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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화

프롤로그

탑을 올랐다.

100층에 도달하면 이런 절망 속으로 우리들을 밀어 넣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루도 쉬지 않았고 잠시도 놀지 않았으며 1초도 마음이 여유로운 적이 없었다.

끊임없이 탑을 올라야 했다.

나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그렇게 난 인류 최초로 100층에 도달했다.

[드디어 이곳에 도달했구나.]

"제가 이제 무얼 해야 합니까?"

[네가 할 것은 없다. 이제 우리의 세례를 받으라.]

"세례? 세례를 받으면 무엇이 달라지는 겁니까?"

[우리들의 인정을 받고 사도가 될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며 신들을 노려보았다.

흐릿한 형체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기운.

100층까지 올라왔음에도 놈들의 본체는 볼 수 없었다.

"고작… 고작 당신들의 하수인이나 시키려고 우리를 이 탑 안으로 부른 겁니까!"

나는 절망 속에서 고통스럽게 외쳤다.

탑을 오르면서 친구를 잃고, 동료를 잃고, 가족마저 잃어버렸다.

100층에 오르면 탑을 나갈 수 있을 거라, 사람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수인이 아니다. 100층에 올라온 자는 신들의 인정을 받을 만한 존재. 우리와 함께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좁은 탑을 나가서 넓은 세상을 보살피리라.]

"...지구로는 가지 못하는 겁니까?"

[그렇다.]

단호한 신의 음성에 절망감을 지울 수 없었다.

탑의 100층까지 올라가며 끊임없이 단련한 끝에 대마법사라는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저들의 하수인이나 하자고 여기까지 오른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난 당신들을 죽이고 탑을 나갈 겁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지팡이에 나의 마력을 새겼다.

[어리석은.]

하나의 세상을 집어삼킬 만한 거대한 힘의 충돌이 연달아 일어난다.

주변 풍경이 뒤바뀌고 세상이 뒤집힐 정도의 여파.

그 치열한 전투의 결말은 처참했다.

쿨럭!

영롱한 빛을 내뿜던 지팡이는 부서지고 각종 마법이 깃든 로브는 갈가리 찢어졌다.

몸은 넝마가 되었고 울컥 올라오는 핏물은 목구멍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꾼다면 이 무례를 넘어가 주겠다.]

신들의 마지막 말을 들은 나는 더욱 이가 갈렸다.

그들은 나의 힘을 직접 느끼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자 그들의 형상이 보였다.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듯했지만, 아까와 같은 위압감은 사라졌고 존재감은 옅어졌다.

'너희들도 결국 인간과 다를 바 없구나.'

신은 도저히 넘보지 못할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도 충분한 수련을 거친다면 신을 죽일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저 권능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았더라면.

[끝까지 어리석구나. 인간이란 그렇기에 불완전한 것이다.]

나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게 끝이었다.

[끝이라 생각하느냐? 신에게 반한 대가를 치르리라.]

[평생을 절망 속에서 살고, 너 자신의 미개함을 느끼며 살거라.]

미지의 힘이 나를 옭아맨다.

거대한 격류에 휩쓸리듯 나의 존재감이 지워져 갔다.

[영원히 인간들에게 토벌당하며 기억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함만을 느끼며 살아가 보거라.]

[너의 옛 동료들과 너의 친구들, 너의 가족들에게 무참히 죽어 가거라.]

[영원토록.]

그렇게 100층에 올라간 나, 이신이란 존재는 사라졌다.

* * *

1층 대기실.

광활한 대지와 높게 솟아오른 산, 그 반대편에 펼쳐진 암석 지대와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그러나 그 외에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용! 저는 이곳의 관리자인 토잉입니당!"

귀여운 토끼 귀를 앙증맞게 펄럭이는 토잉이 대기실에 나타난 도전자들을 맞이했다.

"1층에 도전하시겠어용?"

1층.

두 사람의 도전자가 동굴 속으로 소환되었다.

"여기가 1층인가?"

상당한 크기의 동굴 입구.

뒤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앞으로는 어두운 동굴의 통로가 보인다.

까아아악-

날카롭게 울리는 새 소리에 두 도전자가 절벽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힉! 저게 뭐야?"

까마득한 높이의 절벽과 그 근처를 날아다니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새.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돋게 만드는 그 새가 차가운 입김을 내뿜으며 날아다니고 있다.

두 도전자는 그 새에게 보일까, 허겁지겁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 새가 우리 앞에서 숨만 쉬어도 죽겠다. 빨리 들어가자."

"그, 그래."

1층의 일반 괴수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급 스켈레톤, 난쟁이 고블린, 시궁창 쥐.

조잡한 검 하나만 있어도 쉽게 잡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여기가 보스인가?"

"아무리 1층이라 해도 보스인데 좀 떨리긴 하네?"

"뭘 떨어? 약해 빠졌다고 이미 소문난 보스인데, 그냥 들어가자."

보스 방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너희, 들은, 누구냐."

뚝뚝 끊기는 음성.

"나는... 누구지?"

오락가락하는 정신.

"나는... 신이다...."

자신을 신이라 지칭하는 미친놈.

1층의 보스는 저주받아 나약해진 네크로맨서였다. 극지방에 은거하며 자신의 저주를 풀기 위한 연구를 하다 끝끝내 실패하고 정신이 분열해 버린.

주변에 그가 연구하던 자료들과 시약들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도전자들은 그 글씨들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신은 무슨, 미친놈인가?"

"빨리 죽이고 가자."

"그래."

권태로운 그의 눈동자가 그들을 훑었다.

순간 그 눈동자를 본 도전자들은 움찔했지만 그뿐이었다.

[다크 에로우(Dark arrow)]

허공에 마력으로 일구어진 짙은 보랏빛 화살이 나타나 그들에게 날아갔다.

맞으면 제법 아프겠지만 느려 터진 다크 에로우를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죽어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마법만 사용하는 네크로맨서를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쓰는 마법도 다크 에로우뿐.

"커…헉!"

피를 토하는 네크로맨서를 보는 도전자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진짜 인간 같은 반응, 마치 자신들이 진짜 살아 있는 인간을 죽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분 더럽네."

"가짜일 뿐이야.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1층의 보스, 정신 나간 네크로맨서는 죽었다.

"어서오세용! 도전자 여러분! 저는 토잉입니당!"

토잉이 새로운 1층의 도전자들을 맞이했다.

"여기가 1층의 보스 방이야?"

도전자들이 1층의 보스 방에 도달했다.

"너희, 들은, 누구냐?"

"누구긴 도전자다!"

"나는...누…커-억!"

1층의 네크로맨서는 그렇게 또 죽었다.

"어서오세용! 저는 토잉-."

"너희, 들은, 누구-."

"몰라도 돼!"

"커-헉!"

네크로맨서는 대사도 못 쳐 보고 죽었다

"안녕-"

"너희-"

"켁!"

또 죽었다.

"컥!"

또.

"커-"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또.

"...."

말도 못 해 보고 또 죽었다.

그렇게 죽고.

죽고.

계속 죽었다.

제2화

불망각의 구

어느 날 1층에 평소와 같은 새로운 도전자들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용! 저는 토-."

"닥치고 밧줄 내놔. 아, 최하급 포션도."

다짜고짜 아이템을 내놓으라는 도전자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기에 토잉은 자연스럽게 포인트를 받고 그것들을 넘겨주었다.

"1층으로 간다."

동굴 속으로 들어온 둘은 보스 방 앞에 도달해 밧줄을 꺼내 들었다.

"너희, 들은, 누구냐?"

두 도전자를 본 보스는 평소와 같은 말을 뱉었다.

듣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의 보스를 본 두 도전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 새끼는 어쩜 대사가 이리 똑같냐? 인공 지능이 이것밖에 안 되나?"

"저러니 약하지."

"영상 켰지?"

"그래, 지금은 커뮤니티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2층부터 사용할 수 있다니까. 이렇게 공략한 놈은 우리밖에 없을 거야."

"포인트 좀 빨겠지?"

이곳 탑의 도전자들은 상점에서 포인트를 주고 영상 촬영이 가능했고 영상을 올려 조회 수가 쌓이면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신이다...."

"신은 무슨, 얌전히 우리나 따라와!"

그들은 순식간에 보스를 때려눕혀 밧줄로 포박했다.

"뭐 하는, 것이냐."

"안 죽게 조심해서 묶어! 이놈 워낙 허약해서 잘못하면 끌고 가다 죽는다고."

"알고 있어!"

보스는 약화 될 때로 약해진 신체 탓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밧줄에 묶인 상태로 놈들에게 끌려갔다.

"크허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이냐."

"오! 새로운 대사!"

"신기한데? 어디로 가긴 지옥이다! 인마!"

그들은 혹시 몰라 미리 사 놓은 최하급 회복 물약까지 보스에게 먹이고는 머리를 한 대 때리기까지 했다.

"도대체, 나를...."

"시끄러워 인마!"

퍽!

머리를 거세게 때린 남자가 재밌다는 듯 낄낄 웃으며 절벽이 있는 곳까지 보스를 끌고 갔다.

"자! 여러분 과연 보스가 절벽에 떨어져 죽어도 1층이 클리어될까요? 저희가 한 번 해 보겠습니다!"

허공에 대고 말을 내뱉은 그가 밧줄을 끌고 와 보스를 그대로 절벽으로 내동댕이쳤다.

"으어어어...."

점점 희미해지는 보스의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 울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둘은 낄낄거리며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까아아아악―

그때 절벽 밑에서 소름 끼치는 괴성이 들려왔다.

밑에 깔린 새하얀 안개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괴성은 이곳에서 날아다니는 빙조(氷鳥)의 울음소리가 분명했다.

"이야! 설마! 빙조에게 잡아먹혀서 죽는 건가요?"

"이런 건 저희도 생각 못 했는데 말이죠! 하하핫!"

그들이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

빙조의 발톱에 채어진 보스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의 체력은 회복 물약 덕에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지만, 점점 바닥을 향해 갔다.

점점 흐릿해지는 보스의 시야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형체가 보였다.

마치 이쪽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모습.

까아아악―

빙조는 그를 바다 위로 던져 버리고는 그 형체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풍덩-!

켁켁!

숨은 쉬어지지 않고 몸은 얼어 버릴 것만 같았다.

너무나 차가운 온도에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보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계속해서 가라앉았다.

생각보다 그리 깊지 않은 바닷속, 그는 자신의 귀를 간질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우우웅-

빛조차 없는 바닷속에서는 거의 보기 힘들 정도로 시꺼먼 구체가 그의 눈에 보였다.

보랏빛을 발하는 구체가 마치 그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미 체력은 한계에 도달했고 이제 몇 초 뒤면 익사해 죽기 직전의 상태.

본능인지 발악인지.

보스는 손을 뻗어 그 시커먼 구체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갑자기 구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하며, 뭉쳐 있던 액체가 퍼지듯 구체의 보랏빛 에너지들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체력이 다 떨어진 보스는 그렇게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 * *

"어서오세용! 저는 1층 대기실의 안내자인 토잉이예용!"

깡충깡충 뛰며 토끼 귀를 앞뒤로 흔드는 토잉의 모습은 매우 깜찍했다.

"와아! 너무 귀여워!"

"아아앙! 아파아-."

토잉을 꽉 껴안은 여자가 토잉을 놓아주었다.

"다섯 분이 한꺼번에 도전하실 건가용?"

"1층에 입장하는데 인원 제한이라도 있어?"

여자가 토잉과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아니용!"

"그렇구나, 토잉은 그러면 다른 층에는 없는 거야?"

"넹! 저는 1층 대기실의 관리자이기 때문이죵!"

토잉의 말에 여자와 뒤에 있는 다른 이들까지 괜스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도 토잉을 보며 귀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토잉아, 근데 도전자들이 탑에 안 오르고 이곳에 살 수도 있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물었다.

"그럼용! 이곳은 탑을 오르는 모든 도전자들이 본격적으로 탑을 등반하기 전에 쉴 수 있게 만들어진 공간이에용!"

"그렇군."

"그쪽은 탑 안 오르게요?"

"아니, 그냥 물어본 거예요."

박혜원과 지은주 두 사람만 서로 아는 사이였고 나머지 셋은 서로 처음 보는 사이였다.

그들은 서로 통성명하고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이대가 모두 비슷해서 그런지 서로 말을 놓으며 금방 친해졌다.

"이제 탑에 오르자."

"좋아, 토잉아 우리를 보내 줘."

"넹!"

토잉이 손짓하자 그들은 어느새 극지방의 어느 동굴 속에 들어와 있었다.

"와, 신기하다!"

"은주야, 너는 마법사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 그래도 무기 하나는 있어야 될 것 같아서...."

그녀는 언제 구매했는지 손에 자그마한 단검 하나를 들고 있었다.

"기본 강타 스킬만 사용해도 충분할 텐데."

백현이 포인트가 아깝다는 듯 말했고 은주는 괜히 뻘쭘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에이! 얼마 안 하는데 뭐. 빨리 가기나 하자!"

1층의 일반 몬스터들은 매우 약했다.

도전자들에게 기본적으로 맨 처음 주어지는 스킬인 강타.

마력을 이용해 주먹의 위력을 강화시키는 스킬로, 몬스터들을 죽이는 데 이 스킬 한 방이면 충분했다.

"5명이라 그런지 일반 몬스터들도 그만큼 많아지네."

"그래야 경험치 손실이 줄어들지. 거, 게임 안 해 보셨나?"

박혜원이 놀리듯 강지훈에게 말했다.

"에휴, 자랑이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래도 할 거 다 하면서 했거든!"

보스 방 앞에서 티격태격하는 그들에게 긴장감이란 토끼 똥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들어가기나 하자."

강천이 그들의 티격태격을 보며 보스 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곤 생각과 다른 안쪽의 모습에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매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연구 자료들과.

"너희들은 누구지?"

툭툭 끊기지 않는 부드러운 음성하며.

"도전자들이다."

"내 연구실에는 무슨 일이지? 나를 죽이러 온 건가?"

느긋한 말투와 여유로운 분위기까지.

무언가 이상했다.

자신들이 들어왔던 정보와 확연히 달랐고, 생각했던 분위기와도 완전히 딴판이었다.

"허세가 심하네. 약골이면서."

그의 분위기에 괜히 짓눌리기 싫은 혜원이 말했다.

"약골이라... 그래, 나는 약골이지."

담담하게 자신을 약골이라 말하는 보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전혀 약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5명 모두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는 자신들이 알고 있던 그런 허섭스레기 같은 보스의 모습이 아니었다.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다섯 모두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는 것을.

'이건 정보랑 너무 다르잖아!'

강지훈은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며 긴장을 풀어내려고 노력했다.

'이게 1층의 보스란 말이야? 탑의 최약체, 고블린보다도 공략이 쉽다는 그 보스?'

강천은 그간 바깥에서 모아온 정보에 혼선이 일어남에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상정하던 약함은 이런 게 아니었다.

'진정하자, 분위기와 다르게 실상은 약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 생각은 자기 위로나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알던 정보와 다르다는 것은 무언가 틀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젠장! 나부터 간다!"

강지훈이 솔선수범을 자처하며 보스에게 돌진했다.

그 뒤를 따라 김강천과 백현이.

지은주와 박혜원이 뒤에서 이어질 상황을 대비했다.

흥미로운 눈빛을 빛내는 보스의 손끝에서 다크 에로우가 나타났다.

그 위치가 왠지 모르게 절묘했는데, 강지훈이 피하면 뒤따라오는 백현과 김강천과의 대형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우연이겠지. 강타로 맞받아치고 파고든다.'

1층 보스의 다크 에로우는 위력도 속도도 보잘것없는 걸로 유명했다.

모든 네크로맨서들의 쓰레기 마법에서 독보적 1위로 뽑히는 1층 보스의 다크 에로우.

그러나 강지훈은 다크 에로우의 선명한 마력의 곡선을 보며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휘이익-

느리기는커녕 반응도 못 하게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다크 에로우.

강지훈은 무력하게 벽으로 처박힐 뿐이었다.

"지훈아!"

김강천이 놀란 눈으로 강지훈이 날아간 곳을 보았다.

"강천이 형! 피해!"

백현의 말을 들은 김강천이 아차 싶은 얼굴로 다급히 몸을 틀려고 했지만 이미 다크 에로우는 그의 몸에 박히고 있었다.

"커헉!"

복싱 챔피언의 훅이 뱃가죽을 뚫고 들어오면 이런 느낌일까.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정신이 아찔해지며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1층의 난이도가 올라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자신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지구에선 이러한 정보는 하나도 얻을 수 없었다.

김강천이 짧은 고뇌에 빠진 사이 은주와 혜원은 겁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백현도 그새 다크 에로우에 당해 저 멀리 벽에 처박혀 있었다.

그 와중에 신기한 것은 각종 연구 자료와 시약이 있는 곳으로는 아무도 날아가지 않았다는 것.

'X발... 1층에서 죽는 건가?'

보스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자신들을 깔아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입이 열렸다.

"돌아가라. 아직 너희들은 1층을 돌파하기에 한참 부족해."

"저희를 죽이지 않으시는 건가요?"

놀란 은주가 보스에게 물었다.

"음...죽을래?"

"아, 아니요! 돌아갈게요!"

자신이 괜한 걸 물었다고 생각한 은주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래, 얼른 가라."

보스의 손짓에 여자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남자들을 부축하여 방을 나섰다.

동굴의 입구에 1층 대기실로 돌아가는 포탈이 있었다.

"강해져서 돌아와라."

보스는 자신의 방을 나서는 이들을 보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 * *

[불망각의 구]

잊혀진 신의 편린이 담긴 구슬입니다.

# 망각하지 않습니다.

네크로맨서는 여느 때처럼 동굴 안에서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고 지끈지끈한 두통이 그를 휘감았다.

"기…억...."

- 이제 100층이다.

[...우리의 하수인이 되리라.]

[어리석은.]

[끝이라 생각하느냐? 신에게 반한 대가를 치르리라.]

[평생을 절망 속에서 살고, 너 자신의 미개함을 느끼며 살거라.]

[영원히 인간들에게 토벌당하며 기억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함만을 느끼며 살아가 보거라.]

[너의 옛 동료들과 너의 친구들, 너의 가족들에게 무참히 죽어 가거라.]

[영원토록.]

"크윽...."

하나둘 기억이 떠오르며 그의 입가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꽉 깨문 입술이 찢어지고 턱 근육은 터질 듯 부풀었다.

- 너희, 들은, 누구냐.

- 나는... 누구지?

- 나는... 신이다....

정신이 분열하고 사리 분별이 안 된 그는 마치 대사가 입력된 로봇처럼 반복되는 말만 계속해서 나열했다.

- 커헉!

주먹에 짓눌리고.

- 쿨럭!

칼에 찔리고.

- 끄윽...

발에 짓밟히며.

- 으어어어....

절벽에 내동댕이쳐졌다.

덜덜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온몸이 떨렸다.

망각하지 않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수십, 수백, 수천 번이 넘게 인간들에게 죽었다.

그 모든 고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중에는 그의 옛 동료들도 있었으며 친구들도 있었고 심지어 가족도 있었다.

"우웨엑!"

먹은 것도 없었지만 속에서 올라온 위액과 침이 섞여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수많은 죽음이 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맴돌았다.

그렇다. 신에게 도전했던 자신은 맨 처음 탑이 생겨났던 그때로 돌아와 탑의 1층 보스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인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죽음에 대한 이해도가 급격히 증가합니다.]

[『칭호 - 죽음의 통찰자』를 획득합니다.]

수많은 죽음을 경험해서인가?

갑자기 칭호를 획득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죽음의…통찰자?"

정신이 없었다.

시스템이 메시지가 무언가를 알려 주었지만, 그것을 유의 깊게 볼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불망각의 구."

잊혀진 신의 편린이라.

이러한 것이 갑자기 왜 자신에게 있는 것인가.

밧줄에 묶여 절벽에 떨어질 때였다.

차가운 바닷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검은 구체.

이게 과연 진짜 우연일까?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 망각하지 않습니다.

"망각하지 않는다라...."

간단한 한 문장이었지만 그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신들의 저주와 탑의 시스템을 넘어선 것.

그리고 이것은 스킬이 되어 내게 귀속되어 있었다.

