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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4. 1%

"-해서, 네. 그렇게 됐습니다."

렌은 고개를 정중하게 숙이며 하트먼과 아리스에게 인사했다. 두 사람은 육포를 먹던 중이었는데, 당황하여 눈만 도르륵 돌려 재이와 리베로에게 신호를 보냈다. 새 식구가 들어온 것은 그렇다 치자. 뭐, 사실 사무소의 주인은 그들이 아니라 재이였기 때문에 결정권은 전적으로 재이에게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잘 지내요, 언니."

두 사람은 그리 인사하면서도 힐끔, 입구 쪽을 힐긋거렸다. 껄렁껄렁해 보이는 아시아인들이 누런 니를 히- 드러내며 웃었다. 누가 보아도 장찌엔의 식구들이다. 그들은 마차 옆에 서서는 가볍게 경례하며 인사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여기 왜 왔습니까, 재이 씨?"

"일이 좀 있었어요. 장찌엔이 사과의 뜻으로 마차를 빌려줬습니다. 마침 렌 씨 짐 옮길 것도 있어서 잘 됐다 싶었죠."

"일이라고 하시면?"

"간단히, 이런 거?"

재이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더니 가볍게 까딱거렸다. 총질 좀 시원하게 갈겼나 보다. 어딜 가기만 했다 하면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질 않으니, 하트먼은 어떤 의미로 재이가 참 안타까웠다.

"렌 씨. 짐 내리고 어서 저놈들 가보라고 하세요. 계속 저렇게 서 있으니까 부담스럽네."

"알겠습니다."

"리베로, 도와드리고."

"당연하지.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고."

"아리스?"

"네?"

"2층 끝방 청소 좀 해줄래? 렌 씨가 사용할거다."

"아, 네네! 바로 치울게요. 제 방이랑 가까워서 좋네요."

아리스가 헤헤 웃으며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이어서 갱단원들이 두 손 가득 렌의 짐을 챙겨 들어왔고, 재이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었다. 장찌엔, 그러니까, 자신의 두목이 인정한 자였다. 그는 어떤 의미로 보면 그들과 같은 식구였고, 또 다른 의미로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두목인 장찌엔마저 쩔쩔대는 대상이니, 이는 당연했다.

"재이 씨. 이게 마지막 짐입니닷. 하핫."

"수고했습니다. 잘 돌아가시고."

"아, 예예. 형님께 전할 말씀은?"

"식재료 괜찮은 거 있으면 보내달라고 해주세요. 돈 낼 거니까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된다고."

"어후, 형님께서는 식구에게 먹을 것 아끼지 않으십니다. 아무튼, 꼭 그리 전하겠으니 마음 놓으시고 푹 쉬십시오! 모시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처억! 그들은 주먹을 손바닥으로 감싸더니, 중국식 인사를 남기고서 서둘러 뛰어 나갔다. 혹여 미적댔다가 재이의 심기를 건드리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장찌엔 그 사람 진짜 웃기는 사람이더만."

장찌엔이.

리베로는 마차가 대로변 끝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재이가 핏줄인 줄."

"중국인들 특성이 그래."

"너 중국인 본 적 있어? 난 장찌엔이 처음이었는데?"

"봤지. 아주 많이."

민원 상담 받을 때 세 번째로 많이 보는 유형이 조선족이다. 결은 조금 다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같은 중국문화를 공유하지 않나. 재이는 피곤하다며 신발을 벗었다. 서부에 온 이후로 새끼발톱이 멀쩡한 날이 없다.

"렌 씨."

"네?"

"자물쇠 달아줘요?"

"자물쇠요? 그건 왜-"

아. 렌은 리베로를 보고서 잠시 멈칫거렸다. 하도 능글맞게 껄덕대서 미친놈인가 싶긴 하지만,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2층에서는 저 아리스라는 아이와 가까워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가 잘 들릴 것 같다.

"괜찮습니다.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

"마음 바뀌시면 언제든지 말하세요. 어차피 제가 다는 게 아니라서."

"그럼 누가 다는데요?"

"하트먼은 사무실 일 보느라 바쁘니, 리베로 본인이 달겠죠?"

"엥? 내가?"

어차피 어떤 자물쇠든 리베로가 마음만 먹으면 따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러니, 리베로가 단다고 해서 뭐 달라지겠는가. 렌은 황당하다는 듯 잠시 입술을 오물거렸다가 말았다.

"저 그럼 올라가도 될까요? 먼 거리 왔다 갔다 했더니 조금 피곤해서요."

"그러세요. 저녁부터 아리스와 함께 주방일 보시면 됩니다. 아리스. 너는 앞으로 주방 보조를 맡고, 청소 위주로 부탁해."

"네. 알겠습니다!"

아리스의 대답과 함께, 사무실 사람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오로지 재이만 거실에 남아 서류 더미를 확인했다. 사실 급한 건 없는데, 예상치 못하게 사무실을 며칠 비웠던 터라······.

"아."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시청에서 보내온 전언이 한 장 있다. 정식 우편물은 아니고, 쪽지에 가까운 것이다. 수신자가 재이로 되어있는 터라, 하트먼은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서랍에 챙겨 넣은 듯 했다.

"너도 좀 쉬어라. 하아암."

리베로도 기지개를 켜며 위층으로 올라가려 할 때였다. 재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싶은데, 안 되겠는데."

"왜?"

"하이크석유회사, 오늘 새크라멘토로 들어오나봐."

"누구?"

"석유회사. 피버 박사가 소속된."

"아아아!"

검은 황금, 석유 매장지를 내어주는 대신 임대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했었지? 리베로가 턱을 긁적거리는 순간. 다시 사무실 앞에 마차가 들이닥쳤다. 두 사람은 저 마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김재이!"

"아직 정정하시군요. 피버 박사."

"나참. 거사를 앞두고 대체 어딜 다녀왔단 말인가? 이래서 요즘 젊은 것들은, 쯧!"

박사면서 기억력이 별로 안 좋은가? 얼마 전에 목구멍에 총구 붙이고 편지 썼던 걸 까먹었나 보네? 재이가 의아해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마차에 또 다른 누군가가 타고 있었던 게다.

"저를 찾으셨나봐요?"

"임대 하겠다고 그 난리를 쳐댔으면서 보이질 않으니, 본사 사람들이 와서 기약 없이 그쪽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도 그렇네요. 그런데, 안에는 누구?"

"크흠. 하이크 석유 회사 사장인 폴 박트일세."

박사의 인사에 맞춰 마차 밖으로 모습을 보이는 사내. 석유회사 사장이라고 하여 중장년을 생각했는데, 상당히 앳된 외모였다. 이런 경우 둘 중 하나다. 부모를 잘 만났거나, 아니면 재이처럼 재능이 뛰어나거나.

'오일 머니는 다르다 이건가. 아직 상용화 되기 전인데 귀티가 엄청나군.'

재이는 폴이 분명 전자의 경우일 것이라 확신했다. 태생부터 저자는 남다르다고, 그저 뼈대만 봐도 견적이 나왔다. 폴은 건치를 자랑하며 재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김재이 씨.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하이크 석유 회사의 사장, 폴 박트입니다. 폴이라고 불러주면 고맙겠군요."

"김재이입니다. 저는 뭐, 이것저것 하고 삽니다."

"근래 사무실에 없었다는 소식을 들어서 걱정 많이 했습니다. 의뢰가 있었나 봅니다?"

"예. 뭐. 샌프란시스코에 좀 다녀왔습니다. 장찌엔이라고, 중국 부호에게 받을 게 있어서."

"오호. 장찌엔이요?"

"아세요?"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재이는 안으로 들어오라며 몸을 비켰다. 그러자 폴은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고, 이내 품에서 게약서를 꺼냈다.

"하이크 석유 회사는 새크라멘토에서 작업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임대료를 매출의 1%로 받고자 하시던데, 혹 재고 여지가 있습니까?"

"예를 들면요?"

거래에서 내용 파악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는 아주 매너있게 웃으며, 그저 '제안' 중의 하나라는 말을 덧붙였다.

"뭐, 예를 들면 매출 비율을 낮추는 대신 회사 지분을 가져갈 수도 있겠지요."

"구미가 좀 당기네요. 얼마까지 낮추고 싶은데요?"

"마음 같아서는, 뭐, 하하. 아실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지요. 0.8-0.5까지가 어떨지, 정중히 제안 드리는 바입니다."

"흐음."

당장 계산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이크 회사가 나중에 얼마만큼 성장할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돈의 가치는 시간에 따라 떨어지지만, 기업의 성장은 시간에 따라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정확히 셈을 따지려면 하이크 회사의 가능성이 어디까지인지 봐야 하는데······.

'잠깐만.'

미국의 석유라고 하면 록펠러가 제일 유명하지 않나? 석유의 왕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시기도 얼추 맞을 터다.

"록펠러라는 이름을 들어 봤습니까?"

"록펠러요?"

재이의 물음에 폴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요즘 신경 쓰이는 경쟁사이긴 했다. 주력으로 하는 지역이 달라서 특별히 마찰을 빚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오하이오에서 석유 회사를 설립한, 그 록펠러라면 알고 있습니다만."

거기네. 여기가 아니라 거기다. 재이는 눈이 번쩍 뜨이며 폴의 제안을 거절했다.

"말씀은 친절하시지만, 저는 의견을 거둘 생각이 없습니다. 전한 대로, 1%를 주셨으면 합니다. 현금으로요. 아, 금까지도 괜찮습니다."

지분 모을거면 록펠러 쪽 지분을 모아야지. 안 그런가? 재이의 대답에 폴은 턱을 만지작거렸다. 아쉽다는 반응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우선, 재이 씨 땅에 얼마나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으니 조사를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네. 마음대로."

"고맙군요. 그럼, 보고서가 올라오면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중간에 다른 제안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그랜드호텔에 묵을 거랍니다."

"그랜드호텔, 요즘 거기 일 많지 않나요?"

재이가 피버 박사를 보며 물었다. 뉴욕에서 왔던 핑커튼 직원들이 몰살 당한 곳이 바로 그랜드호텔이었다. 피버 박사가 토마토스파게티에 공포증을 갖게 된 것도, 바로 그곳에서부터였고. 폴은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가요? 서부치고는 괜찮은 호텔 같던데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다행입니다."

"다음에 뵙지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폴은 모자를 벗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피버 박사도 슬그머니 그를 따랐다. 두 사람은 사무실을 나와 마차에 몸을 실었고, 피버 박사는 멀어지는 건물을 힐끗거리며 사장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김재이."

첫인상에 대해 묻는 것이다. 편지에 썼던 대로, 아주 씹새끼이지요? 폴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중얼거렸다.

"예. 뭐.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 것 같은데, 확실히 너무 어리네요. 그래서 그런가. 안 믿깁니다. 저자가 서부의 전설이라는 게."

"서부의 전설?"

피버 박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러자 폴은 몰랐냐면서 웃음을 낮게 터트렸다.

"호크아이, 로건 모두 저자가 처리했잖아요. 듣자하니, 댄버까지 죽였더만. 스위트월드의 그 댄버. 장찌엔이랑은 의가 깊고, 커닝햄과도 인연이 있어 보입니다. 뭐, 이런 거 따지면 서부의 전설이라 칭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듣기로는 그러한데-"

"뉴욕에도 편지 보내셨다면서요."

"저놈이 저를 겁박하여 그런 것입니다!"

"어쨌거나요. 동부에도 이미 소문 쫙 퍼졌을 겁니다."

자신이 왔던 펜실베니아에서도, 미국에서 제일 번화한 도시라는 뉴욕에서도, 아마 김재이를 그리 부르고 있으리라. 서부의 전설이라고.

EP135. 다음 목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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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지."

재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뽀송뽀송하고 깨끗한 침구, 안전한 공간, 나름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 그리고 입맛에 딱 맞는 음식과 대출 없는 생활. 재이는 배추국을 들이키며 연신 만족스러운 콧소리를 내었다. 서부에 와서 손에 꼽을 정도로 만족스럽고 행복한 날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지내는 것도 상관 없겠다 싶을 정도로.

채앵!

"도둑놈 잡아라아아!"

"어이고, 과일 가게에 또 도둑 들었나 보네."

"이상하다. 아저씨가 총 구비해 놓는다고 했는데. 총 소리가 안 나네요."

"그러게. 한번 죽어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만만하게 안 보지. 재이, 그거 다 먹었어?"

"어······."

행복한 감상 끝. 울타리 친 이곳만 평화로우면 뭐하나. 한 발자국만 밖으로 나가도 아수라장 지옥인데. 재이는 바깥에서 들리는 소란을 애써 무시하며 식사에 집중했다. 렌은 주방에 서서는 그들이 먹는 걸 지켜보다가 앞치마를 벗었다.

"담배 좀 태우고 오겠습니다."

"아, 네. 그러세요."

희한한 양반. 서부에서 담배 피는 곳을 가리는 사내가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돈을 많이 주는만큼, 재이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예를 들면, 음식하면서 담배 태우지 말 것. 손은 상시로 씻을 것. 음식물 쓰레기는 조금 멀리 가서 버릴 것 등등. 렌이 밖으로 나가자, 식사를 대충 마무리한 리베로도 벌떡 일어났다.

"나도 다녀올게."

'바쁘네.'

'애쓴다.'

'언니 불쌍해.'

하트먼과 재이, 그리고 아리스가 그 모습을 보고서 속으로 생각했다. 리베로는 진지했으나, 여태 그의 모습을 봐왔던 동료들은 전혀 믿지 않았다. 리베로는 언제나, 사랑에 있어서는 진지했으니까. 그 유효기간이 심각하게 짧아서 그렇지.

"불?"

치익.

렌이 담배를 문 채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자, 리베로가 라이터를 내밀었다. 그녀는 리베로를 잠시 쳐다보더니, 말 없이 불을 붙였다. 저 멀리, 도망치는 과일 도둑과 샷건을 든 채 쫓아가는 사장 가족이 보였다.

"근데요."

"음?"

"김재이 씨는 대체 정체가 뭐예요?"

"총잡이? 좀 예상을 벗어나는 실력이긴 하지만."

"아니. 이름부터가 이상하잖아요."

갈색 머리칼에 잿빛 눈동자. 그는 영락없는 미국인이었다. 하지만 이름부터하며, 조선 음식에 심취한 모습은 뭐랄까. 마치 어린 시절 조선에서 지낸 사람 같다. 절대 그럴 리 없는데.

"뭐 들은 거 없어요?"

"터틀락 출신이라고만 들었어. 가족 얘기는 모르겠고. 가끔 이상한 말을 섞어서 하긴 하는데, 나쁜 애는 아니지."

"그럼요. 그건 알죠. 나쁜 사람이었으면 이런 식으로 저를 고용하지도 않았을거니까."

분에 넘치는 주급과 가족들의 돌봄까지 내걸며 그녀를 데려왔다. 멀리서 비교군을 찾을 것도 없다. 장찌엔만 하더라도, 다들 호인이라 떠들어대지만, 돈에 관해서는 바늘 하나 안 들어갈 만큼 깐깐한 작자다.

"살다 보니 뭐 이런 일도 있구나 싶어서요."

"흐음."

리베로는 담배를 잘근잘근 깨물며 지난 날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재이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하고는 했다. 현대가 어쩌고, 미래는 저쩌고 등등. 귀신 들린 총구를 차치하더라도, 재이의 태생에는 뭔가 의아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상당히 깔끔했지. 아침 저녁으로 씻고, 양치질까지 꼬박꼬박 하고, 속옷도 갈아입고.

