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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어리석은 도전자

후웅- 

1층 대기실 언더모스트 광장 하늘에 하나의 빛무리가 내려앉았다.

180이 넘어가는 키에 꽤나 다부진 체격.

이제 막 어린 티가 조금 벗겨진 신하늘이 신기한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허, 진짜네?"

바깥에서 이종격투기 프로 선수의 꿈을 부상 때문에 접고 좌절하던 신하늘은 그 고쳐지지 않던 몸이 단 한 순간에 원래대로 돌아온 것에 조금 허탈감을 느꼈다.

휙- 휙- 휙-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가상의 상대로 위빙을 시전하던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토끼를 보았다.

"안녕하세용! 토잉이에용!"

토잉을 보며 씨익- 웃던 신하늘이 토잉의 귀를 한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여기에 싸움 제일 잘하는 놈이 누구냐?"

"아아앙! 저도 몰라용!"

짧은 팔다리를 허공에서 허우적대며 말하는 토잉을 보며 믿음이 안 가는지 신하늘이 토잉을 이리저리 흔들며 다시 물었다.

"제대로 말 안 해?"

"으아아앙- 진짜 모올라요오오옹-"

"어이쿠!"

그때 옆을 지나가던 황강웅이 자기 다리에 걸려 신하늘에게 넘어졌고 당황한 신하늘이 황강웅을 붙잡으며 토잉을 손에서 놓쳤다.

"이런, 미안하네...."

"아니, 이 아저씨가 정신 어따 놓고 다녀?"

신하늘이 짜증을 내며 황강웅을 밀쳐내고 그에게 물었다.

토잉은 이미 언제 사라졌는지 그의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여기 제일 싸움 잘하는 놈이 누군지 알아?"

"싸움 잘하는 놈? 그런 건 알아서 뭐 하려고 그러나?"

"한번 붙어 보게. 바깥에서 여기에 탑의 랭커가 될 놈들이 있다던데."

신하늘의 말에 황강웅이 흥미로운 듯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서 그러던가? 호오...."

"호오…는 무슨, 그래서 알아? 몰라?"

"잘 모르겠네만...."

"쯧, 도움이 안 되네."

황강웅을 그대로 두고 신하늘이 도시로 들어갔다.

언더모스트는 정말로 바깥의 도시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중 훈련 더미들이 모여 있고 그곳에서 더미를 치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여기에 그 유망주 놈이 있을라나?'

신하늘이 그곳에서 훈련하는 사람 하나를 잡고 다짜고짜 물었다.

"여기서 제일 센 놈이 누구야?"

다짜고짜 붙잡고 반말을 찍찍 내뱉는 모습에 주변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아까 빛무리가 떨어지던데, 신입인가?'

'뭐 하는 놈이지?'

'센 놈을 왜 찾아? 설마 붙으려고?'

'여기서 젤 센 놈은....'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서 검으로 더미를 치고 있는 박주혁에게로 향했다.

신하늘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그는 착실하게 더미를 검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힘 스탯과 체력을 올리기 위한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저 사람이 젤 센가 보네?"

딱 보기에도 제법 다부진 몸과 강렬한 인상.

신하늘은 순간 움찔했지만, 싸움은 겉모습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입식타격기 부문에서 아마추어 중 대적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전도가 유망하던 사람이 자신이었다.

저런 일반인들 따위에게 자신이 질 리가 없었다.

"어이, 아저씨."

신하늘의 인기척에 박주혁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덕분에 훈련에 집중이 깨진 탓이었다.

"뭐지?"

"아저씨가 여기서 젤 세?"

"...."

"뭐 하자는 거지?"

"나랑 한 판 붙자."

갑작스런 대련 신청에 박주혁은 신하늘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 앳된 티도 다 벗겨지지 않은 어린아이.

이런 녀석 때려 봤자 자신만 우스워질 뿐이었다.

"훈련 중이다. 대련은 안 해."

"뭐래? 쫄았어?"

빠직-

박주혁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성질이 많이 죽었구나를 처음으로 느꼈다.

원래라면 반 죽여 놓았을 녀석을 이리 내버려 두는 것을 보니.

"방해 말고 가라."

"x신, 쫄았네."

"후..., 그래, 덤-."

"티, 팀장님!"

옆에서 그 상황을 조마조마하게 보던 팀원 하나가 박주혁을 붙잡으며 말했다.

"애잖아요. 참으세요."

팀원이 그의 귀에 속삭이며 말했다.

그 말에 박주혁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참았다.

이제는 대꾸도 안 하고 무시하는 박주혁을 보며 김이 샌 신하늘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반응도 없는 상대를 강제로 팰 수도 없으니.

다른 곳을 가 보아도 모두 비슷한 반응들이었다.

'다 x신들밖에 없네.'

이런 놈들이 무슨 한국을 최고로 이끈다는 건지.

신하늘은 중앙광장으로 이동했다.

"1층으로 가시게용?"

포탈 근처에 있는 신하늘을 보며 토잉이 물었다.

"그래."

1층의 보스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다고 했다.

바깥에 있을 때부터 가장 궁금하던 것이 1층의 보스라는 놈이었다.

차유민도 이기지 못했다는 그 보스.

밖에선 차유민의 능력에 페널티가 있었을 것이고 그 페널티 덕에 1층의 다른 도전자들과 능력치가 비슷해졌을 것이라는 게 정론이었다.

'능력치가 비슷하면 내가 이길 수도 있지.'

신하늘은 포탈에 올라섰다.

"오...."

1층으로 올라온 신하늘은 생각보다 웅장한 1층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걷다 보니 세 갈래 길이 나왔고 그중 가장 왼쪽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많이 들었던 몬스터들이 그곳에 있었다.

처음 마주하는 몬스터들, 그러나 이미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을 한 상태였다.

찍찍찍-

시궁창 쥐가 울음을 내뱉으며 신하늘에게 달려들었다.

퍽! 퍽! 퍽!

놈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 세 대를 때렸을 뿐인데 시궁창 쥐가 죽었다.

"너무 쉬운데?"

이어서 스켈레톤도 부수고 고블린도 밟아 죽였다.

자신감이 점점 차올랐다.

처음 들어올 때는 보스를 이길 수 있단 확신은 없었다. 그저 한번 붙어 보고 싶었을 뿐.

자신의 재능이 차유민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근데 스탯 업을 하고 강해지는 신체를 느끼니 '보스가 세면 얼마나 세겠어?'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왼쪽 방을 나와 가운데 이어진 복도를 걸었다.

그 복도 끝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여기가 보스 방인가?"

이길 수 있을까?

내가 차유민도 이기지 못한 보스를 쓰러트릴 수 있을까?

혹여 보스의 마음이 변심해서 나를 죽이려 들면 어쩌지?

그런 걱정은 잠깐뿐이었다.

신하늘은 변해 버린 1층 보스를 최초로 뚫고 초신성으로 거듭나는 상상을 했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칭송하고 차유민보다 대단한 도전자라 일컫는 그런 상상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

내 재능은 최고니까.

신하늘은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 안에는 지루한 표정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보스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왔냐?"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듯한 말투.

신하늘은 뭔가? 싶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네가 보스야?"

"네가?"

다짜고짜 반말을 뱉는 신하늘을 보며 이신의 미간이 좁혀졌다.

"몬스터 주제에 기분 나빠?"

"하하...."

신하늘은 당당하게 나갔다.

저 보스는 여태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 난이도가 올라간 대신 설정된 시스템이라 생각했다.

이 정도로 기분 좀 나쁘다고 도전자들을 죽였으면 진작에 몇 명 죽어 나갔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사망자는 0명, 예외는 없었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놈이구나."

"난 나보다 강한 사람 아니면 존대 안 해."

"네가 강하다 생각해?"

"당연하지. 그리고 몬스터 따위한테 존대를 왜 해야 되는데?"

이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적당히 실력 차를 보여 주고 보내려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듯했다.

이신의 마력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화아악-

보스 방의 모습이 한순간에 변했다.

주변엔 용암이 들끓고 두 사람이 서 있던 땅은 여기저기 무너져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뭐, 뭐야?"

"언제까지 그런 버르장머리를 보일 수 있는지 보자."

온몸에 생생하게 느껴지는 뜨거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은 밑바닥.

저 멀리 폭포처럼 떨어지는 용암과 그로 인해 높아지는 용암의 높이.

이대로 5분 정도만 있으면 용암이 자신의 발에 닿을 정도의 속도였다.

"이거…환상이지? 거짓말이지? 내가 이딴 거에 속을 줄 알아?!"

"큭."

이신은 비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신하늘은 슬쩍 다리를 구부려 용암 쪽으로 움직여 보았다.

설마 진짜인가? 하는 생각에 열기를 확인해 보려 했다.

툭- 치이익-

튀어 오른 용암이 신발에 묻었다. 신발이 실시간으로 녹아내리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다리를 올려 신발을 벗었다.

'지, 진짜?'

정말로 신발이 녹았다.

이 뜨거운 열기는 이 공간이 거짓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반대쪽의 보스를 보았다.

놈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가면 너도 죽어! 이 새끼야!"

"내가 왜 적들을 죽이지 않았는지 알아? 적을 죽이려면 나도 한 번 죽어야 하기 때문이지. 근데 너는 너무 맘에 안 드네?"

"이… 미친놈이...맘에 안 든다고 같이 죽는다고?"

"난 다시 살아나니까. 죽을 때의 고통은 있겠지만."

꿀렁꿀렁 움직이는 용암이 어느새 거의 발밑까지 도달했다.

치이익- 치익-

용암에 신발이 조금씩 닿기 시작했다.

"아아악! 이 미친놈아! 당장 풀어! 풀라고!"

"같이 죽자고."

"미안해! 미안하다고!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이미 늦었다."

치이익-

"크아아아악! 아파! 제발! 살려 줘! 제발...."

생전 처음 겪는 아픔이었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신하늘이 울부짖었다.

피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공간 속에서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만 했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제발…살려 주세요. 제발요!"

"아까 그 당당함은 어디 갔지?"

"죄송합니다아아, 흐윽! 안 그럴게요."

"다시는 안 까불겠습니다. 세 번 복창."

"일단 이것부터 풀어 주...."

"죽어라. 그냥."

치이익-

"으아아악! 다시는 안 까불겠습니다! 다시는 안 까불겠습니다! 다시는 안 까불겠습니다!"

처음 겪는 고통에 눈물 콧물 다 짜내며 외치던 신하늘이 뒤바뀐 감각에 슬쩍 눈을 떴다.

"어...?"

눈을 뜨니 주변에 모여 있는 다른 도전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너...."

그중에는 아까 도시에 보았던 사람들의 얼굴도 몇 보였다.

"이 모자란 애는 누구예요?"

박혜원이 물었다.

"모자란 애."

박주혁이 대답했다.

"저기 구석에 가 있어."

"어?"

이신의 명령에 자신도 모르게 멍청하게 대답하던 신하늘이 그의 표정을 보고 움찔했다.

"아, 알았어요!"

또 그런 고통을 겪을까 허겁지겁 구석으로 간 그가 다른 이들과 보스의 훈련을 멍하니 보았다.

저 보스는 물론이고 아까 시비를 걸었던 저 남자부터 다른 사람들 전부가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자였다.

아까 자신이 덤볐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

* * *

[진 이브리엄]

# 클래스: 네크로맨서

# 상태: 봉인 – 해금 2단계(상세*)

# 칭호: 상세*

# 체력: 3850/3850

# 마력: 63720/63720

# 힘: 28(+47)

# 민첩: 24(+47)

# 지력: 81(+65)

# 지배력: 11

# 스킬: 상세*

"흐음, 많이 성장하긴 했는데...."

솔직히 아직 많이 부족하다.

특히나 힘과 민첩은 키우고 싶다고 키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육체적인 운동으로 최대한 단련을 해 봤지만 이 정도가 한계선.

특수한 스킬이나 칭호를 얻어서 올리거나 탑을 올라 그 보상으로 올리는 수밖에 없다.

'이 기형적인 체력과 마력 스탯....'

현재 마력이 5만을 넘어가고 지력은 150에 근접했다.

신체의 봉인이 풀리며 전체적인 스탯 상승이 크게 이뤄졌다.

그럼에도....

"부족해."

탑은 전체가 신들의 눈 안에 있다.

딱 한 곳.

1층을 제외하고는.

"답답해 미치겠지."

이신은 하늘을 보며 비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1층은 신들의 권역 밖에 있었다. 여태까지 신들의 음성이 들리지 않은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이신은 자신을 1층으로 보낸 이유가 그것 때문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회귀했고 놈들은 하지 않았다.'

시간 선이 분명히 다르고 그쪽 세상과 이쪽 세상은 다른 곳이다.

아마 자신을 회귀시키면서 1층으로 보낸 것도 이쪽 세계의 신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왜?

"흐음...."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빨리 탑을 올라야 이러한 의문들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1층을 벗어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신들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 전에 제대로 준비해서 올라가야 한다.

"칭호 목록."

[탑의 거대한 벽]

100명의 도전을 막아내시다니! 도전자들에게 당신은 거대한 벽이군요!

# 기본 스탯 + 5

[무적의 수호자]

1,000명의 도전을 막아내셨습니다! 당신은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어요! 아마 탑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 같네요.

# 기본 스탯 + 10

다음 칭호는 만 명을 막아내야 얻을 수 있을 거라 예상되었지만 그때까지 이곳에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미 얻을 만한 칭호들은 거의 다 얻은 상태. 이제는 탑을 올라가는 데 집중할 때다.

탑을 올라가기 시작하면 신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고 그때부터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조치가 취해질지도 모른다.

혹은.

엄청난 능력자들이 대거 쏟아지는 것에 환호하며 자신들의 사도를 만들기 위해 온갖 아부를 떨 수도 있다.

놈들은 사도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뛰어난 도전자에 대한 갈망이 대단하니까.

그것은 자신을 따르는 신도나, 사도가 그 격이 높아질수록 자신의 격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굳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1층의 입구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동굴의 입구를 막은 문을 열었다.

매끄럽게 열리는 문 사이로 걸어간 이신은 멀리 보이는 극지방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이곳은 아직 기본 마법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이신의 능력으로 벗어날 수 없는 곳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을 맴도는 새, 빙조 때문이다.

1층뿐 아니라 80층을 넘어가면 볼 수 있는 새다. 빙조라는 이름도 이곳에서 빙조를 본 인간들이 마음대로 지은 이름이다.

마르타스.

저 녀석의 진짜 이름이다.

이곳에 서 있으면 마르타스가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살 떨리게 만드는 저 냉기.

지금의 자신은 마르타스의 브레스 한 방이면 온몸이 얼어 버릴 것이다.

"...."

이신은 복잡한 눈으로 마르타스를 보았다.

불망각의 구를 되찾기 전, 놈은 이신을 바다에 던졌다. 그리고 신원불명의 누군가에게 날아갔다.

마르타스라면 무언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불망각의 구는 무엇인지, 마르타스를 부른 그건 정체가 뭐였는지.

녀석을 보고 있으면 '아직 비밀을 알기에 너는 부족하구나.'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신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제15화

실마리

흐어어어어어어ㅡ

으아아아아아아ㅡ

허공을 흐느적거리며 유영하는 유령들이 계속해서 이신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저 움직이기만 하면 다행이지, 저 거슬리는 괴성들은 그의 집중을 툭툭 끊어 댔다.

죽음의 통찰자라는 칭호를 얻게 된 지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이신은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특히나 연구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더욱.

"야 이 영감탱이야! 그만 좀 알짱거려!"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을 긁는 것 같아 이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저 영혼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

이곳에 영혼들이 우글우글하게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수가 존재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혼들이 저런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허공을 떠다닌다.

이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존재조차 인지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신이 분열된 듯, 마치 진 이브리엄처럼.

그중에서도 극소수가 그나마 나은 상태였는데 그게 워리와 메이였다. 그들은 정신 분열 상태까지는 가지 않은 덕에 이신의 권속이 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신이 메이와 워리에게 물어보았지만 둘 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자신들의 지난 과거도,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이신의 짐작처럼 이곳이 신에게 대항하다 진 이들이 갇힌 곳이라면 메이와 워리는 그 격이 낮아 오히려 멀쩡했을지도 모른다.

메이와 워리가 말하길 신들에 대한 기억은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그들에 대한 반발심이 느껴진다고 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이신의 추측이 맞다면 저들의 망가진 영혼들을 되돌리는 것만으로 든든한 아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저들을 되돌릴 수 있을까?

마침 생각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조금 더 연구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음?'

잠깐 생각에 잠긴 뒤에 고개를 드니, 눈앞에 방금 허공을 지나가던 노인 영혼이 이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이신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노인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 내가… 보이는…가…··?

그의 말은 매우 느렸다.

마치, 너무 오랜만에 말을 해서 말하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그는 기억을 더듬어 말하는 듯 보였다.

"저는 영혼을 볼 수 있습니다."

이신은 놀란 것을 숨기고 담담히 말했다.

- 그...런가.

노인은 워리, 메이와는 다르게 태연했다.

- 영혼…을…보는…자는…많지.

"그렇게 많습니까?"

- 많…아...기억은…잘…안 나는군.

"당신은 왜 그렇게 된 겁니까?"

- 나…는…기억이…나질…않아....

노인의 말에 이신은 눈썹을 찌푸렸다.

죽음의 통찰자의 능력이 발동되지 않았다. 말이 통하는 상대라면 모두 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어떤 조건이 따로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이 노인은 워리와 메이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영혼이었다.

언뜻 보면 격이 높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 이곳은…이곳은....

으아아아아ㅡ

노인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고통에 신음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곳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하지 못하는 듯했다.

"괜찮습니다!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 말이 먹혔던 걸까?

노인의 신음이 점차 줄어들었다.

- …이곳에…길잡이가…있다....

"길잡이?"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노인은 힘겹게 한 자 한 자 말을 이어 갔다.

- …다음…으로…나…아…가…기…위해....

그가 고통에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 전만큼은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버티며 말을 내뱉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이신의 말에도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한순간이지만 이전과 달라 보였다.

분노, 상실, 결의.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마…력…이…흩…어…지는…곳….

으아아아아아ㅡ

마지막 말을 내뱉은 노인은 그가 어떻게 할 새도 없이 표정이 와락 일그러지며 바닥을 통과해 사라져 버렸다.

아마 어떤 정보 노출에 제한이 있던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모습은 전생에 탑에 오르며 몇 번 보았었기에 그 노인 영혼이 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되었다.

의문점은 그가 왜 그랬느냐이다.

도대체 왜?

한순간 보였던 그 눈빛.

무언가에 크게 분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건 아마 신을 향한 것이 아닐까?

길잡이, 다음으로 나아가다, 마력이 흩어지는 곳.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방법을 암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말하는 것일까?

나에 대해 무언가를 아는 건가?

노인은 이신에게 어떤 정보를 전달해주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이신은 언더모스트의 도전자들에게 마치 다음 층으로 갈 방법이 있는 듯 말했었지만 사실 아는 것은 없었다.

그저 저들에게 강해질 동기를 부여하고 그 대가로 포인트를 얻어 가기 위함이었을 뿐.

'마력이 흩어지는 곳....'

아직 이곳 1층에서 그러한 곳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애초에 절벽 밖을 갈 방법이 없으니까.

* * *

시간은 순조롭게 흐르고 있었다.

1층과 언더모스트는 아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그니까, 김강천한테 졌다? 이 말이지?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그게... 진짜 진 게 아니라...."

땀샘도 없는 두개골에서 땀이라도 흐르는 듯 연신 손으로 머리를 문지르는 워리.

그는 필사적으로 이신에게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 뼈를 최하급 스켈레톤의 것으로… 언더모스트의 부탁이… 김강천이 그걸 알고 얄팍한 술수를...."

"…해서 결론은 졌다?"

"...예."

그는 고개를 숙이며 두꺼운 뼈마디를 덜덜덜 떨었다.

"쯧. 질 녀석들이 없어서 저 꼬맹이들한테 졌어?."

이신의 어깨에서 워리의 머리 위로 올라간 릴리안이 발로 두개골을 툭툭 치며 말했다.

"한심한 놈. 주인의 권속이라는 놈이."

"예, 제가 아직 너무 부족...."

"내가 부족했네. 너무 안일했어, 이 정도면 그래도 나름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다 싶었지. 근데 아니구나. 내가 멍청했다."

퍽! 퍽! 퍽! 퍽!

갑작스럽게 이신이 자신의 머리를 후려치며 자책하기 시작했다. 그런 이신을 보며 워리의 안광이 태풍이라도 만난 듯 거세게 흔들렸다.

