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7

제73화

남부 구역의 한 주점.

시끌벅적한 주점 밖으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곧 주점의 문이 거세게 열렸다.

콰앙!

금색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진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 들이닥치고.

그 사이로 은빛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의 성기사가 들어와 주점 안의 사람들 쭉 훑었다.

"그 불신자는 어딨지?"

그의 옆으로 나온 성기사가 다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손가락으로 뷔엘라를 가리켰다.

"저기 있습니다!"

한쪽 구석에서 거나하게 술을 퍼먹는 엘프.

적막감이 감도는 주점 안에서 홀로 여유롭다.

"드디어 왔나?"

"배짱이 두둑하군."

성기사들의 단장인 데바가 검을 꺼내 들었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 주변의 다른 이들은 다급하게 구석으로 몸을 피신했다.

"거 참, 배짱이 두둑한 게 누군지 모르나 본데."

시이잉―

예리한 발검 소리.

조금 전까지 풀어져 있던 그의 기세가 한순간에 일변했다.

"듣던 대로군, 제법이야."

뷔엘라의 기세를 직접 느꼈음에도 데바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 모습을 비웃던 뷔엘라가 먼저 쇄도했다.

채앵―!

검과 검이 거세게 부딪혔다.

뷔엘라의 마력과 데바의 신성력이 서로 얽히며 두 사람의 검이 어지러이 움직였다.

단숨에 목을 베어 버리려던 뷔엘라는 생각보다 강한 그의 실력에 조금 놀란 상태였다.

그리고 그건 데바 또한 마찬가지.

자신과 거의 호각을 이룰 정도의 실력이었다.

'나보다 조금 모자라는 정도인가? 어디서 이런 녀석이....'

상대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데바는 이쯤이면 됐다고 생각할 때.

뷔엘라의 검에 마력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온다.'

성기사와 사제의 합으로도 막기 힘들었다던 엘프의 그 기술.

직접 마주한 데바는 저 기술이 그들이 말한 것 이상임을 느꼈다.

[파절검]

폭풍 같은 검격이 데바가 만든 신성 방패와 맞부딪혔다.

'크윽!'

적의 검격은 자신의 방패에 생긴 자그마한 결함을 끈질기게 공략하며 파쇄하려고 했다.

이런 검격을 고작 성기사 하나와 사제가 막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콰아앙!

후두두둑.

파절검과 데바의 신성 방패의 충돌로 만들어진 여파가 주점 안의 가구들을 죄다 부쉈다.

솟구친 먼지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자, 잔뜩 지친 뷔엘라와 데바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제법이구나."

"...이 망할 옷만 아니었어도."

저런 녀석과 이렇게 비등비등하게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난 뷔엘라가 옷을 내던지고 싶었지만 이신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만하면 실력은 충분히 보았으니...저놈을 제압해라."

데바의 명령에 주변에 있던 성기사들이 뷔엘라에게 몰려들었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 할지라도 지친 지금 이 많은 성기사들을 상대할 순 없다.

뷔엘라는 다급한 눈빛으로 이신을 보았다.

그저 이신은 고개를 저으며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안 도와줘?'

그가 눈으로 물었다.

'조용히 끌려가.'

이신도 눈으로 대답했다.

뷔엘라가 옷을 벗지 않은 이유도, 성기사들이 쳐들어올 것을 알면서도 여유가 있었던 것은 이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이신이 나서기만 한다면 뷔엘라는 굳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 혼자서도 저 정도는 모두 쓸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억울한 얼굴을 한 그가 이신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 모습에 데바와 성기사들의 시선이 이신에게로 향했다.

"뭐지? 한 패인가?"

누가 보아도 뷔엘라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 모습에 데바가 성기사들에게 눈짓했다.

"끌고 와."

"예!"

성기사들에게 속박당하기 직전, 뷔엘라는 이신에게 다가가는 성기사들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들, 저 괴물이 순순히 따라갈 거 같은가?'

무방비하게 서 있는 이신의 옆으로 다가간 성기사 둘이 그의 양팔을 잡아끌었다.

'어라?'

순순히 끌려가는 척하고 농락이라도 하려는 건가?

예상외의 상황.

데바의 앞까지 끌려간 이신이 태연한 모습으로 그를 보았다.

'너무 태연하군. 역시 뭔가 있다.'

데바의 날카로운 검 끝이 이신의 턱 밑에 닿았다.

검이 워낙 예리한 탓에 살짝 닿은 것만으로도 피가 배어 나왔다.

"정체가 뭐지? 처음 보는 얼굴이군."

"얼마 전에 이곳에 왔으니 모르실 겁니다."

"이 불신자와는 아는 사이인가?"

"모릅니다."

그 말에 눈을 희번득 뜬 뷔엘라가 이신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근데…저 불신자는 아닌 거 같은데?"

"조금 전에, 주점에서 만나 술을 몇 잔 같이 먹었을 뿐입니다."

"그렇다기엔 정황이 너무 의심스럽군. 불신자가 아니라면 교회에서 밝혀질 거다. 순순히 따라와라."

"불신자가 아니라는 증명만 하면 되는 겁니까?"

"증명이라...어떻게 한다는 거지?"

오른손으로 데바의 검면을 살짝 눌러 내린 이신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배어 나온 피가 목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렸다.

이신이 검에 베인 부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신성한 치유]

그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금빛의 신성력.

턱에 있던 가벼운 상처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신성력?"

데바도 그러한 증명을 보여 줄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정말로 놀란 얼굴을 했고, 주변의 다른 이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저는 신께 선택받은 신자입니다. 그런 제가 불신자겠습니까?"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결백.

이건 추궁을 하기는커녕 교회에서 환대해야 할 일이었다.

"여기서 신께 선택받은 신자를 만날 줄은 몰랐군. 미안하네, 무례를 사과하지."

가벼운 사과를 건넨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저, 저, 저!"

얼마나 황당한지, 말까지 더듬는 뷔엘라.

그는 인간은 원래 저렇게 뻔뻔한 종족인가? 하는 생각만 계속해서 되뇌었다.

"닥쳐라! 이 불신자. 감히 신께서 선택하신 신자를 모욕해?"

마력을 봉인하는 수갑을 찬, 뷔엘라는 힘없이 성기사의 발길질에 차여 넘어졌다.

"윽! 야이...!"

황당함에 순간 그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저 이글이글 끓는 눈으로 이신을 바라볼 뿐.

"자네, 이름이 뭔가?"

"이신입니다."

"난 데바일세. 이곳에 온 건 교회에 오기 위함이었나?"

"예."

"그럼 우리와 함께 가겠나? 교회에서도 좋아할 걸세."

"할 일이 있어서, 볼 일을 마치면 제가 교회로 찾아가겠습니다."

"흐음... 그런가? 가면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군."

"교회에 도착하면 데바 님께 꼭 들르겠습니다."

"알았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연기에 뷔엘라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이신을 보았다.

처음부터 이럴려고 나를 데리고 온 건가?

성기사들에게 처참하게 죽으라고?

이 수양복도 그래서 입힌 것인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던 뷔엘라가 성기사들에게 끌려가면서도 이신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 뜨거운 시선을 받던 이신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꼭 눈으로 욕하는 거 같네.'

이렇게 성기사들에게 끌려가게 한 것은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교회에 가서 뷔엘라가 할 일이 있다.

지금은 흥분해서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내일이 되면 읽으라고 전해 준 쪽지가 품 안에 있다. 정신 차리면 알아서 읽고 행동할 것이다.

"돌아간다!"

데바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성기사들이 주점을 떠났다.

한차례의 소란이 지나간 직후, 주점 안은 초토화가 된 상태.

데바와 뷔엘라의 싸움의 여파로 주점의 가구들은 완전히 다 박살 나 있었다.

그러나 신의 대리 집행이라는 명목하에 교회의 일원들은 일반 시민들의 피해 따윈 일절 생각하지 않았다.

"난리도 아니구만."

"아휴... 이거 언제 다 치워."

투덜대는 주점 안의 사람들이 정리를 시작하고 주방 안쪽에 있던 여자가 이신에게로 다가왔다.

아까 이신에게 접촉했던 그 여자였다.

"직접 해결한다는 게, 동료를 버리는 일이었나요?"

아까와 달리 경멸 어린 눈빛이 이신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정말로 실망한 상태였다.

책임감 있고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동료를 버릴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었다.

"이 주변에 있는 손님들 전부 너희 집단의 사람들인가?"

"네? 갑자기 무슨...말 돌리지 말아요!"

"여기 시민들이 보이는 광신도적인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아서. 교회의 사람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신성력을 보인 시점에서 내게도 똑같은 태도를 보여야 맞지 않나?"

이신의 담담한 음성이 날카롭게 그녀의 허를 파고들었다.

"맞아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저희가 배치해 둔 사람들이죠. 근데 괜한 짓을 했군요."

실망감을 잔뜩 표출하던 그녀의 시선이 이신의 눈동자를 향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그의 눈을 마주하자, 순간 자신이 생각을 잘못한 게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버린 게 아니야."

"네?"

"그깟 성기사들이 끌고 간 걸로 호들갑 떨지 말고, 빨리 마스터한테나 안내해."

"그깟 성기사들이라뇨? 교회에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하는 말인가요!"

"저놈들 정도론 뷔엘라를 어찌 못해."

그저 허세를 부리는 건가 싶어 보았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그가 보여준 모습은 못 미더웠지만 그녀의 감은 그를 믿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그 신성력은 뭐죠? 혹시 교회의 사람은 아니죠?"

"...."

이신은 '정말 진심으로 묻는 거냐?'라고 말하듯 그녀를 보았다.

그 눈빛을 보자, 그녀도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을 했는지 깨닫고는 얼굴이 뻘게져서 고개를 돌렸다.

"그, 그냥 한 번 해 본 말이에요! 안내해 줄 테니, 가요."

* * *

남부 구역의 비밀지부.

그녀의 안내에 따라 이신은 숨겨진 통로를 통해 비밀지부에 들어올 수 있었다.

"여기가 마스터가 있는 곳이에요."

그녀가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허가가 떨어졌다.

"들어가시면 돼요."

"그래."

끼이익-

낡은 경첩이 소름 끼치는 소음을 내며 문이 열린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

두꺼운 왼쪽 팔과 다르게 허전해 보이는 반대쪽 팔이 눈에 띈다.

대충 걸친 겉옷 안으로 보이는 수많은 검상들.

희미한 호롱불 하나만이 어두운 방 안을 밝히고, 그 빛에 비친 남자의 두 눈은 지긋이 감겨 있다.

"네가…이신인가?"

그는 다리를 꼰 채, 하나뿐인 왼팔로 연초를 호롱불에 가져다 댔다.

치이익-

스읍, 후우-

그가 연초를 한 모금 길게 빨고 뱉자, 매캐한 연기가 서서히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래."

"반갑다."

교회에 대척점에 서 있으며, 이곳 18층의 클리어를 위해서는 반드시 협력해야 하는 비밀 단체 [흑야]의 수장.

"레이커스라 한다."

교회에서 억울하게 버려진 후로, 칼을 갈며 복수의 날만을 기다리던 레이커스가 이신을 맞이했다.

"죽음의 통찰자, 죽음의 지배자...세계의 개척자, 그레트 시엘의 우승자...."

그의 입에서 나열되는 이신의 수많은 칭호들.

"마법의 개척자, 강철의 마법사...7대 원소의 계승자... 마계 군주의 머리를 부순 자."

아무리 세계의 개척자 칭호 효과로 인해 이신의 소문이 퍼졌다 하더라도, 이 모든 걸 레이커스가 알고 있다는 건 이질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군."

그의 나지막한 감탄 뒤로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치이익―

연초의 잎이 아주 천천히 타올랐다.

'그런가....'

이신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레이커스의 입에서 뿜어지는 연기가 어둠에 동화되듯 사라진다.

희미하게 일렁이던 호롱불은 아슬아슬하게 그 불을 유지하고 있다.

쿠우우웅―

문이 닫히는 소리가 길게 늘어지며 천천히 들려왔다.

17층에서 느꼈던 죽음에 대한 감각.

안진 방장이 멸공파를 쏘아 낼 때 치솟았던 위기감이 또다시 그를 짓눌렀다.

"고작."

레이커스가 말하는 음절 하나하나가 천천히 귀에 박힌다.

그의 왼쪽 어깨가 살짝 움직이고.

후웅.

아슬아슬하게 일렁이던 호롱불이 무언가에 휩쓸려 꺼진다.

"18층의."

공간의 중심이 통째로 잘려 나가는 듯한 감각.

"도전자 따위가."

작은 불빛조차 없는 어둠뿐인 공간에서 한 줄기의 선이 지나갔다.

제74화

섬뜩한 감각이 이신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3,2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방비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의 검격이었지만, 이신은 이 상황을 그대로 예측하고 있었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

아니 스테이지에 들어가기 전, 신들이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점부터.

'나를 노릴 수 있는 인물 중 유력한 이가 레이커스였으니까.'

마력을 끌어 올렸다.

유일하게 방 안을 비추던 불씨가 사라지고 어둠에 잠겨 시야의 의미가 없어진 지금, 적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감각밖에 없다.

'설마 했는데, 역시였나.'

애초에 양쪽 눈 모두가 실명된 레이커스에게 시야의 차단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시이잉—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직 마력의 파장으로만 적의 움직임을 예측해야 한다.

느낀 다음에 반응하면 늦는다.

애초에 이 정도의 속도전에서 시야는 무의미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집중을 흩트릴 수는 있기에, 이신은 곧장 마법을 펼쳐 방 안에 빛을 밝혔다.

[라이트(Light)]

빛의 구체가 허공에 떠오르는 순간, 일렁이는 배경이 구체를 베어 내고.

쿠우웅!

그와 동시에 폭발하는 화염이 방 안을 뒤덮는다.

라이트는 놈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을 뿐.

그러나 이신은 이 정도에 적이 피해를 입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라이트닝 차지(Lightning charge)]

[스틸 핸드 그랩(Streel hand grab)]

순식간에 올라간 방 안의 열기와 함께 퍼지는 스파크들이 레이커스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땅에서 솟구치는 철갑 손이 놈을 잡아채려 했지만.

"생각보다는."

콰드득!!

철갑 손이 잡은 것은 레이커스의 잔상일 뿐, 바로 옆에서 휘둘러지는 검격이 철갑 손을 갈라냈다.

"별거 없군."

레이커스의 표정은 무표정했으나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상대는 들은 위명에 비해 한참이나 못 미치는 실력이다.

신들의 전언을 생각하여 방심할 생각은 없었으나,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고작 이런 놈한테...."

그의 팔에 마력이 휘감겼다.

환영처럼 일렁이는 검이 여러 잔상을 남기며 그대로 휘둘러졌다.

자신이 그동안 죽을 둥 살 둥 검을 휘두르며 연마한 기술.

고작 이런 놈에게 사용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싸움에 걸린 것이 많기에 그는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환영참]

허공에 생겨나는 수십 개의 검들이 일제히 이신을 베기 위해 휘둘러졌다.

도저히 피할 만한 공간이 없기에, 사방을 점유하는 검을 모조리 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과거의 내가 아니었다면 조금 당황스러웠겠지.'

환영참을 맞이하는 이신은 여유로웠고.

[실드]

이신이 만들어 낸 실드는 단 한 곳에서만 생성되었다.

작은 무형의 막이 여러 겹 겹쳐지며 환영참이 그 실드를 두들겼다.

가가가가각!

덧씌워진 실드가 환영참에 의해 계속해서 갈려 나갔지만, 레이커스의 검은 결국 그 실드를 뚫지 못한 채 튕겨 나갔다.

"...어떻게?"

상대는 수십 개의 환영 검들 중 정확히 하나의 검격만을 노리고 실드를 전개했다.

처음 보는 기술을 그 찰나의 순간에 파악하고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겹쳐, 기술의 반동으로 움직임이 둔해진 순간.

푹!

"커헉...!"

검은 공간 위로 나타난 스켈레톤의 검이 레이커스의 심장을 뚫고 나왔다.

쿨럭!

순식간에 역류하는 핏물 때문에 목이 메었다.

억지로 참아내고 있지만 입 안 가득한 핏물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내렸다.

"레이커스."

바닥에 무릎 꿇은 채로 이신을 올려다보는 레이커스의 핏발 선 눈에 원통함이 사무쳤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울분이 섞여 들어가 있었다.

원래라면 아무리 이신이라도 이 한순간에 공격의 허실을 파악하고 실드를 그런 식으로 전개하지는 못했을 테지만.

이미 레이커스의 환영참은 전생에서 여러 번 보았던 기술이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끊임없이 이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너를 버린 이들을 벌하고 싶어?"

급격하게 커지는 동공.

"크륵...!"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목을 적신 핏물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네 힘으로 그 복수를 하게 해 주지."

콰직!

워리가 내리친 검이 레이커스의 목을 꿰뚫었다.

죽음의 향으로 가득한 공간.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외팔이 스켈레톤, 레이커스가 검은 마력을 내뿜었다.

"이제 너의 그 사무친 억울함을 말해 봐."

화아악—

그 말과 함께 바뀌는 배경.

지금과 다르게 레이커스는 양팔과 두 눈이 모두 멀쩡했다.

은색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진 갑옷을 입은 그는 교회의 성기사단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교황의 은밀한 부름에 달려간 그는, 비밀 임무를 받았다.

"도시 밖에 신을 모욕하는 악의 집단이 창궐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 네가 그들의 수장을 처리하고 오거라."

"저 혼자서 말입니까?"

"아니, 네가 가장 믿는 수하 소수만을 데리고 가거라. 이 일은 은밀히, 아주 은밀히 처리해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교황의 제일 검이라 불리며 교회의 모든 이들에게 신망을 받고 있는 레이커스가 교황의 명으로 악의 교단을 처리하러 움직였다.

교황이 직접 내린 임무이기에, 레이커스는 자신을 가장 잘 따르는 수하 다섯을 데리고 몰래 도시를 빠져나와 교황이 말한 곳으로 향했다.

음침하기 짝이 없는 작은 마을에는 역병이 돌고 있었고, 사람들은 죽어 나가고 있었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이것도 악의 교단이 한 짓입니까?"

"그렇겠지. 나는 이렇게 시민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으니."

분노에 가득 찬 레이커스가 정보를 토대로 그들의 본거지로 잠입했다.

철저히 그 기운을 숨기고 있었지만, 신성력이 뛰어난 그들에게는 그 악의와 적의가 여실히 느껴졌다.

'교황님의 말이 맞았군.'

교황이 미리 알려 준 정보로 입구에 쳐진 암호를 풀어낸 그들은 몰래 안으로 잠입할 수 있었다.

'근데, 어떻게 교황님은 이러한 것들까지 알고 계신 거지?'

그런 의문이 드는 것도 잠시.

안쪽에 있는 악의 교단에게 들킨 레이커스 일행은 깊숙이 침투했고, 결국 악의 교단의 고위 사제를 맞닥뜨렸다.

'...생각보다 너무 수월하다.'

여태 이러한 불신자들의 무리를 처단한 게 몇 번이나 되었지만 처음 느꼈던 그 악의 기운은 이전의 그 어떤 무리들 보다 강했었다.

근데 막상 들어오니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느낌.

이 앞에 있는 고위 사제도 마찬가지였다.

서걱!

레이커스의 검에 허무하게 목이 잘려 떨어졌다.

치열한 전투도 아니었다.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고 여기 있는 성기사 중 셋만 왔어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전력이었다.

"단장님, 이상합니다."

"생각보다 너무...."

"무언가 잘못됐다. 빨리 돌아가서 교황님께-."

콰아앙!!

그때, 저 멀리 입구에서 들려오는 폭발 소리.

누군가가 이 교단의 입구를 강제로 뚫어 내면서 나는 소리였다.