어찌 되었든 불망각의 구를 얻어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놈들이 나를 밧줄로 묶고 끌고 가서 절벽에 내동댕이쳐 준 덕이었다.

"전화위복…인가?"

결과는 좋았지만, 그렇다고 놈들이 내게 가졌던 악의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당한 것은 갚아 주어야겠지.

탑을 등반하게 된다면 언젠간 마주치지 않겠나.

이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아도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까득-

이가 갈렸다.

지금 내 분노가 향하는 방향은 고작 이 아래층의 인간들이 아닌 탑의 가장 위를 향해야 했다.

기다려라.

다시 한번 더 탑에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너희를 그곳에서 끌어내려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

제3화

각성

1층 대기실에 빛이 내려오며 도전자들이 나타났다.

"잉?"

토잉은 조금 전 자신이 보낸 도전자들이 다시 돌아온 것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다시 돌아온 거예용?"

토잉이 물었다.

"우리 1층에 보낸 거 맞아?"

혜원이 되물었다.

"잉? 그게 무슨 소리인가용? 당연히 1층으로 보내 드렸습니당!"

"근데 왜...."

혜원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우리 1층 보스한테 깨지고 온 거야."

"히잉?"

지훈의 말에, 귀를 펄럭이며 토잉이 그들을 보았다.

"진짜용?"

5명의 얼굴은 침울했고 그 모습에 거짓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뎅..."

다섯은 토잉의 반응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뭐 바뀐 게 없는 건가?"

"저게 원래 난이도라고? 저 난이도를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깨?"

"1층의 뭐가 바뀌었으면 토잉이가 알았겠지. 근데 아무것도 모르는 거 같잖아."

강지훈의 말에 나머지 넷이 멀뚱멀뚱 서 있는 토잉을 보았다.

누가 보아도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진짠가? 그럼 진짜 뭐지? 아니! 우리가 그럼 다 1층도 못 깨는 머저리들이라고?"

박혜원이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아무래도 이상해. 우선 다음 도전자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

강천의 말에 나머지 넷도 동의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어떡해? 진짜 1층도 못 깨고 여기서 살아야 되는 거 아니야?"

"혹시 버그나 오류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게임도 그런 것처럼."

"흠..., 이게 게임도 아니고, 내가 보기엔 탑 안의 상황이 또 변한 게 아닐까?"

"특수 이벤트라도 생긴 건가?"

강지훈이 의문을 던졌다.

"잘 모르겠네."

다섯 명 모두 계속해서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다시 도전해 볼까?"

"그래,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도 없잖아!"

"맞아! 다음 회차 사람들이라도 오면… 어떻게 봐?"

"일단 보스가 도전자를 죽이지는 않는 것 같아. 이것도 난이도가 올라간 대신 생긴 법칙 같은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우선은 한 번 더 도전할 거면 다시 치밀하게 작전을 짜야 돼."

강천이 상황을 정리하고는 1층 보스를 잡기 위해 작전을 다시 세밀하게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들은 다시 1층에 도전했다.

일반 몬스터들은 여전히 약했고, 이미 이전에 몬스터들을 잡으며 스텟을 올려놓은 그들은 더욱 빠르게 보스 방까지 진출했다.

"자, 명심해. 끝까지 방심하지 마. 얘들아."

"당연하지."

"으… 긴장돼."

그들은 이전과 다르게 무장까지 갖춘 상태였다.

은주와 혜원은 [마력이 깃든 최하급 나뭇가지]를 강천, 지훈, 백현 셋은 모두 [조잡한 검]을 들었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그곳엔 저번과 비슷한 모습으로 보스가 의자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왔네. 호구…아니, 도전자들아."

여유로운 표정으로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고 있는 보스.

그의 대사도 저번과는 달랐다.

"망할...."

강지훈이 중얼거리며 눈앞의 보스를 보았다.

저번과 똑같았다.

이 느낌.

절대 못 깬다.

"귀찮으니까 한 번에 들어올래?"

"원래 그럴 생각이었다!"

김강천은 빠르게 시선으로 지시를 보낸 후 보스에게 달려들었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

그의 눈앞에 다크 에로우가 나타났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강천의 시야가 흐릿해지며 어두워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니 1층의 대기실이었다.

"x발...."

탑에 들어오고 그가 처음으로 욕을 내뱉었다.

* * *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마력이 50 상승합니다.]

"하…, 진짜 쥐꼬리만큼 오르네."

뭐, 이것도 도전자가 계속 쌓이면 한 번에 많이 오르겠지.

속으로 상태창을 떠올렸다.

[진 이브리엄]

# 직업: 네크로맨서

# 상태: 봉인(상세*)

# 칭호: 상세*

# 체력: 280/280

# 마력: 210/400

# 힘: 5(+2)

# 민첩: 6(+2)

# 지력: 10(+12)

# 스킬: 상세*

처참한 수준의 능력치.

그나마 칭호 덕에 지력이 많이 상승한 상태였다.

"진 이브리엄이라...."

1층의 보스이자, 이 몸 주인의 이름.

그는 어떤 사연으로 이곳에 이렇게 방치된 채 보스가 된 것일까?

이어서 칭호 목록을 보았다.

[1층 최초의 스킬 창조자]

어떻게 1층에서 마법을 창조하셨나요? 대단하시네요!

혹시 대마법사 출신?

# 지력 +10

[탑의 수호자]

1층부터 도전자들을 막아내시다니. 그대는 진정한 탑의 수호자입니다!

# 기본 스탯 +2

[죽음의 통찰자]

어떻게 죽음을 이렇게 잘 이해하고 계시는 건가요? 마치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겪어 본 것처럼.

# 죽음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 죽은 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하하...."

도전자들을 막는 인형이나 다름없는 나에게도 시스템이 들어먹을 줄이야.

"죽음의 통찰자...."

수천 번이 넘는 죽음을 떠올리고 죽음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하며 생긴 칭호.

죽음을 꿰뚫어 본다는 것이 어떤 능력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죽은 자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능력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흐어어어어어―

괴기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유영하는 영혼들.

그들이 내게 보였다.

문제는 아무리 말을 걸고 다가가 보아도 아무런 반응도 없다는 것.

겉으로 보기에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혼(魂)과 격(格)이 많이 망가져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저들을 저렇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저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저들은 왜 이런 곳에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인가?

아직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쯧."

마력을 움직였다.

네크로맨서 특유의 그 끈적한 마력이 무언가에 걸린 듯 툭툭 막히고 끊어졌다.

전생에서는 단순 정신이 분열되어 그렇게 망가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몸 내부의 마력혈과 마력이 흐르는 길이 모두 망가져 있었다.

'봉인된 상태 때문인가?'

봉인의 상세 정보를 보았다.

[신체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해금됩니다.]

# 해금 1단계: 마력 등급 Lv.1

그가 왜 그런 비효율의 극치에 쓰레기 같은 다크 에로우만 사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신체가 저주로 인해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정신까지 분열한 상태였으니 말 다 했지.

다크 에로우의 술식 배열을 바꾸고 효율성을 극대화해서 지금의 몸 상태로도 쓸 수 있게 바꾸었지만, 그럼에도 한계가 명확했다.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신체의 봉인을 해금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력 등급을 올려야 하는데, [마력 등급 Lv.1]의 조건은 마력량 5000.

그전까지는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라곤 흑마법의 기초 마법인 [다크 에로우], 무 속성 기초 마법인 [매직 미사일] 정도가 전부다.

지금이야 이 정도 수준의 마법으로도 쉽게 도전자들을 처리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도전자들이 모이게 되면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더욱 압도적인 격차를 벌려 놓아야 한다.

다행히 마력량은 도전자들을 막으며 올릴 수 있다.

마력 등급이 Lv.1에 오른다면 여유가 생길 테니 최대한 저 밑의 도전자들이 더 많이 덤벼들게 만들어야 한다.

혹여 담합해서 저들이 포인트를 모아 고성능 아이템이라도 사 들고 오면 그땐 정말 위험할지도 모른다.

"하아...."

입 밖으로 빠져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킨 뒤, 나를 심연 속에서 꺼내 준 스킬을 보았다.

[불망각의 구]

이것은 어떠한 것도 망각하지 않는다는 효과만 있을 뿐 그 어떤 다른 부가적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내게 필요한 효과였다.

인류 최초로 100층을 돌파한 나의 기억.

그 과정에서 얻었던 수많은 지식들, 대마법사가 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내 마법들.

그 모든 것이 떠올랐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탑에 들어오기 전 나의 기억까지. 모든 것이 머리에 선명했다.

4살 때 길 가다 바닥에서 동전을 주웠던 것까지 전부 또렷하게 기억났다.

"하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상태창에는 이신이라는 이름 대신 진 이브리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그간 1층 보스가 되어 나를 죽인 도전자들의 틈바구니에, 내가 알고 있는 과거의 이신은 없었다.

원래라면 이미 이신이라는 인간이 탑을 올랐어야 하는데도.

그렇다면 이 세상엔 이신이라는 존재는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이신이라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던 세상인 것일까?

모르겠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시선을 돌리니 연구 자료와 각종 시약들이 보였다.

이건 분명 진 이브리엄이 생전에 정신이 멀쩡할 때 사용하던 연구 자료가 틀림없었다.

진 이브리엄이라는 네크로맨서는 치매에 걸린 노인과 같은 상태였다.

그는 언제부터 그런 상태였던 것인가? 적어도 탑이 생겨났을 때는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연구 자료를 보면 처음부터 심각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연구 자료를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자료들을 정리해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일관성이 사라지고 있었다.

당장에 알 수 있는 것은 매우 한정적이다,

비록 일관성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남아 있는 연구 자료는 무려 초월의 격에 올랐던 네크로맨서의 것.

그 안에 담긴 가치는 값을 매기기 힘들 정도로 대단하다. 나는 그의 널브러진 연구 자료들을 차곡차곡 모아서 주변에 정리해 두었다.

현재 나는 1층의 보스가 된 상태이다.

도전자들이 탑을 본격적으로 오르기 전, 탑에 대해 적응하고 알아 가게 만들기 위한 튜토리얼의 보스 같은 존재.

그들에게 죽고 죽으며 희생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탑을 올라야 한다.

시스템적으로 현재 나는 도전자와 같은 입장을 가질 수가 없다.

탑을 오르기 위해선 1층의 보스를 죽이고 올라가야 하기에.

그러기 위해선 현재 주어진 이 굴레를 벗어던지고 도전자로서의 자격을 얻어내야 한다.

죽음과 관련된 이 능력.

초월의 격에 올랐던 네크로맨서, 진 이브리엄이 남겨 놓은 연구 자료들.

그리고 전생에 대마법사였던 나의 지식.

이것들이라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곳 1층에서의 체류가 장기화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100층까지 도달하여 신들에게 다시 도전하겠다.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앞으로 절망하게 될 많은 이들을 구해내야 한다.

지금이야 탑의 50층에 도달하면 사람들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생긴다.

그렇기에 탑과 지구 사이에 교류가 생겼고 사람들이 탑을 오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순간 일방적으로 끊기게 된다.

사람들은 지금 탑… 아니, 신들에게 속고 있다.

* * *

다섯 개의 빛이 번쩍이며 1층 대기실에 다섯의 도전자가 소환되었다.

"잉? 또 왔어용?"

토잉의 물음이 그들의 불만을 폭발시켰다.

"야이 토끼 새끼야! 도대체 저걸 어떻게 깨라고 만들어 놓은 거야!"

백현이 토잉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이이이잉-."

은주와 혜원이 간신히 말린 덕에 토잉은 백현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저한테 왜 그러세용. 저도 몰라요옹."

"하아...."

백현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절망적이었다.

고작 1층에 막혀서 이렇게 될 줄이야. 이미 탑을 들어온 이상 나가지도 못한다.

그가 고개를 들어 넓은 벌판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멀리 보이는 바다와 산, 나무, 돌덩이, 풀, 숲... 그게 끝이었다.

터무니없는 1층 난이도와 척박한 1층 대기실의 환경.

앞날이 막막했다.

"현아! 걱정 마! 올라갈 수 있어!"

강지훈이 그를 부축하며 위로했다.

"그래, 오빠 그렇게 벌써 주저앉아 버리면 나중에는 어쩌려고 그래?"

다들 한 마디씩 건네며 그를 위로해 주자 백현도 조금 힘이 났다.

"알았어. 내가 너무 안일했네."

"다음 도전자가 올 때까지 여기 있어 보자.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도전하면 분명 깰 수 있을 거야!"

"그럼, 한 손으로 여럿 못 막는다 했어."

"조금만 버텨 보자."

그들에게 토잉이 다가왔다.

"대기실에서는 배고픔도 피로도 느끼지 않아용! 그러니 걱정 말고 쉬세용! 다음 도전자가 나타나면 불러줄게용!"

"하아...알았어."

그들은 이제 좀 쉬기로 마음먹으며 자리에 앉았다.

"근데... 그때까지 뭐 하고 있지?"

빛이 떨어지길 바라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백현이 중얼거렸다.

"훈련이라도 좀 하고 있을까?"

"그래, 운동으로 스탯이라도 올려놓아야겠어."

다짜고짜 일어선 백현이 주변을 뛰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강천과 지훈은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우리는 명상이라도 해야 하나?"

"상점에서 뭐 쓸 만한 게 있나 찾아보자!"

혜원과 은주도 다음 공략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하늘에서 여러 개의 빛무리가 떨어졌다.

제4화

위기

"왔다 왔어!"

다섯은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간절히 기다렸다.

이번에는 15개의 빛무리가 하늘에서 내려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대기실에 나타났다.

"어서오세용! 저는 토잉이에용! 1층 대기실의 관리자랍니당!"

그들은 토잉을 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이었고 여자들은 귀여워서 토잉을 당장이라도 납치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분들은 지난번 도전자분들이에용."

토잉이 그들을 소개해 주었고 20명의 사람들은 금세 친해졌다.

다들 하나의 커다란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에 말이 잘 통했고 먼저 온 다섯은 그래도 일주일 선배라고 그들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었다.

"에이, 거짓말하는 거지?"

"그니까요, 어떻게 1층 보스가 그렇게 강해요? 저희도 다 들은 게 있는데!"

백현은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진짜라니까요?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다가 된통 당했다구요!"

"맞아요! 어휴…. 이건 말로 백 번 해도 의미 없으니 한 번 갔다 와 보세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그들은 더 말하지도 않고 그들에게 일단 다녀오라는 말만 반복했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등 떠밀리듯 1층에 도전했다.

어차피 1층 대기실에 뭐가 있지도 않고 이곳에서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다시 1층 대기실에 빛무리가 떨어졌다.

"썅!"

그들이 돌아오고 가장 먼저 내지른 말이었다.

* * *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도전자를....]

[....]

털썩.

"하아...."

이신은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레 쳐들어온 20명의 도전자들.

일주일 전에 5명의 도전자들이 보스 방에 쳐들어온 뒤 첫 싸움이었다.

일주일간 그 5명이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다른 기본 몬스터들을 잡고 다닌 덕에 힘 안 빼고 마력량을 꽤나 모을 수 있었다.

보스 방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1층에 도전하고 그냥 나가면 도전자들을 물리친 것이 되니까.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았으면 좀 힘들었을 수도 있었겠어."

슬슬 이쯤 되면 새로운 도전자들이 들어와서 보스 방에 올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아직까지 봉인 때문에 다른 마법을 사용하기 힘들어 공격 마법이라곤 다크 에로우와 매직 미사일 정도뿐이었지만 일반인과 다름없는 도전자들을 처리하기엔 충분했다.

문제는 마력량이었는데, 도전자들이 도전에 실패할 때마다 보스의 마력량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도전자들 덕에 마력량도 제법 많이 모을 수 있었다.

"벌써 1000이 넘었네."

도전자들에게 1층의 재도전에 시간제한이 없었다면 더 빠르게 상승했을 테지만 제한이 있어서 이 정도가 한계라 아쉬웠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순조로웠다.

아직까지는.

"이다음이 문제인데...."

20명이라는 인원.

처음 탑에 들어오면 인당 1000p라는 제법 많은 포인트가 각 도전자들에게 지급된다.

원래라면 튜토리얼이라 불리는 1층에는 아무런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는 게 정상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1000p씩 20명이면 2만 포인트다.

2만 포인트를 한 명에게 몰아준다면 지금의 내게 꽤나 치명적인 아이템을 살 수도 있다.

"[하급 마나 차단 방패], [하급 민첩의 비약], [도살자의 검]...."

지금 대충 떠오르는 것만 해도 수십 가지나 된다.

내게 위협이 될 만한 아이템들.

특히나 1층만을 깨기 위한 1회용 아이템들이 가장 위험했다.

1회용 소모성 아이템들은 단기간에 목표를 이뤄내기에 매우 효율성이 좋기에.

물론, 그들이 단 한 사람을 위해 자신들의 포인트를 희생하며 담합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본래 이기적인 동물이고 신뢰가 쌓이지 않은 남을 위해 자신의 것을 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들에게 뒤가 없는 것도 아니다.

기다리면 도전자들은 계속 들어올 것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확신이 깨지지 않게 적절히 내 실력을 조절해서 보여 줘야 한다.

그들이 자신이 이미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최대한 늦게 자각하도록.

그럼에도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모르는 일이다.

별의별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곳이 이 탑 안이다.

모든 변수들을 상정하고 준비해야 한다.

도전자들은 그저 어려워진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기 위한 일들이겠지만 내게는 나의 목숨을 비롯한 미래의 인류까지, 많은 것들이 걸려 있는 싸움이다.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다.

마력의 격을 올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마력 등급의 상승이 필수적이지만 그 외에도 방법은 있다.

바로 지력 스탯의 상승이다.

마력을 움직였다.

전생의 내가 만들어 낸 마력 운용법.

순도가 떨어지는 마나를 최대한 버리고 오직 높은 순도의 마나만을 추출하여 마력으로 치환하는, 초고도의 정밀한 마력 컨트롤을 필요로 하는 기술.

호흡으로 들어오는 대기 중의 마나들을 분해하고 흐트러트린다.

체내에 흡수되려 하는 마나들을 가로막고 거름망을 만들어 낸다.

뚝. 뚝.

뺨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몸속에선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력이 1 올랐습니다.]

치열한 전쟁 끝에 얻어낸 전리품.

나는 떠오르는 메시지 창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하아..., 하아...."

그 잠깐의 마력 운용만으로 숨이 차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탑은 가만히 있는 도전자를 성장시켜 주지 않는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행동해야 한다.

마력을 운용하여 마나의 축적 순도를 조절하는 것에도 마력의 소모가 크다. 마력이 회복되는 동안 놀고 있을 수는 없다.

"읏차."

삐거덕거리는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냘픈 팔다리가 눈에 띄었다.

마법사라고 저질 체력에 힘도 약하고 민첩하지도 못할 거라 생각하면 이 잔혹한 탑의 세계에선 살아남기 힘들다.

"후아!"

나는 크게 기합을 내뱉고 보스 방의 테두리를 따라 뛰었다.

* * *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도전자....]

[....]

[진 이브리엄]

# 클래스: 네크로맨서

# 상태: 봉인 – 해금 1단계(상세*)

# 칭호: 상세*

# 체력: 830/1020

# 마력: 2080/5140

# 힘: 10(+17)

# 민첩: 10(+17)

# 지력: 25(+27)

# 스킬: 상세*

[마력 등급 Lv.1이 되었습니다.]

[신체의 봉인이 일부 해금됩니다.]

# 해금 2단계: 마력 등급 Lv.2

[봉인 – 해금 1단계]

# 기본 스탯 +15

벌써 근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의 생각처럼 도전자들은 서로에게 포인트를 몰아 주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는지 각자의 무기만 사고 덤벼드는 행동을 반복했고 그 결과는 지금과 같았다.

마력 등급이 상승하며 마력의 격이 상승한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신체의 봉인이 풀리며 마력혈이 회복되고 마력혈 사이의 길이 더 단단해졌다.

우우웅-

내 손끝에 마력이 응집하기 시작했다.

화르륵-

붉게 타오르는 마력.

화염이 일렁이는 불의 구체가 나의 손 위에 떠올랐다.

드디어 속성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졌다.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겠어."

도전자들의 수가 늘어난 지 좀 되었으니 슬슬 다음 도전자들이 들어올 때가 되었다.

'슬슬 또 도전해 오겠군.'

