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9

제97화

마경

마경 속.

검은 안개로 가득 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기로 이루어진 검은 안개는 마력의 흐름을 비틀고 툭툭 끊어대는 탓에 마력을 몸 밖으로 돌려 컨트롤 하는 걸 극도로 어렵게 만든다.

이신 정도의 지력 수치와 마력 컨트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마력을 멀리 보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과거 무능한 지휘관들이 막무가내로 병사들을 밀어 넣어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들이 생각났다.

얼마나 많은 병사가 이 마경 속에 던져졌을까.

이곳을 뚫고 적국의 땅을 밟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신은 이 마경 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기운들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정말 하나도 안 보이네."

처음 마경으로 들어와 본 릴리안은 신기한 듯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어머, 릴리안! 그러다가 길 잃으면 어쩌려고? 빨리 이신 님에게 붙어 있어."

아직 릴리안의 정체를 모르는 카노코는 그녀가 걱정되는지, 안절부절못하며 날아다니는 그녀를 놓치지 않게 고개를 계속 움직였다.

"귀여운 아이로구나.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것이냐?"

"정말…너 정체가 뭐니? 그러다 정말 큰일 나니까 얌전히 있어."

카노코의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지는지, 릴리안도 그녀에게는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기서부터는 카노코 네 능력이 필요하겠어."

이신이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기자, 바닥에서 메이와 워리, 안진이 나왔다.

"메이는 카노코를, 워리와 안진은 코에이와 코고를 맡아."

세 권속이 각자 위치로 움직이고, 카노코는 이신의 옆으로 갔다.

철컥! 쿵!

품에 있던 열쇠로 그녀가 찬 수갑을 풀자, 무거운 수갑이 땅바닥으로 하나둘 떨어졌다.

"와...진짜 날아갈 것 같네요."

마력 차단 수갑을 차고 있다가 풀려난 그녀는 천근만근 무거웠던 몸이 한순간에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해방감이었다.

"부럽다...."

"동의합니다."

인유우 코고는 벌써 몇 달째 수갑을 차고 힘을 봉인 당한 상황이었다.

이제는 꽤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카노코의 수갑이 풀리는 것을 보니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작해."

이신의 명에 그녀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능력을 펼쳤다.

탐험가 클래스의 클래스 스킬.

[지형 감지]

마경 속에서도 그녀의 클래스 스킬은 주변 지형을 정확히 감지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의 마력이 일시에 땅을 훑으며 주변 지형의 모습을 스캔하고 그녀의 머리에 입력시켜 줬다.

"지도 줘 봐요."

당당히 지도를 요구하는 그녀에게 이신은 그가 가지고 있던 지도를 건네주었다.

"흠…저희 목적지가 어디죠?"

"붉은 지대의 델벳 성."

"여기서 저희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 35도가량 옆으로 가면 높은 산이 있어요. 거기로 가야 해요."

"좋아."

카노코를 필두로 빠르게 움직이던 일행은 그녀가 말한 산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걸음을 멈췄다.

"적들이야."

"네? 어떻게?"

카노코는 자신의 [마력 탐지] 스킬로도 아직 잡아내지 못한 적을 이신이 먼저 알아차렸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마경 밖이라면 당연히 그의 탐지 범위가 훨씬 넓어질 테지만, 여기는 마경 안이다.

고유 능력이 아닌 일반적인 마력 컨트롤로 이 정도 범위의 마력 감지는 가당치도 않은 수치였다.

'진짜...인가?'

반경 백 미터를 넘어가는 자신의 마력 탐지보다도 빠르게 적군을 잡아낸 것은 정말 불가해의 경지였다.

"아직 마주치려면 멀었으니까 천천히 움직이자고."

"멀었다고요?"

한참을 움직여도 그녀의 마력 탐지에는 적들이 걸리지 않았다.

이신의 얼굴을 보니 그가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고.

"대략 사십은 되어 보이네."

"사, 사십 명? 미친, 우리 마경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얼마 안 됐습니다."

"근데 벌써 저런 대규모 적군을 만난다고?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다른 이들이 적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이신은 마력 컨트롤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어.'

그렇다는 건 저들이 운이 좋게 여기까지 당도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한참 전부터 마경을 뚫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게 된다.

어찌 되었든 운이 좋았다.

적들이 메르텡의 땅을 밟기 전에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 진짜…였어...."

그가 그렇게 말하고 한참을 더 움직이니 적들이 그녀의 마력 탐지에도 걸리기 시작했다.

정말 백에 가까운 인간들이 산을 넘고 있었다.

"왜 마족들이 안 나타나나 했더니, 저놈들이 다 처리했었나 봅니다."

"젠장,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놈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건데?"

카노코와 코에이와 달리 코고는 불안한 듯 계속해서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사급은 열, 기사 단장급이 하나 있고 나머진 일반 병사들이다."

"기사 열에 기사단장 하나라고? 미친, 이건 아니야. 다른 곳으로 가야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인유우 코고의 계속되는 걱정에 짜증이 난 이신이 안진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뜻을 알아챈 안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코고에게로 다가갔다.

"이건 정말 아니…으…읍!읍!"

"조용하고 따라오게."

"으으읍!"

코에이는 코고의 그런 모습을 보며 카노코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배가 원래 저런 이미지였나?"

"조금 이상한 건 알았는데, 저 정도인 줄은 나도 몰랐어."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갑작스레 표정을 굳혔다.

"왜? 왜 그래?"

"적들도 우리를 눈치챈 거 같아."

"뭐?"

"여기 가만히 있어라."

셋에게 주의를 준 뒤, 이신은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뛰어 들어갔다.

적들과의 거리는 이제 고작 20m 남짓.

놈들도 우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거리다.

'기사 단장급의 실력자가 눈치챈 것이겠지.'

그렇다면 이것도 알아차릴 수 있을까.

[낙뢰]

어둠 속에서 기습적으로 내리치는 전격의 벼락을 과연 막아낼 수 있을까?

검은 안개로 가득 찬 산속을 밝히는 한 줄기의 벼락이 그들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콰아앙!

고막을 찢는 뇌성과 함께 두꺼운 벼락이 기사 둘을 덮침과 동시에 뇌전의 파도가 사방으로 퍼져 갔다.

"크아아아악!"

"크억!"

"적이다! 마법사가 있다! 조심해라!"

반응하기엔 이미 늦었다.

[테티르의 기사 하우젠을 쓰러트렸습니다.]

[공적치가 780 오릅니다.]

[테티르의 기사 쥬드칼을 쓰러트렸습니다.]

[공적치가 630 오릅니다.]

[테티르의 병사를 쓰러트렸습니다.]

[공적치가....]

[....]

한순간에 수북이 쌓이는 공적치를 보며 이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곳 마경에 들어온 진짜 목적.

그건 수많은 공적치를 쓸어 담기 위함이었다.

문양을 빠르게 획득하기 위해선 위마경을 클리어하거나 공적치를 모아야 한다.

하지만 위마경은 매우 한정적이라 실질적으로 문양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선 공적치를 모으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타국의 병사와 기사들은 붉은 지대에서도 많은 공적치를 모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니….

'…마경에 들어올 수밖에!'

이신은 날아오는 검기를 피하며 마력을 바닥에 흩뿌렸다.

쩌저적-!

한순간에 빙판이 되어 버린 땅.

더구나 경사까지 있으니 병사들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바닥에 엎어지며 대열을 무너뜨렸다.

그 와중에도 마력을 이용해 얼어 버린 땅을 으깨고 다가오는 기사단장이 보인다.

어둠에 가려 그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분개한 것이 느껴졌다.

"정체를 밝혀라!"

산 전체를 울릴 정도의 거대한 포효.

이신은 그의 외침을 가볍게 무시하며 마력을 펼쳐 공간을 장악했다.

과연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마경 속에서 마법사가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뇌폭]

파지직!!

허공을 질주하던 기사단장의 앞에 전조 없이 나타나는 뇌전의 폭발.

간신히 몸을 돌려 그것을 피해도 피한 방향에서 또 다른 뇌전이 폭발했다.

"크허억!"

치익! 치이이익!!

결국 뇌폭을 연달아 얻어맞은 그가 공중에서 떨어져 감전된 상태로 바닥을 기었다.

기사단장이 전투 불가 상태가 되었음을 확인한 이신의 시선이 살아 있는 다른 병사들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마력의 파도.

[낙뢰]

쿠구구궁!!

어둠 속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잠깐 번쩍이는 게 전부인 낙뢰를 피할 수 있는 기사와 병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연달아 내리치는 낙뢰에 그들이 몰살당하는 것은 한순간이었고 어지러이 생성되는 메시지 창은 그 전투의 전리품이었다.

이신은 천천히 기사단장에게로 걸어갔다.

"크…으윽...."

쓰러진 기사단장은 경악한 표정으로 이신을 보았다.

"정…체가...뭐지...?"

"이신."

그 이름을 들은 그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반응.

"과…연...위의 선택이…틀리지 않았군."

[테티르의 기사 마틴을 쓰러트렸습니다.]

[공적치가 2,100 오릅니다.]

그가 눈을 감은 뒤, 마틴의 시체를 언데드로 만든 이신이 그를 그림자 공간에 집어넣자, 일행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벌써 다 죽인 거예요?"

"와...."

"미친...이거 진짜 기사단장이야?"

병사들과 기사들이 아무것도 못 한 채 학살당한 것을 봤을 때도 소름이 돋았는데 거기에 기사단장의 시체까지 보니 머리가 띵해졌다.

"마경에서 혼자 저걸 다 처리했단 말이야?"

"다 잡는 데 5분도 안 걸렸네요."

"하, 이게 말이 돼?"

인유우 코고는 그가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움직였는지, 카노코와 코에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드디어 알 것만 같았다.

코고만 충격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카노코와 코에이도 이신의 실력을 이전에 한 번 보긴 했었으나, 그건 아주 단편적인 부분일 뿐이었고 이제서야 그의 진면목을 본 것이었다.

수십에 달하는 병사와 기사 열,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기사단장까지.

전부를 처리하는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별로 힘을 들인 것 같지도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인간이 튀어나온 거지?'

카노코는 정말 그를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진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꾸물거릴 시간 없어. 카노코, 앞장서."

"네!"

'기회를 엿보면 탈출할 수 있는 순간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세 사람의 생각은 이번 전투로 완벽히 사라졌다.

'그냥 이대로 무사히 여정이 끝나길 바라야겠군.'

인유우 코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테티르의 병사들과의 전투를 끝으로 가끔 나타나는 마족을 처리하며 몇 시간을 움직였다.

주변 풍경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적들이 나타나지도 않으니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하…차라리 뭐라도 좀 나타나 줬으면 좋겠네."

"아니, 선배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선배님은 수갑 차서 싸움도 못 하면서 뭘 적이 나오길 바랍니까?"

"어차피, 저 사람이 다 잡아 주잖아. 심심한데 싸움 구경이라도 하면 좋지."

"아오! 말이 씨가 되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요!"

카노코가 그의 팔을 찰싹 때리고는 그에게 주의를 줬다.

얼마나 이 마경 속에서 지낼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힘을 빼는 건 좋지 않다.

그녀도 지루한 건 똑같았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이렇게 무난한 상황은 환영할 일이었다.

적국에 다가가면 갈수록 더 많은 적을 만날 확률이 급격히 높아질 테니.

그녀의 그런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카노코의 잔소리를 들은 코고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며 투덜댄다.

"말이 씨가 되기는...적들이 무슨 이름 부르면 뿅! 하고 나오는-."

피융― 퍼걱!

코고의 머리를 향해 날아온 화살 한 발이 그의 이마를 스치고는 나무에 박혔다.

안진이 자신의 옷깃을 당기지 않았다면 저 화살이 머리를 뚫고 지나갔으리란 생각에 코고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가 그 상태로 굳어 움직이지도 못한 채, 눈알만 열심히 굴렸다.

"뭐, 뭐야?"

"적이다."

이신은 이미 한참 전부터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자격자들이다.'

인유우 코고의 목소리를 듣고 예측해서 화살을 쏘아 보낸 듯했다.

다음 화살이 바로 날아오지 않는 것이 그 증거.

"아우! 그니까 말이 씨가 된-."

피융― 서걱.

허공을 뚫고 날아오는 바람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워리의 검이 화살을 정확히 두 동강 냈다.

투둑.

이걸로 확실해졌다.

적들은 소리를 듣고 화살을 쏘아 낸다는 것을.

그것을 눈치챈 일본 도전자들도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럴 필요 없어."

이신이 입을 여는 순간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의 파동.

그 방향을 따라 마력을 날려 보낸 이신이 그곳에 있는 자격자의 목을 염동력으로 움켜쥔 채 기습적으로 당겨, 그들 앞에 내동댕이쳤다.

"크윽...!"

이신에게 목을 잡힌 도전자도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의 목을 매만지며 이신을 보았다.

지진 난 것처럼 동공이 흔들렸다.

그와 이신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한국인?"

그러나 그의 목에 새겨진 파란 문양은 메르텡의 것이 아닌, 테티르의 것이었다.

제98화

단번에 이신과의 격차를 깨달은 그가 도망가려 해 봤지만, 이신을 상대로 그가 도망갈 방법은 없었다.

"끄억!"

기습적으로 땅에서 치솟는 돌주먹이 그의 복부를 강타했고, 그것에 얻어맞은 그가 땅을 몇 바퀴 구르다가 힘겹게 일어섰다.

"왜 도망가는 거지?"

"퉤!"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 낸 남자가 이신을 노려보았다.

"정체가 뭐야? 메르텡에서 온 놈이냐?"

"정체가 뭐냐고 묻는다면…난 이신이고, 메르텡에서 왔지."

"뭐, 뭐? 이…신?"

그의 이름을 들은 남자가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이신을 바라보았다.

그가 탑을 오르며 수없이 들었던 이름.

탑의 저층 랭킹을 깡그리 갈아엎고 최상위권의 랭커들을 키워 낸 괴물.

그제서야 조금 전 상대방의 말도 안 되는 마법이 이해됨과 동시에 이신이라는 그 사람의 위명이 허명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저는 김찬수라고 합니다! 저도 한국 도전자예요. 이신 님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이신은 자신의 생각대로 상대가 한국 도전자라는 사실에 달아올랐던 흥분이 조금 가라앉는 걸 느꼈다.

사실, 그가 가장 미안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기존에 아이소시아 대륙에서 활동하던 한국 도전자들이다.

자신 때문에 느닷없이 다른 국가들에게 얻어맞고 메르텡이 멸망하면서 그들 모두 포로가 되거나 죽거나 망명자가 되어야만 했다.

눈앞에 이 김찬수라는 이 남자도 그런 이들 중 하나이리라.

이신은 죄책감에 한숨을 내쉬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이신이 그렇게 바로 사과를 할 것이라 생각 못 한 김찬수는 잠깐 당황하더니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이신 님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이신이 그가 내민 손을 잡자 순간적으로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의 손을 타고 마력이 일시에 이신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세르핀의 주박술]

김찬수의 속박 스킬이 이신의 몸을 휘감았다.

'걸렸다!'

세르핀의 주박술에 걸린 이상 적어도 10초 이상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다.

사용 방법이 워낙 까다롭기에 쉽게 사용할 수 없는 스킬.

상대방과 3초 이상 접촉한 상태로 시선을 마주쳐야 걸 수 있는 주술이다.

상시 경계하는 적들에게는 사용하기 어렵지만, 경계하지 않는 아군에게는 쉽게 사용이 가능하다.

이신이라는 대어를 잡는다면 그간에 같은 동료를 배신했다는 그 이미지를 벗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메르텡을 배신하고 테티르에 망명하며 은근히 소외당하던 그 서러움을 단번에 타파할 수 있는 기회.

주박술을 걸자마자 손을 잡은 상태로 김찬수가 소리쳤다.

손을 풀 수는 없었다. 접촉을 풀면 주술이 풀리기에.

"지금!"

그의 목소리와 동시에 검은 안개 속에서 세 명의 자격자들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안 돼!"

김찬수의 미소를 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카노코가 마력을 일으켰다.

이신이 저런 것에 당할까 하는 생각은 나중이었고 당장에 그가 움직이지 않으니 반사적으로 몸이 먼저 튀어 나갔다.

그녀의 손 위로 뻗어진 마력의 줄기가 자격자 하나의 검을 묶어 내려쳤다.

한 명의 공격은 막았으나, 다른 두 명이 남은 상태.

자신의 주력 무기라도 있었으면 어찌어찌 시간을 벌어 봤을 테지만 현재 그녀에겐 아무런 보조 장비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마력 탐지]

왜 이 스킬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의 마력이 움직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아....'

움직인다.

몸 전체를 둘러싼 얄팍한 마력의 사슬들을 가만히 지켜보며 꿈틀대고 있다.

마치, 어디까지 하나 보자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라는 생각과 동시에.

"아니?"

김찬수도 실수를 깨달았다.

[낙뢰]

콰과과광!!

일시에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마력의 줄기가 하늘에서 뇌전을 불러와 다가오는 자격자들을 내리쳤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지도 하지 못한 채.

세 명의 자격자들은 기습적으로 내려오는 백색 전광에 눈을 감았고.

"어…어어...."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김찬수는 잡았던 손을 놓으려 했지만 이신에게 잡혀 바보 같은 소리만 내뱉었다.

"주술이라...."

2층에서 만난 리자드맨 족장의 주술과 비교하면 한참이나 손색이 있었다.

시스템에 의해 조율되는 어설픈 마력 컨트롤로 자신의 마력을 끊고 억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질 없는 능력은 허울 좋은 가짜일 뿐.

아직 이들이 그걸 깨닫기엔 한참 일렀다.

털썩.

이신이 손을 놓자마자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엉덩이를 찧고 주저앉아 버린 김찬수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전…다, 당신들 편이에요. 이것도 어쩔 수 없이...끄…어...."

염동력에 목이 잡힌 그가 공중에 둥둥 뜬 상태로 이신의 앞으로 날아왔다.

"이렇게 다른 한국 도전자들도 배신했나?"

"으…아…니...나안...."

목울대가 무형의 마력에 짓눌려, 변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김찬수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보았지만,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었다.

이신은 그의 변명 따윈 들을 생각이 없었으니.

그의 뒤로 붉은 영혼이 다가왔다.

조금 전 이신의 낙뢰를 맞고 즉사한 자격자의 사령.

억울함과 분노에 사무쳐 사령이 되어 버린 영혼.

- 배신…자...동료를…팔아…산…놈....

죽음과 동시에 격이 낮은 이들은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듣고 싶은 핵심은 충분히 들었다.

"너 같은 겁쟁이 새끼가, 끝까지 버텼을 리 없지."

"끄…어어억...!"

더욱 강하게 조여 오는 압력.

동시에 그의 목에서 뚜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김찬수가 그대로 절명했다.

삽시간에 벌어진 갑작스러운 전투와 그 이후에 남겨진 이들의 적막함.

이전까지와 다른 이신의 차가운 분위기에 일본의 세 도전자는 물론이고 릴리안까지 카노코의 머리 위로 대피했다.

"주인이 저렇게 분위기 다운된 건 처음 보는구나."

"릴리안도 처음이야? 역시, 같은 한국 도전자를 만나서 그런 건가."

"말도 못 걸겠네."

"이럴 땐 조용히 있는 겁니다."

풀풀 풍기는 한기.

1층의 보스로서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 같은 한국 도전자를 죽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쯧.'

그를 죽인 것 자체가 껄끄러운 것은 아니다.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이러한 참사에 희생당한 이들에 대한 죄책감이 갑자기 밀려왔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이신은 자신을 위한다기보단 같은 지구의 인간들을 대표해서, 그들의 몫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탑을 올랐다.

그로 인해 파생되는 변화와 그 여파에 피해를 받는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신은 죄책감을 쉬이 떨칠 수 없었다.

한정적인 상황에서 모든 이들을 구할 수는 없는 법이고 희생할 건 희생해야 하는 법이다.

