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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124

서부의 합법적 핵쟁이가 되었다 114화

EP114. 말뚝

EP114. 말뚝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모르겠습니다!"

사내는 마차 뒤쪽 창문으로 재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떠나는 쪽으로 뭔가를 연신 뿌려대고 있는데, 그 모습도 어이가 없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좋은 뜻은 아닌 게 분명하지 않나. 피버 박사도 파이프를 연신 뻐끔거리며 실망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게. 어려서 그런가. 아주 기고만장하군."

"역시 총잡이 놈들에게 사업을 논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박사님. 차라리 회사에 자금을 더 요청해보도록 하지요. 그걸로 저희가 직접 인부를 더 고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아니면 차라리 은행 손을 빌리든가."

석유가 발견만 되면 그깟 돈이 문제겠나? 재이라는 놈도 참 웃기는 놈이다. 땅 주인이라고 해봤자 새크라멘토 외곽에서 살아가는 작자. 안 봐도 뻔했다. 사냥으로 짐승 고기를 팔거나, 나무를 떼어다 근근이 먹고 사는 놈일 터. 그런 자에게 200달러는 솔직히 과한 보상 아닌가? 그중 일부분을 재이에게 주겠노라 일렀는데도, 놈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워낙 돈이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마어마 하다지? 근데 왜 그런 건물에서 살고 있나 몰라."

"얼마 전에 저택에 불이 났다고 하더군요."

"흐음. 재수가 좋다 해야 하는 건지 원."

그들이 재이를 신명나게 씹어대는 동안, 마차는 그들의 숙소 인근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 아닌가? 펜실베니아에서 함께 온 부하직원이었다.

"무슨 일인데 나와 있는가?"

"박사님. 불렛킬러는 보셨습니까?"

"봤는데, 영 몹쓸 놈이더군."

"아, 그럼 의뢰 계약은 안 하신거네요?"

"그렇다네. 왜 그러지?"

부하직원이 다행이라는 듯 웃자, 박사가 의아해했다.

"방금 정보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새크라멘토와 동부를 오가며 물건 떼는 상인이 알려주었는데, 인근에서 '검은 물'을 보았노라고요."

"뭐? 그게 정말인가?"

"얘기 들어보니 이미 알고 있는 자들이 몇 있었습니다. 그쪽 물은 마실 게 못 된다 하여 대부분은 돌아서 피해 갔다 하더군요."

희소식이었다. 그렇다면 그 주위에 땅 주인이랄 사람도 없을 가능성이 컸다. 사내가 잘 되었다는 듯 연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잘 됐습니다, 박사님. 김재이 그놈에게 의뢰 맡기지 않길 천만다행입니다. 괜히 돈만 뜯길 뻔했군요!"

"지금 당장 보러 가지. 어디쯤이라고 하던가?"

"하힐 광산과 이어진 산등성이 아래라고 했습니다. 지도에 위치를 표시했는데, 아! 여기입니다."

"이쪽은 아직 안 가본 곳이군."

"그래도 계획에 따르면 언젠가 삽 뜰 곳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지, 박사님은 분명히 여길 찾으셨을 겁니다."

부하직원들의 입발린 말에 박사가 기분 좋게 웃었다. 방금까지 재이 때문에 찌푸리고 있었던 건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하하. 그래그래. 어서 가보지."

"시간이 조금 늦었는데, 내일 가보심은 어떠십니까?"

"무슨 소리! 눈으로 확인해두어야 마음이 편하겠네."

"예,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모시겠습니다."

부하직원은 마부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갈 곳을 일렀고, 박사와 사내는 다시금 마차에 올라탔다. 검은 물이 흐르고 있다 하니, 삽을 팔 것도 없이 육안으로 확인 가능하리라.

타닥타닥!

히이잉!

피버 박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들은 숲으로 들어가더니,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이나 들어갔다. 확실히 도시 쪽보다 훨씬 어둡다.

"얼마나 더 걸리나?"

"금방 도착할 것입니다. 마부! 안 그런가?"

"아, 예예. 그런데······."

부하직원이 마부석을 퉁퉁 치며 호탕하게 웃었으나, 마부의 대답은 영 시원치 않았다. 무슨 일인고 하니, 그들 앞으로 마차 한 대가 먼저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쪽 길은 천천히 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길이 좁아서 추월하기가 힘들어요."

"어쩔 수 없지. 안전히 가도록 하세."

"예, 알겠습니다. 곧 가면 갈림길이니 그때부터는 시원하게 달릴 수 있을 겁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새크라멘토 밖으로 나가는 길이었지만, 왼쪽으로 가면 그들의 목적지 쪽이다. 검은 물이 흐른다 하여 어지간한 사람들은 얼씬도 안 하는 길이니, 당연지사-

히이잉!

"어라."

왜 왼쪽으로 가지? 마부는 앞서 가는 사람들을 보고서 뭔가 잘못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굽이치는 길 탓에 앞쪽이 살짝 보였는데, 그들은 마차만이 아니라 말을 탄 개개인도 함께하는 듯 보였다. 즉, 무리가 꽤 크다는 뜻.

"뭔가 이상한데."

"왜 그러지?"

"앞에 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저희랑 목적지가 같아 보입니다."

"뭐? 왜?"

"모르지요. 그건."

인근에 상점이 있는 것도, 촌락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내는 뭔가 불안함을 느꼈고, 마부를 닦달했다.

"앞장 서서는 못 가겠나?"

"추월 못 한다니까요. 여차했다가는 마차가 옆으로 구릅니다. 죽어요."

"허어, 참."

"무슨 일이 있다 하는가?"

"박사님. 앞서 가는 마차가 우리와 목적지가 겹치는 듯 보입니다. 혹시, 아니겠지요?"

혹시, 김재이 그놈이 새어나간 정보를 듣고서? 말도 안 되는 걸 알지만, 왜인지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현실로 다가왔다.

히이잉!

"이보시오! 마차 돌리시오!"

먼저 도착한 작자들이 말뚝을 여기저기 박더니, 막 진입하려는 박사 마차를 막아선 것이었다.

"마차를 돌리라니?"

"여기서부터는 사유지니까, 돌려서 나가시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라니? 서부에서 말뚝 박는 것도 누구 허락을 맡아야 한단 말이오?"

박사와 부하직원들은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거의 열댓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울타리를 치며 구역을 나누고 있었다.

"아니, 참나. 그쪽들도 지금 선점하는 것 아닌가?"

"그렇네만?"

"여긴 우리가 먼저 발견했어!"

"무슨 헛소리를 장황하게 하시오? 누구네 마차가 앞에 있는지. 혹시 구별 불가하시오?"

사내는 이를 꽉 깨물더니, 개울 쪽으로 몸을 틀었다. 검은 물! 물 아래로 검은 무언가가 길게 퍼져있다. 박사도 그것을 보았고, 그들은 동시에 확신했다. 여기는 그들이 찾던 곳이라고!

"혹시-"

사내는 말뚝 치는 자들에게 넌지시 되물었다.

"여기 땅 주인이 김재이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맞는데요?"

"이런 처죽일! 나쁜 새끼!"

사내가 분노를 터트리며 소리치자, 작업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하던 것을 멈추고 쳐다봤다. 대체 뭐하는 작자들이기에 불렛킬러를 저리 욕하나 싶어서.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박사를 돌아보며 억울해했다.

"박사님. 분명 그놈, 우리 얘기를 듣고 선점한 것입니다. 검은 물이 흐르는 곳이 돈 될거라는 생각에 먼저 손 써서 사람을 보낸 것이라고요!"

"미치광이 놈이로군. 내 아주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어."

"이대로 둬서는 안 됩니다. 서둘러 막아야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별수 있나? 그들은 마부까지 합해서 셋이었고, 상대는 망치 따위를 든 장정 열댓 명인데.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봐들. 당장 일 그만두게! 김재이가 얼마를 주기로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비겁한 일이야! 여긴 우리가 먼저 찾았다고! 김재이는 우리 말을 듣고서 낼름 처먹으려는 거야!"

"아······예."

사내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망치질을 계속해댔다.

"저희 일당 7달러씩 받는데요. 말뚝 치고 당분간 여기서 먹고 자기도 할겁니다. 재이 씨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요."

"우리가 10달러 주지."

"재이 씨가 말하기를, 혹 더 부르는 상대가 있으면 무조건 그것보다 5달러 더 준다고 해서요. 고맙습니다."

덕분에 보너스 받겠네. 땡큐!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마차에서 침낭과 생필품 따위를 풀어댔다. 그의 말에 박사 일행은 넋이 나갔다.

"아니, 이 미친-"

미친 놈은 일처리를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거람? 그들은 여기서 해결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마차에 올라탔다.

"돌아가지! 서둘러서!"

"아, 예예."

"잘 가십시오. 말뚝 완성된 이후에는 여기 못 넘어올거니까 그렇게 아시고!"

히이잉!

천한 것들! 박사는 속으로 이를 갈며 멀어지는 블로펀치 사내들을 쳐다봤다.

"김재이 그놈, 행동력과 정보력이 장난 아닙니다."

"그 짧은 사이에, 그러니까, 우리가 핑커튼 사무실을 나와서 숙소에 도착하는 사이 검은 물을 수소문하고 사람을 보냈다는 건가? 그게 정말 맞을까?"

"앞서긴 했지만, 아슬아슬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이미 알음알음 검은 물에 대해 아는 자들이 꽤 있었다 하고요. 놈도 검은 물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석유라는 걸 알려줘서 확신을 갖게 되었을지도요."

어쨌거나 중요한 건, 김재이가 자신들을 만나고 나서 저리 말뚝을 쳐두고 있다는 게다.

"200달러로는 성에 안 차보이던데."

박사는 잠시 고민하며 수염을 매만졌다. 이래서 그렇게 시큰둥했나 싶다.

"제가 제대로 따지겠습니다. 새크라멘토 정부에도 협력을 요청하도록 하지요. 이건 국가적인 사업인데 저런 부랑자 총잡이 한 명이 끼어들어 소란 피우게 할 수는 없지요."

"흐음. 그래. 그렇긴 해."

참나. 하루에도 몇 번이나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들은 이미 어둑해진 숲속을 내달리며 눈을 부라렸다. 김재이 이놈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

끼이익.

"왔어?"

"아, 깜짝이야!"

한편, 어둠을 타고 슬그머니 사무실로 들어서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리베로였다. 그는 사무실 소파에 앉아있는 재이를 보고서 놀라 뒷걸음질 쳤다. 재이는 신문을 거두며 물었다.

"늦었네."

"아, 뭐. 일이 좀 있어서."

"누이들은?"

"······왜?"

낮동안 시내가 발칵 뒤집힌 걸 알고 있다. 잡화점 주인이 피떡이 된 채 널브러지고, 로건이 죽었으며, 보안대원들이 바삐 움직였다지? 그들과 함께한 자 중에서는 재이와 하트먼도 있고. 누이들의 손버릇으로 일어난 사건인지라, 리베로는 조용한 여관 지하에 그녀들과 함께 숨어있었다.

"왜긴. 궁금하니까."

"그, 재이. 이번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 누이들도 실수했다고, 반성 많이 하고 있어."

"알았으니까. 거참 말 많네."

"······정말 괜찮은거야?"

"안 괜찮았으면? 내가 너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을까?"

진작 찾아 나섰겠지. 누이들은 이번에 운이 좋았다. 사건의 시작이었지만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으니까. 로건의 이름값이 너무 커서 그렇다. 리베로는 조심히 재이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

"어. 대신 궁금한 게 있어. 누이들은 어디로 갔나?"

"당분간은 새크라멘토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지. 지금쯤이면 도시를 막 빠져나갔을 거야."

"몰리베이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특히 인디언들."

"인디언? 우리가 만났던 그놈들?"

갑자기 그건 왜? 리베로는 의아해하면서도 누이들에게 들은 내용을 전했다.

"인디언 수장이 바뀌었다고, 그건 알지?"

"알지."

"그리고 최근에는 몰리베이 인근까지 자유롭게 나온다는데? 찰리 보안관이 죽은 뒤로."

서부의 합법적 핵쟁이가 되었다 115화

EP115. 뉴욕에서 오는 손님

EP115. 뉴욕에서 오는 손님

'인디언들이 밖으로 나오게 됐다고.'

찰리 보안관이 인디언들을 적대시한 건 그들이 은행 강도 전말에 대해 말을 흘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의 당사자는 죽고, 새로운 자가 보안관에 올랐으니 당연지사 관계도 달라지는 게 맞다. 새로 취임된 보안관은 인디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로 부족한 인력을 대신하고,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자 할 터.

"근데 인디언들은 갑자기 왜?"

"그쪽에 볼일이 생겨서."

"어? 걔들한테 무슨 볼일? 너 죽이려고 들건데. 그런 식의 볼일?"

리베로가 황당하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 인디언들을 속여 도망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놈들이 죽었겠는가? 아마 재이를 마주하면 앞뒤 달려들지 않고 부족의 원수를 갚겠노라 이를 드러낼 것이다.

"우두머리가 바뀌었으니까, 어떤 식이든 변화가 있지 않을까? 몰리베이가 그런 것처럼."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 그쪽에 무슨 볼일이든 목숨 보다 중요한 건 아니잖아? 신경 끄고 우리는 새크라멘토에 딱 붙어서 살면 돼. 여기만큼 안전하고 있을 거 다 있는 곳이 없다. 내가 봤을 때, 뉴욕보다 여기가 나아. 특히 너한테는."

"특히 나?"

"소란 일으키는 총잡이한테 그 어느 도시 보안관이 머리를 조아리겠어?"

아아. 그런 거라면, 뭐. 반박할 여지가 없긴 하지. 새크라멘토에서는 무슨 일에 휘말려도 믿을만한 구석이 있으니까. 하지만 재이는 알고 있다.

"지금은 그런데, 오래 가지는 않아."

"왜?"

"곧 있으면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돌아갈 거고, 시청 직원들은 하나둘 자리가 교체될 거니까. 그런 와중에 보안관이 계속해서 나한테 숙이고 들어올 필요는 없지. 사실상, 그쪽 월급은 나라에서 나오는 거지 내가 주는 게 아니잖아."

이런 식으로 얻은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평생 지속될 것이라는 환상은 버리는 게 좋다. 아주 작은 기회가 변화를 만드는 법. 재이는 신문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또 다른 소식은 없대?"

"몰리베이가 어수선한 것 외에는 뭐. 아참. 인디언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몰리베이 주민이 있나 보더라고. 그쪽 혼혈인데, 맨 처음 인디언들 부탁 받고 은행 강도 사건 퍼트린 것도 그 사람이래."

"이름은?"

"들었는데 까먹었다. 보면 알 것 같아."

"리베로."

"왜. 뭐.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는 너처럼 그렇게 하나하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여자와 관련된 건 귀신 같으면서."

"그건 중요한 거니까."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니. 재이는 신문을 천천히 넘기며 올라가라는 듯 손짓했다.

"아, 그리고 아리스는 당분간 사무실에서 일 보기로 했어. 누이들 따라가기 두려운가봐. 여기가 벌써 편해졌다는군."

"잘 됐네. 누이들 보니까, 제 몸 챙기기도 바빠 보여서. 그럼, 잘 자. 문단속 잘 하고."

"그래."

리베로는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조용한 밤. 재이는 인기척이라고는 하나 없는 바깥 거리를 내려다보다 다시 신문을 읽으려고 했다. 길게 늘어진 채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지 않았더라면.

