응. 다만, 키날로는 여의치 않을 경우엔 동맹이라도 맺는 걸로."

"확인."

"그래서 말인데... 마수 토벌이 얼마나 걸릴까? 2주 안으로 줄일 수 있어?"

물어보는 세아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자기도 아는 거다. 2주라는 시간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보통의 마수 토벌도 4주는 걸리는데, 지금은 그간 미뤄진 토벌 때문에 마수가 더 흘러넘치는 상황.

2주. 말도 안 되지.

근데,

카슈시를 뺏길 수도 있다며?

"1주."

그 꼴은 내가 못 보지.

내 단호한 대답에 세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녀석으로서는 굉장한 감정 표현.

"그게... 가능해?"

손을 뻗어 녀석의 남색 머리칼을 헝클어 준다.

세아야. 네가 똑똑하긴 하지만 군략을 짜내는 건 나를 못 따라오지.

벌슨 아저씨가 날 얼마나 철저히 가르쳤는데.

크시아스 밑에서 구르면서 수행한 마수 토벌이 몇 개인데.

"충분해. 1주."

물론,

쉽진 않을 거다.

아니,

지옥 같겠지.

<로버랜드의 다섯 방면>

<노르베르쥬를 지나는 황금의 무역로>

*붉은색이 주요 무역로

*보라색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무역로

#34화 변경

"그래도 좀 아쉬워. 한 10주는 훈련만 시키고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워서 한마디 했더니, 옆에서 말을 몰던 칼세릭이 나를 끔찍한 물건 보듯 쳐다봤다.

"...혹시 전투하기도 전에 병사들 다 죽여 버리는 게 취향이셨습니까?"

훈련이 꽤나 혹독했던 모양이다.

칼세릭의 말도 말이지만, 그의 눈에 새겨진 충격과 경악도 퍽 선명했다.

"훈련이 그렇게 빡셌어?"

"솔직히 제 형제들 부른 게 후회될 정도였습니다. 제 형제들도 그렇게 훈련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후.... 날 엄청 원망하겠군."

칼세릭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농담처럼 말하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인 듯했다.

"왜? 그럼 무를래?"

"...누가 그런답니까? 이미 불렀으니 다른 소리 할 생각 마십시오."

하여튼 판단이 빠르다니까.

딱 내 스타일이야.

살려 달라고 대뜸 무릎을 꿇던 과감함.

내게 미래를 맡기는 과단성.

글로잉스틸 유적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고민을 하던 칼세릭은 내가 전사들의 봉급을 공표했을 때 결국 굴복했다.

곧 죽어도 1년만 채우고 바로 떠날 것처럼 굴더니, 태도를 싹 바꿔서 내게 충성 맹세를 하고 제 식구를 전부 쿠샨시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렇게 칼세릭 형제단이 통째로 내게 투신했다. 35명의 익스퍼트, 100명의 엘리트 전사, 그리고 그들의 가족 250여 명.

아마 이번 마수 토벌이 끝날 때쯤엔 다들 쿠샨시에 도착할 거다.

"그래도 네 형제들은 운이 좋은 거야."

나는 행군하는 병사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지독한 훈련에서 해방된 덕분일까? 군장이야 보급대의 수레로 옮기는 중이라고 해도, 걸친 갑옷과 무기는 여전히 무거울 텐데도, 하나같이 표정이 밝았다.

자신들 앞에 어떤 미래가 놓여 있는지도 모르고.

칼세릭이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로... 그 작전대로 하는 겁니까? 그 라이트닝인지 벼락 맞을인지 하는 그걸요?"

"당연하지. 작전은 작전대로 하라고 짜는 거잖아."

"세상에...."

"아까 10주 훈련은 너무하다 그랬지? 장담하는데, 10주 훈련 쪽이 천국일 거야."

"...부정할 수 없군요."

칼세릭은 세상 가엾다는 표정으로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불쌍하게도,

병사들은 정말 다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는 현재 내성을 넘어 외성,

다시 외성을 넘어 촌락 지역까지 도달한 상태.

촌락 지역에 펼쳐진 수려한 풍경 탓이었다.

완만한 언덕들마다 푸릇한 목초지가 널려 있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루었다.

포근한 햇살 냄새에 향긋한 들꽃 냄새가 섞이고, 숲에서 불어온 신선한 바람이 감각을 일깨운다.

병사 중엔 해사하게 웃으며 한쪽 손을 쭉 뻗어 산들바람을 만끽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저 얼굴을 보고도...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날 원망하는 칼세릭. 하지만 원망의 방향이 틀렸다.

"원망은 질풍왕한테 해야지."

감히 건방지게 '내' 카슈시를 노려?

그 덕에 우리 병사들만 죽어 나가게 생겼다.

작전명

라이트닝.

통상적으로 한 달 이상 걸리는 마수 소탕 작전 기간을 단 1주일로 줄이기 위해 내가 고안한 전법.

보통 로버랜드의 마수 소탕은 마수 서식지의 외곽에서부터 차근차근 마수들을 제압하며 올라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흘러넘치는 마수들을 밖에서부터 돌려 깎아 압력을 줄이는 방식인데... 당연히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접근을 달리했다.

마수 서식지의 외곽을 돌려 깎는 게 아니라 힘을 한 점에 집중해 서식지의 중심까지 단숨에 돌파해 들어가는 방식으로.

서식지의 중심을 제압한 후, 인간을 보고 광분해서 달려드는 마수들을 싹 쓸어버리는 게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다.

마수를,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서부터 구제해 버리는 신개념의 전법.

"그... 새로운 게 꼭 좋은 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안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잖습니까? 마수라 겁도 없고... 죄다 죽자고 달려들 텐데...."

"그러니까 좋잖아? 하나하나 찾아다닐 필요도 없고."

"대신 잠도 못 잘 겁니다."

"빨리 죽이고 자면 돼."

힘들 건 안다.

하지만 내가 가려 뽑고 동생들이 훈련시킨 병사들이라면 분명 이겨 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전방에 변경 확인!"

"변경 확인!"

선두에서부터 병사들의 입을 통해 경고 전달이 이루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풍광이 어느 한 지점을 경계로 뚝 끊어진 모습이 보였다.

수채화 같은 초록빛 풍경이 끝나고, 그 자리부터 시작되는 회색빛의 척박한 풍경.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변경.

'그래 어쩌면 더 잘 된 거야.'

저 깊숙한 곳까지 다녀온 뒤에 나의 군대는 정예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어질 테니까.

10주간의 훈련보다도 더 값진 1주일이 저 앞에 놓여 있다.

* * *

로버랜드는 왜 무법의 대륙이 되었는가.

그 이유가 바로 변경에 있었다.

로버랜드는 넓은 대륙이지만, 사실 그 넓은 땅 중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45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45퍼센트에는 사람이 진짜로 살아가기엔 어려운 산지나, 사막, 습지와 숲도 포함이었으니... 실제 거주 가능 구역은 그보다도 훨씬 적은 셈이다.

어쨌든 일단 대충 그런 곳을 '물빛 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머지 55퍼센트의 '잿빛 땅'이 있다.

잿빛 땅은 실제로 모든 것이 잿빛인 땅이었다.

흙도 식물도 다 잿빛.

잿빛 땅에 심은 농작물은 기괴하게 뒤틀리고 고약한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가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그런 식물마저 뜯어 먹는 동물이 있는데 전부 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종국에는 마수가 되었다.

잿빛 땅은 마수의 땅이었다.

이곳에서는 마수들이 다른 지역보다 3배는 빠르게 성장해 금세 숫자를 불렸고, 다른 대륙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강력한 변이체들도 자주 출몰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로버랜드에는 글로리랜드와 같은 왕국들이 발전하질 못했다.

섬처럼 서로 떨어진 물빛 땅마다 하나의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폐쇄적인 생활권이 형성되었고, 각 도시는 소왕국처럼 기능하며 분쟁과 협력을 반복했다.

바로 옆 지역만 넘어가도 문화가 다르고 식생이 다르고 경제구조가 달라져 버리니 더 큰 정치체제로 통합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글로리랜드와 올드랜드 출신의 범죄자, 도망자들이 수백 년 동안 몰려들어 사회, 정치, 군사적 혼란을 계속 일으켰으니... 과연 이곳은 무법의 대륙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땅 되었다.

설명은 길었지만, 결국 지금의 로버랜드를 만든 것은 '잿빛 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잿빛 땅을 도시에서는 '변경'이라고 불렀다.

시민들이 살아가는 '역내'를 벗어나면, 마수들이 들끓는 '변경'이 나온다는 식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변경을 두려워했지만, 그렇다고 벌벌 떨지는 않았다.

로버랜드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항상 변경과 마주 봐야 했으니까.

변경으로 나가 마수를 소탕해 웨이브를 방지하고, 교역로의 안전을 확보해 물자를 공급받지 못하면, 도시는 존립할 수가 없다.

특히나 로버랜드 전사들은 변경을 고향처럼 익숙히 여겼다.

갈 때마다 긴장은 되지만, 항상 드나들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그런 장소.

하지만 오늘, 나를 따라 변경으로 나온 3,000명의 전사들은 평소와 달리 잔뜩 긴장을 했다.

"교역로 쪽 변경은 안 이렇던데... 여긴 왜 이래?"

"그쪽은 자유 전사들이 자주 드나들잖아. 토벌 의뢰 수행도 많이 하고. 근데 이쪽은 워낙 크고 외져서...."

"아무리 그래도... 전사 생활 10년에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난 한 번 본 적 있어."

"언제?"

"5년 전 게슈트시에서."

"...거기 웨이브로 멸망한 도시 아니냐?"

"맞아. 거기로 들어가는 상단을 호위한 적 있는데, 그때 거기가 딱 이런 분위기더라. 그래서 임무만 마치고 바로 도망쳐 나왔지."

전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나도 이런 건 처음 봤거든.

보통은 변경 내부로 꽤 들어가야 마수가 출몰하는 법이었는데, 이번엔 변경에 들어서면서부터 계속 마수의 습격이 이어졌다.

안 그래도 말년의 크시아스가 변경 관리를 허술하게 했는데, 최근 2달가량 정치적 혼란 탓에 소탕 시기까지 놓쳐 버린 탓이었다.

"전방에 록우(鹿牛) 무리 발견! 규모는 300마리!"

선두에서 알려온 경고에 전사들의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록우가... 300마리나?"

"변경 심부도 아니고 이제 막 외곽에 들어섰는데 300마리라고?"

록우는 물소와 닮은, 네 발로 뛰는 마수다.

커다란 머리에 두껍고 짧은 목을 가졌지만, 사슴처럼 날씬하고 긴 뿔을 자랑했다.

무게는 150kg 정도였는데, 길고 얇은 종아리와 두꺼운 허벅지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속력으로 악명 높았다.

일제히 달려들면 꽤 큰 마을도 모래성처럼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런 록우가 300마리.

강적이다.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데."

"근데 우리 진짜 훈련한 대로 싸워야 하는 거야?"

"아직 진짜 써먹어 본 적도 없잖아."

"불안한데...."

몇 번이나 변경을 오간 전사들이었지만, 오늘은 모든 게 생소했다.

들고 있는 무기도 평소와 달랐고, 전술도 달랐다.

지난 한 달간 열심히 배우고 익혔지만, 이게 진짜 통하는 건지 체험해 보진 못했다.

전사들은 동요했다.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이게 기회라 여겼다.

'이 전투를 손쉽게 승리한다면, 자신감이 붙겠지.'

스스로 이룬 성과를 몸소 체험해 볼 수 있는 딱 좋은 상대.

"제1, 제2 전대! 전면에 방진! 분대장 선두!"

오러를 담은 내 외침에 땅이 진동했다.

동요하던 전사들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혹독한 훈련이 헛것이 아니었는지, 1,000명의 중무장병들은 몸이 기억하는 대로 뛰쳐나와 촘촘한 대열을 만들었다.

엘리트 전사(오러 유저)인 분대장이 전면에서 방패를 들고 버티면, 4명의 분대원은 간이 삽으로 빠르게 땅을 파 방패를 묻고 그 위에 장창을 얹어 서로 다른 각도로 고정시켰다.

1열에는 방패를 든 분대장들이 어깨를 붙이고 서서 만든 벽이 있고, 그 방패 벽 너머로 2, 3, 4열의 분대원들이 치켜든 5미터 장창이 고슴도치처럼 가시처럼 빽빽한 형태.

방패의 종류는 카이트 실드였다.

자유 전사들이 주로 쓰는 라운드 실드는 상체만 겨우 가려주지만, 카이트 실드는 정강이까지 가려 주어 방어력이 더 좋다.

"제3, 제4 전대! 투창 준비!"

처저적!

이어진 호령에 나머지 1,000명의 중무장병들이 방패를 내려놓고 투창을 뽑아 들었다.

나의 중무장병들은 그 이름 그대로 다양한 무장을 갖춘 병종이었다.

각기, 사슬 갑옷과 방패, 5미터 장창, 2.5미터 창, 투창, 검, 그리고 철갑이 들어간 장갑과 부츠로 무장했다.

창만 3개이다 보니, 아예 창 3개를 꽂을 수 있는 가방을 만들어 오른쪽 어깨에 걸고 행군했다.

무장은 번다했지만, 덕분에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검방보병도 되고 장창병되고 방패창병도 될 수 있는 전천후의 병종이었다.

비록 훈련 기간은 짧았지만, 로버랜드의 전사들이 원체 전투 경험이 많은 데다가, 선발까지 빡세게 한 덕분에 지금도 충분히 실전 운용이 가능한 상태.

끄에에에엑!

두두두두두두-!

막 대형을 형성했을 때, 멀리 떨어져 있던 록우 무리도 우리를 발견했다.

놈들은 끔찍한 괴성을 지르더니 미친 듯이 돌격해 왔다.

자고로 마수란 인간을 보면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족속들이니까.

두두두두두두-!

회색빛 구름이 피어오른다.

상당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그 돌진에, 중무장병들의 얼굴엔 긴장이 서린다.

그게 날 흡족하게 했다.

'애들이 참 훈련을 잘 시켰어.'

얼굴은 딱딱하게 긴장되었지만, 병사들은 동작과 자세는 유연하고 정석적이었으니까.

'이 맛이지.'

오래도 기다렸네.

어려서부터 늘 갖고 싶었거든.

바로 이런 군대를.

긴장할 대로 긴장한 병사들과 달리, 나는 지금 도리어 두근거리는 설렘을 느꼈다.

#35화 탈피

보통 로버랜드의 대(對)마수 전술은 익스퍼트와 엘리트 전사를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하나같이 괴력을 발휘하는 마수들을 상대로, 익스퍼트와 엘리트 전사가 먼저 예봉을 꺾는 것이다.

익스퍼트는 오러의 힘으로 신체와 무기를 강화할 수 있었고, 오러 유저인 엘리트 전사들은 무기 강화까지는 못 했지만, 오러를 이용해 괴력을 내는 건 가능했으니까.

록우 무리가 달려든다? 그러면 먼저 익스퍼트를 보내 기세를 죽이고 그 후에 엘리트 전사를 보내 무너뜨린 뒤 일반전사가 달라붙어 처리한다.

철갑늑대가 몰려든다? 그러면 먼저 익스퍼트를 보내 휘젓고 그 후에 엘리트 전사를 보내 휩쓸어 버린 뒤 일반 전사가 달라붙어 마무리한다.

대개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나는 익스퍼트를 뒤로 빼고, 엘리트 전사와 일반 전사로만 이루어진 중무장병을 앞세웠으니... 낯설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다들 반신반의하고 있겠지.

이게 과연 통할까? 안 통하면 그냥 다 죽는 건가?

통한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훈련을 시켰으니까.

그래도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안 통한다면?

뭐, 그땐 내가 혼자 다 죽이면 된다. 록우 300마리쯤이야.

"방패수 자세 낮춰! 록우는 머리를 아래에서 위로 들어 올리며 받는다.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자세 낮춰!"

"록우의 뿔은 칼날처럼 날카롭다! 방패 뒤에 잘 숨어! 안 그러면 얼굴이 이뻐질 거야!"

"장창수는 창 각도 잘 만들어! 니들이 창을 못 꽂아 넣으면 분대장들 다 죽는 거야!"

"겁먹지 마라! 내가 뒤에 있다!"

지휘관을 맡은 익스퍼트들이 대열 사이사이에 서서 병사들을 격려했다.

두두두두두-!

록우 무리가 300미터 전방까지 다가왔다.

록우의 속도라면 7초면 주파할 거리.

지금도 무식하게 빠른 속도지만, 놈들은 보통 100미터 전방에서부터 한 번 더 급격한 가속을 이루어 충돌 직전엔 무려 시속 300km를 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들이받는다.

그러니까, 지금이다.

"궁병! 사격 준비!"

끼리리릭!

내 뒤로 포진한 800명의 궁병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150미터 전방을 향해... 쏴!"

쐐애애애액!

거침없이 달려드는 록우 무리의 머리 위로 화살 비가 쏟아졌다.

저게 그냥은 화살은 아니지.

저 무지막지한 괴물들의 돌진과 맞서기 위한, 나의 첫 번째 무기.

제국궁(弓).

일명 흑궁(黑弓)이라고도 한다.

작고, 가볍고, 힘의 전달도 좋아 천하제일의 활로 손꼽히고는 했다.

최대 사거리 400m.

유효 사거리 150m.

심지어 뛰어난 명중률.

나의 궁병대는 모두 이 흑궁으로 무장했다.

물론 제국은 흑궁의 국외 반출을 엄격히 통제했지만, 전혀 문제 될 건 없었다.