턱뼈를 딱딱딱딱 움직이던 워리가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은 공포에 잠식되어갔다.

눈앞에서 자신을 학대하는 주인.

저게 정말로 자신이 못났기 때문일까?

아무리 눈치가 없는 워리라 하더라도 저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마치 저주라도 걸린 것인 양 워리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머리는 땅속을 파고들 것처럼 내려갔다.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모두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 제발...!"

"아니야, 이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 내가 다 멍청하기 때문이지. 이런 멍청한!"

빡!

"네가 그러고도 대마법사야?"

빡!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건가? 어?"

빡!

"제, 제발 그만...."

"워리를 얼마나 약하게 만들었으면 벌써부터 1층도 못 오른 햇병아리들한테 져?"

빡! 빡! 빡!

"제바알...."

달그락-

"주인님, 저번에 말씀하신 서류들...."

후두둑-

메이가 이신이 부탁한 서류를 들고 방문을 열자, 상상조차 하기 힘든 모습이 보였다.

손에 힘이 풀려 자신도 모르게 들고 온 서류들을 땅바닥에 쏟아 버렸고 그것을 생각할 정신조차 없었다.

뛰어난 머리로 순간적인 상황 파악을 마친 메이가 바닥을 파고들 듯 머리를 조아린 워리를 쳐다보았다.

'이런 미친놈이! 무슨 짓을 했길래!'

그 와중에도 이신은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후려치며 자책을 하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놈!"

빡! 빡! 빡!

"주, 주인님!!"

메이가 다급히 이신을 불렀다.

그제서야 이신이 자신을 자해하던 것을 멈추고 메이를 보았다.

"서, 서류를... 헉!"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그를 불렀지만 서류는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였고 그걸 깨달은 메이는 자신의 두개골이 떨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어… 어... 이게...."

"그렇구나..., 서류 가져왔으니 알아서 주워 읽으라는… 뭐, 그런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알았어. 그래, 애들 교육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주인이 뭘 따지겠어? 까라면 까야지. 내가 알아서 다 주워서 읽을게. 미안하다 주인이 이런 놈이라."

이신의 음성은 담담했고 평온했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 있는 한기는 바깥의 빙조가 내뿜는 브레스 보다도 더 차가운 것만 같았다.

메이의 몸이 얼어붙었고 뒤늦게 살짝 고개를 들어 상황을 파악한 워리의 몸이 굳었다.

입이 살짝 벌어진 채로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 놓여진 서류들을 보며 워리의 시선이 메이에게로 향했다.

그런 워리의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올 것 같았다. 메이도 그제서야 워리의 시선을 느끼고 그를 노려봤다.

'미친놈아! 상황을 더 악화시키면 어떡해?'

'이 새끼야! 네가 시작이잖아!'

'한 판 붙어? 할 줄 아는 게 뒤에서 지팡이 휘두르는 것밖에 없는 해골바가지가?'

'이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

'힘이 그렇게 약하니 종이 쪼가리 하나 못 들어서 이 꼴을 만들지.'

'하! 대가리가 얼마나 나쁘면 최하급 스켈레톤 뼈를 지 몸에 껴서 저 언더모스트 애송이들한테 져?'

'뭐라고 했냐?'

둘은 서로 말하진 않았지만 눈빛만으로 충분히 대화를 이어 갔다.

"이 새끼들이 뒈질라고."

"흐엑!"

"커억!"

갑작스레 들려오는 이신의 분노에 찬 음성에 깜짝 놀라 둘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둘이 뭐 하는 거야?"

"아니,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둘이 아주 눈빛으로 주인 몰래 뒷담화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갑자기 본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릴리안이 의자에 앉아 재밌다는 듯 히죽 웃으며 말했다.

"무, 무, 무슨 소리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 녀석이-."

"좋아, 너희에게 요즘 내가 관심이 부족했던 것 같네. 이제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않고 서류를 질질 흘리고 다니지도 않도록 정신머리를 개조해주지."

워리와 메이는 지난날의 악몽을 떠올리며 서로를 노려보고는 이신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메이와 위리에게 지옥문이 열렸다.

* * *

디멘션 게이트가 열린 후부터 지금까지 탑의 커뮤니티는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되어 있었다.

지구에서의 소식을 듣고 온 탑의 도전자들이 다시 탑 안에 체류하고 있는 도전자들에게 소식을 전해 준 것이다.

└ 1층 보스한테 막혔다는 게 실화였어?

└ 아니, 그 약골이 뭘 먹고 그렇게 강해졌지?

└ 차유민도 졌다는데, 1층에 갓 올라온 애들이 어떻게 이기냐?

└ 차유민에게도 페널티가 들어갔겠지, 80층 도전자가 1층에서 원래 힘을 그대로 사용하게 해줬겠니?

└ 그것도 그래. 그나저나, 진짜 1층이 1년 안에 깨질까?

└ 차유민이 그렇게 말했으면 맞다고 봐야지. 차유민인데.

└ 그건 그렇다고 쳐, 그동안 그럼 우리 신입 못 받는 거야? 하… 한동안 올해는 수련이나 주구장창 해야겠구나.

└ 근데 차유민이 한국이 조만간 최고가 될 거라 했다던데. 레알 실화냐?

└ 원래 그런 성격 아닌데... 왜 그랬지? 이유가 뭐래?

└ 모르지, 이유는 안 말했다는데. 아마 1층과 관련 있을 거라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 학계는 무슨, 탑에 대해 잘 아는 게 우리지. 지구에서 연구한다고 뭘 알겠어?

└ 다 필요 없어! 국가전 좀 어떻게 해봐! 지금 한국 망했다고!

└ 망할, 일본 놈들이 이때다 싶어서 계속 싸움 거는데 미치겠다! 작년까지 우리 밑에 기던 놈들이!

└ 차유민님! 계신가요? 나와서 말 좀 해주세요!

└ 차유민님 커뮤니티 거의 안 하는 걸로 유명하잖아요. 그럴 시간에 탑이나 공략하시죠.

각 층의 도전자들은 1층에 대한 자기들만의 생각을 뱉으며 온갖 추측을 쏟아냈고 그 추측은 몇 달이 지나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 * *

이신의 연구실.

그곳에서 이신은 근 한 달간 두문불출하며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필요한 물건만 메이를 통해 전달하고 그 외에는 일절 출입을 금지했다.

"주인님 괜찮으신 거 맞냐?"

"주인님 걱정하기 전에 너부터 걱정해라. 주인님 나오기 전에 확실한 성과 없으면 너 다시 지옥 훈련 시작이란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주인님의 수술대 위에서 얼마나 고통을…."

콰앙-!

그때 이신의 연구실 문이 터질 듯 열리며 그곳에서 꼴이 말이 아닌 이신이 튀어나왔다.

"찾았다! 찾았다고!"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메이와 워리는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설마...."

그 둘을 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이신이 입을 열었다.

"그래, 찾았다. 1층을 탈출할 방법을."

제16화

지난 연구 기간 동안 이신은 대부분의 시간을 죽음과 영혼을 연구하는 데 사용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을 겪으며 얻은 능력.

그리고 네크로맨서이자 대흑마법사였던 진 이브리엄이 남긴 연구 자료들.

이것들이 없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 배는 더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을 것이다.

영혼 약탈자.

한때 수도 없이 많은 영혼들을 약탈하고 먹어 치우며 결국 신격까지 가지게 되었던 신화적 괴물.

그러나 신들에 의해 심장을 빼앗기고 몰락해 버린 녀석.

그 녀석의 심장이 있다면 계획한 것들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영혼을 붙잡아 두고 종속시키는 그 힘.

이신은 그 힘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것이 있어야 자신을 대체할 보스를 이곳에 귀속시키고 그에게 씌워진 이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다행히 영혼 약탈자의 심장은 포인트 상점에서 팔고 있다. 비록 그것은 레플리카, 복제품이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영혼 약탈자의 심장을 얻는 방법이다.

레플리카라 하더라도 한때 신화였던 녀석의 심장이다.

300만 포인트라는 거금이 필요했다.

물론, 놈의 격을 생각한다면 300만도 그렇게 크지 않은 포인트이지만 레플리카인 놈의 심장은 보통의 도전자들에겐 전혀 쓰잘머리 없는 물건이다.

'나니까 이걸 이딴 곳에 쓰려고 필요한 것이지.'

원래라면 여기서 300만 포인트를 모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앞길이 막혀 버린 불쌍한 중생들이 있다.

언더모스트에만 천 명이 넘어가는 도전자들이 있고 그들이 각자 3천 포인트씩만 지불해도 300만 포인트는 금방이었다.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만 모으지 못할 것은 아니란 소리다.

그리고 그들이 이신에게 배운 것들을 생각하면 솔직히 300만 포인트를 주는 것도 전혀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전직 대마법사에게 수련받을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신은 합법적으로 포인트를 모을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 * *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고 잠시 후 방으로 황강웅이 들어왔다.

"불렀나?"

"앉으시죠."

이신과 황강웅이 마주 보고 앉은 뒤 메이가 들어와 차를 놔두고 돌아갔다.

"언더모스트에 슬슬 성벽을 쌓아야겠습니다."

"뭐? 왜? 1층 대기실에는 우리 외엔 아무것도 없지 않나?"

"아니요, 있습니다. 단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뿐이죠."

그 말에 황강웅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안전지대라 생각했던 1층 대기실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면 충분히 위험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황강웅은 침음을 삼키며 생각에 잠겼다.

"토잉이도 우리들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했네."

"토잉이도 모르는 겁니다."

아니, 알 것이다. 모르는 척하는 거겠지.

이신의 입가에 회한이 섞인 미소가 지어졌다.

"그럴 리가.... 관리자인 토잉이도 모르는 것을 자네는 어떻게 아는 건가?"

"...나중에 알게 되실 겁니다."

"알겠네."

황강웅은 더 묻지 않았다.

"성벽을 올리는 일이 쉽지는 않으실 겁니다. 아무리 건축일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익숙해졌다 하더라도 퀄리티가 떨어지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물론이네, 힘들다고 퀄리티가 떨어질 거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감사합니다."

"그거면 되겠나?"

황강웅은 느껴지는 분위기가 그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게 이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음, 성벽이 다 지어졌을 때쯤이면 슬슬 이곳을 나갈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말인가?"

황강웅은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이신을 보았다.

"예, 그리고 현재 언더모스트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 황 사장님이시지 않습니까?"

"나는 그저 건축가일 뿐이네."

"광야의 건축가."

멍한 얼굴을 하던 황강웅이 이신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자네.... 아는구만."

"황 사장님이 탑을 오르기 시작하면 랭커는 우습게 찍으시겠죠."

"아니네, 자네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랭커가 무슨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말이야."

"과대평가가 아닙니다."

언더모스트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 하면 황강웅이 꼽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주력은 건축이니까.

그러나 가장 급성장한 사람을 뽑으라면 단연 황강웅을 뽑을 것이다.

이 사람은 충분히 재능이 있다. 강해지는데 그다지 관심이 없던 그가 어느 날 강해지고 싶다고 내게 부탁을 한 후부터 급격하게 실력이 늘었다.

더구나 광야의 건축가라는 칭호는 건축물을 올릴 때마다 능력이 훌쩍훌쩍 향상된다.

이 칭호의 잠재력은 가벼이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성벽을 건축한다면 더욱 강해지겠지.

거기다 언더모스트 내 그는 최고의 포인트 부자이다. 이신이 보기에 그의 성장 잠재력은 언더모스트 내에서도 발군이었다.

"여기는 한국이 아닙니다. 자기를 숨길 줄도 알아야 하지만 드러낼 땐 제대로 보여 줘야 합니다."

"알겠네."

그는 광야의 건축가의 진짜 특성을 사람들에게 숨기고 있었지만 이신은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황강웅이 아닌 다른 도전자가 가졌었고 그는 이신의 동료였기에, 그 누구보다 이신은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제가 이 말을 한 이유는 1층 대기실에 있을 숨겨진 장소를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장소?"

"예, 부탁을 할 만한 사람이 황 사장님밖에 없습니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곳이라 강함은 기본 전제 조건이고 지형을 잘 알고 눈썰미도 좋아야 합니다."

"위험할 수도 있다?"

"예, 탑이란 곳은 마냥 안전하다고 방심하면 안 되는 곳이기 때문이죠."

이신의 눈빛은 진심이었고, 황강웅은 그 경고를 가슴에 새겼다.

"어쩌면 1층을 탈출할 비밀이 있는 곳일지 모릅니다."

황강웅은 이신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이 흩어지는 곳을 찾아 주세요. 아주 작은 단서라도 발견한다면 제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발견하더라도 절대 혼자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알겠네."

"우선 성벽을 먼저 짓는 것을 우선으로 하면서 1층 대기실에서 재료를 수급하며 한 번 둘러보세요. 또한 마력이 흩어지는 곳을 찾으려면 마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난 아직 마력을 다루는 게 미숙하네."

"그래서 당분간 바쁘게 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제대로 가르쳐드리죠."

"하하하.... 이거 중요한 사안이라 거절할 수도 없고...."

내키지 않는 듯 말했지만, 황강웅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아저씨에게 바라는 게 많구만. 뭔가?"

"포인트 좀 빌려 주십시오."

이신의 말에 황강웅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포인트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신은 여태 한 번도 포인트를 빌려 달라 한 적이 없었다. 물건을 부탁했으면 부탁했지.

"어차피 사용도 못 하지 않나?"

"음… 그게 이번 물건은 너무 비싸서 말이죠. 언더모스트 주민 전체에게 빌릴 생각입니다."

"전체에게?"

얼마나 비싼 물건을 사려고 그러는지.

황강웅의 궁금증이 커져 갔다.

"예, 황 사장님에게 전부 빌리기에는 너무 큰 포인트라."

"도대체 얼마길래 그러나? 나 황강웅이야. 그냥 내가 전부 빌려 주지. 말만 하게!"

진짜로 전부 빌려 달라고 해 볼까?

아니지, 그 포인트가 전부 있을 리도 없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한 사람에게 전부 빌리기에는 너무 큰 포인트이다.

"아닙니다. 아무래도 그건 조금-."

"에헤이! 얼만지 말이나 해보게!"

그래도 언더모스트 최고 포인트 부자라 자부하는 황강웅은 도대체 얼마기에 저러는지 궁금했다.

"삼백...."

"삼백… 삼백?! 삼백만 포인트?"

너무 터무니없는 수치에 황강웅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300만 포인트?"

"네, 정말 300만 포인트."

"정말로?"

"정말로."

"...."

"...어차피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래, 그게 한두 푼도 아니고 너도 어쩔 수 없지.'라는 듯한 표정의 이신을 보며 황강웅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러나?"

"이것 또한 1층을 탈출할 실마리입니다. 아까 그것보다도 더 확실한."

이신의 말에 황강웅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음을 느꼈다.

300만 포인트.

수치만 보면 엄청나게 큰 포인트 같지만 언더모스트의 주민들이 모두 힘을 합치면 못 모을 것도 아니었다.

"내가 좀 많이 보태겠네."

"감사합니다. 모두에게 공짜로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대가는 제대로 줄 겁니다."

"알겠네."

* * *

[특종, 차유민 80층 도달! 여전히 전 세계 최고 층 도전자의 입지를 굳히는 중.]

[차유민 80층 입성에 작년 조나단의 망언이 재조명받으며 대중들 비난 쇄도.]

[미국 조나단과 4층 차이로 격차 벌어져.]

[한국도전자협회로 공략법에 대한 비밀 협상을 위해 미국도전자협회의 협회장 출국.]

[한국, 이제 곧 세계 제일이 될 것.]

[1년 안에 1층 클리어 가능!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인가?]

.

.

.

차유민의 80층 도달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고 그에 대한 찬사와 기사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원래라면 차유민의 품성과 능력 덕에 악의적인 기사는 거의 찾기 힘들 정도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차유민의 거만한 발언 화제. '다른 나라들 모두 고개 숙여라.']

[한국의 1층 도전자 실종사태에 대한 차유민의 답변,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 없어.]

[한국도전자협회의 진실 은폐?]

[1층의 보스에게 차유민 패배, 랭킹 1위의 몰락인가.]

['한국 1층 절대 못 깨' 한국, 이대로 망하나?]

[A 도전자의 인터뷰, '사실 차유민의 민낯은 겸손과 거리가 멀다']

[일본과 독도 문제 또다시 재점화, 결국 일본에게 독도를 빼앗기나?]

모든 국가들이 시끌벅적했고 차유민의 발언에 대해 분석하려고 했다.

그의 말이 과연 사실일까?

정말로 한국이 최정상을 차지할 수 있는가?

그것이 사실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매스컴에서는 그들을 깎아내려야 했다. 그저 그가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로 나타나지도 않은 한국의 잠재력을 치켜세워 줘서는 안 되었다.

만약 정말로 1층이 해방되고 한국이 정상을 차지할 것이라면 그 전에 한국을 내리눌러 놔야 했다.

한편, 차유민과 라이벌로 불리던 조나단은 점점 그에 대한 질투심에 잠식되어갔다.

"차유민이 드디어 미친 건가? 한국이 최고가 될 거라고?"

"뭐, 차유민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아? 그래도 최상층 랭커인데."

"흥, 그래 봤자 나와 4층 차이일 뿐이야, 조만간 따라잡힐 거라고."

"질투하긴, 작년에도 그런 식으로 말하다가 지금 욕먹고 있잖아?"

테이블에 몸을 기대며 와인 잔을 기울이던 제니가 조나단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조나단이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뭐 하는 거야?"

"닥쳐! 그놈의 차유민! 차유민! 그렇게 그놈이 좋으면 한국으로 이민을 가지?"

"나도 그럴까 싶기도 해, 근데 협회에서 날 안 놔주는걸?"

"뭐라고? 너 미쳤어?"

조나단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비켜, 미국 최상층 랭커라는 놈이 고작 한국인 하나에 그렇게 자격지심을 가지다니. 그러니 네가 매력이 없는 거야."

제니는 그의 위협적인 기세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짝 밀치며 지나쳐 갔다.

그녀는 그를 한 번 돌아보고는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테이블을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던 조나단이 그녀가 나간 문을 노려보더니 자신이 잡고 있던 테이블을 내리치며 부숴 버렸다.

"차유민...!"

* * *

한국도전자협회의 협회장실에서는 차유민과 협회장, 부협회장이 기자회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민 군, 정말 괜찮겠나?"

"예. 괜찮습니다. 제가 너무 많은 부담을 드린 것 같아 죄송하네요."

차유민은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과하게 던진 것은 아닌가.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쩜 이번 1년이 가장 힘든 해가 될지도 모르겠어."

"협회장님, 지금이라도 미국이나 영국과 연락해서 협력 체계를 더 공고히 해야 합니다."

"흠.... 그들이 과연 지금의 우리와 협력 체계를 유지할까?"

전재용은 회의적이었다.

전 세계 도전자 전력 1위인 미국과 2위인 중국, 그 밖의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일본 등등.

그들은 협력 국가이자 경쟁 국가들이다.

지금까지야 어찌 되었든 서로의 전력을 인정하고 협력하며 이득을 취해 왔지만 이제 한국은 그 선상에서 탈락되거나 앞으로 치고 나가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 버린 셈.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결국 한국은 이제 같은 선상에는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너무 정보를 안 푼 것은 아닌지...."

부협회장인 신현우는 걱정스레 말했다.

1층에 어떤 보스가 있고, 1층의 사람들이 정확히 어떤 상태이고, 왜 한국이 최고가 될 것인지.

아무것도 풀지 않았다.

"제가 정보를 풀지 않은 것은 이번 기회에 놈들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는 도전자들이 세상의 주류이고 세상을 지배할 이들이라 생각하는 단체.

"'리버스'를 말하는 건가?"

"예."

리버스.

세상의 규칙을 뒤집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노라 말하는 미치광이들.

도전자는 세상의 주류이며 그 외의 인간들은 그 밑에 복종해야 하고 세상은 자신들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미친 사상을 가진 놈들.

문제는 그런 사상에 동조하는 도전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고 더구나 그 도전자들의 밑으로 들어가 하수인 노릇을 하는 일반인들도 많다는 것이다.

이번 차유민의 발언으로 그들은 한국에 분명 제스처를 취하러 올 게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한국에 확실한 아군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확실한 아군?"

"예, 앞으로 상대할 적들을 상대하려면 협력 체계를 공고히 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차유민의 분위기가 좀 더 무거워졌다.

"아직은 정확히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다만 앞으로 닥칠 재앙을 대비해야 합니다."

"재앙? 제대로 말해 줄 수는 없나?"

