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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50

EP143. 잠수부

'······포기할까?'

재이는 아주 진지하게 고민했다. 차라리 줄 세운 사람들 대가리를 한 번에 터트리라고 하지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호수 깊은 곳까지 대체 어떻게 들어가란 말인가? 게다가, 서부시대에는 그럴듯한 스노클링 장비도 없다. 첨벙첨벙, 물에 뛰어드는 미친 작자들 모두 신발만 훌러덩 벗어 던진 야수들이다.

"돌아버리겠네."

그래! 차라리! 해가 떠 있을 때 들어가라고 하든가. 밤중에 불빛이라고는 호숫가에 몰려든 사람들의 등불이 다인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서 물속으로 기어들어 가라고? 저 야수들처럼?

"와하하! 네시 시체는 내 거다!"

"어푸어푸!"

"비켜! 다 비켜!"

"저 새끼가! 야! 배에 구멍 내버려!"

타앙!

서로 먼저 가겠다고 호수에 들어선 채로 나무배에 총질해대는 저자들처럼? 사람들은 잠깐 놀라서 비명을 질러대긴 했지만, 특별히 혼란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인 인원 절반 이상이 네시 시체를 얻고자 마음먹은 게다. 그것 하나만 있으면 석유가 뭐고 황금이 뭐겠는가! 앉은 자리에서 떼부자 되는 건 시간 문제.

타앙! 탕!

"이러지 말라니까, 다들!"

"보트에서 물러나! 이쪽으로!"

"누구 마음대로 네시를 잡겠다는 거야? 응?!"

"콱, 저것들이 어디서 굴러들어와서는. 당장 쫓아내! 저놈들 재워주는 여관은 아주 불 싸질러버리겠어!"

자경단으로 보이는 마을 사람들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려댔지만, 이미 호수 가운데로 출발한 사람들을 어찌 쫓겠는가? 아무리 노를 저어도, 모터가 없는 이상 불가능했다.

"이쯤인가?"

"어어. 그런 것 같은데."

치익!

네시가 모습을 보였다 사라진 지점. 어벙해 보이는 두 남자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다이너마이트를 꺼냈다. 그리고서 망설임 없이 불을 붙이고서는 물속으로 퐁당-!

"얼씨구."

지랄한다. 재이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서부에서 살아간다는 건, 저런 것들을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바보 머저리들.

"엥?"

당연히! 심지가 젖으면 불에 꺼지지! 재이가 발을 굴리며 답답해하자, 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왜 이래? 불량인가?"

"이씨, 이거 판 놈부터 족쳐야겠네."

"어이, 비켜! 머저리들아! 크하하핫!"

그때, 다른 일행이 보트를 타고 다가왔다. 그들은 나름 머리를 썼는지 작은 상자와 비닐 따위를 잔뜩 들고 있었다. 어푸어푸! 열심히 헤엄쳐서 오는 놈들도 눈에 보이는 것만 대여섯이다.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

"킥킥. 사람이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네놈 목에 달린 건 엉덩이 반쪽이냐?"

"뭐라고? 근데 이놈이-!"

타앙!

총성이 터지고, 머저리 한 명이 뒤로 넘어가며 물속으로 빠졌다.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웅성거렸지만, 딱 거기까지다. 워낙에 작은 마을이라 보안대가 없다는 게 흠이다. 자경대들이 아무리 날뛰어 봤자, 진짜 훼까닥 맛 간 미친놈들을 저지하기에는 무리지 않겠나.

"이렇게 하는 거라고. 이렇게."

그들은 불붙인 다이너마이트를 상자에 넣더니, 허겁지겁 비닐로 감싸기 시작했다. 물이 새어 들어가지 못하게 말이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호수 아래로 조심히 넣는데······.

"난 못 보겠다, 진짜."

재이가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머저리 아니면 등신들이 가득한 세상. 그래. 살다가 저런 놈들에게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스킬은 획득하고 보는 게-

퍼어어엉!

"우아아앗!"

폭탄을 던졌어야지! 바로 아래에 떨구었으니 폭발에 보트가 뒤집힌 것도 당연한 일이다. 보트는 순식간에 허공으로 붕 뜨며 터졌고, 두 사람 또한 호수에 빠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 저런 거네.'

저번에 신문 봤을 때, 네시 때문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여럿이라길래 뭔 소리인가 싶었는데, 바로 저런 걸 말하는 거였다. 재이는 여전히 아수라장인 호숫가를 뒤로하고, 다시 여관으로 걸음 했다.

'난 수영도 잘 못해.'

잠수? 어림도 없지. 무슨 특별한 수가 있지 않은 이상, 직접 물 아래로 내려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재이가 여관으로 들어서자, 리베로와 하트먼 그리고 렌이 고개 돌려 맞이했다.

"어, 왔어?"

"밖이 소란스럽던데요. 총소리도 나고. 나가볼까 하던 참이었습니다."

"미친놈들 천지라."

재이는 말도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솔직히, 정상은 아니지. 오밤중에 호수에 뛰어드는 작자들이나, 배 타고 서로에게 총질하는 것들이나. 모두 네시에 미친놈들이다. 리베로는 저게 뭔 소리인가 싶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서, 네시는 봤고?"

"호수에 뭐가 떠 있다가 내려가긴 했는데, 솔직히 그게 네시인지는 잘 모르겠더라고.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잘 안 보여."

"흐음. 그래?"

"근데 세 사람은 왜 안 나가봤어요? 궁금하지 않아요?"

솔직히, 카드게임보다는 네시 아닌가? 그러자 리베로가 카드 패를 쪼여보며 중얼거렸다.

"분명히 구라지. 네시 보려고 온 놈들 노리고 마을 사람들이 소문 낸 거 아니겠어? 아까 저기, 주방 누님이랑 대화 좀 했거든."

"대화? 무슨 대화?"

"건전한! 그런 스몰토크!"

짜식이, 렌 듣고 있는데. 리베로가 자중하라며 재이에게 눈을 부라렸지만, 정작 렌은 별 신경 안 쓰며 카드를 확인했다.

"누님이 은근슬쩍 흘리더구먼. 자기는 네시 안 믿는다고."

"여기 주민 아니야?"

"내 말이. 주민들도 믿느니 마느니 하는 거 보니까 딱 사이즈 나오잖아. 여기 여관 사장은 뭐,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지만."

네시가 존재한다고.

그러자 하트먼이 필요 없는 카드를 버리며 중얼거렸다.

"원래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보니까요. 헛걸 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죠."

"하트먼 씨도 안 믿어요?"

"네? 아니요. 저는 사실 별 생각 없습니다. 근데 진짜면 무서울 것 같아서."

하트먼의 담담한 고백에 그들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겉으로 보면 네시고 뭐고 다 때려잡을 것처럼 보이는데, 뭐라고? 무섭다고?

"푸하하핫! 뭐야, 이 갑작스러운 고백은?"

"무섭지 않아요? 호수 아래 사는 수십 미터 괴물이라니. 괜히 가까이 갔다가 부정 탈까 봐 그렇습니다."

"참나. 네가 지금까지 죽인 인간들 원혼은 안 무섭고?"

"그놈들은 별로 안 무섭습니다. 다시 싸워도 이길 자신 있어서."

자신의 약점을 저리 덤덤하게 이르다니. 저건 상남자인지 하남자인지 헷갈렸다. 마지막으로, 렌은? 재이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저는 별로 관심 없어서."

"아하."

"근데 그거와는 별개로 물괴물은 있다고 생각해요."

"왜요?"

"본 적 있어서."

툭. 렌이 카드를 내려놓자 세 남자의 눈이 커졌다.

"본 적 있다고요?"

"네. 제가 배를 좀 많이 타봤나요."

조선에서 청으로, 청에서 다시 이곳 서부까지. 얕은 해안부터 망망대해까지 모두 겪어본 렌이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겪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여기로 오는 배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밤중에 화장실이 마려워서 갑판으로 나갔거든요. 달빛은 밝은데 구름 한 점 없고, 바다도 잠든 듯이 조용한 날이었어요."

리베로는 상체를 반쯤 숙인 채 렌의 말에 집중했다. 그 탓에, 카드 패가 다 보인다는 것도 모른 채. 렌은 힐끔, 리베로의 카드를 보더니 자신의 패를 새롭게 짜댔다.

"바다 위로 뭔가 길게 뻗어있는 거예요. 꾸물꾸물, 여러 개의 문어 다리가 힘없이 흐물거리더니 그대로 사라졌어요."

"그게, 그게 뭐가 괴물인데?"

"문어 다리가 산만하던데요."

"에에엑!? 거짓말!"

"진짜."

크라켄? 그런 건가? 재이는 대충 그림이라도 그려낼 수 있는데, 리베로와 하트먼은 짐작조차 안 되는지 전혀 믿는 표정이 아니었다.

"체크."

"어? 어어?!"

"아무튼, 그래서 호수에도 네시가 있다 한들, 뭐 그리 놀랄 일인가 싶네요."

"그렇긴 한데······."

차라리 바다면 이해라도 된다. 거긴 정말 별별 것들이 다 모여있는 세상이니까. 근데 호수에서 네시라······. 카드에서 지게 생긴 리베로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그래서, 보긴 봤으니까 이제 만족해? 다시 새크라멘토로 가면 되나?"

"아니. 구분도 못 했다니까. 저 밖에서 난리 치는 작자들 모두 진짜 네시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려고 저러는 거야."

"참나. 어떻게?"

"내 말이."

투욱. 렌이 다시금 카드를 내밀었다.

"들어가서 직접 보면 되는 거 아닌가?"

"렌, 너 되게 살벌한 말들을 많이 하는구나. 그것도 귀여워."

"주접 그만 떠세요. 그것도 병이니까."

그녀는 질색하며 리베로를 노려봤다. 하여간, 코쟁이 남자들 느글거리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렌은 몸서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서 보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렌? 너, 혹시-"

재이가 잠시 멈칫거렸다. 이름부터가 '청이'. 바다를 가로지르고, 아버지를 모시는 효녀. 그리고 물 따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담력이라니. 혹시?

"······심청이?"

"뭐래요."

"······미안."

그렇지. 헛소리였지.

재이가 깔끔하게 사과하자, 렌이 별것 아니라며 덧붙였다.

"물질할 줄 알아요."

"물질? 네가?"

"청나라에 있을 때 배웠어요. 3분까지는 뭐, 문제없죠."

눈 뜨고 물속을 살피는 것도 그녀에게는 일거리가 아니다. 아니, 솔직히 전국각지에서 모인 인간들이 드글하다 보니 개중에서도 눈 뜨고 잠수 가능한 자들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아. 그게 그 뜻이었구나."

"네? 뭐가요?"

렌은 재이가 자신의 머리 위를 보며 이르자, 의문스럽게 되물었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머리 위에 어떤 스킬이 떠 있는지!

-수산물 전문가

당신은 물속에서 더욱 시야가 맑아집니다. 두 눈을 크게 뜨세요!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아주 잘 보일 겁니다. 특히 당신이 채취한 수산물은 조금 더 비싼 값에 팔리며, 풍미가 풍부합니다. 잠수병? 그것도 먹는 것인가요?

"뭐, 뭘 보세요?"

"아니아니아니."

수산물, 사전적 뜻을 생각해보면 '물에서 나는 산물'을 뜻했다. 그 말인즉, 네시도 어떻게 보면 그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잠수 잘하는 누구보다 네시를 발견할 확률이 높다.

"그럼 혹시 호수 밑 좀 봐줄 수 있겠어요?"

"제가요?"

"네. 전 수영을 못해서."

"흐음."

렌이 뜸을 들였다. 두렵거나, 귀찮아서 들이는 뜸이 아니었다. '얼마 줄 수 있냐는' 뜸이었다. 재이는 말해 뭐하냐면서 두 손을 들었다.

"얼마 원해요?"

"아무리 그래도 고용주님께 이런 식으로 숫자를 직접 얘기하는 건 좀 그렇네요."

저것이 조선의 예의인가.

재이가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그러자 렌이 벌떡 일어나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주 엄청난 계약이 성사되었다는 듯.

"그 정도면 할 만하죠."

"아, 괜찮겠어요?"

"물론입니다. 물질 한 번에 10달러라니. 역시 재력가는 뭐가 달라도 좀 다르네요."

아. 10달러?

재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음, 뭐, 잘 부탁드립니다!"

사실은 100달러를 부른 거였는데.

EP144. 주민 갈등

EP144. 주민 갈등

다음 날, 해가 떠오자 주민들은 일상을 준비했다. 곳곳에서 빵과 베이컨을 구워댔고, 거리에 널린 술 취한 자들을 깨워 일으켰다. 돈이 없거나, 혹은 늦게 도착해서 방을 잡지 못한 외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외에는, 밤에 보여주었던 네시 소동에 흥분하여 술을 퍼먹은 자이거나. 아무튼, 막달린 마을의 아침도 여타의 마을과 다를 게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

1층에서 식사 준비를 하던 여관 주인이 인사하며 고개를 들다 멈칫거렸다. 멀리서 온 손님들이라 뭐 문화가 조금 다를 수 있다 치자. 그런데, 여자의 옷차림이 왜 저런단 말인가?

"저기?"

"아, 괜찮습니다. 이게 편해서요."

"아니, 괜찮고 말고 할 게 아니라 그리 입고 밖에 나돌아다닌단 말입니까?"

렌은 물질하기 좋게 옷을 골라 입었다. 딱 달라붙으면서도 혹시 모를 외부 위험에 대비하려면 온몸을 덮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녀는 타이즈에 가까운 옷과 닥 달라붙는 나시 티를 입고서 위에는 대충 재킷으로 가린 상태였다.

"물질을 좀 하려고."

"아니, 여자가 무슨?"

남자들이 호수에서 수영을 하거나, 강에 들어가서 물고기 잡는 것 따위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서부에서, 그것도 야만의 시대에서, 여자가 저렇게 입고 물에 들어간다는 건 쉽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영을 하고 싶으면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하든가! 무슨 변을 당하려고? 미쳤나?

"일 때문에 그런 거니까, 신경 끄세요."

"일이라니?"

