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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34

EP124. 김치

장찌엔은 쪽지를 몇 번이고 읽어내리더니, 당최 알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김치가 대체 뭔데? 들어본 사람 있어?"

"아니요. 저는 처음 듣습니다."

"저도요."

"조선에서 이런 것도 먹었나? 이게 다 그걸 만들기 위한 재료라는 거지? 젓갈은 젠장, 또 뭐람."

재이는 아주 친절하게 쪽지에다 원하는 재료를 적어주었다. 배추, 무, 고춧가루, 마늘, 생강, 젓갈, 쌀 등등은 물론이고, 혹여 구할 수 있다면 유과나 곶감 같은 조선의 간식도 떼와달라 부탁했다. 정 어렵다면 값을 낼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특히 고추장이라는 것에는 별표가 다섯 개나 쳐져 있다. 돌아버리겠다.

"차라리 중국 황실 보물을 가져다달라 할 것이지, 원. 듣도 보도 못한 걸 어디서 구하나. 참."

"그래도 수소문하다 보면 아는 자가 있을 겁니다. 만주 쪽에서 넘어온 자들도 있으니까요. 열심히 알아보겠습니다. 셀리 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봐야지요."

장찌엔은 셀리의 얼굴을 떠올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했다. 경매 건으로 감정이 좋지 않음에도 그를 찾아간 건 딱 두 가지 이유였다. 첫 번째, 셀리가 그만큼 그에게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사람들이 근거 없는 소문을 떠들어대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었다. 풍수지리사도 아니고, 총구를 까딱거리며 적의 위치를 찾는 총잡이라니. 영 미심쩍었지만, 직접 만나 보니 조금은 안심된다. 재이의 자신감을 엿본 것이다.

"이놈이 이걸 먹어봐서 구해달라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나를 골리거나 새로운 미식을 시도해보고 싶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군."

후자라면 아무거나 가져가서 고추장이니, 고춧가루니 지껄이면 될 건데 말이다. 부하들은 그건 좀 아니라는 식으로 웃었다.

"요구 사항이 상세한 것으로 보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음식들을 알고 있을 리 없고, '산과 들 돌아다니며 나물 캐다 데쳐서 고추장이랑 비벼 먹어야지.' 혹은 '김치는 처음 담구는데 그게 뭐 중요하겠어요. 입안에 고춧가루가 들어온다는 게 중요하지.' 또는 '하씨, 겉절이랑 돼지 수육이랑 한입에 딱 삼키고 맥주로 입가심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네' 따위의 말을 했을 리 없다. 지나치게 상세했으니, 그는 분명 조선의 음식을 먹어본 적 있다. 그게 좀 놀라운 부분이다만.

"그놈은 대체······."

그 어린 나이에 조선 음식을 어디서 먹어봤을까. 장찌엔은 혼자 중얼거리더니, 되었다며 손을 내저었다. 의뢰가 시작되었으니 이제는 자신도 빠릿하게 움직여야 했다. 중국 거상 자존심이 있지. 그깟 조선 음식······.

"어서 수소문 해봐. 가능하면 여기 있는 것 외, 조선 음식이라고 하면 모두 가져오라고. 혹시 알아? 김재이가 만족스러워 할지."

"예, 알겠습니다!"

치익.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서 연기를 뱉어냈다. 샌프란시스코와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만, 새크라멘토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근데, 저택은 어디 두고 그런 사무실에서 살고 있대?"

"들리는 말로는 화재가 크게 났나 봅니다."

"하! 안 사길 잘했군."

못 산거 아닙니까? 부하의 목구멍 끄트머리까지 말이 치솟았지만, 그는 현명하게 삼킬 수 있었다.

"근데 들리는 말로는, 방화범이 스위트월드의 댄버였다고 하던데요."

"뭐? 어쩌다?"

"경매 입찰 과정에서 약간의 갈등이 있었나봅니다."

"흐음. 근데 걔 죽었잖아?"

"뭐. 인과관계는 확실해 보이는데, 증거가 없어서."

장찌엔은 흥미롭게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재이, 알면 알수록 참으로 희한한 자다. 세상 천지를 오가며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으로서, 그런 상대와 면을 트고 지내는 것은 분명히 도움 되는 일일 것이다. 그는 갱단이기 전에, 장사꾼이었으니까. 장찌엔은 담뱃재를 탈탈 털며 웃었다.

"조선 여자도 좀 구해봐."

"조선 여자요?"

"그래. 음식에 그렇게 흥미가 있을 정도면 그쪽에도 마음이 있지 않겠어? 음식 구하는 것보다 여자를 구하는 게 더 쉬울 수도 있지. 아니다. 여자고 남자고 가리지 말고 구해봐. 그래. 그게 낫겠군."

음식은 상하고, 보관이 어렵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부하들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며, 알겠노라 대답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쪽으로 전언을 보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하루에서 수십 척의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항구 도시. 샌프란시스코에는 분명히,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새로운 땅으로 들어온 조선인이 있을 것이다.

***

"하아."

재이는 소파에 널브러진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잊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먹고 싶은 게 생기니까 참을 수가 없었다. 참기름 돌돌 친 나물 비빔밥, 김치볶음밥, 김치찌개, 김치전, 김치 두루치기, 흰 쌀밥······. 재이가 끙끙 앓자 아리스가 걱정스레 다가왔다.

"재이 님. 그렇게 먹고 싶으시면 제가 해드릴게요. 처음 해보는 거겠지만, 레시피만 있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어요."

"김치가 없잖아, 김치가."

"양상추에 토마토소스를 바를까요? 소스에 페페론치노를 섞을게요."

이파리 채소에 붉고 매운 소스를 묻히는 거라며? 아리스가 활짝 웃으며 제안했지만, 재이는 경악하며 말을 아꼈다. 그건 김치가 아니다. 페페론치노 토마토 소스를 바른 양상추일 뿐. 재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장찌엔이 두고 간 사진을 집어 들었다.

"됐고. 이러고 있어 봤자 미치기만 하지."

"음. 그럼 저는 저녁 준비할게요."

"리베로, 하트먼!"

재이의 부름에 흩어져 있던 두 사람이 거실 쪽으로 내려왔다. 하트먼은 이미 나갈 준비를 마쳤는지 작은 짐꾸러미를 손에 들고 있었다.

"새크라멘토를 오래 자리 비울 수 없으니까, 서둘러서 움직일 겁니다. 셀리라고 했던가?"

석유 회사에서 사람이 오기까지 시간이 좀 있지만, 정확한 시일은 알 수 없다. 대충 보름 정도 안에 오가면 되겠구나, 계산할 뿐. 하트먼은 사진 뒤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예, 풀네임은 바이엔 셀리. 이름이 특이하군요."

사진기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셀리는 딱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도도하고 오만한 페르시안 고양이. 길게 찢어진 눈매가 매력적이었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는 당당해 보였다. 옷이 반쯤 벗겨져 있는 게 아니라면,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라고 해도 될 정도다. 어찌해서 장찌엔이 여기까지 와 그녀를 찾아달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뭐하는 여자인데?"

리베로는 소파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어찌된 일인지, 여자 밝히는 리베로의 반응이 영 미적지근했다.

"뭐. 딱히 뭘 하지 않고 사는 여자지."

"장찌엔 애인으로 먹고 살았다는 거군. 하긴. 이런 외모로 밖에서 일하면 인생 고달프긴 해. 차라리 장찌엔 같은 사람 옆에 있는 게 편하지."

"반응이 왜 그래?"

"뭐가?"

"호들갑 떨 줄 알았는데. 네 스타일은 아닌가 보지?"

"아아. 음. 뭐랄까."

리베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사진을 내려놓았다.

"굳이 따지면 싫어하는 쪽. 위험하거든. 이런 여자."

"경험이 있나봐?"

"말도 마라. 내 인생 서사 풀려면 하루가 모자란다."

리베로의 말을 차치하고서라도, 셀리는 위험한 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를 찾아 떠났던 자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장찌엔은 그녀의 유혹에 추격자들이 넘어갔다 생각하는 것 같지만, 가능성은 여러 방면으로 열어둬야 했다. 혹시 모를 일이다. 그녀가 사람을 처리하는 데 아주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을지.

"재이 씨, 마지막으로 흔적을 남긴 데가 있습니까?"

"장찌엔의 말대로라면, 제일 마지막으로 떠난 총잡이가 맥드란 쪽으로 갔다 합니다. 그곳에서 연락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았으니 아마 거기서 셀리를 만났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제껏 떠났던 추격자들의 방향은 모두 달랐지만, 결국에는 한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중부. 맥드란이라는 소도시는 미 중부에 위치한 작은 농작 마을이었다. 백베인드 기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몰리베이를 지나 내려서 말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이번에는 오닉스랑 애들도 데려가야겠어."

기차에 화물칸을 하나 사야겠다. 물론, 청구는 장찌엔에게 할 것이다. 리베로는 상관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맥드란 쪽이 아니면? 그 다음은 추격을 어떻게 할 건데?"

의뢰를 수락했다는 건 어쨌거나 끝을 봐야한다는 뜻이다. 셀리를 찾아서 장찌엔 앞에 끌고 오거나, 아니면 그들도 다른 추격자들처럼 실종되거나. 혹여, 의뢰를 받았음에도 별 다른 행동 없이 지금과 같은 생활을 이어 간다면 장찌엔의 분노를 맨몸으로 받아내야 할 것이다. 그건 재이에게 귀찮은 일이었다.

"뭐, 특별한 계획은 없고, 계속 쫓아갈 거야."

"아니. 그런 식으로 하면 황무지에서 딱 말라죽기 좋아요."

"한번 볼까?"

재이는 총을 꺼내더니, 그 끝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문득, 그는 이것이 현대의 무당집에서 일어나는 행위와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왜, 무당들이 방울 흔들어 대면서 신점을 보는 것 말이다. 못 미더워하면서도 놀라워하는 리베로와 하트먼의 반응도 점사 보는 자들과 꼭 닮았다.

사사삭!

호크아이의 나침반이 빛을 보였다. 그의 앞으로 쭉 이어지는 금빛 아우라. 사무실 밖에서 오른쪽으로 끝도 없이 늘어졌다. 재이는 창문을 통해 그걸 확인한 다음, 시선을 벽에 걸린 지도로 옮겼다.

"뭐해?"

"음."

새크라멘토에서 일렁거리는 금빛이 조금씩, 실처럼 길게 늘어지더니 동쪽으로 뻗어갔다. 오른쪽 사선으로 이어지는 길. 그것은 맥드란을 지나쳐 그 위쪽의 황무지에서 멈췄다. 셀리는 바로 저곳에 있을 것이다.

"물을 많이 챙겨야겠다."

재이는 손끝으로 지도를 살핀 다음, 그리 중얼거렸다. 강을 찾기 어려운 지역이다. 도시 위주의 지도인지라 맥드란 위쪽에 무슨 마을이 있는지는 확인 불가다. 아마 그쪽 인근으로 가서 수소문하는 방법밖에 없을 터. 셀리는 대체 그곳에서 뭐하고 있는 걸까? 혹여, 마을이 아니라 진짜 황무지 그 자체라면 더더욱 의아했다.

"저녁 다 되었습니다! 재이 님. 그럼 언제 출발하세요?"

"경로는 다 땄으니까-"

"경로를 따? 어디로 가는데?"

"여기. 맥드란 위쪽으로."

"진짜 믿어도 돼?"

"싫으면 따라오지 마시고요."

리베로는 그럴 리 있겠냐며 화들짝 뛰어올랐다. 멍청이! 장찌엔은 대가에 철저한 인물이다. 재이가 김치인가 뭔가를 얻을 때, 자신도 콩고물을 조금 주워먹을 수 있으리라. 이렇게 달달한 기회가 왔는데 어찌 빠질 수 있겠는가? 재이는 달력을 보며 날짜를 가늠했다.

"내일 오전에 필요한 물건들 사고, 오후에 출발하도록 하지. 아리스는 사무실 지키고 있어.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사람 보내고. 여기 우리가 갈 경로를 그려줄 테니까, 알겠지?"

"네. 여기는 걱정마세요! 제가 잘 지키고 있을게요. 다들 들어오셔서 저녁 드세요!"

아리스는 자신만 믿어달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식당으로 들어간 재이는 탁자 위에 놓인 정체 불명의 음식을 보고서 멈칫거렸다.

"아리스 표 김치입니다!"

기어코, 양상추에 토마토소스를 발라댔구나. 기상천외한 음식에, 재이는 멈칫거렸고 리베로는 큰 거부감 없이 한입 베어물었다.

"음. 맛있네. 이게 김치라고?"

"아니라니까······."

"맛있다!"

"다음에는 오이지피클에 소스를 발라드릴게요. 무? 인가 그건 없지만, 비슷할 거예요.'

재이는 체념하며 싱긋 웃었고,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고소하지만 퍼석한 이 식감. 이제 곧 있으면 안녕이다. 그의 미래에는 진짜 김치가 기다리고 있다.

EP125. 미친X

EP125. 미친X

"흠흠. 흐음."

지평선이 보이는 황무지. 누런 대지와 달리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옷을 가볍게 걸친 셀리는 바위 위에 앉아 다리를 꼬고 까딱거렸다. 그녀의 보석 같은 녹색 눈동자는 저 멀리 달려가는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허억,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한 걸음씩 내딛는 사내. 그는 장찌엔이 고용하여 셀리의 뒤를 쫓다가 황무지까지 들어온 자였다. 처음에 장찌엔이 보상해줄 막대한 대금에 기뻐했던 것도 잠시. 셀리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의 가슴팍에 안겨왔고, 두 사람은 셀리가 몸을 숨기고 있다는 황무지의 바위 틈까지 왔던 것이다. 뭐, 들어오는 데는 하루도 안 걸렸지만, 나가는 데까지는 보름 가까이 걸렸다.

"아이, 잘 뛰네. 우리 다섯 번째 남편."

셀리가 킬킬거리며 담배를 물고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꽤 오래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외모도 괜찮고, 말도 잘 통하고. 혼자 숨어 살던 생활의 낙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는 바위 뒤쪽 땅을 파서 묻어두었던 다른 시체들을 발견했다. 물론, 그걸 셀리에게 직접 이르지는 않았다. 그저 은근히 떠가면서 물어왔던 것이다.

'이전에 왔던 추격자들은 없었어?'

별거 아닌 물음이었지만, 셀리는 그 질문이 이르는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와의 관계가 끝물에 다다른 것이다. 사내는 셀리를 데리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려 했고, 그녀는 그와 함께 마시는 마지막 보드카에 약을 탔다. 심장이 쥐어짜듯 빨리 뛰고, 결국에는 숨이 막혀 죽어버리는 약.

투욱.

겨우겨우 도망치던 남자가 결국 힘 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셀리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앗.

그리고서 총을 챙겨 들고 그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기름지고 윤기나던 풍성한 금발은 사라진 지 오래다. 황무지의 거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휩쓸고 지나갔다.

"흐음. 흠흠."

셀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눈을 뜬 채 엎드려 죽어있었다. 셀리는 총구로 그의 볼을 꾹꾹 누르더니, 이내 눈물을 터트렸다.

"나쁜 놈!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바위 뒤는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바보 같은 놈! 결국 이렇게 될거였으면 나한테 마음 주지 말지! 개새끼!"

