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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85화

이신이 갑자기 바다 위로 사라지고 10분이 지나자, 배 위의 도전자들은 점점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이신 님이 바다에 빠진 건 아닐까요?"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뭐 하늘을 날지도 못하는데, 아직까지 안 돌아왔으면 빠졌다고 봐야죠."

"갑자기 혼자 바다 위로 가더니 그대로 빠져서 못 나오고 있다고? 이신 님이? 너 이신 안티팬이지? 이 새끼, 이거 잘 걸렸다!"

"아이씨, 아니에요!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러니까 말한 거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빠른 속도로 날아가던 이신은 금방 점이 되더니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멀어졌다.

선원들은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해적들의 함대라 생각했고, 그래서 더욱 걱정했다.

"어? 저기!"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속도로 보아 해적선일 확률은 더욱 증가했고, 배가 가까워질수록 불안감은 더욱 가속되었다.

이신이 저 배로 갔다면 무언가 소란이 있어야 함에도 배는 평온했고 무리 없이 이쪽을 향해 순항하고 있었다.

이건 이신이 배에 올라타지 못했거나 해적들에게 잡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신 님이 바다에 떨어졌을 리가."

"이신 님이 저 배에 탄 걸까요?"

"그렇다면, 저건 이신이 끌고 오는 거겠군."

뷔엘라는 이미 저 멀리 보이는 배에 이신이 타고 있을 것이라 확신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더 볼 것도 없고, 기다릴 필요도 없다.

'해적들이 보물섬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

요 바다 위에서 마주칠 만한 놈들이라고 해 봤자 해적 놈들 아니면 아까 그 용인일 텐데.

가까이 가 보니 해적선이어서 혼자 저 배를 강탈해 온 게 분명했다.

그 자식이 바다에 빠지거나 해적에게 잡히는 일은 없을 테니.

"뷔엘라 님? 어디 가세요?"

"좀 자러 간다."

"예? 이신 님이 돌아오지도 않으셨는데."

"그놈 걱정할 바에, 차라리 해적 놈들 걱정을 해라."

"하지만...."

귀찮은 뷔엘라가 손을 내저으며 선실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도전자들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대부분은 다가오는 저 배를 기다렸다.

"혹시 모르니, 전투 준비해."

이신이 저 안에 없다면 전투 상황에 대비해야 하고, 있더라도 그가 좋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도와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선장이 눈을 부라리며 기다리고 있을 때.

"아까 동쪽에 있던 말다리안의 해적선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도전자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날아옵니다!"

점점 선명해지는 무언가.

빠르게 가까워지던 투사체가 배 위에 안착했다.

"이신 님!"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가 뜯어 갔던 갑판을 타고 이신이 돌아왔다.

그리고는 염동력으로 뗐던 갑판을 갑판의 원래 자리에 다시 붙인 뒤, 선장에게 다가갔다.

"말다리안 해적들로부터 나침반을 가져왔습니다."

이신은 선장에게 나침반을 건넸다.

"아, 예!"

20층에 꽤 오랜 기간 머물며 항해술을 깊게 익힌 황일한이 영광스러운 표정으로 나침반을 받았다.

"저 해적들은 왜...?"

"아, 그냥 두기 좀 그래서... 전리품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

"그냥 알아서 써먹으세요. 말 안 들으면 저 부르시고요."

해적들의 관리 권한을 갑자기 넘겨받은 황일한은 당황스러움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저 악명 높은 말다리안 해적단이 자신의 말을 과연 들을까?

아무리 이신이 그렇게 말했다 해도 놈들을 상대하는 건 껄끄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좀...."

"음, 아니면 그냥 돌려보내세요."

"예? 그냥 돌려보내면 보복하겠다고, 이를 갈 겁니다."

"그러진 않을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린 이신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말다리안의 해적선을 보았다.

이신과 눈이 마주친 말다리안이 황급히 다른 일을 하는 척 고개를 돌렸다.

'못 미덥긴 하네.'

황일한의 말에 수긍한 이신이 잠깐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그럼 그냥 저거 다 침몰시켜 버리죠."

"예?"

'예?'라는 말만 몇 번째 하는 것인지.

황일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다리안을 보았다.

머리가 민둥민둥하고 창백한 것이, 그가 이신에게 어떤 고초를 받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저 모습을 보니 괜스레 측은함이 느껴졌다.

"음… 잠깐 고민을-."

"잠까아아아안!"

갑자기 고성을 외치는 말다리안이 자신의 배에서 뛰어 넘어와 이신과 황일한의 옆으로 갔다.

"누구 맘대로 넘어와?"

이신의 싸늘한 목소리에 식겁한 그가 몸을 떨며 무릎을 꿇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저희 배를 침몰시킨다는 소리에 그만...."

연신 머리를 땅에 처박는 말다리안의 모습은 황일한에게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이 녀석이 그 악명 높았던 말다리안이 맞는 건가?

그가 느끼던 측은함이 한 단계 더 증가했다.

"네가 뒤통수칠 것 같다는데, 배라도 부숴야 못 하겠지."

"아니, 아닙니다! 정말 뒤통수칠 생각 없습니다! 제가 미친놈도 아니고 어떻게 마법사님의 뒤통수를 치겠습니까?"

"이, 이신님.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꼴을 보아하니, 말다리안이 이쪽의 뒤통수를 칠 것 같지는 않았다.

황일한이 보기에 자신이 그냥 묻어 버리자고 하면, 이신은 그대로 저 해적들을 바다에 담가 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눈앞에 살아 있는 인간 수백 명을 이 망망대해에 던져 버리는 것은 황일한으로서는 선뜻 결정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냥 보내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뒤통수를 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이구! 선장 나리! 절대! 저희가 뒤통수칠 일은 없을 겁니다! 암요! 그럼!"

"그래, 앞으로 우리 눈에 띄지 말아라. 그리고, 다른 놈들 만나서 작당 모의하지 말고."

"예, 그럽습죠!"

"이거 가져가라."

이신이 자그마한 기계를 꺼내 말다리안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위치 추적기다. 너무 멀어지면 반응하지 않겠지만, 서로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지. 그거 배에 꽂아 놔."

"알겠습니다!"

이거라도 달아 놓으면 그나마 황일한의 불안감이 덜하겠지.

"딴짓하다 걸리면 그땐, 진짜 끝이야."

"당연합죠!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연신 허리를 굽히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던 말다리안이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자신의 배로 넘어갔다.

"귀는 밝아 가지고."

이신이 다시 말이라도 바꿀까, 말다리안이 허겁지겁 해적들을 몰고 사라지자, 황일한은 나침반을 보며 배를 운항했다.

스테이지의 시작부터 정신을 차릴 틈이 없을 정도로 전투가 휘몰아쳤지만, 사실 넓은 바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이 지루한 항해를 매일 같이 반복할 뿐.

하루를 꼬박 움직였음에도 그들은 섬은커녕, 배 한 척도 보지 못했다.

촤아아악!

"파도가 점점 거세지는군."

"이상합니다. 날씨를 보면 이렇게까지 파도가 칠 날씨는 아닙니다."

"그런가?"

선실 안에서 잠을 자고 나왔더니, 그 말다리안을 놓아주었다는 소식에 뷔엘라는 온종일 저기압인 상태였다.

근데 파도가 심하게 쳐서 배까지 계속 흔들거리니,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화가 올라오려 하는구나."

"미친놈."

"미친놈이라니?"

정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뷔엘라를 보며 이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에게 버서커의 재능을 일깨워 준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가면 갈수록 싸움만 바라는 무식한 오크가 되어 가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니다. 그보다 그렇게 짜증이 나면 검이라도 써라."

"검을 어디다 쓰라는 거지? 저기 있는 놈들은 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촤아아아악!

갑자기 바다 위로 솟구치는 거대한 물기둥.

물벼락이 쏟아지고 그 사이로 거대한 괴수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기다가."

이신은 눈짓으로 괴수를 가리켰다.

그 모습을 본 뷔엘라가 입가를 올리며 검을 빼 들었다.

"화풀이하기에 괜찮은 놈이군."

뷔엘라가 땅을 박차고 괴수에게로 달려들었다.

파아아아아―!

길쭉한 거대 물고기 형태.

초점 없는 눈동자가 이리저리 돌아가다 뷔엘라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다.

"죽-."

놈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물줄기가 뷔엘라를 강타했다.

"크허억!"

물대포를 맞고 배의 반대편 바다로 날아가는 뷔엘라를 이신이 염동력으로 붙잡았다.

쿵!

허공에서 무형의 힘에 끌려온 그가 배 위에 안착했다.

"고, 고맙다."

멋쩍은 얼굴로 감사 인사를 건넨 그의 눈이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 생선 대가리가."

분노가 한껏 차오른 뷔엘라가 타오르는 마력의 덩어리를 검으로 보냈다.

거의 대형선 절반만 한 크기의 괴수가 물 위로 몸을 반쯤 드러낸 채, 다시 입가에 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뼈 채로 반으로 갈라 주마."

촤아아아아아!

또다시 쏘아지는 물대포.

[파절검]

그에 맞춰 뷔엘라의 절기인 파절검이 사나운 마력을 뽐내며 쇄도한다.

콰가가가가가각!

물줄기를 반으로 쪼개며 날아가는 파절검의 검기가 그대로 괴수의 몸을 절단 냈다.

괴수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괴성도 지르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생을 마감했다.

콰아아아아!

파절검의 검기는 물대포와 괴수를 베어 내고도 힘이 남았는지 그대로 바다를 가격하며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고 사라졌다.

"와...뷔엘라 님도 장난 아니시네요?"

"저 해류종을 단 일격에 죽이다니."

"역시, 이신 님의 제1검!"

"무슨 소리야? 이신 님의 제1검은 백현 님이지."

"에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데 이신 님 오른팔은 박주혁 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이신 님이 가장 아끼는 사람은 박혜원 님이야. 미래에 정혼자라는 소리가...."

갑자기 벌어진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의 향연에 이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니-."

이신이 그들을 제지하기 위해 한마디 하려 할 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1검이라니? 무슨 저 괴물 녀석의 시종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그들의 말을 들은 뷔엘라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예? 아, 아닌가요?"

"그래! 1검이고 뭐고가 어딨어? 그냥 이신 님의 동료이실 뿐인데!"

"맞네, 맞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도전자들은 그 거센 반응에 당황하여 다급히 변명을 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흥분한 뷔엘라를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른 인간들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내가 그들보다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엉?"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예, 예. 진정하시고요-."

"진정은 무슨! 이신 같은 괴물은 빼고, 나를 이길 녀석은 없…지는 않고 아까 그 엔도인가 엔조인가 뭐시기 하는 놈만 아니면 다 이긴다. 알겠나!"

조금 전 그 거대 해류종을 죽이고도 그 흥분이 진정되지 않았는지 뷔엘라가 배에 올라탄 이들을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그 모습을 보던 이신은 자신을 향해 도움의 눈빛을 보내는 도전자들을 애써 무시하며, 황일한이 있는 곳으로 갔다.

황일한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괴수의 시체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상합니다."

"뭐가 말이죠?"

다가온 이신을 보며 황일한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했다.

"이 괴수들은 해수면까지 올라오는 일이 없습니다. 햇빛을 좋아하지 않는 놈들이기 때문이죠."

"이 괴수들에 대해 아십니까?"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아주 깊은 심해에 사는 놈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들이 잘 보기 힘들 정도로 깊은 곳에 서식하는 놈이죠."

맞다. 이런 거대 물고기가 배 밑을 돌아다닌다면 해적들이 쉽게 이 바다에서 설치고 돌아다닐 수 없었을 테니.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진 놈의 시체 주위로 근처 해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 거대 괴수에 비하면 다른 해류들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좋지 않은 현상입니다. 바다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하면 꼭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곤 하죠."

황일한의 표정은 몹시 좋지 않았다.

그는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혹시 아바임 몬스트레라고 아십니까?"

이신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황일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설마...?"

이신이 쓸데없이 그 이름을 꺼내진 않았을 것이라 황일한은 생각했다.

"아시는 게 있습니까?"

이신은 재차 물었다.

"…저도 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그 심해의 괴수, 아바임 몬스트레가 이 바다 전체를 지배할 정도로 엄청난 녀석이라는 이야기는 종종 들었습니다."

"알겠습니다."

황일한도 유의미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아바임 몬스트레가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신은 이러한 사실을 다른 도전자들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괜히 불안감만 키우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도, 이렇게 된 이상 이 배의 선장인 황일한에게는 알려 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반드시 나타날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마세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황일한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배를 부탁드립니다."

그는 이신의 부탁이 마치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제86화

나침반의 방향을 따라 움직이던 배는 작은 섬에 도착했다.

"왠지 으스스하군."

"오늘은 여기서 잠깐 쉬도록 하죠."

황일한의 지시에 따라 섬의 한쪽에 배들이 모두 정박했다.

"밤하늘이 아름답습니다."

"생각보다 감상적인 노인네군."

뷔엘라의 거침없는 말투에,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습니다. 이 나이를 먹고 탑에 오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여기까지 온 것도 신기하지만, 제가 이런 도전을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황일한은 지금 이 순간이 재밌고 흥미로웠다.

5년 전 이곳 20층의 세계에 정착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매 순간이 두근거리고 떨리는 모험을 하는 것은.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지?"

"뷔엘라 님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재작년 저희 한국 도전자들에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층에서 도전자들이 올라오지 않던 일이죠."

그렇게 말하며 황일한의 시선이 저 멀리 홀로 있는 이신에게로 향했다.

그에 따라 똑같이 시선을 옮긴 뷔엘라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는 것 같군요. 아무튼, 사실 전 그때 그것을 보며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제가 그 시기에 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죠. 그 사건을 보며 제가 20층에 정착한 것을 위안 삼았습니다. 탑은 이렇게나 위험한 곳이라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하하, 뭐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황일한은 쓰디쓴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자, 1층의 도전자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더군요. 하나같이 뛰어난 업적을 새기면서 말이죠. 그때,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차디찬 밤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바닷물의 소금기를 느낀 황일한이 요 며칠간의 짜릿한 감각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나도 탑을 오르고 싶다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빛을 볼 수 있지 않겠냐고.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제 나이가 이제 50이 넘어가니, 고작 나이가 들었다는 것에 치우쳐 처음 탑에 오르던 그 마음을 잊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고작 50년 좀 넘게 산 것 가지고 무슨."

겉으로 보기에 뷔엘라가 황일한에 비해 훨씬 어려 보이지만, 산 세월은 엘프인 그가 두 배는 더 길었다.

그걸 아는 황일한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

"하하, 뷔엘라 님에 비하면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제게는 큰 결심 하나하나가 조금은 버거운 나이입니다."

뷔엘라가 자신을 나무란 것이 아니란 것쯤은 황일한도 알고 있었다.

그저 표현 방식이 서투른 것이지.

황일한은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털어놓으니 후련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나도 안다. 같은 세월을 살아도 느끼고 깨닫는 건 다른 법이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도 된다. 너 정도는 쉽게 도와줄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생각보다 뷔엘라가 따뜻한 엘프라고 황일한은 생각했다.

다른 도전자들이 다들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신은 바닷물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마력을 조사하고 있었다.

'사람의 감정을 조절하는 마력의 잔흔이다.'

이 섬의 전반부에 이러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신은 주변의 다른 도전자들을 보았다.

그들 모두가 왠지 모르게 감상에 빠져 있는 모습.

이 마력에 영향을 받은 탓이 분명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섬이기에 이신은 굳이 움직이지 않고 마력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이 섬의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섬 안에 살아 있는 생명체 중에 이러한 마력을 가진 놈들은 없다.

'그렇다는 건, 바닷속에서 움직였다는 것인데.'

이신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여러 갈래의 마력 줄기가 나선으로 꼬아지며 뻗어졌다.

바닷물 안으로 쭉 밀려들어 가는 마력의 끝부분이 해저 밑바닥에 꽂히고 마력을 퍼트렸다.

[디텍트]

특정 마력의 잔흔을 쫓아 움직여 보지만 그와 유사한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바닷속은 지상과 다르게 더욱 복잡한 마력의 흐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선 뭘 더 얻을 순 없어 보이네.'

마력을 다시 회수한 이신이 황일한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이 섬 전체에 남아 있는 마력의 잔흔을 모두 지워 버릴 수도 있었지만, 황일한과 뷔엘라를 포함하여 도전자들 대부분이 나름 기분 좋은 표정을 내비치고 있었기에 그러지 않았다.

이미 다들 술을 꺼내 한 잔씩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다.

"오셨습니까?"

"홀로 궁상떨더니 심심했나?"

"시끄러."

황일한의 옆자리에 앉은 이신은 고요한 바다를 보았다.

"세이렌에 대해 아십니까?"

"당연히 압니다. 보물섬이 나타나는 시기에 세이렌이 출몰한다고 하죠."

"왜? 세이렌이라도 봤나?"

"아니."

이신은 그렇게 말하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술병 세 개를 꺼내 둘에게 건네주었다.

"오, 이건 100년산 그레티에 명주 아닙니까?"

"네가 이런 센스가 있을 줄이야."

황일한과 뷔엘라가 한껏 감탄한 얼굴로 이신이 건넨 술병을 보았다.

"기분 좀 내 보죠."

술이나 마시며 시간 보내는 것은 이신의 스타일이 아니었으나, 가끔은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세이렌의 마력을 받아서 그런 것인가.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세 사람이 건배를 하며 술을 들이켰다.

"크아! 이 맛이지. 얼마 만에 술을 먹는 건지."

"이신 님 덕분에 호강하는군요. 저로서는 비싸서 엄두도 못 낼 술인데 말입니다."

"술 좋아하십니까?"

"그럼요, 한때는 입에 술만 달고 살다가 탑에 오르며 술을 끊었습니다. 여유가 없었죠."

"부족 최고의 주당이 나였지."

뷔엘라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자신의 주량을 자랑했다.

"세이렌이 술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죠. 아십니까?"

"처음 들어 보는군. 그 녀석들이 술도 잘 마시나?"

"그건 모르겠습니다."

뷔엘라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술을 입에 머금었다.

"그나저나 보물섬에 가기 위해선 세이렌을 찾아야 합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을 보니, 이곳에 혹시 세이렌이 있었던 흔적이 있었습니까?"

"예, 놈들의 마력의 잔흔이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니 떠난 지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더군요."

"보물섬을 가는데 왜 세이렌이 필요한 거지?"

황일한은 뷔엘라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탑에 올랐음을 느꼈다.

이 정도 정보라면 충분히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임에도 모를 정도라면 말 다 한 것이니.

"보물섬에 들어가기 전, 바다에서는 '신의 분노'라 칭해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 현상을 세이렌들은 신의 의식이라 생각하며 그때에 맞춰 노래를 부르곤 하죠."

"아, 세이렌이 노래를 부른다면, 그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소리군."

"맞습니다. 현상이 일어나는 지점을 둘러싸고 세이렌이 노래를 부를 테니, 저희는 세이렌의 위치를 파악하기만 하면 찾을 수 있는 겁니다."

"나침반이 있지 않은가?"

"나침반은 방향을 알려줄 뿐, 시기를 말해 주진 않습니다. 또한 신의 분노가 일어나는 지점에 가까워지면 나침반이 말을 듣지 않으니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도 힘듭니다."

황일한의 설명에 뷔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찾을 방법은 있습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의 설명을 들은 이신이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그럼 오늘 밤은 편히 즐겨 보죠."

* * *

이신에게 쫓겨나듯 도망친 말다리안이 저 멀리 보이는 함대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이 넓은 바다에 왜 이렇게 보기 싫은 놈들을 자주 만나는 거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어떡할깝쇼?"

"하, 엮이기 전에 돌아.... 잠깐."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발한 생각에 말다리안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만 당하면 열 받잖아? 그치?"

"뭐가 말입니까?"

"이 멍청한 새끼야! 그 괴물 마법사 놈 말이야! 그 새끼한테 우리만 당하면 열 받아? 안 받아?"

"맞습죠! 저놈들도 같이 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오히려 기회야. 저 망할 헥토스 자식 성격에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란 말이지."

"그럽습죠. 크크크."

"자! 이것들아! 배 돌려라! 헥토스에게로 간다!"

말다리안의 해적선들이 뱃머리를 돌려 헥토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교전의 의사가 없음을 나타내며 말다리안의 해적선이 헥토스의 해적 함대와 마주했다.

"무슨 일이지?"

상당히 날이 선 상태의 헥토스.

그들도 이신의 낙뢰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탓에 함선들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네가 아주 좋아할 소식을 들고 왔지."

"또 무슨 개소리를 하려고?"

"그 뇌전술사 말이야-."

후우웅- 콰직!

말다리안이 이신을 입에 담자마자, 헥토스가 검을 내질러 그의 옆에 있는 의자를 박살 냈다.

"내 앞에서 그 새끼 이름 꺼내지 마라."

생각보다도 훨씬 열이 받은 듯한 모습에, 말다리안이 조금 당황했다.

'왜 저래?'

옆에 있는 부하에게 귓속말로 그 이유를 묻자.

