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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 *

리비안트 공국 북부.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 설산과 가까운 지형 탓에 다른 지역과 달리 벌써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술! 술 더 가져와! 당장!"

두꺼운 망토를 뒤집어쓴, 며칠간 제대로 씻지 못했는지 수염이 덥수룩하고 꾀죄죄한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작은 마을의 여관 주인이 겁먹은 얼굴로 에일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저,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그만 드시는 게...."

"아가리 닥치고 죽기 싫으면 술이나 내놔!"

"예, 예!"

술을 뺏다시피 한 사내가 그대로 병나발을 불었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꾸겨진 지폐를 꺼내 여관 주인에게 던졌다. 화가 날 법한 행동이었으나 여관 주인은 잠자코 돈을 주울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평화로운 마을이다.

허리춤에 시퍼런 칼을 찬 외지인이 무서울 수밖에. 애써 참으며 조용히 떠나길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그때, 누군가 여관에 들어왔다.

로브를 머리까지 눌러쓴 남자. 또 처음 보는 외지인이었다.

"잠시 나가 계시죠."

"네...?"

로브의 사내, 베르덴이 20만 엘크를 건넸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여관 주인은 머뭇거리다 냉큼 돈을 받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스태프를 손에 든 베르덴이 술에 취한 사내를 바라봤다.

'저놈이군.'

59화 샐러맨더의 심장 (2)

톨란 바네위그.

그는 로커스의 부하로, 각종 정보를 전달하는 연락책을 담당하고 있었다. 로커스의 정보상이 궤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발... 시발...!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자고 했었는데!'

샐러맨더의 심장.

그것이 이번 참사의 발단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샐러맨더의 심장이 에스티리아 왕국의 국경 근처에서 수송 중이라는 정보가 걸려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 보냈다고 하는 게 맞겠지.

한눈에 이해가 갈 정도로 자세한 위치와 정보가 동시에 잡혔으니. 아무리 봐도 우연치고는 너무도 공교로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고하지 않을 순 없다.

톨란은 곧바로 로커스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뭔가 수상한 점이 있으니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는 사족을 달아서. 물론 욕심 많은 로커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당장 믿을 만한 자들을 고용해 샐러맨더의 심장을 훔치기로 결정을 내렸고 얼마 안 가 움직였다. 다행히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운송 중인 자들을 모조리 죽여 흔적을 지웠고, 밀입국하여 추적을 완전히 끊어 냈다.

그러곤 샐러맨더의 심장을 숨겨진 창고에 숨겨 놨으니, 혹여 누군가 말실수를 하더라도 찾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그런데....'

얼마 전, 괴물이 찾아왔다.

두 개의 박도를 든,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거한. 웃음소리가 얼마나 섬뜩한지 눈을 감으면 귓가에 맴돌 정도였다.

하나, 두려운 건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무자비한 칼질에 난도질당한 시체들, 거기다 얼어붙고 꿰뚫린 부하들까지.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토막 나거나 말 그대로 박살 난 숫자만 자그마치 수십이다.

로커스가 신임하는 측근들이 막아섰지만 몇 분도 버티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 나갔다.

혼란을 틈타 로커스와 그의 최측근들이 탈출했다.

톨란을 비롯한 몇몇은 운좋게 벗어나 뿔뿔이 흩어졌지만... 나머지가 살아 있을진 의문이다. 하이에나 같은 그레이의 정보상들이 로커스의 정보를 빼앗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흉터 괴물 또한 로커스를 추적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로커스가 잡히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겠지.

소란이 잠잠해질 때까진 이런 한적한 마을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게 최선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제기랄, 아주 좆같아."

끼이익.

톨란이 술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관의 2층으로 올라가 잠을 청하기 위함이었다. 완전히 만취했는지 다리가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그 순간.

"...이런 시발!"

그는 재빠르게 바닥을 박차며, 뒤를 향해 검을 뽑아 휘둘렀다.

* * *

카앙!

톨란의 기습이 스태프에 간단히 막혔다.

이를 악문 그가 옆으로 움직이며 식탁 위를 굴렀다. 잠시 거리를 벌린 톨란이 베르덴에게 소리쳤다.

"대, 대체 날 어떻게 찾았지?! 그렇게 숨어 다녔는데!"

베르덴이 알 턱이 없다.

그야 페일에게서 들었을 뿐이니까.

'일단 잡고 나서 생각할까.'

시간이 아까우니 가볍게 기절시켜 잡을 생각이었다. 베르덴이 한 발짝 다다가자 톨란이 화들짝 놀라며 근처에 있던 식기를 힘껏 집어 던졌다.

그릇, 포크, 나이프, 숟가락, 잘 구운 고기, 물컵 등. 보호의 목걸이가 생성한 마력방벽 덕분에 가만히 있었음에도 베르덴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자연스레 톨란이 구석으로 몰렸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부웅. 부우웅.

겁에 질렸는지 검을 휘두르는 자세가 영 아니었다. 결국 도망칠 곳이 없어지자 이를 악물더니 베르덴에게 달려들었다.

스태프로 그대로 일격을 흘려 낸 뒤, 가볍게 복부를 후려쳤다.

"커억?!"

명치에 제대로 맞았는지 톨란의 얼굴이 붉어지며 핏발이 섰다.

베르덴은 멈추지 않고 손을 쳐 검을 떨어뜨리게 하고는, 살짝 턱을 스치듯 후려쳤다.

털썩.

톨란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기절했다.

간단히 제압을 마친 베르덴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2층에 시선을 향했다.

"저기가 좋겠군."

베르덴은 기절한 톨란과 의자 하나를 챙기고 계단을 올랐다.

* * *

"...허억!"

톨란이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그런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의자에 강제로 앉혀져 밧줄도 아닌 단단한 흙 같은 것에 팔과 다리 그리고 몸통이 아주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이건... 마법?"

그걸 깨닫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톨란 바네위그, 이제부터 묻는 말에 대답해라."

"누, 누구야?! 설마 아까 그놈이냐! 시발, 이거 풀어! 나는 아는 것 하나도 없다고!"

톨란이 소리를 질렀지만 소리는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았다. 이미 방 안에 마법진을 그려 방음을 해 놓았으니. 베르덴은 대답하는 대신 스태프를 톨란의 목에 갖다 대었다.

차가운 금속이 닿자 놈이 작게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움찔거렸다. 불안감이 커졌는지 심장 박동이 한층 더 빨라졌다.

베르덴이 말했다.

"로커스는 어디 있지?"

"호, 혹시 다른 정보상이 보냈나?! 진짜로 나는 전혀 모르는... 끄아악!"

스태프 끝에 얼음이 맺혔다.

톨란의 어깨 부근에 내려앉은 서리. 조금 더 강하게 한다면 당장이라도 어깨를 완전히 얼어붙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럼 십중팔구는 죽겠지. 살아도 불구로 살아야 될 거고.

결국 공포심에 진 톨란이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잠깐! 말할게! 아니, 말하겠습니다! 그니까 죽이지 말아 주세요!"

"그럼 다시 묻지, 로커스는 어디 있지?"

"아, 아, 안전 가옥에 숨어 있을 겁니다!"

안전 가옥?

"위치는?"

지도를 주자 톨란이 설산 일대에 띄엄띄엄 체크 표시를 했다. 개수는 총 4개 정도 되었다.

"다른 곳은 없는 건가? 네가 알고 있을 정도면 다른 곳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은데."

"그, 그게... 제가 혹시 몰라서 몰래 위치를 알아 둔 거라서...."

그러니까 보험으로 로커스의 뒷통수를 칠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 로커스란 정보상은 부하들에게 최소한의 믿음조차 없는 모양이다.

'이걸로 대강 위치는 확보했고.'

"누군가 로커스의 정보상을 거의 궤멸했다고 하던데, 그게 대체 누구지?"

"저, 저도 잘은 모르지만, 키는 2m가 넘고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놈이었습니다! 두 개의 박도를 들고 마법도 사용하는 괴물 같은 놈이라는 것밖에는.... 아, 그리고 샐러맨더의 심장을 찾으러 로커스를 쫓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름 오래 운영되어 온 정보상이 고작 한 명한테 박살 난 건가.

'그나저나 마법과 검을 동시에 사용하는 인간이라....'

꽤나 특이한 조합이다.

스태프로 근접전을 벌이며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있어도, 날붙이를 들고 근접전을 벌이며 마법을 쓰는 마법사는 거의 없으니까.

드물게 마력과 기를 동시에 깨우치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나, 다양성이 있다 뿐이지, 효율은 굉장히 좋지 않다. 두 힘이 상충하며 서로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기를 단련하면 할수록 마력은 더욱더 단련하기 어려워진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어서 베르덴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톨란은 아는 대로 필사적으로 전부 답했다.

'들을 건 다 들은 것 같은데.'

이제 톨란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문젠데, 안내를 맡기기엔 거리가 좀 멀어서 데리고 다니기 번거롭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일 생각은 없었다. 딱히 자신에게 별 해를 끼친 것도 아닐뿐더러, 베르덴은 사람들을 보이는 족족 죽여 대는 미치광이 살인마도 아니었으니.

베르덴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톨란에게 말했다.

"아, 들어 보니 나 말고 다른 정보상이 고용한 놈들도 이곳으로 오고 있다던데."

"네?"

"너를 찾으러 온 거겠지. 로커스를 찾기 위해서."

물론 거짓말이다.

톨란의 소재를 아는 건 베르덴뿐, 다른 정보상보다 뛰어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는 페일에게서 얻은 정보였다.

그걸 모르는 톨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벌벌 떨었다.

잡히는 순간 하루 종일 고문을 당하고, 쓸모를 다한 순간 죽을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베르덴이 속삭였다.

"살고 싶나?"

톨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살려 주지. 대신, 당장 떠나는 게 좋을걸. 지체했다간 잡히고 말 테니까."

"당장 떠나겠습니다!"

베르덴이 마법을 풀었다.

톨란은 그와 동시에 창문으로 돌진했다. 그 와중에 검과 웃옷도 챙겨 바깥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다급한 발소리가 멀어지며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마 이 마을에는 영영 발도 붙이지 않겠지.

"그럼 움직여 볼까."

* * *

베르덴이 가장 가까운 로커스의 안전 가옥으로 향했다.

숲속에 감춰진 집. 교묘하게 주변이 풀숲과 작은 크기의 나무로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이미 털린 모양이군.'

문은 박살 나고 유리창도 모조리 깨져 있다.

곳곳에는 피가 흩뿌려져 있었고, 시체들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아직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 있는 걸 보니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다.

얼마 전까지 공국 남부에 있었기에 베르덴은 후발 주자였다. 그를 앞서간 자들이 있는 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도 하나같이 정보상에게 고용되었을 테니.

베르덴은 신속히 다음 가옥으로 이동했다.

두 번째도 허탕이었다. 거기에는 시체도 흔적도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이곳을 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였다.

카앙!

생생한 병장기 소리.

베르덴이 비행을 써서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어깨와 다리에 상처를 입은 남자 한 명이 쫓기고 있었고, 그 뒤로는 네 명의 사람이 서로 병장기를 휘두르며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앞에 있는 자가 로커스의 부하 중 하나인 모양.

베르덴이 나섰다.

로커스의 부하가 당황하며 급하게 속도를 줄였다.

"여, 여기도...?! 흐아아아악!"

지면이 그를 집어삼켜 땅 아래에 단단히 구속했다. 물론 숨구멍은 뚫어 놨다.

'이걸로 로커스의 위치는 확보한 셈이고, 다음은 추적자들인가.'

베르덴이 앞으로 시선을 향했다.

험상궂은 얼굴을 한 사내가 철퇴를 빙빙 돌리며 말했다.

"뭐야, 이 로브는? 너도 동업자인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새치기는 안 되지."

"순서라도 정해 놨나?"

"그거야 없지만... 상황 파악이 잘 안되나?"

베르덴은 혼자였고 그들은 다수였다.

삼파전을 한다고 해도 수적으로 밀린다. 힘을 합치면 그보다 더 빨리 죽이고 치워 버릴 수 있다. 그럴진대 죽고 싶지 않고서야 지금 상황에 자존심을 부리는 건 말이 안 됐다. 상식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다만, 베르덴은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태연히 그들의 기세를 받아 낸 베르덴이 단호히 말했다.

"그럼 내가 데려가도 되겠군."

베르덴이 물러나지 않자 추적자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곤 아까까지 싸우고 있던 건 잊었는지, 마치 한 팀이라도 된 듯 베르덴에게 동시에 무기를 겨눴다. 불청객이 나타났으니 먼저 치우고 경쟁을 이어 갈 모양인 것 같다.

'마법사가 둘, 철퇴 하나, 검 하나, 이렇게 넷인가.'

이대로 가 봤자 쫓아올 게 뻔하겠지.

그럴 바에 여기서 치워 두고 로커스를 찾는 편이 훨씬 나았다.

'몸풀기로는 적당하겠어.'

베르덴이 스태프를 상대에게 겨눴다.

60화 샐러맨더의 심장 (3)

<전신 강화>

<감각 강화>

<반응속도 강화>

3위계와 2위계의 부여 마법.

같은 정보상에게 고용된 부여 마법사, 빈츠에게 조력을 받은 사내가 베르덴에게 철퇴를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고, 철퇴에 부딪힌 땅이 부서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퍼졌다.

"둘 다 맘에 안 들지만... 일단 경쟁자부터 줄이는 게 우선이겠지."

이어 다른 두 사람도 나섰다.

베르덴의 뒤를 노린 검사가 빈틈을 노렸고, 원소 마법사는 타이밍을 가늠하며 사각에서 마법을 쏘아 보냈다.

서로 팀을 이뤘던 자들이 아니었기에 제대로 합이 맞지는 않았지만, 전투에 있어서 수적 우위는 가히 절대적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물론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다.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니.

'왜... 왜 맞지 않지?'

철퇴 사내, 헤베겔이 의문을 느꼈다.

자신은 부여 마법으로 신체 능력이 한층 더 강화된 상태. 평소에는 부족한 속도가 한 단계 빨라졌고, 장점이었던 근력이 더욱 강해졌다.

그런데 근접전에서 마법사 하나 제압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카앙! 캉! 카가가각!

철퇴가 휘둘러지기 전에 스태프가 경로를 가로막는다. 제대로 타격을 하기도 전에 막히기만 할 뿐, 기껏 제대로 휘둘러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낸다.

'무슨 미래를 보는 것도 아니고...!'

검사 또한 헤베겔과 같은 마음이었다.

둘은 고작 열 합이 채 되지 않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기세가 위축되는 그 순간, 베르덴의 스태프에서 저장된 마력이 방출됐다.

콰앙!

"크윽?!"

마력집중으로 강화된 스태프의 일격.

헤벨겔이 철퇴로 막아 냈지만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뒷걸음쳤다. 그리고 베르덴의 등 뒤, 지면에서 작은 송곳이 솟아나더니 검사의 발바닥을 꿰뚫었다.

갑작스러운 고통. 기동력이 잡힌 검사가 움직임이 멈췄다.

<스톤 볼트>

쩌엉!

돌조각이 검사의 오른쪽 복부를 강타했다. 마법서로 강화된 마법.

입고 있던 철제 갑옷이 움푹 들어가고 흡수하지 못한 충격이 몸속을 찌르듯 관통했다.

"꺼윽...! 꺽...!"

인간의 급소 중 하나인 간. 거기에 연결된 신경들이 폭주했다.

숨이 턱 막히고 뇌가 저릿거리는 감각. 당장 기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정신력이었으나, 움직일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베르덴이 스태프로 몸통을 후려쳤다.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날아간 검사는 나무를 부수곤 풀숲 위에 널브러졌다.

'그럼 다음은....'

"죽어라!"

불꽃의 창이 베르덴에게 향했다.

그와 동시에 지면이 꿈틀거리더니 거대한 기둥이 비스듬하게 솟구쳤다. 그대로 화염 창을 부순 기둥이 양 갈래로 갈라지더니 후방에 있던 두 마법사에게 육박했다.

다급하게 마력방벽을 둘렀지만 소용없었다.

카앙! 마력의 벽을 박살 낸 기둥이 주변을 휩쓸며 마법사들을 강타했고, 안 그래도 맷집이 약한 둘은 나가떨어지며 의식을 잃었다.

베르덴이 3명을 제압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분 남짓.

전혀 상정하지 못한 상황에 헤베겔이 뒷걸음쳤다. 네 명이서도 상처 하나 내지 못했는데 자신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베르덴은 말없이 마력을 번뜩였다.

"자, 잠깐!"

퍼억!

* * *

"끄으으윽!"

베르덴의 마법에 의해 지면에 갇힌 루커스의 최측근, 크랄그.

몸을 비틀며 있는 힘을 다해 탈출하려고 해 봤지만 부상을 입은 몸으로는 무리였다. 단단히 고착화된 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기랄, 몸만 멀쩡했으면!'

그랬으면 애초에 잡힐 일도 없었는데.

루커스 밑에서 10년 넘게 일해 온 만큼 크랄그는 실력에 나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을 추적해 오던 4명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건 무리겠지만 빈틈을 노려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그나저나 밖이 조용해졌어.'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사라졌다.

아까 전에 큰 진동이 느껴진 이후로 말이다. 바깥을 볼 수 없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를 감싸고 있던 지면이 움직였다.

아마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이긴 모양. 4명을 상대로 이긴 걸 보면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겠지만 멀쩡하지는 않을 것이다.

'잘만 하면 놈을 죽이고 도망갈 수 있을지도.'

이윽고 크랄그가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나 상황은 그가 생각하던 것과 달랐다. 방금 전과 달리 난장판이 된 주변. 곳곳에는 자신을 쫓아오던 추적자들이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니 살아는 있는 모양이다.

그에 반해 로브의 마법사는 상처 하나 없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상치 않은 압박감에 크랄그가 침을 꼴깍 삼켰다.

베르덴이 물었다

"로커스는 어디 있지?"

"아, 넵. 비밀 가옥에 있습니다."

크랄그가 즉답했다.

자존심 세울 때가 아니란 걸 단번에 깨달은 것이다. 비굴해 보이더라도 최대한 협조해서 살고 싶었다. 로커스가 이걸 알게 된다면 자신을 죽이려고 들 테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 루커스는 아마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너는 왜 비밀 가옥으로 가지 않은 거지?"

"그게, 아실진 모르겠지만 '인간 사냥꾼'이라고 그레이에서 유명한 놈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지금쯤이면 루커스도 부하들도 전부 죽었을 겁니다. 무려 4위계 마법사하고 전직 상급 용병이 있으니까요. 이 바닥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놈들입니다."

'이미 선수를 쳤나.'

하지만 말만 듣고 이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우선 그 비밀 가옥이라는 곳부터 찾은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베르덴이 크랄그를 내려다봤다.

"그럼 안내 좀 부탁하지."

살고 싶으면.

* * *

절벽에 숨겨진 지하 비밀 가옥.

입구인 작은 틈새를 지나면 절벽 반대편에 저택에 버금가는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난방은 물론이고 하루 네 끼를 먹어도 몇 달은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걸 짓는 데 동원한 일꾼들은 살처분했기에 로커스와 그 최측근만이 아는 안전지대였다, 바로 어제까지는.

"허억, 허억...!"

로커스가 다급하게 지하로 들어갔다.

두터운 강철로 만들어진 문. 총 여섯 개의 잠금 쇠를 이용해 단단히 걸어 잠갔다. 하지만 추적자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콰아앙!

