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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나이트 벌슨의 일기

[대륙력 1337년. 3월 11일] 하늘이 불타오른다.

멸망했다.

500년 역사의 기사왕국, 반로아가.

나는 지키지 못했다.

수도가 불에 타고,

국왕 전하도 왕비 마마도, 왕세자 저하도 돌아가셨다.

죽지도 못한 나는, 2왕자 저하만을 안고 간신히 도망쳤다.

미리 약속해 둔 도주로에 도착하고 보니, 공후백작가의 마지막 남은 소공자, 소공녀 분들이 모여 계셨다. 각 가문 출신의 20명 남짓 되는 기사들이 피에 절은 채 그 주변을 경계했다.

다들 어리셨다.

대개 3살에서 8살. 제일 나이가 많은 축이 12살, 13살.

왕자 저하까지 포함해 총 16명의 소년 소녀들은 못 볼 꼴을 본 탓인지, 울지도 못하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필이면 오늘은 2왕자 저하의 13번째 생일이었다.

부모님과 형제의 죽음을 제 눈으로 목격한 왕자 저하는 아무 말씀도 없이 타오르는 하늘만 올려다보셨다.

[대륙력 1337년. 4월 1일] 폭풍우가 친다.

록시움의 국경을 넘어 밀항을 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우리는 지금 글로리랜드를 떠나 로버랜드로 향하는 중이다.

전 세계의 범죄자들과 도망자들이 모이는 무법의 땅.

명예를 모르는 강도 백작들이 지배하는 대륙.

그런 곳이, 우리에겐 오히려 안전할 거다.

밖에는 폭풍우가 치고, 선창은 삐걱거린다.

희미한 등불 아래에 작은 어깨들이 잔뜩 웅크린 채 모여 있다.

이제 유일한 적통이 되신 제2 왕자 란센 저하.

그리고 두 공작 가문과 세 후작 가문, 다섯 백작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들.

우리가 저분들을 지켜야 한다.

비록 우리 앞날에 남은 것이 불명예와 비참함뿐일지라도.

(마구 번진 잉크)

...왕궁을 빠져나올 때 입은 내상 때문에 속이 좀 불편하다.

[대륙력 1337년. 8월 23일] 비가 온다.

크시아스 백작이 다스리는 쿠샨시(市)에 도착한 지도 벌써 2달이 지났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기사가 여럿 죽고 이제 살아남은 건 나를 포함한 12명뿐이다.

우리는 버려진 유적에 숨어 살고 있다.

혹시 모를 제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우린 거지소굴을 택한 것이다.

도무지 귀한 분들을 모실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아직 어리셔서 그런지 소공자, 소공녀 님들은 금세 이곳에 적응하셨다.

이 유적에 원래부터 살고 있던 도시의 부랑자들과 어린 고아들.

그 고아들과도 곧잘 어울려서 뛰어노셨다.

기사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막노동을 나갔지만, 호위를 위해서 꼭 4~5명은 남았다.

"벌슨 경.... 괜찮은 걸까요. 귀한 분들을 이런 곳에서...."

그렇게 물어 오는 기사들과 나도 같은 심정이었지만, 나는 그들을 다독였다. 안전하다고 느껴질 때까진 몸을 납작 엎드려야 한다.

제2 왕자 저하.

그리고 비슷한 또래의 공자, 공녀님들께선 줄곧 검술을 수련하셨다.

각 가문의 기사들이 스승의 역할을 했다.

더 어린 소공자, 소공녀님들께서 놀아 달라고 떼쓸 때가 아니면, 항상 목검만 휘두르셨다.

밤이 깊으면 귀한 분들께선 서로를 끌어안고 다독여 주며 잠에 든다.

그 모습을 보다 보면 울컥, 감정이 치밀어오른다.

누군가를 이토록 간절히 지키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다.

그런데,

입었던 내상이 치유가 되질 않는다.

나는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그 사실이 날 두렵게 한다.

[대륙력 1337년. 12월 1일] 눈이 내린다.

2왕자 저하께서 호칭을 정리하셨다.

그동안은 남몰래 왕자 저하, 소백작님 이런 식으로 속삭였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게 왕자 저하의 지론이셨다.

"벌슨 아저씨. 앞으로 이렇게 부를게. 아저씨도 내 이름을 불러. 란센. 이렇게. 말도 놓고."

"제가 어찌...."

"어허. 해 봐."

나를 포함해서 기사들은 힘겹게, 란센이란 두 글자를 입에 담았다.

"잘하네. 너희들도. 이제부터 날 형이나 오빠라고 불러. 나도 너희를 동생으로 여길 테니까."

소공자와 소공녀님들도 처음엔 어려워했지만, 금세 란센 형! 란센 오빠! 하고 부르기 시작했다.

왕자 저하.... 아니, 란센이 호칭을 꼭 지키라고 강조하셨으니, 이제부턴 일기에도 란센이라고 적어야 할 것 같다.

솔직히 감격했다.

어린데도 저렇게 총명하시니.

검술도 나날이 일취월장하고 계신다.

다행히 왕실 근위기사단장이었던 내가 왕가의 비전검술을 모두 익히고 있으니.... 반로아의 검은 끊기지 않고 계승될 것이다.

비록 내상이 굳어져 익스퍼트 최상급이었던 내가, 익스퍼트 하급 수준의 오러밖에는 쓸 수 없게 되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낼 것이다.

[대륙력 1339년. 5월 27일] 맑고 쾌청하다.

이곳의 생활도 2년이 다 되어 간다.

기사들이었던 우리는 이제 "아저씨"라는 호칭에 더 익숙해졌다.

란센과 다른 아이들은 누가 봐도 형제자매들처럼 친근하게 어울려서 지냈다.

란센은 친해진 고아 아이들도 우리 식구로 거두었다.

우리 "아저씨"들도 그 말에 따랐다.

그래. 저 고아들을 기사로 키워서 우리 귀한 분들을 지키도록 하면 될 테니까.

란센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검을 휘둘렀다.

벌써 검이 오러로 물들었다.

15살에 익스퍼트 중급을 눈앞에 두다니....

기사의 왕국으로 이름 높았던 반로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천재였다.

란센은 우리의 희망이고 자랑이고 긍지이다.

[대륙력 1341년. 8월 1일] 매미가 엄청나게 운다.

란센은 말했다.

"이제 이만하면 제국도 우릴 못 찾는다고 봐야 돼."

그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막노동으로 먹고사는 생활은 그만 청산하자고 했다.

이젠 세력을 일으킬 때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도시의 지배자, 크시아스 백작의 가신이 되자고.

"인원은 나랑 로이. 아이하스. 일리아. 제로나. 그리고 아저씨들 10명 정도 따라오면 될 거 같아."

오랜만에 적어 보자면,

란센 왕자 저하와 동갑인 17세의 로이 소공작님. 그리고 16세인 아이하스 소후작님, 일리아, 제로나 소백작님이 되신다.

"벌슨 아저씨랑 입센 아저씨는 남아서 아이들 지켜 주고."

란센은 14명의 무리를 이끌고 백작 저택을 다녀왔다.

돌아온 그의 얼굴이 무척 밝았다.

"이제 우리 일네온 패밀리는 크시아스 백작에게 소속된 조직이야. 앞으론 좀 편하게 살아 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유적의 이름이 일네온 던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일네온 패밀리다.

일이 술술 풀리는 느낌이었다.

란센의 검술도 벌써 익스퍼트 중급을 넘어 익스퍼트 상급을 바라보고 있다.

소드 오러.

그의 검은 검푸른빛의 오러로 완연히 물들었다.

검푸른(Blue black),

반로아 왕가의 비전심법인, 철혼(鐵魂 Iron heart)의 상징색.

다시 피어난 그 아름다운 빛을 보고 있자면, 괜히 목이 메인다.

[대륙력 1341년. 11월 28일] 하루아침에 추워졌다.

크시아스 백작이 주는 임무는 주로 마수를 토벌하거나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

종종 명예롭지 못한 일도 시키는 것 같았지만, 란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우리 식구들이라며 항상 강조해 말했다.

덕분에 우리 형편은 나날이 나아졌다.

란센이 일을 잘 처리하고 올 때마다, 백작은 알찬 사업체를 넘겨주고 목 좋은 자리의 징세권을 내려 주곤 했다.

우리는 유적 옆에 새로 저택을 짓기로 했다.

실전을 병행하는 탓인지 란센의 검술은 눈부시게 발전하는 중이다.

그의 나이 17살.

벌써 익스퍼트 상급이다.

[대륙력 1344년. 3월 11일] 바람에서 봄 냄새가 난다.

란센은 천재다.

어쩌면 반로아 왕국 역사상 제일의 천재가 아닐까?

란센의 20살 생일.

그의 검에선 오러 쓰레드(Aura Thread)가 피어올랐다.

검 밖으로 뿜어져 나온 오러가 실처럼 길게 늘어져 하늘거렸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올랐다는 증거.

나름 기재라 불렸던 나도 거의 서른이 되어서야 이루었던 경지를, 고작 스무 살이란 어린 나이에 따라잡다니....

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륙력 1348년. 5월 12일] 꽃 냄새가 난다.

오늘 나는 보았다.

란센의 검에서 솟아난 오러 블레이드를.

그 강력한 기세를 따라 폭풍이 일어났다.

확실하다.

그는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고작 24살에.

이건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성취라기보다는 '진화'라고 불러야 할 거대한 도약.

당장 나만 해도 29살에 익스퍼트 최상급에 올랐지만, 45살인 지금도 소드마스터의 벽을 넘지 못했다.

천재라 불렸던 많은 기사들이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익스퍼트 최상급의 저주 아니던가?

그런데 소드마스터라니.

기라성 같은 기사들이 넘쳐나던 반로아 왕국에도 소드마스터는 단 4명뿐이었다.

별처럼 빛나는 재능 중에서도 한 줌의 선택된 진짜 천재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

위대한 기사의 증명.

혈혈단신으로도 한 지역의 패자가 될 수 있는 무력.

이것은 오욕과 인고의 세월 끝에 겨우 피어난, 반로아 왕국의 마지막 불씨였다.

란센은 말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벌슨 아저씨. 아니.... 나이트 벌슨."

왕국이 불탔던 그날 이후로, 처음 보는 시원한 미소였다.

그래.

그라면 닿을 것이다.

소드마스터를 넘어서 그랜드 마스터라는 지고의 경지에.

그때가 오면, 란센을.... 다시 왕자 저하라고, 아니 국왕 전하라고, 당당하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대륙력 1348년. 6월 1일] 흐리다.

뭔가 잘못되었다.

란센이 크시아스 백작의 명령을 받고 마수를 토벌하러 떠난 직후였다.

크시아스의 부하들이 저택에 들이닥쳐 아이들을 모두 데려갔다.

약해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불길하다.

그들은 '백작님의 초대'라고 말했지만, 한없이 불길했다.

젠장. 재산을 정리하고 이제 곧 쿠샨시(市)를 떠날 예정이었는데, 그걸 눈치챈 걸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10년을 넘게 충성했는데, 설마....

내 탓이다.

내 탓이다.

오러 코어가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저항을 했어야 했나?

[대륙력 1348년. 6월 5일] 비가 온다.

백작 저택으로 초대됐다던 아이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수 토벌을 다녀온 란센은 돌아오자마자 자초지종을 듣고 곧장 백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돌아온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어떻게 되었냐 물어봤지만 란센은 대답하지 않았다.

란센을 따라갔던 로이가 말해 줬다.

란센이 크시아스 백작에게 한 가지 임무를 받았다고.

혈백작 들카슈를 죽이라는 임무를....

크시아스 개 같은 새끼.

아이들은 인질이었다.

이 자살 임무를 거절할 수 없게 하기 위한.

[대륙력 1348년. 6월 6일 새벽] 아직도 비가 온다.

혈백작 들카슈가 지배하고 있는 카슈시(市)는 우리가 살고 있는 쿠샨시(市)의 동쪽에 있다.

여러 이권이 겹치고 충돌했기에, 크시아스와 들카슈는 항상 앙숙이었다.

문제는 들카슈 백작의 무력이다.

크시아스 백작 역시 소드마스터로 로버랜드 전역에 무명을 떨쳤지만, 그건 들카슈 백작도 못지않았다.

그는 진혈을 가진 강력한 뱀파이어였으며, 휘하에는 소드익스퍼트 상급 이상의 뱀파이어 혈족들이 즐비했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란센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새벽에 몰래 떠나려고 했던 것은.

그는 혼자 목숨을 걸고자 한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그렇게 눈치가 없지 않았다.

모두 깨어 있다가 란센을 저택 입구에서 붙잡았다.

나는 란센을 말리기 위해 열변을 토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가시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의 목숨보다 저하 한 사람의 목숨이 더 중합니다."

하지만, 란센은 고개를 저었다.

"동생들이 없으면 나 역시 살아갈 이유가 없어. 그 동생들은 지금은 크시아스 백작의 손에 붙잡혀 있고."

말다툼이 있었지만 결국 14명이 란센을 따라가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기사 중에 뒤에 남겨진 건 단 둘뿐이었다.

쓸모없는 나. 그리고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렸던 입센 경.

"우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벌슨 아저씨.... 아니, 나이트 벌슨. 그대가 동생들을 돌봐 줘야 돼. 근데 걱정 마. 이겨서 돌아오면 되니까. 그럼 모든 게 다시 제자리를 찾을 거야."

저하는 늘 그렇듯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 웃음을 믿고 싶어졌다.

하늘이시여.

부디 란센 왕자 저하와 로이 소공작님, 아이하스 소후작님, 일리아 소백작님과 제로나 소백작님을 지켜 주소서.

그러고도 남는 자비가 있다면, 저의 오랜 동료 기사들도 굽어살펴 주소서....

[대륙력 1348년. 6월 8일] 야속하게도 하늘엔 별이 반짝인다.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항명을 결심했다.

밤새 말을 달려 카슈시(市)에 도착했다.

검을 빼어 들고 앞을 막는 적병들을 베어 넘겼다.

안 그래도 내상이 깊었던 오러 코어가 아예 부서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오히려 코어를 더욱 힘껏 쥐어짰다.

마침내 도착한 들카슈 백작의 집무실은 지옥이었다.

피. 어디를 둘러봐도 붉은 피다.

붉은 바닥엔 익숙한 사람들이 조각 나 있었다.

소공작님, 소후작님, 소백작님들.... 그 누구 하나 눈을 감지 못한 채 피 웅덩이 속에 잠겨 있다.

이날 이때까지 충심으로 함께해 온 동료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들카슈 백작 역시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지만, 그딴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벽에 기대앉아 색색 숨을 쉬는 란센 왕자 저하가 보였다.

오른 손목이 보이지 않았고,

왼쪽 다리는 정강이부터 발끝까지 짓뭉개져 있었다.

오러 코어에도 금이 갔는지. 늘 강건하게 흘러넘치던 오러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저하의 두 눈동자는 텅 비어 있는 것만 같았다.

"다 끝났어. 벌슨...."

그 목소리에, 내 영혼은 무너져내렸다.

뭐가 끝난 걸까?

반로아 왕국의 명맥을 잇겠다는 꿈?

어쨌든 행복하게 살아 보자던 다짐?

우리의 긍지와 우리의 희망.... 그 모든 게.... 정말 이렇게 끝이라는 건가?

나는 정신을 잃은 저하를 들쳐 업고 카슈시를 빠져나왔다.

11년 전. 왕국을 탈출하던 그날이 생각나서 자꾸만 피눈물이 흘렀다.

쿠샨시(市)에 도착했을 때, 위태롭던 나의 오러 코어는 완전히 부서져 산산이 흩어졌다.

나는 이제 완벽하게 쓸모가 없다.

[대륙력 1351년. 2월 25일] 아직도 춥다.

나이트 입센이 죽었다.

이로써, 남은 기사는 쓸모없는 나 하나뿐이다.

쿠샨시의 무뢰배들은 겨우 한 줌 남은 우리의 사업체마저 빼앗겠다고 계속 분쟁을 일으킨다.