협회장과 부협회장은 뜬구름 잡는 소리만 뱉는 차유민 때문에 답답했지만 그의 다음 말에 그를 닦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는 디멘션 게이트가 사라지기 전에 탑에 돌아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제17화

"뭐라고?"

"자네, 정말 그래도 되겠나?"

현재 지구에서 가장 높은 층까지 올라간 남자.

랭킹 1위이자 전 세계 도전자들의 우상.

그는 탑에 들어간 이후로 한 번도 지구에서 1년을 보낸 적이 없었다. 최상위권에게 시간은 금이며 탑에서 1년이란 공백은 그동안 쌓아 왔던 모든 것이 무너지기에 충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구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다른 경쟁자들은 탑을 오르고 계속해서 강해진다.

굳이 탑을 오르지 않아도 탑 내에서는 강해질 방법이 수없이 많았고 그렇기에 탑에 오른 이들이 지구에 남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피아를 확실히 구분하고 신뢰를 쌓은 상태에서 미리 협력 체계를 구축해 놔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제가 탑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

도대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모든 사람들은 지금 탑에 속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막기 위해 남는 것입니다."

"속고 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빙빙 돌리지 말고 속 시원하게 좀 말해 주게나!"

전재용과 신현우는 답답한 듯 그에게 말했다.

"앞으로 5년 안에 탑은 디멘션 게이트를 폐쇄할 겁니다. 그리고…."

* * *

"…동시에 지구에 새로운 게이트를 뿌리기 시작한다. 아니, 그 전부터 증상은 보이기 시작했지."

이신은 차를 음미하며 예전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탑… 아니, 신들에게 속고 있는 것.

그건 탑과 지구가 영원히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탑이 생기고 초기에는 많은 이들이 함부로 탑에 들어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시스템 창과 그것에 대한 혼란.

그리고 사라지는 사람들.

1년이 지나고 탑에서는 지구에 새로운 영상을 뿌리기 시작했다. 탑에 들어간 도전자들이 탑을 등반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판타지 세계 속에 들어간 듯, 신기한 초능력을 사용하며 적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모습은 사람들의 이 답답하고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했다.

탑 안의 세상은 사람들의 환상 속, 영화나 만화 속에서나 볼 법한 그런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탑에 도전한 도전자들은 그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탑에 하나둘씩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 영상들이 모두 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 처음으로 50층에 도달한 도전자가 지구에 나타난 것은 사람들이 탑을 오르고 싶다는 욕망의 본격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그 도전자는 탑에서의 능력 그대로를 지구에서 사용할 수 있었고, 탑에 있는 신기한 물건들을 지구에 가져와 보여 주었다.

그야말로 지구의 대격변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지구는 탑에 들어가려는 이들로 넘쳐났고, 그 후 탑 안을 보여 주던 영상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탑에 들어가려는 이들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잠시 주춤했을 뿐.

여전히 50층에서 나온 이들이 탑에 대한 정보를 풀며, 탑과 지구의 연결을 증명해 주었다.

하지만 50층의 디멘션 게이트가 문제였던 것인가.

탑을 끝까지 오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소수였고 점점 극악으로 치솟는 난이도와 낮은 생환율은 사람들의 투지와 의욕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결국 도전자들의 대부분은 결국 탑을 오르는 것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지구로 돌아가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탑을 만든 신들은 그것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디멘션 게이트를 닫아 버렸다. 억지로라도 100층을 올라갈 수밖에 없게 만들기 위해.

그리고 탑에서 지구를 볼 수 있는 통신망을 열어 버렸다.

지구에 탑의 괴물들을 풀어놓은 채.

"x발."

다시 생각하니 욕이 또 튀어나왔다.

탑에 들어간 도전자들은 지구에서 학살당하는 사람들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국가, 동료, 친구 그리고 가족들이 괴물들과 힘겹게 싸우는 모습을.

그들은 고작 고블린, 코볼트와 같은 최약체 몬스터들에게도 무력하게 당했다.

디멘션 게이트가 닫히고 아주 초기에.

도심지와 멀리 떨어진 어느 한 시골.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사는 그런 작은 동네에 작은 게이트가 나타났다.

그 작은 게이트에서 오크 한 마리가 걸어 나왔고 하필이면 그곳을 한 노부부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 노부부를 잔인하게 죽이는 그 오크의 광기를.

이신뿐만이 아니라 탑의 도전자들은 거의 다 그 장면을 보았다.

그때, 한 55층 도전자의 글이 커뮤니티를 불태웠다.

그는 노부부의 아들이라 했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탑을 올랐고 50층에 도달해 부모님께 충분한 재화를 안겨 준 뒤 다시 탑에 들어갔다.

탑의 도전자라면 누구나 가지는 욕심.

한 층만 더 오르면, 조금만 더 강해지면.

이러한 욕심들이 모여 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그도 그러다 2년이라는 시간을 더 탑에서 보냈다.

그러다 이제는 진짜 돌아가려 할 때 디멘션 게이트가 닫혀 버린 것이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지금 부모님이 저 오크에게 죽어 버렸고 자신은 무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왜, 왜 자기 돈으로 대도시에 가서 편하게 살지 않았냐고.

자기가 보내준 돈으로 편하게 잘살고 있다며! 고맙다며! 근데 왜 저 모양으로 살고 있는 거냐고!

그가 한탄하는 내용에는 그의 눈물이 젖어 있었다.

수많은 도전자들이 그에게 공감하고 동조했다.

탑에 들어온 이들 모두가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었다.

스크린에 보이는 그 상황이 마냥 타인만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지금 지구에 있었다면.

가족을 두고

친구를 두고,

동료를 두고.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탑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만큼 탑은 매력적인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만큼 후회되었던 적은 그들에게 없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희생하며 지구에 있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탑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들에게 지금 상황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지키기 위해 왔는데 오히려 지킬 수 없었다.

이신은 오크의 그런 광기 위로 신들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그건 오크가 아닌 신들의 광기였다.

그 당시 이신은 그 장면을 끝으로 더 이상 스크린을 보지 않았다.

커뮤니티도 보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런 장면을 굳이 모든 층의 도전자들에게 보여 준 것인가.

인간의 죽음 따윈 신들에게 여흥 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탑의 끝에 오를 도전자들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인간에게 분노랑 큰 동기를 심어 주기 위해 이러한 학살을 벌인 것이다.

인간에게 분노란 하나의 큰 원동력이니까.

그들은 그 분노를 이용했고 그 영상 하나로 모든 한국 도전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수많은 지구의 상황이 그 이후로도 계속 생중계되었다. 그리고 모든 도전자들이 그때부터 미친 듯이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노부부의 자식이었던 도전자는 그 영상 이후로 분노에 가득 차,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는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게 만들 뿐.

그 도전자의 등반은 70층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

"상종 못 할 새끼들."

신들은 뛰어난 도전자들에겐 매우 호의적이었다. 자신의 사도로 만들기 위해.

디멘션 게이트의 폐쇄 이후로 모든 도전자들이 분노에 휩싸였을 때, 몇몇 신들은 그 와중에도 아무렇지 않게 도전자들에게 접근했다.

놈들은 인간들이 그렇게 분노해서 탑의 꼭대기에 올라가더라도 결국 신의 힘을 느끼고 자신들의 밑으로 기어들어 올 것이라 생각하는 미친놈들이었다.

인간들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 놈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들의 그 악행을 잊어버릴 일도 없다.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 황강웅입니다. 찾았다고 전해 달라 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고 잠시 뒤 메이에게 통신이 왔다.

"들어오시라고 해."

* * *

황강웅이 자리에 앉은 채 서류들을 이신에게 건네주었다.

"여길 보게."

그중 황강웅이 가리킨 곳에는 네모난 비석이 존재했다.

"이 비석은...."

신들에게 공양을 하는 제단에 세워지는 비석들과 닮아있다.

어쩌면 진짜 그러한 비석일지도.

"이 비석이 주변의 마력을 흐트러트리고 있었네."

"어디 있었죠?"

황강웅은 검지를 들어 밑을 가리켰다.

"땅속?"

"그래, 암석 지대에서 백회암을 파내다가 찾았지."

"어떻게 찾으셨죠?"

"백회암을 파내던 이들 중에 암석 지대 끝에서 이상함을 느낀 이가 있었더군.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 더 깊숙이 파 보았지. 근데 깊숙이 팔수록 점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네. 자네의 말이 그때 떠올랐지."

"마력이 흩어지는 곳."

"맞네,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비석이 있는 곳까지 파낼 수 없었어. 마력이 흩어지니 쉽지 않더군,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 작업을 실행했지."

"그럼 오래 걸리신 것 같은데 왜 이제 말하시는 거죠?"

"하하하, 사실 그때 바로 말할까 싶었는데 자네가 좀 바빠 보였기도 하고 무언가 확실한 수확을 얻고 말하고 싶었네. 그때까지도 확실한 건 아니었으니."

황강웅의 성격이라면 그럴 만했다. 그는 꼼꼼하고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꽤 힘드셨겠습니다."

"말도 말게, 간만에 일반인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어,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그 밑으로는 더 파 보셨습니까?"

"시도는 해 봤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패했네, 너무 단단해. 마력이 있더라도 안 됐을 것 같았어, 아무래도 비석과 이어진 단단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네."

이신은 그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들로는 절대 그 이상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신들의 제단이란 그런 곳이니까.

손에 쥐어진 사진을 계속 살펴보았지만 이건 제단에 세워지는 비석이 분명했다. 비석에 새겨진 문구. 그것은 진 이브리엄이 가지고 있던 낡은 종이 뭉텅이 속의 고대어와 매우 유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비석에 새겨진 문구를 해석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여기부터는 제가 하겠습니다."

"알겠네. 나는 더 할 일이 없는가?"

"열심히 훈련만 하고 계십시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황강웅이 방을 나가고 이신은 복잡한 얼굴로 천장을 보았다.

그저 돌덩이로 이루어진 천장에 신들의 모습이 담겼다.

100층에서 만났던 신들.

이신의 입가에 쓴 웃음이 담겼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1층은 신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그들에게 꽂아 넣을 비수의 날이 갈리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이다.

"너희의 턱 밑에서 칼이 갈리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겠지."

나뿐만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인간들이 너희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너희들이 그저 도구로 생각했던 인간들이.

너희를 무너뜨리고 철저하게 짓밟아 그 높디높은 곳에서 밑바닥으로 끌어내릴 것이다.

키우던 개에게 물린 기분을 맘껏 느끼게 해주마.

제18화

준비

황강웅이 돌아가고 메이가 들어왔다.

메이의 눈두덩이 밑에 다크서클이 매우 크게 내려와 있었다.

"뭐야?"

스켈레톤이 다크서클은 무슨 다크서클이 있다고.

그저 마력으로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하하.... 여기 고대어 관련 서적들을 최대한 정리해 놨습니다. 문자의 문맥별로 획을 따져서 구분해 놓았으니 당분간 해석에 이것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고생했네. 나도 다 아니까 그런 짓은 안 해도 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놈이 무슨 힘들다는 시위를 그렇게 해?

"아니야, 이제는 내가 하면 되니 너는 당분간 언더모스트 사람들이나 가르치면서 쉬어라."

"알겠습니다."

메이가 나가고 이신은 고대 문자어의 자료를 보았다.

이 작업을 하려면 하루 이틀 밤새운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몇 달은 걸리는 고된 작업. 그것도 메이가 스켈레톤이라 가능한 것이었다.

'하필 비석에 적힌 게 고대어라니.'

이 자료를 보니 아까 본 그 문자들이 고대어라는 확신이 들었다. 타이밍이 아주 좋았다. 당분간은 이 작업에 집중하면 될 것 같았다.

* * *

"야 인마! 너 그렇게 해 가지고 탑 오르면 몇 층 올라가지도 못하고 맞아 죽어 인마!"

"그래, 좀 잘 좀 해 봐라! 애가 근성이 없어요, 근성이. 너 이종격투기 선수 출신 맞냐?"

"아이씨! 여기서 더 어떻게- 아악!"

백현과 강지훈 덕에 잠깐 한눈팔아 버린 신하늘의 손목을 워리가 검면으로 내리쳤다.

"한눈팔 여유가 있나 보군. 내가 안일했다. 이 정도면 너무 여유 있게 해 줬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그의 변명에 대한 답은 없었다.

그저 워리의 공세가 한층 더 매서워질 뿐이었다.

휙- 휙- 휙-

신하늘의 몸이 연체동물처럼 움직이며 워리의 검을 간발의 차로 계속 피했다. 그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갔고 한시도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조금만 삐끗해도 워리의 검이 자신의 몸을 뚫어 버릴 테니까.

워리의 검 끝에는 상대를 꿰뚫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걸 마주하는 신하늘은 그 섬뜩한 감각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흐억."

하마터면 신하늘의 엉덩이가 그대로 몸과 분리될 뻔했다.

날카로운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살점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엉덩이를 지킨 대가는 죽음이었다.

자신의 목 위로 쇄도하는 검을 보며 주마등이 스쳐 가는 것을 느낀 신하늘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그가 발작적으로 소리쳤지만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그제서야 워리의 검이 자신의 목 앞에 멈췄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저거 또 울겠다. 울겠어."

"사내놈이 말이야! 이런 걸로 그렇게 질질 짜 가지고는 탑을 어떻게 올라가려고 그러냐!"

"아이씨! 안 울었어요!"

신하늘이 억울해 소리칠 때, 문의 삐그덕거리는 경첩 소리가 들렸다.

끼익-

문을 열고 이신이 훈련장으로 들어왔다.

"저건 또 울어?"

이신이 신하늘을 보며 말했다.

"안 울었다고요!"

신하늘이 발작했다.

"이제 곧 1층을 넘어 탑을 올라야 하는 것 알고 있지?"

이신은 신하늘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알고 있죠."

"그래서 워리에게 훈련받으러 온 거예요."

"내가 봐주지. 둘이 같이 들어와."

이신의 말에 놀란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연구에 매진하느라 거의 요 몇 달간 거의 훈련을 봐주지 않았었다.

간만에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둘은 그간 혹독하게 수련한 성과를 보여 주고 싶었다.

"예전과는 다를 겁니다."

"기대하세요."

둘의 눈에 의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그때 또 다른 이가 문을 열고 훈련장으로 들어왔다.

거친 인상의 날카로운 눈매, 검을 허리춤에 찬 박주혁이 이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너도 합류해."

"알겠습니다."

박주혁의 합류에 두 사람의 의지가 더욱 불타올랐다. 특히나 백현은 강지훈보다 박주혁을 더욱 신경 썼다.

자신에게 언더모스트 최고 라이벌이라하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박주혁이었다.

"들어와."

이신의 검지, 중지가 까닥였다.

백현의 검이 검집에서 발도하는 순간 검기가 발현되며 이신에게 날아왔다.

사실 검기라기보다는 마법을 이용한 편법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제법 위협적이었다.

그와 동시에 강지훈의 등에서 빠져나온 창이 휘리릭 돌면서 이신에게 쇄도했다.

"호오, 제법."

이신의 마력이 바닥으로 흘러 들어가며 땅에서 돌벽이 튀어나와 검기를 막고 창의 궤적을 비틀었다.

당연히 막을 것이라 예상한 둘은 물 흐르듯 매끄러운 연계로 공격을 이어 갔다.

이신은 둘을 보며 제법 흡족한 듯한 웃음을 지었지만 두 사람은 그 얼굴을 볼 겨를이 없었다.

쾅! 콰광!

한순간 공격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둘은 금세 주도권을 빼앗기고 이신의 공격을 수차례 방어하기 급급했다.

얼음의 창이 천장에서 수십 개가 떨어져 내렸다.

카가가가각-

이신은 둘에게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계속해서 박주혁을 의식했다.

그의 검은 백현, 강지훈과는 다르다.

매우 실전적이며 효율적이다. 쓸데없는 움직임은 전혀 없는, 마치 암살자와 같은 그런 움직임.

그럼에도 패도적이고 광포하다.

위에선 얼음의 창이 떨어지고 땅에선 돌이 솟아올랐으며 허공에선 공기가 펑펑 터졌다.

트리플 캐스팅.

모든 공격이 그저 2, 3위계의 기본 마법들이었지만 캐스팅 속도와 활용 범위가 일반적인 궤를 달리했다.

이신의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속은 달랐다.

'마력 등급이 Lv.2로 올라 3위계까지는 사용 가능한데, 그 이상은 사용할 수가 없으니....'

확실한 한 방이 부족했다.

4위계 마법 하나면 한 번에 셋을 처리할 것을 두 번, 세 번을 연계해야 하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답답할 뿐 어렵지는 않았다.

수십 개의 얼음의 창이 백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마검사라는 놈이 마법은 어디다 버려두고 검만 쓰는 거야! 왼손으로는 마법 술식을 그리면서 검을 휘둘러 활로를 찾으란 말이야!"

한쪽에선 넓은 범위의 화염 방사가 강지훈을 휘감았다.

"창을 회전시켜 화염을 날리는 건 좋아. 근데 앞만 막을 거야? 뒤는? 양옆은? 위는! 화염이 사방에서 뻗쳐오는데 그렇게 막아서 뭐 하자는 거야! 화염을 상대할 때는 바람을 이용하라 몇 번을 말했어? 엉? 마법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생각을 하란 말이야!"

두 사람이 이를 악물었다.

저 뒤에서 신하늘의 시시덕거리는 웃음소리가 거슬리게 들려왔다.

'저 녀석 앞에서 망신만 당할 순 없어!'

'이대로 가다간 더 이상 저 녀석 못 놀린다! 선배의 위엄을 보여 줘야 돼!'

박주혁은 허공에서 전조 없이 터지는 에어 밤(Air bomb)에 마치 줄 달린 인형이라도 된 듯 이신의 마법에 맞춰 이리저리 춤을 추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마력을 이용하라 했지? 지금 네 머릿속엔 [변혁의 힘]밖에 없어! 그걸 쓰기 전에 전투 자체를 잘하란 말이야! 마력 숙련도가 아직까지 그것밖에 안 돼?"

박주혁은 이신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미친 듯이 훈련했다. 그럼에도 아직 한참이나 부족한 것이었다.

저 네크로맨서가 자신의 최고 전력인 흑마법을 쓰지도 않았음에도.

셋의 집중력이 최고조로 올라오며 이신과의 대련이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이신은 내심 셋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미친놈들.

1층에 가장 오래 체류 된 두 사람의 실력은 언더모스트 내에서도 발군이었다.

그간 녀석들의 훈련을 봐주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상당한 성장을 이뤄 놓은 것이다. 탑의 도움 없이.

이것이 중요했다.

결국 탑을 오르면 탑에서 주는 보상에 도전자들은 의존하게 되고 자기 자신의 실력 성장은 더뎌진다.

그렇게 되면 결국엔 언젠가는 탑을 오르는 중 막히게 되고 갑작스럽게 올라간 난이도와 수많은 변수에 죽어 나가게 된다.

"끝이다. 고생했다. 제법 늘긴 했어."

이신이 바닥에 널브러진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세 사람은 개운한 얼굴이었다.

"너무 자만하지 마. 결국 너희가 1층에서 시간을 버린 만큼 강해진 것뿐이니까. 탑 초반에 너희들이 기록을 갱신하더라도 층수가 올라갈수록 결국은 차유민 같은 녀석들에게 격차를 따라 잡히게 될 거다. 탑의 랭커가 괜히 랭커들이 아니야. 그러니 계속해서 정진해라."

"알겠습니다."

"명심할게요."

이신이 방에서 나가려다 말고 멈칫했다.

"아, 그리고 신하늘 너."

"네, 넵?"

신하늘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너는 1층 벗어나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닐까 두렵다. 탑 오르기 시작하면 어디 가서 나대지 말고 조용히 올라라. 너 정도면 탑 오르다 중간에 도전자나 탑의 괴물들에게 눈 깜짝할 새에 저승 갈 수도 있으니까."

"예에...."

신하늘이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처음에 탑에 오를 때만 하더라도 뛰어난 초신성이 되어서 탑을 누벼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언더모스트의 사람들에게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자신을 보며 점점 자신감을 잃었다.

심지어는 강씨 아줌마네 아들에게도 잠깐 고전했던 적이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나려 하네.'

이신의 말을 들은 신하늘은 탑에 오르기가 조금 무서워졌다.

* * *

[2,136,320/3,000,000]

언더모스트 중앙 광장에 커다랗게 시스템창이 띄워져 있었다.

그 앞에 토잉이 자리하고는 사람들에게 포인트를 받았다.

"넹! 감사합니당!"

