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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시체를 이용하면 돼. 그럼 백작과 마주할 수 있어."

세아. 그 똑똑한 녀석은 결국 방법을 찾아냈다.

"아하, 시체들에 주술적 처리가 되어 있다고 했지? 사기(死氣)가 너무 강해서 그 근처에선 마나도 안 느껴진다고."

"맞아. 마법진을 미리 설치하고 그 안에서 죽이는 방식으로 사기를 증폭시키는 것 같아."

"그럼, 내가 그 사이에 숨어 있어도 모르겠구나? 아무리 백작의 감각이 예민해도. 사기(死氣)가 그렇게 강하면."

끄덕.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세아는 지도를 펼쳤다.

"정보에 따르면 오늘, 루에라촌이 습격을 당할 거야. 마을 사람들이 죽고 그 시체를 수레에 옮기기 시작하면 그 사이로 파고들어. 시체인 척하고 가만 있으면 알아서 백작 앞으로 배달해 줄 거야."

그렇게 해서 나는 지금 시체 수레 안에 짓눌려 있는 중이었다.

막상 해 보니 상상 이상으로 고역이었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기 때문이다.

툭, 얼굴 위로 늘어지는 손.

이 손은 자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겠지 싶고,

부릅뜬 눈.

그 눈에 담긴 감정은 원한인지 걱정인지 알 수가 없고,

턱, 배 위로 꺾여서 걸쳐진 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굳은살이 큼직하게 박여 있고....

누구는 너무 어리고, 누구는 너무 나이가 많고....

죽어선 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죽어, 수레 속에서 같이 뒤엉킨다.

나는...

이들을 구하지 못했다.

되레 이용하고 있을 뿐.

마음이 어지러워져서 눈을 감았다.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단 한 사람만을 생각했다.

크시아스 백작.

놈을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그렇게 되뇌고 되뇌며 긴 시간을 버티다 보니 어느새 그 순간이 왔다.

"이렇게 제물로라도 진리에 닿게 해 주니, 이 얼마나 자비로운지."

조금씩 다가오는 역겨운 목소리.

왔구나.

오러 코어를 일깨워 오러를 달구기 시작한다.

한 발자국만 더.

한 발자국만 더.

마침내, 시체들 사이로 크시아스 백작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

나는 한껏 달아오른 오러를 단숨에 뿜어내며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보름달이 떠오른 밤하늘 아래, 검푸르게 작열하는 철혼(鐵魂, Iron heart)의 오러.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기습적인 한 수라 자부했지만,

쩌어어엉!

목을 노렸던 내 검은 크시아스 백작의 오른팔에 막혀 있었다.

흡혈귀와 상극인 성은(星銀)으로 주조한 왕의 검, 반로아가 깊숙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뼈는 베지 못했다.

치이이익!

성은(星銀)이 백작의 팔을 태우며 하얗게 수증기를 피워 올렸다.

뭉클뭉클 솟아나는 수증기 사이로 백작의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본다.

"오호. 란센이 아니냐?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냐?"

그는 놀라는 기색도, 아픈 기색도 없이, 태연한 인사를 건넸다.

그래. 쉽지 않을 줄 알았다.

#10화 반란 분자

스르르-

크시아스는 내 검을 밀어내고 팔을 빼냈다.

피가 진득하게 늘어지며 쫙 벌어진 팔의 상처를 붙잡아 맸다.

아물진 않았지만, 마치 꿰맨 것처럼 착 달라붙은 상처.

"흠.... 성은(星銀)인가? 회복이 잘 안 되는구나."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는 뒷짐을 지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어린아이의 재롱이라도 지켜보듯이.

"몸이 나았구나? 엘릭서라도 찾은 게냐? 축하한다."

누가 보면 자상한 상관인 줄 알겠다....

평온하고 여상한 태도.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런 말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가엽구나. 란센. 어찌 삶이 그리 파란만장할꼬. 고귀하게 태어나 시궁창에 처박히고, 다시 희망을 품었으나 절망해 버리고... 이제 기적처럼 재기했지만, 결국 패배하겠구나."

그의 두 눈에 선명하게 비치는 광신(狂神).

"아아, 좋은 일이구나. 이토록 극단을 오간 영혼이라니. 주인님께서 네 영혼을 무척 흥미로워하실 게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종교쟁이가 됐다더니...

크시아스가 제 입으로 '주인님' 이딴 소리를 할 줄이야.

"자, 란센. 부디 맛있는 절망을 보여다오."

스르릉-

크시아스는 커다란 칼을 한 손으로 뽑아 들었다.

새빨간 뱀파릭 오러가 뚜렷한 검의 형상을 만들며 쭉 뽑혀 나왔다.

흡혈귀가 되며 훨씬 더 강화된 그의 오러 블레이드.

콰우우!

휘두르는 것만으로 대기를 찢어발기는 위력.

나는 감히 마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몸을 던졌다.

쿠콰콰쾅!

크시아스 백작의 오러 블레이드는 나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상실한 오러를 아직 완전히 채우지 못했기에, 내가 뽑아내는 오러 블레이드는 구름에 덮인 태양처럼 희미할 뿐이었다. 연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시간도 고작 15분 남짓.

하지만 크시아스 백작의 오러 블레이드는 벼락처럼 눈부신 혈광을 뿜어냈고 후폭풍은 성난 거인처럼 사방을 후려쳤다.

용의 숨결처럼, 빛과 폭풍을 부르는 오러 블레이드.

이미 그 위력은 다른 소드마스터들의 그것을 아득히 초월한다.

검의 궤적을 따라 영주성이 우드드 뜯겨 나갔다.

"큭...!"

나는 오러 쓰레드를 최대한 많이 뽑아내 나를 향해 닥치는 충격파를 비껴 냈다.

"오호? 피했어?"

크시아스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거인이 내려다보는 것처럼 까마득한 중압감이 느껴졌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견뎌 냈다.

'집중해. 집중해야 한다.'

웅-

우웅-

반로아가 내 손 안에서 울어 댔다.

'검을 느낀다. 검의 마음을 읽는다.'

1만 년 전의 과거에서 마주했던 고대의 검술.

비록 정식으로 배운 건 아니었지만, 나는 평생 검을 다루었던 무인이었다.

나이트 벌슨이 인정한 왕국 역사상 제일의 천재였고.

그렇기에 단 이틀 수련했을 뿐이라도 어느 정도 흉내를 내는 건 가능하다.

예전엔 남들처럼 오러에만 집중했던 나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검 그 자체에 집중한다.

언제나 무겁고 폭급한 오러를 견뎌 주는 고마운 존재.

앞장서서 그 몸을 던지고 나와 함께 싸워 주는 소중한 존재.

검과 마주하고, 검의 목소리를 따라 검로를 정한다.

이전에는 미처 있는지도 알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지평선이 새로 열리는 순간이었다.

콰콰콰콰!

쿠구궁!

붉은 벼락이 사방에서 번뜩인다.

큰 돌들이 잘리고 터지고, 자신의 성이 막 흔들리는데도 크시아스 백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주시하며 검을 휘두를 뿐.

드래곤의 잠을 깨워 버린 모기 새끼마냥...

나는 매 순간순간이 구사일생이었다.

그 빗발치는 죽음 속에서 나를 인도한 건 한 자루의 검.

웅-

우우웅-!

검은 살아 있었다.

용문을 오르는 잉어처럼 기운차게 펄떡이며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주었다.

'이쪽이라고?'

'지금 타이밍이라고?'

검이 알려 주는 위기와 검이 알려 주는 궤적.

나는 끊임없이 검과 대화를 나누며, 매 순간순간 최선의 방향으로 검을 뿌리고 몸을 날렸다.

검이 알려 주는 정보에 내가 평생 쌓아 온 경험과 지혜를 실시간으로 얹는다.

카카칵!

칵!

쿠쿵!

눈앞에서 오러가 폭죽처럼 흩어진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으로 이어질 크시아스 백작의 오러 블레이드를 피해 냈고 빗겨 냈고 파고들었다.

줄곧 평온하던 크시아스는 처음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기묘한 검술을 쓰는구나? 좋다. 계속 그렇게 발악하거라. 마지막 순간까지. 그 덧없는 투쟁이 네 영혼을 더 맛있게 숙성시키겠지."

아주 건방진 소리를 한다.

"이봐, 크시아스."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의 눈썹이 한 번 더 꿈틀거렸다.

나참.... 이 상황에서 내 말투가 건방지다고 불쾌한 거야 지금?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나는, 널 죽일 거야. 그러려고 왔다고!"

쩌어어엉!

쿵! 쿵! 하고 성이 부서지는 소리만 가득하던 이곳에, 처음으로 아주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붉은 오러의 폭풍을 뚫고 나아간 내 검푸른 오러의 일격.

"쳇...."

나는 뻗었던 반로아를 회수했다.

크시아스의 목 바로 옆에서 떨어져 나가는 칼날.

타이밍을 제대로 노려 파고들었지만, 크시아스가 두르고 있는 뱀파릭 오러에 가로막혀 목을 베지 못했다.

크시아스는 제 목에서 떨어져 나가는 반로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놀랍군. 내 오러가 약했으면 목이 베일 뻔했어. 그게 반로아의 검술인가? 과연 기사의 왕국다워."

"...알고 있었어?"

"짐작하고 있었지. 뻔하지 않은가? 네가 아마 끝내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던 반로아의 2왕자겠지?"

"...."

"정말로 귀하구나. 그 귀한 영혼을 바치면 분명 내 염원을 이룰 수 있겠지!"

콰콰콰쾅!

다시 시작이었다.

혈광이 몰아친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폭풍 속을 나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위태로웠다.

그래도,

쩌어어엉!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야. 네 검으론 내 오러를 뚫을 수 없다."

쩡!

나는 몇 번이고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며 크시아스의 목을 쳐 냈다.

오러에 막히고 또 막혀도, 계속 같은 자리를 공략했다.

쩌엉!

크시아스의 목 근처에서 붉은 오러가 깨져서 비산한다.

불똥처럼 튀어 오르는 오러의 파편을 눈에 담으며 나는 이를 갈았다.

"과연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질까? 100번을 한다면? 1,000번을 한다면?!"

쩌어어엉!

크시아스의 검술이 눈에 익으면 익을수록 내가 그의 목을 치는 타이밍은 점점 더 빨라졌다.

같은 자리를 계속 치자, 철옹성 같던 크시아스의 뱀파릭 오러도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러 블레이드가 일으키는 충격파에 계속 노출되자 해당 부위에서 오러의 흐름이 약해진 것이다.

'집중! 집중...!'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나는 긴장을 더더욱 끌어올렸다.

크시아스는 터무니없는 강자였으니까.

100번을 싸운다면 나로서는 겨우 1번 이기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그 1번의 확률을 쟁취하기 위해.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쩌어어엉!

크시아스의 목을 10번쯤 쳐 냈을 때.

마침내 칼날이 그의 목에 닿았다.

치이이이-

크시아스의 목에 실금처럼 그어진 상처.

성은(星銀)에 타오른 살에선 담배 연기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크시아스는 주륵 흘러내린 피를 손으로 찍어 내려보았다.

"정말 대단한 검술이야. 정말 언젠가는 뚫릴지도 모르겠구나."

그의 입가로 비틀린 조소가 지어졌다.

"자, 그런데. 이렇게 하면 어쩔 테냐?"

저벅.

처음으로.

크시아스가 뒤로 물러섰다.

멈칫.

무심결에 그를 따라가려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긴장시켰다.

차자자작!

반쯤 무너진 성 위로 창백한 인물들이 내려섰다.

"망할 흡혈귀들...."

크시아스의 혈족들이었다.

흉흉한 싸움으로 성이 무너져내리는 바람에 뿔뿔이 흩어진 하급 혈족들 말고.

소드마스터들의 싸움에도 제 몸을 건사할 수 있었던 고위 혈족들.

성벽 위로 모습을 드러낸 흡혈귀들은 하나하나가 익스퍼트 상급이거나 최상급이었다.

"자, 춤을 춰 보거라. 너의 그 검으로 여기를 쳐 보거라."

크시아스는 실금이 그어진 제 목을 톡톡 치며 나를 조롱했다.

제 혈족들을 방패 삼아 뒤로 물러선 채로.

"하아...."

시간을 너무 끌었나? 제일 꺼리던 순간이 왔다.

크시아스와 1대1로 대면하려고 시체들 사이에 숨는 수고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거의 반쯤 무너진 영주성.

그 너머로 쿠샨시의 시내가 펼쳐져 있다.

백토를 구워 만든 하얀 벽돌집들이, 달빛 아래 소금 호수처럼 빛났다.

무너진 영주성의 파편이 곳곳에 날아들어, 놀란 사람들이 웅성웅성 이쪽을 쳐다본다.

반로아를 떠나 10년을 살아온 터전.

제2의 고향이자, 절망하고 주저앉아 버린 감옥.

오늘의 이 싸움의 결과로 이 도시의 미래가. 우리의 미래가 결정될 거다.

다시 처박힐지.

아니면 극적으로 날아오를지.

나는 이 아름다운 도시를 짓누르는 창백한 흡혈귀들을 쏘아보았다.

'바뀐 건 없어. 그저 벨 뿐이야.'

애초에 결심하지 않았던가?

칼이 깨지면 깨진 칼날로라도 베겠다고

뿌득.

나는 반로아의 칼자루를 부서질 듯 비틀어 잡았다.

* * *

"대장. 왜 우리를 죄다 불러 모은 거요? 거하게 사고 한번 치려고?"

번화가. 영주성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전망 좋은 식당.

반란 세력의 수장인 리베라 피에트로는 오늘 하루 이곳을 전세 내고 자신의 동료들을 죄다 불러 모았다.

"아니. 뭔가 이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첩보를 들어서. 만일의 사태에 유연하게 대처하려고 모은 거다."

그는 시원한 버터 코코넛을 쪽쪽 빨아먹으며 영주성에 시선을 두었다.

어젯밤.

란센 패밀리의 세아는 오늘 거사가 있을 거라며 예고를 해 왔다.

"내일 기회가 올 거예요. 다시는 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가. 잘 생각하세요. 그 기회를 잡을지. 아니면 놓치고 평생 후회할지."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리베라의 가슴은 뛰지 않았다.

도리어 차갑게 식었다.

'오늘... 란센 패밀리가 끝장나겠구나.'

입맛이 썼다.

쿠샨시에서 활동하는 여러 세력 중에서 그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게 란센 패밀리였다.

관리하는 사업체들에게서 받는 보호비도 가장 합리적이었고 도박, 마약, 인신매매 같은 더러운 사업도 벌이지 않았으며, 시민들을 격의 없이 대하는 이들.

갈수록 팍팍해지는 쿠샨시의 오아시스와도 같은 이들이었는데...

뭐에 몰렸는지. 그들은 자살을 선택했다.

'백작을 치긴커녕 아마 영주성의 방어도 뚫지 못할 거다.'

그 똑똑하던 세아가 왜 이렇게 무모한 작전을 벌이는 걸까?

공포에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쿠구구궁!

굉음과 함께 영주성의 옥상에서 붉은 벼락이 뿜어져 나왔다.

"크시아스...?"

선명한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 그건 틀림없이 크시아스 백작의 것이었다.

쾅! 콰콰쾅!

"허? 크시아스 백작이 싸우고 있는 건가?"

영주성에서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도 못했는데.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잠입해 크시아스 백작과 바로 맞붙는 데 성공했다고?

"와. 대장이 말한 게 저거였어? 누구야? 누가 저런 대담한 짓을 벌인 거지?"

"장난 없는데? 원래 오러 블레이드가 저렇게 강한 거야?"

"그럴 리가 있냐? 크시아스가 워낙 괴물 같으니까 저런 거지."

"와.... 저건 어지간해선 접근도 못 하겠는데?"

"미친. 영주성의 병력 대부분을 단숨에 무력화해 버리네."

사태를 지켜보던 동료들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다들 상상만 하고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일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리베라도 감탄했다.

'과연... 세아. 저걸 해내네.'

하지만,

'대단한 지략인 건 인정해. 하지만 이제 어쩔 거야? 결국 크시아스의 무력을 넘어서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데.'

결국 바뀐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쾅!

콰콰쾅!

쿠쿵!

영주성을 깨부수는 붉은 벼락이 멈추질 않았다.

계속 이어지는 벽력성은 당초의 예상과 달리 이 싸움이 제법 팽팽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방증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아직도 버틴다고?"

"상대가 누구길래...."

"저길 봐!"

누군가 가리키는 손가락. 박살 난 영주성 뿌연 먼지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깊은 밤이었지만, 다들 익스퍼트의 전사들이었기에, 달빛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검푸른 머리칼에 훤칠한 키.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는 잘생긴 얼굴.

"란센...?"

"란센이라고?"

"몸이 회복된 거야?"

"와.... 소드마스터!"

리베라의 동료들이 술렁거렸다.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전성기의 란센이 얼마나 강했는지.

크시아스조차 부담스러워하던 혈백작 들카슈를 격살한 일화는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대장. 이거 해볼 만한 거 아니야?"

"우리 계속 보고만 있어?"

리베라를 힐끗거리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료들.

하지만 리베라는 냉정하게 일갈했다.

"다들 가만히 있어! 허망하게 죽을 셈이냐?!"

"하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동료들을 눈빛으로 찍어누르며 리베라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눌렀다.

그는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크시아스가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두려운지.

그와 동료들은 반란 세력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사실 그런 거창한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백작을 향한 원한으로 어설픈 분풀이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크시아스는 이미 일반적인 소드마스터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강자였다.

그를 잡으려면 로버랜드 최강이라 불리는 5왕(王) 정도는 나서야 겨우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번쩍!

쩌어어엉!

번쩍!

쩌엉!

이상하다. 영주성에 휘몰아치는 붉은 벼락 사이를 꿰뚫으며 검푸른 섬광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쩌어엉!

그 검푸른 섬광이 백작의 목을 치고, 치고, 또 쳤다.

"어? 어?"

"저거...?"

백작의 오러는 단단했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있다.

오러 블레이드로 같은 자리를 계속 친다면 결국은 깨질 수밖에 없는 법.

란센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굴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리베라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생각하세요. 다시는 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를 잡을지. 아니면 놓치고 평생 후회할지.'

그의 귀에 세아가 했던 말이 메아리쳤다.

사위가 고요하다.

동료들도 싸움에 빠져들었는지 아무 말 없이 영주성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아...."

"저런...!"

영주성 위로 크시아스의 최상위 혈족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모두가 침음을 흘렸다.

"비겁한 놈들...."

"젠장!"

그런데, 푹푹 새어 나오는 한숨들 사이로, 활시위를 당기고 장비를 챙기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덜컥.

끼리릭!

절그럭.

리베라 피에트로였다.

동료들이 돌아보자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안하다. 도무지 못 참겠다."

리베라는 장비를 챙기고 테라스를 훌쩍 뛰어내렸다.

그대로 영주성으로 달렸다.

"좋아! 이거지!"

"역시 대장!"

"같이 갑시다!"

그 뒤를 쿠샨시의 반란 분자들이 신이 나서 따라붙었다.

#11화 기다리던 그 순간

화살 한 발 밤공기를 찢는 소리.

쐐애액!

내가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분위기는 바뀌었다.

"켁...!"

기분 나쁘게 나를 깔보던 흡혈귀 하나의 머리가 화살에 꿰뚫렸다.

짙은 노란빛의 오러가 번뜩였고, 화살을 맞은 자리에선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은화살!"

"화살에 오러를 담았어?!"

흡혈귀들은 당황했다.

제아무리 흡혈귀라도 저렇게 짙은 오러에, 그것도 은제 무기로 당했는데 재생이 될 리 없었으니까.

'근데 누가 이렇게 활을 기가 막히게 쏜 거야?'

원거리 무기에 오러를 싣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시선을 돌리자마자 보였다.

'리베라 피에트로.'

친하진 않지만, 아는 얼굴이다.

이 무법의 땅에서 정말 몇 안 되는, 명예를 아는 남자.

그가 흡혈귀들을 저격하며 달려왔다. 잔뜩 흥분한 전사들을 거느리고.

"다 죽여!"

"죽이고 싶었던 놈들이 다 여기 모여 있구나!"

뛰어난 전사들이 세 명 네 명씩 짝을 이루며 흡혈귀들에게 달라붙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블 클래스라 불리는 최고위 흡혈귀들을 상대하기엔 벅찼다.

전사들은 그 역량의 차이를 광기 어린 투지로 메웠다.

"너! 에델리나를 기억해?! 네가 피 빨아 죽인 에델리나. 내 약혼녀였어, 이 개자식아!"

"너구나.... 내 고향 마을을 몰살시킨 놈이...!!!"

미친 들개처럼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전사들의 기세에 흡혈귀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덕분에,

가로막혀 있던 내 앞에 길이 열렸다.

크시아스 백작에게로 향하는 길이...!

하지만,

"쯧. 한심한 놈들."

크시아스가 혀를 한 번 차는 순간, 분위기가 또 한 번 급변했다.

콰아아-!

주춤주춤 물러서던 흡혈귀들의 몸에서 돌연 붉은 오러가 휘몰아쳤다.

"크르르...."

놈들의 두 눈은 핏빛으로 물들고 입에선 증기가 흘러나왔다.

짐승처럼 돌변해서는 전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끄아아악!"

"아.... 에델리나.... 미안...."