강철 문이 통째로 찢겨 나갔다. 파편이 비산하며 로커스의 다리를 관통했다. 볼품없이 넘어진 그 모습에 지하로 들어온 여성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머, 로커스. 그 다리론 더 이상 도망가는 것도 무리겠네?"

"으윽... 베냐, 이 썩을 년이!"

전직 상급 용병, 베냐.

육중한 도끼를 어깨에 멘 그녀가 로커스를 한심한 듯 쳐다봤다.

"말이 심하네. 편하게 죽기 싫어?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진작에 기밀 정보를 넘겼어야지."

"지랄하지 마라...! 정보상에게 정보가 없으면 죽으라는 말밖에 더 되냐!"

"그러게 누가 병신같이 날뛰랬나? 그리고 그쪽이 더 살 가능성이 높았을걸? 안 그래, 로이드?"

"그건 그렇지."

나무 스태프를 든 마법사, 로이드가 계단을 내려왔다.

그의 로브에는 아직 식지 않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위는 전부 처리했다."

"펠레드는?"

"우리 말고 다른 동업자가 쫓아올지 모르니 입구를 막으라고 말했다. 뭐, 보아하니 아무도 오지 않을 모양이지만... 뭐든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지."

<염동력>

염력의 상위 마법.

무형의 마력이 로커스의 품속에서 오래된 서류 하나와 봉인된 주머니를 움직였다. 로커스가 급히 손을 뻗었지만 베냐가 성큼 다가가 로커스의 가슴을 짓밟았다.

"끄아아아악...!"

"자꾸 귀찮게 하긴. 로이드, 물건은 어때?"

"확실하다. 그리고 샐러맨더의 심장도 진품이군."

"이번 의뢰 짭짤하네. 스트레스도 풀고 돈도 벌고. 근데 그 심장이라는 것, 귀족에게 장물로 팔아 버리면 몇 억은 받겠지? 로커스, 이거 고마워서 어떻게 해?"

"이런 개같은... 아아아아아아악!"

베냐가 히죽거리며 다리에 힘을 실었다.

가슴뼈가 반쯤 으깨진 로커스가 이내 기절했다. 그제서야 만족한 듯 도끼를 치켜들었다.

"잘 가, 로커스. 돈은 잘 쓸게."

콰직! 로커스는 그대로 양단되었다.

시체에 도끼를 문질러 피를 닦은 베냐가 로이드를 돌아봤다.

"이제 돌아가 볼...."

아아아아아악!

지상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 분명 펠레드의 음성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다고 직감한 베냐와 로이드가 계단 쪽을 경계했다.

잠시 후, 뭔가가 굴러떨어졌다. 공포에 질린 펠레드의 머리였다.

"카카칵. 카카카칵. 여기서 심장 냄새가 나는군."

기이한 웃음소리. 흉터가 얼굴에 가득한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한이 들고 있는 두 개의 박도에선 피가 뚝뚝 흘러내렸고, 섬뜩하리만치 가지런한 치열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베냐가 고개를 가웃거렸다.

"뭐야, 저 대머리는?"

"그레이 쪽은 아니다. 하지만 생김새를 보니 어디서 왔는지는 알겠군."

로커스가 훔친 샐러맨더의 심장.

그것을 찾기 위해 로커스의 정보상을 궤멸한 놈이 분명할 터. 베냐가 코웃음 치며 도끼를 빙빙 돌렸다.

"잘됐네. 로커스 부하 놈들로는 좀 부족했는데, 큼지막한 게 부수는 맛이 있겠어."

"방심하지 마라. 펠레드를 간단히 죽인 놈이니."

"문제없어."

펠레드 따위야 자신도 한 수에 죽여 버릴 수 있으니.

인간 사냥꾼. 이들에겐 동료의 개념이 희박했다. 이해관계가 맞아 같이 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죽여 볼까?"

후우웅────!

매서운 기세를 담은 도끼가 거한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 * *

베르덴은 크랄그의 안내를 따라 비밀 가옥으로 향했다.

절벽에 난 틈새를 지나자 확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자연 속에 세워진 건물은 꽤나 장관이었다. 주변에 널리고 널린 시체만 아니라면 말이다.

크랄그가 침을 삼켰다.

겁을 먹었으나 베르덴이 턱짓하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피의 웅덩이를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에는 마법에 당한 시체가 대부분이었다.

"여, 여기에 지하가 있는데, 거기에 로커스의 방이 있습니다."

"그렇군."

입구를 막은, 머리가 없는 시체를 치우고 크랄그를 앞장세웠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고 있던 중, 베르덴의 감각에 무언가 스쳤다. 미세하게 들리는 파육음 그리고 끊어질 듯한 신음 소리였다.

'다행히 늦진 않았나.'

곧바로 지하에 들어섰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스태프가 부러진 마법사는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팔 한쪽이 잘린 근육질의 여자는 투박한 검에 꿰여 허공에 들려 있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 이내 목이 베여 머리가 날아갔다.

"카카카카칵."

기이한 외모의 거한.

그 모습에 크랄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괴, 괴물...!"

괴물이라면 로커스의 정보상을 궤멸한 장본인인가?

방금 죽인 자들이 아마 크랄그가 말한 인간 사냥꾼이라는 자들인 것 같은데.... 4위계 마법사와 전직 상급 용병이 죽은 걸 보면 상당한 실력자인 모양이다.

거한이 성큼 로이드의 시체에 다가가더니, 그의 옆에 있는 주머니를 집어들었다.

"드디어 찾았다. 그분이 좋아하시겠어. 하지만 그 전에...."

활짝 웃은 거한이 기괴하게 몸을 비틀었다.

그러곤 베르덴이 있는 입구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카가가각. 두 개의 박도를 서로 부딪치며 날카롭게 칼날을 세웠다.

정확히 베르덴과 크랄그에게 고정된 시선. 아무래도 그냥 지나갈 생각은 없는 것 같다.

화아아악!

베르덴의 몸에서 방대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61화 샐러맨더의 심장 (4)

거한이 박도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달려왔다.

커다란 몸집임에도 날렵하기 그지없는 속도. 어쭙잖게 접근을 허용했다간 위험한 위력이었다.

<어스본>

지면에서 가시가 솟아올랐다.

그러자 거한이 몸을 비틀더니 괴상한 움직임으로 가시들을 박살 냈다. 이어 현란하게 박도를 돌리곤, 어깨를 쭈욱 뻗어 베르덴의 목을 노렸다.

사아악!

베르덴이 고개를 젖히자, 피가 말라붙어 있는 칼날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기괴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신체 구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시감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쨌든 이런 좁은 곳에서 전투를 이어 나가는 건 불리하다.

"흐아아아악!"

거한을 가까이서 마주한 크랄그가 계단을 뛰어 도망쳤다.

베르덴은 다른 입구를 택했다.

<지형조작>

천장이 움직임과 동시에 베르덴이 있던 장소가 하늘로 솟구쳤다.

순식간에 지하에서 빠져나가 건물과 거리를 두었다. 잠시 기다리자, 섬뜩한 웃음소리와 함께 거한이 문을 부수고 달려들었다.

그의 발밑에는 목이 잘린 크랄그의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스 스피어>

암석의 창이 쇄도했다.

거한이 입가를 비틀더니 닿기 직전 칼날을 교차했다. 막강한 근력에 마법이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걸렸군.'

<그라운드 메이든>

허공에 흩어진 암석 조각.

그것들이 수십 개의 작은 가시로 변형되더니 일제히 거한의 전신을 꿰뚫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피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거한이 웃으며 말했다.

"카카카칵. 정보상 따위에게 고용된 놈치고는 꽤 하는군. 토막 내는 맛이 있겠어."

거한이 누더기가 된 상의를 찢었다.

그 모습에 베르덴조차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굴...?"

양어깨, 복부, 등 전신 곳곳에 사람의 얼굴이 이식되어 있다.

만약 단순히 죽인 사람의 얼굴을 꿰맨 거라면 구역질 나는 취미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복부에 있던 얼굴이 움직이더니 입을 쩍 벌렸다.

거한이 그 안으로 자신의 살점을 일부 떼어 넣자, 근육이 융기하며 베르덴에게 입었던 상처가 재생했다.

'잠깐만. 이 특징은....'

"카카카칵! 당황한 모양이군. 하지만 아직 놀라긴 이르지!"

양어깨와 등 뒤에 있던 얼굴이 꿈틀거리며 눈을 떴다.

* * *

마르테스에서 베르덴이 처리한 글러트니의 박사.

놈이 만들어 낸 변종 아인종과 신인류라는 인간의 공통된 특징은 바로 '섭식'이었다.

'리스너가 그랬지, 글러트니는 먹는 것을 통해 인간은 한층 더 진화할 수 있다는 구시대적인 이념을 내세우고 있다고.'

파이테 영지와 마르테스에서 본 것과, 방금 전 거한이 보여 준 능력은 거의 판박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놈은 주변에 널린 시체에 손을 대지 않고 자신의 살점을 먹었으며, 살점을 떼어 낸 부위만이 재생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확실히 박사가 만들어 낸 실험체에 비해 열화된 것으로 보인다.

'즉, 미완성체?'

리스너의 말에 따르면 박사는 글러트니 내부에서도 급진적인 인물이었다고 했으니, 만약 저 거한에게 박사의 손길이 갔다면 마르테스에 오기 전에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나저나, 본의 아니게 내가 끼어든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방주의 일원은 나타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레이의 의뢰 도중에 그 글러트니를 만날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가 됐든 이 상황을 베르덴이 직접 정리하는 것 외엔 답이 없는 건 확실했다.

'일단 처리하고 보자.'

베르덴이 거한에게 고개를 향했다.

양어깨와 등에 있던 얼굴들이 눈을 뜨자 마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입가가 귀에 닿을 듯 활짝 웃는 거한. 이내 그의 전신에 마법이 내려앉았다.

<근력 강화>

2위계의 부여 마법.

보란 듯이 마법 발동에 성공한 거한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카카카카칵! 봐라! 마법과 기를 동시에 다루는 나의────."

굳이 듣고 있을 이유는 없다.

<어스 쉐러>

퍼버벅! 수십 개의 돌조각이 무방비한 거한의 얼굴을 강타했다.

치아가 몇 개 부서지고 얼굴 곳곳에 찢긴 상처가 생겼다. 딱딱딱! 거한의 치아가 위아래로 연신 부딪쳤다. 표정이 일그러진 게 극도로 분노한 듯해 보였다.

그와 함께 거한에게서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토막 내서 씹어 먹어 주마."

츠가가가가각!

전과 다른 속도로 거한이 돌진하며, 그의 박도가 베르덴이 서 있던 대지를 갈랐다. 놈은 곧바로 추격을 이어 나가며 숲이고 뭐고 마구잡이로 난도질을 해 댔다.

그리고 양어깨에 있던 얼굴이 뭐라 중얼거리더니 마력이 움직였다.

베르덴의 양옆을 노린 화염구와 암석. 마법으로 상쇄하려 했지만 코앞에서 거한이 뻗은 칼날이 날아왔다.

가까스로 고개를 숙여 피한 뒤, 지면을 강하게 융기해 사방을 날려 버렸다.

'저 얼굴이 거슬리는군.'

기와 마력을 동시에 다루다니. 그 수준 또한 수준급이다.

마치 다수의 상대를 마주한 듯한 기분. 강화된 감각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저 투박한 칼에 어디 한 군데 베였겠지.

아무리 근접전 경험이 있다고 해도 베르덴은 결국 마법사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먹혀도 레이라나 바르델과 같은 강자와 가까이서 맞붙는다면 잠깐의 시간 벌이밖에 되지 않는다.

베르덴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한 또한 마법으로 비행이 가능했기에 그의 뒤를 쫓았다. 후방에서 날아오는 마법을 피한 베르덴이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허공을 박찼다.

비행 숙련도는 확실히 베르덴이 위였다. 순식간에 거한의 뒤를 잡은 그가 스태프를 겨눴다.

<뇌격>

"크가가가가?!"

강렬한 전격에 거한이 추락했다.

곧바로 일어섰지만 충격은 있었는지 놈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세 개의 거대한 암석 창을 쏘아 보냈다.

콰과과광! 삽시간에 초토화된 지면. 돌더미가 꿈틀거리더니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내구성이군.'

오우거를 단번에 죽일 위력에도 고작 옆구리와 어깨의 일부가 뜯겨 나간 정도라니. 최소한 팔다리 하나쯤은 날려 버릴 생각이었는데.

"카카카카칵, 그 나이에 그만한 마법과 움직임이라니.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와 함께할 생각 없나? 그 분이라면 얼마든지 받아 주실 거다."

"그렇게 되면 나도 그 얼굴들을 이식해야 하나?"

"...하찮은 구인류를 벗어나 신인류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하지."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말했다.

"꺼져."

<플레어>

* * *

전투는 베르덴이 우세했지만 쉽게 끝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살점을 갉아먹어 가며 상처를 회복하는 거한. 강력한 신체 능력을 무기로, 끊임없이 달려드는 박도와 날아오는 마법 탓에 강력한 마법을 시전하기 어려웠다.

'성가시군.'

대체 신체를 어떻게 개조한 건지.

얼굴마다 형태가 다른 걸 보면 타인의 걸 이식한 모양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마력회로의 이식이란 게 가능할 줄이야.

또다시 상처를 재생시킨 거한이 칼날을 휘둘렀다. 스태프로 막아 냈지만 충격은 있다. 검격을 막아 내며 지상으로 내려갔다.

까가가가가강!

베르덴 또한 부여 마법으로 신체 능력을 한층 더 강화했음에도 따라가기 어려운 속도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거한이 낄낄거리며 베르덴을 힘껏 몰아넣었다.

"카카칵! 이제 지친 모양이군! 신인류가 되길 거절하다니, 특별히 너의 얼굴을 잘라 신인류가 될 기회를 주마!"

그렇게 말했지만 거한의 숨소리가 아까보다 거칠어져 있다.

하기사 갉아먹은 신체에서 계속해서 피가 흐르고 있으니, 체력이 떨어지지 않을 리 없다.

'슬슬 한계군.'

이내 체중을 실은 두 개의 박도가 베르덴의 스태프를 날려 버렸다.

무기를 잃었으니 이걸로 끝. 거한이 휘두른 칼날이 베르덴의 턱 아래를 노렸다. 얼굴 가죽을 깔끔하게 베어 내기 위해서.

다만, 간과한 것이 있었다.

마법사에게 스태프는 보조 수단일 뿐, 무기가 없어도 얼마든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특히 베르덴은 그러했다.

<염동력>

외부 충격을 흘리는 반투명한 막이 베르덴을 감쌌다.

마력 조작과 연산 능력이 상위에 다다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기예. 베르덴에게 닿기 직전, 거한의 일격이 뒤틀리더니 그대로 반대로 솟구쳤다.

콰직!

"크아아악?!"

역으로 박도가 거한의 얼굴에 박혔다.

그렇게 한쪽 눈이 날아갔음에도 거한은 다른 손을 전력을 다해 휘둘렀다. 그러나 베르덴의 목에 닿기 직전, 박도에 금이 가더니 산산조각이 났다.

"뭣...?!"

"내 마법을 몇 번이고 막았는데 무기가 멀쩡할 리가 없지."

콰직. 베르덴이 거한의 복부에 있는 얼굴을 움켜잡았다. 가지런한 치열이 딱딱거렸지만, 보호의 목걸이가 만들어 낸 마력방벽을 뚫지는 못했다.

이윽고 손에서 열기를 내뿜었고, 거한의 내부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아, 안 돼...!"

<호염>

거한의 내부에서 거센 불길이 치솟았다.

* * *

글러트니의 거한이 새까맣게 불타올랐다.

내부에서 타오르는 강렬한 열기에 신체가 버티지 못하고 상체와 하체가 서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상체에 이식된 얼굴들 또한 형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뭉개졌다.

거한이 하나만 남은 눈으로 베르덴을 노려봤다.

"카, 칵... 신인류가 될... 내가... 구인류 따위에게...!"

"아직도 살아 있나?"

"박사... 박사께서 실망을... 그분께서 실망을...!"

박사라니. 죽은 지가 언젠데.

글러트니는 아직도 박사가 죽은 줄 모르는 모양이다. 물론 그러는 편이 좋다. 이렇게 사람 신체 가지고 장난질하는 조직에게 습격받는 일은 사양이다.

그 반대라면 몰라도.

어쨌든 이걸로 끝났다.

신경과 근육이 모조리 녹아내렸으니 곧 사망할 터. 염력으로 스태프를 회수하고 마무리를 하기 위해 거한의 머리를 겨눈 순간.

거한의 등 뒤가 꿈틀거렸다. 지체하지 않고 거한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런데 놈이 발작을 일으키더니 몸을 뒤집자, 등에 있던 얼굴이 샐러맨더의 심장을 삼키고 있었다. 이내 머리를 잃은 거한이 재생하며 근육이 붉게 부풀어 올랐다.

"질긴 놈이군."

아예 가루로 만들어야 죽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을 끌어모으던 중, 갑자기 재생된 몸뚱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퍼엉!

살 조각과 피가 사방에 흩날렸다. 베르덴이 경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폭발 이후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멸한 건가?"

그래도 안심할 순 없다.

베르덴이 화염을 퍼뜨려 거한의 잔해를 모조리 불태웠다. 그러고 나서야 앞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떨어진 샐러맨더의 심장이 얕게 맥동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걸 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어떻게 할 문제는 아니다.

방주와 따로 연락할 수 없기도 하고.

베르덴은 일단 이 심장을 챙겨 두기로 결정했다.

글러트니도 죽었고 로커스 또한 죽었으니, 마력감지를 펼쳐 봐도 이 일대에 살아 있는 사람은 베르덴이 유일했다. 페일이 자긴 필요 없다고 했으니 몰래 챙겼다가 써 버리면 아무도 모를 터.

공간가방에 샐러맨더의 심장을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지하로 내려가 서류를 챙겼다.

칼자국이 나고, 피가 좀 묻어 있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이걸로 의뢰는 끝이군."

로커스의 비밀 가옥을 떠나는 베르덴.

그의 뒤로는 거센 불길이 타오르며 건물과 함께 모든 흔적과 잔해를 집어삼켰다.

62화 마핵 (1)

"고생하셨습니다."

페일이 베르덴에게서 로커스의 서류를 건네받았다.

"꽤 큰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설마 인간 사냥꾼까지 고용되었을 줄이야. 어느 정보상인지는 몰라도 타격이 크겠군요. 최소 억을 넘어서는 선수금이 그대로 날아갔으니. 뭐, 경쟁자 입장으로선 호재겠죠."

인간 사냥꾼.

베르덴이 마주하기도 전에 시체로 변해 버린 터라 살아서 보는 일은 없었다.

"그 인간 사냥꾼이라는 것, 들어 보니 유명하다는 것 같은데."

"확실히 이름대로 사람을 잡는 데는 전문가였죠. 옛날엔 에스티리아 왕국의 귀족 밑에서 일하며 여러 범죄를 저지르다가, 노예제가 폐지되고 나서 공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때는 꽤 큰 소란이 있었죠. 본보기로 동업자들을 사냥하고 그 빈자리에 그대로 눌러앉았으니."

하나, 맞서는 자는 없었다.

약자의 밥그릇만 뺏은 터라, 굳이 실력자들이 나설 이유가 없었으니까. 오히려 일거리가 많아졌다고 좋아했다.