렌은 무슨 일인가 하고 그를 쳐다봤다.

"은행이나 정부 돌아가는 꼬라지도 잘 알고, 저번에는 뉴욕이 어떻네 하면서 새크라멘토랑 비교한 적도 있거든요. 가봤냐고 물어보니까 그런 적 없다 하긴 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상세하게 알고 있었단 말이죠."

뭐더라? 로건이 남긴 의문의 수첩! 그건 외국어로 되어있었는데 막힘 없이 술술 읽기도 했다. 리베로는 조금씩 입을 벌리며 놀란 듯이 몸을 굳혔다. 생각해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수상쩍은데 어찌 몰랐을까?

"왜 그래요?"

"재이 아무래도······."

"아무래도?"

"유럽에서 넘어온 귀족 출신 같은데."

"네? 설마."

"아니면 저기, 동부의 숨겨진 고위급 인사 아들이거나."

"부모가 없다면서요?"

"숨기는 거지!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뭐 이해가 안 되는데?"

서부에서는 조선이라는 나라 존재 자체도 모르는 것들이 수두룩 빽빽이다. 리베로만 해도 그렇다. 아시아인이라 하면 중국인밖에 생각 못 했는데, 재이는 중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가 모여있다는 것도 알았다. 참고로, 시청에 있는 세계지도에는 안 적혀 있는 부분이었다.

"뭐. 굳이 따지자면 그게 제일 신빙성 있긴 하네요."

"이, 이-!"

리베로는 거의 확신한 듯, 뭐라 중얼거리더니 담배를 내팽겨치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밥 다 먹고 후식으로 곶감까지 먹으려던 재이가 놀라서 쳐다봤다.

"왜? 까였어?"

"뭐가?"

"렌 씨한테."

"그런 거 아니거든! 난 어디 가서 까여본 적이 없는- 아니지. 또 페이스에 말릴 뻔했네. 너, 솔직하게 말해봐."

"뭐."

"혹시, 대통령의 숨겨진 아들이냐?"

"······?"

뭐 이런 등신 같은 질문이 다 있지? 재이는 황당하게 눈을 깜빡였으나, 리베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아주 다부진 눈빛. 속으로 결정을 내린 것 같다.

"밥 처먹고 지랄하지마."

"아니, 그럼 대체 어떻게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었던 건데? 중국이랑 조선, 일본 세 나라가 붙어있는 건 어떻게 알고? 시발, 길가에 나가서 '세 나라를 아십니까?' 물으면 그게 먹는 줄 아는 놈들이 천지거든."

"다들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배우면 별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너 어디서 배웠냐고! 로건 수첩도 뭐라더라? 핀란드어? 그런 거였다며!"

거기까지 이르자, 하트먼도 조금 궁금한 눈치였다. 재이는 아는 게 너무 많았다. 가끔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저 재이가 말하지 않으니 묻지 않았을 뿐. 그 역시도 재이의 출신에 대해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트먼! 뭐라고 말 좀 해봐!"

"궁금하긴 합니다."

"봐봐! 다들 의아해 한다니까!"

"참나. 빨리도 궁금해한다. 우리가 같이 지낸 지 벌써 몇 달인데."

"있네. 비밀이 있어. 너 이새끼, 누구야."

술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신도 출생신고가 되어 있었다. 한데, 이렇게 똑똑하고 다 아는 김재이가 신분증을 새로 발급받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게다. 그것도 '김재이'라는 개 이상한 이름으로!

"김재이가 본명 아니지?"

"맞거든. 김해 김씨."

"그건 또 뭔데."

"됐고. 네 말이 맞아. 나 숨기고 있는 거 있어."

"와씨. 미친."

보라며, 리베로가 박수를 쳐대며 하트먼과 아리스를 돌아봤다. 그는 자화자찬하는 뜻으로 연신 가볍게 박수를 쳐댔다.

"근데 말 그대로 숨기는 거니까, 알 생각하지 마. 이제껏처럼 잘 지내고 있으라고."

"대통령 아들이지."

"좀! 너 비싼 밥 처먹고 헛소리 할거면 앞으로 따로 먹어."

"오케이. 대통령은 아니다. 그래. 그런 거였으면 총잡이로 이름 날리지도 않았겠지. 그럼 어디 장교 아들인가? 총 쏘는 거 보니까, 교육이 좀 있었던 것 같은데."

리베로가 혼자 중얼중얼대자, 재이가 싱긋 웃으며 고기 써는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헛소리 계속 할거면 각오하라는 듯이. 리베로는 이쯤하면 되었다는 듯, 두 손을 들어올리더니, 재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불쌍한 놈. 사연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어. 나는 다 이해한다."

"이해한다는 놈이 계속 그래."

"오케이! 비밀 지켜줄게! 음! 걱정 마!"

리베로는 자신 만만해하며 제 가슴을 쳐댔다. 하지만 그 동시에, 하트먼과 아리스 그리고 재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글렀네.'

'내일이면 소문 나겠다.'

'리베로 저놈은 개도 안 믿을 말을 해대네.'

"다들 왜 그렇게 봐?"

"······됐어. 밥 다 먹었으면 아리스랑 장이나 보고 와. 렌 씨도요."

"알겠습니다. 정리 하고 다녀오겠습니다."

"천천히 하세요. 일 나는 것도 아니고."

"넌 이제 뭐할 건데?"

"뭐하긴? 놀 거다."

재이는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몸을 기대고서 신문을 집어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신문 보는 것에 취미를 두지 않았는데, 서부에서는 달랐다. 의미없는 정치 싸움, 불안정한 경제 상황, 이해 안 되는 글로벌 사건사고 따위는 없었고, 오로지 '재미'와 '흥미'로만 이루어진 기사가 주를 이루었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또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어쨌거나, 재이에게는 그랬다. 누구와 누가 총질을 하다 죽었고, 어느 가게에 강도가 들어서 피해 금액이 수십 달러였다는 것과, 무법자들의 현상수배, 새로운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등등의 기사들. 재미있지 않나?

"아."

그때, 재이의 눈에 기사 한 문단이 들어왔다. 호수 사진과 함께 실린, 짤막한 기사였다.

[전설의 괴물, 실존하는가?]

막달린 마을은 막달린 호수를 낀 작은 마을이다. 방문객이라고는 하루에 열 댓명에 불과한 외곽지였는데, 몇 달 전부터 방문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바로, 호수에서 종종 목격된다는 전설의 괴물, 네시 때문이었다. 달이 뜬 밤에 주로 보인다는 이 괴물을 목격한 사람은 수십 명에 달한다. 사냥꾼들은 괴물을 잡아내기 위해 온갖 수를 써댔지만, 아쉽게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열 댓명의 사냥꾼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방문객의 방문을 환영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갈등을 빚고 있다. 방문객 유치를 위해 네시를 잡으면 안 된다는 쪽과, 사기 마을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네시를 잡아야 한다는 쪽이다. 네시의 존재가 확실히 밝혀지면 더욱 폭발적인 방문객이 막달린 마을을 찾을 것이라고, 그들은 예상하고 있다. 지금도 괴물 사냥꾼들은 네시를 찾기 위해 막달린 마을을 찾고 있다.

로건의 수첩에 쓰여있던 바로 그 마을이다. 이곳에는 메인 퀘스트 외, 재이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벤트들이 존재할 것이다. 재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신문 속 사진을 자세히 살폈다. 워낙 화질이 안 좋아 확실치는 않지만, 호수 위에 뭔가 가느다란 것이 둥둥 떠 있다.

'아닐 가능성은 높지.'

만약 네시가 어떤 동물의 일종이라면, 현대에서 그 정체가 밝혀졌을 터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는 사람들의 착각이 만들어낸 환상의 동물. 리베로는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며 재이의 뒤쪽에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왜? 재밌는 거라도 있어?"

"막달린 마을이라고 아나?"

"알지. 거기 술 맛있다고 하대."

"그래?"

"동부로 가기 위해서 거칠 마을이 몇 개 있는데, 막달린 마을이 그중 하나지. 근데 예전에는 사실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거든. 근데 어느 순간부터 확 커지더니 이제는 동부 필수 관문처럼 되더라."

흐음. 그래? 재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벽에 붙은 지도 쪽으로 돌아봤다. 동부로 가기 위한 관문이라. 그는 막달린 마을에 동그라미를 크게 쳤다. 하이크 석유 회사와 계약을 맺고 나면, 다음에는 이곳으로 떠날 것이다.

'아. 그리고 인디언들.'

몰리베이 쪽 인디언들이 '부활권'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던데. 재이는 막달린 마을과 몰리베이 인근을 길게 이었다. 길목이 정해졌다.

EP136. 부활권이 뭔데

EP136. 부활권이 뭔데

'부활권이라.'

재이는 오닉스 고삐를 가볍게 쥔 채로 생각했다. 아무리 예상해보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부활권이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말이다. 이곳은 게임 속 세계. 설마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건 아닐 거고. 예수처럼 며칠 있다 부활하는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죽은 누군가를 살리는 힘? 스킬로 보기에는 힘들고, 아마 일회성 아이템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게다. 재이가 미간을 찌푸린 채 앞만 보고 가자, 나란히 따라오던 마차 창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저기. 저도 말 타고 가도 되는데요."

렌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가죽 가방을 아이처럼 안고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전처럼 배낭에 옷가지만 대충 넣고 떠나는 여정이 아니었다. 비싼 돈 주고 모셔왔으니, 매일매일 한식을 먹기 위해서는 렌도 함께 해야 했고, 그렇게 되려면 여러 가지 식자재도 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그들은 작은 마차와 함께 여정을 떠나기로 했다.

"말 타도 되고, 마차 타도 됩니다. 근데 항아리 무게가 장난 아니던데, 말 허리 아플까봐 그런 거니까 앉아있어요."

"그래도, 이건 경우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경우?"

"주인이 말을 타고 가는데, 고용된 사람이 마차에서 편히 있다니요."

조선과 청 그리고 서부시대 모두 겪은 렌이라 할지라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하지만 재이는 별 상관 없다며 덧붙였다.

"괜찮습니다. 근데, 말 많이 타봤어요? 혹시 실수해서 장 깨지기라도 하면 그건 괜찮지 않아서요."

"아."

그렇네. 혹여 말을 잘 못 몰았다가 장이 깨지기라도 하면 그녀가 따라 온 이유가 없어진다. 렌은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혹여 일이 생기면 바로 말씀해주십시오. 내리겠습니다."

"예, 걱정마시고, 들어가세요."

렌은 커튼을 다시 쳤고, 마차를 몰던 리베로가 마부석 창문 쪽을 힐끔거렸다. 렌이 리베로의 시선을 눈치채고 눈을 부라렸다. 뭘 봐!?

"하. 인생 힘들다 진짜."

"힘들긴 뭐가. 앉아서 가고 있으면서."

"나무 의자가 딱딱해서 엉덩이 쪼개질 것 같거든? 돈도 많으면서 하필이면 이런 걸 샀대?"

"내가 안 몰 거니까."

"잘났다. 젠장."

맞는 말이었다. 만약 재이가 마차를 몰게 되면 승차감이 제일 좋은 것을 샀을 것이다. 리베로는 꼬랑지를 살랑거리는 동키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쫌생이. 이런 놈에게 돈이 들어가니까 경제가 안 돌지."

"네 입에서 경제라는 말이 나오니까 웃겨."

"1%! 그게 얼마 짜리인지 나 다 들었거든?"

"어디서?"

"피버 박사가 목소리 높혀서 떠들더라. 영감탱도 어이가 없었던 거지. 생각보다 묻힌 게 많아서, 뭐? 잘하면 1년에 수십만 달러? 뒤져라. 김재이."

석유매장량 검사는 성공적인 것을 넘어 획기적이었다. 회사에서 파악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거라 확인된 것이다. 솔직히 재이는 미국에서 어느 석유 매장지가 유명한지 잘 몰라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분위기를 보니 새크라멘토가 손에 꼽히는 유전지역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언제부터 돈 들어온대?"

"글쎄다. 이제 막 땅 파기 시작했으니까, 적어도 반년에서 일년 정도는 걸릴 것 같다 하던데. 내 손에 돈 들어오려면 아직 멀었어."

"일 년 동안 죽지 않게 조심해. 그거 다 두고 가려면 얼마나 마음이 쓰려."

"네네. 걱정 고맙습니다."

하이크 석유에서는 더 이상의 흥정은 의미가 없다는 걸 인정하고, 재이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매출의 1%를 재이에게 지급하는 조건이었다. 계약 기간은 우선 20년. 그때까지 석유가 남아있으면 퍼센트를 올려 재계약하면 되고, 아니라면 그냥 떠나면 된다. 그때쯤이면 재이도 동부 쪽으로 이동해있을 것 같으니.

"근데 가는 길에 몰리베이는 들려?"

"음."

그들이 가는 길목은 일직선상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새크라멘토에서 몰리베이 그리고 만다린 마을. 몰리베이 인근까지 가면 인디언들 구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니 자연스럽게 '부활권'에 대해서 알게 되겠지만, 몰리베이는 글쎄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굳이 들릴 필요는 없을 게다.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보안관 파악이 쉽지 않고, 그쪽 동네 분위기도 많이 변했을 거라서요."

"그것도 그렇긴 합니다. 물자도 아직은 충분하니. 고기 같은 건 가는 길에 사냥하면 되고."

"강도 멀리 있지 않습니다. 몰리베이 인근 황무지만 지난다면요."

찰리 보안관이 기차에서 쏜 기관총에 너덜너덜 찢긴 이후로, 몰리베이에는 새로운 보안관이 나타났다. 리베로 누이들에게 듣기로는 인디언들에게 그리 적대적이지 않다고 하던데. 전 보안관을 죽인 재이에게는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무섭거나 걱정되는 건 아니었고, 그냥 귀찮은 일은 넘어가는 쪽이 낫지 않은가?

'이번에는 렌도 있고.'

렌은 총을 사용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들었다. 어떻게 서부에서 그럴 수 있나 싶기도 했지만, 하루 걸러 하루 먹고 살기 급급했던 터라 총을 마련하는 건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그런 걸 들고 다니면 괜히 사건 사고에 휘말리는 법이다. 서부의 소시민. 그게 바로 렌이었다.

"그럼 북쪽으로 살짝 틀어서 갈까요?"

"그렇게 하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디언 구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트먼이 지도를 살피며 걱정스레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재이가 별말 하지 않으니 그도 덧붙이지 않았다.

'인디언들에게 볼일이 있는 걸까?'

재이가 그 위험 구역을 모를 리 없는데. 자신도 자신이지만, 재이와 리베로도 큰 위기를 겪었지 않나. 하지만 재이는 정해진 길을 가는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아. 보인다.'

금빛 아우라가.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북쪽으로 이어진 흔적이다. 아무래도 '부활권'에 대한 안내인 듯싶다. 그들은 다시금 침묵하며 하릴없이 전진했다. 그리고 한참 후, 하늘에 노을이 걸릴 때쯤이었다.

바스락.

잘 가던 오닉스가 걸음을 멈췄다. 이어서 동키와 다른 말들도. 하트먼은 올게 왔다는 듯이 총을 빼들었고, 리베로는 마부석 창문 쪽으로 렌에게 신호했다. 위험할 수 있으니 몸을 잘 낮추라는 뜻이었다.