'고대 무구랑 교환하쉴?'을 시전해 버리면, 세상에 못 구할 물건 따위 없으니까.

그 흑궁 800개가 일제히 바람을 쏘아 냈다.

쐐애애애!!!

흑궁 특유의 비교적 짧은 화살, 일명 흑시가, 귀청을 찢는 소리와 함께 날아 록우(鹿牛)의 살가죽을 파고들었다.

끼에에에-!

소름 끼치는 비명과 함께 10여 마리의 록우가 땅을 굴렀다.

워낙 살가죽이 질기고, 튼튼했기에 그렇게 화살을 뒤집어쓰고도 대부분이 멀쩡하게 달려들었다.

'그래도 가속 타이밍은 한 번 뺏었고.'

그런 그들에게 난 두 번째 무기, 투창을 먹였다.

"투창! 던져!"

후드드득!

묵직한 창 1,000여 개가 일제히 날아 록우 무리의 얼굴을 후려쳤다.

끄에에에!!!

이번에는 30여 마리가 쓰러진다.

마수다운 질긴 생명력으로 온몸에 창을 꽂은 채로도 죽지 않고 달려든다.

하지만 쓰러뜨린 숫자보다 더 중요한 건, 넘어지는 록우들 탓에 록우 무리의 돌진이 흐트러졌다는 것이었다.

어떤 록우는 앞에서 무너지는 록우를 훌쩍 뛰어넘었고,

또 어떤 록우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걸려 비틀대었고,

또 다른 록우는 옆으로 비켜 돌아가고...

속도만 느려진 게 아니라 밀집해 있던 대형 자체가 듬성듬성하게 흩어졌다.

마지막 순간, 폭발적으로 가속할 타이밍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밀도조차 낮아진 록우 무리.

그런 그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

길고 단단한 장창!

장창수들은 대열이 흩어진 록우무리를 더 정확하게 노리고, 받아 냈다.

"장창! 버텨!"

콰득! 콰드득! 콰득!

록우들이 달려와 장창에 처박혔다.

그 흉악한 기세에, 뛰어난 탄성과 강도를 지닌 탕나무 창대가 둥글게 휘었다. 어떤 건 아예 부러졌다.

바닥에 방패를 묻고 그 위에 창을 얹어 강력하게 고정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장창수들은 방패 채로 움푹 밀려났다.

그래도 덕분에 록우 무리의 기세는 확연하게 꺾였다.

엘리트 전사들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정도로.

"방패수!!!"

"으랴아!"

꽈가아아앙!

마침내 록우무리가 방패수들과 충돌했다.

마수답게 터무니없는 힘을 자랑했지만, 화살과 투창과 장창에 연달아 기세가 꺾인 놈들로서는 엘리트 전사들이 세운 방패의 벽을 도저히 넘을 수 없었다.

카가각! 카각!

칼날처럼 예리한 뿔들이 카이트 실드에 비벼지면서 날카로운 금속성을 뿌렸다.

"와!"

"이게 되네?!"

"된다!"

전사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록우 300마리의 돌진이라고 하면, 익스퍼트 중급의 전사들이라 해도 부상을 각오해야 하는 괴물들.

그런 괴물의 돌진을 엘리트 전사와 일반 전사들만으로 막아 냈으니, 탄성이 터져 나올 수밖에.

나 역시 신이 난다.

이제 돌격이 저지된 록우 무리를 마음대로 반죽할 차례였다.

이거, 직접 칼질하는 것보다 더 신이 나는 거 같다.

"제1, 제2 전대! 현 위치 사수! 제3, 제4 전대! 좌우로 돌아 포위섬멸! 궁수대! 좌익과 우익에 연사(聯射)!"

"하!"

정면의 엘리트 전사들은 산발적으로 달려드는 록우 무리를 방패로 밀어내고 검으로 목을 쳤다.

그 바로 뒤에 있는 장창병들은 길게 내민 창을 계속 찔러 엘리트 전사들의 부담을 줄였다.

그렇게 전열이 버티는 동안 제3, 제4 전대는 좌우로 우회해 갈팡질팡하는 록우 무리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이번엔 일반 전사들이 두 손으로 방패를 들고 방진을 짜서 전면에 섰다.

아무리 록우가 힘이 세다고 해도 돌진이 멈춘 이상, 4명의 방패수가 서로의 등을 방패로 밀며 버티면 쉽게 밀어내지 못하는 법.

그사이, 엘리트 전사는 방진 뒤에서 5미터 길이의 장창을 역수로 잡아 머리 위로 들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방진 바깥의 록우들을 찔러 댔다.

푹! 푸욱! 푹!

아무리 4명씩 열을 이루어 밀어붙이는 방진이라 해도, 록우의 괴력이라면 결국엔 밀려날 수밖에 없었겠지만, 뒤에서 계속 찔러 대는 엘리트 전사의 장창 때문에 록우들은 힘을 쓰지 못했다.

밀어낼 만하면, 창이 쑤셔박히고 또 밀어낼 만하면 창이 쑤셔 박히니, 록우들은 도리어 한 마리 한 마리 쓰러지며 점점 뒤로 밀릴 수밖에.

거기에,

쏴아아아!

800개의 제국궁이 좌익과 우익에 쉴 새 없이 화살비를 내렸다.

근거리에서 쏟아진 흑시(矢)는 록우들의 살가죽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정면은 막히고 좌측과 우측에서 차츰차츰 밀리기 시작하니 록우들은 갈팡질팡하며 흩어졌다. 어떤 놈은 살육본능에 따라 화살 비와 창 세례 속으로 뛰어들었고, 어떤 놈은 기회를 본답시고 뒤로 물러섰고, 그러면서 록우 간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통일성이 사라졌다.

스펀지처럼 숭숭 뚫린 록우들의 대열.

이제 목을 칠 차례다.

아직도 남아 있는 200여 마리의 록우 무리를 소드 오러로 짓이겨 줄 것이다.

"참마대(斬魔隊)! 출진!"

"하!"

참마대는 60명의 하급 익스퍼트와 10명의 중급 익스퍼트로 구성된 부대.

그들이 소드 오러를 환하게 빛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전열의 병사들은 그들의 길을 열기 위해 자세를 낮춘다.

쿵! 쿵!

땅을 힘껏 걷어차고 높이 뛰어오른 참마대는 그대로 전열을 뛰어넘어 우왕좌왕하는 록우 무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콰직!

투쾅!

끄에에에!

소름 끼치는 비명과 함께, 회백색 피가 분수처럼 치솟는다.

소드 오러는 고대의 검기와 달라서 절삭력보다는 파괴력이 더 강했기에, 록우가 베일 때마다 상처가 터지고 살 조각이 튀어 올랐다.

흥이 오른 참마 대원들은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록우가 이렇게 쉽다니!"

"쓸어! 쓸어 담아!"

본래, 돌진하는 록우는 그들로서도 두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멈춰 서 있는 데다가 양면으로 압박당해 우왕좌왕하는 록우는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쉬웠다.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콰직!

촤악!

끼에에에-!

빗자루에 쓸려나가듯 무너지는 록우 무리.

불리함을 느낀 몇몇 록우들이 재빨리 대열을 이탈해 뒤로 물러섰지만, 그 역시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에겐 아직 마지막 무기가 남았으니까.

"기병대! 돌격!"

슬금슬금 우회하던 200기의 중기병이 내달렸다.

대열을 이탈해 물러서는 록우들을 기병창에 꿰어 버렸다.

끄에에에-!

마지막 록우가 눕는다.

여기까지 소요된 전투 시간은 고작 15분.

압승이었다.

* * *

칼세릭은 경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건 온통 잔뜩 신이 난 병사들이었다.

"아까 봤냐? 내가 창으로! 록우의 미간을 콱!"

"에이- 하수네. 하수야. 나는 눈을 찔렀다고?"

"본인 록우 불알 찔렀다. 질문받는다."

첫 승.

그리고 압승.

군의 분위기 자체가 바뀌었다.

"아니, 백작님이 지휘를 한 번 할 때마다 등줄기가 짜릿! 짜릿! 하더라니까?"

"그러니까, 무슨 록우 무리 가지고 모래 장난하는 줄."

"짜릿? 난 지렸어."

"시바.... 어쩐지 냄새나더라. 꺼져 좀."

병사들의 어깨가 부드럽게 이완된다.

불안으로 뛰던 심장이 이젠 자신감으로 뛴다.

깊이, 변경의 가장 중심으로 치고 들어가면서도 두려움은커녕 되려 콧노래까지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탈피.

이건 하나의 재탄생과도 같았다.

고치 속에서 다 만들어진 나비 하나가 마침내 고치를 찢고 나오는 순간.

자신의 날갯짓이 세상에 통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칼세릭은 느꼈다.

전투 전과 전투 후의 전사들이 완전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그는 자연스럽게, 이 기적을 만들어 낸 아까의 전투를 복기했다.

'천재적인 발상이었어.'

그게 칼세릭의 평가였다.

'익스퍼트의 공격력을 최대로 이끌어 냈잖아.'

익스퍼트를 앞세우는 일반적인 전술에선, 그런 공격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가장 첨예한 적의 예봉과 부딪혀야 하기 때문에 익스퍼트들의 부상도 잦았고 체력 소모도 빠른 탓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적의 예봉이야 확실히 꺾을 수 있었지만, 이쪽도 가장 강력한 전력이 소모되어 전투가 지지부진해졌다.

전투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체력의 소모도 커지고 피해도 커지는 건 당연지사였고.

그런데 익스퍼트가 뒤로 빠지고 엘리트 전사와 일반 전사가 전열을 지켜내자, 모든 게 바뀌었다.

힘을 아낀 익스퍼트가 적의 대형이 붕괴된 틈을 파고들어 가 말 그대로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익스퍼트들이 단숨에 적의 숨통을 끊어 버리니 전투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끝났고, 덕분에 엘리트 전사와 일반 전사의 피해까지 파격적으로 줄어들었다.

'록우 300마리와 싸웠는데... 전사자가 한 명도 없을 수가 있구나....'

심지어 상급 이상의 익스퍼트들은 나서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대(對) 마수전의 신기원을 본 기분.

칼세릭은 사기가 충천한 병사들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록우 300마리라는 강적과 싸웠음에도 전혀 지치지 않은 모습.

곧 그의 시선이 옆쪽을 향했다. 검푸른 머리칼을 휘날리며 말을 몰고 있는 남자.

란센.

그의 주군.

'우리 대장, 뭔가 제대로 배운 느낌이 나긴 했는데... 이 정도까지 전술 전략을 구사해 낸다고?'

그는 충격을 받았고 끝내 가능성을 보았다.

'이대로라면... 정말 라이트닝 작전, 그거 해 볼 만하겠어.'

말도 안 되는 작전이라 생각했는데,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웨이브가 임박한 변경 지대를 단 1주일 만에 토벌한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작전이 말이다.

#36화 개화

라이트닝 작전을 성공시키려면, 총 3개의 연대가 필요했다.

란센이 이끄는 제1연대가 변경의 중심을 향해 깊숙이 나아가면,

카트리나가 이끄는 제2연대가 그 길목을 지키는 것이다.

카트리나의 목소리는 변경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잘 들어라! 우리 제2연대가 패하면, 제1연대가 말라죽는 거다! 니들 어깨에 걸린 목숨이 2개씩이라고 생각하라고! 여길 사수한다! 1연대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확보한다!"

"하!"

"제1, 제2, 제3. 전대! 전면에 사선 대형!"

"하!"

몰려드는 적은 타래오크.

2미터에 육박하는 평균 신장에 고릴라 같은 근육이 가득한 괴물들이었다.

손에서 빼곡한 혈관이 솟아나 서로 딱딱하게 얽혀 도끼나 망치 같은 무기를 만들었다. 가는 혈관이 실타래처럼 솟아나는 모습 때문에 '타래오크'라고 불렸다.

먼 고대에는 오크족 자체가 문명 생활을 하는 이종족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지금은 그저 살육에 미친 마수들일 뿐.

그렇기에, 란센이 만든 전술은 잘만 통했다.

"버틸 만해!"

"카트리나 님보다 가벼워!"

"그러니까! 훈련할 땐 연대장님이 밀치며 나동그라졌는데!"

강력한 마수인 타래오크의 공격을 전면에서 받아 내는 일반 병사들은, 자신들의 성취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지금 나더러 무겁다는 거냐!"

"아, 아닙니다!"

"니들 다 기억했어!"

"히이익!"

카트리나는 조금 다른 측면에 꽂혀서 발끈했지만, 전황만큼은 확실히 읽었다.

"적들이 흩어진다! 가자! 돌격! 나를 따르라!"

사선 대형에 말려들어 박살이 난 타래오크 무리. 카트리나는 직접 말을 타고 기병창을 휘두르며 중기 병대의 돌격을 이끌었다.

두두두두두-!

본래는 말의 돌진조차 맨몸으로 막아 낼 수 있는 괴력을 가진 타래오크였지만, 우왕좌왕 흩어진 지금은 어림도 없는 소리.

심지어 가장 선봉에서 길을 뚫는 게 카트리나였다.

기병대의 돌격을 따라 타래오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한편, 리베라가 이끄는 제3연대는 도시와 무역로를 방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와.... 이것들 난리가 났네."

란센과 카트리나가 이끄는 1연대와 2연대가 변경을 들쑤시니, 거기에 놀란 작은 마수들이 변경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쏴! 계속 쏴! 이날을 위해 훈련받은 거잖아! 자신감 있게 쏴!"

제3연대의 주력은 궁병대.

병사들은 숨 쉴 틈도 없이 시위를 당겨야 했다.

"그렇게 쏴서 남아도는 화살 언제 다 쏠래? 쉬지 마! 야! 멀리 쏘지 말라니까?! 영거리사격! 40보 안에 들어온 놈들만 직사로 쏴 버려! 빨리! 느려지는 순간 우리 다 죽는 거야!"

쐐애애액!

화살이 공기를 꿰뚫는 소리가 귀청을 두들겼다.

들개만 한 마수, 침팬지 같은 마수.

끝없이 쏟아지는 작은 마수들을 일일이 쏘아 맞히며, 궁병들의 사격은 조금씩 조금씩 더 빠르고 정교해졌다.

물론,

카트리나의 2연대든, 리베라의 3연대든,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사실이었으나, 란센이 이끄는 1연대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변경의 한복판에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수들과 싸웠으니까.

"좌, 좌측에서 탐식매머드 접근!"

"칼세릭!"

"예! 제거하겠습니다!"

"우측에 코브라이온 무리 접근!"

"룩크랜서!"

"하! 신살대 출진!"

"히익! 후방에 소낙새입니다! 이건...!"

"됐어! 그건 내가 맡는다!"

끝없이 밀려오는 적.

심지어 사면에서 서로 다른 괴물들이 동시에 덮쳐 왔다.

란센과 칼세릭마저 지휘권을 일선에 넘기고 전장에 뛰어들었고, 6명의 상급 익스퍼트로 이루어진 '빠르게(迅) 죽이는(殺) 부대(隊)', 신살대(迅殺隊)도 출격했다.

그래. 신살대가 출격했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그럭저럭 열심히 싸우고 있던 캐치 소로아는 그 모습을 보았다.

캐치 소로아.

의욕을 잃어버린 21살의 청년.

그는 끝없이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깊은 절망의 동굴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솔직히, 이번 원정도 정말 오기 싫었다.

하지만 란센이, 그의 형이 시키니 마지못해 따라왔을 뿐.

란센의 말을 거절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그 두렵고 아프던 어린 시절을 견뎠고, 그가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그냥 그를 좋아했으니까.

캐치만 그런 게 아니라 란센 패밀리라면 다들 그랬다.

그래서 캐치는 더욱더 절망스러웠다.

'잘츠란....'

달려 나가는 신살대 속에 그보다 한 살 어린 동생, 잘츠란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고작 100인 대장에 불과한.

동생인 잘츠란은 상급 익스퍼트로만 이루어진 신살대에서 뛰는데, 자신은 참마대도 아닌, 중무장병 100인대를 통솔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란센 형도... 내 무력을 믿지 못하는 걸까?'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한때는 정말 그 크고 넓은 등을 힘껏 받쳐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적어도 동생 제페토만큼은 란센 형이 모두에게 그런 것처럼 든든히 지켜 주는 그런 형이 되고 싶었는데....

이미 다 포기한 줄 알았건만, 새삼 속이 너무 쓰렸다.

나도 잘 싸우고 싶은데...!

나는 왜 재능이 없어서...!

베고 싶다.

나도.

잘츠란처럼, 란센 형처럼.

싸우고 싶다. 지키고 싶다.

우웅-

웅-!

왠지 자꾸만 검이 울었다.

그조차도 짜증이 났다.

"큭! 중군이 무너진다! 100인 대장들! 진형을 사수하라!"

때마침 귀를 때리는 전대장의 지시에, 캐치는 앞으로 나섰다.

"검방으로 전환! 타래오크들을 밀어낸다!"

이미 타래오크의 괴력에 밀집대형이 무너졌기에, 창과 방패보다는 검과 방패가 더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병사들만으로는 타래오크를 밀어낼 수 없었다.

여기서는 캐치 소로아. 자신의 역할이 중요했다.

자신이 선봉에 서서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다.

그래, 지금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필요한 순간.

싸우자.

"후...!"

비록 작은 일이지만, 그래도 한몫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캐치는 검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훈련에도 늘 설렁설렁 임하던 캐치 소로아.

그가 아주 오랜만에 진심으로 '베겠다'고 의지를 다지는 그 순간,

우우웅-!

검이 우렁차게 울었다.