전사들은 칼과 도끼를 흡혈귀의 몸에 꽂아 넣었지만, 흡혈귀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대로 달려들어 전사들의 목을 꺾고 뱃가죽을 뜯어 냈다.

내 앞으로 열리던 길이 서서히 다시 닫혀 갔다.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아까보단 훨씬 사정이 좋다.'

칭얼거릴 때가 아니다.

할 일을 해야 할 때.

뜨겁게 싸우는 전사들의 염원이 내 피를 후끈하게 데웠다.

쿠우웅-!

오러를 끌어올렸다. 솟구치려 하는 오러를 아래로 잡아 누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돌진기 [템페스트]로 앞을 막는 흡혈귀들을 조금이라도 빨리 제거하기 위해서.

숨을 크게 들이켜는 순간,

"형님! 저 왔습니다!"

호쾌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잘츠란?"

네가 왜 여기에?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세아, 미카, 제페토, 아샤, 데이지, 세클란 등등.

쿠샨시에 남아 있던 내 동생들이 다 모였다.

정확히는 칼 좀 쓸 줄 알고 17살 이상 먹은 애들이 다 모였다.

아니, 다치면 어쩌려고 여기에...!

하지만 녀석들은 내가 뭐라고 말릴 사이도 없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형님은 백작만 신경 쓰라고!"

콰아아앙!

일반적인 검보다 1.5배는 두껍고 긴 잘츠란의 대검이 흡혈귀 하나를 호쾌하게 날려 버렸다.

흡혈귀도 막는다고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검날이 와장창 깨지며 날아가 처박힐 뿐.

나는 감탄하고 말았다.

'쟤 언제 저렇게 늘었어?'

마지막으로 봤을 때랑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무거운 중검술로 유명한 후안백작가.

잘츠란 후안.

멸문한 백작가의 마지막 후계는 가문의 검술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저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쟤. 쟤. 이렇게 둘 먼저 공략해."

세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전장에 뛰어들었다.

검술보다는 군략으로 이름이 높았던 밀란 후작가의 후계답게 검술이 고강하진 않았지만,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해냈다.

"세클란! 똑바로 막아야지!"

"데이지! 죽으려고 환장했어?! 방금 나 아니었으면 너 죽었어!"

"너가 있으니까 그렇게 한 거잖아?!"

오늘 온 멤버들 중에 가장 어린 17살의 데이지와 세클란도 서로 티격태격하며 제법 활약을 했다.

"...잘 싸우네."

그동안 내가 동생들을 너무 어리게만 생각했었나....

나 혼자 다 짊어질 생각만 했지, 동생들과 같이 싸울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도움이 될 거란 생각도 못 해 봤고.

'하긴, 나도 쟤네만 할 때부터 매일 피를 뒤집어쓰긴 했었지....'

이를 악물고 싸우는 저 표정들을 보니, 이 싸움이 새삼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닌 우리 모두의 싸움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우우웅!

웅-!

이런 내 마음을 안다는 것처럼 반로아가 울어 댔다.

그래.

네가 생각해도 이 싸움,

지면 안 되겠지?

내 검 끝이 가리키는 곳.

그곳에 크시아스 백작이 있다.

흡혈귀들이 가로막고 있던 길은 활짝 열린 상태.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내 동생들 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러 댔다.

"죽이지 마! 란센 패밀리 놈들은 죽이면 안 돼!"

"예?! 하지만...."

"내 말 안 들려?! 귀한 제물이라는 거 몰라?! 팔다리를 자르는 한이 있어도 절대 죽이지 마!"

"아, 알겠습니다."

그제서야 시선을 돌린 크시아스는 나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란센. 투정이 지나쳐. 이제 더는 못 봐주겠어."

한 호흡 한 호흡마다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게 섞여 나왔다.

"언제는 봐준 것처럼 말하네. 근데... 제물이라고? 내 동생들이?"

나는 상체를 다시 앞으로 기울이며 오러를 끌어올렸다.

"그래. 귀한 제물인데.... 빨리 끝내야겠구나. 저 멍청한 놈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쿠우우우-!

그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크시아스 백작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눈앞이 아찔했다.

붉고 불길한 석양이 온 하늘을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긴장으로 굳어지려는 호흡을 억지로 부드럽게 풀었다.

'겨우 여기까지 왔어.'

지금 이 상황.

크시아스가 숨기고 있던 나머지 여력을 다 드러낸 이때가,

딱 내가 바라고 또 바랐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제,

승부수를 던질 때다.

콰아아앙!

디딤발에 오러를 쏟아 내는 순간, 내 등 뒤로 폭풍이 몰아친다.

반로아 왕실검법

돌진기 [템페스트]

후욱!

온 세상이 잉크 번지듯 지워지고, 훌쩍 떨어져 있던 크시아스의 얼굴만이 확대되듯 또렷해졌다.

어지간한 상대라도 결코 반응하지 못할 쾌속의 진격이었으나....

"먼저. 팔부터 뜯어내 볼까...."

크시아스의 두 눈은 정확하게 나를 뒤쫓고 있었다.

그리고,

쿠르륵!

바람을 넣은 풍선처럼 그의 팔이 기괴하게 부풀더니, 터무니없는 속력으로 내 팔을 향해 뻗어 나왔다.

그냥 손톱을 세워 내 팔을 뜯어내려는 것 같았다.

갑자기 빨라진 크시아스 움직임에 내 돌진 속도까지 합쳐지니,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피할 생각도 없었고.

번쩍!

오러를 있는 힘껏 끌어올려 피격점에 휘감는 순간, 눈부신 섬광이 세상을 뒤덮었다.

쩌어어엉!

가슴에 둔탁한 충격이 일며 차고 있던 목걸이 하나가 터져 나갔다.

뜨거운 열기가 훅 끼치고 자욱한 증기가 일어났다.

유적에서 찾아낸 목걸이.

아무래도 이 한 번에 박살 난 것 같지만... 이거면 됐다. 제 할 일은 다 한 거다.

내 팔은 멀쩡했고, 오히려 크시아스의 손이 저 멀리 튕겨져 나갔으니까.

"무슨...?!"

백작이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새끼.

귀엽네.

"[수호의 목걸이]라는 거다! 이 개자식아!"

일네온 던전에서 찾아낸 목걸이. 그건 사교도의 우두머리가 차고 있던 바로 그 목걸이랑 동일한 것이었다.

내 회심의 일격을 가뿐하게 막아 냈던 아티팩트.

물론 그것만으로 크시아스의 일격을 막을 순 없었을 것이다.

내 팔이 무사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찢겨 나간 소맷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얇고 검은 갑주에 있었다.

수호의 목걸이와 함께 찾아낸 마법 갑옷.

오러 쓰레드도 무난히 막아 내는 대단한 아티팩트.

거기에 팔에 두른 내 오러 실드까지.

목걸이, 마갑, 오러. 이 세 가지의 조합으로 크시아스의 일격을 튕겨 낼 수 있었다.

동시에 드러나는 크나큰 허점.

전력을 다한 공격 다음에는 숨길 수 없는 허점이 드러나는 법.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지금만큼은, 찾아드는 죽음에 대처하지 못할 거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순간이다!'

100번 싸워서 단 한 번 이길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지금 이 순간.

우우우웅-!

검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이어진다.

나는 크시아스의 목을 원했고,

왕의 검 반로아도 같은 걸 원했다.

두 마음이 맞닿는 순간, 검 끝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그 아지랑이는 다시 검푸른 오러로 물든다.

오늘 싸우는 내내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고 꼭꼭 숨겼던 비장의 한 수.

돌풍을 일으키는 파괴적인 오러 블레이드에, 흘러가던 바람마저 저절로 잘리는 날카로운 예기가 더해진다.

쿵!

한 번의 발디딤으로 모든 힘을 검에 몰아넣고, 최고의 집중력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일검을 휘둘렀다.

목표는.

몇 번이고 두들기고 두들겼던, 크시아스의 목.

사아악!

오러 블레이드와 고대 검기가 섞인 결과는 놀라웠다.

뻗어 나가는 반로아 앞에서 모든 게 저절로 길을 비켰다.

몇 번이고 크시아스를 지켜 줬던 단단한 오러도 조각조각 잘려서 낙엽처럼 흩어졌다.

최후의 보루인 오러 실드가 맥없이 흩어지는 걸 느낀 크시아스는 뒤늦게 눈을 부릅뜨며 오러를 더 강맹하게 끌어올렸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앞선 싸움에서 몇 번이고 내가 두들겨 놓은 탓에 목 부분의 오러는 영 흐름이 좋지 않았으니까.

크시아스의 어깨와 손에서 날개가 펼쳐지듯 강맹한 오러가 뿜어졌지만, 목만큼은 여전히 약점으로 남았다.

반로아는 그 틈새를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크시아스의 방심, 아티팩트를 이용한 예기치 못한 타이밍의 역습, 고대의 검기와 섞인 새로운 오러 블레이드.

이 모든 게 한순간에 어우러져서,

백작의 목을 쳤다.

서걱!

빙글 치솟아 떨어지는 백작의 머리.

털썩.

머리를 잃은 몸은 주저앉고, 백작의 머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멍청한 눈빛을 내게 던졌다.

퉁 퉁 퉁....

성벽 위를 구르다가 겨우 멈춰선 머리는 눈동자만 데굴 굴려 나를 응시했다.

화르르-!

그의 머리가 하얀 불길에 휩싸여 타올랐다.

제아무리 진혈의 뱀파이어라 해도 회생의 가능성 따위는 없었다.

오러 블레이드와 성은검에 당했으니까.

불길 속에서 크시아스는 입을 뻐끔거렸다.

충격이 가득한 목소리로.

"너... 그거... 소울 블레이드...?"

글쎄?

나도 모른다.

소울 블레이드는 그랜드마스터의 상징이었다.

소드마스터조차 뛰어넘는 진정한 초인의 전유물.

내가 쓴 게 정말 그 소울 블레이드일까?

모르겠다.

나야 그저 고대의 검기를 오러 블레이드와 섞어 봤을 뿐이니까.

소울 블레이드에 관한 소문은 많지만 진짜 어떤진 아무도 몰랐다.

그건 그랜드마스터를 만나 봐야 알 수 있겠지.

그래서 난 솔직하게 대답했다.

"몰라 인마."

"모른다... 니...."

참 허망하지.

모른다니, 이 한마디가,

쿠샨시의 지배자,

일대를 벌벌 떨게 한 뱀파이어 소드마스터, 크시아스 백작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한 마디였다.

#12화 뒷정리

"끄어어.... 크억...."

"크어어...."

크시아스는 쿠샨시에 존재하는 모든 흡혈귀들의 종주(宗主).

그가 죽자 하위 흡혈귀들은 심령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빠르고 강하고 교활하던 모습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미친 짐승처럼 침을 질질 흘려 대며 갈피를 못 잡고 휘청휘청거렸다.

촤아악!

"케륵!"

쩌어억!

"켁!"

싸움은 한꺼번에 끝났다.

치열하게 싸우던 놈들이 갑자기 한쪽 바퀴가 고장 난 수레처럼 빙글빙글 돌아 버리니, 곧장 칼과 도끼가 그들을 난자했던 것.

"뭐야...?"

"약 먹었나? 얘네 갑자기 왜 이래?"

당황하는 전사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사태를 파악한 건 리베라 피에트로였다.

"...설마?"

그의 시선이 란센을 찾아갔다.

"미친...!"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하얀 불꽃에 휩싸여 불타고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있었으니까.

"진짜... 크시아스를 죽였어...."

그러길 바라고 싸움에 뛰어든 것이었지만,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니 왜 믿지를 못하겠는지....

그만큼 그의 마음속에서 크시아스는 끝이 보이지 않는 괴물과도 같았다.

"진짜... 죽은 거야? 크시아스가...?"

핑그르.

리베라는 솟아나려는 눈물을 얼른 꿀꺽 삼켰다.

사나이 가오가 있지, 눈물을 보일 순 없다고 굳게 믿는 그였으니까.

대신 저벅저벅 란센을 향해 다가갔다.

피에 절은, 그의 검푸른 머리칼에 키스라도 갈겨 주고 싶다는 생각을 억지로 누르면서.

* * *

저렇게 재가 되어 사라질 놈에게 당해서 그 긴 시간을 절망 속에서 보냈나....

멍하니 잿더미가 되어 가고 있는 크시아스를 바라보다가 날 부르는 목소리에 풀썩 정신을 차렸다.

"란센 님."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리베라 피에트로가 보였다.

"아, 리베라 님."

가볍게 목례를 나눈 후, 리베라는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내게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읽은 기록에 따르면 종주를 잃은 흡혈귀들은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이지를 상실한다고 합니다."

"아, 그래서 이렇게 쉽게... 어? 근데 그러면 2, 3일 지나면 다시 괜찮아지는 겁니까?"

"네. 시간이 지나면 원 상태로 돌아옵니다. 그러니 지금이 크시아스의 잔당을 소탕할 좋은 기회지요. 허락만 해 주신다면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이 도시에 숨 쉬고 있는 모기 새끼들을 모조리 박멸하겠습니다."

"허락이라뇨. 저희가 부탁을 드려야 할 일인데요. 감사합니다."

서로 한 번씩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할 말이 남았는지 리베라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 일단 이 말씀은 꼭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리베라는 자세를 바로 갖추더니 한층 더 정중하게 각을 딱 잡아서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크시아스는 저의.... 아니, 제 동지들 모두의 원수. 란센 님 덕분에 원수를 갚을 수 있었습니다."

약간의 민망함이 느껴졌지만 나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되레 더 너스레를 떨었다.

"뭐, 고마우시면 앞으로도 우리 애들 잘 대해 주시면 됩니다. 당분간 협력할 일이 많을 텐데. 정말 고마워하시는 게 맞는지 제가 지켜볼 겁니다."

"하하. 깜짝 놀라실 겁니다."

내 뼈 있는 농담에 호쾌하게 웃은 리베라는 몇 마디 말을 더 꺼내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그대로 돌아섰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더 많긴 하지만, 일단 모기놈들 다 때려잡고 그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그런 사람이 있다.

자주 보지 않았어도 호감이 가는 사람.

잘 알지 못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

리베라가 그랬다.

그랬기에 나도 살짝은 내 진심을 드러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같이... 이 도시를 좀 더 살맛 나게 만들어 봅시다."

단순히 크시아스를 죽이고 끝이 아니라 앞으론 이 도시의 통치에 관여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리베라의 세력이면 도시를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내 뜻을 알아들었는지 흠칫 멈춰선 리베라는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악동 같은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아....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불쑥 들어오시니. 제가 어쩔 수가 없네요."

"네?"

"자, 여기요."

휙!

한 손에 탁 잡히는, 네모난 물체가 날아왔다.

낚아채서 보니 귀물(貴物)이었다.

귀한 리프 메탈로 연두색 몸체를 만들고, 갖가지 색깔의 보석 조각을 모자이크해서 사슴뿔 문양을 그려 낸.

역사가 느껴지는 오래된 물건.

'문장(紋章)...?'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아무리 봐도 가문의 문장으로 보이는 물건이었으니까.

그것도 이쪽 대륙인 로버랜드가 아니라, 반로아 왕국이 있던 대륙인 글로리랜드 스타일의 문장.

근데 이게 가문의 문장이라면, 이걸 준다는 건....

"이거...."

"네. 피에트로가의 문장입니다. 사실 저희 집도 300년 전에는 글로리랜드의 귀족 가문이었거든요."

"아니, 그런 문장을...."

리베라가 싱긋 웃었다.

30대 초반인 이 사람. 멋있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저도 나름 귀족으로서 예법을 배운 몸입니다. 그러니까 그거, 무슨 의미인지 다 알고 드린 거예요. 생각하신 그 의미가 맞습니다."

글로리 랜드에서 가문의 문장을 타인에게 준다는 것의 의미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럼. 일 마치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주군."

그대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주종의 맹세였으니.

케케묵은 귀족 예법에 맞춰 거창하게 허리를 숙여 보인 리베라는 곧 로버랜드 토박이다운 껄렁거리는 걸음으로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가문의 문장을 사탕 던져 주듯이 하네.'

우리 왕국에서 이런 충성 맹세는 3박 4일에 걸친 빠방한 의전이 기본이었는데....

리베라 피에트로... 이 사람.

역시 재밌다.

* * *

"그 사람이라면 그럴 줄 알았어."

세아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근데 말투가 리베라랑 좀 친분이 있는 눈치다.

"리베라랑 잘 알아?"

"그럭저럭. 내 정보들이 다 어디서 왔겠어. 그 아저씨한테서도 왔지. 대신 나도 알음알음 도와줬고."

나는 세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금이야 크시아스가 죽었으니 괜찮다곤 하지만... 반란 세력 수괴랑 협력을 했었다고? 그런 위험한 짓을....

세아는 내 시선을 살짝 피하며 변명하듯 말했다.

"때론 피하기보다는 마주 봐야 돼. 살아남으려면...."

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애들이 이러는 거 볼 때마다 반성을 하게 된다. 내가 그간 너무 무심했구나 싶어서.

툭.

나는 세아의 머리에 손을 한번 얹고는 녀석의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앞으로는 혼자 위험 짊어지지 말고 같이 상의해. 나 이제 정신 차렸으니까."

"...응."

세아의 무감각한 목소리에 아주 희미하게 웃음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녀석은 곧 그 희끗한 웃음기를 싹 지워 버리고 내 옆으로 따라붙으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아무튼 잘됐어. 잔당 처리는 리베라 아저씨한테 맡기고. 우리는 백작이 벌인 악행의 증거를 찾자. 백작을 깎아내리면 깎아내릴수록 시민들의 지지는 높아질 거야."

"그렇지. 도시를 통치하려면 시민들의 지지가 중요하지."

"응. 그래야 세금이 잘 걷히니까."

아, 세금.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맞는 말이네.

하여튼 영특한 녀석이었다.

세아는 순식간에 지휘를 내렸다.

우리 식구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우호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사업장의 대표들이나 시민들까지 불러서 금세 조사단을 꾸렸다.

반파된 영주성은 물론이고, 감옥과 법원, 창고까지 샅샅이 뒤져 백작이 벌인 악행의 증거를 모았다.

그리고 나랑 세아는 둘이서 따로 행동했다.

"난 예배당으로 갈 건데. 거기엔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르니까 오빠가 같이 가야 돼."

"예배당.... 하긴, 산 제물을 바쳤다는데, 웬 괴물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진 않을 것 같네."

"응."

"근데. 그러면 넌 안 오는 게 낫지 않아? 위험한데?"

"직접 눈으로 봐야 할 거 같아. 오빠가 잘 지켜 주면 문제없잖아."

"그건... 그렇지."

똑똑 부러지게 말하니까 뭐라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예배당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스산했다.

영주성에서부터 좌우에 높은 담벼락을 쌓아 만든 미로 같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졌는데.

담벼락이 해를 가려 그늘지고 서늘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모퉁이를 돌 때마다 그 너머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오싹함이 느껴졌다.

'진짜 귀신이라도 있나....'

소드마스터인 내 팔뚝에도 닭살이 올라오는 걸 보면 이건 단순한 기분 탓이라고는 볼 수 없는 문제였다.

뭔가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나는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게 칼자루 위에 손을 올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꼬옥....

갑자기 옷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세아가 유독 창백한 얼굴로 내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얼굴이야 무표정하지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니 무서운 모양이다.

'아, 그렇지. 세아가 유독 귀신 이런 걸 무서워했었지?'

크면서 워낙 의연한 모습만 보여 줘서 잊고 있었다.

이 녀석, 5살 때는 밤에 혼자 자지도 못했다.

반로아 왕국을 떠나 망망해를 거쳐 도망치던 그 배 안에서도,

또 쿠샨시에 도착해 일네온 던전에서 숨어 살아갈 때도,

다들 고단해서, 또는 그만 적응을 해서 쿨쿨 잘만 잘 때도 세아는 혼자 깨어서 내 옆으로 기어들어 오곤 했다.

어떻게 그걸 잊었을까?

한 손으로는 칭얼대는 데이지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달달 떠는 세아를 안고 잠이 들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짜식. 아닌 척해도 여전히 이런 으스스한 거 무서워했구나?'

근데 괜히 푸근한 마음이 들어서 녀석을 너무 오래 쳐다봤나 보다.

"아...!"

내 옷자락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달은 세아가 손을 싹 빼더니 시치미를 뚝 떼고 날 지나쳐 앞으로 치고 나갔다.

"...오해하지 마."

그래. 그래. 오해 안 할게.

"...진짜. 오해하지 말라고."

어어. 그래.

피식피식 웃으며 녀석의 뒤를 따라가는데.

후오어으어어어-

모퉁이 너머에서 훅! 불어온 바람이 아주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앞서가던 세아의 어깨가 딱 얼어붙었다.

슬금.

슬금.

천천히 발을 놀려 내 옆으로 돌아온 세아는 다시 내 옷자락을 잡았다.

아나...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네.

"놓치지 말고 꼭 잡고 따라와."

실실대면서 말하자 세아가 찌릿! 날 쏘아본다.

"...어린애 취급하지 마."

"그럼 그럼. 우리 세아 다 컸지. 올해로 20살이나 됐는걸?"

내 옷자락을 쥔 녀석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꼬불꼬불 길을 나아가 예배당에 도착했다.

내내 느껴지던 불길한 느낌과 으스스함은 다 착각이었다는 것처럼... 예배당은 텅 비어 있을 뿐 특별한 건 그 무엇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네. 유독 춥고 기분이 나쁘다는 것만 빼면. 아무것도 없어."

