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3

제26화

놈은 들고 있던 도끼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무기를 쓸 필요도 없다 생각하는 것인가?

쾅! 쾅! 쾅!

놈의 주먹이 이신의 방어 마법과 부딪힐 때마다 성채 전체가 진동했다.

주먹질 한 방 한 방을 막을 때마다 마력이 쭉쭉 깎여 나가고 그 모습을 보던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비명을 내뱉었다.

"미쳤네."

게른이 이신을 보며 씩- 웃었다.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거대한 어금니가 들썩였다.

인간들이 공포에 빠진 모습이 즐거운가?

아니면 너를 맞상대해 줄 상대를 찾아서 즐거운 건가?

"하...."

그것도 아니라면.

너를 죽여 줄 상대를 찾아서 즐거운 거냐.

크아아아아아악!

놈의 눈은 이미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쾅! 쾅! 쾅! 쾅!

"그래 무엇이 되었든."

꿀꺽- 꿀꺽-

이신은 벨리아가 준 마력 회복 포션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마력을 사방으로 펼쳤다.

"뭐가 중요하겠어."

그의 시야 속, 이 거대한 전쟁터가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사기에 물들어 붉어진 영혼들이 사방을 떠다녔다.

족히 백만은 되는 사령들.

[사령술(邪靈術)]

# 사령들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사령이 되어 버린 오크 영혼들의 억울한 원한이 느껴졌다.

어떤 사령들은 이신을 향해.

또 어떤 녀석들은 인간들에게.

그리고 대부분의 오크들은 오크 로드 게른에게.

그러한 사령들의 원망과 원한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졌다.

[사령 폭발]

다른 이들은 볼 수 없는 거대한 폭발이 전장을 휩쓸었다. 붉은 화마가 게른을 덮쳤다.

크아아아아아아아!!

게른의 고통에 찬 비명이 전쟁터를 울렸다.

백만이 넘는 사령을 모두 폭발시킬 만큼의 마력량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한 줌 정도 되는 사령들을 터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크들은 그 특성상 사령술에 약할 수밖에 없다.

육체가 강할 뿐, 정신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니.

"으윽...."

사령 폭발을 시전하고 이신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도대체 몇이나 되는 사령들이 폭발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그 모든 사령들의 원한과 고통이 이신에게로 전해졌다.

악의와 살의로 가득 찬 사령들의 사기(死氣).

사령술의 위험성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머리와 정신이 점점 그들의 사기에 오염되는 느낌. 술사조차도 사령들의 감정에 물들어 악귀가 되어 버릴 것만 같은 기분.

정신력이 강하다고 자부하는 이신도 이 정도로 많은 사기들의 침범은 위험하다 느꼈다.

까득-

사령들과 강제로 이루어지는 교감.

집어삼켜져 버릴 것만 같은 악의에서 이를 악물고 간신히 벗어났다.

영혼들은 사령이 되면 서서히 맹목적인 악의만 남게 된다. 대상이 누구였든 그 대상도 사령이 된 순간부터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령술사는 그 맹목적인 악의를 이용해 사령들을 조종한다.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악의로 물들어 주변 모든 인간들을 죽이게 될까 두려웠다.

마력을 전부 쏟아부었음에도 아직 전장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령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게른의 힘을 빼앗았습니다.]

[힘이 1 상승합니다.]

[게른의 민첩을 빼앗았습니다.]

[민첩이 1 상승합니다.]

[게른의 지배력을 빼앗았습니다.]

[지배력이 1 상승합니다.]

오크들을 죽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혼돈 스탯으로 인한 스탯 강탈이 발생했다.

힘과 민첩을 강탈한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큰 성과는 지배력이었다.

네크로맨서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배력이 필수적이다.

더구나 사령술도 네크로맨서들 유파의 한 줄기다.

이제는 확실한 무기 중 하나인 사령술를 위해서라도 지배력의 상승은 시급했다.

"크르륵-."

보이지 않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했던 붉은 폭발의 화마 속에서 게른의 고통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괴물 같은 새끼. 그걸 맞고도 버티다니.

놈의 영혼은 거의 만신창이에 툭 건들면 깨져 버릴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그럼에도 놈은 굴복하지 않았다.

주변의 다른 병사들과 기사단장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영혼을 볼 수 없는 그들에겐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기사단장만이 그나마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을 뿐이었다.

게른이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힘들게 주워 들었다.

"포기해, 게른."

녀석은 곧 죽을 것이다.

놈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 죽음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의 통찰자의 능력 중 하나.

이것은 죽은 자의 과거를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죽음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던 죽음의 그림자가 녀석을 감싸고 그것은 매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진해졌다.

"취익-, 내…이름을…어떻게 아는 것이냐...."

"게른, 동족은 너를 배척하지 않았어."

"췩! 네 놈이… 뭘 안다고...!"

"알아, 나 역시 너와 같은 삶을 살았으니."

이신의 말에 게른이 눈을 치켜뜨며 그를 보았다.

"단지 너의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으로 그렇게까지 배척당했다 생각해? 아니, 너는 피부색이 아니라 그 강인한 힘 때문에 배척된 거야."

"췩! 그럴 리가 없다! 우리 일족은 강한 자를 숭배한다. 그럼에도 나는 배척당했다. 일족에서 가장 강했음에도! 감히 나를!"

말을 하면서 게른의 투기가 순간적으로 치솟았다.

점점 짙어지던 죽음도 그 순간만큼은 옅어졌다.

'다가오는 죽음을 자력으로 극복하는 건가?'

이신은 조금 전 잠깐 보였던 그 기이한 현상을 머리에 새겼다.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야. 인간도 강하고 뛰어난 이들을 숭배하지. 그러나 그게 규격 외라면 달라져. 인간이든 오크든, 자신이 생각하기 힘든 힘을 가지고 있으면 두려워한다. 그리고 부정하기 시작하지. 저 녀석은 나와 같은 종족이 아니다. 저건 괴물이다...."

"괴물...."

"그래, 괴물. 넌 오크 로드를 가볍게 이길 정도로 괴물이었지. 그렇기에 너의 일족들은 너를 두려워한 거야. 그러니...그만해라. 광기에 빠져들지 마."

"광기...나는…나는…크아악-!"

광기에 가득 찼던 게른의 눈빛이 서서히 원 상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으며 괴성을 질렀다.

이미 거의 부서지기 직전인 영혼이 놈의 의지와 광기로 억지로 붙들려 있던 것이었다. 옅어지던 죽음도 다시 급속도로 짙어지기 시작했다.

"췩, 너는…이름이 뭐지...?"

"이신."

"너를 기억하겠다...고맙다."

게른의 거대한 덩치가 무너져 내렸다.

놈의 눈에는 슬픔과 회한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광기에 차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삶에 미련이 남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진작에 부서져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영혼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오롯이 저 녀석의 의지가 발현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이곳이 탑이 아니고, 탑에서 만들어진 녀석이 아닌 원래의 게른이라면 어땠을까?

저 녀석은 분명 신격을 가지기에 모자람이 없는 녀석이었다.

[게른을 쓰러트렸습니다.]

[히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셨습니다.]

[경이로운 업적! 다수의 신들이 도전자님을 주목합니다!]

[다수의 신들이 도전자님과 대화하고 싶어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아니."

게른의 차갑게 식어 가는 시체를 보니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마도사님."

어느새 그의 근처로 온 벨리아가 말했다.

"성주님이 마도사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알겠습니다."

벨리아를 따라 성벽 밑으로 내려가자 그곳에 성주가 자리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유르테인의 성주인 하멜 유르테인입니다."

"이신입니다."

"마도사님 덕분에 저희 유르테인이 이길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멜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사례를 하고 싶습니다. 저희와 같이 가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성주와 이신은 같이 마차에 올라선 뒤 유르테인의 성으로 들어갔다.

하멜은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 했지만 이신은 한사코 거절한 뒤 곧장 지하창고로 이동했다.

"여기가 저희 유르테인 가문 대대로 보물들을 모아 놓은 지하창고입니다."

하멜이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따라오시죠."

지하창고 안에 들어가서도 또 지하로 내려가는 장소가 있었고 그곳에서 또 두 번을 더 내려가자 진짜 목적지에 도착했다.

"위에 있는 물건들도 충분히 진귀하고 좋은 것들이지만 이곳에 있는 것들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물건들입니다."

"정말 그렇네요."

대강 보아도 위에 있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들이었다.

"역시 한 번에 알아보시는군요."

"대강 그렇게 느껴질 뿐입니다."

"하하하, 겸손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무튼, 이곳에 있는 물건 중 원하시는 것. 그 어떠한 것이라도 단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국보에 가까운 물건들이다 보니 그 이상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멜은 정말로 미안한 표정이었지만 이신도 두 개 이상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나만 하더라도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고르면 됩니까?"

"천천히 둘러보시고 골라 주십시오. 저희는 올라가 있겠습니다."

"제가 여러 개를 훔쳐 가면 어떡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하하하, 그러지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희를 위해 그 무시무시한 검은 오크를 잡아 주신 분이신데 믿어야죠. 그리고 맘만 먹으시면 저희 전부를 전멸시키고 전부를 가져가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의 말은 틀렸다.

유르테인의 전력은 쉽게 볼 만큼 만만하지 않다.

전부를 상대할 만큼 마력이 충분하지도 않았으며 만약 만전의 상태라 하더라도 전멸은 무리였다.

게른 하나를 상대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믿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나가 있겠습니다."

"예."

성주와 기사들이 위로 올라가고 이신은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천천히 확인했다.

위에 있는 것들에 비해 많은 것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 하나하나가 충분히 가치가 있는 물건들이었다.

검, 도끼, 활, 장갑, 갑옷 등등.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은 단 두 개였다.

[마력이 깃든 은나무 지팡이]

마력 농도가 높아 일반적인 식물은 살아갈 수 없는 에르텔 산맥에 자라난 은나무로 만든 지팡이.

# 마력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

# 마력 저장량: 0/300,000

# 마력 포화 상태에서 사용자의 마력을 낮은 확률로 증가시킵니다.

# 하급 정령과 계약.

[아공간 지팡이]

공간의 마도사 아슈렐과 뛰어난 대장장이가 만든 역작입니다.

# [아공간] 스킬 생성.

# [마력 역장] 스킬 생성.

# [블링크] 스킬 생성.

포인트 상점에서 샀던 지팡이 하나가 있기는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손이 허전해서 들고 다닐 뿐이었지, 딱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괜찮은 지팡이가 있다면 당연히 장비는 지팡이부터 마련하는 게 좋다.

여러 아티팩트들을 확인하며 그중 엄선한 두 지팡이.

은나무 지팡이는 현재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마력의 부재를 채워 줄 수도 있으며 하급 정령과 계약도 가능했다.

더구나 마력 저장량이 가득 찬 마력 포화 상태의 지팡이는 들고 있는 것만으로 최대 마력량을 증가시켜준다.

아공간 지팡이는 아공간과 블링크라는 아주 편리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뭐로 해야 하나.'

현재 수준으로는 공간 마법 자체를 만들어 내는 게 불가능하다. 공간 마법은 재능의 영역을 뛰어넘는 그 분야만의 특별함을 가지고 있어야 사용 가능한 마법.

그것도 전생의 수준을 되찾는다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그것에 한참 뒤떨어졌으니.

'역시 이걸 골라야겠지.'

은빛을 내는 나무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아공간 지팡이가 아깝기는 했지만, 지금 이신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이지 편리함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는 은나무 지팡이를 고르는 게 맞았다.

지팡이를 들고 올라가 성주에게 보여주니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3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도전자님의 업적이 기록됩니다.]

[123,820점을 달성했습니다.]

[123,820p를 획득합니다.]

[체력이 2,300 올랐습니다.]

[마력이 10,082 올랐습니다.]

[힘이 7 올랐습니다.]

[민첩이 5 올랐습니다.]

[지력이 15 올랐습니다.]

[지배력이 6 올랐습니다.]

[사령술의 이해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마력이 깃든 은나무 지팡이를 획득합니다.]

[신격의 파편을 획득합니다.]

이신은 곧장 3층을 떠나지 않고 아까 전쟁을 벌였던 성벽으로 다시 이동했다.

병사들은 전쟁의 뒷정리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를 마주친 병사들은 하나 같이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마, 마도사님! 충성!"

성문 앞에 있던 병사가 이신의 모습을 알아보고는 경례를 올렸다.

"게른의 시체는 어딨습니까?"

"그 자리 그대로 있습니다!"

"봐도 되겠습니까?"

"예, 옙! 마도사님이 말씀하시는 건 모두 들으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신은 성문을 지나 게른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성벽 밖에는 아직까지도 셀 수없이 많은 오크들의 잔해로 가득했고 황갈색의 땅은 녹빛 피로 뒤덮여 있었다.

푸른 오크들 사이로 홀로 칠흑같이 어두운 피부색을 가진 게른의 시체가 보였다.

"게른...."

다른 오크들의 크기에 몇 배는 더 큰 덩치.

우악스럽게 튀어나온 어금니.

웬만한 금속들보다도 단단해 보이는 근육.

그러나 놈의 그 흉포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쓰러진 시체는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외로움에 사무친 듯한 모습.

'왜 죽음의 통찰자의 능력이 발현되지 않는 거지?'

2층의 리자드맨 족장처럼 게른을 죽이고 나면 그의 뒤에 있는 이야기를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게른을 마주하는 순간 확신했다.

각 층의 이야기에는 신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신격의 파편은 그 확신을 확정 지어주었다.

[신격의 파편]

신격을 여러 개로 쪼개 놓은 파편입니다. 모든 파편을 모은다면 하나의 제대로 된 신격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게른 또한 신격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신들이 신격을 빼앗아 쪼개고 그 파편을 남겨 둔 것이 아닐까?

이신은 죽음의 통찰자가 발동되지 않은 것은 게른의 격이 자신보다 높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1층에서 죽음의 통찰자가 발현되지 않은 수많은 유령들 전부가 자신보다 격이 높은 이들이라는 말이 된다.

'그럴지도.'

1층으로 돌아갈 방법은 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 한 맺힌 이들의 한을 풀어 줄 수 있을 것이다.

"4층 대기실로."

[4층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 * *

척박한 땅과 칙칙한 분위기가 감도는 평야.

수많은 이들이 여기저기 보이지만 이것도 이때 뿐이다.

별로 할 것도 없고 볼 것도 없는 4층 대기실에 사람들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지금이야 특수 상황인지라 아직 사람들이 많은 것이지만.

"그루카."

3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덩치의 트롤.

눈에는 다크서클 같은 것이 크게 번져 있어 굉장히 피곤한 듯한 인상을 줬다.

"뭐지?"

다짜고짜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는 모습에 이신이 물었다.

"신의 사자인가?"

"아니."

"그런가...알겠다."

갑자기 나타나서 질문하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화를 끝내 버렸다.

이신은 뭔가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조심해라. 그루카."

"뭐를 조심하라는 거지?"

"그냥은 말해 줄 수 없다."

정보를 들으려면 포인트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얼마면 되지?"

이렇게 먼저 관리자가 말을 걸어올 정도라면 정말 중요한 정보일 확률이 높았다.

"10,000p"

"뭐?"

"그 정도가 아니면 안 된다."

고작 4층에서 만 포인트의 값어치를 지닌 정보라.

[10,000p를 지불하였습니다.]

포인트의 여유가 있어 이 정도는 충분히 지불할 수 있었다.

"제단을 조심해라. 그리고 믿지 마라."

"그게 끝인가?"

"그렇다. 그룩!"

'제단....'

이신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다지 도움이 되는 정보가 아니었다.

자신이 회귀한 것이 아니라 처음 4층에 도전했다면 충분한 값어치를 했을 정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단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

"혹시 포인트를 더 지불하면 그다음 정보도 얻을 수 있나?"

"다음은 너무 비싸다. 50,000p는...."

[50,000p를 지불하였습니다.]

"다음 정보나 말해."

제27화

4층

이신은 관리자에게 정보를 들은 뒤, 3층에서 얻은 [마력이 깃든 은나무 지팡이]를 보았다.

은나무 지팡이에는 총 30만에 달하는 마력량을 저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마력량은 온전히 이신의 마력으로 채워 넣어야 했다.

이신은 그 작업을 하느라 4층 대기실에서 시간을 한참이나 지체했다.

"하급 정령과의 계약...."

솔직히 원하는 정령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원하는 정령은 쉽게 볼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정령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준비를 끝마친 이신은 다시 관리자에게 갔다.

"4층으로 보내 줘."

"그루카! 보내 주겠다."

거대 트롤의 지팡이가 땅을 내리찍자, 이신의 몸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신의 모습이 사라지자, 허공을 바라보던 트롤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번 세계는 한동안 시끄럽겠군."

* * *

붉은 노을이 진 것 같은 하늘과 쩍쩍 갈라진 메마른 땅.

근 몇 년은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별로 달라진 건 없네.'

그때 허공에 붉은 피가 모여들며 공간이 열리고 그 안에서 귀여운 박쥐 하나가 튀어나와 이신의 어깨 위에 앉았다.

릴리안이었다.

"완전히 망해 버린 세상이네."

"그래. 이곳은 버림받은 곳이니까."

"버림받았다고?"

릴리안의 물음에 이신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알게 될 테니.

척박한 땅의 끝, 앙상한 나무들과 검게 물든 풀들이 모여 숲을 이루고 있다.

'어둠 숲.'

[어둠서리 트롤 부족을 구원하십시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역병에 잠긴 어둠서리 트롤들은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게 설령 죽음일지라도.]

[어둠서리 트롤 처치 (0/100)]

'어둠 숲'이라 불리는 이곳에 발이 닿자 세상이 어둠에 잠긴 듯 붉었던 하늘마저도 검게 변해 버렸다.

으어어어어어―

크아아아아아―

고통에 찬 괴성인지, 트롤의 울음소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기이한 음성이 어둠 숲 전체에서 메아리쳤다.

검게 물든 나무의 가지들 사이로 검붉은 열매들이 달려 있었다.

"이 열매는 뭐야?"

날개를 펄럭이며 나무 위 열매를 따 온 그녀가 궁금해서 그것을 먹으려 했다.

"먹지 마. 역병에 물든 열매니까."

"역병? 그래 봤자 나한테는-."

"안 돼."

릴리안이 원래의 힘을 모두 쓸 수 있는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그녀는 오랜 시간 잠들어, 힘이 많이 약화 된 상태였다.

더구나 이신에게 종속된 후부터 급격하게 그 힘의 사용에 한계가 생겼다.

이 역병이 그저 그런 역병이라면 아무리 릴리안이 약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겠지만, 이 열매에 담긴 것은 그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크어어어어...."

이지를 잃은 듯한 눈동자와 얄팍한 몸뚱이.

덩치는 이신보다도 컸지만, 그 위용은 앞서 대기실에서 보았던 트롤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신의 앞에 나타난 세 마리의 어둠서리 트롤이 차가운 입김을 내뱉으며 이신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허약해진 트롤일지라도 트롤은 트롤이었다.

그것도 어둠서리 트롤.

날카로운 손톱이 이신의 몸을 그대로 찢어발길 듯 쇄도했지만 가볍게 옆으로 피한 그가 트롤의 손목을 잡아챘다.

"크아아아악!"

그다지 힘을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놈들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까득-

이신이 이를 갈며 트롤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저 모습이 어떻게 내가 알고 있는 어둠서리 트롤의 모습인가?

그 당당하고 위엄 넘치던 그놈들이 정녕 맞는가?

[어둠서리 트롤 처치 (0/100)]

시스템은 이러한 어둠서리 트롤들을 죽이라 말하고 있었다.

트롤들을 죽이면 놈들을 구원하는 것이라,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죽음이 구원이 되는 거지?"

언제부터 죽음과 구원이 같은 의미가 되었느냔 말이다.

이신은 차오르는 역겨움을 눌러 담고 어둠 숲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트롤들이 만들어 놓은 비석이 보였다. 커다란 돌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자들과 어떠한 그림.

'영웅....'

이곳엔 분명 그렇게 새겨져 있었다.

영웅이 잠들어 있다고.

쓴웃음을 지은 이신이 몸을 돌려 어둠 숲을 벗어났다.

* * *

6층 대기실.