크시아스 백작은 뒤에서 그걸 방관하거나 종용할 뿐이다.

란센은 그날 이후로 늘 똑같았다.

포기하고 또 포기했다.

입센 경의 복수는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그저 식구들을 지키는 것.

단지 그것만을 위해 그는 살아가고 있다.

두 눈을 들여다보면 텅 비어 있는 것만 같다.

하루하루 잃어 가는 날들의 반복이다.

[대륙력 1351년. 4월 6일] 다시 꽃이 핀다.

오늘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기적?

그래.

란센 왕자 저하에게 기적이 찾아왔다.

시간을 거슬러 온, 기적.

<나이트 벌슨의 일기 中>

<도주 경로>

<5대양 6대주>

#2화 내 꼴이 참....

"어떡해...."

"저러다 죽겠어...."

16살? 17살?

소년과 소녀가 싸우고 있다.

새파란 장검을 들고.

핏방울이 죽죽 쏟아지고, 서로를 노려보는 눈에는 점점 독기가 차오른다.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은 모두 창백하게 질려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 가운데에. 혼자 웃고 있는 남자가 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고 까만 셔츠에 까만 경장갑을 걸쳤다.

아이들은 모두 그 남자의 눈치만 본다.

대륙력 1351년. 4월 6일.

기적이 일어나기 직전,

그날 아침의 이야기.

* * *

왜 사냐고 묻는다면,

그냥 살고 있다.

팔다리를 잃고 오러 코어에도 금이 간 후로, 사실 그냥 죽고 싶었다.

어차피 가장 가깝던 친구들도 다 죽었으니까.

그러지 못했던 건, 남은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근데 또 웃긴 건, 내가 굳이 살아서 해줄 수 있는 게 그닥 없다는 거다.

산다 해서, 더 이룰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더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뿐.

그래도 아직 아이들에겐 내가 필요하니까... 가능한 견뎌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솔직히 말하면,

별로 의욕이 없다.

"란센 쌤! 쌔앰! 빨리! 빨리! 큰일 났어! 누나랑 형아랑 싸워!"

그러니까 6살짜리 꼬마애, 세온이가 달려와서 소매를 잡아끌었을 때도 난 심드렁했다.

애들이 치고받고 싸우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다만 세온의 손짓 발짓이 너무 절실했기에 모르는 척하고 끌려가 주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의족을 단 왼쪽 다리와 의수를 낀 오른쪽 손이 오늘따라 더 아프다 생각하면서.

'오늘은 누가 싸우려나?'

요샌 애들이 너무 많아서 한 번에 다 떠올리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직 어렸던 우리는 16명이었다.

반로아 왕국의 마지막 자손들.

하지만,

아이들은 자꾸 늘어났다.

쿠샨시(市)의 폐허, 일네온 던전에서는 버려진 고아들이 계속 솟아났고, 걔네들은 나이대가 그나마 비슷한 우리를 졸졸 따라다녔으니까.

크시아스의 가신이 되어 우리만의 저택에 살기 시작한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동생들은 고양이를 주워 오듯 자꾸 어디서 고아를 업어 왔고, 식구는 계속 늘어만 갔다.

세온이도 그렇게 들어온 막내다.

우리 과거를 모르는 이 녀석은, 그냥 형아들 누나들이랑 노는 게 즐거울 뿐이다.

나랑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날 선생님이나 쌤이라고 부른다.

"란센 쌔앰! 빨리!"

"어어. 그래."

아이들의 아지트인 일네온 던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저택의 바로 옆.

세온이는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를 익숙하게 달려서,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간다.

녀석을 따라 어두운 던전 복도를 절뚝절뚝 걷다가, 나는 흠칫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피 냄새!'

그것도 짙은 피 냄새.

직감이 경고성을 울린다.

이건 단순한 싸움이 아니다.

"세온아. 잠시만."

쿵!

멀쩡한 오른 다리로 땅을 찍고 달렸다.

압축되듯 뒤로 밀려나는 유적의 복도.

그 끝에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데이지랑 세클란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고 있었다.

'얘들이 왜?'

데이지는 반로아 출신 동생들 중 막내였다.

줄리앙 후작가의 마지막 남은 핏줄.

어릴 땐, 유독 나를 따르던 아이.

세클란은 비록 반로아 왕국 출신은 아니었지만, 녀석 또한 우리와 함께한 지 10년은 된, 가족 같은 사이.

심지어 둘은 동갑내기 단짝 친구였다.

근데 진검으로 싸운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콰앙!

있는 힘껏 발을 굴렀다.

단단한 화강암 타일에 쩌적 금이 가고 폭탄 터지는 듯한 굉음이 유적 안에 메아리쳤다.

데이지와 세클란이 움찔 놀라며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이 사태의 원흉이 눈앞에 있었다.

5세~18세 사이의 아이들이 모인 가운데, 홀로 눈에 띄는 27살의 남자.

이름은 나기.

크시아스의 가신이다.

예전엔 마주칠 일이 많았다.

지금은 3년 만의 재회였고.

"너 지금 뭐 하냐?"

내가 묻자, 놈은 반갑다는 듯이 웃었다.

"이야! 란센 형님! 진짜 만났네요?"

"지금 뭐 하냐고."

"아.... 이거요?"

나기는 피투성이가 된 데이지와 세클란을 턱짓으로 까딱 가리키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양 손바닥을 흔들었다.

"면접 중이에요."

"면접?"

"네. 싹수가 좀 보이면 혈족으로 거둬 주려고요. 물론 제 직속으로."

"...혈족?"

이게 무슨 흡혈귀 풀 뜯어먹는 소리야?

들카슈 백작이 죽은 후 크시아스 백작은 그의 진혈을 취해 뱀파이어가 되었다.

나이가 들며 점점 쇠락해 가는 육신을 극복하고 싶었던 거지.

지금 크시아스 백작의 가신들 태반이 뱀파이어였고.

그러니까 지금 나기 저 새끼가 하는 말은...

데이지나 세클란을 피 빨아 죽이고... 뱀파이어로 재탄생시키겠다는 소리인 거다.

그것도 고작 나기 새끼 따위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하위 혈족으로.

이만큼 화가 나 본 건 정말 오랜만이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곤두서는 기분.

하지만 나기는 눈치가 없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페이스로 말을 늘어놓는다.

"네. 혈족이요. 근데 듣긴 했지만 진짜 이런 곳에 계셨구나? 그래도 형님, 모아 둔 돈도 좀 있을 텐데 왜 이런 외지에 살아요?"

"니 냄새 나는 피를... 감히 누구한테 섞겠다고?"

"아, 맞다. 여기 고대 유적이죠? 200년 전인가? 여기서 엘릭서가 발굴됐다면서요? 아쉽네. 그거 있었으면 선배 몸도 고칠 수 있었을 텐데."

"죽고 싶은 거냐?"

"그래도 좀 위험한 거 아니에요? 이 유적 만 년도 더 전에 만들어졌다는데... 이러다가 갑자기 막 무너지는 거 아닌가 몰라?"

"백작님도 이걸 아시나?"

백작님이란 말.

그 한마디에 나기의 분위기가 변했다.

"백작님? 아.... 형님도 참....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하네."

성큼, 란센에게 다가선 나기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아직도 니가 소드마스터 같아요? 백작님이 손발 다 잘리고 퇴물이 된 지금의 너를, 1이라도 신경 쓰실까요?"

"그럼 그냥 니 독단으로 온 거야? 여기가 우리 패밀리의 영역인 걸 알면서도?"

"네. 너네 패밀리 영역인 거 알고 왔어요. 그런 소문이 있더라. 그 대단하던 소드마스터 란센이 손발 다 잃게 된 게, 고작 꼬마애들 때문이라는."

"뭐...?"

나기의 얼굴에 스멀스멀 웃음이 피어올랐다.

아까처럼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광기가 일렁이는 진짜 웃음이.

"근데 진짜네? 얘네들 지키려고 이러는 거죠?"

나기의 번들거리는 눈이 아이들을 주욱 훑었다. 마치 하나하나 다 기억하겠다는 듯이.

"내키진 않지만 싹 다 혈족으로 거둬 줄까? 최하위 혈족이면 좀 멍청해지긴 해도... 지금보다는 잘 먹고살 텐데."

놈의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나는 솜털이 바짝 곤두설 정도로 위협감을 느꼈다.

아마 지금 나기의 눈에 비친 내 눈은 화르르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애들 건드리지 마라. 그러다 너 죽어."

"그럴 능력은 되고?"

그 순간,

난 마음을 정했다.

쐐애액!

허리춤에 검을 뽑아 그대로 휘둘렀다.

죽이자. 그냥 죽이고, 남은 보물을 탈탈 털어서라도 백작에게 용서를 구하자. 그게 낫겠다.

하지만 그 칼날이 나기의 목에 닿는 일은 없었다.

타닥!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난 2명의 남녀.

둘 다 얼굴이 창백했다. 뱀파이어 혈족이라는 의미.

채앵!

여자 쪽이 내 공격을 막았고 남자 쪽이 자세를 낮추며 멀쩡한 내 오른 다리를 향해 칼을 그었다.

카카캉!

스파크가 튀듯, 순식간에 공방이 오고 갔다.

'익스퍼트 하급 수준인가...?'

아니, 뱀파이어의 우월한 육신과 오러라면, 중급 정도로 봐줄 수도 있겠다.

꽤 급이 있는 혈족인 셈인데...

그래서 뭐?

슥- 움직여 공격을 피하고 즉시 주먹과 발을 꽂아 넣었다.

"큭!"

"컥!"

아플 거다.

급소를 제대로 쳤거든.

뒤로 나가떨어져서 구르고, 바닥에 주저앉는 둘.

근데 금세 눈에 독기를 품고 다시 일어나 검을 휘둘렀다.

나는 고개만 슬쩍 틀어 공격을 피한다.

"신입들인가? 겁이 없네."

"뭐, 상대가 퇴물이잖아요."

나기 놈은 나한테 자격지심이 있는 게 틀림없다. 입만 열면 퇴물 퇴물.

그래. 퇴물이 어떻게 싸우는지 한번 봐라.

서컥!

"아아아악!"

달려들던 남자의 손목을 노려 그었다.

찢긴 동맥에서 피가 물총처럼 쭉 뽑혔다.

"너...!"

그 모습을 본 여자가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다를 게 없다.

뻐억!

"컥!"

가볍게 여자의 배를 걷어차 넘어뜨리고 검을 내리꽂아 발목을 그었다.

"아아악!"

촤아악!

여자가 웅크리며 발목을 감싸 쥐었지만, 손 틈 사이로 피가 찍찍 솟아올랐다.

남자 혈족도 사정은 마찬가지.

둘 다 치명상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 봤자. 모기 새끼라 금방 아물겠지만.

"잠깐 쉬어라."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 나기만 죽이면 된다. 이 이상 크시아스 백작을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기. 내가 기억하기로는 소드익스퍼트 중급이었다.

꽤 재능이 있었으니, 지금쯤은 익스퍼트 상급이 되었으려나.

객관적으로 보면 내가 불리하다.

내 손상된 오러 코어로 낼 수 있는 출력은 중급에 좀 못 미치는 정도인데다가 손도 발도 정상이 아니니까.

하지만,

'왕년의 소드마스터가 우스워?'

익스퍼트 상급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피에 절은 칼날을 허공에 털어 냈다.

"나기야. 니가 나한테 자격지심이 있는 건 알아."

"제가요? 너한테요?"

놈은 그렇게 말하며 의수와 의족이 달린 내 손과 발을 슥 훑어보았다.

저 봐.

자격지심 맞구만.

"자격지심이 아니야? 그럼 혹시 니가 좋아하던 그 여자애 때문인가?"

"뭐요?"

"왜 있었잖아? 4년 전에. 이름이 제니아였나? 근데 그건 내 잘못이 아니지. 니 얼굴이 토 나온대. 걔가 나랑 밥 먹을 때마다 그러더라고. 제발 말 안 걸었으면 좋겠다고."

"...하?"

"그래도 난 그때 니 편 들어줬다? 나쁜 애는 아니라고."

"허 참...."

키이이잉!

나기는 처음으로 분노를 터뜨렸다.

그가 뿜어내는 붉은 오러가 사방을 잠식했다.

안절부절못하며 구경 중이던 동생들이 그 기세에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섰다.

우우웅-

나 역시 오러를 끌어올렸다.

반로아 왕가의 오러심법, 철혼(鐵魂)이 검푸른 오러를 피워 올린다.

하지만 나기가 뿜어내는 흉흉한 붉은 오러에 비하면 나의 오러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할 뿐이다.

'출력 차이가 너무 커. 정면 승부로는 답이 없다. 변초로 속이고 일격에 목을 거둔다.'

마음을 정했다면, 행동은 신속하게!

쿵!

땅을 부술 듯 짓밟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허장성세.

일검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검을 치켜들었다.

막지 않고는 못 배길 거다.

애초에 내가 유치한 도발을 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으니까.

흥분시켜서 시야를 좁히기 위해!

이 변초에 속아 검을 헛치는 순간, 나는 놈의 목을 벤다.

그런데,

서컥!

내 검은 허공에서 저절로 두 동강이 났다.

주르르-

나기의 검이 내게 닿지도 않았음에도 뺨을 타고 선득한 피가 흘러내린다.

"형님."

히죽 웃어 보이는 나기의 검에선 붉은 오러가 실처럼 올올이 풀려나왔다.

나기가 내 의도를 간파한 게 아니다.

그냥 사방을 장악한 오러의 실이 내 검을 싹둑 잘라 버린 거다.

늘어진 오러의 실이 나를 포위했다.

오러 쓰레드(Aura Thread).

익스퍼트 최상급이 선보일 수 있는 절기.

익스퍼트 최상급이 특별한 이유.

'이러면... 답이 없는데....'

나기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은 채, 나를 제압했다.

"왜 이렇게 못나졌어요. 우리 형님. 코어에 금이 갔다더니. 상태가 생각보다도 더 나쁘네."

"...."

"놀랐어요? 나는 뭐 최상급 못 될 줄 알았나? 뱀파이어가 되고 보니까. 별로 어렵지도 않던데요?"

"...."

길게 늘어진 오러의 실이 내 목덜미를 날름날름 핥았다.

나는 꼼짝도 못 했다.

이건 움직이는 순간 죽는다는 게 너무나 확실했으니까.

"자, 그럼 어떻게 할까? 그 잘난 얼굴을 여기서 죽죽 그어 볼까? 다시는 남의 얼굴 두고 함부로 지껄이지 못하게?"

나기의 두 눈에 잔혹함이 일렁거렸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사태를 역전시킬 방법은?'

없다.

그럼....

'전략을 바꿔야지.'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곤,

웃어 보였다.

어딘가 비굴한 웃음을.

눈도 얼른 내리깔았다.

비장의 전술.

태세 전환.

"하하.... 나기.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응?"

나기의 목소리가 기묘하게 올라간다.

"뭐야? 지금 구걸하는 거예요?"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즐거움.

그래. 내가 너를 모르냐?

얘가 원하는 게 이거다.

내 밑에서 열등감을 느끼며... 항상 이러고 싶었던 거다.

날 짓밟고 추락시키고.

난 기꺼이 그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

아이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진짜 잘할 수 있다.

"근데 형님. 너무 성의가 없는 거 아닌가? 무릎이라도 꿇어야지."

"무릎? 하하...."

나는 주저하는 척했다.

사실 그깟 무릎 백 번도 꿇을 수 있지만 지금은 안 된다.

그러면 오히려 흥미를 잃을 테니까.

놈은 나를 망가뜨리고 싶은 거지 이미 망가진 나를 보고 싶은 게 아니다.

내가 이미 망가져 있었다면? 분풀이로 동생들을 싹 죽이고 떠났겠지. 그러고도 남을 놈이었다. 저놈은.

"뭐야? 못 해?"

눈을 초생달같이 휜 놈은.

퍼억!

뻑!

철퇴 같은 주먹으로 나를 내리쳤다.

어금니 두 개가 깨져 날아가고, 갈빗대가 와장창 부러진다.

"끅...!"