실연 당한 듯한 울먹임과 달리, 그녀의 발길질은 꽤 거칠었다. 이미 힘 없이 뻗어버린 사내의 뒤통수를 무자비하게 밟아대며 악을 질러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쉽게 지워졌다. 그녀는 눈물 한 방울을 톡, 떨어트리더니 사내의 오른쪽 발을 질질 잡고 끌었다.

"하아. 우리 남편, 지금까지 끌었던 것 중에 제일 무겁네엥."

흠. 흠흠. 그녀는 긴 시간을 공들여 시체를 보금자리로 끌고 왔다. 역시, 총은 재밌다. 셀리는 총구 끝, 사내의 이름인 것으로 추정되는 각인을 살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처억.

"자기, 얼른 가. 나를 잊고서, 살아가! 나는 자기를 죽이고 싶지 않아!"

셀리는 허공에 총구를 겨누며 방금 있었던 일을 재연했다. 아까는 분명 '아, 알겠어. 알겠다고, 젠장할!' 따위의 대답이 들려왔지만, 지금은 적막했다. 아, 좋아라.

"보자. 그러면, 이번에는 어디부터 정리해볼까?"

그녀는 소매를 걷고서 침낭 빝에 두었던 단검을 꺼냈다. 몇 번의 사용으로 이미 날이 무뎌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둘러봤다. 세상일이라는 게 말이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하긴, 열아홉, 그 어린 나이에 장찌엔의 애인이 될 줄도 누가 알았던가? 지네 볶아 먹는 아시안 늙은이······.

푸욱!

셀리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사용했다. 이미 여기서 세 명의 추격자를 만났으니, 이제는 이동할 때가 된 것 같다. 망할 놈들. 다 똑같다. 장찌엔도 그렇고, 그놈의 사주를 받고 달려드는 작자들도 죽어 마땅한 놈들이다. 등신들. 그래 놓고 조금만 안기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헤벌레 웃지. 살아있을 가치도 없다.

푸욱! 푸욱!

그녀는 피범벅이 된 손바닥을 목덜미 이곳저곳에 문질러댔다. 햇빛이 뜨거울 때는 이렇게 피를 묻혀주는 것이 좋다. 마을 근처에는 강이 있으니까, 그걸 따라서 다시 동쪽으로 이동해야겠다. 가다가 순진한 카우보이 한 명 만나면 참 좋겠네.

"흐음. 흠흠."

셀리는 다시금 콧노래를 중얼거리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추격자가 또 올 것이라는, 확신은 언제나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

맥드란은 작고 한산한 마을이었다. 오가는 여행객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주민들로만 이루어진 공동체다. 그러니, 재이 일행이 당도했을 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놀랍게도, 작은 마을에 우편국이 있었다.

"이만한 마을에도 배달부가 있네."

"원래 맥드란 마을 위쪽으로 철길을 깔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합의가 잘 안 되었는지, 더 위쪽으로 올라가 철길이 놓였지요. 아마 한창 논의될 때 마을에서 세운 곳일겁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지는 모르겠군요."

하트먼은 지도 뒤에 적힌 자그마한 메모를 읽으며 설명했다. 새크라멘토를 떠나기 전, 재이와 리베로는 물자를 수급하고, 하트먼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맥드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여행객이신가?"

우편국 앞에 앉아있던 사내들이 넌지시 말문을 건네왔다. 호기심과 함께 경계하는 인사였다. 재이는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고,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람을 좀 찾고 있습니다."

"음? 사냥꾼?"

"맞긴 한데, 이번에는 그런 일이 아니라서요. 여자를 찾고 있는데, 보신 적 있으십니까?"

"보자. 아아."

사내들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더니, 셀리의 사진을 뚫어지라 살폈다. 그들은 뭔가를 알 것 같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전에 그 남자랑 같이 온 여자 같지?"

"그랬나? 나는 못 봐서 몰라."

"모자를 깊게 쓰고 있어서 여자인지 아닌지도 몰랐다며."

"아니 근데, 눈매가."

"아아, 얘는 마을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거든. 얼마 전에 한 남자가 여자를 데리고 왔다 했는데, 그 애기를 하는 것 같네."

"그게 언제였죠?"

"일주일 안 됐지, 아마."

재이는 자신의 발치에서 뻗어나가는 금빛 아우라를 가만히 지켜봤다. 마을을 벗어나서 저 멀리, 동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저쪽으로 가면 황무지인데······.

"계산 할 때 잠시 속닥거리며 얘기하길래 쳐다봤는데, 아니, 눈이 정말 아름답더라고. 나는 보석을 박아넣은 줄 알았어. 반짝반짝하니, 아주 크고."

"그러니까, 이 여자 맞다는 말이죠?"

"의상이 많이 달라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맞을 걸세. 살면서 그렇게 예쁜 여자는 우리 마누라 말고는 못 봐서."

"하이고, 지랄! 이놈 또 도박으로 말 날렸구먼?"

"아니야, 진짜야. 우리 마누라 예뻐."

"내가 인마, 아는데!"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웃자, 재이는 하트먼과 리베로를 돌아봤다. 잘 찾아온 거 맞지? 라는 눈빛이다. 사실 재이는 금빛 아우라가 보이기 때문에 셀리를 쫓는 것에 확신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니었다. 신뢰를 주기 위해서, 그리고 잠깐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마을에 들린 것이다.

"황무지로 바로 나가기에는 먹을 것이 거의 다 떨어졌는데요. 하루 정도 쉬었다 들어가는 건 어떻습니까?"

"나도 찬성. 이제껏 달려온 게 있는데, 하루 쉰다고 멀리 안 가. 동키 놈 박자가 엉망이라서 허벅지 아파."

푸헤엥?

동키가 잇몸을 드러내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재이는 알겠노라 이르며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을에 딱 하나 있는 선술집이자 여관이 가까웠다. 가게 주인은 세 사람을 반기며 인사했다.

띠리잉-

"아이고, 오랜만에 오는 손님이군요. 며칠 묵으십니까?"

"하루면 됩니다. 말은 밖에 묶어두었고요. 아, 그리고 그 전에-"

스윽.

재이는 여관 주인에게 셀리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는 잠시 눈을 꿈뻑거리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눈알을 돌려댔다.

"이, 이, 여자 찾으시는 겁니까?"

"뭔가 아시는 것 같네요."

"맞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현상금 걸려있는 거 맞죠? 미친년이었다니까!"

주인은 잇새로 빠르게 중얼거리며 팔을 털어댔다. 소름이 끼친다는 듯.

"언제였더라. 보름 전이었나. 돈 없는 대신 일이라고 하겠다 해서 하룻밤 재워주고 먹여줬거든요. 근데 미친 것이 우리 집 고양이를 죽였지 뭡니까."

"고양이요?"

"일곱 살이나 먹은 놈이었는데, 하이고. 진짜. 내가 기가 차서는 원."

"왜 죽였는데요?"

재이는 셀리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며 물었다. 겉으로만 보면 곱게 자란 부잣집 아가씨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랐으며, 고양이를 죽이는 일 따위 전혀 하지 못할 것 같이 생겼다. 물론, 장찌엔의 애인이었다는 점에서는 조금 의외성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미친년이 고양이를 만지고 싶었나봐요. 근데 걔가 사람 손을 잘 타거든요. 우리 가족 아니면 등을 내주질 않아요. 자고 있는 놈 건드려서 성질을 돋구았으니, 놈이 손등을 할퀴었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죽였대요. 미친년이지, 진짜. 내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열이 뻗쳐서 잠이 안 옵니다."

주인장이 발까지 쾅쾅 굴려대며 울분을 토해냈다. 재이 일행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이런 성정이면, 지금껏 그녀를 찾았 떠났던 추격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예측 가능했다.

"그래서요? 그 다음은 어찌 되었습니까?"

"뭐, 당장 꺼지라고 밖으로 내쫓고, 침 좀 뱉어주었지요. 크흠. 그리고 이건 마을에서만 은근히 떠도는 소문인데······."

주인은 목소리를 낮추며 주위를 살폈다. 가게 안에는 술에 취한 몇몇 노인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언덕 위로 올라가면 양 세 마리를 기르는 집이 있어요. 거기 남자가 그 여자한테 홀랑 넘어가서는 집을 나갔다고 하네."

"정말요?"

"아내가 말문을 열지 않으니 다들 쉬쉬하기만 하는데, 거의 기정 사실이지. 소문이 이렇게 돌고 있는데도 찾아 나서거나 그런 게 없잖아. 여자 왼팔이 부러졌다는 걸로 봐서, 몸싸움 하고 집 나간 게 틀림없어요."

지금껏 만났던 인간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것 같았다. 뭐랄까. 좀 더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며, 다른 의미로 거칠다고 해야 하나. 재이는 문득, 장찌엔에게 셀리가 정확히 어떤 여자인지는 못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방 하나 주세요."

"아, 예예. 그렇게 하지요. 목욕은요?"

"괜찮습니다. 일찍 떠날 거라서."

"창문 있는 방이랑 없는 방, 딱 두 개가 있거든요. 아, 근데 그······. 창문 있는 방은 좀 더럽습니다. 그 미친년이 썼던 방이거든요."

주인은 열쇠 두 개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원래 손님도 잘 없고, 그 와도 여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대충 넘어가곤 했는데 손님들은 다 아시는 것 같아서. 하핫. 창문 없는 방은 좀 작거든요. 그래서 선택 하셔야 할겁니다."

"우선 한번 볼게요."

재이는 열쇠를 받아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주인의 안내대로, 왼쪽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

나무 벽과 바닥이 검으로 긁어낸 것처럼 파여 있었고, 나무 안쪽이 드러난 곳은 얼룩이 묻어있었다.

"아."

고양이 피였다.

EP126. 셀리를 찾아서

EP126. 셀리를 찾아서

"장찌엔 취향도 특이해."

리베로는 땀에 절은 양말을 침대 머리에 말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얼굴이 예쁘기로서니, 하는 짓을 보면 현상금 수백 달러 걸려있는 무뢰배들과 진배 없는 작자다. 그런 여자를 애인으로 두는 것도 모자라, 도망쳤다고 돈과 시간을 쏟아 부어 찾아대다니. 만약 자신이었으면 '아이고, 고마워라!'를 외쳐대며 동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을 터다.

"미인이긴 하잖아."

"헉. 김재이. 정신 똑바로 차려. 너 그런 여자랑 만난다고 하면 인생 얼마나 고달파지는 지 알아? 네가 서부에서 제일 가는 총잡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머리에 총알 맞고 죽을 거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예쁘니까 좋아하는 거 아니겠어? 객관적으로도 미인은 맞잖아. 하는 짓도, 객관적으로는 사이코고."

"내일 몇 시쯤 떠납니까?"

"음. 아침 일곱시 좋겠네요. 요기만 가볍게 하고 바로 달리죠."

재이는 그리 이르며 작은 지도를 꺼냈다. 마을 인근을 표시한 지도였다. 새크라멘토에서 구한 것은 아니고,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여 간단히 약도를 그린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쓸모 없을만큼 간단한 지도였으나, 재이에게는 상관없었다.

사아악.

그저 금빛 아우라가 어떤 식으로 이동하고 있는지, 어디쯤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확인하면 되니까. 재이는 금빛 흔적이 강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축척을 모르니 얼마나 강에 가까운 건지는 모르겠네.'

하트먼은 총기를 점검하며 물었다.

"죽이면 안 되죠?"

"물론. 무조건 생포. 아니면 오히려 장찌엔이 화낼지도 몰라."

"하긴. 애인 찾아오라 했는데 죽여서 데려가면 경우가 아니긴 합니다. 근데 대충 얘기 들어보니까 성격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줄이라도 준비할까요? 여차하면 묶어서 제압해야 합니다."

"네. 그게 좋겠네요."

"흐합!"

리베로는 침대에 대자로 뻗어서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혹시 총 들고 있으려나?"

"그러지 않을까? 지금까지 총 들고 찾아간 남자가 몇 명인데."

"그럼 재이 네가 앞장 서라."

"지금까지 그래왔잖아. 새삼스럽게."

총을 쏜다면 그걸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재이밖에 없다. 하트먼도 뭐, 실력이 좋긴 한데. 재이만큼은 아니니까.

똑똑.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내었다. 목욕물도 필요없고, 식사도 다 하고 올라왔는데, 주인장인가? 하트먼이 문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저 손님이 찾아왔는데요."

"손님이라니? 누구?"

주인장 맞다. 그는 조금 난감한 목소리로 세 사람을 불러댔다.

"언덕 위에 산다는 그, 여자 말입니다."

남편이 셀리를 따라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리베로는 상체를 일으켰고, 재이는 다시금 총을 집어 허리에 찼다.

"마을이 좁아서 소문이 금방금방 돌거든요. 아 글쎄 할 일 없는 작자들이 그 사이 가서 말을 전했나 봅니다. 부인이 꼭 좀 뵙고 싶다고,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어찌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거절할 필요는 없지? 오히려 따지자면 셀리에게 악감정이 있는 자니까, 그들을 도와줄지도 모른다. 허락이 떨어지자, 계단 밟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하트먼은 의아하게 허공에서 손을 멈칫거리더니, 재이를 돌아보며 웃었다. 문이 안 잠기는 구조였나 보다.

"······실례합니다."

"안녕하세요."

"늦은 밤 죄송합니다. 근데 내일 일찍 가신다는 말을 들어서요."

"아닙니다. 괜찮으시면 들어오시죠."

리베로는 후다닥 널어두었던 양말 따위를 거두어 가방에 넣었고, 부인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어색하게 의자에 앉더니, 손끝을 뜯어댔다.

"들으셨을지는 모르겠는데, '그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저희 남편이 실종되었거든요."

주인장은 남편과 셀리가 눈 맞아서 떠났다고 하던데, 부인은 조금 다르게 믿고 있나 보다.

"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여자가 남편의 호의를 이용해서 죽인 것 같아요. 혹시 잡게 되면, 남편에 대해서 알아봐주실 수 있나요? 이름은 케인입니다. 행방을 찾아주신다면 더더욱 좋고요."

"아······."

뭐,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상황을 전해주고 간다는 게 귀찮을 뿐. 강쪽으로 갈 것이라서 물도 충분하고, 무엇보다 먹을 것도 배낭에 가득했다.

"사례는 물론 드릴게요."

"아닙니다. 대신 잠깐 고민 할 시간 좀 주시겠습니까?"

돈 줘봤자 얼마나 주겠어? 이렇게 작은 동네에서 염소 키우며 사는 여자가. 재이는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고, 대신 다시금 지도를 통해 동선을 확인했다. 조금 애매했다.

"남편 분을 찾으면 집으로 가라 하지요. 다만, 돌아와서 직접 말씀을 전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아, 저기-"

부인이 다급하게 재이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더니, 꽤 두툼한 주머니를 내어놓았다.

"헛간 수리를 하려고 틈틈이 모아두었던 돈이에요. 적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나, 아주 혹시나요. 남편을 만나게 되면······."

부인은 작게 속삭였다. 누군가 들을 일 없지만, 굉장히 조심하는 투로.

"죽여주시겠어요?"

"네?"

순진해 보이는 부인의 눈매가 가볍게 깜빡거렸다. 놀란 하트먼이 담배를 떨어트릴 뻔했고, 리베로도 놀라서 코를 훌쩍였다. 그녀는 검지 마디로 눈물을 찍어 누르며 중얼거렸다.