5층을 클리어한 김강천, 박혜원, 지은주, 박주혁이 모여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대체 얘는 왜 안 나오는 거야?"

"벌써 일주일이 지났는데."

"지훈 오빠!"

그때 6층 대기실로 이동된 강지훈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갔다.

옷은 너덜너덜하고 창백한 안색을 한 강지훈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 진짜 죽을 뻔했네."

"또 오바하네."

박혜원의 말에 강지훈이 억울한 얼굴로 정말이라고 소리쳤지만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워낙 평소에 호들갑을 많이 떠는 스타일이라 그 과장된 행동에 네 사람은 속은 적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그의 반응을 보면 그가 진심인지 아닌지 대강은 알 수 있었다.

"진짜 죽을 뻔하긴 했다고!"

"우리도 알아, 오빠도 익스트림(Extreme)으로 했지?"

"어, 근데 이번에 해보니 알겠더라. 왜 이게 익스트림인지. 솔직히 다음 15층에서도 익스트림에 도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강지훈의 말에 나머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5층이다. 자신들이 1층에서 소비했던 시간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막혀서는 안 되었다. 그간 수련해 온 것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5층의 익스트림은 그만큼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는 난이도.

2층의 리자드맨 광전사를 맞이했을 때도 이 정도의 위기감은 가지지 못했는데 이번 5층에서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감각을 다섯 모두 느꼈었다.

"은주는 하드로 했대."

"뭐? 진짜?"

"응...."

지은주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최초 5인방이라고 불리는 5명 중에 자신만이 벌써 뒤처지기 시작한 것에 은주는 내심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을 쫓아가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대담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맘속 초조함을 쉽게 지우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과 이대로 멀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그러한 생각들 때문에.

고개를 들어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들 자신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두 지금까지는 잘해오고 있었지만 언제 어떻게 고꾸라질지 모르는 불안감을 다들 가지고 있었다.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그제서야 지은주도 조금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근데 현이는?"

강지훈의 물음에 네 사람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모르겠어, 아직까지 오빠 소식이 없어."

"어? 걔가 가장 먼저 들어갔잖아? 현이 정도면 제일 먼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데?"

"내가 제일 먼저 이곳에 도착했는데 현이는 그때도 안 보였어, 랭킹도 업데이트되지 않았고."

박주혁의 말에 강지훈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설마...."

"에이, 뭐 어쩌다 오래 걸리는 거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자. 그 오빠가 고작 5층에서 무슨 일 생기겠어?"

"그럼 그럼! 현이 오빠 실력에 그럴 리가 없지!"

혜원과 은주는 맘속에 있는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없애려는 듯 오히려 더 걱정 없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익스트림을 클리어한 네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백현 정도의 실력이라면 그가 어떻게 잘못되었을 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백현의 성격을 잘 아는 그들은 혹시 모를 경우의 수가 떠올라 불안감을 선뜻 지울 수가 없었다.

'헬(Hell) 난이도....'

이신의 점수를 보고 있던 백현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설마....'

* * *

어둠 숲을 벗어나자 다시 척박한 땅이 나타나고 붉은 하늘이 이신을 맞이했다.

이신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러한 땅을 하염없이 걸어갔다.

그러자 또 하나의 오래된 제단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축복의 신의 제단을 발견하셨습니다.]

이신은 메시지를 무시하며 제단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50개의 자그마한 영약들이 존재했다.

[알 수 없는 역병에 감염된 어둠서리 트롤 부족들을 가엾이 여긴 축복의 신은 자신의 사도에게 부탁해 역병을 회복시킬 수 있는 영약 50개를 가져가게 했고 그곳에 제단을 세웠습니다.]

[축복의 신의 영약을 사용하여 어둠서리 트롤 부족을 구원하십시오.]

이곳 4층의 두 번째 클리어 방법이다.

숨겨진 축복의 신의 제단.

그곳에 남겨진 축복의 신의 영약.

이러한 먼 곳에 숨겨진 축복의 신의 제단을 찾아 이번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것도 히든 스테이지는 아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이곳 4층을 클리어했던 방법.

탑의 등반 초반의 뭣 모르는 도전자들은 이러한 축복의 신의 모습에 축복의 신을 좋은 신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겹네."

어둠서리 트롤들을 가엾이 여긴다면 왜 50개만 가져다 놓았는가?

이곳 4층의 처음 클리어 조건은 어둠서리 트롤 100마리를 처치하는 것이었는데 축복의 신의 영약은 50개뿐이란다.

왜 100개가 아니라 50개뿐인가?

50마리만 회복하고 나머지 50마리는 계속 고통받아도 상관없다는 건가?

이신은 마력이 깃든 은나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지팡이가 향한 곳은 제단의 정중앙.

"이 제단을 부수려고?"

"그래."

"크하하하! 이 제단의 주인 얼굴을 보고 싶네."

재밌다는 듯 자신의 어깨 위에서 웃고 있는 릴리안을 뒤로한 채, 이신은 마력 운용에 집중했다.

은나무 지팡이의 끝에 이신의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우웅- 우웅-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위협적인 마력의 파동.

[축복의 신이 대화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

이신은 예상이라도 한 듯 그 메시지를 보았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파앙―!

거센 마력의 파동이 제단을 향해 날아가자 공간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일렁임이 발생했다.

"크윽!"

그 파동의 반발력에 이신이 신음을 뱉었지만 딱히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난 이신이 제단의 멀쩡한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오지의 허름한 제단에 이 정도의 방어막을 설치해 놓았다라...."

- 제단을 조심해라. 그리고 믿지 마라.

관리자의 조언을 떠올린 이신이 이것을 보며 비웃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제단을 관리하는 이도 없으며 그저 사도에게 부탁해 영약을 옮기다가 급조로 세워 놓은 제단이다.

이러한 제단이 한 둘이겠는가?

이 정도 제단은 축복의 신 정도의 격을 가진 신이라면 수십 개가 부서지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이다.

딱히 중요하지 않은 곳이기에.

[축복의 신이 개입합니다.]

[축복의 신이 선을 넘지 말라 경고합니다.]

신들의 음성이 시스템을 통해 강제로 내게 전해지고 있다.

내가 대화를 허락하지도 않았음에도 이렇게 전해진다는 것은 놈이 힘을 소모해 가면서까지 강제로 의사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급하시다는 거겠지.

고작 4층 도전자의 행동에 이리 끌려다니는 게 신이라니.

당시 탑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신이란 전지전능하고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존재라 생각할 뿐이었지.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하찮지 않은가?

"넘으면 어쩔 거지?"

이신이 또 한 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조금 전 공격은 그저 탐색전에 불과했다.

제단은 아직 멀쩡했지만 방어막의 불안정한 파장이 훤히 느껴졌다.

[축복의 신이 지금 멈추면 보상을 주겠다 전합니다.]

이신은 그 말을 무시한 채 다시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마력의 파장.

진의 고유능력인 [검은 마력]이 이신의 주변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축복의 신이 자신의....]

[축복의 신이....]

[축복....]

연달아 이어지는 메시지.

축복의 신의 다급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이렇게까지 조급해할 일인가?

이 제단에 무언가를 숨겨 놓은 것인가?

이신은 생각보다 과한 축복의 신의 반응에 더 큰 비밀이 이곳에 숨겨져 있음을 직감했다.

- 제단을 부숴라. 그러면 비밀이 드러날 테니.

무려 5만 포인트나 주고 얻어 낸 정보였다.

그리고 그 정보는 지금 너무나도 유효했다.

"엿이나 먹어."

마법이라는 분야에 한해서 이질적인 재능을 보였던 이신의 마력이 한곳으로 뭉쳐지고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한다.

4위계 최상위 파동 마법.

이러한 방어막을 부숴 버리기에는 파동 마법이 최고다.

마력이 깃든 은나무 지팡이가 있기에, 이신은 거리낌 없이 이 마법을 발현했다.

[쇼크 웨이브(Shock Wave)]

푸른 물결의 파도가 지팡이 끝에서 쏟아져 제단의 방어막을 덮쳤다.

콰아아아아아!!

귀를 찌르르 울리는 파공음과 함께 공간 전체가 진동하고.

제단을 보호하던 무형의 막이 와장창 깨지며 제단이 무너져 내렸다.

[축복의 신의 제단이 무너졌습니다!]

[제단으로 인해 형성되었던 어둠 숲의 결계가 사라집니다.]

[어둠서리 트롤 부족의 영웅이 깨어납니다!]

[....]

이신은 연달아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축복의 신이 매우 분노합니다!]

[축복의 신이....]

[....]

축복의 신의 메시지들을 무시한 채 이신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이 마치 축복의 신의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히든 스테이지....]

갑자기 떠오르는 히든 스테이지의 내용을 본 이신이 또 한 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비밀이란 것이 이것이었나?

지금 신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자신의 행보는 대부분의 신들에게 보여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것을 본 다른 신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재밌네."

무너져 버린 제단을 뒤로한 이신이 어둠 숲이 있는 방향을 향해 다시 걸음을 떼었다.

제28화

어둠 숲에 도착한 이신은 숲속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어어어어어―

크아아아아아―

고통에 찬 울음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하지만 아까 들었던 것과 미묘하게 다른 느낌.

'그리움…억울함....'

이지를 잃어버린 트롤들의 본능 어린 울부짖음.

그들의 영웅이 깨어났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트롤들이 더욱 거센 괴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히든 스테이지 – 어둠서리 트롤 대전사 샤칸]

[오랜 기간 봉인에 갇혀 있던 어둠서리 트롤 부족의 대전사 샤칸이 기나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동안 사무쳤던 억울함과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고 있습니다. 그의 분노를 잠재우십시오.]

어둠서리 트롤 대전사 샤칸의 분노를 잠재워라.

샤칸을 죽이라는 게 아니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어둠 숲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괴성이 숲 전체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울음소리만으로 그의 분노가 여실히 느껴졌다.

불안정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흉포함이 더욱 큰 위험함을 보여주고 있다.

어둠 숲 전체에 퍼져 있는 어둠서리 트롤의 영혼들.

어딘가에 숨어 있던 그 억울한 영혼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너희들의 대전사가 깨어났다."

분노하지도 말고 억울해하지도 말아라.

# 사령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어느새 사령이 되어 버린 어둠서리 트롤들의 영혼들이 그에게 그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신의 지배력 스탯이 그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사령들이 그의 사령술로 인한 언령(言令)에 영향을 받아 움찔거렸다.

'나의 명령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 거야. 사령들을 다루기에는 아직 내 사령술의 숙련도가 높은 것도 아니며 지배력이 높은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잠깐의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하다.

사령들이 활개를 치면 힘들어지는 건 그였다.

사방을 휘젓는 사령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 그에게 그런 사령들의 통제 불능은 전투 집중에 큰 지장을 주기 때문에.

* * *

어둠 숲 깊은 곳.

커다란 비석이 있던 자리, 그 뒤편의 돌벽이 무너져 내리고 그곳에 커다란 덩치의 샤칸이 자리하고 있었다.

놈의 검게 물든 눈동자가 이신을 직시했다.

분노와 적의에 사로잡혀 제정신을 유지 못 하고 있었다.

놈의 검은 눈동자 속에 담긴 이신은 샤칸에겐 그저 적일 뿐이었다.

"네가…감히...나의 부족을...!"

오랫동안 잠겨 있던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샤칸의 흉포한 피어(Fear)가 공기를 옥죄었다.

이신의 덩치만 한 거대한 곡도가 그를 향해 휘둘러졌다.

카앙!

고작 저층의 마법사라고 볼 수 없는 몸놀림으로 이신이 샤칸의 곡도를 피해냈다.

곡도가 땅에 박히며 진동했다.

"무너져라."

이신의 영창과 함께 샤칸의 몸을 지지하던 땅이 무너져 내렸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샤칸.

그럼에도 곧장 무게중심을 잡고 그곳을 벗어나려는데 허공에서 터지는 폭발에 다시 땅에 처박혔다.

퍼퍼퍼펑-!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땅에 새겨 놓은 마법진이 발동하며 내려앉은 바닥이 샤칸의 발을 묶고, 이어진 공기의 연속된 폭발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크하아아악!"

고작 이 정도의 공격에 머리가 터져 나갈 일은 없었지만, 이건 샤칸의 균형감각을 잃게 만들기 위한 공격이었다.

"카아아아...!"

머릿속이 계속해서 진동하는 느낌에 샤칸이 내려앉은 바닥에서 쉽게 탈출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신은 놈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공격을 때려 부었음에도 놈의 몸은 실시간으로 회복되고 있었다.

반격할 겨를 없이 이어지던 연계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다.

[흑뢰(黑雷)]

땅에 박힌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던 샤칸의 머리 위로 내리치는 검은 벼락.

콰아아아아아!!

하늘에서 내려오는 흑색 뇌전이 샤칸을 덮쳤다.

"크아아아아아아악!"

그 섬뜩한 괴성이 한동안 어둠 숲 전체에 울려 퍼지다가 어느 순간 잦아들기 시작한다.

"나…나는... 내가 왜...."

검게 물들어 초점조차 없어 보이던 샤칸의 눈동자가 푸르게 변했다.

[어둠서리 트롤 대전사 샤칸의 정신이 깨어났습니다.]

[히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샤칸, 정신이 드나?"

"샤…칸...너는…누구지? 어떻게 내 이름을...."

잠겨 있던 의식이 조금씩 회복되는 듯 샤칸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나는 이신이다. 너를 깨우기 위해 왔지."

"나를…깨워? 아, 그렇군. 너는 죽음의 신의 사도인가? 죽음의 냄새가 너에게 진하게 나는구나."

"...."

이신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도라는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넘어가기로 했다.

"드디어 죽음의 신님께서 우리에게도 관심을 주시는 것인가."

어둠서리 트롤 부족은 죽음의 신을 믿는 부족.

그러나 신도들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죽음의 신은 이들의 존재 자체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무슨 일이 있었지?"

"크륵…우리에게 어느 날 한 사도가 찾아왔다...놈은 축복의 신의 사도였지."

이신에게 당해 너덜너덜해진 몸을 힘들게 움직이며 곡도를 땅에 박아 넣고 주저앉은 샤칸.

그가 이신을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이것을 어둠 숲 전체에 뿌려라…."

샤칸의 말과 함께 배경이 뒤바뀌며 샤칸의 예전 모습이 현재의 모습 위로 덧씌워진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축복의 신의 사도가 입을 연다.

"…그러면 너희 부족도 죽음의 신께서 보살피실 것이다."

지금과 다르게 어둠 숲은 이렇지 않았다.

녹빛의 산뜻함을 가진 숲.

그 숲이 축복의 신의 사도가 오고 난 뒤로 한순간에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샤칸은 오랜 기간 그려 왔던 죽음의 신의 보살핌을 위해 축복의 신의 사도가 가져온 액체를 숲 전체에 뿌리기 시작했다.

같은 신의 사도라는 사실에 샤칸은 의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숲은 점점 오염되어 가기 시작했고 그곳에 서식하는 어둠서리 트롤들은 역병에 물들었다.

사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샤칸 자신도 그 역병이 몸에 들어온 직후였으니.

그렇다고 이 숲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기에도 이미 늦은 상태였다.

다른 곳으로 가기엔 트롤들이 버틸 수 없었다.

이 역병에 물든 열매라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기에.

그러던 중 축복의 신의 사도가 다시 나타났다.

"이건 역병의 신의 작품이다. 축복의 신님의 성수가 그랬을 리 없다."

사도는 뻔뻔했고 샤칸은 분노했다.

"감히 축복의 신님을 의심하는 것이냐!"

사도는 오히려 샤칸을 나무라며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샤칸은 사도의 공격을 받아낼 수 없었고 그대로 무너졌다.

"크륵!"

샤칸은 몸만 멀쩡했어도 이리 허무하게 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지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축복의 신을 믿어라. 그리하면 그간의 죄를 용서하고 너희 부족을 축복해주실 것이다."

샤칸은 억울하고 분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된 것인가?

왜 우리 부족이 죽음의 신님을 버리고 축복의 신을 믿어야 하는가?

"우리는…죽음의 신님의 신도이다...."

샤칸은 거부했고.

"그렇다면 그대로 잠들어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축복의 신께선 자비로우시니."

사도는 샤칸을 돌벽 속에 봉인했다.

"너희 부족은 영원히 고통받으며 사리라. 너의 그 어리석은 아집 때문에."

그러한 사도의 선언이 끝나며 배경이 바뀌었다.

"...때문에. 라고 말한 것이 내 기억의 전부다. 그 이후론 봉인되어 기억이 나질 않는군."

"그래?"

이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축복의 신이 자비로워 샤칸을 죽이지 않아? 어둠서리 부족을 그대로 놔둬?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놈들은 그저 역병에 잠겨 고통받으며 결국 축복의 신에게 자신들을 받아 달란 소리를 들을 때까지 어둠서리 부족을 방치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죽음의 통찰자가 발동되었다는 것은.

'샤칸은 결국 그렇게 죽었다는 것이겠지.'

이곳은 탑의 안.

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이다.

아니, 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게 맞을까?

그렇다면 누가 이런 스테이지를 만들었을까? 축복의 신? 죽음의 신?

아니면 그 외의 제삼자가?

아직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죽음의 신이 이 세계에 개입합니다.]

어둠 숲속.

검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검은 장막이 걷히고 그 위로 붉은 하늘이 나타났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검은 빛.

흐릿한 형상의 검은 안개가 어둠 숲에 현신했다.

무언가 형체가 있는 듯 없는 듯한 모습의 신기한 형상.

이신은 알 듯 알 수 없는 이 괴상한 기분에 눈살을 찌푸렸다.

- 호오....

차갑고 음침한 듯하면서도 기품 있는 음성.

안개 속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 음성 자체가 머릿속에서 생성된 듯한 느낌.

죽음의 신의 영체(靈體)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았지만,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 그대가 요즘 신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주인공인가?

죽음의 신은 샤칸이 아닌 이신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샤칸은 죽음의 신의 영체를 직접 마주 보지도 못한 채, 얼굴을 땅에 박고 엎드려 있었다.

본체를 마주한 것도 아닌 그저 그의 아바타나 다름없는 영체를 보았을 뿐인데도 샤칸은 그를 마주 보지 못했다.

- 신격에… 뱀파이어도 키우는 건가? 재밌군.

"...."

자신을 마치 애완동물처럼 말하는 죽음의 신 앞에서 릴리안은 감히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저 엄청난 격 앞에 부들거리는 몸을 진정시키는 게 최선이었다.

"당신의 신도가 이렇게 되기까지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습니까?"

각기 신들은 저마다 모두 다르다.

추구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모두.

죽음의 신에게 신도의 죽음이란 필연적인 것이며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기에 죽음의 신은 신도를 방치한다.

죽으면 죽는 대로. 살면 사는 대로.

고작 격이 낮은 트롤 부족 하나에 신경 쓰기에는 죽음의 신의 격이 너무나 위대했다.

그럼에도 이신은 물었다.

왜 그랬는가?

죽음의 신은 대답할 가치도 없었는지 이신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 나의 신도여.

"시, 신이시여....

자신을 부르는 외침에 샤칸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

- 내게 신도란 그다지 대단치 않은 것들이다.

그가 이렇게 스테이지에 개입할 수 있는 것도.

현신하여 도전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도.

죽음의 신이기에 가능한 일.

모든 생명체는 항상 죽음을 달고 산다. 그렇기에 죽음의 신에겐 딱히 신도가 필요 없었다.

- 내가 이곳에 현신한 것은 너희 때문이 아니다.

너무나 매정하기까지 한 말에도 샤칸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에겐 이러한 것들이 당연한 일상이었기에.

- 그래도 나의 신도를 건드리는 것은 내게 도전하는 행위지.

일렁이는 형상 속에서 뻗어진 에너지가 샤칸을 뒤덮었다.

"크허어어어억!"

- 넌 이제부터 나의 사도다.

검은 에너지가 샤칸의 몸을 타고 흐른다.

샤칸의 눈동자는 역병에 물들었을 때보다 더 칠흑같이 어둡게 변하고 몸 전체엔 죽음의 신을 상징하는 검은 문양이 새겨진다.

얄팍한 샤칸의 근육들이 다시 부풀어 오르고 희미했던 그의 격이 되살아난다.