* * *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도전자가....]

[도전가가....]

갑자기 세기도 힘들 정도로 계속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이 보스 방 안에만 있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흘러가는지 인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도전자들의 수가 많아진 것을 보니 지난 도전 이후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난 듯했다.

'이번엔 무슨 전략을 들고 오려나?'

메시지가 떠오른 수를 세어 보니 50명의 도전자들이 나를 죽이러 오고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뭐지?'

오랜만에 느끼는 이 낯선 감각.

50명이라는 도전자들의 수에 내가 압박을 받는 건가?

기묘한 감각에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마력 등급이 상승하고 신체의 봉인이 일부 해금되면서 도전자들이 50명이나 온다고 하더라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근데 나는 왜 이러는 것인가?

왠지 모르겠다. 아직 도전자들이 보스 방에 온 것도 아니었다. 근데 죽음에 대한 감각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진짜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느꼈던 그런 위기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설마....'

# 죽음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의 통찰자의 능력 중 하나.

이 기묘한 감각의 원인이라면 이것밖에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건 없었다.

그러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하다고.

'오는군.'

수많은 이들의 인기척이 보스 방 너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50명의 도전자가 걸어오며 만드는 땅의 진동이 여기까지 흘러왔다.

마치 그 진동이 나의 숨통을 점점 조여 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뭐가 나를 위협하는 거지?

마력 등급이 올라간 지금, 내게 고작 1층의 도전자들은 위험 요소가 전혀 되지 않았다.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에 어느새 그들이 보스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자가 보스입니까?"

"정말이었네요."

"설마 했는데...."

새로 온 듯한 도전자들이 이신에게서 풍겨지는 분위기를 느끼고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켰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이신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이번에는 정말 자신들이 죽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뭐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뭘 눈치챈 건가?'

'제, 젠장... 움직이질 못하겠어.'

기존에 이신을 보았던 이들은 그의 싸늘한 분위기를 보고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모두 정신 차리세요! 작전대로 갑니다!"

김강천이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다른 이들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이를 악물고 각자 정했던 진형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클리어하는 겁니다! 방심하지 마세-."

"크하악!"

"아아악!"

"뭐, 뭐야? 왜 갑자기 선제공격을...?"

이전까지는 여유롭게 도전자들의 공격을 맞받아치기만 할 뿐, 선제공격을 먼저 펼치는 경우가 없었다.

근데 이번에는 마주치는 순간부터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더니 다짜고짜 공격을 날린다.

'젠장... 진짜 뭐가 바뀌었어!'

이를 악문 김강천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수비조 앞으로! 최대한 보스에게 붙어야 합니다! 네크로맨서라도 고작 기본 공격 마법이 전부예요! 맞아도 안 죽으니까 겁먹지 말고 앞으로 가세요!"

애초에 저 보스의 마법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최대한 방패로 버티면서 한 번이라도 더 몸을 대야 했다.

다크 에로우는 안 되더라도 매직 미사일이라면 그간 체력과 힘을 올렸던 이들이 한 번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터.

마치 좀비 떼가 몰려가듯이 도전자들이 조금씩 이신과의 거리를 좁혀 갔다.

이신은 아직까지 여유가 있었다.

아직 2위계 마법을 꺼내지 않아도 될 만큼 위기가 오지는 않았지만, 몸의 감각은 여전히 그의 위기를 알리고 있었다.

'뭐지? 도대체 저들이 준비한 게 뭐야?'

아직 딱히 그들에게 위협적인 아이템이 보이지는 않았다.

완벽한 타이밍을 노리고 한 수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한데 아직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저들이 쓸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한정적이다.

"죽어!"

그때, 어느새 이신에게 꽤 가까이 다가온 도전자들이 유효 타격 거리를 만들어 내려 했다.

'비장의 수를 숨기고 있다면 꺼내게 만들어야지.'

이신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성질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뭐야?"

"불?"

"피, 피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도전자들은 갑자기 보스의 손에서 생성된 화염을 보고 당황하여 몸을 움찔했다.

"피하지 마!"

그 모습에 김강천이 그들에게 소리쳤고.

쾅! 쩌저정!

갑자기 보스 방의 중앙에서 터진 폭발에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칫했다.

이신의 손끝에서 뿜어지는 화염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연기가 되어 사라졌고 그의 얼굴은 급격하게 굳어졌다.

'마력 동결 폭탄...!'

언제나 이신의 몸을 지탱해 주던 그 마력들이 무언가에 얼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시야에 이를 악물고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오고 있는 도전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제5화

최하층 마을

마력 동결 폭탄.

반경 100m 이내에 모든 생명체의 마력을 5초 동안 동결시키는 아이템이다.

순식간에 몸속에 느껴지던 마력들이 얼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에는 나를 향해 검과 창을 내지르는 도전자들이 보였다.

까득-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를 갈며 땅으로 몸을 던졌다.

단 5초.

5초만 버티면 마력의 동결이 풀린다.

하지만 그 짧은 5초가 5시간처럼 느껴졌다.

마법이 발현되는 타이밍에 마력이 동결된 탓에 마법이 취소되며 그 반동으로 몸이 약간 굳어졌다.

놈들이 그것을 노리고 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이 겹친 것인지는 모르지만 최악의 상황이다.

슈우욱- 서걱!

목덜미 옆을 지나간 창과 옆구리를 살짝 베고 지나간 검을 보자 서늘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찌릿하게 올라온다.

처음부터 예민하게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몸을 움직여 피한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저 창에 꼬챙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기랄!'

빙그르르 돌아가는 시야 속에서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화살촉이 보였다.

내가 몸을 던지는 방향을 정확히 예측해 화살을 날린 것이다.

콱!

"윽!"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신음을 꾹 눌러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초인적인 반사 속도로 팔을 들어서 막지 않았다면 저 화살은 심장에 박혔을 것이다.

'몇 초나 흐른 거지? 2초? 3초?'

영겁과도 같던 시간 속에서 나는 또다시 몸을 굴렀다.

아직 적들의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젠장할.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해 온 건지.

또 다른 화살촉이 나를 향해 날아오고 조금 전 공격에 실패했던 이들의 무기가 정확하게 내 쪽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도저히 피할 수 있는 곳이 없어 보였고 그들의 얼굴에는 승리의 환희가 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얼굴에도 그들을 향한 비웃음이 걸렸다.

땅을 한 바퀴 구른 곳에 있던 작은 돌탑.

그것이 내 몸과 부딪히며 무너지고 그 주위로 동그란 원기둥의 빛이 생기며 무형의 막이 떠올랐다.

탕! 탕! 탕! 탕!

허무하게 허공에 가로막혀 땅으로 떨어지는 화살들과 창칼들.

"뭐, 뭐야?"

"분명 마력이 동결되었을 텐데?"

"뭐가 막은 거야?"

"멈추지 마세요! 끝까지 움직이라고요!"

갑작스런 마법의 발동에 당황한 도전자들이 주춤했던 것도 잠시.

뒤에 있던 박혜원의 외침에 도전자들이 다시 공격을 강행하려 했지만 이내 곧 그들은 낭패한 얼굴이 되었다.

마력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단 5초였을 뿐인데 그 해방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

나의 손끝에서 잠자고 있던 마력이 자유를 만끽하듯 마구잡이로 풀려났다.

[에어 밤(Air bomb)]

펑! 퍼퍼퍼펑!

압축된 공기가 허공에서 터져 나갔다.

내 지척까지 와서 공격하던 도전자들이 한순간에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빠각!

팔에 꽂혀 있는 화살대를 마법으로 부러트리고는 애써 여유로운 표정으로 도전자들을 보았다.

"준비한 건 이게 끝인가?"

* * *

1층 대기실의 하늘에 여러 개의 빛무리가 떨어졌다.

"이런 썅!"

"이번에도 실패했어! 이번 작전은 완벽했는데!"

"아니 갈수록 세지는데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처음으로 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형들 저희는 하도 맞다 보니 체력이 벌써 300이나 올랐어요, 거기에 스탯은 얼마나 올랐게요?"

백현이 그들을 향해 하소연했다.

대기실에 돌아온 도전자들은 망연자실한 듯 바닥에 주저앉아 허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탯이 오르고 체력, 마력이 오르면 뭐 하나. 하...."

김강천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전에 10명이나 되는 도전자들이 더 들어온 탓에 이제 50명이라는 인원이 되었고 이번에야말로 저 망할 보스 놈을 이기리라 다짐했지만... 턱도 없었다.

먼저 들어온 도전자들끼리 담합해서 간신히 새로 들어온 도전자들을 설득하고 포인트를 모아 마력 동결 폭탄까지 구매했다.

커다란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지만 이거라면 충분한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구매했던 것인데....

'힘을 숨겼었던 건가?'

김강천은 고개를 저었다.

힘을 숨겼다기엔 그가 내뿜는 위압감이나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마치 그사이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설마 보스도 점점 성장하는 건가?'

설마....

"이 전까지는 좀 봐줬던 건가?"

"보스가 더 강해진 느낌이었어, 우리를 쓰러트리면서 레벨업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

"그렇다기에는 우리를 죽이지도 않는데요?"

"그럼 왜 저렇게 강한 거냐고! 갑자기 왜 속성 마법까지 쓰는 건데?"

"아니, 어떻게 마력이 막혔는데 마법을 쓰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

"하! 모르겠다. 난 집 가서 머리 좀 식혀야겠어."

백현은 고개를 저으며 저 멀리 보이는 나무 집을 향해 걸어갔다.

이미 그들은 이전에 반포기한 상태로 집을 지어 놓았었다.

어쨌든 1층 대기실에서 생활하려면 자신의 개인적인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이번 공략에 포인트 올인한 거 복구하려면 정신없겠네... 하...."

"후...나도야."

박혜원과 강지훈 그리고 몇몇은 1층 도전의 쿨타임이 지나자 다시 포탈에 올라섰고 다른 이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점점 많아지는 도전자들과 계속 반복되는 층간 이동 부탁에 토잉은 그냥 이곳에 1층으로 올라가는 포탈을 만들어 버렸다.

"히잉- 너무 귀찮았어용!"

"그럼 너는 이제 하는 게 뭐냐?"

평평한 돌 위에 누워서 말하는 토잉이를 어이없다는 듯이 보던 백현이 물었다.

"이곳의 관리?"

"무슨 관리를 하는데?"

"우움.... 아앙! 깜빡하고 가스 불을 안 끄고 왔어용! 그럼 필요하실 때 불러 주세용!"

그렇게 말하고는 토잉은 다짜고짜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토끼가 무슨 가스를 써?"

백현은 황당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광활한 대지에 아무것도 없던 그곳은 어느새 작은 마을이 만들어져 있었다.

* * *

"하아... 하아...."

쿨럭-!

몸속에서 피가 울컥하고 올라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대단한 놈들....'

머리가 지끈거렸다.

온몸이 말이 아니었다.

조금 전 올라왔던 50명의 도전자들.

새로운 도전자들이 이번에 대거 들어오면서 놈들이 새로운 전략을 준비했다.

'설마했는데 이것을 벌써 마주하게 될 줄이야.'

마력 동결 폭탄.

무려 50,000p에 달하는 아이템이다.

처음 도전자들이 탑에 들어올 때 받는 포인트는 고작 1,000p. 50명이 이 포인트 전부를 사용해야 5만 포인트라는 수치가 형성된다.

탑에 이제 막 들어왔고 서로 처음 보는 사이에, 1,000p를 선뜻 1회성 소모품에 사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1층은 포인트 벌이도 시원치 않은 장소이며 설령 저렇게 포인트를 사용한다 쳐도 클리어하지 못하면 포인트만 날리게 되어 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적어도 100명은 모여야 사용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마법진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고순도 마력 축적 운용법으로 지력을 올리기에도 마력이 모자란데, 마법진에 마력을 쏟을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었던 게 회심의 수로 작용했다.

이번에 마력 등급이 1단계로 오르며 신체의 봉인이 1단계 해금된 것과 꾸준히 훈련했던 신체, 만에 하나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마법진.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후우...."

이번 전투에서 입은 내상이 만만치 않았다.

당분간은 몸의 회복에 최대한 집중하며 지내야 했다.

이곳은 회복을 위한 포션도, 그 어떤 약재도 없으니.

이번 전투에서 입은 피해와 더불어, 이 이상의 전략과 전력을 준비하려면 한두 달로는 부족할 것이다.

* * *

지난 습격 이후로 도전자들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해 오지 않았다.

나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진의 연구 자료를 보던 중 벽에 있는 미세한 틈새를 발견했다.

"결계?"

단순한 결계라면 내가 결계가 있다는 것을 여태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마력을 서서히 집어넣어 그 구성을 탐색했다.

'이건....'

단순 결계라 보기에는 다른 마력의 구성들이 어지러이 겹쳐져 있었다.

지금 한순간에 이 결계를 분석하기에는 그 수준이 너무 높았다.

결계가 처져 있는 건 분명한데, 그 결계를 뒤덮는 또 다른 마법이 걸려 있었다.

'이중 결계...?'

한참을 이것과 씨름을 하며 결계를 파악하던 나는 그 정체를 파악하고 혀를 내둘렀다.

제대로 된 원리를 파악하기는 힘들었지만 결계를 치고 그 결계를 아공간 안에 집어넣어 찾지 못하도록 만든 듯했다.

진 이브리엄의 작품이 분명했다.

마력을 사용해 틈새로 찔러 넣었다.

안쪽에 느껴지는 결계와 나의 마력이 부드럽게 융화되었다.

마법사는 다들 자신만의 마력 성질을 가지고 있다. 아주 미세한 차이일지라도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이 마법사마다 마력의 성질도 다르다.

그리고 이 결계는 진의 마력 패턴에만 반응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마력을 계속해서 불어넣어 아공간 속에 결계를 꺼내고 그 결계를 또다시 풀었다.

결계 해제는 다행히 손쉽게 풀 수 있었다.

그그그그그-

돌들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돌벽이 갈라지며 안쪽의 공간이 나타났다.

"와...."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한 곳에 거대한 책꽂이와 빽빽이 꽂혀 있는 책들, 편해 보이는 의자와 넓은 책상의 서재.

책상을 손가락으로 슥- 훑었지만 먼지 한 톨 묻지 않았다.

'반영구 보존 마법이 걸려 있네.'

이 공간 전체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마법.

이런 마법을 서로 연계해서 반영구적으로 보존하는 것은 전생의 나라도 불가능한 마법 수준이었다.

진 이브리엄이 어느 정도의 경지였는지 보여 주는 마법이었다.

나는 한쪽에 있는 또 다른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각종 마법 실험 기구와 재료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도 책들이 쌓여 있었는데, 역시나 이곳에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재료들은 아쉽게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무언가 타 버린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진이 태워 버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다행인 것은 실험 기구는 멀쩡하다는 것.

이것으로 이 불구가 된 몸을 치료할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여태 내가 한 것은 망가진 마력혈의 악화를 막고 소량 회복시키는 게 전부였다. 마력혈을 다시 고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이건...."

안쪽에 또 다른 문이 존재했다.

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이것도 결계가 쳐져 있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진의 마력을 주입하면 자연스레 열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열리기는커녕 오히려 마력이 닿는 순간 반발하는 것으로 보아 특정한 마력이 주입되어야 열리게 설정된 것 같았다.

'뭘 숨겨 놓았길래... 강제로 열 수도 없고.'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다시 방을 나와 조금 전 서재의 책상 위에 놓인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진 이브리엄의 일기장이었다.

- 나는 패배했다. 더 이상 네크로맨서이자 대흑마법사인 진 이브리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일기장의 첫 페이지 내용이었다.

첫 장에 이것 말고 다른 글은 없었다. 충분한 여백이 있음에도.

손이 떨리는 듯 글씨가 흔들려 있었고 약간의 눈물 자국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나는 뒤 페이지를 보지 않고 일기장을 덮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진이기 때문일까? 단 한 줄을 읽었을 뿐인데도 무언가 몸 안에서 북받쳐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

.

.

갑자기 허공에 시스템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인상을 찌푸리며 책을 내려놓고 서재를 나섰다.

원래라면 항상 보스 방에만 있던 탓에 도전자들이 언제 도전을 해 오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제 안쪽 서재와 연구실에 있을 상황이 많을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방해받는 것은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대리인이 하나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무엇이 좋을까?

아니, 그 전에 어떻게? 재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쓸 만한 녀석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중급 이상의 재료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인격을 넣을 매개 물질이 필요하다.

생각나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좀 전에 들어왔던 도전자들이 보스 방에 도착했다.

김강천 일행 5인방이었다.

이신의 눈가가 확 일그러졌다.

자꾸 생각에 잠길 때, 그것을 방해하는 탓에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나서 나온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5명이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 버렸다.

"왜, 왜 그렇게 화가… 나셨… 을까요...?"

강지훈이 땀을 삐질 흘리며 이신에게 물었다.

"죽고 싶어서 5명이 온 거지?"

이신이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죽일 생각도 없으면서...."

"아, 아니요! 오빠 미쳤어?"

박혜원이 식겁하며 백현을 다그쳤다.

"내가 뭐!"

"너는 좀 조용히 해!"

"으으읍!"

강지훈이 백현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저희는 대화를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김강천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리가 한가로이 대화를 나눌 사이던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신의 눈가는 흥미가 생긴 듯 늘어져 있었다.

그 모습에 다섯 명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여태 한 번도 제대로 시도해 보지 않았지만 그는 역시나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던 것이다.

이신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킨 김강천이 무릎을 꿇고 그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도 김강천의 뒤에서 무릎을 꿇었다.

"저희는 탑을 올라야 합니다. 그러니 도와주십쇼!"

"나보고 죽으라는 건가?"

"아닙니다. 탑을 올라가는 방법이 꼭 하나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김강천의 말에 잠깐 생각에 잠긴 이신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서로의 관계를 좀 더 건설적으로 발전해 나갈 때가 왔다.

"...그래, 방법이 있지."

적당한 거짓은 서로에게 좋을 때도 있는 법.

"정말입니까?"

"와! 진짜야! 진짜 있었어!"

아니, 없다.

"그게 뭔가요?"

그들이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이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숨겨진 보스가 있어. 그놈을 죽이면 올라갈 수 있지."

"역시! 1층의 난이도가 이런 게 말이 안 되지!"

"오빠, 오빠 말이 맞았어!"

"마, 맞지? 내가 그랬잖아!"

서로 신나서 부둥켜안는 모습이 나름 감동적이었지만 사실 그런 보스는 없다.

"놈은 어디 있습니까?"

김강천이 물었다.

"아직 너희들이 상대하기엔 일러. 놈을 죽이고 싶으면 더 강해져야 해."

"네? 어떻게...?"

강해져야 한다는 말에 이들의 얼굴이 한순간에 시무룩해졌다.

"내가 가르쳐 줄게. 강해지는 법을. 대신 조건이 있어."

"네? 정말요? 정말 저희를 가르쳐 주신다고요?"

"조건이 뭐죠?"

조건이라는 이야기에 잔뜩 긴장한 듯 보였지만 사실 조건은 별거 없다.

"포인트. 내가 사 오라는 물건들을 가져와. 그러면 너희를 그 누구보다 강하게 만들어 주마."

그 말에 다섯은 서로 고민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한쪽 구석으로 가서 서로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 들린다.

뭐 하러 저기까지 가서 저러고 있는 건지.

"좋아요. 그 보스는 어디 있죠? 한번 보고 싶은데...."

"아직 안 돼. 너희들이 놈을 이길 수 있겠다 싶으면 그때 가르쳐 줄 거야."

그들은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저 강한 보스가 스승이 되어 준다는데 더 불만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것 외에는 탑을 오를 방법도 없고.

이제는 저 보스를 이길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이신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럼 저희 스승님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박혜원의 물음에 이신이 고개를 저었다.

"스승은 무슨. 선배님이라 불러."

"알겠습니다! 선배님!"

"잘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허리를 굽히는 아이들을 보며 이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환영한다. 호…후배들아."

제6화

계속 되는 변화

불망각의 구를 얻고 벌써 몇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

.

.

허공에 여러 개의 시스템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오늘도 여지없이 포인트를 모으러 도전자들이 올라온 것이리라.