"물질 한번에 10달러짜리거든요. 그거 줄 거 아니면 말 덧대지 마시죠. 식사는 간단히 할게요. 배부르게 먹었다가는 힘들어서."

"이봐요, 아가씨."

"주인장. 걱정하는 건 고마운데, 마음만 받겠습니다. 우리 렌은 내가 지킬 거라서."

뒤따라 내려오는 리베로. 그리고 재이와 하트먼. 장정 세 사람이 총을 들고 내려오자, 주인장은 더 말할 것 없다는 듯 주전자를 들었다.

"차?"

"주시죠. 혹시 주전자하고 빌릴 수 있습니까? 호수 나갈 때 따뜻한 물 좀 준비해두려고."

"예예, 뭐 그러시죠. 근데 물질은 뭐하려고요?"

"뭐하긴요. 네시가 진짜 있는지 없는지 보려는 거지."

돌았군. 잡아 먹히려고 아주 애를 써. 오늘 지나면 손님들 모두 네시 배 속에 있을 것 같으니, 내일 부로는 새로운 손님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주인장이었다. 네 사람은 테이블에 모여 앉아 토스트에 잼을 발라댔다.

"근데 렌, 정말 괜찮을까?"

"걱정되면 같이 가시든가."

"내가 수영을 못해서."

말은, 쯧! 렌이 토스트를 힘차게 먹으며 바깥을 살폈다. 어젯밤만큼 사람이 모여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네시는 야행성인 것 같으니, 낮에 잠수하는 게 더 안전할 것 같기는 하다. 혹여 네시를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자고 있으면 직접적인 위험은 없으니까.

"후우."

바다에서 문어 괴물을 봤을 때도 심장이 내려 앉는 기분이었는데, 호수 아래에서 네시를 보게 되면 또 어떨까. 렌이 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세상에서 제일 가는 진정제, 돈이 그녀의 가방에 꽂혀 있지 않은가.

"가시죠."

"벌써?"

"해 지면 안 들어갈 거라서. 해 떠있는 동안 서두르자고요."

"어어, 그래. 이거 들고 가서 먹자. 주인장! 바구니 좀 빌릴게!"

렌의 말에 리베로가 후다닥 도시락 가방을 싸고서 따라 나섰다. 맨몸이다. 재이는 그런 렌에게 재차 물었다.

"정말 장비가 필요하지 않아요?"

"장비는 무슨, 줄만 있으면 돼요. 뭐 좋은 거라도 있어요?"

좋은 거? 없지. 없으니까 렌에게 부탁하는 것 아니겠나. 그들이 호수가에 다다르자, 하트먼이 인근에 배를 띄우고 있는 노인들에게 다가가 제안했다.

"실례합니다. 배를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얼마나?"

"해가 질 때까지요."

"2달러만 주시게."

흥정할 거리도 없다. 하트먼은 바로 값을 내었고, 보트 뒤쪽을 밀며 호수 안쪽으로 들어갔다. 재이와 리베로, 렌이 후다닥 올라타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카랑카랑한 목소리. 재이가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자, 엄청난 풍채의 중년 여성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 손으로 참나무도 들어올릴 것처럼 기골이 장대했다. 외형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을 내에서도 중책을 맡고 있는지 그녀 뒤로 주민 몇몇이 따라 붙어있다.

"당신들, 뭐하려는 거야?"

"배를 타려고 합니다만?"

"그러니까, 왜?"

"왜긴요. 네시가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려고요."

"직접? 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

"그런데요."

"안 돼!"

그녀는 두툼한 팔로 엑스자를 만들며 반대했다. 참으로 우습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기에 된다, 안 된다 난리인 것인지?

"이유는?"

"이유가 뭐가 있어?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지. 그런 식으로 호수 기어들어갔다가 죽은 인간이 한둘인 줄 알아? 그쪽들 시체 처리하는 거, 다 우리 주민들이 한다고."

관광객들 모이는 호수에 시체 둥둥 떠 있으면 퍽이나 보기 좋겠다! 시체를 걷어내고, 신원조회하고, 그 사이 보관 및 정리는 물론, 인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매장까지 마을 주민들의 몫이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무분별하게 호수가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건 당연한 권리였다. 재이가 이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젯밤에는 사람들 다 배도 타고, 수영도 쳐서 들어가던데요. 밤보다는 낮이 안전하지 않나요?"

"밤에 죽으면 네시가 시체라도 먹지! 그리고 미친 인간들을 우리가 무슨 수로 말려? 그쪽은 인간들이 뛰어드는 것만 보이고, 우리가 막아섰던 건 못 봤나봐?"

위험하니까 들어가지 말라고 목청 높여 제한해봤자 소용없었다.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인간들을 하나둘도 아니고, 어찌 막겠는가? 그치만 지금은? 호수가에 기어들어가려는 무리는 재이 일행밖에 없다.

"아. 혹시, 입장료 필요하신가?"

돈? 그걸 원해서 이러는 걸까? 재이가 넌지시 묻자, 여성은 콧김을 씩씩거리며 사자후를 뱉어냈다. 어찌나 목청이 좋던지, 하트먼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릴 정도였다.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아아!"

어이구. 그녀의 고함에 맞춰 주민들이 방망이 같은 것을 들었다. 여차하면 무력도 불사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그들에게 배를 빌려줬던 노인들이 슬그머니 다가와 재이에게 속삭였다.

"우선은 알겠다 하고 보낸 다음, 그때 다시 물에 나가시오. 계속 버티고 있다가는 괜히 피만 봅니다그려."

"흐음."

상황이 좀 희한했다. 누군가는 안 된다면서 이리 거칠게 막아내지만, 또 누군가는 재이 일행에게 돈까지 받아가며 배를 빌려주지 않았나? 마을 내부의 입장이 합쳐지지 않은 느낌. 재이는 우선 알겠노라 이르며 배에서 내렸다.

"진작 그럴 것이지."

흥! 여성이 고개를 픽 돌리며 노인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쪽도! 작작들 좀 하세요!"

"예예, 알겠습니다. 크흠."

그가 돈까지 돌려주는 척을 하자, 여자는 그제야 해결됐다는 듯 등을 돌려 사라졌다. 황당했다. 렌은 여전히 배 위에 앉아 슬그머니 물 온도를 확인했다. 이만하면 입수하기에 나쁘지 않은데.

"대체 누구입니까?"

"아, 마을에서 마구간을 운영하는 팩 씨 아내요. 마구간이라고 해도, 마을에서 거의 유일하게 말 운영을 하는 데라서 입김이 세지요. 성격도 뭐, 보시다시피 만만치 않고. 에고, 망할 여편네. 할 일이 그리도 없나."

"근데 반대하는 게 정말 아까 그 이유 때문입니까?"

"뭐요? 시체 처리?"

노인이 픽!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데서 시체 정리해봤자 뭐 얼마나 까다롭게 한다고 그러겠습니까. 다 핑계지."

"그럼요?"

"······크흠."

노인이 헛기침을 하며 말끝을 흐리자, 재이가 돌려 받은 돈을 다시 그의 주머니에 꽂아 줬다. 그러자 노임이 주위 눈치를 보며 일러줬다.

"네시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마을 주민들은 두 종류로 나뉜다. 네시가 있다는 쪽과 없다는 쪽. 어느 쪽이든 네시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득을 보고 있는지라,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왜, 재이네가 묵었던 여관에서도 직원과 사장의 의견이 갈리지 않던가.

"네시 찾으러 들어갔다가 그런 놈이 없다는 게 밝혀지면 마을에 타격이 크니까 아예 못 들어가게 하려는 거지요!"

"신비주의 전략이다, 뭐 그런 거군요."

"참나, 사람이 호수 훑어봤자 뭐 얼마나 샅샅이 본다고 그런 걸 막나 몰라. 우리 같이 배 빌려주고 돈 받는 인간이 열댓 명인데."

아무리 호수가 한정된 구역이라고 하지만, 사람의 출입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면 언젠가 의혹이 터질 건 분명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호수에 들어섰는데, 그 누구도 네시를 보지도, 흔적을 찾지도 못했다' 등의 의혹 말이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네시는 결국 전설 속의 동물로 자리잡을 것이고, 막달린 마을의 명성도 지게 된다. 저자들은 그걸 염려하여 애초에 사람들의 출입을 적절히 통제하자는 쪽.

"할아버지는 네시를 믿고요?"

"믿고 말고요! 있으니 사람들이 이리 난리가 난거지요. 그리고 나도 밤중에 똑똑히 보았어요. 대가리 처든 것이 어찌나 크던지!"

"가까이서요?"

"아니. 여기서."

"아."

마을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좀 복잡하게 엮여있는 것 같다. 보니까, 네시가 있다 믿는 쪽에서도 수색해서 시체를 얻자, 내버려 두자 쪽으로 나뉘는 것 같던데.

"재이 씨. 어떻게 할까요?"

"괜찮겠어? 괜히 나갔다가 총 맞는거 아닌가 몰라."

"어. 괜찮아. 노 젓자고."

"정말?"

"호수 수색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반대로 그걸 환영하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니까."

재이는 그렇게 말하며 뱃머리를 힘차게 밀었다. 촤아악- 물길을 헤치고 나가는 배. 리베로는 노를 젓기 시작했고, 호수 중앙으로 나갈수록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 아까 그 아줌마다."

재이 일행을 만류했던 여자가 다른 사람들하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아마, 네시 수색에 찬성하고 이로 인해 돈을 버는 무리일 터다. 그들은 격해지더니, 결국 서로 머리채를 붙들고 말았다. 리베로는 휘파람을 불며 그 모습을 흥미롭게 쳐다봤다.

"깡 좋네. 나라도 저 아줌마한테는 못 덤빌 것 같은데. 어우, 펀치 좋고."

"어디까지 들어가요?"

"어젯밤 네시가 나왔던 지점으로요. 저쪽.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렌은 허리에 줄을 단단히 묶으며 입수 준비에 나섰다. 주민끼리 치고 받던 중, 그들은 재이 일행이 호수에 나섰다는 걸 알아채고서 크게 소리쳤다.

"이것들아아아! 안 된다는 말은 똥구멍으로 처먹었냐!"

"안 들려요오!"

"잘 들리는가본데!"

"아니요! 안 들립니다아아! 나중에 가서 얘기해요! 그, 계속 싸우시고요!"

리베로가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물이 잔잔해서 배는 빠르게 중앙으로 이동했다. 물이 좀 탁해서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괜찮을까? 리베로가 렌에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려는 순간.

"다녀올게요. 줄 두 번 당기면 끌어올려요. 문제 있다는 거니까."

타앗!

렌은 망설임없이 호수 아래로 뛰어들었다.

EP145. 고작 몇 분 사이

EP145. 고작 몇 분 사이

우웅- 웅-

물속은 고요했다. 위쪽에서는 주민들이 서로 멱살을 잡아가며 소란을 피워대고 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저 웅웅 울리는 뱃고동 같이 안정적인 소음만 잇따라 들릴 뿐. 렌은 긴 팔다리를 크게 휘저으며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줄이 있으니 최대한으로 내려가도 괜찮을 것 같다. 여차하면 끌어올려주겠지 뭐.

'보자.'

물은 생각보다 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야 식별이 안 될 정도는 아니다. 알 수 없는 식물 따위가 흐드러지며 주위를 날아다녔지만, 렌은 손으로 대충 치워가며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네시라. 어디있니.'

가능하다면 멀리서 모습을 보여줄래? 아무리 강심장인 렌이라도 갑자기 눈앞에서 모습을 보이면 놀라 뒤집어질 것 같으니까. 혹시 인간에게 적대적이어서 주둥이부터 벌리면 어쩌지? 렌은 심장박동이 조금씩 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이러면 안 돼! 물 속에서 허둥댔다가는 숨이 더 빠르게 고갈된다.

사아악!

렌은 계속해서 헤엄치며 주위를 둘러봤다. 간혹 보이는 물고기 외, 움직이는 생명체라고는 없다. 역시 사람들이 단체로 헛것을 보았던 것일까? 더 깊이 내려가기에는 좀 힘들 것 같은-

'어?'

그때, 물 속에서 크게 졌다가 사라지는 그림자. 렌의 목덜미가 빳빳해졌다. 무언가가 렌의 주위를 크게 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크기는 배 한척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투욱! 툭툭!

렌은 위로 올라갈 터이니 줄을 잡아당겨달라 신호했다. 그에 맞춰서 줄에 힘이 실렸다. 위쪽에서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잡아당기는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힘이 들어오지 않았다.

'뭐해!?'

젠장! 이래서 총잡이들이란! 줄 하나 제대로 못 당기나? 렌이 허둥지둥 줄을 잡고서 올라갔다. 호수 표면에 가까워질수록 주위가 밝아졌고, 더더욱 식별이 쉬워졌다.

"······!"

렌은 똑똑히 봤다. 기다란 목을 가진 의문의 생명체. 놀라서 벌어진 입으로 공기 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그리고 겨우 물 밖으로 고개를 들이밀었을 때-

타앙! 탕! 탕!

사방에서 들리는 총소리.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아래 내려간 짧은 사이에 상황이 왜 이렇게 됐어? 렌이 놀라서 배 위로 올라오려고 하자, 리베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렌! 올라오지 마! 총 맞아!"

"아니, 지금 아래에-"

"내가 지켜줄게! 절대! 절대 올라오지마!"

"아니, 미친놈아! 아래에 네시 있다고오!"

타앙!

렌의 절규와 같은 비명이 총성을 지워버렸다. 정확히는, 그녀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총 쏘는 걸 멈췄다고 이르는 게 맞을 터. 렌이 상체를 배 위에 걸친 채 소리쳤다.

"뭐해요? 좀 잡아줘!"

"아니, 근데 진짜 여기 위험한데."

티잉! 팅!

멀리서 날아온 눈먼 총알이 배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나무를 대충 엮어 만든 배인지라, 작은 충격에도 파편이 튀며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재이가 총알을 격추하고 있었지만,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는 터라 모든 걸 온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푸욱! 푹!

"아니, 대체 뭐했어요? 그 짧은 사이에."

"나는 뭐 안 했어."