[죽음의 신에 의해 새로운 사도가 생겨납니다!]

[세계선에 영향을 미칠 커다란 힘이 개입됩니다!]

"어둠서리 부족의 대전사 샤칸. 죽음의 신 앞에 제 영혼을 받쳐 당신에게 종속되었음을 맹세합니다."

- 첫 번째 임무다. 너희를 그렇게 만든 사도를 잡아라. 그리고 죽음을 선사하라.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새로운 세계선이 만들어졌습니다.]

[4층의 세계선이 변화합니다.]

샤칸이 검은 마력이 일렁이는 곡도를 땅에 박아 넣고 일어났다.

크아아아아아아-!

처음 봉인에서 깨어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격.

그저 흉포하고 분노와 적의만 쌓인 괴성과는 다른, 위엄 넘치는 고성(高聲).

샤칸의 피어가 검은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 이곳을 나의 영역으로 선포한다.

[검은 숲이 죽음의 신의 영역으로 선포됩니다.]

[몇몇 신들이 죽음의 신의 지나친 개입에 불만을 표합니다.]

- 내 영역 안에서 그 어떠한 것도 나의 허락 없이 죽음을 택할 수 없다.

[검은 숲의 모든 어둠서리 부족의 트롤들이 역병에서 벗어납니다.]

크아아아아아아―!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트롤들의 울부짖음에는 그간의 고통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깃들어 있었다.

처음 검은 숲에 나타났을 때 확연하게 느껴졌던 죽음의 신의 존재감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세계선의 확장.

엄청난 인과율을 소모하게 되는 이러한 일을 죽음의 신은 아무렇지 않게 행했다.

이신은 이제 곧 사라질 죽음의 신을 바라보았다.

"가는 겁니까?"

- 만나서 즐거웠다. 통찰자여.

그 말을 끝으로 죽음의 신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세계선의 확장으로 4층의 스테이지가 변합니다!]

[대다수의 신이 도전자에게 대화를 요청합니다.]

[업적을 집계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업적의 집계는 시스템이 단번에 확정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업적을 세웠을 때 나오는 것이다.

이신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했는지 시스템들의 메시지들을 무시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신들의 대화 요청이 빗발쳤지만, 이신은 그들과 소통할 생각 따윈 없었다.

단 하나의 신만 제외한다면.

"죽음의 신도 그중에 있나?

[죽음의 신의 대화 요청이 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현신했을 때와 시스템으로 상호 간의 합의하에 이루어졌을 때의 대화에는 큰 차이가 있다.

도전자의 허가가 있으면 굳이 인과율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기에 신들은 이러한 시스템을 선호한다.

[죽음의 신과 연결됩니다.]

[의외로군.]

이전에 들었던 그 신기하리만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내게 하급 정령과 계약할 방법이 있습니다."

[죽음의 정령을 원하는 건가...재밌군.]

지금의 이신이 아니라면 그 어느 누구도 다룰 수 없는 정령.

그가 바라왔던 최고의 선택지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무운을 빌지.]

허공이 공간 채로 빨려 들어가듯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하더니 그 안에서 숨을 턱 막아 버릴 정도의 기운을 내뿜는 존재가 나타났다.

"난 분명 하급을... 크윽!"

[죽음의 신과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먼저 대화를 요청해 놓고, 이러고 사라지기인가?

지금의 그로서도 쉽사리 감당하기 힘든 정령.

중급 정령 하프니스.

죽음의 공포를 조각하는 그 정령이 이신의 앞에 나타났다.

제29화

실종

존재감만으로 주변의 공기를 바꾸는 죽음의 정령이 공간을 찢고 나와 이신의 앞에 나타났다.

검은 연기가 뭉쳐 만들어진 유령과 같은 모습.

그 사이로 뿜어지는 안광이 이신을 향했다.

'이것이… 죽음의 정령....'

이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죽음의 정령은 정말로 다룰 수 있는 이가 없다 말할 정도로 까다롭고 어려운 존재이다. 그들의 본이 되는 죽음의 신조차 대신급의 신이니 더욱 그렇다.

하급 죽음의 정령은 본 적이 있었다.

지금 이 녀석만큼의 위압감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만큼은 비슷했던 녀석.

죽음의 정령을 다루는 자들은 죽음의 신의 고위 신도 혹은 사도 정도가 전부라 들었다.

일반적인 생명체가 함부로 다루다가는 오히려 죽음에 더 가까워진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소문에도 이신은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부탁했다.

죽음의 신이 나타난 김에, 그가 자신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기에.

이건 그들의 '굴레'에 얽히는 정도는 아니었으니.

근데 죽음의 신은 하급이 아닌 중급 정령을 불러왔다.

# 하급 정령과 계약

이것이 은나무 지팡이의 기능이었지만 죽음의 정령은 조금 그 궤를 달리한다. 중급이라면 이 지팡이의 기능을 쓸 수 없다.

죽음의 신이 이러한 것을 모르고 하프니스를 보냈을까?

- 만나서 즐거웠다. 통찰자여.

그는 이신이 죽음의 통찰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신은 자신감을 가지기로 했다.

괜히 벌써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하프니스."

- 죽음을 관찰하는 자...아니...아니군....

하프니스의 차가운 음성이 툭툭 뱉어진다.

- 너는...통찰자(洞察自).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겪고 깨달은 자....

하프니스에게서 무언가 보이는 것인가?

이신은 하프니스가 자신의 죽었던 과거를 보는 것인가 생각했다.

그때, 말을 하던 것을 멈춘 하프니스가 이신의 앞에 다가왔다.

- 통찰자여...죽음을 널리 전파하겠다.

이신은 본능적으로 그의 말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계약의 신호였다.

마력을 움직여 하프니스를 덮었다.

이신의 검은 마력과 하프니스가 뭉쳐지기 시작하더니 눈에 보이지 않는 서로 간의 연결이 이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중급 죽음의 정령 하프니스와 계약되었습니다.]

[지배력이 증가합니다.]

[지배력이 증가합니다.]

[지배력이 증가합니다.]

[지배력이...]

[하프니스]

죽음의 선고자. 하프니스에게 죽은 자는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 중급 죽음의 정령

# 죽음의 선고

# 죽음의 사슬

# 생사의 통로

[죽음의 선고]

하프니스의 심판의 낫은 죽음의 안식을 빼앗아 갑니다.

# 죽인 생명체의 언데드 생성.

# 언데드는 하프니스의 계약자에게 종속됩니다. 다만, 지배력이 낮을 시 종속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 언데드를 안식으로 돌려보냅니다.

[죽음의 사슬]

하프니스의 사슬에 속박당한 자는 다가오는 죽음의 선고를 기다려야 합니다.

# 생명체를 속박합니다. 살아 있는 한 이것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 계약자의 지배력에 따라 속박 시간이 정해집니다.

[생사의 통로]

생(生)과 사(死)의 세계를 잇는 통로를 연결합니다.

이신은 하프니스의 능력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죽음의 선고, 죽음의 사슬, 생사의 통로.

이 세 가지 전부가 고작 중급 정령의 힘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죽음의 선고는 생명체의 죽음의 안식을 빼앗는다.

그게 살아 있는 그 어떤 것이든.

그렇다는 건 어떤 생명체이든 이신이 죽일 수 있는 생명체는 언데드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지배력에 따라 너무 강력한 존재는 권속으로 만들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이것 자체로 대단하기 그지없었다.

기존의 네크로맨서들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능력이다.

중층 이상의 네크로맨서들도 모든 생명체를 언데드로 만들지는 못한다. 강력한 존재는 더더욱.

종속을 시킬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무조건적으로 언데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됐다.

죽음의 사슬은 또 어떤가?

강제 속박기다.

살아 있는 한 그 어떠한 생명체도 저항할 수 없는 속박기.

이것 또한 지배력에 따라 그 속박 시간이 정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엄청났다.

진짜 상위급 실력자들의 싸움에서는 0.1초의 속박이라도 치명적일 수 있으니.

그리고 가장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생사의 통로.'

이신은 그것을 보며 입이 떼지지 않았다.

사(死)의 세계.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세계와의 연결 통로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 통로를 넘어갈 수는 없을지라도 연결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신은 하프니스와의 계약을 너무 성급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신이 이러한 메리트를 몰랐을까?

신들의 권능을 받지 않는 것은 그것을 받는 순간 그들의 굴레에 얽히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정령의 이러한 능력을 보니 괜히 죽음의 신과 더 얽히게 되는 것 같아, 이신은 찝찝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받은 것이 많을수록 주는 것도 많아지는 법이다.

그걸 상대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게 세상의 순리이고 이치이다.

인간들의 세상에 이런 말이 있다.

공짜 좋아하면 머리 벗겨진다.

이런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이다.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이건 자신의 신도를 도와준 대가일 뿐이다.'

이미 받은 이상 더 생각해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그저 이렇게 생각하며 넘어가야 했다.

이신은 앞으로 이 능력을 어떻게 써먹을지 더 고민할 뿐이었다.

"샤칸."

"고맙다. 통찰자여. 덕분에 우리 부족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다."

[업적의 집계가 끝났습니다.]

[보상이 산출됩니다.]

"이제 떠나나?"

"그렇다. 나의 부족들은 죽음의 신님의 영역 안에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임무를 마치고 온다면 다시 한번 들러라."

"그래."

[4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도전자님의 업적이 기록됩니다.]

[200,100점을 달성했습니다.]

[200,100p를 획득합니다.]

[체력이 5,010 올랐습니다.]

[마력이 15,000 올랐습니다.]

[힘이....]

[민첩이....]

수없이 떠오르는 보상들.

이신은 이번 스테이지가 앞으로 2, 30층까지의 그 어떤 스테이지의 업적보다 뛰어날 것임을 짐작했다.

이번 스테이지의 보상에서 만족스러운 것은 지배력의 상승이다.

하프니스와 계약하고 얻은 지배력에 더해 스테이지 클리어 보상으로 지배력이 15나 더 올랐다.

현재 내게 가장 필요하며 효용성 높은 스탯.

신격이나 혼돈은 예외로 친다면 지배력의 상승이 스탯 중에서 가장 그 효용성이 뛰어났다.

[어둠서리 트롤 부족과의 친밀도가 최고조에 달합니다.]

[명성이 대폭 증가합니다.]

[사도들 사이에서 도전자님의 이름이 간혹 들리기 시작합니다.]

[『칭호 – 세계의 개척자』를 획득합니다.]

"5층 대기실로."

이신은 떠오르는 메시지들을 확인한 뒤 5층 대기실로 향했다.

* * *

커다란 산맥에 넓게 펼쳐져 있는 고블린들의 마을.

여기저기 만들어진 조악한 집들과 간혹 지어진 꽤 높은 수준의 건물들.

이신은 이 괴리감 넘치는 광경에 혀를 찼다.

"음...."

5층까지 올라오며 굳이 랭킹을 확인하지 않았다.

대충 언더모스트 도전자들의 점수는 예상되었고 그들이 벌써부터 탈락하거나 할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5층부터는 달라진다.

난이도의 선택이 가능하게 된다는 점.

이것이 사람들의 생환율을 확 떨어뜨렸다.

2층처럼 난이도를 봐 가며 중간에 포기할 수 없고 처음부터 난이도를 정해서 들어가야 한다. 중간에 포기는 없다. 실패하면 죽음뿐이다.

이신은 랭킹의 이상한 점에 눈살을 찌푸렸다.

# 1위. 박주혁 – 83,010점

# 2위. 박혜원 – 78,300점

# 3위. 김강천 – 73,820점

# 4위. 황강웅 – 71,080점

.

.

.

역시나 최상위권에는 예상에 두었던 이들의 이름이 있었지만 문제는 당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 이름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자식은 뭐 하고 있는 거지?'

언더모스트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실력자인 백현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밑으로 쭉 내려 보아도 마찬가지.

그가 사정이 생겨 늦게 5층에 도전한 탓에 아직도 5층을 클리어 중일지도 모르지만 이신의 직감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쯧."

백현의 성격을 아는 그는 백현이 헬(Hell) 난이도에 도전한 것 같다는 생각에 혀를 찼다.

가끔 아주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별들이 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주변의 다른 이들을 초라하게 만드는 그런 녀석들.

그중 하나가 차유민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대개 자신의 특별함을 알기에 더욱 위험하다.

5층의 난이도 선택은 그런 이들에게 함정과도 같은 곳이다.

밝게 빛나던 별들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았다.

5층이라면 솔로 스테이지다.

이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입 안이 쓴 것을 느꼈다.

이신은 오랜만에 커뮤니티를 띄웠다.

그의 커뮤니티에는 이미 수많은 이들의 메시지들이 가득 남아 있었으나 이신은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지웠다.

그리고 몇몇에게 백현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 박혜원 – 선배님! 드디어 답하시네요! 백현 오빠가....

# 박주혁 – 백현이 5층에서 실종됐습니다.

# 김강천 – 선배님, 도와주십쇼.

.

.

.

다른 이들의 메시지가 연달아 전달되었다.

이신은 짤막한 대답만을 보내고는 커뮤니티의 상태를 비활성화한 뒤 창을 닫았다.

5층 대기실에 있는 관리자인 고블린 마을의 촌장.

이신은 관리자에게 다가갔다.

"클클...오르겠는가?"

촌장의 말에 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헬(Hell) 난이도로."

* * *

이신의 등반 소식은 거의 초 단위로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2층을 클리어했을 때부터.

3층, 4층까지.

그의 한 발짝 한 발짝의 발걸음은 탑을 오르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4층에 이신 랭킹 떴다.

└뭐? 이번엔 도대체 몇 점이야?

└미친... 20만? 이십마안??

└무슨 짓을 했길래 20만이 나올 수 있는 거지?

└4층은 진짜 뭐가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20만은 오바인데?

└3층은 그 검은 오크를 잡았다고 생각하면 그럴 법한데, 4층에 그 이상 가는 뭐가 있어?

사람들은 이신의 4층 랭킹 업데이트 소식에 혼돈에 빠졌다.

백현의 실종 사태도 커뮤니티의 화젯거리 중 하나였지만 이신의 소식이 그것을 덮어 버렸다.

# 1위. 이신 – 200,100점

# 2위. 박혜원 – 42,100점

# 3위. 박주혁 – 41,350점

# 4위. 강지훈 – 40,015점

.

.

.

너무 터무니없게 차이가 나는 업적 점수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2층과 3층에서의 차이보다도 더 컸다.

4층은 딱히 그렇다 할 특이점이 보이지 않는 스테이지라 그런지 최상위권의 다른 도전자들의 업적 점수가 그리 크지 않았다.

2층과 3층까지는 이해가 가는 차이였지만 4층에서의 차이는 이해할 수조차 없는 격차였다.

이제는 이신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정도로.

커뮤니티에는 또 다른 흥밋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차유민의 랭킹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왔던 그의 발자취가 지금에 와서 또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처음 언더모스트의 도전자들이 탑을 오르며 네 자릿수까지 랭킹이 밀려났던 차유민.

이제는 그를 퇴물이라 부르는 사람들까지 생길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4층 그리고 5층에 많은 도전자들이 도달하면서 그가 다시 한번 두각을 드러냈다.

2층에서 1위였던 차유민이 순식간에 1000등 중반까지 밀려났던 것이.

3층에선 985위.

4층에선 803위.

5층에선.

└와... 그나저나 차유민 대단하지 않냐?

└그러게, 어떻게 단 5층 만에 저렇게 올라가냐?

└여러분은 차유민의 랭킹 역주행을 보고 계십니다.

└5층이 특수케이스라 그런가?

# 189위. 차유민 – 30,400점.

5층에 도달한 차유민은 어느새 100위권 대까지 진입해 있었다.

└지금 이렇게 보니 진짜 대단하네. 어떻게 저 때 5층의 하드(Hard)를 깰 수가 있지?

└진짜… 차유민의 재평가가 시급하다.

└지금 사람들도 익스트림까지 클리어했잖아. 그 사람들이 더 대단한 거 아니야?

└차유민이 저 사람들처럼 이신님한테 배우고 올라왔으면 헬 모드 쌉 가능 아니냐?

└ㅇㅈ.

└진짜 ㄱㅇㅈ.

└인정은 무슨, 헬을 어디 개밥으로 아나?

└그니까. 하여간 차유민 추종자들 아직도 대가리가 안 깨졌나?

└이신님도 이기겠다고 하지 그래?

└그건 좀...

└아무리 그래도 이신님은 선 넘었지.

└내가 차유민님 팬클럽 정회원인데, 나도 그건 아니라 본다.

└다 필요 없고, 제발 빨리 올라와서 메르텡 좀 도와줘!

└맞아! 제발 빨리 좀 올라와 보세요!

오늘도 커뮤니티는 불같이 타올랐다.

제30화

5층

[5층에 입장하셨습니다.]

[고블린들은 이곳에 사는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마도공학 성채를 지었습니다. 고블린들은 마도공학에 광적으로 집착하며 마도공학에 무지한 자들을 싫어합니다. 고블린들의 성채, 게르페인 성채를 함락시키십시오.]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성채.

성채 곳곳에 고블린들의 자부심인 마도공학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밤은 깊었고 해는 저물어 앞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게르페인 성채 주변을 밝혀주는 빛들이 그곳을 더욱 화려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투둑- 투둑- 투둑-

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던 이신은 하늘에서 나는 기계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신의 위쪽을 낮게 지나가던 고블린 정찰기가 문제가 있는지 빈약한 엔진소리와 함께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쯧."

시작부터 무슨 일인지.

이신은 하필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정찰기를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곤 마력을 움직여 정찰기의 추락을 막아주었다.

[페더 폴(Feather fall)]

쿠국- 쿠국- 쿠국-

정찰기 안에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무언가에 걸린 듯 거슬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추락 속도를 저하시키는 마법으로 정찰기는 땅바닥에 처박히는 대신 안전하게 한쪽 공터에 착륙할 수 있게 되었다.

"키익!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고마...인간?"

정찰기에서 내린 고블린 하나가 이신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의 고블린들은 인간을 싫어하나?'

이상했다.

마도공학을 좋아하는 고블린이라면 인간에게 적대적일 이유가 없는데.

오히려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이신은 의아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쯧, 하필이면. 아니지...도와준 걸 보면 괜찮은 인간인가?"

혼자 고민에 빠진 듯 턱을 잡고 중얼거리는 고블린.

이신은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갔다.

"하필 내 쪽으로 떨어져서 도와줬을 뿐이야."

"그런가? 아무튼 고맙다. 키익, 근데…자네 혹시 트롤 부족을 구했다던 죽음의 통찰자인가?"

"죽음의 통찰자?"

난데없는 소리에 이신은 4층에서 얻은 칭호를 떠올렸다.

[세계의 개척자]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당신에 대한 소문이 전 차원에 퍼집니다.

'이런 산맥에 있는 고블린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질 줄이야.'

그나저나 죽음의 통찰자라니.

이미 가지고 있는 칭호가 영향을 미친 게 분명했다.

"아닌가?"

"맞아. 여기까지 소문이 퍼졌을 줄은 몰랐네."

"이거 유명 인사를 만났구만. 키익, 어디를 가고 있던 건가?"

"게르페인에 가고 있었지."

"그렇군. 한동안 뜸하던 인간들이 근래 갑자기 자주 오는구만! 킥!"

"인간? 인간이 또 왔나?"

이신은 인간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같은 인간, 그것도 거의 인간이 오지 않는 곳에 온 사람이라면 무언가 이번 스테이지의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인간이 있다. 키익. 관심은 꺼라. 관심 가져서 좋을 게 없는 놈이니."

왠지 모르게 그 인간에 대해 고블린의 태도가 적대적인 게 느껴졌다.

처음에 비하면 지금의 자신에게 조금 누그러진 듯한 고블린의 태도.

이신은 고블린의 태도가 그랬던 것이 앞서 게르페인에 왔던 인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게르페인에 갈 거면 '두르긴'이 이곳 숲에 정찰기 운송 장비를 보내 달라고 했다고 얘기 좀 해줄 수 있나? 키익! 게르페인에 들어갈 때 내 이름을 팔면 조금은 친절하게 해줄 거다."

"그러지."

이신은 두르긴을 그곳에 두고 몸을 돌려 게르페인을 향했다.