왤까? 이 순간, 훈련 때마다 자신만 집요하게 패던 란센 형과의 대화가 떠오르는 이유는.

'넌 대체 왜 맞고 있냐?'

'...때리니까 맞죠.'

'아냐. 네 검이 알려 주고 있잖아. 안 맞을 방법을.'

'...?'

'좀 싸워 봐. 그만 도망치고. 검은 싸우려고 하는데, 너는 도망만 치니까 못 듣는 거야.'

그땐 그게 뭔 소린가 했는데...

콰직!

쓰컥!

촤아악!

갑자기 알 것 같았다.

눈앞이 환하게 열린다.

모든 게 보인다.

어디를 찌르고 어떻게 베어야 할지 검이 알려 주는 것만 같다.

캐치 소로아는 흠뻑 빠져들었다.

오랜만이었다.

검을 휘두르며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잊어 본 것은.

보자마자 판단하고 검의 떨림을 따라 손을 뻗었다.

쩌어억!

쩍!

거침없이 밀려들던 타래오크의 무리가 산산이 분쇄되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어!

2.5미터. 타래오크 중에서도 유독 큰 개체가 포효하며 나타났다. 엘리트 마수. 익스퍼트 중급이라 해도 맞상대하기가 어려운 그 난적을,

채챙! 서걱!

캐치는 단 세 번에 베어 버렸다.

정교하게 뻗어진 두 번의 검이 타래오크에게 특정 자세를 강요했고, 그 순간 번뜩인 쾌검이 오크의 헛점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파고들지 마! 위험하다! 물러나! 파고들... 어? 파고들어도 되나?"

지금 캐치가 보여 주는 무용은, 그에게 물러서라 소리치던 지휘관조차 얼을 빼게 만드는 것이었다.

캐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완전히 몰입해서 앞으로 그저 앞으로 계속 전진했다. 그 억센 타래 오크 무리가 그의 앞에서 갈려 나갔다.

타래오크의 혈관이 얽혀서 만들어지는 검붉은 도끼나 해머가 캐치의 검에 걸리면, 과일처럼 가볍게 잘려 나갔다. 원래는 중급 익스퍼트라 해도 서너 번은 두들겨야 박살 낼 수 있는 터프한 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검귀...."

"검귀다...."

그의 뒤를 따르던 병사들이 어느 순간부터 손 놓고 구경만 했다.

강맹한 오러가 주는 공포와는 또 다른 맛.

빈틈을 파고드는 섬전 같은 쾌검. 적과 적 사이를 유린하는 벼락같은 보법.

매 순간순간이 묘기를 보는 듯한 움직임.

그리고 터무니없이 예리한 칼날.

한 인간의 검술이 어느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서걱. 서걱 서거걱!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아지경으로 타래오크를 베어 넘기던 캐치는 불현듯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다.

"아...?"

보이는 것은 타래 오크의 시체들뿐.

그리고,

"끝났어. 인마."

"란센 형?"

언제 다가온 걸까? 괴물의 피로 흠뻑 젖은 란센이 캐치의 어깨를 툭 치더니, 눈짓을 했다.

"해냈네. 축하한다."

"응?"

그 눈짓을 따라가 보니 자신의 검이 보였다.

정체불명의 아지랑이가 은색 소드 오러 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기라는 거야. 내가 1만 년 전으로 가서 배워 온 비기. 역시, 네가 제일 빨랐네?"

"아...."

몽롱하게 제 검을 바라보는 캐치.

란센은 그런 그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쳤다.

"캐치. 잘 들어. 넌 재능 있어. 그것도 엄청나게.

그 말에 캐치는 목구멍이 꽉 메는 기분이었다.

"형...."

란센이 캐치의 은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네가 재능이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난 한눈에 알아봤다고."

그때 캐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나도... 쓸모가 있구나.

누군가를 지킬 수 있겠구나.

그의 입가가 울음과 웃음으로 어지러워졌다.

그렇게 다들,

저마다,

치열한 싸움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개화시켜 나갔다.

* * *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은 지옥 속에서도 착실히 흘렀다.

변경의 중심은 밤낮없이 끔찍했다.

종일 싸우고 나서야 겨우 새벽부터 돌아가며 잠을 청했다.

그렇게 짬이 나면 나는 쿠샨시에 남은 세아와 메시지를 교환했다.

우우웅-!

팔찌 형태의 메시지 아티팩트 위로 세아의 전언이 푸른 글씨로 떠오른다.

이것 역시 아공간 목걸이에 챙겨온 반로아 왕가의 보물.

<4일 전 메시지>

- 전에 말한 대로 해상왕 자파르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어. 그쪽도 질풍왕의 세력이 커지는 걸 바라지 않으니까.

결론적으로, 자파르의 군대가 아일룬 근처에서 매일 군사훈련을 벌일 거야. 이거면 당분간 질풍왕의 움직임을 묶어 둘 수 있겠지. 예정대로 서두르기만 하면, 쿠샨과 키날로를 먼저 장악하는 것도 문제없을 거야.

<3일 전 메시지>

- 성은 오늘도 별 탈 없어. 리베라 아저씨가 작은 마수들을 잘 방어하고 있고, 가끔 멋모르고 성에서 행패 부리는 자유 전사들은 바렌 오빠가 싹 혼내 주고 있어.

근데 캐치 오빠가 고대 검기를 일으켰다며? 그 소식을 카트리나 언니랑 바렌 오빠한테 알려 줬더니, 난리더라. 카트리나 언니는 두고 보라고 자기도 머지않았다고 이를 부득부득 갈아대고, 바렌 오빠는 말은 안 했지만 눈빛이 살벌해졌어. 뭐, 결론적으로, 잘 된 거 같아. 둘 다 더 열심히 하겠지 뭐.

<2일 전 메시지>

- 오늘도 이상 무. 흘러나오는 작은 마수들이 현저하게 줄었어. 토벌이 끝나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 이제 곧 돌아오겠네.

다들 요새 검 휘두르는 게 뭔가 자유로워졌대. 오빠 훈련이 나름 효과가 있나 봐.

<1일 전 메시지>

- 바렌 오빠는 아무래도 오러 안 쓰고 검 휘두르는 데 맛 들인 거 같아. 하루 종일 진검 빼 들고 도시 곳곳을 순찰을 돌아. 문제 일으키는 전사들을 얼마나 야무지게 패는지, '눈밤탱이의 바렌'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야.

"풉."

눈밤탱이의 바렌이라니.

저항 없이 웃고 말았다.

하긴 그 녀석이 만사 귀찮아하는 거 같아 보여도 그런 면이 있었다.

영역에 집착한다고 해야 할까?

자기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곳은, 성질 사나운 고양이처럼 그렇게 신경을 썼다. 이젠 쿠샨시(市) 전체를 자기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거기에 고대식 검술에도 재미를 들인 모양이고.

"하.... 그립네."

메시지를 읽다 보니, 얼른 돌아가고 싶어졌다.

지난 한 주가 일 년은 되었던 것처럼, 집이 그리웠다.

그래.

벌써 1주일 가까이 지났다.

짧은 시간이지만, 길고 길었다.

마침 마지막 휴식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자리를 걷고 일어나 지난 6일간 너덜너덜해진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가 애타게 기다리던 그 명령을 내렸다.

"자! 일어나라!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

"오?"

"오오오!"

"우아아아!"

드디어 이 지옥이 끝났다며 기뻐하는 병사들.

"돌아가는 길에도 습격이 있을지 모른다. 정신 바짝들 차려! 이제 와서 죽거나 다치는 놈들은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하!"

라이트닝 작전.

단 1주일 만에 마수 소탕을 완료하고 복귀한다는 그 정신 나간 작전을, 우리는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이제 집으로 간다.

돌아가면 카슈시(市) 정벌 계획도 세워야 하고 또 엄청 바쁘겠지만.

지금은 그냥 그 사실 자체가 좋았다.

돌아간다.

우리 패밀리가, 동생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37화 말발굽 소리

회군은 성공적이었다.

1주일간의 치열한 전투.

사망자 32명. 부상자 112명.

주요 변경 지역의 마수 70% 제거.

이 압도적인 전과에, 란센의 병사들은 뜨겁게 타올랐다.

"거 사장 아재! 빨리빨리 좀 맥주 좀 내와 봐!"

"어허-! 격려금도 두둑하게 받았는데 이렇게 천천히 나오면 쓸 수가 없잖아!"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개선을 한 병사들은 대낮부터 술집 곳곳에 틀어박혀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왁자지껄 잔뜩 들뜬 그들의 모습은 술집의 다른 자유 전사들을 자극했다.

"...근데 진짜 마수 소탕 제대로 한 거 맞아?"

"그러니까. 1주일 만에 그게 된다는 게 나는 통...."

누군가는 아니꼬운 기색을 드러냈고,

"근데 맞지 않겠어? 소형 마수들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거 다들 봤잖아?"

"그치. 아주 내부를 휘저어 놓은 게 아니면 그 숫자가 안 나오지."

또 누군가는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이러쿵저러쿵하는 다른 전사들의 말들을, 란센의 병사들은 한없이 여유로운 허세로 받아넘길 뿐이었다.

"야. 야. 너네 전력으로 달려오는 록우(鹿牛)의 목에 창 꼽아 봤어?"

"그래. 인마. 타우런드가 휘두르는 방망이를 방패로 받아 봤냐고. 그놈 크기가 3.5미터가 넘었다?"

"안 해 봤으면 말을 말아."

고작 1달 하고 1주일.

란센의 군대는 어느새 그 가슴에 유대감과 자긍심이라는 불꽃을 지피고 있었다.

* * *

'아주 좋았다.'

나는 이번 작전에 매우 만족했다.

미술가나 소설가가 자기 작품을 보면 이런 느낌일까?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전술과 전략이 실제 구현되는 걸 보는 건... 짜릿! 그 자체였다.

사망자가 32명이라니.

위험한 임무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보통의 마수 토벌보다 훨씬 적은 피해만을 입었다.

완벽하게 유지된 대형으로 충분한 방어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전력을 온존한 익스퍼트들이 위기의 순간마다 개입해 병사들을 구해 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 모든 게 다 내가 의도한 대로였다.

만족. 또 만족.

기분은 좋고, 집에 돌아와서 따뜻한 물로 1주일간 묵은 때를 벗겨 내니, 그게 바로 낙원이었다.

모락모락 훈훈한 연기를 뿜으며 회의실로 향했다.

피곤하긴 했지만, 지금은 키날로와 카슈를 노리는 질풍왕 때문에 상황이 급하니, 보고부터 받고 바로 쿠샨시 점령 계획을 세울 작정이었다.

그런데,

"너 눈이 왜 그러냐?"

바렌이 회의석 한구석에 고개를 숙이고 어설프게 왼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 형... 그게...."

"좀 봐 봐."

자꾸 얼굴을 가리길래 다가가서 손을 떼어 냈다.

"누가 이랬어?"

바렌의 왼쪽 눈이 밤탱이가 되어 있었다.

아주 시커멓게 멍이 든 게 제대로 처맞은 몰골.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눈밤탱이의 바렌이라며.

때린 게 아니라 맞은 거야?

아니 애초에 익스퍼트 최상급인 이 녀석을 누가....

"잠깐."

그때, 시야 끝자락에 이상한 게 걸렸다.

"리베라. 고개 돌려 봐."

"네, 네?!"

"고개 돌려 보라고. 왼쪽 좀 보자."

어색하게 목을 비틀어 내게 오른쪽 얼굴만을 보여 주고 있는 우리 리베라 남작님.

"빨리."

결국 체념하고 고개를 돌린 리베라의 왼쪽 눈도... 새카맣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아,

맞았어?

누구한테?

...열 받네?

"누구야."

"그, 그게...."

"주군. 그러니까...."

바렌과 리베라가 우물우물하는 사이, 세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어제. 바렌 오빠가 규율을 어긴 전사들을 패고 있는데 웬 노인이 시비를 걸더래."

"노인?"

"응. 그래서 한판 붙었는데... 저렇게 되었다네."

"그걸 그냥 뒀어?"

"너무 강해서 제대로 싸우면 피해만 커질 거 같고. 정작 노인은 규율을 어기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알잖아? 로버랜드에서 전사들끼리 주먹다짐한 걸로 문제 삼기가 좀 그런 거."

"그래서."

"소식을 들은 리베라 아저씨가 개인적으로 복수를 하러 갔지."

"그런데 또 저렇게 되고?"

"응."

나는 고개를 푹 숙인 바렌과 리베라를 바라봤다.

보통 일이 아니다.

우리 도시에 단 4명뿐인 최상급 익스퍼트가 2명이나 처맞고 돌아왔으니까.

이건 도시의 명예가 걸린 일... 이고 자시고 간에 너무 빡치네? 우리 애들을 때려?

지가 뭔데?

"안내해."

회의를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 노인은 전사들이 많이 모이는 주점, <변경의 마취제>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열받는 건... 그 노인이 어찌나 인기가 좋은지 전사들이 그 주위에 바글바글하게 몰려서 술을 가져다 바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인장! 진짜 대단했어!"

"그러니까! 눈밤탱이의 바렌을 눈탱이밤탱이로 만들다니!"

"진짜 누구지? 노인장 같은 실력이면 이름이 꽤 알려졌을 텐데?!"

좋댄다.

'우리 애들 패놓고 저렇게 인기가 좋아?'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떻게 시작할까?

일단 한 대 패고 시작할까?

그런 고민을 하는데,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 오셨구만!"

노인은 벌겋게 술기운이 오른 얼굴로 자리에 일어섰다.

그제야 뒤를 돌아본 전사들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매운 연기에 쏘인 벌떼처럼 우수수 노인 곁에서 물러섰다.

그래. 물러서야지.

크시아스를 죽인 소드마스터가 기분이 안 좋은데, 알아서 피해야지.

"당신이야?"

내가 물었는데도 노인은 긴장도 하나 안 한 얼굴로 껄껄 웃었다.

"드디어 만나 뵙는군요. 이렇게 뵈니 반갑습니다."

"꼭 기다린 것처럼 말하네?"

"기다렸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질풍왕 하룬 님의 휘하에 있는 자히르라고 합니다."

뭐?

질풍왕?

자히르?

웅성-

사방이 시끄러워졌다.

"백승의 자히르...."

"최강의 익스퍼트...."

"아! 얼굴에 저 칼자국! 내가 왜 못 알아봤지?"

"와...."

백승(百勝)의 자히르.

나도 잘 안다.

로버랜드 서북면 노르베르쥬에서 명성이 쩌렁쩌렁한 전사였으니까.

익스퍼트 최상급의 전사이지만, 같은 최상급 100명과 결투하여 100번을 이겼다는 최강의 익스퍼트.

이쪽 동네에선 소드마스터보다 자히르를 더 존경한다는 전사들이 넘쳐날 정도였다.

이건 좀 당황스럽네.

질풍왕이 자히르를 내게 보냈다라....

근데 그건 그거고,

"그래서."

나는 자히르의 눈을 똑바로 노려본다.

"고명하신 최강의 익스퍼트께서."

지금 내 동공 속에 일렁이는 푸른 불길을 당신이 알아볼까?

"우리 애들을 왜 때렸을까?"

백승의 자히르고 자시고.

이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 * *

"허허 죄송합니다. 이렇게 늙었는데도 이놈이 아직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서... 하룬 님께도 맨날 혼납니다. 허허."

웃어?

점점 심사가 뒤틀리는데, 자히르는 여전히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 오늘은 하룬 님의 사신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사신?"

"하룬 님께선 란센 님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계십니다. 좋은 날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뜻을 합쳐 봄이 어떤지 여쭈라 하셨습니다."

잠깐.

그러니까.

그 뜻을 합친다는 말이...

"나더러 질풍왕의 신하가 되라고?"

"신하든, 주군이든, 그깟 이름이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호걸들이 만나 서로 뜻을 교환하고 그릇을 견주는 거겠지요."

그러니까 그게 그 말이네.

서로의 그릇을 견주면 당연히 내가 더 작을 테니 신하가 될 거라는. 그렇게 생각하는 거네.

그래서 그냥 대놓고 물었다.

"내가 신하가 되면, 나한텐 뭐가 좋은데?"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

"유적 발굴과 판매를 하룬 님이 대신 맡아 주실 수 있습니다."

"대신 맡는다?"

"예. 하룬 님이 가지고 있는 인맥과 교역로라면 훨씬 더 빠르게 더 큰 수익을 낼 수 있지요."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생긴 수익의 30%를 란센 님이 가지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큰 부를 일구시게 되니,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

그러니까, 지금 내 글로잉스틸 유적이 탐이 나는데, 그걸 자기가 가져가고 나한테 수익을 30%만 떼 주겠다고 하는 소리가 맞는 거지?

'세상에....'

경악스러웠다.

아무리 로버랜드가 무법의 대륙이라지만 이렇게 뻔뻔한 제안을 해?

"그게 나한테 좋은 게 맞아?"

내 직설적인 물음에도 자히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럼요. 하룬 님의 보호 아래서 아일룬의 큰 시장과 활발하게 연결될 수 있으니 쿠샨시는 더더욱 번영하겠지요. 이런 혜택을 제공하면서도 하룬 님은 단 한 푼의 세금도 받지 않으실 겁니다."

세금을 안 받아?

거, 말장난이 지나치시네.

"유적 수익이 지금 얼만 줄 알아? 도시 전체 세액의 1.5배를 넘어. 그걸 70%나 가져가면, 그게 이미 엄청난 세금 아냐?"

그렇게 묻자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럼요. 좋은 게 맞죠. 하룬 님의 보호 아래에, 쿠샨시의 통치권을 보장받으실 테니까요."

!!!

