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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북쪽 경기장을 가득 채운 함성.

단순 운으로 올라왔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투갓이 우승 후보인 데몬을 압살하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각인되었다.

- 이, 이변… 아니, 말도 안 되는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단순히 운이 좋은 검사라고 생각했던 투갓이! 사실은 엄청난 마법사였습니다! 화염술사 데몬을 한순간에 찍어 누를 정도의 실력자! 관객석은 지금 흥분의 도가니입니다!

이신은 시끄러운 환호성을 뒤로한 채 경기장을 내려갔다.

스크린 위로 떠 오르는 대진표.

[투갓 vs 칼렌]

흑성에서 마르티르를 얻어내기 위해 보낸 흑마법사 칼렌.

메이와 워리가 얻어 낸 정보로 알아낼 수 있었다.

더구나 이번 8강이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습격이 있을 거란 사실도.

* * *

그레트 시엘의 서쪽 경기장.

예선전에서만 사용했던 그 서쪽 경기장이 폐쇄되고 그 안쪽으로 들어간 이신이 눈을 감고 경기장 위에 앉아 있다.

툭. 투둑.

이신의 주변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숨 막히는 공기가 그를 짓눌렀다.

"우리를 기다렸나?"

마치 쇠를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

저음의 목소리에 담긴 자신감과 여유로움.

그 목소리에 이신이 눈을 떴다.

어느새 그의 주변 가득 모여 있는 흑마법사들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좀 늦었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이신.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에도 눈앞에 선 흑마법사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16강전 잘 봤다. 실력을 숨겼더군. 정체가 뭐지?"

"정체라...."

이신은 대답 대신 은나무 지팡이에서 마력을 흘려보냈다.

"하프니스."

허공에 생긴 검은 포탈에서 튀어나오는 죽음의 사신.

그 모습을 본 흑마법사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마력은...?"

그들의 반응이 어떻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죽음의 사슬]

하프니스의 몸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어둠으로 뒤덮인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수우우욱―

콰각- 콱- 콰직!

그리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사슬들이 흑마법사들의 몸을 관통하며 옥죄기 시작했다.

"크헉!"

"크아악!"

"카악!"

여기저기 흑마법사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이 성질은... 크윽!"

이신에게 여유롭게 말을 걸던 흑마법사가 자신에게 짓쳐들어오는 죽음의 사슬을 막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막을 수가 없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귓가에 알 수 없는 기이한 음성들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으어어어어어어―

망자들의 고통에 찬 울음소리.

억울하게 죽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신세가 된 언데드들.

원통함으로 사무친 그 감정들이 흑마법사들에게 새겨진다.

"흐어어어."

"살려 줘...도대체...."

죽음의 사슬에 몸이 속박된 그들은 무력하게 언데드들의 공격을 받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을 속박하는 사슬 때문에 바닥에 주저앉은 흑마법사가 핏발 선 눈으로 이신을 바라보았다.

"...죽음의 통찰자?"

"그래."

죽음의 향으로 가득한 공간.

언제 어디서 갑자기 사(死)의 세계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느낌.

죽음의 공포에 빠진 흑마법사들로 난장판이 된 경기장.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이를 악문 흑마법사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죽음의 통찰자가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다."

어느새 죽음의 사슬의 지속 시간이 끝나고 흑마법사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뷔레고다. 투갓이 진짜 이름은 아닐 테지? 이름이 뭐냐?"

"이신."

"그래… 대단해. 젊은 나이에 이 정도의 경지라니. 내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나의 최고의 마법을 선사하지. 봐라, 이게 5위계 마법이다."

뷔레고의 마력이 요동쳤다.

단 하나의 목표만을 노리고 새겨지는 마력.

그러나 그 자신만만하던 얼굴은 금세 무너졌다.

"너무 단순해."

"뭐...?"

허공에 새겨지던 뷔레고의 마력이 다른 무언가의 개입에 어그러지고 망가졌다.

"이게 무슨...!"

"넌 흑마법이 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내가 흑마법을 모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

얼굴을 굳힌 뷔레고의 위로 이신의 마력이 뭉친다.

"흑마법의 원류는 적을 괴롭히는 것에서 시작되었지. 그저 적을 이기고 스스로의 위세를 떠벌리기 위한 마법 따위가 아니란 거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자신의 마법이 허무하게 깨짐과 동시에 마력의 역류로 피를 토해낸 뷔레고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듯 소리쳤다.

"순수한 악의 혹은 적의. 상대를 괴롭히고 상대를 어떻게 해서든 절망에 빠뜨리고 나락으로 던져 버리겠다는 그런 집념. 그런 게 바로 진짜 흑마법이란 거다."

이신의 지팡이의 끝에서 흘러나온 시꺼먼 마력이 공간을 짓눌렀다.

"들려? 너의 동료들의 절규와 비명이."

크하아악!

살려 줘!

제발!

"이게... 무슨!"

경기장 전체에 퍼진 짙은 두려움과 공포들이 실시간으로 이신의 마력에 힘을 더해 주고 있었다.

"이런 게 흑마법이야."

콰광―!

치직- 치지직-

하늘에서 떨어진 한 자락의 검은 벼락.

"커… 억...."

그것에 온몸이 새까맣게 타 버린 뷔레고가 그대로 쓰러졌다.

그의 타들어 간 시체 위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영혼.

그 분노에 가득 찬 영혼이 순식간에 원혼이 되고 사령으로 변질되었다.

"내게 와라."

이신의 강력한 지배력이 사령으로 변한 뷔레고를 억눌렀다.

"자, 말해 봐. 너희들의 본체는 어디 있지?"

* * *

- 8강전! 드디어 여러분들이 기다리시던 그 참가자! 이변의 대명사! 행운이 아닌 힘을 숨긴 실력자! 투우우가아앗!

와아아아아아―!

투갓! 투갓! 투갓! 투갓!

- 그리고 그에 맞서는 참가자! 죽음을 통찰하는 마법사! 칼렌!

와아아아아아―!

칼렌! 칼렌!

경기장에 오른 칼렌이 눈동자를 번뜩이며 이신을 탐색했다.

투갓의 습격을 간 흑성의 일원들이 모두 하나같이 연락이 끊겼다.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투갓을 잡으러 간 인원만 해도 수십이었고 그중에는 제논과 뷔레고가 있었다.

제논의 연락이 끊어졌을 때까지 만해도 '투갓은 역시 정체를 숨긴 실력자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뷔레고는 달랐다.

5위계의 끝에 달한 실력자.

흑성 내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실력자인 그조차도 연락이 끊어지는 것은 상정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과연 저 투갓이 그 정도의 실력자이었던 것인가?

"별말이 없네. 다른 놈들과 다르게."

대회 본선 초반에 보였던 칼렌의 그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그는 완전한 경계 태세로 신경을 반짝 곤두세운 듯한 모습이었다.

갑작스런 마력의 점멸.

죽음과 유사하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격의 마력이 칼렌의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죽어라!"

칼렌의 마법인 [죽음의 손길]이 펼쳐졌다.

경기장 그 어디에서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하듯, 수백 개의 검은 손이 나타나 이신을 덮쳤다.

"아류... 뷔레고와 비슷… 아니, 조금 더 나은가?"

그의 입에서 대놓고 뱉어진 뷔레고의 이름에 칼렌은 그가 뷔레고를 죽였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후우웅- 콰앙―!

칼렌의 검은 손길들이 이신을 압박했지만 그 어느 하나도 적중하지 못했다.

"이 마력의 성질… 지팡이인가?"

진의 고유능력인 [검은 마력]

죽음의 속성을 가진 이 마력은 이신이 전생에 탑을 오르면서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능력이다.

근데 칼렌의 마력에는 죽음이 분명 묻어 있었다.

"시끄럽다!"

콰과과광―!

경기장 바닥이 부서지며 돌 파편들이 비산했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이신이 마력을 분출했다.

[흑뢰]

쿠궁―!

검은색의 얇은 뇌전 한 줄기가 칼렌의 위로 내리쳤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반응조차 하지 못했던 칼렌이 자신의 몸에 있던 방어 아티팩트의 발동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공에서 검은 벼락과 검은색의 막이 충돌하자 방어막이 사라지고 검은 뇌전들 또한 여러 갈래로 흩어져 사라졌다.

- 이건 무슨 마법인가요! 얼음계열의 마법사인 줄 알았던 투갓이! 이번에는 암(暗) 속성과 뇌(雷) 속성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세 가지 속성을 다루는 마법사! 그것도 두 가지 속성의 결합이라니! 관객석의 환호성으로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입니다!

'암 속성? 아니... 저건...!'

칼렌은 이신의 마법을 보고는 충격에 빠져, 순간적으로 생각이 정지되었다.

흑성의 보물 중 최고의 아티팩트인 [곤달라의 지팡이]

그 안에 새겨진 죽음의 속성이 저 마법사의 마력 자체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칼렌! 뭐 하냐! 멍하니 구경하는 거냐!"

"저 검은 벼락은 뭐야? 어떻게 두 가지 속성을 겹쳐 쓸 수 있는 거지?"

"미쳤다! 저기 봐! 전격이 흩어지면서 암 속성 때문에 땅이 검게 물들고 있어!"

"투가아아아앗! 믿고 있었다고!"

관객석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모두 영웅을 좋아한다.

그것도 역경과 고난을 헤친 영웅.

투갓은 비록 그 역경과 고난을 겪은 척한 것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의 뇌리에 그의 모습이 깊게 박혀 있는 상태였기에.

"주… 죽음의... 살려...."

"살려 주길 바라나? 나를 사칭하고도?"

투갓의 말에 관객석이 또 한 번 술렁대기 시작했다.

- 아!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사칭이라니? 설마...! 투갓이!

투갓의 손끝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마력이 개방되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마력.

"내가 죽음의 통찰자다."

칼렌의 밑에서 생성된 검은 포탈.

그 안에서 일렁이는 검은 안개가 그를 덮치며 경기가 마무리되었다.

* * *

- 이럴 수가! 이번에도! 이번에도 죽음의 통찰자! 투갓이 승리했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후손으로 이번 대회의 유력한 우승 후보였던 데릭을 꺾고 그가 승리했습니다! 투갓이 결승전에 올라갑니다!

4강전부터 사용되는 남쪽의 메인 스테이지.

남쪽 경기장은 동, 서, 북의 경기장 모두를 합친 것보다도 더 컸고 그와 동시에 경기장의 배경이 시합마다 랜덤으로 변했다.

데릭과의 싸움은 사방이 절벽으로 가득한 아슬아슬한 전장.

드래곤 슬레이어의 후손인 만큼 공중전에는 자신이 있던 녀석과 치열한 접전 끝에 이신이 그를 이기고 결승에 올랐다.

- 이번 그레트 시엘은 정말 이변의 대연속이었습니다. 이번만큼 불같이 타올랐던 회차가 또 있었던가요? 역대급 상품인 활검 마르티르가 걸린 만큼 대회도 후끈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그 화제의 중심에 있는 두 사람이 경기장에 섰습니다!

"투갓… 죽음의 통찰자."

덱스터가 투갓을 보며 말했다.

처음 본선에 오르며 보았던 그 가벼운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단해, 그 명성들이 허명은 아니었군."

"흑성."

갑자기 툭 내뱉어진 흑성이란 단어에 덱스터의 고요한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내가 다 죽였다. 제논도, 뷔레고도, 칼렌도 말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아주 잠깐 생겨났던 흔들림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그 찰나의 흔들림도 이신이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 경기가 이제 시작됩니다. 이번 경기장은...아! 이럴 수가! 밤의 세계 옵스커리트입니다! 빛이라곤 그저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이 전부인, 어둠뿐인 세계! 랜덤으로 배치된 배경이지만 덱스터에게 너무 유리한 전장입니다!

우우우우우-

배경의 공개와 함께 동시에 쏟아지는 야유.

그간 보여 준 능력을 생각하면 덱스터에게 너무나도 유리한 전장이었다.

관객들은 치열한 접전 끝에 생겨나는 승자를 보고 싶은 것이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며 허무하게 끝나는 경기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투갓이 이걸 어떻게 이기냐!"

"너희들 짜고 치는 거지? 그렇지?"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여기서 옵스커리트가 나오냐! 다시 해라!"

- 자자, 진정들 하십시오. 저희 그레트 시엘은 절대 조작이 없다는 거 다들 아시지 않나요? 이것도 순전히 운입니다! 운도 실력! 다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경기는 시작되었습니다. 두 참가자 입장합니다!

후우웅-

포탈을 건너자 나타나는 어둠.

적막하고 고요한 세상.

빛에 적응하고 있던 눈동자가 갑작스런 어둠에 고통을 표출한다.

푸욱-! 콰직-!

이신의 근처에 들리는 소름 돋는 파열음.

무언가 날카롭고 두꺼운 것이 뚫고 지나가며 뭉개지는 소리였다.

단지 시야가 안 보일 뿐, 이신에게 주변 생명체들의 기척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둠에서 서식하는 괴물들.

이곳은 세상 전체가 어둠에 물든 곳.

언제 어디서 괴물들이 튀어나와 공격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라이트(Light)]

이신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빛의 구가 그의 주변을 밝혔다.

하지만 밤의 어둠이 빛을 강하게 밀어냈다. 빛은 끝까지 뻗어나가지 못하고 이신의 주변을 비추는 것에 그쳤다.

"거슬리네."

빛이 생겼음에도 호시탐탐 이신을 노리기 위해 기다리는 괴물들.

공격해서 쉽사리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놈들이 그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메이, 워리."

이신의 그림자가 어둠과 이어졌다.

그 어둠 속에서 일어선 메이와 워리가 그의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왔습니다, 주인님."

"모두 죽여."

"예."

"금방 처리하겠습니다!"

메이와 워리는 곧장 그의 주변에 숨어 있는 녀석들을 무참히 학살하기 시작했다.

퍼석- 콰직- 서걱-

굳이 주변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주변에서 그림자 괴수들이 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이신은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너는 나랑 붙어야지?"

한쪽 입가를 올린 그가 검지를 뻗어 마력을 끌어 올렸다.

검지 끝에서 만들어진 검은 화살이 어둠에 잠긴 땅을 찔렀다.

팅!

땅 밑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이신의 다크 에로우를 쳐내고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어떻게 알았지?"

덱스터로 변한 그림자가 이신을 노려보며 물었다.

제38화

마르티르(Martyr)

"뭘?"

"네가 생각하는 그것."

덱스터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그림자가 두 사람을 둘러싸는 막을 만들었다.

- 아! 덱스터의 그림자 때문에 카메라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안에서는 어떤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답답합니다!

총진행자인 펠릭스가 소리쳤다. 관중들도 답답한지, 관객석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왔다.

바깥에서 궁금해하든 말든 전혀 관심 없는 덱스터가 이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안 거냐?"

"네 부하들에게 들었지."

"...뷔레고인가."

"거짓말이라 생각하지는 않네?"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까. 내가 여기서 널 죽이면 모든 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테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칼렌을 방패막이로 세운 건 너 같은 변수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이미 너에 대한 조사는 끝났어. 흑성이 네가 본 전부일 거라 생각하나?"

흑성의 숨겨진 진짜 수장.

그게 바로 눈앞에 있는 덱스터다.

이신은 사령으로 만든 뷔레고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사령이 되면 그 맹목적인 악의에 빠져, 살아 있을 때의 기억을 상당 부분 잃는다.

그래서 앞서 먼저 죽였던 제논에게서는 듣지 못했었다.

'미안하지만 마르티르는 내가 가져가야겠다.'

이신은 다가올 공격에 대비해 마력을 예열했다.

덱스터의 끈적한 마력이 공간을 잠식해 갔다.

이신이 마력으로 만들어 낸 빛의 구체도 그 그림자에 잠겨 사라졌다.

넓게 펼쳐진 그림자의 공간 안에 새로운 그림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빛이 없기에 더 그림자를 알아볼 수 없는 법이지."

덱스터의 자신만만한 음성에 이신이 비웃음을 내뱉었다.

"나와라."

이신의 그림자 속에서 언데드들이 나타났다.

그림자와 언데드의 대립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곳은 나의 세계이자, 전능한 나의 공간이다. 그깟 언데드들이 나의 불멸의 군단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스켈레톤들이 검으로 아무리 베어도 다시 회복되는 그림자 군사들.

그에 반해 부서져 버린 언데드들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역시, 원조는 조금 다른가?"

"원조?"

"그래,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

덱스터의 눈가가 움찔했다.

"나에 대해 알고 있었나?"

"그래, 네 제자에게 들었지."

"내...제자?"

"그래. 네 제자."

이신은 마치 매우 익숙한 친구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내겐 제자 따윈 없다."

"아니, 있어. 아주 훌륭한 제자가."

흑마법사들의 단체, 흑성의 수장이자 그림자들의 왕.

그림자 검사 덱스터.

그는 차유민의 스승이다.

"그래도 과거엔 조금 인간미가 있었네."

"그게 무슨...윽!"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를 마법진들이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일시에 터져 버리는 마력의 향연에 그림자 공간이 무너져 간다.

"내… 환상 공간이...!"

"어설퍼."

휘몰아치는 이신의 연계 마법에 그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 겨, 경기 종료! 승자는 투가아아앗!

* * *

[그레트 시엘의 우승자가 되었습니다.]

[비밀단체 흑성(黑星)의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업적을 집계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4층에서 세계선을 확장시킨 대가로 인한 업적의 포화 이후 처음으로 시스템이 업적 집계를 바로 하지 못했다.

- 이번 대회의 우승자! 투갓! 그가 경기장 밖으로 나옵니다.

밤의 세계 옵스커리트 속에서 포탈을 타고 걸어 나오는 투갓.

그의 옆구리에는 쓰러진 덱스터가 끼어 있었다.

- 그야말로 충격의 도가니! 압도적으로 유리한 전장에서 싸운 덱스터가 축 늘어진 채로 투갓에게 들려 나옵니다!

"투갓! 믿고 있었다고!"

"이번 그레트 시엘의 최고 스타는 투갓이야!"

"투갓! 투갓! 투갓!"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성을 받으며 투갓이 포탈 앞에 있는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엔 이번 그레트 시엘의 우승 상품인 마르티르(Martyr)가 놓여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마르티르의 자태.

관객들뿐만 아니라 이신조차도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죽음의 통찰자, 투갓. 이번 우승 상품 마르티르입니다."

순백의 검신과 황금빛 장식으로 그 고귀함이 더욱 도드라지는 활검.

이신은 그 검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화아악-

갑자기 일변하는 배경과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장면들.

밤의 세계 옵스커리트.

그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성녀 벨.

찬란한 빛이 어둠으로 가득 찬 세계를 비추며 그 추악한 이면을 들추어냈다.

세상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옵스커리트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대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 이곳은 산 자들이 발을 들일 곳이 아니다.

"전 이곳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을 구하겠어요."

- 순리를 거스르려 하지 마라. 이미 어둠 속에 몸을 내던진 자들이다.

"제 할 일은 산 자들을 구원하는 것, 그리고 살려내는 것. 이것이 제 의무입니다. 그게 혹여 이미 어둠 속에 던져진 자들일지라도.

- 어리석다.

어둠과 빛이 맞부딪히며 장면이 바뀐다.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온 벨이 쓰러지고 그녀의 뒤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그 세상으로 돌아온다.

악마의 유혹에 빠져 밤의 세계로 끌려간 인간들.

그들의 혼이 완벽히 먹히기 전에 벨은 목숨을 걸고 그들을 구해 올 수 있었다.

사람들은 벨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해 보았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그녀를 구할 수 없었다.

"제가 살 수 있는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제 힘으로... 더 많은 이들을 살릴 수 있게...."

"그만 말하십시오. 성녀님."

"제 능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만들어 주세요."

그녀가 구해 낸 이들 중 최고의 대장장이라 불리는 한 노인이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밤낮없이 쇠를 두들겼다.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그 그릇은 마르티르.

그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이 마치 성녀 벨을 꼭 빼닮은 듯했고 성녀는 마르티르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냈다.

사람을 살리는 활검.

죽은 자들을 베어내는 성검.

마르티르(Martyr).

그 비화(秘話)를 본 이신의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마르티르의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마르티르의 진정한 힘이 깨어납니다.]

[마르티르의 에고(Ego)가 주인을 판별합니다.]

[마르티르의 힘이 당신의 마력과 충돌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힘과 죽음의 힘이 격렬하게 맞부딪히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싸움의 격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이신은 온 힘을 쥐어 짜냈다.

땀이 뚝뚝 떨어지고 그간 많이 회복되었던 마력혈이 터질 듯 부풀었다.

마르티르에 담긴 성녀의 힘. 그 본질적이고 드높은 격이 느껴졌다.

아마 이 몸의 주인인 진 이브리엄의 격이 그녀와 비슷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악을 멸하려는 그 의지가 대단했다.

"크허억...."

죽음의 힘을 포기하면 마르티르에 담긴 이 힘을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그게 말이 되는가?

죽음은 이신이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힘의 원천이 되어 있었다.

탑의 비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도, 성검 마르티르의 비화를 알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그 힘 덕이었다.