천천히도 둘러보고 꼼꼼히도 둘러봤지만, 정말로 나오는 게 없었다.

예배당엔 그저 크고 서늘하고 기분 나쁜 석상들만 서 있었을 뿐이었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제단에서 희미한 피 냄새가 난다는 정도가 그나마 특이점이랄까?

하다못해 크시아스가 빠진 종교가 뭔지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눈에 보이는 상징물들도 죄다 듣도 보도 못한 기괴한 것들뿐이었다.

"근데 오빠, 그거 뭐야?"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세아가 물었다.

"응?"

"가슴에."

"가슴?"

어라?

이게 왜?

가슴 위로 늘어진 아공간 목걸이에서 연두색 빛이 나고 있었다.

'이게 왜 빛이 나지? ...혹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아공간에 손을 넣고 책 한 권을 꺼냈다.

스릉-

금속성 표지가 서늘한 소리를 낸다.

"책?"

세아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응. 운명의 책."

며칠 전, 나를 1만 년 전 고대로 날려 보낸 운명의 책이 다시 한번 연두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이 아공간 목걸이 바깥까지 번져 나온 것이고.

근데... 왜 지금?

정작 발동시키려고 할 때는 꼼짝도 안 하다가...?

#13화 들킨 건가?

"운명의 책...! 그때 말했던 게 이거구나."

아주 드문 일이었다.

세아가 눈과 목소리로 저렇게 감정을 분출하다니.

심지어,

"그거 나도 봐도 돼?"

이런 요구도 했다. 언제나 호오를 드러내는 일이 적은 녀석이.

"어, 그래."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아가 운명의 책을 받아 들자마자, 그 빛이 돌연 사그라들었다는 것이었다.

"...안 되네."

어쩐지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

책을 뒤적거리던 세아는 결국 자신이 읽을 수 있는 고대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내게 책을 넘겨주었다.

"오빠한테만 반응하나 봐."

그 말대로였다.

우웅-

내 손에 들어오자마자 운명의 책은 다시 가늘게 진동하며 빛을 뿌렸으니까.

"왕가의 보물이라 그런가...."

내 혼잣말에 세아가 반응을 보였다.

"왕가의 보물?"

"응. 반로아 왕가가 대대로 수호해 온 보물."

"대대로...? 언제쯤부터였을까?"

"글쎄? 마도 시대? 이런 아티팩트는 마도 시대에나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럴까? 하지만 시간을 여행하게 해 준다니. 아무리 마도 시대 아티팩트라 해도 터무니없어."

"그런데 그게 되잖아?"

"...그러니까 이상하지."

확실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기는 했다.

빛을 발하고 있는 작은 책.

성만 한 크기의 거대한 장치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작은 물건에 그런 신적인 힘이 깃들어 있을 수 있는 걸까?

아무리 고대의 기술이라고 해도....

"거기다가 오빠가 정말 과거에 다녀온 거면... 그것도 이상해."

세아가 눈썹을 찡그렸다.

"응? 뭐가?"

"오빠가 엘릭서 마셔 버렸다며. 그럼 200년 전에 발견된 엘릭서는 뭐야?"

"어?"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정말 그렇네. 뭘까?

아, 그건가?

"내가 다 마신 게 아니라 절반밖에 못 마셨거든. 나머지 절반은 바닥에 떨어뜨렸고. 그래서 그런가?"

"다 마신 게 아니었어?"

"응."

"...그럼 200년 전 엘릭서는 절반만 발견됐던 거야?"

"모르지. 양이 얼마나 되는지까지는 못 들어봤으니까."

"나도 그래."

세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곰곰이 집중했다.

깊은 바다 같은 눈동자가 빨려들 것만 같다.

"그렇게 되면... 알 수가 없어지네."

"뭐가?"

"실제로 200년 전에 발견된 엘릭서가 절반 짜리라고 쳐도 말이야."

세아는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들며 말했다.

"원래는 온전한 엘릭서가 발견되는 거였는데 오빠가 마셔서 절반만 발견된 걸로 역사가 바뀐 건지.... 아니면 원래 절반만 발견되었는데 여태 모르고 살았던 건지. 알 수가 없어."

어라?

그런... 가?

"애초에 오빠가 간 그곳이 정말 과거가 맞을까? 정말 과거라면 미래.... 그러니까 지금의 역사를 바꾸는 것도 가능할까? 아니면 현재의 역사는 그대로 유지되고 또 다른 시간선의 새로운 역사가 탄생한 걸까?"

뭐야.... 얘 왜 이렇게 똑똑해.

나는 저런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지도 않았고.

내 어리버리한 얼굴을 흘깃 본 세아는 한숨을 폭 쉬었다.

"오빠.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야."

"그, 그래? 그냥 과거에서 좋은 거 가져오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지. 비록 1만 년이나 지난 과거라고 하지만.... 역사라는 건 아주 복잡해서 사소한 변수 하나만으로도 크게 변할 수 있다는 이론이 있거든."

"그, 그래?"

"응. 그럴 확률이 크진 않겠지만.... 만일의 경우엔 오빠가 과거에서 한 일로 인해 이 세상 전체가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설마. 그렇게까지?"

"당연하지. 가령 루세라스 문명이 오빠로 인해 멸망하지 않는다면? 그럼 어떻게 될 거 같아?"

"어... 그럼 지금이랑은 완전 다른 세상이 되는 거 아냐?"

"내 말이 그 말이야. 어쩌면 나도, 반로아도, 제국도 다 사라진 세계가 될지도 모른다고. 물론 오빠도 존재하지 않는."

"...그건 너무 이상하잖아?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바꾼 역사 때문에 내가 사라지면.... 누가 역사를 바꾼 게 되는 거야? 내가 없는데...?"

"아무도 모르지. 시간이라는 건, 꽉 잠긴 문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과거로 가게 되면 하나하나 신중하게 행동하고, 거기서 벌였던 일들을 잘 기억했다가 그게 현대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확인해야 돼. 알겠지?"

"으, 응."

내가 오히려 세아한테 배우네....

새삼 놀랐다.

이 아이는 대체 얼마나 똑똑한 건지.

만약 이 똑똑한 녀석이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제대로 배웠으면 어땠을까?

그런 아쉬움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갈 때, 세아의 목소리가 날 건져 냈다.

"근데 그거 열어 봐야 되는 거 아니야?"

아직도 연둣빛으로 환히 빛나고 있는 운명의 책.

꼭 열어 보라는 것처럼 책갈피 쪽이 유독 반짝거렸다.

하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지금은."

"왜?"

"생각해 봐. 지금 책을 열었다가 또 과거로 가게 되면?"

"...저번에도 한 20분 정도 실종됐었다고 했지?"

"그래. 내가 거기서 보낸 시간은 2시간 정도였고. 여기선 20분 정도 지났다고 하더라."

"시간 비율은 6대 1...."

"자세히는 모르지만, 행여나 이번에 갔다가 더 오래 거기에 머문다고 생각해 봐. 곤란하잖아? 지금 상황이."

"그건 그래. 확실히. 아직 영지군 쪽은 손도 못 댔으니까."

"그래. 쿠샨시에 난립하는 수많은 패밀리들도 문제고."

백작을 죽였고, 이제 리베라가 남은 흡혈귀들까지 싹 소탕할 예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쿠샨시에 질서가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크시아스가 거느렸던 영지군이었다.

지금이야 속전속결로 백작부터 죽이고 시작하는 바람에 영지군이 끼어들 틈새도 없었지만... 하루만 지나도 상황이 달라질 게 뻔했다.

영지군 안에는 백작에게 충성하는 이들과 속으론 백작을 경멸하던 이들, 또 돈만 준다면 누가 위에 있든 아무 상관 없는 이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이 우리와 리베라의 말을 고분고분 따를 리는 없다는 것이다.

이쪽에 명분이 있다고 한들,

충성파는 충성파니까 우리를 적대할 거고, 반대파나 실리파들도 쿠샨시의 통치를 누가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이견을 드러낼 가능성이 컸다.

거기에 백작의 가신으로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여러 패밀리들까지 가세하면...

어우,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니,

내가 꼭 있어야만 했다.

백작을 죽인 소드마스터라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찍어 눌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샨시는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테니까.

세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좀 창백해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맞네. 그거 얼른 집어넣어, 오빠."

"그래. 빨리 치우자."

운명의 책을 다시 집어넣기 위해 아공간 목걸이에 가져다 댔다.

그런데 그 순간,

파락!

이 미친 책이 갑자기 펄떡이는 연어처럼 멋대로 솟구치더니, 내 손을 뿌리치고 날아올랐다.

"어...?"

그러곤,

파라라라락!

저절로 책장이 펼쳐졌다.

나는 다시 책을 덮으려고 했지만, 마치 강제로 정보를 주입하는 것처럼, 펼쳐진 페이지의 글자가 먼저 내 눈에 박혀 들어왔다.

'루세라스력 4673년. 11월 21일 맑음. 스승님께서 사교도의 보물을 빼앗아 귀환하셨다....'

아,

망할.

째깍째깍째깍째깍

시작됐다.

시계 초침 소리.

시간의 강물.

낚싯바늘에 물린 것처럼 훅! 하고 멀어지는 현실.

"오, 오빠?"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 세아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나는 또다시 시간의 저편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다각 다각 다각

또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이미 상황에 던져져 있었다.

말을 타고 있었다.

망토를 두른 채로.

저번과는 꽤 달랐다.

전에는 1만 년 전이라고 해도 같은 장소였던 일네온 던전에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낯선 들판이었다.

여름인지 해는 짱짱했고 곳곳에 낮은 언덕들이 서 있는 멋진 풍경.

그 안에서 우리는 말을 타고 이동 중이었다.

'이번에도 일행이 있네.'

주변으로 보이는 건, 3명의 사람.

치렁치렁한 로브를 입은 2명의 늙수그레한 남녀.

그리고 내 바로 옆에서 말을 모는 건장한 체격의 무표정한 남자.

삐죽.

그 남자를 살피는데 돌연 소름이 돋았다.

'뭐... 뭐지 이 압박감은...?'

로브를 입은 두 명의 남녀도 범상치 않기는 했다.

1만 년 전의 낯선 차림새임에도 불구하고, 치렁치렁하고 주렁주렁한 차림새와 안장에 꽂혀 있는 기다란 지팡이가 왠지 나 마법사요, 하고 외치고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 눈엔 그 두 사람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말을 몰고 있는 장년의 남자.

그 남자에게서 나는 숨이 막히는 기세를 느꼈다.

사교도의 우두머리가 뿜어내던 불길함과도 비슷하지만... 그 격을 달리하는 압박감이었다.

이젠 나도 고대의 검기를 익힌 탓일까?

현대의 검사에게는 없는 그 무형의 기세가 더욱더 선명하게 나를 찍어 눌렀다.

두렵다.

그 마음에 나는 깜짝 놀랐다.

'두렵다고? 크시아스 백작마저 이긴 내가... 지금 두려워한다고?'

대체 뭐야, 이 남자....

긴장이 곤두선다.

결코 경거망동할 수가 없었다.

'그냥... 기세만이 아니야....'

일대의 마나 전체가 남자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소드마스터인 내가 질릴 정도로...

이 남자는 실제로 거대하고 강하다.

말로만 들어 봤던 그랜드마스터가 이럴까?

'그랜드마스터라 해도... 이게 말이 되나?'

아무리 초인이라도 이 정도로 강할 수 있는 건가?

홀로 제국도 무너트릴 수 있는... 태산과도 같은, 아니 태양과도 같은 기세였다.

그런 남자가 문득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근. 두근.

긴장으로 심장이 뛰었다.

남자의 눈빛을 간파할 수가 없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나를 관찰하는 건가?

나를 꿰뚫어 본 건가?

아니, 그냥 별생각 없는 시선인가?

그 알 수 없는 시선에 나 혼자 백 가지 천 가지 상상을 하며 숨 막혀 했다.

사자의 시선을 받는 토끼처럼 잔뜩 얼어붙었다.

한참 내 쪽을 바라보던 남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래. 란센. 우연히 만나 내가 제자로 삼았지."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아, 이번엔 내가 저 사람의 제자라는 설정이구나?

나는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네. 제자 란센. 스승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남자는 또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저 나를 내려다보기만 한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두 마법사에게 물었다.

"자네들 생각도 마찬가지인가? 내가 언제 이 아이를 제자로 거뒀지?"

마법사들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남자를 향해 극히 공경하는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예. 셀시우스 공. 란센 경은 비록 그 경지가 높지는 않으나, 마나를 직접 다룰 수 있는 특이한 체질이었습니다. 이에 관심을 주시어 1주일 전에 제자 삼으셨습니다."

"그래. 그랬지. 그랬어. 내가 제자로 거두었어. 1주일 전에 말야."

고개를 주억거린 셀시우스라는 남자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정말 신기한 일이 다 있군. 이건 마치 신의 개입으로나 가능할 법한 일 같지 않은가?"

뭔가 묘하다.

이 남자가 하는 말이.

사교도의 예배당에서 우두머리와 그 부하들이 날 대하던 태도와는 아주 달랐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위화감이 섞여 있다.

그가 나를 보는 시선도 그렇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아닌, 이질적으로 바라보는 듯한....

그냥 기분 탓일까?

하지만 묘하다.

나를 당연시하는 두 명의 마법사랑도 전혀 다른 태도이지 않은가?

남자는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혼자 웃음을 머금었다.

"듣거라. 나는 라이테나 셀시우스 대공이다. 천하제일검이라고도 불리지. 영혼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교도들을 박멸하는 게 요즘의 내 숙원이다. 란센 반로아. 그대는 1주일 전 나의 제자가 되었고 우리는 지금 나의 성으로 가는 중이다. 그대는 한동안 그곳에 머물며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말이 나의 불안함을 더욱더 키웠다.

지금 나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만 같지 않은가?

내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이건 마치....

"근데 정말 재밌는 일이야. 나한테 제자가 또 있는 줄은 정말 몰랐는데 말야."

나를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라이테나 대공.

"대체 어떤 운명이 우리를 엮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부탁하마. 부디 우리의 열망이 이루어지기를."

숨이 턱 멎는 것만 같다.

이건...

다 알고 하는 소리지? 맞지?

...뭐야.

나 들킨 거야?

#14화 천하제일검의 제자

들킨 거야? 정말?

짧은 순간에 무수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도망쳐야 하나?

일단 마법사들을 인질로 잡을까?

크시아스를 죽인 그 일검으로 다리를 어떻게든 찌르면 못 쫓아오지 않을까?!

여차하면 왼팔 정도는 내주고...!

폭발하는 생각들은 모조리 극단으로 치달았다.

내 본능이 그만큼 눈앞의 남자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침착해. 정신 차리자.'

나는 저 혼자 폭주하는 생각을 간신히 억눌렀다.

'괜찮아. 들켰다고 해도 적대적이지 않아. 아니, 오히려 아주 우호적이잖아?'

그랬다.

그가 말없이 지켜볼 때는 그 아득한 시선이 대체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일단 입을 열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확연히 달랐다.

호기심, 그리고 숨길 수 없이 새어 나오는 기꺼움. 그리고 '잘 부탁한다.'라고 말할 때는 동지애마저.

'대체 뭘 알고 있길래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거야?'

내 상식으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나라면...

내 옆에 갑자기 모르는 누군가가 끼어든다면...

그러니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난 낯선 사람이 내 동생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그리고 다른 동생들은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그 낯선 자를 자연스럽게 대한다면,

아니, 그러면 당연히 칼부터 뽑아야 되는 거 아닌가?

이 사람은 왜 이래?

혼란에 범벅이 되어 간다. 좋지 않다.

안 그래도 낯설디낯선 고대 시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휘둘리는 건 정말 치명적일 수 있다.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떨렸지만.

눈앞의 남자가 두려웠지만.

나는 심호흡을 하고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 어떻게 생각하면,

이건 어쩜 운명의 책의 정체를 밝혀낼 기회일지도 몰라.

"스승님. 저 역시 스승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를 모르시지 않습니까? 또,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갑작스레 나타난 인물이라는 거."

그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남들이 들으면 그냥 출신성분도 알 수 없는 나를 이렇게 제자로 삼아도 괜찮겠느냐고 묻는 말로 보이겠지.

하지만 우리 사이에서 이건 다른 의미였다.

내가 갑자기 '끼어든' 인물이라는 걸 당신은 알고 있지 않냐는 질문.

아니나 다를까.

"그렇긴 하지. 그래서 나도 내가 느끼는 지금 이 감정이 퍽 신기해."

라이테나 대공의 대답에도 우리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미묘한 뉘앙스가 섞여들어 갔다.

그는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눈으로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은 나의 목적과 합하며... 어쩌면 내가 진작에 동의한 일이라는 거야."

"...네?"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냥 저절로 느껴지는 것뿐이니. 그래서 신기한 거고."

뭔가 딴에는 내게 설명을 해 준 것 같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오히려 더 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뭐야. 말 좀 똑바로 하라고.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뭐가 저절로 느껴졌는데?

끔뻑끔뻑 대공을 바라보는데 남자는 싱긋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려주곤 먼저 말을 몰아 앞으로 치고 나갔다.

꼭, 긴장 풀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와, 진짜... 미치겠네.

왜 이러냐고. 당신.

* * *

라이테나 대공은 은근히 친절했다.

내게 관심을 끊고 무심하게 가다가도, 툭툭 말을 던지며 나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덕분에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가령 지금 가고 있는 기사의 도시, '글로잉스틸'은 그의 집과도 같은 곳이었다.

대공으로서 드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그는 그 부와 권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 큰 땅을 그냥 심복들에게 맡겨 놓고 자신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글로잉스틸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는 것 같다.

그는 이런 큼직큼직한 배경뿐만 아니라, 고대 시대의 상식이나 예법 같은 것도 넌지시 언질을 주어 나의 적응을 도왔다.

가령 밥 먹기 전에 다 같이 읊는 기도문을 천천히 또렷하게 외워 내가 쉽게 따라 할 수 있게 해 준다거나, 본인은 신분상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기사식 인사를 나를 위해 천천히 보여 준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솔직히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다른 이들이 날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난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모르는 거잖아?

다 나를 방심시키기 위한 수작일 수도 있다.

나는 이 남자도 이 세상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까.

'솔직한 마음으로는... 소변 보러 간다고 하고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근데 내가 제자라잖아. 저 사람의.'

욕심.

가슴이 드글 드글 끓어오를 정도로 큰 욕심 탓이었다.

라이테나 셀시우스 대공.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대한 남자.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

그에게...

검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욕심에 내 심장은 풍선처럼 부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는 고작, 어깨너머로 익힌 고대의 검술 한 자락으로 크시아스를 베었다.

고대 검술과 현대 검술이 합쳐졌을 때 어떤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최고의 스승에게 제대로 배운다면...?

상상만 해도 숨이 가빠진다.

이런 가능성을 앞에 두고 도망을 친다면 그건 검사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거지.

때문에 나는 갈등하면서도 계속 남자를 따라갔다.

'...지금쯤 동생들은 내가 없어져서 난리가 났겠지?'

백작이 죽고 혼란스러워질 쿠샨시를 내가 정리해 줘야 하는데....

영지군은 물론이고 좀 큰 패밀리들은 다 권력 좀 잡아 보겠다고 설칠 텐데....

그래도,

동생들과 리베라 씨에겐 미안하지만.

그래도...

'하루 이틀은 괜찮지 않을까...? 그럼, 여기 시간으로는 5일, 10일 정도는 머물러도 된다는 건데....'

나는 은근히 그렇게 바라며, 남자의 뒤를 따랐다.

어느 정도 시간이 있어야 뭘 배우든지 말든지 할 테니까.

안 왔으면 모르겠지만 기왕 온 거, 저번처럼 뭐라도 제대로 얻어 가야지

어차피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

그냥 지금에 충실하자.

이게 다 함정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원래 시간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들에 대한 걱정도,

다 있다. 있지만.

검사로서 내가 품은 욕심이, 작살처럼 내 가슴을 꿰뚫는다.

* * *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났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기사의 도시라는 이명으로 불리는 글로잉스틸은 인구 20만 정도의 아담한 도시였지만, 아주 활기찬 곳이었다.

따앙- 따앙-!

건물의 벽은 희고 이음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세련된 집들이 언덕을 타고 오르며 층층이 경치를 이루었고 어느 길로 가든 먹빛 돌로 잘 포장이 되어 있었으며, 대장간마다 망치질 소리가 가득했다.

'와아....'

고대의 도시에 와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지난번엔 햇빛도 안 드는 던전 안에만 있었으니까.

그리고 직접 목도한 고대의 도시는 충격 그 자체였다.

'저게 뭐야? 저절로 움직이는 수레? 웬 높은 탑은 이렇게 많고? 저건 공사하는 건가? 세상에, 무슨 건물 짓는 데 마법을 써?'

전체적으로 때깔이 달랐다. 예쁘게 채색된 간판과 멋을 낸 건물의 디테일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도 하나하나 고급스러운 빛깔이었다.

'저건 처음 보는 색인데.... 저런 염색도 가능한 거였나? 도시 전체가 미술관 같네.'

과연 마도 시대라고 해야 하나?

루세라스 문명이 굉장히 발전된 문명이었다는 건 여러 유적과 유물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긴 했지만... 실제로 겪어 보니... 그조차도 한참 과소평가 된 거였구나 싶었다.