그 순간 레이커스는 온몸 가득 느껴지는 불안감과 두근거리는 심장에 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했다.

설마 하면서 아닐 것이라 계속해서 되뇌고 있었지만, 결국 추론되는 것은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저 입구에 나타날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인물들이 아니기를.

헛된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이기를 바라고 있을 때.

그의 바람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레이커스 단장님?"

"설마 했는데...."

"교황님의 말씀이 맞았군요."

교회의 사람들.

그 뒤로 보이는 교황까지.

그들은 자신들을 이 악의 교단의 불신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해, 오해입니다! 이건-."

"시끄럽다!"

분노로 가득 찬 교황의 음성이 레이커스의 변명을 막았다.

"내 너를 믿었건만...."

"교황님!"

"그 더러운 입으로 나를 부르지 마라. 당장 이 불신자들을 포박해라! 불가능하다면 죽여도 좋다!"

교황의 명에 교회의 인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장님!"

"젠장, 일단 빠져나간다."

"저희가 길을 열겠습니다. 단장님이라도 사셔야 합니다."

"아니, 모두 살아서 나간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단장님이라도, 제발 살아 주십시오. 그리고 저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

레이커스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곳에서 모두가 살아 나가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꼭 살아라."

레이커스가 눈물을 머금으며 투구를 눌러썼다.

* * *

교단의 신전 밖, 무리하게 교회의 성기사들을 뚫다가 날아간 오른쪽 팔과 잃어버린 한쪽 눈.

반대쪽 눈의 시야도 조금씩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멜프로페!"

교황의 이름을 외치며 악을 내지르는 레이커스가 바닥 난 신성력을 쥐어짜내 눈을 회복하려 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예전부터 몸이 무언가에 침식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고위 사제를 처리한 이후부터 신성력의 사용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를 죽이는 게 저주를 발동하는 트리거였던 것일까?

교황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악의 교단의 수뇌는 이미 자신의 옆에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그 수뇌에게 몸을 내어 주고 있었다는 것을.

삶도 희망도 다 사라졌다.

그가 가졌던 명망과 신앙들은 모두 사라졌고, 설 수 있는 자리도 없었으며, 몸도 성치 않았다.

'이대로 죽어 버리는 게....'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역수로 쥐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막았다.

"레이커스 님."

"성…자님?"

레이커스는 그의 얼굴을 보자 절망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 따위 죽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니.

"크윽...."

그대로 검을 바닥에 떨어트린 그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억울한 감정이 그대로 북받쳐 올라왔다.

"성자님...저는 억울합니다."

"알고 있어요. 레이커스 님은 신실한 신자라는 것을."

의외의 말이었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라면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실낱같은 희망.

"미안해요…저는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어요."

"아…버지...설마, 교황이...?"

"네, 숨겨서 미안해요. 교황님께서는 아들이 성자가 되었다고 하면 신자들 사이에서 말이 나올 수 있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숨겼어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레이커스는 그 말을 듣고 체념했다.

정말 끝이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몸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신성력이었다.

"성자님?"

"눈은 지금의 제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도망가세요. 이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예요."

그는 분명 이 몸 안에 담긴 악의 힘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놀란 듯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미...알고 계셨던 겁니까?"

"미안해요. 그리고 살아 주세요. 언젠가는 저희 아버지의 일탈을 바로잡을 수 있게."

그렇게 자리에서 도망친 레이커스를 뒤로한 채, 과거의 회상이 사라졌다.

그가 겪었던 과거.

이 세계가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신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했나?"

"제대로...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

"다만, 주인님을 죽이라고, 그리하면 사도가 될 것이라고, 이 망가진 몸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뒤에 성자를 만나야 합니다."

"그 꼴로 나가면 곧장 성불하겠네."

"예, 바로 성자의 신성력에 정화될 겁니다. 주인님이 나가셔야 합니다."

"그래."

레이커스와 마무리를 지은 이신은 난장판이 되어 버린 방 안을 보았다.

가구, 집기들이 다 망가진 것은 물론이고 벽면도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당분간 이곳에 아무도 들이지 말고 살아있는 척 행세해."

"예."

그렇게 명령을 마친, 이신이 방 밖을 나가자 아까 자신을 안내해 준 그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걱정 가득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안에서의 소란을 듣고 온 듯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마스터는...."

"가 봐."

침음을 삼킨 그녀가 이신을 지나쳐 방문을 두드렸다.

"마스터...?"

"무슨 일이지?"

방 안에서 들려오는 마스터의 목소리.

성대를 긁는 듯한 목소리, 무언가 이상함에 그녀가 그를 떠보았다.

"이틀 뒤에 있는 일정은 어떻게 할지 여쭈러 왔어요."

"당분간 내게 일이 생겼다. 성자와의 만남은 저 녀석을 보내라."

"예? 아무리 그래도...."

"그만, 내가 두 번 말하는 거 좋아하지 않는 거 모르지는 않겠지?"

"알겠어요."

짧게 대화를 나눈 그녀는 안에 있는 게 레이커스가 맞음을 확신했다.

성자와의 일을 아는 사람은 레이커스와 자신 둘뿐이니.

말하는 방식도 레이커스와 똑같았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죠?"

"알 거 없어."

"알겠어요. 이제 같이 일해야 하는 사이니 제 소개를 하자면. 제 이름은 마리아예요."

"그래."

"이미 알고 있다 해도 자기소개 한 번 해 주면 안 되나요?"

"성자는 어떤 자지?"

깔끔하게 무시당한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그에 대해 말했다.

"성자님은...간단히 말하면 교회 최강의 신자죠. 마음만 먹으면 교황조차도 압살할 수 있을 정도로."

제75화

이틀이 지난 뒤 야밤.

이신은 마리아와 함께 성자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 나왔다.

"저기 오시네요."

저 멀리 다가오는 금발의 미남자.

레이커스의 과거에서 보았던 그 여리여리한 소년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성자님."

성자를 마주한 마리아가 고개 숙이며 성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폰 아드리안이라 합니다."

"이신입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웃는 얼굴로 이신을 맞이하는 성자.

이신은 그 모습 안에 담긴 강자의 여유를 보았다.

"레이커스 님이 사정이 생겨서 대리인으로 이신 님이 오게 되었어요."

"어떤 사정이 생긴 겁니까?"

부드러운 물음 안에 담긴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있다.

조금이라도 흠칫하면 그대로 찔릴 것 같은.

마리아는 그 물음에 움찔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게-."

"제가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말을 끊은 이신이 그 이유를 말했다.

"저를 말입니까?"

"예, 그 대단한 명성의 성자님이 어떤지 보고 싶어서 말이죠."

"대단하다라...명성으로 따지면 저보다는 이신 님이 더 대단하지 않습니까?"

성자도 신과 접촉한 것인가?

흑야는 교회에 반하는 세력이라 그렇다 해도, 이런 폐쇄적인 도시 안에서 바깥에서 발생한 소문을 알고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죽음의 통찰자. 이런 외지까지 그 이름이 들려올 정도라면 엄청난 분이시라 생각합니다. 거기다 그 레이커스가 자신을 대신해 보내기까지 했으니."

성자의 부드러운 눈동자가 이신을 관찰하듯 훑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 도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과 귀를 막고 살지만, 저는 아닙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식도 챙겨 듣고 있죠."

"신도들을 다스리려면 외부의 소문은 듣지 않는 게 더 좋지 않습니까?"

"전 지금의 방식에 대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하죠. 그들이 생각을 하는 게 두려운 것이라면, 그건 진짜 신의 대리자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생각을 할수록 더욱 깨닫게 되겠죠. 신의 위대함을."

언뜻 들으면 성자는 교황보다 더 깨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따지고 들수록 그가 교황보다 더욱 맹목적인 신의 신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인간이란 머리가 있다면 당연히 신의 위대함을 알아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이신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어찌 되었든, 제 증명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예, 같은 배를 타게 된 것을 환영합니다. 이신 님."

"감사합니다."

"교황의 전횡이 심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교회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레이커스 님과 같이 이신 님이 움직여 주신다면 거사는 성공할 겁니다."

"레이커스 님은 합류하지 못합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사실, 레이커스 님이 수련 중 큰 내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겸사겸사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겁니다."

심각한 얼굴로 말을 하는 이신을 보며 성자 역시 고민에 빠진 듯 미간을 좁혔다.

"음…그건 변수군요. 레이커스 님의 전력 부재는 매우 큰데."

입술을 매만지던 그가 무언가 결심한 듯,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요, 저도 나서겠습니다. 아무리 이신 님이 합류했다 하더라도 레이커스 님이 빠진 이상 확실하게 거사를 마무리 지으려면 제가 나서야겠죠."

"직접 교황을 치겠다는 소립니까?"

"예. 제가 수면 밖으로 나서지 않으려 했던 건, 교황님의 기존 세력들을 전부 온전히 흡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회의 대부분은 현재 교황님의 세력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의 말을 음미하던 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 병사들의 시선을 흑야에서 끌어 주십시오. 그럼 저와 이신 님이 직접 교황을 치는 걸로 하죠."

"좋습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뭡니까?"

"제 동료가 교회에 갇혀 있습니다. 거사 전날까지 그를 풀어 주십시오."

"그 정도야 쉽습니다."

* * *

거사의 날이 다가왔다.

흑야의 인원들이 모여 교회를 습격할 준비를 마쳤고, 이신 역시 그들을 도와 교회 전면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레이커스 님이 없는 흑야는 교회의 시선을 오래 끌지 못해요."

마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지원군이 있을 테니까."

"지원군이요?"

"그래. 교회의 시선을 제대로 끌어 줄 지원군들."

자정이 되는 순간 흑야의 인원들이 교회의 정문을 습격할 것이다. 이신은 그때를 노려 교회 안으로 들어가고, 안에서는 성자가 교황을 찾아갈 것이다.

거기서 교황을 처리하면 끝.

"개시합니다."

흑야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화약과 폭탄이 단단한 철문을 두들기고, 사방에 매캐한 연기들이 흩날렸다.

화들짝 놀란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교회 안에서 우르르 몰려나와 흑야의 인원들을 막기 시작했다.

"당장, 저 불신자들을 처단해라!"

흑야에서 꽤 열심히 준비한 덕분에 성기사들이 그들을 바로 밀어내지는 못했지만 그것도 잠깐 버티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 전장의 흐름은 이미 교회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신 님!"

마리아가 안절부절못하며 이신을 찾았다.

"이…신 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이신이 보이지 않았다.

놀란 눈으로 허겁지겁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의 모습은 눈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어디 간 거야!"

그녀가 초조한 마음으로 교회의 정문 쪽을 보고 있을 때, 사제들의 대규모 신성 주문으로 급격하게 전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중상을 입었던 성기사들이 회복된 것뿐만 아니라 전투력까지 더 높아진 탓이었다.

"안 돼, 이제 퇴각을...."

그녀가 퇴각 신호를 보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온 전장에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뭐, 뭐지?"

그림자 위로 올라오는 하얀 뼈마디.

마치 무덤에 잠들어 있던 시체들이 땅을 뒤집고 올라오는 것처럼 난데없이 땅바닥에서 스켈레톤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뭐야?"

"해골? 언데드들이다!"

"으아아악!"

화들짝 놀란 흑야의 일원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했지만, 그건 금방 잠재워졌다.

"다들 조용해라! 전투에 집중하라! 이들은 아군이다!"

매우 익숙한 말투.

걸걸한 음성이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팔이 없는 외팔이 스켈레톤.

두개골에는 익숙한 안대가 씌워져 있고, 왼팔에 들고 있는 검 또한 그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레이…커스 님?"

"난 이 답답한 족쇄에서 벗어나, 드디어 진정한 세상을 찾았다. 죽고 나서야 너희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구나."

그의 말에 사방에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쩌다가...그런 꼴이 되셨습니까?"

"내가 선택한 길이다. 우선은 저 망할 교회의 놈들을 처리해라. 물러서지 마라!"

레이커스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환영참]

그의 진신절기가 검 끝에서 휘몰아쳤다.

사방에 일렁이는 검의 분신들이 성기사들을 향해 쇄도했다.

"레이커스 님이 계신다!"

"포기하지 마! 돌격해라!"

급격히 치솟는 흑야의 사기.

거기에 더해 언데드들의 합류까지.

전장의 흐름이 다시 흑야에게로 넘어갔다.

"불신자들이 드디어 본 모습을 드러냈구나!"

"악의 잔당들이다! 저 사악한 언데드들을 처리하라!"

교회의 주적이라 할 수 있는 언데드.

언데드의 출현은 교회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크윽! 신성력은 너무 싫다."

"버텨라!"

"크르라라라락!"

언데드들의 상극이라 할 수 있는 신성력.

그나마, 이신의 검은 마력으로 인해 신성력에 어느 정도 저항하고 있었지만 상극인 건 마찬가지였다.

대규모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을 상대하는 언데드들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젠장, 저 망할 것들이랑 어떻게 싸우라고 여기 부른 거야?"

"크르라라락! 아프다!"

"미치겠군, 내 [죽음의 손길]도 안 통해."

성기사 하나를 가시로 찔러 죽인 데칸이 신성 마법에 얻어맞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바크와 칼렌도 신성 마법에 얻어맞고 뒤로 주르륵 밀려나, 불만을 터트렸다.

"상대는 가려서 싸우는 게 아니네."

"스님은 빠지쇼!"

"염병은, 네가 약한 걸 탓해야지."

"그래, 이 멍청이가 간만에 옳은 말을 하네."

"뭐? 진짜 한 판 붙을까?"

"그만해라! 싸움에 집중해!"

벨티아르의 일갈에 메이와 워리가 슬쩍 기세를 낮췄다.

아무리 이신의 언데드들이 강하다 하더라도, 저 바퀴벌레 같은 성기사와 성직자들을 쓸어버리는 건 힘든 일이었다.

"우리는 시간만 벌자고."

* * *

철컥!

수갑을 찬 상태로 바닥에 엎어진 채, 잠에 빠져 있던 뷔엘라가 철창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으…음?"

"아주 정신없이 자는구만, 일어나라."

"뭐야… 이제야 꺼내 주는 건가?"

"잠꼬대 받아 줄 시간 없으니까, 일어나!"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간수장이 뷔엘라의 옷을 쥐고 짐짝 들듯 그를 일으켰다.

"어디로 가는 거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뷔엘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원래라면 몇 더 있어야 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너를 처형하라는 명이 왔다. 그러니 목이나 잘 간수해라."

"뭐, 뭐? 나를 처형해? 누구 맘대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는 뷔엘라를 보며 그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프들은 다 이렇게 정상이 아닌가?'

그대로 끌고 올라간 곳에는 병사들이 방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놈, 옷을 갈아입혀라. 처형대에 올라가야 하니까."

짐짝 던지듯 그를 다른 병사들에게 던져 넣은 그가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바깥에서는 불신자들이 난동을 피우고 있는데, 이런 시기에 고작 이런 엘프 하나 처형한다고 일을 시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쯧."

치이익!

그가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 할 때.

콰아앙!

안쪽에서 발생한 난데없는 폭음에 연초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그가 안으로 들어갔다.

우드득- 우득.

입고 있던 누더기 같은 옷을 벗어 던진 엘프가 목과 손가락 뼈마디를 풀고 있었다.

"드디어 이 답답한 옷을 벗었군."

"어, 어떻게?"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간수장이 바닥을 보았다.

수갑이 우그러진 채로 끊어져 있었다.

"고작 이따위 걸로 나를 가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우우웅-

간수장의 손에 모여든 신성력이 기습적으로 날아갔지만 뷔엘라의 손에 의해 저지되었다.

쿠웅.

"뭐야? 아까 그 거만함은 어디 갔지?"

언제 주워 든 건지, 병사의 검을 든 그가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니 신성력이 폭파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런 미-"

퍼억!

검면에 머리를 얻어맞은 간수장이 그대로 기절해 쓰러졌다.

"맘 같아서는 그냥 확! 그래도 여기 데리고 와 줬으니 살려는 주마."

그렇게 방을 나서려던 뷔엘라가 걸음을 멈췄다.

"쯧."

그리곤 뒤를 돌아 땅에 떨어진 수양복을 집어 들었다.

"하아...."

저 누더기 같은 옷을 여기다 버리고 가고 싶었지만, 이신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 한숨만 계속 나왔다.

"망할 놈. 어떻게 이걸 다 예측하는 거야?"

뷔엘라는 쓰러진 간수장의 불에 쪽지를 갖다 대고는 혀를 찼다.

"쯧, 쓸데없이 갇힌 이들을 왜 풀어주라는 거야?"

* * *

똑. 똑. 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라."

높디높은 천장과 금빛으로 가득한 방 안.

교황이 방 안의 창문을 통해 바깥의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교황-."

철그렁!

온몸에 두꺼운 갑옷을 두른 기사가 검을 내밀며 성자를 막았다.

"더 이상 다가가지 마십시오."

"…감히 네가 나를 막는 것이냐?"

"내가 시켰다."

교황의 서늘한 목소리에 성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교황님."

"아버지라 하거라. 우리 둘뿐이니. 내 수호 기사는 나와 한 몸이나 다름없으니 괜찮다."

"…아버지."

"그래, 아들아."

한순간의 적막함.

방 안 가득 흐르는 미묘한 공기가 둘의 감각을 자극했다.

"아버지 저는-."

"드디어 결심이 섰더냐?"

교황은 진심으로 궁금한 듯한 얼굴을 하며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성자의 굳어진 얼굴은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황은 그가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냐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 아비를 죽이고, 교황위를 찬탈하러 온 게 아니냐는 말이다."

제76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성자는 모른 척 고개를 숙였다.

"그런가."

담담한 교황의 음성에, 성자는 눈썹을 살짝 움찔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을 치워라."

"예."

성자에게 가까이 간 교황이 성자의 턱을 잡고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나의 아들, 폰 아드리안. 너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많은 재능이 있지."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성자를 훑었다.

"탐스럽게 컸구나."

입맛을 다시는 그를 바라보는 성자의 눈빛이 변했다.

"피하십시오!"

다급하게 교황을 뒤로 밀어낸 수호 기사가 검을 들어 성자의 신성력을 막고 뒤로 날아갔다.

쿠웅!

"크윽...!"

신성력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제대로 막아냈음에도 그 반동으로 몸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검으로 막았음에도 손바닥이 찌릿찌릿하게 느껴질 정도의 신성력.

수호 기사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교황과 성자.

내부적으로는 쉬쉬하고 있지만, 성자의 능력이 교황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성자님의 실전 경험은 부족하다.'

조금 전의 그 일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기습을 하는 상황에서 성자는 완벽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반면에 교황님은 어릴 때부터 수많은 악의 교도들과 싸우며 이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

교황님과 합을 맞춘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더구나 바깥에는 교황님의 기사들이 깔려 있다. 이런 소란을 알게 되면 그들이 달려올 것이니, 시간은 이쪽 편이었다.

"성자님, 이건 반역 행위입니다."

"이미 교회는 망가져 가고 있다. 너희는 정녕 그것을 모르는가?"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그만해라."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교황이 성자를 직시했다.

"나의 아들아. 정녕 이 아비를 죽일 셈이냐?"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이게 아버님을 위한 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의를 다진 성자의 양손에 신성력이 가득 모여들었다.

[신성한 물결]

그대로 파도처럼 쭉 쏘아지는 신성력이 교황을 덮쳤다.

다급히 그가 신성 방패를 펼치며 신성한 물결을 막아냈다.

콰아아아아—!

가진 신성력의 양만 보아도 교황과 수호 기사가 합친 신성력의 양이 성자 하나가 가진 것보다 적었다.

이대로 신성력 싸움으로 가다간 교황이 밀릴 게 불 보듯 뻔한 일.