"왕! 5천 포인트나용? 장 아저씨 열심히 일하셨네용!"

"우와앙! 포인트가 너무 많이 들어와용!"

300만 포인트. 이것은 영혼 약탈자의 심장을 사기 위한 모금이었다.

그리고 그 고지가 그다지 멀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점점 차오르는 그 숫자를 보며 조금 더 동기를 부여받아 열심히 포인트를 모았다. 언더모스트의 성벽은 거의 다 지어진 상태.

포인트의 모금 진행 소식을 들은 이신은 자신을 대신할 보스의 제작에 박차를 가했다.

"이건… 음, 괜찮고. 두뇌는 메이만큼은 필요 없겠지?"

"주인님, 근데 보스가 이전의 1층 보스보다 너무 강한 거 아닌지요."

메이가 걱정되는 듯 물었다.

"맞아, 그 전 1층 보스는 상대도 안 될 정도지."

"왜 그렇게 강하게 만드시는 겁니까? 그 정도라면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또 1층을 클리어하지 못하고 남아야 할 텐데요."

"그게 중요해, 내가 이곳을 벗어나더라도 1층의 언더모스트 도전자들을 성장시킬 보스가 필요하니까. 1층을 아무런 성장 없이 클리어하는 건 매우 멍청한 짓이야. 그러니 강제로라도 훈련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그렇군요. 사람들이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너는 아직도 한국 도전자들을 몰라. 사람들은 자신이 당한 만큼 다른 이들도 당하길 바라지. 지금 언더모스트의 남은 사람들이 1층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새로 넘어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겠어?"

"아하, 자신들처럼 알아서 교육시키겠군요."

"그래, 그리고 우리가 떠나더라도 먼저 온 이들이 이곳을 점거하거나 할 일도 없어. 이미 고층에서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다는 전례가 있으니까."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하하핫! 이번 디멘션 게이트 전에 1층을 벗어날 수 있겠어."

이번 디멘션 게이트 기간이 되면 사람들의 충격이 장난 아닐 것이다.

랭킹이 싸그리 갈릴 테니.

제19화

언더모스트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드디어 1층을 나갈 수 있다는 소식이 퍼진 것이다.

"어이! 성 씨! 힘을 그것밖에 못 쓰나? 한 번에 더 많이 가져오란 말이야!"

"황 사장님! 여기 균열이 있습니다!"

"뭐? 어떤 새끼가 저딴 식으로 발라 놨어? 성벽 제대로 못 지으면 포인트 모아도 너희 다 못 나가! 알아?!"

"너희는 뭐 해? 빨리 암석 지대 가서 백회암 더 캐 와!"

언더모스트를 거대하게 둘러싸는 성벽 작업은 어마어마한 대공사였고, 지구라면 몇 년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작업이었지만 이곳에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황강웅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지휘를 했다.

그때, 힘들게 암석 지대에서 백회암 덩어리들을 짊어지고 뛰어오는 젊은 청년이 보였다.

자신의 덩치에 두세 배는 되는 지게를 지고 있었다.

"신하늘! 그렇게 굼벵이처럼 움직여서 언제 일 마무리 지을 거야!"

현장에선 그 누구보다 무서운 게 황강웅이었고 그의 호통에 잔뜩 쫄은 신하늘의 동공이 흔들리며 곧장 뛰기 시작했다.

"아, 알겠어요!"

"야이 새끼야! 백회암 떨어지잖아!"

"헉! 죄송합니다!"

신하늘은 갑자기 처음 이곳에 온 날이 떠올랐다.

'그때, 저런 아저씨한테 개겼다니....'

새삼 그 당시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느껴졌다.

"네 옆에 너보다 나이 두 배는 먹은 아저씨들도 너 드는 거에 두 배는 더 들고 다니는 거 안 보여!"

그가 옆을 돌아봤다.

그의 옆에서 자신의 나이에 두 배는 먹어 보이는 아저씨 셋이 커다란 지게를 지고 뛰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자신이 지고 있는 것에 두 배는 더 많은 양의 백회암이 그들의 지게에 담겨 있었다.

"허… 요즘 애들은 하여간에 쯧쯧...."

"그러게 말이야, 나 때는 이런 거 양손에 들고 다녔는데 말이지."

"요즘 애들이 게을러 터졌잖어, 이해해야지 뭐."

세 아저씨의 말에 신하늘의 뺨이 부들부들거렸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미 저 아저씨들에게 한 차례 호되게 교육을 당한 뒤였다.

"예! 시정하겠습니다!"

언더모스트에 오고 나서 기가 바짝 들어 버린 신하늘이었다.

성벽을 짓고 암석 지대를 왔다 갔다 하는 그들의 눈에는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언더모스트의 생활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있을 거 다 있고 피곤하지도 않으며 충분한 훈련도 가능했다.

탑에 오르지 못하는 불만을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사람은 드물었지만 다들 내심 마음속에 탑에 오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도 결국 탑에 오르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이니까.

그다음이 궁금했다. 그리고 지구에 자신들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미 충분히 많은 시간을 허비한 상태이다.

성벽뿐 아니라 언더모스트의 중앙에 있는 1층으로 올라가는 포탈에도 수많은 이들이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이잉! 기다리세용! 어어? 안 돼용! 기다리세용!"

"지금 들어가면 안 돼?"

"안 돼용! 이미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서 1층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용!"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되는데?"

토잉이를 들어서 껴안은 꼬맹이가 물어봤다.

"큰일 나용!"

"큰일 나면 어떻게 되는데?"

"어… 음... 몰라용! 암튼 안 돼용! 이신 님이 이 이상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다고 했어용!"

토잉의 말에 시무룩해진 꼬맹이가 토잉을 마구 흔들며 심술을 부렸다.

"아아아앙- 아파요오옹!"

"어머! 토잉이한테 그러면 못쓴다고 엄마가 그랬지!"

"히잉...."

뒤쪽에서 다급하게 뛰어온 강정원이 와서 다급히 꼬맹이에게서 토잉을 꺼내 주었다.

"미안해 토잉아. 괜찮니?"

"이잉, 괜찮아용."

"이따가 우리 가게로 와, 떡볶이 공짜로 줄게."

"진짜용? 우와앙! 좋아용!"

토잉이가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다.

* * *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벌써 디멘션 게이트가 열릴 때까지 3달이 채 남지 않았다.

언더모스트 중앙 광장에 토잉이 서서 사람들에게 포인트를 받았다. 광장 하늘에는 현재 모인 포인트의 수치가 둥둥 떠 있었다.

[2,922,100/3,000,000]

조금씩 차오르는 숫자를 보며 중앙 광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2,988,100/3,000,000]

300만의 고지에 다다르자 사람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2,999,010/3,000,000]

300만 포인트까지 단 990포인트.

그 마지막을 백현이 장식했다.

"자, 여기."

"감사합니당!"

백현은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990포인트가 들어가자 300만 포인트에 도달한 것이 보였다.

[3,000,000/3,000,000]

언더모스트에 사는 도전자들은 저마다의 감회를 즐겼다.

누군가에게는 1년이 넘는 시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한 달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긴 시간을 이곳에 체류한 이들일수록 더욱 남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0/3,000,000]

그 거대한 숫자가 한순간에 0으로 바뀌었다.

토잉의 조그마한 양손에는 조심스럽게 들린 영혼 약탈자의 심장이 올려져 있었다.

그 심장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심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유령처럼 흐물흐물하며 반투명한 형태의 모습.

그러한 것이 원기둥 모양의 통에 담겨 있었다.

"여기용!"

이번 영혼 약탈자의 심장을 사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황강웅이 그 심장을 토잉에게서 건네받았다.

거의 20만 포인트 가까이를 그 혼자서 제공했다.

그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이 지어져 있었다.

"어서 가요!"

"그래."

황강웅과 김강천 일행 5명이 대표로 1층에 올랐다.

황강웅은 혹여나 심장을 떨어뜨릴까 조심 또 조심하면서 움직였다.

"왔구나."

그들을 맞이한 이신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가 정말로 이 1층을 클리어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게 맞는 것인가?

우리가 지금 속고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무의미한 생각이었다.

황강웅은 피식 웃으며 그에게 심장을 건네주었다.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이신의 그 담담한 한 마디가 여섯 사람의 마음을 찌르르 울렸다.

그 말을 끝으로 이신은 자신의 연구실로 들어갔고 남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이신이 들어간 방문을 하염없이 보았다.

* * *

연구실로 들어간 이신은 조심스레 영혼 약탈자의 심장을 집어 들었다.

[영혼 약탈자의 심장(레플리카)]

한때 신의 격을 가지고 있던 영혼 약탈자의 심장의 레플리카입니다. 그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섣불리 건들다가는 영혼이 먹힐지도 모르니 조심하세요.

비싼 것에 비하면 설명은 너무 무성의했다.

그러나 그 능력을 아는 이신은 심장에 마력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이 심장의 쓰임새를 알 것만 같았다. 심장 안에는 수많은 죽음이 담겨 있었다.

웅- 웅- 웅-

심장이 진 고유의 죽음과 가까운 성질의 마력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좋아.'

이신은 며칠을 연구실에 박혀서 나오지 않은 채 영혼 약탈자의 심장을 연구했다.

'이만하면 됐다.'

이신은 직접 만든 새로운 보스의 몸체에 심장을 이식하기 시작했다. 아주 가느다란 마력의 실이 여기저기 얽히며 수천 가닥의 실이 몸체와 심장을 연결했다.

어느새 이신의 몸 전체가 식은땀으로 젖어 갔다.

그럼에도 손끝은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고 마력의 움직임은 침착했다.

아주 조금의 흔들림도 용납되지 않는 초고도의 집중과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고 연구실에 어떠한 흔들림과 소리도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메이와 워리에게 신신당부해두었다.

거기에 마법적 처리까지 해 두었으니 방해할 요소는 없었다.

영혼 약탈자의 심장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죽음의 통찰자] 칭호 덕분이었다.

심장 자체에 신격의 잔재가 아주 조금이지만 담겨 있었다. 거기에 심장이 가진 성질 자체가 난폭하고 난잡했기 때문에 이 녀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거기에 인형의 영혼을 담아야 했다.

그리고 영혼 역시 죽음의 통찰자를 통해 구할 수 있었다.

"후아...."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가.

작업에 집중하느라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작업이 모두 끝나고 나니 온몸이 삐거덕거리며 과부하가 일어난 듯 근육이 덜덜 떨렸다.

"완성이다."

[전설의 인형 제작자]

신격을 품은 인형을 제작하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이에요! 그렇다면 제작자도 인형에 뒤떨어져선 안 되겠죠?

# 신격 +1

# 인형 제작술 Lv.+4

[신의 자질을 가진 자]

신격을 가지고 계시네요? 당신이라면 신이 될 가능성을 가졌습니다. 신의 자질을 가진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 사망에 이를 시, 3초간 죽음에 면역 (쿨타임 24시간)

"신격을 여기서 얻을 줄은 몰랐는데."

신격은 전생의 내가 90층에 올라서야 간신히 처음 얻은 것이었다. 그것을 고작 1층에서 인형을 제작한 대가로 얻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물론,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기는 했다.

"하아."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분명 2층에 올라가는 순간 신격 덕분에 신들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1층에서 신격을 얻었으리라는 생각을 못 할 테니.

애초에 탑 밖에서부터 신격을 가지고 있던 놈이라 생각할 것이다.

"커피… 커피가 필요해...."

이제 한고비 넘어갔을 뿐 끝이 아니었다.

나는 힘든 몸을 이끌고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따른 뒤 한 모금 마셨다.

진한 카페인 향이 몸에 활력을 돋아 주는 것만 같았다.

커피를 마시며 잠시간의 휴식을 마친 뒤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이제 진짜 [죽음의 통찰자]의 힘이 필요한 때.

그간 수많은 연구를 통해 [죽음의 통찰자]의 응용력을 발전시켰다. 마력과 영혼의 결합.

진 이브리엄의 연구일지를 보며 생각한 결과였고 그것은 꽤 성공적이었다.

내 마력이 빠져나가며 공간 전체를 뒤덮었고 이윽고 내 눈이 되어 영혼을 탐지했다.

이 장소 전체에는 수많은 영혼이 존재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특별하게 느껴지는 영혼이 있었다.

진 이브리엄.

그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이곳에서 수많은 영혼을 보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느껴지는 격.

밑 빠진 독에서 물이 새는 것처럼 그 망가진 격의 본질이 희미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너무 대단하니 오히려 더 빠르게 사라지는구나."

허탈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그의 영혼이 다른 영혼들과는 다른 또 한 가지는 그와 내 몸뚱어리에 연결된 고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별짓을 다 해도 끊을 수 없던 그 고리.

그것을 지금 끊어 낼 것이었다.

"일어나라."

나의 마력이 누워 있던 인형에 흘러 들어가며 영혼 약탈자의 심장을 자극했다.

마력이 기폭제가 된 듯 인형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나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까지 어떤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 인형이 무표정한 얼굴로 진 이브리엄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먹어 치워라."

인형의 심장에서 알 수 없는 힘이 퍼져 나가며 진 이브리엄의 몸을 뒤덮었다.

그 힘이 그를 전부 덮어 갈 때까지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의 입가가 미세하게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고생했습니다. 진."

* * *

언더모스트 하늘에 하나의 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누군가가 언더모스트에 들어올 때 나타나는 빛이었다. 1층에 올라간 이들이 없으니 아마 이건 신입일 확률이 높았다.

"이 시기에 신입이라니. 참."

"다들 어수선해서 할 일도 없는데 구경이나 갈까?"

"그래, 신입이랑 놀면 시간도 잘 가고 좋겠지."

언더모스트의 많은 이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중앙 광장에 모여들었다.

지금 언더모스트의 주민들은 영혼 약탈자의 심장의 가지고 간 이신을 기다리는 일이 일상의 전부였다.

일주일이 넘도록 아무 소식도 없이 하루하루 기다리는 그들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1층도 올라가지 못하는 탓에 속으로 마음만 졸이며 지내고 있는 와중에 신입이 들어온 것.

"안녕하세용! 저는 토잉이에용! 1층 대기실과 이곳 언더모스트의 관리자랍니당!"

새하얀 가면을 쓰고 새하얀 로브를 뒤집어쓴 남성이 나타났다. 1층에 올라간 이들이 없으니 분명 신입이 맞았다.

가끔가다 저렇게 판타지 세계에 가는 것처럼 코스프레 같은 것을 하고 오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들은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구의 물건은 마력이 없어서 결국 탑 안에서 쓸모없기 때문에 곧 버려지지만 처음 들어올 때는 저렇게 옷 같은 것을 입고 오는 이들이 있었다.

"어이 신입! 어디 중세 판타지 시대에서 왔어?"

"하하핫! 마법이라도 쓸 줄 아는 거 아니야?"

"파이어 볼 같은 거 쓰나?"

사람들은 마치 군대에 처음 온 신병 놀리듯 신입에게 장난식으로 말을 걸었다.

새로 들어온 그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며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두리번거렸고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귀여울 따름이었다.

"도전자님, 이곳은 도전자분들이 세운 도시인 언더모스트랍니당! 궁금한 게 있으신가용?"

그는 토잉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토잉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다짜고짜 토잉을 들어 자신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댔다.

"아앙- 이러시면 안 돼용."

토잉은 귀찮은 듯 귀를 후비며 말했고 사람들도 그 모습을 재밌게 구경했다.

이런 일도 하루 이틀이 아닌 것이다.

"오랜만이다. 토잉아."

그의 음성은 차분했고 무언가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잉? 저를 아시나용?"

토잉은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에겐 너무나 귀에 익은 목소리.

"어?"

"설마...."

"정말...?"

토잉은 주변 이들이 왜 저러나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광장에서 즐겁게 앉아 있던 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모두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아주 잘 알지."

그가 토잉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깡충깡충 뛰며 토잉이가 뒤로 물러났다.

하얀 로브를 뒤집어쓴 그가 광장에 모인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제20화

해방

처음 이곳에서 불망각의 구를 얻고 기억을 되찾았을 때가 떠올랐다.

'멍한 상태에서 녀석들이 왔었지.'

김강천, 백현, 강지훈, 지은주, 박혜원.

이 다섯은 왠지 모르게 다른 이들보다 유난히 더 애착이 갔다.

처음 마주한 녀석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탑을 오르지 못하게 한 죄책감 때문일까.

이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외에도 언더모스트를 세우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황강웅, 언더모스트의 명물 떡볶이를 만든 강정원,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고유능력을 얻은 박주혁을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광장에 있었다.

저 모든 사람들이 이신이라는 재해 때문에 탑을 오르지 못하고 이곳에 긴 시간을 체류한 것이다.

"미안했습니다. 다들."

이신의 목소리를 듣자 여기저기서 통곡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간 겪었던 고생이 떠오르며 울기 시작한 것이다.

한두 명이 울기 시작한 게 번지기 시작해서 순식간에 광장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흐어어...."

"진짜, 진짜야...?"

누군가는 펑펑 울며 오열했고,

어떤 이는 몸에 힘이 빠져 자리에 주저앉았으며,

또 어떤 사람은 이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도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격에 겨워 제자리를 펄쩍 뛰고 서로 부둥켜안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여러분은 이제 자유입니다."

이신이 가면을 벗어 던지며 로브를 뒤로 젖혔다.

그의 웃는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와아아아아아아아!"

"해방이다!"

"드디어 자유다!"

"엄마, 아빠! 이 못난 자식 이제서야 출발해요!"

"나도 따라 올라간다! 영미야! 기다려!"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쁨을 표현했다.

"선배님!"

"해내셨군요!"

"으아아아앙!"

"이 꼰대 선배! 사람 이렇게 놀라게 하기예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언더모스트 초기 5인방이 이신에게 달려들어 그를 껴안았다.

원래라면 오그라든다며 마법으로 날려 버렸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받아 주기로 했다.

"그간 정말 고마웠네."

황강웅이 다가와 이신에게 말했다.

"저도 감사했습니다."

"자네 탑에 오르면 도움 준다는 거 잊지 않았겠지?"

"당연하죠."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여기 비석이 있던 위치가 적힌 지도네."

황강웅이 지도 한 장을 건네 주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따라가서 안내해 주어도 되네만."

"괜찮습니다. 회포나 푸시죠."

"자네도 같이 풀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

"저는 여러분을 막은 악당이지 않습니까? 악당은 빠져야죠. 하하."

이신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무운을 빌겠네."

희미한 미소를 지은 이신이 광장 중앙으로 움직였다.

그 모습에, 광장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신에게로 향했다.

"여러분들 제가 이미 여러 번 말했다시피, 1층에서의 성장이 앞으로 탑을 오르는데 엄청난 이점을 줄 겁니다. 그러니 자신의 성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바로 1층을 오르지 말고 더 성장하고 오르시길 바랍니다."

이신은 말을 하고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 가지각색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이 말을 이해하는 이들도 있고 아닌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저 이들이 50층에 도달하기 전에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탑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이신은 시작점이 되는 이곳에서의 성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50층 위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때부터가 진짜 탑의 시련이 시작된다 할 수 있다.

그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50층까지만 가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이곳에서의 성장은 50층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동력원이 될 것이다.

"1층 보스의 난이도는 제가 임의로 설정했습니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클리어조차 불가능하니 성장에 주력하시길 바랍니다."

불만을 터트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몇 보였지만 주변 다른 이들의 눈치가 보여 대놓고 티를 내지는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저런 이들까지 일일이 신경 쓸 생각은 없다. 알아서 나중이 되면 깨닫게 될 테니.

"자, 이제 1층엔 제가 없습니다. 마음껏 도전하세요."

이신의 말에도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미 그들에게 1층의 클리어는 낯선 것이었기에.

그들은 '정말 깰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 그리고 제가 아니더라도 1층의 보스가 여러분을 죽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도전하셔도 됩니다."

그 말이 있고 나서야 나서는 이들이 생겼다.

한 청년이 자신감 있게 나섰다.

"에잇! 사람들이 왜 이리 겁먹어요? 선배님이 깨도 된다고 하셨는데. 저부터 가겠습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1층 포탈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도 청년을 따라 들어가는 도전자들은 없었다.

왠지 모르게 금방 빛이 내려와 방금 들어간 청년이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분, 5분, 10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정말로 1층을 클리어한 건가?

1층을 클리어하면 무슨 폭죽이라도 터지면서 무슨 변화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은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그만큼이나 1층이란 벽이 그들에게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니, 그제서야 하나둘 나서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간다!"

"나도!"

"에잉! 젊은 친구들도 가는데 살 만큼 산 우리가 뭐가 무섭다고! 죽으면 죽는 거지, 나도 갑세."