까딱.

"재이 씨."

"네. 11시 방향 둘, 3시 방향 셋."

재이는 총구를 까딱거리는 것으로 쉽게 상대를 파악했다. 이놈들은 어찌 발전이 없을까. 그때처럼, 수풀 속에서 몸을 숨긴 채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덫에 걸리기만을 기다리는 짐승처럼.

"가면 안 되겠는데요. 총이 문제가 아니라, 땅에 뭔 짓을 해놨을지 몰라서."

어떻게 할까. 재이는 가까이 숨어있는 다섯 명을 모조리 죽여버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그가 여기까지 굳이 돌아서 온 것은 바로 '부활권' 때문이었으니까. 인디언들의 호의가 없다면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이봐! 숨을 거면 잘 좀 숨지 그래?"

재이의 외침에 풀숲이 작게 들썩였다.

"먹고 살만해? 몸집이 커져서 그런 건가?"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여."

"오오. 반갑군."

"너, 김재이지?"

어둠 속에서 인디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까무잡잡한 피부, 그리고 얼굴을 붉게 칠한 화장, 셔츠와 바지는 낡아서 너절했고, 맨발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장총을 들고 있었다.

'좋은 총을 구했네.'

찰리 보안관과 싸우다가 획득한 전리품일까? 아니면 어디선가 독자적으로 구한 무기? 그렇다면, 인디언들은 이미 몰리베이와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예상할 수 있었다. 두어 놈 더 확인해야 확실해질 것 같았다.

"나와. 거기 너. 그리고 그 옆에 놈까지."

풀숲에 가려져 안 보일 것이라 생각했던 인디언들이 당황하여 서로를 쳐다봤다. 저놈은 대체 어떻게 알았지? 마차 창문에서 귀를 쫑긋거리고 있던 렌도 몰라서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스윽.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래. 다 나왔군."

다섯 명 모두 총을 들고 있다. 이건, 단순한 전리품이 아니라 그들이 독자적으로 구했을 가능성이 컸다. 모두 각기 다른 종류의 총을 들고 있었으니까.

"김재이. 리베로. 하트먼."

"어떻게 알아봤대? 우리가 그렇게 유명해?"

"유명하긴, 지랄. 네놈들 때문에 우리 전 족장님이 죽었어. 그러니까 당연히 뼛속에 새길 수밖에. 언젠가 네놈들이 여기로 돌아올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하루하루,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곳을 지켰지."

"지켰다라. 이쪽으로 들어서면 네놈들 마을이 나오나봐?"

"이-!"

아주 정보를 술술 불어다 주는군. 인디언들은 당황해서 발끈했지만, 섣불리 총을 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재이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 말인즉, 재이의 능력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솔직히, 나 때문에 네놈들 족장이 죽은 건 아니지. 나는 그냥 도망쳤던 거고, 그 과정에서 족장이 몰리베이 사람들과 부딪히게 된 것 아닌가?"

"네가 일부러 그렇게 판을 만들었으니까!"

"그럼, 네놈들이 나를 죽이려 했던 건 옳고? 나는 그저 새크라멘토로 가던 길이었는데, 다른 놈들 쫓다가 나를 잡았던 거잖아."

그 다른 놈이 하트먼이지만. 하트먼은 괜히 멋쩍어서 코를 찡긋거렸다. 총구를 겨누고 있는 터라, 손가락으로 긁을 수는 없었다.

"보아하니 지금 정말 살만해보이는데, 찰리 보안관 죽인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그놈이 없어지고 나니 새로운 보안관이랑 우호적인 관계를 틀 수 있었던 거잖아."

인디언들은 찰리의 은행 강도 부정 수사를 폭로했고, 그로인해 서로 죽고 못 사는 관계였다. 하지만 보안관이 바뀌었고, 그는 몰리베이를 수습하느라 인디언들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러나 저러나, 인디언들에게는 어쨌거나 좋은 일이었던 게다. 재이는 그들 사이로 길게 이어진 금빛 아우라를 보며 물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대가를 바라고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여기까지 왜 들어온 거지? 몰리베이 쪽으로 가려면 남쪽으로 쭉 갔으면 됐을 건데."

"궁금한 게 있어서."

안 그래도 하트먼도 궁금했다. 재이가 어째서 인디언들 구역으로 제발로 들어섰는지.

"너희 부족에 '부활'과 관련된 민속신앙이나, 문화 같은 것이 있나?"

"뭐?"

"부활과 관련된 믿음, 뭐 그런 것도 괜찮다. 궁금해서."

"개풀 뜯어 먹는 소리 하는군."

"없어? 그럴 리가 없는데."

재이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인디언 마을에 있을 것이다. 황금빛 아우라가 가리키는 것도 그렇고, 로건의 다이어리도 그리 일렀으니까. 인디언들은 서로 시선을 나누더니, 작게 주춤거렸다. 그 찰나의 변화를, 재이와 하트먼은 인지했다.

"있나봅니다, 재이 씨."

"그걸 좀 듣고 싶어. 물건과 관련된 거라면 살 수도 있고. 뭐가 되었든 나는 그쪽들에게 손님으로 대접받고 싶은데. 어때? 인디언 새 족장에게 말 좀 전해주겠어?"

서부에서 제일 가는 돈쟁이가 왔다고.

EP137. 족장의 손가락

EP137. 족장의 손가락

인디언 아사카부 족은 저녁을 맞이하여 식사를 준비중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부족원들이 한데 모여 음식을 나누었고, 굶는 자가 없게끔 신경 썼다. 아사카부 족의 새로운 족장, 마람탐쿠는 기다란 곰방대를 뻐끔뻐끔 피워대며 사람들이 음식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타닥타닥!

"왔습니다!"

입구 쪽에서 들린 갑작스러운 외침이 아니었다면, 참으로 평화로웠으리라. 마람탐쿠는 곧바로 일어나 물었다.

"무슨 일인가? 설마 몰리베이 놈들이?"

"허억, 헉! 아니오! 그놈들은 아니고요, 김재이입니다!"

"누구?"

"김재이요! 불렛킬러!"

언제고 고향으로 돌아는 오겠지 싶었는데, 이렇게 시일이 빠를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몰리베이의 이전 보안관을 김재이가 기관총으로 터트리지 않았던가? 법적으로는 일이 문제 없이 풀린 것 같다만, 몰리베이를 방문할 만큼은 아닐 터인데? 게다가 인디언들의 감시망에 포착되었다는 뜻은, 인근까지 올라왔다는 뜻이다.

"······우리를 찾아온 겐가?"

"그런 것 같습니다. 목적이 있어 보였습니다."

정찰대의 대답에 저녁 짓던 부족민들이 모두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김재이가 자신들을 찾아왔는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을 낳는 법. 그들은 족장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기를 들까요?"

"그놈이 대체 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복수를 하려는 것 같은데."

"복수는 무슨 복수? 할거면 우리가 해야지! 이전 족장님이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그 전에, 우리도 걔를 죽이려고 했잖아."

"워워. 진정들 하시게. 다 지나간 일이라고. 찰리 보안관도 죽은 마당에 우리가 왜 김재이랑 겨누는가? 족장님. 판단 잘 하셔야 합니다. 괜히 적대적으로 나갔다가 긁어 부스럼입니다."

"예. 그리고 따지자면, 락토버 은행강도 사건 전말을 알려준 게 김재이 아닙니까. 그자 덕분에-"

"덕분에에?! 말 조심해!"

"아니,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자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무기도 얻고, 음식이나 귀한 천도 얻었잖아. 결과적으로 보면 다 좋게 된 거라고! 찰리 보안관도 누가 죽여줬는데?"

"그, 그건 맞지만."

부족민들이 이리저리 떠들어대는 사이, 족장은 곰방대 재를 털어대며 고민했다. 일리가 있었다. 이전 족장이 김재이 때문에 죽기는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신세를 진 게 많았다. 여러 면으로.

"김재이는?"

"큰돌 뒤쪽에서 대치 중입니다."

"내가 직접 가보지. 다들 총을 들어라."

"예! 오늘 저녁은 다 먹었군."

"자자! 서두르자고! 아이와 여자는 안에 숨어있어!"

족장이 말을 타고 내달리자, 부족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해가 완전히 저버렸다. 흐릿한 달빛을 제외하고는 사위가 어둡다. 그들은 저 멀리 보이는 등불을 발견하고 속도를 줄었다.

"어! 족장이시군!"

김재이다. 그의 일행과 정찰대가 계속해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재이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족장은 부족민들의 호위 속에서 천천히 다가갔다.

"김재이?"

"그렇다. 인물이 훤하시네. 젊으시고."

"아사카부 족의 족장, 마람탐쿠다. 신세가 많았는데, 이제야 인사를 하는군."

"그런 고마움은 넣어두시게. 의도한 것도 아니니까."

"······무슨 고마움인줄 알고?"

건방지게? 족장이 뒷말을 삼켰지만, 재이는 기민하게 알아들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읊어줘? 그럼 진짜 나한테 성의 표시를 해야할지도 모르는데?"

"황당하군."

"그저 구하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니까 너무 그러지 말라고. 혹시 마을에, 그러니까, 부족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앙이나 물건 중에서 '부활'과 관련된 것이 없나? 있을 것 같은데."

'부활' 혹은 '영생'은 어지간하면 기본적인 인간의 욕망이었다. 그 어디를 가나 이와 관련된 신앙, 물건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예수가 부활한 것과 일맥상통하게. 족장은 눈썹을 까딱거리더니, 당최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건 어째서?"

"관심이 있다. 말로 전해지는 것이라면 알려주고, 물건이 있다면 팔아줬으면 한다. 물론, 가격은 섭섭지 않게 쳐줄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무리 인디언들이라 하더라도, 입고 먹고 쏠 건 사야하지 않겠어?"

흔히들 생각하는 인디언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파리를 엮어서 옷을 만들거나, 짐승의 뼈로 장신구를 만든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낡은 체크무늬 셔츠를 주워 입고, 신발을 신었으며, 손에는 최신식 화총을 들고 있지 않나. 모르긴 하겠지만, 저들의 식생활에도 신 문명이 깃들었을 게다.

"이제 몰리베이 보안관이 바뀌었으니, 그쪽에서 거래를 진행할 수도 있잖아. 돈만 있으면 편하게 지낼 수 있어."

"······의도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응하지 않겠다."

뭐가 있긴 있나 보군. 재이는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꾸며냈다.

"흥미가 있어서 그렇다. 가질 거 다 가지고 나니까 이제 이런 거에 취미를 붙여보려고. 그래서, 있어, 없어?"

족장은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부족민을 힐끔 쳐다봤다. 그 시선에, 그들은 눈치껏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있긴 있지."

"좋아. 뭔데?"

"아사카부 족의 전설에 따르면, 족장의 손가락뼈로 만든 목걸이가 죽음에서 본인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그걸 차고 있으면 죽음의 강을 건널 때, 족장의 손이 움직여 가지 못하게 잡아준다고 하거든."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시오, 뭐 그런 버전인가? 재이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그래? 이전 족장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잖아. 잘됐네. 그걸로 만들어 놓은 게 있나?"

"없다."

"뭐? 왜?"

"그건 족장의 유언이 있어야 하거든. 죽어서도 누군가를 지켜줄 것이라는 맹세를 들어야, 우리가 목걸이를 만들 수 있다. 고인의 허락 없이 시체를 훼손하면 저주가 깃들어."

"굉장히 토속적이네."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와 미지의 신비는 분명히 존재해."

하긴. 한국에서도 시체를 훼손하는 것은 상당히 뭐랄까. 비윤리적인 행위였다. 하여, 부검 같은 것도 몇 십년 전에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다른 건 없어?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글쎄다. 가끔 아사카부 자연신에게 사랑받는 아이는 어렸을 때 풀병을 앓아도 산다는 말이 있긴 하지."

"풀병?"

"얼굴이 불긋불긋해지며 열이 오르는 병이다. 풀밭에 나가 놀 때쯤 온다하여 풀병이라 부른다."

홍역이구나. 재이는 팔짱을 낀 채로 연신 고민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자연신에게 사랑 받고 말고 하는 건 자신과 관련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족장의 손가락 뼈 어쩌고 목걸이가 지금으로는 정답인 것 같은데······.

"흠."

재이가 족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뭘 그리 보는거지?"

"아니. 방법이 없나 해서. 족장의 손가락 뼈, 그게 맞는 것 같거든."

재이는 별 생각 없이 이른 말이었다. 하지만 족장이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다. 족장의 뼈? 지금 그의 앞에 있지 않은가! 그것도 살아 있는 채로! 혹시 자신의 손을 잘라버리겠다는 걸 돌려서 경고하는 건가? 이래서 바깥 외지 놈들 대화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조, 족장님."

"괜찮다."

가까웠다. 재이와 족장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웠고, 총구는 대화의 틈에서 긴장을 잃고 내려가 있었다. 여차하면 달려들어 재이의 살점을 뜯어놓으면 된다.

"진짜 다른 건 없어? 족장 손가락 뼈 같이 살벌한 거 말고. 내가 그게 진짜 필요한데, 그렇다고 해서 네 손을 자를 수는-"

아. 그렇네. 이놈도 족장은 족장이로군.

재이는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 멈칫거렸다. 당연하게도, 산 사람을 어찌할 생각은 없다. 재이는 족장이 두어 발걸음 뒤로 물러섰다는 걸 알아채고 웃으며 다가갔다.

"걱정마. 그쪽을 뭐 어떻게 한다는 건 아니니까."

"움직이지 말고 거리 유지해."

"오케이. 괜히 긴장감 줄 필요 없지."

유언이고 나발이고, 일단 족장 시체부터 사들일까? 재이가 족장 뼈에 관심있다는 걸 알아차린 부족민들이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족장님. 저놈에게 얼마, 얼마를 줄 수 있는지 물어보면 안 됩니까?"

"어째서?"

"왜, 듣기로는 샬람탄 할머니가 전전대 족장의 부적을 갖고 있다 들었습니다. 열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이었잖아요."

아사카부에는 수많은 족장이 있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개중 몇몇은 사랑하는 가족에게 뼈를 남겼고,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한 자들이 존재했다.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 게다. 아마도.

"이봐, 김재이."

"응?"

"얼마를 줄 수 있지? 혹시 그 목걸이를 거래하겠다 하면."

"아. 있나봐?"

"대답이나 해."

"음 글쎄."

부활권이 자신의 생명을 1회 지켜준다면 그 값어치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인디언들은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 받았다. 놈은 부자다. 웰스파고 은행의 VIP로 미 전역에서 손꼽히는 놈! 그러니까, 적어도, 진짜 적어도 100달러 이상은-

"1000달러까지 줄 수 있다."

"뭐?"

인디언들은 잘 못 들었나 싶어서 눈을 깜빡였다. 1000달러는 지금까지 생각도 못 해본 금액이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이 아득한, 저 먼 곳의 숫자. 재이는 문제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000달러. 대신 흥정 없음. 목걸이가 여럿 있더라도, 내 마음에 드는 것이어야 해서. 좀 까다로울걸?"

이런 미친. 1000달러면 까다로워 봤자지! 인디언들은 흥분해서 족장에게 속닥거렸다. 그 정도 돈이 있다면 앞으로 먹고 사는 것은 문제 없다. 아무리 외부인 놈들이 나무를 베고, 짐승들을 잡아 들여도 오랜 세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게다.

"족장님. 이거, 이거 무조건 잡으셔야 합니다."