내가 살아온 현대 시대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거리는 화려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부유했다.

다각다각다각

말을 타고 천천히 도시를 가로질렀다.

대공을 발견한 시민들은 가볍게 목례하며 인사를 건넸다.

"날씨가 좋습니다. 대공전하."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대공전하."

멈추지도 않고 그냥 목례만 까딱까딱하고 지나치는 사람들.

인사말도 굉장히 가볍고 평상적이었다

'...신기하네.'

우리 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공씩이나 되는 최고위 귀족이 길을 가는데 사람들이 멈춰 서지도 않는다고?

무법지대라고 불리는 로버랜드에서도 백작이 길을 나서면 사람들은 멈춰 서서 고개를 깊이 숙이는 게 기본이었다.

'근데 이것도 은근 괜찮은데? 간소하고. 즐거워 보여.'

나중에 내 왕국을 만들면 나도 이렇게 할까? 볼수록 친근하고 좋은데?

그렇게 도시를 관통하다가 느낀 특이한 사실 하나는, 지나는 사람 중에 기사 또는 기사 지망생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이었다.

기사의 도시라는 이명이 괜히 붙은 건 아니었나 보다.

"충!"

"대공 전하를 뵈어 영광입니다!"

확실히 그들의 인사는 시민들에 비해 각이 잡혀 있었다.

일단 제자리에 멈춰 섰고 왼손을 위로 가도록 해서 두 손을 칼자루 위에 포개 얹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대공은 시선을 스윽 마주치고 고개를 짧게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때마다 대공의 시선을 받은 이들은 뺨이 붉어지도록 기뻐했다. 두 눈에서 존경심이 뚝뚝 떨어졌다.

하기야 천하제일검이라는데 말해서 뭐 하겠어.

그렇게 인사의 파도를 헤치며 마침내 영주성에 도착했다.

영주성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아는 영주성들과는 많이 달랐다.

높은 성벽을 쌓아 만든 진짜 성이 아닌, 높은 담벼락에 둘러싸인 저택의 형태였으니까.

저택 앞에는 일단의 무리가 대공을 맞이하러 나와 있었다.

"스승님!"

그 무리의 가장 앞에선 여자가 금발에 푸른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그런데,

"...어?"

놀랍게도 구면이었다.

1만 년 전의 과거에서 아는 사람을 또 만난다고? 우연? 그럴 수가 있나?

"어...? 그대는?"

여자도 나를 알아봤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저 얼굴.

사교도들의 예배당에서 마주쳤던, 아이들을 구하러 왔다던 그 여기사가 틀림없었다.

"둘이 아는 사이더냐?"

우리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감지한 라이테나 대공이 묻자 여기사가 화들짝 각을 잡으며 대답했다.

"예. 스승님. 기억하시나요? 1년 전쯤에 사교도의 예배당에서 절 도왔다던 그 남자가 저 남자입니다."

"아, 그래. 특이한 검기를 쓴다고 했었지?"

"네. 맞습니다."

"잘됐구나. 아는 사이라니. 이제 네 후배다. 선배로서 잘 가르치도록 하거라."

"네?"

여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번에 직전 제자로 들였거든."

"제, 제 후배라구욧?!"

"그래. 제자로 일단 들이기는 했는데 알다시피 요즘 내가 많이 바쁘지 않느냐? 당분간은 네가 가르치거라. 검술이든 예법이든."

"네에?"

많이 당황했는지, 나와 대공 사이를 데굴데굴 굴러가는 여자의 푸른 눈동자.

근데 나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선배가 있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설마 아는 사람일 줄이야....

우리는 끔뻑끔뻑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건 도대체 어떤 인연일까....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는 걸까?

도통 영문을 모르겠는데,

반가움인지, 즐거움인지, 슬픔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 쪼가리 하나가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갔다.

'방금 뭐였지?'

괜히 의미심장하게.

#15화 선배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사람이 선배가 되어 나타났다.

이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운명의 책이 준비한 안배인가.

잠깐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어차피 고민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 사람은 선배고.

나는 앞으로 저 사람에게 고대의 검술을 배울 예정이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한꺼번에 생겼네.'

좋은 소식은... 저 기사 덕에 불안함이 조금 가셨다는 점이다.

저번에 본 그녀는 정의롭고 신념에 충실한 기사 그 자체였으니까. 그 스승인 라이테나 대공에게도 조금쯤 더 신뢰가 갔다.

나쁜 소식은, 대공에게 검을 직접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주 아쉽지만, 그래도 실망만 할 일은 아니다. 어쨌든 저 여자도 라이테나 대공의 제자. 그의 교육 방식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아방하게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건 패션인가?'

금발에 푸른 눈.

반듯하게 다려 입은 제복.

반짝이는 부츠.

칼처럼 딱 각을 맞춰 선 자세.

모든 게 완벽한데...

'머리가 왜 저래?'

그녀는 앞머리를 모아서 위로 묶은 채였다. 위로 빼꼼 솟은 금발 머리. 그나마도 대충 묶어서 잔머리가 삐죽삐죽 솟은 모습이 퍽 편해 보이기도 하고 귀여워 보이는 맛도 있긴 했는데.... 각이 딱 맞춰진 그녀의 복장과 함께 보면,

'좀 웃긴데?'

집에서 세상 편하게 머리 대충 묶고 뒹굴뒹굴 책을 읽다가 허둥지둥 복장만 갖춰서 달려 나온 모양새였다.

하지만 대공은 그녀의 헤어스타일에 대해 아무 언급도 없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럼 후배하고 인사 나누도록. 나는 여기 계신 마법사분들과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대공은 내게 눈인사를 건네곤 그대로 영주성 안으로 사라졌다.

여자와 나는 함께 대문 앞에 남겨져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여자는 한동안 황망한 표정이었지만 곧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는지 몸가짐을 바로 했다.

아방하던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다듬어진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선배를 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갑작스런 질책.

갑작스럽긴 했지만, 나도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래, 후배가 왔으니 군기 좀 잡아 보겠다 이거지?

뭐, 못 어울려 줄 이유도 없다.

착.

검자루 위로 두 손을 포개 얹어 예를 먼저 표했다.

착.

그러자 여자도 진지한 얼굴로 마주 예를 표했다.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 나는 입을 열었다.

"여기서 또 보네?"

순수한 반가움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여자는 눈썹을 꿈틀! 찌푸렸다.

"또 보네? 지금 그게 선배에게 쓰는 말투가 맞습니까?!"

음, 거 말투 가지고 되게 뭐라 하네.

무법 지대인 로버랜드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이 몸의 반항심이 꿈틀거렸지만, 일단 참았다.

저 여자는 나를 가르칠 사람.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죄송합니다."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해 말투를 정정했지만, 우리 선배님의 잔소리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후배님이 그간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저와 함께 스승님의 단 두 명뿐인 제자가 되었습니다. 아닙니까?!"

"...맞습니다."

"스승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언제나 용모 단정! 품행방정!"

워우....

이거 한두 번 혼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칼처럼 각을 딱 세우고 서서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혼을 내는데, 그 기세가 상당했다.

'으음.... 보기랑 달리 만만한 사람은 아닌가?'

지난번 사교도들이랑 싸울 때는 내가 사실상 갑의 위치였고 그래서, 좀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선배로 만난 지금은 만만치 않은 사람이란 느낌이 팍팍 들었다.

"특히 용모 단정!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십니까?! 대체 그 부츠는 언제 닦은 겁니까! 망토는 왜 그렇게 삐딱하게 걸쳤고요! 머리카락이 산발이군요! 대체 자기 신분에 대한 자각이 있는 겁니까?! 그러고 다니면 산적하고 다를 바가 뭡니까!"

가열 차게 나를 질책하는 선배.

나는 일단 자세를 바로 하며 그 질책을 잘 받아 냈다.

잘 보여야 했으니까.

근데 되게 깐깐하다. 깨물어도 이빨 하나 안 들어갈 것같이.

'저건... 그냥 이 시대의 헤어스타일인가 보네.'

흘깃. 선배의 머리 위, 삐죽 솟은 묶음 머리를 봤다.

흔들흔들거리고 잔머리가 뭉게뭉게 한 것이 자꾸 신경이 쓰였지만, 애써 관심을 끊었다.

저게 이 시대의 패션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저렇게 엄격한 참군인 같은 사람이 자기 머리도 신경 안 썼을 리도 없고.

그런데 선배는 내 찰나의 시선을 또 본 모양이었다.

"뭡니까? 왜 자꾸 제 머리를 힐끔거립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힐끔거리는 것 굉장히 나쁜 버릇입니다! 진중함이란 바로 시선에서부터 나오는 것으로...!"

건수를 물었다는 듯 또 잔소리를 퍼붓는 선배.

그런데...

"저기 이오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기사 하나가 선배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네?"

그녀를 부른 기사는 자기 머리 위쪽을 연신 가리키며 눈치를 줬다.

"네? 왜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방한 표정을 지은 선배는 더듬더듬 제 이마 위를 만지다가 위로 불쑥 솟은 묶은 머리에 손이 닿았다.

'오....'

세상에 저렇게 실시간으로 핏기가 빠지는 얼굴은 처음 봤다.

"저, 계속 이러고 있었어요? 스승님 앞에서도...?"

선배의 물음에 기사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끼릭끼릭.

딱딱하게 얼어붙은 그녀는 눈동자만 돌려서 나를 슬쩍 보았다.

아아.... 저것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게 절대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던 그 '힐끔거리기'라는 것이 아닌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른 선배는,

"끄아아악!"

결국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리며 대문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푸하하하하!"

"아고.... 어쩌냐. 후배 왔다고 그렇게 폼을 잡았는데...."

"푸흐흐. 쟤는 저거 죽어도 못 고쳐. 꼭 하나씩 빼먹는 거."

도망치는 선배의 등을 바라보며 폭소를 터뜨리는 기사들.

나도 그녀의 등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확실히 알았으니까.

'우리 선배. 만만한 사람이 맞았구나?'

그 중요하다는 첫인상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 * *

선배는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까 그러고 도망갔으면서 저녁이 되자 다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타났으니까.

물론 머리는 깔끔하게 빗어 내린 상태였다.

"이름이 란센 반로아 맞습니까?"

"네."

"통성명을 이제야 하는군요. 저는 이오딘 세롬. 대공 전하의 하나뿐인.... 아니지. 이젠 단 둘뿐인 직전 제자입니다. 대공 전하의 친위기사단인 호라이즌 기사단의 단원이기도 합니다."

차분하게 자기소개를 마친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말했다.

"스승님께 여쭤보고 왔습니다. 사실 란센 후배가 나보다 강할지도 모르는데, 제가 가르칠 게 있냐고 말이죠. 그런데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란센 후배가 검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하시더군요?"

"네. 그... 아지랑이 같은 거라면 초보적인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때 보여 준 그 색깔 있는 검기는 특이체질이기에 가능했던 것이지요?"

특이체질.

라이테나 대공과 함께 여기로 오면서도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사는 시대에선 대기 중의 마나를 호흡과 피부로 직접 빨아들여 배꼽 아래에 오러 코어를 형성하는 게 검술의 기본이었다.

그런데 이 시대 사람들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 같다.

나로서는 납득이 잘 안 갔다.

우리 시대엔 다 할 줄 아는 걸 왜 못 하느냐 하는 원론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마나를 직접 움직이는 게 불가능하다고?

근데 당신들도 오러를 지니고 있잖아? 그건 뭔데?

이오딘은 그 부분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우리는 보통 '영력' 또는 '의지'라고 부르는 힘을 통해 간접적으로 마나를 다룹니다."

"영력? 의지? 그게 직접 다루는 거랑 다른 것입니까?"

"다릅니다. 우선 시작은 검의 영혼을 깨우는 것부터입니다."

"검의 영혼...."

"네. 검령이라고 하지요. 검령이 가진 의지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베는 것.' 검령과 교감해 그 베겠다는 의지를 현실에 구현하면, 그게 바로 검기가 됩니다."

"아...."

확실히 고대의 검사들이 쓰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은 기묘했다. 오러의 양은 희박하면서 그 희박한 양에 비해 터무니없는 절삭력을 가졌으니까.

"마나는 그저 그 의지에 이끌려 모여들 뿐이죠. 우리가 직접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영력으로 검기를 먼저 세우면 거기에 마나가 달라붙어 검기를 강화합니다. 마나는 그저 거들 뿐."

점점,

가슴 안쪽에서 두근거림이 커졌다.

'완전히 새로워....'

마나와 오러가 아닌, 영혼과 의지라는 완전히 다른 토대 위에 세워진 새로운 검술.

이 세상에 그런 힘이 존재했다고?

완전히 새로운, 무한한 세계가 서서히 내게 그 진면모를 보이고 있다.

"마나를 직접 다루는 체질은 굉장히 유리할 겁니다. 그저 마나를 응축해 검에 담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검기를 깨뜨려 버리는 파괴력을 선보일 수 있으니까요. 그때, 사교도의 예배당에서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잠깐이지만 이오딘의 눈에 부러움의 감정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 감점은 곧이어 단단한 의지와 자긍심으로 뒤바뀌었다.

"그러나 잊어서 안 되는 것은, 영력이 기둥이고 마나는 지붕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둥을 바로 세우지 못한 채, 마나라는 지붕만을 쌓아 댄다면 그 성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란센 후배는 지금도 강하긴 하지만 기초를 바로 세우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오딘이 준엄한 눈빛으로 당부했다.

지금은 낮과 달리 완벽하게 정돈된 외양을 하고 있었기에 제법 멋이 살았다.

"낮에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란센 후배의 지도는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스승님께선 요즘 정말 바쁘셔서 또 출타를 하셨거든요. 또 앞으로 한 달은 떠나 계실 것 같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 스승님의 가르침을 전할 테니 후배는 너무 서운해하지 않도록 합니다."

"알겠습니다."

아니, 대공 그 양반은 언제 왔다고 또 벌써 떠났대?

대공에게 한 자락이라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쉽게 되었다.

부디 이오딘이 잘 가르쳐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자, 그럼 본격적인 수련에 앞서 란센 후배의 현재 실력을 평가해 보겠습니다. 검을 뽑고 검기를 일으키면 됩니다. 검, 뽑아!"

쩌렁쩌렁한 구령과 함께 나는 반로아를 뽑아 들었다.

햇볕 아래 순백의 검날이 드러나자 이오딘은 탄성을 터뜨렸다.

"대단한 명검...!"

그녀는 칼각을 잡고 서 있던 자세도 무너뜨리곤 반로아를 구석구석을 핥아 대듯 구경했다.

"와.... 뭐야 뭐야?"

"이건 재질이 뭐지?"

그녀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아닌 척하고 구경하고 있던 기사들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좀 뿌듯한데?

우리 왕가의 상징인 반로아가 이렇게 인정을 받으니까.

나는 뻐기는 기분을 한껏 느끼며 검기를 방출했다.

검의 영혼, 검령과 교감하며, 그 의지를 세상에 구현해 낸다.

우우웅-

잘게 떨리며 뚜렷한 아지랑이를 피워올리는 반로아.

나는 조금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어깨너머로 익혔을 뿐인데도 내가 만들어 낸 검기는 사교도의 예배당에서 이오딘이 보여 준 검기보다도 더 선명한 것이었으니까.

"흐음...?"

"음.... 역시...."

그런데 구경꾼들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좀 미적지근하달까?

이오딘도 마찬가지였다.

"잘 봤습니다. 그럼 이번엔 이 검으로도 한번 검기를 일으켜 보겠습니다."

이오딘이 건넨 것은 평범한 철검이었다.

조금 의아했지만, 아무튼 시키는 대로 했다.

"검, 뽑아!"

이오딘의 구령에 맞춰서 평범한 철검을 뽑아 들었다.

검령과의 교감을 시도했다.

그런데....

우... 우...ㅇ

잠깐 뭐야?

이거 왜 이래?

검기가 뽑혀 나오지 않았다.

검이 내 부름에 반응해 미세하게 울긴 했지만, 영 매가리가 없었다. 그나마도 한두 번 울고 나선 다신 울지 않았고....

당황스러웠다. 잘만 되다가 왜 안 돼 갑자기?

"역시 그렇군요."

이오딘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눈으로 묻자 그녀는 차분히 답했다.

"검기는 검이 가진 영혼의 힘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그녀는 긴 손가락을 쭉 뻗어 반로아와 내 손의 철검을 한 번씩 가리켰다.

"즉, 좋은 검일수록, 역사가 깊은 검일수록 더 강한 영혼의 힘을 가지고 있죠. 란센 후배가 쉽게 검기를 뽑아낼 수 있었던 건 그 검이 그만큼 대단한 명검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녀는 말꼬리를 늘리다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그런 대단한 명검을 가지고도 고작 그 정도 검기를 뽑아냈던 게 란센 후배의 현재 실력."

아...?

검이 좋으면 검기도 강해지는 거였다고...?

오러 전도율과 내구성 차이 말고는 별로 무기를 가리지 않는 현대의 오러와는 크게 다른 개념이었다.

'...그래서 그랬나?'

문득 스쳐 지나가는 기억은 반로아 앞에서 산산이 잘려 나가던 크시아스의 붉은 오러.

고대 검기와 현대 오러를 합치면서 터무니없이 위력이 증폭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반로아 자체가 파사(破邪)의 힘을 가진 검이니까 검기에도 파사의 힘이 깃들었던 거야. 그래서 그렇게 쉽게....'

새로운 사실에 놀라는 사이, 이오딘은 착! 하고 정자세를 취했다.

"그럼 평가 내리겠습니다. 현재 후배의 실력은 익스퍼트 하급. 그중에서도 간신히 입문 수준입니다."

"하급... 입문...."

"네. 하급은 독검(讀劍)의 단계이지요. 검의 마음을 읽어 검기를 뽑아내고, 검이 알려 주는 길대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경지를 말합니다."

반로아를 들고 크시아스와 싸웠을 때 느낀 바로 그 감각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곤란하군요."

이오딘은 눈썹을 찌푸렸다.

"하필 교류회 기간인데.... 지금 수준이면 많이 곤란합니다."

그게 뭐죠?

"자세한 건 추후 설명하겠습니다. 지금은 그냥 중요한 행사라는 것만 기억하면 됩니다. 아무튼 2주 뒤, 교류회의 마지막 날까진 중급. 그러니까 체검(體劍)의 경지엔 올라 주어야 합니다. ...골치가 아프게 되었군요."

이오딘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교류회보다는 다른 게 더 궁금했다.

"체검(體劍)의 경지는 또 무엇입니까?"

"익스퍼트 중급. 검의 기운을 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경지입니다. 다양한 신체적 능력이 생기고 더 기민하게 검의 의지를 읽고 활용할 수 있습니다."

흥미진진했다

고대의 검술.

무궁무진하지 않은가?

"그럼 선배님의 경지는 무엇입니까?"

내 질문에 이오딘은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저는 얼마 전에 소드익스퍼트 상급, 그러니까 검탁(劍托)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검탁(劍托)의 경지?

"검이 스스로 움직이는 경지입니다. 생각의 속도보다 빠르게 벨 수 있습니다."

잠깐,

생각하기도 전에 검이 먼저 나간다고?!

그러면,

반응 속도가 아예 0이야?

검사에게 있어서 그건....

'사기잖아?'

두근.

너무나... 탐이 났다.

고대 시대로 넘어온 지 하루하고 한나절.

나에겐 목표가 생겼다.

검탁(劍托)의 경지!

꾸욱.

손에 쥔 검을 꽉 쥐었다.

'그래. 오늘 밤은 특훈이다!'

일단은 이 평범한 철검으로도 검기를 뽑아내는 것부터...!

#16화 경험치

이오딘 세롬.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천하제일검 라이테나 셀시우스의 유일한 직전제자였던 기사.

그녀는 고민이 많았다.

"출신 성분도 불분명한 두 번째 제자라.... 다들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겠지...?"

기사의 도시 글로잉스틸은 라이테나 셀시우스 단 한 사람의 힘으로 쌓아 올린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와 한 수라도 겨뤄 보고 싶어 하는 기사들,

그를 존경하는 기사들,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기사들,

그렇게 뛰어난 기사들이 모여들었고, 뛰어난 기사들이 모여 있으니 그들을 따라 또 다른 기사들이 모여들어 마을이 형성되었다.

기사가 모인 곳에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기사라는 족속은 부유하며, 수많은 장비와 사치품을 소비하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를 공급하기 위해 다시 상인과 장인들이 모여들었고, 그렇게 사람이 모이니 또 필수재를 공급하기 위해 농민과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마을은 점점 커져 도시가 되었다.

도시 전체가 라이테나 셀시우스라는 단 한 명의 거인만을 쳐다보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그러니,

이 도시에는 라이테나 대공의 직전제자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자들, 혹은 자신의 친척이나 자식, 제자를 그의 제자로 꽂아 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드글드글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란센 반로아가 어떻게 보일까?

이오딘 세롬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온갖 시기, 질투, 미움을 헤쳐 나가며 겨우 지금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으니까.

"다들 교류회만 기다리고 있겠지. 어떻게든 망신을 주고 흠을 잡으려고 거품을 물 거야."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교류회는 도시의 젊은 기사들과 견습 기사들 모두가 열망하는 자리였다.

이 도시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카데미.

라이테나 셀시우스 대공이 직접 설립한 '호라이즌 사관학교'를 필두로 사설 아카데미, 검술 연구회, 검술 학원.... 별별 것이 다 있다.