"그렇게 수년간 그레이에서 죽인 사람만 수백 명은 될 겁니다. 그런 자들을 상처 없이 처리하셨으니... 이름값을 날릴 기회인데 정보를 숨기는 게 아쉬울 따름이군요."

흔적을 완벽히 지운 이상, 이번 의뢰의 결과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로커스가 모아 둔 기밀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퍼지면 좋은 시선을 받긴 힘들 테니. 페일은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베르덴의 요청하에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글러트니에 대한 얘기는 가능한 숨기는 게 좋을 테니.'

하는 짓을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기에 그와 적대 관계인 방주가 아니면 모르는 편이 나았다. 자칫 로커스가 궤멸당한 것처럼 페일의 정보상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으니.

그래선 안 된다. 이제 와 다른 정보상을 알아보는 건 시간 낭비였다.

'어차피 인간 사냥꾼을 내가 직접 처리한 것도 아니고.'

페일은 아쉽다는 말을 끝으로, 성공적으로 끝난 의뢰에 신경을 완전히 끊었다.

베르덴에게 로커스를 몰아넣은 범인과 샐러맨더의 심장에 대한 행방을 묻지 않는 걸 보니 뭐, 쓸데없는 말 하지 않고 이대로 넘어가는 편이 상책이었다.

페일이 말했다.

"애셔 님이 요청하신 물건들은 어제부로 다 입수했습니다. 연금술사에 대한 소재도 마찬가지고요. 바로 받으시겠습니까?"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일의 측근인 붕대 사내가 들어오더니 조심조심 나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놨다. 페일이 직접 뚜껑을 열고 안에 있던 물건을 하나둘씩 책상 위에 올렸다.

마핵의 재료들. 베르덴이 하나씩 꼼꼼히 확인하며 품질을 검사했다.

"철저하게 보관하여 운반했으니 상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확실히.

수수료 6%만큼의 값은 하는 모양이다.

"연금술사는?"

"공국에 있는 연금술사 중 세 명을 추렸습니다. 자료를 준비했으니 한번 보시죠."

페일이 건넨 자료를 주욱 읽어 내렸다.

어떤 연금술사인지 자세한 설명이 기재되어 있었다. 간략하게, 베르덴이 궁금해하는 것만 있었기에 상당히 보기 편했다.

'하지만 좀 애매한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대강 읽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마지막 세 번재 연금술사의 이력을 본 베르덴이 물었다.

"이 리토 바르슬란이라는 연금술사는 어떻지?"

"두루두루 뛰어난 연금술사입니다. 다만... 성격이 많이 괴팍합니다."

"괴팍하다?"

"단적으로 말해 초연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이도 많고 그 이상으로 재산도 많습니다. 굳이 누군가에게 의뢰를 받을 이유가 없죠. 제 정보상을 통해 여러 물건을 납품하거나 가끔 의뢰를 받는 건 단순히 취미 생활 중 하나일 뿐입니다. 대신 저희는 서비스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구매를 대행해서 무료로 배송해 드리고 있죠."

돈이 많다라.

"그러니까 제작 의뢰를 하면 돈 말고 다른 걸 요구할 수도 있다는 건가?"

"아마, 아니 확실히 그럴 겁니다."

흐음, 꽤나 귀찮은 성격이다.

뭐, 본인 마음이니 베르덴에게 뭐라고 할 자격 같은 건 없지만, 마핵을 제작하기 위해 돈을 모았는데도 돈을 받지 않겠다는 건 여러모로 씁쓸했다.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실력은?"

페일이 단언했다.

"리비안트 공국 제일입니다. 제 연줄이 닿아 있는 연금술사 중 가장 뛰어나죠."

"그럼 이 사람으로 하지."

"괜찮으시겠습니까?"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치로 따지면 수십억 엘크에 버금가는 마핵을 그런 이유로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으니. 뭘 요구할지는 모르겠으나 공국 제일이라면 감내할 가치가 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약속 날짜를 잡아 놓겠습니다."

"부탁하지."

* * *

컴벨리 타운.

중소 규모의 마을이지만 이 근방에 유일하다시피 한 마을로, 한적하지만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잘 정돈된 가도와 깨끗한 성벽만 봐도 나름 부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러다 공국 전체를 여행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베르덴은 이제까지의 자신의 행적을 돌아봤다.

파이테 영지에선 도적 및 광대 오크를 토벌.

도시 마르테스에선 이리스와 모험가들을 구하고, 글러트니의 박사와 그 실험체들을 처리.

비르온 영지에선 도살자 갈리아크와 함께 통곡의 기사 토벌.

바르드산맥에선 하르칸과 만나고 블랙 아워 처리.

휴양도시 브리엔테에선 방주의 리스너와 조우.

도시 로리엔에선 방주의 후보인 레이라와 소울 트리 토벌.

그 외에도 공국 이곳저곳을 다녔다.

고작 반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상당한 거리를 이동했다. 만약 비행이 없었더라면 절반도 채 가지 못했겠지.

하지만 아직 본궤도에는 오르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방문한 나라는 고작 공국 하나뿐이니. 베르덴은 한곳에만 머물며 성장할 생각 따윈 없었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다른 나라를 오가며 좀 더 적극적으로, 과감하게 나설 생각이었다.

현재 베르덴의 수준은 4위계 중위.

하루도 빠짐없이 몸을 단련하고 마력회로를 확장했으며, 여러 실전을 겪어온 지금, 어느새 4위계 상위를 코앞에 두고 있다.

목숨이 위험한 적은 있었지만 그 덕에 이렇게 이례적인 성장 속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중요한 건 5위계에 오르는 것.'

원소 마법.

3위계는 기본적인 바탕이고, 4위계는 전과 마력 소모가 비교도 안 되게 증가하는 만큼 강력한 위력을 표방한다. 그리고 5위계는 주변 지형을 뒤바꾼다.

단순히 마력을 쏟아부은 지형조작과는 비슷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다르다. 술자의 역량에 따라 기후를 바꿀 수 있고, 작은 마을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릴 수도 있다.

3위계와 4위계는 격이 다르다.

그러나 4위계와 5위계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5위계에 올라서야만 '마도'에 도달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보면 5위계 이상의 마법사는 꽤 있다.

물론 전부 다 위력적인 마법 계열에 특화된 건 아니다. 그보단 마법을 학문으로써 보고 공부한 자들이 많다. 태어나면서부터 수준 높은 재능과 풍족한 집안을 가진 자들.

그러나 그중 마도에 이르는 존재는 고작 한 줌이다.

한계 위계가 6위계든 7위계든, 본인이 무엇인지 자각하고 어떤 길을 걸어왔고, 걸어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면 절대 이룰 수 없는 마도의 경지. 그 방법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뭐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전해진다. 만약 공식이란 게 존재했다면 대부분의 마법사가 마도사가 되었겠지.

경험자가 말하길 오로지 자신만이 볼 수 있고,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베르덴도 그렇게 지식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나만의 마도라....'

베르덴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약속한 시간이 되었고 페일이 보낸 사람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페일 님이 보낸 '샘'이라고 합니다."

"애셔입니다."

"하하, 말씀 편히 해 주세요. 그럼 다른 볼일이 없으시면 바로 연금술사 리토 님에게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샘을 따라 컴벨리 타운 바깥으로 나갔다.

한동안 길을 따라 걷다가 인근 숲으로 들어갔다. 화창한 햇빛이 내리쬐는 평화로운 숲이었다.

'그러고 보니 숲도 자주 오게 되는군.'

하기사 당연했다.

지금까지 베르덴이 받은 의뢰는 도시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벌어지는 것이 전부였으니. 아인종이나 마수 같은 것만 어떻게 한다면, 현상범에겐 도시보다 숲이 훨씬 더 안전했다. 절벽 뒤에 비밀 가옥을 만들었던 로커스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리비안트 공국은 대체적으로 도시 규모가 작고 치안이 탄탄해, 큰 범죄가 일어나기 어려운 환경이다.

단일 도시 국가이자, 세계 최대의 거대 도시인 '바빌론'.

그리고 공국의 전신(前身)인 '에스티리아 왕국'과 비교해서는 말이다.

베르덴이 앞서가는 샘에게 물었다.

"얼마나 걸리지?"

"그리 멀지는 않아요. 하지만 리토 님은 워낙 불청객을 싫어하셔서 좀... 주변에 이런저런 게 깔려 있거든요. 정해진 길로 가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저도 여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몇 번 당해 봤죠, 하하하."

샘이 볼을 긁적이며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체 뭘 깔아 놨길래 그런 걸까. 베르덴은 두리번거리다 저 앞 나무 위에 갈색 꽃이 피어 있는 걸 발견했다.

'몽환꽃?'

나무에 기생하는 식물로, 근처 지상과 하늘에 보이지 않은 가루를 뿌려 들이마신 생명체에게 강력한 환각을 일으킨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회복하지만, 자칫 도중에 아인종이나 마수에게 습격이라도 받으면 치명적이다.

그런 꽃이 일정 거리마다 나무에 붙어 있었다.

'이렇게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닌데, 인위적으로 배양한 건가?'

그렇다면 식물 쪽에 일가견이 있다는 뜻이다.

연금술의 주재료는 식물이니. 이것만으로 공국 제일의 연금술사라고 보긴 어렵지만 기대를 걸어 볼 만한 것 같다.

그렇게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숲을 지나쳤다.

그리고 잠시 후,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2층 오두막이 나타났다.

샘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말했다.

"바로 여기가 리토 님이 계신 집이에요. 미리 말씀을 드렸으니 문을 두들기시면 열어 주실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깥으로 나가실 땐, 리토 님이 해결해 주실 테니 안내는 필요 없을 거예요."

꾸벅, 인사를 한 샘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오두막을 둘러싼 정원을 둘러보니, 흔한 것부터 시작해 각종 희귀한 식물까지 종류별로 자라고 있다.

'자연환경에서 저런 것들을 기르다니. 어지간히 식물 관리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베르덴은 정원을 구경하며 계단에 올라섰다.

오두막의 문 앞에 서서 조심히 문을 두들겼다. 응답은 없었는데 안쪽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다리고 있던 순간, 문 아래로 희뿌연 연기가 올라왔다.

무슨 실험이라도 하는 건가?

딱히 노출될 이유는 없기에 가볍게 마법으로 날려 버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장난도 안 받아 주는 걸 보니 재미없는 놈이 왔군."

벌컥. 문이 열렸다.

중년을 넘어 노년에 가까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63화 마핵 (2)

하얗게 센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꼬장꼬장하게 일그러져 있는 눈.

낡고 허름한 갈색 로브를 입은 노인이 베르덴의 얼굴을 이리저리 쳐다봤다.

"자네가 그 애셔라는 놈인가?"

"그렇습니다."

"잘생겼네. 내 젊을 적을 보는 것 같아. 첫인상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군."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어루만졌다.

"이미 들었겠지만 내 이름은 리토 바르슬란. 사회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천재 연금술사지. 안으로 들어와라."

말투가 경박한 듯하면서 진중하고, 몸짓은 가벼우면서도 위엄이 있다.

이렇게 모순된 태도를 동시에 보여 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잠깐 대화를 나눴을 뿐이지만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라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괴팍하긴 하군.'

베르덴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리토를 따라 거실로 향했다. 최고급 증류기부터 시작해 막자사발, 가마솥, 마력수를 비롯한 각종 연금술 전용의 기구가 사방에 산적해 있었다.

전혀 정리가 안 된 게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어지른 걸 본 듯한 기분이었다.

"보기 좀 더럽긴 해도 내 식대로 정리한 거니까 건들지는 마라. 뭐, 자네도 명색이 마법사라면 이해하겠지."

와르르르르.

리토가 책상 위에 있던 잡동사니를 싹 쓸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곤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나에 대해서 페일에게 들었나?"

"간략하게 들었습니다. 공국 제일의 연금술사라고."

"끌끌끌, 그렇지. 그리고 페일은 괴팍한 노인이라고도 했을 거고. 그런데 그걸 알고서도 다른 연금술사 말고 날 찾아왔으니 뭔가 특별한 걸 의뢰하고 싶다는 말이겠지? 자, 어디 보여 주게. 그 작은 공간가방에서 꺼내 봐."

베르덴이 허리춤에 매단 공간가방에서 페일에게서 구입한 재료들을 꺼냈다.

최상급 마석, 요르단의 손톱, 루트밀의 손, 마력꽃의 뿌리와 꽃잎 등 재료 전체를 슥 둘러본 리토가 헛웃음을 지었다.

"허, 이거 참 오랜만에 보는 구성품이군. 그렇다는 건 그것도 구해 온 건가?"

"여기 있습니다."

만드레이크 추출액.

그걸 책상 위에 올려 두자 리토가 잽싸게 낚아챘다. 뚜껑을 열고 길게 냄새를 맡았다.

"오, 확실한 진품이야. 이건 나도 손에 넣기 어려운 건데, 대체 이걸 어디서 구했지? 어디 공작 자제나 왕족이라도 되나?"

"말해야 합니까?"

"아니, 필요 없어. 중요한 건 만드레이크 추출액이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지. 마핵이라! 늘그막에 이걸 다시 만들게 되다니, 역시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야."

리토가 실실 웃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진심으로 즐거운 듯 보였다.

'흥미가 있다니 다행이군.'

그러니 제작비 대신 터무니 없는 요구 조건을 걸진 않겠지. 만에 하나 베르덴이 거절하기라도 하면 마핵을 제조할 기회가 사라질 테니.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응? 하나 더?"

이번엔 샐러맨더의 심장을 꺼내 놨다.

심장이 뽑힌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미약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샐러맨더까지? 이거 참,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군. 그래, 그걸로 뭘 만들고 싶은데?"

"포션을 만들려고 합니다."

이 심장의 주인은 글러트니.

거한을 죽이고 흔적을 지워 추적을 끊어 냈지만 무턱대고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없다. 이걸로 무기를 만들었다가 눈에 띈다면 들킬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먹어서 없앤다.'

그렇게 하면 깔끔하게 끝난다.

누가 오든 이미 배 속에서 소화된 걸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

"포션이라. 이걸로 신성력에 훨씬 뒤떨어지는 회복 포션 따위를 만들긴 아까운데... 자양 강장제 쪽이 좋다고 보는데?"

"그럼 그걸로 부탁드립니다."

"다른 건 또 없지? 호, 마핵하고 샐러맨더의 심장으로 만든 활력제라.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하겠군. 하지만 그 전에!"

리토가 베르덴을 가리켰다.

"제작비는 선불이야."

"얼맙니까?"

"돈으로 받을 생각 없어. 내가 이래 검소하게 살아도 모아 둔 재산이 엄청 많거든. 뭐, 페일에게 이미 들었겠지만."

"그럼 뭘로 드리면 되겠습니까?"

글쎄, 뭐가 필요할까?

리토가 음흉하게 수염을 어루만졌다.

"애셔, 4위계 마법사지만 실력은 그 이상이라고 페일이 입 아프게 얘기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딱히 겸손을 떨 필요는 없었다.

그야 사실이니까. 블랙 아워의 4위계 마법사 다수를 상대로 손쉽게 승리하기도 했으니.

당당하면서도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리토가 히죽 웃었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자만? 또는 오만? 아니면 교만인가?"

"셋 다 아닙니다."

"그렇군. 흠흠, 자네가 어떤 마법사인지 대강 알겠군그래. 자신의 실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라, 요즘 것들하고는 달리 꽤 싹수가 있군."

후루룩.

리토가 근처에 있던 정체 모를 차로 목을 축였다. 그러곤 베르덴을 보며 말했다.

"내 요구 조건은 간단하다. 바로 동행이지."

동행?

"저기 뒤쪽에 거미숲이라는 곳이 있다. 거기 너머에 내가 겨우 찾아낸 희귀 재료가 있는데, 나 혼자서는 도저히 가져올 수 없어서 말이야. 거미숲도 자주 오가기엔 위험하기도 하고. 안 그래도 페일에게 믿을 만한 놈을 구해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타이밍 좋게 자네가 온 거지."

"그 재료를 구해 돌아올 때까지 호위하면 되는 겁니까?"

"그리고 오가는 길에 말동무도 포함해서."

그게 전부라면 전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최소 수억 엘크에 버금가는 제작비를 아끼는 셈이니까. 더군다나 외부의 위협을 배제하는 것이니, 베르덴의 특기인 마법을 적극 활용하는 일이라는 거다.

이 좋은 조건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동행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바로 출발할까? 날이 저물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리토가 주섬주섬 장비를 챙겼다.

그의 허리춤에는 가지각색의 포션이 매달려 있었다.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호신용 포션이었다. 베르덴보다 큰 공간가방을 등에 멘 리토가 활짝 웃었다.

"자, 후딱 갔다가 후딱 오자고."

* * *

거미숲.

리토가 말한 그 이름답게 숲 전반에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거미줄에 맺힌 이슬이 햇빛에 비쳐 반짝였다.

"보는 것과 달리 가끔 나들이하기 좋은 숲이지. 큼지막한 거미가 득실거리는 건 나도 좀 그렇지만. 자네는 곤충 좋아하나?

"거미는 곤충이 아닙니다."

거미는 절지동물이다.

큰 분류로 따지면 벌레라고 할 수 있지만 결코 곤충은 아니다.

리토가 미간을 찌푸렸다.

"쩝, 내가 종종 써먹는 농담인데 내가 당해 버렸군. 세상엔 거미가 곤충인지 벌레인지 모르는 놈들이 많거든. 알아봤자 어디 쓸데도 없으니까. 그래서 거미를 곤충이라고 하면 그 몰상식함을 비웃어 주는 게 내 취민데... 자네가 빼앗아 버렸어."

"그걸 모른다고 몰상식하기까지야...."

"맞아, 그건 좀 너무했지. 그래서 이 농담을 들은 사람들이 대부분 기분 나빠 하더군."

리토가 끌끌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대화에 두서랄 게 없을 정도로 주제가 난잡했지만 베르덴은 거기서 다른 걸 느꼈다.

'자유롭군.'

몸짓과 말투에 여유가 가득하다.

페일의 말마따나 초연하다. 돈이고 뭐고 오로지 자신이 즐거운 것에만 흥미를 갖고 움직이는 인간. 마탑에서도, 공국에서도 보지 못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애셔, 자네가 마핵을 만들려는 이유는 뭐지? 다른 마법사들처럼 마법적인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선가?"

"...대답해야 합니까?"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뭐, 그렇게 되면 말동무를 해 주겠다는 자네와 나의 약속을 깨게 되는 것이고, 나도 마핵을 만들어 줄 이유가 사라지는 거지. 제작 도중에 콱 이상한 걸 넣을 수도 있는 거고. 왜냐? 자네가 약속을 안 지켰으니까."

"...."

리토의 논리에 베르덴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내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제 성장을 위해서죠."

"왜? 위대한 마법사가 되는 게 꿈이라서?"

물론 그것도 있다.

한 명의 마법사로서 세상에 인정받는 건 어릴 적부터 이어 온 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목표를 위한 발판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떠한 속임수도 없이 순수한 마법전으로 보헤미른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짓밟는 것 그리고 피로 세워진 마탑의 위상을 끌어내리는 것.

그를 위해선 베르덴은 강해져야 한다.

물론 그 증오와 복수심이 가득한 속마음을 리토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다. 베르덴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래?"

리토가 베르덴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수염을 긁적이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하나 더 묻지. 위대한 마법사가 되면 뭘 할 생각이지? 꿈을 이룬 다음엔 어떤 꿈을 꿀지 생각한 적이 있었나?"

"그건...."

만약 복수를 이루는 날이 온다면, 그리고 성공한다면.