"그려! 가자고!"

사람들이 대거 1층의 포탈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혹시 몰라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1층의 클리어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오빠, 우리도 지금 올라갈까?"

"아니, 이제 탑에 오르기 시작하면 우리끼리 언제 모이게 될지도 모르는데. 회포를 풀어야지."

"그래요! 회포를 풀자고요!"

박혜원과 강지훈의 대화에 신하늘이 끼어들었다.

"넌 뭐야?"

백현이 이상한 놈 보듯이 그를 보았다.

"아! 이러기예요?"

"이러기는?"

"미래의 랭커에게 이렇게 소홀히 해도 되는 거냐구요."

"풋!"

신하늘의 말에 지은주가 웃자 놀란 얼굴로 신하늘이 그녀를 보았다.

"은주 누나까지?"

"됐고, 선배님도 같이 회포 푸시죠."

김강천이 이신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는 됐어. 너희끼리 재밌게 놀아라."

"그래도...."

"됐다."

이신은 그들을 보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괜히 아쉬워하는 그들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흔들릴 것만 같았다.

괜히 자신과 어울리면 저들까지 신들에게 미움을 살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은 정을 쌓을 때가 아니었다.

이신은 중앙 광장을 떠났다. 모습을 숨긴 채 언더모스트를 둘러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보는 광경.

중앙 광장부터 외곽 성벽까지.

꽤 넓었다.

이신은 튼튼하게 지어진 성벽을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튼튼하네."

이 정도면 충분히 기대 이상의 성벽을 세워 주었다. 그들이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성벽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난 뒤 언더모스트 안쪽을 구경했다.

중앙 광장 근처에 지어진 5인방의 집.

집의 입구가 굳건히 잠겨져 있었고 마법 처리도 되어 있는 터라 쉽게 부수거나 열기 어려웠다.

보안에 꽤나 신경 쓴 것 같았지만....

철컥-

이신은 마력을 이용해 가볍게 문을 열었다.

다섯 사람의 집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이제 이곳을 떠나는 터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나 그들의 지난 추억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신은 문을 다시 잠가 놓고 거리를 걸었다.

황강웅의 건물이 보였다.

언더모스트 내에서는 그래도 가장 큰 건물이었다.

안쪽은 깔끔하면서도 심플한 느낌이었다. 안에는 사람이 한둘 정도만 남아 있었다.

꼭대기에 올라가니 언더모스트의 전경이 보였다. 제법 사람들이 사는 곳 같이 느껴질 정도로 많이 발전되어 있었다.

'황 사장님의 공이 컸네.'

이 정도라면 다음에 올 도전자들이 적응하는 데에는 충분하리라 생각됐다.

길거리를 걸으니 강씨 아주머니의 가게가 보였다. 그곳에는 강씨 아주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여기 제일 맛있는 떡볶이 하나만 주세요."

"네! 강씨 스페셜 떡볶이가 여기 주력 메뉴예요. 금방 드릴게요."

조금 서 있으니 금방 떡볶이가 나왔다.

도전자로 신분이 바뀌고 포인트를 얻을 수 있게 된 이신에게 황강웅이 포인트를 빌려 주었고 이신은 그 포인트로 떡볶이를 사 먹었다.

맛있었다.

전생에서 먹었던 그 어떤 떡볶이보다.

"인기가 있을 만하네."

떡볶이를 다 먹은 뒤 다시 거리를 걸었다.

공원도 가 보고, 언더모스트 밖으로도 나가 보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밤이 되어 있었다.

다시 돌아온 중앙 광장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신은 그곳에 서서 토잉이를 불렀다.

그러자 토잉이가 건물 뒤편에서 나타났다.

"이신 님도 드디어 1층에 가시는 건가용?"

"그래."

"이이잉."

왠지 모르게 토잉이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이신은 다리를 굽혀 토잉이를 들고는 안아 주었다.

토잉이의 보들보들한 털을 천천히 부드럽게 쓰다듬으니 토잉이도 기분 좋은 듯 가만히 있었다. 어느새 새근새근 잠든 듯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신은 토잉이를 조심스레 땅에 내려놓고는 겉옷을 덮어 주었다.

"아직 가기 전에 할 일이 있어. 조금만 자고 있어라."

* * *

비석에 적힌 고대어는 해석이 쉽지 않았다. 황강웅이 그것을 보여 준 뒤로 매일 같이 고대어 해석에 매달려 보았지만, 그 일부분 정도만 해석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은 그 비석이 그의 예상대로 신의 제단에 세워지는 비석이라는 것이었다.

다만 어떤 신의 신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칫하다 이상한 신이 걸리면 그곳에 묶여 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

그래도 가야만 했다.

애초에 1층 대기실과 1층은 신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그럼에도 1층도 아닌 1층 대기실에 신의 제단이 있다는 것은 확인해 보아야 하는 일이었다.

예상되는 신이 하나 있기는 했다.

[불망각의 구]

잊혀진 신의 편린이 담긴 구슬입니다.

# 망각하지 않습니다.

잊혀진 신.

이신이 불망각의 구를 얻은 장소가 1층이다.

아마 이곳에 있는 비석도 저 잊혀진 신의 제단에 있던 비석이 아닐까?

어느새 지도에 그려진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비석이 땅속 깊은 곳에 박혀 있었다.

이신은 그 비석에 새겨진 글을 읽었다.

"마력에… 역행하라...."

이곳의 마력이 흩어지는 이유는 이곳에서 흐르는 흐름이 자연에서 흐르는 마력의 흐름에 반발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비석에는 그 흐름을 역행하라 적혀 있었다.

이신은 그 말처럼 마력을 강제로 역행시켰다.

자연에 반발하고 흐름을 거스르는 것.

이건 5, 6위계 마법사들도 할 수 없는, 특히나 1층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마력 컨트롤이었다.

이신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누르고 마력 컨트롤에 집중했다.

기껏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들어 놓았던 몸이 최악으로 변해 갔다.

마력혈이 점점 삐거덕거리기 시작했고 마력의 제어는 점점 힘들어졌다.

"큭...!"

핏물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그 핏물이 꾹 다물어진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체력이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마력이 소용돌이치듯 주변에 휘몰아쳤고 마력혈은 터져 나갔다.

"커헉!"

입 안에 가득 찬 피가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눈에 보이는 핏물을 보니 이대로 가다간 과다 출혈로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체력: 500/8,750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온몸의 힘을 쥐어 짜내며 마력을 컨트롤했다.

# 체력: 150/8,750

핏발 선 눈의 힘줄이 하나둘 터져 나갔다.

# 체력: 0/8,750

기억을 되찾고 처음으로 체력이 0에 수렴했다.

[신의 자질을 가진 자]

신격을 가지고 계시네요? 당신이라면 신이 될 가능성을 가졌습니다. 신의 자질을 가진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 사망에 이를 시, 3초간 죽음에 면역. (쿨타임 24시간)

[신격을 가진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3초간 죽음에 면역됩니다.]

허공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볼 새도 없었다.

마지막 남은 정신력까지 끌어모아 마력을 컨트롤했고 그러자 자연을 거스르던 마력이 실타래 풀리듯 자연스레 자연의 흐름과 동화되었다.

"하아아...."

# 체력: 1/8,750

쿠구구구궁-

비석이 있던 땅이 갈라지며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났다.

* * *

└얘들아 특종이다! 미친!

└뭔데? 왜 갑자기 호들갑이야?

└2층 랭킹 업데이트 됐어!

└뭐라고?!

한국 탑의 커뮤니티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21화

2층

온몸의 마력혈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은 기분.

욱신거리는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한동안 가만히 누워서 정양해야 할 정도로 이신의 상태는 심각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지하 깊숙이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지금 상태는 기본적인 1위계 마법도 간신히 발현할 수 있을 정도.

그럼에도 온몸의 힘을 쥐어 짜내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죽음이 느껴지지 않아.'

정말로 위험했다면 죽음이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을 내려가야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정도 내려가자, 계단이 끝나고 자그마한 제단이 보였다.

"이건...."

제단 앞에는 위에서 본 비석과 비슷한 모양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이신은 비석 앞에 다가가 그곳에 적힌 글을 읽었다.

역시나 고대어였다.

"자격이 있는 자만이 오를 수 있다."

자격? 무슨 자격을 말하는 건가?

여러 문장 중 그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이 문장뿐이었다.

비석을 지나쳐 제단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석상이 서 있었다. 명확한 듯하면서도 뭐라 규정하기 힘든 그런 신비한 모습의 석상이.

'이건....'

그 아래에는 어떤 문양과 함께 고대어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 자격을 지닌 자, 마력을 새겨라.

아무래도 이곳에 마력을 새기라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와서 망설일 이유는 없다.

직감은 이것을 따르라 하고 있었고 이신은 그 직감을 믿기로 했다.

'마법사로서는 실격이네.'

모든 것을 계산하고 계획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마법사가 직감에 의존하다니.

혼자 감상에 빠져 피식 웃고는 석상에 손을 올려 마력을 불어넣었다. 문양을 따라 마력을 새기는 것은 이신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양은 순식간에 검은 마력으로 물들었다.

마력이 문양을 따라 새겨지자 석상이 빛나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석상에서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 끝없는 혼돈에서 버티는 자, 그 자격을 증명하리니.

'끝없는 혼돈?'

생각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석상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한 기운이 이신을 덮쳐 왔다.

[혼돈이 스며듭니다.]

[면역됩니다.]

[혼돈이 스며듭니다.]

[면역됩니다.]

[혼돈이 스며듭니다.]

[면역됩니다.]

.

.

.

불길한 기운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왔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허공에 떠오르는 메시지만 반복될 뿐이었다.

'이 기운이 혼돈이라는 건가?'

혼돈, 이것은 100층까지 올랐던 그조차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 혼돈이라는 것에 면역이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음?'

갑작스레 스며드는 혼돈 때문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보지 못했었는데, 석상 근처에서 흐물거리는 영체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혼돈에 잠식되어가는 그를 비웃고 있는 듯한 모습.

다른 인간 영혼들과 다르게 어떠한 형체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혼돈에 잠식당하길 기다리는 것 같은데.'

저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의도에 따라 주기로 했다.

이신은 혼돈에 잠식당하는 듯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크으으으...."

털썩-

힘이 빠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부여잡고 계속해서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슬쩍 저 영체를 한 번씩 보았지만, 영체는 여전히 허공에 둥둥 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라보고 있는지조차 확실하지는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해서 혼돈에 당하는 척, 점점 심하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혼돈이 스며듭니다.]

[면역됩니다.]

"크허어어어억!"

이신의 몸이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자 여태 가만히 있던 영체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 나는 혼돈의 인도자. 자격이 없는 너는 혼돈이 될 것이다.

영체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크윽...혼돈이 된다는 것이 뭐지?"

- 말할 힘은 있나 보군. 그것은 되고 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혼돈이 스며듭니다!]

[혼돈이 스며듭니다!]

[혼돈이 스며듭니다!]

.

.

.

[면역됩니다.]

- 뭐? 어떻게!

가까이 온 영체가 그에게 접촉하더니, 그가 혼돈에 당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놀라 소리쳤다.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가 없어진 이신은 다시 몸을 일으키고 마력을 서서히 움직였다.

- 이럴 수가! 안 돼! 혼돈이-!

[혼돈이 스며듭니다!]

[면역됩니다.]

[『스탯 – 혼돈』이 생성됩니다.]

혼돈 스탯 생성?

스탯 중에 혼돈이라는 스탯이 있다는 것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스탯 [혼돈]'

[혼돈]

모든 힘들이 어우러지지 못하고 결국 어그러져 만들어진 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받아들입니다.

# 모든 속성 저항력 +10%

# 피격 시 매우 낮은 확률로 보유 중인 스탯에 한해서 무작위 스탯 강탈.

# 타격 시 매우 낮은 확률로 보유 중인 스탯에 한해서 무작위 스탯 강탈.

'이런 사기적인....'

혼돈 스탯의 효과를 보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모든 속성 저항력 10%

이건 유례없는 방어 능력이었다. 모든 속성 저항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 자체도 처음 알았다.

거기에 더해 가장 사기적인 것은 스탯 강탈이다.

힘, 민첩, 지력과 같은 스탯을 강탈하는 것도 물론 사기적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사기적인 것은.

# 신격: 1

바로 이 신격 스탯.

얼마 전 [전설의 인형 제작자] 칭호를 얻으며 신격 스탯을 얻었다.

신격 스탯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의 신격 스탯을 강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매우 낮은 확률이 얼마나 낮을지는 모르지만, 그 확률이 신격을 얻을 확률보다 낮지는 않을 것이다.

[신격]

신과 같은 격을 지니게 됩니다.

# 자신보다 신격이 낮은 이에 한하여 모든 능력치가 10% 증가합니다.

아주 간단하지만, 사기적인 능력.

모든 능력치의 10% 증가.

신격을 가진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신격을 가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에 한해서 10%의 추가 전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혼돈으로 인해 나보다 강한 신격을 지닌 이를 만나도 이제는 부담스럽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겠지.

신격을 빼앗을 수 있으니.

- 말도 안 돼.... 도대체 정체가 뭐지?

"아직 안 죽고 살아 있었나 봐?"

- 나는 죽지 않는 존재...아니, 아… 그렇군…. 그랬던 것이었어.

영체는 무언가 깨달은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다는 거지?"

- 그래… 이게 계시의 일부였나..., 그렇다면 내 할 일은 하나.

"계시?"

- 그렇다, 계시. 그러니 너는 그대로 너의 길을 걸으면 된다.

영체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 너의 몸은… 망가져 있구나... 아주 강력한 저주로 인해...

"설마... 회복이 가능해?"

- 그것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하지만 미약하나 신격이 느껴지는군. 그것과 함께라면 조금은 가능하다.

몸속에 스며든 영체의 힘이 비정상적으로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망가져 있던 마력혈들의 일부분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영체에서 느껴지던 힘들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너는… 어떻게 되는 거지?"

- 나는 죽지 않는 자. 내 몸은 사라지되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가."

- 내 영력으로 너의 몸의 격을 조금 끌어 올려 주었다. 너에게 걸린 저주가 너무 강해 이 정도가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다.

막힌 하수구의 일부분이 뚫린 것처럼 온몸의 마력이 한결 원활해졌다. 제단의 입구에서 망가졌던 몸뚱이가 어느새 모두 회복되고 최상의 상태가 되었다.

[마력 등급 Lv.3]

몸속의 마력을 회전시켜 보았다.

그 전보다 배는 빠르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 정도라면… 무리하면 5위계 마법까지는 가능하겠어....'

그래 봤자 마법사의 최상위 정도 수준에 간신히 발을 걸치는 정도겠지만.

적어도 6위계가 넘어가야 마도사의 경지라 불린다.

이제야 사람 구실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수준.

- 나아가라… 앞으로....

그 마지막 말을 끝으로 영체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신은 발걸음을 돌려 언더모스트로 돌아갔다.

* * *

언더모스트의 사람들이 1층을 오르며 드디어 2년 가까이 업데이트되지 않던 2층의 랭킹이 업데이트 되었다.

그리고 2층에서 언제 1층의 도전자들이 올라오나, 랭킹을 주시하던 이들이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하며 탑의 소란이 시작되었다.

└특종입니다! 특종!

└뭔데? 왜 갑자기 호들갑이야?

└2층 랭킹 업데이트 됐어! 빨리 가서 보라고!

└차유민의 말대로 진짜 1층이 뚫렸다고!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야!

└이거 뭐야? 진짜 실화야? 2층에 사람이 올라온 것도 놀라운데 1위 랭킹이 바뀌었다고?

커뮤니티의 작은 소란이 불이 번지듯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불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이들은 황급히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마을로 돌아가 랭킹을 확인했다.

# 1위. 신영우 – 11,200점

# 2위. 차유민 – 10,700점

# 3위. 한상원 – 8,960점

# 4위. 백강우 – 8,120점

.

.

.

└미친 진짜잖아? 그 리자드맨 대전사를 이겼다고?

└만 점을 넘은 걸 보니 차유민보다 더 빨리 깼다는 건데 어떻게?

└아니 그게 중요해? 1층이 해방됐다고! 드디어 우리도 신입을 받을 수 있어!

└가만..., 한국이 최강이 된다던 게 저 신영우라는 사람 때문이야?

단순히 랭킹이 업데이트된 것뿐 아니라 한 번에 랭킹 1위의 자리가 바뀌게 된 것이 탑의 도전자들에게 더욱 큰 혼란을 주었다.

└야이 미친! 랭킹 또 바뀌었다!

└또 다른 신입들이 올라와서 바뀌었겠지 호들갑은.

└랭킹 보라고! 1위가 또 바뀌었어!

└뭐?

# 1위. 강현우 – 14,110점

# 2위. 박지민 – 13,400점

# 3위. 신영우 – 11,200점

# 4위. 차유민 – 10,700점

# 5위. 한상원 – 8,960점

# 6위. 백강우 – 8,120점

.

.

.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저 점수가 말이 돼?

└차유민도 리자드맨 대전사를 간신히 잡은 게 고작이었다고!

└그 리자드맨 사냥꾼을 잡았다고? 고작 2층 도전자가?

└그것도 3명이 넘게?

└3명은 무슨 랭킹 봐라!

└야이 시팔! 설마 또 바뀌었냐?

└1층에서 뭔 일이 일어난 거야!

* * *

우웅- 우웅- 우웅- 우웅- 우웅-

5개의 빛이 2층 대기실에 떨어져 내렸다.

김강천과 그 일행들이었다.

"여기가 2층 대기실인가?"

"우와... 뭔가 신기해."

"1층 대기실하고는 완전 다르네?"

2층 대기실은 질퍽질퍽한 늪이 곳곳에 있는 늪지대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도마뱀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도전자들이 밀려오는군."

도마뱀이 말했다.

"네가 관리자야?"

백현이 도마뱀에게 물었다.

"그렇다. 2층에 도전하겠나?"

2층 대기실은 아무리 봐도 사람이 오래 있을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너무 습하고 땅도 질척거리는 탓에 딱히 길게 이곳에 있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5명 모두 곧장 관리자의 말에 수락하고는 2층에 도전했다.

[2층에 입장하셨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도착한 곳은 늪지대였다.

눅눅하고 습한 장소. 질퍽거리는 늪이 발에 치였다.

주변에 같이 도전한 다른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2층은 1층과 다르게 솔로 클리어 스테이지이기 때문이었다.

[리자드맨 전사를 쓰러트리십시오.]

백현은 눈앞에 허름한 검을 들고 있는 리자드맨 전사를 보았다.

"크르르르르."

딱히 무섭거나 두려운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눈앞의 리자드맨 전사는 메이와 워리에 비하면 어떠한 중압감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백현이 리자드맨 전사에게 쇄도했다.

긴장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짜 실전은 처음이니까.

그러나 그것 또한 잠깐일 뿐이었다.

리자드맨 전사가 공격에 반응하기 위해 팔을 들었을 때는 이미 백현의 검이 놈의 목에 닿기 직전이었다.

서걱!

그의 검이 허무하게 리자드맨 전사의 목을 베어 버렸다.

"뭐야?"

너무 쉽잖아?

1단계라 그런가?

쉬울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간단할 줄은 몰랐다.

백현은 고개를 옆으로 까닥하며 검을 갈무리했다.

[리자드맨 전사를 쓰러트렸습니다.]

[다음 단계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다음 단계는 리자드맨 궁사입니다.]

"그래."

그의 몸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제22화

제단에서 돌아와 언더모스트에 도착했다.

적막함이 감돌았다.

많은 이들이 언더모스트를 떠나 올라갔기 때문일까?

거기에 한창 축제를 벌이던 곳도 어느새 다 치워지고 깔끔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각자 집에 들어가 자고 있는 듯했다.

이곳을 떠난 지 단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그렇다기에는 떠나기 전과 지금의 언더모스트의 모습에는 위화감이 있었다.

'뭐지?'

마침 공원 근처를 뛰는 남자가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이신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기요."

이신은 그에게 다가갔다.

지나가던 그가 이신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오늘이 1층이 해방되고 며칠이나 지났죠?"

"1층 해방이요? 아... 일주일 정도 지났다고 하던데, 그건 왜요?"

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짧게 인사를 마치고 사라진 이신의 뒷모습을 보며 남자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신은 곧장 중앙 광장으로 가서 1층을 오르는 포탈로 들어갔다.

제단에 들어간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이곳은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제단과 이곳의 시간 선이 달랐어.'

이미 다른 이들이 탑을 오르기 시작한 지 벌써 꽤 됐다는 뜻이다.