설령 쉽게 포기할 수 있는 힘이라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작 이 정도에 포기할 의지였다면 신들에게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들의 힘은 이 정도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니까.

까득-

이가 부러질 듯 짓눌렸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 왔다.

이 같은 고통을 도대체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것인가?

처음 혼돈을 얻으러 갔을 때.

그때 죽음의 직전까지 간 후로 처음이었다.

혼돈. 그래 혼돈.

[혼돈]

모든 힘들이 어우러지지 못하고 결국 어그러져 만들어진 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받아들입니다.

'내게는 혼돈이라는 힘이 있었지.'

모든 힘들이 어그러지면서 만들어진 속성,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힘이.

고작 생명과 죽음 두 가지의 대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의 근원이 있었다.

[혼돈]

그 혼탁한 에너지가 몸에서 점점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의 그 치열한 대립 위로 모든 것을 망라한 근원이 그곳을 덮어 갔다.

둘 모두를 압도하는 강력한 힘의 원천이 전장을 정리했다.

[마르티르의 인정을 받아내었습니다.]

[마르티르의 주인이 됩니다.]

[마르티르]

초월(超越)급의 재능을 가진 성녀 벨의 모든 힘이 담긴 검.

# 생명체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 혼(魂)을 볼 수 있습니다.

# 사령(邪靈)을 벨 수 있습니다.

# 악(惡)을 멸할 수 있습니다.

[마르티르의 에고가 깨어납니다.]

"으으...."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 잡은 이신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 당신이… 제 주인님이시군요.

웅웅- 울리는 성검을 타고 음성이 이신의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죽음의 통찰자를 통해 보았던 성녀의 그 목소리와 똑같은 음성이었다.

"너는… 성녀인가?"

- 아니요, 저는 성녀 벨이 아니에요. 그녀의 본질의 일부를 받았을 뿐이지요. 저는 마르티르랍니다.

"그래."

이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까지도 그레트 시엘의 세계는 돌아가고 있었고 주변의 관객들은 그를 환호하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순백색의 마르티르를, 왼손에는 은빛의 은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는 이신의 모습은 영웅 그 자체였다.

이야기 속에서만 듣던 그 이상적인 영웅의 모습.

[『세계의 개척자』로 인해 당신의 업적이 또 한 번 전 차원으로 퍼집니다.]

"마르티르."

- 네, 주인님.

"너는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고 알고 있어. 그럼 죽은 모든 이들을 살릴 수 있는 건가?"

- 그건 아니에요. 몇몇 제약이 있어요.

"뭐지?"

- 첫째, 죽은 자의 혼(魂)이 그릇과 멀어지지 않아야 해요.

"그릇이라면... 저것을 말하는 건가?"

단상을 천천히 내려오던 이신의 눈에 자신이 데려온 덱스터의 시체가 보였다.

자신이 죽인 게 아니다.

분명 옵스커리트에서 덱스터를 데리고 올 때까지만 해도 그의 숨통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덱스터의 목덜미에 희미하게 남은 마력의 흔적이 보였다.

그 짧은 사이에 누가 덱스터를 암살한 것이었다.

'아직 흑성의 잔당이 남아 있었나?'

이신이 마르티르에 정신이 쏠려 있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신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마력을 급속도로 퍼트려 그 마력의 근원을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이 방대한 경기장 전체를 훑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급하게 탐색을 해 보았지만 역시나 느껴지는 놈은 없었다.

"깨지지 않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지?"

- 생명체가 죽게 되면 혼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돼요. 그 연결이 끊어진 지 오래될수록 그릇이 점점 깨지기 시작하죠. 그 신체와 혼의 격이 높다면 그 기간도 길어지겠지만 반대로 격이 낮으면 그만큼 그릇도 빨리 깨어져요.

"그럼 두 번째는?"

- 둘째, 그릇과 그 혼이 가까이 있어야 해요.

덱스터의 시체 앞에 다가간 이신이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관객석 위를 떠다니는 원혼(寃魂).

억울하고 원통해서 혼마저 변해 버린 그 원혼이 어딘가를 향해 그 억울함을 계속해서 내뱉고 있었다.

저렇게 놔두다가 그 억울함이 풀어지지 않으면 결국 그 원혼은 사령이 되어 버린다.

이신의 마력이 그 원혼을 향해 뻗어졌다.

[영혼 사슬]

영혼을 강제로 속박하는 이신의 그 마법이 원혼을 향해 날아갔다.

끄어어어어-

덱스터의 원통함이 느껴졌다.

이신의 앞으로 끌려온 그의 원혼이 그 분노의 방향을 이신에게로 돌렸다.

상관없다.

고작 이 정도의 분노는 아무것도 아니니.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령들의 감정들을 겪어 왔다. 그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었다.

"다음 또 조건이 있나?"

- 마지막 셋째. 혼이 되살아날 의지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마르티르의 말을 들은 이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끌려온 덱스터의 혼을 보았다.

"억울해? 그렇다면 네 손으로 해결해."

이신의 손에 들린 마르티르가 태양 빛을 등지고 머리 위로 올라갔다.

고귀한 자태의 마르티르가 아름다운 검로를 그리며 덱스터의 혼을 베어냈다.

- 끄어어…

"…어어...."

마르티르의 검이 지나간 궤적 위에 새겨진 순백의 선들이 혼과 그릇을 연결시켰다.

차갑게 식었던 덱스터의 몸이 점점 그 온기를 되찾았다.

"내가...살아난 건가?"

"그래."

"왜지? 왜... 나를...?"

"내가 아끼는 녀석이 너를 좋아하니까."

"뭐?"

[업적의 집계가 끝났습니다.]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시스템 메시지.

이신은 창백하게 굳어진 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잘 있어라."

[10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도전자님의 업적이 기록됩니다.]

[그레트 시엘의 회차가 변합니다. 10층 스테이지가 변동됩니다.]

[경이로운 업적! 다수의 신들이 도전자님을 주목합니다!]

[212,000점을 달성했습니다.]

[212,000p를 획득합니다.]

[체력이 5,500 올랐습니다.]

[마력이 15,700 올랐습니다.]

[힘이 10 올랐습니다.]

[민첩이 11 올랐습니다.]

[지력이 18 올랐습니다.]

[지배력이 10 올랐습니다.]

[마르티르(Martyr)를 획득합니다.]

[『칭호 – 그레트 시엘의 우승자』를 획득합니다.]

[그간의 업적을 집계하여 클래스를 산출합니다.]

[클래스가 『네크로맨서』에서 『죽음의 지배자』로 변합니다.]

[『클래스 스킬 - 사계(死界) 소환』을 배웠습니다.]

어지러이 나타나는 시스템 메시지들.

그걸 보던 이신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려왔다.

"죽음의…지배자?"

제39화

두 번째 디멘션 게이트

"안녕하세요. BBC의 차은주 기자입니다. 여기는 디멘션 게이트가 열리는 광화문 광장입니다. 벌써부터 정말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정부와 협회에서 사람들의 통제에 열을 내고 있는데요...."

어느새 시간이 흘러 탑의 도전자들이 실종되는 사건 이후 다시 디멘션 게이트가 열리는 날이 왔다.

그 당시보다도 더 많은 이들이 지금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지이이잉―

12월 1일 00시 00분 00초.

광화문 광장에 거대한 게이트가 나타나며 그 안에서 탑의 도전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왔다! 나왔어!"

"여기 '도전자가 좋다'의 김영현 기자입니다! 잠깐만 인터뷰를-."

"SBC의 송경준 기자입니다! 1층의 도전자들은 올라왔나요?"

"한양일보의...."

쏟아지는 인파 사이로 걸어가는 도전자들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몇몇 이들은 화가 잔뜩 나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고압적인 기세에 기자들과 사람들은 선뜻 그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밀기가 힘들었다.

"누나!"

"강우야!"

디멘션 게이트를 통해 밖으로 나온 신지원이 기다리고 있던 백강우를 반겼다.

"다들 왜 그렇게 저기압이지? 설마, 1층에서 아직 아무도 못 나온 거야?"

백강우의 물음에 신지원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아니, 그 반대야. 너무 잘 나와서 문제였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유민 오빠는 어딨어? 오빠가 필요해."

"어? 그게...."

* * *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디멘션 게이트에서 난리가 났다.

한국의 도전자들에 대한 소식이 전 세계적으로 퍼졌고 곳곳에서 그들에 대한 파격적인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에 관한 기사들이 무수히 쏟아졌다.

[한국 탑의 1층을 막고 있던 벽이 무너졌다. 1층에 체류 되어 있던 도전자들 대거 등반.]

[2층부터 랭킹의 혁신이 이루어져. 1위부터 1000위까지 새로운 도전자들.]

[부동의 랭킹 1등 차유민, 2층에서 1000등 대로 밀려나....]

[새로운 초신성들 대거 등장, 탑의 새로운 파란이 일어나는가?]

[1층을 막고 있던 보스의 이름은 이신? 이신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는 정말 한국인인가?]

[2층부터 10층까지 모든 층의 기록을 완전히 갈아엎었다! 이신은 실존하는 인물인가? 아니면 탑에서 만들어진 인물인가?]

1층에 체류 되었던 도전자들의 등반.

이건 지구에서 그들이 상정하던 것 그 이상의 엄청난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탑 내에서 이미 수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지구의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뭐? 랭킹 1등부터 1000등까지가 모두 바뀌었다고?

└차유민이 1000등대로 밀려? 미친? 거짓말이지?

└이신? 이신이 누군데? 그 사람이 지금 랭킹 1등이라고?

└얘들아! 오피셜 떴다! 나 아는 지인이 이번에 나왔는데 저거 사실이래!

└이신 업적 점수 14만? 2층에서?

└야야, 4층 봐라! 2등이랑 격차 보라고! 이게 말이 되냐!

└진짜 한국 사람 맞아? 저 이신이란 도전자 1층 보스였다며! 뭐야?

전 세계에서 이신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지금 저층의 현 랭킹 최상위권을 독식한 도전자들을 키워 낸 스승.

어느 날 갑자기 도전자들의 등반을 막더니 이제는 각층의 랭킹을 압살하기 시작한 괴물.

디멘션 게이트를 통해 지구로 돌아온 도전자들은 아직 이신을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이신과 만나 본 언더모스트의 도전자들하고도 접촉해 보지 못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정보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져온 소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뭐라고? 메르텡이 무너졌다고?"

"그래.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거지."

"다른 국가들은? 동맹국들이 있잖아! 안 도와줬어?"

"도와주기는커녕 배신했지. 개 같은 새끼들!"

백강우는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어안이 벙벙했다.

21층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 아이소시아.

그곳에서 한국의 도전자들이 속해 있는 국가 메르텡.

그곳이 망하기 직전이라고 한다.

분명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대륙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전력을 가진 곳이었는데.

"다른 도전자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나도 몰라, 소식이 전부 끊겼어."

"뭐...?"

신지원뿐만 아니라 잔뜩 저기압이 되어 버린 한국의 도전자들이 울분을 토하며 여기저기에 이러한 소식을 퍼트렸다.

[아이소시아 대륙, 국가 메르텡 멸망 위기!]

[전 세계의 다른 국가 도전자들 메르텡 죽이기 시작.]

[1층의 해방 이후 급격하게 쇠락한 메르텡, 이게 과연 우연인가?]

[메르텡에서 활동하던 한국의 도전자들의 행방 묘연해져....]

[영국의 초신성 베르고 "영국은 모르는 일이다."]

[미국, 중국, 일본 전부 묵묵부답. 일부 도전자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없다. 모두 밑에 층에서 일어난 일."]

전 세계에서 대놓고 한국의 위기를 모르쇠 한 일에 대해 한국의 국민들이 모두 분노를 표출했다.

└설마, 우리나라가 강해질 것 같으니까 바로 배신한 거야?

└한국이 지들 도운 게 몇 번인데? 배신했다고?

└미친 거 아니야? 모른 척하면 다야? 그렇게 그전에는 아이소시아 대륙 팔면서 정치했으면서 이제는 모르는 일이라고?

└개 같은 놈들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 강하던 메르텡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무너지냐고! 이게 말이 돼?

└망할! 1층에서 이번에 해방된 사람들은 어디까지 올라갔대?

└한국 견제한다고, 메르텡을 공격한 거야? 진짜 그런 거야?

1층부터 49층까지.

그 구간에서 가장 많은 도전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구간이라 한다면 단연 21층에서 29층이 통합된 아이소시아가 꼽힌다.

저층 구간에서 유일하게 9개의 층이 하나의 세계로 분류되는 구간.

아이소시아 대륙.

그곳이 이제는 전 세계의 쟁점이 되었다.

* * *

[21층에 입장하셨습니다.]

[마경(魔境)에 잠겨 가는 세계를 구하십시오.]

['문양'을 얻어야 '자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양'에 따라 추가 능력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국가 '메르텡'을 활성화시키십시오.]

"여긴 도대체...."

저 멀리 보이는 폐허가 된 도시.

사방에 먹구름 같은 검은 안개가 도시 전체를 잡아먹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정말로 저기가 메르텡이라고?"

"오빠...."

"선배님의 말씀이 정말이었어?"

"정말로... 다른 국가들이 배신한 건가?"

이신의 조언대로 21층에 다 같이 올라온 그들은 눈 앞에 펼쳐진 충격적인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 * *

[세계선이 확장됩니다.]

[11층에 입장하셨습니다.]

[이제는 각 층의 대기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15일마다 시험이 치러집니다.]

이신은 새롭게 펼쳐진 세계에 발을 디뎠다.

커다란 도시 안.

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커다란 시계탑.

그곳엔 1부터 15까지의 숫자가 쓰여 있었고 커다란 초침이 14에 가 있었다.

"딱 맞춰 왔네."

저 시간은 스테이지가 시작되는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다.

14에 초침이 있다는 것은 지난 스테이지가 시작되고 14일이 흐른 후라는 것.

다음 스테이지가 곧 시작된다.

커뮤니티 창을 열어 시간을 보았다.

12월 29일.

벌써 디멘션 게이트가 끝나가는 시기이다.

이제 11층인 그에게는 그다지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니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아니다.

지금 난리가 난 아이소시아 대륙.

그리고 1층의 해방.

이 두 가지 안건으로 지구가 떠들썩할 테니. 지금 빨리 나가서 이러한 소식을 알리고 싶어 할 이들이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후...."

등반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느렸다.

할 게 많다 보니 한 층, 한 층 클리어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특히나 이번 10층은 64강부터 다음 시합까지의 텀이 며칠씩 있다 보니 의도치 않게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었다.

그렇다고 우승 상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번 아이소시아의 사태가 벌어진 이상, 이제는 가장 중요한 아이템이 마르티르가 되었으니까.

커뮤니티 창을 켰다.

수많은 글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그중에 눈길을 끄는 글이 보였다.

* 차유민 실종 진짜 뭐야! 진짜 다른 국가들이 작정하고 한국을 말려 죽이려고 그러는 건가?

└진짜 그런 듯. 차유민 [층간 이동자] 스킬 있잖아.

└설마… 차유민이 21층으로 내려올까 봐? 차유민을 납치라도 했다고?

└납치는 무슨, 죽였겠지. 차유민 지금 지구에서도 연락 안 된다며? 지난 디멘션 게이트 때 탑에 들어가지도 않았다는데.

└말도 안 돼... 차유민이 죽었다고?

└아니야, 도전자들 잠수하는 거 하루 이틀이냐? 차유민이 어떻게 죽어? 누가 차유민을 죽여, 차유민보다 강한 사람이 없는데.

└그거야 모르지. 차유민도 방심하면 죽을 수도 있잖아.

차유민의 실종.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이미 죽었다고 확신하는 상태였다.

이신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자신에게 온 메시지들을 보았다.

이번 디멘션 게이트가 열리면 탑으로 들어오라고 이야기를 해 뒀었다. 근데 차유민에게 온 메시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가 실종된 건가?

차유민이 죽었다고?

섣부르게 판단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탑의 도전자들이 몇 달 연락 안 되는 건 충분히 많이 일어나는 일이다.

그게 설령 탑 안이 아닐지라도.

다른 메시지들을 보았다.

# 김강천 – 선배님, 저희 들어갑니다.

# 박혜원 – 저희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빨리 오세요.

# 지은주 – 선배님... 빨리 오셔야 돼요...!

# 강지훈 – 저만 믿으십쇼! 선배!

# 황강웅 – 자네, 빨리 오게. 이 늙은이 고생시키지 말고 말이야.

# 박주혁 – 제가 다 죽여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

.

엄청나게 쌓여 있는 메시지들.

만약 지금까지 제공된 정보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아무리 저들이 올라가서 버틴다 해도 힘들 것이다.

어쩌면 저들 중 누군가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20층에 모여서 다 같이 올라가라고 말해 둔 덕분에 힘을 합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부족하다.

단순히 21층의 마족들만이 그들의 과제였다면 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몇이나 될지 모를 적들과의 싸움.

아군이라 생각했던 이들의 배신.

사방에 둘러싸여 공격당하는 그 외로움을 이겨 내고 승리해야 한다.

'부탁한다.'

틱.

시계탑의 커다란 초침이 15로 움직였다.

[11층의 스테이지가 시작되었습니다.]

[참가할 도전자들은 포탈에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신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가 상태창을 보았다. 그곳엔 새로운 클래스인 '죽음의 지배자'가 적혀 있었다.

죽음의 지배자 클래스와 사계 소환이라는 클래스 스킬.

그 두 개의 설명을 본 이신이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건 진짜…"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시계탑 앞에 생성되는 커다란 포탈을 보았다.

"…말도 안 되네."

헛웃음을 내뱉은 이신은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 *

"이런 망할 새끼들!"

"젠장할! 여기 못 뚫으면 우리 모두 죽어!"

"오빠 뒤에!"

"윽!"

검은 안개로 뒤덮여 주변이 전부 어둠에 휩싸여 있다.

사방에선 마수들이 시시각각 도전자들을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고 있고, 이 기나긴 어둠은 그들을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서걱-!

"허억, 허억.... 무슨 함정이 이렇게 많아?"

"거의 다 왔다. 조금만 참아라."

"하아... 황 아저씨, 포션 더 없어요?"

"아껴 써야 해.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용량이 큰 아공간 주머니를 구매해 둘 걸 그랬구만."

[마경(魔境)의 핵을 발견했습니다. 핵을 부수십시오.]

"저깄어요!"

박혜원이 마경의 핵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그 소리에 주변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나머지 다섯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케로스예요! 강천 오빠!"

"내가 정면을 맡을게. 지훈아 너는 보조해! 혜원이랑 은주는 엄호하면서 황 사장님이랑 같이 주변 몬스터들 처리하고! 주혁이 형- 큭!"

기습적으로 어둠 속에서 날아온 단검이 강천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워낙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던 탓에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이걸 반응해? 너희가 그 최상위권으로 올라오던 도전자들인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내려 보았다.

"뭐야? 당신들이 왜 여기에...?"

"뭐긴, 알아서 뭐 하게? 이제 다 죽을 텐-."

캉! 카강!

어느새 그의 근처까지 다가간 박주혁의 검이 그를 수차례 찔렀다.

기습적인 공격에도 초월적인 반응 속도로 그의 공격을 모두 쳐낸 남자가 조금 놀란 얼굴로 자신을 공격한 박주혁을 보았다.

날카롭고 거친 인상과 살기 어린 눈빛.

"네가 박주혁이군."

"같은 인간을 배신해? 너희들보다 강해질까 봐? 개새끼들이."

박주혁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씹어 뱉으며 말했다.

"인간들을 배신한 게 아니야, 우린 한국을 배신한 거지. 그치?"

여유로운 미소 뒤로 다른 인간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작정하고 자신들을 죽이기 모인 적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충 보아도 여러 인종이 섞인 것을 보니 한 국가에서 보낸 모습은 아니었다.

간신히 마경을 뚫고 핵을 찾은 그들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다 죽여."

콰과과과광!

어둠으로 뒤덮인 마경(魔境) 속.

서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제40화

11층

[11층에 입장하셨습니다.]

[마을로 쳐들어오는 혹한의 군단을 막고 불의 수정을 지키십시오.]

간단하기 짝이 없는 목표.

이신은 주변에 워프 되는 다른 도전자들을 보았다.

"킥! 인간들이 많구만!"

"키이익, 트, 트롤이다!"

"그륵!"

고블린 둘이 옆의 트롤을 보고 기겁했다.

저 담력으로 어떻게 탑을 오른 건지.

헛웃음을 짓던 이신이 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건... 하피인가?'

양팔에 달린 깃털들과 날카로운 손톱, 발톱.

인간과 새를 합쳐놓은 듯한 모습.

그에 더해 세 명의 인간 도전자들도 보였다.

11층부터 확장된 세계선.

그건 단순 지구에서의 도전자들만이 아닌 다른 차원의 도전자들과 세계선이 연결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같은 차원의 도전자들이라 하더라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1층부터 20층까지는 다른 나라의 도전자들과 같이 탑을 오를 수 없다.

다른 차원의 도전자들과의 교류를 원한 것일까.

"망했다... 고블린 둘에 트롤 하나라니."

"저건 뭐지? 처음 보는 종족인데?"