"제가 가서 할머니한테 물어보고 올까요? 목걸이 어디 있는지요."

"1000달러라지 않습니까! 1000달러!"

"너! 그, 그만한 돈 정말 줄 수 있어? 지금 당장?"

"지금은 당연히 없지. 하지만 물건 확인하면 가까운 은행 가서 바로 현금박치기 해줄게."

"혀, 현금 박치기?"

"그 자리에서 뽑아 준다는 뜻이다. 몰리베이에 은행 있잖아. 웰스파고 은행."

진짜다. 말하는 투를 보아하니, 저것은 진짜다. 재이 일행은 인디언들이 호들갑 떨어대는 걸 보며 외쳤다.

"거래 생각 있으면 집으로 안내 좀 해라! 길에서 이게 몇 시간 째인지 모르겠네. 배고파 뒤지겠어! 마지막으로 밥 먹은 게 아침이었다고."

리베로의 투정에 동키가 동의한다는 듯 꼬리를 흔들어댔다. 족장은 그들을 보더니, 이내 고갯짓으로 따라오라 신호했다.

"······마을로 초대하지."

"고맙네, 그거! 기다렸다!"

"너희들은 먼저 가서 샬람탄 할머니에게 목걸이를 받아놔."

"네! 족장님!"

인디언들은 신이 나서 후다닥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체감상 삼십 분 정도 걸리는 길이 십 분밖에 안 걸리는 것 같다. 족장을 기다리던 부족민들은 긴장한 채 무기를 들고 경계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됐어? 족장님은?"

"김재이가, 김재이가 곧 올거야."

"어딜?"

"여기! 지금 족장님이랑 같이 오는 중이니까, 그 무기 내려 놓고 기다리고 있어. 미친 놈! 돈 많은 미친 놈이었다니까!"

"뭐라는 거야.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샬람탄! 샬람탄!"

그들은 대답하지 않고 샬람탄 할머니의 천막으로 찾아갔다. 바짝 마른 몸과 주름진 피부. 느리게 깜빡거리는 눈꺼풀이 아니었더라면, 앉은 채 죽었나 싶을 정도로 노쇠한 자였다.

"할매. 정신 좀 차리고 봐봐."

"······."

"족장이 줬던 목걸이 있지. 손가락 목걸이. 그거 어디있어?"

"응? 말 좀 해봐!"

"······데."

"뭐라고?"

그들은 노인에게 귀를 기울였다. 노인은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대답했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 상놈들아."

EP138. 목걸이

EP138. 목걸이

"함바라, 디아! 아아아-! 아라! 라라!"

인디언들이 바위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목청껏 노래 불렀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모닥불이 크게 불타올랐다. 그 가운데 재이와 리베로, 하트먼 그리고 렌까지 쪼르륵 앉아서는 인디언들의 춤사위를 정면에서 구경했다. 그들은 어색하게 박수를 치며 난데없는 인디언들의 환대에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었다.

"재이. 갑자기 이게 뭔 일이다냐."

"그러게. 천 달러짜리 손님이라 이건가."

"미친. 나 인디언들 노래 부르는 거 처음 봄."

"재이 씨. 괜찮은 거 맞겠지요?"

"왜? 설마 잡아먹기 전에 기도문 올리는 걸까봐?"

"네? 여기 인디언들 사람도 먹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쉿."

잇새로 소곤소곤, 그들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인디언들을 보고서 멈칫거렸다. 커다란 나무 쟁반에 온갖 음식들을 담아낸 것이다. 난생 처음 보는 풀떼기도 많고, 고기는 닭과 돼지 등 여러 가지를 섞어 놓은 것 같다. 게다가 그 옆에는 인디언들이 마시는 전통주까지. 희고 누러면서도 걸죽한 액체가 담겨있었다.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라 대접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차린 건 많지 않지만, 많이 드십시오."

"아. 고맙습니다."

"부족하면 더 말하시고요."

어이구. 존댓말까지.

포크나 수저 따위가 없는지라, 재이는 손끝으로 살살 음식을 헤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베로는 배가 고파서 바로 입에 욱여 넣었고, 하트먼은 경계하여 냄새만 맡아댔다. 반면, 렌은 처음 보는 요리법을 궁금해하는 듯, 이리저리 살펴보기 바쁘다.

"그런데 족장님은?"

"잠시 일이 있어서요. 식사하고 계시면 나오실 겁니다. 술도 드시고, 여기, 담배도 있습니다. 부족에서 전통적으로 말아 피는 건데, 목넘김이 아주 예술이거든요."

"나! 나 한 대만."

"여기 있습니다."

리베로는 아예 즐기기로 마음 먹었나 보다. 인디언들이 주는 걸 넙죽넙죽 잘 받아먹어댔다. 재이는 혹시 몰라 허리춤에 단 총에 손을 올렸지만, 총구의 움직임은 없었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환대에 숨겨진 의도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진짜 천 달러의 위력이다. 죽이네 살리네 이빨 털어가며 싸워대도, 천 달러를 주겠다는 말에 이렇게 손님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음. 맛있다."

"아가씨, 더 드릴까요?"

"소스가 좀 특이한데. 요리법을 알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마음에 들어하시니 기쁘군요."

재이의 일행들은 각자대로 인디언의 환대를 즐겼다. 술이 오른 리베로가 모닥불 쪽으로 달려가 원주민들과 춤을 추기 시작했고, 하트먼도 조심스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근데 좀 늦네."

"그러게 말입니다."

목걸이 그거 가지러 가는데 왜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린단 말인가? 재이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리자, 하트먼도 맞장구를 쳐댔다. 모든 인디언의 시선이 아닌 척 하면서도 재이 일행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면 손님 대접을 위한 '관심'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은근히 느껴지는 '감시'의 기운. 재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번 장전에 여섯 발.'

두 손에 들면 열두 발까지는 바로 당길 수 있으니까, 우선 총을 잡을 수 있는 놈들 위주로 먼저 처리하는 게 낫겠지? 북소리와 노래 소리가 절정으로 뜨겁게 치달았으나, 재이의 머릿속은 차가웠다.

"음식은 입에 좀 맞나?"

"아. 그럼요. 처음 먹는 건데, 아주 맛있습니다."

족장이었다.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재이 가까이 와서 앉았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으나, 당장 뭐라고 짚을 수는 없었다. 족장은 목을 가다듬더니, 술을 들이키고서 잠시 뜸을 들였다.

"무슨 문제라도?"

"크흠. 그게. 별건 아닐세. 다른 게 아니라, 아까 말했듯이 남은 목걸이가 전전 족장님의 아내 분에게 있거든. 근데 그분께는 이게 수십 년을 함께한 남편의 유품이란 말이지."

"아하."

혀가 길어지는구나. 이런 경우는 딱 하나였다.

돈 더 달라는 뜻.

"그래서 설득을 하고는 있는데, 쉽지가 않군."

"뭐.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면, 내올 수 있으니 먹고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지. 부탁하네."

부탁? 재이는 너무 공손한 인디언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다. 아니, 자신도 마을 깊숙이까지 들어온 마당에 반말 찍찍할 수는 없어서 존대하고 있긴 한데, 족장의 태도는 뭐랄까. 음.

"알겠습니다."

이전 족장의 부인이니, 대한민국으로 치면 영부인에 대한 예우 뭐 그런걸까? 재이는 상관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선은 부활권을 얻는 게 중요했으니까. 며칠이 걸리더라도 감수할 수 있다.

"제가 원하는 걸 얻을 수만 있다면요. 혹시 부인께서 마음이 정 헛헛하다고 하신다고 하면, 더 아름답고 반짝이는 목걸이를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전해주세요."

"······알겠소. 그리 이르지."

족장은 그리 대답하고 나서는 연거푸 재이에게 술을 권했다. 몇 번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재이는 술을 홀짝홀짝 들이마셨다. 그렇게 몇 시간. 먹고, 마시고, 춤추며, 웃고 떠들자 달이 반쯤 기울었다.

"어우, 힘들어."

네 사람은 지쳐서 널브러졌고, 머리를 맞대고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에는 쏟아질 것 같은 은하수가 가득했다.

"재이."

"왜."

"나 오줌 마려운데."

"가서 싸고 와."

"무서워잉."

술에 취한 리베로가 장난스럽게 칭얼대자, 세 사람이 동시에 질색하며 그를 돌아봤다. 시선이 꽤 따가웠는지, 리베로 역시 정색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알았다. 알았어. 거참 냉정들 하시기는."

누나들은 아주 꿈뻑 죽었는데! 리베로는 툴툴거리면서 천막 뒤쪽으로 돌아갔고, 수풀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삭! 삭!

"조금 더 파봐."

"뭐가 걸리는데. 여기 맞아?"

"맞다니까. 얼마나 됐다고 그걸 잊겠어?"

"하참, 진짜. 밤중에 이게 뭐하는 짓인지 원."

인디언들이다. 대여섯명 정도가 한데 모여 삽질을 해대고 있었다. 리베로는 오줌을 싸면서 눈을 천천히 끔뻑였다. 알딸딸하니 눈앞이 휙휙 돌아가는 기분이다.

'쟤들 저기서 뭐한담.'

그는 바지춤을 추스르고, 자세를 숙여 천천히 다가갔다. 어지간하면 그냥 돌아갈 건데, 솔직히 너무 궁금하지 않은가. 뭐하기에 달밤에 삽질 중인지.

퍼억! 퍽!

"어! 나왔다!"

'나와? 뭐가?'

리베로는 코를 훌쩍거리며 나무 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꽤 깊게 파인 구덩이. 재이 일행이 놀고 먹는 동안 계속 파댔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깊이가 나올 수 없다.

"들어!"

"아니지. 그럴 거 없이, 팔만 잘라."

"아아. 맞네. 그렇게 하면 되겠네. 너 똑똑하다."

"훗. 이런 게 바로 지혜라는 거란다."

"오른쪽? 왼쪽?"

"맹세는 왼쪽이지."

스릉! 그들은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더니, 이내 칼을 꺼냈다. 그리고서-

푸욱!

"······!"

뭔가를 작업하더니, 구덩이에서 사람 왼쪽 팔을 꺼내는 것 아닌가! 리베로는 술이 단박에 깨버렸다. 이런 시벌거. 인육을 처먹는다더니, 그게 진짜였구나! 환대도 사실은 자신들을 유인하려고?

바스락.

리베로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치자, 인디언들이 동시에 고개를 휙 돌렸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안광이 그렇게 공포스러운지는 처음 알았다. 그들은 천천히 검을 다잡고서, 리베로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무슨 소리 났지?"

"어. 뭐 있네."

"······이봐? 거기 누구 있어?"

혹시 김재이 일행이라면, 일이 복잡해질 건데. 인디언들은 그리 생각하며 혀를 차댔다. 리베로는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움직이면 풀숲의 흔적 때문에 바로 위치를 들킬 것 같았다.

푸헤엥! 헹!

그때였다. 리베로 뒤로 동키가 대뜸 울음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풀을 뜯어먹으라고 풀어둔 것인데, 꽤 뒤쪽까지 올라온 것이다. 인디언들은 긴장을 풀고서 칼을 내렸다.

"뭐야. 뺀질이 놈이 갖고 온 당나귀네."

"아오, 놀래라."

"됐어. 계속해. 늦어지면 김재이가 의심할라."

"족장님이 가격 좀 올려본다며? 되겠어?"

"뭐. 목걸이도 준다고 하던데. 확실히 돈 좀 있나봐."

리베로는 당장이라도 동키의 뒤집어진 입술에 뽀뽀를 날리고 싶었으나, 꾹 참고 천천히 왔던 길을 돌아 나갔다. 구덩이 아래로 시선을 빼앗긴 인디언들은 풀숲이 움직이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타닥타닥!

"재이, 재이!"

"늦었네. 큰 것도 쌌나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리베로는 인디언들의 눈치를 살피며 재이에게 귓속말했다. 다행히, 파티는 거의 끝물인지라 인디언들 대부분이 술이나 잠에 취해 널브러져 있었다.

"이놈들, 우리 잡아먹으려는 것 같아."

"뭐?"

"내가 봤어. 시체 잘라 먹으려던데. 미친 놈들이, 진짜. 하아. 이러지 말고 빨리 대가리 터트리고 도망가자. 응? 목걸이고 뭐고 큰일 난다니까."

"무슨 일입니까?"

"하트먼. 너도 총 들어. 렌, 너는 내 옆에 딱 붙어있어."

리베로가 호들갑을 떨어대자, 하트먼과 렌도 궁금해하며 다가왔다. 식인? 재이는 일단 진정 좀 하라며 리베로를 안심시켰다.

"자세히 좀 말해봐. 정확히 뭘 봤는데?"

"구덩이에서 시체 왼팔을 자르고 있었다고! 묻어뒀다가 배고플 때 꺼내먹는 거라니까?"

"뒤에서?"

"어! 뒤에서!"

리베로가 펄쩍 뛰며 이르자, 깨어있던 몇몇 인디언들이 힐끔거렸다. 재이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지금 상황, 그러니까, 외지인인 내가 있는 상황에서 시체를 꺼냈다면 식인보다는-'

 가짜 목걸이에 무게를 두는 게 맞지 않을까? 왜 하필이면 이럴 때 그런 짓을 하겠냐고! 그때였다. 족장이 부하들과 함께 다가왔다.

"재이. 잠시 괜찮겠나?"

"무슨 일이시기에?"

"목걸이를 보여주고 싶어서."

"아."

"할머니께서 허락한 것은 아니지만, 그대들이 이걸 원하여 여기까지 왔기에 내가 작은 친절을 베풀고 싶다 청하였지."

"······한번 봅시다."

재이의 대답에 그들이 작은 쟁반을 내밀었다. 기다란 뼈 두어 조각이 꿰인 목걸이가 놓여있었다. 그들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검지고, 중지다. 두 손가락은 우리 부족에게 아주 의미가 깊은데, 맹세를 뜻하는 손가락이기 때문이지. 오래 되었지만, 할머니께서 워낙 애지중지 하던 것인지라 관리가 훌륭하게 되어 있다."

"아하."

재이는 눈썹을 까딱거렸다. 놀랍게도, 그 어떤 금빛 아우라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그저, 뼛조각을 꿰어놓은 목걸이에 불과했다. 그것도,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를.

"그러니까, 이게 전전 부족장님의 손가락이란 말이죠?"

"그렇다네."

"더 가까이서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족장은 잠시 멈칫거렸지만 흔쾌히 허락했다. 이자가 시체의 뼈를 구분할 수 있을리 없었으니까. 1년이 지난 시체든, 10년이 지난 시체든, 뼛조각을 육안으로 살펴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할머니께서 궁금해하시더군. 이 귀한 목걸이를 떠나보내면, 제 목이 허전하시어 버티지 못할 것인데. 김재이 그대가 다른 선물을 해준다고 하니,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어."

그러니까, 눈치껏 비싸고 알 굵은 목걸이를 내놓으라는 뜻이다. 재이는 속으로 혀를 쯧, 차며 쟁반을 뒤로 물렸다.

"음.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되는데요."

"그럼?"

"나 이 디자인이 별로다. 다른 건 없어요?"

재이는 팔짱을 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어디 한번, 계속 갖고 와봐라. 진짜가 나타날 때까지.

EP138. 목걸이

EP138. 목걸이

"함바라, 디아! 아아아-! 아라! 라라!"