뒤로 물러나서 아닌 척 숨죽여 대화를 듣고 있던 전사들이 크게 술렁였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카트리나는 아예 오러를 끌어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어이.... 늙은이."

안 그래도 리베라와 바렌의 복수는 자기가 하겠다며 씨근덕씨근덕 날 쫓아왔던 카트리나는 자신의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나는 일단 카트리나를 손으로 제지했다.

이건 내가 직접 대답을 돌려주는 게 맞았으니까.

통치권을 보장해 준다?

그러니까, '말 안 들으면 너 죽어?' 이 뜻 맞지?

뭐,

알겠다.

바뀐 건 없었다.

이곳에 올 때부터, 내가 들려줄 대답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자히르."

"예. 란센 님."

"이게 내 대답이야."

빠아아악!

번개처럼 뻗은 칼자루가 자히르의 오른쪽 눈을 후려쳤다.

후웅- 쿠당탕탕!

하늘을 붕 떠서 날아간 자히르는 책상 몇 개를 부수며 땅에 처박혔다.

요란하게 바닥을 구르며 뻗어 버린 자히르는 기절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왼쪽 눈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음, 보아하니 저거 곧 퉁퉁 부어오르고... 멍은 최소 한 달은 가겠네.

아, 이제야 속이 좀 시원하다.

"저거 성문 밖에 던져 버리고 소금 뿌려. 영원히 출입 금지시키고."

"아.... 내가 하려고 그랬는데."

카트리나가 꿍얼대며 자히르를 들쳐 업고 성문 쪽으로 향했다.

병사한테 안 시키고 왜 직접 저런담?

가는 길에 해코지하려고 그러나....

"바, 방금 봤어?"

"아무리 소드마스터라지만, 백승의 자히르를 단 한 방에...."

"그게 문제가 아니야. 칼자루로 쳤잖아. 저건 바로 목을 벨 수도 있었다는 무력 시위라고...."

놀란 전사들이 수군거렸다.

저들은 놀라지만 나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최강의 익스퍼트고 뭐고 준비 동작도 없이 바로 뻗는 공격을 막을 순 없는 거다.

그게 검탁(劍托)의 경지니까.

"돌아가자. 회의해야겠다."

어쨌든 이로써, 확실히 알았다.

질풍왕이 노리는 건 카슈시(市)뿐만이 아니다.

놈은 여기, 쿠샨시(市)까지 노리고 있다.

아무래도,

계획을 더 서둘러야겠다.

* * *

질풍왕 하룬의 군막(軍幕).

화톳불이 사방을 밝히고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는 그 한복판에서 떠들썩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 자히르. 그래서 그렇게 쫓겨났다고? 눈은 밤탱이가 돼서?"

"...웃지 마십시오."

질풍왕 하룬은 배를 잡고 웃어 댔고, 자히르는 민망해하며 멍든 눈을 가렸다.

"그래도 대단하네. 어떻게, 피하지도 못할 정도였어?"

"피하고 자시고... 기억이 안 납니다. 분명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성 밖이었어요. 심지어 얼굴엔 누가 낙서를 해서.... 후...."

"이야. 란센 걔. 대단하네? 솔직히 자히르 너 정도면 어설픈 소드마스터 정도는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수준은 한참 뛰어넘은 걸로 보입니다."

"그런 거 같네. 햐~ 근데 걔도 한 성깔 하네?"

"예. 제안을 듣고도 전혀 고민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야생이네. 들짐승이야. 그래. 그런 녀석들이 있어. 난 꽤 성의를 보였는데도 마음을 열지 않는."

하룬은 옆자리에 놓아둔 포도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그런 애들은 꼭 말발굽 소리를 들어봐야 마음을 열더라고."

다그닥다그닥!

마침 기동 중인 기병대의 말발굽 소리가 천막 너머를 통해 흘러들었다.

#38화 내일

"여기 신임 백작 말야. 사실 엄청 센 거 아니야?!"

"당연히 세지! 그 크시아스 백작을 죽였는데."

"아니. 그땐 겨우 이겼다매. 근데 이번에 '그' 자히르를 한 방에 떡실신 시켰다잖아."

그날 아침에 일어난 사건은 30분이 되기도 전에 도시를 한 바퀴 돌았다.

"야아아아악! 빅 뉴스! 빅 뉴스! 란센 백작이 백승의 자히르를 한 방에 때려눕혔다아아악!!"

거기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압도적으로 널리 소문을 퍼뜨린, 어느 전사의 눈물 어린 헌신이 뒤따랐다.

현재 쿠샨시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든 만큼 별별 괴인들이 많았다.

"뭐, 뭐?!"

"그게 뭔 소리야?"

"어이! 술값 내줄 테니까 이리 와서 자세히 말해 봐!"

경천동지할 소식에 깜짝 놀란 전사들.

벌컥 벌컥 벌컥!

앞에 놓인 아무 잔이나 들어서 시원하게 원샷을 때린 남자는 곧장 가게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자세한 건 다른 놈한테 들어. 난 바쁘다고."

그는 즉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며 또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악! 란센 백작이 백승의 자히르를 칼자루로 쳐서 기절시켰다아아아악! 그것은 마음만 먹으면 목도 벨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아아악!"

그는 일명 소문 병자.

소문 퍼뜨리는 데 진심인 사나이였다.

그런가 하면, 실로 진지한 부류도 있었다.

"그저 엄청난 한 수였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군."

"준비 동작도 보이지 않았다."

"준비 동작? 훗. 너는 거기까지밖에 보지 못한 것인가?"

"뭣?!"

"그건 고작 준비 동작 수준이 아니었지. 살기도 없고, 오러를 끌어올리는 기척도 없었지. 하지만 그것조차도 부차적인 거야. 진짜는 무엇이었는 줄 아나?"

"뭐, 뭐였지?"

"시선."

"시선!"

"사람인 이상, 시선에서 의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란센 백작은 아니었지. 그 눈은 공격 의도가 전혀 없었어. 순진했다고. 그런데 거기서 발작하듯 팔이 뻗어 나간 거야. 아니... 그것은 차라리 검이 멋대로 움직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인상의 전사가 분석을 늘어놓자 테이블에 모여든 다른 전사들이 수군거렸다.

"오오...!"

"자네 정말 대단하군!"

그러자 테이블 한 켠에 조용히 앉아 있던 까만 피부의 전사가 말을 받았다.

"일리 있어.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냐. 이 중에 란센 백작의 스텝을 본 사람 있어?"

"스텝?"

"그래. 원래 사람이 주먹을 칠 때는 발이 먼저 나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백작은 달랐어. 손이 먼저 나갔지. 발은 움직이지도 않고 몸만 앞으로 기울었어. 마치 검에 매달린 것처럼."

"그런...!"

"그런 와중에도 힘은 제대로 실렸다. 형식을 초월한 공격. 그것이야말로 무형식의 무학!"

"!!!"

"자, 자네도 대단하군!"

"실로 엄청난 분석!"

또다시 쏟아지는 찬사.

그중에 예리한 분석을 보여 준 두 전사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너... 제법이군."

"후훗. 너도."

이렇게 자신들의 눈썰미와 지식을 총동원하며 끈끈한 우정을 형성해 가는 전사들이 있는가 하면, 더 단순한 이들도 있었다.

"강하다! 란센 백작!"

"이 정도면 질풍왕 하룬만큼 강한 거 아닐까?!"

"에이, 그건 아니지!"

"설령 그게 아니라 해도... 5왕(王)이 아니면 상대도 못 할 거 같은데?"

"그건 그렇지."

또, 그 옆에선 정치를 좋아하는 전사들이 판세를 분석하기 바빴다.

"근데 이러면 질풍왕이랑 란센이랑 한 판 붙는 건가? 사신으로 찾아온 사람을 두들겨 패서 쫓아낸 거잖아?"

"뭐야. 그럼 여기로 질풍 기병대가 몰려온다고? 흐억! 당장 떠야겠다."

"그건 아니지. 여기 오려면 키날로를 지나쳐야 하는데, 키날로시(市)에서 그걸 두고 볼 리가 없잖아?"

"아, 그렇군."

"그렇다고 해도 보통 배짱이 아냐."

"그러니까. 그 자히르를 한 방에 쓰러뜨린 실력에, 질풍왕을 같잖게 여기는 배짱에, 다시 봤어. 란센 백작."

이러쿵저러쿵 온갖 사람들이 온갖 말들을 떠들어 댔지만, 결국 한 가지는 분명했다.

카리스마.

저 존재는 우리와는 다른 비범한 인물이라고 마음에서부터 인정하게 하는 그 힘.

그것이, 이제 영주가 된 지 1달 좀 넘은 란센의 머리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는 것.

* * *

바깥의 전사들은 무슨 축제라도 벌어진 것처럼 들뜬 모양이지만, 우리가 모인 회의실은 바짝 긴장되어 있었다.

'심각한 상황이니까.'

노르베르쥬의 패자인 질풍왕이 굴종을 강요했고, 내가 그걸 단칼에 거절했으니 다들 머릿속이 복잡할 거다.

난 타원형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동생들과 리베라, 칼세릭, 벌슨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그래. 이거 먼저 확실히 해야겠다.

"먼저 동생들. 너희 의견이 듣고 싶다."

동생들의 시선이 나에게 쏟아진다.

"내 의무는 너희를 지키는 거야. 그런 면에선 질풍왕과의 싸움은 부담스러워. 물론 아직 키날로가 건재하니까, 바로 싸울 일은 없어.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

최대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 볼 생각이지만, 미래는 알 수 없는 거다.

만약 우리의 견제가 실패로 돌아가고 질풍왕이 키날로시(市)를 함락한다면?

그때는 질풍왕이 곧바로 우리의 근거지 쿠샨시를 노려보는 형국이 된다.

"상황이 최악으로 흐른다면, 질풍왕과 일전을 불사해야 할지도 몰라.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질 거라 생각하지 않아.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너희 목숨까지 다 지켜 낼 자신은 없다. 난... 그게 두렵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혼자 결정하기보다는.

"만일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싸워야 할까?

아니면 굴종해야 할까?

질문을 마쳤을 때, 동생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묘하게...

'왜... 한심해하는 거 같지?'

좀 그랬다.

심지어 언제나 정중한 세클란의 눈에도 날 한심해하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아저씨."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먼저 입을 뗀 건 17세, 데이지였다.

...근데 얘가 날 또 아저씨라고 부르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린 항상 목숨이 간당간당했었는데, 이제 와서???"

그러자 옆에서 세클란이 두 손을 펼쳐서 꼽기 시작했다.

"으음.... 내가 여태 넘긴 생명의 위기가 몇 번이더라. 3번, 5번... 7번...."

20세, 세아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한마디를 툭, 떨어뜨렸다.

"무신경해."

세아와 동갑인 잘츠란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형님! 형님만 꿈 있는 거 아닙니다! 우리더러 꿈의 입구에 서 있다면서요! 그렇게 소극적인 마음으로 나라와 가문을 재건한다는 꿈이 이뤄지겠습니까!"

24세, 바렌은 혼자 중얼거렸다.

"우리 집안은 후작가였는데.... 고작 요만한 도시 하나에서 사업체 좀 나눠 가진다고 가문을 재건했다고는 할 수 없는데...."

22세 지아도, 21세 룩크랜서와 캐치도, 20세 아샤, 19세 미카, 제페토, 다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질풍왕이라 해 봤자. 결국 무법자들의 대빵...."

"그 밑에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건 별로 멋없는데...."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동생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25세 카트리나는 샛노란 눈동자 속에 노오란 불꽃을 피워 올리며 내게 으르렁거렸다.

"오빠."

"응?"

"착각하지 마."

"으, 응?"

"오빠 혼자 나라 잃었어? 혼자 가족 잃었어!?"

"...아니."

"반로아를 짊어진 건 오빠 혼자가 아니야. 그건 우리 모두의 꿈이자 책임이라고. 알겠어?"

"어...."

"왕이란 건, 신하들의 꿈을 하나로 엮어 이끌어 나가는 존재야. 품에 넣고 보호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그녀는 내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오빠. 아니, 란센 반로아 전하. 우리를 이끄세요. 보호하려고만 하지 말고. 앞장서서 이끌라고."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끅...."

눈이 시뻘게진 벌슨 아저씨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우는 것 같다.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거참, 잘 컸어. 다들.

'내가 한참 잘못 생각했네.'

데이지가 3살이던 시절부터 이 꼬마들을 봐 와서 그런지, 자꾸 어리게만 여긴다.

사실은 제 오빠 누나들이 죽는 꼴도 보고, 가문에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왔던 기사 아저씨들이 죽는 꼴도 다 보고, 내가 폐인이 되었던 시절에는 위험으로 가득했던 쿠샨시의 뒷골목에서 스스로 살아남은, 어엿한 전사들이었는데.

크시아스를 죽일 때도 함께 싸우고, 숙청 작업도 함께한... 진짜 전사들.

만감이 교차해서 동생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다가, 간신히 시선을 뗐다.

옆을 돌아보니 눈을 동그랗게 뜬 리베라와 칼세릭이 보였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가 반로아의 혈통이라는 건 비밀이었다.

하지만 이젠 뭐,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14년이나 지난 일이기에 제국의 추적이 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들고, 무엇보다 나는 내 신하들에게 진실하고 싶다.

'여차하면 질풍왕이랑 싸워 달라고 요청해야 되는데, 계속 숨기는 건 예의가 아니지.'

나는 그들의 놀란 눈을 바라보며 툭, 물었다.

"그렇다는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리베라가 동그랗게 떴던 눈을 주무르며 답했다.

"귀한 분들이라 생각은 했는데, 무려 반로아 왕족과 귀족 자제분들이셨습니까?"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리베라는 고개를 한번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군례를 취했다.

"뭐, 저는 그만한 비밀은 없습니다. 300년 전 멸망한 윈드바로우 왕국 출신, 피에트로 자작가의 리베라입니다. 주군께서 크시아스를 참할 때 이미 내 목숨을 주군께 맡긴바, 어떤 명령이든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뭐, 당신이라면 이렇게 나올 줄 알았어.

나는 상쾌하게 웃는 그에게 눈짓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칼세릭 바라보았다.

사실 여기서 가장 애매한 게 칼세릭이다.

그는 충정보다는 실리를 따라 나의 휘하로 들어온 자였으니까.

지금 그의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까? 질풍왕과 싸울 수 있다는 리스크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실리. 둘 중에 말야.

"워.... 뭐, 자기 출신 고백하는 자리입니까? 저는 잘 모르겠고... 하나만 묻겠습니다. 대장."

"말해."

"진짜 이길 수 있습니까 하룬을? 그랜드 마스터는 아니라지만, 그에 거의 근접했다고 평가받는 괴물인데요? 소드마스터 수준은 예전에 벗어났다고 합디다."

"솔직히 자신 없어."

"네에-??!!?!"

이크 깜짝이야. 왜 저렇게 놀라?

칼세릭이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이 상황에서 진다고 하는 게 맞는 겁니까?!"

"...내가 언제 진댔어? 그냥 자신이 없다 그랬지."

"그 말이 그 말...!'

괜히 장난을 쳤다가 민망하게만 됐네....

늦게나마 주섬주섬 수습에 나섰다.

"질 자신이 없다고 질 자신이."

"아...."

짜게 식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칼세릭.

나는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물었다.

"내가 거꾸로 물어볼게. 넌 내가 질 거 같아?"

칼세릭은 내 실력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 왔다.

그래서 무릎까지 꿇고 목숨을 구걸했던 칼세릭 아닌가?

심지어 이번 마수 토벌 때는 그가 보는 앞에서 악명 높은 대형 마수도 여럿 썰어 제꼈고.

그 덕분인지,

"...그쵸? 아니 솔직히 상상이 안 가긴 합니다. 대장이 누구한테 패한다는 게...."

칼세릭은 쓰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60년 전 멸망한 살레트 왕국의 왕립 칼세릭 기사단. 제2대 단장 디고르 칼세릭입니다. 저와 제 형제들의 목숨을 주군께 맡기니, 부디 2배로 불려 돌려주시길 바랍니다."

2배로 돌려 달라는 충성 맹세라니... 참, 용병다운 충성 맹세였다.

그나저나, 살레트 왕국의 칼세릭 기사단?

가만히 쳐다보자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출신 말하는 게 유행인 거 같아서... 그, 별건 아닙니다. 저희 아버지가 칼세릭 기사단장이셨고 왕국이 멸망할 때, 기사단 다 이끌고 로버랜드로 넘어왔거든요. 사실 평민 출신으로 이루어진 기사단이라 변변찮은 가문도 없습니다."

혼자 설명을 이어 가던 칼세릭은 민망함을 느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화제를 돌렸다.

"아,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난 피식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질풍왕이 저렇게 나오니, 우리도 서둘러야지."

"서두른다 함은?"

"하루빨리 카슈시(市)를 함락시킨다."

내 대답에 다들 열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오, 출정은 언제입니까?"

"군을 재정비하려면 최소 이틀은 필요할 테니까 삼일 뒤? 그쯤 아닐까요?"

"아니지. 소모한 물자까지 다 챙겨 넣으려면 일주일 정도는..."

"그건 너무 늦지 않아?"

다들 저마다 사흘이니 일주일이니 하며 계획을 세워댔다.

1주일간의 마수 토벌을 마치고 귀환한 게 바로 오늘 아침이었으니... 당연하게도 다들 재정비 시간을 계산했다.

'하아....'

어쩐지 찬물 뿌리는 것 같아서,

정말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가 없네.

"내일."

모두의 시선 내게 꽂혔다.

"네?"

못 들었어? 그럼 자세히 말해 줄게.