"저건 하피족입니다. 하늘을 날 수 있으며 바람을 다룰 수 있는 종족이죠."

이신과 같이 이번 스테이지에 오른 3명의 인간 도전자들 모두가 한국인들이었다.

이 중, 하나는 이신도 본 적이 있는 도전자였다.

"하피족은 그나마 도움이 되겠네요. 그래도 트롤도 싸움은 잘하니까... 고블린들이 문제인데."

"아뇨, 하피족도 문제입니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동료를 버리는데 거리낌 없는 녀석들인데, 하늘까지 날 수 있으니 언제 저희를 버리고 다른 마을로 도망갈지 모릅니다."

"하아...."

이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멤버 구성을 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허술한 목책 몇 개와 대충 지어진 나무집 4개가 전부인 아주 작은 마을.

이곳에서 혹한의 군단을 막아야 한다.

[첫 웨이브까지 1시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됩니다. 마을에 있는 불의 수정을 지키십시오.]

[불의 수정을 이용해 상점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포기하실 도전자는 불의 수정을 접촉한 뒤 포기 의사를 보이면 됩니다.]

마을 가운데 떡하니 꽂혀 있는 비석처럼 붉은 돌.

다 같이 메시지를 확인한 도전자들이 불의 수정을 눈에 담았다.

"자, 다들 한 번 모여 봐요. 전략을 짜야 하니까."

조금 전 하피족에 관해 설명하던 안경을 쓴 남자가 도전자들을 불러 모았다.

"각자 서로 소개부터 하죠. 앞으로 며칠을 같이 지내야 하는데. 전 강영훈이라 합니다."

"키익! 나는 베바긴이다!"

"나는 조루긴!"

강영훈의 말에 고블린들이 먼저 손을 번쩍 들며 자신들을 소개했다.

"전 신하율이에요."

"박한입니다."

"그룩, 나는 벨칸이다!"

"난 해피."

모두 서로에 대해 통성명을 한 뒤,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이신을 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마주한 이신이 천천히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언더모스트에 있지 않았다면 이신의 얼굴을 알기는 힘들었다.

이신은 자신의 정보가 퍼지지 않도록 주변에서 영상을 찍지 못하게 철저히 막았기 때문에.

텍스트로 정보가 퍼질 수는 있으나, 얼굴을 본 사람들은 적을 것이다.

'음… 모르는 건가?'

이신은 재차 그들의 반응을 살핀 후 이름을 바꿔 말했다.

"이시훈."

"아, 시훈 씨군요. 우선 이곳에 랭커는 없는 듯하네요."

강영훈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혹한의 군단은 총 열 번의 웨이브를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강영훈의 주도하에 도전자들이 서로에 대한 전력을 파악하고 마을을 지키는 것에 관한 전략을 수립하던 중, 점점 도전자들 간에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목책이라도 더 튼튼하게 지어서 세워야죠! 수비를 하려면 제대로 방비를 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룩! 전사들은 그런 비겁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 당당히 앞서 싸워야 한다!"

"아니, 하...."

"키익! 내가 목책을 만드는 거 도와줄 테니, 나무 좀 베어 와라."

"킥, 맞다. 나 저 숲에 가기 무섭다!"

"잠깐, 뭐가 무섭다는 거야? 아직 웨이브는 시작도 안 됐는데!"

"나도, 못 해. 저 무거운 통나무들을 어떻게 들고 여기까지 와? 한 번 정도면 몰라도."

고블린들에 이어 해피까지.

그들의 비협조적인 모습에 박한이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하면 우리 못 지켜!"

"그룩! 그냥 싸우면 된다!"

"야이 새끼야! 그냥 싸우면 안 된다고!"

"나 잠깐, 주변 정찰 좀 하고 와도 되나?"

"갑자기 무슨 정찰입니까? 아직 말도 다 안 끝났는데."

"아니… 주변 정찰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안 됩니다. 대화 끝나기 전까지는 어디 못 갑니다."

"너 도망치려 하는 거지? 그렇지?"

"무슨, 아니거든?"

고블린들은 무섭다고 그저 해달라 하고, 트롤은 힘만 센 게 아니라 고집도 세고 멍청한 데다가 해피는 툭하면 도망갈 궁리만 한다.

이신을 제외한 세 사람은 답답해 미쳐 버릴 것 같은 상황이었고 셋의 언성은 점점 높아졌다.

"그쪽도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하... 미쳐 버리겠네!"

"시간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신의 말에 그들이 다급하게 시스템을 확인했다.

[00:21:38]

벌써 39분이나 지난 상태.

아직 어떤 준비도 못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 버린 것이다.

"시훈 씨 잠깐 이리로 와 봐요."

답답함에 연신 한숨을 내쉬던 영훈과 하율이 이신을 따로 불러냈다.

다른 녀석들이 사고 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박한은 자리에 남았다.

"이거 답 없어요. 다른 마을로 이동하는 게 어때요?"

"어차피 저 트롤은 저희 따라 움직이지 않을 테고 고블린들은 도움도 안 될 겁니다. 해피는 언제 배신할지 모르니 불안하고, 어쩔 수 없이 저희 네 명이서 떠나야 합니다."

불의 수정을 버리고 떠나도 이 스테이지에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각기 랜덤으로 배치된 도전자들이 모여 마을을 지키는 일종의 디펜스 게임과 같은 스테이지기 때문에.

이 스테이지 어딘가에 분명 다른 마을들이 존재할 것이다.

차라리 이곳을 버리고 다른 마을에 합류해서 그곳에서 같이 버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불의 수정이 깨지면 혹한의 군단이 강해지는 거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 팀워크로는 절대 열 번째 웨이브까지 못 버팁니다."

"맞아요."

"가다가 다른 마을을 바로 못 찾으면 숲에서 혹한의 군단을 맞닥뜨릴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 다른 마을에서 우리를 받아줄지도 미지수고."

이신은 다른 마을에 갈 생각이 없었다.

"그쪽도 수비할 인원이 많아지면 더 좋으니까-."

"그건 우리만의 생각이죠. 우리가 무슨 이유로 마을을 버리고 이주했는지 그들은 모르지 않습니까? 그것도 여덟 전부가 온 것도 아니고 고작 4명만 온다? 그쪽에서 우리를 뭘 믿고 받아줍니까? 와서 자신들 뒤통수칠지도 모르는데?"

"그거야 잘 설명하면-."

"고블린은 약해서 버렸고, 트롤은 멍청해서 버렸다 할 겁니까?"

"..."

이신의 신랄한 비판에 신하율은 말문을 잃은 듯 입을 앙다물고만 있었고 강영훈은 굳은 얼굴로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사실, 어찌 보면 이신의 말은 억지나 다름없었다.

클리어에 가망이 보이지 않으면 마을을 버려서라도 다른 길을 찾는 게 맞다.

그에 따른 위험도는 분명 있지만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도전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강영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이신의 말에 반박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마을이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는 미지수지만 이건 확실히 불가능하니까."

"불가능한지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예? 그거야 아까 말했잖습니까?"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지 마세요. 저는 여기 남을 겁니다. 셋이서 떠날 거면 떠나세요."

그들에게 미련 하나 없는 듯 바로 몸을 돌려 떠나는 이신의 모습에 두 사람이 벙찐 얼굴로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다.

"저희가 떠나면 다섯이서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강영훈의 외침에도 이신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이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렇게 강하게 나가지 않는다면 저들은 분명 떠날 게 분명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어떡할 거예요? 저 사람 없이 저희 셋이서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해요."

"...일단 첫 웨이브까지만 지켜봅시다. 저 사람 말처럼 무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다 별거 없으면요? 그때는 진짜 도망치기에 늦을 수도 있어요!"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그쪽이 말해 봐요.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강영훈도 답답했다.

심기일전해서 이번 11층을 깔끔하게 클리어하고 다음 층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근데 시작하자마자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소리쳐서 미안합니다. 우선 가죠."

* * *

[00:00:00]

[첫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다음 웨이브까지 3:00:00 남았습니다.]

"첫 웨이브까지는 괜찮습니다. 미리 짜 둔 대로 진형을 짜면 쉽게 막을 수 있습니다."

강영훈의 지시에 따라 각자 대형을 짜고 몰려오는 혹한의 군단을 막았다.

첫 웨이브는 간단한 맛보기라 할 정도의 수준이라 딱히 어렵지는 않았다.

"괜찮은데요?"

"그러게요, 제법 잘 싸우네요?"

"...그래도 부족합니다. 이 정도론 안 돼요."

박한과 신하율은 생각보다 잘 싸우는 고블린 둘과 벨칸, 해피를 보며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강영훈의 생각은 달랐다.

'합이 맞지 않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어.'

아무리 그래도 저 녀석들 전부 1층부터 10층까지의 스테이지를 통과하고 올라온 도전자들이다.

이 정도의 실력은 당연한 것.

그가 혹여나 하는 생각으로 첫 웨이브를 기다렸던 것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이시훈의 태도 때문이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 딱히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뭔가 다른 분위기는 왠지 한 번 도박을 걸어 보고 싶게 만들었다.

그래서 기대했다.

'고작 스켈레톤 세 기를 쓰는 게 전부였나.'

그 세 스켈레톤의 전투력이 제법 준수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전력을 모두 드러낸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딱히 상황을 뒤집을 만큼의 능력을 가진 것 같지는 않았다.

'젠장, 어떡해야 하지?'

여유 시간은 이제 2시간 남짓.

지금이라도 다른 마을을 찾아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자꾸 아까 그가 한 말들이 떠올랐다.

이대로 다른 마을을 찾아 떠났다가 그들이 자신들을 받아주지 않으면 그냥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것이다.

차라리 식량도 어느 정도 있고 집과 목책이라도 있는 이곳을 지키는 게 나은 것 같기도 했다.

"후...모르겠네."

* * *

[네 번째 웨이브가 끝났습니다.]

[다섯 번째 웨이브까지 2:52:51]

"하아...하아..."

"야이 멍청한 트롤 새끼야! 내가 거기로 가지 말라고 했지!"

뻗치는 열을 참지 못한 박한이 벨칸을 향해 소리쳤다.

"그룩! 무슨 소리냐! 적장이 있는데 어떻게 안 가나!"

"이 새끼야! 네가 앞으로 나가면 우리 진형이 무너지잖아!"

"내가 적장을 잡으면 이기는 건데 무슨 상관인가?"

"야이... 아오!"

강영훈은 한쪽에서 쉬고 있는 고블린들에게로 갔다.

"베바긴, 조루긴. 지금 쉴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목책을 보수하고 수비진을 짜야 합니다."

"키익, 나 힘들다."

"나도 힘들다, 이따가 하자."

"안 됩니다. 다섯 번째 웨이브부터는 적장이 바뀝니다. 그에 맞춰 대응해야 합니다."

"키익, 너 너무 말이 많다."

"맞다! 우리 그만 괴롭혀라! 키익!"

"아니 괴롭히는 게 아니라... 하...."

강영훈이 머리를 싸매고 이를 악물고 있는 시점에서 다른 한쪽에서는 신하율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해피! 해피!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빨리 나와!"

신하율이 커다란 나무 앞에서 소리를 빽빽 지르고 있음에도 아무 반응도 없자, 그녀가 지팡이를 들었다.

"지금 안 내려오면 나무 불태워 버린다. 하나, 두울-."

"아, 왜 그렇게 보채? 나도 바빴다고."

"뭐가 바빴는데?"

"도망치는 몇 놈들이 여기로 가서 잡느라 바빴지."

"너 자꾸 이렇게 내빼면 어떡해? 다 같이 움직여야 할 거 아니야!"

"내빼다니? 나도 바빴다니까?"

신하율은 뻔뻔하게 거짓말을 지껄이는 해피를 보며, 그냥 저 날개에 불을 질러 버릴까 하다 간신히 참았다.

이종족들에게 지친 세 사람이 마을 불의 수정 앞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불려간 이신도 같이.

"시훈 씨, 이 행태를 보고도 아까와 같은 말이 나오십니까?"

"당신 때문에 우리가 이게 무슨 고생이에요! 진짜 돌아 버릴 것 같다구요!"

"형씨, 지금이라도 우리끼리 내빼자고. 다른 마을 찾아봅시다."

"지금 찾기엔 늦었어요! 숲 어디에 혹한의 군단이 깔려 있을지 모르는데. 그놈들 뚫고 가야 된다구요!"

"맞습니다. 여태 제대로 쉬지도 못해서 이 상태로 숲을 헤매는 건 무리입니다."

세 사람이 말을 하며 원망하듯 이신을 바라봤다.

막상 이 모습을 보니 이신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 이종족들이 이 정도로 이들의 골머리를 썩일 줄은 몰랐으니.

"미안합니다."

진심이었다.

다섯 번째 웨이브까지는 쉽게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생각 이상으로 개차반인 놈들의 행태에 이신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면 다... 에휴... 그쪽이라고 뭐 알았겠어요...."

신하율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냥 포기할까요?"

"그래도 이렇게 포기하긴 아쉬운데."

"...."

이신은 그들을 보며 슬슬 나설 때가 되었다 생각했다.

이 정도면 나름 경험한 게 있겠지.

탑은 시련을 겪고, 그 시련을 이겨나간 이들에게 그만한 보상을 준다.

이신은 그들이 자신에게 의존해서 탑을 오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웨이브까지만 막아 보죠."

"그건 가능한데… 이게 희망이 있겠냐는 거죠. 기적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이신의 말에 신하율이 다 포기한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기적도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오는 법이죠."

[00:00:00]

[다섯 번째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혹한의 군단의 본대가 숲에 도착했습니다.]

"온다."

"젠장, 또 시작됐군."

"다들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땅의 진동에 다들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지이잉- 지잉-

그때 사방에서 생성되는 검은 포탈들.

"뭐, 뭐야?"

포탈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에 세 사람은 물론, 고블린들과 벨칸, 해피까지 몸이 굳었다.

"이, 이런 게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검은 포탈 속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스켈레톤.

그 흉악한 두개골과 검게 일렁이는 안광이 그들을 직시했다.

"오… 우거...?"

"쏴, 쏴! 막아!"

크라라라라락!

이신에게 바크라는 이름을 선사 받은 스켈레톤 오우거가 고막을 찢을 듯한 괴성을 내뱉었다.

공격하려던 고블린들은 몸이 굳어 들고 있던 독침들을 떨어트렸고 창백해진 해피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신의 검은 마력을 받고 더욱 강해진 오우거의 피어에 버티는 녀석은 인간을 제외하면 벨칸 뿐이었다.

"대단… 하군...."

벨칸은 이를 악물며 곡도를 움켜쥐었다.

쿵!

그때, 갑자기 무릎을 꿇은 바크가 일렁이는 안광을 번뜩이며 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불렀나... 주인...."

그 시선을 따라 모든 이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바크의 시선 끝에는 담담한 얼굴을 한 이신이 있었다.

"주...인?"

"이게 무슨 일이야? 저 괴물들의 주인이 이 녀석이라고?"

"시훈씨...?"

"그룩! 우리의 동료였던 건가!"

이신을 제외한 모두가 얼빠진 얼굴로 이신을 보았다.

이신은 그런 그들을 무시한 채 언데드들의 너머를 보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막아. 저 얼음덩어리들 전부."

그의 시선의 끝에는 그들을 향해 달려오는 혹한의 군단이 있었다.

제41화

콰앙―!

오우거의 마력이 담긴 주먹이 땅을 내리치자, 혹한의 군단의 전열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키익! 킥! 무, 무섭다."

"뛰어난 전사구…나! 대단하다!"

"히익! 저거… 우리 편 맞지?"

일선에서 혹한의 군단과 맞서는 언데드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스켈레톤 오우거의 모습은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듬직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카아악!"

"아악!"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온 스켈레톤 늑대의 괴성에 놀란 신하율이 비명을 질렀다.

"이게... 말이 돼?"

전장을 지배하는 수십의 언데드들.

그 끔찍할 정도로 짙은 살기와 맹목적인 악의는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 불사의 군단.

그렇기에 살아 있는 자에겐 더욱 두려움을 안겨준다.

"그 사람 정체가 뭐예요? 이신 님인가 설마?"

"한참 전에 10층에 올라가고 그 이후로 소식을 못 들었는데... 진짠가?"

"그렇다기엔 굳이 자신을 숨길 이유가 있습니까?"

"그니까요. 후... 그나저나 저런 것들을 저렇게 풀어 두고 사라지면 어떡하라고...."

"일단 저들이 우릴 공격하지는 않을 거 같으니까 최대한 버팁시다."

* * *

"여긴가?"

숲의 깊은 곳.

셀 수도 없이 많은 혹한의 군단 병사들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모여 있다.

다섯 번째 웨이브가 시작되면 그제서야 나타나는 혹한의 군단의 본대.

이곳에 다른 마을에 쳐들어갈 병력들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주인님, 병력이 너무 많습니다."

"가서 저 군단장이라는 놈 목만 따 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멍청한 놈아, 저렇게 많은 놈들을 어떻게 뚫고 갈 건데?"

"주인님 마법이면 가능하지! 너 설마 주인님을 무시하는 거냐?"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만해. 방법이 있으니까."

이신은 저 멀리 밀집해 있는 군단의 모습을 보았다.

현재 지배력은 94.

이미 저쪽 마을에 소환해 놓은 스켈레톤 오우거 바크를 포함해서 다른 놈들까지 생각하면 여기서 지배할 수 있는 언데드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저 수천이나 되는 군단의 병사들과 대적하기엔 지금 이쪽의 수가 너무 부족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사라질 병사들을 한곳에 모아 죽이는 일이다. 이번 스테이지에 참가한 도전자들 전부를 합쳐도 저 병사들을 한 번에 상대하긴 힘들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꼭 언데드들이 내 지배를 받을 필요가 있는가?

"하프니스."

이신의 부름에 검은 포탈 속에서 죽음의 사신이 튀어나왔다.

- 불렀나.

"사(死)의 세계에 집어넣었던 언데드들. 다 풀어."

- 알겠다.

[생사의 통로]

생(生)과 사(死)의 세계를 잇는 통로를 연결합니다.

하프니스로 인해 생긴 언데드들 전부가 사(死)의 세계에 들어가 있다.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세계.

지이잉―

혹한의 군단 본대 위로 검은 포탈들이 생겨나고.

검은 포탈 너머로 흘러나오는 끈적한 사기(死氣)에 혹한의 군단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다.

포탈을 통해 떨어지는 수백의 언데드들.

그어어어어어―

가아아아아아―

그들의 고통에 찬 괴성이 전장에 울려 퍼지고.

혹한의 군단은 갑작스런 적들의 습격에 당황한 듯 우왕좌왕인 모습을 보인다.

"어디 망자 놈들이 이곳에 발을 들이느냐!"

혹한의 군단 가운데, 그들을 지휘하는 군단장.

벨티아르.

저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벨티아르가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고성을 내질렀다.

검은 포탈을 넘어오는 언데드들 중에서도 이질적인 마력을 내뿜는 스켈레톤.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녀석이 일렁이는 푸른 안광으로 벨티아르를 쳐다보았다.

"여긴...어디지...? 웬 버러지가 나를 꼬나보는 거지?"

"건방진 스켈레톤이구나. 나 혹한의 군단장 벨티아르! 감히 이곳에 쳐들어온 네 놈들을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 주겠다."

"웃기는구나... 죽음 이전의 나였다면 모르겠지만 죽음으로써 리치가 된 내게 위협은 더 이상 없다...."

자신을 리치라 부르는 언데드.

이신에게 죽어 언데드가 되어 버린 칼렌이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죽음의 손길."

칼렌의 주력 마법인 죽음의 손길.

언데드가 되며 더욱 강력해진 죽음의 손길이 혹한의 군단 전방위로 검은 손길을 뻗었다.

"그 정도론 어림없다! 가라! 나의 병사들이여."

언데드들과 혹한의 군단이 맞부딪힌다.

조악하게 이루어진 뼈들이 흩어지고 부서진다.

처음 자신만만하게 덤벼들었던 칼렌의 안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표정이 보기 좋구나!"

"웃기지 마라! 싸워라! 망할 언데드 놈들아!"

칼렌의 마력이 언데드들에게 뻗어지며 놈들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예상외의 분전이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사(死)의 세계 안에서 그 역량을 꽤나 올린 것 같았다.

죽기 전 흑마법사였던 탓인지 언데드가 되었음에도 전력이 감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했다.

사의 세계는 말 그대로 죽은 자들의 세계.

그곳에 들어간 언데드들은 이신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그저 하프니스를 통해 언제든지 이쪽으로 불러올 수 있을 뿐.

사(死)가 아닌 생(生)의 세계로 불러와 통제하에 놓지 않고 풀어 놓고 제멋대로 날뛰게 놔둔 것이다.

사의 세계에 있는 건 이신의 언데드들뿐만이 아니다. 그 탓에 그 안에서 언데드들이 다른 놈들과 치고받고 싸우다 몸이 부서져도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포탈을 통해 나온 언데드들의 수도 이신이 사의 세계에 집어넣었던 수보다 현저히 줄어들어 있는 게 훤히 보였다.