수호 기사가 땅을 박차고 성자에게 쇄도했다.

'우선 공격을 끊어 낸다.'

수호 기사의 검이 목을 노리고 크게 휘둘러졌다.

차분히 검의 경로를 읽은 성자가 공격하던 한 손을 빼내어 검날을 붙잡았다.

"크읏!"

손에 담긴 신성력이 그대로 수호기사의 검을 휘감았다.

후웅— 쾅!

성자는 그대로 잡은 검을 휘둘러 던져 수호 기사를 벽에 처박았다.

교황은 그 틈에 성자의 신성력을 옆으로 밀어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찬란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

도저히 교황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 볼 수 없어, 성자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하지만 성자도 제법 많은 신성력을 쓴 탓인지, 조금은 지친 듯 숨을 골랐다.

"곧 이 방 안에서 들린 소리에 기사들이 몰려올 겁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십시오."

"내가 그것 하나 생각 못 하고 이곳에 왔을 거라 생각하나?"

쿠구궁!!

바깥에서 들려오는 거친 폭음에 수호 기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까 전부터 느껴지는 교회의 진동은 바깥에서 벌어지는 흑야와의 싸움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들이었다.

"이게 무슨...?"

쿵! 콰앙!

크아아악!

점점 가까워지는 기사들의 비명에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철컥-

그리고 들려오는 문 열리는 소리.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처음 보는 인물이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이미 싸우고 계셨군요."

"예, 바깥의 기사들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보랏빛 머리에 은색 지팡이를 들고 허리엔 순백색의 검을 차고 있는 남자.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불길하기만 하다.

"너는...누구지?"

교황의 일그러진 얼굴이 그의 당황스러움을 말해 주고 있었다.

"살아남으면 말해 주지."

그와 동시에 뻗어지는 이신의 마력.

순식간에 만들어진 강철 창이 수호 기사를 향해 쏘아졌다.

후웅― 콰앙!

수호 기사가 만든 신성 방패가 강철 창을 막아내고, 동시에 성자의 [신성 비]가 교황을 향해 쏟아졌다.

쿠구구구궁!

얇은 빗살 하나하나가 교황의 신성력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신은 지팡이로 땅을 쿵! 하고 찍었다. 지팡이의 끝에서 뇌기들이 꿈틀대며 사방으로 기어갔다.

지직! 지지직!

땅 위로 퍼지는 스파크.

얇은 뇌전들이 뱀처럼 움직이며 사방에서 수호 기사와 교황을 노린다.

"큭…!"

큰 피해를 줄 정도로 강력한 마법은 아니었지만, 사방에 흐르는 뇌전들이 신성력의 흐름을 툭툭 끊어 댔다.

저것들 전부를 막아내자니 신성력을 사방에 펼쳐야 하는 부담이 생기고, 무시하자니 전투에 방해가 된다.

이러한 방식의 전투를 벌이는 마법사와 싸워 본 적이 없는 수호 기사는 차오르는 답답함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인가?

쿠웅!!

또다시 대포처럼 쏘아지는 강철 창을 막아낸 그가 신음을 흘렸다.

고난이도의 마법들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는 실력자.

그러고도 여유가 남아 보이는 모습.

도저히 자신과 겨룰 수준의 마법사가 아니었다.

교황님도 성자님을 상대하느라 자신을 도울 수 없는 상황.

'이렇게 된 이상 내가 희생을 해서라도....'

신성력을 극한으로 끌어모아 단기간 신체 능력을 크게 상승시키는 기술.

기술이 끝나고 나면 반신불수가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교황님 제가 희생해서라도-."

"이리로 와라!"

성자의 공격을 막아내던 교황이 짜증스런 말투로 수호 기사를 불렀다.

이 상황에서 자신을 불러서 어쩌자는 건지?

수호 기사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교황이 무언가 생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신의 마법을 뚫고 교황에게 다가갔다.

"잘 왔다."

푹! 퍼걱!

"커…억...."

갑작스러운 고통에 수호 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교황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덜덜 떨리는 눈동자가 교황을 직시했다.

"교…황...."

"네 역할은 이걸로 다했다."

촤악-! 털썩.

교황이 심장을 통해 신성력을 모조리 흡수하자, 온몸이 쪼그라들며 수호 기사가 쓰러졌다.

동시에 급격히 강해진 교황.

그리고 경악스러운 얼굴로 그 모습을 보는 성자.

[히든 스테이지 – 교황 멜프로페 아드리안의 변절]

[마기에 취해 신성을 버리고 마(魔)에 집어삼켜진 교황을 처단하십시오.]

떠오르는 히든 스테이지 메시지를 보며 이신은 인상을 굳혔다.

'과거와 패턴이 변했어.'

18층의 최종 보스인 교황의 두 번째 페이즈.

교황 본인이 진짜 죽을 위험에 처했다고 느꼈을 때 나타나는 페이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싸움이 시작되지도 않은 지금, 두 번째 페이즈로 넘어가는 것 자체가 예상 밖의 일이다.

성자의 개입이 교황의 패턴에 큰 변화를 준 듯했다.

'신성력이 빠른 속도로 마기로 치환되고 있다.'

이 정도의 급격한 변화는 전생에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패턴이다.

원래라면 멜프로페가 이후 상황을 생각해, 신성력 전부를 버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신성력 전부를 버린다면, 적들을 죽이고 난 후 교회에서 교황 노릇을 할 수 없을 테니.

그래서 마기를 이용하는 페이즈가 두 번째 페이즈였지만.

'이건...두 번째가 아니라 세 번째라 해야겠는데.'

이건 마기의 힘을 빌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마족으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급격하게 팽창하는 마기.

이신과 성자에게서 마력과 신성력이 휘몰아쳤다.

"크아아아아아아!"

멜프로페의 마기가 공간 전체로 뻗어 나가며, 방 안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이신의 마력이 마기를 향해 쏘아졌지만, 전체가 상호 보완되는 형태의 결계는 어설픈 공격으로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결계인가."

"너희들의 지원군은 오지 못한다. 이 결계가 풀릴 때면, 너희는 변절자와 나의 대리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콰아아아아아―!

대포처럼 쏘아지는 마기가 성자를 향하자, 이를 악문 그가 신성 마법을 펼쳐 그것을 막아냈다.

"이신 님!"

도움을 청하는 듯 그가 이신을 향해 소리치는 순간, 이신은 미리 구성 중인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페네트레이션]

[토크]

[엑셀러레이션]

[스틸 스피어]

회전력과 관통력, 가속력을 극대화한 강철 창이 마법진 위로 생성됐다.

심상치 않은 마력의 기류에 멜프로페가 성자에게 쏘아 내던 마기를 거두려 했지만, 갑자기 신성력을 쏟아붓는 성자 탓에 제대로 된 방비를 할 수가 없었다.

[강철의 마법사]

# 강철 계열 마법의 위력이 30% 증가합니다.

공격력을 극대화한 마법에 강철의 마법사라는 칭호로 한 번 더 위력이 상승한다.

'한 방에 치명타를 먹여야 한다.'

교황의 힘은 마계 군주 안드라스의 힘을 받은 것이다.

천계에서 변절하여 마계로 넘어간 악마.

놈은 그러한 특성 탓에 신체의 회복이 매우 빠르다. 그것을 봉인하는 것이 놈을 상대하는 데 최고의 방법이다.

"성자님!"

강철 창이 쏘아지는 동시에 그의 외침을 들은 성자가 급격히 줄어드는 마기를 밀어내고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검을 만들어 냈다.

쿠우우웅!!

빠르게 회전하는 강철 창이 마기의 틈을 만들어 내고 기어코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멜프로페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크악!"

강철 창의 창대를 타고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멜프로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이신을 보았다.

그때, 그의 앞까지 쇄도한 성자가 허공에 마치 그림을 그리듯 신성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신성 봉인술]

기이한 문자들의 향연.

그러한 문자들이 그 궤적을 따라 허공에 빛처럼 남았고 성자의 팔이 움직임을 멈추자, 문자들이 서로 동화되어 멜프로페를 감쌌다.

"크아아아악!!"

급속도로 줄어드는 마기에 결계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안 돼...."

그때, 결계가 사라지자마자 다급하게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화려한 갑옷 위로 새겨진 은색의 문양들.

투구를 눌러쓴 성기사가 허겁지겁 성자의 옆으로 달려왔다.

"에단!"

신성 봉인술을 펼치는데 집중하던 성자가 반가운 얼굴에 화색을 했지만.

푹!

기습적으로 찔러 오는 에단의 검이 성자의 복부에 구멍을 냈다.

후웅― 쿵!

그와 거의 동시에 신성력을 펼쳐 에단을 벽에 처박은 그가 신성 봉인술을 중단한 채 부릅뜬 눈으로 에단을 보았다.

툭, 투둑.

굴러떨어지는 은빛 투구 안에서 긴 머리의 잘생긴 미남이 얼굴을 드러냈다.

"아으...장난 아니군."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가루들을 털어 낸 뷔엘라가 허리춤에 걸려 있던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너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는 마력을 전개하는 이신의 모습이 보였다.

[뇌폭(雷爆)]

빠르게 쇄도하는 뇌전의 구체가 성자의 앞에서 폭발하며 사방에 뇌전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잔뜩 분노한 그의 신성력이 그 모든 뇌전을 밀어내고 그대로 이신에게 쏘아졌다.

실드로 신성력을 막아냈지만 그 여파로 이신의 몸이 실드와 함께 뒤로 주욱 밀렸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는 그를 보며, 이신은 피식 웃었다.

"신들의 하수인, 폰 아드리안. 당신의 목적은 어차피 내가 아니었나?"

"...."

부릅뜬 눈, 그 안에 파르르 떨리던 눈동자가 급격히 차분해졌다.

그 눈빛 속 분노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이신을 향한 냉소만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제77화

신의 하수인.

이신이 18층에 오르고, 가장 먼저 생각했던 인물은 레이커스였다.

이 안에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그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직접 부딪혀 본 후, 신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준비한 수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

전생의 기억을 이용해 이긴 것을 제외한다고 해도, 레이커스는 명백히 안진보다도 위협적이지 않았으니.

그러한 사실 때문에, 이신은 신들이 준비한 것이 이게 전부가 아닐 것이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를 노릴 수 있는 이가 누구일까?'

'어떤 비수가 나의 턱 밑에 숨겨져 있을까?'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 되뇌던 그는 성자라는 미지의 인물에 대해 생각했고.

성자를 만난 순간 그가 신들이 준비한 진짜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폰 아드리안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한 채, 이신을 보고 있었다.

이신은 그의 궁금증을 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기습으로 부상을 입은 그가 회복하기 전에 최대한 데미지를 입혀야 할 때였다.

[낙뢰]

쾅! 쾅! 쾅! 쾅!

천장에서 내리치는 뇌전들이 아무것도 없는 바닥 위로 계속해서 떨어졌다.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회복하는 폰의 복부를 본 뷔엘라가 다시 쇄도했다.

정교함에 더해 난폭함까지 겸비한 그의 검격이 계속해서 성자를 쫓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반격뿐.

"크억!"

또다시 신성력에 맞은 뷔엘라가 날아가며 벽에 처박혔다.

그가 지친 모습으로 숨을 헐떡였다.

"엘프, 당신은 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뷔엘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나를 만만히 보지 말아라."

그의 분노가 쌓여 가며 검과 몸에 쌓이는 마력의 밀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지난 층에서 얻은 버서커 클래스.

분노가 쌓여 갈수록 그 클래스의 진가가 발휘된다.

캉! 캉! 캉! 캉!

분노를 토해내듯 뷔엘라가 거센 공세를 펼친다.

성자가 신성력으로 그의 공세를 막아내며 반격으로 피해를 입혔지만 그것은 오히려 악수가 되었다.

온몸에 선혈이 낭자하고 그와 동시에 그의 마력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피를 흘릴수록 강해진다.

그와 동시에 뷔엘라의 이성도 날아가고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를 직접 상대하는 성자는 당황스러웠다.

다칠수록 강해지는 적이라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넘어, 전투의 양상을 어떻게 바꿔야 될지 고민에 휩싸였다.

'까다롭군.'

한 방에 놈을 끝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신이라는 마법사가 그것을 하지 못하게 적재적소에 마법을 사용했다.

분명 간수장에게 이 엘프를 처리하라고 시켰는데, 살아 돌아온 것은 물론이고 이렇게까지 방해가 된다는 것이 성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신이라는 인간 하나만을 상대하는 것도 골치가 아픈데, 이 엘프도 굉장히 까다로웠다.

"신성 비."

하늘에 모여드는 신성력의 구름 안에서, 가시처럼 얇은 신성 비가 두 사람에게 쏟아져 내렸다.

마법을 펼쳐 최대한 그 공격을 흘려내는 이신에 비해, 뷔엘라는 이런 사소한 공격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것처럼 그냥 맞고 공격을 했다.

"폭발."

콰아아앙—!

신성력의 기습적인 폭발에 이신과 뷔엘라가 휘말려 날아갔다.

콰앙!!

앞선 싸움의 여파로 약해진 건물의 벽이 허물어지며 뷔엘라와 이신이 건물 밖으로 튕겨 나갔다.

바깥에서 한창 서로 싸우고 있던 흑야와 교회 측은 들려온 폭음에 교회 내부로 시선을 돌렸다.

교회 안쪽에서 튀어나온 이신과 뷔엘라를 뒤따라 성자가 걸어 나오자, 교회의 신도들은 그를 향해 고개 숙였다.

성자는 그들을 향해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목표는 이신이라는 인물의 죽음뿐.

손이 하늘 위로 뻗어지고 하늘을 뒤덮은 구름들 사이에서 신성의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신성한 심판]

구름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십자가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그 압도적인 모습에 신도들은 화들짝 놀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심판.

이것은 교회의 신도들뿐 아니라 흑야의 일원들에게조차 신이 내리는 신벌처럼 느껴졌다.

"말도 안 돼...."

마리아는 멍하니 입을 떡 벌린 채 하늘에서 나타난 십자가를 보았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제발...."

성기사들과 접전을 벌이던 언데드들도 십자가를 보자 심각해지긴 마찬가지였다.

"저걸 맞으면 그대로 존재가 소멸하겠군."

"주인이 위험할지도 모르겠네."

"태평하게 그런 소리 할 때야? 당장 가서 도와야지!"

"워리, 주인님이 우릴 부르면 그때 나서도 괜찮아."

"젠장할! 내 원래의 힘만 되찾았어도."

워리가 이를 딱딱거리며 원통함을 드러냈다.

"주인님의 신호가 왔어, 그림자 공간으로 들어가."

메이의 말에 몸을 덜덜 떨던 바크부터 일렁이는 안광으로 십자가를 보던 워리까지 그림자 공간으로 들어갔다.

쿠구구궁!

하늘에 쌓인 구름 위로 이신이 강철의 창을 날려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고작 20층도 안 된 세계에서 이러한 위력의 마법이라니.

선을 넘어도 한참이나 넘지 않았나?

"이신, 어찌할 거냐!"

아직까지는 이성의 끈을 잡고 있던 뷔엘라가 이신을 재촉했다.

이신은 대답 없이 성자를 보았다.

그의 주변을 에워싸는 신성력의 방어막들.

신성 스탯을 얻고 나니 더욱 잘 보였다.

저것들이 멜프로페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는 것을.

'물리력으로 뚫는 경우에 말이지.'

이신의 눈에 마력이 깃들었다.

세상 그 어디를 가든 억울한 원혼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히 이러한 특정 종교가 권력을 쥐고 있는 세상은 더더욱.

검은 마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많은 원혼들이 온갖 곳에서 그 억울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3층에서의 사용을 마지막으로 최대한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사령술은 그만큼 술사의 정신에 큰 타격을 주기 때문에.

수백, 수천, 수만에 이르는 사령들이 이신의 시야에 들어왔다.

억울함에 사무친 영혼들은 오직 증오와 악의만이 남아 있었다.

성자의 신성 마법을 본 사령들은 그 감정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심판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그저 권력자들의 횡포에 불과했다.

권력자들의 그러한 주관적인 잣대에 억울하게 휩쓸린 그들의 영혼들이 이곳에 셀 수도 없이 많이 모여 있었다.

"당신들의 존재가 영원히 지워져도 괜찮습니까?"

사령들에게서 그 대답을 듣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감정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들에겐 억울함을 푸는 것이 최우선이기에.

악의, 적의, 살의.

그러한 감정들만이 남은 잔재에 다른 의견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저, 사령술사는 그러한 사령들의 잔재를 이용할 뿐이다.

성자의 주위로 몰려드는 붉은 영혼들이 겹치고 겹쳐져,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 색이 진해졌다.

자신들의 혼으로 그를 세상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듯이.

폰 아드리안의 위로 수많은 사령들이 쌓여 갔다.

"사령 폭발."

[죽음의 힘에 의해 사령들의 통제가 원활해집니다.]

[마력의 소모가 줄어듭니다.]

[지배력이 사령들의 의지를 억누릅니다.]

[마력의....]

[...]

으어어어어어―

아아아아아아―

이신의 귓가에 사령들의 울음소리가 폭발음처럼 들렸다.

성자의 주위에 넘실거리는 죽음의 기운이 급속도로 짙어지기 시작했다.

"커허억...!"

[폰 아드리안의 신성을 빼앗았습니다.]

[신성이 1 상승합니다.]

[폰 아드리안의 신성을....]

[신성이....]

그의 주위로 흐르는 신성력의 막이 흔들리다 사라지고, 금방이라도 내리칠 것 같던 십자가 또한 일렁이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고통.

자신의 존재 자체가 지워질 것 같은 그 힘에 성자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게...도대체 무슨 힘이지?"

예상치 못한 타격에 집중이 깨지고 신성 마법의 흐름이 끊어지며 그 반동으로 내상을 입었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이상한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자꾸 감정이 들쑥날쑥해지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리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이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전 2, 3층에서 사령 폭발을 썼을 때보다도 훨씬 많은 사령들을 한꺼번에 터트렸다.

은나무 지팡이에 있는 마력까지 전부 쏟아부어 버린 탓에 이제는 마력도 정말 조금밖에 남지 않은 상태.

사령들이 폭발해 사라진 그 감정의 잔해들이 이신에게로 몰려들었다.

"크윽...."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이신이 무릎을 꿇었다.

"이신! 괜찮나!"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

뷔엘라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괜…찮아...."

다행히도 3층에서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아진 지배력과 검은 마력, 앞서 겪었던 사령 폭발의 경험들이 이신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연달아 크게 심호흡을 한 이신이 성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아직도 무사령 폭발의 여파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신...."

"넌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거지?"

"저는...꿈을…먹는...용께서...."

들어 본 적이 있다.

누군가의 꿈을 대가로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용.

그 존재의 격이 대단하여 웬만한 신들도 쉽게 견주지 못하는 놈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이명들이 들리네.'

좋지 않은 일이다.

적들의 세력이 생각 이상일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당신은...어떻게 내 정체를 알아본…겁니까?"

"넌 신실한 신도지, 깨어 있는 시민은 당연히 신을 믿을 것이라는 사상을 보고 쉽게 알 수 있었어. 그런 녀석이 흑야와 손을 잡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아."

"그것은…한시적으로 그럴 수 있는 게 아닙니까?"

"둘째."

이신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두 번째 이유기 때문에.

"원래의 폰 아드리안은 아버지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 아무리 교황의 일탈이 잘못되었다 한들,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생각이 들었다 한들. 폰은 직접 교황을 죽일 수 있을 만큼 모진 놈이 아니거든."

레이커스의 과거를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는 멜프로페가 타락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를 죽일 능력이 있음에도 수년간 교황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을.

"제가...아버지를...."

폰은 혼란스러웠다.

이신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행동을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들의 힘을 빌리면 그렇게 될 뿐이야."