타닥타닥!

'뭐지?'

이 시간에 겁도 없이 밖에 돌아다니는 부류는 딱 둘이다. 술에 취해 앞뒤 분간도 못 하는 상황이거나, 그런 놈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무뢰한. 재이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지는 걸 알아채고서 조심히 총을 붙잡았다. 적의가······.

스윽.

있다. 이놈의 서부는 진짜 미친놈들만 있는 건가?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피곤해 죽겠네. 재이는 한 손으로 총을 들고, 나머지 손으로는 찻잔을 들었다. 목을 축이자, 발소리의 주인이 다가왔다.

히이잉!

쿵! 쿵쿵!

"김재이, 안에 있나?"

"오우."

"있는 거 다 아네! 여기 커튼 틈으로 불빛이 나오는군! 이봐! 문 열어봐!"

피버 박사다. 다시 찾아올 줄은 알았는데, 하루도 안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재이는 무시할까 생각하다가, 위층에서 동료들이 자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끼이익.

그래서 문을 열었다. 대신, 문틈으로 얼굴 대신 총구를 먼저 내밀었지만.

"뭡니까. 밤중에."

"흐익!"

피버 박사와 그 부하들은 잠시 뒷걸음질치며 멈칫거렸지만, 이내 목청을 더욱 크게 올려댔다. 어둠 속에서도 얼굴이 붉은 게 잘 보일 정도다. 열 받았나 본데?

"뭡니까? 뭡니까아-?"

"자네. 상도덕이 이리 없을 수 있나? 우리가 검은 물 찾는 걸 알자마자 사람을 풀어서 선점해? 이런 식으로 지금껏 일을 처리했던 거야?"

"아아."

난 또. 뭐라고. 재이는 총구를 그대로 겨눈 채 대답했다.

"그쪽들한테 듣고서 선점한 게 아니라요, 제가 예전부터 침 발라뒀던 곳입니다. 새크라멘토 처음 도착하면서 발견한 곳이니, 꽤 되었죠."

"거짓말 하시네!"

"거짓말이라는 증거는?"

"그러는 넌, 미리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나?"

"그 안쪽으로 안 들어가봤습니까? 제가 큰 돌에 이름 새겨놨는데."

"뭐라고?"

못 보고 왔나보다. 재이는 하품을 쩌억 해대며 덧붙였다.

"이름만 박아놓고 놀리고 있었는데, 박사님이 찾는 거 보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사람 둔 겁니다. 괜히 일 귀찮아지기 전에 확실히 해둔 거라고요."

"웃기시네! 블로펀치 놈들이 말뚝 박자마자 새긴 거겠지!"

"아이고, 의심도 병이라던데."

"나는 내일 해 뜨자마자 이 사안을 갖고 시청에 갈 것이네. 자네가 여기서 떵떵거리며 위세 떨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대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명심해."

피버 박사는 쪼글쪼글한 눈매로 재이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내가 이리 찾아온 건 마지막 경고일세. 욕심은 화를 불러."

"음. 알겠습니다. 그럼 욕심부리지 않고 적당한 합의점을 찾도록 하지요. 땅을 팔 마음은 없거든요. 임대하는 형식으로, 석유를 퍼낸 매출의 1%를 저에게 주시는 건 어떠십니까?"

"······뭐라고?"

"이정도면 욕심 안 부리고 저도 협조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나라의 미래를 위한 일인데, 제가 어찌 깽판을 칠까요."

"기껏 해봤자 200달러 안짝의 땅덩이인데, 매출을 내어달라? 그것도 평생?"

"제게 자식이 생기면 땅을 물려줄 거니까, 대대손손 좋은 파트너가 되면 더 좋겠네요."

피버 박사의 옆에 서 있던 사내가 무어라 이르려 하자, 박사가 손짓으로 막아냈다.

"그쪽 뜻이 그렇단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회사에 회신 넣으십시오. 원하신다면 우편배달비 정도는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한참이나 재이를 쳐다보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왔던 것처럼 소란스럽게 몸을 돌려 사라졌다. 재이는 그들이 가는 길목 쪽으로 총구를 까딱거렸다. 여전히 잘 고정되어 있다. 적의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

'소금 또 쳐야겠네.'

아리스가 아까 장봐서 어디 뒀더라. 재이는 그리 생각하며 문을 잠갔고, 이내 2층 난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세 사람과 눈 마주쳤다.

"헉!"

깜짝 놀래라. 리베로는 방금 들어갔던 옷차림 그대로, 하트먼과 아리스는 자다 깨서 달려나왔나보다. 하트먼은 총을 들고 있었지만, 아리스는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예, 깨셨나봅니다."

"문을 워낙 세게 두드려대다보니."

"아까 노인 누군데? 뭔데?"

"너 없을 때 일이 좀 있었어. 우리가 저번에 봤던 검은 물. 그거 퍼 날라서 팔고 싶어하더라고."

"그걸 어디다 쓰려고?"

"쓸 곳은 많다."

"잠깐!"

리베로는 뭔가 떠오른 것처럼 손을 번쩍 들어댔다. 무슨 헛소리를 하시려고, 또 시동을 거시는 건지?

"아까 매출의 1% 어쩌고 얘기했잖아. 거기에 내 지분도 들어가?"

"얼씨구."

"왜. 우리 같이 발견했잖아!"

"그렇긴 하지. 그럼 가려볼까?"

누가 주인할지? 재이가 총구를 까딱거리자, 리베로가 정신을 번뜩 차리고 멋쩍게 머리를 긁어댔다.

"아. 굳이 가릴 것까지는 없을 듯."

"발 닦고 잠이나 자. 물 퍼올리면 섭섭지 않게 떼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보자고. 응?"

"그 말, 여기 우리 모두가 들었다."

리베로는 하트먼에게 어깨를 두르며 연대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트먼과 아리스는 영 관심 없다며 다시 침실로 돌아갔지만.

끼이익.

재이는 사무실 입구 문을 단단히 잠구며 생각했다. 하는 꼴을 보아 순순히 회사 쪽으로 연락해서 협상할 것 같지는 않고-

'조심해야겠네.'

시청 얘기를 꺼내는 것으로 보아 정치 쪽으로 연줄이 있나보다. 재이는 날 밝는 대로 정부 쪽과 피버 박사의 관계에 알아봐야겠다 생각하며 램프 불을 줄였다.

***

"박사님. 그놈 말이 사실일까요? 그, 바위 어쩌고 한 거 말입니다."

"모른다. 그리고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지. 우리가 못 봤으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매출의 1%라니, 저놈 어린 것이 아주 욕심만 그득해서는 오래 살기 글렀어."

쯧쯧. 피버 박사는 혀를 차더니, 뒤를 휙 돌아봤다. 그 사이 사무실 불이 꺼지고 완전한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핑커튼'이라고 적힌 사무실 간판. 박사는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핑커튼······."

"예?"

"김재이가 불렛킬러라는 소문은 여기저기서 들었는데, 핑커튼 소속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거든. 자네, 아는 것 있나?"

"아, 글쎄요. 저도 들은 바는 없습니다."

"하는 작태로 보아서는 사무실 주인처럼 보이는데, 핑커튼 간판은 달고서 개인으로 움직이는 건가? 내가 아는 핑커튼은 그런 걸 허락할 곳이 아닌데?"

엄격한 규율. 워낙에 여기저기서 막되어 먹어 구른 놈들을 고용하는 회사다보니, 규율만큼은 철저했다. 저런 식으로 혼자 움직이려면 반드시 회사를 나와 핑커튼 배지를 반납하고 난 후여야 한다.

"이상하네. 그래. 이상해······."

어째서 의문을 품지 못했을까?

"저놈은 핑커튼도 아니면서 핑커튼 간판을 달고, 대체 뭔 짓을 했던건지. 내가 궁금한 만큼 본사 놈들도 궁금해하겠지?"

"아마, 사람을 벌써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쪽으로는 미국에서 따라올 곳이 없잖습니까."

"그래. 맞아."

박사는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김재이, 새크라멘토에서 귀족처럼 군림하지만, 결국 실상을 까보면 총 좀 잘 쏘는 어린 애 아닌가? 놈을 흔드려면 지금 피버 박사 혼자서로는 불가능했다. 여기는 펜실베니아가 아니고, 새크라멘토였으니까.

"저기, 박사님."

두 사람 뒤를 따르던 부하직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본사라 하면 뉴욕 말씀하시는 것 맞습니까?"

"그래."

"백베인드 열차 일정을 알고 있는데, 곧 들어올 기차가 뉴욕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의 말에 피버 박사와 사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새크라멘토에 도착하는데?"

"아, 확실한 건 내일 기차 일정을 봐야겠지만, 아마 나흘 내로 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크, 크흐흐!"

피버 박사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체면을 차리고자 애쓰는 게 보였으나, 기쁨은 숨길 수 없나보다.

"그래, 아주 좋은 타이밍이군."

***

한편, 몰리베이 쪽으로 들어서는 열차 한 대. 정장을 잘 차려 입은 사내들이 담배를 문 채로 창밖을 쳐다봤다. 모두 피곤한 낯이었으나, 자세만큼은 올곧았다. 언제든지 총을 꺼낼 수 있게 준비한 자세. 그들의 가슴팍에는 핑커튼 배지가 달려있었다.

EP116. 손님맞이

EP116. 손님맞이

핑커튼. 그 이름이 미국에서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가? 무식하고 야만적이며, 폭력적인 놈들이 총을 들고 설치는 세상이다. 그 세상에서 적절한 대가를 치른 자들에게는 안전을 보장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잡아서 목을 매달고, 파헤치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대신하여 몸으로 뛰는 자들. 하는 일은 굉장히 많았지만, 결국에는 하나로 귀결된다.

'정의와 질서.'

그 정의가 누구를 중심으로 하는 정의인지, 누가 세운 질서인지는 그때그때, 의뢰인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어쨌거나 결국에 그들이 지향하는 바는 그렇다.

"여긴가?"

"흠. 그런 것 같은데."

네 명의 사내가 새크라멘토 핑커튼 사무소 간판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긴 여정이었지만, 표정이 수척해보이는 것 외에는 상당히 멀끔한 인상이었다. 세련된 수트와 깔끔하게 넘어간 머리스타일. 지나가던 여인들이 그들을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광부들이 진을 치는 새크라멘토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샌님들이다.

티잉!

"왜 비어있지?"

"그러게. 팻말도 안 걸려있고."

"잠시 둘러보고 올까?"

그들은 담배를 나누어 피며 다시 핑커튼 사무소를 올려다봤다. 회사 내에도 수많은 직위가 존재한다. 먼지 마시면서 발로 뛰는 사냥꾼들이 있고, 회사를 잘 유지하기 위해 서류 작성을 주로 하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중대 임무를 수행하는 본사의 1급 총잡이들. 낯선 자들이 사무소 앞에 모여있자, 근처의 상점 주인이 넌지시 인사했다.

"무슨 일이시오? 처음 보는 분들인데."

"아. 문이 닫혀있군요."

"멀리서 온 손님들이군요. 어디서 오셨소?"

"뉴욕입니다만."

"아. 뉴욕! 허어! 그쪽은 요즘 경기가 어떤가 몰라."

상점 주인은 반갑다며 주절주절 크게 떠들어댔다. 주위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 쳐다볼 정도로. 사내들은 담배를 문 채로 상점 주인을 응시하다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마치, 너 따위 상대하고 싶지 않지만 알아낼 게 있으니 참겠다는 듯.

"언제 돌아옵니까? 알렉소 씨는."

"알렉소? 아아, 이런. 그, 뭐라고 해야할까."

상점 주인이 말끝을 흐리자, 그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뭔가 있다.

"알렉소는 죽은 지 오래인데."

"죽었다고요?"

"크흠. 아이고, 죽은 사람 얘기를 뭣하러 해? 재수 없게."

상점 주인이 입을 닫으려고 하자, 개중 한 명이 익숙하게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폐 두어장이 상점 주인의 손에 쥐어졌다. 재수 없다며 입술을 탁탁 털던 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난간에 몸을 걸치고 일러댔다.

"그러니까, 몇 달 됐나? 새크라멘토가 아주 시끄러웠던 적이 있지. 갱단 놈들이 다 개떼처럼 몰려들어서 내가 잘났니 네가 못났니 싸워댔거든."

"패권 싸움 같은 거군요."

"들어본 적 있습니다. 샬롯. 스톰콜 갱단이 죽었다는, 그 사건 말하는 것 같은데요."

"아아."

사내들은 저들끼리 속닥거리며 사건 경위를 파악했다.

"그때 휘말려서 죽었어. 끽!"

"그럼 그 이후로, 핑커튼은 누가 관리합니까?"

"원래 거기 소속이었던 하트먼 씨가 관리했지. 뭐, 여러모로 여기저기 도움도 받아가며."

하트먼. 사내들은 수첩에다 이름을 기록하며 중얼거렸다.

"새크라멘토 지점 소속 명단에서 확인 됩니다. 알렉소 바로 밑에서 일했던 놈 같은데요."

그런데 왜 보고를 안 했을까? 그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지금 예상으로는-

"돈을 떼어먹으려 한 것 같군요."

"이런 경우는 보통 그렇지."

핑커튼의 이름을 걸고 영업을 했다면, 당연히 본사로 수익금 일부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새크라멘토에서 뉴욕으로 돈이 들어온 건, 몇 달 전이 마지막. 이동 시간이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오래 전이다.

"하트먼은 어디있는지 아시는가?"

"뭐. 이리저리 동네 왔다갔다 하며 일 보니까 곧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데. 정 그러면 우리 가게에서 차 한잔 하고 계시든가."

꼬질꼬질한 찻잔에 싸구려 티지만, 적어도 1달러쯤은 내야 할 터다. 상점 주인은 그들이 입은 정장이 상당히 고급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반반 나누어서 움직일까?"

"예, 그러시죠."

"나랑 존은 여기 앞을 지키고, 힐릭과 론은 탐문 좀 하고 와."

"알겠습니다."

탐문 지시를 받은 힐릭과 론이 사람들 틈에 섞여 자연스레 사라졌다. 나머지 두 사람은 사무소가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 차를 받았다. 물론, 손끝 하나 대지 않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처벌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그간의 수익을 추정해서 확인하고 몰수할 수 있는 건 몰수해야지. 알렉소의 죽음에 대해서도 조사할 필요가 있겠어. 소란을 틈타 그놈이 죽였을지 어찌 아나."

"그렇긴 합니다. 그간 떼어먹은 금액이 어마어마한데요. 찾는 것도 일일 듯 합니다."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을 거야. 보아하니, 밑에 사람들을 많이 둔 것 같지는 않아서."

몰리베이행 웰스파고 은행 역마차 호위가 마지막 공식 작전이었다.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고, 그 후로 채용 건을 확인할 수 없으니 아마 사무소에는 소수의 인원만 남아있을 터. 그렇게 되면 담당할 수 있는 사건도 자연스레 적어지니, 수익도 적어진다.

"그래도 죽일 거죠?"

"당연한 말을."

처단을 하지 않으면 선례가 남는다. 핑커튼의 규율을 어기고, 그 이름을 헛되이 쓴 자들은 무조건적인 처단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여기 온 것이다.

스윽.

상점 주인이 괜시리 사내들 주위를 오가며 부산스럽게 굴었다. 존이 의아하게 그를 돌아보자, 시선을 알아챈 주인이 멋쩍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새크라멘토는 좀 희한합니다."