인디언들이 바위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목청껏 노래 불렀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모닥불이 크게 불타올랐다. 그 가운데 재이와 리베로, 하트먼 그리고 렌까지 쪼르륵 앉아서는 인디언들의 춤사위를 정면에서 구경했다. 그들은 어색하게 박수를 치며 난데없는 인디언들의 환대에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이었다.

"재이. 갑자기 이게 뭔 일이다냐."

"그러게. 천 달러짜리 손님이라 이건가."

"미친. 나 인디언들 노래 부르는 거 처음 봄."

"재이 씨. 괜찮은 거 맞겠지요?"

"왜? 설마 잡아먹기 전에 기도문 올리는 걸까봐?"

"네? 여기 인디언들 사람도 먹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쉿."

잇새로 소곤소곤, 그들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인디언들을 보고서 멈칫거렸다. 커다란 나무 쟁반에 온갖 음식들을 담아낸 것이다. 난생 처음 보는 풀떼기도 많고, 고기는 닭과 돼지 등 여러 가지를 섞어 놓은 것 같다. 게다가 그 옆에는 인디언들이 마시는 전통주까지. 희고 누러면서도 걸죽한 액체가 담겨있었다.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라 대접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차린 건 많지 않지만, 많이 드십시오."

"아. 고맙습니다."

"부족하면 더 말하시고요."

어이구. 존댓말까지.

포크나 수저 따위가 없는지라, 재이는 손끝으로 살살 음식을 헤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베로는 배가 고파서 바로 입에 욱여 넣었고, 하트먼은 경계하여 냄새만 맡아댔다. 반면, 렌은 처음 보는 요리법을 궁금해하는 듯, 이리저리 살펴보기 바쁘다.

"그런데 족장님은?"

"잠시 일이 있어서요. 식사하고 계시면 나오실 겁니다. 술도 드시고, 여기, 담배도 있습니다. 부족에서 전통적으로 말아 피는 건데, 목넘김이 아주 예술이거든요."

"나! 나 한 대만."

"여기 있습니다."

리베로는 아예 즐기기로 마음 먹었나 보다. 인디언들이 주는 걸 넙죽넙죽 잘 받아먹어댔다. 재이는 혹시 몰라 허리춤에 단 총에 손을 올렸지만, 총구의 움직임은 없었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환대에 숨겨진 의도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진짜 천 달러의 위력이다. 죽이네 살리네 이빨 털어가며 싸워대도, 천 달러를 주겠다는 말에 이렇게 손님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음. 맛있다."

"아가씨, 더 드릴까요?"

"소스가 좀 특이한데. 요리법을 알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마음에 들어하시니 기쁘군요."

재이의 일행들은 각자대로 인디언의 환대를 즐겼다. 술이 오른 리베로가 모닥불 쪽으로 달려가 원주민들과 춤을 추기 시작했고, 하트먼도 조심스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근데 좀 늦네."

"그러게 말입니다."

목걸이 그거 가지러 가는데 왜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린단 말인가? 재이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리자, 하트먼도 맞장구를 쳐댔다. 모든 인디언의 시선이 아닌 척 하면서도 재이 일행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면 손님 대접을 위한 '관심'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은근히 느껴지는 '감시'의 기운. 재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번 장전에 여섯 발.'

두 손에 들면 열두 발까지는 바로 당길 수 있으니까, 우선 총을 잡을 수 있는 놈들 위주로 먼저 처리하는 게 낫겠지? 북소리와 노래 소리가 절정으로 뜨겁게 치달았으나, 재이의 머릿속은 차가웠다.

"음식은 입에 좀 맞나?"

"아. 그럼요. 처음 먹는 건데, 아주 맛있습니다."

족장이었다.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재이 가까이 와서 앉았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으나, 당장 뭐라고 짚을 수는 없었다. 족장은 목을 가다듬더니, 술을 들이키고서 잠시 뜸을 들였다.

"무슨 문제라도?"

"크흠. 그게. 별건 아닐세. 다른 게 아니라, 아까 말했듯이 남은 목걸이가 전전 족장님의 아내 분에게 있거든. 근데 그분께는 이게 수십 년을 함께한 남편의 유품이란 말이지."

"아하."

혀가 길어지는구나. 이런 경우는 딱 하나였다.

돈 더 달라는 뜻.

"그래서 설득을 하고는 있는데, 쉽지가 않군."

"뭐.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면, 내올 수 있으니 먹고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지. 부탁하네."

부탁? 재이는 너무 공손한 인디언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다. 아니, 자신도 마을 깊숙이까지 들어온 마당에 반말 찍찍할 수는 없어서 존대하고 있긴 한데, 족장의 태도는 뭐랄까. 음.

"알겠습니다."

이전 족장의 부인이니, 대한민국으로 치면 영부인에 대한 예우 뭐 그런걸까? 재이는 상관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선은 부활권을 얻는 게 중요했으니까. 며칠이 걸리더라도 감수할 수 있다.

"제가 원하는 걸 얻을 수만 있다면요. 혹시 부인께서 마음이 정 헛헛하다고 하신다고 하면, 더 아름답고 반짝이는 목걸이를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전해주세요."

"······알겠소. 그리 이르지."

족장은 그리 대답하고 나서는 연거푸 재이에게 술을 권했다. 몇 번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재이는 술을 홀짝홀짝 들이마셨다. 그렇게 몇 시간. 먹고, 마시고, 춤추며, 웃고 떠들자 달이 반쯤 기울었다.

"어우, 힘들어."

네 사람은 지쳐서 널브러졌고, 머리를 맞대고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에는 쏟아질 것 같은 은하수가 가득했다.

"재이."

"왜."

"나 오줌 마려운데."

"가서 싸고 와."

"무서워잉."

술에 취한 리베로가 장난스럽게 칭얼대자, 세 사람이 동시에 질색하며 그를 돌아봤다. 시선이 꽤 따가웠는지, 리베로 역시 정색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알았다. 알았어. 거참 냉정들 하시기는."

누나들은 아주 꿈뻑 죽었는데! 리베로는 툴툴거리면서 천막 뒤쪽으로 돌아갔고, 수풀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삭! 삭!

"조금 더 파봐."

"뭐가 걸리는데. 여기 맞아?"

"맞다니까. 얼마나 됐다고 그걸 잊겠어?"

"하참, 진짜. 밤중에 이게 뭐하는 짓인지 원."

인디언들이다. 대여섯명 정도가 한데 모여 삽질을 해대고 있었다. 리베로는 오줌을 싸면서 눈을 천천히 끔뻑였다. 알딸딸하니 눈앞이 휙휙 돌아가는 기분이다.

'쟤들 저기서 뭐한담.'

그는 바지춤을 추스르고, 자세를 숙여 천천히 다가갔다. 어지간하면 그냥 돌아갈 건데, 솔직히 너무 궁금하지 않은가. 뭐하기에 달밤에 삽질 중인지.

퍼억! 퍽!

"어! 나왔다!"

'나와? 뭐가?'

리베로는 코를 훌쩍거리며 나무 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꽤 깊게 파인 구덩이. 재이 일행이 놀고 먹는 동안 계속 파댔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깊이가 나올 수 없다.

"들어!"

"아니지. 그럴 거 없이, 팔만 잘라."

"아아. 맞네. 그렇게 하면 되겠네. 너 똑똑하다."

"훗. 이런 게 바로 지혜라는 거란다."

"오른쪽? 왼쪽?"

"맹세는 왼쪽이지."

스릉! 그들은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더니, 이내 칼을 꺼냈다. 그리고서-

푸욱!

"······!"

뭔가를 작업하더니, 구덩이에서 사람 왼쪽 팔을 꺼내는 것 아닌가! 리베로는 술이 단박에 깨버렸다. 이런 시벌거. 인육을 처먹는다더니, 그게 진짜였구나! 환대도 사실은 자신들을 유인하려고?

바스락.

리베로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치자, 인디언들이 동시에 고개를 휙 돌렸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안광이 그렇게 공포스러운지는 처음 알았다. 그들은 천천히 검을 다잡고서, 리베로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무슨 소리 났지?"

"어. 뭐 있네."

"······이봐? 거기 누구 있어?"

혹시 김재이 일행이라면, 일이 복잡해질 건데. 인디언들은 그리 생각하며 혀를 차댔다. 리베로는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움직이면 풀숲의 흔적 때문에 바로 위치를 들킬 것 같았다.

푸헤엥! 헹!

그때였다. 리베로 뒤로 동키가 대뜸 울음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풀을 뜯어먹으라고 풀어둔 것인데, 꽤 뒤쪽까지 올라온 것이다. 인디언들은 긴장을 풀고서 칼을 내렸다.

"뭐야. 뺀질이 놈이 갖고 온 당나귀네."

"아오, 놀래라."

"됐어. 계속해. 늦어지면 김재이가 의심할라."

"족장님이 가격 좀 올려본다며? 되겠어?"

"뭐. 목걸이도 준다고 하던데. 확실히 돈 좀 있나봐."

리베로는 당장이라도 동키의 뒤집어진 입술에 뽀뽀를 날리고 싶었으나, 꾹 참고 천천히 왔던 길을 돌아 나갔다. 구덩이 아래로 시선을 빼앗긴 인디언들은 풀숲이 움직이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타닥타닥!

"재이, 재이!"

"늦었네. 큰 것도 쌌나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리베로는 인디언들의 눈치를 살피며 재이에게 귓속말했다. 다행히, 파티는 거의 끝물인지라 인디언들 대부분이 술이나 잠에 취해 널브러져 있었다.

"이놈들, 우리 잡아먹으려는 것 같아."

"뭐?"

"내가 봤어. 시체 잘라 먹으려던데. 미친 놈들이, 진짜. 하아. 이러지 말고 빨리 대가리 터트리고 도망가자. 응? 목걸이고 뭐고 큰일 난다니까."

"무슨 일입니까?"

"하트먼. 너도 총 들어. 렌, 너는 내 옆에 딱 붙어있어."

리베로가 호들갑을 떨어대자, 하트먼과 렌도 궁금해하며 다가왔다. 식인? 재이는 일단 진정 좀 하라며 리베로를 안심시켰다.

"자세히 좀 말해봐. 정확히 뭘 봤는데?"

"구덩이에서 시체 왼팔을 자르고 있었다고! 묻어뒀다가 배고플 때 꺼내먹는 거라니까?"

"뒤에서?"

"어! 뒤에서!"

리베로가 펄쩍 뛰며 이르자, 깨어있던 몇몇 인디언들이 힐끔거렸다. 재이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지금 상황, 그러니까, 외지인인 내가 있는 상황에서 시체를 꺼냈다면 식인보다는-'

 가짜 목걸이에 무게를 두는 게 맞지 않을까? 왜 하필이면 이럴 때 그런 짓을 하겠냐고! 그때였다. 족장이 부하들과 함께 다가왔다.

"재이. 잠시 괜찮겠나?"

"무슨 일이시기에?"

"목걸이를 보여주고 싶어서."

"아."

"할머니께서 허락한 것은 아니지만, 그대들이 이걸 원하여 여기까지 왔기에 내가 작은 친절을 베풀고 싶다 청하였지."

"······한번 봅시다."

재이의 대답에 그들이 작은 쟁반을 내밀었다. 기다란 뼈 두어 조각이 꿰인 목걸이가 놓여있었다. 그들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검지고, 중지다. 두 손가락은 우리 부족에게 아주 의미가 깊은데, 맹세를 뜻하는 손가락이기 때문이지. 오래 되었지만, 할머니께서 워낙 애지중지 하던 것인지라 관리가 훌륭하게 되어 있다."

"아하."

재이는 눈썹을 까딱거렸다. 놀랍게도, 그 어떤 금빛 아우라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그저, 뼛조각을 꿰어놓은 목걸이에 불과했다. 그것도,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를.

"그러니까, 이게 전전 부족장님의 손가락이란 말이죠?"

"그렇다네."

"더 가까이서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

족장은 잠시 멈칫거렸지만 흔쾌히 허락했다. 이자가 시체의 뼈를 구분할 수 있을리 없었으니까. 1년이 지난 시체든, 10년이 지난 시체든, 뼛조각을 육안으로 살펴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할머니께서 궁금해하시더군. 이 귀한 목걸이를 떠나보내면, 제 목이 허전하시어 버티지 못할 것인데. 김재이 그대가 다른 선물을 해준다고 하니,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어."

그러니까, 눈치껏 비싸고 알 굵은 목걸이를 내놓으라는 뜻이다. 재이는 속으로 혀를 쯧, 차며 쟁반을 뒤로 물렸다.

"음.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되는데요."

"그럼?"

"나 이 디자인이 별로다. 다른 건 없어요?"

재이는 팔짱을 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어디 한번, 계속 갖고 와봐라. 진짜가 나타날 때까지.

EP139. 이게 여기에?

EP139. 이게 여기에?

"하아, 미친 놈이 진짜!"

퍽! 퍽! 연달아 땅을 파대던 인디언이 결국 참지 못하고 삽을 내던졌다. 마을 뒤쪽, 시체를 묻는 공동묘지 곳곳은 성한 곳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재이 이 정신 나간 놈이 자꾸만 별 같잖지도 않은 이유로 다른 목걸이를 가져오라 지랄했기 때문이다.

"이번이 몇 번째지?"

"다섯 번째."

"하, 참나. 돌아버리겠네."

말이 다섯 번째지, 손가락 뼈가 남아있는 시체를 찾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게다가, 조건이 붙어있지 않은가? 바로, 족장이 남긴 것이어야 한다는 것! 뒤로 갈수록 오래된 뼈를 찾기 위해서 그들은 아닌 밤 중에 개고생을 하고 있었다. 참다 못한 인디언이 쌓인 흙을 퍽퍽 차댔고, 나머지도 땀을 닦아대며 한숨을 쉬어댔다.

"대체 언제까지 이 지랄이냐고!"

"그러니까. 차라리 원하는 디자인을 달라고 하든가."

"등신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무슨 주문 제작도 아니고 개 헛소리를 하고 있어."

"근데 이러고 끝까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어떡해? 죽여버리는 거 맞지?"

"몰라. 술 처마실 때도 총 옆에 끼고 있더라. 여자 애들 시켜서 어떻게 좀 해보라고 해도, 꼼짝 안 해."

"하아, 천 달러만 아니었어도."

"그러게. 천 달러만 아니었어도."

"백 달러 정도만 되어도 그만 뒀으려나?"

"그럴 리 있나."

"하긴. 말이 백 달러지, 여기서 누구 그만한 돈 본 적 있는 사람 나와보라고 해."

끄응. 그들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삽을 집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디에 누구를 묻었는지 다 기록해둘걸 그랬다. 그들은 가족공동체와 같은지라, 개인적인 무덤이라는 개념이 희미했다. 시체가 나오면 적당한 곳을 파서 묻고, 파다가 다른 시체가 나오면 그 위에 얹어 묻기를 반복했다. 대신, 일 년에 세 번씩 그 위를 거닐며 성대한 축제를 하곤 했는데, 외부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뼈가 좀 빽빽한 걸 원하려나?"

"아까 대충 들어보니까, 뭐 아우라가 안 보인다느니 뭐라느니 해대던데."

"깎아볼까? 좀 예쁘고 둥글둥글하게."

"젠장할! 이게 대체 무슨 지랄들인지! 엄마, 아빠! 미안합니다, 예?"