'내가 너무 무른 건가.'

가끔 이렇게 한 번씩 찾아오는 현실과 이상에 대한 자각이 그를 괴롭혔다.

"이신 님...."

그를 부르는 따뜻한 음성에 이신이 고개를 돌렸다.

걱정이 담긴 시선, 몸짓 그리고 표정.

그것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저기압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 그가 분위기를 풀었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너무 생각이 많으신 것 같아서."

"...근데 왜 날 도왔지?"

"네?"

"내가 저 자격자들에게 당하면, 너희가 풀려날 수 있는 게 아닌가? 이 전쟁도 끝이 날 테고."

"아...그건...."

뭣 때문이었을까.

저 자격자들보단 이신이 더 믿음직해서?

아니면 그간의 정 때문에?

카노코는 순간 그녀의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항상 냉철한 판단과 폭넓은 이해력을 기반으로 상황 판단을 하고 행동했던 그녀다.

하지만 이번에 한 행동에는 이렇다 할 확실한 이유가 부족했다.

"잘…모르겠네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은 그가 몸을 돌렸다.

"다시 출발하자."

* * *

"크허어엉!"

나무 위에서 기습적으로 쇄도하는 마수를 권격으로 날려 보낸 안진의 뒤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유우 코고가 귀를 파며 걷는다.

서걱! 쿵.

퍼퍼퍼펑!

간결하면서도 치명적인 마법의 연계가 다가오는 마수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간혹 그 틈을 파고 들어오는 마수들은 이신의 권속들이 처리한다.

코고와 코에이는 능력이 제한된 탓에 처음에는 움찔움찔하며 긴장했었지만, 이내 물 샐 틈 없는 호위에 그 모든 긴장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신이 있는 이상, 붉은 지대 마경으로는 자신들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확신에, 이제는 일말의 걱정조차 들지 않았다.

"배고픈데."

"그러게요, 슬슬 밥 먹을 때가 되지 않았어요?"

"근데 이러다가 식량이 다 사라지면 어떡합니까?"

"어...메르텡에서 많이 챙겨 주기는 했는데, 열흘이면 동나겠어."

"아니요, 저희 벌써 이틀…아니, 며칠 지났는지 확인도 안 되네. 아무튼, 벌써 4일 치 식량을 먹었어요. 열흘이 아니라 아껴먹어도 일주일이면 끝이에요."

카노코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고는 태평하게 앉아 있는 이신을 보며 말했다.

인유우 선배와 코에이는 생각 없이 식량을 먹어도 그렇다고 치자, 이신까지 그런 둘을 아무 말 없이 두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생각이 있는 건가?'

그녀가 답답해하며 인유우 코고의 등짝을 때렸다.

"그만 좀 먹어요!"

"아악! 알았어!"

"어휴...."

카노코가 한숨을 내쉬며 이신을 보았다.

이신은 바닥에 널브러진 마수 사체를 도축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설마? 저거 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에이…마수를 어떻게 먹어? 마기에 절여져 있는데. 고위 성직자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말든, 이신은 마르티르의 잔소리를 들으며 검으로 마수의 사체를 분해했다.

- 주인님! 또!

- 이런, 이 마수의 몸에 마기가 절여져 있군요! 제가 전부 정화하겠어요!

- 이럴 수가! 핏물이 아예 마기로....

"시끄러워."

마르티르의 능력인 악을 멸하는 힘.

이건 완벽히 마족, 악마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힘이다.

마기를 없애고 그 부정적 에너지를 사라지게 만든다.

어찌 보면 이곳에서 마르티르만큼 효율성 좋은 아이템은 찾기 힘들지 않을까.

순백색의 날카로운 검날이 마수의 살점에 닿을 때마다, 찌들었던 검은 마기가 증발하듯 사라졌다.

"오...."

"와...저게 마르티르인가?"

"마르티르가 원래 저런 용도였어요?"

그것을 구경하던 세 사람이 신기한 묘기를 보듯 도축 장면을 구경했다.

거칠게 고기의 부분을 갈라내던 이신이 금세 도축을 끝내고 도축된 고기들을 한곳에 모았다.

검게 물들었던 마기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싱싱한 고기의 살점만이 남은 모습.

처음엔 마수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질겁했던 셋은 어느새 군침을 흘리며 고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딱! 화르륵!

이신이 손가락을 튕기자, 한데 모인 장작 사이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염동력으로 들어 올려진 고기들이 그 위에서 자글자글 익기 시작했다.

"너무 기대 돼."

"마수 고기는 어떤 맛일까요?"

"난 저렇게 싱싱한 고기는 10년 만에 처음 봐."

그들의 기대감 위로 적당히 익은 고기가 먹기 좋게 잘려 그들의 나무 꼬치 위로 끼워졌다.

"식량은 널렸으니, 걱정 말고 먹어라."

"잘 먹을게요."

"덕분에 좋은 경험하는군."

"이신 님은 못 하는 게 뭡니까?"

아이처럼 좋아하는 세 사람을 보며 헛웃음을 지은 이신이 고기를 베어 물었다.

세 사람도 이신이 먹는 것을 보고는, 따라서 고기를 입에 쑤셔 넣었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고기의 육질과 동시에 터져 나오는 환상적인 육즙까지.

어떠한 간도 하지 않았건만, 고기 맛 하나로 모든 게 완벽했다.

"미친...."

"완벽해요."

"내 인생 최고의 고기다."

마수의 고기라 설마 했던 일말의 걱정은 사라진 지 오래.

이제는 남은 고기를 다른 사람이 채갈까, 누가 먼저 하나라도 더 먹나 대결이라도 하듯 손을 놀리고 있다.

"으음…맛있네. 마수 고기도…제법이야."

그 옆에서 고기를 음미하던 릴리안도 만족하며 식사를 하고 있을 때.

투둑. 툭.

그런 그들의 행복한 식사 시간을 방해하는 소리가 들려오며 세 사람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여기서 불 피우고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거지?"

고작 인간 4명과 스켈레톤 3기, 박쥐 한 마리가 전부인 이신의 일행을 본 자격자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검은 안개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뒤로 들려오는 갑옷의 마찰 소리.

대충 들어도 한둘이 아니었다.

"테티르 놈들은 아니고...윌데스도 아닌데. 설마, 메르텡에서 온 놈들이냐?"

그의 물음에도 잠깐 시선을 줬을 뿐, 다시 고기를 먹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에 열이 뻗친 남자가 다짜고짜 검기를 날려 장작불과 고기들을 날려 버렸다.

"미친 새끼들이, 감히 나를 무시하고 고기를 처먹어?"

"…미친 새끼가 누군지 모르겠네."

"지금 네가 뭘 한 건지 알아?"

"이…아까운 고기를...!"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진 기세로 세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그를 노려봤다.

"이 개 같은 새끼가, 이 수갑 당장 풀어 줘! 내가 저놈들 다 불태워 죽여 버릴라니까!"

"맞습니다! 수갑만 풀어 주면 제가 당장...!"

"은근슬쩍 수갑 풀어 달라 하기는."

둘을 뒤로 밀어낸 이신이 그의 앞에 나섰다.

"뒤로 빠져 있어. 이것들 다 내 거니까."

이신의 손등 위로 빛나는 붉은 빛의 문양.

그것을 본 러시아의 도전자가 코웃음을 내뱉는다.

"하, 겁대가리를 상실한 새끼였군."

그의 뺨 위로 발하는 보랏빛 문양.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30명의 기사.

누가 보아도 이신 일행의 완벽한 열세였으나,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덤벼, 혼자 상대해 줄 테니."

제99화

뇌전에 재가 되어 버린 풀과 나무들.

사방으로 흩날린 핏물들이 여기저기 묻어 있고 싸늘하게 식은 시체들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다.

서걱! 쿵.

이신의 손끝을 따라 생성된 바람의 칼날이 마지막 남은 기사의 목을 베고 사라졌다.

[아만의 기사 레임을 쓰러뜨렸습니다.]

[공적치가 1,500 오릅니다.]

[공적치 50,000을 사용합니다.]

[『주황 문양』을 획득합니다.]

[주황 문양]

주황 지대로 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집니다.

# 체력과 마력이 6% 증가합니다.

# 전체 스탯이 10% 증가합니다.

이신의 손등에 붉은빛이 사라지더니, 주황빛이 문양을 뒤덮는다.

예상보다도 빠르게 다음 문양을 획득했다.

'이대로면 노란 문양도 머지않겠어.'

현재 메르텡만큼 성장하기 좋은 환경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능력만 있다면 끊임없이 적국의 병사들과 싸워서 공적치를 얻을 수 있으니.

이신에게는 최적의 조건인 셈.

'반대로 생각하면 적들은 성장의 여지가 적어진다는 거지.'

메르텡이 다수와 싸울 수 있다면 다수의 국가들은 메르텡 하나와만 싸울 수 있고, 그 하나를 여럿이서 나누어야 한다.

또한 마족들을 잡아 공적치를 얻는 것도 여의치 않은 것이, 남색 지대부터 시작되는 마족들의 영역은 현재 대부분 미국과 중국이 점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다른 국가들의 성장이 더뎌질 수밖에.

이신은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격자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보라 문양을 가진 자격자.

이 황량한 마경 속을 왜 이런 실력자가 누비고 있을까.

지금 보라 문양 이상의 자격자들은 대부분 최전선에서 마족들과 대치하거나 미국,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을 텐데.

이 녀석의 목적이 순수하게 마경을 뚫고 메르텡의 땅을 침범하기 위함으로 보이진 않는다.

"너 타국의 병사들 잡는 게 목적이었나?"

"큭…그래...여기서 테티르와 윌데스의 전력을 감소시키고 성장하는 게 목적이었지. 이젠 다 의미 없지만."

"동맹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네."

목을 비틀어 그대로 도전자를 즉사시킨 이신은 놈을 던져 버렸다.

위험한 건 메르텡뿐만이 아니었다.

워프 연합도 언제 찢어질지 모를 아슬아슬한 상황이 분명했다.

"카노코, 우리가 얼마나 왔지?"

"절반은 온 것 같네요."

김강천과 지은주가 테티르에 갇혀 있다고 했다.

'지금 구하러 갈 테니, 제발 죽지만 마라.'

* * *

"허억...허억...."

쿵!

만신창이가 된 김강천이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감옥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은주가 황급히 김강천을 부축해서 그를 살폈다.

그을리고 찢긴 상처가 온몸에 가득했다.

얼마나 많은 고문을 당한 걸까.

희미한 숨소리만 잠깐씩 들려올 뿐, 강천의 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은주도 만신창이이긴 했으나, 강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크흑...."

은주는 도저히 강천이 받은 저 고문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알고 있는 정보의 대부분을 넘겼고 그 덕에 지금 이렇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빠, 이러다 진짜 죽는다고."

테티르에서 망명을 제의해 왔었다.

솔직히 맘 같아선 이 지옥 같은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망명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김강천의 완강한 거부에 그러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눈물뿐인 시간이었다.

이 상황을 헤쳐 나갈 방법 따위는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고 매일매일 두려움과 공포가 그녀를 잠식해 왔다.

'그냥 죽으면 편해질까.'

은주는 극단적인 생각이 자꾸 들었지만 그마저도 실행할 용기가 나지 않아 울며 하루를 보내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흑...."

저벅. 저벅.

그녀가 쓰러진 강천을 보며 울고 있을 때, 간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그 소리에 고개를 드니, 간수가 와서 문을 열고 두 사람을 일으켰다.

"따라와라."

강천을 부축하며 은주가 간수를 따라 감옥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죄인을 가두는 이동식 소형 감옥이 있었고 두 사람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는 거죠?"

"나르덴으로 간다."

"네?"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은주가 그 사실을 알려 준 기사를 보았다.

그 반응이 재밌다는 듯 낄낄 웃는 기사들.

그들 사이로 걸어 나온 도전자가 두 사람이 들어간 감옥의 철창을 잡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네가 준 정보 잘 써 줄게. 내가 특별히 네 목숨은 살려 주지. 근데… 네 친구들은 아니야."

제정신이 아닌 듯한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 도전자.

그리 말한 그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강천에게로 옮겨지고.

"이놈도."

초점이 나간 것 같은 눈동자가 다시 은주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너를 구하러 올 다른 놈들도."

그 말에 지은주의 심장이 내려앉으며 애써 참아 왔던 그녀의 표정이 무너졌다.

* * *

마경에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이신조차 정신적으로 피곤함을 느낄 정도로.

"여기 잠시만 있어, 주변을 잠깐 탐색하고 올 테니까."

이신은 잠깐의 휴식 시간 동안 조금 먼 곳까지 움직이며 적들을 찾아다녔다.

지금까지 잡은 병사들의 수만 해도 세자릿수는 가뿐하게 넘어갔다.

이 정도면 적들도 이 마경을 뚫고 메르텡에 도달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 이 마경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이신이 자리를 뜨자, 답답함에 주변을 걷는 코고를 보며 카노코가 소리쳤다.

"선배! 혼자 그렇게 걸어 다니지 좀 마요. 힘도 없으면서."

"괜찮아, 안진이 지켜 주는데 뭐…어억!"

갑자기 발밑에서 튀어나온 나무의 줄기가 코고의 발을 붙잡고 그를 나무의 뒤쪽에 있는 땅굴로 내던졌다.

"이런!"

그 모습을 본 안진이 다급하게 주먹을 휘둘러 나무줄기를 잘라 내지만, 코고는 이미 날아가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상태.

"사아알려 줘어어어!"

점점 멀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따라 안진이 땅을 박차고 뛰었다.

"아이씨! 사고 칠 줄 알았어!"

다급히 안진을 뒤쫓아 뛰는 카노코.

깊게 파인 땅굴로 코고와 안진이 들어가자마자 땅굴의 입구가 막히고 그 위로 나무 마수가 올라섰다.

그녀를 따라온 메이가 마법을 이용해 나무 마수를 불태워 버리자, 카노코가 땅굴이 있던 곳으로 마력 탐지를 펼쳤다.

"둘의 마력이 안 느껴져."

심각한 표정이 된 그녀가 중얼거렸다.

마경 속에 간혹 생기는 이동 포탈.

이대로는 코고와 안진이 어디로 이동됐는지 알 수 없으니, 쫓을 수도 없다.

"걱정하지 마, 안진이 따라갔으니."

"하지만...."

"쯧, 하필 이 타이밍에 함정에 걸려 가지곤."

메이는 코고의 안전보다는 이신의 잔소리를 들을까 걱정이 될 뿐이었다.

"안진 그 자식 매일 수행한다 뭐다 하면서, 저 얼간이 하나 못 지켜 가지고 이게 뭐야?"

워리가 짜증 난 듯 투덜거렸다.

"이신 님 오시면 한 소리 듣겠구만."

"코에이, 넌 걱정도 안 돼?"

"걱정할 게 뭐 있어? 안진도 있고, 선배님도 이런 곳에서 당할 실력이 아닌데."

"지금 능력 봉인 당했잖아."

"음..., 어떻게든 되겠지."

이제는 안전 불감증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카노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코에이를 보았다.

잠시 후, 이신이 돌아오고 일행들의 침울한 분위기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나."

안진과의 마력 연결이 급격히 멀어지는 게 느껴져, 이신은 안진이 함정에 당했으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안진 혼자 그랬을 가능성은 적으니, 코고를 구하려다 그런 것이라는 것쯤은 쉽게 유추가 가능했다.

"찾으러 가나요?"

"그래야지."

이신의 일행이 움직일 즈음, 인유우 코고와 안진은 사방에 둘러싸인 마족들을 보며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땅굴에 들어갔는데, 절벽 중간에서 튀어나와 땅으로 떨어졌다.

안진이 코고를 바로 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굴러 목이 꺾여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코고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망할…여긴 어디야?"

"그러게 가만히 좀 있으라 하지 않았나."

"답답하니까 그랬지! 젠장, 이거 다 처리할 수 있겠어?"

코고가 주변을 둘러싼 마수들을 보았다.

새 형태의 마수부터, 뱀, 지네, 원숭이, 곰과 같은 종류의 마수들이 먹잇감을 노리고 서로 신경전이라도 하는 듯 으르렁거리고 있다.

안진이 홀로 모두를 잡을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을 상처 없이 지키는 건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코고가 마른침을 삼켰다.

"걱정 마시게."

안진의 여유로운 음성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조금 진정시켜주었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뼈에 검은 마력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기공파]

파앙―!

허공을 때리는 파공음과 함께 일직선으로 쭉 뻗어가는 마력의 파동.

마수들을 강타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고 검은 안개 속에 숨어 있던 일직선상의 마수들이 그대로 쓸려 나간다.

키이이이익!

카아아아악!

마수들이 괴성을 지르며 둘을 향해 달려들었다.

땅을 타고 빠르게 쇄도하는 뱀 마수를 밟아 죽인 안진이 양발에 마력을 둘렀다.

이신의 영향을 받아 새로 개발한 그의 비전절기.

[뢰진각(雷震脚)]

그가 땅을 박차고 튀어 올라 마수들 사이에 착지하자, 그의 발을 타고 사방으로 뇌전이 튀어 올랐다.

파지지지직!!

그가 진각을 내리칠 때마다 우레가 생겨나고 주변의 마수들이 뇌전에 증발했다.

"와, 미친."

신기한 마술이라도 보듯, 코고가 감탄사를 내뱉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 수많았던 마수 전부가 뇌전에 타올라 사라졌다.

짝짝짝!

감탄하며 손뼉을 치던 코고에게 전투를 끝낸 안진이 다가왔다.

"끝났으니, 여기서 대기하겠네."

"여기 있겠다고?"

"주인님이 어디서 올지 모를뿐더러, 내가 여기서 마력을 끌어다 썼으니 이곳으로 올 걸세."

"흐음…그렇구만. 아무튼 고마워."

잿빛으로 변해 버린 숲속.

사방에 가득한 마수들의 시체를 보던 코고는 양팔을 부여잡고는 몸을 떨었다.

안진의 실력을 이제야 제대로 체감했다.

이신이라는 마법사도 말이 안 되게 강한데, 그의 권속들도 말이 안 되게 강하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수준을 넘어선 거 아닌가?'

그는 위급 상황 때문에 자신의 수갑을 풀어 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놈의 수갑은 도대체 언제...."

"쉿. 누군가 오고 있네."

"어? 이신 아냐?"

"주인님은 아니라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여러 명의 발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마수들의 발소리가 아니다.

인간들의 발소리, 이신 일행이 아니라면 적들이라는 소리가 된다.

"젠장...."

긴장감이 치솟아 오른다.

대충 들어도 족히 열 명은 되어 보이는 발소리였다.

코고는 이를 악물었다.

"뭐야? 네크로맨서?"

코고의 옆에 있는 안진을 보며 다가온 도전자가 물었다.

"아니다, 저기 봐라, 수갑 차고 있는 거."

"어? 그러고 보니...."

"그럼 저 해골은 뭡니까?"

"저 녀석을 감시하는 건가? 아니, 잠깐."

이상함을 느낀 도전자 하나가 미간을 좁히며 코고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저거...인유우 코고 아니야?"

"뭐?"

"메르텡에 잡혀 있을 놈이 왜?"

"설마…이신이 올라왔다던데, 놈한테 붙어먹은 건가?"

"그렇다기엔 수갑을 차고 있는데?"

"아직 신뢰를 얻지 못한 건가?"

그들도 여기서 인유우 코고를 발견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지 의견 대립이 이어졌다.

인유우 코고는 그들의 반응을 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신이 올라온 걸 알고 있다. 마경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건가?'

지금쯤이면 위층의 커뮤니티를 통해 이신의 정보가 다른 나라에게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이신이 21층에 올랐단 사실을 안 20층의 도전자들이 21층으로 올라와 알려 준 것이리라.

"잠깐! 나, 나는 도망쳐 나온 거야. 이신한테 억지로 여기로 끌려왔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거라고!"

"뭐? 이신이 여기 들어와 있다고? 그럼 저 스켈레톤은 이신의 권속인가?"