"그러게."

이상하게 낯선 자를 경계하고, 궁금해하는 눈빛이 많았다. 자신들의 복장이 좀 눈에 띄긴 하지만, 여기는 대도시 중의 대도시 아니던가? 워낙 오가는 자들이 많아서 이렇게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일이 아닌데.

"흠······."

그때였다. 우편배달부가 핑커튼 사무소 앞에 자전거를 대고서 안쪽을 살폈다.

"김재이 씨!"

그리고서 쿵쿵! 안에 누가 없는지를 확인하며 낯선 이름을 불러대는 것 아닌가. 김재이. 사내들은 단박에 날을 세웠다.

"김재이 씨! 안에 없으세요? 아이고, 이거 서명 받아야 하는 건데."

"그! 이보세요!"

"네?"

그러자 상점 주인이 화들짝 놀라며 우편배달부를 불러댔다. 돌아선 배달부가 낯선 사내 둘을 보더니, 아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지르는 것 아닌가.

"그, 아이고. 그렇군요."

"일 보러 간 것 같으니까 나중에 오시오."

"예예! 그래야지요. 암요!"

배달부가 재빠르게 페달을 돌리려고 하자, 사내 한 명이 일어나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왼쪽? 오른쪽? 비켜 가려는 시도가 무색하게, 틈이 없다.

"김재이라는 자가 여기서 살고 있나?"

그들은 당연히 김재이의 존재를 알고 있다. 일명, 불렛킬러. 날아가는 총알도 맞춘다고 하여 서부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신예 총잡이 아닌가. 굵직한 무법자들도 여럿 처리하여 이미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들었다. 게다가, 소문으로는 서부의 전설 중 한 명인 호크아이를 처리했다는 것도.

"호크아이를 죽였다는, 그 몰리베이 출신?"

아직 로건에 대한 정보는 들은 바 없었지만, 호크아이 사건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식이 굉장히 빠른 것이었다. 배달부가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수상했다. 뭔가 숨기려는 몸짓.

"이봐."

길게 말하지 않아. 사내는 품안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배달부는 사색이 되어서 뒷걸음질 쳤다.

"잠깐! 뭐하시는 겁니까?"

"뭐하긴. 일하는 중인데. 핑커튼 뉴욕지부 소속 존이다.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해줬으면 좋겠는데. 이 옷이랑 구두, 아끼는 것들이라서."

"재, 재이 씨가 있긴 있는데······."

"핑커튼 소속?"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여기에 계속 계시니까."

말끝이 흐려진다. 배달부가 도와달라는 듯 상점 주인을 쳐다보자, 그가 조심스레 다가와 말려댔다.

"아니, 뭐 그리 중요한 정보라고 이리 총까지 꺼내시오? 보안관 오기 전에 썩 내리시오."

"보안관이 와도 상관 없습니다."

그들의 가슴팍에서 반짝이는 핑커튼 배지. 그것이 이르는 바는 명확했다. 준 사설군사업체에 가까웠던 터라, 일처리 과정에서 사람 하나 죽인다고 한들 문제 되겠나?

"아이고! 애먼 사람 잡겠네. 재이 씨가 여기 사는 건 맞는데, 그게 뭐라고. 응?"

"보고된 바가 없었으니까. 김재이는 지금 어디있지?"

"하, 하트먼 씨랑 같이 있겠지요. 아마."

하트먼과 같이 있다라. 존은 미간을 찌푸렸다. 막대한 자산의 김재이가, 별볼일 없는 하트먼 밑에서 일하는 걸까? 전혀. 그럴 리 없다. 오히려 반대면 반대겠지.

"김재이가 하트먼을 부리고 있나 봅니다. 선배님."

"아, 관계가 그런 것 같네. 희한해."

"그 말은, 사무소 주인이 결국 김재이라는 뜻 아닙니까?"

부정할 수 없지. 사내는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듯 웃었다. 하트먼만 털려고 했을 때는 사실, 큰 생각 없이 주어진 임무만 수행할 생각이었다. 근데 김재이가 끼어있으면 말이 달라진다. 상당한 구미가 생긴 것이다.

"자아, 그럼 두 사람은 지금쯤 어디있을까?"

이번에는 그의 총구가 상점 주인에게 겨누어졌다. 그는 화들짝 놀라더니, 잠시 머뭇거리며 실토했다.

"시, 시청에 가 있을 것이오."

"시청?"

"뭐라더라, 무슨 박사랑 분쟁이 있는데 그걸 시청에서 중재한다고 들었소."

"뭐?"

박사랑 분쟁은 또 무엇이고, 그걸 왜 시청에서 중재한단 말인가? 법원도 아니고. 아무튼 희한하다. 사내들은 총을 거두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마차를 한 대 불러야겠군."

"예, 그게 좋겠습니다."

시청까지 꽤 떨어져 있는 것 같으니.

그들은 수첩에서 메모 한 장을 떼어낸 다음, 상점 주인에게 건넸다.

"내 일행들이 돌아오면 전해주시게. 분명히 하는 게 좋아. 우리는 분명히 돌아오니까."

***

지루한 회의. 뭐라뭐라 떠들어대고는 있지만,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상황. 이것만큼 피곤하고 짜증나는 게 있을까? 재이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하품을 숨기지 않았다. 피버 박사는 그 작태에 얼굴을 붉히며 손가락질 했다.

"이보시게! 예의를 지키게!"

"예의는 그쪽이 좀 지켜주십시오. 이게 뭡니까, 이게. 차라리 법원을 가자니까. 시청사람들 불러 모으면 뭐가 정리 됩니까?"

"저-!"

"아, 재이 씨. 일단 진정하시고요. 아무래도 이게 정부가 주목하는 사업이다 보니 어렵게 갈 것 있습니까? 법원 가기 전에 말로 풀면 참 좋잖아요?"

박사는 자신의 정보를 듣고서 재이가 땅을 선점했다 하고, 재이는 당연히 아니라 주장했다. 간극이 좁혀지지 않으니, 이대로 버티면 사실상 손해는 박사 쪽이 받을 터다. 재이는 마음대로 하라며 연신 몸을 뒤로 기댄 채 관망했다.

똑똑.

"재이 씨."

그때, 하트먼이 들어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지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뉴욕 핑커튼에서 사람이 온 것 같습니다. 맞은편 상점 주인이랑 그 주위 사람들이 붙잡아두고 있다는군요."

EP117. 박사와 핑커튼

EP117. 박사와 핑커튼

거칠고 험난한 세상에도 자신만의 둥지는 분명히 존재했다. 재이에게 새크라멘토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 곧 뉴욕에서 사람이 파견된다는 소식이 곳곳에 흘러가자, 그들은 별다른 대가 없이 재이를 도와주겠노라 말을 붙여봤다. 뉴욕에서 손님이 오면 먼저 재이에게 알려주는 것, 혹 붙잡을 필요가 있다면 그리할 것, 나아가, 거친 방법이 필요하다면 그 또한 긍정적으로 도울 자세가 되어있었다. 마지막의 경우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필요하겠지만.

"몇 명이랍니까?"

재이는 시청을 빠져나오며 하트먼에게 물었다. 박사는 어딜 도망치냐며 큰 소리를 내었지만, 막상 문밖까지 따라올 용기는 없었는지 직원들의 만류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네 명인 것 같은데요. 사무실 앞에 두 명, 그리고 근처에서 수소문하는 자가 둘이랍니다. 무기를 갖고 있고, 꽤 잘 차려입은 신사라고 하던데요."

"신사라고 해봤자 사람 죽이는 걸 업으로 하는 놈들이지 않겠어요?"

"네. 그렇긴 하죠."

"저희처럼."

재이는 마차에 올라타 사무실 쪽으로 돌아가 달라 일렀다. 일단, 정리를 해보자면-

'내가 알렉소의 죽음과 관련있다는 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

모든 사건의 시작. 새크라멘토 지점의 알렉소가 죽은 것으로부터 조사가 시작될 터였다. 사실상 따지자면, 재이를 이용하려 했고 서로 뒤통수를 쳐댔으니 그의 죽음은 자연사나 마찬가지다. 서부에서는 당연한 결과이고, 나아가서는 규칙과 같지만 본사의 직원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터.

"알렉소의 죽음에 대해 맞춰보죠."

"스톰콜과 블로펀치 갱단의 이권 다툼 속에서 몰락하는 핑커튼 사무소를 지켜내기 위해 개입했지만, 결국 총상을 입고 사망. 누구의 공격인지는 알지 못함."

"워낙 시끄럽고 복잡했던 날들이었으니, 이만하면 될 겁니다. 그럼 다음으로-"

사락.

재이는 마차 한쪽에 놓여있던 종이를 뒤적거렸다. 뉴욕에서 사람들이 올 때까지, 어떤 식으로 대처하면 좋을지에 대한 것들이 적혀있었다.

히이잉!

타닥타닥!

그때, 마차의 속도가 급작스럽게 줄어들더니,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하트먼은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마부석 쪽을 쳐다봤고, 마부는 당황스럽게 몸을 굳혔다. 갑자기 말을 타고 나타난 네 명의 사내가 마차를 둘러싼 것이었다.

"김재이가 타고 있는 마차인가?"

"아, 하트먼 씨. 어쩌지요?"

"하트먼! 그래. 자네가 하트먼이군."

뉴욕에서 온 자들이로군. 하트먼은 단박에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핑커튼 본사에서 오셨군요."

"어떻게 알았지?"

"배지를 떡하니 달고 계시니까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마차에서 나가겠습니다."

그는 그리 이른 다음, 몸을 내리고서 재이에게 눈짓했다. 성질 급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직접 그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찾아왔나보다. 하트먼은 재빨리 담배를 꺼내 물고 재이가 들고 있던 종이를 불씨에 태워버렸다.

촤악!

"천천히 내리시면 됩니다. 마차가 멈췄으니 거칠게 나올 이유가 없지요."

"잿더미 잘 정리해주십시오."

"네. 걱정마세요."

뒤에서 말 맞추려던 걸 들켜서는 안 되지. 재이는 속으로 50까지 센 다음, 느릿하게 마차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종이 탄 냄새와 함께 담배 연기가 단번에 쏟아졌다.

"아하."

꽤 잘 차려입은 신사라고 하더니, 정말이네. 뉴욕에서 좀 날리셨겠어. 네 남자는 재이를 내려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김재이?"

"그렇습니다만."

신문에 걸린 사진은 얼굴이 제대로 안 나와 있어 몰랐다. 생각보다 너무 어리고 작지 않나. 이런 게 불렛킬러에 백만장자라니. 참 어이가 없다.

"우리는 뉴욕 핑커튼 본사에서 파견된 정보원들이다. 샬롯, 존, 힐릭, 론."

샬롯이라는 자가 대장인가 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고, 하는 행동이 리더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재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인사했다.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김재이입니다."

"반갑다 하니 조금 의외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재이는 잠시 침묵했다. 사내들은 '그러면 그렇지'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재이는 '언제 봤다고 반말?'이라는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샬롯은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수첩을 꺼냈다.

"됐고. 먼 길 왔으니 협조를 해주어야겠어. 알렉소 사장에 대한 건데 말이지."

"그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접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소란에 파묻혀서 돌아가셨거든요."

"접점이 있었던 게 아닌데, 왜 핑커튼 사무실에 있는거지?"

"하트먼 씨와는 접점이 있었으니까요. 몰리베이 웰스파고 역마차 수송 건, 그거 제 돈이었거든요. 그때의 인연이 계속 이어져서 사무실도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럼, 그쪽은 핑커튼 본사와는 전혀 관계 없이 일했다?"

"네. 솔직히 말씀드리면, 새크라멘토에서는 핑커튼보다 김재이라는 이름 석자가 더 영향력 클 겁니다. 다들 저를 찾아오지 핑커튼을 찾아오지는 않아요."

변명이었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가? 핑커튼은 이미 스톰콜과 블로펀치의 알력 다툼에서 밀려난 상태였고, 그대로 몰락했다. 재이가 사무실에서 받았던 일들 모두, 핑커튼을 찾아온 게 아니라 재이를 찾아온 자들이었다.

'물론, 그 등기를 내가 갖고 있는 게 문제겠지만.'

사내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조사 내용이 부족하다보니, 재이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볼펜을 딸깍거리며 덧붙였다.

"지금 그 말은, 핑커튼의 이름으로 수익이 안 났다는 뜻인가?"

"그렇다고 보면 되겠네요."

"하트먼, 그쪽은 왜 핑커튼 본사로 사건을 보고하지 않았지?"

질문이 하트먼 쪽으로 넘어갔다. 그는 담뱃재 털 듯 웃옷을 탁탁 쳐대더니, 아무것도 몰랐다며 대답했다.

"해야하는지 몰랐습니다."

"몰랐다?"

"예. 알렉소 씨가 그렇게 갑자기 죽어서 인수인계라 할 것도 없었거든요. 제가 밑에서 일을 많이 하긴 했지만, 서류 작업같은 걸 해본 적 없고요. 그저 임금 받고 일하는 처지인데 제가 뭘 어찌하겠습니까."

결백하다 이거네.

시인하지 않으니 일이 길어질 것이다. 사내들은 수첩을 탁, 닫고서 고갯짓했다. 마차에 다시 타도 좋다는 뜻이다.

"돌아가되, 앞으로 사무실은 출입 금지일세."

"무슨 근거로?"

"핑커튼 사무실은 본사의 재산이기 때문이지. 지금껏 무료로 누렸으면 감사하다 하고 물러나는 게 도리지 않겠나? 사용료를 내라고 하기 전에."

"사용료라. 오히려 그쪽들이 내게 관리비를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뭐?"

"영업도 안 하는 빈 건물 지키면서 청소하고, 다듬고, 간판 지켜줬으니까 본사에서는 오히려 고마워하는 게 맞지. 안 그래요?"

사내들이 슬쩍 입매를 굳혔다. '이놈이 왜 갑자기 반말이지' 하는 표정이다.

"하. 누가 부탁이라도 했나? 비어있었으면 비워둘 것이지 어디서 기어들어와서는-"

"오, 그 발언."

재이가 사내의 말을 끊으며 일렀다.

"비어있었다는 그 발언. 인정하시는 거네요."

샬롯이 재이의 의도를 알아채고 멈칫거렸다. 그리고 방금까지 발언한 존의 팔을 잡아당기며 뒤로 물러서라 지시했다. 이곳은 서부. 주인 없이 비어있는 건물이라면 일정 기간 거주한 거주민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아니. 하트먼이 핑커튼 소속이니 비어져 있던 게 아니지."

"아하. 하트먼 씨는 핑커튼 소속이 분명하고요?"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거지?"

"그것만 말해보세요. 핑커튼 소속이 맞는지."

샬롯은 당당한 재이의 발언에 잠시 고민했다. 뭔가 건덕지를 잡으려고 저러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그는 대답을 보류한 채로 고갯짓했다.

"아무튼, 앞으로는 사무실 못 쓰니까 그리 알아두게."

"저희는 지금 사무실 들어가서 쉴 거거든요. 문제 있으면 그때 다시 청구하세요. 지금 보니까 막 도착해서 뭐가 뭔지도 모르는구먼."

"이봐!"

론이라는 자가 벌컥 화를 내며 다가왔으나, 재이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정확히는, 론의 머리 위.