내가 할 수 있는 건 신음을 삼키는 것뿐.

"내가 뭐 엎드려서 내 신발 핥으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응?"

짝! 짜악!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뺨을 치는 나기.

나는 얼굴이 탱탱 부어가면서도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다.

지금부터는 연기력이 중요했다.

무릎을 꿇되, 마지못해 억지로 자존심을 꺾는 것처럼....

나기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그가 위협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이들을 바라보며, 잔혹하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

'지금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는 척을 했다.

"그만...."

최대한 참혹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만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만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나기가 나를 내려다본다.

콰직.

내 정수리를 먼지 묻은 부츠로 짓밟고 꾹꾹 눌렀다.

통했구나!

그래. 통한 거다.

다른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아휴. 이거 참. 형님이 또 무릎을 꿇은 모습을 보니 내가 기분이 그렇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발로는 더 세게 내 머리를 짓밟았다.

"휴.... 진짜 맘 약해지게. 알겠어! 형을 봐서 오늘은 이만 봐줄게."

봐주기는.

그냥 맛있는 걸 아껴먹으려는 거면서.

놈은 이제부터 조금씩, 완전하게, 나를 무너뜨리려고 할 거다.

희망을 줄 듯 말 듯 가지고 놀며.

그래도,

적어도 오늘 하루는 넘길 수 있겠지.

"왜 이러고 살아. 내가 안타까워서 그래. 안타까워서."

나를 일으켜서 옷도 툭툭 털어 준 나기는 제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네. 넷!"

"옙!"

어느새 상처가 다 아문 두 뱀파이어가 황급히 나기의 뒤를 따랐다.

"또 봐! 형님. 내일 보자고."

뚜벅뚜벅

나기는 손을 붕붕 흔들며 천천히 멀어졌다.

나는 놈의 구두 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서 있었다.

비참함을 곱씹는 듯한 분위기로.

'...갔나?'

놈이 확실히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나는 끙-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말도 안 돼. 쌤이 졌어...."

"쌤이 무릎을...."

"어떡해...."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가 데이지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주먹을 꼭 쥐고 서 있었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충격이 큰 것 같았다.

나는 뭐라도 말을 꺼내 보고 싶었지만, 그냥 꿀꺽 삼켰다.

문득 나를 돌아보니,

꼴이 좀 비참해서... 좀 그랬다.

'됐다.'

자존심도 포기하고,

복수도 포기하고,

포기, 포기, 또 포기하고 그저 포기할 일만 남은 비루한 인생이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건...

끝내 저버릴 수 없는, 너희를 지키기 위해서.

뭐, 그럼 된 거니까.

#3화 사교도들의 예배당

아직 일네온 던전에서 노숙을 하던 때였다.

그러니까 17살 때까지.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른 건,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부서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매일 기진맥진 녹초가 된 후에야 개울에서 씻고 집으로 돌아오면, 유적 입구에서부터 데이지가 "오빠!" 하면서 달려와서 꼬옥 안겼다.

나랑 딱 10살 차이 나는 우리 막내.

그 작고 따뜻한 애기가 왜 그리도 사무치던지.

녀석의 온기 덕에, 나는 그 모진 밤들에 나직이 코를 골며 잠들 수 있었다.

* * *

"데이지. 왜 그랬어?"

데이지는 붉은 단발머리에 날카로운 눈매가 예쁘다.

이제 17살이 된 녀석은 입술을 꾹 닫고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온몸이 피투성이었지만, 다행히 깊은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저곳 감아 둔 붕대 사이로 번진 피가 안쓰러웠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니가 그러면 안 되잖아. 식구끼리 칼부림이 뭐냐? 세클란. 너도 말 좀 해 봐."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이는 세클란.

"...죄송해요, 쌤."

그 말에 짜증이 치밀었는지, 꾹 닫고 있던 데이지의 입술이 열렸다.

"지랄."

세클란이 데이지를 쏘아보았다.

데이지는 불손한 눈으로 딴 곳만 쳐다봤다.

주위에 있던 꼬마 아이들이 재잘재잘 일러바치기 시작했다.

"쌤쌤. 데이지 누나가 세클란 형아한테 먼저 칼 휘둘렀어!"

"아까 그 못생긴 아저씨가 시킨 거야!"

"맞아. 칼 들고 싸워서 이긴 쪽을 받아 준다고 했어!"

"세클란 형아는 안 싸우려고 했는데 데이지 누나가 계속 칼질했어!"

데이지....

나는 녀석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우리는 무너지는 중이었다.

크시아스의 묵인하에, 이놈한테 뺨 맞고 저놈한테 차이고.

이 빌어먹을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성인이 된 동생 5명이 우리 곁을 떠났다.

다 같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새 거점을 만들어 오겠다고.

그 후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입센 경은 죽었지.

애들은 맞고 다니지.

겨우 몇 개 남은 사업체도 엉망이지.

내 막내, 데이지는 불안했을 거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을지도 모르고.

이해는 간다.

이해는 가.

그래도,

이건 아니지.

"데이지. 정말 뱀파이어가 되려고 했던 거야?"

대답을 안 하길래 다시 물었다.

"데이지 대답해."

녀석은 딴청을 피우다가 결국 못 참겠는지 씩씩 숨소리를 내며 나와 두 눈을 마주했다.

"왜? 나는 크시아스의 가신이 되면 안 돼? 아저씨도 내 나이 때에 가신이 됐잖아!? 근데 왜 참견인데?"

아저씨....

어릴 때는 오빠 오빠 잘도 부르더니... 언젠가부터 저런다.

가슴 한 켠이 아리다.

나는 흔들리려는 표정을 얼른 굳히고 단호하게 말했다.

"데이지. 몰라서 그래? 그놈 때문에 다 죽었어. 나만 살았다고. 그것도 이 꼴이 나서. 근데 그 밑으로 들어간다고? 심지어 피나 빨고 사는 흡혈귀가 돼서?"

내가 의수를 흔들어 보이자 데이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녀석은 다시 이를 악물더니 독한 말을 쏟아 냈다.

"무슨 상관인데! 아저씨가 내 아빠라도 돼?"

"아빠는 아닌데. 그래서 가족도 아니라는 거냐?"

데이지는 침묵했다.

나는 그만 녀석을 달래고 싶었다.

하지만,

"됐어! 됐다고! 어차피 남남이야! 아저씨가 뭔데 우릴 지켜?! 그럴 필요 없다고! 내 인생 내 맘대로 산다는데 왜 자꾸 참견질이야! 짜증 나게!"

데이지는 빽! 고함을 질렀다.

남남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다.

"야. 데이지. 내가 누구 때문에...."

"누가! 무릎을! 꿇어 달랬어?! 왜! 왜 그러는데?! 대체 왜 맨날...!"

"데이지...!"

"됐어! 누가 누굴 걱정해? 맨날 피나 질질 흘리면서. 아저씨. 제발 아저씨 인생을 사세요. 오지랖 그만 부리고!"

데이지는 나를 외면하곤 훌쩍 뛰어서 사라졌다.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생니가 두 개나 뽑혀서 그런가? 좀 어지럽다.

자리에 주저앉자 세클란이 옆에 다가와서 조심스레 말했다.

"쌤.... 데이지도 진심은 아닐 거예요. 그.... 사춘기잖아요."

지도 데이지랑 동갑이면서 이런 말을 한다.

"알아. 걔 아까 지랄할 때 내 눈을 못 보더라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세클란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저 알아요. 그 상황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도 용기라는 거....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잖아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그리고 결정했다면 뒤도 돌아보지 마라."

...이 와중에 날 위로하는 건가?

얘가 이렇게 속이 깊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녀석은 내 상처를 살폈다.

"포션이 필요하겠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벌슨 아저씨 부를게요."

황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세클란.

그런데 마침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가 있었다.

"란센? 란센! 괜찮아?!"

쿵쿵쿵!

커다란 덩치의 곰 같은 남자가 유적의 그림자를 헤치고 달려왔다.

그의 커다란 손에는 포션 병이 앙증맞게 들려 있었다.

나이트 벌슨. 우리의 보호자다.

근데 저 아저씨는 어떻게 알고 벌써 왔지?

벌슨이 다가와 대답했다.

"아까 리나가 왔어. 데이지가 시켰다고. 싸움이 났는데 란센이 다칠 것 같다고, 날 부르러 왔더라."

그러자 벌슨의 커다란 덩치 뒤에서 여자애 하나가 톡 튀어나왔다.

양 갈래머리의 리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아! 아저씨! 데이지 언니가 시켰다는 건 비밀이랬잖아요! 언니 알면 나 죽어요!"

벌슨은 한 박자 늦게 아, 하며 자기 머리를 때렸다.

"아, 맞다. 그랬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클란 쪽을 보고 턱을 까딱였다.

거 보라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데이지가 나 이렇게 걱정하는 거 보라고.

녀석과 내가 이런 사이다.

* * *

포션 덕에 베인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지만, 뽑혀 나간 어금니와 부러진 갈빗대는 아직도 상당히 아팠다.

그래도 벌슨 아저씨가 붕대를 둘러 줘서 당장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한다....'

나기는 내일 다시 찾아올 거다.

어쩌면 매일 올지도 모르고.

그 돼지 같은 놈은 날 실컷 가지고 놀다가 결국 내 동생들을 싹 다 제 혈족으로 만들어 버리겠지.

그렇게 비겁한 놈이다.

"아 골치 아ㅍ.... 쿨럭! 쿨럭!"

아씨....

또 피 토했네.

검게 뭉친 핏덩이가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이래서 내가 남들 안 보는 곳에 와서 앉아 있었던 거다.

망가진 오러 코어를 툭하면 쥐어짜니... 안 그래도 엉망진창인 몸이 더 엉망이 되었다.

아마 얼마 못 살겠지.

그래서 걱정이다.

죽기 전에, 이 꼬인 상황을 좀 풀고 크시아스랑 빠이빠이까지는 해야 하는데....

"그래. 문제는 나기가 아니야. 결국... 백작하고 담판을 지어야 돼."

나는 목에 걸고 있던 낡은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고풍스러운 은빛 목걸이. 이건 어머니의 유품이자 반로아 왕가의 보물이었다.

무려 아공간 마법이 새겨진 고대의 유물.

왕국을 탈출할 때, 여기에 왕가의 보물들을 담아 왔다.

우웅-

내 손이 목걸이 근처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공간 속을 더듬거려 물건을 찾았다.

'...쓸 만한 게 별로 없네.'

있는 것이라곤 옥새나 왕의 검처럼 팔기도 애매한 상징적인 물건들 뿐. 그나마 조금 있던 보물들은 이미 옛날에 다 팔아 버렸고.

"결국.... 이것밖에 없다는 건데...."

결국 꺼낸 건 한 권의 책.

이걸 아공간 밖으로 꺼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도 정체를 잘 모르는 물건이라서.

책의 표지는 두드리면 챙- 소리가 나는 얇디얇은 미지의 금속.

전체적으로 흰색인데 손으로 잡으면 미세한 홈이 연두색 빛으로 물들었다.

"운명의 책...."

왕실 내에서는 옥새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기던 보물이었다고 한다.

초대 왕의, 아니 그 왕의 선대의 선대의 선대의 선대.... 아득한 고대로부터 우리 가문이 항상 수호해온 책이라던가...?

아바마마께선 이걸 지키는 게 우리의 의무고 소명이라고 하셨다.

왜 그래야 하는지, 용도는 뭔지, 정체는 뭔지, 그런 건 하나도 듣지 못했다.

그냥 알 수 없는 책.

'다 부질없지, 이젠.'

옥새 같은 건 제국의 추적을 받을 수도 있었으니... 쓸 만한 건 이제 이것뿐이었다.

"그래도... 협상해 볼 만해. 크시아스 백작은 고대 유물 좋아하잖아? '고대'라고 하면 뭐든 비싸기도 하고."

그래.

이걸 바치고 그 대가로 확언을 받자.

우리 식구를 더 이상 건드리지 말 것.

우리가 쿠샨시(市)를 떠날 때 훼방을 놓지 말 것.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하자.

크시아스는 빌어먹을 강도 백작이지만... 그래도 뭘 주면, 말이 통하는 편이었으니, 한번 시도해 볼 만했다.

이젠 달리 방법도 없었고.

"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데, 어둠 저편에서 세온이 다가왔다.

"괜찮아? 안 아파?"

작은 손이 내 옷자락을 꼬옥 쥐었다.

나는 슬쩍 몸을 틀어 바닥에 토해 놓은 핏덩이를 감췄다.

"응. 이제 안 아파."

"다행이다! 책 보고 있었어?"

"어...? 아, 이거?"

대답하며, 무심결에 책을 펼쳤다.

팔락-

고대어가 가득한 페이지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와! 쌤은 이거 읽을 수 있어?"

"당연히 못 읽지."

아마 세상 그 누구도 못 읽을걸?

그런데,

"어...?"

팔락팔락 넘기던 페이지 중 하나가 문득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우우웅-

그 페이지만 글자들이 연둣빛을 발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이거 왜 읽히냐...?"

최소 1만 년 전의 고대어가, 마치 대륙 공용어처럼 자연스럽게 읽혔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루세라스력 4673년. 3월 17일 흐림. 사교도들의 비밀 예배당은 불길한 상징들로 가득했다...."

그 글자가 눈에 들어오고 뇌리에 박혀 드는 순간,

퉁!

시야가 뒤집혔다.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세상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기분.

돌연 모든 게 내게서 멀어진다.

"어? 쌤? 쌔앰! 어디 갔어!"

갑자기 사라진 나를 찾는 세온이의 목소리도 차츰 희미해졌다.

수많은 시간이 강물처럼 내 주위를 흘러갔다.

째깍째깍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나는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회랑.

벽을 따라 죽 늘어선 촛대가 노을처럼 사방을 물들이고 있다.

타다다닥!

'뭐야....'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뛰고 있었다.

시커먼 후드를 푹 눌러쓰고.

앞에도, 옆에도 나랑 똑같은 복장의 사람들 여섯이 함께였다.

'뭐야? 어디야? 나 왜 이러고 뛰고 있어?'

분명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여긴 어디고 왜 이러고 있지?

복장마저 바뀐 채로.

'...일단 상황 파악부터.'

나는 섣부르게 당황을 드러내지 않고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관찰했다.

'...환상은 아니야. 현실이다.'

이래 봬도 소드마스터였던 몸.

내 예민한 감각은 환상 정도는 가볍게 간파한다.

그런데,

'어...?'

감각을 돋우어 주변을 살펴보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이 장소, 낯이 익다.

가장 앞에서 뛰고 있던 남자가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예배당에 침입자가 들어왔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언어였지만, 어째서인지 그 말이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먼저, 엘릭서의 안전부터 확보한다."

누가 봐도 대장으로 보이는 그의 말에 후드를 뒤집어쓴 나머지 사람들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도 눈치껏 침묵을 지켰다.

'뭔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날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타다다닥!

나까지, 총 7명이 마치 처음부터 일행이었던 것처럼 횃불이 일렁이는 복도를 함께 달렸다.

'얘네는 누굴까?'

뛰는 모습으로 봐선 꽤 단련이 된 검사들이었다. 그래봤자 나기의 부하들만도 못했지만.

그나마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좀 나았다.

근데,

'묘하게 불길해....'

우두머리.

왜인지 직감이 경고를 보냈다. 저놈은 위험하다고.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네. 이길 거 같은 데도... 꺼려지네?'

일단 경계 수위를 높였다.

주의를 끌지 않으려 노력하며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확신이 들었다.

'역시... 여기는 일네온 던전이야.'

우리 아지트.

처음엔 못 알아봤다.

퇴락하고 마모되었던 던전이 지금은 새것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바닥과 벽을 감싼 화강암 마감재들은 반짝반짝했고, 사방엔 기괴한 조각들이 뚜렷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일네온 던전이 틀림없다.

거기다가,

'아까 엘릭서라고 했지?'

200년 전 일네온 던전에서 엘릭서가 발굴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주 유명했다.

이제는 만들 수도 없는, 고대의 기적, 엘릭서.

'그 엘릭서가... 여기 있다고?'