혹시 몰라 마력을 퍼트려 탐지 범위를 넓혔다.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왜 하필이면 이러한 숲에 맨 처음 떨어졌을까?

헬(Hell) 난이도는 절대 만만한 난이도가 아니다.

이신은 하나의 단서도 놓치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움직였다.

'무언가 있다.'

마력의 끝에 걸리는 이 느낌.

누군가 자신과 두르긴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게 둘 중 누구를 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화를 할 생각은 없어 보여, 이신은 우선 게르페인에 먼저 가 보기로 했다.

"키익! 멈춰라! 인간인가?"

게르페인 성채의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가 이신을 막았다.

"이곳엔 왜 왔지?"

역시나 두르긴 때와 같이, 경계하는 듯한 태도.

문지기인지라 의무적인 행동이기는 했지만 말속에 담긴 그 감정은 분명 단순 일인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이곳에 가면 마도공학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마도공학? 너도 마도공학에 관심이 있나? 음... 근데 자네 혹시… 죽음-."

"맞습니다. 죽음의 통찰자."

"키익! 킥! 역시 그렇구만!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이런 대단한 마법사가 마도공학에 관심이 많다니 이거 환영할 일이군."

"예. 그리고 오는 길에 두르긴을 만났는데, 정찰기가 망가져서 도움이 필요한 듯하더군요."

"두르긴도 안다고? 허, 좋아, 들어가도록."

문지기의 허가가 떨어지자 커다란 문 밑으로 작은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성채 안의 모습은 일반적인 다른 곳과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다만 이곳이 고블린들의 성채라는 점.

기껏해야 1m 안팎의 고블린들이라 작은 건물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이신은 정보를 모으기 위해 성채 안을 천천히 걸었다. 대부분 거주지역은 불이 꺼져 있었고 그나마 이 시간대에도 환한 장소는 대장간들이 모여 있는 구역이었다.

좀 더 여유롭게 다른 곳도 확인해 보았다.

넓은 성채를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벌써 밤이 지나 곧 새벽녘이 밝아올 때였고, 이신은 이때까지도 아직 불이 들어와 있는 한 건물을 향해 움직였다.

"계십니까?"

대답은 없었지만 허술하게 열려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도안들이 눈에 띄었다.

바닥에 떨어진 도안 하나를 집어 들어 무엇인지 보았다.

어지러이 그려진 설계면.

단순 어떠한 장치를 만들기 위한 설계면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쓰여진 마법적 수식과 그런 수식들을 계산하다가 화라도 난 듯 그 위를 휘갈겨 지워진 것들도 보였다.

'마도공학의 수준이 꽤 높은데?'

생각 이상의 수준이었다.

고블린들을 멍청하다 생각하지만 생각보다 마법에 대한 이론이 제법 자리 잡혀 있는 종족이다. 물론 그것도 고블린들의 부족들마다 다르지만.

땅! 땅! 땅! 땅!

도안을 내려놓고 안쪽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망치질 소리에 그곳으로 움직였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으로 조심스레 내려가자 쇠를 두들기는 고블린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냐!"

이신의 인기척을 느낀 고블린 하나가 소리쳤다.

"아, 불이 켜진 곳이 이곳뿐이라 들어왔습니다."

이신은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쯧, 인간들은 매너라는 걸 모르는군."

"그러면 문이라도 잠가 놓지 그러셨습니까?"

"에잉! 내 집 문도 내 맘대로 못 하냐! 키익!"

화라도 벌컥 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저 고블린은 인간에 대한 경계를 딱히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집에 들어온 것도 그냥 조금 짜증 나 보일 뿐,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내쫓지 않으십니까?"

"나가라면 나갈 거냐?"

"음...."

"쯧, 고민하는 척은. 왜 왔어? 보니까 오늘 처음 온 놈팽이 같은데."

고블린은 귀찮게 하면 들고 있는 망치를 던져 버릴 것 같은 자세로 이신에게 말했다.

이신은 피식 웃으며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설계 도안을 하나 집어 들었다.

역시나 이것도 망한 것인지, 마법 수식에 줄이 쫙쫙 그어진 상태로 구겨져 있었다.

"마나 저장 장치에 시간이 지나면서 치솟는 열을 막는 것 때문에 골치이신가 봅니다. 이렇게 큰 마나 저장 장치의 방열이라...뭐 공성 병기라도 만드는 겁니까?"

"키익! 뭐야? 너 마도공학자냐?"

"마법사입니다."

이신의 말에 고블린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했다.

조금 전까지의 그 귀찮다는 듯한 얼굴은 사라지고 호기심과 기대감만이 가득 찬 표정이 되었다.

너무 급격한 변화에 황당할 정도였다.

"뭐, 아는 것 있나? 저기에서 뭐가 잘못된 거지? 아무리 해도 엔진을 10시간 이상 돌리면 다른 부품에 이상이 생기는 걸 막을 수가 없어! 그렇다고 출력을 낮출 수도-."

"방열의 방식이 잘못됐습니다. 열을 식히거나 빼내려는 방식부터 고쳐야 합니다."

"키이익! 뭐? 그럼 어쩐단 말이냐!"

몇 마디나 나눴다고 벌써 흥분하는 건지.

고블린은 어느새 이신의 코앞까지 와서 옷을 붙들며 말하고 있었다.

"열을 다른 동력으로 바꿀 수도 있죠. 가령, 그 치솟는 열기를 마력으로 치환해서 마법으로 사용하든가...."

"뭐? 키익! 키익! 그게 가능하단 말이냐!"

"뭐...가능합니다."

이신은 잔뜩 흥분해서 눈이 뒤집히기 직전인 고블린을 보며 씨익 웃었다.

* * *

하루도 안 돼서 이곳 대장간의 고블린인 보르긴과 친밀도를 거의 끝까지 올렸다. 그리고 이신은 그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자네가 오기 전에 한 인간이 와서 난리가 났었지. 그 인간도 마법을 조금 다룰 줄 알았어. 그래서 게르페인의 많은 고블린들이 그 인간에게 관심이 있었지."

마법을 다룰 줄 안다라······.

"그자도 마법사였습니까?"

"아니네,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 인간은 검을 쓴다고 했네."

마법도 좀 알고 검을 주로 쓰는 인간이라.

마검사인가? 아니면 마법적 이론을 조금 알 뿐인 검사인가?

"그 인간이 우리 성채의 성주님에게 덤벼들었다가 지금은 지하 감옥에 갇혔다고 들었네. 참 바보 같은 인간이지. 킥."

"성주님이 그렇게 강하십니까?"

"그렇다네. 엄청난 분이시지."

이신은 이번 스테이지가 만만치 않을 것이란 것을 직감했다.

"아, 며칠 뒤에 성주님에게 갈 일이 있는데, 자네와 같이 만든 마도공학 도안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라네. 성주님이 자네를 좋아하실 거야."

"같이 만들었다뇨, 전 그저 몇 마디 거들었을 뿐인데."

"그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지.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게. 조만간 성주님이 자네를 초대할지도 모르니."

이신은 보르긴의 공방에서 며칠을 지냈다.

그러면서 보르긴을 도와 마도공학 기계를 만드는 데 조금씩 조언을 해주었고 그러면서 이신도 제법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스킬 - 마도공학 Lv.1』을 습득합니다.]

기존에 있던 마법적 지식이 뛰어난 탓인지 마도공학이라는 분야에 대해 이해하는 게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원래 알고 있던 것들도 꽤 있었지만 보르긴은 이 분야에 제법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이신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보르긴이 성주를 만나고 돌아온 뒤, 성주의 초대장을 받았다.

앞서 왔던 인간도 마법에 대한 지식 덕분에 성주에게 초대를 받고 성에 들어갔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주에게 덤비다 지하 감옥에 갇힌 것이고.

이신은 기회가 된다면 지하 감옥에 가서 그 남자를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초대장을 받은 뒤 하루가 지나자 보르긴의 공방 앞으로 컨버터블(Convertible) 마도공학 자동차가 도착했다.

천장이 없는 오픈형 마도공학 기계로, 성에서 보낸 운전자가 이신을 태우고 성으로 향했다.

이곳 마도공학 성채는 곳곳에 마도공학의 기술력이 눈에 띄었는데 성주의 성은 그것이 더욱 도드라졌다.

특히 성 주변에 보이는 저 거대한 로봇들.

4, 5m가량 되는 타이탄들이 성을 지키는 모습은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성안으로 들어간 이신은 응접실에 앉아 이곳의 성주를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얇은 갑옷을 입고 나타난 성주를 볼 수 있었다.

"키익! 킥! 반갑군, 내가 이곳 게르페인의 성주 고르긴이네."

"이신입니다."

이신은 마력을 퍼트려 고르긴이 착용하고 있는 물건들의 파장을 읽었다.

대충 보아도 옷이며 장신구며 하나하나가 뛰어난 마도구였다.

이러니 그 인간이 고르긴을 습격해도 실패했겠지.

"자네가 그 유명한 죽음의 통찰자라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저 명칭을 자꾸 들으니 죽음의 신의 사도라도 된 듯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키익, 이런 마법사와 담론을 나눌 수 있다니, 영광이구만. 나에게도 자네의 마법 지식에 대해 들려주겠나?"

"얼마든지요."

* * *

이신은 고르긴의 요청으로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며 그와 마도공학의 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 전에 인간에게 습격을 받았음에도 별걱정도 되지 않는지, 고르긴은 계속 이신에게 이 성에서 지내라고 말했다. 고블린들의 마도공학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고르긴은 그 누가 덤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우선, 최대한 이곳의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타이탄들의 보관 장소, 지하 감옥의 위치...'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고르긴의 타이탄이 있는 장소.

아직 그 장소를 알아내지 못했다.

- 나의 타이탄은 정말로 대단하지! 이곳의 모든 타이탄이 덤벼도 이기지 못할 만큼 말이야.

고르긴은 매일 같이 자신의 타이탄을 자랑했고 정말 자랑스러워했다.

'초월(超越)급의 타이탄일 리는 없겠고···성단(城段)급 정도 되려나?'

초월급이 나오기에는 아무리 헬(Hell) 난이도라도 무리이다.

초월급은 홀로 국가 하나를 박살 낼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을 가진 타이탄이다. 솔직히 성단(城段)급의 타이탄도 5층에서 나오기에는 너무한 일이긴 하다.

성단급이라면 하나의 성 전체라 볼 수 있을 정도의 전력.

5층, 이제 막 등반을 시작한 도전자들에게는 말도 안 되게 가혹한 병기이다.

'성단급이 아닐 확률도 있지만 최대 전력을 그 정도로 잡는 게 맞겠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탑, 특히 이 정도의 난이도의 탑은 조심 또 조심을 해도 언제 죽어 나갈지 모를 곳이니까.

"잠시 외출 좀 하고 오겠습니다."

"어디 가나?"

"보르긴과 할 얘기도 있고 같이 작업하던 것도 한 번 봐줄 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알겠네."

고르긴과의 친밀도가 그사이 워낙 높아져서 이 정도의 외출은 크게 터치 받지 않았다.

다만, 그 전의 인간과의 전례가 있던 터라 아직 알게 모르게 깔린 경계심을 지우기는 시기상조였다.

이신은 고르긴의 성을 나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성채 밖으로까지 나갔다.

"보르긴 영감이 부탁한 재료를 수급하러 갑니다."

"알겠네."

문지기에게 보고를 하면 성주의 귀에도 들어가겠지만 상관없었다.

이 정도야 대충 둘러대면 될 일이니.

지금은 한 번 밖으로 나가야만 할 때이다.

이신은 성채의 밖.

꽤 깊은 숲속까지 들어갔다.

온몸을 찌르는 듯한 이 감각.

얼마 만에 느끼는 살기인가?

"언제까지 숨어서 그럴 거지? 이야기나 하자고. 이곳엔 고블린이 없으니."

이신의 말에도 주변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쓴 웃음을 내뱉은 이신이 어느 한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고블린을 피해 숨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나한테서도 도망칠 건가? 어디까지 숨을 거지?"

이신의 도발이 담긴 말에 주변의 공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살기.

증오. 적의. 분노.

그 적나라한 감정들이 이신에게 몰려들었다.

그제서야 이신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그래, 이제야 오우거답네."

그의 앞에 거대한 실루엣이 서서히 드러났다.

제31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느꼈던 그 진득한 살기.

그건 이신을 향하던 것이 아니었다.

"크르르...."

낮게 깔린 울음에 경계심이 깔려 있다.

어두운 밤.

달빛만이 나뭇잎들 사이로 듬성듬성 땅을 비추고 그 외의 공간은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신은 붉게 타오르는 안광으로 자신을 살피는 오우거를 직시했다.

이런 곳에 오우거가 있을 이유가 없다.

오우거는 산맥의 제왕이라 불리는 존재.

이 주변에도 분명 산맥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초입은 오우거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놈도 짙은 마력을 느낀 것인지 선뜻 움직이지 못한 채 경계심만 끌어 올리고 있다.

"내가 알던 오우거는 다 죽었나 본데."

"건방진 인간이군...."

후웅- 쾅!

오우거가 땅에서 튕겨지듯 쇄도했다.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은 민첩한 속도와 땅이 움푹 팰 정도의 강인한 힘.

역시 오우거는 오우거였다.

예상이라도 한 듯 가볍게 오우거의 공격을 피한 이신을 향해 다시 휘둘러지는 몽둥이.

그때, 이신의 코앞에 나타난 검 하나가 오우거의 몽둥이를 가로막았다.

"힘 하나는 장사군."

깊게 잠겨 있는 듯한 목소리에는 약간의 흥분이 담겨 있었다.

"넌… 뭐지?"

"여기 주인님의 충성스러운 기사이자, 적안의 검사라 불리는 몸이지."

워리의 붉은 안광이 더 강하게 타오른다.

그 붉은 오러가 몸을 타고 검으로 전해진다.

"고작 스켈레톤 따위가!"

자신의 공격이 스켈레톤 따위에게 막혔다는 게 자존심이 상한 듯 오우거의 공격에 한층 더 힘이 실렸다.

둘의 공격이 맞닿으며 기파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력을 끌어 올려도 힘으로는 오우거를 이기기 힘든지 워리의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오우거의 거센 공격이 연달아 이어지던 중.

후우웅―

콰앙! 화르륵-

"크아아악!"

어디선가 날아온 화염구가 빈틈을 노리고 오우거의 머리에 적중했다.

"어딜 끼어들어!"

워리가 분노하며 화염구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지팡이를 들고 로브를 뒤집어쓴 메이가 워리를 보며 클클 웃고 있었다.

"밀리고 있던 놈이 자존심은 세 가지고."

"안 밀렸다!"

"크아아악! 감히 이것들이!"

오우거의 마력이 더욱 거세게 뿜어지며 주변의 공기가 급격히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모두 죽여 주-."

"그만!"

그때 오우거의 말을 끊고 들어온 이신의 목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이쯤 하지?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야."

"누구 맘대로 그만한다는 거냐!"

"다른 놈들이 모조리 죽어도 상관없나 봐?"

이신의 말을 듣고 나서야 흥분감을 가라앉힌 오우거가 어느새 숲 곳곳에 퍼진 이신의 마력을 알아차렸다.

어둠에 잠긴 숲에 안개처럼 퍼진 검은 마력.

그 마력 안에 담긴 살벌한 감각은 오우거인 자신에게도 섬뜩하게 느껴졌다.

어둠에 숨어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숲의 다른 종족들.

그들은 자신의 명령에 따라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법사의 인질이 되어버렸다.

오우거의 치솟던 마력이 가라앉았다.

"제법이다, 인간."

은밀하면서도 강렬한 마력.

죽음의 기운이 풀풀 풍기는 검은 마력은 언제라도 적들을 쓸어버릴 듯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아무리 흥분을 했거니와 자신이 마력을 곧장 눈치채지 못한 것에 오우거는 조금 놀란 상태였다.

"이야기할 준비가 됐나?"

* * *

숲의 한 가운데.

이신과 오우거는 서로를 마주하고 앉았다.

덩치가 맞지 않아 눈높이가 맞지 않았던 이신은 높은 돌탑을 세우고 그 위에 앉았다.

"그러니까, 우리와 동맹을 하러 왔다는 건가?"

"그래."

"너는 분명 고블린들의 성채에 들어갔다. 저번엔 고블린을 구하기도 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고블린들의 성채는 쉽게 무너지지 않아. 내부에서 누군가 흔들지 않으면 너희들 전력으론 턱도 없다."

"크르...."

이신의 말에 오우거가 인상을 찌푸리며 분노에 찬 울음을 내뱉었다.

이곳 숲에 사는 이종족들.

이들은 어느 날 쳐들어온 고블린들에 의해 그들의 터전을 빼앗기고 땅을 강탈당했다.

고블린들은 그들의 삶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공생하려 하지도 않았다.

"너는 왜 이곳에 있지? 오우거는 너뿐이야?"

"그렇다… 내 동족들은 모두 고블린들에게 죽었다."

"고블린들이 왜 갑자기 쳐들어온 건데? 굳이 너희들과 반목해서 녀석들에게 좋은 게 뭐가 있다고? 너는 오우거이고 고블린 따위에게 당할 놈들이 아닌데."

"이곳 산맥에 있는 자원들이 탐났겠지. 고블린 놈들은 저 고철 덩어리에 미친 놈들이니까."

이신은 그제서야 이들의 관계가 대충 그려졌다.

고블린들은 그 뛰어난 마도공학의 기술로 이쪽 산맥의 이종족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산을 밀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근처의 모든 자원을 독점하려 한 것.

"너는 정체가 뭐지? 죽은 자들을 다루는 마법사라니."

"그것까진 알 거 없어."

이곳 이종족들에게는 자신의 명성이 퍼지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고블린을 치려는 이유는 뭐냐?"

오우거는 아직까지 의심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너희들은 왜 고블린들 따위에게 터전을 빼앗겼지?"

뜬금없는 질문.

이신은 오우거의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 망할 고철 덩어리 때문이다! 놈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절대 우리를 이길 수 없다! 그니까 빨리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라!"

이신의 말에 흥분한 오우거가 발작이라도 하듯 고성을 내질렀다.

그 흉포한 기세를 바로 코앞에서 받는데도 이신은 꿈쩍도 하지 않고 오우거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그것들은 타이탄이라 부르는 병기지. 단순한 고철 덩어리가 아니야."

"그게 뭐가 중요한가!"

"중요해. 내가 고블린들을 치려는 이유가 거기 있으니."

오우거들은 제법 지성이 높지만 단순하다.

자신의 말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놈을 보며 이신은 말을 이어 갔다.

"타이탄은 너희 오우거들을 이길 정도로 엄청난 병기지. 그중에서도 아마 저 고블린들의 성주가 사용하는 타이탄의 성능은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

"맞다. 그 거대한 고철… 아니, 검은색의 타이탄이라는 것이 우리 동포들을 죽였다."

"그렇게 대단한 타이탄에는 그만큼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 그리고 그 에너지원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난 그걸 빼앗으러 가는 거다."

말을 끝낸 이신이 주변을 훑어보다 눈짓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건 뭐지?"

오래되어 보이는 기둥과 석판들.

낯익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들이 모시는 신의 제단이다."

"...또."

"또? 무슨 말이지?"

"아니, 아무것도."

* * *

"오! 왔나? 나갔던 일은 잘 마무리했는가?"

"예. 조만간 괜찮은 작업물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거 기대되는군."

이신은 성으로 돌아와 오늘도 어김없이 고르긴과 만찬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바깥에서 이종족들을 만났습니다."

"뭐? 무슨 일이 있었나?"

갑작스러운 얘기에 놀란 표정으로 고르긴이 물었다.

"놈들이 저를 습격했습니다만… 그 정도에 당할 만큼 허약하진 않아서. 아무튼, 놈들이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고블린과 한패냐고. 그러길래, 무시하고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근데 저 주변 산맥의 이종족들과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우리들뿐 아니라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 있지. 우리들이 저 녀석들을 몰아내고 이곳을 차지했다고. 하지만 그건 잘못된 이야기야. 애초에 전제부터 잘못되었지."

"숨겨진 내막이 있습니까?"