대신 그 개체 하나하나의 힘이 사의 세계에 들어가기 이전보다 강해져 있었지만.

"저러다 정말 죽겠습니다."

"저놈은 좀 잘 싸우는데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워리와 메이 또한 칼렌의 분전을 인상 깊게 보았는지 그를 걱정하는 듯한 말을 했다.

물론, 그 모든 게 이신의 전력 향상을 위해서였지만.

이신은 품속에서 돌돌 싸여 있는 스크롤 하나를 꺼냈다.

우우웅-

쫙 펼쳐진 스크롤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자들과 수식들.

그 위로 이신의 마력이 가미되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스크롤에서 뻗어 나간 마력이 허공에 커다란 포탈을 만들어 냈다,

"타이탄."

전생에 대마법사였던 이신도 현재로서는 절대 사용할 수 없는 대마법.

[차원 창고]

무려 거금 5만 포인트나 사용해서 구매한 그 1회용 대마법 안에서 수십 기의 타이탄들이 걸어 나왔다.

쿵. 쿵. 쿵. 쿵.

혹한의 군단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숫자였지만 30기에 가까운 무인 타이탄이 모이니까 그 위압감은 혹한의 군단 못지않았다.

9층의 대공장에서 찍어 낸 인공지능 타이탄들.

기존 설계도에서 조금 변형되어 원래의 타이탄들 보다는 성능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타이탄의 조종사가 필요 없다는 점과 쉽게 찍어 낼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또한 능력이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고.

"너희도 가서 엄호해."

"알겠습니다."

"예."

"너도 가라. 군도."

이신의 팔찌에서 뿜어 나온 마력이 군도를 소환했다.

"오랜만의 싸움이군."

지난 10층에서는 군도가 너무 눈에 띄기에 불러내지 않았지만 이런 대전투에서만큼은 군도의 존재감이 빛을 발했다.

"크라라라락!"

전장을 휘젓는 저들의 싸움을 보던 이신이 마력을 일으켰다.

촤아악!

허공에 나타난 피의 웅덩이.

그 안에서 고귀한 격을 가진 존재가 나타났다.

"언제 부르나 기다리다 따분해 죽을 뻔했어. 주인."

"우린 벨티아르를 죽일 거야."

"흠... 저 정도는 나 혼자로도 충분한데."

"네 원래 힘이라면 순식간이겠지만, 지금으로선 안 돼. 너와는 상성이 맞지 않아, 놈들은 피를 흘리지 않으니까."

"칫."

저런 녀석들조차 쉽게 처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릴리안이 자존심이 상한 듯 표정을 찌푸렸다.

"속전속결로 간다."

그간 소모됐던 시간을 줄일 필요가 있다.

21층에 빨리 올라야 한다.

* * *

"허억... 허억...."

"미치겠네. 이렇게 갑자기 사라진다고?"

"이건 아니지...."

전장의 일선에서 혹한의 군단을 도륙하던 이신의 언데드들이 갑자기 검은 포탈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그들은 갑작스런 언데드들의 부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전세가 많이 기운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갑자기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강영훈은 식은땀을 옷 소매로 대충 닦아내며 땅에 주저앉아 속으로 투덜거렸다.

전열이 무너진 게 가장 컸다.

갑자기 고립된 벨칸을 구하는 것부터 전장을 이탈하려는 해피를 붙잡는 것까지.

아주 혼돈의 도가니였다.

"후...."

"그 사람 어떻게 된 거죠? 설마 죽었나?"

"설마...."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언데드들이 사라질 이유는 없잖아요."

"그건 아닐 겁니다. 술사가 죽었다면 언데드들은 그 자리에서 힘없이 쓰러져야 하는데 그들은 포탈을 타고 사라졌으니까요."

[혹한의 군단장이 쓰러졌습니다.]

[나머지 웨이브가 모두 사라집니다.]

[11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업적을….]

[....]

갑자기 쏟아지는 시스템 메시지들.

다섯 번째 웨이브를 막던 이들은 뜬금없는 소리에 어리둥절했다.

"군단장이 쓰러졌다고?"

"무슨 소리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이시훈 씨가 군단장을 잡은 거야?"

"어디 갔나 했더니 군단장 잡으러 간 거였어요?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이걸로 확실해졌습니다. 이시훈 씨가 이신 님일 겁니다."

"진짠가...?"

"이 정도의 능력을 보이려면 이신 님 말고는 가능한 도전자가 어딨겠어요."

"하긴...."

"나가 보면 알겠지. 나가 봅시다!"

* * *

[혹한의 군단장 벨티아르를 쓰러트렸습니다.]

[혹한의 군단을 모두 쓰러트리셨습니다.]

[11층을 최단 시간 클리어하셨습니다.]

[도전자님의 업적이 기록됩니다.]

[242,200점을 달성했습니다.]

[242,200p를 획득합니다.]

[체력이 8,020 올랐습니다.]

[마력이 16,200 올랐습니다.]

[힘이 10 올랐습니다.]

[민첩이 6 올랐습니다.]

[지력이 20 올랐습니다.]

[지배력이 15 올랐습니다.]

[『칭호 – 냉혹한 학살자』를 획득합니다.]

"벨티아르... 악마종이었나?"

벨티아르를 죽이며 발동된 죽음의 통찰자의 능력.

그 배경은 사방이 혹한의 냉기로 가득 찬 마계였고 그 안에 있는 벨티아르는 다짜고짜 찾아온 신의 사도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무리 신들이라도 악마종까지 건들 줄이야."

"믿기지가 않네, 그래도 마계엔 마신(魔神)이 존재할 텐데."

"그거야 알 수 없지. 마신이 허락한 일일 수도 있으니."

이신은 죽어 버린 벨티아르의 시체의 앞에 섰다.

"하프니스. 이 녀석 일으켜."

- 알겠다....

하프니스의 낫이 벨티아르의 혼을 그었다.

그그그그그극-

뼈와 살점이 분리되며 죽음의 힘이 그 연결을 지탱하고 그 안에서 거대한 모습의 언데드가 일어선다.

"나… 는...."

"벨티아르, 내 권속이 돼라."

[검은 마력이 혹한의 군단장 벨티아르의 지배를 시도합니다.]

"크… 아아아...크아악!"

이신의 지팡이 끝에서 흘러나온 검은 마력에 벨티아르가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벨티아르가 검은 마력의 저항에 실패합니다.]

[벨티아르가 당신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지배력이 상승합니다.]

[지배력이 상승합니다.]

[지배력이....]

쿵!

스켈레톤 오우거 바크에 비견될 정도로 큰 몸집을 가진 벨티아르가 무릎을 꿇었다.

"나 벨티아르는 당신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한다."

"좋아, 들어가 있어."

이신은 만족한 얼굴로 벨티아르를 그림자 공간 안에 집어넣었다.

조금 전까지 이신에게 극한의 적대감을 보이던 벨티아르가 이신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벨티아르의 영혼의 격을 생각하면 검은 마력의 지배력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만.

[죽음의 지배자]

# 죽은 자들이 쉽게 두려워합니다.

# 죽은 자들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됩니다.

# 죽은 자들에게 쉽게 인정받습니다.

이번에 네크로맨서에서 바뀐 클래스.

이 죽음의 지배자로 인해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갈수록 정체성이 이쪽으로 굳어 가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르티르."

- 네, 주인님.

이신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마르티르를 꺼냈다.

순백색의 아름다운 검신.

이 안에 담긴 격을 생각하면 조금 전 벨티아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니다."

마르티르가 이 기울어진 밸런스를 맞춰 줄 균형추가 될 것이다.

"주인님, 이번 피해가 제법 큽니다."

메이가 다가와 걱정되는 듯 말했다.

혹한의 군단과의 전쟁이 벌어진 장소.

사방에 죽어 나자빠진 군단의 병사들과 부서져 버린 뼈다귀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곳곳에 반파된 타이탄들과 여기저기 망가진 땅들이 보인다.

"이번 싸움으로 타이탄 23기가 폐기 처분될 정도로 망가지고 7기가 당장 수리를 맡겨야 될 정도입니다. 그간 모았던 언데드의 75% 정도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생각보다 많이 남았네."

병력의 차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원래라면 사방으로 흩어져서 차례차례 격파할 병사들을 한자리에서 처리했으니.

이 정도의 피해는 각오한 부분이었다.

"대신 벨티아르를 얻었으니 손해는 아니야."

그림자 공간에 저장할 수 있는 언데드는 극히 한정적이고, 그만큼 성장 가능성이 있는 놈들만 모아야 했다.

그리고 가장 큰 목적인 시간을 벌었으니.

일주일은 절약했다.

"12층으로 간다."

[12층으로 이동합니다.]

* * *

"커...억...."

촤아악!

박주혁의 검이 적의 살점과 함께 뽑혀 나왔다.

그들을 습격했던 10명의 도전자들.

그들 전부가 처참한 모습으로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우… 우웩!"

"은주야! 괜찮아?"

"하아... 하아...."

"정신 바짝 차려! 이제 시작이니까."

평소에 보지 못했던 바짝 독기가 오른 박주혁의 눈엔 살기가 넘실거렸다.

콰직!

박주혁의 검이 마경의 핵을 뚫었다.

[마경의 핵이 부서졌습니다.]

[일부 지역의 마경이 사라집니다.]

"시간은 우리 편이야. 이제 저 밑에서 지원군이 대거 올라올 테니."

제42화

메르텡 탈환

검은 안개들이 걷히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푸르른 땅이 나타났다.

계속되는 싸움에 지친 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진짜 커뮤니티가 먹통이 됐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기존에 있던 한국 도전자들은 다 어떻게 된 걸까? 진짜 모두 죽은 건가?"

은주의 말에 모두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설마... 그래도 같은 사람들끼리 그렇게까지 했으려고?"

"오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벌써 70년도 더 지났어. 그 끔찍한 참상이 다시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야."

"그래 지훈아. 이번에 그렇게 습격을 받고도 모르겠어? 저놈들에게 이젠 우린 적이야. 저걸 봐."

박주혁의 검이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시체의 조각을 가리켰다.

"저들에게 우리는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교란종일 뿐이야. 언제든 빨리 죽여 박멸시켜 버려야 할."

"우선은 우리 모두 빨리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어야 하네. 적들이 언제 또 쳐들어올지도 모르고 이제 곧 후속으로 밑에서 도전자들이 올라올 테니."

"맞아요, 우리가 선발대잖아요? 그전까지 메르텡을 다시 활성화해야 해요."

한국 도전자들의 제2의 국가.

그들의 시선에 저 멀리 어둠에 휩싸인 도시의 모습이 보인다.

* * *

서걱! 쿵!

김강천의 대검에 중형 마수의 목이 떨어졌다.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어떻게 벌써 중형 마수가 나타나지?"

강지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죽어 버린 마수의 시체에 대고 투덜거렸다.

"놈들이 무슨 수를 쓴 건가?"

"메르텡이 무너진 것부터가 잘못됐어. 뭔 수를 썼어도 이상하지 않아."

"이건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맞아요, 어쩌면 도전자들이 마족들을 조종하는 방법을 찾았을 수도 있죠."

김강천의 말이 맞다.

여기는 아직 [문양]을 하나도 얻지 못한 21층의 도전자들이 거주하는 시작 지점.

국가를 수복해야 하는 첫 번째 스테이지가 진행되는 구간이다.

벌써부터 중형 마수가 나온다는 건 인위적인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게 아니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성벽을 뚫어야 해. 다행히 병사는 얼마 없고 마수들과 마인들만 조금 있을 뿐이야. 황 사장님의 [구조 파악]으로 성벽의 약화 된 부분을 파악하고 강천이가 구멍을 뚫어. 이후엔 계획대로 빠르게 돌입한다."

박주혁의 지시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다섯이 성벽을 향해 뛰었다.

"카아아악!"

성벽 주변을 배회하던 마수들이 달려들었다.

[땅 파기]

황강웅의 삽이 땅을 찌르자 마수가 디디고 있던 땅이 뒤집히며 마수의 균형이 무너졌다.

"하압!"

연이어 들어오는 강지훈의 검이 마수의 다리를 베고 기동력이 약화 된 마수의 목을 박주혁의 검이 꿰뚫었다.

푸욱! 촤아악!

서로의 합으로 손쉽게 마수를 잡은 그들이 연달아 달려오는 마수들을 때려눕히고 성벽에 붙었다.

황강웅의 기술인 [구조 파악].

건축물에 한해서 보는 것만으로 그 구조의 전반적인 부분을 한 번에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다.

건물 벽에 붙은 채로 빠르게 성벽을 훑으며 움직이던 황강웅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여기를 때려!"

황강웅의 지시에 김강천이 망설임도 없이 가리킨 지점을 내리쳤다.

쿠궁!

이곳에서 힘 스탯이 가장 높은 김강천의 일격에 성벽의 한쪽이 손쉽게 허물어졌다.

무너진 잔해 사이로 성인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생겼다.

"좋아, 들어가죠."

성벽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마경으로 둘러싸인 내부 모습을 보며 난감함을 표출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메르텡의 구조가 적힌 지도를 미리 구해 놔서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곳곳에 특정한 구조물이 있으니 이 마경 속에서도 길을 찾을 방법은 있었다.

"여기. 목표는 알현실이에요. 이곳에 핵이 있을 거예요."

"좋아, 내성으로 들어가려면 꽤 고될 거야. 다들 마음 단단히 먹어. 특히 은주."

박주혁이 지은주를 보며 말했다.

벌써부터 걱정이 잔뜩 쌓인 모습.

이런 모습으로는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확률이 높았다.

이전 싸움에서도 지은주가 결정적인 순간에 적들을 처리하는 데 망설이다가 강지훈이 크게 다칠 뻔했었다.

마족들을 공격하는 것에는 딱히 개의치 않아 했지만 같은 인간들을 공격하는 것에는 아직까지도 적응을 전혀 하지 못한 상태.

이제부터는 정말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이 상태로 지은주와 함께하다가는 정말 누군가가 희생하게 될 사태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잘 들어 지은주. 아까도 그랬다시피 네가 또 망설이면 우리들이 다칠 확률이 높아. 알겠어? 적들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고."

박주혁이 지은주의 양어깨를 잡으며 강하게 말했다.

오냐오냐해 줄 때는 충분히 지났다.

"그, 그래. 은주야. 울지 말고...."

주혁의 다그침에 울먹이는 은주를 혜원이 달랬다.

그녀가 울먹이는 건 주혁의 다그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이 답답하기 때문이었다.

"마수들이 눈치챘어."

김강천이 저 멀리 다가오는 마수들을 보며 다급히 말했다.

"지은주, 또 말 안 해. 이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기 싫으면 그냥 애초에 공격에 가담하지 마. 뒤에서 보조만 해. 그리고 메르텡이 활성화되면 그곳에서 얌전히 기다려. 우리가 길을 뚫을 때까지."

말을 마친 주혁이 울먹이는 은주에게 더 이상의 시선을 두지 않고 검을 빼 들며 마수에게 뛰었다.

"은주야, 너무 자책하지 마. 주혁 오빠도 다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까...."

"아니야... 나도 더 이상 짐 되기는 싫어."

크게 심호흡을 한 은주가 다가오는 마수와 마인들을 노려보았다.

"저 마인들은 내가 죽일게, 나한테 맡겨 줘."

그녀가 죽이길 꺼리는 건 인간들뿐만이 아니다.

인간과 비슷한, 혹은 인간들에게 익숙한 생명체들.

마인도 결국 마기에 물든 인간일 뿐이었고 겉모습도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그녀의 망설임을 자극했다.

같은 인간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혼자 마인을 직접 죽이려 하는 건 은주에게 나름 큰 각오였다.

"하아."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심호흡으로 간신히 진정시킨 그녀가 지팡이를 들었다.

그녀의 앞으로 온몸이 검게 물든 마인 둘이 비적비적 걸어왔다.

마인이 땅을 박차고 날카로운 손톱을 들이밀었다.

[스톤 월(Stone wall)]

돌벽이 튀어나와 다가오던 마인 둘을 위로 쳐내고.

[스톤 엣지(Stone edge)]

땅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돌송곳이 공중에서 떨어지는 마인들의 배를 그대로 관통한다.

"카아아악!"

꿰뚫린 몸에서 검은 피가 비산하며 지은주의 얼굴에 튀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피를 맞은 지은주가 움찔하며 고개를 움츠리고 눈을 감으려 할 때.

"봐! 눈 떼지 마!"

어느새 마수를 처리하고 은주의 근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주혁이 소리쳤다.

그 말에 지은주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빳빳이 고정한 채, 마인들을 보았다.

자신의 마법에 마인들이 꼬챙이 꿰이듯 피를 흘리고 내장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저 피부색이 검고 손발에 손톱이 길게 자란 것을 빼면 영락없는 인간과 같은 모습.

지은주는 조금 전 다짐했던 각오를 떠올리며 그 장면을 직시하려 했다.

"네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이야. 적응해, 익숙해지라고. 그 정도도 못 할 녀석이 왜 탑에 들어왔어? 잘 생각해. 네가 탑에 들어온 이유를."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붙잡으며 은주는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주혁의 말이 맞다.

'내가 탑에 들어온 이유....'

그저 도피하기 위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홧김에 들어온 것이었다.

이곳이라면 도망칠 곳이 없으니 다시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들어왔다.

은주의 가쁜 호흡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걱정시켜서."

그 모습을 보던 박주혁이 잘 보이지 않는 미소를 살짝 짓고는 돌아섰다.

"빨리 가자. 늦었다."

* * *

내성의 성문이 부서지고 그 안에서 쏟아진 마수들의 사체가 사방에 깔려 있었다.

선혈이 낭자하고 비릿한 마수들의 피 내음이 사방에 진동했다.

"하아... 하아... 하아...."

"미치겠네. 이제야 진입인데 벌써 이런 꼴이라니."

"하아... 며칠이 걸린 거야 도대체."

"황 아저씨, 저 포션 좀 주세요. 마력이 고갈되기 직전이에요."

"여기, 이제부턴 마력도 아껴 써. 포션도 얼마 안 남았으니."

잔뜩 지친 여섯은 저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마수의 사체에 기대어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여태 20층까지 최상위권을 싹쓸이하다시피 한 여섯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이미 초기 시작 지점에서 다 죽었을 것이다.

슈우웅―

"피해!"

사악! 펑! 퍼버버벙!

쉬고 있는 그들 위로 떨어지는 불덩이들.

박주혁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나머지 여섯 모두 곧장 방어 태세를 취했다. 바로 반응한 덕에 다행히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수들의 시체로 둘러싸여 있던 터라 성문의 입구가 불길에 휩싸였다.

순식간에 치솟은 전장의 온도에, 도전자들의 체력에 대한 부담감이 한층 더 가중되었다.

"상당히 지쳐 보이는구만."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그들에게 걸어왔다.

"우리가 지치길 기다렸나?"

"그래, 워낙 기세가 무서워야 말이지."

하는 말과 다르게 로브인의 모습은 여유롭기 그지없다.

"도대체 우리에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박혜원이 답답한 심정을 내비쳤다.

"진짜 몰라서 그래? 다른 어느 나라보다 한국 사람인 너희들이 더 잘 알 텐데? 경쟁을 가장 강요받는 곳이 너희들 아닌가?"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요! 같은 사람들을 고작 그런 걸로 죽이는 건...!"

지은주가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천성이 착하고 여린 그녀에겐 이런 상황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고작 상대를 시기해서 죽이려고 한다는 건 거의 2년 가까이 탑에 머무르고도 적응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직 어리군."

"혼자서 오진 않았을 테고."

김강천의 기습적인 돌진.

눈 깜짝할 새에 로브인의 앞까지 간 강천의 대검이 위에서 아래로 그어졌다.

차앙-!

일렁이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쌍 단검이 대검의 경로를 가로막는다.

그러나 그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부드럽게 뒤로 물러난 강천이 눈앞에 나타난 복면인을 보았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네. 다른 놈들도 나오지?"

"큭. 여유로운 척은."

갑자기 주변에 나타난 시꺼먼 옷을 입은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에 깔린 검은 안개에 동화되듯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던 인간들.

"도전자들은 아닌 거 같은데."

느껴지는 분위기가 여타 다른 도전자들과 너무 달랐다.

주변에 깔린 이들 전부가 같은 마력의 파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금 전, 강천의 공격을 막았던 단 한 녀석만 제외하고.

"눈치가 빠른데? 이신한테 배웠다더니, 마력에 대한 감각이 좋은가 봐?"

"너희들은 실수하는 거야. 선배님이 올라오면 이 짓거리가 통할 거라 생각해?"

"인정한다. 이신이란 놈은 규격 외지. 근데 그거 알아? 너희는 아니야."

조금 전 대검과 단검이 맞부딪히며 뿜어낸 풍압에 로브 자락이 흩날리며 로브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검은 앞머리가 눈을 뒤덮을 정도로 내려온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그가 썩소를 지으며 한국 도전자들을 바라보았다.

"이신이란 놈이 오기 전에 그 손발들을 잘라 놔야 놈도 어쩌지 못하겠지."

그의 지팡이 끝에서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그리고 그 녀석도 너희와 똑같은 꼴이 될 거다."