'저번에 트웨이드 탄 파열포가 낙뢰를 맞고 바다에 빠졌다고 합니다.'

'뭐? 전부?'

'아뇨. 3개는 남았지만, 2개를 잃었다던데요?'

빠르게 상황을 전달받은 말다리안이 표정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화가 이만저만 난 게 아니겠어. 열 받겠지만 잠깐 내 말 좀 들어 봐."

"헛소리하면, 전쟁이고 뭐고 이 자리에서 살아갈 생각하지 마라."

헥토스의 가시 돋친 말에 순식간에 선실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럼에도 말다리안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나도 놈들에게 당해서 이를 갈고 있는 상태라는 건 너도 알 테지."

"...말해 봐라."

"그 뇌전 술사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나? 내가 놈들의 위치를 알고 있다."

바로 패를 까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

서서히 분위기를 끌어 올려야 한다.

"놈들의 위치를 알면 뭐 하지? 그 마법사가 있는 이상 복수는 불가능해."

"내가 그걸 몰라서 이리 말하겠나?"

그 말을 하며 말다리안이 씨익 웃었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라."

헥토스의 들끓는 음성을 듣고 있자니, 말다리안은 자신의 계략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그 녀석들이 여기 온 이유를 입수했다. 해류종. 그것도 심해의 괴수를 찾고 있다는 것을."

"심해의 괴수를? 그놈들이 왜?"

"그 마법사가 그 녀석의 심장을 노린다더군. 생각해 봐라, 그 정도 마법사라면 가능하지 않겠나?"

"흠...."

헥토스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마법사가 몇 시간 전에 심해의 괴수를 찾았다는 정보를 얻었지. 지금 놈들의 함대에는 그 마법사가 없어."

"...그거 확실한 정보 맞아?"

만약 말다리안의 말이 맞다면, 이건 그 마법사에게 복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아무리 그 마법사가 대단하다 하더라도, 배가 없으면 이 바다 한복판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한 법.

"그래, 불안하면 내가 말하는 위치로 정찰선을 보내 봐라. 놈들의 배가 있을 거다."

"확인해 봐라."

"옙!"

헥토스가 말다리안의 말대로 정찰선을 보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의 말이 거짓말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 한번 해 보지."

그 말에, 말다리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는 일이 틀어지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너희도 마찬가지겠지만, 지난번처럼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도록 하자고. 같이 붙어 있으면 불편하잖아?"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다."

* * *

오늘따라 유난히 파도가 거세다.

황일한은 왠지 모를 불길함이 엄습함을 느꼈다.

"선장님! 전방과 후방에서 해적들의 함대가 보입니다!"

"뭐? 말다리안이 설마?"

말다리안의 함대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이미 이신의 위치 추적기로 인해 알고 있었다.

놈들이 이신이 있는 걸 뻔히 아는 상태에서 무슨 짓을 하려고 오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근데 앞뒤로 해적 함대의 출현이라니.

이게 무슨 의도인지는 명확했다.

"전원 전투 준비! 이신 님과 뷔엘라 님에게 현 상황 전달해!"

"이미 알고 계십니다!"

"좋아."

이신이라는 존재 하나로 느껴지는 안정감.

해적 함대가 앞뒤로 둘러싸고 있다는 말에도 황일한은 일말의 걱정도 되지 않았다.

"이래서 해적들에게 호의를 베풀면 안 되는 건가."

한편, 복수할 생각에 잔뜩 흥분한 헥토스가 한껏 신이나 있었다.

"하하하! 저 망할 놈들 전부 바다에 빠트려라! 다 죽여 버려!"

"감히 헥토스 해적단을 무시한 놈들을 쓸어버려라!"

"바다의 무서움을 보여 주자!"

"파열포를 쏴라! 배를 침몰시켜라!"

헥토스와 그 선원들은 열심히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앞으로 겪을 참사를 생각지도 못한 채.

제87화

몰려드는 해적단의 모습에 이신은 어처구니가 없음을 느꼈다.

'진짜 생각이 없는 건지.'

말다리안이 바보도 아니고 헥토스의 해적단을 끌고 왔다 한들 도전자들의 함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 것이다.

이신은 말다리안과 헥토스의 해적단의 모습을 본 순간 바로 눈치챘다.

말다리안이 자신을 이용해서 헥토스를 처리하려 한다는 것을.

만약 그가 4개의 해적단 전체를 데려왔다면 정말 이겨 보려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2개의 해적단으로는 어림도 없다.

"하."

이래서 싹수 노란 해적들은 살려 둬선 안 된다는 건가.

그다지 빠르게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뭘 해 보려 하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파지직.

이신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뇌전이 소용돌이치며 손바닥 위에서 회전한다.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짜증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데, 지금은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았다.

바다의 흐름이 심상치가 않다.

이 밑에서 강렬한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빨리 이 상황을 정리해야만 한다.

손바닥 위로 새겨진 뇌전을 하늘 위로 쏘아 내자, 평온했던 하늘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푸르른 하늘에 먹구름이 모이고 뇌기가 넘실거린다.

쿠구구궁!

한순간에 뒤바뀌는 날씨에 파열포를 쏘려던 헥토스의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이 개자식이...!'

분명 말다리안이 뇌전술사가 이곳에 없다 했거늘, 혹시 몰라 배 위를 샅샅이 살피기까지 했지만 그 마법사는 보이지 않았다.

선실 안에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확인할 수 없었기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행동했다.

게다가 말다리안의 해적단도 저 마법사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기에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근데 뇌전술사가 배 안에 있었다니.

이 상황은 말다리안이 저쪽에 붙은 간첩이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정보를 잘못 알고 있던 게 틀림없다.

저 마법사 쪽에 붙어먹었을 리는 없으니, 놈이 정보를 잘못 안 게 분명하다.

'저 멍청한 놈이!'

헥토스는 저 멍청한 놈의 말을 믿었던 자신을 탓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배에 타격을 주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도망가야 한다.

"빨리 쏴라! 저 배를 맞춰!"

"예!"

파열포에 에너지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나석을 최대한 때려 박아 출력을 최대로 높인 트웨이드 탄이 강렬하게 회전하며 쏘아졌다.

펑! 펑! 펑!

앞쪽으로 몰아넣은 파열포 세 대가 동시에 불을 내뿜었다.

[낙뢰]

쿠궁! 쿠궁! 쿠궁!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내리치는 뇌전이 정확히 트웨이드 탄 위로 떨어지며 바다 위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촤아아아아아아!

트웨이드 탄 세 발이 한곳에서 동시에 폭발한 대가는 컸다.

순식간에 바다 한가운데가 뻥 뚫리며 바닷물이 사방으로 밀려나고, 그 주변의 배들이 그 파도를 버티지 못하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크윽! 버텨라!"

"쓰러진 배들은 포기해!"

"알아서 올라와라! 이 멍청이들아!"

헥토스는 배의 난간을 붙잡으며 요동치는 배 위에서 버텼다.

마법으로 날아가는 포탄을, 그것도 트웨이드 탄 파열포 세 발을 동시에 타격당하는 것은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아니,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런 마법사가 자신들의 적이라는 소리였으니.

"쏴라! 더 쏴!"

"안 됩니다! 파도가 너무 거셉니다!"

"균형을 잡기가 힘듭니다!"

포탄이 터져서 인공적으로 생긴 파도라기엔 그 위력과 시간이 이상했다.

'뭐지?'

헥토스가 이상함을 느낌과 동시에, 갈라진 바다 밑에서 무언가 이상한 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바다 한복판에서, 바다가 갈라져 봤자 얼마나 갈라졌다고 밑바닥이 보이겠나?

파래야 하는 바다에 점점 검은 그림자가 지더니, 바다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아!

갑자기 크게 출렁이는 바다.

그와 동시에 말다리안의 해적선이 있는 남쪽 바다가 크게 치솟더니 대형선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이신은 트웨이드 탄이 폭발하는 순간, 한탄을 내뱉었다.

트웨이드 탄 따위를 요격할 게 아니라 이 밑에서 올라오는 녀석을 노렸어야 했다.

"모두 배 안으로 들어가세요!"

"선장님!"

"노력 중입니다!"

바다 밑에서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강대한 마력의 파장.

이전에 마주친 그 어떤 놈들보다 그 위험성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황일한은 이를 악물며 배가 뒤집히지 않게 노력하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만 같았다.

대형선과 비교해도 족히 3배는 높은 파도에 뷔엘라는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 칼을 가져다 댔다.

"큭!"

멀쩡한 상태로는 도저히 이 위기를 헤쳐 나가기 힘들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뷔엘라가 온몸에 상처를 새겨 피를 뽑아냈다.

동시에 붉어지는 눈동자와 거세지는 마력.

간신이 이성의 끈을 붙잡은 뷔엘라가 검에 난폭한 마력을 담았다.

[파절검]

파도를 잘라 낸다.

그게 이 검술의 근원이며 가장 기초가 되는 심상이다.

휘두른다.

그리고 베어 낸다.

촤아아아아악!

극도로 끌어올려진 그의 마력이 빠르게 회전하며 다가오는 파도를 반으로 갈라냈다.

파도의 한가운데가 잘리자, 나머지 파도가 그대로 부서지며 바다 위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아!

만약 파도가 그대로 부딪혔다면, 배는 작살나고 수백 명의 도전자들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배 위에서 파도가 반으로 갈라져 부서지는 것을 본 도전자들은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미친...내가 오르던 탑은 진짜 탑이 아니었구나.'

너무 이질적이면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바로 눈앞에서 죽을 뻔한 상황을 맞이했음에도 그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으…억!"

배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튀어 오르자, 미처 배의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한 도전자들이 배 밖으로 튕겨 나갔다.

[염동력]

이신은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 도전자들을 붙잡아 배 안으로 집어넣으며 마력을 흩뿌렸다.

수동적으로 대처하기만 해서는 놈에게 끌려다니기만 할 뿐이다.

"린!"

"부르…셨어요?"

이신의 부름에 나타나긴 했지만, 겁에 질린 듯 몸을 덜덜 떨었다.

"미안한데,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줘."

"네."

파도가 일어난 곳에서 괴수의 꼬리가 살짝 보였다.

꼬리만 살짝 흔들어도 대형선은 가볍게 뒤덮을 정도의 파도가 일어날 정도의 크기.

언뜻 보이는 바다 밑의 검은 그림자는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바임 몬스트레가 분명하다.

'아공간에 넣기 전에 흘린 마력을 따라온 건가?'

아바임 몬스트레의 두 번째 심장은 아공간에 있기에 놈이 그 위치를 눈치챌 수 없다.

지금 놈이 단번에 이 배와 함께 이신을 삼키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

놈은 자신의 심장이 어딨는지 살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끼가 필요하겠지.'

그림자 공간을 펼친 이신이 권속들을 불러내, 이 배를 지키게 한 뒤, 염동력을 이용해 헥토스가 있는 배로 날아갔다.

이신이 있던 배보다 두 배가량 커다란 배임에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

무사히 그 위에 안착한 이신은 곧바로 아공간 주머니에서 아바임 몬스트레의 두 번째 심장을 꺼냈다.

쿠우우우웅―

그 불안정한 에너지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바다가 곧바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소용돌이가!"

"빨려들어 간다!"

"피해! 빨리 빠져나가!"

해적선 아래로 생성된 거대한 소용돌이.

이신은 곧장 마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모았다.

은나무 지팡이에 저장된 30만의 마력을 전부 쏟아부어서라도 이 첫 한 방을 제대로 먹여야 했다.

콰아아아아아아!

몰아치는 소용돌이의 끝자락이 솟구치며 거대 괴수의 머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바닷물에 이미 온몸이 다 젖은 것은 기본이고, 체력도 실시간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놈이 지니고 있는 마력량이 얼마나 방대한 것인지, 그저 놈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만 같다.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정도.

신들이 왜 그리 자신만만하게 나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엔도는 그저 이 녀석에 비하면 애피타이저 정도일 뿐.

치이익!

검은 마력이 주변에 가득 찬 부정적인 감정들을 집어삼키며 하늘 위로 뻗어갔다.

[흑뢰]

이신은 이제껏 탑을 오르며 단 한 번도 흑뢰를 전력으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처음 이 마법을 사용한 3층에서도, 가장 최근에 사용했던 엔도와의 싸움에서도.

진심으로 전력을 내보이지 않았었다.

항상 딱 적절하게 그 상황에 맞춰 최선의 효율을 만들어 내는 게 마법사이기에.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기에, 굳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지 않았어도 이신은 자연스레 적절한 힘만을 내보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죽음의 통찰자가 말하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로 죽을 수 있음을.

방심하거나 실수를 해서 죽을 위험에 처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정말 모든 것을 쏟아 내지 않는다면.

아니, 그 모든 것을 쏟아 내도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죽는다.

은나무 지팡이가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는 게 느껴진다.

"내려쳐라."

콰아아아아아!!

쿠구궁! 쿠궁! 쿵! 쿵! 쿵!

하늘에서 내려오는 흑빛 포격.

한 줄기의 검은 섬광이 찰나의 순간 동안 수차례 떨어진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저 바다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고통에 찬 괴성에 이신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본능적으로 아바임 몬스트레가 발산한 마력의 파동이 이신의 머리를 가격한 탓에, 집중이 순간적으로 깨지고 흑뢰가 사라졌다.

쿠우우우웅!

고통에 몸부림치던 아바임 몬스트레가 그대로 헥토스의 해적 함대를 모두 삼킨 뒤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안 돼!"

"이런 망할!"

이신이 헥토스의 해적선으로 이동한 것을 본 뷔엘라와 한국 도전자들이 절규하며 외쳤다.

저 무지막지한 괴수에게 삼켜졌으니 아무리 이신이라도 살아 돌아올 확률이 극히 낮아진 것은 분명했다.

출렁이는 바닷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고 아바임 몬스트레로 인해 보이던 바닷속 검은 실루엣은 홀연히 사라졌다.

"너희 주인…괜찮은 거 맞아?"

뷔엘라가 메이에게 물었다.

"아직까지 마력의 흐름이 끊기지는 않았다. 주인님이 죽는다면 우리도 그대로 마력이 끊어지고 쓰러지겠지."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메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뷔엘라는 답답함을 느꼈다.

"너희 주인이 걱정도 되지 않나?"

"적어도 너보단 걱정 많이 하고 있으니 닥쳐라."

"뭐라고?"

일촉즉발의 상황.

잔뜩 예민해진 뷔엘라와 메이가 서로 날카롭게 기세를 세우자, 워리가 둘 사이를 가로막으며 중재했다.

"둘이 싸우면 주인님께 피해만 갈 뿐이니까 그만둬라."

"우리를 소환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인은 마력을 계속 소모하고 있을 테니. 그만하시게."

안진의 말을 듣고 나서야 두 사람이 격정적인 기세를 풀었다.

"우리는 그저 힘쓰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주인을 돕는 거다."

"레이커스, 너는 주인님이 걱정되지도 않겠지."

너무나 태평하게 배에 한쪽에 기대서 있는 레이커스를 보며 메이가 이죽거렸다.

"나도 주인을 인정하고 그의 권속이 된 거다. 그런 말은 삼가라. 네가 먼저 주인의 권속이 되었다고 나보다 강한 것은 아니니."

"하, 이참에 여기서 너를 부수면 주인님이 헛된 마력을 더 낭비하지 않아도 되겠지."

"끝까지 어리석은 짓을 하는군."

이제는 뷔엘라와 메이에서 레이커스와 메이로 그 싸움이 번지려 할 때.

"그만하십시오."

황일한이 굳은 얼굴로 그들에게 소리쳤다.

덜덜 떨고 있는 그의 손을 보자, 메이는 잔뜩 흥분되었던 머리가 차분해짐을 느꼈다.

그가 이기지도 못할 괴물들을 중재해야 하는 두려움에 떠는 것인지, 이신을 걱정해서 떠는 것인지 메이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자신보다는 그가 더 이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미안하다."

메이가 성난 기세를 사그라뜨리며 말했다.

"주인님이 무사하길 기도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구만."

워리는 한숨 섞인 한탄을 내뱉으며 평온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 * *

어둠으로 가득한 아바임 몬스트레의 몸속.

질퍽한 바닥을 걸으며 이신은 라이트 마법을 발현했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빛의 구가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이건...."

이걸 괴수의 몸속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 안의 공간이 너무 넓었다.

바닥에 헥토스의 해적단 깃발이 보였다.

어디에 걸려 찢어진 것인지 일부분만이 남아 있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사방에 부서진 배의 잔해들과 각종 괴수들과 해류종들의 시체 찌꺼기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아직 히든 스테이지의 클리어 메시지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아바임 몬스트레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

'흑뢰를 퍼부어도 못 죽인 건가.'

전력을 다했음에도 죽이지 못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흑뢰가 중간에 끊기긴 했지만, 더 쏘아 냈어도 결과는 같았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제법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것은 분명하다.

지금은 회복에 들어간 것인지 잠잠한 듯하지만, 언제 다시 움직일지 알 수 없다.

그 강대한 마력의 근원을 생각하면 금방이라도 회복할 것만 같은 느낌.

놈의 심장이 있는 곳을 빨리 찾아야 한다.

제88화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동굴 같다.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해류들이 계속해서 이신의 앞길을 막았다.

[플레어]

이신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화염이 거미처럼 생긴 괴수들을 불태웠다.

위협이 될 만큼의 강한 놈들은 많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나타나 이신을 공격하는 탓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심해의 거대 괴수의 몸속이라고 생각할 수준이 아니었다.

하나의 세계.

수많은 괴수들이 살아가는 새로운 환경이나 마찬가지였다.

키이이이익!

[윈드 커터]

바람의 칼날이 괴성을 지르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괴수를 베어 냈다.

간단한 마법으로 가볍게 괴수를 처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아바임 몬스트레가 바다 밑 어디까지 내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력의 흐름이 바깥과 너무 달랐다.

거대한 흐름이 시시각각 변하는 탓에, 마법 하나를 사용하는 것도 상당한 심력을 소모했다.

자칫하면 마법의 발현에 실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좋지 않아.'

내부에서 아바임 몬스트레를 향해 공격을 가하면 면역계의 보호 작용이 일어나서 바로 공격이 들어온다.

섣부르게 자극하다가는 낭패를 볼 확률이 높았다.

심해 어디까지 내려갔는지도 알 수 없고, 이 괴수의 옆구리를 뚫고 나갈 수 있단 장담도 할 수 없다.

놈의 첫 번째 심장.

그것을 찾아서 단번에 터트려 아바임 몬스트레를 죽여야 한다.

마력의 격류가 너무 강해 마력 파장을 퍼트려 놈의 심장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까운 거리라면 모르겠지만, 먼 거리까지 파장을 펼치기에는 지금의 몸 상태론 무리였다.

아공간 주머니에 있는 두 번째 심장을 꺼내면 방법이 생길 것도 같았으나, 이걸 꺼내는 순간 아바임 몬스트레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가 없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쿠구구구―

갑작스레 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

'아니, 바닥뿐이 아니야. 온다.'

이 거대한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며 흐르는 물소리.

[임피드 웹]

끈적한 점액이 치솟아 천장에 달라붙어 이신을 끌어당겼다.

콰아아아아아―!

그의 발밑에서 바닷물이 거세게 흘러갔다.

아바임 몬스트레가 먹은 바닷물이 이 통로를 타고 흐르는 듯했다.

'여기가 식도인가?'

밀려드는 바닷물에 간혹 보이는 괴수들.

촤아아악!

기습적으로 뛰어오른 괴수 하나가 입을 쩍 벌리고 이신을 집어삼키려 해 보지만.

[에어 밤]

그의 앞에서 폭발하는 공기가 괴수를 그대로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언제, 어디서 공격이 들어올지 알 수가 없으니....'

물이 모두 빠지고 다시 바닥에 내려서는 그때, 이신의 눈에 작은 구멍이 보였다.

'저긴 어디지?'

조금 거리가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사람 하나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곧장 임피드 웹을 사용한 이신은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출렁거리는 밑바닥을 밟고 안으로 쭉 들어가자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는....'

조금 전에 있던 곳이 큰 동굴처럼 쭉 길이 이어져 있었다면, 여기는 그곳보다 더 큰 공동이었다.

바닥에 내려선 이신은 매캐하게 느껴지는 냄새에 곧장 마법을 펼쳐 그 냄새를 밀어냈다.

'독이다.'

라이트로 빛을 비추자, 허공에 허연 안개 같은 게 둥둥 떠다녔다.

이미 몸에 저 안개가 닿기는 했지만 중독되지는 않았다.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주변을 둘러보던 순간이었다.

스스슥-

바닥을 비비며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개 때문에 바닥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곧바로 바닥을 향해 마력을 흩뿌렸다.

'하나…둘...쯧.'

바닥에 깔린 생물체의 수를 세길 포기한 이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핑크빛 바닥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띤 뱀 형태의 괴수가 다짜고짜 튀어올라 입을 쩍 벌렸다.

'읏!'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다.

윈드 커터로 놈의 입을 그대로 찢어 버리려던 이신이 괴수가 쏘아 낸 무형의 초음파를 맞고 마법 발현에 실패했다.