"어린 나이에 그 남자 하나만 믿고 시집 왔는데, 하루 아침에 젊고 어린 여자에 홀려서는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도 다 되었다며 때려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데요. 집과 양들이 남편의 몫이라 그럴 수가 없네요. 확실히 매듭짓고 싶습니다."

말로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매듭을 단단히 짓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복수심이 분명히 느껴졌다. 재이가 할 말을 잊고 잠시 멈칫거리는 사이, 리베로가 그녀의 주머니를 낚아챘다.

타앗!

"물론입니다, 부인. 그런 시발 새끼는 죽어 마땅하지요. 혹여 죽어있다면 시체에다 침이라도 뱉어주겠습니다."

뭐하냐? 재이가 쳐다보자, 리베로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어차피 넌 이런 푼돈 관심 없잖아. 내가 단독으로 처리할게. 네 일정에 방해 안 되게."

"할 수 있겠어?"

"어허. 이래 뵈어도 원조 불렛킬러는 나라고."

"뭐래. 사기꾼이."

총알을 총알로 맞추는 퍼포먼스는 자신이 먼저하지 않았나? 리베로가 자신만만하게 이르자, 재이는 어이없어하며 콧방귀를 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인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선생님들만 믿고 있겠습니다."

"아, 그 여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저는 본 적 없고 마을에서 떠도는 소문만 전해 들어서요. 근데 남편의 마지막 말로는-"

부인은 기억을 더듬었다. 뭔가에 흥분한 듯 상기된 얼굴. 그는 다급하게 옷가지 몇 개를 챙기더니,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을에 나타난 여자가 길안내를 해달래. 돈을 준다고 하니까 다녀올게. 뭔가 좀 있어보여. 향기가 아주 달작지근하니 좋더라고. 곁에 딱 가는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 정도야. 뭐야, 그 눈초리는? 질투해? 웃기지 마. 그런 거 아니니까. 아무튼 다녀올게. 기다리지는 마.'

"호오."

리베로는 남편의 마지막 말에 감탄하며 박수를 쳐댔다. 황무지에서 객사했다 하더라도 동정할 수 없는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부인은 꽤나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거렸고, 이내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얼마입니까?"

"왜? 하트먼, 너도 하게?"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

"보자, 흐음. 21달러."

조금 애매하지만, 솔직히 적당한 금액이었다. 재이 옆에 붙어 다니면서 수백 달러니, 수천 달러니 귀동냥해대는 탓에 기준이 높아진거고. 특별히 이름 날리지 않는 해결사에게 의뢰한 것이라면, 뭐.

"안 도와준다."

"예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이미 그 남자, 죽었어."

"어떻게 알아?"

"이런 여자는 후환을 남겨두지 않거든."

죽은 사람 죽여달라는 의뢰라니. 이 얼마나 횡재인가! 리베로는 지폐와 동전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세며 만족스레 웃었다. 하트먼은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재이는 남편이 남긴 말을 곱씹었다.

'달짝지근한 향기라. 흐음.'

***

해가 뜨자마자 세 사람은 따뜻한 감자 수프로 허기를 달랜 후 여관을 떠났다. 그들이 갈 길은 너무도 명확했다. 재이는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고, 내달리는 오닉스의 발걸음은 점점 속도가 붙었다.

타닥타닥!

"이쪽으로 계속 가면 됩니까?"

"네. 강이 나올 때까지요."

재이의 대답에 하트먼과 리베로는 서로를 추월하며 시원하게 바람을 갈랐댔다. 동키의 다리가 짧았지만, 그래도 신나게 따라 붙으며 연신 콧소리를 내었다.

"저기!"

"강 보인다!"

조금 앞서가던 두 사람이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수심이 그리 깊은 강은 아니었다. 폭은 20m정도. 재이는 강 쪽으로 뛰어들려다가, 문득 흔적이 희미해진 것을 확인했다.

"워워!"

히이잉!

잘 내달리던 오닉스가 천천히 속도를 늦췄고, 덩달아 하트먼, 리베로도 멈춰서 재이를 돌아봤다.

"왜 그래?"

"강을 안 건넜네?"

"뭐가? 그 여자가?"

"어."

금빛 아우라가 강 건너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 말인 즉, 여자는 강물을 타고 내려갔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는 건데······.

'혹시 모를 추격자를 따돌리기 위해서인가?'

재이처럼 기현상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면, 사냥개나 다른 추격 방법을 사용했을 터. 그랬더라면 분명 물가 인근에서 냄새가 끊어졌을 것이다. 셀리는 그걸 노리고서 강을 타고 사라졌다.

"그럼 이제 어떡해?"

"잠깐만."

물길 위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도가 있다. 재이는 품 안에서 지도를 꺼내 방향을 가늠했다. 셀리는······.

"하류로 갔네."

"물길 따라 내려가면 돼?"

"그래."

"아니, 근데 저걸 대체 어떻게 알아? 너 악마한테 영혼 팔았지?"

"왜? 너도 팔고 싶어?"

으으. 리베로는 질색하며 먼저 하류로 내려갔다. 재이도 다시 출발할 준비를 했고, 하트먼은 그런 그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한두번이 아니긴 했지만, 역시 볼 때마다 그의 능력은 놀랍다.

타닥타닥!

촤아악!

말들이 수심 낮은 쪽을 골라 딛으며 강을 타고 내려갔다. 얼마나 갔을까. 재이는 지도를 계속 확인하며 셀리의 위치를 살폈고, 이제 다 왔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어!"

앞장 서던 리베로가 소리쳤다.

"셀리다!"

여윈 말을 타고 천천히 달리고 있는 금발의 여인. 여자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아.'

세 명이네. 한 명이면 어떻게 구워 삶을 수 있는데, 세 명은 무리다. 드디어 장찌엔 멍청한 노인네가 머리를 쓰기 시작했구나! 셀리는 말의 옆구리를 차대며 속도를 냈고, 몸을 돌려 장총을 꺼냈다.

철컥!

"야!"

리베로가 기겁하며 입을 벌렸다. 아차. 재이를 앞장 서게 했어야 하는데! 그가 당황하는 순간, 셀리는 망설임 없이 총을 갈겨댔다.

타앙! 탕! 타앙!

"리베로!"

연달아 터지는 총성. 하지만, 멀쩡했다. 눈을 질끈 감았던 리베로가 슬그머니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달리던 중이라서 그런가?

타앙! 탕! 탕!

셀리는 계속해서 총을 쏘아댔고, 리베로는 황당하게 제 몸을 살폈다.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리베로는 깨달았다.

"재이! 얘 총 존나 못 쏘네!"

EP127. 저주 받은 실력

EP127. 저주 받은 실력

리베로의 외침에 셀리의 미간이 짙어졌다. 지금 누구보고 총을 못 쏜다는 거야? 죽여버릴라!

타앙! 탕!

그녀는 허리춤에 묶어두었던 권총 두 자루를 꺼내 리베로에게 사정없이 갈겨댔다. 뭐, 당연히 정확도가 낮아질 수는 있겠지. 달리는 말 위였고, 그녀는 평생 찻잔 외에는 무거운 걸 들어본 적 없는 가녀린 팔을 갖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거리가 가까워지면 말이 달라지지 않겠어? 제대로 맛 좀 봐라!

타아앙! 탕탕!

리베로는 사납게 터지는 총성에 몸을 움츠렸지만, 그뿐이었다. 역시나, 자신에게 날아와 박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리베로는 확신이 든다며, 로프를 꺼냈다.

"재이! 잡을까?"

"그래!"

"젠장! 미친 놈들아아! 꺼져어!"

"미친 건 너겠지!"

셀리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다급하게 말의 옆구리를 차댔다. 안 그래도 강 한가운데였고, 곳곳에 난 바위 때문에 달리는 게 쉽지 않았다. 리베로는 포획용 로프를 크게 흔들더니, 셀리에게 내던졌다.

촤아악!

하지만 아깝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거리 계산과 던지는 힘이 어긋났다. 셀리는 자세를 낮추고서 주위를 둘러봤다. 강을 계속 타고 달리는 게 좋을까, 아니면 물가로 나가서 따돌리는 게 좋을까. 이쪽까지 내려온 적은 없는지라, 지형을 알 수 없어 판단하기 어려웠다.

"뭐해?"

"아씨, 쉽지 않네!"

"제가 해보겠습니다!"

재이가 리베로를 타박하자, 하트먼이 자세를 낮추고 셀리 옆으로 따라 붙었다. 대각선 방향으로 따라잡자, 셀리는 눈매를 날카롭게 뜨며 하트먼을 경계했디. 총구가 반대쪽에서 그녀의 옆구리를 타고 넘어와 하트먼을 노렸다.

철컥!

히이잉! 타앗!

그때, 말이 바위를 뛰어 넘기 위해 크게 도약했다. 순간 셀리의 긴 머리칼이 휘날리며 희멀건 얼굴이 햇빛을 그대로 받아냈다. 하트먼은 로프를 던지기 위해 준비했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이상하게 달짝지근한 냄새가 확 풍겨온 것이다. 설탕을 끈적하게 녹인 것 같기도 했고, 끈적한 꿀이 떠오르는 냄새이기도 했다. 하나 확실한 건-

"우웁!"

너무 과하여 속이 울렁거릴 정도라는 것. 하트먼은 로프 잡은 손으로 말 고삐를 잡고서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속을 게워냈다. 리베로는 '시발 저게 뭐람' 하는 눈빛으로 하트먼을 쳐다봤고, 셀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심드렁한 눈빛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히이잉!

하트먼의 말이 앞발을 크게 들었다. 말에 맞은 것은 아니고, 놈이 디딜 바위를 때려 맞춘 것이다. 놀란 말이 흥분하여 몸체를 반대로 돌리자, 하트먼의 몸도 크게 흔들렸다.

"등신! 뭐해?"

"죄, 죄송합니다! 우웁!"

"술도 안 먹었으면서!"

"그게 아니라, 냄새가-"

"냄새? 무슨?"

리베로는 알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워낙 어릴 때부터 누이들과 함께 술집을 드나들었던 리베로였다. 어지간히 독한 향수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고, 어지간히 두꺼운 화장도 그의 눈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왜 자꾸 따라와!"

"그러는 넌 왜 자꾸 도망가는데?"

"내 맘이다, 젠장!"

타앙!

"총알 아까우니까 그만 좀 해라! 살다살다 너같은 애는 처음 본다!"

셀리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재장전을 해댔다. 하트먼이 정신을 겨우 차리고 고개를 들자, 바로 뒤에서 바짝 다가오는 재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총을 사용할 수 없으니, 재이도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는 가만히 도망치는 셀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오닉스만 몰아대고 있었다.

'희한한 능력이네.'

물론, 재이는 셀리의 능력을 파악 중이었다.

-저주 내린 사격 실력

당신의 사격 실력에는 저주가 깃들었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로는 절대 상대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생물 전체에 해당하며, 예외가 없습니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버리는 게 좋습니다. 기대가 높아질수록, 당신의 실망은 더욱 깊어지게 될 것이니까요! 가능하다면 총이 아닌 다른 무기로 승부를 보세요! 서부에서 그것이 어려운 일임을 알기에, 특전이 있습니다.

-원하는 상대를 모두 홀리는 매력(특전)

이것은 비단 외모에 국한 된 스킬이 아닙니다. 상대방은 당신의 몸짓, 손짓, 그리고 의미 없이 던진 대화에 깊은 의미를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알지 못하는 페로몬이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우선 상대의 적의를 풀어보세요. 그렇다면 거의 높은 확률로 상대를 당신의 포로로 만들 수 있습니다. 페로몬은 당신이 즐겁거나, 행복할 때 더욱 많이 나오니, 언제나 그런 상태를 유지하세요! 물론, 그렇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슬프거나, 분노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었을 때도 페로몬은 언제나 나옵니다! 대신, 당신과 같이, 상대를 조금 힘들게 만들거예요. 조심하세요!

그 밑에도 몇 가지 스킬이 있었으나 말이 크게 흔들리는 탓에 쉽게 읽히지 않았다. 재이는 강가 옆으로 길게 뻗은 협곡을 보고서 지형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꽤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안 되겠네.'

슬슬 마무리 짓는 게 좋겠다. 리베로는 계속해서 의미 없이 로프를 던져댔고, 하트먼은 셀리에게 접근만 했다 하면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해댔다. 재이는 로프를 가볍게 휘둘렀고, 리베로에게 소리쳤다.

"리베로! 비켜!"

"어?"

촤아악!

리베로가 고삐를 우측으로 틀자, 재이의 로프가 아주 빠르게 날아들었다. 저 뒤에서 던진거면서, 어떻게 저리 시원하게 날아가지? 그것도 곧게!

"······!"

셀리는 자신의 머리 위로 내려오는 로프를 보고서 입을 천천히 벌렸다. 뭔가 이상했다. 자신은 계속 달리고 있는데, 저 로프가 계속 따라오는 기분이었다. 서서히 힘을 잃고 늘어지는 게 정상 아니던가? 그런 의문을 머릿속에 품는 순간-

꽈악-!

쉬이이익!

셀리의 팔과 몸통이 로프로 묶이자, 오닉스가 급하게 멈춰섰다. 그러자 반작용에 의해 그녀의 몸이 부웅 떠올랐고, 그녀의 말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계속 앞으로 내달렸다.

첨벙-!

셀리의 몸은 무자비하게 강물로 처박혔다. 꼬르륵, 고작 무릎까지 오는 높이였건만, 얼굴이 아래로 내려간 데다 팔이 묶여있어서 쉬이 자세를 바로잡기 어려웠다. 발버둥 칠 때마다 로프가 더욱 세게 조이는 느낌이다.

솨아악!

그런 그녀를 끌어올린 것은 리베로. 머리채를 잡은 채 얼굴을 물 밖으로 빼냈다. 셀리는 숨을 헐떡이며 물을 토해내더니, 이내 짜증스러운 신음을 흘려댔다. 강물에 피가 조금씩 스며들었다. 낙마하면서 충격에 어딘가 쓸린 듯 싶다.

"잡았다. 미친년."

"······하아, 하아."

"재이! 하트먼!"

"그래, 그래."

하트먼은 반다나로 코를 가리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이도 혹시 몰라 소매를 들어올렸다. 두 사람 다 이상하게 다가오자, 리베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예상했던 곱상한 아가씨라기 보다는 똥간 치우다 도망친 하인 같기는 한데, 그 정도 냄새는 아니지 않나? 게다가 방금 물 속에 한번 들어갔다 나와서 괜찮을 건데.

"리베로, 너 괜찮아?"

"나? 뭐가?"

"그, 냄새가 좀 납니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향수를 잔뜩 뿌렸나 봅니다. 독해서 머리가 어지러운데요."

"그래? 아, 그래서 토했어?"

"갑자기 훅 올라와서······."

파훼법이 적혀있지 않았다. 최대한 냄새를 조심하는 수밖에. 재이는 우선 그녀의 어깨를 잡아 물가로 데려갔고,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무릎부터 종아리까지 길게 베어있었다.

"아씨······."

"대충 묶지."

"대충 묶긴 뭘 묶어? 치료 제대로 해줘야지!"

셀리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방금까지 도망쳤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데리러 온 경호원 취급을 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장찌엔이 자신을 죽여서 데려오라 할 리 없었으니, 거기서 나오는 자신감인 듯 싶다.

"지금은 치료제가 없습니다."

"미친 것들.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 뭐? 치료제가 없다고? 너희 장찌엔이 보낸 놈들 아니야? 나를 이꼴로 만들어 놓고 그냥 넘어갈 것 같아?"