'...나는 뭘 해야 하지?'

그러고 보니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 맞겠지.

너무도 높은 목표이기에 그저 하늘을 향한 계단을 오르는 것에 전념했다. 하늘 너머의 하늘까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베르덴이 침묵했다.

그 정적에 리토가 쯧쯧 혀를 찼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은 각자의 이상을 꿈꾸지. 대부분은 좌절하고 현실에 타협하고,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꿈을 이루고 그리고 그 후엔 뭘 하는지 아나?"

"...."

"전부 달라. 누구는 여자들을 꼬시며 육욕적인 삶을 살고 있고, 누구는 제자를 기르며 후학을 양성하지. 강대한 힘을 휘두르며 탐욕적으로 살기도 하고, 타인을 도우며 이타적으로 살기도 해. 가족을 만들고 자식을 키우는 일도 흔하지. 여기서 공통적인 게 뭔지 알아? 전부 다 새로운 꿈을 가졌다는 거야."

하지만 새로운 꿈을 꾸지 못한다면.

"살아갈 의욕을 잃게 되지. 죽을 때까지 그저 살아가거나, 무욕적으로 변해 감정을 잃고, 비관하며 자살하기도 해. 인간은 언제나 꿈이 있어야 하는 존재거든. 애셔, 갑자기 내가 왜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줄 아나?"

"모르겠습니다."

"꿈을 말할 때의 자네의 눈, 아주 활활 불타오르더군.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도 불에 타 죽을 정도로. 분명 꿈을 이루기 위해 아주 강렬한 열망을 품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화톳불의 빛이 너무 밝으면 주변에 있는 걸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것까지 전부 태우고 남김 없이 사그라지지.... 크흐흠, 이거 말을 많이 했더니만 목이 타는군."

리토가 시원한 물병을 꺼내 목을 축였다.

묵묵부답인 베르덴을 보며 미소 지었다.

"끌끌끌, 아주 꿀 먹은 병아리가 되셨구만. 내가 한 말이 그리도 정곡을 찔렀나?"

"조금 생각하게 되기는 하더군요."

"좋은 현상이군. 뭐, 급할 필욘 없어. 자네는 젊으니 생각할 시간이 많아. 조금 더 느긋하게 해 보라고. 그래야 나처럼 이렇게 자유로운 노후를 즐길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리토는 농담스럽게 말을 끝냈다.

베르덴은 생각했다.

방금 전 그가 한 말... 그건 확실히 베르덴의 의표를 찌르는 말이었다. 처음 만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어쩌면 그것이 리토 바르슬란이라는 연금술사의 본질이 아닐까 싶었다.

그때, 리토가 발걸음을 멈췄다.

"아, 근데 내가 그 말을 했었나?"

"...?"

"거미숲에는 주인이 있어. 아주 집채만 한 초거대 거미가 이 숲의 주인이지. 그놈 자식들도 어지간한 사람만 하고. 여러모로 최대한 만나지 않는 게 상책이야."

"그런데 갑자기 왜 그 말을...?"

"내가 실수했다. 얘기하다가 놈의 영역권에 들어와 버렸어."

뭐?

사사사삭. 베르덴의 감각에 무수한 소리가 스쳤다.

64화 마핵 (3)

베르덴이 재빨리 마력감지를 펼쳤다.

그러자 사방에서 수많은 생명체가 감지되었다. 형태로 보아 전부 다 같은 종류의 거미였다.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온 거지?'

이 정도로 가까이 왔다면 진즉에 느꼈어야 정상이었는데.

그러자 리토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여기 거미들은 좀 다르거든. 기척을 숨기는 데 엄청 능하지. 나도 어쩌다 몇 번 물리기도 했고."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겁니까?"

"미리 말하면 재미없잖나."

태연하게 말하는 리토에게 베르덴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어쩌면 아까 전에 자신에게 했던 충고가 거짓이고, 지금 보여 주는 평소의 모습이 진짜일지도.

베르덴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기분 나쁠 정도로 바글바글하군.'

회색 등딱지와 검은색 다리를 가진 거미가 수백 체. 개중엔 베르덴보다 거대한 놈들도 있었다. 입가에 보라색 침이 뚝뚝 흐르는 걸 보아 독을 가진 모양이다.

베르덴의 목적은 리토의 호위.

혹시 모르니 그에게 보호의 목걸이라도 걸어 주고 싶지만, 아마 리토의 마력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기절하면 더 귀찮아진다.

'접근하기 전에 끝내야겠어.'

<화염기류>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얇은 거미줄이 삽시간에 불타올랐고, 몸집이 작은 거미들은 그 자리에서 새까맣게 불타 죽었다. 거대 거미들은 자신의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 틈에 정신을 집중했다.

<화염역병>

방대한 양의 마력이 집결된 스태프의 보석에서 다섯 줄기의 화염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강렬한 열기에 거대 거미들은 베르덴에게 달려들다가 휩쓸려 재가 되었다.

그에 반해 나무들은 멀쩡했다.

"오, 대단하군! 대부분 다 죽었어!"

짝짝짝.

리토가 옆에서 박수를 쳤다.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이걸로 주변에 있던 적들은 거의 다 처리했다. 그러던 순간, 위쪽에서 기척을 느꼈다.

리토의 뒷덜미를 잡은 베르덴이 자리를 벗어났다.

치이이이익!

위에서 날아온 보라색 독액이 지면을 녹였다. 고개를 들자 하늘에는 거대한 거미줄이 깔려 있었고, 그 중심엔 말 그대로 집채만 한 초거대 거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여덟 개의 검은 눈동자가 베르덴과 리토를 포착했다. 새끼들이 많이 죽어서 그런지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저게 거미숲의 주인인 '아라네이드'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군. 애셔, 조심하게. 모험가 길드에서 책정한 위험도는 최소 백금 등급이라고 하니까."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조용히 계시죠."

리토의 입을 닫게 한 베르덴이 아라네이드를 바라봤다.

아까 전 독액을 날린 걸 보면 원거리 사냥이 특기인가? 땅을 녹일 정도로 독성이 강하니 닿는 건 물론이고 그 연기조차 마시면 안 될 터.

물론 파훼법은 간단하다.

'독은 불하고 상극이니.'

<인페르노>

초고온의 화염 벽이 아라네이드를 덥쳤다. 독액을 쏘아 보냈으나 순식간에 불타 사라졌다. 놈은 거체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다른 거미줄에 옮겨 붙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미 예상 범위 내였다.

암석의 창이 나무를 분쇄했다.

범상치 않은 충격에 거미숲의 주인이자 사냥꾼이었던 아라네이드가 되레 쫓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순간,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베르덴을 향해 육박했다.

콰지직!

흙으로 만들어 낸 거대한 칼날이 아라네이드의 턱 아래에 꽂혔다. 입 주변에 있던 독샘이 터지며 독액이 줄줄 샜다. 본인의 독에 대한 면역이 없는 모양인지 아라네이드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마 발성기관이 있었다면 비명을 질러 댔겠지.

<어스 자벨린> 그리고 <아웃버스트>

마법서로 강화된 대지의 창. 그 후면에 압축되어 있던 바람을 일순간에 폭발시켰다.

허공을 가르며 쇄도하는 그 속도는 기존의 약 두 배 이상이다. 관통력 또한 마찬가지.

퍼엉!

아라네이드의 반응을 넘어서는 속도에 놈의 거대한 배가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놈이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였지만 거기까지였다.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에 이내 다리가 말리며 숨이 끊어졌다.

리토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거미숲의 주인이 이렇게 죽다니. 페일이 그렇게 말할 만하군. 아주 좋은 구경이었어."

"이제 가시죠."

"잠깐, 잠깐. 아라네이드의 사체를 이렇게 두고 갈 수는 없지. 독낭이 터진 건 아쉽지만 저 독니에서 뽑아낸 독으로 그럴듯한 해독제를 만들 수 있거든. 잠시만 기다려."

리토가 아라네이드의 독을 채취했다.

"음, 품질이 아주 좋군. 그럼 계속 이동하지."

* * *

아라네이드가 토벌되고 난 후, 베르덴과 리토를 습격하는 거미들은 없었다.

마력감지를 지속하고 있음에도 불청객이 다가오는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안전하게 거미숲을 통과하자, 거미줄이 사라진 깨끗한 숲이 나타났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 이제... 아, 그래! 저쪽으로 가면 목적지야."

이제 안전한 장소인지 리토는 과감하게 발을 디뎠다.

'나이에 비해 체력이 강하군.'

그를 뒤따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공터가 나타났다. 거기에는 무너지고 부서진 돌기둥이 널브러져 있었다.

"...유적?"

"오래된 유적이지. 워낙 외진 곳에 있어서 지금까지 나 외엔 어느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았어. 그리고 저기 유적 중심을 잘 보라고."

리토가 가리킨 곳에 시선을 향했다.

풀에 둘러싸여 있는 한 꽃이 푸른색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로젠플라워(Rozenflower). 우리가 흔히 쓰는 마력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정순하고 농밀한 마력을 품고 있지. 저걸로 대량의 마력수를 만들어 쓰는 것만으로도 훨씬 더 좋은 품질의 물건을 제작할 수 있어."

그야말로 연금술사를 위한 꽃이다.

보통 성장하기 전에 뜯어 먹히거나 다른 식물에게 양분을 빼앗겨 죽기에 자생하기가 극도로 어려운데, 그런 의미에서 이 오래된 유적은 로젠플라워에게 있어서 요람이나 다름없었다.

"저 새를 잘 봐."

새 한 마리가 지면에 내려앉았다.

로젠플라워의 마력에 이끌린 모양. 새가 종종걸음으로 유적에 다가간 순간.

쩌억!

돌조각이 움직이더니 새를 강타했다. 어찌나 충격이 강했는지 피와 깃털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 광경에 베르덴이 눈을 부릅떴다.

"저거... 설마 골렘입니까?"

"그것도 천연 골렘이지."

골렘(Golem).

고농도의 마력이 담긴 물체를 핵으로 삼아 태어나는 아인종. 주로 돌이나 금속 같은 것으로 이루어졌으며 어떤 생식 작용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핵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고대에는 골렘을 만들어 경비용으로 쓰곤 했다고 한다.

지금은 거의 실전된 기술이었는데, 최근 아티슨 마탑이 일부 복원에 성공해 작은 형태의 골렘을 만드는 걸 성공했다고 마탑에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나저나 저게 천연 골렘이라는 말은....'

"설마 저 로젠플라워가 핵입니까?"

"정답이야."

베르덴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핵을 파괴하지 않으면 골렘을 죽일 수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도 정답이지. 하지만 골렘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있어. 바로 핵을 본체에서 멀리 떨어뜨리는 거지!"

그러나 어느 정도 떨어뜨려야 하는지는 모른다.

인간이 인간마다 다르듯, 골렘도 골렘마다 성질이 다르니까.

"만약 끝까지 쫓아온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래서 자네를 데려왔지. 골렘을 처리할 방법의 가짓수는 많아. 예를 들어 자네가 저 핵을 들고 비행을 써서 멀리 날아가면 되는 일이지. 뭐,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그렇게 해도 죽지 않으면... 별수 없이 로젠플라워를 부술 수밖에."

흐음, 베르덴은 생각했다.

핵을 부수지 않으면 골렘은 아무리 파괴해도 끊임없이 재생한다. 아무리 베르덴이라고 해도 직접적으로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방법은 있지.'

핵을 들고 도주하는 것보다는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리고 이 방법은 일반적인 마법사에겐 무리다. 4위계 중에선 오로지 베르덴만이 가능한 방법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 계획대로 하시죠."

"계획?"

* * *

리토가 로젠플라워를 채집하는 동안, 베르덴은 골렘의 시선을 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베르덴은 낮게 비행하며 골렘의 일격을 피해 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거리를 벌렸다간 골렘의 경계가 분산되어 핵에 가까이 있는 리토를 노릴 터.

후욱! 골렘의 팔이 지나가며 거센 바람이 불었다.

마력방벽이나 염동력으로 막아 낼 수 없는 압도적인 질량. 한 번이라도 직격하는 순간 목숨이 위험하다. 그러나 마치 미래를 예측하는 듯한 베르덴의 움직임에 골렘의 팔은 그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거암강타巨巖强打>

콰아앙! 거대한 암석이 측면에서 골렘의 몸체를 부쉈다.

사방으로 흩어진 유적의 파편. 하나, 핵에 있는 마력에 의해 다시금 모여들며 원래의 형상을 되찾았다. 골렘에겐 체력이란 게 없으니 그저 시간 벌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해서 골렘을 부수어 이목을 끌고 있던 중, 리토가 소리쳤다.

"다 됐다!"

로젠플라워를 깔끔히 뽑아내는 데 성공한 리토가 미리 얘기했던 대로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핵이 멀어지는 것을 느낀 골렘이 등을 돌렸다.

뒤에서 날아온 마법에 두 다리가 박살 났다. 여러 개의 벽이 솟아올라 와 골렘의 앞길을 막았다. 얼마 안 가, 다리가 수복된 골렘이 벽을 때려 부수며 리토의 뒤를 쫓았다.

콱! 베르덴이 스태프를 땅에 꽂았다.

그러자 일대가 갈라졌다. 거대한 진동에 무게중심을 가누지 못한 골렘. 휘청거리다가 다리 한쪽이 작은 틈새에 빠져 버렸다.

지반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베르덴이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넘쳐흐른 마력이 눈동자에서 피어올랐다.

쿠구구구구...!

땅이 움직인다. 이내 골렘 발밑의 지면이 세로로 갈라졌고 서서히 그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아래는 까마득한 절벽. 이곳에 떨어지면 골렘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니까.

<지형조작>

콰드득! 순식간에 틈새가 벌어졌다. 결국 지지대를 잃은 골렘이 중심을 잃고 허공에 떠올랐다. 가장자리를 잡으려 했지만 흙이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어둠 속으로 추락하여 사라지는 골렘. 몇 초 뒤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한차례 진동이 울렸다. 베르덴은 이번엔 역으로 지면을 움직여 틈새를 억지로 닫아 냈다.

"후우...."

땀방울이 턱끝에 맺히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베르덴의 기준으로도 상당한 마력을 한 번에 소모한 터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로감이 몰려왔다. 일전에 통곡의 기사가 있던 갱도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때, 멀리서 베르덴의 마법을 지켜보던 리토가 다가왔다.

그러곤 참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아주 미친놈이었군."

"...."

65화 마핵 (4)

젊었을 때의 리토 바르슬란은 온 세상을 여행했다.

자신의 연금술을 갈고닦기 위해 직접 재료를 구하기도 하고, 포션과 마법 물품을 판 돈으로 경매장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본의 아니게 이목을 끌 때도 종종 있었다.

왕족, 귀족, 상인, 모험가 등.

그의 실력을 알아본 자들이 접근했고 연금술 관련 제작 의뢰를 맡기기도 했다. 다만 개중에는 폭력적인 자들도 있었다.

물론 보란 듯이 탈출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몇 번이고 죽을 뻔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우면서도 위험천만한 나날이었다.

그런 삶 속에서 자연스레 수많은 실력자를 접했다.

리토는 그때의 기준으로 베르덴을 평가했다.

"이건 뭐, 숫제 괴물이군."

아라네이드와 그 자식들은 압살.

근거리에서 골렘이 휘두른 일격을 간단히 피하며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 않나, 거기다 대지를 갈라 밑이 보이지 않는 절벽에 골렘을 떨어뜨리기까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만한 마력을 사용했음에도 기절은커녕 멀쩡히 서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4위계 마법사는 뭐였지?'

다 병신들이었나?

저걸 보니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애셔, 대체 어디서 마법을 배웠지?"

"스승님에게 배웠습니다."

고명한 스승의 제자.

그것이 '애셔'의 배경이었다.

대답을 들은 리토가 생각에 잠겼다.

'저런 괴물을 길러 낸 스승이라니... 무슨 마탑주라도 되는 건가?'

뭐가 됐든 저건 천재라는 단어로 전부 표현할 수 없다.

만약 타고난 한계 위계가 마탑주와 같은 7위계 이상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세계적으로 큰 격변을 일으킬 것이다. 마탑주, 아니 그 이상의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고 리토는 직감했다.

'생각하기도 무섭군.'

하지만 즐겁기도 하다.

평화로운 삶 속에서 오랜만에 느낀 자극. 젊을 적에 느꼈던 그 두근거림이다.

이렇게나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마법사라니. 과연 여기서 마핵을 흡수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리토는 너무도 궁금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세상이 점차 변화하는 걸 체감하는 건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었다.

나이 70에 이런 마법사를 만나게 될 줄이야.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리토가 로젠플라워를 화분에 심어 공간가방에 넣었다.

"흠흠, 볼일은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 * *

오두막에 도착하고 나서 리토는 당장 마핵과 샐러맨더의 심장의 연금술을 준비했다. 단열제로 코팅된 장갑과 두꺼운 마스크를 쓴 그가 베르덴에게 말했다.

"한 이틀 정도 걸릴 거다. 그러니 컴벨리 타운에 가서 쉬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여긴 딱히 쉴 공간이 없으니까."

이틀이라.

"제가 도와드리면 더 일찍 끝낼 수 있습니까?"

"응? 뭐, 제대로 된 보조자가 있으면 반나절 정도... 자네, 혹시 연금술도 할 줄 아나?"

"보조 정도는 할 줄 압니다."

보헤미른 마탑에서 강제적으로 포션을 만든 적이 있었다. 전반적인 연금술 지식도 있고.

스스로 냉정하게 평가하면 그리 뛰어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시키는 건 어느 정도 따라 할 수 있다.

"허, 대체 그 나이에 어떻게 살았길래.... 스승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잘 때 빼곤 마법하고 공부만 가르친 모양이군. 이러다 마법진도 쓴다고 하겠어."

"쓸 줄 압니다."

오히려 전공이지.

베르덴이 간단한 마법진을 그렸다. 파랗게 명멸하는 술식을 본 리토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진짜 미친놈이군."

그 외엔 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저어 제정신을 차린 리토가 연금술을 시작했다.

그와 같은 장비를 입은 베르덴은 마치 기계처럼 리토의 지시를 따랐다.

요르단의 손톱의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를 빻아 가루로 만든 다음 루트밀의 손과 마력꽃의 뿌리를 같이 달인 물에 섞었다.

이어 마력꽃의 꽃잎과 여러 재료를 반복해 가며 끓이고 거르는 과정을 반복했다.

한편, 리토는 만드레이크 추출액의 성분을 분리했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손실이 큰 필수적인 과정. 그는 진중한 표정으로 필요한 성분을 추출한 뒤, 다른 재료를 한데 모아 힘껏 짓이기며 마지막 한 방울의 액체까지 쥐어짜 냈다.

그러곤 만드레이크 추출액와 섞었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샐러맨더의 심장에 있던 생명력과 마력을 따로 분리했다.

연금술에서 시간 엄수는 생명 그 자체.

1초라도 늦었다간 전혀 다른 성분으로 뒤바뀐다.

그러나 이 둘이 해낸 과정 속에선 어떠한 변질도 없었다.

베르덴이 리토의 지시대로 만든 액체와 리토가 만든 추출액. 그 둘을 한 그릇에 부은 다음에 최상급 마석을 안에 집어넣었다.

리토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완벽하군. 이제 7시간 정도 기다리면 돼. 샐러맨더의 심장 쪽도 그 정도 걸리고. 애셔, 자네 연금술 실력도 그리 나쁘진 않군. 내가 지시하지 않았으면 초장에 망쳤겠지만 말이야."