[염동력]

간신히 목의 지척까지 다가온 뱀을 염동력으로 잡아챘다.

촤악!

그대로 머리와 꼬리 부분을 붙잡아 당겨 놈의 사지를 절단 낸 뒤, 시체를 땅바닥에 던져 버렸다.

'거기서 초음파를 쏘아 보낼 줄이야.'

심해의 괴수들은 바깥이나 얕은 바다에 사는 괴수들과 사는 환경이 너무 다르다 보니, 특이한 능력을 가진 놈들이 많았다.

심해에 사는 놈들이라 라이트를 띄우면 오히려 도망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반은 맞고 반을 틀렸다.

스슥, 슥.

"키이이이익!"

괴성을 내지르는 뱀 괴수들이 이신 하나만을 노리고 몰려왔다.

'마력 파장을 읽는 거였어.'

상대하기 껄끄러운 괴수들을 놓고 이신이 다시 임피드 웹을 사용해 구멍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날지 못하는 놈들은 그 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기만 할 뿐 벽을 타고 그를 쫓아오지는 못했다.

빛이 없고 마력의 격류가 강한 곳에서 적응하고 살아온 놈들은 마력에 대한 감각이 크게 발달한 듯싶었다.

빛을 싫어하기에, 놈들은 그 빛을 만들어 낸 원인을 마력 파장으로 찾아내 공격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빛을 버리기에는 리스크가 크고, 빛을 띄우자니 괴수들의 어그로가 전부 쏠렸다.

'진퇴양난이네.'

마력의 여유도 충분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속전속결이 필요한 때.

이신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아바임 몬스트레의 두 번째 심장을 꺼냈다.

최대한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웅- 우웅-

꺼내자마자 곧장 심장이 반응했다.

주변에 흐르는 마력의 흐름이 한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신은 다시 식도가 있는 위치로 이동한 뒤 그 흐름을 따라 달렸다.

쿠우웅- 쿠웅!

땅바닥이 출렁이고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바임 몬스트레가 심장의 존재를 파악하고 움직이는 것이었다.

벽에서 촉수처럼 생긴 줄기들이 튀어나와 이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림자 공간]

'슌, 데칸.'

다행히 위쪽에서 소환하지 않은 탓에 그림자 공간에 남아 있던 두 스켈레톤을 꺼낼 수 있었다.

"엄호해."

"예."

"알겠습니다."

슌의 지팡이에서 뻗어 나간 물줄기가 아바임 몬스트레의 촉수들을 강타했다.

데칸의 가시들이 다가오는 괴수들을 찌르고 갈라 내며 이신을 도왔다.

한참을 달리니, 새로운 공간이 나왔다.

좀 더 큰 공간 속에서 촉수들뿐 아니라 새하얀 액체가 쏘아지기 시작했다.

치익! 치이익!

천장과 벽에서 쏘아진 소화액.

여기저기 남아 있는 시체와 각종 잔해들이 소화액을 맞고 증발하듯 사라졌다.

이신이 적절히 실드를 펼쳐 소화액을 막으며 움직이고 있을 때.

그의 앞에 낯이 익은 무언가가 보였다.

커다란 덩치에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인간.

헥토스였다.

그가 하반신이 전부 녹아 없어진 채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해적단의 간부였던 이들이 여기저기 녹아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 괴랄한 모습에 속이 메스꺼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 이신이 애써 그들을 무시하고 뛰어가려 했다.

"...마…법...."

하체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음에도 헥토스는 죽지 않은 채,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냥 지나가려던 이신이 작게 혀를 차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파이어 볼]

이신의 지팡이 끝에서 생성된 불덩이가 헥토스에게 적중했다.

"...끄…아."

고통에 내지르는 비명마저 뭔가 나사가 빠진 듯하다.

상체가 빠르게 타오르기 시작하자, 헥토스의 머리에서 길쭉한 무언가가 머리를 뚫고 튀어나왔다.

역시나.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저런 상태로 살아 있을 수 없다.

치료를 받은 것도 아니고.

기생충이 헥토스의 몸에 들어가 조종하고 있던 것이다.

서걱!

이신의 눈짓에, 슌이 마법을 날려 기생충을 잘라 냈다.

"가자."

* * *

아바임 몬스트레의 두 번째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파장이 이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 안인가?"

일부러 이 안쪽을 보호라도 하려는 듯, 입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꿈틀거리는 내벽이 조금씩 부풀며 입구를 막으려 하고 있었지만, 이신은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딥 플레어]

강렬한 흑색 불꽃이 입구를 막으려는 내벽을 불태웠다.

일반적인 플레어보다 수배는 더 뜨거운 딥 플레어에, 내벽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 부피를 다시 줄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안쪽으로 파고든 이신은 거세게 박동하는 아바임 몬스트레의 첫 번째 심장을 마주했다.

두 번째 심장이 작은 구슬 형태로 되어 있기에, 첫 번째도 비슷할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지름이 족히 100미터는 되어 보이는 크기.

그 표면에 꿈틀거리는 힘줄을 보아하니, 이것을 파괴하는 게 만만치 않으리란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슌은 입구로 가서 이리로 오는 괴수들을 막고, 데칸은 나를 공격하는 놈들을 막으면서 엄호해."

"예!"

"맡기십시오."

심장의 내부에 강대한 마력이 꿈틀대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손에 들린 아바임 몬스트레의 두 번째 심장이 눈앞의 심장과 공명하고 있었다.

강대한 흐름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이신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에너지의 집약체.

마나라는 에너지가 극도로 압축되어 만들어진 심장.

두 개의 심장이 공명하며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그 흐름을 엮어 가기 시작했다.

'그런 건가.'

대마법사의 지위에 올랐던 이신조차 이 난잡하기 그지없는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정확한 정수를 찾아내고 다루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심장 두 개가 서로 맞물려 있었다면 이렇게 단기간에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의 두 번째 심장은 이신의 손에 있고, 두 심장이 만들어 가려는 흐름은 손에 쥐고 있는 심장이 아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깨어질 것이다.

"주인님!"

"더 이상 막기가 힘듭니다!"

수백? 아니, 수천이 넘어가는 아바임 몬스트레의 촉수가 위험을 감지하고 튀어나왔다.

슌과 데칸의 능력으로 모두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신은 그러한 촉수들을 막는 데 신경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한순간이다.

아공간에 아바임 몬스트레의 두 번째 심장을 넣는 그 순간.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두 심장의 흐름이 깨어지며 혼돈에 빠지는 그 타이밍에 정확히 첫 번째 심장의 핵을 찔러 내야 한다.

마력을 펼치고 흐름을 잇는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광대한 흐름을 놓치지 않고 읽는다.

은나무 지팡이를 강하게 움켜잡은 이신이 그 손을 뻗었다.

마력을 타고 그 복잡한 흐름이 이신의 심상 속으로 일목요연하게 빨려 들어왔다.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를 쪼개고 잘게 부순 것처럼, 작은 마력 입자들이 방대한 흐름에 맞춰 움직였다.

여러 가지의 필수적인 조건이 맞물려야 간신히 가능하다 말할 수 있을 만큼의 말도 안 되는 난이도.

이신의 손 위에 있는 아바임 몬스트레의 두 번째 심장이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가고.

우웅- 우웅-

방대한 흐름은 폭포가 내리치는 듯한 거센 격류로 변해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저 광대하고도 난폭한 흐름 안에서 단 한 줄기의 흐름을 찾아내 모든 마력을 쏟아내야 한다.

망설일 틈은 없다.

그저 그 흐름에 맡겨 마력을 움직일 뿐.

압축하고, 찌른다.

[숲의 수호자의 목걸이로 인한 행운이 발생합니다.]

잡혔다.

쿠구구구구궁!!

콰아아아아앙!!

귓속 고막이 터질 듯한 폭발음이 울려 퍼지고.

후두두두둑.

당장이라도 이신을 꿰뚫을 것만 같던 촉수들이 모조리 그 움직임을 잃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극악의 확률을 뚫어 냈습니다.]

[『스텟 – 행운』을 획득합니다.]

"하아...하아...."

지끈거리는 머리와 동시에 덜덜 떨리는 손바닥이 피로 적셔졌다.

모든 마력을 일시에 뿜어냈더니 그 힘을 버티지 못한 은나무 지팡이가 부러졌다.

지팡이의 가시가 손바닥 곳곳에 박혔지만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사용한 은나무 지팡이에 대한 시원섭섭한 감정만이 남았을 뿐.

마력이 바닥을 기고 있다.

이신을 지켜 주던 슌과 데칸이 실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공급해 줄 마력이 사라진 영향 탓이었다.

"잠깐만 있어라."

[히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아바임 몬스트레의 첫 번째 심장을 획득합니다.]

압도적인 크기의 심장은 사라지고 그 안에 작은 구슬이 나타났다.

푸른 에너지가 넘실거리는 구슬.

이신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두 번째 심장을 꺼냈다.

양손에 들린 두 개의 심장이 서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각자 뿜어내는 마력의 성질이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듯 완벽하게 섞였다.

'이건....'

두 개의 심장이 떠오르더니, 서로 맞닿아 합쳐졌다.

[혼돈의 파편]

잊혀진 신의 편린이 담긴 파편입니다.

# 복용 시, 혼돈의 힘을 획득합니다.

# 복용 시, 마력을 획득합니다.

# 복용 시, ???의 자격을 획득합니다.

손 위에 놓인 보랏빛 조각.

그것을 보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왜 두 번째 심장을 보며 익숙한 감각을 느꼈는지 알겠네.'

혼돈의 힘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건 혼돈은 잊혀진 신의 힘이라는 것인가?

[불망각의 구]

잊혀진 신의 편린이 담긴 구슬입니다.

# 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이신을 있게 만든 능력.

불망각의 구도 잊혀진 신의 편린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도 잊혀진 신의 편린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게만 우연이 겹쳐 생긴 일일까?

혼돈의 파편을 보고 있으니, 몸이 계속해서 반응하고 있었다.

이성이 아닌 본능이 나를 통제하는 듯한 감각.

평소라면 이러한 것에 휘둘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을 테지만, 지금 이것을 복용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마력은 바닥을 기고 있고, 은나무 지팡이는 부서져 계약했던 물의 정령은 부를 수도 없다.

꿀꺽.

작은 보랏빛 조각을 입 안에 넣고 삼켰다.

식도를 타고 빠르게 내려가는 그 조각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혼돈의 힘을 확인합니다.]

순식간에 몸의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그 혼돈의 힘이 온몸을 감싸고 망가진 마력혈들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마력이 차오릅니다.]

[마력 등급 Lv.4가 되었습니다.]

[신체의 봉인이 한 단계 해금됩니다.]

[『스킬 – 골렘 소환』을 획득합니다.]

충만하게 느껴지는 마력량.

주변에 흐르는 엄청난 양의 마력들, 죽어 버린 아바임 몬스트레가 가지고 있다 놓아 버린 마력들이 몸속으로 빨려 들어온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조금 전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것만 같다.

모든 게 내 아래 있다 느껴질 만큼의 오만함이 차오른다.

[『칭호 - 대적자의 자격』을 획득합니다.]

제89화

[혼돈의 힘이 강화됩니다.]

[혼돈이 1 올랐습니다.]

[골렘 소환]

# 매개체에 따른 속성을 가진 골렘을 소환합니다.

[봉인 – 해금 3단계]

# 기본 스탯 +100

# 지배력 + 150

한순간에 급증한 능력치.

이곳에서 진의 신체 봉인을 해금하게 될 줄은 몰랐다.

3단계부터는 해금 방법을 알 수가 없었기에, 그저 막연하게 탑을 오르며 성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마력 등급이 Lv.4로 오르며 마력에 대한 격이 상승하고 그간 사용할 수 없던 6위계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력도 단번에 15만을 얻어 50만이 넘어갔다.

첫 번째 심장이 가지고 있던 방대한 마력을 생각하면 15만이라는 마력의 수치도 이신에게는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진짜는 이것들이지.'

혼돈과 행운 스탯.

그리고 대적자의 자격.

[혼돈]

모든 힘들이 어우러지지 못하고 결국 어그러져 만들어진 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받아들입니다.

# 모든 속성 저항력 +20%

# 피격 시, 낮은 확률로 보유 중인 스탯에 한해서 무작위 스탯 강탈.

# 타격 시, 낮은 확률로 보유 중인 스탯에 한해서 무작위 스탯 강탈.

모든 속성의 저항력이 10퍼센트나 증가하고 매우 낮았던 스탯 강탈의 확률이 낮음으로 바뀌었다.

매우 낮은 확률일 때도, 나름 쏠쏠하게 스탯을 얻었었다.

근데 그보다 확률이 더 올라갔으니,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것에 대한 활용을 생각해 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혼돈의 힘을 여기서 발견할 줄은....'

혼돈과 잊혀진 신에 대한 상관관계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생겼다.

더구나 혼돈의 힘이 1층 대기실과 20층의 아바임 몬스트레의 몸속에서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그러한 곳에.

그렇다는 건, 다른 곳에도 남겨진 혼돈의 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앞으로는 움직이는 방향에 혼돈의 힘에 대한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생겼다.

행운 스탯 또한 혼돈과 마찬가지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혼돈이나 신격과 같은 능력치가 전설 속의 능력이라고 하면, 행운은 그 아래아래 단계쯤은 되는 희귀한 스탯이었으니.

얻는 방법도 정말 터무니없고 그런 방법들을 실행하는 것도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번엔 정말 운이 좋았어.'

남들보다 행운이 더 좋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일이었다.

이신은 그걸 몸소 깨달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번에 혼돈을 얻은 것만큼이나 행운 스탯을 얻은 것도 기뻤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대적자의 자격]

신에 대적할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자격입니다.

# 초월의 격에 한 발짝 다가갑니다.

# 신격이 5 이상인 자를 쓰러트리면 초월의 격이 상승합니다.

대적자의 자격을 얻은 것이 가장 기뻤다.

초월의 격.

전생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경지.

고작 20층에서 그 경지에 한 발을 내디딜 수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속도였다.

전생에선 90층에 이르러서야 그 한 발자국을 나아갈 수 있었다.

초월의 격에 다가간다는 건, 일반적인 존재들과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며 신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그렇기에 이신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신격을 얻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성과이다.

신격은 신의 존재에 다가간다는 느낌이라면, 초월의 격은 그 존재 자체의 격이 올라가는 것이기에.

'신격이 5 이상인 존재....'

생각나는 녀석이 있다.

안 그래도 잡으려고 생각하던 놈인데 더욱 확실한 동기가 생겼다.

쿠구구구궁!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바임 몬스트레가 죽으며 더욱 깊은 심해로 가라앉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아바임 몬스트레가 죽었다는 것을 알아챈 하이에나 같은 괴수들이 달라붙은 탓일 수도 있다.

이신이 마력을 뻗어 쓰러진 슌과 데칸에게 마력을 공급하자, 두 권속의 꺼졌던 안광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제가…왜...?"

"기절한…건가?"

자신의 상황을 판단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해 하는 둘.

이신은 대강의 상황을 설명해 준 뒤, 둘을 그림자 공간 안으로 들여보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잃어버렸던 힘을 되찾은 듯한 느낌.

이신은 원활하게 움직이는 마력을 한껏 뽑아내 뭉쳤다.

이제는 심해의 이 거센 마력의 격류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력의 컨트롤이 가능하다.

[창파(滄波)]

천장으로 쏘아지는 얼음의 파동.

아바임 몬스트레의 가죽을 뚫고 뻗어간 얼음 창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바닷물을 얼리며 목표 지점까지 날아갔다.

얼마나 깊게 내려온 것인지.

한참을 올라가도 바닷물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창파가 남기고 간 얼음의 잔해들로 바닷속에 흐르는 마력의 흐름을 읽었다.

얼음의 파동이 위로 올라갈수록 익숙한 흐름이 느껴졌다.

촤아악!

기어코 해수면까지 뻗어간 창파가 바다 위로 곧은 얼음의 가시를 세웠다.

현재의 위치와 그 거리를 파악한 이신이 창파를 해제한 뒤, 구멍을 막았다.

"하프니스."

이신의 부름에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사신이 나타났다.

- 불렀는가.

"아바임 몬스트레를 언데드로 만들어."

- ...강대한 존재, 아직 통찰자의…힘으로는…통제가 불가능하다.

"괜찮으니까 해."

- ...알겠다.

먼지처럼 흩어진 하프니스의 몸체가 아바임 몬스트레를 뒤덮을 정도로 커졌다.

죽음의 기운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죽음의 통찰자로 이 녀석의 죽음을 보았다.

그저 평범한 괴수로 태어나, 우연히 이 편린을 주워 먹고 수백 년이 넘는 기간을 산 괴수이다.

혼돈의 힘을 오랫동안 간직했기 때문일까?

평범한 존재도 힘만 있으면 위대해질 수 있음을 아바임 몬스트레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눈을 살짝 감은 이신은 사방에 넘실거리는 죽음의 기운을 느꼈다.

사아아아―

바람이 부는 것만 같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스치고 지나간 기분이 든다.

눈을 뜨니 거대한 혼이 꿈틀거리며 이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구구-

생기를 잃었던 아바임 몬스트레의 몸뚱이에 사기(死氣)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신은 놈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대고 검은 마력을 주입했다.

[검은 마력이 아바임 몬스트레의 지배를 시도합니다.]

[아바임 몬스트레가 검은 마력에 저항합니다!]

[죽음의 지배자 효과로 인해 지배력이 강화됩니다.]

[아바임 몬스트레가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아바임 몬스트레의 살점과 가죽이 점점 부패하고 썩어 들어간다.

녀석의 몸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요동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데드화가 완전히 진행되지도 않았건만.

부패해 생겨나는 천장의 틈 사이로 물줄기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신은 다시 한번 검은 마력을 주입했다.

[아바임 몬스트레가 검은 마력의 저항에 실패합니다.]

[검은 마력이 아바임 몬스트레를 강제 지배합니다.]

[지배력이 1 올랐습니다.]

[지배력이....]

[....]

'됐다.'

결국엔 풀려나겠지만 잠깐이면 충분하다.

죽음의 지배자와 검은 마력.

높은 지배력 수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아바임 몬스트레는 끝까지 이신의 지배에 저항했다.

릴리안을 제외하면 언데드의 완벽한 지배가 실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힘들 줄은 몰랐다.

강제 지배를 하고 있는 지금도 그 반발이 여실히 느껴졌다.

'위로 올라가라.'

이신의 강력한 의지가 아바임 몬스트레에게 전해졌다.

촤아아아아!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때려 박힌다.

살점의 부패가 빨라지고 두꺼운 갈비뼈가 보이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신은 재빠르게 녀석의 갈비뼈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게 몸을 고정했다.

아바임 몬스트레의 시체를 탐내던 주변의 다른 심해 괴수들이 화들짝 놀라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 것인지, 물살을 얻어맞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쭉쭉 빠지고 있었다.

어둠에 가까운 바닷속.

수 킬로미터 가까이 되는 아바임 몬스트레의 몸체는 그 끝이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거대한 뼈대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해류를 바꿀 정도의 큰 파동이 일어나고.

콰아아아아!

경로에 있는 해류들은 그 물살에 휘말려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러한 언데드가 권속으로 남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녀석 하나를 다루는데, 지배력 전부를 사용해도 벅찬 느낌이다.

안 되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탐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이신은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촤아아아아아!

어느새 해면까지 도착한 아바임 몬스트레가 바다 위로 솟구치고, 그에 따라 이신도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오래간만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주변을 둘러보니, 도전자들의 배가 보이지 않았다.

[디텍트]

이신은 곧장 마력을 퍼트려 도전자들의 마력의 잔흔을 탐색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범위와 규모.

순식간에 수 킬로미터를 아우르는 범위로 뻗어 나간 마력의 파장이 아주 흐릿하게 남은 마력의 잔흔을 찾아냈다.

"가자."

* * *

싸늘한 바닷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간다.

황일한은 몇 시간 째, 배의 운항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고 뷔엘라는 계속 바닷속을 들락날락하며 애꿎은 해류종들을 학살하고 다녔다.

"이제는...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황일한의 참담한 목소리에 이를 아드득 갈던 뷔엘라가 난간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대로 간다고?"

"저 혼자였다면 몇 날 며칠이고 기다렸을 겁니다."

황일한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배 위에 도전자들만 수백이 타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의 스테이지를 포기하며 이신을 기다릴 정도의 애정은 없었다.

빨리 세이렌이나, 나침반을 따라 움직이며 보물섬의 입구를 찾아야 했다.

더 꾸물대다간 기회를 놓치고 스테이지를 실패하게 될 테니까.

이신이 살아 있을 확률이 높았다면 도전자들도 더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바임 몬스트레에게 잡아먹혀 바다로 끌려갔고 그의 권속들은 마력의 연결이 사라져,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사실상 아무리 이신이라 해도 살아 있을 거라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들의 입장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기에, 뷔엘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그 대답에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황일한이 돌아서려 할 때, 뷔엘라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작은 배 하나만 쓰겠다."

"예? 설마?"

"나라도 기다려야 하지 않겠나?"