그가 거만한 얼굴로 한국의 도전자들을 내려보았다.

"인유우 코고?"

"뭐? 저게 인유우 코고라고?"

길게 늘어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쫙 찢어진 눈과 강렬한 화염 마법.

동양인 중에 이러한 화염술사는 인유우 코고밖에 없었다.

"영상으로 봤어."

"그렇군, 그 녀석이구만."

황강웅도 커뮤니티 명예의 전당에 올라온 영상에서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 영상들이 모두 내려가서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2층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볼 수 있었다.

일본의 저층부 랭커.

강력한 화염 마법으로 이름을 떨친 도전자.

"걱정 마, 그래 봤자...."

"봐라."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푸른 문양.

그 모습에 말을 하던 김강천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고작 [자격]조차 얻지 못한 놈들이… 너희들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 색의 격차를 메꾸기는 힘들 거다."

"파란 문양...."

"젠장, 파란 문양을 얻은 녀석이 왜 여기까지...!"

"이만 죽어라."

인유우 코고의 마력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파란 문양이 빛나며 그 불길에 화력을 더해 주었다.

"모두 피해!"

제43화

"[움직이는 화염]"

사방을 불태우던 화염이 인유우 코고의 마력을 따라 이어졌다.

그의 특기는 화염으로 전장의 상황을 조율하는 것.

어느새 그의 의도대로 전장이 변하고 있었다.

"큭! 흩어지지 마!"

"꺄악!"

"은주야! 젠장!"

마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지휘하듯 인유우 코고의 지팡이가 움직이는 대로 화염이 사방을 휘저었다.

화염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둘, 둘, 둘로 쪼개진 상황.

3m 가까이 솟아오른 불의 벽 때문에 한국의 도전자들은 쉽게 다시 뭉칠 수가 없었다.

"모두들 조심해! 상대는 인유우 코고뿐만이 아니야!"

"암살자들을 조심해!"

박주혁과 김강천의 외침에, 다른 이들도 암살자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놈들도 불길 속에선 운신하기 어려울 거야."

"오히려 인유우 코고의 마력 때문에 더 파악하기가 힘들어요."

박주혁이 이를 악물고 불길 너머를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 저쪽에 인유우 코고가 지팡이를 들고 불길을 조종하고 있을 것이다.

"은주가 걱정이야."

"어떡해요?"

"도와주러 가긴 늦었어. 우린 인유우 코고를 잡으러 간다."

박주혁과 박혜원이 불길 안에서 인유우 코고의 위치를 찾고 있을 때, 지은주와 황강웅은 암살자 셋을 상대하고 있었다.

쉬이익- 채앵-!

"은주야! 놈들의 마력 파장을 읽어라!"

"아저씨, 못 하겠어요!"

"할 수 있다, 침착하게. 내가 지켜 주마."

그의 말에 지은주가 눈을 감고 차분하게 마력을 움직였다.

'선배님이 말했잖아. 그렇게 연습했는데...할 수 있어.'

- 마력 파장은 느끼는 게 아니라 읽는 거다. 특성을 생각해.

'암살자들의 특성....'

- 은신이란 기술의 마력 파장은 암살자와 매우 달라. 예리하고 날카로운 암살자들과 달리 은신할 때의 마력 파장은 매우 정적이지.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서 느껴지는 마력들.

그 거센 마력의 흐름 사이에서 유난히 느리게 흐르는 마력의 파장.

자신의 코앞에서 이질적인 파장을 느낀 지은주가 마력을 끌어 올리고.

쉬이익! 가각!

땅에서 튀어나온 돌덩이가 암살자의 검을 막았다.

"아저씨!"

지은주의 말이 나오기 전부터 상황을 보던 황강웅은 이미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든 상태였다.

퍽!

그의 곡괭이가 암살자의 가슴팍을 찍어 쳐냈고 그대로 가슴팍이 함몰된 암살자가 불의 장막 위로 던져졌다.

"좋아… 악!"

그때, 기뻐하던 은주의 팔을 암살자의 단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반응이 조금만 느렸더라도 그대로 팔 하나가 망가졌을 것이다.

"조금 전도 그렇고... 감은 좋군."

허공에서 나타난 암살자가 그녀를 비웃으며 땅에 박힌 단검을 빼 들었다.

"귀찮은 년. 먼저 죽어라."

* * *

"큭!"

챙! 채앵-! 챙!

강지훈이 암살자들의 공세를 버티고 김강천은 아까 전 자신의 공격을 막은 암살자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차앙―!

땅을 긁고 쭉 밀려나는 김강천이 눈을 부릅뜨며 이를 악물었다.

대검을 다루는 자신을 힘으로 밀어낸 암살자.

절대 평범한 놈이 아니었다.

'힘이 200이 넘는 나를 상대로 힘에서 안 밀린다고?'

김강천은 태연한 척 서 있었지만 매우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지금까지 거의 최상위의 업적을 쌓으며 스탯을 누적시키고 올라왔다.

그중 가장 투자를 많이 한 것이 힘이었는데 암살자인 상대가 자신과 힘에서 막상막하를 이루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 암살자의 단검이 녹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초록 문양]의 자격자... 역시, 도전자였나?"

"알았으면 포기하고 순순히 죽어라."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김강천에게 쇄도한 복면인 도전자가 계속해서 급소를 노리고 공격해 왔다.

'제기랄… 민첩마저 높아?'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지만 역시, 속도나 반응 속도에서도 상대에게 밀렸다.

문양을 가진 이상 스탯으로 찍어 누르는 건 불가능하다.

'선배님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김강천은 이신의 목소리가 이 순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 고만고만한 것들이 잘들 노네.

"큭...."

갑작스런 김강천의 웃음에 암살자의 얼굴이 순간 찌푸려졌다.

"뭐가 웃기지?"

"아, 아니야. 고만고만한 것들끼리 제법 치열하다 싶어서 말이지."

"뭐?"

"그래도...."

김강천의 대검에 마력이 깃들기 시작한다.

"고만고만한 놈들 사이에서라도 이겨야겠어. 그래야 선배님 얼굴 볼 낯이 있지."

"건방진 새끼."

"덤벼."

김강천의 대검과 복면인의 단검이 맞부딪히며 폭음이 터졌다.

한편, 인유우 코고는 생각 이상으로 강한 박주혁과 박혜원의 공세에 난처한 상황이었다.

'아직 문양도 없는 것들이... 어떻게 이런 스탯을 가지고 있는 거지?'

인유우 코고의 화염에도 제법 잘 버티는 박혜원을 보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지력의 수치가 자신과 비견해서 많이 딸리지 않는다는 방증이었다.

'미치겠군. 저 여자보다 더 문제는 이놈.'

검을 귀신같이 쓰는 저 녀석.

제법 큰 포인트를 지불하고 고용한 암살자들인데 그 짧은 사이 벌써 두 놈이나 당했다.

이제 막 21층에 올라온 놈들이라면 눈 깜빡할 사이에 절명시킬 수 있는 놈들이 지금 고용한 암살자들이다.

근데 그런 녀석들이 5 대 1, 그것도 자신의 화염 견제까지 있음에도 두 놈이나 벌써 쓰러진 것이다.

"[폭발하는 화염]"

펑! 퍼버버벙!

갑작스레 주변에 있던 화염이 폭탄으로 변하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서 폭발했고 그 화염을 맞상대하던 박혜원이 갑작스런 폭발에 휩쓸려 쓰러졌다.

"박혜원!"

"으윽... 전 괜찮아요!"

다행히 마력 파장의 변화를 눈치챈 혜원이 방어마법을 펼친 덕에, 죽음은 피했지만 제법 큰 부상을 입었다.

"하아... 하아...."

혜원은 인유우 코고의 마력량이 얼마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전장 전체에 뻗어진 화염을 조종하면서 자신과 마력 대결까지 펼치는데도 아직 멀쩡히 서 있다.

문양의 차이가 너무 컸다. 아무리 20층까지 업적을 훨씬 좋게 쌓았어도 저 문양으로 인해 스탯이 밀리고 있었다.

이신에게 배운 마력 컨트롤이 없었다면 진작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그러나 인유우 코고는 능력 자체는 뛰어날지라도 근본적인 마력을 다루는 법은 잘 모르는 듯했다.

[퀵 건(Quick gun)]

퓻! 퓻! 퓻!

바닥에 쓰러진 박혜원이 누워 있는 상태로 검지를 뻗어 허공에 바람 마법을 날렸다.

빠르게 날아가는 바람의 총알 세 발이 박주혁 근처로 날아갔다.

박주혁을 공격하던 암살자 셋을 향해 정확히 날아간 총알. 그들은 간발에 차로 피해냈지만, 연이어 이어진 박주혁의 검격은 피하지 못했다.

빈틈은 절대 놓치지 않는 박주혁의 소름 돋는 검술이 그들의 급소를 갈랐다.

단숨에 암살자 셋의 생명이 끊어졌다.

까득-

그 모습을 보던 인유우 코고가 인상을 확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조금 전 [폭발하는 화염]은 자신에게도 조금 위험한 도박 수였다. 한 번에 기습적인 폭발로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그 반발로 마력의 탈력감 때문에 마법을 잠깐 동안 사용하지 못한다.

저 박혜원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르지만 다 죽어 가는 와중에 마법으로 상황을 역전시켰다.

박주혁도 조금 전 그 마법에 부상을 입은 상태라, 조금만 버티면 이기는 싸움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뻔해."

"다 죽어 가는 몰골로... 웃기는군."

"이제 네 차례다. 인유우 코고."

촤악―

박주혁이 피 묻은 검을 바닥에 한 번 털어내고는 인유우 코고를 향해 뛰었다.

"죽어… 크윽!"

인유우 코고의 목덜미에 박주혁의 검이 꽂히기 직전.

반응하기 힘들 정도로 빠른 검격이 박주혁의 옆구리를 뚫고 지나갔다.

"끄윽...."

줄줄 흐르는 옆구리의 핏물을 손으로 부여잡은 박주혁이 난데없이 나타난 상대를 노려보았다.

"혹시나 해서 왔더니.... 고작 여섯이서... 대단하네."

전장을 둘러싼 20명의 도전자들.

그들의 몸에서 각각의 문양이 빛나고 있었다.

"제기랄...."

"주혁 오빠!"

"주혁이 형!"

"혜원아!"

다친 건 박혜원과 박주혁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넷도 그 둘만큼은 아니지만, 꽤 지치고 다친 상태였다.

"지쳐 보이는데, 이길 수 있겠어?"

조금 전 박주혁에게 치명상을 입힌 남자가 비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인유우 코고라도 죽였어야 했는데.'

박주혁은 조금 전 그 치명상을 입기 전으로 [변혁의 힘]을 쓸까 고민하다가 말았다. 그 상황을 되돌린다 해도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다.

이건 더 확실한 상황이 나왔을 때 써야 했다.

"너희쯤은 이 정도로도 충분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니, 절망적이라 할 수 있는 상황.

이미 이 여섯은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다 부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여차하면... 변혁의 힘으로 내가 희생하고 이 녀석들은 도망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박주혁은 여러 가지 상황을 상정하기 시작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지원군이 더 오고 있거든."

"쪽팔리지도 않나? 쯔위천? 너희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일본 놈들을 도와주면서까지 우리를 공격하겠다고?"

"나를 알아보는군. 걱정 마라, 네놈들 다 죽이면 저기 저 새끼도 내가 죽일 거니까."

쯔위천이 비릿한 미소로 뒤쪽에서 쉬고 있는 인유우 코고와 김강천과 싸웠던 암살자, 코도 토모타츠를 가리켰다.

"비열한 새끼."

박혜원이 경멸스러운 눈길로 그를 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파란 문양]은 쯔위천 하나였고 나머지는 대부분 주황색과 노란색이었다.

그렇다 해도 이 상황에서는 쯔위천 하나 상대하기도 버거운 상황.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잘 들어, 내가 먼저 쯔위천에게 달려들어 놈을 맡을 테니, 너희들은 성 안쪽으로 들어가서 마경의 핵을 부숴. 그 방법밖에 없어."

박주혁이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게 말했다.

"그럼 오빠가...."

"안 돼요. 형, 제가 쯔위천을-."

"김강천. 냉정하게 판단해. 지금 나 아니면 여기 이끌 사람 너밖에 없어. 그리고 쯔위천은 상성적으로 봐도 내가 가장 적합해."

"하지만...."

"무슨 작당 모의를 그렇게 하나? 의미 없는 짓을."

기습적으로 날아오는 쯔위천의 검기가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다 죽여!"

쯔위천의 명령과 동시에 20명의 도전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들 내 말 들어!"

박주혁의 마지막 명령과 함께 박주혁은 쯔위천에게로, 나머지 넷은 반대 방향으로 뛰었고.

"황 아저씨!"

"나는 주혁 군과 같이 갈 테니! 어서 가!"

황강웅은 박주혁을 가로막는 도전자들을 쳐냈다.

"사장님! 왜 말을-."

"이미 돌이키기에 늦었네."

잔뜩 찌푸린 얼굴로 혀를 찬 박주혁이 자신을 가로막은 주황 문양의 도전자를 발로 차내고는 쯔위천을 향해 뛰었다.

쯔위천의 검과 박주혁의 검이 맞부딪혔다.

순식간에 오가는 수십 번의 공방.

점점 몸에 상처가 많아지고 있었지만 박주혁은 단 하나의 결정적인 순간을 노렸다.

'젠장, 몸이 말을 듣질 않아.'

두 사람의 검이 강하게 맞부딪히며 박주혁의 근육이 경직되자, 쯔위천의 검이 그 순간을 노리며 뱀처럼 검을 타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푹-!

"커헉...!"

박주혁의 비명에, 쯔위천의 입가가 올라갔다.

쯔위천은 자신의 검이 박주혁의 심장을 찌르는 장면을 분명 보았다 생각했다.

분명 그랬었는데.

"이게… 무슨...?"

어느새 박주혁의 검이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있고 자신의 검은 위로 올라가 있었다.

상황을 인지하기 이전에, 그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어 간신히 검의 위치를 심장에서 오른쪽 갈비뼈가 있는 방향으로 바꿨다.

콰드득!

"크윽!"

갈비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갈라지는 고통에 쯔위천이 튀어나오는 신음을 그대로 내뱉었다.

검에 찔린 상태에서 쯔위천이 검을 든 손으로 박주혁을 후려치자, 박주혁은 그대로 손의 힘이 풀려 검을 놓치고 바닥에 쓰러졌다.

"하아...하... 이게 도대체 무슨 능력이지?"

이를 아드득 갈며 거친 숨을 내쉬는 쯔위천이 물었다.

이미 온 힘을 다 썼는지 박주혁은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촤악!

"읏...."

갈비뼈에 박힌 검을 빼내어 뒤로 던져 버린 쯔위천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박주혁에게 다가갔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자신에게 이런 일격을 날릴 것이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보면 볼수록 위험한 놈이다.

이제 고작 21층에 올라선 도전자.

천부적인 전투 감각과 생사의 상황에서 전혀 기죽지 않는 냉철함, 2층부터 20층까지의 최상위 업적까지.

이대로 문양까지 얻게 된다면 이들을 적으로 돌린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까지 위험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반드시 여기서 죽여야 한다.'

쯔위천은 더 이상 여유 부리지 않기로 했다.

저 옆에서 다른 도전자들에게 맞서고 있는 황강웅이란 도전자도 마찬가지였고 성 안으로 도망간 네 명의 도전자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쪽은 '그 녀석'이 있으니.... 여기나 잘 마무리해야겠군.'

쯔위천의 검에 마력이 깃들었다.

'잘 가라.'

후우웅― 퍼엉―!

바람을 가르는 거센 풍압과 함께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한 강력한 일격이 쯔위천을 덮쳤다.

뒤로 주르륵 밀려난 쯔위천이 이를 악물며 공격이 날아온 곳을 보았다.

"너는...?"

검은 머리에 너클을 낀 도전자. 이제 막 올라온 도전자가 이 정도의 위력을 내보일 정도라면 예상되는 인물은 단 하나였다.

"뭐야?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꼴이 이게 뭐예요?"

박주혁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머리 위에서 흘러내리는 핏물로 인해 흐려진 시야 속에서, 낯익은 녀석이 자신을 보호하듯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좀… 늦었네."

"늦기는요, 딱 적절하게 왔구만. 이게 주인공이 나타나는 타이밍 아니에요?"

다부진 몸과 든든한 뒷모습에 비해 말투만은 가벼운 녀석.

황갈색의 너클을 양손에 낀 신하늘이 양 주먹을 서로 툭툭 치며 자세를 잡았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네가 좀 맞자."

신하늘이 쯔위천을 흘겨보며 말했다.

"미친놈이 왔군."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린 쯔위천이 검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제44화

"제법 매섭긴 하군."

조금 전 신하늘의 권풍에 뒤로 밀려난 쯔위천이 옷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멀쩡한 척하기는."

"그래 보이나?"

한쪽 입가를 올리며 신하늘을 비웃는 쯔위천.

그의 손등 위 푸른 문양이 빛나며 검이 위에서 아래로 그어졌다.

그 검 끝을 따라 생겨난 푸른 검기가 신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어...? 읏!"

다급하게 마력을 끌어 올려 검기를 막아낸 신하늘이 놀란 얼굴로 쯔위천을 보았다.

자신의 기습을 맞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니, 언더모스트 사람들도 아니고 어떻게?'

언더모스트에 있을 때는 여러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곤 했지만, 재능만큼은 언더모스트 내에서도 최상위에 있던 사람이 신하늘이었다.

탑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최상위권을 바짝 추격하며 매서운 기세를 보일 정도로.

1층에서의 성장 없이 탑을 오른 다른 도전자들에게 자신이 밀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파란 문양을 가진 녀석이야. 스탯으로 누르는 건 불가능해."

"어…그러고 보니...."

박주혁의 말에 그제서야 쯔위천의 몸에서 발하는 푸른 빛을 본 신하늘이 식겁한 얼굴로 변했다.

"아이씨! 그런 건 진작에- 으억!"

"여기가 장난하는 곳인 줄 알아!"

쯔위천은 자신을 앞에 두고도 여전히 여유를 부리는 듯한 신하늘의 모습에 격분하며 공세를 가했다.

허겁지겁 공격을 막아내던 신하늘이 점점 기세에 눌려 손발이 꼬이기 시작했다.

카앙!

중간에 몸을 추스르고 끼어든 박주혁이 쯔위천의 검을 막아내며 그를 신하늘에게서 밀어냈다.

"하아...좀 하네?"

"젠장...짐 덩이만 하나 더 늘어난 느낌인데."

"지, 짐 덩이라뇨? 제가 형님 구해 준 거-."

"피해!"

콰과광!

쯔위천의 검을 피한 박주혁이 순간 이질감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진작에 황강웅을 떨쳐내고 이쪽으로 올 거라 생각한 다른 놈들이 여전히 나타나지 않은 탓이었다.

'설마...?'

콰앙―!

뒤쪽에서 울리는 폭음.

박주혁이 놀란 얼굴로 그곳을 보았다.

"칫, 저 혼자 온 거 아니라고요!"

신하늘의 투덜거림 뒤로 익숙한 실루엣의 사람들이 보였다.

"팀장님!"

"아니, 저희들 버리고 먼저 올라가 놓고 꼴이 이게 뭡니까?"

"이러라고 팀장님 보내 준 거 아니라구요?"

"너희들!"

박주혁의 표정에 안도감이 서렸다.

언더모스트의 동료들.

박주혁의 특수팀 팀원들과 다른 한국 도전자들이 뒤늦게 합류한 것이었다.

"거기 얌전히 쉬고 계세요. 여기는 저희가 끝낼 테니."

"주혁 형님 구한 건 접니다만?"

"다들 전투 준비! 팀장님과 황 사장님을 구하고 우리도 내성으로 들어간다!"

신하늘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백현아가 지시를 내렸다.

"같잖은 것들이!"

"나도 합류하지."

한국 도전자들 사이로 치솟는 불길.

그 불길을 본 박주혁과 황강웅의 표정이 싹 굳었다.

"인유우 코고."

"우리 싸움은 이놈들부터 쓸어버리고 하자고."

쯔위천은 이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과 달리 다수 대 소수의 상황이 바뀐 대치 상태.

그때, 온몸에 피 칠갑을 한 황강웅이 특수팀 팀원들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이제 전세가 역전됐군, 어떤가? 둘이서 될 것 같은가?"

* * *

계속해서 추격하는 다른 도전자들.

상처투성이인 네 사람은 그들을 간신히 따돌리며 한숨을 골랐다.

"하아...주혁이 형이랑 황 아저씨는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우린 지금 상황 해결할 생각부터 하자."

김강천이 품에서 메르텡 내성의 지도를 꺼내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대로 쭉 밀고 올라가면 알현실이야. 도전자들도 문제지만 내성 내부의 마족들도 처리해야 돼."

"은주야, 어때?"

"잠시만."

지은주가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마력을 흘려보냈다.

땅을 타고 흘러가는 마력의 파동에 몇 개의 이질적인 파장이 걸렸다.