그들이 쥐고 있는 게 누구의 뼈인지 모르겠다. 아마 저놈의 엄마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놈의 아빠일 수도 있다. 다시금 적당한 손가락 뼈가 발견되자, 그들은 환호하며 뼈를 닦아댔다.

"잘 되어 가는가?"

"족장님. 말도 마십시오. 이러다가 산 하나 만들겠습니다. 김재이 놈은요?"

"혼자서 안 자고 있네."

"독한 놈 같으니라고. 목걸이 기다리는 거래요?"

"말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의중을 모르겠다."

족장이 팔짱을 낀 채로 뒤쪽을 힐끔거렸다. 먼 곳에서 일렁거리는 불빛. 식사할 때 피워둔 모닥불이 거의 꺼지고 있었다. 인디언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족장에게 넌지시 부탁했다.

"이번 걸로 어떻게든 마무리하면 안 될까요? 더는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 족장님이 남긴 유품이 계속 나오는 것도 솔직히 이상하고요."

"네. 더는 없다고 딱 못 박아놓고 파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 들어와서 지금 몇 번을 퇴짜 놓는데, 눈치가 있으면 마음에 안 들어도 사겠지요."

"맞습니다. 안 그러면 확 죽여서 가죽을 벗겨버립시다. 현금 같은 걸 좀 들고 있지 않을까요?"

족장은 고심하듯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자."

"흑! 감사합니다! 계속 삽질했다가는 어깨 무너지겠습니다."

천 달러를 다 받지 못하더라도, 그들에게는 큰 이익이었다. 몰리베이를 비롯하여 미국의 압박에 숨어산 지 오래. 그들은 현대 문명을 증오했지만, 동시에 선망했다. 잘 말린 시가, 포도주, 질기고 튼튼한 가죽 장화, 부드러운 촉감의 셔츠, 낯선 충격을 주었던 시판 소스, 투명한 유리알, 총, 한 순간에 고통을 잠재우는 의약품 등등.

'돈이 있다면 그보다 더한 편의를 누릴 수 있다.'

그들이 자연의 품에서 거칠게 살아온 것은 지난 날이었고, 이미 익숙해진 사실이다. 그렇기에, 한번 맛 본 편의의 생활은 정말이지 달콤하고 갈망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돈······.'

한데, 그들이 무슨 수로 돈을 얻겠는가? 사냥? 채집? 그것도 아니면, 수공예? 이미 몰리베이에는 차원 높은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급격하게 변하는 세계에서 철저히 외면 되는 중이었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천 달러라!

"조금만 힘내주게. 거래가 잘 되면 모두에게 남부산 초콜릿을 사줄 것이니."

"초콜릿을 말입니까?"

"그래."

인디언들은 신나하며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먹으면 머리가 핑 돌면서 행복해진대."

"엄청 달다 하더라고. 입에서 침이 질질 나올 정도로."

"왜, 저번에 냠뚜가 먹은 적 있잖아. 걔는 그걸 포장지까지 싹싹 핥아 먹더라니까."

"으으으! 좋아! 마지막이다!"

"가자!"

삽질이 다시 시작되었다. 누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후손을 위하여 손가락 뼈 좀 내주십시오! 그들이 신나게 구덩이를 파는 동안, 다른 인디언들은 재이 일행이 이쪽으로 못 오게끔 자연스럽게 막아서고 있었다. 이미 리베로가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모든 걸 보았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재이. 우리 튀자. 응? 제에발!"

리베로가 눈물 콧물 훌쩍이며 재이의 소매를 붙잡았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인디언들에게, 하트먼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이 친구가 술 주정이 좀 그렇습니다. 하핫."

"으흐윽, 무서워 죽겠어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매일 이래요. 술만 먹으면."

"재이! 제바알!"

"조용히 좀 해. 진짜 일 치르고 싶어?"

듣다 못한 재이가 귀를 후비적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낯선 지형이었고, 모닥불이 없다면 한치 앞을 식별할 수도 없었으며, 이미 너댓 번 퇴짜를 놓으며 인디언 놈들을 개고생 시켰다. 보아하니 계속해서 어디선가 사람 뼈를 구해오는 것 같은데, 여기서 그만하겠다 두면 상대가 어찌 나올지는 안 봐도 뻔하지 않은가?

"흐윽, 그럼?"

"거래하고 가면 돼. 내가 원하는 거, 분명히 여기 어디 있거든."

"뭐래 진짜. 내가 봤을 때, 여기서 네가 제일 또라이야! 인마!"

인디언 놈들이 시체 써는 걸 봤는데도 그딴 말을 씨부리니? 응? 이 겁대가리 없는 놈아! 리베로가 다시금 그의 소매를 잡으며 늘어졌지만, 그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렌조차도.

"리베로 씨. 그만해요. 옷 더러워져요."

"렌! 그래, 렌. 너는 내가 지켜줄게. 크흑!"

"그, 본인 간수부터 잘 하십시오. 재이 씨 말이 맞아요.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걸요."

"냉정해! 너, 나야 재이야?"

"······? 당연한 걸 물으시네? 김재이 씨요. 고용주잖아요."

돈 주는 사람 편인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렌이 황당하다는 듯 대답하자, 리베로가 바닥을 짚으며 절망했다. 아아, 이 망할 자본주의 사회 같으니라고.

"그럼 재이 씨, 언제쯤 물건 오케이 하실 생각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이게 막 파온 시체라면 좀 꺼림칙하거든요."

"네. 저도 그런 건 하고 다닐 생각 없습니다. 재수 없으면 저주 받아요."

헛된 생각이 아니라, 진짜 이쪽 세계에서는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무덤을 어지럽힌 자에게 망자의 저주가 내릴 수도 있지 않나.

"그럼요?"

"진짜 물건 나오면 그때. 저 진짜 인디언들 떠보려는 게 아니라 그게 필요해서 온 거거든요."

부활권이라는 것 말이다. 목숨 한 번 연장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이득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상을 다 가졌다는 진시황제도 목숨에 대한 갈망이 그렇게 깊었는데, 서부 시대 와서 똥물 구정물 다 굴러본 재이에게는 또 얼마나 의미가 깊겠는가?

"읏차."

아직 감감무소식인 것 같으니, 좀 움직이면서 직접 찾아볼까? 재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지켜보고 있던 인디언들이 우르르 몰려와 술잔을 쥐어주었다.

"어디 가시게요?"

"잠시 술 좀 깰 겸, 산책 좀."

"아하이, 취하려고 먹는 술을 왜 깨려 하십니까. 아깝게. 그러지 마시고, 새로운 담배를 내오겠습니다. 밤이 어두워서 여기서 조금만 벗어나더라도 위험하거든요. 여기 채이고 저기 채이는 게 짐승 놈들인지라."

조금 강압적인 분위기다. 족장의 지시가 있었겠지? 재이가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던 차였다.

타닥타닥!

히이잉!

마을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사내 세 명이 말을 타고 들어왔는데, 그 뒤에는 사슴 두어마리가 묶여있었다. 그들은 낯선 이방인을 보며 멈칫거렸다.

"뭐야?"

"오, 한다르또!"

"외부인?"

"어어, 손님이야. 손님. 김재이라고, 알지?"

"뭐? 그놈이 왜 여기 있는데?"

"사정이 길어. 족장님이 초대하신거니까 괜한 시비 말고 사슴이나 옮겨줘."

사냥을 나갔던 청년들이었다. 꽤 먼 거리까지 먹잇감을 찾으러 갔던 것인지,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그들은 재이 일행을 노려보더니, 이내 군말 없이 사슴을 내려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컹! 컹컹!

'어?'

사냥개들도 그 뒤를 신나게 따랐다. 재이는 마지못해 술 한모금으로 입술을 적시려다가, 은근히 풍기는 금빛 아우라에 눈을 반짝였다.

"재이? 어디가?"

"사슴 구경하러."

그 정도는 되지? 재이가 인디언들을 돌아보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어디 멀리 가는 게 아니라, 바로 옆 천막인지라 막을 명분이 없었다. 재이는 천천히 금빛 아우라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고, 이내 그 근원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손님이면 손님답게 굴어. 무례하게 어딜 막 들어오나."

"아, 미안미안. 궁금한 게 있어서."

"궁금? 뭐."

"혹시, 그 족장의 가족인가?"

"······우리는 모두가 가족이다."

뭔 개소리지? 인디언 부족에게 가족을 따지는 건 의미 없는 구분이다. 재이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며 손을 들었다.

"다른 게 아니고, 사실 내가 요즘 찾고 있는 게 있어서."

"술에 취한 사람 상대할만큼 한가롭지 않아."

"그 개."

"개?"

사내가 의아하게 재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한 개, 켄이었다. 켄이 헥헥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아주 멋있군. 털도 윤기나고, 다리도 튼튼해보이고."

"그런데?"

"팔지 않을래? 영리한 사냥개 한 마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하! 안-"

"50달러 줄게."

안 판다고 딱 잡아떼려던 것도 잠시. 50달러라는 거금에 인디언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켄은 내 친구야."

"그럼 70달러."

"친구를 어찌 돈으로-"

"80. 더는 안 불러. 결정해."

사내는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침묵했다. 지금 노루 가죽이나 벗길 때가 아니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이더니, 켄의 이마에 입술을 찍었다.

"켄. 너는 끝까지 내게 좋은 친구구나."

"좋았어. 딜?"

"잘 대해주겠다고 맹세해."

"그럼. 애지중지 잘 아끼지."

재이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이다. 재이는 켄에게 손을 내밀었고, 놈은 헥헥거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목걸이가 아주 멋들어졌다.

'내가 찾던 목걸이가 개목걸이였네.'

대체 어쩌다 이리 귀한 게 개 목에 걸려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알 필요 있겠는가? 그때, 천막이 걷히며 중년 여성이 사내를 불렀다.

"한다르또! 샬람탄 할머니께 인사 먼저 하라니까. 할머니가 널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잖아."

EP140. 거래 불발

EP140. 거래 불발

그러니까, 정황은 이러했다.

샬람탄 할머니의 목걸이를 손자인 한다르또가 가져가 제 개 목에 걸어둔 것이다. 그것이 어떠한 가치를 지닌 것인지도 모르고. 재이는 반짝이는 목걸이를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세상에, 사람 목숨 구하는 부활권이 개 목에 걸려있었다는 사실을 누가 알기나 할까.

끼잉?

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재이를 올려다봤다. 아몬드 형태의 갈색 눈동자에 재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신이 팔렸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적의 없이 재이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리와봐."

이놈을 어쩐다. 계속 이동하게 될 건데, 데리고 가도 되려나? 이 시대의 개들은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해도 잠 한번 자고 나면 충전되는 진성 늑대의 후예들이긴 했다. 게다가 인디언들이 사냥용으로 쓰던 녀석이니, 체력이나 지능에 있어서는 보증된 것이나 마찬가지.

"너 어쩔래?"

헥헥!

응? 따라갈래? 사실상 목걸이를 얻었으니 개는 있으나 마나 상관없다. 오히려 지금 놈을 돌려주게 된다면, 재이가 목걸이만 취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될 것이다. 아예 마을 밖으로 나간 다음 돌아가게 하든, 데리고 가든 선택하는 게 낫겠다. 재이는 손에 든 음식을 개에게 나눠주고서 천막 밖으로 나왔다.

"재이!"

마침, 땀으로 범벅된 인디언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다시 상관없는 시체를 파헤쳐 목걸이를 만들어 왔나 보다. 족장은 그들이 건넨 목걸이를 집어서 천천히 들어올렸다. 분위가 깨나 잡는 것으로 보아, 이번이 마지막인가 보다. 저것이, 인디언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수라는 뜻.

"마지막 목걸이일세. 이것 이전에는 너무도 오랜 세월이 지나 족장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 그대에게 제안할 수 있는 마지막 물건이니,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이번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퇴짜를 놓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서려있었다. 재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목걸이를 들여다보는 '척' 했다.

"특별히 다른 건 없네요. 이전에 보여주셨던 것들과."

"이것도 별로라는 뜻인가?"

"네. 애석하게도. 제가 바라는 물건은 아닙니다."

"김재이-"

"하지만, 오늘 이렇게 환대해주시며 편의를 봐주셨으니 그에 합당한 값을 내는 건 당연한 예의겠지요. 20달러 드리겠습니다. 해가 뜨면 나가는 길에 먹을 것도 조금 싸주시죠. 그 술, 맛 좋던데."

재이가 여기서 적당히 마무리하자는 뜻으로 20달러를 제시했다. 목걸이 값에 해당하는 1000달러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사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는데 어쩌겠나? 족장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재이를 노려봤다.

"20달러?"

"네. 왜요? 1000달러 생각하다가 20달러라고 하니까 뭐 줬다 뺐는 것 같습니까? 근데 저는 가져가는 게 없잖아요. 물건이 영 아닌 걸 어쩝니까?"

재이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덧붙였다.

"그렇다고 제 제안 때문에 인디언 부족이 무덤 파대서 없는 물건 만들어온 것도 아니고. 수고비와 접대비에 20달러면 속된 말로, 호구 잡은 거 아닌가요?"

20달러는 안전하게 마을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는 명목도 지니고 있었다. 족장은 한참이나 턱을 매만지더니, 재이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족장의 가호가 깃든 목걸이면 문제 될 것 없는 듯 보였다. 한데, 대체 무엇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것이지? 솔직히 말해주면 고맙겠네."

와. 1000달러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구나. 이자식들 자연에서 살아가는 인디언들 맞아? 뭔 놈의 돈에 대한 집착이 이렇게나 깊어? 재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진실을 말해주기로 했다.

"아우라."

"뭐?"

"아우라가 없던데요. 족장의 가호가 깃든 물건들 치고는 전혀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걸 실제로 느낀다고?"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쪽들은 못 느끼십니까?"

그러면서 족장의 가호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목걸이를 팔 생각이었던 거냐? 머리에 총 맞지 않는 이상 그 누가 사람 뼛조각 목걸이를 1000달러나 주고 사? 그것도 링컨이나 유명한 사람이면 몰라. 이름도 모르는 인디언부족의 족장 뼈를!

"아니아니, 우리는 당연히 믿고, 느낀다. 자연과 선조들의 가호를."

"예. 그렇게 말씀하시니 잘 아시겠네요."

네놈들이 나를 속이려했던 그 행위 자체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재이의 단단한 눈매를 보고서 족장은 흔들렸다. 세간에 떠도는 얘기로는 범상치 않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였으나, 진실이라 여겨지지는 않았다.

'총이 귀신들린 것처럼 홀로 움직이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며, 별자리처럼 세상을 가늠하는 자라고.'

그런데 진짜였나? 목걸이가 가짜라는 걸 알았단 말인가? 재이는 손끝을 딱딱 튕기며 뒤에 서 있는 인디언들에게 부탁했다.

"가서 메모할 것 좀."

"아. 예예."

"거래 제안서를 작성해드리죠. 제가 떠난 뒤에도 혹시나 목걸이가 발견된다면 연락주십시오. 물건을 확인한 후에 제대로 된 값을 쳐드리겠습니다."

오케이? 지금은 너희도 없는 것 같으니까, 이만하자는 뜻이었다. 족장은 까마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민했다.

'1000달러. 정말 줄까?'

어느 쪽이 현실성 있을까. 샬람탄 할머니가 잃어버린 목걸이를 찾아 건넸을 때 김재이가 1000달러를 내밀 확률과, 놈의 시체를 원하는 자에게 시체를 건네고 보상 받을 확률.