"작은 배로는 '신의 분노'를 뚫고 보물섬에 들어가는 건 무리입니다. 그 위치까지 가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다음 스테이지를 노려봐야겠지. 그래도 혼자 가는 건 내키지 않는군."

뷔엘라의 태도는 단호했고, 황일한은 더 묻지 않았다.

잠시 후, 출발 준비를 마친 뒤 황일한은 배 안에 있던 소형선을 꺼내 바다 위로 가져다주었다.

맘 같아선 중형선 이상을 주고 싶었지만, 아바임 몬스트레가 나타나며 모두 침몰해 버린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중간중간에 부표라도 띄워 놓겠습니다. 파도에 밀려 사라질지도 모르지만요."

"고맙다."

"꼭 같이 돌아오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뷔엘라가 소형선에 이신의 권속들을 실은 뒤, 자신도 올라탔다.

황일한은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 배를 몰아 떠났다.

뷔엘라는 멍하니 잔잔한 파도를 보았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에 있다 보니, 시간에 대한 감각도 점점 흐릿해졌다.

"이제는 헛것이 보이는군…무슨 파도가...."

수평선에서부터 보이는 거대한 파도.

눈을 부릅뜬 뷔엘라가 다시 한번 눈을 비비고 보았지만 역시나 똑같았다.

"설마?"

저 정도의 파도를 일으킬 만한 괴수는 아바임 몬스트레밖에 없다.

저기에 이신이 있든 없든, 그에 대한 단서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킨 뷔엘라가 검을 빼 들었다.

이신조차 막아내지 못한 괴물이다.

자신이 과연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자꾸만 뷔엘라를 괴롭혔다.

'온다.'

뷔엘라가 타고 있는 소형선 따위는 단숨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파도.

마력을 끌어 올리던 그가 파도 속에서 얼핏 보이는 기이한 모습에 멈칫했다.

"뼈...?"

그가 그러한 감상을 다 내뱉을 새도 없이.

촤아아아악!

저 멀리서 점점 사그라들던 파도가 무언가에 부딪혀 부서지듯 떨어지고, 흩뿌려진 바닷물에 배가 뒤집혀 그대로 뷔엘라와 언데드들이 바다에 빠졌다.

"푸하!"

입 안으로 들어온 물을 뱉어 낸 뷔엘라가 자신의 앞에 거대한 거체를 드러낸 언데드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마주하는 이를 덩치만으로 압도할 정도로 커다란 언데드.

그 위에 이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다 위로 머리의 일부분만 드러냈을 뿐인데도 고개를 위로 확 꺾어야 이신을 볼 수 있었다.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니 이 괴수의 위용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혼자 있는 거야?"

아바임 몬스트레를 바닷속으로 쭉 밀어 넣으며 뷔엘라와 눈높이를 어느 정도 맞춘 이신이 물었다.

"네가 늦지 않았나."

"하긴."

이신은 그의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메이와 워리, 레이커스, 안진이 보이지 않았다.

곧장 마력을 바다 밑으로 흘려보내니,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신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염동력으로 끌어 올려 그림자 공간에 넣었다.

"나도 좀 꺼내 주지."

그 말에 바다 위로 떠오른 뷔엘라가 아바임 몬스트레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떠난 지 얼마나 됐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해."

곧장 마력을 펼친 이신이 황일한의 배가 떠난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멀리 가진 못했네. 가자."

이신의 명령에 움직이기 시작한 아바임 몬스트레.

그 위에 처음 올라탄 뷔엘라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머리에 튀어나온 부분을 잡았다.

"방심하면 떨어진다."

그 말과 동시에 느껴지는 엄청난 속도에 뷔엘라는 연신 비명을 질렀다.

* * *

"선장님, 세이렌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좋아, 술이 효과가 있었구만."

황일한은 이신이 준 그레티에 명주를 해안가에 뿌려 세이렌들을 유혹했다.

세이렌들은 생각보다 좋은 술을 좋아한다. 흔히 인간들이 명주라고 말하는 그러한 술들.

그리고 이신이 준 그레티에 명주는 완벽한 효과를 보여 주었다.

"후."

잔잔한 바다를 보고 있자니 계속해서 한숨만 나왔다.

세이렌들이 나타난 이상 멀지 않은 곳에서 신의 분노가 발생할 것이고, 보물섬으로 가는 입구가 나타날 거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도전자들은 이신과 함께 올라가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황일한 역시 마찬가지고.

그들 모두 어쩔 수 없이 움직이긴 했지만, 아쉬움은 감출 수 없었다.

해상 나침반도 방향을 잃고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모든 현상이 신의 분노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황일한이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자, 선원의 놀란 비명이 들렸다.

"저, 저기!"

"뭐야? 무슨 일이야?"

"해적들의 함대입니다! 수야크와 쟝의 함대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

제90화

"하하하학! 저기 숨어 있었구만! 쥐새끼 같은 놈들."

"대장, 그 마법사가 있으면 어떡합니까?"

"심해의 괴수한테 깝치다가 잡아먹힌 놈을 왜 무서워해? 그놈이 살아 있을 거 같아?"

"호,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어휴, 이 멍청한 새끼야. 아바임 몬스트레한테 살아 돌아올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가 있었으면, 이미 우린 다 죽었어."

"그렇습니까?"

"그래. 그리고 봐라. 우리가 보이니까 허겁지겁 움직이는 꼬라지를. 그 마법사가 살아 있었으면 저놈들이 저러겠냐?"

"맞는 말입니다, 대장."

수야크는 망원경을 내리며 호쾌하게 웃었다.

말다리안과 헥토스가 죽었다. 그 전설로만 들려오던 아바임 몬스트레한테.

일전의 그 뇌전술사 둘 중 한 놈 또한 아바임 몬스트레한테 덤비다 헥토스와 함께 잡아먹혔다고 들었다.

말다리안의 해적선에 있던 놈 중 살아 돌아온 놈의 이야기니 믿을 만했다.

이제 이 바다는 수야크 해적단과 쟝 해적단의 양분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을 방해하는 놈들은 이참에 모두 죽여야겠지.

"파열포를 장전해라! 목표는 느타리 섬에 정박한 놈들의 대형선이다!"

수야크의 명령에 선원들이 빠르게 파열포를 가동했다.

파열포가 달아오르기 시작하자, 수야크는 고개를 돌려 옆 해적선을 보았다.

쟝 해적단도 파열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없는 적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건 백병전을 할 때나 그런 것이지, 이 바다 위에서의 싸움은 다르다.

"준비됐습니다!"

"좋아, 그럼 쏴-."

크아아아아아아아아!

갑자기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괴성.

그 소리를 듣자마자 모든 이들이 석화 마법이라도 걸린 듯 굳어 버렸다.

바다가 직접 그 울음을 뱉은 듯한 떨림.

짐승의 본능일까.

최상위 포식자를 만난 먹잇감이 된 듯, 해적들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수야크의 눈동자가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서로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수야크와 쟝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동시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촤아아아아아아―

바닷물을 가르고 거센 물보라를 일으키는 무언가.

물보라가 일어나는 범위를 보고 있자니 저 안에 있는 놈의 크기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시부럴...."

나지막이 욕을 내뱉는 수야크가 어떤 대처를 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다가오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쟝도 마찬가지였다.

저건 그들이 무엇을 하든 막을 수 없는, 그야말로 자연재해 그 자체였다.

수십 척의 해적선들을 모조리 뒤덮고도 남는 파도가 일시에 두 해적단의 함대를 덮쳤다.

"크아아아...!"

"살려...!"

해적들의 비명이 물에 잠기고 수백 명의 인간이 바다에 빠져 파도에 휩쓸렸다.

파도가 점점 낮아지며 덩치를 줄이자 그 사이로 거대한 스켈레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국의 도전자들도 해적들의 반응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 역시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굳어 서 있을 뿐이었다.

"늦었습니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이신과 뷔엘라가 아바임 몬스트레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려 그들의 배에 올라탔다.

"이신 님!"

마치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한 듯, 황일한이 울먹거리며 이신을 맞이했다.

이신은 이 아저씨가 왜 이러나 싶었지만, 황일한은 그저 그의 손을 잡고 무사히 와서 다행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제가 나이가 드니, 감수성이 풍부해지나 봅니다."

"아닙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안 기다렸나?"

"하하, 당연히 뷔엘라 님도 기다렸습니다."

두 사람과 도전자들의 반가운 인사가 끝나고, 이신은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셨군요."

"예, 근데 세이렌이 나타났다는 건...."

"맞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기다리면 됩니다. 세이렌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신의 분노가 나타나기 시작할 겁니다. 그게 어디든 이쯤이면 그 위치가 명확히 보일 테니까요."

"시기는 언제라 보십니까?"

"이틀 안, 이르면 오늘 밤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다려 보죠."

* * *

그다음 날 밤.

느타리 섬에서 대기 중이던 이신과 도전자들은 해안가에 올라와 노래를 부르는 세이렌들을 목격했다.

"시작되는군요."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부르는 의식.

바다에 흐르는 거대한 흐름이 급격하게 일그러지고 평화롭던 날씨가 급변했다.

쿠구궁!

먹구름이 몰려오고 뇌기가 구름 사이로 흐르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이 도전자들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신의 분노가 생기면 곧장 배를 타고 그 안으로 뛰어들어야 하기에, 도전자들 모두가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아바임 몬스트레는 진작에 사후세계로 넣어 버렸다.

여기까지 놈을 통제한 것도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마력의 소모는 말할 것도 없고.

놈이라면 사후세계에서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녀석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사후세계에서 불러내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되었다.

부우우우우우―

배 전체를 울리는 뿔피리 소리와 함께, 배가 출발했다.

폭풍이 일어나기 전의 적막함.

그 무엇보다 위대한 것이 자연임을, 도전자들은 요 며칠 뼈저리게 느꼈다.

휘몰아치는 파도가 배의 옆면을 계속해서 때리고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도전자들의 호흡이 짧고 가팔라진 게 눈에 보였다.

그때, 낯익은 함선의 모습이 이신에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나타났나.'

그간 어디에 숨어 있던 것인지, 아니면 자기들 나름대로 입구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던 것인지.

신의 분노가 발생하고 나서야 드디어 마주쳤다.

뱃머리에 서서 이신만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용인.

"엔도."

서로를 호적수로 인정한 뇌전술사.

이신은 엔도의 모습을 보며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다음에는 봐주지 않을 것이라 했던가.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그의 마음에 공존했다.

뛰어난 뇌전술사와의 치열한 수 싸움, 서로의 마법을 주고받으며 상대방에게 자신의 결론을 말하는 설전.

죽을 수도 있다는 긴장감에서 오는 극한의 집중과 그 안에서 느껴지는 스릴과 쾌감.

그걸 이겨 냈을 때 오는 성취감까지.

엔도라면 자신에게 그러한 것들을 맛보여 줄 수 있겠다고 이신은 생각했었다.

그가 다음의 결전을 선언했을 때, 이신은 내심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둘 사이의 격차로 인해 그러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밀려왔다.

'...쯧.'

어느새 이신의 배와 제법 가까워진 엔도가 그의 등에 숨겨 놓았던 날개를 꺼내 들었다.

두꺼운 비늘이 촘촘히 박힌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펼친 그가 이신의 앞으로 날아왔다.

"마지막 결전을 치르러 왔다. 이번엔 전력을 다 해 주지."

"미안하다."

이신의 대답이 예상외의 말이어서일까.

엔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겁먹은 거냐?"

그의 얼굴에 짙게 깔린 실망감.

그럼에도 이신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실망하게 할 것 같아 미안하다는 뜻이다."

"...그게 무슨 소리지?"

"직접 느껴 봐."

이신은 그 이상의 말 대신 마력을 끌어 올려 자신의 의지를 표명했다.

마법사들은 말이 아닌 마법으로 자신의 기치를 세우고 결과를 보여 준다.

그 뜻을 알아들은 엔도도 곧장 마력을 끌어모았다.

[뇌격(雷擊)]

뇌전으로 변한 그의 양손이 움직일 때마다 허공을 가르고 질주하는 뇌전의 조각들이 이신을 향해 날아갔다.

[에어 캐치(Air catch)]

대기 중에 모여드는 공기의 뭉치가 날아오는 뇌전을 붙잡고 터트렸다.

그저 손을 한 번 가로로 훑는 것만으로, 이신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수십 가닥의 뇌전들을 전부 터트렸다.

조금 가볍게, 탐색을 위해 사용한 마법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정수와 위력은 만만치 않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태연하게 그 모든 뇌전을 막아내는 모습에, 엔도는 이질감을 느꼈다.

무언가 변했다.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다시 한번 엔도가 마력을 움직였다.

'이것도 그리 막을 수 있을까!'

[용뢰창(龍雷槍)]

그의 오른손에 생성된 두꺼운 푸른색 뇌전의 창.

마치 창의 형태를 한 용이 그의 손안에 들려 있는 듯한 모습.

쐐애애애애애액!!

소름 돋는 소리를 만들어내며 용뢰창이 날아갔다. 그 주변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양의 뇌전을 압축시켜 놓은 것이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이윽고 푸른색의 뇌전으로 이루어진 용 한 마리가 이신을 집어삼킬 것처럼 쇄도했다.

[스틸 플레이트 실드]

허공에 생겨난 수십 겹의 실드 위로 두꺼운 강철이 씌워졌다.

콰아아아아아앙!!

이신의 강철 실드와 엔도의 용뢰창이 맞부딪히며 고막을 찢는 듯한 폭발음을 자아냈다.

강철이 안으로 우그러지고 그것을 단단하게 지탱하던 실드가 우수수 깨어졌다.

하지만 강철을 끝내 뚫어 내지 못한 뇌전들이 튕겨 사방으로 비산하며 흩어지고.

그 순간 시선을 마주친 둘은, 서로의 생각을 읽고 마력을 펼쳤다.

마력에 대한 제공권을 누가 완벽하게 가져가느냐에 대한 싸움.

용뢰창에 담긴 그 수많은 뇌기들이 흩어져 사라지기 전에 잡아내야 한다.

이신의 손이 처음으로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듯한 그의 현란한 손동작을 따라, 입자 단위로 움직이는 마력이 엔도의 마력을 봉쇄하고 뇌기의 잔해들을 잡아챘다.

제공권 싸움에서 완벽하게 밀리기 시작한 엔도가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혼돈의 파편을 먹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엔도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용뢰창의 뇌전이 그대로 이신에게 넘어가며 뇌전에 담긴 엔도의 심상이 그대로 느껴졌다.

호적수를 이겨 내고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의지.

그 공간 너머에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뇌옥(雷獄)]

수백 갈래로 흩어진 뇌전이 서로 이어지며 거대한 감옥을 만들었다.

같은 마법사에게, 그것도 뇌전 술사에게 마력의 제공권을 빼앗기는 것은 처음이기에, 엔도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흐름이 어느 순간 이신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을 깨달은 엔도가 다급히 뇌전을 일으켜 보지만 소용없다.

그를 둘러싼 뇌전의 줄기들이 그의 마력의 흐름을 끊고 뇌전을 빼앗아 갔다.

"이게…말이 되는...!"

상식 밖의 마력 컨트롤.

용의 피를 받고, 태어날 때부터 숨 쉬듯이 마력을 다뤄 온 그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리라 자신했던 그가 처음으로 좌절을 맛봤다.

"이게...."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엔도에게로 이신의 뇌전이 뻗어졌다.

콰과과과과광!!

일시에 범람하는 뇌전의 파도에, 엔도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정신을 잃고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신은 떨어지는 엔도를 염동력으로 붙잡고 그가 원래 있던 배 위로 던졌다.

"와...."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같은 20층의 도전자가 맞는 거야?"

탑은 공평한 세상이 아니다.

그건 도전자들 또한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합리하다 느껴질 정도로 경이로운 마법의 향연이었다.

"문이 열립니다."

때마침 바다 위로 용오름이 솟아오르고, 아래로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바다 안으로 생겨나는 거대한 차원 이동진.

그 이동진의 마력 역류 때문에 생겨나는 바다의 이상 기후.

보물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저 용오름과 파도를 피해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행위.

"가겠습니다!"

황일한이 핸들을 거칠게 돌리며 용오름을 피해 가운데 가장 큰 소용돌이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다들 꽉 잡으십시오!"

"떨어질 것 같은 사람들은 배 안으로 들어가요!"

미친 듯이 흔들리는 선박.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용오름이 배의 한쪽 난간을 가볍게 부수고 지나갔다.

"어어어어어!"

"오른쪽! 오른쪽!"

배가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용오름을 피하고 소용돌이에 도달했다.

그때 뒤를 돌아보니 반한 연합의 선박도 어찌어찌 용오름을 피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엔도는 아직까지 기절한 채,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복수를 하겠다고 나설까.

아니면 살려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할까.

어느 것이 되었든 나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놈은 아니었으니, 호적수를 넘기 위해 엔도는 미친 듯이 노력하며 성장할 것이다.

그렇게 성장해서 도전한다면 기꺼이 받아 줄 의향이 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해도 마찬가지.

이신은 엔도에 대한 생각을 접고 시선을 소용돌이 가운데로 옮겼다.

그곳에서 보이는 희미한 빛.

촤아아아아아―!

배가 바닷속에 잠기자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쿠웅! 촤아악!

하늘에서 떨어진 대형선이 또 다른 바다 위로 안착했다.

"저기가...."

"보물섬인가?"

천고의 보물로 가득하다는 보물섬.

딱히 대단할 것 없어 보이는 섬에 배를 정박하고 내려가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20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도전자님의 업적이 기록됩니다.]

[역사에 남을 업적! 대다수 신들이 도전자님을 주목합니다!]

[20층 스테이지의 세계선이 변합니다.]

[381,200점을 달성했습니다.]

[381,200p를 획득합니다.]

[체력이 15,120 올랐습니다.]

[마력이 23,000 올랐습니다.]

[힘이 11 올랐습니다.]

[민첩이 13 올랐습니다.]

[지력이 25 올랐습니다.]

[지배력이 16 올랐습니다.]

[행운이 1 올랐습니다.]

[『칭호 – 바다의 포식자』를 획득합니다.]

제91화

대립

[바다의 포식자]

바다의 포식자를 잡은 당신은 진정한 바다의 포식자입니다!

# 물속에서 10분간 호흡 가능. (물 밖으로 나올 시, 리셋.)

# 물에 대한 저항력 20% 증가.

이번 스테이지에서 얻은 게 정말 많았다.

이 칭호 역시, 바다와 같은 무대를 생각하면 효율 면에서 아주 좋았다.

호흡은 물론이고 물에 대한 저항력 20% 증가는 물속에서의 마법 효율을 몇 배 이상 상승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된다.

[대다수 신들이 도전자님에게 대화를 요청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이신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타나는 메시지 창을 무시하며 뷔엘라에게 다가갔다.

"이제 헤어지는 건가?"

"알고 있지? 31층. 그곳에서 기다려."

"알겠다. 늦지 마라."

"그래, 수고했다."

짧은 동행이었지만, 그에 대해 파악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뷔엘라가 도전자들과 가볍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사라졌다.

"이신 님."

황일한이 다가왔다.

그의 뒤로 이신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수백의 도전자들이 보였다.

20층의 스테이지가 끝났음에도 그들은 긴장한 듯, 몸을 배배 꼬거나 옷을 만지작거리는 등 불안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괜찮-."

[신들이 도전자님을 초대합니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메시지 창.

그것을 본 이신의 얼굴이 굳어짐과 동시에.

화아악―

이신은 자신이 새로운 장소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갑자기 무슨 상황인 건지.

거대한 신전 안.

일렁이는 수십 개의 형체가 이신을 둘러싸듯 떠 있었다.

어떤 형체는 뚜렷이 보이고, 어떤 형체는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희미했다.

'쯧.'

이번 스테이지가 끝나고 어떤 반응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강제로 데려올 것은 생각조차 못 했다.

이신은 차갑게 굳은 얼굴을 들어, 신들의 형상을 쳐다보았다.

불쾌하다.

항상 그들은 위에 있고 도전자들은 아래에 있다.

당연한 듯이 위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그들의 행태에 이신은 썩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도전자 이신.]

귓가를 울리는 음성.

소리가 공기를 타고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귓가에서 생성되는 것만 같다.

마치 기계음을 틀어 놓은 것 같은 기괴하면서도 신비로운 소리에 이신이 대답했다.

"예."

이곳에만 해도 수십의 신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처음부터 너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다.

[너의 행보는 많은 신들이 지켜보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초월의 격에 한 발을 내디딘 탓일까.

신들의 힘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너는 우리의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 말과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신들이 당신을 사도로 임명하고 싶어 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그 메시지 창에 표정이 와락 일그러지려는 것을 이신은 간신히 참아 냈다.

여기서 대놓고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다가는 이후 스테이지에서 지금보다 심한 견제를 받을 확률이 높았다.

이전 관리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면 아직까지 대부분의 신은 자신을 견제하기보다 사도로 만들기를 원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신들의 수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전까지 막 나간 행동은 그 정도까지는 어느 정도 괜찮을 것이라 확신했기에 그랬던 것이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대적자의 자격.