그곳 생도들 모두가 열망하는 것이 바로 교류회 참가였다.

30세 미만의 젊은 기사와 견습 기사들의 지원을 받아 1달 동안 호라이즌 기사단이 직접 강의를 맡고 합동 훈련과 실전 훈련을 진행한다.

호라이즌 기사단은 세계에서 가장 이름 높은 최강의 기사단.

라이테나 대공이 직접 뽑고 가르친 그들에게 배운다는 건, 어떤 의미로는 간접적으로나마 대공의 가르침을 받는 것과도 같았다.

거기다가 잘만 하면 호라이즌 기사단에 입단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으니,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교류회 마지막 날.'

직전제자의 검술 시범.

그리고 대련.

그게 전통이라 것. 그게 문제였다.

"후우.... 란센 후배도 이번에 검술 시범을 보여야 할 텐데.... 거기다가 대련 신청도 죄다 후배에게 쏟아지겠지?"

사실 란센의 무력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건 이오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사교도의 예배당에서 보여 준 무력만 생각해도....

익스퍼트 상급이 된 지금의 자신이 이길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문제는 그의 검술이 어떤 측면에서는 '반칙'이라는 점이었다.

'다들 흠을 잡을 거야.'

특이체질 빼면 볼 거 없지 않냐고.

검에 대한 이해도 자체는 형편없다고.

심지어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오딘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체검. 어떻게든 체검까지는 익혀야 돼. 욕을 안 먹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야 면목이 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정답이었다.

하지만...

"근데 이제 익스퍼트 입문 수준인 사람이 무슨 수로 체검을 익혀? 고작 2주 만에...?"

이오딘은 자신의 반짝이는 금발을 쥐어뜯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파구가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야 돼.... 스승님 이름에 먹칠을 할 수는 없어."

사람의 질투와 악심은 지독한 것이어서,

어떤 미친 자들은 대놓고 스승님을 욕하기도 했다.

제자들 꼴 좀 보라고. 늙어서 노망이 난 거 아니냐고.

이오딘 본인이 겪어 본 일이었기에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정작 스승님은 그런 걸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이오딘은 참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건 그녀의 트라우마였다.

"나나 란센 후배가 욕을 먹는 건 괜찮아. 하지만 스승님까지 언급되는 건... 안 돼. 절대 안 돼...!"

쿵! 쿵!

작고 동그란 머리를 벽에 박아 가면서까지 고민하는 이오딘.

밤이 깊었는데도 그녀의 방에선 쿵쿵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 * *

아침 훈련 시간.

나는 가볍게 몸을 풀고 있다가 다가오는 이오딘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선배님? 못 주무셨습니까?"

어째 이오딘은 밤을 꼴딱 새운 나보다도 더 엄청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푸석푸석하고 다크서클이 길게 내려왔다.

늘 그렇듯 오늘도 각이 딱딱 잡힌 셔츠와 바지, 반짝이는 부츠를 신었으나, 머리 빗질을 까먹었는지 꽤나 산발이었다.

완벽을 추구하면서도 늘 하나씩 빠뜨리는 모습이 참으로 한결같다.

'...뭐, 스트레스도 많아 보이는데 모른 체해 주자고.'

그런데 이런 나의 사려 깊음은 알지도 못하는지, 이오딘은 나를 찌릿! 째려보았다.

그러다가 혼자 한숨을 푹 내쉬고는 철검 하나를 내게 던졌다.

"그건 썩 질이 좋지 않은 훈련용 검입니다. 당분간은 이걸로만 수련할 겁니다. 일단은 그런 질 나쁜 검으로도 검기를 일으키는 것부터 시작해 보죠."

그렇게 말하더니 또 혼자 중얼거렸다.

"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심화 과정을 해도 부족한데.... 근데 달리 방법이...."

왜 저러는 걸까?

의아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지금 나는 새로운 검술을 본격적으로 배운다는 기쁨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팅-

검을 뽑아 들었다.

확실히 질이 좋지 않은 훈련용 검이라고 하더니, 소리부터가 영 둔탁했다.

잠재된 가능성이 굉장히 낮은 검.

하지만 그래도 검은 검이고,

검에게는 그 영혼이 있게 마련.

'어젯밤에 들고 연습했던 애보다는 오히려 상태가 더 나은데?'

우우우-!

우웅-!

처음 잡아 보는 낯선 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검령을 느끼고 녀석을 자극하자, 훈련검 위로 피어오르는 날카로운 아지랑이.

밤샘 훈련의 성과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어제 이오딘 앞에서 시범을 보였을 때만 해도 뽑아내지 못했던 검기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좋아. 완전히 익숙해졌네.'

스릉-

승-

날카롭게 제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검을 허공에 몇 번 휘두르고 난 뒤, 나는 이오딘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저러고 있네.'

뭔가 고민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선배님! 이오딘 선배님!"

큰 목소리로 부르자 이오딘은 그제야 깜짝 놀라며 두 눈에 초점을 잡는다.

"으, 음? 무슨 일이죠? 검기를 형성하는 연습을 하라고 내가...."

"형성했습니다."

"네?"

"했다고요. 검기."

나는 한 발짝 물러서며,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검을 좌에서 우로 한번 그었다.

스릉-

시원하게 공기를 가르며 나아가는 검.

"어...?"

이오딘이 눈을 깜빡거렸다.

"어어...?"

그 눈이 점점 커진다.

"어어어?!"

그녀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한 겁니까!?"

"네?"

"아니. 어제만 해도 못 했잖아요? 어떻게 하루 만에...!"

"밤새 연습했습니다."

"아무리 연습을 했어도 그게 될 리가.... 아무리 뛰어나도 1주일 이상은 걸리는...."

"되던데요?"

입을 몇 번 뻐끔거리던 이오딘.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내 손을 맞잡았다.

어쩐지 신이 난 듯했다.

"잘됐습니다. 어쨌든. 정말 잘됐습니다. 이러면 바로 심화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다."

심화 단계!

반갑기 그지없는 단어가 아닌가?

스릉.

이오딘은 검을 뽑아 들고 나와 마주 보았다.

"어떤 검으로든 검기를 뽑아내는 게 자유로워지면, 그다음 단계는 검령을 더욱 크게 일깨우는 겁니다. 검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고, 검과 나 사이에 신뢰를 다져야 합니다."

"그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오딘의 분위기가 변했다.

"생사결에 가까운 대련이 가장 좋은 방법이죠. 검기는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검과의 대화에 집중하며 겨루는 겁니다."

어딘가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이 싹 사라지고, 내 앞에는 그저 예리한 칼날처럼 다듬어진 한 사람의 기사가 서 있을 뿐이다.

좋네.

익스퍼트 상급이 되었다더니, 확실히 이전에 만났을 때랑은 기세가 전혀 달라.

나도 천천히 검을 들어 이오딘을 겨눴다.

안 그래도 궁금했다. 지금의 나는 고대의 검술을 어디까지 상대할 수 있을지.

이오딘과 나의 시선이 부딪히는 순간,

카아아앙!

쩌어어엉!

칼날과 칼날이 부딪히며 불똥을 튀겨 냈다.

* * *

웅성웅성

란센과 이오딘이 격렬하게 검을 나누는 연무장.

각자의 수련을 하고 있던 호라이즌 기사단의 단원들은 하나둘 움직임을 멈추고 둘의 대련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왜 저렇게 잘 싸워?"

"저게 말이 돼? 이제 익스퍼트 하급 아니야? 검이 알려주는 길도 굉장히 제한적일 텐데?"

"오히려 이오딘이 밀리는 거 맞지?"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타고난 센스와 뛰어난 검법으로 자신보다 경지가 높은 사람을 이기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상대는 무려 익스퍼트 상급에 이른 이오딘.

아무리 잘났어도 익스퍼트 하급이라면 검을 제대로 뻗기도 전에 막혀야 하는 게 당연했다.

예전 란센이 더 우월한 오러와 신체 조건을 가지고도 사교도의 우두머리에게 가로막혀 쩔쩔맸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의 란센은 전혀 달랐다.

"이오딘을 완전히 꿰뚫고 있어."

"상황을 돌파하려고 쾌검을 쓰면 보법으로 타이밍을 잡아먹어 카운터를 노리고, 부드럽게 받아넘기려 하면, 쾌검으로 다른 곳을 치네."

"이오딘의 무기들을 죄다 봉쇄시켰어."

오러와 검기를 쓰지 않는 순수한 검술의 대결.

거기서 란센은 오히려 이오딘을 압도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경지가 깊을수록 검령이 전해 주는 정보는 방대해진다.

지금 란센과 이오딘의 경지 차이라면, 사실상 란센 쪽은 눈을 가리고 싸우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란센은 오히려 이오딘을 수 싸움으로 압도했다.

혼란스러워하는 기사들의 뒤통수를 걸걸한 목소리가 때렸다.

"보고도 모르겠나? 한심한 놈들."

"단, 단장님!"

곰과 같은 덩치에, 얼굴에 길게 칼자국이 난 남자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브룩 드나르.

호라이즌 기사단의 단장.

무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초인이며 천하에서 가장 강한 10명의 기사를 뽑는다면 반드시 한 자리를 차지할 절대강자였다.

그는 얼굴을 씰룩여서 살벌한 웃음을 만들며 란센을 평가했다.

"저놈, 경험치가 엄청나게 높아."

"경험치 말입니까?"

"그래. 모르긴 몰라도, 온갖 수라 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게 틀림없어.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은 넘겼겠지. 그러니 저런 대응이 가능한 거다. 자신이 타고난 센스와 경험에서 얻은 전술로 경지의 차이를 극복하는 거지."

"그런...."

"이제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데 실전 경험이 그렇게 많다고...?"

놀라서 웅성거리는 기사들 사이로 브룩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처음 보는 생소한 검법이지만, 굉장히 유서 깊은 명문의 검법이다. 보면 알 수 있어.'

상대의 약점을 정확하게 찌르는 검법으로 서서히 이오딘을 몰아붙이는 란센.

결국.

카아아앙-!

"이오딘. 결국 검탁(劍托)까지 꺼내 들었구나."

반 발자국씩 처지던 이오딘의 대응이 갑자기 빨라졌다.

0에 수렴하는 반응 속도로 란센의 압박을 빠르게 걷어 낸다.

검이 스스로 길을 찾아 뻗어 나가는 경지, 검탁(劍托).

그 가공할 움직임을 대하게 되면 그물에 걸린 것처럼 답답함을 느껴야 하는 게 당연한데...

란센은 오히려 두 눈을 빛내며 입가에 미소를 피워 올렸다.

그가 더 깊이, 더 진하게 검과 대화를 나누며 집중력을 높이는 게 보였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성장한다고...? 저런 게 가능한 건가?'

브룩 드나르는 혀를 내둘렀다.

저런 기사는 본 적이 없었다.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는 라이테나 대공도 저렇게 빠르게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 같은데....

"역시 주군이야. 이번에도 엄청 재밌는 놈을 주워 오셨잖아?"

란센을 지켜보는 브룩의 두 눈에 호기심과 호감이 짙게 깔렸다.

#17화 수련

"교류회라...."

오늘 훈련이 끝난 뒤, 이오딘은 13일 뒤에 있을 교류회를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걱정도 함께.

행여나 라이테나 대공의 이름에 먹칠을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녀의 마음은 알겠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알 바?'

라이테나가 진짜 내 스승도 아니고.

물론 유쾌할 리는 없다. 별 시답지도 않은 것들이 나를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거. 기왕이면 찍소리도 못 내게 밟아 주는 게 좋지.

하지만, 애초에 그때까지 내가 이 과거에 머물지도 의문이었고....

아무튼지 간에 지금 내 관심사는 하나뿐이었다.

'검탁(劍托).'

아, 고대 검술의 이 방대한 세계여.

말로만 들었던 검탁을 오늘 목도하였도다.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서 오히려 반격까지 가할 줄이야.'

치밀한 설계 끝에 결정타를 꽂아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끝없이 심리전을 걸어서 이오딘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줄였고, 템포를 가지고 놀며 그녀를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그녀는 마침내 그녀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한 수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고.... 그게 바로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검이 살아 있는 것 같았어.'

이오딘의 사선 베기를 보는 순간 준비했던 카운터를 휘둘렀다.

승리를 확신했건만, 이오딘의 검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저절로 움직여서 내 비장의 일격을 쳐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불쑥 뻗어 나오던 그 검.

오소소

지금도 생각만 하면 소름이 돋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 밤도 잠들 수 없었다.

오늘도 수련이다!

어제와 달리 반로아를 꺼내 들었다.

어제는 싸구려 철검을 들고 수련을 했으니, 오늘은 천하의 명검을 들고 수련을 할 생각이다.

저마다 장단점이 있다.

새로운 경지를 개척할 때는 더 쉽게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명검이 좋고, 이미 가본 길을 더 꼼꼼히 닦을 때는 교감을 나누기 어려운 싸구려가 좋고.

오늘은 새로운 경지를 목표로 수련한다.

고대 기준으로, 익스퍼트 하급을 넘어 중급의 경지.

체검(體劍).

"후우우...."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훙- 후웅-

반로아를 느끼기 위해 집중했다.

우선은 외적인 것부터.

이 녀석의 무게. 형태, 질감, 소리, 곡률, 무게중심. 모든 것을 느끼고 빨아들인다.

그걸 이해하고 자유자재로 다뤄 나가며 조금씩 조금씩 녀석의 영혼에 접근했다.

승-

스릉-

점점. 휘두르는 검 끝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러다가,

우우웅-

마침내 녀석에게서 엷은 떨림을 느꼈다.

'옳지. 괜찮아. 할 수 있어.'

나는 파트너와 춤을 추듯, 작은 짐승에게 손을 내밀듯, 조심스럽고 친근하게 반로아의 검령에게 접근했다.

'보여 줘. 네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네가 품은 의지를'

우우웅-

검 끝으로 피어나는 아지랑이.

나는 더욱더 부드럽게 검령과 교감하며, 검의 의지를 내 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체검(體劍)은 오러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고대의 검사들이 신체를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언뜻 생각하면, 이미 오러를 다루는 나에게는 쓸모가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소드 오러와 검기를 합쳤을 땐, 그랜드마스터의 소울 블레이드처럼 보이는 현상을 만들어 낼 수 있었어. 그렇다면 몸속에서 검의 기운과 오러를 합치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한 발 한 발,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다가가는 걸까?

글쎄,

그래도 좋고, 아니면 더 좋다.

이게 그랜드마스터의 길이라면, 나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10명을 넘지 않는 초인의 반열에 드는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도리어 그 초인들조차 뛰어넘을, 완전히 새로운 무기를 갖추는 거고.'

솔직히,

상관있나?

오러 없이도, 단지 검만으로도, 이토록 드높은 경지가 존재하는데....

나는 하얗게 빛나는 달빛 아래에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예전에 어떤 현자는 주장했다.

달과 별은 사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고.

그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올라, 달의 크기를 측정하고 말했다.

이토록 높이 올라와도 달의 크기에서 차이를 느낄 수가 없구나. 달은 참으로 멀리 있구나.

매일 보아 왔기에,

너의 거대함을 알아보지 못했구나.

지금 검이 내게 주는 느낌이 딱 그랬다.

늘 보던 달처럼, 늘 가지고 다녔던 검.

그랬기에 도리어 알지 못했다.

그 안에 얼마나 아득한 경지가 숨어 있는지.

그저 더 특별해 보이는 오러에만 관심을 쏟으면서 살아왔었다.

우웅-

웅-

내 손안에서 잘게 떨리는 반로아.

문득 떠오른다.

검을 쥐고 싸웠던 수많은 날들.

그러고 보면 예전에도 검은 종종 이렇게 울곤 했다.

내가 관심이 없어서 그냥 스쳐 지나갔을 뿐.

검은 언제나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싸우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왔었다.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그랬구나. 언제나 내 곁에 있었어. 너는. 항상 말을 걸었어. 우리는 이제야 만난 게 아니라... 내가 이제서야 너를 돌아본 거야. 늘 내 곁에 있던 너를.'

오늘 이오딘과 기사들이 보여 준 표정.

갑자기 늘어난 내 실력에 경악하던 그 얼굴들.

이젠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게 있어서 고대 검술이란, 새로운 걸 익히는 게 아니었다.

사실은 그게 이미 내 옆에 있었음을 깨닫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랬던 거다.

댕- 댕- 댕-

얼마나 오래 검을 휘두른 걸까.

종이 울렸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 11시.

도시를 밝힌 모든 조명을 잠시 끄고, 세상에 가득한 신의 축복에 감사 기도를 드리는 짧은 시간.

후욱-

마법 조명으로 환하게 밝은 글로잉스틸에 한순간 흑암이 내려앉는다.

도시의 불빛으로 희뿌옇게 밝던 하늘도 깊은 우물처럼 어두워진다.

"아...."

세상이 어두워지자 감춰져 있던 별이 드러났다.

깨어진 '브로큰 문(Broken Moon)'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피어나는 별빛들.

별.

언제나 저 자리에 있지만, 지상의 밝은 빛에 가려지는 별.

어쩌면 세상 그 무엇보다 밝게 타오를지도 모르지만, 단지 너무 멀어서...

멀리 있어서,

고작 한 도시의 불빛에도 가려지는 별.

그러나 실제로는 하늘을 덮을 만큼 넓고,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 밝고 아득한 세계.

이제야 알겠다.

늘 오러에 가려져 있던 검 역시 별과 마찬가지라는 걸.

우우우웅-

반로아가 울었다.

그 진동을 따라 내 내면 깊은 곳에도 울림이 새겨졌다.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롭게 세워지는 감각.

명검 반로아가 그렇듯 단단해지고, 유연해지고, 정교해지는 신체.

"아...."

나는 내 몸속을 흐르는 오러가 강대하다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틀렸음을 이제 알겠다.

내 몸속을 흐르는 오러 사이로 세워지는 뼈대.

검의 기운을 받아들이기 전까지의 오러는 뼈가 없는 문어나 오징어 같은 거였어.

후우웅-

지금 누군가 나를 보면, 내가 한 자루의 검과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날, 사교도의 우두머리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느꼈던 그 불길함처럼.

이게

체검(體劍)의 경지구나.

* * *

내가 체검의 경지에 오른 이후로, 이오딘의 얼굴은 확 밝아졌다.

큰 짐을 내려놓은 듯한 시원함이 느껴졌다.

매일매일 검을 수련하는 나날이 지나갔다.

하루하루가 알찼다.

하루 이틀 열흘이 지나고.

체검을 사용하는 것도 이제 제법 익숙해졌을 무렵이었다.

그날도 아침 일찍 연무장에 나가는데 성의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로드(Lord) 셀시우스 님이 오셨다고?"

"하필이면 대공께서 출타 중이실 때...."

"출타 중인 걸 알고 온 거지. 젠장. 왜 대공께서는 그 작자를...."

"쉿. 아무리 그래도 대공 전하의 혈족이야. 입조심해."

로드 셀시우스?

대공의 혈족에 높은 사람인 모양인데.... 어째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 이유를 연무장에서 금방 알 수 있었다.

"으하하하! 그 이름 높은 호라이즌 기사단도 별것 없구나! 이래 가지고 라이테나를 보필할 수 있겠느냐!"

목소리에까지 지방이 낀, 볼때기와 배가 두둑한 남자였다.

머리가 훤하게 벗겨진 그는 상의를 벗고 뱃살을 출렁이며 그 넓은 연무장을 자기 집 안방처럼 헤집고 있었다.

막 그와의 대련에서 패배한 듯한 단원 하나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물러섰다.

둥글게 모여선 호라이즌 기사단원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벌써 5연승인가? 자! 다음 상대 나와라!"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으하하하! 천하의 호라이즌 기사단이 겁을 먹은 거냐! 라이테나가 가져온 보물 좀 보여 달라고 할 때는 안 된다고 그렇게 건방을 떨더니. 실력 좀 보자니까 겁쟁이들이 따로 없어!"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주 사람을 긁어 댄다.

기사단원들이 울컥한다.

"로드 셀시우스. 그럼 내가 상대해 주겠소."

그 꼬락서니가 보기 싫었는지, 결국 단장인 브룩 드나르가 거구를 일으키며 나섰다.

그러자 로드 셀시우스라는 작자는 고개를 젓는다.

"하하. 아니지. 단장은 호라이즌 기사단의 자존심이 아닌가. 그건 내가 지켜 줘야지. 으하하!"

마치 이길 수 있는데 봐준다는 듯한 말투.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돼지가 브룩의 일검이라도 받아 낼 가능성은 없었다.

'익스퍼트 상급 끝자락 정도인가?'

느껴지는 기세가 사교도의 우두머리나 이오딘 세롬보다는 훨씬 강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양의 차이일 뿐 질적인 차이는 아닌.

그 증거로,

"로드 셀시우스 님! 그럼 제가 한 수 배우겠습니다."

"그대는 쾌검술이 특기가 아닌가? 나는 중검술을 쓰니 쾌검인 자네는 나에게서 배울 게 없어."

"그럼 제가...!"

"아- 좀. 자주 본 얼굴들은 너무 식상해. 좀 신선한 사람 없나?"

"저랑 검을 겨뤄 보신 적은...."

"이렇게들 용기가 없단 말인가! 이럴 거면 그냥 그 보물도 나한테 맡기지 그래?! 지키지도 못할 실력들 같은데!"