오소소.

팔뚝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한 가지 가설이 뇌리에 꽂힌다.

일네온 던전과 동일한 구조.

하지만 새것 같은 내부.

엘릭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루세라스력 4673년.'

여기 오기 직전에 읽은 책의 내용.

'1만 년 전에 사라진 고대 문명을 루세라스라고 불렀지...?'

이 모든 사실이 가리키는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시간 여행...?'

그러니까,

나는 지금,

1만 년 전, 그 찬란했다는 마도 시대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다.

#4화 서로 다른 오러

과거로 왔다.

그것도 무려 1만 년 전의 마도 시대로.

운명의 책에 이런 기능이 있었을 줄이야!

그렇게 감탄하고 넘어가기에는... 사실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좋다.

'만약 내가 정말 1만 년 전의 과거로 넘어온 거라면....'

정말로 그렇다면,

지금 생각해야 하는 건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횃불이 너울거리는 복도 저 너머... 거기에....

'정말 엘릭서가 있다는 거지?'

잘려 나간 팔다리는 물론, 손상된 오러 코어까지도 회복할 수 있는 기적의 약.

엘릭서라는 이름 앞에 모든 의문이 녹아내린다.

운명의 책의 정체가 무엇이며, 원래 시대로는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뭐 이딴 것들.

그건 나중 문제다.

엘릭서가 저기 있다는데...!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수 있다는데...!

두근.

아주 오랜만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 * *

"다행히 엘릭서는 무사하군. 제물도 이상 없고."

후드를 눌러쓴 남자는 제단 한쪽에 놓여 있는 손가락 크기만 한 유리병을 들어 올렸다.

난 그때 고민했다.

'칠까?'

당장 다 죽이고 엘릭서를 탈취할까?

주변에 있는 사람은 총 12명이다.

나와 함께 온, 후드쟁이 6명.

그리고 제단 주위를 지키는 전사 6명.

그래도...

'해볼 만하지 않나...?'

심장이 으르렁거린다.

당장 손을 쓰라고.

하지만,

나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를 흘깃 살폈다.

그가 신경 쓰였다.

다른 이들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데....

자꾸 내 직감이 그를 꺼려 했다.

'...여기는 1만 년 전. 난 이 시대를 몰라.'

들끓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

이 시대는 마도 시대라고 불렸다.

현대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지고한 마법 유물들을 만들어 낸 시대.

'혹시 모르지. 마법을 쓸지도. 신중해야 된다.'

마법사와의 싸움은 늘 까다롭고 위험했다.

현대에도 그랬는데, 마도 시대라 불리는 이곳에선 오죽할까?

'일단은 정보를 모으며 틈을 살핀다.'

무리에 섞여 상황을 관망했다.

우두머리가 지시를 내렸다.

"2명씩 짝을 이루어서 침입자를 수색한다. 칼틱, 크룸. 동쪽 통로로. 세이룽, 토툰은 서쪽 통로로. 세루아스, 란센. 북쪽 통로로. 나는 여기서 제단을 지키겠다."

여기서 나는 한 번 더 놀랐다.

'내 이름을.... 알아?'

분명,

란센이라고 불렀다.

난 혹시나 해서 내 감각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아무 이상도 없었다.

팔, 다리, 발가락, 어깨, 손가락.

다 내 것이다.

나는 틀림없이 대륙력 1351년을 살아가던 란센이었다.

오른쪽 의수와 왼쪽 의족도 그대로였고, 나기에게 당한 상처는 지금도 욱신거렸다.

품에는 운명의 책이 있고, 허리에 장검도 내가 쓰던 것이다.

내 소지품이 모두 있고 그냥 겉에 검은 후드가 달린 로브가 추가된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일종의 암시 상태... 인 건가?

나를 알 리가 없는데도, 알고 있다.

그것도 자신들의 동료라고 잘못 알고 있다.

정신에 간섭하는 강력한 마법만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운명의 책.... 대체 뭐지?'

시간 여행에,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고대어도 저절로 익히게 해 주며,

복장도 바꿔 주고,

주변 사람들의 정신에까지 간섭한다.

아무리 고대의 유물이어도... 이게 말이 되나?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하지만 나는 일단 떠오르는 의문을 모두 꾹꾹 밀어 넣었다.

지금은 눈앞에 닥친 일이 더 중요했다.

"뭘 멀뚱하게 서 있어? 서두르자."

후드를 쓴 남자.

그중에서도 가장 키가 작은 남자가 다가와서 내 어깨를 툭 쳤다.

'얘가 세루아스구나.'

나랑 같이 북쪽 통로를 수색할 동료.

나는 일단 그를 따라 움직이며 머리를 굴렸다.

'이제 어떻게 할까?'

무리가 동쪽, 서쪽, 북쪽으로 흩어졌으니까 각개격파를 할까?

아냐. 일단 침입자를 찾아볼까?

이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싸우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고민하며 북쪽 통로로 나아가는데,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잔뜩 억눌러서 가늘게 내쉬는 부자연스러운 숨소리.

'운이 좋네.'

침입자였다.

침입자가 아니라면 저런 식으로 숨을 억누를 필요가 없을 테니까.

느껴지는 기세로 봐서, 익스퍼트 하급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저러고 있지? 오러만 살짝 돌려도 소리를 지울 수 있을 텐데....'

나는 세루아스를 살폈다. 당연히 얘도 느꼈겠지?

하지만,

'...눈치 못 챘어?'

...뭐지?

익스퍼트씩이나 되어서 저딴 걸 은신이랍시고 하고 있는 침입자나, 그걸 못 알아채는 세루아스나.

현대라면 익스퍼트가 아니라 오러 유저만 되어도 알아챌 거 같은데....

'검술의 발전은 뒤처져 있나?'

마법에 몰빵하고 검술은 빈곤한 문명?

충분히 가능한 이론이긴 했다.

뭐, 확인해 보면 알겠지.

앞에 모퉁이.

그 바로 뒤에 침입자가 숨어 있다.

세루아스는 그쪽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중이고.

곧 충돌이다.

나는 감각을 북돋웠다.

과연 이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싸울까?

스칵!

싸늘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한껏 집중한 내 눈에는 모든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지나갔다.

모퉁이에서 확! 뛰쳐나오는 금발의 여성.

은빛 갑옷을 입은 그녀의 검에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화들짝 놀란 세루아스는 검을 비스듬히 세워 공격을 막고자 했다.

그의 검에도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서렸고.

여자의 검이 세루아스를,

두 동강 냈다.

검째로,

두부 자르듯 부드럽게.

삐쭉 등허리를 따라 소름이 돋는다.

'...뭐야? 칼과 사람을 한꺼번에 갈랐어...? 어떻게?'

결과만 놓고 보면 대단할 것 없었다.

나도 충분히 쇳덩이와 사람을 같이 갈라 버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런 식으로는 불가능했다.

'아니.... 검이 상당히 느렸는데? 그리고 잘린 단면은 왜 저렇게 깨끗해? 소리조차 거의 나지 않았어.'

만약 내가 했다면...

검을 저것보다 두 배는 더 빨리 휘둘러야 했을 거다.

저렇게 깔끔하게 가르지도 못했을 거다.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소드 오러에 칼날은 와장창 깨져 나가고, 살점은 너덜너덜하게 찢겼겠지.

반면에 그녀의 느릿한 검은, 세루아스를 마치 처음부터 두 조각이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나누었다.

잘린 단면에선 피조차도 뒤늦게 뿜어져 나왔다.

이상한 건 그것 말고도 또 있었다.

'저거 소드 오러가 맞기는 해...?'

소드 오러라는 것은, 칼날이 오러의 색으로 물드는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저 여자의 검에는 색깔이 없었다.

그저 투명한 아지랑이가 칼날 위로 일렁일 뿐.

'달라.... 완전 달라. 우리 시대랑은 아예 다르게 발전한 검술인 건가?'

미지의 힘에 대한 호기심과 긴장감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여자를 관찰했다.

털썩.

무너지는 세루아스의 시신. 그 사이로 여자의 푸른 눈은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스릉!

여자의 발이 땅을 박차는 순간 나는 고개를 숙였다.

머리칼 위로 여자의 은빛 칼날이 지나간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아찔한 예기에 오소소 닭살이 올라왔다.

여자의 칼날이 닿지 않아도 검을 타고 흐르는 아지랑이에 머리카락이 베여서 나풀거렸다.

오러 쓰레드 같은 건가?

칼날이 닿지도 않았는데 베이다니....

보면 볼수록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부딪혀 보자.'

관찰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힘껏 소드 오러를 끌어올려 그녀와 검을 맞부딪혔다.

쩌어엉!

칼끝에서 터지는 반발력.

"꺄악!"

여자의 검에 맺혀 있던 아지랑이가 산산조각 났다.

여자는 충격 때문에 뒤로 비틀비틀 물러섰다.

난 좀 당황했다.

'뭐야? 내구성은 형편없잖아?'

설마 단번에 깨질 줄이야.

'근데....'

이건 또 이상한 일이었다.

'검날이 상했네?'

저렇게 약해 빠진 기운이 내 오러를 가르고 들어와 칼날을 깼다고?

'진짜 이상한 힘이야....'

나는 잠시 이가 나간 검을 바라보았다.

휘청휘청 물러섰던 여자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검강(劍鋼)? 아, 아닌데.... 좀 이상한데?"

여자도 당황한 모양이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구나?

네가 볼 땐 내 검이 이상하지?

'일단 확인.'

소드 오러라는 건 결국 마나를 오러로 가공해 검에 담는 것.

우리 시대엔 그게 상식이었는데... 이 시대에는 아닌 것 같다.

뭔지 짐작도 가지 않는 방법으로 웬 아지랑이를 만들어 내는데,

'해볼 만해.'

놀랍도록 날카로운 건 인정한다.

근데 그게 전부였다.

내구성은 훨씬 떨어지고 오러로 육체를 강화하는 기술도 꽤나 원시적인 것 같다.

그렇다고 마법을 쓸 줄 아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정말 이게 전부라면,

내 상대는 아니다.

우우웅-!

검푸른 소드 오러가 내 검을 짙게 물들였다.

'일단 잡아 볼까? 침입자를 잡아가면... 틈을 만들 수 있지도 몰라.'

방심시키고 기습을 하면, 그 불길한 느낌을 주던 우두머리를 쉽게 해치울지도 모른다.

그럼 어떻게 잡아갈까? 다리를 자를까?

그런 고민을 하던 그때,

소드 오러에 위압감을 느끼는지 주춤 물러서던 여자가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당신 같은 검사가 아이들이나 납치하는 사교도의 편에 서다니요...!"

그 말이 내 머리를 때렸다.

"...아이들?"

익숙한 단어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여자는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시치미 떼는 겁니까? 이미 흔적을 다 확인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디 있습니까? 설마 벌써...! 산 제물로?"

화르르 타오르는 그녀의 분노.

아이들?

납치?

산 제물?

나는 일단 뒤로 훌쩍 물러섰다.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물었다.

"몇 살?"

"뭐요?"

"납치된 애들이 몇 살이냐고."

"하? 끝까지 모르는 체를...."

"몇 살이냐고."

내 살기를 느꼈는지, 여자는 흠칫하더니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일곱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 총 13명."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마음을 정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입니까...?"

당황한 여자를 앞에 두고 나는 고요하게 기세를 죽였다.

귀는 활짝 열고, 발밑으로 전해지는 극히 미세한 진동까지도 세밀하게 느끼는 채로.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렀을 때, 여자의 눈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당신.... 지원을 기다린 겁니까? 비겁한!"

고쳐잡는 검 끝에서 다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선 내가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루아스가 당했나?"

"합세한다."

동쪽 방향으로 수색을 떠났던 후드들이었다.

죽은 세루아스의 몸에 무슨 장치라도 되어 있었는지, 그가 죽고 얼마 안 있어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잘된 거다. 찾아가는 수고를 덜었으니까.

후우-

난 그들이 내 바로 옆을 통과할 때까지 기다렸다.

어깨엔 힘을 뺐다.

그리고,

지금!

완벽한 순간에 숨을 훅! 뱉으며 검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서컥!

쯔걱!

검이 만든 원형의 궤적에 두 사람의 목이 걸렸다.

"크륵!"

"큭!"

피거품이 끓는 소리와 함께 두 남자의 몸이 바닥을 촤아악 미끄러진다.

허우적거리는 몸뚱이 아래로 피가 흥건하게 고인다.

좋아. 이로써 남은 건 셋인가?

"뭐... 뭐예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헤 벌렸다.

갑자기 같은 편을 베어버리는 내 모습에 놀랐나 보다.

난 간단하게 답했다.

"생각이 바뀌어서."

따지고 보면, 이 여자랑 싸울 필요가 없잖아?

어차피 그 사교도? 라는 수상한 후드들을 다 해치워야 되는데... 차라리 이 여자랑 같은 편 먹는 게 낫지.

거기다가... 저 여자. 어린아이들을 구하러 여기 왔다니까.

'그 맘 내가 잘 알지.'

나는 칼을 한 번 털고 검집에 넣었다.

여자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같은 편 하자고. 나 원래 사교도? 그것도 아니었어."

"네?"

애가 좀 둔하네.

배신하는 거 처음 보나.

"됐고. 그 아지랑이 같은 거 켜고 나랑 싸우는 척해. 빨리."

그래야, 오는 족족 죽이기가 쉬우니까.

#5화 한 모금

아 거참, 연기 되게 못 하네.

"칼 들어."

싸우는 척 좀 하라니까.

벌써 왔잖아?

"저깄다...!"

"셋이나 당한 건가?!"

"란센을 도와! 여기 붙잡아 둬야 한다!"

저 뒤에 또 다른 후드 둘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번엔 서쪽 방향으로 수색을 떠났던 무리였다.

살기가 따끔따끔했다.

스릉!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고대 오러 특유의 날카로운 예기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난 마지막 순간까지 여자의 파란 눈과 시선을 맞추다가 등을 돌렸다.

쩌저정!

쯔컥!

"컥!"

"꺼흑...!"

하나는 베고, 하나는 찔렀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검을 치켜들어 내 공격을 막고자 했지만, 그들의 오러는 여자의 그것보다도 더 약했다.

박살 난 검조각이 반짝이며 떨어져 내렸다.

이번에도 내 칼날에 이가 나갔다.

진짜 웃긴다니까.

약해 빠진 게 예리함 하나는 미쳤네.

"꺽...."

"끅.... 너... 배신을...."

목을 베이고 폐를 관통당한 두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을 허우적거리며 죽어 갔다.

"아무리 하급이라지만... 익스퍼트들을 이렇게 간단하게?"

많이 놀랐나 보네.

여자는 내 검과 쓰러진 남자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설마 정말로... 소드마스터십니까? 근데 그렇다기엔...."

여자는 혼란스러워했다.

글쎄.

소드마스터였었지.

1만 년 뒤를 기준으로.

난 헝겊을 꺼내 피 묻은 칼날을 닦았다.

여자의 물음엔 답하지 않고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애들이 여기 잡혀 있다고?"

"당신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 몰랐어."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믿어. 정말이니까."

"말 몇 마디로 어떻게...."

"믿어야 될 거야. 지금까지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는데...."

스윽.

검을 치켜들었다.

그녀를 등지고 횃불이 일렁거리는 복도 저편을 향해서.

"저 사람은 잘 가늠이 안 되거든. 네가 도왔으면 좋겠어."

저벅.

저쪽 복도 끝에서 그림자 같은 게 불쑥 솟았다.

검은 로브를 푹 뒤집어쓴 남자.

사교도들의 우두머리였다.

'가능하면 기습을 하고 싶었는데....'

이미 들킨 눈치라 별수 없었다.

우두머리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복도를 따라 울려 퍼졌다.

"그래. 란센. 배신을 한 건가?"

저벅저벅.

그는 널브러진 부하들의 시체에 시선을 주었다.

위기감은 조금도 느끼지 않는지 그저 덤덤하고 여유로웠다.