"근데 왜들 이래요?"

"그, 뭐랄까. 유명세 같은 거지 않을까."

"뭐래! 어서 노 저어요! 젠장! 배에 물 들어오잖아!"

아무리 수영에 자신 있는 렌이라도 호수 중앙에서 물가까지 단번에 갈 수는 없었다. 하물며, 물이 무섭다는 하트먼은 오죽하겠는가? 그는 다른 때와 다르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리베로, 넌 수영 좀 해?"

"개헤엄은 일등이지."

"어, 그럼 됐다."

"뭐가?"

"구멍, 크게 났어."

재이가 제 발치를 내려다보며 이르자, 일행들이 '히익!'하며 질겁했다. 손바닥 크기만큼 뚫린 구멍에서 물이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 멀리, 그들에게 배를 빌려주었던 노인들이 그들을 구해주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지만, 글쎄다. 가라앉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 렌은 짜증스럽게 손으로 구멍을 막으며 외쳤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요!"

***

재이 일행이 여관에서 나오던 그 시각. 길가에 널려 널브러져있던 노숙인 한 명이 신문 틈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에, 그러니까, 갈색 머리칼에 잿빛 눈동자, 그리고 그 옆의 뺀질이, 전형적인 총잡이까지. 새크라멘토의 전설이라 불리는 김재이 일행이 확실해 보였다.

"저놈, 김재이 아닌가?"

"누구?"

"저기 가는 놈."

"아아, 맞네. 새크라멘토에서 한번 본 적 있어."

"저놈이 여긴 무슨 일이지? 새크라멘토에서도 일이 많을 건데."

김재이가 새크라멘토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그들도 잘 알았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 여러 면에서 한 주름 꽉 잡고 있는 놈 아니던가. 그들 역시 비루한 총잡이인지라, 김재이가 서부의 전설을 모조리 정리하며 큰 부를 축적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물론, 과장되어 부풀려진 면이 없잖아 있지만, 아무튼!

"그러게. 희한하네."

"저기 여관에서 나왔지?"

"어어."

기다릴 것 없다. 그들은 김재이 일행이 멀어지자, 바로 여관을 박차고 들어갔다. 식기를 치우던 주인이 화들짝 놀라며 그들을 쳐다봤다. 손님 치고는 너무 격한 입장 아닌가?

"무, 무슨 일이십니까?"

"방금 나간 김재이."

"김재이요? 아아, 손님이요?"

"누군지 몰라?"

"모르겠는데, 뭐, 돈은 많아 보이더이다. 그런데 왜요? 아침에는 일이 많아서 바쁘니까 별거 아니면 나중에 오시오."

"김재이가 여긴 왜 왔지?"

콰앙!

그들이 문을 위협적으로 닫으며 주인장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주인이 뒷걸음질치며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주방에서 일을 하던 직원이 뒷문으로 후다닥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무뢰한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더더욱 주인 가까이 붙어 이를 드러냈다.

"우리가 뭘 어쨌다고 그리 긴장해? 응?"

"안, 안하게 생겼소? 좀 떨어지시오."

"그러니까, 말하라고. 쟤가 여기 왜 왔는지."

"막달린 마을에 네시 보러 왔지 뭐하러 왔겠어? 요! 일자리 찾으러 왔겠냐? 고요?"

여관 주인이 뒤에다 존댓말을 어색하게 붙이며 이르자, 그들의 눈이 반짝였다.

"어어, 맞네. 김재이가 네시를 찾으러 왔다니."

"하하하! 이거, 일이 재밌는데?"

"그러니까. 김재이가 찾는 거라면 분명히 있다는 뜻이잖아."

김재이는 무슨 일이든지 손대는 것마다 족족 대박을 터트리며 돈을 쓸어 모은 작자다. 그뿐인가? 호크아이처럼 보이지 않는 상대를 찾는 것에도 귀신이라 들었다. 총구를 까딱이기만 하면 수맥 찾든 상대를 찾는다나 뭐라나. 진위여부를 가리기 힘들긴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김재이를 따라가면 돈이 된다!'

옆에서 콩고물이 떨어지든, 아니면 운이 좋아서 가로채든 뭐든 좋다! 김재이가 네시를 보러 왔다는 건 그놈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

"이번에는 네시 시체를 찾아서 돈 벌려고 하나?"

"김재이 놈 지금까지 했던 걸 보면 그럴수도."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도 얼른 가서 뒤져보자고!"

"수영할 줄 알아?"

"당연하지."

그들은 여관 주인을 내팽겨치고서 바로 몸을 돌렸다. 마침 직원들의 신고를 받고 달려온 동네 자경단들이 그들을 불러세웠다.

"이봐! 네놈들이 소란을 피웠냐?"

"소란은 무슨. 정보 수집이라는거지."

"정보 수집은 개뿔이."

"네시가 호수에 진짜 있다고. 지금 건져서 보여줄 거니까 기다리기나 하셔."

"뭐?"

네시가 있다고 믿는 놈들은 하루에도 한 마차씩 밀고 들어오는 법인데, 이놈들의 발언은 뭔가 달랐다. 근거가 있어 보이는 것 아닌가. 뭐, 당연히 주민 중에서도 네시가 있다고 믿는 이들이 한둘은 아니었지만.

"가만 보기나 하라고. 가끔 밤마다 튀어나오는 네시보다 시체 조각이라도 전시하면 지금보다 더 사람들이 많이 몰려올 거니까."

"아니, 잠깐. 누가 그래?"

"누구긴?"

그들은 코를 킁, 훌쩍이더니 시선을 돌려댔다. 이럴 때는 당연지사-

"김재이가."

이름 팔아먹어야지! 크흐흐.

김재이라는 이름에도 주민들은 멈칫거리며 '뭐지? 이 등신은?' 표정을 지었다. 이놈들, 시골 촌구석에 박혀있어서 김재이가 누군지 모른다니! 무뢰한들은 웃음을 터트리며 덧붙였다.

"김재이 몰라? 김재이?"

"이름이 특이한데,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새크라멘토 꽉 쥐어 잡고있는 놈 있어. 주지사도 김재이한테는 꼼짝을 못 하지. 백베인드 회사나 하힐 광산 같은 큰 기업도 그놈 손바닥 안이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저놈이 저렇게 찾는 이유는,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라고! 킬킬킬! 그들이 웃고 떠들어댔지만, 주민들은 멈칫 선 채로 아무말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놈들 말은······.

"정부에서 지금 관여를 하겠다는 뜻인가?"

"그, 그런 거 아닌가? 주지사도 꽉 잡고 있다며."

"여기서 새크라멘토는 엄청 멀잖아. 그쪽이 갑자기 왜?"

"바보냐? 새크라멘토 주지사가 캘리포니아 주지사잖아. 동네 반장 같은 게 아니라고."

"그래, 말이 캘리포니아 주지사지 그만한 사람이랑 연 있을 정도면 우리 쪽 의원들이랑 이어져 있는 건 또 당연지사 아니겠어?"

"세상에. 올 게 왔군. 드디어 정치꾼놈들이 여기까지 눈독을 들이려는 거야."

"잠깐만, 저러다 김재이 저놈이 진짜 네시를 찾으면 어쩌지?"

누군가의 물음에 모두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딱 하나는 분명했다. 네시의 존재로 인한 후광을 더 이상 마을이 받지 못한다는 것. 정부 고위인사 쪽으로 사체가 팔려가거나, 혹은-

"모, 못 찾아도 문제되는 거 아닙니까?"

정부 공식으로 네시 따위는 없노라 선언하는 것과 무엇 다르단 말인가? 그들은 동시에 희게 질려서는 총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앞서 가는 무뢰한들의 등에 총을 갈겨댔다.

타앙! 탕! 탕!

"으아아악!"

"커, 커헉!"

걷다가 등이 터진 자들은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고, 오가던 주민들이 놀라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다.

"서둘러! 김재이를 막아라!"

"김재이? 그게 누군데?"

"여기 여관에 묵었던 외지인! 정부와 관련있는 놈이래!"

무엇이든, 정부가 끼어서 좋았던 적이 있던가? 세금이나 뜯어갈 줄 알지, 하등 도움 안 되는 족속들. 말도 안되는 개법을 들이밀며 돈 내놓으라 분기별로 쪼는 것들인데, 네시의 존재가 밝혀지면 어찌 나올지 뻔했다. 주민들은 비상사태에 준하는 낯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상황을 공유했다.

"그러니까, 배를 빌려주면 어쩌냐고!"

"아니, 그런 걸로 돈 벌고 있잖습니까. 서로 먹고 살면 좋잖아요."

"참나, 이봐!"

"잠깐! 잠까아안! 지금 그렇게 싸울 때가 아니라고!"

재이 일행이 배를 타고 호수에 나가는 동안, 중년 여성이 주민들과 언성을 높였지 않은가. 재이와 친구들은 노를 젓느라 보지 못했다. 누군가 달려와 상황을 중재하고, 지금 처리할 건 누가 옳네 마네가 아니라 바로 저기!

'정부 관계자!'

김재이라고 의견 모으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은 잠시 멀뚱히 그들을 지켜보다가, 동시에 총을 꺼내들었다.

처억!

"죽여."

이때는 이견을 따질 게 없다. 공통의 적이 저기 있지 않나. 첫 총성이 터진 것은-

퐁당!

렌이 물 아래로 잠수한 순간이었다. 재이는 호수가를 빙 둘러서 사람들이 총구를 조준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어허라.

'조졌네.'

***

"이렇게 되었다!"

재이가 설명하는 동안, 세 사람은 가라앉는 배 위에서 열심히 노를 저어댔다. 거의 엉덩이까지 물이 차 오르자, 렌이 짜증섞인 고함을 질러댔다.

"아 진짜아아아!"

10달러 말고 더 받을걸! 자신은 그럴 자격이 된다.

EP146. 숨

EP146. 숨

한편, 이 모습을 남의 집 불구경처럼 바라보는 자들이 있었으니.

푸헤엥!

리베로의 단짝 동키와 오닉스 그리고 켄이었다. 그들은 건초더미 옆에 쪼르륵 서서는 개판 오 분 전인 마을을 쳐다봤다. 주인들은 호수 위에 둥둥 떠서는 손으로 노를 젓고 있고, 마을 사람들은 그 근처를 빙 둘러서 연신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인간들이란, 참. 눈앞에 깨끗한 물 있고 건초 있으면 처먹고 자면 될 일을, 어찌하여 저리 귀찮게 떠들어댄단 말인가?

히히잉!

오닉스가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거리며 일어나자, 켄이 엉덩이를 바짝 들었다. 그리고 후다닥, 여관 뒤쪽으로 들어가서 2층으로 올라갔다. 무뢰한들에게 위협당했던 주인이 구석에 앉아서는 연신 찬물을 꿀떡꿀떡 넘기느라, 개가 들어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간 켄이 혀를 길게 내밀고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 이내 앞발로 가방을 연달아 파헤치더니, 재이의 신분증을 찾아냈다. 켄은 다시 쪼르륵 계단을 내려와 뒷문으로 나왔다. 그러는 사이, 주방 주인이 과일 깎은 것을 내와 주인장 앞에 내주었다.

컹! 컹컹!

오닉스는 켄이 건네준 신분증을 들고서 천천히 몸을 돌려 마구간을 빠져나갔다. 그의 영리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재이인지라, 그는 평소에도 오닉스를 묶어두지 않았다. 매여있는 것은 오로지 동키뿐. 동키는 오닉스를 배웅하듯 크게 울어젖혔고, 그 탓에 오닉스의 말발굽 소리는 묻혔다.

타닥타닥!

"음? 웬 말이?"

"뭐해? 어서 이리 오라고!"

"아니, 저기 말이 가는데?"

"네 말이야?"

"그건 아니고."

"그럼 어서 오라니까!"

마을 주민 몇몇이 오닉스가 혼자 움직이는 걸 보았지만, 이내 바로 관심을 거두고서 호수로 달려갔다. 정부 관계자가 네시를 찾아 죽이려 한다, 따위의 와전된 소문이 이미 쫙 퍼졌기 때문이다. 오닉스는 냄새를 따라 힘차게 달음박질했고, 아주 쉽게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별일이 없다면, 반나절만에 반대 마을에 당도할 것이다.

히이잉!

그곳에는 보안대가 있다. 막달린 마을 역시 그쪽 관할이었지만, 거리가 꽤 있는데다 마을 자체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평상시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최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마을에 보안대를 두자는 의견이 종종 있었으나, 막달린 마을에서 이를 거부했다. 왜?

타앙! 탕!

"아씨! 진짜 왜들 이래요오오!"

"리베로, 애원할 시간에 총을 쏴."

"네가 쏴! 내가 쏘면 총알 아까우니까!"

"젠장, 왜들 총만 쏘고 있어요? 노를 저으라니까!"

"어어, 가라 앉습니다-"

"하씨, 렌! 넌 내가 지켜줄게!"

"닥치고 노 저으라고오!"

저러니까. 재이가 정부 관계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 개판 오 분 전 난리가 났는데, 보안대라는 외부 세력이 들어오면 마을 분위기가 어땠을지는 눈에 훤했다. 자경대를 보안대로 승격시키는 것 외, 외부의 간섭을 허락할 리 없지 않나. 오닉스가 오솔길 사이로 사라지는 동안, 켄과 동키는 당근 따위를 와작와작 씹으며 주인들이 물에 잠기는 걸 지켜봤다.

촤아아악!

"어! 아저씨! 여기! 여기!"

보트를 빌려줬던 노인들이 재이 일행으로 맹렬하게 다가왔다. 분명히 저 기세는 구해주려는 것이다. 그래, 아무렴! 미친 마을이라도 몇몇은 정신 똑바로 박혀있기 마련-

"이 새끼들아!"

"엥?"

"배가 다 망가졌잖아!"

"아니, 우리가 망가트렸나? 총은 저쪽에서 쐈는데!"

"됐고, 수리비! 수리비 내놔! 가진 걸 내놓으란 말이다!"