저 대머리는 익스퍼트 최상급으로 알려진 고위 기사들이 도전을 청하면 말같지도 않은 이유를 대며 승부를 피했다.

그러면서 입은 거하게 턴다.

강약약강.

그는 자기가 이길 수 있을 만한 단원만을 찾아서 눈을 번들거렸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란센 후배. 저 인간 눈에 띄어서 좋을 거 없습니다. 오늘은 성 밖의 연무장으로...."

어느샌가 다가온 이오딘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언제나 예의를 중시하는 이오딘이 '저 인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다니....

"그런데 누굽니까? 로드 셀시우스? 스승님의 혈족이라는 거 같던데...."

"맞습니다. 로드 카시기에르 셀시우스. 스승님의 형님 되십니다. 하지만 행실이 썩 바르지 않기에... 기사단 내에서도 기피하는 인물입니다."

호오.... 대공에게 망나니 형이 있었던 건가?

확실히 엮여서 좋을 건 없는 인간인 듯했다.

그를 일별하고 돌아서려는데, 그 기름 낀 목소리가 이번엔 나를 향했다.

"응? 잠깐. 너! 러셀? 아니지, 랑셀이었나? 너 맞지! 이번에 라이테나가 제자로 거뒀다는!"

나를 빼내려던 이오딘이 눈을 찔끔 감았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로드 카시기에르가 쿵쾅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이, 이...! 버르장머리 없는! 사숙(師叔)을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예의범절이냐! 하여튼 이래서 천것들이란...!"

아, 벌써 골치 아프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겉으로는 예의를 갖춰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숙. 중요한 대련을 진행 중이신 것 같아 방해 드리지 않고 조용히 나간다는 것이 큰 실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핑계조차 천박하기 그지없구나. 하여튼.... 라이테나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이번엔 신원 미상의 부랑자를 제자로 거둬? 전에는 고아 계집애더니...."

와우.

이오딘이 왜 '저 인간'이라고 했는지 확실히 알겠다.

말 한마디에 대공에 대한 무례에, 나랑 이오딘을 향해 멸시까지 그득그득 담아 버리네.

'거슬려....'

무법의 대륙 로버랜드. 말이 좋아 백작의 가신이지 사실상 깡패, 강도나 다름없던 놈들과 들이받으며 길러 온 나의 성질머리가 꿈틀거린다.

#18화 집에는 어떻게 돌아가지?

근데 이게 끝도 아니었다.

"하여튼 라이테나 놈. 내가 좋은 애들을 추천해 줘도 다 거절을 하더니.... 고작 저딴 것들을 제자로 들여? 대공이라는 놈이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나빠서야. 역시 가주 자리는 내가 물려받았어야 하는데...!"

이 대머리의 발언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스승 바라기인 이오딘은 결국 참지 못하고 발끈하고 말았다.

"사숙! 여기는 지켜보는 눈이 많습니다! 스승님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는 것은 법도가 아니지요!"

"뭐? 지금 네년이 날 가르치는 게냐?! 라이테나가 널 후계로 천명했다고 벌써 네가 대공이라도 된 줄 아느냐?! 사숙이고 뭐고 보이지도 않아?!"

"그런 것이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 같은 건 우스운 게지! 이러니 라이테나의 안목이 엉망이라는 거다! 길거리에서 굶어 죽을 거지년을 데려다가 사람 만들어 놨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인성이 그따위면 검 솜씨라도 뛰어나든가! 그것도 아니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스승님께 대해서만이라도...."

"닥쳐! 니가 뭐라고! 난 너희들 인정 안 해! 거지에! 부랑자에! 이번에 새로 온 놈은 익스퍼트 하급이라지? 미친 거지. 내 추천은 다 거절하더니, 어떻게 이딴 것들을 제자라고.... 라이테나가 미친 게 틀림이 없다!"

"사숙!"

아아 머리가 아프다.

미친 멧돼지처럼 콧김을 뿜으며 달려드는 카시기에르와 쩔쩔매는 이오딘.

'대공도 사람은 사람인가.'

세상 초탈한 초인처럼 보였는데, 혈육의 정을 끊지 못했나 보다. 저런 망종을 가만히 두는 걸 보면.

근데 그건 대공이고.

나는 아니잖아?

"사숙. 그러면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스승님의 안목이 정확한지 아닌지."

"뭐?!"

애초에 진짜 사숙도 아니고 선은 저쪽이 먼저 넘었으니 명분도 이쪽에 있고. 나야 뭐 여기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니까.

보기 싫은 꼴을 보고 참아 줄 이유가 없다.

"좋은 검 두고 긴말할 거 있습니까? 검 솜씨가 미덥지 않으시다면 한 판 붙어 보죠. 제가 지면 사숙님 말씀에 더 힘이 실리지 않겠습니까?"

"후배!!"

이오딘이 날 말렸지만, 나는 카시기에르에게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움찔.

그의 어깨가 떨렸다.

그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내 무력을 짐작해 보려는 것 같았다.

참 한결같네.

네가 질 것 같은 싸움은 정말 하기 싫구나?

그래. 네가 볼 땐 어떤데? 나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잠시 뒤,

결과가 드러났다.

두피를 붉게 물들인 그가 코웃음을 쳤다.

"건방지게! 세상에 어느 누가 제자뻘 되는 애송이랑 대련을 한다는 말이냐? 진짜 천박하군. 이 무례는 내가 직접 라이테나에게 따져 물을 것이다!"

너,

날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안 섰구나...?

알 만했다.

고대 기준으로 내 검술 경지는 낮았지만, 대신 난 오러를 직접 다룰 수 있었으니까.

미지의 힘을 가진 만큼 혹시나 망신을 당할까 두려운 거다.

하지만 로버랜드에서 굴러먹던 나의 도발 솜씨를 얕보면 곤란하다.

"왜요? 간단한 것 아닙니까? 그 모(毛), 자람 없는 실력으로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하면 되는 거잖습니까?"

손가락을 쭉 펼쳐 그의 훤히 벗겨진 머리를 가리켰다.

카시기에르는 순간 무슨 소린가 눈을 끔뻑거리다가 뒤늦게 알아듣곤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이...!"

그가 막 분노를 터뜨리려는 순간 내가 먼저 말을 끊고 들어갔다.

"왜요? 저랑 같이 붙기에는 제가 너무 모, 자랐습니까?"

척.

이번엔 손가락으로 내 풍성한 블루블랙 헤어를 가리켰다.

"허...! 허...!"

성질내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헛웃음만 흘리는 카시기에르.

그때,

"크흠! 큼! 란센 경. 아무리 그래도, 신체적 약점을 두고.... 큼! 그러는 건 옳지 못하다."

브룩 드나르가 끼어들며 중재를 시도했다.

그런데 헛기침 중간중간에 새어 나오는 웃음이.... 이야, 브룩 씨 정말 나쁜 사람이었네.

결국.

풉....

풉! 큽 풉!

곳곳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

이것만큼은 뻔뻔한 카시기에르도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네... 네놈들...! 라이테나 놈이 시킨 거겠지! 나를 이렇게 능멸하라고! 언제까지 이렇게 건방을 떠는지 내가 지켜보겠다!"

끝까지 피해망상을 쏟아 내며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카시기에르.

그래. 도망치라고. 그게 네 수준이다.

그 초라한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이오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란센 후배...."

아아, 그녀가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나도 느꼈다.

"괜찮습니다."

저 속 좁은 배불뚝이 대머리는 아마 이번 교류회에서 수작을 부릴 거다.

나에게 망신을 줄 어떤 수작을.

하지만 그래 봤자 나에겐 별로 의미가 없었다.

망신을 당하든 말든 알 바냐.

지금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검.

오직 검.

스릉.

나는 검을 뽑아 들고 이오딘에게 물었다.

"오늘은 무엇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이오딘은 그런 나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주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야,

신나는 하루가 다시 시작되었다.

* * *

종일 수련을 마치고 또 밤이 왔다.

그간 잠을 너무 안 자서... 아무리 소드마스터에 이른 강건한 육체라도 이젠 잠을 좀 자야 할 텐데.

잠이 안 온다.

"슬슬 걱정되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12일째.

그간 검술 수련에 흠뻑 빠져 있었지만, 점점 마음이 불편해진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는 거지? 어떻게... 돌아가지?"

지난번 시간 여행 때의 시간 비율은 6대 1.

만약 이번에도 그렇다면, 원래 시간대도 벌써 이틀이 지난 셈이었다.

이틀까진 괜찮다.

갑자기 백작의 목이 잘렸으니, 다들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한 걸음만 잘못 걸어도 목이 잘려 나갈 수 있으니 신중할 거다.

하지만 그 이상이 되면 위험했다.

백작의 목을 벤 게 나라는 소문이 퍼질 거고.

그런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느낄 것이다.

영지군에 패밀리에.... 경솔한 놈들은 곧 온갖 방식으로 행복 회로를 돌릴 게 틀림없었다.

'란센이 백작과 동귀어진했다!'

'백작을 죽였지만, 예전처럼 큰 부상을 입고 폐인이 되었다!'

'이 기회를 잘 살리면 크게 한 몫을 쥘 수 있겠는데?!'

욕심 앞에서 이런 낭설은 곧 정설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하나둘 숙이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겠지.

개판이 된 쿠샨시가 훤하게 그려졌다.

우리 식구들의 무력도 만만치 않고, 같은 편이 된 리베라 피에트로도 큰 세력과 인맥을 지니고 있으니 당장 위험에 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알 수 없다.

쿠샨시에 워낙 또라이가 많아야지....

그러니 걱정이다.

대체 돌아가는 조건이 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스릉-

나는 아공간에서 운명의 책을 꺼냈다.

주르르 펼쳐서 읽어 보면 읽을 수 있는 페이지는 딱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사교도들의 비밀 예배당은....'으로 시작하는 지난번 페이지고 다른 하나는 '스승님께서 사교도의 보물을 빼앗아 귀환하셨다.'라고 적힌 이번 페이지.

참 이상하게도, 고대의 언어와 글을 모두 쓸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페이지들은 읽을 수가 없었다.

읽으려고만 하면 잠에 취한 채로 주고받는 헛소리처럼 그 의미가 파악되질 않는다.

"아무튼, 뭔가 사교도와 관련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저번엔 비밀 예배당의 우두머리를 죽이니 돌아왔다.

그럼 이번엔?

'대공이 가져왔다는 보물에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카시기에르라는 돼지도 호기심을 드러냈던 보물.

하지만 내가 그걸 볼 방법은 없었다.

호라이즌 기사단은 물론이고 그때 대공과 함께 왔던 두 명의 남녀 마법사도 삼엄하게 그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답답하네."

그걸 본다고 해도 문제였다.

어떻게 해야 돌아갈 수 있는 걸까?

부숴야 하나?

아니면.... 지켜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은 안 오고.

나는 밤공기를 쐬며 산책을 나섰다.

멀리 건물들에선 마법 등불이 환히 빛나고 있고, 대공의 정원엔 달빛이 쏟아진다.

그 달빛 아래. 금발의 여인이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을 뻗어 하늘의 한 점을 가늠하고 있었다.

"이오딘...?"

무심결에 부르자 푸른 눈이 날 돌아보았다.

"란센 후배...?"

"달 보고 있어?"

말해 놓고 뒤늦게 아차, 싶었다.

무심결에 존댓말을 생략했네.

또 한참 잔소리를 하려나....

하지만 이오딘은 신경 쓰지 않고 여상하게 답했다.

나랑 똑같이 반말로.

"아니. 별 보고 있었어."

"...반말했다고 뭐라 안 하네?"

그러자 그녀는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나직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보는 사람 없으니까. 나도 염치가 없진 않아. 넌 내 생명의 은인이잖아? 반말 좀 한다고 뭐라 할 건 아니지."

"오올~"

진심 어린 감탄에, 어째서인지 째릿! 눈총이 돌아온다.

"...어쨌든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그땐 정말 고마웠어. 덕분에 살고. 덕분에 아이들도 구하고."

"아이들은 잘 지내?"

"응. 다들 집으로 돌려보냈어. 명절 때마다 편지도 와."

기분 좋게 미소 짓는 이오딘.

나는 어쩐지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근데 그럼 아예 사석에선 나한테 존댓말 하는 게 어때? 생명의 은인인 데다가 나이도 내가 3살 더 많잖아?"

"...아무리 그래도 후배한테 존댓말은 좀...."

나는 실실 웃으며 이오딘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엉덩이를 살짝 빼내 내 공간을 마련해 주는 이오딘.

"별 보는 거 좋아해?"

그녀는 내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냥 별은 아니고. 13주신을 보는 걸 좋아해."

"13주신?"

"하여튼.... 넌 가만 보면 상식이 너무 없어."

한숨을 짧게 쉰 그녀가 하늘의 별들을 하나하나 짚어 주었다.

"별들은 모두 움직여. 그건 알아?"

"...별이 움직여?"

"그래. 하늘의 중심을 기준으로 회전을 한다고."

몰랐다.

하늘을 그렇게 자주 볼 일이 있어야지.

"모든 별이 하늘의 중심을 회전하는데... 움직이지 않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무는 13개의 별이 있어. 주신들의 이름이 붙은 그 13개의 별을 13주신이라고 불러."

"아하.... 근데 그게 왜 좋아?"

내 질문에 이오딘은 다시 아까처럼 손을 들어 가장 가까운 주신의 별을 겨냥했다.

"저 별은 지혜의 여신 미바바르야. 미바바르가 딱 머리 위, 이 각도로 떠오르는 곳은 이 세상에서 오직 이곳뿐이야. 저 별은 움직이지 않으니까."

"호오...?"

"그러니까, 주신들을 통해서 나는 이 세상 속에 내 위치를 알 수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여기에 있구나. 여기까지 왔구나. 미바바르가 딱 이 각도로 내려다보는 이 위치, 이곳이 바로 내가 지켜야 할 곳. 내가 속한 장소. 내 삶의 목적이구나."

...그러고 보니 카시기에르가 그랬지? 이오딘이 고아였다고.

고아였던 소녀가 천하제일검의 제자가 될 때까진 심상치 않은 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별을 바라보는 이오딘의 표정은 애절하고 진지했다.

벌떡!

뒤늦게 자기가 한 말이 민망했는지 이오딘은 화들짝 일어났다.

그녀는 살짝 달아오른 귀를 숨긴 채 등을 돌렸다.

"아무튼 난 이만 간다. 교류회 때 할 특강을 준비해야 되거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용건까지 말하며 몇 걸음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강조했다.

"다른 사람 앞에선 존댓말!"

"네. 네. 선배님."

나는 멀어지는 이오딘을 바라보다가 훌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안 움직이네....'

한참 바라보니 내 눈에도 보였다.

천천히 흐르는 별빛들 사이로 그 자리에 딱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13개의 별.

모든 게 변하는 이 세상에도 변하지 않는 게 있었던 걸까?

'하긴 나한테도 있지.'

목숨을 던지더라도 지켜야 할 사람들, 지키고 싶은 아이들.

그건 나에게 있어선 결코 변하지 않을 별과도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쓰게 웃었다.

하아.... 진짜 슬슬 돌아가야 되는데 어떻게 한담.

답도 안 나오는 고민을 하며 터덜터덜 침소로 돌아왔다.

* * *

며칠이 더 흐르고.

집에 돌아가는 방법은 여전히 감이 안 오고.

마침내 교류회 날이 밝았다.

아침 일찍 먼저 만난 이오딘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좋아. 특강 준비는 완벽하고. 수련생들 정보도 숙지를 끝냈고. 란센 후배. 후배도 검술 시연 준비 다 했지?"

"완벽하지. 근데...."

"오케이. 또 준비해야 할게.... 질의응답 예상 답안도 다 준비했고.... 아 그렇지. 헤어! 그래 오늘은 헤어도 완벽하고. 그래. 다 준비됐어. 완벽해. 침착하자. 침착하기만 하면 돼."

저번에 머리가 엉망이었던 게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머리를 더듬으며 헤어 상태까지 확인한 이오딘은 심호흡을 하며 마인드 컨트롤을 시작했다.

근데...

저기, 이오딘?

지금 머리가 문제가 아닌데....

"선배."

"말 시키지 마. 호흡 조절 중이니까."

"아니. 선배."

"잠깐."

"그게 아니라. 옷. 옷 좀 보라고."

"응?"

그제야 자기 옷을 내려다보는 이오딘.

금발 사이로 그녀의 동그란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으... 으...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침실로 뛰어가는 이오딘.

노오란 병아리 잠옷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아니, 머리를 신경 쓰다가 잠옷 입고 나온 것도 몰랐던 거야?

참 사람이 한결같아.

똑 부러지는 것 같다가도 하나씩 허술한 게.

거기에 병아리 잠옷이라니....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나는 연무장 쪽에 시선을 던졌다.

슬슬 수련생들이 집합을 하고 있을 것이다.

후우....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정밀하게 조율했다.

좋아. 완벽해. 전투 준비 완료.

"그럼.... 이제 나도 긴장 좀 해 볼까?"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시야를 크게 넓혔다.

전장에 나가는 마음으로.

여태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교류회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렇다고 교류회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려고 이러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을 좀 해 봤다.

한 달간 이어졌다는 교류회의 마지막 날.

오늘은 영주성 심처인 이곳까지 외부인이 들어오는 몇 없는 특별한 날이었다.

만약 운명의 책이 아무 시간대로나 보내는 게 아니라, 사교도와 관련된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대로 날 보내는 거라면.

그 사건을 해결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라면,

그 사건은 아마,

교류회의 마지막 날,

수백 명의 외부인이 영주성 안으로 들어오는,

바로 오늘 일어날 것이다.

#19화 교류회

웅성거리는 소리, 바닥을 차는 소리,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영주성 대연무장 쪽에서는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호라이즌 기사단의 고위 기사 이나파르 경이 우리를 배웅했다.

"작년까지는 내가 이오딘의 경호를 맡았지만, 올해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과잉보호는 대공전하의 교육방침이 아니니까. 이젠 란센도 있으니 둘이 전우조로 활동하며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잘 대처하도록."

"네. 맡겨 주십시오."

이나파르 경은 흐뭇한 눈으로 나와 이오딘을 바라보더니 등을 돌렸다.

"그럼 수고해라. 교류회의 마무리를 잘 부탁한다."

"네!"

"네!"

이나파르 경이 떠난 후 이오딘은 한 번 심호흡을 하곤 내게 다짐을 받았다.

"란센 후배.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돼. 네가 못하면 네가 아닌 스승님이 욕을 먹는 거라고."

"네. 네. 충분히 준비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믿을게. 그래도 이번 기수는 특히 수준이 높으니까, 더 잘해야 돼. 100퍼센트 그 이상으로!"

"네. 네."

"아니 그렇게 건성건성 대답하지 말고."

"먼저 들어간다."

"아, 아! 잠시!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잔소리가 길어지는 이오딘을 뒤로 하고, 대연무장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와글와글

싸아-

내가 들어서는 순간, 수많은 인기척으로 시끄럽던 대연무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워어- 눈빛들 좀 보게.'

이오딘이 왜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총원 1,820명이라고 했나?

그 많은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혔다.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니가 걔야? 새로운 직전제자?'

이런 노골적인 호기심은 양반이었고,

'별로 안 세 보이는데? 싸우면 내가 이길 수 있어.'

이런 호승심은 귀여웠다.

정말 거슬리는 건,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어떻게 해야 망신을 줄 수 있지?'

'밟고 싶은데.... 뭐 건수 없나?'

분명한 적대감.

뭐 하나만 실수하면 물어뜯겠다고 벼르고 있는 표정들.

나를 내려다보며 평가를 하는 듯한 그 시선들이 정말 거슬렸다.

뒷줄보다 앞줄로 올수록 그런 경향이 더 강해서, 제일 앞에 선 교육생들은 아예 시비를 거는 것처럼 굉장히 띠꺼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쟨 뭐냐?'

유독 눈에 띄는 교육생이 하나 있었다.

겨울에나 쓸 법한, 귀를 다 가리는 모자를 푹 눌러쓴 소년.

연두색 머리칼이 특이했다.

그는 혼자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며 나와 적극적으로 아이컨택을 시도했다.

눈이 마주치자 손까지 붕붕 흔들어 댔다.

'...나 알아?'

원래 사람이라는 게 좋은 말보다 나쁜 말이 먼저 들리는 법인데.... 저 교육생의 시선은 너무나 반짝거려서, 이 악의로 가득한 시선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아무리 봐도 구면이 아닌데... 왜 저렇게 호의적인 거지?

"란센 후배. 준비."

아, 잠시 신경이 팔렸다.

어느새 환영 인사를 마쳤는지, 이오딘이 내 뒤로 다가와 신호를 보냈다.

후, 그래.

지금은 일단, 검술 시연에 집중하자.

저벅.

연단 위로 올라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음마다 세상이 지워진다.

내게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이 지워지고,

화창한 하늘이 지워지고,

복잡한 상황들과 생각들도 지워지고,

오롯이 나와 검. 그리고 연단만 남는다.

우우웅-

검령을 깨우고, 검기를 뽑아내고, 그 기운을 내 몸속까지 받아들였다.

익스퍼트 중급, 체검(體劍)의 경지.

몸이 한 자루의 칼처럼 변해 간다.

스으윽-

움직임을 따라 공기가 갈라졌다.

공기저항이 사라지니 몸이 훨씬 더 가벼워진다.

우웅-

몸이 검처럼 단단해진다.

타아앙!