-솜씨 좋은 총잡이

-탐색에 유리한 감각

-주당이고 싶어하는 알코올 쓰레기

-악필

뭐. 나쁘지는 않네. 사실 네 명 모두 고만고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딱 한 명,

-동부의 사격 마스터

-냉정한 분석가

-말타기의 귀재

······

샬롯이라는 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샬롯은 그 밑에도 자잘한 능력들이 너무 많았다. 오죽하면 단번에 못 읽을 정도였으니까. 재이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인사를 남겼고,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저희는 어디 안 가니까, 볼일 있으면 사무실로 오십시오. 그럼."

히이잉!

타닥타닥!

네 남자는 재이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고서 혀를 차댔다. 이곳이 새크라멘토인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들은 수첩을 품 안에 넣으며 조사 가닥을 바로 잡았다.

"뭔가 있지. 김재이라는 놈."

"그러게 말입니다. 숨기는 기색이 있습니다. 하트먼이 왜 따르는지도 모르겠고요."

"조사를 더 해보죠. 아까 도착해서 얻은 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자신만만해 하니까, 도망갈 생각도 없어 보이고."

"서부에서 도망가봤자 아닙니까? 이미 얼굴 다 팔리고 이름도 쫙 알려졌는데."

"좋아. 그럼 계속 탐문하도록 하지."

"아."

존이 뒤쪽을 가리켰다. 시청 쪽에서 빠져 나오는 마차 한 대. 마차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다가 사내들 옆에 섰다. 커튼이 걷히고, 의심스러운 눈초리의 박사가 그들을 쳐다봤다.

"누구신가?"

"지금 우리에게 물으시는 겁니까?"

"그럼. 여기 그대들 말고 또 누가 있다고?"

상식적으로, 마차 타고 온 사람이 먼저 자기 소개를 해야되는 거 아닌가? 사내들이 인상을 찌푸리자, 박사가 웃으며 물었다.

"뉴욕에서 온 핑커튼 본사 직원들 아니신가? 왜 그렇다고 말을 못해?"

"뭡니까? 용건이."

"나는 펜실베니아의 피버 박사인데, 김재이에 대해서 말할 게 있어서. 듣고 싶지 않나? 서로에게 아주 중요한 만남이 될 것 같은데."

피버 박사가 마차에 타라는 듯 문을 열었다. 그러자 샬롯은 잠시 고민하더니, 부하들에게 찢어지자며 신호하고서 올라탔다.

"호텔에서 뵙겠습니다."

"그러자고."

타앙!

마차 문이 닫히자, 마부가 바로 출발했다. 샬롯은 허리춤의 총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김재이에 대해 말할 게 뭔지 궁금하군요."

"다른 게 아니라, 그자가 핑커튼 건물 등기를 갖고 있다 하더라고."

"진짜입니까?"

"시간 아깝게 내가 무엇하러 거짓을 고하겠나? 나도 그렇고 자네들도 시간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조사할 필요 없이, 내 말만 들어보세. 나 여기 오래있었어. 김재이 저놈에 대해 알만한 건 다 안다고."

그리고 아마 수소문하더라도 쉬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을 터다. 이곳 주민들은 모두 김재이의 편이었으니까.

"하나만 약속해. 내 얘기를 다 듣고나면, 나와 손 잡겠다고."

샬롯은 미심쩍다는 듯, 담배를 꺼내물며 박사를 쳐다봤다. 이럴 때 꼭 나오는 부탁은 딱 하나밖에 없다.

"김재이를 죽일 수 있겠어?"

EP118. 내 구역

EP118. 내 구역

그랜드 호텔 지하의 카지노. 웨이터는 그들 앞에 위스키를 내려놓으며 친절하게 웃었다. 딱 봐도 동부 어딘가에서 온 잘생긴 사내들이다. 그들은 붉은색 칩을 테이블 가운데로 던져대며 카드를 섞어댔다.

"그러니까, 샬롯. 지금 한 마디로 김재이를 죽여주면 피버 박사가 돈을 준다는 거 아닙니까."

"석유 묻힌 땅으로 분쟁이 있나봐. 그것만 처리해주면 두당 넉넉히 챙겨주겠다고 하는데."

"피버 박사가 돈이 어디서 나서요? 회사에서 할당된 보상금은 정해져 있을 것 아닙니까. 어? 저 났습니다."

"그게 왜 거기서 나오나? 김재이 주머니에서 나와야지. 하힐 사장 죽을 때 여기저기서 손 잡고 털어댔던 거, 뉴욕에서도 좀 유명했잖아?"

"아아. 그런 방식이요. 하힐 부인 아내가 돌아온다고 떠들썩했었지요."

"뜻만 모으면 방법은 무궁무진해. 시청도 피버 박사에게 호의적이라 하는 것 보니, 아예 힘든 건 아닌 것 같아."

"예를 들어, 김재이 목에 현상금이라도 걸고 털어버린다든지. 나도 난 것 같군."

"아, 잠시만. 카드 누가 섞었어?"

"존이 섞었을걸? 수배되어서 목 걸리면 재산 몰수 가능. 그럼 시청 쪽에서도 안 할 이유가 없는데? 우리도 그렇고. 못 먹어도 수만 달러 아닙니까."

"이래서 사람은 먼 거리를 떠나야해. 길이 있잖아. 길이. 나는 했으면 좋겠는데?"

존이 칩을 내던지며 동료들의 의견을 물었다. 아무리 시청과 김재이가 돈독한 관계라 하더라도, 대외적인 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피버 박사가 소속된 석유 회사는 미정부의 지지를 전폭적으로 받고 있었으며, 그들이 소속된 핑커튼 역시 끊어낼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재이가 이전에 뭐 도움을 줬든, 그건 옛날이야. 대가도 다 치렀고. 우리만 오케이 하면 바로 진행될지도?"

이어서 론 역시 동의한다며 칩을 던져댔다. 남은 것은 샬롯과 힐릭. 힐릭 또한 샬롯의 눈치를 슬쩍 보며 칩을 만지작거렸다.

"근데, 왜 우리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걸까?"

"이미 새크라멘토에서는 김재이에게 총구를 겨눌만한 인간이 없다는 뜻이지. 어느 이유로든지."

"그리고 힘은 모을수록 좋잖아? 안 갈 거야?"

존과 론의 재촉에 힐릭 역시 칩을 밀어넣었다. 샬롯은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더니, 신중하게 입 안에서 굴려댔다.

"김재이라는 놈, 범상치 않은 건 확실해."

그 나이에 오로지 운으로만 모든 걸 얻어낼 수 있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불렛킬러, 날아가는 총알도 맞춘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수도 있다. 동료들은 그래봤자라며 피식 웃어댔다.

"사방에서 갈겨대면 레이몬드 대저택의 유령이라도 구멍 뚫려서 다시 뒤질 거다. 기습할 기회도 있고. 아니, 근데 왜 우리가 '그런 걸' 걱정해?"

그런 것. 상대를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걸 말하는 게다. 론은 상당히 자존심 상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참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인데?"

핑커튼 제1 총잡이들. 서부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지역이었지만, 동부는 원래부터 왁자지껄했던 지역이었다. 날고 긴다는 자들 위에서 미국을 주무르는 게 바로 동부다. 거기서 그들을 대적할 자가 있었던가? 응? 론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샬롯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 이대로는 못 돌아가. 새크라멘토까지 허리 아프게 왔는데 몇 놈 죽이고 돌아가서 푼돈이나 받으라고? 아잇! 그러지 맙시다!"

론의 재촉에 샬롯도 고민을 거두었다. 어렵겠지만, 확실히 불가능하다 여긴 건 아니다. 그저, 위험을 가늠하느라 결정이 늦어졌을 뿐. 샬롯은 담배를 새로이 꺼내 물며 중얼거렸다.

"피버 박사가 김재이 정보를 한번에 넘길 거다. 예상하긴 했는데, 알렉소의 죽음이 확실히 수상하긴 해. 핑커튼 사무실 이름으로 올렸던 채권도 없어졌다는군. 누군가 갖고 있을거라는데, 아무리 봐도 한 명밖에 없지?"

"아까는 딱 잡아떼며 모른 척 하더니! 재수없는 놈!"

콰앙!

존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며 테이블을 내려쳤다. 그러자 주위에서 게임을 즐기던 사람들이 살짝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조심해. 여긴 새크라멘토야."

김재이 그놈을 옆에서 두둔하는 블로펀치 놈들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잔을 한입에 털어버렸다.

'처음 보는 자들인데.'

그런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백베인드 회사의 브랫 버든이다. 브랫 버든은 그들에게 서빙한 웨이터를 부르더니, 자연스럽게 옆에 앉혔다.

"이봐. 저 사내들, 어디서 왔대?"

"모르겠는데, 동부 쪽 발음이더라고."

"······동부."

맞나보네. 백베인드 기차를 타고 뉴욕에서 사람들이 온다고 하더니만, 그게 저들이었나보다. 브랫 버든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부하에게 속삭였다.

"놈들, 몇층 묵는지 좀 알아봐. 분위기가 심상치 않군."

"네. 알겠습니다."

브랫 버든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샬롯은 칩을 던지며 마지막 베팅을 이어갔다.

***

"도망치는 게 어때?"

리베로의 물음에 재이와 하트먼이 동시에 그를 쳐다봤다.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아리스조차.

"도망? 누가? 내가?"

"아니, 그렇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들킬 수밖에 없어. 주민들이 우리를 도와준다 한들, 새크라멘토에 눈이 몇 개고 입이 몇 개인데. 개중 누군가는 분명히 놈들에게 정보를 건네줄 거라고."

"그건 괜찮아. 나도 그걸 바라고 있는 건 아니거든."

"뭐? 그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내가 사무실 건물 먹은 건 지나가는 개도 아는 거라 어쩔 방도가 없어."

재이는 느긋하게 다리를 꼬더니 차를 홀짝거렸다. 하트먼도 무슨 생각인지, 별 반응 없이 옆에서 총을 닦아댔다.

"그럼 더더욱! 도망가야겠네!"

"궁금하군. 왜 하필 도망인지."

"핑커튼 본사에서 파견한 저 양복쟁이 놈들이 어떤 직책일지는 안 봐도 뻔하다고. 놈들을 죽여봤자, 핑커튼을 적으로 만드는 것 외에 뭐 되겠어? 그럴 바에는 문제 만들 것 없이 그냥 도망치는 게 낫지."

"도망치는 게, 가능은 하고?"

적으로 만들면 위험한 이유가 뭔데? 본질적으로 도망치지 못하니까 그런 거 아닌가? 재이의 반박에 리베로가 입을 뻐끔거렸다.

"기회를 봐야지. 기회를. 여기 새크라멘토는 어쨌거나 내가 파악하기 쉬운 도시고, 각종 이권이 어지럽게 얽혀있지. 핑커튼 놈들을 어느 구멍에 빠트리는 게 좋을지 보고 있다가, 틈이 나면 밀어버리는 게 제일 좋아."

"뭔 말?"

"내 손 안 거치고 죽이는 게 제일 좋다고. 말마따나, 본사랑 엮이면 귀찮아지니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유명한 말이 있지 않나? 다른 무엇보다, 재이가 도망칠 필요가 없기도 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긴 한데."

"뭐?"

"나한테 현상금 걸리는 거."

"네가 뭘, 뭘했다고?"

"한 거 많지?"

제 손에 죽어나간 사람이 몇 명인데 그런 걸 묻나? 제일 최근에는 로건도 죽었다. 사건은 끝났지만, 그녀는 어쨌거나 절도 피해자. 그쪽을 부각하여 다시금 조서를 새로 꾸며낸다면, 재이는 걸려들 수밖에 없다. 맨 처음, 도둑질의 시작이었던 누이들도, 여기 앞에 서 있는 리베로의 혈육이다.

"현상금 걸리면 겉으로는 호의적이었던 주민들 다 돌아설 거고, 시청에서는 재산 몰수하려고 여기저기 적극 지원하겠지. 피버 박사는 아주 춤추고 난리나겠군."

핑커튼은 이때다 싶어 달려들 터였다. 자신들의 총격을 지원해주고, 응원해줄 자가 너무 많았다. 리베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듯, 의자에 걸터 앉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진짜 좋은 수인데?"

"그렇지?"

"우리 망한 거 아니야? 너 진짜 그렇게 되면 어떡해?"

재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

"왜에. 뭔데! 나도 알려줘!"

"다들 등 돌려도, 딱 한 군데. 거기는 나 못 놔. 그래서 어느 정도 팽팽하게 균형이 맞을 거다."

"거기가 어딘데? 너 뭐, 아무것도 없잖아."

"아무것도 없긴? 돈 있잖아. 웰스파고 은행에 이만큼."

리베로가 눈을 깜빡거렸다. 재이가 돈이 많은 건 알겠다. 그런데 그게 왜 웰스파고 은행이 재이 편을 들어주는 것인지까지는 이해되지 않았다. 재이는 잠시 보라며, 종이 한 장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봐봐. 리베로. 나는 너에게 돈을 줬어. 100달러라고 치자.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걸 알고 있지."

"어? 어어. 내가 은행인가?"

"그래. 은행에 돈이 있는 걸 아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와서 돈 좀 빌려달라고 해. 리베로. 너는 100달러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빌려줄 수 있다고 하지. 그런데 어라?"

재이는 하트먼의 팔을 끌어냈다.

"하트먼도 빌려달라하네? 저기, 아리스도?"

"돈 없는데?"

"없지? 근데, 사람들은 그걸 몰라. 네가 돈이 없다는 걸."

뭔 말이래. 리베로가 눈을 가늘게 뜨며 침묵하자 재이는 흰 종이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일종의 공수표 같은 거지. 100달러가 있지만, 너는 그 이상을 빌려줄 수 있고 반대로 그 이상을 빌릴 수도 있다. 이게 뭘 뜻하는지 알겠어?"

"모르겠는데."

"은행은 절대 돈을 고이게 두지 않는다. 웰스파고 은행은 내 돈을 베이스 삼아서 분명히, 여기저기 투자를 했을 거란 말이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그 돈을 모두 빼겠다고 하면, 여러모로 차질이 생기지 않겠어?"

"귀찮아진다는 거군."

"그건 긍정적인 태도고. 잘못하면 글쎄."

돈을 줘야할 때 못 줄 수 있다. 반대로, 돈을 빌려줌으로 얻을 기회비용도 날아간다. 단순히 100달러라는 표면 가치가 아닌, 그 이상의 가치가 날아가는 것이다.

"내가 당장 돈 다 뺀다고 하면 은행에서는 곤란해져. 그렇게 되면 내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지. 새크라멘토의 어지간한 기업가들은 다 거기와 엮여있으니, 어느 정도 견고하다 보면 될 것 같네."

기업가들은 또 정부와 엮여있다. 세금과 지원이라는 관계로. 그쪽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어쨌거나 은행을 방패 삼아 시청을 단단히 붙들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럼 내일 웰스파고 은행 문 열자마자 가려고?"

"이미 말해놨지. 무슨 일처리를 그렇게 해?"

"아. 그렇군."

괜한 걱정을 했군. 리베로가 코를 훌쩍거리며 자리에 앉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혹 뉴욕 직원들이 온 것인가 싶어서 하트먼은 재빨리 장전했다.

철컥!

"계십니까?"

하지만 처음 보는 자다. 그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트먼이 문을 반쯤 열고서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브랫 버든 님이 김재이 씨에게 보냈습니다. 그랜드 호텔이고요. 그럼 이만."