구태여 그를 도와주거나 살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녀석에게 동정심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저 이러한 이들을 만들어 내는 신들에 대한 적대감만 커져 갈 뿐.

[낙뢰]

쿠구궁!!

두꺼운 벼락이 성자의 심장을 직격했다.

그의 희미해져 가는 생명에 종지부를 찍어 주었다.

[폰 아드리안의 신격을 빼앗았습니다.]

[신격이 1 상승합니다.]

그의 생명력이 사그라지며 이신은 느껴지는 신격에 눈을 부릅떴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여기서 신격을 이렇게 얻게 될 줄은.

그저 존재 자체에서 느껴지는 격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이루 말하기 힘든 존재감.

옆에 있는 뷔엘라는 갑자기 달라진 이신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뭘...한 거지?"

"아무것도."

신격을 잃고 싸늘한 시체가 된 성자를 뒤로한 채 몸을 돌렸다.

"아직 스테이지는 끝나지 않았어."

교황, 멜프로페를 죽여야 이 지겨운 세상을 끝낼 수 있다.

조금 전, 사령 폭발로 인해 마력이 한 줌밖에 남지 않았지만 상관없어졌다.

부서진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간 이신은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교황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성자의 신성 봉인술은 풀린 상태.

그러나 이미 멜프로페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네 이놈...!"

[신격으로 인해 능력치가 20% 증가합니다.]

차오르는 힘.

마력 자체에서부터 격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졌다.

한 줌밖에 남지 않은 마력이었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라이트닝 드릴]

지팡이 끝에서 회전하는 뇌전이 쏘아졌다.

[냉혹한 학살자의 효과로 인해 급소에 적중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마계 군주의 머리를 부순 자의 효과로 인해 중급 마족 멜프로페 아드리안의 능력치가 15% 하락합니다.]

콰아아!!

치이익!!

그대로 심장에 라이트닝 드릴을 적중당한 멜프로페가 바닥에 쓰러졌다.

"크하악!"

고통에 괴성을 내지르는 그가 지진 난 듯 떨리는 동공으로 이신을 바라보았다.

아까는 마족이 되어 가는 과정 중에 당한 탓에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는 완벽한 마족이 되었는데 왜 더 약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눈빛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에단의 검을 집어 든 이신이 무력하게 쓰러진 멜프로페에게 다가갔다.

"이해할 필요 없어."

푹!

에단의 검에 담긴 신성력이 이신의 신성력과 만나 끈질기게 살아남으려 하는 멜프로페의 마기를 짓눌렀다.

심장이 관통당한 멜프로페의 숨이 그대로 끊어졌다.

[18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앞으로 2개 층.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너희의 목을 조르게 될 거다.'

이신의 눈앞에 18층의 클리어 보상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제78화

기습

[도전자님의 업적이 기록됩니다.]

[경이로운 업적! 다수의 신들이 도전자님을 주목합니다!]

[321,000점을 달성했습니다.]

[321,000p를 획득합니다.]

[체력이 11,100 올랐습니다.]

[마력이 21,000 올랐습니다.]

[힘이 10 올랐습니다]

[민첩이 10 올랐습니다.]

[지력이 25 올랐습니다.]

[지배력이 20 올랐습니다.]

[신성이 5 올랐습니다.]

[행운이 깃든 주머니를 획득합니다.]

떠오르는 메시지창.

이신은 손 위로 생겨난 행운이 깃든 주머니를 보았다.

[행운이 깃든 주머니]

행운이 깃들어 있습니다. 주머니를 열면 필요한 물건이 들어 있을지도?

# 사용자의 행운에 영향을 받습니다.

행운 스탯이 거저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신은 곧바로 주머니를 열었다.

[BG - 282를 획득합니다.]

[BG - 282]

공간술사 뷔겐이 아공간을 연구하며 초창기에 만들어 낸 아공간 주머니입니다.

# 차원 에너지 수용량: 1K

주머니 안에는 새하얀 주머니가 담겨 있었다.

딱 손바닥 크기 정도의 작고 가벼운 주머니였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물건이 들어갈 수 있었다.

아공간 자체가 4차원 공간 사이의 틈을 만들어 좌표를 설정하고 그곳을 이용하는 것.

차원마다 수용할 수 있는 에너지에는 차이가 있다.

'1K면 타이탄까진 무리겠네.'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현재 가지고 있는 물건들은 다 집어넣을 수 있는 수치다.

품 안에 있던 물건들을 전부 집어넣은 이신이 죽어 버린 교황 앞으로 갔다.

팍!

교황의 가슴에 박힌 검을 빼서 바닥에 던진 이신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신성력을 다루는 이들은 언데드로 만들 수가 없다.

이미 마족이 된 교황은 언데드로 만드는 게 가능했지만 사실상 전력감으로 쓰기에는 모자란 감이 있었다.

실상, 신성력을 쓰지 못하는 교황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니.

아쉬움이 드는 건 성자였다.

그 정도의 잠재력을 가진 인간이라면 언데드가 되어도 충분히 강한 전력이 되어 줬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이들의 시체는 강화를 위한 재료로 사용하는 수밖에.

이곳 교회 도처에 시체들이 넘쳐 난다.

전력 상승을 꾀할 시간이다.

* * *

아이소시아의 초록 지대.

초록 문양 혹은 그 상위 문양을 가져야만 갈 수 있는 지역.

에데르타 성 밖의 마경을 없애기 위해 김강천, 강지훈, 지은주, 신하늘이 병사들과 함께 마경에 들어갔다.

서걱! 쿵!

마경의 핵을 지키고 있던 마족의 목이 떨어지고, 김강천의 검이 마경의 핵을 찔렀다.

[마경의 핵이 부서졌습니다.]

[공적치를 계산합니다.]

[공적치 1위부터 2위까지 『파란 문양』의 자격을 획득합니다.]

1위. 김강천 – 38,100점

2위. 신하늘 – 32,900점

[『파란 문양』을 획득합니다.]

김강천과 신하늘의 몸에 새겨진 문양이 초록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파란 문양]

파란 지대로 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집니다.

# 체력과 마력이 17% 증가합니다.

# 전체 스탯이 26% 증가합니다.

퍼센트 단위로 올라가는 문양의 효과는 도전자들에게 마약처럼 다가왔다.

문양의 단계가 올라갈 때마다 확연히 느껴지는 힘의 차이.

허공에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크으...이게 문양의 힘이지."

"이제 파란 지대로 갈 수 있겠어."

[마경이 사라집니다.]

사방을 뒤덮은 마경이 사라지고 푸른 하늘과 주변 가득한 숲이 나타났다.

"적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빨리 에데르타 성으로 돌아가야겠어."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불길함.

김강천은 피부 위로 닭살이 쭈뼛쭈뼛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쪽 지역은 적들이 오려면 반드시 들킬 수밖에 없는 곳이다.

주변에 있는 괴수도 위험한 녀석들이 없고, 마경도 없앴기에 이런 감각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번 마경을 뚫는다고 기사들 중에 부상자가 꽤 생겼어. 왜 그렇게 급하게 움직인 거야?"

강지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마경 안에서 계속해서 따질 수는 없었기에, 지금에서야 궁금함을 물었다.

"그래도 사망자는 없으니까, 다행이야."

"은주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그때, 그들 사이로 날아오는 화살 하나.

콕.

땅에 박힌 화살을 보던 김강천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모두 피해!"

콰과과과과광!

화살이 폭발하면서 순식간에 번진 화마가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재빠르게 반응한 김강천 덕분에 곧장 방어 태세를 취해서 대부분이 그 화마에서 벗어났지만, 기습적인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피융—

희미한 잔상을 남기는 화살 하나가 지은주를 노렸으나 김강천의 대검이 그것을 막았다.

쿵!

화살에 담긴 힘이 얼마나 강한지 손아귀가 저릿하다.

쩌저적-

대검 위로 빠르게 생겨나는 서리.

이를 악문 김강천이 들려오는 기사들의 비명에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했다.

숲속 그늘진 나무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한 여성.

차가운 얼굴로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주변으로 수십의 도전자들이 더 나타났다.

'도대체 어떻게?'

김강천 일행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저들이 자신들의 이목을 속이고 여기까지 올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대어 네 마리를 잡았네."

"어떻게 온 거지?"

김강천의 물음에 어깨를 들썩인 그녀가 싸늘하게 웃었다.

"곧 죽을 놈이 알아서 뭐 해? 다 죽여."

도전자들 위로 빛을 발하는 문양.

주변으로 물드는 초록빛의 향연에 김강천 일행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 * *

에데르타 성벽 너머로 보이는 수천의 적병들.

"적들이 도대체 어떻게 저기 온 거죠?"

추밀원장 제이크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에이먼에게 물었다.

에이먼 수석 마법관은 저 멀리 보이는 적들의 군세에 표정을 굳혔다.

"...조금 전, 대규모 텔레포트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좌표 지정 차단망을 뚫고 저들이 텔레포트를 했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저런 대병력을 전부? 저쪽은 무슨 대마법사라도 있답니까?"

혼란스러운 것은 에이먼도 마찬가지였다.

최전방도 아니고 후방인 이곳에 적들이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에.

"배신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아...추측되는 이가 있습니까?"

"상황을 볼 때 의심되는 몇몇이 있긴 하지만, 아직 확실하게 특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머리를 부여잡은 제이크가 이 답 없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수성 가능성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없습니다."

"자격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상황으로 보아선, 그들도 위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배신자가 있다는 가정하에 그쪽으로도 적들이 갔을 겁니다."

"디플렉터 실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1시간.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고작? 1시간이란 말입니까?"

"적들 중에 파동술사가 있습니다."

에이먼의 말에 제이크가 놀란 눈으로 다시 한번 적들을 보았다.

"남색 문양의 자격자가 아닌가?"

"맞습니다."

"젠장할, 여기까지 파동술사를 보낼 여력이 있었나?"

"시간이 없습니다.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추밀원장인 제이크는 메르텡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이다.

그가 여기서 허무하게 죽는 것은 국가적으로 너무 큰 타격. 어떻게 해서든 제이크만은 살려 보내야 했다.

"알겠습니다."

"이거 받으십시오."

품 안에서 수첩을 꺼낸 그가 마력을 일으켜 암호 마법을 풀고는 제이크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제가 생각하는 배신자들의 정보입니다. 원장님께서 찾아 주셔야 합니다."

"...."

그것을 받아 든 제이크는 결의를 다진 에이먼의 눈빛을 보았다.

"디플렉터 실드의 자가 방어로는 안 되는 겁니까?"

"그렇게 되면 5분 안에 뚫릴 겁니다."

"미안합니다."

제이크는 자꾸만 일그러지려 하는 표정을 애써 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자신의 무능력함이 너무나 짜증이 났다.

"꼭 살아오십시오."

"알겠습니다."

이를 악문 제이크가 마탑을 나가고 화면을 통해 적들을 바라보는 에이먼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디플렉터 실드 제너레이터에 손을 올린 에이먼이 마력을 불어넣었다.

"와라. 다 막아 주마."

* * *

헉… 헉… 헉....

가쁜 숨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린다.

같이 왔던 서른의 기사 중 겨우 다섯을 빼고 전부 죽었다.

김강천과 신하늘, 강지훈의 온몸엔 핏물과 흙먼지로 얽혀 있었고 지은주는 몸에 차고 있던 아티팩트가 죄다 부서져 꼴이 말이 아니었다.

"성으로는 못 들어가, 남쪽으로 가야 돼."

"거기까지 가다가 다 죽을 수도 있어."

강천의 말에 지훈이 반박했다.

"방법이 없어, 지금 성안에 추밀원장님과 의전 장관님이 계셔. 반드시 비밀 통로로 빠져나갈 거야."

"성안에 있는 게 안전하지 않아요?"

"저 꼴을 보니 그렇지는 않아 보이네."

강지훈은 저 멀리 보이는 적들의 공세에 혀를 내둘렀다.

아데르타 성의 디플렉터 실드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파동 술사가 오다니, 다른 곳의 공성은 포기한 건가?"

"저 정도라면 아마 수석 마법관님께서 직접 디플렉터 실드를 다루고 계신 게 분명해."

바쁘게 달려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방법을 강구했다.

적들이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고, 성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

'저 파동 술사만 처리하면, 아데르타 성의 수성 시간을 확 늘릴 수 있어.'

김강천은 즉석에서 빠르게 계획을 세웠다.

"은주랑 나랑, 그리고 너희 둘과 기사들 전부. 이렇게 해서 나뉘자."

"뭐? 둘은 어디 가게?"

"아무래도 우리가 찢어지는 게 적들의 공세도 분산되고 좋을 거 같아. 그리고 이대로 가다간 에데르타에 있는 마법사들은 전부 다 죽어."

"설마, 저 파동 술사를 잡으러 가려고요? 안 돼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

"어쩔 수 없어. 지금 이게 최선의 선택이야."

신하늘의 만류에도 김강천은 마음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우선 시간이 없으니까. 너희는 그냥 이대로 남쪽으로 이동해서 최대한 놈들을 따돌리는 데 주력해. 나랑 은주는 파동 술사를 잡으러 갈 테니까."

"괜찮을까?"

지은주의 음성에 걱정스러움이 가득 담겼다.

"좀 위험하긴 하지만, 충분히 해볼 만해."

아이소시아 대륙으로 온 뒤 지금까지 위험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늘 사방이 적들로 가득했지만, 끝끝내 이겨 내고 여기까지 왔다.

이번에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김강천은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가 저쪽 갈림길이 나오면 찢어진다."

"오케이."

김강천 일행을 쫓던 도전자들은 갈림길이 나오자 서로 정반대로 찢어지는 그들을 보며 침착하게 서로 신호를 보냈다.

"우리도 나뉜다."

단 한 팀만이 김강천과 지은주를 따라갔고 나머지는 모두 신하늘과 강지훈 쪽으로 향했다.

"은주야 잘 들어, 놈들에게 우리의 의도를 들키면 안 돼. 최대한 놈들을 따돌리는 척 저쪽과 거리를 좁힐 거야. 파동 술사는 무조건 디플렉터 실드를 부수기 위해 대규모 마법을 시전할 거야. 그때 기습적으로 달려들면 돼."

"알겠어."

"걱정 마. 잘 될 테니까."

은주는 강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걱정이 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후웅― 쾅!!

적들의 공세가 줄어들었다.

확실히 쫓아오는 인원이 적어지니 상대하기 수월했다.

'좋아.'

파동 술사는 적 병력의 뒤쪽에서 마법을 난사 중이었다.

주변에 그녀를 지키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파동술사가 대처할 수 없는 한 뚫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때 파동술사가 있는 곳에서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강천과 은주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지금!'

강천과 은주가 곧장 방향을 선회하여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그제서야 둘의 의도를 눈치챈 이들이 막으라 소리쳤지만, 이미 둘이 한발 빠른 상황.

대처하기에는 늦었다.

"은주야!"

금방이라도 적들의 창에 닿을 것 같은 거리.

강천의 발밑에서 땅이 솟아올랐다.

파동 술사를 지키는 병사들의 검기가 강천을 향해 날아왔지만 끈질긴 은주의 마법이 그것들을 막았고.

마력이 깃든 강천의 검이 그대로 파동 술사를 향해 휘둘러졌다.

"크윽!"

대규모 마법을 시전한 여파로 반 박자 느리게 마법을 펼친 그녀가 고통에 신음을 내뱉었다.

검과 그녀의 파동이 마주치자 폭발이 길게 번져 나갔고 연이어 날아온 검기가 그녀의 주위에서 또 한 번 폭발했다.

확실하게 그녀의 목숨을 앗아 가려던 강천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에 미간을 좁혔다.

생각보다 상대의 대처가 좋았다.

뒤늦게 쇄도하는 적들의 공격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강천은 적들의 공세를 받아 내며 다급히 은주를 보았다.

자신이 마무리 짓지 못하면 그녀가 마무리를 짓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은주의 떨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또다시 그녀가 사람을 죽이는 것에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가 마무리를 짓지 못할 것이라 예감한 강천이 이를 악물고 적들을 파고들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커다란 로브의 모자가 벗겨지고 바닥에 쓰러진 파동 술사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성인조차 되지 않은, 끽해야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이래서였나.'

강천도 어린아이를 베는 일은 내키지 않았지만, 이곳은 죽이지 않으면 죽는 세계이다.

더구나 메르텡의 수천 명을 죽이는데 공헌한 녀석이 저 파동 술사였다.

여기서 죽이지 않으면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하다.'

끝내 기사들과 도전자들을 밀어내고 쓰러진 그녀의 지척까지 다가간 강천이 검을 휘둘렀다.

제79화

채앵―!

내려치는 대검과 올려치는 검이 서로 맞부딪히면서 굉음과 폭발을 자아낸다.

'젠장할.'

너무 무리한 공격이었다.

억지로 밀어붙인 탓에 적 도전자들이 파동술사를 보호하기 위해 앞을 가로막았다.

이 이상 공격을 감행하다간 정말로 목숨과 맞바꿔야 하게 될지도 모른다.

폭발로 적들을 떼어 낸 강천이 방향을 급선회하여 은주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아무리 압도적인 업적을 쌓으며 탑을 오른 강천이라 해도 이렇게 많은 적을 다 상대하는 건 어불성설.

그럼에도 대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발생하는 폭발은 다른 도전자들이 강천에게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은주야!"

검은 연기와 흙먼지 사이에서 튀어나온 강천이 은주와 합류했다.

"어딜!"

구구구궁!!

두 사람의 발을 타고 느껴지는 흔들림.

바닥이 일그러지며 형성되는 거대한 골렘이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 둔중한 주먹을 내지른다.

후웅- 콰앙!

커다란 크기에 비해 민첩하기 그지없는 주먹이 두 사람의 앞을 내리치자, 파도가 출렁이듯 땅이 솟아오르고 진동이 울려 퍼졌다.

까드득-

주변을 둘러싼 도전자들을 보며 강천이 이를 갈았다.

첫 시도가 실패했을 때 탈출했어야 했다.

연이은 두 번의 실패는 실로 커다란 패착이 되었다.

'포위됐다.'

아까보다도 수십 배는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였다.

이제는 탈출마저 불가능해진 상황.

고작 둘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선배님이라면....'

갑자기 이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라면 이러한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지 않았을까?

"여기서 파동술사를 죽이러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파동술사의 앞에서 강천의 검을 쳐낸 남자가 과장된 몸짓을 보이며 말했다.

마치 다 잡은 물고기를 앞에 두고 여유를 부리듯이.

"알아서 그물 안으로 들어와 주는 군, 어때? 이참에 망명해 보는 건?"

"정정당당하게 일대일로 날 이기면 생각해 보지."

현재 강천의 온몸은 만신창이였다.

이러한 도발이 먹힐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가능하다면 하나라도 더 처리하고 싶었다.

"큭, 그 몸으로?"

휘이익!!

비웃음을 흘린 남자의 검이 기습적으로 지은주를 향해 쇄도했다.

강천은 다급하게 검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땅에서 올라온 돌 손이 검을 잡아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런!'

은주는 놀라서 몸이 굳어 반응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상대의 실력을 감안하면 반응한다 해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알고 있는 강천이 대검의 손잡이를 놓고 몸을 돌려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푹!

"커허억...."

등허리가 검에 꿰뚫리고 복부에서 튀어나온 검이 그의 눈에 보였다.

쿨럭!

피가 목을 타고 솟구쳤다.

"오빠! 안 돼!"

그 모습을 본 지은주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료애가 가득하군."

"안 돼! 오빠! 오빠!"

촤악-!

검이 빠져나가자 그 구멍을 통해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곳을 손으로 막으며 무릎을 꿇은 강천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울컥거리는 피를 쏟아 냈고.