이미 도전자들의 대부분은 보스를 죽이고 탑을 오르는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이신이 김강천 일행에게 대가를 받고 가르침을 주기 시작한 지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들뿐 아니라 다른 도전자들도 가르침을 원했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조만간 다른 이들을 가르칠 만한 녀석을 만들 수 있으니, 그때가 되면 모든 이들에게 물건을 받으며 그들을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신은 시스템 메시지를 대강 치우고 다시 하던 연구에 집중했다.

여전히 진 이브리엄이 남긴 연구 자료들의 해석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깊은 지식과 뛰어난 통찰력이 가미된 자료들이었다.

이신은 대리 구매로 받아 낸 푹신한 의자에 기대앉아 자료들을 보았다.

"신성과 마력, 영혼과 죽음, 생(生)과 사(死) 그리고 경계."

자료의 내용만 해도 책 수십 권에 달하는 양이었다, 그리고 대략 이 정도의 내용으로 축약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분야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를 섞어 연구한 자료였다.

그나마도 아직까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영혼과 죽음… 죽음이라...."

지난 불망각의 구를 얻으며 수천 번이 넘는 죽음을 기억했다.

[죽음에 대한 이해도가 급격히 증가합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시스템 메시지를 보았다.

당시에는 그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의 연구 자료 중 죽음에 대한 것들을 읽으면서 그 차이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진의 자료를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되고 모자란 것들까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신은 머리를 털며 생각을 한 번 정리했다.

내용을 보면 신에 대항하기 위한 힘을 연구하는 듯한 내용들도 간혹 보였다.

진 이브리엄도 신과의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거기에 더해 이 자료.

유난히 오래된 듯한 종이 뭉텅이.

누렇게 변해 버린 이 종이는 보존 마법이 걸리기 전부터 이렇게 변해 있던 상태임이 틀림없었다.

고대 문자로 적혀진 탓에 알 수 있는 내용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탑을 오르며 단 몇 번만 보았던 단어들.

"신앙, 전쟁, 파편...."

지금으로서는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 적었지만, 탑을 오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신과 탑.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신들이 이 탑을 만든 것이 맞을까?

지난 100층에서의 신들이 말한 것으로 보아 그들의 의도가 탑에 담겨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과연 신이 정말로 탑을 만들었다면 이 불망각의 구는 무엇일까.

[불망각의 구]

# 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들의 권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능력이다.

더구나 탑에 들어오기 이전의 기억까지 살아난 것으로 보아 굳이 탑에 국한된 힘 또한 아니었다.

모르겠다.

생각해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고 해야 할 것 또한 많았다.

손발이 너무 부족했다.

지금 진행 중인 스켈레톤 메이지의 제작을 빨리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영혼 구슬만 있으면 완성하겠어."

이들의 몸체는 완성되었다. 아직 수정할 부분이 조금 있었지만, 그것은 계속해서 수정에 들어갈 것이라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

.

.

갑작스레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포인트 작업이 끝난 이들이 돌아가는 것이다.

[마력이 60 올랐습니다.]

도전자들이 이렇게 작업을 끝마치고 돌아가면 이신은 가만히 그 수만큼 마력을 얻는다.

덕분에 현재 이신의 마력은 다섯 자릿수를 넘어간 상태.

# 마력: 13,400/13,400

"아직 한참 멀었네."

마력혈이 망가진 지금,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이것을 고치는 방법이었다.

# 해금 2단계: 마력 등급 Lv.2

마력 등급을 올려야 신체의 2단계 해금이 풀린다.

[마력 등급 Lv.2]

# 필요 마력: 50,000

# 필요 지력: 100

5만의 마력량.

초월의 격에 올랐던 진의 신체의 일부라도 회복시킬 수 있다면 엄청난 전력 상승이 될 것이다.

수치를 눈으로 직접 보니 조금 조급해지는 느낌이 있었지만 진정하고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점점 탑에 들어오는 도전자들의 수는 늘어날 것이고 그에 따라 마력의 상승 폭도 커질 것이다.

봉인이 해금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 * *

└한국 도전자들을 찾습니다.

└다들 어디 가셨나요? 혹시 제가 탑에 들어온 사이에 전쟁이라도 터져서 한국인들 다 뒈졌나요?

└아니, 시부럴! 몇 달 동안 한 명도 안 올라오는 게 말이 되냐!

└국가전 어떡해요, 지금 한국만 안 올라와서 이제는 자리를 지키기도 힘들다고요!

└지금 아이소시아의 도전자들 다 죽어 나가고 있다!!!

└아이소시아면 많이 올라갔네! 나는 지금 아직도 10층 대인데... 한국인이 그리워!

한국의 도전자들을 위한 커뮤니티는 지금 계속해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1층에서 도전자들이 올라오지 않는 기이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고 그 덕에 위층의 도전자들만 죽을 맛인 상황이었다.

탑은 혼자서 올라가는 곳이 아니라 팀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며 활동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수급되어야 하는 인력이 갑작스레 턱하고 끊겨 버리니 위층 인원들은 당황스러웠다.

그나마 최상층에 있는 도전자들에게는 아직까지 그 영향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도 조만간 큰 문제로 다가올 것이 뻔했기에 그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직전인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매년 12월 1일이 되면 50층에서 디멘션 게이트가 열린다. 50층부터 100층까지는 층간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50층까지 오른 도전자들은 12월 1일이 되면 이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었다.

디멘션 게이트(Dimension Gate)는 지구와 탑 간의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고 한 달간 열렸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탑에 남아 있는 이들이 가장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지구로 돌아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

그러나 아직 디멘션 게이트가 열리려면 한참이나 남았고 그전까지 탑에 있는 이들은 어떠한 바깥의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한국 진짜 망한 거 아니지? 그렇지?

└한국이 왜 망하냐! 한국만큼 고층 도전자가 많은 나라도 몇 없는데.

└그니까 견제하는 나라도 많을 거 아니야?

└한국은 차유민 보유국이라고, 최상층 랭커 차유민! 다른 놈들이 어떻게 건드려?

└정부가 미쳐 가지고 사람들 탑에 못 들어오게 규제 때린 거 아니냐? 그 10년 전처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근데 왜 신입들이 안 올라오는 거야?

└왜 탑에 애초에 사람들이 안 들어왔다고 생각해? 1층에서 못 올라오는 거일지 모르지.

└1층 보스가 존나 세서?

└시벌! 그게 말이 되냐!

가끔가다 나오는 1층 보스가 세다는 가설은 다른 이들의 뭇매를 맞으며 저 밑으로 사라지곤 했다.

커뮤니티는 2층에 올라오고 나서부터 활성화된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1층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 불안감은 갈수록 증폭되어 갔다.

또한 50층 밑은 층간 이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 번 층을 올라가면 아래층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위층의 도전자들에게는 1층 상황의 힌트라도 얻기 위해서는 12월 1일, 디멘션 게이트의 오픈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바깥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아닌지라도 알 수 있기에.

* * *

1층 대기실.

하늘에서 여러 개의 빛무리가 마을 중앙 광장에 떨어져 내렸다.

"안녕하세용! 저는 1층 대기실의 관리자 토잉입니당!"

열 명이 넘는 이들이 이번에 무더기로 들어왔다.

그중 여섯이 다부진 몸과 날카로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살기 넘치는 전장에서 방금 막 돌아온 듯 예리함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토잉에게는 관심도 없는지 눈썹을 씰룩이며 1층 대기실에 세워진 마을을 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넹?"

남자의 혼잣말에 토잉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이곳에 왜 마을이 세워져 있지? 아무것도 없는 곳일 텐데."

"아항! 그건 여기 온 도전자님들이 세운 것이랍니당!"

"왜?"

그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고 토잉은 익숙하다는 듯 대답했다.

"움… 잘 곳이 없어서?"

"뭐?"

"넹?"

눈썹을 찌푸린 그가 토잉을 노려보았다.

돌의자 위에 올라서서 도전자들을 맞이하는 토잉에게 남자가 손을 뻗었다.

탁.

그때, 옆에 나타난 백현이 토잉을 잡으려던 남자의 손을 잡아 막았다.

"넌 뭐지?"

"아하하, 이 녀석이 관리자인데 좀 바보라서. 제가 답해 드릴게요."

손이 잡힌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현이 손을 놓자, 남자도 순순히 손을 내리고는 백현을 보았다.

'악력이....'

남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백현을 살폈다.

흔히 한국에 보이는 평범한 20대 남자.

몸이 제법 다부져 보이긴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넌 누구지?"

"저는 백현이에요."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거 알 텐데?"

"그럼 뭘 묻는 건데요?"

백현은 진짜 모르겠다는 듯 그를 보았다.

"나는 한국도전자협회 특수팀 팀장 박주혁이다. 우리는 빠른 탑의 공략을 위해 협회와 정부에서 만들어진 팀이지."

"그런데요?"

생각 외로 시큰둥한 반응에 박주혁의 입가가 비틀렸다.

자신에 대해서 듣고도 그게 뭐 어쨌냐는 듯한 거만한 반응.

자신의 실력에 대해 자신감이 넘치는 이들의 일관된 태도였다.

이런 경우 실력으로 초장에 찍어 눌러 줘야 다음부터 저런 거만한 태도가 나오지 않는다.

섬전처럼 뻗어지는 박주혁의 손이 백현의 옷깃을 잡아채려 했다.

그러나 그에 곧장 반응한 백현이 박주혁의 손을 왼손으로 살짝 밀어내고 몸을 비틀어 흘려냈다.

백현은 갑작스럽게 공격이 들어온 것에 당황했고 박주혁은 자신의 기습을 쉽게 막은 것에 놀랐다.

"뭐 하는 짓이에요?"

정말로 당황한 듯 백현이 그에게 물었다.

박주혁은 어느새 주변에 몰린 인파를 보며 인상을 굳혔다.

여기서 더 소란을 피워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이곳에 왜 마을이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여기 있는 이들은 아직 하나의 층도 오르지 못한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다.'

그런데도 눈앞의 백현은 잠깐이지만 자신과 동수를 이룰 정도의 실력을 보여 주었다. 그런 녀석이 왜 아직까지 1층 대기실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고층에서 만날지도 모를 녀석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다.

박주혁은 먼저 그에게 사과의 손길을 건네기로 했다.

"갑자기 기습해서 미안하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

순순히 사과하는 모습에 잠깐이지만 화가 났던 백현도 금세 화가 풀렸다.

"알겠어요. 이번은 넘어가죠."

"왜 너 같은 실력자가 아직까지 탑을 오르고 있지 않지? 그리고 이곳에 마을이 생긴 이유는?"

의문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마을의 분위기도 이상했다.

사람이 생각 이상으로 많았고 마을의 규모도 제법 컸다. 이 정도면 몇 달 동안 들어간 도전자들 전부가 탑에 오르지 않고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백현은 박주혁의 물음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답은 한번 다음 층에 도전해 보세요. 그러면 알 거예요."

백현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들이 1층에 도전해서 클리어하면 다시 이곳에 내려오지 못한다, 그러면 이 비밀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비밀을 말해 주기 싫은 건가?"

"아, 뭐... 알아서 생각하세요."

"말해 주기 싫으면 됐다. 우리가 알아서 알아보지."

백현에게서는 답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한 박주혁이 팀원들과 돌아서 갈 때, 뒤에서 백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리고 지금처럼 사람들한테 막 시비 걸고 다니지 마세요!"

"알겠다."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특수팀이 떠나고 주변의 다른 이들 사이에 껴서 그 상황을 구경하던 박혜원과 강지훈이 백현에게 다가왔다.

"왜 저렇게 싸가지가 없어?"

"저 정도면 그럴 만하지. 협회랑 정부에서 미는 팀이라잖아."

박혜원의 불만스러운 말에 강지훈이 웃으며 말했다.

"협회랑 정부에서 밀어주면 단가."

"원래 인생은 빽이 전부다 인마."

"어휴...."

장난스레 말하는 강지훈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박혜원.

백현이 점점 멀리 사라지는 박주혁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래?"

그런 백현을 의아하게 보던 박혜원이 물었다.

"보니까 밖에서 싸움 좀 하던 사람 같은데 여기서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한테 얻어맞으면 얼마나 자괴감 들까? 하는 생각에."

"근데 왜 1층에 도전하라고 한 거야? 선배님이라면...."

박혜원의 물음에 백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신입이면 신고식은 해야지."

제7화

"뼈의 강화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만..., 흠, 두개골에 마법진을 하나 더 새기고 싶은데 그러면 과부하가 일어날 것 같단 말이지."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스켈레톤의 두개골에 마나를 이용해 마법진을 촘촘히 새기던 이신은 갑작스레 들리는 시스템음에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김강천 일행이 영혼 구슬을 주기로 한 시간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요즘 마법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이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연구실에서 보스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조금 기다리니 김강천과 박혜원, 지은주가 보스 방으로 들어왔다.

"영혼 구슬은 가져왔어?"

"네, 여기요."

김강천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구슬 두 개를 이신에게 건네주었다.

투명한 구슬 속에 하얀 연기가 넘실대는 듯한 모양의 구슬.

그것 외에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지만 이신은 이 구슬의 쓰임새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고맙다."

이신은 영혼 구슬을 한쪽에 가져다 두었다.

지금 1층의 도전자들은 탑을 오르지 못한 채 1층 대기실에 정체되어 있었지만 대신 이신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자신들의 포인트를 사용하여 이신이 원하는 물건들을 포인트 상점에서 구매해 이신에게 건네주고 그 대신 이신에게 훈련을 받는 식.

오늘은 영혼 구슬을 대가로 박혜원과 지은주가 마법을 배우는 날이었다.

"아 참, 조만간 새로운 도전자들이 올 거예요. 협회와 정부에서 만든 탑 공략 특수팀이라고 하더라구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네?"

"아, 아니야."

한국에서 협회와 정부가 야심 차게 만든 특수팀.

전생에서도 보았던 녀석들이었다. 최상위층에서 인력 부족난을 느끼는 팀을 보조하기 위해 최상위급 실력자들로만 구성해 만든 팀인데 생각만큼의 공략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묻혔었다.

그중 팀장인 박주혁은 그래도 제법 뛰어났었다.

그리고 팀원들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탑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밖에서 아무리 날아다녔다 한들 탑에서도 그것이 무조건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박주혁이 온다 이거지?

이신은 박주혁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혜원과 은주는 자기들을 굴릴 생각에 웃은 거라 착각하며 두려움에 휩싸였다.

"강천이는 가 보고, 자. 그럼 시작해 볼까?"

김강천은 두 사람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 * *

영혼 구슬은 주변에 떠도는 영혼을 불러 구슬 안에 그 영혼을 담는 역할을 하는 아이템이다

그리고 1층은 소름이 돋게도 뛰어난 영혼들이 너무 많았다. 허공을 유영하는 영혼들에게서 느껴지는 격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고작 튜토리얼 수준의 저주받은 네크로맨서가 보스로 있는 이런 곳에 말이다.

그러나 진에 대해 일부 알게 된 지금으로서는 그 이유가 대략 짐작되었다.

'1층은 신에게 반발한 영웅들의 감옥이 아니었을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느낌의 장소임에는 틀림없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을 겪고 그 모든 죽음을 정확히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죽음은 나와 아주 친숙하고 가까운 것이 되었다.

이들의 감각이 내게는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왔다.

[죽음의 통찰자]

어떻게 죽음을 이렇게 잘 이해하고 계시는 건가요? 마치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겪어 본 것처럼.

# 죽음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 죽은 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불망각의 구를 얻고 수천 번이 넘는 죽음을 겪으며 얻어낸 칭호.

그럼으로써 볼 수 있게 된 수많은 영혼들.

"왜 저를 쫓아다니는 겁니까?"

나의 혼잣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거기 팔 하나 떨어진 금발 기사분, 그쪽 말하는 겁니다."

명백하게 내 눈앞에 보이는 금발의 남성.

방금 막 전쟁이라도 치른 듯 여기저기 망가진 갑옷을 입고 오른팔은 어디다 놓고 왔는지 사라져 있는 금발의 미남자.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떠돌고 있었지만 다른 영혼들과 다르게 내 주변을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그래서 말을 걸어 보았다.

다른 영혼들은 이지(理智)를 잃어버린 것처럼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처 없이 떠다닐 뿐이었다.

'이 영혼도 똑같나?'

그때, 기사와 내 눈이 마주쳤다.

- …나를… 부른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맞습니다. 그쪽 부른 거."

- …이제는 헛소리까지 들리는군.

"헛소리 아닙니다."

- 뭐...? 정말 나를 본다고?

"예."

기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고는 나를 보았다.

나와 그의 눈동자가 정확히 마주 보고 있었다.

내 눈은 그를 응시하고 있었고 그는 그 모습을 보더니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내 죽음을…. 나를 해방시켜 줘!!

"으윽!"

소름 끼치는 기이한 소리가 그의 입에서 울렸다.

귀를 막아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 기이한 고성은 내 귀를 파고들어 머릿속을 맴돌았다.

"죽음에서 해방되고 싶습니까?"

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그에게 말했다.

- 죽음! 나는! 억울해!

처음 보았던 미남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악귀처럼 변해 버린 그의 얼굴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화아아아-

갑자기 시야가 점멸하며 공간이 변했다.

그곳엔 방금 전 보았던 미남자가 갑옷을 입은 채 정갈한 모습으로 출정을 위해 서 있었다.

'그의 과거인가?'

# 죽음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을 꿰뚫어 본다는 게 이 뜻이었나?'

발동 조건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태 한 번도 발동되지 않았던 그 능력이 이번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공간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이번엔 그 기사가 아름다운 여성 앞에 서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둘은 각별한 사이처럼 보였다.

다시 바뀌는 배경.

전장 속, 기사는 용맹했고 대단했다.

수많은 적들을 무참히 베어 버리며 뛰어난 신위를 보여 주었다.

그의 활약 속에 전쟁은 무난히 승리하는 듯 보였다.

그때 그가 상급자로 보이는 이의 명령을 따라 별동대를 꾸려 적의 후미를 공격하러 갔다.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전쟁의 승리가 코앞이었다.

'그럴 리가.'

이 스킬은 그자의 삶의 궤적이 아닌 삶의 마지막을 보여 주는 것.

죽음과 관련되지 않았다면 보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나의 예상대로 변수가 발생했다.

아까 보았던 그 여성이 그곳에 붙잡혀 있었다.

눈이 돌아간 기사가 동료들의 말을 무시하고 혼자 달려 나갔다. 동료들은 그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리하게 돌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사는 동료들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그 여자만을 바라보았다.

그 뛰어났던 신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검을 내지르다가도 여인에게 칼을 가까이 가는 것을 보면 멈췄으며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연명했지만, 그때마다 그의 동료들은 하나, 둘 죽어 나갔다.

결국 적들에 둘러싸인 채 그는 여성의 앞에 상처투성이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여자는 그를 한껏 비웃어 주며 그의 오른팔을 베어 버리고는 그를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떠나 버렸다.

전쟁은 기사의 어리석음에 한쪽으로 기울었고 기사는 모든 것을 잃은 채 차디찬 바닥에서 혼자 쓸쓸히 죽어 갔다.

배경은 그것을 끝으로 사라지며 다시 내가 있던 1층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 기사에게 그다지 불쌍함을 느끼지 않았다. 내 입가에는 썩소만 가득할 뿐이었다.

"한심한 놈."

- 한…심? 네가, 도대체 네가 뭘 안다고!

"고작 여자 하나에 동료들을 모두 죽게 만들어? 네가 그러고도 기사야?'

- 나는 억울....

"닥쳐! 너 같은 새끼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되살리면 안 되겠어."

- 뭐…? 되살려? 어떻게? 나를 어떻게 되살릴 거지?

"그럴 생각 없다고 했다."

- 제발! 나를 도와줘! 다른 녀석들이 오기 전에!

"아니, 너는 또다시 여자에게 홀려 동료를 버릴 게 분명해."

- 아니야! 절대!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믿어 줄 거지?

아까와 같은 괴성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처절하고 비굴해진 기사 하나만이 내 앞에 있을 뿐이었다.

나는 주변을 슬쩍 보았다.

영혼이 많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간혹 지나가는 녀석들도 이 소란이 들리지 않는 듯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럼 나와 계약할 수 있겠어?"

- 좋아! 뭐든 하겠어! 나를 살려만 준다면!

낚였네.

나는 올라오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리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 * *

"워리, 메이."