떽떽거리는 목소리가 아주 우렁찼다. 리베로는 천을 들고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재이. 천은 이거 하나밖에 없는데, 다리 묶는 게 나을까? 입 막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딴 짓 하기만 해봐! 내가 장찌엔에게-!"

"막자."

"오케이."

재이의 허락이 떨어지자, 리베로가 셀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저항이 세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방도가 없다.

"읍! 읍읍!"

"대충 실어서 가자고. 여자가 탔던 말은?"

"보이지 않네. 하트먼 뒤에 실을까? 동키는 작아서."

"아, 냄새가······."

"괜찮아. 내 뒤에 실어."

리베로와 하트먼은 셀리를 오닉스 위에 올려놨다. 팔은 묶었지만, 다리는 묶지 않았다. 어차피 로프가 오닉스와 연결되어 있었고,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릴 정도로 멍청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돌아갈까?"

"이보시오들! 잠깐만!"

그때였다. 언덕 위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던 상단인 것 같은데, 다들 의아하게 재이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총을 든 사내들과 흠뻑 젖은 채 재갈 물린 아름다운 여인이라······.

"뭐합니까?"

"별거 아닙니다. 갈길 가십시오."

"별거 아닌 게 아닌데? 왜 여자를 그리 다루시오?"

"의뢰를 받아 수행중이니, 가십시오."

"의뢰? 현상금 사냥꾼인가? 그럼 저 여자는 수배자고? 수배 전단지를 보여주시게."

"······."

하씨. 저것들이 왜 저래? 재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속내는 훤히 보였다. 셀리의 외모만큼은 상당히 아름다웠으니, 그녀를 데려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게 의협심 혹은 개인적인 욕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랄 말고 꺼져."

처억.

재이가 총을 들어올리며 위협했다. 상대는 네 명. 그리고 재이 쪽은 세 명. 인원 수는 비등비등 했으나, 위치 선정이 달랐다. 위쪽을 선점한 자들은 씨익 웃으며 마찬가지로 총을 꺼내들었다.

"아가씨, 우리가 금방-"

타앙!

퍼억!

말 꺼내기 무섭게 고개가 뒤로 꺾이는 사내. 재이의 총이 놈의 머리통을 꿴 것이었다. 그들은 놀라서 대응 사격을 시작했고, 아주 잠깐의 전투가 이어졌다. 하트먼과 리베로는 그저 눈 먼 총알에 맞지 않기 위해 언덕 가까이 몸을 붙일 뿐이다.

"아."

셀리도 데리고 와야지. 리베로가 그리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반지를 반대로 돌려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로프를 끈어낼만한 날카로운 무언가가, 거기에 달려있다. 이는 장찌엔이 그녀의 호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준 것이었다.

"재이!"

휘익!

철컥!

재이가 위쪽 상대를 모두 정리함과 동시에 셀리가 재이의 허리 쪽에서 리볼버를 꺼내 그의 머리통을 겨누었다. 총구와 머리가 딱 붙어있다. 쏜다면 무조건, 무조건 재이는 죽게 되리라. 그녀는 재이의 귀에 바람을 넣으며 속삭였다.

"등- 신."

그리고 철컥! 방아쇠를 당겼다.

"······?"

하지만, 격발되지 않았다. 재이의 리볼버에는 총알이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이는 아마 그녀의 스킬 능력이 만들어낸 상황일 터다. 재이는 총구를 잡고 내리며 뒤를 돌아봤다.

"등신은······당신이 아닐지?"

EP128. 조선 음식

EP128. 조선 음식

셀리는 코를 훌쩍이기만 할 뿐, 어떠한 말썽 없이 오닉스 등에 잘 '묶여'있었다. 팔과 다리를 단단히 결박한 것만이 아니라, 아예 몸통 전체를 미라처럼 로프로 돌돌 만 것이다. 이대로 떨어지면 분명히 목이 부러지거나, 말 뒷말에 얼굴이 걷어차일 게 확실했으니, 셀리는 몸부림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물론, 그녀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하고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지만.

"저기이."

콧바람에 애교를 넣어 말을 건네도 리베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세이렌을 대하는 것 같다. 재이는 동키를 몰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봐아. 왜 대답이 없어?"

"의미 없이 부르는 거잖아."

"아닌데."

리베로는 셋 중 셀리의 페로몬 능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하여, 큰 말인 오닉스를 내어줘서 셀리 이송을 맡게 했고, 재이는 동키를 몰게 된 것이다. 하트먼은 저 멀리 앞서가서 말을 몰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오는 냄새를 맡지 않기 위해.

'희한하네.'

사무실에서부터 리베로는 셀리 같은 여자를 싫어한다고 말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그녀의 능력이 안 통할 줄은 몰랐다. 호색한 중의 호색한, 자유분방한 아랫도리의 소유자이지 않나? 지금껏 그와 붙어먹은 상대들을 떠올려 봤을 때, 사실 셀리와 대적할만한 인물이 없었다.

'대체 무슨 스킬 때문에 셀리의 것이 무력화 되는 것일까.'

흐음. 저건가?

-확신의 센터

어느 곳을 가나, 그 누구를 만나나 당신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고, 여인의 입술을 훔치는 건 술잔을 기우는 것보다 가벼운 일이지요. 즐기세요! 그리고 운명을 어지럽히세요! 당신을 두고 일어나는 모든 다툼에서 멀리 도망치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 앞에서는 매력적인 자가 될 수 없고, 당신도 그걸 지켜보고 있지 못할 겁니다. 언제나 확신의 센터 자리에 서세요! 그곳이 당신의 자리랍니다.

등신 같은데, 아무래도 저게 맞겠지? 향기가 독하지 않냐는 하트먼의 질문에. 리베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누이들 향수가 워낙 독해서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어렸을 때, 누이들은 향수를 직접 만들어서 썼거든. 무슨 말인지 알지?'

전문가의 영역인 조향을 민간에서 이것저것 잡다하게 섞었을 때 어떤 부작용이 일어났겠는가? 또 그녀들은 리베로에게 맡아보라며 얼마나 닦달을 해댔겠는가? 리베로는 과거의 그 일 때문에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능력을 보니 이유는 조금 달랐다.

'셀리가 리베로보다 매력적인 인물이라서 그렇다.'

남녀를 떠나, 매력으로 우위를 점하는 상대는 항상 있기 마련이다. 리베로는 본능적으로 셀리의 능력을 감지했고,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에게 적대를 느낀 것이다. '그 누구도 당신 앞에서는 매력적인 자가 될 수 없고'라는 문구 덕분에 스킬이 무력화된 것 아닐까?

"왜들 내 말 안 들어줘!?"

세 명 다 각자의 이유 탓에 셀리의 말을 무시했더니, 그녀가 참지 못하고 벌컥 소리를 질러댔다. 광활한 곳인지라, 소리는 바람을 타고 쉽게 흩어졌다.

"나 원래 살던 곳, 거기에 장찌엔이 준 반지를 두고 왔다니까! 가는 길에 그것 좀 들고 가자고! 맨몸으로 가면 그 영감탱이 진짜 나를 죽이려 들거야!"

"장찌엔이 준 반지?"

"그래. 다이아몬드 알이 이만해."

셀리는 혀를 앞니로 살짝 깨물며 다이아몬드 크기를 알려줬다. 하는 짓이 하나부터 열까지 참······. 재이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 집어 치우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반지라면 계속 끼고 있었겠지. 도망치는 입장에서 돈 되는거라면 뭐든 걸치고 있어야 하니까. 근데 그걸 은신처에 두고 왔다?"

"마지막으로 나 찾아온 남자. 그러니까, 너희들 바로 직전에 날 찾아온 추격자가 있었어. 그놈 때문에 도망치느라 뭘 챙겨오지 못했어! 정말이야!"

"진짜든 아니든 상관없어. 반지 좀 없어도 안 죽으니까."

대신, 뭐, 좀 얻어 맞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건 반지 때문이 아니다. 예상하건대, 장찌엔은 반지 따위 까마득하게 잊었을 것이다.

"하씨. 진짠데······."

셀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중얼거렸다. 어쩌지? 대체 어떻게 하면 이놈들에게서 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말을 섞는 건 고사하고,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지금껏 왔던 놈들과는 완전히 다른 놈들이다. 장찌엔 시발 영감탱! 이번에는 돈 좀 썼나 보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진짜배기들이 왔다.

"장찌엔에게 말하면 똑같은 걸로 새로 사줄거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우린 이미 길 지나왔어."

"무슨 길?"

"네 은신처."

"하! 내 은신처가 어디인 줄 알고?"

황무지 한가운데 바위 틈을 파서 만든 굴이었다. 그런데 뭐라고? 거길 지나왔다고? 자신도 거기가 어디인지 잘 모르는데, 뭔 개소리!

"우리는 북쪽으로 꺾어서 가고 있거든. 모르겠으면 그냥 입 다물고 잠이나 자. 새크라멘토까지는 금방이다."

"새크라멘토?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우리는 거기서 왔거든. 장찌엔도 거기 있어."

지도 한가운데서 반짝이는 무언가. 바로, 셀리가 말했던 자신의 보금자리였다. 금빛 아우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뭔가 있긴 있다. 그녀가 말한 반지가 아니더라도, 재이에게 도움되는 것이.

'시체들이겠지.'

셀리에게 길안내를 해주겠다고 떠난 남자의 시체부터, 그녀를 쫓다가 매혹 당한 추격자들의 시체가 인근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단순히 숫자를 세어도 다섯 이상. 그 정도 살인이라면 당연히 현상금을 붙이기에 충분했고, 특히 장찌엔과의 관계나 아름다운 외모 등의 이슈로 높은 현상금이 책정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재이는 딜을 할 수 있다.

'현상금이 걸린 셀리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또 명성과 자금을 얻을 수 있겠지.'

다섯 명을 죽인 세기의 미녀. 어느 시대나, 아름다운 여자에 대한 잣대는 가혹하고, 날카로우며, 집요했다. 분명 셀리는 서부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가십 살인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됐다. 됐어.'

귀찮게 뭐 그런 일을 하겠나? 지금 그는 셀리를 무사히 잡아다 줌으로 얻을 게 있다. 그깟 돈 몇 푼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귀중한! 재이는 동키의 옆구리를 쳐댔고, 동키는 신나게 오닉스를 앞찌르며 질주했다. 새크라멘토까지, 최대한 쉬지 않고 달릴 예정이다.

***

타닥타닥!

느지막한 오후. 호텔 로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찌엔이 급하게 뛰어나왔다. 문을 직접 열었던 것인지, 벨보이가 황당한 시선으로 그를 지켜봤다. 그 뒤를 우르르 따르는 장찌엔의 식구들. 사람들은 중국인 갱단들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거나 몸을 숨겼다. 평화로워진 새크라멘토였지만, 또 언제 피바람이 불어닥칠지 모른다.

"어서!"

"예, 서두르겠습니다!"

장찌엔은 마차를 타고서 급하게 문을 두드려댔다. 그들은 큰길을 내달려 재이의 사무실에 당도했다. 그간의 기다림이 정말 괴롭고 힘들었는데, 딱 열흘 만에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재이 일행이 셀리를 데리고 복귀하였노라고.

쿵! 쿵쿵!

"이봐! 나다! 장찌엔!"

장찌엔은 잠긴 사무실 문을 연달아 두드려댔고, 이내 안쪽의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재이가 그를 맞이했다.

"와. 미쳤네. 저 방금 사람 보냈는데."

"셀리는?"

"잘 데리고 왔습니다."

"셀리!"

스윽.

장찌엔이 연인의 이름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재이가 돌돌 만 신문으로 가볍게 저지했다. 그는 셀리를 데리고 있는데, 장찌엔은 빈손이었다. 우리, 약속한 게 있지 않나?

"남의 집 찾아오면서 빈 손이면 어째요?"

"그쪽이 원하는 건 다 구해놨어. 지금 부하들이 그걸 가지러 갔다. 조선인 요리사가 직접 관리하고 있거든."

"조선인 요리사?"

"이제 좀, 응?"

"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게 분명해 보였다. 재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몸을 비켜줬고, 장찌엔은 후다닥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셀리가 소파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새초롬하게 눈을 뜨더니, 눈썹을 매혹적으로 까딱거리며 웃었다.

"자기, 안녕."

"너, 너-!"

장찌엔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몸을 덜덜 떨어댔다. 혹여 여기서 난장판이 일어나면 말려야지, 리베로와 하트먼 그리고 아리스까지 긴장한 채로 장찌엔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바로 셀리 쪽으로 뛰어가더니-

"자기야!"

흐어엉! 체면 구기는 것도 모르고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기쁨은 눈물을 뚝뚝 흘려대는 것 아닌가. 재이를 비롯한 사무실 식구들이 황당하여 그대로 굳어버렸다. 장찌엔의 부하들은 익숙한 일인지 그저 박수만 쳐대며 형님이 연인과 재회한 것을 축하했다.

"어디 갔었어어! 말도 없이 사라지고! 죽고 싶어?"

"아니. 그러니까, 내가 걔 싫다고 했잖아. 그때 말했을 때 죽여줬으면 이런 식으로 가출 안 했지."

"한번만 더 도망치면 진짜 알아서 해. 평생 목줄 매고 살 줄 알아."

"아이참, 농담도."

"으허어엉. 돌아와줘서 고마워."

살벌하고, 경악스러우면서도, 조금은 애정 섞인 대화가 오갔다. 맨정신으로는 차마 못 들어주겠다. 재이는 문을 틀어 막았던 것과 달리, 반대로 문을 활짝 열고 부탁했다.

"의뢰대로 셀리 데려왔으니까, 이제 좀 나가주지? 피곤해서 말이야."

"어허! 김재이! 불렛킬러!"

장찌엔은 그제야 재이가 생각났다는 듯, 그에게 다가와 어깨를 와락 붙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껴안기를 반복했다. 중국인들 특유의 감사함을 표시할 때 나오는 몸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흥분하여 중국어로 무어라 무어라 떠들어대는데, 거기까지는 알아들을 길이 없다.

"고맙다는 말이지?"

"암! 그럼! 그대는 내 영원한 은인이자, 친우요!"

"언제부터······."

"바로 지금부터지!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그 어느때든 연락하시게. 내 대인의 명예를 걸고 그대와의 우정을 지키도록 하지. 고맙네, 고마워!"

셀리는 이제 그만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재이를 스쳐지나가며 속삭였다.

"······죽어버려."

나를 영감탱에게 데려오다니.

재이는 그녀를 돌아봤다. 그녀는 장찌엔을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녀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다시 사랑에 빠진 척을 하게 될 것이다. 재이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대꾸했다.

"미안하게 됐군. 다음에 도망치면, 그때는 잡지 않겠어."

"꺼져."

"잘 가라고."

셀리는 재이를 바라보던 냉랭한 시선을 거두고,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장찌엔을 쳐다봤다. 그는 연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서 밖으로 나갔다.

"참, 약속했던 것은 금방 올걸세! 맛있게 먹으라고!"

"고맙군."

"별 말씀을! 또 보지!"

콰앙!

장찌엔은 인사를 급히 남겨두고서 서둘러 마차를 타고 떠났다. 그리고 잠시 후. 장찌엔의 부하들이 상자 두어개를 들고서 사무실을 찾았다.

투욱,.

"······이게 다 뭐야?"

"무. 배추. 그리고 이건 조선에서 사용하는, 뭐라더라?"