"전 보조만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끌끌끌. 그건 그렇지."

리토가 마핵에 시선을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걸 묻는 걸 깜빡했군. 애셔, 자네는 마핵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효과에 대해 알고 있나?"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마핵.

그 안에 담긴 마력을 흡수하면 마법사의 전체적인 기량이 상승한다.

첫 번째, 마력회로 강화.

두 번째, 마력량 증가.

세 번째, 마법 시전 속도 증가.

네 번째, 마력의 정순화.

이렇게 네 가지로, 마탑에서는 주로 마탑주의 제자나 투자할 가치가 있는 마법사를 발탁해 마핵을 지원한다.

두 개 이상은 흡수할 수 없기에 이런 식으로 인재를 성장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대충은 알고 있군. 하지만 두 번째는 자네한테 필요 없는 것 같은데? 그 나이에 그만한 마력을 가지고 있으니."

리토의 말이 맞다.

정확히 베르덴에게 필요한 효과는 두 가지뿐.

베르덴의 마력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그리고 역천으로 재구성된 육체의 마력은 새파란 바다처럼 정순하다.

그렇기에 두 번째와 네 번째 효과는 거의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효과만으로도 투자할 가치가 있었으니까.

"일부 효율이 적긴 하겠지만 다른 효과들만으로도 제게 충분합니다."

"물론 그렇겠지. 마핵을 흡수한 자와 아닌 자는 확실히 다르니."

하지만.

"역시 본질적인 건 전혀 모르는군. 하기야 마핵을 눈앞에 둔 마법사가 분석을 시도할 리가 없지, 냉큼 흡수해도 모자랄 판에. 아주 어리석기 짝이 없어. 자기가 뭘 먹는지도 모르고 배를 채운다는 게 말이야."

본질적인 것?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토가 말을 이었다.

"뭐, 보조도 해 줬고 즐겁기도 했으니 특별히 설명해 주마. 마핵의 효과는 자네가 말한 게 맞아. 정확히는 대부분의 마법사가 얻게 되는 효과지. 하지만 마핵의 의미는 단순히 마법적인 능력을 상승시키는 데 있는 게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마법사의 육체 중 '마법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한층 더 성장시켜 주는 역할이지. 육체와 하나가 되어서 말이야."

그것이 마핵의 본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법사에게 부족한 것이 위 네 가지이기에 하나같이 같은 효과를 보여 주는 것뿐. 하나, 그 편차가 사람마다 다른 게 그 증거다.

"뭐든지 알아야만이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법이지."

리토가 머리를 톡톡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잘못된 지식에서 오는 착각, 그 무의식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주거든. 제멋대로 마핵의 효과를 한정했기에 그 외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거다. 가짜 약으로 환자의 병세가 완화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는 건 마핵에 다른 효과가 있다는 겁니까?"

"글쎄? 나야 본 적은 없어서 모르지만, 마핵이 그 이상의 잠재력을 가진 건 확실하지. 하지만 극단적으로 예를 하나 들자면, 육체에 부족한 부분이 없는 마법사가 마핵을 흡수한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아무도 모르지. 세상에 마법적으로 완벽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있을 턱이 없으니. 하지만 다른 마법사와 같은 효과가 나올 거라고 누구도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런 가능성이 있으니 자네 말대로 다른 효과를 보일 수도 있겠지."

리토가 기지개를 켜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한숨 자야겠어. 늙으니까 여러모로 체력이 달리는군. 자네도 피곤하면 알아서 자리 잡아서 눈 좀 붙여. 시간은 맞춰 놨으니 걱정하지 말고."

리토가 하품을 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홀로 남은 베르덴은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완벽한 육체라....'

* * *

다음 날 이른 새벽, 베르덴과 리토는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동이 트기 시작할 때쯤 마침내 완성했다. 마핵과 샐러맨더의 심장으로 만든 활력제를 말이다.

"둘 중 하나를 복용한 뒤, 나머지 하나는 한 달 뒤에 복용해라. 둘이 상극이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거든. 잘못하면 몸이 뻥 터져 버릴지도?"

"진짭니까?"

"아니. 그래도 간격을 두는 건 맞다."

리토에게서 마핵과 활력제를 건네받았다.

조심히 감싸 공간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 베르덴이 리토에게 인사를 전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부탁드리죠."

"끌끌끌, 아주 노인을 혹사할 생각인 모양이군. 대신 시답잖은 것 말고, 이번처럼 마핵과 같은 재밌는 걸 가져오도록."

쾅. 리토가 문을 닫았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멀지 않을 거라는 기분이 든다. 그의 연금술은 베르덴이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으니.

베르덴은 몸을 돌려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몽환꽃의 영향권 바깥까지 올라간 다음에 숲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는, 인적이 드문 장소를 물색했다.

'저곳이 좋겠어.'

고요한 숲.

그 중심에 내려간 베르덴은 지형을 조작해 땅굴을 파냈다. 안으로 들어가 흔적을 지우고는 미세하게 숨구멍을 몇 개 뚫어 놓았다.

후에 다시 지형을 움직여 지하 깊은 곳에 커다란 공동을 만들어 냈다.

'이걸로 도중에 방해가 들어오는 일은 없겠지.

그 중심에 앉은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마핵을 집어 들었다.

이걸 손에 넣은 지금, 지체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마핵을 손에 쥐고 심장 부근에 갖다 대었다.

화아악! 전신의 마력회로 가득히 마력을 채워 넣자 마핵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베르덴의 심장을 서서히 파고드는 마핵의 마력. 서로 다른 형질의 마력이 만나며 뒤엉키기 시작했다.

"큭...!"

하나의 마력회로에 두 종류의 마력이 공존하고 있다.

이제 서로 반발하던 마력이 자연스레 합쳐질 차례였다. 그런데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마력회로에 퍼져 있던 마핵의 마력.

그것들이 다시 심장에 집결하더니 갑작스레 엄청난 양의 마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보다 아득히 많았다.

대체 어디서 이 마력이 터져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베르덴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 기분은... 분명 느껴 본 적이 있었다.

바로 마탑의 동력원에서 말이다.

화아아악!

베르덴의 몸에 새겨진 역천의 마법진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더니 방대한 마력이 일제히 몸에 스며들었고, 그 마력이 오른쪽 눈에 모였다.

"크윽...!"

눈알이 터지는 듯한 그리고 뇌가 짓이겨지는 듯한 격통.

하지만 베르덴은 이것이 위험한 게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역천으로 새로운 육체를 구성하는 것과 같은 감각.

고통은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

뿌드득.

이를 깨물며 목 안에 차오른 비명을 억눌렀고, 손톱을 지면에 박아 넣었다. 강하게 깨문 입술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신경이 찢어발겨지는 듯한 느낌에 경련이 찾아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치 꿈이라도 꾼 듯, 고통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고요했다. 땀에 흠뻑 젖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이 가볍게 느껴졌다.

스르륵.

베르덴이 눈을 떴다.

마력이 가득한 청안.

그의 오른쪽 눈에는 그가 몸에 새겼던 역천의 마법진과 같은 문양이 마력으로 빛나고 있었다.

66화 마핵 (5)

마법 물품의 종류는 다양하다.

무기, 갑옷, 특수한 포션 등 마법적인 기술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마법 물품으로 분류된다. 그중 소비형으로 분류되어 있는 마핵.

마탑에 종사한 마법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으로 베르덴 또한 그러했다.

마핵의 마력을 흡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지 이론적으로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베르덴이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현재 그의 마력 위계는 한 단계 상승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문턱을 넘어 4위계 상위에 다다랐다. 마핵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마력회로가 확장되었을 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건....'

오른쪽 눈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압력.

기존의 허용량을 아득히 넘어선 마력이 눈에 집결되어 있다. 본래라면 이미 터져 버리고 남을 정도의 양이었음에도 안정을 이루고 있었다.

대체 어떠한 작용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베르덴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리토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마핵의 본질은 마법사와 하나가 되어, 그 육체 중 마법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한층 더 성장시켜 주는 역할이라고.

'하지만 내 몸은 일반적인 마법사와 다르다.'

베르덴의 육체는 무한한 가능성의 집합체. 그야말로 완전한 물질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탑의 심장을 이용해 재구성했다.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최초의 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어떠한 결점이 있을까. 있을 리가 없다.

한계에 얽매이지 않는 무한한 가능성.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던 하늘, 그 자체를 뒤집는 역천.

베르덴. 그는 남들과 달리 스스로의,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렇기에 마핵은 이상 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다.

화륵.

손가락 끝에서 불을 피워 어둠을 밝혔다. 그러곤 공간가방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마력이 집중되어 있는 오른쪽 눈.

그 중심엔 베르덴의 몸에 새겨져 있는 것과 같은 역천의 마법진이 담겨 있었다.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특이하군.'

동공이 푸른빛으로 발광한다.

전신의 마력회로를 활성화해, 허용 범위를 넘어선 마력이 바깥으로 흘러넘치는 현상과는 다르다. 마치 눈에 새로운 마력회로라도 형성된 듯 제대로 갈무리가 되어 있었다.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그에 따라 오른쪽 눈에 있던 마력이 더욱 강하게 명멸했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바뀌기 시작했다. 시야에 비친 공동이 푸른색으로 물들었고 방대한 마력이 술렁거렸다.

그 방향에 따라 이끌리듯 베르덴이 마력을 움직였다.

콰득!

공동 끝에서 솟아난 바위 가시. 평소에 자주 쓰던 지형조작의 응용이었다. 그러나 그 광경에 베르덴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마력이 닿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마법이...?"

마법이란 마법사 본인의 마력으로부터 기인한다.

지형조작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으로 장악한 지형이 아니면 당연하게도 지형을 조작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방금의 상황은 그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설마 내 시야에 비친 장소라면 어디든 마법을 시전할 수 있다는 건가?'

베르덴은 곧바로 실험에 들어갔다.

보다 내적인 부분에 집중하여 일련의 현상을 바라봤다. 화염과 땅 그리고 얼음과 물 또는 번개. 연이은 마법에 공동이 흔들리며 천장이 일부 무너져 내렸다.

그러한 짧은 실험을 통해 베르덴은 몇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베르덴의 시야 내의 위치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거리가 멀수록 연산량이 증가해 시전 속도가 느려진다.

둘째, 다른 마력회로와 병렬로 연결함으로써 마법의 시전 시간을 극한으로 단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해진 타깃만을 불태우는 화염역병이나 광범위한 파괴력을 가진 하르칸의 유성을 말이다.

'하지만 단점은 있다.'

셋째, 이러한 사용법은 눈에 부담이 많이 간다. 최대한의 부하를 준다면 연속해서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두 번 정도. 그 이상은 눈에 담긴 마력회로가 견디지 못한다.

자칫하면 출혈이 일어나고 심하면 시력 자체가 손상될 가능성이 높다.

베르덴이 자신의 오른쪽 눈가를 어루만졌다.

'공간 자체에 마법을 일으키는 눈이라니, 마법사로서 듣도 보도 못한 현상이군.'

어쩌면 베르덴이 단순히 모르고 있는 걸지도.

세상이 워낙 넓기도 하고, 베르덴이 있던 보헤미른 마탑은 총 10개의 마탑 중 하나밖에 되지 않으니.

적어도 흔한 건 아니겠지만 누군가는 이것과 비슷한 눈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좋은 일이다.

상대의 빈틈을 찌르는, 그야말로 비장의 수단이 하나 생긴 셈이니. 그리고 이렇다 할 부작용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마핵의 작용에 베르덴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마력의 눈이라... 그렇다면 마안(魔眼)이라고 부를까."

마안.

나쁘지 않은 명칭이다. 마력의 눈이라고 부르는 것보단 직관적이었다.

서서히 마력을 거두자, 베르덴의 눈에 있던 역천의 문양이 사라졌다.

'눈에 일정량 이상의 마력을 불어넣지 않으면 사라지는 건가.'

마안의 기능에 대해 하나 더 배웠다.

이어서 지하 공동을 무너뜨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베르덴을 맞이하는 화창한 햇살과 청량한 풀 내음.

그 상쾌함 속에서 그는 또다시 한 발짝 나아갔다.

* * *

코헨으로 돌아온 베르덴은 한동안 여관에 틀어박혔다.

5위계를 앞에 둔 4위계 상위에 이르렀으니 다시 한번 자신의 마법을 갈무리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침대 옆에 물과 건조식품을 쌓아 놓고 방 전체에 마법진을 둘렀다.

중급 마석 5개와 액체형 연금술 재료인 '숲의 이슬'을 소모해 만든 고도의 마법진. 물 샐 틈이 없는 공간에서 베르덴은 편히 방대한 마력을 풀어헤쳤다.

그 아득한 집중력에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론, 연구 그리고 마법적인 단련을 반복하고 또 반복할 뿐.

어느 순간, 베르덴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웃었다.

'드디어 실마리를 잡았다.'

하르칸이 남긴, 일명 성신 속성의 마법.

그가 만들어 낸 다섯 개의 별 중 마침내 두 번째 별의 단초를 얻을 수 있었다. 하르칸에게서 받은 기억으로 봤을 때 아주 확실한 근거였다.

베르덴의 손에 회색의 마력이 맺혔다.

그 잔상을 따라 연쇄적으로 마력이 공명하며 허공에 별자리가 생겨났다. 초반부와 중반부는 자연스레 이어졌고 후반부에서 연결이 끓기더니 이내 사라졌다.

결과 자체를 얻어 낼 수는 없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과거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 후반부만 해결되면 그가 남긴 두 번째 별을 체득할 수 있다.

한 걸음, 아니 반걸음이 채 남지 않은 것이다.

'다만 아쉬운 부분이 있긴 해.'

성신 속성의 첫 번째 별인 흐르는 별, 유성.

베르덴이 알고 있는 마법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지만, 너무나 마력 소모가 크고 범위를 조절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여 활용도가 극히 낮았다.

장점만큼이나 단점 또한 명확했다.

그래서 여러 방향성을 염두에 두고 개량을 진행했다.

휴양도시 브리엔테에서부터 줄곧 연구했던 것이었는데,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그 자체로 안정적인 마법이기에 그러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안 된다고 포기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지금보다 더한 시행착오를 겪고, 반복적인 노력을 하면 될 테니까. 그래도 안 된다면 더욱더. 이건 그렇게 해야만 해결될 과제였다.

마지막으로 마법서에도 새로운 마법을 등록했다. 기존의 마법을 갈고닦는 건 이 정도로 충분할 터.

이제 다시 움직일 때가 되었다.

* * *

베르덴이 머물고 있는 여관의 특실.

그 방문 아래로 편지 봉투 하나가 밀어 넣어졌다. 언뜻 보면 상회의 광고문으로 보이나 일부 문자를 조합해 보면 숨겨진 내용이 보인다.

[2등급. 지명 의뢰.]

페일에게서 온 편지였다.

'지명 의뢰라. 로든마이어 백작 이후로 처음인가.'

마침 잘됐다.

안 그래도 의뢰를 받을 생각이었는데.

오랜만에 코헨의 거리로 나섰다.

여느 때처럼 공업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삭막함이 거리에 가득했다. 겨울이 오며 그 정도는 심해진 것처럼 보였다.

두꺼운 옷을 껴입은 사람들이 평소와 같은 얼굴로 길거리를 거닐었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거리에 병사가 많이 돌아다니는군. 기사도 종종 보이고.'

순찰이야 치안을 위해 항상 있었지만 오늘따라 상당히 자주 마주쳤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의뢰를 받기 위해 빈민가와 지하를 지나 페일을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애셔 님. 금방 오셨군요."

"지명 의뢰가 들어왔다던데, 어떤 의뢰지?"

페일이 언제나 그랬듯 서류를 가져왔다.

그러곤 베르덴에게 물었다.

"혹시 코헨에서 평소와 다른 점은 못 느끼셨습니까? 예를 들면 순찰하러 돌아다니는 병사의 숫자라든가 말이죠."

"전보다 3배 정도 많기는 하던데... 그것과 이번 의뢰가 관계가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곧 있으면 공국에서 진행하는 '대행사'의 날짜가 발표될 예정이기 때문이죠."

"대행사?"

"아, 모르셨군요. 그럼 이해를 위해 간략히 설명드리겠습니다."

공국의 대행사.

그건 불시에 일 년에 한 번씩, 백작 이상의 계급을 지닌 영주들을 수도로 불러내어 직접 리비안트 공왕에게 영지에 대한 보고를 하게 하는 날을 일컫는다.

'그러고 보니 공국은 기형적인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고 들었었는데, 그게 이걸 말하는 거였나?'

마탑에서 수집했던 리비안트 공국에 대한 정보.

하지만 워낙 멀어서 정보를 얻기가 여러모로 어려웠고, 나라의 행사 일정 따위는 베르덴에게 전혀 필요가 없었기에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다.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고.

베르덴이 물었다.

"귀족이 모여서 공왕에게 직접 보고 한다라, 그게 가능한 건가?"

순수한 의문이었다.

대놓고 귀족들을 견제하겠다는 것이었으니, 분명 반발이 심할 터였다.

"다른 나라라면 무리였을 겁니다. 하지만 공국이어서 가능했죠."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독립하고, 전쟁이 끝난 이후까지 공국의 상황은 별로 좋지 못했다. 모든 귀족이 리바안트 공작을 진심으로 따르는 건 아니었으니까.

공국과 인접한 국경에 있어 마지못해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고, 공국의 탄생으로 인해 왕국과 영지가 단절되어 항복한 자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체계가 어지러워지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부패한 귀족도 많았습니다. 혼란 속에서 제 배를 채우느라 남의 것을 빼앗는 놈들이 말이죠. 그래서 공왕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왕권으로 지배하기로.

자칫 내란이 터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행보였으나 그를 지지하는, 고위 귀족 가드란 후작과 라비슈른 후작이 있었기에 공왕의 계획은 성공했다.

기사단을 파견하고, 그 외 여러 강자를 고용하여 도시와 영지에 있는, 도적들과 같은 문제를 순식간에 처리했다.

처형에 합당한 죄를 저지른 귀족들은 그 자리에서 목을 잘랐다. 더러운 피가 강이 되어 공국 전역에 흘렀다.

궁지에 몰린 귀족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공왕은 자신을 물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적절한 때에 회유책을 펼쳤다. 본보기로 몇 명을 채찍으로 때려 죽이고 당근을 쥐여 준 것이다.

"신상필벌. 영지의 운영 상태를 보고 몇 명을 뽑아 상을 주었고, 부진한 영주에겐 경고와 충고를 내렸습니다. 거기다 이전에 있었던 죄 또한 묻지 않겠다고 하니, 귀족들의 머리가 아주 복잡해졌죠."

결국 귀족들은 순응했다.

겨우 죽다가 살아났는데 또다시 처형이라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내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왕이 주는 상도 탐이 나기도 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과 같은 공국만의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타협한 것도 있었습니다, 영주의 공무가 바쁘면 보좌관인 자작급을 대신 보내 보고를 올려도 되는 것처럼. 그런 공왕의 유연한 수완 덕에 공국이 여기까지 나름 순조롭게 성장할 수 있었죠."

이것이 공국의 대행사라 불리는 날의 배경이었다.

정확한 날짜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으니 당연히 이번 겨울 내에 정해질 터. 각 영주들은 혹여 일어날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보다 치안에 힘썼다.

"그런데 최근 그런 귀족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만한 통계가 나왔습니다."

페일이 서류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그 상단에 적힌 의뢰의 주제.