"그래, 보다시피 조금 전 마수들과의 싸움에서 힘을 다 써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야."

코고는 그러면서 슬쩍 안진을 보았다.

제발 안진이 자신의 말뜻을 알아듣길 바라며.

'눈치 있으면 알아서 가만히 있어라!'

다행히 안진은 그 의도를 눈치채고 죽은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신이 여기 있는 게 맞다면, 우리도 돌아가서 그 사실을 알려야 된다."

"흠…그건 그렇지. 인유우 코고는 어떡하지?"

"데리고 간다. 란탄에게 협상 카드로 쓸 수 있겠어."

그들의 말을 들은 코고가 표정을 굳혔다.

'이대로 끌려가면 절대 안 된다.'

여기서 테티르로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이 포로라는 신분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테티르보다 이신의 곁이 더 이득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자, 잠깐! 이대로 가기보다는 이신을 잡는 게 어때? 그 녀석 지금 엄청 지쳤다고."

"이신을 잡자?"

"그래, 그놈 생각보다 약해. 지금 주황 문양밖에 없어. 거기다 아까는 파란 문양 도전자 몇 명에게 도망치기도 했고."

코고는 필사적으로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제발 속아라!'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그 말을 들은 도전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말을 우리한테 믿으라는 거냐?"

"이 새끼가...이신이 20층의 아바임 몬스트레를 잡았다는 소리가 있는데. 고작 파란 문양 단 몇 놈에게 도망을 쳤다고?"

"인유우 코고 이거, 그새 한국의 개가 다 됐네?"

"하긴…이 새끼가 임무 하나 제대로 수행 못 해서 지금 이 꼴인 거 아니야?"

"그 명성도 다 허명이었네."

"그때 내가 그 임무를 갔어야 했는데."

"...뭐?"

이신에게 놈들을 데리고 가는 전략은 실패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놈들의 몸에 달린 주황, 노랑 문양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무서워서 덤비지도 못했을 놈들이 자신을 씹어 대는 것에 코고의 자존심이 뭉개졌다.

"뭐긴? 퇴물 새끼가."

후웅- 퍼억!

"커…억...."

기습적으로 휘둘러진 발길질이 코고의 복부를 정확히 가격했다.

제대로 숨을 내쉬지 못하던 코고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놈들을 보았다.

'개 같은…이 수갑만 아니었어도...!'

턱 근육이 터져라 이를 악문 그가 주먹을 움켜쥐고 있을 때, 그의 주먹에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안진이 그의 주먹을 잡고 있었다.

"손 내밀게."

"어?"

우드득! 우드드득!!

툭. 투두둑.

그의 손발에 채어져 있던 수갑들이 안진의 악력에 뜯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마력.

몇 달 만에 몸속을 흐르기 시작한 마력의 파동이 인유우 코고의 잠들어 있던 감각을 깨우기 시작했다.

"주인님이 올 때까지 한 번 마음껏 날뛰어 보게."

화르륵!

그의 손 위로 피어오르는 불꽃이 사방으로 날아가 주변의 풀과 나무들을 불태우며 그 화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화염]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이는 화염을 본 테티르의 도전자들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누가 퇴물이라고?"

제100화

"켁! 켁!"

주먹에 얻어맞은 인유우 코고가 안진에게로 날아가 거친 기침을 쏟아 냈다.

"뭐야? 폼이란 폼은 다 잡더니?"

"뭐, 수갑 풀면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나 봐?"

마력이 돌아오고 신체 능력만 회복되면 예전과 같은 실력을 낼 수 있다 생각한 것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마력을 사용하지 못한 지 수개월이다.

한순간에 그 수개월의 공백을 메우기에는 아직 그의 경험이 부족했다.

그 결과 열 명 중 단 하나만을 불태워 버리고 그대로 자신도 날아갔다.

'망할…쪽팔리게....'

그것도 안진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미 치명상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내가 처리해도 되겠나?"

"…그래, 제발 다 조져 줘."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최선은 다해 보겠네."

안진이 코고의 앞으로 나섰다.

이전과 완전히 다른 기세.

안진의 몸에서 흐르는 시꺼먼 마력을 본 도전자들은 언제라도 반응할 수 있게 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저게 이신의 권속?'

처음 인유우 코고의 화염을 보았을 때도, 쫄긴 했지만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저 대머리 스켈레톤도 마찬가지겠지.

"이신이 오기 전에 빠르게 처리하고 빠진다."

이곳의 리더인 도전자의 명령에 일제히 마력을 끌어 올리던 그때.

쿠구구궁!!

떨어지는 수십 개의 벼락들이 도전자들을 덮쳤다.

한순간에 전장을 뒤엎는 벼락 세례에 인유우 코고의 긴장이 곧바로 녹아내렸다.

"이런 놈들한테 고전하고 있었나?"

무덤덤한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봐준 거다."

"어머, 선배 수갑 없어졌네요? 부순 거예요?"

"그래...근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지."

자괴감 가득한 그의 목소리에 카노코와 코에이가 그를 보았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태연했던 그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기가 죽은 것일까.

"카아아아악!"

"케엑! 켁!"

"미…친 이신이다...!"

"살려 줘...!"

테티르에서 보낸 열 명의 도전자가 몰살당하는 건 순식간이었고, 그에 비해 저런 놈들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어이구, 선배 진짜 장난 아니시네요?"

"뭐?"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코고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다.

"지금 이신 님 마법 보면서 자괴감을 느끼시는 거잖아요?"

"하...그럼, 저걸 보면서 넌 자괴감도 안 드냐?"

"당연하죠. 저 사람이 우리랑 같은 인간이에요? 비교할 대상이 아니잖아요. 선배는 지금 이신 님이랑 자신이랑 비슷한 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와, 대단하시네."

"무슨 소리를! 나도 눈이 있는데!"

"그니까요, 괜한 데에 신경 쓰지 말라고요. 저 사람은 천외천의 미친 인간이니까."

카노코의 말을 듣고 피식 웃은 코고는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부터 제자리로 돌아오면 될 일이다.'

그의 근처로 다가온 코에이가 입을 헤 벌리며 압도적인 이신의 전투 장면을 보고 입을 열었다.

"와…근데 진짜 보면 볼수록 대단합니다. 이신 님."

"그니까, 도전자 10명 상대하는 데도 압도적이야."

"저번엔 기사 30명이랑 보라 문양 도전자도 잡았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마경 속이라 더 그런 걸까요? 다른 사람들은 다 약화된 것 같은데, 이신 님만 멀쩡한 거 같아요."

"저 능구렁이 같은 속을 좀 보고 싶다."

자격자들을 모두 처리한 이신이 안진에게 그간의 일들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코고에게 다가왔다.

"수갑은 다시 찰 거야! 허튼수작 부린 거 아니다?"

괜히 혼자 찔려 이야기하는 그를 보며 이신이 피식 웃었다.

"저런 약골들도 못 잡는 놈 묶으나 마나지. 다 왔으니까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어...? 그, 그래."

"와, 그럼 선배님도 수갑 풀고 계시는 거예요? 저는? 저도...!"

철그럭. 툭.

앞으로 걸어가던 이신이 등 뒤로 열쇠 더미를 던졌다.

"알아서 해라."

너무도 쿨하게 수갑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주는 모습에 세 사람이 놀라 그대로 굳었다.

무슨 함정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의심.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깐일 뿐, 곧바로 열쇠를 주운 코에이가 자신의 손발에 달린 수갑을 풀었다.

"와...! 이게 신세계인가?"

"고작 며칠 수갑 찬 걸로 호들갑은."

"지옥 속에서의 며칠이었죠. 아무튼, 이걸로 저희 모두 속박은 풀렸네요?"

그 말에 세 사람이 걷던 걸음을 멈췄다.

사실 이번 마경에 들어온 계기도 이신이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한답시고 강제로 데리고 들어온 것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란탄이 메르텡과 동맹을 맺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제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닐 수 있다는 것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신이라는 존재 하나만으로도 메르텡은 충분히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발판뿐만이 아니야. 날개를 단 격이다.'

인유우 코고는 처음과 비교해서 생각이 완벽히 뒤집힌 상태였다.

'무조건 메르텡과 협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카노코와 코에이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이신 님이 테티르를 끝장낼지도....'

'그 자체로 하나의 국가 이상의 전력이다.'

이신의 의도대로 그들 모두는 이미 이신과의 동맹을 전제로 한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 * *

엘츠의 성주인 제이든 콤프턴은 통신실에 자리한 채로, 긴장했는지 계속해서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다.

툭. 툭. 툭. 툭.

그의 심경을 대변하듯, 계속해서 책상 두드리는 소리가 통신실 전체를 울렸다.

"시간이 됐습니다."

툭.

외교 장관 데이비드 에덴의 말에, 영원할 것 같던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통신을 열겠습니다."

마법관이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넣자, 벽면 위로 윌데스의 장관들 얼굴이 떠올랐다.

"앨런, 오랜만이군."

제이든의 인사에 앨런이 굳은 얼굴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래. 지금 우리가 한가로이 인사를 나눌 때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우리가 보낸 메시지는 잘 전달 받았나 보군? 표정이 그러한 걸 보니 말이야."

통신을 열기 전의 긴장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제이든은 여유로운 분위기로 앨런을 상대했다.

"...긴말할 필요는 없겠지. 우리 자격자들을 돌려받겠다. 5명의 자격자들 전부 두당 20만의 공적치를 제공하지. 100만이면 메르텡에서도-."

"푸핫!"

자신의 말을 끊은 제이든의 갑작스러운 폭소에 앨런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하하하학! 아…미안하네, 너무 웃긴 소리를 들어서 말이지."

"...대화할 생각이 없나 보군. 제이든. 죽었다 살아나니 제정신이 아닌가?"

"그 전의 제이든이라는 놈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난 호구가 아니야. 앨런."

"포로에게 두당 20만의 공적치는 적지 않은-."

"100만."

"...뭐?"

"두당 100만. 그리고 팀장이라는 보라 문양 자격자는 200만이다."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터무니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는 앨런이 주변의 장관들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협상은 없던 걸로 해야겠군."

먼저 강하게 나오는 앨런을 보며, 제이든이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그래. 협상은 없던 걸로 하고 포로는 모두 죽이도록 하지."

"지금 그깟 자격자들 몇으로 국가 전체를 협박하는 건가?"

"그깟...? 그게 그렇게 어처구니가 없었다면 왜 통신을 아직까지 안 끊고 있지? 네 성격이라면 진작 통신이 끊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제이든을 보자, 앨런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상대방이 자신이 모르는 카드를 쥐고 있다는 느낌.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느껴지는 주변의 공기가 있다.

상대방은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그러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다.

"그렇군. 협상을 원할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말이지. 그럼 다시 시작해보자고. 100만...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정말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이가 보았다면 정말 그렇다 생각했을 완벽한 연기.

허나, 이신에게 모든 사실을 들은 제이든에게 그의 그러한 연기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게 너무하면 곤란한데."

"그게 무슨 소리지?"

"공적치에 대한 값은 다음에 나올 조건 때문에 낮춘 건데 말이야."

"다른 조건이 또 있다고? 미친 건가?"

"그래, 미쳤지. 메르텡이 위험하다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말이야."

"진짜 미쳐 가는군. 이신이라는 자격자가 올라왔다고 하던데...그래, 그 하나가 뭘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의 말을 듣자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지 제이든의 입가에 더욱 밝은 미소가 자리했다.

"바꿀 수 있지. 충분히. 지금 이 자리부터가 그렇지 않나? 앨런?"

상대방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여유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불안감.

앨런의 설마 하는 생각이 이후 제이든이 제안하는 조건을 듣고 확신으로 바뀌었다.

"...다음 조건이 뭐지?"

"나르덴을 공격하고 있는 군사의 회군. 그리고 지금 테티르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병사들을 본국으로 귀환시켜."

까드득-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조건에 앨런의 이가 갈렸다.

그럼에도 당장에 그의 제안을 무시하고 이 통신을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신경을 긁었다.

'이신의 말이 사실이었군.'

앨런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터무니없는 제안을 듣고도 협상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앨런, 이건 너희의 포로를 돌려주기 위한 우리의 첫 번째 제안이다."

"...첫 번째 제안? 다음 제안이…있다는 건가?"

"그래. 난 개인적으로 이 두 번째 제안이 성사되길 바라네."

제이든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지어졌다.

* * *

사방을 가득 메웠던 검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밝은 하늘과 뜨거운 햇빛이 그들을 맞이했다.

"으으...눈부셔."

"눈을 못 뜨겠군."

도대체 며칠이나 마경 속에 있었던 것일까.

그들에게 이제 햇빛은 낯설기만 했다.

"음?"

그때, 그들의 귓가에 들려오는 낯선 이의 목소리.

동시에 착 가라앉은 그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갈 때, 그곳에는 테티르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병사가 성벽 위에 서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때까지가 약 1초 남짓 되지 않은 시점.

초월의 격을 개방한 이신이 가속화된 시간 속에서 염동력을 발휘해 병사를 성벽에서 끌어내리고 그대로 절명시켰다.

털썩.

"와..., 반응도 못 했어."

"괴물...."

"지린다."

그들의 고개가 목소리를 듣고 돌아갈 즈음 이미 병사의 시체가 그들의 앞에 배달되어 있었다.

절로 감탄이 나오는 실력.

몇 번을 보아도 쉽게 적응이 되질 않았다.

"다행히 여기를 순찰하던 병사가 하나뿐인 것 같네, 들키기 전에 빠르게 안으로 진입한다."

이신이 점프해 성벽 위로 올라서자, 움찔하는 세 사람이 멍하니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족히 15m는 되어 보이는 높이의 성벽.

이것에 비하면 메르텡에서 마경의 경계를 그은 성벽은 한없이 초라했다.

"이걸 어떻게 넘…어어억!"

"윽!"

그들의 생각을 읽었는지 성벽 위로 오른 이신이 염동력을 이용해 그들을 끌어 올렸다.

"마경을 뚫고 적이 침입할 거란 생각은 못 할 거다."

성벽 아래로 뛰어내린 이신을 따라 파닥파닥 날갯짓하며 날아간 릴리안이 그의 어깨 위에 올라가 물었다.

"이놈들은 그렇게 쳐들어왔다며?"

"뱀파이어들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있지."

"흠…남은 안 되고 자기는 될 것 같다?"

"뭐…비슷해."

조금 전과 같이 염동력으로 셋을 끌어내린 이신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마력 파장에 걸리는 병사들의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무리 국경에 인력을 쏟을 필요가 없다 해도, 테티르치고 너무 적어.'

병사를 차출할 이유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빠르게 진입한다."

"정말 델벳 성으로 가나요?"

"그래."

적진의 성채에 침투하는 일이다.

이전에 코고는 메르텡의 성에 진입한 적이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미 멸망한 메르텡에 침투한 것이었다.

활발히 활성화되어 있는 적국의 성에 들어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꿀꺽.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세 사람이 이신의 곁에 서서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언덕 아래로 넓게 펼쳐진 들판과 간혹 보이는 테티르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신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우린 델벳을 무너뜨린다."

제101화

델벳 함락

델벳 성채의 입구.

그곳의 문지기가 로브를 뒤집어쓴 이신 일행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흐음, 어디에서 왔지?"

"란탄에서."

"란탄?"

카노코는 품에서 란탄의 증패를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자신의 문양과 함께.

"호오…란탄에서 오셨군요."

"성주를 만나고 싶어. 시급이 급한 일이니 빨리 전달했으면 좋겠는데."

"아, 그렇습니까? 성주님에게는 뭐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란탄의 카노코와 코에이가 왔다고 전해. 지금 메르텡의 상황에 대해 급히 전할 게 있다고."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안으로 들어간 문지기가 갑작스러운 거물 손님의 소식을 알리자, 안쪽에서 느긋하게 있던 병사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문지기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카노코와 코에이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은 걸까?"

"괜찮아요. 저들은 우리가 메르텡에 침입했던 걸 모르니까. 아마 우리가 왔다고 하면 란탄에 연락을 할 거예요."

"란탄에서는 우리의 계획을 모르잖아?"

"그쵸, 근데 하즈키라면 눈치껏 받아 줄 거예요."

"하긴... 하즈키라면 알아서 센스껏 대응해 주겠지."

카노코와 코에이의 말에도 코고는 불안한 듯 입술을 물어뜯었다.

이신도 카노코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처음에는 망설이긴 했으나, 성공한다면 훨씬 일이 쉬워질 것이라는 생각에 그 계획을 받아들였다.

실패하더라도 상관없다.

차선책은 준비되어 있으니.

쿠궁.

성채의 작은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문지기가 황급히 뛰어나왔다.

"들어오십시오. 성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에 네 사람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담겼다.

성채의 가장 큰 성문을 넘어가니, 안쪽에 많은 발전이 이루어진 도시가 보였다.

현재의 메르텡과 비교하면 월등하게 발전된 도시의 모습.

메르텡이 멸망했다가 다시 부활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델벳의 모습을 보니 새삼 그게 더욱 실감이 났다.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델벳의 내성 앞에 도착했다.

그곳을 지키던 기사들이 이신 일행을 보고 그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내성의 입구부터 성안으로 들어가서까지.

숨길 수 없는 은근한 긴장감이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고 넓은 방 안 가운데 놓인 큰 테이블이 보인다.

그곳에 앉은 중년의 남성은 델벳의 성주 로버트 플랜트.

기품 있는 분위기와 그 안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기도.

란탄의 자격자들 중 그 누가 오더라도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자신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래, 란탄에서 뭐가 그리 급하다고 다짜고짜 나를 만나야 한다고 한 거지?"

거만하면서도 당당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매섭다.

카노코와 코에이는 로버트의 기세에 짓눌렸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애쓰고 있었으나, 그를 속일 순 없었다.

'호오....'

로버트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가장 앞선 카노코와 코에이가 언뜻 저 무리의 리더로 보이지만, 둘은 겁먹었고 뒤에 있는 마법사는 긴장했다.

하지만 어깨에 박쥐를 얹고 있는 남자는 태평하다.

'저자가 진짜겠군.'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세 사람을 넘어 이신에게로 향했고 그 시선을 느낀 이신도 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허공에 맞부딪힌 시선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만 같다.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긴장감이 주변 다른 이들의 근육을 경직시켰다.

"큭, 우선 자리에 앉지."

로버트의 말에 잔뜩 긴장하던 세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와중에, 로버트가 먼저 분위기를 풀었다.

강자의 약자를 향한 배려라고 할까.

그는 아직까지도 일말의 긴장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란탄의 자격자들은 달랐다.

로버트 하나만 이곳에 있었다면 그나마 덜 긴장했을 것이다.

뭘 알고 있는 것인지, 로버트의 양옆에 엄청난 수준의 기사 둘과 마법사 하나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들어온 입구는 이미 열 명의 기사가 막고 있었다.

이대로 전투가 벌어진다면 이신은 몰라도 자신들은 정말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감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었다.

'이 성의 수호기사단인가? 마법사는 수석 마법관 정도 되어 보이고.'

로버트 플랜트 정도의 실력자라면 굳이 동맹국에서 소식을 전하러 온 이들을 만나는데 이러한 전력을 데리고 올 이유가 없다.

무언가를 눈치챈 게 분명하다.

"그 박쥐는 뭐 애완용으로 키우는 건가?"

"뭐라? 감히-."

"잠깐. 뭐…이미 눈치챈 거 같으니 피차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도록 합시다. 로버트 플랜트 성주."

자리에 앉기 전부터 다른 곳에는 전혀 시선을 두지 않고 오로지 이신만을 바라보는 로버트.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알아서 정체를 드러내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하하, 자네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꽤나 당돌하군."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김강천과 지은주는 어디 있지?"

이신의 돌직구에 처음으로 로버트의 얼굴에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나에 대해 눈치챈 것은 아니었었나?'

그게 아니라면 테티르와 메르텡 사이의 마경에서 병사와 기사들의 실종을 눈치채고 경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걱정할 건 없다.