"이쪽으로 그대로 들어가면 마족을 상대하다가 도전자들을 마주칠 거 같아."

"그럼 돌아가야 하나?"

"시간이 없어, 밖의 두 사람을 구하려면 빠르게 처리해야 돼."

"적 전력은 어때?"

"소형 마수 셋, 마인 둘이 입구를 막고 있어. 도전자들의 위치는 지금은 파악이 안 돼."

도전자들의 위치 파악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무시하고 들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안전하게 가야 하는가.

김강천은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리더 역할을 맡을 사람은 자신뿐인데 동료들의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 게 맞는 건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머리로는 전자가 맞다고 하고 있지만....

"그대로 들어가자."

박혜원이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뒤로 돌아간다고 안전하리란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밖에 두 사람이 우리 대신 희생하고 있잖아. 난 정면 돌파가 맞다고 생각해."

"그래. 까짓것, 돌격하자. 형."

두 사람의 의견이 종합되고 강천은 은주를 보았다.

"너는?"

"...나도."

"괜찮겠어?"

"응."

김강천은 자신이 너무 이들을 약하게 보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방문을 조심스럽게 연 네 사람이 복도를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들의 시야에 마수 하나와 마인 하나가 복도를 천천히 걷고 있는 게 보였다.

"다행이야, 놈들이 안 뭉쳐 있어서."

"저 정도라면 조용히 처리할 수 있겠어."

김강천이 나머지 셋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미 호흡은 수도 없이 맞춰 본 사이.

김강천은 마족들의 외관과 함께 놈들의 특성을 떠올렸다.

'퀴렛은 민첩한 놈이지만 방어력은 약하고 마인 쪽은 장갑이 강화된 녀석인가? 실수하면 골치 아파지겠어.'

김강천과 눈빛이 마주친 박혜원. 두 사람의 고개가 가볍게 끄덕여지고 김강천이 먼저 땅을 박차고 뛰었다.

그와 동시에 강지훈도 움직이며 박혜원의 마력이 김강천의 검으로 덧씌워졌다.

"키릭?"

놈들이 그 둘을 인식하는 사이, 강지훈의 검이 퀴렛에게로, 김강천의 대검이 마인에게로 쏘아졌다.

땅에서 튀어나온 돌덩이가 퀴렛을 발을 잡았고 그 위로 강지훈의 검이 퀴렛의 목을 그대로 꿰뚫었다.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퀴렛의 옆에서 마인의 목이 대검에 그대로 두 동강 나며 머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가자."

부드럽게 이어지는 연계와 환상적인 호흡으로 남은 세 마족도 처리한 그들은 다행히 도전자들에게 들키지 않고 알현실에 도착했다.

"너무 쉬워."

"...함정일까?"

"그럴 확률이 높아 보여. 조심해."

잔뜩 굳은 표정으로 네 사람이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검은 안개가 가득 찬 알현실 안.

가운데 존재하는 옥좌 위, 검붉은 마경의 핵이 놓여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마경의 핵의 위치를 파악한 박혜원.

알현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가열해 놓았던 마력을 방출했다.

[윈드 커터(Wind cutter)]

그녀의 자랑인 빠른 캐스팅 속도가 그 자리에서 빛을 발했지만.

카가각!

윈드 커터의 절삭력으로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 단단한 발톱이 핵이 부서지는 것을 가로막았다.

"성질이 급하군."

검은 안개 속에서 드러나는 수북한 털.

척 보기에도 두껍고 단단해 보이는 근육질 몸과 양손과 발에 달린 흉포한 손톱, 발톱까지.

"수인?"

놈의 가슴팍에서 빛나는 남색 문양을 생각하면 분명 도전자가 맞았다.

10층 대의 구간은 다른 차원의 도전자들과 만날 수 있지만 21층부터는 또다시 달라진다. 다른 차원이 아닌 지구의 차원에서 올라온 도전자들끼리만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는 건 이 수인도 분명 지구의 도전자가 맞다는 것이다.

"반갑다, 한국의 도전자들. 그리고 떠오르는 슈퍼 루키들아."

수인은 여유로웠고 그에 반해 네 사람은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문양을 가진 이들은 능력치가 퍼센트의 단위로 올라간다.

뿐만 아니라 수인은 도전자의 피지컬을 극대화해준다. 문양을 가졌다면 그 수치의 증대는 그간 최상위권에서 굴러왔던 자신들도 비빌 수 없는 정도.

더구나 바깥의 파란 문양의 자격자들도 힘겨웠는데 상대는 그보다 더 위층인 남색 문양.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제기랄.'

최상의 컨디션이어도 힘든 상대다.

하물며 지금은 체력이고 마력이며 모두 좋지 않은 상태로 저 수인을 상대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뒤쪽에는 자신들을 찾는 도전자들도 있는 상태.

"걱정이 많아 보이는군. 걱정 마라, 너희들 넷이 나를 이긴다면 핵을 건네주지. 다른 녀석들은 끼어들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뭐?"

"슈퍼 루키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거든, 싸우기 전에 통성명이나 하지. 내 이름은 에단. 너희들 이름은 다 알고 있으니 말할 필요 없다. 하하학!"

네 사람은 저 에단이라는 이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럼 간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던 에단이 땅을 박차고 김강천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대검을 그대로 구겨 버릴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악력이 검을 타고 김강천에게 전해졌다.

후우웅-!

대검째로 잡힌 김강천은 힘에 밀려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히고.

뒤늦게 달려든 강지훈은 머리가 바닥에 눌린 채로 에단의 발에 깔려 땅에 박힌다.

"꺄악!"

뒤늦게라도 반응하려고 마법을 날리려던 지은주는 다가오는 공포에 제대로 마법을 시전하지도 못한 채 에단에게 맞고 날아가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 박혜원의 서늘한 바람의 창이 에단의 목을 노렸지만 살짝 고개를 비튼 에단이 마지막 발악마저 가볍게 피해 버린다.

"내가 너무 기대를 한 건가?"

에단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며 쓰러진 네 사람을 보았다.

어차피 그들이 자신을 이길 거란 기대 따윈 안 했다.

하지만 그 돌풍의 중심인 놈들이기에 신선한 무언가를 보여 주지 않을까 했거늘.

"이 정도가 전부라면 더 두고 볼 필요도 없겠어. 이신이란 놈도 거품이겠군."

비웃음을 남긴 에단이 돌아가려 할 때.

콰과과광!

"읏...!"

연달아 이어지는 검기의 폭발.

단순 검기라 생각한 것들이 그대로 폭발을 일으키자 당황한 에단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네까짓 게...선배님을 평가하기엔 한참 일러."

벽에서 비적비적 걸어 나온 김강천이 거친 숨을 고르며 말했다.

"꼴에 자존심…크윽!"

그그그그그그극!

검은 안개 속에서 쏘아진 바람의 창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에단의 손톱을 파고들었다.

"카아아아악!"

잔뜩 짜증이 깃든 음성을 내뱉으며 에단이 마법을 쳐내고 연이어 들어오는 강지훈의 머리를 잡아 땅바닥에 수차례 내리쳤다.

쾅! 쾅! 쾅! 쾅!

"크하아악!"

"지훈 오빠!"

그나마 조금이라도 회복되었던 체력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치닫고 압도적인 강함에 마음이 서서히 꺾여 가던 강지훈의 정신이 조금씩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를 구하기 위해 강천이 다급히 검을 휘둘러 보지만 에단이 날린 강지훈의 몸뚱이에 대검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채 다시 거두어진다.

단단한 두 다리로 지면을 쓸어내며 강지훈을 받아낸 강천의 위로 에단의 발길질이 꽂혔다.

콰앙!!

포탄이라도 맞은 듯한 굉음이 알현실 전체에 울리고.

"하아...하아...."

순간적으로 흥분한 에단의 눈빛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이들에게 공격을 허용한 것에 무심코 흥분해 버린 것이다.

수인화의 부작용이 가끔 나타나곤 했는데 지금이 그때였다.

"제법 한 수는 있는 놈들이었군."

에단은 쓰러진 네 사람을 보았다.

여기서 이렇게 죽여 버리기에 아까운 재능을 가진 녀석들이었다. 자신의 상황만 아니었더라도 이런 일에 동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마침 알현실로 다른 도전자들이 몰려들었다.

"에단 님? 벌써 다 처리하셨군요."

"그래."

이미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린 네 사람이 도전자들에게 끌려와 몸이 묶인 채로 한 곳에 던져졌다.

"죽일까요?"

"생포가 가능하면 생포하라 했으니, 데리고 가라."

"알겠습니다."

네 사람이 마력 차단 수갑이 채워진 채로 끌려가려 할 때.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과 함께 그들을 끌고 가던 도전자들이 쓰러진다.

"뭐지?"

"주혁이 형? 황 아저씨인가?"

정신을 잃은 강지훈을 제외한 세 사람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쓰러진 도전자들을 보았다.

슈웅- 콰앙!

위에서 아래로 베어진 묵직한 검기.

그 검기를 막아낸 에단이 퍼지는 먼지 사이로 자신을 공격한 이의 실루엣을 관찰했다.

"누구냐."

에단은 그 누가 오더라도 자신 있었다.

오히려 이 갑작스러운 상황은 그의 흥분을 자아냈다.

"나 없이 가더니, 뭐 하는 거야? 고작 곰인간한테 고전하고 있고."

검은 안개와 퍼지는 먼지 때문에 시야가 어지러운 전장 속.

여러 사람의 실루엣이 안개 사이로 비치기 시작하고 그들에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현이...오빠?"

간절함이 담긴 지은주의 떨리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혜원도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제가 이 녀석을 맡을 테니 나머지를 맡아 주세요."

흩어지는 먼지 사이로 드러나는 백현의 모습.

그 모습에 강천은 이를 악물었고, 혜원은 눈을 감았으며 은주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덤벼, 이 짐승 새끼야."

제45화

15층

수인, 그것도 남색 문양을 가진 곰 인간.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 말했지만 실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처음 날린 검기는 나름대로 회심의 일격을 날린 것이었음에도 눈앞의 수인은 아무렇지 않게 막아냈다.

놈의 힘과 마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정면 대결론 못 이겨, 그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백현이 에단에게 붙고, 그 사이 그와 같이 왔던 다른 도전자들이 붙잡힌 네 사람을 구해 냈다.

"아줌마?"

"미안, 내가 늦었지?"

"후...죽는 줄 알았어요. 그나저나 그 상황에도 아줌마 떡볶이 생각나는 거 있죠?"

박혜원의 너스레에 그들을 구하러 온 도전자들의 긴장한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현이 혼자선 못 이겨요."

"그 몸으로 어떡하려고? 우리한테 맡겨."

강정원이 나서려는 김강천을 뒤로 밀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만신창이가 된 네 사람을 둘러싼 도전자들.

그들 모두가 언더모스트의 도전자들이었다.

"든든하네요."

이런 것을 이신은 예상이라도 하고 그들을 묶어 둔 것일까?

언더모스트에서 성장한 한국의 도전자들은 그 어떤 이들보다도 듬직하게 느껴졌다.

"문양도 없는 것들이...다 죽여!"

아이소시아의 카르텔을 형성한 다른 국가의 도전자들과 언더모스트의 한국 도전자들이 맞붙었다.

쿠웅―!

"커억!"

그때 에단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백현이 에단의 손에 채여 그대로 벽에 던져졌다. 수인의 그 압도적인 피지컬에 백현은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다.

"크하학! 이게 전부냐!"

낮게 혀를 찬 백현이 다시 에단에게 달려들었다.

칼날 위를 걷듯,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에단의 공격을 흘리던 백현의 발밑에서 마법진이 빛을 발하고 그것을 눈치챈 에단이 황급히 뒤로 몸을 뺀다.

하지만 에단의 예상과 다르게 마법진에서 느껴지던 거센 마력은 원래 그것을 의도했던 것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오히려 백현의 검에서 그 이상의 강력한 찌르기가 발현됐다.

[풍추(風錐)]

백현의 마력이 검에 모여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그대로 쏘아졌다.

관통력이 극대화된 마력의 검기가 에단의 심장부를 향해 정확히 쇄도했다.

딱 보아도 온 힘을 쏟은 듯한 위력의 기술.

뒤로 빠지던 에단의 몸이 기이하게 꺾이며 그의 꼬리가 땅을 누르더니 스프링처럼 에단의 몸을 튕겨 오르게 만들었다.

간발의 차로 에단의 몸을 스쳐 지나가는 백현의 검기를 보며 에단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콰직!

[마경의 핵이 부서졌습니다.]

떠오르는 메시지에 에단의 고개가 황급히 돌아갔다.

조금 전 백현의 기술이 노리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옥좌 위에 있던 마경의 핵이었던 것이다.

"이런, 잔머리를!"

또다시 발작이 일어날 듯 눈이 충혈되던 에단은 주변에 잔뜩 끼어 있던 마경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다음에 보자, 꼬맹이."

쿠웅! 콰앙!

그대로 바닥에 착지한 에단의 발밑에 크레이터가 생기며 대포가 쏘아지듯 에단의 몸이 벽을 뚫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를 따라 다른 도전자들 또한 다급하게 성을 탈출했다.

백현은 놈들 모두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피로감이 상당한 탓에 그러지는 못했다.

[메르텡이 활성화됩니다.]

[공적치를 계산합니다.]

[공적치의 1위부터 3위까지 『붉은 문양』의 자격을 획득합니다.]

1위. 김강천 - 13,200점

2위. 박주혁 - 10,800점

3위. 백현 - 8,400점

[『붉은 문양』을 획득합니다.]

백현의 손등 위로 새겨지는 메르텡을 상징하는 문양.

그 위로 붉은 마력이 채워진다.

[붉은 문양]

다음 지역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집니다.

# 체력과 마력이 3% 증가합니다.

# 전체 스탯이 5% 증가합니다.

퍼센트 단위로 올라가는 문양의 능력치.

안 그래도 밑에 층에서 그 누구보다 스탯을 많이 모아 왔던 세 사람에게 문양의 힘은 날개를 달아 주는 것과 같았다.

"주혁이 형! 주혁이 형은 괜찮나?"

떠오른 공적치의 순위를 보던 김강천이 다급히 그에 관해 물었다.

"괜찮을 거야, 그쪽에도 사람들이 갔으니까."

그 말에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는 듯 강천과 혜원, 은주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마경의 핵이 부서지고 메르텡 전체를 덮고 있던 마경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무너진 건물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텅 비어 있던 옥좌의 주인이 그곳에 자리했다.

"자네들인가? 자격자들이여."

기품 있고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옥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옥좌 위에 자리한 국왕.

그리고 그 양옆으로 쭉 도열한 왕실 기사들.

그 압도적인 모습에 도전자들은 괜스레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붉은 문양의 자격자들만 남고 모두 내보내도록."

모두들 한마음 한뜻으로 적들을 물리치고 마경을 없앴지만, 인정을 받는 이들은 문양을 가진 이들뿐이었다.

몇몇이 반발을 할까 했지만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기사의 위엄에 찍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끌려 나갔다.

"반갑네, 메르텡의 국왕 아돌프 진 드 마르테이스라네."

"백현입니다."

"박주혁입니다."

두 사람은 왕실의 예법 따윈 알지 못했기에 한국식대로 허리를 숙여 인사할 뿐이었고 국왕은 그 모습을 그러려니 했다.

"자네들의 고향의 인사법인가?"

"그렇습니다."

"그런 표정을 지을 것 없네. 타 차원의 인간들이 오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니. 근데, 붉은 문양을 가진 자격자는 둘뿐인가?"

"밑에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가서 자격자를 데리고 와라."

"예!"

국왕의 명에 기사 하나가 인사를 한 뒤 알현실을 나갔다.

잔뜩 긴장한 두 사람과 달리 국왕의 표정은 매우 여유로웠다.

"긴장할 것 없네. 그대들은 우리 국가의 귀빈이니."

* * *

[15층에 입장하셨습니다.]

[시작할 도시를 선택하십시오.]

여러 가지 도시들의 이름이 허공에 떠오른다.

그중에서 이신이 선택할 도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마법의 도시 세이아를 선택하셨습니다.]

[마탑을 선택하십시오.]

또다시 떠오르는 마탑들.

적색 마탑, 청색 마탑, 황색 마탑....

이 부분에서 고민이 되긴 했지만 이신은 결국 처음의 선택을 이어 갔다.

[흑색 마탑을 선택하셨습니다.]

[흑색 마탑은 지난 300년 동안 한 번도 델리그(Deleague)에서 총마탑주 '델리거(Deleaguer)'를 배출하지 못한 마탑입니다. 델리그에서 우승하여 델리거를 배출하십시오.]

마법의 도시 세이아에는 총 7개의 마탑이 존재하고 그 마탑들은 7년마다 델리그라는 대회를 개최한다.

7개의 마탑들 전체를 대표하는 총마탑주 델리거를 선출하는 대회.

그곳에서 흑색 마탑을 우승시켜야 한다.

'익스트림을 선택했을 때에는 델리그에서 4개의 마탑을 쓰러트리라고 했었지.'

이번엔 6개 마탑 전부를 이기고 델리그에서 우승해야 한다.

"예상은 했지만...골치 아프네."

300년 동안 한 번도 델리거를 배출하지 못한 마탑은 흑색 마탑이 유일했다.

일단은 그 속 사정에 대해 파악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멍하니 뭐 해? 시험 안 볼 거야?"

흑색 마탑을 상징하는 검은 양 문양.

그것이 그려진 로브를 입은 남자가 이신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안 볼 거면 빨리 꺼져. 여기서 알짱대지 말고."

신입 마법사들을 받는 태도가 다른 마탑과는 완전히 상반됐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태도에 짜증을 내고 다른 마탑으로 갔겠지만, 이신은 그러지 않았다.

"시험 보겠습니다."

"그래?"

한순간의 호기심.

딱 그 정도의 관심이 전부였다.

흑색 마탑의 마법사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따라오라는 신호를 줄 뿐, 이신을 향해 더 이상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여기다. 이 더미에 다크 에로우를 쏴서 저주를 걸면 합격이다."

다크 에로우.

흑마법의 가장 기초적인 마법이나, 그와 상반되게 엄청난 기량의 차이를 보여 줄 수 있는 마법.

다크 에로우는 단순히 적을 가격하는 것이 아닌, 피격당한 상대에게 저주를 걸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신에게 대충 설명을 끝낸 마법사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지도 않고 귀를 후볐다.

그리고는 빨리 대충 쏘고 끝내라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턱으로 더미를 가리켰다.

'너도 다른 놈들과 별다를 거 없겠지.'라는 표정.

이신은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1층의 보스가 되고 수천, 수백 번을 사용했던 다크 에로우.

비록 형편없고 발전도 없던.

그런 의미 없는 반복이었지만 기억을 되찾은 이신에게 그러한 경험들은 마냥 의미 없지만은 않았다.

이신의 검지 끝에 일구어진 검은 화살.

단순하며 특출나지도 않은 그런 다크 에로우가 더미의 심장에 꽂혔다.

다크 에로우가 닿은 부분이 검게 그을렸을 뿐 더미는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도 않았다.

"호오, 나쁘진 않군."

전혀 기대하지 않던 마법사는 이신의 깔끔한 다크 에로우에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저 귀찮은 거머리처럼 바라보던 눈빛은 사라졌지만, 그 귀찮음이 호의로 바뀌지는 않았다.

"운이 좋군, 합격이다."

"감사합니다."

"이 합격증을 1층의 직원에게 가져다주면 된다."

"예."

합격을 했음에도 그저 담담한 모습.

시험에서의 통과는 당연하다는 듯한 그런 태도에 마법사의 고개가 미세하게 끄덕여졌다.

"이름이 뭐지?"

"이신입니다."

이름을 듣자 아주 찰나지만 굳어진 눈빛이 보였다.

'여기도 역시 이름이 퍼진 건가?'

이신의 예상과 다르게 마법사는 그에 대해서 더 묻지 않았다.

"난 레이먼드다. 흑색 마탑의 1급 마법사지."

"예."

"허, 놀라지도 않는군. 아무튼, 잘해 봐라. 재능이 나쁘진 않은 거 같으니."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줄 관심은 없다는 듯이 레이먼드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시험장을 떠났다.

그리고 이신은 레이먼드의 말을 따라 1층의 로비로 이동했다.

"합격증이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합격증을 받은 직원이 잠깐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옷 하나를 들고 나왔다.

"3급 마법사들이 입는 옷이에요. 시험에 통과한 러너에게 드리는 옷이랍니다."

검은 양 문양이 새겨진 회색 복장.

흑색 마탑이 3급 마법사를 상징하는 옷이다.

"여기 흑색 마탑에 대한 안내 책자예요. 3급 마법사는 공용 훈련실을 사용하실 수 있고 마법 수업은 거기 적힌 시간표를 보시면 아실 수 있어요. 참관은 자유예요."

"2급 시험은 언제 볼 수 있습니까?"

"2급 시험은 일주일에 한 번 있고 다음 시험은... 아, 3일 뒤네요."

"알겠습니다."

"3급 마법사의 숙소는 2층에 있고, 이신 님은 215호로 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이신은 숙소가 아닌 곧장 흑색 마탑의 밖으로 나갔다.