이 하나로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이 자격 자체만으로도 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기에.

"수락하면 어떤 신의 사도가 되는 겁니까?"

[네가 원하는 신의 사도가 될 것이다.]

"모든 신이 저를 원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세례를 받으면 알게 된다.]

이신은 슬쩍 정보를 빼내 보려 했지만 넘어오지 않자,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아주 잠깐의 침묵 속에서.

이신은 자신을 향해 뻗쳐 오는 무언의 압박감을 강하게 느꼈다.

100층에 올랐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것과 비슷했지.'

사도가 되라는 압박.

힘으로 찍어 누르면 원하는 대로 될 거라 생각하는 오만함이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100층이었고 지금은 고작 20층일 뿐이다.

"싫습니다."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뿜어지는 강렬한 기세.

숨통이 조여 오고 온몸이 부들거린다.

"크…윽."

아주 잠깐.

시간으로 따지면 찰나였지만, 당하는 이가 느끼는 시간은 억겁과도 같았다.

매 순간, 무릎을 꿇고 쓰러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버텨 냈다.

아무리 저들이 강한 압력을 가해도 굴복하는 모습은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괘씸하군.]

그것을 신들도 느낀 것일까.

아니면 사도 제안을 거절한 것에 대한 감상일까.

구체적인 형상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신은 자신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네는 신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그 음성을 듣고 있자니, 이제는 웃겨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금방이라도 죽일 것처럼 굴던 신들도 고작 도전자의 의지 하나 꺾지 못해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신들이 탑에 개입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저층일수록 개입에 대한 인과율의 희생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이 이상 놈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후회는 무슨."

이신은 더 이상 존대를 하는 것도 포기했다.

이런 놈들을 신이라고 존대하는 것도 우스웠다.

신들도 저마다 가진 격이 천차만별이지만, 적어도 이곳에 있는 신들 중에 최고위 신은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죽음의 신을 믿는 건가.]

'내가 죽음의 신과 관련이 있다 믿는 건가?'

저들이 신들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최고위 신 중 하나인 죽음의 신이라면 더더욱.

탑의 초반부터 끝까지 죽음의 능력을 다루었으니, 뒷배에 죽음의 신이 있다고 믿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적어도 저 사이에 죽음의 신이 없다는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뭐, 죽음의 신이 저런 놈들 사이에 껴 있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이신은 대놓고 비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죽음의 신을 팔기로 했다.

그 이름에 겁먹어 몇몇 신들은 나서지 않기를 바라며.

[허장성세를 부리는군.]

믿지도 않을 거면 왜 물어본 건지.

이신은 이 답답한 시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신들을 적으로 돌리는 건 현명하지 않은 일이다.]

이전과 다른 음성이 귓가에 박혔다.

'누구지?'

이신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 존재가 누군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세례를 받으라.]

또다시 이전과 같은 신의 음성이 들렸다.

"꺼져."

그 대답과 함께 배경이 유리창 깨지듯 부서지며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니 황일한이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앞에 서 있었다.

다른 이들의 반응을 보니, 몸이 이동되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정신만 이동되었던 건가.'

그마저도 매우 찰나의 시간이었는지, 황일한을 포함해 도전자들은 자신에 대해 위화감을 전혀 못 느끼고 있었다.

"이신 님?"

"아, 아닙니다."

수백 명의 한국 도전자들이 이신의 눈에 들어왔다.

이신은 물론이고, 그들도 지금 아이소시아의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리 최상위권 랭커들이 올라갔다 하더라도 상황이 좋을 리는 없었다.

그걸 알기에 저 도전자들도 저리 불안해하는 것일 테지.

"갑시다, 21층으로."

괜찮다.

상황은 언제나 반전되기 마련이니.

* * *

란탄의 마도공학 기술의 정수를 쏟아부은 선박이 대륙의 땅에 정착했다.

"드디어 도착했다."

"이 미친 짓은 다신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경을 고쳐 쓴 미우라 카노코가 선박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디뎠다.

얼마 만에 땅에 발을 디딘 건지.

기껏해야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사이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한 달도 더 된 것만 같다.

"저 마경을 뚫고 바다를 통해서 올 줄은 메르텡도 상상조차 못 하겠지."

"그래도 조심해라, 놈들이 아예 이 구역을 방치해 둔 건 아니니까."

"알아."

그렇게 말한 카노코가 배의 조종 장치를 조작해, 커다란 바위의 틈 사이로 배를 숨겼다.

"들키지는 않겠지?"

"놈들이 굳이 여기까지 둘러보지는 않을 거야. 빨리 움직여야 해. 할 게 많아."

"그래."

그렇게 말한 그녀가 땅에 손바닥을 대고 마력을 흘렸다.

[마력 탐지]

한참을 탐지하던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일어났다.

"누군가 여기로 오고 있어."

"눈치챈 건가?"

"되살아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메르텡이 알아챘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는데... 혹시 모르니, 일단 지켜봐야겠지."

두 사람은 바로 주변의 나무 위로 숨은 뒤, 자신들 쪽으로 오는 누군가를 기다렸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태평하게 걸어오는 두 명의 기사.

갑옷의 독수리 문양을 보니, 메르텡의 기사가 분명했다.

"도전자는 아니군."

"쉿."

카노코가 코에이의 입을 검지로 막으며 숨을 죽였다.

해안가를 두리번거리며 걷던 기사들이 걸음을 멈췄다.

"분명 이쪽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이상하네,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배가 움직이는 소리였는데."

"뭐 큰 물고기라도 움직였나 보지. 요 뒤로 다 원마경(原魔境)인데, 무슨 배가 와?"

"하긴 사라지지도 않는 원마경을 뚫고 저 망망대해를 건널 배가 있을 리가 없긴 하지."

"여기는 가끔 마족 놈들 튀어나오나 안 나오나만 보면 돼."

"그래, 가자."

기사들이 그렇게 떠나간 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의 카노코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아니, 어떻게 물살 가르는 소리를 들은 거야? 지들이 무슨 소머즈야?"

"그런 종류의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겠지. 신경 쓰지 마라."

"하마터면 오자마자 일 꼬일 뻔했네. 되도록 메르텡의 기사들은 건드리면 안 돼."

"알고 있다. 근데 이제 막 여기로 올라오는 놈들은 처리해도 되겠지?"

"응, 메르텡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문양을 얻기 전에 처리해 두면 좋겠지."

그렇게 말한 그녀가 코에이가 메고 있는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음...."

[지형 감지]

그녀의 마력이 지표면을 따라 반경 수십 미터의 범위를 쫙 훑으며 지나갔다.

주변의 지형을 완벽하게 스캔한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지도를 보았다.

"이 주변에 한국 도전자들의 시작 지점이 있어."

"기왕이면 몇 놈 올라왔으면 좋겠군."

"처리하는 건 좋지만, 그래도 우리 임무를 잊어선 안 돼. 메르텡의 동향 파악, 정보 수집, 기회가 된다면 요인 암살…."

"…그리고 이신의 존재 확인이지."

이신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두 사람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맞아.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해. 그 이신이라는 도전자가 어쩌면 이번 아이소시아 폐쇄의 목적이기도 하니까."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이제 막 저층에 올라온 그깟 녀석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이는 거지?"

코에이의 얼굴에 드러나는 호승심에 카노코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간에서는 그를 무시하는 사람도 있고, 다수 앞에서는 장사 없다며 가볍게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내 생각은 달라."

한국의 사건을 접하고 그 화제의 중심에 이신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그날부터 이신에 대한 자료를 긁어모아 그에 관해 연구했었다.

"혼자선 다수를 이길 수 없어. 나도 그 말엔 동의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야. 그가 만들어 낸 수많은 최상위권 도전자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지금 아이소시아 대륙에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한국의 도전자들 전부가 그의 작품이야."

"하지만 그놈들도 지금은 바람 앞에 촛불일 뿐이지."

"그렇지만 아직까지 촛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게 문제지. 진작에 꺼져야 했을 촛불인데 말이야. 그리고 이제 곧 이신이 올라올 텐데. 그가 올라오면 어떻게 될 거 같아?"

그녀의 말에 코에이도 할 말이 없는지 입술을 앙다물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지금 강대국들이 힘을 합쳐 한국을 공격하는 건 그만큼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야. 지금 그 연합도 삐거덕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여기 온 거지 않나."

"맞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신을 보더라도 그 호승심 버려. 만약 우리가 이신을 포섭할 수 있다면 일본은 단숨에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어."

그렇게 말한 그녀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다수의 마력이 감지됐어."

"뭐? 설마 도전자들이 올라온 건가?"

"그런 거 같아...."

마력 탐지로 도전자들의 수를 확인하던 그녀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도전자들이 너무 많아."

"몇 명이나 되는데?"

"백...아니 이백도 더 되겠어."

상당한 숫자에 코에이도 표정을 굳히긴 했지만, 카노코가 이렇게까지 경직될 일인가 싶어 의아해했다.

"좀 많긴 하군. 놈들을 처리하는 건 어렵겠어. 아무리 문양이 없는 놈들이라도 그 숫자면 무리지."

가늘게 떨리는 카노코의 얼굴.

그녀가 이를 악물고 마력을 끌어 올렸다.

"우선 빠져야 해."

"뭐? 왜? 놈들은 우리에 대해 모를 거다. 거리가 얼마나 먼데...."

"아니, 아직 모르겠어? 한동안 안 올라오던 도전자들이 한 번에 올라온 거라고!"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야?"

코에이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우선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이신! 그가 온 거야. 그래서 겁에 질려 안 올라오던 도전자들이 함께 올라온 거겠지."

한국 도전자들과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삼백여 미터 정도.

마력 탐지의 범위로는 그녀를 따라올 도전자들이 몇 없다 자부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그녀는 이신이라는 괴물이 자신만큼의 탐지 범위를 가졌다는 것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넌 걱정이 너무 많다."

코에이는 그녀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았지만, 카노코는 갑작스럽게 덮쳐오는 이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심해서 나쁠 거-."

쿠궁!

난데없이 떨어지는 벼락에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벼락에 맞고 쓰러져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미친...."

상황이 꼬였음을 감지한 두 사람이 석상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제92화

포로

카노코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곱씹으며 이를 악물었다.

분명 도전자들이 막 아이소시아 대륙의 땅을 밟은 순간 자신의 마력 탐지에 걸렸다.

그 순간의 거리는 거의 이백 미터쯤. 순간적으로 판단한 그녀가 도망가기 시작하면서 그 거리가 단숨에 오백 미터 가까이 벌어졌다.

이신이 오자마자 마력을 펼쳤다 해도 삼백 미터 가까이 되는 거리를 탐지해야 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탐지해야만 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아직 이신의 모습이 나타난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 벼락이 이신의 소행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직 낙담하기엔 일러.'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이신과의 만남은 어찌 되었든 한 번은 성사되길 원했으니.

꿀꺽.

벼락에 맞아 활활 타오르는 나무 앞에서 두 사람은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 뛰지도 않았건만 왠지 모르게 가빠지는 숨소리에, 그들은 자신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젠장 할...내가 왜....'

아직 마주치지도 않은 적에게 겁먹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코에이가 주먹을 꽉 쥐었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온다.

점점 커지는 발소리가 그들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온다.'

두 사람의 시야에 서서히 드러나는 실루엣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랏빛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눈매, 여유 넘치는 표정.

그의 주변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그들에게 알 수 없는 압박감을 선사했다.

'저게… 문양도 없는 도전자...라고?'

'헛소문이었어, 그것도 아주 잘못된.'

이길 수 없다.

애초에 격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갑자기 도망치길래 뭔가 했더니... 몰래 본국에 침투한 공작원이었나."

이신의 싸늘한 음성에, 두 사람이 또다시 침음을 삼켰다.

그의 손바닥 위로 흐르는 마력을 본 카노코가 화들짝 놀라 양손을 내저으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전했다.

"저는! 미우라 카노코라고 해요!"

"...."

"뭐 해?"

그녀가 팔꿈치로 코에이를 툭툭 치자, 그도 다급히 자기를 소개했다.

"타다시 코에이…입니다."

"일본 쪽이었나."

"아니요! 잠깐, 제 말 좀 들어 주실래요?"

카노코는 이신을 직접 마주하니 더더욱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이신…님 맞죠?"

그가 방금 보여 주었던 능력만 보아도, 이신이 아니면 불가능한 기예였다.

'이신은 마르티르랑 은나무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고 했는데.'

그의 허리에 검이 있긴 했지만, 검집에 들어가 있어서 마르티르인 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고 지팡이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맞다면?"

"저희 일본은 이신 님과 적대적인 관계보다는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길 원해요."

"그런 놈들이 아이소시아를 폐쇄하고 메르텡을 공격했어?"

"오해예요! 저희 일본은 메르텡 습격에 참여하지 않았어요."

"...그럼 어느 나라가 그랬다는 거지?"

원래라면 다른 국가들이 메르텡을 고립시킨다는 것 자체도 바깥에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변수란 늘 있는 법이고, 결국 비밀을 아는 이들이 아이소시아를 벗어나며 배신하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그렇다 해도 전세에는 변화가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카노코는 일단 현 상황을 모면하는 게 우선이라 여겼다.

"그건 저희 본국과 함께하시면-."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차게 내려앉은 이신의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입술을 비틀어 올린 그가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으윽!"

이신의 염동력에 목을 잡힌 그녀가 바람 빠진 신음을 내뱉으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 새끼가!"

그 모습에 눈이 돌아간 코에이가 도를 빼 들었다. 그녀가 말리려고 했지만 염동력에 몸이 속박당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 크윽!"

이신이 일부러 코에이를 자극하기 위해 그녀를 속박한 것을 깨달은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발도]

코에이의 도가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며 이신을 향해 도기를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마력을 끌어 올려 이신의 염동력에서 풀려나 품에서 푸른 캡슐을 꺼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야.'

그의 태도로 보아 대화로 이 자리를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

그녀는 [마력 동결 폭탄]을 꺼내 이신을 향해 던졌다.

마력이 동결되는 순간 도망간다.

마력을 동결당한 그보다는 빠르게 도망칠 수 있으리라.

후우우웅―

마력 동결 폭탄이 느릿하게 이신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신은 한 손으로는 실드를 형성해 코에이의 발도를 막고 다른 손으로는 마력을 뻗어 마력 동결 폭탄에 가져다 댔다.

폭탄이 터지기까지 기껏해야 1, 2초 남짓한 시간일 뿐이지만 초월의 격에 한 발 걸친 그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마나 입자들이 한순간에 팽창하며 대기 중의 마나를 얼리고, 생체 내부의 마력의 흐름을 멈추게 만든다.

그 안에 담긴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하지만 이신은 그보다 더한 마력의 흐름도 잡아냈다.

아바임 몬스트레의 첫 번째 심장에 비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할 만한 수준이었다.

안쪽의 복잡하게 얽혀 있는 회로를 타고 마나 에너지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뭉치고 갈라지고 회전하고 변화한다.

[마도공학 Lv.1]

일전에 5층에서 얻었던 마도공학 스킬이 이러한 과정들을 관조하는 데 일조했다.

마력 동결은 일시에 수십 개의 가닥을 끊어 내야지만 에너지가 그 힘을 잃고 흩어진다.

그리고 입자 단위의 고밀도 컨트롤은 이신의 전문 분야.

파고들어 끊어 낸다.

후우웅― 툭.

김빠지는 바람 소리를 내며 마력 동결 폭탄이 허무하게 빛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스킬 - 마도공학 Lv.2』를 획득합니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

마력의 동결을 생각하며 도를 집어넣던 코에이의 손이 멈칫했다.

그가 영문 모를 얼굴로 카노코를 바라보자, 그녀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쯧."

이신이 혀를 차며 염동력으로 두 사람을 눌렀다.

"윽!"

털썩.

마력 동결 폭탄의 불발이 두 사람의 사기를 꺾었던 건지, 둘은 순순히 무릎을 꿇었다.

"마력 동결 폭탄이 불발되는 경우도...있나요?"

아니란 걸 알면서도 물어볼 수밖에 없는 이 상황.

말하면서 금세 현실을 자각한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니에요. 하...저희 안 놔줄 거죠?"

이제는 이신에게서 벗어나기를 포기한 그녀가 온몸의 긴장을 풀고 물었다.

오히려 포기함으로써 이신에게 편히 물어볼 수 있었다.

"벌써 포기하는 거야?"

"그러면요? 방금 마력 동결 폭탄 해제한 거 아니에요? 아니! 무슨 날아가는 1, 2초 동안 그걸 해제해요? 말이 되는 거예요? 무슨 그런 듣도 보도 못한...."

"그만해라."

옆에서 한숨을 내쉬던 코에이가 그녀를 말렸다.

평소에는 냉철한데 가끔 저렇게 흥분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박을 때가 있다.

이신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 하나 없는데 왜 저러는 건지.

코에이는 자신이라도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있는 거 다 드리겠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너희 죽여도 다 가질 수 있는 건데?"

"아는 것도 다 말하겠습니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현재 워프(WOFP)의 계획 몇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코에이!"

그가 이렇게까지 모든 패를 밝힐 거라고는 생각 못 한 그녀가 다급히 외쳤다.

"호오..., 좋아. 우선은 동행하지."

이신이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기자, 그림자가 뻗어 나가며 워리와 메이가 함께 나타났다.

"얘네 소지품 전부 챙기고 묶어."

"네."

"알겠습니다."

코에이의 앞에 건달처럼 비적비적 걸어간 워리가 건달처럼 쭈그리고 앉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맞기 싫으면 가진 거 다 내놔."

"뭐?"

이신도 아니고 고작 스켈레톤 따위에게 삥을 뜯기는 것 같은 기분에, 짜증이 난 코에이가 아무 반응 없이 워리를 노려보았다.

"허… 이 쪼만한 새끼가."

시뻘건 안광을 들이밀며 시선을 마주치던 워리가 두개골을 그의 머리에 가져다 대며 밀었다.

까드득!

하지만 그에 지지 않으려는 코에이가 오히려 더 힘을 주어 머리를 들이밀었다.

갑자기 벌어진 두 남자의 자존심 싸움.

서로의 머리가 부서져라, 들이밀던 둘은 메이의 지팡이에 머리를 얻어맞고는 고통에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이 대가리에 똥만 찬 놈들이… 빨리 안 해?"

이신의 눈치를 보며 턱을 딱딱거리던 워리가 코에이에게서 가방을 채 가듯 뺏어 간 뒤, 그 안에 있던 수갑을 꺼내 두 사람을 묶었다.

"크하하하하! 가만히 있어라!"

"크윽!"

코에이가 분한 얼굴로 몸을 뒤척이며 워리에게 저항하고, 워리는 그런 코에이를 짓누르며 즐거워한다.

그 모습을 보며 메이와 카노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갑자기 사라진 이신을 기다리던 도전자들은 코에이와 카노코를 데리고 오는 이신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신 님, 저 사람들은 누굽니까?"

도전자들과 함께 이신을 기다리던 메르텡의 기사가 물었다.

"란탄의 첩자들입니다."

"첩자는 아니고-."

"시끄러."

기사는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보았다.

"파란 문양의 자격자? 이 둘을 혼자 잡아 오신 겁니까?"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이신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일본의 도전자들이군요."

황일한이 두 사람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이 둘이라면 현재 아이소시아의 상황을 잘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나온 눈빛이었다.

"이제 막 고문…같은 거 하는 겁니까? 포로들은 그렇게 해서...."

말을 하던 황일한은 두 사람의 따가운 눈초리를 느끼고는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냥 물어본 건데....'

"그건 상황을 봐야 알겠죠."

"왜 상황을 봐요? 다 말해 준다고 했잖아요!"

고문이라는 말에 놀란 그녀가 소리쳐 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사람은 죽기 직전에 본심이 나오는 법이지."

"죽기 직전이 아니어도 본심은 말할 수 있거든요?"

"그건 내가 판단해."

시답지 않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메르텡을 향해 갔다.

그들이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검은 안개.

인위적으로 어떤 구역만을 뒤덮고 있는 마경.

도전자들은 처음으로 마주하는 그 음습한 마경의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위마경(僞魔境)입니다."

거짓된 마경.

핵을 부수면 사라지는 마경을 일컫는다.

"운이 좋네요. 위마경이 하필 이 타이밍에 나타나다니."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짓지? 마경이 나타나면 안 좋은 거 아닌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메이가 물었다.

"위마경을 뚫는다면 문양을 바로 얻을 수 있으니까. 너희 주인은 안 그래도 강한데, 바로 문양을 얻으면 얼마나 강해지겠어?"

"우리 주인님은 그까짓 문양이 없어도 강해."

"쳇, 나도 알고 있거든?"

직접 이신과 마주했던 그녀로서는 이신이 문양까지 받는다면 정말 그를 잡을 방법이 없어진다는 것을 직감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한시도 멈춰지지 않는 걸음.

마경 속은 검은 안개에 잠겨 길을 찾는 게 어려울뿐더러, 조심해서 움직여야 했다.

언제 검은 안개 속에서 마족이 튀어나와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에.

하지만.

쾅! 콰드득! 콰직!