"김강천과 지은주? 란탄에서 그들을 왜 찾는 거지?"

"그건 알 거 없고."

"흠...주황 문양의 자격자가 이렇게 발언권이 센 건 이상하군. 네 정체를 말하면 우리도 김강천과 지은주가 어디 있는지 말해 주지."

"내 정체라...아직도 눈치를 못 챘어?"

이신의 말과 함께 급변하는 방 안의 분위기.

로버트의 눈살이 찌푸려지며 표정이 굳어졌다.

콰앙!

이신이 테이블을 내리치자, 그대로 두 동강 난 테이블의 사이로 마력이 뻗어 나갔다. 마력은 곧 얼어붙으며 로버트를 덮쳤다.

쩌저적!!

가가가가각- 파각!

섬전처럼 뽑힌 로버트의 검이 이신의 얼음을 그대로 부수자, 사방에서 검이 뽑히는 소리가 어지러이 들려왔다.

"뭐…이렇게 갑자기?"

"젠장!"

"우린 뭉쳐야 해요!"

카노코, 코에이, 코고가 한곳으로 뭉쳐, 달려오는 기사들을 막았다.

그 사이 사방으로 뻗은 이신의 그림자 속에서 불길한 안광을 일렁이는 스켈레톤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 능력은...설마?"

"이제야 눈치챘어? 정체를 알았으니,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야."

그렇게 말하곤 이신의 검은 마력이 공간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싸움을 질질 끌 시간은 없다.

전투를 시작했으면 단기간에 빠르게 마무리 지어야 한다.

이곳은 적진의 한복판이다.

[사계 소환]

공간 전체를 가득 메우는 강렬한 사기.

죽은 자들의 얼어붙은 사념들이 녹아내리며 기사들에게로 향하기 시작한다.

"끄으윽...!"

"젠장 몸이 갑자기 무거워졌어."

"버텨라! 사술일 뿐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능력치를 감소시키는 스킬.

이곳에선 이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능력이 10% 감소한다.

[신격으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20% 증가합니다.]

동시에 신격으로 인한 능력치의 증가.

우우웅― 콰아아아아아!!

이신의 손가락 위에서 점멸하던 흑빛 전광이 로버트를 향해 쏘아진다.

뇌전의 파도가 사방을 휩쓸고 강력한 지배력이 공간을 장악한다.

크아아아아아―

캬아아아아악!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언데드들이 기사들을 물어뜯고 하나둘 그 생명의 불씨를 무자비하게 꺼트렸다.

[기사 필립의 힘을 빼앗았습니다.]

[힘이 1 상승합니다.]

[기사 프리모의 민첩을 빼앗았습니다.]

[민첩이 1 상승합니다.]

[기사 라비아의....]

[....]

혼돈의 능력이 향상되고 스탯의 강탈도 더욱 활발해졌다.

실시간으로 능력이 성장하는 게 느껴졌다.

압도적인 전투와 공포로 무장한 싸움.

사계의 안에서 느껴지는 그 위험함을 그 누구보다 여실히 느끼고 있을 로버트 플랜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까 그 자신감과 여유는 어디 갔지?"

로버트에게 다가가는 이신의 양손에 마력이 깃들었다.

"다시 한번 물을게. 김강천과 지은주는 어디 있지?"

* * *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

사방의 가구가 다 부서지는 것은 물론이고, 성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쿨럭!

검붉은 피를 계속 토해 내는 로버트가 핏물로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한 자들의 공통된 반응.

이신은 끝끝내 원하는 대답을 내뱉지 않는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델벳의 성주 로버트 플랜트를 쓰러트렸습니다.]

[공적치가 7,500 오릅니다.]

차가운 그의 시체 옆에 떨어진 로버트 플랜트의 애검.

그 검을 집어 든 이신이 검의 손잡이 부분에 박힌 보석에 손을 올렸다.

일명 생명의 돌이라 불리는 보석.

그대로 보석에 마력을 주입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자, 보석의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파각!

끝내 부서진 생명의 돌이 가루가 되며 성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 성채는 죽은 도시가 되었다.

[델벳의 생명의 돌을 부쉈습니다.]

[델벳의 함락에 대한 공헌도를 확인합니다.]

[공헌도에 따른 공적치를 획득합니다.]

[공적치가 99,800 오릅니다.]

이곳 델벳을 쳐들어온 첫 번째 이유가 김강천과 지은주의 생사를 확인하고 구하기 위함이었다면,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이 공적치를 얻기 위함이었다.

[공적치 100,000을 사용합니다.]

[『노란 문양』을 획득합니다.]

[노란 문양]

노란 지대로 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집니다.

# 체력과 마력이 9% 증가합니다.

# 전체 스탯이 15% 증가합니다.

이신의 손등에 물들었던 주황빛의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노란빛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을 본 일본의 도전자들이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니까. 지금 노란 문양을 얻은 거지?"

"주황 문양 얻은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요?"

"이제는 기사들 잡는 것도 모자라서, 성을 무너뜨리고 공적치를 얻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은 세상이 맞는 거지?"

"저는 그것보다 저 사람이 이제 노란 문양을 얻은 게 신기하네요. 주황 문양 자격자가 델벳의 성주를 죽이고 그곳의 수호 기사들과 수석 마법관까지 죽인 거잖아요?"

"알고는 있었는데...새삼 또 어이가 없네."

세 사람의 입은 다물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신은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문양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본격적인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노란 지대를 가장 빠르게 가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더구나 테티르와 메르텡은 노란 지대부터 마경이 아닌 지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그렇기에 노란 문양을 얻어 놓으면 그쪽으로도 퇴로를 잡을 수 있어 좋았다.

이제는 강천과 은주의 생사만 알면 될 일.

"일어나라."

시퍼런 안광을 흘리며 일어나는 로버트 플랜트에게 이신이 그의 애검을 쥐여 주었다.

"너의 기사들은 죽어서도 너를 돕게 되네."

[시체 강화]

주위에 죽어 쓰러진 기사들의 시체를 이용해서 로버트 플랜트의 힘을 강화시킨 뒤, 이신은 그에게 김강천과 지은주에 대해 물었다.

거기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질 않았길 바라며.

"기억납니다."

"좋아, 둘은 어디 있지?"

"노란 지대를 통해서 나르덴으로 가고 있을 겁니다."

"뭐? 거기를 왜?"

"나르덴에 숨어 있는 구원자들을 끌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신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인질을 이용해서 신하늘과 강지훈, 백현아 같은 이들을 유인해서 죽이려는 것이다.

아마 그들은 저 둘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나설 테니.

"망할 새끼들."

"와…지독하네요."

"그니까, 저게 사람 새끼들이 할 짓이냐?"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 사람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신은 그들을 보며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과거는 생각 안 하나?'

속으로 혀를 찬 이신이 창문 앞으로 가, 한순간에 멸망해 버린 델벳을 보며 말했다.

"바로 출발한다."

이곳에서 꾸물댈 시간이 없다.

델벳 성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라질 것이라 생각 못 했을 테니, 테티르에서 대군을 이끌고 이곳에 올 것이 분명했다.

우선은 빠르게 빠져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미 한참 전에 출발했다는 강천과 은주를 구해야 한다.

마경에 들어온 후로 메르텡에 소식을 전달해 주지 못했지만, 델벳의 함락이면 충분한 전달이 될 것이다.

'제이든이 윌데스와 협상을 잘했을지 모르겠네.'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일이 좀 꼬일 테니, 잘 마무리되었으면 했다.

* * *

"젠장, 저기도 와글와글 모여 있군."

"조금만 더 가면 노란 지대인데."

"사방에 병사들이 쫙 깔려 있어요. 제 지형 감지로도 이 정도인데, 빠져나가기가...."

사방에서 몰려오는 테티르의 병사들을 피해 움직이던 이신 일행은 산속에 숨어들어 적들의 동향을 살폈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하기도 힘들어진 상태.

'그냥 빠르게 처리하고 빠져나가야겠어.'

전 범위로 뿌려진 마력 파장으로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가장 취약한 부분을 뚫어야 한다.

"뚫을 거니까 준비...."

그때, 이신의 마력 파장에 대규모 병사들이 새로 잡혔다.

테티르의 병사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

확인을 위해 위쪽으로 움직여 그들을 살핀 이신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왔구나.'

기다리던 지원군이.

제102화

구출

산맥의 골짜기,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세 방향으로 둘러싸고 있고 그 위로 마경이 자리 잡고 있다.

테티르의 병사들은 골짜기 안에다가 김강천과 지은주가 수감 되어 있는 철창 감옥을 두고는 진을 치기 시작했다.

"나르덴에는 연락을 취하고 있나?"

"전령이 갔습니다. 아마 곧 메르텡 놈들이 알게 될 겁니다."

"표정들이 볼 만하겠군."

나르덴에 숨어 있는 구원자들을 끌어낼 미끼.

메르텡을 여기까지 끌고 온 그 자격자들을 처리할 최고의 함정이 만들어지고 있다.

"지들이 안 오고 배겨?"

"근데 이걸로 괜찮겠습니까? 그래도 놈들은 그 지옥 같은 상황을 뚫고 윈저까지 탈환한 놈들인데."

"얀마, 그때랑 지금이랑 상황이 완전히 다르지."

골짜기의 입구에서 경계를 서던 기사가 병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지금 나르덴에는 박주혁과 백현이 없다. 주요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놈들은 다 윈저에 있으니까, 그러니 실패할 이유는 없어."

"그렇군요."

지은주에게서 정보를 확인한 테티르는 이번 기회에 확실히 적들의 전력을 줄일 생각이었다.

"코르미르와 아만에서도 지원군이 곧 올 테니, 놈들이 온다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죽여 줘야지."

골짜기에서 함정이 만들어지고 있을 때, 나르덴에서는 전령을 통해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런…망할 새끼들이...!"

쾅!

나르덴의 성주, 셰인 시모어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책상을 내리쳤다.

난감했다.

지금 나르덴의 주변에는 테티르와 아만의 군대가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상태. 전력은 저쪽이 압도적으로 우위다.

이대로 나르덴의 핵심 전력들이 빠져나간다면 나르덴도 흔들릴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성채의 주인이자, 이곳을 수성해야 하는 셰인의 입장에서 이런 뻔한 함정에 제 발로 걸어가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구원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 뻔하기에.

이건 김강천과 지은주가 끌려간 순간부터 당할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구원자들을 불러와."

잠시 후.

전령의 소식을 들은 강지훈과 신하늘, 백현아가 셰인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다들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지금 테티르에 두 사람이 잡혀 있는 상황이야."

"구하러 가야 해요."

"적들은 대놓고 자네들을 유인하고 있어."

"함정이란 걸 알면서도 움직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셰인 성주님."

백현아의 담담한 음성에 셰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저희가 맨 처음 메르텡을 다시 살려냈을 때도, 억지로 아데르타까지 전선을 늘리고 윈저를 탈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는 박주혁과 백현, 김강천이 있었지."

지독하리만치 차가운 눈빛.

그의 말속에는 '너희들은 그 셋이 아니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 자리엔 저희도 있었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결의와 자신감이 이 한 문장에 모두 들어가 있었다.

"성주님이 뭐라 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저희는 움직일 테니까요."

"저희를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성주님."

셰인은 지훈과 하늘의 투지가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그들의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미안하군. 성공할 수 있겠나?"

"성주님."

"뭐지?"

"성주님은 한 가지를 모르고 계십니다."

갑작스러운 강지훈의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 건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배님이 올라왔어요, 저희가 여기서 두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선배님한테 죽거든요."

"으으...전 솔직히 저놈들보다 선배님이 더 무서워요."

양팔을 부여잡고 과장되게 몸을 떠는 신하늘.

하지만 그의 얼굴에 담긴 두려움은 진심이었다.

"선배님이라면 그 이신이라는 자격자 말인가?"

"예, 성주님.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매사에 냉철한 백현아마저 잔뜩 굳은 얼굴로 말하자, 셰인은 그들의 말이 진짜인지 장난으로 하는 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뭐가 그리 심각하다는 건가?"

"선배님이 홀로 델벳을 함락했다는 소식 듣지 않았습니까?"

"들었지, 솔직히 아직도 그 말이 믿어지지는 않지만."

"사실일 겁니다. 그렇다는 건 선배님이 노란 문양을 얻었을 확률이 높다는 거겠죠."

그녀의 메마른 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곧 이곳까지 올 수도 있다는 소립니다. 이렇게 꾸물대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선배님이 오기 전에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해요!"

점점 거세지는 그녀의 목소리.

격양된 그녀의 태도 속에서 불안감이 느껴졌다.

"진정하게! 도대체 이신이 오는데 왜 자네들이 그러는 거야?"

"왜긴요! 아까 하늘이가 말하는 거 못 들으셨나요? 이대로 두 사람 못 구하면 저희 지옥 훈련 행입니다! 지옥 훈련!"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지옥 훈련'이라는 단어에 강지훈과 신하늘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돼...그것만은."

"구해야 돼...움직여야 된다고!"

갑자기 단체로 공황에 빠진 듯한 모습에 당황한 셰인의 머릿속에 이신에 대한 이미지가 새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무서운 자인가 보군.... 제이든이나 국왕님께서 그런 말씀은 없으셨는데 말이지. 조심해야겠어.'

* * *

푸르렀던 하늘이 어둠에 잠기고 밝게 빛나던 햇빛이 달빛으로 바뀌자, 검은 옷을 입은 여섯의 인영이 성벽 위로 올라섰다.

"아무리 밤이라 해도 이 평야 속에서 적들의 시선을 벗어나기는 힘들어."

"걱정 마, 내 스킬이 있으면 몰래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백현아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어둠의 장막]

그녀의 마력이 주위의 다른 이들에게까지 뻗어 나가며 그들을 어둠 속에 잠기게 해 주었다.

"나랑 5m 이상 떨어지면 안 돼."

"알겠어."

"우선, 산맥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강지훈, 신하늘, 백현아와 한국 도전자협회 특수팀의 일원이었던 3명까지.

총 여섯 명이 이번 김강천, 지은주 구출을 위한 별동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백현아는 박주혁 밑에서 특수팀의 부팀장으로 있었기에 이번 별동대의 리더를 맡았다.

"가자."

성벽의 벽을 타고 빠르게 내려간 별동대가 지면에 다 와 갈 즈음에 성벽을 차고 뛰어, 해자를 넘어갔다.

서로의 시선을 빠르게 주고받은 그들이 곧장 뛰어 산맥의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적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습.

나무들 사이에 숨어들고 나서야 백현아는 어둠의 장막을 풀었다.

"골짜기로 가려면 서둘러야 돼."

"적들은 마주치면 놈들이 신호를 보내기 전에 처리해야 된다."

백현아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인 그들이 다시 출발했다.

골짜기는 경사가 급한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데다 그 위를 마경이 덮고 있는 탓에, 여러 방향에서 침투하는 게 불가능한 곳이다.

침투 가능한 방향은 하나뿐이고 그 길에는 분명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을 터.

적들의 함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

"쉿."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낸 백현아가 어둠을 꿰뚫고 적들을 보았다.

나르덴의 주변과 달리, 이곳에는 나무와 같은 높이 솟은 식물이 없어 사방이 뻥 뚫려 있었다.

때문에, 적들의 시야가 넓어져 그들을 피해 몸을 숨기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둔덕 뒤에 몸을 찰싹 달라 붙인 별동대는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병사들을 보며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세 사람은 조금 뒤로 돌아 저기 멀리 있는 병사를 처리하고 나머지 셋은 이곳에서 다가오고 있는 병사 둘을 맡기로 했다.

일시에 처리하지 않으면 바로 들킨다.

거의 100m 거리까지 움직인 신하늘과 강지훈이 백현아와 허공에서 시선을 마주친 채, 그녀가 든 손가락을 보았다.

하나, 둘, 셋.

세 번째 손가락이 들어 올려지는 순간, 일시에 세 사람이 순찰병들을 향해 뛰었다.

강지훈이 다가오는 순찰병 하나를 처리하고 몇 발자국 떨어져서 오던 병사를 신하늘이 처리했다.

그때 다른 곳에서 뒤늦게 걸어오던 순찰병 하나가 둘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입을 열려고 한 순간.

후웅― 푹!

백현아가 던진 단검이 목에 박혀 끝내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쓰러졌다.

바닥에 닿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먼저 순찰병을 처리한 강지훈이 달려가 쓰러지는 병사를 붙잡고 조심스레 땅 위로 눕혔다.

곧바로 시체를 한곳에 숨겨 놓은 뒤, 백현아의 지시대로 별동대는 마경이 있는 곳을 따라 조심스레 움직였다.

절벽의 거의 끝자락 땅에 찰싹 달라붙은 백현아는 저 밑에 세워진 철창 감옥을 보았다.

'저기 있다.'

시선을 돌리자, 다른 이들도 감옥을 보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작전은 미리 짜 둔 상태.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은 뒤, 백현아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밤이라 그런지 감옥을 지키고 있는 기사는 셋뿐.

나머지 병사들은 외곽을 돌아다니며 순찰을 하거나 잡일을 하는 중이고 나머지는 막사에 있는 듯했다.

이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내려가면 아무리 밤이라도 감옥에 닿기 한참 전에 들킬 것은 뻔한 일.

침투할 수 있는 곳이 이곳뿐이라 적들의 시선도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방법은 있지.'

[어둠 도약]

밤에만 사용할 수 있는 단거리 도약 기술.

순식간에 어둠 속에 스며든 그녀가 절벽을 뛰어내리더니, 허공을 뛰어넘어 단번에 철창 속에서 나타났다.

'이런.'

묶여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백현아가 미간을 좁혔다.

생각보다 김강천과 지은주의 상태가 심각했다.

파각! 파각!

두 사람이 그녀가 다가왔다는 것을 눈치챌 틈도 없이 바로 두 사람의 마력을 봉인한 수갑을 자르고 백현아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기사 셋이 눈을 부릅뜨며 다급히 검을 뽑는 모습이 보인다.

"마력 끌어 올려!"

그렇게 외친 그녀가 철창을 가르는 순간.

콰아아아앙!!

철창 감옥이 통째로 폭발하며 세 사람이 화마에 휩쓸렸다.

"이런!"

백현아가 철창에 들어가서 수갑을 풀어 버림과 동시에 절벽에서 뛰어내린 나머지 별동대원들이 폭발을 보고는 욕설을 내뱉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적침입니다!"

"철창이 폭발했어? 기사들은 뭐 하는 거야!"

다급하게 막사에 뛰쳐나오는 자격자와 기사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바빴다.

골짜기에는 테티르의 병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만의 자격자 여섯과 코르미르에서 온 자격자 하나.

거기에 더해 열이 넘는 기사들까지.

워프 연합의 전력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둘러쌌다.

이 정도 함정에 상대가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다음을 대비하며 그들이 마력을 예열하고 있을 때.

자욱한 먼지와 검은 연기가 휘날리며 그 안에서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서걱! 쿵.

푹! 촤악!

반응할 틈도 없이 휘둘러지는 공격에 순식간에 기사 둘의 목숨이 사라졌지만, 기습적 우위는 거기서 끝났다.

카앙!

그녀의 검을 막은 테티르의 자격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혼자 뭘 어쩌려고?"

그의 검을 튕겨낸 그녀가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 다시 연기 속으로 숨어들며 사라졌다.

"모두 조심해라! 싸움 수법을 보니 백현아야!"

"기습에 조심해! 마력 파장을 찾아!"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함께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적들이 또 옵니다!"

"절벽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다급하게 병사들을 무참히 베어 내며 달려오는 다섯.

그러나 그들의 앞길을 아만의 자격자들과 기사들이 움직여 막았다.

"여기는 우리가 처리하자고."

"비켜!"

빨리 저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신하늘이 마력을 끌어 올려 주먹을 휘둘렀다.

파앙―!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뒤로 주르륵 밀려나는 자격자가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보아하니 신하늘인가 보군."