"지금 당장 비상종부터 울려서 전 병력 집합시키고 전달해."

"그, 저, 정말 합니까?"

이런 땐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어. 1연대 출진이다. 고스란히 다시 군장 싸서 아침 8시에 출진 집합 걸어."

"오... 세상에...."

오늘 토벌에서 복귀한, 1연대 부사령관 칼세릭이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39화 왕관을 쓴 야생마

"아쉬워. 실전도 빡세게 경험했겠다, 딱 지금 타이밍에 특별훈련을 했으면 금세 강병이 되었을 텐데...."

내 말에 칼세릭이 좌우를 휙휙 돌아보더니 속삭였다.

"행여나 그 말 병사들 앞에서는 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사기가 말이 아닌데.... 아니, 진짜 전사들하고 원수졌습니까? 인간적으로 최소 2박은 휴식을 주셨어야죠. 복귀 바로 다음 날 출진을 때리면서, 뭐요? 특별훈련?!"

"그게 내 탓이야?"

"사령관 탓이 아니면 누구 탓입니까?"

"하룬 탓이지."

질풍왕 하룬. 아주 나쁜 놈이다.

솔직히 나라고 어제 복귀했는데 오늘 다시 출진하고 싶었겠나?

놈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욘 없잖습니까? 아무리 질풍왕이라 해도 키날로를 단숨에 함락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감이 안 좋아."

"감이요?"

"그래. 감."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마법사의 도시라 불리는 키날로가 결코 만만한 도시가 아니라는 것쯤은.

세아의 책략으로 해상왕 자파르가 질풍왕의 군대를 견제하고 있는 형국이기도 했고.

어쩜, 이렇게까지 서두를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영... 꺼림칙하단 말이야.'

비범한 사람이 왜 비범한가?

일반적인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일을 벌이기 때문에 비범한 거다.

그리고 질풍왕 하룬은 누가 보아도 비범했다.

10년 전, 하룬은 자기 아버지로부터 인구 60만의 도시, 에기라를 물려받았다. 아일룬 지방을 구성하는 다섯 도시 중에서도 가장 작은 도시.

그리고 단 4년 만에 그는 아일룬의 나머지 4개 도시를 모두 정복하는 전설을 써 내렸다. 노르베르쥬 제일의 도시, 인구 230만의 일루나엘조차 그를 당하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겨우 서른셋이었다.

그리고 그가 35살이 되었을 땐, 나엘룬드 호수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해상왕 자파르와 갈등을 일으켰다. 그는 당시 4왕의 일원이었던 자파르와 하루 반나절에 걸친 결투를 벌여 무승부를 이뤘고, 그렇게 4왕은 5왕이 되었다.

그런 사람이다.

함부로 예단할 수 없는 비범한 인간.

"카슈시(市)를 회수하는 게 먼저야. 휴식은 그다음."

"...하긴 지휘관의 감이 중요하긴 하죠."

칼세릭은 어쨌거나 수긍을 해 줬다.

마수 토벌을 다녀온 다음부터 내 판단을 더 신뢰하는 기색이었다.

"아무튼 미안하게 됐어. 기껏 형제들과 재회했는데 바로 끌고 나와서."

"익숙합니다. 저희야 뭐 전 대륙에 뿔뿔이 흩어져서 용병질로 먹고 사니까요. 일 년 내내 얼굴 한 번 못 보는 때도 허다합니다."

우리가 토벌을 나가 있는 동안, 칼세릭 형제단의 모든 인원이 쿠샨에 집결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회포를 풀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도, 칼세릭은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참, 저들의 삶도 대단해.'

멸망한 왕국의 기사단 하나가 통째로 넘어와 다 같이 용병 일을 하면서 살아가다니.

그게 벌써 2대째다.

역시 이 로버랜드에 사연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칼세릭."

"네?"

"후회 안 할 거다. 날 따르기로 한 거."

"당연하죠. 저도 감 좋습니다. 노름을 해도 거의 따요."

기껏 진지하게 말해 줬더니, 대수롭지 않게 받아친 칼세릭은 저 멀리 나타나는 풍경을 확인하곤 내게 물었다.

"아! 저기 뱀바다가 보입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지금 건넙니까? 아니면 내일?"

아침에 출발한 행군이었는데 벌써 브로큰 문(Broken Moon)이 휘영청 떠올랐다.

그 은은한 달빛 아래, 정말 뱀바다가 보였다.

'얼추 삼 분의 일 정도 왔네.'

혈백작 들카슈를 죽였던 그때 이후로 처음 보는 뱀바다.

다신 이쪽 방향으론 오줌도 누지 않을 심산이었는데...

쿠샨 시를 점령하고 카슈를 치러 여길 또 오다니, 사람 일은 참 알 수가 없다.

"건너간다. 좀 늦게 자더라도 잠자리는 편안해야지."

어둠에 잠긴 뱀바다.

바다라고는 하지만 마침 간조 시기였기에 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달빛조차 빨아들이는 시커먼 갯벌이 검은 강물처럼 좌우로 길게 이어져 있을 뿐.

갯벌 위로는 푸르게 빛나는 길이 건너편까지 쭉 이어져 있다.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드는 푸른빛의 길은, 용과 마법사가 등장하는 어느 전설 속으로 우리를 이끌 것만 같다.

음.... 갑자기 마도 시대가 생각나네.

그땐 하루하루가 진짜 다 전설 속이었는데.

하여튼,

"마침 딱 좋은 시점에 도착했어."

저 길을 따라 건너가면 거기서부터는 버스크 곶, 카슈시(市)가 자리 잡은 땅이었다.

* * *

대륙 북쪽의 망망해는 버스크곶의 남단을 돌아 쿠샨시(市)의 동쪽까지 길고 가늘게 이어진다.

이 가늘고 길게 이어지는 바다를 '뱀바다'라고 불렀다.

만조 때에는 꽤 큰 강물 수준으로 바닷물이 들어차지만, 간조가 되면 그 많던 물이 싹 빠지고 갯벌만 훤하게 드러났다.

그러다 보니, 이곳을 그냥 건너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갯벌을 무거운 갑옷을 입고 수레와 말을 끌며 건널 수는 없으니까.

다행스럽게도, 뱀바다를 건널 수 있는 고대 가도가 존재했다.

폭 20미터, 길이 700미터.

갯벌에 자갈을 부어 잘 다지고, 그 위에 밤이 되면 푸르게 빛나는 청영석(靑影石)을 깔아 길을 닦았다.

대개는 바다에 휩쓸린 진흙과 토사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밤이 되면 진흙 아래 청영석이 갯벌 자체를 푸르게 물들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덕분에 어두운 밤에도 갯벌에 빠지지 않고 단단한 길을 찾아 건널 수 있었다.

"햐.... 여기를 다 와 보는군요. 푸르게 빛나는 밤의 길. 로버랜드 8경 중 하나로 꼽히는데."

"로버랜드 8경? 그게 뭐야?"

칼세릭이 아연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것도 모르십니까? 죽기 전에 가봐야 할 로버랜드의 여덟 가지 절경!"

"...처음 듣는데."

"후.... 대장도 좀 대장 인생을 사십쇼. 맨날 동생들만 챙기지 말고. 다른 도시 여행도 좀 가고. 맨날 촌구석 쿠샨에만 계시니 모르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려서는 반로아의 왕성에서만 살았고 그 후에는 쿠샨시에서만 살았으니. 살면서 유일하게 가본 다른 도시가 카슈시(市). 혈백작 들카슈를 죽이러 갔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낭만을 아는 연인, 탐험가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와 보고 싶어 하는 곳이 여기란 말입니다. 저도 죽기 전엔 로버랜드 8경을 다 보고 죽는 게 꿈인데.... 설마 군대를 이끌고 도시 하나 조지러 여길 올 줄은 몰랐네요."

"그래? 근데 사실 그렇게 낭만적인 땅은 아닌데."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낭만은커녕 개 같은 땅이었다.

"그렇습니까?"

"응. 여긴 광전사들의 땅이거든."

"아, 광전사.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상대하기가 많이 까다롭습니까?"

"아주 질리는 놈들이지. 고통도 못 느끼고 두려움도 몰라. 팔다리를 잘라 놓으면 꿈틀꿈틀 기어서 발뒤꿈치를 물지."

"오...."

마침 저 멀리, 뱀바다 건너 언덕 위에, 불을 밝힌 요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 바로 오늘 묵어갈 요새 마을, '하벨노르'다.

버서크 곶.

반로아 왕국 영토의 60%에 육박할 정도로 큰 땅이었지만 이곳에 존재하는 도시는 오직 카슈시(市) 하나뿐이었다.

원래 로버랜드 도시들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여긴 좀 심했다. 버서크 곶 정도의 크기면 도시가 2개는 들어가고도 남았으니까.

대신 이곳엔 저런 요새 마을들이 도시의 빈자리를 채웠다.

작으면 인구 2천, 많으면 인구 1만에 이르는 광전사들의 요새이자 마을.

인구가 85만이나 되는 카슈시(市)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인 삶을 유지해 온, 그러면서 또 자기들끼리도 피 터지게 싸워 온 전투 민족의 터전.

오늘은 그중 한 곳인 하벨노르에서 묵어갈 것이다.

그리고 내일 모레, 해질녘이면 카슈시를 볼 수 있을 거다.

* * *

"란센! 위대한 전사여! 환영한다!"

하벨노르의 족장은 머리가 새하얗게 물든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 몸은 근육으로 터질 듯이 불끈거렸다.

"삶은 양고기와 술을 잔뜩 준비해 뒀으니 편히 즐겨라!"

"술은 됐고, 과일 주스로 부탁해. 내일도 종일 행군해야 돼서."

"아~ 그렇지. 애기들아! 과일 주스로 바꿔라!"

"예!!"

족장의 명령에 울끌불끈한 광전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커다란 식탁에 올라가 있던 맥주통들이 순식간에 과일 주스통으로 대체되었다.

칼세릭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광전사라고 해서 많이 거칠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진 않습니다?"

"이곳 광전사들과는 인연이 있어서."

원래 경지에 오른 광전사일수록 투기와 살기를 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었다. 그러니 생각보다 부드러워 보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허나, 그걸 감안해도 저들이 내게 보이는 호의는 특별한 것이 맞았다.

'오랜만이네. 여기도.'

사실 이곳은 혈백작 들카슈를 죽인 후, 벌슨 아저씨가 날 데리고 도주할 때 머문 곳이었다.

당시에도 하벨노르의 광전사들은 나를 친구 그 이상으로 극진히 대우해 주었다.

그때 들카슈는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은 광전사들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혀 댄 흡혈귀였고, 나는 바로 그 들카슈를 죽인 소드마스터였으니까.

물론 오늘의 식삿값과 숙박비는 제대로 지불했지만, 광전사들은 그 값 이상으로 나를 대접했다.

흥청망청 쏟아지는 음식들. 쾌적한 환경.

그 덕분에 내 병사들도 깊은 피로를 풀고 조금이나마 활력을 되찾았다.

한참 먹고 마시는데, 족장이 물었다.

"그나저나 케세레스를 죽이러 간다고?"

케세레스는 크시아스가 임명한 카슈의 총독.

카슈시를 치러 가는 것이니 케세레스를 죽이러 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

"끌끌. 그놈들한테 붙어먹는 겁쟁이 변절자들이 아직도 있다던데, 죄다 조상님 곁으로 가겠군. 꼴 좋다."

이들은 싸우다 죽은 전사들은 영령이 되어 조상과 함께 이 땅을 수호한다고 믿었다.

"조상님 곁으로 가면 좋은 거 아닌가?"

"그럴 리가. 조상님들이 그 허약한 놈들을 가만두겠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매일 처맞으면서 조련당해야 할걸? 음...? 그럼 좋은 건가? 아, 생각해 보니 좋은 거네! 더 강해진다! 그렇지 않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광전사들이란 사고의 흐름이 종잡을 수 없는 작자들이었다.

바로 옆 동네에 사는 데도 이들의 머릿속은 도통 이해하기가 어렵다.

"카슈시에 대해서 뭐 아는 건 없고?"

주제를 슬쩍 돌리자 족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조용했다. 그래도 케세레스 그놈은 아주 기분 나쁜 놈이니 조심해라."

화르륵!

타오르는 화롯불의 광선이 그의 얼굴 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림자를 남겼다.

'조심해라' 그 한마디가 무슨 예언처럼 의미심장하게 뇌리에 남는다.

'기분 나쁜 놈이라....'

광전사들이 사람을 두고 '기분 나쁘다'라고 표현하면 그건 대개 '머리를 잘 굴린다.'라는 의미였다.

확실히.

케세레스는 똑똑한 놈이었다.

분명 뭔가를 준비했겠지.

상상도 하지 못할.

하지만,

"상관없어. 뭘 준비했든 더 강한 쪽이 이기는 거니까."

"과연! 너는 전사다!"

눈을 반짝이는 족장을 일별하고 나는 내 앞에 놓인 그릇을 비웠다.

잘 구운 양고기 덕에 기분 좋은 포만감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잘 죽여라! 위대한 전사 란센! 너는 언제든지 환영이다!"

"그래. 너도 항상 이겨라. 또 보자."

하벨노르를 떠나 더 기운차게 행군을 이어 간 우리는 이틀 뒤 노을이 내릴 때쯤, 큰 언덕 하나를 넘어 카슈시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촌락 지역에 설치된 작은 요새들과 전초기지가 모두 비어 있었기에, 목책으로 만들어진 외성 앞까지 아무런 전투도 치르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기 대장. 우리 조진 거 같은데요?"

칼세릭의 말대로였다.

'그걸' 본 순간,

모두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얼어붙었다.

"끙.... 저거, 왕관을 쓴 야생마.... 저 깃발 질풍왕의 깃발 아닙니까?"

그래.

질풍왕의 깃발이었다.

"남는 것은 말발굽 소리뿐...."

겁에 질린 몇몇 병사는 질풍왕 무훈시 중 가장 유명한 구절을 읊기도 했다.

질풍왕에게 까불던 도시 하나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발굽 소리만 요란했다나 어쨌다나.

어쨌든 그러니까,

저기 질풍왕의 깃발이 있다는 건,

'카슈시(市)가 벌써 질풍왕한테 넘어갔다고?'

말도 안 돼.

불가능한 일이었다.

키날로는 어쩌고!?

* * *

다각 다각 다그닥.

피로 물든 키날로시(市).

질풍왕의 기병대가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잔당들을 찔러 죽였다.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집안에 틀어박혔다.

질풍왕 하룬은 그대로 말을 탄 채로 영주성 꼭대기까지 올라 도시의 지배자였던 마법사 칼리도라의 목을 베었다.

칼리도라가 자랑하던 위대한 주문도 소드마스터를 벗어났다고 알려진 하룬 앞에선 그저 야바위꾼의 허망한 손기술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 내가 정말 마법이 두려워서 자기들을 가만히 두었다고 생각했나?"

하룬의 말에, 아직도 한쪽 눈이 시커먼 자히르가 피식 웃었다.

"사실 정말 성가셨던 건 흡혈귀들의 정보력이었죠. 군사를 일으키려고만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서 공동전선을 만들어 댔으니..."

"내 말이."

다각-

하룬은 말을 몰아 저 아래로 펼쳐진 키날로시를 내려다보았다.

"근데 그 흡혈귀가 내 부하가 되니 이렇게 편하네."

"정보력도 정보력이지만 지략도 뛰어난 녀석입니다."

"케세레스 녀석. 깃발만 먼저 내 달라고 찾아왔을 땐 깜짝 놀랐어."

하룬의 입가로 장난기 어린 미소가 그려졌다.

이제 내년이면 마흔이 되는데도, 그의 얼굴엔 여전히 소년 같은 천진함이 있다.

"란센. 걔도 지금쯤 봤을까? 표정이 궁금하네."

"봤겠지요. 간담이 서늘할 겁니다."

"그치? 그러면 이 타이밍에 기회를 한 번 더 줘야지."

하룬은 뒤에 서 있는 부관을 불렀다.

"란센한테 서신을 보내. 지금쯤이면 카슈시 앞에 진을 치고 있을 거야."

"내용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최후통첩."

휘이잉-

영주성 꼭대기로 세찬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 속에서, 죽은 마법사들의 피 냄새가 물씬 풍겼다.

<버서크 곶>

#40화 개수작

개수작.

카슈시(市) 위로 펄럭이는 질풍왕의 깃발.

저게 바로 개수작이다.

'질풍왕의 군대가 벌써 여기까지 왔을 리 없어.'

애초에 물리적으로 그리 빠른 진군은 불가능.

설령 그걸 해냈다 해도, 광전사들이 뭐라고 언질이라도 줬겠지.

그러니까, 저건 흡혈귀 케세레스의 개수작이다.

질풍왕의 군대는 하나도 없이. 그냥 깃발만 가져온 거겠지.

내가 겁먹길 기대하고.

칼세릭이 내 눈치를 살폈다.

"대장. 마음은 알겠지만, 일단은 물러나야 합니다. 어떻게 된 사정인지는 몰라도 질풍왕의 깃발이 걸려 있어요. 저길 치는 즉시 전쟁입니다."

그는 내 귀에만 들리게 속삭였다.

"지금 병사들 사기도 말이 아닙니다. 5왕(王)의 군대랑 싸우고 싶어 하는 전사는 아무도 없다고요."

전쟁?

사기?

그러니까 고작 저런 깃발 하나로?

웃기지도 않았다.

누가 뭐래도.

'카슈시(市)는 내 거야.'

혈백작 들카슈를 죽여 카슈를 쿠샨에 복속시켰을 때부터.