"아무튼, 그쪽이 이른 것들이요."

재이는 덤덤한 시선으로 채소와 식재료들을 눈으로 훑었다. 난생 처음 보는 모양의 재료들. 모두, 개량 전 식자재들이었다. 재이는 이마를 감싸며 앞으로 상체를 숙였고, 그때 누군가 그에게 말을 붙여왔다.

"조선 음식 구하신다고 해서······. 아, 저는 조선에서 온 청이입니다. 여기서는 렌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고요."

EP129. 렌

EP129. 렌

아리스를 선두로 하여, 재이와 리베로가 주방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은밀히 지켜보는 행동은 같았지만, 명백히 의도가 달랐다. 아리스는 낯설지만 맛있는 냄새에 대한 강력한 호기심. 재이는 익숙한 음식 냄새가 조금씩 풍겨오는 것 같다는 기대감. 그리고 리베로는-

"예쁘네."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의 여자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싶은 감탄이었다. 또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군. 재이는 눈을 잠시 흘겼다가 렌의 요리를 구경했다.

탁탁탁!

도마를 치는 칼 소리가 일정하고 듣기 좋았다. 감자와 당근이 채로 썰렸고, 기름 잔뜩 두른 웍에 같이 넣고 볶아대며 소금을 쳐대기 시작했다. 렌은 머리를 하나로 단단히 묶고 소매를 걷은 모습이었는데, 어쩐지 서부의 요리사에게서는 볼 수 없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뭐랄까. 거꾸로 걸려있는 돼지 뒷다리를 그 자리에서 잘라 구워 먹는 놈들과는 격이 다르다고 해야하나. 아리스도 그걸 느꼈는지, 눈에 반짝임이 깃들었다.

"냄새가 참 희한합니다. 같은 재료를 사용하는데요. 아! 저건 뭐죠?"

"고추일걸? 아마."

"먹어본 적 있으세요?"

"음. 아마?"

"다 아마래······."

아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툴툴거렸으나, 재이는 진짜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고추는 고추인데 자신이 먹어보았던 것들과 같은 맛이 날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렌은 감자와 당근을 익히는 와중에도 무와 배추를 손질하여 물에 헹구기 시작했다.

"혹 원하시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말씀해주십시오."

렌은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일렀다. 재이는 조선 음식이 먹고 싶다 하였지만, 서부에서 나고 자란 자가 조선 음식에 호기심을 갖고 있다는 건, 계기가 될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렌은 자신이 갖고 온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항아리를 꺼냈다.

"······!"

헉! 물김치다! 재이는 감격하여 입을 틀어 막았고, 리베로는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문틀에 몸을 반쯤 기댔다.

"렌 아가씨는 어쩌다 여기까지 왔대? 들어 보니 조선이라는 나라는 뱃길로도 몇 달씩 걸린다던데."

"수십 일이었지요. 몇 달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칼 같기도 해라. 나는 그런 여자가 좋더라."

엥? 웬 등신? 렌이 질색하며 뒤를 돌아보자, 재이가 대신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리베로의 볼을 잡아당겼다. 지금 재이에게 저 여자는 새크라멘토 시장보다 중요하고 귀한 사람이다. 어디서 감히 심기를 어지럽히려고!

"아아!"

"미안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요. 조선에서 나고 자랐더니 아직도 이런 문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조선에서 저런 말을 대놓고 하는 건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거라서."

"여기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오신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이제 햇수로 3년 되어가는군요."

"아. 그렇구나."

렌은 묵묵히 음식을 볶고, 지지며 덧붙였다.

"함경의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랐는데, 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요."

아버지가 무역 일을 하셨던 것인지, 아니면 범죄를 저질러 도망쳤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풍류를 즐기기 위해 떠도는 삶을 선택하였던 것인지, 렌은 설명하지 않았다. 체념이 깃들어 있는 말투였다. 원망이 빛을 바라고, 시간에 희석되어 완전히 사그라든 사람만이 이를 수 있는 말투.

"팔자가 기구하여 정신 차리니 배 위에 있더군요.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함경의 촌 것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왕보다 먼저 보았으니까요. 우스운 일입니다."

타앗.

렌은 그리 이르며 국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만들어진 음식을 덜어내더니, 식탁에 조촐한 밥상을 차렸다. 재이가 원하던 쌀이 아니라는 걸 알고, 콩을 잔뜩 섞어 밥을 지었다. 그리고 감자채 볶음과 자신이 직접 담갔던 물김치, 나물볶음, 고등어구이까지 차려대니 그럴싸한 식사가 완성되었다.

"앉으시지요. 숭늉을 내어드리겠습니다."

"하, 이게, 이게 진정한 오마카세지."

"일본어를 하십니까?"

렌이 의외라며 솥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아리스와 리베로도 신기해하며 가까이 다가왔지만, 차마 한입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재이의 눈이 촉촉해지고, 입가에 침이 잔뜩 고여있었기 때문이다. 재이는 경건한 마음으로 밥을 한입 떠먹었다.

"······!"

미쳤다. 한입 먹은 재이의 눈이 크게 튀어나왔다. 분명히 개량 전 음식임에도 재이가 그리워했던 그 어떤 맛이 났다. 자신도 모르게 왈칵, 코 끝이 찡해진 재이는 정성껏 음식을 씹어 넘겼고, 이내 고삐 풀린 말처럼 흡입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라. 안 뺏어 먹으려니까."

"그렇게 맛있으십니까?"

"아리스, 미안해. 먹어보라고 하고 싶은데 참을 수가 없네."

"아니요,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저, 너무 행복해보이셔서요. 그냥 물어본 것입니다."

유학이나 이민 간 사람들이 향수병을 느낄 때, 제일 쉽게 위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한식이라 하지 않나? 재이는 그 말을 뼈저리게 느꼈다. 서부시대의 고단한 일상들이 한 순간에 씻겨내려가는 기분이다. 렌은 그의 앞에 따뜻한 숭늉을 내어주며 웃었다.

"처음 먹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신가 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 먹을 리 없지. 맛의 유무를 떠나서 말이다.

"진짜 맛있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맛있게 드시니 저도 보람있군요. 장찌엔 쪽 제안을 받길 잘 했습니다."

"제안이라니요?"

"별건 아니고, 소정의 수고비지요. 제가 사는 곳에서 거리가 좀 멀거든요. 갈까 말까 했는데, 돈을 떠나 이리 조선 음식을 좋아하시는 분이었다면 고민하지 말걸 그랬습니다. 더 드십시오. 아주 많습니다."

사실 렌은 식탁에 내온 것 외, 남은 것을 모두 싸갈 생각이었다. 재료도 재료고, 괜히 번잡스럽게 집에서 또 요리할 필요가 없지 않나? 하지만 재이가 먹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모두 남겨주고 가기로.

"그럼 렌 씨는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해?"

"······그것이 왜 궁금하십니까?"

"나는 렌에 대해서는 뭐든-"

퍼억!

아리스가 리베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쳐대며 작작하라 말려댔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서더니, 부탁했다.

"혹, 괜찮으시면 요리법을 알려주고 가실 수 있나요? 제가 여기 식사 담당인데, 고용주께서 저리 좋아하시니 종종 해드리려고 합니다."

"아. 알려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쉽지 않을 거예요. 부차적인 재료가 있어야 그 맛들이 나는지라. 우선은 적어드리지요."

"고맙습니다!"

괜찮다. 재이는 양배추에 토마토소스를 발라준 것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었다. 아리스가 기뻐하며 방방 뛰자, 렌은 희미하게 웃었다. 함경에서 살 적에, 그녀에게도 저만한 동생이 있었는데······.

타앗.

그때, 재이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 사이 밥 한 그릇을 비운 것이다. 너무도 놀라운 속도에 렌과 아리스가 멈칫거리며 돌아봤다.

"후식 있습니까?"

"수정과와 곶감이 있습니다."

"최고군요. 진짜 최고입니다."

"아, 위에 단 것을 뿌려드릴까요?"

"그대로 주십시오. 있는 그대로."

재이는 렌이 내어준 후식까지 단번에 해치우고서 만족스럽게 이마를 문질러댔다. 행복해서 미칠 것 같다. 정말 별거 아니게 여겼던 일상이 이렇게도 큰 행복이었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식단 조절이고 나발이고 밥 좀 많이 먹어둘 걸 그랬다.

"남은 것은 정리해서 보관해놓겠습니다. 이른 시일에 먹어야 탈이 없습니다. 부지런히 드십시오. 그리고-"

"아리스입니다."

"네. 아리스 씨. 메모지가 있을까요? 적으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여기 있습니다!"

렌은 주방을 정리하며 아리스에게 요리법을 간단히 일러주었다. 하지만 설명이 덧붙여질수록, 아이의 표정이 미세하게 난감해졌다.

"그러니까, 이걸 땅에 묻으라고요?"

"예. 독 같은 걸 구하면 좋겠지만, 어려울 것입니다. 밀폐가 잘 되는 것이면 상관없습니다."

"머, 먹는 것인데요? 그걸 땅에 묻어도 됩니까?"

"조선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아······."

"괜찮습니다. 문화적으로 이해 안 되는 부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 곶감은 바람과 볕이 잘 드는 곳에 말리는 것 맞고요?"

"네. 육포 말리듯이요."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 했다. 렌은 대충 정리가 끝난 것 같자, 앞치마에 손 물기를 닦으며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차 시간이 있어서요."

"아, 저기!"

재이는 잠시만 기다려 보라는 듯 일어서더니, 서랍장으로 가서 지갑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팁을 두툼하게 건넸다.

"아, 너무 많이 주시는데요. 일당이 10달러였습니다."

"괜찮아요. 많이 받으셔도. 진짜 맛있었어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렌은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더니, 빠르게 사무실을 떠났다. 아무래도 집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장찌엔이 붙여준 마차가 큰 길을 떠나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고, 그 모습을 세 사람이 지켜봤다.

"와, 진짜······."

재이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그 뒷말을 완성하는 리베로.

"탐난다."

그래. 탐난다는 말이-

"뭐?"

"진짜 아름답지 않아? 난 살면서 저렇게 아름답고 신비한 여자는 처음 봤어. 요리 하는 모습은 뭐랄까. 신성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던데!"

재이는 어이없다는 듯 눈매를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도 반박할 수 없었다.

"뭐······."

다른 의미도 탐이 났으니까! 렌을 옆에 두면 조선 음식을 마음껏, 하루에 세 끼 씩 꼬박꼬박 챙겨 먹을 수 있지 않나? 돈도 있겠다, 전용 요리사로 채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고용해서 돈 아끼지 말고 재료 사다 줄터이니, 밥 먹고 잠 자는 시간 외에 계속 요리만 하라고 부탁하고 싶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리베로가 뭔가를 결심한 듯, 웃옷을 챙겨 들고 나서려고 했다. 재이가 그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타앗!

"왜 이래? 말리지 마."

리베로는 재이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챘다.

"너, 너, 설마-!"

너도 렌 씨를 마음에 두었던 거냐! 리베로가 환장하겠다는 듯 뒤로 물러서자, 재이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고용해야겠다."

"고, 고용?"

"모셔와야겠어. 이거 한번 먹어서 달래질 게 아니네. 오히려 한번 맛 봐서 더 힘들어질 것 같아. 오닉스도 같이 내와."

누가 보면 고향 음식이라도 먹을 줄? 리베로가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 쳤지만, 재이의 말대로 동키를 내오며 오닉스도 데리고 왔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말에 올라타서 렌이 사라진 쪽으로 달려갔다. 놓치게 되면, 장찌엔 쪽으로 가서 그녀에 대해 수소문해야 할 터다.

타닥타닥!

"아! 재이 님! 리베로 씨!"

"아리스? 요리사는?"

"아, 방금 갔는데······."

2층에서 쉬고 있던 하트먼이 계단을 내려오며 물었다. 아리스는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거렸고, 주방으로 달려가 남은 음식을 조금 맛 봤다.

"······!"

난생처음 먹어보는 맛. 아리스는 놀라워하며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 입 집어 먹었다. 그리고 또 한 입······

EP130. 샌프란시스코로

EP130. 샌프란시스코로

마차가 크게 흔들리자 렌은 가방을 끌어안았다. 여기서는 구하기 힘든 조선의 장이나, 자신이 직접 만든 조미료 등이 들어있었다. 혹여 문제가 생겨 깨지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니, 렌은 갓난아이를 품에 안 듯 가방을 보호했다. 그리고 마부석 창문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이보십시오. 마차가 왜 이리 흔들립니까?"

"바퀴가 헐거워서 그런가봅니다. 어쩔 수 없으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여기서 멈추면 위험해요."

마차는 그 사이 새크라멘토 외곽지로 들어섰다. 이곳에는 인생 갈 때까지 간 부랑자, 신분 숨긴 수배자, 술에 절은 도박꾼, 정신 나간 마약쟁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근면하게 땀 흘리며 광산으로 출근하는 중심지와 달리, 서부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소. 렌은 바람 속에서 섞여 들어오는 불쾌한 냄새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조심히 몰아주세요."

"저도 그러고 싶군요."

마부의 말대로 이런 곳에서 멈추면 더 위험할 것이다. 조금 멀리 나가서 바퀴를 재고정하는 것이 나을 터. 마부는 최대한 해보겠다며 어깨를 으쓱거렸고, 렌은 다시금 가방을 조심히 안았다.

쿠궁! 쿵!

끼이익! 끽!

하지만 젠장할. 오래 가지 않아 문제가 확실히 생겨버렸다. 바퀴 한쪽이 나가버린 것이다. 마차는 크게 흔들리며 반 바퀴 옆으로 돌았고, 렌은 비명을 삼키며 몸을 벽에 바짝 붙였다.

"······!"

다행히 뒤집히지는 않았다. 말도 놀란 기색이 있었지만, 딱 그것뿐. 렌은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고, 마부는 난감하다는 듯 머리를 긁어댔다.

"사람을 불러와야겠는데요."

"무, 무슨 사람이요?"

"무슨 사람은요. 마차 들어줄 사람들이지요. 혼자서 바퀴 못 끼웁니다."

주위에 사람이······.

"아."

있긴 있는데 상태들이 영 아니었다. 술에 취해 난간에 기대 있는 자들 반이고, 눈빛이 영 불안한 자들 반이었다. 렌은 가방을 들고서 마부를 따라 나서려고 했다.

"저도 같이 가요."

"둘 다 가면 말은 누가 봅니까? 금방 와요. 아까 지나온 모퉁이, 그쪽에 작은 잡화점이 있었으니까. 사람을 모을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저기-!"

"바로 저기예요. 저기."

마부가 손가락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정말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혹여 두 사람 다 움직였다가 누군가 말을 훔쳐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진짜 꼼짝없이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괜찮아요. 눈이 있으면 이게 장찌엔 마차라는 걸 알고 있을 거니까."

툭툭! 마부는 보란 듯이 마차 옆의 문양을 두드렸다. 중국인 갱단 중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김재이와 같은 존재다. 그 누가 감히 장찌엔의 마차를 함부로 건드린단 말인가? 마부는 걱정하지 말라며 후다닥 모퉁이 쪽으로 달려갔고, 렌은 혼자 남아 주위를 경계했다.

'으으.'