난리가 났을 탑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잘하고 있으려나.'

포탈을 타고 들어온 1층의 모습은 딱히 변한 것이 없었다.

이신은 1층 보스 방을 향해 거침없이 움직였다.

이미 많은 이들이 거쳐 간 길이었다.

보스 방의 문이 열리자 그곳엔 그가 만들어 낸 보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보스는 이신을 보며 놀란 얼굴을 하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올라가시는 겁니까?"

"그래."

훈훈한 모습에 안경을 고쳐 쓴 보스는 들고 있던 책을 덮었다.

"이미 저는 수없이 죽으며 기억이 리셋 되었겠지만, 주인님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군요."

"그렇지.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이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잊혀진다는 게 참으로 슬픈 거더라고."

"그렇군요."

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은 잘 있나?"

"예, 아직은 의식이 없어서 말을 하지는 않지만 제 안에 잘 있습니다."

"그를 잘 부탁해."

"알겠습니다."

이신은 웃으며 마력을 움직였다.

"그럼 마지막 결전을 해 보자."

"좋습니다."

* * *

서걱-

툭.

리자드맨 궁사의 목이 허무하게 떨어졌다. 나무 위에 남아 있던 놈의 몸도 뒤따라 땅으로 떨어졌다.

"진짜 뭐지?"

강지훈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닥에 누운 리자드맨 궁사를 보았다.

[리자드맨 궁사를 쓰러트렸습니다.]

[다음 단계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다음 단계는 리자드맨 주술사입니다.]

"도전!"

그의 몸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 * *

화악- 후두둑-

화염이 나무에 번지며 점점 퍼져나갔다.

리자드맨 주술사의 나뭇가지 끝에서 불덩이가 너울너울 날아왔지만, 지은주는 '이게 뭐지?' 하며 슬쩍 피했다.

그러자 그대로 불덩이가 그녀를 스쳐 지나갔고 그대로 뒤에 있는 나무에 적중했다.

너무 느린 캐스팅 속도에 지은주는 당황했다.

"스톤 볼(Stone Ball)."

고작 2위계 속성 기본 마법.

슬쩍, 아주 슬쩍 공격을 날려 보았다.

퍽!

"크어억-."

[리자드맨 주술사를 쓰러트렸습니다.]

"무슨 저거 맞고...."

지은주는 머리를 긁적였다.

[다음 단계부터는 난이도가 급격히 증가합니다.]

[다음 단계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다음 단계는 리자드맨 대전사입니다.]

난이도가 급상승한다지만 아직까지는 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중간에 포기도 가능하니 도전해 볼 만하다 생각했다.

"도전할게."

그녀의 몸이 빛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 * *

카강!

대전사의 대검이 김강천의 검과 맞부딪혔다.

카가가가각―

검날과 검날이 서로 긁히며 마찰음을 자아냈다.

"크르라라락! 너, 대단하다."

"그래?"

뛰어난 전사를 만나 기뻐하는 리자드맨 대전사와는 달리 김강천은 무표정했다.

"크라라라락!"

리자드맨 대전사의 기세가 사나워지며 둔중한 검이 내려쳐졌다.

쿡.

그러나 대전사의 검은 허무하게 땅에 박혔다. 공격하는 동작이 너무 큰 탓에 공격 경로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공격을 피한 김강천의 검이 움직였다.

"대단하다, 내 기술을 피하다니."

"대단하긴, 그냥 죽어라."

김강천의 검이 리자드맨 대전사의 목을 꿰뚫었다.

[리자드맨 대전사를 쓰러트렸습니다.]

[다음 단계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다음 단계는 리자드맨 사냥꾼입니다.]

"그래."

* * *

휙- 휙- 휙-

늪지대인 탓에 기동력에 상당한 제약이 걸렸다. 마법사인 박혜원은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적을 상대해야 했다.

멀리서 날렵하게 움직이며 화살을 쏘아대는 리자드맨 사냥꾼은 여간 귀찮은 녀석이 아니었다.

"요놈은 꽤 귀찮게 하네."

자신과 다르게 녀석은 늪지대에서도 딱히 이동에 제약이 없어 보였다.

이곳은 놈의 전장이었다.

상대가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윈드 커터(Wind Cutter)."

3위계 마법.

전방의 광범위를 바람의 칼날이 휩쓸었다.

녀석이 몸을 숨기며 뛰어다니던 나무들이 모조리 베어지고 동시에 녀석의 팔까지 윈드 커터에 베여 떨어졌다.

"어머나, 어떡해. 팔 하나로 활은 쏠 수 있겠어?"

"크륵, 야비한 인간 같으니!"

"야비한 게 누군데?"

박혜원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리자드맨 사냥꾼은 하나 남은 팔로 단검을 뽑아 들고 박혜원에게 달려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에어 밤(Air Bomb)."

리자드맨 사냥꾼의 머리 앞에서 공기가 폭발하며 그대로 놈이 쓰러졌다.

[리자드맨 사냥꾼을 쓰러트렸습니다.]

[다음 단계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다음 단계는 리자드맨 대주술사입니다.]

"좋아, 마법전이야 말로 내 전문 분야지."

그녀의 몸이 빛에 휩싸이며 사라졌다.

* * *

2층의 난이도는 언더모스트에서 올라온 이들에게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4단계, 7단계부터는 난이도가 전 단계보다 급격히 상승했고 그 구간은 언더모스트의 사람들에게도 쉽지 않았다.

1층에서 충분한 성장을 하지 않고 올라온 이들은 리자드맨 대전사에게도 고전했다.

그럼에도 리자드맨 대전사에게 진 이들은 극소수였다. 그 사람들도 처음 하는 실전에서 겁을 먹은 탓에 실수해서 진 것이지 역량이 부족해서 진 것은 아니었다.

이신이 정한 1층의 최소 클리어 조건이 딱 리자드맨 대전사를 이길 수 있는 정도였기에,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가장 먼저 2층에 도전한 신영우는 랭킹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맨 처음 랭킹 1등을 찍었다는 사실에 기뻐할 틈도 없이 실시간으로 계속 랭킹이 떨어졌고 순식간에 세 자릿수대로 떨어졌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차유민이 그의 아래에 있다는 것.

랭킹이 이렇게 확 떨어질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유명한 차유민과 이것밖에 차이가 안 난다는 것은 조금 충격이었다.

"이게 재능의 차인가.... 후...."

차유민은 1층에서 분명 아무것도 안 하고 바로 2층으로 올라와 도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리자드맨 대전사를 이겼다.

자신은 언더모스트에서 나름 꽤 성장을 이루고 올라왔다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차유민과 근소한 차이가 날 뿐이었다.

"이 멍청한 놈."

신영우는 언더모스트에서 조금이라도 더 성장을 하고 올라왔어야 했나? 하고 후회했다.

* * *

[리자드맨 대주술사를 쓰러트렸습니다.]

[다음 단계부터는 난이도가 매우 급격히 증가합니다! 중간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다음 단계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다음 단계는 리자드맨 광전사입니다.]

2층에 올라온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 시스템 메시지를 마주하곤 고민에 빠졌다.

3단계에서 4단계로 넘어갈 때 상승한 난이도를 생각하면 이번에는 더욱 급격하게 난이도가 올라갈 것 같았다.

대부분은 대주술사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꽤 힘들어했다.

하지만 지금 단계부터는 싸우는 중간에 포기도 할 수도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시작하자마자 2층에서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이미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한 업적을 쌓았다.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이게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언더모스트의 극소수는 7단계에 도전했다.

"선배님이 안정을 꾀하다 보면 결국 성장이 멈춘다고 했지. 도전하겠어."

김강천이 도전했다.

"에라이, 고작 여기서 쫄 거면 랭커 자질 없지! 도전한다!"

백현이 도전했다.

"못 먹어도 고지! 도전!"

강지훈이 도전했다.

"어떡하지...그래도 대주술사는 할 만했는데, 다른 오빠들은 도전했으려나? 그래도 선배님이 7단계까진 우리가 해 볼 만하다 했으니... 도전!"

박혜원이 도전했다.

"저는...그만할게요."

지은주는 도전을 포기했다.

대주술사는 충분히 할 만했지만 벌써부터 목숨을 걸고 도전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도전할 생각이었지만 막상 선택의 시간이 오니까 겁이 났다.

* * *

[리자드맨 광전사를 쓰러트리십시오.]

리자드맨 광전사는 덩치부터 이전 리자드맨들보다 두 배는 컸고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있었으며 위압적인 도끼를 들고 있었다.

붉게 물든 안광은 진짜 전투에 미친 전사의 모습 같았다.

"확실히 위압감부터 다르긴 하네."

박주혁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리자드맨 광전사를 보았다.

"내게 도전하다니, 어디 그만큼 실력이 있는지 보겠다!"

광전사의 몸이 박주혁에게 쇄도했다.

덩치와 다르게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그럼에도 그뿐. 박주혁에게는 뻔히 보였다.

서걱- 서걱- 서걱-

박주혁은 침착하게 녀석의 빈틈을 노리며 차분히 데미지를 누적시켰다.

마력을 이용한 육체의 강화.

효율적인 마력 운용으로 박주혁은 데미지를 입히고 공격을 막는 순간에만 적절하게 마력을 사용했다.

이미 광전사의 온몸은 피 칠갑이 되었지만, 그에 비해 박주혁은 어느 한 곳 다친 곳이 없었다. 아직 마력도 충분했다.

"생각보다 별거 없네."

"크카칵! 건방진 인간 놈이 자만하는구나! 이제 제대로 놀아 보자!"

캉! 캉! 캉! 캉!

리자드맨 광전사의 도끼를 검으로 빗겨 흘려 가며 막았지만, 점점 그것에도 한계가 오고 있었다.

박주혁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데미지를 입힐수록 적은 지치고 약해져야 하건만 놈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크윽!"

광전사의 도끼를 순간적으로 놓친 박주혁이 검면으로 도끼를 막다가 힘에 밀려 뒤로 날아갔다.

도끼를 막은 검의 내구도가 점점 한계에 달하는 것이 보였다.

막는 순간 마력을 두르는 게 조금 늦어 버려 내구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분명 피해는 충분히 누적되었다. 근데 어떻게 속도와 힘이 점점 증가하는 거지?'

2층에서 광전사까지 도달한 도전자는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덕에 광전사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고 박주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적은 피해를 입을수록 강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강력한 일격으로 한 번에 녀석을 쓰러트려야 하나?

아니면 계속해서 피해를 누적시켜야 하나?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공방은 계속 이어졌다.

그나마 우위였던 속도도 점점 따라 잡혀갔다.

'젠장, 난 여기까지인가?'

적어도 이번 단계는 고유능력 없이 클리어하고 싶었는데....

이 녀석이 이 정도라면, 다음 단계는 고유능력을 써도 클리어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럴 바에는 고유능력을 아끼지 말고 빠르게 사용해서 클리어 타임이라도 줄이는 게 낫다.

"죽어라!"

리자드맨 광전사의 도끼에 붉은 마력이 일렁이며 박주혁을 향해 휘둘러졌다.

쾅! 챙―!

도끼를 막은 검이 부러지고, 도끼는 그대로 나아가 박주혁의 머리를 깨부술 기세로 휘둘러졌다.

그때 박주혁의 몸에서 황금빛이 뻗어 나오며 리자드맨 광전사를 포함한 세상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그리고는 그들의 몸이 검이 부서지기 전으로 돌아갔다.

그의 고유능력이 발휘된 것이다.

[변혁의 힘]

# 일어난 결과를 변화시킵니다.

조금 전과 다르게 리자드맨 광전사가 들고 있던 도끼가 박주혁의 검에 의해 깨졌다.

[변혁 에너지가 300 소모됩니다.]

"크헉! 이럴...수가!"

"죽어."

박주혁은 틈을 주지 않은 채 녀석에게 파고들며 목에 검을 꽂았다.

푹-!

"대…단...."

[리자드맨 광전사를 쓰러트렸습니다.]

[놀라운 업적입니다!]

[다음 단계는 난이도가 급격히 증가합니다. 중간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다음 단계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다음 단계는 리자드맨 수호 전사입니다.]

박주혁은 거친 숨을 내쉬며 시스템 창을 보았다.

# 변혁 에너지: 200/500

분명 도끼의 균열 부분을 보았다. 그곳을 노리고 마력을 쏟아부으면 충분히 도끼를 깨트릴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변혁 에너지가 300이나 소모되었다.

'내 힘으로는 힘든 일이었던 건가?'

박주혁은 이를 악물며 시스템 창을 보았다.

"포기한다."

[3층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 * *

커뮤니티의 활화산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1층에서 올라온 도전자들을 주목하고 있었고 천 명이 넘는 도전자가 한 번에 등반하자 랭킹은 수시로 갱신되었다.

그들은 그저 그것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이제는 슬슬 1위가 굳어지는 건가?

└아직 모르죠, 이제 3일 차인데요.

└근데 1위가 20,300점인데, 여기서 더 높은 점수가 가능한가? 상위권 3명 순위 고정된 지도 벌써 하루가 넘었는데.

└나는 한두 번은 더 갱신된다고 본다.

└내기할까? 여기서 최고 랭킹이 갱신될지 안 될지?

└내기하자고! 여기서 어떻게 더 높아져? 베팅장 열어!

└좋아! 들어와!

└잠깐 랭킹 업데이트 됐어!

└뭐?

# 1위. 박주혁 – 38,420점

# 2위. 백현 – 37,180점

# 3위. 김강천 – 34,750점

# 4위. 황강웅 – 34,380점

# 5위. 강지훈 – 33,010점

# 6위. 박혜원 – 31,830점

.

.

.

└미친... 지금 보고 있는 거 실화냐?

└3만 점이 넘었다고? 그것도 1위는 4만 점에 육박하는데?

└뭐야? 당신들 도대체 어디까지 깬 겁니까?

└이거 뭐냐고? 당신들 우리랑 같은 한국인 맞아?

다시 한번 갱신되는 충격적인 랭킹은 커뮤니티의 불씨를 또 한 번 더 키웠다.

이제 2층에 오른 이들은 커뮤니티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고 탑의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탑 위층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신기하고 재밌었다.

└저기요! 커뮤니티 한 번만 들어와 주세요! 제발요!

└1층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정보 좀 풀어 주세요!

└그렇게 강해진 비결이 뭡니까!

사람들은 언더모스트의 도전자들에게 정보를 얻었고 그제서야 1층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저렇게 높은 업적 점수를 얻게 된 이유도.

1층의 보스가 전대 탑을 오른 네크로맨서였고 그 보스가 정신을 차린 탓에 2층에 오를 수 없었다.

그래서 수련을 했고 인간에 호의적인 그가 도와주었다. 그래서 강해졌다.

간단히 말하면 이 정도였고 모두가 그렇게 말하니,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 네크로맨서가 아직 1층에 있다는 것.

아마 그도 탑에 오를 것이라는 말들이 많았다.

어떻게 층의 보스가 탑을 오를 수 있는지는 그들도 알지 못했다.

그저 보스가 영혼 약탈자의 심장을 사용했다는 정보가 전부일 뿐.

그들의 지식으로는 이신이 사용한 방법을 유추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그 허약했던 1층 보스가 어떻게 변해서 올라올지에 대한 궁금함만 남았을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2층뿐이 아니라 3층, 4층까지 각 층의 랭킹은 격변을 맞이했다.

3층의 랭킹 역시 최상위권 내에서 순위만 바뀔 뿐, 그곳을 차지하는 이들은 같았다.

# 1위. 백현 – 53,100점

# 2위. 박혜원 – 52,380점

# 3위. 박주혁 – 46,300점

# 4위. 황강웅 – 43,200점

# 5위 김강천 – 42,83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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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위권 내에서 그들의 순위는 스테이지의 컨셉에 따라 계속해서 바뀌었고 중위권과 세 자릿수대 랭킹 하위권에 있던 이들은 하나둘씩 1,000위권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최상위권은 이제 거의 고정이네.

└와 차유민은 이제 나가리인가?

└에이 아직 몰라, 3층인데 벌써 차유민보다 점수 떨어지는 사람들 생기는 거 안 보여?

└그래도 차유민이 최상위권 되는 건 이제 불가능할 것 같은데?

거의 모든 층에서 랭킹 1등을 항상 고수하던 차유민은 2층에서는 1,000위 밖으로 밀려나며 흔하디흔한 도전자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3층, 4층에서는 점점 순위가 올라 세 자릿수대에 진입했다.

이제 도전자들의 관심은 5층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난이도를 설정해서 도전하는 층.

이곳에서 객기 부리다 죽어 나가는 도전자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최상위권은 당연히 헬 난이도로 도전하겠지?

└헬은 진짜 아닌데...그러다 죽으면 어떡해?

└익스트림만 해도 충분해 얘들아! 그러니 제발 너무 욕심부리지 마!

└무슨, 저 정도 업적 점수 달성한 도전자들이면 헬 도전할 만하지.

└하드 난이도라도 도전해 보고 그딴 소리 지껄이는 거죠? 익스트림부터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고.

5층에 도달한 도전자들은 모두 고민에 빠졌다.

난이도에 대한 정보는 제법 많았다. 그리고 이미 이곳을 겪은 탑의 도전자들이 그들에게 주는 정보도 많았다.

그러나 익스트림부터는 정보를 거의 찾기 힘들 정도였고 헬 난이도는 다 추정뿐이었다.

랭킹의 최상위권을 차지한 이들이 5층 난이도에 대해 서로 모여 의견을 주고받을 때 다시 한번 커뮤니티가 난리가 났다.

"어머! 이거 봐봐!"

커뮤니티를 보던 박혜원의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왜? 무슨 일인데?"

"뭐 선배님이라도 올라온 것처럼... 설마?"

"빨리 랭킹 봐봐!"

박혜원의 말에 다들 굳은 얼굴로 황급히 각자 2층의 업적 점수 랭킹을 확인했다.

# 1위. 이신 – 108,320점

# 2위. 박주혁 – 38,420점

# 3위. 백현 – 37,180점

# 4위. 김강천 – 34,750점

# 5위. 황강웅 – 34,380점

.

.

.

"미친… 실화야?"

"도대체 어디까지 깨신 거야?"

"신고식 제대로 하시네."

그들은 랭킹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편 랭킹을 본 커뮤니티는 온종일 이신의 이름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제23화

이신의 랭킹이 업데이트되면서 커뮤니티는 그야말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사람들은 이신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알 수 있는 것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이제 막 올라온 도전자들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이신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가장 그에 대해 많이 아는 이들도 단편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을 뿐.

왜 그의 이름이 이신인지, 전대 탑은 무엇인지, 그가 어떻게 보스였다가 탑을 오르는 도전자가 된 것인지.

어느 하나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언더모스트의 도전자들이 옛적에 고민을 끝낸 부분이었다.

"아주 난리가 났네, 난리가 났어."

강지훈은 얼마나 재밌는지 계속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들만 구경하고 있었다.

"뭘 고민해? 그냥 그런 사람이 있나 보다 하는 거지."

"사람들이 오빠처럼 단순한 줄 알아?"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아냐! 물어도 안 가르쳐 주잖아!"

박혜원의 말에 발끈한 백현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그건 맞는 말이지. 가장 가까이 지내던 우리도 잘 모르니까."

둘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던 박주혁이 끼어들며 말했다.

"형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뭘?"

"난이도 말이에요."

"아."

박주혁은 안 그래도 그것에 대해 고민하던 참이었다.

한국 정부와 협회에서 만든 특수팀의 팀원들과 자신 사이에는 격차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격차는 조금씩이지만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벌써부터 박주혁과 팀원들 사이에 층수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팀원들이 박주혁의 짐만 될 게 분명했다.

물론 박주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팀원들 스스로 점점 그렇게 느낀다는 점이 문제였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층은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벌어지는 격차는 그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심하게 줄 게 뻔했다.

'맘 같아선 헬 난이도에 도전하고 싶다.'

하지만 위험부담도 위험부담이거니와 팀원들이 걸렸다.

동료들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팀원들은 박주혁이 헬 난이도에 도전하면 분명 무리를 해서라도 난이도를 하나 더 올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죽는 이들이 속출할 게 뻔했다.

"난 익스트림(Extreme)으로."

박주혁의 말에 그들도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황 사장님은 어떻게 하신대?"

"황 아저씨도 익스트림으로 할 거라 하셨어."

"역시 익스트림이 답인가?"

"그치, 익스트림조차도 우리가 최초잖아. 헬 난이도는 너무 큰 모험이야."

박혜원의 말에 다들 동의했다.

백현을 제외하고.