"나쁘진 않지. 배신당해 비통하게 죽은 원혼이 다섯. 거기에 배신 그 자체가 가지는 혼란의 속성. 또 고결한 기사의 영혼까지 있으니... 주께서는 오히려 더 기뻐하실 거다."

그렇게 말하는 우두머리의 두 눈은 광신(狂神)으로 번들거렸다.

오싹.

나는 괜히 소름이 끼쳤다.

뭐지?

오러만 놓고 보면 간신히 익스퍼트 중급의 기세일 뿐이었는데... 자꾸 뭔가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내 뺨을 핥고 지나갔다.

왜 이렇게 꺼림칙할까?

그에게서 불길함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익스퍼트 상급.... 저런 실력자가 왜 이런 곳에...."

낮게 중얼거리는 여자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인해 목이 졸린 듯했다.

익스퍼트 상급. 나는 그 단어를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아까 상대한 애들이 이 시대 기준으로 익스퍼트 하급이랬지? 상급이면, 꽤 강한 편이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긴장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이 시대의 하급이 그 수준이니까 상급도 별거 없어야 되는 게 맞는데....

하지만 영 불편하다.

'분명 사람인데... 사람 같지가 않아.'

차라리, 한 자루의 칼과 같았다.

소리, 냄새, 움직임.

그 모든 것에서 희미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가 걸어오는 궤적을 따라 바람이 베여 나가는 것만 같았다.

칼을 사람의 형상으로 빚으면 저런 느낌일까?

내 본능이 저 남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따져 보면 내가 불리할 이유가 없어.'

그런데도 먼저 치고 들어가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정체도 알 수 없는 마굴 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기분.

나는 등 뒤의 여자를 슬쩍 돌아보았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

"...제가 먼저 공격하라고요? ...그래 놓고 뒤를 치려는 건 아닙니까?"

"애들 구해야지. 내가 안 도와줘도 저거 이길 수 있어?"

"...망할. 지원을 요청하고 왔어야 됐는데...."

여자는 갈등하는 듯하더니 결국 앞으로 나섰다.

"저는 익스퍼트 중급.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가라고. 받쳐 줄 테니까."

"...믿겠습니다."

타닷!

여자는 깃털처럼 가볍게 땅을 박찼다.

카각! 칵! 카가각!

일렁이는 고대의 오러가 허공에서 연달아 부딪혔다.

확연하게 밀리는 건 여자 쪽이었다.

여자는 검을 한껏 비틀어 우두머리의 공격을 흘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날이 연필 깎이듯 쭉쭉 깎여 나갔다.

오러의 예리함에서부터 큰 차이가 났다.

나는 찬찬히 적을 살폈다.

그사이 여자는 신나게 얻어터졌다.

쩌억!

우두머리의 발차기 한 방에 여자의 흉갑이 우그러들고,

빠악!

검자루로 내려찍은 공격에 눈 위가 찢어져 피가 튀었다.

"큭! 안 돕고 뭐 하는 겁니까!"

정신없이 공격을 막으며 여자가 나를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난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관찰만 계속했다.

'힘은 나랑 비슷하고, 속도는 나보다 좀 더 빠른가?'

이변은 없었다.

익스퍼트 상급이라는 우두머리의 무력은 딱 우리 시대의 익스퍼트 중급 수준이었다.

마법사도 아닌 것 같고.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했다.

'근데 검로가 예측이 안 돼.'

우리 시대와는 전혀 다른 검술 탓인지 공격 타이밍과 궤적을 읽기 어려웠다.

저걸 다 막아 내며 버티는 여자가 신기해 보일 정도.

'...그래. 신중하게 하자. 변수를 배제하고, 일격에 끝낸다.'

그러는 사이, 여자는 점점 더 다급해졌다.

"아니 지금! 지금 공격했으면!"

"역시 배신인 겁니까?!"

"야!!!"

그녀는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다.

반짝이던 금발 머리카락이 석 달은 안 씻은 개털처럼 산발이 되었고, 갑옷도 베이고 찢기고 난리가 났다.

"뭐 하냐고!!!"

고지식할 정도로 붙여 대던 존댓말도 사라지고 그녀가 악! 소리를 질렀을 때, 나는 드디어 상대의 틈을 보았다.

우우웅-!

검푸른 오러가 발밑에서 시작해 어깨를 타고 피어오른다.

반로아 왕가가 자랑하는 돌진기 [템페스트].

몸을 쓰러질 듯 앞으로 기울여 모든 에너지를 추진력으로 바꾼다.

응축된 오러가 종아리와 허벅지를 강화하는 것을 넘어, 발바닥을 타고 뿜어진다.

한줄기 오러가 피부 표면을 휘감으며 바람의 저항을 좌우로 밀어낸다.

콰아아앙-!

익스퍼트 중급의 한계를 뛰어넘는 돌진.

박살 난 화강암 바닥으로 먼지가 피어오른다.

분출한 오러와 밀려난 바람으로 인해 내 뒤엔 폭풍이 남는다.

한 걸음을 딛는 순간 이미 적의 바로 앞이었다.

도와 달라고 악을 쓰던 여자조차도 내 움직임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찰나를 가른 일보.

콰직!

다시 한번 땅을 찍으며, 이 가공할 속도를 검 끝에 휘감았다.

'이걸로 끝이다!'

왠지 모를 불길함을 주는 적.

해서 나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이거면 통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단단히 믿었다.

번쩍!

쩌어엉!

눈앞에서 난데없는 빛이 터져 복도를 다 집어삼키기 전까지는.

'뭐, 뭐야...!'

손아귀를 타고 오르는 극심한 고통.

상대를 베는 그 부드러운 손맛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내 검끝을 후려쳤다.

충격이 손을 넘어 전신으로 저릿저릿하게 퍼져나갔다.

난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눈부신 빛 때문에 순간적으로 날아갔던 시야가 천천히 회복된다.

내 옆에는 놀라서 같이 물러선 여자가 있었고, 앞에는 후드가 벗겨진 남자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치이이익-!

그의 목걸이에서 하얀 연기가 뭉클뭉클 치솟았다.

그는 뜨거운 목걸이를 살짝 만져 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하? 나 방금 죽을 뻔한 건가?"

뭐야, 저 목걸이.

아티팩트야?

여자가 침음성을 흘렸다.

"큭...! 수호의 목걸이!"

아니, 아무리 마도 시대의 아티팩트라도 소드 오러를 이리 쉽게 막는다고...?

하지만 놀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스컥!

스거걱!

카칵!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남자가 제대로 칼춤을 추기 시작했으니까.

'뭐야? 왜 이래?'

남자의 검도 겉보기에는 그 부하들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공기를 일그러뜨리는 투명한 아지랑이.

하지만 부딪혀 보면 전혀 달랐다.

칵!

스칵!

'이러다... 검이 잘리겠는데?'

이번엔 칼날이 나가는 수준이 아니었다.

우두머리의 검은 내 오러소드를 버텼으며, 되려 내 검에 푹푹 박혔다.

타격지점에 오러를 집중시켜야 겨우 버텨 낼 수가 있었다.

쩡!

쩌정!

나는 그의 기세를 막을 수가 없어서 연신 뒤로 물러섰다.

'이거, 위험해....'

여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뭐 해요! 검기(劍氣)가 색으로 물들었는데 왜 그렇게 약해요!"

아니.... 그러니까 당신이 아는 검기라는 거랑, 내가 아는 소드 오러는 전혀 다른 거 같은데...?

보면 몰라?

투명한 아지랑이가 검기.

검을 물들이는 색깔이 소드 오러.

응?

남자가 비웃음을 흘렸다.

"보면 모르나? 허풍선이다. 검기가 색으로 물들면 뭐 해? 검의 마음을 읽지도 못하는 반쪽짜리 검사인데."

크시아스 백작 밑에서 구르며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몸이다.

전략 병기라 불리는 소드마스터까지 되어 봤던 몸이다.

그런데... 허풍선이에 반쪽짜리라니....

반박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한심하게 뒷걸음질 치는 내 모습이었다.

'무슨 검술이....'

오러를 자르는 그 예리한 기운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남자의 검은 신묘했다.

그래. 신묘하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말이 없다.

한 번의 휘두름에 서너 가지 이득을 가져가고 수십 수 앞을 내다보는 듯했다.

평생 살면서 한두 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신의 한 수를 연거푸 펼치고 있다.

열 합을 넘기기 전에 손발이 꼬였다.

의수와 의족이 거치적거렸다.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저 여자는... 여태 어떻게 버틴 거야...?!'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지만, 파국은 착실하게 다가왔다.

"큭...!"

낮에 나기에게 당한 상처는 욱신거렸고, 오러의 무리한 운용으로 온몸이 저릿저릿 아팠다.

픽! 피잇!

피한다고 피했지만, 교묘하게 뻗어오는 남자의 검에 여기저기 베여 점점 상처가 늘어났다. 허공으로 뿌려지는 핏방울은 모두 나와 여자의 것이었다.

'...너무 강한데?'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

"잘 가라. 란센."

남자의 입가에 스치는 조롱.

여자의 얼굴에 맺히는 절망.

그래. 마음먹었다.

나더러 허풍쟁이랬지?

"그럼 이것도 허풍인지, 한번 받아 봐라...!"

빠득.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다.

우우우웅-!

이를 악문다.

금이 간 오러 코어를 쥐어짠다.

츠츠츠-!

짙게 물든 검푸른 오러가 칼날을 넘어 솟아올랐다.

실처럼 줄기줄기 뽑혀 나오는 오러 쓰레드.

고장 날 대로 고장 난 내가 목숨을 담보로 피워 내는 마지막 불꽃.

빠직!

빠지직!

코어의 균열이 점점 더 커지며 끔찍한 격통이 온몸을 두들겼다.

이 뒤엔 참혹한 대가가 기다리겠지만, 잠깐 동안은 예전의 무력을 일부나마 되찾을 수 있다.

'이기면 돼. 이겨서 엘릭서만 따면...! 돼!'

드래곤의 등에 올라탄 형세.

고통을 참고, 온몸에 넘치는 오러로 땅을 박찼다.

쩌어어엉!

"큭...! 너?!"

아까까지만 해도 여유롭게 나를 상대하던 남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쩌어어엉!

쩡!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최상급의 소드 오러로 후려쳐도 남자의 칼에 깃든 기운은 깨지지 않았다.

아니, 되려 아직도 날이 깨지는 건 내 쪽이었다.

어찌나 날카로운지, 최상급의 오러마저 기어코 가르고 들어왔다.

'이 빌어먹을 고대의 검술...!'

그래도 다행히 힘은 이쪽이 확실한 우위.

칼날이 부딪힐 때마다 남자는 뒤로 휘청휘청 물러났다.

내 힘과 속도에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분명 검의 마음도 읽지 못하는 반쪽짜리인데, 어떻게 이런 힘을!"

남자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검의 마음?

그게 뭔진 몰라도.

이게 바로 미래의 검이라는 거다!

슈르륵!

남자가 정신없이 내 검을 쳐내는 사이, 거미줄처럼 뻗은 오러 쓰레드가 남자의 팔뚝과 가슴을 훑었다.

익스퍼트 최상급이 규격 외의 전력으로 분류되는 이유였다.

칼날은 막아도, 갈래갈래 뻗은 오러 쓰레드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런데,

캉! 카캉!

'...베이질 않아?'

오러 쓰레드가 베고 지나간 가슴과 팔뚝이 멀쩡했다.

남자가 입은 검은 갑옷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졌다. 이것도 일반 갑옷이 아닌 모양이다.

'이놈의 마도 시대. 무슨 갑옷이 오러 쓰레드도 막아 버리네....'

시간이 없다.

오러의 빛이 흐려지고 있었다.

이제 곧 내 깨질 거다.

내 오러 코어가.

그러니,

'이 일격에 모든 걸 건다.'

마지막 한 줌의 기운까지 끌어올려 좌에서 우로 길게 참격을 날렸다.

곧게 뻗는 칼날과 채찍처럼 휘어지는 오러 쓰레드가 동시에 남자의 목을 노렸다.

쩌엉!

스컥!

내 검이 두 동강 나서 허공을 빙글빙글 날았다.

"끄...."

우두머리의 검은 내 목 바로 옆에서 파르르 떨렸다.

더 이상 뻗어 나오질 못했다.

비록 내 칼은 잘렸지만, 대신 오러는 먹혔거든.

낭창하게 휘어진 오러 쓰레드가 남자의 목덜미를 깔끔하게 도려낸 것이었다.

'후....'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설마 오러를 그렇게 때려 박았는데도 검이 잘릴 줄은 몰랐으니까.

'질린다 질려. 이렇게 날카로울 수가 있나....'

한숨을 쉬며 죽어 가는 우두머리를 내려다보았다.

"꺼... 으...."

그의 단말마는 그저 바람 빠지는 소리.

쭉쭉 뿜어지는 피를 주워 담지 못해, 그는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아 피웅덩이 속으로 잠겨 들었다.

그리고,

빠직!

내 오러 코어가 완전히 부서졌다.

"우욱...."

토할 것 같아 자리에 주저앉았다.

파스스....

오러 코어가 흩어지는 불쾌함과 함께, 온몸에선 힘이 풀린다.

'이거 죽을 수도 있겠는데....'

심상치 않았다.

두통에, 울렁거림에, 입에서는 울컥울컥 자꾸 핏물이 쏟아졌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아직 안 되는데....

적어도 애들 데리고 쿠샨시(市)를 벗어난 다음에....

'제발. 제발 있어라.'

나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다가가 죽은 남자의 품을 뒤졌다.

작은 나무 상자가 하나.

열어 보니... 있다!

회색빛 열쇠 하나와 손가락만 한 크기의 엘릭서가 거기 있었다!

"있어...!"

그치. 귀한 거니까 직접 품고 왔겠지!

자기 곁이 제일 안전할 거라 생각했겠지!

역시! 믿고 있었다고, 우두머리!

살았다. 이제 살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얼른 마개를 따고 엘릭서를 입에 털어 넣었다.

당장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 틀림없이 죽을 거다.

꼴깍.

엘릭서를 한 모금 겨우 마셨을 때,

"당신 대체 정체가...?"

여자가 물었다.

동시에,

딸그랑!

내가 마시던 엘릭서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아직 내용물이 절반쯤은 남은 채로.

"어? 어어?"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여자의 모습이 점점 멀어진다.

째깍째깍째깍

사방을 뒤덮는 시계 초침 소리.

시간의 강물이 나를 휘감고,

나는 또 한 번, 시간선을 이탈해 어디론가 빨려들어 간다.

머릿속이 캄캄해진다.

* * *

퉁!

털썩!

란센의 몸은 허공에서 뚝 떨어지듯이 갑자기 나타났다.

탱그랑-

금속성의 책 한 권이 그의 옆에 같이 떨어졌다.

때마침 아이들이 그를 발견했다.

"선생님!"

"쌤이야!"

아기 병아리들처럼 우르르 몰려드는 아이들.

란센을 흔들어 봤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의 입에는 핏물이 흥건했다.

"어떡하지? 어떡해?!"

"빨리 세클란 오빠 불러!"

혼비백산하는 아이들.

그들 사이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란센.

그의 손에는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꼭 쥐어져 있었다.

#6화 다시 꾸는 꿈

란센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서, 데이지는 옛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 란센이 건강하던 시절.

언제나 자신들을 지켜 주던 그 크고 넓은 어깨.

그때 란센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고, 데이지의 가장 큰 자랑이었다.

그래서였다.

한없이 약해지고 초라해진 그의 등을 지켜보기 괴로운 것은.

매일 밤 남몰래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들을 지키겠다고 고군분투하는 그를 보는 게... 너무나 염치없어서 죽고 싶은 것은.

자신들을 위해서 자존심마저 꺾어 버리는 란센의 모습에 제 마음이 산산히 깨져 버리는 이유도.

하지만, 결국 가장 못 보겠는 건.

이렇게 죽은 듯 누워 있는 란센의 모습.

금방이라도 죽을 듯 얕은 호흡을 내뱉는 란센을 보면,

데이지의 작은 우주는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안 돼...! 절반밖에 못 마셨는데!"

오빠...?