"미안해, 오빠. 그러니까 제발!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다 할 테니까 제발!"

그의 몸 위로 생겨난 구멍을 부여잡은 은주가 오열하며 소리쳤다.

"그렇지. 이렇게 굴어야지. 지금 그게 너희 위치니까."

* * *

싸늘하게 식어 버린 교황의 시체.

이번에도 이신은 죽음의 통찰자로 그의 과거를 보았다.

역시나.

교황은 타락하지 않았고 신들은 그런 교황을 압박하고 끝내 죽여버렸다.

이러한 능력을 얻게 된 경위가 무엇일까.

탑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스테이지에서 꼭두각시처럼 다뤄지고 있는 이들의 과거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신은 탑이 만들어진 비화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처음 100층에 올라, 신들에게 당했을 때만 해도 신들은 모두 똑같다고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가고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죽음의 통찰자는 탑 주민들의 과거를 통해 신들의 만행을 알아낼 수 있다.

아무리 탑의 시스템 판단하에 주어진 능력이라 해도 죽음의 신이라면 이 능력이 부여되지 않게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탑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전생에서부터 많은 생각을 했었다.

신들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동시에 독립적이다.

하지만 또 신의 힘에 따라 개입은 가능하다.

탑이 세워지는 데 신들이 관여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모든 신들이 이 탑을 세우는 것에 동의한 것일까?

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신들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같은 편인가? 아니면 오월동주일 뿐인가?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없다.

탑을 오르면서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난다.

마치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짜듯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러 가지가 상호 연결되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러한 것들은 탑의 꼭대기에 오른다면 자연스레 해결될 터.

19층과 20층.

이 두 개의 층을 클리어할 때쯤이면 무언가 알 수 있는 것들이 생길 것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신은 18층의 스테이지를 끝내고 19층에 올랐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메시지와 커뮤니티.

커뮤니티의 경우 내용의 대부분이 아이소이아와 이신에 대한 것들이었다.

* 이신 님 18층 클리어하셨다.

└와 진짜 업적 점수 실화냐? 2위가 박주혁인데 점수 차이가 20만이 넘게 나네.

└같이 스테이지 도전한 도전자들 없나? 썰 좀 풀어봐.

└17층에서 이신 님 봤는데 그냥 소환수 하나로 싹 쓸더라. 그리고 일반 도전자들은 이신 님 속도 못 따라가. 진행 속도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진다.

└맞습니다. 제가 이신 님과 같은 팀으로 스테이지 클리어한 적 있는데, 그분이랑 같이 있으면 웬만한 도전자들은 병풍 됩니다. 스테이지 난이도부터가 급격하게 치솟아요.

└이번 층 클리어한 사람 없어요? 빨리 이야기 좀 해줘요!

└맞아, 지금 20층에서 이신 님 기다리는데 지루해 죽겠다.

└이신 님 빨리 올라오세요! 지금 기다리는 사람이 몇인지 모르겠네.

└다른 도전자들 다 올라가는데, 지금 한국인들만 20층에서 못 올라가고 있다니까.

└그래도 2개 층만 남았다. 이신 님이랑 같이 올라갈 생각 하니까 가슴이 웅장하다.

날이 갈수록 한국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탑을 오르지 못한 채 커뮤니티만 주구장창 사용하고 있다는 뜻.

많은 이들이 21층에 오르지 못하고 이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속도를 내야겠어.'

19층의 스테이지.

푸르른 나무들과 풀 내음이 가득한 숲속 세상.

이신의 옆으로 뷔엘라를 포함한 도전자들이 워프 되었다.

[19층에 입장하셨습니다.]

[숲의 수호자를 처리하십시오.]

메시지의 의미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휘이이익!!

허공을 격하고 질주하는 단창이 나무 위에서 떨어진다.

"크허억!"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틈도 없이, 쇄도하는 공격에 인간 하나와 고블린 하나가 꼬챙이 꿰이듯 단창에 꽂혀 즉사했다.

"뭐야?"

"갑자기 어디서 날아온 거지?"

"여기가 원래 이런 스테이지였나?"

도전자들이 패닉에 빠지고 몰려오는 혼란에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족히 10m는 넘게 솟아오른 나무들 사이로 빛조차 잘 들어오지 않는 공간.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엘프들의 안광이 도전자들을 직시한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 세례.

하나둘 허무하게 죽어 나가는 도전자들을 보고 그제야 다른 이들도 허겁지겁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제기랄, 저것들 엘프가 맞는 건가?"

스테이지에 들어오자마자 기습이라니.

뷔엘라는 이번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엘프들을 만날 생각에 신이 나 있었지만, 그 환상은 처참하게 깨져 버렸다.

"물러나, 죽고 싶지 않으면."

"뭐?"

허리춤에 걸려 있던 지팡이를 빠르게 빼든 이신이 마력을 일으켜 실드를 세웠다.

엘프들 사이에서 유난히 빛나는 은빛 머릿결을 가진 이가 흑색 궁을 들고 이신을 조준하고 있었다.

파앙―!

공기가 터지는 듯한 파공음.

허공을 가르고 뻗어 나가는 한 줄기의 섬광이 정확히 이신의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아앙!!

수십 겹의 실드가 한 점으로 겹쳐지고 그 위에 맞닿은 화살이 미친 속도로 회전하더니, 고작 몇 겹의 실드만을 깨부순 채로 폭발한다.

주변의 나무나 풀들이 화마에 휩쓸려 재가 되어 버리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모습에 뷔엘라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저딴 것들이 엘프라고?"

자연을 해치고 숲에 피가 묻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종족이 엘프건만.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뷔엘라가 검을 빼 들고 마력을 끌어 올린다.

검 끝으로 형성되는 마력의 흐름이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를 자아내고, 흑색 궁의 시위를 당기고 있는 거만한 표정의 엘프를 조준한다.

"크허어어어엉!!"

그때, 마치 허공을 발판 삼아 뛰는 것처럼 늑대에 올라탄 엘프 검사가 뷔엘라를 내리쳐 공중에서 떨어트렸다.

"크윽!"

갑작스러운 기습에 흥분을 가라앉힌 뷔엘라가 엘프 검사와 다시 격돌했다.

시끄러운 괴성들이 난무하는 공간 속에서, 이신은 마력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된 숲속에서 도전자들과 엘프들이 뒤얽혀 숲속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적당히 상황을 지켜보며 변해 버린 이 스테이지의 원인을 찾아낼 때가 아니었다.

이신의 지팡이가 올라가며 검은 마력이 하늘 위로 솟구치고 공간을 뒤덮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신격의 효과로 인해 능력치가 20% 증가합니다.]

허공을 부유하는 강렬한 마력의 파동이 안개처럼 휘날리며 그 몸집을 부풀리고 뇌전의 힘을 더욱 공고히 한다.

쿠구구구궁!!

구름 사이로 나부끼는 뇌전의 힘을 느낀 은발의 엘프가 미간을 좁히고 시위를 당겼다.

그의 주위로 휘몰아치는 바람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관통력을 극대화하고 공기의 저항을 최대한 낮추었다.

파앙―!

대기를 뚫고 쏘아지는 녹색 화살.

그저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 아닌 적중하는 적을 단번에 말살시킬 수 있는 녹빛의 포격.

쐐애애애액!

귓가에 때려 박히는 소름 끼치는 소음이 경계심을 치솟게 만든다.

"어딜."

그림자 위로 튀어나온 붉은 안광의 스켈레톤이 그 녹색의 화살을 검으로 흘려내었다.

흐름을 꿰뚫어 보지 않고서야 가능할 리 없는 검의 묘리.

자신의 화살이 튕겨 나갔음을 인지한 엘프가 다시 한번 흑색 궁의 시위를 당겨 보지만.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강대한 마력의 파동에, 그의 고개가 위로 올라간다.

[흑뢰(黑雷)]

콰아아아아아!

두꺼운 흑빛 전광이 창백해진 얼굴을 한 엘프 위로 쏟아지고, 뇌전의 잔해들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엘프들을 공포로 물들인다.

"이제야 납셨군."

싸늘한 음성과 함께 이신이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흑뢰의 전광이 사라진 자리에 백발의 엘프가 서 있었다.

숲의 수호자.

아르데히트 세이크.

엘프 부족의 부족장이자, 이번 스테이지의 최종 보스.

꽤나 당혹스러운 얼굴로 만신창이가 된 그녀가 이신을 바라봤다.

흑뢰의 힘을 전면으로 받아 냈으니 그러한 얼굴을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압도적인 역량의 차이를 그녀라면 충분히 알 수 있을 테니.

그간 극한의 난이도 속에서 탑을 오르며 숙성된 능력치와 최근 연달아 발생한 전투로 인해 달아오른 감각은 저층의 평범한 보스들 따위와 비교 불가의 차이를 보여 주었다.

이번 스테이지의 함정은 무엇인가?

또 어떠한 것을 가져올 것인가?

그러한 이신의 의문은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쿨럭...!"

버티고 버티다 못해 끝내 토해 내는 붉은 피가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흘렀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동자의 떨림. 동시에 원망 어린 시선이 하늘 위로 향했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에게 그러한 감정을 쏟아 내고 있는 것인가?

회한이 담긴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이신에게로 향했다.

"대단…하군...."

이신은 당혹스러웠다.

이 스테이지의 보스는 분명 저 엘프가 맞았고, 스테이지가 변한 것도 분명했다.

전생에서 19층은 이렇게 시작하는 스테이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저 엘프는 금방 죽는다.

변수는 없었다.

죽음의 통찰자가 그녀의 죽음을 알려주고 있었기에.

"나는...버려지는 말이었던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흑뢰를 막아내고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그녀의 앞에 선 이신을 향해 은빛 머리카락의 엘프가 흑궁의 시위를 당겼다.

"뒤지기 싫으면 그거 내리는 게 좋을 거다."

이신과 다니는 짧은 시간 동안 입이 상당히 거칠어진 뷔엘라가 검을 들어 그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뷔엘라에게 밀리고 있던 늑대를 탄 엘프 검사는 이신의 흑뢰의 영향에 닿아 뷔엘라에게 목이 날아간 지 오래.

엘프를 죽인 탓인지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뷔엘라는 이 스테이지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내가 해 줄 말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충고해 줄 건 있군."

"뭐지?"

"정령들이... 말해 주는구나...다음을 조심하라고."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더 이상 엘프들이 고통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19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도전자님의 업적이 기록됩니다.]

[놀라운 업적! 다수의 신이 도전자님을 주목합니다.]

[137,000점을 달성했습니다.]

[137,000p를 획득합니다.]

[체력이 3,800 올랐습니다.]

[마력이 9,900 올랐습니다.]

[힘이 3 올랐습니다.]

[민첩이 4 올랐습니다.]

[지력이 10 올랐습니다.]

[지배력이 3 올랐습니다.]

[숲의 수호자의 목걸이를 획득합니다.]

제80화

염동력

[숲의 수호자의 목걸이]

엘프 장인이 숲의 정기를 가득 담아 만든 작품.

# 착용자에게 행운이 깃듭니다. (쿨타임 168시간)

목걸이를 받아 든 이신이 그것을 착용했다.

행운이 어떤 식으로 깃들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행운이 쓸모없는 곳에 깃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치열했지만 찰나였던 전투의 끝은 망가진 숲을 남겼다.

깨끗하고 평화로운 느낌의 숲과 상반되는 힘의 잔재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쯧."

이신은 작게 혀를 찼다.

20층의 스테이지를 생각하면 19층에서 물의 정령과 계약할 필요가 있었다.

근데 이렇게 오자마자 숲을 망쳐 버렸으니 정령들이 자신과 계약을 해 줄 리 만무했다.

7대 원소의 계승자 칭호를 이용해 숲에 오자마자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

그 후에 보스를 공략하려 했는데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이것 또한 신들이 생각한 것인가?

고민에 빠져 미간을 좁히고 있는 이신의 근처로 뷔엘라가 다가왔다.

"대단한 놈. 방금 그 마법은...할 말이 없군."

뷔엘라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이신의 진면목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흑색 뇌전의 포화를 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뷔엘라도 그럴진대, 다른 이들은 어떻겠나.

같은 공간에 있던 수많은 도전자가 넋을 잃은 채 잿더미가 되어 버린 숲의 한 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19층의 보스인 아르데히트 세이크가 아니라 자신들이 저 아래에 있었다면 버틸 수 있었을까?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주변 도전자들을 보았다.

다른 도전자들도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그들 전부가 저 아래 있었어도 똑같았겠구나.

그렇게 속으로 되뇌던 도전자들은 저 이신이라는 도전자가 얼마나 상식 밖의 인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이신을 알고 있던 이들도, 모르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령…부를 수 있겠어?"

난데없는 물음에 뷔엘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래라면 이러한 곳에서 정령을 부르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확신하기 힘들었다.

"어떤 정령이 필요하지?"

"물의 정령."

"물이라...."

저 뇌전의 파도에 단 하나라도 살아남았다면 기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뷔엘라가 마력을 움직였다.

선천적으로 자연과 교감을 할 수 있는 엘프들은 정령과도 많은 교감을 나눈다.

뷔엘라의 마력을 타고 전해지는 울림에서 정령들의 감정이 전해져 온다.

"허...이 지경이 됐는데도 너한테 관심을 보이는데?"

두려움과 불안.

그와 동시에 호기심과 경외심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에 대한 악의적인 감정은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엘프들이 먼저 숲을 해쳤기 때문일까?

그 말을 들은 이신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은나무 지팡이를 들었다.

"물의 정령을 불러 줘."

"알겠다."

뷔엘라의 마력이 움직이며 주변으로 모여드는 기묘한 감각이 이신의 마력을 자극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경계하고 밀어냈을 힘을 이신은 차분히 느끼고 받아들였다.

촤아아―

허공에 얼기설기 뭉쳐지는 수분이 구심점을 만들고 형상을 이룬다.

기껏해야 손바닥만 한 크기.

선명하지 않은, 생기다 만 것 같은 모습의 정령이 이신을 마주하며 가늘게 떨고 있었다.

"안 떨어도 돼."

가벼운 한 마디였음에도 물의 정령의 떨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나랑 계약할래?"

이신의 부드러운 음성에 물의 정령이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좋아."

은나무 지팡이의 능력 중 하나인 하급 정령과의 계약.

지팡이에 마력을 실어 물의 정령에게로 보냈다.

"계약한다."

그와 동시에 지팡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사라지는 물의 정령.

[하급 물의 정령과 계약되었습니다.]

이신은 곧바로 정령을 다시 소환했다.

조금 전과 다르게 좀 더 생기 있고 힘이 넘치는 모습.

정령의 생각과 의지가 머릿속으로 곧장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름은 '린'이다."

[하급 물의 정령의 이름이 새겨집니다.]

[하급 물의 정령 린의 힘이 소폭 상승합니다.]

"이름을 새기는 것도 알아?"

뷔엘라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신은 굳이 대답하지 않은 채 다시 린을 지팡이 안으로 돌려보냈다.

이것에 대답하면 또 다른 물음이 생길 게 뻔하기에.

"이제 긴장해야 할 거야. 다음이 진짜니까."

* * *

* 뭐지? 이신 님 랭킹 그새 업데이트됐는데?

└헛소리하지 마라.

└들어간 지 한 시간도 안 됐다. 되지도 않는 낚시 ㄴㄴ

└하여간 위에 두 놈처럼 눈치 없는 애들은…어휴, 적당히 맞춰서 낚으라고!

└아니 진짠데? 19층 스테이지 끝났어!

└이미 늦었다. 속겠냐?

└야야 진짜다. 이거 ㄹㅇ임

└진짜라고?

└허, 진짠데?

* 19층 스테이지 21분. 클리어 시간 실화냐?

└진짜 미친 듯.

└와 뭐 어떻게 하면 30분도 안 걸리는 거야?

└그냥 들어가자마자 보스한테 돌격이라도 했나?

└내가 볼 때, 보스가 대기라도 탄 듯. 맨 처음 어리둥절할 때 기습하는 거지. 안 그러면 못 이기니까.

└또또. 헛소리하는 애들 나오네.

└보스가 이신 님 오는 줄 알고 대기를 탔다고? 이신 님 오는 줄 알았으면 머리를 처박고 있었겠지!

└근데 궁금하긴 하네. 어떻게 클리어했을지

└이번에는 업적 점수가 생각보다 낮네?

└그러게, 너무 빨리 클리어해서 제대로 업적을 못 쌓았나?

└21분 업적 14만이면 효율 상타 아니냐

└그건 ㅇㅈ.

└어? 스테이지 클리어한 사람 만났다. 얘기 듣고 옴.

└뭐야! 나도 알려줘!

└갔다 와라. 안 오면 죽는다.

* 보스 원샷 원킬 나왔단다. 본 사람들 하나 같이 레전드.

└보스를 원샷으로 죽였다고? 말이 되냐?

└아무리 이신 님이라도 그건 좀...

└이신 님이라면 가능하지.

└이신 빠들 또 말 지어내네.

└그니까, 아르데히트가 뉘 집 앞마당에 사는 보스인 줄 아냐? 온갖 정령들이 다 도와주는데. 그게 말이 돼?

└어휴, 또또 배 아파 가지고 저러는 놈들 나오네.

└이신 님 앞에선 한마디도 못 할 놈들이.

└ㄹㅇ ㅋㅋ

└영상을 못 보는 게 한이다. 이신 님 근처에서 영상 키려고 카메라 소환하면 다 부순다며?

└아이소시아에 전력 노출 안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던데.

└뭔, 2층 올라올 때부터 영상 하나도 안 나왔는데. 그럼 그때부터 예상한 거냐?

└이신 님이랑 같이 올라온 최상위권 도전자들 다 영상 안 올리잖아.

└그거랑 뭔 상관이야.

└올리면 포인트 빨아가는 게 몇인데 그냥 안 올리겠냐? 당연히 전략 노출 안 하려는 거겠지.

└맞아, 나도 들었는데 저거 맞음.

└뇌피셜 그만하시죠.

└오피셜입니다.

이신의 미친 클리어 타임을 보고 한껏 불타오른 커뮤니티.

20층의 해양 도시에 유난히 북적북적한 도전자들의 숫자에 뷔엘라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20층은 다른가?"

"그만큼 이번 스테이지가 어렵다는 거지."

다음 스테이지가 열리기까지 3일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생각보다 너무 빠른 스테이지 클리어에 3일이라는 여유 시간이 남은 이상, 철저히 다음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챙길 게 있으면 준비해. 3일 뒤에 여기서 모이는 걸로 하자."

"알겠다. 나도 할 게 많으니."

도전자들뿐만 아니라 탑의 주민들에게까지 명성이 꽤나 자자하게 알려진 이신은 옷을 바꿔 입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움직였다.

20층의 관리자는 다른 관리자들과 다르게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다.

물만 있다면.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이동한 이신은 바닥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 앞에 가서 그를 불렀다.

"관리자님."

그 말과 함께 꿈틀거리는 물웅덩이에 작은 파문이 일어나고.

촤아악!

그 웅덩이 안에서 물로 이루어진 인간 형상의 관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쯧."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대놓고 내보이는 불쾌한 감정.

조그마한 물웅덩이에서 자신을 불러냈다고 저러는 것이다.

이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반응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로 그가 관리자로서의 일에 자신의 기분을 집어넣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건방진 놈. 뭐가 필요해서 나를 불렀지?"

"다음 층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라."

"기존의 스테이지에서 변한 것이 있습니까?"

신들이 움직였다면 바뀌는 게 있을 것이다.

"5만 포인트다."

[50,000p를 지불하였습니다.]

망설임 없이 지불했다.

5만 포인트쯤이야 이신에게 큰 포인트도 아니었으니.

"해적들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그들이 해군의 존재를 눈치챘으니."