그는 쪽지 하나만 남기고서 서둘러 사라졌다. 영문 모를 하트먼이 종이를 재이에게 넘겨줬다. 천천히 읽던 재이가 싱긋 웃었다.

"봐봐. 여긴 내 구역이라니까."

[그랜드 호텔 뉴욕 직원들 302호, 303호 숙박중. 피버 박사와 방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목격. 조심할 것.]

"아, 근데 피버 박사가 끼어있을 줄은 몰랐네. 이거, 재밌게 됐습니다."

EP119. 개코

EP119. 개코

"안 됩니다!"

콰앙!

웰스파고 새크라멘토 지점장은 거칠게 테이블을 내려쳤다. 다소 과격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 자리의 모두는 그 행동을 이해하는 듯 보였다.

"장난하십니까? 아니, 사람이라면 이래서는 안 되지요. 김재이 씨가 새크라멘토에서 한 일들이 있는데, 뭐, 뭐라고요? 현상금이요?"

"잠깐. 진정 좀 해보십시오."

"다들 그러는 거 아닙니다!"

시청 직원들은 쩔쩔매며 지점장의 화를 받아내고만 있었다. 평소에는 유해보이는 성격이었지만, 그는 새크라멘토 대표 은행의 지점장이었다. 한번 아니다 싶은 일에는 큰 소리를 아끼지 않았으니, 감정이 조금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그, 김재이의 재산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도 은행에 피해주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은행이 걱정하는 게 뭔지 안다고, 시청 직원들은 그를 다독이며 덧붙였다. 그 말에 지점장은 조금 누그러진 투로 잠시 침묵했다.

"막말로 예금주만 바뀐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요. 은행에도 절차라는 게 있습니다. 아니, 그리고 이게 단순히 김재이 씨와 관련된 일이겠습니까?"

새크라멘토의 기업가들은 모두 웰스파고의 손님들이다. 한데, 김재이가 한순간에 범법자로 전락하여 계좌가 털리는 꼴이 된다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은행의 신뢰는 땅으로 떨어지게 된다. 지금 은행이 나서서 안 된다고 외치는 행위 자체가 실상은 고객들에게 하는 항변인 것이다.

"금융업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랍니까? 바로 신뢰 아닙니까? 김재이 씨에게 현상금이 걸리는 것도 쉽지 않을 건데, 저희가 '알겠습니다, 하라는 대로 하지요' 거리면서 협조하면 새크라멘토 기업인들 모두 거래를 끊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어찌 되는지, 진짜 말로 해줘야 알겠습니까?"

망한다. 문자 그대로, 깔끔하게 망한다. 웰스파고 은행만큼 크고 안전한 곳이 없다지만, 그렇다고 하여 대체재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시청과 달리, 은행은 분명히 망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김재이를 보호하는 것은 결국 은행의 존속을 위한 일이다.

"그러지 말고, 생각을 좀 더 해보십시오. 진짜 금방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현상금 거는 거, 하루 이틀이면 바로 끝나요. 그 사이에 김재이가 출금만 못 하게 하면 되는 거잖습니까."

"김재이 씨 앞에서는 하루 이틀이란 말도 꺼내지 마십시오. 도장 딱딱 찍어서 한 시간 안에 끝낼 거 아니면 엄두도 내지 말란 말입니다. 그자가 어떤 자인데! 바로 알아채고 액션 취할 겁니다, 아니,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지점장은 딱 잘라 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청 직원들은 그자를 따라 일어났으나, 차마 따라 붙지는 못한 채 안타까운 신음만 흘려댔다.

"아무튼, 웰스파고 은행은 절대 협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혹여 김재이 씨에게 그딴 누명 씌울 생각도 마십시오. 참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현상금을 하루 이틀만에 찍어낸다고, 원."

적어도 정식적인 법원 절차를 거쳐야 할 것 아닌가? 어디 시장바닥도 아니고 무슨 현상금을 하루 만에 책정해?

콰앙!

지점장은 거칠게 문을 박차고 나갔고, 시청 직원들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문질러댔다.

"어느 시대긴. 경매장 못 들어가게 사람 붙잡아두는 시대지. 염병."

"생각보다 쉽지 않겠습니다. 웰스파고 은행 쪽을 설득해야 새크라멘토 다른 기업인들도 설득할 건데요."

"순서를 바꿔볼까요? 차라리 기업인들 쪽을 먼저 파보는 겁니다."

"에이, 그쪽은 절대 안 듣죠. 김재이 쳐내는 거 보면 자신들도 쳐질 수 있다고 경계할거니까. 선례 자체를 안 만들겁니다."

"어허, 이렇게 되면 좀 곤란한데요. 기업인들 후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발의하지 못할 겁니다."

김재이를 어떤 식으로든 살인자로 몰아넣고, 현상금까지 걸기 위해서는 많은 공무원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걸 모으기 위해서는 새크라멘토 기업인들의 도움이 절실했는데······.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된 거군요."

뒤에 서 있던 존이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입을 열었다. 핑커튼 뉴욕 본사에서 온 네 명의 사내들은 아쉽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는데, 상황적인 아쉬움인지 아니면 위스키 맛이 별로라는 건지는 모르겠다.

"시청과 피버 박사, 그리고 저희 핑커튼 대 김재이와 새크라멘토 돈쟁이들. 이렇게 구도가 갈렸다고 보면 되나요?"

"예, 뭐. 돈쟁이라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따지면 그렇습니다."

그들과 테이블을 같이 쓰고 있던 피버 박사는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새크라멘토가 김재이의 영향권 안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사건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참나."

시청의 재원들과 핑커튼 본사 직원들까지 모였건만, 그깟 어린 것 목숨 하나 어쩌지 못해서 곤란해하는 꼴이라니. 그는 궐련을 툭툭 털며 비아냥거렸다.

"서부도 많이 발전했습니다."

픽하면 죽이고, 물어뜯는 야생과 같은 곳인줄 알았는데 나름 체계적인 질서라는 게 있긴 한가 보다. 론은 다 마신 위스키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는 거 아닙니까?"

"뭡니까, 그게."

"김재이 죽이는 거요."

참으로 아무렇지 않은 말투였다. 시청 직원들은 기함했지만, 누구도 섣불리 대꾸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머릿속에 은연 중에 그걸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웰스파고 은행이 지금 저렇게 반대하는 건, 결국 계좌 주인이 바뀌는 그 절차 때문 아닙니까. 김재이, 고아라면서요? 죽으면 재산이 자연스럽게 국가 귀속이니, 시청 측에서는 원래 달성하려던 목적을 달성할 것이고-"

김재이가 죽으면, 피버 박사와 시청은 무조건적인 이득이다.

"그리고 은행도 재산 처리하기 쉬울 것 아닙니까. 남은 기업인들도 뭐라 하지 못하겠지요. '사고'나 여의치 않은 일 따위로 죽었다면 그저 제 명을 다하여 재수가 없었노라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사고라. 그거 좋군."

피버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강하게 찬성했다.

"저희도 핑커튼 내부에서 지시 받은 사안을 종결 시킬 수 있으니, 더할나위 없습니다."

조사 대상이 없으면 사건 종결이다. 그 과정에서 콩고물도 조금 얻어먹을 수 있으니, 귀찮은 일은 제하고 이득만이 있으리라. 김재이가 '사고'로 죽으면 모든 게 평화로워진다.

"흐음."

"반대 의견 듣습니다."

론은 어디 한번 말해보시라는 듯, 웃었다. 실상이 어찌되었든, 일단 '사고'이기만 하면 모든 게 만사 오케이다. 기업인들도 찜찜하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하지는 않을 게다. 어쩌겠나? 이미 김재이는 죽었고,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데.

"반대······있나?"

"저는 좋을 것 같습니다."

"예, 저도요."

"하아, 근데 사고라 하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김재이, 진짜 보통 아닌 녀석이거든요."

"그래봤자 총 좀 쏜다 이거지, 별 수 있겠습니까?"

독 앞에서는 코끼리도 쓰러지고, 기차 앞에서는 버팔로도 날아간다. 어떤 식으로든 죽이는 방법은 많다. 그리고 거기에 특화된 것이 바로, 그들. 핑커튼 본사 소속 총잡이들이고. 그들은 총뿐만 아니라 우아하게 사람을 죽이는 법을 아주 많이 알고 있다.

"맡겨만 주시면 저희가 처리하도록 하죠. 일주일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일주일? 정말입니까?"

"저희는 맡을 수 있는 일만 맡습니다. 대신, 계약서를 하나 쓰지요."

핑커튼이 직접 나서게 되었으니, 구체적인 착수금과 보상금에 대해 말해보자는 뜻이다. 시청 직원들과 피버 박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

"음냠냠. 냠냠."

아리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감자를 볶아댔다. 하루에 세 번, 음식하는 게 이리 즐거운 일인지는 몰랐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누군가 손잡이를 두드려댔다. 아리스는 불을 줄인 다음, 후다닥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네! 누구세요?"

"아리스, 나 저기 식료품점 사장인데."

"아아,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외상 같은 건 없는데. 헉! 설마, 리베로 오라버니가 돈 떼어갔나요?"

식료품 주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리스에게 인사했다. 그는 아이의 뒤쪽을 연신 살피며 물었다.

"아니아니, 그런 건 아니고. 지금 안에 아무도 없나?"

"네. 다들 일 보러 가셨어요. 금방 오실 거예요."

하트먼과 재이는 총기류를 보러 갔다가 마구간을 들릴 예정이었고, 리베로는······. 음. 뭔가 심부름을 받은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나간 김에 카드게임 한판 치고 올 수도? 아리스는 식료품점 주인 손에 들린 토마토 소스를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요?"

"이거, 이번에 우리 가게에서 새로 만든 소스거든."

"어머. 직접 만드신 거예요?"

라벨이 없네?

식료품점 주인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웃었다.

"그렇지. 근데 너무 많이 만들어서, 손님들에게 조금씩 나눠주려고. 먹고 평가 좀 해주겠니?"

"너무 좋아요! 안 그래도 토마토 소스를 사야겠다 생각했던 차라. 근데 갑자기 이런 걸 왜 직접 만드셨어요? 아주머니 손목 아프다고 하시더만."

"뭐, 우리도 이제 돈 좀 벌어야지······."

돈 좀 벌어야겠다는 주인의 말이 묘하게 늘어졌지만, 아리스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토마토 소스 통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맛을 기대할 뿐이다.

"금방 상하니까 오늘 내일 내로 먹는 게 좋아."

"네. 당장 쓰죠 뭐.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아, 그, 미안한데 가능하면 재이 씨랑 같이 먹을래? 저번에 신세진 것도 있고 그래서."

"신세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아니, 너는 몰라도 돼. 그래. 그럼······."

아리스는 고개를 꾸벅 숙였고, 사장은 허둥지둥 재빠르게 대로변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아리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의아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희한하네."

이런 걸 다 만드시고. 근데 뭔가 불편해보였지? 아리스는 토마토 소스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프라이팬을 달군 다음, 망설이지 않고 모두 털어넣었다.

촤아악!

뜨거운 열기를 만난 소스가 아주 맛있는-

"음?"

맛있는? 아리스는 코를 킁킁거렸다. 시큼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비리다고 해야 할지 모를 냄새가 어디선가 풍겨왔다.

'뭐야. 통 세척을 제대로 안 했나? 이거 먹어도 돼?'

아리스가 그리 고민하던 중.

"우리 왔어."

"음. 냄새 좋다."

볼일 보러 나갔던 하트먼과 재이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허기졌는지 바로 주방으로 들어와 점심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소스는 왜 부었어?"

"아, 이거 방금 저쪽 식료품점 사장님이 가져다준건데요. 냄새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냄새?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하트먼 씨는 알겠어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트먼과 재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수프를 한입 떠 먹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강하게 세워지는 촉.

"잠깐만요오오!"

아리스가 주먹으로 숟가락을 막아세웠고, 진지하게 말했다.

"아닌데. 아무래도 이상한데요. 냄새가 난단 말이에요."

재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리스 머리 위를 살폈다. 못 보던 글자가 적혀있었다.

-위험 탐지 개코

EP120. 안 죽네

EP120. 안 죽네

세 사람은 쪼그려앉은 채 머리를 맞댔다. 토마토소스에 이상한 게 들어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먹어보면 되지!

찍찍! 찍!

서부에는 발에 치이는 게 쥐새끼들이었다. 자려고 누우면 천장 위에서 우당탕탕 달려가고, 먹을 것을 반나절이라도 밖에 내두었다간 쥐새끼의 앞니 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쥐덫에 걸린 쥐를 주렁주렁 달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니. 아무튼, 참으로 적절한 실험 대상이다.

"먹나?"

"먹네요."

쥐덫에 걸린 쥐 앞에 토마토소스를 조금 떨어트리니, 놈들은 경계 없이 코를 박고 핥아댔다. 세 사람은 다시금 머리를 맞댄 채로 놈들을 살펴봤다. 짐승도 이상함을 감지 못하여 먹는데, 이걸 아리스가 발견했다니. 좀 놀랍다.

"어떤 것 같습니까?"

"좀 더 보는 게-"

"어?"

좀 더 봐야하지 않겠냐는 하트먼의 말이 무색하게,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쥐들은 거품을 물더니, 연신 기침을 해대고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경련이 몇 번 이어지고, 놈들은 그대로 죽어버렸다. 고작 한 스푼 맛 보았을 뿐인데.

"독이네."

"독입니다."

"헉! 독이다."

세 사람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하트먼은 쥐 꼬리를 잡고 들어올려 사체를 살폈고, 아리스는 놀라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이, 이럴 수가."

"아리스. 토마토소스 누가 줬지?"

"저, 저 앞의 식료품점 사장님이요. 이번에 새로 만들었다고 시식해보라 하더라고요. 아니, 어쩐지. 그 짠돌이가 이상하다 했어요. 세상에, 미쳤지. 어떻게 이런, 이런 짓을!"

아리스는 몸을 덜덜 떨어대며 분을 터트려댔다. 차라리 앞에서 총구를 겨눌 것이지! 어떻게 먹을 것에 장난질을 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호의를 가장하여서 말이다! 이건 인간 관계의 배신이다. 이런 식으로 상대를 기만하는 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 하트먼은 죽은 쥐 시체를 덫 안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사무실 모두를 노린 것 같군요. 음식은 나눠먹을 거니까요."

"개중에서, 정확히는 나를 노린 거겠죠."

"배후가 있다고 보시는군요."

"그럼요.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한 달에 3달러 벌려고 오닉스 말똥 얻어가는 사람이 이런 대범한 일을 저지를 일 없지요. 피버 박사 아니면, 뉴욕 핑커튼."

"둘 다일 가능성도요."

"물론입니다. 뭐, 무슨 독성인지 자세히 조사하는 건 한계가 있을 것 같으니 쥐는 치워도 될 것 같습니다."

서부에는 무슨 독이 섞였는지 알아낼만한 기술이 없다. 적어도 동부, 혹은 저명한 의사들에게 자문을 구하면 알 수 있겠다만, 사실상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청산가리든, 염산이든, 락스물이든, 양재물이든, 혹은 저 썩은 개똥이든 알게 뭐란 말인가.

'이미 토마토소스가 엎어졌다는 게 중요하지.'

상대는 자신을 죽이려 했고, 살아남았다. 그게 중요하다. 특히, 여기 서부에서는.

"어디서부터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흐음."

하트먼이 쥐를 치우고, 아리스가 토마토소스를 닦아내며 그를 쳐다봤다. 재이는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손가락을 튕기며 웃었다.