이미 적들에게 유명 인사가 된 메르텡의 도전자들은 그 기술과 능력들이 속속들이 파악된 상태였다.

신하늘을 가로막는 남색 문양의 자격자와 그와 비슷한 실력의 기사 둘.

그리고 강지훈과 나머지 셋에게도 열 명이나 되는 기사와 그보다 더 많은 병사가 붙었다.

"망할...."

"이렇게 된 이상 돌파밖에 없어."

"할 수 있을 거 같나?"

강지훈은 그들의 어깨 너머로 일렁이는 화마를 보았다.

연기가 서서히 걷히자,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김강천과 지은주를 볼 수 있었다.

백현아도 폭발 속에서 그 둘을 구하느라 꽤 큰 피해를 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셋을 둘러싼 자격자들의 문양이 빛나기 시작했다.

"자, 이제 우리의 지긋지긋한 인연의 종지부를 찍어 보자고."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보랏빛 문양의 도전자가 불길에 휩싸인 세 사람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제103화

"거의 다 왔습니다."

"이제 곧 골짜기가 보일 겁니다."

이신 일행에게 길을 안내해 준 기사가 골짜기가 있는 방향을 집어주며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신의 일행을 테티르의 포위에서 꺼내 준 이들은 윌데스의 기사단이었다.

"이리로 가면 함정을 판 장소가 나온다는 거죠?"

"예, 저희 군대와 같이 움직이는 건 이동 효율이 떨어질 테니, 급하시면 먼저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사의 말에 네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미친놈이 이런 계획을 짠 거야?"

"그니까요,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요."

"근데 그 녀석들이면 어떻게든 구해내지 않았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힘들죠. 그들 중에서도 주요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도전자들은 다 윈저에 있으니까요."

세 사람의 말을 듣던 이신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력을 펼치니 골짜기가 있는 방향에서 거센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이미 시작된 거 같다."

"네?"

"벌써?"

이신의 말을 들은 셋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죽음의 기운이 강해지고 있다.'

불길할 정도로 강하게.

계속해서 감각을 자극한다.

"왜 그래 주인?"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던 이신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나 먼저 간다. 알아서 따라와. 당신들도."

이신은 일본의 세 도전자와 기사에게 말을 한 뒤 곧장 뛰기 시작했다.

'제발 조금만 버텨라.'

* * *

백현아는 머리가 복잡했다.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을까.

내가 희생하면 다른 이들을 구할 수 있을까.

호기롭게 두 사람을 구하고자 했지만, 작전은 실패했고 적들의 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대로 전면전을 펼치면 필패가 분명하다.

게다가 눈앞에서 적발을 휘날리며 보랏빛 문양을 빛내는 이 남자.

일반적인 보라 문양의 자격자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표정에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것을 보면 절대 상대를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게 분명하다.

파란 문양 이상급의 기사만 열이 넘고 자격자의 수도 그에 가깝다.

뿐만 아니라 병사들은 수십이 넘는다.

퇴로로 절벽을 선택하는 건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입구로 가기에는 병사들이 쫙 깔려 있다.

'감옥에 함정을 파 놓았을 줄이야....'

적들은 애초에 김강천과 지은주를 살릴 생각이 없던 게 분명하다.

두 사람을 포함해서 나머지도 포로로 잡기를 원할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오판이었다.

'우선은 약한 놈부터 빠르게 처리해서 인원수를 줄인다.'

[은신 기동]

배경에 동화되며 사라진 백현아가 그녀를 찾던 기사의 뒤에서 갑작스럽게 기척을 드러냈다.

퍽!

시잉-

서늘한 감각이 기사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적발의 남자가 기사를 발로 냅다 차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이 잘려 죽었을 것이다.

기습의 실패에 이를 악문 그녀가 곧장 방향을 바꿔 다른 방향으로 뛰려고 하는 순간, 적발의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마치 더 발악해 보라고 말하는 듯, 비열한 눈빛이 그녀를 직시한다.

'제기랄!'

그가 자신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본 그녀는 다급히 그를 향해 뛰었다.

카앙! 

김강천과 지은주를 베려는 듯한 모션을 하던 남자의 검이 수직으로 꺾이며 백현아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녀가 엄청난 반사 신경으로 간신히 검을 쳐냈지만 그의 발에 복부를 얻어맞고 뒤로 밀려났다.

연이어 기사들의 공격이 들어왔다.

공격을 막다가 점점 두 사람에게 멀어지는 상황에 백현아가 이를 악물었다.

폭발에 휩쓸려 김강천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지은주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다.

빨리 구해야만 했다.

"스…톤...크억!"

자신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적발의 남자를 밀어내려던 지은주가 채찍질처럼 휘둘러지는 발길질을 맞고 땅을 몇 바퀴 구르다 쓰러졌다.

"은주야!"

그 모습을 본 백현아가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그녀를 구하러 다가갈 여유는 없었다.

오히려 지금 공세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아슬아슬한 상황.

적발의 자격자가 끼어드는 순간 바로 당할 것 같았지만 왜인지 놈은 공세에 가담하지 않았다.

'젠장, 목적이 뭐지?'

더 이상 흥미가 없는지, 쓰러진 인질들에게는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마치 이 상황 자체를 즐기는 모습.

일반적인 도전자들과 그 실력을 달리하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누나!"

후웅― 콰앙!

공중에서 떨어지며 바닥에 주먹을 내리꽂자,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기며 그 여파로 주변의 기사들과 자격자들이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아만의 자격자들을 억지로 뚫고 온 신하늘이 백현아의 옆으로 섰다.

"괜찮아?"

"괜찮아. 일단 이 녀석들을 빨리 처리하고 둘을 구하러 가야 돼."

바로 옆에 있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백현아가 말했다.

"우선 저기에 관심 주지 마, 둘을 건드릴 생각은 없어 보이니까."

"알겠어."

신하늘이 힐끔 쓰러진 두 사람을 보았다가 그 앞에 서 있는 적발의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기이하리만치 스산한 눈동자.

황급히 시선을 돌린 신하늘의 얼굴이 굳어졌다.

"덤벼, x밥들아."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도발을 시전하는 신하늘을 보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 자격자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신하늘의 온몸을 파고드는 검격.

연체동물처럼 모든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내던 신하늘이 아주 찰나의 틈을 발견하자 눈을 빛냈다.

기습적으로 휘둘러지는 그의 주먹에 마력이 실렸다.

한 방에 힘을 극대화한 신하늘의 주먹이 살짝 열린 기사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콰드득!!

갑옷이 안으로 우그러지며 가슴팍이 함몰된 기사가 피를 토하며 땅을 굴렀다.

그때 뒤쪽에 있던 마법사가 신하늘에게 지팡이를 겨눴다.

[애시드 밤(Acid bomb)]

자세가 약간 흐트러진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터지는 산성 폭발.

가벼운 방어구만 착용한 신하늘은 식겁하며 마력을 휘둘러 산성액을 날려 보지만, 이내 이어지는 자격자의 검격에 스치며 옆구리가 찢어졌다.

"칫."

"괜찮아?"

"그럼요. 이 정도쯤이야."

백현아의 걱정에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신하늘은 불에 지진 듯한 고통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산성액이 상처로 튀었나.'

적들이 너무 많았다.

한 명 한 명이 다 상당한 실력자들이었고 인질까지 붙잡힌 상태였다.

더구나 백현아는 두 사람을 지키다 폭발에 휩쓸려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아직 남은 적은 여덟.

지금 상태론 아만 쪽 적들을 상대하는 넷이 도움을 주러 오기 전에 당할 판이었다.

'살을 내주고 목숨을 가져온다.'

이렇게 해서라도 적들의 수를 줄여야 한다.

지면을 발로 밀어내며 뛰어오른 신하늘이 가장 강해 보이는 자격자에게로 달려들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흥분해서 뛰어드는 모양새였지만 자격자는 끝까지 신중을 기했다.

'뭐 하자는 거지?'

검을 든 자격자는 의아했다.

신하늘은 거의 지척에 다다를 때까지 자신의 몸을 훤히 내밀고 공격만을 생각하며 다가오고 있다.

검을 들고 있는 자신이 리치가 훨씬 긴 탓에, 이대로 찌르면 반드시 신하늘은 죽는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자격자는 마력을 검에 새기고 그대로 출수했다.

여기선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다는 자신감.

단 일격에 신하늘을 처리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 올리던 그가 난데없이 날아온 무형의 기파에 팔을 얻어맞고 휘청였다.

'이런!'

정확히 몇몇 군데의 마력혈이 찔리고 그대로 마력의 흐름이 깨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탓에 공격 속도가 늦어지고 궤도가 살짝 비틀려, 검이 심장이 아닌 그 옆을 가르고 지나갔다.

촤아악!

우드득!!

신하늘의 가슴부터 겨드랑이 사이로 깊게 갈라진 상처로 피가 주르륵 흐르고, 검을 내뻗은 남자는 신하늘의 주먹에 맞아 목이 꺾여 즉사했다.

신하늘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지만 신음은 내뱉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신하늘은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오는 기사의 검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날아오는 단검이 기사의 목을 정확히 관통했다.

"하아...하아...."

신하늘뿐 아니라, 어깨에서부터 피를 줄줄 흘리는 백현아가 악귀 같은 얼굴로 자신이 죽인 기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근처에 죽어 나자빠진 두 명의 시체가 보였다.

대신 그녀 또한 팔 하나를 내줬는지, 피투성이인 오른팔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순식간에 넷이 당한 상황.

아무리 적들의 전력의 우위라 한들, 절대적 숫자의 압박은 아까에 비해 확연히 줄어들었다.

"애시드 건(Acid gun)."

지팡이를 꼬나 잡은 마법사가 또다시 신하늘을 향해 산성액을 쏘아 보냈다.

총알처럼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산성액을 힘들게 피하던 신하늘이 마법사에게로 달려들었다.

파앙―!

주먹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공간이 통째로 터지는 듯한 바람이 흩날렸다.

파란 문양의 자격자의 머리에 박치기를 날린 신하늘이 눈 안으로 튄 피를 참아내며 눈을 부릅뜨고는 마법사를 붙잡았다.

그 괴기한 모습에 움찔한 마법사가 다급히 마력을 끌어 올려 보지만, 이미 지척까지 다가온 신하늘의 공격을 막기엔 늦은 상태.

그때.

그 마법사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코르미르의 자격자가 신하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돼!"

그의 발밑에 가쁜 숨을 내쉬며 쓰러진 두 사람 위로 검을 내리꽂고 있었다.

"안 돼!!"

푸욱!

"커…허억...."

지은주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떨어지던 검을 본 김강천이 그녀를 밀어내며 자신의 몸을 그 검에 가져다 대었다.

촤아악―!

그의 등을 뚫고 바닥에 박힌 검이 다시 허공으로 뽑히고.

푸욱!

그런 김강천을 못마땅하게 보던 자격자가 다시 검을 그의 목을 향해 찔렀다.

"강천이 형!"

"야이 개새끼야!!"

그 모습을 본 강지훈과 백현아가 울분을 토해 내며 소리치고.

"아아...안…돼...아니야…그럴 리가 없어...."

자신을 밀어내고 죽어 버린 김강천을 보며 실성한 듯 몸을 덜덜 떠는 지은주가 땅을 기며 김강천에게 다가갔다.

"비켜!"

마법사에게 휘두르려던 주먹을 거두고 바로 방향을 바꿔 김강천에게 달려가던 신하늘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날아가는 산성 마법을 본 백현아가 다급하게 신하늘을 잡아당겨 그를 구해내고는 소리쳤다.

"정신 차려!"

그 소리에 순간 얼이 빠졌던 신하늘이 정신을 차리고 마력을 끌어 올리는 순간.

"큭."

서늘한 비웃음 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스쳤다.

"안 돼…안 돼...나 때문에 오빠가...."

마치 나사가 하나 빠진 듯, 지은주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어졌고 몸은 고장 난 듯 덜덜 떨렸다.

"그래, 너 때문이야."

검에서 흐르는 김강천의 피를 손으로 쓱 밀어낸 그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한국 도전자들 전체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리꽂히는 검이 지은주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다.

푸욱!

"커…어…어...."

목을 타고 울컥 올라오는 핏물에, 지은주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그녀가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을 구하러 온 이들을 처연하게 바라보다 쓰러졌다.

"은주야!!"

"내가 죽일 거예요. 저 새끼는 내가!"

"비켜! 이 새끼들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함 속에서 외친 절규.

처음으로 동료를 잃은 신하늘과 강지훈은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고, 이미 이러한 경험을 겪었었던 백현아는 과거와 똑같은 자신의 모습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 꼴로?"

그들의 분노한 모습을 봐서 매우 즐겁다는 듯, 적발의 남자가 웃었다.

그 모습에 눈이 돌아간 신하늘과 강지훈이 다른 이들의 존재는 잊은 채, 그를 향해 달려갔다.

백현아는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며 두 사람을 막으려는 다른 도전자들을 견제했지만, 오른팔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크윽!"

상대의 검을 받아낸 백현아가 고통에 신음을 내뱉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숨은 가빠지고 마력은 금방이라도 바닥을 칠 것 같았다.

억지로 적들을 뚫고 오다가 칼침을 맞은 강지훈은 결국 바닥에 쓰러졌고 신하늘은 몸에 상처가 나든 말든 이성을 잃은 채 쇄도했다.

테티르와 아만 쪽 사람들은 코르미르 쪽 자격자의 독단적인 행동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 덕에 적들이 이성을 잃어 상황이 반전된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기세가 적들에게 넘어가고 있던 상태에서 완벽하게 적의 사기를 꺾어버린 것이다.

"크아아아!"

신하늘이 이성을 잃고 폭주했다.

보라 문양의 자격자는 그런 그의 주먹을 여유롭게 피해내며 무릎으로 상대의 복부를 가격했다.

"커억!"

뒤로 주르륵 날아간 신하늘이 켁켁 대며 눈물을 쏟아 냈다.

"그거 맞았다고 울기는."

그 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흘리던 남자가 검에 진득한 살기를 담아 마력을 둘렀다.

"안 돼! 하늘아!!"

"그만해! 떨어져! 떨어지라고 이 새끼야!"

김강천과 지은주에 이어 신하늘까지 죽을 위험에 처한 것을 보자, 백현아와 강지훈은 이성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가서 하늘이를 구해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무력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검이 들어 올려지고.

"네가 그렇게 그리워하는 친구들 곁으로 보내 주마."

다시 내려가는 순간.

쿠구궁!!

콰아앙!

하늘에서 내리치는 일발의 벼락이 그를 막았다.

흑빛 섬광이 적발의 남자를 향해 쏘아지며 땅에 잿빛 잔흔을 남기고 사라졌다.

"크윽...!"

간신히 벼락을 피해 낸 남자가 갑작스러운 기습에 신음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와 신하늘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노란 문양의 자격자를 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싸늘함이 서려 있었다.

"이게...무슨 상황이지?"

제104화

후회

엘츠 성에서 전장의 소식만을 기다리던 제이든은 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방 안을 계속 왔다 갔다 움직였다.

"의장, 앨런이 제대로 했겠지?"

"그랬을 겁니다. 그래도 앨런이 일 처리는 깔끔하게 하는 인간이니까요."

"그래도 뜻대로 돼서 다행이야. 윌데스와의 동맹이라니. 그게 성공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

"그러게 말입니다. 이신 님은 정말 신기하신 분입니다.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알고, 그렇게 강하신 건지."

"저 광대한 마경을 뚫고 가서 홀로 델벳을 함락시킬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나? 정말 대단한 인간이야."

제이든은 그의 이야기를 하자, 자연스레 나오는 미소에 입술을 매만졌다.

"윌데스의 병사들이 제때 도착했으면 좋겠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여 윌데스에서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더라도 이신 님이라면 능히 빠져나오실 분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그래도 혹시나 하는 걱정은 어쩔 수가 없구만."

"아직 테티르와 아만에선 윌데스가 저희 쪽에 붙었다는 사실을 모르니, 만약 접촉에 성공했다면 국경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그리고 지금 나르덴의 구원자들이 인질로 잡힌 김강천과 지은주를 구하러 갔다고 하던데."

"이신님도 테티르로 간 목적이 두 사람이었으니,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그분이 구해주실지도 모릅니다."

"하...."

제이든은 한숨을 내쉬며 창문으로 다가가 바깥을 보았다.

평화로워 보이는 이 도시 역시 모두 자격자들이 힘을 내준 탓이었다.

이신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더욱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신에게 너무 큰 도움을 받는 것 같지만...그래도 한 번만 더 도와주게.'

제이든은 눈을 감고 기도했다.

* * *

골짜기 안의 공기가 급격히 무거워졌다.

단 한 사람의 등장과 동시에 뒤바뀐 전장의 분위기.

쿠구구궁-

어느새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으며 그 사이로 뇌전이 살 떨리게 흐르고 있었다.

언제라도 내리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처럼.

"선배님!"

"아…아흑...흐으윽...."

강지훈이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이신을 불렀고 백현아는 그를 보자마자 참아왔던 울음을 내보였다.

"이…신?"

"저 사람이 그 이신이라고?"

꿀꺽.

한순간에 고요해진 전장 위로 자격자들과 기사들의 침 삼키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단 한 사람이 그 존재감만으로 전장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처음으로 느꼈다.

이신을 처음 마주한 이들은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압박감에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이는 순간 하늘에서 뇌전이 떨어져 자신을 뼈째로 녹여 버릴 것만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까드득-

전장의 모습을 확인한 이신의 이가 갈렸다.

그들이 느낀 것은 그저 착각이 아니었다.

이신은 이곳에 온 뒤로 가장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 감정의 파도가 주변으로 썰물처럼 밀려 나가고 있었기에 그들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었다.

"네가 이신인가?"

보라 문양의 자격자가 이신에게 물었다.

"너는 뭐지?"

주변의 공기가 얼어 버릴 것 같은 차가운 음성.

한기 어린 그의 물음에 남자는 전처럼 웃지 못한 채 대답했다.

"마이클 테일러다. 듣던 것 이상이군."

"왜 죽였지?"

자신이 죽였다고 단정을 짓는 이신의 말에 테일러는 미간을 좁혔다.

'주변 정황을 보고 눈치를 챈 건가?'

발뺌하면서 기회를 보려 했지만 소용없어졌다.

"이들은 적일 뿐, 그게 문제가 되나?"

"그런가. 그럴 수 있지."

담담한 그의 목소리, 마치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듯한 모순된 태도에 테일러는 오히려 더 불안감을 느꼈다.

심장을 조여 오는 압박감.

이곳에 올라와서 자신에게 이런 위기감을 준 인물이 있었던가?

그의 온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죽고 싶지 않으면 무기 버리고 투항해라. 5초 주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자존심이 상할 수 있을 법한 발언.

많은 이들이 죽고 부상당했다지만 아직까지 절대다수인 쪽은 워프 쪽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선뜻 이신에게 반발하지 못했다.

서로의 눈치만 슬금슬금 보는 상황.

그때 테일러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가며 그가 검을 내질렀다.

후웅- 콰아앙!!

일순간 뻗어진 검기가 백현아를 향해 날아갔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검기를 덮치며 그 공격을 무력화했다.

"쫄지 마! 이대로 끌려가면 다 죽음이야!"

테일러의 외침과 동시에 백현아의 근처에 있던 도전자가 낙뢰의 파장에 휩쓸리며 얼결에 먼저 움직였고 그것을 기점으로 다시 싸움이 시작됐다.

하지만.

콰과과광!! 쿠궁! 쿵!

연달아 내리치는 벼락 줄기들이 그들 전체를 공격하며 그 반란은 단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제압되었다.

"크허억...!"

"크윽."

압도적인 무력.

저 거대한 뇌전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드러나는 여유로운 표정.

도대체 얼마나 많은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어딜."

[뇌폭]

콰앙! 파지지직!!

몸을 내빼려 하는 테일러의 눈앞에 나타나는 뇌전의 폭발.