내 부름에 스켈레톤 두 녀석이 앞에 섰다.

최근에 김강천 일행에게 영혼 구슬 2개를 받아 만든 스켈레톤 워리어와 스켈레톤 메이지.

워리는 여자에게 배신당한 비운의 기사로.

메이는 마법을 연구하다 실패해 죽은 마법사로.

둘 모두 아주 좋은 계약을 마친 상태로 나의 스켈레톤이 되었다.

워리는 녀석이 원하는 대로 원래 살아 있을 때의 몸에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었다. 뼈에는 마법 각인을 박으며 최대한 단단하게, 특히 팔 부분을 신경 썼다.

메이는 뼈대가 튼튼하지는 않았지만 뼈 전체에 새겨진 마법진 덕에 마력 회로가 활발하게 돌아가 워리에 비해 스탯이 전반적으로 높았다.

[워리]

# 힘: 27(+13)

# 민첩: 21(+10)

# 지력: 10(+7)

[메이]

# 힘: 7(+15)

# 민첩: 10(+14)

# 지력: 38(+20)

수 개월간 공들여 만든 언데드들이다.

특히 나의 연구 부분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줄 메이는 조금 더 신경 써서 마법 회로를 새겼다.

저 밑의 도전자들은 이 두 녀석 중 하나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 녀석들의 영혼이 나와의 계약으로 이루어져 소환 상태에 나의 마력이 소모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녀석들이 망가진다면 내 마력으로 되돌려 놓을 수 없었다.

장단점이 있지만 이곳에서 저 둘을 위협할 이들은 없으니,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았다.

"메이는 내가 정리하라던 서류 다 정리했어?"

"예, 진 이브리엄의 마법 연구 결과를 세분화해서 따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좋아, 워리는 지금 사용하는 팔 어때?"

"뼈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마력의 연결이 이전 것보다는 좋지 않습니다. 지금 제 역량으로는 마력 흐름을 원활히 하면서 뼈의 기능을 최대로 이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 흠…, 조금 더 연구해 봐야겠네. 알겠어, 둘 다 가 봐."

워리와 메이가 방에서 나가고 이신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슬슬 박주혁이 올라올 때가 됐다.

'준비를 해 볼까?'

* * *

"팀장님, 그간 모아 온 정보로 보아 아무래도 1층의 보스가 너무 강해서 사람들이 탑을 오르지 못하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요."

1층 대기실 마을 바깥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특수팀 팀원들이 모여 심각한 얼굴로 얘기 중이었다.

팀원들의 보고에 박주혁 또한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벌어진 실랑이 때문에 이곳 사람들의 반감을 사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제법 사람들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며, 계속해서 정보를 모아 온 결과 1층의 보스 상황이 변했다는 것이 정론이었다.

"슬슬 우리도 도전해 볼 때가 된 것 같다."

그들의 말이 맞다면 자신들 역시 도전에 실패하고 다시 이곳에 돌아올 것이고 그들이 거짓을 말했다면 다음 층으로 넘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후자일 리는 없다고 이미 모든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 1층의 보스가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도전을 하더라도 전의가 상실된 상대를 그 이상으로 건들지 않고 돌려보낸다고 하니, 죽을 리스크를 감수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늦은 밤, 박주혁을 비롯한 특수팀은 중앙 광장에 있는 1층으로 향하는 포탈로 향했다.

"잉? 1층에 올라가시나용?"

토잉이 그들을 보며 물었다.

"그래."

그들은 그 말을 끝으로 포탈로 들어갔다.

커다란 동굴 속.

안쪽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지구에서 들었던 하급 스켈레톤, 시궁창 쥐, 난쟁이 고블린들이 보였다. 이 녀석들은 생각했던 대로 쉽게 죽일 수 있었다.

스탯의 상승 문구와 함께 능력치가 상승했고 그들은 보스 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불안감은 점차 옅어졌다. 보스를 만나 방심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몬스터들을 잡고 나니 자신감이 조금은 상승했다.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보스 방 입구의 문을 열자, 그 안에 나태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보스가 보였다.

풀린 눈동자와 축 늘어진 몸, 창백한 안색.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

'뭐지...?'

제8화

"방심하지 마."

박주혁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보스를 훑었다.

보스는 특수팀이 들어왔음에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너희, 들은, 누구지?"

보스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박주혁은 굳이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만약 원래의 보스라면 자신이 누군지 물을 거다.'

그러나 박주혁의 생각과 다르게 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의자의 팔걸이에 걸쳐 놓았던 팔을 들어 올렸다.

"조심해!"

예상외의 행동에 바짝 긴장한 박주혁이 소리쳤다. 하지만 무언갈 할 것 같던 그의 행동은 그저 팔을 들어 올리는 것에서 그쳤다.

박주혁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사소하지만 계속해서 빗나가는 예측.

대놓고 위험함을 보여 주는 것보다 더 좋지 않은 것이 이런 상황이다.

박주혁은 점점 신경이 곤두섬을 느꼈다.

이럴 땐, 가만히 있기보다 움직여야 한다.

상황을 주도해야 적의 의도를 끌어낼 수 있다.

박주혁의 신호에 팀원들이 보스에게 달려들었다.

우웅-

보스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나는 마력.

어설프게 만들어진 다크 에로우가 천천히 그를 향해 날아왔다.

'도대체 뭐지?'

이를 악문 박주혁이 다크 에로우를 피하며 보스에게 다가가 검을 내질렀다.

푹-

허탈감이 들 정도로 보스의 목이 허무하게 꿰뚫렸다.

촤아아악!

뽑혀 나오는 검과 함께 쏟아지는 붉은 핏물.

그 따뜻한 핏물이 그의 얼굴과 몸을 적셔 갔다.

'정말로 깬 건가?'

그간 걱정했던 게 너무나도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허무한 결말.

바로 앞에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진 보스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고생...."

고개를 들고 주변을 본 박주혁의 눈이 부릅떠졌다.

붉은 안광이 일렁이는 스켈레톤 하나가 자신의 팀원들을 도륙 내고 있었다.

"팀장…님...."

푹-

촤아악!

흉흉한 마력을 내뿜는 스켈레톤이 쥐고 있던 뼈 칼로 박주혁의 팀원 하나를 찌른 뒤 그를 노려보았다.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스켈레톤은 그를 비웃듯 턱을 딱딱거리며 움직였다.

까드득-

박주혁은 턱 근육이 터질 듯 이를 꽉 물었다.

- 대장....

- 도망가십쇼. 여기는 제가….

- 죄송합…니다…. 대장....

그의 눈앞에 지난날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전쟁 용병 시절 잃었던 자신의 동료들.

트라우마로 남아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어두운 과거가 다시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 난…대장을 원망…해....

"그만! 그만!"

박주혁이 머리를 움켜쥐며 조잡한 검을 떨어트렸다.

트라우마 때문에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한참이나 악몽에 시달렸었다. 그런 과거를 잊기 위해 하루하루 지쳐 쓰러지도록 살아왔다.

- 대장은…우리를 버렸어.

"아니야! 아니라고!"

깊게 충혈된 눈동자를 번뜩이며 바닥에 떨어트린 검을 집어 든 박주혁이 눈앞에 보이는 스켈레톤을 향해 달려들었다.

캉! 캉! 캉! 캉! 캉!

미친 듯이 휘둘러지는 검은 예리하면서도 광포했다.

그러나 스켈레톤은 뒤로 밀리는 듯하면서도 그의 공격을 모조리 받아냈다.

"죽어! 죽으라고!"

박주혁이 괴성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근육이 잔뜩 부풀며 과하게 혹사당했지만, 분비된 아드레날린 탓인지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동료를 죽인 해골을 부숴 버려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캉! 캉! 캉!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스켈레톤은 점차 박주혁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이내 결국 스켈레톤의 뼈 칼은 그의 몸에 하나둘 상처를 새겼다.

냉정을 잃고 흥분에 빠져 버린 그는 침착하게 공격해 들어오는 스켈레톤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팅!

손아귀의 힘이 빠진 탓에 박주혁의 검이 스켈레톤의 검에 맞고 튕겨 나갔다.

"크윽!"

힘에 밀려 그대로 머리를 벽에 박았다. 골이 울리고 피가 흘렀다.

힘이 빠진 다리는 결국 무릎이 바닥에 닿게 만들었고 그의 시야는 점점 아래로 향했다.

차게 식어 가는 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부릅떠진 눈이 마치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미안…미안하다...."

피를 토하며 헐떡이는 팀원의 모습을 보니, 멍청하게 흥분해서 복수도 못 하고 쓰러져 버린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그가 고개를 들자 스켈레톤이 검을 질질 끌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시선을 살짝 돌리니, 쓰러진 팀원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과거를 반복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자.'

붉게 충혈되었던 그의 눈이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침착하게 스켈레톤의 움직임을 보던 그가 스켈레톤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뼈 칼이 그의 어깨를 깊게 베며 지나갔고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은 박주혁이 더 안으로 파고들며 스켈레톤을 몸으로 밀쳤다.

동시에 다치지 않은 반대쪽 팔로 칼을 쥔 스켈레톤의 팔을 휘감아 온몸으로 뼈를 비틀었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뼈 칼을 쥔 팔이 뒤로 돌아갔다.

쾌재를 내지르며 마무리를 지으려던 박주혁은 스켈레톤의 왼 주먹이 날아오는 것을 간신히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우드득- 우득-

"말도 안 돼."

스켈레톤은 태연하게 뒤로 돌아간 팔을 원상태로 돌렸다.

그에 반해 박주혁의 왼 어깨는 아작이 나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온몸이 삐걱거리고 말을 듣지 않는다.

고통스럽다.

포기하고 싶다.

이런 감정들이 박주혁을 자꾸만 괴롭혔다.

스켈레톤의 붉은 안광이 비웃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힘이 빠져 숙어지는 고개 덕에 바닥에 쓰러진 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까득-

삐걱거리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바닥에 있는 검을 쥐었다. 팔이 부들거리고 손아귀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저승길에 저 스켈레톤을 데리고 갈 것이라 다짐했다.

캉!

"커헉-!"

스켈레톤의 검질 한 방에 들고 있던 검을 놓쳤다. 발에 복부를 차여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대로 끝인가?

스켈레톤의 뼈 칼이 머리 위로 내려오고 있었지만, 도저히 피할 힘이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동료들의 복수는? 과거의 후회는? 결국 난 변하지 못한 건가?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 변하고 싶다. 지난 후회를 되돌리고 싶다. 싸우고 싶다! 아직 내 의지는 살아 있다!

광기에 절여지듯 피눈물이 그의 얼굴을 적셨다. 그러자 몸에서 황금빛이 일렁이며 그와 스켈레톤을 뒤덮었다.

"뭐, 뭐지?"

박주혁과 스켈레톤의 싸움을 지켜보던 이신은 박주혁의 몸에서 뿜어지는 빛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빛은...설마?'

[고유능력을 각성하였습니다.]

[변혁의 힘을 배웠습니다.]

"변…혁…."

박주혁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를 보았다.

세상이 마치 그 순간 멈춘 듯 느껴졌다. 저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 상황의 해답이 될 것만 같았다.

"…의 힘."

황금빛 에너지가 시야를 덮었다. 둘의 상황이 순식간에 뒤바뀌어 있었다.

어느새 쓰러져 있던 박주혁은 자신이 스켈레톤의 위에서 검을 내리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선은 눈앞의 스켈레톤을 부숴 버려야 할 뿐.

"죽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쳐지는 박주혁의 검.

칵- 

털썩-

하지만 힘이 빠져 버린 박주혁은 더 이상 검을 휘두를 여력이 없었고 그의 검은 허무하게 바닥에 떨어지며 튕겨 나갔다.

그리곤 그는 스켈레톤 위로 무력하게 쓰러졌다.

"팀장님!"

"이 망할 스켈레톤 새끼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의 팀원들은 멀쩡했다. 그들은 박주혁을 황급히 둘러업고 뒤로 물러나 그를 살폈다.

다행히 힘이 빠져 쓰러진 것이지 죽을 정도의 부상은 아니었다.

"수고했다. 워리."

"감사합니다. 주인님."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워리가 이신의 뒤로 움직였다. 이신은 상처투성이로 박주혁을 부축하는 그들을 보았다.

박주혁이 본 것들은 미리 구매해 놓은 환각초를 이용해 만든 작은 함정이었다.

환각초는 그 향을 맡은 이에게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환상을 일으키게 만든다.

실제로 팀원들은 워리와 이신에게 얻어터져 쓰러졌을 뿐, 실제로 죽은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만 돌아가. 그리고 너희 팀장 일어나면 나한테 다시 오라고 해."

"왜...우리를 죽이지 않죠?"

박주혁을 보살피던 여자가 이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건 나중에 너희 팀장에게 들어. 돌아가."

"...."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분노한 얼굴로 이신을 노려보고 돌아갔다.

이신은 그런 그녀를 보며 코웃음 칠 뿐이었다.

저들이 찾아오란 말을 박주혁에게 전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결국 당사자가 궁금해서 찾아올 수밖에 없으니.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도전자를 물리쳤습니다.]

.

.

.

[마력이 80 올랐습니다.]

그들이 돌아가고 이신은 심각한 얼굴로 워리와 박주혁의 싸움을 상기했다.

"분명 변혁의 힘이라 했지."

변혁의 힘.

이건 전생의 박주혁이 사용하던 힘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스킬을 쓰는 사람을 본 적조차 없었다.

분명 박주혁이 워리에게 발로 차이고 쓰러지며 싸움은 끝난 상황이었다.

근데 황금빛과 함께 상황이 완벽하게 반전되었다.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는 그가 와 봐야 알겠지만 지금 본 것만으로도 말이 안 되는 힘이었다.

상황을 거스르는 힘.

아니, 인과를 거슬렀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갑자기 발생한 황금빛과 상식 밖의 능력.

이건 고유능력의 각성이 분명했다.

"고유능력의 각성이라...."

재밌네.

* * *

이신의 보스 방에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박주혁이 찾아왔다.

이신은 보스 방 안쪽에 응접실을 만들어 두었다. 그곳에 자리한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그래, 드디어 깼나?"

"...."

이신은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며 박주혁을 보았고 그는 생각이 복잡한 얼굴로 이신을 보며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홀짝-

감사 인사를 들은 이신은 잠깐의 침묵을 유지하며 차를 마셨다.

박주혁은 그 침묵이 불편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도대체 이 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개 탑의 보스일 뿐인데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게 맞는 것인가?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 찾아오려 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고 결국은 만나 봐야 무언가 실마리가 풀릴 것 같다는 생각에 무작정 이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상도덕은 아는 녀석이네."

"도대체 저에게 왜 그렇게 하신 겁니까?"

이게 가장 궁금했다.

그가 다른 탑의 주민들과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

그걸 떠나서, 왜 자신에게만 다른 도전자들과 다른 행동을 한 것인가?

"그냥."

"예?"

"그냥이라고."

박주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보았다. 그가 지금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에게 어떠한 장난기도 보이지 않았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딱히 이 이상 무언가를 말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들어 봐도 저에게만 다르게 행동하셨습니다. 마치 저에 대해 무언갈 아는 듯이."

"난 그저 너에게 장난을 쳤을 뿐이야."

"...그렇습니까?"

박주혁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추궁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덕분에 고유능력 각성했잖아?"

"그것도 의도하신 겁니까?"

"...그것도?"

은근슬쩍 말장난으로 이신의 의도를 파악하려던 박주혁은 그 말에 움찔했다.

이신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고는 차를 홀짝 마셨다.

"그럴 리가."

"그렇…습니까?"

박주혁은 더 이상 이신을 자극해선 안 되겠다 생각했다.

그런 그를 뚫어지게 보던 이신이 입을 열었다.

"뭐 해?"

"예?"

"정보 공유해."

"아."

당연한 듯 고유능력의 정보를 공유하라는 뻔뻔한 모습.

물론, 보여 줄 생각은 있었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줄은 몰랐다.

"공유하겠습니다."

이신은 그래도 혹여나 그가 반발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순순히 정보 공유를 하는 것에 조금 놀랐다.

이렇게 순종적인 녀석이었나?

그때,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이신의 눈앞에 그의 고유능력에 대한 정보창이 떠올랐다.

[변혁의 힘]

# 일어난 결과를 변화시킵니다.

# 변혁 에너지가 생성됩니다.

# 결과를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힘만큼 변혁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정보창을 살핀 이신은 대충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잠깐이지만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 일어난 결과를 변화시킵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능력이었다.

싸움에선 단 한 수에 승패가 뒤바뀌기도 하고 전장의 판도를 바꾸기도 한다.

이 능력은 혹여나 자신이 상대에게 간발의 차로 진다거나 혹은 수 싸움에 졌다거나 또는 한순간의 실수로 죽더라도 그것을 뒤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워리가 박주혁의 검을 쳐내고 발로 차 쓰러트렸을 때도 그 결과를 완전히 뒤집었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이신은 어이가 없어, 튀어나오는 실소를 내뱉었다.

여기서 이런 보물덩이를 얻게 될 줄이야.

그의 계획 속에 박주혁이란 인물은 없었다. 그저 전력에 약간의 도움이 된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리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숨은 보석이었던 것이다.

"오늘부터 매일 아침 여기로 찾아와."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강해지고 싶지 않아?"

이신의 질문에 어리둥절하던 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동료들을 무력하게 잃었던 기억은 그를 탑에 들어오게 만든 가장 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강해져서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좋아, 그럼 매일 아침에 나를 찾아와. 강하게 만들어 주지."

"제 팀원들도 같이 가능하겠습니까?"

이신에게 박주혁의 팀원은 딱히 시간을 쏟을 만큼 가치가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 녀석을 위해서 조금은 시간을 써 줄까?'

"내가 주력으로 봐주는 건 너야. 팀원들이 이곳에 와서 훈련하는 것은 막지 않겠지만, 세심히 봐주지는 않을 거다."

그 말에 박주혁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박주혁이 나가고 이신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디멘션 게이트가 열릴 시기였나?

1층에서 추가 인원들이 안 올라오니, 사람들이 미치고 팔짝 뛰고 있을 것이다.

빨리 해결하긴 해야 했다. 지금 한국의 탑만 이런 상황일 테니.

다른 국가에서 이 상황을 알게 되면 한국이 힘들어질지 모른다.

21층부터 29층까지의 세계관에서 있을 국가전.

아이소시아 대륙의 전쟁.

한국은 아이소시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국력이 강한 편에 속한다.

그러나 지금은 인력 수급이 끊긴 지, 1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 국가전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을 확률이 높았다.

디멘션 게이트가 열리면 한국의 약세가 지구에도 알려질 것이고 각 국가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한국에 압력이 들어갈지도 모른다.

지금의 세계는 도전자의 힘이 곧 국력이 되는 시대니까.

호로록-

따뜻하고 향긋한 차가 정신과 심신을 안정시켜 주었다.

"음, 향이 괜찮네."

그래도 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한국이 힘들어지고 탑 상위층의 고인물들이 힘들지라도.

1층 대기실의 저 녀석들이 풀려나는 순간 미국이고 중국이고 영국이고 다 끝일 테니까.

계획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신들을 위협할 날카로운 무기가 될 것이다.

제9화

디멘션 게이트

"사장님! 이건 아니죠! 제가 저 잡몹들 잡으면서 뼈 빠지게 포인트 모아 왔는데 이렇게 날먹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허, 백현군. 자네니까 이 정도 가격에 해 주는 거야. 나 1층의 안토니오 가우디라고 불리는 황강웅이야!"

"에이, 그래도 10,000p는 너무하잖아요! 저기 1층 스켈레톤 한 마리 잡아야 고작 5p 오르는데! 1층 한 바퀴 돌면 50p라구요! 1층을 200바퀴는 돌아야 되는데!"

"허, 알겠네! 거, 참. 내가 자네니까 좀 싸게 해 주는 거야. 8,000p만 받겠네."

10층 높이의 커다란 건물.

그 꼭대기 층인 10층의 큰 방 안에서 황강웅과 백현이 실랑이를 벌였다.

크디큰 방 안에는 각종 건물의 모형과 뼈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큰 지도와 모의 지형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황강웅 사장님. 저 1층 최고 마검사 백현입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크흠!"

황강웅도 조금 고민되는지 헛기침을 하며 생각했다.