노인들은 그들을 건져서 보따리만 빼갈 생각이었다. 여관에 있는 짐이라고 해봤자, 여관 주인이나 자경단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까, 시체가 털리기 전 주머니 쌈짓돈이라도 가져가야지. 그들이 기다란 노를 휘두르며 재이 일행을 위협하자, 렌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납작 눕혔다.

"미쳤나봐 진짜!"

"내놓으라고!"

타앙!

하트먼은 배로 넘어오려는 노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시체가 호수가로 풍덩 빠지며 모습을 감추었다. 흐릿하게 스며드는 붉은 핏물이 아니었더라면, 시체가 잠긴 걸 아무도 모를 것이다.

"히익!"

그 모습을 보고서 렌의 얼굴이 더 희게 변했다. 혹시나, 혹시나 말이다. 네시가 상어처럼 피 냄새에 환장하는 족속이라면 어쩐단 말인가? 네시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지만, 이미 호수에서 사람이 여럿 죽었고, 못 건진 시체만 한가득이다.

"나가요! 나가! 어서!"

렌은 노인들이 가져온 배로 옮겨타자 이르며 노를 집어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솨아아악-

"······!"

배 아래로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 재이 일행이 총 쏘는 것을 멈추고 몸을 굳혔다. 호수의 흐름이 기이해졌다. 이는 총을 쏘아대던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입을 떡 벌리며 호수 표면 위까지 올라온 무언가를 응시했다.

"네, 네시? 진짜?"

"진짜라니까! 저건 진짜라고!"

"아니, 진정해. 아직 안 보이잖아. 큰 물고기일 수도 있다고."

"등신아! 저렇게 큰 물고기가 어디있어?!"

마을 사람들이 네시의 존재에 대해 떠들며 멈출 때, 정신을 퍼뜩 차린 작자들이 있었으니.

"네시가 김재이 죽이면-"

"안 되지!"

타앙! 탕!

바로, 마을 사람들이 아닌데도 함께 총을 쏘아대던 인간들이다. 그들은 미 전역 방방곡곡을 떠돌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모험가······이면서 부랑자에 가까운 자들이었다. 그들은 김재이가 네시를 찾든 못 찾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김재이를 잡아야지!'

'서부의 전설을 내가 꺾으면-! 크하하핫!'

'큰 돈을 벌 수 있어!'

'김재이'라는 인간을 그저 잡고 싶었을 뿐. 재이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부자였고,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실력자였고,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적이 많았다. 이건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그의 손에 죽었던 수많은 유명인사, 혹은 이름 모를 인간들이 남긴 씨앗이다. 김재이가 지금껏 쌓아온 명성을 단번에 앗아오는 길은, 그자를 죽이고 물려 받는 수밖에 없다.

'핑커튼에서 주시하고 있다던데!'

'나도 드디어 건당 100달러 총잡이가 되는 건가?'

'김재이, 개새끼! 네놈 때문에 그레고리가 죽었어!'

철컥!

김재이를 죽이면 단숨에 서부의 일인자가 된다! 명예에 눈 먼 자들은 재이가 물에 빠지기 전 제 총알에 목숨 잃기만을 바랐다.

"어서, 옮겨가요!"

"렌, 먼저!"

"아잇, 자요! 손 잡아요!"

렌은 덜덜 떨리는 다리로 배를 넘어갔고, 이어서 리베로와 하트먼이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남은 재이. 그는 사실 배를 타고 있다 말할 수준이 아니었다. 무릎을 지나 허벅지까지 물이 차올랐으니까. 그저, 물 속에 잠긴 나무 판자를 딛고 서 있다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재이 씨! 여기!"

하트먼이 손을 뻗으며 재이를 잡아주려고 할 때였다.

휘이이익!

물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무언가에 재이가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찰나였다. 어두운 호수 아래로 재이의 몸이 노인의 시체처럼 잠겼다.

"재이 씨!"

"재이!"

렌과 리베로가 놀라서 배 아래에 대고 소리쳤지만, 놀랍도록 어떠한 울림도 들리지 않았다. 허우적대거나, 손과 발을 휘젓는 등의 반응 말이다. 마치 순식간에 네시의 목구멍 안으로 빨려들어간 것 같다.

"아······."

이거 어쩌지? 다들 사고회로가 정지된 것처럼 멈추었다.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숨 역시 멈춘 상태였다, 호흡하는 것을 잊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상태. 하지만 이내, 렌이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에 묶인 끈을 잡아당기더니, 그 끄트머리를 리베로와 하트먼에게 맡겼다.

"뭐, 뭐해?"

"뭐하긴요. 재이 씨 수영 못 한다 했잖아요."

"그래서? 내려간다고? 네시가 있는데?"

"피가 안 보여요."

잡아먹혔어도, 아그작 씹히지는 않았다는 거겠지. 렌이 뛰어들려고 하자, 리베로가 그녀의 허리를 붙들며 말려댔다.

"미쳤어? 죽는다고!"

"아잇! 놔봐요. 어차피 여기 있어도 전 총도 못 쏜다고요. 두 사람은 저쪽이나 정리해요."

퍼억! 렌이 리베로의 턱을 가볍게 날린 다음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을 사람들의 움직임은 모두 멈춘 상태. 재이의 목숨을 노리던 놈들도 재이가 사라지자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철컥!

그 틈을 놓치지 않는 하트먼. 하트먼이 장전하고서 자신들에게 위협을 가했던 사내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타앙! 탕! 탕!

"하트먼!"

"재이 씨 올라와도, 저놈들 정리 안 하면 배 못 댑니다. 그러니까, 리베로 씨는 줄이나 꽉 잡고 있어요. 렌 씨가 신호주면 말해주고."

"아씨! 젠장!"

리베로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이내 정신 차리고서 두 손으로 줄을 단단히 쥐었다. 마치 이것이 렌의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

'와씨.'

좆됐다. 재이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낯선 괴물을 보고서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기다란 목과 미끄러워 보이는 흰색 피부 그리고 코끼리와 같은 몸체. 저게 다 뭐란 말인가? 아무리 게임 속 세상이라지만-

'아.'

게임 속 세상. 그렇구나. 그러면 이해가 되지. 재이는 네시가 검은 동공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무서움은 생각보다 쉬이 가라앉았다. 놈에게서 적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었지만, 물에 젖은 상태로는 무용지물. 재이는 총을 버리고서 헤엄치기 위해 손발을 크게 휘저었다.

쉬이이익!

그러자 네시가 그 주위를 유영하며 수면 위로 올라가려는 것을 방해했다. 숨이 점차 차오르는 게 느껴지는데, 이놈이? 놈은 뭔가 원하는 게 있는지, 계속해서 재이 인근을 맴돌았다.

'아니.'

나 이러다 숨 넘어가겠다고! 재이의 코와 입에서 공기방울이 부르륵 터져나왔다. 그때, 네시가 그의 옷깃을 잡고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 것 아닌가?

촤아아악!

이거, 이놈 수법인가? 호수 바닥까지 끌고 가서 숨 끊은 다음 먹어치우려고? 재이가 있는 힘껏 발버둥치려 할 때였다.

반짝!

그의 눈앞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바로, 금빛 아우라. 그것은 네시를 타고 흐르면서 동시에 호수 바닥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쯤하니, 재이의 눈앞이 흐려졌다. 이러다가 오도가도 못하고 여기서 죽게 생겼다.

'그래, 가보자.'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어디 한번 해보자고. 재이가 네시의 이끌림에 따라 힘을 풀려고 할 때였다.

타앗!

렌이 그의 목덜미를 잡더니 두 턱을 단단히 받히고 그의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 정신이 오락가락한 상태를 확인하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네시는 계속해서 재이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고, 렌은 그걸 막을 수 없지 않나. 선택지가 없다.

흐읍!

렌은 재이의 입에 입을 맞추고 공기를 불어넣어줬다. 훅, 하고 들어오는 숨에 재이의 가슴이 부풀었다. 정신이 번뜩 드는 것도 잠시. 숨을 모두 넣어준 렌이 물 위로 올라갔고, 네시는 오래 기다렸다는 듯 다시금 그를 끌고 호수 아래로 내려갔다.

EP147. 없어

EP147. 없어

호수 바닥까지 가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여기가 얼마나 춥고, 무거우며, 어두운지. 재이는 실눈을 뜬 채로 계속해서 호흡을 참았다. 서부에서 처음 정신 차렸을 때보다, 지금이 더 현실성 없다. 살다살다, 네시라니. 그리고 그놈에게 이끌려 호수 바닥까지 내려오다니.

쉬이이익!

네시가 동굴처럼 생긴 곳으로 재이의 등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아주 놀랍게도, 동굴 윗부분에 공기가 조금 차 있는 것 아닌가. 얼굴을 들이밀면 딱 한 뼘. 한 뼘의 공간에 공기가 차 있었다.

"푸핫!"

재이가 숨을 토해내며 콜록거리자, 아래에서 이상한 느낌이 느껴졌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우면서 미끄러운······.

"어?"

네시 새끼다. 크기는 송아지만 했지만, 성체 네시와 비교하자면 너무 작아서 강아지처럼 느껴질 정도. 네시는 기운 없이 고개를 들이밀어 재이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어어, 잠만."

숨 좀 조금 더 쉬고. 재이는 폐 깊이 공기를 들이 넣은 다음 다시 잠수했다. 그러자 까만 눈동자가 댕그란 네시와 시선이 똑바로 마주쳤다. 제 어미는 사람 찢어 발길 것처럼 눈매가 무서운데, 그래도 얘는 새끼랍시고 꽤 귀엽-

'헉. 설마.'

새끼 먹이로 주려고 산 채로 데려왔나? 재이의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물속에 있는지라 인지하지 못했다. 재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긴장했다. 어미 네시가 동굴 밖에서 둘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끼이이익. 끼익.

그리고 연달아 구슬픈 소리를 내는 것 아닌가. 물속에서 그 울음은 재이의 귓가를 간질거렸다. 재이는 자신도 모르게 새끼 네시 쪽으로 손을 뻗었고, 이내 놈의 지느러미에 뭔가가 감겨있다는 걸 알아챘다.

'아아.'

네시의 지느러미에 낚시 그물이 걸려있다. 그것은 날카로운 바위 끄트머리에 걸려있는지라, 새끼는 꼼짝없이 그 동굴 주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제 좀 알 것 같다.

'이거 풀어달라고?'

오래되었나 보다. 낚시 그물이 엮인 지느러미에 아문 상처가 보였다. 살점과 함께 그물이 파묻혀있었다. 네시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게 3년 전이라고 했던가? 아니면 2년? 아무튼, 그때부터 이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먹이 같은 건 어미가 구해다 주고.'

인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겠지만, 이놈들은 똑똑한 족속이었다. 인간들이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가진 총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에 빠진 사람들을 데리고 왔던 거군.'

하지만 대부분은 동굴에 닿기 전 익사해서 죽었을 것이다. 아니면, 공포에 심장마비가 왔거나. 재이의 추론을 증명하듯, 저 먼 곳 물풀 더미에 시체 하나가 걸려있었다.

'다행이다. 사람은 안 먹나보네.'

먹었더라면, 시체가 저리 온전할 리 없지. 재이가 생각을 거듭하며 서 있자, 어미 네시가 그를 재촉하듯 울어댔다.

끼이익. 끼익.

'알았어. 기다려봐.'

그는 허리춤에 달린 잭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물이 단단하고 억세 보였지만, 그래 봤자 그물 아니겠는가. 재이는 동굴 위로 다시 올라가 숨을 들이마셨고, 내려와 그물 자르는 행위를 반복했다.

"푸핫!"

몇 번이나 했을까. 반쯤 뜯긴 그물에 새끼 네시가 즐거워하며 꼬리를 파닥거렸다.

'살점에 묻힌 그물은 어쩔 수가 없다. 앞으로 다른데 안 걸리게 대충 다 풀어서 끊어줄 수밖에.'

이게 다 뭐하는건지 원. 위쪽 상황은 어찌되었는지 걱정되었지만, 재이는 나이프질에 집중했다. 이걸 하면-

반짝!

뭔지 모르겠지만 스킬이나 이득이 들어온다! 뭐, 사실 이런 상황에서 저걸 끊어주지 않을 인간이 몇이나 되겠느냐만은.

타앗!

재이가 마지막 그물을 끊어내자, 새끼 네시가 있는 힘껏 앞으로 달려가 헤엄쳤다. 몇 년 만에 얻은 자유를 만끽하며, 이리저리 돌고 돌아 기쁨을 표현했다.

끼이이익!

두 마리의 네시는 서로 머리를 맞대며 행복해했고, 재이는 그물 쪼가리를 대충 버리며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자아, 이제 다 했으니까 나를 위로 데려다줄래? 줄 거 있음 주고.

'엥?'

이게 무슨 일? 네시 두 마리는 재이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대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 아닌가? 이런 미친 것들아! 구해줬으면 보답을 해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황당한 것도 잠시, 막막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시발, 진짜. 저 새끼들-'

어지간이 깊어야지! 올라다가 숨 막혀 뒤지겠네! 재이는 동굴에 얼굴을 들이밀고서 급한 호흡을 진정시켰다.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머리와 달리, 몸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씨발! 네시 이것들아!"

우웅-! 우웅-!

동굴에 가로 막혀 재이의 고함은 재이의 귀를 때려댔다. 다음에 만나면 진짜 알아서 해라! 재이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숨을 최대한 깊에 들이마셨다. 동선은 단순하고, 짧게. 호흡은 길게. 평정심은 무조건! 여기서 평생 숨만 붙이고 살거 아니라면, 체온이 더 떨어지기 전에 나가는 게 좋겠다.

푸확!

재이가 물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호수 위쪽으로 손발을 휘적거렸다. 조금씩, 조금씩, 햇빛이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점점 차오르는 숨.

'끄으윽.'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손만 뻗으면 어찌 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부서진 배 파편이 재이의 주위에 떠돌고 있었다. 아아. 저기 또 다른 배 밑부분이 보인다.

'으아아아!'

서부에서 처음으로 겪는 죽음의 고비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잠수함이라도 사서 저놈들 찾아와야지.

끼이익! 끼익!