"식료품점 주인을 족치면 피버 박사나 핑커튼까지 닿을 수도 있겠죠. 근데, 이게 핑커튼이면 이런 식으로 증거를 남기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일처리에 있어서는 정말 확실한 사람들이니까요."

"예, 식료품점 사장 머리를 들고 갈 때면, 이미 증거 인멸에 시치미만 떼겠지요."

"그럼, 좋은 생각 있으십니까?"

"먹었다고 합시다."

"토마토소스를요?"

"뭐,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알릴 필요는 없고, 제가 '뭘 잘못 먹고' 쓰러졌다는 소문만 내도 괜찮지 않겠어요?"

먹고 죽으면 끝인데, 먹고 죽지 않으면 다음을 계획할 것이다. 그리하면, 꼬리를 잡을 수 있겠지.

"이놈들이 더럽게 나온다는 걸 알았으니까, 준비만 잘 하면 잡아낼 수 있을겁니다."

하트먼이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조금 의외였다. 뉴욕의 핑커튼이라고 하면 사실상 총잡이들의 정수라고 여겨지는 자들인데 말이다. 이런 식으로 뒤에서 공작질을 하는 건 명예롭지 못했다. 그러니까,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일단 소문을 내 보고 상대측 움직임을 확인하는 게 좋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먼저 꼬리가 드러나면, 예."

그때는-

철컥!

우리의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면 된다. 아리스는 빈 토마토소스를 들고서 어쩔 줄 몰라하며 서 있었다. 재이는 그런 아리스에게 눈짓으로 일렀다.

"아리스?"

"예?"

"뭐해? 어서 가서 의사를 불러오지 않고."

"아! 자, 잠시만요."

"헬가 선생을 데려와. 요즘 그 양반, 눈도 침침하고 잘 들리지도 않는다며. 속여 넘기기에는 적당할 거다. 돈에도 욕심 있는 사람이고."

"알겠습니다! 그럼 재이 님은 쉬고 계셔요! 금방, 금방 가서 모셔오겠습니다."

"아, 그리고-"

재이가 소파에 누으며 뭐라 이르려는 순간이었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리베로가 돌아왔다. 외출이 꽤 즐거웠는지,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어수선한 사무실 상황을 보기 전까지는.

"뭐여? 뭔 일?"

"아아."

재이는 이때다 싶어서 머리를 짚으며 쓰러지는 '척'했고, 하트먼은 리베로의 어깨를 감싸며 아리스와 함께 밖으로 보냈다.

"재이 씨가 뭘 잘못 먹었는지 쓰러졌습니다."

"뭐!? 어쩌다? 아니, 돈도 많은 새끼가 뭘 잘못 주워 먹고 저래? 괜찮은 거래?"

"아리스가 의사를 데리러 갈 건데, 같이 가주시죠. 저는 사무실을 지키겠습니다."

"어이고, 시발! 알겠어! 미치겠네, 진짜. 아리스!"

"네네! 주, 준비 다 되었습니다!"

"김재이이! 야! 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라!"

하트먼이 아리스에게 작게 눈짓했다. 적을 속이려면 제 편도 속여야 하는 법. 소문을 크게크게 내려면 리베로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리베로, 무슨 일이야?"

"아니! 시발, 김재이 쓰러졌대!"

"뭐? 어쩌다?"

"몰라, 뭐 잘못 먹었다는데 나도 몰라."

"어허, 이런이런."

"무슨 일이래?"

"재이 씨가 뭘 잘못 먹었다는데?"

"그래? 뭘 먹었길래 속이 안 좋은 것도 아니고 바로 쓰러져?"

"그러니까. 안타깝게 됐네. 하필 새크라멘토에 뉴욕 본사 직원들이 와 있는데."

"왜? 왜들 소란이야?"

타닥타닥!

리베로가 불 지핀 소문은 빠르게 사람들 틈으로 스며들었다. 아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가락에 침을 묻혀 눈가에 찍어 발랐다. 적어도 이정도 디테일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비켜어어어!"

한편, 리베로는 진심인 듯 보였지만 말이다. 김재이가 죽으면 거기에 의탁해서 사는 자신도 끝이다! 정부에서 분명 현상금을 걸 건데, 그 옆에 딱 붙어있던 자신도 무사하기는 글렀다!

"감동이라 해야하나, 괘씸하다고 해야하나."

소파에 누워있던 재이가 창문 밖으로 그 모습을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하트먼은 커튼을 친 다음,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위층으로 가시죠. 사람들이 몰려오면 모습을 숨기는 게 좋겠습니다. 리베로와 아리스가 의사들을 데리고 오면, 저는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식료품주인을 넌지시 떠보는 게 좋겠군요."

"아, 너무 티나지 않게. 알죠?"

"그럼요. 제가 이런 건 또 전문입니다."

"예, 살랑살랑. 됐나 안 됐나 싶을 정도로만 간질이면 재채기는 알아서 나올겁니다."

아이고! 재이는 수건에 물을 묻히고서 제 발로 2층에 올라갔다. 그리고 그대로 벌러덩! 안 그래도 요즘 피곤한 일이 많았는데, 이참에 좀 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쿵! 쿵쿵!

"계십니까? 저 앞집 잡화점인데요."

"재이 씨가 쓰러졌다고 해서요."

"어머어머,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래?"

재이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아래층 소란을 들을 수 있었다.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걱정되어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하나, 그 와중에도 식료품점 주인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

"먹었다고?"

"예! 마침 그집 아이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더군요. 토마토소스를 주니까 얼마나 좋아하든지. 아마 귀가하고 바로 먹었나 봅니다. 소식이 바로 들려왔어요!"

식료품점 주인은 낯선 사내에게 연신 속닥거렸다. 그자는 주위 분위기를 파악한 듯 보였다. 알겠노라 이르며 품 속에서 금화 동전 하나를 은밀히 내어줬다.

"입단속 잘 하는 게 좋아."

"그럼요, 그럼요. 불어봤자 저만 손해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김재이는 그 수단이었다. 마침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말에 겨우겨우 올라타고 가서 얻은 일감이다. 아마 이들은 피버 박사 일행이거나, 뉴욕 핑커튼 직원이겠지. 신원을 밝히지 않아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상관 없다. 중요한 건, 꽤 큰 돈이 자신에 손에 들어왔다는 것! 사내는 은밀히 가게 밖으로 나갔고, 이내 골목 뒤쪽에서 마차에 올라탔다.

"소문이 사실인가?"

피버 박사였다. 그는 커튼 틈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훔쳐보며 중얼거렸다.

"예, 의사까지 왔다 갔다는데요. 아주 중증이랍니다. 손 쓸 게 딱히 없어서 한 것도 없다네요. 소화 제대로 시켰나 봅니다."

"잘 되었군. 저승길 가는 길에 배는 든든하겠어."

"핑커튼 쪽에도 연락하겠습니다."

피버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탄 마차는 재빠르게 골목을 빠져나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고, 이내 소문은 핑커튼 일행에게도 닿았다. 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보란 듯이 손을 펼쳐댔다.

"하하하! 쉽다, 쉬워. 응?"

"그러게 말입니다. 어지간한 사람 아니고서는 먹을 거 관리하는 게 쉽지 않긴 한데. 이렇게 바로 걸려들지는 몰랐네요."

"언제 죽는대?"

"오늘 내일 한다고는 하는데, 글쎄. 두고봐야하지 않을까? 그걸 다 먹었으면 길어봤자 일주일이라."

좋다. 샬롯은 손끝을 탁탁 튕겨대며 즐거움을 표했다. 이제 그가 죽기만 한다면 모든 일은 수월하게 풀릴 것이다.

"계속 사무실 쪽 주시해. 죽었다는 말 나오자마자 사람들 불러모을 거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저 주둥이를 쩍 벌린 채 먹잇감이 굴러들어오길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들은 동시에 위스키 잔을 들어올리며 축배를 들었고, 그날 밤은 늦게까지 소란이 줄지 않았다.

콰앙! 쾅!

그리고 열흘 후. 존은 인상을 찌푸린 채, 위스키 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들이 축배를 들 때 사용했던 바로 그것이다.

"아니, 시발!"

"진정해. 진정."

"이상하잖아. 대체 왜-"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이건만 열흘 전과는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 존은 얼굴이 벌게진 채로 어이없이 소리쳤다.

"대체 그 새끼 왜 안 죽는 건데? 어!?"

알 수 없다는 듯, 핑커튼 동료들이 시선을 돌리며 작게 한숨 쉬었다. 새크라멘토 의사가 이렇게 훌륭한지는 또 처음 알았다. 존은 짜증스럽게 이를 갈아대더니, 동료들에게 제안했다.

"열흘이나 기다렸어. 이 망할 촌구석 새크라멘토에서! 더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우리가 다시 나서는 건 어때?"

EP121. 대접

EP121. 대접

"이상하긴 해. 원래라면 하루 이틀 내로 끝났어야 하는 건데."

처음 시름시름 앓는다고 했을 때만 해도, 금방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보아라. 벌써 열흘째! 이렇게 길게 이어질 일이 아닌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샬롯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더니, 한 가지를 가정했다.

"독을 안 먹었나?"

"안 먹었으면? 진작 우리 뒤집으러 왔겠지. 내 생각에는 거의 다 왔어. 며칠만 더 기다려보자."

"아니, 시발! 못해먹겠다고!"

"진정하세요. 그러다 김재이보다 먼저 뒤지겠습니다."

"독을 먹은 척 했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그렇게 해서 대체 뭘 얻으려고?"

김재이가 몸을 사리면서까지 뭘 얻으려 했겠는가? 샬롯은 손가락으로 천천히 주위를 가리켰다. 너와 나,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피버 박사까지.

"증거."

그들이 김재이를 죽이려 했단 증거 말이다. 아무리 새크라멘토에서 날고 기는 자라 하더라도 핑커튼 본사 직원을 죽이는 건 위험 부담이 크다. 그러니, 다른 그 무엇보다 증거가 필요할 것이다. 김재이가 먼저 생명의 위협을 당했다는.

"아니······."

콰앙!

존이 무어라 이르려는 순간이었다.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룸서비스 직원이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그들은 하던 대화를 멈추고 어색하게 시선만 주고 받았다. 이제는 호텔 곳곳에 김재이의 눈과 귀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게 그의 의도였든 아니든 간에 어쨌거나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심지어는 그가 앓아 뒤지기 일보직전이라 하여도.

"주문하신 메뉴 확인하겠습니다. 토마토스파게티와 뇨끼스프, 베이컨샌드위치 등 총 열 가지입니다. 술은 따로 올려드리도록 하지요."

"고맙군."

샬롯이 주머니에서 팁을 꺼내주려다 멈칫거렸다. 뭔가 이상하게 직원의 얼굴이 낯익었기 때문이다. 샬롯이 그를 미심쩍게 바라보자, 다른 핑커튼 직원들이 포크를 잡다가 멈추었다.

"왜 그래?"

"······."

"왜 그러십니까, 손님?"

"······이름이?"

가슴팍에 붙어있는 명찰은 '엘가'라는 이름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뭔가 안 어울려. 게다가 어디선가 분명히 본 얼굴······.

"그 새끼네!"

기억을 헤집던 샬롯 대신 존이 자리를 박차며 소리쳤다.

"김재이랑 같이 다닌다는 샌님 새끼!"

"아이고, 소문이 그렇게 났나? 솔직히 나보다는 김재이가 더 샌님 같은데."

"너 이새끼 여기서 뭐해?"

무슨 수작이길래 호텔에서 음식 따위를 나르고 있는 거지? 그들이 주머니에서 총을 빼내려고 하자, 함께 들어왔던 직원들이 재빠르게 그들의 머리통을 겨누었다.

철컥!

핑커튼 직원들은 다해서 네 명. 그리고 직원은 세 명. 한 명이 우세한 상황이었지만, 룸서비스 받아 먹으려다 일어난 일인지라, 그는 총을 들고 있지 않았다. 리베로는 음식 뚜껑을 열어주며 일렀다.

"뭐긴. 귀한 손님 배 안 굶게 밥 나르고 있지. 그러지 말고, 어서들 처드세요. 재이, 너도 이참에 같이 앉지?"

"······!"

직원 두 명은 하트먼과 김재이였다. 그들은 모자를 벗으며 핑커튼 손에 들린 총을 하나 둘씩 빼앗아 멀리 던져댔다.

"이런 미친 것들이."

"김재이? 죽어간다더니."

"그러니까 내가 얘기했잖아! 저 새끼, 안 먹은 것 같다고."

"네가 언제 그랬어? 샬롯이 그랬지."

"그만, 그만!"

샬롯은 다들 닥치라며 크게 소리쳤다. 적의 총구가 머리를 겨누고 있는데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왜 그런 것일까 가만 생각해 보니, 이는 상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놈들은 총을 겨누고 있지만, '살기'가 없다.

"살아있었군."

"그래. 걱정해줘서 고마워."

"딱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그쪽 의도까지 알아야하나?"

작게 콧노래가 섞인 것 같기도 하다. 샬롯은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이프와 포크만 주시하며 상황을 살폈다. 당최 녀석의 의중을 알 수 없다.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궁금하겠지. 지난 열흘 간, 뒤에서 수소문을 따로 해봤는데, 대단하더군. 꼬리 하나 남지 않았어."

독을 구하고, 그것을 토마토소스에 섞고, 식료품점 사장과 접촉하여 독살을 시도한 모든 정황에 대한 말이었다. 어떤 식으로 일 처리를 했는지 몰라도 정말 '깔끔'했다.

"그래서 애 좀 먹었어. 근데 이게 웬걸. 내가 곧 죽을거라고 생각했는지, 조금씩 말이 풀리더라고."

식료품점 사장이 어찌하여 도박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는지가 화두였다. 그는 하루 종일 불 꺼진 핑커튼 사무실을 보고서 방심한 것인지, 술 김에 사람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도 핑커튼이랑 일을 해봤다 이거야. 그 대가로 돈도 많이 받았는걸?'

정확히 무엇을 했고, 어떤 대가를 받았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꽤 많은 사람이 재이와의 연관성을 짐작했다. 그쯤이었다. 재이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난 것이.

"식료품점 사장이랑 얘기를 해봤는데, 그자가 말할 게 생각보다 많더라고. 근데 혼자서는 기억에 한계가 있어서 말이지. 네 명 모두 얼굴을 한번 보면 좋겠어."

네 명 중 한 명이 그자와 접촉하였는데, 사장은 그자의 이름이나 나이 그 어떤 신원도 모른다. 그러니까, 직접 대면할 수밖에. 존이 미간을 찌푸리며 동료들에게 눈짓했고, 동료들도 눈알을 굴리며 침묵했다.

"어때? 괜찮겠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음.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은-"

재이가 샬롯 앞에 숟가락을 단정히 놓아줬다.

"여기서 식사하며 기다리라는 뜻이야. 곧 올 거거든."

식사를 하라는 말에 샬롯의 목덜미가 쭈뼛거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토마토소스스파게티가 유독 반질거리는 기분이다.

'독을 탔나?'

자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놈도? 하지만 알 수 없었다. 김재이는 아무런 대꾸 없이 샬롯을 지켜보기만 했고, 그는 죄 없는 스푼만 연신 만지작거렸다.

"뭐해?"

"······이런 상황에서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어?"

"안 넘어가면?"

"뭐?"

"안 넘어가면 또 어쩔 건데. 먹어."