* * *

"하, 러너들이 보는 시험장에 왜 방부제들을 넣어 둔 거야?"

굉장히 짜증스러운 모습으로 한 여자가 시험장 문을 거칠게 열었다.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더미.

그 뒤에 그녀가 가져가려는 물건들이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더미를 향하고 있었다.

"뭐지?"

분명 2시간 전에 오랜만에 러너 하나가 시험을 보았다는 소리를 듣긴 했다.

그래서 한동안 쓰이지 않던 러너의 시험장에 두었던 물건을 지러 온 것이었고.

"이건...."

더미의 심장에 정확히 박힌 검은 흔적.

다크 에로우가 적중하고 저주가 묻은 흔적이 분명했다.

보통 다크 에로우에 닿은 그 흔적은 주변으로 퍼지기 마련이다.

다크 에로우에 싣는 저주에 그렇게 세세한 컨트롤까지 할 필요는 없기에.

그들에게 애초에 다크 에로우는 약간의 견제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근데 여기 남긴 흔적은 정확히 동그랗게 남아 주변으로 퍼지지 않았다.

이러한 흔적은 피격자가 받는 관통 데미지를 증폭시켜주는 종류의 저주에서 발생한다.

제법 어려운 저주 중 하나지만, 중요한 건 관통 저주가 들어갔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다크 에로우."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뻗어나간 미약한 마력의 검은 화살이 더미에 남은 저주의 흔적에 정확히 적중했다.

콰직!

허무하게 뚫려버린 더미의 심장.

그 모습을 본 그녀의 표정이 더욱 급격히 굳어졌다.

"이 새끼 정체가 뭐지?"

제46화

"이신? 재밌는 이름이네."

"또냐? 흑색 마탑 놈들이란...."

"진짜 이름이 이신이야? 따라 한 게 아니고?"

이신은 흑색 마탑 밖에서 만난 마법사들과 대화를 나눴고 만나는 이마다 이신의 이름을 들으면 한결같은 반응을 내보였다.

"죽음의 통찰자인지 뭐시기인지 소문이 들리긴 하는데 워낙 자기가 이신이라 사칭하는 놈들이 많았어야 말이지. 그리고 소문 자체가 워낙 말이 안 돼서 믿는 놈들도 잘 없고."

"사칭해서 좋을 게 뭐 있다고 그럽니까?"

"명성이지, 그러면서 여기저기 사기 치고 다니던 놈들이 있었는데. 한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

그렇게 말하며 마법사가 이신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렇게 보지 마십쇼. 전 사기 칠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 근데 흑색 마탑 마법사가 여긴 무슨 일인데?"

청색 마탑의 마법사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이신을 보았다.

"견학 왔습니다."

"견학?"

의외의 말을 들은 마법사가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흠… 이제 막 3급 마법사가 됐으면 그럴 만도 하군. 좋아, 따라와."

청색 마탑은 흑색 마탑과 다르게 1층에서부터 꽤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청색 마탑의 마법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러너들.

그들은 이신의 흑색 마법 복을 흘깃 보며 서로 소곤대기 시작했다.

"흑색 마탑 마법사?"

"여기는 왜 온 거지?"

"들어가 보니 흑색 마탑은 아니란 걸 깨달은 거지."

"근데 흑색 마탑도 불쌍하네, 얼마 만에 받은 마법사인데 이렇게 또 뺏기냐."

아직 러너조차 벗어나지 못한 놈들이다. 마법사라 부를 수도 없는 이들.

상대가 3급 마법사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들은 이신이 자신보다 더 낫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흑색 마탑이었으면 진작에 나도 합격했지.'

'저런 곳에서 마법사 타이틀을 달 바에 안 다는 게 나아.'

저마다의 핑계들을 대며.

단순히 흑색 마탑이 청색 마탑보다 못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상대를 낮추고 자신을 들어 올렸다.

"마침, 오늘 러너들이 배우는 마법 강의가 있는 날이지. 잘 들어 봐라."

청색의 마법사는 이신을 강의실에 넣어 두고는 그대로 떠났다.

이신의 시야에 강의를 듣기 위해 모인 러너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직 마법사로 인정조차 받지 못해 마법복도 없는 이들.

3급 마법사가 러너들 사이에 껴서 강의를 들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법사의 격을 떨어뜨리는 행위였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청색 마법사는 이신을 이곳에 집어넣은 것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당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

흑색 마탑의 위치를 알고 있기에 예상은 하고 있던 일이다. 원래라면 3급 마법사가 견학을 온다면 3급 마법사들이 받는 강의를 안내받아야 정상이었지만 마법사는 러너들의 강의에 이신을 안내했다.

조금의 짜증을 감내한 이신이 자리에 앉았다.

로비에서보다 더 노골적인 소곤거림이 들려오던 와중, 강의를 하기 위해 청색 마법사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반갑다, 나는 1급 마법사 로렌이다. 여기 의외의 수강생이 있구만."

로렌은 이신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자, 강의를 시작하지."

러너들이 듣는 강의는 마법의 아주 기초적인 것들이었다. 청색 마탑의 마법사가 되기 위한 기본 소양. 그것은 마력을 일으키고 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마법사가 되면 마력을 일으키는 건 아주 기본 중에 기본 소양이지.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력을 일으키는 건 가능해. 다만, 마법사는 그 마력의 성질을 변화시킬 줄 알아야 하지."

로렌은 강의실 가장 앞쪽에 앉은 러너의 책상에 있는 휴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곧 검지와 엄지에 잡힌 휴지가 손가락으로부터 조금씩 젖어 들기 시작했다.

"마력의 성질 변화도 하지 못하는 녀석들은 마법사라 부를 수 없다. 물의 성질은 매우 유동적이라 할 수 있다.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속성 성질 중 가장 밸런스가 좋다고 할 수 있지. 자, 물을 만들어 형태를 이룰 필요는 없다. 성질을 바꾸는 것에만 성공하면 돼. 방금 내가 한 것처럼 휴지를 젖게만 만들어도 성공이다."

로렌의 설명이 끝나고 러너들이 마력을 일으켜 물을 만들어 내려 노력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유동적인 성질?"

"물... 물...."

여기저기 들려오는 답답함 가득한 목소리들.

눈앞에 로렌은 너무나도 손쉽게 물을 만들어 냈지만 러너들에게는 쉽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자네는 왜 하지 않지?"

시킨 것은 안 하고 멍하니 주변의 러너들이 하는 것만 지켜보던 이신에게 로렌이 다가와 물었다.

반쯤 감기다 만 눈과 위로 올라간 눈썹.

탐색과 비웃음이 공존하는 눈빛.

이신은 자신의 앞에 온 이 마법사의 의도가 눈에 훤히 보여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다른 러너들이 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왜지? 다른 러너들이 하는 것을 보지 않고는 못 하겠나?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한쪽 입가가 슬며시 올라간 로렌의 역겨운 표정.

누가 보아도 한심하다는 듯, 경멸 섞인 말투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물...만 만들면 되는 겁니까?"

"그래."

1급 마법사.

클라테(Clarte)조차 되지 못한 마법사의 경멸 따위는 이신에게 먼지만큼의 수치심도 주지 못했다.

"큭."

아주 찰나의 웃음.

'웃어?'

이신과 서로 시선을 마주하던 로렌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고작 3급 마법사, 그것도 흑색 마탑의 3급 마법사가 자신 앞에서 비웃음을 지었다는 것에 열이 뻗친 로렌이 마력을 일으켜 상대를 망신을 주려던 찰나.

이신에게서 순간적으로 치솟은 마력을 느낀 로렌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듯 움직이지 못했다.

'뭐, 뭐지...?'

고작 3급 마법사에게서 느꼈을 리 없는 마력량.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것이 느껴지다 사라졌다.

'착…각...이었나?'

이신과 눈을 마주친 그 순간, 로렌은 그에게서 청색의 마탑주를 마주한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했습니다."

"뭐?"

드르륵-

의자를 밀어 자리에서 일어난 이신.

"뭐, 뭐 하는 거야!"

갑자기 자신보다 더 눈높이가 높아진 이신을 보자 당황한 로렌이 소리쳤다.

그리곤 이신의 손이 들어 올려지자, 화들짝 놀란 로렌이 기습이라 생각하고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 자식이! 감히 어디-."

"끝났습니다."

"뭐?"

예상외의 말에 멍한 얼굴을 한 로렌이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시계가 있었고 시계의 시침이 조금 전에 막 정각을 넘어선 것을 볼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손을 부들부들 떠십니까?"

자신도 모르게 잔뜩 긴장한 로렌의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모, 몸이 안 좋군. 강의 끝이다! 모두 가서 연습해라!"

그렇게 말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강의실을 나가 버린 로렌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저 개자식이 감히... 나한테 망신을 줘?'

고작 흑색 마탑의 놈이! 그것도 이제 막 3급 마법사가 된 놈이 감히!

이신이 딱히 그에게 한 것은 없었고 러너들 중에서도 크게 이상하다 생각한 이들은 없었지만 로렌은 자기 자신에게 수치심이 들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이, 로렌! 어딜 그렇게 가나? 얼굴은 시뻘게져 가지곤."

반대편에서 오던 다른 마법사가 로렌에게 물었다.

"신경 꺼."

"강의하던 것 아니었나? 뭐가 그렇게 열이 받은 거야?"

"흑색 마탑 놈이 내 강의를 들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뭐,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는. 그나저나 밖에 비가 갑자기 쏟아지는데 우산이라도 챙겨."

"뭐? 비가 온다고? 쯧."

열 받은 머리를 식히려고 밖에 나가려 했던 로렌이 또다시 치솟는 짜증을 애써 진정시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쾅!

방문을 거세게 닫은 그가 창문 너머로 들리는 빗소리에 밖을 보았다.

'비....'

- 했습니다.

갑자기 떠오르는 그 흑색 마법사의 음성.

머릿속을 맴도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로렌이 그대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 * *

"청강하고 왔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럼 혹시 시험받으실 건가요?"

"그건 아직… 생각 좀 해 봐야겠습니다. 안내 책자를 받을 수 있습니까?"

"네, 청강하신 분들은 나눠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안내 책자를 받아 든 이신이 몸을 돌려 나가려 할 때, 자신에게 쏠린 주변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이 보기에 이신은 러너들의 강의를 듣고도 3급 시험에 통과할 자신이 없어서 포기하고 가는 마법사였다.

"어휴, 내가 저럴 줄 알았지."

"그래도 3급 마법사라길래 시험은 볼 줄 알았는데… 벌써 포기야?"

"흑색 마탑,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수준 떨어지네."

"역시, 여기서 러너로 더 오래 있더라도 안 가길 잘했다."

마치 힘 빠진 사자를 기다리던 하이에나들처럼 이신이 청색 마탑을 나가자마자 온갖 조롱이 쏟아졌다.

어느 정도 재능이 있다면 금방 통과하는 3급 시험조차 합격하지 못한 러너들에게 3급 마법사라는 이유로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

거기다 흑색 마탑의 마법사라면 더더욱.

그들에겐 자신들의 열등감을 해소해 줄 무언가가 필요할 뿐이었다.

"역시, 3급 마법사들의 강의 시간이 적혀 있는 게 전부인가."

띄엄띄엄 있는 청색 마탑 3급 마법사들의 강의.

그 목록을 쭉 보던 이신의 눈에 굉장히 낯이 익은 이름이 보였다.

'슌 그라미스.'

청색 마탑의 클라테이자, 곧 수석 클라테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고 칭해지는 인물이며 미래엔 마탑주까지도 노릴 만한 천재.

슌 그라미스 클라테의 강의가 내일 있을 예정이었다.

'좋아.'

* * *

다음 날.

이신은 또다시 청색 마탑에 찾아갔고 그 모습을 본 청색 마탑의 마법사들은 또다시 이신을 씹어 대기 시작했다.

"또 왔네?"

"포기한 게 아니었나?"

"적당히 하지, 창피한 줄도 모르나 보네. 흑색 마탑 녀석들은."

노골적으로 들으라는 듯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신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모습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그를 비웃듯 씹어 대기 시작했다.

이신은 그들을 모두 무시하고 안내 직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슌 그라미스의 강의를 듣고 싶습니다."

"네? 아... 그게...."

안내 직원의 당황한 모습.

이신은 그녀가 할 말이 훤히 보였지만 그럼에도 물었다.

"3급 마법사라면 3급 마법사들이 듣는 강의는 청강할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게... 슌 님의 강의는 인기가 많아서 자리가 모두...."

"청강생의 자리도 모두 찼습니까?"

"네? 그건...."

"자리 있으니까 들어."

갑자기 뒤에서 끼어든 목소리를 들은 이신이 고개를 돌렸다.

로렌이었다.

"청강생 자리 있잖아. 듣게 해 주라고."

"네? 아... 알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이신이 부탁할 때는 뭉그적거리며 절대 자리를 안 줄 것 같던 직원이 로렌의 말 한마디에 곧장 이신에게 청강증을 건네주었다.

"3급 마법사이신데, 들을 수 있어야지. 안 그래?"

그 특유의 비열한 미소를 짓는 로렌을 보며 이신이 피식 웃었다.

'또 웃어? 이 개자식이!'

고작 3급에게 화를 내기엔 체면이 상하기에, 로렌은 못 본 척 웃는 얼굴로 이신의 어깨를 토닥였다.

"잘 들어 보라고. 이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예."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강의실로 향하는 이신.

그 모습에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로렌은 끝내 참았다.

'가서도 그딴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보자.'

이신이 로렌을 뒤로 한 채, 강의실에 도착했다.

러너들이 듣던 강의실보다 훨씬 크고 깔끔한 강의실.

그 안에 수많은 3급 마법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뭐야? 흑색?"

"저 녀석이 여길 왜 온 거지?"

"쟤 저번에 러너 강의도 못 따라갔다던 녀석 아니야?"

"무슨 깡으로 여길 온 거야?"

"에이씨, 수준 떨어지게. 쟤를 왜 들여보내?"

수없이 쏟아지는 비웃음과 조롱, 질타, 무시.

그 사이로 이신은 당당히 걸어 자리에 앉았다.

강의 시간이 되어 슌 그라미스가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가 좌석 전체를 훑으며 이신에게로도 향했지만 딱히 로렌 때와 같은 반응은 없었다.

"강의 시작하지. 오늘의 강의는 창과 방패다. 여기서 상대를 지목해 창과 방패를 선택하고 대련을 진행한다."

창과 방패라는 대련 수업.

처음 강의를 들어온 이신의 입장에서는 참여조차 힘든 수업이었다.

"지난 마력 컨트롤 시험의 결과를 오늘 공개하겠다. 1등부터 꼴등까지."

슌이 손가락을 튕기자, 거대 스크린에 그들의 순위가 좌르륵 공개되었다.

"이번에 청강생이 셋이나 있는데, 뭐 구경만 하면 심심하겠지? 어때, 자네들도 한 번 참여하겠나?"

'나 말고도 둘이나 더 있었나?'

이신의 시선이 슌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곳엔 적색 옷과 금색 옷을 입은 마법사가 앉아 있었다.

'금색은 몰라도… 적색은 의왼데?'

"하겠습니다."

"저도요."

두 사람이 대답을 하자, 연이어 시선이 이신에게로 향했다.

"좋습니다."

이신의 대답이 이어지자 주변에서 그를 향한 적의가 치솟았다.

제47화

"자 그럼, 기회를 주겠다. 누가 먼저 하겠나? 참고로 당연히 마법은 물 속성을 사용해야 한다."

슌의 말에, 강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이신을 포함한 청강생 세 명에게 쏠렸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입을 뗀 이는 금색 마탑의 마법사.

마탑 중에서도 최고라 칭해지는 마탑 중 하나가 금색 마탑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의 거만한 표정이 그 프라이드를 보여 주고 있었다.

"1등 세이카를 고르겠습니다."

"좋다, 둘 다 앞으로 나오도록."

금색 마탑의 마법사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지만 세이카는 똥 씹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상대가 금색 마탑에서 온 녀석이라 해도 이 대결은 물 속성 마법으로 싸우는 대결. 같은 3급 마법사라면 청색 마탑인 자신이 이기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저 거만한 금색의 마법사는 당연히 이길 수 있다는 듯이 1등인 자신을 불렀다.

'그 콧대를 눌러 주마.'

서로가 승리를 확신하는 대결.

이신은 두 사람을 보며 승부의 향방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룰은 물 속성을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물은 너희가 배웠던 것처럼 무엇이든 변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속성이지. 물 속성을 사용한다는 룰 외에 그 어떠한 룰도 없다. 베른, 뭘 하겠나?"

"전 창을 하겠습니다."

"그럼 자동으로 세이카는 방패다. 그럼 시작해라."

금색 마탑의 마법사 베른.

전생에서 이신을 꽤나 애먹였던 녀석.

이 승부의 결과는 불 보듯 훤했다.

대결이 시작되고, 세이카가 능숙한 솜씨로 물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생성된 물의 덩어리는 아직 어떠한 형태로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건 의도적이었다.

상대의 공격에 즉시 반응하여 대응하기 위해서.

그와 반대로 여유롭게 마법을 시전한 베른의 물덩이가 뾰족한 창의 모습으로 변했다.

날카로운 창날과 곧게 뻗은 창대.

청색 마탑의 마법사라 해도 믿을 정도로 완벽한 마력 컨트롤에, 그것을 보던 마법사들의 감탄이 연이어졌다.

"와... 미쳤네."

"저 정도면 세이카만큼이나 잘하는데?"

"이거 세이카가 지는 거 아니야?"

"에이, 그래도 세이카가 우리 1등인데 설마 금색 마탑 마법사한테 지겠어?"

"그건 그렇지, 봐봐. 세이카도 벌써 대응했다고."

베른의 공격 형태에 맞춰 변해가는 세이카의 마법.

두껍고 기다란 물의 방패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귀엽네."

"뭐? 거만도 그쯤 해라. 네가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아무리 너라도 물 마법으로 나를 뚫을 순 없어."

"막아 봐."

씩- 웃는 그의 미소에 담긴 자그마한 경멸.

이신은 저 미소의 담긴 의도를 정확히 간파했다.

쉬이익―!

바람을 날카롭게 가르며 날아가는 물의 창.

그 위로 새겨지는 또 다른 마력.

치직- 치지직-

물의 표면을 타고 넘실거리는 뇌전이 그 창의 속도를 한 번 더 가속시키고.

촤악―!

세이카의 방패와 베른의 창이 부딪히며 물보라를 일으킨다.

"아악!"

"거기까지."

퍽! 촤악!

방패는 허무하게 터지고 그대로 뻗어 나가던 베른의 창은 무언가에 막혀 허무하게 부서졌다.

"허억... 허억...."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거센 숨을 내쉬는 세이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몸을 덜덜 떨었다.

그와 반대로 여전히 여유롭게 서 있는 베른.

슌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고 있었지만 베른은 어깨만 으쓱할 뿐, 그 시선을 무시했다.

"상대에게 해를 입히는 건 금지다. 방패를 뚫었으면 거기서 멈춰라."

"힘이 너무 들어가다 보니까."

슌은 뻔한 그의 거짓말에도 딱히 그에게 더 이상의 제제를 내리지는 않았다.

더블 캐스팅.

조금 전 베른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물과 뇌전을 동시에 사용해 결합했다.

고작 3급 마법사라 보기 힘든 마력의 컨트롤.

이건 마법의 수준을 떠나 재능의 차이라고 부르는 게 맞았다.

베른의 마법을 본 마법사들은 놀랐다. 그리고 그 놀람은 곧 강의실에 적막을 가져왔고 그것은 또 감탄으로 변했다.

"미쳤다!"

"이게 금색 마탑인가? 금색 마탑의 마법사는 다 저런 거야?"

"아니야, 그냥 저 녀석이 대단한 거라고. 2급 마법사님들도 더블 캐스팅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걸?"

"젠장! 우리 마탑엔 저런 녀석이 없는 거야?"

웅성웅성 시끄러워진 강의실을 슌이 교탁을 내리치며 진정시켰다.

"그만. 내려가라, 다음. 누가 할 거지?"

"제가 하겠습니다."

그다음 손을 든 사람은 예상외로 적색 마탑의 마법사가 아닌 흑색 마탑의 이신이었다.

그의 말과 동시에 주변에서 다른 이들의 탄식이 들려왔다.

다들 이신이 손을 들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손을 들어 상대로 지목할 생각이었다.

이신이 누군가를 이길 리는 없으니, 이신과 대련할 기회는 한 번뿐이라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이신의 손에 지목되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신은 수많은 청색의 3급 마법사들 사이를 걸어 내려갔다.

그의 마력이 은밀히 뻗어 나가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래, 상대는 생각했나?"

"딱히 끌리는 상대가 없으니 지원받겠습니다."

"호오... 그렇다는군."

이신의 발언에 강의실의 열기가 급격히 뜨거워졌다.

그와 상대하겠다는 지원자들이 속출했다.

"흠... 지원자가 많은데 고르겠나?"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슌.

이신은 수많은 지원자들을 쭉 둘러봤다.