"자네는 정말 1층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네. 선배님이 그랬으니까요."

백현의 표정은 진지했고 황강웅도 당장 앞만 보기보다는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난 1층을 벗어나는 게 어쩌면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네."

황강웅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이신은 너무나 강했고 아무리 도전자들이 강해져도 이길 수 없고, 넘을 수 없는 벽이었으니까.

이신은 탑이 정한 1층의 보스로, 1층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들 또한 영원히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래도 그가 가능할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 봤자 탑 안에 종속된 인간이라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저희도 묶여 있죠. 지금 이 1층 대기실에."

"억지 부리지 말게."

백현은 거기서 더 반발하려다 참았다. 황강웅이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하고 합리적인 생각이니까.

그는 탑이 만들어 낸 인간일 뿐이고, 어쩌면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 탑이 만든 캐릭터성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접 그를 마주하고 몇 번이나 부대낀 백현은 그가 도저히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탑이 만든 인조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설령 그의 말처럼 다른 클리어 조건이 있어서 1층을 벗어날지라도 자네가 훗날 랭커가 되리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거야 그렇지만, 여태 1층 대기실에서부터 저희처럼 강해진 도전자들은 한 명도 없었을 거예요. 앞으로 올라갈 모든 층의 기록을 압도적으로 갈아 치울 수 있어요."

백현의 말도 맞았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1층 대기실에 들어왔고 그 수가 이미 수백 명에 달했다. 그리고 눈앞에 백현은 그들 중에도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강했다.

"알겠네. 5,000p. 그 이하는 안 돼."

"크으! 역시 한국의 안토니오 가우디! 그럼 잘 부탁드려요! 수련장 완공돼서 제가 강해지면 나중에 탑 올라갈 때 좀 도와드릴게요. 하핫!"

"됐네. 그만 가기나 하게."

"그럼, 수고하십쇼!"

백현이 방에서 나가고 황강웅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에 다가가 1층 대기실에 생겨난 도시를 바라봤다.

이젠 고작 마을이라 불릴 수도 없는 곳이었다. 이제는 소도시라 불러야 될 정도.

광활한 대지에는 소유주가 없었고 포인트 상점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더구나 일반적인 가구의 재료들이나 음식, 혹은 완성된 제품들의 가격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또한 저 멀리에 있는 산과 나무들, 암석 지대에 있는 수많은 종류의 돌덩이들은 건축의 재료를 보충해 주었고 피로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 몸은 건축을 더욱 가속시켜 주었다.

처음 이곳에 들어오고 자신은 당황했다.

1층의 보스가 강해 탑을 오르지 못하다니?

그러나 금방 적응했다.

그의 흥미를 끈 것은 광활한 대지와 그곳에 띄엄띄엄 어설프게 생긴 나무집들과 가구들. 아무것도 없는 개활지와 그곳에 살게 될 사람들이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현대인들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환경을 구축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만족시켜 줄 수 있었다.

자신의 건축물이 이곳을 하나씩 채워 가는 모습. 그것이 탑을 오르는 것보다 자신을 더 설레게 만들었고, 그렇게 건축을 하다 보니 어느새 광야의 건축가라는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그는 이 도시에 가장 큰 부자이자 가장 뛰어난 건축가 되어 있었다.

"강웅아. 너는 탑을 오르고 싶었던 거냐. 아님, 그저 도피를 하고 싶었던 거냐."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한이 담겨 있었다.

* * *

이신이 기억을 되찾은 지 1년 가까이 되어 가는 시점에서 벌써 12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탑 안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지구에선 디멘션 게이트에서 나올 도전자들에게서 탑의 정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디멘션 게이트 앞으로 3일 후.]

[탑의 도전자들은 과연 몇 층까지 도달했을 것인가!]

[전문가들, 지금쯤 차유민이 75층을 돌파했을 것이라 예상.]

[아무리 차유민이라도 80층은 무리라는 의견이 주류....]

[올해 들어간 도전자들은 과연 어디까지 올라갔을 것인가?]

[올해의 초신성은 과연?]

[벌써부터 광화문 광장에 인파가 쏠려 대중교통이 정체를…]

한국은 이미 탑의 도전자들이 나올 날 만을 기다리며 인터넷에 온갖 기사를 뿌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한국 랭킹 1위 차유민이 어디까지 올라갔을지, 탑의 도전자들이 어떤 새로운 아이템을 들고나올지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올해 들어간 신입들이 어디까지 올라갔을지, 새로운 초신성이 나올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들은 꿈에도 몰랐다.

탑에서 도전자들이 어떤 소식을 들고나올지.

탑은 인생 역전의 기회가 되면서도 매우 위험한 도박 수였다.

50층에 도달한 사람이 지구에 나오는 순간 그는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가 되며 세계의 주류가 된다.

그러나 50층까지 올라가는 과정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았고 올라가지 못하고 정체되어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탑에서 나온 이들의 입으로, 혹은 그 유산이나 증거물로 자신들의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은 이들이 좌절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현실을 도피했으며, 어떤 이들은 탑을 올랐다.

자신의 가족을 찾기 위해서,

직접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혹은 그 탑에 복수하기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탑이라는 도박 수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그만큼 50층에 오르는 순간 그 현실적이지 않은 능력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그 어떤 것들보다 강렬한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디멘션 게이트의 오픈까지 단 하루!]

[과연 도전자들은 이번에 어떤 기적을 가져올 것인가!]

[차유민, 신창호, 신지원은 과연 어디까지 올라갔나?!]

[전 세계에서 한국을 주목 중! 과연 탑 최정상의 자리는 바뀌었을까.]

[미국의 조나단 작년 발언 재조명! '미스터 차는 80층에 도달하지 못한다.']

[영국의 초신성 베르고, 과연 3년 안에 50층에 도달했을 것인가!]

전 세계의 뜨거운 행사.

디멘션 게이트가 열리기까지 단 하루가 남았을 때 그 열기가 절정에 달했고.

각 나라의 게이트가 열렸을 때.

전 세계는 불타올랐다.

그중 단연 가장 불타오른 나라는 한국이었다.

* * *

[특종! 한국의 올해 도전자들 전부 실종!]

[1층에 도전한 모든 도전자들 감감무소식!]

[탑에 변화가 생긴 것인가? 1층의 난이도 급변?]

[탑, 한국 탑의 버그? 오류? 과연 진실은.]

한국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지난 1년간 탑에 들어간 사람의 수만 978명.

그중 단 한 명도.

단 한 사람도 1층에서 올라온 이가 없었다.

이건 단순히 인명의 실종과 죽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한국 도전자들의 대거 실종, 왜?]

[전 세계 다른 국가들, '아무 문제 없어.']

[한국 탑 랭커들과 도전자들의 탑 등반 정체.]

[20층 대의 국가전에서 5대 강국이던 한국, 현재 나락으로 가는 중.]

[한국 이대로 무너지는가?]

[과연 한국만 그런 것인가? 혹은 시작에 불과한 것인가?]

전 세계의 관심이 한국에 집중되었고 한국의 기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기자들까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광화문은 포화상태.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데만 해도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연락이 몰려들었고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정부는 현 상황을 파악하는 것만 해도 버거웠다.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실화야?

└미친, 이제 한국 망했네 망했어.

└올해 들어간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1층을 못 깼을 리가 없잖아!

└1층은 그냥 튜토리얼인데 그걸 못 깬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그것도 978명 중에 한 명도 못 나온 거면 문제가 생긴 게 맞지. 이제 탑도 끝이구나.

└내가 볼 때 이게 시작이야, 한국뿐만 아니라 이제 내년부터는 다른 국가들도 이렇게 될 거야.

└종말이다, 종말이야!

* * *

디멘션 게이트가 열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원래라면 열기가 조금이라도 가라앉아야 할 시기였지만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 불타오르고 있었다.

차유민.

그가 디멘션 게이트가 열린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지구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것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최상층 랭커인 차유민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이들은 그의 등장과 동시에 전 세계로 그 소식을 퍼트렸다.

차유민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특종감이었다.

현재 아무런 정보도 존재하지 않고 헛소문만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그가 내뱉는 정보는 가뭄에 단비와 다름없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가득 찬 광장 속에서 차유민에게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그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2일 뒤 기자회견을 열겠습니다."

차유민의 한 마디에 시끄럽던 주변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지금 한국이 난리인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난리 났죠."

그의 차분한 한 마디 한 마디.

그렇게 크게 목소리를 내지른 것도 아닌데 그의 목소리가 그곳에 있던 전부에게 명확하게 들렸다.

"1층에 다녀왔습니다."

그의 짧은 말 한마디.

그 안에 담긴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제10화

탑에 들어간 도전자들의 실종.

사람들은 '탑이 앞으로 또 한 번 변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탑은 변화를 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변화에 억지로 적응해야 했고 그 변화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탑 안쪽에 있던 이들의 반응은 바깥과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한국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니라 다행이라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문제는 그들도 이제는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디멘션 게이트가 닫히기 전에 탑에 들어갈지, 아니면 지구에 남을지.

1층뿐만 아니라 위층에도 문제가 생길지 모르는 일.

탑을 나온 이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머리를 쥐어 싸매야 했다.

혹여나 변화가 생겼다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날 일이라 생각했지만, 오직 한국에서만 일어난 특이 상황이었기에 한국인들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골치 아프네."

"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지?"

"일단 좀 생각을 해 보자.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난 가족들을 보고 올게."

"그래."

도전자들은 지구의 현 상황에 대해 대강 파악한 후 각자 흩어졌다.

기자들을 피해 숨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아들! 고생했어, 어서 들어와 앉아."

"예."

"저 이번에-."

"아들, 이제 탑에 다시 안 들어가면 안 돼?"

"예? 왜...?"

"이번에 기사 봤어, 작년에 들어간 사람들 모두 실종됐다고. 아들도 잘못되는 거 아니야? 엄마는 너무 걱정돼."

어머니의 표정을 본 백강우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은 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수많은 적들을 베고 수련을 반복하며 강해지고, 더 강한 적을 베고 광활한 대지를 맘껏 뛰어다니며 더 넓은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탑을 버릴 수 없었다.

이미 많은 시간을 탑에서 보냈기에 그곳은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에는 동료들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탑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가난하고 힘들었던 집을 부흥시키기 위해.

어릴 때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홀몸으로 자신을 힘들게 키워 주신 어머니에게 보답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기 위해.

그렇기에 탑에서 처절하게 버티며 싸웠고 끝끝내 50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는 어머니에게 힘든 일 시키지 않고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지원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췄다.

더 이상 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람 새끼라면 그러면 안 된다.

그러면 안 돼....

그럼에도.

그래도.

.

.

.

"죄송…해요...."

눈물이 흘렀다.

뚝. 뚝. 뚝.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바지춤을 꽉 쥐어 잡은 손등 위로 하나 둘 떨어졌다.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배신감을 느끼셨을 것이다.

남은 여생을 자신을 위해 사신 어머니를 저버리고 탑에 들어가겠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덜덜 떨리는 어깨를 타고 따듯한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녀는 말없이 안으며 토닥여 주었다.

"크흑...."

"미안해, 엄마가 무리한 부탁을 했구나."

아니에요, 어머니.

무리한 부탁이 아니에요.

그러니 제발 그런 말 마세요.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감정에 휩쓸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흐으으윽."

"괜찮아. 괜찮으니 맘껏 우렴."

그날 백강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 *

한편, 탑에 올라가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도 차유민에 대한 이야기가 일상 화젯거리였다.

"너 그거 들었어?"

"뭐? 차유민이 나온 거? 근데 80층이라도 클리어하고 온 건가? 만신창이던데?"

"그게 아니라, 1층에 다녀왔대."

"뭐? 1층에? 어떻게?"

"나야 모르지, 조만간 기자회견을 열 거라던데. 지금 전 세계에서 그곳에 가려고 온갖 로비를 찔러 넣는다더라."

"대박이네. 언제지? 너무 궁금한데?"

그 밖에 인터넷에서도 온종일 차유민 얘기뿐이었다.

└유민 오빠! 그사이 더 멋있어졌어!

└우.유.빛.깔. 차.유.민! 사.랑.해.요. 차.유.민!

└그만해 이것들아! 지금 차유민 멋있는 게 중요하냐!

└역시 랭킹 1등인가? 1층을 어떻게 간 거야??

└작년에 71층까지 클리어했었지? 10층마다 보상이 커지니까 아마 80층을 클리어하고 뭐라도 받은 게 아닐까?

└50층부터는 층간 이동이 가능하니까 80층 도달하면 1층도 갈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면 대박인데? 조나단도 76층까지밖에 못 갔던데 우리의 자랑 차유민은 과연.

* * *

차유민이 돌아오고 이틀이 지나서야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장은 차유민이 나타나기도 전부터 기자들로 가득 찼다. 뿐만 아니라 고위인사들과 각 나라의 랭커들도 대거 참석한 상태였다.

한국의 1층 도전자 실종사태는 전 세계적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언제 자신들이 겪을지 모르기 때문에.

"차유민 랭커님 입장하십니다."

차유민이 문을 열고 차분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전날에 비루했던 그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아주 말끔한 모습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차유민입니다."

사방에서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자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들며 질문의 의사를 내비쳤지만 한국도전자협회의 협회장인 전재용이 제지했다.

"질문을 받는 시간은 따로 갖겠습니다. 일단 차유민 랭커의 말을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전재용의 말에 기자들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차츰 가라앉았다.

기자회견장에 있는 모든 이들은 마치 어미 새가 먹이를 주길 기다리는 새끼 새들처럼 차유민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1층에서 도전자들이 올라오지 않은 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1년이 가까이 되었습니다. 탑 내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작에 알고 있었고 저는 그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탑을 올랐습니다."

차유민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차분히 적절한 호흡으로 말을 이어 갔다.

"모두 아시다시피 탑에는 격언이 있지요.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탑을 오르라. 그곳에 너의 꿈이 있을지니.' 저는 80층에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80층에 도달했습니다. 일주일 전에."

그의 마지막 말에 또다시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기자회견장을 울렸다.

1층 도전자들의 실종 사건 외에도 사람들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건 차유민의 80층 공략이었다. 근데 그것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알려졌으니….

이제 각국의 랭커들은 그에게서 공략법을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의 권력을 키워 주고 명예를 드높여 주었다.

"탑은 높이 오를수록 막강한 권한과 힘을 줍니다. 또한 엄청난 보상과 부귀영화를 누리게 만들어 주죠. 그리고 전 80층의 보상으로 1층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회견장에서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특종감이었다.

* * *

"후... 내가 다 긴장돼...."

"내가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있다니. 1층에서 안 올라가고 있길 잘했어!"

"잘하긴, 네가 안 오르고 싶어서 안 오른 거냐?"

"조용, 차유민 님 앞에서 뭐 하는 거야?"

김강천이 백현과 강지훈을 제지시켰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보스 방 앞에 심상치 않은 마력이 느껴지는데, 뭐죠?"

"아, 그게... 가 보시면 알 겁니다. 하하...."

차유민은 의아한 표정으로 보스 방 앞으로 갔다.

그곳엔 메이가 고압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며 서 있었다.

어두침침한 검은 로브와 딱 봐도 사이한 기운이 음침하게 퍼지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해골이 문 앞을 가로막고 있다.

"저게 당신들이 말한 보스입니까?"

"아니요...."

차유민도 알고는 있었다.

그들이 말한 것과 너무 달랐으니까.

그럼에도 느껴지는 분위기와 힘은 보스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저건, 이곳 네크로맨서 님이 만든 문지기 겸 비서입니다."

김강천이 멋쩍은 얼굴로 설명했다.

"문지기면 문지기지… 비서는 뭡니까?"

차유민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김강천이 차유민의 물음에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 메이가 그들을 발견했다.

"너는 뭐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나는 이곳 보스에게 볼일이 있으니 비켜라. 죽기 싫으면."

"헤엑!"

차유민의 뒤에 있던 백현이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강지훈이 다급히 손으로 막았다.

차유민은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든 앞에 있는 메이에게만 신경을 집중했다.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상대였다.

'이걸 일개 1층 보스가 만들었다고? 근데 이 정도라니....'

"호오? 재밌는 녀석이 새로 들어왔네. 주인님에게 볼일이 있다면 나를 거쳐야 할 거야."

"고작 문지기 따위에게 낭비할 시간 따윈 없다. 금방 끝내 주지."

"으억-!"

"야야, 조용히 해!"

백현이 차유민의 발언에 또다시 괴성을 내지르다 강지훈에게 제지당했다.

메이의 무력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 차유민의 발언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랭킹 1위의 도전자였다.

그가 고작 1층에서 패배할 일 따윈 없을 것이지만....

그들은 아무리 그래도 왠지 모르게 선배님은 못 이길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메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메이를 건들면 선배님이 대노하실 지도 모르는데.

사실 그들은 차유민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차유민이 곧장 검을 빼 들며 메이에게 달려들었다.

탕!

허공에 생성된 마력 실드가 검을 막아냈지만 자연스럽게 다음 공격으로 연계가 들어가며 메이와 차유민의 공방이 이어졌다.

마법과 검격이 공간을 난무했다.

"크윽!"

"크하하핫! 그것밖에 안 되나? 고작 그 정도론 주인님을 뵐 자격이 없다!"

불, 물, 땅, 바람.

4원소를 모두 사용하는 스켈레톤 메이지의 실력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냉기 계열 마법으로 바닥을 얼려 기동력을 약화시키고 바람과 화염 계열 마법을 조합해 계속해서 빈틈을 찔러 기회를 노림과 동시에 접근을 못 하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파고들어 접근하면 대지 계열 마법으로 막고 반격을 하니,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건 단순 놈의 능력치가 뛰어난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전투 경험과 동시에 그것을 뒷받침할 마법적 능력을 고루 갖춰야 했다.

이게 어떻게 일개 스켈레톤 메이지가 가질 수 있는 능력이란 말인가?

"대단해. 인정한다."

차유민은 인정했다.

이곳은 분명히 자신의 상식선을 한참이나 벗어났다는 것을.

"이제 나도 제대로 해 주지."

그의 검이 검게 물들었다.

영식(影式).

가르기.

차유민의 검이 메이의 돌벽을 갈랐다.

그러나 돌벽엔 어떠한 흠집도 나지 않았다.

"커억-."

대신 돌벽 뒤에 숨어 있던 메이의 고통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돌벽이 무너진 자리엔 찢긴 로브를 입은 메이가 보였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있던 팔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주인님 외에… 패배는… 오랜만이군."

메이가 무릎 꿇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차유민 뒤에 서 있던 세 남자들은 입을 떡 벌리며 그 광경을 보았다.

저 무지막지한 메이가 팔 하나를 잃고 무릎 꿇고 있다니.

역시 랭킹 1위는 다르구나.

그들은 다시 한번 차유민을 보며 경외의 감정을 가졌다.

"들어가라, 주인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그래. 이들의 당부가 있어서 죽이지는 않으마."

"큭… 고맙네."

세 사람이 차유민에게 절대 메이를 죽이면 안 된다고 간절히 부탁했다.

메이는 보스가 아끼는 녀석이니까, 혹시나 그가 분노하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차유민이 그를 죽이고 1층을 해방시켜 줄 지도 몰랐지만.

그게 실패하면 그다음은 절망뿐이었다.

그리고 그 부탁은 성공적이었다.

보스 방으로 들어간 그들은 그가 메이를 다치게 만들어 조금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생각보다 태연한 표정에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차유민은 차분하고 침착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지금 1층 대기실에 있는 이들을 제외한 모든 탑과 지구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1층의 보스는 허약하고 무기력하며, 제정신도 아닌. 그저 인형에 불과한 보스였다.

그러나 차유민은 마주치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자가 그런 것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차유민을 본 이신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제11화

"당신입니까? 이 사태의 원인이."

"음.... 너는 누구지? 다짜고짜 그렇게 물으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어."

차유민이 그를 노려보았다.

대화가 통한다는 것도, 말은 저렇게 했지만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태도인 것도.

그는 1층의 보스가 맞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탑에서 생긴 특수 인물인 건가?

그렇다면 이번 1층의 사태는 특수한 이벤트인가?

"…저는 차유민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처음 탑에 올랐을 때 스치듯 지나갔던 그 보스와는 확연히 달랐다.

여유로운 태도.

느긋한 말투와 또렷한 음성.

깊은 눈동자.