진절머리가 난다. 이런 분위기. 그녀가 청나라로 옮겨갔을 때부터, 항상 그녀의 주위에는 술 취한 사람이 즐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음식을 만드는 것인데, 조선의 어린 아이에게 주방을 내어주는 곳이라고는 싸구려 술집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음식을 술과 함께 먹었고, 렌은 그것이 싫었다. 술맛에 음식 고유의 풍미가 잡아먹혔을 게 분명하니까.

"장찌엔 마차! 입니다! 이게······."

하하. 하하하······. 렌은 아무렇지 않은 척 주위를 둘러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몸을 숨기며 사는 수배자들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서 다가오는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여어. 뭐야. 왜 여자랑 말이 여기 길가에 떡하니 서 있지?"

"무슨 일 있어? 아가씨?"

술에 취한 부랑자들은 상황이 달랐다. 그들은 놀랍게도, 장찌엔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하루하루 술에 절어 지금이 봄인지 여름인지도 구분 못하는 작자들이었기에, 장찌엔이라는 중국 갱을 알 리 없었다.

"장찌엔? 그게 아가씨 이름이야?"

아시안 이름 느낌이 나니, 그저 렌의 이름인가보구나 하고 수작질을 걸 뿐. 렌은 가방을 끌어 안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장찌엔, 모르세요?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주, 아주 힘 있는 갱인데."

"모르겠는데. 힘은 나도 좋아."

"아. 진짜."

지랄 났네, 짜증나게. 렌은 손끝을 덜덜 떨면서도 그리 생각했다. 여차했다가는 가방에 둔 식도를 꺼내는 수밖에 없겠다. 저놈들도 특별히 총이 있어 보이지는 않으니까.

"가던 길 가세요."

"아니, 우리가 길을 가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아시아에서 왔지? 뭐 빌어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기어들어와?"

"킬킬! 금 찾아서 왔다가 저리 된 거겠지. 가방은 뭘 그리 소중히 들고 있어?"

"이거 놓고 가라고요!"

누군가 렌의 가방을 거칠게 확 잡아 당겼다. 그녀는 있는 힘껏 저항했으나, 사내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니, 허구헌 날 술만 처 먹어서 앙상한데, 대체 이런 힘이 어디서 나는지 모르겠다. 렌이 황당하고, 당황하여 잠깐 '아차'하는 순간.

타닥타닥!

멀리서 말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가방 입구가 열리며 안에 있던 것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장 따위를 담아두었던 작은 도자기가 바닥에 굴러 깨졌고, 신문지에 싸 두었던 식재료도 나뒹굴어 흙투성이가 되었다. 렌이 놀라서 손을 뻗으려고 할 때였다.

히이잉!

거칠게 다가온 말 한 마리. 용맹한 울음 소리에 비해 다리가 짧았다. 동키였다. 리베로는 총 뒤편으로 부랑자의 머리를 후려쳤고, 그는 속절없이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쓰러졌다.

"아아악!"

"이게, 감히 어딜!"

"뭐하자는 거야!"

"그러는 너희들은 뭐하자는 건데?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한테 그러고 싶어?"

"뭐라는 거야, 미친 놈이. 입에 버터를 처 발랐나."

부랑자 떼가 짜증스럽게 윽박지르며 달려오려 하자, 뒤에서 장전음이 들려왔다. 함께 온 재이였다. 그는 모두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얼굴을 보여줬고, 총구를 까딱거렸다.

"질서 유지하세요."

"부, 불렛 킬러?"

"잠깐! 잠깐만이라고! 우리는 총이 없어."

"그래서 저도 안 쏘고 있잖습니까."

술에 반쯤 절어있던 부랑자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발음을 똑바로 해댔다. 재이는 두 번 경고는 없을 거라는 뜻으로 방아쇠에 손을 걸었고, 그들은 모두 뒷걸음질치며 단숨에 달아났다.

"아이, 짜식들."

리베로는 멀리 도망치는 놈들을 지켜보다가, 아주 멋드러진 자세로 착지하여 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자 꼬실 때 주로 사용하는, 오른쪽 눈 살짝 뜨기도 시전했다. 렌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다치신 곳은 없으시고요?"

"네. 저는 크게 문제가 없는데······."

"헉!"

문제라 하면, 바로 깨져버린 장독. 리베로는 엉망이 된 바닥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렌도 렌이지만-

"이-"

재이의 반응이 더 난리였다. 눈앞이 핑 도는지, 눈을 감고서 잠시 비틀거리는 것 아닌가. 하긴, 자기 같아도 아끼는 위스키가 바닥에 처박혔다 생각하면 저런 반응이 나올 것 같긴 했다. 렌은 쪼그려 앉아서는 장을 살폈다. 혹여 위에 것을 겉어낼 수는 없을까 싶은데······.

"젠장."

그냥 흙바닥이 아니다. 말들의 똥과 천지 분간 못하는 머저리들의 배설물, 음식물 쓰레기, 오수 따위가 섞인 바닥이다. 도저히 살려낼 방도가 없자, 렌은 이마를 짚으며 한탄했다.

"아까워라. 저놈들 크게 혼내줄 걸 그랬습니다."

"되었습니다. 사람 목숨이 귀하지요.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저를 쫓아 오신 것입니까?"

"아. 그것이-"

"할 일은 다 했는데요?"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하고 왔건만, 무슨 볼일이 있다고? 렌이 찢어진 가방을 돌돌 말아 옆구리에 말았다. 다행히 재이가 챙겨준 돈은 안주머니에 있어서 털리지 않았다.

"할 일을 너무 잘 하셔서, 제안하러 왔습니다."

"무슨 제안이요?"

"전담 요리사가 되어주셨으면 해서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으로 원래 받는 월급의 두 배를 드리고 보너스로 세 배까지 맞춰드리죠."

"네?"

느닷없는 제안에 렌이 황당하게 되물었다. 조선 음식을 뭔 놈의 서부인이 이렇게 좋아한단 말인가?

"죄송한데, 저는 조선 음식만 잘 합니다. 이쪽 음식은 손에 익지도 않고, 제 간에도 안 맞아서 영 별로더군요."

"네. 괜찮습니다. 그런 요리는 아리스가 할거라서요. 아까 그 아이, 아리스."

"······제가 한 달에 얼마나 버는 줄 아시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많이 버세요? 솔직히, 음. 제 제안이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는데."

갱단화 되지 않은 아시아 여자가 서부에서 살아가려면 얼마나 궂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지, 겪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렌은 잠시 고민하다가 옷을 털며 대답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합니다."

"왜요? 더 드릴게요! 진짜로. 계약서도 쓰고요. 물론, 재료비는 따로 제가 부담하는 쪽으로."

"그게 문제가 아니라-"

렌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오물과 섞인 장을 가리켰다.

"지금 당장 갖고 있는 건 저게 다라서요."

"마, 말도 안 돼요."

"말이 안 되긴 왜 안 되나요. 여기는 조선이 아니에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낙담하던 재이는 렌의 말에서 잠시 희망을 살폈다. '지금' 당장 갖고 있는 건 저거라고? 그렇다면 나중에는?

"또 담글 수 있죠?"

"담글 수는 있는데, 저 혼자서는 못하고요. 가족들 도움이 필요해요."

"가족들?"

됐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식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경제력에 대한 갈망이 깊어질 것이다. 지금 렌이 망설이는 무언가만 해결하면, 재이는 렌을 전담으로 고용할 수 있다. 세상에 그런 말이 있지 않나?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제일 쉬운 일이라고.

"네. 그리고 약값 벌려고 잠시 나온 거라 돌아가야 해요. 여러모로 사정이 안 되겠네요. 우선 돌아가고 나서, 제가 상황이 괜찮아지면······."

렌은 몰려든 구경꾼 사이 잡화점 쪽에서 나온 사람들이 섞여있다는 걸 알아챘다. 목에 앞치마를 걸고 있었던 게다. 마부가 분명 그쪽으로 갔으니, 저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저기!"

"음?"

"마부가 바퀴 고치려고 사람 구하러 갔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 있나요?"

"아. 그 양반? 아까 소란 일 때 튀었는데?"

"뭐라고요?"

부랑자 떼들이 렌에게 몰려들자 아차 싶어서 먼저 도망간 것이다. 마차와 말도 버리고. 아마 시내로 가서 보안대를 불러오려고 했겠지? 그 사이 렌은 어찌 되든 상관 없고. 렌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황당하게 바퀴 빠진 마차를 보고 있자, 재이가 이때다 싶어서 끼어들었다.

"그, 가족들 보러 가야한다고요."

"네?"

"샌프란시스코. 혼자 가려면 좀 힘들건데, 데려다 줄까요?"

"그, 왜요?"

"왜긴요?"

간 김에 조선 음식 있으면 좀 얻어오고, 렌 고용을 위해 가족들 설득하려고 그러지. 재이가 그리 이르려고 하자, 리베로가 확 끼어들며 느끼하게 중얼거렸다. 렌의 손등을 꼭 붙잡은 채.

"아리따운 아가씨가 곤경에 처했는데, 신사된 자로서 어찌 그냥 지나가겠습니까?"

윽. 재이와 렌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렌은 선택지가 딱히 없다는 걸 알고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P131. 빈민굴의 정육점

EP131. 빈민굴의 정육점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는 대도시라는 관점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었으나,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내었다. 광산업이 발달해 있고, 철도와 산림업이 부가적으로 발달한 새크라멘토와 달리, 샌프란시스코는 바다를 끼고 있는 터라 해운업이 발달해 있었다. 세계 각지의 희귀한 물건을 나르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골드러시의 꿈을 안고 온 사람들을 나르는 배였다.

"와씨."

바다를 처음 본 리베로의 눈이 반짝였다. 눈동자에 윤슬이 비친 것인지, 아니면 놀라움에 눈이 뜨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거대한 배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고, 피곤함에 절은 사람들이 제 몸만 한 가방을 들고 내렸다.

"이쪽이에요."

"리베로."

"어, 어어. 알겠어. 와, 세상에. 진짜 크다. 재이, 넌 바다 본 적 있어? 반응이 왜 이리 시원찮아?"

"바다 본 적 있지."

해수욕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바다라고 하면 모래사장도 있고 좀 여유로운 분위기가 기본 아니던가? 한데, 이곳은-

"언제?"

"옛날에. 바다라기보다 해변을 본 거지만."

"이건 해변이 아닌가?"

"선착장이잖아. 전혀 달라."

녹슨 쇳덩어리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뭐인지 감도 안 오는 기구들이 바쁘게 왔다갔다 거렸다. 이끼는 또 얼마나 많은지. 자칫 잘못하여 발 디뎠다가는 미끄러지기 일쑤다.

쿠웅!

바로 앞에 가던 저 사람처럼. 하지만 렌은 아주 익숙하다는 듯 가파른 계단을 탁탁 치고 내려갔다.

"집이 이런 곳에 있어?"

"왜요?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아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래서 말은 여관에 두라고 한 거예요. 여기는 말들이 들어올 수 없거든요."

리베로는 난감해하며 잠시 멈칫거렸지만, 이내 렌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굴에 또 다른 도시가 들어서 있었다. 판자를 대충 엮어 만든 지붕은 양호한 편이었고, 대부분은 천 따위를 대충 쳐대어 햇빛을 가리는 것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이제 막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민자들이 주로 묵다 가는 공간이다. 누군가는 며칠만에 떠나고, 또 누군가는 몇 십년이 걸리는 게 차이지만.

"처음 샌프란시스코에 왔을 때, 정말 놀랐어요. 아니 사람들 사는 굴이 어쩜 이리 밑에 있지? 정말 놀랍지 않아요? 미국의 기술이요."

"그렇긴 한데."

"새크라멘토에도 이런 건 없잖아요. 대부분 대지에서 지내지. 뭐.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그런거겠지만요."

새크라멘토에서 렌을 호위하여 달려온 지 사흘째. 그들은 세 번의 낮과 밤을 함께 지냈지만, 아직도 좀 데면데면 했다. 아니, '그들'이 아니라, 리베로와 렌 사이가 그럴 것이다. 재이는 뭐, 고용만 할 수 있다면 렌과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니까.

타닥타닥!

집에 가까워지자, 렌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질은 흙이 여기저기 튀겼고, 알 수 없는 고함과 괴성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녀가 멈춰선 곳은 미로같은 골목 한 가운데. 옆으로 돌아보니, 낡은 유리문 하나가 나 있었다.

"산니! 나 왔어!"

쿵! 쿵쿵!

"렌이라고. 돈 벌어왔으니까 어서 문 열어."

그러자, 안쪽에서 우당탕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아이들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나! 왔어?"

"생각보다 늦었네?"

"일이 좀 있었거든."

"돈은 받았고? 어떤 미친 놈이 아시안 음식을 먹고 싶어 했대? 혹시 시한부 부자 영감탱 아니야? 죽기 전에 전 세계 음식 전부 먹어보고 죽자 한 거지."

"언니 피곤하겠다. 얼른 들어와. 할아버지는 방금 잠드셨어."

열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조잘조잘 떠들어대다가, 리베로와 재이를 발견하고 동시에 멈췄다. 합! 하고 입을 모은 것이 새끼 제비들 같다. 리베로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이내 놀라서 후다닥 안으로 도망쳤다.

"애들이 낯을 많이 가려서 그래요."

"동생들인가요?"

"피는 안 이어져 있지만, 식구죠. 여기 올 때 한배를 탔던 가족들이 모여 살고 있어서요. 집세도 아끼고, 뭐 겸사겸사 일손이 필요해서."

"이런 집에도 집세를 낸다고요?"

"세금도 내는걸요? 들어올래요?"

렌은 두 사람을 안내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천장에 닿을 것 같다. 어둡고, 습한 내부로 들어서니 더더욱.

"렌. 저 사람들은?"

"사정이 있어서요. 우선 이거 갖고-"

렌은 재이가 주었던 팁 10달러를 한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당부했다.

"먹을 거랑 아버지 약 사서 쓰세요."

"세상에. 장찌엔 님이 돈은 진짜 시원시원하게 쓰는구나. 일당도 따로 줬잖아."

"아, 그건 장찌엔 님이 준 게 아니라요. 저분이."

"저분?"

"조선 음식 먹고 싶다 한 총잡이."

"어머어머!"

아주머니는 당황했는지, 연신 호들갑을 떨어대며 인사했다. 그리고 서둘러 돈을 들고 밖으로 나가며 집안의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귀한 손님이 왔으니까 절대 실수하지 말라며. 렌은 쪽방 문을 열었고, 이내 송장처럼 누워있는 노인 옆에 앉아 허리를 숙였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

"일 잘 마치고 왔어요. 오늘 저녁에는 소고기 죽을 해드릴게요."

노인은 힘이 없는지 눈만 깜빡거리다 말았다. 렌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고, 이내 재이를 돌아봤다. 자, 자신의 사정이 이렇다.

"군식구들이 많습니다. 아버지도 거동이 불편하시고요, 그래서 일자리가 있다 한들 쉽게 이동하지 못했어요. 재이 님이 저를 고용하고 싶다는 말은 감사하지만, 이런 사정이라 수락하기가 어렵네요."

돈을 떠나서,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늙고 병든 아비를 어찌 새크라멘토까지 옮기겠나? 지하굴 입구까지 가는 것도 힘들어서 거금 들여 의사를 불러오는데.

"여기까지 데려다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 염치 없지만,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제가 대접할게요. 여기는 그래도, 조선식 식재료가 좀 있어서요. 저 말고 한마 이모도 조선인이에요."

"한마 이모?"

"아까 나가신. 이모에게 요리도 많이 배웠지요. 지금은 손이 불편하셔서 뭘 제대로 잡지 못하지만."