[급증하는 실종자.]

67화 불온한 움직임 (1)

이 시대에 사람들이 실종되는 건 비교적 흔한 일이다.

주로 아인종이나 이형종 또는 도적들에게 당해 시체도 못 건지는 경우인데, 도시 바깥에서 일어나는 만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병사들을 더욱 징집해 영토 전체를 지키는 건 말 그대로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설령 가능하더라도 자칫 폐쇄적인 국가로 보일 여지가 매우 높았다. 당연히 외교적으로 좋게 보일 리가 없을 터.

그래도 과거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기술과 체계가 발전했고 단순히 실종 처리하는 것이 아닌, 그 원인을 규명하려는 노력 또한 커졌다. 이 사람은 어떻게 죽었고, 저 사람은 왜 실종되었는지 알아내는 데 말이다.

그렇게 국가에선 해마다 통계를 내어 전체적인 치안 상태를 판단한다. 세계적으로 그 통계를 참고해 국가에 대한 평가를 내기도 하고.

안전한 삶이란 언제나 인류의 숙원이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공국 또한 통계에 신경을 쓴다.

실제로 리비안트 공왕이 직접 각 영지에 대한 평가에 참고하기도 하니. 공국의 대행사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영주들은 보다 영지의 치안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런데 최근 굉장히 불미스러운 통계가 잡혔다.

"도시 외적으로 실종자의 수가 작년에 비해 무려 5배나 증가했습니다. 심지어 수십 명 단위의 촌락은 아예 사람들이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더군요."

"아인종의 소행인가?"

"사람일 수도 있지요. 또는 이형종일 수도. 모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애셔 님이 직접 해결하신 로리엔의 소울 트리, 하마터면 수만 명의 희생자가 생길 뻔한 일도 있었으니까요. 뭐가 일어나든 이상하지 않은 게 지금의 시대가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럴지도.

그에 비하면 촌락 몇 개가 사라지는 것쯤은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귀족분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일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죠. 이미 원인을 찾고는 있지만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쓸 수 있는 수는 다 쓰겠다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희 쪽에 의뢰가 들어온 겁니다. 그 유명한 핏빛검 레이라와 함께 소울 트리를 토벌한 애셔 님을 콕 집어서 말이죠."

"의뢰주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로든마이어 백작입니다, 마침 백작의 영지에도 문제가 발생한 터라. 다른 귀족들에게서도 같은 의뢰가 들어오긴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인맥이란 게 이 바닥에선 여러모로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페일이 의뢰서를 베르덴에게 건넸다.

그 아래 적혀 있는 보수의 액수는 최소 억 단위. 의뢰의 성과에 따라 추가 보수가 지급되는 형식이었다.

"아무튼 이번 의뢰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애셔 님이 하실 일은 그 원인을 찾아내는 일이죠. 더해서 성공적으로 배제하고 실종자들의 소재까지 파악하면, 아래 명시된 금액의 최대 3배까지 지급될 예정입니다. 꽤나 큰 액수죠."

"의뢰, 수락하시겠습니까?"

* * *

페일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던 수사 정보를 입수해 베르덴에게 건넸다. 사람 한 명, 한 명이 숫자로 기재된 통계를 주욱 읽어 내렸다.

'이렇게 보니 실종자 수가 꽤 많군. 그리고 여러 영지에 걸쳐 있어서 범위가 넓기도 하고.'

확실히 귀족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만하다.

영지에서 실종 사건이 급증하고 있는데 제대로 된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하면 영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닐 테지.

그레이의 정보상을 비롯해 병사, 기사뿐만이 아니라 용병과 모험가까지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얼마나 이 사안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중요하게 여기는 건 공국의 대행사인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로든마이어 백작에게서 지명 의뢰가 들어왔으니 보수를 위해 움직일 뿐이다. 성과에 따라 보수가 다르긴 하나, 최대 성과를 내면 또다시 억 단위의 돈이 들어온다.

'금전 감각이 이상해지는 기분인데.'

소울 트리 토벌 이후부터 벌어들이는 액수의 단위가 달라지다 보니 그렇게 느껴졌다.

물론 좋은 건 좋은 거다. 그 덕분에 베르덴의 성장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남은 마탑의 보물을 남김없이 사용하기 전까지는 돈이 우선이었다.

베르덴은 페일이 준 지도를 꺼냈다.

거기에는 각 촌락이나 마을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전부 실종자 수가 증가하거나 촌락 전체가 사라져 버린 장소임을 뜻했다.

그중 가장 멀리 있는 외딴 촌락으로 향했다. 가급적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끝에서부터 하나둘씩 거쳐 갈 셈이었다.

"저곳이군."

목적지를 찾아내곤 지면으로 내려갔다. 촌락은 듣던 대로 텅 비어 있었다.

'건물은 멀쩡한데 인기척이 전혀 없어.'

마력감지를 펼쳐 봐도 딱히 잡히는 건 없었다.

촌락 주변에 수많은 발자국이 새겨져 있긴 했지만 뒤섞여 있어서 식별하는 건 무리였다. 정보에 따르면 촌락 사람들 말고도, 수색을 나선 병사나 모험가가 이미 한차례 왔었다고 했으니.

혹시 모를 단서를 찾기 위해 오긴 했지만 여기서 얻을 만한 건 없는 것 같았다.

"애초에 간단히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그렇게 쉬웠다면 진즉에 귀족 쪽에서 처리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베르덴은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촌락과 마을. 여러 곳을 오가며 마법으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훔쳐 들었으나 이렇다 할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거의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거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래도 베르덴은 워낙 먼 거리를 비교적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기에 거리에 비해 시간은 그리 소모되지 않았다.

이렇듯 혼자서 활동하는 건 여러모로 형편이 좋다. 배려하거나 눈치 볼 것 없이 자유롭게 움직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으니까.

이윽고 다른 영지를 넘어 얕은 숲에 있는 촌락에 도착했다.

이곳 또한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남김없이 사라져 버린 장소는 이곳이 두 번째. 감각을 곤두세우고 마력감지를 넓게 펼쳤다.

하지만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렇다 할 단서는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마을 밖에서 흔적을 하나 감지했다.

무성한 풀숲 사이, 흙에 새겨진 발자국 하나. 너무도 작아 베르덴조차 하마터면 놓칠 뻔할 정도였다. 베르덴이 그 발자국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생긴 지 며칠 안 된 것 같은데.'

실종 사태가 벌어진 시간과 겹친다.

거기다 발자국 크기로 보아 어린아이임이 분명하다. 수색대로 인해 생긴 흔적은 아니라는 뜻.

발자국이 가리킨 방향으로, 마력감지를 유지하며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 밑동 아래에 틈새가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그 지하에서 꺼질 듯 말 듯 한 자그마한 생명 반응이 느껴졌다.

지형을 조심스레 움직여 틈새를 확장했다.

매캐한 흙먼지가 사방으로 퍼지자, 안쪽에서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암시를 쓰고 아래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핼쑥한 얼굴의 어린아이 두 명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

겁먹은 아이들이 베르덴과 눈을 마주쳤다.

* * *

텅 빈 촌락.

마을 밖 나무 아래에 숨어 있는 아이들.

어째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이 두 아이만이 남았는지는 모른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베르덴이 지하로 손을 내밀었다.

아이들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망울을 글썽거렸지만 꾹 참고 천천히 구석에서 기어 나왔다. 그리고 마주 손을 뻗었다.

겁을 먹긴 했지만 베르덴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 거라 느낀 모양.

아이들은 순수하다. 그렇기에 잘 속기도 하지만, 이렇듯 때론 타인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손을 잡은 베르덴은 그대로 아이를 한 명씩 들어 올리곤 바깥으로 빼냈다.

그러곤 공간가방에서 육포와 물을 꺼내 건넸다. 그리고 기다렸다, 아이들이 차분히 감정을 가라앉힐 때까지.

성급하게 대화를 시도했다간 오히려 악화될 수도 있다. 마탑에 들어가기 전 고아원에서 배운 요령이었다.

허겁지겁 배를 채운 아이들이 조심스레 베르덴을 올려다봤다.

대화를 할 때가 된 것이다. 베르덴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부모님은?"

여자아이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다, 다른 마을에 있어요. 저기 리프 마을이란 곳이요."

"다른 마을? 그럼 왜 너희들은 여기에 있는 거지?"

"그게...."

"나일즈 형을 따라왔어요! 다른 마을에 우유를 파는 형이에요!"

남자아이가 그렇게 말하곤 여자아이 뒤에 숨었다.

아마 남매인 모양이다. 여자아이가 누나, 남자아이가 동생.

여자아이가 말을 이었다.

"나일즈 오빠는 저희 마을에 사는 이웃 사람이에요. 항상 저희를 데리고 다른 마을을 구경시켜 주는데 갑자기 전부... 사라졌어요."

두 아이는 언제나 몰래 촌락을 벗어나 바깥에서 뛰놀았다.

고블린이나 짐승들이 거의 없는 얕은 숲이라 안전할 수 있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일즈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있어 나일즈는 친형 또는 친오빠와도 같았다.

하지만 이틀 전, 점심에 촌락으로 돌아가니 모두가 사라져 있었다.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도, 먹을 걸 주는 아주머니도, 항상 자신들을 지켜 주던 나일즈도. 덜컥 겁에 질린 아이들은 나무 아래에 숨겨져 있는 틈새에 몸을 숨겼다.

옛날에 나일즈가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찾아올 때까지 여기에 숨으라고 말했었기에.

그렇게 이틀이 넘게 어둠 속에서 있었다.

주머니에 챙겨 두었던 간식이 아니었다면, 혼자였다면 결코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근데 기다려도 나일즈 형은 안 왔어요. 위에서 발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동생 말이 맞아요. 목소리도 들렸는데 무서워서 저흰 그냥 숨어 있었어요."

"목소리?"

"엄청 무서운 목소리였어요. 막 엄청 화도 내고...."

목소리라.

"정확히 뭐라고 했었지?"

"음, 음, 그게... 아! 빨리 안내하지 않으면 처리? 하겠다고, 그리고 또... 삼 일? 이라고 들은 것 같아요."

베르덴은 생각에 잠겼다.

'화가 났다라, 그렇다면 마음이 급하다는 뜻일 테고. 그리고 삼 일이라는 시간은 어떠한 제한인가.'

촉박한 시간.

그렇다면 귀족이 보낸 사병일 수도 있다. 공국의 대행사가 머지않았다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아이들이 들은 대로라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처리하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과격하게 말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안내라는 단어까지.'

베르덴은 곧바로 관점을 바꿨다.

아이들이 들은 목소리의 주인을 대규모 실종 사건을 일으킨 범인들로 말이다.

다시 페일이 건네준 정보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 주변에서 마지막으로 실종 사태가 확인된 건 바로 이 촌락. 여기에 삼 일이라는 시간을 넣었다. 명확한 근거는 없다고 해도 어떠한 정보도 없는 지금, 가진 것을 쥐어짜 내어 결론을 도출해 내는 건 최선의 선택이었다.

설령 틀렸다고 해도 말이다.

베르덴이 이 주변 영지의 지도를 꺼내 바라봤다.

그중 이 촌락에서 삼 일 거리에 있는 마을이나 촌락은 다양하다. 걷거나 뛰거나 말을 타거나 마법사라면 비행을 쓰거나 등 이동 수단의 가짓수가 많았다.

'하지만 서로 대화를 나눴다고 했으니 다수.'

다수가 이동할 수 있는 최대 거리와 최소 거리를 빠르게 계산하여 추정했다.

거기다 또다시 실종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조건을 추가해서. 그렇게 조건에 맞는 중소 규모의 마을이 하나 도출되었다.

'호푼 타운.'

그들이 말한 삼 일까지 남은 시간은 약 하루.

베르덴의 비행 속도라면 충분히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다.

그때, 아이들이 말했다.

"저, 혹시 사라진 사람들을 찾는 건가요?"

"그래."

"그, 그럼 나일즈 오빠도 찾아 주세요! 키는 이만하고 저희가 만든 목걸이를 하고 있어요. 새 발자국 모양이요! 그리고... 그리고 또, 손톱에 고블린이 할퀸 상처도 있어요!"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다. 실종의 원인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실종자들의 거취에 대해 알게 될 테니.

하지만 그 전에 아이들을 마을로 데려다주는 게 먼저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지금, 이런 장소에 두 아이를 내버려 두고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베르덴이 아이들에게 손을 뻗었다.

"잡아라, 마을로 데려다주마."

* * *

베르덴이 아이들을 부모에게 데려다주었다.

논밭을 일구던 부모가 아이들을 감싸 안으며 연신 감사하다고 소리쳤다. 베르덴은 그들을 뒤로하고 곧바로 호푼 타운으로 향했다.

컴벨리 타운에 이어 타운이라는 명칭이 붙은 곳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며 길거리를 거닐던 중, 근처에 있던 여관에서 큰 소란이 들려왔다.

꼭대기 층에서부터 시작된 소리는 이어 작은 폭발 소리와 함께 쇠붙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로까지 번졌다.

콰아앙!

천장이 무너지며 검은 로브의 누군가가 1층으로 떨어졌다. 이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사이로 투명하고 가느다란 실이 묶인 단검들이 날아왔다.

작게 불꽃이 튀기며 먼지 안에서 인간들이 나타났다. 앞선 이와 마찬가지로 검은 로브를 쓴 자들이었다.

그중 전열에 서 있던 자가 소리쳤다.

"테온!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그러나 단검을 던진 사내는 대답하지 않고 도주했고, 그 뒤를 추적자들이 따라붙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소란에 사람들이 멍하니 엉망진창이 된 여관을 바라봤다. 여관 주인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무너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베르덴은 검은 로브의 등을 바라봤다.

'테온. 그리고 투명한 실이 매달린 단검.'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 본 적이 있는 무기.

이윽고 베르덴이 기억에서 놈의 정체를 끄집어냈다.

테온.

마르테스에서 베르덴을 죽이려 했던 '글러트니'의 암살자.

아무래도 단서를 찾은 것 같다.

68화 불온한 움직임 (2)

글러트니의 테온.

그는 박사의 부하 중 하나로서 도시 마르테스에서 베르덴을 죽이려고 했던 전적이 있었다. 그러나 보란 듯이 실패했다.

단순히 기회를 놓친 게 아니라 깊은 상처까지 입고 겨우 도주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대체 언제 옷에 마법진을 새겨 넣었는지, 박사의 본거지를 어처구니없게도 들키고 말았다.

박사는 테온에게 명령했다, 마법사와 기사를 막으라고. 불가능한 얘기다.

방주에서 온 마법사 하나를 상대하다가 죽을 뻔했는데, 둘을 동시에 상대하고 더군다나 죽이는 건 말도 안 됐다.

그래서 테온은 애셔라는 이름의 마법사를 보내고 기사를 상대했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테온은 암살에 특화되어 있긴 하나, 고작 작은 도시의 차석 기사 하나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기교적인 단검술에 기사는 점차 수세에 몰렸고 이윽고 목숨을 빼앗을 기회가 왔다.

하지만 상황은 테온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기사의 목에 단검을 꽂으려던 도중, 포션으로 겨우 회복했던 상처가 무리한 움직임에 견디지 못하고 찢어졌다.

그 미세한 틈, 기사는 기회를 잡았다.

촤아악!

테온의 단검이 기사의 어깨에 박혔고, 기사의 검이 테온의 상체를 베었다. 누가 더 치명상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크으윽...."

적지 않은 출혈에 테온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텨 내며 판단을 내렸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테온은 격통을 삼키고 쓰러진 기사에게서 등을 돌렸다.

뒤에서 기사가 뭐라고 욕을 퍼부었지만 테온은 멈추지 않았다.

박사의 연구실 복도를 가로질러 통로를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일절 뒤를 돌아보지 않고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한계까지 멀리 간 테온은 냇가에서 지친 몸을 쉬였다.

깨끗한 물로 피를 닦고, 직접 상처를 꿰맨 뒤에 남은 포션을 전부 마셔 간신히 상처를 회복했다.

지면에 드러누운 테온이 하늘을 바라봤다.

"...좆됐군."

박사를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이대로 돌아가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아니, 잠깐만... 이게 그나마 나은 건가?'

만약 연구실에 남아 있었다면.

박사가 살았든 혹은 그 애셔란 마법사에게 죽었든 간에 테온에게 미래는 없었다.

박사가 살았으면 자신은 실험체로 사용되거나 실험체에게 희생당할 것이고, 박사가 죽는다면 마법사에게 죽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잠시나마 자유의 몸이 된 지금이 훨씬 나을지도 몰랐다.

아주 운이 좋아 글러트니의 눈을 피해 살아남을지도 몰랐으니.

테온은 고민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글러트니의 추적을 피할 수 있을지. 만약 잡혀서 박사를 지키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게 된다면 죽음 이상의 공포를 겪게 될 것이다.

테온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공국을 뜬다."

그게 최선이다.

박사의 행적은 글러트니 내부에서도 모르지만 얼추 공국에 있을 거라곤 추측하고 있을 테니, 늦으면 도망은 물 건너간다.

테온은 움직였다.

공국을 벗어나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서.

하지만 국경 근처에 가기도 전에 들켜 버렸다.

테온의 길을 막아선 자들.

그중 목에 흉터가 있는 사내, 이식자(移植者)가 물었다.

"테온, 박사께선 어디 계시지?"

"...."

테온이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상대는 글러트니에서 수술을 받은 이식자.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괴물이기에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테온은 기계적으로 답했다.

"중요한 실험을 진행하시는 중이라 바쁘십니다."

"상황이 바뀌었다. '송곳니'께서 명령하셨으니 답하라."

"단순한 실험이 아닙니다. '신인류'의 완성이 코앞에 있습니다."

"신인류...?"

그 단어에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 이식자가 말했다.

"알겠다. 송곳니께 시간을 달라 요청하지. 대신 테온, 너는 우리와 함께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겨우 시간을 벌었지만, 테온의 도망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별수 없이 이식자와 함께 다니며 공국 내에서 글러트니의 일원으로서 움직였다. 사라진 샐러맨더의 심장을 추적하고, 사람을 납치하는 등.

그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 테온의 시간 벌이는 한계에 다다랐다.

호푼 타운.

여관의 꼭대기 층에서 이식자가 테온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테온, 대체 박사께선 언제 연락을 보낼 생각이신 거지? 송곳니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셨다. 당장 박사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말해라."

방 전체에 살기가 감돌았다.

이대로 있다가 죽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한 차례 침을 삼킨 테온이 나지막이 말했다.

"박사께선...."

퍼엉!

그와 동시에 재빠르게 품속에서 연막탄을 꺼내 내던졌다. 연기구름 속에서 테온이 바닥을 부수고 아래층으로 떨어졌다.

뒤따라온 두 명을 기습해 죽인 뒤, 작은 폭탄을 꺼내 던졌다. 연쇄 폭발이 일어나며 여관 전체가 흔들렸다.

그렇게 1층으로 낙하한 테온이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테온!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이식자에게 단검을 던지고 내달렸다.

여기서 추적을 뿌리쳐야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글러트니. 골목을 이리저리 오가며 움직였지만, 금세 테온에게 따라붙은 자들이 쇠사슬을 던졌다.

단검을 휘둘러 쳐 냈지만 교묘하게 움직인 사슬이 팔을 옭아맸다.

"이런...!"

양팔을 구속당한 테온.

이식자가 달려와 그의 명치를 강하게 후려쳤다. 숨이 터져 나오며 테온이 무릎을 꿇었다.