잘 두드려 만든 강철처럼 탄성을 지닌다. 특히 손목이나 무릎 같은 관절의 변화가 새삼스러웠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하고 유연하면서도 탄력적이다.

타닥!

검을 짧게 쥐고 길게 쥐고 하는 것처럼, 몸의 무게중심이 자유롭게 이동한다. 발을 바닥에 붙인 채로 몸을 눕히다시피 하는, 평소라면 불가능한 자세도 가능해진다.

쿵!

순간적으로 몸무게가 더 무거워지기도 하고, 더 가벼워지기도 한다.

체검의 경지가 완숙해져야 보여 줄 수 있는 다섯 가지의 변화가 내 몸을 통해 발현되었다.

'재밌어.'

나는 지금이 검술 시연 중이라는 것도 잊고 흠뻑 빠져들었다.

오러랑은 전혀 다른 맛이다.

오러는 기본적으로 신체의 출력을 강화하는 것.

질주하는 야생마를 타는 것처럼, 그 넘치는 힘을 어떻게 컨트롤하고 뿜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그건 그 나름의 통쾌한 재미가 있지만, 이런 섬세한 재미는 없다.

때론 무게중심을 옮기고, 때론 탄성을 이용하고, 공기저항을 죽이고, 무게를 바꿔 가며, 오러가 뿜어내는 막대한 힘에 버금갈 만한 효과를 일으키는 것.

퍼즐을 푸는 것처럼 흥미롭다.

이 위에 오러를 얹는다면 또 어떻게 될까?

흠뻑 빠져서 검을 휘둘렀다.

스카앙!

크게 휘두른 횡 베기를 마지막으로 내가 준비한 시연은 끝났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쏟아지는 햇살 아래 훤히 드러난 얼굴들을 보았다.

떨떠름한 표정들이 거기에 있었다.

'뭐야 너무 잘하잖아...?'

기가 죽은 표정.

'특이체질이라 검술 자체는 약한 거 아니었어? 체검의 사용이 벌써 완숙한데?'

예상 밖이라는 듯 놀란 표정.

'나랑 비교하면 어떻지...?'

내 경지와 자신의 경지를 비교해 보며 찌푸린 인상.

뭐가 됐든,

부족하게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툭.

"잘했어...! 평소보다 더 잘했는데? 이 정도면 친선 대련도 문제없겠어. 그래도 이번 애들 수준이 높으니까 긴장하고."

그걸 이오딘의 밝은 얼굴이 증명했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자! 그럼 이어서 친선 대련이 있겠다! 대련 희망자는 앞에 줄을 서도록!"

이오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40명쯤 되는 교육생들이 연단 아래로 줄을 섰다.

워우.... 많잖아?

이오딘은 매년 이 많은 애들을 상대했던 거야?

이오딘을 흘깃 봤더니,

"어... 어? 어...."

그녀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평소엔 이렇게 많지 않구나?

내가 어지간히 밉보이긴 했나 보다.

곧 첫 번째 도전자가 연단 위로 올라왔다.

호라이즌 사관학교를 제외하면 글로잉스틸 최고 명문 중 하나로 꼽히는 세테스 아카데미의 수석이라는 청년이었다.

그는 잔뜩 흥분한 숨소리를 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근데... 여기 얘들. 아까부터 느낀 건데, 눈빛이 되게 거슬리네.'

그냥 기분 나쁘다 이런 게 아니다.

'짐승의 눈깔이라고 해야 되나?'

눈빛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광망이 있다.

사람의 그것 같아 보이지 않는.

'들카슈나 크시아스 눈깔이 저랬는데.'

그렇다고 뱀파이어인 것 같지는 않고.

기분 탓인가?

상당히 찜찜하고 불쾌하다.

"나는 인정 못해."

23살쯤 됐을까? 어린 녀석이 눈깔은 기분 나쁘게 떠서는 대뜸 반말을 지껄였다.

"너 27살이라며? 그런데 이제 체검이라니. 그걸로 잘난 척을 하는 거야? 이오딘 경은 이미 17살에 네 경지에 올랐어. 이오딘 경은 몰라도, 너는 인정 못 해."

그래?

"난 널 꼭 꺾을 거야. 너 같이 출신도 불분명한 부랑자보다는... 테시에르 가문의 적자인 내가 훨씬! 그 자리에 잘 어울린다고."

그러면서 녀석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대연무장 한 켠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익숙한 대머리 돼지가 있었다.

'카시기에르?'

대공의 형 놈이 여기 있다.

심지어 놈은 눈앞의 청년을 향해 미미하게 고개까지 끄덕여 주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머릿속으로 연극 한 편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나한테 망신을 주라고 시켰구나?'

카시기에르의 지위면 이 꿈 많은 청년들을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적당히 내 욕을 하고, 이번 친선 대련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 주면 대공에게 추천을 해 주겠니 뭐니 하는 입발린 소리를 했겠지.

내 검술을 분석해서 약점을 알려줬으려나?

아니면 내 체력을 빼놓기 위한 차륜전을 지시했을지도 모르지.

'뭘 준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스릉-

나는 이오딘의 지시에 맞춰 검을 뽑아 들었다.

'여기서 망신당할 생각은 없다고.'

내 취향도 아니고.

힘도 아껴야 했고.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바로 오늘일 테니.

괜히 오러도 없이 짐승 같은 도전자 40명을 내리 상대한다?

그렇게 소모할 심력 따위 없다.

그러니까,

이오딘은 싫어하겠지만,

뭐, 잔소리 좀 들으면 되지.

구우우웅!

내 연습용 검에서 장엄한 파동이 퍼져 나갔다.

"그, 그건!?"

내 앞에서 건방 떨던 도전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린다.

이런 건 처음 봤지?

검푸른색으로 물든 검신 위로 검푸른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이게 바로 지금으로부터 1만 년 뒤에 발전하는 오러 검술이다. 이제 거기에 고대의 검기를 곁들인.

"비열한! 순수한 검술로 겨룰 생각은 하지 않고?!"

"란센 후배!"

이오딘까지 깜짝 놀라서 날 제지하려고 했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시작 신호. 아까 울렸지?"

쩌어어엉!

일 검.

단 일 검에 도전자의 검이 산산조각 나서 날아갔다.

뭘 해 볼 새도 없이 패배한 도전자가 나동그라져서는 허망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를 무시한 채 연단 아래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다음."

* * *

쨍그랑!

"다음."

쩌저정!

"다음."

이거 꿀잼이네.

이오딘은 아예 손으로 눈을 덮었고, 저 멀리서 지켜보던 카시기에르는 얼굴이 점점 붉어지다가 씩씩대며 대연무장을 떠났다.

오러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상, 그 누구도 내 일 검조차 받아 내지 못했으니까.

맥없이 당하는 앞선 도전자들을 보고 저마다 참신한 계획과 전략을 준비해서 덤벼들었지만, 모두 평등하게 처맞을 뿐이었다.

너도 한 방. 쟤도 한 방.

이들의 수준은 잘해야 체검의 끝자락.

그 정도로는 오러의 폭력적인 힘을 당해 낼 수가 없다.

그렇게 마지막 도전자만이 겨우 남았을 때, 연단 아래에서 불평이 쏟아졌다.

"이건 반칙입니다!"

"정정당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편법은 인정할 수 없어요!"

올 게 왔다는 듯이 이오딘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중재하려 나서려 했지만, 내가 먼저 입을 뗐다.

"뭐가 반칙이지?"

"순수 검술이 아니라 특이체질을 이용해서 이긴 게 아닙니까!"

"꼬우면 너도 특이체질 하든가."

"그런 궤변을...!"

"그딴 마인드로는 영원히 날 이길 수 없어. 왜? 전장에서 날 만났을 때도 오러는 쓰지 말라고 싹싹 빌게?"

"그...!"

한 명을 침묵시키자 곧장 다른 곳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이런 건 대공 전하께서도 원치 않으실 겁니다! 그렇게 편법에 기대는 방식으로는 대공 전하의 검을 온전히 이을 수 없으니까요!"

오호? 대공을 핑계로 날 공격하겠다?

맞아!

그래!

옳소!

허를 찔렀다고 생각하는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동의의 외침들.

코웃음만 나올 뿐이다.

대공은, 대공으로 받아치면 그만이거든.

"글쎄? 스승님께서 그저 자신의 검술을 답습하기만을 바라실까? 그 검술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그래서 날 제자로 들이신 건 아니고?"

"말도 안 되는...!"

"말이 왜 안 돼? 이오딘 선배가 있잖아? 스승님의 온전한 검술은 선배가 물려받는 거고. 나는 그걸 내 식대로 개량하는 거고."

"어...?"

좋아. 살짝 박혔다.

이제부터는 기세.

최대한 한심하다는 듯 감정을 담아, 살짝 박힌 못을 박아 넣듯이!

"진짜 그런 생각 못 해 본 거야? 내가 특이체질이라서 제자가 된 거라고. 응? 대공전하께서 원하시잖아. 근데 내가 왜 그걸 쓰면 안 돼? 응? 설명해 봐."

"큭...."

"으윽...."

다들 반박은 못 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다.

가볍게 승리.

"아...!"

이 와중에 이오딘은 뭔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냥 적당히 둘러댄 건데.'

이오딘은 방금 내가 한 말이 정말 대공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나는 연단 아래에 마지막 남은 소년을 보며 말했다.

"다음."

"네! 올라갑니다!"

발랄하게 대답하는 연두색 머리.

적개심으로 가득한 교육생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무한한 호의를 보내던, 바로 그 교육생이었다.

쩌어어엉!

"으헉!"

뭐 그렇다고 다를 건 없다.

일 검에 검이 깨지는 건 똑같았으니.

다른 건 내게 패배한 이후의 반응.

"하... 하하하하. 하하하!"

일 검에 검을 박살 내 주니, 뒤로 넘어진 소년은 드러누운 채로 폭소를 터뜨렸다.

10년 묵은 한이 쑥 풀리는 것처럼 시원한 웃음이었다.

"...왜 웃어?"

묻자, 소년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눈으로 외쳤다.

"존경합니다! 란센 경은 제 롤 모델이에요!"

...갑자기?

언제 봤다고?

"저! 여기 깨진 검에 사인 좀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혹시 이거 그거냐?

여행자의 외투를 벗기는 건 사나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 어쩌고?

날 적대하는 수많은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던 내가, 단 한 명의 반짝이는 시선 앞에서 그만,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20화 사이키델릭 문

비록 교육생들은 여전히 내게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어쨌든 교류회는 무사히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영주성의 대연회장에서 벌이는 수료 연회뿐.

황금빛 노을이 은은히 지는 가운데, 대연회장의 샹들리에는 젊은 교육생들의 야망처럼 반짝거렸다.

"란센 경! 란센 경! 아까 진짜 멋있었어요!"

시원한 음료와 기름진 음식이 가득한 연회장. 다들 잔을 부딪치며 시끌시끌 즐거운데, 나는 혼자 미간을 좁히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지금일 텐데.'

2,000명에 육박하는 외부인이 영주성 내 저택까지 들어온 지금 상황.

누군가 무슨 일을 꾸민다면, 당연히 오늘이었다.

그래서 연회를 즐기지도 못하고 잔뜩 집중하고 있는데....

"특이체질이기 때문에 대공전하의 제자가 되었다. 내가 왜 그 힘을 안 써야 하지?! 크으.... 진짜 저 울 뻔했어요. 감사해요. 진짜 진짜 고마워요, 란센 경."

웬 연두 머리가 옆에서 자꾸 알짱거린다.

"너, 밀로라고 했나?"

"네! 란센 경! 밀로 히아센이라고 합니다! 와! 저한테 말을 붙여 주셨어! 영광입니다!"

귀찮아서 떼어 내려고 말을 붙였더니, 더욱더 달라붙는 연두 머리 밀로.

나는 참다 참다 결국 녀석을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

"너.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달라붙냐? 응?"

맨날 애기들이랑 놀아 주다 보니 애기들을 끌어들이는 페로몬이라도 흘리게 된 건가? 교육생 중 제일 어리다는 18살의 밀로는 연회장에 들어온 그때부터 단 한 순간도 내 옆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게...."

대답을 주저하는 밀로.

애초에 나도 대답을 들을 생각이 아니었다.

귀찮다고 대놓고 눈치를 준 건데 그걸 못 알아듣고 또 대답을 하려고 하네.

"됐고...."

"그게! 저도 특이체질이거든요! 그래서 란센 경처럼 되고 싶어요!"

응?

특이체질?

"너도 마나를 직접 다루냐?"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뭔데."

"그게...."

조금 고민하는 듯하던 밀로는 결심했는지 작은 입술을 꼭 깨물며 항상 쓰고 있던 겨울 모자를 벗었다.

환하게 드러나는 연둣빛 머리카락 사이로, 인간의 그것이라기엔 지나치게 길고 뾰족한 귀가 드러났다.

"저.... 사실 하프 엘프거든요."

"하프... 엘프?"

세상에, 진짜 엘프라는 종족이 실존했다고?

그건 건국 신화에나 등장하는 요정의 다른 이름잖아?

누군가는 허황된 전설로 치부하고, 누군가는 가끔 발견되는 인간 닮은 화석을 엘프의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던....

근데 살아 있는 하프 엘프라니....

비록 순혈은 아니지만, 어쨌든 반은 엘프가 아닌가?

진짜 있었구나! 이런 종족이!

심지어 말도 잘해!

제 정체를 드러낸 밀로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인간들은.... 아 저도 인간은 인간이지만.... 아무튼, 보통 사람들은 검령하고만 소통하잖아요. 아무래도 인간이 만들어 낸 물건하고 소통하는 게 더 편한 거죠. 하지만 전... 자연의 정령과 소통하는 게 더 편해요. 그래서 오히려 검령처럼 인위적인 물건에 깃든 영혼과는 소통하기가 어려웠죠."

정령?

그건 동화책에나 나오는 거 아니었어?

이 시대에는 정말 별게 다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알아요! 다들 란센 경을 두고 출신도 알 수 없다고 욕하지만, 저는 경께서 왜 과거를 숨기시는지 엄청 엄청 공감해요! 저라도 그럴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밀로의 눈은 울먹이고 있었다.

"그렇잖아요.... 남들하고 조금만 다르면... 온갖 나쁜 사람들이 꼬이잖아요. 특히 마법사들.... 저도 어릴 때 나쁜 마법사에게 납치당해서 온갖 끔찍한 실험을 당했어요...."

저런.... 우여곡절이 많았구나.

"겨우 탈출해서 가문에 돌아갔는데도 아버지는 사생아라고 무시해 버리시고.... 그런 과거... 잊어버리는 게 낫죠. 저도 그래서 다 끊고 살아요. 히아센이라는 성도 아버지 성씨가 아니에요. 엘프셨던 어머니 쪽 성씨죠."

아, 이제 알겠다.

이 아이가 내게 가지고 있었던 호감의 정체는 동질감이었다.

그런데 가슴이 쿡쿡 찔리는 기분이다.

아닌데....

난 특이체질 아닌데....

근데 또 이렇게 제 자신을 환히 드러내고 날 따르니, 모질게 떼어 내질 못하겠다.

이 녀석 묘하게.... 애들이 주워오던 고아들이랑 분위기가 비슷했으니까.

세클란이나 세온이 같은.

아이들 얼굴이 자꾸 아른거려서, 나는 얼떨결에 녀석의 말을 경청하고 말았다.

"특이체질은 검을 익히기도 오히려 어렵잖아요. 더 쉽고 빠르게 강해질 방법이 있으니까.... 그래서, 란센 경처럼 되고 싶어요! 뼈를 깎는 노력으로 검령을 다루고! 내가 가진 원래의 힘도 부정하지 않고! 검령과 정령, 모두 쓰고 싶어요! 란센 경처럼!"

"어.... 그러냐."

에라. 포기다.

나는 녀석을 떼어 내는 걸 포기 했다.

그냥 건성으로 녀석의 말을 들어 주며 연회장을 곳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회장 천장에는 거대한 천창(Roof Window)이 있다.

노을마저 흐려지고 서서히 어둑해지는 하늘이 천창에 고스란히 비치면서 대연회장의 분위기는 한층 더 고조되고 있었다.

'아직인가...? 오늘... 뭔가 일어나긴 일어나는 거지?'

오늘 뭔가가 일어나야 집에 돌아갈 단서도 잡을 텐데....

나는 조금씩 초조해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긴장을 유지했다.

"근데... 부끄럽지만... 사실 온전한 제힘은 아니었어요. 아! 그렇다고 제가 막 부정을 저지른 건 아닌데.... 그 왜 '시술'이라는 게 유행을 했거든요."

시간이 흐르고, 대연회장의 분위기는 몇 번씩이나 변해 가는데도 밀로 히아센이라는 하프 엘프 녀석은 한결같았다. 계속 내 옆에 딱 붙어서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시술을 받고 약을 꾸준히 먹으면... 놀랄 정도로 검령과의 소통이 편해져요. 요새는 웬만한 애들은 다 하거든요. 아, 란센 경은 시술 안 받았죠? 그런데도 그렇게 강하시다니...."

뭐... 도핑 같은 거라도 유행하나?

밀로도 슬슬 취해 가는지 대화 주제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알 바는 아니다.

1만 년 전의 기사 지망생들이 도핑을 했든 마약 파티를 했든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니까.

"저기. 쟤도 시술받았고. 쟤도 시술받았고. 요새 잘나가는 애들은 다 시술받은 애들이에요."

밀로가 가리키는 애들은 하나같이 이오딘이 주시하라고 했던 애들이었다. 최근 두각을 드러내는 루키들이라던가?

잘 보고 마음에 드는 애가 있으면 호라이즌 기사단에 천거를 하라고 했다.

나야 뭐 쟤네 눈깔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럴 마음 없지만....

아, 밀로나 한번 천거해 볼까?

홀짝.

그나저나 진짜 아무 일 안 일어나는 거야?

그러면 집에는 어떻게 돌아가지?

대앵-

그때, 종이 울렸다.

"응?"

감사기도 시간도 아닌데 왜?

흠칫 고개를 들자 밀로가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아! 시작되나 봐요!"

"시작돼? 뭐가?"

"사이키델릭 문이요! 오늘 한 달에 한 번 사이키델릭 문이 뜨는 날이잖아요."

사이키델릭 문? 그게 뭔데?

"저기! 저기 보세요!"

밀로가 천창을 가리켰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까만 하늘에... 생전 처음 보는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뭐야? 저게...?'

그건 정말이지 난생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달이 세모 모양이야?'

내가 아는 달은 하나뿐이었다.

한쪽 귀퉁이가 움푹 뜯겨 나간 브로큰 문(Broken Moon).

전설에 의하면, 거대한 새가 뜯어먹었다고 전해지는 그 부서진 달이 내가 아는 유일한 달인데....

저건 세모 모양이다.

그리고 더 작았다.

그러니까... 브로큰 문의 움푹 뜯겨 나간 자리에 집어넣으면 딱 맞을 것 같은. 그런 달이었다.

'무슨 달이 저렇게 휘황찬란하지?'

그것은 새벽빛처럼 밝았고, 온갖 색깔로 번뜩이고 있었다.

푸른빛, 붉은빛, 노란빛, 연둣빛,

천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형광 색채의 달빛이 대연회장을 정신없이 물들였다.

"와.... 여기서 보니까... 정말 예뻐요. 사이키델릭 문."

예쁘다고?

내 눈에는 한없이 불길해 보이는데....

벌레가 피부 위를 스멀스멀 기는 것만 같은 불쾌함.

여기는 정말 1만 년 전의 과거인가?

그렇다면 저 불길한 달은 대체 뭘까?

왜 이 시대에는 있는 달이, 우리 시대에는 없는 거지?

갑자기 쏟아진 정보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서였다.

줄곧 기다리던 '사건'이 발생하던 순간, 내 반응이 느렸던 것은.

쿠르르륵.

크와아악!

시작은 짐승의 울음소리였다.

'뭐야?'

쏟아지는 형광빛 아래에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교육생들이 몸을 뒤틀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아예 포효를 터뜨리는 놈도 있었다.

우득! 우득!

온몸의 관절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고 몸이 부풀어 올라 옷을 찢었다.

주둥이가 길어지고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났으며, 손발톱이 칼날처럼 자라나 사방을 난자했다.

"꺄아아악!"

"끄아악!"

갑자기 뻗어 나온 손톱에 걸려든 교육생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대충 어림짐작으로 300~400명 정도 되는 교육생이 괴물로 변화한 것 같았다.

'늑대 인간...?'

형태는 늑대 인간을 닮았다.

하지만 달랐다.

일단 털이 없어서 흉측했고, 혀는 뱀 한 마리를 물고 있는 것처럼 길었으며 꼬리도 꿈틀거리는 촉수들로 가득했다.

"제압해!"

연회장의 경비를 서던 기사들이 달려들었지만,

"커억!"

"끄아악!"

익스퍼트 중급의 기사들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익스퍼트 상급은 되어야 겨우 한두 놈을 몰아붙일 정도.

그만큼 괴물이 된 교육생들은 터무니없는 힘을 자랑했다.

그중에 유독 강한 개체도 섞여 있었고.

콰앙! 쾅!

괴물들이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테이블을 뒤엎고, 뱀처럼 길어진 혓바닥을 휘둘러 멀쩡한 교육생들을 꿰뚫었다.

'이런 스케일이라고?'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근접한 괴물이 400마리?