그때였다. 희미하게 네시의 울음이 들렸다. 두 마리는 황당하다는 듯 급하게 다가와 재이의 몸을 등에 받쳤다. 놈들은 입에 뭔가를 물고 있었는데, 아마 그걸 가지러 가기 위해 잠시 모습을 감췄던 것 같다.

'병신아.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왜 나왔어?'

'엄마. 이 자식 뭐지요?'

'몰라. 성격 한번 급하구나.'

얼핏 마주친 네시의 시선이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재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놈들이 건네준 물건을 손에 꼭 쥐었고-

'어억. 나 죽는다.'

꼬르륵.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아아. 진정들 하시고."

"시발, 진정하게 생겼어? 총 쏜 새끼들 다 묶어서 교수형 달아버려. 진짜."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므슨 마를그르게 합니까아아? 지랄도 병이지. 약도 없는 병. 총질로 벌집 될 뻔한 거 알아, 몰라?"

"아니, 그건 서로간 오해가 좀 있었잖아요."

"이봐요. 보안관 양반. 우리가 정부관계자라 생각해서 죽이려 했다잖아요. 이거 반정부적인 사상과 태도 아닙니까? 보안관 그쪽도 지금 대원들이랑 같이 있어서 그렇지, 혼자 있어봐요! 바로 뒤졌을걸?"

"리베로 씨라고 했나요?"

"몇 번을 말해!"

"렌 씨, 진정을 좀 하시고-"

"차라리 일대일로 들어오라고! 엉? 뒤에서 그러지 말고!"

으음. 시끄러워.

재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몸이 상당히 무겁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숨 쉬는 것도 좀 힘들고. 아무튼, 다들 입 좀 다물어 줬으면 좋겠는데.

"봐봐요. 김재이는 저렇게 누워있고, 우리도 여기 다친 거! 이거 그냥 안 넘어가!"

"맞아요! 물 잘 못 먹으면 바보 되는 거 몰라요? 지금 서부에서 제일 돈 많고, 그, 잘 나가는 사람인데 한 순간에 병신되면 누가 책임질 건데? 나한테 월급 주는 사람이란 말이야!"

"나도! 나도 재이한테 받을 거 있어!"

"하트먼 씨! 안 그래요?"

"예예. 그렇습니다."

리베로? 넌 나한테 뭘 받을 게 있는데?

재이가 어이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은근슬쩍 말 얹는 거 봐라. 내가 죽어도 너한테는 돈 한 푼-

아니지. 퇴직금 명목으로 조금 쥐어주긴 할 건데, 꿈 깨는 게 좋을 거다. 크흠.

"근데 진짜 오닉스가 그쪽들 불러온 거예요?"

"오닉스? 아, 그 말 이름이 오닉스인가보죠?"

"재이 말이거든요. 애가 영리한 건 알았지만, 진짜 기똥차네."

"저희도 웬 말이 혼자 이러고 있나 싶었는데, 재이 씨 신분증을 주더라고요. 요즘 이쪽 동네에서 김재이 씨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뭐. 무슨 일이 있나보다 하고 따라온 겁니다."

그쯤 하자, 재이가 눈을 떴다. 장소는 그가 묵었던 여관방. 이불이 몇 겹이나 덮여 있는지 무거워 죽겠다. 재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문을 두고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쪽은 리베로와 하트먼 그리고 렌. 그리고 나머지 반대쪽은 마을 사람들과 보안대.

"······베로."

"어쨌거나! 딱 각오해요! 김재이 일어나면-!"

"리베로."

"봐봐. 이렇게 딱 일어났잖아? 그럼 당신네들은 이제-! 헉!"

리베로가 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다가 멈칫거렸다. 재이가 정신을 차리다니!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 그래도 어지럽고 힘든데, 못생긴 얼굴들 보려니 힘드네.

"아, 뭐야? 나 어떻게 됐어?"

"내가 할 말이다! 갑자기 호수 위로 둥둥 떠올라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죽는 줄 알았어, 인마."

"이런 걸로는 쉽게 안 죽지."

"하긴. 총잡이가 물에 빠져 죽는 것만큼 폼 안 나긴 해."

재이는 시답잖은 농담 집어치우고, 상황 설명 하라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하트먼이 주민들을 뒤로 물리는 와중, 리베로는 고개를 들이밀어 속삭였다.

"네시 나타난 것 같다고 해서 주민들은 총질 멈췄고, 대신 바람잡이 같은 놈들이 덤비더라고. 내가 딱 정리하고-"

"하트먼 씨가 정리하고."

렌이 빠르게 끼어들어 정정했다.

"어엉. 아무튼, 그렇게 정리하고, 일단 뭍으로 나왔거든. 어쩌나 싶어서 주민들하고 대치하고 있었단 말이지. 근데 얼마 안 가서 오닉스가 옆 마을에서 보안대를 끌고 왔어. 그때 너도 호수 위로 둥둥 떠오르고. 일단 건져서 여관으로 들어왔고, 지금은 뭐. 보시다시피."

체포하네, 마네 보안대와 주민들 사이에서 소란이 있었던 것이다. 재이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고, 그걸 본 주민들이 재빠르게 물어왔다.

"김재이, 호수 아래에서 네시를 봤어요?"

"네시, 진짜 있죠? 그놈 눈으로 본 거 맞죠?"

"맞다니까 그러네! 재이 씨, 얼른 말해봐요, 뭘 봤는지."

"옷자락 뜯긴 거 보니까 뭔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소문으로만 떠돌고, 의심으로만 그려내던 네시의 모습을, 김재이는 보았으리라! 주민들은 그리 여기며 재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보았다고 이르기만 한다면, 네시 시체고 뭐고 필요 없이 이는 기정사실이 되는 것이다. 김재이만큼 유명한 자라면 입밖으로 내는 즉시 사람들의 신뢰를 받을 것 아닌가. 막달린 마을에는 더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오리라! 그들은 사과한다며 말을 덧붙였지만, 재이의 증언을 듣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했다.

"아. 네시."

렌이 그를 힐끔거렸다. 렌도 제이를 따라 잠수했을 때, 네시를 보긴 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침묵하고 있었는데-

"그런 건 없던데."

뭐? 주민들이 눈을 끔뻑였다.

"좀 큰 붕어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내가 수영을 못 해서 허우적댔던 거지, 네시 같은 건 없었어."

"거, 거짓말."

"내가 뭐하러? 죽다 살아났는데."

재이는 딱 잡아떼며 네시는 없노라 증언했다. 그것은 자신들에게 총질했던 주민들에게 할 수 있는 강력한 복수였다. 네시가 없는 시골 마을에 대체 누가 오겠나? 재이는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나가서 신문사 좀 들쑤셔야겠어. 어느 등신 머저리 같은 데가 여기 네시가 있다고 한 건지. 호수 바닥까지 갔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다고."

영향력이 뭔지 보여주마.

쳐죽일 것들아. 마을 씨를 말려주마.

"못 믿겠으면 호수 바닥까지 갔다 와보든가."

EP148. 오해

EP148. 오해

"에, 그러니까, 호수 바닥까지 갔는데 아무것도 못 봤단 말이죠?"

"큰 붕어 말고는."

"예에, 흐음."

재이는 침대에 누운 채 아몬드만 주워먹었다. 그의 옆에 앉아서 수첩을 끄적이고 있는 자는 인근 마을의 작은 신문사 직원. 그는 연신 펜으로 콧잔등을 벅벅 긁더니, 재차 되물었다.

"그럼 재이 씨는 그 붕어가 네시였다 주장하시는 겁니까?"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네시는 없었다고요. 뭔 말이 그렇게 깁니까?"

네시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질렀고, 이에 주민들이 공격을 멈췄다. 그 뜻은, 지금껏 그들이 보면서 네시라 여겼던 무언가가 분명히 물속, 재이의 보트 아래에 있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갔는데, 붕어밖에 없었다? 호수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김재이가 못 본 것이지 없는 게 아니다, 따위의 변명을 바로 틀어막는 증언이었다.

"예에, 워낙 뭐랄까. 다들 궁금해하는 내용이니까요. 몸은 좀 괜찮으신 거죠?"

"빨리도 물으시네요."

"지금 덕분에 마을이 아주 시끌시끌합니다. 중앙정부에서도 조사 나온다고 할 정도예요. 감옥 수가 모자라서 보안관 사무실 창고까지 쓰고 있다니까요."

아하. 그러셔요? 재이는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막달린 마을에서 재이에게 총질을 해댔던 사람 대부분이 보안대에 끌려가서 조사 받고, 그대로 수감되었다. 워낙에 시골 중의 시골인지라, 이주판사가 와서 재판이 열릴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터.

"리베로, 거기 내 지갑."

재이는 리베로에게 손끝을 까딱거렸고, 리베로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가죽지갑을 내어주었다. 사실, 서부에서는 지갑이라는 물건 자체가 부를 상징하는 소지품이었다. 대체 누가, 현금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그것도 수납 공간이 특별히 필요한 만큼!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건만.

"이건 말씀드렸던 신문사 기부금입니다."

"아, 이렇게 주셔도 되나요?"

"가시는 길에 맛있는 것도 좀 사먹으시라고."

적당히 알아서 떼 먹으라는 뜻이다. 대신, 기사는 자극적으로! 그리고 강렬하게! 말 안해도 알지? 기자는 재이가 내민 돈을 두 손으로 받들고서 고개를 꾸벅였다.

"아유, 감사합니다."

"예, 별말씀을요.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재이 씨는 언제쯤 이동하시는데요?"

"글쎄요. 여기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서. 의사가 절대 안정이라고 처방해준 게 딱 오늘까지거든요. 하루 이틀 안으로 떠날 것 같네요. 우선은 그쪽 마을로."

"아아. 저희 쪽으로 오시는구나. 작긴 하지만 여기보다는 낫죠. 있을 거 다 있고."

"뭐. 있을 거 다 있는 것도 좋은데, 없어야 할 게 없는 게 더 좋습니다."

재이의 말을 알아챈 기자가 방긋 웃었다.

"그럼 저희 마을 다음은요? 새크라멘토로?"

"음······."

재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번 일로 하나 확실히 배웠다. 유명세라는 건 진짜 세금과 같다는 것. 재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것 자체가 사건사고를 만든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 괜히 흘렸다가 또 똥파리 꼬이면 어째? 신문기자는 하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소식 듣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예예, 저도 신문기사 기다리겠습니다. 그쪽 마을로 옮겨가면 바로 기사를 볼 수 있겠군요. 잘 부탁합니다."

"물론입니다. 힘내서 글 쓰라고 밥까지 사주시는데. 하하! 그럼, 이만."

기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자 재이는 벌떡 일어나 창문 밖을 살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주민 절반이 사라졌다. 그들은 옆 동네에 수감 되어 있으며, 수감된 자들의 가족은 그들을 보살피기 위해 또 그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조용하네."

동네가 텅 비어버린 것이다. 그뿐인가? 네시를 찾아왔던 구경꾼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제 갈길을 떠났다. 호수 바닥까지 들어갔다 나온 재이가 '네시는 사실 붕어였다!'라고 주장해대니, 김이 팍 식어버린 것이다.

"관광객들도 싹 빠지고."

"관광객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지만."

개중 일부는 재이 일행을 해하려 했지만 운 좋게 도망 잘 친 놈들이 섞여있을 터. 아마 재이 일행이 묵고 있는 여관과 몇몇 상점을 제외하면 모두 빈집일 것이다. 목욕을 마치고 온 하트먼이 방안을 둘러봤다.

"기자가 벌써 갔습니까?"

"마지막으로 확인하려 한 거겠죠. 아무래도, 네시가 없다고 하면 그쪽도 조금 곤란할 거니까."

막달린 마을에 사람들이 몰려들면 그 옆 마을도 수혜를 얻었다. 이곳의 물자와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그건 재이가 신문사에 기부하는 기부금으로 간단히 지워지는 문제다. 무릇 사람이란 장기적인 공공의 이득보다는 눈앞에 놓인 자신의 이득을 중시하는 법이니까. 안 그런가?

"그렇긴 해. 근데 재이, 이제 우리 어디로 가?"

"음. 글쎄."

"글쎄라니! 집 놔두고 왜 자꾸 밖으로 나도는데?"

"내 팔자라서 그래."

"팔자가 뭔데."

재이는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이렇게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며 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장소가 영 부적합했다. 어쨌거나 재이는 마을을 박살낸 장본인 아닌가? 주민들이 되돌아온다 한들, 네시 없는 이곳은 이제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사라질 터.

"이동을 하긴 해야지."

쉬어도 다른 곳에서 쉬는 게 맞다. 재이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 속 열쇠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정신이 끊어지는 순간, 네시가 그에게 건네준 물건이다. 주머니에 난데없는 열쇠가 들어있기에 물었더니, 자신이 기절했음에도 꽉 쥐고 있던 거란다. 도저히 풀지 않아서 애 좀 먹었다고, 리베로는 툴툴 거리며 말했다.

"너도 참 너다. 바닥에서 뭘 그런 걸 주워와?"

"그러게. 정신 없는 와중에도 참 징글징글하네."

"여관 주인장도 모르는 눈치더라고. 혹시 마을에 뭐, 공용 금고나 아니면 괴담에 버려진 집 따위가 있는지 물어봤었거든."

상상력하고는. 딱 봐도 크기가 작아서 그런 용도가 아니다. 집이나 금고보다는, 보석함을 여는 정도의 크기? 재이가 그것을 뼈 목걸이와 이은 다음 목에 걸었다.

'어쨌거나, 죽다 살아나서 받은 거니까 어디든 쓸모가 있겠지.'

재이는 그렇게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똑똑.

그때, 렌이 문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내었다.

"식사 준비 됐으니까 내려오세요."

"오, 오늘은 렌이 해주는 거야?"

"여관 주인이나 직원이 음식 할 정신머리가 아니라서. 어서 내려와요."

마을이 한순간에 풍비박산 났는데 여관 주인이 멀쩡하겠나? 게다가, 그는 마음 깊이 네시가 있다고 믿었다. 직접 두 눈으로(아주 멀리서였지만) 보기도 했고. 재이에게 따지고 들자니 호수 바닥에서 살아돌아온 총잡이를 이길 수는 없는지라,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절충했다.