총체적 난국이군. 재이는 렌의 사정을 바로 이해했다. 돈을 떠나서,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재이는 꼭 렌을 데려오고 싶었다.

"원한다면, 간병인 비용도 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사흘이나 나흘에 한번씩 와서 음식을 만드는 것도 좋겠고요. 번거롭지만, 어쨌거나 렌 씨도 돈이 필요하잖아요?"

렌은 쌀을 씻다가 멈칫거렸다. 그래. 솔직히 서부에서, 아시아인 여자에게 그만한 일거리를 준다는 건 믿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속된 말로, 여관에 출근해도 그만한 벌이는 불가할 것이다. 렌은 쪼그려 앉은 채로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우선 식사하시겠어요? 그동안 고민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저희가 가도 계속 생각하세요. 그리고 언제든지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우편 보낼 돈이 없어서."

다른 도시로 이동할 여력이 안 되니, 재이가 앞에 있을 때 결정을 내려야 했다. 렌은 쌀을 벅벅 씻으면서 침묵에 빠져들었다.

"혹시 오래 걸릴까요?"

"이모가 사올 게 좀 있어서요."

"그럼 잠시 나가있겠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좀 답답하셨겠네요."

"아니오. 돌아갈 때 필요한 물건을 좀 사려고요."

"초행길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얘들아!"

괜찮다고 이르려는 순간, 렌이 안쪽을 보고 소리쳤다. 아까 재잘재잘 떠들어대던 아이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손님들 필요한 게 있으시다니까 안내 좀 해드려."

"네엥."

아이들은 조심히 재이와 리베로를 지나쳐 앞장 서 걸었다. 밖으로 나오니, 숨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다. 그래 봤자 짠내 섞인 진득한 바닷 바람이었지만.

"뭐 사실건데요?"

"말린 고기 같은 거. 새크라멘토에서 왔는데, 오늘 길에 사냥거리가 많이 없더라고."

"아. 말린 고기. 이쪽으로 오세요."

정육점은 어느 도시를 가나 갱단과 연관되어 있었다. 시체를 자르고, 핏물을 제거하기 편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꺼리는 기색 없이 앞다투어 안내했다.

"장찌엔 식구가 하는 곳인가?"

"헉!"

별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그러자 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재이를 돌아봤다. 여기서 어떻게, 감히! 장찌엔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단 말인가? 아이들은 괜히 주위를 둘러보며 혹여 들은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여기서는 그리 무례하게 말하지 마세요."

"무례라니? 내가 뭘 어쨌다고?"

"장찌엔 님 이름을 함부로 불렀잖아요."

"와아······."

그 호색한 영감이 여기서는 절대자나 마찬가지구나. 하긴. 새크라멘토에서도 누군가 재이를 입에 담으면 금방 귀에 들려올 것이었다.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인근에 있는 사람들 선에서 정리가 되었다는 것이고. 아이들이 눈을 부라리며 경고하자, 재이가 알겠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조심해주세요. 그쪽은 떠나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살고 있잖아요."

"그래. 미안."

순순히 사과하자, 아이들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앞서 달려갔다. 리베로는 그 모습을 보며 재이에게 속삭였다.

"애들이 몰라서 참 아쉽다. 장찌엔 그놈, 애인한테 매달리다시피 해서 엉엉 울었다는 거."

"알아서 뭐하겠어. 괜히 눈이나 버리지."

"하긴. 그것도 그래."

"다 왔네. 저긴가 보다."

재이는 정육점 안으로 들어갔다.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했다. 서부에서는 어딜 가나 불쾌한 냄새가 기본이지만, 정육점처럼 특출나게 비리고 짜증나는 곳은 드물었다. 고기를 썰며 담배를 태우던 사장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말린 고기 있습니까?"

"있지요. 종류는? 얼마나 드릴까요?"

"소고기로 주십시오. 주머니 가득."

"85센트입니다."

동전을 세던 재이가 멈칫거렸다. 못 사는 동네치고는 시세가 상당했다. 사장은 싱글거리며 웃었고, 이내 외부인 텍스가 붙었다는 걸 알아챘다. 더럽지만, 뭐, 어쩌겠나? 어딜 가나 외지인 등처먹으려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니. 재이가 지갑을 열어 값을 지불하려 하자, 사장의 눈이 번뜩였다. 두둑한 지폐를 포착한 것이다.

"1달러."

"네?"

"1달러라고요."

"방금 85센트라 하셨잖습니까."

"내가 그랬나? 시세 변동이 좀 심합니다."

"······."

철컥. 문이 닫히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서 창문으로 안쪽을 살폈다. 정육점 구석에서 칼을 갈던 직원들이 사장의 신호를 알아채고 슬쩍 일어났다. 재이는 지갑 속 돈을 헤아리며 중얼거렸다. 1달러라. 이놈들은 분명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 같은데······.

"현지인 친구들이 안내해준 곳인데 실망스럽네요."

"애새끼들이 뭘 알겠습니까. 어른의 사정을."

"샌프란시스코는 원래 이렇습니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예. 원래 이렇습니다."

"지랄맞은 동네군요."

"약자에게는 그런 법이지요. 어딜가나."

재이는 손끝으로 지폐를 헤아리더니, 재빠르게 총을 꺼내 들었다.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 재이가 총구를 사장의 머리통에 들이밀자, 직원들이 외쳤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장찌엔 님이 직접 관리하는 곳이라고!"

그러니까, 허튼 짓 하지 말고 순순히 돈만 내놓고 가라! 하지만 재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방아쇠에 손을 걸었다.

"알아. 그래서 이래도 돼. 장찌엔 영감탱 나한테 빚이 있거든."

타앙!

사장이 틈을 봐서 총을 잡으려 하자, 재이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EP132. 새크라멘토에서 온 손님

EP132. 새크라멘토에서 온 손님

"큰일났어요! 큰일났어요!"

아이들이 골목을 내달리며 주위에 도움을 청했다. 외부인을 데리고 간 적이 없는지라, 정육점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전혀 몰랐다. 그들은 그저, 가끔 불친절하고 거친 동네 아저씨들이었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가리지 않고 칼질을 한다는 점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구석에 숨어 사는 동네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무슨 일인데?"

"정육점에서, 소, 손님을-!"

아마 아이들은 클 때까지 모를 것이다. 정육점 사람들이 아이들을 굳이 건드리 않은 건, 가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말이다. 어른들의 사정. 그게 딱 알맞은 말이었다. 동네에서는 이미 관계가 얽힐대로 얽혀서 정육점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누는 자가 여럿 있었다.

"뭐라는 거람."

"어서 가보세요! 어서요!"

"허참. 일단 가봅시다. 애들이 이렇게 기함을 해대니 원."

길가에 모여 앉아 카드를 치던 사람들이 이때다 싶어 일어났다. 분명히 지고 있던 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어딜 가!'를 외쳐대는 상대방을 무시하며 정육점 쪽으로 달려갔다.

"새크라멘토에서 온 손님이 있는데, 말린 고기가 필요하다고 해서 안내했거든요. 근데 갑자기 칼을 꺼내더니-"

"칼?"

타앙! 탕! 탕!

가까이 갈수록 들리는 것은 총성인데? 사내들은 조심스레 허리를 낮추고 아이들에게 물러나라 손짓했다. 그 누구도 보안대를 부를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이곳은 장찌엔의 구역이었고, 여기서 암암리에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건 알만한 자들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타앙!

끼이익!

마지막으로 들린 총성과 함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돼지처럼 지방이 가득한 남자가 힘 없이 뒤로 널브러지며 문 밖으로 삐져나온 것이다. 그의 머리에는 깔끔하게 구멍 하나가 뚫려있었다. 인도에서 온 이민자들이 미간에 점 찍듯 말이다. 아이들은 놀라서 입을 떡 벌렸고, 사내들은 멈칫거렸다.

"이런, 미친!"

정육점 놈들이 지랄 부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손님 쪽이 문제였어! 사내들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더니, 골목 안쪽으로 달려갔다. 장찌엔의 식구들에게 이 상황을 알려야했다.

"헉. 괜찮아요?"

"어어. 그럭저럭."

"이씨, 김재이! 너 일부러 보란 듯이 쐈지?"

재이는 밖으로 나와 죽은 사내의 얼굴을 발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상처를 통해 피가 울컥 새어나왔다. 죽음을 확실히 확인하는 모습이다. 멀쩡한 재이와 달리, 리베로는 핏물을 뒤집어 쓰고서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아니, 내가 옆에 있는데 그러면 어떡해?"

"뭘 어떡해. 그럼 네가 진작 처리하든가."

"내가 딱 하려고 했는데 네가 잡은 거거든?"

"말은."

"아잇. 피 비린내. 진짜 짜증나네."

끼이익.

아이는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사장을 비롯하여 정육점 안에 있었던 자들 모두 전멸이다. 하나 같이 동네에서는 주름 잡는 사람들인데. 역시 총 앞에서는 장사 없다 이건가. 한 아이가 겁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스윽.

진열대를 열어 싸구려 소시지를 한 움큼 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재이는 총구를 시체의 바지에 닦으며 그걸 지켜봤다. 이때다 싶어 도둑질 하는 아이들의 행동이, 뭐랄까. 황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빨리 챙겨!"

"아니, 잠깐만. 이러면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우리가 죽였어?"

죽인 사람은 따로 있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한 아이의 주머니가 볼록해지자, 다른 아이들도 재이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정육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고기며, 잔돈이며, 돈 될만한 것들은 모두 챙겨서 뒷문으로 도망쳤다.

"참나. 웃긴 자식들이네."

리베로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어디서 사는지 다 알고, 누가 보호자인지도 아는데 저러는 게 의미 있을까?

"영리한 거겠지. 생존하기 위해서."

"렌이 알면 호되게 혼낼 건데."

"뭐. 렌이 알 수 없을 거라 판단한 거지 않겠어?"

"왜?"

"왜긴. 방금 사내들이 저쪽으로 갔잖아."

다른 장찌엔 식구들을 부르기 위해서. 재이의 설명을 들은 리베로가 알겠다며 주먹으로 손바닥을 쳐댔다.

"우리가 뒤질 거라는 거네."

"애들이 보기에는."

"이 짜식들이!"

"우리도 고기나 챙길까?"

"······그럴까? 할 일은 하는 게 맞겠지?"

리베로는 아이들이 사라진 쪽으로 열을 내더니, 바로 수긍하고 정육점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의 선택은 현명했다. 자신은 장찌엔 갱단원을 죽였고, 아이들이 여기 계속 있었더라면 분명히 휘말렸을 게다. 손절하고 도망치는 게, 여러모로 옳은 선택이었다.

"고기는 또 상태가 괜찮네. 돼지새끼들. 먹는 데에는 진심이지."

"뒤에 보니까 돈통 있더라."

"오! 그러게. 재이 너, 돈 찾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

"네 용돈 해라."

"그래도 돼?"

"애들 몰려오면 네가 죽였다고 하고."

"참나."

리베로는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차댔으나, 별다른 대꾸 없이 돈을 챙겨 넣었다. 재이의 살벌한 농담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지 않아 멀리서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다."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데 알아챌 정도의 소음이니, 적어도······.

"열? 열다섯?"

"그 정도로 많아?"

"숨어있어."

"아이, 내가 또 받은 게 있는데."

"눈 먼 총알 맞고 죽어도 모른다."

"나 저기 있을게. 끝나면 불러."

리베로는 재이에게 자신의 총까지 건네주며 정육점 안으로 들어갔다. 재이의 주위로 금빛 아우라가 휘몰아쳤다. 이는, 호크아이가 상대와 마주했을 때 사용했다던 그 능력이다. 어디서 사람이 나오고, 어느 쪽으로 이동하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그저 한 자리에 선 채로.

철컥.

재이는 장전과 동시에 빠르게 왼쪽을 총구로 겨누었다.

타앙! 탕!

골목 밖으로 한 걸음 나오자마자 머리가 터진 갱단원. 덕분에 놀란 다른 갱단원들은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미리 말한다."

"뭐라는 거야, 저 새끼?"

"근데 목소리가 되게 앳되는데."

"정육점 놈들이 먼저 선을 넘었어. 나는 정당방위였다고."

"지랄하지 마라! 네놈이 먼저 총을 갈겨댔으니까 쟤들이 저렇게 된 거지! 그렇지 않고서, 네놈이 한 번에 너댓을 상대했다고?"

"우리가 쟤들 실력을 아는데!"

"그래! 망할 놈 같으니. 어디서 뻔히 보이는 수작질을!"

재이는 귀찮다는 듯 콧잔등을 긁적였다.

"그럼 알아서 해봐, 나는 분명히 말했다. 내 잘못 아니라고."

"산 채로 끌고가서 지옥이 뭔지 보여주마!"

"껍질 채로 삶아버리겠어."

"우엑."

정육점 앞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까 좀 역겨운데. 재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총구를 까딱거렸다. 올 놈들은 어서 오라는 듯이.

"어쨌거나, 너는 살아서 못 돌아가. 여긴 장찌엔의 나라라고."

"대단하네. 그렇게 보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뭐가?"

"네놈들 두목. 장찌엔."

"이게 쳐 돌았나!"

타앗!

누군가의 신호에 맞춰 갱단원들이 우르르 쏟아져내렸다. 재이는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고, 총성 한 번에 누군가의 머리 하나가 터졌다. 놈들이 총을 갈기자, 왼쪽에 든 리베로의 총으로 공중에서 격추시켰다.

타앙! 탕!

어라. 근데 중국 갱단들이라서 그런가. 수가 좀 많다. 재이가 총으로 죽이는 놈들보다, 밀려오는 머릿수가 훨씬 많았다. 재이는 어허, 속으로 혀를 차며 정육점 안으로 들어갔고, 엄폐했다.

"쥐새끼 같은 놈! 숨기는!"

격추 시키는 총알을 공격용으로 돌리는 게 나으니까. 재이가 탁자에 몸을 기댄 채로 소리쳤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

"헛소리로 시간 끌 생각 마라!"

"아니, 그렇잖아. 네놈들이 그렇게 총을 갈겼는데, 나는 상처 하나 안 입었다는 게."

재이의 말에 그제야 갱단원들이 제 총을 내려다봤다. 총알을 반쯤 썼는데도, 상대에게 부상하나 입히지 못했다. 그러게? 이게 뭐지? 단체로 뭘 잘못 처먹고 몸이 기운 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는데?

"그리고 네놈 친구들. 하나 같이 머리 가운데가 꿰여서 즉사했지. 이쯤하면 내 이름이 뭔지 떠올릴 만한데."

"이름 같은-!"

이름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라며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별명 하나.

'불렛킬러.'

총알로 총알을 막아내고, 쏘는 족족 머리를 맞혀 낭비하는 것이 없다는, 새크라멘토의 떠오르는 신예 총잡이. 이미 굵직한 네임드 수배자들을 많이 잡아서 정부쪽과 연도 깊다 들었다. 그들이 주춤거리는 걸 느낀 재이가 웃으며 일렀다.

"그래. 내가 바로 불렛킬러다."

"지랄하시네."

"그러니까 총알 낭비 그만하고 가서 장찌엔한테 보고나 제대로 해."

그럼 이 지루하고, 귀찮은 상황을 금방 종결할 수 있을 것이다. 재이의 제안에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눈짓했다. 너는 여기서 빠져나가 장찌엔에게 보고를 올리라는 신호였다. 혹여 진짜 불렛킬러라면, 그들이 맞서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독안에 든 쥐도 쥐 나름이니까.