20층의 스테이지는 바다 위에서 시작한다.

천고의 보물로 가득하다 일컬어지는 보물섬으로 향하는 여정.

수십 척의 배에 다 실어도 배가 모자랄 만큼의 보물이 쌓여 있다는 전설의 보고.

도전자들은 배를 타고 그 보고를 찾아 움직인다.

해적들 또한 보물섬을 찾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과의 부딪힘은 불가피하다.

해적들 역시 서로 경쟁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끼리의 경쟁일 뿐 새로운 경쟁자는 환영하지 않는다.

'시작 지점에 해적들이 모여 있겠군.'

19층에서의 상황과 비슷하게 흘러갈 확률이 높았다.

숲과 다르게 바다 위는 배가 부서지는 순간 전력의 대부분이 무력화된다.

더욱 힘든 싸움이 될 것은 자명한 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그 해적 중에 신들이 준비한 회심의 한 수가 있는 건가?

정보의 구매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 이상의 도움이 되는 것을 알아내려면 또 엄청난 양의 포인트를 지불해야 하기에.

모든 정보를 다 알아내고 탑을 오르려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상황에 맞춰 실시간으로 대응해야 하는 능력을 기르지 않는다면 결국은 도태된다.

그러한 생각을 하던 이신은 그만하고 관리자를 보내려 했다.

관리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는 것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뭐지?'

물로 이루어진 그의 표정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그가 어떤 의미로 그러한 표정을 지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신의 죽음에 대한 예리한 감각이 자꾸 그를 건드렸다.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인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 이신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도전자들의 무리.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런가."

손가락으로 연신 턱을 매만지던 이신이 다시 관리자를 보았다.

조금 전에 느껴진 불안감은 씻은 듯 사라졌다.

원인을 알았으면 그에 맞춰 행동하면 될 일.

"여기 주변에 방해받지 않고 훈련에 집중할 만한 곳 있습니까?"

그의 물음에 관리자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는 서비스로 가르쳐 주지."

* * *

우우우웅―

배를 타고 한참을 가야 관리자가 말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

그곳에 배를 정박하고 선장에게 포인트를 건네준 뒤, 하선했다.

20층의 선원들 중에서도 이곳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신을 데려다 준 선장 또한 모르는 곳이라 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네.'

정말 아무도 없었다.

홀로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던 이신이 포인트 상점을 열었다.

[1,820,540p]

현재 이신이 가지고 있는 포인트다.

그렇게 많은 포인트를 소모하고도 이 정도의 포인트가 남았다는 것.

지금의 최상위권 랭킹을 유지하는 박주혁이나 백현이 20층까지 올라도 100만 포인트를 모으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만큼 1위와 2위의 격차는 아득했다.

그간 포인트를 아끼며 정말 필요한 순간에만 사용하려 했던 이신이 이 쌓이고 쌓인 포인트를 소모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여태껏 진의 신체가 봉인 당한 탓에 5위계를 넘어가는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을지 몰라도 이제는 정말 힘들어질 수도 있는 상황.

새로운 방법을 찾을 때였다.

[라르지엔의 기초 염동 마법서]

염동 계열 하나만을 깊게 연구한 그가 정립한 이론이 담긴 기초 마법서입니다.

무려 100만 포인트에 달하는 마법서.

아무리 염동 계열이 특수 계열의 마법이라 해도 기초 마법서가 이렇게 비싼 이유는 될 수 없다.

'사용법을 모른다면 말이지.'

염동 계열과 같은 특수 계열의 마법들은 그러한 재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용할 수 없다.

아무리 마법이라는 분야에 대단한 재능을 가진 이신이라 해도 타고난 체질은 바꿀 수 없는 법.

하지만, 이 마법서는 다르다.

마법사라고 모든 마법을 다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다룰 수 있다고 꼭 다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만 깊이 파고들어도 그 끝을 바라보기 힘들 진데, 여러 분야를 탐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

그렇기에 이신도 염동이라는 분야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마법서 위에 손을 올려놓은 이신의 마력이 잘게 부서지며 마법서의 안으로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마법서를 보호하는 각인이 있었지만, 이신은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도 가볍게 그것을 뚫어 냈다.

그러자, 그 안에 적나라하게 새겨진 수십 가지의 복잡한 마법 술식이 나타났다.

마치 뚫을 수 있으면 뚫어 보라는 듯이.

마력을 깊숙이 집어넣은 순간, 이신은 이 마법서의 술식 구성과 얼기설기 얽혀 있는 각인의 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을 직감했다.

어느 방향에서 마력의 흐름이 회전하고 어떤 방식으로 술식들이 상호 보완을 취하는지.

그 동력은 어떻게 작용하며 어떠한 목적성을 가지는지.

그러한 것들이 하나둘 이신의 심상 속으로 천천히 새겨지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 라르지엔의 장난이나 심술 같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단계들을 밟고 넘어올 수 있다면 염동이라는 능력을 가질 기회를 주노라 말하는 것.

이신은 지금의 방대한 마력량이 아니었다면 금방 마력이 고갈되어 내상을 입었을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땀을 주르륵 흘렸다.

마력의 흐름을 이해하고 관조하는 것은 첫 번째 단계일 뿐.

이것들을 해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빠르게 움직이는 마력의 미세한 움직임이 마법서의 술식 위를 가로지르고 역회전하며 공명한다.

뚝. 뚝.

땀이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쉰 이신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라르지엔의 기초 염동 마법서를 사용하셨습니다.]

[『스킬 – 염동력』을 획득합니다.]

"...됐다."

제81화

결전

쿵! 쿠구궁!!

"허억... 허억...."

모래사장 위에서 거친 숨을 내쉰 이신이 주변에 새겨진 작은 크레이터를 보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익숙하지 않은 염동력을 단련하느라 꽤나 고생했다.

라르지엔의 기초 염동 마법서.

염동력에 대한 선천적 재능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몸뚱이에 강제로 염동력의 재능을 쑤셔 넣었다.

마력이 흐르는 길을 뚫고 잘 사용하지 않는 마력혈을 활성화시켜 흐름을 원활히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염동력을 얻게 되자, 마법서 안에 적혀 있던 내용들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빈 페이지만이 남았다.

그 안의 내용들은 자동으로 이신의 머릿속에 각인처럼 새겨졌다.

마법을 각인하기 전, 마법서의 내용을 한번 쭉 훑었던 이신은 머리에 각인된 내용들과 실제 적혀 있던 내용들을 비교했다.

망각하지 않는 능력을 가진 이신에게는 매우 쉬운 작업이었다.

'역시, 마법서에 적혀 있지 않은 것들이 있네.'

마법서에는 기초 염동 마법에 대한 이론이 빠삭하게 적혀 있었지만, 이 마법서의 진짜 목적은 염동에 대한 재능 있는 이들을 위함이 아니다.

염동 계열은 선천적 체질을 가지지 않으면 애초에 발을 담그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기에.

마법에 대한 열정과 그 지식이 높은 이들 중에, 염동을 원하는 마법사에게 그가 주는 기회인 셈이었다

그렇기에 라르지엔은 염동 능력을 빠르게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숨겨 놓았다.

중급 단계에 이르러야 넘볼 수 있는 그러한 방법을.

'시간이 너무 부족해.'

가벼운 물체를 드는 것은 쉽게 됐다.

돌조각, 돌멩이, 바위까지도.

지력이 워낙 높기에 별다른 훈련 없이 할 수 있었다.

허나,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염동력이라는 힘 자체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단기간에 힘을 키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시간은 부족하고 도달해야 하는 목표는 높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이었다면 진작에 포기했을 테지만, 이신은 아니었다.

콰드득!

그의 손 모양을 따라 일그러지던 돌멩이가 그대로 쪼개졌다.

- 염동력의 힘은 그저 단순한 마력의 질과 양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 극한의 마력 컨트롤. 무거운 것들을 움직이기 위해선 역으로 극도로 가벼운 것들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

사방으로 퍼지는 마력의 파편들이 잘게 부서지며 모래사장 위로 흩뿌려졌다.

모래의 알갱이들을 하나하나 움직일 수 있는 마법사가 얼마나 될까?

이신은 그 기예에 가까운 마력 컨트롤로 수만 개의 모래 알갱이들을 붙잡았다.

- 염동 계열은 재능의 영역이지만, 마력 컨트롤은 훈련의 영역이다.

라르지엔은 그렇게 언급했지만 실상 마력 컨트롤도 재능을 많이 탄다.

재능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은 그 성과를 이뤄내는 속도부터가 확연히 다르므로.

다만, 라르지엔이 말하고자 한 것은 마력 컨트롤은 결국 미친 듯이 연습하면 조금씩이라도 는다는 것이다.

재능의 부재로 느릴 순 있지만 불가능의 영역은 아니다.

라르지엔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 했다.

- 그러나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마법사에겐 그 어떤 마법보다 강력하다.

마력으로 인한 강력한 인력이 모래들을 한곳으로 뭉쳤다.

주먹과 같은 형태로 뭉쳐진 모래가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바위를 향해 뻗어졌다.

쿠웅!!

바위와 모래가 부딪힌다면 누구나 당연히 모래가 부서질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아니었다.

단 한 줌의 모래 알갱이들이 튕겨 나갔을 뿐, 오히려 바위가 그대로 박살이 났다.

그러한 놀라운 결과를 이뤄 냈음에도 이신의 눈가는 불만족스러운 듯 찌푸려져 있었다.

잠도 안 자고 훈련했건만.

"쯧."

온몸 가득 적셔진 땀이 콧등과 턱을 타고 떨어져, 모래를 적셨다.

살갗을 스치는 새벽녘의 찬 바람이 시원스레 느껴졌다.

부우우우우―

귓가에 때려 박히는 뿔 고동 소리에 이신이 고개를 들었다.

출렁이는 바닷물 위로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이! 형씨 갈 시간이야!"

3일이라는 시간은 찰나와 같이 지나갔다.

* * *

해양도시의 선착장에 모여든 도전자들.

이제 곧 다음 스테이지로 갈 포탈이 열릴 시간이다.

"자네는 좋은 배 좀 구했나?"

"좋은 배는 무슨. 난 저기 저 중형선에 얻어 타기로 했네."

"그럼 거의 보물섬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맘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겠구먼."

"그렇지."

이번에 스테이지를 올라가는 나이 든 도전자 둘이 투덜거리며 한쪽을 힐끔거렸다.

그들의 시선의 끝에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도전자들이 있었다.

"거기! 배 확인 똑바로 해요!"

"여기, 이거 이상한데? 어디 망가지거나 그런 거 아니죠?"

"다들 빨리 타! 이제 곧 출항이라고!"

그들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하여간에 호들갑들은."

뷔엘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선착장 한곳에 정박해 있는 대형선을 보았다.

한국인들이 한마음 한뜻을 모아 만든 배.

만들어진 지는 꽤 되었지만 이제서야 출항을 시도했다.

"근데 뭐 저리 배가 많은 거지?"

수백 명도 더 태울 수 있는 대형선이 세 척.

한 스테이지에 대형선 한 척이 출항하는 것도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 이번에만 세 척이다.

더구나, 그 외에 중형선과 소형선은 셀 수도 없다.

"저희도 이상하네요. 하필 이번에 저놈들이 움직이다니. 굳이 저럴 필요는 없는데."

뷔엘라의 옆에 있던 한국인 여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한국 도전자들끼리만 뭉치는 게 싫어서 만들어진 연합이긴 한데...."

이번 아이소시아의 일을 계기로 20층에 오른 한국 도전자들은 다른 차원의 도전자들을 전부 배척했다.

그들끼리 소속을 만들어 거대한 대형선을 두 척 만들어 냈고, 그 밖의 중형선과 소형선도 여럿 만들었다.

조선술 강국 아니랄까 봐, 그들이 모이자 수십 척의 배들이 척척 만들어졌다.

이신이 스테이지 난이도를 극한으로 상승시켜 클리어한다는 것쯤은 한국인 도전자들이라면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한 방법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황새 따라가다 뱁새 가랑이 찢어진다고.

그들은 자신의 주제를 알고 있었을 뿐.

가랑이라도 찢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다.

다른 차원의 도전자들은 20층의 스테이지가 끝나면 또다시 바뀌는 세계선에 의해 그들과 다른 곳으로 이동된다.

그들이 뒤통수를 치고 도망가도 잡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들 위주로 뭉치게 되고 다른 차원의 도전자들은 배척하게 되었다.

물론 필요한 인력들은 받아들이긴 했지만, 소수일 뿐이었다.

"인력이 많으니 굳이 다른 이들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죠."

"그래도 화합은 필요한 법이다. 저것들이 그 증거 아니겠나?"

한국인들의 연합에 대적하는 반한 연합.

대형선 한 척과 몇몇 중, 소형선이 그들의 것이었다.

"다 의미 없는 짓이야."

그때 귀에 익은 음성에 뷔엘라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지.

가면을 쓴 이신이 팔짱을 낀 채, 선박장의 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 박혀 있다 이제야 나타난 건가?"

"바빴어."

짤막한 이신의 대답에 침음을 삼킨 뷔엘라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태도를 보아하니 원하는 답은 들을 수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보던 여성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이신을 보았다.

"혹시…, 이신 님이세요?"

신분을 숨긴 연예인을 길거리에서 마주치기라도 한 팬처럼, 그녀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대답조차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전생에도 이러한 반응을 보인 이들은 많았다.

한때는 조금 우쭐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신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일 뿐.

결국 패배했고, 신들에게 농락당하며 과거로 돌아왔다.

지금은 그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한 인간일 뿐이었다.

"와...실제로 한번 뵙고 싶었어요!"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가면을 쓴 이신에게로 쏠렸다.

이신과 뷔엘라가 같이 움직이는 것쯤은 이미 다 아는 사실.

뷔엘라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신의 정체를 곧장 유추한 한국인 도전자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후...."

그 모습을 본 뷔엘라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신의 반응을 볼 것도 없다.

이런 상황을 딱히 반기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기에.

시잉―

검집이 검에 긁히며 소름 돋는 금속음을 자아냈다.

그 소리를 들은 도전자들이 움찔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귀찮게 하지 마라. 다음 층에 오르고 싶다면."

이신의 충성스러운 기사도 아니고, 자신이 왜 이런 짓까지 하고 있는지.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오려는 순간.

저 멀리 바다 위로 푸른색의 거대한 포탈이 생겨났다.

무대 위에 올라가기 위한 입구.

그것을 본 도전자들이 다급하게 상선하기 시작했다.

"가지."

검을 집어넣은 뷔엘라가 대형선 위로 움직였다.

"저게 우리가 올라탈 배라더군."

척 보아도 수백에 달하는 도전자들이 올라타 있었다.

한국인들이 배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은 커뮤니티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골치 아프네."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생각하면 배가 좋은 것은 무조건 반길 일이지만, 이 많은 인원을 지켜 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타자."

뷔엘라와 이신이 배 위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눈동자가 그들의 모습을 쫓았다.

"출발합니다!"

포탈 너머로 스테이지 위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난폭하게 출렁이는 파도.

쏟아지는 장대비.

"음...."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하는 듯한 분위기에 이신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가 움직이자, 그 주위로 홍해가 갈라지듯 몰려 있던 인파들이 양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마치 출진하는 대장군의 길목에 도열하는 병사들처럼.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배가 포탈을 넘어 스테이지에 도달했다.

[20층에 입장하셨습니다.]

[미지의 섬, 천고의 보물로 가득한 보물섬을 찾으십시오.]

이번 스테이지에 대한 메시지 창이 떠올랐지만, 그것을 곱씹을 여유 따윈 없다.

자욱한 물안개와 쏟아지는 빗물 사이로 일렁이는 수백의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검은 그림자가 없는 곳이 없다.

"해적들이다! 놈들이 여기를 포위하고 있어!"

배를 지휘하는 선장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외쳤다.

"뭐, 뭐야?"

넓디넓은 바다 위에, 한순간에 고립된 도전자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참을 항해해야 마주칠 해적들이 포탈을 건너오자마자 대기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포탈이 사라지면 동시에 안개도 서서히 걷히게 될 것이고, 뒤이어 저 수백의 해적선들도 다가올 것이다.

"모두 포격에 대비하세요."

이신의 말에 다급하게 정신을 차린 한국의 도전자들이 여기저기 지금의 상황을 알리기 시작했다.

당황은 한순간일 뿐, 대처는 빨라야 한다.

이신과 함께 지난 19층을 겪었던 도전자들은 더욱 신속하게 움직였다.

"저쪽 함대에도 전해. 해적들이 대기하고 있다고."

"우리 말을 들어 줄까요?"

"그럼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야? 우린 지금 상어 주둥이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대가리가 있으면 알아서 행동하겠지!"

우수수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도전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다른 함선들도 마찬가지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해적선들의 그림자를 보고 있으면 발을 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포탈이 사라진다!"

"준비해!"

"날아오는 포탄들은 최대한 공중에서 요격한다! 근접 계열 전투원들은 소형선을 타고 바다 위에서 커트해!"

다른 이들이 저 멀리 보이는 해적선들만을 주시하고 있을 때, 이신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피부 여기저기에 박혀 있는 비늘과 쫙 찢어진 눈동자.

두껍고 긴 꼬리와 로브의 소매에 슬쩍 드러난 날카로운 발톱까지.

마치 인간과 용을 합쳐 놓은 듯한 괴상한 모습에 이신이 눈가를 좁혔다.

놈이 뱃머리에 서서 여유롭게 해적선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둘의 시선이 바다 위에서 부딪히고 서로를 관찰하듯 훑었다.

마력을 끌어올린 이신이 상대를 탐색하기 위해 감각권을 확장하고 공간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에 맞춰 동시에 뻗어오는 놈의 마력이 대놓고 이신의 공간을 침범하려 했다.

'이건....'

거만하기 짝이 없는 행동.

차분하게 주변을 조금씩 확장하던 이신과 달리 놈은 그 마력을 쭉 뻗어 이신의 공간으로 내던졌다.

이런 행동을 저지른다면 후에 그 마력의 제어권을 상대에게 빼앗겨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파지지지직!!

그와 동시에 뭉쳐진 마력의 덩어리가 전격으로 변해 공간의 빈틈을 찌르고 마력의 흐름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같은 뇌전 계열의 마법사인가."

허를 찌르는 상대의 한 수에도 불구하고 이신은 짤막한 감상 한마디를 내뱉을 뿐.

피아노를 두드리듯 현란하게 움직이는 이신의 손가락을 따라 그의 감각권에 있는 마력들이 일제히 놈의 뇌전의 잔흔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붙잡고 억누르고 지배한다.

상대의 공간에 마력을 집어넣는 것은 마법사로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일.

하물며 뇌전 계열로 이신에게 승부를 거는 건, 그에게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마력의 흐름들을 건드리던 뇌전의 잔해들의 지배권을 박탈당하는 건 순간이었고.

지직, 지지직!

한데 모여 아우러진 그 뇌전들이 이신의 마력에 스며들며 회전하는 것은 찰나였다.

[전격포]

콰아아아아아아!

귀를 찢는 뇌성과 함께 허공을 뚫고 뻗어지는 금빛 포격.

급격히 일그러지는 놈의 얼굴을 보자 이신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깃들었다.

제82화

갑작스레 벌어진 두 사람의 격돌에 순간적으로 모든 이들이 멈칫했다.

눈이 멀 것 같은 섬광과 보기만 해도 따끔거리는 뇌전이 사방으로 튀고, 안 그래도 거센 파도가 그 충격으로 더욱 크게 출렁거렸다.

원작자인 고든의 전격포를 몇 단계는 더 개량한 마법이다.

더구나 고든의 것보다 더욱 강력한 뇌기(雷氣)를 가져다 썼으니 위력은 말할 것도 없다.

놈의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가 한층 더 가늘게 변했다.