"전세냈네."

덕분에, 여관에는 그들밖에 없었다. 네 사람이 둘러 앉아 밥을 먹으려고 하자, 밖에서 켄이 문을 긁어댔다.

멍! 멍멍!

자신도 먹을 것 좀 달라는 듯이. 재이는 소시지와 당근 따위를 챙겨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오닉스와 동키 역시 여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자, 다들 맛있게 먹어라."

덕분에 죽다 살아났다. 신분증을 어떻게 가방에서 빼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켄이 들어와서 가져갔겠지? 오닉스 몸으로는 문도 못 들어오니까.

"너희들 근데, 동물 아니지. 사람이지?"

영리해도 이렇게 영리할 수가 있나? 거의 사람 수준이다. 재이가 위험에 처했다는 판단과 그걸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자체적으로 생각해서 행한 것 아닌가. 오닉스는 기분 좋게 투레질을 하며 당근을 씹어댔다.

"현대였으면 우리 진짜 떼돈 벌었겠다."

유튜브니 방송출연이니 돈 벌 수단이 무궁무진하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재이가 어이없이 웃으며 멈칫거렸다.

'이래서 소시민은 어쩔 수가 없네.'

수백 평대의 저택을 갖고 있고, 심지어는 석유 회사 매출 지분까지 갖고 있으면서 고작 동물농장으로 돈 벌 생각을 하다니. 먹고 자는데 어려움은 없지만, 하도 개고생을 하고 다녀서 재력가라는 감각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참에 아예 동부로 넘어가볼까.'

어차피 로건의 수첩에 따르면 메인 퀘스트 주 무대가 동부쪽이었다. 중앙정부의 군부대와 연계된 임무였으니, 당연히 그쪽 인사가 많이 모여있는 쪽으로 가는 게 옳다.

'일단 인디언 측이랑 네시 쪽 퀘스트는 깼으니까.'

굳이 서부 쪽을 돌아다니며 전전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다. 지금 시대의 동부, 세계에서 제일 가는 대도시, 뉴욕의 모습은 어떨지.

'핑커튼 놈들이 있겠지만, 미정부랑 연계하려면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

이 시대에서 핑커튼은 용병회사이자, 사적군사였으며, 움직이는 군대였기 때문이다. 미국 전역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에 핑커튼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래. 어차피 한번 엮이게 될 거, 아예 먼저 들이받아버리지 뭐.'

좋다. 다음은 동부다.

재이가 오닉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결정했다.

"재이! 뭐해? 밥 식겠다!"

"이게 무슨 죽이라고요?"

"생선죽이요. 처음 봐요?"

"······좀, 예. 그렇네요."

"······방금 개밥 같다고 생각했죠?"

리베로가 그를 부르고, 렌과 하트먼이 정갈하게 담긴 죽을 두고서 티격거렸다. 재이는 동물들을 두고 안으로 들어와 숟가락을 들었다.

"역시 아플 때는 죽이죠."

"바보냐? 아플 때는 데운 위스키지."

"······너나 그렇게 먹어."

조선에서는 아플 때 죽 안 먹으면 낫지 않는 문화가 있단다. 바보야. 재이가 한술 크게 뜨며 죽을 비우기 시작하자, 렌은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빤히 지켜봤다.

"······왜요?"

"아니. 그냥요. 잘 먹으니까 좋아서."

뭔가, 말투의 뉘앙스가 이상했다. 리베로가 소시지를 뜯어 먹다가 멈칫거리고, 하트먼은 인지하지 못했는지 맥주를 들이켰다. 리베로의 눈이 재이와 렌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어지럽게 살폈다.

"저, 할 말 있어요. 재이 씨."

"어······."

주륵, 재이의 입가로 죽이 흘러내렸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호수에 빠졌을 때, 렌이 자신에게 숨을 불어넣어준 거.

'큰일 났네,'

솔직히 현대인의 관점에서 그정도 스킨십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게다가 생과 사를 오가는 절체절명의 순간. 인공호흡 따위에 감정 실을 틈이 어디있단 말인가. 하지만 렌은 상황이 달랐다. 그녀는 보수적 유교관을 배우고 자란 조선 여자였으며,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저기, 렌 씨. 그, 고마운데요, 딱 잘라서 말할게요."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그럼 제가 뭐가 돼요?"

"헉. 저기, 뭐랄까. 이건 필수불가결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 뭐 그런 거였거든요."

"그런 건 없어요."

렌이 상체를 숙이며 재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리베로의 눈이 세모로 바뀌며 그가 포크를 칼 쥐듯 쥐었다. 재이와 리베로가 동시에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자, 렌이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수고비 주셔야죠. 물에 두 번 들어갔다 나왔으니 두 배로. 아직 정산 안 하셨는데."

EP148. 오해

EP148. 오해

"에, 그러니까, 호수 바닥까지 갔는데 아무것도 못 봤단 말이죠?"

"큰 붕어 말고는."

"예에, 흐음."

재이는 침대에 누운 채 아몬드만 주워먹었다. 그의 옆에 앉아서 수첩을 끄적이고 있는 자는 인근 마을의 작은 신문사 직원. 그는 연신 펜으로 콧잔등을 벅벅 긁더니, 재차 되물었다.

"그럼 재이 씨는 그 붕어가 네시였다 주장하시는 겁니까?"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네시는 없었다고요. 뭔 말이 그렇게 깁니까?"

네시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질렀고, 이에 주민들이 공격을 멈췄다. 그 뜻은, 지금껏 그들이 보면서 네시라 여겼던 무언가가 분명히 물속, 재이의 보트 아래에 있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갔는데, 붕어밖에 없었다? 호수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김재이가 못 본 것이지 없는 게 아니다, 따위의 변명을 바로 틀어막는 증언이었다.

"예에, 워낙 뭐랄까. 다들 궁금해하는 내용이니까요. 몸은 좀 괜찮으신 거죠?"

"빨리도 물으시네요."

"지금 덕분에 마을이 아주 시끌시끌합니다. 중앙정부에서도 조사 나온다고 할 정도예요. 감옥 수가 모자라서 보안관 사무실 창고까지 쓰고 있다니까요."

아하. 그러셔요? 재이는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막달린 마을에서 재이에게 총질을 해댔던 사람 대부분이 보안대에 끌려가서 조사 받고, 그대로 수감되었다. 워낙에 시골 중의 시골인지라, 이주판사가 와서 재판이 열릴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터.

"리베로, 거기 내 지갑."

재이는 리베로에게 손끝을 까딱거렸고, 리베로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가죽지갑을 내어주었다. 사실, 서부에서는 지갑이라는 물건 자체가 부를 상징하는 소지품이었다. 대체 누가, 현금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그것도 수납 공간이 특별히 필요한 만큼!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건만.

"이건 말씀드렸던 신문사 기부금입니다."

"아, 이렇게 주셔도 되나요?"

"가시는 길에 맛있는 것도 좀 사먹으시라고."

적당히 알아서 떼 먹으라는 뜻이다. 대신, 기사는 자극적으로! 그리고 강렬하게! 말 안해도 알지? 기자는 재이가 내민 돈을 두 손으로 받들고서 고개를 꾸벅였다.

"아유, 감사합니다."

"예, 별말씀을요.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재이 씨는 언제쯤 이동하시는데요?"

"글쎄요. 여기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서. 의사가 절대 안정이라고 처방해준 게 딱 오늘까지거든요. 하루 이틀 안으로 떠날 것 같네요. 우선은 그쪽 마을로."

"아아. 저희 쪽으로 오시는구나. 작긴 하지만 여기보다는 낫죠. 있을 거 다 있고."

"뭐. 있을 거 다 있는 것도 좋은데, 없어야 할 게 없는 게 더 좋습니다."

재이의 말을 알아챈 기자가 방긋 웃었다.

"그럼 저희 마을 다음은요? 새크라멘토로?"

"음······."

재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번 일로 하나 확실히 배웠다. 유명세라는 건 진짜 세금과 같다는 것. 재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것 자체가 사건사고를 만든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 괜히 흘렸다가 또 똥파리 꼬이면 어째? 신문기자는 하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소식 듣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예예, 저도 신문기사 기다리겠습니다. 그쪽 마을로 옮겨가면 바로 기사를 볼 수 있겠군요. 잘 부탁합니다."

"물론입니다. 힘내서 글 쓰라고 밥까지 사주시는데. 하하! 그럼, 이만."

기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자 재이는 벌떡 일어나 창문 밖을 살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주민 절반이 사라졌다. 그들은 옆 동네에 수감 되어 있으며, 수감된 자들의 가족은 그들을 보살피기 위해 또 그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조용하네."

동네가 텅 비어버린 것이다. 그뿐인가? 네시를 찾아왔던 구경꾼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제 갈길을 떠났다. 호수 바닥까지 들어갔다 나온 재이가 '네시는 사실 붕어였다!'라고 주장해대니, 김이 팍 식어버린 것이다.

"관광객들도 싹 빠지고."

"관광객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지만."

개중 일부는 재이 일행을 해하려 했지만 운 좋게 도망 잘 친 놈들이 섞여있을 터. 아마 재이 일행이 묵고 있는 여관과 몇몇 상점을 제외하면 모두 빈집일 것이다. 목욕을 마치고 온 하트먼이 방안을 둘러봤다.

"기자가 벌써 갔습니까?"

"마지막으로 확인하려 한 거겠죠. 아무래도, 네시가 없다고 하면 그쪽도 조금 곤란할 거니까."

막달린 마을에 사람들이 몰려들면 그 옆 마을도 수혜를 얻었다. 이곳의 물자와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그건 재이가 신문사에 기부하는 기부금으로 간단히 지워지는 문제다. 무릇 사람이란 장기적인 공공의 이득보다는 눈앞에 놓인 자신의 이득을 중시하는 법이니까. 안 그런가?

"그렇긴 해. 근데 재이, 이제 우리 어디로 가?"

"음. 글쎄."

"글쎄라니! 집 놔두고 왜 자꾸 밖으로 나도는데?"

"내 팔자라서 그래."

"팔자가 뭔데."

재이는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이렇게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며 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장소가 영 부적합했다. 어쨌거나 재이는 마을을 박살낸 장본인 아닌가? 주민들이 되돌아온다 한들, 네시 없는 이곳은 이제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사라질 터.

"이동을 하긴 해야지."

쉬어도 다른 곳에서 쉬는 게 맞다. 재이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 속 열쇠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정신이 끊어지는 순간, 네시가 그에게 건네준 물건이다. 주머니에 난데없는 열쇠가 들어있기에 물었더니, 자신이 기절했음에도 꽉 쥐고 있던 거란다. 도저히 풀지 않아서 애 좀 먹었다고, 리베로는 툴툴 거리며 말했다.

"너도 참 너다. 바닥에서 뭘 그런 걸 주워와?"

"그러게. 정신 없는 와중에도 참 징글징글하네."

"여관 주인장도 모르는 눈치더라고. 혹시 마을에 뭐, 공용 금고나 아니면 괴담에 버려진 집 따위가 있는지 물어봤었거든."

상상력하고는. 딱 봐도 크기가 작아서 그런 용도가 아니다. 집이나 금고보다는, 보석함을 여는 정도의 크기? 재이가 그것을 뼈 목걸이와 이은 다음 목에 걸었다.

'어쨌거나, 죽다 살아나서 받은 거니까 어디든 쓸모가 있겠지.'

재이는 그렇게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똑똑.

그때, 렌이 문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내었다.

"식사 준비 됐으니까 내려오세요."

"오, 오늘은 렌이 해주는 거야?"

"여관 주인이나 직원이 음식 할 정신머리가 아니라서. 어서 내려와요."

마을이 한순간에 풍비박산 났는데 여관 주인이 멀쩡하겠나? 게다가, 그는 마음 깊이 네시가 있다고 믿었다. 직접 두 눈으로(아주 멀리서였지만) 보기도 했고. 재이에게 따지고 들자니 호수 바닥에서 살아돌아온 총잡이를 이길 수는 없는지라,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절충했다.

"전세냈네."

덕분에, 여관에는 그들밖에 없었다. 네 사람이 둘러 앉아 밥을 먹으려고 하자, 밖에서 켄이 문을 긁어댔다.

멍! 멍멍!

자신도 먹을 것 좀 달라는 듯이. 재이는 소시지와 당근 따위를 챙겨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오닉스와 동키 역시 여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자, 다들 맛있게 먹어라."

덕분에 죽다 살아났다. 신분증을 어떻게 가방에서 빼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켄이 들어와서 가져갔겠지? 오닉스 몸으로는 문도 못 들어오니까.

"너희들 근데, 동물 아니지. 사람이지?"

영리해도 이렇게 영리할 수가 있나? 거의 사람 수준이다. 재이가 위험에 처했다는 판단과 그걸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자체적으로 생각해서 행한 것 아닌가. 오닉스는 기분 좋게 투레질을 하며 당근을 씹어댔다.

"현대였으면 우리 진짜 떼돈 벌었겠다."

유튜브니 방송출연이니 돈 벌 수단이 무궁무진하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재이가 어이없이 웃으며 멈칫거렸다.

'이래서 소시민은 어쩔 수가 없네.'

수백 평대의 저택을 갖고 있고, 심지어는 석유 회사 매출 지분까지 갖고 있으면서 고작 동물농장으로 돈 벌 생각을 하다니. 먹고 자는데 어려움은 없지만, 하도 개고생을 하고 다녀서 재력가라는 감각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참에 아예 동부로 넘어가볼까.'

어차피 로건의 수첩에 따르면 메인 퀘스트 주 무대가 동부쪽이었다. 중앙정부의 군부대와 연계된 임무였으니, 당연히 그쪽 인사가 많이 모여있는 쪽으로 가는 게 옳다.

'일단 인디언 측이랑 네시 쪽 퀘스트는 깼으니까.'

굳이 서부 쪽을 돌아다니며 전전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다. 지금 시대의 동부, 세계에서 제일 가는 대도시, 뉴욕의 모습은 어떨지.