이식자가 말했다.

"글러트니의 일원을 죽인 것도 모자라 도망까지 치다니.... 테온, 박사께선 대체 어디 계시지?"

"...."

"그래, 그렇게 닥치고 있어라. 곧 그 머리에서 원하는 대답을 뽑아 줄 테니."

테온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상황. 그게 무엇이든 간에 끔찍한 결말이라는 건 분명했다. 지난 시간 동안 살기 위해 발버둥 친 것이 모두 무의미해진 것이다.

그러나 테온의 운명은 아직 결정된 게 아니었다.

이식자를 비롯한 글러트니의 일원들을 한 그림자가 막아섰다.

잿빛의 마법사, 베르덴이 스태프를 든 채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식자가 물었다.

"네놈은 누구지?"

"되도록 무시하고 있었는데, 거슬리게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리는군."

"...?"

"목적이 뭔지, 이제는 알아야겠어."

맞물리지 않는 대화.

베르덴은 이식자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스태프를 그들에게 향했다.

* * *

<락 페이탈>

스태프 끝에서 터져 나온 암석 조각이 순식간에 가슴 정중앙을 관통했다. 이어 뒤에 있는 놈의 머리까지.

베르덴의 마법 위계를 눈치챈 이식자가 명령했다.

"흩어져서 죽여라."

곧바로 서로 간격을 둔 글러트니의 일원들이 사방에서 베르덴에게 달려들었다. 하나같이 기를 다루며 움직임 또한 재빨랐다.

양옆에서 날아오는 쇠사슬과 후방과 전방에서 베르덴의 목과 심장을 노리는 날붙이. 그 위험 속에서 베르덴은 생각했다.

참, 마법을 시험하기 좋은 상대라고.

<아이스 필러>

주위에 솟아오른 얼음 기둥들이 놈들의 육체를 강타했다. 뼈에 금이 가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퍼져 나가는 한기에 놈들이 숨을 참았다. 조금이라도 폐에 스며들어 갔다간 심폐가 크게 손상될 테니.

베르덴이 스태프를 가볍게 휘둘렀다.

콰드득!

금이 간 얼음 기둥들이 부서지고 그 뾰족한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얼음 조각이 놈들의 몸에 파고들어 갔고 한기가 근육과 관절의 기능을 저하시켰다. 거기서 베르덴이 손가락을 튕겼다.

<크랙>

몸에 박힌 얼음 조각이 일제히 터졌다.

내부와 외부를 아우르는 한기에 놈들의 몸이 꽁꽁 얼어붙었고 이내 산산조각이 났다. 그 죽음에 글러트니의 일원들이 경계심을 더욱 높이고 베르덴의 목숨을 노렸다.

그러나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시시각각 죽어 나가는 부하들을 본 이식자가 로브를 벗어 던졌다.

목에 흉측하게 난 흉터와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표정.

이내 이빨을 드러내며 짐승과도 같은 손톱을 베르덴에게 휘둘렀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부하는 그대로 반토막이 났다.

쩌엉!

손톱과 스태프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부여 마법으로 신체 능력을 강화한 베르덴이 현란하게 스태프를 휘둘렀다.

네 번의 접전.

마력이 집중된 스태프가 놈에게 스치지도 못한 채 베르덴이 세 발짝 물러섰다.

'반응속도가 빠르군. 마치 인간 형태의 짐승을 상대하는 것 같아.'

왠지 모르게 여러 개의 얼굴을 달고 있었던 글러트니의 거한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아무튼 여기는 외진 골목이지만 이렇게 소란이 계속되면 사람들이 몰려올지 모른다. 빠르게 끝내는 편이 나을 터.

베르덴의 오른쪽 눈에 마력이 집결하며 마안이 발동했다.

<스웜프>

"무슨...?!"

바닥이 흐물거리더니 순식간에 이식자의 발이 지면에 파고들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강력한 힘에 빨려 들어갔다. 당장 벗어나려면 다리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판단보다도 베르덴의 마법이 빨랐다.

지형에서 솟아난 가시가 이식자의 몸통을 네 방향에서 꿰뚫었다.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이식자. 그 상체를 향해 어스 자벨린을 쏘아 보냈고, 이식자의 상체가 그대로 뜯겨져 나갔다. 남은 하체는 늪 아래로 사라졌다.

베르덴이 눈가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역시 쓸 만해. 어떤 상황에서라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겠어. 눈치를 채기도 어려우니 들킬 위험도 없고.'

어쨌든 이걸로 글러트니는 몰살했다.

베르덴이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테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머리에 뒤집어쓴 로브를 뒤로 젖혔다.

"테온이라고 했나? 꽤나 오랜만이군."

"너, 너는 설마 마르테스에서...!"

"네가 암살하려고 했던 마법사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살아 있다는 건 박사도 죽었다는 뜻. 어렴풋이 예상했지만 그게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테온이 놀란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고작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베르덴이 너무도 현격하게 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 나름대로 날뛰었다고 생각했는데 못 들어 봤나 보군. 그동안 바빴나? 같은 글러트니와 적대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

"대화는 나중에 이어서 하지."

베르덴이 테온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테온은 판단했다. 글러트니의 눈이 사라진 지금이 바로 도망칠 기회라고.

'강하긴 해도 마법사는 마법사.... 한 방만 노리면 된다.'

그렇게 테온은 베르덴이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팔목에 숨겨 놓은 단검을 꺼내 베르덴의 심장을 향해 찔렀다. 베르덴이 가볍게 몸을 돌려 공격을 피해 냈다.

이 정도는 예상한 바다.

상대는 마법사지만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으니까. 테온은 곧바로 몸을 회전시켰다.

신발 뒤축에서 솟아난 작은 칼날이 베르덴의 목을 향했다.

맞으면 즉사, 스쳐도 치명상.

이 한 방에 테온이 가진 모든 걸 걸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빗나가고 말았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인 베르덴이 스태프로 테온의 가슴을 가격했다.

"크억?!"

테온이 바닥을 굴렀다.

이어 지형이 움직이며 거대한 바위의 손이 솟아올라 테온의 몸뚱이를 잡았고, 그 상태로 베르덴을 향해 움직였다.

스태프를 양손으로 잡은 베르덴이 이내 온몸이 속박된 테온을 향해 휘둘렀다.

"자, 잠───!"

콰아아앙!

충격과 함께 바닥을 부수며 튕겨 나간 테온은 그대로 정신이 날아갔다. 여기저기 부러진 것 같지만 목숨에 큰 지장은 없을 테니 상관은 없겠지.

"이걸로 단서를 얻을 수 있겠군."

마법으로 생긴 전투의 흔적을 전부 지하에 감췄다.

테온을 어깨에 둘러멘 베르덴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 * *

촤아아악.

갑작스레 얼굴에 끼얹은 차가운 물에 테온이 정신을 차렸다.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의식을 잃은 척, 실눈을 뜨고 주위를 바라봤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온통 어둠뿐이었다.

"정신을 차렸나 보군."

"...."

"아닌가? 그럼 팔다리 하나쯤 날려야...."

테온이 눈을 번쩍 떴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어둠 속에서 암시를 쓴 채, 몸을 숨기고 있던 베르덴이 테온을 바라봤다.

'몸을 아끼는군. 인간으로서 당연한 거지만... 역시 다른 글러트니와는 달라.'

마르테스 이후 마주한 글러트니는 죄다 미친놈이었다.

사람의 얼굴을 몸에 붙이지 않나, 짐승의 손톱 같은 걸 이식하지 않나. 눈도 죄다 광기에 차 있는 게 어쭙잖은 심문으로는 어떠한 정보조차 얻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 테온이라는 암살자는 다르다.

놈은 목숨을 아낄 줄 안다. 여차하면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면 될 테니, 비교적 정보를 캐내기 쉽다고 판단했다.

제대로 된 심문이나 고문 같은 걸 배운 적 없는 베르덴이라고 해도 말이다.

베르덴이 테온에게 말했다.

"내가 질문하면 너는 대답하면 된다. 물론 정보를 숨길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말하면 살려 주나?"

"적어도 그럴 확률은 높아지겠지."

테온은 자신의 목숨을 저울질했다.

다 불어 버리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과 입 다물고 글러트니의 일원답게 행동하는 것. 테온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조금 얘기가 길어질 텐데."

"그럼 빨리 말하면 되겠군."

테온의 목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닿았다.

"말할 준비는 됐나?"

테온이 작게 숨을 삼켰다.

"...언제든 물어봐라."

69화 불온한 움직임 (3)

"왜 글러트니와 적대하고 있던 거지?"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누가 글러트니에서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박사를 죽였으니, 박사를 지키지 못했다는 걸 들키면 나는 죽는 것보다 더한 꼴을 겪게 됐을 거다."

생각보다 정상적인 이유였다.

글러트니와 같은 사람의 신체를 가지고 노는 미치광이 집단의 일원에게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 어려웠다.

베르덴이 이어서 물었다.

"최근 도시 바깥의 실종자 수가 급증했다. 글러트니에선 왜 사람들을 데려간 거지?"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륵.

테온의 목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더 명확하게."

"그들이 가진 생명력을 얻기 위해서... 라고 알고 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아인종과 짐승까지도 포함되어 있지."

"생명력? 그렇다면 샐러맨더의 심장도 관련이 있는 건가?"

샐러맨더의 심장은 그 자체로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무슨 이유인지도 몰라도 생명력이란 것이 목적이라면 글러트니의 거한이 왜 그것을 찾고 있었는지 이해가 된다.

베르덴의 말에 테온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아니, 역시 방주와 관계가 있었나. 너희들이 샐러맨더의 심장에 대한 정보를 그레이에 흘린 거군. 대체 어떻게 그 정보를 얻은 거지? 글러트니 내부에서도 은밀하게 이송하고 있었는데."

베르덴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르니까. 진짜 하나도 모른다.

"질문은 내가 한다. 그럼 다음으로 묻지, 그 생명력을 가지고 뭘 하려는 거지?"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베르덴의 차가운 시선에 테온은 진심이라는 듯 소리쳤다.

"정말로 몰라! 네가 박사를 죽인 뒤로 내가 어떤 개고생을 했는데! 글러트니에게 잡혀서 박사가 죽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불안하게 살았는지 알고는 있나!"

"내가 알 바는 아니지. 그리고 날 죽이려 했던 암살자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지극히 정론이었다.

베르덴의 말에 테온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한숨을 쉬었다.

"글러트니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모른다, 내 위치는 별로 높지 않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당황스럽다. 이제까지 방주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다가, 이렇게 공국에서도 눈치챌 정도로 대놓고 움직인다는 게 말이지."

"그렇다는 건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생겼다는 건가? 대놓고 사람들을 납치할 필요가 있는."

"아마 그렇겠지. 어쨌든 내가 박사를 따라간 후에 어떠한 일이 생겼다는 건 확실하다."

사람들의 생명력이 필요한 목적이라.

베르덴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마탑에서 여러 실험을 보고 겪었지만 생명력이란 걸 다루는 실험은 과거의 기록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생명력이란 건, 기나 마력, 신성력과 같은 힘의 개념이 아니다.

기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형종이라면 모를까, 인간이 실체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생명 그 자체를 이용한다는 것에 대해선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질문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놈들은 뭐지? 사람의 얼굴을 몸에 꿰맨 거한이나, 짐승의 손톱 같은 게 돋아난 인간 같지도 않은 것."

"이식자. 글러트니에선 그렇게 부르지. 인간이나 아인종 또는 마수의 신체를 이식해 기존의 인류에서 벗어난 자를 뜻한다고 알고 있다. 심지어 이형종의 것을 이식한 자도 있지."

지치지 않는 체력, 광기에 물든 공격성, 기괴한 움직임.

이식자의 강함은 간단히 볼 게 아니다. 개개인의 차이가 있다 할지언정, 하나같이 인간을 벗어난 능력을 지녔다는 건 분명하다.

'그걸 쉽게 죽인 이 마법사는... 대체 뭐지?'

글러트니 내부에도 방주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 있다.

그러나 잿빛 머리의 마법사에 대해선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방주가 비밀리에 키운 것 같기는 한데... 이마저도 추측이다.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데도 테온은 베르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식자라, 말 그대로의 괴물이군. 그럼 마지막으로 묻지. 사람들은 어디로 데려갔지?"

"나도 모른다. 내가 있던 부대가 맡은 건 사람들을 잡아 다른 부대에 넘기는 것이었으니...."

"숨기는 것 없이, 신중하게 대답해. 그 답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사람들을 모아 놓은 정확한 위치는 정말로 모른다. 하지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소를 하나 알고 있다. 지도를 주면 바로 짚어 주지."

베르덴이 의심하며 지도를 건넸다.

재빠르게 지도를 훑어본 테온이 산맥의 중간을 가리켰다.

"이곳에 동굴이 하나 있다. 글러트니에서 자주 사용하는 거처지."

"증거는?"

"네 말대로 나는 아는 대로 전부 답했다. 글러트니의 정보를 타인에게 발설했다는 사실을 들키면 나는 산 채로 해부되겠지. 이미 나는 글러트니 입장에서 배신자다."

베르덴은 테온을 믿지 않았다. 믿을 생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장소에 직접 찾아가 볼 가치는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베르덴이 테온의 속박을 풀었다.

"안내해라."

"...내가?"

"당연하지. 내가 글러트니 같은 역겨운 집단에 있던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런 시발.'

테온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안내했다가 글러트니가 있으면 이 마법사가 전부 죽일 것이고 자신의 생사 또한 불분명해진다. 놈은 자신을 살려 준다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만약 글러트니에서 애셔를 죽여도 문제다.

어째서 외부인을 데려왔는지 추궁을 받으면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 그 자리에서 단검으로 심장을 찔러 자결하는 게 가장 좋은 죽음일 것이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

입술을 깨문 테온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여긴가?"

"그래."

어두운 숲속에 숨겨져 있는 자연 동굴.

지하에 뚫려 있어서 그런지 입구가 거의 돌출되어 있지 않고, 인적이 거의 없는 곳에 있는 터라 은밀한 거처로 삼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어 보였다.

테온을 앞장세워 천천히 지하로 들어갔다.

마력감지를 쓰지 않고 오로지 감각에만 의존해 경계심을 극도로 높였다. 딱히 글러트니 놈들을 살려 둘 생각은 없었기에 한둘만 남겨 놓고 깡그리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똑. 똑.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지면에 떨어졌다.

꽤나 큰 공동을 지나니 드디어 누군가 있었던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테온을 바라보자 그가 진심으로 당황해하고 있었다.

"피 냄새...? 글러트니에선 흔적을 전부 지우고 들어가는 터라 이럴 리가 없을 텐데."

즉, 변수가 발생했다.

베르덴과 테온은 좀 더 속도를 높여 내부로 들어갔다. 곳곳에 글러트니로 보이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검은 아니고... 둔기에 맞은 흔적인가?'

머리가 터져 있거나 몸통 쪽이 흐물흐물해져 있다.

무언가에 맞아 뼈와 장기가 박살 난 것으로 보이는데, 누군지 모르겠지만 글러트니와 적대하고 있는 누군가가 침입한 모양이다.

'방주일지도 모르겠군.'

베르덴이 알고 있는, 글러트니의 적대 세력은 그들밖에 없었으니.

시체가 가득한 현장을 넘어 더욱 깊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동굴 끝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베르덴과 테온이 고개를 내밀어 안쪽을 훔쳐보자, 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갈색 머리의 앳된 사내가 이식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살벌하게 허공을 가르는 이식자의 도끼.

사내는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내다 가볍게 뒤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바닥에 닿는 동시에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이식자 앞에 육박했다.

터엉!

사내가 내지른 주먹에 이식자의 몸이 벽에 처박혔다. 지독한 회복력으로 이식자가 다시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근거리에서 벌어지는 격전.

그러나 사내의 공격은 이식자에게 충격을 주었고, 이식자의 공격은 하나도 사내에게 닿지 못했다.

"으랴!"

사내가 내지른 다리가 이식자의 목을 후려쳤다.

뿌드득. 목뼈에서 들리는 심상찮은 소리. 이어 손날로 목젖을 강타했고 몸을 회전시켜 공중에 떠올라 이식자의 머리 반대편을 걷어찼다.

연이은 충격에 견디지 못한 이식자의 목이 그대로 찢기며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힘을 잃고 쓰러지는 이식자의 몸뚱이.

사내는 깊게 한숨을 뱉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휴우, 진짜 더럽게 안 죽네. 역시 정의의 길은 멀고 험해. 음, 스승님 말씀대로야."

혼잣말을 하며 흡족한 미소를 지은 사내가 이내 동굴 한편에 고개를 향했다.

"그런데 거기서 언제까지 지켜보고 있을 거야? 글러트니는 아닌 것 같은데."

베르덴과 테온에게 말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방주가 맞나 보군.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이미 들킨 마당에 숨어 있을 이유는 없었다.

머뭇거리는 테온을 내세우며 베르덴이 사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곤 물었다.

"방주에서 왔습니까?"

* * *

"어? 그럼 그쪽도 방주? 음, 처음 보는 얼굴인데... 글러트니답지 않게 생겼긴 하네. 아, 혹시 시련 쪽인가?"

시련과 글러트니를 상대하는 쪽이 나뉘어 있는 건가? 아니면 떠보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베르덴은 거짓을 일절 섞지 않고 사실만으로 답했다.

"그쪽에 더 관련이 있습니다. 레이라와 리스너에게 물으면 알 겁니다."

"레이라 누님하고 리스너? 그 둘 이름을 말하는 걸 보면 진짜인가 보네. 미안, 내가 공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몰랐어. 내 이름은 로크야. 그쪽은?"

"애셔라고 합니다."

"애셔...? 아, 잠깐! 들어 본 적 있어! 레이라 누님 시련에 끼어든 들러리 마법사지?"

'들러리?'

베르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로크가 말을 이었다.

"다시 보니 확실히 들어 본 모습이네. 잿빛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마법사.... 아, 그리고 나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는데 존대는 하지 마, 나도 안 쓸 테니까. 나는 나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면 말을 높이지 않거든."

뭔지는 몰라도 애셔라는 이름이 방주 내부에 알려진 모양.

그런데도 베르덴이 방주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걸 모르고 있다는 건, 전에 예상했던 대로 베르덴이 방주와 연관되는 걸 리스너가 암묵적으로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애써 설득할 필요 없으니 편리했다.

"뭐, 그러지."

"좋아. 그런데 저 사람은 뭐야? 내가 모르는 방주 후본가?"

로크가 테온을 가리켰다.

베르덴이 고개를 저었다.

"글러트니 중 하나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 잡아 놨지."

"응? 정보를 얻는데 왜 글러트니를 잡아?"

로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르덴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시련 쪽이라서 몰랐나 보네. 글러트니에 소속된 놈들은 죄다 '글러트니의 조각'이라는 이상한 걸 이식받거든. 그게 기나 마력에 완전히 동화되면 절대 글러트니에 대한 어떤 정보도 발설할 수 없어. 나도 본 적은 없지만 어기면 그냥 퍼엉! 하고 세포 단위로 터져 버린다고 하던데."

베르덴이 테온을 바라봤다.

배신한다고 했는데 애초에 배신하지 못한다니. 그러나 놈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안내한 거처가 진짜인 걸 보면 말이다.

"그럼 이놈은?"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애초에 글러트니가 아니거나가 아닐까?"

"잠깐, 난 거짓말한 적 없어!"

"흐음, 잠깐만 있어 봐."