마경 속에 숨어 있는 마수들은 이신의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미친...."

이게 정녕 방금 막 이 대륙에 발을 디딘 도전자의 모습이란 말인가?

카노코와 코에이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한 채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른 도전자들은 그저 이신을 따라 걸을 뿐 아무것도 하는 게 없었다.

기껏해야 이신이 지나가고 나서 기습하는 마수들을 처리하는 정도.

그들을 메르텡까지 안전하게 호위하기 위해 동행하는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들도 제법 하는 거 같은데....'

마수들을 상대하는 모습만 봐도 어느 정도 실력 파악은 된다.

새삼 이것을 보니 한국 도전자들의 평균적인 수준이 많이 상승되었다는 것을 체감한 그녀가 얼굴을 굳혔다.

"크허어엉!"

들끓는 포효를 내뱉으며 케로스가 나타났다.

마경의 핵을 지키는 머리가 두 개 달린 개 종류의 마수.

다른 마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녀석이지만, 이신에게는 그놈이나 저놈이나 비슷한 수준이었다.

서걱!

쿵.

언제 다가간 건지, 케로스의 머리를 단칼에 베어 낸 워리가 칼을 갈무리하며 다시 코에이의 옆으로 돌아갔다.

'저걸 단칼에?'

코에이는 그 모습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케로스를 단칼에 베는 건 자신도 할 수 있었다.

다만, 저 스켈레톤은 문양도 없고 하물며 이신의 소환수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강한 소환수겠지만, 그럼에도 느껴지는 허탈함은 지울 수가 없었다.

'고작 난 이신의 소환수 하나와 동급인 수준인가?'

코에이가 갑작스러운 고뇌에 빠져 있을 때.

이신은 눈앞에 보이는 마경의 핵을 부쉈다.

[마경의 핵이 부서졌습니다.]

[일부 지역의 마경이 사라집니다.]

[공적치를 계산합니다.]

[공적치 1위부터 2위까지 『붉은 문양』의 자격을 획득합니다.]

1위. 이신 – 5,400점

2위. 박태윤 – 380점

[『붉은 문양』을 획득합니다.]

[붉은 문양]

다음 지역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집니다.

# 체력과 마력이 3% 증가합니다.

# 전체 스탯이 5% 증가합니다.

이신의 손등 위로 새겨지는 붉은 문양.

퍼센트 단위로 올라가는 이 문양의 능력은 그 어느 누구보다 이신에게 높은 효율을 선사해 주었다.

'좋아.'

손등에 새겨진 문양을 보며 짧은 감상을 내뱉는 이신의 뒤로 기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와! 문양이다! 내가 문양을 얻었어!"

그저 다가오는 마수 몇을 베어 냈을 뿐인데 2위가 되어 문양을 얻었다.

도전자들은 그를 보며 부러운 눈초리를 보냈고 이신은 피식 웃으며 다시 움직였다.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성채 도시.

그곳으로 이신과 도전자들이 걸어갔다.

제93화

이신과 도전자들이 성문 앞에 도착하자, 성문을 지키던 경비대장이 그들을 반겨 주었다.

"이번에 온 자격자들이시군요."

"그래, 이분이 그 이신 님이다."

그들과 동행한 기사가 경비대장에게 이신을 소개했다.

"어엇! 그 이신 님 말입니까?"

"그래, 여기 보이나? 이신 님이 오자마자 잡아 왔지."

기사는 자랑스럽게 카노코와 코에이를 끌고 와 경비대장에게 보이며 말했다.

"설마…자격자입니까? 도대체 여긴 어떻게?"

"몰래 들어온 것 같더군, 여기 보게."

카노코의 목과 코에이의 손에 새겨진 문양을 본 경비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란 문양? 그것도 국경을 몰래 침투할 정도의 실력자들을 잡았단 말입니까?"

"그래, 정말 대단한 분이시지."

기사는 마경에서 이신의 신위를 보고는 그의 팬이 되어 있었다.

"이, 인사가 늦었습니다! 경비대장 헤론입니다!"

갑작스레 깍듯하게 변한 태도.

이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들어가시죠."

기사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그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소시아에 온 자격자분들은 저희 국가에서 따로 마련한 숙소가 제공됩니다."

"제법 발전이 잘 됐군요."

이신은 생각보다 괜찮은 도시의 상태에 조금 놀란 상태였다.

"앞서 오신 자격자분들의 도움 때문입니다."

기사를 따라 수백의 도전자들이 떼 지어 이동하니 시민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평화로운데?"

"그러게, 너무 쫄았던 건가?"

"오히려 이신 님이랑 스테이지에 오른 게 더 빡셌던 거 같은데?"

도전자들은 도시에 처음 온 촌사람들처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내성에 도착하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경례를 보내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안에다가 전해, 이신 님 오셨다고."

"예? 그 이신 님 말입니까?"

"그래, 자격자들이 그렇게 말하던."

"알겠습니다!"

기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온 도전자들을 긴 머리를 묶고 안경을 올려 쓴 남자가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레딘입니다."

그를 본 기사가 이신의 옆에서 말해 주었다.

"의전 장관님이십니다."

이신도 알고는 있었지만, 모른 척 인사했다.

"이신입니다."

"오! 이신 님이시군요.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혹시 그 사람들은 지금 메르텡에 있습니까?"

"지금은 없습니다. 워낙 인력이 부족해서 말이죠."

그가 인력 부족을 돌려서 한탄하였으나, 이신은 그에 반응하지 않았다.

"크흠…아무튼, 지금 국왕님께서 이신 님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레딘은 이신만 따로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도전자들은 기사를 따라 움직였다.

"요즘 국왕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나 이신 님께서 오셨으니 걱정을 한층 더시겠군요."

"제 얘기가 많이 들리네요."

"그렇습니다. 이곳 메르텡을 다시 살린 구원자분들이 이신 님을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더구나 이신 님은 워낙 유명하신 분 아니십니까?"

"그 녀석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게...."

그 물음에 레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국왕님께서 말씀해 주실 겁니다."

어느새 도착한 알현실.

화려한 문이 열리고 옥좌에 앉은 국왕의 모습이 보였다.

'아돌프 국왕.'

전생의 기억과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이신은 그를 보며 반가움을 느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이신은 아주 자연스럽게 국왕을 향해 정돈된 예를 차렸다.

그 모습에 국왕의 옆에 서 있던 기사단장도, 같이 들어온 의전 장관도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보통 자격자들은 왕실의 예법 따위는 전혀 모르며 가르쳐 준다 해도 잘 지키지 않는다.

근데 이신은 오자마자 완벽한 예법을 보여 준 것이다.

그 모습에 아돌프 또한 놀란 얼굴을 하다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라. 자네가 이신인가?"

"맞습니다. 이신이라고 합니다."

"나는 아돌프 진 드 마르테이스다. 혹 어디서 왕실 예법을 배운 것인가?"

"이곳에 오기 전, 필요할 것 같아 배워 두었습니다."

"그렇군. 메르텡을 살려 낸 구원자들이 자네의 이름을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었지."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인물마다 그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

"자네가 왔으니, 그들에게 연락이 갈 거네."

"감사합니다."

"포로들을 잡아 왔다 들었다. 파란 문양의 자격자 둘을 잡았다지. 오자마자 대단하군. 혹 포상으로 원하는 게 있나?"

"아직은 원하는 게 없습니다. 나중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신의 그러한 부탁에 심기가 불편한지, 주변 관료들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러나 아돌프는 호쾌하게 웃으며 부탁을 받아들였다.

"하하하, 그래. 생각나면 말하라."

"감사합니다."

"오자마자 미안한 말이지만, 자네에게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겠나?"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이신은 아돌프가 오자마자 임무를 내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레딘이 말했던 것처럼 왕국의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아 보였다.

"테티르와 맞닿은 국경 쪽에 파견 나간 기사단이 실종 상태라네. 자네에게 병력을 붙여 줄 테니, 조사해 주겠나?"

이신은 그 말에 머릿속에 담긴 지도를 펼쳤다.

테티르와 맞닿은 국경은 붉은 지대와 주황 지대가 붙어 있다.

기사단이 주황 지대를 넘어간 순간 붉은 문양만 있는 그로서는 조사가 불가능하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옆에 있던 레딘이 입을 열었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압니다. 기사단은 붉은 지대 안쪽에서 연락이 끊겼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임무 범위 또한 붉은 지대 안이기 때문에, 주황 지대로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신의 대답을 들은 국왕이 침음을 삼키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자네와 구원자들의 관계가 특별하다고 들었다. 맞는가?"

"맞습니다."

"김강천 님과 지은주 님이 테티르에 잡혀 있습니다. 이신 님."

레딘의 말에 이신의 눈이 이곳에 온 뒤로 가장 크게 떠졌다.

"신하늘과 강지훈은 중상으로 치료 중이지."

연달아 들려오는 비보에 이신의 머리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어찌 보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나 마찬가지.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 * *

메르텡의 지하 감옥.

"들어가라."

"아악!"

그곳을 관리하는 병사가 카노코를 철창 안에 집어넣었다.

양손에 채워진 수갑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지친 그녀가 힘을 빼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메르텡의 땅을 밟자마자 이렇게 될 줄이야.'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고개를 들자, 맞은편 방에 굉장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양손이 풀어진 채, 굉장히 편안한 모습으로 누워서 그녀를 보고 있는 남자.

"인유우…선배?"

그 목소리에 인유우 코고가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시다가 카노코를 보았다.

"어...? 너...미우라냐?"

미우라 카노코 이상으로 당황스러운 표정을 한 그가 철창에 달라붙어 그녀를 뚫어져라 보았다.

"미치겠네, 너는 여기 왜 들어온 거야?"

"잡혔어요."

"하...어쩌다가?"

그 말에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든 그녀가 독방의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신한테 잡혔어요."

"이신…이신? 그 이신?"

"네, 네네. 그 이신이요. 그 무지막지한 괴물!"

"그놈이 올라왔다고?"

"네."

"하! 그 개자식 어떻더냐? 그놈 때문에 내가 여기서 뭔 꼴인지."

사실상 WOFP는 이신 때문에 만들어진 연합이자 카르텔이었다.

그 결과 WOFP에 속한 인유우 코고도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메르텡에 잡힌 것이고.

"뭐..., 근데 선배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네요? 무자비하게 고문당해서 폐인이라도 돼 있을 줄 알았는데."

"이놈들이 마음이 약한 건지, 바보 같은 건지 나도 모르겠네. 아무튼, 대접이 마냥 나쁘진 않다."

그도 말하면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근데 망명은 안 하셨네요?"

"망명은 무슨! 어떻게 조국을 버려?"

"음...."

그 말에 카노코가 생각에 잠긴 듯,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철창에 붙어서 가까이 붙으라고 코고를 향해 손짓했다.

"뭔데?"

"그게 말이죠."

누가 들을세라 소곤소곤 말하는 카노코.

아무도 없는데 뭔 짓이냐는 듯, 인유우가 쳐다보아도 그녀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저 망명할까 생각 중이에요."

"뭐? 넌 어떻게 잡히자마자 그런 생각을 하냐? 애국심도 없어?"

잔뜩 분노한 듯 그가 소리치자, 그녀가 놀란 얼굴로 검지를 들어 입을 막았다.

"쉿! 쉿! 조용히 좀 해 봐요!"

"쯧...."

"아까 이신이 어떠냐고 물었죠? 그 전에 선배가 처음 한국의 최상위권들이랑 여기서 붙었잖아요? 그때 어땠어요?"

그녀의 물음에 그가 똥 씹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얘기를."

"해 봐요."

"놀랐지...참담했고 위기감도 느꼈다. 문양조차 없는 놈들이 이 정도라면 문양을 가졌을 때 어떻게 변할지. 지금 밟아 놓지 않으면 한국이 압도적인 강대국이 되리라 생각되더군."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렇게 몇 달이 지났잖아요. 금방 밟아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메르텡은 버젓이 살아 있고요. 물론,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요."

"그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손이 열 손 못 이기는 법이지. 메르텡은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어."

그렇게 말하며 '이제 곧 풀려나려나?'라고 중얼거리던 그가 바닥에 철퍼덕 누웠다.

그때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왔다.

"저 최상위권 녀석들 목숨이 여러 개도 아니고, 결국 하나둘 죽게 되어 있어. 그럼 메르텡도 끝인 거지."

"맞아요, 김강천과 지은주가 저번에 테티르에 잡혀갔거든요. 저희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죠. '곧 메르텡도 무너지겠구나.'라고."

"저희?"

"아! 코에이도 잡혔어요. 저랑 같이."

"뭐? 그놈도? 허. 도대체 무슨 임무를 하다가 잡힌 거야?"

인유우는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일본에서 나름 주목받던 유망주 둘이 잡혀 왔으니, 지금 일본의 상황은 안 봐도 눈에 훤히 들어왔다.

"남해의 마경을 뚫고 메르텡의 땅에 침투하는 거였죠."

"뭐? 그런 미친 짓을 했다고?"

"충분히 할 만했어요. 아무튼, 그래서 성공했고 메르텡 근처까지 갔죠. 근데 마침 이신이 이곳에 올라온 거예요."

"그래서?"

"이신에게 들켰어요. 도망치려 했는데."

"네가? 그 이신이란 놈 탐지 능력이 뛰어난가 보네."

"그 정도가 아니었어요. 아무튼 그래서 저랑 코에이가 이신과 붙었어요. 그리고 제가 느낀 게 뭔 줄 알아요?"

인유우는 그녀의 대답이 대충 예상이 갔다.

너무 강한 상대에 놀라 좌절했다는 그런 류의 이야기.

자신도 느꼈던 그 느낌을 그녀도 느꼈을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한국 도전자들이 포기 안 하고 그렇게 악착같이 버텼었구나. 그랬구나. 했네요."

"뭔 소리야? 이신 하나만 보고 그랬다는 거야?"

"네. 솔직히, 그 한 사람이 지금 이 모든 전세를 바꿔 놓지 않을까 생각해요."

"네가 이신한테 얻어맞고 정신을 놨구나?"

"한 대도 안 맞았거든요?"

"그건 또 뭔 소리야?"

인유우는 계속 이상한 소리를 나열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맛이 갔네, 맛이 갔어."

"아니라구요!"

"그럼 뭔데? 자꾸 아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

"모두가 선배처럼 생각하고 있죠. 그래서 더 위험하다는 거예요. 선배는 몰라요,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인유우는 그녀가 어디까지 말하나 보자는 셈 치고 가만히 들었다.

"20층까지 오르면서 자기 정보를 철저히 통제하고 단편적인 정보만 흘렸어요. 그래서 더욱 사람들을 방심하게 만들었죠. 전 이 상황을 일부러 그가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해요."

"음모론자 납셨군."

그가 이제는 불쌍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과거엔 한 사람의 영웅이 세상을 바꾸곤 했었죠. 이제 그럴 시기가 온 게 아닐까요?"

"이신이 그 영웅이라고? 너 무슨 정신 세뇌라도 당했니?"

인유우가 검지를 관자놀이에 대고 빙빙 돌리며 말했다.

"저 진지해요. 선배, 문양 없는 박주혁의 무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세요?"

"음...솔직히 쯔위천이 파란 문양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겼을 거 같은데."

"그래요?"

카노코의 진지한 모습에 인유우도 고개를 옆으로 까닥였다.

"이신은 어땠길래 그러지?"

"저는 파란 문양의 쯔위천이 파란 문양의 코에이와 비등 혹은 그 아래라 생각하거든요?"

"그래? 그 녀석이 그렇게까지 강해졌다고?"

"네, 근데 그런 코에이가 열이 있어도 이신은 못 이겨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 백 명이라도 있으면...지쳐서 이길 수는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인유우 코고는 그녀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닌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 * *

"여기인가."

테티르와 맞닿은 국경 근처.

원마경으로 가득한 국경의 모습을 보며 이신이 마력을 뿌렸다.

한순간에 퍼지는 마력의 파장이 실종된 기사단의 마력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음...."

"뭐가 있습니까?"

이신과 같이 온 기사 셋.

그중 아까 이신을 메르텡에 인도했던 기사 또한 자원하여 그를 따라와 물었다.

"아니."

단순 탐지 목적으로 뻗어진 수 킬로미터 범위를 아우르는 마력의 파장.

여기까지 오며 단 한 번도 마력 탐지를 푼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찾지 못했으면 적어도 지상에는 기사단이 없다는 것이다.

"베런."

"예, 이신 님."

"국경의 방비는 확실하게 하고 있었겠지?"

"예, 기사단이고 적들이고 그림자도 못 봤다고 합니다."

그렇다는 건, 아직 이 붉은 지대 안에 있다는 이야기.

이신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드문드문 떠 있는 구름을 제외하면 태양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실종된 기사단이 하늘로 솟은 게 아니라면, 남은 건 땅밖에 없겠지.

이신의 손 위로 흐르는 검은 마력이 땅으로 스며들자,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올 때부터 유난히 그를 거슬리게 만드는 죽음의 기운이 있었다.

땅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죽음의 향이 이곳에 무언가가 있음을 계속해서 이신에게 알려 주었다.

[골렘 소환]

지면에 있던 흙과 돌들이 뭉치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형상을 이뤘다.

족히 5m는 되어 보이는 거체.

입을 떡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골렘이 생겨나면서 지면에 생긴 구멍을 향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스스스스스.

그 아래 작은 구멍으로 흙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기사 하나가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

콰앙! 콰앙! 콰앙!

거체를 움직인 골렘이 그 부분을 향해 주먹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지면에 생겨나는 균열을 발견한 기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너진 땅과 함께 드러나는 공간에 흙을 뒤집어쓴 남자가 서 있었다.

"어떤 놈이! 겁도 없이 내 결계를 건드려?"

잔뜩 성이 난 남자의 목소리.

얼굴의 반쪽이 화상으로 뒤덮여 있고 한쪽 눈은 괴기스러운 하얀 동공을 담고 있다.

'인공 안구인가?'

이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보고 있자, 남자는 자신의 백발을 쓸어 넘기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기사단과 이신을 보았다.

"호오...실험체들이 제 발로 찾아왔네?"

비릿한 미소를 지은 남자가 땅 위로 올라왔다.

제94화

피부와 함께 성대까지 녹아내린 건지, 오크들이 내는 목소리보다 더 걸걸하다.

백발의 남자와 달리 표정이 극명하게 굳은 기사단은 위험을 감지하고는 곧장 검을 빼 들었다.

세 기사 모두 메르텡의 정식 기사이며 그중에서도 베런은 뛰어난 실력자였다.

최소 초록 문양을 가진 자격자급의 실력자들.

그들이 긴장했다는 건 상대의 실력이 최소 파란 문양 이상이라는 것을 뜻했다.

'역시, 저 여유로운 태도는 자신감의 발로인가.'

백발의 남자는 탐스러운 음식을 훑듯, 천천히 눈알을 굴렸다.

"지난번 기사들과 비슷한 수준인가? 맛있겠어."

입맛을 다시며 입술을 핥는 남자.

동시에 그의 몸에서 풀풀 풍기는 마력을 감지한 이신이 눈을 빛냈다.

느껴지는 기운이 죽음에 가깝다.

흑마법사인가? 아니면 다른 능력자?

언뜻 보이는 실험실 내부에는 기사단과 괴수들의 사체로 보이는 것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죽음을 다루는 건 쉽지 않은 일이며, 그것은 곧 많은 이들의 죽음을 다루고 고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죽이고 연구한 것일까.

'어쩌면, 그의 연구 표본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이신이 백발 남자의 연구 자료를 탐내고 있을 때, 기사들이 먼저 움직였다.

날카롭게 피어나는 마력이 검을 타고 적을 향해 뻗어 간다.

메르텡 기사 특유의 정돈된 검식이 고스란히 드러난 검격.

까드득-

기사가 내려친 검을 백발의 남자가 한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잡았다. 그 모습에 놀란 기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다른 기사가 상대의 옆구리를 꿰뚫을 기세로 검을 뻗었지만 다른 한 손에 허무하게 잡혀 버렸다.

"말도 안 돼...!"

힘을 주어도 빠지지 않는 검에 그들이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베런은 놈의 목을 치기 위해 검기를 날렸다.

"뒈져라!"

하지만 검붉은 마력이 흐물흐물 흘러나와 쇄도하는 베런의 검기를 쳐내고는 그의 목을 쥐어 잡고 들어 올렸다.

"크…윽!"

아무것도 못 하고 허무하게 제압당한 세 명의 기사들이 시뻘게진 얼굴로 놈을 노려보았다.

백발의 남자는 세 기사를 제압하는 상황에서도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크…허어억!"

검붉은 마력에 목이 잡힌 베런의 마력이 놈의 마력을 타고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생명력을 갈취하는 힘.

'그랬나.'

놈의 근원을 파악한 이신이 곧장 마력을 날려 놈의 검붉은 마력을 절단했다.

"뭣...?"

자신의 마력을 이리도 쉽게 잘라낼 것이라 예상치 못했는지,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럴 것이다. 그것은 단순 마법이 아닌 권능의 영역이니까.