'핑커튼 놈들이 있겠지만, 미정부랑 연계하려면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

이 시대에서 핑커튼은 용병회사이자, 사적군사였으며, 움직이는 군대였기 때문이다. 미국 전역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에 핑커튼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래. 어차피 한번 엮이게 될 거, 아예 먼저 들이받아버리지 뭐.'

좋다. 다음은 동부다.

재이가 오닉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결정했다.

"재이! 뭐해? 밥 식겠다!"

"이게 무슨 죽이라고요?"

"생선죽이요. 처음 봐요?"

"······좀, 예. 그렇네요."

"······방금 개밥 같다고 생각했죠?"

리베로가 그를 부르고, 렌과 하트먼이 정갈하게 담긴 죽을 두고서 티격거렸다. 재이는 동물들을 두고 안으로 들어와 숟가락을 들었다.

"역시 아플 때는 죽이죠."

"바보냐? 아플 때는 데운 위스키지."

"······너나 그렇게 먹어."

조선에서는 아플 때 죽 안 먹으면 낫지 않는 문화가 있단다. 바보야. 재이가 한술 크게 뜨며 죽을 비우기 시작하자, 렌은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빤히 지켜봤다.

"······왜요?"

"아니. 그냥요. 잘 먹으니까 좋아서."

뭔가, 말투의 뉘앙스가 이상했다. 리베로가 소시지를 뜯어 먹다가 멈칫거리고, 하트먼은 인지하지 못했는지 맥주를 들이켰다. 리베로의 눈이 재이와 렌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어지럽게 살폈다.

"저, 할 말 있어요. 재이 씨."

"어······."

주륵, 재이의 입가로 죽이 흘러내렸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호수에 빠졌을 때, 렌이 자신에게 숨을 불어넣어준 거.

'큰일 났네,'

솔직히 현대인의 관점에서 그정도 스킨십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게다가 생과 사를 오가는 절체절명의 순간. 인공호흡 따위에 감정 실을 틈이 어디있단 말인가. 하지만 렌은 상황이 달랐다. 그녀는 보수적 유교관을 배우고 자란 조선 여자였으며,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저기, 렌 씨. 그, 고마운데요, 딱 잘라서 말할게요."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그럼 제가 뭐가 돼요?"

"헉. 저기, 뭐랄까. 이건 필수불가결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 뭐 그런 거였거든요."

"그런 건 없어요."

렌이 상체를 숙이며 재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리베로의 눈이 세모로 바뀌며 그가 포크를 칼 쥐듯 쥐었다. 재이와 리베로가 동시에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자, 렌이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수고비 주셔야죠. 물에 두 번 들어갔다 나왔으니 두 배로. 아직 정산 안 하셨는데."

EP149. 도박장

EP149. 도박장

재이는 발끝을 까딱거리며 쌓인 신문을 손으로 훑었다. 지금 그들이 거처로 삼은 곳은 막달린 마을 인근의 매드타운이었다. 역시나 촌구석 동네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구 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던 막달린과 비교하면 번화한 측에 속했다.

"이게 다야?"

"신문은 그게 단데. 뭐 얼마나 대단한 기사를 보고 싶어서?"

재이의 물음에 리베로가 빵을 물고서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여기서 그들은 식재료를 보충하고, 생필품 등 물자를 확보한 다음 동부로 떠날 예정이었다. 다만, 휴식이라는 건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는지라 모두가 원기회복을 제대로 할 때까지 기간을 잡았다. 어차피 급한 것도 없으니까.

"대단한 걸 보고 싶은 건 아니고-"

"하여간 자의식 과잉. 너 물에 빠졌다가 기어 나온 게 기사로 나온 것도 신기하게 여길 판인데, 거기서 뭘 더 어떻게 하라고?"

"그게 아니라니까. 콱."

"아니면?"

"전쟁."

"전쟁?"

재이가 짜증스럽게 손날을 올리자, 리베로가 자연스럽게 목젖을 감싸며 보호했다. 재이는 지금 자신에 관한 기사를 찾고 있는 게 아니라, 엄연히 정보 수집 중이었다.

'로건의 다이어리에 따르면 이 게임 스토리의 끝은 정부군의 제안을 받고 전쟁에서 활약해 승리로 이끄는 것. 정부군 제안까지도 할 만하고, 승리로 이끄는 것도 가봐야 알 것이긴 한데-'

아니, 전쟁이 없다.

이게 말인가? 서부시대라고 하면 총기보급으로 인해 오만 곳에서 너 죽니 나 사니 하면서 지랄해댈 때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신문 기사에는 전쟁에 관한 것이 단 한줄로 실려있지 않았다.

대부분-

-미모의 여배우 랄프 레이디 실종!

-광산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남부의 새로운 희망이라 불리던 맥킨 광산의 기이한 전설!

-현상금 수배자 목록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긴급 회동? 정치적인 음모라 이르는 공화당 의원들

-투표의 자유를! 자유란 대체 무엇이며, 과연 어디까지가 자유라는 이름에 걸맞단 말인가?

-네시의 전설은 가짜였다! 호수 밑바닥까지 다녀온 사내의 증언!

등등. 개 헛소리 가십만 가득이었다. 마을 자체가 외진 곳이라 그런 걸까 싶었는데, 이건 그래도 너무한 것 아닌가? 재이는 끙, 소리를 내며 신문을 덮었다.

'됐어. 지금은 아니더라도, 가까운 시일 내에 전쟁은 일어날 수 있어. 뭐, 바라는 것도 웃기긴 한데 스토리가 그러니까.'

일단은 정부 쪽과 안면을 트는 게 순서겠지. 재이는 신문을 옆으로 치운 다음 찻잔을 홀짝였다. 몰랐는데, 렌은 찻물 내리는 솜씨도 훌륭했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구멍난 옷을 수선하고 있었다.

'쪽팔려.'

혼자 오바 육갑 다 떨었던 게 다시금 생각나서 머리가 아득해졌다. 재이는 렌에게 수고비 명목으로 딱 100달러에 맞춰 지급을 약속했고, 그날 이후 렌은 이전과 다른 충성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꿰고 있는 것도 재이의 구멍난 양말이었다.

"재이."

"응?"

"렌이 아무리 예뼈도 그렇게 보지마."

내. 거. 니. 까.

리베로가 입으로 벙긋거리자 뒷 목부터 소름이 쭈르륵 올라왔다. 이 자식은 태생부터가 남달랐다. 어떻게 술도 안 먹고 저런 말을!

"제발."

"됐고, 동부로 갈 방법은 정했어?"

"하······."

리베로는 재이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쿠키를 와작거렸다. 일단 그들의 목적지는 뉴욕으로 고정되었다. 재이 일행 중 그 누구도 가보지 못했던 미지와 환상의 도시! 뉴욕으로 간다 하니 다들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을 보이곤 했다. 이제 다음으로 정할 것은 방법인데.

"기차로 가는 게 제일 좋지 않겠어?"

"그치? 말 타고 언제 가? 아. 오닉스라면 일찍 갈 수도 있겠네. 근데 동키는 안 돼."

객식구 강아지, 켄도 있고.

여기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은 꼬박 사흘 정도 내달려야 나온다고 했다. 다만, 문제는 그 기차의 일정표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

"사거리 잡화점은 보름에 한 번씩 온다 하고, 저쪽 밑집은 열흘에 한 번이라고 하더라. 크게 차이는 없는데, 재수 없으면 기차역 가서 노숙해야해."

"근처에는 묵는 곳이 없대?"

"정식 여관은 없다 하더라."

"으음."

귀찮지만 문제될 사안은 아니다. 새크라멘토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매일 같이 한 게 노숙이니까. 재이는 리베로의 쿠키를 뺏어먹으며 말했다.

"그럼 최대한 빨리 내려가자고. 가서 일정 안 맞으면 거기서 며칠 또 쉬면 되니까."

"그럴까? 어차피 기차에서도 쉬면서 갈건데."

"응. 쉴 수만 있다면."

"그게 무슨, 무슨 뜻이지?"

리베로가 멈칫거렸다. 혹시, 설마, 또 열차 강도를 만나게 될 거라는 뜻일까? 이곳은 중부 지역에 가까웠다. 서부에서 동부로 넘어가는 분기점이다보니 열차 선로 역시 나뉘는 지점이 많았는데, 그 말인즉 열차 강도들의 노다지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항상 재이랑 움직이다보면 별별 사건이 다 벌어지는 걸 이미 체득한지라, 리베로의 낯빛이 퍼래졌다.

"음? 무슨 뜻이라니? 별거 없는데."

반면, 재이는 정말 별 뜻이 아니었다. 같은 객실에 소똥 밟은 사람이 같이 타거나, 코골이가 유독 심한 사람이 있으면 쉬는 것 자체가 불가하니까. 재이는 창문 바깥에 서 있는 마차를 보며 지시했다.

"마차 팔고, 말들도 팔아. 그 돈으로 상등급 객실로 가자고. 동부까지 기차 타고 일주일 넘게 가야하는데, 갈 때만이라도 푹 쉬게."

"말도 다 팔아?"

"······당연히, 오닉스와 동키는 제외다."

"아. 그래."

푸이히잉!?

오물오물 당근을 씹어먹던 동키가 귀를 쫑긋거리며 멈칫거렸다. 저놈이 저래 보여도 진짜 사람 말귀는 귀신같이 아는 놈이다. 재이가 렌에게도 당부했다.

"말 없이 움직일 거니까 식재료는 계산해서 준비해요. 무거우면 움직이기 힘들어서. 딱 오닉스랑 동키 두 마리에게 나눠서 달 수 있을 정도로만."

"네. 알겠어요."

"근데 하트먼은 어딜 갔대?"

"아까 카드 치러 간다 했는데."

"은근히 좋아한단 말이지."

겉으로 보기에는 성실, 근면 그 자체였지만 역시 서부인은 서부인이다. 재이는 웃옷을 들고서 여관을 나섰다.

"하트먼 찾아올게. 마을 구경도 좀 하고."

"어어."

같이 갈까? 하고 물으려던 리베로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 등신, 지금 뭐하는 거야? 렌이랑 단둘이 있을 절호의 기회구먼. 리베로는 능글맞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조심히, 그리고 아주 늦게 돌아와."

"까불지 말고."

"까불기는 누가! 에헴!"

콰앙!

그리고서 미련 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재이는 혀를 끌, 차며 오닉스의 고삐를 잡아 끌었다. 멀리 갈 것은 아니지만 혹시나 싶어서.

"보자. 어디로 갔으려나."

마을이 작아서 도박장은 한정적이었다. 술집이랑 겸해있는 곳이거나, 아니면 그쪽만 전문으로 하거나. 하트먼이라면 아마 후자 쪽으로 갔을 터. 재이는 여기저기 물어가며 도박장을 찾아갔다.

"여긴가?"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진성 도박쟁이들이 모인 곳인가 보다. 퀘퀘한 냄새와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로 탁한 공기. 재이는 손으로 공기를 휘휘 내저어가며 주위를 둘러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아, 친구 찾으러 왔어요."

"친구? 누구? 안 그래도 잘 생긴 오빠 한 명이 새로 왔던데. 혹시 저 오빠인가?"

종업원이 재이에게 몸을 기대며 손끝을 가리켰다. 하트먼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카드를 고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앉아있어요! 술이라도 한잔 가져다 줄게!"

재이는 고개를 까딱거린 다음 하트먼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가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가, 재이인 것을 알고 눈썹을 까딱거렸다.

"아. 재이 씨. 벌써 밥 먹을 시간인가?"

"아니, 그건 아닌데. 뭐하나 싶어서. 애들이랑 열차 타러 갈 일정도 정했거든요. 근데 이기고 있어요?"

"음."

털리고 있군. 하트먼이 심각한 눈빛으로 턱을 괴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다섯가지 패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한데-

"친구?"

맞은편의 사내 앞에 수두룩하게 놓여있는 칩. 다하면 적어도 60달러정도 되는 거금이다. 반면 하트먼의 앞에는 12달러가 전부다. 대충 눈대중으로 훑어봐도 개털리는 중인가 보다.

"예, 뭐."

"아이고, 오늘 가서 술이나 한잔 사줘. 이 친구 마음이 쓰라려서 어쩌나 몰라."

"돈은 벌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건데요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하루 아침에 이만큼 털리면 나 같음 못 살지! 크하하핫!"

하트먼이 고심하며 카드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사내가 눈을 꿈뻑이더니, 익살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이번에도 내가 이겼네!"

"하아."

"오늘은 날이 아닌가보다. 응. 이봐, 그만 하고 가! 나라고 이렇게 계속 따면 마음이 편하겠어? 크하하핫!"

편하다 못해 행복해 보이는데? 하트먼은 완벽한 패배를 느끼고서 담배를 꺼내물었다. 그는 지나가는 종업원을 불러세우더니, 안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 건넸다.

"칩으로 더 바꿔줘."

"어머, 오늘 여기 큰판이네."

"뭐? 더 하겠다고?"

"일 없으면 계속 앉아계십시오."

"흐흐. 나는 뭐, 이게 일인데!"

재이가 술을 홀짝이며 하트먼을 쳐다봤다. 원래라면 이렇게 이성을 놓는 사람이 아닌데, 의아했다.

"자자, 난 오줌이나 싸고 오려니까! 칩 바꿔올 동안 잠깐 쉬자고!"

"······하트먼 씨, 괜찮아요?"

재이의 물음에 하트먼은 식은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사내가 보이지 않게 되자, 재이에게 속삭였다.

"이상해요."

"뭐가요? 지금 하트먼 씨가 제일 이상한데."

"이길 것 같은데 자꾸 아슬아슬하게 진다니까요. 뭐랄까. 꼭 내 패를 알고 있는 것처럼."

"에이, 설마."

재이가 그리 이르며 뒤쪽을 힐끔거렸다. 다른 도박꾼들이 테이블 가득 앉아있었다. 혹시 뒤에서 패를 부고 신호를 주는 건 아닐까? 재이는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도박이란 게 원래 그런거잖아요."

"오랜만에 속 뒤집혀서 안 되겠습니다. 아예 끝장을 봐야겠어요."

"음. 뭐. 그렇게 해서 마음이 편하시다면."