스윽. 재이는 음식을 그들 앞에 하나씩 밀어넣어주며 재차 덧붙였다. 그쯤 되니, 이제는 확신이 들었다. 김재이는 모든 걸 알고 있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독을 타서 복수하려는 것이다. 기다리다 지친 리베로가 숟가락에 소스를 듬뿍 떠서 샬롯 입에 가져다줬다.

"손이 많이 가네. 떠먹여줘야 먹어?"

"치워."

"아- 하세요. 시발."

"치우라고!"

타앗! 샬롯이 거칠게 스푼을 쳐내자, 토마토소스가 흰 벽지에 뿌려졌다. 길게, 그리고 늘어지면서. 이는 마치 누군가의 머리통에서 터져나온 피처럼 보였다.

타앙! 탕!

샬롯이 나이프를 쥔 채 벌떡 일어나자, 재이가 그의 허벅지에 총알을 박았다.

"아아악!"

"배부른 놈일세. 먹여줘도 싫다하고. 왜? 못 먹을 거라도 탔을까봐?"

재이는 쓰러진 샬롯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고서 싱긋 웃었다.

"나는 음식에 장난질 안 쳐. 그건 모독이거든."

"개, 개 소리-"

"그리고 내가 하나 재밌는 거 알려줄까?"

주위가 조용해졌다. 샬롯 또한 신음을 삼키며 재이를 올려다봤다. 불안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알렉소, 내가 죽인 거 맞아."

"너-!"

"핑커튼 사무실도, 그 과정에서 내가 먹었다. 이걸 원했지?"

철컥.

재이는 그리 이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숨기고 있던 걸 직접 말해준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어차피 여기 있는 너희들은 살아갈 수 없으니까 마지막 아량을 베푼다는 뜻이다.

타앙!

격발음과 동시에 샬롯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놀란 동료들이 반사적으로 일어났지만, 하트먼은 그들의 등에 총을 쏘아댔다.

타앙! 탕! 탕!

순식간에 백색의 테이블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존은 끅끅거리면서 총이 있는 쪽으로 기어갔고, 그의 손끝이 총에 닿는 순간.

타앗!

리베로가 시원하게 발로 쳐서 멀리 보냈다. 리베로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핏줄이 선명했다.

"너희들, 이러고도, 우리가, 핑커튼을······."

"아이고, 아저씨들. 됐으니까 입 다물고 가셔요. 총잡이가 어떻게 독극물을 사용해? 핑커튼 본사도 쪽팔려서 제대로 말 못할 거다."

열흘. 짧지만, 확실한 시간이었다. 식료품점 사장의 증언과 뒷조사로 놈들이 음독 시도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었으니까. 이렇게 죽어나간다 한들, 그 누가 안타까워할까.

"가기 전에 맛 봐도 되는데, 하여간."

리베로는 포크로 스파게티와 샌드위치 따위를 주워먹으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담은 존의 눈동자에서 빛이 꺼졌다. 재이는 그들이 앉아있던 테이블에 자리하고서, 냅킨으로 피 묻은 손을 닦아냈다.

"꺼억, 꺽-"

아직 론과 힐릭은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재이는 그에게 샌드위치를 건넸다가, 이내 '아, 못 먹겠군' 이라 중얼거리며 다시 가져왔다.

타닥타닥!

총소리가 났으니까, 당연지사 직원들이 달려오겠지? 다들 어서 와서 김재이 저놈의 행패를 보고, 보안관을 불러주게! 힐릭은 차마 목 밖으로 이르지 못한 채, 꺽꺽거리며 문쪽만 바라봤다.

"헉!"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달려온 사람은 호텔 직원이 아니었다. 바로, 연락을 받고 달려온 피버 박사. 핑커튼 직원들이 급히 이를 말이 있다 하여 온 것인데, 이게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히익!"

그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몸을 돌려 나가려 했으나, 재이가 바로 총을 쏘아 저지했다.

타앙!

총알이 피버 박사의 코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벽에 박혔다. 우연인가?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의도적인데? 피버 박사는 그대로 몸을 굳히고서 고개를 돌렸고, 재이는 총을 까딱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듯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피버 박사."

"기, 김재이. 자네가 왜 여기 있나?"

"식사 준비를 제가 했거든요. 차린 건 없는데, 마음에 드시려나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 사람들을 어찌······."

재이는 그에게 스파게티를 건네며 물었다.

"박사님. 이제 욕심 좀 그만 부리시고, 정리 합시다. 석유 회사 쪽 설득하는 건 알아서 하세요. 제가 스파게티까지 대접해드렸는데, 계속 강짜 부리시면 서운합니다."

스파게티. 피버 박사도 이게 뭘 뜻하는지 알고 있다. 핑커튼 본사 놈들, 독을 먹고 당한 건가? 아니지. 그런 것치고는 총상이 분명한데! 피버 박사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잡더니, 여전히 모르겠다며 시치미를 떼었다.

"뭐, 뭐를?"

"매출의 1%. 임대 방식으로 진행. 그 정도만 해주면 제가 피버 박사님게는 강권하지 않겠습니다. 억지로 먹으면 체하잖아요. 나이도 많으신데."

"아! 음. 크흠."

피버 박사도 음독 시도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시청 직원들까지 엮으려면 엮을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재이는 그게 귀찮고, 무리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여, 제안했다.

"석유 회사 말고, 핑커튼 본사로도 서신을 넣어주시면 좋겠네요. 박사님이 증인으로 하여, 이번 사건이 어떻게 된 건지 말입니다. 본사 사람들이 아주 궁금해 할 거라서요."

이놈들의 죽음은 그럴 만했고, 김재이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걸 증언해달라는 것이었다. 박사가 눈알만 도르륵 굴리고 있자,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힐릭이 그의 바짓단을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김재이가···알렉소를 죽···시인······."

김재이가 알렉소를 죽였노라 시인했다, 힐릭은 그리 말하고 싶었지만 바로 고개가 꺾이고 말았다.

타앙!

가는 길 심심하지 않게 알려준 건데, 여기저기 떠벌리면 곤란하지. 재이가 마지막으로 그의 숨통을 끊어줬기 때문이다.

EP122. 피버박사의 편지

EP122. 피버박사의 편지

[어, 안녕하신가. 나 라일리 피버 박사일세. 이 편지는 새크라멘토에서 보내는 것이니, 참고하시게.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있어. 뭘 먼저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음. 우선, 우리가 예상한 대로 석유 매장지를 찾았다네. 새크라멘토 외곽지의 숲 속인데, 보니까 물 밑으로 흐르는 검은 물이 상당해. 매장량이 상당할 것으로 보이네.

안 좋은 소식은, 그곳에 주인이 있다는 거야. 물론 나도 협상을 해보려고 했지. 이것에 대해서는 나를 비난할 생각하지 말게. 신께 맹세하건대, 나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 땅주인은 매장지를 임대해주는 조건으로 매출의 1%를 달라고 하더군. 아, 누가 그런 정신 나간 조건을 걸었냐고?

김재이, 불렛킬러! 알려나 모르겠어. 새크라멘토에서는 그놈 이름 모르는 작자가 없던데.

현장의 의견을 존중해주게. 분명하게 말하는데, 이 이상 나는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네.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꽤 많은 사람이 죽었어. 개중에는 뉴욕 핑커튼 본사의 총잡이도 섞여있지.

무슨 말이냐고?

닥치고, 그냥 글자 그대로 읽게.

난 아직도 토마토소스스파게티를 보면 속이 울렁거려서 미칠 지경이니까. 김재이 그놈은 내게, 앞으로 토마토소스를 먹지 못하게끔 저주를 걸었어! 망할 새끼! 아무튼, 회사에서는 새크라멘토의 상황을 그리 알고 판단하시게. 혹,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손 떼겠네.

혹여나 김재이와 내가 손 잡고 회사를 속여먹으려 한건 아닌지 의심하지 말게. 그것만큼 지금 내게 모욕적인 건 없으니까. 가능하다면, 내가 그놈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을 정도라네!

크흠. 말이 길어졌군. 나는 이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내용을 뉴욕 핑커튼 회사에 보낼 것이네. 그쪽 핑커튼 직원들이 김재이 음식에 독을 섞다 걸렸거든. 멍청한 놈들. 재수 없게도 내가 이번 사건의 목격자가 되어버렸어.

뭐, 무엇이 되었든 서둘러 답신해주게. 하루라도 빨리 거지 같은 새크라멘토를 떠나 펜실베니아로 돌아가고 싶거든.

덧붙이자면, 혹 김재이를 처치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다고 하여도 연락해주게. 난 자리를 피해 있는 게 좋겠어. 아!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지긋지긋해, 서부의 총잡이 놈들······.]

"이게 피버 박사가 보낸 거라고요?"

"네. 저도 처음에는 안 믿겼습니다. 박사님이 이렇게 거친 단어를 사용할 줄은 몰랐 거든요."

피버 박사가 몸담고 있는 하이크석유 본사. 편지를 전달 받은 사장이 의아해하며 연신 종이를 뒤적거렸다. 단어 선택을 보면 어디 시정잡배가 쓴 줄 알겠지만, 필체나 인장 따위가 영락없는 피버 박사의 것이다. 직원들이 난감해하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새크라멘토에서 고생이 많으신 것 같은데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무슨 일이라고 있겠습니까. 그랬으면 다른 편지가 도착했겠지요."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석유매장지 찾았다고 하니, 그게 어딥니까. 역시 예상한 대로 새크라멘토에 있었어요."

"근데 그 김재이라는 자가 갑작스러운 변수입니다. 매출의 1%라니요. 게다가 그저 임대하는 형식에 불과하면서. 이건 너무 과한 것 같은데요."

"김재이라는 이름, 들어본 사람? 피버 박사의 편지대로라면 이름 좀 날리는 작자 같은데."

"서부의 총잡이 중 한 명입니다. 요즘 제일 잘 나간다고 하죠. 맥스 롤디오리, 호크아이를 연달아 잡은 실력자라 합니다. 최근에는 로건도 잡았다는 말이 있던데, 이건 확실치 않습니다."

"맥스 롤디오리랑 호크아이를요? 김재이라는 이 자가?"

두 무법자 모두 사장에게는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맥스 롤디오리는 열차 강도범이었고, 호크아이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아는 전설이었으니까. 그가 놀랍다며 다시 편지를 확인했다.

"그만한 정도면, 굉장히 부자일 것 같은데."

"웰스파고에서도 신경쓰는 VIP라고 합니다."

"돈 좀 볼 줄 아는 놈인가 봅니다. 매출의 1%라."

"어찌하면 좋을까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핑커튼 본사 직원들까지 당했다는 걸 보면 섣부르게 처리 못 할 것 같은데."

과연 가능할까? 그자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 것이? 대부분 살면서 사람 한번 죽여본 적 없는 엘리트들이었지만, 이런 경우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좋을지는 빠삭했다. 사장이 담배로 테이블을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버 박사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볼장 다 봤다는 거겠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니, 제가 한번 가보겠습니다."

"사장님이요?"

"가서 매출을 순익으로 바꾸기만 해도 이득 아닙니까? 대체 어떤 자인지 눈으로도 좀 보고, 뭐 겸사겸사 새크라멘토의 매장지도 확인하고."

폴이 젊은 나이에 석유 회사 사장직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바로, 의심 가는 모든 걸 눈으로 확인하는 것. 사장의 움직임에 직원들도 자리에 일어나서 테이블을 정리했다. 오늘 회의는 이걸로 끝이다. 바로, 다같이 새크라멘토로 가는 것.

'그리고, 프로젝트가 진행된다는 것,'

매출의 1%를 순익의 1%로 줄인다고 결심했다는 게 그 증거였다. 김재이는 어떤 식으로든지 천문학적인 부를 손에 쥐게 될 것이고, 그들은 앞으로 몇 년 동안 새크라멘토 숲 속에서 석유를 파내게 될 것이다. 아주 역사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가며 주먹을 맞부딪혔다.

***

[안녕하신가. 나는 하이크 석유 회사에서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라일리 피버 박사일세. 갑작스레 연락을 하게 되어 놀랐을 것이라 여겨지겠지만, 참아보시고 끝까지 읽어주게. 그러니까 말이지-

그대들이 보낸 핑커튼 본사 직원 네 명은 어제 그랜드호텔에서 명을 다했다네. 죽었다는 말이지! 미끄러져서 머리가 터져 죽었거나, 혹은 복상사 따위를 했으면 내 추모라도 했을 것인데 지금의 사태로는 딱히 이를 말이 없군. 왜냐하면, 핑커튼 본사의 엘리트 총잡이라는 작자들이 음독을 시도했다가 반격 당해 죽었으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고?

내가 묻고 싶은 말일세. 대체 본사는 직원 교육을 어떤 식으로 하기에 일 처리를 이딴 식으로 하는 것인가? 그들은 새크라멘토에 도착하여 핑커튼 사무실을 조사했네. 그 과정에서 김재이, 하트먼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 사실, 이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내 알 바 아닐세. 나도 새크라멘토에서 지낸 지 얼마 안 되었거든.

중요한 건, 놈들은 김재이를 죽이고 싶어했지만 불가했다는 것이지. 사정이 좀 복잡해. 웰스파고 은행과 새크라멘토 기업인들이 김재이를 싸고 돌았거든.

아무튼, 그 잘나신 서부의 총잡이들께서 야비하게 음독을 시도했다가 들통나서 대가리에 구멍이 뚫렸다는 게 이 편지의 용건일세.

김재이가 핑커튼 본사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나도 몰라, 시발!

그런 게 있었으면 그쪽 부하들이 정정당당하게 문제를 제기하여 김재이 머리통을 날려버렸겠지! 복잡해져서 쓰지 않으려 했지만,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할 것 같아 말하네.

나는 그쪽 부하들의 꼬임에 넘어갔어.

의견이 같았단 말일세. 나는 김재이가 죽어야만 이득을 보는 입장이었거든. 그래서 도와주겠다 하긴 했는데, 아니 일처리가 영······.

쯧. 됐고. 그쪽 부하들의 죽음이 이르는 건 딱 하나일세. 그들은 김재이의 죄를 입증하지 못했고, 그래서 뒷공작 펼치다가 뒈졌다는 거지! 놈들은 김재이의 재산을 노리려 했거든.

큼큼!

가능하다면 새크라멘토 지점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걸세. 이미 여기 도시에서는 핑커튼이라는 이름이 지워졌거든. 날고 기는 총잡이들이 적절하게 사람들 의뢰를 받고 있어.

그러니까 네 명의 장례를 치러주되, 이쪽으로는 눈길도 얼씬하지 말게. 알겠나? 내 신분을 걸고 이 편지에 대해서 거짓이 없음을 맹세하지.

그럼,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게 뭔 개소리야?"

뉴욕의 핑커튼 본사. 초대 설립자였던 앨런 핑커튼의 손자인 웨이드가 편지를 휙 날리며 소리쳤다. 샬롯의 보고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피버 박사라는 작자가 연락을 해온 것 아닌가? 그런데 뭐?

"애들이 다 죽었다고? 설마!"

샬롯을 비롯한 그 네 명은 핑커튼 내에서도 최정예 총잡이였다. 두뇌면 두뇌, 실력이면 실력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는지라 본사 특별 명령만 주로 이행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죽었다니? 편지가 새크라멘토에서 뉴욕까지 오는 시간을 계산해보면, 꽤 오래 전 사달이 벌어진 것이다.