"그렇다네. 오히려 일상을 빼앗긴 건 우리 고블린들이네. 저놈들은 우리들을 잡아다가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바쳤지. 우린 어쩔 수 없이 희생당해야 했네."

그렇게 고르긴의 한탄 아닌 한탄을 한참 동안 듣던 이신이 자신의 방에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양쪽의 입장은 서로 완전히 달랐다.

누가 거짓이고 누가 진실일까?

아님, 둘 다 거짓인가.

이후로 이틀이라는 시간이 더 지났다.

고르긴은 이신에게 꽤나 마음을 연 듯 보였지만 안쪽에 있는 진짜 벽은 허물어지지 않았음을 이신은 느끼고 있었다.

지하 감옥이 어딨는지, 어떤 녀석들을 가두어 두는 곳인지는 알아낼 수 있었지만 이신을 들여보내 주지는 않았다.

고르긴의 타이탄을 보기도 했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곳의 경계는 매우 철저했고 타이탄이 보관된 장소는 알아내지 못했다.

가장 베스트는 고르긴이 타이탄을 탑승하기 전에 죽이거나 그 타이탄을 가동하지 못하게 부수는 것인데 아무리 보아도 그건 불가능했다.

더구나 지하 감옥에 갇혔다는 그 인간을 한 번 봐야 무언가 실마리가 풀릴 것 같은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고르긴과의 이 벽을 허물어야 한다.

삐- 삐- 삐- 삐-

갑작스럽게 들리는 경고음.

성 내부는 한순간에 난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고르긴의 물음에 병사 하나가 와서 상황을 알려 주었다.

"이종족들이 대규모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성채로의 침공입니다!"

"뭐?"

급격하게 굳어지는 표정.

그럼에도 고르긴의 얼굴엔 패배의 두려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타이탄 부대를 대기시켜라. 성채 방어를 준비해! 수성에 돌입한다! 키익!"

이신은 고르긴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종족들이 갑자기 왜 저러는 겁니까?"

"나도 모르겠네. 걱정 말게, 놈들은 성문도 뚫지 못할 테니."

"그렇습니까? 고르긴 님도 출격하시는 겁니까?"

이신의 물음에 고르긴의 눈빛이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관찰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

고르긴은 이 사태에 대해 이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내가 나설 정도는 아닌 것 같군. 자네는 어찌하겠나?"

"저도 돕겠습니다. 이종족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고르긴의 눈빛이 살짝 풀렸다.

"자네까지 그럴 필요는 없는데."

"아닙니다. 성벽으로 보내 주십시오."

"손님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자네는 지켜만 보고 있게. 우리들의 마도공학의 위력을."

바깥에서는 벌써부터 고블린들이 수성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르긴과 이신은 다급하게 성벽이 있는 곳으로 갔다.

성벽 위에 올라서니 엄청난 수의 이종족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많기도 하군.'

우어어어어어어어―!

선두에 선 오우거의 거센 포효.

그 한 번의 포효가 이종족들의 사기를 최대로 끌어냈다.

"온다!"

"쏴라!"

"다 죽여 버려!"

마도공학 성채는 성벽부터 각종 기술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다. 아무리 이종족들이 수가 많고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 화력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하등한 놈들이 발악을 하는구나."

오우거에 뒤에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박쥐가 작은 날개를 펄럭이며 오우거의 머리 위에 앉았다.

오우거는 자신의 머리 위에 무언가가 올라타는 감각에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표정이 굳을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저건 뭐지?"

"스켈레톤?"

그리고 그들 뒤로 나타난 두 개체의 스켈레톤.

고블린들은 예상외의 적들이 나타나자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들의 마도공학 대포가 이종족들을 향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키익! 스켈레톤이 뭐가 중요해? 쏴라! 저 해골의 뼛가루도 남기지 마!"

팡! 팡! 팡!

콰아앙―!

포탄이 도달한 곳에 거대한 폭음과 먼지들이 흩날리며 이종족들을 피죽으로 만들었고 이종족들은 그 포탄을 몸으로 맞으며 그냥 밀고 들어갔다.

높디높은 성벽을 넘기 위해 몰려든 이종족들이 그 벽을 넘지 못하고 무수히 죽어 나갔다.

"릴리안 님! 지금입니다!"

보다 못한 메이가 소리쳤다.

"보아라, 전장에서의 피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공성이 시작되고 그 짧은 시간 동안 흩뿌려진 수많은 피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그 피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각기 다른 미사일의 형태로 변해 갔다.

"피는 또 다른 피를 부르지...."

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미사일들이 날아가 성벽 곳곳에 설치된 마도공학 대포들을 터트렸다.

콰콰콰콰콰쾅!

"키익! 킥! 대포가!"

"도망쳐! 적들이 사술을 쓴다!"

"피, 피가 날아온다! 키이익!"

단 한 번의 혈마법에 혼비백산이 된 고블린들을 보며 릴리안이 거만한 얼굴로 오우거를 보았다.

"보았느냐."

"크륵... 대단하...압니다."

"이제 알아서 해라."

오우거의 머리 위를 벗어난 릴리안이 뒤쪽에 있던 메이의 위로 올라탔다.

그러자 족쇄라도 풀린 듯 표정이 풀어진 오우거가 급발진하여 성벽의 벽을 내리쳤다.

쾅! 쾅! 쾅! 쾅!

순식간에 휘둘러진 몽둥이 한 방 한 방에 성문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키익! 키이익!"

"성문이 부서진다!"

"오우거를 막아!"

오우거의 마력이 점점 더 짙어지자 성문에 금이 가더니 후두두 무너져 내렸다.

기세를 탄 이종족들이 성벽에 쇄도하며 그들의 몸을 성안에 구겨 넣기 시작했다.

"막아!"

"막아라!"

한순간에 변해 버린 전황.

하나의 강자가 전장의 판도를 뒤집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할 건 없어 보이네."

"아주 기세가 탔는데?"

메이와 워리가 이종족들의 공성을 지켜보며 말했다.

"크라라라! 성문이 무너졌다! 고블린들을 죽여라!"

오우거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또다시 포효를 내질렀다.

성문이 무너졌으니 함락은 시간문제이다.

* * *

고르긴은 성벽 위에 올라 이종족들을 보았을 때만 하더라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선두에 있는 오우거와 그 뒤의 해골들을 볼 때 순간적으로 드는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적중했다.

"해골이 저런 사술을 쓰다니, 저런 놈들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군."

고르긴이 이를 아드득 갈며 말했다.

"타이탄 부대를 출격시켜라."

고르긴의 음성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디스트로이어(Destroyer)를 대기시켜. 내가 나선다."

고르긴의 성단(城段)급 타이탄 디스트로이어가 드디어 움직였다.

그리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이신의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걸렸다.

제32화

이신을 성벽 위에 두고 타이탄을 가지러 사라지는 고르긴.

"쫓아가."

이신은 고블린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사령을 바라보며 말하고는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벽이 일부 무너진 탓에 분주해진 고블린들.

그 무너진 곳을 어떻게든 뚫고 가려는 이종족들.

성벽이 일부 무너졌다 하더라도 이종족들이 이길 확률은 여전히 현저히 낮았다.

우우우웅―

벌써부터 들리는 기계음.

성 안쪽에서 날아오는 타이탄들의 모습이 보인다.

총 12기의 타이탄.

이미 성벽을 뚫고 안으로 들어온 이종족들이 있지만 저 타이탄이 막는 순간, 이종족들에게 넘어갔던 기세는 금방 다시 고블린들에게로 넘어갈 것이다.

'이제 네가 활약할 차례다. 군도.'

성벽 아래의 한쪽 구석으로 움직인 이신의 팔찌에서 마력이 빠져나와 군도가 소환된다.

이미 안쪽으로 들어온 이종족들 때문에 난장판이 된 상태.

"제대로 휘저어 봐라."

"알겠다!"

군도가 땅을 박차고 난장판이 된 성문의 안쪽으로 향했다.

"키, 키익!"

그때 들려오는 괴성에 이신이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고블린이 손가락질하며 이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인간… 너, 너 배신-."

"쉿."

푹!

"키...익...."

이신의 손가락 끝에서 날아간 다크 에로우가 고블린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절명해버린 고블린을 그 자리에 내버려 둔 채 이신은 다시 성벽을 올랐다.

콰앙―! 쿵!

"크아아아악!"

"이 녀석은 뭐냐! 키익!"

"안쪽에 괴물이 하나 더 있다! 막아라!"

"타이탄! 타이탄!"

군도의 등장으로 더욱 난리가 난 성문의 상황. 그걸 바라보던 이신은 느껴지는 마력의 파동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에너지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나도 슬슬 움직여야겠네."

* * *

콰앙-! 쾅! 쾅! 쾅!

오우거의 거대한 몽둥이가 타이탄의 몸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크라락! 이딴 고철 덩어리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키익!"

오우거보다 조금 작은 타이탄이 오우거의 거력에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쉬이잉― 콰과광!

옆쪽에서 날아온 포탄들이 오우거를 가격했다.

폭발로 인해 일어난 연기 속에서 튀어나온 오우거의 팔이 타이탄 팔을 잡아채며 몸체와 그 팔을 분리시켜 버렸다.

"어서 들어가라!"

"고맙다!"

자그마한 기계에 타고 있는 고블린 하나를 기계째로 베어 낸 워리가 타이탄이 막고 있던 성문의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이미 난장판인 상태.

그때 워리의 눈에 반가운 얼굴이 하나 보였다.

"군도!"

타이탄 셋에 둘러싸여 힘겹게 싸움을 지속하고 있는 모습.

이미 온몸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카가가각―!

뒤쪽에서 기습적으로 가한 내려베기.

워리의 검에 타이탄의 배리어가 부서지며 팔 안쪽이 떨어져 나갔다.

'쯧.'

팔을 베어냈지만 워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배리어가 아니었다면 단번에 몸체를 두 동강 냈을 텐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덤벼라! 이 고철 덩어리들!"

군도는 괴성을 내지르며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군도를 돕기 위해 워리가 합류했지만 그와 함께 타이탄 하나가 더 달라붙었다.

"비겁한 놈들...4:2라니. 너희가 그러고도 전사인가!"

"키익! 우린 전사가 아니다! 멍청한 해골바가지."

"뭐, 뭐? 멍청한 해골바가지?"

"키익! 킥! 죽어라!"

워리의 검에 뻗어 나간 마력이 타이탄의 포탄을 베어낸다.

"내가 왜 적안의 검사라 불렸는지 알려 주지."

붉게 물든 안광.

워리의 시야에 사방에서 날아오는 포탄들의 궤적이 그려지듯 보인다.

그 궤적을 따라 부드럽게 그어지는 베기.

워리를 향해 날아가던 포탄들이 허무하게 잘려 버린 채, 그 위력을 다 발산하지 못하고는 사라진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타이탄들이 멈칫했다.

"자, 다음은 너희들 차-."

후웅― 콰아아앙!!

저 멀리서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에너지 포.

워리의 신형이 그대로 날아가 성벽에 처박히고 그가 들고 있던 검은 그대로 바스러졌다.

주변에 있던 군도와 타이탄들도 그 여파로 튕겨지듯 날아가고 땅은 커다란 피탄지를 남겼다.

"크허억...."

워리가 성벽에 박힌 채로 안광을 번득였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무력한 감각.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뼈가 금방이라도 가루가 될 것만 같았다.

'분명 궤적을 보았는데....'

궤적은 읽혔다.

그러나 그것에 반응할 수가 없었다.

워리는 한순간에 자신을 무력화시킨 저 괴물을 보았다.

바깥에 있는 오우거보다도 더 큰 거체를 가진 검은색 타이탄.

놈의 등장 하나로 전장의 공기가 바뀌었다.

이종족들은 마치 드래곤이라도 본 듯 기겁하며 도망치려 했고 고블린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이종족들을 조롱했다.

철컥! 쿠웅- 파앙―!

타이탄의 왼 장갑의 손등에 달린 곳에서 또다시 에너지 포가 발산했다.

이종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크아아아악!"

"도망쳐!"

"죽는다! 죽어!"

사방으로 비산하는 이종족들의 살점들.

대부분의 사체가 그대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워리가 어떻게 저 에너지 포를 맞고도 버텼는지 신기할 정도로 강력한 위력.

"성단(城段)급. 그중에서도 하(下) 체급 정도인가?"

이신은 성벽의 위에서 디스트로이어의 전력 분석에 몰두했다.

"음?"

저 멀리서 다가오는 붉은 영체.

이미 사령으로 변해 형체가 존재하지 않은 그 영혼이 이신과 교감했다.

"그래?"

사령과의 이야기를 마친 이신은 그 사령을 흡수했다.

그리곤 다시 전장에 집중했다.

어느새 타이탄을 뚫고 안으로 들어온 오우거가 디스트로이어를 향해 마력을 끌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이신은 슬슬 자신이 나설 때라고 생각하고 성벽을 내려왔다.

성벽 위에서 전장의 상황을 전부 살피고 있던 이신의 마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력이 깃든 은나무 지팡이]

마력 농도가 높아 일반적인 식물은 살아갈 수 없는 에르텔 산맥에서 자라난 은나무로 만든 지팡이.

# 마력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

# 마력 저장량: 300,000/300,000

# 마력 포화 상태에서 사용자의 마력을 낮은 확률로 증가시킵니다.

# 하급 정령과 계약.

이미 릴리안의 대규모 혈마법과 메이와 워리의 소환 덕에 마력이 급격히 떨어져 있었지만 은나무 지팡이의 마력 저장량 30만 덕에 아직 마력은 충분했다.

이제는 고르긴이 나서기 전에 싸움을 끝내야 할 때이다.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

[아이스 스피어(Ice spear)]

[엑셀러레이션(Acceleration)]

[토크(Torque)]

[페네트레이션(Penetration)]

고블린과 이종족들의 전쟁으로 인해 비산하는 피들이 점점 굳어갔다.

급격히 내려가는 온도에 이종족들이 변화를 감지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먼저 이 변화를 감지한 디스트로이어가 이신을 향해 움직였다.

"뭐 하는 건가!"

고르긴이 갑작스런 이신의 난입에 물음을 표했다.

그 물음 속엔 '설마 저 이종족들을 도우려는 건가?' 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제가 말했잖습니까."

이신은 피식 웃으며 디스트로이어 안에 있는 고르긴과 눈을 마주쳤다.

"다 죽여 버리겠다고."

이신의 지팡이가 위를 향하자, 어느새 전장을 뒤덮는 거대한 마법진 속에서 수백 개의 얼음의 창이 생성되었다.

블리자드(Blizzard).

7위계 대마법의 열화판.

지난 생에 이신의 주력 마법 중 하나였던 그 블리자드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5층의 이종족들에게는 충분한 위력을 장담했다.

카가가가가각!

파바바바바박!

고도에서 떨어져 내린 얼음의 창들이 땅에 박힐 때마다 이종족들이 빈사 상태에 빠졌다.

"하프니스."

허공이 찢어지듯 벌어지며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 속에서 검은 낫을 들고 있는 유령이 나타났다.

- 불렀는가.

"자, 심판의 시간이다."

- 알겠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어둠 속에 스며든 하프니스의 낫이 수백 개로 분리되어 이신이 만든 얼음의 창에 맞은 이종족 괴물들을 베어 냈다.

이신은 전장 속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으로 인해 만들어진 죽음의 그림자.

그들에겐 예상치 못한 날벼락이었지만 이신에게는 아니었다.

그가 마음먹음으로써 나타난 당연한 결과.

이신의 차디찬 눈동자엔 일말의 자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가아아아안―!"

오우거가 쏟아지는 얼음의 창 세례를 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분노로 가득 찬 그 고성에 주변 고블린들이 피어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죽여 버리겠다!"

콰직!

오우거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땅에 거센 크레이터가 생길 정도의 힘.

"그렇겐 안 되지. 키익!"

파앙―!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던 오우거가 디스트로이어의 주먹에 맞고 성벽 밖으로 날아갔다.

오우거를 날려 보낸 디스트로이어가 성벽 위에 올라섰다.

"자네 대단하군."

고르긴은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이신을 바라보았다.

"디스트로이어에 비하면 별거 아닙니다."

"미안하네."

"뭐가 말입니까?"

다짜고짜 하는 사과에 이신이 물었다.

"아니네. 그럼 난 저 녀석이나 마무리 짓겠네."

디스트로이어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신은 그가 움직인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콰앙!

오우거와 디스트로이어의 힘과 힘의 대결.

서로의 주먹이 마주치며 그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신은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오우거는 역시 오우거였다.

저 디스트로이어의 거력에도 제법 비등한 힘을 보여 주고 있었다.

콰앙! 쾅! 쾅! 쾅!

둘의 치열한 싸움은 생각보다 이르게 끝났다.

이미 잔뜩 분노에 휩싸인 오우거는 여유 있는 디스트로이어에게 허무하게 당했고 싸움은 고르긴의 승리가 되었다.

"키익! 남은 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항복은 없다!"

고르긴의 선언과 함께 이종족들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 * *

"자! 한잔하시게!"

고르긴의 축배에 이신이 잔을 부딪쳤다.

"자네 덕분에 이종족 놈들을 손쉽게 처리했어."

"아닙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야. 자네를 내가 알아보긴 했네만...그간 있는 명성이 허명이 아니었군. 킥!"

고르긴은 아주 기분이 좋은 듯 술을 벌컥벌컥 마셨고 이신은 적당히 마력을 돌려 취기를 빼내며 마셨다.

"그 사술을 쓰던 스켈레톤을 잡지 못한 게 아쉽군. 어디로 내뺀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이신은 태연하게 모른 척 연기했다.

혈마법을 쓴 녀석이 워리와 메이는 아니었지만 이신은 오해를 풀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그 많던 이종족 놈들의 시체들이 거의 다 사라졌어. 그 해골 놈의 짓이 분명해. 도대체 그 많은 시체들을 어떻게 가져간 거지?"

고르긴은 답답한 듯 이신에게 토로했지만 답변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닌 듯했다.

"지하 감옥에 갇힌 인간도 마법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그래도 자네만큼은 절대 아니네. 내 장담하지."

"그래도 어느 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있는 법이죠. 한번 만나 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흐음... 원래 그곳은 외부인을 절대 들여보내는 곳이 아닌데...."

조금 고민에 빠진 듯 보이던 고르긴이 조금 뻘게진 얼굴로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더니 이신에게 지하 감옥의 출입을 허락했다.

"감사합니다."

"내가 시종장에게 말해 놓겠네."

두 사람의 술자리가 기분 좋게 끝나고 이신은 다음 날이 되어서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

벌써 이곳 5층에서만 열흘을 넘게 보냈다.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이신은 이번에 딱히 유의미한 소득을 얻지 못하면 오늘 고르긴을 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하 감옥에 들어서며 잠시 보류되었다.

"이곳에 이신 님의 마력 패턴을 등록해 놓았습니다. 문 앞에 있는 발판에 서 있으면 마력 패턴을 읽고 보안 장치가 해제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시종장이 돌아가고 이신은 지하 감옥의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가장 밑, 최하층의 감옥.

그곳에 인간이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가장 악질 범죄자들만 가둬 놓는 장소.

그곳에 오래간만에 인간의 발소리가 들렸다.

"밥...."

이신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순간 멈췄다.

'밥?'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듯한 목소리.

이신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양손과 양발이 묶인 채 벽에 걸려 있는 인간이 보였다.

며칠을 이 상태로 있었는지 초췌한 얼굴에 온몸의 근육이 쪼그라든 모습이었다.

그는 힘도 없는지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작은 목소리로 계속 먹을 것을 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너...?"

이신의 목소리를 들은 인간이 움찔하며 중얼거리던 것을 멈췄다.

그리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선배...님...?"

게르페인의 지하 감옥엔 한동안 실종되었던 백현이 갇혀 있었다.

제33화

"네가 도대체 어떻게...."

이신은 말을 하던 것을 멈추고 다급히 마력을 퍼트렸다.

그의 마력에 이곳을 감시하는 마도구가 감지되었고 마력을 움직여 주변 공간에 사일런스(Silence) 마법을 걸었다.

그리곤 그 마도구의 시야가 닿지 않게 몸을 돌려 입을 가렸다.

"듣기만 해. 이건 실시간으로 감시되고 있으니. 고개도 끄덕이지 마."