'뉴욕이랑 그쪽에 수요가 있는 것 같던데.'

자연 속에 묻혀사는 인디언들이지만, 눈과 귀는 건재했다. 뉴욕 핑커튼 본사에서 김재이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이 있다는 것과, 스위트월드 댄버와 함께 죽었던 고위층 자제의 가족들이 재이에게 날을 세우고 있다는 것 등등.

'뭐 그자들이 아니더라도, 김재이 정도면 어딜 가나 환영이지.'

서부의 전설을 정리한 새로운 전설이었으니까. 고약한 취미를 가진 부자라면 그의 시체를 수집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족장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셈이 오가고 있을 때였다. 재이가 슬쩍 다가와 그의 어깨를 쿡 찔렀다.

"저기, 족장님?"

"······?"

"대가리, 아니지. 머리 굴러가는 소리 여기까지 들립니다."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총구가 계속 움직이려고 했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뽑아 들어 눈앞의 놈을 없애라고. 속마음을 들킨 족장이 황당해하며 재이를 쳐다봤다. 이놈은 어찌, 눈치라는 게······.

"그만하시죠. 아니면 진짜 시끄러워집니다."

감당할 수 있겠어? 숫자로 따지면 절대적으로 불리했지만, 그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는 갈기는 족족 모두 적이라는 뜻이니까. 게다가 무기를 든 자만 있는 게 아니다. 여자, 어린이, 노인 등 마을에서 보호할 대상들도 함께였다. 그들은 각자의 천막에서 단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여차하면 그대로 내일의 해를 못 볼 수도 있다.

"······그래. 좋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근데 상황이 이렇다보니, 좀 그렇네요. 해 뜰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바로 떠나겠습니다."

"음식을 준비해주지."

"예, 고맙습니다. 리베로!"

"엉!?"

재이의 부름에 리베로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는 불안과 기대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재이는 웃으며 고개를 까딱거렸고, 그는 두 손을 모은 채 신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드디어, 이 무시무시한 인디언 소굴을 떠나는구나!

"오케이! 가자고. 그래, 갈 길이 바쁜데 이런데서 자빠져 있을 수는 없지. 하트먼! 렌! 들었지? 준비하자."

"바로 나갑니까? 재이 씨?"

"네. 어차피 곧 있으면 해 뜰 것 같으니 지체하지 맙시다."

이놈들, 지금 돈독 잔뜩 올라서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적당히 설득했을 때 튑시다! 재이의 시선이 그렇게 이르고 있었다. 하트먼과 렌은 바로 짐을 챙겨 들었다. 사실, 말 안장에서 내려둔 걸 바로 올리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그 개는?"

"아. 마음에 들어서 샀습니다. 이름이 한또 뭐라고 하던데."

"한다르또."

"아, 예예. 그 이름이었죠."

"얼마에?"

"음. 말해줘야 하나요?"

"우리 부족은 모든 것을 공유하고 함께한다."

재이가 말한 금액과 한다르또가 말한 금액이 맞는지 확인해보겠다는 게다. 이거 완전 공산당이구먼? 재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80달러요."

"하."

이놈은 무슨 돈을 물 쓰듯 하는군. 어떻게 개 한 마리에 80달러를 줄 수 있지? 그 돈이면 인디언 부족 전체가 몇 달동안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근데 김재이 이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돈이라니.

"제 눈에는 참 마음에 드는데, 한다르또에게는 제일 친한 친구라고 해서요. 애 좀 썼습니다."

"제일 친한 친구라. 친구를 돈 주고 파는 경우도 있나?"

"한다르또에게는 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죠."

족장은 마음에 안 들었다. 밤사이 개고생하며 구덩이를 팠건만, 돌아온 것은 20달러. 근데 개 한 마리 팔아서 80달러를 얻었다니.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재이가 원하는 목걸이를 찾으면 1000달러를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이!"

짧은 사이, 일행은 출발 준비를 마쳤다. 렌이 마차를 끌며 입구 쪽으로 이동하자, 인기척을 느낀 인디언들이 하나 둘 천막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갑작스럽게 온 손님이더만, 가는 것도 갑작스럽다.

"당분간 동부 쪽에서 볼일을 볼 거라서요. 혹 용건이 있으면 새크라멘토 쪽으로 연락하십시오. 거기에도 제 사람이 있어서 업무 처리는 가능합니다."

"······기억해두지."

족장은 재이가 적어준 메모를 품에 넣으며 대답했다. 오닉스가 투레질을 해대며 천천히 움직이자, 개가 꼬리를 흔들며 그 주위를 맴돌았다.

"영리하긴 하네."

누구를 따라 가야 할지 알고 있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재이는 힘차게 오닉스 옆구리를 차댔고, 그들은 인디언 마을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어두웠지만, 말들은 인간이 보지 못하는 길을 볼 수 있었다.

타닥타닥!

히이잉!

"족장님. 가게 두실 겁니까?"

"어쩔 수 없지. 황금알 낳는 거위 배를 가를 수는 없으니까."

"쓰읍. 그렇긴 합니다."

족장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재이 일행을 보다가 등을 돌렸다. 샬람탄 할머니의 천막이 반쯤 걷혀있었다. 그쪽에서 뭔가 이상한 소란이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할머니가 아까부터 자꾸 승질을 부리셔서요. 뭘 말하고 싶은데 힘든가봐요."

"한다르또. 일을 보고 잠시 보지. 김재이가 80달러를 줬다면서?"

"아, 예. 뭐. 그렇긴 한데."

한다르또는 불만 섞인 투로 말끝을 흐렸다. 그놈은 참, 입이 싸군! 그 사이 족장에게 그걸 말해? 한다르또가 일어서려고 하자, 샬람탄 할머니가 손주의 손목을 거칠게 확 낚아챘다. 어디서 난 힘인지 모르겠다. 할머니는 숨이 꺽꺽 넘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네?"

한다르또와 다른 인디언들이 허리를 숙이며 노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뭐라고 하는 거람?

"내 목걸이, 네가 가져갔잖아. 한다르또. 개목걸이 한다고!"

엥? 한다르또는 상황 파악이 안 되어서 눈만 깜빡거렸다. 그가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자, 경악 섞인 낯빛의 인디언 부족이 모두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EP141. 켄

EP141. 켄

"됐나?"

한참을 내달리던 재이 일행이 해가 떠오는 것을 보고 멈췄다. 어두웠던 사위가 밝아져 먼 곳까지 식별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왔던 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디언들이 금방이라도 쫓아올까 어찌나 마음 졸였던지, 리베로는 동키 위로 엎어져 한숨만 쉬어댔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내가 저것들이랑 얽히나 봐라."

"근데, 인디언들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사실 좀 거칠어 보이긴 한데, 환대도 잘 해주고 친절해서 저는 좋았거든요."

렌 역시 마차 의자를 다시 고정하며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세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에서 보여주는 지난 날의 고생이 훤했다.

"아. 엄청났나보네요."

"말도 마십시오."

"말해 뭐해!"

하트먼과 리베로가 혀까지 차대며 질색했다. 저승길 저편까지 봤다가 겨우 돌아온 경험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리라. 인디언들로 인해 동료를 잃고, 맨 몸으로 황무지를 떠돌았던 나날들은 정말이지, 고통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이 질색하듯 고개를 털어대자, 렌 옆에 앉아있던 개도 머리를 털어댔다.

"재이, 근데 얘는 어떻게 해?"

"얌전히 있어서 데려오긴 했는데, 계속 함께해요?"

끼잉? 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제 얘기 하는 걸 눈치챘나 보다. 재이는 어깨를 으쓱거렸고, 개에게 말을 건넸다.

"너 어쩔래?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돼."

사실, 중요한 건 목걸이였으니까.

재이는 품에서 꺼낸 목걸이를 일행들에게 보여주었고, 리베로가 뭉크의 절규처럼 볼을 감싸고서 소리쳤다.

"너어어어! 훔쳤어!?"

훔쳤으면 X 되는거다! 그 인디언 놈들, 지구 끝까지 쫓아올 거라고! 리베로가 경악하며 뒤집어지자, 재이는 그걸 목에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돈 주고 정당하게 샀어."

"헉. 심장 아파. 진작 그렇게 얘기하지!"

"지금 얘기하고 있잖아?"

이놈이 개목걸이로 차고 있더라고. 일행들은 재이가 왜 그리 서둘렀는지 이해하고서 멈칫거렸다. 그렇게 되면-

"개는 어떡해?"

"그러니까. 내 말이."

다시 문제가 귀결된다. 목걸이는 가져갈건데, 어쩌다가 함께하게 된 이 개를 어찌할지. 렌은 옆에 앉아있는 개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데려가면 안 돼요? 얌전하고, 영리해보이는데."

"뭐. 그래도 되긴 하죠."

개는 헥헥거리며 꼬리를 흔들어댔다. 사실 놈에게는 줄이 묶여있지 않았다. 마차가 멈추고 있었으니, 뛰어내리고 싶으면 진작 뛰어내려 어디론가로 가버렸으리라.

"그럼 같이 가지 뭐. 계속 붙어있으면 새크라멘토 돌아가서 집 지어주고."

"이름은요?"

"켄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요."

켄이라. 인디언들치고는 상당히 세련된 이름 아닌가? 사람 이름은 띠도 뭐시기, 샬람 저시기면서. 재이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새로 주인을 만났으니, 이름도 새로 지어주는 게 좋을까요?"

"보통은 그렇게 하긴 하죠."

"잠깐! 재이한테 이름 지어달라고 함부로 하면 안 돼. 오닉스 얘, 이름 뭐라고 지으려 했는지 알아?"

"뭔데요?"

"말순이."

리베로가 '경악스럽지?' 싶은 표정으로 렌에게 일렀으나, 그녀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조선에서는 참으로 널리 쓰이는 이름 아니던가. 말똥이, 개똥이, 삼순이, 돌석이······.

"어라. 왜 안 놀라지."

"괜찮은 것 같은데요. 그럼 개 이름은, 개순이?"

"안 돼!"

리베로가 절대 반대라며 손으로 엑스자를 그었다. 재이는 속으로 괜찮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개 이름을 '켄'이라 계속 부르는 것으로 합의하고 기지개를 켰다.

"좀 피곤한데."

"밤 내내 자지도 못하고 술만 퍼 먹었으니."

"인근 적당한 곳에 자리 필까요?"

"음······."

재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총구를 꺼내 왔던 길을 겨누었다. 그리고 까딱까딱. 혹여 인디언들이 쫓아오는지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총구는 힘 없이 움직이더니, 이내 좌측으로 틀어진 방향에 고정되었다.

"안 될 것 같네요. 더 가죠."

"더, 도망치자는 뜻?"

"어. 적어도 황무지가 아니라 마을로 들어가는 게 안전할 것 같네."

"마을이라고 하면 몰리베이가 제일 가까운데."

"거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재이가 전 보안관을 죽였는데, 들어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현재의 보안관은 그렇다 치고, 찰리 보안관의 가족들이 남아있을 수도 있지 않나. 재이는 잘 모르겠다며 다시 말 고삐를 쥐었다.

"일단은 움직이죠. 몰리베이에서 자지 않더라도, 그쪽을 지나가는 게 안전하겠습니다. 인디언들이 쫓아올 수 있는 구역은 한정되어 있으······."

재이가 말을 잇다 말고 멈칫거렸다. 불길한 기운. 리베로가 조심스럽게 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봤고, 이어서 하트먼과 렌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두두두-!

"이런, 젠장."

땅이 우두두 울릴 정도로 강한 발돋움이다. 흙먼지가 좌우로 크게 일어나 산을 만들 정도였고,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들이 그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진짜네. 진짜 쫓아왔네."

"자, 계속 움직입시다. 렌 씨, 거리가 있으니까 서두르지는 말고요. 마차 조심히 모십시오."

"알겠습니다."

혹시 바퀴라도 빠지면 큰일이다. 렌은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먼저 앞장 서서 달려갔다. 재이와 하트먼 그리고 리베로는 총을 장전하고서 서서히 그 뒤를 따랐다.

타닥타닥!

히이잉!

"근데 쟤들 왜 따라오는 건데? 돈 주고 샀다며."

"샀지. 80달러나 주고. 근데 개 주인은 목걸이가 어떤 목걸이인지 잘 모르는 것 같더라고."

"참나."

알지도 못하고 판 건 그쪽 잘못 아닌가? 그래놓고 왜 저렇게 혈안이 되어서 쫓아와? 저 멀리서 인디언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김재이!"

거기 서 봐라! 우리 거래 아직 안 끝났다, 이놈아! 재이는 보란 듯이 손을 흔들고서 웃어 보였고, 빡친 인디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타앙! 탕!

"어쭈."

"재이 씨, 대응사격 할까요?"

"네. 가능하다면."

철컥! 하트먼이 총을 장전하고서 허리를 반쯤 틀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정면도 아니고, 뒤쪽을 조준한다는 건 정말이지 단단한 하체 힘이 필요했다. 하트먼이 조심스럽게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기자, 인디언 한 명이 속절없이 말 위에서 떨어졌다.

타앙!

"나이스 샷!"

리베로가 엄지를 치켜들며 뒤쪽으로 총을 갈겨댔다. 재이 역시 총구를 고정시키고 총을 쏘아댔고, 총성이 한번씩 터질 때마다 인디언들이 낙마해서 바닥으로 굴러댔다.

덜컹!

"······!"

마차를 몰던 렌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바퀴 굴러가는 것이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잘 닦인 길이 아닌지라,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주행에 방해가 되었다. 마차가 크게 덜컥거리자, 렌이 재이에게 일렀다.

"재이 씨! 왼쪽 바퀴가 이상해요!"

"에고, 그래요?"

"속도, 더 줄여야 할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하트먼! 저랑 같이 양옆으로 퍼지죠."

재이의 신호에 하트먼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 머리를 우측으로 꺾었다. 그리고 재이는 좌측으로. 두 사람이 좌우로 벌어지며 인디언 무리 측면으로 파고 들었고, 리베로는 렌 옆에 붙어서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천천히! 괜찮으니까!"

"이게 마음처럼-"

"애들이 돌아서 갔어! 속도 더 늦춰도 돼!"

재이와 하트먼 둘이 간다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인디언들은 딱 보아도 수십인데? 렌이 아랫 입술을 깨물며 인상을 찌푸렸고, 그 순간 총성이 연달아 터졌다.

타앙! 탕! 탕!

렌이 마차 뒤쪽으로 상황을 살폈다. 인디언 쪽으로 가까이 간 두 사람이 파고들어 진열을 흐트려놓고 있었다.

"김재이! 이 사기꾼아!"

"무슨 소리? 호구라고 불러주라! 개 한 마리를 80달러나 주고 샀는데!"

"그 개-!"

타앙!

말을 이으려던 인디언의 머리가 속절없이 터졌다. 렌 옆에 꼬옥 붙어있던 켄이 낑낑거리며 몸을 가만두지 못했다. 그래도 가족들이라고, 죽어나가는 게 마음 아픈가?

"켄, 미안."

지금은 멈출 수가 없어. 나중에라도-

덜컹!

"앗!"

돌부리에 마차 바퀴가 결국 빠지고 말았다. 쿠웅! 하며 뒷부분이 내려앉았고, 재이와 하트먼 인디언들이 그것을 보았다. 다시 끼우면 되는 간단한 고장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기회다!'