데이지는 퍼뜩 몸을 바로 세웠다.

란센의 목소리였다.

데이지는 얼른 침대 위로 몸을 기울였다.

란센의 눈동자를 두 눈에 담았다.

흐릿하던 눈동자가 차츰차츰 초첨을 잡았다.

데이지는 우다다 말을 쏟아냈다.

"오빠 일어났어...? 어떻게 된 거야! 뭔데 대체! 왜 갑자기 사라지고! 왜 피칠갑을 하고!"

란센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물끄러미 데이지를 쳐다보았다.

"...뭐, 뭘 그렇게 쳐다봐?"

침묵이 길어지자, 데이지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힐끗힐끗 란센을 살폈다.

란센이 물었다.

"너 방금 오빠라고 했지?"

데이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뭐, 뭐래? 내가 언제?"

하지만 란센은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데이지의 얼굴을 뜯어 보다가 또 툭, 물었다.

"너 울었지?"

"뭐, 뭐?"

"눈은 빨갛고 뺨은 부었고... 이 오. 빠.가 많이 걱정 됐나 봐?"

"!!!"

미친, 미쳤나 봐!

근데 또 입 밖으로 부정하는 말이 나오진 않았다.

"뭐, 왜!"

그러자 란센은 또 데이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 왜 자꾸 이상하게 쳐다보냐고!"

"그냥, 이 순간을 기억하려고."

"기억?"

"응. 너 우니까 되게 못생겼네."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쓰윽- 쓱-

천천히. 두 눈을 닦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한 데이지는 곧 무섭도록 침착해졌다.

화륵!

그녀의 두 눈에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반로아 왕국의 귀족이라는 증거였다.

감정이 격해지면 동공 깊은 곳에서 귀화가 피어오르는 건 반로아의 왕족과 귀족들이 가진 특징.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지만 그래도 어두운 곳에서는 조금 티가 나는 편이었다.

데이지는 두 동공을 불태우며 상큼하게 웃었다.

"다시 말해 볼래?"

"...."

불길함을 느낀 란센이 얼른 시선을 돌렸다.

"야! 다시 말해 보라고!"

데이지가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란센은 얼른 몸을 웅크리며 곡소리를 냈다.

"아야야야... 죽는다. 죽어...."

막 달려들던 데이지는 흠칫 멈춰 섰다.

날카롭게 세워졌던 손끝이 어쩔 줄을 모르고 허공만 휘적거린다.

"풉...."

그 모습을 본 란센이 웃음을 흘렸다.

끅끅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 댔다.

"너...!"

화륵!

데이지의 두 눈이 아까보다 두 배는 더 밝게 타올랐다.

"야!!!!"

"야는 반말이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알아. 고맙다. 데이지."

란센은 데이지의 머리칼을 헝클어 주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사실 데이지와 란센이 이렇게 시시껄렁한 장난을 쳐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3년 전, 란센이 팔다리를 잃은 후 처음이 아닐까?

데이지는 순간 분노도 잊어버리고 그만 아련해졌다.

뭐라도 란센과 더 말을 붙여 보고 싶어서 숨을 들이켰는데....

"어... 라?"

란센이 갑자기 휘청했다.

"오빠!"

다급히 몸을 붙잡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란센의 몸이 화로처럼 절절 끓었다.

"끄윽...."

심한 고통까지 느끼는지 몸을 웅크린다.

"오빠!"

짜게 말라붙었던 데이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펑펑 샘솟았다.

란센이 바들거리는 손을 들어 데이지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데이지는 반사적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오빠...?"

기괴했다.

란센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두 눈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광기...?

데이지는 란센이 정말 어딘가 크게 잘못된 건 아닌지 두려웠다.

그때 란센이 말했다.

"데이지. 이거, 약효가 도는 것 같아."

"뭐?"

"약효가 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란센은 열에 들뜬 어조로 데이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느껴져."

"손발이 간질간질해."

"신선하다."

"살아나고 있어."

...오빠?

정말 미쳤나?

란센의 헛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한 모금만 마셔서 부족할 줄 알았거든...?"

"충분했어."

"꿈이 아니야.... 진짜였던 거야."

오빠 왜 그래....

"그게 무슨 말이야?!"

그때, 란센은 그 뜨거운 손으로 데이지의 어깨를 붙잡았다.

"데이지. 똑똑히 들어. 이제 걱정할 필요 없어."

"무슨 소리야?"

"네가 우리 식구들을 보호할 생각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가, 갑자기 그 얘기가 왜...!"

깜짝 놀란 데이지는 란센을 응시했다.

"알고 있었어?"

"니 머릿속에 있는 건 다 알지. 쪼끄만 게."

"아니...!"

"아무튼 이제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어...? 어? 오빠. 빛이...."

어느 틈엔가, 란센의 몸을 타고 찬란한 광휘가 타오르고 있었다.

데이지는 알지 못했다.

생명의 약, 엘릭서.

현재의 마법으로는 재현할 수 없는, 아득하게 잊혀진 고대의 기적이,

이 자리에 현현하고 있음을.

쏴아아아-

밝게 타오르는 빛무리가 란센의 오른손과 왼쪽 다리 그리고 아랫배로 스며들었다.

찬란하게 빛나며 형태를 갖춰 나가는 빛의 알갱이들.

"어? 어어...?"

데이지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스르륵.

잘려서 텅 비어 있던 란센의 오른손이 이불을 헤치고 나와 데이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으니까.

허전하게 비어 있던 왼쪽 다리가 빛무리 속에서 다시 태어났으니까.

"오빠 몸이...?"

"그래. 내가 돌아왔다."

데이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미소.

란센의 입가에 매달린 그 자신만만한 미소는... 그녀가 그토록 되찾고 싶었던 소중한 풍경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데이지는 온 세상을 가진 것만 같았다.

란센이.

온 세상이 덤벼도 이겨 낼 것만 같았던, 자신의 오빠가 돌아왔다.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

풀썩.

"오빠? 오빠!!"

란센은 다시 혼절했다.

기분 좋은 웃음을 입에 매단 채로.

* * *

깜빡.

일어나 보니, 이미 해가 지고 사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반사적으로 묻자, 걸걸한 벌슨 아저씨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직 하루도 안 지났어. 아침에 그 일이 있고.... 지금이야."

아하,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모여 있네?"

내 주변에 식구들이 가득했다.

이제 하나 남은 기사인 벌슨.

그리고 반로아 왕국에서 함께 탈출한 동생들, 데이지, 미카, 제페토, 아샤, 잘츠란, 세아.

새로운 거점을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난 5명의 동생들을 제외하면, 반로아 왕국의 마지막 후예들이 다 모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 모인 것도 오랜만이다.

애들이 크다 보니 요새는 각자 일을 맡아서 한다고 다들 바빴으니까.

"진짜다. 손도 발도 다 움직인다 이제."

누군가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적... 기적이다.... 기적이야!"

벌슨 아저씨는 갑자기 흐느꼈다.

나도 새삼 내 손발을 내려다보았다.

의수 의족 대신 진짜 내 손발이 보였다.

나는 씩 웃어 보이며 그들 앞에서 오른 주먹을 쥐었다 펴고 왼발을 까딱거렸다.

그리고 배꼽 아래 있는 오러 코어....

"코어도 회복됐어. 흩어진 오러는 다시 모아야겠지만."

내가 그렇게 툭 한마디 하자.

"형!"

"오빠!"

아이들이 와르르 달려들었다.

"왁! 와악! 잠깐!"

어린 꼬마들이 달려들 때랑은 달랐다.

그건 병아리들이 몰려드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건 다 큰 어른과 다 커 가는 청소년들뿐.

물소 떼가 달려드는 것 같은 압박이었다.

그래도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지진 않았다.

잠시 격렬한 해후가 지나가고 난 뒤.

벌슨이 흐트러진 셔츠와 넥타이를 고치며 물었다.

"란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엘릭서를 마셨어."

"엘릭서? 그 한 모금에 5만 달론도 넘는다는 그거?"

웅성거리는 사람들.

그래.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보여 주자.

나는 침대를 짚고 일어나며 말했다.

"음, 잠깐. 그 전에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다들 따라와."

"확인? 뭘?"

"가면서 얘기하자."

나는 다시 생긴 왼발로 땅을 밟았다.

자박-

아아... 감동적이다.

늘 둔탁하고 정강이에 압박감을 주던 의족의 느낌이 아닌 내 살과 피로 땅을 밟는 느낌.

이 감각이 증명해 준다.

내가 정말 1만 년 전을 다녀왔고, 엘릭서를 마셨다는 사실을.

'재활이 필요할 거 같긴 하지만.'

아직은 조금 어색한 걸음.

나는 신중하게 걸어서 외투를 걸쳤다.

그 품 안에서 만져지는 작은 나무 상자 하나.

이 상자 속에 있던 엘릭서는 이제 없지만, 그 옆에 있던 회색빛 열쇠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고대 던전에서 발견된 열쇠면... 무조건 그거지.'

크시아스 백작 밑에서 일할 때 이런 얘기를 많이 들어 봐서 잘 안다.

"어딜 가는 거야?"

우르르-

우리가 향한 곳은 물론 일네온 던전이었다.

늘 보던 던전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 반짝반짝 새것 같았던 모습을 기억하는데, 지금은 퇴락하고 먼지에 덮여 있다.

저벅저벅 탁.

던전 깊숙이 들어가서 제단이 있는 방에 멈춰 섰다.

새록새록 기억이 떠오른다.

'분명 저 위에 엘릭서가 놓여 있었지.'

그리고 그 뒤쪽으로 유독 경비가 삼엄했었다.

왜 경비가 삼엄했을까?

이제부터 그걸 확인해 볼 작정이었다.

'고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열쇠는... 비밀 공간을 열기 위한 열쇠!'

나는 나무 상자를 열었다.

회색빛 열쇠가 그 자리에 있다.

'역시.'

열쇠는 마치 내 짐작이 맞다는 것처럼 희미한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벽으로 다가갔다.

"란센. 대체 무슨 일인데?"

모두가 궁금해하는 걸 벌슨이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열쇠를 들어 벽에 꽂았다.

화아아악!

순간 벽을 타고 들불처럼 일어나는 마법진.

안개처럼 희미한 빛만이 가득하던 던전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두근.

밝아진 빛 속에서 넋이 나간 사람들의 얼굴이 비쳤다.

"이, 이게 무슨...."

허공에서 타오르는 빛줄기.

층층이 겹을 그리며 점점 복잡해지던 마법진은 이윽고 하나의 문의 형태를 이루었다.

딸깍!

내가 열쇠를 돌리는 순간,

맑은 소리와 함께 마법진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그그긍!

우렁찬 소리를 내며 던전의 벽면 하나가 통째로 열렸다.

두근두근.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비밀 공간?"

경외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1만 년 동안 숨겨져 있던 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어떤 마법이길래, 활짝 열린 벽 너머는 1만 년이 지난 지금도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보물들은 새것처럼 반짝거렸다.

상자마다 쌓여 있는 금화들.

3자루의 검.

얇은 금속 재질의 검은색 갑옷.

눈에 익은 목걸이 하나.

벌슨이 넋이 빠진 표정으로 금화 무더기를 둘러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이거... 금화만 해도 5천 달론은 나오겠는데?"

1달론이 금 10g이니, 5천 달론이면 금값만 따져도 50kg이었다.

요즘 사업체 관리를 열심히 돕고 있는 아샤가 말을 거들었다.

"벌슨 아저씨. 문제가 그게 아냐. 이거 다 고대 유물. 고대 검. 고대 갑옷...! 저 목걸이는 마도구! 세상에.... 이런 건, 부르는 게 값이라구?"

두서없는 감탄이 여기저기서 몰아쳤다.

다들 한동안 홀린 듯이 보물을 살피더니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오빠! 어떻게 된 거야?"

"맞아. 팔다리가 갑자기 재생된 것도 그렇고... 이건 또...."

난 웃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나, 1만 년 전의 이곳을 다녀왔어."

"뭐어?!"

다들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사실 나도 아직 안 믿기는데....

툭.

가슴을 만져 보면 딱딱한 책이 한 권 느껴진다.

만약 이 유물의 힘이 일회성이 아니라면.

몇 번이고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다 이룰 수 있어.'

반로아 왕국을 재건하든,

그냥 다 잊고 우리 식구들끼리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든,

뭐든지 말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사실 고민 많이 했는데,

지금 발견한 보물들 덕에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얘들아."

"응?"

"우리. 크시아스 백작. 제끼자."

"뭐어?!"

이번엔 다들, 입까지 떠억 벌어졌다.

#7화 사냥

그날 나는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벽 너머 이쪽은 반짝이는 황금과 보물이 그득하고, 벽 너머 저쪽은 연기처럼 어둡다.

뭔가 상징적으로 느껴지는 그 한복판에서 우리는 여름날 괴담회처럼 둘러앉아 그동안 외면했던 정보들을 공유했다.

어둠 속에서 조금씩 흉흉한 소문들을 더듬어 나갈 때, 데이지는 돌연 일어나 지옥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소문 아니야! 그거 소문 아니라고!"

빽! 소리친 녀석의 목소리가 화강암 벽면에 부딪혀 왕왕 메아리쳤다.

"밤마다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소문? 내가 봤어! 크시아스의 부하들이 아이들 잡아가는 거! 내가 봤다고! 나도... 잡혀갈 뻔했어."

그때의 공포가 떠오르는 듯 데이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뿐이야? 세금을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을 하나를 통째로 몰살한 것도 봤어. 내가 가 봤어. 마을이... 텅 비어 있었다고. 이주? 그런 게 아니야. 시체는 하나도 없었지만... 땅을 파 보면 시뻘건 피가 축축하게 묻어 나왔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세율은 계속 오르고, 쿠샨시의 빈부격차는 커지고, 사람을 납치해서 파는 인신매매에 길거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처형'해 버리는 세력가들.

내가 기억하는 크시아스 백작은 자비롭진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 게 없으면 도시를 다스릴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데이지의 입에서 쏟아지는 증언은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우리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이 미친 도시에서.... 이 미친 백작 밑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그쪽 연줄을 잡아야...!"

데이지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거리에서 녀석이 마주친 현실은 지옥 그 자체.

그나마 안전한 우리의 영역이 자꾸만 쪼그라들고 있다는 사실에 녀석은 두려웠던 거다.

'그래서 흡혈귀라도 되려고 했던 거냐....'

독한 표정으로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아 내는 데이지.

옆에 있던 세아가 그런 데이지를 안고 토닥여 주었다.

"고생 많았어. 우리 막내."

"세아 언니...."

세아 밀란. 20세.

데이지보다 3살이 많다.

이제 하나 남은 밀란 후작가의 후계자인 이 녀석은, 예전부터 말수가 적었다.

남색 머리칼을 한쪽으로 묶어 내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보통이었지만, 한 번 입을 열면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 수 없는 고급 정보와 날카로운 통찰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그런 세아가 단언했다.

"데이지 말은 다 사실이야. 란센 오빠가 그렇게 되고 난 뒤로... 백작은 완전히 돌아 버렸어. 솔직히 여태 왜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는지도 의문이야."

데이지에 이어 세아도 이렇게 말하다니....

내가 세상일에 관심을 끊은 이래로 쿠샨시가 많이 엉망이 되긴 한 모양이었다.

도무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역시. 이게 맞다.

몇 번을 고민해 봐도.

"크시아스를 죽여야겠네. 우리를 위해서도. 도시를 위해서도."

내 말에 벌슨이 걱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크시아스 백작은 강해. 안 그래도 소드마스터였던 그가 들카슈의 진혈까지 취했으니 지금은 얼마나 강할지...."

벌슨은 네 명의 동생들과 열 명의 기사 아저씨들이 모두 죽은... 그 핏빛의 밤을 목격했으니까.

그의 두려움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건 선택 사항이 아냐. 이 정도로 미쳐 버린 크시아스가 내가 회복된 걸 알면 어떻게 나올까?"

모두들 눈이 커졌다.

결과가 뻔했으니까.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매달 크시아스 백작에게 바쳐야 하는 세금.