자신의 권능을 저층의 어떤 도전자가 이리 쉽게 잘라 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는가?

"하아...하아...."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베런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검을 잡혔던 기사 둘도 내팽개쳐지듯 날아간 상태, 백발의 남자는 다른 것들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듯 이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한 거지?"

"어떻게 한 건 없어, 그깟 싸구려 권능 하나 받아 내고 우쭐하는 게 웃기지 않나?"

죽음의 신도 아닌, 그의 '죽음'을 먹고 자라난 한 아류(亞流) 신.

그는 신격에 도달하다 만 괴수의 힘의 편린을 사용하는 것뿐이다.

"사계(死界)에 서식하는 괴수의 힘. 그저 탐하고 먹기만 하는 그런 싸구려 같은 힘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너…뭘 알고 있는 거야?"

"꼴을 보니 알 만해, 힘에 먹혀 이성 통제가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네. 힘이 그렇게 고팠나?"

이신의 이죽거림을 듣던 남자의 얼굴이 마귀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네가…네가 뭘 안다고! 우쭐하지 마라!"

검붉은 마력이 용솟음치며 이신에게 달려든다.

그 모든 힘을 빼앗아 가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은 채.

"큭."

코웃음을 친 이신이 검은 마력을 풀풀 풍겼다.

그를 집어삼키려던 남자의 검붉은 마력은 이신의 검은 마력에 다가가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겁에 질린 듯 덜덜 떨기 시작했다.

"뭐야? 뭐가 어떻게...?"

"하이에나들은 정작 사자 앞에선 겁먹은 쥐새끼가 될 뿐이지."

검은 마력의 죽음 속성.

'죽음'의 파편을 먹고 격을 얻은 탐식의 괴수가 죽음이라는 근원 앞에 이를 드러낼 수는 없다.

"꿇어."

털썩.

"이, 이게 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마력이 본체를 짓눌렀다.

"이름은?"

"빅…토르."

"러시아인인가?"

"...그래."

빅토르 정도의 실력자라면 러시아에서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아무리 이 자가 힘에 먹혀 정신을 놓고 있다고 해도 어떻게든 전력으로 써먹을 생각하는 놈들이 러시아이기 때문에.

"이곳에 온 이유는?"

"아이소시아 폐쇄 전에 메르텡을 무너뜨리기 위해 왔다."

"근데 왜 여기 있는 거지?"

"메르텡을 무너뜨리면서 놈들을 실컷 잡아먹었지. 참 맛있었어. 큭.... 그러다 보니 옆에 있는 놈들도 탐스러워 보이더군. 그래서 다 죽이고 탐했지. 지금 생각하면 아직도 그때가 잊혀지질 않아...."

"미친 새끼."

저 말을 들으니 그 당시의 참상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빅토르가 아직까지 여기 숨어 있는 게 이해가 되었다.

탐식의 괴수의 힘은 다른 이들의 힘을 먹고 계속해서 성장하기에, 이 녀석이 다른 이들을 전부 몰살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러시아라면 아직도 이 녀석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터.

다른 국가에 망명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악행을 저질렀으니, 어디를 가든 잡히는 순간 죽음은 확정이다.

어쩌면 지금의 메르텡이 살아 있는 것도 이 녀석의 영향이 한몫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키메라를 만들고 있었다. 아직 성공하진 못했지만."

실험실의 안쪽을 보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이었을 줄이야.

"그 와중에 기사단의 생명력을 빨아 먹고?"

"...."

싸늘한 이신의 목소리를 들은 그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쯧."

표정을 일그러트린 이신이 혀를 차고는 하늘 위로 마력을 쏘아 보냈다.

그와 동시에 내리치는 벼락의 연발.

쿠궁! 쿠궁! 쿠궁!

"크아아아아아아!"

가래 섞인 비명을 내지르던 빅토르가 눈깔을 뒤집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적당히 위력을 조절했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이거 묶어서 호송해. 그리고 여기 한 번 조사해 봐."

"예!"

기사들과 함께 이신도 실험실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오니, 밖에서 볼 때보다 훨씬 넓었다.

"여기, 실종된 기사단의 시체가 있습니다."

머리와 몸, 팔다리가 모두 분해된 채 이상한 액체에 담겨 보관된 모습.

그 모습을 본, 기사들도 속이 좋지 않은지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기사단의 시신은 모두 수습하고, 국경 대원들에게 가서 엘츠에 연락하라고 해."

"예."

붉은 지대에 있는 엘츠 성이라면 이곳까지 반나절이면 올 수 있을 거다.

"흐음...."

실험실 전부를 뒤져 봐도 그다지 유의미한 연구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나마 키메라에 관련된 연구 자료들이 있기는 했지만, 성공한 것은 없고 그나마 성과가 있던 것도 그다지 도움이 될 수준은 아니었다.

한 번 자료들을 쭉 훑어본 이신은 실망감을 애써 감추며 모든 자료를 폐기해 버렸다.

'이런 자료들은 없는 게 나아.'

죽음을 다룬다는 건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몇 년의 시간이 더 있었다면 충분히 유의미한 성과를 냈을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생명의 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연구할 필요는 없겠지.

실험실을 모두 둘러본 뒤, 입구를 막은 이신과 기사들은 밖으로 나와 국경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에게로 갔다.

원마경으로 수 킬로에서 수십 킬로미터 범위까지 펼쳐진 국경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딱히 병사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마경에 들어가면 검은 안개 때문에 바로 앞도 잘 보이지 않는데 저 넓은 곳을 뚫고 언제 나타날지 모를 마족들을 피해 국경을 넘어가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원마경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가끔 마족들이 마경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정도로만 배치되어 있었다.

"오셨습니까!"

이신과 기사들의 모습에 잔뜩 힘이 들어간 병사가 그들을 맞이했다.

"엘츠에는 연락했나?"

"예! 바로 이곳으로 병사들을 보낸다고 합니다."

"메르텡에 연락을 좀 하고 싶은데."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신의 부탁에 허겁지겁 어디론가 달려간 병사가 연락을 취한 뒤, 그들을 불렀다.

작은 건물 안에 설치된 스크린에 떠오르는 레딘의 모습.

그가 이신을 보더니 반가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 이신 님, 뭐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필요한 건 없고, 보고를 위해서 연락했습니다."

- 아, 그러십니까? 임무가 끝나면 보고하셔도 괜찮습니다.

"임무 끝났습니다."

- 예? 아..., 역시 이신 님도 이건 조금 찾기 힘들다고 판단하신 겁니까? 그래도 조금만 더 찾아 주시면-.

"그게 아니라, 찾았습니다."

- 예에? 어, 어떻게 됐습니까? 기사단은 무사한 겁...표정을 보니 알겠군요.

잔뜩 흥분하며 말을 하던 레딘은 이신의 얼굴을 보며 어찌 되었는지 예감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과정에서 아만의 자격자를 잡았습니다."

- 아만 말입니까?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이곳에 온 지는 꽤 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포로도 보내겠습니다. 아만과 협상하는 데 쓰면 괜찮을 겁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돌아오시는 겁니까?

"예, 이제 돌아가야겠죠."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사라지는 레딘.

이신이 돌아갈 채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섬과 동시에 국경의 초소에서 시끄러운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뭐지?"

"저,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뭐?"

난데없이 적침이라니?

이신은 황당함을 뒤로한 채 급박하게 경고음이 들린 곳으로 움직였다.

"나 먼저 갈 테니, 다른 병사들은 자리 지켜. 어디서 또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곧장 마력을 흩뿌린 이신의 감각에 도전자들의 마력이 감지되었다.

총 5명.

대충 보아도 상당한 실력자들임이 틀림없었다.

콰과과과광!!

폭발음과 함께 무너지는 국경 벽.

원마경을 둘러싼 벽과 초소가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그 앞을 가로막은 병사들의 심장이 적들의 칼에 허무하게 꿰뚫렸다.

촤아악! 쿨럭!

입으로 피를 쏟아내며 쓰러지던 그들의 시야에 이신의 모습이 담겼다.

"이…신 님이...."

"도와…주십시오…이신 님...."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침입자들의 눈가가 가늘어진다.

"이…신?"

"설마...?"

그제서야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떠올린 그들의 고개가 다급하게 돌아가고.

치이이이익!

쇄도하는 전격의 채찍을 확인한 그들이 몸을 피해 보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한 도전자가 그대로 몸이 휘감겨 감전되었다.

"크아아아아악!"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함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일제히 마력을 서로 연결하여 이신을 둘러쌌다.

'합격진인가.'

네 방위로 둘러싼 마력의 연결.

서로 상호보완하며 불필요한 부분에는 마력을 빼내서 적재적소에 힘을 몰아 주는 합격진.

오랫동안 합을 맞춘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계였다.

"하압!"

넷 중 가장 체격이 큰 남자가 단검을 역수로 쥔 채 쇄도했다.

카앙―!

밑에서 위로 올려치는 베기가 이신의 실드에 부딪혀 막혔지만, 예상이라도 한 듯 방향을 바꿔 연달아 공격이 들어왔다.

후웅― 콰아앙!

그와 동시에 언제 포를 꺼낸 건지, 두꺼운 포탄이 날아와 이신의 후면을 때리고.

콰직!

발밑에서 튀어나온 줄기가 이신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제법인데?'

마치 하나의 인간형 보스를 잡기 위해 수없이 연습한 듯한 매끄러운 연계.

이신이 놀라 속으로 감상을 내뱉는 순간에도 그 연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쾅! 쾅! 콰아앙!

첫 포탄으로 이신의 실드를 뚫을 수 없다고 생각한 도전자는 곧장 포탄을 충격포로 바꾼 뒤, 땅에 지지대를 고정하고 인간 포탑이 되어 이신을 향해 충격포를 연달아 쏘았다.

실드를 깨부수는 데 최적화된 충격포에 철벽같던 이신의 실드에 금이 가고, 다음 충격포가 실드를 정확히 때리는 순간.

발밑에서 치솟은 줄기들이 이신의 온몸을 결박했다.

단검이 금방이라도 그의 목을 꿰뚫을 듯 쇄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신의 눈동자는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아직인가.'

미간을 살짝 씰룩인 이신이 잠재우고 있던 마력을 한 번에 끌어 올렸다.

치이이이이익!

주변으로 치솟은 뇌전이 그를 옥죄고 있던 줄기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동시에 그가 허공을 움켜쥐자 쇄도하던 남자의 몸이 염동력에 잡혀 줄기를 사용하던 자격자에게로 날아갔다.

"크…윽!"

남자가 날아가자마자 또다시 쇄도하는 충격포.

이전과 확연히 다른 충격량이 이신의 실드 위로 쌓이며 결국 그의 실드를 완전히 깨부쉈다.

차아아앙!!

유리창이 깨지듯 박살이 난 실드의 틈 사이로 뻗어오는 한 줄기의 탄환이 이신의 목을 노리고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실드가 재생성되기 전, 그 찰나에 맞춰 날아간 완벽한 타이밍.

허나, 이신은 스나이퍼를 처음부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파앙! 피시―

총알의 경로 위로 압축된 공기가 폭발하며 그 궤적을 바꿔놓았다. 총알은 간발의 차이로 이신의 목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신은 스나이퍼를 향해 '이게 끝이냐'고 말하듯 얕은 미소를 띄웠다.

그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가고 있는 도중에 느닷없이 그의 미간 위로 하얀 탄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서야 스나이퍼의 눈가가 얇게 늘어지며 이신과 시선을 마주쳤다.

상대를 벼랑 끝까지 몰아 피할 수 없는 한 방을 노리는 치열한 수 싸움.

이신을 저격한 그녀는 그가 절대 이것을 막을 수 없으리라 확신했지만.

치이이이이이―

갑작스레 튀어나온 피의 웅덩이에, 파묻히듯 사라지는 탄환을 보며 그녀가 경악성을 내뱉었다.

"뭐...?"

피로 이루어진 안개에서 튀어나온 귀여운 박쥐가 이신의 어깨 위에 앉았다.

"왜 나를 안 부르는 거야? 이제 그렇게 부담도 안 되잖아?"

"보다시피, 경황이 없어서."

어깨를 들썩이는 이신의 모습에 잔뜩 짜증을 내던 박쥐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보랏빛 머릿결을 흩날리며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릴리안이 차디찬 눈빛으로 도전자들을 바라봤다.

타앙―! 콰드득!

자신의 얼굴로 날아오는 탄환을 손으로 잡아낸 그녀가 움켜쥔 탄환을 가루로 만들어 바닥에 뿌렸다.

그리고는 자신을 저격한 스나이퍼를 피의 채찍으로 끌고 와 들어 올렸다.

"끄…어…억...."

"오랜만에 나, 기분 좀 내도 되겠지? 주인."

제95화

협상

릴리안의 등장과 함께 순식간에 정리된 싸움.

이신은 그 모습에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끝내려면 진작에 끝낼 수 있었다.

다만, 놈들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어 볼까 시간을 끌었던 것일 뿐.

'뭐, 그래도 하나는 제대로 건졌네.'

이신의 시선에 걸린 한 도전자.

마지막 그 저격은 그조차도 순간 식겁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공간의 일그러짐을 느끼고 릴리안을 불러내지 않았다면 이신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초 단위로 정확히 계산된 전투 방식과 그걸 완벽하게 이행하는 실력자들.

더구나 거기에 뒷받침하여 치명타를 먹일 고유능력까지.

'여기서 그 공간 왜곡 능력자를 만날 줄이야.'

제대로 된 대어를 잡은 탓에 이신은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간만에 상쾌한 공기를 마셔서 그런지 기분이 좋구나."

"미안해, 내가 너무 안 부르긴 했지."

"그래, 당분간 안 들어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마력의 부담 탓에 오랫동안 혈계에서 릴리안을 꺼내지 않다 보니 그녀도 어지간히 나오고 싶었던 것 같다.

이제는 마력 등급도 오르고 지배력도 많이 오른 탓에 릴리안을 박쥐 모습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 정도는 괜찮은 상태가 되었다.

근데 문제는....

"이신 님, 저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저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계시다니...."

"저분이 메르텡 최고 미인이신 게 분명합니다!"

"거기다 저렇게 강력한 능력까지. 아...다 가지셨구나."

병사들뿐만 아니라 기사들까지 릴리안의 미모에 빠져 버렸다는 것.

릴리안은 매혹을 떠나서 외적으로도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주변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다.

하물며 그녀가 뱀파이어 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 귀찮아질 수도 있기에, 되도록 본체는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데....

'쯧. 어쩔 수 없지.'

이신은 릴리안을 다시 박쥐의 모습으로 바꾸게 만든 뒤 사로잡힌 포로들에게로 갔다.

마력 차단 수갑을 차고 있는 터라 이전처럼 거센 저항을 할 수 없던 그들은 몸을 비틀며 이신을 노려보았다.

"복면 벗겨."

"예."

하나둘 얼굴이 드러나자, 이신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깃들었다 사라졌다.

"정체가 뭐지?"

"...."

"도대체 마경은 어떻게 뚫고 온 거지?"

"...."

"계속 대답하지 않을 건가?"

"...."

이신의 물음에도 절대 입을 열지 않는 다섯.

이신은 그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단 말이지."

"어떻게 할까요?"

"동료가 죽는데도 입을 다물고 있을지 모르겠네."

이신의 말에 그들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것을 캐치한 이신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뜨드득!

남자의 팔을 뒤덮은 소매를 쫙 찢은 이신은 그 안에 담긴 문양을 보았다.

"남색 문양."

뜨득!

"남색."

그 옆에 있는 이의 옷도 찢고, 다른 이들의 수트도 일일이 찢어 확인했다.

"남색, 남색… 보라색...."

이신의 목숨을 위협하고, 릴리안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여성 도전자.

그녀의 문양만이 유일하게 보라색이었다.

"네가 대장이야?"

"...."

"또 대답을 안 하네."

이신은 옆에 있던 기사에게 손을 펼쳐 뻗었다.

"검."

"아, 여깄습니다."

그의 손바닥 위로 기사가 검을 얹어 주자, 이신은 그대로 검을 들어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

"잠깐!"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목 앞에서 멈춰 선 검,

자신의 목덜미에 검이 멈춰 선 것을 본 그녀의 몸이 아주 가늘게 떨렸다.

"뭐지?"

잠깐이라 소리친 남자가 이신을 노려보며 이를 아드득 갈았다.

"이렇게 함부로 포로를 죽여도 되는 건가?"

애써 여유로운 척 말을 꺼내 보지만, 이미 그들은 이신에게 끌려 다니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이 여자를 살려 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꼴을 보니 이신은 웃음만 나왔다.

"뭐, 포로를 죽이지 않으면 너희 국가가 메르텡을 돕기라도 한다든?"

"…적어도 협상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이미 수많은 국가들이 한국을 누르겠다고 카르텔을 형성했어. 여기서 너희들이랑 무슨 협상을 할 수 있을까?"

"섣부르게 판단하지 마라."

"그럼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도록 내 물음에 답해 줄래?"

채, 채앵―

들고 있던 검을 뒤로 던져 버린 이신이 남자의 앞으로 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차갑게 내려앉은 그의 눈빛.

남자는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첫 번째. 너희들의 국가는?"

"...."

끝까지 버텨 보겠다고 입을 다무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이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올라간 왼손이 허공을 움켜쥐자, 끝에 무릎 꿇고 있던 보라 문양의 여자 도전자가 숨이 막혀 켁켁 대기 시작했다.

"아니-."

"마지막으로 묻는다. 봐주는 건 이번뿐이야."

낮게 깔린 이신의 음성이 남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마경은 어떻게 뚫고 온 거지?"

* * *

붉은 지대에 위치한 국가 메르텡의 성, 엘츠.

메르텡 못지않게 많은 발전이 이루어져 있다.

'그 사이 공적치를 많이도 때려 박았네.'

각 성의 성주는 가지고 있는 공적치로 시스템의 상점을 이용할 수 있다.

이곳의 세계는 도전자들뿐만 아니라, 성주 또한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기에 그들은 공적치로 성을 발전시키고 국가를 개발할 수 있다.

'한국 도전자들의 고생이 눈에 훤하네.'

메르텡은 한 번 무너졌다가 다시 활성화된 터라, 모든 성이 공적치가 많이 모이지 않았다. 그동안 이룩한 십수 년간의 발전 또한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을 것이다.

이 정도로 발전했다면 순전히 이번에 올라온 도전자들의 역량 탓이겠지.

평탄하게 깔린 도로를 따라 성에 도착한 이신은 엘츠 성의 성주를 만날 수 있었다.

"자네가 이신이로군."

"맞습니다."

"제이든 콤프턴일세. 소식은 들었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지?"

응접실에 앉은 이신은 제이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전생의 제이든 콤프턴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그 엄청난 위압감이 몸소 느껴졌었지만, 지금의 제이든은 그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이미 한 번 죽고 다시 엘츠가 활성화되며 제이든이 성장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이들의 성장도 한계치가 있긴 하지만, 제이든은 아직 그 위치까지 가지는 못한 듯싶었다.

"윌데스의 자격자들이었습니다."

"들어서 알고 있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실력자들이더군. 보라 문양의 자격자까지 있는 걸로 보아 적잖은 인력을 투입한 것 같은데."

"맞습니다, 들어 보니 윌데스뿐만 아니라 테티르와 아만에서도 병력이 투입된 것 같습니다. 안에서 헤멜 수밖에 없는 마경의 특수성을 인력을 쏟아부어서 억지로 깨고 들어온 거죠. 현재의 상황이 아니면 하기 힘든 방법입니다."

독일의 윌데스, 프랑스의 테티르, 러시아의 아만까지.

메르텡의 붉은 지대와 주황 지대에 가장 가까운 저 세 국가에서 작정하고 인력을 쏟아부어 마경을 뚫어 낸 것이다.

한 팀이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혼란스러운 이 상황에 치명타를 먹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겠지.

"나르덴 성도 계속해서 공격을 받는 상황이야. 더럼은 나르덴을 지원하고 있지만, 아까와 같은 상황이 주황 지대에도 생긴다면 그 지원에 문제가 생기겠지."

"국경의 경비를 강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지금도 마경을 헤매는 적들의 수가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다지 확률이 높지 않은 일에 많은 병력을 차출할 수는 없네. 지금 그 정도로 상황이 여유롭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이신도 알고는 있다.

국가 메르텡은 지금 바람 앞에 촛불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억지로 파란 지대의 윈저 성까지 활성화시킨 탓에, 전선은 길어지고 필요 병력은 급격히 증가했다.

그렇다고 윈저를 활성화시킨 게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안 했다면 메르텡은 그대로 갇혀서 숨통이 조여졌을 테니.

윈저까지 활성화한 건 어찌 보면 최선의 선택이기는 했다.

그만큼 국력을 급격하게 증가시킬 방법은 없었으니까.

"현재 전체적인 상황은 어떻게 됩니까?"

"윈저는 빌론, 스탄, 코르미르와 아만이 공격 중이고, 나르덴은 윌데스와 테티르가 공격 중이지. 여차하면 윈저는 버리면 되지만, 문제는 그곳에 구원자들이 다수 있다는 것일세."