동시에 마기로 변하는 테일러의 마력.

검붉은 마기가 뇌전을 집어삼키고 테일러의 몸이 검은 안개로 변하더니 절벽 위의 마경 속으로 날아갔다.

'마인?'

급격히 굳어진 그의 시선이 검은 안개로 변한 테일러로 향하자마자, 그곳으로 마력을 날려 보냈다.

[프로즌 월(Frozen wall)]

쩌저저적―

절벽 위로 생겨나는 얼음들이 벽을 세우고 테일러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깨어나는 이신의 신성력.

'도망치게 둘 순 없지.'

얼마 되지는 않지만 마족에게 그 무엇보다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성스러운 십자가]

검지와 중지를 세우고 신성력을 끌어 올려 허공을 십자가로 그었다.

손가락을 따라 생성된 십자가가 점점 그 크기를 키우며 가둬졌다고 생각한 테일러를 향해 날아갔다.

이신은 그 순간 끝이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그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얼음벽 앞으로 검은 포탈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검은 안개가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공간 도약까지 할 수 있을 줄이야.'

자신이 방심했다는 사실에 입술을 비튼 이신은 곧바로 낙뢰를 떨어뜨렸고.

콰아아아앙!!

성스러운 십자가에 스친 테일러가 낙뢰에 적중당했지만, 안개가 그대로 흩어지며 속도가 조금 줄어들었을 뿐.

놈은 마경으로 무사히 들어가 버렸다.

이대로 놈을 따라 마경으로 들어가 잡을 수도 있겠지만, 남아 있는 이들이 있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권속들을 놓고 가더라도 마경으로 들어가면 마력의 연결이 끊어지니 어쩔 수가 없었다.

'쯧.'

나중에라도 잡으면 되겠지.

이신은 한숨을 내쉬며 지쳐 쓰러진 이들을 보았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차가운 시체가 된 두 사람의 앞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을 붙잡고 오열하고 있는 신하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선…배…님...."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이는 신하늘이 그의 눈빛을 보고는 뒤로 물러났다.

이신에게 제압당한 적들은 무거워진 공기를 들이마시며 힘겹게 서 있을 뿐, 더 이상의 싸움에 대한 의지를 보이진 않았다.

백현아와 강지훈도 마찬가지.

뒤늦게 골짜기에 합류한 카노코와 코에이, 코고는 병사들 사이를 뚫고 마르티르를 꺼낸 이신의 뒷모습을 보았다.

순백색의 검신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이신은 멍하니 시선을 던졌다.

그리곤 한숨을 내쉬더니 공간을 베어 내듯 검을 휘둘렀다.

후웅―

공허한 바람 소리와 잠깐의 정적.

그저 허공에 검을 휘두른 것뿐인데,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부스럭- 부스럭-

사람들의 시선이 땅으로 내려갔다.

피를 줄줄 흘리며 심장과 목을 관통당했던 김강천의 시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르티르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 신성력이 김강천에게로 스며들며 죽음을 야기한 그 상처들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으...."

힘겨운 신음이 김강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수많은 이들이 나지막한 감탄사를 흘렸다.

마르티르의 권능(權能).

그 말도 안 되는 이적이 지금 이 순간 실현된 것이다.

잠깐이었지만 길었을 잠에서 김강천이 깨어나며 그의 시선이 이신에게로 향하고.

"선…배님?"

지끈거리는 머리에 눈살을 찌푸린 그가 다시 고개를 내려 이신의 손에 들린 마르티르를 한 번 보더니 다시 자신의 몸을 보았다.

"아...."

이제야 깨달았다.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신의 도움으로 인해.

"고맙...."

그의 감사 인사는 중간에 끊어지고 말았다.

착.

이신이 할 일을 끝낸 것처럼 마르티르를 다시 검집에 꽂아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이 이신을 향해 의문의 눈빛을 던졌다.

"선배님?"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요?"

그들의 말을 들은 이신이 심란한 얼굴로 허공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죽음을 맞이한 지은주.

이신은 그녀의 죽음을 통찰할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살릴 생각이었다. 그녀가 죽은 이유쯤은 다 알고 있었으니.

하지만 지은주가 되살아나는 것을 거부하며 이신은 죽음의 통찰자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죽음을 야기한 과거들이 이신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탑을 오르며 그녀가 겪었던 죽음을 향한 과정들.

그러한 것들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애초에 지은주는 마음이 여리고 멘탈이 강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탑이라는 가혹한 세상 속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지은주는 자신이 동료들에게 민폐라는 사실에 자책하며, 다시 살아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김강천이 죽은 것도, 이렇게 고통받은 것도.

전부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멀리서나마 그들을 지켜보고 싶어 할 뿐. 삶에 미련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래, 이제는 마음 편하게 살아라.'

영혼이 되어 떠다니는 그녀를 보니, 오히려 지금이 더욱 마음이 홀가분해 보였다.

"은주는 살아나지 못해."

"네...?"

"은주는 탑이랑 맞지 않아. 이제는 놔줄 때가 된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보내 달래."

"...네?"

"보내 달라고 했다고. 그러니까...더 이상 붙잡지 마."

이신의 단호한 음성과 그 안에 담긴 미묘한 씁쓸함을 느낀 그들은 더 이상 은주에 대해 입을 열지 못했다.

백현아는 흐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고, 강지훈과 신하늘은 눈시울을 붉히며 울지 않기 위해 숨을 골랐다.

"은…주야...."

간신히 죽음에서 살아난 강천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무릎 위에서 눈을 감고 일어나지 않는 지은주를 보며 오열했다.

"내가…약해서...흐윽...."

다른 이들도 다 소중한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가장 오랜 시간 동거동락하고 그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던 사람이 바로 지은주였다.

천성이 이런 가혹한 세상과는 맞지 않아, 언제나 동료들에게 미안해하고 자신을 탓하기만 했던 지은주를 보면 늘 마음이 아팠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애써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그녀를 이 세상에 적응시키려고만 했다.

그녀의 속이 곪아가는 것도 모르고.

"미안해.... 흐으윽...정말로."

강천은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이신에게 은주를 살려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게 오히려 은주를 더 괴롭히는 일일까 봐, 또 그녀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봐 그러지 못했다.

"혀엉...."

결국 강지훈은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 냈다.

김강천이 오열하고 있는 것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흐어어어어, 왜 울어. 그만 울라…고."

백현아와 신하늘까지 가세하며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어 버린 전장.

그 모습을 보던 테티르와 아만 쪽 사람들 몇몇 또한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하아...."

깊게 한숨을 내쉰 이신은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저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도 울어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자, 어두워진 그의 시야 속에서 지난날이 스쳐 지나갔다.

가족 같던 동료의 죽음은 몇 번을 겪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일이다.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탑을 올랐다.

1층에서 도전자들을 성장시킨 이유 중 하나도 이것 때문이었다.

죽지 말라고.

'마르티르를 얻어도 달라지는 건 없구나.'

어쩌면 지금까지 버틴 것도 그간의 노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탑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죽는 건 비일비재하다.

이런 일에 너무 큰 감정을 쏟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일 뿐.

"죽음은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렇지."

릴리안의 위로에 이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인가.'

이신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에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탑을 오르며 자신이 점점 죽음에 둔감해져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코르미르…그놈 뭐죠? 그 능력…마기 맞죠? 그렇죠?"

신하늘의 눈물 젖은 목소리에 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르미르가 마족과 손을 잡은 건가?"

"망할 새끼들! 당장 코르미르 놈들을 그냥!"

"아니, 그렇다고 판단하기는 일러."

이신의 단언에 그들이 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럼 어떡해요! 코르미르에라도 복수하지 않으면 이 분이 삭여지질 않는데!"

"하지 말란 게 아니야. 다만 코르미르도 모르는 일일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원인 제공은 그 녀석뿐만이 아니잖아?"

그렇게 말한 이신이 무기를 버리고 포로가 되어 버린 테티르와 아만 쪽 사람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까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속박당한 그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선 테티르와 아만을 조진다. 아데르타를 수복하고 윈저를 먼저 구하자고. 또 동료를 잃을 생각은 아니겠지?"

이신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텡의 안정화가 먼저야. 복수는 그다음이다."

제105화

나르덴 평야전

테티르의 국왕 레이먼드는 시름에 잠겨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급격히 변한 전황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데르타를 함락했을 때까지만 해도 곧 메르텡이 무너지리라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었는데, 마경에 들어간 자격자들과 기사들의 소식은 모두 끊기고 갑자기 나타난 이신이라는 놈은 델벳을 함락시켰다.

김강천과 지은주로 메르텡의 핵심 전력을 꾀어내는 작전은 이신의 개입으로 완벽히 실패했고, 윌데스는 동맹을 배신하고 메르텡에게 넘어간 상태.

이신이라는 자격자 하나가 모든 걸 망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게르만."

"솔직히 말하면 진퇴양난의 상황입니다. 동쪽에는 메르텡이, 북쪽에는 윌데스가, 심지어 남쪽 바다 건너에는 란탄이 있습니다."

"그렇지."

"상황으로 보아 란탄도 메르텡에 넘어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윌데스까지 넘어갔으니.... 다른 국가의 지원이 없다면 메르텡과 같은 길을 겪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입니다."

"하아...아만과 코르미르에서는 말이 없는가?"

"예."

레이먼드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지리적으로 다른 국가가 테티르를 도와주기에는 힘들다.

게다가 붉은 지대의 성채는 단 한 명에게 함락되었다.

즉, 만약 이신이 맘만 먹는다면 테티르의 멸망은 시간문제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나르덴에서 슐트 성으로 병사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나르덴 평야에 있는 테티르의 병사들은 어찌 되었지?"

"고립된 상태입니다. 통신도 안 되는 상태라 적들에게 당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미치겠군."

"델벳이 무너진 상태라, 본국에서의 지원이 쉽지는 않습니다. 초록 지대에는 윌데스의 병사들이 대치 중이고 란탄 쪽에서도 윈저에 지원을 보낸 상태라, 어쩌면 슐트에서 이신을 상대해야 할 수 있습니다."

붉은 지대의 델벳 성채가 함락된 것 하나만으로 국가의 전력이 급감했다.

한 번 함락된 성채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최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데다, 한 번 무너지면 그간에 쌓았던 모든 게 사라지는 탓에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번에 슐트까지 함락당한다면 정말 테티르는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

'우리에게도 이신 같은 자격자 하나만 있었어도!'

쿵!

분노한 레이먼드가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하지만 그런다고 현실은 바뀌지 않는 법.

분노를 삭인 그가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추밀원에서는 어떤 의견이지?"

"그들은 저희도 메르텡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런가."

"예,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희가 그들에게 한 일들이 있으니까요."

"의회를 열긴 해야겠군."

"일정을 잡을까요?"

"그래, 메르텡과의 통신은 언제쯤 하는 거지?"

"이제 곧 연락이 올 겁니다. 그들과의 동맹도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텡과 통신이 연결되어 두 국가의 국왕이 서로를 마주하게 됐다.

스크린 위로 떠 오르는 메르텡의 국왕 아돌프의 얼굴.

거만하고 여유로운 그의 얼굴을 보자 레이먼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 안색이 많이 안 좋군, 레이먼드.

"누구 덕분에 좋을 수가 없지."

-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네.

싸늘한 그의 음성에는 그간의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레이먼드도 그들의 입장을 깨달았기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미안하군."

- 허, 예전에 그 거만한 레이먼드는 어디 갔지?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법이네."

- 굉장히 가벼워졌군.

"...용건이나 빨리 끝내지."

- 그래, 나도 별로 말 섞고 싶지 않으니. 음…테티르는 우리와 동맹을 맺고 싶을 테지?

"뭐?"

상대도 그 사실을 알 것이라 예상은 했으나, 이 타이밍에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한 레이먼드가 당황스러움을 쉽게 숨기지 못했다.

- 자, 이제부터 테티르가 우리와 동맹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논의하고자 우리 쪽에서 전령을 보낼 거다.

레이먼드의 대답조차 듣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아돌프.

그 모습에 레이먼드가 미간을 좁혔다.

"어이가 없군, 우리가 왜 너희들의 조건을 받아들여 가며 동맹을 해야 하지? 아무리 메르텡의 상황이 좋아졌다고 한들, 워프에게 밀리는 건 매한가지일 텐데?"

- 그건 워프의 입장이지, 테티르의 입장은 아니란 거...자네도 알지 않나? 어쭙잖은 말장난이 통할 거 같은가?

"...."

- 이번에 우리 쪽에 들어온 테티르의 포로가 몇인 줄 아나? 죽은 이들까지 합치면 훨씬 많아지겠지.

"...조건이 동맹을 하면 포로들을 풀어 준다는 건가?"

- 그건 테티르가 하는 것에 따라 달라지겠지.

쾅!

레이먼드가 아돌프의 말에 또다시 의자의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게 무슨 동맹이라고 지껄이는 거야!"

- 닥쳐라! 레이먼드! 누구는 화를 낼 줄 몰라서 참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나!

아돌프의 눈동자에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여차하면 폭발할 것처럼.

- 메르텡이 테티르와 동맹을 맺는다고 해서 친우가 되는 건 아니야.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거라고. 알겠나? 우린 아직도 지난날의 테티르의 만행을 잊지 않고 있으니까.

"...."

- 다시 말하지 않을 테니 잘 듣게. 뒈지기 싫으면 숙이고 들어와. 그럼 자비를 베풀어서 종전하고 동맹에 끼워 줄 테니.

아돌프의 거친 언사에도 레이먼드는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었다.

명분도, 힘도 현재의 테티르는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 * *

아직까지도 나르덴의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테티르와 아만의 군대.

테티르에서 김강천과 지은주를 이용해 나르덴에 박혀 있는 구원자들을 끌어내기로 한 상황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저 멀리 산맥을 뚫고 내려오는 군대를 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저게 뭐지?"

"어, 언데드입니다!"

"언데드? 갑자기 저기서 언데드가 왜 나와!"

수백이 넘어가는 언데드 군단의 등장에 테티르 쪽 군대는 물론, 아만의 군대까지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함정은? 메르텡의 구원자들은 어떻게 됐어!"

"소식이 없습니다! 나르덴에서도 움직임이 없어서 알 수가 없습니다!"

"아데르타의 증원은 어떻게 됐나!"

"도착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불길해, 언데드라니...설마?"

아만 쪽에서는 언데드 군단의 등장에도 이렇게 큰 동요는 없었다.

자신들의 병력에 비하면 한참이나 적은 수였으니.

하지만 테티르에선 달랐다.

"서, 설마?"

"이신? 저거 설마 이신의 군단인가?"

"젠장! 델벳을 함락했다고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곳을 뚫고 여기까지 왔다고?"

"함정도 보나 마나 실패했겠군."

그저 언데드들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패닉에 빠진 상태.

그 어느 곳보다 이신에게 당한 게 많았던 테티르는 이신의 이름만 들어도 사기가 저하됐다.

"전원! 대열을 정비하라! 아만과 합쳐서 아데르타로 후퇴한다!"

"이미 꽤 가까이까지 왔습니다. 후퇴하다가는 더 큰 참사가 날 수도 있습니다!"

"야 이 망할 새끼야! 그럼 이신이랑 전면으로 붙겠다는 소리야? 델벳을 홀로 함락시킨 괴물을? 거기다 이신이 나타나면 나르덴에서 가만히 있을 거 같아? 바로 튀어나와서 우리 다 싸잡혀서 죽는다고! 말 내뱉기 전에 대가리에 거치고 얘기 안 해?"

"죄송합니다!"

테티르의 군단에 섞여 대기하던 프랑스의 도전자는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언데드들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영화 속에서나 보던 좀비 떼들이 달려오는 느낌.

죽음을 도외시하고 오롯이 눈에 보이는 것만을 죽이기 위한 살인 인형.

상대는 나를 죽일 수 있지만 나는 상대를 죽일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이 언데드를 상대하는 인간들에게 큰 공포감을 안겨 주었다.

'제기랄.'

이를 악문 그가 마력을 끌어 올려, 아데르타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땅을 박찼다.

쿠구구구궁!!

그러자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가 흔들렸다.

도망가려는 그들의 앞에 땅이 갈라지더니 돌덩이들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뭐야?"

"골렘?"

수 미터에 달하는 크기의 스톤 골렘.

테티르 쪽 병사들과 같이 있던 한 여성 자격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골렘 소환."

그리고 그녀의 마력이 땅으로 스며들며 똑같이 골렘을 만들어 냈다.

쿠구구구구구.

"이 골렘은 제가 맡을게요! 빨리 움직여요!"

쾅! 쾅!

양 골렘이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힘 대결을 펼치는 사이, 테티르와 아만의 군대는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동작 그만."

그리고 그들의 귓가에 스며드는 차가운 음성.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언제 다가왔는지, 그 목소리의 주인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보랏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는 그가 자신의 노란 문양을 드러냈다.

"노란 문양의 자격자...."

"역시, 이신인가."

아무리 상대가 이신이라도 이쪽엔 수천의 군세가 있다.

병사들을 제외하고 초록 문양급 이상의 전력만 백 가까이 된다.

'나르덴에서 눈치채고 나오기 전에 이신을 잡으면....'

'이건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막다른 길에 몰렸다고 생각하자, 그들에게 없어졌던 용기가 갑자기 샘솟았다.

그들의 눈빛이 변하고 그 안에 희미한 욕망이 담겼다.

"혼자서 너무 자만하는군."

아직 언데드의 군단이 이쪽까지 다가오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

그 안에 이신을 처리하면 저 언데드들도 사라질 터.

아만의 병력을 이끌던 기사가 검을 빼 들었다.

"죽여라!"

"이신의 목을 베는 자는 국왕님께 내 직접 포상을 건의할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

가라앉았던 기세가 한순간에 뒤집혔다.

아무리 적이 강하다 하더라도 상대는 한 명.

홀로 수천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신만 잡으면 이 전쟁은 사실상 승리나 다름없다!"

"이신을 잡는 사람은 전쟁을 끝낸 영웅이 될 것이다!"

다시 한번 더 치솟는 사기.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데 능숙한 지휘관의 모습을 보며 이신은 혀를 찼다.

"네크로맨서에 대해 너무 모르는걸."

딱!

그가 중지와 엄지를 맞닿아 튕기자, 허공에서 검은 포탈이 생겨났다.

"저, 저게… 뭐야?"

직접 마주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괴리감.

그들의 온몸을 옥죄여 오는 죽은 자들의 기운이 포탈을 타고 흘러나왔다.

으어어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아...!"

"미, 미친!"

"괴물들이 떨어진다!"

쿵. 쿠구구궁.

그들의 위로 떨어지는 수많은 스켈레톤들.

"크아아아아악!"

"저리 가! 떨어지라고!"

"젠장! 놈들의 뼈를 부숴! 머리통을 으깨 버리라고!"

죽음을 도외시하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산 자들을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만을 가진 존재들.

이신의 지배력에서 벗어난 그 존재들은 그저 피아 식별 없이 닥치는 대로 눈앞의 상대를 공격했다.

처음 겪어 보는 전투 양상에 당황한 병사들이 허둥지둥 대며 전열을 흩뜨리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퍼걱! 파각!

자신에게 달려드는 스켈레톤을 검으로 쳐내고 머리통을 밟아 부숴 버린 지휘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크로맨서를 상대해 본 적은 있으나 이런 식으로 스켈레톤들을 사용한 술사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신 차려라! 지금 나오는 스켈레톤들은 정신만 차리면 별거 없는 놈들이다! 진영을 구축하고 다가오는 놈들만 철저하게 부수면 된다! 접근을 허용하지 마라!"

지휘관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무너져 가는 진영을 도와 그 혼란을 잠재우기 시작했다.

'호오....'

그 모습을 보며 이신은 턱을 매만졌다.

상황 판단, 병력 통제, 무력까지.

상당히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탐나는데?'

맘 같아서는 그냥 죽이고 휘하 권속으로 두고 싶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지금의 싸움은 그저 기반을 다지기 위함일 뿐이니.