백작은 그 세금 보고를 반드시 나에게 시켰다. 설령, 병에 걸려서 한 걸음 딛기가 어려워도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의무.

그날이 오면 백작은 나의 회복을 눈치챌 것이고....

또다시 나를 밟을 것이다.

"아저씨. 걱정하는 건 알지만, 방법이 없어. 이제 3주 뒤면 세금 보고잖아? 그 전에 승부를 봐야 돼."

"그건 그렇지만...."

"걱정 마. 철저히 준비해서 실행할 거야. 그날 같은 일은.... 이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

그렇게 다짐하고 내 동생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일단 나기를 잡는다."

"나기? 아침에 그...?"

"응. 내일 다시 온다고 했잖아? 내 모습을 보여 줄 순 없으니까... 오기 전에 죽여야지."

나기를 죽이고 세금 보고가 있을 3주 뒤까지 시간을 번다.

이게 첫걸음이다.

"알았어. 그러면... 크시아스 백작을 어떻게 암살해야 할지는, 내가 내일까지 계획을 짜 볼게. 오빠는 일단 나기를 죽이는 것만 생각해."

세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남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조심해. 나기는 절대 약하지 않으니까. 아직 다 회복되지 않은 오빠라면, 위험할 수도 있어."

나는 세아의 남색 머리칼을 툭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세아야. 나 란센이다?"

그제서야 세아는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 이게 사는 거지."

지금 누군가 나기의 얼굴을 본다면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지고 말 것이다.

"오늘은 또 어떤 즐거운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까?"

그만큼 그의 얼굴은 한점 그늘 없이 행복으로 빛나고 있었다.

해가 지도록 밖에서 힘껏 공을 차고 놀던 어린 시절이 떠오를 것만 같은 그런 표정이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 돌린다면 생각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쓰레기 새끼. 완전 미쳐 버렸네.'

나는 지금 나기의 방에 잠입한 상태다.

놈의 방에 펼쳐진 참상을 보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푸른 새벽빛이 들어오는 방에는 창백한 시체가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으니까.

나기는 그 참혹한 현장 한복판에서 해사하게 웃었다.

그는 굳어 있는 시체의 뺨을 쓸었다.

"이게 특히 맛이 좋았어. 어떻게 만든 거야?"

"특별히 신경 써서 작업했습니다. 야심이 큰 사람을 찾아서 투자를 해 주고, 앞으로 큰돈을 벌게 될 거라고 확신을 주면... 딱 좋은 상태로 준비됩니다."

"그래. 어쩐지 행복한 맛이더라. 오늘 밤에도 이걸로 준비해 놔."

"네."

"자, 그럼 란센 그 퇴물을 보러 가 볼까? 오늘은 아예 꼬맹이들 두셋쯤 마셔 버리면 어떨까? 란센 그놈 앞에서."

"그런데... 란센 패밀리를 직접 건드리는 건 영주님께서 금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전부는 아니야. 란센 포함해서 그 동생 11명만 피하면 돼. 그러니까 16세 이하의 어린애들은 다 죽여도 문제없어."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어제 봤던 두 명의 젊은 남녀 뱀파이어가 입 속의 혀처럼 나기를 극진히 모셨다.

사람을 데려와 피를 빨아먹고 죽이는 게 일상인지, 다들 아주 자연스러웠다.

나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을 재미로 죽인다는 건, 특히 보호해야 마땅할 영지민을 되레 이렇게 죽인다는 건...

좀 많이 그랬다.

나는 들끓는 살의를 감추고 나기의 뒤를 따랐다.

나기가 사는 곳은 내성에서도 부촌이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거리를 지나면 상점가가 나왔고 쭉 직진해서 성벽을 넘으면 거기서부터 외성 구역이었다. 우리의 근거지인 일네온 던전은 외성 구역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있었다.

그 중간 즈음, 인적이 아주 드문 버려진 시가지에서 나는 나기의 앞을 가로막았다.

"응? 직접 마중 나왔어?"

스릉.

거리엔 사람이 없고, 나기와 나기 부하 둘. 그리고 내가 마주 봤으니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가 없다.

검집에서 검을 천천히 뽑아 들자 나기가 웃었다.

"뭐야? 또 한판 하자고? 감당되겠어? 오늘은 어제처럼 그냥 봐줄 수가 없는데?"

히죽히죽 웃던 녀석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왜 손이 있어?"

눈동자가 휙휙 돌아간다.

안정적으로 딛고 선 내 왼발도 보고, 내 눈도 유심히 들여다본다.

"설마... 코어도 회복한 겁니까? 엘릭서라도 먹었습니까?"

새끼.

갑자기 존댓말을 하기는.

하긴 똥줄 타겠지. 어제 그렇게 모욕을 줬던 소드마스터가 갑자기 몸을 회복해서 나타났으니까.

스르릉.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려 자세를 잡자, 나기도 황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놈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제 부하들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가라. 가서 영주님에게 알려. 란센이 코어를 회복했다고. 같은 방향으로 가지 말고 둘이 흩어져서 가. 최대한 빨리!"

"네!"

내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진득한 오러를 느낀 탓인지 두 남녀 흡혈귀는 안 그래도 얼음처럼 하얀 얼굴을 더 하얗게 만들며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 이건 좀 의외네?

"이렇게 부하를 생각하는 놈이었나? 당연히 저 둘을 미끼로 던지고 도망칠 줄 알았는데?"

나기가 코웃음을 쳤다.

조용히 넘어가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존댓말을 집어치운 채였다.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쟤네들이 단 1초라도 시간을 끌겠어? 차라리 내가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게 가능성이 높지."

"그게 되겠냐?"

"너. 뱀파이어를 너무 얕보는 거 아냐? 난 백작님의 직속 혈족인 노블 클래스라고."

나기 놈은 최상위 뱀파이어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내며 줄기줄기 오러를 뿜어냈다.

피처럼 새빨간 오러가 놈의 검 끝에서 실타래처럼 풀려나온다.

"이 몸의 우월한 육체. 죽여도 죽지 않는 재생 능력. 거기에 이 뱀파릭 오러까지 합쳐지면... 설령 상대가 소드마스터라도 시간을 끄는 것쯤은 어렵지 않아."

"아? 그래?"

그렇게 믿는다면야 뭐.

내 검 끝에서 검푸른 오러 쓰레드가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그럼 받아 봐."

"응? 오러 블레이드도 아니고 오러 쓰레드로 날 상대하겠다고?"

무슨 말이 필요할까.

되묻는 나기를 향해 대뜸 검을 휘둘렀다.

파아앙!

검 끝에서 튕겨져 나가는 오러의 뭉치.

소드 익스퍼트 상급부터 사용 가능한 원거리 공격, 오러 슈팅(Aura shooting)이다.

나기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너... 아직 코어가 다 회복된 건 아니구나?"

그 말은 맞다.

물론 내 코어는 완벽하게 치유되었지만, 예전의 막대한 오러도 함께 돌아온 건 아니었다.

아직 조금 움직이는 게 어색한 오른손과 왼발처럼 코어도 재활이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오러 블레이드를 쓰는 게 좀 벅찼다.

그래서 오러 쓰레드를 꺼냈다.

뭐든 부술 수 있는 오러 블레이드와 달리, 이건 막으면 막히겠지만...

그래서 뭐?

"막아 봐. 한번."

팔랑!

일직선으로 나아가던 검푸른 오러는 나기의 코앞에서 돌연 오러 쓰레드를 뿜어내며 궤적을 틀었다.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자유롭고 몸을 말았다가 펼치는 고양이처럼 변칙적인 움직임.

써컥!

"어...?"

나기는 거기에 반응하지 못했다.

오러의 실을 뿌리며 날갯짓하는 나의 오러가 녀석의 오러를 사뿐히 넘어 파고들었다.

그대로 목을 갈랐다.

나는 나기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두 번 더 칼을 휘둘렀다.

두 갈래의 오러가 급강하하는 독수리처럼 쏘아져 나가 이미 꽤 멀어진 나기의 두 부하를 추적했다.

스카각!

"꺅!"

"아악!"

털썩-

한 번의 휘두름에 한 놈씩.

세 개의 목이 땅에 떨어지고 세 개의 몸통이 나자빠졌다.

"어... 어떻게...."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기의 잘린 목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놈을 내려다보며 대답해 주었다.

"오러 지배력의 차이지. 네가 나를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고."

내가 24살이란 어린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었던 이유.

나이트 벌슨이 나를 두고 천재라고 확신했던 이유.

나보다 훨씬 강했고, 수많은 부하까지 데리고 있던 들카슈 백작을, 어쨌거나 결국 내가 죽일 수 있었던 이유.

내 오러 지배력은 특별했고, 지금도 지배력만큼은 전성기 때와 다르지 않았다.

완벽하게 계산하고 섬세하게 통제한 오러는 마법과도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한다.

고작 흡혈귀의 권능에 힘입어 익스퍼트 최상급이 된 반푼이 따위,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그런...."

화르르륵!

허망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던 나기의 머리가 하얀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기 멀리 쓰러진 두 남녀도 마찬가지.

저들의 시체는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스르릉.

나는 납검하고 등을 돌렸다.

됐다. 나기를 잡았으니, 세금보고가 있는 3주 후까지는 시간을 벌었다.

이제는 크시아스 백작을 잡기 위한 준비를 할 차례.

'돌아가자.'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나는 예기치 않은 소식을 듣고 말았다.

호흡이 턱 끝까지 차오른 데이지가 숨을 헐떡이며 소식을 전했다.

"오, 오빠! 오빠. 큰일 났어!"

"응? 무슨 일이야?"

"백작이! 크시아스가! 우릴... 초대했어! 영주성으로!"

초대...?

초대란 사람이 사람에게 선의와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다.

하지만 백작과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지난번에 백작이 아이들을 초대했을 때 나는... 손발을 잃고 폐인이 되었지.

근데 또 초대한다고?

"언제?"

"3일 뒤. 영주성으로 오래."

고작 3일 뒤?

목덜미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8화 계획

"수고했어."

세아는 오늘도 무표정했지만, 얼굴은 조금 창백한 채로 나를 맞이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백작이 우릴 초대해? 혹시 알아차린 거야? 내가 나기를 죽인걸?"

세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타이밍도 안 맞고. 그리고 나기가 죽었다는 걸 알아도 반란 세력의 짓이라고 여길 거야."

"반란 세력?"

"응. 요즘 들어 백작의 부하들을 암살하는 세력이 있거든. 나기 같은 거물까지 죽인 적은 없지만... 요샌 누가 실종되면 으레 그들의 짓이겠거니 해. 그러니까 걱정 마."

백작. 인망을 다 잃었구나?

전에는 다들 그가 무서워서 불만도 꾹꾹 눌러 참았는데, 이젠 더 이상 누를 수 없는 풍선처럼 빵빵 터져 버리는 모양이다.

아무튼, 나기 때문은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긴 한데....

"그럼 우릴 왜 초대하는 거야?"

"그건 모르지.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런 게 아니야. 갑작스러운 초대 때문에... 백작을 암살할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게 문제지."

세아는 미묘하게 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원래 계획은 백작이 의식을 치르는 순간을 노리는 거였거든."

단어 하나가 내 신경을 잡아끌었다.

"의식?"

"응. 꽤 됐어. 오빠가 그렇게 된 이후로... 백작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영주성을 나와서 혼자 의식을 치러."

"종교의식 같은 거?"

"정확히는 모르지만 뭐 그 비슷한 거겠지. 종교든 주술이든."

"정말이야? 그 크시아스 백작이?"

나로서는 쉬이 믿기지 않았다.

크시아스 백작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속물이다. 신이 어느 날 계시를 내리면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냐면서 시비를 틀 인물인 것이다.

내가 7년이나 그 밑에서 빡빡 굴렀는데 그걸 모를까?

근데 그 백작이 종교쟁이가 됐다고?

"후,"

세아는 짧게 한숨을 내뱉곤 깊은 바닷물 같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오빠. 예전의 크시아스는 잊어. 어제 데이지가 말했지? 아이들이 납치되고 마을 하나가 통째로 몰살당한다고. 그 아이들과 시체들이 다 어디로 갔는 줄 알아? 전부 의식에 제물로 사용되는 거야."

"그런...."

"확실해. 그 시체들, 내 눈으로 봤어. 그거 그냥 시체가 아니었어. 주술 처리까지 했는지.... 사기(死氣)가 농축되어 있었어. 마나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사기가 가득했다고. 절대 자연적인 시체가 아니야."

세상에.

그러니까 백작이 알 수도 없는 존재에게 굽실거리기 위해서 시체와 산 제물을 준비한다고?

지난 3년간 정말 많은 게 바뀌었구나....

겨우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자 새삼 또 새로운 사실이 눈에 띄었다.

세아. 전에도 똑똑하고 이거저거 잘 아는 동생이긴 했지만...

"근데 넌 그걸 다 어떻게 아는 거야?"

아까 반란 세력 얘기도 그렇고, 한 달에 한 번 의식을 한다거나 그 의식에 어떤 제물을 쓴다거나 하는 사실은 영주성 안에서도 기밀로 취급이 될 만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걸 다 안다고?

내 질문에 세아는 살짝 시선을 피했다.

"...이 도시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그동안 여기저기에 정보망을 구축해 놨어."

이건 좀 뜨끔했다.

내가 희망을 잃고 틀어박혀 있는 동안, 동생들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저마다 이렇게 발버둥을 쳤던 건가?

나의 부재가 녀석들을 일찍 어른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세아는 그런 내 눈치를 흘깃 살피더니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중요한 건 계획이 다 어그러졌다는 거야. 아까 말했듯이 원래 계획은 백작이 의식을 치를 때를 노리는 거였어. 예배당 안에는 백작 혼자만 들어가거든. 심지어 영주성 밖에 있고."

"그러니까, 미리 예배당에 가서 잠복해 있다가 백작이 들어오면 친다?"

"응. 백작 부하들을 배제해야 승산이 오르니까. 지난번처럼... 그럴 수는 없잖아?"

하긴.

들카슈 백작을 암살할 때는 그 부하들의 저항을 뚫어 가면서 싸워야 했다.

정말 지옥이었지.

그러니 세아의 계획은 훌륭했다.

문제는...

"근데 완전 어그러졌어. 의식이 치러지는 건 1주일 뒤로 예상되는데... 백작은 3일 뒤를 명시해서 우릴 초대했잖아."

크시아스가 마치 우리 계획을 다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참 공교로운 타이밍에 초대장을 날렸다는 것.

세아는 고민이 깊어지는지 무표정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휙 나를 응시했다.

"아무튼 방법은 내가 고민할게. 오빠는 백작을 어떻게 잡을지 그것만 생각해."

녀석은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마음을 먹은 듯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오빠. 정말 크시아스를 벨 수 있겠어?"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조심스러움과 두려움.

그 말이 뗄감이라도 된 것처럼 옆에 있던 벌슨이 화르르 타올랐다.

"그, 그러니까. 란센. 꼭 싸워야 하나? 크시아스는 이제 완전 괴물이 됐다고!"

다들 겉으론 내 말을 따라 주었지만, 속으로는 이런 불안감을 감추고 있었던 거다.

나를 믿고 싶겠지만... 이미 내가 한 번 폐인이 되어 버린 모습을 보았으니까.

두렵겠지.

기껏 회복한 내가 또 그렇게 될까 봐.

하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이건 선택 사항이 아니다.

"벌슨 아저씨. 달리 방법이 없어. 그리고... 승산도 있고."

우웅-

나는 아공간 목걸이를 통해 검 한 자루를 꺼냈다.

아침에 나기를 벨 때 썼던 검이었다.

"검?"

"좋아 보이는데...?"

다들 의아해하는 가운데, 그 정체를 알아본 벌슨이 홀로 감격했다.

"왕의 검, 반로아...."

반로아의 초대 국왕께서 난쟁이 대장장이와 요정의 도움을 받아 주조했다는 검.

무려 왕국의 이름을 부여받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물이었다.

"벌슨 아저씨는 알지? 이 검을 뭐로 만들었는지."