"룰이 물 속성의 마법만 사용하면 된다고 하셨죠?"

"그래."

이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베른이 했던 것처럼, 물 속성 마법을 쓰기만 하면 그 외 어떤 조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 방패가 여러 개라도 상관없겠군요."

"당연히 상관없지만, 방패를 여러 개 만들 수준의 학생은-."

"전부."

"뭐?"

"저 지원자 전부와 하겠습니다."

베른이 세이카를 골랐을 때도.

그가 더블 캐스팅을 손쉽게 사용하고 그의 짜릿한 공격을 막았을 때조차도 슌은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흑색 마탑의 마법사.

그것도 고작 3급에, 얼마 전에는 이곳에서 로렌의 강의를 듣고 그 과제를 성공시키지도 못한 채 도망갔다는 소문이 들리는 녀석.

그런 녀석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기지 못할 거 잔머리를 쓰는 건가?'

그러나 옆에서 지켜본 이신이라는 이 마법사의 눈빛은 일말의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 지원자 전부와 붙겠다는 건가?"

"예. 조금 전 방패가 여러 개여도 상관없다고 하셨습니다."

"하하...그랬지." 

평생 천재 소리를 듣고 산 그라도 이런 상황은 전혀 상정해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고민은 금세 사라졌다.

"좋아, 모두 내려와라."

당연히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거절할 거라 생각했던 마법사들은 슌의 결정에 얼굴을 와락 구겼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의 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

일대일로 철저하게 망신을 주고 녀석을 무너뜨리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그러나 오히려 저 녀석의 꼬임에 상황이 이상하게 변했다.

"어차피 이기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이런 짓을 하는 건가?"

뒤에서 재밌다는 듯 그 상황을 보던 베른이 옆에 앉은 적색 마법사에게 말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재밌는 광경이 벌어지겠군."

"뭐?"

적색 마법사의 대답이 더 이상 들리지 않자,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표정으로 베른도 이신을 보았다.

그의 반대편에 모여든 청색의 3급 마법사들.

제법 넓은 공간임에도 좁게 보일 정도로 많은 이들이 내려왔다.

"젠장할, 되도 않는 꾀를 부리다니."

"칫, 이렇게 된 거 제일 먼저 쓰러트리는 건 나다."

"공격한 녀석이 오히려 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이신의 앞에 선 스무 명의 마법사들은 저마다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섰다.

"이건 창과 방패의 대결이다. 네가 뚫지 못하면 다음엔 네가 저 스물의 마법사의 창을 막아내야 하는 거다. 알고 있나?"

"예."

"알겠다. 자, 양쪽 다 준비된 것 같으니 이제 시작하지."

스무 명의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물의 방패가 마치 성벽을 세우듯 연달아 만들어졌다.

서로 이신의 공격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뚫리는 것은 생각지도 않은 채, 서로의 경쟁만을 신경 썼다.

반면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신은 마력을 은밀히 움직였다.

검은 마력의 사슬들이 스무 명의 마법사들 밑에서 치솟아 그들의 마력의 흐름을 건드렸다.

툭, 투두두둑.

촤악! 촥! 촥! 촥!

절대 뚫리지 않을 것만 같던 물의 방패들이 연달아 터지며 바닥에 흩뿌려지자, 당황한 마법사들이 서로 허둥지둥 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런 썅! 누구야?"

"아악!"

"갑자기 마력이 왜!"

자신들에게 벌어진 일조차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신의 앞에 자그마한 물의 창이 나타났다.

후우웅―

단 한 발.

아까 베른이 보여 줬던 크고 예리해 보이던 물의 창과는 상반되게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물의 창이 가장 앞에 있는 청색 마법사를 가격하고.

퍽! 촤악!

그와 동시에 쏟아지듯 퍼져 나간 물방울들이 주변의 모든 마법사를 뒤덮더니 그대로 폭발한다.

퍼버버버버벅!

"끄악!"

"아아악!"

"카악!"

한순간에 난리가 난 무대 위.

물방울이 폭발하기 시작하자마자 낯선 마력이 이신의 마력에 개입한다.

'그래도 같은 마탑의 마법사들이라는 건가?'

슌의 기습적인 개입.

허공에 생겨난 얕은 물의 안개가 마치 막이 되듯 이신의 물방울 폭탄들을 둘러쌌다.

'대단한 센스와 마력 컨트롤인데?'

이신은 슌의 실력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그건 슌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라면 거의 나와 맞먹는 재능의 수준이다. 하지만... 아직 내게 닿으려면 한참은 이르다!'

슌의 마력이 거세게 움직이며 이신의 마법을 막는 것과 동시에 그의 마력의 흐름을 건드렸다.

그러자 우수수 터져 가던 물방울들이 오히려 이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슌의 통제하에서 한 곳으로 뭉쳐 사라졌다.

"와...."

"방금 뭘 본 거지?"

아주 잠깐 사이에 벌어진 두 사람의 공방.

이신의 마법이 중단되기는 했지만 앞서 그가 보여 준 실력은 청색 마법사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미친...."

"저게 흑색 마탑의 마법사라고?"

"여태 퍼지던 소문은 헛소문이었나 본데."

"거짓말...."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입을 떡 벌리고 굳어 버렸다.

"꼴이 말이 아니군."

물방울 폭탄에 맞은 몇몇은 기절하듯 쓰러져 있고 나머지들은 충격에 어벙벙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슌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머리가 아팠다.

"모두 일어나라, 승자는 흑색 마탑의 마법사, 이신이다."

"이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 녀석이 수작을 부린 거라고요!"

"맞아요! 대결 시작도 전에 미리 저희한테 마법을 걸어 놓은 게 분명해요."

"흑색 마탑이 야비하고 음침한 마법이나 쓸 줄 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도-."

"그만! 상대 마법에 그렇게 멍청하게 당한 것도 자랑이라고 떠벌리는 건가?"

슌의 날 선 목소리에 항의하던 마법사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 자리로 돌아가도록. 너도 자리로 돌아가."

이신과 청색 마법사들이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진행한다."

* * *

수업이 마무리되고 청색 마탑을 나선 이신을 베른과 적색 마법사가 따라왔다.

"이신이라고 했나?"

"뭐지?"

"너 정체가 뭐야?"

다짜고짜 하는 소리가 정체가 뭐냐니.

이신은 이 거만한 놈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피식 웃어 버렸다.

"뭐야?"

"그저 흑색 마탑의 마법사일 뿐이야."

"3급 마법사라는 놈이 그런 마법을 쓴다고? 그것도 흑색 마탑의 녀석이?"

"흑색 마탑은 그러면 안 되냐?"

"뭐, 그럴 수야 있지. 근데 기고만장해하지 마. 나도 그 정도 녀석들쯤은 백 명이 있었어도 이길 수 있었어."

"그래, 알았다."

마치 세기의 라이벌이라도 만난 듯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번뜩이는 베른.

기껏 불러서 한다는 소리가 저거라니.

참 베른답다는 생각을 하며 이신은 자리를 벗어났다.

그날 밤.

마법 도시 세이아의 외곽 호수에 슌 그라미스가 호수를 보고 있었다.

그는 가끔 이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마음의 평온을 즐기곤 했다.

'오늘은 방해꾼이 있군.'

나무 뒤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파장에 슌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지? 설마 나를 쫓아왔나?"

"그래."

아무도 없는 호수 앞.

나무 뒤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이신이었다.

그 모습에 순간적으로 무거워지는 공기와 대기의 마력이 일렁이고.

잔잔하던 호수에 파문이 일어난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 했는데... 내 위치는 어떻게 알았지?"

"아는 방법이 다 있지."

그렇게 말하는 이신의 시선이 슌 그라미스의 뒤쪽으로 향했다.

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이신에게는 보이는 영체들.

이신은 흡수했던 사령을 슌에게 붙여 그 위치를 파악했다.

"그래서, 목적은?"

날카로운 이신의 눈동자가 슌의 모습을 훑는다.

경계는 하고 있지만 긴장은 하지 않는 모습.

상대가 자신을 절대 어찌하지 못하리란 자신감의 발로였다.

이신은 슌 그라미스의 그런 모습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라면 자신을 노리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도움 요청 따윈 하지 않을 테니까.

이신은 천천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여기서 죽어 줘야겠어."

슌 그라미스는 이곳에서 전쟁의 씨앗이 되어 주어야 한다.

제48화

호수에서 치솟은 물의 소용돌이는 거대한 화염에 집어삼켜져 증발되고 가득 차 있던 호수는 텅 비어 버린 구덩이가 되었다.

청색 마탑의 클라테.

곧 수석 클라테도 될 수 있을 것이란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 슌 그라미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져 몸을 덜덜 떤다.

"말…도…안…돼...."

"미안한데, 이곳에선 내가 악역이 돼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화르륵!

이신의 손 위로 타오르는 불꽃이 만들어진다.

"내가 이곳의 악역이 돼야 한다면... 기왕이면 최고의 악당이 되어야겠지."

"잘도 그런 말을...."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이 이신의 손 위에서 슌 그라미스에게로 떨어진다.

"잘 가라."

"개…자…식... 크아아악!"

등을 돌려 사라지는 이신이 어둠 속에 동화되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의 뒤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작은 불꽃이 고작 몇 분도 채 타오르지 않고 꺼졌다. 그곳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물과 불의 커다란 대립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 * *

"야 이 자식아!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 거야? 흑색 마탑에 들어온다는 놈이 왜 청색 마탑에서 그렇게 설쳐?"

밤늦게 돌아온 이신이 마주친 사람은 레이먼드였다.

도대체 이 밤까지 뭘 하는 건지.

"들으셨습니까?"

"그럼 당연히 듣지! 네 놈이 그렇게 설치고 다니는데!"

화를 내는 것처럼 말하는 것과 달리, 레이먼드의 표정은 그리 화가 나 보이지 않았다.

"흑마법을 배우더라도 다른 기본적인 속성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하면 안 된다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 녀석아!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어휴, 됐다. 그래도 그 청색 놈들 몇 놈을 때려눕혔다며? 그런 머저리 같은 놈들에게 얻어맞지 않은 건 칭찬해 주마."

고작 몇 놈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레이먼드의 표정은 나름 홀가분해 보였다.

그동안 흑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다른 마탑에게 무시 받던 것을 알기에 이번 일에 대해 이신을 크게 나무랄 수 없었다.

"들어가도 됩니까?"

"성질 급하긴, 네놈 곧바로 2급 시험을 보려 한다지? 자신은 있나?"

"없지는 않습니다."

"에잉, 건방진 놈. 어쩌다 이런 놈이 들어와 가지곤. 자, 받아라."

레이먼드가 들고 있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을 이신에게 건네줬다.

"이게 뭡니까?"

"저주의 제조 용법들을 적어 놓은 수첩이다. 내가 왕년에 공부할 때 쓰던 거지."

"이걸 왜...?"

"2차 시험의 내용은 마법이 아닌 물건으로 저주를 하는 시험이다. 물론, 마력을 사용하긴 하지만 너는 아직 하나도 배우지 않은 내용이니 이거라도 보고 가면 도움이 될 거다."

"이런 걸 주셔도 되는 겁니까?"

"상관없다, 거기 적힌 내용이 나오리란 법도 없고 말이지. 더구나 다른 놈들은 다 이미 공부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야, 네놈이 너무 허무하게 탈락하고 우리 마탑을 나갈까 봐, 주는 거다."

툴툴대며 자신의 수첩을 건네주는 레이먼드를 보며 이신은 생각 외로 그가 마탑에 대한 애정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합격하면 내 덕이니 그때는 내 심부름이나 좀 해라."

"예."

다음 날이 되고, 세이아는 그 어느 때보다 큰 난리가 났다.

그 시작점은 세이아의 외곽 호수.

청색 마탑과 적색 마탑의 대립이 이 소란의 원인이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두 마탑의 소란은 주변의 다른 마탑들에게도 퍼져 조금 변방에 있는 흑색 마탑에도 퍼졌다.

"들었어? 청색 마탑의 그 슌 그라미스가 죽었다네?"

"미친... 그 호수가 아주 난장판이 됐더만?"

"그거 봤어? 지금 청색 마탑에서 아무도 못 들어가게 막던데?"

"밤에 봤지, 마침 내가 그 근처에 있었는데 막 폭음이 들리는 거 같아서 가 보니까 완전 불로 다 타가지고... 어후, 소름 돋아서 도망쳤다니까."

"진짜 적색 마탑에서 슌 그라미스를 죽인 걸까?"

"그럼 누가 죽여? 지금 청색 마탑에서 다 조사했는데 주변에 온통 화염 마법의 흔적뿐이라는데."

청색 마탑의 슌 그라미스의 죽음.

이건 단순히 클라테라는 마법사가 죽은 일 이상으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는 청색 마탑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으며, 청색 마탑의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그를 신뢰하고 존경했다.

그를 죽였다는 건 청색 마탑 전체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것과 마찬가지.

거기에 더해 그 상대가 오랜 라이벌인 적색 마탑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신은 당장 마탑을 나와 호수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호수 전체를 둘러싼 결계.

그 결계 밖으로 많은 마법사들이 몰려 있었지만 정작 결계 안에 있는 마법사들은 소수였다.

'역시 결계 마법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네.'

이 정도의 결계를 뚫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이신은 약간의 마력의 흐름을 비트는 것만으로 결계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결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잔뜩 격양된 목소리가 들렸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청색과 적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보였다.

청색 마탑의 푸른 용 문양이 새겨진 로브와 긴 수염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

'청색 마탑의 마탑주인가.'

그 반대편에는 짧고 붉은 머리에 짙은 눈썹을 가진 여자가 붉은 새 문양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다.

'마탑주들, 그리고 주변엔 수석 클라테들과 클라테들이네.'

이미 전생에 다 한 번씩 보았던 녀석들이다.

원래라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스치듯 지나갔던 이들도 있지만 이신의 머릿속에는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건 누군가의 농간이야! 우리가 왜 이 시기에 슌을 죽여? 그것도 이렇게 대놓고!"

"그럼 누가 그랬다는 거지? 슌을 죽일 정도의 화염 마법을 쓸 수 있는 녀석이 누가 있냔 말이야!"

"셰인. 진정해라. 곧 3달 뒤면 델리그가 열려. 근데 이 상황에서 이렇게 뻔하게 슌을 우리가 죽인다고? 이게 진짜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대로 우리가 맞붙으면 진짜 범인에게만 좋은 일이라고."

침착하게 셰인을 진정시키는 헬렌.

적색 마탑주인 그녀는 잔뜩 흥분한 셰인을 진정시키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셰인도 딱히 무력을 행사하거나 흥분하여 섣부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적색 마탑주의 성격이라면 바로 들이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뭐지?'

이런 상황이 있을지 몰라, 청색의 슌을 죽인 거다.

셰인이 흥분해 달려들면 헬렌은 그 불같은 성격상 피하지 않을 테니.

근데 예상과 다르게 헬렌은 침착하게 셰인을 말리고 있었다.

"그럼 나보고 어쩌자는 거지? 우리에겐 이러한 증거들이 있고 너희를 의심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도 우리보고 참고 있으라는 건가?"

"그게 아니야, 조금의 시간을 갖자는 거지. 우리 둘이 이대로 붙는다면 나머지 마탑들만 좋은 일이라고. 나한테 방법이 있어."

"뭐? 지금 생각 잘 해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허튼소리라면 우리 마탑이 전멸하는 한이 있어도 네놈들 끝장낼 테니까."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가쁜 숨을 내쉬는 청색 마탑의 마법사들과 달리 적색 마탑의 마법사들은 조용히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긴장을 늦추지 않는 모습이다.

"우리에게 이 화염의 마력 패턴을 분석할 방법이 있어. 우리 마탑의 마법사들 전부의 인명부를 보내 주지. 그 녀석들 전부를 하나씩 대조해 보여 주겠어. 우선 나부터 확인시켜 줄게."

"너희들의 인명부를 모두 보여 준다? 정말인가?"

"그래."

헬렌의 말에 넘어가는 듯한 상황.

이신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젠장, 이대로면 그간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겠는데.'

그가 혀를 차고 있을 때, 마탑주들 사이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갔다.

'여기 오길 잘했네.'

이신은 그대로 결계 밖으로 나와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하나하나 마력의 패턴을 대조하는 일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원도 많을뿐더러 정확한 파악을 위해서는 시간이 꽤 걸린다.

그 시간을 잘 활용해야 한다.

흑색 마탑에 돌아온 이신은 레이먼드가 준 수첩을 살펴봤다.

수많은 제조 용법이 적혀 있었고 그 대부분은 매우 기초적이었지만 제법 괜찮은 방법들도 몇 가지 존재했다.

'뭐, 그것도 그 정도 수준이 끝이지만.'

딱히 이신의 수준에서 쓸모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방법들.

다만, 지금 2급 마법사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어서 오세요."

세이아는 마법 도시인 만큼 마법 재료들을 파는 상점이 많았고 이신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필요한 재료들을 수집했다.

"레트널의 눈알은 500p입니다."

"붉은 도마뱀의 꼬리, 350p입니다."

"양식용 검은 줄무늬 꽃의 줄기는 900p입니다."

.

.

.

총 8가지의 재료.

레이먼드의 수첩의 조합법을 보던 이신은 적당한 난이도의 제조 용법을 생각해 재료를 모두 구비 했다.

진 이브리엄의 연구 자료를 보면 수준이 너무 높아서 오히려 이 정도 수준의 저주를 만드는 게 어려웠는데 레이먼드의 수첩 덕에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이걸로 2급 시험의 준비는 끝났고."

어느새 밤이 되어 어두워진 하늘.

낮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작업을 치느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이신은 흑색 마탑으로 돌아가지 않고 적색 마탑의 주변에 대기하며 누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지금 적색 마탑과 청색 마탑은 비상사태로 1급 이하의 마법사들은 마탑 외부로 나가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올 수 있는 마법사는 클라테부터.

'나왔다.'

적색 마탑의 붉은 로브를 둘러싼 마법사 하나가 조심스레 마탑 밖으로 나온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는지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은 채.

[딥 플레어(Deep Flare)]

어둠 속에서 터지는 검은 화염이 적색 마법사를 불태우기 시작한다.

나름 클라테의 지위까지 올라간 적색 마법사다. 곧장 불길을 일으켜 이신의 검은 불꽃을 몰아내려 하지만 오히려 그 불길은 이신의 검은 불길에 잡아먹혀 그 힘을 더해 주고 있었다.

"크학! 이게 무슨?"

처음 겪어 보는 마법에 허무하게 쓰러진 적색 마법사. 그의 옷을 벗겨 낸 이신이 그것을 덮어 입는다.

"화염 내성이 대단한데."

최대한 옷이 망가지지 않게 마력을 조절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탈 법도 한대, 이 클라테가 입고 있던 로브엔 약간의 그슬린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멀쩡했다.

하프니스를 불러 이 마법사의 시체를 언데드로 만들고 그림자 공간에 집어넣은 이신이 곧장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세이아 밖의 한 광산.

흑화석이 채굴되는 적색 마탑의 구역인 이곳은 스스로 열기를 내뿜는 흑화석이 사방에 깔려 주변의 열기가 뜨거웠다.

이러한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청색 마탑의 마법사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초조한 모습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왔군."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생성되는 물의 장막.

그러나 주변의 뜨거운 열기에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화염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성질이 급한데? 아들의 안위가 걱정되지도 않나 봐?"

여유로운 상대의 모습에 이를 악문 청색 마탑의 마법사.

수석 클라테 헤밍웨이.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의문의 쪽지 때문이었다.

- 잡화점의 갤 리드웨이. 아들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흑화석 광산으로 자정까지 혼자 와라. 누구에게 알리거나 혼자가 아니라면 네 아들의 목숨은 장담 못 한다.

그 쪽지를 받은 헤밍웨이는 바로 아들에게 달려갔지만 이미 아들의 가게는 문을 닫았고 아들이 사는 곳에도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성을 잃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함정이 뻔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나 그는 그 누가 와도 최소한 도망칠 수는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역시, 적색 놈들이었군. 내 아들은 어떻게 안 거지?"

분노로 가득 찬 그가 그의 감정을 씹어 뱉듯 말했다.

붉은 새 문양이 새겨진 클라테의 로브를 푹 뒤집어쓴 이신은 어둠 속에 숨어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로 그를 비웃었다.

"궁금하면 이겨 봐라."

이곳은 적색 마법사에게 너무나도 유리한 공간.

이신의 화염과 헤밍웨이의 파도가 맞부딪혔다.

* * *

쾅! 쾅! 쾅!

거세게 두들겨지는 방문 소리에 셰인이 문을 열었다.

"마… 마탑주님...."

"헤밍웨이!"

그곳엔 화염에 옷의 절반이 불타고 온몸에 화상을 입은 그가 다 죽어 가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적…색...놈에게...."

"뭐? 왜 보고도 없이 나간 거야?"

"놈들이 제 아들을...인질로...."

"뭐? 감히 이 적색 빨갱이들이!"

쾅!

셰인이 탁상 위 버튼을 누르자 청색 마탑 전체에 사이렌이 울렸다.

"전쟁이다. 이 빨갱이 놈들."

제4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