백현의 고개가 미세하게 움직이다 멈칫했다.

"지금은 대화할 상태가 아닌 것 같으니 그냥 가만히만 있어. 내가 알아서 구해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한 이신이 사일런스 마법을 풀었다.

"당신이 마법에 대해 잘 안다고 들었습니다."

이신의 갑작스러운 존대와 뜬금없는 말에 백현이 움찔했지만 이신의 말대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상태를 보니 대답할 상황이 아닌 것 같네요. 이따 다시 오겠습니다. 먹을 거라도 넣어 드리죠."

이신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그곳을 나갔다.

* * *

헬(Hell) 난이도.

이건 전생에서 단 한 명도 클리어하지 못한 난이도이다.

이신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정보가 전혀 없었다.

애초에 한 자릿수 대의 층은 1층을 제외하면 솔로 스테이지로 알려져 있다.

다른 도전자들과의 협력이 애초에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이신도 백현의 존재를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설마 먼저 게르페인에 들어와 난동을 부렸던 인간이 백현일 줄이야.

백현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헬 난이도에 도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근데 그게 이렇게 이어지다니.

이건 생각 이상으로 큰 소득이었다.

이건 이신 혼자만 도전했었다면 절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걸 알려야 하나....'

익스트림까지는 솔로 스테이지라고 했다. 그러나 헬 난이도가 멀티 스테이지라면 여러 명의 도전자들이 합심해서 클리어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다만, 도전자가 더 모인다고 과연 이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수 있을까?

백현조차도 허무하게 당했다. 클리어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죽을 뻔했는데 다른 도전자들이 모인다고 가능할지는 의문이었다.

괜한 도전 의식만 불태워 무의미한 죽음을 야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백현에게 먹을 걸 줘야겠어.'

스테이지에 들어온 지 시간이 많이 흘렀을 거다. 탑을 오르면서 얻은 스탯과 이전에 단련해 놓은 것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굶주림으로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을 것이다.

예상외 전력의 발견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 * *

고르긴과의 식사 자리에서 이신은 지하 감옥에서의 상황을 설명하며 그 죄인에게 먹을 걸 조금만 나눠 주는 게 어떻겠냐고 부탁했고 고르긴은 고심 끝에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아무리 그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밥을 주는 게 내키지는 않군. 그래도 자네 부탁이니 들어는 주겠지만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굶기겠네."

"감사합니다."

저녁이 되고 이신이 다시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둘은 형식적인 이야기만 주고받은 채 다시 헤어졌다.

'안쪽으로 들어오면 생각보다 보안이 허술하다.'

마도공학이 발달한 폐해라고 볼 수도 있다.

인력이 아닌 기술로 모든 것을 해결하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

지하 감옥의 보안은 입구에 거의 기술력이 쏠려 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입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오면 그 보안력의 격차가 컸다.

안쪽은 거의 감시 카메라로 감시하는 게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보안이 허술했다.

물론, 그만큼 죄수들이 탈출할 수 없다는 자신이 있는 거겠지만.

이신은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삐- 삐- 삐- 삐-

성안에 또다시 울려 퍼지는 경고음.

"무슨 일이야!"

"적들이 쳐들어왔습니다!"

"언데드들이!"

이 전에 이종족들이 쳐들어왔을 때보다도 훨씬 큰 소동이 일어났다.

"놈들이 어떻게 이 안에?"

"언데드들이 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타이탄을 출격시켜야 합니다!"

이번엔 성벽 밖에서의 공격이 아닌 게르페인 성채 안에서의 습격이었다.

내부에서의 혼란이 발생했으니 그럴 수밖에.

이신은 소란이 일어난 틈을 타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그의 마력 패턴은 등록되어 있었고 들어감과 동시에 이신은 이전에 깔아 두었던 마력장을 펼쳤다.

감시 장치들이 이신의 마력에 의해 먹통이 되었고 그는 곧장 최하층의 지하 감옥에 잠입하여 백현에게 갔다.

[프로즌(Frozen)]

쩌적- 쩍-

철창으로 스며드는 마력. 동시에 그 위로 번지는 새하얀 서리.

순식간에 얼어붙은 철창을 이신은 힘껏 발로 찼다.

쿵!

그대로 부서지는 철창을 본 백현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이신을 바라보았다.

"이제 말해도 된다."

"선배님!"

백현은 그제야 살겠다는 듯 목청껏 이신을 불렀다.

그동안 그를 보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던 게 너무 답답했다. 족쇄에 묶인 것만큼이나.

툭- 투둑-

백현을 묶고 있던 족쇄가 이신의 마법에 잘려 나가며 땅에 떨어졌다.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지 백현은 곧장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거 받아라."

이신은 성채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백현의 무기와 지도를 건네주었다.

"오! 근데 이건 뭐예요?"

"타이탄들이 보관된 곳이야, 이미 전부가 출격했을지도 모르지만 수리 중인 것들이나 대기 중인 타이탄들이 있을 수 있으니 마무리 짓고 와라."

"선배님은요?"

"나는 디스트로이어를 부수러 간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지체할 시간은 없다.

간단하게 지시 사항만 전달한 이신은 곧장 자리에서 벗어났다.

지도와 검 말고도 하급 회복 포션을 받은 백현은 허겁지겁 포션을 들이켜며 이신을 따라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어....'

이신은 언제 사라졌는지 그새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백현은 지도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봐도 잘 모르겠는데...여긴가?'

백현은 자신의 감을 믿기로 하며 움직였다.

* * *

지하 감옥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의 지하실.

그곳으로 다급하게 뛰어간 고르긴이 지하실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자신의 팔찌를 벽에 댔다.

삐이―

붉은 레이저가 그의 팔찌를 스캔하더니 문이 열렸고 그 안으로 고르긴이 들어갔다.

쿠웅.

지하실에 존재하는 거대한 공동.

그곳에는 거대하고 위압감 넘치는 모습의 디스트로이어가 숨겨져 있었다.

투명한 유리 벽 너머의 디스트로이어를 보던 고르긴이 씨익- 웃으며 발판 위에 선다.

삐빅- 삑-

[스캔 중입니다.]

[마력 파장을 검색합니다.]

[확인 중입니다.]

삐- 삐- 삐-

[이상 마력 파장이 탐지되었습니다.]

[보안 단계가 강화됩니다. 지하실 전체에 마력 차단막이 활성화됩니다.]

"뭐, 뭐야?"

당황한 고르긴이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네!"

굉장히 낯이 익은 인간의 모습.

이신이 고르긴의 뒤에 서 있었다.

"마력 차단망이라...조금 당황스럽긴 한데...."

천장의 기계음이 들리는 방향을 바라보며 이신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향해 고르긴의 칼이 쇄도했다.

"키익! 감히 나를 미행한 건가? 디스트로이어의 위치를 알아내려 한 것이냐!"

"그렇다면?"

카앙!

이신의 단검과 고르긴의 검이 서로 맞부딪히며 튕겨 나갔다.

생각 외의 힘에 놀란 고르긴이 잠시 멈칫했다.

"마법사의 힘이 약할 거란 생각은 편견이지."

# 힘: 55(+47)

이미 100이 넘어가는 이신의 힘은 이 저층 대의 어떠한 도전자들보다도 강했다.

고블린치고도 꽤나 강한 편인 고르긴도 힘으로는 이신에게 이길 수 없었다.

"키익! 킥! 그래 봤자 마법사일 뿐이지. 마법이 차단당한 상황에서 네 놈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힘에 밀려 튕겨져 나갔지만 그럼에도 고르긴의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틱!

둘 사이에 갑자기 생겨난 배리어.

이러한 상황을 대비하여 만들어 놓은 듯 고르긴의 신호에 발동되었다.

"키긱! 그 잘난 힘으로 뚫어 보거라."

그렇게 조롱을 내뱉은 고르긴이 다시 발판 위로 올라갔다.

"쯧, 마도공학을 마법보다 대단하다 착각하고 있는데...."

이신의 몸 안에 있는 마력이 일시에 개방되며 주변의 마력을 끌어당겼다.

"이딴 허섭스레기 같은 기술로는 마법을 막지 못해."

대기가 일렁이며 둘 사이를 갈라놓았던 마력망이 요동친다.

태풍이라도 생긴 듯, 순식간에 뒤바뀌는 현장의 파동이 공동 전체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파아―

콰앙―!

이신의 마력 파장이 배리어를 부수고 공간의 마력의 흐름을 차단하던 차단망을 터트려 버렸다.

본신의 마력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대기에 남아 있는 마력을 움직이면 될 뿐.

원래라면 최소 마도사의 경지는 되어야 할 수 있는 짓거리였지만 이신은 대마법사였다.

하물며 그때보다 정신적 깨달음과 지식은 더욱 깊어진 상태였다.

다만, 아쉬운 점은 준비되지 못한 몸에 반동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큭...."

오랜만에 온몸의 마력혈이 비틀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마력 등급이 3단계로 오르고 신격과 혼돈이 생겼으며 기본 스탯까지 상당히 많이 상승한 상태다.

다행히 이 정도 잠깐의 경지 초월의 반동은 버틸 만했다.

"쯧."

이곳의 보안은 2중, 3중으로 되어 있었다.

지난 이종족 침공 때 사령을 보내 이곳의 위치는 알아냈지만 보안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기에 이번엔 고르긴을 따라 몰래 들어와 디스트로이어를 무력화시키려 했다.

워프 포탈이 있는 게 아니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는데....

워프를 타고 디스트로이어에 탑승하는 고르긴의 모습이 보였다.

입맛이 조금 썼다.

이렇게 된 이상 디스트로이어와의 정면 대결밖에 없다.

차라리 고르긴을 기습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쳤지만 무의미한 생각이다.

고르긴에게는 자신을 보호해 주는 아티팩트가 존재했다.

만약 기습에 실패하면 오히려 게르페인 전체와의 전면 대결을 벌였어야 했을 수도 있다.

'못 이길 것도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게 무식하게 스테이지 클리어만 하다 보면 결국 놓치는 게 생기는 법이다.

"대단하군, 마력 차단망까지 뚫을 줄이야."

디스트로이어에 탑승한 고르긴의 목소리가 들렸다.

"덤벼."

* * *

"키익! 키익! 언데드들이 계속 나온다!"

"죽지 마! 킥! 죽으면 저 악마가 우리를 언데드로 만든다!"

"누구보고 악마라는 거냐!"

억울한 듯 소리치는 메이.

"크큭, 거기 악마. 언데드들 좀 더 소환해 보라고."

그 옆에서 비웃는 워리.

"크아악! 빨리 이놈들이나 어떻게 해 봐라!"

군도가 타이탄 둘의 공세를 막으며 소리쳤다.

"저 해골은 뭐야? 겁나 센데?"

타이탄의 위치를 찾다가 결국 실패한 백현이 전장에 도착해 물었다.

한쪽에서 거대한 몽둥이를 휘두르며 엄청난 위용을 보여주는 언데드.

스켈레톤 오우거였다.

"너는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주인님 귀찮게나 하고 말이야."

"그러게, 약한 녀석이 왜 여기까지 와 가지고는."

이미 이신에게 백현의 소식을 들은 메이와 워리가 백현을 보며 말했다.

"에이씨! 이미 잔뜩 후회하고 왔거든? 나도 다시는 헬 도전 안 할 거라고!"

이런 곳은 지긋지긋해서 절대 오지 않겠다고 하는 백현은 말과는 반대로 적들을 완전히 학살하고 있었다.

타이탄들도 이미 한 번 상대해 봐서 그런지 유연하게 대처하며 하나씩 무력화시켰다.

"근데 메이 너 마법사 아니었어? 네크로맨서였냐?"

"······이 언데드들은 주인님의 언데드다. 나는 임시로 조종하고 있을 뿐이지."

계속해서 네크로맨서라 오해받으니 괜히 기분이 나빠진 메이가 참고 있을 때,

후우웅―

콰앙―!

"뭐, 뭐야?"

"크윽!"

거대한 무언가가 날아오더니 바닥에 내리꽂혔다.

땅은 지진 난 듯 흔들리고 순식간에 먼지가 퍼지며 전장의 시야를 가렸다.

"주인님!"

공중에서 떨어지듯 착지한 이신이 전장의 상황을 보았다.

이곳은 기계화 병사들이 많은 탓에 언데드가 힘들지 않을까 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디스트로이어가 없는 고블린들은 고작 타이탄만으로 이들을 막지 못하고 있었다.

"크윽...."

땅에 파묻혀 있던 디스트로이어가 신음을 내며 천천히 일어섰다.

이미 몸체 곳곳이 부서져 그 자랑스러워하던 기품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났어."

이미 고르긴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죽음이 그에게 가까이 온다.

기체 내부의 조종실에도 피해의 여파가 간 탓에 고르긴의 몸도 꽤 성치 못한 상태.

스으으으―

화악―

고르긴을 바라보던 이신의 눈에 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없어지고 고르긴만이 남아 있었다.

젊어진 고르긴이 작업복을 입고 망치를 두들겼다.

"서둘러라. 고르긴."

"키익, 이게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안 돼도 되게 하라. 시간이 없다."

"키익... 알겠습니다."

이를 악문 고르긴이 들어왔던 병사가 나가자, 작업을 하던 것을 멈추고 숨겨 둔 무언가를 찾아 꺼내 작업하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며칠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병사가 말하던 기한이 다가왔다.

"드디어 완성했다! 키익!"

고르긴은 여러 개로 쪼개져 있던 부품들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어딘가 익숙한 형태의 기계.

검은색의 기체는 디스트로이어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었다. 다만, 그 크기가 인간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크기였다.

기계 안으로 들어간 고르긴이 탈출을 감행했다.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 주는 고르긴의 미니 타이탄이 적들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 고르긴은 누군가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어떤 산길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그는 우연히 엄청난 에너지를 품고 있는 마운틴 바이탈 포스(Mountain Vital Force, MVF)를 발견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고블린들이 살고 있었다. 고르긴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MVF를 동력원으로 꿈에 그리던 디스트로이어를 만들어 냈다.

그러던 중 고블린 부족들이 다른 이종족들에게 납치당해 신들의 제물로 희생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디스트로이어를 끌고 간 고르긴은 고블린들을 구하고 MVF가 잠들어 있던 그곳에 그들의 마을을 세웠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마을은 점점 커져 게르페인 성채가 되었고 고르긴은 그곳의 성주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이종족들이 게르페인을 침공하며 게르페인은 무너졌다.

이종족들을 이끌던 오우거와 그 옆에 있는 낯익은 병사가 고르긴 앞에 섰다.

"여기 숨어 있었군. 고르긴."

"너는... 여기까지 쫓아온 건가... 지독하군."

고르긴을 가두고 마도공학 기계를 만들게 했던 그 병사가 반파된 디스트로이어에서 고르긴을 꺼냈다.

"도망칠 수 없다."

화아악―

그 병사의 말을 끝으로 다시 바뀌는 배경.

이신의 눈앞에 조금 전 그 모습과 비슷하게 반파된 디스트로이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무력하게 있는 고르긴의 모습이 보였다.

까득-

이신은 죽음의 통찰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저들의 과거를 볼 수 있게 되었고 그 안에서 신들의 만행들을 보았다.

이가 갈렸다.

자신들이 정의고 진리라 생각하는 상종 못 할 신들의 행태들은 보는 것만으로 악에 받치게 만든다.

과거가 떠올랐다.

잊을 수 없는 그 과거들, 아니. 이제는 그 어떠한 것도 잊지 못하게 된 이신은 과거의 그 시궁창 같던 불행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불행들 위로 고르긴의 모습이 겹쳐졌다.

고르긴은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았는지 끝까지 저항하기 위해 디스트로이어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를 향해 손을 쓰려니 꼭 신들의 졸개가 되어 버린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그럼에도.

[낙뢰(落雷)]

쿠구궁―!

먹구름 낀 하늘에서 거대한 벼락 하나가 디스트로이어 위로 내리꽂혔다.

"그만 고통에서 벗어나십시오."

낙뢰는 힘겹게 일어서던 디스트로이어의 몸체를 다시 바닥에 눕혔다.

[디스트로이어를 완벽하게 쓰러트렸습니다.]

[고르긴을 해치웠습니다.]

[게르페인 전력의 97%를 무력화시켰습니다.]

[게르페인이 함락되었습니다.]

[5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도전자님의 업적이 기록됩니다.]

[158,550점을 달성했습니다.]

[158,550p를 획득합니다.]

[체력이 3,555 올랐습니다.]

[마력이 12,300 올랐습니다.]

[힘이 6 올랐습니다.]

[민첩이 4 올랐습니다.]

[지력이 13 올랐습니다.]

[지배력이 8 올랐습니다.]

[마운틴 바이탈 포스(Mountain Vital Force, MVF)를 획득합니다.]

[성단(城段)급 타이탄 『디스트로이어』의 설계도를 획득합니다.]

제34화

10층

6층 대기실.

이신은 조용한 대기실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5층보다는 확실히 이곳에 사람이 더 적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올라간 후라 그럴 것이다.

6층은 딱히 어려운 층은 아니니.

그때, 이신의 앞에 대기실로 워프 된 백현이 나타났다.

"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백현이 이신을 마주했다.

"선배...."

"쉿. 따라와."

이신이 입에 검지를 갖다 대며 주의를 주었다.

그는 괜히 소란을 피워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백현을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봐."

"그게...."

이신의 추궁에 백현은 그간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신도 자신이 어떻게 백현을 구출하게 된 건지 간략하게 말해 줬다.

"선배님 덕분에 살았네요...."

백현은 기가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신이 그렇게 주의를 주던 것이 자만하다가 허무하게 죽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짓거리를 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을 왜 해? 그리고 네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야. 네가 너무 섣불렀던 거지. 네가 조금만 신중하게 접근하고 이종족들과 전략을 잘 짰으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어."

이신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애초에 자신처럼 이렇게 압도적인 힘으로 몰아치는 전략은 일반적인 도전자가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종족도 스테이지 상에선 잘 구슬려 자신의 전력으로 만들어 같이 게르페인을 치도록 만들어진 진형이 분명했지만 그 제단을 본 순간 이신은 그들을 동료로 삼을 수가 없었다.

'생기를 빨아먹는 신.'

그 망할 신의 문양이 그려진 제단.

그것을 본 순간부터 이신은 이종족들을 믿지 않았다.

"보상 뭐 받았어?"

"보상이요? 아! 저 타이탄들의 설계도 받았어요."

백현이 자신이 받은 설계도면을 이신에게 보여 주었다.

"흐음...."

디스트로이어의 설계도와는 그 가치가 비교조차 되지 않았지만 이 기본적인 타이탄들의 설계도는 그 나름대로 디스트로이어의 설계도보다 더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애초에 디스트로이어는 MVF가 없다면 만들지도 못하며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제작할 수 있을 만한 마도공학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애물단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저 타이탄들은 그에 비해 재료도, 제작자도 구하기가 훨씬 수월하니까.

"너 마도공학 스킬은 얻었냐?"

"아니요? 그런 스킬도 줬어요?"

"흐음···…그럼 이거 압수."

"에엑? 서, 선배님?"

이렇게 갑자기 자신이 받은 보상을 빼앗아 갈 줄 생각 못 했던 백현이 놀란 눈으로 이신을 보았다.

"진…짜요?"

솔직히 백현은 이 보상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없었다.

게르페인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도, 디스트로이어를 처리한 것도 모두 이신이 했으며 자신을 구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타이탄의 위력을 직접 겪었던 백현은 저 설계도가 너무 아까웠다.

그렇기에 선뜻 알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너는 활용도 못 해."

"그럼 팔기라도 하면 되는...."

"얼마에 팔 건데?"

설마 포인트로 사려고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백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선배님이라면 조금 할인해서...."

"네 목숨값."

"네?"

"목숨값 줬잖아. 이게 네 목숨값보다 비싼가?"

백현은 이신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가지세요...."

"잘 쓰마."

이신의 품속으로 사라지는 설계도를 보며 백현의 어깨가 또다시 축 처졌다.

* * *

두 사람의 랭킹 업데이트 소식은 또 커뮤니티에 떠돌았고 당연히 일행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 강지훈 – 야! 어떻게 된 거야? 진짜 헬 난이도를 클리어한 거야?