여기는 내 것이었다.

그뿐인가?

세아가 날밤을 새워 가며 짜낸 삼전계(三戰計), 그 첫 삽이라도 떠 보려면 카슈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 도시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고작 저런 천 쪼가리 하나로 꿀꺽하겠다고?

"칼세릭."

"네."

"부대 지휘를 맡아. 대기하다가 성문이 열리면 그대로 들어와서 제압하면 된다."

"네?"

"내가. 케세레스 그놈 모가지 들고. 성문을 연다."

"대, 대장!"

원래는 이럴 작정이 아니었다.

특별훈련도 못 하게 된 마당에 이번엔 본격적으로 공성 전술을 한번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펄럭이는 깃발이 내 분노를 부채질했다.

카트리나가 뭐라고 했더라?

왕은 신하의 꿈을 엮어 이끄는 존재라고 했지?

그날, 말은 직접적으로 안 했지만 다들 제 꿈을 밝힌 거나 다름없었다.

삼전계(三戰計).

제국을 무너뜨리고 영원할 왕국 반로아를 재건하는 것.

그게 우리 꿈이니.

기꺼이 그 꿈을 이끌 작정이다.

"오래 안 걸릴 거야."

저벅. 저벅.

홀로 카슈시(市)의 외성으로 나아갔다.

칼세릭은 뭐라고 나를 말려 보려고 하다가 제 이마를 짚고 멈춰 섰다.

점점 멀어지는 내 등을 보며, 병사들의 동요는 커져만 갔다.

"다들 조용!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기한다!"

칼세릭이 병사들을 추스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정지! 이곳 카슈는 이미 질풍왕의 영토다! 여기 깃발이 보이지 않는가! 이 이상의 접근은 질풍왕에 대한 적대로 간주하겠다!"

외성.

그러니까 통나무로 짜 올린 성벽 위에서, 지휘관 하나가 소리쳤다.

기세등등하다.

질풍왕의 위명을 업으니, 내가 하찮아 보이는 모양이다.

건방지게.

쿠우웅!

땅을 눌러 밟고 앞으로 뛰었다.

체검(體劍)의 묘리로 인해 앞을 가로막는 바람은 저절로 좌우로 갈라지고, 몸은 가벼워지고, 땅을 박차는 발목은 강철처럼 탄력이 넘친다.

쿠웅!

5미터 높이의 목책 따위, 한 걸음이면 올라선다.

부랴부랴 화살을 쏘아 낸 훌륭한 병사도 있었지만, 모조리 내 뒤에 떨어졌을 뿐.

내가 몰고 온 흙먼지 사이로 눈을 부릅뜬 적병들이 보였다.

서걱!

나는 시선을 적병들에게 고정시킨 채로 검만 옆으로 휘둘러 질풍왕의 깃대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물었다.

"깃발?"

"그... 그게...."

아까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게 외치던 지휘관은 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았다.

주르르 오줌까지 지리는 그를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

"기다려. 케세레스의 목을 들고 올 테니까."

콰앙!

다시 한번 목책을 짓밟고 뛰었다.

"멈춰라!"

넓은 외성 지역을 건물 지붕만 밟고 건너가니 금방 내성이 나왔다.

내성의 대응은 외성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아무래도 진짜 제대로 된 전사들은 다 이쪽에 배치한 것 같다.

"궁병!"

끼리리릭!

수십 개의 활이 나를 겨누었다.

나는 흘깃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노을이 내리는 저녁.

거리에는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민들이 가득하다.

여기에 대고 활을 쏘겠다고?

하여튼. 로버랜드 놈들이란.

"쏴!"

쐐애애애애액!

허공을 가로지르며 쏟아져 오는 화살들.

멀리서부터 내 돌진을 지켜본 덕분인지, 아니면 궁병들이 더 정예라서 그런 건지, 아까랑은 다르게 제법 정확성이 높았다.

오히려 잘 됐다.

사가가가각!

쭉 한번 뻗는 검.

그 끝에서 피어오르는 무수한 실오라기들.

그 하나하나가 정확한 궤적을 그리며 화살촉만을 베어 냈다.

푸확!

뒤따르는 풍압에, 잘린 화살촉과 화살대가 빙글빙글 돌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 무슨!"

저들이 보기엔 마법처럼 보일 것이다.

오러 쓰레드는 분명 강력한 무기지만, 이렇게 수십 가닥의 오러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은 못 봤을 테니까.

천재라 불리던 나도 전에는 이리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대 검술을 익히니 오러도 검처럼 마음대로 다뤄지더라.

고대의 검기 검술과 현대의 오러 검술의 시너지는 솔직히 사기적이다.

"막...!"

쿵!

나는 지휘관의 바로 앞에 떨어져 내렸다.

10미터가 넘는 단단한 암석으로 쌓아 올린 내성의 위.

엘리트 전사 대여섯 명이 무기를 뽑아 들고 나를 막기 위해 달려드는 그 순간,

푸하아악!

피 보라가 치솟았다.

별다를 것 없다.

아까 화살에 썼던 기술을 사람에게 썼을 뿐.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대여섯 구의 시체가, 뒤늦게 몰아치는 검풍에 휘말려 뒤로 넘어갔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핏물은 단 한 방울도 내게 튀지 않고 내성 위로 촉촉하게 뿌려졌다.

"괴물...!"

그런 말은 스무 살 때도 들어 봤다니까 그러네.

쾅!!

이번엔 내성을 박차고 뛰었다.

목적지는 영주성.

내 진격은 말을 타고 달리는 전령보다도 빠를 것이다.

케세레스는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지도 못한 채, 나를 맞이할 거다.

"막아!"

"멍청한 놈! 여길 혼자 돌파하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네 무덤이야!"

이건 또 뭘까?

내성에 존재하는 번화가.

그곳의 지붕들을 밟고 달려가는데, 사방에서 익스퍼트들이 튀어나왔다.

쐐애애액!

날아오는 화살들마다 색색의 오러가 일렁거렸다.

익스퍼트에 이른 전사들이 쏘아 내는 저격.

거기에,

"연격전(聯擊戰)이다! 적은 소드마스터! 최선의 일격을 딱 한 번씩만 꽂아 넣으면 우리의 승리야!"

연격전.

익스퍼트들이 소드마스터급 강자에게 돌격할 때 주로 사용하는 전술이다.

양측이 마주 보고 달려드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익스퍼트들은 딱 한 번의 공격 기회만을 갖는다.

그 한 번에 모든 힘을 쏟아붓는 것, 그리고 그런 공격이 잠시의 틈도 없이 쏟아지는 강물처럼 이어지게 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연격전의 핵심이었다.

제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100명 이상의 익스퍼트가 펼치는 제대로 된 연격에 걸려들면, 고기 조각 하나 건지기 어렵다는 게 이 세상의 통설.

그런데,

나는 일반적인 소드마스터가 아니라서.

"잘 쓸게."

탕!

나는 발끝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밟고 뛰어올랐다.

더 높은 곳으로, 한 층 더 가속했다.

체검(體劍)이 몸을 가볍게 만들어 주고 무게중심을 자유자재로 옮길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이런 묘기도 가능했다.

그 덕분에 마주 달려오던 익스퍼트들은 허망하게 내 발밑으로 스쳐 지나갔다. 난 그 행렬을 향해 오러 슈팅을 쏘아 냈다.

"으히이익!"

그들 역시 가만히 당하진 않았다. 황급히 나를 돌아보며 저마다 오러 소드를 휘두르며 방어에 나섰다.

허공에서 충돌한 오러들이 강렬한 폭풍을 일으키고,

"이것도 잘 쓸게."

파아아앙!

나는 그 폭풍을 등에 업고 한 번 더 가속했다.

내 발밑으론 끝내 오러를 다 막아 내지 못한 익스퍼트들이 날개 잘린 벌레들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미, 미친..."

나머지 익스퍼트들은 두 번이나 가속한 내 속력을 따라잡지 못하고, 멀어지는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해야 했다.

쿵!

그렇게 단숨에 영주성 앞에 도착했다.

굳게 닫힌 강철 문은 검기가 담긴 오러 블레이드로 썰어 버리고 앞을 가로막는 전사들을 걸음걸음마다 베어 죽이며 계단을 올랐다.

'아주 그리운 곳이네.'

잘 알고 있다.

이 성 어디에 영주의 집무실이 있는지.

혈백작 들카슈를 죽일 때도 이렇게 계단을 올랐으니까.

"또 너희냐?"

나는 계단 위를 틀어막은 전사들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크르르르-!"

두 눈을 붉게 물들이고, 입가엔 하얗게 거품을 피워 올리는,

짐승과도 같은 형상의 광전사들.

버서크 곶의 광전사들은 대개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일명 변절자, 겁쟁이라고 불리는 일족들은 도시의 힘에 굴복해서, 또는 도시가 주는 환락에 취해 권력자의 품에 정착해 살아갔다.

혈백작 들카슈 때는, 이들이 가장 까다로운 장벽이었다.

광전사들은 엘리트 전사가 아닌 일반 전사조차 인간을 초월한 신체 능력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 팔다리가 잘려도 기어와 이로 물고 마는 지독함까지.

그때 나와 형제들 그리고 아저씨들은 이놈들을 뚫기 위해 힘을 크게 소모했다.

그런 광전사들이 또다시 내 앞을 가로막는다.

계단 위에 구름처럼 몰려서서.

"오냐. 싸워 보자."

"크아아아아!"

내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광전사들이 계단 아래로 쏟아져 내려왔다.

쏟아진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놈들이 서로를 짓누르며 짐승처럼 달려들었으니까.

이게 광전사의 무서운 점이다.

겁이 없다.

고통도 모르고.

저렇게 몰려서 내려오면 정교하게 베기가 힘들었다.

크게 휘둘러 베어도, 굴러떨어지는 시체들 사이에 섞여 살아남은 광전사가 도끼를 휘두르고, 이빨로 깨물고, 두 팔 벌려 달라붙으면, 지긋지긋한 난전이 되는 거다.

예전엔 이 지옥을 힘겹게 뚫고 올라갔다.

'이번엔 다를 거다.'

쏟아져 내리는 광전사들을 뭉텅이로 보지 않고 그 하나하나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그들의 급소를 연결하는 최단 경로의 선을 찾았다.

우웅- 우웅-

검이 알려 주는 정보. 검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 그걸 경청하다 보면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절묘한 틈새가 환하게 드러났다.

그 사이로 몸을 비집어 넣는다.

한 줄기 바람이 되어서,

실을 당기듯,

찰흙을 반죽하듯.

검이 마음껏 춤을 추게 내버려 둔다.

푹! 푹!

서걱! 석!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처럼,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날뛰는 칼날.

짧게, 길게, 당겨서, 밀어서, 검으로 해낼 수 있는 모든 동작으로 광전사들을 베고 찌르고, 밀친다.

퉁! 터덕!

퉁! 주르르....

쿠당탕탕!

인형처럼 나자빠지는 광전사들이 벽과 계단에 머리를 박고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나는 그 사이에 서 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광전사들의 흐름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멈춤 없이 계단을 오른다.

철벅 철벅.

핏물에 발자국마다 소리가 났다.

하지만 단 한 방울도 내 몸에 튀진 않았다.

그만큼 여력이 남았다.

쏟아지는 핏물을 피하고,

중간중간 오러를 쏟아 핏방울을 날려 버릴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이.

그렇게 얼마나 죽였을까?

말똥말똥-

끔뻑끔뻑-

어느 순간,

광전사들은 더 이상 달려들지 않았다.

붉게 물들었던 눈동자를 순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이건 또 신박하네.'

원래 경지에 이른 광전사들은 광기를 자유롭게 켜고 끈다지만, 이런 전개는 나도 예상 못했다.

저벅.

우르르르.

내가 한 걸음 걸으면, 그 많은 광전사들이 와르르 물러섰다.

식은땀을 흘리며.

그러니까,

저들도 깨달은 것이다.

상대가 안 된다는 걸.

그 많은 광전사를 도륙 내고도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내 모습에 겁을 먹은 것이다.

싸움에 미친 광전사들이.

저벅 저벅 저벅.

나는 검을 늘어뜨리고 그냥 걸어 올라갔다.

우르르르!

뒤로 물러선 광전사들은 자기들끼리 부딪혀 자리가 없어지자 아예 계단 양옆으로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내 걸음을 따라 길이 열렸다.

나는 덜덜 떠는 광전사들의 사이를 그냥 걸어 지났다.

그러곤 별것 없었다.

최후까지 앞을 가로막는 익스퍼트 최상급이나 상급의 전사들.

그 심장과 목과 입에 칼날을 먹여 주었다.

벌컥!

마침내 도착한 집무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여기 있네.'

케세레스는 집무실 중앙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를 마셔?'

도망치기엔 내가 너무 빨랐을 거다.

그래서 괜히 여유로운 척이라고 하고 싶은 거겠지.

"아, 왔나?"

그가 날 보고 친근하게 인사했다.

"솔직히 많이 놀랐어. 자네 원래 이렇게 막무가내였나? 예전에는 좀 더 신중했던 거 같은데."

사실 지금도 그래.

다만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강할 뿐이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뤄야 할 꿈을 가졌을 뿐이고.

그러니 더 이상 너희의 개수작에 휘말리지 않아.

"뭐, 아무튼 앉게. 차 한잔하지."

케세레스는 손을 뻗어 자리를 권했다.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갈 땐 가더라도, 차 한 잔은 괜찮잖아?"

씨익- 하고 매력적인 웃음을 보여 주는 그 흡혈귀에게,

서걱-

나는 반로아의 하얀 칼날을 선물해 주었다.

툭- 데구르르....

굴러가는 머리. 화르르 타오르는 시체.

"미안. 머리 굴리는 놈은 일단 죽이고 보는 성격이라."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차는 발로 차서 엎어 버렸다.

대신 방 한구석에 놓인 물병을 찾아 벌컥벌컥 마셨다.

찌르르르-

온몸으로 시원하게 물의 기운이 퍼진다.

살이 다 떨리는 이 맛.

이제 좀 개운하네.

#41화 최후통첩

고작 10분이었다.

"자, 여기 니들 대장. 계속 싸울래?"

외성을 넘어 들어간 란센이 케세레스의 목을 들고 다시 나타날 때까지 걸린 시간이.

"마... 말도 안 되는...."

외성의 수비대장은 입술을 떨었다.

"계속 싸울 거면 여기서 다 죽이고."

란센의 무미건조한 눈과 마주친 수비대장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아, 아닙니다!"

사실 그를 정말로 두렵게 한 건 란센의 눈빛도, 그 손에 들려 있는 케세레스의 머리도 아니었다.

'옷이...!'

그건 란센의 옷이었다.

'피가 하나도... 없어!'

수비대장은 알고 있었다. 저 안에 어떤 대비가 되어 있었는지.

케세레스는 용의주도한 인물이다.

물론 그가 준비한 가장 큰 계책은 질풍왕의 깃발이었지만, 그는 단지 그것만을 믿진 않았다.

분을 못 이긴 란센이 병력을 몰려 들이치는 상황, 아니면 예전에 들카슈를 죽일 때처럼 소수정예로 들이치는 상황, 케세레스는 모든 시나리오를 만들고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세웠다.

근데 왜 결과가 이렇게 나온 거지?

'익스퍼트급 전사들... 광전사들... 그들을 혼자서 10분 만에 다 뚫어 냈다고? 옷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수비대장은 두려웠다.

눈앞의 이 남자.

단순히 소드마스터라는 말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압도적인 무력을 갖춘 존재.

대항해 봤자 남는 건 개죽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결국 하나뿐이었다.

"뭣들 하고 있어! 무기 버리고 성문 열어!"

"예, 옛!"

챙! 챙강!

빗소리처럼 여기저기서 창칼을 던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끼이익!

목책으로 이루어진 외성의 성문이 열렸다.

란센이 단신으로 카슈시(市)를 함락시키는 순간이었다.

* * *

"병사들이 그럽디다."

영주 집무실의 쇼파에 앉아 좀 쉬는데, 칼세릭이 말을 걸었다.

"뭐라 그러는데?"

"대장 사실은 귀신 아니냐고."

"뭔 소리야?"

칼세릭은 진짜 모르겠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솔직히 저도 진짜 모르겠습니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뭘?"

"아니. 피요. 저쪽 번화가 쪽에도 익스퍼트들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여기 영주성 안에는 아예 광전사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 대체 대장 옷에는 왜 피가 한 방울도 안 묻은 겁니까?"

"피 안 튀게 잘 베고, 그래도 튀면 오러 일으켜서 밀어내면 돼."

"...."

"...몰라? 오러를 검으로 끌어올리면, 막 바람이 휘몰아치잖아. 그러니까 그걸로 핏방울을...."

"알죠! 당연히! 저도 최상급 익스퍼트입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냐고요! 아니 여기저기서 막 튀는 피를 다 계산해 가면서 그렇게 한다는 게...!"

"쉽던데."

"...아, 예...."

"별거 아니더라."

솔직히 말하면, 나도 고대 검술을 배우기 전엔 이런 거 못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으스댔다.

크, 이 맛에 강해지는 거지.

"칼세릭은 못 해?"

으스대는 김에 칼세릭도 한번 찔렀다.

"...못 합니다."

"그래? 쉬운데."

"아, 진짜!"

얼굴을 붉히는 칼세릭.

나는 킥킥 웃고 말았다.

이젠 좀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네.

기지개를 켜며 테라스 밖으로 나섰다.

영주성답게 이곳에 서면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네?"

여기서도 잘 보였다.

1연대를 따라온 쿠샨시의 행정관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카슈시의 곳곳을 장악했다.