"피버 박사를 수소문해봤는데, 신원은 확실한 자입니다. 석유 쪽에서는 이름을 꽤 날렸더군요. 현재 새크라멘토에 있는 것도 맞는 것 같고요. 음,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특별한 게 없어 보입니다."

"말이 장황하긴 한데, 결국에는 김재이가 죽였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 것 같은데요."

"참나! 김재이면 걔잖아? 불렛킬러."

정보에 민감한 핑커튼답게 불렛킬러라는 이름이 단박에 나왔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피버 박사의 편지를 읽고서 침묵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자가 이런 식으로 서신을 보냈다는 건-

"새크라멘토로 가서 다시 조사를 진행한다고 해도 특별히 발견되는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이미 뒷정리까지 끝난 사안일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 피버 박사라는 자가 이런 식으로 편지를 보냈을 리 없지요."

"아마 그쪽에서는 본사가 새크라멘토 조사를 진행한다는 사실 자체를 경계하고 있을 겁니다."

"그럼 어쩝니까? 편지에서 경고한 대로, 포기합니까?"

"사실 그쪽 건물이나, 채권 등이 그리 큰 금액은 아닌데······."

"저는 이대로 두고 못 봅니다. 명예와 관련된 것입니다."

명예 좋지. 그런데 말이다. 핑커튼 직원들이 음독을 시도했다는 그 불명예는 어찌 가린단 말인가? 웨이드는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묻어."

"묻습니까?"

"대외적으로 새크라멘토 일은 앞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회사 차원에서도 정리 해."

대외적으로, 말이다. 그 말인 즉, 이번에는 은밀하게 사람을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쪽으로 접근하겠다는 뜻이다. 편지 대로 정말 김재이 측에게 실책이 없고, 핑커튼 직원들이 실수한 것이라면-

"접자고. 새크라멘토 지점. 지금 거기가 아니더라도 관리할 곳은 많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하, 참나. 샬롯 걔는 독 같은 걸 사용하는 애가 아닌데 어쩌다 그랬대?"

"상황이 좀 그랬나 봅니다. 사정이 있었겠지요."

"뭐. 그렇다고 해도······."

웨이드는 담배를 비벼 끈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샬롯을 비롯한 네 명의 가족들에게 부고를 알려야 했으니까. 직원들도 분주하게 움직였고, 정신없는 뉴욕의 풍경이 창문 밖 가득 차올랐다.

***

"흐윽!"

굴욕이다, 굴욕이야!

피버 박사는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 연신 훌쩍였다. 그 모습을 본 사내가 함께 온 동료에게 속닥거렸다.

"왜 저러신가?"

"말도 마. 김재이가 보는 앞에서 편지를 썼대. 총 때문에 긴장하셨는지, 철자 틀렸다고 지적도 받고."

"아."

사내들은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고, 피버 박사는 연신 훌쩍거리며 책상에 머리를 박아댔다. 쿵쿵! 그 소리는 밤이 늦어질 때까지 끊이질 않았다.

EP123. 장찌엔

EP123. 장찌엔

재이는 마른 천으로 총구를 가볍게 닦아냈다. 호텔에서 그 난리를 친 것치고는 상당히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다. 재이가 멀쩡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이웃들이 오가다 창문에 얼굴을 들이미는 것 말고는, 아주 한가로웠다. 리베로는 커튼을 치더니, 토마토소스스파게티를 뒤적거렸다.

"근데, 왜 시청 쪽은 정리 안해?"

"뭐가?"

"그렇잖아. 핑커튼 그놈들이 설치고 다녔던 거, 시청 쪽에서 힘 실어주니까 가능했던 건데. 아무리 피버 박사 입김이 있었다 한들, 선택은 정부도 한 거잖아."

"흐음."

재이는 계속해보라는 듯, 작게 호응했다. 사건에 엮여있던 핑커튼과 피버 박사는 다 적당히 되갚아주었는데, 어찌하여 시청 쪽 사람들은 가만히 두는지 모르겠다. 리베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하트먼을 바라봤지만, 그 역시 별다른 의견이 없어보였다. 그냥, 재이의 결정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눈치. 쯧쯧. 저 몸집만 큰 곰탱이 같으니라고.

"시청은 주체가 없어."

"주체라니?"

"말 그대로, 피버 박사나 핑커튼 일당 네 명처럼 개인으로 특정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시청은 정부지. 개인이 정부와 싸워서 이긴다는 건 현대에도 어려운 일이거든."

피버 박사를 죽이지 않은 것도 연관된 사안이다. 그는 어쨌거나, 미정부가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프로젝트의 담당자. 아무리 피버 박사가 꼴 보기 싫더라도 죽이게 된다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다. 이래서 어느 시대든, 배워야 한다는 건가.

"핑커튼은 내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했으니 내 총질이 용납 되는데 피버 박사는 입증하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정부 쪽에서 쉬이 허락하지 않지."

"그래 봤자, 먼저 총알 박는 놈이 이기는 거지!"

"그렇게 되면 진짜 현상금 바로 걸린다. 은행도 내 편 들어주기 힘들어져. 한 순간에 계좌의 돈이 공중분해 될 거다."

"아. 그건 좀 곤란하네."

"그래. 그리고 무엇보다 여길 지키고 있을 세력이 필요하거든."

"여기?"

"새크라멘토."

재이가 총을 내려놓더니, 만족스레 이리저리 둘러봤다. 로건이 남긴 수첩에는 그가 가야 할 길이 적혀있었다. 미국의 동부 쪽으로 조금씩 이동하여 스킬을 습득하고, 최종적으로 미정부와 접촉해 게임의 끝을 맺어야 하는데 어찌 시청 측과 등을 돌린단 말인가? 모른 척, 서로 눈 감아주며 없었던 일로 하는 게 좋다. 그쪽에게나, 재이에게나.

"피버 박사가 석유회사에 편지를 보냈잖아. 어떤 결정을 내리든, 본사에서는 사람이 올 거란 말이지."

"본사, 본사, 그놈의 본사. 지겹다 정말."

"잘 협의해서 삽 뜨면 인근에는 광산업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그쪽 회사 사람들이 몰려들 거다. 근데 우리는? 일년 내내 여기 사무실에 엉덩이 붙이고 있을까?"

"절대, 아니지."

"그러니까. 우리가 새크라멘토를 떠나 있어도, 그 땅이 내 땅이라는 걸 증명해주고, 편 들어줄 세력이 필요하다는 거거든."

그게 바로 시청이다.

"그렇게 해줄까? 이번에 하는 거 보니까 이익에 따라서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뒤집히던데."

"오히려 좋지. 이득만 있다면 분명한 내 편이라는 거니까. 내가 받을 매출의 1%중 일부를 새크라멘토에 세금으로 납부할 거다. 그렇게 되면, 시청 측에서는 매장지 소유권을 나로 인정할 수밖에 없어."

자신이 새크라멘토를 떠나 있어도, 매출이 늘어나야 세금이 늘어나니 사업 감사를 게을리하지 않을 터다. 그뿐인가? 아무리 석유 회사 직원들이 진을 치고 앉아도, 나라에서 '김재이의 땅'이라 보증한다면 허튼 수작질 할 틈이 없다.

"말뚝 박아놓겠다는거군."

"시대에 맞춰 행동하겠다는 거지."

"석유 회사에서는 사람 온다고 쳐. 핑커튼에서는 어떻게 나올까?"

재이는 피버 박사가 썼던 편지를 떠올리며 웃었다.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현명한 판단이 가능한 자가 수장이라면 더 이상 새크라멘토에 눈독들이지 않겠지? 혹여 계속 사람을 보내온다면, 그만큼 멍청한 놈이라는 거니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너 잘났다, 인마."

"칭찬 감사."

펜실베니아에서 새크라멘토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 넉넉잡아 보름 정도 걸리겠지. 와서 계약을 매듭짓는다면 한 달 정도 걸리려나? 우선 회사 사람들과 한번 정도 만난 다음 새크라멘토를 떠나는 게 좋겠다. 역마 스킬 때문인지, 아니면 상황상 어쩔 수 없는 것인지 계속해서 집 떠날 일이 생기고 있었다.

똑똑.

"누구세요? 영업 안 합니다."

리베로가 친 커튼 뒤로 인기척이 어른거렸다. 문고리를 두드리는 손짓도 상당히 진중하게 느껴졌다. 재이는 고개를 돌렸고, 하트먼은 허리 쪽에 손을 가져다댔다. 이는 의식한 것이 아닌, 습관적이고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김재이 씨를 찾아 왔는데. 며칠 몸이 안 좋다 들어오지 않았소."

억양이 좀 특이했다. 세 사람은 동시에 시선을 나누고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들어도-

'중국인인 것 같은데.'

발음이나, 음정 처리 따위가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리베로는 조심스럽게 커튼을 걷었고, 이내 기겁하며 목을 뒤로 젖혔다.

"재이."

"누군데?"

"우리는 왜 이렇게 하루하루가 바쁘고 피곤하냐?"

리베로가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리자, 재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수십 명의 사내가 사무실 앞에 모여있는 것 아닌가. 앞쪽에 선 자들은 화려한 옷이었고, 뒤쪽에 선 자들은 비교적 남루한 차림새다. 하지만 더 중요하고, 시선을 앗는 것이 있었으니.

"문 좀 열어보지. 의뢰를 하러 온 것이니까."

바로, 그들이 모두 동양인이었다는 것. 재이는 새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자신은 아시아인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익숙해진 것일까. 재이는 괜히 얼굴을 더듬거리다가 대꾸했다.

"의뢰를 안 받겠다고 하면?"

"······."

"농담일세. 대신 한 명만 들어와. 무기는 모두 버리고. 그렇게 살벌하게 몰려오면 보안관도 오줌을 지린다고. 문 열어둘 거니까, 현명하게 판단해."

재이와 하트먼 그리고 리베로는 총구를 문 쪽에 겨눈 채 숨 죽였다. 잠시 소란이 들려오더니,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끼익.

안으로 들어서는 중년 남자. 가느다란 수염을 하나로 묶고, 귀에는 치렁치렁 장신구를 달고 있었다. 붉은 기가 들어간 셔츠. 앞으로 굴러 봐도 중국인이고, 뒤로 굴러 생각해도 장찌엔이다.

"······손님 환대가 격하군."

"장찌엔, 맞지?"

"이름도 알아주나?"

"알아줄 수밖에. 아시아인들을 끌고 다니는 건 자네밖에 없잖아. 하트먼."

재이는 하트먼에게 눈짓으로 몸수색을 지시했다. 하트먼이 그의 웃옷을 가볍게 툭툭 치며 숨긴 총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없습니다."

"환영합니다, 손님. 이쪽으로 오시죠."

무장해제 상태라는 걸 확인한 재이가 싱긋 웃으며 소파 쪽으로 그를 안내했다. 장찌엔은 기다란 손톱으로 턱을 긁어대더니, 이내 체념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댔다.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새크라멘토에 언제 왔던 것입니까?"

"사흘 전쯤."

"아, 그때는 좀 아팠습니다."

중국 이민자 출신의 거상, 장찌엔. 그는 아시아인으로 이루어진 갱단의 두목이었으며, 샌프란시스코를 주름잡는 대부호다. 일전에, 하힐 저택 경매에 참여했던 세 명의 부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장찌엔, 철강회사를 소유한 타이거롤, 스위트월드의 댄버. 이 셋 말이다. 댄버는 뭐, 이미 저세상 간 지 오래지만.

"그런데 무슨 일로? 바쁘신 분이 과거 일을 헤집다 오셨을 것 같지는 않고."

아직도 하힐 저택 경매 사건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는지 묻는 질문이다. 장찌엔은 피식 웃더니, 품에서 기다란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대인은 지나간 일에 미련두지 않지. 그리고 그깟 저택, 남는 것이라고는 땅덩어리밖에 없는 미국에서 특별할 것도 없어. 아, 물론 경매 과정에 대해서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일러두지."

"그렇군요. 상했다, 정도라 다행입니다. 일전에 다른 분께서는 악감정을 품고 있다가 뒤지셔서."

"댄버?"

"아시네요?"

"상인에게 그 정도 소식은 기본 아닌가?"

후우. 장찌엔은 우습다며 킬킬거렸다. 분위기로 보아 하니, 하힐 저택 경매 사건 때문에 앙갚음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의문이다. 이자가 대체 여긴 무엇하러 왔는지.

"용건이?"

"총잡이 사무소에 의뢰하러 오지 밥 먹으러 오겠나?"

"아. 의뢰······. 샌프란시스코에는 인재가 없나 봅니다?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있었는데, 다 없어졌어. 등신들. 하나 같이 덜떨어져서는."

그의 입에서 연기가 뻐끔뻐끔 피어올랐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일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아무래도 중요한 사안인가 보지? 멀리 떨어진데다, 경매 사건으로 엮여있는 자신을 찾아올 정도면.

"당분간은 의뢰를 안 받으려 했는데, 먼 길 오셨으니 먼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사람을 하나 찾아줬으면 좋겠어."

"사람이요?"

"그래. 내 애인인데, 거금을 주고 사왔었거든. 근데 이게 맹랑하게 도망을 쳤지 뭐야?"

애인······. 그것 참 낭만적이고 병신 같다. 재이는 뭐라 말을 이을지 몰라 입을 다물었고, 리베로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트먼 역시 황당하여 재이의 반응을 살피는 중이었다.

"애인, 그, 사람 찾는 데는 인해전술이 최고 아닙니까. 그쪽에서는 독보적일 것 같은데."

"듣자 하니, 사람 찾는 걸 그렇게 잘 한다면서? 총만 까딱거리면 길도 잘 찾고. 보는 사람마다 신기해한다던데."

"오."

정보력 하나는 진짜 끝내주는군. 이건 인정이다. 하지만 그렇게 귀찮고, 찜찜한 일을 맡을 수는 없다.

"그, 죄송한데-"

"잡으러 간 놈들 다 그년에게 당한걸거야."

"당했다니요?"

"아름답거든. 눈 한번 마주치면 홀려서 정신 다 놔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막상 찾아도 내 손에 돌아오지 않은 거라고."

"아하."

그렇군요. 어이없는 설명 감사합니다. 재이는 그를 쫓아내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귀찮고,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이다. 사실상 돈이라면 이제 더 이상 미련 없을 만큼 있고-

"찾아만 준다면, 내 뭐든 다 주지. 돈을 말하는 게 아니야."

"돈이 아니면요?"

"내가 원하는 건 뭐든 얻어올 수 있거든. 중국 황제만 사용한다는 최고급 향신료부터, 조선의 보물, 몰락한 왕가의 비밀 애장품 등등."

"헉."

이건 재이가 아니라, 리베로의 감탄사였다. 장찌엔이라는 거상이 대단한 줄은 알았지만, 깊이가 남달랐다. 허세라 하기에는 목소리에 단단함이 분명했다.

"재, 재이."

우리 어차피 시간도 남는데 한번 하는 게 어때? 밑 지는 것도 없잖아!

"보물이래. 보물······."

리베로가 잇새로 속삭였다. 재이의 눈도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아무리 재이라도 보물은-

"혹시 그럼 쌀 구할 수 있습니까?"

"뭐?"

"조선에서 주로 먹는 쌀."

"······."

재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서부시대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빵과 스테이크. 그리고 망할 위스키 밖에 없었다.

"가능하다면 고춧가루도요. 간장! 간장도 좋겠네요. 그, 배추랑 무도 구하고 싶은데. 가능합니까?"

EP124. 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