# 백현 – 어, 그렇게 됐네....

# 강지훈 – 대박인데? 헬 난이도를 클리어했다고? 근데 선배님이랑 같이 랭킹이 업데이트됐다던데 어떻게 된 거야?

# 백현 – 선배님이 날 구해 줬어.

# 강지훈 – 선배님이 구해 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5층은 솔로 스테이지잖아.

# 백현 – 그게······.

# 박혜원 – 야이 멍청아! 걱정했잖아! 진짜 헬 난이도 도전한 거야?

# 백현 – 어! 아 그게 말이야······.

# 지은주 – 오빠아아아아, 나 진짜 오빠 어떻게 된 줄 알고······ 흑······.

# 백현 – 으, 은주야. 내가 미안해. 일단 울지 말고······.

백현은 쏟아지는 친구들의 메시지 세례에 해명하느라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이미 탑을 오르는 중이라 그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했고 이신은 메시지를 잘 확인하지 않는 탓에 그에 대한 소식도 백현이 모두 전해 줘야 했다.

"후······."

한참을 그렇게 메시지와 씨름하던 백현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신은 이미 다음 층으로 올라간 상태.

"그래도 이번에 얻은 게 적지 않아."

타이탄의 설계도는 제쳐 두더라도 나머지 보상들도 충분히 좋았다. 층의 클리어가 늦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선배님이 말하셨다.

백현은 주먹을 꽉 쥐고는 커뮤니티를 열어 날짜를 보았다.

11/03 03:20

디멘션 게이트가 열리기까지 고작 한 달조차 남지 않은 상태.

그전까지 최대한 많은 층을 올라야 한다.

"이제 나도 가 볼까."

* * *

[10층에 입장하셨습니다.]

[그레트 시엘에서 32강 안에 진출하여 다음 세계로 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십시오.]

구름을 뚫고 지나갈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의 탑과 그 탑을 중심으로 형성된 거대 경기장.

그레트 시엘.

그레트 시엘은 탑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그 주변에 생긴 경기장 전체를 아우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에서 열리는 이 대회 또한 그레트 시엘이라는 이름으로 열린다.

다음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

이 대회를 보기 위해 수천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회차 그레트 시엘의 총진행을 맡은 펠릭스라고 합니다. 이제 드디어 본선이 진행되는데요, 이번에는 정말로 뛰어난 참가자들이 아주 많이 나왔습니다! 관객분들은 잔뜩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중앙 원형의 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경기장이 마련되어 있다. 각 경기장 속 스크린에 펠릭스가 나타나 진행을 시작했다.

- 이번 회차에는 정말 많은 능력자들이 참가했는데 말이죠. 그게 과연 얼마나 될까요? 바로바로! 자그마치 5,327명이라는 참가자들이 이번 회차에 참가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역대급....

경기의 시작에 앞서 관객들의 흥을 돋우고 경기장의 열기를 끌어 올리는 펠릭스.

관객들 모두가 이번 회차가 이전 회차들과 다르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에 그 용기사 벡스가 나온다며?"

"용기사가 나오면 뭐 하나? 드래곤 슬레이어의 자손인 자르칸이 이번에 나온다는데. 완전 천적 아니야?"

"어이, 꼬마야. 너는 이번에 누구 응원하러 왔니?"

"저는 화염술사 데몬이요! 펑펑펑! 하고 불이 막 터지는데 엄청 멋있잖아요!"

"데몬이라…데몬도 정말 강하긴 하지. 데몬 정도면 이번에 참가한 마법사 중에 최고 아닌가?"

"쯧쯧,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이번에 그 어둠서리 트롤 부족을 구한 마법사도 나온다는 소문이 있더구먼."

"네? 그 죽음을 다룬다는 그 마법사?"

"그래! 그자가 죽음의 신의 사도라는 소문도 있어."

"사도라구요? 그런 대단하신 분이 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

"뭐 소문일 뿐이니 아직 모르지."

5천 명이 넘는 참가자들 중 단 64명만이 올라간 본선.

수천 명의 예선전을 뚫고 올라온 본선 참가자들 중에는 대부분이 이미 꽤 명성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었다.

혹은 이번 예선전에서 뛰어난 활약으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아서 유명세를 얻었다던가.

- 이번 그레트 시엘에 유독 뛰어난 참가자들이 많이 참가한 이유! 5,327명이나 되는 참가자들이 모여든 그 이유를 지금 바로 공개합니다!

스크린 속 화면이 전환되며 기다란 목함이 나타났다.

펠릭스가 그 목함을 들어 올려 카메라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 이 안에 이번 회차 그레트 시엘의 우승자가 받는 상품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금방이라도 열 것처럼 하던 펠릭스가 뜸을 들이자 관객들의 야유가 빗발쳤다.

"뭐 하냐! 또 시작이냐!"

"그 패턴 지겨워! 빨리 열어! 장난해?"

"빨리 그 영롱한 자태를 보고 싶다고!"

관객들의 야유성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런 일에 익숙한 듯 펠릭스는 그들의 반응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여유롭게, 아주 천천히 목함을 열었다.

목함의 뚜껑이 열리며 그 틈새 사이로 보이는 순백 색의 아름다운 검신.

보는 것만으로도 성스러운 기운을 받는 듯한 고고한 자태.

순백색의 검신에서 느껴지는 그 우아하고 고귀한 분위기는 고작 검 한 자루일 뿐이지만 모든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단지 스크린으로 보았을 뿐인데도 이 정도라면 실제로 보면 얼마나 더 대단할까? 라고 대부분의 관객들이 생각했다.

- 다들 모두 얼이 빠지셨군요! 그렇습니다! 이 검이 바로 성녀님의 모든 신성력이 담긴 그 성검! 생명을 죽이기 위한 검이 아닌 죽은 자를 살리는 활검(活劍)! 마르티르입니다!

와아아아아아―

펠릭스의 소개와 함께 관객들의 환호성이 거대한 그레트 시엘 경기장 전체를 울렸다.

성녀가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여 만들어 낸 검.

마르티르(Martyr).

그녀의 희생으로 순교자라는 이름이 붙여진 활검(活劍).

이 검으로는 살아 있는 그 어떤 생명체를 베어낼 수도 없고 찌를 수도 없다.

죽은 자만이 이 검에 베여 살아날 뿐.

- 자! 여태까지 그레트 시엘의 우승 상품 중 역대급의 상품이 걸렸습니다! 그만큼 날고 기는 참가자들이 모였습니다만, 마르티르를 가져갈 수 있는 참가자는 단 한 명! 과연 그 참가자는 누가 될 것인지! 이제 곧! 그 대망의 경기를! 시자아아악합니다아아!

와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과 몰려드는 인파.

화려한 개막식과 치솟는 열기.

역대급의 우승 상품과 역대급의 참가자들까지.

이번 그레트 시엘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 * *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진득한 발걸음 소리가 적막한 복도를 채웠다.

끼익-

방문이 열리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들어와 칙칙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자리에 앉았다.

긴장감으로 가득한 이 참가자 대기실에 로브인이 들어오자, 차가웠던 분위기가 더 냉랭해졌다.

"거기 마법사 나리."

가벼운 차림새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남자가 대뜸 일어서더니, 조금 전 들어온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로브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뭐지?"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지는 듯한 차가운 음성.

로브인이 지팡이를 뻗어 남자를 향하게 하고는 물었다.

"예민하네, 그 지팡이 내려놓지? 감당할 자신은 있고?"

"벌써 죽고 싶은가 보군."

"워어, 이제야 본선인데 벌써 죽기는 싫네? 그만하자구."

남자의 항복 의사에도 불구하고 로브인의 지팡이는 그대로였다.

"당신이지? 죽음의 통찰자."

남자의 말에 주변 다른 참가자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향했다.

사소한 다툼쯤이야 이곳에서는 흔했지만 저 두 사람의 다툼은 달랐다.

이번 대회에 우승 후보로 불리는 인물 중 하나인 덱스터.

그리고 그가 말하는 죽음의 통찰자.

두 이름이 가진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확신에 찬 듯한 얼굴로 덱스터가 피식 웃었다.

로브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대답이 된 듯 덱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구만?"

"한마디만 더 하면 죽는다."

로브인의 지팡이에 쏠리는 검은 마력.

죽음과 너무나도 어울리는 마력의 성질.

다른 이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두 사람을 훑었다.

죽음을 다룬다는 저 마법사와 그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는 덱스터의 대결.

미리 두 사람의 능력의 일부라도 알 수 있다면 이득이었다.

"히...한 마…"

후우웅-

덱스터의 입이 열리자마자 검은 마력이 거세게 회전하며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콰앙-!

"…디익!"

히죽 웃으며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하던 덱스터가 식겁한 얼굴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덕에 로브인이 쏘아낸 마법이 애꿎은 다른 참가자를 향해 날아갔지만, 참가자들의 관심은 사라졌다 튀어나온 덱스터에게로 쏠려 있었다.

땅으로 꺼지듯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그가 원래 있던 곳과 조금 거리가 있는 다른 참가자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나만큼 죽음을 잘 아는 놈은 없지."

로브인이 한기 가득한 목소리로 조금 전 도망친 덱스터를 향해 말했다.

"네 놈의 그림자에 죽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군."

"호오? 그래? 너무 무서운걸?"

아까보다도 더 진득한 살기가 담긴 마력이 로브인의 지팡이에 맴돌았다.

적을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뭉쳐진 에너지가 허공에 모여들었다.

그것을 본 다른 참가자들은 저 로브인이 죽음의 통찰자라는 것을 확신했다.

"죽어라."

삐- 삐- 삐- 삐-

갑자기 대기실 내부에서 울리는 경고음.

- 두 참가자는 당장 싸움을 중지하십시오. 곧 경기가 시작됩니다. 경기장 밖에서의 대결은 삼가십시오. 심판 재량에 따라 탈락 처리 될 수 있습니다.

그 소리에 로브인의 지팡이에 맺혀 있던 살기의 덩어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것을 보며 과장되게 안도의 한숨을 쉰 덱스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안 죽었네?"

"넌 저 위에서 반드시 죽는다."

로브인이 스크린 속 경기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이쿠! 무서워라. 아, 하필 내가 첫 경기네? 죽나 안 죽나 한 번 볼게? 그럼 이만."

덱스터가 로브인에게 계속 장난치듯 말하며 대기실을 벗어났다.

로브인 또한 화가 나는지 대기실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움직였고 긴장감 가득하던 참가자들의 대기실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조금 전 검은 마력을 얼떨결에 얻어맞은 남자가 자신의 검게 변한 손바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재밌네."

제35화

- 이번 본선에는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은 강자들이 많이 나타났는데요? 그로 인해 예선전에서 많은 변수가 생겼었습니다! 덕분에 포인트를 잃은 분들의 통곡 소리로 제가 요즘 잠을 잘 못 잤습니다. 하하하!

북쪽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64강 17번째 경기.

가벼운 차림의 후줄근한 티를 입은 검사와 갑옷을 입은 기사.

두 사람이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 자! 벌써 64강의 절반을 넘어선 17번째 경기가 시작됩니다! 이번 예선전에서 기적 같이 올라온 행운의 검사, 투갓!

우우우우우-

"운만 좋은 놈!"

"이번에 떨어지겠구만!"

"너 때문에 내가 응원하던 기사가 떨어졌잖아!"

경기장에 올라선 투갓을 향해 관객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워낙 화제를 불러 모은 이번 회차에 이름도 실력도 없는 놈이 본선에 올라왔다며 관객들은 투갓에게 비난을 보냈다.

예선전에서도 나름 실력자로 본선을 갈 것이라 여겨졌던 몇 명이 서로 싸우다 자멸하며 힘 빠진 이를 쓰러트린 투갓이 본선에 올랐다.

재밌는 경기를 바라던 관객들에게 투갓은 딱히 호감 가는 참가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관객들 사이에서도 투갓을 응원하는 이들은 있었다.

"주...투가앗! 이, 이겨라! 이겨라! 뭐 해? 빨리 응원 안 해?"

"쯧, 뭐 하러 응원해? 응원 하나 안 하나 결과는 똑같을 텐데. 머리는 장식이야?"

"뭐? 한 판 붙을까? 대가리만 큰 놈이."

"지금 뭐라고 했지? 진짜 죽고 싶은가 봐?"

"거기! 시끄러우니까 싸울 거면 저기 나가서 싸워요!"

"무슨 투갓을 응원한다고. 해골들이라 앞으로 죽을 놈을 응원하는 건가? 신박한 응원 법이군."

주변 관객들이 뭐라고 하자, 투갓을 응원하던 둘은 입을 다물고 서로를 노려보다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상대편이 경기장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 투갓의 상대는 바로, 철벽의 기사라 불리는 강자 호펜!

와아아아아아―!

"호펜! 호펜! 호펜!"

"그냥 죽여 버려! 호펜!"

"저런 머저리가 본선에 있게 할 거야? 호펜 너의 힘을 보여 줘!"

투갓이 등장했을 때와는 다르게 호펜에게는 제법 환호가 많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운이 좋군. 본선 처음부터 이런 상대라니."

"아저씨, 방심하다 골로 갑니다."

"하하하! 오우거가 고블린 앞에서 방심한다고 죽을 거라 생각하는가?"

"오우거 이기는 고블린 제가 봤습니다만."

"그런 웃기는 소리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구만. 재밌는 친구로군.

"믿기 싫으면 마십쇼, 그런 고정관념이 눈을 가리는 겁니다."

"허허,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나 했는데, 입으로 올라왔는가 보군. 내가 이곳은 실력으로 승부하는 곳이라는 걸 알려 주겠네."

투구를 눌러쓴 기사, 호펜이 검을 뽑았다.

그에 맞춰 조금 어설픈 자세로 투갓이 검을 들었다.

- 자! 두 참가자 모두 준비가 된 것 같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요? 그럼! 64강 17번째 경기를 시자아아악! 하겠습니다!

쿠우우웅―!

거친 북소리가 울리며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철의 기사라 불리는 호펜이 투갓에게 쇄도하며 검을 내질렀다.

간발의 차로 피한 투갓의 올려 베기가 호펜의 투구를 스치듯 지나갔다.

"크윽-."

생각보다 빠른 반응 속도에 놀란 호펜이 움찔하며 자세를 갈무리했다.

"제법이군. 그래도 마냥 운으로 올라온 건 아니었다는 건가?"

"다시 오십쇼."

"가겠네."

호펜의 검이 다시 투갓에게 쇄도했다.

채앵! 챙! 챙!

둘의 연이은 격돌.

생각보다 치열하게 이뤄지는 두 사람의 공방에 관객들의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뭐야? 투갓 생각보다 잘 싸우는데?"

"운이 아니었던 건가?"

"투갓! 설마 이기는 거냐? 또 이겨?"

"이런 검에 'ㄱ'자도 모르는 것들아! 봐라! 저 둘의 실력 차이를. 투갓이 검 휘두르는 것 봐! 신체 능력은 좋은 것 같은데 검술이 어설퍼. 저런 검술로는 호펜 절대 못 이긴다."

경기 시작 전까지만 해도 거의 대부분의 관객들이 호펜의 승리를 점쳤지만, 경기가 절정에 치닫는 지금, 10:0에서 8.5:1.5 정도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관객들은 결국 호펜이 승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아직 많이 어설프다!"

철벽의 기사라 불리는 호펜은 처음 한 수를 제외하고는 마치 예상이라도 하듯 모든 투갓의 공격을 막아냈다.

투갓은 수비적인 검술로 유명한 그의 빈틈을 뚫기가 어려웠다.

반면 차근차근 조여 오는 호펜의 검격은 투갓의 몸에 조금씩 상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큭!"

투갓의 왼팔이 조금 깊게 베이며 그의 입에서 신음이 비집고 나왔다.

호펜의 노림수에 당해 팔이 날아갈 뻔했지만, 뛰어난 반사 신경과 강인한 신체 능력으로 간신히 피해낸 투갓이 한 턴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던 관객석에서 많은 이들이 아쉬움이 묻어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투갓을 응원하던 두 해골은 거친 고성을 내뱉었다.

"저, 저 자식이!"

"내가 당장이라도 저놈의 사지를 모두 분해시켜 주겠다!"

"그러다 네 두개골이 분해된다. 이 멍청한 뼈다귀야."

"후...잠시 흥분했군. 기사도에 어울리지 않았다."

"염병을 하네."

"조용해라. 근데 내가 그렇게 누누이 저 상황에서는 중심을 밑으로 잡아야 한다 말했는데… 어어? 그렇게 들어가면- 어이구, 아니! 오른발을 뒤로 빼십쇼! 상체는 사선으로! 아!"

답답해서 자신의 복장뼈를 내리치는 모습에 옆에 있던 해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염병을 하는군."

치솟는 관객들의 열기에 비례하여 경기장 안, 두 사람의 대결도 점점 치열해지고 있었다.

언제 두 사람이 지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두 사람은 지치기는커녕 더 불타올랐다.

"아저씨, 나이도 있어서 힘들 텐데 포기하십쇼."

"어림없지, 아직 난 멀쩡하네!"

둘의 긴장감이 극대화되는 상황.

겉으로 보기엔 치열해 보였지만 이미 투갓의 온몸은 거의 누더기라고 말할 정도로 정상이 아니었다.

호펜의 검을 막던 투갓의 오른팔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모습에 이미 한계치에 도달했다 생각한 호펜의 회심의 한 수가 먹혀들어 간 것이다.

그의 마력이 검을 타고 흘러 투갓의 근육을 자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작은 틈은 둘 사이의 싸움을 결정짓기에 충분했다.

'이겼다!'

호펜의 검이 섬전처럼 뻗어지며 투갓의 심장에 닿기 직전.

"어억!"

하필 검을 내지르면서 땅바닥의 작은 돌덩이들을 밟은 호펜이 미끄러지며 균형을 잃었다.

둘의 싸움 중에 경기장의 일부가 부서지며 만들어진 파편들.

그 돌덩이들이 결정적인 순간을 뒤집었다.

호펜의 검은 투갓의 심장이 아닌 목과 어깨 사이를 지나갔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투갓의 검이 호펜의 복부를 꿰뚫었다.

쿨럭-!

단 한 번도 유효타를 당하지 않았던 호펜이 단 한 번의 공격 성공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예상외의 상황에 관객들이 벙찐 얼굴로 경기장을 보았고 이내 북소리가 경기의 종료를 알렸다.

와아아아아아!!

"미쳤다! 어떻게 이긴 거야?"

"호펜이 갑자기 왜 저렇게 된 거지?"

"미끄러진 것 같은데? 돌멩이들 밟고."

"에라이 이 머저리 새끼야! 질 사람이 없어서 투갓한테 지냐!"

"뭐 하는 거야! 내 포인트 어쩔 거야! 네가 그러고도 철벽의 기사냐!"

도박장에서 대부분의 관객들이 호펜에게 포인트를 걸었고 이번에야말로 이변 따위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 싸움은 1:1이고 그 상대는 철벽의 기사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이변은 발생했고, 승리자는 투갓이었다.

"안 돼! 내 포인트!"

"아아아아아악! 이건 무효야! 어떻게 하필 저 타이밍에 돌멩이들을 밟아서 미끄러지냐고!"

"투가아아아아아앗! 투갓! 투갓! 사랑한다! 투갓!"

"이겼다! 투갓이 이겼다고! 난 이제 부자야!"

어딜 가나 역베팅을 걸며 도박을 하는 인간들은 있는 법.

호펜에 비해 투갓의 배당률은 엄청나게 높았고 그가 이긴다면 포인트를 쓸어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관객들 중 극소수가 그 도박에 성공한 것.

"크하하학! 나도 이제 부자군."

"네가 부자냐? 아무튼 빨리 가자고."

"그래."

경기 처음부터 투갓을 응원하던 두 스켈레톤이 경기장 밖을 나와 도박장으로 향했다.

도박장의 안은 그야말로 난리가 난 상태.

투갓의 승리에 많은 이들이 돈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있었다.

"쯧, 저런 멍청이들. 당연히 투갓이 이기지. 그걸 못 보나?"

"시끄러워. 빨리 포인트나 받으러 가."

두 스켈레톤이 포인트를 교환했다.