법원, 세무서는 물론이고 병영과 이곳 영주성까지.

모든 서류를 훑어 카슈에 존재하는 재산과 인력 등을 확인하고 인수하고, 분류하고.

쿠샨시에서도 빠릿빠릿했던 녀석들만 데려왔으니 3일이면 이곳의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 질풍왕보다 우리가 먼저 카슈를 먹었네. 결국."

내 말에 칼세릭이 딴지를 걸었다.

"먼저 먹은 것 맞습니까? ...엄연하게 그의 깃발이 걸려 있던 도시인데. 이거, 문제가 될 겁니다."

"되면 어때? 어차피 언제가 되든 한번 붙게 되어 있어."

"저기.... 아직은 우리 세력이 훨씬 부족한 건 알고 계시죠?"

"괜찮아. 그래서 쿠샨을 서둘러 점령한 거잖아. 키날로가 있는 이상 아직 하룬이 우릴 직접 타격할 순 없어. 설령, 하더라도, 남쪽의 자파르 때문에 총공세는 어려울 거고."

"그건 그렇지만...."

"너무 무서워하지 마."

"어떻게 안 무서워합니까? 상대가 그 5왕(王)인데!"

칼세릭. 처음엔 진중한 용병대장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순 잔소리꾼이다.

'아, 처음에도 진중하진 않았나?'

무릎 꿇고 목숨을 애원했던 게 첫 만남이었으니....

"어? 어? 지금 뭔가 굉장히 무례하고 불쾌한 생각을 하고 계신 거 같습니다?"

"아냐. 아냐."

나는 부하의 체면을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해 주며 표정을 고쳤다.

그렇게 칼세릭과 아옹다옹하고 있는데, 병사 하나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백작님!"

"응?"

"발견한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그 기괴한 예배당 말입니다."

아, 진짜 발견했구나.

나는 자세를 바로 고쳤다.

세아가 예견한 대로 이곳에도 사교도의 예배당이 있었다.

"예배당? 맞다. 그러고 보니 왜 그런 걸 찾으라고 한 겁니까? 종교쟁이는 좀 그런데..."

"종교는 개뿔. 시간 여행 하려고 그런다."

"네?"

칼세릭이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언젠가는 알려 줘야겠지만, 아직은 좀 시기상조란 생각도 들고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그나저나, 지금 확인해 보는 건 좀 그렇겠지?'

마음 같아선 당장 운명의 책을 들고 찾아가 보고 싶었지만... 저번처럼 강제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면 상황이 많이 곤란했다.

방금 막 질풍왕의 깃발을 베어 버린 참이라서.

적어도 질풍왕이 어떻게 나오지는 확인하고, 충분히 놈을 견제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어야 겨우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예배당은 현 상태 그대로 보존해 둬. 출입도 금지 시키고."

"예! 알겠습니다."

병사를 내보내고 나는 다시 테라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칼세릭이 자꾸 "시간 여행이 무슨 뜻이냐고요오!"라면서 귀찮게 굴었지만, 무시했다.

'이제 최대한 빨리 키날로시(市)와 교감을 나눠야겠어.'

쿠샨을 안정시켰고, 카슈도 정리했으니.

이제는 키날로다.

언젠간 그곳도 우리가 차지해야겠지만, 일단은 동맹을 맺는 걸로. 그곳의 마법사 전력과 힘을 합치면 질풍왕을 견제할 수 있는 그럴듯한 세력이 될 테니까.

그런 계획이었다.

고작 이틀 뒤,

그 모든 걸 백지화하고 처음부터 새로 계획을 짜야 했지만.

* * *

이틀 뒤 새벽.

질풍왕의 전령들은 카슈시를 내려다보았다.

갈기가 유독 길고 풍성한 백마를 타고서.

"미친놈이군."

질풍 기병대 소속 익스퍼트 최상급의 전사 피르제는 멀리 보이는 카슈시(市)를 바라보곤 혀를 찼다.

"하룬 님의 깃발을 무시하고 카슈를 함락시켜? 미친놈인 줄은 알았지만.... 목숨이 한 10개쯤 되나?"

그녀는 불쾌했다.

저들의 무지가.

"잘 모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본인도 소드마스터니 하룬 님께 대적할 수 있다고. 본인의 군대면 질풍 기병대에 맞설 수도 있다고.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지."

그 무지가 같잖고 우스웠다.

아일룬 밖에 사는 놈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촌놈들뿐.

질풍왕이 다스리는 아일룬 지방과 그밖에 다른 지역 사이에 얼마나 큰 격차 존재하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경제력은 말할 것도 없고 병력의 질과 숫자부터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설령 제국일지라도 우리를 상대론 감히 이토록 건방질 수 없을 텐데."

피르제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란센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아무튼 그녀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가자. 가서 저 무지한 자들에게 주군의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주자."

"네!"

칼날같이 대답한 9명의 대원을 이끌고,

"이랴!"

그녀는 박차를 가했다.

히히이이잉-!

로버랜드 전역에서 제일로 꼽히는,

아이룬 사람들은 천하제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아일룬 백마.

그중에서도 가려 뽑은 최고의 명마들이 길게 울음을 토해 내며 땅을 박찼다.

두두두두-!

바람이 피르제의 뺨을 후려치며 지나갔다.

기병대장인 그녀는 언제나 이 순간이 좋았다.

바람조차 쳐부수며 달리는 이 압도적인 속력이.

저 멀리 보이던 5미터 높이의 목책이 순식간에 눈앞에 다가왔다.

그 위에서 경계하고 있던 란센의 병사들이 그녀와 부하들의 질주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 활을 쏘았다.

피이잉- 피잉-!

"제법. 반응은 빠르군. 저건 제국의 흑궁인가?"

조금은 감탄했다.

반응도 빠르고 조준도 정확했다.

허나,

그중 무엇 하나도 닿지 않았다.

한 번 더 가속하고 또 한 번 가속하면 언제나 화살은 뒤로 떨어지니까.

"무, 무슨 말이!"

"저기서 더 빨라진다고?!"

경악한 목소리가 들렸다.

놀랍겠지. 하늘 아래 이보다 더 빠른 말은 존재하지 않음에.

"어... 어? 부딪힌다!"

목책까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드는 피르제 일행의 질주에 목책 위 병사들이 당황했다.

하지만,

쿵————!

타닥!

말이 목책과 부딪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뿐.

"나... 날아?"

하얀 백마들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단숨에 목책 위를 밟았다.

5미터 목책을 단숨에 뛰어넘는 말이라니.

이걸 말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히이이이잉-!

"히이이익!"

목책 위에서 서서 울부짖는 말과 그 위에서 태연하게 병사들을 노려보는 기병대의 서늘한 시선.

병사들은 창 한 번 내밀 생각도 못 하고 기가 질려 뒤로 물러섰다.

"아일룬 백마..."

"질풍 기병대!"

그들도 노르베르쥬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전사들.

아일룬 백마와 관련한 온갖 괴담을 한 번쯤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대개는 흔히 떠도는 과장된 헛소문이라 여겼는데... 설마 진짜로 5미터 목책을 넘어 버릴 줄이야.

피르제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무지한 자들은 결국 눈앞에 말발굽을 보여 줘야 정신을 차리는 법이니....

"모두 들어라!!"

오러를 한껏 머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새벽의 카슈시(市)를 쩌렁쩌렁하게 깨웠다.

외성은 물론이고 내성을 지나 영주성 그 너머까지, 파도처럼 밀려가는 압도적인 성량.

"키날로에서! 질풍왕의 전언이다! 질풍왕이 란센을 어여삐 여겨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안을 한다! 그대가 이제라도 강퍅한 마음을 버리고 나와 술잔을 기울인다면, 나는 그대를 형제이자 친구로 대할 것이다!"

피르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백하게 질린 근처의 병사들을 슥 둘러보았다.

이후, 한 글자 한 글자, 더 크게 힘을 주어 외쳤다.

"허나! 이 마지막 제안을 거절한다면! 다음엔 그대와 그대의 친구들은 나의 사로잡은 포로로! 불의한 죄인으로 다룰 것이다! 모쪼록 잘 생각하라!"

새벽을 찢고 찌르르 울려 퍼진 최후통첩은 도시 모두의 잠을 깨웠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선언을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성벽 위로 올라선 10마리의 백마와 그 위에 신장(神將)처럼 앉아 있는 10명의 기병들을.

그때, 칼세릭은 외성 근처에서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는 이변을 깨닫자마자 전력을 다해 달렸다.

'젠장.... 이건 안 좋아! 이런 짓을 당하면 사기가 박살 난다고! 절대로 그냥 보내면 안 돼!'

근처의 병사들과 익스퍼트들 모두가 얼어붙었을 때, 그는 홀로 움직였다. 이 빌어먹을 상황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그래서 나섰다.

목책 아래에서 위로, 잘 보이지 않을 사각지대를 노려 단숨에 몸을 날렸다.

"네놈!!!!"

피르제의 목소리에 지지 않을 우렁우렁한 고함을 뿜으며 그녀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설령 베진 못하더라도, 망신이라도 줄 작정이었는데...

피잉-

검이 닿지 않았다.

피르제는 꼼짝도 하지 않고 도도하게 몸을 세운 채 칼세릭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놈의 말이...!'

검을 피해 낸 건, 그녀가 탄 말.

아일룬 백마가 단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칼세릭의 공격을 무효화했다.

그러곤,

콰아앙!

백마는 물러나자마자, 다시 앞으로 내디뎠다.

그 타이밍에 맞춰 훅! 하고 휘둘러지는 피르제의 방패.

"억!"

칼세릭은 피하지도 못한 채 방패에 얻어맞고 목책 아래로 떨어졌다.

"흥."

비웃음을 베어 문 피르제는 마지막으로 외쳤다.

"시한은 한 달! 좋은 대답을 기다리겠다! 란센!"

곧장 기수를 돌렸다.

"가자!"

"예! 이랴!"

기병대는 나타난 것처럼 순식간에, 성벽을 뛰어내려 저기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 * *

"...아주 시끄럽게 저질러 줬네."

이 난리 중에, 나는 뒤늦게 도착했다.

멀리 영주성에 있었기에 힘껏 달렸으나 한발 늦었다.

"죄다 표정이 엉망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짝거리던 병사들의 얼굴이, 지금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드높던 사기가 이렇게 단 한 순간에 꺾일 수도 있는 건지....

"질풍 기병대라...."

멀리 시선을 던졌지만, 놈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놈들은 장황한 개소리를 늘어놓고 떠났지만, 그 중엔 주목해야 할 정보도 섞여 있었다.

'키날로가 이미 함락됐다고?'

뿌득.

이가 절로 갈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아니 아마 사실이겠지.

"기어코 우리 목줄을 쥐었구나?"

이젠 일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이렇게 달려드는데,

확인해 줘야지.

그놈의 5왕(王)이, 얼마나 잘 싸우는지.

#42화 사기

질풍왕의 최후통첩이 떨어진 이후, 전사들의 동요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이거...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되는 거 아냐? 질풍왕은 모조리 학살하잖아."

"아... 진짜 미치겠다. 쌩고생을 해 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니까. 내가 어디 가서 또 이만한 봉급을 받아 보냐고.... 왜 하필 질풍왕한테 개겨 가지고."

그들은 좌절했고, 란센을 원망했다.

막연하게 키워 왔던 5왕(王)에 대한 두려움.

그게 질풍왕의 기병들을 보는 순간, 폭발하듯 분출되었다.

설마 말이 성벽을 뛰어넘을 줄이야....

이름 높은 칼세릭이 날파리처럼 나가떨어질 줄이야....

물론 아일룬 백마라고 다 성벽을 넘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은 질풍 기병대에서도 가리고 가려 뽑은 한 줌의 정예만이 그런 묘기를 선보일 수 있었지만, 지금 병사들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질 못했다.

그저 두렵고 원망스러울 뿐.

"아, 나 안 되겠다. 짐 싸야겠어."

"야야. 좀만 기다려 봐. 당장 싸우는 것도 아니고, 한 달이나 유예가 있잖아. 백작님이 머리를 숙일 수도 있다고."

"그건 그런데.... 아, 왜 이렇게 불안하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질풍왕과 싸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노르베르쥬에서 가장 부유한 5개의 도시를 다스리는 질풍왕의 군대는, 이제 고작 변방 도시 2개를 차지한 란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강했으니까.

심지어 키날로시(市)까지 함락하고 올라와 쿠샨의 목줄을 틀어쥔 질풍왕이 아닌가.

그런 그가 굴복을 하라고, 그러면 형제이자 친구로 대하겠다고 관대한 제안까지 했는데.

그런데 왜 불안한가...?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단 1주일 만에 마수 소탕을 완료해야 했던 그 지옥 같고 무식했던 작전.

단신으로 카슈시를 점령해 버리던 란센의 막무가내 행동.

"설마 진짜 싸운다고 하진 않겠지?"

"설마...."

전사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꾸만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 * *

칼세릭의 얼굴은 심각했다.

"대장. 병사들 사기가 너무 떨어졌습니다. 이거 이대로는 싸움 못 합니다. 다들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다고요."

뭐랄까?

숫제 온 세상이 나서서 내게 외치는 것 같았다.

굴복하라고.

넌 아직 질풍왕의 상대가 아니라고.

꿈?

그건 미루면 된다고.

일단 살아남는 게 먼저 아니냐고.

살아남아서 운명의 책을 사용해 과거를 오가며 착실히 힘을 쌓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냥 귀에만 달콤한 거짓말이지....'

제국.

결국 우리 반로아 혈족들의 꿈은, 제국과 연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을 무너뜨리거나, 아니면 최소한 제국을 상대로도 살아남을 힘을 기르거나.

질풍왕?

아일룬의 기병대?

인정한다.

강자들이라는 거.

하지만, 그 정도의 무력, 제국에는 넘쳐나는 것이었다.

기사 왕국이라 불리던 반로아가 약했는가?

아니다. 질풍 기병대도 눈 아래로 볼만큼 강력한 장창병들과 기사단이 있었다.

비록 그랜드마스터는 없었지만, 소드마스터가 4명이나 있었고, 그중 두 명은 질풍왕이 그러하듯 그랜드마스터에 근접했다고 평가받는 달인들이었다.

실제로, 반로아는 여러 차례 제국군을 격파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제국이 진심을 드러내는 순간, 그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왕국을 수호하던 소드마스터들은 도륙당했고, 왕국이 자랑하던 중갑보병들과 기사단은 크게 패해 땅에 칠해졌다.

그런데 내가... 우리가... 고작 여기서 물러선다면?

한창 성장 중인 이 좋은 기세를 꺾고 더 불리한 상태에서 기약 없는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면?

아마 꿈은 영영 멀어져 다시는 손에 닿지 않게 될 것이다.

'이걸 넘지 못하면... 제국도 영영 넘을 수 없어.'

두렵다.

나도 두려웠다.

패해서 내가 죽는 것보다, 내 동생들이, 벌슨 아저씨가, 그리고 여태까지 나를 믿고 따라와 준 사람들이 허망하게 죽어 갈 것이 그것이 더 두렵다.

하지만 이미 약속하지 않았나?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나아가기로.

나는 동생들을 이끌어야 한다.

"대장, 정말 질풍왕과 싸우실 겁니까? 싸운다고 하시면 나야 믿고 같이 싸우기로 했지만... 솔직히 지금 이런 사기로 싸우는 건 자살행위밖에 되지 않습니다."

칼세릭의 말투는 오묘했다.

언뜻 보면 질풍왕에게 굴복하라고 종용하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들으면 그게 아니다.

그는 호소하고 있었다. 뭔가 대책을 달라고. 당신이라면 생각이 있지 않냐고.

분명히 목소리의 한구석에는 그런 기대가 서려 있었다.

나는 거기에,

기꺼이 응답한다.

"그러니까. 페널티가 커졌다는 거잖아?"

"페널티요?"

"그래. 병사들 입장에서 보면, 내가 줄 수 있는 이득보다 죽을 수도 있다는 페널티가 더 커진 거잖아? 그래서 사기가 떨어지는 거고."

"그렇... 죠?"

"그럼 간단하네. 이득을 더 키우면 되지. 페널티를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이득 말입니까? 어떻게요?"

칼세릭은 자꾸 잊어버린다.

우린 지금, 돈이 무지하게 많다는 걸.

"포상을 쏟아붓는 거지. 어차피 이번 한 번만 이기면 되는 거야. 그럼 다들 생각이 바뀔 테니까. 그걸 생각하면 아무리 투자해도 손해가 아니야."

좋아.

마음을 정했다.

나는 여전히 갈피를 못 잡는 칼세릭에게 명령을 내렸다.

"1연대 전 병력. 한 명도 빠짐없이 영주성 앞 광장에 집합시켜. 이번에 포로로 잡은 카슈시의 전사들도. 기병대, 광전사, 엘리트 전사, 익스퍼트, 가리지 말고 전부 다. 집합."

칼세릭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더니 후욱 하고 뱉어 내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 얼굴에서 약간의 후련함과 어떤 기대감이 빛났다.

* * *

느껴진다.

병사들의 불안이.

영주성 한가운데에 돌출된 테라스에 서니, 수천 쌍의 눈이 보였다.

갈팡질팡 흔들리는 눈동자와 걱정으로 일그러지는 눈썹.

이런 상황에 대고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붙이는 건 하책이다. 특히나 로버랜드의 전사들에겐.

이럴 땐, 그냥 현실로, 가능성으로, 후드려 패는 게 맞다.

후-

짧게 호흡을 고른 나는 준비했던 서두들은 다 날려 버리고 곧장 본론을 꽂아 넣었다.