진짜 적은 따로 있다.

"뭐 이건 시간 끄는 용도일 뿐이니까."

이신의 시선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그들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르덴의 안에서 이 전투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

'이쯤 해 줬으면 그만 눈치 보고 나오겠지.'

이신의 생각을 듣기라도 한 듯.

철 사슬이 빠르게 풀리며 도개교가 내려가고 성문이 활짝 열렸다.

"이신 님이 왔다!"

"지금이다! 저 망할 것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 줄 때가 왔다!"

"나가라! 이신 님을 도와 싸워라! 그리고 승리하리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과 함께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나타나는 나르덴의 병사들.

그동안 성채 안에서 숨죽이며 적들을 피해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힘들게 버텨 왔던가.

지금을 위해 그간의 답답함을 참아 왔었던 것처럼, 활화산이 폭발하듯 분노를 토해 내며 달려 나간다.

그 함성을 듣자, 두 국가의 병사들은 패닉에 빠졌다.

그들의 당황스러움은 그 전열의 뒤틀림만 보아도 확연히 느껴질 정도.

"침착해라! 전열을 유지해! 이신을 뚫고...썩을!"

그들을 이끌던 지휘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앞으로는 이신의 언데드들이, 뒤로는 메르텡의 병사들이 몰려오는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었다.

제106화

윈저 수성전

한편 윈저는 갑작스럽게 적들의 공세가 거세짐에 따라 대책을 세우기에 급급했다.

무슨 타임 어택이라도 하듯 적군들이 공격의 속도를 올리기 시작한 탓에 하루하루가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

후안 바이런은 핵심 인물들을 불러 모아 지금 상황에 대한 대책 회의를 열었다.

"우선 현재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윈저의 행정관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이신이라는 자격자께서 오신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메르텡의 자격자분들이 그렇게나 말씀을 많이 하셨었죠. 그분이 오시면 판도가 바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한 행정관은 그에 대한 자료를 보며 홀로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신 님이 얼마 전 테티르의 델벳을 홀로 함락시켰다고 합니다."

그 말에 자리에 있던 여럿이 화들짝 놀라며 헛웃음을 지었다.

후안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들어도 놀라운지 고개를 내저었고 박주혁과 백현을 포함한 도전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그 마경을 뚫고 델벳에 도착했다는 건가? 그 정도 시간이면 전혀 헤매지 않고 직행한 수준인데?"

"예, 란탄의 자격자들 중에 탐험가라는 클래스를 가진 자격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자도 그 특성을 이용해 바다 위의 마경을 뚫고 메르텡의 땅에 발을 디뎠죠."

"그럼 그 자격자가 이신 님을 도왔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신 님이 잡아낸 란탄의 자격자 둘과 감옥에 갇혀 있던 란탄의 인유우 코고까지 마경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건 알고 있는 거 아닌가."

"예, 그 이유가 란탄을 메르텡의 동맹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행정관의 터무니없는 말에 사람들의 고개가 갸웃했다.

"그들을 데리고 가서 설득이라도 하려고 했다는 건가?"

"예, 그리고 란탄이 동맹에 합류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고 합니다."

"뭐?"

"도대체 뭘 보고? 그 란탄의 자격자들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들인가?"

"그것까진 아직 정확히 듣지 못했습니다."

후안은 모든 사항을 간략하게 알고 있는 상태였지만 들을 때마다 새로웠다.

올라오자마자 한 사람이 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게 가능한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업적이었으니.

이미 이신에 대해 알고 있는 도전자들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마경에 들어가기 전에, 윌데스의 중요 전력인 특수팀을 잡아냈고 그걸 빌미로 윌데스와 협상해서 그들의 협약을 받아내며 종국에는 동맹까지 체결한 상태입니다."

"듣고 보니 이해가 가는군. 테티르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기 시작했으니, 메르텡의 가능성을 보고 넘어온 건가?"

"그것도 있지만 아마 빌론과 멜데른의 독식에 불만이 쌓인 것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불만이 있어도 거역할 수 없는 권력 구도에서 빠져나올 길이 생겼으니 동맹에 들어오는 도박 수를 던진 것이겠죠."

"하하하! 이 모든 게 이신이라는 그 자격자 때문 아니겠나? 다음으로 넘어가지."

하나하나 들을 때마다 흥분으로 과열되는 회의실을 후안이 진정시키며 회의를 진행시켰다.

"예, 델벳을 함락시킨 이신 님은 김강천과 지은주 자격자의 정보를 수소문해서 노란 지대를 타고 따라갔습니다. 그 후, 그 둘을 이용한 테티르의 함정을 격파하고 그 함정에 빠졌던 구원자분들을 구해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김강천 님은 구했지만, 지은주 님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뭐?"

"은주…은주가 죽었다고요?"

이제서야 그 소식을 들은 박주혁과 백현, 박혜원, 황강웅은 당황한 표정을 하고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도 이 정도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은 아니었다.

근데 막상 그녀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뇌가 기능을 멈춘 것처럼 멍해졌다.

"은주…은주가 왜! 선배님이 갔다면서요! 근데 왜 죽은 거죠? 선배님은 마르티르도 있을 텐데 왜!"

현실을 부정하며 박혜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행정관을 향해 소리쳤다.

"혜원아, 그만해라."

황강웅이 그녀를 붙잡으며 말렸지만,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쉴 뿐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이지 못했다.

"혜원이 말처럼 선배님…아니, 이신 님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어요. 근데 왜 은주가 살아나지 못한 거죠?"

"설마…적들이 은주의 시체를 소각한 거예요? 아니면 시체를 못 찾은 건가요?"

"시체를 못 찾았다면 죽었다고 확신하지도 않았겠지."

박주혁의 말에 박혜원이 입술을 질끈 씹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그저 혹시나 하는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싶어 얘기한 것이었다.

네 사람을 포함한 나머지 언더모스트 도전자들의 얼굴도 급격히 굳어졌다.

'진작에 말렸어야 했는데.'

박주혁은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지은주가 언젠가 죽음을 겪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란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몰아붙이며 탑을 오르는 걸 포기하거나 성격을 바꾸라고 말을 했던 거였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죽었고 자신의 다그침은 의미가 없어졌다.

자신의 안일함에 박주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놈에게 반드시 복수하리라고 다짐했다.

"지은주 님이 소생을 포기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어지는 행정관의 말에 그들이 또다시 벙찐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살아나는 것을 포기하다니?

하지만 그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바꾸었다.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은주를 죽인 놈은 누군지 아십니까?"

"코르미르의 자격자인 마이클 테일러라고 합니다."

"코르미르의 마이클 테일러...."

"그 새끼란 말이지."

"코르미르는 안 그래도 맘에 안 들던 놈들인데 잘됐네."

그들이 이를 악물며 머릿속에 코르미르라는 네 글자와 마이클 테일러라는 이름을 가슴 깊숙이 새겼다.

"코르미르의 뜻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그자가 마지막에 도망가기 전에 마기를 썼다고 했습니다."

"마기요?"

"설마 마인이었나?"

"이런 마족 개 같은 새끼들이!"

"그만. 그만하게, 지금은 윈저에 대책 회의를 위한 시간이니."

후안이 흥분한 그들을 제지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이어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아무튼, 그 상황 이후 나르덴을 포위하고 있던 아만과 테티르의 병사들은 모두 잡혀 호송된 상태입니다. 곧 아데르타를 점령하고 윈저로 지원을 올 것이며 테티르가 저희 동맹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메르텡의 상황입니다."

"좋아, 다들 들어서 알겠지만 마음이 급해진 것은 저쪽 연합이다. 그렇기에 적들의 공세가 갑자기 거세진 거지. 우린 버티기만 하면 이기는 싸움이야."

"하지만 버티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회의에 한 자리를 차지한 마법관이 심각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윈저가 활성화되며 메르텡에서 많은 공적치를 몰아넣었지만, 아직까지도 적군에 비해 한참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저희의 리프렉션 실드(Refraction shield)의 성능으로는 오래 버티기 힘듭니다."

"흐음...."

후안은 입술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계속되는 전투에 소모되는 공적치는 많고 수급할 수 있는 공적치는 적다.

이 상황에서 시스템을 이용해 방어막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막막할 뿐이었다.

"적들이 대규모 합격 마법진을 준비 중입니다. 공격을 굴절시켜 방어하는 리프렉션 실드라도 압도적인 화력으로 밀어붙이면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마법사가 많다 하더라도 오합지졸들로는 한계가 있지 않나?"

"적진에 6위계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있는 걸로 추정됩니다. 그자만 제거한다면 마법진의 가동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급하긴 했나 보군, 6위계 마법을 쓸 수 있을 정도면 최소 검은 문양 급의 실력자 아닌가?"

"맞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안과 간부들의 시선이 박주혁 외 세 사람에게로 향했다.

메르텡의 구원자이자, 가장 강력한 전력인 그들이 아니면 이 상황을 타개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희가 암살하겠습니다."

"자네들이라면 가능할 거라 생각되네."

박주혁은 박혜원과 백현을 보며 시선을 마주쳤다.

"저희 셋이 하겠습니다. 황 사장님은 성벽의 강화에 더 힘써 주시죠."

"알겠네."

"좋아, 지금 빌론과 스탄, 아만과 코르미르에서 병력을 이곳으로 밀어 넣고 있다. 우리는 이대로 어떻게 해서든 버틴다. 곧 최고의 지원군이 올 테니."

후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

* * *

밤이 되자, 박주혁과 백현, 박혜원은 몰래 성채를 빠져나와 적들을 살폈다.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박혜원.

그녀의 바람 마법이 있다면 충분히 적진의 마법사를 저격할 수 있다.

"우선 적들에게 들키지 않게 저격 포인트를 잡아야 돼."

"마법진이 가동되려면 적어도 몇 시간은 더 필요할 테니, 그 전에 자리 잡자."

세 사람은 수 킬로미터 거리에 떨어진 산속으로 들어갔다.

육안으로는 사람이 개미처럼 보일 정도의 거리.

적들의 병력과 세 사람 사이에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저격 지점을 잡을 곳이 매우 한정적이었다.

몇 곳의 포인트를 발견한 그들은 그중 하나에 자리한 다음, 주변을 살피며 안전하다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저격을 준비했다.

박혜원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나오는 커다란 마법공학 대물 저격 소총.

철컥!

아공간 주머니가 있어, 굳이 분해하고 조립할 필요도 없다.

그 자리에서 저격 소총을 꺼내 자세를 잡은 그녀가 자신의 마력을 집어넣으며 조준경을 보았다.

마력을 불어넣자, 급속도로 시야가 확대되었다.

한순간에 적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당겨진 줌으로 그녀는 천천히 마법사를 찾아 조준경을 움직였다.

수만에 달하는 군세.

그중에서 마법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곧 해가 뜬다."

어느새 저물었던 해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하며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적들의 공세가 다시 시작될 시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적들 사이로 로브를 뒤집어쓴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마법사들이야."

"뭐? 찾았어?"

"조용히 좀 해 봐! 아직 그 마법사는 못 찾았으니까."

백현의 호들갑에 박혜원이 짜증을 내며 다시 마법사를 찾는 데 집중했다.

그저 적을 찾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집중력과 심력이 소모된다.

계속해서 마력을 운용하며 눈알이 빠져라 눈을 굴려야 하기 때문에.

"음...."

망원경을 들고 있던 두 사람이 박혜원을 도와 적들의 진영을 살폈다.

마법사로 추정되는 이들은 여럿 있었지만, 그 6위계 마법을 쓰는 마법사는 찾을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마법진을 가동하는 순간을 노릴 수밖에 없겠어."

"맞아요. 마법진을 가동하는 곳은 찾았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죠."

잠시 후, 바닥에 새겨진 커다란 마법진의 주변으로 수십의 마법사들이 모여들며 마력을 쏟아붓고 한 마법사가 그 마법진의 가운데에 올라섰다.

마법진을 중심으로 그 마법 전체를 통제하는 듯한 제스처.

눈으로 보이는 마력의 움직임이 저 마법사의 손길 하나하나에 맞춰 흐르고 있었다.

'찾았다!'

세 사람 모두 그자가 자신들이 찾던 마법사라 확신했다.

철컥! 착!

바닥에 딱 달라붙어 박혜원에게 견착 된 저격 소총이 그 마법사를 향해 정조준되고 그녀의 마력이 소총으로 부드럽게 흘러 들어갔다.

'한 번에 끝내야 된다.'

아무리 자격자라 하더라도 상대는 마법사, 체력이 높지는 않을 것이다.

급소를 정확하게 가격한다면 즉사시킬 수 있다.

'잘 가라.'

저격 소총 자체에 설정된 탄환의 강화에 곁들여 바람 속성을 더하고 회전력과 관통력을 극대화시킨다.

타앙―!

그녀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거센 반동과 함께 탄환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초음속에 달하는 속도.

수 킬로미터 거리에 달했지만, 목표물에 도달하는 데에는 고작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콰드득!

콰아아아앙―!

마법사의 코앞에서 생성된 실드가 탄환을 막아 보지만 허무하게 뚫리며 거센 폭음을 자아냈다.

탄환이 목표물의 머리를 정확히 관통하며 땅에 박히고 이어서 폭발을 만들어 냈다.

적을 확실히 사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탄환.

가동되던 마법진이 깨지며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수십의 마법사들이 휘청였다.

"좋아!"

"이제...."

저격이 성공한 것을 보자마자 몸을 일으킨 박혜원은 갑자기 땅의 흔들림에 표정을 굳혔다.

"뭐야?"

산의 절반을 둘러싸는 거대한 마력의 파동.

그것을 느낀 박주혁이 다급히 다시 망원경을 들어 적진을 보았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적들.

'당했다.'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제107화

박주혁은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에 가장 높이 솟은 나무 위로 올라갔다.

광범위하게 둘러쳐진 결계가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범위를 보자, 그의 눈가가 씰룩였다.

"적들의 함정이야."

나무에서 내려온 그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결계의 범위가 저격 포인트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어."

"이곳에서 저격할 것을 예상했다는 말이에요?"

"말도 안 돼."

적들의 진영이 있는 곳과 저격 지점은 수 킬로미터 달하는 거리다.

그 사이로 저격이 가능한 포인트는 더 있었고 방향을 바꾼다면 저격 포인트는 훨씬 많아진다.

그 모든 장소 중에서 이곳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건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적들이 이곳에 곧 도달할 것이란 거지."

"우선은 빨리 움직이자."

셋은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결계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쉿, 적이다."

산의 중간마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빌론의 병사들.

이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던 녀석들이 분명했다.

"점점 마주치는 횟수가 늘어나는데?"

"잠깐만요."

박혜원이 제자리에 섰다.

그런 그녀를 따라 나머지 둘도 멈춰 섰다.

"왜?"

"만약 오빠 말대로 적들이 저격을 예상하고 결계를 쳤다면, 이대로 결계에 도달한다 해도 나갈 수 있을까요? 오히려 결계를 건드렸다가 적들에게 포위될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 결계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동력원을 찾아내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어."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결계에 다가갈수록 마력의 흐름이 조금씩 파악되고 있어요."

이신에게 마력의 운용법을 직접 배운 박혜원이라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찾을 수 있겠어?"

"조금만 더 결계에 가까이 가면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시 멀어지면 느끼지 못할 테지만, 그때는 대충 위치를 파악하고 움직이는 거니까요. 결계를 발생시키는 동력 장치가 근처에 있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의견에 백현이 먼저 동의했다.

"좋네. 그리고 적들도 당연히 결계가 있는 곳으로 가리라 생각할 테니까 더 움직이기도 편할 것 같고."

"좋아. 그럼 그렇게 가자."

박주혁의 허가가 떨어지며 셋은 결계를 발생시키는 원천을 찾아 움직였다.

'아직 널널하다.'

아직까지도 적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적들이 이 지점을 정확히 예측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아직 골든 타임이 지나지 않았다는 뜻.

박주혁은 동력 장치의 근처에 적들이 별로 없을 것을 확신했다.

"잠깐, 느껴져요."

"뭐? 어디야?"

"이쪽…이쪽이에요."

박혜원을 따라 움직이던 그들은 숲속에 숨어 있는 동력 장치를 발견했다.

풀들로 뒤덮여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동력 장치가 분명했다.

그 가운데 강렬한 빛을 발하며 동력 장치에 마나를 공급하고 있는 마나 스톤.

그것을 발견한 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바로 부순다.'

동력 장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숨어 있던 병사가 몸을 드러냈지만, 박주혁의 속도는 따라올 수 없었다.

'역시, 적들은 저격 위치까지는 정확히 예상하지 못한 게 분명해.'

동력 장치의 근처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며 주혁은 확신했다.

저격 포인트 여러 곳에 동력 장치를 박아놓은 게 분명했다.

'우리가 이겼다.'

그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동력장치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콰드드드득―

마나 스톤과 함께 동력 장치가 갈라지며 마나가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나 스톤을 부수는 것이 트리거였는지, 불안정하게 바뀐 마나의 흐름이 일그러지더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려 했다.

'이런!'

동력 장치의 마나 흐름이 급격히 뒤바뀌는 것을 눈치챈 박주혁은 다급히 검을 회수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콰아아아아아!!

불길이 뿜어지며 순식간에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바로 코앞에서 폭발을 마주한 박주혁은 이를 악물며 [변혁의 힘]을 사용했다.

[변혁의 힘을 사용합니다.]

비디오를 거꾸로 재생한 것처럼 주변을 가득 메웠던 화마가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결과의 변혁에 대한 변혁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다시 급속도로 사그라들던 화마가 일순간 멈췄다.

박주혁은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얼굴을 와락 구겼다.

[업적을 소모해서 이 세계의 변혁 에너지를 끌어올 수 있습니다.]

[업적을 소모하시겠습니까?]

일전에 한 번 겪었던 상황이다.

변혁의 힘은 이신이 과거에 말했던 말처럼 인과를 거스를 정도의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보이는 힘이다.

그것을 행하기 위한 변혁 에너지를 끌어온다는 것은 웬만한 업적으로는 턱도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박주혁은 망설임 없이 업적을 소모했다.

[업적을 소모합니다.]

[변혁 에너지 100을 끌어옵니다.]

[변혁의 힘을 사용합니다.]

업적을 소모하며 변혁의 힘을 사용하자, 폭발이 사라지며 동력 장치가 다시 정상 가동되기 시작했다.

"허억...허억...."

거친 숨을 몰아 내쉬는 박주혁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몸속 가득했던 존재감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

'도대체 누가....'

직접 겪으니 알 수 있었다.

이 결계는 애초에 자신들을 끌어오기 위한 함정이었다는 것을.

결계의 방어력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모든 에너지를 이 폭발에 쏟아 내기 위해 마련된 장치였다.

이건 상대방이 결계로 가지 않고 동력 장치를 찾아올 것이라 확신한 누군가의 전략이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전략에 당한 것이고.

"어…어억!"

방금 그 폭발을 보았던 병사가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리에 얼이 빠져있던 백현이 곧장 병사의 목을 베고 주변으로 마력을 펼쳐 숨어 있는 병사들을 잡아냈다.

"오빠! 괜찮아요?"

"괜찮아."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주혁을 혜원이 부축했다.

억지로 세계의 변혁 에너지를 끌어 쓴 탓에 주혁은 탈진해 버렸고,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어떡하지?"

"형, 움직일 수 있겠어요?"

"어,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놈들이 들이닥칠 거야."

박주혁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자신의 힘이 빠지고 전력에서 이탈하게 된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적진에 있을 의문의 전략가였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한 모든 행동이 그자의 손 위에 놀아난 듯한 느낌이었다.

상대가 어떻게 대응한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박주혁은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우선...퇴로로 쓸 수 있는 경로는 세 곳이야."

박주혁은 세 경로를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세 곳 중 어디를 가야 적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아니면 이 경로 외의 다른 곳으로 움직여 볼까?

적들은 지금 어디쯤 왔을까?