'한계는 내 자신이 만드는 것....'

백현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이신에 의해 새로이 업데이트된 랭킹을 보며 그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 * *

"도전자인가?"

습하고 축축한 늪지대의 나무 덩이에 기대앉아 있던 리자드맨이 이신을 보며 말했다.

"그래."

"너는...허...."

리자드맨은 이신을 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신혈인가?"

"헛소리."

"아닌가? 뭐, 신혈이든 아니든 신격을 지닌 존재가 오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군."

리자드맨은 이신을 보자마자 그의 신격을 알아차렸다.

'이 녀석도 신격을 가지고 있는 건가?'

2층 대기실의 관리자.

그들은 신들에게 특별히 엄선된 녀석들이다. 신격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이 녀석을 공격하면... 신격을 빼앗을 수도 있는 건가?'

이신은 갑자기 혼돈 스탯이 떠올랐다.

그의 눈빛에 미묘한 탐욕이 깃들었다.

"불쾌한 눈빛을 하는군. 자네와 달리 나는 평범한 관리자일 뿐. 그러니 그냥 가시게."

리자드맨의 말에 이신은 약간의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실제로 신격을 가졌다 하더라도 공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관리자를 건드는 것은 멍청한 짓이니.

"2층에 도전하지."

"알겠네."

이신의 몸이 빛에 휩싸이며 이동되었다.

2층 대기실과 비슷한 배경의 늪지대.

눈앞에 긴 꼬리를 바닥에 찰팍찰팍 내리치는 리자드맨이 보였다.

이신의 손가락 끝에서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보랏빛 화살이 생겨나더니 그대로 녀석의 미간을 꿰뚫었다.

놈은 그대로 절명했다.

[리자드맨 전사를 쓰러트렸습니다.]

[다음 단계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다음 단계는 리자드맨 궁사입니다.]

"그래."

.

.

.

[리자드맨 광전사를 쓰러트리십시오.]

"크르륵... 네 놈은… 대단한 기운을 가지고 있구나."

"잔말 말고 덤벼."

"좋다! 강한 전사와의 대결은 나를 흥분시키지!"

리자드맨 광전사의 근육이 한껏 부풀었다.

콰앙-!

무형의 마력 방패가 광전사의 도끼를 막았다.

쾅! 쾅! 쾅! 쾅! 쾅!

반격을 하며 피해를 줄수록 광전사의 공격은 더욱 흉포해졌다.

"크롸라라라!"

2층의 광전사부터는 전생의 이신도 가 보지 못한 곳이었다. 전생에서는 리자드맨 대주술사까지만 상대해 봤으니.

그마저도 대주술사와 싸우는 도중 포기하고 도망갔었다.

그래도 이 녀석의 정보는 알고 있었다.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리자드맨 광전사에 대해 잠깐 들었었다. 원래라면 잊어버리고 지냈을 것이지만 불망각의 구 덕에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콰롸롹! 더! 더 해 봐라!"

어느새 온몸이 피로 흥건한 상태가 되었지만, 녀석은 오히려 더 미친 듯이 덤벼들었다.

'멍청한 놈.'

신체 능력은 점점 강화되었으나 그만큼 이성을 잃어 가며 판단력이 현저히 흐려졌다.

대놓고 파 놓은 함정에도 그대로 머리를 들이밀 정도로.

"이만 죽어라."

바닥에 떡하니 그려 놓은 마법진.

그 위로 유인하자 녀석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위로 뛰어들었다.

콰직-!

마법진이 번쩍 빛나자, 땅이 일그러지며 솟구쳤다. 돌로 이루어진 드릴이 녀석의 사타구니를 뚫고 몸을 관통해 머리를 뚫고 나왔다.

[리자드맨 광전사의 힘을 빼앗았습니다.]

[힘이 1 상승합니다.]

상대방의 스탯을 갈취하는 힘.

혼돈.

스탯창을 보니 힘이 1 상승해 있었다.

'좋아.'

[리자드맨 광전사를 쓰러트렸습니다.]

[다음 단계의 난이도가 급격히 증가합니다. 중간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다음 단계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다음 단계는 리자드맨 수호 전사입니다.]

"도전한다."

빛이 번쩍이며 새로운 장소로 이동되었다.

이전까지 보다 더욱 넓어진 필드.

그곳엔 리자드맨 광전사보다도 위로 두 뼘은 더 큰 리자드맨 수호 전사가 서 있었다.

"너는…사도인가?"

수호 전사의 말에 반사적으로 이신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역겨운 소리하지 마라."

"아니란 말인가?"

"그래."

"내가 그간 만나 온 사도들은 전부 너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같지만 다르지. 이건 오롯이 나의 힘이니까."

이신은 녀석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런 빌어먹을 신들과 나를 엮지 마라."

수호 전사는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대단하군."

쿵!

녀석이 들고 있던 거대한 창이 바닥에 내리 찍혔다.

"내 이름은 군도. 리자드맨 수호 전사. 너에게 [전사의 신성한 대결]을 신청한다!"

군도의 말에 이신은 놀란 얼굴로 녀석을 보았다.

여기서 이걸 하게 될 줄이야.

"하, 욕심이 과하네.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지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투쟁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법이다. 너를 이기고 나는 또 한 번 강해질 것이다!"

[히든 스테이지 – 전사의 신성한 대결]

[군도가 전사의 신성한 대결을 걸어왔습니다. 상대가 죽을 때까지 이 대결은 끝나지 않습니다.

심판의 신의 입회하에 진행합니다.

이 대결에서 지는 자는 모든 것을 상대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전사의 신성한 대결.

이것은 고작 2층 스테이지에서 마주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반드시 한 쪽이 죽어야 끝나는 대결.

게다가 승리자가 패배자의 모든 것을 가져간다.

상대방의 스탯이든, 능력이든, 격이든.

그 모든 것을.

그렇다고 아무나 이 대결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자격이 있고 심판의 신이 인정할 수 있는 그런 대결일 경우에만 가능한 것.

강자가 터무니없이 약자에게 싸움을 걸 수 없으며 서로가 비등비등하거나 약자가 강자에게 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마저도 심판의 신의 재량에 달려있다.

신격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일까.

아니면 혼돈 때문인가.

아무튼 이신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대결을 시작하라.]

그의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경이롭고 신비하며 차갑고 딱딱하다.

심판의 신의 음성이었다.

"크르라악!"

군도의 거대 창이 눈 깜짝할 새에 그에게로 쇄도했다.

그와 동시에 이미 설계해 두었던 마법진이 일시에 발동되었다.

[영혼 사슬]

마법진에서 나온 반투명한 마력 사슬들이 놈의 머리, 몸, 팔, 다리 전부를 속박했고 하나의 붉은 사슬이 튀어나와 놈의 심장부로 들어갔다.

"커허억-!"

몸이 뚫리지는 않았다.

그저 반투명한 붉은 사슬이 놈의 심장에 유령처럼 박혀 있을 뿐이었다.

이신을 꿰뚫고 피육으로 만들어 버릴 것만 같던 창은 그의 앞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내게…무슨 짓을…한 것이냐...."

이신은 놈의 말을 무시한 채 천천히 녀석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보다 몇 배는 더 큰 덩치 때문에 마법으로 땅을 일으켜 군도와 눈높이를 맞췄다.

"무슨 짓은, 네 영혼을 속박했을 뿐이지."

그 말에 군도의 눈동자가 불처럼 일렁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당장 풀어라! 전사의 신성한 대결에서-!"

"전사의 신성한 대결이지. 그렇기에 한 거야."

"그게 무슨 말이냐."

"전사의 신성한 대결은 상대방의 모든 것을 빼앗는 대결. 그렇기에 완벽하게 빼앗아 주려고 하는 것뿐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온몸이 속박당해 있는 상태에서도 군도의 광포한 음성은 여전했다.

"영혼이란 곧 존재 그 자체지. 영혼이 속박당한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어?"

"...그게 무슨 소리냐!"

이신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걸렸다.

군도의 얼굴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떠올랐다.

"이대로 네 존재 자체를 지워 주마. 전사의 신성한 대결이란 그런 거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영혼 사슬]에 담긴 마력이 더욱 짙어졌다.

"크하아아아악―!"

군도가 비명을 내질렀다. 놈에게 느껴지는 커다란 존재감이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이렇게 사라질 수 없다...!"

"사라지기 싫어?"

"죽는 건 상관없다. 전사란 그런 것이니! 그러나 나의 존재, 내가 그간 쌓아 왔던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데?"

이신은 영혼 사슬에 마력을 좀 더 실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군도가 숨을 헐떡이며 이신을 보았다.

"어떻게…하면 되는가."

놈의 흉포한 눈빛은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그 음성은 이전과 다르게 차분했다.

"너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지지 않는 방법이 하나 있지."

"무엇이지?"

"내 수하가 되는 것. 너의 영혼을 내게 넘겨."

"영혼을 넘기면 어떻게 되는가?"

"너는 나의 소유가 되며 나를 위해 살아가게 될 거야. 내가 죽을 때쯤이면 너의 영혼도 풀려나겠지."

"좋다. 내 영혼을 너에게 넘기겠다."

이신은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도박 수가 먹힌 것.

녀석의 능력을 빼앗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놈의 영혼을 가져가는 게 훨씬 큰 소득이었다.

어차피 능력이야 키우면 되는 것이니.

애초에 군도의 힘과 같은 스탯은 이신에게 딱히 쓸모가 없었다. 군도의 힘이 100이라고 힘 100을 그대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빼앗지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게 이 대결이었다.

더구나 능력치의 부족은 혼돈으로 얼마든지 커버가 가능하다.

전사의 신성한 전투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심판의 신에게 인정받을 재목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면 군도를 권속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심판의 신이여! 군도를 내 영혼의 수하로 삼겠다! 이것으로 전사의 신성한 대결은 나의 승리다!"

[리자드맨 수호 전사 군도. 동의하는가?]

"동의한다!"

[좋다. 전사의 신성한 대결은 도전자 이신의 승리다.]

판결이 내려지자 군도가 마력에 휩싸이며 군도의 몸이 녹색의 팔찌로 변하며 이신의 손목에 채워졌다.

[군도의 팔찌]

# 사용자의 마력을 사용하여 리자드맨 수호 전사 군도를 소환할 수 있다.

[리자드맨 수호 전사를 쓰러트렸습니다.]

[다음 단계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다음 단계는 리자드맨 족장입니다.]

"잠시만."

이신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조금 전 사용한 [영혼 사슬]은 엄청난 마력 소모를 동반한다. 그간 상당한 마력량을 증가시켜 왔음에도 부족했다.

영혼 사슬은 마법의 영역을 영(靈)의 영역에 걸쳐서 만들어 낸 기적과 같은 마법이다.

죽음에 대한 엄청난 이해도와 [죽음의 통찰자]로 인한 능력의 시너지로 일구어낸 산물.

현재 수준에서 불가능한 마법을 편법으로 억지로 일구어냈기에, 마력 소모가 너무 컸다.

이신은 마력량과 마력 회복량의 증가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회복의 신이 마력 회복의 권능을 주고 싶어 합니다. 받으시겠습니까?]

명상 중에 다짜고짜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에 이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 마력 부족을 보고 꼬시려는 건가?'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꺼져."

제24화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신은 회복의 신이 분명 분노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신이란 그런 놈들이니까.

그럼에도 놈들은 다시 제안해 올 게 뻔했다.

자신의 신격을 위해.

그것도 안 된다면....

'협박을 하겠지.'

망할 새끼들.

회복의 신을 제외한 다른 신들이 연달아 말을 걸어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단 하나의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특히나 죽음의 신.

놈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게 의문스러웠지만, 신이란 족속들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판단하기 힘든 놈들이다.

단호하게 회복의 신의 권능을 거절해서일까?

아니면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생각한 것인가.

마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 이신은 자리에 일어나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옅은 안개가 낀 늪지대 속, 리자드맨 족장이 보였다.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과 꼬불꼬불한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녀석은 수호 전사만큼은 아니었지만 리자드맨 광전사 정도의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리자드맨 족장을 쓰러트리십시오.]

"클클클... 신격을 가진 인간이라니."

"신기한가 봐?"

"신기할 것도 없지. 이 세계가 다 그런 법이거늘...다만 이곳에서 신격을 가진 녀석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그의 걸걸한 목소리를 들은 이신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격을 가진 이를 본 적이 있나?"

"클클클... 있지. 네 놈보다 더."

"그래?"

"네 녀석을 잡으면 나도 신격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족장의 눈에 탐욕이 깃들었다. 눈앞의 좋은 먹잇감을 놓치기 싫다는 듯한 욕망이 그대로 느껴졌다.

"와라, 나의 아이들이여!"

놈이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찍자, 바닥의 늪지에서 리자드맨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리자드맨 전사, 리자드맨 궁사, 주술사, 사냥꾼....

크오오오-

자잘한 잡몹들 사이로 커다란 형체의 리자드맨이 튀어나왔다.

리자드맨 수호 전사.

미친.

수호 전사 앞으로 2마리의 광전사도 나타났다.

순식간에 이신의 주위는 리자드맨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클클클...가라! 나의 아이들이여."

족장의 지팡이가 그를 향해 뻗어지자 주변 리자드맨들이 한꺼번에 이신에게 달려들었다.

"소수는 결국 다수에게 지는 법이라네."

리자드맨 족장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다지 동의하는 말은 아니지만...틀렸다고 할 수도 없지."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나 보겠네."

끝까지 여유를 잃지 않는 이신의 모습에, 리자드맨 족장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그림자 공간]

이신의 그림자가 커지면서 그 안에서 스켈레톤 메이지와 스켈레톤 워리어가 일어섰다.

이전에는 계약으로만 이루어진 관계였다면, 이제는 정말 이신의 권속으로서 새롭게 태어난 메이와 워리였다.

메이와 워리의 지배력 소모만 해도 합쳐서 19나 잡아먹었다.

덕분에 다른 언데드들은 데리고 다닐 엄두도 나지 않는 수준.

군도를 끌어들이려고 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제가 지키겠습니다."

둘은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마친 뒤 다가오는 리자드맨들을 휩쓸었다.

화아악-

메이의 지팡이 끝에서 뿜어 나온 마력이 불의 벽을 만들어 냈고 그 안으로 들어오려던 리자드맨들이 전부 타 버렸다.

워리는 이신의 근처까지 다가온 녀석들의 목을 일격에 베어 버리며 이신의 곁을 지켰다.

"네크로맨서였나?"

"아니, 난 마법사다. 그렇기에 이런 것도 가능하지. 나와라, 군도."

이신의 손목에 채워진 녹색 팔찌가 빛나며 군도를 소환해냈다.

크르르-

붉게 타오르는 듯한 군도의 눈빛에 주변 리자드맨들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수호 전사? 어떻게 한 거지?"

"영혼을 빼앗았지."

담담하게 내뱉는 그 목소리에 족장의 지팡이가 처음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리자드맨 부족의 가장 긍지 높은 전사인 수호 전사가 한낱 인간의 밑으로 들어갔으니 화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나의 것을...!"

족장의 지팡이에서 붉은 마력이 일렁이며 이신에게로 쏘아졌다.

저주계열인가?

흐르는 마력의 구성으로 보아 저주계열이 분명했다. 마법이 아닌 주술의 종류라 정확한 파악은 힘들었지만 결국 그것 또한 큰 틀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술은 위쪽에서 많이 겪어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이신은 마력을 펼쳐 실드를 생성했다.

실드는 족장이 쏘아 보낸 마력을 막았다.

쿵! 쿵! 쿵!

"쿠룸타라 오움타아."

족장의 알 수 없는 주문이 또다시 붉은 마력을 일으켰다.

"쿠루말리아 우암타 도르마루!"

지팡이가 지면을 연속으로 세 번 치자 이번엔 전장 전체의 바닥에서 붉은 마력이 치솟아 리자드맨들을 감쌌다.

쿠오오오오―!

리자드맨들의 눈빛이 변했다. 흉포한 기세로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가라! 나의 아이들이여! 저 인간을 찢어 죽이고! 우리의 동족을 해방시켜라!"

카아아아악ㅡ!

리자드맨들의 기세가 전과 사뭇 달라졌다. 한층 흉포해진 기세로 워리와 메이, 군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광전사 둘과 수호 전사 하나를 군도와 워리가 맡았다.

메이는 마법을 이용해 다른 리자드맨들을 막았다.

셋의 도움으로 조금 여유로워진 이신이 마력을 응집했다.

'한 방에 끝낸다.'

그의 손끝에 마력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이신은 이곳 늪지대에 수많은 영혼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영혼들은 눈앞의 족장을 죽이고 싶어 하는, 분노에 가득 찬 원혼들이었다.

그리고 그 원혼들은 사령(邪靈)이 되어 있었다.

[죽음의 통찰자]가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분야.

그로 인해 범접할 수 있었던 주술.

마력이 퍼지며 순식간에 주변 공간을 뒤덮는 마법진이 그려졌다.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운 수식이 어지러이 펼쳐졌다.

머리가 터져 나갈 것처럼 지끈거렸다.

"원한을 많이 쌓았나 보네."

"무슨, 소리냐!"

사방의 사령들이 이신의 마력에 기꺼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 사령들의 혼에 마력이 깃들며 리자드맨 족장에게로 모여들었다.

"뭐, 뭐 하는 것이냐! 이건 도대체 무슨 힘인 게야!"

"마법과 주술을 결합해 봤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번에 제단에서 상승한 마력 등급과 죽음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그 사령의 의지를 이용한 마법.

사령술사(邪靈術士)가 아닌 이신이 마법을 이용해 편법으로 만들어 낸 주술.

제대로 실전에서 사용해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신은 이것에 대강 이름을 붙였다.

"사령 폭발."

휘이이이익―

족장의 근처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붉은 파도가 족장을 덮치고 수많은 사령의 잔흔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이신의 눈에는 보였지만, 다른 이들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리자드맨 족장과 부들거리며 서 있는 이신의 모습이 보이는 전부였다.

크오오오오―

사방의 리자드맨들이 비틀거리며 제 자리에 쓰러졌다. 리자드맨들의 눈에 광기가 사라지고 생기가 사라졌다.

방금까지 살아 숨 쉬던 모든 리자드맨들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아니, 애초에 살아 있던 적이 없던 것이다.

녀석들은 원래 죽어 있었으니까.

크아아아아악―!

리자드맨 족장에게 원한이 쌓인 사령들이 족장의 영혼에 달라붙어 자신을 희생하며 터져 나갔다.

그들을 주술로 조종하던 리자드맨 족장의 영혼은 그 희생들로 인해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녀석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리자드맨 족장의 지력을 빼앗았습니다.]

[지력이 1 상승합니다.]

[리자드맨 족장의 지배력을 빼앗았습니다.]

[지배력이 1 상승합니다.]

혼돈으로 인한 스탯 강탈.

하지만 이 메시지에 시선이 가지는 않았다.

그 너머에 분노로 찬 리자드맨 족장의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내 너를 죽어서도-."

"구질구질하기는."

퍼퍼펑-

주변에 있던 사령들의 연이은 폭발이 마지막 남은 녀석의 존재를 지웠다.

리자드맨 족장의 시체는 그가 서 있던 자세 그대로였지만 눈에 담겨 있던 생기는 모두 사라져 있었다.

"수고했다."

메이, 워리, 군도가 모두 역소환 되었다.

녀석들의 격이 워낙 높다 보니 소환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기가 힘들었고 장기전으로 갔으면 분명 이신도 마력이 모두 고갈되어 난처했을 것이었다.

[리자드맨 족장을 쓰러트렸습니다.]

[경이로운 업적! 다수의 신들이 도전자님을 주목합니다!]

[2층 최종 단계를 클리어하셨습니다.]

[도전자님의 업적이 기록됩니다.]

[108,320점을 달성했습니다.]

[108,320p를 획득합니다.]

[체력이 2,530 올랐습니다.]

[마력이 8,302 올랐습니다.]

[힘이 5 올랐습니다.]

[민첩이 6 올랐습니다.]

[지력이 13 올랐습니다.]

[지배력이 5 올랐습니다.]

[『스킬 - 사령술(邪靈術)』을 배웠습니다.]

[『스킬 – 사령 폭발』을 배웠습니다.]

[3층 대기실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눈앞에 생기가 빠져나간 채로 서 있는 리자드맨 족장.

시스템 메시지들을 무시하며 그 앞으로 갔다.

아직까지 리자드맨 족장 주위를 맴도는 사령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령들은 원한을 풀어낸 듯, 색이 옅어지며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 고맙다, 주인. 나의 동포들이 고마워하고 있다.