로크가 테온의 목에 손가락을 대었다.

눈을 감고 그의 맥박을 통해 신체 상태를 들여다보곤 조용히 눈을 떴다.

"글러트니다운 기분 나쁜 기운은 안 느껴지는데...."

고민하던 로크가 이내 결론을 내렸다.

"일단 방주에 데려가 봐야겠어. 가능성은 없는 거나 다름없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만약 사실이라면 글러트니의 내부 사정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때 처리하면 되는 거고."

테온이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살긴 살았는데 시한부 인생이 된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

베르덴이 물었다.

"그런데 글러트니가 데려간 사람들이 어디 있는진 아나?"

"오, 정보가 빠르네. 나도 그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바로 온 거거든. 다행히 여기서 그 정보를 입수했어. 곧장 그쪽으로 가 볼 생각인데 같이 갈래?"

뜻밖에 만난 레이라와 다른 방주의 후보.

정보를 저쪽에서 쥐고 있으니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러지."

베르덴은 로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70화 붉은 조각 (1)

로크를 따라 베르덴은 글러트니의 근거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테온이 쫓았다.

도망가고 싶어도 옷에 마법진이 새겨져 있는 데다가, 저 둘을 상대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기에 어쩔 수 없었다.

휴식을 최소화하고 최대한 속도를 냈다.

그렇게 도착한 목적지에는 오래된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건물 양식을 봤을 때 과거의 유적 비스무리한 것으로 보였는데, 그 입구에는 검은 로브로 몸 전체를 가린 자들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역시 정답이었나 보네. 하나씩 처리할까?"

베르덴이 왼쪽, 로크가 오른쪽.

둘이 동시에 행동에 나섰다. 가차 없는 마법이 상대의 머리를 통째로 날려 버렸고, 로크는 정면에서 상대의 목을 돌려 부러뜨렸다.

시체를 옆으로 내던진 로크가 손을 털었다.

"들러리치고 꽤 하네? 하긴 레이라 누님의 시련을 조금이나마 도왔다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건가? 뭐, 어쨌든. 그나저나 경비는 별것 없어 보이는데, 빠르게 치고 들어갈까?"

"마음대로."

"좋아, 그럼 내가 앞장설게. 너보단 내가 훨씬 더 빠를 테니까."

로크가 당당히 앞으로 나섰다.

실력에 확실히 자신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베르덴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상관없나.'

어떻게 생각하든 굳이 관여할 일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베르덴이 로크의 뒤를 따랐다.

본격적으로 유적 안으로 돌입했다.

신속하게 움직인 로크가 미처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손날로 뒷목을 후려쳤다. 이어진 팔꿈치와 무릎 그리고 발끝을 이용한 치명적인 일격.

일순간에 급소가 파괴된 놈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신기한 기술이군. 누구에게 배웠는지 궁금할 지경이야.'

장갑조차 끼지 않은 맨손.

순간적으로 손끝에서 폭발하는 위력을 두 번 이상 버티는 자가 없었다.

한 명이 잽싸게 검을 휘둘렀지만, 로크는 손바닥으로 검 면을 쳐 내곤 가슴을 타격하며 기를 폭발시켰다. 가슴뼈가 완전히 으깨지며 내부에 있던 장기가 곤죽이 되었다.

기사처럼 기를 응용한 검술을 다루는 건 본 적이 있어도, 저렇게 상대를 내부부터 파괴하는 기술을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콰직!

날카로운 뒤차기로 상대의 몸통을 박살 낸 로크가 멈춰 섰다.

더욱 깊은 지하로 가는 계단.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불쾌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베르덴조차 무심코 미간을 찌푸릴 정도였다.

로크가 손을 풀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아래가 진짜인 것 같은데. 준비됐어?"

고개를 끄덕인 베르덴이 테온에게 시선을 향했다.

허튼짓하면 죽는다는 무언의 압박에 테온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준비를 마친 세 명은 계단으로 다리를 뻗으며 근거지의 중심으로 향했다.

"이건...."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끔찍한 광경을 맞닥뜨렸다.

* * *

사체, 사체, 사체.

마치 미라처럼 피부가 검게 말라붙어 있는 사체가 가득했다. 어떠한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죽음 그리고 고통만이 간접적으로 느껴졌다.

로크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심한데...."

여태껏 글러트니가 해 왔던 만행들은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실험체로 삼아 사용하고, 섭식을 통해 인류를 진화시켜 구인류를 멸절하겠다는 허황된 이념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냈는지 말이다.

그러나 이건 처음이다.

수백 명이 넘는 사람 그리고 이형종, 짐승, 마수들이 말라비틀어져 쓰레기처럼 쌓여 있다.

로크가 가볍게 손가락으로 사체를 찌르자, 탄력도 없이 푹 들어가며 안에 있던 뼈가 바스러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수십 년간 건조한 것처럼.

"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야, 글러트니. 진짜 몰라?"

"모, 모른다. 사람을 실험체로 쓰는 건 봤어도 이런 적은...."

어릴 적부터 글러트니에 소속되어 있던 테온조차 당황했다.

굳이 외부의 시선을 감수해 가며 이렇게나 많은 인간을 납치해 온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라붙은 사체까지도 말이다.

조용히 주변을 관찰하고 있던 베르덴이 한 사체에게 다가갔다.

'목걸이....'

새의 발자국 모양의 장식이 걸린 목걸이.

죽은 사내의 손톱에는 어딘가에 긁힌 듯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형태로 보아 아마 고블린의 손톱 자국.

촌락의 아이들이 찾고 있던 나일즈란 사내의 시체였다.

베르덴이 나일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상태로 보아 분명 산 채로 죽은 것으로 보인다. 기괴하게 말라붙어 일그러진 표정에는 무력감, 고통, 증오, 분노 등이 가득했으니.

베르덴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감정들이었다.

무력한 죽음, 헛된 희망.

분명 이 사내는 마지막까지 그런 감정을 품고 고통 속에서 죽었을 것이다. 만약 베르덴 또한 역천에 실패하거나 아예 포기했더라면 그와 비슷한 결말을 맞이했겠지.

'불쾌하군.'

뚜둑.

나일즈의 목걸이를 회수해 공간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수색을 이어 가던 중, 사체 더미 아래에서 기다란 홈을 찾아냈다.

안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그 홈은 어딘가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베르덴은 말없이 그 흔적을 따라 움직였다.

"어? 같이 가!"

로크와 테온이 뒤따라왔다.

횃불이 어두운 유적의 내부를 밝혔다. 전보다도 짙은 혈향과 부패한 악취가 코끝을 스쳤고, 이내 복도의 끝에 커다란 공동이 나타났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

그 중심에 놓여 있는 거대한 석관.

베르덴이 따라온 홈이 그 석관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기 직전, 베르덴의 의식이 위쪽으로 향했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석관 앞에 떨어졌다.

코와 입을 붕대로 감싼, 샛노란 눈을 가진 마법사였다.

"방주에서 불청객이 찾아왔군. 사냥개(Hound) 로크."

"누구보고 사냥개라는 거야? 괴물이."

로크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마법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괴물이 아닌 신인류라고 해도, 너희 방주는 그 진의를 왜곡하는군. 그러나 상관없다. 대의는 시작되었고, 변화는 가속화되었으니. 도대체 어떻게 알고 여기를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너희들은 이미 늦었다. 그리고 그 결말 또한 결정되었지."

어둠 속에서 글러트니의 일원들이 나타났다.

그중 이식자는 마법사를 포함해 총 네 명. 로크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태연히 서 있었지만 내심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이식자가 네 명이나 있을 줄이야. 나 혼자서는 위험한데.'

로크는 베르덴에게 별다른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았다.

같은 방주의 후보라고 해도 특출나게 강한 사람은 몇 없었고, 이 잿빛 마법사는 레이라의 시련을 도왔을 뿐인 들러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로크가 주먹을 쥐었다.

마법사는 고개를 옆으로 비틀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큭큭큭. 우리의 일원들을 그렇게나 사냥해 온 개새끼가 제 목숨 귀한 줄은 아는구나. 옆에 있는 두 놈은 누군지 몰라도 안타깝게 되었군, 죽음보다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될 테니까. 하나 그렇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 생명력, 우리의 '글러트니'를 위해 남김없이 써 주도록 할 테니."

글러트니의 일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로크가 앞으로 나서며 자세를 잡았다.

"내가 앞에서 막을 테니 너는 후방... 을...?"

베르덴이 앞으로 걸어가 로크를 지나쳤다.

태연하게 스태프를 돌리며 몸을 푼 베르덴이 로크에게 말했다.

"여긴 내가 처리하지."

"뭐? 그게 무슨...."

화아아악!

베르덴의 몸에서 방대한 마력이 피어올랐다. 너무나 짙은 마력의 농도. 유형화된 마력이 실체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베르덴이 딛고 있는 바닥과 주변 구조물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마력량에 마법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방주의 후보인가? 저런 외형을 가진 자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느껴지는 마력으로 보아 자신을 약간 웃도는 정도.

마법사의 심장을 무려 일곱 개나 이식한 자신보다 더한 마력량에 불쾌한 감정이 감돌았지만 이내 누그러뜨렸다.

마력은 마력일 뿐이니, 이 전력이려면 능히 압도할 수 있다.

쿵. 마법사가 스태프로 바닥을 찍었다.

그러곤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베르덴을 바라봤다.

"머리와 심장만 남겨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식자를 포함한 글러트니의 일원들이 베르덴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육중한 일격과 강력한 마법이 오가며 그 여파에 주변 일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로크가 도우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해진 중심. 사체와 피가 난자한 그 광경에 숨어 있던 테온이 돌처럼 굳었고, 로크가 멍하니 목소리를 흘렸다.

"...어?"

* * *

이식자는 글러트니 내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성공률이 낮은 이식 수술을 마치고 신인류로 한 발자국 다가선 선도자들. 숫자가 적은 만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그에 걸맞은 강함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자가 무려 네 명.

더해서 그들은 다른 국가에서 방주의 후보를 살해한 전적까지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힘을 의심하지 않았다.

방금까지는 말이다.

털썩. 마법사가 무릎을 꿇었다.

스태프를 쥐고 있던 팔은 이미 재가 되었고, 복부에 박힌 돌조각으로 인해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마법사가 주위를 둘러봤다.

오우거의 근육을 이식받은, 굴강한 육체를 가진 거한. 로어 울푸의 성대를 이식받은 여자. 네 개의 팔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검술을 다루는 남자.

자신을 제외한 세 이식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잔해 아래에 깔려 있었다. 하나같이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육체가 완전히 파괴된 채로.

다른 글러트니의 일원들은 강렬한 전격에 노출되어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 어떻게...."

상대는 자신과 같은 4위계 상위의 마법사다.

마력량이 조금 밀린다고 할지라도 수준이 같으니, 수적으로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결과는 전멸.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법사가 고개를 들었다.

소름 끼치도록 맑은 청안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베르덴이 로브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마법에 일부가 손상되어, 안쪽에 입었던 마흐바트의 가죽에는 약간 흠집이 나 있었다.

'샐러맨더의 심장을 가지러 온 그 얼굴 괴물보단 약했지만, 확실히 강하긴 하군.'

그래도 비교적 좁은 실내에서 이 정도로 끝냈으니 좋은 결과였다.

베르덴이 앞으로 걸어갔다.

스태프의 보석이 마력의 빛으로 명멸했다. 무릎 꿇고 있는 마법사와 베르덴의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극도의 혐오감이 가득한 눈빛.

난생처음으로 느껴 보는 오싹함에, 마법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글러트니를 위───."

퍼억!

스태프가 직격당한 마법사의 머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내 생명 활동이 점차 사그라들며 조용히 들려오던 다수의 심장 소리가 완전히 멈췄다.

베르덴이 스태프에 묻은 피를 털었다.

어차피 글러트니의 조각으로 인해, 놈의 입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고 들었으니 아쉬울 건 없었다.

다시 한번 주변을 확인했다.

로크와 테온이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긴 했지만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이 공간에 있던 글러트니가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은 걸 확인하고는 마력을 가라앉혔다.

'그럼....'

중심에 있는 석관.

베르덴이 쫓아왔던 홈이 여기에 이어져 있었다. 염력으로 석관의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석관 내부는 생각과 달리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피처럼 붉은 조각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71화 붉은 조각 (2)

사체 더미 아래에 있던 기다란 홈들이 석관으로 이어져 있다. 그 안에 흐르고 있었던 피가 석관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부는 너무나도 깨끗했다.

혈흔은커녕 띠끌 같은 먼지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피처럼 붉은 조각들이 중심에 놓여 있었다.

'붉은색이라... 분명히 실종자의 시체들과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

함부로 만질 생각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베르덴은 마력으로 조각을 감싸 염력을 발동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단순히 마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염력이나 염동력으로는 생명체를 조작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정 이상의 마력을 지닌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체내에 기와 마력을 품고 있다.

그걸 임의로 다룰 수 있냐 없냐에 따라 기를 깨우친 자나 마법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루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이 가진 힘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은 아니다.

몸속에 흐르는, 살아 숨 쉬는 마력.

이건 마법 물품과 달리 그 자체로 외부 마력에 대한 저항력을 갖는다. 그리고 마력 저항력이 조금이라도 높으면 염력으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

마력 저항력이 극도로 낮은 식물이라면 가능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조각은 살아 있다는 건가?'

자세히 살펴보니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진다. 마력인 것 같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은.

테온이 말한 생명력.

분명 그것이 관계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그때, 테온과 로크가 석관이 있는 중심으로 걸어왔다.

베르덴이 고개를 돌리자 그들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까 전까지와는 다른, 긴장이 역력한 반응이었다.

베르덴이 붉은 조각을 가리켰다.

"이게 뭔지 아나?"

"네, 네?"

로크의 말투가 존댓말로 바뀌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투 따위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로크가 슬쩍 다가가 붉은 조각을 바라봤다.

"...음,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야, 글러트니. 너도 몰라?"

"나도 모르는 물건이다. 하지만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둘 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르덴이 테온에게 손짓했다.

"테온, 네가 직접 잡아 봐."

"...내가? 아, 아니. 그렇게 하지."

베르덴의 시선에 테온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다.

방금 전에 보였던 마법 수준은 그야말로 격이 달랐으니까. 로크가 슬쩍 시선을 돌려 사방에 널브러진 이식자들의 파편을 바라봤다.

'저놈들은 그냥 이식자가 아니었는데....'

마법사와 네 개의 팔을 가진 검사.

그 둘은 테온이 지난 몇 달간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이식자였다. 멀리서 본 것임에도 위압감을 주는 괴물들.

하나는 마법사의 심장을 여러 개 이식받아 통상의 위계를 벗어나는 마력량을 가졌으며, 다른 하나는 수준 높은 검사들의 팔과 신경을 이식받아 궤적을 읽을 수 없는 복잡한 검술을 구사했다.

어느 모로 보나 결코 쉽게 죽을 놈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죽었다.

마법사는 자신이 자랑하는 마법전에서 팔이 통째로 날아갔고, 검사는 베르덴의 옷을 한 번 베고는 전신이 얼어붙은 뒤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동시에 수십 명을 상대하면서도 정면, 후면, 위, 아래 등 전방위의 공격에 반응하고, 각기 다른 마법으로 대응하는 마법사라니.

테온이 베르덴의 시선을 떠올렸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혐오감과 불쾌감이 가득한 그 눈빛. 자신을 비롯한 글러트니를 보는 시선이 전부 그러했다.

'눈에 거슬렸다간 진짜로 죽는다.'

그러니 하라면 하는 수밖에. 이것저것 잴 상대가 아니었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은 테온이 천천히 붉은 조각을 들어 올렸다.

매끈한 단면. 무게는 크기만큼이나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접촉만으로는 별다른 이상 반응을 일으키지는 않는 것인지,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크도 붉은 조각을 손에 들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며 그 안에 담긴 기운을 천천히 감지했다.

"확실히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지긴 하네. 글러트니의 조각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글러트니의 조각.

로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 글러트니의 조각이란 게 정확히 뭐지?"

"음, 뭐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말하자면 기생충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글러트니의 조각은 타인의 육체에 동화되어 자연스레 뒤섞이곤, 숙주가 글러트니 내부의 정보를 발설하지 않도록 행동을 제한한다.

아마 이게 아니었더라면 글러트니는 진즉에 방주에게 완전히 토벌당했겠지.

베르덴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얻었던 정보를 종합해 보면... 글러트니라는 것이 단순히 조직의 이름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베르덴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로크에게 던졌다.

"글러트니는... 단순한 조직 이름이 아닌 건가?"

"어? 모르셨어요? 아, 시련 쪽이라면 모를 수도 있겠네요. 레이라 누님도 몰랐었으니까요."

작게 헛기침을 한 로크가 설명을 시작했다.

"글러트니는 먼 옛날 방주에게 토벌당한 이형종이에요. 다른 말로는 '세상을 집어삼키는 괴물'이라고도 하죠. 너무 옛날에 일어났던 일이라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나라를 두 개나 몰살하고 대륙 위에 있던 생명체를 모조리 집어삼키려 했다고 알고 있어요."

베르덴이 모르는 역사다.

전혀 짚이는 게 없는 걸 보아, 최소 수백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거나 어떠한 이유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뭐, 그래서 어떻게 토벌은 성공했는데 몇몇 방주의 일원이 글러트니의 사체를 일부 빼돌렸다고 들었어요. 그게 글러트니의 기원이죠."

"그럼 글러트니의 조각이란 건 그 사체에서 나온 건가?"

"정확히는 글러트니의 장기에서요. 대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글러트니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데 성공했거든요. 그 선택받은 존재를 글러트니에선 '다섯 개의 이빨'이라고 부르고요. 놈들이 장기에서 만들어 낸 조각을 이용해 글러트니를 이제까지 존속시켜 왔죠."

'다섯 개의 이빨이라, 테온도 그렇게 말했었지.'

베르덴은 글러트니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글러트니의 지도자로 생각되는 다섯 개의 이빨.

그들은 생명체의 실험에 대해선 어느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인종 또는 이형종의 신체를 인간에게 이식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을 테니.

분야가 다르긴 해도 연구자로서 순수하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놈들과 공존할 수 없다.

인간을 물건으로써 여기는 건 베르덴이 무엇보다 혐오하는 것이었으니까.

베르덴이 남은 붉은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내가 가져가지."

"네? 글러트니에 대한 물건은 일단 방주에서... 아, 아니. 그러세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베르덴의 단호한 표정에 로크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세 개나 되니 하나가 없어도 분석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로크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했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다.

화르르르륵.

베르덴이 동굴 전체를 불태웠다. 이런 장소에 사체를 방치했다간 언데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글러트니를 비롯한 실종자들의 시신을 확실히 처리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렇게 실종자들에 대한 수색은 일단락이 났다.

로크는 테온을 방주로 데려가 놈의 처우를 결정할 것이고, 베르덴은 곧장 코헨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서로 헤어지기 직전,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목걸이를 꺼내 로크에게 건넸다. 나일즈의 유품이었다.

"이게 뭐죠?"

"주인의 이름은 나일즈. 체리벨 마을에 있는 어린 남매에게 전해 주면 돼. 미안하지만 가는 길에 부탁하지."

로크가 조심스레 목걸이를 받았다.

분명 실종자의 유품이다. 이걸 받을 사람은 가족이거나 각별히 친한 사이일 터.

"네, 전해 드릴게요."

로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옳은 일이었으니까. 그것이 로크가 스승에게 배운 정의였다.

* * *