연달아 적에게 자신의 전략이 예측 당했다고 생각하니, 모든 생각이 의문의 상대에게 간파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무엇을 해도 적에게 통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에 판단력이 자꾸만 흐려졌다.

"여기로 가자."

어쩔 수 없이 그 세 곳 중, 가장 적들이 예상하지 못할 것 같은 능선이 있는 곳을 탈출 경로로 정했다.

불안감을 애써 지우고 셋은 능선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능선은 적들에게 들키기 쉽다. 위기에 몰린 이들은 큰 리스크를 지지 않는 법이니, 예상하기 힘들 거다.'

박주혁은 이번에야말로 간파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리스크를 감수하고 능선을 골랐다.

사방이 훤히 뚫린 이쪽 능선은 적들에게 쉽게 들키기 쉽지만, 상대방이 미리 함정을 파고 준비하고 있지 않다면 빠져나갈 방법은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지금부터는 속도를 높여야 해. 무조건 적에게 들킬 테니."

능선의 시작 지점에 도착한 그들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움직이려 할 때, 낯선 이의 목소리가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미 들켰으니까요. 하하하."

장기판에서 장군을 외치며 여유롭게 게임의 끝을 선언하듯, 남자는 그들의 앞에 천천히 걸어 나와 이야기했다.

"반갑습니다. 처음 뵙네요. 여러분들은 꼭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깃발을 촤악- 펼쳐 얼굴의 절반을 가리며 남자가 말했다.

그런 남자를 보며 셋은 표정을 굳힐 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삽시간에 피어오르는 마력의 파동.

주변에 숨죽이고 있던 이들이 일시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했다.'

여기까지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박주혁은 이를 악물며 앞을 가로막은 남자를 보았다.

"저와 대화하기 싫으신가 보군요. 이런, 전 여러분과 대화할 날만을 기다렸는데 말이죠."

부채에 가려져 얼굴의 눈만 보였지만, 그 늘어진 눈꼬리를 보고 있으니 세 사람은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넌 누구지?"

처음으로 박주혁이 내뱉은 질문.

그 말을 들은 남자는 목소리를 들어 정말로 기쁜 듯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 제 소개를 하지 않아서 대답하지 않으셨던 거군요? 제 이름은 제갈윤입니다. 탑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무명인 도전자이니 참 쑥스럽습니다."

그의 말처럼 세 사람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이...이 모든 일을 주도한 건가요?"

지금까지 일련의 모든 일이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졌다니.

박혜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는 물었다.

"네, 맞습니다. 마법진을 준비하는 척하며 여러분을 꾀어낸 것도, 이 저격 포인트에 결계를 미리 깔아 놓은 것도, 그리고 결계 동력 장치에 함정을 파 놓은 것도...전부 제 머릿속에서 나왔습니다. 하하하."

그의 웃음에 담긴 미묘한 느낌.

흔히 천재들, 그중에서도 진짜 천재라 부르는 이들이 가지는 표정이라는 것을 박주혁은 단번에 알아챘다.

평범한 이들과 다른 세상을 살아가며 자신들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그 표정.

그런 이를 과거에 두 번이나 마주한 적이 있던 박주혁은 제갈윤에게서도 그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박주혁은 입술을 앙다물고 이를 아드득 갈았다.

"...우리가 이곳으로 올 것을 어떻게 안 거지?"

"그거야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생각보다 너무 예상대로라 조금 실망했습니다. 그래도 박주혁 씨는 조금 더 기대했는데 말입니다. 하하하."

"대답이나 해."

"그간 당신들의 행보를 보면 쉬운 일이죠. 윈저에서 저희의 마법진을 보고 나올 전력은 딱 당신들 셋이 가장 적합합니다. 저격이 가능한 박혜원 씨는 당연히 올 것이고,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 전투력이 가장 강한 박주혁 씨와 백현 씨가 따라붙을 확률이 높습니다. 백현 씨가 무력은 출중하지만 상황 판단 능력이 저 둘에 비하면 떨어지니 둘이 온다면 박주혁 씨와 박혜원 씨가 올 것이고, 셋이 온다면 거기서 백현 씨까지 추가하여 오겠지요. 황강웅 씨는 수성에 필요하니 제외, 그 외 나머지는 전력 차가 너무 크죠. 암살 작전에 많은 인원은 오히려 독입니다."

자신의 말을 이해했냐는 듯, 제갈윤이 그들에게 눈빛을 보냈다.

마치 수업을 듣는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듯한 말투에 백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한 번 더 웃음을 흘린 제갈윤이 말을 이어 갔다.

"시간은 윈저의 편이고 저희는 빠르게 윈저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걸 양쪽 모두 알고 있죠. 급한 건 빌론 쪽이라 생각하면서도 불리한 건 윈저였습니다. 윈저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고, 그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당연히 저격뿐이겠죠."

박주혁은 그의 말을 들으며 최대한 지친 몸을 회복했다.

제갈윤은 천천히 설명을 이어 갔다.

"저격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은 총 23곳. 그중 마음이 급한 당신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북쪽 지역을 제외한 서쪽과 동쪽. 윈저의 성채는 서쪽에 절벽을 끼고 있고 마경이 여러 곳에 포진하고 있어 저격 포인트를 잡기 힘들 거라는 심리적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확률은 거의 9:1 정도로 동쪽의 포인트를 잡을 수밖에 없겠죠. 여기서 도박도 가능합니다만, 이 중요한 순간에 제법 안전한 길을 두고 큰 리스크를 감수할 분들은 아니시죠. 여러분들은."

그의 말을 들을수록 세 사람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그럼 남은 지점 중, 저격이 용이한 산은 8곳이 남습니다. 그 안에서도 저격 포인트는 수십 곳이 되겠죠. 그중 박혜원의 저격 범위로 추정되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지점이 이 산이었습니다. 아! 이 중에서 정확히 어디를 갈지 제가 예측한 건 아니었어요. 확률적으로 높은 곳은 여기였지만 확신할 순 없으니 그 지점 전부에 같은 결계를 깔아 두었죠."

이건 박주혁의 예상과 같았다.

중국은 그만한 자금력이 받쳐 주었으니.

"동력 장치에 마력 감지 장치를 설치해 두고 저격이 발생하면 결계가 발동되도록 해 두었습니다. 여기서 생각했습니다. 박주혁 씨와 박혜원 씨라면 결계로 갈까? 아님 동력 장치를 찾을까? 두 사람은 여태 모든 작전에서 일차원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어요. 항상 의도를 한 번 꼬아서 생각하고 움직였죠. 그래서 병사들을 소수만 배치하고 저격 후에 병사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함정임을 인지시키고 동력 장치를 찾게끔 확률을 높였습니다.

폭발이 그대로 이뤄지면 좋은 거고, 아니라면 박주혁 씨의 그 고유능력을 사용했겠죠. 그럼 거기서 당신들이 살아날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워집니다.

여기서 문제! 당신들은 지난 윈저 탈환 작전에서 어떻게 행동했죠?"

마치 아이들을 교육시키듯, 질문을 던지는 남자의 모습에 그들이 표정을 굳혔다.

"아, 모르시나 보군요. 정답은 위험을 무릅쓰고 최고의 효과성을 찾았다! 입니다. 당신들은 위기에 직면할수록 효율성보단 효과성을 찾더군요? 그래서 능선으로 오겠다 싶었습니다. 다른 곳에 비해 리스크는 크지만 성공하면 확실히 탈출할 수 있는 곳이 이 능선이었으니. 뭐, 그 외에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도 있지만 생략하겠습니다. 여기가 토론의 장도 아니고 말이죠. 하하하."

부채를 착, 접은 제갈윤이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그들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아! 뭘 하든 이미 다 예상은 되지만요."

제108화

박주혁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기회를 엿보았다.

제갈윤이라는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리 주혁이 탈진 상태라 하더라도 그쪽에는 박혜원과 백현이 있다.

제갈윤이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그 둘이 기습을 해도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것이겠지.'

주혁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제길...느껴지는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아.'

'내가 멀쩡했어도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눈앞의 저 남자는 그런 상황에 대한 대비도 이미 끝마쳤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

거미줄에 걸린 벌레와 같은 무력함.

제갈윤의 웃음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잠깐만요, 마법사의 저격을 예상했다는 건...그 마법사는 가짜란 건가요?"

박혜원의 물음에 제갈윤이 재밌다는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가짜는 아니고 음...반은 가짜라고 해 두죠. 윈저의 보호막을 부술 만큼 뛰어난 마법사는 아니나, 당신들을 속일 정도의 실력은 되는...음, 보라 문양 정도의 실력자입니다. 검은 문양의 마법사는 따로 있죠."

제갈윤의 말에 박혜원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윈저도 지금...."

"예, 맞습니다. 이제 진짜 검은 문양의 마법사가 윈저를 때리고 있겠죠? 당신들도 없으니 이제 윈저를 지키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제갈윤은 처음부터 윈저와 메르텡의 구원자들. 전부를 노리고 작전을 실행한 것이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저항은 포기하시죠. 괜히 힘 빼고 싶지는 않군요."

"개소리하지 마."

백현은 벼락처럼 빠르게 검을 빼 들고 제갈윤을 향해 뛰었다.

그는 언뜻 보기에 아무런 방비도 되어 있지 않아 보였다.

'여기서 이 녀석만 잡으면...!'

[풍추(風錐)]

검면으로 모여드는 바람이 빠르게 회전하며 그의 검 끝으로 향했다.

실드를 펼치더라도 단번에 뚫고 적을 일격에 죽이기 위한 공격.

"어림없습니다."

후우웅―

제갈윤의 손에 든 부채가 한 번 휘둘러지자, 급격히 휘몰아치는 바람이 백현을 향해 날아간다.

"아니?"

자신이 일으켰던 바람이 휩쓸려 사라질 정도로 강력한 바람이었다.

당황한 백현이 뻗었던 검을 회수하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괜찮아?"

"어. 근데 저 부채는 뭐지? 어떻게 내 바람을...?"

백현은 처음 겪는 상황에 혼란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일으킨 바람이 상대방이 일으킨 바람에 복종하여 힘을 풀어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고작 한 번 부채질을 한 것만으로 현이 오빠의 기술을 막았어...."

"자신감의 원천이 저거였나?"

백현은 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한번 쇄도했다.

이번엔 검에 뇌기를 담아.

"제법입니다."

제갈윤은 자신의 부채를 빠르게 접으며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쿠구궁!

그 방향에 따라 그대로 떨어지는 벼락.

화들짝 놀란 백현은 검으로 급히 벼락을 막으려 했지만, 흘러들어 오는 뇌전을 전부 밀어내지 못하고 몸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낙뢰?"

이신이 주로 사용하는 마법.

그것을 직접 마주한 적 있었던 백현은 방금 그 낙뢰가 그의 마법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하하하, 낙뢰를 이신만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다시 부채를 착- 펼치며 입을 가린 그가 부채 뒤에서 웃음을 흘렸다.

"어떻습니까? 제 낙뢰가."

* * *

윈저에서는 합격 마법진을 가동하던 핵심 마법사가 저격에 쓰러진 것을 보며 기뻐했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적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새로운 마법사가 저격으로 죽은 마법사의 자리를 차지하는 모습에 후안과 간부들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검은 문양의 마법사가 둘이었던 건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검은 문양을 가진 마법사를 둘이나 이쪽으로 뺐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 아까 죽은 마법사는 가짜란 말인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적들은 저격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조금의 동요도 없이 움직였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검은 문양 급의 마법사를 저격에 노출시키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윈저의 방어막을 책임지는 수석 마법관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렇다는 건...."

쿵! 쿵! 쿵!

갑자기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

문을 열고 들어온 병사가 굳어진 얼굴로 그들에게 비보를 알렸다.

"구원자분들이 가신 산맥에 거대한 에너지 기류가 감지됐다고 합니다. 폭발도 잠깐 일어났다가 사라진 것 같다는 이상 현상도 있었습니다.

"뭐?"

박주혁의 고유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 두 사람은 그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곧바로 눈치챘다.

"제기랄! 바로 병력을 풀어서-."

"안 됩니다! 지금 방어막을 풀었다가는 저 마법에 성채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럼 구원자들을 저렇게 놔두자는 건가?"

"지금은 구원자분들을 믿을 때입니다. 그들이 왜 위험을 무릅쓰고 나섰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입술을 깨문 후안은 확대된 적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 이성을 잃지 말자.'

보호막이 풀어진다면 적들은 주저 없이 이 성채를 향해 공격을 난사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구원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적 마법사를 저격한 행위가 무용지물이 된다.

어떻게든 버텨서 그들이 돌아올 보금자리를 유지해야 한다.

"공격이 옵니다."

수석 마법관의 말에 후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스크린을 보았다.

이곳 첨탑은 성채 내부에서 가장 높이 솟아오른 곳이며, 성채 전체를 보호하는 보호막을 관장하는 장소이다.

여기서는 성채 주변의 전부를 볼 수 있기에, 전쟁이 시작되면 줄곧 이곳에서 주변을 살폈다.

"옵니다!"

콰아아아앙―

보호막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위력적인 공격.

성채 내부까지 그 영향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보호막을 다루는 수석 마법관은 상당한 심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괜찮나?"

"괜찮습니다. 하지만 몇 번 더 공격이 오면 버티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다음 공격은 언제라 생각하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최소 20분은 걸릴 거라 생각됩니다."

거대한 합격 마법진을 다루기 위해서는 공격 측에서도 꽤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대로 20분마다 공격을 받게 되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보호막이 깨져 버릴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얼마나 버틸 수 있지?"

"방금 그 마법의 위력이 최대라면 10번, 그보다 더 강한 위력이라면 8번 이내입니다."

"젠장,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현재 메르텡의 상황이 반전되며 기세를 타고 있었지만, 이대로 윈저가 무너지고 구원자들이 모두 잡힌다면 그 기세는 확 꺾여 버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기다리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거센 진동이 또 한 번 들려온다.

콰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또.

콰아아아아아앙―!

또.

그렇게 8번의 충격이 성채를 덮칠 때까지 후안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균열이 생기는 보호막을 바라볼 뿐.

"크윽...마지막입니다. 한 발 더 맞으면 보호막이 깨질 겁니다."

이미 수석 마법관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핏물을 간신히 삼키며 버티고 있는 수준.

적들이 얼마나 돈을 쏟아붓고 있는 건지, 마력의 부족으로 쉬는 것 없이 제시간마다 공격을 쏘아 냈다.

"잠깐, 저기 다른 국가의 지원병이 도착했어."

안 그래도 버거운 상태인데, 적들의 병력이 충원되는 모습은 그들에게 더 큰 절망을 주었다.

"아니…잠깐만."

그때, 무언가를 발견한 후안.

그가 눈가를 좁히며 그들이 달고 있는 깃발을 보았다.

"란…탄이다."

"예? 란탄이 저기 왜...아!"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쳤다.

"적들은 란탄의 배신을 모른다."

"아주 적절할 때 왔습니다."

란탄이 윈저에 지원을 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조금 긴가민가했었다.

란탄은 파란 지대와 마족 지대가 이어진 포탈을 통해서만 대륙으로 올 수 있었으니까.

바다를 타고 마경을 헤치며 오는 것은 너무 큰 도박 수라 제외한다고 치고.

'아직 적들은 란탄이 배신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아.'

원래라면 더욱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때 쓰면 좋을 패였지만, 이신이 있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위기의 상황에서 윈저를 구할 수 있다면 그 어느 때보다 적절한 사용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은 화면이 뚫어져라 스크린을 보았다.

적들의 군세 사이를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란탄의 병사들.

그리고 마법을 준비 중인 마법사에게로 병사들의 지휘관이 다가갔다.

투구를 눌러 쓴 지휘관.

그가 마법진을 가동하기에 앞서, 마력을 모으고 있는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뭘 하려는 거지?"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대화로 시간을 벌어 봤자 의미는 없을 텐데 말입니다."

의문에 잠긴 두 사람.

하지만 두 사람의 의문은 금세 풀렸다.

슬금슬금 란탄의 병사들이 마법사들 근처로 움직이더니 지휘관의 손이 검 위로 올라가고.

벼락처럼 휘둘러지는 검격이 핵심 마법사의 왼쪽 팔을 자르고 지나갔다.

"아니?"

그와 동시에 마법사들을 학살하는 란탄의 병사들.

그들은 이미 수차례 합격 마법진을 가동한 터라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마법사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죽었다.

뒤늦게 란탄의 배신을 알게 된 적들이 그들을 잡으려 하자, 란탄의 병사들은 그곳을 빠져나와 윈저로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성문을 열라고 해! 기사들은 란탄의 병사들을 구하러 나가라! 방어막을 해제해!"

"알겠습니다!"

란탄의 병사들을 본 후안이 다급하게 외쳤고, 문밖에 대기하던 병사는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성벽에서 적진의 상황을 보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벌써 출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후안의 명이 전해지자마자 성문이 올라가고 도개교가 내려가며 기사단이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강웅 님!"

"내가 적들을 막겠네!"

란탄의 병사들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절반 이상이 당한 상황.

그들의 지휘관인 기사도 피투성이인 상태였다.

순식간에 말을 타고 란탄의 병사들이 있는 곳까지 도달한 황강웅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건축 자재를 꺼냈다.

[급속 건축]

[돌 쌓기]

아공간 주머니에서 쏟아져 나오는 단단한 돌덩어리들이 란탄의 병사들 뒤로 한순간에 성벽처럼 쌓여 올라갔다.

[방어력 강화]

달려오던 적군의 병사들이 당황한 듯 주춤하더니 황강웅이 만든 돌벽으로 달려들었다.

"급조된 돌벽일 뿐이다! 부딪혀서 뚫고 가라!"

그의 돌벽을 향해 검을 들고 차징을 하던 적군의 병사들을 본 강웅이 마력을 다시 흩뿌렸다.

[돌벽 폭발]

애초에 보호보다는 공격을 위해 만든 구조물이었다.

화가 난 그들이 이 돌벽을 피해 우회하기보다는 곧장 뚫어낼 것을 예상한 황강웅은 애초에 돌벽을 세우며 그 사이사이에 폭발물을 설치했다.

콰과과과광!!

돌벽이 폭발하며 뜨거운 돌덩이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폭발에 휘말린 병사들은 말에서 떨어지며 나뒹굴었고, 추적하는 이들의 전열은 한순간에 뒤틀리며 무너졌다.

추적을 막아낸 것을 확인한 황강웅이 빠르게 란탄의 병사들을 따라 돌아갔다.

"란탄의 병사들이 돌아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공훈을 세우고 돌아온 이들의 금의환향.

란탄의 병사들과 그들을 구해 온 황강웅을 향해 병사들이 소리쳤다.

이전까지 분명 적으로 마주쳤던 란탄의 병사들이 이제는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고 돌아온 것이었다.

윈저는 다른 곳보다 더 란탄과의 마찰이 잦았지만, 란탄은 그 과거를 자신들의 피로 씻어 냈다.

"하아…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란탄의 지휘관을 후안 바이런이 맞이했다.

"고생했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적진의 최전방에서 진행되는 마법 공격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이런 무모한 짓을 하고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런 짓을 벌이고도 살아서 돌아온 게 용할 정도.

란탄에서는 이들을 윈저를 구하기 위해 희생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희생을 받아들이고 싸운 것이며, 그럼에도 생색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그대들은 이제 우리의 친우나 다름없네."

"그럼 저희 병사들을 좀 쉬게 해 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여기 란탄의 병사들을 치료하고 숙식을 제공하라!"

"예!"

"자네의 이름이 뭐지?"

"베노미노입니다."

"베노미노라…, 앞으로 잘 부탁하네."

"예."

후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후안과 악수하던 베노미노가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할 말 있는가?"

"저희의 임무는 이신이 오기 전까지 이곳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가?"

"그리고 구원자들을 지키는 것이죠. 구원자들은 어딨습니까?"

"그들은...."

말을 하던 후안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제10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