그리고 짙은 마력의 농도까지.

도저히 그때와 같은 보스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겉모습만 같을 뿐 그 외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었다.

차유민은 태도를 바꿨다. 그저 몬스터 따위로 생각하고 대해선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서야 상대방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대화할 자세가 되었구만. 나는 이신이다."

"이신?"

마치 한국인의 이름 같지 않은가.

그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오랜만에 실력이나 한번 볼까?"

오랜만에?

차유민은 의아함을 더 이어 갈 수 없었다.

스켈레톤 메이지와는 완전히 다른 캐스팅 속도.

마력이 감지됨과 동시에 허공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큭-."

"반응이 느려."

실력을 숨길 상대가 아니었다.

곧장 차유민은 그림자를 개방했다.

검은 바닥에서 흘러나온 그림자에 몸이 휩싸였다.

"호오, 처음부터 전력인가?"

차유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속전속결, 전력을 꺼낸 이상 빠르게 끝내야 했다.

영식(影式).

환상 베기.

그림자의 검은 검기들이 이신의 시야를 베었다.

그의 시야가 그림자 속 세상에 잠겼다.

환상 베기라.

오랜만에 보네.

이신은 그것을 보며 위기감에 잠기기는커녕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과 함께 탑을 오르던 차유민의 마지막 모습을.

- 형...

- 유민아.

검게 물든 세상 속, 차유민의 환상 베기가 악마를 베어내고 동시에 악마의 손톱은 차유민의 몸통을 꿰뚫었다.

바닥에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는 차유민.

한발 늦게 그곳에 나타난 이신이 쓰러져 있는 차유민에게 다가갔다.

뻥 뚫린 그의 복부를 통해 흘러나오는 내장을 눌러 막은 이신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

후련한 얼굴이었다.

- 형은 제발 탑의 끝까지 올라가 줘요.

- 유민아.

- 제가 못 다 이룬 꿈을…형이 대신 꿔 줘요....

- 유민아.

그가 눈을 감았다.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미안하다.

미안해...

이신의 음성은 그렇게 참혹한 전장 속을 계속 메아리쳤다.

# 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머릿속에 전생의 모든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잊고 싶었던 기억까지도.

어둠에 잠겨 이신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그림자들이 차츰 그를 옥죄였다.

전생에서 수없이 보았던 그림자들.

이신에게 이 그림자들을 파훼하고 반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선뜻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미래라도 보는 것처럼 그림자들의 공격 궤도를 모두 읽고 마법으로 막는 모습에 차유민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는 전투의 승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적당히 어울려 주는 듯한 모습에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오히려 더 차분해질 수 있었다.

어느 순간 그림자의 검이 이신을 베는 것을 멈췄다.

"왜...왜 공격하지 않는 겁니까?"

"...."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겁니까?"

"...."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이러는 것일까.

여기 있는 차유민은 과거의 그 차유민이 아닌데.

"너는 지금 행복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차유민은 그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행복…합니다."

"그렇군."

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검은 마력이 발현되었다.

이제 그만 질질 끌던 이 전투를 끝낼 때였다.

딥 플레어(Deep flare).

짙은 어둠과 화염의 조화.

두 가지 속성의 결합,

불을 활활 타오르지만 그 빛은 잠들어 있다.

그림자보다 더 짙은 어둠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차유민을 불태우며 폭발한다.

콰과광!

동굴이 흔들리고 지면이 떨려온다.

돌무더기가 천장에서부터 떨어져 내리고 검게 물든 돌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마치 저주에 걸린 듯 온몸이 검게 변한 차유민이 화상을 입고 이신의 앞에 쓰러졌다.

"데리고 가라."

"네? 넵!"

세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인지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들의 인지 능력을 한참이나 넘어가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상황 파악이 대충 끝났을 때는 이미 차유민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1층의 보스인 네크로맨서는 슬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차유민은 1층의 대기실로 돌아가자마자 정신을 차렸다.

1층의 대기실은 모든 상태 이상을 회복시킨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어떻게 된 것인지 상황 파악을 순식간에 끝냈다. 그는 1층의 보스인 네크로맨서에게 졌고 지금 1층의 대기실로 쫓겨난 것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대로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

차유민은 충격에 정신을 차리고도 한동안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80층을 돌파하고 각층을 이동할 수 있는 [층간 이동자]라는 스킬을 얻었다. 다만 이것에 제약이 있었는데, 각 층의 도전자들의 평균 능력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각종 뛰어난 스킬들과 아이템들이 있기 때문에 1층의 보스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졌다.

그것도 허무하리만치 어이없게.

말 그대로 발렸다.

1층 대기실에 있는 도전자들이라면 일반인보다 조금 더 뛰어난 정도일 거라 예상했다.

초인이라 부를 수는 없는 그런 사람들만 있을 테니, [층간 이동자]로 인한 자신의 능력치도 그 정도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 도전자들의 평균 능력치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훨씬 상회했다. 어떻게 이곳을 1층 대기실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자신의 능력치도 그만큼 증가했다는 것이고 충분히 보스를 이길 수 있는 수치였다.

"하...."

자신이 이렇게까지 무력하게 진 적이 언제였나?

그는 마치 뻔하디 뻔한 공격을 막아내는 것처럼 모든 공격을 예측하고 마법을 사용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정말로 자신의 공격이 그런 하수들의 올곧고 뻔히 보이는 공격이라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림자 검은 은밀하고 변칙적인 성질이 강한 검.

차유민은 그와 자신의 격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싸움 내내 그의 눈빛에는 회한이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일까?

왜 하필 나와 싸울 때 그런 생각을 한 것일까?

그의 사연이 듣고 싶었다.

어떠한 사연이 그에게 망설임을 주었던 것인가.

그는 망설였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체류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겠어."

* * *

"또 왔냐?"

"예."

"그만 오지?"

이신이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어차피 오래 못 있습니다. 며칠만 참으시죠."

차유민의 단호한 태도에 이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메이랑 워리에게 상대하라 할 수도 없고… 쯧."

"이번엔 2위계 이상은 사용하지 말아 주시죠."

그의 말에 이신은 벙찐 얼굴로 그를 보았다.

"미친놈, 갈수록 뻔뻔해지네? 1위계만 사용하라고?"

"예."

"내가 왜?"

"원래 1층 보스는 다크 에로우만 사용했습니다."

"허... 얼굴에 철판을 까셨나? 내가 그놈이야?"

"그놈이 그놈이긴 합니다만."

맞긴 맞다.

내가 그놈이긴 하지.

얍삽한 놈.

비겁하게 팩트를 말하다니.

"애들은 너 이런 놈인 거 아냐?"

"모릅니다."

"랭킹 1위가 미친놈이라니…. 세상 말세야. 어서 바깥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할 텐데."

"그럴 일 없습니다."

그렇겠지. 넌 그런 놈이니까.

"그래, 뭐. 기초마법만 쓰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니요, 그래도 허무하게 지지는 않겠죠."

"쯧, 이번에 80층에 도달했다지?"

"예. 혹시 다음 층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차유민은 그의 입에서 먼저 층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반색하며 곧장 물었다.

"당연하지. 내가 너희 선배라고 했어, 안 했어?"

"아, 그거야...."

그가 허구한 날 입에 달고 사는 것이 자신은 100층을 이미 오른 너희들의 대선배니까 깍듯이 하라는 말이었다.

물론, 그의 무력이 엄청난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의 제약이 사라진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저 허세에 불과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같이 지내보면서 가끔 나오는 그의 통찰과 탑에 대한 지식은 헛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말해 주는 것을 들어보면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있었다.

"다음 층에 대해 알고 싶어?"

"예!"

다음 층의 정보를 미리 알고 간다면 당연히 층의 공략에 크나큰 이점을 지고 가는 것이다. 그만큼 정보 하나의 가치는 천금을 주고도 못 살 정도.

탑이 [층간 이동자]라는 스킬을 준 것이 이것 때문이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 이번 1층 실종사태와 더불어 다음 층의 공략을 원했었고 그것의 보상은 [층간 이동자]라는 스킬이었다.

단순 1층 실종사태에 대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다음 층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줄이야.

"나를 이긴다면 알려 주지."

"예?"

"귀가 그새 막히기라도 했어? 이겨 보라고, 기본 마법만 써 줄 테니까."

차유민의 전의가 급격히 상승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졌다.

또.

* * *

기자들은 차유민에게서 나오는 말 하나, 그 단어 하나에 담긴 느낌이나 억양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엄청난 집중을 하고 있었다.

"능력에 대한 상세 내용은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일단 저는 그 능력을 사용하여 1층 대기실로 향했습니다."

차유민의 말이 끝나자 기자들의 자판 두들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곳엔 탑에 들어간 도전자들이 있었습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탁! 탁! 탁! 탁! 탁!

"그곳은 제가 알던 1층 대기실이 아니었습니다. 휑한 개활지였던 그곳에는 작은 소도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1층 대기실에 도시를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집도 있었고, 음식을 파는 음식점도 있었으며 옷가게도 있었고 사람들이 산책을 거니는 공원과 호수도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저는 그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올라가지 않느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고 묻자, 그들은 저에게 말했습니다. 올라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이곳에 도시가 세워진 것이라고."

차유민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기자들이 손을 들었다.

누군가는 발작하듯 입을 열려고 했지만 무언가에 막혀 말을 할 수 없었다.

'협회장!'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의 힘인지 곧장 눈치챘다.

염동 능력자.

한국도전자협회의 협회장 전재용.

그가 기자들이 나서는 것을 막은 것이다.

"저는 곧장 1층의 보스를 죽이고 이곳의 사람들을 해방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1층에 올라가 보스를 마주했습니다."

꿀꺽-

사람들이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회견장 안은 고요했다.

이제가 진짜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실종사태고 뭐고 아니라, 1층 보스가 급격히 강해졌다는 것이다. 갑자기 탑의 한국 서버 난이도가 바뀌었다면 다른 나라들의 탑도 그렇게 될 확률이 충분히 높았다.

과연 차유민은 그 보스를 죽이고 1층 대기실에 묶여 버린 도전자들을 해방시켜 주었을까?

그 보스는 얼마나 강할까? 어떤 능력을 가졌을까?

사람들에겐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졌습니다. 그 보스에게."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그의 말이 끝남과 함께 터지는 셔터 세례.

차유민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전 세계에서 탑의 가장 높은 층까지 도달한 도전자이자, 한국 1위 랭커.

그가 고작 1층의 보스에게 진 것이다.

"ACN의 기자 레이나입니다! 그럼 한국의 1층은 영원히 클리어할 수 없는 것인가요?"

갑작스레 들려오는 기자의 질문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전재용은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미국의 랭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는 전재용의 시선을 모른척하며 차유민만을 노려보았다.

그가 자신 쪽 기자에게 걸린 마력을 풀어 버린 것이다.

"대답할 필요 없네. 자네는-."

"괜찮습니다. 레이나 기자님. 영원히 클리어할 수 없냐고 물으셨죠. 예, 맞습니다. 그곳의 보스는 그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의 말에 기자들의 타자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렸다.

질문을 던진 레이나도 만족한다는 듯 웃으며 타자를 열심히 치고 있었다.

"레이널드의 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 탑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헤스티지의 헤이그입니다! 이제라도 다른 나라로 넘어갈 생각이 있습니까?"

레이나를 기점으로 기자들의 질문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재용이 기를 쓰고 막으려 했지만, 옆의 차유민이 그에게 그냥 내버려 두라는 신호를 보냈다.

기자들은 이때다 싶어 한국을 내리깔고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면 한국에 미래는 없고 앞은 내리막길뿐이었다.

그러나 암울한 분위기를 가져야 하는 차유민은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누군가는 한국의 몰락, 한국의 탑은 끝났다는 둥, 기사를 쓰고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에 뜨끔한 기자들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쏠렸다.

아마 많은 기자들이 그런 식으로 기사를 써재끼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한국을 내리깔고 싶은 나라들의 기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기사를 썼을 것이고.

"내년부터 한국의 탑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다들 하고 계실 겁니다. 지금 제가 당부하겠습니다. 한국분들은 반드시, 반드시 탑에 들어가십시오."

그의 말에 사람들이 의외라는 듯 그를 보았다.

"현재 한국의 전력이 간신히 세계 10위권 정도로 사람들은 인식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 한국은 10위권 밖으로 떨어져 나갈 것이라 생각하며 까 내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지금 선언하죠. 3년. 3년 내로 한국이 최고를 찍을 것이고 아마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 겁니다."

그의 말에 기자들은 물론, 옆에 있던 전재용도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여태까지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탑을 오를 때도, 50, 60, 70층을 격파했을 때도, 그는 이런 거만한 발언을 한 적이 없었다.

항상 겸손하게.

그는 자신을 숨겼었다.

"그리고 1층은 1년 안에 뚫릴 겁니다. 그러니 1년 남았습니다."

"뭐가 1년 남았다는 거죠?"

한 기자가 답답한 듯 소리쳤다.

이미 전재용은 기자들을 막았던 마력을 모조리 거둬들인 상태였다.

"여러분이 한국과의 관계를 구축할 기회. 잘 생각하세요. 1년 남았습니다."

제12화

뱀파이어 퀸

[마력 등급 Lv.2가 되었습니다.]

[신체의 봉인이 일부 해금됩니다.]

[고유능력이 개방됩니다.]

[검은 마력을 습득합니다.]

[『스탯 – 지배력』을 획득합니다.]

[『스킬 – 그림자 공간』을 획득합니다.]

차유민이 오기 전 나의 마력은 5만을 돌파하며 마력 등급이 한 단계 상승했다.

그와 동시에 신체의 봉인이 2단계로 해금되어 고유능력을 개방하고 지배력과 그림자 공간이라는 스킬을 얻었다.

지배력은 네크로맨서에게 없어선 안 될 스탯이다. 지배력이 높을수록 부릴 수 있는 권속의 수가 늘어나기에.

[그림자 공간]

지배력에 따라 공간에 보관할 수 있는 언데드의 개체 수가 달라집니다.

1층을 벗어날 때, 메이와 워리를 데리고 갈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현재 지배력은 1뿐이지만, 앞으로 더 올리면 될 터.

[검은 마력]

# 죽음 속성

# 언데드 종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을 가집니다.

앞선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것이다.

"다시 봐도 말이 안 되는데."

언데드 종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과 죽음 속성.

네크로맨서라면 누구나 꿈에 그리는 능력들.

진 이브리엄이 어떻게 초월의 격에 올랐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사기적인 고유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고유능력을 여기서 얻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건 정말 엄청난 수확이었다.

아마 메이가 이 검은 마력을 받았다면 차유민에게 그리 허무하게 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잘하고 있으려나?'

차유민에게 많은 일들을 부탁했지만, 이제는 내 손을 떠난 일.

더 고민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후."

한 번 심호흡을 한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진의 일기장을 펼쳤다.

- 네크로맨서로서의 생명은 끝났다. 점점 흐릿해져 가는 정신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이 점점 미쳐 가고 있는 것까지도.

-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방법을 찾았지만 망가진 이 몸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이대로 점점 미쳐 가다가 영원히 내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이럴 수는 없다.

다음 장을 넘겼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지나가는 시간을 계산할 여유도 없다. 오늘 이 몸을 회복할 실마리를 발견했다.

일기장에 적힌 글에 그의 초조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 실마리를 찾은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서재가 온통 망가져 있었다. 지난 한 달간이 기억나질 않는다. 그간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다행히 이 일기장과 마법으로 보호장치를 걸어 놓은 노트는 남아 있었다.

그의 정신이 분열되어가고 있었다.

-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격을 올려야 한다. 격! 신과 같은 격에 이르러야 이 고통스러운 저주를 풀 수 있을 것이다.

- 마력 등급을 올리면 마법사로서의 격이 올라간다. 망가진 마력혈 일부를 회복시킬 순 있지만, 지금 나는 마력 등급을 올릴 방법이 없다.

- 다음 방법을 찾을 때까지 일기장을 적지 않을 것이다.

내 입가가 쓰게 올라갔다.

그대로 일기장을 덮어 버렸다.

이다음 장에도 일기가 적혀 있었으나, 마력혈을 회복시킬 방법 따위는 적혀 있지 않았다.

'진, 당신의 의지는 내가 잇겠습니다.'

뒤의 일기장은 그가 정신을 놓은 채 적은 것과 좌절해 휘갈긴 것들이 전부였다.

그의 고통이 어떨지 일기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되었다.

지금의 나는 진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진이 이곳에 갇혔을 때는 탑에 도전자가 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 장소 자체가 탑의 일부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현재 나는 시스템의 도움을 받고 있고 불망각의 구라는 사기적인 능력이 있다.

진의 일기장에 적힌 것처럼 격을 올리려면 우선 탑을 올라야 한다.

신체의 봉인 일부가 해금되었을 뿐이지 그의 능력을 되찾기 위해선 고작 마력 등급의 상승 정도론 불가능하다.

신격.

그것을 얻어야 한다.

"이 안에...."

나는 연구실의 안쪽으로 들어가 그간 열지 못했던 문 앞에 섰다.

아무리 들어가 보려 발악을 해도 들어갈 수 없었던 방.

그간 알아낸 것이라곤 특정한 마력을 주입해야 열린다는 것인데, 검은 마력을 얻고 나니 그 특정 마력이 이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안이라면 진이 남겨 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휘몰아치는 검은 마력.

그 안에 느껴지는 이 짙은 죽음의 향을 문을 가로막고 있는 마법에 주입했다.

쿠구구궁-

역시나.

검은 마력이 주입되자 굳게 닫혀 있던 그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작은 공간.

그 안에는 투박하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관 위를 슬쩍 손가락을 쓸어 보아도 먼지 하나 묻어나오지 않았다.

'여기에도 반영구 보존 마법이 걸려있네.'

이 안에 담긴 것이 무엇일까.

두근거리는 심장을 심호흡으로 진정시키며 천천히 관의 뚜껑을 열었다.

"사…람...?"

창백한 혈색에 보랏빛 머리카락.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인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성.

그간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예쁜 사람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 다소곳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이 마력 파장은....'

인간들이 가진 것과 확연히 다른 마력 파장.

그때, 마력 파장을 탐색하던 중 사용하지도 않던 검은 마력이 본능에 이끌리듯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로 뻗어 갔다.

검은 마력이 그녀의 영혼을 속박하듯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을 번쩍 뜬 그녀가 초점 없는 눈빛으로 이신을 바라보았다.

붉은 보석이 박힌 것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

그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이신은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그녀에게로 움직이자, 이신은 다급하게 관을 잡고 마력을 끌어 올려 정신을 붙잡았다.

"뱀파이어...."

[뱀파이어 퀸의 영혼이 긴 잠에서 깨어납니다.]

[검은 마력이 뱀파이어 퀸의 영혼을 지배하려 합니다.]

[뱀파이어 퀸의 강대한 영혼이 지배를 거부합니다.]

"윽!"

그녀의 영혼을 강제로 지배하려다 실패한 반동이 그의 몸에 몰려왔다.

"진...?"

가만히 무표정으로 이신을 보던 그녀의 표정이 한순간에 변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고 그를 감싸 안았다.

[뱀파이어 퀸의 영혼이 검은 마력을 받아들입니다.]

[뱀파이어 퀸, 릴리안이 당신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존재를 권속으로 만들었습니다.]

[지배력이 상승합니다.]

[지배력이 상승합니다.]

[지배력이....]

"진! 돌아왔구나!"

이신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진이 남겨놓은 어떤 유산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뱀파이어 퀸이라니.

뱀파이어 퀸은 쉽게 거론할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가 아니다.

이 탑 안에서 그 누구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격을 가진 존재.

왕(王)급의 존재들과 그 격을 나란히 하는 괴물이 바로 뱀파이어 퀸이다.

"잠깐...이거 놔 봐."

이신은 우선 이 잘못된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릴리안의 손을 풀고 그 속박에서 벗어난 이신이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보았다.

"일단 그 매혹 좀 풀지?"

"응? 뭐 이런 걸로 그래? 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거야? 알겠어."

그녀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뱀파이어, 그것도 뱀파이어 퀸의 매혹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심력을 소비하게 만든다.

지금은 그녀가 자신의 권속이 되어 그 정도가 덜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오랫동안 마주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고맙네. 우선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난 진 이브리엄이 아니야."