"재이 씨도 한판 하시겠습니까?"

"저요?"

자고로, 도박은 패가망신이라는 격언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재이였다. 카드 게임이라고 해봤자 일행들이랑 소소하게만 해봤지, 이런 식으로 본격적으로 해본 적은-

'아. 있긴 있네.'

몰리베이에서 리베로랑 같이. 근데 그 이후로는 거의 손에 대지 않았다. 재이는 하트먼의 상태가 조금 심상치 않다는 걸 보고서, 도와주기 위해 판에 끼기로 했다.

"예, 뭐. 그럼 저도 잠깐 쳐볼게요. 대충 하다가 마무리하고 돌아가시죠."

"알겠습니다."

얼마 뒤, 화장실 갔던 사내가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다시금 두둑해진 하트먼의 칩. 그는 그것이 곧 자기것이라도 되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친구도 한판 하는 건가?"

"네. 뭐, 그래도 되죠?"

"그럼! 걸리는 돈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게임 방식은 간단했다. 패를 무작위로 나눠가지고 숫자 합이 높은 쪽을 내는 사람이 승자. 문자와 순서 등에도 족보가 있었지만, 사실 재이가 그것까지 다 알지는 못했다.

"흠. 그럼."

시작!

재이는 엎어진 패를 손끝으로 틱틱거리며 상대를 살폈다. 그의 머리 위에서 글자가 맴돌고 있었다.

-타짜인 척 하는 사짜

-열한 손가락의 사기꾼

EP150. 패

EP150. 패

열한 손가락이라.

재이는 도박꾼의 손가락을 힐끗 살폈다.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이 손가락 열 개가 달려있다. 그 뜻은······.

-열한 손가락의 사기꾼

당신에게는 언제나 게임을 도와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은밀하게 움직여 당신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카드 치는데 손가락 열 개보다는 열한 개가 유리하니까! 혹시 그 친구와의 우애가 깨진다 한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에게는 다음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그 친구는 불필요한 감정 소모 따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할 것이니까요.

뭔 말이지?

재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테이블 위의 라이터를 발견했다. 어느 유명한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패를 나눠줄 때 라이터나 크리스털 재떨이를 밑에 두고 카드 패를 확인하는 수작. 역시 창작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더니, 딱 그 용도인 게 분명했다.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다는 거지.'

물건이라면 그나마 다행. 이곳은 서부인지라 도청장치나 스캐너 같은 고급 장치는 없을 것이다. 해봤자, 저런 라이터나 카드 끄트머리에 스크래치를 내놓는 것, 그 정도겠지.

"흐음."

패를 받은 하트먼이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디, 망했습니까? 재이가 슬쩍 보려고 하자 하트먼이 조심스럽게 패를 돌려서 보여줬다.

"어엉."

개패네. 개패야.

도박꾼의 눈썹이 파도처럼 자유롭게 출렁거렸다. 그가 슬쩍 간 보듯 물었다.

"별로인가봐?"

"카드 좀 잘 섞어주지 그러셨습니까."

"아잇. 내가 보고 섞었나? 쯧쯧. 그리고 괜찮아, 나도 개패거든. 어때? 개패끼리 가볼까?"

"잠시만요."

하트먼이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고민했다. 할 일 없이 카드만 치는 인간들에게는 남는 것이 시간이다. 도박꾼은 얼마든지 기다려 주겠다는 듯, 패를 엎어놓고 종업원을 불렀다. 배가 출출한지 먹을 것을 시키는 모습. 재이도 패를 쪼듯 슬쩍 자신의 것을 살폈다.

'음.'

나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해서 돈 걸기에는 소시민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재이 역시 카드패를 뒤집어 엎은 다음, 술을 한 모금 적셨다.

'보자.'

이 도박을 끝내려면 두 가지의 경우밖에 없다. 도박꾼이 파산하든지, 아니면 하트먼이 파산하든지. 문제는, 도박꾼은 이미 많은 돈을 땄고, 하트먼 역시 파산하기에는 '쩐'이 많다는 것이었다.

"하트먼 씨. 얼마 남았어요?"

"음.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잘 모르겠다는 건, 지금 주머니에 든 것 외 숙소 가방에 꿍쳐둔 것도 도박자금에 포함시켰다는 뜻이다.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도박꾼 쪽에서 실책 사유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판을 아예 어그러트리는 것이다. 재이는 손끝으로 툭툭 테이블을 두드리며 도박꾼을 관찰했다. 그가 담배를 피우고 라이터를 테이블 가운데 내던지자, 재이가 그걸 집어 휙 치워버렸다.

"엥?"

"제가 라이터만 보면 두드러기가 올라와서."

"아니, 그렇다고 해서 그걸 던져? 웃기는 놈일세."

재이가 라이터 날아간 쪽을 돌아봤다. 뒤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한 사내가 엉거주춤 일어나 그것을 집어주었다.

'오케이.'

저놈이 한패일 가능성 높고.

사내는 테이블에 라이터를 툭, 하고 올려놓더니 재이에게 경고했다.

"아무거나 휙휙 던지지 마쇼. 맞을 뻔했잖아."

"아아. 미안합니다."

라이터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다. 정중앙에서 살짝 오른쪽으로 쳐진 지점. 도박꾼이 패를 돌릴 때 정확히 가로지르는 곳이었다. 패가 보일 수밖에 없다.

"좋습니다. 가겠습니다."

"어우, 오래 기다렸다."

"칩 다 걸겠습니다."

"화끈하군! 남자라면 이런 맛이 있어야지!"

씨익. 도박꾼은 환영한다는 듯이 두 손을 크게 펼쳤다. 재이, 그쪽은?

"저는 죽겠습니다."

"좋아좋아. 죽을 사람도 어서 죽으시고."

투둑. 칩이 테이블 위로 휙휙 날아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던 재이는 뭔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짝.

도박꾼의 카드패에서 뭔가 반짝임이 보였던 것이다. 호크아이 발동! 재이는 잠시 기다려 보라며 손을 들고서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라이터를 집어주었던 사내가 재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슬쩍 돌렸다. 재이는 천천히 일어나 그쪽 테이블로 갔고, 이내 상판을 손으로 짚으며 게임을 중단시켰다.

"저기, 선생?"

"뭐, 뭐하는 건가? 지금 중요한 판인데."

"잠시 몸 수색좀 해도 되겠습니까?"

"몸 수색? 미쳤어?"

"아니. 방금 라이터 내려 놓으면서 카드패 바꿔치기를 하신 것 같아서."

"하! 참나! 살다살다 원."

"이봐, 왜 거기 가서 그래? 응?"

"재, 재이 씨?"

재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들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재이는 직감적으로 이놈이 카드패를 바꿔치기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 방금까지 별 반응 없던 카드패가 어찌 갑작스럽게 반짝인단 말인가?

"주머니, 잠시 봐도 됩니까?"

"안 된다면?"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슬쩍 일어나 거리를 벌렸고, 사내는 험악한 낯으로 재이를 노려봤다. 재이가 슬쩍 한숨을 흘리며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 그가 혼비백산하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댔다.

철컥!

총을 꺼내려 했으나, 손놀림이 좀 굼떴다. 그가 총을 꺼내기 전, 재이가 먼저 안주머니에서-

"지갑?"

"제가 잘못 짚은 거라면 사과하는 마음으로 이걸 드리겠습니다. 어때요?"

자그마치 10달러. 앉은 자리에서 10달러를 벌 기회였다.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도박꾼 쪽을 힐끔거렸다. 한참의 고민 끝에 나온 허락.

"좋아. 마음대로 해."

"실례."

재이는 그의 주머니를 삭삭 뒤져봤다. 걸치고 있는 것이라고는 셔츠와 바지밖에 없었기 때문에 숨겨져 있는 주머니가 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됐나?"

타앗! 주머니가 모두 까발려지자, 사내가 10달러를 휙 챙기며 짜증스럽게 그의 손을 쳐냈다. 흐음.

"잠깐."

아직 안 본 데가 있다. 바로, 테이블 위의 카드패 더미. 게임을 하다가 버린 패들이 모여 있는 곳. 재이는 고갯짓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카드를 바꿔치기 해서 여기 버렸을 수도 있잖아요."

"지랄을 해라. 지랄을."

"카드 뒤집어봐요. 같은 패가 두 개 들어있으면 내 말이 맞는 거니까. 하트먼 씨. 그쪽 패도 다 뒤집어서 확인해봐요. 없는 게 있을 겁니다."

카드의 종류와 수는 정해져 있다. 그런데 그게 맞지 않다면? 특히, 여기 있어야 할 게 저기 있고, 저기 있어야 할 게 여기 있다면? 누가 뭐라해도 은밀하게 숨겨 가져갔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하트먼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자신의 패를 보여주며 게임을 던졌다.

"실례합니다."

그리고서 도박꾼의 패와 카드 더미에 있는 것을 하나 둘 살피며 세기 시작했다. 어느덧 도박장의 구경꾼들이 모두 모여 하트먼과 재이를 도와 카드 분류를 하고 있었다.

"A부터 보자, 음. 7 하트가 없는데?"

"그렇게. 하트가 없네."

"······어? 여기 7 하트가 두 개다."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슬쩍 들어올려진 7하트에 집중되었다.

타앗!

도박꾼은 바로 테이블을 넘어 도망쳤고, 사내 또한 엉거주춤 거리다가 후다닥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작은 동네라 알만한 사람 다 아는데, 저리 가서 뭐하나 싶지?

"하트먼 씨!"

"네!"

저들은 여기 주민이지만, 재이와 하트먼이 외지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즉, 어디서 며칠 동안 뻐기면서 잠수 타면 그들이 언젠가 떠날 것이라는 걸 노린 것이다. 보안대에게 인계해도 같은 동네 사람. 떠난 재이 일행의 뒤처리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충 넘겨 처리할 것이다.

"히익!"

콰직!

와장창!

하트먼이 테이블을 채로 들어서 내던졌다. 주인장은 말릴 생각도 못하고 입을 틀어 막았고, 사내가 종아리를 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이내 불굴의 의지로 일어나 다시 힘차게-!

타앙!

총소리. 그 한 번에 모든 게 멈췄다. 재이는 총구 끝을 까딱거리며 소리쳤다.

"앞에 도망치는 도박꾼 선생! 안 멈추면 쏩니다!"

"쏴 봐라! 으히히, 으힛!"

바로 모퉁이 돌아서 도망가면 그만!

저 머저리는 왜 도망 안 치고 멈췄대? 멈추면 끝인데!

"······."

하지만 사내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우선 재이와 거리가 가까운데다, 그가 쏜 총알이 가랑이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아주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갔지만 여차했다면 정말이지, 끔찍한······.

타앙!

사내가 다시금 움찔거렸다. 혹시 우연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재이는 정확히 사내의 가랑이를 겨누고 압박한 것이었다. 하트먼은 도박꾼을 잡으러 뛰어갔으나, 이내 골목길 안에서 놓치고 말았다.

"참나."

빠르기도 해라. 하지만 재이와 하트먼은 굳이 그 사람을 쫓고 싶지 않았다. 왜?

"등신인가? 칩을 다 두고 갔네."

"그러게요. 하하. 그런 등신에게 당한 나는 상등신······."

하트먼의 앞자리에 그가 잃었던 칩 외, 도박꾼이 들고 있었던 칩도 고스란히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재이는 입이 떡 벌어진 채 굳어버린 주인장에게 고갯짓했다.

"여기 칩 다시 현금으로 바꿔줘요. 수수료 떼고, 저기, 문짝이랑 테이블 금액도 제해서."

"아. 예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저씨. 아저씨는 이쪽으로."

"아, 으."

"빠릿하게 움직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처억!

사내는 침을 꼴깍 삼키며 가랑이를 문질러댔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름이?"

"커밍스입니다."

"아까 저 아저씨는?"

"잭이요. 하프잭."

"어이구, 이름부터가 아주."

도박하려고 타고난 사람이구만. 재이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이 둘이 어느 정도 손기술과 잡기술을 써서 도박장 털어먹는 건 대충 아는 듯싶다. 그도 그럴 게, 이리 작은 마을에서 한탕 해봤자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사실 외지인을 제외한 모두가 한 패나 마찬가지.

"우선 돌려주시고."

"뭐, 뭐를요?"

"10달러."

"아!"

사내는 번뜩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내 되돌려줬다. 재이는 그걸 고이 접어 챙긴 다음 나가자며 고갯짓했다.

"어, 어디를요?"

설마 보안대? 가면 일주일 정도 감옥에 있다 나오겠군. 하지만 재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 우리 숙소 가서 마차 좀 가져가세요."

"마, 마차라니?"

"그거 팔아서 처분해야 하거든요. 30달러에 맞춰서 팔아오세요. 아시겠죠?"

"네에?"

아니, 이런 미친? 30달러에 맞춰 팔라는 건, 돈 덧붙여서 내놓으란 말과 뭐가 다른가? 재이는 어깨를 으쓰거렸다.

"너무 싸나? 40달러?"

"아, 아닙니다. 30달러 맞춰보겠습니다."

"예, 그럼 그렇게 하고."

돈 모자라면 동업자 양반이랑 힘 좀 합쳐보시든가. 재이가 그만 돌아가자며 하트먼을 돌아봤다. 하트먼은 바닥에 엎어진 카드패를 보며 중얼거렸다.

"재이 씨. 카드 패 완전 좋았네요."

"네? 별로지 않아요?"

"게임 할 때 그 정도면 저는 절반 이상 겁니다."

"아······."

재이는 금빛 아우라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처음부터 패를 엎어두었던지라 사내는 재이의 패가 뭔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게임 참여도 안 할 것 같으니, 하트먼의 패에만 맞춰서 도박꾼에게 카드를 바꿔치기 해주었겠지. 하지만 그게 결국에는 재이가 이겨먹는 패였던 게다.

'걸라고.'

아아아. 걸라고 금빛 아우라가 보였던 거구나.

그건 또 몰랐네. 재이는 주인장이 바꿔준 지폐 더미를 받고서 도박장을 나왔다. 마을은 작았지만, 꽤 재미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