"이야, 어떻게 투갓에 이렇게 많은 포인트를 걸 생각을 했지? 도박을 한 건가?"

"딱 봐도 투갓이 더 센데 무슨."

"투갓이 더 세다고?"

"헛소리 그만해라. 빨리 포인트나 줘."

"알겠네. 신분을 확인하지. 메이, 워리... 맞군. 여기 받게."

메이와 워리가 포인트로 환전할 수 있는 화폐를 받아 품에 넣고 돌아갔다.

"아쉽다, 한 번에 3,000p를 거는 게 최대라니. 더 걸었으면 포인트를 쓸어 담았을 텐데."

"이번에 배당률이 21배였나? 생각보다 짜네. 예선전에 투갓이 그렇게 과대평가 받았나?"

둘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도박장을 나가자, 도박장 안은 순간적으로 잠깐 고요해졌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몇몇 이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일어나 도박장 밖을 나갔다.

* * *

"괜찮습니까?"

투갓이 쓰러진 호펜을 부축하며 물었다.

방금 복부를 찌른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선 전투 불능에 이를 수 있는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이상 승리 판정을 잘 내리지 않는다.

그 때문이었다.

"고맙군...."

"어서 가서 치료받으십시오."

"알겠네, 그리고 이제 자네 말을 믿을 수 있겠어."

"뭘 말입니까?"

"고블린도… 오우거를 이길 수 있다는 거 말일세."

이 상황에서 저런 소리나 하고 있다니.

투갓은 헛웃음을 내뱉고는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고블린이 아니라...."

"...뭐?"

투갓의 말을 들은 호펜이 놀란 얼굴로 투갓을 보았다.

-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승자는 투갓! 이런 이변이 본선에서도 또 일어나는군요! 어쩌면 투갓은 엄청난 강자일지도?

"두 참가자는 물러나십시오."

관계자들이 올라오며 호펜을 후송해 갔고 투갓은 관객들의 환호를 들으며 경기장을 내려갔다.

- 자, 이제 다음 경기가 곧 진행되겠습니다. 다음 참가자는! 바로 이번 대회의 화제의 인물 중 하나인 칼렌! 많은 이들이 그를 죽음을 통찰하는 마법사라....

투갓은 안쪽으로 들어가며 다음 경기를 기다리는 칼렌을 보았다.

"운 좋은 놈이구나."

칼렌이 그 옆을 지나가는 투갓에게 말했다.

"너는 운이 안 좋네."

"무슨 소리지? 내가 이번 경기에서 질 것 같나?"

"잘해 봐라."

투갓의 의미 모를 말에 칼렌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잡아서 무슨 소린지 추궁하려 했지만 이제 곧 경기의 시작이라 그러지 못했다.

* * *

메이와 워리가 조금 전 따낸 포인트를 사용하기 위해 그레트 시엘 밖을 나왔다.

"이 포인트면 내가 점 찍어 두었던 마법서를 살 수 있겠어."

"쯧, 그딴 거 말고 무기를 사야지! 자고로 무인이란 무기와 일심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이거 이거, 포인트 좀 많이 벌었나 봐?"

"뼈밖에 없는 놈들이 포인트 쓸 데가 어디 있다고. 같이 좀 나눠 쓰자."

지금 한창 진행 중인 경기들 때문에 관객들은 대부분 그레트 시엘 안에 있다. 그래서 밖은 매우 한적했다.

근데 갑자기 일단의 무리가 나타나 둘을 둘러쌌다.

둘은 위험한 상황에 놓였음에도 태연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포인트를 나눠 쓰자고? 이게 너희들 건가?"

"다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되도 않는 소리에 메이가 피식 웃었다.

"맞네, 좋은 게 좋은 거지. 근데 난 약한 놈들하고는 겸상을 안 하는데 말이지."

"약한 놈들? 고작 스켈레톤 주제에 실성했구나. 그 머저리 같은 투갓이 운 좋게 이겨서 포인트나 벌어간 놈들이 뭐?"

이 무리에서 그나마 가장 강해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와 둘을 비웃었다.

그가 약해 보이는 스켈레톤 둘을 보았다.

고작 이런 스켈레톤 두 놈이 가지기에는 너무 큰 포인트였다.

20 대 2의 상황.

저 두 놈과 싸우는 것이 아닌 그 이후의 상황을 생각해야 할 때였다.

'최대한 많이 가져가려면 가장 먼저 저 둘을 처리해야 한다. 가지고 도망가는 건 최악의 수야. 다른 놈들을 한데 뭉치게 만들면 나도 힘들어지니.'

이번 대회 예선 탈락자인 그렉은 상황을 미리 상정하며 검을 빼 들었다.

"방금 뭐라 했지?"

갑자기 확 가라앉은 음성.

로브를 뒤집어쓴 스켈레톤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달라졌다.

"이런 미친놈,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 거다."

머리에 뿔 달린 스켈레톤이 그렉을 보며 말했다.

"뭐? 그레트 시엘의 안이 아니었으면 인간들에게 토벌당했을 놈들이...말이 많군."

그렉은 그들이 자신들을 모욕해서 화가 났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시이잉―

워리의 검이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그 모습의 그렉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검사는 검을 뽑는 모습만 보아도 어느 정도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저 스켈레톤은 적어도 상당한 수준의 검사임이 틀림없었다.

"너희는 죽음에서도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메이의 안광이 검게 물들었다.

그 어둡고 칙칙한 메이의 마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 주변의 공간을 잠식했다.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것만으로 느껴지는 진득한 살기, 적의, 악의.

둘을 둘러싼 무리의 사람들이 공포에 휩싸였다.

"감히 우리 주…투갓을 욕보인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한순간에 뒤바뀐 공기.

도박장에 포인트를 꼬라박은 인간들은 점점 숨이 가빠져 오는 것을 느꼈다.

언데드들의 이런 맹목적인 살기는 그들에게 너무나 생소했다.

"미친."

욕설을 지껄인 그렉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제36화

그렉은 고작 스켈레톤 따위가 이런 마력을 다룬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선전에서 그저 운이 안 좋아 떨어졌다 생각했던 자신조차 지금 이 공간이 답답했다.

"한심한 놈들."

메이가 그들 전부를 하찮게 바라보며 말했다.

고작 이 정도에 전의를 상실할 놈들이 뭘 믿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건지.

"이제 내 차례인가?"

검을 어깨에 걸친 워리가 그렉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이라도 살고 싶다면 우리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도록."

"크윽...."

"도망칠 생각은 마. 그리고 잘 생각해야 할 거야. 한순간이라도 망설이다 대답이 늦으면 바로 목을 그어 버릴 테니까."

* * *

- 자! 드디어 32강이 시작되었습니다! 64강이 모두 끝나고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요. 그동안 저희도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힘들었답니다. 하하하! 이번 32강은 정말 강한 참가자들이 많이 올라왔는데요....

32강이 시작되고 그 전보다 더 많은 관객들이 경기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이들이 경기의 승패를 점 찍어 포인트를 걸고 있었다.

"여기. 3,000p."

"오! 자네들이로군. 이번에도 투갓에 거는 건가?"

"당연하지! 투갓이 최고라니…까아아-."

"조용히 해라."

자꾸만 쓸데없는 소리를 내뱉는 워리의 머리를 뒤로 밀어낸 메이가 전표를 받았다.

"이번 상대는 그 용기사 벡스인데도 배당이 줄었네?"

"하하하, 당연하지. 그래도 저번에 꽤나 저력을 보여 줬으니까. 더구나 용기사는 그레트 시엘에 용을 데리고 오지 못하니 전력을 낼 수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호펜 때보다 더 상대하기 쉬울 수도 있다네."

"흐음...."

메이는 워리의 뒷덜미를 잡아끌고는 도박장을 나왔다.

"이상해."

"뭐가?"

"저놈. 다른 녀석들이 투갓에게 더 투자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어."

"당연히 투갓이 질 거라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니야?"

워리는 메이가 쓸데없는 고민을 한다고 생각했다.

'용기사에 대한 정보가 있는 건가?'

메이와 워리가 관객석에 들어가고 32강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투갓은 아홉 번째 경기에 출전한다.

그때까지 다른 녀석들의 실력이나 볼 겸 둘은 경기를 구경하기로 했다.

"어휴, 저놈 저거. 어떻게 본선에 올라왔지?"

"그럼 네가 참가하지 그랬냐?"

"내가 참가를 왜 하냐! 저기에 괴물이 있는데. 1등 못할 거면 안 하는 게 낫다."

"주제 파악은 잘하는군."

"뭐라? 한 판 붙어?"

* * *

- 32강의 아홉 번째 경기! 어느새 벌써 절반을 지나 아홉 번째 경기까지 왔습니다! 이번 경기는 바로 용기사 벡스 대 행운의 검사 투갓! 과연 이번에도 그 벡스를 상대로 행운이 있을 것인지? 모두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경기장 주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환호성과 함께 투갓과 벡스가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행운의 검사? 웃기는군."

"뭐가 웃기지?"

"수작 부리지 마라. 나한테는 안 통할 테니."

벡스가 창으로 투갓을 겨누며 말했다.

- 투갓과 벡스의 신경전이 장난이 아닌데요! 과연 승자는 누가 될지! 그럼 경기이이이 시작합니다!

벡스의 창이 화려하게 회전하며 투갓을 향해 쇄도했다.

창끝에 모인 활활 타오르는 마력.

투갓의 검이 그 창을 간신히 빗겨내며 반격을 시도하지만 이어지는 창대의 스윙에 맞은 투갓의 검이 튕겨 나갔다.

"하아압!"

기압과 함께 벡스의 창이 투갓을 반으로 가를 것처럼 휘둘러졌다.

거센 풍압이 투갓을 짓누를 듯 휘몰아치고 벡스의 화염이 깃든 마력이 공기를 뜨겁게 데웠다.

"큭!"

투갓의 어설픈 검술이 벡스의 창을 막아내려 했지만 기술에서 밀려 창끝에 얼굴 가죽이 스쳤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 투갓의 몸이 기이한 각도로 회전하며 벡스의 허리에 주먹을 꽂았다.

"뻔해."

마치 이 공격을 유도한 듯, 벡스가 비릿한 웃음을 내뱉었다.

투갓의 주먹이 정확히 벡스의 허리춤을 가격했지만 마치 단단한 돌덩이를 친 것처럼 그의 몸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이건...."

투갓이 욱신거리는 주먹을 빼내며 이를 악물었다.

용인화.

용기사가 용의 신체 능력을 가져 오는 능력.

고작 10층 수준의 놈이 용인화를 할 줄은 몰랐는지 낭패한 얼굴의 투갓이 다가오는 벡스의 창을 보았다.

"잘 가라. 머저리."

마력이 일렁이며 벡스의 창끝이 투갓의 목에 닿기 직전의 순간.

'뭐지?'

그 찰나의 짧은 순간이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벡스에게 느리게 흘러갔다.

자신이 죽기 직전의 상황임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얼굴.

투갓의 그런 덤덤한 모습을 보자, 벡스는 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윽!"

푸욱―

"커…어...."

어느새 기이한 각도로 뻗어진 검이 벡스의 창보다 먼저 상대의 목덜미에 닿았다.

투갓의 검에 목이 꿰뚫린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멍하니 투갓을 바라보는 벡스.

벡스는 지금 이 상황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어쩌나? 수작질은 네가 하려다가 제대로 시도조차 못 했네."

"네…노…오로로록...."

피가 끌어 올라 말을 이어 가지 못한 벡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거센 환호성이 투갓을 향해 쏟아졌다.

치열한 접전과 예상치 못한 반전을 선보인 투갓에게 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투갓! 투가아아아앗! 이번에도 일을 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벡스가 투갓을 베기 직전이 아니었나?"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왜 투갓이 아니라 벡스가 쓰러진 거지?"

관객들의 의문이 가득한 경기의 결과.

벡스조차 인지하지 못한 그 상황을 그보다 약한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우...너무하시네. 애들을 너무 가지고 노시는 거 아닌가?"

"약한 놈들이 잘못이지."

메이와 워리는 이번에도 투갓에 건 포인트를 13배로 회수했다.

"자네들 이번에 제대로 한탕 하는 구만."

"여기."

받은 포인트 전부를 다시 건네는 메이.

"이게 뭔가?"

"이 정도면 여기 잠입한 놈들의 정보를 받을 수 있나?"

뜬금없는 소리에 중개인의 눈동자가 차게 가라앉았다.

이번 그레트 시엘의 숨겨진 정보상.

메이가 보기에 그놈은 바로 눈앞에 있는 중개인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럼 이건 어때?"

[80,000p]

메이가 제시한 엄청난 포인트에 중개인의 표정이 굳었다.

"...눈치가 빠르군."

"머리가 좋다고도 하지."

"...가져가게."

중개인이 건넨 종이를 품속에 집어넣은 메이와 워리가 도박장을 나섰다.

* * *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레트 시엘 바깥에서 검을 휘두르며 훈련을 하던 투갓의 주변으로 정체 모를 로브인들이 모여들었다.

"뭐지?"

투갓의 차분한 음성이 그를 둘러싼 로브인들을 자극했다.

"역시, 뭔가 있는 놈이군."

로브인들 사이에서 앞으로 나선 노인이 투갓의 정체를 탐색하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훑었다.

어설픈 검술과 애매한 능력.

순전히 운이 반복되어 16강까지 올라온 검사.

'불확실한 존재라면 지운다.'

노인이 투갓을 탐색하고 있는 것처럼 투갓도 그들을 탐색하고 있었다.

'역시 왔네.'

10층의 비밀 단체.

지난 생에 탑에 오를 때 32강을 끝내고 16강을 진행하려 하자 나타났던 놈들이 또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

"자네는 두렵지 않나? 이 많은 이들이 자네를 붙잡기 위해 여기 모였네."

"허수아비 백이 모인들 뭐가 무서울까?"

"허허…대단한 자신감이군."

쿵!

노인의 지팡이가 땅을 내리찍자 그의 마력이 투갓을 옭아맸다.

"말해라, 네 정체는 뭐지?"

"반대로 묻지. 너희들의 정체는 뭐지?"

화아악―

갑자기 공간 전체에 점멸하는 검은 마력.

투갓을 옭아매던 노인의 마력이 한순간에 풀어 없어졌다.

"거, 검은…마력...?"

툭- 투두둑- 툭.

그와 동시에 땅속에서 튀어나오는 얄팍한 뼈다귀들.

그오오오오―

땅속에서 시작된 기이한 괴성이 사방을 메우고.

"너...크윽, 어느새...."

언제 뻗어 나온 지 모를 검은 사슬이 노인의 목을 쥐어짰다.

노인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너희들의 수가 많다고 했나?"

지이이잉-

검은 마력이 허공을 격하며 타원형의 커다란 포탈을 만들어 냈다.

"크르르...."

그 안에서 걸어 나오는 수십의 언데드들.

검은 기운을 풀풀 풍기는 언데드들 사이에서 유독 커다란 스켈레톤 하나가 기함을 내뱉었다.

크르라라라라라락!

족히 5m는 되는 거체에 그 자체만으로 흉악함을 보여 주는 괴물.

"오…우거...?"

"젠장! 네크로맨서였어!"

"이게…도, 도대체 몇 마리야...."

"괴물이다... 말도 안 돼...."

사방에 점철되는 악의.

적을 죽여 버리겠다는 그 맹목적인 살기가 공간을 짓누른다.

처음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이 눈앞에 투갓을 직시했다.

"너는… 설마... 네가 그 죽음의 통찰자...?"

"그 오그라드는 칭호는 그만 듣고 싶은데."

"어째서… 정체를 숨긴…거냐."

"그래야 너희들이 이렇게 나타나니까."

투갓의 탈을 쓰고 있던 이신이 숨기고 있던 마력을 방출했다.

"허억...."

"이제 다시 대화를 해 보자고. 너희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해."

이신의 검은 마력이 노인을 압박했다.

* * *

[16강에 진출하셨습니다. 포기하고 다음 층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포기하시겠습니까?]

"아니."

[16강에 도전합니다. 높은 등수에 오를수록 업적이 증가합니다.]

지난 생에서도 보았던 문구이다.

"흑성(黑星)이라...."

이신의 주위를 맴도는 영혼.

원한에 사무쳐 이제는 사령이 되어 버린 흑마법사 제논.

끝까지 자신의 단체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이신은 굳이 살아 있는 이의 입을 빌릴 필요는 없었다.

"마르티르를 노리고 있다고?"

붉은 안개가 뭉친 것처럼 생긴 사령이 이신의 근처를 둥둥 떠다녔다.

사령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과 이제는 상당히 증가한 지배력 스탯으로 제논의 사령을 압박했다.

사령에게서 느껴지는 적의와 악의가 짓눌리고 그 위로 공포가 자리하기 시작한다.

"활검(活劍)...."

고작 10층에서 얻기에는 말도 안 되는 성능을 가진 검이다.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능력을 가진 검.

살리는 데에 제약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탐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죽음과 가까이 사는 흑마법사들에게는 완전한 상극의 힘을 가진 검이다.

놈들이 왜 이렇게 죽을 둥 살 둥 이번 대회에서 우승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주인님."

이신이 있는 곳으로 온 메이와 워리가 그에게 한 장의 종이를 건네주었다.

"놈들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도."

"수고했다. 남은 포인트는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메이와 워리가 떠나고 이신은 자리에 남아 생각에 잠겼다.

이번 10층은 앞선 그 어느 층보다도 중요한 층이다.

32강까지는 압도적인 능력치와 마력 컨트롤로 적들을 속이며 검사인 척 해 왔지만, 슬슬 그것도 한계였다.

용기사 벡스도 말하는 것을 보니, 이상함을 눈치챈 것 같았다.

어차피 이제 도박장에서 충분히 포인트도 벌어 놓은 상태.

거기다 흑성에서 보낸 흑마법사들의 연락이 끊겼으니 그들도 이제는 투갓의 정체를 의심할 것이다.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는 정체를 더 들고 갈 필요는 없다.

* * *

- 16강! 이제는 정말 강자들만 남은 상태입니다! 과연 마르티르를 거머쥘 승자는 누가 될 것인지?

16강이 되며 점점 열기가 가열되어 가는 그레트 시엘.

그 열띤 환호성의 주인공 중 하나인 투갓이 경기장 위로 올라섰다.

- 이번 대회의 가장 큰 이변의 주인공! 투갓! 그리고 그에 맞서는 화염술사 데몬!

데몬 또한 경기장 위로 올라왔다.

경계심이 깃든 눈빛 위로 느껴지는 거만함과 자신감.

그것에는 어느 정도의 근거가 존재하고 있었다.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안 통한다. 투갓."

"똑같은 소리 지겹다."

"똑같다 생각하나? 앞선 그런 가짜들과 나는 다르다. 나는 진짜니까."

우승 후보로 불리는 참가자 중 하나인 화염술사 데몬.

그의 뜨거운 화염에 녹아 버린 참가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이번에도 투갓이 기적을 보여 줄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는 정말로 이변 따위는 없이 데몬이 이길 것인지! 경기! 시작합니다!

"이변 따위는 없을 것이다. 단 한 수로 끝내 주지."

하늘 위로 생성되는 거대한 화염 덩어리.

저것이 경기장 위로 떨어지면 막기는커녕 닿는 순간 재로 산화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 이변 따위는 없겠지."

이신은 마력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리고 그 마력의 입자들은 급속도로 성질을 변화시켰다.

"뭐, 뭐지?"

허공에 모여들던 데몬의 화염 위로 이신의 마력이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화염으로 데워진 공기가 급속도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마법? 하! 마법을 어디서 주워 배웠나? 나와 설마 마력 대결이라도 펼쳐 보려는 거냐!"

"마력 대결? 네가?"

투갓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 모습을 본 데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지만 점점 거세지는 마력의 압력에 데몬은 저 비웃음이 허세가 아님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쩌적- 쩍-

화염 덩어리 위로 서늘한 안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작아지던 화염의 구체가 허공에서 폭발하듯 터지고.

"커헉... 쿠에엑!"

그 반동으로 온몸의 마력혈이 터져 버린 데몬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관객들은 경기를 보면서도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인지력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

하지만 그레트 시엘의 경기장 위로 내렸던 차가운 공기가 관객들의 열기로 다시금 뜨거워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3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