"일반 전사 300달론."

술렁-

술렁였다.

그야 그렇겠지. 지금 주고 있는 월급이 12달론이니, 300달론이면 2년 치 연봉이다.

내성 안에 괜찮은 집 한 채를 살 수도 있는 거금.

"엘리트 전사는 약속했던 고대 무구를 조건 없이 즉시 지급."

엘리트 전사들의 눈이 커진다.

상품(上品)의 고대 무구는 그냥 팔아도 1,500달론이고, 사실은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보물이다.

"전사했을 시, 일반 전사는 사전에 지정한 상속인에게 500달론을. 엘리트 전사의 경우는 상속인에게 2,500달론을 즉시 지급하겠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분위기가 꽤 변했다.

턱 밑까지 차올랐던 두려움과 불안은 잠시 잊어버리고 다들 머릿속 계산기를 두들기기 바빴다. 미처 생각도 못 해 봤던 보상이었을 테니까.

또 한쪽에선 익스퍼트들이 눈을 빛냈다. 자신들에겐 무엇이 떨어질까 궁금해하며.

"익스퍼트들에겐 각기 등급에 따라 명품에서 보물급의 고대 무구를 즉시 지급하며, 사망 시엔 하급, 중급, 상급 각각 경지에 따라 1만 달론, 1만 8천 달론, 3만 달론을 상속인에게 지급한다."

명품급의 고대 무구는 6,000달론에서 15,000달론 이상의 가치가 있고 보물급에 이르면 2만에서 5만에 이르는 가치를 가졌다.

그러니까 이건,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라는 것이다.

설령 목숨을 걸어야 하더라도,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릴 만한 제안.

"이 모든 게, 단 한 번의 전투에 대한 특별수당으로, 전투가 끝난 즉시 지급될 것이다."

그 말에 전사들의 반응이 양극으로 갈렸다.

한편으로는 단 한 번의 전투로 이런 막대한 대가를 지불한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전투에서 지면 못 받는 돈이 아니냐는 불만이 팽배했다.

그래.

불안하겠지.

내가 뭘 약속하든, 질풍왕과의 전투에서 내가 전사하기라도 하면 그 약속은 모두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릴 테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선금을 줄 순 없으니까.

뭘 믿고 선금을 줘?

이곳은 로버랜드.

선금만 먹고 튀지 않으면 그걸 바보 취급하는 놈들만 모인 땅이다. 이곳은.

그러니,

나는 설득해야만 했다.

"지금 너희는 생각하겠지? 패배하면 이 약속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하다.

내가 제시한 인센티브를 허망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선,

저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과 저들에게 보여 준 모든 것을 걸고.

"하지만 잘 생각해 봐라. 내가 질까? 정말? 병력 차이는 크지 않다. 남쪽에 해상왕이 버티고 있는 이상, 질풍왕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결국 우리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니까."

아직이다. 이 정도로는 병사들을 설득할 수 없다.

입술을 삐죽이는 이들이 보였다.

난 그런 그들의 가슴에 자부심이란 불길을 피워 올렸다.

그걸 위한 장작은 이미 그 안에 꽉 차 있었으니까.

"질풍 기병대가 두렵나? 하지만 너희는 막아 낼 수 있다. 그 마수 록우(鹿牛)의 돌진을 막아 냈던 게 누구였지? 익스퍼트였나? 아니다. 너희가 방패와 창으로, 화살로 직접 막아 냈다."

그 말에 조금이지만 병사들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사실이었으니까.

아일룬 백마의 질주가 아무리 무서워도 마수인 록우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닌 것.

우리는 그런 록우의 돌격을 막아 냈다. 그것도 몇 번이나.

"아일룬의 궁기병이 두렵나?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가 가진 흑궁이 더 멀리 뻗고 더 강력하다."

이 역시 사실.

궁병들의 눈에 빛이 들어온다.

그 질긴 마수들의 가죽도 몇 번이나 뚫어 냈던 흑궁의 파괴력을 그들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에게 묻고 싶다. 질풍왕 하론. 내가 고작 그런 자에게 질 것 같으냐? 크시아스를 죽이고 카슈를 홀로 함락한, 나, 란센이?!"

사실 별것 아닌 말이었다.

'내가 질 거 같아?' 동네 꼬마도 할 수 있는 말.

하지만 그 말을 한 게 나라면, 느낌이 좀 다를걸?

난 계속해서 증명하고 보여 줬다.

오러 블레이드로 성 하나를 때려 부쉈던 크시아스의 목을 베었고, 최상급 익스퍼트 4명과 붉은 전사단을 순식간에 제압했으며, 소드마스터조차 꺼리는 대형 마수들을 셀 수 없이도 참했고, 익스퍼트들의 연격전과 광전사의 파도를 뚫고 홀로 카슈시를 함락시켰다.

이런 나의 무용을 바로 곁에서 보아 온 이들이, 내 말을 쉽게 부정할 수 있을까?

'내가 질 것 같아?'

이 단순한 말속에 내가 올린 판돈은, 나의 인생과 나의 모든 것.

웅성-

전사들이 웅성거린다.

하지만 처음과는 그 높낮이가 달랐다.

잘게 끓는 물처럼, 뜨겁게 부글거리는 그런 웅성거림이 광장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이제는 마무리.

"너희는 싸우고, 이기고. 약속한 상급을 받는다. 내가 그렇게 만든다."

전사들의 눈동자가 곧게 나를 향했다.

솟은 눈썹들이 의지로 쭉 뻗었다.

나는 눈싸움이라도 벌이듯, 꼿꼿이 서서 그 수천 쌍의 눈을 맞이했다.

만족했다.

적어도 저 눈은 더 이상, 겁먹은 패배자의 눈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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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100달론의 가치는 원화로 1억 원 정도 됩니다. 다만 로버랜드의 평균 임금 수준이 대한민국의 절반 정도로 낮고, 세금은 막대하기 때문에 실제 로버랜드의 서민들에게 100달론은 약 2억 5천만 원 정도의 가치로 느껴집니다.

#43화 대비

다른 대륙의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미치광이들.

그게 로버랜드의 전사들이었다.

어떤 때는 패잔병보다도 겁쟁이고, 어떤 때는 전설의 용사보다 용감하다.

그걸 가르는 기준은 바로 한 가지.

얼마나 큰 이득이 눈앞에 있는가.

1년간 피로 번 돈을 하룻밤의 도박으로 날려 버릴 수도 있는, 야수의 심장을 가진 이들이 바로 로버랜드의 전사들이었으니....

술집마다 전사들이 모여 팔뚝을 휘둘렀다.

화제는 단연 오늘 란센이 던진 제안.

전술과 전략을 좋아하는 이성적인 전사들은 상황을 분석했다.

"자자, 우리 현실적으로 분석을 해 보자."

"맞아. 최악과 최선의 상황을 가려 보자고."

"질풍왕이 어느 정도의 병력을 동원할까? 우리 측 병력은 어느 정도나 되지?"

"대충... 이 정도?"

"동의."

"그럼... 이런 상황이라면?"

"최악의 경우 승률 5%! 최선의 경우 20%! 이게 내 결론이다."

"최악이 5%?"

결론이 나오자, 전사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X나 해 볼 만한데?"

이기면 300달론인데 확률이 5%라니!

당연히 해야지!

그런 인간들이었다. 로버랜드의 전사들이.

그런가 하면, 질풍왕 하룬과 란센의 전투력 비교를 중점으로 하는 전사들도 있었다.

"소드마스터를 벗어나기 시작한 전사는 일반 소드마스터와는 아득한 차이가 나지."

"그래? 차이가 그렇게 커?"

"너는 그것도 모르나? 저기, 샤말룬의 지배자, 해상왕 자파르는 소싯적에 소드마스터 2명을 10여 합 만에 참살했다고."

"헉! 고작 10여 합?"

"그래. 그게 10년 전이다. 지금은 더 강하겠지. 그런 자파르랑 무승부를 이룬 게 질풍왕이고."

둘러앉은 테이블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전사 하나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란센 백작님이... 이길 수 있을까?"

"가능성은... 있지. 너희도 봤잖아? 그 말도 안 되는 무력. 백작님도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벗어난 건 틀림없어."

"그래. 란센 백작님은 천재야. 5왕(王) 중 그 누구도 27살에 이만큼 강했던 사람은 없다고."

"그래서, 그래서,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그러자 여태 분석을 주도하던 두 명의 전사가 잠시 눈을 감고 긴 고민에 빠졌다가 동시에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13%! 그게 란센 백작이 이길 확률이다."

"19%! 난 그 정도 확률은 된다고 본다!"

이번에도 전사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10%가 넘어? 그럼 해야 되는 거 아냐?!"

그러자 이성적인 전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아니.... 자칫하면 죽을 확률이 90%인데... 그걸 한다고?"

희번덕!

주위 전사들이 두 눈에서 광망을 뿜었다.

"그러다 백작이 이기면?"

"그러고 살 수 있겠어? 눈앞에서 300달론이 날아갔는데?"

"넌 평생 겁쟁이 취급이다."

"어디 가서 당당하게 말하고 다녀! 아, 난 그때 백작이 질 줄 알고 도망쳤지 뭐야.... 그래서 개그지가 되고 말았지 뭐야.... 이러라고!"

"떼라 그냥."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던 전사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 * *

나는 최대한 빨리 카슈시(市)를 정리하고 쿠샨으로 돌아왔다.

이제 병사들의 사기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쿠샨에 도착했을 땐, 이미 이곳에도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질풍왕의 최후통첩은 물론이고, 거기에 맞서 내가 내놓은 제안까지도.

나를 맞이한 세아가 처음 한 말은 이거였다.

"잘했어. 오빠."

간단한 말이지만, 난 그 말속에 담긴 여러 의미를 눈치챘다.

그래서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이쯤이야.'

"근데, 오빠가 공약한 보상 말이야. 다른 건 어찌어찌 될 거 같은데, 명품급이랑 보물급 고대 무구는 숫자가 안 맞아. 언제 발굴할 수 있을지 기약도 없고."

예상했던 바였다.

명품급이라는 건, 고대 시대를 기준으로도 명품이었으니까.

보물급은 최강이라던 호라이즌 기사단 정도는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거였고.

하지만,

"걱정 마."

난 아공간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세아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세아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내게 건네주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벌슨 아저씨가 훈련 계획을 세웠어. 일단 한 달 유예를 생각하고 짠 계획이긴 한데, 도중에 멈춰도 상관없도록 중요한 훈련을 앞에 몰아넣었어."

도중에 멈춰도 상관이 없도록.

이게 포인트다.

질풍왕이 1달의 유예를 말했다곤 하지만, 그걸 믿는다면 멍청이니까.

한 번 뱉은 말은 지킨다.

이런 걸 덕목으로 삼는 건, 글로리랜드나 올드랜드의 군주들뿐이다. 로버랜드엔 그딴 게 없다.

내가 저항을 천명한 이상, 당장 내일 질풍왕이 쳐들어와도 이상하진 않다는 거다.

그래서 나도 운명의 책을 사용하지 않고 일단 쿠샨으로 돌아온 것이고.

"그래도 최소 2주는 걸릴 거야. 질풍왕도 키날로를 안정시킬 시간은 필요하니까. 소모된 병력도 보충해야 할 테고."

세아는 2주를 말했다.

정보에 밝은 녀석이니까 얼추 정확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 간부들 다 불러. 회의부터 하자."

* * *

세아는 열심히 모아온 정보를 토대로 브리핑을 했다.

병력의 총규모는 질풍왕이 2만 명. 그리고 우리 측이 1만 4천 명.

카슈시의 전사들까지 박박 긁어모은 숫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측이 열세.

나는 자리에 모인 4명의 최상급 익스퍼트들을 죽 둘러보았다.

바렌, 카트리나. 그리고 리베라, 칼세릭.

"결국엔 너희 4명이 대장전을 잘 치러 줘야 우리가 이겨."

우리가 택한 전술은 가장 강한 전사들 간의 대장전이었다.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은 우리 병력은 버티기로 들어가고, 그사이에 대장전을 치러 적장을 꺾는 것.

더 정확히는,

내가 질풍왕 하룬을 찾아 그 목을 베는 것.

그때까지 모두가, 이기고 버텨 주는 것.

나는 브리핑 종이를 팔락 넘기며 말했다.

"정보에 의하면 질풍 7걸 중 4명이 동원되었다고 해."

질풍왕 하룬이 데리고 있는 7명의 맹장들.

2명의 소드마스터와 절정의 기량을 뽐내는 5명의 최상급 익스퍼트를 합쳐서 질풍 7걸이라고 했다.

"불가항력의 바르칸. 2년 전에 소드마스터가 되었다지. 이 자는 카트리나. 네가 막아야 해."

"응! 맡겨 둬!"

소드마스터가 상대였음에도 익스퍼트 최상급인 카트리나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 카트리나. 너라면 해낼 수 있을 거야.

팔락, 또 종이를 한 장 넘겼다.

"백승의 자히르. 이 할아버지는 다들 알지?"

"그 할아버지는 제 겁니다."

바렌이 두 눈에 독기를 담고 말했다.

"그래. 이번엔 처맞지 말고."

대답 없이 이를 악무는 바렌.

믿는다. 동생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재능인 너라면, 그 백전불패의 맹장 자히르도 꺾을 거라고.

나는 다음 명단을 읽었다.

"승부사 제다크. 이 자는 리베라가 상대해 줘."

"네! 목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리베라는 언제나 그렇듯 시원시원했다.

"마지막은 수호의 브리다. 질풍왕의 연인으로도 알려진 전사야."

"그건 제 차지겠군요. 그런 어린것한테는 지지 않습니다."

칼세릭은 갈색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로 씨익 웃어 보였다.

나는 서류를 툭 내려놓고 넷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누구 하나 겁먹은 사람이 없었다.

그게 아주 든든하긴 했는데....

"다들 아주 자신감이 넘치네?"

툭, 물으니,

"대장. 그깟 애송이 따위는...!"

"자히르. 이번엔 내가...!"

"흐하핫! 드디어 고대의 검기를 실전에서...!"

"계획은 있습니다. 지금도 세우고 있고."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감은 좋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자질들이 있다고도 믿는다. 하지만 그게 만용이 되면 안 되지.

"너네 지금, 딱 죽기 좋아 보여."

그나마 진중하게 눈빛을 가라앉힌 리베라는 괜찮았는데...

나머지는 뭐야?

강적과 싸우는데 긴장을 안 해?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건가?

겁 없는 전사는 죽는다. 그게 이 로버랜드에서 온갖 지옥을 헤쳐 나온 내 결론이었다.

"상대가 우스워? 그렇게 실력에 자신이 있어? 한번 보자, 그 실력."

드륵.

검을 들고 일어섰다.

살기를 풀풀 날리며.

"다들 연무장으로 따라와."

순식간에 싸하게 얼어붙는 분위기.

"으음.... 망한 듯?"

바렌이 신음을 흘렸고.

"이것만 기다렸다!"

카트리나는 되려 신이 나서 뛰쳐나왔다.

* * *

이곳에선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밀로가 죽고, 이오딘이 죽어도 다시 되돌아가서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그런 축복은 없다.

한 번이라도 실수한다면 나는 동생들을 영영 잃고 말 거다.

"카트리나."

그러니까 이 과정은 꼭 필요했다.

현실을 알려 주고, 더 절박하게 대비하게 하는 것.

"두려워해도 돼. 네 안의 두려움을 좀 받아들여.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네 목숨을 함부로 한다는 뜻이라고."

오렌지색 사자 갈기 같은 머리칼을 가진 내 동생, 카트리나.

이 녀석이 어릴 때부터 용감했던 건 잘 안다.

하지만 요즘은 그게 좀 과했다.

"두려움?"

카트리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래 인마. 너 왜 이렇게 겁대가리가 없어졌어?

카트리나와 함께 반년간 떠나 있던 동생들한테 쭉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들은 비슷했다.

'무리하더라. 자기가 란센 형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나의 역할.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나란 절대 굴하지 않고 절대 패하지 않고,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무언가.

대충 그런 식으로 미화되어 있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봐라.

그 끝이 어땠나.

폐인으로 끝났었잖아?

나는 카트리나의 미래가 그렇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오빠. 솔직히. 진짜 솔직히 말할까?"

"응. 얼마든지."

"전엔 그랬어. 두려워도 그걸 숨기고 밀어냈어. 오빠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진짜 노력했어. 근데... 요즘은 그런 게 아니야."

"그러면?"

"요즘의 난, 정말 두렵지가 않아. 그 무엇도."

카트리나가 면갑을 내리고 창을 움켜쥐었다.

우리는 지금 기병전을 대비하여 각각 말에 올라탄 상태.

말은 아일룬 백마였다.

이거 밀수한다고 돈 좀 썼지.

카트리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진짜 두렵지가 않아."

녀석의 전신에서 주황색 오러가 휘몰아쳤다.

"그러니까 오빠. 오빠가 좀 가르쳐 줘. 이렇게 행동하면 죽는다는 두려움을. 그래야. 나도 더 예리해질 것 같아."

창 위로 피어오르는 오러. 그리고 그 위로 일렁이는 고대의 검기, 아니, 창기(槍氣).

캐치에 이어 두 번째로 독검(讀劍)의 경지에 이른 카트리나의 기세.

뭐지...?

허세가 아닌 것 같았다.

정말로 두려움이 없다고? 사람이 그럴 수가 있나?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오냐. 새겨 주마. 뭘 두려워해야 하는지. 아- 이런 짓 하면 바로 죽는구나, 깨닫게 해 줄게."

나도 면갑을 내리고 창을 치켜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