일그러진 표정과 달리, 겉으로 보아선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듯한 모습.

펄럭이는 로브 자락이 뒤로 젖혀지자, 두꺼운 비늘로 덮인 놈의 팔이 나타났다.

풍기는 마력이나 생김새 하며, 저 거만한 표정까지.

이신이 알고 있는 그 용들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용과 인간의 혼혈인가.'

고작 20층에서 저런 놈을 만날 줄이야.

신격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적어도 저 녀석이 2 이상의 신격을 가진 놈이라는 것.

신혈일 확률이 대폭 높아졌다.

"신의 사도인가?"

그럴 확률은 적다고 생각하지만, 배제할 수는 없으니.

원래라면 이미 생각해 두었던 다음 수를 꺼내 들었어도 진작에 꺼냈어야 하지만.

우웅- 우웅-

저 멀리서 느껴지는 마력의 파장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용인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걸까.

이신을 바라보는 부담스러운 눈빛은 사라지고 놈의 시선이 안개 너머의 그림자로 향했다.

"해적들이 온다!"

"모두 전투 준비 해!"

용인과의 사전 탐색은 이쯤으로 하고, 지금은 저 강대한 에너지에 대한 대책을 세울 때.

안개가 걷히고 무형의 파열포가 이쪽으로 강렬한 위압감을 내뿜으며 날아오고 있었다.

공간이 일렁이고 파열포가 날아오는 궤적에 따라 생기는 바닷물의 출렁임이 그 위력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단 한 발만으로도 이 대형선도 쉽게 침몰시킬 수 있을 정도의 위력.

놈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기습적으로 파열포를 쏜다면, 적들을 쉽게 혼비백산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진형이 뭉개지고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하는 치명타는 실제로 입은 피해 이상의 효과를 보여 준다.

"뷔엘라!"

"알겠다!"

이쪽의 대형선은 총 세 척.

기습으로 상대를 한 방에 무력화시킬 생각이라면 이 대형선만 노릴 리가 없다.

동시에 세 척 모두를 노리겠지.

뷔엘라도 그 에너지를 느꼈는지 이신의 말을 곧장 알아듣고 다른 쪽 대형선으로 뛰어올랐다.

나머지 한 척은 반한 연합의 배.

그쪽은 용인이 있으니 충분히 막을 터.

[스틸 플레이트 실드]

조금 전, 용인과의 대립으로 감각권을 크게 늘려 놓았던 이신은 최대한 먼 곳에 실드를 세웠다.

콰아아아아앙!!

실드가 찌르르 울림과 동시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폭음이 바다 한복판에서 발생했다.

고작 저 정도의 파열포로 뚫기에는 이신의 마법 경지가 너무 높았다.

안개가 걷히고 수백 척의 배들이 배경처럼 주르륵 떠 있었다.

북 방위에서 내려오는 거대 함선.

조금 전 파열포를 쏘아 낸 배의 뱃머리에서 덩치 큰 남자가 꽥꽥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자신들의 파열포가 쉽게 막혔기 때문일까.

180mm 트웨이드 탄 파열포.

이신도 익히 알고 있는 함대의 포탄이다.

마도공학의 정수를 집약해서 만든 이 포탄은 20층의 도전자들이 골머리를 싸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었다.

해적 따위가 이 바다를 무법자처럼 활개 치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무기.

해적들의 실질적인 무력도 있겠지만, 그들이 바다를 지배하게끔 기반을 다지게 만든 원인인 건 확실했다.

자신들의 그러한 파열포가 허무하게 막혔으니, 이제는 다음 수를 꺼내야만 할 것이다.

'자, 이제 뭘 보여 줄 거지?'

이신은 안심할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을 것이란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음을 확정 지을 순 없지만, 언제라도 죽음이 찾아올 수 있으리란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아직까지 신들이 자신들의 인과율을 소모해 가며 개입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고작해야 해적들에게 이곳에 해군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흘린 것과 신혈 도전자를 이곳에 보낸 것 정도.

이 두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될지 모른다.

허나, 이신의 예민해진 감각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바다가 크게 튀어 오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아까 그 용인이 해적선과 맞붙는 모습이 보였다.

밝게 빛나는 전격의 구체가 해적들의 거대 함선을 향해 쏘아지더니 공간을 뭉개고 바다를 헤집었다.

마치, 중력을 거스르듯 솟아오른 용오름이 뇌전과 합쳐지며 함선을 덮치고 있었다.

이신은 남쪽에 있는 해적선들은 저 마법으로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느껴지는 마력의 일그러짐을 느끼기 전까지.

"큭!"

마력을 끌어 올리던 이신은 투두둑 끊어지는 마력 제어에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대체로 마법사들은 바다에 가는 것을 기피한다. 어떠한 바다는 마법사들의 무덤이라 불리기도 한다.

정적인 땅 위의 대기와 다르게 바다 위는 난폭하고 거칠다.

평소에 쉽게 성공하던 마법도 바다 위에선 실패할 수 있다.

바다에서만 활동하는 마법사들이 있는 이유도 그러한 것 때문이었다.

"이때다! 쏴라! 저 해군 놈들을 다 죽여 버려라!"

"놈들의 마법사가 무력화됐다. 배를 침몰시켜!"

이번 스테이지에 오른 수백의 도전자들이 상정하지 못했던 상황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쾅! 콰과광!!

쏟아지는 포격의 세례에 침몰하는 배들이 속속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막아! 막으라고!"

"저쪽 배로 넘어가!"

"이신 님이 탄 배는 어디야? 어디로 가야 돼!"

"망할 새끼들아! 도망칠 생각만 말고 대처를 하란 말이야!"

개인 하나하나의 기량이 뛰어나다 한들, 집단으로서 힘을 합치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

오히려 개인의 힘이 뛰어날수록 집단은 통제하기 힘들어진다.

그들은 결국 남이 아닌 스스로만을 믿기에.

"마력이 제대로 안 움직인다고!"

"젠장! 아무리 바다 위라도 그렇지, 왜 이렇게 마력 컨트롤이 안 되는 거야!"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된 바다 위.

이를 악문 이신은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보았다.

쏟아지는 빗물과 뭉쳐 있는 구름 사이로 희미한 에너지가 흘러나왔다.

'자신만만하던 게 저것 때문이었나.'

단순 바다의 환경 때문에, 마력의 컨트롤이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무언가가 마력 컨트롤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이신은 마력을 대기로 흘려 이러한 현상을 빠르게 조사했다.

마력이 자꾸만 제멋대로 흩어지고 뭉쳐지고를 반복한다.

다행히 몸 안에 있는 마력에는 큰 타격이 없었지만, 바깥으로 뻗어지는 순간 마력의 제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적들의 치밀한 준비에 이신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당황을 넘어가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고 하던가.

이신은 그런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마력을 몸속에서 미친 듯이 회전시켰다.

저 구름 사이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까드득-

저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상대가 어떠한 인간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턱이 부서져라, 이를 악문 이신이 잔뜩 끌어모은 마력을 하늘 위로 뻗어 올렸다.

급격히 흔들리는 마력들이 통제권 내에서 하나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할 만하다.

서서히 마력 통제에 대한 간섭이 심해지고 있었다.

아마 곧장 최대 출력을 내지 못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 존재를 숨기기 위함도 있겠지.

이신은 자신의 마력을 전부 쏟아붓더라도 저 하늘에 있는 무언가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게 완성이 되면 이 전쟁에서 이길 방법은 사라진다.

'크윽!'

용솟음치는 마력의 줄기.

이신의 마력에 무형의 힘이 좀비처럼 달라붙어 그 의지를 강제로 끌어내리려 했다.

이제부턴 정신력과 의지력의 싸움이다.

터질 것처럼 머리가 과열되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럼에도 이신은 자신 있었다.

그 누가 이신의 정신력과 의지력을 의심할 수 있을까.

전생의 그 최악의 상황에서도 결국 탑의 끝에 올라갔으며, 수없는 죽음을 겪었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닿았다.'

그의 마력이 눈과 귀가 되고, 손과 발이 되었다.

구름 사이에 새겨진 커다란 마법진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 가운데 막대한 에너지를 품은 구체가 자신의 힘을 서서히 풀어내고 있었다.

'역시.'

저 구체가 품은 에너지부터가 매우 불안정하다.

그러한 불안정함을 주변에 퍼트릴 정도로.

지팡이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구체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마력 제어가 급격히 힘들어졌다.

'지금 상태로 저 마법진을 깰 수 있을까?'

척 보아도 구체를 둘러싼 마법진의 힘이 대단했다.

현재 이신은 마력을 제대로 다루기 힘든 상태.

저 정도의 마법진을 깨려면 상당히 힘을 써야 할 정도이지만....

"얕보여도 너무 얕보였네."

이신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뇌전술사인 자신에게 이러한 전장을 내어 준 것이.

그들 나름 이신이라는 도전자를 인정했기에 이렇게까지 한 것일 테지만, 그럼에도 그 뿌리 깊은 인간에 대한 무시가 그들에게 박혀 있음이 느껴졌다.

그들에게 그러한 감정에 대해 불평할 생각은 없다.

그저, 보여 줄 뿐.

계속해서 뻗어 낸 마력을 사방 가득한 먹구름으로 흘려보냈다.

마법진 주변으로 구름이 가득한 가운데, 빛나는 백색 뇌전이 군데군데 자신의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다.

치직- 치지직-.

이러한 먹구름 가득한 전장에서 자신을 잡을 생각을 한 점.

거기에 더해 가장 중요한 한 수를 이곳에 숨겨 놓은 점.

쓰디쓴 미소를 머금은 이신의 마력이 얕은 수분으로 변해 구름 가득 퍼진다.

수분들이 대기 중에서 파열하고 동시에 뇌기를 만들어 낸다.

뇌기를 가득 머금은 구름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듯 뇌성을 토해 내고.

쿠구궁!!

그러한 뇌성이 점점 거세지자, 이신의 마력이 다시 한번 그 공간에 강한 인력을 새긴다.

[피뢰(避雷)]

뇌기를 끌어당기는 마법이 마법진 위로 새겨진다.

콰과과과광!!

사방 가득한 먹구름이 그 수용량을 감당하지 못한 채 안에 있는 뇌기를 전부 마법진 위로 토해 내기 시작했다.

해상에 있는 이들은 시끄러운 뇌성의 반복에도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으나, 점점 커지는 그 소리에 하나둘 고개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뭐…지?"

"무슨 번개가 저리...."

마력의 제어가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기어코 마법을 발현하여 배 하나를 침몰시킨 용인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하늘을 보다 시선을 내려 대형선의 뱃머리를 보았다.

같은 뇌전 계열의 마법사이기에 알 수 있었다.

저 구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것인지.

저 뇌기들이 아래로 떨어지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도.

'인간이....'

자신의 몸에는 절반은 용의 피, 나머지 절반은 인간의 피가 섞여 있다.

수많은 종족 중에서도 최약체로 꼽히는 인간의 피가 찬란하고 위대한 용족의 피와 섞여 들어간 탓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질시와 모멸을 받아 왔다.

그 때문에 평생을 인간을 원망하며 살았다.

'고작 인간 주제에....'

그간 자신이 겪어 온 경험과 감정, 생각들이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 * *

쏟아지는 뇌기의 파도에 마법진이 버티다 못해 깨졌다.

안의 구체는 마법진의 동력원일 뿐, 마법진이 사라지니 주변을 아우르던 마력의 불안정이 일시에 사그라들었다.

답답한 족쇄가 풀어진 듯한 감각.

한계 이상의 뇌전에, 피뢰도 더 이상 버티다 못해 터져나갔다.

이신은 곧장 구체를 향해 마력을 뻗었다.

[염동력]

마력으로 이루어진 무형의 손이 이신의 의지를 따라 구체를 붙잡았다.

[히든 스테이지 – 아바임 몬스트레]

[심해에 잠든 괴수, 아바임 몬스트레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자신의 두 번째 심장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바임 몬스트레가 자신의 심장을 찾고 있습니다. 아바임 몬스트레의 나머지 심장을 빼앗고 놈을 처치하십시오.]

갑자기 떠오르는 메시지에 이신이 눈가를 좁혔다.

'이게 그 녀석의 심장이라고?'

쿠구궁!!

이것에 대해 길게 생각할 시간이 없다.

아직까지 자신의 넘쳐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뇌기들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기에.

이신은 아바임의 심장을 당겨와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주변을 살폈다.

콰과광!!

피아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내리치는 낙뢰에 도전자들의 진영은 물론이고 해적들까지 혼비백산이 되었다.

"아악! 무너진다!"

"돛 내려! 아니! 그냥 돛대를 부숴 버려!"

"미쳤어요? 돛대를 왜 부숴?"

"그럼 그냥 저 낙뢰 맞을래? 저기 안 보여? 낙뢰 한 방에 배가 그대로 반으로 쪼개졌다고!"

"x발...무슨 위력이."

"안 할 거면 나와! 막기라도 하든가!"

이러한 아수라장이 벌어질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내가 한 짓은 내가 해결해야겠지."

혼란스러운 광경을 보던 이신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제83화

구름 사이를 나부끼는 뇌기.

갈 곳을 잃은 뇌기들이 수백 갈래로 나뉘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쿠궁! 쿠궁! 콰과광!!

돛대 위로 강렬하게 내리꽂히는 낙뢰들의 잔치.

너무 책임감 없이 뇌기들을 놓아 버린 게 아니었나 하는 죄책감과 저 고삐 풀린 천둥과 번개들을 모두 잡아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동시에 생겨났다.

이미 잔뜩 달궈진 이신의 마력이 곧장 하늘 위로 뻗어지고.

촤아아아악!

하나하나 그물망으로 낚아채듯, 새하얀 뇌전의 파편들을 붙잡기 시작했다.

피뢰의 원리를 이용한 응용 버전.

마력을 뇌기가 있는 곳에 뻗어 흡수하듯 끌고 온 뒤, 한곳으로 모은다.

뻗고, 붙잡고, 뭉친다.

한곳에 동그랗게 뭉쳐지는 뇌기들이 시끄러운 뇌성을 흘릴 때.

그의 감각권에 걸린 강대한 뇌전의 힘이 도전자들 사이를 뚫고 이신을 향해 쇄도했다.

[낙뢰]

용인이 쏘아 보낸 뇌전을 감지한 순간부터 마력의 흐름을 바꾼 이신이 그에 맞춰 낙뢰를 불러 그 뇌전 위로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아아아!!

바다 위에서 일어난 거대한 격돌.

그 아래에서 일어난 거센 충격파에 바다가 부서지듯 사방으로 밀려난다.

그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배가 그 여파에 휩쓸려 뒤집혔고 두 뇌전의 격돌 후 비산하는 뇌전의 파편들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저 두 도전자와 다른 이들과의 아득한 격차로 인해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건만.

바다 위라는 한정적 상황 때문에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모두 최대한 대형선 쪽으로 올라가! 저 둘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이동해!"

"불가능합니다! 이쪽을 피하면 저기 해적들이-."

"야이 머저리 새끼야! 저 둘 옆에 있는 게 해적들이랑 싸우는 것보다 안전할 것 같아?"

"예, 예! 알겠습니다!"

바깥쪽은 자신들을 해군이라 지껄이며 침몰시키려는 해적들로 깔려 있고, 안쪽에는 천외천의 도전자 둘이 주변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미친 듯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

"왜, 하필이면 또 둘 다 뇌전술사인 거야."

날아오는 해적들의 포탄을 견제하던 뷔엘라가 난데없이 몰려오는 거대한 물벼락을 맞고는 중얼거렸다.

저 이종족은 또 어디서 튀어나온 괴물인지.

느껴지는 마력으로만 보아도 자신보다 몇 수 위의 실력자가 분명하다.

버서커의 능력을 끌어 쓴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저 바라보고 싸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뷔엘라의 시선이 용인에게서 이신에게로 옮겨졌다.

저 이종족이 아무리 괴물이라 해도 이신은 이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걱! 쿵!

동쪽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잘라 낸 뷔엘라가 짧은 감상을 뒤로한 채 마력을 끌어올렸다.

'난 해적들이나 처리하면 될 뿐.'

이신이 저 싸움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뭐 했냐는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저 해적선에 가져다 대! 백병전으로 간다!"

와아아아아아아!!

어느새 나머지 한 척 대형선의 리더 격이 된 뷔엘라의 외침에 선원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한편, 이신은 간만에 벌어지는 격전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 흥을 내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15층에서 금색 마탑의 마탑주를 만났을 때도 큰 감흥이 없었다.

그가 한때 이신의 스승이라고 해도, 스승을 넘어선 지는 오래전 일이기에.

오랜만에 과거의 스승을 만났다는 것 외에는 마법적으로는 그다지 흥미도, 놀람도 생기지 않았었다.

근데, 지금은 다르다.

이렇게 강력한 뇌전술사와의 싸움이 얼마 만이던가.

처음의 탐색전과 다르게 용인은 자신의 감정을 가득 담아 열정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라이트닝 체인]

사슬처럼 뻗어지는 뇌전이 용인의 양팔을 묶었지만 전격을 머금은 놈의 손톱은 라이트닝 체인을 그대로 끊어 냈다.

'신체 능력도 뛰어난 건가.'

그렇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이미 용의 피를 이은 걸 안 이상 그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배의 갑판을 박차고 뛰어오른 용인이 양손을 가운데로 모아 주변의 뇌기를 미친 듯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모여드는 뇌기의 구체가 반경 수 미터에 달하는 크기가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림자 공간]

용인의 마법을 보는 순간, 이신은 그 마법의 후폭풍을 대비하기 위해 권속 넷을 불러냈다.

"안진, 데칸. 너희는 바다에 떨어진 이들을 구해. 인간이든 이종족이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둘이 사라지고.

"워리, 너는 해적들을 견제해."

"예."

"메이는 이 배를 지켜."

"알겠습니다."

이 대형선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결국 저 용인을 이긴다 해도, 이 많은 이들이 바다 위에서 버틸 배는 있어야 하기에.

보물섬도 찾아야 하는데, 이 많은 인원을 전부 데리고 가려면 웬만한 배들론 어림없다.

[염동력]

이신이 팔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자 용인이 서 있던 돛대 한 부분이 우그러지며 부러졌다.

한가로이 뇌기를 모으게 둘 생각은 없다.

이신은 부러트린 돛대를 용인을 향해 휘둘렀다.

파지지지지직!!

하지만 극도로 압축된 뇌기에, 돛대는 허무하게 녹아 버렸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해서 이신은 실망하지 않았다.

잠시 그의 주의를 돌리는 정도면 충분했으니.

[폭뢰]

전조 없이 터지는 뇌전의 폭발.

두 사람의 잇따른 뇌전의 격돌로, 대기 가득 뇌기의 잔흔들이 퍼져 있었다.

이신은 그러한 뇌기에 공기의 폭발을 섞어 용인의 집중을 흩트리는 데에 집중했다.

콰광!!

파지직!

머리맡에서 터지는 폭발에 순간적으로 일그러지는 용인의 표정과 흩어지는 뇌기들.

용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그 시도가 성공적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이게 잔재주로 보인다면, 유감이야."

한쪽 입꼬리를 삐뚤어지게 올린 이신이 검은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성장을 멈춘 뇌기의 구체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탄격뢰(呑擊雷)]

마치 뇌기로 이루어진 태양을 가까이 가져다 놓은 듯한 모습에, 그 광경을 보던 도전자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막는다면 인정하지."

그러한 말과 함께 용인이 그 뇌기의 구체를 이신에게 던졌다.

무엇을 인정한다는 것인지.

고작 저런 녀석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게 아니다.

파지직!!

검은 전류가 이신의 온몸을 타고 흐르며 하늘 위로 솟구쳤다.