사건이 벌어질 줄은 알았지만....

이건 전쟁 수준의 사건이잖아?

나도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일단 빠지자.

밀로도 데리고.

그런데,

"크르륵.... 라, 란센 경.... 크륵.... 나, 몸이... 이상해요...."

밀로도 변해 가고 있었다.

옷이 반쯤은 찢어졌고 주둥이도 길어졌다. 다만 몸 전체에서 희미한 연둣빛이 도는 게 다른 괴물들과는 조금 달랐다.

"밀로! 정신 차려."

그사이 정이 든 걸까?

나는 괴물이 되어 가는 밀로를 베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때였다.

크르르릉!

괴물 하나가 테이블을 붕 뛰어넘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반로아를 뽑아 그것을 베어 넘기려던 순간,

"크아아앙!"

괴로워하던 밀로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건 분명, 나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콰드득!

괴물의 이빨이 밀로의 어깨에 박혀 들었다.

"끄라아아아아락!"

반쯤 괴물로 변한 밀로가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밀로!"

황급히 구하려 하던 때, 녀석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녀석은 처연한 눈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란센... 경.... 나... 기사가 되고... 싶었어요...."

콰드드득!

괴물이 밀로를 악어처럼 물어 채서 등 뒤 집어 던졌다.

"크르르르!"

"캬아아아!"

드글드글 몰려 있던 괴물들은 마치 밀로가 배신자라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밀로에게 달려들었다.

회백색 괴물들 사이로 밀로의 연둣빛 몸체가 갈가리 찢겨 나간다.

후끈.

두 눈동자가 뜨겁다.

내 동공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검푸른 불길에 온 세상이 일렁인다.

당하고 있는 밀로를 보자,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밀로!!"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 녀석을 구하고 싶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21화 이번엔 꼭

"밀로!"

우우웅-!

오러 블레이드를 쑥 뽑아내고 달려들었다.

강맹하게 몰아치는 폭풍.

그 무엇도 파괴할 수 있는 오러 검술의 궁극.

그렇게 믿고 있었다.

쩌엉!

"큭...?!"

그런 오러 블레이드가 막혔다.

벌거숭이 늑대인간같이 생긴 이 괴물은 잿빛의 발톱을 길게 뻗어 오러 블레이드를 가로막았다.

'못 벴다고...?'

고대의 검기까지 두른 오러 블레이드.

크시아스 백작도 목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 검을, 고작 괴물 발톱 따위로 막는다고?

콰아앙!

베진 못했지만, 오러 블레이드의 파괴력까지 안 먹히는 건 아니었다.

강한 충격파와 함께 앞을 가로막던 잿빛 발톱이 뒤로 튕겨졌다.

나는 그 틈새를 달려서 괴물의 목을 노렸다.

'그래. 막히면 어때, 죽이기만 하면...!'

후웅-!

히죽-

괴물은 나를 보며 주둥이를 찢고 웃었다.

마치 내가 목을 노릴 줄 알았다는 듯이, 슥 뒤로 목을 빼내 가뿐히 내 검을 피했다.

허공을 헛치는 아찔한 감각.

'무슨...!'

흥분으로 폭주하려는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코끝이 저리도록 집중을 하고 다시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훙-!

닿지 않았다.

계단을 헛디딘 것만 같은 아찔함만이 덮쳐 올 뿐.

괴물의 반응속도는 터무니없이 빨랐고, 기괴했다.

쩡! 쩌어엉!

오러 블레이드로 잿빛 발톱을 날리고 자세를 무너뜨린 뒤, 몇 번이고 회심의 일격을 날렸지만 모두 빗나갔다.

"왜!"

"대체!"

"왜!"

닿지 않는 안개와 싸우는 기분이었다.

내가 쌓아 올린 수많은 전투 경험으로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악전고투 끝에 겨우 베어 낸 괴물은 고작 두 마리.

점점 좁아지는 내 시야를 일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란센! 혼자 행동하지 마!"

어느새 다가왔는지 이오딘이 내 옆으로 달라붙었다.

"하지만 밀로가...!"

사실 이미 밀로는 보이지도 않았다.

드글드글 모여든 괴물만 보일 뿐.

이오딘이 차갑게 말했다.

"포기해. 이미 늦었어."

"...."

사실 나도 알았다. 그 말이 맞다.

'늦었어....'

왜 이토록 가슴이 먹먹할까?

밀로에게 우리 아이들을 너무 많이 투영했나 보다.

목구멍에서 치미는 신물을 삼키며, 나는 애써 미련을 끊어 냈다.

"미안. 흥분했어. 일단 같이 빠지자."

"그래. 정신 줄 똑바로 잡고."

이오딘과 함께 몸을 빼내려고 했다.

"크르르르!"

"크아아앙!"

그런데 이번엔 괴물들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느새 밀로를 잡아먹은 건지, 찢어 죽인 건지.... 녀석에게 모여 있던 괴물들이 말벌 떼처럼 확! 흩어지며 단숨에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오러 블레이드도 막아 내는 강인한 발톱이 폭풍처럼 사방을 난자한다.

"란센, 잘 들어!"

죽음이 사방을 할퀴는 가운데 이오딘이 말했다.

"내가 놈들의 목을 칠 테니까... 발톱들을 막아 줘. 할 수 있지?"

"목을 친다고? 그러기엔 놈들 반응이 너무 빠른...!"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도 할 수 있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다.

방어뿐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후으으으-

숨을 한껏 빨아들였다.

코어에서 퍼 올린 강대한 오러를 전신으로 그물처럼 뿜어냈다.

거기에, 체검(體劍)의 묘리를 섞었다.

공기저항을 죽이고, 무게중심을 옮기며, 탄성을 띠는 육체.

그 위로 오러의 출력을 더했다.

반로아 왕실 검법.

가속검 [토렌트(torrent)]

쩌저저저저저정!

일순간에 떨쳐 낸 수십 번의 검격.

놈들의 목을 치는 건 어렵지만, 이미 뻗은 발톱을 쳐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파고들어 목을 치는 건 두 동작이지만, 내게 다가오는 공격을 쳐내는 건 한 동작이면 되니까.

놈들이 뻗는 발의 각도만 봐도 공격 경로를 예측할 수 있고, 길게 뻗은 오러 블레이드는 넓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다.

검푸른 오러가 거대한 날개처럼, 이오딘의 전후좌우를 감싸고 폭발했다.

폭풍처럼 사방을 뒤덮던 괴물들의 발톱이 뒤로 튕겨져 나가고 둥그렇게 텅 빈 공간이 드러났다.

"나이스."

그 공간 속으로 뛰어든 이오딘이 춤을 추었다.

서컥!

쓰걱!

춤사위를 한 번 떨칠 때마다, 괴물의 목이 떨어졌다.

내가 노릴 때는 닿지도 않던 목이, 이오딘의 검 앞에서는 썩은 과일처럼 툭툭 잘도 떨어졌다.

'이게 검탁(劍托)....'

실전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예상한 것보다 더 대단했다.

검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과 질이 다르고 반응속도가 달랐다.

처음 상대해 보는 유형의 적 앞에서 내가 쌓아 올린 경험마저 빛이 바랬을 때, 검탁을 사용하는 이오딘은 물 만난 고기처럼 진가를 드러냈다.

"이거 좋은데?!"

이오딘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겠지.

내가 방어도 해 주고 적들 자세까지 무너뜨려 주니까.

이오딘도 혼자였으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 거다.

하지만 우리 둘은 궁합이 좋았다.

힘으로 늑대 괴물을 찍어 누를 수 있는 나와, 괴물의 반응속도보다도 빠르게 그 목을 칠 수 있는 이오딘.

우리는 금방금방 괴물을 베고 포위망을 뚫어냈다.

이오딘이 외쳤다.

"다 왔어! 이대로 빠져나가서 기사단에 합류한다! 괴물들이 노리는 건 틀림없이 스승님이 가져온 보물일 거야! 반드시 막아야 돼!"

그렇게 막 포위망을 벗어나려던 순간,

"크르르르!"

마지막까지 따라붙은 괴물 셋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오딘이 반짝이는 땀을 흩날리며 외쳤다.

"마지막이야! 한 번 더 간다!"

내가 발톱을 쳐내면 이오딘이 목을 친다.

우웅-

다시 한번 반로아에 오러 블레이드를 담았을 때,

쿠르륵!

콰르르륵!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전조도 없이 괴물들의 복부와 가슴이 터지더니, 그 안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어마어마한 속력으로 쏟아졌다.

따다다당!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반응을 한 건 이오딘이었다.

번개처럼 내 앞으로 뛰어든 이오딘은 날 보호하며 사방으로 검을 뿌렸다.

폭죽처럼 흩어지는 불똥.

반응속도가 0에 수렴하는 검탁(劍托)을 사용했기에 가능했던 신위.

하지만,

촉수의 수가 너무 많았다.

퍼버버버벅!

날카로운 촉수들이 마침내 검을 넘어 이오딘의 몸을 꿰뚫었다.

이오딘의 몸을 촘촘히 꿰고도 여력이 남아 내 몸까지 찔러 왔지만, 나는 오러 실드가 있었기에, 약간의 찰과상을 입은 게 전부였다.

"이오딘!"

그러니까,

이오딘이 날 감쌀 이유가 없었다.

난 저걸 그냥 다 맞았어도, 부상을 입을지언정 죽진 않았을 텐데....

"왜...?"

왜 날 감싼 거야? 그냥 피했으면 됐잖아. 피할 수 있었잖아.

이오딘은 빛이 꺼져 들어가는 눈으로 나를 힘겹게 응시했다.

"미안.... 꼭... 살아남아.... 이젠 네가... 스승님의 유일한... 제자...."

나는 반응하지 못했다.

이오딘과 달리 검탁(劍托)을 깨우치지 못했기에.

그녀의 몸이 마구잡이로 꿰뚫려 허공을 훨훨 나는 걸, 멍청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오딘!!!!"

그 후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미친 듯이 오러를 끌어올려 싸웠다.

놈들의 발톱은 내 오러 실드를 쉬이 뚫지 못하고, 내 검은 놈들의 발톱을 꺾지 못하고, 몇 마리 베지도 못한 채 평행선만 달리는 답답한 싸움이었다.

그래서일까?

놈들은 날 오래 상대하지 않았다.

하나둘 대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결국 나 혼자 남았다.

수많은 시체 사이에 홀로 망연히 섰다.

이오딘에게 목이 잘려 죽은 줄 알았던 괴물의 목에선 꿈틀꿈틀 촉수가 기어 나와 다시 몸과 합쳐지고 있었다.

정말 지독한 놈들이다.

기어코 목을 다시 이어 붙인 괴물들은 크르릉대며 나를 노려보다가 훌쩍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이오딘의 말대로 놈들의 목표는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대공이 전리품으로 가져왔다는 사교도의 보물이 그것이겠지.

"갑자기 왜 이렇게 빡센 거야...."

이런 결말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지난번이랑은 너무 갭이 크잖아?

저번에는 기껏해야 소드 익스퍼트 상급 하나 해치우는 게 다였는데...?

얼핏 보였다.

시체들 사이로 버려진 인형처럼 짓밟힌 이오딘의 금발이.

산산이 찢긴 밀로의 연둣빛 몸체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대연회장 밖으로 나섰다.

"아아아악!

"끄아아아!"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중앙저택으로 몰려간 괴물들은 사용인들을 씹어 삼키며 저택을 짓밟아 댔다.

기사들이 저항을 하고 있었지만, 괴물들이 너무 많고 강했기에 몰아내려면 한참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하필이면 호라이즌 기사단의 단장이자 소드마스터인 브룩 드나르 경도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저건 또 뭐야...."

남쪽, 도시 한복판에선 불길한 형광빛 광채가 솟구치고 있었다.

사이키델릭 문의 달빛을 꼭 닮은 기괴한 색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저절로 깨달았다.

저 빛이 오늘 있었던 일의 원흉이라는 걸.

뿌드득.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난 그 누구도 지키지 못했다.

마치 세계의 종말과도 같은 풍경을 눈에 담으며, 무력하게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역사 개변에 실패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들려온 웬 여자 목소리.

[깨어진 인과를 소모하여 시간을 되감습니다.]

시간을 되감는다고?

[깨어진 인과는 무한하지 않으며, 실패는 완전한 패배를 의미합니다. 부디 매 순간 신중하기를.]

다시... 기회를 준다고!?

[무운을 빕니다.]

사무적인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 뒤에,

파라라락!

아공간에서 제멋대로 튀어나온 운명의 책이 활짝 펼쳐졌다.

[루세라스력 4673년. 11월 21일 맑음. 스승님께서 사교도의 보물을 빼앗아 귀환하셨다....]

이곳에 넘어올 때 펼쳐졌던 바로 그 페이지가 뒤에서부터 지워졌다.

...빼앗아 귀환하....

...빼앗아 귀....

...빼앗....

....

째깍째깍째깍째깍

시끄러운 초침 소리와 함께 내 몸은 또 한 번 지금의 시간대를 이탈했다.

그리고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이었다.

다각다각

나는 말을 타고 있었고, 옆에는 검은 머리칼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가 나란히 말을 몰았다.

그가 나를 바라보다가 툭 말했다.

"그래, 란센. 우연히 만나 내가 제자로 삼았지."

라이테나 셀시우스 대공.

그를 처음 만나던 순간으로 되돌아왔다.

* * *

루세라스력 4673년. 11월 21일.

모든 게 처음과 같았다.

운명의 책은 시간을 되감음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명확히 했다.

교류회 마지막 날,

괴물들을 막아 내라고.

대체 운명의 책의 정체가 뭔지, 내게 뭘 바라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은 그저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고마웠다.

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이.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너무 오래 쳐다본 걸까? 라이테나 대공은 이전과는 다르게 반응했다.

나도 그랬다.

"스승님."

"응?"

"스승님이 가지고 오신 전리품이 무엇입니까?"

라이테나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도 안다.

신뢰 관계도 쌓지 못한 내가 이런 말 던지는 거 무리수라는 걸.

그래도....

그래도 그 참상을 막을 수만 있다면.

대공은 날 찬찬히 바라보더니, 의외로 선선히 대답을 해 주었다.

"사교도의 성물이다."

"성물... 스승님. 사실은...!"

말하려고 했다. 그것 때문에 큰 사단이 일어난다고. 그러니... 자리를 비워선 안 된다고.

헌데,

"그만."

대공은 나를 보지 않았다.

마치 무슨 목소리라도 듣는 것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다시 시선을 내려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리 말했다.

"그건 내가 아닌, 네가 감당해야 하는 일인 것 같구나."

뭐...?

대체 뭔데?

당신은 뭘 알고 있는 건데?

멱살이라도 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도 모른다. 그저 어쩐지... 참으로 가엽고, 고맙구나."

대공은 그리 말할 뿐이었다.

#22화 죽지 마

단호한 목소리와 표정

나는 직감했다.

이 한없이 거대한 존재는 내가 아무리 간청을 해도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걸.

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알겠다.

그럼 나는 나대로 해야지.

"스승님, 그럼 대신 다른 부탁이 있습니다."

다시 생각하니,

이게 오히려 맞는 거 같았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대공에게 청했다.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강해져야 한다.

지금의 나를 견딜 수가 없다.

살짝 대공의 입꼬리가 휜다 싶더니, 그는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사방이 탁 트인 들판이었기에 대련은 어디서 해도 좋았다.

두 명의 마법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는 잠시 말을 세워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체검(體劍)의 경지인가? 그 막대한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검술의 경지도 체검이라니. 강하구나."

대공은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경지를 파악하곤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의 너는 자신이 추구해야 할 목적지를 보는 게 우선일 것 같구나. 잘 보거라. 이것이 바로 충검(充劍)의 경지, 강기(鋼氣)이다."

우우우우웅-

대공의 검이 울었다.

어...?

난 몸이 덜덜 떨렸다.

저게 뭐야...?

저게 강기라고?

"어떤 것 같으냐?"

"어떻냐고 하셔도...."

나는 이를 악물고 간신히 대공의 검을 마주 보았다.

왜 이오딘이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소드마스터냐고 오해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강기라는 게, 겉보기에는 소드 오러와 꼭 닮아 있었으니까.

웅웅 울며 황금빛으로 물든 검.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걸 마주한 내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저... 아직 살아 있습니까?"

그건 검의 형상을 한 죽음이었다.

눈에 담는 순간 이미 영혼 깊숙한 부분이 베여 나간 기분이었다.

저 검은 경계였다.

저 검 너머로 보이는 것은 그저 죽음의 캄캄함, 저승의 차가움.

저 검과 마주한다면, 그 무엇도 본래의 형체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 어떤 지혜도, 그 어떤 열정도, 나뉘고 나누어져 한 줌의 먼지로 돌아갈 것이다.

"죽음. 그래. 네 눈에는 이게 죽음으로 보이는구나. 꽤나 험난한 삶을 살아온 모양이지."

작게 웃은 그는 검 끝을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겁 많은 고양이처럼 펄쩍 뒤로 물러서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두려워도 부딪혀 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지. 전력으로 덤벼라."

이를 악물었다.

저런 검을 보여 주고 덤비라니.

질 나쁜 농담처럼 들렸지만...

"갑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구우우우웅-!

반로아를 타고 쭉 뻗어 나가는 검푸른 색의 오러 블레이드.

그 강렬한 힘의 파동에 폭풍이 몰아친다.

체검의 경지에 오른 날카로운 검기가 오러 블레이드와 섞이며 사방을 할퀸다.

들판에 가득하던 푸른 잔디가 조각조각 잘려 휘몰아쳤다.

초록빛 눈보라가 일대를 휩쓴다.

"허어...."

"저런 힘이...."

구경하던 두 명의 마법사가 신음을 흘렸다.

"좋구나.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참으로 파괴적인 검술이야. 익스퍼트 최상급이라 해도 저 힘을 감당하기는 어렵겠지."

라이테나 대공은 여유롭게 감탄을 표했다.

그래.

부딪혀 보자.

들끓는 오러.

비록 늑대 괴물의 발톱도 끊어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오러는 대개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니,

다시 한번 믿어 본다.

"갑니다!"

[템페스트]

꽈아아앙!

바람의 장벽이 좌우로 찢겨 나가고, 그 사이로 난 길을 꿰뚫는다.

초신속의 돌진.

그리고 내 검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온 세상을 찢어발길 듯한 폭풍을 일으켰지만,

쩌저적!

대공의 강기와 맞닿는 순간, 종잇장처럼 잘려 나풀거렸다.

성난 늑대처럼 달려들던 내 오러 블레이드가 겁에 질린 나비 떼처럼 흩어졌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죽음과도 같은 황금색 강기.

"아...."

조각난 오러가 흩날리다가 마나로 분해되어 흩어졌다.

나는 반로아 위에 살포시 얹힌 대공의 검을 보았다.

대단한 명검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대공이 마음을 먹었다면, 저 어중간한 검으로도 반로아를 두 동강 낼 수 있었음을.

단 일 검으로 승부가 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격차.

나는 침음을 삼키며 그에게 물었다.

"...소드마스터는 다 이럽니까?"

"소드마스터라면 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신선한 충격이 후두부를 강타했다.

1만 년 뒤 나의 시대에서,

나도 소드마스터라고 나름 자신만만했는데....

'격이 너무 달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이 시대 검술의 상한선이 훨씬 높다.'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건 현대의 오러 검술이었다.

오러의 막대한 출력으로 신체를 강화하고 검의 위력을 더하면, 어지간한 적은 짓누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단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 고절해지는 쪽은 고대의 검술이었다.

'대충... 익스퍼트 상급부터 역전이 되는 걸까?'

익스퍼트 하급과 중급까지는 오러 검술을 익힌 쪽이 쉽게 압도하는 게 가능하지만, 상급부터는 거의 패배하게 되고... 마스터에 이르면 그 격의 차이는 이토록 아득해진다.

사실 늑대 인간을 닮은 괴물들만 봐도 그랬다.

도무지 이해는 안 가지만, 놈들의 발톱은 내 오러 블레이드를 견뎌 낼 만큼 단단했고, 놈들의 반응속도는 내 검격을 피할 만큼 빨랐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저 힘세고 단단한 멍청이가 되어 버렸다.

반면에 이오딘은 어떻던가?

고작 익스퍼트 상급에 불과한 그녀도, 그 괴물의 목을 툭툭 떨어뜨릴 수 있는 한 수가 있었다.

검술. 즉 검을 다루는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고대의 검술은 현대의 오러 검술을 한참이나 상회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

역시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

검탁.

그 경지에 오르는 것.

이오딘의 검을 빌리지 않고도 내 스스로 괴물들의 목을 떨어뜨릴 수 있어야, 그 터무니없는 습격을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이테나 대공은 꿰뚫는 시선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다가 대답했다.

"소드마스터의 충검(充劍)이란 네 영혼으로 너만의 검을 벼리는 것이다. 너의 작은 우주에서 시작한 그 검으로 네 손에 들린 검까지 물들일 때 충검이 완성된다."

"검령과의 교감을 극한으로 끌고 가야 하는 겁니까?"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교감이라기보다는 수렴, 그리고 초월이라고 할 수 있다. 산을 오르는 길은 제각각이지만 정상에선 모두가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만나 초월하는 것이지."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하지만 대공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지금 단계에선 그저 기억하거라. 내가 보여 준 강기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리고 네 영혼을 한 자루의 검으로 벼려야 함을. 그거면 충분할 거다."

여전히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나는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