타닥타닥!

"네가 아무리 불렛킬러라도 장찌엔 님은 넘어가지 않으실 거다. 그분은 자신의 것을 꼭 지키시는 분이라."

"아아. 그래서 믿고 있다. 입이 하나면 뱉은 말도 하나겠지. 내 걱정 그만하시고 그쪽들 걱정이나 해."

"하! 진짜 어이가 없군."

"불만 있으시면 이쪽으로 오시든가."

대치 상황이었다. 재이는 정육점 안에서 몸을 숨김으로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특별한 작전이 있지 않는 이상, 진입하는 즉시 누군가의 희생이 분명하게 일어날 것이다. 하여, 그 누구도 섣부르게 돌진하지 못했다. 그들은 장찌엔에게 보고하러 간 자가 더욱 빠르게 달리기만을 고대했다. 그가 현 상황을 알게 되면, 다이너마이트라도 갖고 달려올 터이니.

***

타닥타닥!

"장찌엔 님! 장찌엔 님!"

"무슨 일인가."

장찌엔이 주로 술과 도박을 즐기는 술집이었다. 그가 어디서 잠을 자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는 터라, 사내는 그곳으로 달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장찌엔은 그 술집에 있었다. 언젠가 사라졌다고 들었던 셀리와 함께. 부하들이 다가오는 사내를 저지하며 묻자, 그는 피맛 섞인 침을 삼키며 상황을 일렀다.

"······허억, 헉, 해서, 이런, 상황입니다!"

"정육점이?"

"예! 실력이 보통 아닌 놈입니다."

"어떤 정신나간 놈이 감히 내 구역에서!"

콰아앙!

장찌엔이 테이블 위에 놓인 술을 밀어 버리며 소리치자, 셀리가 입을 비죽이며 과일을 집었다. 하여간, 성질머리하고는. 술만 아까워 죽겠네. 장찌엔은 장총을 들고서 부하에게 앞장 서라 일렀다.

"터지는 것들은 모두 챙겨. 날고 기는 놈이라도 화약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

정육점 건물을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죽인다! 부하는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덧붙였다.

"자기가 부, 불렛킬러라 하더라고요."

"뭐라고?"

"불렛킬러요. 새크라멘토에서 온. 동료 놈은 김재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토옥. 셀리가 방울토마토를 떨어트렸다. 기세 좋게 일어난 장찌엔도 눈을 꿈뻑이며 방금 저놈이 무어라 말했는지 되새겼다.

"김, 김재이? 불렛킬러?"

"예!"

"이런-!"

역시, 장찌엔님! 상대가 누구든-!

"미친 놈아!"

퍼억!

"허억!"

하지만 돌아온 것은, 답답함이 잔뜩 섞인 주먹 한 망. 부하는 오른쪽 턱을 부여잡고서 장찌엔을 쳐다봤다. 상황이 이해 안 되는 낯이었다. 불렛킬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상황을 이해한 장찌엔과는 정 반대로.

"그래서! 쐈어?"

"뭐를······?"

"총! 쐈냐고!"

"예예, 당연합죠."

"이런, 젠장!"

퍼억!

장찌엔은 다시 한번 부하의 머리를 내려치고서 서둘러 밖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장총을 챙기지 않았다.

EP133. 장찌엔의 소개

EP133. 장찌엔의 소개

"멈춰어어! 멈춰!"

재이는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알아챘다. 절규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애원에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라는 것. 재이는 조심스레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다행이 대치하던 놈들 모두 목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이 틀어져 있었다.

"멈추라고, 등신들아!"

"자, 장찌엔 님?"

"이것들이 진짜 앞뒤 분간 못하고 뭐하는 짓들이야!"

장찌엔은 말을 타고 달려와 정육점 앞에서 떡하니 멈췄다. 그리고서 멍하니 서 있는 부하들에게 윽박을 내지르며 서둘러 사라져라 지시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지라고!"

이는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불렛킬러가 어떤 놈인지 활자로만 접한 자들은 쉬이 알지 못할 것이다. 마주해서는 그 누구도 김재이를 잡을 수 없고, 심지어는 상처 하나 낼 수도 없다. 그런 자를 상대해봤자 남는 것은 오로지 개죽음 하나. 혹여 분개한 김재이가 저놈들을 죽이라고 길길이 날뛸까봐, 장찌엔은 자신이 더 과장하여 부하들을 밀쳐댔다.

"어, 하, 하지만-"

"하지만은 지랄! 죽고 싶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것들이 사리분간이 안 되면 가만히 있기라도 하든가! 보고하는 건 폼으로 두고, 시발! 응? 다들 나사 빠졌지? 정신머리 어따 뒀어?!"

장찌엔이 정육점 쪽을 힐끗거리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쯤하니, 부하들도 두목의 의도를 알아채고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장찌엔이 저렇게 나올 정도면, 그들로서는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건 사격 실력을 이르는 게 아니고, 전반적인 '대응'에 관한 것이었다. 재이에게는 사격 실력만이 아니라, 장찌엔을 능가하는 그 어떤 실질적 권력이 존재했다.

"크흠. 큼!"

부하들이 물러나자, 장찌엔은 정육점 쪽으로 뒤를 돌았다. 그리고 창문에 떡하니 걸쳐있는 총구를 보고 멈칫거렸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자신의 이마를 겨누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김재이?"

"어허.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네."

"미안하게 됐네. 아니, 이놈들이 좀 실수를 했어."

"누구시람?"

재이가 능청맞게 묻자, 장찌엔이 어설픈 웃음을 흘려댔다.

"나 장찌엔일세. 그대의 친구."

"아, 그래?"

재이는 정말 몰랐다는 듯, 총구를 거두고서 물었다. 여전히 정육점 안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장찌엔이 내 친구는 맞는데, 이거 함정 아닌가? 안심하고 나갔다가 벌집 통구이 되면?"

"그럴 리가 있나. 봐봐! 나는 총도 안 들었어!"

"그쪽 친구들이 든 것 같은데."

재이는 총구를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장찌엔은 진짜 빈손일지 모르겠지만, 그를 따라온 직속 부하들은 완전히 무장 상태였다. 재이에게 친우라 이르는 장찌엔과 달리, 그들은 장찌엔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이라도 재이를 죽일 수 있는 자들이다. 장찌엔이 눈매를 매섭게 뜨며 뒤를 확 돌아봤다.

'총 버려, 이것들아!'

저놈은, 그러니까, 뭐랄까! 귀신이란 말이다! 이는 셀리와 대화하면서도 느꼈다. 이 넓고 넓은 미국 땅덩어리에서 셀리를 바로 찾아낸 것도 놀랍고, 셀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도 놀랍다. 그뿐인가? 셀리는 분명히 보았다고 했다. 그의 총구가 마치 수맥을 짚는 것처럼 서서히 이동하는 것을!

"어서!"

괜히 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새크라멘토까지 찾아가 부탁했던 게 아니다. 재이에게는 일반인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 예를 들면, 제 3의 눈같은 것. 그러니까, 저렇게 애들이 총 들고 있는 것도 보지 않고 아는거겠지. 부하들은 주춤주춤 총을 거두더니, 이내 조심스레 허리춤으로 집어넣었다.

뚝.

총구의 고정력이 완전히 떨어지자, 재이는 벌떡 일어나 창문 밖으로 얼굴을 보였다. 장찌엔이 흠칫 놀라는 듯 싶었지만, 이내 아주 반갑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 있어? 우리가 새크라멘토에서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장찌엔과 셀리도 보금자리에 도착하여 여독을 푼 지 겨우 이틀째였다. 시간상으로 보면, 그들이 떠남과 거의 동시에 재이도 떠났다는 뜻이다. 재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때 붙여준 조선 요리사요."

"아아! 괜찮았나?"

"괜찮다 정도가 아니더군요.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직접 데려다주고, 가능하다면 고용까지 하고 싶어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으음?"

그게 무슨 말이람. 고용은 어디까지나 돈으로 이루어지는 계약 관계 아닌가. 모르긴 해도 김재이는 분명 자신만큼 재산이 많을 터였다. 한데, 그럼에도 고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페이가 넉넉지 않았던 건 아니고?"

"그건 아닌 것 같고요. 보살필 가족이 있어서 그렇다 하더라고요. 고민 중이라 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답 듣고 갈 거라서.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걱정은 무슨!"

장찌엔은 속내를 들켰다. 사실, 그가 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지 은근히 걱정되었던 것이다. 새크라멘토를 이어서, 이곳을 접수하려고? 혹 그게 아니라면, 자신에게 뭔가 불만이 있어서 직접 따지기 위해? 오만 생각들이 찰나의 시간 동안 스쳐 지나갔다. 한데, 별것 아니라니 마음이 놓였다.

'아니지. 오히려 그 이상이지.'

자신이 찾아준 요리사가 마음에 들어 이 난리를 쳤다는 것 아닌가? 장찌엔은 자신감을 되찾고서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시게. 나도 최선을 다해 돕지. 아마 그 여자가 신세 지고 있는 의사가 우리 쪽에 세를 내고 있어서 연이 닿았던 거로 알아. 이렇게 저렇게 잘 구슬리면 원하는 대로 될 걸세."

"렌 씨가 무리하는 건 원하지 않고요."

"아, 그럼! 알지알지. 난 자네 마음 다 알아."

장찌엔은 그리 말하며 정육점 문을 열었다. 차마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핏물이 그득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보며 한탄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쯧. 바보같은 것들.'

잘 좀 보고 상대하지. 하필이면 김재이를 건드려서 이 사달을 내다니. 재이는 총구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내며 물었다.

"셀리랑은 화해했고요?"

"셀리? 아아! 그럼!"

장찌엔은 말도 말라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주 강한 예감이 든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른 시일 내로 또 도망갈 것 같다. 그때 다시 재이의 도움을 받으려면 관계를 돈독히 해야 했다.

"당장 의사 쪽으로 언질 놓지."

"뭐 어떻게 놓으시려고?"

설마, 김재이를 따르지 않으면 치료해주지 않겠다, 뭐 그런건 아니겠지? 재이가 눈매를 가늘게 뜨자, 장찌엔이 손을 급하게 저어댔다. 아니라고는 하지만, 분명히 그런 의도로 말한 것 같다.

"그, 흘려 듣기로는 그쪽에 아이들도 많다며."

"그럴 겁니다. 대여섯 되더군요."

"애들을 학교에 보내면 되잖아. 의사 선생이 작은 학교도 운영하고 있거든."

"학비는요?"

"책걸상 하나씩 더 놓으면 되는데 무슨! 안 그런가?"

장찌엔이 부하들을 돌아보며 묻자, 그들이 어색하게 맞장구를 쳤다. 의사 선생이 운영하는 작은 학교는 이 동네에서 하나밖에 없는 교육 센터였다. 번듯한 학교는 굴다리 위로 올라가야지만 있다.

"애들은 그렇게 처리하고, 나머지는 일자리를 주선해주면 되겠군. 아시아 여자들은 손이 야무지다는 평을 받거든. 어디든 식당에 꽂아주면 되는 거 아닌가?"

"남은 가족들이 돈을 벌게 되면 뭐, 간병인 비를 충당할 수 있겠네요."

그 사이, 렌은 새크라멘토로 와서 재이에게 월급을 타고, 그걸 집으로 보내주면 이전과는 상상할 수 없이 여유로운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리베로가 끼어들었다.

"이렇게 쉬운 일인데, 왜 여태껏 안 하고 있었대요?"

"사연 없는 집안 있어? 이 동네에 그런 가족은 발에 치이도록 많아. 무슨 뜻인지 알아?"

렌의 사정만 특별히 봐줄만한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재이가 끼어있으니, 이런 식으로 편의와 생활을 봐주는 것이지 다른 일반인이었으면 어림도 없다.

"크흠. 아무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뭐, 어디 다친 곳은 없지?"

"예. 아쉽게도."

"아쉽기는! 다행인 일이지. 안 그래? 하하핫! 그래, 요리사 만나기 전까지 계속 여기 있을 건가?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좀 우습지만, 여긴 좀 지저분하고 어지럽거든. 굴다리 위로 올라가면 내가 아주 좋은 식당에서 식사를-"

"아악!"

장찌엔이 다른 동네로 가자고 꼬드기려는 순간이었다. 멀리서 아이들의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팔을 걷어 붙인 렌이 아이들의 귀를 잡아당긴 채 이쪽으로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들!"

"누나! 누나! 잘못했어!"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으아아앙! 으아아앙!"

"시끄러워! 뭘 잘 했다고!"

조선인의 훈계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비슷하구나. 재이는 렌의 손짓과 꾸중에서 향수를 느꼈다. 그도 어릴 적, 엄마에게 저렇게 귀를 잡힌 적이 있다.

"대체 어디서 뭘 배웠길래 그런 못된 짓을 했어?"

"잘못했어요! 아아악!"

"어딜-!"

사람이 죽은 틈을 타서 물건을 훔치고, 도움 받은 은인을 내팽겨치고 도망쳐? 렌은 진심으로 화가 났는지, 아이들을 넘어트리다시피 앞으로 밀었다. 그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 재이 씨?"

렌이 재이를 발견하고 애들 귀를 스르륵 풀었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재이와 리베로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으세요?"

"네. 저희는 괜찮은데, 애들이 안 괜찮아 보이네요."

"죄송합니다. 주머니가 볼록해서 뭔지 봤더니, 이놈들이 고기랑 돈을 훔쳤더라고요. 그렇게 안 가르쳤는데, 아직 애들이라서 사리분별이 안 됐나봐요."

"아닙니다. 사과하실 거 없어요. 가게 주인들은 이미 다 죽어서."

"아."

렌은 반쯤 열린 문으로 정육점 안을 힐끗거리더니,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장찌엔이라는 걸 알아챘다.

"안녕하세요!"

"어어. 렌 씨? 재이에게 아주 맛있는 음식을 해주었다며?"

"제 몫을 다한 것입니다. 수고비를 크게 주셨잖아요."

"음. 그렇긴 해. 아무튼, 그래도 고마워!"

"네?"

이 영감탱이 왜 이래? 렌은 장찌엔과 깊게 엮인 적 없었지만, 이런 인사 치레를 할 영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는 재이에게 보란 듯이 렌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덕분에 재이가 아주 만족했다잖아. 저 친구의 행복이 내 행복이거든!"

"아······."

"그래서 내가 고마움을 좀 표하고 싶어."

렌과 그 동생들은 당최 장찌엔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시선이었다. 처음부터 죄다 지켜보고 있던 부하들도 적응이 안 되는데, 렌네 가족은 오죽하겠는가. 그는 재이에게 말했던 계획을 렌에게도 전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일자리를 주선해주는 계획 말이다.

"네?"

"누, 누나 저게 무슨 말이야?"

"우리 학교 가? 정말로?"

"아니, 저기······."

"아버지 봐줄 간병인도 찾아줄 테니까, 기회 있을 때 잡아. 응? 아아!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야!"

장찌엔이 사람 좋은 척 웃으며 강조했다. 재이가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샌프란시스코에 살면서 장찌엔의 악명을 들었던 렌은, 저것이 무엇을 경고하는지 알고 있었다. 호의를 받지 않고 재이를 떠나보낸다면, 그 다음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고, 책임지지도 못할 것이다.

"아······."

렌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재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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