파괴 신의 잔재라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고 집어삼킬 것만 같은 탄격뢰.

저러한 마법을 정면에서 상대하는 것은 사실 바보 같은 짓이다.

피하고자 하면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피할 수 있었지만, 이신은 그러지 않았다.

상대도 이신이 그리할 것이라 알고 있는 것일까.

뇌기의 구체는 정직하게 이신을 향해 날아왔다.

그의 시야를 가득 메운, 파멸을 갈구하는 뇌전을 보는 순간 이신은 상대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직진뿐이었던 걸음은, 숱한 좌절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자신의 발자취는 절대 헛되지 않았노라고.

그의 절망과 허망, 그와 동시에 생을 향한 필사의 의지가 뇌전의 구체에서 처절하게 느껴졌다.

이대로 저 의지를 피해 버린다면 조금 더 쉽게 승리를 가져올 순 있어도 후련함이 아닌 찝찝함이 남을 것만 같았다.

그가 전력을 다한다면 이쪽도 똑같이 전력을 다하는 게 예의가 아니겠나.

[흑뢰(黑雷)]

현재 이신이 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

수많은 이들의 괴로움, 울분, 고통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이 가득한 이러한 전장에서는 더더욱.

콰과광!

어두운 바다 위를 비추는 뇌전이 시시각각 발생하는 와중에, 그사이에 생겨나는 흑빛 번개.

그 검은 섬광이 바다 위로 내리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놀랍다 못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이적(異跡).

화려하면서도 음침하고, 웅장하면서도 은밀하다.

자신이 발현한 마법이었지만, 이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두 거대 마법의 격돌.

극도로 쌓이고 쌓인 뇌기와 강렬하게 내리꽂는 뇌전의 충돌.

그 여파로 발생한 뇌성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한순간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그대로 죽는다.

한 번이라도 멈칫하면 저 뇌기에 온몸이 타오를 것이다.

그러한 감각들이 이신을 짜릿하게 만들어 주었다.

상대의 뇌전 마법을 보고 있자면 이신의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영감이 하나둘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이런 감각이 얼마 만이던가.

그간 뇌전이 아닌 다른 능력을 키우느라 잊혀져 있던 그 생동감이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용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흑색 포격.

두꺼운 흑뢰의 줄기를 마주한 그는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한동안 권태로웠던 그의 감각을 깨우는 한 수.

필사의 의지를 내보였던 마법이 깨져 버린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잔뜩 달아올라 버린 이 심장을 더욱 달궈 줄 앞으로의 공방을 기대할 뿐.

이신의 마력이 주변 가득한 선박들로 향한다.

[염동력]

조금 전, 두 마법의 격돌에 발생한 충격파로 인해 거의 모든 배들이 뒤집혔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 여파가 장난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버틴 도전자들의 배는 단 세 척의 대형선뿐.

그마저도 이신이 타고 있던 배는 침몰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콰득! 콰드득!

양손이 떨릴 정도로 사방의 배들을 염동력으로 움켜잡은 이신이 기울어져 가는 대형선과 주변의 배들을 인력으로 서로 당겼다.

메이의 마법이 충격을 많이 흘려냈기에 망정이지, 그것이 없었다면 진작에 배의 갑판이 다 떨어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까드득!!

이가 부서져라, 턱에 힘을 준 이신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 올랐다.

주변 수십 척의 배를 붙잡고 이 대형선과 균형을 조절하는 것은 정말로 머리가 빠개져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의 어려움이었다.

1분 전으로 돌아가라 한다면 정말로 돌아가고 싶어질 정도로.

"으어어어어!"

"넘어간다! 넘어간다!"

"아, 안 돼! 제발!"

"이신 님!"

주변 도전자들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넘어지기 직전의 대형선의 균형은 쉽게 잡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젠장! 무리였나?'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마력량을 생각하면 이쯤 포기하고 놓는 게 맞았다.

그때.

콰아아아앙!

배가 넘어지려던 쪽의 바닷물이 갑자기 하늘 위로 치솟으며 기울어지던 배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그 균형을 잡아갔다.

"뭐, 뭐지?"

"왜 갑자기 바다에서 폭발이?"

치솟은 바닷물의 장막이 걷히고 그곳에서 낯익은 얼굴의 도전자가 조금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난간 위에 서 있었다.

"방금 그런 마법을 펼쳐놓고 꼴사나운 꼴을 보이는군."

"뭐…하는 거지?"

언제 여기까지 온 것인지, 그새 배의 반대편까지 튀어온 용인이 마법으로 파도를 일으켜 배의 균형을 맞춰 주었다.

염동력을 쓰면서도 항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음에도 용인의 공격은 날아오지 않았다.

녀석이 진심으로 또 한 번 공격을 펼쳤다면, 도전자들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신은 처음으로 가까이서 마주하는 용인을 보자, 녀석의 덩치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느꼈다.

족히 자신의 1.5배는 되어 보이는 모습.

날카로운 용인의 눈동자가 이신을 훑었다.

"엔도 디 베리에르 물타리아 포스케리앙트다. 엔도라고 불러라."

"...이신이다."

"알고 있다. 죽음과 뇌전을 모두 다루는 마법사...나와 동수를 이룰 정도로 뇌전을 다룰 수 있는 인간은 처음이군. 아니, 전 종족에서 처음이다."

엔도의 말투는 딱딱했지만 그 안에 담긴 말은 진심이었다.

"나를 죽이러 온 게 아니었나?"

"처음엔 그랬지.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그럼 왜 그런 거지? 방금 나를 죽일 아주 좋은 기회였는데?"

"뛰어난 뇌전술사에 대한 예우일 뿐이다. 다음엔 봐주지 않아."

그 말을 끝으로 엔도가 몸을 돌렸다.

"신이 시켰나?"

이신의 물음에 엔도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니...내 의지다."

그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담겼다고 생각한 건 착각일까.

이신의 시선이 자신의 배로 돌아가는 엔도의 뒷모습을 좇다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그 많던 해적선이 그사이 몸을 내뺐다.

아직 남아 있는 녀석들이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이 배가 망가져서 도망가지 못한 것들뿐.

그러나, 이쪽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 어떡할 거지?"

동쪽 해적 함대의 대가리를 썰어 오지 못해 이를 갈고 있던 뷔엘라가 다가와 물었다.

"어떡하긴, 스테이지를 클리어해야지."

제84화

20층

[아바임 몬스트레의 두 번째 심장]

# 불안정한 에너지를 품고 있습니다.

# 지니고 있으면 아바임 몬스트레가 찾아올 확률이 높아집니다.

이신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심장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20층의 스테이지에서 아바임 몬스트레를 보았다는 도전자는 몇 없었고, 그렇다 보니 이에 대한 정보도 정말 적었다.

그나마 있는 것은 20층의 도시에서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라던가, 그 심해의 괴수를 마주친 이들이 그린 몽타주 정도라고 하는 것들이 전부였다.

들려오는 이야기도 심장을 먹으면 평생을 늙지도 아프지도 않다느니, 무한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느니 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뿐이었다.

이 심장을 이용해 광범위 마력 제어 방해 마법진을 설치해 놓은 것은 신들의 개입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깨지고, 아바임 몬스트레가 나타나는 것까지가 그들의 설계일까?

아바임 몬스트레의 심장을 빼돌려 이런 짓을 벌인 것만으로 심각한 스테이지 개입이다.

얼마나 큰 인과율을 희생한 것인가? 그 파멸의 신이라는 놈이 그렇게나 대단한 신인가? 아니면, 꿈을 먹는 용이라는 놈이 대단한 것일까.

이대로 이 심장을 부숴 버리고 바다에 던져 버린다면 아바임 몬스트레가 찾아올 위험과 더불어 발생할 변수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신은 구슬 안에 일렁이는 보랏빛 에너지를 노려보았다.

왠지 모르게 눈을 뗄 수 없는, 친숙함이 느껴지는 듯한 감각.

잡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머리를 털며 아공간 주머니에 아바임 몬스트레의 두 번째 심장을 넣었다.

고개를 들어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보았다.

아까까지 비가 쏟아지고 파도가 출렁이던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사라졌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바다 위, 패잔병과 같은 모습으로 여기저기 부서진 배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에 염동력으로 전복되는 것을 막은 배들이 여기 있는 전부였다.

나머지는 모두 이신과 엔도의 전투 여파로 모두 침몰한 상태.

남은 배는 대형선 두 척과 중형선 여덟 척뿐이다.

"이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보물섬을 찾아야 하는 건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렇겠지."

뷔엘라의 물음에 이신이 위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 방향으로 시선을 보내니, 선장이 선원들을 시켜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서 무언가를 찾도록 지시하고 있었다.

"여기 뭐가 있다고 저렇게 찾는 거지?"

"해적들을 찾는 거야."

"해적들? 그 망할 놈들을 왜?"

굳이 그놈들과 마주쳐서 싸울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에 뷔엘라가 물었다.

"놈들이 가지고 있는 해상 나침반이 필요하니까."

"그게 왜?"

"그게 있어야 보물섬의 위치를 찾을 수 있으니까."

"아, 그렇군."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대략적인 방향은 찾을 수 있지."

아까 이 바다를 장악하는 4명의 해적 대장 중에 한 놈이라도 잡아서 나침반을 얻었어야 했다.

이신이 내던진 낙뢰에 해적들의 배들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지금쯤 그들도 도전자들이 해군이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챘을 것이다.

이신과 엔도의 그 무지막지한 싸움을 보기도 했으니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할 확률이 높았다.

오히려 마주치면 도망치려 하겠지.

조금 귀찮게 됐다.

"지금 빨리 찾아야 돼. 놈들이 정비를 끝내기 전에."

부우우우우우우―

그때, 돛대 위에서 망원경으로 해상을 살피던 한 선원이 뿔피리를 힘차게 불었다.

"전방 40도가량 되는 방향에 무언가 보입니다!"

선원의 말에, 이신과 뷔엘라가 고개를 돌렸다.

아직 너무 멀어, 눈으로는 점처럼 보여 무엇인지 제대로 확인이 되지 않았다.

마력 파장을 퍼트리기에도 조금은 먼 거리.

그렇다면, 잠깐 다녀올 수밖에.

"잠깐 빌린다고 해."

"뭐?"

[염동력]

우드득!

난데없는 이신의 말에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뷔엘라의 뒤에서 갑판이 떨어져 나갔다.

자신의 머리 옆을 스치고 날아가는 갑판에 놀란 뷔엘라가 벙찐 얼굴로 날아가는 갑판을 보았다.

어느새 이신은 그 갑판 위에 올라타 바다로 날아가고 있었다.

"어, 어?"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점점 멀어져 가는 이신.

그 모습을 뷔엘라와 배 위의 다른 이들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와...."

그들은 처음 보는 기예에 나지막한 감탄사만을 흘렸다.

배 위의 도전자들이 어떠한 반응을 하든 전혀 관심이 없던 이신은 금세 가까워지는 목표물을 보며 연이어 마법을 사용했다.

[접착]

[호크아이]

강철 갑판에 발바닥이 찰싹 달라붙은 채로, 망원경을 눈에 씌운 듯 확대되는 시야를 통해 저 멀리 있는 바다 위 물체를 보았다.

"역시, 배였나?"

꽤 멀리까지 날았음에도 아직까지 맨눈으로 보기엔 멀기만 했다.

그래도 제법 가까워진 탓에, 배 위에 있는 녀석들의 모습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대형선 하나와 중형선 수십 척이 같이 움직이고 있다.

해골 모양의 깃발을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까 도전자들을 마중 나왔던 해적들 중 하나로 보인다.

'뷔엘라와 싸우던 녀석인가?'

놈들의 배도 여기저기 망가져 상처투성이인 모습.

배 위에 있는 해적들도 어수선한 모습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슬슬 허공에 뜬 갑판과 바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린."

촤아아!

바닷물이 떠오르며 지난 층에서 계약했던 정령 린이 나타나고.

마치 서핑을 하듯, 갑판이 해수면 위로 일어난 파도를 타며 움직인다.

파도 서핑을 직접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뛰어난 신체 능력과 염동력으로 균형을 잡은 덕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음...."

원래라면 잠깐 확인만 하고 돌아가려 했지만.

"저기로 가자."

기왕 온 김에 해적들을 손봐 주고 가면 좋겠지.

그리고 도전자들이 타고 있는 대형선을 타고 따라붙었다가는 금방 발각당하고 놓칠 것이다.

"네!"

촤아아아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작은 파도.

해적들이 어수선한 탓에 지금까지는 들키지 않았지만, 발견되는 건 금방일 것이다.

'날씨가 너무 좋네. 쯧.'

이럴 때 비라도 좀 내릴 것이지.

비라도 오면 모습을 숨기기에 몇 배는 수월했을 것이다.

이신은 홀로 혀를 차며 최대한 빠르게 접근했다.

그때.

부우우우우우―

적들의 배에서 거센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제기랄.'

있는 거라곤 바닷물뿐인 망망대해에 홀로 파도를 타고 움직이니, 들킬 수밖에.

"속도를 최대한 빠르게 올려."

"네!"

해적들도 바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곧장 반응을 하지는 못했다.

이신을 발견한 선원이 선장에게 무엇인가를 말하자, 선장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망원경을 빼앗았다.

망원경을 들어 이신을 본 선장의 얼굴이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그제서야 뱃머리가 이신이 있는 방향과 반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며 그를 향해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늦었지.'

펑! 펑! 펑!

촤아악! 촤악!

린의 환상적인 움직임으로 포탄들을 피해 냈다. 그사이 가까이 다가간 이신이 접착 마법을 푼 뒤, 갑판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막아! 쏴! 바다로 떨어뜨리란 말이야!"

상당히 가까워진 거리.

이제는 놈들의 말소리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염동력]

허공에서 손을 뻗은 이신의 무형의 손에 커다란 돛대가 잡혔다.

우드득!

돛대의 밑부분이 그대로 우그러지며, 쓰러지는 돛대를 피해 다급히 해적들이 몸을 피했다.

쿵!

[임피드 웹]

마력으로 만들어진 끈적한 그물이 쓰러지는 돛대의 끝부분을 잡고 이신을 당겼다.

무사히 돛대에 안착한 이신이 린을 돌려보낸 뒤, 다시 한번 뛰어올라 배 위에 올라탔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아수라장이 된 해적들 사이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신.

그런 이신을 보며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린 해적 대장이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여기는 왜 온 거지? 혼자 온 거냐?"

"…질문을 하려면 자기소개를 먼저 해야 한다고 안 배웠나? 아니 못 배워 먹은 건가?"

이신의 모욕적인 언사에 해적 대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이신의 실력을 알기에 꾹 눌러 참았다.

"내 이름은 말다리안이다. 크흠! 넌 누구지?"

"알 거 없어."

대답해 줄 가치도 없다는 듯,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이신의 모습에 그가 이를 아드득 갈았다.

"음..., 선장실은 어디지?"

도전자들이 탄 대형선의 족히 두 배는 될 정도로 배가 크다 보니, 혼자 이곳을 다 돌아다니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선장…실은...왜 찾는 거지?"

울그락불그락 달아오른 말다리안의 얼굴이 곧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알기론 네놈들이 해상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 어딨어?"

마치 맡긴 자신의 물건을 가지러 온 듯한 모습.

말다리안은 해적이 자신인지 아님, 저 마법사 놈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없다. 잘못 찾아온 것 같군."

"그래?"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푹 쉬다 가겠나? 바쁘면 그냥 사라져 버려…아니, 가도 된다만."

"나보고 꺼지라고?"

"내가 언제 그랬나! 그냥 가도 좋다는 뜻이지."

이 바다 위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한 4명의 해적 대장 중 하나인 말다리안이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해적 선원들에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해가 되었다.

이 무슨 모순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느꼈다.

이신이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배 위에 올라탄 수백의 해적들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신은 그 모습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뭔, 자석의 N극과 S극도 아니고.'

여기서 오랜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저 멀리 기다리는 녀석들이 있으니 빨리 볼일만 끝내고 사라지는 게 좋겠지.

"말다리안."

"왜, 왜 그러냐?"

한기 서린 이신의 음성에 말다리안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말장난할 시간 없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해상 나침반 어딨어?"

꿀꺽.

침을 꿀꺽 삼킨 말다리안이 고민에 휩싸였다.

이 녀석이 정말 확신이라도 하고 온 건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원래라면 배짱부리면서 없다고 했을 테지만....

'그냥 줘?'

보물섬으로 갈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이 나침반인데 이대로 주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이것을 찾기 위해 노력한 세월이 있는데, 해적의 자존심이 있지!'

상대는 혼자, 여기는 해적만 수백이 넘어간다.

시이잉!

결국 말다리안이 칼을 꺼내 들자, 수백 명의 해적 선원들이 동시에 무기를 들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망할 새끼가. 우리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나름 무력으로도 이름을 날렸던 나다.

이 바다 위에서는 4명의 대장 중 하나로 불리기도 하는 내게 감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 말다리안이 검에 마력을 담았다.

"배가 부서져도 괜찮으니까 쏴라! 저 망할 새끼를 죽인 놈에게 비어 버린 간부 자리를 내어 주마!"

"간부라고?"

"좋아! 운 좋게 칼침 한 방이라도 먹이면 포상이라도 나오겠지!"

"여기에 수백 명이 있는데 혼자 어쩔 거야!"

한참 전에 이신의 마법을 보고 공포에 떨던 것은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는지, 해적들은 금방이라도 눈앞의 마법사를 죽이고 받을 포상만을 상상했다.

이신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바다 놈들은 다 돌대가리라더니....'

고개를 가로젓는 이신에게로 수백의 해적들이 달려들었다.

"죽여라!"

"내 거다! 저리 비켜!"

"하하하학! 이거나 먹어라! 네이팜 탄이다!"

주변으로 둘러쳐진 실드 위로 네이팜 탄이 폭발을 일으키고, 총알들이 우수수 튕겨 나갔다.

화기들이 전혀 먹히지 않음에도 아무 생각이 없는지,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해적들의 앞에 그림자 공간이 펼쳐진다.

퍽!

바닥에서 솟구치는 거대한 몽둥이가 해적의 턱을 후려쳐 날려 버리자, 턱을 얻어맞은 해적이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뭐야?"

"기공파."

유난히 두개골이 반짝이는 스켈레톤이 마력의 덩어리를 쏘아 내자, 일직선에 있는 수십의 해적들이 그대로 밀려나 바다 위로 떨어졌다.

"이 해골들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으어어어, 오, 오지 마!"

"이 괴물들이! 저리 가!"

갑자기 나타난 죽음의 권속들.

마법사인 줄 알고 붙기만 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 해적들은 그를 둘러싼 스켈레톤들의 모습에 기겁하여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시꺼먼 마력을 줄줄 풍기는 것이,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다.

"아니?"

서걱! 쿵!

간부 중 하나가 호기롭게 워리에게 도끼를 들이밀다가 그대로 목이 잘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 간부의 시체가 다시 스켈레톤이 되는 장면은 놀랍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했다.

해적들의 사기가 추락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해적 선원들의 싸움을 보던 말다리안이 점점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저 해골 놈들은 뭐 저리 센 거야?'

마법사 하나 상대하기도 벅찬 판국에, 튀어나오는 해골들 하나하나가 자신과 동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말다리안은 그대로 검을 떨어뜨렸다.

"하, 하하하! 장난 한번 쳤을 뿐인-."

후웅― 치이익!

반응할 새도 없이 그의 머리 위를 스치는 짜릿한 뇌전.

머리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감각에 덜덜 떨리는 손을 갖다 대자, 반들반들한 피부가 느껴진다.

"나도 장난인데, 한 번 더쳐도 되나?"

미소 지으며 말하는 이신의 음성에 담긴 싸늘함에, 말다리안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리며 억지로 올라갔다.

제8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