인디언들의 눈이 번뜩였다. 렌이 안절부절 못하며 내려서 바퀴 쪽으로 가자, 켄 또한 그녀를 따라 달려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달려오는 인디언 쪽으로.

월월!

켄은 용맹하게 달려들더니, 재빠른 몸놀림으로 말 사이를 내달렸다. 놀란 말들이 앞발을 쳐들며 몸부림을 쳐댔고, 이어서 인디언들이 굴러 떨어졌다.

히이잉!

"어허라."

저놈, 몇 시간 전까지 인디언네에서 밥 얻어먹고 살던 개 맞나? 알 수가 없네. 재이는 고개를 가로 저었고, 하트먼은 반사경으로 그에게 신호했다. 상대가 어수선할 때 돌격하자는 뜻이었다.

"크흑-!"

바닥으로 떨어진 인디언 한 명이 품을 뒤적거렸다. 소문 그대로다. 총으로는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쉽지 않은 상대. 하지만, 폭탄은 좀 다르겠지.

"젠장."

치익!

그는 낡은 다이너마이트를 꺼내 불 붙이고서 가까이 다가오는 재이에게 힘껏 던졌다. 치지직! 불 붙은 것이 천천히 궤를 그리며 재이 쪽으로 날아들었다.

"어라."

저건 어쩌지? 총으로 맞추면 빨리 터질 건데.

찰나 동안,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이다. 재이가 잠시 멈칫거리는 순간.

타앗!

켄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다이너마이트를 단번에 잡아챘다.

멍!

그리고 우다다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그걸 던졌던 인디언에게 되돌아가는 것 아닌가. 재이와 하트먼이 입을 벌리고서 경악했다.

"안 돼! 안 돼! 저리 가! 멍청아!"

멍멍!

인디언이 저리 가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켄은 꼬리를 흔들며 친절히, 그의 앞에 폭탄을 내려놓았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듯이. 재이 역시 놀라서 소리쳤다.

"켄! 이쪽으로 와!"

멍? 그의 부름에 켄이 귀가 쫑긋거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반사적으로 다시 재이 쪽으로 내달렸다. 치지직! 불붙은 심지가 멈추지 않고 타들어갔고, 인디언의 눈이 커졌다.

'터진다.'

퍼어어어엉!

재이 쪽으로 달려오던 켄이 놀라서 꼬리를 말았다. 폭발음이 굉장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인디언 대열은 엉망으로 초토화 되었고, 켄은 그 자리에 앉아 헥헥대며 광경을 지켜봤다.

"재이 씨!"

"저는 괜찮습니다! 켄도요!"

켄이라는 부름에 다시 개의 귀가 쫑긋거렸다. 이놈,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알 수가 없는 놈이다. 재이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마른 육포를 꺼냈다.

"저기, 켄?"

일단은, 뭐. 잘 했으니까 간식이라도 줄까? 재이가 조심스럽게 고기를 건네자, 켄이 펄쩍펄쩍 뛰며 오닉스 주위를 내달렸다. 미친 듯이, 수십 바퀴를.

"······아."

······이거 영 시끄러운 객식구가 들었네.

켄은 재이의 손에 들린 고기를 낚아채더니, 한 입에 꿀꺽 삼키고서 꼬리를 흔들었다.

EP142. 전설의 네시

EP142. 전설의 네시

재이 일행은 그대로 몰리베이를 지나쳐 계속 동쪽으로 달려갔다. 밤이 되면 마차 안에서 다 같이 온기를 나누며 잠들었다가, 낮이 되면 다시 달리기를 반복했다. 널린 것이 풀밭이었고, 사냥감이었으며, 물을 따라 가기만 하면 목마른 것도 문제 되지 않았다. 다만, 조금 꼬질꼬질해지는 것 외에는.

"막달린 마을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말 고삐를 대충 잡은 렌이 재이에게 물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켄이 엎드려 있었다. 마차가 크게 흔들려도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눈을 꿈뻑거리며 졸고 있다.

"거의 다 왔을 겁니다."

"제대로 온 거 맞지?"

"나침반은 거짓말하지 않아."

그리고 특히, 길안내 해주는 금빛 아우라도. 리베로는 말린 고기를 질겅이다가, 멀리서 보이는 마을의 흔적에 상체를 바짝 세웠다. 굴뚝들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어? 저기!"

언덕 아래로 펼쳐진 아름다운 호수 마을, 막달린. 날이 좋아 색색의 꽃들이 피어 있었고, 호수는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지름이 수 킬로미터는 되어 보인다. 걸어서 돈다면 두어 시간 정도 걸릴 작은 호수. 그리고 호수보다 더 작은 마을이 옆에 세워져 있었다.

"근데, 마을 규모에 비해서 들어가는 마차가 많네."

"인기 관광지라서 그런 것 아닐까요?"

"흠. 하긴. 우리도 그걸 보려고 왔으니까."

정확히는, 재이가 보고 싶다 해서 온 거다. 대체 네시 같은 것을 봐서 어디에다 쓰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천천히 마을 쪽으로 말을 이동시켰다. 드디어, 딱딱한 마차 안에서 앉아 자는 것이 아니라 침대에 누워 잘 수 있게 되었다. 재이 일행은 꽤 복잡한 마을 입구로 들어서서 여관을 찾았다.

"오늘 묵으시는 분께는 스프가 공짜입니다!"

"우리는 목욕을 반값에 해드려요! 어서 오세요!"

"마차 관리를 해드립니다! 단돈 2달러!"

마을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대부분 집에서 여관을 열거나 식당을 차린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눈에 봐도 호수 근처에 몰려든 관광객들이 어마어마했다. 그 중에서는 카메라를 든 기자들도 섞여 있다.

"먼저 짐부터 풀까요?"

"그래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방 먼저 잡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렌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적당한 여관을 손으로 가리켰다. 마침 마차 하나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여기, 자리 났습니까?"

"네네. 그럼요. 어서오십시오."

"마차 한 대에 말 세 마리 그리고 개도 있습니다."

"사람은?"

"네 명이요."

"방은 하나밖에 없는데, 괜찮겠습니까?"

렌이 뒤를 돌아봤다. 꼬질꼬질하니, 당장 하나밖에 없는 방이라도 급했다. 재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관 주인이 메모지에 뭔가를 끄적였다.

"1박에 10달러입니다."

"네? 뭐라고요?"

"네 명이잖아요. 이 정도면 여기서 정말 싼 가격입니다."

렌이 황당하게 입을 벌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1박에 10달러나 할 수 있는가? 놀랍게도, 식사와 말 관리 그리고 목욕은 또 비용이 따로 청구된다. 재이는 어쩔 수 없다며 앞으로 나서서 돈을 꺼냈다.

"우선 사흘치요. 연장할 때 다시 말하도록 하죠."

"네!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끼이익.

일반 가정집을 개조한 여관이다. 좋은 뜻으로는 아늑하고, 나쁘게는 좁아 터졌다는 뜻. 재이는 현관 옆에 놓인 신문 한 부를 집어 들고 주인장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큰 침대 하나만 겨우 들어서 있는 작은 방이다.

"식사는?"

"준비해주십시오."

"네. 준비되면 부르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콰앙!

문이 닫히자, 리베로는 황당하다는 듯 침대를 꾹꾹 눌러댔다. 두 명 올라가면 꽉 차서 떨어질 것 같은데.

"아니, 원래 관광지가 이래? 난 살면서 이런 데 처음 와보거든."

"어. 원래 관광지는 이래. 개떡같은 밥도 서너 배씩 처먹고 그러거든."

"김재이, 네가 어떻게 알아?"

"말하면, 너는 알고?"

재이는 피식 웃으며 신문을 펼쳤다. 인근지역신문이었다. 역시 대부분은 만다린 마을의 네시에 관한 기사였고, 오른쪽 하단에 짤막히 몰리베이 기사가 실려있었다.

"재밌는 거 있어?"

"어. 있긴 있네."

"뭔데?"

"인디언들. 몰리베이로 쳐들어갔나봐."

"에엥?"

그의 말에 리베로와 하트먼 그리고 렌까지 고개를 들이밀어 기사를 읽어댔다.

"······갑작스러운 인디언들의 습격. 끝나지 않은 전쟁인가? 무장한 인디언들이 들이닥쳐 보안대를 털고, 마을에 불을 지르는 등 행패를 부리자 자경대와 보안대원들이 한뜻으로 반격해 인디언들과 피터지는 전투를 벌였다."

"얘들 왜 이래? 미쳤나?"

"아마, 우리가 몰리베이로 들어갔을 거라 생각했던 것 아닐까요."

하트먼의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그를 쳐다봤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들은 조심스레 신문을 덮으며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이놈들이 김재이 일행을 찾으러 왔다가 흥분해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 것이다. 그 이전에 몰리베이와도 인연 자체가 악연이었으니, 다시 때가 되었다 하고 총질을 해댄 것일수도. 어쨌거나, 재이 일행이 알 바는 아니다.

"됐고. 이제 여기서 뭐하면 되는데?"

리베로는 신문을 구석으로 치워버리며 재이에게 물었다. 창밖으로 호수 끄트머리가 보였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것이, 저 틈에 섞이면 호수가 보이기나 할까 싶다. 차라리 여기서 구경하는 게 효율적일지도.

"음. 네시를 한번 볼까 해."

"너 참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구나."

"보면 그 다음 어찌할지 생각할게. 일단 다들 쉬어. 렌 씨는 여관 주인한테 말해서 방 남는 게 나오면 그쪽으로 옮기시고요. 같이 낑겨 자려면 불편하잖아요."

"지금까지 계속 마차에서 잤는데요, 뭘."

"그래도. 제가 불편해서."

재이의 말에 렌이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들은 오랜만에 빵과 구황작물 따위를 먹으며 배를 채웠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 바깥에서는 해가 질 때까지 소란이 가라앉지 않았다.

"자자, 포도주입니다. 한 잔씩 서비스요!"

"오,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근데 저 사람들 다 네시 보려고 온 거죠?"

재이는 여관 홀에 앉아 주인장이 나눠준 술을 홀짝였다. 뭐랄까. 밤이 될수록 거리에 사람들이 더 쏟아지는 것 같았다.

"네. 그렇죠. 손님들은 아닙니까?"

"아니요. 맞습니다."

"하핫! 복덩이에요, 복덩이. 여행객이라고는 일년에 두어 번 보는 게 다였는데, 덕분에 하루가 멀다하고 이렇게 활기가 찹니다. 앉아서 돈 번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줄은 몰랐어요!"

"네시를 보신 적 있고요?"

"물론이지요! 달이 뜨는 밤이면 예전에는 자주 봤습니다. 처음 봤던 게, 4년 전인가? 아내랑 밤에 몰래 만났다가 들어가면 가끔 호수 가운데 바위 같은 것이 둥둥 떠 있었지요."

"지금은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게 자주 보이지는 않아요. 그래도 보이긴 한답니다. 보름 전, 잠깐 봤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주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탁자 따위를 닦아댔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네시는 전설의 동물이다. 있을 리 없는 존재인데, 여기는 또 게임 속이니까 뭐가 다르려나? 재이는 술을 홀짝이며 바깥을 살폈다.

'금빛 아우라는 보이지 않네.'

흐음. 그는 술을 비우고 일어났고, 문 밖에 기대어 자고 있던 켄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월! 월월!

"잠깐 산책이나 할까?"

겸사겸사, 호수가도 둘러보고. 어딜가나 사람이 많아서 불편하겠지만. 재이는 사람들을 헤치며 호수 근처로 들어갔고, 켄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왔다.

'네시가 있다고 하면, 뭐 그렇다 쳐. 근데 그거랑 스킬이랑 무슨 연관이 있을까. 혹시, 잡으라는 건 아니겠지?'

수영이라고는 배영으로 둥둥 떠다니는 것 말고는 하지 못하는데. 몇몇 사냥꾼들은 네시를 잡으러 호수에 배를 띄웠다가 죽었다 하지 않나. 재이는 미심쩍은 듯 인상을 찌푸렸고, 계속해서 호수가를 돌아 살폈다.

"어?"

"저기, 뭐 올라온 것 같지 않아?"

"뭐가? 어디?"

"저기! 손끝을 잘 봐봐!"

"에이, 바위잖아."

네시를 눈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은 가끔 환시를 보며 바위를 가리키고는 했다. 혹은 나무조각, 심지어는 일렁거리는 호수 표면을 보고도 네시의 흔적이 아닌가 의심했다. 재이는 피식 웃으며 그들을 지나치려고 했다.

"어? 어어!"

하지만, 조금씩 말소리가 커져갔다. 탄성은 옆으로, 또 옆으로 옮겨가며 점점 퍼졌고, 이내 사람들은 더욱 호수 가까이 바짝 붙어댔다. 찰칵찰칵! 셔터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저기! 네시다!"

"네시가 모습을 보였다!"

"어디? 어디이!"

"저기, 안 보여? 고개 들었잖아!"

수 키로미터 멀리 있는 것인지라, 식별이 어렵긴 했다. 재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제대로 보려 했고, 아마 네시 입장에서는 인근의 모든 인간들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리라.

"배 띄워! 간다!"

"아니! 안 된다니까!"

"이거 놔!"

그때, 선착장 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네시가 나타났다는 걸 확인한 누군가가 배를 밀며 나갔고, 또 몇몇은 그들을 필사적으로 막으며 버텨댔다. 재이는 저들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신문으로 보지 않았던가.

'네시를 잡아서 실체를 밝히자는 쪽과 잡으면 안 된다는 쪽이군. 거짓말 마을이라는 오명을 벗자는 측과 그리 되면 네시로 인한 관광객이 끊길 거라는 측.'

두 세력은 거칠게 부딪히며 서로 몸싸움을 해댔다.

"네시를 잡아서 뭐 어쩌게! 내버려 둬!"

"다들 궁금해하잖아! 시체든 뭐든, 네시가 진짜라는 것만 증명되면 더 많은 사람이 올 거라고! 거짓말쟁이 마을이라는 오명도 벗고!"

"웃기지 마! 네시가 죽으면 호황도 끝이야!"

재이는 그들이 싸우든 말든, 상관 쓰지 않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어딜 가나 있을 법했고, 둘 다 그럴 듯한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쪽 렌즈가 깨진 망원경으로 호수 중앙을 살폈다. 희한하게, 계속 보면 볼수록 네시 같기도 하고 아니면 다른 구조물 같기도 했다.

'알 수가 없네.'

가까이 다가가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겠어.

이리 생각한 사람들이 각자 작은 보트를 호수에 띄워 나아가기 시작했다. 재이도 다음에는 작은 배를 준비해두자 생각하며, 호수가를 따라 뛰었다.

타앗!

월! 월월!

사람들이 중앙으로 몰려들 때쯤, 물결이 이면서 네시 머리가 아래로 사라졌다. 사람들이 동시에 탄성을 내지르며 이마를 쥐었다. 참으로 예민한 놈 같으니라고!

"어찌 딱 알고 숨어드는지 원."

"더 가보자고!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 잘못했다가 빠져 죽은 게 열댓 명이야!"

"읏쌰! 하나! 둘! 하나! 둘! 노 저어!"

재이는 풀밭에 서서 계속 망원경만 들여다봤다. 반짝반짝, 호수 위로 드리운 반짝임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물에 비친 달? 아니다.

'설마.'

금빛 아우라? 저기에?

지금 그러니까, 나보고······.

'저기 호수 아래로 들어가란 거야?'

EP143. 잠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