"뭐? 갑자기 무슨 그런 장난...."

갑자기 급격하게 변하는 표정.

이신의 존재가 진 이브리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가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너… 너는 누구지? 감히… 진의 몸을...!"

급격히 무거워지는 공기.

그녀의 분노로 인한 압박감이 이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를 악문 이신이 마력을 끌어 올려 간신히 그것에 저항했다.

"그만!"

그녀는 이신의 마력에 종속되어 있다.

검은 마력이 그녀를 압박하자 그녀의 기세가 상당 부분 줄어들었다.

'미친... 순식간에 마력의 3분지 1이 사라졌어.'

릴리안은 결국 이신의 권속이었고, 그녀가 힘을 사용할수록 그만큼 이신의 마력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이 폭주를 막아야 했다.

"진정하고 잘 봐! 진 이브리엄이 어디 있는지!"

"끝까지 나를 능멸하려 하는구나. 네까짓 게 진의 몸을 어떻게 빼앗았는지 모르겠지만 더는 안 될 것이다."

이신은 간만에 식은땀으로 온몸이 범벅이 되었다.

그녀가 검은 마력을 받아들였지만, 현재 상당한 힘을 봉인 당한 진의 몸으로 그녀를 계속해서 강제하는 건 엄청난 압박감으로 돌아왔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봐! 보이지 않는다면 느껴. 진은 이곳에 있으니까."

"뭐...?"

잔뜩 흥분하여 가쁜 호흡을 내쉬던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다. 흐릿했던 초점이 맞춰지고 그녀의 시선은 이신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아...."

그녀의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은 이곳에 있다.'

이곳 1층에 있는 그 어떤 영혼들보다도 심각하게 망가진 영혼이.

거의 지워질 것 같은 희미한 진의 존재는 이곳에 확실히 존재했다.

죽음의 통찰자의 능력을 얻은 이신에겐 진의 존재가 확연히 보였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그의 몸과 점점 융화되고 그의 연구 자료들을 연구하며 그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하자 점점 더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릴리안이 죽은 자의 영혼을 보는 능력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격이라면, 진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다.

그리고 그건 정확하게 통했다.

"...있었어. 진이...흐윽… 어쩌다가, 어쩌다 그렇게...."

진을 인식한 릴리안의 표정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일그러졌다.

"너는...어떻게 진과 연결되어 있는 거지?"

"진이 남긴 일기장이 있어."

"...내가 그걸 봐도 될까?"

"그래."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그녀에게 진의 일기장을 건네주었다.

한참을 말없이 일기장을 넘기던 릴리안.

그녀의 덜덜 떨리는 팔을 이신이 붙잡아 주었다.

"진의 글씨...크흑...."

진에 대한 그간의 일들을 알게 된 그녀가 울분에 휩싸였다.

"너는…어쩌다 진의 몸에 있게 된 거지?"

"나는...."

이신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자신의 과거를 내보였다.

진에 대한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그녀라면 이 무거운 업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 줄 동반자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가...."

이신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눈동자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권속이 되었기에 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한 푼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도와줘...진의 복수를 할 수 있게."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난 이 위. 탑의 꼭대기에 있는 신들을 끌어내릴 생각이야. 그러니 내게 힘을 보태줘."

"알겠어. 내 영혼을 걸고 너를 돕겠어."

"든든하네."

[뱀파이어 퀸, 릴리안이 완전한 복종을 표명합니다.]

"이제부터는 주인님이라 하겠습니다."

"그럴 필욘 없어. 그냥 편하게 불러. 이름을 부르던가. 존대도 필요 없고."

"...알겠어. 그냥 주인이라고 할게."

"그나저나, 내가 널 유지하는데 마력이 너무 많이 소모되는데 어떻게 안 되나?"

아직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긴 했지만 이대로 마냥 릴리안을 소환 상태로 유지하기는 아직 이신의 마력으로는 부담이 컸다.

"난 혈계로 언제든지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그게 아니면 이 본체를 다른 모습으로 바꿀 수도 있지. 그럼 부담이 덜할 거야."

"의사소통은 가능해?"

"혈계 안에서 의사소통까지는 되지 않아도 주인이 나를 부르고 싶다면 그 정도는 언제든지 부를 수 있어."

"그래? 그럼 당장 모습부터 바꾸자."

"알겠어."

그녀의 몸이 피로 변하더니 한순간에 작은 박쥐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압박감이 느껴지던 그녀의 존재감이 확실히 줄어들었고 소모되던 마력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 모습으론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해. 그건 알아둬."

"그래."

자신의 어깨 위로 올라간 릴리안을 보며 이신이 피식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 * *

"주인님, 말씀하신 서류를... 이건 뭡니까?"

메이가 이신의 어깨 위에 붙어 있는 박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에 박쥐가 있을 리가 없는데."

"인사해, 새로운 동료다."

"동료… 말입니까? 저 녀석이?"

메이가 놀란 얼굴로 박쥐를 보았다.

조그만 얼굴에 그 거만한 표정이 조금 맘에 들지 않았다.

'저 조그마한 녀석이 뭐라고....'

못마땅함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녀석의 작고 귀여운 모습과는 상반되게 몸에 흐르는 마력이 심상치가 않았다.

"정체가 뭡니까?"

"뱀파이어 퀸."

"배, 뱀파이어… 그것도 퀸 말입니까?"

"그래."

자신의 주인님이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저 말은 진실일 것이다.

자칫 저 박쥐에게 실례되는 행동을 할 뻔한 메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끼익-

"주인님, 언더모스트 인간들이... 그 박쥐는 뭡니까? 하하하! 귀엽구만."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워리가 박쥐에게 다가가 툭툭 건드렸다.

그 모습에 헛웃음을 짓는 이신과 경악한 모습으로 얼어 버린 메이가 멍하니 그 장면을 보았다.

"감히! 하찮은 스켈레톤 따위가!"

박쥐의 몸이 피로 변하며 붉은 파도가 워리를 덮쳤다.

"이, 이게 무슨...!"

"앞으로 다시는 그 경솔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사, 살려... 주인님...!"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신이 릴리안을 말리며 다행히 사소한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다.

제13화

언더모스트 

"백강우, 정말이야? 괜찮겠어?"

차유민이 걱정되는 얼굴로 그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예, 이제는 한국에 정착하려구요. 탑은... 이 정도면 됐어요."

마음을 정리한 듯한 말과 다르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야! 너 정도면 최상위권 랭커도 될 수 있어! 근데 왜 갑자기! 설마 유민 오빠를 못 믿는 거야?"

신지원이 답답한 듯 그에게 따지듯 말했다.

최상위권 랭커인 신지원과 차유민과 다르게 아직 상위권에 살짝 걸친 백강우는 같이 탑을 오르지는 못했다. 층수 차이가 많이 나니까.

그러나, 탑의 특성상 올라올 도전자들은 결국 자신들과 같은 층까지 올라오게 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쌓이는 업적의 질과 양은 다르겠지만, 공략된 층은 같아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백강우는 한국의 중요 전력 중 하나였다. 그는 80층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인재였고 차유민과 신지원은 그를 그때까지 충분히 푸시해 줄 의향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머리도 똑똑한 놈이 왜 그러는 거야? 지금 탑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S대 로스쿨까지 나와서 다 포기하고 탑에 올랐으면 끝까지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만해, 지원아."

"하지만!"

"강우도 사정이 있을 거야. 그렇지?"

"죄송해요. 여태까지 그렇게 도와주셨는데."

차유민도 답답하고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백강우 같은 유망주가 전력에서 이탈하는 건 크나큰 손실이니까.

그러나, 어차피 지금 자신도 1년을 포기하고 한국에 남아야 했다.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지구에서의 활동에 큰 전력 하나가 생기는 셈이니까. 그리고 그 1년 동안 설득하면 된다. 그가 다시 탑에 오를 수 있도록.

이제 곧 디멘션 게이트가 닫힌다.

아직 지구에서의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 덕에 더 혼란이 가중되었다고 봐야 된다.

그 혼란은 그래도 디멘션 게이트가 닫히고 도전자들이 탑에 들어가면 어느 정도는 가라앉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자신이 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다시 한번 논란이 일어날 것이다.

"오빠, 무슨 생각해?"

차유민의 굳어진 표정을 본 신지원이 물었다.

"아니야, 그것보다 내가 이전에 말한 거. 기억하지?"

"응… 기억이야 하고 있긴 한데...."

"명심해, 그리고 절대 80층 위로는 도전하지 마. 탑에서 나오지 않은 녀석들한테도 말해 주고."

"응, 알겠어."

이제 모든 변화가 시작된다. 아니 1년 전부터 시작한 변화의 바람을 이제부터 사람들도 느끼게 될 것이다.

* * *

디멘션 게이트가 닫히고 다시 탑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지구와 위층의 도전자들이야 혼돈의 도가니에 있었지만 1층 대기실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한 달일 뿐이었다.

그들은 평소처럼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후웅- 후웅- 후웅-

세 개의 빛줄기가 광장 중앙에 내려왔다.

"안녕하세용! 저는 1층 대기실의 관리자 토잉이에용! 이곳은 최하층 도시인 언더모스트(Undermost)입니당!"

"와아-."

새로 들어온 도전자들은 감탄하고는 고개를 돌려가며 도시를 구경했다.

차유민이 말한 대로였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개활지가 아니었다.

세 사람은 서로 인사를 하고는 토잉의 안내를 따랐다.

토잉은 이제 1층의 관리인이라기보다는 언더모스트의 안내역을 맡고 있었다.

도전자들은 처음 언더모스트에 들어오면 토잉의 안내로 언더모스트를 둘러본 뒤 1층에 올랐다.

"이곳은 1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에용! 이곳을 넘어가면 여기 1층의 명물… 아니, 네크로맨서님이 계셔용!"

"정말로, 차유민 님이 지셨다는 그 보스 몬스터?"

"넹! 아시네용?"

1층 대기실의 관리자까지 그렇게 말하니 이들은 그제서야 진짜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한 번 가 봐도 돼?"

"그럼용! 어차피 이제 매일 가셔야 돼용!"

토잉의 말에 그들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포인트 작업을 하셔야 되거든용."

"포인트 작업?"

"넹! 이곳의 화폐는 포인트에용! 그래서 포인트 벌려면 여기 1층에 올라가서 몬스터 잡으면서 포인트 작업을 하셔야 돼용!"

그들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가 어떻게 세워졌나 했더니, 토잉이 설명해 준 포인트 상점에서 이것저것 사서 만들어 준 듯했다.

부족한 포인트는 1층에 올라가서 벌어 오고.

"그럼 이곳으로 가시면-"

"아까 빛무리가 보이던데 신입인가 봐?"

"안녕하세용! 강천 님!"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김강천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1층에 올라가시려구요?"

"네."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토잉이는 어차피 못 올라가서."

강천의 말에 그들이 토잉을 보았다.

그 시선에 토잉이 맞다는 대답을 해 주고 강천에 대해 소개해 주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천을 따라 1층으로 올라가는 포탈에 올라섰다.

1층으로 가자 거대한 입구가 그들을 맞이했다.

뒤쪽으로는 커다란 문 하나가 동굴 밖으로 나가는 입구를 막고 있었고, 강천이 바깥으로 나가는 입구인데 나가면 죽는다는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세 사람은 강천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와… 제가 들은 건 그저 허름한 동굴이라고만 들었는데 이건...."

"무슨 신전에라도 온 것 같네요."

이제는 동굴이 동굴이 아니었다.

허름한 외관이 거슬렸던 이신은 하나둘, 외관을 바꾸기 시작했고 황강웅을 불러 동굴의 입구에서부터 안쪽까지 대공사를 진행했다.

그 덕에 이제 1층은 위층에 있는 빛의 여신의 신전 뺨치는 기품을 자랑했다.

세 사람은 벽 곳곳에 새겨진 문양과 전체적으로 뿜어지는 분위기에 연신 감탄을 뱉으며 강천을 따라 걸었다.

그곳엔 세 갈래로 갈라진 입구가 나타났는데, 강천이 하나씩 설명을 해 주었다.

"가장 왼쪽은 작업장이라고 불리는 곳이에요. 사람들이 포인트 작업을 하는 곳이에요."

"포인트 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별거 없어요. 그냥 몬스터를 잡고 포인트를 얻으면 됩니다."

그들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오른쪽은 훈련장이에요. 말 그대로 사람들이 훈련을 하는 곳이죠."

"네? 1층에서 훈련도 하나요?"

"네. 메이와 워리가 훈련을 가르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하죠."

"메이, 워리는 누구죠? 한국 사람 이름은 아닌데...."

"아하하… 이따가 가 보시면 압니다."

세 사람은 예상과 다른 1층의 모습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가운데는 보스 방으로 가는 입구입니다. 근데 함부로 가시면 안 됩니다."

시종일관 웃으며 친절한 모습이던 김강천이 보스 방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분위기가 일변하며 진지해졌다.

그 모습에 세 사람은 잔뜩 긴장하며 보스 방으로 가는 입구를 보았다.

길게 이어진 복도 끝에 보이는 문.

심플하면서도 위엄이 넘치는 것 같았다.

"네크로맨서 님은 허락 없이 자신의 방에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그러니 가시기 전에는 반드시 허락을 맡으시길 바랍니다."

"누구에게 허락을 맡아야 하죠?"

"워리에게 맡으면 됩니다."

메이는 도대체 누구고 워리는 또 누구인가?

거기에 보스 방을 보스의 허락 맡고 가야 한다니....

무슨 이런 층이 다 있지?

세 사람은 내심 어이가 없어 입을 뻐끔거리다가 강천의 진지한 얼굴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작업장에 한번 가 보실래요?"

"네."

작업장은 별거 없었다.

커다란 방 안에 있는 최하급 스켈레톤, 시궁창 쥐, 난쟁이 고블린을 잡고 포인트를 얻는 곳이었다.

몬스터들을 잡고 스탯 업을 한 그들이 이번엔 가장 오른쪽의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또다시 방이 여러 개로 나뉘었고, 생각보다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는 1층을 보며 그들은 혀를 내둘렀다.

"네크로맨서 님이 심혈을 기울여 황 사장님과 만드셨습니다."

황 사장님은 또 누군지.

"이쪽으로 먼저 가 보시죠."

가장 가운데에 있는 방. 그곳엔 메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뭐야?"

그들은 그 모습을 보자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까 작업장에서 봤던 스켈레톤들과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와 모습.

이곳 1층의 보스가 이 녀석이 아닐까?

직접 싸워 보진 않았지만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그냥 못 이긴다.

"메이, 신입이야."

"그런가?"

"메, 메이?"

아까 메이인가 메기인가 뭐시기한테 훈련을 받는다 하지 않았나?

저 흉흉한 안광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만 봐도 오줌을 지릴 것 같은데 저런 놈 밑에서 훈련을 받는다니, 미친 것 아닌가?

몇 시간 전까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던 그들 세 사람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했다.

"뭐, 훈련이라도 받으러 왔나?"

메이의 말에 그들이 다급히 강천을 보며 그러지 말라는 눈빛을 간절히 보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인사차. 이곳 구경시켜 주고 있었지."

그 모습에 조금 당황한 강천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안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다. 주인님이 주신 연구 자료 정리해야 하지, 너희들 마법 가르칠 이론 정리해야지. 또 훈련시켜야 하지.... 내 비록 신체적 피곤함을 느끼진 않지만 정신적 피로는 있어. 신입은 더 안 보냈으면 좋겠네."

메이의 걸걸하고 음습한 음성은 담담해 보였지만 강천은 메이에게서 피로함이 크게 느껴졌다.

"그래..., 수고해."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강천이 방을 나섰다.

다음은 그 옆인 훈련장이었다. 그곳은 보통 메이와 워리가 다른 이들을 가르쳐 주거나 서로 대련을 하는 류의 장소로 쓰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훈련장을 들어갔다.

그곳엔 땅바닥에 대(大)자로 누워 있는 스켈레톤 하나가 보였다.

덜그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스켈레톤.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던 작업장의 스켈레톤과 다르게 이 녀석은 뼈로 만든 검 한 자루만 들고 있을 뿐 그다지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것 하며, 덜그럭- 덜그럭-거리는 움직임부터가 부자연스럽고 어색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자신들도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

"싸워 봐도 되나요?"

"하하하, 당연합니다. 싸우더라도 만약 다치실 것 같다 싶으면 제가 막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하 난이도는 저희 언더모스트의 주민들의 대부분은 가볍게 이깁니다."

아무리 자신들이 이제 막 들어왔다 하더라도 언더모스트의 대부분이 가볍게 이길 정도라면 충분히 할 만하다.

"한번 해 볼게요."

"저도요."

"음, 지켜주신다고 했으니...."

세 사람은 한번 해 보기로 결정하고 순서를 정했다.

그 모습을 본 강천이 그들을 말리며 말했다.

"그냥 세 분이 한 번에 덤비시죠."

"네?"

강천은 그들의 반문에 살짝 웃어 주는 게 끝이었다.

그들은 차라리 그게 더 나을 것 같다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이제 처음 왔으니 안전하게 가는 게 나았다.

"찔리면 아프겠지?"

싸울 준비를 마친 그들은 눈앞에 날카로운 뼈 칼에 베이는 상상을 하며 지레 겁을 먹었다.

"다 각오하고 온 거 아니에요?"

다부진 눈빛을 한 여성이 두 사람을 다그치듯 말했고 그제서야 두 사람도 정신 차리고 싸움에 집중했다.

"하압!"

그녀가 먼저 스켈레톤에게 덤벼들었다.

주먹에 파란 에너지가 뭉쳤다.

강타 스킬.

마력을 응집하여 적을 때린다.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공격이다.

그러나 맞추지 못한다면 무용지물.

스켈레톤은 가볍게 그녀의 공격을 피하며 이어 들어오는 두 사람의 공격을 칼로 쳐내고는 칼등으로 세 사람의 손목을 딱! 딱! 딱! 쳐냈다.

"아악!"

"윽!"

"으으...."

세 사람 모두 욱신거리는 손목을 보며 '저게 검날이었으면 손목이 잘렸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는 기권했다.

들어 보니 이 정도 스켈레톤은 이곳에서 딱히 어려운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언더모스트의 대부분이 가볍게 이긴다는 강천의 말에 그들은 괜히 기가 죽었다.

"하아..., 이게 탑인가?"

"1층의 작업장은 말 그대로 포인트 작업용이니까 그렇다 쳐도 훈련장에서도 이 꼴이라니."

"사람들은 이곳에 훈련을 꾸준히 한 덕에 강해진 거겠죠?"

그들은 훈련장을 다시 한번 힐끗 보고는 그곳을 나와 다시 언더모스트로 돌아갔다.

강천은 그들과 같이 나가지 않고 여전히 훈련장에 남아 있었다.

그때, 훈련장에서 아까 세 사람을 가볍게 이긴 스켈레톤이 걸어 나왔다.

"언제까지 이래야 되는 거냐."

"음…, 선배님이 이곳에서 나가실 때까지?"

"꼭 이래야 되나? 훈련이란 원래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다."

스켈레톤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동기 부여가 있으면 좋잖아. 그리고 워리 네가 여기서 제일 한가하기도 하고."

"한가하지 않다. 항상 수련을 반복-."

"뼈 맞추기 놀이가 수련이야?"

"놀이가 아니다! 그건 완벽한 신체 구성을 위해-."

"됐고, 여기까지 온 김에 오랜만에 한 판 붙자."

강천의 제안에 워리가 자신의 뼈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세를 잡았다.

"좋아, 이게 왜 놀이가 아닌지 보여 주겠다."

"마침 뼈도 마법 각인이 박히지 않은 하급 뼈들로 맞춰 놨으니 대충 밸런스는 맞겠네. 이번에야말로 이겨 보겠어."

"덤벼라, 애송이. 결코 주인님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먹칠은 무슨, 지면 뼈가 시리도록 털리니까 죽기 살기로 하는 거겠지."

"크흠! 말이 많구나, 덤벼라!"

"그래, 간다."

"잠깐."

갑작스레 검을 땅에 박은 워리의 모습에 김강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보았다.

"왜?"

"...다리뼈만 바꾸고 오면 안 되나?"

"...."

요즘 들어 부쩍 실력이 늘어난 강천의 모습에 조금 걱정이 되는 워리였다.

제1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