내 질문에 그는 왕국 건국기의 일부를 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왕께서 별빛의 기운을 머금은 성은(星銀)으로 검 한 자루를 벼리시니...."

그 말에 늘 무표정하던 세아마저 입술을 살짝 벌렸다.

"하늘에서 떨어진 은강(銀鋼)을 오러로 정제해서 만드는 그 성은(星銀)? 그걸 통째로 써서 검을 만들었다고?"

"그래. 통짜 성은검. 흡혈귀처럼 삿된 것들은 이 검을 견뎌 낼 수 없어. 들카슈도 이걸로 죽였지. 다만 그때는... 놈의 부하도 많았고, 뱀파이어랑 싸우는 것도 처음이었고. 하지만 이번엔 달라."

나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세아를 보았고, 세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믿을게 오빠. 뭐 잘 안 돼도. 같이 죽으면 그만이지 뭐."

아니. 왜 같이 죽어. 무슨 말을....

"농담이야."

내가 가만히 노려보자. 툭 덧붙이는 세아.

근데 늘 무표정한 얼굴이라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렸다.

나는 녀석에게 경고했다.

"그거 농담 아니야. 하지 마."

세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확인한 다음에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튼 절대 안 죽어. 너는 계획을 세우고 나는 그걸 실행한다. 설령 계획대로 안 돼도...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해낼 거니까."

계획이 칼이라면,

계획이 어그러진다는 건 칼날이 깨진다는 것.

나는... 설령 깨진 칼날이라도 벤다.

그뿐이었다.

* * *

부족해.

부족해.

세아에겐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사실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성은검.

거기에 이번에 발견한 수호의 목걸이와 마법 갑옷.

사실 이 모든 게 있어도 백작을 이기기에는 부족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족한 무력을 무엇으로 메꿔야 할까?

'아, 진짜 왜 발동을 안 하는 거냐.'

마음 같아서는 과거로 한 번 더 돌아가고 싶었다. 또 쓸 만한 무기를 찾아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이후로 운명의 책은 다시 반응하지 않았다.

여기에 매달려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고.

그러니 남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새로운 검술을 익힌다.'

바로 얼마 전에 굉장한 검술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걸 내 것으로 만든다.

악으로 깡으로, 그리고 벌슨 아저씨가 찬탄했던 나의 재능으로.

스르릉-

나는 검을 천천히 움직였다.

기억 속의 자취를 따라서 천천히 천천히.

점점 더 선명해졌다.

1만 년 전의 고대.

사교도의 우두머리가 펼쳤던 바로 그 검술이.

기억 속의 검로를 따라 검을 움직이며 나는 실시간으로 계속 소름이 돋았다.

'미쳤어. 어떻게 그 상황에서 이 궤적을 볼 수가 있지?'

그는 검의 달인이라고 불리던 나를 완전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놀았다.

나는 익스퍼트 최상급 수준의 압도적인 오러를 뿜어내고도 그를 쉽게 제압할 수 없었다.

그 끈질기고 단단한 검술.

그리고 그 날카로운 기운.

'복기하면 할수록 진짜 말이 안 되네.'

한 번의 움직임에 대체 몇 개의 노림수를 담은 거야?

검을 이렇게 쓸 수도 있는 거였나?

당시에도 놀랐지만, 차근히 분석해 보니 더 놀랍다.

누가 계시라도 내려 주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순간적으로 이런 판단을 하지?

그때, 그자가 했던 말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검기가 색으로 물들면 뭐 해? 검의 마음을 읽지도 못하는 반쪽짜리 검사인데.'

검의 마음을 읽는다.

그건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참 이상하지.

그때 그 우두머리의 검술을 떠올리며 몸을 움직이다 보면... 어쩐지 그 의미를 알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고 보면 그랬다.

나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그렇고...

이 시대의 검술은 모두 오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떻게 오러의 위력을 증대할 것인가.

어떻게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룰 것인가.

오로지 그것에 초점을 맞춰서 검을 다룬다.

우리에게 검이란 오러를 실어 나르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고대의 검술은 다르다.

검이 중심에 있다.

한없이 예리했고, 자유로웠다.

마치 검과 대화를 나누듯이, 아니... 검 그 자체가 된 것처럼.

'오롯하게 검과 마주해 본 적이... 언제였더라.'

어쩐지 오래 잊어버리고 있던 첫사랑과 다시 만난 기분에 심장이 뛰었다.

점점 더 깊이 검에 빠져든다.

휘두르고 또 휘두르고....

차차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백작도 잊어버리고,

나도 잊어버리고,

한 호흡 한 호흡을 검과 함께했다.

우웅- 우우웅-

어느 순간부터 검이 자꾸 울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검을 마주 보고 마음으로 끌어안았다.

"후...."

그리고 문득 눈을 떴을 때,

우우우웅-

저절로 잘게 떨리는 내 검 끝에는 투명한 아지랑이가 타오르고 있었다.

고대의 검사들이 보여 주었던 것과도 같은 날카롭디 날카로운 아지랑이가.

직접 해 보니까 알겠다.

이건 확실히 오러가 아니었다.

* * *

쿠샨시(市)의 영주성.

한때는 반짝이는 보물들로 치장되어 있던 화려한 성이었는데, 지금은 창문마다 드리워진 암막 커튼으로 캄캄하고 스산한 장소가 되었다.

죽음과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대전에 거대한 남자가 홀로 옥좌를 깔고 앉아 있었다.

빠각-

빠각!

그는 피가 가득 담긴 해골바가지들을 옆에 늘어놓고 꿀꺽꿀꺽 마셔 버리곤 옥좌 아래도 던져 깨뜨리기를 반복했다.

끼이익-

대전문이 열리고 흡혈귀 하나가 발걸음 소리도 없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 답장이 돌아왔습니다. 3일 뒤에 입궁하겠다고 합니다."

"그래? 드디어...."

"예. 그런데 란센은 조금 아깝지 않습니까? 혈족으로 삼으면 부상도 회복될 테고 소드마스터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인데...."

"크크크큭. 멍청한 놈."

빠각-

쿠샨시의 영주 크시아스는 또 하나의 해골잔을 깨끗하게 비우곤 바닥에 던져 깨 버렸다.

"그깟 소드마스터가 뭐가 중요할까? 이제 훨씬 더 큰 힘을 얻을 텐데."

"네?"

"그놈들. 틀림없이 반로아 왕국의 귀족들이다. 몰랐느냐?"

"그, 그렇습니까? 몰랐습니다."

"란센 그놈은 어쩌면, 반로아의 마지막 왕자일지도 모르고."

"상당히 정통의 검술을 쓴다 싶긴 했는데... 그런 비밀이.... "

"그래. 그러니 생각해 보거라. 그 고귀한 피를 바치면 주인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얼마나 더 큰 힘을 내려 주실까...? 그 건방을 떠는 5왕(王)들도 내 상대가 되지 않겠지. 크크크큭. 정말 오래 기다렸다. 놈들을 제물로 쓸 수 있는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꿀꺽꿀꺽꿀꺽 빠각-!

또 한 번 해골 잔을 집어 던진 크시아스.

그의 눈동자엔 광기가 타올랐다.

"그래. 다른 제물들은 다 제대로 준비됐겠지?"

"네. 내일 들어올 물량만 받으면 완벽하게 준비됩니다."

"그래. 완벽해야지. 그래야지."

어둠 속에서 크시아스의 커다란 입이 하얗게 웃었다.

피에 젖은 송곳니가 번들거렸다.

#9화 대면

로버랜드에서 도시의 존재는 은혜롭기 짝이 없다.

그 어떤 대륙보다 많은 마수와 마적들이 들끓는 로버랜드에서, 그나마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도시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영주가 아무리 무서워도, 또 부당해도, 대부분의 시민은 그에 순종하며 작은 삶 속에서 행복을 찾아 살아간다.

쿠샨시(市)는 총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드높고 단단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내성에는 번화가가 있다.

그 밖으로 목책에 둘러싸인 외성에는 각종 공산품을 만들어 내는 작업장들이 즐비하고, 외성마저 넘어가면 여기저기 흩어진 전초기지에 의해 보호되는 드넓은 촌락지가 펼쳐진다.

촌락 지역에 존재하는 여러 마을 중 하나인 루에라촌.

이곳 사람들도 최근에 오른 세율 때문에 고단한 매일을 보내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행복했다.

이 로버랜드에서 마수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마적들에게 목이 베이지 않고, 근근이라도 밥 굶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은혜였으니까.

그래서 루에라촌의 어린아이들은 활기차게 뛰어다녔다.

오늘도 그랬다.

염소를 기르는 라인 씨네 막내아들, 10살짜리 데인은 오늘도 친구들과 함께 냇가로 들로 놀러 다녔다.

그냥 놀러 다닌 건 아니고, 빠듯한 가계에 보태기 위해 각종 약초와 버섯을 따러 다닌 건데, 애들한테는 그게 노는 거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와! 달다!"

"진짜 달아!"

"자꾸 먹지 마!"

"어차피 많은데 뭐!"

"콜록콜록! 벌 쫓는다고 연기 너무 마셔서 아직도 목이 맵다."

4명의 아이들이 커다란 바구니를 같이 들고 꽃이 지천에 널린 들판을 가로질렀다.

바구니에는 커다란 벌집이 가득 들어 있었다.

벌집에서 흘러내린 황금색의 꿀이 기우뚱기우뚱 출렁거렸다.

쿠샨시(市)의 특산품인 황금벌꿀.

이 일대에 사는 황금벌이 사시사철 연노랑 잎을 피우는 에버옐로우 나무의 수액을 모아 만들어 낸다.

가격이 상당했기에 이걸 가져가면 당분간은 놀기만 해도 혼나지 않을 수 있었다.

한동안 꿀 바른 간식을 먹을 수 있는 건 물론이었고.

네 명의 아이는 노래를 흥얼거리면 노을이 불타는 들판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막 언덕을 넘었는데....

"꺄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어...?"

"무, 무슨 일이야?!"

언덕 아래로 참혹한 풍경이 펼쳐졌다.

번쩍이는 갑옷과 창칼로 무장한 병사들이 루에라 마을을 에워싸고, 몰이사냥을 하듯 마을 사람들을 밀어붙이며 찔러 댔다.

아이들은 바짝 얼어 버리고 말았다.

"아빠?"

"엄마!!?"

익숙한 그림자들이 아우성치며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공포에 질린 비명.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붉은 선혈.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명 지르는 아빠 엄마가 저 멀리 보였다.

"저기 애들이 있다!"

"한 놈도 놓치지 마!"

불행하게도 주춤주춤 다가가는 아이들을 일단의 병사들이 발견했다.

"히익!"

"도, 도망쳐야 돼!"

"놔! 저기 엄마가!"

"멍청아! 죽는다고!"

아이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혼비백산하여 다시 언덕을 넘어 도망쳤지만, 아이들의 걸음으로 어른들을 따돌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놓치면 안 돼! 잡아!"

악을 쓰며 아이들을 뒤쫓는 병사들.

성큼성큼 다가선 병사들의 그림자가 금세 아이들을 뒤덮었다.

"아악!"

운명을 직감한 아이들이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비명을 지를 때,

쐐애애액!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었다.

"켁!"

"끅!"

"뭐, 뭐...!? 컥!"

하나, 둘, 셋.

쾌속하게 날아든 화살이 순식간에 병사들의 목을 꿰뚫었다.

귀신같이 빈틈을 파고드는 화살 앞에선 입고 있는 번쩍이는 갑옷도 소용없었다.

털썩.

거의 동시에 쓰러진 세 명의 병사들.

"히이익!"

아이들은 뺨에 묻은 피를 만지며 더더욱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괜찮니?"

그런 아이들의 머리 위로 크고 따뜻한 손이 내려앉았다.

활과 화살로 무장한 남자는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누, 누구세요?"

"리베라 피에트로."

"리베라... 어? 남작님이요?"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일단은 따라와. 벗어나야 한다."

"아, 안 돼요! 저기 엄마가!!"

"미안하다...."

남자, 리베라 피에트로는 발버둥 치는 아이들을 억지로 품에 안고 지옥이 펼쳐진 루에라 마을을 일별했다.

'백작.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부하들 몇 명 암살해 봤자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

그는 오늘 오전, 자신을 찾아왔던 한 소녀를 떠올렸다.

란센 패밀리의 세아.

정보를 거래하며 서로 은연중에 돕고 돕는 협력 관계에 있는 소녀였다.

그녀가 오늘은 믿기 힘든 제안을 했다.

'란센 패밀리가 백작을 친다고? 그러니 호응을 해 달라고?'

리베라는 그 자리에선 즉답을 피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아주 부정적이었다.

'될 리가 없지. 란센. 한때는 이 도시의 희망이었지만... 이젠 너무 초라하잖아. 슬프게도.'

설령 전성기의 란센이 돌아온다고 해도 지금의 크시아스 백작을 이길 순 없을 것이다. 하물며 폐인이 된 지금에야....

'백작을 친다니 터무니없지. 고작 어린아이 몇 구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데....'

피에트로가(家)는 아주 오래전부터. 크시아스 백작이 이곳에 오기 한참 전부터 대대로 이 일대를 지켜온 호족 가문.

시민들에겐 남작이라고 불리며 제법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감히 백작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다가오는 파국을 예감했다.

'란센. 이 로버랜드에선 흔치 않게 명예를 아는 남자였는데... 괜히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다가 죽진 않았으면 좋겠군.'

리베라는 품에 아이들을 꽉 끌어안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렸다.

꽉 깨문 그의 입술에선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어쩔 수는 없어도... 분한 건 분한 것이었으니.

* * *

덜컹 덜컹 덜컹

루에라 마을에서 출발한 수레들이 쿠샨시의 영주성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오늘 할당량입니다. 108구보다 좀 더 많이 넉넉하게 가져왔습니다. 총 116구입니다."

"수고했다."

문 너머에서 기다리던 흡혈귀들은 천을 뒤집어 까서 시체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순간적으로 주변의 마나가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짙은 사기가 훅 끼치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그 무거운 수레를 번쩍 들어 영주성의 꼭대기층으로 옮겼다.

3단 케이크처럼 층을 이루고 있는 영주성의 꼭대기에는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평평하고 넓은 옥상이 있었다.

작업은 그곳에서 이루어진다.

보름달 아래에 시체들을 늘어놓고 며칠간 달빛으로 건조를 시키면 딱 좋은 제물이 완성되는 것이다.

"백작님 올라오십니다."

흡혈귀 하나가 낮게 말하자, 모든 흡혈귀들이 행동을 멈추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쿵- 쿵-

크시아스 백작은 위압적인 발소리를 내며 올라왔다.

그는 자신의 권속들을 주욱 둘러보더니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내려들 가라. 귀한 제물인데 부정 타면 안 되지."

"네."

흡혈귀들은 허리를 숙인 자세 그대로 백작에게 등을 보이지 않으며 잰걸음으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흐으음-!"

백작은 시체가 실린 수레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콧소리를 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농밀한 사기(死氣)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잘 준비되고 있어. 이제 내일이면 란센 애들이 입궁하는 날인가? 드디어... 기다리던 이 순간이 오는구나."

백작은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나게 웃으며 수레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부하 중에서도 손에 꼽는 실력자였던 나기가 죽었고 시민들의 삶은 황폐해져 가고, 반란 세력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날뛰고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귀한 핏줄을 타고난 란센과 그 무리들을 제물로 바치면 이제 자신은 인간은 물론 뱀파이어까지 초월한 위대한 존재로 거듭날 테니까.

"이 세상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것들... 이렇게 제물로라도 진리에 닿게 해 주니, 이 얼마나 자비로운지."

들카슈의 진혈을 취하고 뱀파이어 로드로 다시 태어나던 날. 크시아스 백작은 이 세계에 감춰진 진실을 알았다.

그때부터 준비해 온 계획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것이다.

그는 흐뭇하게 웃으며 마지막 수레를 살펴보려 허리를 숙였다.

바로 그 순간,

번쩍!

콰아아아!

섬광, 그리고 돌풍.

시체들 사이에서 검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크시아스의 목을 향해 뻗어 나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