구원자들.

최초로 메르텡을 활성화시킨 이들을 칭한다.

이신의 입장에선 그 누구보다 구해야 할 이들이다.

그들의 이름이 입에 담기자, 이신 또한 표정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데르타가 무너진 상황에서 윈저에 지원을 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고, 그 안에서 주요 인물들만 빼 오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아데르타 성은 왜 그렇게 된 겁니까?"

"배신자가 있었지. 좌표 교란 마법진의 비활성화로 뒤통수를 맞았네. 그 덕에 김강천, 지은주, 강지훈, 신하늘이 당한 것이고."

강천과 은주는 테티르에 수감되어 있고, 지훈과 하늘은 나르덴에서 다친 몸을 이끌고 수성 중이었다.

"윈저를 구할 방법은 없습니까?"

"솔직히 자네가 움직이지 않는 이상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네."

그 말에 이신은 침음을 삼켰다.

문양만 있었다면 이신이 가서 윈저를 지켜 냈을 것이다.

그러나 파란 문양을 얻기 위해서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다 보니,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윈저 함락까지 얼마나 걸릴 거라 보십니까?"

"그래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걸세, 윈저에 꽤 많은 투자를 했으니. 아마 길어도 한 달...아니, 3주가 최대이지 않을까 싶군."

생각에 잠긴 이신이 입가를 문질렀다.

'3주 정도라....'

나르덴을 공격하는 적국은 윌데스와 테티르.

메르텡에 인접한 국가 둘이다.

이 둘을 저지한다면 나르덴에서 아데르타 탈환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아데르타를 점령하고 있는 곳이 어딥니까?"

"아만이네."

아데르타를 다시 얻어 내려면 러시아까지 뚫어내야 한다.

결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를 잡아야 윈저를 구할 수 있다는 이야기.

입술을 매만지던 이신이 고민 끝에 생각을 굳혔다.

"윌데스에 연락하세요. 당장 병력을 빼지 않으면 지금 포로들을 다 죽이겠다고."

"포로를 다 죽이겠다고? 그건 너무 심한 처사일세. 다른 적국과 적대 관계가 극에 치달을 수 있어."

"진짜로 죽이진 않을 겁니다."

"그 정도 협박에 윌데스가 병력을 빼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텐데."

"아니요. 윌데스는 무조건 병력을 뺄 겁니다."

이신의 뜻 모를 확신에, 제이든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뜻인가?"

"이번에 잡아 온 자격자들 중에 윌데스의 핵심 인물이 있기 때문이죠."

나타샤 폴리.

독일 정보국 차장의 딸이자, KSK의 일원이며 공간 왜곡이라는 엄청난 고유능력까지 각성한 독일의 기대주.

독일의 입장에선 절대 그녀를 허무하게 잃고 싶지 않을 거다.

전생에서의 나타샤의 활약상만 보아도 이렇게 사라져서는 안 될 인물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다.

어차피 다 이긴 싸움, 자신들이 핑계를 대고 빠진다고 전세가 뒤집힐 거라 생각하지는 못할 테지.

"보라 문양의 자격자를 잘 대접해 주십시오. 그녀가 이번 협상의 히든카드가 될 테니까요."

* * *

파란 지대의 윈저 성.

그곳의 성주인 후안 바이런은 근심에 가득 찬 얼굴로 구원자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심각하네, 저들이 언제 어떻게 공격해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야."

"이제는 정말 수성전이 불가피한 상황이 됐습니다."

"적 병력은 줄여도 줄어드는 것 같지가 않아요. 망할."

박혜원은 습관적으로 또 욕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곳에 온 뒤로 입에 자꾸 욕만 붙는 것 같았다.

"스탄과 빌론의 병사들을 최전선에서부터 최대한 줄이긴 했지만, 코르미르와 아만으로부터 또 지원이 온 탓에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이대로 수성을 하다간 결국 함락은 시간문제일세."

"아무리 보이드 실드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지원군이 필요합니다."

윈저 성의 보호막을 담당하는 마법관이 침울한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제가 빌론의 사령관을 암살하고 오겠습니다."

"무모한 생각 말게."

박주혁의 터무니없는 제안에 후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도 알고는 있다. 박주혁이 왜 저런 무모한 제안을 했는지.

저런 방법이라도 성공시키지 않으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전혀 없기에 그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대책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내게 묶여 있는 이 족쇄만 아니었다면 내가 나서고 싶군."

"성주님은 '생명의 돌'을 지키셔야죠."

백현의 말에 후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전의 '후안 바이런'은 어땠는지 아는가?"

메르텡이 멸망하기 전, 오랫동안 생존해 있던 후안 바이런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능히 1천의 병사를 홀로 막을 정도라 했어요."

"아쉽구나, 지금의 내가 그 정도의 무력이 없다는 게."

이곳의 시스템상으로 만들어진 인간들 중 고위급들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서.

각 성의 성주들은 성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돌'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파괴되면 이 성에 귀속된 모든 이들이 사라지게 되니.

그들은 성채 밖을 나갈 수도 없다.

그들은 그저 그런 운명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겨 낼 겁니다."

박주혁은 그 정도의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윈저 성은 결국 함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의 후안 바이런은 오래 살 수 없었고 그것은 본인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예감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 회의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전해드릴 소식이 있어서 왔습니다!"

한 병사의 말에 회의실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병사에게로 집중되었다.

전시 상황에 이렇게 회의 도중에 들어올 정도라면 정말 중요한 일이 분명했다.

"뭐지?"

"이신...이신 님이 왔다고 합니다."

"뭐?"

"이신 님이?"

"선배가요?"

"대박!"

회의실에 있던 그 누구보다 언성이 높아진 이들은 구원자라 불리는 네 명이었다.

"젠장! 선배님은 왜 이제야 올라온 거야!"

"이제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막을 내리겠어."

"허..., 이 늙은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랬건만."

"됐다."

박혜원과 백현을 비롯해서 황강웅까지 안심한 얼굴을 했고, 박주혁은 드디어 해결할 방책이 생겼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후안은 그들에게 이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이신이란 자격자에 대해 호기심이 있었다.

지금도 대단한 무위를 보여 주는 이들이 이러한 태도를 보일 정도라면 어느 정도일까?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오래지 않아, 결국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봤자 한 명의 인간일 뿐. 이렇게 대단한 자격자들이 모여도 이 전쟁을 해결할 순 없었다.

이신이라는 그 자격자가 홀로 얼마나 큰 기적을 보여 주겠는가?

후안은 이신이라는 이름에 이들이 너무 의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오히려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온다 한들 변하는 건 없을 걸세."

싸늘한 그의 음성과 함께 한껏 달아올랐던 회의장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미안하군, 찬물을 끼얹은 거 같아서."

"하하하... 괜찮습니다. 뭐, 그게 현실적인 반응이니까요."

박주혁의 난데없는 웃음에 후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자네들은 그 이신이란 인간을 너무 신격화하고 있어. 인간은 인간일세."

"성주님. 일인 군단이라고 아세요?"

백현의 진지한 얼굴을 마주한 그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의 눈빛엔 이신에 대한 일말의 의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건 맹신도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일인 군단?"

"예, 아까 이전의 후안 바이런이 천 명의 병사를 상대할 수 있었다고 했었죠?"

"그랬지."

"전 그 사람이 천 명의 기사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 이상으로."

터무니없었다.

너무나.

천 명의 기사라니.

그 정도라면 하나의 국가의 전력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숫자인데, 일개 개인이 국가 하나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다른 이들이 말했다면 감옥에 가둬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었다.

여태까지 이들이 보여 준 업적이 있기에 쉬이 흘려들을 수 없었다.

"정말...그렇게 생각하는가?"

"예. 작전을 바꿔야겠습니다."

"작전을 바꾼다?"

그의 물음에 박주혁의 입가가 올라갔다.

"앞으로 최대한 버팁니다."

"뭐?"

"지원군이 올 때까지 성에서 꼼짝하지 않고 버티자는 말입니다. 저희가 할 일은 그것뿐입니다."

제96화

메르텡으로 돌아온 이신은 곧장 레딘을 만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예, 전하는 안에 계십니까?"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죠."

알현실에 들어가자, 국왕이 이신을 반갑게 맞이했다.

"임무를 마무리하고 돌아왔습니다. 전하."

"자네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 여태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던 일을 너무도 쉽게 해결했어."

"과찬이십니다."

"포상을 내려야겠지. 이번에도 보류하겠나?"

"마력의 재생률을 올려 주는 아티팩트가 있다면 받고 싶습니다."

"마력의 재생률이라...마침 자네에게 알맞은 게 있지."

아돌프의 명령을 받고 나간 병사가 잠시 뒤에 작은 목함을 들고 왔다.

"열어 보게."

천천히 열리는 목함 속에 보이는 푸른색의 귀걸이.

푸른 물방울에 박힌 하얀 가루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확인해 보게."

[게르마릭의 뼛가루 귀걸이]

심해에 사는 게르마릭의 뼛가루로 만든 귀걸이입니다.

# 마력 재생률 20% 상승

# 마력 흡수율 10% 상승

"이건...."

마력 재생률도 그렇지만 마력 흡수율이 달린 아티팩트는 흔하지 않다.

이신은 생각보다 너무 좋은 보상에 순간적으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맘에 드나 보군."

"그렇습니다."

"윌데스를 나르덴에서 물릴 수 있다고 했다 들었다."

"운이 좋게 윌데스의 주요 인물 중 하나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던 아돌프가 말을 이었다.

"테티르와 아만의 병사들을 뚫고 아데르타를 되찾는다면 이 정도의 포상으로도 부족할 테지."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 아이소시아 대륙의 판을 흔들 계획을.

* * *

"들어가라! 소란 피우지 말고. 너희를 보시기로 한 분이 오실 테니까."

양손과 다리에 각각 특수한 수갑을 찬 타다시 코에이와 미우라 카노코, 인유우 코고가 면회실에 들어가 앉았다.

"누가 또 우리를 부른다는 겁니까?"

"대충 빨리 끝내고 갔으면 좋겠는데요."

"쯧, 또 넘어오라는 시답잖은 얘기나 하려는 거겠지."

그들이 서로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이신?"

"뭐? 저 사람이 이신이라고?"

이번에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이신을 보자 동물원의 동물을 보듯 코고가 흥미로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이신은 껄끄러운 기분을 느끼며 그들의 반대편에 자리했다.

"윌데스가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자신들을 불러 놓고 다짜고짜 내뱉는 말이 윌데스의 배신이라니.

그 충격적인 사실을 어떻게 그의 말만 듣고 믿겠는가?

셋 모두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되지도 않는 거짓말은 왜 하는 거야?"

인유우 코고는 아예 믿지 않았고.

"아무리 그래도 윌데스는 너무하지 않습니까?"

코에이는 차라리 다른 국가로 거짓말을 했으면 믿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으며.

"설마…거짓말이죠?"

카노코는 반신반의했다.

"거짓말이라 생각해?"

이신은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라는 듯 태연했고, 오히려 그 반응에 일본 도전자들은 더 애가 탔다.

믿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쉬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었다.

코고는 이성적으론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꾸 그의 내면 어딘가에서 혹시나?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탑의 파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이다.

세계 최초로 한국을 누르기 위해 강대국들이 힘을 합치게 만든 사람.

설마 하던 의구심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 말을 한 이유가 뭐예요?"

카노코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신은 그들의 재촉에도 여유롭게 차를 음미하며 뜸을 들였다.

'이 정도면 생각은 충분히 했으려나.'

처음 윌데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대화의 주도권을 잡는 것과 동시에 분위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강한 인상을 박아 주고 대화에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그 후 정적을 통해 그들이 스스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만들어 주면 끝이다.

혹시? 라는 생각의 물꼬를 터 주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

여러 국가가 얽혀 있는 싸움에는 언제나 협상 테이블이 생기는 법이고, 대화 방식에 따라 그 협상의 진행 방향이 바뀐다.

이신은 세 사람의 표정을 보고는 자신의 의도대로 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일본은 아직도 한국에 적대적인가?"

이신은 그들의 물음에 대답이 아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원하는 대답을 못 들었지만, 그들로서는 그 질문에 관한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요?"

"메르텡이 왜 포로들의 편의를 봐주고 있는지 모르겠어?"

"…란탄도 연맹을 버리고 메르텡에 붙으라는 건가요?"

"하, 란탄이 그럴 거라 생각해?"

카노코의 물음에 비웃음을 내뱉은 코고가 말했다.

"란탄은 대륙과 떨어진 섬에 존재하지. 필연적으로 메르텡과의 동조가 없으면 결국 살아남을 수 없어."

"워프(WOFP)에선 메르텡을 란탄에 넘기기로 했죠."

그녀의 말에 이신이 코웃음을 쳤다.

"큭, 그건 표면적일 뿐이라는 거. 일본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러니까 너희 둘이 나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거고."

그 말에 카노코와 코에이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그가 정확히 그들의 의도를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희의 망명은 바라지 않아. 망명하는 순간 페널티가 생기니까. 다만, 난 란탄과의 신뢰 있는 동맹을 원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마족들의 영역 대부분을 미국과 중국이 먹고 있지 않나? 워프가 오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적어도 네가 살아 있는 이상은 지속되겠지."

"아니, 아까 내가 말했지. 윌데스가 넘어올 거라고."

"그건 거짓말이-."

"그리고 터키와 인도도 우리 쪽에 붙을 거다."

"뭐...?"

윌데스에 이어 디에르와 타샤라까지 넘어간다면 정말 워프에 대항할 새로운 세력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게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세 사람의 얼굴에 근심이 들어찼다.

"메르텡은 디에르와 타샤라와 접촉할 여유가 없었을 텐데요?"

카노코의 날카로운 물음에 이신은 속으로 움찔했지만,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너희가 모른다고 그게 다 사실인 것은 아니야."

이신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대화가 더 길어지면 허세가 들통날 수도 있기에.

"잘 생각해, 너희도 조국을 버리고 싶진 않겠지. 죽고 싶지도 않을 테고. 충분히 고민해 봐."

그렇게 방을 나서려던 이신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아, 그리고 내가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궁금하면 따라와."

"네? 어딜...?"

카노코의 물음에 대답 없이 이신이 방문을 나서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셋이 시선을 마주치더니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한 번 가 볼까?"

* * *

방에서 나온 이신은 곧장 성 밖으로 향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성과는 있었다.'

솔직히 일본 도전자들을 설득하는 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직 보여 준 것도 없고, 그들이 넘어오기에는 메르텡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으니.

그래서 조미료를 쳐서 거짓을 보탰다. 윌데스와 디에르, 타샤라의 합류.

이건 사실 현재로서는 거짓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거짓은 아니었다.

이신은 정말로 그렇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획대로만 된다면 충분해.'

아돌프 국왕과의 이야기도 마무리되었다.

이제는 다음 계획을 위해 움직여야 할 때.

지이이이이―

피의 웅덩이 속에서 나타난 릴리안이 박쥐 형태로 이신의 어깨 위에 안착했다.

"주인, 드디어 다른 놈들 피 맛을 보러 가는 거야?"

"피 맛은 무슨."

이신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아까 국왕에게 포상으로 받은 게르마릭의 뼛가루 귀걸이를 꺼내 착용했다.

마력이 차오르는 속도가 이전보다 확연히 빨라졌다.

마력의 흡수율 상승 덕에 대기 중의 마나를 마력으로 치환하는 효율도 더욱 올라가, 이제는 정말 릴리안을 상시 소환해 두고 있어도 전혀 부담이 안 될 정도가 됐다.

"이제는 나도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겠네."

"릴리안, 그렇다고 본체로 힘을 쓰는 건 안 돼."

"알고 있어. 칫, 도대체 그 몸은 언제 다 봉인이 풀리는 거야?"

"나도 모르겠네."

릴리안과 대화를 나누며 움직이는 것도 간만인지라 나쁘지 않았다.

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마차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왔네."

"저 아가들이야? 이번에 달고 다닌다는 짐 덩이들이."

"그래."

마차가 이신 앞에 서자, 익숙한 얼굴의 세 사람이 그곳에서 내렸다.

"어딜 간다는 거예요?"

"와, 성 밖으로 나온 건가? 이게 얼마 만이지?"

"도대체 우릴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겁니까?"

일본 도전자 셋을 내려 준 기사가 가방 세 개를 놓고 이신에게 경례를 하고는 돌아갔다.

이번 윌데스의 자격자들이 원마경을 뚫고 붉은 지대로 넘어온 것을 본 순간, 이신이 생각했던 것이 있었다.

상대가 했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게 어디 있겠나?

마침, 그보다 더한 곳을 뚫고 온 이들이 이신의 근처에 있었고 그 계획이 머리에 새겨지는 순간 그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카노코. 너의 클래스가 뭐라고 했지?"

"네? 갑자기 그건 왜...탐험…가죠."

말을 하면서 순간 불안감이 엄습한 그녀가 몸을 떨었다.

이신의 입가에 걸려 있는 희미한 미소가 눈에 띄었다.

"우린 원마경을 뚫고 테티르로 간다."

"네에?"

"무슨…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 우리는 왜 데리고 가는 거냐!"

카노코는 물론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따라온 건 너희지."

"이런 말은 없었잖아요!"

"거기가 얼마나 넓은지 알고는 하는 소리야? 수백 킬로가 넘어! 거길 아무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넘어간다고? 마족들은 물론이고 적국의 병사들을 마주칠 수도 있어!"

"적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

"길은? 길은 어떻게 찾을 건데? 잘못하면 마경 속 미아가 될 텐데?"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이신이 미소를 지으며 카노코와 코에이를 바라보았다.

"너희는 바다 위의 원마경을 뚫고 왔잖아."

그것도 고작 일주일 만에 넘어왔다고 했다. 아무리 최첨단 마도공학 장비를 동원했다지만, 기본적으로 저 둘의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이신은 그걸 이용해 테티르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호오...적국에 단신으로 들어간다라. 역시, 내 주인이야."

태연하게 말을 하는 박쥐를 본 세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손가락으로 릴리안을 가리켰다.

"저, 저 박쥐는 언제부터 있었대?"

"어머! 귀여워라! 말도 할 줄 알았네?"

"...정체가 뭐지?"

하도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을 겪다 보니 미처 릴리안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내 권속이야. 함부로 대하다간 큰코다칠 테니까 알아서 하고. 아무튼, 우린 이대로 출발한다. 저기 짐 들어."

이신이 기사가 놓고 간 가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시, 싫다! 난 못 가! 아니! 안 가!"

인유우 코고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비명을 꽥꽥 지르고는 바닥에 누워 버리자, 이신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두 사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함과 동시에 이신의 마력이 하늘로 솟구쳤다.

쿠구궁!!

치익- 치이익!

정확히 인유우 코고의 머리맡에 떨어진 선명한 낙뢰.

그 뇌기가 얼마나 강력한지, 낙뢰가 사라진 뒤에도 뇌기가 그 자리에서 소름 돋는 파열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묻지. 따라올 사람만 와라. 난 강요는 안 할 테니."

그 말과 동시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움직이는 이신.

그 뒷모습을 보던 카노코와 코에이는 주섬주섬 가방을 메고 따라 걸었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코고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뇌성에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그를 따라갔다.

"강요한다 말만 안 하면 강요하는 게 아닌 게 되는 건가...."

"조용히 해요! 그러다 또 벼락 맞으려고요?"

"말도 못 하게 해.... 그리고 아직 안 맞았거든?"

카노코의 다그침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코고가 힘없이 걸어갔다.

"기분 나쁜 냄새가 나."

"무슨 냄새?"

성채 밖으로 나오자, 주변에 보이는 마경의 모습을 본 릴리안이 얼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이 세계 전체에 배인 더러운 냄새...."

"마족들의 냄새를 말하는 건가?"

"응, 그것도 아주 지독한."

릴리안의 말을 들은 이신의 표정도 덩달아 차갑게 변했다.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큰 위험을 릴리안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야?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선배님도 그렇습니까? 저도 안 나는데 말이죠."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제발 좀 조용히 하고 가요!"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붉은 지대에 도착했다.

밝았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어둠에 마경이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국경을 지키던 병사들이 이신에게 경례를 한 뒤 장벽 밖으로 그들을 보내 주었다.

"와...진짜 들어가나?"

"이거 정말 맞는 거겠죠?"

막상 마경의 앞에 서니 긴장이 되는지, 세 사람은 그 자리에 굳어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들어가."

이신의 명령에도 셋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위험한데, 수갑 때문에 마력도 못 쓰고 신체 능력도 하락하여 저항조차 못 한다.

이신이 지켜 주지 않으면 그저 하급 마수 하나만 마주쳐도 목숨이 위태위태해질 게 뻔했다.

"쯧."

그들의 생각이 얼굴에 훤히 보여, 이신이 혀를 차고는 마력을 일으켰다.

[염동력]

"어…어?"

"꺄악!"

"크윽!"

이신은 그들의 비명은 무시한 채, 염동력으로 세 사람을 들어 올려 마경에 던져버리고는 자신도 그들을 따라 천천히 마경 속으로 들어갔다.

[마경에 입장하셨습니다.]

제9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