팔찌 속에서 군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자드맨 족장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 족장은....

군도의 말이 끝나기 전, 리자드맨 족장을 중심으로 배경이 갑자기 변했다.

[죽음의 통찰자]

# 죽음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의 통찰자의 능력이 발동된 것이다.

리자드맨 족장이 수많은 리자드맨들과 함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사방에서 서로 고기를 물어뜯고 연녹색의 물인지 술인지 모를 것을 마시며 다들 축제 분위기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뭐지?'

죽음의 통찰자는 대상자가 죽게 된 계기와 죽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리고 족장은 내게서 죽었다.

능력이 발휘될 이유가 없었다.

'설마....'

축제 속 모습은 조금 전 보았던 그 족장의 잔악한 분위기와는 완벽히 대조되었다.

과거의 족장은 부족원들과 아주 좋아 보였다.

어쩌다 저렇게 변해 버린 것이지?

다시 한번 배경이 바뀌었다.

어떠한 동굴 속.

리자드맨 족장은 새롭게 발견된 동굴 속을 부족원들과 함께 탐사했다.

처음에는 부족원들이 동굴을 찾아 탐사했지만 안쪽에는 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주술이 걸려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족장이 움직였다.

그리고 족장은 그 주술을 해제할 수 있을 만큼의 주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주술을 해제하고 들어간 곳에는 지팡이 하나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도 역시 강력한 주술이 걸려 있었고 족장은 그 주술마저 풀어내며 지팡이를 꺼내 쥐었다.

"이건 사령인가...어찌하여 이런 강력한 원혼이...."

족장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 지팡이는 이대로 봉인에 풀려나선 안 되는 것이었다.

"당장 이것을- 으어어어억!"

크아아아아아악!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던 지팡이를 쥔 채로 족장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에 신음하기 시작했다.

"안…돼...."

붉게 물들어 버린 눈동자가 족장 근처에 있던 부족원들을 보았다.

"크아아아악!"

"카라락!"

지팡이에서 뿜어 나온 붉은 마력이 리자드맨들을 옥죄었다.

"나의 부족원들이여…나의 충실한 부하가 되어라...."

이지를 잃어버린 듯한 눈동자에는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어떠한 총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더욱 강력한 주술사가 되었다."

그의 입가엔 지금까지와는 다른 비릿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또다시 바뀌는 배경.

조금 전 족장과 싸우던 필드와 매우 흡사한 장소. 질퍽한 늪이 사방에 깔려 있는 늪지대에 모여 있는 부족원들.

붉은 마력을 한껏 내뿜는 족장 앞에 수백 마리의 리자드맨들이 이지를 잃은 채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리자드맨 대군 앞에는 다른 종족들의 대군이 대열을 선 채 대치하고 있었다.

"나의 아이들이여… 모두 죽여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괴수들이 죽어 나갔다. 이지를 잃고 주술의 힘으로 강력해진 리자드맨들은 그 수가 압도적으로 적었음에도 적들을 도륙했다.

리자드맨 부족의 승리로 점점 기울어지던 시점에 또 하나의 괴수가 나타났다.

검은색 창을 든 리자드맨.

등에 작은 날개를 달고 있는 리자드맨의 등장과 동시에 순식간에 전쟁의 판국이 뒤집어졌다.

녀석의 능력이 종족들을 강하게 만들었고 다친 이들을 회복시켰으며 홀로 족장의 리자드맨들을 도륙 내기까지 했다.

"네 녀석은…사도인가...."

신의 힘을 받은 신의 하수인들.

사도로 추정되는 리자드맨이 창을 휘두르며 말했다.

"그렇다, 너희는 성역을 침범했다. 그러니 죽어라."

"너희의 것이 아니다, 여기는 나의-."

사도의 흑창이 빛의 속도로 쇄도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족장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허억...."

리자드맨 족장이 창을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입에서 핏물이 계속해서 역류해 올라왔다.

"이곳은 '시작의 성역'이 될 것이다."

"그…게…무…슨...."

"너는 알 것 없다. 조용히 그분들의 개가 되어라."

푹-

신의 사도가 놈의 머리를 꿰뚫고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를 쥐고 일어나며 과거가 끝났다.

이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죽어 버린 리자드맨 족장을 보았다.

과거를 보며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족장은 실존했던 리자드맨이었으며, 신의 사도는 그런 족장을 죽이고 탑의 인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녀석의 죽음에는 신이 관계되었다는 것. 비록 직접 개입하지 않았지만 사도의 등장은 그것을 짐작하게 했다.

"너도 무언가 억울한 부분이 있겠지."

그 지팡이의 정체는 무엇이고 왜 하필 이 녀석을 끌어들인 것일까?

이신은 리자드맨 족장이 우연히 그 동굴에 가게 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 또한 신들의 의도가 담겨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역시...."

족장이 들고 있던 지팡이를 녀석의 손에서 빼내었다. 평범한 지팡이일 뿐이었다.

만약 과거에 나온 그 지팡이를 족장이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이기지 못했을 테지.

"3층 대기실로 가겠어."

그 말과 동시에 빛에 휩싸이며 장소가 이동되었다.

3층 대기실로 이동한 이신은 곧장 몸을 숨기고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탑을 오르지 않은 이들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에게 시간을 빼앗길 때가 아니었다.

이신은 보상으로 받은 것들을 보았다.

"허...."

스킬을 확인한 이신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25화

3층 

[사령술(邪靈術)]

사령술은 술사의 정신을 오염시킬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 지배력에 따라 사령을 더욱 쉽게 다룰 수 있습니다.

# 사령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 사령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 흡수한 사령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사령 폭발]

이미 한 번 죽은 영혼을 폭발시킬 생각을 하시다니? 당신은 정말... 대단하세요!

# 사령을 폭발시켜 상대의 영혼에 강한 충격을 입힙니다. 폭발한 사령은 소멸합니다.

# 사령의 사기(邪氣)에 비례하여 위력과 마력 소모량이 커집니다.

이신은 사령술을 이곳에서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은 그저 편법에 불과한 주술이었으니까.

더구나 전생에서도 사령술을 제대로 사용하는 놈은 딱 한 명밖에 보지 못했을 정도로 다루기 힘든 능력이었다.

단지 영혼을 보고 교감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사악한 영혼이기에 다루기가 훨씬 어려웠다. 오히려 다루면 다룰수록 사령술사들은 정신이 오염된다고 했다.

애초에 스킬 설명에도 써 있으니 확실하다.

그럼에도 사령술은 포기하지 못할 정도로 메리트가 있었다.

이신은 이 능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상태창.'

[이신]

# 직업: 네크로맨서

# 상태: 봉인 – 해금 2단계(상세*)

# 칭호: 상세*

# 체력: 12830/12830

# 마력: 114852/114852

# 힘: 36(+47)

# 민첩: 33(+47)

# 지력: 115(+65)

# 지배력: 26

# 신격: 1

# 혼돈: 1

# 스킬: 상세*

처음 기억을 되찾았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한 스탯.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이신....'

진 이브리엄이 아닌, 이신이라는 이름.

이제는 시스템에서도 그를 이신으로 인식했다.

거의 1년 반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의 이름을 찾은 것이다.

'이제야 진짜 시작하는 느낌이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이신은 관리자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곳곳에 보이는 푸른 오크들과 다르게 온몸이 검은색인 오크가 보였다.

이곳의 관리자인 검은 오크가 분명했다.

이신은 지체 없이 녀석에게 걸어갔다.

"3층으로 보내 줘."

관리자는 다짜고짜 찾아와 말하는 그를 멍하니 보았다.

"췩! 성질이 급하구만. 알겠다. 보내 주지."

관리자는 귀찮다는 듯한 손짓과 함께 이신을 3층으로 이동시켰다.

[오크들을 막으십시오.]

[유르테인 수성전에 최대한 많은 기여를 하십시오.]

이신은 거대한 성벽 위로 이동했다.

눈앞에는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고 그곳을 전부 뒤덮는 수백만의 오크들이 이 성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부우우우우우우―!

전쟁을 알리는 고동 소리가 들려온다.

성채에는 이미 저 오크 대군을 막을 만큼 수많은 병사들이 즐비해 있었고 수성을 위한 준비가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

또한 지형이 위로 솟구쳐 있는 성채를 뚫어야 하기 때문에 공성 장비가 딱히 없는 오크들은 절대 이곳을 뚫을 수 없다.

3층의 도전자들은 그저 이 전쟁에서 얼마나 더 많은 기여를 하는지가 중요할 뿐, 전쟁의 승패 따위는 의미 없었다. 어차피 유르테인이 승리할 테니.

"어이, 너 신병이야?"

성벽 위에 이신과 같이 있던 병사 하나가 멍하니 오크들을 바라보던 그를 불렀다.

"예."

"그럼 정신 바짝 차리고 있으라고! 아무리 저 오크 녀석들이 이곳을 뚫을 수 없다고 해도 신병이 벌써 그렇게 빠져 있으면 되겠나!"

"알겠습니다."

이신은 대강 대답을 해 주며 다가오는 오크들을 보았다.

그런 그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그 병사가 다시 그를 불렀다.

"야! 너 특기가 뭐야? 화살은 쏠 수 있어? 엉?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어떻게 이런 새끼가 들어왔지? 오크 하나 못 잡고 나자빠질 것 같은데?"

"화살은 잘 쏠 수 있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병사가 의외라는 듯 말한다.

"그래? 하, 얼마나 잘하나 보자."

"예."

방금 이신에게 말을 건 병사도, 주변 다른 병사들도 당연히 이기는 전투라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눈빛에는 분명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부우우우우우우우―!

어느새 오크들이 성채의 공격 사정거리까지 다가왔고,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성채에서 오크들을 향한 공격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성벽 앞에 무수히 많은 오크들의 시체가 쌓여 갔다.

그와 동시에 병사들의 긴장감도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어이 신입! 멍때리지 말고 빨리 화살이라도 쏴! 등에 달고 있는 화살은 장식이야!"

"그러죠."

이신은 어깨에 걸쳐 매고 있던 활을 들어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대에 보이지 않는 마력이 스며들며 부드럽게 시위가 당겨지고, 마력으로 강화된 근력이 팔의 근육을 터질 듯 부풀렸다.

끼이익-

따로 조준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대충 어디다 쏘아도 사방이 오크들 천지였으니.

파앙―!

화살이 허공을 격하며 파공음을 자아내고.

"뭐, 뭐야?"

기이한 각도로 떨어지던 화살이 언덕 지형을 따라 다시 한번 방향을 바꾸었다.

퍼퍼퍼퍼퍼퍽!

관통력이 극대화된 화살은 수십 마리의 오크 가죽을 뚫고 지나간 다음에서야 그 움직임을 멈췄다.

보우 마스터가 활을 쏜다면 이런 느낌일까?

이신이 쏜 활을 본 병사는 벙찐 얼굴로 조금 전 그 화살이 지나간 곳을 보았다.

단 한 발로 일직선상의 오크들이 대형을 잃고 무너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신기(神技).

'설마 진짜로 성주가 비밀리에 고용한 보우 마스터인가?'

조금 전 자신이 그에게 했던 미친 소리들이 떠올랐다.

'난 죽었다.'

이신은 그런 병사는 안중에도 없는 듯 다시 한번 화살을 활에 걸며 시위를 당겼다.

조금 전에는 관통력을 극대화했다면 이번엔 불 속성과 바람 속성을 융합했다. 이신의 마력이 화살에 깃들었다.

파앙―!

또다시 울리는 파공음이 병사의 귀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화살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오크들을 향해 날아갔다.

화살은 미친 듯한 속도로 날아가 적 오크들의 진형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콰과과과광!

화살이 땅에 박히자 지면의 반경 수십 미터가 화마에 휩쓸렸다.

단 한 발의 화살이 만들어 낸 참상.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화살 한 발로도 수십, 수백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거센 파공음을 발산하며 화살 한 발이 또 쏘아졌다.

콰아앙―!

이게 도대체 대포를 쏜 건지, 화살을 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굉음이 전장을 울렸다.

세 번째 화살이 날아가고부터는 성벽 위에서 오크들을 막던 병사들까지 순간적으로 전투를 멈추고 이신을 보았다.

성채 내부가 한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자, 자네…아니, 보우 마스터님...이십니까?"

이 대륙에 단 세 명밖에 없다는 보우 마스터.

그중 하나가 이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너무 젊기는 했지만 이런 천외천의 인간들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조금 전 훈수를 두던 병사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이신에게 말했다.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네.'

이신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무심한 눈으로 다음 마법을 계산하고 있었다.

화살을 잘 쏘는 것은 이쯤 하면 충분히 보여줬겠지.

역시나 활은 자신과 맞지 않았다.

활을 땅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허공에 마법진을 구축했다.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는 커다란 마법진.

느껴지는 마력의 파동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조금 전 화살 한 방에 나가떨어진 오크들도 겁에 질려 몸을 움찔했다.

그때 다급하게 성벽 근처로 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병사들과 다르게 화려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누군가를 호위하는 모양새였고 그 호위 기사 중 하나가 성벽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신은 그 모습을 못 본 척 무시하며 계속해서 술식을 계산했다.

또 시답잖은 제안이나 하러 오는 것일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에 빨리 하나라도 더 적을 죽이는 게 이득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마법사님. 저는 이곳 유르테인 백작령의 기사단장인 벨리아 데하루트입니다."

"...."

이미 마법을 발현시키는데 집중한 상태였다. 기사는 그 모습에 자신이 무시당한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마법사의 마법이 일으킬 위용을 기대하며 전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푸르던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밝았던 전장은 밤이라도 된 듯 어두워졌다.

다가올 마법에 오크들만 덜덜 떨 뿐 아니라 일변하는 공기에 아군 측인 인간들도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무거운 공기가 전장을 짓눌렀다.

전장에 가득 찬 공포와 두려움이 이신의 마력으로 치환되며 그 힘을 더해 갔다.

'그래...죽음 속성이란 이런 거지.'

해금 2단계가 되며 얻은 [검은 마력]으로 인해 알게 된 사실.

'죽음 속성은 죽음에 관련된 모든 것을 먹고 자란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전장은 죽음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흑뢰(黑雷)]

쿠구구구구궁!!

시꺼먼 벼락이 오크들이 모여 있는 곳을 내리쳤다.

병사들의 시선에 검은 한 줄기 벼락이 마치 세상을 반으로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검은 벼락은 땅을 타고 퍼져 나가며 오크들을 감전시켰다.

본래의 오크라면 감전 따위는 금방 털고 일어날 놈들이었지만 감전당한 오크들은 모두 머리를 싸매며 땅을 구르고 있었다.

"뭐, 뭐지?"

"왜 저러는 거야?"

"저 마법이 떨어진 곳 근처에 있는 놈들도 아니고...저 멀리에 있는 놈들은 왜...."

병사들은 이 알 수 없는 현상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죽음 속성은 공포를 증폭시킨다.'

조금이라도 저 흑뢰에 닿은 녀석들은 그 죽음이라는 공포에 물들어 저렇게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검게 물든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벼락.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벌처럼 보였다.

감히 인간에게 대적한 오크들에게 내리는 신의 징벌.

이신의 마법을 보던 병사들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말도 안 돼...."

벨리아는 눈앞의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며 이신을 존경의 눈빛으로 보았다.

생전 보지도, 들어 본 적조차 없는 마법.

마법 한 방에 그 많던 오크들의 상당수를 쓸어버렸다. 물론,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저 많은 놈들을 잠깐이라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가 다시 전장을 보았다.

전장에 있는 오크들은 이미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놈들은 더 이상 전쟁을 이어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도사...."

벨리아는 그가 마도사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아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마법이 끝나고도 그는 거친 숨소리 하나 내뱉지 않고 있었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

어쩌면 대마법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니지. 대마법사는 제국에 단 한 분밖에 계시지 않아. 이분이 대마법사이실 리가 없다.'

이신은 냉담한 눈빛으로 벨리아를 보았다.

쿠오오오오오오오―!

그때 저 멀리 오크들의 진형에서 이 성벽까지 광포한 괴성이 들려왔다.

한참이나 먼 거리에서도 그 형체가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거대한 덩치.

원래라면 이 3층의 전쟁에서 녀석은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놈은 오크들이 전멸하는 순간까지도 움직이지 않다가 전쟁이 끝나면 그대로 사라진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괴성을 내지른 것이다.

"저토록 위압감이 강하다니...."

벨리아가 검은 오크를 보며 기겁한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마도사님, 아니, 혹시 대마법사…님이십니까?"

벨리아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아닙니다."

"아…그렇군요.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이곳 유르테인 백작령의 기사단장인 벨리아 데하루트입니다."

"예."

"도대체 마도사님 정도 되시는 분이 왜 이곳에서 오크들을 막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저 검은 오크를 잡으러 오신 겁니까?"

"...확인하러 왔을 뿐입니다."

"아, 그렇다면 저희가 정식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발 저 오크를 막아 주십시오."

벨리아가 허리를 숙이며 이신에게 부탁했다.

[히든 스테이지 – 검은 오크 게른]

[푸른색 피부를 가진 오크들 사이에서 검은 피부를 가진 오크 게른은 불길함의 상징으로 오크들에게서 배척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게른은 그럼에도 오크들을 버리지 못하였고 결국 힘으로 오크들의 왕인 오크 로드를 죽이고 자신이 오크 로드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분을 오크들과 인간들 모두에게 풀기 위해 유르테인 성채에 공격을 강행했습니다. 오크가 죽어 감에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던 게른이 당신의 대단한 위용에 호승심이 생겨 당신과 싸우고 싶어 합니다. 게른을 죽이고 오크와 유르테인 성채를 지키십시오.]

"병사들은 저 오크의 힘을 모릅니다. 저희 성채의 힘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저희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 생각됩니다. 사례라면 얼마든지 할 테니 저 오크를 막아 주십시오."

"저 혼자 저 녀석을 막으라는 겁니까?"

"저희는 마도사님이 마침 이곳에 있던 것을 신의 계시라 생각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신의 계시라는 말에 이신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이신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에 있는 검은 오크 게른을 보았다.

놈은 자신이 들고 있던 도끼를 번쩍 들며 거센 포효를 내뿜었다. 그러자, 오크들의 떨어졌던 사기가 미친 듯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막아! 오크들이 달라붙는다!"

"활을 쏴! 다가오지 못하게 해라!"

"마법사들은 가장 화력이 높은 마법을 시전해! 이미 오크들의 전력은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우리 진형엔 마도사님이 계신다! 저 검은 오크는 마도사님과 유르테인 기사단이 막을 것이다! 그러니 겁먹지 마라!"

우와아아아아!

우오오오오오!

"이긴다!"

"승리한다!"

"유르테인을 위하여!"

병사들의 사기가 다시 급격하게 올라갔다.

유르테인에는 역시나 유능한 지휘관들이 많았다.

"기사단이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말만 해 주시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어 녀석의 시선이라도 끌어야 한다면-"

"마력 회복 포션이나 가지고 오십시오."

"예?"

"있는 거 다 가져오세요. 지금 당장!"

"아, 알겠습니다!"

벨리아가 다급하게 밑에 있는 병사들에게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이신은 눈앞에 참혹한 전쟁의 모습을 보았다.

오크들은 죽음을 도외시하고 동료들의 시체를 짓밟아 가며 성벽을 오르려 했다. 성벽 밑에는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오크들이 죽어 시체와 피육이 되어 있었고 그것들은 다른 오크들이 성벽을 오르기 위한 발판이 되었다.

"여기 물약-."

벨리아가 물약을 그에게 가져왔을 때 게른이 움직였다.

쿠웅.

놈이 지면을 박차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진동했다.

콰앙―!

놈의 주먹과 이신의 방어 마법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커다란 굉음을 만들어 냈다.

쿠오오오오오오!

성벽 근처까지 순식간에 다가온 놈이 괴성을 내지르고 그 굉음에 병사들이 귀를 막으며 쓰러진다.

단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위압감.

성벽 위에 있던 대부분의 병사들이 그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방금 이신의 방어 마법이 아니었다면 성벽이 한 방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들은 자신들의 무력감을 절절히 느꼈다.

"크윽!"

물약을 건네주던 기사단장이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어느새 검을 뽑고 게른을 노려보며 서 있었지만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게른의 피어(Fear)에 나름대로 저항하고 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병사들을 추스르세요."

"...알겠습니다."

벨리아는 자신의 무력감에 이를 악물며 병사들에게 뛰어갔다.

이신은 다시 게른을 보았다.

놈 또한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이신을 보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허, 비웃고 있어?"

그것을 본 이신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제2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